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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끄러운 밤 그리고 당신 (10/15)

10. 부끄러운 밤 그리고 당신

“내가 그렇게 우스워요? 씨발, 나는 누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냐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흐린 시야로 안타까운 듯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미안.”

“이럴 거면 왜 그랬어요. 왜 받아 줬어요?”

“미안해.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넌 충분히 좋은 애니까.”

나는 좋은 사람 따위를 만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지.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눈물 고인 눈으로 나는 원망을 담아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을 뿐 미련은 한 톨조차 없었다. 그게 너무 미웠다. 그게 너무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 당시 내가 충분히 어른이라고 생각했지만, 제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어린애였다. 처음 맛보는 사랑의 달콤함에 취해, 그 사랑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고 조금의 끊어짐도 없이 영원할 줄 알았던 것이다.

사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사랑이야 언제든지 색이 바랠 수 있고, 그 바랜 사랑을 동아줄인 양 붙잡고 매달렸던 건 나였다. 구차하게 매달렸으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고 그녀가 나를 동정하게 만들었다.

그 후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결과는 똑같았고 이번엔 다를 거라는 환상은 내겐 너무 위험했다.

한여름 밤의 꿈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다. 아직도 내 주제를 깨닫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끝이 나는 게 맞다. 그와 나는 결국 같은 노선을 밟게 될 것이다. 그 길의 끝에서 그의 사랑이 바래 버리고, 그가 나를 무감한 눈으로 본다면 나는 분명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젠가 그렇게 생각하겠지. 내가 없었으면 더 아름다운 나날이었을 텐데.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햇빛이 눈을 찔렀다. 동이 틀 때까지 눈을 뜨고 있었는데, 어느새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와 헤어진 지 사흘째였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일상생활이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끝이 나서 다행이었다.

밥을 먹고 수업 자료를 만들고 텔레비전을 보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문득 술이 당겨서 혼자 마실까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상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와 헤어진 이후로 메신저는 지워 버렸다.

저녁이 될 때까지 멍하니 누워 있다가 바깥이 어두워지자 바로 밖으로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다음 날부터 투둑, 투둑 떨어지던 비는 이제 세차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평년보다 조금 늦게 장마 전선이 북상한 것이다. 어두컴컴한 하늘 때문에 시계를 봐야 시간을 알 수 있었다.

라디오를 틀었다. 자동차를 무너뜨릴 것처럼 쏟아지는 물방울 소리를 에어컨과 라디오 소리가 잡아먹으려 들었다. 차창으로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와이퍼가 연신 닦아 냈다. 와이퍼가 차창을 한 번 닦아 낼 때마다 머릿속에서도 지우개가 쓱싹쓱싹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어, 여기.”

상호가 나를 보자마자 손을 들었다. 상호의 회사에서 가까운 선술집은 사람이 거의 없어 조용했다. 아무래도 비가 쏟아지는 기간에는 확실히 바깥에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너 또 무슨 일로 술을 마시재? 이쯤 되면 나 무섭다?”

“일단 먹기나 하고.”

실없이 웃어 보이고선 술과 안주를 시켰다.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흘금거리는 시선을 무시하고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댔다.

“요즘 술자리가 잦은 것 같은데. 유정 씨가 뭐라 안 해?”

“유정이도 요즘 회식이 잦아서, 뭐.”

“민형이는?”

“아부지가 봐 주시지.”

“아저씨가?”

“어. 슈퍼 보면서 TV 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으니까 우리 애 맡긴 뒤로는 엄청 좋아하셔. 사실 애 낳으면 시터라도 고용해서 부모님께 부담 안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좋아하시니까 말도 못 꺼내겠더라.”

“하긴. 예쁘고 순하니까. 네 애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말에 녀석이 발끈해서 자신이 뭐 어떠냐며 자기변호를 했다. 발끈하는 녀석의 말을 대충 흘려듣는데 안주가 나왔다. 사람도 없고, 끓여 먹는 전골이라 빠르게 나온 것이었다. 그와도 전골을 같이 먹었었지. 그런 생각이 나자 불쑥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에 술잔에 따른 술을 한 모금에 넘겼다.

“넌 무슨 술을 벌써 그렇게……. 무슨 일 있냐?”

“헤어졌어.”

“뭐어?”

상호가 술잔을 들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내 녀석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야,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헤어져? 왜?”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라.”

하! 녀석이 코웃음 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술을 들이켰다.

“네 애인도 그래? 자기가 과분하대?”

“그럴 리가.”

“그럼 인마, 너 혼자 생각이잖아. 너 그것도 병이야, 교만이고. 상대가 그렇게 생각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너 혼자 지레 겁먹고 뒤로 빼는 거잖아, 그냥.”

정 선생과 비슷한 소리를 한다. 그럼 내가 틀렸다는 소리겠지. 할 말이 없어 웃음만 흘리고 있자니 녀석이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하면 놓치지 마라. 그래, 이러고 있는 너에 비해 과분한 사람이겠지만 그런 사람 안 놓치는 것도 능력이다.”

“난 그런 쪽으론 원래 능력 없잖아.”

상호가 내게 따라 준 술을 단숨에 삼키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맑은 국물을 노려보았다. 거품 하나에 그의 생각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아. 그를 위한 선택이었어.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침처럼 튀어나와 나를 괴롭히던 그녀는 더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머릿속을 채우는 건 오직 그일 뿐이다. 그는 기침이 아니다. 떨어지지 않는 감기지.

“야, 천천히 마셔. 너 그러다 훅 간다.”

걱정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차가운 물을 머금었다. 입안 점막이 시릴 정도로 머금고 있다가 삼켰다. 정신이 좀 깨는 느낌이다. 그리 반갑지 않은 일이라 다시 소주를 따랐다.

머리 위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 * *

집을 정리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곳곳을 청소했다. 필요가 없는 물건들을 버리려다가 지연이가 내게 준 물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 손목시계, 지갑, 머그컵 심지어는 벽에 걸린 시계까지 그녀의 선물이었다.

4년. 그리고 결혼을 전제한 연애는 너무 많은 것을 남겼다. 나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하나하나 모두 쓰레기봉투에 처넣었다. 서랍장이 비고 벽 한 면이 휑한 것을 보다가 봉투를 묶어 바깥에 버리고 다시 들어왔다. 그러다 새삼 그의 흔적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안 지는 반년이 넘어가지만 정식으로 연애를 한 것은 일주일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다. 정말, 한여름 밤의 꿈처럼.

한낮이었다. 여전히 비구름이 뭉글뭉글 저들끼리 모여 다니며 세찬 비를 뿌렸다. 청소를 했는데도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갑이 없으니 돈 넣어 둘 곳이 없어졌다. 지갑을 사야겠다 싶어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 바로 앞에 있었기에 우산은 쓰지 않았다. 잠시간 짧은 거리를 쓰지 않았을 뿐인데도 어깨가 흠뻑 젖는 느낌이었다.

출발하면서 라디오를 틀었다. 디제이의 정갈한 목소리가 에어컨의 바람과 함께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문득 그 소음이 죽음 같은 정적보다 견디기가 힘들어 라디오를 껐다. 그러자 빗소리가 더 잘 들렸다. 그래, 라디오보다는 이 소리가 더 낫지.

백화점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혹시나 그를 마주할 우연이 또 발생하지 않을까 주변을 돌아보다 곧 얼간이 같은 생각임을 깨닫고 엘리베이터 안에 올랐다.

지갑을 사고 나자 할 일이 없어졌다. 백화점을 나오다가 카페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어깨가 움츠려질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와 닿았다.

아메리카노를 시키려다 메뉴판을 훑고는 정 선생이 그때 시켰던 메뉴를 시켰다. 녹차 프라페, 휘핑크림 많이.

보기만 해도 달아 보이는 음료를 노려보듯 바라보다 이내 한 모금 마셨다. 나쁘진 않았다. 녹차의 쌉싸래한 맛을 휘핑크림의 단맛이 조금 중화해 주었다.

“맛있네.”

생각보다. 그러고선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고 피식 웃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없이 그의 흔적을 좇는 것이 얼마나 얼간이 같은지.

빨대를 휘저었다. 새하얗게 얹힌 크림이 녹아들 듯하면서도 녹아들지 않고 덩어리졌다. 그것을 떠먹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세차게 내렸고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공허함이 폭우처럼 가슴속으로 내려앉았다. 무언가를 마셨는데도 속이 허했고 카페 안을 채우고 있는 차가운 공기는 지나치게 시렸다. 퍼붓는 비를 실컷 맞고 싶은 기분이었다.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며칠째 울리지 않은 핸드폰.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에게서 연락이 없는 핸드폰. 문자함에 들어갔다. 그의 이름 두 글자와 그와 나누었던 문자들이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뭐가 그리 대단했나 싶다. 그녀가 생각난 것이, 그녀가 떠오른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건지.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거다.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입안이 퍽퍽하게 메말라서 음료를 들이켰다. 녹차의 씁쓸한 맛이 혀에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 쓴맛이, 이내 쓰라린 기억을 자꾸만 불러와서…….

결국 다 마시지도 못하고, 그러나 버리자니 아까워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 * *

그와 헤어진 지 일주일하고도 반이 지났다. 어떻게든 삶은 굴러갔다. 고물 차처럼 매번 덜커덩거리고 뒤에서 힘겹게 밀어 주어야 한다 해도, 정말로 어떻게든.

간만에 외출을 하기 위해 옷을 꺼내 입었다. 쉬는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출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습기가 피부의 작은 구멍에 달라붙어 숨을 쉬는 것을 막는 기분이었다. 차에 올라타 에어컨을 켜고 잠시 무거운 눈두덩을 짓눌렀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몸도 무거웠다. 반면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 속은 허했다. 그러나 뭔가를 먹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시동을 걸고, 도로로 나와 버스 정류장을 지나칠 때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주었다. 출근을 위해 옹기종기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사람은 없었다. 있어도 문제일 것이다. 신호등 앞에서 멍하니 정차해 있다가 뒤에서 클랙슨이 울리고 나서야 출발했다. 간만에 바깥바람을 쐐서 그런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고개를 털듯이 저었다.

조용한 주차장을 지나 학교로 들어갔다. 고요한 복도에 내 발걸음 소리만이 터벅터벅 울릴 뿐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교무실엔 이경하 선생이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다가, 무심코 스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출근하셨네요.”

“네. 저 방과 후 담당이잖아요.”

“아……. 고생하십니다.”

“뭘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내 자리로 향하는데, 이 선생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아, 교과 협의 때문에 정 선생님도 오시기로 했어요. 이따가 저희 같이 점심 먹으면 되겠네요.”

잘됐다는 듯 손뼉을 맞부딪치는 이 선생을 보며 또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앉아 책상 쪽으로 의자를 끌어당기고 노트북을 켜면서, 거멓던 화면이 색색으로 켜지는 걸 보면서 손바닥을 들어 입술을 묻었다.

왜 하필.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떤 기대감이 솟구쳐 올라서.

자기혐오도 함께 목구멍 너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쫓기듯이 일어나 정수기에서 물을 떠 마셨다. 찬물이 몸속으로 직행하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정신이 좀 차려지는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공문을 처리하면서 종종, 아니 꽤 자주 노트북 화면의 오른쪽 아래를 보았다. 그가 온다면, 언제 올까.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는 것을 보아 점심을 먹기 전에는 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10분 뒤일까, 30분 뒤일까, 한 시간 뒤일까.

그가 오면 무슨 얼굴을 해야지.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지. 어떻게 해야 아무렇지 않게 보일 수 있지.

그런 형편없는 생각들을 하다 실수한 것을 발견하고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이제까지 괜찮았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았고, 삐걱거리면서도 굴러갔다. 나는 더 이상 스무 살 어린애가 아니었다. 어느덧 서른을 넘겼고,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할 수 있을 거다.

이별을 말한 건 난데, 아픔을 말하는 것조차 염치가 없는 것 아닐까. 내게 이별을 말한 그녀는, 이별을 말할 새도 없이 떠난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아프지 않았던 걸까.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의 나는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다시는 사랑 같은 건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별을 처음으로 말하게 된 나는, 그를 사랑함에도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게 뼈아팠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아픈 이유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이기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떨까.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은 처음이라며 수줍게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처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그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이렇게 형편없는 끝을 맞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아프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나 반짝반짝 빛나기만 하는 사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친구로 남았으면 좋았을 거다. 그가 친구라도 하자고 말했을 때, 욕심부리지 않고 그러자 했다면 좋았을 거다.

그와의 시간이 후회를 남긴다. 더없이 슬픈 일이다.

“안녕하세요.”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던 눈이 자석처럼 그에게로 끌려갔다. 이 선생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그의 얼굴이 무심코 내 자리로 돌아온다. 눈이 조금 크게 뜨이고, 이내 웃음기가 사그라든다.

그가 꾸벅, 묵례를 했다. 무심하게 눈을 돌리려고 했던 나는 그 인사를 맞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을 보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자판을 누르지만 엉망인 글자들만 쏟아져 나올 뿐이다.

나보다 어른인 그는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큰 동요 없는 얼굴. 조금 살이 빠진 듯도 했지만 크게 나쁘지 않은 얼굴이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이 못내 아파서,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교무실 안은 조용했다.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이 안을 울릴 뿐이었다.

나는 공문을 처리한 뒤 일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협의 때문에 정 선생과 이 선생이 자리를 비운 이후, 내내 정 선생의 자리를 응시했다. 파티션 때문에 얼핏 보이기만 하는 다갈색 머리칼과, 그러다 문득 드러날 얼굴을 상상하며.

앞으로 남은 반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문득 막막해졌다. 마땅한 이유 없이 휴가를 낼 수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직업도 아니고, 적어도 맡은 반 아이들은 다음 학년으로 보내 주어야 하니까.

막막한 앞날이 머리 위를 짓누른다. 비단 정 선생을 어떻게 계속 봐야 할지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저 포기하고 싶어지는, 이제는 정말 꿋꿋하게 이어 가고 싶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와서 노트북을 닫고 엎드렸다. 그러자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차단했다.

“김 선생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들어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어쩌면 아주 찰나 잠이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요즘 잠을 못 자도 너무 못 잤으니까.

고개를 드니 이 선생 그리고 그 뒤에 정 선생이 얼핏 보였으나 이 선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 아프세요?”

“아닙니다.”

“피곤하신가 보다. 뭐 드실래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뇨, 딱히. 드시고 싶은 걸로 먹죠.”

이 선생이 흐음, 하며 냉장고에 붙어 있던 배달 책자를 들고 뒤졌다. 그러면서 간간이 정 선생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마땅한 게 없는 모양이었다.

“도시락 괜찮은데, 세 명은 배달이 안 될 것 같네요.”

“사거리 말하시는 겁니까?”

“네.”

“그럼 제가 사 오죠.”

“아니에요. 다녀오시려면 또 번거롭잖아요.”

“금방인데요. 다녀올게요. 바람도 좀 쐬고 싶고, 차 타면 금방이니까. 뭐 드실래요.”

“네, 감사해요. 그럼 저는……. 음, 참치 비빔밥이요!”

“네. 정 선생님은…….”

그의 성 하나를 툭 내뱉었을 뿐인데 목이 조여 와서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러나 시선은 여상하게 그에게로 돌렸다. 다갈색 눈을, 제대로 마주했다.

“저도, 같은 걸로요.”

“알겠습니다. 갔다 오죠.”

그렇게 또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고, 차키를 들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텅 빈 복도 안이 터벅터벅 울린다.

잘했다. 괜찮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 또한.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반년만 버티면 그와 완전히 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위를 하며 차에 올라탔다.

도시락집에서 미리 주문을 한 도시락을 가져오고 편의점에 들러 단맛이 강한 캔 커피를 산 뒤 학교로 돌아왔다. 교무실 앞에 도착해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아하하!”

그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그만 손을 놓고 말았다.

안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났지만, 무슨 말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한 걸음 뒤로 멀어졌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이 마치 열 걸음 뒤인 것처럼 아득했다.

현실과 유리된 기분이었다. 이 얇은 교무실 문 하나를 기준으로.

고개를 털었다. 비로소 내가 없는 세계의 그를 마주하게 된 것 같아 잠시 정신이 멍했지만,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의 웃음이 금방 사그라들지 않았으면 해서 잠시간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선생이 도시락을 들고 온 나를 반겼고, 정 선생이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기 참치 비빔밥 진짜 맛있어요.”

“정말요? 전 저번에 제육덮밥 먹어 봤는데, 그냥 그렇더라고요. 이 쌤 따라 정하길 잘했네요.”

“여기는 덮밥 계열은 별로예요.”

“그렇구나. 음, 맛있는데요?”

그가 맛있어 해서 다행이다. 식지 않은 도시락을 그에게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김 선생님은 쉬는 동안 뭐하고 지내셨어요?”

“그냥, 연수 다녀오고……. 별거 없었습니다.”

별게 없었던 게 아니었는데, 별거 없었다는 그 한 문장으로 그렇게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우스웠다. 차마 정 선생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으로 밥을 떴다.

“정 선생님은요?”

“저도 뭐……. 본가도 다녀오고, 열심히 놀았죠. 이 선생님은요?”

“저야 뭐 방과 후 때문에 애매해서요. 그래도 내일이면 끝나니까 그땐 좀 쉬려고요. 계곡 가고 싶은데.”

“아아, 저도요. 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수박 먹고 싶어요.”

그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밥을 먹고 있지만, 그와 같이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 * *

개학이 가까워져 왔다. 전학을 오는 학생이 우리 반에 배정될 것 같아 학교를 들락날락했다. 예전이라면 번거롭다 여겼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낮 동안만이라도 막아 주니까.

주말이 되니 상호에게 연락이 와 외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만났던 이후로 짬짬이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더니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잡았다.

살이 좀 빠졌다. 체격이 있는 편이라 볼품없이 말라 보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티는 났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한몫했다. 밤을 새우고 새벽과 함께하다 동이 트는 걸 보며 잠이 들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울을 보며 혀를 차다가 밖으로 나왔다. 단기간에 살을 찌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

상호가 나를 부른 곳은 피자를 전문으로 하는 펍 분위기의 레스토랑이었다. 한식을 고집하는 녀석이지만 유정 씨가 피자랑 파스타를 좋아해서 약속 장소를 이리로 잡은 듯했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상호와 유정 씨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 아니 어디서 본 듯도 한 여자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해. 우리 처제.”

“안녕하세요, 성하영이에요.”

인사를 맞받고 통성명을 하면서, 상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녀석이 움찔하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약속이 깨졌는데 언니가 근처라고 해서, 제가 오겠다고 했어요. 불편하시죠.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예의 바르게 죄송하다는 듯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보니 유정 씨와 닮은 구석을 찾을 수 있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상호의 결혼식에서 봤던 것이 떠올랐다.

“후진 씨, 오랜만이에요. 근데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요즘 운동을 좀 해서. 많이 빠지진 않았어요.”

“운동 안 해도 괜찮은데요, 뭘. 하긴, 요즘은 건강 관리차 운동 많이 하니까요. 그래도 살 너무 빠졌다. 많이 드시면서 하세요.”

“네. 오늘 많이 먹고 가야겠네요.”

실없이 대답하는데 상호가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 저런 눈을 하고 있는 거겠지만, 녀석의 아내와 처제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들과 함께 있으니 최소한 잔소리는 듣지 않겠구나 싶어서.

보기만 해도 느끼해 보이는 치즈가 두둑이 든 피자가 나왔다. 거기다 치즈를 뿌린 샐러드와, 토마토 스파게티를 보면서 내 접시에 놓인 피자를 잘라 먹었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들이 들어오니 조금 더부룩한 듯도 했다.

“너무 제가 좋아하는 걸로 먹자고 했나 봐요.”

열심히 먹던 유정 씨가 쑥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유정 씨가 같이 오셔서 다행인데요. 상호 녀석이랑 오면 이런 데 못 오니까요.”

“하긴, 이이가 편식파긴 해요.”

상호가 자기는 한식을 좋아하는 것뿐이라며 구시렁거리는 것은 모두가 무시했다.

“선생님이시라고 들었는데, 급식에 스파게티나 피자도 종종 나오지 않나요?”

하영 씨가 무시당한 상호의 표정을 보고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네. 피자는 피자빵이지만요. 가끔 나오면 애들이 좋아합니다.”

“저 학교 다닐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날은 스파게티 수북이 쌓아 놓고 먹는 애들 많았죠.”

“네. 그래서 평소보다 양을 더 많이 준비한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안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여상하게 대화를 하고 샐러드를 입에 넣는데 상호의 시선이 따라왔다. 어쩐지 음흉한 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여,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고 무시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스몰 비어로 향했다. 둘 다 차를 끌고 왔지만 대리를 부를 생각이었다. 유정 씨가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 술이 빠질 수 없다며 눈을 빛냈기 때문이다.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맥주를 조금씩 비웠다. 상호네 아기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고, 간간이 주변 부부들의 이야기나 하영 씨의 대학 생활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곧 그 화제의 촉이 내게로 향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역시나 그리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후진 씨는 방학인데 뭐하고 지내셨어요?”

“얘는 그냥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상호가 핀잔을 던지자 유정 씨가 애매한 낯으로 웃었다. 어쩐지 그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아직도 내가 지연이의 그림자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피식 웃으며 맥주 한 잔을 넘겼다. 톡 쏘는 액체가 입천장에 가득 부딪친다. 그냥 웃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그 그림자 속에 있는 게 아닌가, 하고.

“하영이 얘도 집에만 있어. 집순이야, 아주. 얼마 전에 실연하더니,”

“아, 언니!”

하영 씨가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맥주잔을 쾅 내려놓았다. 유정 씨가 혀를 깨물며 어깨를 으쓱였다.

“차인 거 아니고 그냥 깨진 거거든?”

“그래, 그래. 잘됐지, 처제. 처제랑 사귀는 동안 속만 썩였다면서.”

“네, 뭐…….”

그녀가 쓰게 웃으며 맥주를 넘겼다. 노란 조명 아래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는 그녀를 보자니 노란 불빛 아래 따뜻하게 물들었던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끝낼 때가 되긴 했었죠. 더 해 봤자 저만 상처받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그래. 사랑은 구걸하는 게 아니라잖아.”

우수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부드럽게 휜 콧날이 한 번 찡긋한다. 눈길을 그녀의 긴 속눈썹으로 돌려, 가는 선을 응시하다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죠. 상처받을 게 뻔한 사랑은 끝내는 게 낫죠.”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얼핏 유정 씨와 상호의 염려 어린 낯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러나 나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당연히 긍정할 줄 알았건만, 그녀는 가볍게도 부정했다.

“상처 안 받는 사랑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사랑하니까 상처도 받는 건데요. 상처받을 게 뻔해서 끝내는 게 아니라, 상처만이 남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사랑이 나보다 더 소중하지 않아서 끝내는 거예요.”

그녀가 통통한 감자튀김을 오물오물 씹으며 시니컬하게 말을 이었다.

“상처 좀 받으면 어때요. 사랑 좀 구걸하면 어때요. 내가 그 사람이랑 있고 싶다는데.”

“…….”

“근데 그 사랑이, 그냥 덜 소중해졌을 뿐이에요.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요. 상처받을까 지레 겁나 끝내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크, 우리 처제 많이 컸네.” 하며 상호가 그녀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녀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얀마, 너는 좀 배워라!”

상호가 내게 핀잔을 던졌다. 실없이 웃음을 흘리자 그녀의 호기심 담긴 눈이 내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그 호기심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제가 그 사람이랑 사귀면서 워낙 지지고 볶아서 친구들 연애 상담 전문이에요.”

그녀가 자연스레 내게로 쏠린 시선을 다시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문득 모든 걸 털어놓고 후련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나, 그런 자격이 내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리가 파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붉은 가로등이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통통 튀었다.

간만에 친구 부부를 만나 술을 마셨고, 대리를 불렀고, 가만히 창에 기대 야경을 바라보는 여느 때와 같은 시간이다. 그가 없던 시절에도 이런 시간을 살았다. 그런데 왜 그가 없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이렇게 추잡하고 미련 많고 서툴고 멍청해서, 왜 하지 말자고 다짐한 사랑을 또 해 버리고 그를 놓자고 결심해도 놓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이런 인간으로 태어나야 했던 걸까, 하는 자기혐오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집에 도착해 불을 켜지도 않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로 잠이 오지 않을 걸 알기에 그저 눈만 감았다.

내가 나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낌없이 그를 사랑했을 텐데.

내가 상처받을 게 뻔해서 끝낸 것이 아니라, 그를 지치게 하고 그가 나를 미워하게 만들 것이 뻔해서 끝낸 것이라고 되뇐다. 어느 쪽이든 내가 아니었으면 괜찮았을 일이다.

상념은 자기혐오부터 자괴감, 그리고 늘 이어지던 형편없는 생각들로 이어져 끝내는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로 끌려간다.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랑은 없나. 그녀의 말이 맞다. 상처받지 않는 사랑은 없다. 적어도 내 사랑에서는.

나는 내가 상처받는 게 두려워 그와 이별했나, 그에게 끔찍한 기억만을 남길 것이 두려워 이별했나.

이내 깨달았다. 어느 쪽이든 똑같다. 어느 쪽이든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이기에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결국 그를 배제한 결론을 내리고 혼자 이별을 택한 것이다.

그러자, 헤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물씬 밀려왔다.

나는 이런 인간이잖아.

새어들어 오는 빛에 눈을 뜨자, 창밖으로는 동이 트고 있었다. 세상은 밝아지고 있는데 나는 점점 어둠에 스며들어 그림자가 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해가 뜨고 있는데 나는 그 빛의 사각지대에 있는 기분. 그리고 그곳에 있길 자처한 건 나다.

침실 안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 * *

개학 날이었다. 해가 쨍쨍했다. 아직 9월이 되지 못한 여름은 가을과는 한참 멀어져 있는 듯했다.

날이 더워서인지 개학식은 강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더운데 그냥 방송으로 개학식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아이들의 불평을 잠재우고 강당으로 향했다.

방학 동안 잘 먹고 온 건지 볼이 토실토실해진 아이들이 종알대며 줄을 섰다. 아이들의 줄을 잘 맞춰 주며 앞으로 향했다. 정 선생과 옆 반인 관계로, 내 옆에는 바로 정 선생이 서 있었다.

그를 힐긋 훔쳐봤다. 밝은 낯으로 아이들을 보는 그의 얼굴은 좋아 보였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살이 조금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쌤, 오늘 예쁘게 입고 오셨네요.”

2반 반장이 정 선생에게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그는 아이보리 얇은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 있었는데, 왜 아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평범한 옷차림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위한 옷처럼 딱 들어맞았고, 머리를 손질했는지 이전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여전히 예쁘다. 아니, 이전보다 더.

그런 그를 보는 나는 문득 부끄러워졌다. 내 머릿속이 순수하지 못해서. 복잡한 생각들이 지리멸렬하게 휘몰아쳐서.

다행히 개학식이 곧 시작되었다. 상념들을 애써 깨뜨리며 줄을 맞추고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다는 명분으로 뒤로 향했다. 맨 뒤로 가 강단 쪽을 돌아보자, 정 선생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예쁘네, 하고 중얼거리다가 그런 내가 우스워 자조적으로 웃었다.

개학식이 끝날 즈음 도착한 전학생을 데리고 교실로 향했다. 긴장한 눈치인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문을 열었다. 전학생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옆 반에 민폐가 되는 일이라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자 곧 조용해졌다.

“오늘 전학생이 왔다. 처음이라 어색한 게 많을 텐데 다들 많이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라.”

“네에!”

“현서야.”

내 부름에 현서가 교실로 쪼르르 들어왔다. 상기된 뺨에는 긴장이 어려 있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현서, 자기소개 할까?”

“네. 안녕, 나는 김현서야. 서울에서 왔구, 앞으로 잘 부탁해.”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아이들이 웃으면서 손뼉을 쳐 주었다. 현서를 빈자리에 앉히고 나서 출석을 확인하고 출석부를 덮었다.

“자, 오늘 정상 수업인 거 알고 있지?”

“우우!”

“조용. 방학 동안 다들 잘 놀고 와서 수업 듣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적응하려고 해 봐. 수업 잘 듣고.”

전학생과 이야기를 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일찍 조회를 끝내고 나왔다. 옆 반에서도 문이 열렸다.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정 선생이 우뚝 서서 나를 보고 고개를 꾸벅이더니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갔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가 곧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와 나의 발걸음이 엇갈린다. 잠시 멈춰 섰다가, 그가 왼발을 내밀 때 나도 왼발을 뻗었다.

그와의 보폭을 비슷하게 하자 열 걸음 떨어진 거리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금이라도 함께하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정 선생과 만나면서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수포로 돌아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개학 날에도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왔는지 남학생과 산책을 하고 있는 정 선생을 발견했다. 아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쨍쨍한 햇빛 아래 그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만지고 싶어서 괜스레 내 소맷부리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잘 지내고 있었다. 먹기도 잘 먹고, 웃기도 잘 웃고, 이야기도 잘했다. 간혹 나와 눈이 마주칠 때도 있었으나,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젠 남남이 되었다는 것만 다를 뿐, 그는 평소와 아주 똑같았다.

길지 않은, 그러나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그는 잘 털어 낸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가 나로 인해 괴롭지 않아서, 나로 인해 그의 올바른 시간들을 엉망으로 보내지 않아서.

비록 나는 그를 털어 내지 못할 것 같지만.

잘 걸어가던 정 선생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내가 있는 옥상 쪽으로 향한다. 다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가, 어느 날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제 보입니까?’

-음, 조금요. 난간 때문에 더 안 보이는 것도 있나 봐요. 역시 좋은 아지트네요.

조금,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가 그의 얼굴을 계속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아주 조금의 모습도 어쩌면 그를 불쾌하게 할까 봐. 아니 사실은 그가 어떤 낯을 하고 있을지 보기가 무서워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덜컥 두려워졌다. 언제쯤이면 괜찮아질까 싶어서. 문득문득 들이치는 후회와 아픔의 파도가 언제쯤이면 뒤로 밀려날까 싶어서.

* * *

“쌤!”

조례를 끝내고 나오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세민이가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교무실 가세요?”

“응.”

“저도 같이 가요.”

교무실로 향하면서 세민이를 흘깃 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교무실에 도착해 내 자리에 앉아 책상으로 다가온 세민이에게 사탕을 건넸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네. 현서 말이에요.”

“현서?”

그러고 보니 현서가 전학 온 지 일주일이 흘렀다. 어떻게 잘 지내고 있는지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현서가 왜.”

“저희랑 친해지기 싫은가 봐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

“그냥, 같이 뭐 하자고 해도 괜찮다 그러고. 저는 현서랑 친해지고 싶은데, 우리가 싫은가? 자꾸 피하는 것 같아요.”

입을 비죽이는 현서의 낯이 시무룩했다. 아이가 전학을 온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되었으니 낯을 가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낯을 가리나 봐. 아직 일주일 안 됐으니까, 이해해 주고 기다려 줘. 전에 살던 곳에서 이사 와서 친구랑도 떨어지고 다 처음이니까. 너희를 싫어하는 건 아닐 거야.”

“음, 네.”

퍽 신경이 쓰였는지 내게 와서 말해 준 것이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사탕을 더 쥐여 주었다. 세민이가 자리를 뜨고 나서 현서와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옥상으로 올라왔는데, 현서가 잠긴 문 앞에 앉아 울고 있었다.

“현서야.”

내 부름에 현서가 깜짝 놀라 고개를 퍼뜩 들더니 손으로 얼굴을 마구 닦았다. 한숨을 삼키고 무릎을 꿇어 앉아 숙인 아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왜 여기서 울고 있어.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줄래? 선생님이 도와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줄 테니까.”

“아니에요.”

말을 하기가 싫은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이의 옆으로 가 앉았다. 급식으로 나왔던 요구르트를 안 마시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잘됐다 싶어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래, 그럼. 얼굴 가라앉을 때까지 선생님이랑 쉬다 가자.”

바닥이 생각보다 차갑지 않아 다행이었다. 여선생이었다면 아이가 조금 더 편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성별보다는 사람의 문제인 걸 알기에 쓴맛만 다셨다.

“……선생님은 여기 왜 올라오셨어요?”

이제 진정이 좀 됐는지 아이가 훌쩍이며 물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너무 불량 교사가 되는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

“바람 좀 쐬고 싶어서.”

“옥상 문 잠겨 있던데요.”

“쌤은 열 수 있어. 들어가 볼래?”

“들어가도 돼요?”

“원래는 안 되는데, 비밀.”

부은 눈을 한 아이가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귀여워 짧게 웃고는 문을 열었다. 옥상 안엔 별게 없었지만, 그래도 풍경은 좋은 편이라 아이가 탄성을 흘렸다.

“시원해요.”

“풍경 괜찮지?”

“네.”

“난간에 너무 붙진 말고.”

내 말에 난간에 손을 올리고 있던 아이가 착실히 뒤로 물러났다. 간만에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가을의 기미가 섞여 든 바람이었다.

“쌤.”

한 10분간 멍하니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이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 해서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응.”

“……애들이 저 싫어해요?”

“아니? 현서 너랑 친해지고 싶다고 하던데. 왜, 애들이 널 싫어하는 것 같아?”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입술을 우물쭈물하는 게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얌전히 기다리니 곧이어 말이 나왔다.

“그냥…… 저를 싫어하면 어쩌나 해서요.”

“너를 왜 싫어하겠어.”

“……전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었는데요. 그래서 무서워요. 여기서도 따 당할까 봐요.”

아. 세민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현서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가 들고 있는 요구르트의 껍질을 뜯어 건네줬다. 아이가 요구르트를 홀짝홀짝 마셨다.

“겁먹지 마. 전에 겪은 일로 겁은 나겠지만, 손 내미는 친구들도 봐 줘. 여긴 새 학교고 새 교실이고, 새 친구들이니까.”

“…….”

“현서야. 우리 반 애들이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던데, 걱정 말고 손부터 잡아 줘. 그 뒤로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다시 선생님을 찾아와. 선생님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까.”

이 나이 때 아이들이 겉은 어떨지 몰라도 속이 얼마나 여린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고, 어떤 관계는 부딪치고 깨지고 박살이 난 걸 경험해 보았음에도 아직도 힘이 든다. 그래서 때로는 친구가 전부인 어린아이들에게 이러한 일이 얼마나 힘들지 또한 안다.

다만 아이들이 제 잘못이 없음을 알기를 바랄 뿐이다. 설령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돌아오는 것이 제 잘못에 비해 지나치게 크다면, 그것까지 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현서 네가 따돌림을 당했던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움츠러들 필요 없어. 우리 반에 친구를 따돌릴 놈들은 없고, 만약 그런 녀석들이 있다면 선생님은 절대 그 애들의 편을 들어 주지 않을 거야. 못된 아이들 때문에 네가 상처받아 새 친구도 사귀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잖아. 그렇지?”

아이가 훌쩍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담은 꽤 간만이라 나긋한 말투가 스스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이에게 내 말이 어떻게 가 닿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좋게 받아들였을 수도, 어쩌면 나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지켜봐야 하는 건 내 쪽이었다.

“점심시간 끝나 간다. 그거 다 마시고 들어가자.”

“네. ……쌤.”

“응?”

“비밀로 해 주세요.”

어떤 걸 비밀로 해 달라는지는 명확해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요구르트를 비운 뒤 옥상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복도를 지나치는 정 선생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지나칠 줄 알았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가 한 발자국 다가온다.

“전학 온 현서 맞지?”

“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선생님 초콜릿 있는데 먹을래?”

정 선생이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이가 감사합니다, 하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그래, 한다.

분명 아이의 얼굴에 울음기가 남아 있어 가던 도중 멈춰 초콜릿까지 쥐여 준 것일 테다. 그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다시 뒤돌아선다. 미간을 좁히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보며, 내가 과연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지레 겁먹고 노력조차 포기한 게 난데, 어떻게 아이에게 노력을 강요할 수 있을까.

머리가 아프다. 사랑으로부터 비롯한 고통은, 언제나 나를 잠식했다.

* * *

얼핏 의식이 깨어났다. 빛이 창문 너머로 가득 들어온다는 걸 느끼면서,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자긴 잤구나 싶었다. 몇 시일까. 알람이 울릴 때가 된 것 같은데, 하며 핸드폰을 들었을 때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8시 반이었다. 잠시 눈을 껌뻑이며 시간을 멍하니 응시하다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빨리 준비해 봤자 9시에 가깝게 도착할 것이다. 부장님께 문자를 보낸 뒤 욕실로 들어갔다.

기껏해야 세 시간 남짓 잔 것이기에 정신이 몽롱했다. 개운하게 잔 것도 아니면서 지각까지 하다니 엉망이었다. 어쩌다 알람이 울리지 않은 것인지, 알람을 듣고도 자 버린 건지 모르겠다.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씻고 나와 잡히는 대로 옷을 입고 나왔다. 속도를 내고 싶어도 남들 출근 시간에 맞물린 데다가 오늘따라 신호에 자꾸 걸렸다. 이래서 9시 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한숨을 내쉬고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점점 몸이 엉망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점심을 균형 잡힌 식단으로 먹는 대신, 아침과 저녁을 거르고 잠은 제대로 자지 못하여 스트레스 때문에 명치 한가운데가 꽉 막힌 기분이 몇 주째 계속되고 있었다. 가끔은 위도 쓰려서 점심을 먹을 때도 곤욕스러울 때가 있다. 스트레스성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달고 있던 마음에서 비롯한 병이었으니까.

너무 일찍 지치고 있다고 느꼈다. 조금 더 느리게 지쳐야 하는데,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찾아오는 속도처럼 대비할 새도 없이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뭘 위해서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나도 싶었다. 나름대로 아등바등 살아왔는데,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도착해 계단을 서너 개씩 성큼성큼 올라 교무실로 향했다. 아슬아슬하게 9시에 도착했기에 반에 들러 조회를 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근무를 하면서 처음 하는 지각에 동료 선생들이 놀란 듯 한 마디씩을 던졌다. 대충 대답하고 수업 자료를 챙겨 교무실을 나왔다. 의식적으로 정 선생에게는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수업은 엉망이었다. 특별히 버벅거리거나 잘못된 공식을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으나, 스스로 집중이 되지 않아 엉망인 게 느껴졌다. 아이들도 집중을 하지 못하기에 자습을 시켰다.

오늘은 수업이 두 개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종례를 할 때는 정신이 조금 깨어 있었다. 종례를 마치고 청소를 했는데도 어수선한 교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세민이가 현서와 함께 팔짱을 끼고 내 앞을 얼쩡거렸다.

“쌤!”

“응, 왜.”

“저 스포츠 교실 하잖아요. 배드민턴!”

“응.”

“현서가 초등학생 때 배드민턴 선수였대요! 그래서 오늘 현서 데려가서 같이 하려고 하는데 쌤 구경 오실래요?”

그새 친해진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귀엽게 빛내는 두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세민이도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니,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굳이 가야 하나, 싶으면서도 이 정도 부탁 하나 못 들어주나 싶어서, 그리고 현서가 있어서 같이 가 주기로 했다.

강당 가운데는 네트가 펼쳐져 있었다. 아직 수업을 시작하기 전인지, 아이들은 저마다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포츠 강사에게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강단 밑에 스포츠 강사뿐만 아니라 정 선생도 눈에 띄었다. 친화력 좋은 정 선생은 그와 그새 친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 그냥 가야겠다 하고 생각했을 때 세민이가 목소리를 냈다.

“쌤!”

그 목소리에 스포츠 강사와 정 선생 모두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배드민턴 선수였던 제 친구 데려왔는데요. 오늘 같이 해도 돼요? 오늘 해 보고 얘도 할지 말지 결정하고 싶대요!”

“그럼, 괜찮지. 안녕하세요.”

스포츠 강사가 시원하게 대답하고선 아이들 뒤에 서 있던 내게 인사를 건넸다. 어쩔 수 없이 인사를 건네고 다가가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아이들이 구경 오라고 해서요.”

“잘 오셨습니다. 아, 이왕 오신 김에 한판 하고 가시죠! 정 선생님이랑 한판 하시면 되겠네.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가볍게 몸 풀고 가세요.”

“아.”

와! 쌤이랑 정 쌤이랑 붙으시는 거예요? 재밌겠다!

아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쏠리는 걸 느끼며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아침부터 엉망인 하루가 기어코 끝도 엉망으로 나려는가 싶었다. 거절을 해야지, 하고 입을 열 때였다.

“좋아요. 한 판만 하고 가죠.”

정 선생이 싱긋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보면서. 잠시 뭔가에 얻어맞은 듯 멍하니 있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선생이 라켓과 셔틀콕을 들고 네트 반대편으로 갔다. 나는 스포츠 강사가 내게 떠안긴 라켓을 들고 얼떨결에 정 선생의 반대편에 섰다. 아이들이 강단 앞에 옹기종기 모여 그와 나를 응원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하고 정신을 추스르기도 전에 셔틀콕이 날아왔다. 그는 운동을 잘하는 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언젠가 같이 운동을 하자던 그의 음성이 떠올랐다. 시원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셔틀콕을 받아쳤다.

그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 이렇게 공을 주고받았겠지. 채 떨치지 못한 미련이 라켓 구멍 하나하나에 맺혔다.

좋다고 흔쾌히 라켓을 든 그의 의중이 읽히지 않았다. 헤어진 연인과 아무렇지 않게 셔틀콕을 주고받을 만큼, 그는 이제 다 털어 낸 걸까.

그와 함께 전시회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그가 형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그와 이전에 교제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걸 보면 그는 이전 연인과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그의 전 애인이 된 거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건 한 사람이면 족했다. 그것이 나라면 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셔틀콕을 그에게로 넘기고, 셔틀콕을 눈으로 좇는 그의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이 시간이 현실 같지 않았다. 그가 라켓을 뒤로 넘기고 힘을 주어 셔틀콕을 쳤다. 소맷부리가 어깨 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잠깐 보였던 그의 팔뚝이 힘을 받아 마르게 잡힌 근육을 드러냈다.

셔틀콕이 내게로 날아온다. 정확히 내 얼굴 부근으로 날아오는 것에, 나는 미처 라켓으로 받아치지 못하고 고개를 젖혔다. 셔틀콕이 내 목덜미를 맞히고 떨어졌다.

“괜찮으세요?”

정 선생이 미안하다는 낯으로 나를 보고 물었다. 셔틀콕을 주워 들고,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그가 나를 아프게 해도 좋았다. 그가 나를 아프지 않게 해도 좋았다.

바닥에 수북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에 대한 마음이 갑작스레 떠올라 한데 뭉쳐 목구멍을 막는 기분이었다. 그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좋을 것 같다는 것을 자각하는 건 큰 고통이었다.

* * *

주말이었다. 동이 트는 걸 보고 잠들어 12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일어났다. 그나마 주말이 되면 잠을 조금 잘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일어나 씻고 나와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생수를 사서 들어왔다. 식사를 챙기는 게 귀찮았으나 평일에 수업할 체력을 유지하려면 조금이라도 챙겨야 했다.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물을 마신 뒤 도시락을 꺼냈다. 요즘은 편의점 도시락이 잘되어 있어서 한 끼를 때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재방송의 향연을 멍하니 감상했다. 하나의 프로그램이 끝나면 채널을 돌렸다. 그렇게 텔레비전만 보고 있자니 어느덧 오후 6시였다.

아직 창밖은 밝았다. 9월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여름 티를 못 벗어난 날은 해가 짧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길어서 하루마저 긴 것같이 느끼게 했다. 공기가 답답해서 발코니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꽁초가 될 때까지 물고 있었더니 노을이 지는 것이 보였다.

색이 유난했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 것만 같이 하늘이 붉었다. 자줏빛이 낀 붉은색은 핏빛이었고 현실이 아니라 꼭 만화 속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비현실적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 담배가 더 당겨 한 개비를 더 꺼낼 때, 희미한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창 사이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열렬히 진동하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안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들었다가, 화면에 뜬 발신인의 이름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정진]

정갈한 두 글자가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세상에 어떤 글자도, 어떤 말도 이같이 사람을 등신처럼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들진 못할 거다.

마른침을 삼키고,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몇 번이나 목소리를 내어 스스로의 목소리를 확인하다 행여나 전화가 끊길까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김후진 씨 되십니까?

다정한 목소리가 아닌 생각지도 못한, 어떤 난감한 기색이 서린 다른 남자의 목소리에 당황해서 입매를 굳혔다.

“예. 누구시죠?”

-여기 술집인데요. 이 핸드폰 주인분이 지금 술에 취하셔서요. 깨워도 안 일어나셔서 전화 드렸어요.

“거기가 어딥니까.”

-아, 여기가 강천동인데요. 그 종합 병원 앞 사거리에 있는 이자카야…….

“압니다. 지금 가죠.”

-예.

어딘지 알고 있다. 일전에 정 선생과 함께 전골을 먹었던 곳이었다. 직원이 왜 내게 연락을 한 건지, 그가 왜 초저녁부터 취해 쓰러진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다급하게 신발을 신었다.

습기 어린 선선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가게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뛰듯이 걸었더니 등에 땀이 맺힌 것이 느껴졌다. 불쾌함을 뒤로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종이 딸랑, 울리면서 직원의 우렁찬 인사가 나를 반겼다. 가게 안은 작아서 정 선생을 찾기 어렵지 않았다. 그는 가게 구석에 혼자 앉아 엎드려 있었다.

“아, 아까 전화받으신 분?”

“예……. 이 술을 혼자 다 마셨습니까?”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이 무려 세 병이나 있었다. 정 선생의 주량을 보았을 때, 확실히 많은 양이었다.

“오픈하자마자 오셔서 저걸 다 마시셨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가게가 오픈하자마자 찾아와 이기지도 못할 독한 술을 마셨을까. 한숨을 삼키고 그를 흔들어 보았지만, 그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찾아보니까 화면에 손님 번호가 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전화 드렸습니다. 제가 뭐, 실수한 건 아니죠?”

“……괜찮습니다.”

그가 먹은 값을 지불하고 그를 업었다. 축 늘어진 몸이 무거워야 마땅했으나, 수학여행 때 업었던 무게보다는 형편없이 가볍게 느껴져서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흘러내리는 그의 몸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온기가 등을 덥힌다. 땀이 맺힌 내 등 때문에 그가 불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핸드폰에 내 번호가 떠 있었다는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애써 꾹꾹 눌러 밟으려고 해도 유연한 풍선처럼 그 말은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을 흘깃 돌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를 보았다. 그의 체향이 코끝으로 스며든다. 눈을 감았다 떴다. 억지로 끊고 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하루가 길었던 만큼 지금 이 시간도 길기를 바랐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다 못해 영원히 멈추어 버렸으면, 하고.

술을 많이 마시면 자는 사람이 어떻게 소주 세 병까지 버티게 된 걸까. 혼자 마시지 말고, 누구라도 같이 불러서 천천히 마시지. 그런 비겁한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우스워서 뻔한 웃음을 흘렸다.

걸음을 아주 천천히 옮기면서도 혹시라도 그가 깨어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몇 번이나 더 빨리 움직일까 고민했다. 그가 내쉬는 숨이 내 옷깃에 닿을 때마다 명치 한가운데를 막고 있던 그간의 스트레스가 사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걸음걸음 그와의 좋은 기억이 다시 살아났다. 끔찍했던 기억의 잔재나, 예정해 두었던 끝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했던 좋은 시간들만이.

별이 떴다. 어쩌면 그와 볼 수 있는 마지막 밤하늘일지도 모른다. 그의 집 앞에 다다라서 잠시 별빛이 번진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 서서는 비밀번호를 알지 못해 잠시 난감하게 서 있었다. 술 취한 사람을 모텔에 혼자 눕히는 것은 영 마땅치 않아 도어록을 열고 그의 생일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음,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너무 쉬운 번호가 아닌가 싶다가도 괜한 걱정이지 싶어 안으로 들어섰다. 불을 켜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그를 눕혔다. 가뿐한 숨을 내쉬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그의 신발을 벗겼다.

“음…….”

뒤척이는 소리에 그의 신발을 든 채로 멈춰 섰다.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가 눈을 떴다.

“……김 선생님?”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몽롱한 목소리는 술김인 것 같기도 했고 잠결인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손을 뻗었다. 그의 쪽으로 다가가자, 그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선생님이세요?”

대답하지 않자 그의 손가락이 내 손목을 지분거린다. 그의 피부가 닿자 찌릿함이 올라와 입술을 물었다.

“선생님 맞으시죠? 근데 왜 대답 안 하세요? ……김 쌤 진짜 짜증 나요.”

목소리에 술기운이 묻어났다. 어쩌면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기억을 하더라도, 꿈이었다 생각할지도.

“왜 김 쌤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왜 저만 이렇게 아파요? 절 좋아하시기는 하셨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밤낮을 끙끙 앓으면서 고민해도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이해가 안 가요.”

울먹이는 목소리에 주먹을 쥐었다. 혹시 내 손이 빠져나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지 정 선생이 내 손목을 꽉 부여잡았다.

“제가 남자라서, 사귀고 보니까 아니구나 싶었어요? 내가 뭘 잘못했나? 이럴 거면 왜 붙잡았어요. 내가 친구라도 괜찮다고 했는데……. 진짜 괜찮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척했을 거란 말이에요…….”

다정했던 그가 내게 원망을 쏟아 내고 있었다.

내가 착각했다. 그는 괜찮은 게 아니었다. 그는 다 털어 낸 게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면 왜요. 차라리 사귀어 보니까 안 되겠다, 하면 포기라도 하지. 전에 사귀었던 사람을 저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왜 과거의 그림자 때문에 제가 피해를 봐야 해요?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왜 김 쌤이랑 내가 헤어져야 하는데요?”

나만 아픈 게 아니었다. 나는 아파서도 안 됐다.

또 한 번 나의 이기심을 실감하는 순간, 헤어져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이걸 말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진짜 싫어요. 김 쌤 너무 싫고 밉고 짜증 나요. 선생님은 비겁해요.”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나 같은 인간이 싫은데, 누가 이런 나를 좋아할 수 있을까.

“그래도 좋아해요.”

“…….”

“후진 쌤은…… 비겁하고 밉고 싫지만 그래도 좋아요. 선생님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그래서 미운 부분보다 그 부분이 더 크게 들어와서 전 좋아요. 제가 좋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감당이 안 되게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우물우물하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그를 사랑해서 다행이다. 그를 사랑할 수 있던 시간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친구라도 하면 안 돼요?”

“…….”

“저는 후진 쌤이 남자로서 좋기도 하지만, 한 사람으로서 좋기도 해요. 그니까, 그냥, 친구라도 하면 안 돼요?”

“…….”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무서워요. 사실은 그냥 나한테 질려서, 아니면 남자는 안 되겠어서 나한테 그렇게 못되게 말한 걸까 봐요. 그래서 잡지도 못하겠어. 너무 무서워요…….”

정 선생은 그 말을 하면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이별을 통보한 형편없는 남자 앞에서 그는 친구라도 하자며 울고 있었다.

“울지 말아요.”

막연히 그가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겉보기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그의 입장에선 전혀 생각지 않고 나 좋을 대로 생각하고 말았다.

내가 상처받을까 두려워 끝낸 사랑이, 그를 상처 입히고 말았다.

뭘 위해서 이렇게 했던 걸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나는, 그 속에서 나만 제자리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의 손을 잡아채 같은 자리에 앉혀 둔 게 아니었을까.

이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도 나의 전 연인들처럼 내게 질릴 거라 생각했다. 나는 그래야 마땅한 인간이었다. 부모도 형제도 연인도 나를 끝내 사랑해 주지 못했는데, 그도 언젠가 차가운 눈으로 내게 이별을 고할 거라고.

하지만 그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내가 상처 입는 게, 그가 상처 입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 따위가 이별을 말해 그를 괴롭게 한다. 그냥 두려워도 버티고 버텨, 끝내 찾아올 미래에 그의 차가운 눈을 보며 사랑을 구걸하는 게 나았을 거다. 나는 절대 그가 나 같은 인간에게 사랑을 구걸하게 하려고 이런 선택을 내린 게 아니었다.

발밑이 새까맣게 물든 기분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살아왔던 삶과, 그 위에 세운 나의 보잘것없던 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인간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 순간에도 자기혐오가 끝까지 나를 괴롭힌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여서, 그런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한 사람이라, 말할 수도 없이 괴로웠다. 이토록 괴로웠던 적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목구멍 너머로 울컥, 토해 내는 감정들을 겨우 삼키고 그의 눈 위에 손을 덮었다.

“가지 마세요.”

“응. 안 갈 테니까 자요.”

훌쩍이면서 끅끅대던 정 선생의 숨이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 손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풀리고, 스르륵 떨어진다.

창밖으로 보름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빛이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그 빛줄기가 못내 아픈 내가 너무 나약해서 또 괴로웠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든 정 선생의 얼굴을 보다가 협탁 위에 있는 물티슈를 뽑아 그의 얼굴을 닦아 주고, 그의 핸드폰을 들어 통화 기록을 지웠다. 그리고 그의 신발을 현관 앞에 내려놓았다. 그가 혼자 들어온 것처럼 보이게 흐트러진 채로.

그리고 그의 집을 나왔다. 밤하늘이 맑았다. 유난히 괴롭고 부끄러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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