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주 씨가 돌아간 후, 한동안 소파에 앉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현관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옮겼다가는 내가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튕겨져 나가거나,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그만큼 격렬한 에너지를 가진 감정이었다. 전날 우동주 씨가 고백했을 때보다 더.
그의 구두가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멀어지고 멀어져서, 오피스텔 밖으로 나가 큰길에 도착했을 즈음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소리 내어 숨을 뱉으면서 그 자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기진맥진했다. 굉장히 집중해서 오랜 시간 일을 한 뒤에나 느낄 수 있는 정신적 피로감이었다. 그제야 잠이 몰려왔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핸드폰부터 확인해 보니(이제는 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하는 게 습관처럼 돼버렸다) 우동주 씨의 연락은 없고 누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걸려와 있었다. [보는 즉시 연락 줄 것]이라는 상당히 심플하고 강압적인 메시지와 함께.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에는 심적으로 너무 지쳐 있었지만 꽤 급한 일인 것 같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뭐 하느라 전화를 안 받아? 회사야?]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니 방금 전까지의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쪽은 내게 익숙한 현실, 저쪽은 꿈. 하지만 꿈에 젖어 있는 듯한 몽롱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니, 샤워 중이었어. 무슨 일인데?]
[너 론진 시계 갖고 있는 거 있지? 로즈골드 시리즈.]
[어, 왜.]
시계야 워낙 고가품이 많다 보니 그 정도는 어디 가서 손목에 힘줄 정도도 못 됐지만 얇고 서늘해 보이면서도 드레시한 느낌이 마음에 들어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차지도 않고 고이 아껴둔 놈이었다.
[그것 좀 빌려주라. 촬영 때 써야 되는데 구하질 못했어.]
[그거 별로 귀한 모델도 아니잖아. 누나가 그걸 못 구해?]
[원래는 그거 말고 다른 모델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나을 것 같잖아. 당장 오늘 밤에 촬영인데 이제 와서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닐 수도 없고. 네가 갖고 있는 게 딱 생각났지.]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치고 완벽주의자가 아닌 사람 없다고들 하는데, 누나도 나도 일에 있어서는 타협점이 없는 게 아마 유전인 것 같다.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피곤하게 만드는 성격이지. 우동주 씨도 출장 때 나 때문에 고생했었고. 난 누나만큼 성공을 거둔 케이스는 아니지만.
[벼룩의 간을 내먹어라. 내가 시계가 몇 개나 된다고 그걸 가져다 촬영을 한대? 서랍 속에 시계 케이스 꽉꽉 채워 놓고 사는 놈들 많이 알 거 아냐.]
그런 놈들한테야 수많은 컬렉션 중 하나겠지만, 그 모델은 내 소장품 중엔 꽤 고가였다.
[네가 갖고 있는데 굳이 여기저기 수소문해야겠냐?]
결국 만만한 네가 협조 좀 해라 이거지. 평소에 누나한테서 이것저것 받아온 것도 있고 애초에 내가 승낙하고 거절하고의 문제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거부권이 없다. 그리고 뭔가 좋은 생각이 나기도 했고. 나에게도 있긴 있었다. 상담을 할 수 있는 사람. 속 시원히 모든 걸 밝힌 상담은 무리겠지만.
[그래서. 지금 갖고 가라고?]
[아니, 우리 스태프 보낼 테니까 오피스텔 로비로만 좀 나와줘. 아우, 착한 내 동생. 누나가 보상은 확실히 한다! 알지?]
알지, 그 화끈한 성격. 나와는 다르게. 그래서 마침 아주 오랜만에 다시 또 누나가 부러워지려 하고 있다고.
[그럼… 내일 시간 돼?]
[내일? 촬영 끝나고 뻗어서 자고 있겠지. 왜?]
[나 퇴근하고 잠깐 시간 좀 내. ‘스시조’ 예약해놔도 되지?]
[스시조? 알았다, 알았어. 하여간 알차셔.]
누나와 전화를 끊고, 보낸다는 스태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사이 우동주 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집에 왔습니다. 선배님은 어떠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오늘 행복했어요. 잘 주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또 단정한 척, 신사적인 척을 한다. 잘은 몰라도 상당히 공들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것 같다. 태어나 처음으로 폭주하는 감정에 둘러싸인 건 나와 똑같을 텐데도 이렇게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는 걸 보면 그건 참 기특했다. 누구한테 주긴 너무 아깝긴 해.
[아까는 주세영이라고 막 부르더니.]
그의 문자를 읽는 동안에도, 또 답장을 하는 동안에도 몸속과 손가락 끝이 낯선 간지러움으로 술렁거렸다. 아마도 요 며칠 사이 그에게 처음으로 보내는 까칠하지 않은 내용의 메시지인 듯했다. 그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도 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해줬으니, 나도 이 정도의 농담으로 그의 긴장을 조금은 풀어주고 싶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을 때도 집에 있으면 안 하던 짓을 하면서 자주 핸드폰을 신경 썼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동주 씨 역시 그렇겠지. 머리맡에 핸드폰을 두고 잤을 거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핸드폰을 자꾸 확인했을 거고. 아니면 내가 억울해서 안 돼.
그사이 누나가 보낸 스태프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로비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데, 이 단정한 신사분께서 이번엔 또 살짝 삐딱선을 타셨다.
[그럼, 계속 주세영할까?]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 아까까진 서로 내가 더 죽을 것 같다고 으르렁거리면서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놈들처럼 굴더니 지금은 문자로 이런 실없는 짓이나 하고 있으니…. 누가 보면 웃기고 있다고 혀를 찰 거다 아마. 근데 난, 이렇게 나오는 우동주가 귀여웠고, 그리고 조금씩 고마웠다. 우동주라도 이래 줘야지 같이 삽질하는 놈이었으면 난 벌써 질식할 것 같아 도망쳤을 거다.
[죽을래?]
[살려주세영. 절 살릴 수 있는 건 선배님밖에 없어요.]
아무리 얼굴이 안 보인다고 해도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어떻게 하는지. 그것도 같은 남자를 상대로. 연애를 할 때 늘 이랬을까? 탁한 하늘색 싸구려 운동복을 입고 있어도 연예인 뺨치는 미녀가 작업 걸어주는 놈이면서,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놈이 좋다는 건지.
복잡한 마음에 침대에 누워서도 곧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면서 쓸데없는 생각들을 해보게 된다. 그래도 우동주 씨가 다녀가기 전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능력자야. 누구네 집 아들인지는 몰라도 참 잘 키우셨단 말이야. 내가 여자였거나 우동주 씨가 여자였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우동주 씨가 먼저 대시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잡아채고 싶었을 텐데.
[이렇게 답장만 없어도 죽을 것 같다구요. 저 이제 잘랍니다. 답장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못 잘 테니까 그냥 잘래요. 잘 자요. 술 먹지 말고.]
원래 이렇게 시시콜콜 메시지 주고받으면서 연애했냐? 어째 이렇게 살뜰해. 기뻐할 만한 말만 늘어놔. 이러는데 어느 놈이 안 넘어오고 배기겠냐고. 요즘 젊은 애들은(나도 겨우 서른하나에 이런 말 하는 게 웃기지만) 연애도 자존심 세워가면서 하는 거 아니었나? 이 정도로까지 치켜세워주면 우쭐해지잖아. 관심받고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그것도 상대방 헷갈리게 하는 변덕스러운 어장관리로서의 관심이 아닌, 일관되고 힘이 있는 믿을 수 있는 애정의 힘. 그건 대단했다. 무사안일만이 삶의 목표였던 주세영 같은 목석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우동주 씨도 잘 자요.]
아직은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없었지만 내 짧은 말에 담긴 깊숙한 진심까지 찰떡같이 알아듣는 기특한 너니까…. 며칠 만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동주 씨도 나처럼 잘 자기를 바랐다.
■
모처럼 몸과 머리가 가벼웠다. 어젯밤엔 오늘 입을 옷을 정해두지 못하고 잤지만 오래간만에 옷을 고를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날이 꽤 차긴 하지만 3월에 맞는 산뜻한 차림이 하고 싶어졌다.
양쪽 가슴에 포켓이 달린 푸른색 깅엄체크 셔츠를 먼저 정하고 거기에 맞는 다른 아이템들을 골라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10부 길이로 테일러샵에서 직접 맞춘 화이트 팬츠에 베이지색 더블 블레이저를 매치해 놓고 보니… 음, 너무 봄인가? 왠지 내 기분이 옷차림에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아 혼자 겸연쩍었지만 일단 입고 싶어지면 아무도 못 말리는 게 주세영이니까.
부드러운 스웨이드 소재로 된 옅은 브라운의 옥스퍼드화로 마무리하고 집을 나섰다. 뺨에 와 닿는 이른 3월의 아침 바람이 지난주보다 한결 포근해진 것 같았다. 절대 내 기분 탓이 아니다. 아무리 꽃샘추위가 있다 해도 3월은 엄연히 2월과는 다른 계절이었으니까.
“주 대리님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사무실에 도착해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맞은편의 프로그래머가 내 쪽을 보더니 슬쩍 웃었다.
“네?”
“옷차림이 그래 보이셔서요.”
“아, 그런가요? 그냥… 3월도 됐고 해서….”
역시 좀 더 다운시킬 걸 그랬나? 팬츠만이라도 점잖은 색으로 바꿔 입을 걸 잘못했나?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어젯밤 일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로 열이 올라 도망치듯 흡연실로 내뺐다. 다른 사람 눈에 보일 정도로 티가 났나 싶어 흡연실 유리창에 옷차림을 비춰 보는데 마침 흡연실로 들어서는 우동주 씨가 창에 비쳤다. 가끔은 4층에 정보통이라도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흡연실에 와 있으면 열 번에 예닐곱 번은 어김없이 나타나니까. 우동주 씨 눈에도 내가 좋은 일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 궁금했다. 근데… 쟤 저 옷은 어디서 난 거야? 쟤야말로 좋은 일 있는 놈 같잖아?
“잘 주무셨어요? 얼굴 보니까 어제보다는 괜찮긴 한데.”
그러면서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이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어제까지 봤던 것과는 다른 얼굴인 것 같은 낯섦에 시선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럭저럭….”
예전 같았으면 내가 잘 못 잘 게 뭐 있냐고 받아쳤겠지만, 이젠 그래봤자 내 얼굴에 침 뱉기인 것 같아 관뒀다. 고백 이후에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건 어젯밤에 벌써 어느 정도 눈치챘을 테니까.
“저 오늘 어때요? 이것도 화요일 날 새로 산 건데.”
“대체 몇 벌이나 샀어요? …비싸 보이는데.”
브라운에 가깝게 톤 다운된 단정한 베이지색 슈트에 가느다란 푸른색 스트라이프 셔츠와 붉은색으로 사선이 들어간 네이비색 타이를 맨 그는 느낌 좋은 엘리트 대학생처럼 보였다. 체격이 커서 진중한 스타일만 어울릴 줄 알았는데 열여덟 같은 스물여덟이라 그런지 이런 느낌의 슈트도 무리 없이 어울렸다. 학생처럼 짧게 자른 머리 역시 오늘만큼은 풋풋하게 슈트와 잘 어우러졌다. 재킷을 벗은 모습도 궁금했다. 스트라이프 셔츠 때문에 경쾌해 보이겠지. 잘 단련된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날 거고. 두꺼운 어깨라든가, 곧은 등이라든가, 널찍하고 불룩한 가슴이라든가, 묵직한데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허리라든가….
“거기 점원 누나가 하도 말을 잘해서 세 벌 질러버렸죠.”
‘거기’가 대체 어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점원의 말에 넘어가 한 벌에 2백만 원이 훌쩍 넘을 게 분명한 슈트를 세 벌이나 질러버렸다는 것에 순간적으로 내 돈도 아닌데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점원 말에 홀려서 슈트를 세 벌이나 사요? 우동주 씨 사실은 재벌집 아들이야?”
“솔직히, 선배님한테 잘 보이려고 무리한 거예요. 뻔하잖아요. 근데 우리 오늘, 좀 커플룩 같지 않아요? 선배님도 베이지, 나도 베이지.”
메시지로는 그나마 얼굴이 안 보이니까 견딜 만했는데 눈앞에서 직접적인 작업 멘트를 듣고 있으려니, 누가 들을까 겁났다. 열이 올랐을 것 같은 얼굴을 숨기려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
“근데 선배님은 오늘… 뭐랄까….”
커플룩 어쩌고 하면서 혼자 실없이 웃더니 이번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진득한 시선으로 나를 한참 훑어본다. 우동주, 너 눈빛이 그게 뭐냐? 요즘 동성 간에도 사내 성희롱이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아냐? 하긴, 좀 전에 나도 가슴이 어떻고 허리가 어떻고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일어난 혼자만의 상상이고, 넌 지금….
“예쁘시네요.”
“뭐?”
한참 위아래로 끈적하게 쳐다보길래 뭐라고 하려나 약간 긴장하고 있었는데, 예쁘시네요, 라니. 2차 성징이 덜 진행됐던 중학교 때쯤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예쁘다’는 말은 태어나 처음이다. 근데 이거, 기분 묘하네. 어떻게 봐도 지금의 나는 ‘예쁘다’는 평을 붙일 만한 얼굴이 아니었으니, 그건 어디까지나 옷차림에 대한 평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른 넘은 남자에게 예쁘다니. 우동주의 콩깍지는 보통이 아닌 듯했다.
“아니, 평소엔 좀 딱딱해 보일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왠지 말랑말랑해 보여서요.”
그러면서 픽 웃는다. 그 웃음이 꼭, 주세영 네 마음이 지금 말랑말랑하구나? 다 알겠다 야, 라고 하는 것 같아 쪽팔리고 민망했지만,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꾹꾹 눌러가면서 나를 향해 귀엽다는 듯 피식 웃는 옆얼굴에, 정말로 마음이 말랑말랑해질 것 같았다. 연하의 사내놈이 지금 날 귀여워하고 있는데 울컥하기는커녕 자꾸 가슴 언저리가 들썩거렸다. 우동주, 웃긴다. 네가 더 귀여워, 인마.
“말랑말랑은 무슨… 봄도 됐고 하니까….”
“잘 어울려요. 안 어울리는 게 대체 뭐예요?”
“그만해라, 진짜.”
더는 못 들어주겠다. 이번에야말로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반대쪽으로 쓱 밀어버렸다. 그랬더니 이 선수놈이 슬쩍 내 손을 붙잡는다. 너무 자연스러운 연결이라 뿌리칠 생각도 못 했다.
“전 오늘 계속 외근일 것 같은데, 퇴근하고 뭐 하세요?”
내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제자리에 돌려놓고는 흡연실 전면창에 두 팔을 짚고 얼굴만 이쪽으로 돌려 나를 본다. 담배를 쥔 손에 다른 쪽 손보다 살짝 더 진하게 돋은 핏줄이 눈에 띄었다. 굵직굵직하고 시원시원하고 약간 투박한 듯하면서도 다정함이 느껴지는 손이다.
“오늘은… 누나하고 저녁 약속이 있어서….”
“아… 그러시구나. 오늘도 한번 들이대보려고 했는데.”
엄살을 떨면서 아쉬워했으면 차라리 내 쪽에서 면박을 줬을 텐데, 씁쓸하게 웃으면서 괜찮은 척 마음을 숨기는 우동주 씨의 행동에 내 마음이 더 언짢아졌다. 누나하고 약속이 없었더라도 그와 뭘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꼭 약속을 했다가 내가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처럼 찜찜했다.
“근데 선배님, 혹시 저 피하려고 하는 건 아니죠?”
“무슨 소리예요.”
“아니면 됐구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좀 많이 드세요. 요즘 너무 해쓱해지셨어요. 뭐… 저 때문인 거라 면목 없지만.”
또 씁쓰름하게 웃으면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불거진 손가락 마디마디가 결단력이 있으면서도 자제할 줄 아는 우동주 씨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 같았다. 저런 손이 붙잡아준다면 용기가 생길 것도 같았다.
“알면 좀 편하게 해줘요.”
“음…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조금만 더 면목 없을게요.”
뻔뻔한 것마저도 귀엽게 보이는 건 오늘 옷차림 때문일까.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장이었고, 주말에는 교회에 나가 청년부 활동을 성실히 하고, 집이 꽤 부유해 1년에 두세 번은 해외에서 휴가를 즐기다 오는, ‘과 선배 오빠’를 보는 것 같았다. 똑똑하고 다정하고 운동도 공부도 다 잘하고 근데 성격까지 좋은, 과에 한 명씩은 꼭 있다는, 그러나 항상 우리 과에만 없는, 도시전설 같은 ‘선배’. 우동주 오빠님, 학교 때 인기 많았겠어요. 남녀를 불문하고 후배들한테 둘러싸여 지냈을 모습이 눈에 훤하네. 뭐 꼭 학교 때뿐이었겠냐만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살짝 고까운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자니, 박 대리가 흡연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야, 우동주! 너 외근 나갈 놈이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으면 어떡해, 인마! 빨리 내려와!”
그러고는 우동주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어딘가로 바쁘게 사라졌다. 아, 지금부터 외근이구나. 그럼 퇴근 때쯤 돼서야 보겠네.
“하루 종일 외근이라 시무룩했었는데 선배님 얼굴 보고 가게 돼서 다행이네요. 선배님은 일 잘하는 사람 좋아하시니까 두 배로 힘내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본 우동주 씨는 저 혼자 잠깐 뜻 모를 웃음을 짓고 흡연실을 나섰다. 처음엔 은근히 사람 신경 긁으면서 얄밉게 굴더니 요즘엔 기특한 말, 이쁜 말만 골라 한다. 요즘에도 몰아붙이면서 열 받게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오늘 아침엔 유독 씁쓰름하게 웃는 얼굴을 많이 본 것 같다. 근무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진이 빠진 느낌이었다. 우동주 씨하고 있으면 에너지 소모가 심했다. 커피나 한잔 마시고 시작해야지.
■
“야, 주세영. 너 누가 별실로 예약해놓으래? 시계 하나 빌려주고 아주 뽕을 뽑아라, 응?”
말은 그러면서도 누나는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웃으면서 룸에 들어섰다. 주이영 하면 화려하고 럭셔리한 스타일링으로 유명했지만, 정작 본인은 평소에 심플하고 편한 룩을 즐겼다. 머리도 액세서리도 늘 수수했다. 그런데도 자기 삶에서 충족감을 느끼는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로운 당당함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 그 자체로 스타일리시했다. 청바지에 컨버스 운동화와 에코백 차림인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촬영 잘 했어?”
“덕분에. 역시 고걸 차니까 아주 모델이 살더라.”
“그래도 내가 더 잘 어울리지?”
누나에게 케이스를 받아 가방에 넣어두면서 나도 슬쩍 농담을 건넸다. 가족의 힘이란 이런 건지, 그래도 누나 얼굴을 보니 내 편을 만난 것 같아, 무슨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벌써 힘이 났다. 우동주가 내 적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럼, 그럼. 야들야들하니 우리 주세영 손목에 착 감기지.”
“서른 넘은 놈한테 야들야들은 무슨… 징그럽게.”
같은 남자에게서 대시를 받은 후라 그런지 그 말이 괜히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아까 우동주 씨도 예쁘네 어쩌네 했었고.
“왜? 내 동생이지만 이 정도면 엄청 준수하지. 키만 좀 컸어도 내가 모델로 키우는 건데.”
빈말이 아니라 누나는 잡지사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화보에 몇 번 나를 추천한 적이 있었다. 성격상 무리라 매번 거절했더니 요즘엔 말도 안 꺼내지만.
“모델은 뭐 아무나 하나?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폼 잡고 멋있는 척하는 거, 억만금을 준대도 난 못 해.”
“걔들 중에서도 숫기 없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뭐 그런 애들은 금방 떨어져 나가긴 하지만.”
마침 헬퍼가 기본찬과 엽차를 세팅해주고 나간 터라 적절한 타이밍이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쪽 애들 중엔 게이도 많다며?”
“응? 아, 모델 애들? 뭐… 일반인보다는 있는 편이지.”
“같이 일해본 적도 있어?”
어느 잡지에 어느 모델이 입고 나온 재킷 좀 구해줄 수 있느냐는 질문은 해도 모델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던 내가 생전 안 하던 질문을 늘어놓으니 누나도 좀 이상했는지 눈빛이며 표정이 약간 진지해진다.
“물론 있지. 친한 애들 중에도 몇 명 있고. 왜? 주변에 누가 게이야?”
눈치 하나는…. 누나 앞에 있잖아. 하나밖에 없는 누나 동생이 지금 게이가 되냐 마냐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누나라도, 누나 주변에 게이들이 많고 누나가 그걸 별난 일로 여기지 않는 쿨한 사람이라 해도, 난 내 얘기라고는 절대 말 못 한다. 왜냐? 내가 쿨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회사 후배놈이… 남자한테 고백을 받았다면서 나한테 상담을 하는데… 내가 그런 쪽으로 뭘 알아야 말이지.”
서른한 살이 되고 보니 이젠 제법 자연스럽게 거짓말도 할 줄 알게 됐고 적당히 둘러대는 법도 어느 정도는 터득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누나에게 뒷덜미를 잡혔을 텐데,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 내가 신기했다. 물론 뭐라고 얘기할지 하루 종일 정리해온 덕도 있지만.
“어쩐지 네가 별실로 예약했을 때부터 뭔가 할 말이 있나 싶더라. 후배? 무슨 후배? 너 살살 긁는다던 그 후배?”
뜨끔했다. 그랬었지, 참. 초반에 내가 우동주 씨 때문에 약 올라서 누나한테 상담하고 그랬었지. 한 달도 안 된 일인데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원래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한 달 전이 어제 같고 1년 전도 어제 같고, 다 비슷비슷하기 마련인데 그사이에 굴곡이 많긴 했나 보다.
“어… 알고 보니 좋은 놈이라 꽤 친해졌거든. 출장도 몇 번 같이 갔다 왔고.”
“흠… 그 사람 괜찮은가 보다? 게이들 남자 보는 눈, 엄청 까다로운데. 나쁘게 말하자면 외모만 좀 심하게 따지는 거기도 하지만.”
“뭐, 괜찮은 편이지.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로 꺼내놓으니 애인 자랑하는 팔불출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어쩌겠는가. 우동주가 그런 인물이라는 건 가감 없는 사실인데.
“요즘 세상에도 그런 남자가 있어? 나 좀 소개시켜줘라. 그 후배는 게이 아니라며.”
“누나는 무슨 농담을 해도….”
“하여간 주세영. 농담도 못 하냐? 근데 그 후배도 영 마음이 없진 않나 봐? 단번에 거절 안 하고 고민하는 걸 보니.”
거기서 또 뜨끔. 역시 제3자가 보면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성격에, 남자에게 고백받고 고민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마음이 흔들린다는 증거겠지.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않겠어? 그 후배는 게이도 아니라며. 근데 남자가 고백했다고 보통 고민을 하겠냐? 자기도 조금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사람들은 남의 일에는 참 거침이 없었다. 난 그렇게 박 터지게 고민했는데 누나 입에서는 망설임 없이 정답이 나온다. 나도 다 알고 있었던 일인데 남의 입으로 정확하게 전해 들으니, 모르는 척 피해왔던 시간들이 부끄러웠다. 다 큰 어른이 자기 일을 남에게 묻고 있으니….
“근데… 부모님도 그렇고, 세상눈도 있고, 여태 여자 만나면서 잘 살다가 갑자기 그러려니까 고민이 많이 되나 보던데.”
“부모님이니 세상눈이니, 그런 거 다 핑계 아니야? 마음은 가는데 결국 자기가 무섭다는 거잖아.”
아, 또 뜨끔. 이러다 마음에 구멍이 숭숭 뚫리겠다. 누나가 꼭 내 속을 들여다보고 꾸짖는 것 같았다. 내내 그렇게 살더니 서른이 넘어서까지도 앞가림 하나 혼자 못 하냐며 혀를 찰 것 같다.
회와 술이 나오고, 우리는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 나는… 만나보라고 얘기해줘야 되는 거야?”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지 뭘 네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너 원래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거 싫어하잖아.”
해산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우리 남매였지만, 오늘 젓가락을 들고 회에 덤벼든 건 누나뿐이다. 원래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도 식욕이 떨어지는데 요즘엔 아예 배고픔 자체를 못 느끼고 있었다. 스시조의 도로회를 눈앞에 놓고도 얘기에만 열을 올리다니, 내가 어지간히 코너에 몰려 있긴 한가 보다.
“너무… 심각한 일이니까 그러지…. 그래서, 사귀라고 말라고?”
“마음 가면 몸 가고 그러는 거지, 별수 있냐. 동성인데도 고민될 정도라면 아마 꽤 많이 끌리고 있다는 얘기일 텐데.”
꽃등심 부럽지 않은 마블링이 핀 오토로를 삼키면서 누나가 당연한 걸 다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아무리 아버지가 뱃살은 뒤에 먹는 거라고 일러주셔도, 누나와 나는 회가 나오면 일단 오토로에 먼저 달려들었었다. 그게 버릇이 됐는지 원하는 만큼 실컷 먹을 수 있게 된 지금도 누나는 오토로부터 처치해버린다.
“만약에 내가 그 후배였어도 누나 그렇게 말했을 거야?”
“너, 니 얘기인 거 아니야?”
사케를 한 잔 따르던 누나가 눈을 번뜩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한 번쯤은 이런 의심을 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야! 누나는 멀리 가지 좀 마!”
내가 펄쩍 뛰자 그제야 누나는 의심스런 눈빛을 거두었다. 내가 생각해도 오버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글쎄… 그렇게 말하니까 또 진지해지긴 하네? 그래도 기본적인 방침은 변함없을 것 같은데? 다 커서 저 살 대로 살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어디서 개뼉다구 같은 놈을 데려와서 게이 되겠다고 하면 다리를 분질러버리겠지만.”
개뼈다귀도 아니고 개뼉다구라니, 참 누나다운 강렬한 표현이다. 뭐 아무튼 간에 우동주 씨는 확실히 개뼉다구라고 하기엔 너무 번듯하니까 일단 그건 다행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잘 돼서 누나한테 들키더라도, 적어도 다리가 분질러지진 않을 테니까.
“누나는 처음부터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고 상담을 해줬어야지, 뭐가 그래?”
“야, 내가 얼굴도 모르는 ‘살살 긁는 후배 씨’ 상담에까지 진지해져야 되냐? 그거 말고도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몇 점 나오지도 않은 오토로의 마지막 한 점을 집어 “내가 먹는다?”라고 하는 누나에게 어서 먹으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이제 살살 긁는 후배 아니라고.”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 싸고도는 걸 보니.”
누나는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툭툭 던지듯이 얘기했지만 하는 족족 맞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해답은 아니었지만, 아마 나는 다른 사람, 내가 신뢰하는 가까운 사람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하려고 하는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 그러니까. 마음은 이미 정해졌으면서도, 타인을 통해 그것을 한 번 더 굳히고 싶었던 거다. 못난 생각이지만, 그거 맞다.
누나가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비우자마자 핸드폰부터 꺼내 보니 역시나 우동주 씨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30분쯤 전에 보낸 문자였다. 웃음이 새어 나오려 하는 걸 막으려고 입가에 힘을 주면서 내용을 확인했다.
[방해 안 하려고 했는데 문자라도 안 하면 미치겠어서 그냥 합니다. 뭐 해요? 뭐 먹어요? 진짜 누나 만나는 거 맞아요? 여자친구 만나는 거 아니에요? 이런 거 물으면 나한테 정떨어지려나.]
할 말 다 해놓고 마지막에 ‘정떨어지려나’만 붙이면 다냐? 어떤 때 보면 철두철미한 선수 같은데, 어떤 때 보면 영 맹탕 같고…. 아니면 이런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다 계산인가? 여자친구하고는 벌써 예전에 헤어졌지만 이 타이밍에 와서 ‘사실은 헤어졌어요.’ 하는 것도 웃겨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일단 그냥 넘겼다.
[누나 만나는 거 맞아요. 난 회 먹는 중인데, 우동주 씬 저녁 먹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답장으로 보내면서도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는 것도 같고 복잡한 심정이다. 손가락 끝,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손톱 아래가 가려운 기분.
[와… 지금 저 걱정해주시는 거죠? 안 먹어도 배불러요. 저 대신 선배님이 많이 드세요.]
[안 먹어도 배부른 건 잠깐이니까 챙겨 먹어요.]
스마트폰의 메시지함에 우동주 씨와 내가 나눈 대화가 쭉 이어진다. 실없는 얘기들인데, 이런 실없는 잡담만으로도 내내 마음은 싫지 않은 긴장으로 팽팽했다.
[먹으라니까 먹어야 될 것 같아요. 주세영, 조련질 쩐다.]
이게 자꾸 은근슬쩍 선배님 자를 빼먹고 말이 짧아지는데… 이렇게 뺀질뺀질하게 구는 것도 밉지가 않고 그저 웃음만 나니, 참….
[까불래?]
[아니요. 얌전히 밥 먹겠습니다, 선배님. 이렇게 문자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진짜 일주일은 밥 안 먹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방해꾼은 그만 문자 접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오늘 득템을 너무 많이 해서 더 했다가는 코피 터질 것 같습니다.]
애처럼 조르고 징징댔다가, 어른스럽게 물러날 줄도 알았다가. 치고 빠지기에는 당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득템 좀 했다고 김칫국 마시진 마요.]
[싫습니다. 김칫국에 국수 말아 먹을 겁니다. 고향에서 보내주신 백김치 국물이 끝내줘요. 나중에 선배님도 한번 드시러 오세요.]
그 뻔뻔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식욕이 좀 돌아온 것 같았다. 오토로는 누나가 전부 해치워버렸지만 아직 다른 부위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산토리를 한 병 주문하고 의자를 당겨 테이블에 바짝 다가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누나가 자기 자리로 가다 말고 내 어깨를 툭 치면서, “고민 좀 해결됐나 봐? 젓가락 드는 걸 보니.” 하고 나를 민망하게 했다.
“그래도 주세영이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을 갖고. 좀 컸는데?”
“뭐가….”
“너 완전 깍쟁이였잖아.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거기다 소심하기까지. 이제 좀 어른스러워졌다, 응?”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누나의 얘기에도 식욕은 유지되었다. 스시조의 도로회는 역시나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지만, 나는 왠지 우동주 씨가 먹고 있을 백김치 국수 맛이 궁금했다. 그 커다란 몸으로 주방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국수를 말아 먹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그리고 혼자 TV 앞에 앉아 등을 구부리고 그걸 먹을 생각을 하니 이번에는 웃음이 안 나고 콧날이 시큰했다. 괜히 내가 우동주 씨를 배신하고 혼자만 좋은 음식을 먹고 있는 것처럼 찔렸다. 혹시 회를 좋아하면 다음에 여기 꼭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나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우동주 씨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쭉 훑어보다가 충동적으로 저장명을 바꿨다. 개뼉다구로.
그렇게 해놓고는 택시 뒷좌석에서 혼자 어깨까지 떨어가면서 한참을 웃었다.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로 힐끔거렸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항상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주세영에게는 그것만 해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동주 씨, 내가 회 사주면 백김치 국수 말아 줄래? 네가 혼자 국수 먹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좋아하는 참치회가 목에 콱 걸리더라. 그거 왜 그런 거게?
□ WOO DONG ZOO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옷차림은 그 사람의 개성을 나타내는 수단이라고.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나는, 그건 그저 멋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자기변명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보통의 남자들보다 몇 배나 더 옷차림에 엄격한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도 본받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아이구 저렇게까지 하실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니까.
그랬던 내가, 세 시간이나 돌아다니면서 수십 벌의 옷을 입어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더니 오직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신념만으로 스스로 백화점에 달려가 한 자리에서 슈트를 세 벌이나 구입하고, 그것도 모자라 목요일 아침, 흡연실에 서 있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본 순간에는 급기야 ‘개성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의 옷’을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개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분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져왔다. 화이트 팬츠에 베이지색 재킷을 입은 그 사람의 뒷모습이 온몸으로 외치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 난 지금 봄이랍니다!
뒷모습에 대고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었다. 살금살금 등 뒤로 다가가 틀림없이 탱탱하게 위로 착 올라붙었을 엉덩이를 움켜쥐면서 귓가에 끈적한 농담을 흘려주고 싶었다. 주 대리, 화이트 팬츠라니…. 야하고 좋은데?
연인도 아닌데 그런 짓 하겠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우리가 그럴 수 있는 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누가 보기라도 했을까 봐 당황하면서 내 손을 쳐내는 그 사람을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 당장 현실은? 망상대로 실천했다간 피우고 있던 담배를 그대로 가차 없이 내 얼굴에 들이밀었을지도.
하지만 우동주, 쉽게 죽지 않는다. 이젠 어느 정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았으니까. 매몰차게 쫓아내 놓고도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에는 답장을 주는 변덕쟁이 주세영이니까.
‘진짜 가요?’ 하는 내 물음에 그 사람이 돌려준, ‘가’라는 간결한 한 음절이 사실은 가지 말라는 붙잡음보다 더 깊고 조심스러운 애정임을 이제는 안다. 그 사람만의 방식과 속도가 있고, 지금의 이런 변화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굉장한 파격이라는 것도. 같은 감정을 가지고 같은 변화를 마주하더라도 거기에 반응하는 감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건데, 내가 너무 조급했던 면이 있었지. 열여덟 살 소리 들어도 싸다.
계절의 변화는 여자들의 옷차림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다고들 하는데, 여자고 남자고 아직 무채색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없는 쌀쌀한 날씨에 주세영 혼자 완전 봄이었다. 그렇게 차려입고 아무리 ‘난 아직 심각해. 난 우울하다고.’ 우겨봤자 아무도 안 믿어준다구요. 그래도 속는 척해줘야지 별수 있나.
서른한 살 직장인 남성이면 이제 슬슬 청바지도 잘 안 어울릴 나이인데, 화이트 팬츠에 푸른색 깅엄체크 셔츠가 어찌나 산뜻한지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보다 더 어리게 볼 것 같았다. 칙칙한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일만 하기엔 오늘 주세영은 너무 상큼했다. 둘이서 확 회사 제끼고 어디 나무 밑에라도 가서 주세영 무릎 베고 노닥거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안 그래도 망상 폭주하는데… 겁도 없이 자기가 먼저 내 얼굴에 손을 대?
붙잡은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중심을 잃은 그 사람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쪽,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여기까지 온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아서 또 참았다. 지금 뽀뽀했다가는 내일 당장 상복 같은 검은 슈트로 완전 무장을 하고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서늘하게 섹시한 맛이 있겠지만 옷차림으로 기분을 나타내는 주세영이니 당분간은 요런 상큼한 차림만 보고 싶었다. 모처럼 그 사람이 긍정적인 마음을 먹어줬는데 설레발치다가 일을 그르칠 수야 없지.
지금의 인내는 차곡차곡 킵해뒀다가 나중에 달게 보상받겠어요, 주세영 대리님. 그러니까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자꾸 나 만지지 마. 아니, 내가 어떻게든 잘 참아볼 테니까 마음껏 더 더 만져줘요. 근데 어떻게 다른 데도 아니고 얼굴을 만질 생각을 해? 싸대기 맞은 것보다 더 불이 번쩍했던 거 알아요?
외근을 돌면서도 몇 번이나 뺨을 만져봤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 말대로 정말 봄이 왔는지 만져볼 때마다 뺨이 따뜻했다. 그 사람을 반찬 삼아 한 발 빼는 짐승이면서 갑자기 웬 순정남 행세인지 스스로 가증스럽기도 했지만, 전에도 말했듯 대부분의 남자는 마음과 몸이 직결돼 있는 생물이기 때문에(때로는 몸이 혼자 제멋대로 독단적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그 사람을 반찬 삼는 것과 순수한 두근거림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 사람을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자위하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그 사람도 이해할 거다. 그래도 반찬 삼는단 얘긴 아직 안 할 거지만.
외근에서 돌아와 보니 그 사람은 벌써 퇴근한 후였고, 집에 가봤자 똥 마려운 개처럼 서성거리기만 할 것 같고, 누나 만난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여자친구 만나러 간 건 아닌지 불안해 죽겠고… 당장 전화하고 싶고, 문자 하고 싶고,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얌전히 집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앞에 놓고 고사를 지냈다.
먼저 메시지 보내주기를 기대한 건 아니고,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적어도 8시까지는 버텨주고 싶었다. 누님과의 단란한 디너를 방해하는 매너 없는 놈으로 취급되긴 싫으니까.
회사에서 가져온 자료도 뒤적여보고, TV 채널도 이리저리 바꿔보고, 연구 좀 해볼까 해서 외근 나간 길에 구입한 잡지도 들춰보면서 꾸역꾸역 시간을 밀어내다가 8시 땡하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 몰라,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어! 십대와 배틀 붙어도 밀리지 않을 속도로 키패드를 두드려 메시지를 전송했다.
벌써부터 의처증 돋는 철없는 우동주의 메시지에 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다정함으로 일격을 가했다.
[누나 만나는 거 맞아요. 난 회 먹는 중인데, 우동주 씬 저녁 먹었어요?]
아, 주세영 진짜….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뭐가 돼? 너무 좋잖아….
한국 사람이 상대의 끼니를 걱정해준다는 건 상투적인 예의일 때도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분명 식욕도 입맛도 밥맛도 없었는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배가 고팠다. 또 한편으로는 네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먹기 싫다고 씨알도 안 먹힐 투정을 부리고 싶기도 했고.
[먹으라니까 먹어야 될 것 같아요. 주세영, 조련질 쩐다.]
사실 그 사람에게 말을 놓고 싶다거나 그 사람이 나보다 연상인 게 마음에 안 든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다. 오히려 연상인 그 사람이 코피 터지게 섹시하다. 죽도록 조련당해도 좋다.
근데도 왜 내가 가끔씩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떼버리고 주세영, 주세영 하면서 올라타느냐.
[까불래?]
이런 반응을 보고 싶어서다.
그 사람에게 듣는 ‘죽을래? 까불래?’가 너무 좋았다. 오한이 오는 것처럼 등줄기부터 어깨까지를 요란스레 부르르 떨게 된다. 좀 전에 샤워를 했어도 온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응, 죽여줘요. 킬링 미 소프틀리, 주세영. 아… 나 진짜 위험한데? 원래 꽤 산뜻하고 반듯한 놈인데 점점 변태가 돼가네.
그 사람이야 의도한 바 아니겠지만 나 혼자 멋대로 조련당하기 시작한 건 꽤 됐다. 내 품에서 격하게 저항하던 그 사람이 서서히 잦아들어 무방비한 뒷덜미를 드러냈던 순간의 느낌은 특히나 짜릿했었다. 가장 좋은 먹이를 던져주는 동시에 가장 따끔한 채찍으로 나를 후리는….
이거 줄게, 조금만 참아봐, 착하지, 응?
그렇게 나오면 별수 있나. 착한 척하면서 또 참는 수밖에.
[득템 좀 했다고 김칫국 마시진 마요.]
당근을 준 뒤엔 꼭 채찍도 잊지 않는 주세영이지만 그렇다고 채찍질만 당하고 있을 우동주도 아니다. 무슨 김칫국이요? 응? 무슨 김칫국? 당신 마음속에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고, 그 바람의 근원지가 우동주고, 내 모든 망상들이 현실화되고 모든 인내를 보상받을 날이 그리 머지않은 것 같다는 김칫국? 근데 그거 김칫국 아니잖아. 현실이고 한창 진행 중이잖아.
난 믿어. 점점 더 확신하게 돼. 당신은 아무 희망 없는 방황으로 나를 고문하지 않으리란 걸. 내게 주는 말 한마디도 당신에게는 큰 의미일 거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만큼 당신이 내게 줄 애정은 쉽게 변질되지 않는 묵직하고 진지한 신뢰감이겠지. 그때가 되면 우리, 제대로 연애해요. 머지않았어.
[싫습니다. 김칫국에 국수 말아 먹을 겁니다. 고향에서 보내주신 백김치 국물이 끝내줘요. 나중에 선배님도 한번 드시러 오세요.]
정말로 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소면 사다 둔 게 있던가…. 나중에 그 사람이 오면 맛있게 한 대접 말아 주고 점수 따고 싶으니 미리 연습 삼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나중에 한번 오라고 했지만, 내가 그 사람에게 하는 말 중에 ‘그냥 해보는 소리’는 하나도 없다. 다 깊은 음흉함과 검은 사심이 깃들어 있는 거지. 떡밥을 던졌으니 부디 못 이기는 척 물어주세영. 내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집에 가기 싫게 만들어줄게. 올 때는 네 마음대로여도 갈 때는 그렇게 안 될걸.
난 하루에도 몇 번씩 참을 인 자만 써대고 있으니까 내 야한 상상 속에서 망상의 대상이 되는 것쯤은 당신도 봐줘요. 망상 속에서도 당신뿐인 놈이니까. 근데 이제 노트가 빽빽하게 차서 더 이상 참을 인 자 써 넣을 자리도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좀 빨리 안 될까?
□ ZOO SE YOUNG
금요일 아침에는 평소처럼 제대로 헬스클럽에도 들렀다. 혹시 우동주 씨가 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언제 언제 오자고 제대로 약속을 하기도 전에 폭탄이 터진 터라 별 기대를 하진 않았다. 어차피 출근하면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 거고.
보기 싫어도 봐야 한다던 사람치고는 어제보다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회사에 가보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다들 출근 시간에는 축 늘어져 맥을 못 추고 있기 마련인데 오늘은 삼삼오오 모여 서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들뜬 분위기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 대리, 주 대리! 그거 들었어?”
역시나 박 부장님이 제일 신나서 이제 막 사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불러 세우는데, 웃음이 만면하신 걸 보니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나 보다.
“경리과 미스 김 있잖아, 김수희 씨.”
그러면서 부장님은 두 손으로 여성의 굴곡을 상징하는 콜라병의 형태를 만들어 보였다. 노골적인 제스처에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네.”
“김수희 씨가 오늘 우동주한테 넥타이 선물했어! 크흐흐―.”
말문이 막혔다. 이제 좀 뭐가 정리되고 머릿속이 개운해지나 했는데, 누가 누구에게 뭘 어쨌다구요?
갑자기 나는 두더지 게임 속의 두더지가 돼버렸다. 그리고 박 부장님이 망치로 사정없이 나를 내리쳤다. 한 일주일 만에 겨우 기분 좋게 출근했더니 이건 또 뭔 일이야. 내 일상이 이렇게 매일매일 스펙터클해도 되는 거야?
“그래서 다들 신나신 거예요?”
겉으로 태연한 척하며 맞장구를 치고 있는 내가 무섭다. 심지어 살짝 웃기까지 하고 있다. 몇 년간의 지난 사회생활은 거짓말에 서툴렀던 한 청년을 양치기 소년 뺨치는 거짓말쟁이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건,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의 일로 김수희 씨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반응이기도 했다.
“둘이 잘만 되면 엔 소프트 첫 사내 커플 탄생이잖아! 선남선녀라 잘 어울리고.”
부장님이 자녀분들도 다 장성하시고 한참 적적해 보이시더니 젊은 사람들 연애사에 본인이 더 신나셨다. 나한테도 틈만 나면 선 얘기를 들이미셨는데, 이제 당분간은 저쪽에 집중하시느라 내 연애사엔 관심 꺼주실 테니, 그건 잘됐다고 봐야 하나?
물론 눈곱만큼도 잘된 일이 아니었다.
“하하.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니에요?”
제가 알기론 우동주 씨는 죽고 못 살면서 공들이는 상대가 있는 것 같던데요, 라는 말을 덧붙여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왜? 우동주도 신수 훤하긴 하지만 김수희 씨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네, 그렇죠. 이런 말 하면 제 자신이 좀 비참해지고 속물처럼 보이겠지만, 외모도 성격도, 그리고 나이도 저보다 훨씬 나은 상대죠. 근데요, 저 이제, 김수희 씨가 아니라 어떤 누가 온다고 해도 우동주를 양보하고 싶진 않아졌거든요.
“아, 그리고 오늘 끝나고 회식. 지난번 프로젝트도 무사히 끝났고, 지금 프로젝트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영업부하고 친목도모 한번 해야지. 경리과 사람들도 부르자고. 선배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나서서 자리도 마련해 주고 그래야지. 주 대리도 빠져나갈 생각 마.”
부장님은 영업부와의 친목 도모를 핑계 댔지만 사실은 김수희 씨와 우동주 씨의 연애에 (이 둘을 묶어 연애라는 말을 붙이려니 상당히 심기 불편하지만, 어쨌든) 마담뚜 기질이 발동해서라는 걸 아마 온 회사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거다.
우동주 씨와 김수희 씨의 스펙을 비교하면서 누가 더 아깝네, 누가 더 기우네, 열을 올리는 사람들의 얘기가 듣기 싫어 흡연실로 나와버렸다. 흡연실에 가 있으면 4층에 몰래카메라 설치해놓은 게 분명한 우동주가 쪼르르 쫓아올 것 같기도 했고. 출근 후의 흡연실, 왠지 이거, 암묵적인 약속처럼 된 것 같다.
진짜 몰래카메라 있나 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막 한 모금 들이마시기가 무섭게 우동주 씨가 허겁지겁 들이닥쳤다. 우동주 씨를 발견한 개발부 사람들이 축하의 환호, 혹은 부러움의 야유를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어떤 새끼야? 부장님 새끼 아니야?
“들었죠… 얘기?”
내 옆에 와서 슬쩍 곁눈질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오늘도 또 새 슈트다. 세 벌을 샀다고 했으니 아마 오늘이 마지막 슈트겠지. 가벼워 보이는 연한 회색 슈트에 페일핑크 셔츠를 입었다. 말로 사람 홀려서 슈트를 세 벌이나 사게 만든 상술만 좋은 점원인 줄 알았는데, 그분 옷 좀 볼 줄 아시네? 아니면 우동주 씨가 몸매가 좋아서 뭘 걸치든 소화가 되는 건가? 선남선녀라….
“무슨 얘기?”
모르는 척 담배 끝에 시선을 주고 있으니 우동주 씨가 말없이 제 목에 걸린 넥타이를 들어 보였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자줏빛의 실크 타이가 셔츠의 색과 어우러지면서 슈트에 무게를 실어준다. 연장자 쪽 그녀가 나에게 선물했던 기하학적인 타이에 비하면, 김수희 씨의 안목이 훨씬 괜찮았다.
“아아― 꽤 괜찮은 걸로 골랐네. 이런 센스가 있는 아가씨인 줄은 몰랐는데.”
넌 줬다고 또 그걸 날름 매고 오냐? 라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 올라왔지만 담배 연기와 함께 깊이 들이마셔 버렸다. 내가 속 터져서 진짜…. 좀 잘해보려고 했던 거 확 틀어버릴까 보다.
“이거 아니거든요? 제가 그걸 왜 매요? 이건 제가 산 거고….”
우동주 씨는 억울한 얼굴로 펄쩍 뛰면서 강하게 부정했다. 아, 그런 거였어? 그럼 진즉 말을 하지. 그 넥타이로 목 졸라버릴 뻔했잖아.
“왜요? 성의를 봐서 좀 매주면 어때서.”
무신경해 보이는 내 대답에 우동주 씨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너, 지금 내가 한 말, 곧이곧대로 들었다가는 나 여태 직진했던 거 그대로 후진해버린다. 아니면 아예 유턴해버릴 수도 있어. 잘 생각해. 깊은 말뜻을 잘 생각하란 말이야.
“아무튼, 오해하지 마세요. 전 절대, 저어어얼대 그분한테 요만큼도 마음 없으니까.”
사실은 이렇게 바로 달려와 굳이 말로 확인시켜 주는 우동주라서 다행이었다. 내 성격에 이성과 사내연애를 했어도 남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었을 텐데, 아직 사귀는 건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검토 중인 상대가 남자다 보니 드러내놓고 말은 못 하고…. 이럴 때 저쪽에서도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 난 바로 삽질 들어갔겠지.
“누가 뭐래나?”
다른 때는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더니 오늘은 영 센스가 없다. 김수희 씨에게 받았다는 넥타이에 진짜 아무 관심도 없어서 툭툭 던지는 줄 아는 건지 구둣발로 바닥을 차면서 억울함을 피력한다.
“아, 진짜!”
이 새끼가 뭘 잘했다고 나한테 짜증이야? 진짜 짜증 나는 사람이 지금 누군데? 누군 뭐 넥타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 받아오는 줄 아냐?
“진짜, 뭐?”
이번엔 나도 같이 맞받아치면서 눈을 딱 맞췄더니 정말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한다는 말이….
“질투하는 척이라도 좀 해주면 안 돼요?”
가끔씩 우동주 씨가 하는 말이나 메시지에 머리가 딩― 울릴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렇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낼 때.
넌 어떻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냐? 듣는 내가 다 쪽팔려서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넌 괜찮아? 그리고 나 지금 엄청 질투하는 중이거든. 모르면 땡이다, 바보 같은 놈.
“보면 진짜 냉정하다니까. 이따… 회식 갈 거죠?”
여전히 내 무반응이 무관심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어쩔 수 없다는 듯 화제를 바꿔버린다. 부루퉁해진 표정을 보니 아마 좀 삐졌나 보다. 그래도 아침부터 두더지 돼서 부장님한테 얻어맞은 나의 충격에 비할 순 없었다.
“선배님 안 가면 저도 안 가요.”
반응 없는 냉정한 주세영인데도 지치지도 않고 치대주는 게 고맙고 이쁘긴 하다. 저 덩치로 내 앞에서 끙끙대는 걸 보고 있자면 귀엽기도 하고. 그러니까 넥타이 같은 거 받아오지 말라고. 나 원래 담백한 남자인데 너 때문에 자꾸 유치해지잖아.
“부장님 보니까 아무도 못 빠질 분위기던데, 뭐.”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오늘은 애초에 빠질 생각이 없었다. 나 안 가면 안 간다는 둥 했지만, 우동주 씨는 신입이라 빠질 엄두도 못 낼 거고, 나 혼자 퇴근해봐야 회식에서 벌어질 일이 궁금해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할 거 뻔한데 집에 가서 뭐 하겠는가.
그나저나 오늘 회식의 목적이 자기와 김수희 씨 엮어주기라는 건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모른다고 해도 절대 내가 얘기해줄 순 없지만. 스물여덟이나 먹었으면 그 정도는 알아서 눈치 까고 행동해야 되는 거지, 내가 그것까지 일일이 어드바이스 해줘야 돼? 나도 더 망가지긴 싫다고.
“아무튼, 이상한 생각하지 마요, 진짜. 넥타이는 나중에 조용히 돌려줄 거니까.”
왼쪽 손목을 털어 시계를 보더니 다시 한번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고는 먼저 흡연실을 나간다. 담배도 한 대 안 피우고 갈 거면서 흡연실은 뭐 하러 온 거냐? 재킷 자락을 펄럭이면서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이 부장님 말대로 정말 ‘선남’이라 못마땅했다. 어느 매장 점원인지 몰라도 그 점원은 대체 저 덩치한테 페일 핑크 입힐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이 이상 근사해지면 나만 곤란하다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우동주 씨가 여자에게 넥타이 좀 선물 받았다고 일에 집중이 안 되다니 스스로가 한심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부장님에게 급한 일이 생겨 회식이 취소되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외근을 나갔다 온 우동주 씨가 시럽 넣은 커피를 사다 주면서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네가 회식에 끌려가서 당할 거 생각하니 벌써부터 혈압이 올라서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언제 이렇게 푹 빠졌지? 분명 나는 이제 막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택시를 타기 전 나를 쳐다본 얼굴이 달려와 키스할 것 같다고 느꼈던 그때부터 사실은 시작이었을까. 아니면 세미나실에서의 다툼이 꼭 연인들의 그것 같다고 느낀 때부터? 정확한 시작점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우동주 씨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엮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싫다는 거다. 그것도 천하의 주세영이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를 걱정스럽게 보는 우동주 씨의 벌어진 재킷 사이를 보는데 가슴이 뛰었다. 그 안에는 정말 나밖에 없는지를 확인받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진짜 곤란하다. 점점 유치해져.
예상은 했지만 회식은 예상보다 훨씬 최악이었다. 고깃집에서부터 시작된 우동주, 김수희 엮어주기는 점입가경과 설상가상을 지나 진퇴양난의 위기로까지 치달았다.
무슨 결혼식 피로연도 아니고, 우동주 씨와 김수희 씨를 나란히 사람들 앞으로 불러낸 부장님은 러브샷을 시키고,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뽀뽀해! 뽀뽀해!’를 연호했다.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이렇게 단합이 잘됐었는지. 우동주 씨가 정색하면서 그러지 말라고 빼는 바람에 뽀뽀는 무산됐지만, 혹시라도 압박에 못 이겨 진짜 뽀뽀할까 봐 내 속이 타들어간 걸 생각하면 하고 안 하고는 이미 중요한 게 아니었다.
평소엔 권해도 사양했던 술을 스스로 따라 마셨다. 술이라도 안 마시면 이 자리를 버티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부장님의 오더 아래 김수희 씨가 직접 싼 쌈을 우동주 씨에게 먹여줬을 때는 아무리 나라도 더 이상 태연한 척하기가 힘들었다.
주변에서 너무 분위기를 몰아가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이해하는데, 아직 사귀는 건 아니라도 버젓이 서로 마음 있는 걸 아는 상대가 다른 사람과 저러고 있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 현실이 짜증스러웠다. 짜증스럽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만큼 마음이 확 상했다. 가라오케로 옮기자며 고깃집을 나설 때쯤에 내 기분은 그야말로 63빌딩에서 떨어뜨린 볼링공처럼 수직하강을 하고 있었다.
우동주 씨는 집에 보내달라며 사정했지만 오늘의 주인공이 2차를 안 가서야 말이 되냐며 부장님은 막무가내였다. 대체 언제부터 오늘 회식의 주인공이 우동주 씨가 된 건지. 본격적인 프로젝트 진행에 앞서 영업부와 개발부의 친목 다지기가 목적이라면서요.
부장님만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가 타깃일 땐 부장님의 도 넘은 참견에 그렇게 치를 떨었던 사람들이 남의 일이 되니 너도 나도 신이 나서 놀려주고 골려줄 만만한 상대를 발견한 사악한 어린애들처럼 2차 장소로 몰려가는데, 이건 뭐… 가자니 속 터지고 안 가자니 그럼 더 속 터지겠고…. 착잡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면서 조금 떨어져 일행들을 뒤따라가고 있는데 부장님에게 붙잡혀 있던 우동주 씨가 슬쩍 빠져나와 내 쪽으로 쭈뼛쭈뼛 다가왔다.
“화났어요?”
이번에는 아니라고 잡아떼질 못하겠다. 담배를 입에 물고 빤히 쳐다만 봤다. 반듯하고 훤한 게 잘나긴 했어. 손바닥으로 이마 한 대 딱 쳐줬으면 좋겠네.
“아, 진짜…. 나 그냥 지금 도망가고 회사 때려치울까?”
내가 대답이 없자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면서 괴로워하는데, 픽 헛웃음이 났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네가 알아서 하면 되지. 네가 그 얘길 그렇게 진지하게 하니까 화도 못 내겠다. 그리고 너 왜 자꾸 말 놓는 주기가 짧아져? 난 한 살 위 선배한테도 아직까지 깍듯하게 존대하는데. 귀여워서 봐준다.
“왜 웃어요….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내가 잘 해보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왜 엉뚱한… 아우, 진짜….”
우동주 씨라고 이런 상황이 좋은 건 아니겠지. 대학 선후배 모임이라면 미친 척하고 뒤집어엎거나 박차고 나갈 수도 있겠지만 사회생활이란 게 또 그렇게는 안 되는 거니까. 그래도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야. 뽀뽀해! 뽀뽀해! 했을 때, 네가 진짜 할까 봐 내가 얼마나 철렁했는지 알아?
“알아서 잘해.”
그랬더니 내 말뜻을 뭐로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단번에 눈빛이 달라진다.
“알아서 잘하면, 상 있어요?”
점수 오르면 핸드폰 바꿔달라는 고딩도 아니고, 내 마음 잡고 싶어서 아쉬운 건 너로 돼있는 거 아니었냐? 근데 내가 왜 상을 줘? 그 발상이 귀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빤히 보고만 있는데 가라오케 앞에 도착한 부장님이 우동주를 찾는다.
“우동주! 너 빨리 안 오고 뭐 하냐!”
고깃집에서부터 벌써 술이 얼큰하게 오르셨던데 어째 까먹지도 않고 끈질기게 우동주를 찾으시는지. 이 자리 전체를 통틀어 막내인 김수희 씨는 아예 반항할 꿈도 꾸지 못하고 이미 가라오케로 끌려 들어간 후였다.
“네, 갑니다!”
손을 번쩍 들어 대답한 우동주 씨는 3분의 2를 태워 거의 꽁초가 돼버린 내 담배를 휙 채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확실히 손이 빠르다. 과거가 의심스러워.
“상 좀 미리 땡겨 받을게요.”
어디서 본 건 많아서, 짧아진 담배를 엄지와 검지로 쥐고 뺨이 홀쭉해지도록 깊숙이 들이마시면서 눈꺼풀을 살짝 일그러뜨린다. 뭐 몸에 좋은 거라고 그렇게 쪽쪽 빠냐? 뭉근하고 진득한 눈빛이 내 눈을 파고들어 와 꼼짝 못 하도록 제 시선 안에 가두었다.
“주세영 선배님은 타액이 많으신가 봐요. 필터가 축축하네. 상 잘 받았어요.”
키스라도 하고 난 것처럼 손등으로 입가를 쓱 훔치더니 내가 뭐라고 받아치기도 전에 등을 보이고 먼저 가버린다. 쟤 뭐라는 거야 지금? 반듯한 놈인 줄만 알았는데 알수록 아니네. 꽁초도 길바닥에 막 버리고, 그다지 모범 청년도 아니었어. 뭐 나도 꼬박꼬박 휴지통 찾아 버린다고는 말 못 하지만.
흡연실에 둘만 있는 시간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언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싫다는 발칙한 생각을 하게 됐지? 부장님에게 끌려가다시피 가라오케 안으로 사라지는 우동주 씨를 보는데, 멀쩡한 내 배우자가 눈앞에서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기분이 착잡하다.
나야말로 회사를 때려치우든 어쩌든 너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 진짜. 어제만 해도 봄이 온 것 같았는데 다시 겨울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공기가 싸늘했다.
내 마음이 내 본래의 속도를 이미 앞질러 가고 있었다. 아찔하다.
□ WOO DONG ZOO
“요즘 옷에 신경 많이 쓰시는 것 같길래 어제 백화점 간 김에 생각나서 하나 샀어요.”
출근하자마자 이게 무슨 일? 오며 가며 인사나 나누고, 외근하고 와서 영수증 제출하러 경리과 올라갈 때나 얼굴 보는 사이인 김수희 씨가 3층까지 내려와 조심스럽게 웬 얄팍한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너무 의외인 상대의 대시라 잠깐 놀라긴 했지만, 자랑은 아닌데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경험한 건 아니라서 예의바르게 거절하려는 찰나 서너 명의 선배들이 한꺼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그 장면을 목격해버렸다. 김수희 씨는 완전 식겁해서 놀라고, 나도 놀라고, 선배들은 당장 둘러싸고 놀리기 바쁘고… 난리도 아닌 아침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매너고 나발이고 그 자리에서 당장, 받을 수 없습니다, 해버리고 싶었지만 눈치도 없이 구는 선배들이 잘못이지, 김수희 씨가 무슨 죄인가. 그런 망신을 줄 순 없었다.
문제는 주세영이었다.
이 얼토당토않은 사건이 그 사람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고, 남의 입으로 듣게 하느니 내가 먼저 선수 쳐야겠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시계만 쳐다보고 있다가 그 사람 출근 시간에 맞춰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근데 아무래도 내가 한발 늦은 건지 유리벽 너머로 사무실을 들여다봐도 그 똘망똘망 기특한 뒤통수는 안 보이고 벌써 소문을 전해 들은 시큼한 개발부 아저씨들만이 나를 알아보고는 환호인지 야유인지 모를 괴성을 질러댔다. 하여간, 어딜 가든 왜 남의 연애에 저렇게들 열을 올리는지. 우리 각자 자기 연애에나 신경 씁시다, 예?
마음이 급해져 거의 달리다시피 흡연실로 쫓아가 보니 쌔끈한 뒷모습 하나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길래, 질투심에 타오르는 속을 다스리고 있나, 좀 기대했는데 웬걸. 그 얘기 하러 여기까지 왔냐는 듯 무심한 태도에 기운이 쫙 빠졌다. 괜히 오해해도 곤란하지만 내가 딴 사람한테 넥타이를 받았다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니. 우리 조금은 분위기 좋아지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이 무심한 남자, 주세영.
사무실 서랍 속에는 찜찜한 넥타이가 들어 있고, 그 사람은 질투도 안 해주고, 하루 종일 일할 맛이 안 났다. 그런 와중에도 그 사람 커피 심부름은 또 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시럽 넣은 커피 대령했더니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흘 동안 모이 하나 못 먹은 병아리처럼 축 늘어져 있어서 속이 탔다.
“일에 문제 있어요?”
“아니.”
“안 좋아 보여…. 점심 안 먹었어요?”
“먹었어."
화났을 때 발끈해서 쏘아붙이는 반말도 좋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아 살짝 투정 부리듯이 해주는 반말에 나는 거의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 사람의 머리가 내 어깨에 툭 기대온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부르르 진동이 왔다.
반말 존댓말 섞어가며 얘기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런 때는 친한 후배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라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오늘은 확실히 방어벽이 쑥 내려간 느낌이었다.
항상 곧은 자세를 유지하던 그 사람의 등과 어깨가 둥글게 굽어 있는 옆모습이 측은한 한편 사랑스러워서 자꾸 손이 가려고 했다. 등을 쓰다듬고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살짝 내 쪽으로 끌어당겨 뺨에 입을 맞추면서 달콤한 밀어로 그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다.
우리 주세영한테 누가 그랬어? 내가 다 혼내줄게요. 퇴근하면 백화점에 가서 당신 기분이 좋아질 만한 걸로 뭔가 살까? 타이도 좋고, 당신 소매에 매달려 있으면 왠지 똑똑, 야무진 소리가 날 것 같은 커프스링크도 좋고, 슈트 한 벌을 그대로 사들여도 좋고. 뭐든 좋으니까 당신이 기운 차릴 만한 걸로. ―이런 말로 부드럽게 어르고 위로해 결국엔 그 사람이 마치 ‘너 때문에 내가 산다’라는 듯 엷게 웃는 것만 볼 수 있다면.
“어디 몸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이번 주만 해도 월요일에 나랑 다투고 화요일 결근에 수요일은 출장, 새벽까지 일하고 났더니 같이 출장 간 후배놈한테서 고백…. 병이 나도 이상할 게 없긴 하지. 화형류의 난초처럼 섬세하고 예민한 주세영이 견뎌내기에는 분명 벅찼을 거야.
“아니야, 그냥 춘곤증이 좀 오는지….”
커피 사다 준 것에 대한 답례인 것처럼 그 사람은 딱 담배 한 대 피울 동안만 얼굴을 보여주고는 사무실로 돌아가 버렸지만, 나는 잠깐 동안 복도를 서성거리며 데스크 앞에 앉은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세영 선배님, 나 너 좋아서 어쩌냐. 빨리 주세영 공식인증 애인이 돼서 당당하게 참견하고 마음껏 걱정하고 실컷 챙겨주고 싶다. 언제 돼요? 나 이러다 수전증 오게 생겼어.
아까는 딴 사람한테 받은 넥타이에 관심도 없어 보여서 좀 시무룩했는데, ‘나 오늘 힘들어’ 하는 투의 약한 모습 반말 공격이라니…. 이 밀당의 고수야, 당신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진짜 오케이 사인은 대체 언제 떨어지는 거야? 응?
사무실에서도 선배들이 무슨 구경거리 난 것처럼 몰려들어서 김수희 씨와 관련해 질문 세례를 퍼부어댔기 때문에, 회식 가서도 김수희 씨하고 나하고 엮으려고 난리 좀 나겠구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사회생활의 어두운 면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다 성인들인데 대충 불편하다는 티 좀 내면 알아서 분위기 파악하고 그만둬주겠지 싶었는데, 다들 짓궂고 능글맞기가 군대 선임 저리 가라였다. 러브샷까지는 백 번 양보해 장난으로 봐줄 수 있다 쳐도, 나중엔 무슨 말도 안 되게 뽀뽀까지 하라고 난리를 하는데… 와, 나 진짜 주세영 보기 민망해서….
진짜 서로 마음 통한 두 사람한테 이런다 해도 매너가 아닌 건데,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던 김수희 씨조차도 당연히 그 자리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나도 사회생활 초짜지만 그래도 난 스물여덟 먹으면서 나름 더러운 꼴, 이상한 꼴 겪어온 경험이라도 있지, 스물다섯도 안 된 여동생 같은 사람 세워두고 이러고 싶어요, 다들? 이거 나한테도 김수희 씨한테도 엄연한 성희롱 아니냐구요.
떠들썩한 와중에 1차 자리가 끝나고 심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제발 집에 보내주십사 부장님들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지만, 사무실에서는 그토록 너그럽고 자상하셨던 우리 부장님마저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나의 애원을 깨끗하게 기각하셨다. 다들 무슨 약을 잘못 드셨는지 평소에 내가 알던 선배들이 아니었다.
같이 쇼핑했던 날 입었던 간절기용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일행과 멀찍이 떨어져 걸어오던 그 사람이 잠깐 멈춰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게 보여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갔다.
무시하거나 냉랭하게 대할까 봐 불안했지만 화났냐는 물음에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기만 하는 표정을 보고 확실히 안심했다. ‘너, 미워.’ 라고 얼굴에 써 있었다. 그렇게 노력해도 보이지 않았던 그 사람의 속이 훤히 비쳤다. 그래도 이 난리통에 단 하나 좋은 건, 주세영이 질투를 해주고 있었다는 것.
알아서 잘해, 라며 은근히 협박했을 때는 좋아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알아서 잘하라니, 알아서 잘하라니. 뭘? 내가 왜?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내가 뭘 알아서 잘해야 될까요? 이러면서 아직도 튕기지? 사람 실컷 간지럽게 만들어놓고 또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머뭇거리면서 뒤로 물러날 생각이에요? 그렇게는 안 돼. 나 이제 빨리 당신하고 애인 같은 짓 좀 하고 싶다고.
그 사람의 입술에 물려 있는 담배가 초콜릿 스틱처럼 달콤해 보여 탐이 났다. 마음 같아선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불쑥 끌고 들어가 1차에서 먹은 갈비 따위 무시하고 질척한 키스를 나누고 싶었지만 겨우 키스 한 번으로 주세영을 날려먹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사람의 입술에 물렸던 담배를 가로채는 것으로 당장의 아쉬움을 달랬다.
차갑게 젖은 필터가 입술에 닿은 순간, 끝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의 목덜미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이제 다음 코스로 나아갈 때였다.
“주세영 선배님은 타액이 많으신가 봐요. 필터가 축축하네. 상 잘 받았어요.”
아침마다 팬티를 적시는 몽정기의 중딩도 아니고 남이 피우던 담배나 빨면서 흐뭇해할 나이는 아닌데. 당신이 자꾸 비싸게 구니까 나같이 멀쩡한 남자가 길거리에서 성희롱 멘트나 날리고 있잖아. 내가 이제부터 당신에게 받아내고자 하는 상은 겨우 이런 게 아니라고. 예고편에 불과해, 이건.
주세영의 담배를 입에 댄 순간 내 안의 뭔가가 울었다. 700마력의 12기통 6,500cc 엔진이 우는 소리였을 수도 있고, 사흘 밤낮을 굶은 육식동물이 사슴 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를 맡고 우는 소리였을 수도 있다. 닿을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꽃 한 송이 때문에 필사적으로 팔을 뻗고 있는데 마침 방향을 제대로 탄 바람에 실려 그 꽃의 아찔한 향기가 콧속으로 훅 밀려들어 온 격이었다. 이젠 몸을 날려서라도 그 꽃을 꺾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고백을 받고도 그 사람은 나를 내치지 않았고, 내가 껴안은 뒤에도 나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요즘 주고받은 메시지만 보면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라고 할 정도다. 아니라고 하면 주세영은 그냥 날 갖고 논 거지. 주세영은 절대 누굴 갖고 놀 위인이 못 되고.
나 믿고 한 번만 당신 감정이 시키는 대로 따라와 봐. 질투 나면 질투하고, 끌리면 끌려오고, 갖고 싶으면 그냥 가져. 자꾸 클릭하면서 찜만 하지 말고 장바구니에 넣어서 결제를 하라고, 이 남자야.
1차 때까지만 해도 벌레 씹은 얼굴로 당장이라도 고깃상 엎을 기세로 비협조적이었던 나는 2차에서는 전의를 상실했다. 정말로 내가 회사 때려치울 생각 하고 이 부조리함을 진지하게 역설하지 않는 한, 선배들은 김수희 씨나 나의 곤란함을 고려해줄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에.
김수희 씨와 나는, 어차피 이 정도 반항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으니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장단을 맞추기로 선배들 안 보는 곳에서 얘기를 맞췄다. 자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다며 김수희 씨는 미안해했지만, 그녀에게 한 말처럼, 김수희 씨가 미안해 할 일은 전혀 아니었다. 넥타이 하나 받은 걸로 당장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흥분한 저 룸 안의 아저씨들이 문제였지. 평소엔 별로 나쁜 아저씨들은 아닌데, 이런 데서 이렇게 구리게 나올 줄이야. 나도 사회생활 5년 차 되고 10년 차 되면 저렇게 될까 겁나네, 아주 그냥. 주세영 봐. 주세영은 안 그러잖아.
술기운의 도움이라도 받기 위해, 테이블에 술이 세팅되자마자 얼음에 희석시키지도 않은 양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표정은 여전히 뻣뻣했지만, 이젠 김수희 씨도 나도 무의미한 반항은 그만두기로 했다. 무반응으로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오히려 재미없어서 그만둘 것 같았다. 그쪽에 희망을 거는 게 차라리 빠르지 싶었다.
“우동주, 오늘 김수희 씨가 준 넥타이 한번 해봐라!”
“그래, 해봐, 해봐!”
내가 조금 고분고분해지자 흥이 오른 개발부 박 부장님이 먼저 운을 띄웠고 모두 합심해서 분위기를 몰고 갔다. 노래를 부른다 춤을 춘다 술을 돌린다 하면서 다들 자리에서 들락거리느라 어느새 저 안쪽 상석으로 밀려난 그 사람을 힐끔 쳐다봤지만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외면해버렸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주세영? 좋아, 잘하고 있어. 근데 이 모든 상황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전개되고 있으며, 나 역시 이 상황의 순수한 피해자 중 한 명인 거. 그건 꼭 인지하고 질투해. 안 그럼 지금 나의 고통이 억울해서 안 돼.
그 사이 박 부장님은 담배를 삐뚜룸하게 문 채로 직접 케이스를 열어 넥타이를 꺼내 김수희 씨에게 쥐여주었다.
“자― 김수희 씨가 이놈 한 번 꽉 졸라매봐.”
어디가 웃긴지 알 수 없는 부장님의 멘트에 다들 박장대소를 했고, 주세영은 얼음이 담긴 온더록스잔에 술을 따랐다. 아, 옆에 가고 싶다. 반드르르하게 잘 차려입은 남자가 흥청망청한 주변 분위기와 동떨어져 흐트러진 모습으로 빈틈을 보이고 있으면 응당 파고들어 주는 게 매너인데, 내가 지금 살짝만 매너 없을게.
노래방 기계 앞으로 불려나와 마주 선 김수희 씨와 나는 짧은 순간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이 순간 그녀와 나는 전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어정쩡하게 넥타이를 손에 쥔 채 김수희 씨가 한 발 더 다가왔고, 키 차이가 꽤 있었기 때문에 나는 두 발을 양쪽으로 벌려 키를 낮췄다. 그것만으로도 선배들은 좋다고 난리였다. 유부남들도 꽤 있고, 여자친구 있는 선배들도 있는데, 다들 왜 저렇게 남의 연애에 목을 매는 건지. 남의 일이니까 그렇겠지. 남의 일은 뭐든 다 재밌으니까.
셔츠의 깃을 세우고 원래 매고 있던 자줏빛 타이를 끌러내자, 김수희 씨가 망설임이 없는 재빠르고 기계적인 손길로 새 타이를 두르고 매듭을 지었다. 김수희 씨, 굿 잡.
“무드 없이 뭐냐 그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냐!”
선배들은 야유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짐승들이 무드를 찾는 것이야말로 모순이었다.
“왜요, 넥타이 하라고 하셔서 했잖습니까.”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새 넥타이를 쥐고 어깨 너머로 휙 넘기며 넉살을 떨었다. 흥분으로 반짝거렸던 부장님의 얼굴이 심드렁해진 걸 보니 김수희 씨와 나의 작전이 어느 정도 먹히는 것 같았다.
“둘이 노래 한 곡 찐한 걸로 같이 해! 그럼 봐준다!”
지금 누가 누굴 봐주고 있는 건데, 뭐래냐. 미간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젠 다들 술도 얼큰하게 들어갔고, 정말 노래 한 곡 제대로 하면 풀어줄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놀려먹을 만큼 놀려먹고 이제 흥미 떨어진 거다.
딱 한 사람. 안쪽 자리의 주세영만이 좀 전보다 훨씬 어두워진 얼굴로 자작을 해대고 있었다. 어째 질투의 영역을 점점 벗어나 분노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아, 슬슬 완전히 끝을 내야 할 것 같았다.
김수희 씨와 나는 선배들이 만족하고 깨끗하게 인정할 만한 곡으로 트로트를 골랐다. 김수희 씨는 가만히 서서 박수만 쳐도 내가 리액션을 화려하게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내 환영회를 겸한 회식 때 술을 많이 마신 것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으니, 뒤늦은 신고식이라 생각하면 망가지지 못할 것도 없었다. 빼는 타입은 아니다. 이 판을 벌인 의도가 마음에 안 들 뿐.
다행히 선곡이 먹혔는지, 선배들은 우리가 고른 곡명이 화면에 뜨자마자 열렬히 환호했다. 물론, 주세영 선배님 제외.
한 점 부끄럼 없이 이 한 몸을 불살랐다. 선배들이 공감할 만한 온갖 옛날 춤을 동원했고, 그냥 박수만 치고 있어도 된다고 했는데도 김수희 씨가 어색하게나마 내 춤을 따라 추기까지 한 덕에 선배들의 만족도는 두 배로 높아졌다. 하이라이트 후렴구에서는 가사에 맞춰 내가 김수희 씨에게 손을 내밀고, 김수희 씨가 가볍게 그 손을 잡는 쇼맨십까지 벌였다. 이거 먹고 좀 떨어지라는 선배들을 향한 떡밥이었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사람, 의자 위로 올라서서 껑충껑충 뛰는 사람, 박수를 치며 뒤집어지는 사람까지. 선배들은 완전히 만족한 것 같았다. 역시나 주세영 선배님만큼은 팔짱을 단단히 낀 채 무서운 기세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주세영의 반응과 무관하게 내 의도대로 부장님들 이하 선배들은 완전히 만족해했고, 우리의 장렬했던 쇼가 끝나자마자 이번엔 너도 나도 무대로 뛰쳐나와 본인들의 흥을 펼치기 바빴다.
고생 끝에 겨우 해방된 김수희 씨와 나는 각 부서의 막내들답게 무대 바로 앞 끄트머리 자리에 앉아 맥주를 한 잔씩 나누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했다. 치열한 전투였다.
선배들에게 불려나가 춤을 추고, 말도 안 되는 비트박스를 하고, 그러는 틈틈이 차고 넘치는 술을 받고. 그러다 또 막내 지정석으로 돌아와 맥주 한 잔에 목을 축이고 있자니, 팬츠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올 게 왔구나 싶어 반사적으로 그 사람 쪽을 쳐다봤다. 주세영은 막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옆에 앉은 김수희 씨에게서 살짝 등을 돌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 메시지 하나에 우리 관계의 존망이 달린 것 같은 엄숙한 기분마저 들었다.
[좋냐?]
어, 좆나 좋아. 당신이 나 때문에 똥줄 타서 이런 문자를 보내줬는데 그럼 내가 안 좋아? 천하의 주세영이 얼마나 속이 터졌으면 먼저 이런 문자를 다 보냈을까 생각하니 살 떨릴 정도로 좋았다. 신경 쓰여 죽겠지? 아마 마음 같아서는 다 팽개치고 집에 가버리고 싶을 거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가봤자 자기만 속탈 것 같거든. 오지도 가지도 못한 채 김수희 씨와 내가 벌이는 전투를 고스란히 관람해야 했으니, 그 전투가 내 의지와는 관계없다는 걸 자기도 뻔히 알지만 알면서도 내가 밉고… 그런 거잖아요, 지금.
[선배님까지 왜 그러세요. 진짜 죽을 맛이었구만.]
[왜? 하라는 대로 꼬박꼬박 말도 잘 듣던데. 입이 찢어지더라?]
에이, 그건 진짜 아니다. 내가 언제 또 입이 찢어졌어? 당신 문자 받고는 쪼금 찢어질 뻔했지만 그것도 허벅지 비틀어가며 꾹 참았는데. 우리 세영이, 너무 열 받아서 헛것을 봤구나?
[음. 당신 말이라면 진짜 꼬박꼬박 잘 들을 자신 있는데. 회사에서도, 그… 침대에서도.]
오늘 지나고 내일이면 토요일인데 내일은 또 무슨 핑계를 대서 당신을 불러낼까 고민하기 싫다. 주5일제가 원망스럽다고 하면 지금 여기 있는 선배들은 날 두들겨 패겠지. 나도 주5일제를 좋아하고 싶다고. 주말엔 우리 집 당신 집 왔다 갔다 하면서 실컷 애정행각도 하고 드라이브도 가고 영화도 보고…. 아니, 솔직히 사귀게 된다면 당분간은 집에만 묶어두고 싶어. 하루 종일 당신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다가 일요일이 가는 게 아쉬워서 당신 목덜미에 코를 부비면서 한 판 더 하자고 조르고 싶어. 뭘 한 판 더 하냐고? 게임? 고스톱? 피자?
[너 미쳤냐? 아니면 벌써 취했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거 보니까 내 문자가 많이 당황스러웠나 보다. 뭘 그렇게 놀라? 다 큰 성인이 좋다고 들이대는데, 그럼 아까 노래 가사처럼 손만 잡아도 좋다고 할 줄 알았어?
당신은 안 궁금해요? 다른 사람들은 못 보는 내 벗은 몸. 어떤 식으로 혀를 움직여서 키스하는지, 발기하면 어떤 색과 모양이 되는지, 어떻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사정하는지 진짜 안 궁금해? 안 궁금하다고 해도 나는 알려주고 싶은데. 맨날 자기는 고추도 안 달린 것처럼 순결한 척만 해.
[질투하죠? 아… 주세영 질투하니까 좆나 귀엽다. 못 참겠어.]
아무리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고 금욕적인 분위기의 당신이라 해도 결국은 남자고, 그럼 밑에 나랑 똑같은 거 달렸을 테고, 그 아들놈이 주는 신호로 상대에 대한 호감도를 어느 정도 감지할 텐데. 날 봐도 아무 느낌 없어요? 질투는 할 줄 알면서 나하고 살 맞대고 싶단 생각은 안 들어? 당신, 나 싫은 거 아니잖아. 요즘 최대 관심사, 우동주 맞잖아.
[알아서 잘하라고 했지? 지금 잘하고 있는 거냐?]
정말 화났나 보다. 한 손으로 메시지를 찍으면서 담배를 쥔 다른 손으로 단정히 정돈되어 있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다. 대체 어떤 헤어제품을 쓰는지 고정되어 있는데도 딱딱하게 굳지 않고 늘 촉촉해 보이는 머리카락이 손가락으로 훑어내자 이마를 가리며 흘러내렸다. 그럼 또 쓸어 넘기고 또 흘러내리고 또 쓸어 넘기고…. 주세영 바보네.
이리 와봐요, 하고 곁에 앉아서 다시 잘 만져주고 싶다. 머리카락에서 귀 뒤로, 목덜미로, 항상 깨끗하게 다려진 셔츠의 깃 사이에 감춰진 깊숙한 곳까지. 그의 냄새를 흠뻑 들이마시고 싶었다. 곁에 있으면 순간순간 스치는 상쾌한 향은 코롱일까 향수일까 아니면 애프터세이브일까. 그런 것도 궁금하긴 하지만, 인위적인 향을 전부 제거한 순수한 주세영의 살 냄새가 제일 궁금했다.
취한 척 연기 좀 해보려고 술 마셨는데 취하진 않고 괜히 기분만 꼴릿해졌잖아. 왜 인간은 술을 마시면 성욕이 강해지는가. 선배님은 혹시 답을 아시나요. 어쨌든 나보다 3년이나 더 살았잖습니까.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거 선배님도 다 봤잖아요.]
그 사람의 시선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약간 술이 오르는 척 고개를 푹 숙이고 몇 번 세게 흔든 뒤 잔을 새로 채웠다.
[너 술 그만 마셔.]
같이 고생한 김수희 씨한텐 미안하지만, 이쯤 되면 판을 만들어준 선배들한테 고마울 정도였다. 아니, 한 번쯤 용서는 해줄 수 있을 정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주세영이라니.
[싫은데? 내가 누구 때문에 술을 마시는데 나보고 술 먹지 말래.]
그런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지간히 마셔서는 내가 취하지 않는다는 걸 다들 아니까 평소보다 훨씬 부지런히 마셔댔다. 취한 것까진 아니어도 확실히 기분이 느슨해지면서 알딸딸하긴 했다. 중간중간 개발부 부장님이 말아주신 폭탄주만 해도 몇 잔을 마셨는지.
[진짜 이럴래?]
맨날 이렇게 돌려서 얘기하지? ‘네가 그 사람한테 관심 있건 없건 당장 엉덩이 떼고 내 옆으로 와’라고 왜 못 해? 그래도 여기까지 해줬으면 주세영 많이 양보한 거니까 이쯤에서 나도 한 수 물러줘야겠지.
[나, 그쪽으로 가도 돼요?]
[묻지 마. 대답하기 싫어.]
정말 대답하기 싫으면 대답하기 싫다는 문자도 보내지 말았어야지, 바보야. 지금까지 당신하고 사귀었던 사람들, 당신이 이렇게 질투로 파르르 떠는 모습도 본 적 있을까? 아마 내가 최초일 것 같은데. 나 좀 우쭐해져도 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상석 자리로 비집고 들어갔다. 몇 번이나 테이블을 헛짚고 선배들의 허벅지 위로 고꾸라지는 명연기를 펼치면서.
“한 잔 주세요, 선배님.”
빈 잔을 하나 가져다 두 손으로 주세영 앞에 척 내밀었더니 아예 잔을 뺏어가 버린다.
“그만 마셔.”
이젠 완전히 말 놓기로 한 건가? 아니면 또 월요일 되면 다시 존대? 월요일까지 못 보는 건 싫다. 주말은 당연히 같이 보내는 사이가 되고 싶어.
“왜요…. 선배님 술 한번 받고 싶어서 그러는데….”
고개를 푹 떨군 채 중얼거리자 그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너 취했어.”
“하하… 안 취했습니다…. 저, 술 세요…. 아시잖아요….”
고개를 숙인 그대로 상체를 밀어 그 사람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마구 치댔다. 셔츠에 코를 대자 좀 더 짙은 향기가 끼쳐왔다. 얇은 셔츠 아래로 그 사람의 피부와 근육이 느껴졌다. 이대로 이를 세워 물어버리고 싶었다.
“혹시 향수 써요? 냄새가 왜 이렇게 좋아….”
취한 척 그 사람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하지만 몸이 딱딱하게 경직된 그 사람은 내 얼굴을 밀어내면서 뒤로 슬쩍 물러앉았다.
“정신 좀 차려봐.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취했어?”
허둥지둥 내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자기도 영 싫기만 했던 건 아니구만. 찌릿했어? 그거 왔어? 그렇게 가까이 닿으니까 완전 미치겠지? 술 마셔서 그런지 당신 지금 체온도 꽤 높더라. 아니면 내가 옆에 있어서 그런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주세영 질투 유발 및 가라오케 탈출 작전이 동시에 완성될 것 같았다. 비틀비틀 일어나 저만치 떨어져 놓인 술병을 잡으려고 상체를 기울였다가 테이블을 짚고 있는 손이 미끄러진 것처럼 위장해 술병은 물론이고 컵과 안주 접시까지 제대로 엎어버렸다.
<청춘을 돌려다오>를 열창하고 계시던 개발부 부장님마저도 잠시 멈칫하고 이쪽을 쳐다봤을 정도로 요란한 소동이었다. 이 정도는 해줘야 주세영 데리고 여길 빠져나갈 구실이 생기지.
“아이구, 얘들이 왜 이러냐…. 하하… 여러분, 저 안 취했습니다. 멀쩡해요. 죄송합니다아―.”
집중된 시선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모두 어느 정도 취해 있는 상태라 주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때 나의 전우였던 김수희 씨도 되지도 않는 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에서 겨우 풀려나 아저씨들의 쇼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막내들은 그저 분위기 띄우는 용도고, 그 다음부턴 본인들이 재롱떠는 이상한 아저씨들이었다. 이제는 제각각 자신들의 취기에 흥이 올라 있을 뿐, 우동주와 김수희 주연의 드라마는 모두 싹 잊은 것 같았다. 이렇게 깨끗하게 잊을 거면 왜 그렇게 집착을 해댔던 건지 허무할 정도로.
“너 뭐야. 진짜 취했어?”
황급히 나를 잡아당겨 자리에 앉힌 그 사람만이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안 취했다니까요. 뭘 취해요? 저 양주 두 병까진 끄떡없습니다.”
그러면서 또 술병으로 손을 뻗으려고 하자 아예 술병을 저쪽으로 치워버린다.
“그만 마셔.”
“싫어요…. 술 주세영… 흐흐흐….”
“하나도 안 웃기거든?”
“줘…. 술이라도 달라고.”
“…….”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내 괴로움의 근원이 어디인지, 그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
오늘은 정말 보내기 싫었다. 그 사람은 이미 너무 많은 떡밥을 뿌려줬다. 우리의 피부가 가까이 닿았을 때 흐른 전류가 나의 일방적인 착각이 아니라는 것에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내가 소파 아래로 한 번 구르고 나서야 그 사람과 나는 가라오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두 부장님들을 비롯해 다들 못 간다며 아우성을 쳤지만 한번 마음먹은 주세영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우동주 씨가 술이 세다고 해도 그렇지 그 술 센 사람이 이렇게 될 때까지 먹이시면 어떡하냐고, 개발부 부장님은 잔소리까지 들었다. 그 사람이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좋아서 취한 척 푹 숙인 고개 안에서 슬쩍 웃었다.
나를 부축하는 주세영에게 기대 계속 취한 척을 하며 룸을 빠져나올 때, 김수희 씨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김수희 씨도 잘 가라며 선배들 모르게 살짝 손을 들었다. 고마웠어요. 그리고 오늘 보니까 남의 드라마에 환장한 사람들만 있는 거 아니고, 김수희 씨한테 진심으로 충성할 남자들도 여럿 있는 것 같던데 잘 살펴봐요. 난… 아무래도 게이인 것 같아.
“나 안 가요…. 가기 싫어….”
도로변으로 나가는 길에서 간다 못 간다, 그 사람과 잠깐 실랑이를 벌였다. 마음 같아서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당장 택시에 태워 우리 집으로 내빼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동화책 속의 나무꾼은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선녀를 놓쳤지만 난 그런 아마추어가 아니지. 그동안 써댄 참을 인 자 다 보상받으려면 끝까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이렇게 돼? 드링크 하나 마실래?”
“욱― 나 그거 진짜 안 받아요. 마시면 다 토해….”
“가지가지 한다, 진짜. 집 어디야? 택시 잡는 사람은 왜 또 이렇게 많아?”
“집? 우리 집 군산이지.”
나는 픽픽 웃으면서 내 허리를 붙잡아 부축한 그 사람의 손을 슬쩍 겹쳐 잡았다. 주변에는 우리 같은 커플(?)들이 넘쳐났다. 술에 취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번갈아가며 상대의 볼에 뽀뽀를 하는 아저씨들까지 있었다. 대체 술만 마시면 왜들 저러는지. 하긴 저런 아저씨들이 있어서 그나마 주세영이 지금 나하고 달라붙어 있어주는 거니까 감사해야지. 이름 모를 어느 회사의 과장님이신지 부장님이신진 몰라도, 두 분 모쪼록 예쁜 사랑 하세요.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야. 집이 어딘지 알아야 택시를 잡을 거 아니야. 아무 데나 다 가주지도 않는다고.”
“몰라…. 안 가…. 같이 안 가면 택시 안 타요….”
그 사람 등 뒤에 거의 매달리듯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목덜미 윗부분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너 진짜 이럴래? 똑바로 좀 서!”
그 사람은 발끈하면서 어깨에 두른 내 팔을 확 걷어냈다. 목에다 코 좀 갖다 댔다고 뺨이라도 갈길 기세다. 주세영, 됐거든. 너 목에 소름 돋은 거 내가 다 봤어. 너도 신호 왔지?
입맛을 다시고 있는 속마음을 숨긴 채 풀 죽은 척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살짝 휘청거렸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와 다시 나를 부축해준다. 하여간 마음 약해서 큰일이다. 일단 내 거 만들어놓고 나면 이 부분은 진짜 확실히 해야지, 안 그러면 겁나서 밖에 내놓질 못하겠다. 불쌍하다고 온갖 놈들 다 받아주면 안 되니까.
“집 어디야. 데려다주고 갈 테니까.”
“한남동.”
“한남동?”
그 사람은 의외라는 듯 한 번 더 되묻더니 택시를 잡는 사람들 틈에 끼어 속도를 줄이고 지나가는 택시에 대고 열심히 한남동을 외쳤다. 10분 남짓 그 짓을 하고 난 뒤에야 우리는 겨우 모범택시 한 대를 잡아탈 수 있었다. 취한 척을 하는 와중에도 같이 안 타고 도망가 버릴까 봐 그 사람을 먼저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한남동 어디야? 우동주, 너 진짜 정신 안 차릴래? 집 어디냐고!”
이제 회사 사람들도 없겠다, 안쪽 자리에 앉은 그 사람에게 거의 무너지듯이 몸을 기대고 허리를 끌어안았더니, 기겁을 하면서 나를 밀어내는 바람에 좀 상처받았다. 기사 아저씨 때문에 그래요? 에이, 뭐 어때. 한 번 보고 말 사이인데. 그리고 어차피 어두워서 이 정도 스킨십은 보이지도 않아.
“한남동….”
“그니까 한남동 어디?”
기사님에게 내비게이션에 우리 빌라 이름 찍으라고 불러준 뒤 다시 그 사람에게 엉겨 붙었다. 밀어내고 밀어내도 계속 덤벼들어 허리를 끌어안자 나중에는 그 사람도 포기했는지 등 뒤로 살짝 팔을 둘러주기까지 했다. 내가 취한 줄 알고 드디어 은근슬쩍 본심을 드러내는 거지.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응?”
“뭔 소리야. 너 내려주고 난 우리 집 갈 거야. 마음 같아선 버려두고 가고 싶은 걸 참는 거니까 고마운 줄이나 알아.”
말은 그러면서도 내 코를 살짝 집어 비트는 눈이 가라오케에서와는 비교도 안 되게 다정했다. 내가 응석부리니까 지금 나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주세영. 근데 어쩌나. 이거 다 페이크인데. 지금 내 속을 알면 귀엽단 생각은 절대 못 할걸.
“왜… 자고 가요…. 국수 해줄게…. 나 연습도 했어요…”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허리에 매달려 그렇게도 꿈꾸었던 그 사람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지르고 있으려니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당장 재킷의 라펠을 젖히고 셔츠의 단추와 단추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싶었다. 가까이 달라붙어 있으니 주세영 냄새가 솔솔 피어올라 후각이 한껏 자극됐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게 무슨 국수야….”
그러면서 내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만지는데 간지러워 죽겠고, 좋아서 죽겠다. 머리카락엔 분명 신경이 없을 텐데. 그리고 간지러운데 왜 소름이 돋지? 지금 내 몸의 감각 기관들이 어딘가 고장난 게 분명해.
“할 수 있어…. 자고 가요…. 우리 집 안 궁금해?”
긍정적인 반응에 용기를 얻어 그 사람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려 이번엔 목덜미에 파묻었다. 그랬더니 이 남자, 이번엔 밀어내지 않고 잠자코 목을 내주면서 한다는 대답이….
“궁금해….”
순간, 취한 척이고 타이밍이고 뭐고 그나마 알딸딸했던 술기운마저도 전부 날아가는 것 같았다. 회피하는 것도 아니고 돌려 말하는 것도 아닌, 처음 들어보는 제대로 된 긍정적 대답이었다. 그거 무슨 뜻이냐고 다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안 그래도 차곡차곡 올라가고 있던 흥분 게이지가 극에 달했다. 숨이 찰 지경이다.
얼굴을 뒤척이는 척하면서 그 사람의 목에 입술을 댔다. 움찔거리며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빨고 싶어…. 그냥 입술만 대는 게 아니라 힘껏 빨아들여서 멍울을 만들고 싶다고. 가볍게 물고 잘근거리면서 장난치고 싶어. 넥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고 싶어. 목에 입술을 파묻은 채로 셔츠의 버튼을 똑똑 따고 싶어. 그 사이로 내 손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걸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어. 미치겠다, 진짜.
그 사람을 향한 욕망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일부러 좀 끈적한 움직임으로 몸을 비볐다. 그 사람은 빳빳하게 몸을 굳히긴 했지만 나를 밀어내진 않았다.
허벅지 옆에 놓인 손을 끌어다 잡았더니 아주 심란해 보이는 눈으로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고민하고 있는 거라면 제발 이젠 결정을 내려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목소리를 낮춰 그 사람의 고민을 응원했다.
“미치겠어…. 당신 너무 섹시해….”
내 손 안에 잡혀 있던 주세영의 손이 힘주어 내 손을 마주 꽉 붙잡았다. 귓속에 혀를 밀어 넣을 뻔했다. 그대로 타이를 잡아당겨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고 입술을 집어삼킬 뻔했다. 각질 하나 일어나지 않은 매끈매끈한 입술. 담배 피울 때나 커피 마실 때나 밉살맞은 소리를 할 때조차도 섹시한 그 입술.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선뜻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 사람의 손을 잡아끌어 빌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뭐야… 이런 데 살아? 우동주 씨 진짜 재벌 집 아들이었어?”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그가 빌라에 대해 한마디 했지만 그저 긴장감을 감추려는 말로밖에는 안 들렸다. 사실은 지금 집이 어떻건 그런 거 관심도 없으면서.
“진짜 재벌 집 아들은 이런 데 안 살아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돌변해 그 사람을 코너에 몰아놓고 키스하고 싶었지만, 취기가 사라지지 않는 척 얌전히 그 사람의 어깨에 기대 있기만 했다.
“자고 갈 거죠?”
가장 좋은 타이밍을 찾아 감각을 곤두세운다. 6,500cc의 엔진은 질주할 준비가 끝났다. 부릉부릉.
“방은 많아 보이네.”
“각방 쓰겠다고?”
각방이라는 말에 시선이 흔들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서른한 살이 무슨 부끄러움이 이렇게 많은지. 누가 보면 그런 쪽으로 경험 하나도 없는 줄 알겠네. 하긴, 남자 경험으로 보자면 당신도 나도 다 총각인 게 맞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도 망설이고 있길래 “나 어지러워요.” 하면서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자 문득 정신이 든 사람처럼 놀라면서 복도로 내려섰다. 도어록을 누를 때는 일부러 두 번쯤 틀려줬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 사람은 핀잔을 줄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자꾸 웃음이 나려고 해서, 손으로 입가를 비틀어야 했다.
문이 열리고, 나를 부축한 그 사람이 내 집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 나를 앉혀놓았을 때쯤 그 사람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그리고 잠겼다. 드디어.
올 때는 네 마음대로여도 갈 때는 그렇게 안 되는, 우동주의 집에 잘 오셨습니다.
앞에 선 그 사람의 손목을 붙잡았다. 당신 집에 두 번째로 갔던 날, 진짜 가요? 하고 물었던 내게 가라고 했었지. 뒤쫓아 나올까 기대했지만 그것도 아니었어. 그건 다 용서할게. 벌써 예전에 다 용서했어. 그러니까 우리 이제, 제대로 연애 좀 하자.
“가지 마…. 너는 나 보냈지만, 나는 너 못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