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후일담
서왕국에서 돌고 있다는 소문의 초상화를 구한 램파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브로치나 로켓에 넣어 장식하는 초상화는 영웅이나 존경하는 위인. 혹은 얼굴이 예쁜 배우의 초상화를 많이 사용한다.
램파드도 인기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전쟁을 치른 적국이었다 보니까 대놓고 쓰는 자가 적었다. 그중에서 몇 년 전부터 인기몰이한다는 이름 모를 은발의 사내는 아무리 뜯어봐도 커틀러였다. 하얀 드레스 셔츠 차림의 얌전한 초상화면 넓은 아량을 베풀어 줄 수 있었는데 웃통을 까고 있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네놈 몸을 보고 그린 것 같은데?”
단단하게 짜인 근육과 유두의 위치, 크기, 색을 보면 분명히 커틀러의 몸이 맞았다.
“맞습니다.”
욕설과 헛바람이 뒤섞여 정작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램파드는 입을 벌리고 인상을 잔뜩 찡그렸고, 그는 태연하게 떠들었다.
“루안을 데리고 왕국 길에 오를 수가 없어 반대로 초대했죠. 출장 조건으로 한 장 그린 겁니다.”
“미쳤어?”
“제가 폐하의 일로 제정신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요새는 제정신이 든 것 같았거든.”
그는 램파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지 않겠다고 버티는 걸 어찌하겠습니까. 팔다리를 하나 잘라 억지로 끌고 와도 그리지 않으면 끝이니까 사탕으로 꾀어냈죠.”
다른 건 몰라도 커틀러의 몸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당장 커틀러를 혼자만 볼 수 있는 곳에 가두고 군대를 이끌어 왕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랬다간 몇 년간 고생해서 쌓아 올린 평화가 무너지니 참아야 했다.
“하, 너… 앞으로 다시는 내 허락 없이 초상화 같은 건 그리지 마.”
램파드는 유달리 잘 그려진 한 장의 초상화를 주섬주섬 품에 넣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쯤 되니 얼굴도 남에게 보이기 싫어졌고 그날 곧장 아쥴린 여왕에게 황실 문장을 크게 박아 넣은 공문을 비밀스레 보냈다. 왕국 내 돌고 있는 커틀러의 초상화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전부 모아 구김 없이 제국 황실로 고이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최대한 자제해서 썼다지만, 어느 모로 봐도 협박문 같아 보였고 약속한 날짜가 되자 왕국에서는 커틀러의 초상화를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제작 금지령도 내렸으니 이제 커틀러의 초상화는 황궁에 걸려 있는 제국의 화가가 그린 것 하나만 남게 되었다. 커틀러의 그 숨겨진 미소를 표현할 수 있는 자는 서왕국의 화가 말고는 없는 모양이었다. 제국의 화가가 자신의 역작이라는 초상화는 잘 그렸긴 해도 평소 커틀러가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이라 다소 무뚝뚝해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면 산채로 씹어 먹을 것같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었다. 램파드의 눈에도 이 정도니까 다른 사람들은 더 무서워 보일 터.
아무렴 뭐 어때. 진짜 커틀러의 표정은 나 하나만 간직하고 싶으니까.
며칠 후.
램파드는 아쥴린 여왕이 보낸 초상화를 몰래 펼쳐 봤다. 커틀러의 초상화를 모은 것은 당사자에게도 비밀로 했다. 그래서 커틀러를 멀리 출장 보내고, 혼자 은밀히 살펴봤다.
유행이라더니 개수가 상당했다. 펜던트에 넣는 용도 말고도, 거실 장식용의 거대한 액자도 있었다. 남의 황후를 가지고 참 가지가지 해 먹은 것이다.
이름 없는 인물이라 화가들끼리 마음대로 서로를 베껴 그리는 통에 변형된 점도 많았다. 작게는 복장부터 크게는 표정이 달라져서 다른 사람 같은 것도 있었다.
이걸 태울 수도 없고, 괜히 모셔 뒀다가 커틀러에게 들키는 것도 싫었다. 램파드는 커틀러 몰래 황궁의 보물 창고 안에 상자를 가져다가 초상화를 집어넣고 단단하게 잠갔다.
따로 챙긴 것은 커틀러가 의뢰한 루안을 안고 있는 그림과 압수 물품 중 고심해서 고른 한 장이었다. 로켓에 들어갈 만한 작은 그림 속 커틀러는 눈꼬리를 살짝 휜 채로 미소 짓고 있는데, 램파드조차 몇 번밖에 보지 못한 귀한 표정이었다. 웃는 표정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과지만 램파드의 기억을 들춰 보고 그린 것만 같았다.
세상 무엇보다 값지게 느껴져 로켓 한쪽에 두장을 겹쳐 넣어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커틀러 다음으로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
램파드는 어느 날부터인가 아침마다 가슴이 당기기 시작했다. 크기가 좀 커진 것 같기도 하고 유두도 도톰해 보였다. 낯설어진 가슴을 여러 번 꾹 누르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관뒀다.
“커틀러.”
곁에서 자는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멈칫했다. 어젯밤 부로 먼 임무에 나갔지. 한 달 정도의 짧은 일정이고, 헤어진 지 하루도 채 안 됐지만 벌써 보고 싶었다. 무언가 아쉬워진 램파드는 그가 사용한 베개를 끌어안고 고개를 처박았다. 후우, 숨을 들이쉬자 커틀러의 향기를 찾을 수 있었다.
좀 더, 그의 냄새를 맡고 싶어 비비적거렸다. 끌어안은 베개에 볼을 문질렀지만 부족했다. 얼른 돌아왔으면. 그의 체취를 흠뻑 맡고 싶었다.
임무를 위해 남부 지방에 도착한 커틀러는 며칠 내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먹을 만한 게 포도밖에 없는 남부 지방에서는 커틀러가 좋아하는 생선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편식이 더 심했다.
“단장님, 입맛이 없으십니까?”
일단 겉은 멀쩡했지만, 커틀러가 걱정된 부기사단장은 근처 계곡에서 어렵게 낚시한 물고기를 열심히 구워 왔다. 그는 깨끗한 접시 위에 바짝 익힌 생선 요리를 올리고, 레몬즙을 뿌렸다.
“오늘 아침에 갓 잡은 생선뼈를 발라 구운 겁니다. 허브로 향을 냈으니 꽤 괜찮을 겁니다.”
분명히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이상하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커틀러는 나이프로 생선 꼬리를 툭툭 건드렸다.
커틀러 앞에 접시를 내려놓은 부기사단장은 맞은편에 앉아 으깬 감자에 베이컨칩을 뿌렸다. 감자, 베이컨, 생선의 짠 내가 뒤섞이자 구역질이 났다.
“단장님?”
신물이 올라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하자 주변에서 식사하던 다른 기사들이 나이프나 포크를 떨어뜨리고 시선을 고정했다. 집에 두고 온 부인이 아이를 가졌을 때 한 행동이 겹쳐 보였고, 온갖 생각이 다 났지만,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황제 폐하께서 힘을 내셨구나. 황손이 생긴 건가. 누가 먼저 말을 꺼내 봐.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아니면 말 못해. 서로 눈빛을 열심히 교환하더니 공경의 의미로 커틀러만 황궁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냥 가라고 하면 업무 태만이냐며 호통을 칠 것이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두려웠다.
대표가 된 부기사단장은 한 소리들을 각오로 커틀러를 찾아갔다.
“지난번 서부 지역의 예산서 말입니다. 제가 깜빡하고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일정 맞춰 제출했다 하지 않았나.”
“그게… 실수로 찢어 버렸는데, 단장님의 서명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리에 계시지 않아 나중에 받는다는 것이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발이 빠른 자를 보내도록 해라.”
“클로비스 단장님의 서명이 꼭 필요한 일이잖습니까. 자리를 비우셔도 제가 두 배, 아니 열 배로 일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먼저 황궁 길에 오르십시오.”
떨떠름했지만 다른 기사들까지 거들어 이번 임무는 쉽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커틀러를 떠밀듯이 보냈다.
황궁에 도착한 커틀러는 예산서를 작성했는데 이미 제출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무언가 이상해서 로열 가드를 이끌고 화이트 테일을 쳐야 하나 생각까지 하던 중, 이야기를 듣던 램파드가 드물게 배까지 부여잡고 크게 웃었다.
“정말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더냐?”
“폐하께서는 이유를 알고 계시나 보군요.”
“응.”
램파드는 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배를 만지게 했다. 커틀러는 여전히 조용했다.
“모르겠어?”
감정을 깨닫고 표현하는 건 빠르면서, 이런 건 늦게 알아차리다니.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자 심장이 작게 요동쳤다.
그나저나 임신한 오메가 대신 알파가 입덧도 하나?
화이트 테일은 커틀러를 보낸 후 그가 알파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얼마나 램파드가 좋으면 상상 임신까지 했냐고 생각하려나. 실없는 상상에 기분이 좋아져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둔하긴.”
황의를 불러 진단을 해야 하지만 커틀러가 입덧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램파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그를 쓰러뜨리며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래도 너와 나의 사랑의 결실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