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알로호모라 (2/15)

2. 알로호모라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과학적 근거라고는 없는 미신이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이름을 따라간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김후진. 임금 후后에 보배 진珍이라는, 의미만 보면 굉장히 진귀한 이름이었지만 이런 이름을 지어 준 부모님은 정작 나를 보배처럼 여기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내 별명은 ‘김빠꾸’, ‘엘리제’였다. 조그마한 건더기만 있어도 크게 부풀려서 서로를 놀리던 어린 시절, 이름은 가장 큰 소재가 되곤 했다. 자동차가 후진할 때 후진이란 말 대신 흔히들 쓰는 ‘빠꾸’나, 자동차가 후진할 때 나는 음악 ‘엘리제를 위하여’에서 딴 별명이었다. 물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들어 본 적도 없는 별명이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고 되돌아가는 사람은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르는 사람이나, 되돌아갈 용기는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떨어지고 되돌아갈 용기는 없는 일방통행의 길에서, 나는 낙오자였고 실패자였다.

내 계절이 한곳에 머물러 있는 만큼, 나 또한 한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머무르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한 발자국 내디디려 하면 나는 그 한 발자국의 배만큼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렇게 뒤로 물러서다,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는 끝에 다다르면 어떻게 될까. 그곳에는 벽이 있을까, 절벽이 있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만큼 무서운 것이 뒤가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오늘은 노래 좀 틀어 볼까요?”

긴 손가락이 라디오로 향했다. 스피커에서 통통 튀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아는 노래인지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흥얼거린다.

정진. 사람이 이름을 따라간다면, 그도 역시 이름을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닐까. 정진이든, 발음이 비슷한 전진이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다르지 않았다. 그는 길이 몇 갈래로 나누어져 있든 자신감 넘치게 앞으로 나아갈 것만 같았다. 태양이 떠 있어 이미 밝은데도 가로등까지 켜져 있어 눈이 부신 길. 그가 걷고 있는 길은 아마 그런 길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 자체가 빛이라 그런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친해질 생각조차 없었던, 오히려 먼저 다가왔을 때 꺼려지기까지 했던 정 선생과 카풀 일주일째였다. 계기는 일주일을 거슬러 우리가 술을 마신 다음 날로 올라간다.

그날은 정말 거짓말처럼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알람을 듣고 번쩍 눈을 떴을 때,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빛을 보며 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자연의 소리는 재생이 끝나 귀에 꽂힌 이어폰에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들어와 잠에 든 건 2시 전후였을 테니 5시간 반은 잔 셈이었다. 머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고 몸도 개운했다. 자연의 소리가 정말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 차가 가까워졌을 즈음,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정 선생은 없었다. 지금이 8시니 먼저 갔거나 아마 조금 늦게 나올 모양이었다.

교무실에는 정 선생이 없었다. 가방을 놓고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는데 8시 30분이 지나도록 정 선생이 오지 않았다. 아침 조회에 들어가야 해서 교실로 향했다. 우리 반으로 향하면서 2반을 보는데 정 선생은 없고 교실은 시끌벅적했다.

출석을 확인하고 전달 사항을 전달한 뒤, 아이들과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 50분이 되어 교실을 나왔을 때도 2반 교실에는 정 선생이 없었다. 교무실에도 그는 없었다. 연락이라도 해 봐야 하나. 자리에 앉아 수업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핸드폰을 쳐다볼 때였다.

‘허억, 헉, 하…….’

그때 문을 열고 정 선생이 들어왔다. 뛰어왔는지 숨을 헉헉 내쉬며 안으로 들어서는 정 선생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어머, 정 선생님 늦으셨네요.’

‘늦잠 자셨어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고, 동료 선생들이 놀리듯 그에게 물었다. 정 선생이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하하. 조금 늦게 일어났는데 버스까지 안 와서……. 죄송합니다.’

‘뭐, 우리한테 죄송할 건 없지. 그러니까 정 선생도 일찍 결혼해. 집사람이 나보다 일찍 출근하니까 매일 깨워 주거든.’

‘그래서 부장님은 오늘도 아침 식사 든든히 하고 오셨습니까?’

‘그럼.’

그는 학년 부장의 말에 너스레를 떨고선 빨리 조회를 하러 가야겠다며 교무실을 부리나케 나섰다. 교과서와 수업 자료를 챙기고 그를 따라나섰다.

‘아, 김 선생님.’

‘알로호모라.’

그의 곁을 지나치며 중얼거리듯 그가 말했던 주문을 속삭였다.

‘아하하-!’

유쾌한 웃음이 복도 안을 울렸다. 입가가 허물어지는 걸 느끼며 교실로 향했다.

늦잠을 잤는데 버스까지 늦어서 지각을 했다는 정 선생에게, 나는 카풀을 제안했다. 그건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앞뒤 생각 없이, 점심시간에 그를 마주하고 있는데 그냥 그렇게 말이 나왔다. 어차피 나도 가는 길이니 번거로울 것도 없었고, 라디오 대신 그의 말을 틀어 놓는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나와 술을 마시다 지각한 거니 약간은 내 책임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제안한 것이었는데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고맙다며 내게 기름값을 주겠다고 했고, 나는 거절했지만 기어코 글러브 박스에 봉투를 넣어 놓고 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갔고, 카풀은 수월하게 이어졌다. 내가 교문 지도를 서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는 정 선생이 좀 일찍 나와야 한다는 것 빼고는 불편한 점도 없었다. 오히려 라디오에서 맨날 똑같은 레퍼토리의 방송을 듣는 것보다 다양하고 생동감 넘치는 정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 더 좋았다. 어쩌면 내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그의 곁에 서서 반짝이는 빛 조각의 부스러기라도 뒤집어쓰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살기 싫은 주제에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선생님은 시험 감독 할 때 무슨 생각 하세요?”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중간고사 시작 날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교문 지도도 하지 않아서 늦게 출발해도 되었다.

“그냥 애들 봅니다. 답 쓰는 거 보면서 틀렸는지, 맞았는지 보는 거죠.”

“아아. 저 학생 때 선생님들 시험 기간에 감독하시는 거 보면서 진짜 지루하겠다고 늘 생각했었거든요. 핸드폰도 못 보고 다른 일도 못 하고 오로지 아이들만 봐야 하잖아요. 전 오늘 지루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45분 의외로 금방 갑니다. 교탁 밑이나 교실 뒤에서 몰래 핸드폰 하는 선생들도 있고요.”

“그래도 돼요?”

“안 되지만 그냥 다들 눈치 보면서 하는 거죠.”

“음, 전 아직 경력이 안 되니까 안 될 것 같아요.”

팔자 주름이 깊게 들어갈 정도로 입술을 꾹 다물던 정 선생이 정말 지루하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선생들은 좀 지루하더라도 수업을 안 할 수 있어 시험 기간을 좋아하는데 말이다.

“근데 선생님은 커닝하는 아이 본 적 있으세요?”

“네.”

“어떻게 하셨어요?”

“시험 다 끝나고 불러냈습니다.”

“아, 경고 주셨어요?”

“0점을 줬죠.”

“아…….”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임새에 정 선생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의 낯이 염려로 물들어 있었다.

“왜요.”

“아뇨, 만약 제가 감독 보는데 커닝하는 애가 있음 어떡하나 해서요.”

“어떻게 대처를 하든, 마음 약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자업자득이니까요.”

정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시험 감독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우리 학교엔 커닝하는 애들 잘 없습니다. 걱정 말아요.”

“네. 아무래도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학교에 도착해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테이블 위에 시험지가 든 봉투들이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걸 훑어보다 교실로 향했다. 시험 기간 한정으로 복도는 조용했다. 시험 직전에 바짝 암기를 해서 효과를 보려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드디어 첫 중간고사다.”

내 말 한마디에 아이들이 책상 위로 엎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들어와서 말을 하는데도 보는 둥, 마는 둥 교과서만 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잘하라곤 말 안 할 테니까 열심히만 해. 10분 만에 찍고 엎드리는 짓 하지 말고. 하나라도 아는 게 있나 더 확인해 봐.”

아이들이 우는소리를 낸다. 적당히 달래 주고 교실을 일찍 나왔다. 괜히 앞에 서 있어 봤자 신경만 쓰이고 도움 되는 건 없을 테니 말이다.

1교시 10분 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어서 시험지와 답안지를 챙겨 감독을 맡은 교실로 가야 했다. 교실로 들어서기 전에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두려고 꺼내 들었는데 문자가 하나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드디어 1교시! 김 선생님 힘내세요~ ^^]

정 선생이었다. 카풀을 한 이후로 이렇게 종종 문자를 보내곤 했다. 문자에서부터 들뜬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을 짧게 흘리고 교실로 들어섰다.

* * *

문제는 시험 마지막 날 터졌다. 일찍 퇴근할 수 있는 데다 내일이 주말이라 학생이며 선생이며 모두 들떠 있는 날이었다. 답안지를 챙기고 교무실로 들어가다가 정 선생 앞에서 학생 한 명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 선생이 앉은 채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정 선생의 얼굴이 안 좋아 보였다. 그의 저런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교무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분위기를 살피며 자리에 앉는데 학년 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애들은 하여튼 무서운 줄을 몰라요.”

“저렇게 엉엉 울 거면 애초에 커닝은 왜 하는지 몰라.”

선생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자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울고 있던 아이는 정 선생의 반 학생이고, 커닝을 하다 걸린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담임을 맡은 반의 감독을 할 수 없으니 정 선생이 직접 아이를 적발한 게 아니라는 점 정도일까.

그저께 커닝하는 아이가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묻던 정 선생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정 선생 반의 아이가 그럴 게 뭐인가. 내 일도 아닌데 괜히 신경이 쓰여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종례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올 때까지 정 선생은 없었다. 그 아이와 상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동료 선생이 귀띔을 해 주었다.

뒷반 수학 선생과 마주 보고 앉아 서술형의 채점을 했다. 주말에는 쉬고 싶다며 윤 선생이 채점하는 속도를 높였다. 수학은 다른 과목에 비해 유난히 백지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쓰면 부분 점수를 줄 텐데. 고개를 저으며 채점을 했다.

정리를 하고 교무실로 돌아왔다. 정 선생의 자리는 여전히 빈자리였다. 오늘 일찍 퇴근해서 오랜만에 본가로 갈 거라고 했었는데, 가방이 있는 걸 보니 퇴근한 건 아닌 듯했다. 집에 들렀다 간다고 해서 차는 같이 타기로 했었는데. 기다려야 하나, 연락을 해 볼까 하다가 이내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갑자기 담배가 당겨서 옥상 열쇠를 챙겼다.

아직 해가 지진 않았지만, 하늘이 붉게 물들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불을 붙이고 필터를 깊게 빨아들였다. 나른해지는 기분이다.

수학은 상대적으로 서술형에 대한 항의도 없어서 시험이 끝나도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정 선생은 뭘 하고 있으려나. 집에 가야 하는데. 담배가 짧게 타들어 갈수록 더 갈증이 일었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새로운 담배를 꺼낼 때였다. 난간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고, 그제야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네.”

-아, 김 선생님.

정 선생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를 처음 본 이후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색이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따로 연락을 못 드렸네요. 죄송해요. 집에 가셨죠?

“아뇨. 학교입니다.”

-네? 교무실에 없으시던데…….

“옥상이에요.”

-혹시 저 기다리신 거예요? 아, 죄송해요. 제가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

“아니요. 담배 피우다가 시간이 다 갔네요. 정 선생 전화 때문에 정신 차렸습니다.”

내 말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듯했다. 어쩌면 미안해서 말을 못 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끝났어요?”

-네……. 일단은.

“그럼 가죠. 차 시간 안 늦었습니까?”

-늦진 않았어요.

“잘됐네요. 지금 내려갑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난간에 담배꽁초가 쌓여 있었다. 이마를 긁적이다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꽁초 더미를 담았다. 내려오는 길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교무실로 들어섰다. 정 선생이 가방을 안고 의자에 앉아 있다 날 보고 벌떡 일어났다. 교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일찍 퇴근을 한 모양이었다. 열쇠를 서랍에 넣어 놓고 가방을 챙겼다.

“가죠.”

“감사해요, 선생님.”

“뭐가요.”

“기다려 주신 거요.”

그의 말에 대답 없이 앞서 나갔다. 시동을 걸면서 차창을 살짝 열어 놓았다. 정 선생이 문을 열기 전에 열린 창문에 눈을 가져다 대고 안을 보며 웃었다.

“몇 시 찹니까?”

“8시 차가 있는데……. 그냥 가지 말까 싶어요.”

“피곤해요?”

“네. 가는데 두 시간은 걸릴 텐데 차마 버스 안에 구겨져 있을 엄두가 안 나네요.”

하긴 지금 마음으로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흘깃 보았다. 그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정 선생의 머리칼을 훑고 지나쳤다.

말을 거는 대신 라디오를 틀었다. 퇴근길 귀를 편안하게 해 주는 음악이 흐르는 채널이었다. 옆에서 옅은 웃음이 들린 것도 같았다.

“선생님은 집에 가실 거죠.”

“예.”

“그럼 저랑 술 한잔하실래요?”

괜찮은 듯 내는 목소리에는 늘 넘치던 생기가 시들했다.

“괜찮겠어요?”

“저야 뭐 괜찮죠.”

“그럼 좋아요.”

“저희 집 가실래요? 좀 편하게 마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좋습니다.”

정 선생이 창문에서 머리를 떼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흥얼거렸다. 그새 기분이 나아진 듯한 그의 얼굴을 보고 짧게 웃었다.

옷을 갈아입고 편하게 오라는 말에 정 선생을 집에 데려다주고 내 집으로 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털고 걸음을 옮겼다. 밤공기는 서늘했다. 가로등의 불그스름한 빛이 인도를 비췄다.

빈손으로 갈 순 없어 편의점에 들렀다. 물티슈 묶음과 간식거리를 좀 사고 편의점을 나왔다. 편의점을 지난 지 몇 분 되지 않아 정 선생의 집이 나왔다.

정 선생의 집은 2층이었다. 그가 알려 준 호수를 찾아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왔다. 회색 후드 티에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검은색 반바지를 입고 있는 그는 앳되어 보였다.

“아무것도 안 가져오셔도 된다니까요.”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순 없죠.”

정 선생이 내 손에서 봉투를 받아 들고 고맙다며 인사했다.

“자취생 필수 아이템 물티슈네요. 역시 같은 자취생끼리는 통하는 게 있어.”

정 선생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요리를 하고 있었던 듯 노릇노릇한 냄새가 났다.

“앉아 계시겠어요? 금방 다 되는데.”

좌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방석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두 명이서 살아도 될 정도로 넓고 쾌적한 원룸은 옵션으로 주어진 가구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하나 눈에 띄는 건 장난감과 피규어, 햄버거를 먹으면 준다는 걸로 유명했던 인형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흰색의 4단 선반이었다. 왠지 딱 정 선생과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걸 보고 있는데 정 선생이 큰 계란말이와 과일이 담긴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 제가 저런 거 모으는 걸 좀 좋아해서요.”

그가 내가 사 온 간식거리를 놓고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왔다.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래도 계란말이는 자신 있어요.”

술잔에 소주와 맥주를 따르고 섞은 뒤 잔을 부딪쳤다.

“크…….”

정 선생이 인상을 찌푸리며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젓가락을 들고 계란말이 한 조각을 입에 넣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맛있네요.”

“제가 자취하면서 계란말이 하나는 정복했거든요.”

그가 씩 웃고선 자신이 만든 계란말이를 맛보고는 역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집에 오니까 긴장이 다 풀린다. 하하.”

정 선생이 팔을 뒤로 뻗어 바닥을 짚고서 고개를 젖혔다.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학교에 있을 때보다는 나아지긴 했지만, 평소 때에 비하면 훨씬 힘이 없어 보였다.

“일은 잘 처리됐어요?”

술을 목구멍 너머로 흘려 넘기며 가볍게 물었다.

“아…….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면, 그 애가 공부를 잘하는데 역사가 좀 약한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커닝 페이퍼를 만들어서 몰래 본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게 교무 부장님께 걸린 거고요.”

교무 부장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교무 부장이라면 깐깐하기로 소문난 중년의 선생이었다. 키가 작고 체구가 작은 그녀는 신경질적인 인상에 걸맞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엄격한 것은 물론이고 동료 교사의 옷차림을 지적한다든지, 담임이 앞에 있는데도 그 반 학생에게 핀잔을 준다든지 해서 학생들도, 교사들도 그리 좋아하는 선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칙에 충실하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은 충분히 장점으로 인정할 만했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시험지 갈가리 찢고 밖으로 내보내셨대요. 애들 다 보니까 창피하지, 쉬는 시간에 혼나느라 공부도 못 해, 걱정하느라 다음 시험은 다 망치고…….”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건 아이 쪽이었다. 어리다는 건 그렇다. 자신의 행동이 불러일으킬 결과에 대해 간과하고 결국엔 책임조차 지지 못할 거면서 일을 벌인다. 그것에 고통받는 건 자신뿐만이 아닌데도 말이다.

“연락받고 어머님께서 오셨는데 무릎이라도 꿇으실 기세시더라고요. 하하, 이것 참 난감해서. 저희 어머니 생각도 나고 말이에요.”

그나마 다행인 편이었다. 요즘은 제 아이는 잘못한 게 하나 없고 애를 잘 가르치지 못한 선생 잘못이라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더 불편한 건 아무래도 이쪽이겠지.

“고생했어요.”

잔을 내밀자 정 선생이 잔을 부딪쳤다. 영롱한 소리가 울렸다. 내가 한 모금을 마실 때 정 선생은 꿀꺽꿀꺽 술을 넘겨 잔을 비웠다.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다 끝난 일이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죠.”

정 선생이 애써 힘을 내려는 듯 웃어 보였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끙끙 앓아 봐야 나아질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내일은 주말인데 뭐하세요? 여자 친구? 아아, 없다고 하셨죠.”

“네.”

그가 과자를 집어 입에 넣으며 웃었다. 이번 웃음은 어쩐지 가벼운 느낌이었다.

“본가는 내일 갈 겁니까?”

“아뇨. 그냥 다음 주로 미루죠, 뭐. 마음 같아선 그냥 푹 쉬고 싶네요.”

정말 갈 생각이 없는 듯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저러다 취하겠는데. 그렇다고 말릴 생각은 없어 가만히 지켜보자니 그가 배시시 웃었다. 얼굴 하나 빨개지지 않고 취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경우가 사실 제일 위험하다. 잘 마시는 것 같아서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감당이 불가할 정도로 취해 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정 선생이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말이 느려지고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잦아지더니, 결국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주사 중에 가장 얌전한 게 있다면 자는 거겠지. 침대에서 베개를 가져와 바닥에 내려놓고 목을 가누지 못하는 정 선생을 조심스레 눕혔다. 상을 치우고 이불을 가져와 그의 몸에 덮어 주었다.

“으음…….”

작게 칭얼거리더니 색색 숨을 내쉰다. 이제 보니까 피부가 꼭 애들 같았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를 보고 있자니 긴 속눈썹도 눈에 띄었다. 멀끔하고 깨끗한 얼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여자들이 좋아할 스타일이다. 자고 있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불을 끄고 집을 나왔다. 어느새 하늘은 깜깜해져 있었다.

* * *

[어제 혼자 잠들었나 봐요....... ㅠㅠ 죄송해요. 그리고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쌤 짱!]

정오가 다 돼서 온 문자를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옷을 입고 나와 차에 올라타 답장을 보냈다. 아마 일어나자마자 문자를 보낸 것 같은데, 늦잠을 잔 모양이다. 게으름을 부릴 것 같진 않았는데 의외로 일찍 일어나는 타입은 아닌 듯했다.

자연스레 라디오를 틀었다. 주말 오후의 교통 정보를 들으며 신호를 기다렸다. 차가 조금 막힐 기세였다. 아무래도 시간을 잘못 잡은 모양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맑았다. 시험이 끝나니 꽃이 진 벚나무에서 푸릇한 잎이 돋아 있었다. 흠 없이 푸른 하늘과 몽글몽글한 구름, 따사로운 햇살 아래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를 보니 여전히 봄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은 이렇게 불쑥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떠오르곤 한다. 허리 아래로 꽃잎처럼 펼쳐진 원피스는 화려하지 않은 잔잔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학생들이 오가는 복도에서 마주쳐 모른 척 고개를 꾸벅이는데, 스쳐 지나가면서 손가락과 함께 사르르 퍼져 있는 치맛자락이 닿았다. 벚꽃 보러 가요. 돌아보자 그녀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머리가 아파 온다. 라디오로도 해결되지 않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인지, 사실은 떠올리고 싶었기에 떠오른 건지는 알 수 없다.

문득 정 선생이 생각났다. 그라도 옆에 앉아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게 방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 실소를 흘리며 라디오를 끄고 핸드폰에 있는 자연의 소리를 틀었다. 그날 이후로 꽤 자주 듣는 것이었다. 불쑥 나오는 다정한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을 끌어 올려 주곤 했다.

한 시간이면 될 거리를 차가 막혀 두 시간이 다 되어서 도착했다. 또 잔소리를 듣겠다. 귀찮아지겠다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렸다.

백화점 근처에 위치한 초밥집은 피크 타임을 넘겨서 그런지 한산한 편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상호가 손을 들었다.

“야, 인마. 시간이 몇 시야?”

“미안. 차가 막혀서.”

“새끼가. 이거 네가 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히죽 웃는다. 아무래도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돈을 아끼는 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 아무 말 없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시험은 다 끝났냐?”

“어.”

“이야, 좋겠다.”

“좋긴. 곧 수학여행 갈 텐데 피곤하기만 하지.”

“어디로 가는데?”

잔에 상호가 미리 따라 놓았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마른 입술을 적셔 주었다.

“동해. 설악산이랑 강릉이랑, 뭐 그렇게 돌 거야.”

“좋네. 나 때는 초등학교 때 갔던 경주 또 갔던 것 같은데.”

“요즘은 세 개 정도 코스 주고 설문 조사 해. 경주권, 부여권이 경쟁 후보였는데 아무래도 애들은 싫은 모양이지.”

“싫지, 야. 딱 봐도 역사 공부 하러 갈 것같이 생겼는데. 뭐 그래도 강원도가 더 가까워서 괜찮겠네.”

“응.”

모서리에 벚꽃이 그려진 검은 접시에 초밥이 나왔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며 상호가 서둘러 젓가락을 들었다. 통통한 연어 초밥을 간장에 찍어 먹었다. 일본풍으로 잘 꾸민 인테리어가 허투루 꾸민 건 아닌 듯 맛이 있었다.

“야, 근데 이게 얼마 만이냐. 얼굴 보기 진짜 힘들어, 너.”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그저 웃었다. 지연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아마 두 번째가 아닐까. 지연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싫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누군가한테 기대고,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가 떠났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고, 그녀가 내 지인들로부터 ‘나쁜 년’이라고 불리는 게 싫었다. 한때 내가 정말 사랑했던, 혹은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불리는 게 싫었고, 그녀가 ‘나쁜 년’이라고 불림으로써 그녀가 날 배신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게 싫었다.

“학교는 어때. 참한 여선생님 없냐?”

참한 여선생을 묻는데 문득 왜 정 선생의 얼굴이 떠오르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동료 선생을 만났다가 크게 데었는데. 물론 일반화를 할 순 없다 해도 새로운 인연을 권하는 상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너는. 이제 신혼도 슬슬 지났는데, 어때?”

“우린 뭐 매일 신혼이지. 이번에 애기 맡겨 놓고 여행이나 가려고.”

“월차 쓰게?”

“월급쟁이가 월차는 무슨. 주말에 가게. 애 밸 동안 고생해서 어디 좋은 데 가지도 못 했는데.”

3년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해 허니문 베이비를 가진 상호네는 여전히 좋고 풋풋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지연이가 그렇게 되지만 않았더라면 나 또한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아니, 오히려 불행했으려나.

초밥을 먹고 나와서 백화점으로 향했다. 얼굴도 볼 겸 여행지에 가서 아내에게 줄 선물을 같이 골라 달라는 게 상호의 용건이었다. 차를 따로따로 가지고 왔기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올 때는 주차 공간이 어느 정도 있었는데 자신이 올 땐 주차 공간이 없었다며 툴툴거리더니, 꽤 먼 곳에 차를 세워 뒀던 모양이다. 주차를 하고 입구 앞에 꽤 오래 서 있었는데도 상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툭툭 건드리다 고개를 들었다.

“어……?”

고개를 들자 마주친 건 정 선생이었다. 회색 셔츠에 슬림 피트의 검은 면바지를 입은 그는 편해 보이면서도 멋 부린 것 같았다. 그의 옆에는 캐주얼한 정장 차림의 키가 크고 멀쑥하게 생긴 남자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여기서 다 만나네요.”

“그러게요.”

“약속 있으세요?”

“예.”

“아, 그러시구나. ……그럼 월요일에 봬요.”

“네. 정 선생님도.”

지나치는 정 선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분 탓인가. 눈이 마주치고 나서 인사하는 정 선생의 모습이 어쩐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쳐서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정 선생이 당황할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문득 정 선생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멀쑥하고 깔끔한 인상,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정 선생. 둘의 분위기.

음…….

어쩐지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둘의 사이가 연인 같다는. 동성애자를 알아보는 눈이라든가 그런 게 있는 게 아닌데도 어쩐지 정 선생이 그쪽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왜지. 정말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아니겠지. 스스로의 생각에 고개를 젓는데, 저 멀리 상호가 오는 것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