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그 사람은 결근했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회사에는 몸이 안 좋은 걸로 얘기해둔 모양이었지만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은 나로서는 몸이 안 좋은 것보다도 더 걱정이 됐다.
좋아하는 사람을 상처 입혔다. 좋아한다는 얘기를 할 수 없는 갑갑함을 엉뚱한 방식으로 해소하려 들었다.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원인인 건데, 그 사람 잘못인 것처럼 따지고 몰아붙이고 결국은 화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의 팔은 가늘지도 여리여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단단하고 탄력 있는 근육의 힘이 그대로 전해져왔지만, 이상하게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면 툭 부러질 것 같았다. 그 사람의 표정 때문에 그랬을 거다. 물기 없이 바삭하게 건조해져 아주 약한 힘에도 부서져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야 되는데.’
무언가에 오래 시달려 지친, 금방이라도 제어와 평정을 잃고 일상의 자신을 무너뜨릴 듯한. 요즘 거울 속에서 자주 보는 내 얼굴과도 비슷한 그 사람의 얼굴에서 희망을 봤다고 하면 난 미친놈일까. 하지만 내 속옷을 가지고 농담하던 그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 밥도 안 먹고 집에 가겠다며 고집을 부린 이유, 난 질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사람한테 먹자고 해요. 엉뚱한 나 붙잡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건 올해 여섯 살인 내 조카가 봐도 명백한 질투가 아니냔 말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좀 흥분한 부분이 없진 않다. 진짜 갈 것도 아니면서 집에 가겠다고 우기는, 다툼으로 흥분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쏟아내는 애인처럼 구는 그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나에게서 빠져나가겠다고 어깨 근육까지 제대로 털어가면서 힘을 썼지만, 그건 결코 연약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힘이었지만, 눈곱만큼이라 해도 희망을 발견한 나에게는 밀어내는 그 힘마저도 좋은 먹이였다.
당신은 진짜 버릇없이 기어오르는 후배놈한테 화가 난 거라 해도 미친놈인 내 눈에는 내가 딴 사람 좋아한다는 생각에 질투하는 걸로 보여. 그러니까 오늘 회사까지 빠진 거잖아요. 당신이 어디 후배하고 다툼 좀 했다고 일을 제낄 사람이야? 주세영 선배님, 이렇게 나오시면 저는 더 포기가 안 돼요. 혹시 당신도 혼돈의 입구에서 망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얼른 마중 나가고 싶어진다고.
주세영, 혹시 그런 거라면 그냥 그 문 열고 들어와라. 지금까지 사랑을 몰랐던 만큼 너도 역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넌 알고 싶어. 좆나 궁금해. 정신도 육체도. 내 생애 최초로, 이만큼 거부하고 밀어내는데도 깔끔하게 손 털고 돌아서는 게 안 된다니까?
[선배님, 용서해주세요. 뭐라도 하겠습니다. 제가 아직 어려서 사리 분별을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절대 그딴 짓 하지 않겠습니다.]
어제부터 시작해 몇 번째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보낸 메시지함이 ‘한번주세영’으로 꽉 차 있을 거다. 아, 저번에 같이 쇼핑 갔던 날 ‘개발부 주세영 대리님’이라는 멋없는 저장명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바꿔봤다. ‘한번주세영’으로. 들키는 날에는 어제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까이고 어쩌면 변태로 몰려 회사에서도 잘릴지 모르지만, 이 정도는 연인 사이의 야한 농담 정도로 받아들여 줘야 했다. 우리가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음, 그래서 절대 들키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난 절대로 그 사람의 몸만이 목적인 게 아니지만(게다가 한 번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백 번, 천 번, 억만 번을 원하지만) 스물여덟 살 남자는 누굴 좋아할 때 그다지 맑고 투명한 마음만 가질 수는 없다. 나도 이렇게 아저씨가 돼가는 건가 싶긴 해도,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원하는 내 마음이 지저분한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전부를 원하는 거지, 그 육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쾌락만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한번주세영’씨, 답장 좀 해라. 응? 나가 뒈져 새꺄, 이런 거라도 좋으니까 아무 말이나 싸질러주면 황송하게 받아먹을게. 냉정해 진짜. 잘생기고 몸 좋고 옷 잘 입고 섹시하면 다야?
내가 섹시 어쩌고 하면서 또 헛생각하는 걸 알았는지, 아니면 나의 엄청난 끈기와 지구력에 탄복해 그만 반해버렸는지, 주세영은 드디어 답장을 하사하셨다. 성질나서 혼자 핸드폰 박살내고 문자도 전화도 수신 못하는 건가 걱정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우동주 씨 때문 아니니까 그만해요. 스토커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야. 일 안 해요? 그리고 나도 잘한 거 없으니까 됐어요. 괜히 다른 일 때문에 울컥해서 우동주 씨한테 화풀이했어요. 오늘은 진짜 몸이 안 좋아서 쉰 거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요.]
뭘 다른 일 때문에 울컥해? 그때 너하고 나 내내 둘밖에 없었고, 조금 전만 해도 속옷은 야하고 화려한 게 좋다는 둥 해가면서 사람 꼴리게 만들었으면서. ‘그 사람 때문에 관리하는 건가?’ 어쩌고 하면서 자기가 먼저 얘기 꺼내놓고, 그때부터 분위기 이상했잖아. 내가 지금 짝사랑 중이라 나 좋을 대로 망상 폭주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그래?
이런 문자 보내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보고 싶잖아. 딱 한 번 가봤어도 나 당신 집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못 찾을 것 같으면 회사 주소록 뒤지면 되는 거고. 내 속은 이렇게 당신으로 펄펄 끓는데 이거 어디다 갖다 부어야 돼요? 그냥 나 혼자만 끙끙 앓다 죽어? 이왕 끓은 거 아까운데 여기다 찹쌀 넣고 야채 다져 넣고 죽이라도 끓여 줄게요. 꾀병도 병이긴 하니까, 당신 그거 먹고 얼른 나으라고.
칼바람 쌩쌩 부는 냉혈한인 척해도 끝까지 냉정하진 못한 사람이었다. 내가 저자세로 나가면 꼭 이렇게 한 수 물러주니까, 내가 주춤하다가도 기가 살아서 자꾸 들이대잖아. 계속 밀어붙이다 보면 당신이 동정심에라도 허락해줄 것 같아서. 나 말고 딴 새끼들한테도 이렇게 마음 약할까 봐 걱정될 정도야 진짜.
[선배님이 용서해 주시기만 하면 스토커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요. 저 진짜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아요.]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알아요? 주세영이 안 나오니까 우동주가 같이 맥을 못 춘다고 놀린다구요. 4층이고 흡연실이고 갈 마음이 안 들어. 오늘 나왔으면 그건 그거대로 얼굴 보기 괴로웠겠지만 아예 안 나와버리니까 혹시 날 피하기로 한 건가 싶어 죽을 것 같다고.
[왜 그렇게까지 괴로워요?]
이전 메시지를 발송한 지 얼마 안 돼 거의 바로 메시지 하나가 더 날아와서 깜짝 놀랐다. 책상 위에 다시 널브러지려다 튕겨 일어난 나는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잠시 사고가 정지됐다.
뭔가 낌새를 챈 걸까. 뭔가를 얘기해보고 싶어진 걸까. 몸 안의 수분이 싹 다 말라버리는 기분이었다. 한 장의 김이 되어 앞뒤로 바싹바싹 구워지는 것 같았다.
[약을 먹었더니 잠이 오네요. 좀 자야 될 것 같아요. 아무튼 화 안 났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일 봐요.]
내가 뭐라고 답장을 하기도 전에 바로 이어서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제 오늘, 몇십 통의 내 문자를 우적우적 잘만 씹어 드신 ‘한번주세영’ 씨는 앞서 보낸 문자메시지를 후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른 매듭을 지어버렸다.
[내일 머리 쓰다듬어주시면 믿을게요, 화 안 나셨다는 말. 아프지 마세요. 차라리 꾀병이기를 바랍니다. 내일도 선배님 못 보면 제 눈 썩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무리 당신이 그 문자 보낸 걸 후회해봤자 난 영구 보관할 거라구요. 선배님, 뭔가 느끼셨죠? 냄새 맡으신 거죠? 열렬한 구애로 타들어가는 수컷의 똥줄 냄새. 그러게요, 회사 선배하고 좀 싸운 건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괴로워할까요? 오늘 꾀병 부리면서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긍정적인 결론 기대하겠습니다.
[우동주 씨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이제 핸드폰 끄고 잘 겁니다. 문자 그만해요. 우동주 씨 때문에 내 핸드폰 터지겠어요.]
뭔가 냄새를 맡은 게 99%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수분이 바싹 말랐던 내 몸이 이번에는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손가락도 빵빵하게 부풀어 일을 할 수가 없고, 엉덩이가 부풀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고, 혀가 부풀어 다른 사람과 말을 섞을 수도 없다. 기대와 희망과 긴장과 혈압 상승으로 점점 더 부푸는 내 몸은 밧줄을 묶어 어디에 매달아놔야 할 것 같았다.
아니야, 너무 기대하지 말자, 우동주.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절대 처음부터 긍정적인 결론을 내려줄 사람이 아니니까.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쏙 숨어버리더라도 상처받지 않고, 의식을 해준 것만으로도 발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우동주, 부풀지만 말고 마인드컨트롤, 마인드컨트롤.
그래놓고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슈트를 한 벌 더 사고 싶은데 어떤 게 좋을지를 상담했다. 그 사람이 혼돈의 입구에 도착했을지도 모르는 이 시점에 내가 예상치 못한 멋진 모습으로 짠 나타나주면… 혹시 알아? 입구에서 우동주를 찾아줄지.
무슨 좋은 계략이라도 생각난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도저히 6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5시 55분에 사무실을 튀어나갔다. 어차피 부장님은 외근으로 자리를 비우셨고 박 대리님에게는 “내일 점심 쏘겠습니다!” 하고는 대답도 안 듣고 도망 나왔다. 나뿐만이 아니라 거리가 온통 두근두근 부풀고 있었다. 자동차들은 하나같이 장난감처럼 귀여웠고, 유리 빌딩에 비친 노을은 낭만적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쁘고 멋져 보였다.
그 사람에게 내가 이상해 보이는 건 당연하다. 벌써 진즉에 알아챘어야 했다. 어쩌다 한 번이면 몰라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같은 남자 선배 커피를 매번 사다 나르는 놈이 어딨어? 일요일에 잔업하는데 먹을 거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놈은 또 어디 있고.
그 사람이 슬슬 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징후만으로도 마음이 이어진 양 세상이 아름다웠다. 어제 이후 막대를 뺀 핫바처럼 축 늘어져 있었던 내가 탱탱하게 되살아났다. 절대 한 번에 받아들일 리 없으니까 너무 들뜨지 말자고 아무리 브레이크를 걸어보려고 해도 조절이 잘 안 됐다. 그 증거로 점원 누나가 이쁘다고 칭찬해준 슈트를 세 벌 다 사버렸다. 웬만한 소형차 한 대 값이었지만 슈트 사는 데 썼다고 하면 아버지는 별말 하지 않으실 테고, 이걸 입은 나를 보고 그 사람이 입구에서 우동주만 찾아준다면야 우리 집 땅문서를 전부 훔쳐 내다 팔 수도 있었다.
점원 누나는 고객님 신체에 맞게 수선을 해드릴 테니 3~4일 정도 맡겨두시라고 했지만, 난 내일 당장 전투복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음에 와서 맡기겠다고 하고는 급한 대로 동네 세탁소에 들러 바짓단만 응급처치를 했다. 쇼윈도에 ‘명품 전문’이라고 써 붙여놨던 게 허세는 아니었던지 아저씨 솜씨에서 꽤 장인의 포스가 풍겼다. 아, 그냥 내가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여서 그랬다.
[선배님, 저 새 옷 샀어요. 점원 누나는 이쁘다 그랬는데 아무래도 선배님이 칭찬해주셔야 마음이 놓일 거 같아요. 내일 보고 이쁘면 머리 두 번 쓰다듬어 주세영.]
나름대로 애교랍시고 그 사람 이름으로 애드립을 쳐봤는데 먹힐지 어떨지…. 그러고 보니 그 사람 핸드폰에는 내 이름이 뭐로 저장돼 있을까? 내 친구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동? 동동주? 아니면 심플하게 특수문자로 빨간 하트 하나? 물론 그냥 ‘우동주’ 아니면 ‘우동주 씨’라고 돼 있겠지만 요즘 내 망상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내일 복장을 다 세팅해놓고 거의 경건한 마음이 되어 자려고 누웠을 때쯤 그 사람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이고, 하도 답장이 빨라서 내가 문자 보낸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네. ‘한번주세영’ 씨 왈.
[누가 내 허락 없이 옷 사래?]
주세영, 그냥 날 죽여라. 왜 이렇게 귀여운 건데?
핸드폰을 붙잡고 침대 위에서 난리브루스를 추면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헤드에 머리를 박았다. 그 와중에도 내가 어디서 거적때기 같은 거 샀을까 봐 그건 걱정되셨어요? 아, 주세영, 제발 그냥 나한테 와. 날 선택하기만 해줘. 입구에서 우동주를 찾아 주세영. 최고의 서비스로 모실 테니까.
■
다음 날, 산뜻한 기분으로 일어나 비장한 각오로 전투복을 착용하고 의욕만땅이 되어 출근했건만 그 사람과 몇 마디 나눠보기도 전에 회사에 비상이 걸렸다. 월요일에 마무리했던 프로젝트에 이상이 생겼다는 컴플레인이 들어온 것이다. 특정 페이지에 접속 장애가 일어난다는데 원격으로도 해결이 안 됐다.
아침부터 개발부, 영업부가 모여서 미팅하고 스케줄 조정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사람은 회의 내내 예민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착 가라앉아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아니, 그건 침울보다는 침통에 가까웠다. 항상 단정하게 빗어 넘겨 고정해두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는데도 그 사람은 가다듬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숨처럼 여기는 셔츠의 소매가 구겨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커프스링크를 풀어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붙였다.
그 사람이 얼마나 일에 엄격한지는 입사한 지 보름이 갓 넘은 나도 다 알 정도인데 단독으로 담당했던 프로젝트가 오픈 이틀 만에 에러가 떴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들고, 스스로를 모질게 자책하고 있는 게 뻔히 눈에 보였다. 이 정도 에러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오히려 부장님이 그 사람을 다독였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 사람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고 싶었지만 지은 죄가 있는 몸이라 섣불리 들이댈 수가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분위기였다. 지금 간만에 힘을 준 전투복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박 대리님 말을 들어보니 그 사람 입사 이후로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해서 난 완전히 경악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쪽 일이라는 게 그렇게 딱딱 떨어지게 계획처럼 완벽할 수가 없는 건데 3년 동안 실수 한 번 없었다니. 아주 잠깐이라도 내 망상 속에서 그 사람을 잘생기고 몸 좋고 옷 잘 입고 섹시한 사람으로만 몰아갔던 게 미안해졌다.
허술하고 우유부단하고 마음 약한 면도 있지만 일에 있어서만큼은 잔인하리만치 자신을 몰아세워 가면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만큼의 결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부분은 분명 선배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장착하고 다시 그 사람을 보니 이전보다 더 욕심이 났다.
그래도 그다지 큰 실수도 아닌데 너무 자책하지 마요. 이제까지 완벽했던 게 더 이상한 건데. 내 주세영, 스타일 다 구겨지네. 일 앞에서 스타일이고 뭐고 없는 당신이 더 멋져 보이긴 하지만, 나한텐 소중한 주세영이니까 살살 다뤄 주세영.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애 복구 출장은 그 사람과 내가 가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의 영업 담당자였던 박 대리님은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에 출장이 어려웠다. 상황 봐서 하루 자고 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철없는 우동주는 속으로 은근히 좋았다. 제대로 화해할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자책에 빠져 예민해져 있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직접 옆에서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게 돼서, 그게 일단 다행이었다.
“가는 동안 눈이라도 좀 붙이세요. 선배님 지금 얼굴, 너무 안됐어요.”
그 사람 컨디션만 조금 괜찮았으면 여행 기분도 내는 건데. 하도 죽상을 하고 있어서 용서의 의미로 머리 쓰다듬어달라는 말이나 내 새 옷 어떠냐는 말은 꺼낼 엄두도 못 냈다.
“그따위 초보적인 실수라니… 진짜 어이가 없다. 특정 페이지에서만 그런 식이면 하나하나 다 뒤져가면서 확인해봐야 걸리는 건데… 어떻게 경력 5년 차가 그런 실수를…. 내가 쪽팔려서 진짜….”
평소엔 옷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사람이 슈트 재킷은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내던져두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면서 혼잣말처럼 자책을 한다.
“약속한 날짜에 오픈도 제대로 했고… 우리 쪽에서 지체 보상금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아직 잘은 모르지만, 박 대리님 말 들으니까 원래 업계에서 이 정도 실수는 통상적인 거라고 하시던데.”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그렇다고 거짓말도 아니었고. 전체적으로 잘못된 것도 아니고 어느 페이지에서만 살짝 에러가 난 건데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게 안타까워서 한 말이었다. 물론 문제는 사소해도 그걸 수정하려면 거의 노가다 수준으로 눈알 빠지게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쪽 업체나 우리 회사에 큰 타격을 가져온 것도 아닌데 필요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닌가 싶었다.
“통상적? 지체 보상금? 우동주 씨,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당장 주머니에서 돈이 안 나가더라도 이런 일 하나로 회사 이미지에 금이 갈 수도 있는 거라고. 거기다 책임자는 나고, 난 거기에 오점 같은 거 남기기 싫어.”
이거 봐. 또 화나니까 반말하잖아. 월요일에도 타이밍이 안 좋아서 당신을 화나게 했지만 틀린 말 아니었어, 그치? 하지만 그나마 화풀이 상대가 돼주는 것밖에 해줄 게 없는, 아직은 무능한 사회생활 3주 차 우동주는 까칠해질 대로 까칠해진 주세영의 온갖 비위를 다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화나니까 또 반말하시네요, 같은 얘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금 못 한다. 나도 그 정도 눈치와 그 정도 자제력은 있다.
결국 대전까지 내려가는 동안 그 사람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은커녕 내내 초조한 모습으로 자료를 들춰보고 그쪽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그게 아닐 때는 담배를 피울 뿐 말도 없었다. 기분 전환을 하게 하려고 휴게소에도 잠깐 들러봤지만 그 사람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선배님, 이거라도 마시세요. 시럽 넣은 커피예요. 요즘엔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제대로 된 커피 전문점이 있네요. 이번엔 제가 맛 안 봤으니까 안심하고 드세요.”
“우동주 씨, 나 지금 농담하고 싶은 기분 아니야.”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이마를 받친 채 세상 시름 다 짊어진 사람처럼 그 사람이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끝까지 내가 사 준 커피에 입도 대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도 지금 그 사람에겐 내가 아예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그게 슬펐다. 그저 운전기사? 그쪽에 가서도 전혀 도움이 안 될 185센티미터의 패널 인형?
혹시 우리가 연인이었다면 따뜻한 말이나 다정한 손길로 그 사람의 각박한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었을까. 당신한텐 내가 있잖아, 너무 그렇게 자책하니까 내가 더 아프다. 그런 느끼한 말도 연인이었다면 힘이 됐을까? 까칠해진 것 같은 뺨을 쓰다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면서 이마에 입을 맞춰주면, 뾰족뾰족 아프게 일어난 그 사람의 마음도 조금은 진정이 됐을까?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하게 그 사람과 마음으로 이어진 관계였으면 싶었다. 단순한 후배, 그것도 바로 얼마 전 그 사람을 길 한복판에서 화나게 만들었던 후배인 채로는 위로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 그게 주세영에게 있어 우동주라는 존재의 위치였다.
“뭐예요?”
거래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쯤엔 내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둘러 짐을 챙기는 그 사람에게 검은 비닐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아까 휴게소 편의점에서 산 거예요. 왁스하고 빗. 선배님 쓰시는 거보다 후진 거겠지만 급한 대로 이거라도 쓰세요.”
그 사람은 엉겁결에 봉투를 받아 들었다. 손가락으로 얽어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커프스링크를 풀어 걷어 올린 셔츠 차림도 섹시했지만, 아마 주세영 자신은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의 모습을 후회할 거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막아주고 싶었다.
“전 선배님이 다른 사람한테 완벽하지 않은 모습 보여주시는 게 싫어요. 먼저 내려서 기다릴 테니까 평소의 주세영 선배님으로 변신해 주세영.”
이 상황에서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농담질이냐고 뭐라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무 말 없이 내 말대로 따라주었다. 머리를 말끔하게 정돈하고 셔츠와 타이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재킷을 걸친 그 사람은, 바늘 하나 찌를 틈 없을 것 같은 대외적 주세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바늘로 찌르면 파르르 떠는 사람이라는 걸 난 알지. 날씬한 서류가방을 들고 흐트러짐 없이 걸어가는 그 사람을 한 걸음 뒤에서 따라 걸으며 나만이 알고 있는 그 아찔한 갭에 문득 전율이 일었다.
철두철미해 보이는 사람이 알고 보니 진짜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더라. ―그럼 거기에서 무슨 매력이 발생하고 무슨 상상이 피어날 수 있을까. 흐트러짐 없는 모습 아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이고 가련한 노력이 있음을 알았을 때, 인간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던 완벽함에 비로소 생명과 개성이 부여되는 법이었다. 주세영이 내게 보여주는 갭은 단점이 될 수 없었다.
계단을 오르는 그 사람의 뒷덜미를 잡아채 균형을 무너뜨리고 내게 등을 기댄 채로 버둥거리는 그 사람에게 강제로 입 맞추고 싶었다. 도움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일 수도 있고, 새삼 더 멋져 보이는 그 사람에 대한 충동적 발정일 수도 있겠지만, 둘 중 어느 이유에서건 어제보다 더 그 사람을 원하게 됐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에서, 완벽의 구축이 무리라면 완벽을 가장하기라도 하기 위한 극도로 섬세하고 예민한 싸움이 보였고, 그것이 나도 몰랐던 어느 취향의 스위치를 지그시 자극하고 있었다.
때와 장소 못 가리는 우동주의 망상은, 그 사람 못지않게 인상을 팍 쓰고 기다리고 있던 거래처 실무 담당자를 만나고서야 사그라졌다. 그쪽 계장직을 맡고 있다는 담당자는 이제 막 머리숱이 적어지기 시작하고 허리에 기름띠가 둘러진, 넉넉한 풍채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워 보이지 않는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위에서 얼마나 깨졌는지 알아요?”
담당자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안 그래도 깊이 상심해 있는 우리 주세영이 폭발할까 봐 나는 얼른 담당자에게 달라붙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장님. 저희 쪽 프로그래머가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공간만 마련해주시면 바로 작업에 착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저희 쪽에서 조촐하게나마 점심 접대라도 꼭 해드리고 싶습니다.”
원래 장애 복구할 때는 영업부에서 할 일이 별로 없다고 해도(그저 속없는 놈처럼 그쪽 담당자에게 손바닥 잘 비비고 개발부 편의 잘 봐주면서 양쪽 얘기만 잘 전달, 조율해주면 된다는 게 박 대리님의 조언이었다) 적어도 이 이상 그 사람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주세영의 고운 이마에 새겨진 내 천(川) 자를 지워주는 거니까 거래처 계장 앞에서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작은 회의실을 하나 빌려놓고, 점심 접대를 할 음식점을 찾아 예약을 해두고, 밥 생각 없다는 그 사람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담당자와 둘이서 고기를 먹고(계장님은 1등급 한우 차돌박이 4인분에 꽃등심 3인분을 해치웠다) 그쪽 회사 경리 직원에게 부탁해 맛있는 도시락집을 알아내 그 사람 몫의 도시락과 음료수를 사다 주고, 커피가 식지 않도록 자주자주 신경 써주고, 틈틈이 담당자를 찾아가 상황보고를 하면서 비위를 맞추고….
그 사람 일하는 옆에서 손 놓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거의 자질구레한 일이긴 했지만.
“춥진 않으세요?”
중앙난방이 돌아가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2월 말이었고, 썰렁한 회의실에 가만히 앉아 컴퓨터로 작업만 하고 있으면 추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재킷을 입고 작업하자니 몸도 둔해지고 갑갑할 테고. 아까 그 경리 직원에게 잘 말해서 이동식 난로라도 하나 가져다줄까 싶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그 사람의 흰 셔츠가 오늘따라 참 시려 보여서.
“추우면 재킷 입었겠지.”
“난로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가져다드릴게요. 뭐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말 시키지 말아줄래?”
깨갱. 매번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또 안 물어볼 수도 없는 내 신세가 참 안됐다. 그래도 그 사람 곁에서 이렇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마음 편하긴 하다. 짜증도 나한테 냈으면 좋겠고, 신경질도 나한테 부렸으면 좋겠다. 그건 분명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일 테니까 그런 건 다 내가 받아주고 싶다. 박 대리님하고 왔다면 그 사람은 분명 이렇게까지 까칠하게 굴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회의실 앞 복도의 간이 의자에 앉아서도, 마치 그 사람을 지키는 문지기가 된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그 사람 기분이 안 좋으니까 반말도 계속 들을 수 있었고. 짝사랑에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긍정적 해석은 필수였다. 특히 그 짝사랑의 대상이 주세영이라면 더더욱.
담당자는 오늘 안으로는 복구가 힘들다는 얘기를 듣더니 칼퇴근을 해버렸다. 자기네 회사는 아마 9시쯤 문을 닫을 테니 그때까지 이 회의실을 쓰다 가든 숙소로 옮겨서 마저 하든 알아서 하라는 거다. 박 대리님은 법인 카드를 내주면서 1박에 10만 원 이하인 평범한 비즈니스호텔에서 묵으라고 했지만, 안 그래도 피곤하고 예민한 상태인 그 사람을 말만 호텔이지 모텔이나 다름없는 허술한 방에서 재우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 없었다.
그 사람이 잠깐 담배 한 대 피우러 나온 사이에 잘 구슬려서 점심 식사 후에 미리 예약해둔 호텔로 데려갔다. 서울의 특급 호텔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놈의 ‘비즈니스 호텔’보다는 훨씬 쾌적했다.
“설마 법인 카드로 결제할 건 아니지?”
“제가 잠자리를 좀 가려서요…. 제 카드로 결제할 거니까 선배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편하게 작업하세요.”
그 사람이 생긴 거하고 다르게 무슨 잠자리까지 다 신경 쓰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잠깐 쳐다봤지만, 그래도 내가 쪼잔한 놈 되는 걸로 당신을 편하게 해줄 수 있다면야. 그리고 매일같이 빈틈없이 멋 부리고 다니는 당신한테서만큼은 그런 눈빛 받고 싶지 않거든요? 원래 난 머리만 닿으면 아무 데서나 잘 잔다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 이렇게까지 사람한테 목매보는 거 처음인 건 알아요? 나도 집에선 귀한 자식이야. 우리 부모님 알면 얼마나 속상해 하실… 아, 부모님은 절대 아시면 안 되니까 패스.
주니어 스위트룸이라고는 해도 특급 호텔들하고 비할 바가 못 됐고 그나마 침실과 따로 분리된 거실이 있고, 작업할 수 있는 데스크가 있고, 킹사이즈 침대와 욕조가 있는 정도였다.
이게 만약 둘만의 여행이었다면 호텔이 아닌 모텔이었더라도, 모텔이 아닌 그 어디였더라도 나는 황홀하게 잠들었을 텐데. 아니지, 아깝게 잠을 왜 자. 당신이 밤에는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 당신의 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볼 텐데. 물론 오늘도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일하는 밤’이 아니라 ‘사적인 밤’에 존재하는 당신이니까. ‘일하는 밤’의 주세영도 놓칠 생각이 없긴 마찬가지지만.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켜놓고 볼륨 없이 맞고를 치면서 그 사람의 일하는 뒷모습을 감상하고 있으려니, 얼마 전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말대로 왠지 센치해졌다. 계속 같은 공간에 있으면 위험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노트북을 덮고 일어났다.
“선배님, 불편하실 텐데 잠깐 나가서 갈아입으실 만한 거 간단한 옷 좀 사 올게요.”
“아니, 됐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왼손에 담배를 쥔 채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뒤통수가 어찌나 반듯반듯 얄미운지…. 확 뒤에 가서 끌어안아 버릴까 보다.
“그래도 이따 주무실 때는 편하게 주무셔야 하니까…. 아니면 프런트에 부탁해도 되고….”
갈아입을 속옷은 아까 편의점에 갔을 때 대강 싸구려로 두 개 사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슈트를 입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는 일도 없이 옆에서 노닥거리고 있기도 미안하고, 호텔이라는 공간의 미묘함이 슬금슬금 망상을 부채질할 것 같고. 그래서 갈아입을 옷이라도 사 오겠다는데 그 사람은 종일 몸을 죄고 있었던 슈트 차림이 갑갑하지도 않은가 보다. 지금은 그렇다 쳐도 잘 땐 뭐 입고 자려고. 가운 하나 달랑 걸치고 자준다면야 나야 고맙지만.
“우동주 씨.”
드디어 몸을 돌려 나를 봐줬는데 별로 기쁘지가 않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내가 뭔가 지뢰를 밟았다는 걸 감지하고 제대로 깨질 각오를 했다.
“챙겨주는 건 알겠는데… 나 솔직히 지금 우동주 씨 친절에 일일이 응답을 못 하겠어. 이렇게까지 된 것도, 애초에 우동주 씨가 일요일에 오지만 않았으면….”
거기까지 말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처럼 머리카락을 한 차례 흩트리더니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연기를 뱉어냈다. 내가 일요일에 찾아가지만 않았으면 실수도 하지 않았을 거란 얘기를 하는 건가?
오늘 출장 때문에 희미하게 잊고 있었던, 어제 종일 나를 부풀게 했던 기대감이 문득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난 그날 분명 당신이 가라고 해서 초밥만 몇 개 집어먹고 돌아갔는데, 내가 뭘? 내가 있는 동안엔 당신 일도 안 했으면서, 그게 왜 내 탓인데?
“아니, 이건 쓸데없는 얘기였고. 아무튼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부를 테니까 없는 듯이 있어줘요. 그게 내 부탁이야.”
당연한 얘기지만 그 사람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눈꺼풀이 눈동자의 모양을 따라 움푹 파이고, 얼굴빛이 탁해졌고, 입술이 파리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얌전히 소파로 돌아가 맞고를 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정말 비꼬는 게 아니라, 하나도 섭섭하지가 않았다. 그게 그 사람이 일을 대하는 방식이고 어쩔 수 없는 성격이니까, 그 부분은 내가 편하게 받아주고 싶었다. 거기서 애처럼 토라지고 투정 부려서,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에게 짜증을 더 얹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이후, 2시 무렵에 일이 전부 마무리될 때까지 그 사람은 내게 커피를 두 번 부탁하고 물을 세 번 부탁했을 뿐이었다. 담배도 삼각김밥도 비타민 음료도 모두 충분했다. 남아돌았다.
그 사람에게는 1만 개의 ‘두부’라는 글자 중에 단 하나의 ‘부부’라는 글자를 찾아야 하는 것과 같은 피로하고 갑갑한 시간이었겠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리가 노트북을 펼쳐 놓은 응접실에는 그 사람이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내가 마우스를 딸깍이는 소리뿐이었고, 가끔씩 그 사람은 내 이름을 부르고 필요한 것을 얘기했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다. 정말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히려 나는 거기에서 어떤 차분함, 정갈함, 심지어 반짝임까지도 느꼈다.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찔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 사람의 어깨와 오랜 시간 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듯하게 유지하고 있는 상체, 그리고 가끔씩 겹쳐지기도 하고 의자의 다리에 감겨지기도 하고 초조하게 떨기도 하면서 상체와는 대조적으로 가만히 있질 못하는 그 사람의 두 다리.
그런 것들을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도는 고요하지만 맑은 테두리와 그 테두리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 같은 것들이 그에 대한 내 감정을 더욱 분명하게 했다. 우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이 시간과 공간 안에 편안하게 공존하고 있는 듯했다.
“끝.”
하고 그 사람이 아주 명쾌한 소리를 내면서 마지막 자판을 탁 두드렸을 때는 어딘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나는 그 시간이, 그 사람이 좋았다.
“해결된 거예요?”
상기된 내 물음에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 소파로 걸어오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온 기력을 다 소모한 사람 같았다.
“파라미터 값 중에 잘못된 값이 하나 숨어 있었어. 그거 찾느라 어찌나 뻘짓을 했는지…. 아, 진짜 생각도 하기 싫다….”
“이제 그럼 다 된 거죠?”
소파와 한 몸이 될 듯 축 늘어져 있던 그 사람이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대 턱이 들린 채로 내게 시선을 준다. 푸석해진 얼굴과 하루 사이 마른 것처럼 보이는 아래턱과 목선, 넥타이 없이 버튼 두 개를 풀어 내린 셔츠마저도 그는 섹시함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수정해서 적용 완료하고 제대로 돌아가는 것까지 확인했으니까 내일 가서 보고하고 복귀하면 될 것 같아요.”
“진―짜, 진―짜 수고하셨어요, 선배님. 이제라도 씻고 눈 좀 붙이세요. 뒷정리는 제가 할 테니까. 아, 갈아입을 옷 지금이라도 프런트에 부탁할까요?”
심각한 에러가 났던 건 아니지만 이번 일 같은 경우는 거의 노가다에 가까웠다. 비유하자면, 맞춤법 교정 기능이 안 되는 한글 파일 1000페이지짜리 원고에서 딱 하나의 오타를 찾는 정도? 그 정도쯤 되면 차라리 벽돌을 지고 공사장을 오르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고도의 노동을 마친 주세영을 당장이라도 침대에 엎드리게 한 뒤 전신 마사지를 해주고 싶었지만 어깨만 주물러줘도 펄쩍 뛰시는 분이었기에 곱게 재워드리기로 했다. 여기가 이래 봬도 주니어 스위트라서 방 두 개 예약 안 했어요. 침대 킹사이즈니까 각자 이쪽 끝, 저쪽 끝에서 자면 될 거예요.
“우동주 씨, 그 전에 나 시럽 넣은 커피 한 잔만 더 내려주면 안 될까?”
“…….”
여전히 소파에 늘어지듯 기댄 채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얼굴과 말투에서는, 좀 전까지의 날선 방어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말투는 부드러웠고, 까칠해진 입술에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도 걸려 있었다. 거기다 화가 난 것도 아닌데 반말까지. 그가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음을,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연인 사이였다면, 지금 그가 보인 태도는 다툼 끝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애교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 사람 나름의 간접적인 사과방식이 황홀해서 가벼운 현기증마저 일었다. 주세영은 분명 송곳니 대신 내 목에 빨대를 꽂고 철분을 쪽쪽 빨아먹는 신개념의 섹시한 뱀파이어였다.
“물론 되죠. 안 되는 게 뭐 있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커피머신을 눌러놓고 프런트에 실내복 두 벌을 부탁해놓고, 아예 통째로 사 왔던 시럽을 조금씩 섞어가며 황금비율의 커피를 제조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럽게. 그리고 이 커피가 보약이 되어 그의 몸을 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커피를 대령했다.
“미안해요….”
“…….”
곧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소파에 등을 묻으며 고개를 젖혔다. 오늘 하루 동안의 자신의 날카로움에 대해 후회하는 시간이 찾아온 모양이었지만, 만약 그게 나를 향한 것이라면 불필요했다. 나는 이미 충분한 사과를 받았으니까.
“오늘 하루 종일 우동주 씨 괴롭히기만 한 것 같아서 진짜 미안하네…. 아… 나도 진짜 돌아버릴 거 같아서…. 이해 좀 해줘요…. 응?”
병 주고 약 주는 주세영. 그럼 또 꼬박꼬박 잘 받아먹는 우동주. 아무래도 천생연분인 것 같은데 말이야.
“괜찮아요. 이게 다 제 일인데요. 고생은 선배님 혼자 다 하시고…. 제가 진짜 해드린 게 없어서 더 죄송하죠.”
하루 종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시달린 탓에 우리 주세영이 정신이 잠깐 나갔나? 소파에 퍼질러져 있던 그 사람이 느닷없이 앞에 서 있는 내 손목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반사적으로 상체가 숙여지면서 주세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하늘 같은 선배한테 대들었던 거 용서해줄게요. 오늘 너무 고마웠으니까.”
그러고는 내 손목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사근사근 쓰다듬었다. 약간은 어색하게 쭈뼛대면서. 그래도 어떻게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해보려고 애를 쓰면서. 화나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믿겠다고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 최고로 가까운 거리에 도달한 스킨십에도 나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키스하려는 줄 알았다.
지난 몇 주간, 혼돈의 입구에서 절망하고, 날 게이로 만든 상대 남자도 없이 나 혼자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서 혼자 지지고 볶고 망상하고 실망했던 온갖 감정적 소모들을,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과감한 방식으로 그가 달콤하게 보상해주려는 줄 알았다.
어색하게 내 머리 위를 떠나는 그의 손과, 내 손목을 놓아주는 다른 손을 그저 눈으로 좇으면서, 내가 숨을 쉬고 있기는 한 건지 걱정스러웠다. 키스가 아니었다는 아쉬움이 아니다. 그런 일차원적인 실망감이 아니었다. 내 머리 위에 잠시 앉았던 그 사람의 손이 채 다가가기도 전에 날아가 버리는 흰나비의 날개처럼 아쉬워서…. 당신이 먼저 날 당겨준 건 처음이라서….
“선배님.”
주세영을 부른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주세영을 부른 건 내 입술이었지만, 그것을 명령한 건 절대 내 이성과 두뇌가 아니었다. 갑자기 나는 내 몸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빼앗겼고 각 기관들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세영이 나를 본다. 피곤에 완전히 잠식되어 나른한 자세로 흐트러져 내가 달달하게 시럽을 넣어준 커피를 한 손에 들고 비스듬히 나를 올려다본다. 약간 푸석해 보이는 얼굴, 건조하게 바싹 마른 뺨, 유난히 날카로운 목덜미의 결후, 평온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그리고 이 평온을 부수려고 하는 나.
안 돼, 안 돼.
제구실을 할 수 없도록 머릿속 한구석에 결박당한 이성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의자에 단단히 묶인 이성은 이후의 사건을 막을 수 없었다.
“좋아합니다.”
끝났어, 이제.
아직 내 말의 의미를 자각하지 못한 주세영이 방금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선배님을 좋아해요. 예의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면, 지금은 선배님으로서 대하는 거 아니니까 이름을 부르고 싶지만… 참을게요. 저, 선배님을 좋아합니다.”
이번엔 그 사람의 얼굴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엔 하나로 잘 뭉쳐져 있다가 바람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구름처럼. 눈이 커지고, 입술이 벌어지고, 그리고 눈 속의 눈동자가 흔들거린다. 나로 인한 그 떨림이 참 예쁘다.
나는 지금, 소파에 앉아 있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의 허리에 가만히 한 손을 대고 다른 한 손으로 당신의 뺨과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키스하고 싶어. 정성스러운 내 혀의 움직임으로 오늘 하루 당신의 수고로움과 고단함을 위로하고 칭찬해주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런 말을 전해서도 안 되는 거잖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동주 씨?”
하나 떨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더듬거리지도 않고 묻는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거겠지. 좋아한다는 말을 해도 결국은 그런 거야. 속을 홀랑 뒤집어 당신 앞에 보이지 못할 바에야 지금의 나는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너무 많은 거지.
“오해하진 마세요. 저 원래 게이는 아니에요. 여태까지 여자들 만나면서 잘만 살아왔구요. 근데, 지금은 선배님이 좋습니다. 저도 이렇게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방금 느낌이 왔네요. 지금이라고.”
“아니… 대체… 그게, 무슨….”
그래도 이번엔 말도 더듬고 목소리도 떨어줘서 조금 위로가 된다. 주세영이 나를 본다. 좋아한다는 내 고백을 듣고 있다. 기분이 어때? 엿같아? 더러워? 내가 딱 두 번 당신을 반찬 삼긴 했지만 지금 내 마음 꽤 순애보적인 건데 적어도 더럽다고 생각하진 말아주라. 솔직히 나도 내가 진짜 당신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 나 대단하네.
“저 지금, 되게 침착해 보이죠? 하하… 근데… 떨려서 죽을 것 같아요. 이거 보세요, 제 손. 알코올 중독자 같죠?”
그러면서 그 사람 눈앞에, 그야말로 약발 떨어진 뽕쟁이처럼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어 보였다. 어떻게든 분위기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보자고 해본 농담이었는데, 그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져가고 있었다.
“우동주 씨… 난 무슨 말인지….”
쥐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은 주세영이 소파 팔걸이를 꽉 붙잡았다. 그래도 내 눈을 피하진 않아 줘서, 그게 고마웠다. 눈을 보고 말할 수도 없었다면, 이 상황에서 날 봐달라는 말까지 했어야 됐으면, 비참함 때문이 아니라 나에 대한, 내 마음에 대한 당신의 외면 때문에 가슴이 다 찢겼을지도 모른다.
“좋아해요. 선배로서 아니고, 다른 남자들이 여자에게 하는 좋아한다는 의미로 선배님이 좋습니다…. 당장 대답을 듣자는 건 아니에요. 그냥, 이 순간에 너무 말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지금을 놓치면 후회할 것 같은… 그런 타이밍 있잖아요. 근데 그 타이밍에 말했는데도 왠지 벌써 후회가 되네요, 하하…. 다음에 기회 주시면 제대로 제 마음 설명하고 싶은데… 그래주실 수 있을까요?”
“…….”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건 스스로도 안다. 이 어색함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메워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충동적으로 꺼내놓은 내 고백은 점점 초라해지고, 그 사람의 얼굴은 속을 읽을 수 없게 굳어가고, 지금이라도 다 장난이었다면서 취소하고 싶고….
나 같아도 싫을 거야.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남자. 당신 마음 알아. 이해해.
“아, 이것도 대답하기 좀 그러신가? 당황하셨죠?”
“그거야… 당연히….”
소파에 앉아 놀란 눈으로 나만 올려다보고 있던 그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내게서 벗어나 바닥을 향했다. 나를 계속 봐주기를 바랐는데 막상 그 사람의 시야에서 자유로워지니 숨통이 트이면서 순식간에 몸속으로 공기가 밀려들어 오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공기와 차단되어 있었던 것처럼.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오늘 피곤하셨을 텐데. 그래도 선배님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죄송하고 싶지 않아요. 저 좋자고 이런 타이밍에 말씀드린 거, 그것만 죄송한 걸로 할게요.”
고개를 떨구고, 카펫이 아닌 타일이 깔린 바닥 어딘가를 보고 있는 그 사람은 대답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멱살을 흔들면서 추궁하고 싶지만, 우동주, 제발 오늘은 여기서 그만 멋지게 퇴장해라. 지금까지만으로도 멋있는 건 완전 텄지만.
“주무세요. 전 아래 싱글룸에 방 하나 더 잡고 잘게요. 저 때문에 잠 안 오실 수도 있지만, 선배님이 저 때문에 못 주무시면… 아마 저,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 미우시면 꼭 잘 주무세요. 저 갑니다.”
도대체 뭐라고 자꾸 주절거리는 건지. 마이너스가 될 허튼 소리들만 늘어놓는 내 입에 누가 시멘트를 들이부어 줬으면 싶었다.
뒤돌아 입구를 향해 걷는데 구두 소리만으로도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다 알겠다. 문 앞까지 걸어갔지만, 이미 잘 자라고 인사까지 마쳤지만, 지금까지도 충분히 없어 보이는 짓을 해놓고 나는 또 이 문을 열고 나가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가슴을 넘쳐 발밑을 흘러 상대가 서 있는 곳까지 닿아도, 정작 입으로 한 문장, 한 단어 꺼내는 것조차도 질식할 것처럼 조심스러운… 이런 게 사랑 고백이었다. 며칠을 계획하고 멋진 말을 준비해서 상대를 감동시키면서 리드하는 건, 그렇게 모든 것을 제어하는 게 가능한 건 진짜 고백이 아니었다. 주세영, 너는 이거 알고 있었어?
이번엔 내 다리가 멋대로 뒤돌아 주세영이 있는 소파 앞으로 성큼성큼 되돌아간다. 문 앞까지 올 때는 천년만년 같더니 돌아갈 때는, 그 사람 앞으로 갈 때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다. 추하다는 거 알아. 이러면 이럴수록 당신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 그걸 다 알면서도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는, 이런 게 사랑이야? 그럼 난 그 비 오던 금요일, 당신에게 말했던 대로 지금까지 사랑을 몰랐던 게 맞아.
나를 붙잡으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 소파에서 일어나 있는 그 사람 앞에 가서 멈춰 섰다. 이번에는 내가 그 사람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사람의 셔츠 단추가 보이고, 얌전한 가죽 벨트가 보이고, 늘 한번 잡아보고 싶었던 정갈한 손이 보인다. 나는 기어이 이 손이 나를 밀어내는 것을 보려고 발악을 하는 미친놈 같았다.
“아니요, 선배님. 이걸로는 진짜… 안 돼요, 너무 부족합니다. 제 마음이 표현이 안 돼요. 근데 저 진짜… 제 감정 진짜… 진지해요.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한마디라도 해주세요. 제발….”
무너지듯이 그 사람의 가슴팍에 제발이라는 호소를 던지면서도 이것이 비굴함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생을 통틀어 나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순간이었다. 그 사람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고개를 숙인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내 머리 위에 가만히 놓인다.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의 떨림이 전해져왔다.
“오늘… 옷 잘 어울렸어요.”
아무리 많은 말을 쏟아내도 마음의 한 조각조차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지는데, 그 사람의 말에 웃음이 났다. 오늘 보고 옷 예쁘면 머리 두 번 쓰다듬어달라던 것까지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왜 이렇게 다정해요? 같은 남자가 좋아한다고 고백해도 개새끼 취급을 안 해요, 왜? 그건 나에게 개코딱지만큼이라도 희망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원래 당신 심성이 너무 고와서 그런 거예요? 후자 쪽이면 주세영, 다 찢어발겨버릴 거야. 그런 고운 심성 따윈 자기도취야. 진짜 친절도 진짜 다정도 뭣도 아니야. 그딴 얄팍한 감정으로 지금 내 머리에 손 올린 거면, 너 진짜 찢어발겨서 오늘 내 찌질한 모습 네 안에서 다 지워버릴 거라고.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재도전하게 해주세요. 오늘 고백은… 너무 구린 거 같아요. 원래 저 진짜 이렇게 어설프지 않거든요. 하하….”
하필 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빠진 상대가 연상의 남자라니. 그것도 직장 선배라니. 그것도 여친까지 떡하니 있는. 아, 우동주, 꼴좋다.
그 사람의 손이 천천히, 머뭇거리듯이 내 머리 위를 떠난다. 흰나비가 두어 번 날개를 접었다 펴고는 날아가 버린다. 마음 같아선 날아가지 못하게 날개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내 흰나비의 날개는 어쩌면 셔츠일 테니까 그 정도는 찢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옷장 속에 수십 개의 날개를 가졌을 텐데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
뒤를 돌아 다시 문을 향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이번에는 좀 전보다 구두 소리가 안정적이었다. 엉망으로 뒤집어진 내 마음과 무관하게. 등 뒤에서 문이 닫혔지만 복도를 걸을 수가 없었다. 룸 안과 달리 카펫이 깔린 복도에 주저앉았다. 그냥 이 문 앞에서 밤을 보내고 싶었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수 없는 건, 혹시라도 당신이 문을 열고 나와서 내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까 하는….
부탁했던 실내복을 가지고 온 호텔 직원이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정신이 든 나는 그제야 휘청거리며 일어나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추한 모습으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순서 없이 늘어놓은 것이 그에 대한 고백이 될 줄 알았다면, 그 타이밍은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었던 건데. 하지만 알 것 같았다. 언제 어떤 타이밍에 했더라도 이런 모습이었을 거다. 정연하게 갈무리될 수 없는 생애 최초의 경험. 그에 대한 마음은 처음부터 혼돈이었으니까.
□ ZOO SE YOUNG
삐―.
주세영은 암전 중이다. 아니, 정전됐다. 아니, 감전인가?
모르겠다. 하여간 난 지금 그냥 삐― 중이다.
우동주 씨가 방을 나간 후, 앉지도 눕지도 서지도 못하고 소파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급한 볼일이 생각난 것처럼 담배를 주워 물었다. 구원이라도 받은 듯 담배가 반가웠다. 그만큼 나에겐 뭔가 할 일이 절실했다. 응접실 안을 돌아다니면서 한 대를 피우고, 유리창 앞에 서서 서울보다 한결 소박한 야경을 내려다보며 또 한 대를 피웠다. 두 대, 세 대, 네 대… 모르겠다.
두뇌는 생각을 거부했다. 유리로 만든 상자가 있고 검은 보자기가 그 위를 넉넉하게 덮고 있다. 조금 들추어 안에 든 것을 볼까 하다가도, 거기 든 것이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상대일 거란 직감에 얼른 다시 덮어버린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월요일, 헬스클럽 앞 골목에서 옥신각신했던 우리 둘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선후배 사이가 아니었다. 우동주 씨는 남자인데, 우동주 씨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나 자신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묘한 방식으로 나를 대하는 우동주 씨도 짜증스러웠다. 속 시원히 물어볼 수 없는 문제라 더 갑갑했다. 우동주 씨, 왜 나를 이렇게까지 잘 따라? 내가 그렇게 좋아?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난 넉살이 좋지 못하다. 화요일엔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어 회사까지 결근했을 정도로 꽉 막힌 놈이 나다.
너 얼른 일어나서 학교 안 가? 싫어, 오늘 안 갈 거야! 아니, 얘가 대체 왜 이래? 얼른 일어나지 못해? 안 가! 우동주 그 새끼하고 싸웠단 말이야! ―쪽팔리지만 그런 상황과 다를 게 없었다.
이왕 결근까지 하게 됐으니 머리도 가슴도 좀 차갑게 식혀보자고 생각했는데 폭주하는 메시지에 결국은 또 온종일 우동주 씨 생각이었다.
[……아프지 마세요. 차라리 꾀병이기를 바랍니다. 내일도 선배님 못 보면 제 눈 썩어요…….]
물론 꾀병이었지만 우동주 씨의 그 문자에는 진짜 열이 날 것 같았다. 이게 만약 장난이고 농담이고 자각 없는 어장관리라면 넌 미친놈이야. 우동주 씨의 말을 더 듣고 있다가는 없던 병도 생길 판이었다. 남자 후배의 맹렬한 작업멘트에 불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가 실망스러웠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고, 점점 더 분명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자는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였고 그걸 열어 마주할 용기도 내겐 없었다. 그런데 맙소사… 우동주 씨, 내가 그렇게 좋아?
우동주 씨는 내가 그렇게 좋았단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입이 마르고, 수술실 앞에 대기한 보호자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샤워라도 하려고 테이블 위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는데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한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우동주 씨는 나에게 몇 번이나 커피를 내려줬을까.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설탕 대신 시럽까지 사 들고 와서 내 입에 딱 맞는 커피를 몇 번이고 내려줬다. 식어버릴 때까지 내가 한 잔을 다 비우지 않고 있으면 말없이 잔을 가지고 가서 따뜻한 새 커피로 채워 왔다. 그런 사람에게 종일 가시만 세워댄 게 안 그래도 미안했는데, 그럼 그것도 다 우동주 씨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베풀었던 특별 서비스라는 건가.
일에 관련돼서는 필요 이상으로 초조하고 날카로워진다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병적으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이번과 같이 단순한 실수는 거의 없었다. 거래처에서 컴플레인 전화를 받은 순간엔, 조금 오버스러운 표현이 되겠지만, 자아가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최근 흔들리고 있었던 일상에서 파생된, 예견된 실수나 마찬가지였다. 우동주. 모든 원인을 떠넘기고 탓하기에 그는 좋은 희생양이었다.
일요일에 사무실에 와서 훼방을 놓지만 않았으면 평정심을 잃을 일도 없었을 거고, 그럼 실수도 없었을 것 같았다. 일요일에 온다는 말에 토요일에는 회사에 나가기 싫었고, 오후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기대감에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고, 막상 자신의 그런 생각을 자각한 순간엔 그와 함께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돌려보냈고, 혼자가 되어도 더 이상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실수는 우동주 씨 탓이었다.
아니, 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다. 자신을 감시하고 제어하고 조절해야만 겨우 원하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놈이 난데, 그의 등장 이후 주변이 흐트러지고 일상에 변수가 생기고, 그리고 그것들을 바로잡지 않았던 건 바로 나였다.
그런데도 나는 죄 없는 우동주 씨를 화풀이 상대로 삼았다. 퍼붓고 퍼붓고 퍼부어도 밑 빠진 독처럼 내 치졸한 예민함을 그저 받아주기만 하는 우동주 씨를 보면서 그 순간에조차 미안한 감정이 공존했지만, 당장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그짓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 비뚤어지고 못난 방식으로 나는 분명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 마치 자기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듯 그는 그렇게 나를 지탱해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늘 하루,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인 우동주가 성질 까칠한 선배인 주세영에게 치여 고생하는 것 같았겠지만 그 반대였다. 주세영이야말로 우동주 덕분에 살았다. 그저 내가 선배니까 배알 틀려도 참고 맞춰준 게 아니다. 우동주 씨는 나를 받아준 거다. 내 까탈도 짜증도 못되게 나가는 말들도, 우동주 씨는 전부 자기 속에 담아주었다. 생각해보니까 우동주 씨 탓이 맞다. 그렇게 받아주니까 내가 더 그런 거다.
‘선배로서가 아니고, 다른 남자들이 여자에게 하는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로 선배님이 좋습니다….’
살짝 들췄던 상자의 덮개를 얼른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 열어서 확인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테이블 위에서 식어가는 커피에 마음이 쓰여 그대로 욕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테이블 앞에 서서 아직 미지근한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적당한 달콤함이 깔깔해진 입안을 달래주고, 예민해진 속을 달래주고, 두뇌를 느슨하게 풀어준다. 우동주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우동주 씨가 던지고 간 말은 다시 돌아보기가 겁났지만 우동주 씨가 지금 뭘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건 궁금했다.
샤워를 해도 개운해지지 않았고, 피곤이 손끝까지 퍼져 있는데도 잠을 잘 수 없었다. 호텔 직원이 가져다준 실내복은 두 벌이었지만 우동주 씨 몫의 한 벌은 침대 옆 티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우동주 씨의 재킷도, 핸드폰도, 가방도 전부 여기에 있었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핸드폰을 가지고 간 걸 알았다면 난 아마 무작정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답변도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실례겠지.
무슨 말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암전 혹은 정전인, 거의 반무의식 상태로 전화를 걸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동주 씨가 전화를 받으면 아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겠지. 나는 비겁해서 네가 주고 간 이 상자 혼자 열어볼 용기가 없으니까 와서 같이 열어줘, 라고. 무서운 일이다.
문 앞까지 걸어갔던 그가 다시 내 앞으로 되돌아왔을 때, ‘사실은 선배님도 절 좋아하죠?’라고 물을 것 같은 긴장감에 자리를 피해버리고 싶었다. 너도 날 좋아하면서 왜 아닌 척하냐고,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왠지 그가 그렇게 추궁해올 것 같았다. 그런 나 자신이 가장 두려웠다.
내 앞으로 다시 되돌아왔던 우동주 씨의 얼굴은, 창문에 맺힌 빗방울처럼 곧 흘러내릴 것 같았다.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었던 게 나만은 아니었다. 그는 초라한 고백을 걱정했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져 눈물을 보일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찾는 다 큰 사내놈이 한심해 보이지가 않았다. 열여덟 살처럼 앞뒤 없이 그저 절절하기만 한 그 서툰 고백에 오히려 내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는 고백조차도 열여덟 살처럼 하고 있었다.
화 안 났다는 말 못 믿겠다고, 머리 쓰다듬어주면 믿겠다고 했었지. 그리고 혼자 쇼핑한 옷이 예쁘면 한 번 더 쓰다듬어 달라고 했었고. 자신을 전부 드러내 보인 우동주 씨를 마주 안고 나도 너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도, 무슨 말이든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해달라는 그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줄 수 있는 기회는 남아 있었다. 겨우 그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도 나에게는 자신의 삶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열여덟 살이 아니었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 바라보는 창밖의 세상이 하늘 끝자락부터 바다색으로 천천히 물들어 마침내 완전히 밝아올 때까지도 내 안의 암전은 그대로였다.
■
의식의 바깥에서부터 서서히 들려온 벨소리가 어느 순간 리얼하게 귓전을 울리고, 몇 시지? 하는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져 벌떡 일어났다. 객실에 설치된 호텔 전화가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여유가 있는 시간이다. 일단 지각은 아니란 생각에 안심했지만 다음 순간, 어젯밤에 들춰보지 못했던 검은 상자가 불쑥 사고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 제발… 또 삐― 상태가 돼버릴 것 같다고.
째지는 듯한 고음의 벨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전화를 연결했다. 우동주 씨가 신청해둔 건지 프런트에서 걸려온 모닝콜이었다.
한 시간 남짓 겨우 잔 것 같다. 어제 종일 커피를 너무 마셔댄 탓인지, 육체는 수면을 원하면서 축 늘어지는데 머리는 멀쩡하게 깨어 있었다. 이 와중에 검은 상자는 빨리 열어보라며 머릿속을 들쑤시고 다니고…. 무사안일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주세영 인생에 가장 무사하지 못한 아침이라 할 만했다.
설마 어제 그러고 나가서 혼자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든가 한 건 아니겠지? 아니면 그대로 술을 진탕 퍼먹고 지금까지 곯아떨어져 있다든가. 왜, 우동주 씨는 전적이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밤새 술 퍼마신 게 분명한 흉측한 몰골로 출근했던 전적. 그러고 보니 그날도 싸웠었지. 뭐야, 그럼 그때 그렇게 술 퍼마신 원인도 설마 나? 좋아한다던 ‘그 사람’은 당연히 백 프로 나? 아니아니, 잠깐 그만. 다시 자체 정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서울로 튀어버렸거나 술을 마시고 떡실신한 건 아니었다. 전혀 좋은 아침처럼 보이지 않는 우동주 씨가 까칠한 얼굴로 복도에 서 있었다.
“아침 뭐로 하실래요? 호텔 조식으로 해도 되고, 거래처 들어가는 길에 어디 들러서 먹어도 되고, 지금 나가서 제가 뭐 간단한 거 사 와도 되구요. 어떻게 하실래요?”
응접실로 걸어가는 우동주 씨를 뒤따르면서 신기한 생물 보듯 그 등을 훑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돌아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바람에 당황한 시선이 허공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남자한테 고백한 남자치고는 너무 태연한 거 아닌가? 어제는 그렇게 절절하게 당장이라도 엎드려 울 사람처럼 굴었었는데 지금은 별다른 변화를 못 찾겠다. 나한테 그런 고백을 한 사람 같지가 않다.
“아무거나… 식욕이 별로 없어서….”
도리어 내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실내복 위에 걸친 가운을 만지작거리며 우동주 씨의 넥타이 매듭쯤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가 왜?
“잠, 잘 못 잤어요?”
한 발자국 내 쪽으로 깊숙이 들어서면서 허리를 숙여 안색을 살핀다. 그 말투가 방금 전과 달리 한없이 상냥해서 이제야 좀 나한테 고백한 사람 같았다. 전 같았으면 우동주 씨의 이런 행동에, 이거 봐 이거 봐 이 새끼 분명 이상하다니까, 했을 텐데 이젠 의미를 알고 있으니 이상한 놈 취급도 할 수 없다.
“얼굴이 엉망이에요.”
네 얼굴도 만만치 않거든. 면도를 어떻게 했길래 뿌리가 그대로 남아서 파릇파릇하냐?
“아니, 난… 커피를… 많이 마셨더니….”
우동주 씨가 다가온 만큼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면서 얼버무렸다.
“준비하세요. 입안도 까칠할 텐데 나가서 해장국 같은 거 먹어요, 우리.”
잠깐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곧 지친 얼굴로 멀어져가는 우동주 씨의 등이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굽어 보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흘린 별 의미 없는 ‘우리’라는 말의 울림이 나를 가볍게 흔들었다.
좋아한다는 고백 후에도 우동주 씨는 아주 태연하게 나를 챙겨줬다. 나 같으면 쑥스러워서라도 날 챙겨주는 짓 따위 그만둘 것 같은데, 고백은 고백이고 이건 이거라는 듯이 내 노트북을 정리해 가방에 넣고 어질러진 응접실을 치우고 구두 위의 먼지를 닦아줬다. 그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쭈뼛대는 내가 촌스러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입맛 없어도 몇 술이라도 떠요. 곧 쓰러질 것 같아서 못 보겠어요.”
딱히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콩나물 해장국을 시켜놓고 마주 앉아 우동주 씨는 깍두기를 먹기 좋게 잘라주었다. 그런 우동주 씨의 행동에서는 사적인 다정함이 느껴졌다. 후배로서의 예의로 한다기보다는 하고 싶어서 한다는 느낌. 이전에는 그 느낌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이제는 그 느낌 때문에 어색했다. 가만히 앉아서 이 친절을 받고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그가 워낙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고 있어 딱히 그만두게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우동주 씨도 내 눈을 똑바로 보지는 못했다. 평소의 장난기도 찾을 수 없었다. 언뜻 보면 약간 화가 난 사람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그가 잘라놓은 깍두기를 씹었다. 나는 반도 못 먹었는데 그는 국물 한 방울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뚝배기를 전부 비웠다. 불편한 식사 시간이었지만 어려운 자리에서 느끼는 거북함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질감의 불편함이었다.
일은 제대로 처리됐다. 거래처 담당자의 얼굴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이 걷히고 나서야(아마 그 사람에게는 만족스러운 표정이라는 옵션이 없는 것 같았다. 무표정이 곧 만족의 표현인 듯) 어젯밤 일이 다 끝난 후에 폭탄을 터뜨려준 우동주 씨가 문득 고마워졌다. 안 그랬으면 나는 해결해야 할 일과 우동주 씨가 던져준 상자 사이에 짓눌려 폭발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 집어던지고 서울로 날라버렸거나. 주세영이 감당하기엔 너무 파급력이 큰 상자였으니까.
담당자 앞에서는 평소의 서글서글한 얼굴로 잠깐 돌아왔던 우동주 씨는 거래처를 나서자마자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날 대하는 태도는 변함없이 친절했지만 싱거울 정도로 실실대던 가벼움이 싹 빠져 있었다. 그래, 태연할 수 없겠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뒷좌석에서 눈 좀 붙이세요. 회사 들어가셔도 퇴근 때까지 또 일하셔야 되잖아요.”
“아니… 괜찮아요. 별로 잠 올 것 같지도 않고….”
그런 폭탄을 던져놓고 완벽히 평소 같은 모습을 유지했다면 그것도 억울했겠지만, 상처받았다는 듯한, 그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듯한 그의 표정과 말투가 나에 대한 원망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뜨거운 국물에 입천장을 데인 듯, 찹쌀떡 하나가 식도를 틀어막은 듯, 껄끄럽고 갑갑했다. 나 좋아한다며? 그럼 어떻게든 점수 따려고 노력하는 게 보통 아닌가? 폭탄을 던진 건 우동주고, 그 폭탄을 지금 끌어안고 있는 건 나인데, 왜 내가 저를 신경 쓰고 있어야 되냐고.
속으로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한참 말을 골랐다. 3월이 코앞이라 그런지 자동차 앞유리로 쏟아지는 햇빛이 제법 봄답게 포근했다.
“커피 좀 마시고 싶은데… 고속도로 타기 전에 적당한 데서 잠깐 세워줄래요?”
“어제도 많이 마시셨잖아요. 어제야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오늘은 자중하세요. 그러다 오늘 밤에도 못 주무시면 내일은 진짜 쓰러져요.”
내 딴에는 말 좀 붙여보려고 어렵게 꺼낸 얘기였는데 운전에만 집중한 채로 딱 잘라버린다. 괘씸한 놈. 내가 오늘 밤에도 못 자면 그건 커피 탓이 아니라 네 탓일 거란 생각 안 드냐?
“우동주 씨는… 형제가 어떻게 돼요?”
궁지에 몰리니 결국 생각나는 건 호구조사뿐. 닳고 닳은 5년 차 직장인의 두뇌는 그다지 창의적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듬뿍 사랑받으며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고 자란 외아들이나 막내 같은 인상이 강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장남 같기도 하다. 남 챙겨주는 데에 이렇게까지 소질이 있는 걸 보면 아래로 동생들이 서너 명 줄줄이 딸린 장남일지도. 아, 그래도 섬세한 손길로 유치원 가는 여동생 머리를 묶어주는 우동주 씨는 왠지 상상이 안 되네.
“삼 형제요. 위로 형 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
장남도 아니고 막내도 아닌 딱 중간이었다. 부모님은 형은 형이니까 동생은 막내니까 특혜를 많이 주셨을 거고, 삼 형제 중 둘째는 억울함이 많기 마련인데 그런 거에 비해선 구김이 별로 없었다.
“아… 왠지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것 같긴 했어요.”
“왜요?”
그제야 내 쪽을 슬쩍 쳐다보면서 흥미를 보인다. 왜긴 왜야. 동성인 회사 선배에게 좋아한다고 직구로 고백할 정도로 남자다운, 아니 단순하니까 그렇지.
“고향이 군산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부모님은 뭐 하세요?”
“저희 집은 계속 농사짓던 집이에요. 지금은 결혼한 형이 할아버지 밑에서 농사일 보고 있구요. 선배님은 형제 있으세요?”
지방 출신이라고는 해도 어딘가 흙냄새가 나지 않아서 농사짓는 집 아들일 줄은 예상 못 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여름에 윗옷을 벗고 논밭에 나가 농사일을 돕는 우동주 씨가 그럴듯하게 상상이 되기도 했다. 일 잘할 것 같다.
“난, 누나 하나. 지금은 결혼해서 분가했고.”
잡지 좀 본다, 혹은 연예계에 관심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누나를 알았다. 흔한 이름도 아니라서 어쩌다 누나 이름이 나오면 혹시 스타일리스트 주이영 씨가 누나냐며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곤 했는데, 나로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동생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난 주세영이지 주이영 동생은 아니고, 우동주 씨에게는 더더욱 주이영 동생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동주 씨는 스타일리스트 이름 같은 걸 일일이 외우고 다닐 것 같진 않았지만.
“왜… 그렇게 봐요?”
좀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화난 사람처럼 말할 때조차 내 쪽을 돌아보지 않더니, 운전하는 도중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한 시선이 신경 쓰였다. 이젠 쳐다보기만 해도, 날 좋아해서 보는 건가? 의식하게 된다.
“선배님이 저한테 먼저 이것저것 물어주시는 게 처음이라서요.”
그야… 난 원래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는 편이고 인간관계에 능숙하지도 못하니까. 근데 네가 그런 나를 억지로 밀고 들어와서 혼란스럽게 하더니 시커먼 상자까지 하나 떠안겨줬잖아. 그러고는 자기가 더 쓸쓸한 얼굴로 앉아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안 되는 화술로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용쓰는 거 아니야.
“대체 어떤 놈이 나 좋다고 하나, 궁금해지셨어요?”
방심하고 있던 머릿속에서 한순간 불빛이 팟 터지더니 다시 또 정전이 돼버렸다. 아무리 우동주 씨라도 이렇게 밝은 햇살 아래서 그 얘기를 또 꺼내리라고는 예상 못 했다. 원래 밤에는 인간이 감상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니 어제는 그 충동의 힘으로 어쩌어찌 고백을 했다 해도, 며칠간은 그 화제의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 할 줄 알았다. 남녀 사이에도 고백한 후에는 양쪽 모두 어색해지기 마련인데 잘도 그 입에서 ‘좋다’는 말이 술술 나오는군. 이거, 생각보다 강적일지도.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선배님은 그럴 자격 있으니까. 성실하게 대답하면 점수 좀 딸 수 있는 건가요?”
나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작업을 걸어본 적이 없다. 성격도 그렇지만, 타고난 성격을 깨부술 정도로 간절했던 상대를 못 만난 탓도 있을 거다. 그래서 우동주 씨의 이런 말을 듣고 있으면 몸이 근지러웠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좋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만도 아닌데, 스스로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모호한 감정을 남에게 전달할 줄 아는 요령 따윈 내게 없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성격과 전혀 다른 화술을 가진 그가 그저 신기했다. 내 입장에선 대단히 경험 많은 선수처럼 느껴졌다.
상자를 열어보기는커녕 그 상자의 존재 자체도 아직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나에게, 점수 좀 딸 수 있는 거냐며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해왔지만, 물론 대답은 준비돼 있지 않았다.
남자에게 고백받은, 그리고 거기에서 불쾌감을 못 느끼는 자신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뛰겠는, 나에 대한 배려 같은 건 뭐 없는 건가. 우동주 씨 원래 게이도 아니라며. 그런데도 너는 내가 남자인 거에 대한 고민, 벌써 다 끝난 거? 아니면 너한테 그건 하찮은 문제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에게는 대범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나와는 달리.
“그렇게 곤란한 표정 하지 마세요. 지금 선배님, 눈썹 한 번 찡그리는 걸로도 저 죽일 수 있어요. 살려주세영.”
그런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할 거면 무리해서 농담할 필요는 없는데.
말끝에 이름을 붙이는 농담은 어린 시절부터 내내 나를 따라다녔었고, 이름으로 놀림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는 그 농담에 치를 떨었다. 어른이 돼서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더 이상 유치하게 이름으로 장난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었을 정도니까. 그런데 우동주 씨가 그러는 건 싫지 않다. 놀리려는 목적이 아닌 걸 알아서 그럴까? 불쾌하지가 않다. 불쾌하지 않은 게 문제다. 우동주 씨, 왜 너는 남자냐?
연애에 면역이 없는 가슴이 말랑말랑한 열다섯 소년도 아니고, 내가 우동주 씨의 농담과 고백을 불쾌해하지 않는 이유 따윈 알고 있다. 그딴 건 굳이 상자를 들춰보지 않아도 다 아는 거다. 상자를 들춰 그것을 자신의 눈앞에 확인하는 것이 두려울 뿐. 어른은 가끔씩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해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도 언급만 하지 않으면 없는 일이 되는 게 어른의 세계다. 그다지 쿨하지도 성숙하지도 않다. 쿨해 보이고 성숙해 보이는 요령만 터득하게 되는 것뿐.
우동주 씨는 역시 아직 열여덟 소년인가 보다. 우동주 씨나 나, 둘 중에 한 명이 여자가 아닌 게 문제가 아니라, 아마 그게 문제인 거겠지.
“우동주 씨.”
우동주 씨는 운전을 아주 잘한다. 어차피 영업을 위해 구비한 회사 차니까 좀 거칠게 몰아도 되는데 이 소형차를 가지고 신줏단지 모시듯 곱게 운전을 한다. 아니면 여기에 내가 타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다 소용 없는 궁금증이다. 난 알고 있다. 우동주 씨가 열여덟 같은 사람이래도 주세영이 서른한 살이라는 건 변함없었다.
“우동주 씨.”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휙휙 지나쳐가는 풍경들을 내다본다. 확실히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뒤늦게 사들인 카멜 코트는 결국 한 번밖에 입지 못했다.
“선배님, 저 대답 꼭 해야 됩니까?”
괴로운 목소리. 턱을 괸 채로 우동주 씨를 돌아보았다. 핸들을 붙잡은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가 있다. 태연해 보였던 우동주 씨도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다. 고백이란 그런 거니까. 상대의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무장해제시키고 철저히 약자가 되는 일이니까. 두렵지 않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내가 더 두려워. 난 사춘기 때도 방문 한 번 쾅 소리 나게 닫아본 적 없는 소심한 놈이라고.
“대답하면, 선배님이 저 죽이실 것 같아서 무서운데요.”
처음에 나는 우동주 씨 특유의 장난기와 넉살에 약이 올랐었다. 그 다음엔 쾌활한 다정함에 끌렸고, 그 다정함이 주세영 한정이라는 사실에 들떴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우동주 씨의 말에 혼자 헛물 켠 것 같이 입이 썼었다. 지금은… 장난처럼 뱉는 우동주 씨의 말이 더 아팠다. 농담으로 덮으려 하는 우동주 씨의 괴로움을 이해하는 서른한 살이라서.
“나 서른한 살이라고. 그 말 하려고 한 거예요.”
우동주 씨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창밖을 본다. 서울이 다가오고 있다. 마음속에 비밀 상자가 하나 들어서도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아무 일 없었던 척 행동해야 한다. 더 이상 충동적인 행동이 이해받을 수 없는 나이였다.
“우동주 씨는 열여덟 살인데, 나는 스물한 살이 아니고 서른한 살이라고.”
문득문득 열여덟처럼 웃을 때가 있었다. 그게 마냥 부러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우동주 씨는 열여덟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서 좁혀질 수 없는 13년의 차이가 서글펐던가 보다.
“거봐요. 저 죽이려고 한 거 맞잖아요.”
우동주 씨가 또 괴로운 목소리를 낸다. 억울하고 슬프고 내가 미워서 죽겠다는 듯한 열여덟의 목소리. 아마도 그는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너 죽이자는 거 아니야.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얘기지. 바보 새끼.
□ WOO DONG ZOO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둘 다 남자인 데다가, 빈말이라도 결코 개방적이라고 할 수 없는 주세영이 내 상대니까. 그 사람의 여자친구? 그건 오히려 별로 문제가 안 됐다. 그다지 깊은 사이가 아니라고 본인 입으로 말한 바 있고, 내가 보기에도 그 사람은 그녀와의 가벼운 관계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플러스, 여자친구가 없었다고 해서 나를 받아들여 줄 것도 아니었기에, 애초에 연인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었다.
장기전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컨트롤이 잘 안 됐다. 위에서 퍼부은 게 아니라 내 안에서부터 솟아오른 감정이라 눈치를 못 챘던 것일까. 언제 이렇게 가득 차 흘러넘치게 됐는지. 가지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절박함이 우동주 인생에도 찾아올 줄이야.
우습다. 내가 무슨 그 사람과 몇 년을 알고 지내면서 인간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눠온 것도 아닌데, 그 시간 동안 이렇게까지 원하게 되다니.
굳이 말하자면 이건 아직 사랑이 아니다. 상대에게 강렬하게 끌리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그 사람이 나에게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어차피 네 감정은 얄팍한 거야.’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게 맞다고 인정하겠단 얘긴 아니지만.
사랑이 아니어도 사람이 죽어갈 수가 있다구요, 주세영 씨. 그리고 분명 이 감정은 사랑으로 진화할 거야. 그러니까 누가 손목 잡아당기면서 머리 쓰다듬어주래? 내가 어깨만 주물러도 펄쩍 뛰면서 경계하던 주세영은 어디 간 건데? 고속도로 휴게소에 놓고 왔어? 역시 그거잖아. 헬스클럽 앞에서 싸웠던 날, 질투한 거지? 내가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너하고 둘이 있으면서 마치 애인이라도 된 듯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으로 챙겨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나를 왜 부추겼어? 네가 머리만 안 쓰다듬었어도 나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었는데. 완전 키스할 것처럼 당겼잖아. 거기에 내가 정신이 나간 거지.
고백 자체에 대한 후회는 없다. 며칠을 더 참았건 어쨌건 아마 나는 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밖에는 나를 설명할 수 없었을 거다. 조심스러운 사람임을 잘 알아서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놀랄 수 있도록 나도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 사람 마음만 생각해줬다가는 영원히 조심만 떨다가 끝날 판이었다. 내가 왁, 하고 성큼 다가가면 우왁, 하고 저만치 도망갈 걸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근데 열 걸음 물러섰다가 열한 걸음 다가오게 하면 되잖아. 주세영이 준비되길 기다렸다가는 나 혼자 펄펄 끓다가 전부 수증기가 돼서 증발하게 생겼는데. 못 참겠어. 장기전 안 해. 내가 언제 어떻게 말 꺼내도 당신은 놀랄 거고 도망갈 거잖아.
잘했어, 우동주. 잘한 거야. 아예 가망 없지 않다니까. 그 사람도 분명 널 의식하기 시작했었고, 고백한 후에도 더럽다며 주먹을 날린 것도 아니고, 다음 날 피한 것도 아니잖아. 주세영한테 이 정도면 엄청난 가능성 아니야? 네가 싫고 네 고백이 끔찍했어 봐. 너하고 나란히 같은 차 타는 것에도 몸서리쳤을 사람이야. 일에 집중하니까 돌변하는 거 못 봤어? 냉정하려면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냉정해지지 않았잖아. 나쁘지 않은 반응이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맞는 말 같고 앞뒤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거기다 주세영은 갑자기 형제는 몇이냐 부모님은 뭘 하시냐, 질문을 해왔다. 그것도 관심이랍시고 나는 기뻤다. 어차피 주세영이 밀어낸다고 순순히 밀려나 줄 생각도 없었으니 오래 버티려면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내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게 주세영 나름의 배려임을 알아서 더 희망적이었다. 딴에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발악이겠지. 백 년은 일러. 사회생활 5년 차여도 표정 하나 못 숨기는 숙맥씨.
‘우동주 씨는 열여덟 살인데, 나는 스물한 살이 아니고 서른한 살이라고.’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긴 옆모습이 꼭 비 오던 그날처럼, 우동주 씨 나 지금 좀 센치한 것 같다, 할 것 같았는데 그거하곤 비교도 안 되는 강도로 주세영이 내 숨을 콱 졸랐다. 갑자기 웬 열여덟 타령. 이 덩치에 이 얼굴이 진짜 열여덟 살인 줄 알았을 리는 없고. 아무리 나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안다. 서른한 살인 자기는 열여덟 같은 내 장단에 같이 놀아나 줄 수 없다는 뜻 아니야?
너는 지금 눈썹 한 번 찡그리는 걸로도 날 죽일 수 있으니까 살인하고 싶지 않으면 조심해달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주세영은 나를 죽였다. 나를 죽여놓고도 자기가 더 심란하다는 얼굴로 내내 시선을 창밖에 두고 있었다. 왜, 거기 밖에 뭐가 있는데? 나도 군산에선 얼굴로 알아줬었어. 나 좀 봐. 자꾸 봐야 정이 들지. 그러지 않으면 당신만 힘들어.
거절도 아니고 수용도 아닌 그 사람의 애매함과 다정함과 잔인함에 기절할 것 같다. 점잖은 척, 이성적인 척하는 것도 버거웠다. 말의 힘이란. 좋아한다고 내뱉은 순간부터 우동주는 주세영의 밥이 돼버렸다. 더 이상 조절도 인내도 뭣도 안 된다. 거리 두기? 차라리 나한테 죽으라고 해. 어차피 주세영도 나한테 죽어라 죽어라 하고 있는데. 이제까지의 연애경험도 왜 주세영한테는 아무 쓸모가 없을까. 어떤 공식도 적용이 안 되는 난이도 최상의 응용문제, 주세영 씨. 전화 찬스 없습니까? 어차피 물어볼 사람도 없지만.
옆자리에는 그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 사람이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니. 아니, 고백 전이었다면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당장 덤벼들어 그 안을 헤집어보고 싶었다.
당신이 뭘 고민하는지 알아. 남자고, 남자고, 그래 우린 둘 다 남자지. 나도 처음엔 그게 좀 그랬어. 사실 ‘좀’ 그런 걸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도 알아. 근데 나도 쉽게 마음 정한 거 아니거든? 왜 내 마음을 열여덟 살짜리 가벼움으로 취급해? 나 스물여덟이고 이젠 이성을 만나더라도 결혼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만나야 될 나이야. 근데 이제 와서 아무 책임감도 없이 단순히 가벼운 호기심 같은 걸로 남자한테 고백할 것 같아? 그것도 얼굴 맞대고 일해야 하는 회사 선배한테? 너는… 넌 좀 맞아야 돼.
회사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우리는 일 외의 다른 얘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가 버튼을 누르려고 팔을 뻗자 움찔거린 주세영 때문에 소리 내서 피식 웃을 뻔했다. 우와, 웃긴다, 주세영. 누가 뭐 너 어떻게 한대? 뭐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하지만 그러면 너 아예 나 안 보려고 들 거잖아, 지금은.
“제가 진짜 열여덟이었으면, 어제 그 방에 선배님 혼자 남겨놓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님… 제가 나쁜놈이 되든, 끝을 보려고 했겠죠.”
개발부 부장님께 먼저 보고를 드리기 위해 나란히 4층에 내려서면서 기어코 한마디 해주고야 말았다. 열여덟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주세영. 그나마 내가 스물여덟에 널 만나고 이런 감정을 알았으니 이만큼이나 견디는 거야. 고작 세 살 많으면서 혼자만 어른인 척하지 말라고. 내 눈에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알게 되면 너 분해서 어쩌냐? 내가 열여덟이었으면 너 아까 움찔했을 때, 네가 날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순간에 입술부터 들이댔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을 그 사람을 등 뒤에 두고 내가 먼저 복도를 걸어 사무실로 들어섰다. 옷 입는 것에 있어서만 남들보다 유별날 뿐, 주세영은 부모님 심기 한 번 건드리지 않고 바르게 자랐을 거 뻔하고 동성이 한 고백 따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근데 주세영 눈에 이 감정을 받아들인 내가 열여덟로 보인다면, 그게 열여덟의 용기에 대한 칭찬이었건 치기에 대한 꾸지람이었건 간에, 나도 처음부터 열여덟이었던 건 아니었다. 날 열여덟로 만든 건 주세영 본인이었다. 그건 왜 몰라줘?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내가 말로 확 뱉어버리니까 우왕좌왕 혼란스러운 거지, 너도 솔직히 내가 영 싫은 건 아니잖아. 내가 말 안 하고 있으면 한 몇 년 지난 후에, 아 내가 그때 우동주한테 좀 마음이 있었던 거구나, 그렇게 깨달으려고 했어? 그때 가서 가슴 쓸어내리면서, 다행이다 까딱 잘못했으면 나 호모 될 뻔했구나, 그러려고 했냐고. 넌 절대 나한테 마음 없는 게 아니야. 그랬으면 오늘도 그렇고 어제 고백 직후에도 그렇고 나한테 이렇게 못 했어. 넌 그냥 이후에 벌어질 골치 아픈 일들이 무서운 거지. 아마 지금쯤 이런 폭탄을 안겨준 나를 속으로 엄청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부장님께 보고를 마친 그 사람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데스크로 가버렸다. 화가 날 때는 속에 있는 것을 좀 발산해도 될 텐데 혼자 삭히려 든다. 자기를 들키기 싫으니까, 화를 내다보면 진심이 나와버릴까 겁나니까 일단 피하고 본다. 나에게 아주 불리한 버릇이다. 언성 높이면서 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래 나도 너 좋아한다! 됐냐?’ 하는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건데.
“왜 화나셨어요?”
뒤로 슬쩍 다가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 딱 떼고 물어보니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의자에 앉은 주세영이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는 각도는 멋지다. 전기가 쫙쫙 온다. 게다가 지금 내 눈앞의 주세영은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주세영이었다. 아마 내 말,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겠지. 당신은 당신 타이의 그 매듭처럼 섬세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매듭도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은 아니야. 그치? 집에 가서 그 매듭을 끄르고 난 후의 당신은 꼭 섬세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어떨까.
“몰라서 물어?”
잔뜩 이를 세우면서도 주변을 의식해 목소리를 낮추는 걸 잊지 않는다. 그냥 지금이라도 내가 좋다고 해. 그럼 이렇게 당신 들쑤셔가면서 약 올리지 않아도 되잖아. 우동주는 주세영 밥이고, 발아래 엎드려 찬양만 하기에도 모자란 당신인데, 나도 이렇게 혈압 오르게 하긴 싫다고. 이게 다 당신을 얻기 위해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만 알아줘요. 난 절대 즐기지 않았어. 예전에 고백 전에는 조금 즐겼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저 불안하고, 당장이라도 당신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제 감정 진지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린애의 순간적인 기분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수정해드린 겁니다.”
그 사람 맞은편 자리의 다른 개발자가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을 힐끔거렸다. 거기에 뜨끔해 입을 다물어버리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고….
“아무튼 나중에 얘기해요. 그만 가줘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또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서만큼은 타협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이중적인 면이 있는 거니까. 나도 요즘 이제껏 내가 몰랐던 새로운 우동주와 조우하고 있는 중이야.
“그럼, 작전상 이만 후퇴하겠습니다, 선배님.”
농담을 할 여유 따위, 물론 쥐똥만큼도 없다. 돌아서서 개발부 사무실을 나오는 순간, 내 눈앞에서 그 사람의 형상이 사라지는 순간, 마음은 검은 불안으로 가득 차고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희망들도 다 무너지고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도 확신할 수가 없어졌다. 날 밀어내고 나에게 화를 내고 나를 애 취급해도, 함께 있는 편이 나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그 사람 혼자 진전시켜 나갈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 사람 말대로 진짜 열여덟 살 맞는 건지도.
출장에, 고백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몸 상태는 엉망인데 피곤한 줄도 모르겠고 졸리지도 않았다. 내 꼴을 보고 측은히 여긴 박 대리님이 5시부터 그만 들어가 보라고 등을 떠밀길래 못 이기는 척 회사를 나와버렸다. 이러다간 정말 퇴근하는 그 사람 붙잡고 회사 로비에서 신파 드라마라도 한 편 찍을 것 같아 무서웠다.
물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얻을 수만 있다면야 드라마 한 편이 문제겠는가. 어떤 추태라도 기꺼이 부릴 수 있다. 그랬다가는 그 사람이 다시는 날 상대도 안 해줄 것 같아서 그게 문제지.
집에 가도 잠이 안 올 건 뻔하고 술이나 마실까 하다가 헬스클럽으로 방향을 바꿨다. 내일 술에 절은 모습으로 출근했다가는 그 사람이 속으로 혀를 차면서 나와 잘될 수 있는 가능성에 빨간 줄을 죽죽 그어버릴 것 같았다. 자기 관리 못하는 사람은 싫어할 것 같으니까. 운동 좀 격하게 해주면 몸이 못 이겨서라도 잠이 들겠지.
월요일에 그 사람하고 왔을 때는 반짝반짝하고 산뜻하게 느껴졌던 헬스클럽이 오늘은 영 우중충했다. 옷을 벗어 라커 안에 대강 쑤셔 넣으려다가 그 사람 생각이 나서 제대로 옷걸이에 걸어 넣었다. 셔츠 위에 재킷을 걸쳐 라커 안에 넣으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몇 주 사이에 주세영한테 잘 보이겠다고 돈을 얼마나 들인 건지. 아버지가 사 주겠다고 해도 필요 없다고 했던 게 슈트인데. 그래도 이거 덕분에 주세영이 머리도 한 번 더 쓰다듬어줬으니 헛돈 쓴 건 아닌가? 와, 주세영 손 엄청 비싸네. 이거 말고 월요일에 산 거 두 벌 더 있으니까 새 옷 입고 갈 때마다 한 번씩 또 쓰다듬어주는 건가? 아… 내가 진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웃어도 속이 썩어들어가고, 가슴이 꺼멓게 벌레 먹는다.
차라리 주세영한테 뭘 사다 안긴 거면 덜 억울하지. 난 그냥 파크랜드 같은 데서 파는 것도 좋던데. 그래도 확실히 좋은 슈트를 입고 외근 나간 날은 대우가 다르긴 했으니까 주세영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아니야, 고맙긴 뭐가 고마워. 슈트 값으로 벌써 내 연봉 절반도 넘게 써버렸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배꼽이 배 밖으로 튀어나가더라도 그 사람이 날 좋게 봐주기만 한다면 카드 한도가 바닥날 때까지 긁어댈 각오가 돼 있는, 내가 미친놈이지 주세영 잘못은 아니었다.
지금쯤 퇴근했겠지? 내가 얼굴도 안 비추고 먼저 퇴근해버렸다는 걸 알고 조금은 섭섭했을까? 아니면 3층 사정은 관심도 없이 쌔하게 퇴근해버렸을까? 멀쩡한 남자 게이 만들어놓고도 책임감을 못 느끼는 나쁜 주세영은 내일 아침 옷장 앞에 서서 평소처럼 완벽한 차림을 위해 옷을 고르고 머리를 만지겠지. 그러고는 얼룩 하나 없는 구두를 신고 등을 곧게 펴고 회사에 출근해 말끔하게 정돈된 책상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겠지.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 사람 생각뿐이었다. 어제 일부터 퇴근 전까지의 일들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오늘까지를, 수도 없이 반복해 되새겨보았다.
처음엔 겉으론 딱딱한 척하지만 속은 맹탕 같은 점이 흥미로웠지. 그러다 내 앞에서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한 빈틈이 귀여워졌고, 그 빈틈 사이로 그 사람을 들여다보고 싶어졌고, 센치하다고 말하는 느슨해진 입술과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코트 자락에 내 마음도 펄럭펄럭 뒤집어졌고… 그리고 어느 틈엔가 그 사람도 나를 의식하고 있음을 느낀 후부터 마음은 가속도를 타게 됐다. 난 아마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믿음을 갖게 됐을 거다. 고백하더라도, 미친놈 더러운 놈 취급받진 않을 거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데에는 분명 주세영도 한몫했다. 나 혼자 착각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다. 누구의 마음을 얻고 싶어 고민이었던 적도 없지만 흑심 없는 시선이나 관심을 오해해 혼자 들뜬 적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그런 쪽으로는 무딘 편이었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 사람의 눈, 평소엔 늘 차분하면서 내 앞에서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평정심을 찾지 못했던 그 사람의 태도, 문득문득 드러나기 시작했던 돌발적인 면들. 그건 분명 찌릿찌릿한 신호였다. 나도 너 싫지 않아, 나한테 마음 있으면 와서 대시해도 괜찮아, 하는 신호였다. 그럼 뭐가 문제였을까.
쇼핑 갔던 날 머플러를 둘러준 건 너무 오버였을까. 일요일에 회사로 찾아가지 말 걸 그랬나. 집에 데려가달라고 조른 게 성급했을까. 커피는 어쩌다 한 번만 사다 줬어야 했나. 잠자리를 가리는 편이라 호텔에서 자야겠다고 한 건 너무 뻔한 핑계였을까. 온갖 후회와 삽질이 뒤얽혀 머릿속은 철수세미처럼 엉망이 돼버렸다. 그 사람이 스스로의 감정을 더 정확히 자각할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했을까. 아니야, 그냥 뒀으면 평생 가도 날 좋아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리 없었다. 아니야, 나도 놀랐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는데 그래도 좀 더 시간을 줬어야….
결국 혼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들이었다. 내가 아무리 온갖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해 그럴듯한 보기를 4번까지 만들어놔도 주세영이 5번에 새로운 보기를 하나 추가해 그게 답이라고 하면 그런 거였다. 러닝머신의 모니터는 내가 1시간 40분이 넘도록 삽질을 하고 있음을 알려줬다. 어쩐지 죽을 것 같더라.
어른스럽게 대처하고 싶었다. 심사숙고해서 잘 정리한 말들로 내 감정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그 사람의 대답을 천천히 기다려주면서, 다정하고 마음이 넓은 우동주가 되어주고 싶었다. 근데 그러다가는 내가 먼저 피가 말라 죽을 것 같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알고 싶다. 이 문제가 사지선다형인지 아닌지. 죽도록 고민했는데 정답이 5번이라면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주세영이라도 용서가 안 될 것 같다.
주저 없이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한참을 머리로 생각하다가도 결국은 감정의 충동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어쩌면 지금 나는 열여덟 살이 돼버린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공을 들여 타이에 매듭을 짓는 거울 속의 내 눈은 수능을 보던 날보다, 대학 논술을 치르던 날보다, 입사 면접이 있었던 날보다 더 진지하고 결의에 차 있어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했다.
이제 막 좋아한다는 감정에 눈을 뜬 열여덟 소년의 치기를 가르친 게 주세영이라면, 나를 스물여덟의 진짜 남자로 만들어준 것도 주세영이었다. 적어도 주세영은 그걸 알아줘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내 손은 거침이 없었다. 두려움도 없다.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건 그 사람이 실컷 하고 있을 테니, 나까지 그럴 필요 없다. 내일이 되면, 아니 막상 그 사람의 얼굴을 눈앞에 두면 지금의 이 용기도 단호함도 간단히 박살나버릴지 모르지만 이렇게 두서없이 우왕좌왕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감정도 나에게는 첫 경험이었다. 부딪쳐 박살나버리더라도, 추하고 구질구질해지더라도 감정이 시키는 대로 원없이 충실해질 의무가 있었다. 주세영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마음과 고백을 취소해줄 생각은 없으니, 그럼 최선을 다해야 했다.
[여보세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이 먼저 가슴을 박차고 나가 하늘만큼 커다란 날개를 펴고 당신에게 날아가 버리는데… 내가 그걸 무슨 수로 막겠어.
[저예요. 할 말이 있어요. 잠깐이면 되니까 시간 좀 내주세요.]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혹시라도 나중에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남자끼리니까 이런저런 신경 쓸 일이 많을 거라는 생각도, 심지어 나 자신도 주세영도, 이 감정을 막을 수 없다. 아직 사랑이라 할 만큼 무르익은 마음은 아니어도, 그 사랑을 주세영과 하고 싶다는 이 열망 자체에는 거짓이 없었다.
[……나, 벌써 집인데.]
곤란해해도 봐줄 수가 없어요. 미안.
[제가 집으로 갈게요. 진짜 잠깐이면 돼요. 오지 말라고 하셔도 갈 겁니다.]
이미 내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종일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두 시간 가까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몸이 가볍다. 피곤에 절어 곯아떨어지려고 운동을 했는데 오히려 머릿속은 점점 맑아져 음각으로 또렷이 새긴 그 사람의 이름만이 남았다.
[……내일 회사에서…….]
[회사에서 얘기해도 돼요, 정말?]
예의 바르게 돌려 말해 거절하는 거 지금 나에겐 안 통해요. 오지 말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도 난 갈 건데, 내일 회사에서 얘기하자는 그런 얄팍한 핑계가 먹힐 것 같아?
[10분 안에 도착합니다. 끊을게요.]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없을 그 사람을 알아서 그냥 전화를 끊었다. 이미 나는 거의 달리고 있었다. 세 번을 고쳐 매가면서 정성을 들인 타이가 흐트러지고,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닌 구두 바닥이 아프게 발을 때렸지만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왜 나는 네 앞에서 멋지게 폼 잡을 수 없을까. 아, 몰라. 멋진 건 네가 하세요, 주세영. 내가 너 꼬신 거야. 그러니까 주세영은 그냥 우동주 탓하세요. 내가 먼저 옆구리 콕콕 찌른 걸로 해요.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내 끈질긴 구애에 당신은 익숙해질 거고, 그리고 점차 무뎌지게 될 거야.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도 못 하게 되겠지. 왜냐면 어차피 넌 지금 내가 싫은 것도 아니거든. 혼란의 입구에서 그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두려울 뿐.
원래 길눈이 밝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됐는데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니 저절로 다음 코스가 기억이 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호수가 가물가물했는데 막상 복도로 들어서니 어느 집인지 알 것 같았다. 매일 드나드는 자기 집을 호수를 보고 찾는 사람이 없듯이.
현관 앞에서 벨을 누르기 전에 다시 또 마음이 약해지려 했지만 그냥 질러버렸다. 문이 열리고, 열린 문틈으로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냐고 묻는 듯한, 나를 원망하는 듯한 표정.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화나셨어요?”
퇴근 시간은 훨씬 전에 지났는데 아직도 슈트 차림이었다. 타이도 풀지 않았다. 평소보다 살짝 느슨해진 헤어, 눈에 띄게 해쓱해진 뺨, 거칠어 보이는 입술. 완벽주의자에 미적인 것에 까다롭고 자극에 예민하지만 한편으로는 말랑말랑하고 나긋나긋한 감성으로 세상을 볼 것 같은 섬세한 얼굴. 코가 높고, 눈이 깊고, 광대에서 턱으로 떨어지는 선이 날카롭고 깨끗하다. 잘생기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분위기가 있는 편이지. 지적일 것 같고, 정적일 것 같고, 하지만 그 안엔 뜨거운 덩어리가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그 덩어리 한번 내 속에 삼켜봤으면.
“선배님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억지 부리고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내가 들어도 참 절절한 목소리다. 그 사람도 거기에 감복했는지 어쨌는지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한쪽으로 비켜서 길을 열어준다.
“알면서 왜 그래요…. 됐으니까 들어와서 얘기해요.”
내가 조금만 저자세로 나가면 금방 마음 약해지면서…. 이러니까 내가 자꾸 희망을 갖게 되지. 구두를 벗고 복도에 올라섰다. 앞서 걸어가는 그 사람의 등이 피곤해 보였다. 뒤에서 가만히 안아주고 싶었다. 씻고 나오라고 욕실에 들여보내 놓고 방도 정리해주고 따뜻한 음식도 적당히 주문하고 혹시 널어놓은 빨래 같은 거 있으면 그것도 좀 개주고… 그러면서 점수 따고 싶었다. 내가 그러려고 했을 땐 당신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지.
“지저분해요…. 지난번에 와봐서 알죠? 마실 게 없는데… 커피하고 녹차밖에….”
평소 대외적 이미지가 워낙 맑고 투명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지저분하게 느껴질 뿐 딱히 그 사람 집이 엉망진창인 건 아니다. 주세영은 왠지 집에서도 셔츠에 치노팬츠를 차려입고 먼지 하나 없는 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 내려놓고 독서를 즐길 것 같은 이미지니까, 그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는 것뿐.
집에 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밥도 안 먹고 맥주 한잔하고 있었나 보다. 소파 테이블 위에 속이 비어 쓰러진 맥주캔이 두어 개 있고 막 피우다 끈 건지 재떨이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 때문에 그랬을 거라 생각하니 측은하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했다.
“그냥 물이나 한 잔 주세요.”
오피스텔치고는 조금 넓은 편이긴 하지만, 앉을 곳이라고는 침대 앞으로 TV를 마주하고 놓인 3인용 소파 하나뿐이라 그 사람과 나는 나란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험악한 인상의 낯선 사람을 방에 들인 것처럼 멀찍이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그 사람을 보고 있으니 처음엔 안 그랬는데 자꾸 못된 마음이 고개를 들 것 같았다. 내가 덤벼들면 전력을 다해서 걷어찰 거면서.
그 사람이 가져다준 냉수를 단숨에 비워버렸다. 한 잔 더 주려는 건지 내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컵을 가져가려는 그 사람의 손목을 붙잡아 소파에 끌어 앉혔다.
“술 드셨어요?”
“그냥 피곤해서… 마시고 푹 자려고….”
너 때문에 마신 거 아니니까 괜한 착각하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다. 나도 그렇지만 주세영도 참 서툴다.
“전 헬스클럽에 갔었어요. 집에 가봤자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운동이라도 하면 푹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 시간 가까이 달렸는데도 지치지가 않더라구요.”
한 사람이 겨우 비집고 앉을 정도의 틈을 두고 떨어져 앉은 거리를 지우고 싶었다. 피곤으로 푹 꺼진 두 눈이 잔뜩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만지고 싶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지금 나는 그저 당신의 뺨을 만지고 싶을 뿐인데. 그뿐인데.
“선배님, 주세영 선배님.”
눈을 마주하고 힘주어 이름을 부르자 시선을 피하면서 뒷목을 문지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겁나겠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어떤 용기로 자기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허벅지 위에 올려진 그 사람의 마른 손가락이 너무나 탐난다. 내 손가락을 얽어 단단히 깍지 끼고 싶다.
“저, 가능성 없어요? 정말 요만큼도 저한테 안 끌리세요?”
드디어 물었다. 이 문제가 사지선다인지 아니면 5번까지 보기가 있는 건지. 절박함이 긴장감을 이겨 없던 용기가 생겨나고, 감정이 격해지면서 목소리가 떨리는데 그런데도 이 나쁜 남자는 내 쪽을 봐주지도 않는다.
“제가 열여덟 살처럼 굴어서, 그래서 저하고는 안 되나요?”
“우동주 씨,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제야 나를 보면서 입을 연다. 사실을 말해. 당신 진짜 마음을 말하라고. 어설픈 변명 같은 거 듣자고 이 지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런 뜻이고 이런 뜻이고. 내 감정에 어울려줄 수 없다는 건 같은 결론 아닙니까? 그럼 저한텐 똑같아요.”
애초에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여기 온 것도 아니지만 감정적으로 날뛰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근데 솔직하게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을 마주하면 속이 터져서 또 이렇게 폭주해버린다. 지금까지 연애할 땐 분명히 상대가 잘못했어도 순순히 접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왜 이 사람 앞에서는 그게 안 될까.
그 사람이 나를 보면서 한숨을 쉰다. 상대가 안 된다는 듯이. 이러니까 너는 안 된다는 듯이. 그럴수록 나는 억울하고 초조해져서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했다.
“선배님은 그런 적 없죠? 갖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막무가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면 그 사람이 날 더 싫어할지 모른다는 것도 다 알면서… 눈앞에 보기라도 해야 살 것 같고, 그 사람이 없는 모든 공간이 다 지옥 같고… 그런 적 없죠? 없으니까 내 마음 모르는 거야…. 분명히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물을 한 잔 더 달라고 할 걸 그랬다. 한 템포 쉬면서 좀 진정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의지할 게 없다. 허겁지겁 재킷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지만 맛도 모르겠고 전혀 진정이 되지도 않는다. 난 내가 자존심이 꽤 센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그런 쪽팔리는 말을 술술 잘도 늘어놓는구나.
“왜 그렇게 몰아붙여? 난 뭐 그런 얘기 듣고 태연한 줄 알아? 하루 만에 이렇다 저렇다 대답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만 가. 오늘 더 얘기하는 거 좋지 않은 것 같다.”
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돼, 이렇게는 못 가. 눈앞에서 사람이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내던지듯 담배를 끄고 뒤따라 일어나 돌아서는 그 사람의 등을 끌어안아 버렸다. 허락되지 않은 건방을 떨어버렸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너 미쳤어?”
내 팔 안에서 그 사람이 격렬하게 저항한다. 내 입술에 그 사람의 머리카락이 스치고, 품에 꽉 차는 그 사람의 단단한 몸이 펄떡거린다. 맞아, 나 당신 알고부터 쭉 미친놈이었어. 근데 내가 미친놈이면 넌 나쁜놈이야. 내가 미친놈인 건 알면서 네가 나쁜놈인 건 왜 몰라?
“나한테 끌리죠? …그것만 말해줘요, 제발…. 주세영, 제발!”
그 사람의 가슴 앞에서 깍지를 낀 손에 강한 힘을 주었다. 가슴이 뛰어서 셔츠가 터질 것 같았다. 잠잠해진 그 사람이 고개를 푹 떨어뜨린다. 셔츠 칼라 사이로 솟은 말끔한 목덜미가 제발 내 것이었으면 했다.
“우동주 씨, 내가 서른한 살이라고 한 건… 우동주 씨가 어리다는 게 아니라… 나는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는 모자란 사람이란 뜻이야. 나는… 난 그렇게….”
아, 주세영, 이럴 때 보면 진짜 고단수다. 차라리 소리를 질러요. 5년 동안 다듬어왔다는 그 멋진 팔로 차라리 내 옆구리를 힘껏 내려쳐. 그렇게 괴로운 목소리 내면서 우회적으로 나를 꾸짖지 말고. 이러면 내가 나쁜놈이 되잖아. 나쁜놈은 당신인데.
“그게 뭐예요. 끌리고 있다는 말로밖에 안 들려.”
“그만 돌아가 줘. 나도 제발이다, 정말….”
그 사람이 내 손목을 붙잡아 가볍게 끌어내렸다. 그 무엇으로도 끊어낼 수 없을 만큼 꽉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너무 쉽게 팔이 풀렸다. 윽박지르고 혼내는 것보다 어르고 달래면 말을 잘 듣는 어린애처럼. 아니, 당신 입에서 나오는 제발이라는 말을 거스를 수 없는, 당신을 좋아하는 나이기 때문이겠지.
좋아한다는 거, 진짜 요상한 거네. 내가 죽겠는데, 내가 여기서 피 토하고 쓰러지게 생겼는데, 그런데도 끝에는 당신 말을 들을 수밖에 없으니…. 내가 이렇게 자기희생적인 놈이었나. 아니, 듣고 싶었던 말을 이미 들었으니 만족한 짐승은 배를 두드리며 물러설 뿐이다. 잡아먹힌 건 주세영 쪽이다. 마음을 뜯어 내가 잠잠해질 수 있도록 먹이를 던져 준 건 주세영이었다.
“나, 진짜 가요?”
한 발자국인데. 팔을 뻗으면 다시 당신을 안을 수 있는데. 지금 몰아붙이면 진짜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건 당신에게 못할 짓이겠지.
“가.”
오늘은 이걸로 만족할게. 당신에게는 끌리고 있다는 직접적인 인정보다 더한 자기고백이었을 테니까. 한 발 다가가 끌어안는 대신에 그 사람의 어깨에 이마를 툭 내려놓았다.
“진짜 좋아해요. 그걸 의심하진 마…. 고마워요, 오늘.”
구두에 발을 넣고 문을 열고 나와 등 뒤에서 도어록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혹시 이번에는 그 사람이 뒤쫓아 나와 내 등을 안아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욕심이겠지. 오늘은 정말 이걸로 충분해. 너무 잘해줬어, 주세영. 이렇게만 해줘. 내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한 줌씩 넣어주는 희망이라도 좋으니까… 오늘처럼만….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어떤 노래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입안에 맴돌긴 하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답답했다. 달콤한 사랑 노래도, 절절한 이별 노래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딱 한 부분의 가사가 묘하게 지금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곡이었다. 너무나 격렬한 감정을 느끼지만, 도리어 그 감정을 이길 수 없기에 오늘은 이만 말없이 돌아선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대답할 수가 없다니. 그것보다 더 나를 기쁘게 할 대답은 없을 거야. 주세영은 오늘부터 나쁜놈 아니야. 좆나 좋은 놈이야. 그 노래 어딘가의 가사를 또 빌려오자면 당신은 나의, 딸기사탕 포장지야. 좋아하는 아이가 별 생각 없이 건네준, 사탕은 벌써 먹어버렸지만 포장지만이라도 차마 버릴 수 없어 서랍 속에 넣어둔.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니, 가슴을 박차고 나와 나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로 날아갔던 내 마음이 날개를 펼쳐 밤하늘의 별을 온통 품고 있었다. 서울이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나는 앞으로 분명 그를 사랑하게 되겠지.
□ ZOO SE YOUNG
한 번도 부모님 뜻을 거슬러본 적이 없다. 외향적이고 활달했던 누나와 달리 온순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대학의 학과 선택부터 입대 시기까지 부모님이 결정해주신 대로 따랐다.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하긴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안정적이고 전망이 좋은 전문직 직업을 갖길 바라셨다. 누나는 이미 중학교 무렵부터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내고 입시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의상 관련 전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부모님을 설득하는 동안 집안 분위기가 삭막했기 때문에 나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꼭 관련 직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마음에 드는 옷을 사서 잘 차려입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명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통신 관련 기업의 간부직까지 지내시다 재작년에 정년퇴직하셨고, 어머니는 공무원이셨던 외할아버지 아래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신 분으로 외할머니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전업주부로 지내오셨다. 두 분 다 결코 개방적이라거나 현대적인 교육관을 가진 분들은 아니셨지만,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하셔서 집안에는 큰 소리 나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유일한 골칫거리가 누나였다.
누나는 워낙 활동적이라 학교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호기심도 많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다. 가족 중에 혼자만 참 유별났다. 그렇게 부모님의 앓던 이였던 누나는 장학생으로 추천을 받아 유학까지 다녀온 후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승승장구해 이제는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부모님의 기대주는 누나가 아닌 나였다. 차분하고 꼼꼼해서 성적이 꽤 잘 나왔기 때문에 부모님은 내가, 못해도 아버지만큼은 사회에서 한몫하리라 기대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나는 상당히 무기력한 놈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아무런 열정도 없는 채로 나이만 성인이 되어 있었다.
누나가 부러웠다. 시기하고 질투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 기간이 꽤 길었다. 취업을 하고 일에서 보람을 찾기 전까지, 그러니까 20대 후반까지는 계속 그런 열등감에 시달렸었다. 나도 누나처럼 부모님과도 부딪쳐보고 밖으로도 나돌아보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볼걸, 후회도 많이 했다. 그러나 본성은 쉽게 달라지는 게 아니라서 이제까지의 삶을 다 뒤집어엎고 새롭게 시작할 용기는 또 없었다. 그걸 뒤집으면, 그럼 그때부터는 뭘 하면 좋을지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었고.
일에 재미를 붙이면서부터는 그런 생각도 서서히 사라졌다. 큰 욕심도, 타는 듯한 열정도, 원대한 꿈도 없지만 매일의 일상에서 보람을 찾고 가끔은 적당히 회의도 느끼고 가끔은 허무해하기도 하면서 남들 사는 것처럼 사는 거,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다만 가끔씩, 그런 생각으로도 위안 삼을 수 없는 외로움이 덮칠 때가 있었다. 큰 욕심, 타는 듯한 열정, 원대한 꿈 ―그런 건 없어도 살겠는데, 곁에 있어 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었다. 이대로 나는 누구와도 깊은 유대와 애정을 나눠보지 못한 채 부모님이 골라주신 상대와 결혼을 하고, 배우자와도 적절한 선과 예의를 지켜가면서 점잖게 살게 될까. 깨가 쏟아지는 생활은 아니더라도 무난하고 평화롭게, 그렇게 살 수는 있겠지.
누군가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도, 그 사람을 향해 내 몸이 다 탈 것 같은 열정도, 그 사람과 내가 함께 그리는 둘만의 원대한 꿈도, 나는 가져보지 못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 가끔 어떤 세속적인 성공도, 지금껏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온 굴곡 없이 평온한 일상도 다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생각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단 한 명,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서로에게 기대 살아갈 단 한 명이면 될 것 같았는데.
서른한 살, 나이로는 이미 한참 전에 어른이 됐어도 사랑의 시옷 자도 모르는 채 허한 가슴을 숨기고 가벼운 관계만을 전전하며 떠도는 섬이었다, 나는.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살아온 내가, 세 살 연하의 남자 후배가 던져주고 간 상자를 쉽게 열어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니, 사실 연하라는 건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스물여덟이나 서른하나나 결국에는 내가 여든여섯일 때 그쪽이 여든셋,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 거지.
진짜 문제는, 나는 껍질째 단단하게 굳어버린 시시한 서른한 살인데, 우동주 씨는 부드럽고 연한 자신의 속살을 내 앞에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게 너무 눈부시고, 부럽고, 내 몫이라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는 그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벌거벗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온전한 솔직함에 똑같은 솔직함으로 응할 수 없는, 나는 비겁한 어른이었다.
가끔씩 열여덟처럼 웃는구나, 생각했었다. 또 가끔씩은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거절당한 중학생처럼 구네, 생각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나를 잘 따르는지, 왜 나에게만 유난스레 구는지도 궁금했고, 성욕을 일으키는 대상을 보듯 내 몸을 훑는 시선의 이유도 궁금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도 왜 자꾸 나에게 와서 치대는지 화가 나기도 했었고.
그래도 나는 절대, 우동주 씨에게는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도 그 이유를 물을 생각이 없었다. 궁금증과 기대감은 점점 불거지는데 해소하지를 못하니 혼자 한껏 들떴다가 갑자기 화를 냈다가, 다중인격처럼 굴 수밖에….
우동주 씨가 그러는 이유는 확신할 수 없어도, 내가 그러는 이유는 굳이 자문하지 않아도 무의식이 알고 있었다. 끝까지 모르는 체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알게 돼버렸다. 그런데 우동주 씨도 나와 같은 이유였다고 말해줘도 기뻐할 수가 없다니. 어째서 나의 욕심이자 열정이자 꿈의 대상이 남자가 돼야만 했을까.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타인이 사는 방식에 대해서는 꽤 수용 폭이 넓은 편이다. 달리 말하면 관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누군가가 게이든 뭐든 남이 나서서 참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리고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해는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었고.
사춘기 때도 부모님께 한 번 대들어보지 못한 내가, 아버지가 정해주신 대학의 학과에 군소리 없이 원서를 넣고, 군대에 갔던 것을 제외하면 휴학 한 번 없이 졸업 후 곧바로 취업을 하고, 남들이 사는 사이클에 맞춰 대열에서 벗어나는 법 없이 심지어 그 편리함에 길들여지기까지 한 내가, 오직 감정에만 의지해 줄을 이탈하기란 쉽지 않다. 왜 난 단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을까.
첫 경험조차 당시 석 달간 교제했던 여자친구와 스물한 살에 치렀던 주세영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남자의 평균 첫 경험 나이가 21~23세라고 해서, 역시나 그렇군, 했던 기억이 있다. 쉽게 말하면 평범의 끝이자 평범의 결정판. 학교 다닐 땐 범생, 군대에선 축구 못하는 놈, 사회에선 재미없는 놈. 그나마 옷 좀 신경 쓰고 다니는 게 가장 큰 특징이었지만, 누구나 한두 가지의 특이점은 다들 가지고 있으니 특징이 하나 있다는 것마저도 유별난 일이 못 됐다. 그런 내가 남자와….
이게 정말 주세영 인생 최고의 고비고 위기고, 그리고 기회일까?
우동주 본인이 자신은 게이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쪽도 아마 남자는 내가 처음일 테고, 아무리 열여덟 살처럼 보일 때가 많아도 스물여덟 해를 살아온 것에는 변함이 없고, 그럼 우동주 씨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그리고 지금도) 고민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매듭을 짓게 됐을까. 고백이라니. 나는 감정의 정체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조차 고의적으로 피해왔는데 무려 상대방에게 고백이라니. 나와는 여러모로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끌렸던 거겠지.
‘제가 진짜 열여덟이었으면, 어제 그 방에 선배님 혼자 남겨놓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건방진 대사에 화가 나기보다 가슴이 들떴다. 아마 진짜 열여덟 살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기가 차고 우스웠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스물여덟이 되어서도 열여덟 같은 면을 간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우동주 씨를 오래 알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호기심으로 하는 말이 아닌 줄은 당연히 알았고, 충동이나 일시적 감정에 휩쓸린 고백도 아니었을 거다. 믿는다. 내가 열여덟 같다고 말했던 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 솔직하고 깨끗하게 자기 감정을 인정할 수 있는 투명함. 그걸 얘기한 거지.
퇴근 시간까지 온 신경이 등 뒤로 쏠려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커피를 사 들고 오지는 않을까, 아니면 이글거리는 눈으로 복도에서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건지 기대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동주 씨는 그대로 퇴근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서류가방을 껴안고 4층 복도에 와서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퇴근 전에 한 번은 상황을 보러 올 줄 알았는데. 하다못해 전화라도. 6시 20분까지 기다렸는데도 소식이 없자, 일이 다 끝났는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퇴근을 미루고 있었던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그런 용기 없다면서,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건지.
가방 속에 소지품을 쑤셔 넣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고백한 건 우동주 씨일지 몰라도 휘둘리고 있는 건 주세영이었다. 내가 유지해온 틀은, 내가 버티고 있던 땅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대리님, 지금 퇴근하세요? 오늘도 근사하시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경리과 직원 두 명과 마주쳤다. 한 명은 나보다 세 살 위로 이 회사에서 오래 일한 분이었고, 또 한 명은 작년에 입사한 스물네 살의 아가씨로 경리과의 막내였다. 열 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내의 단짝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스물네 살 쪽이 약간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 서로 마음이 잘 맞는 것 같긴 했다.
“근데 우동주 씨는요? 요즘 맨날 붙어 다니시던데.”
연장자 쪽이 불쑥 우동주 씨 이름을 꺼냈다. 우동주가 주세영을 잘 따르더라고 회사 안에 소문이 난 건 알고 있었고, 그녀들은 우동주가 나에게 고백했다는 걸 알 턱이 없는데도 나는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렸다.
“붙어 다니긴요….”
“대전 거래처 트러블 생긴 것도 우동주 씨하고 같이 가셨었다면서요? 잘 해결됐다고 하던데. 다들 명콤비 탄생이냐고 그러더라구요. 박 대리님이 섭섭하시겠어요.”
일상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도, 우동주라는 이름과 관련해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던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 다였다.
“근데 대리님, 혹시… 우동주 씨 여자친구 있어요?”
엘리베이터가 막 1층에 도착할 때쯤 연장자 쪽이 꺼내놓은 질문에 제대로 움찔했다. 그녀와 내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 회사에서 일하면서 오래 얼굴을 본 사이이긴 했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동료 사이에 이 정도의 사적 질문이 통상적으로 크게 무례한 일은 아니었다. 그 통상적 기준 자체의 옳고 그름은 둘째치더라도.
“그,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하지만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상대에게 우동주의 ‘여자친구’에 대한 질문을 받은 탓에, 이런 반응이 더 수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대처하질 못했다. 말했지 않은가. 요령이 없다고.
그녀들과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 입구를 향해 로비를 가로질렀다.
“우동주 씨는 물어봐도 애매하게 말만 돌리고 대답을 안 해주더라구요. 그래도 여자친구는 없는 거 맞죠? 없는 눈치던데.”
사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나는 연장자 쪽 그녀에게 넥타이와 함께 미지근한 대시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누구누구처럼 대놓고 고백을 해왔던 건 아니었지만 내게 호감이 있음을 은근하게 표시했던 그녀에게 나 역시 빙 둘러 거절을 전했었다. 격렬하게 감정을 부딪치는 고백도, 단호한 거절도 없었다. 무슨 암호처럼 약한 신호를 보내고 약한 신호로 답하고,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나잇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쿨하게. 만약 그것이 쿨함이라면.
우동주 씨에 대한 질문을 해온 쪽이 그녀였기에, 그에게 호감을 가진 것도 그녀일 거라 예상했지만, 그제야 내 눈에 경리과의 막내인 또 한 명의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안절부절못하며 그만하라는 듯 연장자 쪽의 팔을 당기는 그녀의 아직 어린 티가 역력한, 수줍음으로 붉어진 얼굴을 본 순간, 연장자 쪽 그녀가 나선 것은 순전히 또 한 명의 그녀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호감형의 귀여운 이목구비에 아담한 체형으로 사내에서도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친절한 성격에 융통성도 있어서, 경리과와 부딪칠 일이 많은 영업부에서 그녀는 구세주로 통했다.
“그런 얘기까진 서로 잘 안 해서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대리님. 들어가세요.”
우동주 씨가 딱히 내가 아니면 만날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목매고 있는 게 아닌 줄은 알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부딪치는 것 사이에는 괴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경리과 막내가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가 만약 조심스럽게 진심으로 우동주에게 호감을 표시한다면, 애초에 게이도 아니라는 우동주 씨가 나를 선택할 것 같지가 않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난 그의 고백에도 뻗대기만 하는 동성의 벅찬 상대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고백을 받아줄 용기가, 혹은 의사가 정말 없다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일까. 내가 느끼는 불안에는 명목이 없었다.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놀부 심보인 건가? 한 번 더 솔직해지자면, 남 주기 아까운 우동주인 건 맞지만, 내가 갖기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이런 혼란이 얼마 만이더라. 아니, 내 인생에 혼란이 있기는 했었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걸어간 안전하게 닦인 길만 골라왔던 나에게는 대단한 고민조차도 별로 없었다. 가끔씩 어쩌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그 외로움만이 문제였을 뿐.
큰 행복도, 그렇다고 큰 고통도 없었던, 좋게 말하면 평탄하고 나쁘게 말하면 심심했던 인생이었는데. 요즘 같은 감정 기복을 조금만 더 겪었다가는 과부하로 정말 정전 상태가 돼버릴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좋았다가 싫었다가 들떴다가 화가 났다가… 이런 유치한 놈이 정말 주세영인가?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게이가 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더라도, 평범하게 살아온 서른한 살이란 무엇이든 새로운 선택을 하기에는 겁이 많아지는 나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코트와 재킷을 벗고 타이만 끌러놓고 맥주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세 캔 정도 마시면 약간 알딸딸해질 거고, 머릿속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몸이 피곤하니 그 정도면 잠이 오겠지, 라는 계산이었다. 근데 웬걸.
마실수록 감정은 더욱 넘실거려 금방이라도 내 속의 상자가 쓰러져 안에 담긴 것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이럴 때 속 시원히 상담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구나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우동주 씨가 간절했다. 우동주 씨로 인한 문제인데 우동주 씨에게 상담해서 뭐 어쩌겠다는 건지.
세 캔을 다 비워갈 때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왜 이제야 전화했냐고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관철시킬 것처럼 굴더니 왜 먼저 퇴근해버렸냐고 채근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안심이 되고 반가웠다. 아직은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나를 포기한 건 아니구나.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뭔지 나조차도 방황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그는 오죽할까.
바람 냄새를 잔뜩 묻히고 그가 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가다듬기는 했겠지만 아직 불규칙한 호흡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이기지 못한 감정으로 가득 차 나를 향해 호소하는 일렁거리는 눈과 풀어진 재킷의 라펠 사이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셔츠. 거기에 감싸인 가슴은 뜨겁겠지.
네가 내 단단한 껍질을 깨고 아직 굳어버리지 않은 말랑말랑한 보호구역까지 들어올 수 있을까. 반숙으로 익힌 달걀의 노른자를 터뜨리듯 그걸 찔러 내 마음을 그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아니, 내 안에 정말 그런 게 남아 있기는 할까.
“전 헬스클럽에 갔었어요. 집에 가봤자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운동이라도 하면 푹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 시간 가까이 달렸는데도 지치지가 않더라구요.”
나도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술을 마셨다고. 피하려고 해봐도, 안 된다고 못을 박으려 해봐도, 네 전화가 오면 받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언젠가는 나도 그런 말을 해줄 수 있게 될까. 살아온 방식이 뭐길래, 성격이 대체 뭐길래, 내 속에 있는 생각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선배님은 그런 적 없죠? 갖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막무가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면 그 사람이 날 더 싫어할지 모른다는 것도 다 알면서… 눈앞에 보기라도 해야 살 것 같고, 그 사람이 없는 모든 공간이 다 지옥 같고… 그런 적 없죠? 없으니까 내 마음 모르는 거야…. 분명히 그래.”
그래, 그런 적 없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발끈해본 적도, 전전긍긍해본 적도, 전화를 기다려본 적도, 스스로의 마음을 정할 수 없어 고통스러운 애매한 경계선에서 서성거려본 적도 없었다.
근데 네가 그 고통을 알게 했어. 누군가는 그것마저도 달콤한 고통이라고 하던데,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거야. 내가 너와 같은 속도로 달려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래서 괴로운 사람이 너뿐인 것만은 아니야.
“왜 그렇게 몰아붙여? 난 뭐 그런 얘기 듣고 태연한 줄 알아? 하루 만에 이렇다 저렇다 대답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만 가. 오늘 더 얘기하는 거 좋지 않은 것 같다.”
내 감정이든, 상자 속에 담긴 내용물이든, 하다못해 눈물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넘실거리는 뭔가를 몸 밖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그런 내 모습을 보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너를 보면서, 왜 내가 괴로워야 하는 거냐? 이것도 달콤한 괴로움이냐? 두 번만 달콤했다간 나 같은 놈은 공중분해 되겠다.
포옹이 아니라 결박이었다, 그건.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려는 절박함이었다. 뒤에서 나를 강하게 끌어안은 두 팔 안에서야말로 공중분해 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단단하게 붙잡는 팔 안에서 진정으로 분해될 것 같았다. 그 품을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자신에게 소름이 끼쳤다. 그것이 내 실체였다. 그래서 더욱 도망가려고 발버둥 쳤다. 공중분해 되는 것,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것은 두렵다.
“나한테 끌리죠? …그것만 말해줘요, 제발…. 주세영, 제발!”
더 단단하게 결박해줘. 내가 네 핑계를 대서라도 이 갈등을 끝내버릴 수 있게.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정말 어른답지 못하고 비겁한 생각이겠지. 세 살 연하의 후배가 멋대로 이름을 부르면서 반말을 해대는데도 화가 안 났다. 오히려 그 울부짖음에 가까운 부탁이 내 가슴을 찢고 함부로 물어뜯어 시뻘건 피가 쏟아지도록 만들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괴로운 와중에도, 너를 가엾다고 여길 수 있을까. 난 지금까지 나만 알고, 나만 지키려 하며 살아온 이기적인 놈인데.
“우동주 씨, 내가 서른한 살이라고 한 건… 우동주 씨가 어리다는 게 아니라… 나는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는 모자란 사람이란 뜻이야. 나는… 난 그렇게….”
쪽팔린 일이지만 목이 메었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게 다 엎질러질 것 같아서 말을 삼켰다. 우동주 씨의 팔은 사실, 내가 공중분해 되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끌리고 있다는 말로밖에 안 들려.”
그렇게 알아들어 줘. 그렇게 알아들어 주는 너라서, 내가 이러고 있나 보다. 남자가 나한테 고백이라니. 너 말고 딴 놈이었으면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그 자리에서 후려쳤어. 알긴 아냐?
“나, 진짜 가요?”
안 갔으면 싶기도 하고 얼른 가줬으면 싶기도 한 이중적인 내 마음은 둘째치고, 가기 싫어하는 그의 마음에 나는 분명 안심하고 있었다. 앞으로 귀찮고 성가신, 사회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들을 극복해나가야 하는 동성이라는 약점도 없고, 나보다 성격도 더 좋은 그녀가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단 사실에 불안을 느껴놓고도, 나는 뭘 더 뻗대려는 건지….
“진짜 좋아해요. 그걸 의심하진 마…. 고마워요, 오늘.”
끝까지 밀어붙여 나를 진짜 분해시켜버리는 대신 내가 불안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파괴하지 않아도 되는, 딱 그 선까지만 성큼 다가왔다가 부드럽게 감싸고돌면서 멀어져가 주는 너.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네 마음을 의심하겠니. 내가 더 고마워, 오늘.
복도를 지나 현관으로 가서 구두를 신고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동주 씨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건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차마 돌아볼 수 없는 마음이 그 등으로 전해져왔기 때문에.
열어보지 못하고 끌어안고만 있었던 상자의 덮개를, 그는 기어코 내 눈앞에서 제 손으로 걷어 보였다. 그 안엔 발간 내 마음이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우동주, 너도 봤냐? 내가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 난 처음 봤다. 신기해 너무.
그 안에 있는 건 아마도 우동주의 마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내 마음이었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이고, 꽉 막힌 성격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그를 마주 안아버리고 싶은, 내 마음이 거기 있었다.
그걸 열어보면 내가 사라질 것 같았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나는 살아 있었다. 자유로움마저 느꼈다. 날개를 가진 그가 비좁았던 내 하늘을 날고, 그의 날개가 닿는 만큼 내 하늘이, 세계가, 그만큼 확장되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의 자기 부정은 무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