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루안
아이를 가진 잔트는 조용히 지내고 싶다며, 식솔이 아닌 황실에서 소개해 준 소수의 시종과 함께 별장으로 떠났다. 그의 호위를 맡은 커틀러는 잔트를 별장에 데려다준 후 바로 돌아왔다.
“한동안 콘테 공작저에서 지내겠습니다.”
일주일 정도 떨어져 지냈건만 돌아오자마자 한 첫 보고가 저거라니. 상대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하는 건 커틀러 쪽이 더 심하다. 온종일 달라붙고 싶어 하는 그가 따로 지내자는 말을 꺼내는 걸 보면 어떠한 이유가 있을 테지. 그 점을 잘 아는 램파드가 인상을 살짝 쓰며 투덜댔다.
“도착하자마자 한다는 말이 별거하겠다고?”
그의 투정에 커틀러가 피식 웃었다. 램파드가 정말로 화가 났다면 당장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손부터 날아왔을 테니까. 그의 귀여운 투정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혼인했으면 콘테 가문의 일은 신경 쓰지 마. 너는 내 사람이지 않나.”
“저택이 걱정되는 게 아닙니다.”
“커틀러.”
“네.”
램파드는 자신의 목깃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몇 개만 풀어 봐라.”
가벼운 기사단 정복 차림의 커틀러는 램파드의 지시에 따라 목깃을 여민 단추를 풀어 내렸다. 꽁꽁 감싼 옷깃이 벌어지자 목선이 드러났는데 열흘 전 램파드가 힘껏 깨문 자국이 그새 아물어 가고 있었다.
“옅어졌군.”
“폐하 또한 제 정액 냄새가 다 빠지셨습니다.”
손을 뻗어 램파드의 입술을 탐하며 자신의 냄새를 덧씌우는 대신 입만 나불대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큰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네놈이 영역 활동을 제치고 돌아갈 정도라면 제대로 된 변명을 준비했겠지?”
“예. 루안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폐하만큼이나 아버지를 싫어하니 단둘이 둘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램파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안이 자신을 싫어하고 경계하는 것은 진작 알고 있던 사실이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뒤엣것은 아니었다.
“콘테 공작이 루안을 학대라도 하는 거냐.”
“그랬으면 제가 먼저 아버지를 죽였지요.”
잔잔한 미소를 머금던 입매가 순식간에 굳었다. 방해된다면 혈육이라도 주저함이 없이 베어 버리는 자식이 커틀러란 것을 콘테 공작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램파드의 심기를 거슬렸다간 제 목숨은 물론 콘테 가문마저 잿더미가 될 터인데 루안을 함부로 건드릴 리가 없었다.
“하긴, 그놈이 그럴 배짱을 가지진 않았지.”
램파드는 자리에서 일어난 김에 커틀러가 기댄 창문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닦인 창문 밖으로 푸르른 잔디와 꽃이 흐드러진 화려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인인 램파드가 집무실에 붙어 있는 통에 오랫동안 버려진 정원은 언젠가 찾아올 주인을 위해 부지런히 갈고 닦여져, 당장 나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차라리 루안을 황궁으로 데려오는 것은 어떠냐.”
“루안을 말입니까.”
커틀러가 뜸을 들이기에 램파드가 먼저 선수 쳤다.
“이제 그 아이도 다 컸지 않나. 어리다는 변명은 안 통해.”
“하긴,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를 정도니까 다 컸죠.”
아무리 연습용 검이라고 하지만 한 손으로 들 정도면 수련을 꽤 했다는 뜻이다. 검을 가르치기 시작했단 이야기를 들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나갔다니. 그만큼 루안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길었단 뜻이었다.
떠나기 전 잔트가 넌지시 한 말로는 내년에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라고 했지. 얼굴 보기가 전보다 더 힘들어질 거란 생각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검은 잘 쓰던가?”
“미숙합니다.”
“가르치는 선생이 부족해서겠지. 내가 가르치면 금방 능숙해질 거다.”
커틀러는 자신의 목가를 추스르며 램파드의 시선이 향한 정원을 흘끗 바라봤다. 램파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루안을 황궁에 두실 생각입니까.”
“가능한은.”
“외척을 가까이하지 말라며 최고 대신이 반대할 겁니다.”
“내 집에 내 황후의 동생을 초대한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냐. 그리고 그놈들도 루안의 얼굴을 익혀야 할 테지. 차기 황제가 될 테니까.”
램파드와 함께할 수 있다니 커틀러로선 당연히 환영이었다. 그는 답 대신 램파드만이 알아보는 옅은 미소로 승낙의 의미를 보였고, 램파드가 화답하듯 볼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온기를 느낀 커틀러가 램파드의 허리를 감싸며 속삭였다.
“하나, 귀띔해 드리지요. 루안은 승마를 좋아합니다.”
“실력은 어느 정도지?”
“화이트 테일의 기사들과 견줄 정도입니다.”
화이트 테일은 기마병이 아니지만, 평민들보다 말을 탈 일이 많다. 최소 하급 기사 수준은 된다는 말에 램파드는 루안과 함께 말을 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친해질 수 있으려는가. 황궁으로 초대한 김에 루안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루안과의 만남이 자연스레 뒤로 미뤄졌고 며칠 후, 드디어 하늘이 맑아졌다. 아침 회의가 끝난 램파드의 몸에 시종 여럿이 달라붙어 있었다. 황궁의 보물 창고를 털어 왔는지 수북이 쌓인 장신구의 개수는 혼인식을 치른 날보다 훨씬 더 많았다.
“다른 건 없느냐.”
그들이 전달받은 황제의 일정은 아침 회의 이후 콘테 가문의 공자와 독대를 하는 거였다. 작위도 받지 못한 소년을 황제가 직접 맞이하는 것부터가 큰 영광인데 신경 써서 환복까지 하다니. 과한 처사가 분명하건만 말릴 커틀러가 없어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누가 봐도 아름다움의 신이 현신한 모습이 분명하건만, 램파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한껏 썼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시종은 손을 다시 움직이란 청천벽력 같은 말에 뒤늦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시종은 방금 걸친 어깨 망토를 고정하는 금줄을 풀어내고 다른 걸 꺼내 들었지만, 황제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침 회의가 끝난 후 치장에 들어간 지 어언 두 시간이었다. 보다 못한 한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램파드 폐하, 주제넘지만 소인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아라.”
“지금도 충분히 빼어나십니다. 콘테 가문의 어린 공자를 기선 제압할 생각이 아니시라면 그쯤 해 주시옵소서.”
“하아.”
늘 콘테 공작저에 가서 그 아이를 만났지 초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시종들을 닦달해 이것저것 입어 보고 있지만 뭘 해도 불만족스럽다. 램파드의 눈에는 여전히 미흡해 보이지만 한스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램파드와 커틀러가 특이한 거였지 본디 클로비스 황가와 콘테 공작가의 사이는 좋지 않다. 다 큰 어른이 어린 공자를 견제하는 꼴로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걸친 망토와 코트를 벗어 던졌다.
“자네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지. 승마복을 준비해라.”
“말도 준비할까요?”
“루안이 탈 말은…….”
가장 좋은 말을 선물로 주고 싶지만, 군마와 교배시킨 녀석들은 사납고 자존심이 강해 소년에게 쉽게 등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재작년에 태어난 어린 말 중 훈련이 끝난 순한 녀석으로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램파드가 마음을 정하자 옷가지와 장신구를 잔뜩 들고 있던 시종들의 표정이 한층 풀어졌다. 그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승마복을 꺼내 왔고, 루안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준비를 끝마쳤다.
걸친 옷은 한층 가벼워졌지만 이상하리만큼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루안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해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 아이는 자랄수록 램파드를 경계하고 꺼렸다. 이번이 루안과 친해질 마지막 기회라고 느껴지는데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었다.
가까워지긴커녕 도리어 사이가 악화되지 않을까. 이후에 램파드가 자신을 낳았단 사실을 경멸할 정도로 미워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직 닥치지도 않았는데 파멸로 치닫다니. 아이를 다루는 건 익숙하지 않기에 걱정만 잔뜩 됐다.
커틀러는 아침 일찍 콘테 저택에 들러 루안을 데리고 왔다.
루안은 자신에게 서먹하게 구는 아버지가 아닌 좋아하는 형이랑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 따라왔지만, 램파드를 만나자마자 솔직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루안은 램파드가 형을 빼앗았다고 느꼈다. 혼인을 올린 상대가 황제만 아니었다면, 커틀러는 차기 공작으로서 자신과 저택에서 함께 지냈을 테니까.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궁에 초대되기엔 어린 나이라 버릇없어도 넘어갈 텐데 누구의 입김인지 지난번엔 보이지 않던 예법을 익혀 왔다. 하지만 며칠 전과 똑같이 억지로 인사를 하는 모습은 여전히 램파드가 싫다는 뜻이었다.
그 꼴을 본 커틀러가 또 언성을 높일 모양새라 램파드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진정시켰다.
“됐어.”
“나서기 전 단단히 일러뒀는데도 이러는군요.”
커틀러가 낮게 으르렁대자 루안이 움찔 떨었다. 설마 출발하기 전 혼을 낸 건 아니겠지. 사랑스러운 아이가 지레 겁을 먹은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아 그를 끌고 말 쪽으로 가 루안과 멀어졌다.
“낯선 어른이니까 경계하는 건 당연하지.”
“두둔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너를 닮아 덤덤한 성격이었다면 어련히 잘 타일렀을 거다.”
램파드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춰 커틀러의 귓가에 속삭였다. 거리가 멀어 둘의 이야기를 들을 자는 없지만 혹시나 해 조심하는 거였다.
“루안은 아무래도 날 닮은 것 같거든.”
잔트의 눈썰미는 완벽했다. 워낙에 진귀한 은발이 눈에 띄는 바람에 이목구비는 천천히 뜯어보게 되는데, 가만 보면 날카로운 인상이 묘하게 램파드와 닮았다.
외모만 닮으면 좋았으련만. 불행히도 램파드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나쁜 성격까지 닮았고, 타인에게 곁을 내주기 싫어 뾰족하게 가시를 세워 놓은 모습이 특히 판박이였다.
“과연… 그렇군요.”
루안은 순한 강아지처럼 커틀러를 따르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삐죽 세우고 날카롭게 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시감을 느끼긴 했다. 고슴도치의 자식은 밤송이만 해도 고슴도치였다.
“뭐야. 순순히 인정하는 것도 왠지 기분 나쁜데?”
커틀러는 언짢은 램파드의 귀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드러난 말랑한 귓불을 조물거리며 옅게 웃어 줬다. 사랑하는 오메가는 작은 손길에도 기뻐하며 귀 끝이 붉어졌다.
“누굴 닮아 저렇게 까칠한지 고민했거든요.”
기껏 누그러진 램파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런 기분 상한 모습까지 사랑스러워 미약한 미소를 지었다.
“성질이 사나워도 밉지 않은 건 폐하처럼 곱기 때문인가 보군요.”
“너는 내 얼굴이 그렇게 좋은가? 사나운 성격을 받아들일 정도로?”
“당연하지요. 폐하께서 평범하셨다면 그 성격을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뭐?”
그는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척도 안 하고 빠르게 인정했고, 램파드는 조금 실망한 낯빛을 보였다.
“생각해 보십시오. 초면에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망나니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 내가 늙으면 주저 없이 버리겠단 말이군.”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네놈 말대로… 얼굴 말곤 봐줄 게 없으니까……?”
밀담을 위해 작게 소곤거리는 램파드의 목소리가 힘이 빠진 것처럼 점점 더 잦아들었다. 아주 작은 소리지만 온전히 그에게 집중하고 있는 커틀러는 똑똑히 들었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얼굴 말곤 봐줄 게 없었습니다.”
지금은 뭐, 몸이 좋다고?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지만 아이의 눈앞에서 성적인 대화를 할 만큼 염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몸 또한 늙으면 추해지기 마찬가지기에 못마땅해 눈알만 굴렸다.
“어느 날부터 알파인 저를 뛰어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
“한계를 느끼고 포기할 법도 한데 이를 악물며 버티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시작했습니다. 오롯이 저 하나만을 목표로 노력하는 거니까요. 그 예쁜 머릿속에 저만이 존재하다니.”
“자… 잠깐.”
잠깐 실망했긴 하지만 고작 나이가 들었다고 커틀러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신경을 거스르는 한마디에 투정 부린 건데 이대로 내버려 두면 낯부끄러운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폐하께서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저를 크게 부정했지만.”
“…….”
“저를 욕하는 입술이.”
“커틀러…….”
“힘껏 밀어내는 몸짓이.”
“커틀러!”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커틀러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는 램파드와 눈을 마주치곤 피식 웃었다. 일부러 그런 거였다. 이제는 진짜로 거슬리기 시작한 램파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장난을 치는 건 여기까지란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램파드의 손가락을 붙잡아 손끝에 쪽, 입을 맞췄다.
“나머지는 오늘 밤 침대에서 속삭여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램파드는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자신을 반기는 회색마 쪽으로 갔다. 한스와 로열 가드가 신경 써서 정비를 끝마쳤지만 멀쩡한 안장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솔직하지 못하긴. 광대뼈가 잔뜩 붉어진 채로 싫다고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재밌게 노십시오.”
“…….”
“램파드 폐하.”
단단히 삐진 그는 커틀러의 말을 무시했다.
“결과가 어떠한들 저는 당신 편입니다.”
커틀러는 루안과의 사이가 틀어질까 봐 염려하는 램파드를 응원하며 일부러 자리를 떴다.
램파드는 가시를 삐죽 세운 과거의 자신이 어떻게 마음을 열었는지 잘 안다. 커틀러가 그에게 한 것처럼, 찔려도 아프지 않다며 웃으며 버틸 테지. 아픈 마음을 숨기며 미소 짓는 램파드를 봤다간 루안을 걷어찰지도 모른다. 다른 이를 경계하는 건 상관없지만 램파드에게는 아니니까. 그러니 램파드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
그래, 분명 좋은 선택이었건만, 램파드는 크게 다쳐 돌아왔다.
***
지난번에 진흙을 던져 커틀러에게 혼쭐이 난 루안은 쭈뼛거렸다. 램파드는 루안이 탈 말을 끌고 왔다.
“함께 걸을까?”
루안은 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램파드는 출발 전 미리 불러 둔 로열 가드에게 멀리 떨어져 호위하라고 지시했다. 로열 가드는 호위라기보다는 혹여 루안이 미아가 되면 찾기 위한 수색대였다.
어린 램파드는 루트비안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탓에 황궁이 반나절 동안 뒤집힌 적이 있었다. 황궁은 드넓어 시야에서 벗어나면 혼자서는 찾기가 쉽지 않아 미리 준비한 것이다.
램파드의 손짓에 따라 자리를 잡은 로열 가드 중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램파드 폐하.”
“무슨 일인가.”
“미리 앞을 살펴보았습니다. 숲 안쪽은 그늘이 져서 땅이 미처 마르지 못했으니 조심하십시오.”
진흙은 발이 푹 들어가고 미끄러워 쉽게 넘어지지만, 전속으로 달리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천천히 말을 몰며 대화를 나눌 생각이기에 램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열 가드를 자신의 자리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낯선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바싹 긴장한 루안을 내려다봤다.
“말을 잘 탄다고 들었다.”
“잘 정도가 아니에요. 굉장히 잘 타요.”
커틀러의 조언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할 생각에 루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으니까. 당장에라도 말을 타고 싶어 근질근질해하는 모습에 램파드는 고삐를 넘겨줬다.
“혼자서 탈 수 있는가.”
“네.”
루안은 갈색 말의 이마와 턱을 몇 번 쓰다듬더니 날렵하게 몸을 놀려 안장 위에 앉았다. 처음 타는 낯선 말인데도 꺼리지 않고 능숙하게 타는 걸 보니 동물과의 교감에 능숙한 모양이었다. 실제로는 황족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콘테 공작 가문의 차남인 루안이 말과 가깝다니.
“평소 마구간에 자주 다니는가 보군.”
“매일매일 가요.”
“매일?”
좋아하는 주제의 이야기라 루안은 신이 난 듯 말했다.
“말이 좋아요. 저랑 놀아 주니까요.”
들뜬 루안과 달리 램파드는 심란해졌다. 생각해 보면 램파드도 처음부터 예민한 아이가 아니었다. 단짝과도 같은 형이 사라지고 황궁에서 고립되는 바람에 마음을 닫고 주변을 경계하면서부터 까탈스럽게 굴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오메가로 발현한 탓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해 들짐승처럼 사나워졌다.
“콘테 저택에서 늘 혼자 있는 건가.”
“네……. 다들 바쁘잖아요.”
램파드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루안은 다시 눈치를 봤다. 어른의 안색을 살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 감정 변화에 쉽게 반응했다. 거대한 저택에서 어른의 눈치를 보며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자 램파드는 속이 쓰렸다.
“당장 콘테 공작을 불러야겠군.”
“아버지를요?”
“말동무 하나 붙여 주지 않는다니, 너를 홀로 두지 말라며 단단히 일러두겠다.”
“안 돼요. 아버지한테 미움받긴 싫어요.”
“콘테 공작이 널 미워하는 건가.”
정곡인지 말고삐를 쥔 루안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 작자가……!”
“아버지는 절 홀로… 두신 적 없어요. 그러니까 화내지 마세요.”
나이가 어린 루안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 못해 말을 뱉었다가 서둘러 콘테 공작의 변호를 했다. 필사적으로 수습했지만, 이미 램파드는 상황을 파악해 버렸다. 뒤늦은 수습으로는 램파드의 표정이 끝내 밝아지지 않았다. 루안은 점점 램파드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졌다.
“아… 아니, 아니에요. 아버지는 절 좋아하세요.”
이미 램파드의 마음은 공작 저택의 문짝을 부숴서 나이 많은 가주를 끌어내 채찍질까지 끝마쳤다. 루안의 곁이라 불같은 화를 애써 억눌렀지만, 어른의 감정 변화에 예민한 아이는 겁을 먹고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아버지는 절 미워하지 않아요…….”
루안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큰일에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고,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 램파드는 그제야 자신의 표정이 험악하단 걸 알아채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에서 내려 루안에게 다가갔다.
“많이 놀랐느냐.”
루안은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램파드는 조심스레 루안을 안아 들어 말에서 내려오게 했다.
“흐어엉.”
한번 눈물을 터뜨린 루안은 무언가 서러운 게 잔뜩 남았는지, 바닥에 내려오기 전 램파드의 등을 끌어안고 옷깃을 축축하게 적셨다. 램파드는 아이를 돌보는 게 서툴러 루안이 갓난아이일 때 몇 번 안지 못했다. 이제라도 자신의 품 안에 들어왔으니 기뻐해야 하건만, 훌쩍이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파 조용히 등을 두드려 줬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루안이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고, 내려오고 싶다며 몸을 뒤틀었다. 램파드가 바닥으로 내려놓자 루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언뜻 보이는 콧날 끝이 붉었다.
“말 잘 들을 테니까 아버지에겐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그건 곤란하구나.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지.”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잘 보살핀다고 해서 맡긴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황궁으로 데려왔을 거였다. 또다시 울릴 수는 없기에 램파드는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공작을 부르진 않겠다. 대신 너를 어떻게 대하는지 말해 주거라.”
루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아버지의 아이가 아니래요.”
“뭐?”
램파드의 중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소수의 시종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입이 무겁다고 단언했는데, 어린아이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헤픈 자들이었다니. 램파드는 또다시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 이마를 꾹 눌렀다.
“어머니가 다른 알파를 만나 생긴 아이라고.”
“하…….”
다행히 루안이 램파드의 아이라는 소문이 도는 건 아니지만, 사생아 취급을 한다 이거지. 커틀러의 귀에 들어갔으면 당장 저택이 뒤집혔을 건데, 조용한 걸 보면 소수의 몇 명이 겁 없이 떠드는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여러 번 꾹 눌렀다.
“설마 콘테 공작도 너에게도 그런 소릴 하더냐.”
“아뇨. 그렇지만 아버지는 저보고 검을 배우라고 하잖아요.”
그건 램파드가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검을 배우는 게 싫은 건가.”
“네. 검이 싫어요……. 재미없고…….”
평소에는 잔트가 가르치고, 가끔 커틀러가 저택에 들를 때 직접 지도한다고 했다.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루안이 하기 싫은 일이었다니.
“콘테 가문은 대대로 재무 대신이 되잖아요.”
“그렇지.”
램파드는 사랑하는 형을 빼앗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주 만나 익숙한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만날 때마다 웃으며 반기니까 솔직히 다른 어른들과 비교하여 무섭지도 않았다. 익숙한 램파드의 모습에 안심한 루안은 한번 말문을 트기 시작하자 줄줄이 내뱉었다. 그간 응어리처럼 뭉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검을 배우는 건… 재무 대신이 되지 말라는 거죠…….”
대대로 콘테 가문의 후계자들은 재무 대신이 되었다. 안 그래도 시종들의 이야기 때문에 싱숭생숭한데 검을 익히는 건 재무 대신이 되지 말라는 뜻이고, 곧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커틀러도 재무 대신이 아니지 않나.”
그러나 램파드는 루안이 단순히 재무 대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형은 달라요. 처음부터 검을 좋아했으니까 기사가 된 거지, 나는 아니에요.”
설마 콘테 공작이 루안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건가. 커틀러가 클로비스 황가 소속이 되었으니 잔트가 둘째를 가지지 않았으면 콘테 공작 가문의 맥이 끊기는 것과 같아 루안을 이용하는지도 모른다. 램파드는 슬슬 공작이 진심으로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자에게 단단히 경고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은 루안이 마음을 다잡게 해야 했다.
“재무 대신은 지루한 자리다. 검을 배우면 좀 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어.”
콘테 공작은 루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며 안아 준 적이 없었다. 내 아들이라고 자랑스러워한 적도 없었다. 루안은 불안한 게 당연했다.
기껏 속마음을 이야기했는데……. 사랑하는 형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했으니까 램파드가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전혀 다른 소리를 들은 루안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어 불만을 표했다.
“형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 듣는 사람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요!”
“…….”
“형도… 아빠도 엄마도, 나한테는 한 번도 말한 적 없단 말이야……!”
램파드는 이제야 루안의 서러움을 알았다. 루안은 재무 대신이 되어 핏줄을 인정받으려는 것이다. 램파드의 입술이 달싹였다. 너는 그럴 필요 없다고, 진짜 가족이 눈앞에 있으니 사랑한다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램파드의 말 따윈 루안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램파드가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자 루안은 울컥했다. 불쌍하게 여기는 걸 보아하니, 램파드도 자신이 콘테 공작의 아이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검 같은 건… 필요 없어!”
눈을 거칠게 문지르던 루안은 두 마리의 말 중 튼튼하고 발이 빠른 말을 단번에 골라 올라탔다. 선택된 건 군마인 램파드의 회색마였다. 램파드가 아닌 다른 사람을 태워 본 적이 처음인 회색마는 화들짝 놀라더니 쏜살같이 내달렸다.
“루안!”
램파드는 흥분한 말의 고삐를 빠르게 붙잡았지만 놓치고 말았다. 루안과 회색마의 이름을 번갈아 불러도 흥분한 말은 주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루안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빠른 속도에 당황했다.
“워, 워, 진정해!”
이때껏 루안이 만난 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말을 잘 들었는데 회색마는 달랐다. 달래도 말을 듣지 않고 빠르게 달렸다. 통제 불가능한 말을 처음 만난 루안은 놀라서 제대로 몰지 못했고, 가벼운 소년을 태운 회색마는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 사태를 파악한 로열 가드가 곧바로 추적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에서 몇 마리 없는 군마는 워낙에 발이 빨라 따라잡기 힘들었다.
루안을 태운 회색마는 한참을 달리다가 진흙에 미끄덩 넘어졌다.
“악!”
말이 옆으로 쓰러져 기수였던 루안도 덩달아 떨어졌는데, 진흙에 내동댕이쳐진 덕분에 옷은 엉망이어도 몸은 다치지 않았다.
“푸르릉!”
옆으로 엎어진 말은 공중에서 발을 허우적대더니, 이내 땅을 딛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등에 올라탄 낯선 사람을 노려보며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황제의 말은 특별하게 교육된다. 혹여 말을 빼앗길 것을 염려해 주인인 램파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타면 흥분해 날뛰든가, 심할 경우 공격하도록.
“……으.”
말과 벗처럼 지낸 루안은 자신에게 악의를 드러내는 짐승이 낯설게 느껴졌다. 회색마는 튼튼한 앞발로 땅을 힘차게 박찼고, 겁을 먹은 루안이 숲속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소년의 몸으론 발이 빠른 군마를 따돌리지 못해 금방 따라잡혔다.
“저… 저리 가.”
이빨을 따닥따닥하며 발길질하는 말굽이 흉기 같았다. 루안은 겁을 먹어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다가 진흙에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적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회색마는 콧김을 푸릉, 내뿜고는 다리를 절며 돌아갔다.
“루안! 어딨느냐. 루안!”
로열 가드의 말을 탄 램파드는 숲을 달리며 외쳤다. 이렇게 전속력을 냈다간 진흙에 미끄러질 수도 있는데,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달렸다.
푸르릉!
그때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익숙한 말의 콧소리가 들렸다. 소리 난 방향으로 가자 회색마가 절뚝거리며 주인에게 달려왔다. 로열 가드가 먼저 앞장서 회색마를 살펴봤다.
“루안은?”
로열 가드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공자는 타고 있지 않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램파드는 바닥이 꺼지는 것을 느꼈다. 회색마는 램파드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말이라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자신의 등에 탄 낯선 사람을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고, 루안이 바닥에 떨어졌으면 공격했을지도.
숨을 내쉰 램파드는 고삐를 꽉 쥐고 회색마를 살펴봤다. 다리를 절고 몸에 진흙이 잔뜩 묻었다. 루안은 말이 넘어지면서 함께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엎어진 말이 버둥거리며 경황없는 틈에 피했을지도 모른다.
“바닥을… 잘 살펴보거라. 말이 쓰러졌으니 진흙이 움푹 팬 곳이 분명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몸에 묻은 진흙이 아직 다 굳지 않았으니 근방을 뒤져 봐라. 서둘러!”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로열 가드들은 말이 다니는 넓은 길부터 빠르게 수색했다.
말을 이끈 램파드는 다른 쪽을 살펴봤다. 회색마는 그루터기나 쓰러진 나무 같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걸 좋아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인 양 날뛰며 잘 닦인 길보다 제가 좋아하는 우거진 숲을 선택했을 것이다.
멀리 가지 않아 회색마가 쓰러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램파드는 진흙 위에 남겨진 말발굽을 따라 걸었고, 낭떠러지 끝에서 우뚝 멈췄다.
“하아…….”
거친 숨결이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차마 아래를 살펴볼 수 없었다. 확인을 해야 하는데 벌써 몸속은 엉망진창이 됐고, 작은 희망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진 램파드는 자신을 책망했다. 괜히 데려오라고 했다. 당초 커틀러의 계획대로 콘테 저택에서 보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을.
“……큭!”
커틀러와 루안을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이렇게 되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몸이 굳어 간다. 램파드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절벽 아래를 살펴봤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 그 가파른 절벽 사이를 비집고 뻗어 나온 나무 한 그루가 루안을 받아 냈다. 손수 없애 버린 신의 기적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다행이라며 기뻐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램파드는 떨리는 손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일어나 아래를 자세히 살펴봤다. 루안은 정신을 잃어 작은 미동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아래로 떨어질 테니, 깨어나기 전 한시라도 빨리 끌어 올려야 했다.
손을 쭉 뻗었지만 닿지 않는다. 절벽 아래로 조금 내려가야 했다.
램파드는 두 번째로 주저했다. 비가 잔뜩 내린 탓에 벽이 물러져서 혼자 내려가기에는 위험했다.
‘저는 당신이 눈을 감은 후 곧바로 따라갈 겁니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목숨 같은 것도 내걸 수 있지만, 언젠가 한번 커틀러가 읊조렸던 예고가 손을 멈추게 하였다. 만에 하나 잘못되었다간 그는 분명 따라올 것이다. 눈을 감은 커틀러를 떠올리면 괜히 움츠려졌다.
램파드는 당장 내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로열 가드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구출할 수 있을 테니까.
“……으!”
그 순간 정신을 차린 루안이 화들짝 놀라 미끄러졌다. 램파드의 기분 또한 아래로 툭 꺼졌다. 그 짧은 몇 분 새 천국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었다.
“루안!”
미안하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네가 우선이지만 눈앞의 상황을 외면할 순 없다. 혹여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한들 허튼 생각은 하지 말아라. 커틀러에게 몇 번이나 사과하며 몸을 움직였다.
생각이 많아지면 주저할 뿐이었다. 이를 꽉 문 램파드는 절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빠르게 미끄러져 떨어지는 루안을 가까스로 붙잡아 품에 넣었다.
“윽!”
빈손으로는 루안이 걸쳐 있던 나뭇가지를 꽉 붙들었다. 잔가시가 박혀 통증이 일었다.
“램파드 폐하! 조금만 버티십시오.”
램파드가 루안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듣고 로열 가드들이 찾아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축 처진 나뭇가지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씩 천천히, 아래로 몸이 꺼져 가자 램파드의 품에 있던 루안이 공황 상태에 빠져 몸부림쳤다.
“아, 아……!”
“루안…….”
온 신경을 나무를 붙잡은 손에 집중한 램파드가 힘겹게 말했다. 가뜩이나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건만, 발버둥 친 바람에 두 사람을 지탱한 나뭇가지가 불유쾌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기 시작했다.
“으… 으아……. 아.”
루안이 벌벌 떨었고, 램파드는 아래를 흘끗 바라봤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에 계곡물이 잔뜩 불어나 갈색빛을 띠었다. 계곡 바닥까지 다 뒤엎을 정도로 수압이 거세니 떨어졌다간 순식간에 떠내려갈 터.
“로열 가드들이 왔으니 진정해라.”
빠직, 꺾인 나무만큼 두 사람의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몸에 반동이 오자 루안의 몸부림이 더 거세졌다. 이대로라면 둘 다 아래로 추락한다.
시선을 거둔 램파드는 나무를 봤다. 꺾이는 건 가지뿐이니 뿌리 쪽으로 움직이면 버틸 수 있었다. 루안을 붙들고 있는 램파드는 한 손이라 이동하기 쉽지 않지만 루안이라면 움직일 수 있었다.
“진정하고 뿌리 쪽으로 이동하거라.”
덜덜 떠는 소년은 램파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서.”
“…….”
“루안 콘테!”
“헉!”
“콘테 가문의 차남이 고작 이런 일로 허둥대느냐. 정신 차려!”
램파드의 호통에 루안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고, 큰 버둥거림이 멎자 잘게 떨었다.
“뿌리 쪽으로 이동하거라.”
“아… 안 돼요. 못해요.”
“루안, 제발……. 부탁이니까 움직여……!”
질책하는 램파드의 목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한 차례 더 꺾였다.
“힉!”
“짐이 단단히 붙잡고 있으니 그대로 손만 뻗으면 된다. 용기를 내어라.”
그 말에 루안은 조심스레 양손을 뻗어 뿌리와 가까운 안쪽 가지를 붙잡았다.
“잘했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꽉 붙들어야 한다.”
램파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손에 힘을 꽉 줬다. 루안의 위치는 안전했다. 램파드가 붙잡은 곳과 달리 부러질 염려도 없고, 꽉 붙들기만 하면 됐다.
가지가 또다시 크게 꺾였고, 겁먹은 루안이 램파드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한계를 느낀 램파드는 함께 떨어질 수 없어 붙잡은 루안을 풀어 줬다. 그리고 한번 꼭 해 주고 싶은 말을 속삭였다.
“사랑한다, 루안.”
루안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저 아이는 램파드가 아닌 콘테 공작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니까. 그런데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었기에 욕심을 부려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커틀러.
나무가 부러지고 손을 놓은 램파드는 아래로 추락하며 멈췄던 생각을 이어 나갔다. 램파드의 으뜸은 단연코 커틀러였다. 그를 위해서라도 몸을 사렸어야 했는데, 커틀러의 목숨이 함께 꺼져 가는 걸 생각하면 뒤늦게 후회됐다. 너무나도 소중한 그의 최후 같은 건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눈앞에 일렁거려 절로 인상도 써진다.
‘정말로 바로 쫓아오면 걷어차서 내쫓을 테다.’
진심이어도 그에게 발길질을 하고 싶진 않으니 따라오지 말았으면 했다.
몸은 빠르게 아래로 떨어졌고, 마지막에 다다르자 또 다른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틀러의 말을 끝까지 듣고 보낼 것을. 그의 속삭임에 몸 전체가 시뻘겋게 데워져도 참았어야 한다. 그래야 너를 가장 사랑하노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했을 테니.
***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한 램파드의 귓가에 여러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하아……. 설마 며칠 내내 제대로 잠도 자지 않고 저러고 있던 거냐.”
“…….”
“한스, 자네가 대신 답해 보아라.”
“주인어른의 짐작이 맞습니다. 식사도 손대시지 않았습니다.”
“폐하 곁은 내가 지킬 테니 너는 이만 쉬러 가거라.”
왜 침실에 여러 사람이 있는 거지, 늦잠을 잤다면 급사 한 명만으로 충분할 텐데.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왠지 싫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지내는 것도 상당히 고역이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아프다는 핑계로 침대에 계속 누워 있고 싶었다.
조금만 더 뭉그적댄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다시 한번 깨어난 램파드는 언제까지고 누워 있을 수만은 없어 힘겹게 눈을 떴다.
“램파드 폐… 폐하께서 눈을 뜨십니다. 황의를 불러오십시오!”
낯선 칭호에 인상을 쓴 램파드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꾹 눌렀다.
“정신이 드십니까.”
이마를 여러 번 꾹 누른 램파드는 곁에 앉아 있는 콘테 공작을 바라봤다.
“뭐야, 왜 이리 늙은 건가.”
램파드는 루안을 만나러 콘테 공작저를 종종 방문했지만 정작 저택의 주인인 콘테 공작은 만나지 않았다. 콘테 공작은 선대 황제와 사이가 안 좋았고, 황실을 꺼렸기 때문에 램파드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점을 잘 아는 램파드도 굳이 독대를 시키지 않았고, 서로 얼굴을 본 것은 커틀러와 혼인을 올렸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신경 쓸 일이 워낙에 많아 절로 늙더군요.”
“그건 그렇고 자네가 왜 내 방에 있는 거지.”
루안은 대외적으로 콘테 공작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었으니, 수습하기 위해 콘테 공작이 황궁으로 불려 온 것이다. 속사정은 커틀러가 힘겨워해서 보다 못한 한스가 불러온 거였지만.
“루안 때문에 폐하께서 크게 다치셨으니 대신 벌을 받으러 왔습니다.”
램파드의 방 안에는 간호를 위한 시종 여러 명이 대기 중이었다. 그들의 귀가 있으니 에둘러 말했다.
“아버지가 다쳤다고?”
램파드의 대답이 심상치 않다는 걸 파악한 콘테 공작은 확인을 위해 물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몇 년이 되셨습니까.”
“32년째 되지.”
곁에 있던 한스가 입을 쩍 벌리더니, 서둘러 바깥으로 나가 커틀러를 부르러 갔다. 주변에 있던 다른 시종들 또한 소스라치게 놀라자 램파드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첫째 아들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는 1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뭐……?”
램파드는 고개를 돌려 침대 근처에 세워 둔 거울을 바라봤다. 침대에 기댄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지 않나.”
커틀러 또한 몸만 단단해졌을 뿐, 그들의 외모는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 아카데미를 졸업한 시기에서 변하지 않았다. 콘테 공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한스와 함께 커틀러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램파드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밝아졌다.
“커틀러, 너 또한 그대로군.”
커틀러는 황의가 진단을 내리지 않아도 램파드가 어떤 상태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램파드가 저렇게 구김 없이 활짝 웃던 시절은 만개한 꽃의 아름다움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 한철뿐이니까.
전쟁 중 쿠와트 숲에서 벌어진 일을 기점으로 램파드와 갈라지기 전, 커틀러의 말이라면 의심 하나 없이 온전히 믿었던, 우정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랑을 숨기던 스무 살의 램파드였다.
깨어난 램파드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커틀러는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황제의 명령에 사지로 내몰렸다. 홀로 황궁에 돌아온 램파드는 혹여 아버지의 눈에 띌까 봐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냈다. 황궁은 황제의 영역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안심되지 않아,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서재에 틀어박혀 커틀러가 떠나기 전 쥐여 준 억제제를 먹었다. 아버지와 함께 식사라도 한 날은 괜히 더 불안해 평소보다 많은 양의 억제제를 먹고 공부를 핑계로 서재에 온종일 눌러앉았다가 중압감에 짓눌려 잠들었다.
그러다가 눈을 떴는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램파드는 불쾌한 듯 인상을 썼지만,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는 시종장 한스라고 합니다. 황궁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신을 오랫동안 모셨다고 주장하는 한스와 함께 황궁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익숙한 황궁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구태여 찾는다면 기본 틀이 되어 준 기둥 정도뿐. 넓은 벽에 줄줄이 걸린 초상화도, 장식도, 모조리 달라졌다. 어디를 가도 아버지의 흔적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형이 창관으로 끌려가던 순간 걸렸던 저주에서 감쪽같이 풀린 것이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낯간지러운 칭호에 램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대신들은 모두 나이를 먹어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마구간이었다. 다리를 다친 회색마는 관리를 받는 중에도 주인을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너도 나이를 먹었구나.”
한 살을 갓 넘긴 어린 말을 하사받았는데, 회색마는 그새 자라나 덩치가 커지고 근육이 단단하게 붙었다. 멀리서 보면 뽀얀 은빛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날붙이에 긁혔다가 아문 상처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나이를 먹었지만 튼튼한 군마라 다리 건(腱)이 건재해 램파드의 말로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작은 상처와 함께 털빛이 바랜 모습 또한 많은 시간을 말해 줬고, 순간 먹먹해졌다.
더는 둘러봐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돌아가지.”
기분이 가라앉은 램파드를 배려한 한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로 안내했다.
침실에서는 황의와 커틀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궁의 모든 것이 바뀌고 시간이 흘렀건만, 커틀러만큼은 여전했다. 낯선 곳에 떨어진 램파드가 미아가 되지 않도록 그가 따라와 준 것만 같았다. 그라면 충분히 그랬을 테니.
“바뀐 황궁이 마음에 드십니까.”
커틀러의 존대가 익숙하지 않은 램파드는 왠지 낯간지러워 솜털이 삐죽 섰다.
인제 보니 그 또한 세월을 거스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깐죽거리던 동급생이 하루아침에 올곧은 가신이 되었을까.
“별로, 더 재미없어졌어. 궁전이 아니라 마치 큰 감옥 같아.”
“대신들 처지에서는 감옥이 맞습니다. 주어진 업무를 끝내지 않았다고 집에 보내지도 않고 몇 날 며칠 가둬 두시니까요.”
“너도 황궁에 감금된 거냐. 꼴이 말이 아니군.”
커틀러는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허여멀건한 반죽 같아 몸이 약해 보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멀끔하게 자신을 유지하고, 시선이 날카로워 연약한 인상이란 소린 듣지 않았는데, 며칠 시달렸는지 눈 밑이 퀭한 게 진짜 아파 보였다.
“저는 특별히 오래 시달렸거든요.”
커틀러가 웃었다. 동급생인 그는 절제된 작은 웃음을 지었었는데, 지금은 입술에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미소가 옅어졌다. 오랜 룸메이트 앞에서도 미소를 숨기다니. 감정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둘 사이에 좋지 못한 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램파드는 커틀러에게서 시선을 떼고 의자에 편히 걸터앉았다. 적응해야겠지. 혼자서 멈춰 설 수는 없으니까.
램파드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린 황의는 준비된 약재를 배합하기 시작했다.
혼자서만 한참이나 과거로 돌아왔지만,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황제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준비되었으니까. 갑작스레 떠안은 황좌지만 이때껏 해 온 것처럼 힘을 내면 되었다.
며칠째 잠을 자던 황제가 깨어나자 멈춰 있던 황궁은 다시 바삐 움직였다. 램파드가 중심이 되어 많은 사람을 이끌어야 했지만, 그는 정무에서 빠져 최근 몇 년 사이 일어난 사건을 정리한 서류를 읽고 있었다.
램파드 클로비스 황제.
황태자 전하라고 불리던 램파드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는 불리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개혁을 방해할 국교와 알파 세력을 정리하고, 황권을 강화해 독단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내부 쓰레기를 정리할 땐 과격했으면서 정작 침략국은 자비롭게 용서하고 화평을 청하며, 함께 발전하기 위해 다양하게 교류했다. 또한, 제국민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시를 구축하고, 다양한 교육 시설을 짓고, 가장 최근에는 억제제 가격을 술값 정도로 떨어뜨려 오메가들이 가족과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자신이 행한 일이라고 하지만, 환상 같아서 그저 잘 짜인 이야기 같았다. 자신의 업적을 읽은 램파드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절대로 깨기 싫은 행복한 꿈. 모든 소망이 이뤄져 있었다. 커틀러와 함께하고 싶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 가득한 소원까지도.
그는 자신을 사랑해서 곁에 있어 주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면 늘 그래 왔듯이 불쌍한 친우를 돕다 보니 어영부영 곁에 남아 버린 걸까. 아마도 얼떨결에 남은 쪽일 테지만, 인제 와서 그를 자유롭게 풀어 주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아카데미를 다니며 꽤 오랫동안 커틀러와 같은 방을 썼지만, 한 침대를 공유한 적은 없었다. 부부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램파드를 배려한 커틀러는 콘테 공작 저택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 아침마다 황의와 함께 램파드를 살펴보러 침실로 찾아왔다. 램파드는 그새 커틀러의 말투와 다소 딱딱해진 시선에 익숙해졌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램파드의 침실에 커틀러와 황의가 찾아왔다. 약병을 정돈한 황의가 난처한 듯 시선을 떨궜다.
“다방면으로 치료해 봤지만, 진전이 없군요. 비슷한 충격을 받으면 되돌아올지도 모릅니다만…….”
“폐하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란 말인가.”
커틀러의 낮은 음성에 황의가 흠칫 놀랬다.
“감히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맡은 환자 중 비슷한 증상을 앓던 자가 있었는데 큰 충격을 받으니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그자의 경우는 어떠했느냐.”
“칼에 찔린 충격에 최근 기억이 모조리 사라졌는데 가장 좋아하던 할아버지의 무덤을 보고선 기억이 되돌아왔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마 비슷한 수준의 정신적 충격을 받아도 될 겁니다.”
그 얘길 듣던 램파드는 커틀러가 이혼장을 내밀면 되지 않겠냔 생각을 했다. 한술 더 떠 옆구리에 다른 오메가를 끼고 사랑스럽게 껴안으면 효과 만점일 것이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것보다 커틀러의 성이 클로비스가 되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기뻤으니까. 인제 와서 결혼은 없던 사실이라고 말하면 상당한 충격을 받을 터.
태평하게 이혼장으로 해결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는 조바심이 났다. 분명히 같은 램파드인데 하나둘, 다른 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점점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동떨어져 갔다. 특히 자신에게 크게 의지하는 점이 거슬릴 정도로 괴리감이 느껴졌다.
커틀러와 떨어져 지낸 저 시기의 램파드는 혼자서 각오를 다지고 미래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만약 커틀러가 사라진다고 하면, 크게 슬퍼해도 혼자서 충분히 살아갈 정도로 마음을 단단히 굳힐 텐데. 지금의 램파드는 그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처럼 굴 것이다.
램파드는 집중하는 커틀러를 흘끗 바라보다가 읽던 서류에 집중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램파드의 침실을 정돈하는 시종이 왔다. 그는 램파드와 커틀러를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오늘 합방 준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난번처럼 다음으로 미루시련지요?”
“뭐… 뭐?”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화들짝 놀란 램파드가 읽던 서류를 떨어뜨렸다. 황제가 맡은 중요한 일 중 하나는 튼튼한 후계자를 낳는 것. 그렇기에 일주일에 두 번은 황후나 후궁들과 합방을 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진짜로 한다고?
커틀러의 말에 따르면 제국민은 아직도 램파드를 베타로 알고 있었다. 커틀러와의 혼인은 그저 겉치레일 뿐이니까 합방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램파드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하… 합방은 누구랑 하는 건가.”
이번에는 커틀러가 답했다.
“황후인 저랑 하시는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애처가셔서 첩을 들이지 않으셨거든요.”
곁에 있던 커틀러가 침대 위로 펼쳐진 서류를 하나씩 정리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확답까지 듣자 램파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오랫동안 짝사랑을 숨겨 왔으면서, 함께 잠자리에 든다는 이야기 하나만으로 무방비하게 마음을 내보이다니.
“…….”
램파드는 뒤늦게 얼굴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에 손등으로 볼을 문지르며 머리를 푹 숙였다. 아교를 바른 듯, 꾹 다문 램파드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자 커틀러가 지시했다.
“준비하도록 해라.”
죄인인 양 고개를 푹 숙인 램파드가 화들짝 놀라 커틀러를 바라봤다.
“뭐? 뭘? 뭘 하려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가 된 것 같아 허둥대며 물어봤다. 잔뜩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는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황제 폐하와 제가 함께할 잠자리를 꾸미도록 지시해야지요. 사용할 향유를 직접 고르시겠습니까?”
커틀러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침실을 꾸미는 시종이 무언가 내밀었다. 푹신한 쿠션 위에 올려진 투명한 병에는 색색의 액체가 채워져 있었고, 그걸 본 램파드는 숨을 쉬는 것도 까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커틀러는 익숙한 행동으로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려 병마개를 뽑았다. 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대 과일과 꽃을 섞은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지난번에 사용한 향유입니다. 끈적거리는 게 특히 마음에 든다며 제 가슴에 잔뜩 바르셨죠.”
뭘 어디다 발랐다고? 작게 벌려진 램파드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 그, 그런 건 몰라!”
“좀 있으면 알게 되실 겁니다.”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사에 관한 건 지식밖에 없어서, 저런 물건까지 써 가며 단단히 교접할 생각을 하자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다른 것보다 상대가 커틀러란 사실이 램파드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고르실 마음이 없다면 제가 선택하도록 하죠.”
그는 기다란 손가락 끝으로 병 몇 개를 툭툭 치더니, 유독 붉은 액체가 담긴 것을 골랐다. 커틀러가 향유를 선택하자 시종은 무릎을 천천히 꿇고 일어서 침실을 꾸미러 사라졌다.
심장이 쿵쿵 뛰는 램파드는 어디든 시선을 집중하지 않으면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아 사라지는 시종의 뒷모습을 쫓기 바빴다. 커틀러는 그런 램파드의 붉어진 볼을 가볍게 톡톡 치며 피식 웃었다.
“그럼 전 준비하러 갈 테니 침실에서 얌전히 기다리십시오.”
싫어, 가지 마.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지만 입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커틀러가 사라지자 램파드는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어쩌지, 도망칠까?
마음만은 이미 국경 너머로 뛰쳐나갔지만, 몸은 뻣뻣하게 굳어 동상처럼 가만히 바닥에 꽂혀 있었다.
“폐하, 이동하시지요.”
시종들은 딱딱하게 서 있는 램파드의 팔을 한쪽씩 붙잡아 침실 옆에 딸린 작은 옷방으로 이끌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무서워 잔뜩 굳은 램파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염소처럼 보였다.
시종들은 램파드의 옷을 벗기고 얇은 가운으로 갈아입혔다. 그리고 또다시 병자를 부축하는 것처럼 램파드를 질질 끌어 침실로 이끌었다.
램파드가 옷을 갈아입으러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드넓은 침대 시트는 주름 한 점 없이 곱게 펴졌고, 연분홍색 장미꽃잎으로 장식됐다. 야릇한 생각이 들 정도의 농밀한 꽃향기가 코를 찌르며, 침대맡에는 커틀러가 골라 둔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램파드의 얼굴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벌게졌다. 안 되겠어. 진짜 도망가야 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쳐 침실 밖으로 향했지만 가로막혔다.
램파드의 등에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벽이 닿았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리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
“침대는 이쪽이 아니라 저깁니다.”
그가 양어깨를 꽉 부여잡더니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털썩, 커틀러가 등 뒤에서 미는 바람에 램파드는 침대 위에 엎드린 자세로 쓰러졌다. 엉덩이를 치켜들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서둘러 자세를 바꿨지만, 그가 등을 짓누르는 통에 일어날 수는 없었다.
“옷 벗으십시오.”
램파드는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상태였다. 부끄럽고, 민망했다. 하아, 귓가에 그의 낮은 한숨이 닿았다.
“손이 멈춰 있네요. 제가 벗겨 주길 원하는 겁니까.”
“필요 없어!”
함께 엎어져 있던 커틀러가 일어나자 침대가 살짝 출렁거렸다. 짓누르던 사나운 알파가 사라지자 램파드는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봤다.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그가 보였다. 화가 났나. 커틀러의 저런 딱딱한 표정은 본 적이 없었지만, 죽일 듯 노려보는 걸 보아하니 화가 난 것 같았다.
“성가시게 하지 말고 빨리 옷 벗어요. 저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요.”
그의 말에 가슴이 철러덩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귀찮은 일을 떠안아, 한시라도 빨리 대충 끝내고 싶어 하는 느낌이 들었기에.
“어차피 눈가림을 위해 부부가 된 것뿐……. 진짜로 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후계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베타 여성들과의 혼담을 막기 위해 한 혼인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야 친구의 혼삿길을 막지 않기 위해서도 커틀러를 받아들일 리는 없으니까. 한번 물꼬를 튼 램파드는 엉망진창인 머릿속에 떠다니는 말을 아무거나 꺼냈다.
“넌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런 짓까지 할 필요 없어.”
“하…….”
“아니면 뭐야. 그냥 한 번 싸고 싶어서 내가 기억이 없는 틈을 타 멋대로 굴 생각인 건가?”
“…….”
“그럴 거면 차라리 다른 오메가를 찾아가.”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매우 화가 났고, 또 피곤해 보였다.
“제가 미치는 꼴이 보고 싶지 않다면 닥치고 벗어요.”
경고 어린 어조에 램파드가 움찔 떨었다. 손이 날아올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그는 사납게 노려보기만 했다.
“계속 가만있을 겁니까?”
하아, 여전히 뻣뻣한 램파드를 보며 다시 깊게 한숨을 내쉰 커틀러가 걸친 옷을 벗었다. 벗기기 편하게 만든 황후의 옷은 몇 번의 손짓으로 빠르게 그를 나신으로 만들었다.
커틀러의 하얀 몸이 드러나자 램파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의 몸 곳곳에는 누군가가 물고 씹은 것이 분명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대체 누가? 합방한답시고 같은 침대 위에 올라온 걸 보니, 흔적을 남긴 것 또한 램파드일 것이다. 막연히 그가 알파니까 자신이 구멍을 열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반대였나? 커틀러가 황후가 된 걸 보면 그편이 정답인지도.
램파드는 시선을 흘끗 내려 그의 중심을 살펴봤다. 아래로 축 처져 있지만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크기였다. 저런 게 들어갈 리가 없으니까 반대로 그가 대 준 모양이었다.
“너…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무엇을 말입니까.”
“내 자리를 지켜 주기 위해서… 합방을 무사히 치렀단 증거를 보이려고… 알파가 구멍까지 내줬던 거냐.”
딱딱하던 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자 램파드의 경계도 줄어들었고, 커틀러가 손을 움직여 가운을 감싼 끈을 풀었다. 가운이 흘러내리며 램파드의 어깨가 드러났다.
“무슨 오해를 하시는 겁니까. 지금 문 앞에서 폐하께서 앓는 소리를 내기만을 기다리는 시종은 당신이 오메가인 걸 알고 있습니다.”
커틀러에게 매수된 자라면 굳이 성교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섹스한 척만 하면 되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가……. 아, 아니… 네 몸에 남은 흔적은 또 뭐고…….”
귀찮아진 커틀러의 표정이 또 굳었다.
“등에 흉터는 또……. 뭐, 너 대체 무슨 짓을 당하고 다닌 거냐?”
“제가 굳이 답해야 할 필요가 없죠.”
커틀러의 손이 램파드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흐읍, 램파드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몸을 굳혔다.
“큿, 이러지… 마.”
“벌려요.”
그는 제 할 말만 하더니, 꼼짝달싹하지 않는 램파드의 무릎을 잡고 다리를 쫙 벌리게 하였다.
“하지 마… 힛!”
입구에 손가락이 들어오자 달뜬 소리를 내며 아랫배에 힘을 잔뜩 줬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기대는 잔뜩 한 모양입니다. 흐른 애액이 침대 시트를 잔뜩 적시고 있으니까요.”
“하흑, 커틀러…….”
손가락이 내벽을 찌르자 머릿속도 휘젓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엉망진창 뒤섞이자 램파드는 정신이 멍해졌고, 느슨하게 풀린 몸은 쉽게 절정에 도달했다.
“……흣!”
정액을 질질 싼 램파드는 멍한 시선으로 커틀러의 중심을 바라봤다. 쾌락에 날아간 정신이 순식간에 돌아올 정도로 큰 크기였다.
“그런 거… 안 들어가니까……. 그만해.”
손가락을 하나 머금은 램파드의 가슴이 크게 헐떡였다. 왈칵 쏟아지는 애액이 커틀러의 손가락을 축축하게 적셨고, 그의 손가락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사나운 움직임에 자극받은 램파드의 몸은 아랫도릴 꼿꼿이 세우며 한 번 더 정액을 질질 흘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의 구멍은 제 좆대가리는 물론 뿌리 끝까지 다 들어가니까요. 이미 노팅도 여러 번 해 봤으니까 쓸데없는 걱정할 시간에 구멍이나 벌려요.”
“네가 나한테 노팅했다고?”
“임신 중에도 좆을 꽂아 벌려 놨으니 무사히 아이까지 낳았죠.”
“아이?”
램파드는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몸속에 파정하고 노팅해 아이를 낳았다니, 그가 나에게 각인한 건가?
그렇다면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만 해 준다면 원하는 대로 몸을 내줄 텐데. 하다못해 사랑스럽게, 아니 전처럼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각인한 알파의 목소리라면 사랑으로 물든 심장을 꺼내 보여 주지 않아도 기뻐 매달릴 테니까. 이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몸을 내주긴 싫어 램파드가 마지막으로 버둥거렸다.
“쯧……!”
혀를 찬 커틀러가 램파드의 가슴을 강하게 짓눌렀다.
“이거 놔!”
“가만히 좀 계십시오.”
“싫어. 네놈 물건 너무 크다고……!”
“닥쳐.”
서늘한 목소리에 램파드는 흠칫 놀랐다. 그는 욕설을 내뱉는 일이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커틀러…….”
이름을 부르자 그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하, 씹……. 닥치고 가만있으라고 몇 번이나 말해!”
화가 난 커틀러가 소리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세차게 내리칠 모양에 램파드가 눈을 꽉 감았다. 대비했지만 충격은 오지 않았다. 뺨을 맞진 않았지만, 램파드의 마음은 이미 손찌검을 당한 것처럼 처량해졌다. 소중하지 않으니 손을 들어 올리는 거겠지. 사랑하지 않으니까.
“흡!”
손가락이 빠져나간 구멍에 무언가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그의 물건이 닿자 눈에 힘을 꽉 줬다. 슬픈 마음과 달리 몸은 기뻐하며 벌렁거렸고, 가슴 안쪽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통에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고, 램파드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흥분해 씩씩거리던 소리가 잦아졌고, 침대가 삐걱거렸다.
“힘주면 다칩니다. 힘 풀어요.”
“싫다고 하는데, 밀어붙여 놓고선……. 마음대로 할 거잖나… 어차피…….”
“폐하.”
“…….”
“하아, 저도…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협조 좀 하십시오.”
감은 램파드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 그래. 우리의 종착점은 결국 이렇구나. 램파드의 마음은 여전히 일방통행이고, 어울려 준 그는 뒤늦게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거였다. 혼인으로 그를 옭아매고, 욕구가 쌓이면 배설할 수 있도록 도왔겠지. 서럽긴 해도 차라리 몸을 내줘서라도 커틀러가 곁에 있었으면 한다.
커틀러는 실신한 램파드 곁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오늘 하루 동안 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며 욕설을 내뱉는지. 몇 날 며칠 밤을 새운 덕분에 몸이 피로해 자꾸만 짜증이 나는 듯했다. 해소되지 않은 짜증이 쌓여서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칼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 아무나 베어 버리고 싶은 기분도 든다.
뭐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정말 일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또 한 번 한숨을 쉰 커틀러는 정신을 잃은 램파드를 내려다봤다. 눈앞에 있지만,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담아지지 않는다. 어떻게 끄집어내야 할까. 뭘 해야 만날 수 있을까.
커틀러는 눈을 꼭 감고 자신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램파드의 목소리가, 따뜻한 온기가, 날카롭게 쏘아내는 말이 모두 필요했다. 어느 정도냐면 끔찍하게 여겼던 그의 사복까지 보고 싶을 지경이니까. 그가 미치도록 간절하게 보고 싶다.
***
커틀러는 합방 이후로 콘테 공작 저택에서 쭉 지냈다. 아침에 일어난 그는 가장 먼저 거울 앞에 서서 램파드가 남긴 흉터를 확인했다. 희미하게 보이던 마지막 흔적이 사라졌다. 이음새가 끊기자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쯧.”
거울을 확인한 그는 근처에 둔 독한 술을 부어 마셨다. 술기운이 돌아도 짜증이 가시지 않았다. 절반쯤 비운 술잔을 다시 채워 넣고, 서랍을 뒤져 약을 꺼내 담배처럼 말아 불을 피웠다. 연기를 빨아들이자 성난 기운이 잠재워졌다.
“후우…….”
강한 중독성으로 금지된 약은 뛰어난 효과를 보였다.
약은 전쟁 초, 불리한 전장에 나간 기사들의 공포심을 줄이기 위해 개발되어 지급됐다. 그러나 램파드의 참전 이후로 제국군이 연승해 사기가 올라가자 더는 필요 없어졌고, 강한 중독성 탓에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원료의 재배조차 금지되어 그 후 구하기가 어려워졌지만, 그의 재력으로는 문제될 것 없었다.
가장 최전방에 섰을 때도 두려움에 떨지 않아 약 같은 건 써 보지 않았건만, 지금은 맨정신으로 하루를 보내기 버거웠다.
아침에는 특히 더 기분이 가라앉아 가만있어도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기에, 정신 놓을 용도로는 약이 딱 좋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는 소량만 사용해도 되지만, 일부러 정신을 놓기 위해 잔뜩 빨아들였다. 약에 취하자 몸이 늘어졌고, 그가 원하는 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됐다. 밤을 설치는 바람에 제대로 못 잔 잠이 한꺼번에 쏟아져 눈을 감았다.
한참을 의자에 기대 멍하니 있던 커틀러는 정신을 차린 대로 한스가 정리한 서류를 읽어 봤다.
수소문하여 램파드와 비슷한 증상을 겪은 자들을 알아봤지만 하나같이 자연스레 회복되었단 말뿐. 가장 빠르게 회복된 자가 10년 후였고, 느리면 40년이 걸렸다. 하염없이 램파드를 기다려야 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는가.
“형…….”
커틀러의 방문이 살짝 열리고, 고개를 푹 숙인 루안이 들어왔다.
램파드가 기억을 잃었단 사실은 루안에게는 비밀이었고, 가볍게 다친 정도로만 전했다. 큰 부상은 아니란 말에 안도했지만, 자신을 감싸다가 다친 사실은 변함없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은데 만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나 뾰족하게 굴었으니, 이제 램파드 쪽에서 질렸을지도 모른다. 루안은 그렇게 느꼈다.
“오늘은 폐하를 만나러 가도 돼?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자진해서 반성실에 틀어박힌 루안은 한껏 기가 죽어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며 우물쭈물했다. 로열 가드의 증언을 들어보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은 루안의 독단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저 아이가 램파드를 위험에 빠뜨린 거였다.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쉰 커틀러는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노를 퍼부었을 테지만 램파드의 아이라 참았다. 내 자식이어서가 아닌, 사랑하는 오메가의 아이니까 이해해 주고, 억누르는 것이다.
내리눌러도 풀지 못한 노기가 응어리로 남아 커틀러의 표정에 다 드러났다. 그의 안색이 좋지 못하자 루안은 더 주눅이 들었다.
“내가 전달해 줄 테니 할 말이 있으면 하여라.”
“죄송하단 말은 내가 직접 폐하께 하고 싶어.”
루안은 며칠 내내 반성실에 틀어박혀 램파드를 떠올렸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잘해 준 사람이니까. 아버지보다 훨씬 더 다정하게 굴어 준 사람이었는데. 아버지에게 사랑을 갈구했다가 되돌려받지 못해 서운하지 않았던가. 형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에 램파드를 밀어내기 바빴는데 적어도 나만은. 사랑을 거절당한 아픈 걸 잘 아는 자신이 그러면 안 됐다.
“이번 말고도… 지난번 저택을 방문하실 때 일도. 전부 다 죄송하다고 말할 거야……. 허락해 주신다면 이번에야말로 승마도 함께하고 싶어…….”
“좀 더 기다려라.”
“응…….”
루안은 한껏 기죽은 자세로 방 밖으로 나갔다.
커틀러는 또다시 한숨을 쉬고 시종을 불러 기사단장복으로 갈아입고, 서랍에 넣어 둔 약을 챙겨 황궁으로 향했다. 황제와 알현할 땐 약이 없으면 이성이 뚝 끊길 테니, 챙겨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오늘 하루도 램파드가 없는 무의미하고 지루한 시간이 될 터. 과연 언제까지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야 할까. 해결되긴 할까. 하루가 지나는 것이 너무나도 쓸모없어 차라리 약에 찌들려 가만있는 쪽이 더 유익할 것 같았다.
평소 어떤 일을 겪어도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는 커틀러는 마치 램파드처럼 온종일 인상을 썼다.
몇 주 뒤.
사라진 램파드의 기억은 되돌아오지 않았지만, 정무가 시작됐다. 램파드 스스로가 부랴부랴 움직였고, 여러 대신이 도왔지만 크게 빈 황제의 자리를 메꾸지 못했다. 오랜 공백은 하루아침 노력한다고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고, 황궁의 일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황제의 집무실에서는 심기가 불편한 커틀러와 마찬가지로 피곤함에 절어 안색이 좋지 못한 최고 대신이 번갈아 보고를 올리는 중이었다.
램파드는 기억보다 훨씬 더 늙은 최고 대신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무가 지루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애를 써도 일이 풀리지 않다 보니, 점점 흥미가 떨어져 무료해졌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는 황후께서 설명해 드릴 겁니다.”
최고 대신의 이야기를 무심하게 듣던 램파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보고지만 커틀러의 목소리를 더하니 달랐다. 딱 한 번이지만 침대를 함께 쓰고 몸이 가까워지자, 아직 먼 거리인 마음도 욕심났다. 애틋함이 젖어 든 램파드의 눈동자가 떨렸다. 짝사랑에 빠진 듯한 램파드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최고 대신은 인사를 하고 집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 보고를 끝낸 커틀러가 나왔고, 그의 뒤를 밟았다.
커틀러는 집무실과 멀지 않은 긴 회랑에 멈췄다. 다른 궁으로 이동하는 중간 길인 회랑은 기둥만 놓여 사방이 뻥 뚫렸지만, 황제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 극소수다 보니 밀담을 나누기 좋았다.
“황후 폐하.”
“뭔가.”
커틀러는 품속에 넣어 둔 약을 꺼내 불을 붙이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셨습니까?”
눈이 있든 말든 타들어 가는 약을 문 커틀러는 멍하니 바깥을 바라봤다. 복용 횟수가 늘어서 잠깐 문 정도로는 안 돼,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커틀러에게 가까이 다가간 최고 대신은 냄새를 맡고 정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 달달한 냄새는……. 약을 하는 겁니까?”
연기를 빨아들인 커틀러는 답 대신 인상만 잔뜩 썼다. 의료 지식이 없는 사람도 약이 몸에 나쁜 건 안다. 잔소리할 거면 지나가란 뜻이었다.
저 약은 흥분해 날뛰는 부류가 아닌 힘이 쭉 빠져 구석에 널브러지는 용도니까 못 본 척하기로 했다. 하지만 연기는 맡기 싫어 멀찌감치 떨어진 채 말했다.
“방금 램파드 폐하의 표정 보았는지요? 첫사랑에 빠진 풋내기의 모습이덥니다.”
합방 이후로 램파드에게 관심이 사라진 커틀러는 그의 표정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하는지 아무것도 관심 없으니까. 원치 않은 주제라 인상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합방해도 그대로시길래 저 나이대의 폐하께선 황후께 흥미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닌 모양입니다. 폐하께선 오래전부터 황후를 좋아하신 모양이지요.”
“관심 없어.”
램파드와 결혼하기 위해 온갖 난리를 쳤던 게 커틀러건만, 저런 무심한 반응이라니. 최고 대신은 커틀러의 반응이 의아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황제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자는 램파드지만 램파드가 아니니까.
“폐하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예상대로 커틀러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고, 최고 대신이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기사 서임식 때 있었던 일 기억하는지요?”
“그래.”
“똑같이 해 보시죠. 분명 먹혀들 겁니다.”
황궁은 호위를 허락받은 로열 가드와 황제를 제외하고는 무기를 들고 올 수 없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틀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최고 대신은 자신의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화려한 세공의 단도를 꺼냈다. 유독 다른 단도보다 훨씬 더 짧고 화려한 걸 보아하니 부적 용도로 몰래 들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무기를 숨기고 폐하 앞에 선 것이냐.”
커틀러는 피우던 약을 바닥으로 던져 발로 밟으며 인상을 구겼고, 최고 대신은 시치미를 뚝 뗐다.
“소신이 단도를 겨눠 봤자 폐하께 닿기라도 하겠습니까? 정원에 있는 야생 사과의 껍질을 깎을 때 보여 드렸으니 폐하께서도 아십니다.”
램파드가 허락한 일이어도 기분이 불쾌했다. 커틀러의 인상이 한껏 험악해지자 최고 대신은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늘 무덤덤한 사내였건만, 최근 그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팍 쓰며 눈치를 절로 보게 하였다. 대신은 커틀러의 살벌한 표정을 무시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원래대로 되돌아온다면 그대로 폐기해 주십시오.”
최고 대신은 단도를 들고 가라며 손을 털었다. 램파드는 정무에 익숙해지기 위해 온종일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집무실은 검을 소지하고 들어갈 수 없다. 최고 대신이 꺼낸 단도 말고는 별수가 없으니 못마땅하게 받아 들었다.
커틀러가 받아 들자 최고 대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목숨을 걸 필요는 없고, 급소를 피해 대충 찌르는 척만 해도 먹힐 겁니다. 사랑에 눈이 먼 자는 어딜 찔러도 심장으로 보일 테니.”
“…….”
“며칠 뒤에 합방하지요? 그때를 잘 노려…….”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커틀러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는 화이트 테일의 방향이 아닌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고, 최고 대신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분명 저 약의 효능은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두려움에 떠는 기사들이 숙면을 할 수 있도록. 잠시나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을 놓게 만드는 약인데, 반대 효과가 났는지 그는 빠르게 이동해 버려 말릴 새도 없었다.
어차피 며칠 뒤에 벌어질 일, 조금 더 빨리 결과가 나와도 나쁘지 않을 터. 다만, 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부디 램파드가 정신을 차려 황궁이 제대로 돌아갔으면 했다.
“커틀러?”
볼을 괴고 서류를 여러 번 읽던 램파드는 갑자기 들이닥친 그를 바라봤다. 그는 힘이 빠진 듯, 몸이 무거워 보였다. 축 처진 어깨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모양새였기에 그를 주시했다.
일직선으로 닫혀 있던 커틀러의 입술이 열렸다.
“한스, 너는 나가서 망을 살펴봐라.”
커틀러가 약을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깥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약을 하다가 온 것 같았다. 혹여 쓰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황의를 부를 계획을 세우며 일단은 지시대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오늘치 보고는 끝났을 텐데. 무슨 볼일이지?”
“이만 끝내러 왔습니다.”
커틀러가 품속에 넣어 둔 짧은 단도를 꺼내자 램파드의 멍한 시선이 꽂혔다. 짧긴 해도 날이 살아 있어 사람의 살갗을 찢기엔 충분했다. 커틀러의 실력이라면 뼈를 부러뜨리고, 급소를 후벼 팔 수 있겠지. 램파드는 입꼬리를 한쪽만 끌어 올려 비웃었다.
“그렇게 내가 싫나?”
“네. 진실로 당신이 거슬립니다.”
“알아.”
커틀러가 가까이 다가왔고, 램파드는 덤덤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이미 알고 있었기에 상처받진 않았다.
“넌…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까. 램파드 폐하라고도 부르지 않았어.”
“알고 계셨군요.”
“그래. 계속 거리를 두니 알 수밖에 없지.”
보고를 위해 집무실에 올 때마다 커틀러의 표정이 더러워졌다. 못 볼 걸 봤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당장에라도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느낀 건 거짓이 아니었구나. 성가시니까 한시라도 빨리 없애 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너를 좋아했다.”
“압니다.”
“틀려. 훨씬 예전부터…….”
“알고 있으니까 설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쓸데없는 소릴 하는 건 시간 낭비지 않습니까.”
눈을 뜬 이후로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았건만, 그 꿈은 커틀러를 중심으로 일그러져 악몽으로 변화한 지 오래였다. 그의 경멸 어린 시선 따윈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대로 찔러서 분풀이해. 좋아하는 네게 찔렸다는 건 상당히 큰 충격일 테니까……. 원하는 대로 단번에 꿈에서 깨어날 거야.”
걸어오던 그는 보고를 올렸던 자리에서 멈춰 섰다. 램파드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커틀러가 흡입한 약이 서서히 효과를 발휘했다. 미쳐 발광하는 마음을 진정시켰고, 드디어 램파드가 눈에 담아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상처받자, 태연하게 있긴 힘들었다. 이따위 촌극은 빨리 끝내고 싶었다.
“폐하, 저를 보십시오.”
고개를 숙이면 안 되기에 그를 불렀다.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도 램파드는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 긴 화랑에 걸려 있는 램파드의 초상화가 저런 표정이어도 똑같이 마음은 아플 것이다. 겉껍데기만큼은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랑한다며 이름을 불러 주면 슬픔 같은 건 단숨에 거두고 활짝 웃을 게 뻔하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아 거짓말도 나오지 않는다. 분명, 스무 살의 램파드도 절절히 사랑했는데 왜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인가.
예전과 같은 차분해진 상태가 되자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인간은 슬픔에 익숙해지기 위해 망각을 배웠다. 사랑도 예외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풍화하고 처음의 설렘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진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매력적이었고, 지나칠 정도로 사랑스러워졌다. 함께한 하루만큼 내실이 쌓여 하루 더 어여뻐진 램파드니 감정이 무뎌질 새가 없었다. 매일이 첫사랑이었다.
그러니 함께 시간을 축적하지 않은 램파드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고, 겉의 아름다움만으로는 빠르게 마음이 식는다. 지금 눈앞에 있는 램파드에게 사랑을 속삭이려면, 함께 과거로 돌아갔어야 했다.
원래 계획은 동맥을 피해 목을 긋는 거였다. 얇은 피부가 갈라져 피가 왈칵 쏟아져도, 잠시일 뿐. 피는 금방 멎고, 생명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 잠깐 놀라게 하는 거니 살갗을 찢는 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약 때문에 점잖아진 머리가 계획을 과감하게 틀었다.
최대 40년이라니, 램파드 없이는 1년도 버티지 못한다. 아니, 그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당장 지나가는 몇 분도 참을 수 없이 괴롭고 미칠 것 같았다. 커틀러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을 드디어 자각했다. 램파드가 사라졌으니 아무것도 필요 없어졌다. 혹여 먼 훗날 커틀러가 사랑하는 램파드로 돌아와도 걱정할 건 없었다. 그가 오메가라는 걸 아는 알파는 이제 커틀러 혼자가 아니니까. 뛰어난 능력의 그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것이다.
“너, 무슨 짓이야!”
그는 정확히 동맥을 조준했다. 커틀러에게 집중한 램파드가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한 손으로 책상을 짚고 훌쩍 뛰어넘어 단도를 꽉 잡았다. 우성 알파인 그와 맨주먹으로 싸우면 밀리는 건 램파드였다. 쉽게 뺏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건만, 그의 손이 이상할 정도로 맥없이 풀리더니 그대로 함께 넘어졌다.
램파드는 뺏은 단도를 던지고, 자신이 깔아뭉갠 커틀러를 바라보며 씨근덕거렸다.
“하… 미친 새끼……. 날 찌르려던 게 아니냐.”
욕설을 내뱉으며 손수건을 꺼내 커틀러의 목을 닦았다. 피를 닦자 상처가 드러났는데 깊진 않았다. 다행이지마는 한 번 매우 놀란 심장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꼴 보기 싫으면 나를 찌르라고!”
“…….”
“말해 봐. 며칠 내내 나를 비꼴 때는 주둥이를 잘도 나불거리더니 인제 와서 다무는 거냐.”
“저희가 처음으로 섹스한 장소가 어딥니까.”
“무슨 소릴… 아……!”
지난번 합방 때는 끝까지 가지 않았으니 섹스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충격이 먹혔는지 확인이나 하고 있었다. 실망한 커틀러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더는 현실에 있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잠을 자고 싶었고, 슬슬 돌기 시작하는 약효 덕분에 몸이 나른해졌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탄 램파드는 자존심이 처절하게 짓밟혀 몸을 잘게 떨었다. 그의 뜻대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아랫입술을 말아 씹으며 고개를 숙였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 퍼뜩 들어 올렸다.
근원지는 커틀러였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아닌, 분명 다른 사람에게서도 맡아 본 향기였다. 은은한 단내는 설탕 같지만, 악취처럼 고약하게 느껴졌다. 신경이 거슬릴 정도의 달콤한 냄새를 어디선가 맡아 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상치 않은 달달한 냄새가 무엇인지 떠올려야 했다. 그를 위해서라도.
“윽……!”
램파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눈을 찌푸렸다. 피비린내가 나던 전장. 불리한 전장에 뛰어든 기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약. 전쟁이 끝나자마자 생산지를 모조리 태워 버렸지만, 커틀러라면 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미친 새끼가… 고작 몇 주 버티기 힘들어 약을 찾은 거냐? 중독된 기사들이 어떤 꼴이 됐는지 다 봐 놓고선?”
피로해진 커틀러는 바닥에 누운 채로 잠을 청하다가 눈을 반짝 떴다. 처음 하는 사랑에 어찌할 줄 모르는 햇병아리 같던 남자가 아닌 꽤 오랜 시간, 비바람을 모두 견디며 단단해진 땅 같은 램파드였다.
드디어 다시 만났다. 어떤 아픔을 겪어도 자신을 놓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 견고한 나의 황제이자 날마다 새로운 일상을 주는 사랑하는 오메가. 그리고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존재.
“램파드 폐하.”
술에 취해도, 약에 절어도 떨쳐지지 않던 짜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랑 하나만으로도 이리도 벅차니,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 따윈 느낄 겨를이 없는 것이다.
“램파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리던 그는 약이 보여 주는 환각이 아니기를 바라며 정신을 잃었다. 램파드는 축 처진 커틀러를 안아 들었다. 피부가 하얘 짙은 그림자가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램파드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 오랜 시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긴장이 풀려 쓰러진 거였다.
“하, 병신 같은 새끼가. 약해 빠져서는!”
램파드는 그의 피가 묻은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오지 말았으면 했다. 어떻게든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악착같이 생을 다한 뒤 만나면 좋으련만, 커틀러의 다짐을 무너뜨릴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게 됐다. 강제로 그를 묶어 두어도 약에 찌들어 죽느니만도 못한 모습으로 삶을 이어 갈 터.
“앞으로 너를 위해 조심할 테니……. 다신 이러지 마.”
약에 끌려간 커틀러는 듣지 못하지만,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 중얼거렸다. 실신한 그를 근처 소파로 옮긴 램파드는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손수건으로 감싸 품에 넣고, 집무실 문을 활짝 열었다.
“폐하… 손을 다치신 겁니까.”
“커틀러가 흘린 피다.”
“주, 주인님!”
크게 놀란 한스는 순간 예절도 잊고, 커틀러에게 달려갔다. 그는 소파에 누운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큰 상처가 아니라 피는 이미 멎었다. 커틀러의 몸에 더는 흉이 남는 게 싫으니 실력 좋은 황의와 함께 침실에 집어넣어라.”
한스는 능수능란하게 지시하는 램파드의 모습에 안도했다.
“램파드 폐하… 기억이 돌아오신 겁니까.”
“중요한 건 짐의 기억 따위가 아니지 않으냐.”
램파드가 무슨 말을 할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한스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커틀러에게 약을 구해 준 놈, 판매한 놈들을 죄다 잡아 오너라.”
커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한스지만 주인의 몸에 위험이 닥치는 일은 수행하지 않고 바른 조언을 하며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커틀러에게 약을 구해 준 자는 콘테 공작에 있는 시종 중에서도 돈이 급한 자였기에 누군지 추려졌다.
“아… 알겠습니다.”
“짐의 앞에 끌고 오기 전 손목을 잘라 대령하도록 하여라. 지금 당장.”
한스는 램파드가 지시한 바를 따르기 위해 우선 황의를 불러왔다. 커틀러가 침실로 옮겨졌고, 곧바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약 때문인지 까무룩 잠든 그의 모습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좋은 꿈 꾸거라.”
그의 이마를 한 번 쓰다듬은 램파드는 호위로 로열 가드를 몇 명을 붙인 후 회랑을 건넜다.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램파드가, 램파드가 아니었을 때. 커틀러가 내뱉은 말이 모두 다 떠올랐다. 감정 없는 무심한 눈과 말은 램파드에게 아무런 흠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남에게 내색하지 않은 그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반증했다.
커틀러의 목줄을 쥘 사람은 램파드밖에 없다. 주인을 잃고 으르렁대는 맹견을 함부로 손대지 못해 내버려 둔 거라면 나무라지 않을 테지만 제멋대로 꾀어낸 건 용서하기 힘들었다.
최고 대신이 사용하는 집무실 앞에 서 있던 시종이 허리를 굽혔다.
“고하지 말고 열어라.”
호명하지 않고 개인실 문을 여는 것은 큰 실례지만, 황제의 말은 모든 절차보다 우위에 있었다. 시종들은 허리를 굽히고 바로 문을 활짝 열었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던 최고 대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황제로 군림한 램파드는 같은 모습이어도 기백이 달랐다. 얼떨결에 떠안은 황제의 자리에 쩔쩔매는 미숙한 모습을 모두 벗어냈기에 기억이 되돌아온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태양께서 어인 행차십니까.”
“자네가 두고 간 물건을 돌려주러 왔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황궁을 위해서, 더 나아가 제국을 생각한 일이지만 쉽사리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황제를 오랫동안 봐 온 최고 대신은 변명을 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대의를 위한 일이었으니, 조금이라도 선처를 바란다면 그편이 나았다.
“뭐하나? 들고 가지 않고.”
날카로운 칼날은 칼집이 아닌 피로 흠뻑 적셔진 손수건에 감싸여 있었다. 검을 잘 쓰는 커틀러니까 적당히 힘 조절을 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크게 다친 건가. 그의 목숨이 끊어졌다면 황제는 장검을 들고 찾아왔을 것이다. 최고 대신은 진심으로 사죄의 의미를 담아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 해, 들고 가라 하지 않았나.”
최고 대신의 굽은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높낮이 없는 무료한 목소리는 쉽사리 봐주지 않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램파드 폐하…….”
“그래, 들고 가기 싫다면, 짐이 손수 돌려주겠다.”
손수건으로 손잡이를 꽉 쥔 램파드는 단검을 들어 올려 대신의 어깨에 박아 넣었다.
“아악!”
“큰 소리 내지 마라. 거슬린다면 정말로 심장을 찌를지도 모르니까.”
괜한 협박이 아니란 걸 느낀 대신은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며 신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버텼다. 어찌나 강하게 깨무는지 입술에서 흐르는 피가 턱에 뚝뚝 고였다.
시선을 단검에 고정한 램파드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그의 심장을 파내 버리고 싶었다. 대의를 위함이라고 한들 커틀러를 이용한 것이 불쾌했다. 가슴을 갈라 장기를 빼낼까. 손질된 생선같이 속이 빈 최고 대신을 황궁 입구에 걸어 두면 그 누구도 다시는 그를 넘보지 않을지도.
“이 정도로 봐주는 이유는 스스로가 알고 있겠지.”
뼈에 다다라 멈췄지만, 칼에 찔린 고통은 매우 컸다. 대신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단검을 꾹 누르던 램파드는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그대로 손을 놨다.
“커억… 네.”
덕분에 커틀러가 약물 중독자가 되기 전에 깨어났다. 중독성이 강한 약이니 시간이 더 지났다면 손을 쓰기 힘들었을 터. 냉정하게 생각하면 여기서 끝내야 하지만, 울화통이 치밀었다. 램파드는 박아 넣은 단도 손잡이를 톡 쳤다.
“흐악!”
뾰족한 칼끝이 어깨뼈를 찌르자 번개에 감전된 듯, 큰 통증이 몸을 관통했고 최고 대신은 그대로 자리에서 쓰러져 꿈틀댔다.
“자네는 꽤 신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짐이 잘못 봤나 보군. 적어도 그대는 짐이 황후를 어떻게 아끼는지 잘 알지 않았나.”
“헉, 잘 알고 있습니다…….”
“제국을 위해 몇 번이고 짐을 시험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나 그 대상이 커틀러라면 두 번은 없다. 한 번만 더 그를 건드린다면 자네는 물론 가문까지 멸할 것이니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명… 심하겠습니다. 자애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이번은 딱 3일만 고생하거라.”
램파드는 파리해진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지시에 따라 최고 대신을 부축했다.
“검을 뽑지 말고 그대로 포박하여 감옥에 가두거라.”
괜히 아무렇게나 찌른 게 아니었다. 지속해서 뼈와 살갗을 누르는 통에 뽑지 않는 한 통증에 3일 내내 잠들지도 못한다.
고통에 이를 악문 대신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남자를 건드렸는데 목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3일 동안 고통에 시달려야 하지만 사지가 잘리는 것도 아니니 자비에 감사해할 뿐이었다.
당장 침실로 가고 싶지만, 엉망이 된 일 처리가 우선이었다. 기억을 잃었을 동안 치른 정무가 떠올랐는데,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자고 서류 처리를 이렇게 해 놨는지, 과거의 자신을 불러와 호통치고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시종에게 치료 경과를 전해 들은 램파드는 급한 일만 서둘러 끝내고 침실로 돌아왔다.
모든 치료가 끝난 침실은 고요했다. 아직도 잠을 자는 건가. 그간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정신을 쉽게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길게 늘어진 천을 헤치고 들어가자 넓은 침대 위에 조용히 잠든 그가 보였다. 커틀러가 잠든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외로워 보여, 한시라도 빨리 내가 돌아왔다고 알리고 싶었다.
램파드는 시종을 전부 무르고, 그의 곁에 앉았다. 처치를 끝내고 붕대로 칭칭 동여맨 목이 보였다. 상처가 남지 않으면 좋으련만. 목은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니까 마주할 때마다 이성이 끊길지도 몰랐다.
커틀러, 혹여 그가 깰까 봐 마음속으로 조용히 부르며 곁을 지켰다. 알파에게 도움이 되는 건 각인한 오메가의 페로몬이지만, 헤어지기 전 격하게 한바탕 뒹군 덕분에 쌓인 욕구가 없어 유혹의 향도 뿜어낼 수 없었다. 램파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곁을 지키는 것뿐.
“오셨습니까.”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있었는데, 그는 인기척에 깨어났다. 갈라진 목소리가 들리자 램파드는 그의 안색부터 살폈다.
“……그래.”
“램파드 폐하, 저는 지금의 당신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아직 잠에서 덜 깼나. 깨어나자마자 엉뚱한 소릴 하는 그를 미심쩍게 바라봤다. 약 기운이 덜 빠졌을지도 모르니 유심히 살펴보다가 황의를 부를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램파드를 향해 옅게 웃었다.
“침대에서 말해 주기로 했잖습니까. 늦었지만 들어 주십시오.”
몇 주 전 일인데 그걸 또 기억하고 있다니. 램파드는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어 눈살만 찌푸렸다.
“말해 봐. 들어 줄게.”
“램파드 폐하는 매 순간 새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저를 설레게 하지요.”
벌써 못 들어 줄 것 같았다. 램파드는 한쪽 다리를 끌어 모아 고개를 나른하게 기울였다. 마음 같아서는 들어 줄 가치가 없다며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환자니까 특별히 자리를 지켜 줬다.
커틀러에겐 기회였다. 쑥스러워 소리를 질러 막든가 도망가지 않고, 제대로 들어 주니까.
“하루치의 새로움이 더해진 내일의 당신은 분명 더 사랑스럽겠죠. 세월이 흐를수록 당신은 빼어나질 테니, 제 사랑 또한 명백히 식지 않을 겁니다.”
이대로 얼굴을 붉히며 가만있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램파드는 심술을 부렸다.
“그 말은 한때는 과거의 나도 매우 사랑했단 거군. 추억이 동했나?”
“확실히 웃는 모습 하나만큼은 지금과 견줘 볼 만하군요.”
감정을 숨겨야 하는 황제의 자리에 앉기 전, 스무 살 남짓의 램파드는 좀 더 표현이 솔직했다. 현재의 램파드를 그리워하느라 금방 잊었지만, 잠시나마 과거로 함께 빨려 들어가는 기분도 들었다.
“어때, 숫내 나는 내 첫 경험을 겪어 본 소감이?”
“뻣뻣하게 굳어 있기만 하고 정말 재미없었습니다.”
잠자리 상대라고는 램파드 하나밖에 없는 그가 자신의 경험은 생각 안 하고 미숙자를 비웃었다.
“네놈이 제대로 흥분시키질 못한 탓이지.”
“섹스를 저 혼자 합니까. 상대도 응해 줘야지요.”
“어차피 할 생각도 없었잖아. 아니, 못한 건가? 네놈 좆은 서지도 않았으니까.”
미숙한 램파드는 손만 대도 절정에 달해 혼자 만족에 빠지고, 커틀러는 발기조차 못 했다. 그는 램파드에게 큰 충격을 가하기 위해 발기하지 못한 성기를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했지만 축 처진 살덩어리는 입구를 뚫지도 못했다.
“노련한 완숙미가 없는 폐하는 매력이 한참이나 부족하더군요.”
램파드가 이맛살을 살짝 구겼다. 커틀러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이를 먹고 첫 경험을 치러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자칫하면 큰 실망을 할 뻔했어요.”
“네놈의 발기부전을 남 탓으로 돌리지 마.”
“제대로 섭니다.”
그는 램파드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중앙에 가져갔다. 얇은 천 아래로 발칙한 살덩어리가 닿자 기회다 싶은 램파드는 마음껏 주물렀다. 몇 번의 손길로 금방 뻣뻣해지는 게, 좀 더 만지면 완전히 기립할 것이다.
“네놈은 정조대를 채울 필요가 없겠군.”
같은 얼굴인데도 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발기조차 안 됐으니까. 램파드는 뒷말을 삼키고 주무르던 손을 멈췄다. 완전히 떼어내기 전, 그의 성기가 꿈틀댔다. 마치 바지 속에 갓 건져 낸 장어를 한 마리 집어넣은 것 같았다. 하반신에서 시선을 뗀 램파드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지금의 폐하라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발기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섰는데? 광대뼈가 살짝 물든 램파드는 냉큼 손을 떼어 냈다. 그는 아쉬운 듯 탄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장난치기 위해 발기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선 게 확실했다.
“하……! 시도 때도 없이 세우진 마. 처리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
목의 상처가 도질 것을 염려해 참아야 하는데 버티기 힘들었다. 괜히 더 주물렀다간 오히려 램파드가 성욕이 일어 커틀러를 덮칠지도 몰랐다. 지금도 당장 그의 몸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고 싶으니까.
입술을 짓씹으며 버텼지만 힘들었다. 조금만 맛보기로 여러 번 다짐한 램파드는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 그를 끌어안았다. 딱 이 정도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욕심을 내면 안 됐기에 그의 품에 고개를 푹 넣었다. 커틀러도 포옹 정도는 어울려 주기 위해 램파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고개를 파묻었다.
“약 끊어.”
그의 품에 머리를 문지른 램파드가 중얼거렸다. 단단히 밀착된 상태로 이야기했으니 작은 목소리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신이 이곳에 있으니 더는 꿈속으로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각오 단단히 해. 제대로 끊지 않으면 화낼 거니까.”
커틀러는 그를 꽉 끌어안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램파드가 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약 생각은 떨쳐냈다. 그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또 하나의 걱정을 천천히 꺼냈다.
“루안은 어떻게 지내더냐.”
“직접 만나서 보십시오.”
커틀러의 제안에 덜컥 겁이 났다. 마음이 급해져 루안에게 큰소리를 질렀다. 더 나아가 큰일을 겪게 했으니, 램파드를 싫어하든가 무서워할지도 몰랐다.
“나에게 온갖 정이 다 떨어졌을 거야…….”
“아닙니다. 폐하를 당장 만나고 싶다며 여러 번 저를 찾을 정도였습니까.”
“정말인가?”
시무룩해 있던 램파드는 빠르게 기운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커틀러를 바라봤고, 그가 위아래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못다 한 승마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함께할 테니, 마음이 내키는 대로 초대장을 보내십시오.”
램파드는 이미 루안이 가진 마음의 벽을 혼자만의 힘으로 허물었다. 이제는 친해질 일만 남았으니 한시라도 빨리 만나는 것이 좋았다. 커틀러는 루안과 친해지기 위해 사활을 거는 램파드를 전력으로 도울 생각이었다. 램파드의 시간을 루안과 나누는 건 아쉽지만,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한다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몇 주 후.
한참 밀린 정무를 수습한 램파드는 휴식을 취할 겸, 미약한 후유증이 남은 커틀러와 함께 인근 별장으로 짧은 휴양을 떠나기로 했다. 별장은 콘테 가문 소유의 사냥터 안에 있었고 붉은여우나 세뿔사슴 정도만 출몰하는 조용한 곳이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시종 없이 단둘이 가기로 했다. 미리 준비하라 일렀으니, 음식 같은 건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뒀을 터.
출발 당일, 커틀러는 콘테 저택에 볼일이 있어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비웠다. 램파드는 홀로 별장으로 떠났고, 미리 가서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먼저 도착할 줄 알았는데 이미 커틀러는 별장 안에 있었다. 깜짝 상자를 든 기분이 된 램파드가 씩 웃었다.
“뭘 준비해 둔 거냐.”
문을 연 커틀러 곁으로 선물 같은 루안이 쪼르르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해 당연히 둘이서 떠날 줄 알았는데 예고도 없이 루안을 데려왔다.
건강해진 램파드를 발견한 루안은 활짝 웃다가 무언갈 퍼뜩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여도 염치가 없단 건 알았다. 차마 자신 때문에 다친 램파드에게 먼저 말을 할 수 없었으니.
“지난번에 하다 만 승마를 함께하지 않겠나?”
램파드가 먼저 권해 주자 루안은 구김 없이 웃었다.
“네!”
루안이 힘차게 답하자 램파드는 순간 움찔했다. 저 아이가 자신 앞에서 저렇게 해맑은 표정을 짓지 않을 텐데.
“네놈이 또 뭔가 한마디 했군.”
곁에 있던 커틀러의 어깨를 툭툭 치고 별장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털을 부풀리고 하악질을 하던 새끼 고양이가 꼬리를 세차게 흔드는 강아지가 됐으니 커틀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네.”
역시,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너…….”
대체 뭘 한 거냐. 순하게 길들인 방법이 솔직히 궁금하지만, 커틀러라면 희한한 방식을 사용했을 테지. 왠지 좋지 못한 방법일 것 같아 따져 들고 싶지만,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특별히 넘어가기로 했다.
어쩐지 별장에 있을 동안 내내 그를 위해 참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휴양이 아니라 커틀러를 간호하러 온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저… 램파드 폐하.”
묘한 기류가 흐르는 램파드와 커틀러를 보던 루안이 조심스레 불렀다.
“무슨 일이냐.”
“말을 타기 전에 먼저 이쪽으로 오세요.”
루안은 램파드의 한 손을 양손으로 덥석 잡고 어디론가 질질 끌었다. 램파드는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루안이 스스럼없이 손을 붙잡다니. 크게 설레어 광대뼈가 살짝 붉어졌고, 뒤따라 천천히 걸어오는 커틀러를 향해 입만 뻐끔거렸다.
커틀러는 기쁨과 당황이 섞인 램파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저리도 기뻐하다니, 역시 루안과 함께 오길 잘한 거였다.
램파드를 이끈 루안은 멀지 않은 응접실에 도착했다. 사냥을 하며 며칠간 머물 용도로 사용되는 별장의 응접실은 크기는 작지만, 고풍스럽게 꾸며졌다.
“차와 다과를 준비해 올 테니 먼저 앉으시지요.”
커틀러는 시종의 흉내를 내 램파드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뽑았다. 그는 램파드가 자리에 앉자 주방 방향으로 사라졌다.
램파드의 맞은편에 앉은 루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해 보아라.”
“지난번에 저 때문에 다치셔서 죄송해요…….”
“신경 쓰지 말아라. 짐이 무심하게 말한 탓이니.”
“그 일 말고도 예전부터…….”
머뭇거리는 루안을 향해 응원의 뜻을 담아 웃었다. 루안은 램파드의 웃음에 큰 힘을 얻었다.
“저도 폐하가 좋았어요. 사실 전부터……. 너무 편해서 이때껏 응석을 부렸어요…….”
램파드의 욕심으로 중얼거린 말을 저 아이는 똑똑히 들은 모양이었다. 커틀러가 준비한 깜짝 상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줬다. 달달한 기분에 흠뻑 젖게 한 그에게 충분히 보답하고 싶어졌다. 차를 준비한 그가 빨리 돌아오길 바랬다.
“이제 화해를 한 거겠지?”
“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매부님…….”
램파드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루안이 움찔했고,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누가 그리 부르라 이르더냐.”
“형이요.”
루안은 빠르게 사족을 덧붙였다.
“램파드 폐하께서는 아버지보다도 더 자주 놀아 주시니 진짜 가족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기쁘구나.”
“폐하를 친하게 부르고 싶다고 말했더니 매부님이라 알려 줬어요…….”
커틀러가 기뻐하도록 향유를 온몸에 바른 후, 알몸으로 안마해 줄까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친한 사이는 애칭을 만들어 부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매부라는 칭호는 아니지 않나.
“그냥 평소처럼 폐하라 부르거라.”
“…….”
“아니, 짐과 단둘이 있을 땐 형… 이라고 불러도 좋다…….”
“형이랑 있을 때는요?”
램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하여라.”
제 딴에는 친해지고 싶어 정한 호칭이었다. 거절당해 시무룩해진 루안은 형이라는 말에 순식간에 밝아졌다. 주눅이 들어도 간식 하나에 벌떡 일어나는 모양새가 정말로 강아지 같았다.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 램파드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커틀러는 저런 좋은 모습을 이때껏 혼자만 봐 왔다. 이제는 괘씸해져 침대에 손발을 묶어 놓고 알몸으로 올라타 손가락 하나 못 대개 하고 애태울까 싶었다.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네놈 생각을 했지.”
“그거 기대되네요.”
그는 램파드가 자신을 애태울 생각이란 걸 알아도 똑같이 답했을 것이다. 히죽거리는 램파드를 뒤로한 커틀러는 준비한 차를 따르고 함께 가져온 갓 구운 파이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보석같이 탐스럽게 빛나는 산딸기로 장식된 파이 위로 곱게 간 설탕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능숙해 램파드는 의아하게 커틀러를 바라봤다. 태연하게 제 할 일 다 한 커틀러는 자리에 앉아 자신이 따른 차를 홀짝였다.
기다렸단 듯 맞은편에 앉은 루안은 몸을 길게 빼내고, 한 조각 덜어 낸 파이를 접시 위에 올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램파드에게 공손히 권했다.
“딸기를 좋아한다고 하셔서 준비했어요.”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커틀러가 한마디했다.
“루안이 직접 딴 산딸기로 만들었습니다. 아직 이른 시기인데 잘 영글었더군요.”
“저도 옆에서 조금 도왔지만… 만든 건 형이에요.”
아까부터 이상함을 느낀 램파드가 차를 홀짝이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너… 파이를 구울 줄 아는 거냐?”
얼떨떨하게 접시를 받아 든 램파드가 물었다. 기사 수행을 함께했으니, 굽고 끓이는 것 정도야 할 순 있겠지만, 공작 가문의 장자가 파이를 구울 줄 알다니. 오랜 세월 그와 함께 지냈지만 금시초문이었다.
“혹시 몰라 익혀 뒀습니다.”
“이런 취미가 있었어?”
“아뇨. 언젠가 램파드 폐하께서 사고를 거하게 쳐서 쫓겨날까 봐 틈틈이 배운 겁니다.”
“무슨 소리냐.”
“도망치면 단둘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잖습니까. 둘 중 하나는 음식을 만들 줄 알아야 굶어 죽진 않겠지요.”
“나도 굽는 건 할 줄 알아.”
램파드가 말하는 굽는 요리를 본 적 있는 커틀러가 피식 웃었다.
“파이는 굽는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거기다가 기사 수행 중의 구운 꿩처럼 새까맣게 태우면 파이가 아니라 흉기가 되지요.”
“먹어도 죽진 않았어!”
“파이를 그렇게 새까맣게 태우면 둔기가 됩니다. 딱딱해지거든요.”
당연히 파이 같은 걸 만들 줄 모르는 램파드는 태우면 단단해지는 사실을 몰랐다. 요리 지식이 없다는 걸 적나라하게 들켜서 언짢아졌다.
“파이 하나 만들 줄 안다고 으스대지 말아라. 그것밖에 만들지 못하잖느냐.”
“디저트는 파이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고기를 잔뜩 넣어 끓인 굴라쉬나 학세는 잘 만듭니다.”
둘 다 램파드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였다. 단순히 맹물에 고기를 넣어 끓이거나 직화로 구울 줄만 아는 램파드는 저 요리가 어떤 공정으로 나오는지 몰랐다. 분명한 건 자신은 재료를 줘도 못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 몫의 파이를 한 조각 덜어 내고, 램파드를 향해 웃었다.
“그 두 가지를 만들 줄 알면 어지간한 고기 요리는 다 만들 줄 압니다.”
“네놈이 좋아하는 생선 요리는……?”
“폐하처럼 굽기만 할 줄 압니다.”
“…….”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고, 그가 놀리듯 말했다.
“물론 저는 태우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라도 모든 요리를 다 익히기엔 시간이 부족한 것이다. 상대가 좋아하는 요리만 골라서 배우다니, 참 커틀러답다 싶었다.
“사고 안 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믿어 보겠습니다.”
“그냥 믿어.”
램파드는 이제 파이에 집중하기로 했다. 포크를 이용해 작게 조각을 내어 입에 넣었다. 황궁에 있는 전문가들만큼 풍부하고 농후한 맛이 나는 건 아니지만, 훨씬 더 맛나게 느껴지는 건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맛있구나.”
중얼거림에 맞은편에 앉은 루안이 기뻐했다. 그동안은 루안의 가시에 찔려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이번 일로 한 걸음 부쩍 가까워졌고, 앞으로 더욱 친해질 것이다.
램파드는 루안에게 진실을 밝히기가 두려웠다. 이대로 사이가 발전된다면 두렵다며 피하는 것이 아닌 도전해야 할 일이 될 테지. 적절한 시기는 루안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였다.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기 전 핏줄임을 밝히고 황위를 이을지, 콘테 가문의 일원으로 살아갈지, 의견을 묻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루안의 형으로서, 친구로서 지내며 힘껏 사랑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