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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작을 말할 용기 (11/15)

11. 시작을 말할 용기

영어 듣기 평가가 시작됐다. 작은 소음에도 예민한 시험인지라 교탁 앞에 망부석처럼 서서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그날 밤의 공기와 그날 밤의 달빛과 그날 밤의 목소리와 그날 밤의 온기가 잊히지 않는다.

그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하지만 다시 학교에서 만난 그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하게 굴었던 것처럼, 기억을 하고 있으나 못 하는 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날 있었던 일은 허상이 아니었고, 비록 없던 일처럼 꾸며 놓았다 하나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술김에든 잠결에든 홧김에든 내게 진심을 전했고, 내가 그날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은 그에 대한 기만일 테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 또한 나를 사랑한다 말했다. 누군가는 그렇다면 뭐가 문제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날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사랑은 사랑으로밖에 해결되는 감정이 아니다. 그렇게 쉽게 흘러가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사랑을 하려면, 어떤 사람을 짊어져야 한다. 그 사람이 살았던 세월이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 녹아들어서, 세상에 사랑이란 단어는 하나일지 모르나 그 감정의 정의와 깊이는 제각각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의 차이를 이해하고 극복하는 것은 힘든 일이고 상대에게도 이해하고 극복해 달라는 것 또한 두려운 일이다.

그의 말대로 나는 비겁하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사랑한다 말했고, 나는 또 비겁하게도 그 말에 기대고 싶어진다.

“자, 펜 내려놓고 뒤에서부터 답안지 걷어 온다.”

한숨을 내쉬는 아이들을 다독이고 걷은 답안지를 확인한 뒤 교실을 나왔다.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옆 반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고 나오는 정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어딘지 무심한 얼굴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뒤돌아선다.

나는 또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오른발부터 뻗은 그를 따라 오른발부터 걸음을 시작했다. 열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따라 걸었다.

시끌벅적한 복도에서 그의 발뒤꿈치만을 보고 걷다가, 그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면서 곧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그가 뒤를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출 뻔했다.

그에게서 비껴 난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걸었다. 이번엔 보폭을 좀 크게 해서 그를 지나쳤다. 그가 어떤 낯을 하고 있는지, 왜 걷다가 돌연 멈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회식이 있었다. 보통 학기 초와 학기 말에 모았던 회비를 지출하는 날이었다. 사실 직장인으로서 회식은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학년 부장이 좋으신 분이었기에 나쁘진 않았다.

다만 웃고 떠들며 회식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에 개인의 기분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저 정 선생과 같은 테이블은 아니기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같은 테이블이면 어떨까 하는 모순된 생각을 했을 뿐이다.

종례를 마치고 교무실로 와 내 자리에 앉자마자 후진 쌤,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교무실 문밖에서 현서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오늘 스포츠 교실 하는 날 아니야?”

“맞아요.”

“음. 무슨 일 있어?”

내 물음에 아이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작은 손에는 캔 커피가 있었다.

“나?”

“네. 드세요.”

“고맙다. 잘 마실게. 근데 앞으론 이런 거 사 오지 마. 감사하면 편지 같은 걸 써.”

“네에.”

고맙다고 한 마디를 다시 한 뒤 캔을 따 마시는데 눈길이 조르르 따라 올라왔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치에 눈썹을 들어 올리자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 애들이랑 조금 친해졌어요.”

“응. 그런 것 같더라.”

“그때 감사했습니다.”

“그래. 감사하면 앞으로도 무슨 일 있을 때 찾아와.”

“네.”

“가 봐.”

아이가 히히 웃으며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뛰듯이 걸어가는 아이를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상 내가 해 준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한마디였고, 모든 노력은 아이가 한 것이었는데 이런 걸 받는 게 민망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작은 아이도 용기를 내는데, 선생이란 사람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요즘은 오히려 제자들에게 많은 걸 배운다. 스승이랍시고 교단에 서 있지만 내가 하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경험이 적을수록 용기를 내기 더 쉬워진다고, 형편없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뒤돌아섰다. 돌아서자마자 이쪽을 응시하고 있던 정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는 듯 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목구멍 안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라 캔 커피를 한입에 비운 뒤 자리로 돌아왔다. 수업을 하느라 미뤄 두었던 업무를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 되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갔으면 했지만 회식이 남아 있었다.

“자, 이제 슬슬 갈까?”

학년 부장의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선선해져서 저마다 겉옷을 챙겨 입었다.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입는데, 품이 넉넉한 카디건을 입고 문 앞에 서 있는 정 선생이 보였다.

그는 꼭 그 같은 옷을 입는다.

“자, 자. 가자구!”

학년 부장이 먼저 나가고, 그 뒤를 선생들이 우르르 따라 나갔다. 나는 정 선생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설 선생의 옆에서 걸었다. 정 선생은 학년 부장의 옆에 서서 살갑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우, 이제 조금 으슬으슬하네. 낮엔 덥고 밤엔 싸늘하니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

“전 여름용 셔츠 입고 재킷 입고 다닙니다. 그게 제일 편하더라고요.”

“나는 양복 불편해서. 김 선생은 어떻게 그렇게 매일 잘 차려입고 다녀?”

“저는 이런저런 옷 꺼내 입는 것보다 이렇게 입는 게 무난하고 편해서요.”

“김 선생은 몸이 되니까 어떻게 입어도 괜찮지, 뭘.”

설 선생의 칭찬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칭찬이 후한 분인 걸 알기에 그저 흘려 넘겼다.

“근데 김 선생 나이가 몇이었지?”

“올해 서른둘입니다.”

“결혼할 때 됐네.”

이런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설 선생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오지랖이 조금 넓은 편이었다.

“애인은 없나? 좋은 사람 없으면 내가 소개해 줘?”

교직 사회는 워낙 좁고 또 소문이 빨리 퍼져서 나와 지연이의 이야기가 어떻게 퍼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이 순수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그래, 아직 뭐 창창하니까. 사실 내 조카가 정말 예쁜데, 결혼할 때가 다 됐거든.”

“예.”

“그럼 정 선생을 소개해 줄까?”

“아니요.”

“음?”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리고 당황해서 눈썹 끝을 매만졌다. 하루가 갈수록 얼이 빠진 채로 다니는 느낌이다. 어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자리 잡기 전까지는……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아, 하긴 자리 잡고 나서 뭘 하는 게 낫지. 정 선생 아까운데 말이야.”

정말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는 설 선생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정 선생의 성 지향성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설 선생의 소개팅 제안이 그에게는 곤혹스러울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괜찮다고 자위해 본다. 물론 그게, 자기 합리화라 해도.

삼겹살집에 도착해서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 선생이 학년 부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기에 나는 그와 떨어진 테이블에 앉았다.

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기름진 음식은 별로 먹고 싶지가 않아서 고기를 조금씩 먹고 있었더니 왜 안 먹느냐, 고기를 굽느라 못 먹고 있는 거냐, 하는 둥의 말이 들려와서 평소보다 더 젓가락을 많이 움직여야 했다.

소맥이 한두 잔씩 들어가면서 다들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웃고 떠드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얼핏얼핏 들려오는 정 선생의 목소리와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약간 취한 모양인데, 더 마시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9시가 돼서야 자리가 파할 기미를 보였다. 다들 더 먹고 마실 수는 있었지만 가정이 있는 선생도 있고, 선생들이 너무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면 별로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에 일찍 일어났다.

“자, 그럼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보자고.”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학년 부장과 설 선생이 떠나고 다들 어느 쪽으로 가는지, 뭘 타고 갈 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 선생님이랑 정 선생님은 같이 가시죠?”

종종 카풀을 했던 데다가 집이 같은 쪽임을 아는 선생의 물음에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정 선생이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남은 선생들과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정 선생이 한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공기가 서늘하기 때문인지 그의 귀 끝이 발긋했다. 평소와 같은 정갈한 걸음도 아닌 흐트러진 걸음에 그의 발걸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그의 팔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그러나 절대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훑었다. 간혹 지나치는 차 소리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는 취객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 울렸다. 그러나 그런 소음들은 멀어지고 내 귀에는 오직 그의 발소리만이 담기는 기분이었다.

길지 않은 거리를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에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섰다.

버스가 한 대 섰다. 방향이 다른 버스였다. 마치 정차할 것처럼 느리게 도착하던 버스가 타지 않을 손님이란 걸 알아차린 듯 이내 속도를 높였다. 빈 차라는 붉은 표시를 띄운 택시가 정류장 앞을 느리게 굴러 가다 다시 속도를 높인다.

정 선생의 시선이 정면에 향해 있다. 정면에는 불을 켠 닭강정집 앞에서 야간 자율 학습을 끝내고 나온 고등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서 그는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을지 생각해 본다. 닭강정집일까, 그 앞의 아이들일까, 아니면 옆에 자리한 불 꺼진 건물일까, 지나치는 행인들일까.

버스가 도착한다는 안내음이 울렸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였다. 이내 버스가 도착했고, 정 선생이 먼저 올라탔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이 시간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정 선생은 통로를 사이에 둔 왼쪽 자리에 앉았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의 고개는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나도 따라 창밖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야경과 함께 차창에 맺힌 그의 얼굴을. 그리고 그의 시선은 어디로 가 있을지 짐작해 본다. 까만 어둠에 잡아먹힌 밭일까, 불을 환하게 켠 주유소일까, 붉은 빛을 내는 가로등일까, 그도 아니면 바로 옆에서 당신을 보고 있는 나일까.

20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원래라면 짧게 느껴져야 할 시간이, 꼭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길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거의 없는 버스 안,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사실은 그 창에 비치는 야경에 녹아든 상대의 모습을 보는 이 시간이 하나의 영화 속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도착지에 다다라 정 선생이 벨을 누르고 먼저 내렸다. 나는 또다시 그의 뒤에서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걸었다.

주택가는 조용했다. 간혹 편의점과 술집만이 불을 밝혔고 가로등은 띄엄띄엄 제자리에서 빛을 냈다. 갈림길에서 그가 멈춰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나를 올려다본다. 무언가 할 말을 기다리는 얼굴에 나는 입을 열었다. 그가 기다린 답은 아니었겠지만.

“조심해서 들어가요.”

어두워진 다갈색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돌아섰다. 나는 한참을, 그가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까지 가로등도 내 옆에 있었다.

마침내 그가 보이지 않았을 때, 문득 눈이 시큰거려 와서 손바닥을 들어 눈을 덮었다.

그와 버스를 타고 걸었던 30분 남짓한 짧은 시간, 그는 내게 허락을 말했다. 기실 그는 입 한번 떼지 않았으나 그와 나 사이의 공기가, 그와의 시간이, 그의 다정한 눈이 내게 모든 걸 말해 주었다.

내가 용서를 빌 수 있도록, 내가 다시 시작을 말할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모든 걸 허락해 주겠다고.

다시 시작을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시작을 위한 용기가 아니다. 끝을 위한 용기다.

* * *

“어.”

-이따 시간 있냐?

“왜?”

-술이나 한잔하자고, 인마. 나 오늘 처제 귀걸이 사 주러 백화점 가는데 거기 근처에 전집 괜찮잖아.

“하영 씨도 같이 온다고?”

-아니, 처제는 귀걸이만 받고 갈 거야. 약속 있대. 내가 처제 귀걸이를 밟아 버려서, 이번에 새로 사 주게.

“그래, 그럼.”

하던 일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겼다. 교무실을 나오면서 자리를 비운 정 선생의 자리에 잠깐 시선을 두다 걸음을 옮겼다.

주말에 볼까요. 미처 보내지 못한 문자가 임시 보관함에 남겨져 있었다. 그 이후 며칠간 그 문자를 보며 전송 버튼을 앞두고 망설였다.

뭐가 옳은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운전대는 내게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려면 밟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백화점에 도착하자마자 상호에게 전화가 왔다.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자마자 꽉 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미안하다.

“왜?”

-지금 차가 꽉 막혀서, 좀 늦을 것 같은데.

“천천히 와.”

-근데 우리 처제가 도착했다네? 내가 카페 가서 뭐 좀 마시면서 기다리랬는데, 같이 좀 있어 주라.

“뭐?”

-미안하다. 빨리 갈게.

어떤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긴 하나 물증이 없으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녀석이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은 뒤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렸다.

하영 씨가 있다는 카페로 향했다. 그녀는 작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빨대로 무언가를 쪽 빨고 있었다. 그녀가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내 커피를 주문하고 받아 와 그녀 앞에 앉았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넸다.

“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네.”

“죄송해요.”

“예?”

“형부가 오해를 한 모양이에요.”

그녀가 웃으며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겼다.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관심 있는 건, 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후진 씨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저 당분간 연애할 생각 정말 없거든요.”

컵에 맺힌 물방울을 매만지며 그럼 뭐에 관심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눈으로 보자 그녀가 답했다.

“그냥, 상담이 필요해 보이셔서요. 그때 표정, 되게 안 좋으셨는데. 모르셨나 봐요.”

“그랬습니까.”

“네. 근데 뭐 제가 오지랖 부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호기심 정도였는데 형부가 오해를 했나 봐요.”

그녀가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스물다섯이라고 했던가. 한참은 어린 그녀가 너무도 어른스러워 보여서, 어쩐지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해 줄 수 있으십니까.”

“그럼요. 그렇다고 제가 만능 해결사는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시면 안 돼요.”

그녀가 빨대를 빙빙 돌렸다. 얼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영롱하게 울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예쁘게 칠한 손톱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끝이 무서워서 헤어졌는데, 이별이 다가올 끝보다 더 끔찍한 것 같아서요. 상대는 다시 시작을 원하는 것 같은데, 나는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손톱으로 빨대를 질근질근 씹고 있는데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손을 저었다.

“죄송해요.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하고요. 나이 많은 남자도 똑같이 무섭구나 싶어서.”

“하영 씨도 그런 게 무서웠습니까?”

“그럼요.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무섭죠. 이렇게 사랑하는데, 나는 이만큼 좋은데 끝은 생각도 하기 싫은데, 언젠가 끝은 오겠구나 하면 무서워요. 상대가 나를 찰까 무섭고, 다른 여자가 생길까 무섭고. 근데 그 무서운 것보다 당장 사랑하면서 행복한 게 더 크지 않나요?”

“행복한 게 클수록 두려움도, 그리고 끝에 찾아오는 아픔도 더 크지 않습니까.”

내 말에 그녀가 눈을 굴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죠. 그건 그런데, 음, 결혼은 하실 생각 없으세요?”

“결혼에도 끝은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녀는 어렵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를 붙들고 물어보고 있는 내가 우습다 느껴져 만지작거리던 빨대를 놓았다.

“그런데요.”

“…….”

“나중에 찾아올 엄청 무서운 끝이나, 지금 찾아오는 덜 무서운 끝이나 똑같거든요.”

알 듯 말 듯한 말에 눈썹을 들어 올리자 그녀가 웃어 보였다.

“본인이 무서워서 끝내신 거예요? 상대한테 말은 해 보셨고요? 상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 보셨어요? 저는요. 애인이 나중에 찾아올 끝이 무서워 헤어지자고 하면, 지금 당장 찾아오는 끝이 훨씬 무서울 것 같거든요. 미래에 찾아올 끔찍한 끝이야 알 게 뭐예요. 찾아오거나 찾아오지 않거나 반반의 확률인데. 그거에 연연해서 지금 끝내는 게 더 무섭지 않나요? 미래의 일은 미래의 내가 감당하겠죠.”

그녀는 말하는 도중 미간을 찌푸렸다가, 눈가를 찡그렸다가, 입매를 굳혔다. 그것이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 때문인지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내게는 꾸지람처럼 와 닿았다.

“덜컥 겁나서 끝내셔 놓고서도 얼마 전에 처음 본 저한테 이렇게 털어놓으실 정도로 괴로우신 거잖아요. 그럴 바엔 그냥 좀 무서워도 다시 시작하는 게 낫지 않나요? 상대나, 후진 씨한테나 그게 더 이로울 것 같은데.”

시원스러운 답변에 짧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간단할 정도로 맞는 말인데, 나는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왜 끝이 무서우신데요?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끝이라서?”

“여태까지 다 그랬으니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그 사람이, 나를 질려 할 그 사람을 보는 게 무서우니까. 구태여 그 사람에게 나쁜 추억을 심어 줄 필요가 있나, 싶은데.”

“으음……. 원래 구 여친, 구 남친은 다 나쁜 추억으로 남는 거 아닌가요? 좋은 추억인 쪽이 더 희귀해요. 좋은 추억으로 남겠다는 건 멍청한 욕심이고, 그 멍청한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가 커피를 다 마시고 얼음을 아그작 아그작 씹었다. 멍청하다는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멍청하고 어리석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 찬물에 머리를 담그는 기분이다.

“나쁜 추억이 될 거라고 장담하지 마세요. 그건 후진 씨가 정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본인이 노력하면, 상대의 감정이 다하더라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어요. 아니면, 그 사람이 더 이상 본인을 좋아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기라도 하세요? 근데, 아닐걸요.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 그래 오셨잖아요.”

단정 짓는 말에 짧게 웃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아주 쉬운 문제인 것만 같아서. 나는 여태까지 사랑을 하고, 끝내고, 또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끝이 난다고 안 죽어요. 죽도록 슬프고 아플 수는 있겠지만, 세상엔 사랑할 만한 사람들이 널렸어요.”

“그런가요.”

“그럼요. 남자는 더 쉽죠. 등신 같은 남자는 많아도 등신 같은 여자는 적더라고요. 아, 기분 나빠하진 마세요. 그냥……. 제 주위에 등신 같은 놈들이 많아서. 아무튼 그래요.”

얼음이 녹았다. 커피의 색이 연해진 듯도 하다.

“다른 건 몰라도 등신 같은 놈은 되지 마세요.”

“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친구들한테 이야기하듯이 했네요.”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그녀가 짓궂게 웃었다. 그녀를 마주 보며 나 또한 웃었다. 아직 뭐가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누군가에게 이런 조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되도록 이런 얘긴 그분이랑 하세요. 제가 당사자였음 기분 나빴을 거예요. 뭐, 제가 상담해 드린다고 꼬시긴 했지만.”

“네, 고맙습니다.”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하는 말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올리면서, 그간 지나쳐 온 길을 떠올렸다.

“근데요. 혹시 저기 창밖에 서 있는 남자들, 아는 분들이세요? 여기 계속 쳐다보는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훑다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돌아선다. 그와 같이 있던 남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나도 모르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안한데, 상호한테 오늘 못 만난다고 전해 줘요.”

“네?”

잡아야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녀에게 인사도 남기지 않은 채 뛰쳐나갔다. 백화점 입구를 빠져나오자 저 멀리 정 선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대로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정 선생.”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썹께가 미묘하게 구겨진 채로,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본다.

“아는 사람이야?”

정 선생 옆에는 남자가 있었다. 모르는 얼굴. 물론 당연히 모르는 얼굴이겠지만…….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죄송한데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5분이면 됩니다.”

정 선생에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양해의 눈길을 보냈다.

“아, 뭐 저는 상관없습니다. 야, 들어가 있을 테니까 영화 시작 전에 와라.”

말투를 보니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다시 길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고, 정 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앉죠.”

정 선생이 백화점 앞에 자리한 벤치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나란히 앉았다. 그의 옆에 앉고 나서,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아무 사이 아닙니다.”

내 말에 그가 입술을 작게 비죽였다. 그의 팔을 살포시 쥐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누군데요?”

“친구 처제요.”

그의 낯이 미묘해졌다. 내가 생각해도 친구 처제라는 관계는 애매한 변명 같아서 다시 입을 열었다.

“친구랑 친구 아내와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나왔길래 한 번 봤습니다. 오늘은 친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가 처제한테 사 줄 게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차가 밀려서 그 녀석이 늦게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잠깐 같이 있었던 거고요.”

“…….”

“오해, 풀렸어요?”

“오해한 적 없어요.”

정 선생이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웅얼거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꿈지럭거리는 발이 보였다.

“할 말, 있으세요?”

그의 물음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할 말을 정리하지 못하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를 무작정 잡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나는 내 스스로 뒤돌아 감을 선택했고, 그러나 진정 뒤돌아 가지 못했다.

아직도 끝은 무섭다. 나는 사랑받지 못한 인간이었고, 그래서 내가 사랑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지금 나를 사랑한다 말할지라도, 그 언젠가 찾아올 미래에 미련 없이 뒤돌아설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친구라도 하면 안 되겠느냐고 어둠 속에서 펑펑 울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선연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나는, 그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그가 상처받느니, 그에게 상처를 주느니 언젠가 찾아올 그때에 피를 토하겠다. 버석하게 메말라 버린 눈물을 쏟아 내겠다. 삶의 끈을 놓지 못해 의미 없이 꾸역꾸역 살더라도, 나를 위해 그에게 상처를 주진 않겠다.

“다시 시작하고, 끝냅시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미묘하게 나를 훑던 눈이 이내 바삭 구겨진다.

“시작하자고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끝내자고 하시는 거예요?”

그의 날카로운 물음에 짧게 웃으면서 눈썹께를 매만졌다.

“어떻게 끝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시작하자는 거죠.”

“비겁하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당연히 제가 이별을 말할 걸 전제하지 마세요.”

정 선생이 미간을 구기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야무진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내 대답이 못마땅하지만 져 준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정리, 다 하셨어요?”

“네.”

“나쁜 쪽으로 하신 거 아니죠?”

“응.”

“또 이러실 거예요?”

그와의 사랑에 있어 그에게 무엇도 장담해 줄 수는 없지만, 단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다면 내가 그보다 그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해 줄 것이란 것, 그래서 이별 또한 이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요.”

“……하아.”

정 선생이 허벅지에 이마를 딱 붙이고 제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바짓가랑이를 꽉 쥐며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그가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약속, 있으신 거 아니에요?”

“꼭 지켜야 하는 건 아니라 괜찮아요. 정 선생은.”

“저도……. 나중에 욕은 먹겠지만요.”

“그럼 들어가 봐도 돼요.”

“아뇨. 저녁, 드셨어요?”

“안 먹었습니다. 정 선생은.”

“저도요. 그럼, 식사 같이하실래요?”

“좋아요.”

정 선생이 쭈뼛거리면서 일어났다.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고 한 걸음 물러나기에 나도 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작스러운 약속을 잡은 것도, 늦게 온 것도, 하영 씨와 나를 둘만 둔 것도 그 녀석이니 이 정도는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각자 전화를 끝내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서는 어색한 정적이 흐르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친구가 괜찮다고 해요?”

“네. 제 성향 아는 애거든요. 분위기 보고 눈치챈 모양이에요.”

“그래요. 뭐 먹고 싶어요?”

“그냥…… 밥이요.”

따뜻한 걸 먹이고 싶어서 근처 전골집으로 데려갔다. 정 선생이 자리에 앉자마자 이마를 긁적이며 물었다.

“저 놀리시려고 여기 오신 거 아니죠?”

“네?”

“아니에요.”

정 선생이 선선하게 고개를 저었다. 싱거운 태도에 메뉴를 주문하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오랜만에 마주 보는 얼굴이다. 이렇게 밝은 조명 아래서 마음 놓고 본 지가 거의 한 달이 넘었다.

“……너무 보시는 거 아니에요?”

내 시선이 민망했던 듯 그가 눈을 내리깔며 웅얼거렸다. 짧게 웃으면서 그의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영화, 뭐 보려고 했어요.”

“그냥 코미디 영화요.”

“밥 먹고 볼까요, 그럼.”

“전 좋아요.”

아무래도 한 달 가까이 말도 거의 안 하고 떨어져 있던 탓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정 선생이 물수건을 가지고 노는 틈을 타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머리칼이 조금 짧아지고, 약간 손을 본 듯 더 멋스러워졌다. 살은 조금 빠진 것 같지만 상기된 뺨은 생기 있어 보이고, 오늘은 무채색이지만 여전히 그다운 옷을 입었다.

“선생님.”

“네.”

“살 빠지신 것 같아요.”

“기분 탓입니다.”

단호한 대답에 그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훑어본다. 그 시선을 음미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니에요. 선생님들도 다 김 쌤 살 빠졌다고 하셨어요.”

“게을러서 그래요. 저녁을 잘 안 챙겨 먹었거든. 정 선생은요.”

“전……. 잘 먹었어요.”

거짓말 같았지만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의 정갈한 손끝을 보고 있는데 전골이 나왔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로 정 선생의 숟가락이 향했다.

“맛있어요?”

“네.”

“다행이네.”

그가 나를 보며 짧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았지만, 먹고 있는데 계속 쳐다보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 겨우 눈을 내리깔았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영화관으로 향했다. 예매를 하진 않았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좌석은 꽤 많았다. 우리는 주위에 사람이 없고 오른쪽으로 치우친 자리에 앉았다. 올 때 들고 온 따끈한 커피를 홀더에 넣고 스크린을 보았다. 스크린에선 카페 새 메뉴 광고를 하고 있었다.

“저 라테 드셔 보셨어요?”

“아니요.”

“나중에 저랑 가 봐요. 맛있더라고요.”

“응. 저번엔 그걸 먹어 봤어요.”

“어떤 거요?”

“녹차 프라페.”

“맛있었죠?”

“네. 휘핑은 좀 달았지만.”

내 사족에 그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서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불이 꺼졌다. 영화가 시작되고, 색색의 빛들이 얼굴을 비추는데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눈을 내리니, 그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를 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다.

문득 그가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가 내 옆에 있어 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지금 이 순간이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의 손을 꼭 맞붙잡았다. 우스운 장면들의 향연에, 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그의 웃음 속에 잠수해 숨을 쉬고 싶었다.

영화는 그의 웃음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영화를 보고 나와 우리는 동네에 도착했다. 조금 걷자는 정 선생의 제안에 걷다가 아파트 앞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벤치 바로 뒤편에 가로등이 있었다. 주황빛 가로등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바람에 밀려 삐거덕거리는 그네를 응시했다. 벤치 위에 놓인 손과 손끝은 맞닿아 있었다.

“선생님.”

같은 풍경을 바라보던 정 선생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네.”

“저는 제 마음의 영원을 약속드릴 수는 없어요.”

평소보다 더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바람이 되었다. 으스스하게 들릴 수 있는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그의 바람으로 선선하게 들린다.

“감정이 변한다는 건 알아요. 식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저는 지금 김 선생님이 너무 좋지만, 언젠가의 미래에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어요.”

그가 손가락을 구부리다가 손바닥을 뒤집어 내 손바닥과 맞닿게 했다. 그로부터 닿은 온기가 물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오래오래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처음의 온도와는 조금 다르더라도, 손 맞잡고 거리를 걷는 노부부처럼요.”

가로등 불빛이 우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퍼졌다. 그와 나의 무대에서, 우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그럴 수 있기 위해서, 혹은 그러지 못할 때를 위해서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와 고민하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들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나의 고민을, 나의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생각을 그에게 이야기했다면, 그는 더 따뜻하게 감싸 주지 않았을까. 그런 고민과 생각들을, 도닥이면서 사라지게 해 주지 않았을까.

“끝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끝 같은 건 없다고 눈 감고 귀 막으면서, 지금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요.”

“…….”

“그러니까, 후진 쌤.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과거에 어땠든, 선생님의 잘못은 하나도 없고 그 사람들이 선생님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에게도 선생님을 사랑했던 시간은 있었겠죠. 비록 그 감정이 변했다 하더라도요.”

그가 몸을 틀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가 물이라면 그에게 빠져 익사했으리라. 질식하여 행복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선생님을 지나쳤어요. 선생님 곁에 있는 건 바로 저고요. 전 이렇게 사랑스러운 선생님을 지나친 그 사람들이 불쌍해요. 선생님 곁에 있어 보지 못할 사람들이 불쌍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행운아예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요.”

체면 같은 거 차리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었다. 학교도 가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사랑 좀 받아 보겠다고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키스, 해 줄래요.”

그 대신 나는 키스를 청했다. 실바람 같은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그가 웃으면서 입술을 맞댔다.

다시 시작을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으려면, 그 또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그를 외면하고, 홀로 긴긴밤의 외로움을 인내해야 하는 용기.

나는 겁쟁이다. 비겁자다. 그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고, 어쩌면 그 무수한 등신 같은 남자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을 말했다. 그에게 시작을 청했다. 그렇게 말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가, 시작을 말하지 않을 용기보다 더 작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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