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어떤 예감 (3/15)

3. 어떤 예감

“설렙니까?”

수학여행의 첫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 선생의 표정은 밝았다. 그가 배낭을 품에 끌어안고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제 인생에서 수학여행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딱 세 번일 줄 알았거든요. 수학여행이 다 좋은 기억뿐이라, 설레네요.”

교사와 학생의 수학여행은 다르다. 학생들이야 교사의 지시에 따르고 교사가 말해 주는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만 하면 되지만, 교사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아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멀미하는 애들이 없는지 확인하고, 일정에 맞추어 학생들을 인솔하고, 버스에서 오르고 내리기 전에 인원 점검을 하고, 아픈 아이들은 없는지 부지런히 확인해야 했다. 학생들에게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교사에게도 자유 시간이 오는 거지만, 실상 매번 거기서 거기인 여행지에, 패키지여행을 하는 것처럼 빡빡한 일정 탓에 생각했던 만큼 설레는 기분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초를 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긍정적인 정 선생이라면 피곤한 수학여행조차 즐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즐거움으로 물든 얼굴을 흘깃 보았다. 순간 주말에 보았던 그와 옆에 있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은 주말을 보내면서 간간이 생각이 났던 모습이다. 왜일까.

동성애자에 딱히 편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혐오하는 것도 아니다. 그네들도 그네들만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애초에 정 선생이 그쪽이라고 넘겨짚는 것도 예의가 아닌 건데.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정 선생이 동성애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라면, 나 굉장히 몹쓸 놈 아닌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 선생의 손이 갑자기 내 입가로 다가오더니 주먹을 쥐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제 입가로 가져간다. 뭔가를 먹는 시늉을 하는 정 선생을 힐긋 보며 물었다.

“뭐 합니까?”

“김 선생님 복 제가 먹었어요.”

“네?”

“한숨 쉬면 복 날아간다고 하잖아요. 제가 유명한 복 도둑이니까 제 앞에서 한숨 쉬지 마세요. 큰일 나요.”

실없는 소리에 짧은 웃음을 흘리자 그가 “어어, 진짠데?” 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 말마저도 그저 귀엽게 느껴져 손을 들어 정 선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차 안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당황하고 말았다.

“아. 미안해요.”

“아니에요.”

정 선생이 어쩐지 묘한 얼굴로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동생 있으세요?”

“아뇨.”

“그럼 외동?”

“……형 한 명 있습니다.”

“아아. 동생 있으면 되게 잘해 주셨을 것 같은데.”

“정 선생은요. 막내?”

“그렇게 보이세요? 만나는 사람마다 저보고 막내일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막내라면 막내죠. 위로 누나 한 명 있어요.”

그건 아마 그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화목한 가정의 막내일 것만 같은 이미지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린 동생들을 줄줄이 두고 있는 대가족의 장남 정도일까.

이미지라는 게 그렇다. 나는 어딜 가면 장남일 것 같단 소리를 많이 듣는다. 듬직하고 독립심이 있어 보인다고. 그건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사람의 이미지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보이는 것은 대부분 환경이 만드는 것이다.

“왈가닥이라서 부모님이 항상 걱정하세요. 결혼은 언제 하냐고.”

“정 선생 닮았으면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요.”

“어? 그거 저 돌려서 칭찬하신 거 맞죠?”

웃음기가 묻어 나오는 말에 어깨를 으쓱이자 그가 아무래도 좋은지 기분 좋은 기색을 흘렸다.

“누나라도 결혼을 해야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자유분방한 사람이라서요.”

누나라도?

“정 선생은 독신주의입니까?”

“독신주의는 아니지만……. 네, 아무래도 그에 가까울 것 같긴 하네요.”

말끝에 기묘한 망설임이 묻어 나왔다. 나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타인의 사생활에 발을 들이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새 학교가 눈앞이었다.

크지 않은 운동장에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설렘과 기대가 묻어 나오는 웅성거림이 선선한 아침 공기를 채웠다. 버스가 속속들이 교문을 통과해 운동장에 들어섰다. 인원 점검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아이들을 확인했다.

일정을 확인하고 나서 차에 탔다. 아이들이 이미 다 온 것을 알지만 한 번 더 확인을 했다.

“1반 인원 점검 완료했습니다.”

무전기에 대고 말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다른 반 인원 점검이 끝나고 준비가 되면 우리 반부터 출발을 할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해서 그런지 머리가 무거웠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는데 아이들은 신이 나는지 왁자지껄했다. 벌써부터 과자 봉지를 뜯는 소리도 들렸다.

“출발하겠습니다.”

“예.”

버스가 출발하자 아이들이 드디어 출발한다면서 수군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향해 돌아섰다.

“다들 안전벨트 매라. 아까 멀미약 나눠 줬지만 토할 것 같은 사람은 말하고. 괜히 일어나서 돌아다니지 말고 제자리에만 앉아 있어.”

“네에!”

오늘따라 고분고분하고 밝은 아이들을 보며 픽 웃고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니 한숨 자도 될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눈을 떴다.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배불렀는지 아이들이 다 자고 있는 버스 안은 조용했다. 나 또한 점심을 먹고 또 잠들었나 보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고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선생님~ 밖에 보이세요?]

[바다예요, 바다! 설렌다!]

정 선생의 들뜬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문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었다. 바다는 아니고 호수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푸른 물결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예쁘네요.]

문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결국 답장을 했다. 주차장에 버스가 멈춰 서자마자 귀신같이 알아챈 아이들이 일어나서 커튼을 걷더니 환호성을 내질렀다.

“자, 조용. 내리면서 기사님께 인사하고 아까 선 대로 두 줄로 서는 거 잊지 마라.”

“네!”

아이들이 뒤를 따라 내리며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햇빛에 눈이 부셨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맑고 시원했다. 이어서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정 선생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반마다 두 줄로 줄을 섰다. 인원 점검을 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날씨가 맑아서 다행이었다.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았다.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옆에 오라며 난리였다. 아이들을 가리지 않도록 맨 뒤에 자리를 잡았다.

“하나, 둘, 셋! 김치!”

사진 기사님의 신호에 맞춰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흔들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아이들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뻔했다며 투덜거렸다.

“자, 한 시간 반 동안 자유 시간이다. 바닷가에 가는 건 좋은데 바다엔 절대 들어가지 마. 발도 담그지 마라. 바다 들어가는 순간 바로 집으로 돌려보낼 거니까 알아서 해.”

아이들이 야유를 보냈으나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 말래도 꼭 하는 아이들이 있기에 엄한 얼굴로 으름장을 놓고는 옹기종기 서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근처 산책로와 바닷가는 가도 되는데 더 멀리는 가지 마라. 시간 정확히 지켜서 한 시간 반 후에 여기에 집합한다. 선생님도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네.”

“가서 놀아.”

우와아! 아이들이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저마다 바닷가로 달려갔다. 내 으름장이 통한 건지 아니면 발이 젖는 게 싫었던 건지 아이들은 밀려오는 물결을 피하며 까르르댔지만 물에 들어가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김 쌤, 한 카리스마 하시는데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정 선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바닷바람에 머리칼이 자연스레 흐트러져 있었다.

“좋네요. 호수도 바로 앞, 바다도 바로 앞. 저 바다 진짜 몇 년 만에 오는 것 같아요. 기자 생활 할 때는 하는 것도 없이 바빠서 이런 여유도 없었는데.”

하아. 정 선생이 팔을 넓게 벌리고선 숨을 들이쉬었다. 꼭 이온 음료 광고에 나오는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잠은 좀 잤습니까?”

“네. 사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꾸벅꾸벅 졸았는데 밖에 보자마자 잠이 싹 달아나는 거 있죠.”

정 선생이 푸스스 웃었다. 정말 좋은 듯 맑아 보이는 얼굴에 나도 덩달아 입가가 허물어졌다.

“커피 드실래요? 아까 보니까 카페들 많던데.”

“그러죠.”

“테이크아웃해서 좀 걸어요. 여기 풍경 너무 좋다.”

눈앞에 보이는 카페로 향했다. 난 아메리카노를, 그는 조금 달콤한 카페 모카를 주문하고 각각 한 손에 들었다. 가로수가 쭉 늘어서 있는 산책로는 분위기가 꽤 좋았다. 우리 학교의 교복을 입은 우리 아이들이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고,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휭 지나갔다.

“사회 나와서 단체로 어디 간다고 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이건 나름대로 좋네요.”

“의외네요.”

“의외요?”

“좋아했을 것 같아서.”

“아아. 아무래도 학생 때는 이런 거 주도도 하고 좋아했는데, 사회생활이랑은 또 다르더라고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사회생활이긴 한데, 동심들 옆에 있어서 동심을 좀먹었나.”

그가 조금 부끄러운 듯 말끝에 웃음을 흘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연푸른 니트가 그의 얼굴을 더 환히 보이게 했다. 흰색 스니커즈가 땅바닥을 가볍게 찼다. 정말 어딜 가든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었다.

바닷가 근처라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불었다. 여자아이들이 치맛자락을 붙잡으면서 잘도 뛰어놀았다. 나뭇잎들끼리 몸을 부대끼며 웃는 소리를 냈다. 정 선생과 나는 별말 없이 걸었다. 정적이 나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정적을 주변의 소리들이 채워 주고 있었다.

“쌤!”

세민이가 나를 불렀다. 핸드폰을 든 채로 제 친구들끼리 쪼르르 몰려오는 모습들을 보니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할 것 같았다.

“아니요. 같이 찍자고요.”

핸드폰을 받아 드는 내게 세민이가 고개를 저으며 새침하게 말했다.

“쌤이 찍어 줄게.”

“진짜요? 감사합니다!”

정 선생이 핸드폰을 받아 들자마자 우리 반 아이들이 내게로 쪼르르 몰려들었다. 내 옆에 선 아이들이 하나같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고선 예쁘게 웃었다.

“자, 찍을게.”

“네!”

“에이, 김 선생님. 웃으셔야죠.”

정 선생이 나를 부드럽게 타박했다. 쌤! 우리랑 사진 찍는 거 싫어요? 빨리 웃어요! 녀석들이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카메라만 보면서 내게 핀잔을 주었다. 어쩔 수 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다 보니 억지로 웃는 게 아니라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액정 속 우리를 바라보는 정 선생의 눈가가 퍽 다정스레 접혔다.

“찍을게요.”

하나, 둘, 셋. 숫자를 말하는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의 다갈색 머리칼 너머로 길게 뻗은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일상의, 매일 마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색다른 공간에 와서 정 선생을 마주하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한 번 더 사진을 찍은 정 선생이 고개를 들고서 웃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내게 매우 느릿하게 보였다.

“잘 나왔다.”

“볼래요, 볼래요!”

얼굴에 예민한 아이들이 달려들어서 핸드폰 속 자신을 보았다. 그러더니 선생님보다 제 얼굴이 더 크다느니, 선생님 다리가 더 잘 빠진 것 같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쌤들도 사진 찍어 드릴까요?”

“됐어.”

“에이, 왜요! 쌤 유일한 친구신데!”

여전히 ‘담임 선생님 왕따설’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정 선생의 등을 밀어 내 옆으로 끌고 왔다. 정 선생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얼떨결에 밀쳐져 내 옆에 섰다.

무슨 사진을……. 됐다고 말하려는 순간 어깨에 무언가가 닿았다. 흘긋 돌아보자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든 손이 내 어깨 위에 얹힌 듯 아닌 듯 올라와 있었다. 정 선생을 돌아보자 그가 히죽 웃었다.

“치-즈!”

카메라를 보라는 세민이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앞을 보았다. 어깨 위에 살포시 얹혀 잘 느껴지지도 않는 손의 무게가 어쩐지 무겁게 다가왔다. 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가슴이 벅찬 것 같기도 했다.

콘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 콘도는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육지와 동떨어진 느낌이라 꼭 제주도라도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콘도 앞에는 큰 정원이 있었는데, 일반 성인 남성보다 머리 두 개는 큰 소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산책로와 나무 하나를 둘러싸고 둥그렇게 자리한 벤치도 보였다.

아이들은 날듯이 좋아했다. 일단 바다가 보이는 숙소라는 점이 아이들의 낭만을 자극했고, 내부 시설도 꽤 좋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가운데에 거실을 두고 큰 방이 두 개가 있는 객실에 들어갔다. 남자 방과 여자 방을 나누어 들어가기 때문에 좁진 않을 터였다.

선생들은 아이들 방보다는 좁은, 침실과 거실이 있는 객실로 두 명씩 배정되었다. 학년 부장과 나이가 비슷한 7반 담임이 같은 방을 배정받았으니 자연스레 남은 남선생인 정 선생과 내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와, 경치 진짜 좋다.”

정 선생이 발코니의 창을 열어젖히며 감탄했다. 꼭대기 층의 객실은 창밖으로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솔솔 들어와 정 선생의 머리를 간질이고 도망갔다.

“웬만한 5성급 호텔 안 부러운데요?”

정 선생이 실실 웃으며 창을 닫았다. 그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욕실을 들여다보고 냉장고도 열어 보다 이내 식탁 위에 놓인 담뱃갑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이제 김 쌤 거?”

“취향이 아니라.”

“흐음. 아깝네요.”

소지품 검사 시간 때 화장실에 가서 변기 물탱크를 열어 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걸 가져온 것이었다. 담배 외에도 가방 안에서 화투와 물로 위장한 술병 몇 개를 걸러 냈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딱딱 아셨어요?”

“뻔하죠. 우리 때도 그랬으니까요.”

“하긴. 그래도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요. 반 친구들 중에서도 담배 피우는 놈들이 있긴 있었는데, 그땐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보니까…… 너무 애기들이잖아요. 애들이 들으면 꼰대 같다 하겠지만.”

정 선생이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아련하게 웃었다. 이내 그가 담뱃갑을 내려놓고 막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선생님은 담배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교단에 서고 나서부터요.”

“으음.”

그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직업상의 스트레스 때문에 담배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나에겐 언제나 도피처가 필요했고 그도 아니라면 잠시간만이라도 현실을 잊게 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취직을 하고 돈을 벌게 되면서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간에 한 번 담배를 끊은 적은 있었다. 지연이와 교제를 하면서부터였다.

“간식거리라도 사 올까요? 우리 새벽까지 버텨야 하잖아요.”

“저 혼자 해도 됩니다.”

“에이, 불침번 둘이 맡기로 했는데 어떻게 그래요.”

불침번까지는 아니고, 새벽 2시까지는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게 굴거나 밖에 나가지 않도록 간간이 복도에 나가 확인을 해야 했다. 그 역을 오늘은 정 선생과 내가 맡은 것이었다. 사실 첫날은 내일 일정을 위해 금방 잠드는 아이들이 많기에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럼 같이 나가죠.”

“좋아요.”

가게는 1층에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우리 반 아이들이었다. 저들끼리 나를 발견하고 몸을 움츠리면서 쑥덕거리다가 이내 내게 다가왔다.

“쌔앰!”

저런 목소리를 하고 달려들 때의 용건은 딱 하나다.

“적당히 먹고 일찍들 자라.”

“아싸! 쌤, 감사합니다.”

“이럴 때만 예의 바르지.”

“헤헤.”

카드를 꺼내는 나를 보며 아이들이 매대로 달려가 품 안에 과자를 담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더니 정 선생이 풋, 웃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아시나 봐요.”

“뻔하죠.”

“김 쌤은 애들 참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뭐 사 들고 갈 것이 있나 둘러보다가 정 선생의 말에 그를 보았다. 정 선생이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소린 처음 듣네요.”

아니,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지연이가 그랬었지. 넌 참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러나 그건 조금은 열정에 타올랐을 초보 교사 시절이었고, 그녀가 나를 좋아했던 시절이니.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지워 냈다.

“에이, 설마요.”

정 선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선 과자 하나를 골랐다. 그러고선 김 선생님도 하나 고르세요, 하기에 대충 아무것이나 하나 집어 들었다.

작정을 했는지 계산대에 쌓인 과자와 통 아이스크림을 보고 한숨과 함께 카드를 내밀었다. 골고루 나눠 먹으라는 말에 아이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객실로 뛰어 올라갔다. 우리는 한 손엔 과자, 다른 한 손엔 캔 음료를 들고 객실로 올라왔다.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아 과자 봉지를 뜯고 캔 뚜껑을 땄다. 정 선생이 텔레비전을 켰다. 막 시작한 영화에 채널을 고정했다.

“이거 본 적 있으세요?”

“아뇨.”

“저도 처음 본 영환데. 재밌겠다.”

영화는 색감이 예쁜 로맨스 영화였다.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영화로 알고 있는데, 영화에서 나온 OST가 한국에서도 크게 히트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오도독, 오도독. 과자를 먹는 소리가 텔레비전 소리에 맞물려 고요하게 울렸다. 정 선생은 집중을 했는지 음료엔 손을 대지 않고 손안에 담긴 과자만 먹으며 브라운관에 시선을 고정했다. 안주가 아니면 밤에 뭘 먹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음료만 연신 들이켰다.

“잠깐 보고 올게요.”

“네.”

중얼거리듯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실을 나와 남학생들 전용 객실이 있는 층으로 내려갔다. 몇몇 방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는지 복도까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렸다. 불시에 문을 열자 순식간에 방이 조용해졌다. 둥글게 모여서 낄낄대고 있던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고 일찍 자라는 말을 남긴 후에 복도 끝 창문으로 향했다. 창밖을 내다보았으나 밖에 나다니는 아이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정 선생이 영화를 보고 있다가 문소리에 잠깐 고개를 돌렸다.

“애들 조용해요?”

“아직 시끄러워요. 주의 좀 주고 왔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난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는 잔잔하고 조금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여자 주인공이 통기타를 들고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씩은 들어 봤다던 이 영화의 유명한 OST였다. 정 선생이 노래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는 것이 시야에 걸렸다.

좋았다. 할로겐등만 몇 개 켜 놓아 은은한 거실과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창밖의 밤바다, 몽환적인 색감과 분위기의 영화에서 흐르는 잔잔하면서도 통통 튀는 음악.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좋다’라는 말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분위기다. 귀찮고 피곤하기만 했던 학교 행사에서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입가가 느른하게 풀어졌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마음을 확인하고 격렬하게 입술을 부딪쳤다. 현관 앞에서 입술을 맞물리던 이들이 서로의 옷을 벗겨 내면서 침대로 향했다. 옷가지가 하나둘씩 그들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침대에 누운 이들이 입술을 비비면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여자 주인공의 속옷이 벗겨지면서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캑-!”

사레들린 듯 정 선생이 음료를 들이켜다 말고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그가 입을 가리고 허리를 굽힌 채로 기침을 삼켰다.

“괜찮아요?”

“아. 아, 네. 저 애들 보고 와야겠네요.”

그가 캔을 테이블 위에 엉거주춤 올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허겁지겁 신는 정 선생의 귀가 붉었다. 문이 닫히는 걸 끝까지 보다가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15세 관람가인데 가슴이 노출되어도 괜찮나 싶었는데 베드 신은 얼렁뚱땅 넘어간 듯했다.

……설마 저것 때문에 저렇게 급하게 나간 건가. 겨우 저런 장면 때문에?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귀엽네.”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리고선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흘렸다.

베드 신이 영화의 절정 부분이었고 거의 끝나 갈 무렵이긴 했지만, 정 선생은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다. 객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온 건 영화가 다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멋쩍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정 선생이 걸어왔다.

“애들 다 조용하더라고요. 자나 봐요.”

“그래요? 우리도 자죠. 먼저 씻어요.”

“네.”

정 선생은 사양 않고 방에서 옷가지를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과자 봉지와 캔을 정리해서 쓰레기통에 넣는데 웃음이 또 나와서 입가를 매만졌다.

정 선생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열기에 닿은 뺨이 불그스름했다. 정 선생에 이어 나도 욕실에 들어가서 씻고 나왔다.

“내가 소파에서 잘게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마시고 있던 정 선생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나를 보았다.

“정 선생이 불편해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남 옆에서 안 자 버릇해서.”

“아, 그럼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됐어요. 예민한 사람이 나와 자야지.”

“누가 봐도 나와 자야 할 사람은 전데요. 제가 후배고, 어리고…….”

“15세 영화도 못 봐서 쩔쩔매는 어리신 분을 어떻게 소파에서 재우겠습니까. 들어가서 자요.”

아. 아……. 내 말에 붉어진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던 정 선생이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정 선생이 입술을 꾹 다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좀 짓궂었나. 나답지 않은 행동이긴 했지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 선생이 몇 살이랬지. 스물여덟이랬나. 고작 네 살 차이인데 이렇게 귀엽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일은 산을 올라야 해서 피곤할 게 분명했다. 소파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서서히 몸을 잠식했다.

* * *

높다란 산을 보자마자 아이들의 입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아프다며 꾀병을 부리는 아이들이 속출해서 적당히 무시하고 적당히 달래며 줄을 세웠다. 교복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들이 필수 준비물이었던 체육복을 전부 입고 나서야 출발 준비가 다 되었다.

가장 먼저 앞서가는 건 우리 1반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산을 오르다 보면 뒤처지는 아이들과 먼저 올라가는 아이들이 생기기에 결국엔 반이 모조리 섞이고 만다. 아이들이 중간에 이탈하지 않고 다치지 않게 돌보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었다.

“쌤. 업어 주면 안 돼요?”

“무겁다.”

“치. 맨날 무겁대.”

“맨날 업어 달라고 하니까 그렇지.”

세민이의 정수리를 톡 치고선 걸음을 뒤쪽으로 옮겼다. 벌써부터 어깨가 축 처져서 구시렁거리는 아이들을 격려했다. 뒤에서 정 선생이 배낭을 추스르고 열심히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과 장난을 치면서 올라오는 폼이 아이들과 친구처럼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평지를 지나 조금 가파른 길이 나오자 아이들이 헉헉댔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철재 층계를 오르는 동안 나도 조금씩 숨이 차는 것을 느꼈다. 왕복 두 시간, 길어 봤자 두 시간 반인 거리는 그리 힘든 코스가 아니었지만 산은 그래도 역시 산이었다.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출렁다리를 건널 때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손잡이를 꼭 잡고 장난을 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조금 더 가팔라졌다. 아이들은 이 정도도 죽을 것 같은지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체력이 좋은 아이들은 신이 나서 먼저 휙휙 올라갔다.

숲의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매번 수학여행을 갈 때마다 한 번씩 꼭 날이 흐릴 때가 있었는데, 이번엔 날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땀이 나서 겉옷을 벗어 팔에 걸쳤다.

목적지인 폭포에 도착해서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쉬었다. 뒷반인 2반도 머지않아 도착했다. 정 선생은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올라왔다.

“안 힘든가 봐요.”

“아, 이 정도야 거뜬하죠. 평소에 운동하는 거 좋아해서요. 하이킹도 자주 다녔고요.”

“젊음이 좋긴 좋네.”

어제의 연장선이 되는 말인 것을 알아차린 정 선생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에 이러시깁니까?”

“궁합도 안 본다니까 이러는 거죠. 부장님께 이럴 순 없지 않습니까.”

아하하! 정 선생의 웃음이 기분 좋은 울림이 되어 퍼졌다. 맞는 말이네요. 그가 짐짓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애들 뻗은 것 좀 보세요. 많이 힘든가 봐요.”

“평소에 운동을 해 봤어야 말이죠. 내일 근육통으로 고생 좀 할 겁니다.”

“그래도 다 올라오니까 애들 얼굴이 폈네요.”

“내려갈 땐 더 필 거예요, 아마.”

별 재미도 없는 평범한 말에 정 선생이 웃었다. 질서 없이 한꺼번에 우르르 내려가는 불상사를 방지하려면 이제 우리 반부터 다시 내려가야 했다.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다리를 풀었다.

“이제 내려가나요?”

“그래야죠. 천천히 따라와요.”

“넵. 파이팅입니다.”

내 앞에 아이들을 불러 세우고 인원을 확인했다. 구시렁거리면서 싫은 티는 냈어도 다들 잘 따라온 모양이었다. 내려간다는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빨리 점심을 먹고 싶다며 아우성쳤다.

“내려갈 때는 더 조심해야 돼. 관절 나간다.”

“쌤! 아저씨 같아요.”

사실인데 아저씨 같다는 말에 픽 웃었다. 아저씨니까 아저씨 같은 거겠지.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배경으로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내려갔다. 산을 오르는 뒷반 아이들이 우리 반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쌤. 쌤은 설악산 와 본 적 있으세요?”

유독 나에게 말을 많이 거는 세민이가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물었다.

“자주 와 봤지.”

“진짜요? 누구랑요? 여자 친구랑?”

“누구긴 누구야. 너희들이지.”

“에에? 저희랑은 첨이잖아요.”

“수학여행으로 많이 와 봤단 소리야.”

“와, 그럼 지루하겠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또 재잘재잘. 화제가 휙휙 바뀌는 걸 들으며 뒤를 돌아볼 때였다.

“어!”

자기들끼리 퍽퍽 밀치면서 장난을 치다가 한 녀석이 중심을 잃었다. 비탈을 가로지르는 철제 층계 위였다. 뒤에 서 있던 정 선생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아이의 팔을 잡아채 몸을 홱 돌려 위로 끌어 올리면서 아이는 몸을 바로 세웠지만, 정 선생의 몸의 축이 뒤로 넘어갔다.

“꺄악-!”

쾅. 머리가 난간에 한 번 부딪히고, 그가 난간을 잡으려 팔을 허우적대다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가파른 계단이었다. 다행히 좁았고, 주변 아이들의 다리에 치여서 계단을 모두 굴러 내려오진 않았다. 입술을 짓씹고 계단 위를 성큼성큼 올라갔다.

“정 선생!”

어떡해! 선생님, 괜찮아요? 수런대는 아이들 틈을 파고들어 몸을 웅크린 채로 계단 위에 비스듬하게 쓰러진 정 선생에게 다가갔다.

“아…….”

“괜찮습니까?”

계단을 구르면서 무리가 갔는지 그가 왼쪽 어깨를 쥐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마는 찌푸린 채였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쌤 괜찮아, 얘들아. 쌤처럼 되지 말고 난간 꼭 잡고 내려가라.”

이 와중에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생글생글 웃는 폼에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손에 난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봐요. 괜찮아요?”

“네.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더 크네요. 하하.”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아!”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던 정 선생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가 발목을 잡고 침음을 삼켰다.

“접질렸나 보네요.”

“오랜만에 깽깽이라도 해야겠네요.”

“지금 농담이 나옵니까?”

인상을 찡그리며 험악하게 나온 목소리에 정 선생이 입을 다물었다.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점점 사그라드는 걸 보자 명치끝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것이 차갑게 식었다.

“업혀요.”

“괜찮아요.”

“두 번 말 안 합니다. 업혀요.”

단호하게 말하자 정 선생이 머뭇거리며 내게 업혔다. 키에 비하면 그리 무겁진 않은 무게였다.

“다들 서 있지만 말고 내려가. 앞으론 장난치지 말고 내려가고, 주차장 앞에서 다른 선생님들 오실 때까지 얌전히 서 있는다. 알았어?”

“네.”

정 선생을 업은 채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주머니에서 핸드폰 좀 꺼내 줘요.”

그가 꼬물대며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장님께 전화 걸고 나 바꿔 줘요.”

“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선 전화를 걸어 내 귀에 대 주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기가 죽은 목소리에 한숨이 나왔다.

-어, 김 선생.

“부장님. 지금 하산 중인데요. 정 선생이 조금 다쳤습니다.”

-어어? 괜찮아? 많이 다쳤나?

“발목을 조금 접질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병원 데려가려고 하는데, 저희 반 아이들이랑 정 선생 반 아이들 좀 부탁드리려고요.”

-그래, 그래. 알아서 잘할 테니까 급하게 하지 말고 치료 잘 받고 와. 정 선생한테 걱정 말라고 전해 주고.

“예. 감사합니다.”

전화가 끊기자 정 선생이 다시 핸드폰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색색 내쉬는 숨이 귓가에 닿았다.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무겁잖아요, 저.”

“잘 먹는 것 같았는데 다 어디로 날아갔나 보네요.”

내 퉁명스러운 말에 그가 푸스스 웃었다. 귓가에 웃음이 흩어졌다. 조금 가파른 길을 지나니 평지가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그리 힘들지 않은 길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이 나올 것이었다.

“안 아픕니까?”

“괜찮아요.”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네요.”

“네. 제가 다쳐서 다행이죠. 애가 다쳤을 거 생각하니 끔찍하네요.”

“지금도 충분히 끔찍합니다.”

정 선생이 입을 다시 다물었다. 정적이 감돌자 다시 한숨이 나왔다. 생각과는 다르게, 아니 생각과 같이 말이 튀어나왔다. 사과라도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어깨에 툭, 뭔가가 닿았다. 그의 이마가 내 어깨에 묻혔다.

“화내지 마세요.”

“화낸 거 아닙니다.”

“앞으로 안 다치겠습니다.”

그가 내 딱딱한 말투를 흉내 내며 웅얼거렸다. 이 와중에 장난을 치는 것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그도 따라 웃었다. 뭐가 좋아 그리 웃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 구하려다가 넘어진 정 선생에게, 다친 그에게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을 내려와서 콜택시를 불렀다. 정 선생을 부축해 뒤에 앉히고선 나도 그 옆에 앉았다.

“근처 병원으로 좀 가 주세요. 응급실 있는 곳으로.”

“네.”

정 선생을 차 문에 기대게 하고 신발을 벗겨 발을 내 다리 위에 얹었다. 그가 발을 꼼지락댔다. 발목을 약하게 쥐자 인상을 찌푸렸다.

“깁스할 수도 있겠네요.”

“놀러 와서 이게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네요.”

“병원 갔다 와선 푹 쉬어요.”

“그래야겠죠? 박물관 가고 싶었는데.”

그가 고개를 숙여 제 발목을 내려다봤다. 조금 풀이 죽은 얼굴에 머리를 쓰다듬듯 두드려 주자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양말에 싸인 발은 키에 비하면 작은 편인 듯했지만 얼핏 보기에도 모양이 잘 잡혀 있었다. 발가락을 자꾸 꼼지락대기에 꿀밤을 때리듯 한 번 툭 건드렸더니 그만두었다. 짧은 웃음을 흘리자 그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그냥 부축을 받고 걸어가겠다는 정 선생과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그를 다시 업었다. 응급실로 들어가 의사의 안내대로 그를 침대에 앉혔다.

“계단에서 구르셨다고요.”

“네. 가파른 계단이었는데 많이 구른 건 아니지만 좁다 보니 여기저기 부딪힌 것 같습니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한 번 부딪혔고……. 어깨가 바로 바닥에 닿았습니다.”

의사가 정 선생의 어깨를 쥐었다.

“어때요. 많이 아프신가요?”

“아뇨. 조금 욱신거리긴 하지만 괜찮아요.”

“머리는요. 어지럽진 않으시고요.”

“네. 혹이 조금 난 것뿐이에요.”

“음……. 지금 보니까 가장 문제는 발목이신 것 같네요. 엑스레이 한번 찍어 보죠. 그 전에 상처 치료부터 하고요.”

까져서 피가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의사가 가리켰다. 간호사가 와서 손바닥에 소독약을 발랐다. 꽤 따가운지 정 선생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호자분. 접수해 주세요.”

“네. 신분증 있습니까?”

정 선생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내게 건넸다. 지갑을 받아 들고 원무 창구로 향했다. 지갑에서 그의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옛날에 찍은 사진인지 앳되어 보이는 것만 빼면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풋풋했다. 사진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정신을 차리고 접수서에 그의 이름을 기재했다.

0723……. 정 선생과 잘 어울리는 생일이었다. 풋풋하고 청량한 여름에 태어났구나. 이어서 보호자란에 이름을 쓰고, 펜은 그 아래에서 멈췄다. 환자와의 관계. 잠시 고민하다 ‘동료’라고 쓰고 접수했다.

정 선생은 치료를 다 했는지 손에 반창고를 붙이고서 내가 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보호자라고 불리고 보호자로서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직원의 안내대로 엑스레이 촬영실로 향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가 어쩐지 작아 보였다. 그가 촬영을 하는 동안 나는 복도에 앉아 있었다. 핸드폰 사용 금지라는 팻말을 보다가 아무도 없는 복도 끝을 응시했다. 고요했다. 병원이 만들어 내는 특유의 분위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정 선생이 심각한 병에 걸려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손안에 쥔 정 선생의 갈색 지갑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의 머리칼보다 조금 더 옅은 색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 정 선생이 나오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1층의 응급실로 올라와 그를 침대에 앉혀 주었다.

“감사합니다.”

“잠깐 기다려요. 부장님께 전화드리고 올 테니까.”

“네. 저 걱정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죄송하다고도요.”

고개를 끄덕이고선 응급실을 나왔다. 담배가 당겼다. 수학여행까지 와서 피우는 건 피하자 싶어 담배는 숙소에 놓고 온 지 오래였다. 주머니를 더듬거리다 결국 그냥 핸드폰을 꺼냈다.

-어, 김 선생. 어떻게 됐어.

“발목 엑스레이 찍고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많이 다치진 않았고요.”

-거 다행이네. 2반 아이들은 내가 인솔하고 있고, 김 선생 반 아이들은 설 선생이 인솔하고 있어.

“힘드실 텐데 감사합니다.”

-힘들긴, 뭘. 거진 다 자유 시간인데. 병원까지 오래 걸렸나?

“20분 좀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럼 그냥 바로 숙소로 갈래? 어차피 오늘 애들 장기 자랑 준비 시간 때문에 일정 일찍 끝날 거고. 점심도 아직이잖아.

“그럼 밥 먹고 정 선생 숙소 데려다준 다음 가겠습니다.”

-됐어, 됐어. 오가는 시간 합해서 김 선생 올 때쯤이면 우리도 숙소 가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럼 그렇게 알게. 알았지?

“부장…….”

전화가 끊겼다. 혀를 차고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응급실로 들어왔다. 정 선생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매불망 주인 기다리고 있는 강아지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의사 선생님 방금 왔다 가셨는데, 별 이상 없대요. 그냥 좀 놀란 거라네요. 그래서 좀 아파도 걸을 수 있을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바로 돌아가면 되겠어요.”

“됐습니다. 정 선생은 쉬어요. 일단 우린 밥부터 먹고. 일어날 수 있겠어요?”

정 선생이 주춤주춤 침대에서 내려왔다. 두 발로 서자 아프긴 한지 눈가를 찡그리긴 했지만 아예 못 걷진 않았다. 정 선생의 팔뚝을 붙잡고 로비 의자에 그를 앉혔다.

“기다려요. 수납하고 올 테니까.”

“제 지갑 안 써 준다고 우니까 꼭 써 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정 선생이 내 손에 들린 제 지갑을 가리키고선 어깨를 으쓱였다. 꼭 좀 써 달라는 눈빛에 웃음을 흘리곤 원무 창구로 향했다. 수납을 하고 나서 그를 부축한 채로 병원을 나왔다. 병원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 하나를 잡아탔다.

“김 선생님이 제 보호자 되셨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스물여덟 성인 남자의 보호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저도 네 살 위의 성인 남자가 제 보호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궁합도 안 본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죠.”

병원을 나오자 기운을 차린 정 선생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듣자 나도 모르게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택시는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렸다. 숙소 근처에서 간단히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부장 선생 말대로 다시 아이들이 있을 박물관으로 가기에는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일단 먼저 씻어야겠어요. 먼지를 다 뒤집어쓴 것 같아요.”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야 뭐, 거뜬하죠.”

정 선생이 불편한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들이켰다. 어깨가 뻐근했다. 어깨를 돌리고 나서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담배를 꺼내 들어 발코니로 향했다.

담배를 입에 물자 비로소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생각지 못했던 부상에 정신도, 몸도 나도 모르게 굳어 있었던 모양이다.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스쳤다. 여전히 맑은 바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정 선생은 아무래도 불편해서 그런지 씻는 데 조금 오래 걸렸다.

정 선생이 나온 건 내가 또 꺼내 문 담배를 다 태웠을 때였다.

“선생님도 씻으실래요?”

“그래야겠네요. 좀 쉬어요.”

“네.”

정 선생이 소파에 앉는 걸 보고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산을 오르면서 났던 땀을 씻어 내자 몸이 활기를 되찾았다. 머리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뜨끈한 열기로 가득한 욕실을 나와 머리를 터는데 소파에 누워 잠이 든 정 선생이 보였다.

왜 침대로 가지 않고. 낮게 혀를 차고선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은 채로 그는 곤히 자고 있었다. 아파서 그런 건지 피곤해서 그런 건지 자는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였다. 한숨을 내쉬고선 그의 앞에 앉았다.

자는 얼굴은 더 앳되어 보였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또 했던 것 같은데. 아. 시험이 끝나고 나서 그의 집에서 술 한잔을 하고 나왔을 때였다. 정 선생이 술을 마시다 잠들어서 그가 잠든 것을 보고 나왔었지.

“음…….”

아픈 건지 불편한 건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고운 미간에 주름이 진 것을 보고 살며시 손가락을 들었다. 엄지로 그의 미간을 문지르자 곧 주름이 펴졌다. 평온하게 잠든 모습을 한참이나 보다가 이내 짧은 웃음을 흘렸다.

감긴 눈이 스르륵, 떠졌을 때는 눈앞에 정 선생이 보였다. 그는 검은 소파에 누운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퍼뜩 몸을 일으켰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다리가 짧은 테이블 위에 나도 모르게 엎드려 자고 있었던 듯싶었다.

“좀 잤습니까.”

“네. 선생님도 쉬셨어요?”

“나도 모르게 잤네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5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이들이 올 때가 거의 다 됐다.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꺼내 물을 따라 하나는 정 선생에게 넘기고 하나는 내가 마셨다.

“애들 오자마자 저녁 먹고 장기 자랑 준비 시간 가진 다음 바로 강당에 모일 겁니다. 어떻게 할래요.”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런지 밥 생각은 없고, 강당엔 갈래요. 발목도 많이 안 아프고, 애들 장기 자랑 하는 것도 보고 싶고요.”

“그렇게 해요, 그럼. 나도 저녁 생각은 없고. 아, 전화 왔네요. 애들 왔나 봅니다. 난 내려가 볼 테니까 정 선생은 쉬고 있어요.”

“네.”

정 선생은 굳이 내려가겠다 고집부리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채기가 난 하얀 발목을 흘긋 내려다보고선 방을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 아이들이 왔다는 전화였다. 반나절을 담임도 없이 돌아다녔을 아이들에게 칭찬을 해 줄 차례였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아이들이 이동 시간에 조금 잤는지 몽롱한 얼굴로 하나둘씩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보자마자 우리 반 아이들과 정 선생 반 아이들이 내게로 와글와글 몰려들었다.

“쌤! 정 쌤 괜찮아요?”

“쌤, 저희 담임 쌤은요?”

“쌤, 저희 버리고 가기 있어요?”

한 명이 한 마디씩을 하니까 그게 열 마디고 백 마디였다.

“정 선생님은 괜찮으시고 발목이 아프셔서 지금 쉬고 계셔. 장기 자랑 때는 아마 계실 거다. 오늘 우리 반은 나 없이 질서 지키느라 수고했고, 잘했다. 바로 저녁 먹고 숙소로 들어간 다음 한 시간 동안 준비하고 강당으로 모인다. 알았지?”

“네!”

2반 아이들이 다행이라는 듯 저들끼리 재잘대며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줄지어서 식당으로 향하는 걸 보다가 부장 선생에게 다가갔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 정 선생은 괜찮고?”

“네. 그냥 좀 놀라서 그랬고,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저흰 점심을 늦게 먹어서 저녁은 안 먹고 바로 강당으로 가려고요.”

“그래, 그럼.”

“저녁 맛있게 드십시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에서 혼자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는 정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하는 겁니까?”

“재활이요.”

정 선생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한숨을 내쉬고 정 선생에게로 가 그를 소파에 앉히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밥 먹고 준비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그동안 좀 쉬죠.”

넵.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정 선생이 고개를 주억이고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여태껏 쉬었지만 텔레비전을 보면서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죽이다 장기 자랑 시간이 다 되어서 강당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가장 바라 왔던 시간이었기에 강당은 열기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사회자가 되어 아이들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잠깐의 레크리에이션 뒤에 드디어 장기 자랑 시간이 찾아왔다. 반마다 준비한 팀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지나치게 섹시한 아이돌의 춤을 추었던 것을 제외하면 장기 자랑 시간은 즐거웠다. 팀별로 상품을 나누어 주고 해산을 시켰다. 마지막 밤이니 오늘만은 밤을 새우는 아이들이 많겠지만 특별히 풀어 줄 예정이었다.

마지막 날은 교사들도 술자리를 가진다. 정 선생은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지 못해 맥주 한 모금만 홀짝이곤 다른 교사들의 권유로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적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정 선생은 침대 한구석에서 자고 있었다. 혼자 자기에 넓은 침대인데 왜 저리 한쪽에서 자는 건지 모르겠다. 가슴 밑으로 내려간 이불을 추어올려 주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누웠다. 취기에 눈이 꾸벅꾸벅 감겼다.

눈을 떴을 땐 동이 트고 있었다. 푸르스름해지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목이 말라서 몸을 일으키고 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다가 침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 틈새로 보이는 침대 위는 텅 비어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는 컵을 내려놓고 방으로 향했다. 정 선생이 없었다.

욕실에도 없는 것을 보아 밖에 나간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 다리로 어딜 나간 건가 싶었다.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벤치에 정 선생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일교차가 줄어들어 날은 춥지 않았지만 바닷바람은 무시할 수 없었다.

날이 맑았다. 멀리 보이는 바다가 눈을 상쾌하게,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정 선생의 동그란 머리통이 보였다.

“응. 어어, 나 이렇게 좋아해 본 사람 처음이야. 갈수록 좋다.”

열 걸음 정도 남았을 때 정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보니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전화를 하러 나온 건 줄은 몰랐다. 통화를 엿들을 수는 없어 막 뒤를 돌려고 할 때였다.

“어? 고백은 무슨. 우리 김 쌤 헤테로야.”

비스듬하게 돌아간 몸이 그대로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하하! 그 특유의 웃음소리가 귀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머리가 멍했다. 정신을 차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을 때, 정 선생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

“…….”

파도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이 정적이, 정 선생의 희게 굳은 낯이, 차갑게 식은 공기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서, 선생님.”

혼란스러운 얼굴로 정 선생이 일어났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으나 애써 무시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헤테로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 단어인지 알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정 선생은 아마도 동성애자일 것이고,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불쾌감도 당황스러움도 아닌, 배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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