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하나가 완전히 마무리되고 오랜만의 한가한 토요일이다. 어제는 퇴근길에 우동주와 단골 이자카야에 들러 벨트의 구멍을 한 칸 더 밀어내야 할 정도로 먹고 마시면서 떠들었다. 기분 좋게 취한 채로 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급하게 1라운드를 마치고, 침실로 자리를 옮겨 제대로 신나게 뒹굴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었고. 그 덕분에 오늘은 정오가 지나도록 늦잠을 자다가 좀 전에야 겨우 일어나 소파에 늘어져 있는 중이었다.
“어우, 추워.”
전면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포근한데, 어디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건지 문득 공기가 서늘했다. 벌써 그런 계절이 온 것이다.
“추워? 안아줄까?”
내가 축 늘어진 소파 아래에 똑같이 널브러져 있던 우동주가 어기적거리면서 소파로 올라와 내 위에 올라탔다.
“뭔 헛소리야. 무거워. 가서 테라스 문이나 좀 닫아.”
그랬더니 내 위에 엎드린 그대로 고개를 쳐들고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면서 내려다본다.
“왜, 뭐.”
“지금이 겨울이었으면 좋겠다. 추우니까 안아달라고 하게. ―이런 귀여운 소리를 하던 주세영은 어디로 갔나요?”
“어디로 갔는진 모르지만, 여기에 없는 건 확실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가서 문 닫고 와.”
과장된 표정과 말투로 내 흉내를 내는 우동주에게 그런 소리 한 적 없다고 발뺌부터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거에 일일이 부끄러워하기엔 어젯밤에 우동주 앞에서 했던 짓들이 벌써 너무 과감했다.
“아니야, 분명히 여기 어디에 있어. 어디에 숨겼어? 어?”
닫으라는 테라스 문을 닫을 생각은 않고 티셔츠 안으로 불쑥 손을 밀어 넣은 우동주가 맨살 여기저기를 마구 더듬어대기 시작했다.
“아, 하지 말라고! 간지러워! 너 죽는다?”
“당신 죽는단 말 하나도 안 무서워. 내 귀염둥이 주세영 어디다 숨겼냐니까? 어젯밤에도 내가 분명히 여기서 봤다고! 여긴가? 어?”
아예 티셔츠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더니 왼쪽 유두를 혀로 핥아 올렸다. 쌀쌀한 공기 때문에 딱딱하게 뭉쳐 있던 유두가 위로 꺾이면서 목구멍 안쪽을 간질였다.
“으읏!”
“흐흐흥… 여기 있었네….”
티셔츠 속에서 빠져나온 우동주는 삐딱하게 웃으면서 아예 티셔츠를 목 아래까지 밀어 올렸다. 새벽까지 그렇게 해댔는데도, 다리 사이로 사타구니를 밀어붙이면서 파고드는 우동주의 묵직함을 느끼고 있자니 금방 또 허리 뒤가 노골노골해지면서 욕구가 일었다. 몇 달 뒤엔 서른넷인데 나도 진짜 지치지도 않는구나. 툭하면 덤벼든다고 얘만 탓할 게 아니야.
─♬
“아, 뭐야. 겨우 귀염둥이 주세영 좀 찾았나 했더니.”
1층 로비에서 누른 벨이 울리는 소리에 우동주는 진심으로 짜증을 내면서 입 안에 넣고 둥글리던 유두를 뱉어놓았다. 타이밍이 아쉬운 건 우동주만은 아니었다. 우동주의 허리에 감으려던 다리로 꽉 조인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줬다.
“귀염둥이 주세영 어디 안 가니까 빨리 나가봐. 5분 이상 늦어지면 어디 가버릴 수도 있어.”
“알았어. 딱 기다려, 당신.”
느긋한 토요일에서 불타는 토요일로 막 바뀌려던 타이밍을 방해한 건 택배였다. 집으로 뭐 올 만한 게 없는데 뭐지 싶었던 나는 “어? 아버지가 보내신 거네?”라는 우동주의 말에 가슴까지 말려 올라가 있던 티셔츠를 얼른 끌어내리고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 복도로 달려 나갔다.
“아버님이? 왜? 뭐 보내셨대?”
“저리 가. 나한테 보낸 거니까. 당신은 우리 아버지한테 접근 금지, 관심 금지, 아무튼 다 금지야.”
“너한테 보내신 거 아닌데? 여기 내 이름도 있잖아.”
받는 사람 난에는 분명 우동주와 내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그것도 내 이름이 우동주 이름보다 더 앞에.
“뭐야, 이거… 혹시 우리 둘한테 경고장 같은 거 보내신 거 아닐까?”
발신자 불명의 의문의 소포라도 받은 사람처럼 우동주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음, 경고장 하나 들었다고 하기엔 부피가 너무 크고 무거운데?”
“그럼… 내 이름 파낸 족보 같은 거 아니야? 빨간 줄 좍좍 그어서.”
우동주가 이러니까 슬슬 나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다녀가신 뒤로 우동주와 몇 번 통화를 하시긴 했지만, 마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똑같으셨다고 하길래 일단은 안심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아무것도 아닌 듯 넘어가기에는 너무 큰일이었기 때문에 우리 둘 다 완전히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느긋한 토요일에서 불타는 토요일로 바뀌려던 시점에, 불시검문처럼 찾아온 아버님의 택배 상자를 앞에 둔 우리들의 토요일은 이제 막 근심 어린 토요일이 되려 하고 있었다.
보내는 사람은 우수영. 받는 사람은 주세영, 우동주.
그 세 개의 이름이 한데 모인 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아버님과 함께 보냈던, 아니 2, 30년 뒤의 우동주와 함께 보냈던 그 믿기지 않는 토요일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몇 주일 만에 아버님에게서 우리에게로 날아온 상자. 그건 아버님 나름의 어떤 신호 혹은 전달사항일 게 분명했고, 그러니 우리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의 시작은 이번 가을의 초입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자, 커피.”
“땡큐.”
차만 타면 에어컨부터 찾던 게 바로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커피를 사서 차에 올라탄 우동주에게서 서늘한 바람 냄새가 났다. 내가 즐겨 마시는 커피도 어느새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바뀌어 있었다.
“와… 시간 진짜 잘 간다.”
“갑자기 왜?”
“벌써 가을이구나 싶어서.”
점심시간을 이용한 짧은 데이트 중이었다. 우동주가 찾아낸, 회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카페는 회사들이 모여 있는 빌딩숲에서 벗어나 있어 점심시간에도 줄을 서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작은 카페라 메뉴는 김치볶음밥이나 오므라이스 정도였지만, 회사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둘이서 점심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했다. 자주는 아니어도 2주에 한 번 정도는 각자 부서 사람들을 따돌리고 빠져나와 같이 점심을 먹곤 했는데, 그럴 때 시간을 보낼 장소로는 딱이었다.
같이 살고 있으면서, 그것도 같이 산 지 2년도 더 지났으면서, 꼭 점심시간까지 같이 보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사내연애의 짜릿함은 또 즐겨줘야 맛이니까.
그 카페에서 다소 부실한 점심을 먹고,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 한 잔씩 사서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점심 데이트 코스였다. 그건 분명 집에서 찰싹 달라붙어 쪽쪽거리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였다. 포기하기 힘든.
두 손으로 커피잔을 쥐고 온기를 느끼면서 창밖을 보니,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은행나무가 맨 위쪽부터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적당히 배도 부르고, 차 안에는 커피 향이 가득하고, 창밖에서 은행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옆에 앉은 우동주는 잘생겼고. 아… 왠지 일하러 들어가기 싫은 기분이었다.
“당신 그런 말 할 때 보면 진짜 아저씨 같은 거 알아?”
형님이 간만에 가을 좀 타려고 하는데, 우동주가 2차선으로 끼어들면서 픽 웃었다. 좀 전에 잘생겼다고 한 거 취소다.
“그래, 젊은 네가 세월의 무상함을 어떻게 이해하겠냐.”
“또, 또. 세 살 차이 가지고 또 그런다. 저기요, 아저씨. 저도 서른이거든요?”
“네가?”
처음 만났을 때 우동주는 스물여덟 살의 사회 새내기였다. 멋없이 그저 바짝 깎은 머리와 몸에 제대로 맞지 않는 중저가 브랜드의 슈트를 입고 신입답게 패기 가득한 모습으로 회식 자리에서 씩씩하게 인사를 했었지. 그랬던 우리 엔 소프트 꿈나무가 서른이라니. 몰랐던 사실도 아닌데, 가끔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사실을 대면하게 되면 잘 실감이 안 났다.
“왜, 당신만 나이 먹고 난 그대로인 것 같아?”
“어, 좀 그런 생각이 든다.”
회의실에 앉혀놓고 내가 교육시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우동주는 박 팀장이 된 박 대리에게서 독립해 후배를 데리고 다니면서 스스로 계약을 따오는 우 대리가 되어 있었다. 꿈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아름드리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긴, 서른셋이면 이제 주세영도 한물갔지.”
“한물간 아저씨한테 넌 어제도 그렇게 집적댔냐? 어?”
아무리 내가 자기를 좀 꿈나무 취급했기로서니, 애인한테 한물갔다니?
“아! 아, 진짜 아파! 당신 요새 운동량 늘렸어? 왜 이렇게 힘이 세?”
“넌 맞아도 싸. 더 맞아야 돼.”
“어? 당신 여기, 눈가에 주름 아니야?”
“뭐? 진짜? 어디?”
신호 대기에 걸린 사이, 괘씸한 우동주의 팔뚝에 퍼붓던 주먹세례가 주름이라는 말에 뚝 멈췄다. 작년부터 우동주 몰래 아이크림도 꾸준히 바르고 있는데, 주름이라니…. 우동주는 아직도 팽팽한데 내가 벌써 눈에 띌 정도로 주름이 진해졌단 말이야?
쪽.
자세히 좀 보라고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데, 이놈이 난데없이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얼굴을 붉힐 겨를도 없이 재빨리 주변부터 둘러봤다. 우리 차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낯익은 얼굴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훈계에 들어갔다.
“야, 미쳤어? 회사 근처야.”
“2km 떨어져 있는데도 회사 근처야?”
“조심해서 나쁠 게 뭐 있어?”
“네, 네. 잘못했습니다. 제가 아직 서른밖에 안 돼서 철이 없어서 그렇죠.”
이럴 때 보면 반항기 중학생이다. 뭘 믿고 저러는 건지. 우리 관계 들통나면 나만 회사 짤리냐? 우리 회사 사장님이 너희 아버지라도 돼? 너희 아버지, 건축설계사이신 거 아니었어?
“농담 아니야. 밖에선 무조건 조심하기로 했잖아.”
“당신 자꾸 그렇게 사소한 데에 신경 쓰면 주름 더 생겨요.”
늙어가는 게 유쾌하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반 이상 농담인 걸 알아도 자꾸 주름, 주름 하니까 괜히 신경이 쓰여서 조수석 천장에 달린 거울을 펼쳐 얼굴을 비춰 봤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다크서클이 좀 진하긴 하네.
거울을 보는 사이, 이번엔 볼에 와서 또 뽀뽀 쪽, 이다.
“야, 하지 말라니까!”
심지어 지금은 회사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앞뒤를 또 살폈다. 물론 이래 보여도 우동주가 그렇게 헐렁한 놈은 아니니 앞뒤 잘 확인하고 하긴 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간댕이가 부었어, 이게 진짜.
“예뻐요, 예뻐. 주름 같은 거 없어.”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해,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리고, 서른세 살 먹고 너한테 예쁘단 소리 들으면 내가 좋아할 줄 아냐? 아까는 아저씨라며. 예쁜 아저씨가 어딨어, 세상에?”
“예쁘다의 기준은 다양한 거야. 내 눈에 주세영은 주세영처럼 이쁜 걸 어떡해? 자기 애인이 못나 보이는 사람도 있나? 당신은 그럼, 나 안 이뻐?”
후방주차하다 말고 조수석 시트에 팔 걸친 채로 그렇게 묻는 스킬은 또 어디서 배워온 거냐? 하여간 남들 하는 건 다 하려고 해요.
“어? 안 이쁘냐니까.”
점심도 둘이서 오붓하게 먹었고, 오는 길에 뽀뽀도 했고(하지 말라고 구박하긴 했지만), 이런 기특한 소리만 골라 해주는 우동주인데 예쁘지 않을 리가 없지만, 멍석 깔아주면 못 하는 게 주세영의 고질병 중 하나였다. 그리고 우동주는 내 그런 성격 다 알면서도 곤란해하는 거 보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고.
“이… 쁘긴 뭐가 이뻐? 징그럽지!”
“호오… 징그럽다 이거지? 그럼 저번 주말에는 내가 징그러워서 그렇게 집에 들어가자마자 남의 바지를 막 벗기고, 고추를 막 쪽쪽 빨고 그랬나? 어? 아… 그게 아니면, 나는 징그러워도 내 고추는 안 징그러운 건가? 어? 주세영 진짜, 사람이 안 되겠네.”
이게 영업 뛰면서 이상한 말발만 늘어가지고, 대낮부터 회사 주차장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섹드립을…. 그럼, 뭐? 내가 부끄러워할 줄 아냐?
“그래, 넌 징그러워도 네 여긴 좋다, 왜?”
“…….”
능글능글 자꾸 놀리려고 드는 우동주를 좀 당황하게 해주려고 한 짓이었는데, 어째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지그시 쳐다보는 시선의 농도에, 나는 우동주의 다리 사이를 움켜쥐었던 손을 얼른 치우려고 했지만, 이런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우동주가 한발 빨랐다.
“주세영. 당신 지금 사람 잘못 건드렸어. 이 차, 뒷좌석 펼치면 바로 누워서 뒹굴 수 있는 거 알지?”
농담이겠지. 농담일 수밖에. 아무리 얘가 나보다 경계심이 없어도 회사 주차장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막가는 애는 아니야. 그러니까 농담인 거 아는데, 농담인 거 알아도… 이 새끼 지금, 눈이 무섭다고.
“어디 가? 이리 안 와?”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나는 얼른 우동주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서 뛰어내렸고, 우동주는 곧장 내 뒤를 쫓아왔다. 그 와중에도 커피는 챙긴 나의 순발력.
“너 진짜 여기서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봐. 가만 안 둬. 나 농담 아니야.”
뛰어봤자 엘리베이터 앞이다. 하여간 이놈의 엘리베이터는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는 적이 없어요. 드라마에서 보면 주인공이 필요할 때 딱딱 대기하고 있더만. 역시 인생은 그렇게 쉽게 안 풀리는 거지. 이미 눌러놓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계속 누르면서, 눈으로는 코앞까지 쫓아온 우동주를 경계했다.
“뭐야, 그 야한 대사는….”
협박한다고 내뱉은 말이 오히려 이놈을 자극한 꼴이었다. 한 발짝 더 다가오면서 씨익 웃는데, 여기가 회사만 아니었다면 네 넥타이를 낚아채서 내가 잡아당기고 싶을 만큼 멋지긴 하다만… 제발, 우동아, 우리 이성을 찾자. 군산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해. 네가 회사에서 야한 짓 하다가, 그것도 남직원하고 야한 짓 하다가 쫓겨난 걸 아시면 부모님이 얼마나 충격을 받으시겠냐.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우동주는 막다른 곳에 몰린 사냥감을 앞에 두고 이제 이걸 어떻게 요리해줄까 궁리하는 비열한 사냥꾼처럼 나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몰아넣었다. 이번엔 우동주의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회사야, 여기.”
그 말 말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설마 하겠어? 또 이러면서 내가 쩔쩔매는 걸 보고 즐거워하는 거겠지. 설마, 그래도 우동주가 상식이 있는 놈인데….
“잊었어?”
“뭐, 뭘….”
“수요일에, CCTV 고장 나서 수리한다고 떼버렸던 거.”
원래 CCTV가 매달려 있던 자리를 가리키면서 우동주가 또 한 번 씨익 웃었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사선으로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우동주의 타이를 낚아채 끌어당겼다.
인정한다. CCTV가 고장난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비밀 사내연애 중인 애인과 키스하는 건 무엇보다 짜릿한 일이다. 아이셔 열 알을 한 번에 입 안에 머금은 것보다 더. 시작은 내가 먼저였지만, 나를 단번에 벽으로 몰아붙이며 턱을 비틀어 혀를 넣은 것은 우동주였다.
허락된 찰나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듯, 우동주는 저돌적이었다. 지하에서 3층까지. 우리는 굉장한 집중력을 발휘해 서로의 영혼까지 탐하는 것 같은 키스를 나눴다. 타액이 서로 뒤섞이는 달콤함과 살덩이가 쓸리는 젖은 마찰에 열이 올라, 손에 쥔 그의 타이를 끌러버리고 싶은 충동에 도달했을 때쯤 우동주가 내 아랫입술을 아프게 빨아들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선배님 의외로 커피를 달게 드시나 봐요. 혀가 다 녹을 것 같네.”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면서, 우동주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디서 들어본 대사였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출근길에 우연히 만나 같이 들어오는데 누나에게 전화가 걸려왔었고, 내가 전화를 받는 동안 우동주가 내 커피를 들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통화하는 사이 언제 마셔봤던 건지, 3층에서 내리다 말고 내가 이렇게 달짝지근한 커피를 마실 줄은 몰랐다며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나를 도발했었다. 진짜 밉살맞은 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밉살맞은 놈하고 이런 짓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3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에게 한 방 먹였단 생각에 의기양양해진 우동주는 여유롭게 등 뒤로 손까지 흔들어 보이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우동주 너, 그런 말 아냐?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는 말.
“우동주 씨.”
우동주가 돌아봤다.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지만 옷차림이 구제불능이었던 꿈나무 우동주 씨가, 랄프로렌의 라펠이 좁은 슈트를 입고 나를 돌아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우동주에게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그게, 커피가 단 거라고 생각해?”
“아, 주세영 진짜.”
마지막 문이 닫히기 직전 우동주가 보여준 그 웃음은, 할 수만 있다면 사진으로 인화해 우리 침실의 협탁 위에 세워두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한 방 먹고도 마냥 행복하다는 얼굴이었다.
3년 먼저 태어난 형님의 연륜을 얕보지 말라고. 그 짧은 순간에 입안을 완전히 휘저어가면서 만족스러운 키스를 달성한 네 놈의 테크닉만은 나도 인정해줄 테니까.
만족스러운 점심시간에 대한 충만함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4층 사무실로 들어설 때쯤, 우동주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책임져요. 나 이제 앞으로 커피도 못 먹게 생겼어. 마실 때마다 야한 생각나서.]
겨우 그 정도로 엄살은. 난 이제 앞으로 엘리베이터도 못 타게 생겼거든?
점심을 일찍 먹고 사무실에 와 있던 다른 프로그래머가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냐고 물어서, 누가 인터넷 기사에 웃긴 댓글을 달았더라고 대강 둘러댔다. 남들에겐 일주일에 다섯 번 있는, 특별할 것도 재밌을 것도 없는 점심시간이었지만, 나에겐 스토리와 캐릭터,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까지 버릴 게 없는 잘 만들어진 짧은 단편영화 같은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을 가장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아이디어 공모전이 있다면 도전해보고 싶을 만큼.
점심시간 동안 재충전을 제대로 했더니 새 기획 플랜을 시간 안에 넉넉히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요일이었고, 퇴근 후에는 둘이서 한잔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데이트 시간이 조금이라도 미뤄지는 건 원치 않았다.
“주 대리. 잠깐 회의실에서 나 좀 봐.”
막 책상 앞에 앉으려는데, 뜬금없이 부장님 호출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회의실까지 부르시는 거지? 워낙 사무실 직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하시는 분이라(?) 프라이버시 존중 따위 전혀 없이 웬만한 얘기는 사무실 안에서 다 하시는 분인데.
안 좋은 예감에 걱정이 앞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좀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했던 키스부터 떠오르면서 등줄기에 식은땀까지 배어났다. 설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CCTV 수리가 끝난 건 아니겠지? 원래 있던 자리에 CCTV가 없는 걸 분명 내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부장님뿐만 아니라, 회사 사람 중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심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순간순간 심장이 내려앉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다시는 회사에서 스킨십 못 하게 해야지 단단히 결심하지만, 또 별 탈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이어지다 보면 진땀 흘렸던 순간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결심도 느슨해졌다. 고작 십몇 분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이 아찔함도 그놈의 사내연애가 가져다주는 부록이었다.
“어이구, 우리 주 대리. 점심은 잘 드셨어?”
“네…. 부장님도 맛있게 드셨어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날 반겨주시는 걸 보니 일단 ‘동성 사내연애’ 문제로 나를 호출하신 게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심장을 꽉 조이고 있던 긴장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내가 이러다 제명에 못 죽지.
“저 옆 골목에 순댓국밥집 있잖아? 거기 갔었는데 말이야, 맛이 영 예전 같지가 않더라고. 사장이 돈 좀 벌었는지. 아, 그게 아니라, 주 대리 좀 잘 챙겨 먹고 다녀. 우리 개발부 기둥인데 쓰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회사 마비야. 알지?”
“아, 네….”
나는 어떤 죄목인지도 모른 채 학생부에 불려온 문제 학생 같은 심정으로 부장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학교 때 학생부에 불려간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아마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딴 게 아니고, 우리 주 대리도 이제 슬슬 팀장 명함 파줄 때가 되지 않았나 해서 불렀지.”
“네?”
이제 곧 분필이 날아오든 출석부가 날아오든 하겠구나 각오를 하고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데, 평소엔 나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으르렁대던 학생주임 선생이 갑자기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얼떨떨했다.
“박성훈이 팀장 될 때 주 대리도 해줬어야 했는데, 그땐 사실 우동주한테 대리 달아줘야 해서 그렇게 됐던 거잖아. 연차로 보나 실적으로 보나 주 대리도 진작에 팀장 직함을 줬어야 하는 건데, 그동안 일이 끊이질 않다 보니 이제야 해주게 됐어.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진 말고.”
“아닙니다. 섭섭하긴요….”
“그래, 뭐, 주 대리야 그런 거에 상관없이 늘 성실하게 해주는 사람이니까. 허허.”
박 대리는 박 팀장이 되고, 우동주는 우 대리가 되었지만, 우리 회사에서 팀장이란 직함은 별 큰 의미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하는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연차가 되면, 일단 대외적으로 보기 좋으라고 대우를 해주는 정도였다. 그래도 물론 기분이 나쁠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 회사가 팀장이라고 해봐야 직함만 팀장이지 뭐 크게 달라지는 게 없는 건 주 대리도 잘 알잖아. 그런데 이번에 주 대리가 팀장이 되면 말 그대로 개발부에서 하는 프로젝트는 전부 주 대리 관할로 넣을 생각이야. 연봉도 재협상하기로 얘기가 다 됐고. 분위기 봐서 내년쯤엔 과장으로 승진될 확률이 높은 것 같으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열심히 해주라고. 이사님들도 사장님도 주 대리한테 거는 기대가 아주 크신 것 같으니까. 물론 나도 주 대리 아주 아끼고 있고.”
“네… 감사합니다….”
슬슬 팀장 얘기가 나오기는 하겠단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뜻밖이었다. 팀장이란 명함만 파주는 게 아니라 연봉도 올려주고 지금보다 더 중요한 직책도 맡겨준다니. 기다렸던 일이고, 목표로 했던 일인데, 기뻐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겠는데, 상기된 얼굴로 ‘부장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해야 한다는 타이밍이라는 것도 아는데, 그저 얼빠진 놈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실감이 잘 안 나서 그런가….
부장님이 뭔가 격려하고 축하하는 말씀을 해주시는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대강 웃는 척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내내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냥, 좀 아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우동주가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왜지? 우동주한테 이 기쁜, 기뻐해야 하는 일을 얼른 알려주고 축하받고 싶어서?
“근데 세영아, 너 장가는 안 가냐?”
“네?”
업무적인 얘기를 마친 부장님은 평소처럼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셨다. 하지만 내 귀가 번쩍 뜨인 건 부장님이 이름을 부르셔서가 아니라, 그놈의 결혼 얘기를 또 꺼내셨기 때문이었다. 승진 얘기보다 결혼 얘기에 귀가 열리다니. 나 진짜 어디 좀 이상한가?
“얼굴 반듯하겠다, 일 잘하고 성실하겠다, 어째 아직도 장가를 못 가고 그러고 있어?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되면 가정에 정착을 해야 돼. 그래야 일도 술술 풀리는 법이야.”
“아, 네….”
부장님은 미혼인 모든 직원들에게 주기적으로 결혼 얘기를 꺼내시는 분이었고, 그게 특별히 무겁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거의 부장님의 취미 같은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듣기 좋은 말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그날따라 내 귀에는 그 말이 더 무겁게 들렸다.
“괜히 이거저거 잴 거 없어.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사람하고 하는 게 제일이야. 자식한테 뭐가 좋은지는 부모가 제일 잘 아는 법이거든. 박성훈이도 갔는데, 주세영이가 못 갈 게 뭐가 있어? 이번에 승진도 하게 됐으니,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얼른 장가가. 응?”
사회생활 하는 남자가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장가를 안 가고 있으면 어딘가 모자란 놈 취급을 받고, 서른다섯이 넘어서도 장가를 안 가면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단 얘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우리 회사는 대기업들에 비하면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그런 날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내 예상만큼 먼 훗날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부장님이 아버지 같은 좋은 마음으로(누구도 원한 적은 없지만) 이런 말씀을 해주시지만, 내년에는 어떨까? 그 다음 해에는? 멀쩡한 놈이 왜 결혼을 안 하는 걸까 이상하게 여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 부장님이 나를 회의실로 불러서,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우동주하고 뭐 하고 있었던 건가?’라고 묻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우리 회사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고, 승진에다 연봉인상까지 확정된 겹경사였지만, 흥이 나질 않았다. 점심을 먹고 오면서 우동주와 장난을 치고, 치기 어린 애들처럼 엘리베이터에서 키스를 했던 그 시간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회의실을 나온 뒤 흡연실에서 혼자 줄담배를 두세 개비 피웠고, 단번에 해치우겠다며 의욕에 불탔던 오후 업무는 결국 시간 내에 끝내지 못했다.
■
“진짜야?”
“야, 좀 조용히 해.”
끝내려고 했던 플랜을 마치지 못했지만, 나는 그냥 일거리를 들고 퇴근해버렸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봤자 일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미리 예약해놓은 이자카야에서 우동주와 맥주 한 잔씩을 다 마셔갈 때쯤 오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더니, 우동주는 자세까지 고쳐 앉으면서 기뻐했다. 그래, 내가 너무 심드렁했던 거고 아마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조용히 해? 와… 우리 주세영… 능력 있는 남자인 줄은 알았지만, 역시… 역시 내 남자야. 주 팀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나중에 이사님이 되시더라도 절대 절 버리시면 안 됩니다.”
입이 찢어져라 좋아하는 우동주를 보니, 그제야 나도 좀 웃을 마음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가츠동에 맥주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네. 어쩔까? 자리 옮길까? 샴페인? 와인? 뭐로 건배할까? 말만 해요. 오늘은 내가 다 쏠게. 앞으로 팀장님 거쳐서 곧 과장님 되실 분인데, 미리미리 잘 보여둬야지.”
“됐어, 그냥 여기서 마셔.”
“그럴까? 그럼 여기서 사케 마실까? 구보타 만쥬 어때? 당신 그거 마시면 완전 야해지고 좋은데.”
바닥이 깊이 파인 일본식 좌식 테이블 아래로 우동주가 내 다리에 자기 다리를 얽으면서 슬쩍 웃었다.
“맥주로 시작했으니까 맥주로 해, 그냥.”
“에이, 이렇게 좋은 일엔 좋은 술로 건배를 해야지. 여기요!”
우동주는 기어이 특사시미에 구보타 만쥬 한 병을 주문했다. 예전에 우동주 동생이 우리 집에 와 있었을 때, 내가 안세영 만나서 구보타 만쥬를 마시고 뻗었던 날 이후로 우동주는 그 술에 묘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것만 마시면 내가 과감해진다나 뭐라나.
정작 나는 이 상황이 얼떨떨하고 머릿속이 무거운데, 내 일에 나보다 더 신나 하는 우동주를 보는 것만은 좋았다. 그리고, 이런 기쁜 소식에 왜 머릿속이 무겁기만 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자, 우리 주 팀장님의 승진을 축하하며.”
“팀장님은 무슨 팀장님. 진짜 그렇게 되려면 아직도 한두 달은 있어야 될 텐데.”
아이스버킷에 차게 식혀져 나온 사케를 한 잔씩 받아놓고, 우동주는 팀장님, 팀장님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쓸데없이 생각 많고 꼬장꼬장한 주세영 기분 푸는 데 우동주의 넉살만큼 잘 듣는 약이 없다. 내 눈엔 넉살보단 애교에 가까웠지만.
“미리미리 익숙해져야지, 무슨 소리야. 기억 안 나? 박 팀장님은 명함 나오기도 전부터 나한테 팀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훈련시켰던 거.”
내 앞에서도 한동안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던 박 팀장 생각이 나서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웃었다.
“당신도 좀 그런 구석이 있어야 돼. 승진하는 데다가 연봉까지 오르게 된 사람 얼굴이 뭐 이러냐고. 안 좋아? 안 신나?”
“좋아. 신나.”
“으이그… 또 무슨 걱정하고 있죠, 혼자? 팀장이 되면 신경 써야 할 일이 배로 늘어날 텐데, 어쩌고저쩌고. 내가 그만한 자격이 있을까, 어쩌고저쩌고.”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아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언제 이렇게 우리 부모님보다, 누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됐는지. 서른셋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하고 같이한 시간은 채 3년도 되지 않는 놈이.
“당신은 그런 자격 충분해. 이미 오래전부터 충분했어.”
“네가 어떻게 알아?”
“2년 넘게 밤마다 배 맞추고 자는 사인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몰라?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너는, 하여간….”
개별실이라지만 옆방과는 고작 미닫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우동주의 야하고 직설적인 농담에, 나는 또 반사적으로 좌우부터 살폈다. 우동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옆방 사람들은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심취해 떠들썩할 뿐, 우리 테이블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잘할 거야, 주세영은. 그러니까 걱정은 그때 가서 하고, 오늘은 축하하자. 응?”
어색하게나마 웃으면서 우동주가 내민 잔에 내 잔을 마주 부딪쳤다. 내 안에서는 아직 갈등 중이긴 했지만, 직장인으로서 사회적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것만 놓고 보자면 축하할 일이긴 했다. 그리고 우동주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일단 그것만으로도 흥을 맞춰주고 싶었다. 아직 한두 달 뒤의 일이니까 그동안 생각해볼 시간은 충분하겠지. 그래, 오늘은 괜히 심각해지지 말고 일단 좋은 면만 생각하자.
“누구?”
입으로는 우동주가 넣어준 광어 뱃살을 씹으면서 테이블 아래에서는 서로 다리를 얽고 장난치느라 바쁜 와중에, 내 핸드폰이 울렸다.
“누나야. 잠깐만.”
[어, 왜.]
[하아… 귀염성 없는 성격은 여전하구나, 주세영.]
[그럼 뭐 이제 와서 사람이 바뀌어? 왜, 무슨 일인데. 나 밖이야.]
[밖? 아직도 일해?]
[술 한잔하고 있어.]
그러면서 나는 맞은편의 우동주를 슬쩍 한 번 쳐다봤다.
[와… 주세영이 언제부터 불금이라고 술도 마시는 애였어? 사람 바뀐 거 맞네. 근데 내가 날을 잘못 골랐나 보다. 오랜만에 너하고 한잔하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또 뭐가 있구만?]
[있긴 뭐가 있어?]
[누나가 아무 일도 없는데 나한테 술 마시자고 할 사람이야? 매형하고 싸웠거나, 일 때문에 넋두리하고 싶거나, 나한테 부탁할 일 있거나. 그중 하나지.]
[안 변했네. 주세영 그대로야. 내가 잠시 착각했어.]
“누님, 오세요! 같이 마셔요!”
“야, 오긴 어딜 와. 조용히 안 해?”
우동주의 돌발행동에 일단 핸드폰을 틀어막았지만, 나의 승진 소식에 들뜬 건지 우동주는 막무가내였다.
“왜? 오시라고 해요! 누님, 뵙고 싶습니다!”
“언제 봤다고 누님이래?”
“언제 뵙긴. 봄에 뵀었지.”
5월쯤인가 누나가 줄 게 있다면서 회사 앞에 잠깐 들렀을 때, 우동주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인사라도 하고 싶다면서 따라 내려와서 잠깐 본 적이 있긴 했다. 그 전에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 잡지 촬영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누나가 나와 우동주를 데리고 식사 대접을 한 적도 있었고. 둘 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사교적이라 그런지, 우동주는 친동생인 나보다도 누나와 죽이 잘 맞았다. 혹시라도 들키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서 음식의 맛도 알 수 없었던 나와 달리, 우동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다는 듯이 웃으면서 누나의 기분을 잘 맞춰줬다.
하여간 누나가 우동주를 좋게 생각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쁘게 생각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새가슴인 내 입장에서는 그냥 두 사람이 안 만나는 게 상책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 뭐야? 너 동주 씨랑 마시고 있던 거였어?]
누나의 목소리 톤을 보니 우동주가 있다는 걸 알고 더 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 진짜 가도 돼?]
[아, 오긴 어딜 와? 다음에 마셔.]
“누님, 오세요! 주 대리님 오늘 좋은 일 있어요! 같이 축하해요!”
그때 죽어도 누나를 못 오게 했어야 했다. 아니, 결과만 놓고 보자면 잘한 건가? 결과가 좋긴 했어도 과정이 너무 빡셌으니 잘못한 짓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청담에 있는 무슨 스튜디오에서 촬영 중이었다는 누나는 30분도 안 돼서 우리가 있는 이태원의 이자카야로 날아왔고, 역시나 오자마자 우동주와 짝짜꿍이 돼서 나를 외톨이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누나가 도착했을 때 우동주가 누나를 맞아주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줘서 그나마 좀 덜 외로웠다.
“잘됐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고지식할 정도로 성실하게 살더니, 주세영, 젊은 나이에 벌써 출세가도구나!”
우동주에게서 내 승진 예정 소식을 들은 누나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축하를 해줬다.
“세영 선배, 어릴 때부터 성실했어요?”
우동주가 눈을 빛내면서 테이블 앞으로 상체를 쑥 내밀었다. 누나랑 우동주가 만나는 게 싫은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거다. 둘이 공통 화제라고는 나밖에 없으니 매번 내가 도마 위에 오르는데, 둘이서 날 놀리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애인 앞에서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에피소드가 낱낱이 밝혀지는 게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하하! 좋게 말해 성실이지, 완전히 애어른이 따로 없었다니까요? 학교 갔다 오면 손 씻고 양치질한 다음 숙제부터 딱 해놓고, 다음 날 책이며 준비물 딱 챙겨놓고.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으니까. 내가 고등학교 때 놀러 다닐 때도 부모님이 아니라 얘 눈치를 보고 다녔어요.”
“그랬구나…. 세영 선배는 어릴 때부터 귀여우셨구나….”
이놈이 벌써 술에 취한 건지, 아니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누나가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데 내가 귀엽다는 둥 헛소리를 하는 걸로도 모자라 테이블 아래로 허벅지를 슬슬 문지르기까지 했다. 혹시나 누나가 눈치챌까 봐 우동주의 손을 쳐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서 술만 들이켰다.
“자기 딴에는 완벽하게 군다고 하는데 가끔씩 허당기가 나와서, 그게 귀여웠죠.”
“아, 저도 그거 뭔지 알아요! 선배 가끔 엉뚱한 실수를 하실 때가 있거든요.”
“그죠? 세상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다가 꼭 이상한 데서 어버버거린다니까?”
“그게 선배 매력이죠. 하하하.”
하하하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우동주. 매력이고 나발이고, 제발 내 무릎 위 15cm 지점에서 꼼지락거리는 손 좀 치우고 얘기할래?
누나와 우동주가 주세영이라는 생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회를 뜨기도 했다가 초밥을 만들기도 했다가 매운탕을 끓이기도 했다가 하는 동안, 나는 점점 끈적하게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드는 우동주의 손을 신경 쓰느라 반박도 제대로 못 했다. 긴장을 숨기느라 연거푸 사케를 들이켰더니 술기운도 올라오는 것 같았고.
“근데… 동주 씨는 진짜 볼 때마다 멋있어진다.”
“에이, 별말씀을요. 아직도 촌놈 티 벗으려면 멀었죠.”
얼씨구. 맨날 나보고 자기 이제 완전히 서울 남자 같지 않냐고 강요하는 놈이 내숭 떠는 거 봐라.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완전히 모델 같은데. 저기, 그래서 말인데, 동주 씨…”
“안 돼.”
나는 또 한 잔 쭉 들이켜던 사케잔을 탁 내려놓으면서 단호하게 누나의 말을 끊었다. 뭔가 느낌이 싸했다.
“뭐?”
“안 된다고.”
“내가 무슨 얘길 할 줄 알고 안 된대?”
“뻔하지. 또 무슨 잡지 촬영하자는 거 아니야?”
“…….”
바로 대꾸하지 못하는 걸 보니 딱 맞췄네. 내가 그때는 동거 문제로 우동주하고 아슬아슬했던 때라 나 일하는 동안 기분전환이라도 하라고 어쩔 수 없이 허락했던 거지, 두 번이나 내 애인 얼굴을 전국적으로 뿌려댈 것 같아? 그때 결혼정보회사에서 우동주한테 연락 왔던 게 지금까지도 충격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야, 내가.
“아니, 이번 기획이 클래식한 남자를 다루는 건데, 요즘 남자들 다 비실비실하잖아. 선이 굵직굵직하고 무게감 있는 남자를 찾는다는데, 내가 동주 씨 생각이 딱 나더라고!”
무게감? 얘가 침대 위에서 얼마나 경박한 애인 줄이나 알고 지금 무게감을 우동주한테서 찾는 거냐고.
전국적으로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그렇지만, 촬영을 하면 누나하고 또 얽히게 될 텐데 두 사람이 이 이상 가까워지는 건 웬만하면 막아야 할 것 같았다.
“하여간 안 돼. 얘가 무슨 전문 모델이야?”
“전문 모델 쓰는 촬영이면 내가 권하지도 않아요. 그때처럼 일반인 대상으로 한 기획이야. 전―혀 부담 없이 평소대로만 해주면 돼요, 동주 씨.”
“그런 데에 자꾸 얼굴 팔려서 뭐 좋을 게 있다고? 누나도 좀 누나 선에서 해결을 해. 왜 자꾸 내 주변을 끌어들여?”
“야, 근데 넌 왜 네가 나서서 된다, 안 된다야? 난 엄연히 동주 씨한테 부탁하는 거거든? 이상한 애네, 얘.”
그렇지. 이상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지금 좀 이상해 보이고 끝나는 게 낫지, 나하고 우동주 사이에 깊이 파고들었다간 누나, 더 이상한 꼴을 보게 될 수도 있다고.
“회…회사 선배로서 허락 못 해. 괜히 그런 데 들락거렸다가 헛바람 들면 회사 일에 불성실해질 거 아니야.”
그때까지 그저 웃는 얼굴로 앉아서 누나와 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우동주가 발표권을 요구하는 초등학생처럼 갑자기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첫 신입사원 환영 회식 때가 떠오르는 패기 넘치는 눈빛을 보니 예감이 안 좋았다.
“아니요, 선배님! 저 절대 그렇게 개념 없는 놈 아닙니다! 저번에 해보니까 촬영도 하루면 끝나던데요, 뭐. 누님, 저 할게요. 시켜만 주세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이런 기분일까? 평소엔 그렇게 찰떡 같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놈이 왜 이럴 땐 꼭 손발이 안 맞냐고. 내가 진짜 그거 땜에 이렇게 반대하는 거겠냐?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야.
“진짜? 내가 또 동주 씨 때문에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겠네.”
목적을 달성한 누나는 기뻐했지만, 나는 말없이 옆에 앉은 우동주에게 따갑고 끈질긴 시선을 보냈다. 내 눈을 보고 말해봐.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는데, 저걸 또 한다고?
“너 진심이야?”
“누님이 제가 필요하시다잖아요. 별 볼 일 없는 몸뚱이지만,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갖다 쓰세요.”
“진짜 그래도 돼요? 동주 씨 같은 몸이면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한텐 금덩이지. 맨날 갖다 쓰고 싶을 정도야.”
네, 두 분이 아주 쿵짝이 잘 맞으시네요. 둘이 거리가 좁혀질수록 눈치 빠른 누나가 냄새를 맡진 않을지 걱정하는 건 또 나뿐이지? 그리고 우동주, 네 몸뚱인 내 건데 누구 마음대로 갖다 쓰라 마라야?
이런 놈 때문에 그 좋은 조건을 두고 잠시나마 이직을 고민했었다니… 내가 미친놈이지. 너 두고 보자. 내가 꼭 엔 소프트 이사 자리까지 올라가서 네 그 별 볼 일 없다는 몸뚱이, 마음껏 굴려준다.
점심시간에 엘리베이터에서 뽀뽀하고 놀 때만 해도 행복한 금요일이었는데, 신성한 회사에서 야한 짓이나 했다고 벌을 받는 건지. 애인은 서른셋에 찾아온 진로 고민에 속이 썩는지도 모르고, 그놈의 잡지에 또 얼굴을 비추겠다며 누나와 둘이서 하하호호 신난 우동주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내가 열 받은 거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모른 척하면서 허벅지를 치대는 손등이 기가 막혀서 있는 힘껏 꼬집어버렸다. 우동주는 누나 앞이라 아픈 티도 못 내고 어금니 꽉 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눈곱만큼도 불쌍하지 않았다.
너 하여간 이번에도 결혼정보회사니 뭐니에서 연락 오기만 해봐. 부장님한테 부탁해서 확 맞선 봐버릴 거니까.
□ WOO DONG ZOO
[네? 이번 주요?]
퇴근 후에 주세영과 월화 드라마를 열혈 시청하고 있는데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에게는 자주 안부 전화를 드려도 아버지한테는 그게 잘 안 되는 무뚝뚝한 아들놈이라, 오랜만에 아버지하고 서로 이런저런 안부를 전하던 나는 ‘그 대목’에서 일단 주세영의 눈치를 살폈다.
통화하던 내 목소리 톤이 갑자기 높아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는 그 사람에게 괜찮다는 표시로 웃어주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일단 다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어디 여행이라도 가는 거냐?]
[아니요… 그건 아닌데….]
아버지의 건축 사무실은 군산 시내에 있었고, 주로 전라도를 무대로 활동하시고 있었지만, 가끔은 서울에서 일이 잡히는 경우도 있었다. 영감을 주는 좋은 자리를 발견하시면 다른 회사를 통할 것 없이 아버지 사무실에서 직접 빌라나 빌딩을 짓기도 하시는데, 지금 주세영과 내가 살고 있는 빌라 역시 그중 하나였다.
꼭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서울에 오시는 일이 드물지는 않았는데, 내가 이 집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호텔에 묵으시는 경우가 많아서 서울에 오신다 해도 얼굴을 뵙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우리 집에서 묵고 싶으시단 얘기였다. 그것도 서울에 계시는 동안 내내.
[오랜만에 너하고 시간도 보내고, 집이 어떤지 상태도 좀 볼 겸 가볼까 싶은데. 날씨가 좋았으면 테라스에서 바비큐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게 아쉽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어떻게 ‘이제 여긴 주세영과 저의 보금자리고, 주세영이 불편해하니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할 수가 있겠냐고. 아버지가 이 집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건축하셨는지, 이 집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내가 다 아는데.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버지하고 보낸 시간이 정말 얼마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방문을 저지할 그럴 듯한 핑계가 전혀 없었다.
“왜,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
거실로 나가보니 그 사람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아버지가 오신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다. 문제는 주세영이지. 하아… 악몽이 떠오른다… 악몽이…. 우리의 첫 크리스마스에 우성주 그놈이 쳐들어온 바람에 가장 로맨틱하고 행복해야 하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주세영과 냉전을 치러야만 했던 그 악몽이….
아버지는 우성주와 달라서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 관계로, 우리 집에 와 계신다고 해도 주세영과 마주칠 일도 별로 없을 거고, 그러니 우리 관계를 들킬 염려 따윈 더더욱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지만, 문제는… 주세영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분명히 아버지가 오실 거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패닉일 텐데. 이걸 뭐라고 말해야 되는 거지?
“아니… 아버지 이번 주에 출장 때문에 서울 올라오신다고.”
“으응. 이번엔 시간 좀 내서 아버지하고 저녁이라도 해. 저번에 오셨을 때도 너 얼굴도 못 보고 내려가셨잖아.”
“어? 어….”
그건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바쁘셔서 그런 건데, 주세영은 맨날 나만 불효자 취급한다.
아버지가 서울 오시는 게 가끔 있는 일도 아니고, 주세영은 그 이후로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요즘 주세영과 둘이서 푹 빠져 있는 드라마였는데, 난 그것도 더 이상 눈에 안 들어왔다. 옆자리에 앉아 드라마에 몰입한 주세영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면서, 언제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주세영의 패닉의 강도를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을지, 한 대라도 덜 얻어맞을 수 있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남자 주인공하고 여자 주인공의 오해가 오늘은 꼭 풀려야 할 텐데. 그리고 주세영이 좋아하는 그 조연도 좀 많이 나와주고. 그래야 기분이 좋을 거 아니야. 조금이라도 더 기분이 좋을 때 얘기해야 한 대라도 덜 맞… 아니, 우리 섬세한 주세영의 멘탈이 조금이라도 덜 손상되지.
“아, 진짜 저것들은 짜증나게 왜 저러는 거야? 그렇게 서로 못 믿을 거면 연애를 왜 하냐고!”
제기랄…. 드라마에 기대보는 건 꿈도 못 꿀 것 같다. 드라마 때문에 오히려 주세영 기분만 더 망치게 생겼으니, 시간을 끌어봐야 더 불리한 게임이 될 것 같았다. 직접 나서서 주세영 기분을 업시키는 수밖에.
일단 좀 더 그 사람 가까이로 스윽 옮겨갔다.
“그러게…. 아니, 좋아하면 서로 좀 믿어줘야 할 거 아니야. 저렇게 얘기도 안 들어주고 가버리는 게 사랑이야? 어?”
주세영의 분노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슬금슬금 그 사람의 허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주세영이 가장 기분 좋을 때라면 아무래도 ‘그거’를 할 때였다.
“뭐야… 아직 드라마 안 끝났어.”
난 주세영이 이럴 때 진짜 짜릿하다.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아직 드라마 안 끝났다니. 드라마 끝나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얘기 같아서 꼴릿하기도 하고, 이런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우리 사이가 약간 부부처럼 느껴져서 새롭기도 하고. 하여간 별걸로 다 사람 흥분하게 하는 남자였다.
“당신은 드라마 봐.”
아예 그 사람의 등과 소파 사이로 파고 들어가 자리를 잡은 나는, 뒤에서 그 사람을 껴안은 채 본격적으로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날렵한 근육이 찰싹 붙은 마른 피부 위를 쓸어 올라가 존재감 확실한 유두 위를 손가락으로 은근하게 더듬었다.
“아저씨냐?”
“어, 아저씨라고 쳐.”
그러는 자기는 아저씨라고 면박 주면서 유두는 왜 세우는데?
아무리 하기 어려운 얘기라도 그렇지, 잠자리에서 허락을 받아내려고 하냐고, 사내새끼가 하는 짓이 치사스럽다고 욕하지 마라. 동거 3년 차에 이 정도는 꼼수가 아니라 요령이었다. 대놓고 부딪쳐서 싸울 거 뭐 있나. 돌아가더라도 좋게 좋게 가는 게 좋은 거지. 그리고, 멘탈 나간 주세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이거, 확실히 처음보다 더 커진 거 맞지?”
아버지 오신단 얘기 하기 전에 점수 좀 따려고 시작한 거였는데, 내가 먼저 그럴 기분이 충만해졌다. 애초에 그 사람 몸을 만지면서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긴 했지만.
더 가까워질 것도 없이 바짝 붙어 앉은 주세영의 허리를 자꾸 더 끌어당겨 안으면서 단단하게 뭉쳐진 유두를 살살 긁어댔다.
“야, 너…!”
뒤에서 주세영을 껴안고 날이 갈수록 실팍해지는 가슴근육을 주무르면서 죽여주는 엉덩이 사이에 페니스를 치대고 있으면 저절로 숨결이 흐트러졌다. 자극을 받아 평소와 달리 통통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쥐고 비틀다 잡아당기면, 주세영은 말로는 싫은 척해도 허리도 못 편 채 내 팔 안에서 움찔거렸다.
“찌찌. 기분 좋다.”
가슴 위를 더듬던 내 두 손을 붙잡은 주세영이 그중 하나를 자기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얇은 실내복 위로, 주세영의 페니스의 부피감과 열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할 거면, 제대로 해.”
멋진 남자야. 날마다 반한다니까.
■
낮게 헐떡거리는 주세영의 신음이 조도를 낮춘 거실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거의 드러눕듯이 소파의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주세영은 완전한 알몸이었다. 아무리 우리 두 사람의 집이라 해도 침대 위에서의 알몸과 거실 소파 위에서의 알몸은 감흥이 달랐다. 좀 더 위험한 장난을 치고 있는 기분에 목구멍 안쪽이 자꾸 말라붙었다.
엉덩이를 소파 끝까지 쭉 내밀고 가슴까지 끌어올린 두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주세영은 벌써 세 개까지 삼킨 내 손가락이 드나드는 애널을 이쪽으로 훤히 공개하고 있었다.
윤활제를 가득 머금은 애널 안으로 바짝 오므린, 결코 가늘다고 할 수 없는 길고 투박한 세 개의 손가락이 깊이 파고들면, 내부를 채우는 압력에 애널 안에서 윤활제가 새어 나와 손가락과 애널이 맞닿은 주변으로 둥글게 거품을 일으켰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정에 이를 것 같은 장면이었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손가락과 내벽 사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틈으로 젤이 삐져나오면서 만들어내는 그 마찰음마저도 페니스의 삽입을 연상시켜 나를 부채질했다.
소파 아래 무릎을 꿇은 채 허벅지를 벌리고 앉은 나의 위치 탓에 그 모든 장면이 어느 때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동거한 햇수가 햇수이니만큼 이런 자세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전에도 몇 번 해봤다는 것이 흥분을 시들게 하는 이유가 되진 못했다. 어깨 높이에서 벌린 무릎 사이로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춰 느리게 들썩거리는 주세영의 아랫배와 가슴이 보이고, 이가 닿은 곳이 하얘지도록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얼굴이 보이고, 발기한 채 음모 위에 착 달라붙은 팽팽한 성기가 보였다.
“으, 으으응….”
온 힘을 쏟아가며 마구 들쑤셔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손가락 끝마디를 구부려 이젠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손에 익은 그 부위 위를 지그시 문지르자, 주세영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끙끙댔다. 종아리가 풀리지 않도록 스스로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등에 순간적으로 핏줄이 팍 솟는 게 보였다. 복근이 예쁘게 잡힌 뱃가죽의 오르내림이 훨씬 가팔라졌다.
전립선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기에는 성기보다 손가락 쪽이 더 유리했다. 그렇다고 꼭 주세영이 손가락을 더 좋아하는 건 아니었고, 두 방식이 끌어내는 흥분의 성질이 달랐다. 소파 위에서 급하게 치르는 섹스 시에는 손가락을 이용해 흥분의 직전까지 빠르게 몰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흐리멍덩하게 풀려버린 주세영의 눈에 똑바로 시선을 맞춘 채 같은 부위를 계속해서 자극했다. 뒤로 빠져나올 땐 긁어내듯이, 안으로 다시 파고들 땐 밀어 올리듯이. 그곳에 남은 얼룩을 힘주어 지워내려는 사람처럼 손끝을 비벼댔다.
“으! 윽! 흐으, 흐, 흑!”
발끝으로 소파 끝을 겨우 지탱한 주세영이 허리를 들썩거리며 몸부림쳤다. 붙잡고 있던 다리를 놓친 두 손 중 하나가 허공을 더듬다 내벽을 들락거리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밀어내려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강한 쾌감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일시적이고 반사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코앞의 엉덩이는 더 헤집어주길 원하며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이보다 더 금욕적일 수 없어도 잠자리에선 처음부터 대담했지만, 성적으로 완숙해진 요즘의 주세영은 사람 피를 말렸다. 맨살을 맞댄 횟수가 늘어날수록 어색함과 수치가 옅어지면서 그 자리에 더 적나라하게 활짝 열린 섹스 라이프가 들어앉았고, 하고 또 해도 눈앞의 육체에 대한 욕구는 여전했다. 이런 걸 보고 살았는데, 내가 이제 와서 다른 걸 보고 서기나 하겠냐고.
“가지 말고 기다려봐…. 금방 더 좋은 거 넣어줄게….”
이대로 손가락만 재미 보게 할 수는 없었다. 절정의 직전에서 자극을 멈춘 나는 재빠르고도 정확한 동작으로 페니스에 콘돔을 씌웠다. 그 사이에도 위로 들린 그 사람의 고환 뒤를 이로 잘근거렸다. 주세영은 여기를 건드리면 반드시 질질 싼다. 원래는 이런 천박한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고고한 생명체지만, 이것만큼은 다른 어떤 말로도 대체될 수 없었다. 그리고, 섹스할 때 고고해서 뭐 하게.
“으… 으윽! 거기, 치, 치워…. 가지 말라면서 거긴 왜…!”
거봐라. 고환을 빨아주면 풀발기까지 1분, 사정까지 30초였다. 건드리기만 해도 픽픽 가버리는 그런 10대 애들도 아니고, 페니스에는 아직 손도 안 댔는데 고환 뒤를 좀 빨아줬다고 요도에서 뭐가 막 흘러나오는 서른세 살이라니. 야해. 말도 못하게 야해. 누가 알까 무서워.
좀 전까지 내 손가락이 들락거리며 늘여놓은 그 사람의 애널은 페니스 역시 큰 저항감 없이 빨아들였다. 하지만 성기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쥐어짜는 압박감은 여전했다. 파고들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끝까지 진입한 페니스를 전부 삼키고 두둑해진 뱃가죽은 흥분과 포만감으로 좀 전보다 더 빠르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뿌리 부분을 끊어낼 것 같은 입구의 조임에 입술을 벌려 신음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소파의 등받이에 고개가 직각으로 꺾인 그 사람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코끝을 혀로 핥으며 페니스를 밀어 넣은 그대로 허리를 둥글게 비볐다.
“세게 해줄까, 응?”
“미친….”
내 앞에서 이런 꼴을 하고도 여전히 입으로는 도도하기 그지없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3박 4일, 아니 4박 5일만 있다가 가시면 안 될까?
“왜, 당신 뱃가죽이 들썩거리는 거 보니까 세게 해줬으면 하는 거 맞는데.”
“알면… 묻지 말고 그냥 해.”
가끔 생각한다. 주세영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부끄러움일까 박력일까. 그게 뭐든 나를 부추기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사람의 양 손목을 꽉 붙잡아 아래로 팽팽하게 당겼다. 아직 본격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주세영이 기대감으로 가득 찬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실망시킬 수 없지.
“윽! 흐으… 흐으윽!”
초반부터 봐주는 거 없었다. 주세영과 함께 소파까지 부숴버릴 기세로 허리를 털었다. 귀두만 남기고 페니스를 뒤로 뺐다가 뿌리까지 강하게 박아 넣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두 팔을 결박당한 채 들쑤셔지는 주세영은 고개를 마구 저으면서 어깨를 비틀었다.
“나, 잠깐… 잠깐 페니스 좀 만져줘! 만져줘, 동주야!”
“안 돼…. 안 만지고도, 당신, 갈 수 있잖아.”
몸속에 내 것을 넣은 채로 주세영의 몸을 추슬러 엉덩이를 좀 더 위로 들었다. 내가 어디를 찔러주려 하는 건지 경험상 아주 잘 알고 있는 주세영은 차라리 공포에 더 가까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마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벌써 젖을 대로 젖은 주세영의 성기가 날씬한 복부에 거꾸로 달라붙어 있었고, 거기서 흘러내린 체액이 들뛰는 가슴 위로, 곤두선 유두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거기…! 거기야! 거기!”
소파 위에 거의 구겨지다시피 몸을 반 접은 알몸의 주세영은 YES를 외쳐댔다. 주세영 뒤의 등받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허리와 허벅지에서 나오는 모든 힘이, 1그램도 낭비되지 않고 주세영의 몸에 곧장 전달되도록.
3인용 물소가죽 소파가 덜컹거리고, 주세영은 목소리가 다 갈라지도록 신음하고,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온몸의 근육을 최대치로 팽창시킨 채 주세영을 흔들어댔다.
“좋아! 아, 동주야… 좋아!”
가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상체를 더 숙여, 공기가 모자란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는 주세영의 입 안에 혀를 넣었다. 주세영은 입술을 오므려 내 혀를 빨아들일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숨을 들이켜느라 여전히 턱을 벌린 그 사람의 입안을 혀로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버지… 며칠만 와 계실 거야. 그것도 좋지?”
“좋아… 아, 좋아…. 좋아, 멈추지 마!”
멈춰달라고 애원을 해도 안 멈출 거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 오랫동안 입을 다물지 않은 탓에, 유난히 선이 단정한 주세영의 입가에서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체를 숙여 턱 끝으로 흐르는 타액을 핥아 올리며 되물었다.
“좋다고 했어, 당신?”
위로 들린 그 사람의 허벅지를 단단히 감싸 안고, 내 사타구니에 그 탄탄한 엉덩이가 완전히 밀착하도록 바짝 끌어당겼다. 그 상태로 몇 번 움직이기도 전에 주세영은 사정해버렸고, 사정하는 동안에도 내가 전혀 속도를 줄여주지 않고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댄 바람에 그 사람의 얼굴과 머리카락에까지 정액이 튀어버렸다. 내 거든 자기 거든, 정액을 뒤집어쓰고 헐떡거리는 주세영이란 그 어떤 발기부전도 단번에 해결할 극강의 비아그라였다.
“야, 너… 어떻게 거기서 또 커져…?”
사정 직후 눈가와 입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주세영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커지긴 뭘 어떻게 커져. 당신이 먹였잖아, 주세영 비아그라.
■
물론 이럴 줄 알았다. 알면서도 한 거다.
“너 진심으로 미쳤냐?”
“아까 당신이 분명 오케이 했잖아?”
“내가 언제!”
둘 다 땀범벅이 될 정도로, 애초의 계획보다 더 격렬했던 섹스가 끝난 뒤, 여느 때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 없이 늘어진 그에게 물을 가져다주면서 아버지 얘길 다시 꺼냈더니, 역시나 주세영은 펄쩍 뛰었다. 땀과 정액으로 범벅이 돼서. 그것도 침대도 아닌 소파에서. 홀딱 벗은 채로.
“주세영 선배님,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말하시는 겁니까, 지금?”
“사나이 안 해, 이 새끼야. 섹스 중에 배꼽까지 찔러 넣어놓고 사람 헐떡거리는 사이에 유도신문 하는 건 사나이냐? 어? 어?”
“주세영 말하는 것 좀 봐…. 언어희롱이야, 완전. 생긴 건 이렇게 얼음처럼 생겨가지고 말하는 게 그렇게 질펀하면, 내가 또 서, 안 서? 어? 당신이야말로 좀 말해봐.”
소파에 늘어져 입으로만 펄펄 뛰는 그 사람의 눈앞에 아직도 완전히 다 사그라지지 않은 성기를 들이밀면서 어떻게든 잘 넘어가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주세영은 그렇게 좋다고 놔주지 않던 내 페니스를 손등으로 툭 밀쳤다.
“나 농담할 기분 아니야. 네 동생 왔을 때 우리가 얼마나 악몽 같았는지 잊었어? 근데… 근데 뭐… 이번엔 아버니이임? 아, 몰라. 나 가출할 거야.”
“어디로.”
이런 반응도 물론 예상했다. 놀랍지도 않아요. 이래야 내 주세영이지.
“호텔이라도 가 있든지 해야 할 거 아니야? 네 동생은 좀 얼빵해서 눈치 못 채고 내려갔다고 치자. 야, 부모님은 절대 못 속여. 금방 알아채실 거라고.”
“주세영, 일단 진정 좀 하자. 응?”
담배에 불을 붙여 주세영의 입술에 물려줬다. 그랬더니 그건 또 착하게 받아 피운다. 이 와중에도 귀여워. 홀딱 벗고 화내니까 섹시하기까지 해. 아버지는 어차피 우리가 어떻게 해도 오실 아버지고… 2라운드 들어가면 안 될까?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갑자기 집에 왜 오신다는 거지? 출장 오실 때마다 항상 호텔에 계셨었잖아. 설마… 벌써 눈치채신 건가?”
패닉이 시작됐다. 예상한 코스 그대로다.
“망상은 나만 하는 줄 알았더니, 우리 주세영도 소설 잘 쓰네. 호텔에 계시면 나하고 만날 스케줄 정하기도 애매하잖아. 내 얼굴도 볼 겸, 이 집 상태도 점검하실 겸 겸사겸사 오시는 거야. 잊었어? 이거 우리 아버지 빌라잖아. 아버지가 설계하신 것 중에서도 특히 더 좋아하시는 집이란 말이야. 내가 살기 전에 우리 가족이 서울에 오면 늘 지내던 데라서 추억도 많고. 그래서 그냥 와보고 싶으신 거야. 아버지가 그 멀리에서 우리 관계를 어떻게 알아?”
“…….”
담배를 몇 모금 피우면서 내 얘기를 듣고 난 주세영은 그제야 이성이 아주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소파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를 주세영 앞으로 옮겨다 주었다.
“그래도 난 나가 있는 게 좋겠어. 우린 익숙해져서 못 느끼지만, 집에 있다가 무의식중에 풀어져서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어떡해?”
주세영은 심각한데, 완전히 겁먹고 있는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우동주는 주세영의 다리 사이로 자꾸 시선이 갔다. 윤기 흐르는 음모 사이에 모양 좋게 늘어진 페니스가 너무 만져보고 싶게 생겼다.
“에이, 그럼 더 의심 산다니까. 이미 회사 선배하고 사는 거 가족들이 다 알고 있는데, 아버지 오신다고 했다고 그 선배가 집에서 나가버리면 그게 더 이상하지.”
“들킬 거 같아…. 느낌이 안 좋아. 너희 아버진 센스도 좋으시다며.”
“주세영.”
“…….”
담배를 피우는 그 사람의 옆자리에 앉아 나와의 정사로 흘린 땀이 아직 끈적하게 남아 있는 두 뺨을 감싸 쥐고 나를 보게 했다. 우리 알몸으로 이러고 있는 거 누가 보면 되게 코메디겠다. 그치?
“그 촬영. 누님이 부탁하신 거. 그거 내가 왜 한다고 한 줄 알아요?”
“여자들한테 인기 끌고 싶어서?”
“당신 진짜…. 누님한테 잘 보여두면 혹시라도 나중에 무슨 일 있을 때, 조금이라도 날 이쁘게 생각해주실 거 아니야. 그러니까 당신도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서 이번 기회에 미리미리 우리 아버지한테 점수 좀 따놔.”
“…….”
이제야 이 애인의 깊은 뜻을 아셨습니까? 저보다 세 살 연상에 회사 선배인 주세영 씨?
내가 잡지 촬영 제안에 응한 걸 지금까지도 못마땅해하고 있었던 그 사람은 조금은 감동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내 마음을 몰라줬던 게 미안했는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왕 여기까지 이야기가 온 거,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고 진지하게 털어놓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결혼 압박도 그렇고, 아직은 대강 흘려 넘길 만하지만 앞으로는 가족들도 주변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권하고 그럴 거 아니야. 그럼 그때마다 대충 넘길 수도 없는 거고, 언젠가는 가족들한테 털어놔야지. 인정은 못 받더라도 알고는 계셔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중을 위해서 이번 기회에 우리 같이 아버지한테 점수 좀 따놓는다고 생각하자. 응? 그럼 언젠가 이실직고할 때 백 대 맞을 거 한두 대쯤은 빼주시지 않겠어?”
그 사람이 잔근육 살살 붙은 잘빠진 팔을 뻗어, 필터까지 타들어갈 정도로 바짝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버님, 반찬은 뭐 좋아하시냐?”
아버님 반찬 뭐 좋아하시냐는 얘기에 페니스가 움찔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멋진 남자야. 날마다 반한다니까.
■
“나 너무 편하게 입고 있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갈아입을까?”
회의를 마친 아버지가 이쪽으로 출발하셨다는 전화가 온 이후부터 주세영의 불안 증세는 한층 더 심각해졌다.
이번 주 내내 집 안을 홀랑 뒤집어가면서 대청소를 하고, 혹시 모른다면서 젤이나 콘돔, 섹스할 때 사용하는 장난감 따위를 여기 숨겼다 저기 숨겼다 하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일도 손에 안 잡혔단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남기고, 이러다 쓰러질까 걱정이다. 내 애인 마음고생 시킨다고 벌써부터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질 것 같은 걸 보니, 나 아무래도 대단한 효자는 못 될 듯.
“주세영, 지금 밤 11시야. 밤 11시에 자기가 사는 집에서 차려입고 있는 사람이 어딨어? 그게 더 이상해.”
“야, 주세영이라니. 너 혹시라도 아버님 앞에서 말실수했다가는 진짜 나 가출하는 꼴 보게 될 줄 알아. 지금부터 꼬박꼬박 선배라고 해. 알았어?”
“지금 상황 봐선 내가 아니라 당신이 실수할 거 같은데. 너무 긴장해서?”
내 코앞에 바짝 들이댄 주세영의 검지를 손으로 감싸 옆자리로 끌어당겼다. 좀 앉으세요. 우리 아버지인데 나까지 긴장하겠네.
“하아… 어떻게 긴장을 안 해. 너희 아버지잖아….”
“그렇지. 시아버지 처음 뵙는 자리인데 긴장하는 게 정상이긴 하지.”
“야, 왜 시아버지가 되냐? 장인어른이면 몰라도.”
긴장 좀 풀라고 옆에 앉혀놓고 어깨를 주물러주는데, 주세영은 갑자기 이상한 데에 꽂혀가지고 나를 돌아보면서 정색을 한다.
“너 설마, 내가 너한테 엉덩이 대준다고 지금 너희 아버지를 시아버지로 설정한 거냐? 너 그런 거 진짜 고리타분한 발상인 거 알아? 내가 세 살 연상이니까 시집을 오더라도 네가 나한테 오는 게 맞는 거지.”
자기가 이러면 되게 살벌하고 무서운 줄 아는데, 어쩌나… 내 눈엔 귀엽기만 한데. 아무튼 2년 넘게 같이 살면서 옆에서 보니까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이 더 적다고 내가 시집가는 게 된다는 발상은 안 고리타분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말이.
“그럼 시집은 내가 가는 걸로 하고, 당신도 나한테 좀 넣어줘.”
“뭐?”
“당신 말이야… 내가 넣고 흔들어줄 때, 진―짜 기분 좋아 보이거든. 나도 궁금해. 내가 워낙 그쪽으로 호기심이 왕성하잖아. 당신이 나한테 장가오는 거로 할 테니까, 가끔은 당신도 나한테 좀 넣어주라고.”
“진심이냐?”
진심은 개뿔. 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내내 긴장 타고 있던 주세영이 지금만큼은 아버지 생각도 잊은 것 같으니 차라리 이쪽으로 유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장난 같아? 솔직히 할 때마다 진짜 궁금하거든.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여자들과는 아예 서로 성별이 다르니까 아무리 기분 좋아 보여도 어차피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진 않았지만, 같은 거 달린 같은 남자인데도 주세영이 내가 모르는 뭔가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니, 내가 보통 남자들은 모르는 뭔가를 주세영이 느끼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야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어떤 기분이길래 저런 소리를 내고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조여대는 걸까, 안 궁금할 수가 없는 반응이었다.
“너, 날 사랑하긴 하냐?”
하지만 주세영에게서 돌아온 건 의외의 반응이었다. 갑자기 여기서 왜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의심하는 대목으로 넘어가는 건데? 어떻게 하면 발상이 그렇게 가? 하지만 그 사람의 표정은 극히 진지했다.
“뭐가?”
“어떻게 그 덩치를 해가지고 넣어달란 소리가 나와? 내가 원래 게이였던 것도 아닌데. 너도 똑같이 노멀이었던 남자로서 좀 양심이 있어라. 근육 다 빼고, 최소 60킬로까지 만들어와. 그럼 생각해볼게.”
“60킬로? 거기까지 빼면 난 죽어.”
“그러니까, 그만큼 말도 안 된단 소리야.”
주세영이 오냐, 좋다 하면서 나한테 넣겠다고 덤벼도 곤란하긴 한데, 막상 이렇게 나오니까 은근히 기분 나쁘네, 이거…. 나 같아도 어깨가 백과사전보다 두꺼운 놈한테 넣으라면 그건 싫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난 당신 몸이 그렇게 된대도 기쁘게 안을 수 있는데, 당신은 무슨 발언이 그래? 그거야말로 너무 사랑이 없는 거 아니야?
주세영,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해. 이건 자존심(?)이 달린 문제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
“오셨나 봐!”
초인종 벨소리가 울리고, 긴장이 좀 풀어진 것처럼 보였던 주세영은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 그대로 경직됐다. 60킬로까지 안 빼면 날 안아주지도 않겠다는 사랑 없는 남자였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에 동성인 나와의 관계를 받아들여준 남자이기도 했다. 전에 없이 긴장한 주세영의 두 뺨을 감싸 쥐고 마지막으로 최면 비슷한 걸 걸어줬다.
“당신이 평소에 어른들한테 하는 것처럼 하면 돼. 우리 아버지라고 괜히 의식할 필요 없어.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사윗감인지 며느릿감인지 아직 모르시니까 당신 평가하고 그러는 거 없다고.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응?”
주세영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쁘고 착해서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주세영이 지금 아버지가 현관 앞에 와 계신 마당에 그딴 짓을 왜 하는 거냐고 펄펄 뛰기 전에 얼른 나가서 현관문부터 열었다.
“아버지, 어서 오세요.”
“그래, 우동주. 잘 지냈냐?”
현관 앞에 서 계신 아버지는 역시나 늦은 시간까지 회의를 하고 파김치가 된 중년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늘 내가 닮고 싶었던 여유 넘치고 건강한 미소 그대로였다.
“그럼요. 회의를 늦게까지 하셨네요. 피곤하시죠?”
“그래, 나도 이제 나이를 먹긴 했는지 좀 피곤하긴 하다. 회의 뒤에 술도 한잔하자는 거 겨우 거절하고 오는 길이야.”
장난기 섞인 엄살을 부리며 아버지는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의 브리프케이스를 받아들면서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스타일링을 체크했다. 아버지하고 같이 살 때만 해도 청바지에 운동화만 고집하던 우동주가, 일평생을 호남 지역 패셔니스타로 군림해오신 아버지의 스타일링을 체크한다는 자체가 시건방진 일이었지만, 주세영이 조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다가가게 하려면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오늘도 완벽했다. 회색빛이 도는 추계용 체크 슈트에, 허리를 알맞게 조인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코트의 깃 사이로 슬쩍 보이는 짙은 와인 컬러의 스카프. 슈트와 조화를 이루는 연한 회색 페도라에 브라운 컬러의 윙팁 슈즈까지. 몸에 착 감기는 맞춤 슈트의 맛을 알게 된 지 아직 3년이 안 된 우동주라도, 이만하면 주세영이 호감을 갖기에 충분하다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버지, 나이스. 존경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세영하고 이렇게 잘된 것도, 아버지가 사주셨던 구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주세영이 저에게 관심을 보였던 건 그것뿐이었거든요. 음… 그렇게 생각하니 좀 씁쓸하네….
“아, 전화로 말씀드렸죠? 저하고 하우스 셰어하는 회사 선배님.”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복도 끝에 대기하고 있던 주세영을 아버지에게 먼저 소개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에게 주세영을 소개하다니. 주세영은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있는데도 오늘따라 더 정갈해 보이고 단정해 보이고 똑똑해 보이고 난리였다. 아버지에게 다시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버지, 저하고 만으로 3년째 동거하고 있는 주세영입니다. 잘생겼죠? 잘빠졌죠? 유능해 보이죠? 저도 어디서 이런 사람을 찾았나 스스로 대견하다니까요. 하하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주세영입니다.”
좀 전까지 그렇게 긴장으로 몸부림치던 사람이 맞나 싶게, 그 사람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예의상 대외용으로 만들어 보이는 기계적인 미소가 아니라, 사적으로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보일 법한 경계심 없는 미소였다. 거봐, 슛 들어가면 이렇게 잘할 거면서….
“반가워요. 우수영이에요.”
아버지 역시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셨다. 원래 아버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절한 분이었지만, 피를 이어받은 아들의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 사람의 첫인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고 계시다는 걸. 주세영이야 워낙 어른들이 예뻐하는 타입이니까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안 들지, 그런 건 걱정도 안 했다.
“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응? 음? 그렇게 긴장했던 사람답지 않게 주세영이 너무 자연스럽다 싶긴 했는데, 어째 느낌이 좀 싸했다. 주세영 성격상, 예의 바르게 굴긴 해도 긴장했다는 게 팍팍 티 나면서 경직돼 있어야 정상인데,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했다.
잠깐만, 당신 지금 시선은 왜 사선으로 떨어뜨리는 건데? 이거 만화도 아닌데 뺨 위에 빗금 세 개, 그거 뭐야? 그리고, 영광은 무슨 영광? 우리 아버지가 뭐 유명인사라도 돼? 그리고 아버지, 이제 손은 그만 좀 놓으시죠?
“혹시 우리 우동주보다 후배 아닌가? 두세 살은 어려 보이는데.”
그러나 아버지는 맞잡은 손을 놓기는커녕 다정히 흔들면서 농담까지 하셨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였으면 작업멘트로 간주하고 당장 경계태세에 들어갔을 거다.
“아니요, 그런….”
더 가관인 건 주세영이다. 어어? 이거 봐라. 주세영, 당신 지금 빗금 세 개 더 늘어났어? 이런 거 그냥 사회생활이잖아. 처음 만나면 형식적으로 다 하는 얘기잖아. 선수끼리 왜 이래? 갑자기 웬 수줍은 척?
이게 아닌데 싶었다.
아버지가 발군의 스타일링으로 주세영한테 점수 좀 따주시기를 바랐던 나는, 아버지야말로 주세영의 로망 그 자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죠. 나 때문에 괜히 세영 씨까지 못 자고 기다리게 만든 거 아닌가?”
아버지의 저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매너를 늘 동경했었지만 지금만큼은 노 땡큐였다. 그러니까 거실로 들어가는 건 좋은데 등에 손은 왜 올리시냐구요. 그리고 5분 전에 처음 봤는데 ‘세영 씨’는 또 뭡니까? 주세영, 당신도 마찬가지야. 그 얌전한 태도는 뭐야? 나한테는 맨날 이 세우면서!
아버지가 오시면 주세영이 전적으로 나에게만 의지할 줄 알았던 나는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로 전락했고, 내 아버지와 내 애인 사이에서 깊은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아닙니다. 원래 아직 잘 시간도 아니에요. 코트하고 슈트 상의 받아드릴까요?”
“그래도 우리 아들 선배인데 그런 서비스를 받아도 되나?”
물론 안 됩니다, 아버지.
그러나 이미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내 집 거실에서 주세영이 다른 남자의 외투를 받아주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아버지라고 해도 아버지가 우동주는 아니니까 다른 남자 맞다. 그리고 주세영, 당신 너무해. 나한테 그런 서비스 한 번이라도 해준 적 있어?
“피곤하실 텐데, 시원한 맥주라도 좀 갖다드릴까요?”
“아, 시원한 맥주 한 잔 진짜 좋겠는데요? 그럼 미안하지만 세영 씨한테 부탁 좀 할게요.”
난 분명히 봤다. 아버지가 맥주 마시겠다는 말에 주세영이 신나서 주방으로 뛰어가는 걸. 웃고 있었다…. 웃음이 막 비어져 나오려는 걸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면서 아주 팔랑팔랑 주방으로 날아갔다.
이게 뭐야…. 대체 이건 누굴 위한 아버지 방문이냐고.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지.
주세영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급하게 아버지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거 아시죠? 선배가 손님방 쓰고 있어서…. 아버지는 서재에서 주무셔야 되는데, 아무래도 불편하시지 않겠어요? 내일이라도 호텔에 가시는 게 더 편하실 것 같은데. 아버지 침대 아니면 잘 못 주무시잖아요. H호텔 이그제큐티브룸 좋아하시죠? 룸이 있는지 제가 지금이라도 전화해볼까요?”
“내가 서재에서 잘게.”
주세영, 당신 오늘 엄청 재빠르다? 맥주를 벌써 가지고 왔어? 심지어 얼음 넣은 유리잔까지 챙겨서?
“내가 서재에서 자지, 뭐.”
주세영은 한 번 더 그렇게 쐐기를 박으면서 아버지 앞에 트레이를 곱게 내려놓았다. 내가 못 들었을까 봐 한 번 더 강조해서 말씀해주신 건가요, 선배님? 아주 고마워서 눈물 나겠네.
“아니, 방 주인을 쫓아낼 순 없지. 괜찮아요, 세영 씨. 신경 쓰지 마요. 이불은 있을 거 아니냐. 난 요하고 이불이면 되니까 걱정 마라.”
한 번도, 단 한 번도 주세영이 내 앞에서 다른 남자 때문에 얼굴을 붉히거나 일부러 단정하게 행동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윤 이사하고 있을 땐 어땠는지 몰라도 그건 내 눈으로 못 봤으니 패스다. 근데, 윤 이사를 쳐다볼 때도 분명히 지금처럼 눈이 하트가 되진 않았을 거다. 아무리 그 대상이 우리 아버지라도, 다른 남자를 보고 주세영의 눈이 하트가 되는 건 충격이었다.
“아버지 허리도 안 좋으신데 괜히 요 깔고 주무셨다가 고생하시면 안 되죠.”
아버지 생각해 드리는 척, 어떻게든 아버지와 그 사람을 떨어뜨려 놓고 싶었던 나의 마지막 몸부림에 주세영이 동조해주기를 바랐지만, 하트가 돼버린 주세영 눈에 질투심으로 조급해진 애인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되돌아온 대답은 나를 좌절하게 했다.
“그럼 네가 침실 양보해드려. 그럼 되겠네.”
주세영 뭐야, 진짜. 우리 아버지한테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 ZOO SE YOUNG
첫눈에 반했다.
그 베이커리에서 우동주를 처음 봤을 때, 서울에서 가장 멋진 남자라고 판단했던 스스로의 성급함을 지적하고 싶어졌을 만큼, 우동주의 아버지는 내 머릿속에 부연 실루엣으로만 막연히 존재했던 완벽한 남성이 구체적으로 현실화된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
빈틈이 없는 숨통이 조일 듯 깐깐한 완벽함이 아니라, 다가가기조차 조심스러운 거리감을 조성해 자신과 타인을 분리시키는 완벽함이 아니라, 슬쩍 여지를 남겨두는, 넉넉한 다정함과 여유가 공존하는, 훨씬 더 성숙한 형태의 완벽이었다. 오버하는 게 아니라 보는 순간 전해져오는 느낌이 그랬다.
요즘 서울엔 고급 슈트에 질 좋은 액세서리를 매치한 남자가 넘쳐나지만, 단순히 옷을 잘 입어서 패셔너블한 것과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우동주의 아버지에게는 스타일이 있었다. 스타일은 살아온 방식 자체를 룩(look)에 녹여내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옷차림으로 자신의 고유함을 드러낼 수 있는 자기표현의 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아버님을 보는 순간 그분의 스타일의 영향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누구든 중년이 되면 꼭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은연중에 풍겨 나오기 마련이었으니까. 그 연륜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을수록 더더욱.
“반가워요, 우수영이에요.”
눈과 입술만이 아닌, 얼굴 전체를 이용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악수를 청하셨던 그 순간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따르고 존경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이름마저 우수영이라니. 반칙입니다, 아버님.
보통의 아버지들이 아들의 회사 선배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으레 하듯이 ‘우동주 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시지 않아서 더 설렜다…라는 건 우동주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토록 공포에 떨었던 우동주 아버님의 방문이었고, 신체 건강하고 마인드 훈훈하고 밤에는 섹시하고 낮에는 귀여운 사랑하는 나의 우동주였건만, 지난 2박 3일 동안 우동주는 완전히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아버님은 나의 이상형, 아니, 이상향의 집결이나 마찬가지였다(‘이상형’ 아니다. ‘이상향’이다. 순간적으로 말이 잘못 나온 거다. 진짜, 정말).
음. <귀여운 여인> 속의 리차드 기어를 연상해보자. 거기에서 기름기는 빼고, 인간적인 소탈함과 담백함, 유머와 배려를 추가한, 진화된 형태의 리차드 기어라고 하면 조금은 비슷할 것 같았다. 이미 그 시점에서 더 이상 리차드 기어가 아닌 게 돼버리겠지만.
목요일 밤에 도착하셨던 아버님은 금요일이었던 어제도 일 관계로 늦게 귀가하셔서 그동안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나눴던 인사만으로도 아버님의 포로가 되기엔 충분했다. 아침에도 피로감 하나 없이 상쾌한 얼굴로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좋은 하루 보내고 이따 만나요.’ 하실 때마다 정말로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에 황홀해질 지경이었으니까.
“모처럼 휴일인데, 나한테 시간을 써서 어떡해요? 혼자 가봐도 된다니까 괜히 동주 그놈이 고집을 피워서….”
“아니에요, 저 오늘 별다른 계획도 없었어요. 아버님 아니었으면 하루 종일 집에서 따분하게 보냈을 텐데요, 뭐. 그리고… 동주가 아니라 제가 먼저 모시고 가고 싶다고 얘기한 거였거든요.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님이 어제 내가 입고 출근한 슈트를 칭찬하시면서 슈트를 맞춘 샵에 한번 가보고 싶어 하셔서, 원래 오늘은 우동주가 아버님을 모시고 드레시 리버스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우동주와 시간도 보내실 겸해서 스케줄까지 조정하셨는데, 계약 건으로 자꾸 말썽을 일으키는 거래처 때문에 박 팀장이 갑작스럽게 SOS를 친 바람에 우동주 스케줄이 꼬여버렸다.
아버님이 슈트 고르시는 법을 옆에서 보고 좀 배우고 싶었지만, 회사 후배가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에 끼는 건 아무래도 어색한 일 같아서 아쉬워하기만 하고 있었던 나에겐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우동주는 별로 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금요일 내내 아버님에 대한 나의 찬양을 들어야 했던 우동주는, 자기 아버지를 상대로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아버님 앞에서 내숭을 떤다나 뭐라나.
너희 아버지니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예의 바르게 하는 거잖아. 부장님 앞에서도, 거래처 담당자 앞에서도, 난 연장자 앞에서는 항상 예의 바르거든? 그걸 꼭 내숭이라고 받아들여야겠냐? 나를 무슨 모든 남자를 함락시킬 수 있는 옴므파탈 정도로 생각하면서 자기 혼자 불필요한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하다 하다 이젠 자기 아버지를 대상으로 질투라니. 언제 철들까 싶다.
“옷에는 영 관심 없던 놈이 왜 저렇게 바뀌었나 했더니, 그게 다 세영 씨 덕이었네. 내가 뭐라고 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역시 비슷한 나이의 선배가 멋지게 차려입은 걸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나 보지?”
“아버님에 비하면 전 아직 배우는 수준이죠. 어릴 때부터 아버님을 보고 자랐으니까 우동주도 늦게나마 안목이 트인 걸 거예요. 저야말로 동주가 어떻게 그렇게 스타일 감각이 빨리 성장하는지 신기했는데, 그게 다 아버님 덕이었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무심코 사이드 미러에 비친 내 얼굴을 봤는데… 음…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내숭을 떨고 있는 거라고 인정해야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요즘 우동주가 보이는 질투가 정당한 것이 될 순 없지만.
“빈말이라도 세영 씨 같은 멋쟁이한테 그런 말 들으니 기분은 좋은데요?”
“빈말 절대 아닙니다. 저 진짜 아버님한테 스타일링 팁 좀 배우고 싶을 정도인데요? 전 아침마다 뭘 입어야 할지 아직도 매일 고민이거든요.”
“하하, 그건 쉰이 넘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집에서 드레시 리버스까지는 원래도 가까운 거리였지만, 아버님이 직접 운전해주시는 차를 타고 달리는 그 10분 남짓한 시간이 아쉬웠을 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서울에 오실 때는 거의 KTX를 타고 오셔서 차는 렌트를 하신다기에 우아한 세단을 모실 줄 알았는데, 지하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던 건 의외로 SUV였다. 하지만 어쩌면 의외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렌트한 차량인데도 원래 아버님이 오너인 차처럼 보였으니까. 몇 년을 타온 것처럼. 오늘은 슈트가 아닌 캐주얼 차림을 하셔서 그런지 SUV의 운전석에 앉으신 모습에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슈트가 너무 잘 어울리기도 했고, 슈트 차림으로도 스웨터에 치노팬츠를 입은 것처럼 지극히 편안해 보여서, 캐주얼을 입으신 모습이 상상이 안 됐었는데, 슈트에 정통한 남자는 다른 어떤 옷도 자기 식대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고전적 진리였다.
카멜색 케이블 니트에 길이 잘 든 청바지를 입은 50대 남성이라니. 스타일링 자체보다, 그 연세에 그런 스타일링이 전혀 어색함 없이 어울린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억지로 어려 보이려 하는 느낌이 없었고, 니트의 컬러가 블랙이 아님에도 시크해 보였다. 심지어 슈즈는 옥스퍼드나 윙팁이 아닌 블랙 컬러의 페니 로퍼였고, 살짝 드러나는 양말의 컬러마저도 위트가 있었다. 핸들을 쥔 팔이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드러나는, 군더더기 없이 단정해 청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피아제의 손목시계까지.
국내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예를 들어 우리 누나 같은)가 최고급 브랜드의 의상으로 꾸며놓은 20대 모델들보다 더 멋졌다. 자신의 취향도 아닌 의상을 입혀주는 대로 입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그들은, 어색하고 불편해 보일 때가 더 많았으니까.
코발트블루로 칠해진 드레시 리버스의 외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약간 화려하긴 해도 고상하면서도 개성 있게 꾸며진 그곳에서, 워너비와도 같은 분에게 셔츠감을 고르고 그 셔츠감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선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술 공연을 보러 가는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차 있었지만, 이 방문이 나를 기대하게 하는 이유가 사실 하나 더 있었다.
“세영 씨, 어서 와요. 전화 받고 기다리고 있었….”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감정 표현에 직설적인 드레시 리버스 오너가 우동주의 아버지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게 너무 궁금했다. 우동주를 처음 데려갔을 때도 노골적인 시선을 던지면서 얼굴과 몸을 칭찬했던 사람이니, 딱 그 우동주가 세 배 정도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아버님을 보면 어떤 반응을 할지.
속으로는 이만큼 반했으면서도 ‘아버님이 너무 좋아요!’ 할 수 없는 성격이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은 다 해가면서 아버님을 찬양하는 오너를 통해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은 심리도 있었다.
나를 뒤따라 들어서는 아버님을 발견하자마자 오너는 일단 동공부터 확장시켰다. 그리고 앞서 들어서던 나를 그대로 지나쳐갔다.
“동주 씨가 전화로 다른 손님이 같이 오실 거라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내 취향… 아니, 취향이 훌륭하신 분일 거란 얘기는 없었는데…. 어서 오세요, 드레시 리버스 대표입니다. 잘 오셨어요.”
벌써 몇 년째 이 샵의 단골이었고, 우동주와 함께 다닌 것만도 3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내내 마음 한편에 찜찜하게 남아 있었던 의혹이 오늘에서야 확실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가끔씩 우동주와 나는 오너가 과연 게이일지 아닐지에 대해 결론 없는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우동주는 항상 어디 게이바에서 오너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100% 확실하다며 호언장담을 했었고, 나는 게이가 그렇게 흔한 줄 아냐면서 ‘자기가 남자 애인하고 사니까 남들도 다 그래 보이나 봐.’ 하는 식으로 부정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우동주의 승리를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처음 여기에 우동주를 데려왔을 때만 해도, 같은 남자로서 우동주의 신체적 조건을 부러워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버님을 보는 두 눈 속에는 확실히 핑크색 하트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세영 씨가 너무 괜찮은 슈트를 입고 있길래 어떤 샵인지 좀 소개해달라고 해서 와봤는데, 샵이 아주 느낌이 좋네요.”
아버님께서 ‘세영 씨’라고 부르시면서 아주 친근한 제스처로 내 등에 가볍게 손을 올리셨고, 오너는 약간 놀란 시선으로 나를 힐끔 쳐다봤다. ‘맨날 같이 오는 그 덩치하고 분명히 사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야, 헤어진 거야, 아니면 양다리야?’라며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괜히 장난기가 발동해서 완전히 시치미를 떼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아버님 곁에서 그냥 웃고 있었다.
“세영 씨가 입었던 것처럼 뒤트임이 있는 더블 재킷으로 슈트 한 벌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셔츠도 한두 개 정도 맞추고 싶은데. 너무 젊은 척하는 느낌이려나?”
아버님은 오너에게 직접 얘기하지 않고 반쯤은 내 쪽을 보면서 의견을 물어주셨다. 소개해준 내 입장을 생각해주시는 배려에 별거 아닌데도 어깨가 으쓱했다.
“아니요!”
“아니요!”
오너와 나는 거의 동시에 아버님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고는 둘 다 머쓱해져 서로 시선을 피했다. 손님의 취향을 항상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마음에 꼭 들 만한 것들로 추천해주는 오너였지만, 본인이 평소에 입는 옷은 나에겐 좀 화려하게 느껴져서 실제 취향은 나와 판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꽤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버님 정도가 되면 개개인의 취향의 문제를 벗어난 절대적 영역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만.
“오늘 입으신 이런 스타일도 어울리시는데 그 정도 슈트가 안 어울리실 리가 없어요. 마침 샘플이 준비돼 있으니까 이쪽으로 오셔서 직접 피팅해보시겠어요?”
아버님은 다녀오겠다는 표시로 나에게 살짝 웃어 보이시고는 오너를 따라 안쪽 룸으로 사라지셨다. 아버님의 뒤를 따라가는 오너의 머리 위로 둥둥 떠다니는 핑크색 하트가 보이는 것 같아서 뒤에서 혼자 피식 웃었다.
우동주와 함께 번치북을 보곤 하는 소파에 앉아 우동주의 아버님이 피팅하고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으려니, 묘한 감상이 밀려왔다. 아버님은 내가 당신의 아들과 교제 중인 ‘사내놈’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계셨지만, 나는 아버님이 나와 교제 중인 사내놈의 아버지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우동주의 아버지와 단둘이 드레시 리버스에 와서 아버님이 슈트를 맞추시는 걸 도와드리는 날이 올 줄이야.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랑하는 우동주의 아버님이 이렇게 좋은 분이라 내가 다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아버님이 나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시고 따뜻한 말씀을 해주실 때마다 마음 깊은 곳이 아프기도 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종류의 아픔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먼저 나 좋다고 옆구리 찔러댄 건 우동주였고, 난 절대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호모로 만든 나쁜 놈이 아니라고. 누가 먼저 옆구리 찔렀는지 그런 건 차치하고서라도, 우동주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미안할 필요 없는 거라고, 흔들림 없이 믿어왔는데…. 티끌만 한 거리낌도 없이 아버님과 마주 웃기는 어려웠다.
머리 위의 하늘은 쾌청한데, 시야의 끝 먼 곳에서 조금씩 밀려오는 먹구름을 무시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버님이 윤 이사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분이었다면 죄책감을 좀 덜 느꼈을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까지 하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우동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또 삽질하고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가끔 보면 어디서 CCTV로 날 지켜보고 있던 것처럼 타이밍이 기가 막힐 때가 있었다.
[뭐 하고 있어요?]
[아버님은 피팅하러 들어가시고, 난 기다리는 중.]
[그래? 진짜 드레시 리버스 갔구나.]
[그럼 뭐. 너한텐 거기 간다고 하고 데이트라도 하고 있을까 봐?]
[솔직히 그런 걱정을 안 했던 건 아니지.]
[그런 건 걱정이 아니라 망상이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그리고, 꼭 드라이브를 하거나 레스토랑을 가야 데이트인 건 아니거든?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10분 동안 내가 느꼈던 설렘만으로도 이미 최고의 데이트였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런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놈이니, 괜한 말로 더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 큰일 났어. 아무래도 팀장님하고 저녁 접대까지 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야.]
얘기 안 하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얘, 접대고 뭐고 때려치우고 당장 여기로 오겠다고 펄펄 뛸 게 뻔했으니까.
[그래? 어쩔 수 없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아버님 저녁 식사까지 잘 챙길 테니까.]
[뭐? 왜? 안 돼, 당신 불편하잖아. 내가 사정 말씀드리면 돼. 그렇게까지 안 해도 우리 아버지하고 같이 밥 먹어줄 사람 서울에 널렸어. 장인어른하고 단둘이 식사라니, 우리 주세영 예민한 위가 버티지 못할 거라고.]
내 생각 해주는 척하긴. 애인이 자기 아버지한테 빠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서른 살 우동주의 귀여운 짓 때문에, 죄책감으로 어두워지려 했던 마음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마저 멋있어서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하는 괘씸한 놈이었지만, 내가 곤란할 때 그걸 풀어주고 웃게 해주는 것도 역시 우동주였다.
서비스로 내주었지만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던 홍차가 담긴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아니, 난 아버님하고 먹는 저녁이라면 떡볶이에 순대라도 근사할 것 같은데?]
[하아… 주세영아, 왜 아빠들이 그런 말 하잖아. 아빠 말고 딴 남자는 다 늑대야. 아빠 말고 다른 남자는 절대 믿으면 안 돼.]
또 무슨 엉뚱한 발상에서 나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 싶어 잠자코 뒷말을 기다렸다.
[근데 왜 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그 ‘아빠’한테 당신을 맡겨놨는데, 당신이 윤 이사하고 와인 마시고 다닐 때보다 몇 배는 더 불안한 거냐. 당신 혹시 그 이유 알아?]
별것도 아닌 일에 망상 부풀려 질투한다고 항상 우동주를 구박하고 있지만, 어느 날 우동주가 내가 누굴 만나든 어디서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아마 난 심심할 것 같다. 더 솔직히 아마 섭섭할 것 같다.
겉으로는 진지해 보이는 우동주의 질투심도 반 이상, 대부분은 장난이다. 이해 못할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나에 대한 관심이 여전하다는 우동주 식의 표현이었다. 이게 진심이었으면 그건 진짜 병이다.
[넌 모르겠어, 그 이유?]
그러니까 우동주의 질투도,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부추기는 나의 도발도, 우리에겐 새콤한 사랑싸움에 가까웠다.
[주세영… 우리 아버지야. 당신이 아무리 그래봤자 우리 아버지라고. 나 괜히 불안하게 하지 마.]
[누가 뭐래? 일 열심히 해. 너 지금 일까지 못하게 되면 진짜 불안해야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 연락 안 돼도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아, 아버님 피팅하고 나오신다. 끊을게.]
통화는 이미 끝났는데, 전화 너머에서 우동주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웃음이 났다.
“어때요, 세영 씨? 너무 가벼운 느낌 아닌가?”
하지만 새 슈트를 입은 아버님의 풀샷 앞에서는 웃음도 지워졌다.
오너의 취향대로 전체적인 구조는 심플하게, 소품은 화려하게 꾸며진 드레시 리버스의 라운지로 토요일 늦은 오후의 노란 볕이 비스듬하게 스며들어오고 있었고, 블랙과 화이트의 깅엄체크 패턴의 소재로 만들어진 슈트를 입은 아버님의 얼굴 위에서 그 빛이 일렁거렸다. 갈색빛으로 그을린 건강한 피부 위에 얼굴의 일부인 것처럼 늘 머물러 있는 다정한 미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아버님이 내가 그려왔던 이상향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아버님 앞에서 설레고 들떴었는지,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중년 남성의 모습을 전부 갖춘 분이기도 했고, 동경하고 존경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를 볼 때는 온 얼굴과 온 존재를 다한 것 같은 미소를 주는 사람.
나는 아버님에게서 2, 30년 뒤의 우동주를 보고 있었던 거다. 윤 이사님에게서 우동주의 모습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윤 이사님 때는 나의 착각으로 끝나버린 새드 스토리였지만, 이번엔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이분은 진짜였다. 그런 씁쓸한 진창 속으로 나를 떠밀 분이 아니었다.
2, 30년 뒤 우동주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대해 의식하느라 가슴속은 더 어수선하게 들뜨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환하게 웃는다고 웃었는데도 이상한 웃음이 돼버린 것 같았다.
“아니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리고 감히 말씀드리자면, 아마 아버님은 10년 뒤에도 얼마든지 그런 슈트가 어울리실 겁니다.
“세영 씨가 그렇게 말해주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아버님은 나에게서 등을 돌려 거울 속 당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체크하셨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릴 때는 그래도 좀 아닌 것 같다고 하시더니 세영 씨가 어울린다고 하니까 바로 납득하시는 거예요?”
섭섭함이 섞인 듯한 오너의 가벼운 투정에 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저… 아버님, 동주가 아무래도 그쪽에서 저녁 접대까지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는데요….”
“그래요? 휴일에까지 일 때문에 불려 다니는 걸 보니 진짜 그놈이 좀 사회인으로 보이네. 하하. 어… 그럼… 혹시 세영 씨 저녁 약속 따로 없으면 나하고 같이 저녁 할래요? 좋은 샵 알려준 답례로 내가 맛있는 거 대접하고 싶은데.”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해주는 우동주가 항상 신기했었는데, 아버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2, 30년 뒤의 우동주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게 무리였다. 나는 웃었다.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된 미소가 나왔다.
“저야 너무 좋죠.”
2, 30년 뒤의 자신의 연인과 토요일 오후에 좋아하는 테일러샵에서 슈트를 맞추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행운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아버님은 여러 군데의 레스토랑에 전화를 거셨지만, 토요일 저녁이라 그 시간에 테이블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아버님이 서울에 오실 때마다 들르신다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해놓고 겨우 이런 걸 대접하다니 미안해서 어떡하냐고 아버님은 계속 신경 쓰셨지만, 언젠가 전주에서 먹었던 콩나물국밥보다도 더 맛있었다.
그리고 콩나물국밥은 나에겐 조금 의미 있는 음식이기도 했다.
우동주가 출장지의 호텔에서 나에게 고백했던 그 다음 날, 우리 둘이 처음으로 같이 먹었던 게 콩나물국밥이었다. 그때 난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알 수 없었는데, 정작 남의 인생에 폭탄을 던져놓은 우동주는 밥알 한 톨 안 남기고 싹싹 긁어먹었었지. 멘탈이 보통이 아닌 놈이구나 싶기도 했었지만, 내가 먹기 좋으라고 깍두기를 잘게 잘라주던 다정함이 인상 깊기도 했었다.
그런 사연을 아버님께 말씀드릴 순 없었지만, 고백받았던 다음 날 우동주와 먹었던 콩나물국밥을 아버님과 먹고 있으려니 음식의 맛과는 별개로 숟가락질이 빨라지질 않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 한잔하자는 얘기가 나왔고, 아버님과 나는 평소 우동주와 내가 자주 다니는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겼다. 꼬치 요리로 유명한 그 집 역시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꽉꽉 차 있었지만, 운 좋게도 마침 한 커플이 일어난 덕분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천장이 낮고, 시끌벅적하고, 사케의 빈 병과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피규어로 장식해놓은 실내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꼬치 굽는 화로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허름한 이자카야의 다찌 자리에서도 아버님은 겉돌지 않았다. 옆 사람이 화장실에 갈 때마다 의자를 당겨 앉아야 할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일식을 드실 땐 개별 룸이 마련된 고급 레스토랑만 가실 것 같은 아버님은 불편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으셨다.
옷 얘기는 물론이고,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을 설계하시게 된 배경, 여러 도시를 여행하시면서 겪었던 일들까지. 이야기 소재는 끝이 없었다.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라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완성도 좋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듯이 빠져들었다. 어른과의 술자리에서 이렇게 편안하고 즐겁기는 처음이었다.
모든 얘기가 다 흥미로웠지만, 아무래도 그중에 제일 나의 관심을 끈 건 우동주의 어릴 때 얘기들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의 우동주. 방과 후에는 검도장과 테니스 클럽을 다니고 주말에는 논일, 밭일을 돕기도 했던 고등학생 우동주.
“팔불출처럼 들리겠지만, 어릴 때부터 뭘 시켜도 못하는 게 없는 놈이었어요.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성적도 늘 상위권이었고, 은근히 리더십도 있어서 초중고 내내 학생회장도 했었고, 성격 원만한 데다 운동이라면 뭐든 만능이니 친구들도 많이 따랐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좋았지. 내 아들이지만 얼굴 하나는 좀 봐줄 만하잖아요?”
격하게 맞장구를 치고 싶었지만, 동조의 의미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카멜색 스웨터의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 올리고 술기운이 살짝 올라 약간 높아진 톤으로 우동주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씀하시는 아버님은, 분명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셨다. 그리고 이제는 다 자라서 품을 떠난 아들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느껴져서 조금은 외로워 보이기도 했고. 그런 부분은 다른 여느 부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데 그렇게 뭐든 쉽게 얻어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무엇에든 집착하는 법이 없었어요. 그게 겉으로 보면 욕심이 없고 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도를 닦는 게 아닌 이상은 보통 사람이라면 뭔가에 집착하면서 얻는 재미도 삶에서 큰 즐거움인 법인데… 이놈은 어릴 때부터 장난감이나 게임은 물론이고, 사춘기 때는 이성한테도 별 관심을 안 보여서 내가 걱정을 많이 했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춘기 남자애한테 이성은 거의 절대적 존재잖아요. 잘 보이고 싶고, 다가가고 싶고….”
이번에도 나는 별다른 말없이 그저 웃었지만, 속으로는 찔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춘기 때 다른 놈들만큼 이성에 관심이 없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비슷했던 우동주와 주세영이 지금은 서로 연애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 나이엔 여자애들한테 잘 보이려고 기를 쓰는 게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지는 시기인데, 멋도 부릴 줄 모르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사내놈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운동하고 캠핑하는 걸 더 좋아했으니, 좀 특이한 놈이다 싶었죠. 부모는 자식이 평범하지 않으면 불안하거든. 혹시 고생하면서 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게 멋없는 놈인데도 호감을 표현해주는 여자애들이 늘 몇 명씩 주변에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정작 진짜 여자친구들한테는 별로 점수를 못 따는 것 같더라구요.”
맨날 자기 입으로 학교 때 인기 많았다며 내 질투를 얻으려 하는 우동주에게, ‘아, 그러셔.’ 라며 믿지 않는 척 넘겨버리곤 했지만, 짧은 머리에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도 어설프게 멋을 부린 또래의 다른 놈들보다 몇 배는 더 신수가 훤했을 우동주를 상상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인기 많았을 거다.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체격 조건 좋고, 운동 잘하고, 머리 좋고, 집안이 부유한 것까지만 해도 사기 캐릭터인데, 성격마저 사교적이고 리더십까지 있었을 테니 인기가 없을 수가. 나도 사춘기 시절을 통과해봐서 안다. 남녀 모두에게 두루두루 사랑받을 타입이었다.
그 잘난 아들을 ‘평범하지 않게’ 만든 나쁜 놈이 나인 것 같은 생각에, 술을 마시는 척 잠시 아버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내가 알기로 그놈은 이제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이 없어요. 부모한테 자기 연애까지 시시콜콜 떠드는 놈은 아니지만, 부모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또 있으니까. 나이가 벌써 서른이 된 놈이 아직 누군가를 진하게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게 좀 걱정이긴 하지. 더 늦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오직 상대를 위해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지는 그런 사랑은 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할까 봐, 좋은 직장에 취직하지 못할까 봐, 조건이 괜찮은 상대와 결혼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부모는 많이 봤지만, 계산 없이 누군가에게 몰입해 상대를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을까 봐 걱정하는 부모를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우동주는 충분히 정열적으로, 자기가 아닌 상대를 위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아버님이 바란 아들의 상대는 아마도 같은 성별을 가진 회사 선배는 아니었을 것이다. 입이 써지는 감각에 3분의 1쯤 남아 있던 맥주잔을 쭉 비워버렸다.
“어때요, 세영 씨는 여자친구 없어요? 우리 아들만큼이나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아무리 아버님이 좋은 분이고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셔도, 우동주와 나의 관계를 죄송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죄송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자꾸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랑의 정당함을 아무리 스스로에게 변호해봐도 그 생각을 완전히 꺾어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의 사랑이 죄송한 건 아니지만, 아버님 말씀대로 자식이 평범하지 않은 길을 가게 되는 건 모든 부모들이 걱정하는 일이었다. 걱정하실 일을 만든 것, 그것 자체는 죄송했다.
술의 힘일까. 아니면 처음 뵌 순간부터 아버님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지금 이 자리에서, 아버님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여자친구는 없지만, 애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동주예요.’ 라고. 아무리 충동일 뿐이었다지만, 주세영치고는 엄청나게 과감한 충동이었다.
아버님이라면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 내 속으로 가져보는 기대감이었고, 기대감 뒤의 결과가 반드시 그 기대에 부응한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우동주의 표현에 의하면, 어찌 됐든 주세영은 기본적으로 매우 조심성 많은 초식동물이었다. 충동적인 기대감보다는 철저히 검증된 가능성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내 인생의 가장 과감한 충동은 우동주와의 연애를 결정한 일이었고,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이상의 충동은 나오기 어렵겠지.
“표정을 보니 누가 있는 거네.”
아버님은 약간 놀리듯이 나를 보며 웃으셨고, 나 역시 굳이 부정하지 않으며 애매하게 웃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웃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그것도 꽤 깊은 사이인가 본데?”
“어떻게 아세요?”
“누구인지 몰라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해져 온다는 표정을 보니까 그러네.”
정확한 진단이었다. 하지만 아버님의 말을 긍정할 수조차 없었다. 그게 혹시 아버님을 기만하는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닐지 두려웠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져 올 만큼 소중한 그 상대가 아버님의 아들이라는 걸 숨긴 채, ‘네, 맞아요.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라며 웃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그게 우동주라는 걸 알게 되시면 날 가증스럽다고 생각하실까 봐….
“우동주도 얼른 그런 상대를 만나야 할 텐데. 옷에는 영 관심도 없고, 만들어준 카드로 쓰는 데라고 해봐야 생활비 정도밖에 없던 놈이 입사 첫 달에 슈트 값으로만 엄청난 돈을 썼길래, 난 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겼나 기대했었거든. 근데 여기 와서 보니까 세영 씨 영향이었네.”
내가 알기로 우동주가 입사 첫 달에 슈트를 사들이는 데에 쓴 돈이 웬만한 중고차 가격 정도는 됐다. 다행히 아버님은 사회인이 슈트에 돈을 들이는 건 낭비가 아닌 투자로 여기시는 분이었고, 우동주가 옷차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지만, 그때 우동주가 미친 듯이 슈트를 사들인 건 잘 보이고 싶은 여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잘 보이고 싶은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되면, 아버님은 화를 내실까. 이제야 뭔가에 몰두도 하고 옷차림에도 신경 쓰게 된 줄 알았더니, 기껏 사내놈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돈을 쓰고 다녔던 거냐고 실망하실까. 얼굴을 일그러뜨리실까.
함께 드레시 리버스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시선이 닿는 가장 먼 곳에서 아직까지는 남의 일처럼 존재했던 먹구름이 바로 머리 위까지 닥쳐와 있었다.
우동주가 보고 싶었다. 한없이 긍정적이고 배짱이 있는 우동주와 조심성 많고 그만큼 걱정도 많은 주세영은 서로를 보완하기 위한 세트 같아서, 이럴 때 내 삽질을 멈춰줄 수 있는 것도 우동주였다.
[아버지가 혹시 손잡고 포옹하셔도 그거 그냥 술버릇이니까 당신 절대 넘어가면 안 돼ㅜㅜ]라는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머리 위의 먹구름 사이로 솟아날 구멍 하나쯤 뚫어줄 수 있는 능력자이기도 했다.
내일 잡지 촬영까지 잡혀 있는 상황에서 접대 자리에 불려 나가 주말에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놈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어서, [넘어가진 않을 건데, 설레는 마음까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까 그거 갖고 뭐라고 하진 마.]라며 장난으로 받아쳤지만, 사실은 ‘내가 지금 필요한 건 네 손과 네 포옹’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언제 이렇게 이놈한테 의지하게 됐는지.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남과 나누는 것 자체에 서툴고, 남을 의지하는 방법 자체를 몰라서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끌어안고 가는 게 속편했던 주세영인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혼자 책임지고 혼자 감당하던 시절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강인하게 느껴졌다. 예전의 나는 강해서 혼자 끌어안았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자기 것과 자기 영역을 지키려고 필사적이었던 것뿐.
예전의 나라면 아버님 앞에서 느낀 이런 죄책감이 그대로 우동주와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줬겠지만, 지금은 죄송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우동주와 헤어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헤어질 수 없으니까 죄송한 것이기도 했지만.
저녁을 먹고 7시쯤 이자카야에 들어왔던 것 같은데, 나올 때는 11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덧칠되긴 했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드레시 리버스에 들러 슈트와 셔츠를 맞추고, 저녁은 간소하게 먹고, 단골 이자카야에 들러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대리기사님에게 운전을 맡긴 채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토요일. ―그건 우동주와 보내는 여느 토요일과 다르지 않았고, 나에게 그건 이미 데이트였다. 2, 30년 후의 우동주와 함께한 데이트. 그 시간이 즐겁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내가 휴일을 다 뺏은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한데… 나는 엄청 즐거웠거든, 세영 씨랑.”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버님은 다독이듯 격려하듯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셨다. 아들의 회사 선배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아끼는 후배를 대하시는 것 같은 말투와 표정이었다.
“저도 즐거웠어요.”
“난 아들만 셋이지만, 세영 씨는 뭔가 우리 아들들하고는 좀 다른 느낌이야. 그놈들은 나하고 한 시간 이상 대화를 안 해주거든.”
“저도 저희 아버지 앞에선 무뚝뚝해요.”
“음… 아무래도 남의 아버지 앞이니까 좀 더 기분 맞춰주려고 하게 되는 게 있겠지?”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제안해주신 일도… 너무 감사하구요.”
아버님은 지금 운영하시는 사무실의 홈페이지 리뉴얼을 생각하고 계셨고, 괜찮다면 그 일을 나에게 맡기고 싶다고 제안해주셨다. 지금까지는 시공사의 오더대로 진행하는 굵직굵직한 일들을 주로 해오셨지만, 앞으로는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최대한 살린 소규모 건축 위주로 작업하고 싶은 꿈이 있다는 말씀과 함께, 개인 고객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웹 공간이 필요하다고.
“세영 씨가 웹 디자이너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기본적으로 감각과 센스가 뛰어난 사람이고, 또 이번에 와서 며칠 같이 지내보면서 나하고 생각도 잘 맞는다는 생각에 꼭 세영 씨가 해줬으면 하는 욕심이 생겨서 그래요. 홈페이지 리뉴얼이 급한 일도 아니니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하고 같이 일하고 싶거든.”
아버님 같은 분이 내 감각을 좋게 봐주셨다는 것도 기뻤지만, 마침 이직을 두고 고민하고 있던 시기라 그 제안 자체가 어떤 계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침 세영 씨도 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니까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도 인정받는 인재라는 건 동주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세영 씨가 가진 미적 감각이나 센스도 그대로 묻어두기엔 너무 아까워. 잘은 몰라도, 왠지 세영 씨한테는 회사 생활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작업방식이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분야가 달라서 내가 직접적인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의논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
“감사합니다…. 오늘 해주신 말씀들도 벌써 많은 도움이 됐어요.”
아버님의 편안한 분위기 때문인지, 나는 술자리에서 이직에 대한 고민까지 털어놨었다. 아직 우동주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였는데.
직업 자체를 바꾸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프로그래머로서의 경력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직은 필요한 시기였고, 더불어 우동주와의 미래를 고려했을 때도 이대로 계속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은 위험이 따를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탓에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고민에 가닥이 잡힌 기분이었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연세에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아버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직업의 방향을 전환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닐지 망설였던 내 고민이 무색해졌다.
오늘 나는 아버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회사 선배하고 집을 같이 쓴다고 했을 땐 집에 와서까지 선배 눈치 보면서 불편하게 지내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게 세영 씨라서 다행이에요. 세영 씨가 앞에 있어서 빈말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오래 보고 지낸 사람처럼 참 정이 가네. 이 나이가 되면 백 퍼센트까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사람 보는 안목이 생기거든. 세영 씨가 언변이 화려하거나 사교적인 건 아니지만, 사람을 대하는 데에 거짓이 없고 진솔하다는 걸 알겠어요. 앞으로도 우동주 잘 좀 부탁해요. 회사 선배로서도, 형으로서도. 세영 씨 같은 사람이 옆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한시름 덜 것 같아.”
“…….”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턱 끝이 쇄골에 닿을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나는 해주신 좋은 말씀에 감사하다는 표현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발밑만 내려다보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정이 간다’
다른 많은 좋은 말씀보다도 그 말에 마음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단 한마디도 그냥 하는 말처럼 느껴지지 않는 진심이 담긴 말씀 하나하나가 감사하고, 내가 우동주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실 것 같단 말씀에 가슴이 죄이듯 죄송스러웠다. 만약 내가, 회사 선배나 가까운 형으로서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우동주 옆에 있다고 해도 같은 말씀을 해주실까, 만약 그런 의미로 해주신 말씀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언제까지나 가족에게 비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도, 더 이상 연애나 인생에 대한 계획에 가족의 동의가 필수적인 나이는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에 부딪치게 되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만큼 우리 관계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그런 나였기 때문에, 아버님 앞에서 자꾸 수그러지는 자신을 제대로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아버님….”
“응?”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센서의 불빛 아래서, 첫날 여기 서 계셨을 때와 똑같은 다정한 미소로 나를 보고 계셨다. 어떤 내 모습이든, 받아주고 담아주고 사랑해줄 것 같은 따뜻한 미소가 우동주의 그것과 겹쳐졌다.
2, 30년 뒤의 우동주와의 데이트가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우동주 앞에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못난 놈이었지만, 2, 30년 뒤의 우동주 앞에서는 어린애로 돌아간 듯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죄송합니다.”
그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기어이 그 말이 멋대로 비집고 나와버렸다. 사실은 우동주에게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감히 그런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담아둔 채로는 숨을 쉴 수 없는 깊은 죄를 지은 것 같은 갑갑함에 대책도 없이 아버님을 부르긴 했지만, 밑도 끝도 없이 죄송하다는 말을 할 줄은 나도 몰랐다.
“응? 뭐가? 세영 씨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모처럼 서울에 오셔서 동주하고 시간 보내고 싶으셨을 텐데… 제가 있어서 방해가 된 건 아닌지….”
아무 말이나 둘러대고 있었지만, 얘기를 하는 동안 점점 더 감정이 어지러워졌다. 원래 어떤 형태로 정리되어 있었던 건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늘 나하고 데이트 잘 해놓고 끝에 가서 별소릴 다 하네? 재미있었다는 거 다 거짓말이었어요?”
“아니요…. 전 정말 즐거웠는데….”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적지 않은 양의 맥주를 마신 뒤였으니, 취한 사람의 종잡을 수 없는 주사라 여겨주시기만을 바라며 수습하지 못한 말 끝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즐거웠으니까 그런 소리 마요. 내가 다 미안해지네. 그리고, 그놈하고 돌아다녀봤자 뚱한 얼굴 해가지고 툴툴거리기나 하고 하나도 재미없었을 텐데, 뭘. 세영 씨하고 있어서 오랜만에 정말 즐거운 시간 보냈어요.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푹 쉬어요. 내가 했던 제안, 꼭 긍정적으로 잘 생각해보고. 알았죠?”
다정하게 해주실수록, 죄송한 마음은 점점 고통이 되어갔다. 입을 열었다가는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버릇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말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은 말없이 두어 번 내 등을 토닥거려주셨다.
죄송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한 일이 아니라고, 우리 관계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죄송해지면 안 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뵙지 말 걸 그랬다. 차라리 호텔에 가 있는 게 나았을 뻔했다. 그랬다면, 아버님을 속이고 있단 생각에, 아버님의 귀한 아들을 평범하지 않은 길로 끌어냈단 생각에, 이렇게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텐데.
우동주는 자정이 지나서야 술 냄새를 풍기면서 귀가했다. 몰래 손님방에 들어와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오늘 자기 대신 아버지 즐겁게 해드려서 고마웠다고 속삭이는 커다란 몸이 문득 많이 소중해서, 침대에 누운 채로 목을 끌어안았다. 아버님 계시는 동안 집안에서 스킨십 금지라고 못 박았던 건 나였는데도.
“왜 그래. 아버지 계신데 또 하고 싶게 만들지?”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는 우동주에게 “어, 당장 하고 싶어.”라고 대답했다가, 하지도 못하게 할 거면서 사람 부추기는 거, 그거 진짜 못된 버릇이라고 우동주에게 한소리 들었다.
넌 왜 너 하나만 잘났으면 됐지, 아버지까지 멋진 분을 둬서 나를 이렇게 괴롭게 만드냐. 아버님이 고지식하고 권위적이고 부장님처럼 나이 찼으니 빨리 결혼하라고 닦달하는 분이셨으면, 나도 죄책감 같은 거 안 느꼈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우동주를 탓해봤지만, 그래도 역시 우동주의 아버지가 지금의 아버님이라서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 더 컸다. 그렇지 않았으면, 2, 30년 뒤의 우동주와 데이트하는 행운은 없었을 테니까.
술을 꽤 마셨는데, 술기운에라도 잠이 들 법도 한데, 오랫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난 참 행복한 놈인 것 같다가도, 난 참 나쁜 놈인 것 같기도 했다. 서재에서 자고 있을 우동주의 옆자리로 숨어들고 싶다는, 주세영답지 않은, 참 우동주 같은 생각을 하면서 겨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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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평일이었으면 저번처럼 회사 좀 빠지는 건데, 하필 일요일이야, 또….”
“핑곗거리만 있으면 조퇴하고 싶은 고등학생이냐? 투덜대지 말고 잘하고 와.”
누나에게 부탁받은 잡지 촬영이 오후 1시부터 잡혀 있어서, 우동주는 일요일인데도 정오가 되기도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 어제도 늦게까지 접대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괜히 우리 누나 부탁이라 거절 못 하고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고맙기도 했고. 아버님이 안 계셨으면 스튜디오까지 태워다주고, 수고하라고 엉덩이라도 두드려줬을 텐데. 아버님과 함께 나란히 현관에서 배웅하느라 달콤한 인사 한마디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아버지, 배웅 못 해드려서 죄송해요. 몇 시 차라고 하셨죠?”
“2시 10분이든가. 이제 곧 준비하고 나가봐야지. 배웅은 됐으니까, 가서 폐 끼치지 말고 잘해. 잡지 나오면 나도 하나 사서 볼 테니까. 선배 잘 만난 덕에 잡지 촬영까지 하고. 출세했다?”
아버님이 우동주의 어깨를 툭 치셨는데, 그게 꼭 부자간이 아니라 친구 사이에 하듯 친근해 보여서 조금 부러웠다.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내가 집에 들르면 ‘왔냐’ 한마디 하시고 별말씀이 없으셨으니까. 속으로는 많이 반가워하신다는 건 알지만.
“죄송해요. 일부러 우리 집까지 오셨는데 아버지하고 식사도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걱정 마라. 난 세영 씨하고 아주 즐겁게 지내다가 가니까.”
“아… 예… 그러시겠죠.”
우동주는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후퇴하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 그저 웃고 있었다. 내가 지금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인마. 아버님이 오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저 불편할 것 같고, 행동 하나 말투 하나 일일이 신경 써야 될 게 걱정돼서 반대했던 건데, 이런 식으로 괴로워질 줄은 몰랐다고.
우동주가 나가고 나니, 장난이 심한 초등학생 아이들 서너 명이 한 번에 쑥 빠져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집이 조용해졌다.
“저… 아버님. 괜찮으시면, 제가 역까지 배웅해드릴까요?”
“응? 그렇게 멀지도 않고 택시면 돼요. 어제도 하루 종일 나 따라다니느라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좀 쉬어야지. 정말 신경 쓰지 마요.”
렌트하신 차량은 따로 반납하러 가실 필요 없이 그쪽 회사에서 우리 집으로 직접 가지러 오는 걸로 되어 있어서 택시로 움직이기가 불편하시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 모를 미래의 일을 위해 우리 누나한테 잘 보이겠다고 일요일에도 나가서 고생하고 있는 우동주를 생각하니, 나도 미리미리 아버님께 점수를 좀 더 따둬야겠단 생각도 들었고.
“피곤하긴요. 정말 즐거웠으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어제의 술자리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간 덕인지, 마음은 여전히 어지러워도 아버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친근함이 배어 나왔다. 그만큼 좋게 봐주시고 예뻐해주시는데 마음을 안 열게 되는 게 더 이상하지. 섭섭한 표정을 지으니 다정하게 웃으시면서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어주셨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도 기쁘고. 근데 정말 택시면 되니까 마음 쓰지 마요. 서울역까지 택시로 20분이면 되는데, 뭘.”
아껴주시는 마음이 전해지는 장난스럽고 친근한 스킨십에 나 역시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번에 아버님께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 감사한 게 많아서 꼭 모셔다드리고 싶었지만, 사양하는 척만 하시는 게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아서 더는 권하지 않았다.
뭘 두고 나간 건지, 현관을 나선 지 5분도 안 돼서 우동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길래, 아버님께 양해를 구하고 일단 (아버님이 내 방으로 알고 계시는)손님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옆에 계시면 아무 말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방으로 가서 전화 받아봐.]
[지금 손님방이야. 왜, 무슨 일인데.]
[나 촬영 가는데 당신한테 응원도 못 받고 가게 생겼잖아. 원래는 촬영장까지 같이 가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한테 주말 내내 당신 뺏기고 이게 뭔 신세냐고.]
[그래서.]
시작부터 목소리 쫙 깔길래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긴장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안 그래도 지금 네 애인, 풍전등화 같은 상태니까 별거 아닌 일로 긴장 타게 하는 건 좀 삼가라. 나 진짜 수명이 줄어들 것 같다고.
[편의점에 뭐 사러 나간다고 하고 잠깐만 내려와라.]
[뭐?]
[와서 뽀뽀라도 좀 해줘.]
[너는 이 상황에 무슨….]
[뭐 어때. 집 안에서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나 잘하고 오라고 그 정도도 못 해줘? 솔직히 나 이번에 아버지 계신 동안 진짜 잘 참았잖아. 아니야?]
그건 맞아. 내 생각보다 너무 잘 참아줘서 솔직히 조금 섭섭했을 정도였지.
[그리고 어젯밤에 당신이 평소답지 않게 귀여운 짓 하는 바람에 마음이 좀 안 좋았단 말이야. 10분만 내려와. 주세영 충전 좀 하고 가자. 아니면 당신 애인이 거기 가서 기죽어 있어도 좋아?]
쉽게 수락하지 못하고 있긴 했지만, 나를 찾는 우동주가 싫지 않았다. 나야말로 우동주를 좀 충전할 필요가 있었다. 쳐다본다고 문 밖에 계신 아버님이 보일 것도 아닌데, 문 쪽을 힐끔거리면서 목소리를 더 낮췄다.
[알았어. 차 밖으로 빼지 말고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려.]
혹시나 해서 엘리베이터도 1층까지만 타고, 거기서 다시 계단으로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몰래 사귀고 있는 애인과 잠깐 시간이 난 틈을 이용해 밀회를 나누는 배우라도 되는 것처럼, 누구 보는 사람이 없는지 경계하면서 우동주 차의 조수석으로 거의 뛰어들다시피 했다. 우리 집 놔두고, 우리 집 주차장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어차피 입혀주는 대로 입고 촬영할 건데 괜히 꾸미고 갈 필요 없을 것 같다면서, 청바지에 티셔츠에 간절기용 얇은 재킷을 입고 스니커즈를 신은 우동주가 일주일 만에 겨우 얼굴을 본 것처럼 나를 보고 웃었다.
산뜻한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얇은 남색의 발마칸 코트를 입은 우동주를 보고 있자니,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과거에 그 문제의 베이커리에서 얘를 보고 서울에서 제일 멋진 남자라고 생각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나온 것 같은데도 자연스러운 스타일이 있어서 옷 좀 입는 놈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말 그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나온 거였지. 몸매 되고 얼굴 되는 것들은 이래서 얄밉다니까. 세상을 너무 쉽게 산단 말이지. 그래도 이젠 내 거니까 얄밉기보단 이쁘지만. 하여간 촬영장에서 몰래 빠져나와 단 10분이라도 밀회를 나눌 만한 가치가 있는 애인이었다. 우리가 파파라치의 추적을 받는 배우라는 가정하에.
“어제 아버지랑 콩나물국밥집 갔었다며?”
내 손부터 찾아 쥐면서 우동주는 싱글거렸다.
“어. 맛있더라.”
“내 생각했겠네?”
확신하고 묻는 얼굴이 얄밉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깍지를 껴오는 손바닥을 밀어냈다.
“네 생각을 왜 해?”
우동주가 더 강하게 손가락을 얽으면서 잡은 손을 당겼다. 쳐다보는 시선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싶었는데, 가까워진 거리에서 고개를 꺾어 아프지 않게 귓불을 물어왔다.
“또 또 모르는 척한다. 내가 고백한 다음 날, 우리 처음으로 먹었던 게 콩나물국밥이잖아.”
“아… 그랬었지. 자기가 한 말 때문에 남은 머릿속이 쑥대밭이 됐는데, 맞은편에 앉아서 어찌나 잘 먹던지. 뒤통수를 한 대 확 갈겨주고 싶었지, 내가.”
“나라고 뭐 제정신이었는 줄 알아? 나까지 그러고 있으면 당신이 더 어색할까 봐 괜찮은 척했던 거지. 솔직히 체하는 줄 알았거든?”
아무것도 아닌 이런 일상적인 대화가 이렇게 깨가 쏟아지도록 재미있는 것이었다니. 내 손을 조물락거리는 우동주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잠깐 감상에 젖었다.
같이 살다 보면, 키스하고 섹스할 일은 많아도 의외로 손을 잡을 일은 별로 없어서 그 별 것 아닌 스킨십이 신선했다.
“나 진짜 심란하다. 당신이 우리 아버지하고 잘 지내서 되게 행복한데… 솔직히 나 좀 진지하게 질투 난다?”
나랑 똑같네. 너희 아버지가 좋은 분이라서 되게 행복하기도 하고, 너무 죄송하기도 해서 심란하거든.
“너 그거 진짜 병이야. 좀 고쳐.”
평소처럼 구박하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찬바람 쌩쌩 부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걸 또 놓치지 않고 알아챈 우동주는 점점 웃음기가 짙어지는 얼굴로 내 손을 더 끈적하게 조물딱거렸다. 손바닥 위를 문질거리는 엄지손가락이 의미심장한 사인처럼 느껴졌다.
“오늘 촬영하고 오면 상 줄 거야?”
“무슨 상.”
“누님한테 잘 보여두겠다고 내가 애쓰는 거잖아. 아버지 계신 동안도 잘 참았고. 나 요 며칠, 당신이 내 앞으로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설 것 같았던 거 알아?”
같이 사는 애인이 손 좀 만졌다고 야릇한 기분을 느끼는 나도 나지만, 같이 사는 애인을 며칠 못 만졌다고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우동주도 우동주였다. 그래도 둘 다 증상이 비슷하니까 그나마 다행인 거겠지. 동거하고 이쯤 지나면 섹스도 성의 없어지고 설레고 두근거리는 것도 없어진다는 건 대체 누가 한 소리야?
쉴 새 없이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우동주의 손바닥을 검지로 살살 긁었다.
“빨리 끝내고 와. 너보다 내가 더 미치겠으니까.”
“…….”
내가 자기 눈앞에서 한순간에 알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보는 우동주.
“아, 주세영, 진짜…. 그런 소린 왜 지금 하는 건데? 나 촬영 어떻게 하라고? 잡지 촬영이 아니라 포르노 촬영 돼버리면 다 당신 탓인 줄 알아, 엉?”
인상을 쓰면서 우동주가 조금 거칠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내 입술을 아래에서 위로 핥아 올리듯 겹쳐져왔고, 다음 순간엔 따뜻하게 젖은 혀가 다급하게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며칠 만에 제대로 맛보는 우동주의 혀와 입술이었다. 눈을 감으면서 우동주의 코트 안으로 손을 넣어 티셔츠 위를 더듬었다. 순간적으로 단단하게 수축한 가슴 근육이 손바닥으로 전해져왔다.
“미친다, 진짜. 평소에 좀 이래 봐. 왜 꼭 가봐야 할 때 사람 부추기는 건데? 취미야? 당신 이거 즐기지?”
“떠들 시간 있으면 집중해.”
떨어져 나가는 혀와 입술이 아쉬워서, 우동주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이번엔 내가 먼저 그 입술 안으로 혀를 넣었다. 터뜨려버릴 것처럼 강하게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혀뿌리까지 얼얼해졌음에도 더 조여주기를 원했다. 운전석으로 거의 넘어갈 듯이 상체를 기울이면서 우동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코트 안에서, 두툼한 어깨와 가슴 근육을 정신없이 쓰다듬었다. 그것만으론 부족해서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느끼려는데, 우동주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 이렇게까지 할 생각 없었다고. 당신 이러면 나 진짜 못 멈춰.”
나도 못 멈춰. 네 찌찌 좀 잠깐만 만질 테니까 얌전히 이리 와. 항상 우동주가 먼저 덤비고 내가 쳐내는 역할이었지, 내가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으려는 걸 우동주가 못 하게 하기는 처음이라 그게 또 묘하게 흥분됐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가 튕길 때마다 넌 이런 기분이었던 거였어…. 그래서 그렇게 튕기면 튕길수록 더 덤벼들었구나. 나 이제 네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
스트라이프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내 한 손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우동주의 가슴 위를 더듬으면서 자꾸만 더 몸을 밀착하려 애를 썼다. 우동주 역시 이젠 안 되겠는지, 등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더듬어 내려가 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주물렀다. 이래야 내 우동주지.
아직도 이렇게 틈만 나면 미친 듯이 불붙는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했다. 사랑이라 명명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진지한 연애 자체가 처음이기도 했지만, 한 사람을 이렇게 길게 만난 것도 우동주가 처음이라 아직도 나는 신기한 게 많았다. 앞으로도 신기한 일들이 더 많이 남아 있겠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쓸 일이 없는 혀와 입술로,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우동주의 혀와 입술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절대 닿아서는 안 되는 우동주의 맨살을 내 손으로 더듬어 존재를 확인하고… 너무나 익숙한 우동주의 체취를 호흡하고…. 그러는 동안에 어제부터 내내 헝클어져 있던 내 마음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에누리 없이 꼬박꼬박 흘러가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입술과 혀를 빨고 가슴 위를 문지르고 그 목에 매달렸다. 10분이면 라면 하나를 끓여서 다 먹을 수도 있고, 흡연실에서 담배 두 대를 연속으로 피우면서 우동주와 노닥거릴 수도 있고, 점심을 먹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커피를 한 잔 사면서 여유를 즐길 수도 있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인데… 이 밀회를 나누는 10분은 그저 짧기만 했다. 나도 진짜 곤란하다고. 왜 하필 이럴 때 놔주기가 싫은 건데.
“더… 동주야, 더 야하게 해줘….”
바지 속으로 들어가 엉덩이를 쥐어뜯을 듯이 움키는 우동주의 손목을 붙잡고 더 깊숙한 곳으로 잡아끌었다. 가끔 내가 먼저 달려들기도 하고, 먼저 유혹할 때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원하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주세영, 잠깐 그만해봐.”
왜,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 너 딱 그만둔 적 한 번이라도 있어? 그러니까 나도 마음대로 할 거야. 바지 속에서 나오려고 하는 우동주의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뒤로 빼는 우동주의 입술을 간지럽게 핥았다. 내려와 보라고 한 놈이 누군데, 왜 이제 와서 빼고 그래? 너 그런 놈 아니잖아.
“잠깐 그만해보라니까.”
“왜, 아직 10분 정도 괜찮잖….”
나와의 키스에 열중하고 있어야 할 놈이 어정쩡하게 내 어깨를 붙잡고 밀어내면서 앞유리 너머로 딴 곳을 보고 있었다. 무심결에 그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장을 비롯한 전신이 그대로 굳어버린 순간이었다.
대각선으로 떨어진 지하주차장 입구에 아버님이 서 계셨다. 그것도 비스듬히 이쪽을 향해 선 채로. 못 봤다고 생각할 수가 없는 구도였다.
이건 경험해본 사람만 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는 건 이런 거다. 예전에 박 대리였던 박 팀장에게 걸렸을 때의 낭패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낭패? 그따위 말로는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동주의 티셔츠 속으로 들어간 손을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다. 너… 이거 때문에 그만하라고 했던 거였어? 그럼 때려서라도 말렸어야지!
아니… 아무리 말렸어도 이미 키스를 목격하신 시점에서 1초를 더 했건, 10초를 더 했건, 되돌릴 수 없는 일인 건 마찬가지였겠지.
“미치겠다. 여기 왜 내려오셨지? 어디서부터 보신 거야?”
우동주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고, 잠깐 그렇게 서 계시던 아버님은 우리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쪽을 보고 계셨던 건 아마 기껏해야 5초? 아니면 7초? 우리에게 주어진 10분은 찰나 같았는데, 아버님이 이쪽을 보고 계셨던 그 짧은 순간은 마라톤 회의 중에 부장님의 똑같은 훈계를 듣는 것처럼 영원 같았다.
렌트한 차의 트렁크에서 뭔가를 꺼낸 아버님은 그대로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셨다.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였다. 우리 차를 향해 다가와 조수석 차 문을 열고 나를 끌어내리신 다음 뺨을 갈기는 일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온몸을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20초 전, 아니 10초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동주의 입술을 핥으며 그 목을 자꾸만 끌어당기던 나의 뺨을 스스로 갈겨버리고 싶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 몇 시간 뒤엔 아버님이 떠나실 거고, 이젠 출발하실 준비를 하신다고 했고, 렌트 회사에서 차를 가지러 오기 전까지는 주차장으로 내려오실 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는데….
어제부터 계속 싱숭생숭했던 탓에 마음이 약해졌던 거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충동에 넘어간 거고. 평소라면 절대 이런 빈틈은 안 보였을 텐데.
됐고,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도움이 될 상황도 아니었다.
“우리, 올라가서 같이 무릎 꿇고 말씀드릴까?”
참 우동주 같은 발상이었다. 이런 순간에 ‘그러게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 그만했어야지.’ 같은 소리나 지껄이면서 내 탓이네, 네 탓이네 같은 소모전을 치르려 하는 놈이 아니라서,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을 함께 맞은 파트너가 우동주라서, 이 와중에도 그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박 팀장에게 들켰을 때 그 자리에서 패닉 상태에 돌입했던 때와 비교하면 주세영도 대단한 변화였다.
물이 엎질러졌다. 그것도 아주 팍. 다시 컵을 일으켜 세워봐야 이미 그 안에는 입술을 축일 정도의 물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아주 팍. 그 컵을 거꾸로 쥐고 아무리 털어봐야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넌 일단 촬영하러 가봐.”
“뭐?”
“촬영하러 가보라고.”
“내가 이 상황에 어떻게 당신만 두고 촬영을 하러 가?”
“그럼, 너 하나 때문에 스태프들 다 대기하고 있는데 그걸 펑크낼래? 가서 책임을 져야 될 거 아니야.”
“이 상황은? 여기서 당신 혼자 뭘 어쩌게?”
“설마 아버님이… 날 죽이기야 하시겠냐.”
아버님이 좋았다. 처음 우동주의 어깨 너머로 우리 집 현관 앞에 서 계신 모습을 보자마자, 내가 앞으로 이분을 많이 존경하고 따르겠구나, 예감이 왔었다. 그래서 잘 보이고 싶었고, 다른 어른들을 대할 때처럼 경직된 예의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으로 아버님을 대했다.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게 기뻤고, 나를 인정해주시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런 분이 우동주의 아버지라서 몇 배로 더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 딱 그 두 배만큼 죄송했다.
“안 돼, 나 못 가. 아니면 그냥 당신도 집에 들어가지 마.”
우동주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더니 시동을 걸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태우고 주차장을 빠져나갈 기세였다. 기어에 올린 우동주의 손을 꽉 붙잡았다.
“넌 촬영하러 가. 나 괜찮으니까.”
우동주가 내 눈을 진지하게 들여다본다. 내가 너무 소중해서, 누가 나를 상처 주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예를 들어 그게 자신의 아버지라도. 아들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 야, 누가 보면 네가 날 무슨 전쟁터에 내버리고 가는 줄 알겠다.
“그냥 집에 가지 말라니까. 나중에 내가 잘 말씀드리면 돼.”
“지금 내가 잘 말씀드려도 돼. 지금 자리를 피해버리면, 그걸 더 안 좋게 생각하실 거야.”
“…….”
우동주는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자기 아버지니까 나보다 더 아버님을 잘 알겠지. 나를 혼자 보낼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우동주의 두 뺨을 감쌌다. 이럴 때 보면 애 같다니까. 형아 안 죽는다, 이놈아.
“우리 누나한테 잘 보여두고 싶다며. 이런 순간이 생기면 좀 잘 봐줬으면 하고 그랬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넌 가서 촬영 잘하고 우리 누나한테 잘 보여둬야지.”
“이 상황에 당신 혼자 두고 가면 내가 너무 비겁한 새끼잖아.”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가 비겁한 새끼면, 세상에 안 비겁한 새끼 하나도 없어.
“넌 나한테 그냥 좋은 새끼니까 그런 걱정 말고 가.”
뺨을 감싼 내 손목을 부드럽게 쥐면서 우동주가 웃어 보였다. 반 억지웃음이었지만 나를 위해 억지로라도 웃어주는 게 기특했다. 무슨 외국 배우처럼 잘생긴 그 입술에 일부러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좀 전에 그런 짓을 하다가 봉변을 당해놓고도 정신 못 차린 거다. 아버님이 보셨으니 이젠 그 누가 와서 본다고 해도 이보다 더 최악인 상황은 있을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있었다.
“갔다 오면, 상 줄게.”
나는 조수석에서 내렸고, 우동주는 차를 반쯤 돌려 빌라 출입구 앞에 선 내 앞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주세영.”
항상 너무 가까이에만 있어서, 함께 차를 타고 서로를 마주 본 적은 많아도, 우동주는 차에 타고 나는 밖에 선 채로 서로를 본 적은 별로 없어서, 이렇게 보니까 또 느낌이 색달랐다.
어디 버릇없이 선배님 이름을 막 부르냐며 평소처럼 핀잔하는 농담도 나오지를 않았다. 능글맞게 구는 버릇없는 회사 후배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또 나를 의지하는 연인의 목소리였으니까.
“멋있어서 내가 진짜 또 반했다. 오늘은 나보고 엎드리라면 엎드릴게.”
이 상황에서도 날 웃게 할 수 있는 건, 장담하는데 우동주뿐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사양한다.”
우동주도 나를 따라 웃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면, 그 집 아들이 나 좋다고 하도 따라다녀서 하는 수 없이 사귀어주는 거라고 말씀드려버려.”
“‘말씀드려버려’라니? 그게 사실 아니야?”
고개를 저으면서 우동주가 또 웃었다. 못 당하겠다는 듯이. 너 그렇게 웃을 때, 아버지하고 정말 많이 닮았어. 물론 내 눈엔… 네가 쪼―금 더, 아주 쪼―금 더 멋있지만.
“어. 사실이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어주세영. 안 그러면 평생 귀찮게 따라다닐 거야.”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동주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동주는 끝까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별로 두렵지가 않았다.
예전의 주세영이라면 이런 순간의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을 거다. 기본적인 성격이 있으니, 벌어진 일에 대해 책임은 지려고 했겠지만, 분명 지금처럼 담담한 각오로 임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빨리 패닉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을 거고. 아마 한 며칠은 신경쇠약에 시달렸겠지. 박 팀장에게 들켰을 때만 해도 완전히 반 정신이 나갔었으니까.
등수가 확 떨어진 성적표를 숨겨놓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너 이게 뭐니’라는 멘트 아래 성적표 사진과 함께. 이제 집에 가면 난 죽었구나 하는 공포와, 그래도 앞으로는 마음 졸이며 살 필요는 없어졌다는 안도감이 함께 드는, 그런 복잡한 기분이었다.
내가 먼저 나서서 밝힐 용기는 없으니, 차라리 부모님이 찾아내서 따끔하게 혼내고 끝내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어느 한구석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혼자 지고 있기엔 너무 무거운 마음이었으니까.
현관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도어록을 열었다. 거실은 조용했다. 아버님은 출발하실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 아버님이 나오시기를 기다렸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 톤으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작전 같은 전 전혀 세우지 않았다. 그런 게 다 소용없을 것 같았다. 어젯밤에 현관 앞에서 나도 모르게 죄송하다는 말이 나와버렸던 것처럼.
등 뒤에서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님의 발자국 소리는 평소처럼 정숙해서 감정의 흐트러짐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다정한 미소로 나를 바라봐주셨던 아버님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있을까 봐, 그것을 두려워하면서.
웃고 계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싸늘한 눈빛도 아니었다. 그거면 됐다. 충분했고, 과분했다.
“세영 씨.”
“네….”
“괜찮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 소리 하기 좀 미안하지만… 나 좀 역까지 배웅해줄래요?”
그 말씀 뒤에는 희미하게나마 웃어주셨다. 나는 벌써 가슴이 막 뜨거웠다. 서울역까지 가는 동안, 우동주와 헤어져달라는 말씀을 하시더라도, 이런 순간에조차 나에게 웃어주신 그 마음만큼은 두고두고 감사할 것 같았다. 2, 30년 뒤의 우동주가 나를 싸늘하게 대한다면, 그것을 견뎌낼 자신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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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드리겠다는 작전도 없었지만, 역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신 걸 봐서는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아서, 나는 일단 아버님이 말문을 여시기를 기다렸다.
렌트 회사에서 차를 가져갔고, 아버님과 나는 내 차를 타고 좀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참 우습게 날씨가 좋았다. 누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마른 걸레로 꼼꼼히 문질러 닦은 것처럼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고, 시야가 깨끗했다. 전형적인 맑은 가을날이었다.
“잠깐 한강에 들렀다 갈까요?”
올 것이 오고 있었다. 와야만 하는 것이라면 와야 하겠지. 잠원한강공원으로 가기 위해 한남오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았다. 아마 내 생애 가장 의미심장한 좌회전이었을 거다.
일요일 오후인데도 한강공원 주차장은 생각만큼 붐비지 않았다. 그러나 물론 나들이 나온 가족이나 연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한강이 곧장 내려다보이는 주차장의 가장 앞줄에 차를 세웠다.
자기의 두 팔을 다 벌려도 한 아름에 안지 못하는 알록달록한 공을 가진 어린아이가 젊은 부부와 함께 차 앞을 지나갔다. 그걸 보니까 갑자기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용기가 다 사그라지고 아버님 앞에 고개를 들 면목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 아버님께 나는, 당신의 아들에게서 저런 형태의 행복을 빼앗아간 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무리 우동주 자신이 저런 행복보다 주세영과 함께 있는 행복을 택했다고 해도, 저런 행복 속의 아들을 지켜볼 수 있는 행복을 아버님에게서 빼앗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
어제 술자리에서 계속 담배를 피우시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담배를 안 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버님은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셨다. 나에게도 한 대 권하셨지만, 물론 사양했다. 예의도 예의였지만, 머리 아픈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담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걸 빨아들이고 뱉어낼 정신조차 없을 것 같았다.
오래 사용한 것 같은 길이 잘 든 고급 라이터로 불을 붙인 아버님은 첫 모금을 길게 내뿜으셨다. 한숨을 쉬는 대신 담배를 피우시는 것처럼 느껴져 안 그래도 말라붙은 마음이 서걱거렸다.
성적표 보시고 아마 많이 충격받으셨을 거예요. 압니다. 상상도 못 해보신 그런 성적일 테니까요. 그런데 아버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래요. ―우동주라면 아마 마음속으로 혼자서 이런 농담을 만들면서 긴장을 풀었겠지.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내 옆에 같이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우동주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 존재의 아버지 앞이라도.
“차에서 둘이 그러고 있었다는 건… 결국, 그런 얘기겠지?”
두어 모금을 더 피우시는 동안 눈앞의 한강을 잠자코 내려다보고 계시던 아버님이 드디어 입을 떼셨다. 지금 나에겐 염라대왕이나 옥황상제, 3심 판결을 내리려고 하는 판사나 다름없었다. 나는 2심에서까지 계속 유죄 선고를 받고 종신형에 처할지도 모르는 피고인이었고.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 죄를 지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도 왜 자꾸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혹시 제대로 못 보셨던 건 아닐까 하는 기대가 아예 없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리고 나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었다. 거짓말이란 끝까지 감출 자신이 있을 때, 상대가 마지막까지 이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게 해줄 수 있을 때, 그럴 때만 꺼내야 하는 작전이었다. 도중에 들켜서, 진실의 내용을 알게 된 충격에다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까지 두 배의 실망을 하게 할 바에야, 차라리 처음에 진실을 얘기하는 것으로 한 번의 충격만 주는 편이 나았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동주하고는… 3년째 교제하고 있습니다.”
우동주의 아버지에게, 내가 우동주와 사귀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는 기분.
언젠가는 말씀드려야 하는 날이 오겠지 생각하면서도 그건 우리 둘 다 마흔 줄에 들어섰을 때쯤일 거라고, 아직 먼 미래 같아서 실감이 안 났었는데. 아버님의 반응이 어떨지 그건 둘째치고라도 우리 관계에 대해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기분은… 그건 두려우면서도 벅찬 일이었다.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 우리의 관계를 인정받는 것보다 더. 인정해주지 않으시더라도, 말씀을 드리는 것만으로도.
“3년째라…. 회사에서 처음 만나서 그대로 사귀게 됐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어제. 집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나한테 죄송하다고 했던 거… 그것도 이런 의미였던 거예요?”
추궁하는 듯한 말투는 전혀 아니었다. 아버님은 가끔씩 반쯤 열어둔 창문 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쉬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가셨다.
“말씀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죄송했고, 지금도 죄송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말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저희 관계 자체에 대해 죄송한 마음은 갖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내 진심을 망가뜨리지 않고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횡설수설이라도 진심을 전하려 최선을 다하면 아버님은 그것을 알아주실 것 같았다. 그 진심을 받아주고 받아주지 않고는 그 다음 문제였다. 얘기를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분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나에게는 충분한 구원이었다.
고개를 숙였다. 열 번, 백 번이라도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비좁은 차 안이 아니었다면, 정말 우동주 말대로 무릎이라도 꿇었을 것이다. 그만큼 비장한 마음이었다.
“죄송하지 않다면서 세영 씨, 자꾸 죄송하다고만 하는데?”
무거운 분위기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렇게나마 나에게 농담을 해주시려 하는 마음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것까지 알아주시길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스스로 그렇게 꽉 막힌 꼰대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나도 결국 별수 없는 건가…. TV에서 가끔 그런 화제가 나오면, 만약 우리 아들들이 어느 날 나한테 남자가 좋다고 고백해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런 상상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실제하고 상상은 큰 차이가 있네. 나도 별수 없는 꼰대인 건지.”
옷차림은 물론이고 행동과 언변에서도 품위와 교양이 느껴지는 분이라 ‘꼰대’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아버님은 완벽한 신사처럼 보이는 한편 열에 들뜬 소년 같은 면이 남아 있는 분이라 그런지 어색하지가 않았다. 진짜 꼰대는 절대 자기가 꼰대인 줄 모른다. 진짜 꼰대는, 자기 아들과 키스한 남자의 마음 같은 건 헤아려주지 않는다. 잘은 몰라도, 아마 그럴 것이다.
우동주와 사귀고 있다는 얘기에 ‘응, 그랬군. 앞으로도 우리 동주 잘 부탁해요.’라고 말씀해주시길 기대한 건 전혀 아니었지만, 실제와 상상에 큰 차이가 있다는 말씀에, 뭔가 무서운 얘기를 하시려는 것은 아닐지 허벅지 위에 놓인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버님, 정말 죄송한데 저 동주랑 못 헤어집니다.
“사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동주 그놈하고 통화를 잠깐 했어요.”
하지 말라니까 진짜 말은 죽어라 안 듣는 놈이다.
“설설 기면서 빌 줄 알았더니, 그놈, 오히려 자기가 성이 바짝 나서 한다는 말이, 세영 씨한테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 하면 가만히 안 있겠다나?”
내가 못 산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니까, 진짜.
하지만, 기분이 나빴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못 말린다고 하면서도, 남자하고 키스하는 걸 부모한테 들켜놓고도 적반하장이나 하고 있는 망나니라고 하면서도, 날 생각해주는 것도 역시 그 망나니밖엔 없단 생각에 큰 응원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아니, 응원을 받은 게 아니지. 우린 한 팀이었으니까.
“내 아들이고, 30년을 봐왔으면서도 난 그놈을 얼마나 알고 있었나 싶네. 제 형은 갑자기 대학을 안 가고 농사를 이어받겠다는 둥, 아직 한창 어린 나이에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는 둥 하면서 몇 번이나 집안을 발칵 뒤집어놨었어도, 저놈은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놈이라 온순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서른이 돼서야 저렇게 이를 세울 줄이야.”
그렇게 말 잘 듣고 온순했던 아들이 나 때문에 달라졌다고 날 미워하실까. 아마 미워지셨겠지.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고개가 자꾸 수그러들어 턱이 거의 가슴에 닿을 지경이었다.
“바로 어제는 뭐가 됐든 좋으니까 그놈이 좀 집착할 대상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해놓고… 오늘은 바로 말을 바꿔버리면, 그건 역시 좀 치사하겠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 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가로저었다.
“어제 내가 세영 씨한테 했던 얘기들, 일단 그건 진심이에요. 우리 아들하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아직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솔직히 지금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해줄 말이 없지만… 세영 씨라면 나한테 미안해하고 괴로워할 것 같아서….”
윤 이사님 때 나는 실수했었다. 존경하고 믿을 수 있는 어른이라며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었지만, 내가 보지 못했던 그 뒷면에는 전혀 어른답지 못한 비겁함과 추한 속물근성이 웅크리고 있었다. 명백히 나의 실수였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아버님이 만약 우동주의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이분을 존경했을 거다. 어쩌면 그 이상의 감정까지도 품었을지 모른다. 어찌 됐든 2, 30년 뒤의 우동주였으니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모욕하고 원망하고, 헤어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것보다 더 목 안이 뜨끈해져왔다.
“동주하고 무슨 사이건, 그런 걸 떠나서 세영 씨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생각엔 변함없으니까…. 어제 우리가 했던 얘기들도 그놈하고는 상관없이 나하고 세영 씨하고 했던 얘기고…. 그러니까 어제 내 앞에서 한 얘기들 가지고 괜히 미안해할 거 없어요.”
처음엔 다소 경직돼 있었던 아버님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었던 물감의 덩어리가 물속에서 부드럽게 풀리듯이 점점 유연해져, 마지막쯤에는 거의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해졌다. 그게 너무 놀라웠다.
“오늘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이것뿐이네. 미안해요.”
“아니요…. 아닙니다….”
아버님의 미안하다는 말씀에 대해 거듭 부정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말씀을 더 드릴 수 있을까. 우리 관계의 떳떳함과는 별개로, 따귀를 맞고 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필 또 들켜도 그런 최악의 방법으로 들켜버렸는데,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주실 수 있는 건지. 그 인품 자체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3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은 존재했다. 숨 쉴 수 있었다.
아버님은 떠나셨다.
기차에 오르시기 전, 플랫폼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면서, 있는 동안 즐거웠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홈페이지 디자인 건은 긍정적으로 잘 부탁한다며 웃으면서 농담도 하셨다. 입을 열면 가슴속을 틀어막은 뜨거운 덩어리가 눈물이 되어 쏟아질 것 같아서, 그때는 죄송하다는 말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작은 상자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인 내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드레시 리버스의 로고가 새겨진 정사각형의 흰색 상자였다.
“이거, 어제 고마워서 세영 씨 주려고 하나 샀던 거예요. 받아줘요.”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처음 우리 집 현관 앞에 계셨을 때와 같은 미소로 나를 보고 계셨다. 상황 파악이 안 된 내가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내 손에다 직접 상자를 쥐여주셨다.
“사실 이거 가지러 주차장에 내려갔었어요. 몰래 주려고 어제 차에 두고 왔었거든. 별것도 아닌 걸로 괜히 세영 씨 놀라게 하려다 내가 당했지. 금요일에 입었던 슈트, 거기에 포켓스퀘어로 쓰면 어울릴 것 같길래.”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 했다. 감사하다는 말도, 죄송하다는 말도, 그 둘을 모두 몇 번이나 말한다 해도, 그건 지금 내 마음이 아닌 것 같았다. 손안에 들어온 작은 상자를 그저 꽉 쥐고 있었다.
기차가 떠나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시동을 켜지 못했다. 아버님이 계실 때 피우지 못했던 담배를 연달아 몇 개비를 피웠는지 모른다. 과다 충전된 니코틴 때문에 손끝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을 때쯤, 잊고 있던 중요한 일이 갑자기 생각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상자를 열어보았다.
테두리에 갈색 트리밍이 둘러진 진회색 손수건이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네이비색 슈트의 체스트 포켓에 장식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누가 추천해주신 건데. 어울리지 않을 리가.
아버님은 이걸로 나를 놀라게 하시려다 오히려 아버님이 놀랐다고 하셨지만, 그 상황을 겪고도 나에게 이걸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몇 배를 더 놀랐다. 그러니 아버님의 작전은 절대 실패가 아니었다.
나는 시동을 켜고 액셀을 밟았다.
우동주가 촬영하고 있는 스튜디오 앞에 차를 세워두고 두세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아마추어 일반인이 모델이고, 한두 컷만 채우면 되는 촬영이라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꽤 길게 진행이 됐다. 하지만 꼼짝없이 운전석에 앉아 가끔 담배만 피웠을 뿐인데도 지루한 줄 몰랐다. 모든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우동주와 격렬하게 키스하는 장면을 우동주의 아버지에게 들켰는데, 우동주의 아버지는 나를 추궁하지도 탓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내가 죄송해하고 마음 쓰일 것을 염려하셨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우리가 정말 들킨 게 맞긴 한가? 우동주하고 애인 사이라고, 아버님께 제대로 말씀드리긴 했었나?
분명 엄청난 폭풍이 지나갔는데, 지나가는 동안 질끈 눈을 감고 있다가 처참한 광경을 예상하면서 가까스로 실눈을 떴는데, 폭풍이 지나가기 전과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기적을 목격한 것 같았다. 기뻐하기에 앞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튜디오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나는, 웬 우월한 놈이 잘생긴 얼굴을 험악하게 찡그린 채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두드리면서 뛰어나오는 걸 보고 짧게 클랙슨을 울렸다. 나를 발견한 우동주가 화난 것 같은 험악한 표정으로 멈춰 서서 이쪽을 보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떻게 됐어? 응? 전화는 또 왜 꺼놨는데? 아버지한테 막 이상한 소리 같은 거 들은 거 아니지?”
한 번에 하나씩 물어봐라. 안 그래도 이 형님 정신이 반쯤 나가서 두뇌 회전이 느리다.
“어떤 이상한 소리?”
“아, 왜 드라마에서 보면 꼭 그러잖아. 봉투 같은 거 내밀면서, 내 아들한테서 떨어지라고.”
아버님은 30년이 넘도록 아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30년을 뵈어왔으면서도 자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건 우동주도 마찬가지였다.
대답할 기력도 없어서 고개만 가로저었다. 우동주 얼굴을 보니까 그제야 극심한 피로가 느껴졌다. 좀 전까진 누가 때려도 모를 것 같을 만큼 아무 감각이 없었는데. 동주야, 폭풍이 지나갔어. 근데 폭풍이 지나간 자리가 너무 멀쩡해. 무슨 그런 폭풍이 다 있냐? 어?
“그럼 전화는 왜 꺼놨어?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얼마나 똥줄 탔는지 알아?”
우동주는 아예 나를 한 대 쥐어박을 기세였다.
“별일 없었다고 문자 했잖아. 그리고 너 계속 전화만 신경 쓰면서 촬영도 제대로 안 할까 봐 꺼놨지.”
정곡을 찔린 우동주는 핸드폰을 꺼놓은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털어놓으라는 우동주의 닦달에 자동차 안에 앉은 채로 아버님과 했던 얘기들을 고스란히 전달해야 했다.
얘기를 듣는 동안 우동주는 말없이 두 개비의 담배를 피웠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야 겨우 미간의 주름을 지우고 조수석 시트에 등을 기댔다. 한시름 놨다는 듯한 표정을 보니, 왠지 하고 있지도 않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는 것 같았다.
“하아… 아무튼 급한 고비는 넘긴 거 같고…. 난 아버지가 당신한테 뭐라고 하시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냥 다행이야. 아, 근데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들키냐고! 빼도 박도 못하게 현행범이잖아.”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는 듯 우동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좀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오늘따라 바싹 말라 건조한 것 같은 손등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면서. 이 미소를 보려고 오늘 하루 그렇게 진을 뺐던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으니까 그냥 좋았다. 편안하고, 다른 건 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대로 집에 가서 둘이 껴안고 머릿속이, 몸속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실컷 섹스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주세영, 진짜 멋있다. 내가 28년 만에 갑자기 게이가 될 만해. 아버지도 곧 인정하시게 될 거야.”
“너 근데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무슨 버릇없는 말을 한 거야. 이따 전화해서 제대로 사과드려.”
“왜, 나 틀린 말 한 거 없어.”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미운 고집쟁이인데, 어떻게 학교 다닐 땐 말썽 한 번 안 피웠을까. 너 내숭 떤 거지? 부모님 몰래 뒤에서 할 거 다 하고 다녔지? 분명히 아버님이 너한테 속고 계신 걸 거야.
“네가 그러면 아버님이 날 더 미워하실 거 아니야. 나 때문에 네가 버릇없어졌다고.”
“흠….”
누가 봐도 내가 맞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데도 우동주는 얼른 알았다고 하지 않고, 굉장히 불만스럽고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반응은.”
“내가 당신 좋아하면 됐지, 꼭 아버지까지 당신 좋아해야 돼? 그럴 필요가 있어?”
“야, 이게 그런 문제냐?”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안달 안 해도 아버진 분명히 당신 좋아해.”
“뭐?”
“우리 아버지야. 나하고 적어도 절반은 같은 유전자를 가졌다고.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아? 당신, 우리 아버지가 다정하고 친절한 분이라고 생각하지?”
하느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부처님이 살생하지 않으시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소리를.
“우리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한테 얼마나 냉정하고 차갑게 대하는지 못 봐서 그러는 거야. 당신이 마음에 안 들었으면 오늘 한남동에 칼바람 불었어. 나도 당신도 둘 다 살아남지 못했다고. 나중에 우리 관계 인정해주시게 되더라도, 그건 아마 내가 남자 만나는 걸 인정해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하고 만나는 걸 인정하시는 게 될걸?”
원래가 기질이 다정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에게 따뜻하게 웃어주셔도, 정답게 손을 붙잡아주셔도 그건 내가 특별한 게 아니라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정이 많으신 분일 거라고. 그래서 아버님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좀 이상하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 냉정하고 차갑게 구는 아버님을 상상해봐도 전혀 싫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버님이 싫어하시는 거라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싶었다.
근데 나한테 특별히 잘해주셨던 거구나. 그래도 조금은 마음에 들었던 거였어…. 다행이다.
“내가 이래서 말해주기 싫었어!”
“뭐… 뭐가?”
“아버지가 당신 마음에 들어 하신다니까 당신 지금 좋아서 얼굴 빨개졌잖아!”
너는 우리 누나한테 잘 보이겠다고 전국에 있는 남녀가 다 볼 수 있는 잡지에 얼굴 실어놓고, 나는 너희 아버지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는 것도 안 되냐?
“빨리 가. 빨리 가서 나 상 줘.”
“네 차는?”
“지금 차가 문제야? 여기서 당장 해줄 거 아니면 빨리 출발해.”
우동주는 운전석 쪽으로 덤벼들면서 자기가 대신 시동을 걸었다. 서른 살짜리 다 큰 애인의 막무가내 질투심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웃는다.
그래, 가자. 상 줘야지. 어차피 그거, 나한테도 상이니까.
■
그렇게 서로 상을 주고 상을 받으면서, 나중엔 담배를 들어 올릴 기운도 남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불태운 일요일이 지난 뒤로 몇 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는 꽤 묵직한 상자, 꽤 묵직한 ‘심판의 결과’가 놓여 있었다.
“네가 열어봐.”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우동주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니야, 내가 열어볼래!”
하지만 역시 내가 직접 열어보고 싶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상자의 뚜껑이 서로 맞닿은 부분을 커터칼로 잘라나가는 심정이 대수술을 위해 환자의 환부를 열어보는 외과의라도 된 것처럼 진지했다.
이 안에 어떤 형태의 ‘결정’이 들어 있더라도 놀라지 말자. 지금 당장 받아들여 주지 않으신대도 우린 헤어질 생각이 없고, 앞으로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설득해나가기로 했으니까. 무엇이 있더라도. 예를 들어,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의 경고장이나, 우동주의 이름에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족보라든가, 드레시 리버스의 로고가 새겨진 상자가 있더라도… 응? 뭐? 드레시 리버스?
“…….”
“…….”
상자를 열어본 우리는 둘 다 말이 없었다. 택배 박스 안에 들어 있는 건 또 하나의 하얀 상자였고, 블랙 컬러의 리본이 정갈하게 묶인,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상자 위에 잔뜩 멋을 부린 필기체로 인쇄된 글자는 분명 ‘DRESSY REVERSE’였다.
“드레시 리버스? 당신, 여기서 뭐 주문했어? 아닌데, 분명 보낸 사람이 아버지였는데.”
우동주는 택배 송장에 적힌 이름까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우동주는 아직 감이 안 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일지, 그걸 보내주신 아버님의 ‘결정’이 어떤 것일지, 벌써부터 짐작이 돼서, 하얀 상자 위에 감긴 검은 리본의 매듭을 풀어보기도 전부터 숯덩이라도 삼킨 것처럼 목구멍 안쪽이 뜨거워졌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면, 아버님에게 진짜 반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상자는 아래위로 두 개가 겹쳐져 있었고, 그 두 개의 상자 안에는 각각 슈트 한 벌씩이 들어 있었다. 그레이톤의 글렌체크 슈트에는 우동주의 이니셜이, 네이비 컬러의 더블 슈트에는 나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아버님이 와 계셨던 금요일에 나는 출근 의상으로 네이비색 슈트를 골랐었고, 아버님은 네이비가 아주 잘 어울린다며 칭찬해주셨었다. 그리고 아버님 그걸 기억해주고 계셨다. 감동하지 말라는 게 무리다.
“저번주에 갔을 때, 그 오너 아무 말도 없었잖아. 아버지하고 한통속이네.”
드레시 리버스에는 우동주와 나의 치수가 모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셔츠를 맞출 때도 슈트를 맞출 때도 따로 치수를 잴 필요가 없었다. 전화 한 통으로도 주문은 충분히 가능했다.
지난주에도 우동주와 함께 가서 겨울을 대비한 톡톡한 셔츠를 하나씩 맞추고 왔지만, 오너는 우리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 오너는 전적으로 아버님 편일 테니까.
우동주는 자기 몫의 슈트를 꺼내 벌써 걸쳐보고 있었지만, 나는 상자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내 몫의 슈트를 감히 꺼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유리로 된 진열장 같은 걸 만들어서 이 상태 그대로 영원히 보존해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뭐야. 카드네.”
우동주의 슈트 상의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카드가 툭 떨어졌고, 우리는 바짝 붙어 앉아서 침도 제대로 못 삼킨 채 벌벌 떨면서 카드를 개봉했다.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이야말로 진짜 ‘결정’일 테니까. 아마 혼자 있었을 때 이 카드를 발견했으면 난 우동주가 올 때까지 열어보지도 못했을 거다.
카드마저도 아름답고 고상한데, 아버님은 필체까지 멋졌다.
난 이런 식으로 알게 됐지만,
엄마에겐 니들이 직접 제대로 설명해야지.
언제 한번 둘이 군산에 내려와.
각오가 됐을 때 얘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