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또다시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첫눈에 반했다는 것은 보통, 그 사람의 외적인 혹은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첫 느낌이라는 것은 있다. 단순한 호불호로 시작해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 같다는.
내가 지나온 시간들 속 그녀들에 대해 돌이켜 보자면, 첫눈에 반한 적은 없으나 첫 느낌은 좋았다. 그냥 막연히, 같이 있으면 편하고 좋다든지 연락이 기다려진다든지 하는 것들. 좋아하기도 전에, 혹은 내 감정을 깨닫기도 전에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사실은 그녀들을 좋아하고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 선생에 대해, 정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처음 정 선생을 교무실에서 만났을 때는 사실 별 생각도 감흥도 없었다. 그가 내게 말을 걸고,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다던 그 일들조차 내 기억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와 처음으로 제대로 얘기를 해 보았던 옥상에서의 일을 떠올리자면, 느낌은 역시 ‘좋았다’였다.
[집 잘 들어가셨어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내일 봬요. 안녕히 주무세요!]
마지막 문자를 끝으로 이어지지 않은 문자함을 위로 올려 보았다. 첫 문자부터 그의 문자는 늘 밝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고, 보다 보면 입가가 허물어졌다.
불이 꺼진 액정에 비친 내가 웃고 있어서, 낯선 사람을 마주하는 기분에 입가를 매만졌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 문자를 받았던 그날 이후, 수면 위로 올라온 의문이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명치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신경줄에서 솟아오른 송곳이 온통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형용할 수 없는,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같은 남자를 연인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또한 그런 감정으로 호감을 느껴 본 적도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다. 그들은 내겐 오직 친구였다. 친구거나, 동료거나, 상사거나 혹은 내 범위에 있지 않는 사람.
정 선생을 그 범위 중 하나에 넣어 보라면 친구라는 틀에 넣을 수는 있겠으나, 그가 단순한 친구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설마.
정 선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와 닿는 상상을 해 보았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더 나아가 섹스를 하는.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실감이 아예 없었다. 상상으로는 가능했던 일이지만, 과연 실제로도 가능할까.
더군다나 내가 누군가를 또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지연이를 잊고? 지연이가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쩌면 정 선생에게 내가 너무 의지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정 선생이 나를 너무 받아 줘서. 나를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봐 주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으니까. 그밖에 없을 테니까.
알약이 혀에서 녹은 것처럼 혀끝이 불쾌하게 쌉싸래했다. 나는 그에게 분명 친구로서의 관계를 제안했다. 선을 넘지 말라고 말한 것은 분명 나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다 끝난 일이고, 더 나아갈 수도 없는 관계다.
그런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6월의 첫날을 맞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복을 입고 등교를 했고 아침 공기가 더는 서늘하지 않았다. 눈동자에 맺히는 햇빛은 설익은 여름의 향기를 풍겼고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교문 지도를 끝내고 들어가려는데 본관에서 정 선생이 나왔다. 품에 하얀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그가 날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만이 아니라, 강아지의 발을 잡고.
“뭡니까?”
“어떻게 알고 교실까지 찾아왔더라고요. 너무 귀엽죠.”
초롱초롱한 검은 눈을 한 강아지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걸 보는 정 선생의 고개도 같이 갸우뚱한다. 누가 누굴 보고 귀엽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밖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마음 같아선 키우고 싶은데……. 혼자 있음 외로울 것 같아서요. 친구 부르려고요.”
“친구?”
“아는 형 중에 노산시에서 동물 병원 하는 형이 있거든요. 오늘 쉬는 날이라 놀러 온다고 해서, 저 퇴근할 때까지 저희 집에서 얘랑 놀라고 하려고요.”
“아, 그래요.”
“네. 김 선생님은 강아지 좋아하세요?”
그의 말에 다시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순하게 나를 올려다보던 녀석이 끼잉, 작은 소리를 낸다.
강아지를 싫어하진 않는다. 작고 귀여우니까. 어렸을 적에는 강아지를 키우고 싶단 생각도 한 적 있었다. 그러나 너무 작아서 무섭다. 나에 비해 녀석들은 너무 작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귀여워는 합니다.”
“그럼 악수.”
그가 깜찍한 소리를 내뱉으며 강아지의 발을 내밀었다. 인형 같은 발바닥을 응시하다가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멍!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강아지가 한 번 짖었다. 녀석의 발과 닿았던 손가락을 움츠리자 정 선생이 정말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얘 지금 꼬리 엄청 흔들고 있어요. 김 쌤이 되게 좋나 보다.”
그가 웃으면서 강아지 몸을 돌려 안더니 녀석의 코에 자신의 코를 부딪쳤다. 강아지가 정말 귀여워 못 이기겠다는 것이 얼굴에 빤히 쓰여 있었다.
“진아!”
뒤에서 정 선생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이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지 않은 그의 이름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져서 한 박자 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 잠시만요.”
정 선생이 강아지를 품에 안고 차를 탄 남자 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에게 강아지를 안기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정 선생의 명치를 툭 쳤다. 그러자 정 선생이 엄살을 부리듯 가슴께를 문지르며 무어라고 말을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교문 밖에서, 학교 사람이 아닌 누군가와 저리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를 보니 조금 새롭게 느껴졌다. 아니 새롭다기보다는…….
“뭐 보세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 선생을 보았다. 턱으로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곡선이 유려했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까지.
“김 선생님은 여름 좋아하세요?”
“별로 안 좋아합니다.”
“더워서?”
“예.”
“귀여워.”
“…….”
“…….”
끝도 없을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정 선생을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이내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굴린다.
“아, 그, 죄송해요. 입버릇처럼……. 그렇다고 빈말은 아닌데, 아무튼 죄송합니다.”
“여름을 싫어하는 게 정 선생한테는 귀엽습니까?”
“어…….”
영 뜬금없는 말이기도 했고 별로 죄송할 말도 아닌데 지나치게 당황해하는 느낌이라 어색한 공기가 돌기 전에 몸을 돌렸다.
“가죠. 곧 있으면 종 치겠네요.”
“……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서둘러 내 뒤를 따르는 것이 시야에 걸렸다. 다갈색 머리칼 사이로 얼핏 보이는 가마가 앙증맞았다.
퇴근을 위해 교무실을 나오는데, 내 뒤를 정 선생이 졸졸 따라 나왔다. 사실 따라 나왔다기보다는 그도 퇴근을 위해 나온 것뿐이겠지만, 어쩐지 그렇게 보였다.
“후진 쌤.”
그리고 그는 그날 이후로 나를 종종 이렇게 부른다. 내 이름이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은 늘 나비처럼 가볍게 풀풀 귓가에 내려앉았다.
“네.”
“초콜릿 좋아하세요?”
“싫어하진 않아요.”
“그럼 이거 드실래요?”
그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니 담뱃갑 모양이긴 했으나 기존의 담뱃갑과는 디자인도 상표도 달랐다. 그걸 받아 들고 돌려 보았다.
“초콜릿?”
“네. 애들이 교실에서 꺼내 물길래 식겁했는데, 초콜릿이더라고요. 하나 받았는데, 김 쌤 생각나길래.”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가 씩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담뱃갑 모양을 한 초콜릿을 손에 쥐고 밖으로 나왔다. 바로 교문으로 향할 것 같은 정 선생을 향해 물었다.
“집에 가는 길이면, 같이 갈래요?”
“아, 저 아침에 봤던 그 형이 태워 준다고 해서요. 말씀은 감사해요.”
“알겠습니다. 내일 뵙죠.”
“넵.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먼저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먼저 가라는 듯 손짓을 하기에 뒤돌아섰다.
쉬는 날에 아침부터 찾아와 빈집에서 그를 기다릴 정도라면, 보통 관계는 아니지 않을까. 영 다른 데로 튀어 버리는 생각에 고개를 털었다. 세상에 있을 수많은 관계에 대해 내 기준으로 정의 내리는 편협함은 버리는 게 옳다.
명치끝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이번에 느껴지는 감각은 어두컴컴히 벅차오르는 감각이라, 그를 떨쳐 내기 위해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지잉-. 시동을 걸자마자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상호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어. 뭐해.
“이제 퇴근하려고.”
-잘됐네. 만나자.
“지금?”
-어. 너네 집 가는 중.
“갑자기 왜.”
-왜긴, 인마.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수씨는?”
-형수님이라고 불러, 자식아. 친정 갔어.
“싸웠어?”
-싸우긴! 큰 처제가 남자 친구를 데려온다니까 보러 갔어. 난 가 봤자 그 사람 불편하기만 할 테니까.
“민형이는?”
-집사람이 데려갔지. 장인, 장모님 민형이만 보면 껌뻑 죽으시는데.
“그래. 이따 집에서 보자.”
-오냐.
핸드폰을 조수석에 던져 놓고 출발했다. 집에 먹을 것이 없는데 어떡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호라면 오랜만에 배달 음식을 먹자고 할 것 같았다. 녀석의 아내가 임신했을 때 저염식의 식단으로 매끼를 차렸던 녀석이라, 민형이를 낳고 나서는 자극적인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듯했다.
가는 길에 마트로 들러 맥주를 샀다. 견과류와 상호가 좋아하는 과자를 한 봉지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 온 걸 정리하고서 씻고 나오니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어 보니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있는 상호가 있었다.
“뭘 그렇게 사 온 거야.”
“하나는 과일. 하나는 치킨.”
“과일은 왜.”
“너 집에서 아무것도 안 먹을 게 뻔하니까, 자식아. 바나나랑 사과 같은 걸로 사 왔어. 바나나는 껍질만 까면 되고 사과는 껍질 안 까고 먹어도 되니까.”
있어도 안 먹을 거라는 말을 고이 입안에 접어 두고 봉지를 받아 들었다. 과일을 냉장고에 넣고 맥주를 꺼내 오니 상호가 좌식 테이블 위에 치킨을 세팅하고 있었다.
“야, 빨리 앉아. 배고파 죽겠다.”
“오늘 일 일찍 끝났나 보네.”
“어. 요즘은 일 많이 없어.”
맥주 캔을 따자 시원한 소리가 올라왔다. 물기 어린 캔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넌 혼자 안 심심하냐? 연락 좀 하고 살아라.”
“이 나이에 뭐가 심심해.”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가끔 이렇게 술이라도 한잔 마셔야 스트레스도 풀리는 거지. 너 맨날 집에 짱박혀 있지?”
“저번 주에 술 한잔했어.”
“누구랑?”
“……동료.”
상호가 치킨을 뜯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보나마나 또 아저씨들이랑 마신 거겠지.”
자기도 아저씨인 주제에 아저씨 타령이다. 풋풋한 정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아저씨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보다 어려.”
“뭐야. 여자?”
“남자.”
“에라이.”
녀석이 뜯던 치킨을 내려놓고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상호는 항상 나보다 더 내 연애사에 관심이 많아 탈이었다.
“근데 웬일이냐. 동료들이랑 사적으로 잘 안 만나잖아?”
“근처 살아서. 그렇게 됐어.”
“잘됐네. 이웃이면 가끔 불러서 밥도 같이 먹고. 몇 살인데?”
“스물여덟.”
“크, 어리네. 부럽다. 아, 근데 스물여덟이면 우리 작은 처제 소개해 줘도 되냐? 우리 처제가…….”
“안 돼.”
생각을 하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말에 나도 모르게 굳고 말았다. 혀로 젖은 입술을 쓸다가 이마를 긁적였다.
“왜? 여자 친구 있대?”
“……아마도.”
“그래? 아깝다. 우리 처제가 진짜 참하고 예쁜데, 장모님이 주위에 공무원 있음 소개해 달라고 하셔서. 너는 어때?”
결국 마지막 말이 본심인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쩝,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또 권할 생각은 없는지 말없이 맥주만 들이켠다.
“근데 너 뭐 좋은 일 있냐?”
“내가?”
“어.”
“왜.”
“아니, 그냥 얼굴이 좀 핀 것 같아서.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더니 좀 나아진 것 같다.”
상호의 말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로서는 똑같은 내 얼굴이었지만 녀석이 나아졌다면 좋은 거겠지. 실상 별로 나을 것도 안 좋을 것도 없지만 말이다.
“아. 여행은 잘 다녀왔어?”
“일찍도 묻는다. 어, 잘 다녀왔지. 오랜만에 신혼 분위기 나고 좋더라.”
“선물은. 유정 씨가 좋아해?”
“말도 마. 펑펑 울더라. 그깟 목걸이가 뭐라고. 애 낳고 고생한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자기가 울 것처럼 울먹울먹한 목소리에 웃음을 흘렸다. 연애할 때도 좋아 죽더니 결혼하니 더 깊어진 모양이다.
마음이 닳아 버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떠올리기만 했을 뿐인데도 두려운 감정이 손을 잡았다. 가슴을, 나라는 사람 자체를, 내 일상을 온통 흔들어 버리는 감정은 끝이 나면 모든 것을 재로 만드는 듯했으니까.
갑자기 지연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니코틴이 필요해서 소파 위에 올려놓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입에 딱 물었을 때 담배가 아니란 걸 알았다.
“뭐야? 담배 아냐?”
“초콜릿.”
앞니로 깨무니 똑 하고 부러진다. 쌉싸래하면서도 무겁게 달콤한 맛이 혀에 녹아들었다.
“뭐야. 애처럼 그런 걸 들고 다녀. 금연하게?”
“아니. 받았어.”
“남자한테?”
“응.”
“에라이.”
맥주 한 캔을 벌써 다 비운 상호가 새 캔을 땄다. 내 연애사에 관심을 끄기로 했는지 화제를 돌린다. 나도 그게 편해서 적당히 받아 주며 캔을 비웠다.
일이 바빠 보기 힘든 친구들의 근황을 이야기하다 보니 빈 캔이 늘어났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을 때, 소파 위에 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먼!]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깨끗해진 강아지가 카메라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사진과 함께 글자 하나가 문자 창에 쓰여 있었다.
[아니 멍이에요, 멍.......]
별로 신경 쓰진 않았지만 오타였나 보다. 사료를 막 먹은 뒤였는지 갈색 부스러기가 남은 그릇이 강아지의 발 옆에 있었다.
“누군데 그렇게 웃어?”
상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녀석이 맥주 캔을 쥔 손에서 검지를 펴 내 입가를 가리켰다.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깨닫고 퍼뜩 내렸다.
“누군데?”
“……동료.”
“야! 넌 내 문자 받으면 그렇게 웃긴 하냐? 짜식이. 너 남이 보면 오해해. 남자 문자에 그렇게 웃는다고. 음흉하게.”
“뭐가.”
상호의 말과 함께 맥주를 흘려 넘겼다. 그러다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인지하고 캔을 내려놓았다.
정 선생과 나는 남자라는 사실. 타인의 눈엔 그렇게 보이겠구나. 그러나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부감도 불쾌함도, 그리고 이상하고 싫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 선생의 마음을 들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생각의 흐름이 또 제멋대로 나아간다. 망상에 빠진 철부지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고개를 털고 맥주가 조금 남은 캔을 비웠다.
“근데 답장 안 하냐?”
“답장?”
“답장 좀 하고 살아라.”
“뭐라고?”
“뭐라고 왔는데.”
“……됐어.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 정 없는 놈이니, 답장이 없을 때가 많아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때가 많다느니 잔소리가 밀려온다. 치킨을 무슨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뜯는 녀석을 보다가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귀엽네요.]
답장을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막 내려놓는 동시에 진동이 울려서 다시 문자함을 확인해야 했다.
[누가요? 제가요? ^^?]
이번 문자에선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했다. 대신 아침에 보았던 강아지와 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그의 얼굴이 시간이 지나 꺼져 버린 액정 위로 떠올랐다. 가만히 있던 손가락이 저절로 핸드폰의 버튼을 누른 뒤 키패드로 향했다.
[둘 다요.]
[농담입니다....... ㅠㅠ]
문자를 보냄과 동시에 답장이 왔다. 아마 내 답장이 늦어져서 보낸 문자이리라. 지문이 묻은 액정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가만히 답장이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술에 취해 혼자서 쭝얼쭝얼하던 상호가 잠이 들 때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빈 캔을 치우고 테이블 위도 정리하고 나서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다 잠에 들었다.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지만.
* * *
교사들은 일주일마다 돌아가면서 급식 지도를 맡는다. 아이들이 줄을 똑바로 서는지 확인하거나, 급식실에 들어가기 전에 학생증을 찍고 들어가는지 확인하는, 힘들지 않은 지도였다.
이번 주 급식 지도는 정 선생이 맡게 되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밥을 빨리 먹고 싶어 교무실에서부터 발을 동동 구르는 그가 급식 지도를 하는 건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하루 이틀 하니 적응이 된 듯했다. 줄을 서 있는 아이들과 장난까지 치며 즐기고 있는 모양이니 말이다.
밥을 다 먹고 교무실로 바로 올라가려다 오늘 나온, 그러나 나는 마시지 않은 요구르트를 그에게 줄까 싶어 길을 돌아갔다.
“아, 왜요!”
“새치기. 딱 걸렸어. 우리 똑바로 줄 서자.”
“새치기 아닌데요?”
“쌤이 다 봤는데?”
“아, 쌤이 뭔 상관이에요. 야! 괜찮지? 봐요! 얘가 괜찮대잖아요.”
큰소리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낯익은 얼굴이다 했더니 3학년에 깐족거리기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 제 화를 주체하지 못해 말을 막 내뱉을 때가 종종 있는 놈이다.
“음, 진호야. 잠깐 쌤이랑 얘기 좀 할까?”
하면 뭐 어쩔 건데요, 하는 얼굴로 입술을 비죽이며 정 선생을 따라간다. 그 모습을 구경하느라 앞이 비어도 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어 내가 그쪽으로 향했다.
“자, 앞으로. 똑바로 줄 서라.”
내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종알대며 앞으로 향했다. 그런 아이들의 줄을 정리하며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정 선생이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얼핏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애들도 다 똑같이 빨리 먹고 싶을 거야. 진호 네가 그랬듯이. 이해하겠어?”
“…….”
“다들 빨리 먹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데 다 참고 줄 서는 거잖아. 서로서로가 조금만 배려해 주고 참아 주면 기분 나쁜 사람 하나 없이 밥 먹을 수 있겠지?”
“…….”
“쌤도 밥 빨리 먹고 싶어서 가끔은 ‘교무실에 다른 쌤들 두고 뛰어갈까?’ 할 때도 많아. 진호도 약간 그런 마음이었나 보다. 그치.”
눈을 내리깔고 부루퉁한 얼굴로 있던 아이가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러자 정 선생이 활짝 웃었다.
“1분만 생각해 볼래? 네가 지금 왜 화가 났는지.”
끝까지 배짱을 부릴 성격은 아니었다. 눈을 도르르 굴리는 게 여기까지 보였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아이의 입이 다시 열렸다.
“줄 서서 먹을게요.”
“정말? 그래, 진호야. 쌤이 오늘 영양사 선생님한테 미리 받은 요구르트 있는데 줄게. 늦게 먹는 기념으로.”
“괜찮아요.”
“아니, 쌤은……. 봐. 저기 김 선생님이 쌤 요구르트 마시라고 들고 오셨다. 그쵸?”
눈썹을 들어 올린 채로 웃으며 묻는 정 선생과 눈이 마주치자 숨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숨을 도로 토해 내자 가슴께가 뻐근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아.
안 되는데.
* * *
사랑의 성공과 실패를 따지자면, 나는 언제나 실패한 쪽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상대에게는 시작도 하지 않은 경기였다. 사랑에 있어 지는 쪽은 언제나 나였고 마음껏 지고 살았지만 결과는 늘 허망하게 돌아왔다.
연이은 실패 속에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지라 나는 또 새로 찾아온 사랑에 목을 매고 기대를 하곤 했다. 그 끝은 결국 어떠했던가.
정 선생은 좋은 사람이다. 한 사람으로서도 친구로서도. 분명 연인으로서도 좋은 사람이겠지만, 만약 내가 그에게 버림을 받는다면 제대로 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멋지고 좋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그가 내게 실망을 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말하고 내게 돌아선다면.
아니, 애초에 현재 정 선생의 마음도 확신할 수 없다. 이미 나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을 수 있다. 그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고, 그의 곁에는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이 즐비할 테니까.
끔찍했다. 나도 모르게, 나도 주체할 수 없이 커져서는 더 자랄 수 있도록 물을 달라고 졸라 대는 감정들이.
분명 나는 또 치열하게 사랑을 할 거고, 온몸을 부딪쳐 호소할 거고, 결국엔 사랑을 구걸할 거다. 그러니 그만두는 게 좋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아직은 그를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만두려면 그와 거리를 둬야 했다. 그와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공유하다 보면 자석에 끌려가는 쇠구슬처럼 끌리고 말 거다. 하지만 어떻게 그만둔단 말인가. 그와는 친구로 지내기로 했고, 그에게 두 번의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후진 쌤. 무슨 생각 하세요?”
어느덧 기말고사를 2주 앞두고 있었다. 정 선생의 제안으로 주말에 카페에 나와 각자 노트북을 가지고 시험 문제를 만들고 있었다.
“아닙니다.”
“문제 생각 안 나시죠. 수학은 더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학생 때 수학을 놓아서 그런가.”
“어차피 계산 문제라서요. 꼬아서 내는 국어가 더 어렵죠.”
“아아, 차라리 문제 풀 때가 나았던 것 같아요. 이건 정말 신경 쓸 게 많네요.”
머리가 안 돌아갈 땐 단게 최고라며 보기만 해도 달아 보이는 초코 라테를 빨대로 죽 빨아들이는 그를 흘긋 보았다.
거리를 둬야 하는데…….
‘쌤, 쌤. 주말에 뭐하세요?’
‘별일 없습니다. 왜요?’
‘문제 제출. 주말에 만나서 같이 하실래요? 혼자 하니까 자꾸 다른 짓 해서 안 될 것 같아요.’
기대에 차서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뒤는 생각하지 않고, 등신같이 말이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며 노트북을 두드렸다. 이 정도 거리라면 나쁘지 않을 테다. 나는 그에게 좋은 동료, 선배 정도가 될 테니까.
“어. 잠시만요.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액정에 뜨는 누군가의 이름을 확인한 그가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눈부시리만치 환한 햇빛을 받으며 핸드폰을 귀에 댄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어느새 완연한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팔꿈치까지 오는 티셔츠 밑으로 드러난 그의 흰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여린 팔이 아니라 남자의 탄탄한 팔에 눈이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와 즐겁게 통화를 하고 있는 정 선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반이 넘게 남은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아메리카노만큼 시꺼먼 감정이 단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만두는 게 맞는데, 어떻게 그만둬야 하는지를 잊어버렸다. 아니, 애초에 그런 방법은 알지 못했다. 누군가를 사랑한 뒤 그 감정을 잘라 내는 법도, 뿌리 뽑는 법도 알지 못하고 뿌리 내린 감정에 허우적거리는 것이 내 삶이었으니까.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곧 방학이고 방학이면 그를 따로 만나지 않는 이상 볼 일이 거의 없을 거다.
그러니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이 마음이 천천히 숨을 죽이기를.
6시까지 문제를 만들다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카페에서 만났을 때부터 정 선생이 먹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샤부샤부였다.
“제가 학부생 때 샤부샤부집 알바를 한 적 있었거든요.”
“서빙?”
“네. 밑반찬이 별로 없기도 하고 냄비 하나에 다 쏟아붓고 움직이면 되니까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님들이 어찌나 많던지. 가게가 크기도 했고 가족 단위 손님이랑 주변 교회에서도 많이 오고……. 첫날 손님 받고 죽을 뻔했어요.”
“냄비도 무거웠을 텐데요.”
“맞아요. 반반 냄비가 있거든요. 국물 따로따로 담는. 그게 진짜 무거웠어요. 그래도 그때 근육 최고치 찍었죠. 그런 거 생각하면 운동해야 하는데.”
보글보글 끓는 냄비를 보던 그가 제 팔뚝을 주무르며 미간을 좁혔다.
“방학 때 운동할까 봐요. 아! 김 쌤은 방학 때 뭐하세요?”
“연수 있습니다.”
“바로요?”
“네.”
“얼마나요?”
“5일 정도요.”
“아아. 그럼 연수 끝나면 저랑 운동하실래요?”
“연수 끝나고 수학과 회의만 마치면 바로 본가에 갈 생각입니다.”
눈을 내리떠 보리차 같은 색의 국물 위로 뜨는 거품을 응시했다. 본가 같은 건 없다. 내게 돌아갈 고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 그러시구나. 본가가 머세요?”
“조금요.”
“아, 그럼 평소에 잘 못 가셨겠어요. 좋죠. 쉬다 오세요.”
아쉬운 기색이 옅게 서린 채로 웃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쌤 가시면 난 누구랑 노나. 아, 뽀삐랑 놀아야겠다.”
“뽀삐요?”
“저번에 봤던 그 강아지요. 그 형이 데려가서 키우기로 했거든요. 사진 보실래요?”
그가 핸드폰에서 사진첩을 열어 사진을 내게 보여 주었다. 누군가의 손에 안긴 강아지가 카메라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귀엽고 작은 강아지에서, 그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손에 눈길이 갔다. 정 선생의 손가락보다 더 굵고 가무잡잡한 손가락에.
“일만 아니었으면 제가 키웠을 텐데요. 프리랜서였다면 키울 만도 했을 텐데. 아무래도 안 되겠죠.”
아쉬운 듯 입술을 질근, 깨무는 그에게로 다시 시선이 돌아갔다.
“그렇게 아쉬우면 더 생각해 보지 그래요.”
“음, 제 욕심이니까요. 최소한 9시부터 6시까지는 혼자 있을 텐데, 외로울 거예요. 외롭지 말라고 두 마리를 키워도 결국 걔네들이 기다리는 건 주인이라네요.”
콧잔등을 찡그리며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정 선생도…… 외로워 본 적이 있습니까?”
내 나직한 물음에 그가 씩 웃으며 나를 보았다.
“왜요? 전 안 외로울 것 같나요?”
“그냥…….”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 봐도 그는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사람 같으니까. 주변에 언제나 사람이 넘쳐 나고 그 스스로도 빛이 나서, 모서리 사이에 낀 곰팡이같이 침침한 감정 따윈 모르고 살았을 것 같았다.
“사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외로움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외로울 일이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대학에 오고 자취를 하니까, 내가 살던 고향을 처음으로 떠나게 된 거잖아요. 주변은 다 새로운 사람들뿐이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달랐으니까요.”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푹 묻고 싶은 온탕 같은 목소리였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귓가에 켜켜이 쌓이다가 종내에는 가슴 안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온전한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온전한 내 편. 그의 말이 머릿속에 콱 박혀 들었다. 이 세상에 어떤 값진 것보다, 명예니 돈이니 하는 것들보다 더 강하게 욕심나는 것.
“물론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그거랑은 좀 다른 거였어요. 내가 투정을 부려도 다 받아 주고, 내 고민도 다 들어 주고, 언제든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 김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제 취향이…… 남들과는 다르잖아요. 그래서 더 그런 것도 있었고요.”
그가 나를 흘긋 보며 조심스레,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의 말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었다. 어쩐지 확답을 들은 듯한 기분에, 안심이 되는 기분에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물론, 애인이라고 온전한 제 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머쓱한 듯 웃음을 흘리는 그를 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사랑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나 자신이 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흠. 아무튼 그랬어요. 김 선생님은요?”
그의 물음에 멍멍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눈썹을 치켜세우자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실 김 선생님이야말로 외로움이란 걸 모르실 것 같거든요. 철옹성 같아요.”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긴. 다들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 안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익은 고기를 야채와 함께 싸서 우물우물 씹었다. 볼이 불룩해지게 입에 넣으면서도 뭐 하나 흘리지 않고, 불쾌한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참 바르게 먹는다 싶었다.
“그래도요.”
그가 안에 든 음식물을 다 씹어 넘기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결핍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 같아요. 결핍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있고, 내 결핍을 채워 줄 사람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외로워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외로운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전 외로워 봄으로써,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눈꼬리를 살포시 접어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의 언어가 바스러지면서 귓가로 녹아들었다. 그의 말에서 남은 여운을 가만히 음미하다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집에 돌아와서 장롱 깊숙이 박아 넣은 상자를 꺼냈다. 작은 상자에는 반지와 편지 그리고 사진들이 있었다.
손가락에서 뺀 지 오래된, 상대를 잃어버린 커플링을 만지작거리다가 사진을 꺼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던 지연이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산 뒤로 폴라로이드 사진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더랬다. 사진 하단에는 날짜와 함께 지연이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4년간의 연애는 길었고 깊었으며 그만큼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녀가 죽은 뒤 화장실에 있는 그녀의 칫솔을 버려야 했고, 청소를 하다 침대 밑에서 그녀의 머리끈을 발견했으며, 찬장에는 그녀가 사다 놓은 컵과 접시가 가득했다.
인생의 한순간을 지배했던 사랑은 끝이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깊숙이 들어간 뿌리는 시간의 뒤를 좇아 길고 더 깊어진다. 그것이 썩어도 뿌리는 바스러지지 않는다. 인생의 한순간이, 결국은 인생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사랑이란 건 영원하지 않다. 내 사랑은 영원할 수 있어도 타인의 사랑은 영원하지 못하다. 나는 언젠가 버림받을 것이고 그는 분명 내게 질려 나를 떠나고 말 것이다. 사랑이 식은 그의 눈은 어떠할까. 참을 수 없이 비참할 것이고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안 된다. 전쟁을 시작하기에 나는 노병이고 패잔병이었다. 끝은 분명 참혹한 패배일 것이다.
* * *
방학식은 교실에서 진행되었다. 시청각실에서 진행되는 방학식을 빔 프로젝터의 스크린으로 보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들 모두가 한창 무르익고 있는 훈화를 듣지 않고 저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너무 시끄러운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고 교실을 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직무 태만이었지만 방학식이니까, 하는 핑계를 대면서.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더는 그 흐름을 좇을 수도 없을 정도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기말고사를 보내고 방학식이 찾아오는 동안, 정 선생과는 적당한 거리를 지켰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면서 서로 일이 바빠 학교에서 마주치는 것을 제외하면 사적으로 만날 일이 없었고, 기말고사가 끝난 주말에는 정 선생이 본가에 갔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적당히 이야기를 하고, 적당히 시간을 죽이고, 적당히. 동료처럼, 그렇게.
스무 살의 철없고 치열했던 청춘이 아니니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아이들을 맡고 있는 동안은 나쁜 죽음을 맞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또 상처받고, 스스로를 날카로운 소용돌이에 던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담배 하나를 다 태우고 옥상을 내려왔다. 방학식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자, 여름 방학 중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다. 물놀이 사고가 1년에 한 번씩은 꼭 나오니까 다들 조심하고. 오토바이, 술, 담배 절대 금지. 방학 숙제는 잊지 말고 미리미리 하고.”
“네!”
“다들 방학 잘 보내고, 개학하면 보자. 반장.”
“공수! 인사.”
입을 모아 우렁차게 인사를 한 녀석들이 병아리처럼 재잘대며 한꺼번에 교실을 빠져나갔다. 텅 빈 교실을 둘러보다가 문단속을 하고 교무실로 향했다.
남은 업무를 하다가 음식이 배달 온 것을 보고 뻐근한 목을 풀었다. 오늘은 급식이 없는 날이라 배달 음식을 먹기로 했다.
“와, 맛있겠다.”
“정 쌤, 오늘 얼굴이 더 폈는데요?”
“정말요? 그래도 방학이라고 하니까 막 설레는 거 있죠.”
그릇을 감싼 랩을 풀면서 정 선생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를 흘긋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방학 동안 뭘 할 건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밥을 먹었다. 그중 가장 계획이 많은 건 정 선생이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어요, 하는 그의 목소리는 즐거워 보였다.
의식적으로 그의 목소리를 흘려 넘겼다. 그것이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밥을 다 먹고 나서 그릇을 치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일을 모두 끝마쳤을 때는 오후 5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남은 교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교무실을 나왔다. 정 선생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스쳐 지나가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후진 쌤. 같이 가요!”
정 선생이 뛰듯이 걸어와 내 옆에 섰다. 같이 간다고 해 봤자 함께 차를 타고 가진 않을 것이니 건물을 나오자마자 헤어질 텐데 말이다.
“연수는 언제 가세요? 월요일?”
“네. 주말 끝나면 바로 갑니다.”
“아아. 파이팅 하세요.”
그의 응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을 때 스치는 그의 옷자락이 자꾸 눈에 감겼다.
“방학 때는 김 선생님 거의 못 뵙겠네요. 아쉽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옅게 웃는 그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정말 아쉽다는 듯 땅을 맴도는 시선을 뒤좇았다.
“빨리 방학이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방학이 와서 설렌다고, 즐겁다는 듯 말했던 점심의 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의미심장한 말은 꽤나 무거운 울림을 가지고 귓가에 박혀 들었다.
건물을 나오자 잘 익은 햇빛이 이마를 찔렀다. 우리는 동시에 걸음을 멈췄고, 먼저 입을 연 쪽은 정 선생이었다.
“그럼…….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 방학 잘 보내시고요. 파이팅.”
장난스레 응원의 인사를 던지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묵례를 한 뒤 뒤돌아섰다.
참 솔직한 사람이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이, 말투가, 조금 의기소침해 보이는 어깨가 내게 어떤 희망을 심어 주는 것만 같았다.
문득,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럴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다른 동료 선생들에게도 저렇게 아쉬운 얼굴을 하고 아쉬운 인사를 남길까.
이대로 돌아서기만 하면, 한 달 남짓한 시간을 정 선생과 마주치지 않고 보낼 수 있다. 누군가는 겁쟁이라 욕할 수도 있겠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동굴로 숨어들 수 있는 시간이다. 한 달의 짧은 시간을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보내면 된다.
가슴이 불쑥 시큰거렸다. 명치가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온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에 닿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의 손을 잡아 보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면 나의 새벽이 온통 그가 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동이 트는 하늘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또다시 사랑하지 않겠노라고.
그러나 생각이 말하는 것과 다르게 발이 먼저 움직였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그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동그랗게 뜬 눈이 내게로 향했다.
“정 선생.”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난 분명, 언젠가의 미래에서 사무치게 후회할 것이다.
“나에 대한 마음. 여전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