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못난 고백 (9/15)

9. 못난 고백

고요한 공간에 바람이 한차례 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시원했다. 다소 공기가 무겁긴 했으나 나쁘지 않았다.

정 선생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의 턱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가 내려앉으면서 꾹 눌렸다. 첫 키스도 아닌데 심장이 경련했다.

아랫입술을 살며시 빨았다. 달았다. 몇 시간이고 빨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혀는 얼마나 더 달까. 벌어진 입술 새로 그의 혀를 찾아 얽었다. 물컹한 감촉이 더없이 황홀했다. 그의 입안은 그만치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가 손을 내 목에 걸쳤다. 그의 손끝이 내 뒷목을 은근하게 문질렀다. 입술을 살짝 뗐다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꺾고 다시 붙였다. 방향이 달라진 것뿐인데도 처음 닿아 보는 것 같았고 애가 탔다.

서로의 입안을 탐하는 것보다는 서로의 알맹이를 맛보는 데 집중을 했다. 혀끝을 감질나게 문질렀다가 거칠게 얽었다. 젖은 소리가 났다.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눈을 떴다. 눈을 감고 내게 매달린 정 선생이 보였다. 남자를 상대로 키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상대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질 줄도 몰랐다. 사춘기 소년처럼 키스 하나에 발기할 것만 같아 직전에 입술을 뗐다.

눈을 맞추고 숨을 골랐다. 상기되고 고양된 얼굴에 참지 못하고 다시 짧게 입을 맞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 한복판이었다. 물론 보통 길보다 낮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한밤의 산책로였지만 멋쩍은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가죠.”

“네.”

길게 늘어진 산책로를 걷는 동안 손을 잡았다. 인도에 올라와서는 손을 놓아야 했다. 손안에 여전히 남은 온기가 아쉽게 느껴졌다.

애매한 정적이 흘렀다. 전에 교제했던 이들에게는 모두 내가 먼저 고백했지만, 그때는 아마 헤어지기 직전이나 그녀들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사랑을 말했던 것 같다. 이번엔 정 선생이 먼저 연애를 하자고 했고, 집에 가려면 10분은 더 걸어야 했다.

첫사랑 앓는 사춘기 고등학생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지 모르겠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다. 나이 서른둘 먹고 감정 하나 주체 못 하면 안 되니까.

“가요.”

정 선생의 집 앞에 도착해서 인사를 건넸다. 정 선생이 고개를 작게 숙였다.

“조심히 가세요.”

내가 먼저 돌아서는 것을 바라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고서 돌아섰다. 나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후덥지근한 밤바람이 전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이 전혀 쓸쓸하지 않았다.

불 꺼진 집이 어두컴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을 켜고 욕실로 들어가 끈적거리는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나오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정 선생의 전화였다.

“네.”

-잘 들어가셨어요?

“응. 막 씻었습니다.”

-음. 내일모레 뭐하세요?

“만날까요?”

대답과도 같은 질문에 정 선생이 웃음을 흘렸다.

-미술 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번에 전시회를 연다고 해서요. 시간 되시면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네. 오늘 하루가 길었네요. 푹 쉬세요.

“정 선생.”

-네?

“잘 자요.”

-아하하! 네. 선생님도요.

전화를 끊자마자 잠이 밀려왔다. 어쩐지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와 침대에 쓰러지듯 눕는 순간까지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고요한 공간에 바람 같은 웃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잠이 왔다. 좋은 밤이었다.

* * *

하늘이 노랗게 익을 무렵 상호에게 호출을 받았다. 간만에 시간이 돼서 근처에 사는 윤상이와 만났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친구 놈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그러니 너도 오라는 것이 용건의 전부였다.

서울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오랜만에 다 모이는 자리였기에 불참하면 두고두고 잔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정 선생이 시간이 되면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했는데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정 선생이었다.

“일 잘 마치고 왔습니까?”

-네. 별건 아니고, 그냥 선배 도와주는 정도였어요. 집이세요? 뭐 하세요?

“약속 있어서 서울 가는 중이에요.”

-아. 시간 되시면 저녁 같이 먹을까 했는데.

전화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저녁을 같이 할 수 있었을 거다. 아쉬운 목소리에 괜히 입이 말랐다. 그냥 가지 말고 그랑 놀까.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에 지레 놀라 실소를 흘렸다.

“나도 그랬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빠지기가 좀 그래요.”

-친구분들 만나세요?

“네. 원래 다들 일이 있어서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우연히 시간이 됐나 보더라고요.”

-아아. 고등학교 친구예요?

“한 명은. 나머지는 세 명은 대학 가서 만났고.”

-와, 그렇게도 인연이 돼요?

“워낙 사교성 좋은 놈들이라. 서로 잘 맞기도 했고. 어떻게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이렇게 다 친해진 데는 친구들, 특히 상호의 덕이 컸다. 나 혼자 다른 과에 접점도 없었으나 상호가 그들을 다 모아 내게 소개해 주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은요? 여러모로 인기 많으셨을 것 같은데.

“내 인간관계는 내 친구들에 비해서 좁은 편이에요.”

-대신 깊겠죠?

“음. 정 선생은요.”

-저는 뭐, 워낙 여기저기 쏘다녀서. 그런데 아무래도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학생 때 반장은 도맡아서 했을 것 같은데.”

-부반장 했어요. 감투는 쓰고 일은 안 해서 편한.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재밌는 라디오나 신나는 노래보다 그의 웃음이 더 즐겁게 조용한 차 안을 채웠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운전을 하면 몇 시간 거리의 고속 도로도 거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근데 지금 운전 중이신 거 아니세요?

“맞아요.”

-그럼 끊을게요. 운전에 집중하세요.

“목소리 계속 들려주면 안 됩니까?”

-…….

“안 바쁘면요.”

-……네.

정 선생이 아까보다는 작아진 목소리로 오늘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었다. 한 시간 반을 넘는 거리를 그의 목소리가 촘촘히 채워 주었다. 그러다 보니 꼭 조수석에 그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출렁이는 오선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높은음자리표부터 시작해서 도, 미, 솔.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어느덧 약속 장소에 다다랐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린 정 선생이 “이제 끊을까요?” 하기에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작게 웃더니 “많이 마시지 마시고, 집에 들어가시면 연락 주세요.” 한다. 다정한 말투에 긍정의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창 마시고 있던 놈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윤상이 어이, 하고 손을 들더니 내가 자리에 앉자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 무슨 좋은 일 있냐?”

“무슨.”

“아니, 얼굴이 좋아 보여서. 보이는 게 아니라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상호가 내미는 소주잔과 함께 소주를 받았다. 그러자 윤상의 말을 다른 놈이 거들기 시작했다.

“그러게. 얼굴이 폈어. 그냥 핀 게 아니라 아주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야.”

“이상호, 넌 모르냐?”

상호가 나를 흘긋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상호가 알 리가 없다. 그나저나 그저 통화를 했을 뿐인데 얼굴에 표가 났다는 게 우습게 느껴져 괜스레 표정을 굳히고 소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이 새끼 이런 얼굴일 땐 연애할 때밖에 더 있냐?”

진성이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했다. 다른 놈들이 나를 조심스럽게 쳐다본다. 이 눈길의 의미는 분명 지연이를, 지연이를 사랑했던 나를 신경 쓰는 것이 분명해서 쓰게 웃었다.

“연애는 무슨.”

둥글게 앉은 네 놈의 얼굴을 차례차례 훑어보았다.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는 사랑에 대해서 어떤 편견이나 혐오를 가질 놈들은 아니지만, 지금 나와 정 선생의 사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로또 맞았냐?”

“로또는 무슨. 너희 오랜만에 만나니까.”

실없는 소리에 실없는 소리를 대답으로 툭 던지고 남은 소주를 들이켜는데 테이블 위에 정적이 흘렀다. 윤상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이 새끼 이거, 가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 던지는 거 아주 취미야, 취미.”

“솔직히 얼굴이 되니까 봐줬지. 다른 놈들이 했으면 웩이다, 웩.”

“야. 외모 지상주의냐?”

“얼굴이 최고지!”

‘얼굴이 최고지!’ 하며 되도 않는 건배를 하기에 얼추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래도 넌 방학이니까 부르면 나온다, 야.”

“어. 너넨 어떻게 오늘은 일찍 퇴근했나 보네.”

“응. 이런 날 로또를 사야 하는데.”

그러면서 줄지어 회사 욕과 상사 욕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이어졌을 한탄이 다시 시작된 게 분명했고, 놈들의 한탄은 사람을 같은 늪으로 빠뜨리는 것이 아닌 데다 유쾌한 구석이 있어 술안주로는 썩 괜찮았다.

“김후진, 네 얘기 좀 해 봐. 뭐하고 지냈냐? 두문불출, 히키코모리 자식.”

“난 뭐, 똑같지.”

“애들은 괜찮고?”

“예뻐. 이번 애들은 좀 순해.”

“그거 다행이다. 요즘 뉴스 보면 심각하던데.”

화제가 또 금방 돌아섰다. 와글와글한 술집 안에서 와글와글한 녀석들이 술잔을 나누며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귀로 담았다. 구태여 이야기를 짜내지 않고 굳이 정성스레 반응을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는 익숙하고 편했다.

취기가 조금 오를 즈음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건물 옆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상호가 따라왔다.

“금연 실패?”

“실패는 무슨. 그냥.”

피식 웃고선 담배를 입에 물다가 문득 든 생각에 혀를 차며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담배 냄새 나는 애인은 별로겠지.

“왜. 안 피우냐?”

“응.”

“왜?”

“그냥.”

이번엔 녀석이 피식 웃는다. 기지개를 켜며 나를 물끄러미 보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눈썹을 들어 올리자 결국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무슨 일 있지?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서.”

“그렇게 좋은 일 없을 것같이 보여?”

“웬만한 일 아니고서야 네 얼굴이 그렇게 펴질 리가 있냐.”

이번엔 조금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놈들이 날 염려했던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연애해.”

상호에게 귀띔 정도는 해도 괜찮을 것이다. 정 선생과의 관계가 조금 더 길어지고 깊어지면 그때 전부에게 말을 해도 늦지 않겠지.

“뭐? 언제부터?”

“어제부터.”

“에에? 뭐야, 진짜 얼마 안 됐네? 와, 야! 잘됐다, 자식아!”

상호가 나를 끌어안더니 두툼한 손으로 내 등을 퍽퍽 내리쳤다. 조금 아팠지만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 몸을 떼고 녀석이 환하게 웃었다.

“누군데?”

“동료.”

“야, 내가 그때 물어봤을 땐 없다더니. 예쁘냐? 그렇게 좋냐?”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상호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나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잘해 봐. 너 똑 닮은 아기 기대해 봐도 되는 거냐?”

정 선생을 닮는 쪽이 더 나을 것 같긴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루어지지는 못할 상상이다.

“너무 갔어, 너.”

“요즘엔 속도위반이 트렌드라더라. 마음만 잘 맞으면 결혼 전에 2세 계획부터 세운다던데.”

“됐어.”

실없는 소리를 만류하니 녀석이 키득키득 웃었다. 문득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고등학생 때, 교실에 앉아 한참 서로의 2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어떤 연예인과 결혼하면 끝내주는 2세가 탄생할 거라느니, 미래의 2세에게는 태권도를 시킬 거라느니 모두 가볍고 실없는 소리들뿐이었다. 그래도 그중 몇몇은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었는데, 이젠 다들 그 계획들을 이룰 나이가 되었다.

물론 난 그 ‘평범한’ 계획에서는 한발 물러나 있겠지만. 꼭 남자인 정 선생과 교제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것이 좋은 확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저 웃었다. 어떤 계획이든 평범함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엔 같이 나아갈 길의 끝이 중요한 것이니까.

* * *

간만에 주량을 넘겼더니 머리가 울리고 속이 쓰렸다.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머리가 까치집이었다.

어제 집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차를 타고 갔으니 올 때는 대리를 불렀을 거다. 어제 정 선생에게 연락을 하기로 했었는데, 그럴 정신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목록을 확인하자 마지막으로 정 선생의 번호가 있었다. 통화 시간은 6분 30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밑을 보니 문자를 발신한 기록이 있었다. 문자함으로 손을 뻗었다.

[들ㄹ어와습ㄴㅣ다^ ^]

……가관이군.

5시에 만나 서울로 간 뒤 저녁을 먹고 전시회에 가는 방향으로 약속을 잡았다. 티셔츠 위에 가벼운 남색 재킷을 걸쳐 입고 차키를 챙겨 나왔다.

정 선생의 집 앞에는 이미 그가 나와 있었다. 그는 연한 노란빛의 차이나 칼라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은은하면서도 밝은 색이 그와 참 잘 어울렸다.

그가 문을 열고 꾸벅 인사하더니 조수석에 앉고 나서 안전벨트를 맨 뒤에 히죽 웃었다. 필름이 끊긴 어젯밤, 잃어버린 6분 30초의 일을 가관인 맛보기 문자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기에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

“오늘 몇 시에 일어나셨어요?”

“12시 다 돼서 일어났습니다.”

“해장은 하셨고요?”

“간단히 했어요.”

“으흠.”

의미심장한 추임새에 그를 흘긋 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다. 물론 늘 생글생글하긴 했지만 오늘은 더욱 그렇다.

“어제…….”

결국 운을 뗄 수밖에 없었다. 정 선생이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실수한 거 있어요? 내가.”

그가 나를 보던 채로 웃음을 흘렸다. 눈이 둥글게 접히면서 애교 살이 볼록 올라오고 입술 아래로 시원하게 이가 드러났다.

“아니요. 그런 거 없었어요.”

영 미덥지는 못했지만 안 믿고 파고들면 그건 또 내 손해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됐다. 실수까지는 아니었겠지.

한적한 거리에 위치한 일본 가정식을 주메뉴로 하는 식당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들어섰다. 음식을 주문하고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정 선생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웃었다.

“애들이 방학 숙제 꼭 해야 하느냐고 난리예요.”

“숙제 내 줬습니까?”

“영어 선생님이 내 준 모양이에요. 김상미 선생님 번호는 모르니까 저한테 그러는 거죠.”

“정 선생이 잘 들어 줘서 그러는 모양이네요.”

“아, 그렇다기보다는 이게 단체 채팅이라서…….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된달까. 그런 거죠.”

정 선생이 핸드폰을 내려놓고선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막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선 운을 띄웠다.

“선생님은 메신저 안 하세요? 문자가 더 편하세요?”

“귀찮아서요. 애들이고 학부모고 다 목록에 뜨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 맞아요. 그건 좀 그렇긴 해요. 아무래도 메신저는 사적인 공간의 느낌이 강하니까.”

그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점원이 내 앞으로 내주는 음식들을 바라보다 물었다.

“메신저 쪽이 더 편합니까?”

“아,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문자는 조금만 길게 보내도 MMS로 넘어가 버리니까요. 그렇다고 한 번에 여러 개 보내면 귀찮으실 것 같고…….”

“안 귀찮아요.”

“으흠. 그럼 됐고요.”

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전시회의 주인공인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개인 전시회는 아니었고 같은 주제의 작품을 전시하는 데 친구의 작품이 꽤 많이 있다고 했다. 친구는 정 선생이 대학을 다닐 때 만났는데, 미술에 대한 열정이 워낙 대단해서 언젠가 이름을 널리 알릴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정 선생의 얼굴이 대단히 뿌듯해 보였다.

그런데 묘한 괴리감이랄지, 길거리를 지나다 툭 튀어나온 돌부리를 밟는 느낌에 입을 열었다.

“전에 만났던 친구입니까?”

그러자 정 선생이 입을 다물었다. 얼핏 굳은 얼굴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냥.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아, 죄송해요. 속이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정말 짧게 사귀었던 친군데 정말 친구거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요.”

“괜찮아요. 속인 거라고 생각 안 합니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낯을 살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묘해서 눈썹을 들어 올리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선생님은 어른스러우시구나, 하고.”

“내가?”

정 선생이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인 것 같아 짧은 웃음을 흘렸다.

“과거잖아요.”

내 말에 그가 다시 끄덕끄덕. 그를 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미술관에 도착해서 천천히 작품들을 보았다. 정 선생은 손에 팸플릿을 들고 작품들을 유심히 보는 중이었다. 특히 같은 이름 앞에서 오래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친구가 그린 작품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미술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아는 것이 많아 볼 줄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끔 찾는 전시회는 그저 감상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적당히 가늘고 긴 손가락이 팸플릿을 쥔 채로 꼬물꼬물. 어째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그를 보는 게 더 재밌는 것 같아 큰일이었다.

전시관을 한 번 다 돌고 입구를 빠져나오면서 그대로 집에 갈지, 어디에 들를지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진아!”

뒤에서 정 선생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 선생과 내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색의 가벼운 정장을 입은, 장신에 인상이 좋은 남자였다. 그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이게 얼마 만이냐?”

“뭐야, 형? 못 온다더니?”

“너 보려고 왔다, 자식아. 하도 얼굴을 안 보여 주니까.”

“내가 아니라 형이 바빠서였지. 근데 형 이렇게 차려입은 거 처음 봐.”

즐겁다는 듯 말하는 정 선생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를 잠시 보다가 남자를 보았다. 친구라고 하기에 또래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나이가 많았나 보다.

그러니까, 전에 사귀었던 사람이라는 거지. 일전에 백화점 앞에서 마주쳤던 정 선생과 그 옆의 남자가 떠올랐다. 정 선생보다는 조금 어려 보였던. 그러고 보니 둘 다 키가 크네.

좋게 헤어진 모양이다. 아직도 이리 사이가 좋은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딱 정 선생답다 싶기도 하고.

“근데 오늘…….”

남자의 눈길이 흘깃, 내게로 왔다. 그러고선 다시 정 선생을 보는 눈빛이, 왠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애인이냐는 뜻이 아닐까. 정 선생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약속 있어, 미안. 다음에 만나자. 연락할게.”

“그래, 어쩔 수 없지. 가 봐.”

남자가 내게 눈인사를 하기에 나도 그에게 인사를 했다. 정 선생이 약간 어색한 얼굴로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라 그의 정갈한 뒤통수를 한 번 쓰다듬었더니 그제야 평소로 돌아온다.

“뭘 그렇게 신경 써요.”

이럴 땐 영락없이 연하다. 입술을 꾹 모으고 어색하게 눈치를 보는 모습이 귀엽다. 해서 왜 애인이 아니라고 한 건지 굳이 묻기보다는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가늘어서 그런지 정 선생의 머릿결은 유독 좋아 보였다. 슥슥 쓰다듬다 보면 결 좋고 포근한 이불을 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고개를 흔드는 애교를 부린다. 내 손바닥에 그의 머리가 비벼졌다.

어느새 해가 진 하늘에는 별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차에 올라타면서 정 선생이 옷깃을 잡고 펄럭이기에 바로 에어컨을 켰다.

“더워……. 수영하고 싶어요.”

“수영할 줄 알아요?”

“네. 고등학생 때 배우고 나서 좋아했어요. 선생님은 수영할 줄 아세요?”

“예전에 한번 배우고……. 가끔 했었어요.”

“아아.”

정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시야에 걸린다. 바람이 너무 강한 것 같아 세기를 줄였다.

“저랑 수영장 가실래요?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데.”

“그래요.”

“모레 어떠세요?”

“응. 오후에 보죠.”

동네에 다다라서 정 선생을 내려 주었다. 정 선생이 운전석 쪽으로 오더니 손을 흔든다. 창문을 내리자 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 같이 가 주셔서 감사했어요. 푹 쉬세요.”

“잘 자요.”

내가 떠날 때까지 지켜보려는 듯 사이드 미러에 정 선생의 모습이 비쳤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핸드폰을 드니 정 선생에게서 온 문자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주무실 거예요~?]

어쩐지 장난스러운 투에 픽 웃음이 나왔다. 답장을 보내려다가 문자 창을 위로 올려 보았다.

메신저를 이용하지 않는 것은 교사라는 직업 때문이었다. 처음 스마트폰이 생기고 동료 교사들이 메신저를 설치한 뒤에 아이들에게 메시지 폭탄을 받는 것을 보고 지레 질려 설치하지 않기로 했다. 지연이가 메신저를 깔지 않겠느냐고 물어도, 친구들이 단체 채팅에 너만 없다고 해도 귀찮아서 깔지 않았다.

음성 통화, 영상 통화도 되고 음성 메시지도 보낼 수 있고 사진도 많이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은 여러 번 들어 보았다. 그리고 메시지를 길게 보낼 수 있고 와이파이만 연결되어 있으면 요금도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 또한.

정 선생도 문자보다는 메신저가 편하겠지. 아무래도 젊기도 하고 문자를 자주 보내는 편이니까.

메신저의 첫 메시지를 정 선생에게 보내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불쑥 메신저를 깔고 싶은 마음이 튀어나왔다.

답장을 뒤로하고 메신저를 깔았다. 누르자마자 친구 목록이 주르륵 떴다. 그중에서 정 선생을 찾았다.

[조금 이따가. 언제 잘 거예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분홍색 물방울 머리가 눈을 반짝이는 이모티콘이었다. 유행을 하는 건지 아이들이 책가방에 매달고 다니던 인형 중에서 본 캐릭터였다.

[우와~]

[쌤 저랑 메신저 하시려고? ^^]

귀여워. 중얼거림이 조용한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답장을 하고 나서 친구 목록을 훑었다. 한 학년을 맡을 때마다 기본으로 서른 명의 아이들의 번호를 저장하다 보니 목록에 인원이 너무 많았다.

프로필 사진이 다들 가지각색이다. 중학교 2학년인 아이들이 심각한 상태 메시지를 달고 있는 것을 보니 웃음만 나왔다.

목록을 죽 아래로 내릴 때였다. 시야에 걸리는 이름에 스크롤을 내리던 것을 멈추었다.

아주 오랜만에 활자로 마주하는 이름이었다. 몇 년 만이지. 거의 10년 만인 것 같은데.

동그란 틀 안으로 그녀가 활짝 웃고 있었다. 10년 만에 보는 얼굴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냥 조금 성숙해졌을 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추억이 기침처럼 머리 위를 덮쳤다.

* * *

정 선생의 무릎이 통통 튀어 오른다. 핸들을 돌리면서 그를 흘긋 보았다. 신이 난 얼굴이다.

“그렇게 좋아요?”

그제야 정 선생이 다리를 가만두며 쑥스럽다는 듯 작게 웃었다.

“수영하는 거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재밌을 것 같아요.”

그 모습이 꼭 놀이공원에 처음 놀러 가는 어린아이 같아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입술을 깨문 채로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수영장에 도착해서 탈의실에 들어가자마자 헤어졌다. 서로 옷을 갈아입을 때는 정반대의 로커를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녀 커플이었다면 이런 애매한 일이 없었을 텐데, 새삼 내가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 안에 들어서자 풀장 앞에 서 있는 정 선생이 보였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눈을 크게 뜬다.

“음?”

“아…….”

그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흘긋, 내 가슴께로 향했다. 그를 따라 내 가슴을 보았다가 정 선생의 몸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위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반면 그는 흰색의 얇은 수영용 집업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위에 뭐 입어도 됩니까?”

“네. 여기는…….”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스트레칭을 하는 정 선생의 귀 끝이 옅게 붉어져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그가 저러니 괜히 머쓱해졌다.

그를 따라 몸을 풀면서도 시선은 그에게로 끌려갔다. 다리에 딱 붙는 수영복 위를 안이 비치는 헐렁한 하얀 집업 카디건이 가리고 있었다. 몸 선이 예쁘다. 군더더기 없는 몸은 적당히 관리를 한 몸이었다.

“들어갈까요?”

그와 나는 동시에 물에 들어갔다. 그가 차가운지 잠시 몸을 떨다가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우리 내기할까요?”

“무슨 내기요.”

“밥 사기 내기 해요. 왕복해서 먼저 온 사람이 이기는 걸로!”

“자신 있어요?”

“그럼요.”

“좋아요. 하죠.”

손바닥에 고인 물을 얼굴에 뿌리던 정 선생이 히죽 웃었다.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시원해졌다.

“그러면 시작, 하면 하는 거예요. 시-작!”

그와 내가 동시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적당히 차가운 물에 잠수를 하자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뇌를 통째로 뽑아 씻은 뒤에 머리를 열고 다시 넣고 싶을 정도로.

아니면 이대로 잠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찾아온 기침은 금방 멎기가 힘들다. 물이라도 많이 머금어야 멎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물마저 토해 내게 할 것이다, 기침이란 것은.

손을 뻗어 벽을 터치했다. 옆 라인에서 정 선생이 나와 비슷하게 도는 것이 보였다.

라인의 중간까지 왔을 때,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정 선생을 앞지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팔을 휘젓는 속도를 줄였다.

“푸하, 제가 이겼어요!”

정 선생이 팔을 높게 들고 환하게 웃었다. 내가 졌지만 괜찮았다. 그에게 맛있는 밥을 사 주고 싶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맥주를 사서 우리 집으로 왔다. 안주를 좌식 테이블 위에 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맥주 캔을 따고 건배를 하고 나서 차가운 맥주를 머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까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풀렸다.

수영을 마치고 잠시 쉬기 위해 위로 올라왔을 때, 정 선생의 모습은 다소 난감했다. 흰색의 카디건이 몸에 착 달라붙어 살결이 비치는데 꽤 아슬아슬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와 내가 단순한 동료였다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근육이 알맞게 붙어 있는 탄탄한 팔과 군살 없는 복부, 가장 눈에 띈 것은 유독 다른 색깔을 띠고 있는 작은 유두였다.

내가 남자의 몸에 흥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이제 더는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묘하기도 했고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었다. 내가 그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몸이란 것이.

어쨌든 서로의 젖은 몸이 분위기를 묘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저 운동을 하듯 가볍게 수영을 할 것이라는 생각만 했지, 이런 상황이 연출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도 잠시,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 가는 정 선생 덕분에 곧 평소와 같아질 수 있었다.

“목욕 뒤에 마시는 맥주가 최고인데, 목욕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최고네요.”

아저씨같이 들려야 할 캬, 소리가 열심히 땀 흘린 뒤 탄산 가득한 사이다를 마시는 열일곱 남고생의 소리처럼 들리니 말이다. 중증이지.

“선생님 수영 잘하시더라고요. 다른 운동도 잘하시죠.”

“그럭저럭 합니다.”

“운동하는 거 좋아하세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는 건 나름 좋아해요. 한계를 넘어서는 기분이라.”

“와, 그러기 쉽지 않은데. 전 뛰는 건 재미없어서 뭘 가지고 하는 게 좋더라고요. 배드민턴이나 테니스도 좋고,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요. 나중에 저랑 다 해 봐요.”

예전에도 운동을 같이 하자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이런 사이가 되어 똑같은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지. 새삼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니스는 언제 배웠어요?”

“고등학교 때요. 사립이었는데, 재단에 돈이 많았거든요. 테니스장이 있어서 그때 배우고 쉬는 시간마다 치고 그랬어요.”

“수준급이겠는데.”

“하하, 그 정도는 아니고요. 스트레스 풀고 싶을 때마다 가서 하니까 재미 들리더라고요. 선생님은요? 학생 때 어떠셨어요? 듣고 싶다.”

누군가 내 학창 시절에 대해 물을 때면 대답할 말이 늘 애매하다. 나는 항상 여유가 없었고 그 시절을 채운 건 아르바이트, 잠, 공부가 다였으니까. 물론 친구들도 있긴 했지만 같이 있을 시간이라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전부였고, 쌓은 추억도 없이 공감대도 없이 어영부영 어울려 다녔다. 그런 내게 남아 준 그 시절 친구는 상호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그래서 참 고마운 녀석이다.

“그냥, 별거 없었어요. 공부도 하고 알바도 하고. 평범했지. 아, 동아리에 들었던 적은 있어요.”

“무슨 동아리요?”

“사진 동아리였는데, 학교 선생님 중에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분이 있었거든요. 사실 난 동아리 활동에 큰 관심이 없어서 가입할 생각이 없었는데 친구 놈이 나 몰래 입부 신청서를 넣었더라고요. 인원 모자랄까 봐.”

“정말요? 그래서 열심히 활동하셨어요?”

맥주를 한 모금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닌 말을 경청하는 정 선생의 눈이 반짝여서 웃음이 나왔다.

“아뇨. 친구가 열심히 꼬드겨도 이름만 올려놓았죠. 그런데 축제 날, 동아리에서 그동안 활동했던 결과물을 전시하고 판매도 하고 했던 때가 있었거든. 친구가 거기서 나 몰래 찍은 내 사진을 팔았어요.”

“아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걸 누가 사나 했는데 팔리긴 팔리더라고. 난 축제가 다 끝나고 나서야 알아서 뭐, 하는 수 없었어요.”

내 말이 유쾌했는지 정 선생은 한 손엔 맥주잔을 들고 한 손으로는 배를 부여잡은 채로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매진이었죠? 안 봐도 훤해요. 우리 선생님은 인기도 많으셨을 거고. 그때 사진 있으세요? 학생 때 쌤 사진 저도 보고 싶은데.”

“내가 갖고 있는 건 없어요. 아마 친구들은 가지고 있을 것 같긴 한데……. 나중에 기회 되면 보여 줄게요.”

“네. 꼭이요.”

“나도 정 선생 어렸을 때가 보고 싶은데.”

“앨범이 본가에 있어요. 나중에 교환할까요?”

“그러죠.”

그와 이야기를 하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구름이나 솜사탕 같은 것 위를 총총총 밟아 나가는 느낌.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발을 내디디면 금세 아래로 추락할 것만 같기도 하다.

그가 좋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부풀어 가는 마음을 직면한다. 그와 동시에 의문도 새록새록 자라난다. 그는 왜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에 비하면 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람인데.

처음으로 몸과 마음 모두를 나누었던 그녀는 내게 주었던 마음의 색이 바랬다고 말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으나 그녀에게 나는 정거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를 원망하느냐고 묻느냐면, 아니다.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그녀의 집에서도 이렇게 단둘이 술잔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녀의 사진을 본 뒤로부터 자꾸 그녀의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기어오른 생각은 곧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이내 그 생각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끔찍하지 않아?

어질한 시야 앞으로 그녀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꿈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는 자각은 있었다.

좋아해.

그녀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녀는 사랑을 말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다. 작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모든 게 위로가 되는 것만 같았고 작은 몸으로 내게 안길 때면 그녀가 나를 감싸 안아 주는 것 같았다.

“누나, 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움직임이 멎었다. 눈을 굴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정 선생이었다.

꿈이었구나. 꿈일 수밖에 없지. 당연한 생각에 한숨을 내쉬고선 입을 열었다. 머리가 울렸다.

“어디 가요.”

“아, 깨셨어요? 어제 여기서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깨시기 전에 가려고 했는데…….”

“가지 마요.”

내 쪽으로 다가오는 정 선생의 손을 잡았다. 그가 짧은 웃음을 흘리며 내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머리 아프세요?”

“조금.”

“어제 좀 많이 드시는 것 같더라고요. 숙취는요.”

“그건 괜찮아요. 밥 먹고 가요.”

“해 주시는 거예요?”

“응.”

“저야 좋죠. 감사합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자 머리가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부엌에 서자 정 선생이 나를 따라오더니 내 뒤 식탁 앞에 앉았다.

“콩나물국 괜찮아요?”

“완전 좋아요.”

해맑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냈다. 음식을 분주히 준비하는 동안 정 선생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흘긋 돌아볼 때마다 그가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식탁 위에 음식을 차리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잊지 않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을 들었다. 맑은 국을 한 숟가락 떠먹는데, 정 선생의 시선이 여전히 내게로 머물러 있는 게 느껴졌다.

“할 말 있어요?”

내게로 머물러 있던 그윽한 시선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이내 숟가락을 드는 그의 얼굴에 남은 웃음기가 어쩐지 애매하단 생각이 들었다.

* * *

“네가 진짜 웬일이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상호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먼저 녀석을 호출한 것이 새삼스러운 모양이었다.

“사진은?”

“갖고 왔어, 자식아.”

상호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열어 안을 흘긋 들여다보자 교복을 입은 내 사진이 있었다.

“근데 이건 갑자기 왜? 나도 오랜만에 앨범 뒤지느라 타임머신 좀 타고 왔다.”

“보고 싶대서.”

“뭐? 누가. 네 그대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웃음기가 그득하다. 한마디라도 더 하면 꼬리를 잡고 늘어질 기색이 역력해서 입을 다물자 녀석이 혀를 찼다.

“데이트 안 하냐? 언제 하냐?”

그러나 이미 잡은 놀림거리를 놓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본가 갔어.”

“그래. 제수씨는 친정에 갔구나.”

제수씨라니. 새삼스러운 말에 눈살을 찌푸리자 녀석이 낄낄 웃는다.

“친정은 기분 안 나쁘고?”

“됐어.”

“뭘 돼. 어떤 사람인지 말 좀 해 봐라. 풋풋한 연애사나 듣자.”

상호의 말에 차가운 물이 든 컵을 손안에서 굴리며 정 선생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환하게 웃는 얼굴과 유쾌한 웃음소리. 뒤이어 떠오르는 건 수영장에서의 모습이다. 역시 한 번에 잊기는 힘든.

“좋은 사람이야.”

“넌 그 소리 맨날 하는 거 아냐?”

“지연이 일을 알아.”

“뭐?”

오느라 더웠는지 땀을 닦으며 물을 들이켜려던 상호가 이마를 왈칵 찌푸렸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더라.”

“…….”

“그리고 자기는 내가 정말 좋대.”

“…….”

“내가 사랑스럽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녀석이 나를 희한한 것을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물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탁, 크게 난 뒤 상호가 입을 열었다.

“무슨 당연한 소리에 그렇게 감동을 받고 그러냐, 너는?”

“…….”

“아니, 물론 네가 사랑스럽다는 말 말고. 멀대같이 큰 놈한테 사랑스럽다니. 으으……. 네 잘못이 아닌 거 말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몰랐으면 알아 둬야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굳힌 입매를 풀었다.

“좋은 여자네. 잘해 줘라. 세상에 전 여친 이야기를 듣고도 그렇게 대해 주는 애인이 어디 있냐?”

“잘해야지.”

시킨 음식이 나오고 나서 젓가락을 들었지만 녀석은 젓가락을 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눈썹을 들어 올리자 이내 답이 나온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

“뭐가.”

“고민 있는 것 같아, 너.”

이래서 10년 지기는 무섭다니까.

“꿈을 꿨어.”

“무슨.”

“누나.”

에이, 씨! 녀석이 젓가락을 팩 내팽개쳤다. 꽤 큰 소리가 나서 주위에서 시선이 돌아왔다. 녀석이 창피한지 이내 시뻘게진 얼굴로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부정 타, 자식아. 갑자기 그 선배는 왜.”

“메신저를 깔았는데, 친구 목록에 뜨더라고.”

“뭐? 번호를 아직도 안 바꿨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이어 녀석이 번호 안 지운 너도 징글징글하다고 타박했다. 그저 실없이 웃음을 흘리자 상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게 뭐. 연락이라도 와?”

“아니. 보고 싶더라고.”

“미쳤냐? 뭘 보고 싶어. 밸도 없는 새끼. 너 지금 애인한테나 잘해.”

“그래야지.”

그게 정상이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나를 못마땅하게 보는 눈은 변하지 않기에 그저 웃음을 흘렸다.

* * *

“오래 기다리셨어요? 차가 막혀서…….”

본가에 다녀온 정 선생을 터미널로 마중 나왔다. 나흘 만에 보는 얼굴은 여전히 밝았고 밥을 잘 챙겨 먹어서 그런지 더 보기 좋아졌다.

“별로 안 기다렸어요. 버스에서 안 힘들었습니까? 많이 막혔나 본데.”

“지겨워 죽는 줄 알았어요. 겉옷 없는데 에어컨은 너무 빵빵해서 덜덜 떨었고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만져 보았다. 정말 차가웠다.

“차갑네. 이거 덮어요.”

뒷좌석에서 담요를 집어 건네주자 그가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서 몸에 덮었다. 더울까 봐 틀어 놓았던 에어컨을 끄고 출발했다.

“잘 지내셨어요?”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정 선생이 싱글싱글 웃으며 장난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흘 동안 서로 전화가 없었다. 메신저만으로 간간이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었다.

“늘 똑같죠. 정 선생은.”

“저는 너무 많이 먹고 왔어요. 아, 그리고 앨범 가져왔어요! 쌤은요?”

“받아 왔어요.”

“기대된다. 저녁 드셨어요?”

“아뇨.”

“늦었으니까 간단히 한잔하고 갈까요?”

“좋아요.”

집에 도착해 차를 놓고 와서 새로 생긴 스몰 비어로 향했다. 주황빛 조명 아래 로봇 피규어들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감자튀김을 시키고 나는 맥주, 정 선생은 과일 맥주를 시켰다.

“저희 앨범부터 봐요.”

정 선생이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두툼한 앨범 하나를 꺼냈다. 그에 비해 나는 서류 봉투에 사진 몇십 장이 다였기에 내 사진부터 보기로 했다.

“와…….”

그가 맨 처음으로 보게 된 사진은 책상에 턱을 괴고 있는 내가 눈만 흘깃 돌려 카메라를 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상호의 갑작스러운 도둑 촬영 덕분에 찍힌 사진이었다.

“후진 쌤, 너무 어려요…….”

“열일곱일 때니까요.”

“그리고 너무 귀엽고……. 얼굴은 여전하시네요.”

정 선생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사진을 뚫어져라 보았다. 나도 고개를 들이밀고 그가 들고 있는 사진을 같이 보았다. 다음 사진은 길거리에서 교복을 입은 채로 카메라를 향해 옅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거 그거 같아요. 청소년 모델. 사진 찍는 거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되게 잘 나왔다.”

“최고의 사진 한 장 뽑겠다고 도와 달라 난리를 치길래 찍어 줬더니, 결국 남은 건 돈이었죠.”

“그래도 좋은 게 남았는데요? 친구분이 맛있는 거라도 쏘셨어요?”

“밥 한 번 사던데요. 남은 돈이 결국에는 동아리 활동비로 들어가는 거라서요. 나한테 남는 건 없었습니다.”

정 선생이 고개를 들고 눈을 접어 웃었다. 호선을 그리는 눈이 주황빛 조명 아래 따뜻하게 빛났다.

“그래도 이렇게 사진이 남았잖아요. 정말 값진 건데, 이렇게 선생님의 과거를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별것 아닌 사진이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장, 한 장 조심히 넘겨보는 그를 턱을 괸 채로 응시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조잘거리는 입술은 거스러미 하나 없어 보드라워 보였다.

“저 하나만 가져도 돼요?”

사진을 다 본 정 선생이 가뿐한 숨을 내쉬며 기대를 품고 물었다.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니 사진 한 장을 골라낸다. 길거리에서 웃으며 찍은 그 사진이었다.

“그 사진이 마음에 들어요?”

“네,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친구분이 사진을 잘 찍으시는 것 같아요. 구도도 좋고, 풍경도 좋고, 모델도 좋고.”

“과찬이네.”

“선생님한테요?”

“아니. 내 친구한테.”

내 대답에 그가 키득키득 웃다가 이제 제 품에서 앨범을 꺼냈다. 그에게서 앨범을 받아 첫 장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갓난아기의 사진이었다.

“정 선생 전용 앨범이에요?”

“네. 제 성장 일기예요.”

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점점 커 가는 정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릴 때 꽤 개구쟁이였는지 눈이 아주 가늘게 접힌 채로 환하게 웃는 정 선생은 놀이터에서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사진이 많았다.

“이건 중학교 때예요?”

“네.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일 거예요. 소풍 가서 찍힌 사진 같은데.”

“어리네.”

젖살이 하얗게 오른 아이는 품이 좀 큰 흰 티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보니 바지가 교복 바지다.

앨범을 넘기면서 점점 지금의 그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대학교 졸업 사진이었다. 동시에 가족사진이기도 했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네요.”

“역시 그렇죠?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누나는 아버지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듣고.”

누가 봐도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닮은 가족이었다. 얼굴만이 닮은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닮았다. 보기만 해도 꽃잎이 휘날리는 것만 같다. 젖은 이불을 금세 뽀송뽀송하게 말릴 수 있는 따뜻한 햇볕 같은 모습이다.

앨범을 덮자마자 안주가 나왔다. 일단 안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맥주를 나눴다. 그가 본가에 가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나는 그와 떨어져 있을 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아이들 이야기도 하고, 학교 이야기도 했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원래라면, 불필요한 정적이 아니었다. 다음 이야기를 위한 정적이었고,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정적이기도 했고, 서로의 얼굴이나 손 같은 곳을 눈에 오래 담을 수 있는 정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정적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어쩐지 미묘한, 애매하고 불편한 정적.

그것은 그와 나로부터 발생된 분위기였다. 그와 나는 간간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얼굴은 고민 쪽에 더 가까웠지만.

“후진 쌤.”

통보와도 같은 부름이었다. 이름 두 글자가 던져졌을 뿐인데 어쩐지 벅차게 느껴졌다.

“네.”

“혹시…… 누님이 있으세요?”

고민 끝에 나온 질문은 생각과는 다르게 영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뇨.”

“아…….”

“그건 왜…….”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섬광 같은 생각이 뇌를 아프게 찔렀다.

꿈이 아니었나. 아니, 꿈은 맞았다. 그럼…….

“아니에요.”

열없이 웃으며 맥주를 들이켜는 정 선생을 멍하니 응시했다. 주황빛 조명 아래 선명한 색깔을 띠고 있는 자몽 맥주가 그의 입술 너머로 꿀꺽꿀꺽 넘어간다.

그리고 나는 그 따뜻한 조명 아래 취해 마치 고해 성사를 하듯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러나 조심스레 입을 연 것과는 다르게 그것은 충동이나 다름없었다.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씁쓸한 기가 감도는 미소에 가슴이 풀썩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에요. 꿈을 꾸신 것 같아서…….”

그와 나의 생각은 켜켜이 쌓였으나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접점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그 짧지 않은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날 어떻게 봤을까.

그간의 생각을 숨겼던 것이 어쩐지 죄처럼 느껴졌다. 눈을 아래로 깐 채로 물방울이 맺힌 맥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정 선생이 푸스스 웃으며 손가락을 뻗어 내 미간을 문질렀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노란 정 선생이다. 그러니까, 노란색과 어울리는. 봄에 피는 개나리와 가을을 데우는 따스한 햇볕과 닮은.

“메신저를 깔았는데, 그 사람이 떴어요. 번호를 안 바꾼 모양이더라고요.”

“아.”

그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한 움직임으로 보였다. 내 미간에서 그의 손가락이 떼어졌다.

말을 하려니 입이 안 떨어졌다. 그에게라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어쩐지 입만 벙긋거리게 된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걱정이 묻어나는 물음에 나는 살얼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는 나를 녹이는 따뜻한 조명이다.

“생각이 납니다.”

옅게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사그라들었다. 가슴이 쿵쿵 뛴다. 달무리처럼 불투명하게 번져 가는 박동은 언젠가 비를 내릴 것만 같다.

“생각이 난다는 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보고 싶으세요?”

그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장 만나거나 뭘 어떻게 해 보겠단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매끈한 미간에 골이 생겼다. 내가 파낸 골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

그제야 박동의 정체가 이해가 갔다. 두려움이었다. 이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나았던가?

“어……. 그분이라면 그 첫사랑, 말씀하시는 거죠? 선생님 두고 다른 사람 만났다는.”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골이 더 깊게 팬다.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잘 이해가 안 가요. 왜 보고 싶은 건지……. 그렇게까지 한 사람을, 아니. 혹시 보고 싶다는 게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그런 의미세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감정은 없어요.”

정 선생은 혼란스러운 듯싶었다. 그의 눈이 내 얼굴을 비껴갔다. 흔들리는 동공을 보고 있자니 아, 내가 또 잘못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끝에 닿은 맥주잔이 살갗을 얼려 버릴 것처럼 시리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내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아뇨. 아뇨, 아니에요. 이상한 건 아니에요. 보고 싶다는……. 저도 물론 전에 만났던 사람이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바람까지 피우고 선생님을 그렇게 대했던 사람이 보고 싶다는 게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서요.”

“나도 내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보고 싶다기보다는……. 그랬었지. 그때 그 사람이랑은 이런 이야기를 나눴고 이런 걸 했었고. 그런 게 떠올랐어요. 보고 싶은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의 눈이 내 맥주잔으로 향했다. 시선의 끝이 내게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 참을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죠. 뭐, 안 좋게 헤어진 분이긴 하지만 원래 구 여친은 언제나 생각나는 사람이라고도 하니까요.”

“이게 정상입니까?”

“정상이 아닌 건 아니죠.”

“하지만 정 선생은 그러지 않잖아요.”

그가 눈을 들었다. 마주 보고 있는데 평행선을 걷는 느낌이다.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최근에 그런 적이 있어요? 나와 만나고 난 뒤부터.”

“……아니요.”

“그러니까.”

정 선생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주황빛 조명 아래 비친 그의 머리칼이 갈색으로 빛났다. 따뜻한 색이나 여전히 손끝은 시렸다.

“당신은 다른 생각을 전혀 안 하는데 내가 그러고 있잖아. 이게 비정상이 아닙니까? 난 내가 부정하다고 느껴지는데.”

“선생님…….”

나는 어쩌면 아직도 지리멸렬한 과거에서 헤엄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와 다른 세계에 있다. 그는 당당하게 나에게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내 머릿속 한편에는 지리멸렬한 과거가 머물러 있다.

그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다. 그의 말대로 그녀가 생각날 이유가 없는데. 내게는 그가 있으니까.

내가 못나게 느껴진다. 더럽게도 느껴진다. 아니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완벽하고 깨끗한 사람. 그가 기댈 수 있는. 그러나 나는 아니다. 이제야 실감한다. 아니, 예전부터 느끼고 있던 것이긴 하지만.

“전 애인이 보고 싶은 건 이해해요. 제 친구들도 다들 그러니까.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어요.”

“…….”

“제가 화나는 건, 그 사람 때문에 선생님이 자신을 나쁘게 보고 있는 거예요.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 말이에요. 요 며칠 기분 별로 안 좋으셨죠. 그 사람 때문인 거고요. 저는 그냥 그게 더 싫어요. 그 사람이 후진 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요.”

그가 처음으로 화가 난다고 말했다. 완벽히 굳은 얼굴에 손가락이 굽어 들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티를 냈구나. 다른 것보다 그 사실이 더 아프게 박혀 들었다. 나는 여전히 못난 사람이다. 그는 그런 나를 배려해 줬고 모른 척해 줬던 거다. 그럼 나도 그를 따라 모른 척하는 게 맞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알아요. 나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정 선생에 비하면.”

“갑자기 왜…….”

“미안해요.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심장이 바짝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다. 잠깐의 정적이 목을 조른다.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에게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부터 기인한 두려움이다. 죽을 것만 같은 게 아니라, 죽어 버리고 싶은 것만 같기도 했다.

“저는 선생님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거지.”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쩐지 안타깝다는 듯한 눈빛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나를 그런 눈으로 봐 줄 수 있는 걸까.

“그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네?”

“이런 사람이랑 계속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에 나는 그를 지치게 만들 거다. 추측이나 예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늘 그랬듯. 그가 지친 한숨을 내쉬었듯이.

“선생님. 조금 취하신 것 같아요. 왜 그러세요.”

맞다. 그의 말처럼 취한지도 모른다. 머리가 계속 무겁기 때문이었다. 맥주를 많이 마셨지.

“머리 비우시고, 생각 그만하세요. 조금 가벼워지면 다시 얘기해요. 오늘은 일어나죠.”

어쩐지 화난 듯한 얼굴은 그러나 감정을 분출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어른스러운 사람이다. 나보다 어리지만, 오히려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어른스럽다.

밖으로 나오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불쾌하게 살갗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무겁게 침잠한 생각들은 피부로 스며든다.

“선생님.”

“네.”

“나쁜 생각 말고 푹 쉬세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선생님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집 근처에 다다라서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늘은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취하신 것 같은데 일찍 주무세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을 흔들고 뒤돌아섰다. 항상 내가 먼저 가는 것을 보고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가로등의 불빛도 주황빛. 꼭 경고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네 사람이 절대 될 수 없다고. 너에겐 과분한 사람이라고.

상호도 그렇게 말했지.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잘해 주라고. 맞다. 그는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생각을 했다. 그는 나쁜 생각을 말고 머리를 비우라고 했지만, 무거운 생각을 했다. 나쁜 생각을.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은 둘째 치고, 나를 잡아먹고 있는 생각은 다른 것이었다. 두려움.

무섭다. 그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화를 내고 미간을 좁히는 순간,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나라는 사실이.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던 그는, 성장기를 모두 드러내는 사진에서조차 웃지 않는 모습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점차 실망하게 될 거다. 나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녀들에게 그러했듯이 그를 지치게 만들 거다. 질리게 만들 거다. 그러나 나의 사랑은 감당할 수 없이 커져 그를 놓지 못할 것이다. 물고, 늘어지고, 질척거릴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집에 들어가서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았다. 달빛이 밝았다. 곧 장마가 온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공기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취기는 어느새 날아가 있었다. 이성이 머리를 때린다.

그만하는 게 낫다. 시작을 안 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좋은 동료로 남았다면, 좋아하는 동료로 남았다면 구질구질한 끝을 만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구질구질한 끝을 보이기 전에, 그만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여태까지 멋모르고 날뛰었지. 주제 파악을 할 시간이다.

-네, 선생님. 들어가셨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고 깊다. 그러나 여전히 다정하고 부드럽다. 그것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그가 나에 비해 너무나도 찬란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역시, 그만하는 게 낫겠습니다.”

승패가 정해진 게임이다.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다.

그가 나를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부터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을 때, 어쩌면 이미 끝난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난 나은 길로 갈 수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후진 쌤. 왜 그러세요. 하루도 아니고 겨우 한 시간 지났어요. 선생님 취하셨고…….

“내가 못 하겠습니다. 이건 겨우 시작일 뿐이고, 결국은 매번 똑같을 거예요.”

통보를 한 것은 나였으나 그것은 지독한 기다림으로 돌아왔다. 사실상 통보를 받는 것은 나였다. 그가 없는 인생을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몇 년 남았습니다. 땅땅.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을 못난 사람으로 정의하고 그렇게 결론 내리면 마음이 편하세요? 그동안 내내 그 생각만 하고 계셨어요? 그 시간 동안 마음 정리는 벌써 다 하고 혼자 결론은 다 내리신 모양이네요.

“…….”

-왜 이별을 말하는 데 그 사람이 끼어 있어야 해요? 왜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이유가 그 사람이어야 하는데요.

“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나 때문이죠. 어차피……. 나중에는 정 선생이 먼저 이별을 말하게 될 겁니다.”

-…….

“…….”

-……하. 제가 많이 우스우신가 봐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네. 그렇게 하죠.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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