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

“애들도 아니고 무슨 트리를 하자고 그래.”

크리스마스를 2주일 정도 앞둔 주말.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트리 타령을 하던 우동주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우리는 강남고속터미널 지하상가로 출발했다.

“그런 거 엄청 좋아하게 생겨가지고 은근 무디다니까. 일단 해놓으면 당신도 좋아할걸?”

놀러 간 친구 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와서 우리 집도 하자며 떼쓰는 애도 아니고. 그래도 트리 사러 간다고 신나서 종일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는 게, 해서 나쁠 건 없겠지 싶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 오랜만에 차는 두고 나왔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그러고 보니 나하고 대중교통 타본 적이 없다고 굳이 버스를 타자고 해서 한남오거리 버스정류장까지 내려갔다. 사람들 틈에 섞여 우동주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기분이 신선하긴 했다. 이번 주 들어 부쩍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지만, 내 기분 탓인지 아니면 우동주 말대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서 그런지 다들 표정만큼은 밝아 보였다.

“안 추워요? 코트 너무 얇지 않아?”

카키가 섞인 따뜻한 색감의 회색 헌팅 재킷에 트위드 재질의 코트까지 겹쳐 입고 나온 우동주는, 스웨터 위에 울 코트만 걸치고 머플러를 두른 내가 추워 보이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옷차림을 훑었다.

네가 워낙 든든하게 입어서 그렇지 난 그냥 보통이거든? 나보고 과잉보호라더니 자기가 더하네. 조금은 고집스러워 보이는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담배 연기 같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얘, 언제 이렇게 멋쟁이가 됐지? 애인을 잘 만났나 봐.

“왜, 춥다 그러면 안아주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동주는 진지한 얼굴로 코트 자락을 양쪽으로 벌려 보였다. 뭐, 그 안에 들어가라고?

“그러기엔 내가 너무 크다고 생각 안 하냐?”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확 그래봐?’라는 짓궂은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많이 변했다. 전 같았으면 아무리 장난이라도 사람들 있는 데서 뭐 하는 짓이냐며 몸부터 사렸을 텐데.

장난을 장난으로 받은 내 대응에 우동주가 입가에 매력적인 주름을 만들면서 웃었다. 아직은 20대라 웃지 않고 있으면 그 주름은 자취를 감춰버리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진해질 것이다. 해가 지날수록 아마 더 멋진 남자가 되겠지. 난 평생토록 이 남자에게 꼬이는 경쟁자들을 물리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일흔이 넘어도, 아니 일흔이 넘으면, 지금 가진 매력에 연륜이 더해져 더 근사해질 테니 그건 그거대로 행복한 고민이다. 일흔이 넘어서도 연인에게 성적 긴장감을 느끼며 살 수 있다면 나도 거기에 뒤지지 않기 위해 그만큼 스스로 관리하게 될 거고. 멋진 할아버지 커플로 나이를 먹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아직은 막연한 상상이기는 해도.

“나한텐 작고 귀여워.”

“7센티 가지고 생색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우동주의 어깨를 툭 밀면서 핀잔했지만, 무슨 뜻인지 안다. 객관적으로 작고 귀여운가 하는 사실과는 별개다. 나에게도 우동주는 작고 귀엽다. 그건 소중히 여기는 마음 자체의 표현이다.

5분 정도 지나고 142번 버스가 도착했다. 빈자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만원 버스도 아니었다. 우리는 버스의 허리쯤에 손잡이를 잡고 나란히 섰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 우동주가 선물해줬던 갈색 가죽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거실엔 큰 걸로 하고 침실엔 작은 걸로 귀엽게 하자.”

“두 개나 하려고?”

“거실에만 하면 침실이 썰렁하고, 침실에만 하면 거실이 썰렁하잖아.”

그래그래, 이왕 하는 거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우동주 어린이. 버스는 금세 한남대교로 들어섰고 잠시 후에는 전면창에 햇빛을 반사시키는 우리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 집이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마주 보고 씩 웃었다.

신사역에서 우동주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내렸고, 우동주는 내 팔을 끌어다 거기 앉혔다. 내 앞의 좌석 등받이에 달린 손잡이를 붙잡은 우동주의 손을 보는데 괜히 가슴이 뛰었다. 우동주의 벌어진 코트 자락이 버스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릴 때마다 손으로 쥐어보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올려다보니 우동주도 날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처음으로 같이 버스를 탄 것만으로도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눈이 올 것처럼 하늘이 낮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우동주의 짧은 곱슬머리에 구름이 닿을 것 같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거실엔 초록색 트리로 하고, 침실은 화이트로 하자. 우와, 이거 어때요? 진짜 나무 같다. 그치?”

우동주에게 선택받은 놈은 2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우람하고 풍성한 솔잎을 가진 트리였다. 줄기도 촘촘하고 튼튼해서 오래 두고 매년 쓰기엔 좋을 것 같긴 했지만 그만큼 가격이 좀 셌다.

“이거 봐. 이거 창문에도 붙일 수 있대. 거실 테라스 창에다 붙일까?”

신났네, 신났어. 눈사람, 트리, 산타, 루돌프 등등 다양한 디자인의 그래픽 스티커에 꽂힌 우동주는 이걸 집었다 저걸 집었다 하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다.

말끔하게 잘 차려입은 성인 남자가 크리스마스 장식품들 사이에 서서 눈을 빛내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생각보다 예쁜 소품들이 많기도 해서 나도 처음엔 흥이 났지만 두 시간쯤 지나자 슬슬 지루했다.

“집집마다 다 비슷비슷하네. 그만 결정하고 집에 가자. 이제 피곤하다.”

덥고 건조한 실내 공기에 손부채질을 하며 우동주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코트는 벌써 아까부터 벗어서 손에 들고 있었다.

“옷 살 땐 몇 시간이고 잘만 돌아다니면서.”

지하라 그런지 공기도 답답하고, 사람이 너무 많아 멈춰 서서 구경 좀 하려면 이리저리 밀리기 바빴다. 요즘엔 백화점에 가서도 두 시간 이상 버틴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우동주가 ‘몇 시간이고’라며 툴툴거리길래 말없이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봤더니, “알았어요.” 라며 금세 꼬리를 내렸다.

착한 애인을 두긴 했지. 가끔은 우동주의 친절에 너무 익숙해진 자신을 보면서, 이래도 되나 걱정될 정도니까. 이 달콤함에 완전히 길들여지고 나면 다른 사람은 진짜 못 만나게 될 것 같고. 다른 사람 만날 생각도 없지만, 그 정도로 잘해준다는 얘기다.

2m 넘는 트리 하나에 내 허리쯤 오는 작은 트리 하나. 갖가지 디자인과 갖가지 사이즈의 장식볼에 오너먼트에 리본, 꼬마전구, 그래픽 스티커…. 아무튼 원 없이 골랐다. 트리 두 개에 들어간 총금액은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지만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코트 값하고 비슷하잖아.’라고 하면 할 말 없으니까.

트리, 트리 노래를 부르길래 어릴 때 트리를 못 만들어봐서 한이 맺혔나 싶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매년 11월만 되면 집 거실에 집채만 한 트리가 들어선단다. 그래서 그런지 장식품 고르는 센스가 제법이었다. 너무 유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고상 떠는 분위기도 아닌, 적절히 포근하고 가정적인 느낌이었다. 딱 지금 우리 집처럼.

아마 우동주의 부모님은 좋은 분들일 것 같다. 고급 빌라들 특유의 거만함이 빠진, 사람 냄새 풍기는 따뜻한 공간을 만드신 우동주의 아버님도 그렇고, 우동주가 가끔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어머님도 곧은 의지에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실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즘 세상에 아들을 이렇게 반듯하고 훈훈한 사람으로 성장시키실 순 없었겠지.

그럴 일은 아마 없겠지만 혹시라도 양가 부모님이 서로 만날 일이 생긴다면 꽤 재미있을 것 같다는, 나로서는 굉장히 대범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고른 물건들은 전부 트리와 함께 배달해준다고 해서 잔뜩 사놓고도 달랑달랑 맨손으로 가볍게 상가를 나왔다. 값비싼 슈트를 맞추고도 빈손으로 테일러샵을 나올 때와 비슷했다.

“어? 눈 오나 봐.”

하늘이 찌뿌드드하더니 그새 눈이 오는지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머리와 어깨를 털기 바빴다.

“우산 하나 살까?”

사람이 많아 나보다 한 계단 앞서 올라가던 우동주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얘는 가끔 나를 너무 과보호할 때가 있다. 그것도 다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됐어, 갈 때 택시 타고 가지 뭐.”

눈도 오는데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서 근처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잔하기로 하고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갈색 트위드 코트의 깃을 반쯤 세우고 걸어가는 우동주의 뒷모습이 멋졌다. 아마 지나가다가 이런 남자를 봤다면, 따라가서 묻고 싶었을 거다. 그 코트 어디서 사셨어요? 하지만 꼭 코트의 문제만은 아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팔과 옆구리 사이의 빈 공간을 보는데 문득 팔짱이 끼고 싶었다. 스스로도 의외의 충동이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그런 류의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무슨 변덕인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에서 손만 잡으려고 해도 펄쩍 뛰던 주세영인데 참 많이 변했다. 아닌 척했지만 크리스마스 트리를 쇼핑하고 눈 오는 거리를 걷는 데이트에 약간은 들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마실래요? 주문해올게.”

아울렛이 있는 거리까지 꽤 걸어 카페로 들어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우동주는 내 어깨와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조심스럽게 털어줬다. 예전 같았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매정하게 뿌리쳤겠지만, 이젠 이 정도 스킨십은 얌전히 받아들였다.

“카푸치노. 눈이 와서 그런지 거품이 땡기네.”

“오케이.”

주문을 하러 가면서 물방울이 멀리 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머리를 털어내는 우동주를 지켜보다가 문득 매장 안을 둘러보니, 역시나 몇몇 사람들이 나처럼 우동주의 뒷모습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들 잘 키워놓으면 이런 기분일까. 어깨가 으쓱해지는 이 흐뭇함이 비슷할 것도 같았다.

우동주가 벗어놓고 간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면서 카페에 흐르는 캐롤을 듣고 있으려니 슬슬 나도 성탄절 분위기에 동화되는 것 같았다. 8시에는 물건이 도착할 거라고 했으니까 저녁 먹고 같이 트리 만들어야지. 조명을 전부 꺼놓고 깜빡거리는 꼬마전구 불빛에만 의존해 트리 앞에서 키스를 하는 것도 그림 괜찮겠네.

[네. 아… 다음 주 수요일이요?]

동그란 진동벨을 들고 자리로 걸어오면서 우동주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누구?’ 입 모양으로 물었더니, ‘엄마, 엄마’ 하고 자기도 입모양으로 대답한다. 서울에서 혼자 맞는 겨울인데, 우동주 어린이가 트리는 장식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전화하셨나, 생각하면서 이번엔 우동주가 가지고 온 진동벨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네, 제가 성주하고 따로 통화할게요. 아이,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응.]

성주? 성주라면 우 씨 집안 삼 형제 중 막내인 그 성주?

[그럼, 잘 지내죠. 할아버진? 아… 진짜? 하하, 아무튼 대단하시다니까…. 응? 크리스마스 선물? 아, 당연히 해드려야지. 뭐 갖고 싶은지 생각해두세요. 엄마, 나 지금 밖이라…. 어, 내가 전화할게요. 응, 들어가세요.]

나에게 얘기할 때는 거의 꼬박꼬박 어머니라고 존칭하는데 직접 대화할 때는 엄마라고도 하는구나, 귀엽네.

“뭐라셔?”

별생각 없이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우동주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잘 계신다고 한 것 같고, 동생한테 무슨 일이 있나?

“아… 저기….”

우동주가 머뭇머뭇 입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내 손안에서 진동벨이 울렸다. 일어나려고 하는 우동주의 어깨를 누르면서 진동벨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왔다.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무슨 일인지 얘기해보라고 우동주를 재촉했다.

“내 동생 알죠? 성주. 걔가 종강했다고 서울 놀러 간다고 하도 그래서… 수요일에 우리 집에 좀 보낸다고….”

“뭐?”

거의 반사적으로 나간 반응이었다.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안락하고 비밀스러운 우리의 보금자리에 침입자가 등장하다니. 최대 위기상황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당신은 신경 안 써도 돼요. 애 혼자 호텔에 두기도 그러니까 그냥 우리 집에 짐 두고 잠만 재우라는 거지. 맨날 뽈뽈거리고 돌아다닐 거라 부딪칠 일도 없을 거야.”

우동주의 형님(나와 동갑이긴 하지만)에 대한 얘기는 종종 자세히 들었던 것 같은데 동생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애? 몇 살인데?”

“스물한 살.”

가끔 무슨무슨 한정판 운동화나 군산에서 품절된 나이키 패딩 점퍼 같은 걸 사서 보내라고 하길래, 막내가 좀 어린가 보다 싶긴 했는데… 정말 애였군.

아무리 동생이라고는 해도 일단 우동주의 가족인 데다가 거기다 안세영보다도 더 어린 스물한 살짜리. 그것도 한정판 운동화와 나이키 패딩 점퍼에 목매는 스물한 살짜리와 단 며칠이라도 같은 집에서 화목하게 지낼 자신이 없었다. 눈 내리는 풍경과 조용조용한 캐롤과 우동주의 훈훈한 뒷모습에 눅진눅진해졌던 내 마음이 단번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내년에 군대 가거든. 그 전에 좀 놀고 싶나 봐. 얘가 막내에 늦둥이라 집에서 좀 오냐오냐해요. 하고 싶단 건 별로 안 말려.”

내 생각엔 동생분을 오냐오냐한다는 그 ‘집’이라는 그룹에 너도 포함되는 것 같은데.

“너, 나는 뭐라고 설명할 건데?”

“같이 사는 회사 선배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무리 스물한 살이 우리보다 한참 어려도 중고딩도 아닌데, 다 큰 남자끼리 그것도 친한 친구도 아니고 회사 선후배끼리 같이 사는 걸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없잖아, 이 멍충아! 옆 테이블의 대화도, 속삭이는 듯한 캐롤도, 뭉실뭉실한 카푸치노의 거품도, 갑자기 모든 게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애라서 괜찮을 거야. 내가 하는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믿는 애거든. 예의 바르고 착한 애라니까. 대학교 2학년이나 된 놈이 아직도 얼마나 귀여운데. 걱정할 거 진짜 하나도 없어요, 어?”

나도 너처럼 속 편한 놈이고 싶다…. 글쎄, 난 네가 뭐라고 말해도 스물한 살 된 네 동생이 우리 둘의 동거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데?

“몰라, 네 동생 와 있는 동안 난 나가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뭐? 왜? 어디로?”

이번엔 우동주가 펄쩍 뛰었다. 근데 난 지금 우동주가 펄쩍 뛰든 땅으로 꺼지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호텔에 가 있든지 할 거야.”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어진 우동주의 동생이라는 미션에 얕은 내 멘탈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멀쩡한 집 놔두고 왜? 내 동생 진짜 착하고 귀엽다니까. 만나보면 당신도 분명히 걔 마음에 들어 할걸? 그리고 걔는 나하고 달리 옷도 좋아해. 둘이 통하는 게 많을 거야.”

운동화에 패딩 점퍼를 입는 스물한 살짜리하고 내가 통하는 게 많을 거라고? 난 스물한 살 때도 페라가모 구두를 갖고 싶어서 과외 알바했던 놈이거든? 아, 완전히 패닉이다, 진짜.

“군산엔 언제 다시 간다는데?”

우동주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마지막 희망을 한 가닥 부여잡고 물었다. 2박 3일이나 3박 4일이라면 어떻게 버텨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지금까지는 확신에 차서 적극적으로 나를 설득하던 우동주가 콧등을 긁으면서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아, 그게… 연말까지 있을 거라고….”

안타깝게도, 내 멘탈의 수용범위는 거기까지였다.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우동주의 정강이를 걷어찰 것 같았다. 우동주의 막둥이 늦둥이 동생님은 내 토요일을 망친 데 이어 우동주와의 첫 크리스마스까지 망칠 셈이었다.

뭐? 같이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니까 집에서 직접 스테이크도 굽고 샐러드도 만들어주겠다고? 다이닝룸에다 캔들 스탠드까지 놓고 우리도 분위기 좀 내보자고? 그런 다음엔 욕실에 향초 켜놓고 거품 목욕 하고 끝내주는 밤을 보내자고? 네가 그랬지? 네가 이 입으로 그랬지? 이 못된 입!

만화영화에서처럼 머리 위로 김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쟁반을 서비스 테이블에 가져다 놓고 황급히 뒤따라 나온 우동주의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거의 비처럼 변해버린 눈 때문에 담배에 불이 잘 안 붙었다. 신경질 나서 죽겠는데 별게 다 속 썩이네.

“미안, 진짜 미안. 근데 어머니가 전화하셔서 그러라고 하시는데 뭐라고 둘러댈 말이 없잖아. 화내지 마라, 응?”

방향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내딛던 걸음을 뚝 멈췄다. 나도 우동주에게 화내기 싫다. 우동주가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면도 좋아한다. 할 수만 있다면, 우동주를 이렇게 따뜻하고 멋진 남자로 길러주시고 내 곁으로 보내주신 우동주의 부모님을 뵙고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근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남자 애인이 찾아가서 인사드리는 것이야말로 불효일 테니까.

넌 정말 네 동생이 나라는 존재를 그냥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냐? 너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놈이네.

“스테이크랑 샐러드는 네 동생이랑 같이 맛있게 먹어라. 거품 목욕도 네 동생이랑 하고.”

“세영아.”

이런 순간에 이름을 부르다니, 비겁한 놈. 너 지금 내 앞에 무릎 꿇고 싹싹 빌면서, 주세영 선배님, 주세영 님, 주세영 대왕님 해도 모자랄 판이야. 네 동생이 눈치채면 어떡할 거냐고. 어? ‘형, 저 선배라는 사람이 형을 엄청 끈적한 눈으로 보는데?’ 이럼 어쩔 거야? 회사에선 몰라도 지금까지 집에선 완전히 풀어져 지냈는데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널 대하면 어쩔 거냐고. 원래 그런 건 자기들은 의식 못 해도 남들 눈엔 미묘하게 표시 나기 마련인데. 내가 회사 후배를 보는 눈으로 널 볼 수 있겠냐? 난 그렇다 쳐도 내 생각엔 네가 절대로 그렇겐 못할 것 같은데.

“미안, 진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말고 할 말이 없다. 근데 정말… 조금만 이해해주면 안 돼? 크리스마스 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돌려보낼게.”

너처럼 마음 약한 놈이 무슨 수로? 거기다 또 동생 바보야. 내가 딸바보란 말은 들어봤어도, 다 큰 남동생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바보도 있단 얘긴 처음 들어본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거리에서 날 붙잡고 서 있는 우동주를 보고 있는데, 말할 수 없이 속상했다. 사실은 우동주한테 화내고 싶은 게 아닌데…. 우동주의 크리스마스 계획에 무슨 유난이냐고 했었지만 사실은 나도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계획이 틀어져버린 것도 실망스러웠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가족의 방문이라는 극히 자연스러운 상황조차도 우리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자체. 이 상황을 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우동주.

이것도 견해 차이일까? 예민한 주세영이 미리 겁먹고 몸 사리는 거? 그럼 대체 어디까지가 조심스러운 대비고, 어디서부터가 불필요한 걱정인 거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왔다. 택시 안에서도 우동주는 안절부절못하고 내 눈치를 살폈지만, 입을 열면 상처 주는 말들이 나올 것 같아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일시적인 감정에 휩싸인 충동적인 생각이었지만 괜히 같이 살았나 싶기까지 했다. 집에서 나갈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즐거웠는데. 그 생각을 하니 더 속상했다.

아직까지 상세 커플이 놀러 와도 불편함을 느끼는 모난 성격의 대표주자 주세영이라, 우리 관계를 전혀 모르고 또 들켜서도 안 되는 우동주의 동생이 와서 지내게 된 것에 거의 공포감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동주 회사 선배인 주세영이라고 합니다. 잘 지내봐요.’라고 말할 뻔뻔함이 나에겐 없단 말이다.

침실도 따로 써야 할 거고, 말투도 신경 써야 되고, 어째서 다 큰 남자들끼리 같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도 생각해내야 하고…. 우동주 너야 연기 잘하니까 괜찮겠지만 난 연기엔 정말 소질 없다고. 덕분에 참고서값 한 번 몰래 빼돌려보지 못한 비운의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인데, 내가. 아, 정말 미치겠네.

“진짜 별일 없을 거라니까. 주세영, 진짜 이럴래?”

미안하다고 계속 사과하는 우동주를 무시하고 침실로 직행했다. 뭐? 주세영 진짜 이럴래? 주세영 선배님, 주세영 님, 주세영 대왕님 해도 모자랄 판이라니까 얘가 진짜 분위기 파악 못하네. 나 지금 진지하거든? 진짜 호텔로 나가버릴 수도 있어, 농담 아니야.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이를 닦는 동안에도 우동주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어떻게든 화해 모드를 만들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이건 화를 풀고 안 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화 풀면, 그럼 네 동생 안 와? 다음 주 수요일에도,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네 동생 방해 없이 우리 둘만 조용히 여기서 살 수 있냐고. 나, 너 아닌 사람하고 한집에서 지낼 자신 없다. 그게 네 동생이든, 형님이든, 심지어 5년도 넘게 혼자 살았더니 이젠 내 부모님하고도 같이 못 살 것 같아. 연말까지든, 크리스마스까지든, 일주일이든, 하루든 못 견딜 것 같다고, 이 망할 놈아.

“그러지 말고…. 밥 먹고 같이 트리 만들자, 세영아, 응?”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내 위에 올라타고는 그 커다란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른다. 귀여운 척해봐야 소용없어. 지금 마음 같아선 그 트리도 전부 다 환불해버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니까.

“안 해, 네가 샀으니까 너 혼자 해. 나가, 잘 거야.”

“싫어, 자지 마. 나 배고프다, 같이 밥 먹자아―. 성주한텐 내가 진짜 잘 설명해놓을게. 크리스마스 전에 꼭 쫓아낼 거고. 어? 어?”

이불 위에서 나를 부둥켜안고 있던 우동주는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내려고 했지만, 어림없었다. 네 동생 오면 이 침대에서도 못 자는 거잖아. 내가 왜 멀쩡한 내 침실 놔두고 손님방으로 쫓겨나야 되는 거냐고. 아니지, 어쩌면 손님방 침대도 동생님한테 내주고 난 서재에서 이불 깔고 자야 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지. 왜, 왜, 왜? 난 엄연히 생활비 반 내고 떳떳하게 이 집에 사는 사람인데, 내가 왜?

“나 지금 진짜 혼자 있고 싶으니까 너 혼자 라면 끓여 먹든지 짱깨 시켜 먹든지 마음대로 해.”

풀어주겠다고 끈기 있게 덤비는 우동주 마음은 알겠는데, 가끔은 잠깐 혼자 두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옆에서 달래려고 하면 점점 감정에 도취돼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흐려져 버리기도 하니까. 내 몸을 안고 흔들거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내 얼굴쯤에 우동주가 고개를 푹 파묻었다.

“안 먹고 기다릴게.”

얼굴이 멀어지고, 그 다음으론 팔이 풀려나가고, 그러고는 내 위를 누르고 있던 무게가 완전히 사라졌다. 우동주는 조용한 걸음으로 침실을 나갔다.

정말로 한숨 잘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난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성질이 좋지 못했다. 그런 성격이었다면 고작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지도 않았겠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본성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건지….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스스로가 싫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저놈이 못돼먹은 놈이었으면 발로 뻥뻥 차주기라도 했을 텐데, 착한 놈하고 사귀려니 나만 나쁜 놈이 되는 기분이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등장에 당황스러운 게 나만은 아닐 텐데.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내고 천장을 향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감정, 저런 감정이 다 지나고 난 뒤엔 결국 우동주에 대한 미안함만 남게 돼 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트리 사러 간다고 신나서 속옷만 입고 옷장 앞에 서서 콧노래 부르던 거, 자기 주먹보다도 작은 장식볼을 들고 날 보면서 애처럼 웃던 모습, 트위드 코트 위에 쌓이던 눈의 보드라움, 내 머플러로는 느낄 수 없는 우동주 머플러만의 따스함 같은 것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그러고 나면 걱정이나 불안보다도 우동주에 대한 미안함이 더 앞섰다.

잠시 누워 있으려니 현관 벨 소리가 들리고 트리가 배달됐는지 잠깐 거실 쪽이 소란스러웠다. 침실과 거실 사이에 꽤 긴 복도가 있어서 자세한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우동주가 아저씨를 도와 트리를 옮기는 것 같았다. 흥, 착한 척하기는. 돌아누우면서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했다. 내 우동주는 착한 척하는 놈이 아니라 정말 착한 놈이었다.

곤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하고 어린이와 노약자는 우선해줘야 하는, 이 시대에 흔치 않은 마음의 훈남이었다. 그리고 어린이와 노약자와 주세영이 물에 빠져 있으면 주저 없이 나를 먼저 구할 놈이기도 했다. 그런 우동주이기 때문에, 혹시 만약에 일이 잘못돼서 동생에게 우리 관계를 들킨다고 해도 사실 크게 겁나지는 않는다. 적어도 박 대리에게 들켰을 때 같은 패닉은 없을 거다. 다만, 그 이후의 일들이 조금 성가실 뿐.

그리고 방해받게 될 우리의 일상과 위협받고 있는 우리의 첫 크리스마스가 억울할 뿐.

얼마나 더 누워 있었을까. 창밖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고 진눈깨비로 변했던 눈은 다시 함박눈이 되어 서울의 야경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계속 버티고 있어봤자 나중에 우동주에게 미안해할 일만 늘어날 게 뻔했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온 집이 잠잠하고 깜깜하고, 복도 천장에 매달린 조그만 조명등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꼬마전구에 불을 밝힌 커다란 트리 앞에 앉아 혼자 장식볼을 매달고 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에서부터 성질부렸던 것이 죽도록 후회됐다. 이럴 줄 알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테라스에는 눈이 쌓여 있고, 쌓인 눈 위로 함박눈이 내리고, 꼬마전구를 밝힌 트리처럼 서울의 야경은 반짝거렸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합친 광경도 불 꺼진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뒷모습만큼 내 안에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우동주야, 알고는 있었는데 나, 너 진짜 사랑하나 보다.

그놈이 만들어놓은 트리는 딱 우동주 같았다. 크고 따뜻하고 포근한 빛.

“같이 하자더니 혼자 다 했냐?”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벌떡 일어나 쪼르르 달려온다. 이 덩치에 쪼르르라는 의태어는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나한텐 작고 귀여운 우동주니까. 이렇게 금방 후회할 걸 왜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을까. 나 진짜 성격 개조해주는 학원이라도 다닐까 봐.

“미안해, 진짜.”

‘내가 더 미안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끌어안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목이 메어버렸다. 평생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둘이 여기에 숨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닌데, 이럴 때일수록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의지하면서 마음을 합쳐야 하는 건데, 내가 너를 외롭게 했다.

트위드 코트를 입고 눈 오는 거리를 걷던 우동주의 어깨는, 온 세상으로부터도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처럼 강하게만 보였었는데, 지금 나를 꽉 껴안은 구부정한 등은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져 어떻게든 내가 지켜주고 싶었다. 그냥 힘주어 마주 끌어안았다. 꽉 끌어안고, 어깨에 뺨을 부비고, 그 등을 계속 쓰다듬었다.

“크리스마스 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내보낸다 그랬어, 너.”

“당연하지! 그건 절대, 저얼대 걱정하지 마!”

우동주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2미터짜리 트리가 세상에서 제일 작고 귀엽게 느껴졌다. 이제 보름 후면 서른두 살이 되는데 우동주하고 살다 보니 뒤늦게 자꾸 감성이 풍부해진다.

“배 안 고파?”

“너 땜에 열 받아서 배고픈 것도 잊었어.”

“그럼, 한 판 해서 배고프게 만들어줄까?”

내가 이번 생에서는 좀 못난 성격으로 태어났지만 아마 전생에는 좋은 일을 제법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애를 만났지.

하지만 역시, 전생에 좋은 일만 했던 건 아닌가 보다.

수요일 저녁, 하필 우동주가 화장실에 가 있는 사이 동생님이 도착해버렸고, 최악의 타이밍에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다 현관문을 열어보니, 시커먼 볼캡 위에 우중충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까만 패딩 조끼를 입은, 인상 험악하고 덩치 커다란 놈이 서 있었다.

“형은요?”

우동주의 ‘예의 바르고 착한 막냇동생님’이 나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귀엽다며? 순진하다며? 대체 얘의 어디가?

나 아마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하다가 막판에 도박에 손을 대 패가망신을 했거나, 한순간의 유혹에 넘어가 남의 집 감이라도 훔쳐 먹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 WOO DONG ZOO

“그래서. 집으로 가겠다고?”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겨울 하늘 같은 울 플란넬 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주세영은 차갑게 물었다.

꼭 맞는 사이즈의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나의 길고 긴 변명을 한마디로 딱 잘라 정리한다. 그렇죠, 요점을 정리하자면 집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그런 얘기죠…. 맞긴 맞는데….

“아… 그게, 그래도 동생이 오랜만에 올라왔는데… 어제도 집에 혼자 뒀고….”

수요일 밤에 우리 집에 도착한 성주는 오자마자 주세영과 껄끄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오랜만에 서울에 왔으니 맛있는 걸 먹고 싶다며 나를 끌고 나갔다. 주세영에게 같이 가자는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성주에게 그 사람은, 사정이 있어 두세 달만 우리 집에 같이 살게 된 회사 선배였으니까.

“너 뭐라고 그랬었냐? 네 동생 오기 전에. 올라오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느라 집에 잘 붙어 있지도 않을 거라고 안 했어?”

성질도 어쩌면 저렇게 또박또박 똑똑하게 내는지. 화를 내는 주세영이 무서운 것과 별개로, 당장 저 골목 안쪽으로 끌고 가서 나를 채근하는 야무진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랬다간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며 정강이를 걷어차이겠지만.

맞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 원래도 가족끼리 서울에 와 있으면 눈뜨자마자 나가서 한밤중에야 들어오던 놈이었으니까. 근데 이놈이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변했는지 어쨌는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웃도어파였던 놈이 어제도 오늘도 집에만 틀어박혀서 나갈 생각을 않는 거다.

어제는 우리 둘 다 일 핑계를 대고 밖에서 저녁을 먹고 데이트를 하다 늦게 들어갔지만, 솔직히 성주 혼자 집에서 피자 조각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을 걸 생각하니 데이트에만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 사람은 내년이면 스물두 살인 다 큰 놈인데 서울에 친구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안 나가겠다는 걸 뭘 그렇게까지 신경 쓰냐며 나를 브라더 콤플렉스 취급했지만, 우리 집에선 나와 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늦둥이 막내인 데다가 어릴 때부터 큰형보다도 나를 더 따르던 놈이라, 아직 나에겐 보살펴줘야 할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걔가 진짜 원랜 안 그랬거든. 가족끼리 서울에 와도 자기 혼자 친구들 만난다, 쇼핑한다 하면서 우리하곤 어울리지도 않던 놈인데….”

“됐고. 걔야, 나야?”

금요일 퇴근길. 회사 앞 도로변의 편의점 앞에서 주세영은 내 손에 칼을 쥐여줬다. 20년 넘게 형제로 자라온 우성주냐, 올 봄부터 내 연인이 된 주세영이냐.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평소에 내 앞에서 워낙 이성적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그런 애 같은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물론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성주에겐 미안하지만, 굳이 선택하라면 난 주세영이다.

성주도 나중에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를 이해할 거다. 하지만 아직 그놈은 여름엔 캠핑을 다니고 겨울엔 스키장에 눌러사는 대학교 2학년 ‘남자애’였다. 형으로서 어느 정도는 보살펴줄 의무가 있었다. 거기다 항상 같이 지내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인데, 이렇게까지 이해 못 해주는 주세영이 조금 야속해질 것 같았다.

난 고르라면 너야. 근데 이 상황에서 그런 질문 하는 건 좀 치사하잖아.

“크리스마스 전엔 꼭 보낸다고 했잖아. 맨날 와서 있는 것도 아닌데 조금만 이해해주면 안 돼?”

“이해했잖아. 그래서 침실에서도 쫓겨났고, 걔한테 손님방 침대까지 양보했어. 서재에 이불 펴고 누우면 얼마나 처량한지 알아?”

나도 속상하다. 반년 넘게 매일같이 그 사람과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났는데, 각자 다른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도 그렇고, 침실도 아닌 서재에 요를 깔고 누워 있을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어도 등이 배기는 것 같았다.

“난 뭐 옆에 당신 없는데 잠 잘 올 것 같아?”

“아, 그래? 그럼 네가 서재에서 자든지.”

성주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백번이라도 그러고 싶은 내 마음을 정말 모르는 건지, 아직도 내 눈엔 예뻐 보이기만 하는 똑떨어지는 얼굴로 미운 말만 쏟아놓는 주세영이 오늘은 정말 미워 죽겠다. 콱 진짜 뽀뽀해서 입을 다물게 할까 보다.

다툼이 점점 유치해지려 하고 있었다. 평소엔 이렇게 억지 부리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 더 당황스럽다. 결국 나도 담배를 꺼냈다. 잠깐 머리를 식히지 않으면 논점에서 벗어난 주제로 쓸데없이 싸움이 커질 것 같았다.

“넌 집에 가. 난 세영이네 카페로 갈 거니까.”

그 사람이 편의점 앞 휴지통에 꽁초를 버리면서 결론을 내린다. 주세영 성격에 모르는 사람과 한집에서 지내야 하는 게 스트레스일 거란 건 이해한다. 그래서 집 밖에 나오기만 하면 내가 더 잘하려고 했고. 어제도 속으론 성주가 신경 쓰였지만 그 사람 앞에선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럼 주세영도 어느 정도는 날 위해 노력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거긴 왜?”

“네가 나하고 안 놀아준다며. 금요일이니까 난 놀아야겠다, 왜? 세영이 끝나기 기다렸다가 같이 놀고 들어갈 거야. 뭐, 놀다 보면 안 들어갈 수도 있고.”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노는 걸 좋아했다고 그래?”

뭐? 안 들어올 수도 있다고? 아주 내 속을 확 뒤집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별일 없으면 금요일엔 거의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주세영은 금요일엔 꼭 놀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는 결코 아니었다. 거기다 아직까지 한 번도 그 사람 혼자 따로 세영이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 사람과 세영이가 단둘이 만나면 안 될 이유는 없지만, 주세영이 나와 내 동생 사이를 말도 안 되게 질투하는 것처럼 나도 괜히 둘만 따로 만나는 건 질투 나고 신경 쓰인다.

“그럼 맨날 돌아다닌다던 네 동생은 왜 집에 있는데?”

“말 자꾸 얄밉게 하지?”

“까불지 마, 내가 형이야.”

그래, 형이지. 실제로 우리 형하고 또 딱 동갑이야. 근데 우리 형은 성주하고 자기 중에 누굴 택하겠냐는 질문 같은 건 안 하거든?

“진짜 꼭 그래야겠어?”

“너야말로 꼭 집에 가서 동생하고 있어야겠냐?”

어제 늦게 들어왔으니 오늘은 꼭 자기하고 치킨 먹으면서 부루마블 하자는 얘기만 안 했어도, 주세영이 이 정도로 떼를 썼으면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되건 나는 주세영 손을 들어줬을 거다. 하지만 치킨과 맥주에 부루마블은 우리 형제 사이의 오랜 전통 같은 거였다. 거절했다간 우성주가 상처받을 게 뻔했다. 주세영은 지금 내 동생이 와 있는 상황이 못마땅해서 스스로도 땡깡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거고.

나는 대답 없이 담배 필터만 빨고 있었다. 답답하다, 답답해.

“그리고, 네 동생 분명히 날 안 좋게 생각하고 있다고. 뭔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그랬지? 그냥 회사 선배라고 해봤자 안 믿을 거라고.”

“그건 진짜 당신 생각이 지나친 거야.”

“그럼 왜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대체 걔의 어디가 귀엽고 예의 바르다는 거야, 너는?”

성주가 그 사람에게 까칠하게 구는 건 나도 인정한다. 원래 좀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넉살이 좋은 놈인데, 큰형하고 동갑인 어른이라 어려워서 그런지 기껏 주세영이 먼저 말을 걸어도 단답형으로 퉁명스럽게 받아버리는 게 다였다. 원래도 할아버지보다 아버지보다 큰형을 더 무서워하는 놈이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낯가려서 그래. 세영이 낯가리는 건 다 이해하면서 왜 성주는 이해 못 해?”

그 사람이 성주와 친하게 지내주길 기대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려가기 전까지 서로 조금씩 이해하면서 이 상황을 무사히 넘겨보자는 건데, 주세영은 기어코 자기와 성주 사이에 나를 끼워 넣고 샌드위치를 만들어버릴 생각인 거다.

“알았어. 난 세영이네 카페로 갈 거니까, 넌 그 징그럽게 귀여운 곰인형하고 잘 먹고 잘 살아라.”

결국 주세영은 편의점 앞에 나를 세워놓고 택시를 잡아타고 가버렸다. 내가 잡아주길 기대한 것도 아닌지 잽싸게 날라버렸다. 내 동생이 좀 큰 것도 인정한다. 집안 내력인 걸 어쩌라고. 근데 그래도 나보다는 작은데, 그럼 나는 우성주보다 더 징그럽냐? 그런 징그러운 놈하고 잘도 같이 사네. 에잇,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근데 형, 그 사람 게이야?”

이런저런 사정으로 주세영이 잔뜩 골나서 너한테 갔으니 오늘 잘 좀 부탁한다고, 안세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놓고 문구점에 들러 부루마블을 사서 귀가한 나는, 우성주가 뜬금없이 꺼낸 게이라는 말에 뜯고 있던 치킨이 목에 탁 걸리는 것 같았다.

“뭐? 누구?”

“형 선배라는 사람, 이 집에 사는.”

무인도에 걸려 두 번째 쉬고 있는 바람에 안 그래도 기분 잡쳤는데 성주 이놈은 정말 주세영 말대로 뭔가를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게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았다. 먹고 있던 치킨이 속에서 닭이 되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일단 타고난 순발력과 연기력으로 커버했다.

“웬 게이?”

“옷 입는 것도 그렇고, 까칠하게 성질부리는 것도 그렇고, 좀 게이 같잖아.”

내가 쉬는 동안에 벌써 스톡홀름과 부산을 사들인 우성주는 세 번째 단독 주사위를 던지면서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이놈이 게이라는 말을 이렇게 태평스럽게 꺼낼 수 있는 놈인지 나는 몰랐다.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더니, 못 만난 동안 여러모로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렇게 싸돌아다니던 놈이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형님의 연애사를 다 방해하고 말이다.

“야, 그럼 서울 남자들 웬만하면 다 게이게?”

나도 처음엔 옷차림만 보고 그런 생각을 조금 하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 결과적으로는 게이가 됐다고도 할 수 있지만, 주세영이 게이라서 그렇게 번쩍번쩍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건 분명 아니었다.

“하긴, 그런가?”

지방 남자들은 서울 남자들에 대해 어느 정도 편견이 있다. 요즘은 지방이라고 해도 젊은 사람들은 그다지 사투리 억양이 심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귀에 서울 남자들의 말투는 어딘가 근지럽게 들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울 남자들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니까, 결과적으로는 한 수 들어갔다가 한 수 무르는 셈이었다.

“그리고, 큰형하고 동갑이고 나한테 회사 선밴데 ‘그 사람’이 뭐냐, 너.”

드디어 세 번을 쉬고 무인도에서 빠져나온 나는 그 많은 주인 없는 땅 다 놔두고 하필 우성주가 이미 사들인 부산에 걸려서 60만 원을 날렸다. 오늘 일진 더럽네, 진짜. 주세영은 억지 부리고, 우성주는 내 돈 갈취하고(부루마블 돈도 돈이니까), 영혼이 공허하다, 공허해.

“그럼 뭐라고 불러?”

그러게… 나한테 선배인 거지 이놈한테도 선배인 건 아니니까 선배님이라고 하라는 것도 웃기고,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했다간 주세영이 펄펄 뛸 게 뻔하고, 주세영 나이에 스물한 살짜리한테 형님 소리 듣는 것도 웃기고. 그래도 ‘그 사람’은 아니지. 그 사람을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우성주가 말하는 ‘그 사람’하고 내가 말하는 ‘그 사람’이 완전히 다른 뉘앙스라고 해도.

“형이라고 해. 세영이 형.”

“세영? 이름도 열라 간지럽네.”

부루마블의 흐름이 자기 쪽으로 흐르자 기분이 좋아진 우성주는 감히 서울을 노리면서 주사위를 던졌다. 하지만 나는 부루마블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진짜 돈도 아닌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내 돈을 홀라당 따간다고 해도 아깝지 않다.

다만 이름도 열라 간지럽고, 키스도 열라 간지럽게 하고, 덩달아 내 마음도 열라 간지럽게 하는 ‘세영이 형’이 자정이 다 돼가는데도 깜깜 무소식인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우성주 핑계 대놓고 사실은 자기가 나 떼놓고 놀고 싶었던 거 아니야?

슬슬 걱정이 돼서 안세영이에게 메시지를 보내봤다. 주세영이한테 직접 해봐야 답장 안 올 게 뻔했으니까.

[우리 집 세영이 좀 어떠냐? 기분 좀 풀린 것 같아?]

그쪽 집 세영이는 술이 세서 문제없지만, 맥주나 와인이 아니면 많이 못 마시는 우리 집 세영이가 걱정이었다. 둘이서 이자카야에 갔다고 저쪽 세영이가 문자 보내준 게 8시 반쯤인데 아직까지도 마시고 있다면 슬슬 주세영 혀가 풀렸을 시간이었다.

“근데 형은 서울 오더니 멋있어졌다? 촌놈 때 많이 벗었는데?”

할아버지 표현에 의하면 거렁뱅이 같고, 주세영 표현에 의하면 홍대 클럽 좀 드나들 것 같은 차림을 즐기는 우성주는 서울을 사지 못한 아쉬움을 월급 20만 원으로 달래면서 갑자기 내 옷차림을 칭찬했다.

뭔가 기회다 싶었다. 주세영의 최고 장점이라면 역시 옷이지. 우성주와의 유일한 공통점이기도 하고. 둘이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그러냐? 그게 다 그 사… 아니, 선배님이 조언해준 덕이다.”

“흠… 그래? 자기는 꼭 제비같이 입고 다니면서 형한테는 그런 옷 추천 안 하나 봐?”

제비라니. 주세영 들었으면 난리 났겠구만. ‘패딩 점퍼에 후드나 뒤집어쓰고 다니는 징그럽게 큰 꼬맹이가 감히 내 스타일을 지적해?’라면서 펄펄 뛰었을 거다.

“자기한테 어울리는 거하고 남한테 어울리는 건 다르니까. 그런 거 엄청 잘 봐. 누님이 유명한 스타일리스트라던데. 나 지난번에 잡지 촬영했던 것도 그 선배 누님이 소개시켜줘서 했던 거야.”

우성주는 못 들은 척, 자기 땅 싱가포르에 호텔을 짓겠다며 말을 돌렸지만 속으로는 꽤 호기심이 생긴 것 같았다. 그때 잡지에 나온 거 보고 어떻게 된 거냐면서 엄청 흥분해서 전화했었으니까.

근데 왜 우리 집 세영이건 저쪽 집 세영이건 둘 다 연락이 없어? 설마 둘 다 뻗은 건 아니겠지?

아, 보고 싶다. 분명히 날 안주 삼아 엄청 씹어대면서 술 마시고 있을 텐데, 그래도 보고 싶다. 이틀이나 같이 못 잔 데다가 뽀뽀도 제대로 못 했더니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싸우고 그대로 헤어진 것도 마음에 걸리고. 원래대로였으면 지금쯤, 맛있는 저녁 먹고 술 한잔 걸치고 들어와서 침대 위에서 쪽쪽대고 있을 시간인데. 젠장.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부루마블로 날 이겨먹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우성주가 괘씸해졌다. 너 때문에 내가 대로변에서 주세영한테 까이고 버림받은 걸 생각하면…. 근데 진짜 이놈이 그럴 가치가 있는 놈이야? 몇 년만 더 있으면 내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도 모르고 여자친구하고 사네 죽네 할 텐데.

그러고 보니까 집안 내력대로 키 크고 골격 크고 이목구비 우뚝우뚝한 것이 주세영 말대로 하나도 안 귀여운 것 같기도 하다. 수요일 밤부터 면도 안 해서 수염도 거뭇거뭇하고.

“근데 너, 언제 내려갈 거냐?”

“왜? 빨리 갔으면 좋겠어?”

그래, 이놈아. 당장 내려갔으면 좋겠다. 아니면 어디 호텔에라도 가버려! 너 때문에 우리 섬세한 주세영이 신경쇠약 걸리게 생겼다고! 거기다 하루라도 빼주지 않으면 바로 컨디션 저조해지는 내 아랫도리 사정은 어쩔 건데?

“겨울엔 맨날 스키장에 짱박혀 있는 놈이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면서 서울에 있겠다고 하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다음 주에 중학교 동창회 있어서 그것 때문에 겸사겸사 올라온 거야. 서울로 학교 온 애들끼리 연말 모임 한다고 해서.”

우리 징그러운 곰 우성주는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어서, 집에서도 충분히 통학할 수 있는 군산 근처의 평범한 대학에 진학하는 바람에 서울로 상경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아픈 상처가 있는 놈이었다.

“넌 서울 학교 아니잖아. 아… 고은이 때문에?”

고은이로 말할 것 같으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플(조금 전까진 그랬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눈엣가시다) 내 동생의 첫사랑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사랑인 여인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우성주가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였다. 안타깝게도 고은이는 공부를 잘했고, 전주에 있는 자립형 사립고로 진학하는 바람에 우성주는 고등학교부터는 고은이와 같이 다닐 수가 없었다. 심지어 고은이는 고등학교 가서도 공부를 잘해 서울 안에서도 제법 명문대에 철컥 붙어 군산을 떠나버렸다.

수능 전날 찹쌀떡 주면서 고백했다가 차인 이후로 마음 접은 줄 알았는데(심지어 이놈은 자기가 수능 망친 이유를 실연의 아픔 때문이라고 우기기까지 했다) 아직까지도 못 잊고 있었다니, 나를 닮아 벌써부터 순정남 조짐이 보이는군.

“그래서 말인데… 형이 옷 좀 골라줘라. 어디 호텔에서 한다던데 입고 갈 게 없어. 정장 같은 거 입고 오라는데 나 그런 옷 하나도 없잖아.”

앗싸, 처음으로 우성주가 내 땅에 걸렸다. 마드리드, 어디 보자…. 만이천 원. 만이천 원 내놔, 인마.

“왜? 있잖아. 대학 입학 때 아버지가 사주신 거.”

“아, 그건 너무 나이 들어 보이잖아. 오늘 형 입고 출근한 거 같은 거, 그런 걸로 골라달라고.”

오늘 출근할 때 입었던 거? 오늘은 외근이 없는 날이라 평소보다 조금 덜 클래식하게 입었었다. 짙은 밤색 더블 재킷에 재킷보다 연한 브라운의 울 팬츠. 회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노 타이. 그게 멋있어 보였나 보지? 거렁뱅이에 홍대 클럽 좀 드나들 것 같은 스타일의 우성주도 보는 눈은 있나 보다.

“그것도 선배가 골라준 거야.”

“그래?”

부루마블이 이제야 좀 풀리려는지, 우성주 땅인 도쿄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 아직 미지의 개척지로 남아 있는 파리를 손에 넣었다.

“다른 사람 쇼핑 도와주는 것도 좋아하거든. 선배한테 부탁해봐. 요즘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쫙 뽑아줄걸?”

우성주는 제비 같고 게이 같은 서른한 살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결국은 고은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고은이가 부드러운 분위기의 남자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평생을 고수했던 반삭 머리를 5cm까지 길렀던 놈이니까.

런던이나 서울을 노리고 주사위를 던졌으나 엉뚱하게 사회복지기금에 걸려 버럭버럭 성질을 내는 우성주에게 쐐기를 박아주었다.

“서울 토박이거든, 그 선배. 완전 서울 남자처럼 만들어달라고 해봐.”

우성주의 눈빛이 빛났다. 등 뒤에서 깜빡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더.

지방 남자들이 서울 남자에게 열등감과 동경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자들 역시 막연하게나마 서울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 남자들은 다들 세련되고 다정하고 매너가 좋을 거라는(전혀 근거 없는 환상으로, 지방 남자로서 매우 억울하다. 서울 남자도 양말 뒤집어서 침대 밑에 쑤셔 넣더라. 박 대리님도 서울 토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우성주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다. 서울 남자처럼 만들어줄 거라는 얘기에 그놈의 눈은 벌써 고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고은이도 서울 남자라는 메리트에 흔들릴지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었지만, 이놈은 뭐라도 해보고 싶은 거다.  

내일 아침엔 우성주가 주세영한테 무릎 꿇는 걸 볼 수 있겠군. 이걸로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 그나저나 이 두 세영이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거야?

“앗싸, 서울 내 거!”

우성주가 그렇게나 갖고 싶어 했던, 부루마블의 승패를 단 한 순간에 뒤집기 할 수 있는 결정적 히든카드! 서울은 결국 내 손안에 들어왔다.

“뭐야! 형 주사위 치사하게 던졌지!”

야, 내가 어딜 봐서 그런 꼼수를 쓸 놈으로 보이냐? 바락바락 대드는 빡빡이의 이마를 한 대 탁 때려주고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100만 원을 지불했다. 빤딱빤딱한 서울 카드를 막 내 앞으로 옮겨다 놓는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하는 멘트까지 쳐가면서.

[형, 세영이 형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어떡할까요? 지금 막 형 찾으시는데….]

흥이다. 그렇게 매몰차게 버리고 가놓고 날 왜 찾아?

하지만 주세영이 날 찾는다는데 별수 있나? 뉴욕, 도쿄, 상파울루, 서울까지 전부 내 땅이어도 다 버리고 달려가야지.

“어디 가? 내 차롄데. 화장실 가려면 나 던진 다음에 가. 나보고 또 사기 쳤다고 하지 말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성주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직도 부루마블에 목숨을 거는 우성주는 확실히 누군가가 좀 더 보살펴줘야 하는 어린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애정과 관심을 듬뿍 받고 있을 테니까 나까지 과잉보호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건, 어쩌면 스물한 살 우성주보다 서른한 살 주세영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떤 면으로는 확실히 그렇다. 나도 그랬으니까. 

“선배 많이 취했다 그래서 데리러 가야 될 거 같아.”

“형이 뭐하러 데리러 가? 다 큰 어른이 알아서 택시 타고 오면 되지.”

딱히 비꼬려는 말투는 아니다. 주세영과 나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회사에서나 선배지, 집에서까지 선배한테 군기 잡혀서 살면 피곤해서 어떻게 사냐고. 하지만 세상에는 회사 선배가 술 먹고 나를 찾는다는 소리에 비실비실 웃음이 나는 후배도 있는 법이다. 잘 찾아보면 나 말고도 몇 명 있을 거다.

“뭘 모르는 놈이구만. 오늘 잘 보여놔야 네 옷 사러 같이 가줄 거 아니야.”

“알았어. 빨리 갔다 와, 그럼.”

내가 이래서 우성주가 귀엽다는 거다. 좀 뻔뻔하고 단순할지언정 영악하진 않거든. 덕분에 내가 어릴 때부터 좀 많이 이용해먹었지. 내가 깬 접시도 우성주가 깼다고 뒤집어씌우고.

“네 잠바 좀 입고 갔다 올게.”

소파 위에 나뒹굴고 있던 우성주의 곰가죽 같은 점퍼를 얼른 껴입고 차 키와 지갑을 챙겨 집을 나섰다. 복도는 싸늘하고 자동차 시트는 얼음장 같았지만 날 찾는다는 주세영을 데리러 가는 마음만큼은 라디에이터가 필요 없을 정도로 훈훈했다. 그래도 켜긴 켰다. 이따가 주세영이 추우면 안 되니까.

두 세영이들은 더블 데이트 때 가끔씩 들르는 이자카야에 있었다. 테이블마다 독립적으로 칸막이가 나누어져 있어서 주로 연인들이 많이 찾는 집이었다. 저쪽 집 세영이가 알려준 대로 창가 쪽 구석 자리로 가보니, 우리 집 세영이는 완전히 눈이 풀려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고개를 이리저리 꺾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렇게 나한테 차갑게 했던 사람인데도, 눈앞에 보니까 또 슬금슬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이 정도면 병이지 싶다.

“주세영, 정신 차려. 나 왔어, 집에 가자.”

옆자리에 앉아 어깨를 끌어안고 뺨을 톡톡 두드렸더니, 넌 뭐야? 하는 눈으로 게슴츠레하게 날 쳐다본다. 안녕하세요, 그쪽 애인되는 사람입니다만.

“어? 우동주잖아. 안세영 너, 얘 부르지 말라니까…. 배신자.”

오라고 찾아놓곤 뭘 딴소리야. 엔 소프트 주세영 대리님, 오랜만에 떡이 되도록 마시셨네요. 내가 내 동생하고 부루마블 하겠다고 금요일 데이트 좀 빠뜨린 게 그렇게 속상했어?

“이 사람, 얼마나 마셨어?”

앞에 앉은 안세영이 너무 멀쩡해서 상대적으로 주세영이 더 취한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 둘이 마시는데 한쪽이 먼저 취해버리면 다른 쪽은 잘 안 취하게 되지.

“사케 한 병 정도는 형이 다 드셨을 거예요. 죄송해요…. 말리려고 했는데….”

테이블을 보니 1.8리터짜리 구보타 만쥬가 5분의 1쯤 남아 있었다. 그럼 나 오기 전에 이 테이블에서 한두 병은 벌써 장렬히 전사했단 얘기네. 고개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취한 주세영과 달리 얼굴빛 하나 달라지지 않은 안세영이 뒷목을 쓸면서 내게 사과했다.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나도 못 이기는 게 주세영인데.

“아니야, 아니야. 나 때문에 화난 건데 네가 뒤치다꺼리하게 하고 내가 미안하지. 가자, 가는 길에 너도 데려다줄게.”

내 어깨에다 뺨을 비비면서 혼자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주세영에게 코트를 입히고 머플러를 둘둘 감아준 다음, 팔을 붙잡아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마실 거라고 집에 안 간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냥 무시했다.

“아니에요, 저는 형이 데리러 온다고 하셔서… 여기서 좀 더 있을게요. 금방 도착하실 테니까 먼저 가세요. 세영이 형 많이 취하셨는데….”

오늘 신세 진 건 다음에 형님까지 모시고 꼭 갚겠다고 하고 테이블을 나와, 자꾸 어디론가 가려 하는 주세영을 붙잡아가면서 계산을 했다. 거의 쑤셔 넣듯이 조수석에 태우고 나도 얼른 운전석에 올라타 주세영 안전벨트부터 채웠다. 차 안에는 다행히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어? 뭐야? 너 누가 이런 거 사 입으래?”

답답하다면서 머플러부터 벗어 뒷좌석으로 내던진 주세영은 우성주한테서 빌려 입고 나온 카키색 봄버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처음 같이 회식했던 날도 이렇게 취해서는 내 머리와 옷차림을 계속 지적했었다. ‘옷만 조금 잘 입어도 엄청 인기 많을 텐데 왜 옷에 신경을 안 써요?’라면서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었지. 옷 대충 입어도 인기는 원래 많았거든요.

“내 거 아니야, 성주 거야.”

허리를 굽히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사람이 혹시 고꾸라져 글로브박스에 머리를 박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천천히 차를 몰았다.

“걔 아직도 안 갔냐?”

미안하지만 내일도 안 갈 거거든요? 그리고 심지어 당신한테 스타일 조언을 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이렇게 취해서야 내일 쇼핑을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전엔 꼭 보낼 거야. 다음 주 금요일에 모임이 있어서 왔다니까 다음 주말엔 짐 싸서 내려보낼게. 그때까지만 좀 참자, 응?”

“다음 주 주말?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참아…. 넌 참을 수 있냐? 혼자 자니까 좋아? 응?”

집으로 가는 길은 고뇌와 번민의 연속이었다. 같이 자고 싶다고, 서재 싫다고, 등 아파서 못 자겠다고, 내 팔을 붙잡고 찡얼거리는 주세영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 어디다 차 세워놓고 뽀뽀라도 찐하게 한번 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뽀뽀했다간 절대 뽀뽀에서 멈출 자신이 없었다.

내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세영은 자꾸만 팔에 들러붙으면서 같이 자고 싶다고 보챘다. 맨날 같이 잘 때는 내가 조금만 껴안거나 파고들어도, 닿아 있으면 신경 쓰여서 못 잔다면서 밀어내놓고 막상 같이 못 자게 되니 아쉬운가 보지?

나도 엄청 아쉬워. 우리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싶고 자다가 깨서도 당신이 없어서 깜짝깜짝 놀라. 근데 자기야, 나 지금 운전 중이거든? 자기와 함께라면 저승길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갈 땐 가더라도 우리 조금 먼 미래에 가면 안 될까?

“같이 자고 싶어, 동주야….”

한 손엔 그 사람 브리프케이스와 머플러를 들고 다른 팔은 그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로 넣어 부축하고 겨우겨우 엘리베이터에 태웠더니, 주세영이 몸을 돌려 품에 안겨왔다. 그렇게 의식하던 CCTV마저도 잊었나 보다. 술의 힘이 대단하긴 하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몸을 기대오는 주세영의 등을 마주 안아 다독이면서 고개를 깊이 숙여 귓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그래, 나도 같이 자고 싶어. 딱 일주일만 참자. 내가 진짜,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해줘서라도 다시는 그 자식 우리 집에 못 오게 할게.”

뻥이 아니다. 이 순간 처절한 나의 진심이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우리가 이 집을 나가 호텔로 가버리고 싶은데, 그랬다간 우성주가 진짜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고…. 돌아버리겠다, 진짜.

“그게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췄다. 주세영은 그게 아니라면서 내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순간 진심으로 고민했다. 다시 타고 내려가?

“같이 자고 싶다니까…. 하고 싶다고….”

“…….”

오른손에 들고 있던 그 사람의 고야드 브리프케이스를 떨어뜨릴 뻔했다. 지난달에 새로 사서 엄청 아끼는 건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 섰어. 주세영, 너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일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세영을 복도 벽에 기대게 한 다음, 브리프케이스를 옆구리에 끼고 주세영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꽉 붙잡았다.

“주세영, 내 말 똑바로 들어.”

내 두 손 안에서 주세영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 이뻐. 세상에서 제일 이뻐. 길거리에 날 내버리고 택시 타고 가버려도 난 네가 제일 이뻐.

“지금 성주 안 자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들어가서 실수하면 안 돼. 알았지?”

주세영은 겨우 그 말 하려는 거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나 이 사람아. 자고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것을.

“들어가면 옷 갈아입고 바로 씻어. 내가 못 챙겨줘도 섭섭해하지 말고. 그리고 서재 가서 이불 깔고 앉아 있어. 성주 자러 가면, 나 바로 서재로 갈 테니까.”

무슨 뜻인지 접수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잠깐 나를 보다가 곧 배시시 웃으면서 내 가슴을 툭 밀친다. 우리 세영이가 여기서 엉덩이 까고 싶구나? 엉?

“자지 마. 자고 있어도 덮칠 거니까.”

도어록의 패스워드를 누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단단히 경고를 하고 문을 열었다. 정신을 좀 차려보려는 듯 뺨을 짝짝 두드리면서 고개를 몇 번 휘저은 주세영은 브리프케이스와 머플러를 받아 들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우성주가 소파 너머로 우리를 힐끔 쳐다봤다.

“다녀오셨어요?”

오, 우성주가 먼저 인사도 한다.

“네… 늦어서 미안해요. 금요일이라 술을 좀 마셔서….”

주세영도 고분고분 인사를 받아준다.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두 사람은 서로 목례를 하고 주세영은 서재로, 우성주는 TV 쪽으로 몸을 돌렸다. 상투적인 인사였지만 장족의 발전이다. 착하다고, 까끌까끌한 우성주의 반삭 머리를 슥슥 문질러줬다. 거실 바닥을 보니 부루마블은 정리해서 소파테이블 위에 올려뒀고 치킨하고 맥주 먹은 것도 싹 정리해놨다. 내 동생이여서 그런 게 아니라 본성은 순박하고 좋은 놈이다. 지금 이 순간엔 사랑의 방해꾼일 뿐이지만.

“아… 나도 자야겠다. 형 기다리다가 소파에서 잘 뻔했잖아.”

아버지와 나를 빼다 박은, 눈썹 아래로 깊이 들어가 자리한 눈에 졸음이 가득한 우성주가 TV를 끄고 일어났다.

“그래, 그래, 일찍 자. 내일 쇼핑 가려면 얼른 자야지.”

얘는 원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그건 우리 삼 형제 모두 마찬가지다. 조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대가족에 농사짓는 집이라 규칙적인 생활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 있었다. 난 서울에 와서 따로 지내면서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주세영이 우성주에게 손님방을 내준 게 천만다행이다. 손님방은 거실을 기준으로 현관 쪽에 있고, 서재는 침실 쪽 복도에 있어서 잠입이 훨씬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우성주가 방에 들어가고 나서 나도 얼른 침실에 들어가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주세영이 옷을 갈아입고 씻느라 서재를 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부터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고 싶다고….’ 속삭이던 주세영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주세영이 유혹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전에 내가 먼저 껄떡대니까 상대적으로 비율이 낮아서 그렇지, 주세영이 먼저 유혹할 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고고한 남자는 유혹할 때조차 쓰도록 담백해서, 툭 건드려 놓고 ‘싫어? 싫으면 말고.’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황홀한 유혹이라니. 주세영을 떡으로 만들어준 구보타 만쥬 신에게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ZOO SE YOUNG

우동주가 자기 동생 귀엽고 예의 바르다길래 잘 지내보려고 했다. 스물여섯인 안세영하고도 잘 지내는데, 까짓 동생 하나 생겼다 치고 우리 집에서 지내는 동안 좋은 이미지 좀 심어주자고 기특한 마음도 먹었었다. 우동주가 만약을 위해 우리 누나에게 잘 보여두면 좋을 것 같다며 잡지 촬영을 흔쾌히 받아들여 준 것처럼.

그리고 우동주 동생이면 진짜 귀여울 것 같기도 했다. 가끔 우동주는 대학 때 어땠을까, 고등학교 땐 어땠을까, 궁금했는데 우동주의 어린 버전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난 두 가지를 잊고 있었다. 요즘 애들은 발육이 뛰어나다는 것과 우동주는 어릴 때도 작고 귀엽진 않았을 거라는 것.

물론 우동주는 나에게 작고 귀엽다. 사전적인 의미 말고 상징적인 의미로.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동주가 가진 유전자는 크고 단단했다. 게다가 엄청난 우성 유전자였다. 우동주의 동생은 말 그대로 우동주의 스물한 살 버전이었다. 몸과 얼굴만.

자기 형의 서글서글하고 원만한 성격은 전혀 닮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나를 완전히 얹혀사는 객식구 취급하면서 우동주를 독점하려 들었다. 거기에 속이 뒤집어지는 나도 어른스럽지 못한 건 인정하지만 스물한 살에 형, 형 하면서 우동주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그놈도 별다를 건 없어 보였다.

근데 제일 열 받는 건,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그놈이 집에 혼자 있는 게 마음 쓰여서 못 견디는 우동주다. 나쁜 놈. 짜증 나는 놈. 수요일 밤엔 자기들끼리 나가서 족발 먹고 들어오더니, 이번엔 금요일인데도 자기는 집에 가야겠다는 거다. 왜? 기저귀도 갈아주고 우유도 먹여주지?

그렇게 안세영을 붙잡고 한참 불만을 늘어놨더니 그 다음엔 보고 싶어졌다. 사케를 한 병도 넘게 마신 탓일 수도 있고,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제대로 스킨십도 못 한 것에 대한 욕구불만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보고 싶었다. 항상 내 옆에만 있었고, 항상 내 거였는데. 동생 왔다고 날 찬밥 만들다니. 당장 모시러 오지 못해?

그 다음부턴 기억이 희미하게 끊겼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우동주가 옆에 앉아 있었다. 어? 정말 당장 모시러 왔네. 그래, 그래야 내 개뼉다구지. 네 동생은 어차피 조금 지나면 다른 사람 좋다고 넌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난 앞으로도 평생 널 거들떠봐 줄 수도 있으니까 동생이 아니라 나한테 잘 보여야지. 그래, 안 그래? 어?

우동주의 냄새에 몸이 평소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를 보고, 나를 만지고, 나 때문에 이성을 날려버리고, 나에게만 집중한 우동주를 보고 싶었다. 원했다.

우동주가 동생에게서 빌려 입고 나온 봄버는 너무 두꺼워서, 끌어안고 있어도 그 안에 든 몸을 제대로 느끼기엔 역부족이었다. 여름이 좋았어. 그땐 꽉 껴안으면 네 가슴의 굴곡과 복부의 단단함까지 그대로 느껴졌었는데.

샤워를 했더니 술이 좀 깨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집까지 오는 동안 했던 짓들이 쪽팔리거나 후회되지는 않았다. 머리도 말리지 않고 이불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잠깐 방 안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많이 마시긴 했지.

누운 채로 팔을 뻗어 손가락을 쫙 펴봤다. 이 손안에, 이 몸 위에, 입술 위에, 우동주가 없다는 게 허전하다. 서른한 살에 사내놈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고 이제 10개월쯤. 그사이 나는 벌써 누군가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누군가의 무게를 느끼는 것에 익숙해진 걸까?

자신이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은 별로 없었다. 우동주를 내 몸 안에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 인격이 변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섹스를 즐기게 됐다. 이전에는 둔감했던 부분들, 예를 들어 목덜미라든가 귓불이라든가 유두, 엉덩이, 그리고 몸의 깊은 안쪽까지 구석구석 예민해졌고 거의 온몸을 사용해 우동주를 느끼고 또 우동주를 자극할 수 있었다.

섹스 시의 성 역할에서 벗어나 전신을 사용해 즐기는 섹스는 성적 쾌감 이상의 자유를 주기도 했다. 페니스의 쾌감에만 집중하지 말고 다양한 성감대를 좀 개발해 보라고, 이성애자 남자들에게도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페니스가 아닌 다른 곳으로 성적 쾌감을 느끼면 고추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아직도 수두룩했으니까. 근데 그거 진짜 손해다. 나는 둘째치고, 우동주도 젖꼭지나 목덜미, 겨드랑이로 느끼고 신음하는데 걔도 절대 고추 안 떨어지더라.

내가 젖꼭지를 물고 쪽쪽거리면 입술을 깨물면서 거기를 세우는 우동주를 생각하면서 누워 있으려니까 누운 채로 몸이 비비 틀렸다. 왜 이렇게 안 와? 확 내가 가서 덮쳐버릴까 보다.

막 몸을 뒤집어 엎드리려는데,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치고 지나갈 정도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우동주가 살금살금 문을 열었다.

엎드리려던 몸을 다시 펼쳐 누웠다. 우동주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잠근다. 정말 소리 없이 닫혔다. 세상과 우리를 차단하는 무형의 결계처럼. 문이 제대로 잠긴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 돌렸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면서 씨익 웃는다. 나도 그냥 솔직하게 마주 웃었다.

“술 좀 깼어?”

작게 속삭이면서 몸을 낮춰 이불 위로 올라온다. 잔뜩 챙겨온 젤과 콘돔을 이불 옆에 내려놓는다. 귀여운 놈, 얼마나 하려고 이렇게 챙겨왔냐?

“원래 안 취했어.”

이불 끝자락에서부터 무릎으로 기어오는 우동주의 몸을 다리로 끌어안았다.

“안 취했으면 평소에도 좀 이래 봐.”

발등으로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희롱하는 내 허벅지를 스윽 쓰다듬으면서 우동주가 내 코끝을 가볍게 꼬집었다.

“매일 이러면 식상하잖아.”

내 몸 위로 겹쳐오는 넓고 두꺼운 등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그 길을 따라 미끄럼을 탈 수도 있을 것처럼 깊이 움푹 파인 척추골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우동주가 고개를 숙여 뺨에 입을 맞추면서 티셔츠를 밀어 올렸다. 그 별것 아닌 움직임에도 우동주의 등에 굵은 파도가 일었다. 우동주의 등 안에는 승천하지 못한 천 년 묵은 구렁이 다섯 마리가 갇혀 있다는 전설이 있다. 여섯 마리일지도 모르고. 이렇게 딱딱한데 어떻게 이렇게 유연하게 움직이지?

“전혀. 할 때마다 코피 터질걸? 나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좀 섰던 거 알아, 몰라?”

내 티셔츠를 겨드랑이까지 말아 올린 우동주가 그걸 다 벗기고 싶어 하길래 팔을 위로 뻗어 협조했다. 훌렁 뒤집어진 티셔츠가 책상 아래에 가서 처박혔다.

엘리베이터에서 발기했었단 얘기에 나는 키득거리면서 오른쪽 다리를 우동주의 허리에 감았다. 우동주가 내 다리 사이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단번에 시원하게 티셔츠를 벗어젖히자, 일주일에 두세 번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로도 꽉꽉 조이는 축복받은 몸이 드러났다.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인지 도시의 불빛인지 모를 부연 빛이 그 몸 위를 비췄다.

단백질 음료도 마시지 않고 식단 조절도 하지 않기 때문에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우 씨 집안 형제들이 아마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우성 유전자 덕분에 근육은 덩어리가 크면서도 빈틈없이 몸에 밀착돼 움직임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오래된 고목의 굵고 뒤틀린 가지를 가져다 박은 것 같은 우동주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우동주가 허리를 숙여 내 위로 몸을 기울이면서 웃는다. 선이 굵고 반듯하고 단정한 얼굴선을 쓰다듬었다. 결이 곱진 않아도 건강한 피부 위에 따끔따끔하게 돋아난 수염의 촉감이 좋았다.

“애들 재워놓고 몰래 합방하는 부부가 된 기분이지 않아?”

아랫배에서부터 뒤덮어오는 우동주의 무게가 느껴졌다.

“난 저렇게 나보다 더 큰 아들 싫거든?”

목에 팔을 감아 당기면서 억센 턱 끝을 입술 사이에 물었다. 늦은 시간이라 까슬하게 돋은 수염 때문에 입술 안쪽의 점막이 따끔거렸다. 입술을 뒤집어 몇 번이나 거기에 점막을 비볐다.

“그럼, 오늘 열심히 해서 당신 닮은 애 좀 만들어볼까?”

허리 뒤로 손을 넣어 내 브리프를 아래로 밀어내면서 우동주가 음흉하게 웃었다. 엉덩이를 들어 거기에 협조하면서 나도 손발을 모두 이용해 우동주의 트렁크와 반바지를 허벅지 아래로 끌어내렸다. 둥근 바위처럼 딱딱하게 솟은 엉덩이가 드러났다.

“난 애 낳기 싫으니까 그럼 오늘은 네가 엎드려야겠네.”

그 엉덩이를 손으로 꽉 움키면서 턱 끝의 살을 잘근거렸다. 벌써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우리 둘의 아래가 서로 얽혀들었다. 미디엄 레어로 익힌, 두툼하고 야들야들한 고깃덩어리를 마주 비비는 것 같았다. 육즙이 흥건하고, 질퍽질퍽하고, 서로 잘 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한 손으론 내 옆구리를 쓸어 올리고 입술의 겉껍질만을 비벼 내 귓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우동주는 진지했다. 나도 취향이 있다 보니, 구렁이 다섯 마리가 꿈틀거리는 등을 보면서 우락부락한 엉덩이에 페니스를 넣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지만, 뭐 언젠가 한번쯤은 우동주 안에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 근데 오늘은 하던 대로 해줘. 오늘은 그러고 싶어.”

허리를 움직여 내 페니스를 우동주의 페니스에 좀 더 밀착시켰다. 신체 중 가장 예민한 부위의 살갗에 마찰열이 일어났다. 몸 안에서부터 치미는 그 뜨끈한 열을 이기지 못해 굵고 건강한 검은 곱슬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움켰다.

“잘됐다. 나도 오늘은 당신 안에 들어가고 싶은 날인데.”

귓가에서부터 뺨을 타고 내려온 입술이 내 입술과 스치듯 맞닿은 채로 속삭인다. 혀끝을 세워 그 입술 안으로 찔러 넣었다. 따뜻하게 젖은 점막을 훑었다. 희고 고른 치아를 혀의 뒷면에 느끼면서. 우동주의 도톰한 아랫입술이 내 입술을 핥아 올렸다. 벌어진 두 입술이 깊이 겹쳐졌다.

가슴이 맞비벼지고, 평소보다 과장되게 들썩거리는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우동주의 고환이 내 고환 위를 누르고, 한창 발기가 진행 중인 페니스는 아프도록 짓눌리면서도 부풀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주 비벼지는 우동주의 페니스가 뜨거웠다. 그 뜨거움이 내 몸의 뜨거움과 뒤섞였다. 목을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등 여기저기를 쓰다듬었다. 일렁거리는 굴곡 사이사이로 난 길을 더듬거렸다.

“흐으으음―.”

신음 소리는 뒤가 무거웠다. 우동주가 허리를 슬쩍 들어 올리자 페니스가 일어서면서 우동주의 아랫배에 가서 따라붙는다. 거치적거릴 정도로 불거져 나온 두 살덩이가 엇갈린다. 허리를 든 채로 우동주가 몸 전체에 파도를 일으켰다. 엉덩이에서부터 유연하게 꿈틀거리며 밀려온 파도가 차례대로 몸을 뒤덮었다. 거칠고 무성한, 머리카락을 닮아 곱슬거리는 우동주의 음모에 귀두가 비벼지는 감촉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목과 어깨가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크흐읍….”

숨을 내쉬려고 했지만 두툼한 혀가 입속을 꽉 메우면서 깊숙이 들어오는 바람에 오히려 숨을 삼켜야 했다. 점액질의 끈끈한 액체가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우동주의 등을 붙잡은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마 손톱 밑이 하얗게 질렸을 거다.

부드러운 굴곡을 만들며 움직이던 우동주의 허리가 이번엔 오른쪽 왼쪽으로 서서히 원을 그리듯 움직인다. 수북한 털 뭉치에 귀두가 쓸리면서 페니스가 이쪽저쪽으로 휩쓸렸다. 천장을 향해 뒤집어진 우동주의 발바닥에 내 엄지발가락을 짓이겨 비비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입속에서 둔하게 움직거리던 젖은 살덩이가 밀려 나갔다.

“하, 하아… 흐.”

막혀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쉬이―. 소리 커.”

우동주의 검지가 급하게 입술 위를 눌렀다. 고개를 옆으로 꺾고 숨을 여러 번에 나누어 내쉬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눈앞을 뒤덮은 삼각근을 비틀어 쥐고 입이 아닌 코로 숨을 뱉었다. 발끝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큽.”

아래로 휘어져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드나들던 우동주의 귀두 끝이 내 고환과 음경 사이를 꾹 눌러왔다. 미처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끅끅대고 있던 나는 눈을 감고 입을 틀어막았다. 성기가 서로 완전히 겹쳐진 상태에서 우동주가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마치 이미 삽입한 것처럼.

“흐으으… 으으….”

우동주의 입술에서도 흐느낌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페니스의 뿌리를 찌르는 안타까운 자극에 나는 허리를 들어 올렸다. 눈을 뜨니 이를 꽉 깨문 우동주가 미간에 인상을 쓰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 뒤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흥분한 우동주의 혀가 성급하게 밀고 들어왔다. 축축한 혀 위로 내 혀를 미끄러뜨렸다. 젖은 살이 얽혀들고 혀끝에 우동주의 입천장이 닿았다.

부드러운 살덩이를 감싼 타액은 찰박찰박, 질척질척, 원색적인 소리를 내면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실제로는 아주 작은 소리일 텐데 문밖으로 새어 나가 우동주의 동생이 자고 있는 손님방에까지 훤히 들릴 것 같았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멈출 수 없었다.

“…꽉 눌러줘….”

다리를 굽혀 발뒤꿈치로 우동주의 등허리를 눌러 끌어당겼다. 고환의 뿌리를 누르고 있던 우동주의 페니스가 튕기듯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비스듬히 선 채로 우동주의 아랫배에 닿아 있던 내 페니스는 그대로 우동주의 아랫배에 강하게 짓눌렸다.

입술과, 혀와, 가슴과, 서로를 끌어안은 팔과 겨드랑이와, 다리와 발목과 발가락이 마구 얽혔다. 규칙도 없고, 체면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몸을 비비고 옭아매고 허리를 비틀어 페니스를 문질렀다. 미처 다 벗지 못했던 아랫도리가 쓸려 내려가고, 격렬한 움직임에 이가 부딪치고, 입가로 타액이 흘렀다. 서로 안은 채 흥분한 전신을 상대의 육체에 문지르기 위해 몸부림치며 끙끙댈 뿐이었다.

몸이 밀려 올라가 책상 옆의 서랍장에 정수리를 박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것처럼 헐떡거리고, 누가 더 흥분했는지를 경쟁하는 것처럼 서로의 몸을 정신없이 탐했다.

다리 사이를 조여 땀과 선액으로 번들거리며 허벅지 사이를 드나드는 우동주의 페니스를 꽉 물었다. 성기에 가해지는 압박감에 순간적으로 흥분이 가파르게 치솟은 우동주는 전신으로 내 몸을 누르면서 허리를 짓찧어댔다. 끓어오른 그의 페니스를 부드러운 가랑이 사이로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뜨겁고 빡빡하게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압력을 원했다.

“흐… 흐윽… 언제… 넣을 거야….”

억지로 안으로 끌어당기는 숨은 헉, 헉, 시원하게 터지지 못하고 울음 같은 소리가 되었다. 그건 우동주도 마찬가지였다. 흥분을 억제하듯 입을 꽉 다문 우동주의 코에서 나오는 바람은 축축하고 뜨거웠다.

“뒤집어.”

우리는 호흡이 잘 맞는 콤비였다. 우동주가 몸을 일으켜 이불 밖에 놔뒀던 콘돔을 뜯어 씌우는 동안,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손가락에 젤을 바르고 애널을 더듬었다.

“뭐 하는 거야? 맨손으로 하지 마.”

이 와중에도 우동주는 기겁을 하면서 내 손을 치워냈다. 우동주는 항상 콘돔을 낀 손가락이나 플러그로 정성을 들여 몸을 열었지만 지금 나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충분히 더워진 몸은 다음 단계를 원하고 있었다. 가끔은 강-약-약-중간-약-약으로 구불구불 리듬을 타는 것보다 약-중간-강-강강강강으로 고속질주 하고 싶을 때도 있는 거다.

“됐어, 나 급해.”

우동주의 손목을 뿌리치고 손가락을 계속 움직여나갔다. 혹시 다치진 않을까 아프진 않을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우동주와 달리, 어디를 어떻게 눌러주고 어떤 타이밍에 손가락을 더 집어넣어야 빨리 풀리는지, 내 몸이니 내가 잘 알았다. 우동주가 만져줄 때와 같은 은근하고 묵직한 흥분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찾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이깟 손가락 따위가 아니라 더 굵고 뜨겁고 집요한 그 덩어리를 원했다.

“조심해… 상처 나지 않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동주는 스스로 엉덩이를 넓히는 내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야한 기분이었다. 우동주가 보고 있지 않다면 애널에 손가락을 넣는 짓은 흥분의 요소가 될 수 없었을 거다. 아니,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만큼 흥분되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콘돔을 씌운 페니스 위에 젤을 문지르면서, 긴급하고 심각한 문제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우동주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애널에 가해지는 신체적인 자극 자체보다 그 시선이 나를 더 흥분시켰다. 인정한다. 일부러 더 보라는 듯, 엉덩이를 벌려 스스로의 손가락이 휘젓고 있는 애널을 그에게 공개했다.

손가락 세 개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입구가 넓혀졌을 때, 원을 그리듯 손목을 돌리며 손가락을 빼냈다. 강한 점성을 가진 젤이 꾸덕하게 애널과 내 손가락 사이에서 늘어졌다. 성욕으로 번들거리는 우동주의 눈이 희미한 빛 속에서 그 모두를 주시하고 있었다.

“넣어봐….”

“벌써? 내가 좀 더 풀어줄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페니스를 앞세우고도 절제할 줄 아는 우동주의 자제심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지금 난 우동주를 원했다. 내가 이 상황에 제발 넣어달라고 애원까지 해야 되겠냐? 무릎으로 서서 우동주 앞에 두 손으로 엉덩이를 벌렸다.

“괜찮다니까. 해봐….”

우동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요 위를 짚은 내 무릎 양 옆으로 우동주의 무릎이 들어서고 등 뒤에 두툼한 가슴이 느껴졌다. 그 다음엔 둔부 사이를 비비는 음경의 뜨겁고 단단한 윤곽이 느껴졌다. 심호흡을 하면서 우동주의 왼손을 내 페니스로 가져갔다.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성기를 애무하면서 귀두가 서서히 뒤를 밀고 들어온다.

“흐으으….”

턱이 들리고 눈이 감겼다. 코로 길게 내쉰 숨이 떨렸다. 우동주가 내 어깨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좌우로 돌려 입술을 비볐다. 오른팔을 뒤로 뻗어 우동주의 엉덩이를 애무했다.

입구까지는 쉽게 들어왔지만 그 다음부터는 역시 뻑뻑했다. 하지만 아프거나 고통스럽진 않았다. 통증이 있긴 했지만 예리하고 날카롭기보다는 둔탁하고 은근했다.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의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서늘한 온도의 젤은 몸속으로 들어오자마자 금세 뜨거워졌다.

“하… 아아… 너무, 조여….”

내 어깨 위에 이마를 비비면서 우동주가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밀고 들어오는 움직임을 멈추진 않는다. 막다른 골목인 것처럼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 같다가도 우동주가 좀 더 들어서면 내 안은 거짓말처럼 갈라졌다. 허리 아래가 묵직했다. 이미 몸속 끝까지 들어온 것 같은데도 아직 엉덩이에 우동주의 음모가 느껴지지 않았다. 페니스를 문질러주는 우동주의 왼팔을 꽉 붙잡았다.

“아파?”

“아니. 좋아.”

조금씩 조금씩 밀려오던 페니스가 뒤에서 누가 밀기라도 한 것처럼 한순간 푹 찌르고 들어왔다.

“큽!”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아 이를 꽉 물고 목 안으로 삼켰다. 우동주가 무릎을 움직여 더 바짝 붙어 섰다. 등 뒤의 사타구니에 엉덩이가 눌렸다. 꺼칠한 음모가 비벼졌다. 전부 다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뜨거운 혀가 귀를 핥아댔다. 달콤하고 촉촉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간지러움이 아니었다.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허기에 빈 접시를 핥아대는 개처럼 헐떡거리면서 혓바닥 전체를 써서 귀를 적셨다. 페니스를 끝까지 밀어 넣었으니 이제 어서 허리를 움직여 쑤셔대고 싶은 욕구로, 등 뒤의 엉덩이가 쉼 없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 오늘, 좀 날뛸 수도 있어. 네가 부추겼으니까 감당해.”

내 몸 생각해서 항상 죽을힘을 다해 브레이크 밟는 놈이 말은 잘한다.

“윽.”

분명 끝까지 다 들어온 거라 생각했는데, 뒤로 밀려났다가 들어오는 느낌도 없었는데, 아래를 바짝 밀착시킨 상태에서 한 마디 만큼을 더 파고들었다. 저절로 허리가 꺾였다. 바닥을 짚은 팔이 덜덜 떨렸다. 애널 아래로 우동주의 고환이 찰싹 달라붙었다.

깊숙이 들어온 채 허리를 돌려 안을 넓혀나간다. 휘저어진다. 이전에는 모르던 쾌감. 뱃속과 머릿속까지 전부 휘저어 이전의 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뜨거운 덩어리. 그 덩어리가 한순간 뒤로 쑥 밀려 나갔다. 귀두 끝을 입구에 걸친 채 땀에 젖은 손바닥으로 내 등을 쓸었다. 곧 치고 들어올 쾌락에 대한 예상으로 내 몸은 미리부터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금이 저려 버티고 서 있기가 힘들었다.

“흡! 크읏….”

온몸을 후려치는 듯한 감각에 눈앞에 불이 번쩍였다. 날뛸 수도 있다는 경고는 그저 말뿐일 줄 알았는데 등 뒤의 이놈은 내가 알던 그놈이 아닌 듯 가차가 없다. 커다란 몸을 앞뒤로 흔들며 나를 들쑤신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언제 숨을 내쉬고 언제 들이마셔야 할지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그저 헉헉거렸다.

내 허리를 붙잡은 손은 상냥하지 않았다. 매트리스가 깔리지 않은 맨바닥은 우동주가 주는 충격을 전혀 흡수하지 못했다. 그건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철벅철벅, 살과 살이 교접하는 소리마저도 하나의 음란한 혀가 되어 전신을 핥아대는 것 같았다.

“주세영… 사랑해. 알지?”

평소엔 잘 안 하는 소리였다. 나도 우동주도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그런 말을 밖으로 꺼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사랑한다니. 의외의 순간에 꺼낸 사랑이라는 단어에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헉헉댔다.

이제껏 중에 가장 흥분한 것 같은 우동주는 배 아래로 손을 넣어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받치고 골반으로 내 몸을 눌러 좀 더 허리를 낮추게 했다. 그러고는 내 등 위로 완전히 올라탔다. 내 ‘뒤’가 아니라 내 ‘위’에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은 체위였다.

안에 든 페니스의 위치가 달라졌다. 바닥을 짚고 엎드린 상태에서 뒤에서 찌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리누르는 감각은 생소했다. 우동주의 어깨가 내 어깨보다 더 앞에 있었다. 스모 선수들의 준비 자세처럼 무릎을 굽힌 채 양다리를 벌리고 엉덩이 위에 올라타듯이 자세를 잡은 우동주는 상체를 숙여 내 등에 가슴을 바짝 붙이고 귓불을 빨면서 온몸으로 나를 찍어 눌렀다. 말 못 하는 짐승들의 교미처럼 점잖지 못한 체위였지만, 누가 보는 게 아니니 상관없었다.

상체가 쏟아지지 않도록 나보다 좀 더 앞을 짚은 우동주의 팔에 내 팔을 감았다. 평소보다 더 불거진 핏줄 아래로 상완근이 펄떡거렸다. 요가 밀리고, 무릎이 쓸리고, 페니스가 격하게 흔들리고, 이 방과 이 빌라와 세상 전체가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우동주의 동생이 뛰어나와 지진이 났다며 방문을 두드릴 것 같았다.

“잠깐만… 잠깐….”

“허억, 헉… 헉….”

팔을 비틀어 쥐면서 매달렸지만 우동주는 내 안을 드나드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퍽, 퍽, 퍽.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정말 퍽,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엉덩이에 사타구니를 부딪혀왔다. 그때마다 우동주의 고환이 때리듯 회음부에 들러붙었다. 위에서 찧듯이 내리누를 때마다 전립선 위를 비비고 지나가는 음경의 단단함에 더는 참기 힘들었다.

“그만, 잠깐만… 잠깐만, 동주야….”

페니스를 흔드는 손이라도 멈춰주길 바라며 잡아 떼어내려 했지만 허사였다.

“흐으, 윽… 윽… 그냥 사정해…. 나 지금, 못 멈춰.”

허락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상체가 고꾸라졌다. 내가 상체를 무너뜨리고 사정의 쾌락에 어깨를 비트는데도 우동주는 삽입을 멈추지 않았다. 끝장을 보겠다는 듯,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 좀 전보다 더 빠르고 강한 힘으로 안을 들락거리면서 마지막 스퍼트를 올렸다.

“으으, 윽. 흐윽.”

전신이 느리게 경련했다. 더 이상은 우동주의 무게를 견디고 있을 힘이 없었다. 결국 나는 무너졌다. 요 위에 엎어져 전신을 비비면서, 내 페니스를 쥔 우동주의 손에 내 손을 겹쳐 자극에 자극을 더하면서, 사정했다. 우동주는 아직이었다. 널브러진 내 위에 바짝 엎드린 채 사타구니만을 들었다 놨다 빠르게 털어대며 삽입을 멈추지 않았다. 앞은 이미 쾌감을 터뜨려 사정하고 있는데도 뒤는 계속해서 더 달아올랐다. 한계점이 없는 흥분이었다.

“끄… 으윽… 흣….”

발가락으로 요 위를 긁어가며 사정하면서도 엉덩이의 근육을 조여 우동주의 것을 압박했다. 분명 내 아래는 매트리스가 아닌 딱딱한 맨바닥인데 온몸이 출렁이는 기분이었다.

요 위에 이마를 박고 있던 얼굴이 우동주의 손에 의해 뒤를 향했다. 흥분으로 완전히 흐트러진 땀범벅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며 헉헉대고 있었다. 얼굴을 핥듯이 훑어가는 뜨거운 시선에, 달려들어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혀를 내밀자, 입술로 그것을 삼키는 대신 그 역시 혀를 내밀어 입술 밖에서 서로 혀를 문질렀다.

“사랑해… 사랑해, 주세영… 모르면 안 돼….”

“으으읏… 흐… 읍.”

사랑한다는 고백을 마주 들려주기도 전에 그가 이번엔 내 혀를 삼켜버렸다. 내 안에서 진하게 사정하는 온기가 느껴졌다. 손끝까지 퍼지는 전율에 몸을 떠는 그의 만족감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왔다. 함께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었지만 팔을 뻗어 우동주의 뺨을 만졌다. 머리 위의 책상 쪽에서 스며든 빛이 비스듬하게 우리의 발끝쯤을 비췄다. 오늘 내가 왜 너에게 화를 냈었는지 그건 벌써 까마득해진 후였다.

“어떻게 내가… 모르겠어.”

흥분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눈으로, 꼼꼼히 살피듯 그가 내 얼굴을 구석구석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엎드려 하나로 포개진 채 다시 깊게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쳐왔다.

“그럼 됐어. 그거면 돼.”

하나밖에 없는 요 위에 정액을 잔뜩 묻힌 바람에 우동주가 가져다준 겨울 이불을 두 개나 깔고 잤지만 워낙 격렬한 밤일을 해서 그런지 뒤가 묵직하고 허리 아래가 노곤했다. 할 때는 완전 좋았는데 다음 날 죽어나네. 나이 탓인가?

“저기…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서재에서 나와 주방에서 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우 씨 집안 두 곰돌이가 나란히 들어오더니 작은 곰돌이(라고 해봤자 185cm)가 쭈뼛거리면서 말을 걸어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큰 곰돌이가 뭔가 보상을 해주겠다고 딜을 한 모양이었다.

“편한 대로 해요.”

어젯밤의 열나고 불나는 섹스로 우동주에 대한 내 마음은 살짝 부드러워졌지만 그렇다고 작은 곰에 대한 적대감이 다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 시큰둥한 반응에 둘이서 뭐라고 속닥거리면서 잠깐 티격태격했다. “거 봐, 내가 까칠하다고 했잖아.” “아니야, 그냥 원래 말투가 그런 거라니까.” 어이, 곰 브라더스, 다 들리거든?

“성주가 선배한테 할 말 있대요.”

합의도 없이 큰 곰이 불쑥 질러버리자 작은 곰은 팔꿈치로 큰 곰의 옆구리를 마구 찔러댔다. 야, 그 곰 내 거거든? 누가 마음대로 막 찔러보래?

“무슨 얘긴데요?”

다 마신 빈 컵을 개수대 안에 내려놓고 곰 브라더스 쪽으로 돌아섰다. 직설적인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작은 곰이 띄엄띄엄 말을 꺼냈다.

“어… 그게… 혹시 오늘 시간 되시면… 쇼핑….”

쇼핑? 나보고 지금 패딩 점퍼랑 운동화 사는데 같이 가자는 얘기? 눈을 맞추지 못하고 보조 조리대 앞의 스툴쯤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작은 곰 대신,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큰 곰에게 찌릿한 시선을 쏴줬다. ‘죽고 싶냐?’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서.

“다음 주에 호텔에서 동창회가 있는데 입고 갈 옷이 없대요. 선배가 옷 잘 입는 것 같다고 부탁하고 싶다네.”

그러라고 네가 꼬드겼겠지. 흥이다, 요놈아. 그래도 일단 홍대 클럽 드나들 때나 통할 것 같은 옷 사러 가자는 얘긴 아니었네. 어디 한번 네 입으로 직접 부탁해봐, 라는 눈으로 작은 곰을 물끄러미 쳐다봤더니 의외로 간단히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제가 슈트는 전혀 몰라서요. 시간 되신다면 부탁드립니다.”

우동주와 똑같은 얼굴로 그렇게 정중하게 나오는데 더 이상 뻗댈 수가 없었다. 나하고 작은 곰이 사이좋게 지내면 큰 곰이 기뻐할 것 같기도 했고. 이렇게 예의 바르게 할 수 있는 놈이 여태 왜 그랬어? 내가 너네 형 봐서 같이 가주는 거야.

“어차피 오늘은 집에서 쉬려고 했으니까, 그럼 같이 가볼까요?”

그렇게 해서 나는 황금 같은 주말 시간을 쪼개 우동주의 동생과 슈트를 사러 외출했다. 지난 주말에는 우동주와 트리를 사러 외출했다가 이놈 때문에 다퉜었는데, 오늘은 그 다툼의 원인인 이놈과 쇼핑을 하고 있다니. 인생살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진짜.

“이걸로 한번 입어봐요.”

“꼭… 입어봐야 돼요?”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정도 남긴 주말의 백화점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좀처럼 붐비는 일이 없는 남성복 명품 매장까지 연말 모임이나 선물을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스웨트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트래킹 슈즈를 신은 우동주의 동생은 슈트 매장이 영 어색한지 내가 골라준 옷을 들고 어정쩡하게 서서 울상을 지었다. 이러니까 쬐금, 아주 쬐금 귀여운 것도 같다.

“옷 좋아하니까 잘 알 텐데. 옷은 그냥 볼 때랑 입어봤을 때랑 다르다는 거. 슈트는 더 그래요. 얼른 입어보고 나와요.”

나의 가차 없는 대답에 작은 곰은 할 수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피팅룸으로 향했다. 옆에서 우리 대화를 지켜보던 점원이 웃으면서 작은 곰을 안내해줬다. 괜히 즐거워서 나도 모르게 입가가 자꾸 움찔거렸다. 동생을 괴롭히는 형들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근데, 넌 왜 따라온 거냐?”

“왜냐니. 그럼 둘이 보내?”

내 옆에 서서 잘 다녀오라며 작은 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던 큰 곰이 당연한 얘길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사람도 많아서 정신없어 죽겠는데 덩치 큰 놈 둘이랑 다니려니까 불편해 죽겠다.”

멧돼지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황토색 장갑을 만지작거리면서 큰 곰에게 투덜거렸다. 매장 안에는 남자친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러 온 것 같은 여자 손님들도 눈에 띄었다. 나라면 이 장갑을 추천하겠다. 지난번에 새로 산 우동주의 브라운 체크무늬 슈트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난 그냥 보디가드라고 생각해. 혹은 짐꾼.”

우동주는 작은 곰과 내가 화해한 것이 만족스러운지 뭐라고 구박을 해도 내내 웃는 얼굴이다. 작은 곰과 딱히 싸운 것은 아니지만 왠지 싸웠다가 화해한 것 같은 기분인 건 사실이었다.

“어제 일은… 눈치 못 챈 것 같지?”

눈치챘다면 같이 쇼핑 오자는 말도 안 꺼냈겠지만,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주변에 들리지 않게 슬쩍 물어봤다.

“어제 일? 뭐?”

그랬더니 이 능글맞은 큰 곰은 다 알아들어 놓고도 일부러 모르는 척이다. 어젯밤을 생각만 해도 좋은지 얼굴이 완전히 풀어져서 빙글빙글 웃는 얼굴에 나 역시 어젯밤의 열기에 생각이 닿았다. 어제는 좀 우리가… 평소보다 많이 동물적이긴 했었다. 얼굴로 열이 오르는 느낌에 만지작거리던 장갑을 내려놓고 말없이 가만히 쳐다봤더니 그제야 웃음기를 억지로 참으면서 질문에 답한다.

“당연히 눈치 못 채지. 상상도 못 해, 쟤는. 근데… 어제 진짜 좋았지?”

“떨어져라. 사람들 본다.”

등 뒤로 바짝 붙으면서 허리에 손을 대길래 구두 앞코라도 확 밟아주려는데, 작은 곰이 피팅룸에서 나왔다. 라펠이 새틴으로 된 검은 턱시도 슈트를 입고 나온 작은 곰은 역시나 우동주 동생답게 각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아직 몸에 맞게 수선하기도 전인데 맞춤복인 것처럼 잘 맞는다. 턱시도 슈트지만 여밈이 더블로 된 디자인이라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고, 호텔에서 열리는 스물한 살의 연말 모임용으로는 딱이었다. 매장에서 피팅용으로 빌려주는 브라운 윙팁 슈즈가 조금 거슬렸지만, 구두야 어울리는 걸로 사면 되는 거니까.

“이야― 내 동생 멋있다아―.”

브라콤인 우동주는 엄지를 치켜 보이며 칭찬했지만 작은 곰은 큰 곰의 의견 따윈 불필요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앞으로 슈트만 입고 다녀요. 잘 어울리네.”

작은 곰은 그제야 안심한 듯 몸을 돌려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봤다. 근데 이 집 남자들은 저런 좋은 조건을 타고났으면서도 왜 옷에 관심이 없거나 자기 몸하고 안 어울리는 옷을 입는 거지? 아버님이 군산에서 알아주는 멋쟁이라고 하던데 어릴 때부터 멋진 옷을 너무 많이 봐서 오히려 옷에 무감해졌나? 아니면 조건이 좋은 남자들은 특별히 노력을 기울일 필요를 못 느끼는 건가?

아, 욕망이 솟구쳐 오른다. 특급 보석이 될 자질을 갖춘 원석을 발견하니 갈고 닦아서 광을 내고 싶은 욕망이 마구 솟구쳐 오르는구만.

그러고 보면 이 병이 우동주와 나의 시작이었다. 옷하고 머리만 바꾸면 괜찮을 것 같은데 왜 신경을 안 쓰냐고, 처음 만났던 회식자리에서 술주정을 했던 게 계기였으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같이 쇼핑 가자는 약속까지 잡았었고. 그 상대가 만약 우동주가 아닌 부장님이나 혹은 사장님이었다면….

그러고 보니 속으로는 이렇게 저렇게 평가해도 기본적으로 남의 일에는 무심한 편이라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는데 그때는 왜 그랬나 모르겠다.

“서울 남자… 같아요?”

한참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던 작은 곰이 나를 향해 뜻 모를 질문을 던졌다. 서울 남자? 그건 또 뭔 소리야? 스물한 살짜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은어인가? 영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우동주를 쳐다봤더니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금요일 모임에 성주가 짝사랑하는 여자애도 오거든. 서울 남자처럼 세련돼 보이냐, 뭐 그런 뜻으로 해석하면 돼요.”

짝사랑하는 여자애를 만나려고 서울까지 온 거였어? 데이트 신청할 용기도 없어서 동창회 핑계로 얼굴이나 보려고? 첫인상은 엄청 험악하더니 완전 숙맥이었구만.

“좋아하는 애한테 잘 보이려고 사는 거였어?”

내 질문을 놀림으로 받아들였는지 작은 곰은 쑥스러워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자꾸 보니까 확실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 형님은 결코 너를 놀리려는 게 아니란다.

“그럼 진작 얘기하지. 가요, 그럴 때 딱인 데는 따로 있으니까.”

얼른 옷을 벗고 나오라고 작은 곰을 피팅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친절하게 응대해준 점원에게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원래 우동주하고 자주 들르던 매장이고, 아무래도 저 황토색 장갑을 사러 내일쯤 우동주 몰래 혼자 오게 될 것 같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건물 전체에 루미나리에를 환하게 장식한 복잡한 백화점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한남동으로 출발했다. 주차하다가 시간 다 보낼 것 같아 차는 두고 나왔는데 잘한 일이었다. 드레시 리버스는 워낙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이 불규칙한 샵이라 조금이라도 서두르는 편이 안심이었다.

아직 4시도 안 된 시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택시 안에서 미리 전화를 해봤더니, 역시나 연말이고 주말이라 기분이 들떠서 일찍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단다. 이 젊은 사장, 돈 때문에 샵을 운영하는 게 아닌 줄은 알았지만 요즘 같은 대목에 4시 클로징이라니. 기다린다고 했는데도 마음이 급해졌다.

번화가를 살짝 벗어난 주택가에 택시를 세우고 잔돈 챙길 정신도 없이 두 곰돌이를 데리고 서둘렀다. 코발트블루의 외벽에 둘러싸인 아담한 쇼윈도 안에 커다란 트리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이벤트라면 껌뻑 죽는 젊은 주인은 11월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트리를 장식해뒀었다. 아마 서울에서 제일 먼저 트리를 꺼낸 집일 거다. 슈트 샘플을 입힌 토르소가 놓여 있던 자리를 꽉 채운 트리는 아주 작은 사이즈의 꼬마전구와 금색 오너먼트만으로 심플하게 장식돼 있었지만 허전한 느낌 없이 풍성하고 따뜻한 크리스마스 자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예상대로 잔잔한 캐롤이 흐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캐롤이 아니라 토니 베넷이 부르는 였지만, 루미나리에를 화려하게 밝히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백화점보다 훨씬 더 성탄절다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젊은 사장은 여느 때보다 한층 더 기합이 들어간 차림으로 우리를 맞았다. 지금 당장 크리스마스 파티에 간다고 해도 믿을 만한 차림이었다. 나도 옷차림으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타입이었지만, 여기 사장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그에게 작은 곰을 소개시켜줬더니 우동주와 정말 많이 닮았다며 신기해했다.

“크리스마스 데이트에 입을 만한 슈트를 맞추고 싶은데, 샘플 좀 볼 수 있을까요?”

작은 곰이 옆에서 “데이트 아닌데….”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형님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넌 그냥 입어보라는 옷이나 입고 나와, 인마.

크리스마스 데이트라는 말에 신난 젊은 사장은 당장 샘플북을 가지고 나왔다. 별 관심 없이 밋밋하게 앉아 있는 곰 두 마리는 내버려 두고 젊은 사장과 나는 샘플북을 세 권이나 샅샅이 뒤졌지만, 사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샘플북 속에서 토르소에 입혀진 그 슈트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엔 이미 그걸 입고 모임 장소에서 짝사랑하는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은 곰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 슈트… 혹시 지금 준비돼 있나요? 입어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금장 단추가 달린, 아이보리에 가까운 페일 핑크의 더블 슈트를 가리키자 젊은 사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샘플북을 탁 덮었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곰 두 마리는 드디어 결정된 거냐는 얼굴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똑같이 저러고 있으니까 정말 닮긴 닮았다.

“마침 샘플이 있으니까 저쪽에서 입어보시죠.”

크리스마스 데이트라는 말의 어감에 한껏 들뜬, 극단적인 로맨티스트가 확실한 젊은 사장은 어색해하는 작은 곰을 데리고 피팅룸으로 사라졌다. 나 역시 아들의 첫 데이트를 준비하는 아버지가 된 듯한 감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그의 호들갑을 충분히 이해했다.

금테를 두른 하얀 바탕에 작은 들꽃이 수놓인 빈티지 찻잔에 내온 커피는 벌써 식어 있었지만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다.

“근데 여기 사장, 이 노래 엄청 좋아하나 봐.”

이 샵에서 맞춘, 깃 안쪽에 ZOO가 새겨진 셔츠를 입은 우동주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를 돌아보면서 손가락으로 찻잔을 탁 튕겼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아직도 가 흐르고 있다. 이 한 곡만 반복 재생해둔 것 같았다.

“좋잖아, 크리스마스 같고.”

복잡한 세상에서 반걸음 떨어져 있는 은신처 같은 아담한 로비의 소파에 우동주와 나란히 등을 기대고 앉아 따뜻하게 불을 밝힌 트리를 보면서 음악을 듣고 있으니 한없이 느긋한 기분이 되었다. 소파에 놓인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치고 검지를 까딱이며 허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던 우동주가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성주랑 나랑 그렇게 닮았어?”

평생 그런 말 지겹게 들으면서 살아왔을 줄 알았는데 전혀 몰랐다는 듯이 묻는 우동주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문득 가슴이 뻐근한 행복이 밀려왔다.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평범한 일상에서 갑작스럽게 품에 안겨오는 행복이었다. 전에도 이 소파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손을 뻗어 우동주의 뺨을 만지면서 웃었다.

“아니, 네가 훨씬 멋있지.”

우동주도 나를 보면서 마주 웃었다. 기시감이 아니었다. 전에 이 소파에서 느꼈던 행복은 너무 아름답게 반짝거려서 조금 마음이 아픈 행복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포근하고 충만했다.

방금 전에 막 끝난 가 또 한 번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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