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탯줄 끊기 (4/15)

4. 탯줄 끊기

대학교 1학년 때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 중도에서 모여 출석을 한 뒤 각자 공부를 하는 출석 스터디였고, 공부를 하다 종종 같이 밥을 먹는 때도 있었다. 들어가고 싶어 들어간 스터디는 아니었고,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그녀가 하자고 해서 따라 들어간 곳이었다.

거기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애는 밝고 귀엽고 붙임성도 좋은 친구로 잠깐 밥을 먹으면서 얘기를 한 사이지만, 금세 친해져서 연락을 주고받곤 했었다. 내가 붙임성이 좋은 편이 아닌 것을 감안할 때, 그 애는 사교성이 정말 좋았고 그 애랑 대화를 하면 즐거웠기에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와 그녀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끝낸 뒤,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서로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가 내 볼에 입을 맞췄을 때, 창 너머로 그 애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듯했지만 그 애는 지나쳤고 나는 그 애가 나를 보지 못했나 싶어서, 또한 상황이 그러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그 애는 스터디에 나오지 않았다. 연락도 뚝 끊겼고 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아쉬웠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흘려 넘겼던 일이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나서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애가 나를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자존감이 높은 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 스스로에 대해 자신하지 않았고 흔히 말하는 도끼병과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가진 것이라곤 어렸을 때부터 눈칫밥을 먹어 눈치가 좀 빠른 정도일까.

그런데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좀 친하게 지냈다는 것 정도.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 정도. 물론 그것이 그 애에게는 나를 좋아한다는 것의 척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 애가 나와만 그렇게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금 친하게 지냈던 같은 반 여자애가 있었다. 사교성이 좋은 애였고 활달한 애여서 나와도 조금 친하게 지낸 정도였다. 어느 날 소문이 돌았다. 그 여자애가 좋아하는 애가 있다는.

그러자 그게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티를 낸 것도 아니었고, 그럴 만한 증거도 없었으나 뜬금없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지만,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 애가 친구에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고, 그 뒤로 그 애를 피하게 되었다. 희망 고문은 하고 싶지 않았고, 나는 아르바이트에 공부에 한창 바쁜 시기였으니까.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내가 그들의 마음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좋아한다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사실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모른다고, 몰랐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들의 눈, 손짓, 말투 등을 통해서 나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정 선생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내가 놀라지 않은 것은, 당황스러워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동안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그를 희망 고문 하고 있었나. 술잔을 나누고, 차를 같이 타고, 웃고, 이야기하면서.

머리가 아팠다. 그만둘 수도 없는 직장, 그것도 옆 반, 같은 교무실을 쓰는 직장 동료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좋은 친구를 잃게 되겠다는 생각에.

그래서 배신감이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나는 남녀 사이에는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상대를 좋은 친구로 여겨도 상대가 그러하지 않다면 끝나거나 어영부영하게 이어질 관계가 되고 만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나는 이성과는 친구로서의 거리를 두었다. 그런 내게 남자는 범위 밖에 있는 존재였다. 그들은 어쩌면 내 삶 속에서 당연히 친구가 될 수 있는, 친구로만 남을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나는 그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이지만, 그에게서 빛의 조각을 맛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 곁에 있어 주고 내 옆에서 환히 웃어 주는 것을 보며 어쩌면 나 또한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아닐까, 하고 으스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그가 내게 먼저 다가온 것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면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불면이 다시 찾아왔다. 익숙한 것이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주말을 보내고 나니 당장 월요일에 카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걱정이 찾아왔다.

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뒤돌아섬으로써, 그 이후로 한 번도 정 선생과 눈을 마주치지 않음으로써 거부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건 그에 대한 마음뿐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대화에 대한 거절이기도 했다.

주말에 정 선생에게서 전화가 한 번 왔으나 받지 않았다. 불편했고 어떤 식으로 정리를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모든 것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월요일이었다. 정 선생과 카풀을 약속한 이상 나는 이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잠을 자지 못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뻑뻑했다. 눈두덩을 꾹꾹 누르면서 고개를 돌렸을 때 막 건물 밖으로 나오던 정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정 선생은 내가 있을 줄 몰랐다는 듯 놀라고 당혹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정 선생이 차에 올라타며 인사를 건넸다. 원래의 밝고 명랑했던 목소리가 아니라 힘이 좀 빠져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흘긋 본 얼굴이 불과 이틀 만에 초췌해져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예. 짧은 대답으로 인사를 맞받고 출발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첫마디를 무엇으로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대화를 끝맺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온 서른두 해는 몽땅 허투루 날려 버린 것인가 싶기도 했다. 맺고 끊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신호에 막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적이 목을 죄었다. 라디오도 틀지 않은 차 안은 무거운 공기가 침잠하고 있었다. 평소엔 정 선생이 아침에 보고 온 뉴스를 재잘재잘 읊었지만, 지금은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틀 사이에 끔찍이도 벌어진 거리는 어쩌면 내가 자초한 건지도 몰랐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무 말도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충돌했다. 정작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학교에 다다랐고, 교문을 통과했고,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끔찍하게 긴 침묵은 끊어지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입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정 선생님.”

내 손으로 이 관계를 끊어 내는 것이 그에 대한 예의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이 정해진 수순이고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내 손에 쥐어진 칼이란 것이 끔찍하리만큼 무거웠다.

“앞으로 카풀은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정 선생을 바라보았다. 정 선생도 나와 똑같이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카풀만이 아니라……. 모두요.”

말을 꺼낸 건 난데 내 심장이 땅 끝까지 내려앉았다. 목이 바싹 말라서 목소리가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갈색빛이 도는 정 선생의 맑은 눈이 가슴을 꽉 조여 왔다.

정 선생은 생각을 고르는 듯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늘어나고 맑은 동공이 흔들렸다. 그가 애써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김 선생님.”

“…….”

“일단 죄송해요.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려요.”

목소리가 애처로워서 절로 손이 뻗어 나갈 것 같아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불쾌하진 않았지만 그의 말을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어떤 말이든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제 마음을 받아 달란 말은 안 해요. 어불성설이죠. 그래도, 괜찮으시면 친구로라도 지내…….”

“정 선생님.”

“……네.”

“내가 말하는 모두는, 모두입니다. 전부요.”

정 선생의 눈꺼풀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의 얼굴에 서린 나에 대한 마음이 내게로 온전히 닿아 와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언젠가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손끝을 차갑게 만들었다.

“친구로라도…… 안 되시겠어요? 저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티도 안 내고, 정리하라고 하시면…….”

차마 확언할 수 없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는지 정 선생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스물여덟의 그는 지금 마치 첫사랑에 빠진 풋풋하고 치열한 청춘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정 선생님. 저는 희망 고문 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차에서 내렸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뺨을 불쾌하게 간질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진 끈은 질기고도 그 결이 복잡해서, 가위로 자르면 언제나 그 단면이 울퉁불퉁하게 남는다. 마치 탯줄처럼, 너무 가까이서도 너무 멀리서도 잘라 내면 안 되는 그 줄은 자르고 나면 배꼽처럼 중심에 흔적이 남아 버린다.

문득 배가 아파 왔다. 누군가가 바늘로 콕콕 찌른 듯이.

그 흔적은 너무나도 예민해서, 이렇게 제 존재를 알려 오곤 했다. 짧은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예민함은 곧 무뎌진다. 시간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 * *

“맛있어요?”

“응.”

“웬일로 단걸 먹어요? 단거 싫어하는 사람이.”

보기만 해도 단 초콜릿 프라페를 마시며 그녀가 은근하게 웃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헤어지기 전 카페에 왔을 때였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그녀가 나를 보았다.

“후진아.”

나는 언젠가부터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면 불안하곤 했다. 그녀가 처음 이렇게 나를 마주 보고 내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내게 말했었다. 나 사실 다른 사람 있어, 하고.

그 뒤로,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가슴이 쿵 내려앉곤 했다. 혹시 그녀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할까 봐. 내가 아닌 그 사람에게로 간다고 할까 봐.

“우리…… 여기서 그만할까?”

심장이 내려앉다 못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산 정상에 오른 듯 귀가 먹먹했고 지독한 독감에 걸린 듯 머리가 울렸으며 소리도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누…… 누나. 왜 그래요.”

“여기서 그만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 사람이 그래요? 나랑 그만하라고?”

그녀는 열없이 웃었다. 나를 가엾게 보는 듯도 했고 이런 내가 난감한 듯도 싶었다.

“너한텐 미안해. 하지만 이게 맞는 것 같아. 너도 다른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고.”

“왜 이래요, 누나. 이러지 말아요.”

“후진아.”

그녀를 만난 뒤로 들어 보았던 가장 단호한 목소리였다.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 고인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친구, 친구라도 해요, 누나. 나랑 친구라도 하면…….”

알람이 울려서 잠에서 깼다. 10분도 채 자지 못한 듯 머리가 무거웠지만 열 시간은 잔 듯 꿈은 아주 길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다 알람을 껐다.

짙은 한숨을 내쉬고 이마를 짚었다. 동이 트는 걸 보고 잤으니 한두 시간은 잔 셈이었다.

과거의 일이 이렇게 튀어나와 꿈에까지 나타날 줄은 몰랐다. 흔적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 선생과의 일이 이렇게 나를 괴롭게 할 일인가. 돌이켜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 선생이 더 힘들 것이고, 나는 가해자라고 볼 수도 있는데.

매운 치약으로 양치를 하며 정신을 일깨웠다. 씻고 옷을 입는, 출근 준비를 위한 일련의 과정이 무겁고 힘들었다. 문득 모든 걸 놓고 싶다는 생각이 또 물처럼 밀려왔다. 짧게 웃음으로써 애써 상념을 털어 내고 차에 올라탔다.

정 선생이 버스를 타는 정류장을 지나칠 때 그곳으로 눈길이 갔다. 정 선생은 없었다. 내가 조금 일찍 나온 편이니 아마 10분은 있어야 나올 것이다.

잠은 잘 자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잘 자고 있을 거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 일이고, 학교에서 보는 정 선생은 여전히 유쾌했으니까.

그래. 이게 옳았다. 나는 정 선생과 같은 쪽도 아니고,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남자니까. 정 선생같이 빛나는 사람에겐 그와 같은 사람이 어울린다. 조금 더 듬직하고 밝고, 잘 이끌어 주며 그에게 잘 이끌려 가는.

문득 입안이 썼다. 치약이 너무 매웠나 보다.

신호를 기다리며 껌이 있나 찾아보는데 도어 포켓에 놓인 사탕이 눈에 들어왔다. 청포도 맛 사탕. 언젠가 정 선생에게 받았던 사탕이다. 두 개 중에 한 개는 먹고, 한 개는 여기다 두었던가.

사탕을 꺼내 손에 쥐고 굴렸다. 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알이 큰 사탕이 손가락 안에서 구르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먹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치약의 매운맛이 오래도록 입안에 남아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해 주길 바라서였다.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정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나보다 일찍 출근했을 줄은 몰랐다. 묵례한 뒤 내 자리로 향했다. 등이 따끔따끔한 건 기분 탓일 테다.

월요일마다 진행되는 교무 회의를 마치고 교실로 향했다. 중간고사도 끝나고 수학여행도 다녀오고 축제와 체육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풀어진 아이들을 데리고 조회를 하고 수업을 진행하는 건 조금 힘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만 지나면 또 기말고사라 조금 풀어지는 것도 괜찮을 거다.

“자, 조용.”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조회와 종례 시간 때만 초롱거리는 눈빛이 내게로 쏠렸다.

“교내 팝송 대회 지원 기간이 늘었다. 이번 주 목요일까지. 신청자가 많지 않아서 상점 얻을 수 있는 기회니까 생각해 보고 신청서 내라.”

“네.”

“장기 자랑 신청서는 오늘까지. 종례 전에 내고 가고.”

“네.”

“오늘 전달 사항은 이상. 2교시 체육이네. 체육 끝나고 환기해라.”

“네!”

항상 대답은 잘한다. 담임 선생이 얼른 나가기를 바라는 눈빛들에 짧은 웃음을 흘리며 교실을 나왔다.

2반 교실 창문 너머로 조회를 하고 있는 정 선생이 보였다. 교탁에 몸을 바짝 붙여 아이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환히 웃으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눈이다. 반짝거리고 열정으로 가득 찬 데다 애정이 어린 눈. 꼭 교사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하고 빛날 사람. 그런 사람이 나를 마음에 뒀다니. 새삼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부족해서.

문득 씁쓸함이 치밀어 올라 발끝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이쪽을 보고 있는 정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웃음기가 사라진 눈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걷는 발 하나하나가 시큰거렸다. 교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다리를 주물렀으나 시큰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리에 신경을 쓰니 괜스레 더 불편해져서 수업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쌤! 쌤은 장기 자랑 안 하세요?”

수업 끝나기 5분 전, 질문을 하랬더니 수업과 관련 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예상은 했던 일이다. 보통 질문을 하라고 하면 열 번에 한 번 정도 할까말까이니 말이다.

“안 해.”

“정진 쌤은 하는 거 맞죠?”

갑자기 튀어나온 정 선생의 이름에 손끝이 굳었다.

매년 새로 부임한 선생들이 축제 때마다 장기 자랑을 준비했고, 올해도 빠지지 않는 행사였기에 당연히 정 선생도 준비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미리 말하지 않는 일종의 서프라이즈였지만, 작년에 했으니 올해도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했다.

“글쎄.”

“에이, 작년에 했으니까 올해도 하겠죠! 정 쌤 뭐하신대요? 남자 쌤은 정 쌤 혼자 아니에요? 3월 소년 춤춰 줬음 좋겠다! 혼자선 못 하시려나?”

나도 얘기만 들었지 뭘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정 선생이라면 춤보단 노래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쿠스틱 기타를 통통 튕기며 부르는 잔잔한 노래가 어울릴 것 같다. 목소리도 그를 닮아 따뜻한 편이니까. 신문 기자가 아니라 방송 기자를 했다면 인기를 꽤 끌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쌤도 우리 학교 처음 왔을 때 장기 자랑 하셨어요?”

“응.”

“헐, 대박! 뭐 하셨어요?”

“비밀. 종 쳤다. 반장.”

“어어어!”

자기들끼리 놀던 녀석들이 어느새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수업 때도 보이지 않는 관심이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렸다. 대답해 주지 않으면 보내 주지 않을 기세다.

“노래했어. 그땐 나 혼자였거든. 자, 인사.”

“무슨 노래요?”

“오늘은 인사 생략. 48페이지 풀어 오는 거 잊지 마라.”

“어우!”

야유를 뒤로하고 교실을 나왔다. 한번 상대해 주다 보면 끝도 없이 달려드니 적절히 끊어 줘야 했다. 화제가 금방 휙휙 바뀌는 녀석들이라 금방 또 잊고 말 거다.

재작년에 이 학교에 발령받은 선생은 나 혼자였다. 축제 때마다 새로 온 교사들이 장기 자랑을 하는 것이 전통이란 말에 실소를 흘렸지만, 매년 해 왔다던 일을 끊기는 무리였다. 어차피 교생 때부터 줄곧 겪어 왔던 일이기에 크게 힘든 일도 아니었다.

무슨 노래를 불렀더라.

그때 한창 인기가 좋았던 드라마의 OST를 불렀던 것 같다. 드라마는 안 보지만, 노래는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노래도 몰랐지만……. 그래. 지연이가 추천해 준 노래였다. 장기 자랑에 나가야 한다고 말하니 웃으면서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아 줬었지.

잠이 안 온다고 말하면 내 무릎 위에 머리를 대어 눕히고 노래를 불러 줬던 것 같다. 갈수록 노래가 는다면서 웃던 그녀의 얼굴이 선연했다.

불쑥, 아주 오랜만에 떠오른 얼굴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네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아마 용서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살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김 선생님. 안 들어가세요?”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나 혼자 교무실 앞에 서 있었다. 이경하 선생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선 웃으며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정 선생이 묵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 선생이 스쳐 지나가면서 희미하게 로션 향이 났다. 은은하게 스며들어 오는 부드러운 향이었다. 머릿속을 채웠던 그녀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다시 그녀의 잔상을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선연했던 그녀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서, 갑작스레 느껴지는 당혹감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남은 건 잔향이었다. 그를 닮아 따뜻했던.

* * *

내일이 체육 대회고 모레가 축제다 보니 학교 전체가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7년간 교사로서 학교를 다니면서 축제나 체육 대회가 있어도 설레지 않던데, 아이들은 또 다른가 보다. 내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중학생 때는 조금 설렜던 것도 같다. 아무래도 수업을 안 하니까. 고등학교 때는 그런 걸 즐기기보다는 빈 교실에 들어가서 밀린 잠을 청했던 것 같다. 운동을 하거나 장기 자랑을 보면서 힘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양일간은 평소보다 하교를 빨리 할 수 있으니 좋기도 좋을 테다. 남학생들은 발야구, 여학생들은 피구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장기 자랑에 나가는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모여 춤을 추곤 했다.

그건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정 선생은 점심시간만 되면 새로 부임한 여선생들과 같이 어디론가로 사라지곤 했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입술 새로 흘러나온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담배가 늘었다.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못 끊는 게 담배였다. 사실 담배를 다시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마 그녀가 죽고 나서부터일 거다. 그녀를 앞에 두고 내가 담배를 피웠을 리는 없으니까.

유일한 도피처라고 해도 좋았다. 매캐한 연기는 영 유쾌한 유의 것이 아니었지만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일 때 머릿속을 채우는 몽롱함은 잠시라도 상념 속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운동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남선생 한 명과 여선생 한 명이 교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 명은 정 선생이고 한 명은 정 선생과 요즘 장기 자랑 준비를 하는 선생인 듯싶었다.

이름이…… 임민희였던가. 임 선생이 정 선생의 팔뚝을 붙잡고 교문 밖으로 밀듯이 걸었다. 정 선생이 환히 웃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분식집으로 향하는 걸 보니 저녁을 학교에서 해결하고 늦게까지 남아 연습을 할 모양인가 보다. 멀어져 버린 뒷모습을 눈으로 좆다 눈앞에 남는 잔상에 웃음을 흘렸다.

쌉싸래한 뒤끝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친구, 사람을 놓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이기적인 놈이 아닌가.

거뭇한 재를 떨어냈다. 바람결에 흘러가 아래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재를 응시하다 뒤돌아 옥상을 나왔다.

* * *

체육 대회 날은 따로 교문 지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한 뒤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 기간만큼은 눈감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바짝 줄인 치마나 꽉 조이는 바지를 보는 것보다는 체육복을 보는 게 더 낫다는 것이 교사들의 생각이었다. 뭐, 요즘 아이들은 체육복도 리폼을 하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교실에서 조회를 끝내고 다들 운동장을 나와 줄을 서게 했다. 식은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에 이어 교장의 대회사와 운영 위원장의 축사를 들은 뒤, 학생회장이 선수 선서를 하고 다 같이 교가를 부름으로써 끝이 난다. 애들 체육 대회에 뭐 이리 차례가 많은 건지 모르겠다만 늘 이어져 오는 것이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정 선생이 뒷줄에서 장난을 치는 학생에게 주의를 주러 갔다. 그래 놓고 웃으면서 조곤조곤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게 또 정 선생다워서 저절로 눈이 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를 하더니 웃는 얼굴로 입을 다물며 똑바로 선다. 정 선생이 몸을 돌려 앞쪽으로 향하기에 눈을 돌렸다.

마지막 교가 제창까지 끝이 나고 스탠드로 향했다. 우리 반은 다른 학년의 1반들과 한 팀이 되었다. 다들 똑같은 반티를 입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니 갓 태어난 병아리들 같았다.

응원 점수도 팀 점수에 포함시킨다고 하니 저마다 응원가를 즐겁게 부른다. 남교사들이 대회 운영을 돕기로 했기에 아이들을 1학년 1반 담임에게 맡기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열심히들 뛰어다녀서 모래바람을 날리는 운동장에서 휘슬을 불었다. 평소에는 꺅꺅거리면서 설렁설렁 공을 피해 다니던 여자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날아다니는 공이 워낙 빨라 따라가기에 급급할 지경이었다.

“아웃!”

공에 맞은 아이를 가리키고 휘슬을 불었다. 빨리 처리를 하지 않으면 가뜩이나 예민해진 아이들의 아우성이 날아오기에 심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했다.

피구 8강이 끝나고 줄다리기 시간이 찾아왔다. 다시 스탠드로 돌아가 학부모들이 사 준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돌렸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번외 경기로 교사 계주가 있다. 젊은 교사들끼리 이어서 뛰다 마지막엔 부장 교사들이 뛰는 식이었는데 생각보다 매년 치열하게 경기가 이어져 오고 있다. 선생들의 승부욕도 학생 못지않으니 말이다.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다 먹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쓰레기봉투에 모으고 나니 줄다리기가 끝이 났다.

“쌤! 파이팅!”

“쌤, 꼭 이겨요!”

“우유 빛깔 김후진!”

이럴 때면 극성 담임 팬이 따로 없다. 적당히 발을 풀어 주고 체육 선생의 안내에 따라 내 자리로 향했다. 도착한 곳엔 정 선생이 있었다. 아마 같은 또래의 남선생인지라 상대로 붙여 준 듯싶었다.

나를 발견한 정 선생의 눈에 머뭇거림이 읽혔다. 그를 외면하고 우리 앞 순서인 여선생들의 뒤에 가 섰다.

“와! 정 쌤이랑 김 선생님이랑 붙으시는 거예요? 누가 이길지 궁금하다.”

“정 쌤! 김 선생님 진짜 잘 달리세요. 작년에도 김 쌤 때문에 김 쌤 팀 이겼을걸? 힘내 봐요!”

정 선생이 나를 흘긋 보며 아하하, 짧게 웃었다. 예의 그 웃음과는 다른 어색함이 서린 웃음이었다.

멀리서 경기가 시작할 기미가 보였다. 여선생들이 트랙으로 나가 첫 타자를 기다렸다. 휘슬 소리가 들리고, 경기가 시작됐다. 아이들이 저마다 자기 선생님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뚫을 것만 같았다.

어쩐지 그 소리들이 멀게만 느껴져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툭툭 쳤다. 우리 앞 순서의 여선생들이 바통을 받아 달렸다. 여선생들이 있던 자리에 정 선생과 내가 나왔다.

바통을 들고 달리는 선생이 가까워져서 달릴 준비를 했다. 반대 팀과 우리 팀이 거의 막상막하였다.

바통을 받자마자 달렸다. 유희거리인 번외 경기에 온 힘을 다 쏟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지켜보고 응원해 주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전속력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반 바퀴라 그리 힘든 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시야에 정 선생이 걸렸다. 날쌔 보이는 몸이라 예상은 했지만 빨랐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바통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다음 타자에게 바통을 건넸다.

“와아아아아─!”

바통을 건네준 건 거의 동시였다. 정 선생이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와, 김 쌤 진짜 잘 달리…… 시네요.”

무심코 내뱉은 웃음기 가득한 그의 말이 이내 땅 끝으로 처박혔다. 전속력으로 달려 차오른 숨이 다시 목구멍 너머로 들어갔다. 공기 가득한 풍선이 목구멍에 처박히는 기분을 뒤로하고 우리 반 아이들이 있는 스탠드로 향했다.

체육 대회가 무사히 끝이 났다. 애들을 돌려보내고 교무실로 돌아왔을 땐 교사들 모두 녹초가 되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교무실 한가운데 놓인 회의용 테이블에 분식집에서 사 온 떡볶이와 순대, 튀김이 놓여 있었다.

“어, 김 선생. 수고했어.”

“김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와서 드세요.”

자리를 잡고 앉아 동료 교사가 내민 꼬치를 들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종이컵에 담긴 사이다만 들이켰다.

“뛰어다닌 건 애들인데 왜 제가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나이 때문에 그래, 나이 때문에.”

“정 선생님은 젊으셔서 그런가 날아다니시던데요? 지금도 별로 안 피곤해 보이시고.”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구보다 잘 먹고 있던 정 선생이 주목을 받자 짧은 웃음을 흘렸다.

“저야 처음이니까 신이 나서요. 체육 대회라니. 오랜만이잖아요.”

“좋겠다. 나도 1년 차 땐 신났는데.”

“윤 선생님도 응원가 잘 부르시던데요?”

“아, 그야 요즘 애들 응원가 재밌으니까. 우리 때랑 똑같은 것도 있고.”

맞아요. 저 고등학생 때 불렀던 응원가가…….

정 선생의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며칠간의 불면을 해결해 줄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사람을 날게 해 준다는 팅커벨의 가루 같기도 했다.

그의 마음을 들었을 때 내가 느꼈던 배신감은,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는 사이가 그대로 끊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틀렸는지도 모른다.

나 같은 사람이 그에게 좋은 친구로나 남을 수 있었을까. 좋은 자식도, 좋은 연인도 되지 못했던 내가.

피터 팬 같은 사람이다. 늘 저런 모습으로 남아 줄 것 같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아이들을 꿈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만 같은.

나는 네버랜드로는 갈 수 없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없어 텅 빈 주제에 무거웠으니까.

투명한 사이다를 한 모금 넘겼다. 목이 따끔따끔했다.

* * *

동이 트고 있었다. 닫힌 창 너머로 어두웠던 세상이 점점 밝아졌다. 창문을 열었다. 어둑어둑했던 하늘이 점차 푸르러지기 시작한다. 어디엔가 올라서 짹짹대고 있을 새소리가 들려왔고, 벌써부터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는 것이 보였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이 무거운 걸 보니 잠이 올 것 같았다.

불면은 내내 앓아 왔던 것이고 이제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사이였다. 동이 트는 걸 보고 잠이 드는 일은 허다했다. 동이 트는 하늘을 볼 때면 새벽의 상쾌한 공기와 청명해지는 하늘과는 다르게 초조함이 들곤 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초조함.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으로 까맣게 내려앉아 생기는 좌절감. 이 시간까지 깨어 있으면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 나에 대한 한심함.

그러다 기절하듯 잠에 빠지곤 했다. 불과 두세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잠은 죽음처럼 깊었고 그래서 달았다.

조금 늦잠을 잤다. 늦은 것은 아니고, 평소에 교문 지도를 하느라 일찍 알람을 맞춰 두었던 시간보다 조금 더 잔 셈이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찬물을 마시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냉장고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은 원래 안 먹고, 점심엔 급식을 먹고 저녁엔 배가 고프면 오다가 빵이나 간단하게 먹을 것을 사 먹는 편이었다.

아침을 안 먹으면 하루의 시작이 우울하다는 정 선생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말이 떠오르자 문득 뭐라도 먹고 싶어졌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혹시 정 선생을 만날까 봐 집과는 좀 떨어진 곳이었다. 마땅한 게 없어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샀다. 가만히 앉아서 먹기엔 시간이 부족했고 운전을 하면서 먹자니 그러고 싶진 않았다. 막상 샀지만 딱히 입맛이 돋는 것도 아니라 조수석에 봉지를 던져 놓고 출발했다.

결국 교무실까지 들고 왔지만 먹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저녁에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상 한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아아.”

“왜 그러세요?”

“늦을까 봐 아침을 못 먹고 와서요. 오늘 우울할 예정이에요.”

“아침 못 먹고 와서요?”

“네.”

이 선생이 웃는 소리에 그쪽을 흘긋 보았다. 정 선생이 책상 위에 엎드려서 장난스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님 조회 전에 나가서 사 오세요.”

“초코바 있어요. 이걸로 때우려고요. 선생님도 드릴까요?”

“아뇨, 식량 빼앗아 먹을 순 없죠. 말씀만 받을게요.”

눈길이 자연스레 책상 끝으로 밀어 놓은 편의점 봉지로 갔다. 정 선생이 샌드위치를 좋아할까. 내가 먹지 않으면 그가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떠오른 생각이 당혹스러워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치 하지 말라면 더 하는 미운 아이처럼, 끊고자 하니 그의 생각이 낙엽처럼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낙엽을 어서 쓸어야 하는데, 발밑에서 밟히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더 방방 뛰어다니는 아이 같았다.

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조회를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출석부와 아이들에게 나눠 줄 가정 통신문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은 한참 시끌벅적했다. 수업도 없고 기다리던 축제가 오니 살판이 난 모양이었다. 출석부를 교탁 위에 소리가 나게 내려놓자 소란스러움이 금세 수그러들었다. 들떠 보이는 아이들의 면면을 훑다가 빈자리를 발견하고 물었다.

“유나 어디 갔어?”

“춤 연습 한다고 화장실 갔어요!”

“그래. 26일이 학부모 수업 참관의 날이다. 지금 나눠 주는 거 버리지 말고 부모님 가져다 드려.”

“네.”

“1교시는 동아리랑 CA 전시 감상 및 체험 시간이다. 자유 시간이나 다름없고, 몇몇 동아리에선 창작품 판매도 하고 있다니까 구경해 보고. 2교시엔 강당으로 모인다. 알겠지?”

“네!”

우렁찬 대답을 뒤로하고 교실을 나왔다. 얼핏 스친 2반의 교실 풍경에는 정 선생이 있었다.

교무실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내가 조회를 가장 빨리 끝마친 모양이었다.

내 책상에 여전히 놓여 있는 봉지를 보았다. 봉지를 들고 정 선생의 책상 쪽을 보았다. 점심을 먹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의외로 먹성 좋은 그가 초코바 하나로 될까. 아침을 먹지 않으면 하루가 우울하다던데, 축제는 즐겁게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놓았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나인지도 모를 테니, 다른 선생이리라 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으나 정 선생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방금까지 내가 보고 있던 그의 책상과 나, 그리고 내 손에 들린 봉지를 차례로 보았다. 어쩐지 당황스러워 보이는 눈에 정신을 차릴 즈음, 그가 물었다.

“그……. 저 주시려고요?”

그 물음에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에게 봉지를 건네려고 하는 폼을 보인 꼴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그에 나 스스로도 당혹스러움을 감추려고 눈을 내리뜨는데, 정 선생이 내게로 다가왔다.

툭. 봉지가 나에게서 그에게로 넘어갔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눈을 들자 바르게, 예쁘게 웃는 정 선생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를 스쳐 지나가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희망 고문을 하는 취미는 없다. 그렇게 할 생각도 없고, 모두 끊어 내자고 말한 주제에 충동적으로 행동한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유난히 귀에 크게 울려서, 그런데 그 발소리가 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소리를 차단해야 했다.

1교시가 끝나고 아이들은 모두 강당으로 모였다. 아이들이 줄을 똑바로 맞추어 설 수 있도록 인솔했다. 아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강당에 불이 꺼지고 무대 위 조명만 켜졌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강당 안을 울렸다. 설렘이 가득한 술렁거림 속에서 사회자가 나왔다.

오늘을 위해 섭외한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마이크를 들고 무대 중앙에 섰다.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서로 안마를 하고 간지러움을 태우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장기 자랑 첫 번째 팀이 나왔다.

교사들을 위해 마련된 뒷자리에 앉았다. 정 선생을 비롯해 장기 자랑에 나갈 교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 선생을 마주친다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

중간중간 있는 경품 추첨 시간에는 교감과 부장 교사들이 나와 추첨을 했다. 학년과 반, 번호를 읊으면 해당되는 아이가 나왔다. 다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교사들에게서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이번 축제를 전반적으로 기획한 교사들이 가장 기분이 좋을 것이다.

노래부터 랩, 춤까지 다양한 무대가 나왔다.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대충 1, 2, 3위가 정해진 듯했다. 아이들의 장기 자랑이 모두 끝나면 교사들이 준비한 무대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팀만 끝나면 나올 것이다.

“자!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어느덧 마지막 팀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어어,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이분들의 끝내주는 무대가 여러분들의 아쉬움을 달래 줄 테니까요! 이분들 보시면 아주 깜~짝! 놀라실 거예요. 팀명은 티쳐 걸스! 째깍째깍입니다!”

“와아아아아-!”

무대에 네 명의 교사가 올라 뒤를 돌아본 채로 섰다. 아이들이 환호하며 무대 바로 밑까지 달려갔다. 네 명 모두 학생들에게 빌렸는지 교복을 입고 있었고……. 모두 치마를 입고 있었다.

네 명 중에 유독 키가 큰, 그러나 허리의 중간까지 오는 긴 머리칼을 한 선생이 눈에 띄었다.

전주가 시작되고, 한 명씩 뒤를 돌아보았다. 정 선생이 뒤를 돌아보자마자 아이들이 난리가 나서 환호를 질렀다.

잘은 모르지만 유명한 아이돌의 노래인 듯했다. 노래와 춤의 스타일로 봐서는 청순한 콘셉트의 아이돌인 것 같았다. 노래에 맞추어 나풀나풀 춤을 추는 정 선생을 보며 입가를 매만졌다. 화장을 했는지 눈매가 진했고 입술은 평소보다 더 붉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팬 서비스를 하는 것처럼 손으로 키스를 날린다.

뭐든지 열심히 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열심이다. 가린 입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지도 못했지만 예뻤다. 화장을 한 얼굴이 아니라, 밤낮 없이 열심히 노력해서 능숙해졌을 춤을 선보이는 그가.

홀린 듯이 눈을 박고 있었는데 어느덧 노래가 끝이 났다. 사회자가 얼른 내려가려는 선생들을 붙잡았다.

“아이, 그냥 보낼 순 없죠! 거기 제일 키 크신 미녀 분! 질문 하나 받고 가세요!”

“아하하! 안녕하세요. 2학년 2반 미녀 담임 정진입니다.”

우렁찬 함성이 강당 안을 가득 울린다. 사회자가 과장스레 놀란 얼굴을 하며 귀를 막았다.

“아니, 아니! 어떻게 이렇게 춤을 잘 추세요?”

“어……. 담임 쌤 무대를 볼 우리 2반 아이들을 생각해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인터뷰를 이어 가는 정 선생에게 시선을 박아 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무실에서 열쇠를 챙겨 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담배에 불을 붙였으나 곧장 빨아들이진 않았다. 솜사탕처럼 뭉쳐 있다 바람결에 흩어져 가늘어진 하얀 구름을 응시했다.

정 선생이 너무 좋은 사람이라, 그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인생에 있어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꼽으라면 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그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친구들이 너는 희망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닿을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좌절감을 느꼈다. 닿을 듯 말 듯 닿을 수 없었던, 마음을 줄 듯 말 듯 주지 않았던 관계. 희망이 피어올랐다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시들어 버리고 마는.

어찌하였든 그 시간은 내가 그녀를 사랑했던 시간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시간을 보내겠다고 말하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러나 정 선생은 티를 내지 않겠다고 했다. 될 수 있으면 마음을 정리해 보겠다고. 그와 나는 남자고, 나는 이성애자이며, 성별을 떠나 내가 누군가를 또 사랑할 일은 없을 테니 그와 친구로 지낸다고 해도 희망을 주는 건 아니지 않을까.

이기심으로부터 피어오른 생각이 우스워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실소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조소와 함께 피우지 않은 담배의 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가 내 곁에 있다면, 그가 내 친구로 남아 준다면 무채색이었던 나의 세상이 적어도 그의 옆에 있을 때만큼은 총천연색으로 물들 것만 같아서. 그의 눈을 빌려 무지갯빛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내내 겨울이었던 내 세상에서, 꽃을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만치 짧아졌을 때 옥상을 내려왔다. 다시 강당으로 향하는 길, 빈 교실로 들어가려는 정 선생과 마주쳤다.

“아…….”

그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대에서 내려왔음에도 여전히 반짝거린다는 게 신기했다.

묵례를 하고 그를 지나쳤다. 얼핏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서 숨을 들이켰다. 그 속에서 얼마 전 느꼈던 희미한 로션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축제가 끝나고 남아 있던 업무를 해치운 뒤 주차장으로 나왔을 때, 차 앞에는 정 선생이 서 있었다. 해가 길어져서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바람만 간간이 불 뿐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설핏 웃음이 담겼지만 진중한 얼굴을.

“이거 드세요. 별건 아니지만……. 오늘 샌드위치 잘 먹었습니다.”

그가 내게 캔 커피를 내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와 내 손에 캔 커피를 쥐여 주고 다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내 눈에 그가 물러난 거리가 담겼다.

“그리고 김 선생님.”

눈을 들었을 땐 우물과 같은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잘 익은 과실 같은 입술이 열렸다.

“모두 끊자고 말씀하셨지만……. 혹시.”

“친구로.”

“…….”

“괜찮겠습니까?”

바람이 한차례 우리 사이의 거리를 훑고 지나갔다. 나를 물끄러미 응시해 오던 눈이 이내 반달처럼 접혔다.

“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나는 내 이기심에 못 이겨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발밑이 이기심에 먹혀들지 않고 그가 뿌려 준 빛의 가루로 동동 떠다녔다.

흔적은 지울 수 없다. 나는 이 흔적을 시간에 내맡기지 않기로 했고 정 선생은 여전히, 티 없이 맑게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