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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이 오지 않는 겨울 (1/15)

1. 봄이 오지 않는 겨울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언가가 남는다고 했다. 그건 사람이거나,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닌 감정이거나, 기억이거나, 추억이거나, 상처 같은 것들일 테다. 그것들은 보통 누군가의 인생에 있어 거름이 될 것이다. 자라기 위한 자양분, 걸어 나가기 위한 용기, 발을 굳게 디디고 설 수 있는 기반.

내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나 생각해 보면……. 오직 나만이 남았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 폐허가 된 기반 위에 위태롭게 서서 품에는 아무것도 안지 못한 나.

내가 열다섯이었던 겨울, 우리 집은 부도가 났다. 아버지의 회사는 인테리어 전문 업체였으나 계속되는 적자로 인한 하락세 끝에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아버지의 꿈과 같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셨고, 집에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빨간딱지가 붙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다. 부모님의 싸움의 여파는 내게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급식비를 내주지 않으셔서 물로 배를 채워야 했고, 학교 같은 건 때려치우고 취업을 해서 집안에 도움이 되라며 닦달을 하셨고, 예민해진 어머니는 내게 손찌검까지 하셨다. 결국 내가 열여섯이 되던 해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졌다.

내게는 형이 한 명 있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은 활기차고 언제나 자신만만했지만 건방지고 영악한 면이 있었다. 형과 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나는 형의 나쁜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고, 형은 툭하면 나를 때리곤 했다. 두 살 많은 형의 힘을 나는 이길 수 없었고, 얻어맞을 때마다 부모님께 달려갔지만 늘 듣던 한마디는 “네가 형 말을 안 들으니까 그렇지.”였다.

그래, 부모님은 나보다 형을 더 좋아했다. 좋은 옷도, 음식도, 핸드폰도 다 형 것이었다. 형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는 누리지 못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형보다 공부를 더 잘하고, 형보다 부모님 말씀을 더 잘 듣고, 형보다 더 착한데. 아마 형을 낳으시면서 자식에게 줄 사랑을 형에게 남김없이 쏟아 버려 내게 줄 사랑이 모자랐던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부모님의 눈높이에서 나는 한없이 모자랐던 것이겠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니, 사실 나는 반쪽짜리의 부족하고 덜떨어진 놈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였을까. 어머니는 형을 데려가셨다. 아버지 또한 형을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집안을 이렇게 만든 책임으로 어머니에게서 형을 데려오지 못하셨다. 그리고 나 또한 데려가지 않으셨다.

눈이 녹고 새싹이 돋고 움츠려 있던 생명들이 서서히 몸을 펴는 봄이 왔지만, 나는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나 혼자 남은 집은 너무 쓸쓸했고, 외로웠고, 추웠다. 그 뒤로도 부모님은 나를 찾지 않았다. 불면증이 찾아왔고, 세상에 오롯이 나 혼자 남은 듯한 새벽에는 울음을 터뜨렸고, 끝내는 체념했다.

돈을 벌기 위해 학교가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했고, 새벽 2시에 집으로 돌아와 학교에 가기 위해 7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4년 내내 반복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논다거나 방학이면 여행을 간다는 선택지는 내게 없었다. 여유라는 것을 잃어버렸고, 몇 번이고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용기라는 것도 없어 그러지도 못했다.

사춘기 대신 나는 겨울을 앓았다. 내 청춘은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이었고, 나의 세계는 한 해 내내 겨울인 협소한 왕국이었다.

시간은 훌쩍 흘렀고 나는 어떤 준비도 없이 성인이 되어 버렸다. 미성년자일 때의 모든 제약이 해제되었으나 딱히 어떤 감흥도 없었다. 스물의 새로움과 들뜸과 특별함은 내 몫이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했고, 나름대로 원하던 과에 들어왔지만 그것은 그간 열심히 했던 노력에 대한 보상이자 성공이라는 이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새내기라는 타이틀을 달고도 모든 것에 무감했던 내게 다가온 여자는 봄의 한 조각을 맛보게 해 줬다. 나보다 두 살이 많지만 학년은 하나가 더 높았던 선배는 웃는 게 예뻤고, 다정했고, 따뜻했다. 선배는 햇빛 같았다. 보고 있으면 눈이 부셨고, 따뜻했고, 손안에 잡고 싶었다. 항상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곤조곤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선배와 나는 모든 것을 처음 해 봤다. 그렇게 1년을 사귀고, 나는 입대를 했다.

군에서 반년을 보내고 휴가를 나왔을 때 선배는 내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팝송이 흘러나오고 은은한 조명이 테이블 위를 밝히고 있는 카페 안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말하던 선배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너무 외로웠고, 새 사람이 생겼지만 너 또한 놓칠 수 없고,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던 예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내 따귀를 때리고 목을 졸랐다.

나는 울면서 빌었다. 제발 나만 봐 달라고, 내가 더 잘해 줄 테니 그 사람을 버리고 와 달라고. 하지만 선배는 그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나보다 훨씬 듬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참았다. 선배에게는 그가 필요했지만 나도 놓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내가 더 잘하면 선배는 오롯이 나만 찾아 주리라.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견뎠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온 건 이별 통보였다. 나는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며 갖은 욕설을 내뱉었고 선배는 그런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결국 선배는 나를 버렸다. 끝은 진흙탕같이 더러웠다. 내가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나를 진득하게 붙잡았을 뿐이었다.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고, 영원히 선배를 놓지 못할 것 같았던 내게도 새 사랑은 찾아왔다. 졸업 전 스터디에서 만난 그녀는 활달한 성격에 웃음이 많았고 나와 코드가 맞는 여자였다.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깨달을 새도 없이 그녀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고 그만큼 남자도 많았다. 그녀는 내게 호감을 보였고, 연락도 종종 하며 데이트라고 할 만한 것도 하곤 했지만, 내게 마음이란 걸 온전히 내주지는 않았다. 애인처럼 나를 구속하다가도 자신을 구속하려 하면 신경질을 냈고, 다 내줄 것처럼 굴다가도 조금 다가가면 없던 일처럼 굴었다. 먼저 연락을 해도 답도 없다가 체념할 즈음엔 연락이 왔다.

친구들은 나를 호구라고 불렀지만, 그녀가 가끔 가다 보여 주는 환한 웃음은 내겐 단비였고 다정한 눈빛은 오아시스였다. 어장 속의 물고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시험을 보고, 졸업을 하고 합격을 해서 교단에 설 때까지 나는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연락이 먼저 왔다.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녔기에 대출금은 없었고,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면서 저축한 돈이 있을 때였다. 그중 필요한 데 쓰고 남는 돈은 조금이지만 할머니와 아버지께 드렸고, 할 수 있는 최대한 할머니와 아버지를 알뜰살뜰 보살폈다.

어머니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간 형 또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형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형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을 하고 있으며 아직 학교에 다니는 중이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는 돈으로는 학비를 메꿀 수 없으니 그에 조금 보태 주면 안 되느냐는 용건이었다. 실망감을 감추고 돈을 보냈다. 아버지의 기뻐하는 목소리에 쓴웃음을 흘리면서.

처음 맞는 직장 생활과 교사라는 직종에서 오는 스트레스, 그리고 가족들. 그녀의 손안에서 놀아나기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녀에게서 결국 마음이 떨어져 갈 무렵, 한 동료 교사를 만났다. 지연이는 평생의 꿈이 교사였던 만큼 학생들을 잘 보살폈고 어딜 가나 환영받는 존재였다. 장난기가 많았고, 무뚝뚝한 내게 먼저 다가와 살갑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고, 매사에 상냥하고 다정했다.

지연이에게 빠지기에 나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지쳐 있었기에 그녀는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나와 그녀는 4년간 연애를 했다. 살갑진 않았지만 나를 키워 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내 옆을 묵묵히 지켜 주었다. 아버지께 또다시 연락이 와서 형이 사업을 준비한다며 대출을 해서라도 돈을 꾸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우울함과 박탈감에서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것도 그녀였다. 당연하게도 그녀와 나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결혼을 두 달 남기고 그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동승자는 그녀와 최근부터 만남을 가져 왔던 그녀의 전 애인이라고 했다. 밀려오는 슬픔을 채 느낄 새도 없이 찾아온 배신감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 세상이 내게 가시를 세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나를 베고, 찌르고, 피를 보아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온 세상이 적이었다. 밤만 되면 그들은 내 앞에 나타나 목을 졸랐다. 차라리 죽을까, 싶었지만 죽을 용기도 내지 못한 채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내 청춘은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이었다. 눈이 내리다 못해 바닥을 꽁꽁 얼리고 모든 살아나는 생명들의 숨을 죽였다. 내가 살아온 서른두 해는 햇빛이 비치지 않는 밤이었고, 내가 사랑했던 자리에는 오직 나만이 남아 있었다. 모두가 나를 지나쳤다.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서.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생명력이었다.

* * *

3월은 새로운 계절과 학기를 알리며 기대감에 들뜨게 하는 달이었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경계인 만큼 여전히 추웠다. 따뜻하게 데워졌던 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금세 피부에 달라붙었다. 하얀 입김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복도에서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교무실로 들어섰다. 동료 선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학기 초는 교사들에게 가장 바쁜 달이었다. 오늘은 교문 지도를 하지 않는 날이라 다행이었다. 바람이 꽤나 많이 불었기 때문이다.

새 학기를 맞아 학부모에게 전달할 가정 통신문을 작성해야 했다.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인사를 첫 문장에 썼다. 그 이후로 문장은 더 나아가지 못했고 커서는 한자리에서 깜빡였다. 담임을 맡으면 매년 쓰는 가정 통신문이지만, 꼼꼼히 읽는 학부모가 꽤 많다는 걸 알고 있기에 건성으로 쓸 순 없었다. 담임인 내 소개와 앞으로의 학급 운영 계획을 짧게 작성하고 끝으로 연락처를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문서 서식을 좀 손볼 때였다.

똑똑-.

보통은 교무실의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게 요즘 아이들이었지만 저렇게 노크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교무실에 들어올 때 먼저 노크를 하라고 말을 해 두었는데, 물론 지키지 않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들려오는 건 아이들의 앳된 목소리가 아닌 성인의 목소리였다. 의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학생이 아니라 남자였다. 눈썹께에서 어른거리는 다갈색의 머리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 다음은 흰 피부, 시원한 눈매. 전체적으로 순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아, 어서 와요.”

학년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반겼다. 학년 부장을 따라 일어난 심해연 선생의 얼굴을 보니 남자를 아는 듯한 눈치였다. 그제야 남자가 누군지 감이 왔다. 곧 휴직을 할 심 선생을 대신할 기간제 교사였다. 얼굴만 봤을 땐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심 선생의 자리를 대신해 줄 정진 선생님입니다.”

“안녕하세요, 정진입니다. 새 학기에 이렇게 새로운 분들을 만나 뵙게 돼서 설레네요. 처음이라 많이 부족할 테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부드러운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깨끗해 보이는 인상이다. 게다가 넉살도 좋아 보이고.

심해연 선생은 오랜 고생 끝에 아이를 가졌다. 첫 아이였고, 노산인지라 그녀는 임신 사실을 안 뒤 얼마 되지 않아 휴직서를 제출했다. 2학년 2반 담임이자 국어 선생인 심해연 선생의 빈자리를 저 선생이 채우게 되는 것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빨리 빈자리를 메꿔야 했는데, 다행히도 후임을 일찍 찾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인수인계를 하려면 꽤 바쁠 것이었다. 같은 부서나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바쁜 새 학기에 어리뜩한 신입 교사를 케어해 주는 것도 일이었기 때문이다.

* * *

학교라는 곳은 건물 자체가 금연 구역이기에 교사들이 흡연을 하려면 학교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눈을 피할 수 있고, 홀로 떨어질 수 있는 곳이라면 교사들끼리는 묵인해 주는 것이 현실이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교사 휴게실이나 교사 전용 화장실이 암묵적으로 흡연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학교는 그런 게 허락되지 않아 따로 옥상 열쇠를 얻었다.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자체에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줄에 달려 통행을 막았지만, 교사에게 그것이 해당할 리 없었다.

이제 4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공기는 더 따뜻해졌고 햇볕은 더 쨍쨍해졌다. 중식을 먹고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이들은 힘들지도 않은지, 쉬지도 않고 열심히 공을 차 대고 있었다.

교단에 선 지 7년, 완벽 적응이라고 할 건 못 되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수월하게 학생들을 대하고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었다. 훌륭하진 못하더라도 좋은 교사가 되자 마음먹고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던 신입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현실에 찌든 월급쟁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매캐한 연기가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뻗어 나갔다. 지연이가 죽은 지도 벌써 세 달이 지났다.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여전히 그 악몽에 갇힌 듯 아닌 듯했다.

일을 하다 보면 나의 폐허를 잊게 된다. 그러나 학교를 벗어나면 혼자라는 지독한 현실이 나를 에워싸고 짓누른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내게 좋은 도피처가 된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장례식장을 찾을 텐데,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로 그런 짓은 하지 말자고 나를 다독인다. 그러면 최소한 정년까진 살게 될 텐데, 지겹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와 나동그라지는 연기와 함께 생각을 빼냈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옥상이라곤 해도 금연 구역이라 당당한 처지는 못 됐다. 혹시 학생이라도 들어온 거라면 조금 곤란해지겠지만, 출입 금지인 곳에 출입한 저나 금연 구역에서 흡연한 나나 도토리 키 재기겠지. 하지만 이런 상황을 묵인해 주지 않는 동료 교사라면 조금 난감해질 테다.

그리고 눈앞의 사람은 나를 난감하게 할지, 아닐지 아직 구분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 담배 피우시면 안 되는데.”

아무래도 난감하게 하려나.

그러나 웃는 표정을 보아하니 아닐 수도. 학교에 들어온 지 이제 막 한 달이 넘어가는 정 선생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 이거 제가 김 선생님 약점 하나 잡은 거예요?”

“약점까진 아닐 텐데요.”

교직에서 잘릴 일 정도는 돼야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시큰둥하게 답하자 그가 아하하, 하고 웃었다. 웃는 소리가 유쾌했지만 그다지 유쾌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친분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살갑게 구는 건 그리 편하지 않았다. 거기다 그 내용이 유쾌하지 않은 내용이라면 더더욱.

“식후 땡. 그거 하시는 거예요, 지금?”

“네.”

“아, 오늘 돈가스 정말 맛있지 않았어요? 여기 와서 처음 먹어 보는 돈가슨데, 여태까지 먹어 본 돈가스 중 최고더라고요.”

“아. 그래요.”

급식 메뉴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들 사이에서도 이슈였다. 그럭저럭 딱 학교 급식 맛을 한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 학교의 급식이 그의 입맛에는 꽤 맞는 모양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아, 그야 김 선생님 스토킹 좀 했죠.”

웃음기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정 선생이 농담을 던졌다.

“담배 피우러 왔습니까?”

농담을 받아 주지 않고 묻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말이 장난처럼 들리세요?”

“장난이 아니면 뭐예요.”

“하하, 백 프로 진심은 아니고 엇비슷해요. 저번에 점심 먹고 김 선생님 놀라게 하려고 뒤에서 몰래 따라가는데 옥상 올라가시더라고요.”

애도 아니고 놀라게 하려고 따라온다는 건 뭔지. 미간을 좁히며 오른손에 든 담배를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뒤에 선 채로 조금 떨어져 있던 정 선생이 미소 지은 채로 오른편에 섰다.

“이거 독한 거 아니에요?”

정 선생이 담뱃갑을 가리키며 물었다.

“별로 안 독합니다.”

“아아.”

목소리를 흘리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1반 애들은 좀 어떤가요? 말 잘 듣나요?”

“그냥 그렇죠. 잘 듣는 애들도 있고, 안 듣는 애들도 있고.”

“우리 반 애들은 어찌나 활기찬지……. 가끔은 좀 벅차더라고요. 저번에는 같이 얘기하는데, 어떤 애가 ‘선생님, 기간제 교사라면서요! 그럼 잘못하면 잘리겠네요?’ 하는 거예요. 윽, 상처…….”

정 선생이 가슴 위에 양손을 올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상처받았다고 말은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전히 유쾌한 얼굴이었다.

“속상했겠네요.”

“음, 속상했다기보다는 ‘요 녀석들 그런 것도 알고 있어?’ 이런 마음? 악의는 없었으니까요. 요즘 애들 너무 당돌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웃는 그의 얼굴에는 아이들이 귀여워 죽겠다고 쓰여 있었다.

“경력 좀 있는 교사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중2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중2병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고요. 더 심한 말 나와도 상처받지 마세요.”

사실 아이들이 정 선생이 기간제 교사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아마 동료 교사가 그 말을 흘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솔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입에 올릴 순 없어 그저 저렇게 말했다. 내 말을 듣고 그가 고개를 약간 젖히며 입을 벌려 크게 웃었다.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접혔다. 선명하게 울리는 유쾌한 웃음이었다.

“김 선생님은 몇 년 차세요?”

“올해로 7년입니다.”

“우와. 생각보다 오래 하셨네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서른둘이요.”

“헐, 진짜요? 또래일 것 같았는데, 동안이시네요.”

‘헐’이라는 감탄사를 애들 아닌 성인한테서 듣는 건 오랜만인 것 같다. 문득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동안은 정 선생보고 하는 말이죠.”

“저요? 저 몇 살같이 보이는데요?”

나이를 물어보면 종종 듣던 되물음이었다. 무심코 입을 떼려다 말았다. 그러나 해서 기분 나쁠 말도 아니고,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처음 봤을 땐 대학생인 줄 알았어요.”

“정말요?”

정 선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어깨를 좁히며 큭큭 웃었다. 햇빛을 받아 환한 얼굴이, 웃는 모습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나이를 알았어도 아마 대학생 같다고 느꼈을 거다. 싱그러운 청춘 같았으니까.

“그래서 몇 살입니까?”

“올해 스물여덟이에요.”

“아. 다른 일 하다 오셨다고 들었는데.”

내 말에 그가 나를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저번에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못 들으셨나 봐요.”

아. 못 들었다기보다는 관심이 없었다는 쪽에 가까울 거다. 아마 선생들끼리 다 같이 밥을 먹거나 했을 때 말했겠지. 워낙 많은 말들이 오가는 자리니 집중을 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었다. 할 말이 없어서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기자 일 하다가 왔어요.”

“기자요?”

의외였다. 기자라 하면 조금 거칠고 힘든 직업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어서 그랬다. 얼굴만 보면 유치원 선생이 딱 맞는데. 하긴 뭐, 기자도 속한 부서가 세부적으로 나뉠뿐더러, 교사에 대한 환상과 편견을 지극히 들어 온 내가 직업에 대해 고정 관념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긴 했다. 더군다나 얼굴을 보고 어떠하다고 단정 짓는 것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

“네. 기자랑 교사가 꿈이었는데, 기자 한번 해 보니까 재미는 있는데 딱히 적성도 아닌 것 같고. 교사가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진로 변경했죠.”

“그럼 학교를 다시 다닌 겁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나이가 맞지 않았다. 역시나 정 선생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국교가 주전, 신방이 복전이었어요.”

“둘 다 복전 하기 쉬운 과는 아닌데. 힘들었겠네요.”

“네. 정말 술과 밤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정 선생이 우는 소리를 냈다.

“신문 기자였습니까?”

“네. 하나일보 정치부요.”

하나일보면 우리나라 메이저 신문사였다. 거기다 정치부라니. 메이저 신문사의 기자 자리를 내놓고 다시 교사에 도전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정치관이 안 맞더라고요. 특종 하나를 잡았는데 이거 내 주지도 않고, 더러워서 때려치웠죠.”

그는 전혀 미련 없다는 얼굴로 키들댔다. 메이저 신문사 기자에서 기간제 교사라.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하나도 아쉽지 않다는 듯, 후회 없다는 듯 웃는 얼굴이 어쩐지 부러웠다.

“아, 근데 임용 정말 어렵더라고요. 물론 공부를 안 하고 홧김에 바로 본 거지만요.”

공부를 안 했으니까 어려운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임용 공부를 하다 들어온 타 후보들을 제치고 공채에 합격한 거라면 능력은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소리였다. 어느새 짧게 타들어 간 담배에서 재가 투둑, 툭 떨어지고 있었다.

“근데 김 선생님은, 선생님이 꿈이셨어요?”

“꿈…… 이라기보다는 꿈에 가까웠죠.”

“아, 그렇구나. 사실 선생님 하실 상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무슨 상인데요?”

“모델 할 상이요!”

할 말을 잃고 그만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불씨가 남은 담배를 난간에 지져 껐다.

“모델 하시면 인기 진짜 많으실 것 같아요.”

엄지를 들어 올리며 해맑게 말하는 폼이 진심 같아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휴지 뭉치를 꺼내 꽁초를 묻고 입을 열었다.

“그만 가죠. 점심시간 끝나 가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심시간 끝나기 10분 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하하! 지금 쑥스러워 하시는 거죠. 그쵸? 뒤에서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재잘댔으나 애써 무시하고 옥상을 나왔다. 교무실에 들어서고 나니 정 선생과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생각보다 가볍지만은 않은 대화였다는 걸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 휘말렸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건 딱히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밀린 업무를 마무리하니 시간은 7시 반에 가까워져 있었다. 오늘 할 일을 미루면 내일은 더 늦게 퇴근해야 한단 걸 알기에 추가 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퇴근을 일찍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업 끝나면 교사도 퇴근하고 방학을 하면 교사도 무한히 방학을 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공무원은 무조건 6시 칼퇴근하고 은행원은 은행 문 닫으면 바로 퇴근하는 줄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편한 사고방식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제 시험 기간이니 집에 가서도 시험 문제를 만들어야 했다. 퇴근이 퇴근이 아닌 셈이다.

교무실에는 나까지 넷이 남아 있었다. 가방을 정리한 후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김 선생님!”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 선생이었다. 뒤를 돌아보며 멈춰 서자 그가 후다닥 달려왔다.

“퇴근하세요? 같이 하죠.”

하교 같이 하는 학생들도 아니고 퇴근을 같이 하자니. 딱히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자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겨서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어디 사세요?”

“강천동 삽니다.”

“어, 강천동 어디요?”

왠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종빌이요.”

“와, 저 거기 알아요. 저 신완빌 사는데.”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신완빌이면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알고 보니 이웃이었던 것이다. 별로 유쾌한 상황은 아닌지라 입을 다물었다.

학교 근처에도 살 곳은 많았지만 일부러 차로 10여 분, 버스로는 20분 가까이 걸리는 곳을 선택한 건 학교 근처에서 살면 학생들과 학부모를 많이 만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학교 근처가 편하다며 동료 교사도 많이 살았기에 피한 것이었는데 같은 동네, 그것도 가까운 곳에 정 선생이 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야, 이거 이웃 발견한 기념으로 술 한잔해요.”

“괜찮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콜?”

확실치 않은 미래에 대한 제안까지 거절할 수는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한 대답에도 기죽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는 걸 보니 거절한 게 민망하지도, 미안하지도 않았다. 원체 성격이 그런 것인지 배려를 해 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그럼 오늘 저 태워 주시는 거예요?”

정 선생이 신난다는 듯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기대가 잔뜩 담긴, 부드럽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고맙다고 말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가 바로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창문 열어도 돼요?”

“네.”

말이 끝나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는 조금 선선한 편이었다. 봄밤의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로 살랑살랑 들어왔다. 들어오는 바람에 정 선생의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자취하세요?”

“예.”

“자취하는 거 안 힘드세요? 전 8년 차인데도 1년 차 같네요.”

“전 별로.”

사실상 열여섯부터 자취를 한 거나 다름없었다. 할머니와 같이 살긴 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집에서 밥을 먹은 기억도 거의 없고, 집안일도 내가 알아서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겨운 건 사실이었다.

“봄바람 좋네요.”

살랑살랑 들어오는 바람이 좋아서 중얼거렸다. 혼자 있으면 창문을 여는 일이 잘 없다. 날 응시하는 시선이 길게 머무르는 것 같아 빨간불일 때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좋네요, 진짜.”

신호가 바뀌고 출발했다. 간간이 지나치는 차 소리를 제외하면 차 안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무슨 말을 하기가 애매한 분위기였다. 그가 말을 더 하지 않아서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다시 보니 정말 내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오늘 제가 멋대로 말씀드린 건데, 태워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꾸벅였다. 내가 출발할 때까지 들어가지 않으려는 듯 입구를 지키며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출발했다.

집 안에는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어두운 방 안으로 창밖 붉은 가로등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불을 켜고 옷을 갈아입은 뒤, 샤워를 하고 나왔다. 노트북을 켜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한글 창을 켜고 만들다 만 문제를 보았다. 문제 만들기는 여전히 귀찮았다. 그래도 시험 기간이면 상대적으로 한가해져서 문제만 빨리 만들고 확정 지으면 마음이 편해질 테다. 껌뻑거리는 커서를 지켜보다 눈을 무겁게 짓누르는 눈꺼풀을 문질렀다.

텅 빈 방 안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약간의 소음이라도 필요할 것 같아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켰다. 9시 뉴스에서 우울한 소식을 들려주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니 인기 없는 예능 하나가 나왔다. 채널을 거기에 고정시켜 놓고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좌식 책상 밑에 펼쳐 놓은 교과서를 보고 있자니 문제가 떠올랐다. 문제 하나를 작성하고 다시 손을 놓았다. 예능에서 나오는 방청객들의 웃음이 귀에 들려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무엇 때문에 웃는지는 알 수 없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갑자기 나다가, 이내 연예인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춰 두고 눌러두고 막아 왔던 상념들이 하나둘씩 글자 대신 빈 여백을 채우기 시작했다. 숨을 가다듬었다. 새벽도 아닌데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하는 현실들이 목을 졸랐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정 선생과 술이라도 한잔하고 들어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오늘은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눈을 뜨고 키보드를 억지로 두드렸다. 아무렇게나 틀어 놓은 예능 프로가 어느새 끝나 있었다.

* * *

새벽까지 문제를 마무리 짓느라 잠을 별로 자지 못했다. 어차피 불면증 때문에 제대로 자지 못했겠지만 핑계라도 대는 게 나았다. 눈을 부릅뜨며 앞을 보는데, 버스 정류장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정 선생인 듯했다. 여태까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웃인 걸 알고 나니 딱 보이나 싶었다.

무시하고 액셀을 밟았다.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한 번 태워 주면 그게 한 번이 아니게 될 수 있었다. 학교 앞 정류장까지 가는 버스는 배차 시간이 15분 내외로 좀 긴 편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남은 터라 지금 버스를 타도 충분할 것이었다.

“하아…….”

그런데 왜인지 자꾸 눈에 밟혔다. 학교에 가서도 신경이 쓰일 것 같아 결국 차를 돌렸다. 버스 정류장엔 아직도 그가 서 있었다. 차를 세우자 그가 날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타요.”

“안녕하세요.”

그가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며 조수석에 탔다.

“저 못 보고 그냥 가시는 줄 알았는데, 보셨나 봐요.”

“내 차 봤습니까?”

“네. 딱 보이던데요.”

“그런데 그냥 보냈어요?”

“택시도 아닌데 그냥 보내야죠.”

정 선생이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넉살 좋게 구는 걸로 봐서는 전화라도 해서 태워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그냥 지나친 걸 그가 알았다고 하니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근데 일찍 나오시네요.”

“교문 지도 해야 하니까요.”

“아, 맞다. 학생부시지.”

교육청 권장으로 등교 시간이 전체적으로 늦춰지는 분위기였다. 8시 30분으로 연기된 등교 시간에 교문 지도는 7시 50분부터 시작하면 됐다. 학생부 교사의 출근 시간도 좀 늦춰져서 좋은 일이긴 했다. 조회 시간이 줄어들긴 했지만 수업 시간이 늦춰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괜찮았다. 대부분 교사들은 8시나 8시 30분쯤에 출근을 했다. 정 선생이 지금 나온 것은 조금 이른 축에 속하는 것이었다.

“정 선생님은 왜 빨리 나오셨습니까.”

“오늘은 일찍 눈이 떠져서요. 집에 있으면 뭐하나 싶어서 빨리 나왔죠. 담임 업무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네. 출근할 때 라디오 안 들으세요?”

“듣습니다.”

“아, 저 타서 끄신 거예요?”

“아니, 괜찮아요.”

정적이 도는 게 싫어 평소에는 라디오든 음악이든 틀어 놓는다. 그러나 옆에 사람이 앉아 있을 때 그런 걸 틀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은 종일 쨍쨍하대요.”

“예?”

“라디오 대신이요.”

정 선생이 민망한지 짧게 웃었다. 창문 너머 흘긋 올려다본 하늘은 맑았다. 월초에는 봄비가 몇 번 내렸지만 그 이후로는 내내 쾌청한 날씨였다.

“오늘 뉴스는 있습니까?”

“아. 정치 분야에서는 남성 공무원 육아 휴직을 기존 1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됐다고 해요. 아빠들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다녔던 학교의 교무 부장이 생각났다. 늦둥이를 본 그는 아내의 육아 휴직이 끝나면 자신이 육아 휴직을 낼 거라고 했는데, 그때 3년으로 연장되었다면 그는 당장 3년 휴직을 했을 것이다.

“경제는……. HC가 비자금 조성 혐의로 압수 수색을 당했고요. 스포츠는 딱히 말할 만한 게 없었네요. 연예는 가수 K랑 배우 임지민의 핑크빛 열애설이 터졌답니다. 더 알고 싶은 부분 있으세요?”

“아뇨.”

“그럼 이상, 정진 기자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김 선생님 웃을 때 보조개 들어가시네요?”

“그런가요.”

“이래서 보조개 있는 사람들은 웃으면서 다녀야 해요. 얼마나 예뻐.”

“아침에 뉴스 보고 오는 겁니까?”

낯간지러운 말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네. 학교 갈 준비 하고, 아침 먹으면서 봐요. 전 아침에 보는 뉴스가 제일 재미있더라고요.”

“아침도 먹어요?”

“전 아침 안 먹으면 하루의 시작이 우울한 사람이라. 밥은 못 해 먹어도 시리얼이나 빵은 먹어요. 시간 많으면 전날 미리 해 둔 밥 먹고.”

자취생에게 아침은 사치였다.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이 아침을 챙겨 주셔서 꼭 먹고 오던 놈이 있었지만, 자취를 한 이후로는 한 번도 챙겨 먹은 적이 없다고 했다. 정 선생은 나름대로 부지런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김 선생님은 아침 안 드시고 오세요?”

“네.”

“교문 지도까지 하시려면 든든하게 드시고 오셔야 할 텐데.”

“아무래도 귀찮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아침을 챙겨 먹는 편이 아니었다.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으니 말이다. 가끔 수학여행이나 1박 이상의 연수 같은 단체 생활을 제외하면 아침을 먹는 일은 아예 없었다.

“시험 문제는 다 내셨어요? 얼핏 들어 보니까 수학은 진도가 좀 빨리 나간다던데.”

“전 다 냈습니다. 이제 최종 협의 들어가야죠.”

“와, 좋으시겠다. 저는 처음 내 보는 시험 문제라서,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처음엔 다 그래요. 그래도 이경하 선생님이 잘 도와주고 계실 텐데요.”

“네. 경하 쌤이 저한테 도움 많이 주시죠. 한참 부족할 텐데 잘 이끌어 주시고.”

“그 선생님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스타일이니까, 정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네. 김 선생님한테 이런 말 들으니까 왠지 힘이 불끈 나네요.”

나한테 이런 말을 듣는 게 어떻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학교가 눈앞에 보였다. 교문을 통과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렸다.

“그럼 저는 교문 지도 하러.”

“아!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별거 아니지만. 그가 멋쩍게 웃으며 가방에서 사탕 두 알을 꺼냈다. 애들한테 가끔 주곤 했던 청포도 맛 사탕이었다.

“아침도 못 드셨는데, 당이라도 섭취해서 힘내셔야죠. 파이팅!”

그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웃음을 터뜨리고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 두 알을 내려다보았다. 한 알은 주머니에 넣고 한 알은 봉지를 뜯어 입에 넣었다. 평소에 단건 별로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이 사탕은 알이 너무 큰지라 먹어 보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교문으로 향했다. 벌써 교문을 통과하는 학생이 눈에 보였다.

교문 지도를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와 교무 수첩과 교과서를 챙겼다. 오늘 1교시는 우리 반 수업이라 조회와 함께 수업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교실로 향하는데 2반 교실에서 정 선생이 나왔다. 조회를 끝내고 막 나오는 참인 모양이었다.

“고생하셨어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를 지나쳤다. 뒤에서 “쌤, 쌤!” 하며 여학생들이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인기가 좋은 모양이다. 좋을 수밖에 없지. 성격 좋은 교사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좋아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통할 호감 형의 얼굴이니.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교실 밖에까지 들렸던 시끄러운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교문 지도가 있는 날이면 조회가 늦는 걸 알기에 지각하는 녀석들이 종종 있었다. 교실을 둘러보았지만 오늘은 지각생이 없었다.

“좋은 아침.”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우렁차고 해맑은 인사에 대답을 해 주고선 교무 수첩을 열었다.

“오늘 수학여행 참가 동의서 마지막으로 받는다고 했다. 다들 가져왔지?”

구석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꼭 끝까지 안 가져오는 놈들이 한 명씩 있었다. 뭘 내라고 하면 정해진 기간 내에 내는 녀석들은 60퍼센트가 될까말까였다.

“김종하. 안 가져왔어?”

“네, 죄송해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눈치를 보는 녀석은 상습범이었다. 꾸지람을 하는 것도 지쳐 콧대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 선생님이 따로 연락할 테니까 앞으로 또 이러면 그땐 더 안 받아 준다. 알았어?”

“네에…….”

수학여행에 가려면 수학여행 참가 동의서가 꼭 필요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참가를 하지만, 간혹 부모가 동의하지 않아 불참하는 아이들이 꽤 있어 동의서를 형식적으로 걷을 순 없었다. 교사의 전화를 받는 학부모의 마음도 불편하겠지만,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교사의 마음 또한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몇 개의 전달 사항을 전달하고 바로 교과서를 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나왔다. 1교시부터 수학이라니,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는 학교에서는 끔찍할 게 분명했으나 수업을 쉴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피곤하기도 했고, 정해 놓은 진도를 생각보다 빨리 끝마쳐서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을 주었다. 몇몇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엎드려 잤고, 몇몇 아이들은 수업 때는 나른함에 풀렸던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짝과 수다를 떨었다.

“쌤!”

조용한 소음 사이를 파고든 건 세민이의 목소리였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세민이를 보며 되물었다.

“왜.”

“쌤, 옆 반 쌤이랑 친해요?”

“정진 선생님?”

“네!”

“그건 왜.”

“그냥요. 궁금해서요.”

“선생님들은 다 친해.”

새파란 동심들에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에이, 거짓말.”

그러나 요즘 동심들은 동심들이 아니었다.

“국어 쌤은 쌤 왕따 안 시키죠?”

“왕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인마.”

우리 반에서는 나도 모르게 ‘담임 선생님 왕따설’이 돌고 있었다. 어쩌다 나온 이야기에 충격 아닌 충격을 받고 그 이유를 들어 보니, 이유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었다. 동료 교사를 기다리는 게 귀찮아서 혼자 밥을 먹으러 내려가거나, 할 일이 남아 있거나 밥 생각이 없어 밥을 종종 거르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들을 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는 ‘밥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면 외톨이’라는 공식이 콱 박혀 있으니까. 거기에 내 무뚝뚝한 성격까지 포함하여 자기들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었다. 그때마다 소설 쓰지 말라며 정정해 주어도, 아이들의 상상의 나래는 꺾일 줄을 몰랐다.

“국어 쌤은 완전 천사라서 쌤 왕따 안 시킬걸?”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정 선생 찬양을 늘어놓으며 까르르 웃는다. 아무래도 학생들 사이에서 정 선생의 평판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동료 교사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문득 정 선생이 주고 간 사탕이 생각나 주머니를 더듬으니 동그란 사탕이 만져졌다. 꺼내서 애들한테 던져 줄까 하다가 하나뿐이라 그냥 그만두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고 업무를 끝낸 선생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내려갔다. 교사 식당은 별관 1층 구석에 있었다. 학생과 교사 둘 다 편한 구조가 이번 학교에서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였다. 조리사 입장에선 좀 번거롭긴 하겠지만 말이다.

오늘 점심은 카레라이스였다. 잔반 없는 날답게 케첩을 뿌린 미니 핫도그와 요구르트가 나왔다. 계란국과 김치를 제외하면 밥과 같이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순전히 학생들을 위한 식단이었다.

“역시 수요일이 제일 고비인 것 같아요.”

“쌤도 그러세요? 정말 일주일 중에 수요일이 제일 시간이 안 가요.”

“그러니까. 수요일이 공휴일인 날은 일주일이 후딱 지나가는데 말이야.”

직장인이고 학생이고 가릴 것 없이 공감할 말을 들으며 카레를 얹은 밥을 한입 떠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정 선생의 눈길이 도르르 따라 올라왔다. 의문이 담긴 눈길로 그를 쳐다보니 그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숟가락을 곧게 세웠다.

“김 선생님도 떠먹파세요?”

“떠먹파요?”

“카레 안 비벼 먹고 그냥 떠먹는 파요. 비벼 먹는 파는 비먹파!”

듣도 보도 못한 말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어 혀로 입안을 쓸었다.

“그런 것도 있습니까.”

“네. 탕수육 찍먹, 부먹처럼요. 전 카레 밥에 안 비벼 먹고 그냥 떠먹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냥 먹는 게 더 맛있지 않아요?”

“전 귀찮아서 그냥 먹는 건데요.”

내 말에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은 선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뭐가 저리 즐거운지 이해를 못 하는 나를 두고 이경하 선생이 입을 열었다.

“떠먹으면 뭐가 좀 달라요?”

“카레 맛이 좀 더 진해요. 밥알도 더 꼬들꼬들한 것 같고. 감자랑 당근도 안 뭉개지고요.”

“오, 정 쌤 미식가시네.”

“미식가랄 건 없고, 나중에 한번 비교해 보세요. 좀 다르실 거예요.”

별것 아닌 얘기에 모두가 흥미를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느낀 게 있다면 그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의 능력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소질인 것 같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 무리의 중심이었을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사람들을 적지 않게 봐 왔다.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그들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밥을 떠먹었다.

오늘도 여지없이 점심을 먹고 옥상으로 향했다. 난간에 기대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까딱이는데 옥상 문이 열렸다. 정 선생이었다. 양치를 하러 화장실로 가더니 금세 마치고 따라온 모양이었다.

“오늘은 안 피우세요?”

담배를 입에 물고 까딱이기만 하는 나를 보며 정 선생이 물었다.

“왠지 안 당겨서요.”

카레를 먹고 나니 흡연 욕구가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그냥 상쾌하게 양치나 하고 싶었다.

“김 선생님 여기 왜 오시는지 알 것 같아요. 경치가 맑네요.”

그의 말에 뒤를 돌아 옥상 밖 풍경을 눈에 담았다. 크지 않은 운동장에서 열심히 모래바람을 날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몰래 교문을 빠져나가 학교 앞 분식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 그리고 그 너머 밀집해 있는 주택가와 높게 솟은 아파트들이 맑은 하늘 아래 어느 하나의 옥에 티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 저한테 공유해 주세요.”

“공유라고 할 것도 없는데요. 애초에 공동 시설인데.”

“그래도 아지트 같은 거 아니에요?”

정 선생이 찾아오기 전에는 그 엇비슷한 거였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에 풍경을 지그시 응시했다. 점심시간 중 교문 밖에 나가는 학생들에게는 벌점을 부여하는 것이 규칙인데, 나태한 교사는 언제나 옥상 위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저 어렸을 때 라면땅 진짜 맛있게 해 주는 분식집 있었는데.”

마치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아는 것처럼 그가 말을 꺼냈다.

“거기 아직도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가끔 갔던 곳인데, 안 간 지 10년이 넘어가네요.”

라면땅. 이름만 들어 봤지 먹어 보지는 못한 것이었다. 최근에 요리 프로에나 나오는 것을 보고 무슨 맛이겠구나 짐작했을 뿐이다. 애초에 학창 시절엔 분식집에 들러서 여러 가지를 맛보며 즐길 여력도 없었다.

“저기서도 라면땅 팔던데. 드셔 보셨어요?”

“아뇨.”

“그럼 드셔 보실래요?”

“예?”

그가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옥상을 나갔다. 잡을 새도 없이 나가 버린 바람에 눈만 껌뻑이며 한참을 문만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건물에서 막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정 선생이 보였다. 날렵한 몸으로 빠르게 뛰면서 날아오는 공도 한 번 차 주고선 교문을 나선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교문 앞 분식집으로 향하더니 분식집 앞에 서 있는 애들에게 어깨동무를 한다. 아이들의 머리에 손바닥을 비비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뒤 아이들 앞으로 접시 하나가 더 나왔다. 아마 그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더 사 준 것일 테다. 그는 검은 봉지를 받아 들더니 온 길을 다시 되돌아왔다.

문득 내가 그를 왜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뛰어오는 모습을 보니 그냥 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에 물고 있어 축축해진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곧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 선생이 봉지를 들고 흔들었다.

“배달 왔습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다가와 바닥에 털썩 앉았다. 아무 데나 털썩 앉는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그가 봉지에서 하얀 종이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뭉텅뭉텅 잘린 라면 조각들이 있었다. 튀긴 라면 위에는 빨간 양념이 발라져 있었다.

“원래는 통째로 주는데 제가 조각내서 달라고 했어요.”

정 선생이 고개를 들더니 멀뚱히 서서 뭐하냐며 내 팔을 잡아 내렸다. 막무가내인 손길에 결국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가 라면 조각 하나를 집어서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들고 살폈다. 딱 봐도 불량 식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 선생이 자신의 몫도 하나 집더니 입에 쏙 넣고 씹었다. 바삭한 소리가 우물거리는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가 날 보더니 어서 먹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걸 입에 넣었다.

양념은 새콤하고 달콤했고 약간 매콤했다. 튀긴 면에 이런 양념을 발랐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죠?”

그가 입에 든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죠? 식후 땡 아니고 식후 땅이네요.”

그가 라면 조각 하나를 다시 집어 내게 건넸다. 나란히 앉아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라면땅은 맛있었다. 바삭한 라면을 우물우물 씹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두꺼운 뭉게구름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김 선생님은 너그러운 학생부신가 봐요.”

“예?”

“애들 교문 밖에 있는 거, 안 잡으셨잖아요.”

“내 점심시간이니까요. 관심 없습니다.”

“애들한테요?”

“네.”

“흐음…….”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

그리고 이내 짧은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업무를 마무리하고 시간을 보니 6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어제 일을 다 끝내 놓은 덕에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퇴근을 하자니 내키지 않았다. 핸드폰을 켜고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부르면 나올 친구 놈들은 있었지만 근처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든 그쪽에서 오든 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 그러기엔 부담스러웠다.

수면 유도제를 사서 먹고 잘까. 수면 유도제는 효과도 복불복이고 다음 날 머리가 아파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거운 눈꺼풀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에 얼핏 정 선생의 자리가 걸렸다. 그는 시험 문제 협의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선생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교무실을 나왔다.

신호가 바뀌어서 속도를 줄이는데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 드는 게 뭐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라디오가 꺼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틀 연속으로 정 선생을 태웠더니 그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실소를 흘리고선 라디오를 켜자 퇴근길 교통 정보를 알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약국에 들러 수면 유도제를 샀다.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뒤 좀 쉬다 보니 시침이 8시를 향해 있었다. 유리컵에 물을 따르고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차가워서 실온에 둬도 될 것 같았다. 약을 넘기고서 불을 끄고 침대로 향했다. 아직 정신이 말똥말똥했지만 눈을 감았다. 정적을 신경 쓰지 않으려 시험 문제에 대해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점심에 정 선생과 함께 먹은 라면땅이 불쑥 떠올랐다. 불현듯 정신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약효를 잘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몸이 수면 위로 둥실 떠오른 기분이었다. 무겁게 잠들어 있던 정신이 몸과 같이 떠올랐다. 문득 내가 잠을 꽤 오래 잔 것인지 10분도 채 자지 못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내가 잠들긴 했던 건지도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눈을 떠 볼까. 그러나 눈이 떠지질 않았다. 눈을 떴으나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걸까. 손가락을 움직였다. 꿈쩍도 하질 않았다.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윽…….”

그걸 깨닫고 나자 갑자기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내 목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숨을 밭게 내쉬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줄을 감고 누군가가 잡아당기는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괴로웠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문득 팔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심장 뛰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지금 눈을 뜬다면, 떠질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뇌 전체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허억……!”

눈을 뜨자 내 앞에 있는 건 어떤 여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저 여자를 잘 알고 있다. 불과 세 달 전까지만 해도 나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그리던 여자였다.

지연아. 입을 뻥끗거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천장에 바짝 붙은 채로 공중에 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지연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연아. 다시 한 번 불렀다. 그러나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날 뿐,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녀의 까만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그대로 뺨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바닥에는 내가 있었다.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물에 눈을 깜빡였다.

지연아. 왜 울어. 네가 왜 울어. 나는 그녀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네 옆에 있던 게 정말 네 예전 사람이 맞았어? 정말이야? 왜 그랬어.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너무 행복하다고 했잖아.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는 그러나 그녀에게 전달된 모양인 듯 그녀의 눈물이 서서히 멎어 들었다. 그녀가 눈물을 닦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지연이의 눈에는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명백히 원망하고 있었다. 미워하고 있었다.

손을 내밀고 싶었으나 내밀 수 없었다. 고개를 젓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는 일밖에 없었다. 할 수 있다면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부족해서 네가 떠난 거겠지. 그때로 다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더 잘하겠다고. 그러나 그녀는 답이 없었다. 지연아, 다시 돌아와 줘. 아니면 내가 갈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조금만 힘을 주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연아!”

벌떡 몸을 일으켰으나 눈앞에 보이는 건 없었다.

“허억, 헉, 헉…….”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고선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불을 켜자 방 안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발코니의 문을 열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집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 집에는 나뿐이었다. 지연이는 죽었다. 그것도 바람을 피운 상대와 함께.

“우욱-!”

토기가 몰려와 변기통에 머리를 박았다. 저녁을 먹지 않아 나오는 건 없었다. 길게 늘어지는 침을 뱉고 숨을 밭게 쉬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수면 유도제의 부작용이리라.

“하, 하하, 하…….”

정신을 차리자 웃음이 나왔다. 온몸에 식은땀이 가득하고 머리는 헝클어져서 마른 화장실 바닥에 혼자 앉아 있는 꼴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지연이가 눈앞에 다시 나타나자 나는 빌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라고, 너는 잘못한 게 없다고. 구차했다. 구질구질했다. 질기게 이어 오고 있는 생명만큼 끔찍했다.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집에 있지 않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다.

거실로 나와 시계를 보니 11시가 좀 넘어 있었다.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한 건가. 핸드폰과 지갑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여유 따윈 없었다.

서늘하다 싶은 바람이 얼굴에 와 닿았다. 얇은 천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혔다. 조금만 더 걸어 나가면 편의점이 있다. 맨정신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소주든 맥주든 사서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쓴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핸드폰을 보며 웅얼거렸다. 냉장고에서 맥주 세 캔을 꺼냈다. 편의점 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으니 거기서 마시다 부족하면 더 사면 되겠지.

“어? 김 선생님!”

이 시간에 이곳에서 저 호칭으로 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정 선생밖에 없었다. 뒤돌아보자 역시 정 선생이 있었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녹색 무지 티셔츠에 연한 색의 청바지를 입고 있는 그는 꼭 대학생 같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맥주 드시게요?”

“네.”

“혼자?”

“네.”

“세 캔이나요?”

그의 말에 손에 담긴 맥주 캔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마시고 더 마실 생각이라고 말하기엔 민망한 상황이었다.

“주당이시네. 저도 자기 전에 맥주 한잔하려고 들른 건데. 같이 드실래요?”

아뇨, 라고 말하려고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어차피 지금 바로 집에 돌아갈 생각도 없고, 혼자 마시는 것보단 말 많은 정 선생이 옆에서 같이 마셔 주면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와, 오늘 계 탔네.”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안주는 뭐 좋아하세요?”

안주를 먹을 생각은 없었다. 딱히 없다고 말하자 그가 과자 두 봉지와 육포, 소시지 몇 개를 들었다. 내 맥주와 그의 맥주, 안주들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지갑을 꺼냈다.

“어, 제가 계산할게요. 안주 다 제가 고른 건데.”

“됐습니다. 라면땅 보답으로 하죠.”

그가 시원하게 웃고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와 안주를 나눠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고 있었다. 의자를 끌어다 앉고서 정 선생은 안주로 산 과자 봉지와 육포를 뜯었다.

“밖에서 보니까 색다르네요.”

“그러게요.”

“그렇게 입으시니까 더 어려 보이세요.”

“정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키들대며 과자 하나를 입에 넣더니 맥주 캔을 따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도 내 몫의 맥주 캔을 따고 그의 캔에 맞부딪쳤다.

“짠.”

정 선생이 추임새를 넣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아, 시원하다. 근데 김 선생님 자다 오셨죠.”

“어떻게 알았습니까?”

“뒷머리가 좀…….”

그가 자신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아.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머리칼을 정돈했다. 귀여워. 얼핏 그런 말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잘못 들었겠지, 생각하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협의는 다 끝났습니까?”

“네. 문제만 없으면 다음 주에 그대로 나가요.”

“수고하셨습니다.”

“저야 뭐, 경하 쌤이 수고하셨죠.”

“업무는 어때요. 안 힘듭니까?”

그가 육포를 집어 들고 질겅질겅 씹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음……. 아예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근데 좋아요. 즐거워요. 모든 게 다 새로우니까 재밌기도 하고.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뭐, 한 달 차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요.”

멋쩍게 웃는 그를 보며 막 발령받았을 때의 나를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하루하루가 즐겁고, 재밌고, 기대가 됐었던가. 처음에는 나름대로 사명이라든지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포부라든가 하는 것들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데 김 선생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뭡니까.”

“여자 친구 있으세요?”

그의 물음에 맥주 캔을 들다 멈칫했다.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이 있었으나 금세 사라졌다.

“아니요. 없습니다.”

“아아…….”

정 선생이 입가를 끌어 올려 웃었다. 왜 웃습니까. 웃는 게 그냥 웃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물었다.

“저도 애인 없거든요.”

“그래요.”

“네. 옆구리가 시려요.”

엉엉 우는 흉내를 내며 그가 웃었다.

교사 둘이서 만나 나눌 공통적인 화제는 아무래도 학생들이었다. 서로의 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했을 때 느꼈던 점과 각각의 아이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안주는 점점 줄어들었고 캔도 하나씩 착실히 비워졌다.

영화나 노래 같은 취향이나 여행, 자신의 친구들 이야기라든지 정 선생은 자신에 대해서 꽤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내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나, 그가 하는 얘기에 곁들이는 정도였으나 어색함은 없었다. 그는 아주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갈 줄 알았고, 상대를 편하게 만들 줄 알았다.

캔이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정 선생은 맥주 두 캔을 다 비우고 조금 남은 과자를 집어 먹었다. 원래 잘 먹는 편인지, 술을 마실 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인지 그는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것들을 거의 다 해치웠다. 내가 두 캔을 마시고 남은 한 캔의 반을 비웠을 때였다. 약간의 고요한 정적이 흘렀을 때, 그가 문득 물었다.

“기분이 안 좋으세요?”

“그렇게 보입니까?”

“음, 네.”

날 잘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기분이 안 좋은 게 보일 정도로 표정이 별로였나. 입가를 마른손으로 쓸고선 어깨를 으쓱였다.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보네요.”

“저 잠 안 올 때마다 듣는 자연의 소리 있는데. 보내 드릴까요?”

“자연의 소리요?”

“네. 새소리랑 모닥불 소리 같은 건데, 가만히 누워서 듣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오더라고요. 집 가면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제일 싫어하는 게 고요한 정적 속에서 잠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래도 틀어 보고, 거실의 텔레비전도 틀어 보곤 했지만 귀에 거슬리기만 했지 잠이 오진 않았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서 그냥 밤을 새우느니 그 소리라도 집중해서 듣는 게 낫지 싶었다.

“그리고요.”

그의 말에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그의 긴 손가락이 눈앞으로 뻗어 왔다. 정 선생이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문질렀다.

“내일은 좋으실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에게 너무 곁을 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굳이 말하자면 좋은 축에 속했다. 고개를 숙이며 실소를 흘리자 그가 실실 웃었다.

그의 언어가 내 사고를 지배했다. 정말 내일은 좋아질 것만 같았다.

“이제 일어나죠.”

캔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것들을 정리해서 버리고 정 선생과 마주 섰다.

“그럼 내일 뵙죠.”

“네. 오늘 즐거웠습니다, 김 선생님.”

“예. 안녕히 가세요.”

정 선생과 헤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맥주 세 캔 정도로는 취하지 않지만 적당히 열이 올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정 선생이었다. 메일을 보내 준다더니 집에 가자마자 바로 보낸 모양이었다.

노트북을 켜고 메일함을 열었다. 하. 제목을 보자마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목: 김 선생님의 편안한 밤을 위하여

-보낸 사람: 정진<[email protected]>

-받는 사람: <[email protected]>

일반 첨부 파일 1개(자연의_소리.mp3)

내용: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한잔하실 거죠? 이거 듣고 푹 주무시길 바랄게요. 내일 지각은 노노입니다. ^-----^

딱 정 선생답다 싶었다. 제목과 내용의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다가 첨부된 파일을 핸드폰에 다운받았다.

노트북을 끄고 방으로 들어섰다. 불을 끄지 않고 나갔기에 환한 방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흐트러진 침대를 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침대에 누우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또 가위에 눌릴까 두려웠지만 정 선생이 보내 준 파일을 생각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잠시 시간을 두고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아아. 김 선생님. 이거 지금 듣고 계세요?

정 선생의 목소리였다. 평소엔 그냥 귀로 듣던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니 왠지 낯설었다. 내가 파일을 잘 받은 것이 맞나 확인했다. 앨범 아트도 없는 음악 파일은 ‘자연의 소리’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달고 있었다.

-제가 바로 보내 드렸으니까 진짜 들으셨는지 확인할 겁니다. 암호는 알로호모라입니다. 해리 포터 좋아하세요? 제가, 아, 이게 아니지. 아무튼 내일 절 만나자마자 암호를 말씀하세요. 들으신 게 맞는지 검사할 겁니다.

짐짓 엄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귓가를 간지럽혔다. 바람 빠진 웃음이 입술 새로 자꾸만 새어 나왔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좋아질 내일에 봬요.

다정함이 깃든 목소리가 사라지고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간간이 새가 노래를 부르듯 영롱하게 짹짹대는 소리도 들렸다. 어쩐지 기분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았다. 가까이 들리던 자연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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