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 서울은 본격적인 여름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한강은 싱싱한 초여름 햇빛을 잘게 부수며 흐르고, 물이 오른 초록 잎들로 뒤덮인 한강공원은 보는 것만으로도 폐가 정화되는 것 같고, 하늘빛은 청아하고 상쾌하다.
전면창이 있다고는 해도 내다보이는 건 칙칙한 고층빌딩뿐인 오피스텔에 살 때는 몰랐던 서울의 아름다움을 이곳에 와서 많이 느낀다. 이제까지 내가 알던 서울은 계절의 변화에 둔감한, 두껍고 칙칙한 피부를 가진 파충류 같았는데, 이 집에서 만나는 서울은 기분 따라 매일 다른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스무 살의 청년처럼 매력적이었다.
금요일이었던 어제, 우리는 거실에서 밤새도록 세 편의 DVD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동거 초반에는 주말이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침실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두 달 조금 지나고 나니 이런 여유도 생겼다. 별개로 섹스 라이프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소파에서 시작됐던 영화 관람은 점점 마룻바닥으로 자리를 옮겨, 설탕에 조린 과일이나 견과류, 크래커, 나쵸칩 같은 주전부리가 담긴 커다란 쟁반이며 맥주 캔과 쿠션들까지 나중엔 죄다 바닥에 늘어놨었다.
언제 잠들었지? 빨간 드레스를 입은 장만옥이 힐을 신은 채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던 장면은 기억나는데. 양조위 헤어스타일이 내 출근 모드 머리하고 비슷하다며 키득거리는 우동주의 입안에 금귤을 여러 개 욱여넣으며 장난쳤던 것도 기억나고.
이미 몇 번이나 봤던 영화이니, 엔딩 크레딧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진 않았다.
초여름의 토요일 오전, 느지막이 눈을 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어젯밤에 본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고, 몸을 돌려 누우면 오늘도 역시나 대자로 누워 트레이닝팬츠의 밴드에 손가락 네 개를 찔러 넣고 곤하게 잠이 든 연인의 얼굴이 보이고. 만족스럽다. 팔을 뻗어 내 손바닥 안에 우동주의 얼굴을 가두었다.
“음… 일어났어요?”
저혈압이라 아침에 늘 고생하는 나와 달리 우동주는 눈 뜨자마자 쌩쌩해 보였다. 목소리만 조금 깔깔하게 잠겨 있었다.
“어, 나 언제 잠들었냐?”
“장만옥하고 양조위가 같이 택시 탔을 때쯤?”
내 손목을 붙잡아 끌어내린 우동주가 손바닥의 오목한 자리에 입을 꾹 누르면서 웃었다.
“아깝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앙코르와트에 간 양조위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나 하나로는 만족을 못 하는구나?”
웃음기가 머무는 우동주의 얼굴을 보며 나도 웃었다. 기분 좋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창밖의 신록, 시원한 마룻바닥, 등 아래에 깔린 보들보들한 촉감의 담요, 딱 요즘 날씨같이 청량하고 건강한 미소의 연인.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문득 감사했다.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해주는 일들은 사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했던 값비싼 선물이나 승진, 벼르고 별렀던 특별한 여행 같은 것들보다 매일 내 곁에서 일상을 떠받쳐 주는 당연한 따스함들.
이런 순간엔 확실히 같이 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엄청 하고 싶다는 얼굴이네?”
이번엔 우동주가 팔을 뻗어 중지로 내 눈썹을 훑었다. 방금 전까지 딱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는데 막상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기분이 야시시해서 끌리는 날도 있지만 오늘처럼 행복해서 하고 싶은 날도 있다. 지금까지 행복과 성욕은 접점이 없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라고만 여겼었는데.
“너 아침엔 너무 격렬해서 싫어.”
워낙 건강한 탓인지 실제로 우동주는 아침에도 매트리스의 스프링을 끊어버릴 듯한 패팅을 한다. 오히려 밤에는 여유롭게 천천히 애무를 즐기는 타입인데, 아침엔 에너지와 박력이 넘쳤다. 하지만 그래서 싫다는 건 조금 거짓말이다. 평일 아침에야 출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어내긴 하지만.
“그거 칭찬 아니야? 난 그 말 들으니까 확 땡기는데.”
내 쪽을 향해 모로 누워 있던 우동주가 몸을 뒤집어 팔꿈치를 괴고 엎드리면서 웃었다. 음흉해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약간 야비하기도 한 웃음이었다. 라운드가 느슨한, 무늬 없는 반팔 티셔츠 소매 아래의 그을린 팔이 탄탄하고 예뻤다.
우동주에게서는 가끔씩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남자들과는 다른 냄새가 풍겼다. 그건 아주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향수나 코롱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체취 같은 것이라서 내 시각과 후각을 자기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같은 남자로서의 동경일 수도 있고, 연인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일 수도 있고, 둘 모두일 수도 있는 매력이었다.
몸을 일으켜 내 앞에 무릎으로 버티고 선 우동주는 가슴 앞에서 엑스자로 팔을 교차시켜 티셔츠를 단번에 훌렁 벗어버렸다.
“봐, 벌써 의욕 만땅이야.”
아침이라 불룩하게 일어난 앞섶을 검지로 가리키면서 저렇게 산뜻한 미소를 짓다니. 가벼운 사기를 당한 것 같은 억울함에, 밥을 많이 먹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앉아도 배가 접히지 않는 퍽퍽한 복근을 발끝으로 쿡쿡 찌르며 웃었다.
그러다 한순간 발목을 붙잡혔다. 우동주가 허리를 굽혀 붙잡은 내 발목 안쪽에 입을 맞췄다. 이런 곳에도 간지러움을 느낄 수 있는 촉각이 존재했다.
“영화 찍냐?”
속마음과 달리 장난조로 면박을 줘도 우동주는 웃어넘겼다. 그리고 이번엔 혀를 내밀어 좀 전에 입을 맞춘 곳을 좀 더 넓고 진하게 핥아 올렸다.
“지금 영화 찍으면 포르노 될 것 같은데?”
붙잡히지 않은 오른쪽 다리를 들어 우동주의 트레이닝팬츠에 꼬물꼬물 발가락을 휘감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누워서 올려다보는 우동주는 항상 나를 대담하게 만든다. 기대했던 영화를 보러 가서 음료수를 컵홀더에 걸어놓고 영화 시작을 기다릴 때와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아침엔 끝까지 안 해. 알지?”
이제 막 회색 트렁크가 반쯤 드러났는데, 내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우동주는 대답 없이 오른쪽 발목마저 채갔다. 윗옷을 벗은 채로 내 양쪽 발목을 붙잡은 우동주가 가늘게 뜬 눈꺼풀 안에서 몸을 훑어나간다. 아주 조금 내밀어진 혀가 입술을 축이고, 기회를 노리듯 신중해 보이기까지 한 시선은 내 다리 사이에서 머물렀다.
“어딜 봐?”
지금 이 자세 그대로 내 엉덩이를 까고 당장 밀어 넣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바지 좀 내려봐.”
“뭐?”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얘 눈이 심상치가 않다. 딱히 나도 토요일 아침 거실에서의 모닝 섹스가 싫진 않지만, 전면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초여름 오전 11시의 맑은 햇빛 아래에서 발목을 잡힌 채로 엉덩이를 까려니 좀 부끄럽긴 했다.
“넣는 건 절대 안 돼….”
앞쪽에서 끈을 묶어 조이는 반바지의 매듭을 풀고, 엉덩이를 살짝 들어 주춤주춤 바지와 드로즈를 한꺼번에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는 동안 사람 민망하게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심각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누가 보면 내 다리 사이에서 놀라운 일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줄 알겠다. 그렇게 쳐다볼 거면 차라리 빨리 와서 덮쳐라.
발목을 잡힌 다리를 굽혀 우동주를 끌어당겼다. 그제야 발목을 놓고 제 아랫도리를 끌어내리며 몸을 겹쳐온다. 방금 잠에서 깬 따뜻하고 민감한 맨살이 맞닿으면서, 그 부위에서부터 알싸한 전율이 일어난다.
“흐음….”
페니스와 페니스가 맞닿는 직접적인 자극에 저절로 눈이 가늘어지고 호흡이 깊어졌다. 가까이 다가온 우동주의 뺨을 감쌌다. 육중한 몸이 나를 누르자 ㄴ자로 굽혀진 다리가 더 밀어 올려져 무릎이 거의 어깨에 닿을 것 같았다. 엉덩이가 살짝 공중에 떴다.
“안 넣어. 젤이고 콘돔이고 다 방에 있는데… 어떻게 넣어. 그냥, 흉내나 좀, 내자는 거지.”
허벅지를 움직여 자세를 잡는 우동주의 숨결도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100미터를 10초 초반대에 주파할 것 같은 허벅지로 내 엉덩이 양쪽을 꽉 고정시키고는 다시 내 발목을 찾아 쥔다. 겹쳐진 자세 때문에 우동주의 고환이 내 고환 위를 누른다.
곧고 바른 등부터 돌 뭉치가 든 것 같은 엉덩이까지 큰 물결을 일으키면서 내 몸을 흔들면, 자는 동안 자연발기 되었던 두 개의 페니스가 진동하면서 서로 몸을 비벼댔다. 감질나게 맞붙었다 떨어지는 그 감촉에 애가 탔다. 가끔은 얘들을 하나로 딱 붙여놨으면 싶을 때가 있다.
마치 삽입을 한 듯한 우동주의 움직임에 몸은 둘째치고 정신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등에 닿는 마룻바닥의 딱딱함마저도 의식 못 하겠다. 아니, 오히려 침대가 아닌 장소라는 것이 분명하게 와닿아 그마저도 자극적이었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육체는 쉽게 흥분했다. 절대 넣으면 안 된다던 나는 참을 것도 없이 거친 숨을 내쉬면서 우동주의 벗은 어깨를 쓰다듬고, 발목을 붙잡은 딱딱한 팔을 더듬고, 크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넓은 가슴을 애무했다.
“아, 아아… 하….”
머릿속이 어느 온도 이상으로 달아오르면 소리도, 행동도, 말도 더는 가리지 않게 된다. 섹스는 할수록 는다더니, 요즘 나는 처음보다 더 잠자리에서 솔직해졌다. 아직도 우동주의 야한 농담에 나는 아닌 척, 모른 척할 때가 많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는 스스로 엉덩이를 흔드는 것쯤은 망설이지 않게 됐다.
지금도 온 근육을 터뜨려버릴 듯 잔뜩 힘을 주고 나와의 행위에 집중한 우동주의 전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연인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촉각으로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잘, 안 닿는다. 당신이… 손으로 좀 잡아봐.”
신체구조상 우리의 두 아들놈은 서로 찰싹 달라붙지 못하고 슬쩍슬쩍 스치면서 매번 애간장을 태웠다. 그 간질간질하고 아슬아슬하고 흔들흔들거리는 느낌이 흥분을 고양시켜주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타들어가는 갈증으로 사람을 말려 죽이기도 했다. 시원하게, 원하는 만큼 성기를 치대고 싶은 건 본능이었다.
왼손으론 우동주의 목을 감싸고, 살짝 틈을 두고 벌어진 우리의 상체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두 페니스가 잘 마찰할 수 있도록 오른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겹쳐진 두 페니스는 한 손에 쏙 잡히는 사이즈는 결코 아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를 최대한 늘려, 두께와 탄력에 금방이라도 손가락 밖으로 튕겨져 나갈 것 같은 살덩이를 잘 움켰다. 그동안 요령이 제법 늘었다.
“하아아… 아…. 하… 흐읍….”
찍어 누르듯이 발목을 붙잡고 허리를 터는 우동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들린 엉덩이를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듯 그의 몸이 사타구니를 자극하면 내 몸은 그만큼 위로 밀려 올라갔다. 더 이상 밀리지 않도록 왼손을 뻗어 소파를 붙잡았다. 피부를 찢고 뭔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몸속의 근지러움에 나는 이리저리 목을 꺾어가며 발버둥 쳤다.
“후, 후우… 하… 아, 그냥, 엎드려서 네 몸으로 눌러줘.”
꽉 누르고 있다가 손을 뗀 용수철처럼 몸이 어딘가로 탁 튀어 나가버릴 것 같았다. 페니스는 좀 더 강한 압박을 원했다. 내 몸은 우동주의 무게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허리를 비틀어 페니스를 자극해주는지, 맞닿은 가슴에 비벼지는 두툼한 근육의 굴곡이 어떤 모양인지, 옆선에 보조개가 파인 엉덩이에 다리를 휘감으면 그 안에 든 단단한 근육의 움직임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그 모두를 제대로 느끼고 싶은 열망에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페니스에서 손을 떼고 우동주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어 바짝 힘이 들어간 등을 마구 끌어당겼다. 절벽 끝에서 발을 헛디뎠다가 겨우 팔꿈치를 걸친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우동주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간 내 반바지 한쪽을 붙잡았다.
“발 빼요.”
한쪽 발을 빼내자 재빠른 동작으로 내 몸 위에 완전히 밀착해 엎드린다. 긴 두 다리를 뒤로 뻗으면서, 내 티셔츠를 위로 말아 올리면서, 다리 사이로 밀려들어 온다. 페니스에서부터, 아랫배, 가슴의 순서대로 겹쳐지는 맨살의 촉감에 그의 등을 결박하듯 부둥켜안았다.
“하아… 흣.”
페니스를 뭉개는 몸통의 압박감에 밭은 숨이 터졌다. 배와 가슴을 헐떡거리며 시원하게 숨을 몰아쉬고 싶었지만 나를 누른 무게를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 입을 통해 겨우 공기를 들이쉬면서도, 등을 안은 팔에 더 강한 힘을 주며 더 가까이 끌어당기려 애를 썼다.
우동주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뼈가 도드라지는 마른 발을 내 종아리에 휘감고 등 아래로 팔을 넣어 허리를 꼬집듯이 쓰다듬고, 살집이 얼얼하도록 엉덩이를 쥐어짜고, 역시 넣고 싶은 건지 애널 주변을 지분거리기도 한다. 나 역시 털이 까슬한 우동주의 종아리에 발등을 비벼댔다. 허리 아래를 들썩거리며 페니스를 눌렀다 뗐다 하는 노골적인 움직임에 흥분이 점점 고조되었다. 땀이 배어 나온 피부 사이에 공기가 새어들어 그가 삽입한 것처럼 사타구니를 치댈 때 가끔 뿍, 뿍, 하는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둘 다 웃지 않았다. 우동주의 고환이 묵직하게 흔들리면서 회음부를 툭툭 쳐대는 촉감에 목줄기가 쫙 당겼다.
“더, 동주야… 하, 하아… 더 세게, 해도 돼….”
“등, 안 아파?”
제법 자란 곱슬머리가 땀에 젖어 반듯한 이마를 가렸다.
“괜… 괜찮아. 더… 조금만. 으, 윽….”
분당 100회는 될 것 같은 강력한 떨림으로 내 몸을 흔드는 진동에 목소리가 흩어졌다.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는 마룻바닥은 우동주의 힘을 고스란히 내 몸에 퍼부었다. 나도 모르게 우동주의 종아리에 휘감은 다리를 마구 조여댔다. 정신없이 우동주의 얼굴을 찾아 양쪽 뺨을 쥐고 입술을 겹쳤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뒤통수를 헤집고 근육으로 꽉 찬 몸의 다른 부위와 달리 야들야들한 귓불을 문질거리며 잠시도 혀를 가만두지 않고 이리저리 꺾어댔다. 사정 직전의 키스는 뜨겁고, 요란하고, 들쑥날쑥했다. 섹스 그 자체처럼.
갈 것 같았다. 그의 다리를 조이던 힘이 어느 순간 확 풀어졌다. 내 변화를 알아챈 우동주는 등허리를 쑥 집어넣고 페니스를 아래에서부터 쭉 짜내듯이 몸을 쳐올렸다. 그렇게 몇 번을 빠르게 반복하는 사이 뜨뜻한 액체가 맞닿은 배 사이로 걸쭉하게 번져나갔다.
“흐음… 음….”
내가 사정을 마친 뒤에도 우동주는 느릿느릿 오래 사정했다. 이마와 콧등과 뺨과 귀, 목덜미와 어깨에 여러 번 다정하게 입을 맞추면서 커다란 몸을 서서히 풀어나갔다.
나른한 감각에 희미하게 눈을 떠 우동주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니, 거실 끝자락을 겨우 적시고 있던 햇빛이 어느새 우리가 몸을 겹친 발치까지 넓게 번져 있었다. 몸은 더운데 축 늘어진 목덜미에는 소름이 돋았다. 팔을 들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우동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뻐 죽겠네.”
고개를 꺾어, 내 목덜미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그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나?”
“어, 너.”
속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팔불출이면서 겉으로 표현을 잘 못하는 주세영이지만, 가끔은 제어할 틈도 없이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아침엔 격렬해서 싫다더니. 사실은 좋았구나?”
씨익 웃으면서 검지로 내 뺨을 쿡쿡 찌르는데, 방금 질펀한 사정을 마쳐놓고 또 청량음료 CF처럼 산뜻하게도 웃는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 나와 달리, 눈썹이 진하고 콧대가 높고 두꺼워 이국적일 정도로 이목구비가 강렬한데도 호쾌하고 선한 이미지라 웃으면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상쾌해졌다.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거지만, 호감이 가게 생긴 건 사는 데 확실히 이득이었다.
“그게 좋아서 이쁘단 게 아니라.”
“알아. 근데, 당신이 더 이뻐.”
누가 보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 둘이서 별 닭살 돋는 말을 다 한다고, 두 놈 중에 이쁜 놈 하나도 없다고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여긴 우리 집이니까 괜찮다. 아무도 없다. 그리고 옛말에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했다. 우동주는 이쁘다. 바비 인형 같은 예쁨이 아니라서 그렇지, 한강보다 신록보다 초여름 하늘보다 더 이쁘다.
서로 네가 더 이쁘다며 한심한 실랑이를 벌인 우리는 이번엔 입술부터 천천히 핥아가며 부드럽고 진득하게 혀를 얽었다. 사정 후의 키스는 뜨겁고, 잔잔하고, 깊었다.
□ WOO DONG ZOO
그렇게 황홀한 모닝 섹스를 하고 영화를 보러 나가서 우리는 다투고 들어왔다.
스카이블루의 리넨 재킷에 칼라 부분이 화이트로 마감된 자잘한 푸른색 체크 셔츠를 입고 10부 길이로 턴업된 화이트 팬츠에 옅은 브라운 태슬 로퍼를 신은 주세영은, 처음 사귄 여자친구와 첫 데이트를 나온 산뜻한 도련님 같았다. 여자친구의 손조차도 감히 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는 순진한 도련님.
날씨와도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회사에 갈 때처럼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하지 않고 느슨하게 흘러내려 자연스럽게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이 초여름 미풍에 살랑살랑 날릴 때마다 나는 손등이 가려웠다.
주차하기 힘들기로 소문난 극장이었지만 운 좋게 바로 자리가 나서 영화 시작 30분 전에 주차를 마쳤고, 예매해둔 티켓을 찾고 팝콘과 음료를 사고, 로비에 세워놓은 포스터를 잠깐 둘러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다들 주세영을 힐끔거렸다. 개중에는 눈이 동그래져서 주세영의 동선을 따라 대놓고 시선이 따라붙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처음 봤을 땐 그랬으니까. 모델도 아닌데, 패션계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구나, 신기했으니까.
우리 아버지야 연세도 있으시고 정통 슈트파이다 보니 화려하다기보다 무게 있고 신사적인 느낌인데, 주세영은 역시 30대 초반이라 트렌디한 센스가 있어 더 이목을 끌었다.
난 좋다. 내 애인이 멋지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가벼운 리넨 재킷을 입은 단정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예쁘죠? 제 애인입니다.’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다. 티켓 박스의 직원도, 팝콘을 주문받던 알바생도, 상영관 앞에서 티켓을 체크해주던 남자 직원도, 전부 주세영을 흘깃거렸다.
근데 그렇게 완벽했던 데이트가 왜 다툼으로 끝이 났느냐.
우리가 예약한 좌석은 스크린을 정면으로 보고 섰을 때 오른쪽 사이드 자리였는데, 요즘 멀티플렉스들은 사이드 자리라도 자막이 잘 보이지 않는다거나 배우의 얼굴이 반쯤 날아가 보인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주세영을 안쪽에 앉게 하고 내가 바깥쪽에 앉았는데, 아직 불이 꺼지기 전부터 앞 좌석에서 스킨십이 뜨거웠다.
둘 다 아마 20대 중후반쯤? 가운데 팔걸이를 올리고 찰싹 달라붙어서 얼굴을 꼭 맞붙이고 끊임없이 속닥거리고 키득거렸다. 뭐, 좋을 때지. 아마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을 거다. 내 그 심정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러고 보니 주변이 죄다 커플이었다. 내 왼쪽으로도 커플, 우리 뒤쪽으로도 커플. 대학생 커플, 사회인 커플, 이미 결혼했을 것 같은 커플, 사회인과 대학생 커플. 음료 하나에 빨대도 하나만 꽂고 번갈아가면서 마시는 커플, 팝콘을 집어 서로 입안에 넣어주는 커플, 아직 예고편이 나오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영화 보러 와서 이마를 맞대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리는 커플. 아무튼 커플, 커플, 커플.
그 많은 커플 중에 팔걸이를 내리고 있는 커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더 정확히는 팔걸이를 올리고 있으면 커플, 내리고 있으면 남남으로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배알이 뒤틀렸다. 우리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닭살 커플인데.
팝콘을 한 알씩 툭툭 입안에 던져 넣으면서 슬쩍 주세영을 쳐다봤다. 아침에 한 판 하고 나와서 그런지, 얼굴색을 확 살려주는 화사한 옷차림 때문인지, 오늘따라 주세영은 더 이뻐 보였다. 재킷 포켓에 꽂고 나왔던 가느다란 뿔테 안경을 꺼내 쓴 옆얼굴은 유약하면서도 섬세하고 날카로워 보여, 상상력을 부추겼다.
암만 봐도 감수성이 풍부한 문학소년 같단 말이지.
교정의 돌계단에 앉아 주세영이 책장을 넘기면 수많은 남학생들이 멀찍이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애를 태우는 거지.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날리고, 책장 위를 지그시 누르고 있던 정갈한 손가락이 가느다란 안경테를 스윽 밀어 올리면, 남학생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물어뜯으며 그에게 말 한마디 붙일 수 없는 잔혹한 현실에 몸부림치는 거다.
왜 그에게 말 한마디 붙일 수 없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게는 이미 임자가 있기 때문이다. 우동주라는, 아주 독점욕 강하고 질투심 많고 용서와 자비가 없는 애인이.
그 애인이 등장하면 문학소년은 책을 덮고 안경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직 그에게만 보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아주 얇은 층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결이 곱고 부드러운 페이스트리 같은 미소를. 하… 내 망상이지만 진짜 그럴듯하다.
“왜?”
망상이 폭주하는 뜨거운 시선을 눈치챈 주세영이 빨대를 문 채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대답 없이 팝콘만 날름날름 입안으로 던져 넣으면서 주세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팔걸이의 홀더에 꽂혀 있던 팝콘을 들어내고 팔걸이를 위로 올리려 했다…가 주세영에게 바로 저지당했다.
“뭐 하는 짓이야?”
양 팔꿈치로 팔걸이를 꽉 찍어 누른 주세영은 고개는 그대로 둔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혹시 누구 보는 사람이 없나 살피기 바빴다. 아무도 안 봐. 지금이야 다 한 방향만 보고 앉아 있으니 당신 얼굴도 안 보이고 옷도 안 보이니까, 지금은 아무도 우리 안 쳐다본다고.
“불편하니까 좀 올리자고.”
“됐거든? 난 이게 편해.”
내리누르는 주세영과 들어 올리려는 나의 기싸움은 조명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도 계속됐다. 물론 내가 마음먹고 전력을 다하면 힘으로 주세영을 못 이기겠냐마는, 팔걸이 위에 거의 엎어지다시피 하면서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는 주세영을 팔걸이와 함께 들어 올려버리기엔 내 사랑은 너무 깊고, 난 주세영에게 너무 약했다.
“아무도 우리 안 본다고. 어차피 영화 시작해서 깜깜하잖아. 좀 올리자, 응?”
“시끄러. 올리고 뭐 하게? 어깨라도 끌어안고 영화 보게?”
스크린 위에 감독과 주연 배우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안에도 우리는 팔걸이에 매달려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옥신각신했다. 누가 뭐 어깨까지 끌어안겠대? 집에서 영화 볼 때도 어깨 안고 본 적은 없거든? 무릎베개 해주거나 내가 뒤에서 찰싹 끌어안고 본 적은 많아도.
“그럼 손잡아. 그건 되지? 어차피 밑에서 잡고 있으면 아무도 못 보잖아. 둘 중 하나는 무조건이야. 이거 올릴래, 손잡을래?”
아무리 목소리를 죽이고 있다고는 해도 그 이상 떠들었다가는 사방에서 돌팔매가 날아올 것 같았다. 여기까지 몰아붙이면 주세영은 더 밀어내지 못하고 타협하려 하겠지. 민폐 끼쳐서 욕먹는 건 죽기보다 싫을 테니까.
“너, 집에 가서 두고 봐.”
나중에 두고 보자는 사람, 겁 하나도 안 나네요. 일단 손잡고 보면 당신도 좋을걸?
결국 주세영은 항복했다. 우리는 팔걸이 아래로 손을 잡고 두 시간가량 영화를 봤다. 여름 시즌을 겨냥한 시원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였다. 쌀쌀할 정도로 에어컨이 빵빵한 덕분에 두 시간 동안 손을 잡고 있어도 땀이 안 났다. 깍지 낀 손 때문에 음료수를 마시는 것도 팝콘을 먹는 것도 조금씩 불편했지만, 그걸 다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내 손에 부드럽게 얽힌 손가락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입가로 가져가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하고 싶은 걸 힘들게 참았다. 거기까지 했다간 집에 가서 진짜 깨질 게 분명했으니까. 내가 그래도 선을 아는 놈이다. 그 선의 바로 코앞까지 질주해서 문제지.
영화가 끝나고 다시 조명이 환하게 밝혀지자마자 주세영은 얼른 손을 빼갔다. 그래도 나는 좋다고 실실거렸다. 자기도 싫진 않았을 거다. 거의 끝부분에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구출해내면서 진하게 키스할 때 내 손을 꽉 붙잡았던 거 난 다 느꼈다.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동안 나는 능청스럽게 영화 얘기를 계속했고 주세영은 단답형으로 대강대강 대답했다. 아마 잔소리를 퍼붓고 싶은데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꾹 눌러 담고 있는 거겠지. 나도 이제 주세영 전문가가 다 된 듯.
역시나. 우리 차가 가까워져 오자 주세영은 걸음을 재촉해 나를 휙 앞질러 갔다. 조수석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내가 차 문을 열길 기다렸다가 문이 부서져라 쾅 닫으며 올라탔다. 아, 이제 내가 운전석에 엉덩이를 들이밀자마자 시작되겠구나.
“우동주, 너 몇 살이냐? 나이 어디로 먹었어? 어?”
“뭐가, 또…. 영화 잘 보고 나와서.”
더위에 약한 그 사람은 화났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재킷부터 벗었고, 나는 시동을 걸고 에어컨 온도부터 낮췄다.
“팔걸이 올리자, 손잡고 보자…. 진짜 네가 스물여덟 맞냐?”
스물여덟 아니라 여든여덟이 돼도 나는 영화관에서 당신하고 손잡고 영화 보고 싶은데?
“허벅지도 좀 더듬으려다 참았는데, 칭찬해줘야지.”
“너, 나 괴롭히는 게 재밌어서 그러지?”
손잡고 영화 보는 게 당신 괴롭히는 거야? 내가 침대에서 당신 괴롭히는 건 조금 즐기지만 다른 때는 당신한테 껌뻑 죽는 놈이라는 거 스스로 잘 아실 텐데 왜 이렇게 열을 내실까. 그만 침착해, 주세영. 화내면 괜히 더 덥다?
타이까지 끌러 뒷좌석 재킷 위에 던져놓고 씩씩대는 주세영을 달래주려고, 입술을 깨물고 분을 식히는 얼굴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이런 일로 이렇게 펄펄 뛰는 당신이 더 애 같은 건 모르나?
“진짜 그렇게 생각해, 당신? 내가 당신 괴롭히려고 손잡았다고?”
안경 코 받침에 눌려 자국이 남은 자리를 엄지로 살살 문지르면서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아, 귀여워. 주세영, 너야말로 몇 살이냐? 부모님이 너 태어나기도 전에 호적 신고 미리 하셔서 나이 뻥튀기된 거 아니야? 너 사실은 나보다 어리지? 형아라고 해봐, 형아. 이렇게 이쁘게 생겨서 나보다 형이래요. 무슨 형아가 이렇게 겁이 많아? 설사 우리가 손잡고 영화 보는 거 누가 봤으면, 뭐 어쩔 건데?
내가 진지하게 나오니까 주세영은 또 주춤한다. 자기가 생각해도 괴롭히려고 손잡았다는 발언은 좀 아니었던 거지.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연속 공격에 들어갔다.
“어차피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 없는데, 손 좀 잡고 영화 보면 뭐 어때서 그래? 우리가 무슨 죄졌어?”
“아니… 우리가 죄짓고 있단 얘기가 아니라… 애도 아니고, 꼭 영화 보러 가서 손잡고 그래야 데이트냐? 너는 진짜….”
그제야 주세영의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졌다. 내 손목을 붙잡고 끌어내리는 손길도 부드러웠다. 나하고는 다른 방식으로 섬세하게 존재하는 사람이니 내 기준에선 이해 안 되는 일로 예민하게 굴 때도 있었지만, 별거 아닌 일엔 이렇게 금방 화를 풀어주기도 했다.
난 우리 조카들이 울면서 떼쓰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데 주세영 달래는 데는 이제 도가 튼 것 같다. 아니, 왠지 처음부터 훤히 알 것 같았지. 이 사람을 언제 잡아당기고 언제 풀어줘야 하는지, 그 리듬이 내 몸의 리듬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세영처럼 섬세한 사람은 풀어줘야 할 때 당겼다간 바로 끈을 놔버리고 도망가버리기 십상이니까.
벌써 저녁 시간인데,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밖은 아직도 대낮처럼 환했다. 역시 해가 길어지긴 했다. 레스토랑을 예약해놓은 호텔로 가는 동안에도 우리의 토론(?)은 계속됐다. ‘허벅지를 쓰다듬겠다는 것도 아니고 키스를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남들 눈 피해서 스킨십 좀 하는 게 어때서 그러냐’라는 우동주와 ‘굳이 가슴 졸여가면서 그럴 필요 뭐 있냐, 집에서 하는 걸로는 부족하냐, 이 짐승아’라는 주세영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에 그랜드 체로키는 한남대교로 들어섰다.
“어? 저기 우리 집!”
“어디?”
열변을 토하다 말고 우리 집 찾겠다고 유리창에 코를 박고 내다보는 주세영이 귀여워서 액셀과 브레이크를 헷갈릴 뻔했다. 진짜 언제 한번 형이라고 불러보라고 해야 될 것 같다. 심각하게 귀여워. 자기가 연상인 걸 과하게 의식해서 내 앞에서 의젓해 보이려고 하는 걸 알아서 더 귀엽단 말이지. 어차피 연인 사이고, 애인 앞에서 좀 흐트러지고 어리광부리는 모습 보인다 해서 그게 흉도 아닌데.
한남대교 오른쪽으로 햇빛을 반사시키며 반짝거리고 있는 우리 집 전면창을 구경한 주세영은, 정지버튼을 눌러놨던 영화를 다시 재생시키는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좀 전에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내가 너무 주세영을 호락호락하게 봤나 보다. 내 눈에 많이 귀여워도 쉬운 사람은 절대 아니긴 하지. 사탕으로 관심을 끌어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우리 조카들하곤 당연히 다른 거다.
근데 주세영 씨, 계속 얘기해봤자 당신이 불리할 텐데. 왜냐면 내 의견이 더 호소력이 짙거든.
왜 우리는 남들 앞에 떳떳하게 연인임을 밝힐 수 없냐며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게 아니다. 그냥 나도 좀 누굴 붙잡고 자랑하고 싶다는 거지.
‘얘가 내 애인이에요, 장난 아니죠? 도도하고 쌀쌀맞아 보이지만 마음은 또 안 그렇답니다. 얼굴도 잘생겼는데 옷도 잘 입어요. 몸도 죽이죠. 잠자리요? 하하, 그런 얘기까지 하긴 좀 쑥스럽지만… 뭐, 그냥 딱 봐도 알겠지 않습니까? 저를 거의 반쯤 죽여놓죠. 하하하….’ 이러고 싶은 건 행복한 연애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당신은 나하고 사랑하는 게 불행해? 아니잖아. 분명히 당신도 누군가에게 날 자랑하고 싶고, 내 소유주가 당신이라는 걸 인정받고 싶을 거야. 그래서 날 잡지에 내보낸 거 아니었어? 그건 별로 대단한 욕구는 아니지만 채워지지 않으면 좀 짜증스럽긴 하거든.
그냥 그 정도다. 남들 앞에서 손 못 잡는 걸로 우리 사랑이 문득 우울하고 슬프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인정받을 수 없다고 해서 우리 둘이서만 쓸쓸하게 왕따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인정? 우리 둘이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고 안 하고가 뭔 상관이야? 애초에 남이 인정하겠다 안 하겠다 할 문제도 아닌 거다.
“나도 사람들이 보는 데서 당신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내 애인이라고 티 내고 싶어. 당신은 안 그래? 그런 생각 정말 요만큼도 없어?”
그 사람이 좋아하는 호텔의, 그 사람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이었고, 어렵게 예약한 디너였다. 하지만 우리는 창밖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한번 해보자, 주세영. 네가 까칠남인가 내가 짐승남인가.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계속 생각해서 뭐 할 건데. 집에서 그만큼 더 붙어 있으면 되잖아.”
거봐, 결국 너도 아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단 얘기는 아닌 거잖아. 요상한 모양으로 유명한 식전빵이 나오고, 계속 이어진 열띤 토론에 허기가 진 우리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바게트를 뜯었다. 버터에 찍어 바게트를 몇 입 우물거리는 동안 굉장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유레카!’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경계심 강한 주세영이 겁먹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별일 아니라는 듯 최대한 덤덤하게 얘기를 꺼냈다.
“그럼 우리… 게이들 다니는 바 같은 데 한번 가볼까?”
“뭐?!”
역시나 주세영은 누가 우리 얘기를 듣기라도 했을까 봐 주변부터 살핀다. 저 경계심 강한 초식남…인 척하는 까칠남.
“거기 가면 우리 둘이서 깍지를 끼고 있든 끌어안고 있든 딥키스를 하든 신경 안 쓸 거 아니야.”
“싫어.”
요상하게 생긴 빵의 꼬투리는 쏙 빼놓고 가운데 부드러운 부분만 두 조각 골라 먹은 주세영은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내가 진짜 콩깍지가 씌긴 했는지 저렇게 깔끔을 떠는데도 꼴불견으로 안 보이고 그냥 다 좋아 죽겠다. 집에선 식탁 의자 위에 올라앉아 책상다리하고 비빔밥 퍼먹으면서. 아, 귀여워.
“왜 싫은데?”
왜냐고 묻긴 했지만 주세영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맨날 농담으로 너 때문에 게이 됐다느니 하지만 아직 자기가 진짜 게이라고는 생각 안 하는 거지. ‘남자’하고 사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우동주’하고 사는 거라고.
주세영 생각도 틀린 건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평생 우리 둘이서만 사랑하면서 살 텐데, 과연 나는 게이인가 아닌가로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하지만 연인으로서의 우리 모습을 자연스럽게 이해해줄 사람도 게이밖에는 없다는 게 안타까운 현실.
우리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곤 박 대리님이 전부인데, 아무리 박 대리님이 우리를 이해해줬다고는 해도 내가 주세영을 찬양하는 것까지 들어주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거기다 우리가 눈앞에서 끌어안고 뽀뽀라도 한다면, 아마 박 대리님은 용량 초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럼 대체 어떡하냐고. 나도 자랑하고 싶어, 팍팍 티 내고 싶다고. 이건 절대로 자연스러운 욕망이야!
“그냥… 그런 데 드나드는 건 기분이 좀….”
하긴 나도 그다지 그 장소가 우리에게 유쾌한 기분을 가져다주리라고는 생각 안 한다. 가본 적은 없어도 나이가 이 정도 되다 보면 주변에서 이렇게 저렇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라 대강은 알고 있었다. 아마 어느 정도는 (악의적으로)부풀려진 소문이겠지만, 거기서는 처음 본 사람들끼리 화장실에서 지퍼 내리고 바로 한다더라, 홍대 클럽 부비부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질척거리면서 춤을 춘다더라, 심지어 일반 남자가 호기심에 갔다가 반 강간을 당했다더라, 라는 둥.
실제로 게이클럽 입구 한 번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까지 끌어오지 않더라도, 한창 남자끼리의 섹스에 대해 열공할 무렵 그런 쪽 사이트에서 알게 된 바로도 그다지 정조 관념이 강하거나 산뜻하게 노는 분들은 아닌 것 같았다. 게이라고 다 그런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태원이나 종로의 클럽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원나잇 상대를 찾거나 하룻밤 익명의 다수와 끈적하게 몸을 비비며 춤추는 걸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라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나는 친구들이 한창 나이트에 재미를 붙여 죽돌이가 됐던 나이에도 부킹조차도 싫어 나이트를 멀리했던 놈이다. 그러니 음흉한 흑심으로 가득 찬 늑대들이 바글거리는 곳에 내 애인을 데리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주세영은 그런 곳에 갔다 하면 적어도 서너 명한테 대시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팔불출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클럽은 좀 그렇고, 조용한 분위기의 바도 몇 개 있다고 하니까, 그냥 그런 데 가서 양주나 한 병 킵해두고 가끔 우리 둘이 가서 기분전환이나 했으면 한 건데, 지금 주세영 반응 봐서는 며칠 설득하는 걸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에스카르고의 알맹이를 빼내 그 사람 접시에 덜어주다가 나는 또 한 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럼, 다른 커플들 한번 만나보자. 우리하고 라이프 스타일도 비슷하고 나잇대도 비슷한 커플 만나서 가끔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럼 좋잖아. 어때? 이건 좀 괜찮지?”
“뭐… 근데, 그런 커플 찾기가 쉽겠냐?”
오, 이건 그렇게 싫지 않나봐? 달팽이를 오물거리면서 시선을 내리깔고 별 흥미 없는 척하고 있었지만 조금쯤은 주세영도 기대되는 눈치였다.
“내가 찾아볼게. 어딘가에 분명 ‘우동주세영’을 기다리고 있는 ‘짬뽕주세영’들이 있을 거야.”
‘짬뽕주세영’에서 주세영은 가드를 내리고 픽 웃었다. 그럼 그 커플은 ‘짬뽕주’하고 ‘주세영’하고 사귀는 거냐며, 한쪽이 자기랑 이름이 똑같아서 싫다고 농담까지 했다. 그제야 나는 메인으로 나온 요리에 식욕이 돋았다.
영화관에서 좀 다퉜던 것을 전부 만회할 만큼 근사한 토요일 저녁을 보냈다. 매일 같은 집에서 얼굴을 보며 지내는데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고, 내 실없는 농담에도 그 사람은 자주 웃었다. 토요일이라 테이블이 거의 꽉 차 주변이 약간 소란스러웠지만 그것마저도 유쾌한 저녁이었다.
주세영은 각종 베리와 라즈베리 셔벗이 담긴 긴 샴페인 글라스에 스파클링 와인을 따라주는 달콤하고 화려한 디저트를 골랐다. 나는 커피를 앞에 놓고 주세영만 쳐다보고 있었다. 목이 긴 우아한 금빛 스푼으로 빨간 라즈베리 셔벗을 떠먹는 주세영을 테이블에 턱을 괴고 구경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랑하고 싶었다.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엔 이 남자의 매력은 너무나 치명적이니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무리 우리의 사랑이 성숙하고 어른스럽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 따윈 불필요하다며 쿨한 척해도, 역시 사람들 틈에 어울려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고, 사귀면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자랑하거나 푸념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건 남녀 커플이냐 남남 커플이냐를 떠나 아주 자연스러운 욕구였다.
그렇게 해서, 남들 앞에서 얘가 내 애인이라고 자랑하고 싶어진 평균 나이 29.5세의 우동주세영은 친분을 쌓을 만한 다른 게이 커플 찾기에 나서게 됐다.
□ ZOO SE YOUNG
“이번이 마지막이야. 오늘도 아니면 나 진짜 다신 안 해.”
“알았어, 알았어. 이번엔 진짜 확실하다니까.”
지난주에 드레시 리버스에 가서 새로 맞춘 얇은 데님 소재의 셔츠 버튼을 잠그면서 우동주가 또 큰소리를 친다. 이전 커플을 만날 때도, 그 이전 커플을 만날 때도 ‘확실’하다며, 불안해하는 나를 설득했던 건 잊었나 보다.
영화를 봤던 그 토요일 이후로 의욕에 가득 찬 우동주는 퇴근 후 노트북에 매달려 눈에 불을 켜고 서핑을 하더니, 드디어 서로 신뢰가 두터운 아름답고 건전한 커플을 찾았다며 그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한 조용한 이자카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우동주와 사귀는 것에 대해 고민은 했어도 이상할 만큼 거부감은 없었는데, 내가 남자와 연애를 하고 다른 게이 커플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왠지 묘한 기분이었다. 3년 사귄 서른한 살 동갑내기 커플이라 나와도 나이가 같아서 대하기 편할 거라고 우동주는 긴장한 나를 다독거렸었다.
한쪽은 미용사고 한쪽은 바텐더라고 소개한 그쪽 커플은 직업의 영향인지 겉모습이 꽤 화려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사귀려고 만난 것도 아닌데 겉모습은 별로 관계없었다. 내가 사귀는 우동주는 그날 완전 내 스타일이었으니까.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나와 달리, 편안하고 호감 가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리드해나가는 모습에 새삼 한 번 더 반했다.
게이 커플이 3년을 사귀는 경우는 드물다며 초반에 자신들의 애정을 과시하던 그쪽 커플은 사케를 두 병 비운 이후부터는 점점 자세가 흐트러지고 말투가 과격해지더니 초면엔 살짝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놓았다.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된 계기라던가, 부모님에게 들켜 집을 나오게 된 일 등을 가벼운 농담거리처럼 툭툭 던져놓은 것까진 좋은데, 나중엔 우리 앞에서 서로를 헐뜯기까지 했다.
3년 사귀는 동안 바람을 몇 번이나 폈는지 모른다는 둥, 자기쯤이나 되니까 사귀어주는 거지 정말 성격이 이상하다는 둥…. 그쯤 되자 안 그래도 불편했던 나는 슬슬 표정 관리가 어려워졌다.
특히 바텐더 쪽이 분위기가 이상했다. “동갑이니까 말 놔도 되지?”라며 왠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본다 싶더니, 세 살이나 어린 애인하고 살려면 피곤하지 않냐며 우동주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사회성이나 사교성, 객관적 스펙은 둘째치고 외모와 됨됨이부터도 우동주가 그 남자보다 못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유치하게 나이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빈정거림도 불쾌했는데,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싸구려 수작을 걸어오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참을성이 바닥났다.
다음엔 둘이서만 따로 만나자며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는 그 바텐더에게 “미안하지만 제가 눈이 높아서요.” 하고 정중하게 한 방 먹여줬다. 번듯한 직업 좀 갖고 있다고 사람 무시하는 거냐며 그놈은 발끈했지만, 직업의 문제도 아니고 연봉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 걸로 사람을 판단할 정도의 속물은 아니다.
우동주 말대로 그저 진지하고 따뜻하게 사랑하는 커플을 만나 좋은 교류를 하고 싶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땐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의지가 돼주기도 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지켜봐 줄 수 있는. 근데 니들은 게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인간으로서 꽝이야.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너 같으면 우동주 같은 애하고 사귀다가 너하고 바람피우고 싶겠냐?
테이블로 돌아오자마자 집에 가자고 우동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처음엔 왜 이러나 싶은 표정으로 주춤거리던 우동주도 내가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대강 자리를 마무리하고 나를 따라 일어섰다. 더 열 받는 건 그날 계산을 전부 우동주가 했다는 거다. 그놈들한테 뭘 얻어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밖으로 나온 뒤에야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 우동주에게 바텐더 쪽이 껄떡거렸다고 했더니, 그 자식 목을 따버리겠다며 펄펄 뛰는 바람에 억지로 끌고 오느라 힘들었다.
그날 미팅은 완전히 실패였다. 우동주가 얼마나 멋진 놈인지를 또 한 번 깨닫게 됐다는 것밖엔 건질 게 없었다. 시간 낭비, 돈 낭비, 감정 낭비.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영업맨 우동주는 그러고 난 뒤에도 서핑을 다시 시작해 새로운 커플을 물색했다. 이번엔 7년이나 사귄 커플이라며 블로그 주소가 올라와 있길래 거기도 찾아가 봤는데, 아직까지도 깨가 쏟아지더라며 우리보다 더한 닭살 커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도 호기심에 이런저런 사이트들의 분위기를 살펴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게이 커플이 7년을 사귄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커플이 서로 다정하게 사랑하더라도 우리하고 안 맞을 수도 있는 거니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미팅도 실패였다. 서른 살 동갑내기 커플이라는 그들은 알고 보니 7년 동안 헤어지고 다시 합치기를 계속 반복해 실제로 사귄 기간은 다 합해봐야 3년 정도였다. 사귄 기간으로 사랑의 깊이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지만(그렇게 치자면 아직 1년도 안 된 우리 사랑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연애에 불과하므로),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이어온 그들의 사랑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특히나 게이이기 때문에, 게이도 남자이기 때문에, 사랑과 섹스가 가끔은 별개일 수 있다는 그 커플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이별을 반복했다면서도, 두 사람 모두 마치 그것이 게이의 숙명이라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건 너뿐이지만 섹시한 남자를 보면 같이 자고 싶은 건 별개의 얘기야, 라니. 그게 정말 어쩔 수 없는 부분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게이이고 남자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인격 문제인 것 같은데.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고민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 게이 사회에 쭉 몸담고 살아온 그들과, 스트레이트로 살다가 같은 스트레이트인 남자와 사랑을 하게 된 우리는 서로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알겠다. 아직 나는 내가 게이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고, 우동주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부분은 아마 우동주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만약 우동주가 내가 아닌 남자와 혹은 여자와 잠자리를 하고 온다면 나는 같은 남자라 그게 뭔지 안다며 이해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일로 우동주에게 상처를 주거나 내가 사랑하는 우동주를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그 부분에서 의견 일치를 본 그 커플은 어떤 의미로는 천생연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랑과 섹스는 별개로 작용할 때가 있다던 그 커플의 바텀 쪽은(바텀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알고 그 말을 사용하게 되다니, 한결 게이에 가까워진 느낌이군) 꽤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게이스러운?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꺾은 채 시종일관 우동주에게 눈웃음을 보내는 모습이 매우 신경에 거슬렸다.
“동주 씨 같은 남자를 어떻게 잡았어요? 얼굴이며 몸매며 매너며 정말 빠지는 데가 없다. 아까 보니까 차도 엄청 좋던데, 동주 씨 게이클럽 가면 애들 진짜 옷 벗고 달려들겠다, 그치 자기야?” 라며 자신의 연인 앞에서 노골적으로 우동주를 치켜세웠다.
남자가 목소리에 비음을 섞어가며 우동주를 유혹하는 걸 눈앞에서 보는 기분은… 질투 나고 불쾌하기 이전에 참 색달랐다. 우동주와 둘이 있을 땐 딱히 ‘아, 우리가 남자끼리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자각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다른 게이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수록 그게 점점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울해졌다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다른 커플 만나서 우리 연애 자랑 좀 하려다가 애한테 나쁜 물이 드는 건 아닌지 좀 걱정이 됐다. 게이클럽이라니, 옷을 벗고 덤빈다니?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닌데 열 받을 것 같았다.
1차 자리만 대강 끝내고 그 커플과도 헤어졌다. “걔가 너 좋다고 하니까 신나던? 인기 많을 거라고 하니까 게이 클럽 가보고 싶어졌어?” 라며 죄 없는 우동주만 나에게 시달려야 했다.
지난번에 그 바텐더가 나에게 집적댔을 때 우동주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하니, 평생 우리 둘이서만 지내도 되니까 다른 커플은 이제 그만 만나보고 싶어졌다. 한 번만 더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가는, 나도 남자와 사귀고 있으면서도 게이에 대한 편견이 생길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한동안 또 만나보자는 얘기를 안 꺼내길래 이제 포기했나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3일 동안 졸라댄 바람에 할 수 없이 지금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포기를 모르는 우동주, 과연 엔 소프트의 꿈나무답다.
“나한테든 너한테든 집적거리면 이번엔 진짜 바로 나와버릴 거야.”
“그런 일 없을 거야. 이번엔 내가 두 사람하고 통화까지 다 해봤다고. 느낌이 좋아.”
우동주는 자신만만해하지만 나는 별로 기대 안 한다. 첫 번째 때도 두 번째 때도 큰소리 뻥뻥 쳤던 놈이니까. 이젠 그냥 우리 둘이 데이트하러 나간다는 마음으로 즐길 생각이다. 계절에 맞게 리넨 팬츠에 얇은 데님 셔츠를 입고 마지막으로 왼쪽 손목에 시계 밴드를 감으면서 나를 보고 웃는 우동주와 토요일 저녁에 함께 외출하는 것만큼은 어쨌든 즐거운 일이니까.
“이번엔 게이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커플이 아니야.”
시동을 걸면서 우동주는 오늘 만날 커플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게이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는 모든 게이들을 비난하려는 생각은 아니지만 그곳의 대체적인 분위기가 건전하고 산뜻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나도 몇 번 들어가 보긴 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해서 아예 발길을 끊었다.
‘애인이 생겼어요, 축하해 주세요. 드디어 제 짝을 만난 것 같아요. 자기야, 이 글 보고 있지? 사랑해.’라는 글을 올린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알고 보니 미친놈이더라구요. 헤어졌어요. 아, 어디 멋있는 남자 없나? 외롭다.’라는 글이 올라오는 걸 보고는 씁쓸함을 지나 허탈해졌었다.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
“블로그에서 덧글 같은 걸로 타고 가고 타고 가고 하다가 우연히 포스팅을 보게 됐거든.”
중간중간 맞춤법도 틀리고 글 솜씨가 좋지도 않았지만, 진솔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진심을 써 내려간 그 포스팅에 우동주는 감동했다고 한다.
줄거리만 듣자면 흔한 얘기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뒤 방황하면서 되는대로 인생을 살던 한 청년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이후로 꿈도 찾게 되고 미래도 생각하게 되어 자신의 연인에게 감사하는 글. 그 포스팅에는 몇 개인가 지인들의 시샘 어린 덧글이 달려 있었지만 연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덧글은 없었단다.
그 외에 내가 우동주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공개되어 있는 몇 개 안 되는 포스팅은 대부분 한두 줄짜리의 짤막한 일기 형식으로 대부분 커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블로그를 다 뒤져도 연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그 감동적인 포스팅도 연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자기 고백이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 ―당신이 보지 못해도 좋아, 어딘가에 지금 내 이런 마음을 기록해두고 싶을 뿐. 이런 거라나 뭐라나. 꿈보다 해몽이 더 좋았다.
“네가 무슨 스토커냐? 블로그를 다 뒤지고 다니게.”
“그래도 또 실패하지 않으려면 신중해야지.”
“아, 난 이제 모르겠다…. 진짜 이렇게까지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꼭 만나야 되는 건지.”
여름은 어느새 제법 무르익어 낮에는 30도 가까이 기온이 올라가곤 했지만, 저녁이 되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다. 예전엔 아무리 해가 진 뒤여도 자동차 창문을 꼭꼭 닫고 에어컨을 켰었는데.
“어딘가에 분명히 좋은 사람들이 있을 거야. 지금이야 우리도 젊고 사귄 지도 얼마 안 돼서 둘만 있어도 뭐든 될 것 같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응원군이 있는 게 좋지. 인생은 혼자서는 안 되는 거랍니다.”
현란한 간판을 내건 유흥가를 벗어나 한산한 골목으로 차를 몰고 들어간 우동주는 얼핏 봐서는 가정집처럼 보이는 야트막한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 앞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어디선가 노련해 보이는 인상의 아저씨가 나타나 주차할 자리를 안내해줬다.
“네, 그러세요? 전 아직 어려서 인생을 잘 모르겠네요.”
나는 심드렁하게 받아치면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러지 말고 스마일 해봐요, 스마일. 오늘 옷도 이쁜데. 응? 게다가 당신이 좋아하는 참치야, 오늘은.”
“몰라, 아무튼 아니다 싶으면 난 바로 집에 갈 거니까 그렇게만 알아.”
잘 정돈된 아담한 뜰이 딸린 정갈한 느낌의 일식 레스토랑이었다. 너무 캐주얼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격식이 갖춰진 느낌이라 오늘 같은 자리에 알맞았다. 평소에 이런 데 좀 데리고 와보시지. 사실은 평소에도 좋은 곳 많이 다니지만 두 번의 앞선 실패에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죄 없는 우동주에게 속으로나마 툴툴거리는 것으로 세 번째 도전에 대한 불안함을 표시했다.
“아, 한 분은 서른다섯 살 형님이시고, 다른 쪽은 스물여섯 살이야.”
“나이 차이가 꽤 나네.”
아홉 살 연하의 남자와 사귀는 서른다섯 살 남자라니, 말만 들어서는 왠지 위험한 냄새가 난다. 스물여섯 살이면 어린애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거 다 아는 능글맞은 아저씨가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꼬셔서 밤마다 나쁜 짓을 가르치는 이미지가 연상됐다. 말만 들어서는 그런 느낌이었다는 얘기다.
“어, 스물여섯 쪽은 조금 늦는대. 알바가 8시에 끝나서.”
“하하, 알바라니. 진짜 상큼하네.”
은은한 조명의 일본식 등이 매달린 입구를 향해 잔디 사이로 난 자갈길을 걸었다. 제법 여름밤다운 정취가 있었다. 이런 날 이런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그냥 단둘이 데이트하면 안 되는 건가? 아르바이트하는 스물여섯 살하고 무슨 말을 하면 되는 건지 영 자신 없는데.
“근데, 그 스물여섯 살 이름이 뭔지 알아?”
우동주는 입구에 들어가기 전 내 어깨에 가볍게 팔을 걸치더니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해주려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대답 없이 표정으로 되물었다. 뭔데?
“세영, 안세영.”
“뭐, 진짜?”
“어, 운명이 느껴지지 않아?”
느껴진다, 느껴져. 불길한 운명이….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스물여섯 살 게이 청년이라니, 이젠 불안함을 넘어서서 호기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약속 시간 15분 전이라 우리가 먼저 도착했을 줄 알았는데, 입구 카운터에서 우동주의 이름을 대자, 일행분이 기다리고 계시다며 단정한 유니폼 차림의 직원이 안쪽 룸으로 안내해줬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다니 일단 스타트는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서른다섯 살이라고 해서 배 나오고 능글맞은 우리 회사 과장님, 팀장님들을 떠올렸는데,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에 매너가 좋을 것 같은 분이었다. 일단, 젊은 게이 청년을 꼬셔서 조련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하긴. 서른다섯이면 나하고 네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요즘 세상에 벌써 아저씨처럼 보일 나이는 아니긴 했다. 거기다 게이들은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하더니 그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인 듯, 실제 나이보다도 더 젊어 보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명함을 건네줘서 놀랐다.
어디 보자, 이름은 김상진. 정형외과 전문의?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막 공개해도 되나? 다른 커플들은 자신의 직업은 쉽게 밝혀도 상세한 개인 정보는 공개하길 꺼려했었기 때문에 의외이면서도 믿음이 갔다. 오늘 만남에 어느 정도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서. 물론 우리도 명함을 드렸다.
“어? 성함이….”
내 명함을 보고 나를 한 번 쳐다본 의사 선생님은 자기 연인과 이름이 같다니 인연인 것 같다며 반가워했다. 8시에 알바가 끝나는 스물여섯 살 젊은 애인을 ‘거느린’ 권위적인 의사 선생님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어느 정도 걷히는 것도 같았다.
“세영이한테 처음 얘기 듣고는 조금 놀랐었어요. 사귄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저한테 뭔가를 부탁하기는 처음이었거든요. 워낙 조용한 애라. 그래서 동주 씨하고 세영 씨 커플을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땐 엄청 기쁘더라구요. 하하, 팔불출 같죠?”
의사 선생님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팔불출은요, 전 마음속으로 더해요. 제 옆에 앉아 있는 이놈이 서울 최고의 남자라고 믿고 사는데요, 뭐.
“아닙니다. 보기 좋은데요. 사귄 지 얼마나 되셨어요? 저희도 사실 3월부터 사귄 거라 얼마 안 됐거든요.”
낯가리는 서른한 살 주세영 대신 타고난 영업 체질의 우동주가 의사 선생님의 대화 상대가 되었다. 나는 엽차를 홀짝이면서 중간중간 맞장구를 치는 정도였다. 하지만 좋은 분위기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 특유의 적절한 긴장감과,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잘 통하는 면이 있는 사람들 특유의 편안함이 공존했다.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어색한 침묵도 억지스러운 친절도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아무래도 스물여섯 살 세영 군(아, 기분 묘하다)에게 푹 빠지신 모양으로, 혹시 찾아오는 동안 길을 헤매지는 않을까 계속 걱정하는 눈치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도 하겠지. 상대가 이 자리에 없는데도 그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니까.
사귄 지는 얼마 안 됐어도 진지하게 교제를 하고 있는 커플인 것 같아 어느 정도 경계를 풀었다. 아니, 어쩌면 상당 부분. 적어도 우리 앞에서 서로를 헐뜯거나 우리 둘 중 누군가를 유혹할 일은 없어 보였다.
8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스물여섯의 세영 군은 예상과 달리 그다지 상큼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키는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마른 체격이라 그런지 나보다 좀 더 커 보였다. 게이가 된 후로 꽤 방황했다고 하기도 했고, 또 나이도 어리다 보니까 화려한 차림을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옷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인 듯 무늬 없는 검은 티셔츠에 오래 입어 길이 잘 든 스키니한 블랙진을 입고 나타났다. 말랐어도 근육이 탄탄하게 붙어 옷태도 나쁘지 않았고 허약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강단 있어 보이는 편이었다. 그리고 무뚝뚝했다.
“안녕하세요, 안세영입니다.”
택배 배달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왔을 것 같은 분위기의 세영 군은 우리 쪽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얼른 의사 선생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낮고 허스키한 인상적인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아르바이트가 8시에 끝나서….”
“괜찮아요, 미리 말해줬던 건데요, 뭐. 일하고 왔으면 배고플 텐데 회 말고 식사라도 따로 주문할까요?”
물어본 건 우동주인데 세영 군은 자기 애인을 쳐다봤다. 날카로운 얼굴선에 쌍꺼풀 없이 긴 눈매와 꾹 다문 입술이 그다지 의존적일 것 같은 인상은 아닌데, 정말 의사 선생님 말대로 낯가림이 심하고 조용한 성격인 모양이다. 나도 낯가림이 심해서인지, 아니면 세영 군이 오기 전에 의사 선생님이 쌓아놓은 좋은 인상 때문인지, 그런 모습도 딱히 예의 없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른들 사이에 불려와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애 같아서 약간 측은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배고파? 뭐 먹을래? 괜찮아, 얘기해봐.”
의사 선생님은 다리 뒤에 숨은 외아들을 보는 것 같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세영 군을 쳐다보면서 사근사근 달래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이거 그냥 같이 먹을게요.”
얼핏 사나워 보이기까지 했던 스물여섯의 청춘은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면서 웃을 때만큼은 그 나이 또래처럼, 아니 또래보다 더 어리고 천진해 보여서 조금 놀랐다. 길 가다 부딪치면 낮게 욕설을 뱉을 것 같았던 입술로 그런 파스텔 톤의 미소라니,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약간 서툴고 다듬어지지 않은 면이 있어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솔직하고 담백한 청년이었다. 원래 그런 건지 의사 선생님을 만나 달라진 건지 몰라도. 고독하게 지내다 연인을 만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사람으로서 약간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 반전 미소에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첫 만남은… 그다지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원나잇 상대였어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첫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오 마이 갓. 원나잇이라니. 설마 형님도 ‘사랑과 섹스는 따로따로’라는 프리한 사상의 소유자는 아니시겠죠? 제발 아니시기를 빕니다.
의사 선생님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세영 군을 쳐다봤다. 세영군도 그때가 생각났는지 마주 웃으면서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볼수록 귀엽다. 낯은 가리지만 까탈스러운 건 아니어서, 가리는 것도 없이 밥도 어찌나 잘 먹는지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랬다간 털을 곤두세우고 경계할 것 같았지만.
“저도 나이가 있고 하니까 솔로로 혼자 지내다 보면 몸도 외롭고 마음도 외롭고, 그래서 가끔 파트너를 찾으러 클럽 같은 데 가기도 했는데… 거의 젊은 애들 물주 노릇이죠, 하하. 근데 그날은… 이놈이 절 유혹해오더라구요.”
의사 선생님이 옆에 앉은 세영 군의 머리를 마구 흩트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의사 선생님의 손길에는 털을 세우지 않았다.
“내, 내가 언제요? 형이 먼저… 계속 봤잖아요.”
우와, 얘 진짜 반칙이다. 까칠하게 생긴 얼굴로 저렇게 부끄러움을 타네. 나이 때문인지 타고난 건지, 매끈하고 창백한 피부를 붉게 물들이면서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쥔 손등으로 또 입가를 가렸다. 버릇인가 보다. 거칠 것 없이 살아온 분위기가 풍기면서도, 눈매나 입매, 목덜미 같은 부분에서 문득문득 묘한 색기가 느껴졌다. 의사 선생님 좀 불안하시겠는데?
“평소처럼 하룻밤 지낼 생각으로 같이 호텔에 갔다가 일어났는데 아침에 옆에 잠들어 있는 이놈 얼굴이 너무 귀여워 보이는 겁니다. 이대로 헤어지면 안 되겠구나 싶었죠.”
자고 있는 얼굴이 귀여워 보이는 것. 그건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생김새와는 관련이 없다. 지금 내 옆에 앉아 내 몫까지 열심히 의사 선생님을 상대하고 있는 이 덩치 커다란 놈의 자는 얼굴도 내 눈에는 귀여워 보이니까.
의사 선생님은 아마 이전에도 문란한 관계를 즐기진 않았을 거다. 게이들의 사정이란 확실히 일반인과는 다른 부분이 있고, 제대로 된 연인을 만들 기회도 그만큼 적다 보니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면이 많아 외로웠겠지. 그건 연인이 아닌 상대를 향한 성욕이나 바람기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자신들의 문란함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달랐다.
어쩌다 한 번씩, 육체적인 외로움이나마 잠시 달래줄 파트너를 찾았을 테고, 그러다 만난 게 방황하던 청년 세영 군이고, 이제 두 사람은 채워지지 않던 빈 공간에 서로로 인해 서서히 충만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은 달랐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 선생님이 첫 만남을 회상하는 동안 세영 군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푹 숙인 채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얼핏 보면 화가 난 것 같지만 나도 감정 표현에 서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저 부끄러워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르바이트를 하는 스물여섯 살과는 절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았는데 왠지 세영 군과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세영 씨는 카페에서 알바하시죠?”
우동주가 붙임성 없는 수컷 길고양이에게 겁 없이 말을 붙였다.
“아, 네….”
하지만 대답은 그걸로 끝. 세영 군은 아무래도 자신에게로 대화가 집중되는 게 부담스러운가 보다. 털털하고 수수해 보이다가도 순간순간 섹시하고, 개념 없이 제멋대로 날뛸 것 같은데 부끄러움을 탄다.
“블로그 보니까 커피에 관심이 많아 보이시던데, 바리스타가 꿈이세요?”
“아니요…. 바리스타까지는….”
포기를 모르는 영업부 꿈나무 우동주가 계속해서 말을 붙이자, 세영 군은 자기를 좀 구해달라는 표정으로 의사 선생님을 쳐다보면서 옆구리를 찌른다. 저러면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넣어 번쩍 안아 올려주고 싶어질 것 같다. 그러기엔 사이즈가 좀 크긴 하지만.
“저하고 만난 뒤로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거기서 커피 만드는 법을 조금씩 배우더니 관심을 보이더라구요. 덕분에 요즘 제가 실험대상입니다, 하하.”
의사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으로 세영 군의 SOS 사인을 받아들였다. 말은 실험대상이라 괴롭다는 듯하지만, ‘널 위해서라면 하루에 백 잔이라도 마셔주겠어!’라는 뉘앙스다. 말끝마다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모르시네. 세영 군을 보고 있으니 의사 선생님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뭐예요, 맛있다고 했으면서….”
터프한 부끄럼쟁이 세영 군은 또 입가를 문지르면서 어깨로 의사 선생님을 툭 밀쳤다. 그러고는 부끄러움이 최고치에 이르렀는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두 분은 같이 사신다니까 부럽네요. 저도 얼른 같이 살았으면 싶은데 동거 얘기만 나오면 세영이가 말을 돌려서요. 이 나이에 젊은 애한테 집착하는 거 추해 보이겠지만, 전 정말 세영이 놓치고 나면 이런 사랑은 다시 안 올 것 같아서 필사적이거든요.”
세영 군이 있는 자리에서는 사랑에 푹 빠져 마냥 행복하기만 한 얼굴이었던 의사 선생님은, 그가 없는 곳에서는 약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 이 커플… 세영 군에게는 동질감 느끼고 의사 선생님 말에는 공감하고…. 이번을 놓치고 나면 이번 같은 다음은 없을 것 같은 필사적인 감정. 서른한 살에 늦되게 그 감정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나보다 더 늦되게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언제 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단히 붙잡을 수 있는 각오가 돼있는지가 중요한 거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요. 그리고 세영 씨도 형님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두 살 차이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긴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게 진짜 귀엽네요.”
세영 군이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걸 굳이 내 앞에서 말로 하는 매너는 어디서 배웠냐, 우동주. 테이블 아래로 종아리를 툭 찼더니, “왜? 참치 더 줄까?” 라며 내 접시에 대뱃살을 덜어준다. 능구렁이 같은 놈.
“그래 보이나요? 하하…. 외롭게 지내온 녀석이라 제 입장에선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 게 많은데 아직은 잘 받아주질 않네요. 커피를 배우고 싶다고 하길래 그럼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점이라도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가 한소리 들었습니다. 자기하고 원조교제 할 거냐면서…. 마음이 급해서인지 자꾸 세영일 구속하려 하는 것 같고…. 좋아하는 만큼 참 어렵네요.”
사랑이 어려운 건 꼭 나이차 나는 커플뿐만이 아니라 다 마찬가지 아닐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가끔씩 방법은 틀릴 수 있어도 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만 진실하다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그곳에서는 두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세영 군에게 뭐든 해주고 싶은 의사 선생님의 마음도, 그걸 넙죽넙죽 받을 수만은 없는 세영 군의 마음도 양쪽 다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세영 씨도 아마 형님의 그런 마음 충분히 느끼고 있을 겁니다.”
우동주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의사 선생님은 아마 우동주가 읽은 그 블로그 포스팅을 보지 못했을 거다. 세영 군은 당분간 그걸 보여줄 생각이 없을 테고. 하지만 세영 군은 자기 나름대로 굳은 결심과 각오로 이 사랑을 지켜나갈 힘을 다지고 있겠지. 만난 지 얼마 안 됐어도 왠지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연애감정은 당사자들보다 주변에서 볼 때 더 잘 보이기도 하는 거니까.
즐거운 저녁이었다. 비록 주세영과 안세영은 들러리처럼 앉아서 술만 마시고 대부분의 대화는 의사 선생님과 우동주 둘이서 나누긴 했지만, 주세영도 안세영도 그 자리가 지루하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그냥 느낄 수 있었다. 말이 없는 얇은 입술과 가끔씩 입을 열면 나직하게 울리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와 가식이 없는 몸짓이 좋았다. 그리고 가끔씩 의사 선생님에게만 보여주는 파스텔 톤의 미소에 내가 다 흐뭇했고.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뵙고 싶네요.”
“저희도 즐거웠어요. 형님이 시간만 되시면 자주 뵙고 싶습니다.”
두 커플은 대리운전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정원에서 인사를 나눴다. 세영 군은 또 말없이 허리만 꾸벅 숙여 보였다. 이대로 헤어지기가 뭔가 아쉬웠다. 타인의 연애와 사랑이 이렇게 내 마음속에 직접적으로 와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내 사랑이 소중하니 남의 사랑도 그렇게 보이는 건지 모른다.
“세영 씨, 반가웠어요. 세영 씨가 만들어주는 커피, 나도 꼭 마셔보고 싶네요.”
우동주가 나를 달라지게 했다거나, 의사 선생님이 세영 군을 변화시킬 거라든가, 그런 일방통행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진실한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이끌어준다. 내 발언에 우동주도 의사 선생님도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안세영은 별로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 우린 꽤 잘 통할 것 같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세영 군은 거의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따뜻하게 지켜봐 주고 싶은 청년이었다. 우리의 러브스토리만이 아니라 그들의 러브스토리도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라는 착한 마음이 생겼다.
■
그 이후로 우리는 ‘상세 커플’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짬뽕주세영이라 할 순 없으니 김상진의 ‘상’과 안세영의 ‘세’를 따서 우리끼리 커플명을 붙였다.
가끔씩 세영 군이 일하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넷이서 같이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도 있다. 세영 군은 처음보다 낯가림이 줄었고, 의사 선생님의 호칭은 형님으로 통일됐다. 나중에 더 가까워지면 자연스럽게 상진이 형이 되겠지만, 아직 친해지는 중이라 우동주도 나도 이 나이에 형, 형, 하기엔 조금 그랬다.
우동주의 말대로, 막상 마음이 잘 맞는 커플을 만나고 나니, 둘이서 노는 것도 좋았지만 넷이 몰려다니는 것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둘이서만 다닐 때는 주변 눈치가 많이 보였는데 이상하게 넷이 다니니까 오히려 대담해져서, 우동주가 내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줘도 머리를 만지거나 다리가 스칠 정도로 가까이 앉아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보다는 즐거운 모임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다 우리만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도 했고.
처음에 세영 군이 일하는 카페에 가보자는 얘기를 꺼낸 것도 나였다. 학동사거리 근처 깊은 안쪽 골목에 있는 고풍스러운 카페였다. 요즘 카페들이 대부분 아기자기하고 빈티지한 인테리어에 오픈된 분위기인 것에 비해 차분하고 묵직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연령대도 30대 이상이 대부분이라 퇴근하고 온 직장인 티가 팍팍 나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적었다.
허리부터 시작되는 길고 검은 에이프런을 두르고 검은 셔츠를 입은 세영 군이 스틸 주전자를 냅킨으로 감싸 쥐고 소리 없이 우아하게 글라스에 물을 채워주었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태도가 사석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미리 연락을 하고 가기는 했지만 우리를 보면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반가워하는 눈치여서 괜히 뿌듯했다. 처음으로 알바하는 아들이 궁금해서 탐방하러 나온 호들갑스러운 부모가 된 것 같기도 했고.
“저렇게 하고 있으니까 확실히 눈에 띄긴 한다, 그치?”
세영 군은 서빙 알바라 원래는 자신이 만든 커피를 손님에게 낼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특별히 세영 군이 만든 커피로 부탁했다. 날씬한 허리를 끈으로 꽉 조인 세영 군의 뒷모습은, 과연 알바생을 외모로 뽑는다는 이 청담동 거리에서도 주목받을 만했다.
“당신, 세영 씨한테 엄청 우호적인 거 알아?”
테이블 위에 팔짱을 걸친 우동주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내가 세영 군을 좀 귀여워하는 건 사실이지만, 내 타입은 호리호리한 꽃미남보다는 이국적인 얼굴에 크고 두꺼운 근육을 가진 놈이라서 말이지. 하지만 그걸 말로 해주긴 싫다.
“네가 친하게 지내자며.”
“그건 그런데, 필요 이상으로 너무 관심이 많다는 거지.”
“너야말로 세영 씨라고 부르는 거 엄청 거슬리거든?”
평균 나이 29.5세의 커플이 자기를 사이에 두고 유치한 질투로 투닥거린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세영 군은 맛이 어떨지 모르겠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 테이블에 커피를 내왔다. 많을 때는 하루에 대여섯 잔씩 마시면서도 그다지 커피에 조예가 깊다거나 그런 편은 아니라 전문적인 평가는 무리였지만, 따뜻하고 솔직한 맛이 났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우동주 말대로 내가 세영 군에게 우호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내려주는 게 더 맛있지? 어?”
질투심에 휩싸인 우동주는 내 무릎 사이에 슬쩍 다리를 얽고 툭툭 건드리며 대답을 추궁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세영 군이 아무리 귀여워도 남의 집 자식이고, 넌 우리 집 자식인데. 하지만 질투로 안달 난 우동주가 고소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대답을 얼버무리면서 좀 더 애를 태웠다.
그렇게 카페에서 퇴근 후 시간을 보내다 의사 선생님이 병원 문을 닫고 오면 다 같이 자리를 옮겨 가볍게 술 한 잔씩 걸치고 헤어지곤 했다.
친해지고 나니 세영 군은 의외로 애교가 있는 편이었다. 우리한테 말고 형님에게. 말수는 여전히 적었지만, 미소가 늘었고 무뚝뚝함은 줄었다. 무엇보다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남남 커플인 우리들은 독립적인 공간이 준비된 곳들 위주로 더블 데이트를 즐겼기 때문에 주변 시선을 크게 의식할 필요는 없었지만, 아무리 상세 커플 앞이라 해도 둘이 있을 때처럼 우동주를 대할 수 없는 목석 같은 나에겐 작은 충격이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대담한 스킨십은 아니었지만, 메뉴를 고를 때 메뉴판을 쥔 형님의 손을 살짝 감싸면서 어깨에 턱을 올리거나 화장실을 다녀올 때 어깨를 짚거나 하는, 사소한 것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술이 들어가 기분이 업되면 대리운전기사를 기다리는 동안 형님의 등에 매달릴 때도 있었다. 키도 훤칠한 다 큰 녀석이 응석을 부리는데도 꼴사납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우동주가 손만 잡으려고 해도 펄쩍 뛰었던 나인데, 이제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 맞은편에서 다정하게 붙어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히 나도 우동주를 만지고 싶어졌다. 나도 버젓이 잘나고 다정한 연인이 옆에 있는데 왜 만지고 싶지 않겠는가.
만약 우동주가 이런 효과를 노리고 다른 커플을 만나자고 한 거였다면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대하는 태도도,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도, 조금은 시야가 넓어졌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상세 커플을 집으로 초대했다.
여름도 무르익었고, 안 그래도 테라스에서 바비큐 파티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둘이서만 하자니 조금 썰렁할 것 같기도 해서 고민 중이었는데. 지금쯤이면 서로 집을 오갈 정도로 적절히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해서 형님께 먼저 얘기를 꺼냈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바비큐 파티라고는 해도 그냥 굽기만 해서 먹으면 되는 거니까 별로 준비할 것도 없다고, 상세 커플에게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막상 준비에 들어가려고 하니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일엔 대부분 저녁을 회사나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는 데다가 주말에는 데이트 핑계 삼아 외식으로 때우거나 배달해 먹는, 요리에 별로 취미가 없는 둘이서 저녁 초대를 준비하려니 꽤 일이었다. 인터넷 검색까지 해가면서 둘이 장 볼 항목을 정하고, 마트에도 다녀오고, 어제부터 아주 바빴다.
토요일 아침엔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 안에서 한참 노닥거리는 게 일상이었는데 오늘은 그것도 패스했다. 창고에서 접이식 식탁을 꺼내 테라스에 내놓고, 오랫동안 쓰지 않아 먼지가 앉은 그릴도 손질했다. 곁들일 야채도 씻어서 준비하고, 같이 구워 먹을 옥수수와 감자, 고구마도 먹기 좋게 썰었다. 둘이 지내기엔 항상 휑했던 주방과 다이닝룸이 갖가지 재료들로 넘쳐서 명절 같은 분위기였다.
낮 동안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을 때쯤 상세 커플이 도착했다. 현관에 나란히 서서 손님맞이를 하고 있으려니 우리가 정말 커플이구나 싶은 실감이 들었다. 우동주와 내가 커플로서 처음 치르는 손님이었다. 초대할 때만 해도 그저 밥 한 끼 대접하자는 생각이었는데, 기분이 좀 묘했다.
“차 많이 밀리죠?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야아… 둘이 좋은 데 사는구나? 집 자랑하려고 부른 거였어.”
형님은 와인을, 세영 군은 일하는 카페에서 판매하는 커피 원두를 선물로 가져왔다. 신혼집 집들이하는 것 같아서 어째 좀 간질간질했다.
“준비하느라 힘들었지? 몸만 와서 먹기만 하려니 좀 미안하네.”
“그럼 다음에 형님 댁으로도 한번 불러주세요.”
“언제든 좋지. 뭐 도와줄 건 없어?”
“아침부터 한다고 했는데, 둘 다 손에 익지가 않아서 그런지 아직도 준비가 안 끝났어요. 도와주실 거 많습니다. 당신은 세영이하고 고기 좀 구워줄래요? 준비 마무린 내가 할게.”
우동주는 형님과 함께 주방으로, 나는 간단히 집을 안내해준 다음 세영 군과 테라스로 나갔다. 이젠 둘만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친했다. 가끔씩 서로 메시지도 주고받는다. 안 그래도 낯가리는 성격에 형님은 연상이라 아직도 조금 어려웠지만, 세영 군하고 있으면 둘 다 말은 별로 없어도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아마 성격이 서로 비슷한 면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넉살 좋고 사교적인 건 우동주인데도 나를 더 따르는 걸 보면 세영 군도 나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우동주는 우리에게 고기를 굽고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숯에 불을 붙여본 적이 없는, 소위 서울 촌놈이었다. 무엇으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기구만 살펴보고 있으려니까 “제가 한번 해볼까요?”라며 세영 군이 나섰다. 공기가 잘 통하도록 숯을 쌓더니 토치로 한 번에 불을 붙였다. 숯에 불붙이느라 목장갑을 낀 김에 세영 군은 그릴 위에 고기를 올려 굽기 시작했다. 자연히 나는 조수 역할을 맡게 됐다.
“집이 진짜 좋네요. 경치도 좋고…. 형들은 능력이 좋은가 봐요.”
비록 양념 다 해서 파는 거지만 등갈비도 있고, 목살에 등심 스테이크에, 뭉툭한 손으로 우동주가 어설프게 칼집을 내놓은 수제 소시지, 대하까지 갖춰 바비큐 재료가 푸짐했다.
“능력은 무슨…. 그래봤자 우동주가 아버지한테 받은 거야. 현실은 둘 다 월급쟁이지. 맥주 마실래? 시원한데.”
더 친해지는 사이 나와 우동주는 세영 군에게 말을 놓게 됐고, 세영 군도 우리를 형이라고 부르게 됐는데, 동생이 없어서 그런지 형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떡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네, 한 병 주세요.”
미리 테라스에 내놓은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꺼내 뚜껑을 열어 건네줬다. 그릴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우리는 한 손엔 집게, 한 손엔 맥주병을 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사이좋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저녁 강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다른 집들에서 고기 냄새 맡고 꽤나 괴로울 것 같았다.
“근데, 형… 같이 살면 좋아요? 서로 깨거나 그런 부분 없어요?”
알바하는 곳에서 친해진 사람들 얘기, 그 사람들한테 형님이 가끔 질투한다는 얘기 등을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조근조근하게 들려주던 세영 군은 조심스럽게 동거에 대한 얘기를 꺼내왔다. 세영 군도 드디어 형님과의 동거를 고려하게 된 것 같았다.
나도 우동주에게 동거를 거부했던 사람으로서 동거는 절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주의였지만, 한 달 정도 이 커플을 지켜 본 바로는 지금이 딱 적기였다. 노멀이었더라도 형님 나이면 결혼을 해서 안정을 찾고 싶어 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때였고, 세영 군도 나에게 이런 상담을 할 정도면 마음은 이미 기울었는데 혹시 동거를 했다가 자신에게 실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망설여진다는 얘기니까. 여기서 더 고민만 했다가는 때를 놓치기 쉬웠다. 그것도 내가 경험자였다.
“글쎄, 우린 깰 거 다 깬 다음에 같이 살아서 그런지 별로 그런 건 없는데. 왜, 형님하고 같이 살려고?”
장갑 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고는 싶은데… 같이 살았다가 깨지는 사람들 너무 많이 봐서… 좀… 걱정이 되네요.”
세영 군이 형님을 만나기 전에 게이 사회에서 제법 화려하게 놀았다는 얘기는 들었다. 언젠가 술에 많이 취했을 때 자신의 과거를 다 지워버리고 싶다며 괴로워하는 모습도 직접 봤었고. 형님이 그런 세영 군을 다정하게 감싸주는 모습과 함께.
“그래도 이제까지 네 주변에 있던 사람들하고 형님을 똑같이 생각하는 건 아니잖아?”
“그건 절대 아닌데… 괜히 같이 살았다가 형한테 피해만 주는 건 아닌지, 그런 것도 걱정이고….”
세영 군에게서는 기본적으로 거리에서 자란 냄새가 난다. 교양이 풍부하거나 취미가 고상하거나 지적인 청년은 아니었다. 대신 아무 데서나 잘 자고, 음식 투정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일에 불평불만이 없다. 해본 적이 없어도 숯에 불도 잘 붙이고. 무인도에 데려다 놔도 혼자 척척 잘 살 것 같은 캐릭터다.
그런 녀석이 유독 사랑 앞에서는 위축되고 망설이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형님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여튼 복잡한 기분이다. 아마 형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겁날 것도 거리낄 것도 없이 살아왔겠지. 이전의 세영 군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 생긴 지금의 세영 군이 훨씬 인간적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별걱정을 다 한다. 형님도 너하고 같이 살길 바라시잖아. 그런 각오도 없이 프러포즈하셨을까 봐?”
우리는 맥주 한 병을 비우고 새로운 병을 열었다. 숯불에 고기 익는 냄새가 슬슬 식욕을 자극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하늘은 푸른빛을 잃고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전 겨우 고졸이잖아요. 고3 때 담임선생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에 졸업장도 겨우 땄거든요. 그땐 참견하지 말라고 건방진 소리를 했는데, 그 졸업장이라도 있으니까 카페에서 일도 할 수 있고….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해요.”
벌집 모양으로 넣어둔 칼집을 따라 소시지가 탁탁 터지면서 부풀어 오른다. 불길이 좀 더 약한 쪽으로 소시지를 옮겨 놓으면서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근데 형은… 공부도 많이 했고, 의사고…. 사실 형 노리는 젊은 애들 진짜 많았거든요.”
아, 뭐야. 나에게만 비밀 얘기 해주는 줄 알았더니 결국은 애인 자랑이었어?
“요즘은 그 바닥도 연령대가 자꾸 낮아져서 스물둘만 넘어도 아저씨 취급받거든요. 조금이라도 어릴 때 돈 많은 남자 잡아서 한밑천 뽑아내는 게 꿈인 애들 많아요. 근데 형은 직업도 의사고, 생활도 안정적이고, 멋있고… 매너도 좋으니까… 다들 난리였죠. 사실 저도 처음엔 저런 남자 잡으면 한동안 잘 놀겠다 싶어서, 불순한 생각에 접근한 거긴 하지만… 지금은… 형한테 버림받으면 어떻게 살까 싶고, 무서워요….”
좀 놀랐다. 요즘 들어 날 많이 따르고 조금은 의지하는구나 싶기는 했지만 맥주도 한 병밖에 안 마신 맨정신에 이런 얘기를 상담해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기쁘다는 얘기다.
덤덤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예전의 나만큼이나 감정표현이 서툰 스물여섯 살의 게이 청년과 내가 마주 서서 바비큐를 굽고 있게 만든 인연이라는 것의 절묘함이 새삼스러웠다.
한창 사춘기 때보다도 20대 초반 때보다도, 요즘이 나는 더 사는 게 재미있었다. 혹시라도 현재의 생활이 위협받는 것은 아닐까, 뭐든 새로운 선택을 겁내면서 살아왔었지만, 이전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상황들이 계속 이어져도 천지가 개벽하거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삶이 훨씬 풍부한 색깔로 채워지고 있었다.
“너도 충분히 멋있어. 그리고 형님도 아마 너 못지않게 널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계실걸?”
세영 군은 그럴 리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리고 이번엔 집게를 쥐지 않은 다른 손에 들린 맥주병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반투명한 갈색 병 위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옆에서 봐도 그렇게 티 나는데 넌 정말로 모르는 거야? 형님이 널 얼마나 아끼시는지? 아니면… 알고 있지만 또 부끄러워서 모르는 척이냐?”
얼굴을 붉힌 세영 군이 내 놀림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오호, 이젠 나한테도 발끈하네? 우리 그만큼 가까워진 거라고 생각해도 되냐?
“솔직한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봐. 그게 제일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나도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같이 살면 아마, 서로에게 실망하는 부분이 생기더라도 그 대신 연애감정보다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신뢰가 생길 거야.”
지금의 감정이 그저 순간 지나치는 얄팍한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활과 삶에 밀착하고 스며들어 나의 숨이 되고 밥이 되고 편안한 잠이 되는 경험. 그건 아마 외로웠던 세영 군과 형님에게 가장 절실한 부분이 아닐까? 사랑이 머릿속의 관념이 아닌 실체로서의 생활이 되는 것.
“야― 테라스 정말 좋네!”
대하를 구울 호일을 깐 얇은 팬을 들고 나오던 형님이 테라스의 전망에 잠시 감탄하는 사이, 나는 좀 전의 대화는 비밀로 부쳐주겠다는 뜻으로 세영 군에게 짧게 윙크했다.
“세영이 너, 고기 구울 줄 알아? 다 태우는 거 아니야?”
형님은 아마 면박 주는 척하면서 귀여워하는 게 특기인 것 같다. 매번 말과 표정이 서로 다르다. 형님의 등장에 세영 군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몇 박 며칠 떨어져 있다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네가 그러니까 나도 갑자기 우리 개뼉다구가 보고 싶잖냐. 벌써 못 본 지 20분은 됐겠네.
“숯불도 세영이가 붙였는데요? 혹시 같이 살게 되면 형님이 세영이한테 배울 게 많으실 것 같은데요?”
놀리려고 일부러 한 말이었는데 직구로 먹혔다. 세영 군의 얼굴이 아주 숯처럼 활활 타오른다.
“세영아, 이거 옮기는 것 좀 도와줘!”
우동주가 다이닝룸의 테라스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나를 찾았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형님이 부르는 세영이와 우동주의 세영이는 전혀 다르다. 처음엔 의사 선생님이 세영이, 세영이 할 때마다 뜨끔뜨끔했지만 지금은 세영 군과 내가 같은 이름이라는 것도 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 구분이 분명해졌다.
“어, 금방 갈게!”
내가 자리를 뜨고 나면 두 사람은 해 지는 한강을 배경으로 짧게 키스를 할지도 모른다. 세영 군이 마시던 맥주를 형님이 마실지도 모르고. 은근히 애교가 많은 세영 군이니 맛 좀 봐달라며 형님 입에 스테이크를 넣어줄지도 모르지.
다이닝룸으로 향하는 등 뒤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나직이 들린다.
“집 너무 좋지?”
“그래도 전, 형 집이 더 좋아요.”
저 녀석 좀 보시게. 그렇게 좋으면 얼른 그 집에 들어가서 살아라, 요놈아. 혼자 싱글싱글 웃으면서 다이닝룸에 들어가 보니 우동주가 등을 돌리고 서서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김치를 썰고 있었다. 넓고 듬직한 그 등을 보니 문득 나도 세영 군이 하던 것처럼 매달려보고 싶어졌다.
“아직 멀었어? 나 배고픈데.”
보조 조리대 앞에 선 등을 끌어안으면서 목덜미에 입술을 부볐다. 내 품이 넘치도록 꽉 차는 이 몸이 좋았다. 김치를 썰던 손이 흠칫 멈추면서 우동주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왜 그래, 배 많이 고파?”
“뭐?”
“아니,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배가 너무 고파서 살짝 이상해졌나 싶어서.”
내가 평소에 그렇게 애정표현이 없었나? 우동주가 너무 많이 하다 보니 나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별로 못 느꼈을 수도. 나까지 애정표현이 넘쳤다간 우린 닭이 돼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앞으로 하지 말까?”
“에이, 왜 그래. 너무 황홀해서 그러지. 지금 당장 식탁 위에 눕히고 싶은데?”
우리는 짧게 입을 맞췄다. 내가 뒤에서 우동주를 안고 키스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앞으로 종종 해줘야지. 우동주가 하는 애정표현과 내가 하는 애정표현은 분명 별개의 것이니까.
서로 마음을 열어가면서 조금은 실망하기도 하고 깨기도 하고, 그러면서 전보다 더 단단하게 이어지고. 그런 과정은 다 비슷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다들 자신의 사랑은 좀 더 특별하다고 믿으면서 사랑을 하겠지. 그건 그걸로 좋은 거 아닐까? 각자 자신의 사랑을 소중히 하면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랑이 소중하게 지켜질 테니까. 내 사랑만이 소중하다는 생각은 위험하겠지만.
내 사랑의 소중함을 알고 나니 다른 사람의 사랑도 지켜졌으면 좋겠고, 다른 사람의 사랑을 통해 내 사랑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깨닫기도 하고. 더블 데이트는 좋은 점이 많은 것 같다. 비록 쓰디 쓴 실패의 과정이 있긴 했지만.
다음에 영화 보러 가면 팔걸이를 올려야지. 어차피 깜깜해서 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우동주 말대로, 보면 좀 어떤가. 천지가 개벽하거나 내 일상이 박살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