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9/25)

4

쾅, 쾅, 쾅. 해가 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거대한 보리수나무 옆에 지어진 저택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애쉬와 밀러가 깨어나 각자 자신의 방에서 나오며 하품을 찍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한 듯 소란스러운 소리의 근원지인 현관문으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애쉬와 밀러는 잔뜩 경계하며 문 앞을 바라봤다. 이 저택은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며, 멀쩡한 사람이라면 꼭두새벽부터 찾아올 리 만무했다. 이런 경우 찾아올 손님이란 불청객이란 뜻이다.

단단하게 닫힌 문밖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집주인은 따로 있건만 새벽의 방문자는 마치 제집인 양 명령조로 말했다. 불쾌할 법도 하지만 집주인인 애쉬에게는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 찬사처럼 기쁘게 들렸고, 다급히 문을 열었다. 열린 문밖에는 아직 잊지 못한 향을 품은 사람이 서 있었다.

꿈인가. 그가 자신의 저택 문 앞에 서 있는 장면이 현실감이 없어 아직도 방 안 침대에 누워 있고,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램… 램파드 폐하!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애쉬의 곁에 섰던 밀러가 방문자를 알아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램파드는 고개만 까딱하더니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연락도 없이 이곳은 어인 일이십니까.”

혹여 램파드가 수행인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까 뒤를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램파드는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정복을 입었고, 호위할 기사나 수행원을 잔뜩 거느려야 할 차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램파드는 수행원은커녕 흔한 여행 가방조차 없는 빈손이었다. 밀러를 흘끗 보던 램파드가 명령했다.

“정원에 짐의 말을 묶어 뒀다. 한참 달려왔으니 살펴봐 주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밀러와 달리 아직 어안이 벙벙한 애쉬는 그대로 굳어 버린 듯했다. 램파드는 그의 팔을 툭툭 치며 저택 안쪽을 가리켰다.

“피곤해. 재워 줘.”

“어… 어?”

“손님용 방이 하나 정도 있겠지. 안내해.”

하품을 길게 찍 하던 램파드는 애쉬의 안내 없이 제멋대로 저택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애쉬는 램파드보다 앞서 사용하지 않는 빈방을 하나 안내해 줬다.

이 저택은 황실의 지원으로 지어졌다. 램파드는 이보다 훨씬 더 크게 만들고 싶어 했지만 극구 반대하는 애쉬 덕분에 이 정도로 그쳤다. 램파드의 계획에 미치지 않아도 쓰지 않는 빈방이 넘쳐 났는데, 그중 손님용으로 꾸며져 침대가 놓인 방은 단 하나뿐이었다.

애쉬는 침대와 자그마한 테이블만 덜러덩 있는 황량한 방이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손님인 램파드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침대로 가 엎어졌다.

“이 방은 너무 삭막한데 차라리 내 방을 쓸래?”

“됐어. 집주인의 방을 함부로 쓸 수 없지.”

램파드는 장신구가 잔뜩 달린 무거운 옷을 벗지 않고 꾸물거렸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푹 잠들 것 같은데, 옷이 방해한다. 램파드는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피곤해. 벗겨 줘.”

애쉬는 별다른 말없이 램파드가 누운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상당히 피곤한지 애쉬가 옷을 풀어 헤치는 도중 깜빡깜빡 졸기까지 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맨살을 감싼 셔츠가 전부 벗겨졌다. 경쾌할 정도로 맑은 단추 푸는 소리에 램파드는 눈을 번쩍 떴고 애쉬를 바라봤다. 램파드의 미모를 찬양하는 수많은 추종자와 같은 시선. 아니 좀 더 욕망을 내보이며 이글거렸다.

“…너랑 섹스할 생각은 없어.”

램파드에게는 커틀러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시종과 동일하다. 눈앞의 사내가 한때 첫 번째 각인 상대라고 하여도 이제 그의 손길은 시종들과 같았다. 그렇기에 피곤한 램파드는 애쉬에게 옷 시중을 들게 했다. 램파드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혹시 내가 유혹하면 어찌할 거냐. 버틸 수 있겠느냐.”

램파드는 한번 그를 떠보았다. 혹여 그가 버티지 못하겠다 싶으면 애쉬를 차 버리고 근처 여관이라도 찾아갈 생각이었다.

“유부남을 덮치는 취향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믿을 만하군. 며칠 신세 지지.”

“그래. 설령 네가 히트 사이클이 왔다고 해도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큰소리치는 거 보니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나 보군?”

“루사한테 혼났거든.”

램파드가 의아하단 시선으로 바라봤고, 머쓱해진 애쉬가 몇 마디 더 붙였다.

“이곳에 돌아온 날 루사의 꿈을 꿨어. 감히 내 동생에게 노팅까지 했냐고 꾸중 들었어.”

“형이?”

“응. 루사가 화내면 정말 무섭거든. 혹여 또 그가 나타나 호통칠까 봐 이제 네 몸엔 손대지 않을 거야.”

램파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루트비안은 화는커녕 남에게 싫은 소리 하나 않던 참한 소년이었다. 화를 냈다니.

“상상되지 않는걸.”

옷이 벗겨지고 알몸이 된 램파드는 침대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당장에라도 자려는 폼인 그를 바라보던 애쉬가 풋, 웃으며 램파드의 의문을 풀기 위해 설명했다.

“루사는 한번 화나면 양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내 등을 마구잡이로 때리기도 해. 심할 때는 다음날 멍도 들어. 그런 거 보면 너랑 닮은 것 같지 않아?”

“그럴 리가. 내가 진심 거슬려 내리쳤다면 그 정도로 그치지 않지.”

램파드가 씩 웃었고, 애쉬는 무언가 한기를 느꼈다. 하긴, 램파드의 주먹은 귀엽지 않고 철퇴 같을 터. 멍 정도가 아니라 뼈가 똑 부러질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자신의 농담 아닌 소리에 겁먹은 애쉬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

“형 얘길 더 해 줘.”

“피곤하지 않아?”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군. 형에 대해 아는 건 너뿐이니까.”

램파드의 침대에 걸터앉은 애쉬는 소중한 추억을 꺼내 램파드에게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시작은 창관의 관리인의 눈을 피해 작은 창고에서 몰래 만난 일부터였다. 그 후 창관을 찾아갈 때마다 달달한 쿠키를 숨겨 들고 가 루사에게 건네준 일. 그와 함께 도피 생활을 하며 서로를 의지했을 때. 남부 지방에 겨우 도착해 작은 집을 구했던 추억을 말해 줄 땐 어느덧 아침 해가 뜨기 시작했다.

잠이 오는데도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램파드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버텼다. 애쉬는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머지는 나중에 말해 줄게.”

램파드는 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애쉬의 소중한 추억을 나눠 받은 채로 푹 잠들었다. 다음 날 램파드는 온종일 잠에 빠졌고,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아침 일찍 일어났다.

3일 전, 황궁.

램파드의 개입으로 왕국의 늙은 왕이 죽고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의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승리가 예정된 싸움이었고, 왕위를 차지한 그녀는 아쥴린 여왕으로 등극해 제국과 우호를 돈독히 다지기로 공표했다.

그 덕분에 램파드가 오랫동안 준비한 제국과 왕국간의 무역은 박차를 가해 개시일이 다가왔다.

무역 개시일을 앞둔 제국은 왕국의 사절단을 맞이할 준비에 한창이었다. 황궁 전체가 화려하게 꾸며졌고, 새로 왕위에 오른 아쥴린 여왕과 왕국의 사절단이 속속들이 제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제 앞으로 우호국으로서 서로 협력하며 발전을 하겠다는 서약까지 끝마쳤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소수의 중요 인사를 위한 축하연이 시작되었다.

축하연에 참여하기 전, 램파드는 시종을 이끌고 황후의 대기실에 찾아왔다. 커틀러의 채비를 돕던 시종은 모두 손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황제를 맞이했다.

“짐은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마무리 짓거라.”

“알겠습니다.”

램파드는 방구석에 서서 배우자의 준비를 지켜봤다. 커틀러는 늘 화이트 테일의 기사단장복만을 입기에 빠르게 준비를 끝마치고 램파드를 기다리는 쪽이었다. 이번에는 황후의 신분으로 참석하기에 램파드보다 준비 시간이 길었다. 상황이 역전되어 그의 모습을 감상하게 되었는데, 하나씩 장신구가 올라갈 때마다 램파드의 입매가 점점 굳어졌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시종들이 방 밖으로 나가자 램파드와 커틀러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앞으로 그렇게 빼입지 말아라.”

“무슨 말씀인지요.”

“너무 눈에 띄어.”

직업과 지위를 표현하고 활동성에 치중한 기사단 제복과 달리 겉면의 화려함에 치중한 황후의 복장은 세공을 끝마친 보석 같았다. 커틀러 자체가 워낙에 진귀한 보석이었고, 그것을 곱게 다듬고 매만졌더니 비할 것이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난다.

툴툴대는 듯, 평소보다 낮은 램파드의 음성에 커틀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제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조금은 알 것 같군.”

커틀러는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 램파드에게만 보여 주는 눈웃음을 지었다. 눈꼬리가 짙게 휘는 저 표정은 램파드조차 드물게 감상하는 값진 미소였다.

“그런 치장에만 중시한 옷을 늘 입어도 잘 몰랐거든. 직접 보니까 효과가 굉장하군.”

“전 당신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몇 년이나 참아 왔습니다. 솔직히 저만 바라보고 싶은 것을 다른 이와 함께 공유하는 기분이 얼마나 언짢았는지……. 이제 아셨으니 어찌하실 겁니까.”

“생각 중이야. 넌 어쩌고 싶었나?”

“당신을 바라보는 자들의 눈동자를 뽑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지요.”

“그렇게까지 살벌한 생각은 들지 않아.”

타인의 눈동자를 뽑기 전, 아예 처음부터 커틀러의 저런 모습을 혼자만 독차지하고 싶었다. 다른 이가 커틀러를 마주한다면 램파드의 감상과 똑같이 넋을 놓고 바라볼 게 분명하니까.

또한, 감히 황제의 것을 탐내며 귀중한 보석을 손에 넣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기도 할 것이었다. 타인의 그런 감상을 알게 된다면 커틀러와 똑같이 그를 담은 눈동자를 없애 버리고 싶을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자신의 마음을 파악하고, 뒤늦게 정정했다.

“아니, 너와 같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앞으로 폐하께서도 조심해 주십시오.”

“조심하라니. 꾸미는 게 싫다고 다 벗고 연회장에 갈 순 없잖아?”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폐하께서는 벗은 몸이 더 아름다운데, 그런 모습을 타인과 공유할 생각까진 없습니다.”

“이미 내 알몸을 본 사람은 꽤 되는걸.”

램파드의 말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았다. 꿍꿍이 가득한 표정을 보아하니 램파드의 몸을 탐했던 자들은 그와 애쉬를 제외하고 이미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커틀러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커틀러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바라보았다. 권위를 돋보이기 위한 황제의 정복과 달리 미적 감각에만 치중한 황후의 복장을 갖춘 그는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솔직히 이대로 침실로 단둘이 들어가 온종일 끌어안고 감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밖에 왕국의 중요 인사들이 모여 있으니 욕망을 눌러야 했다. 온전히 억누르기는 힘들어 적어도 지금은 그의 볼을 살짝 만지는 것으로 만족했다.

“오늘 일정이 다 끝나면 갈아입지 말고, 그 옷 그대로 침실로 찾아와라.”

“감상만 하십시오.”

“…뭐?”

커틀러는 뻣뻣하게 굳어 버린 램파드의 볼을 가볍게 톡톡 쳤다. 화가 났는지 그의 양 볼이 살짝 붉어졌다.

“괜히 손댈 생각하지 말고 눈으로만 보시란 말입니다.”

잔뜩 불만인 램파드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지난번 관계 때 코피를 잔뜩 쏟은 이후로 커틀러는 램파드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고, 내 체력을 우습게 보지 말라며 그를 덮쳤지만 전부 제압당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 버렸다.

무엇을 위해 혼인까지 했는데, 같은 방에서 함께 잠을 자는데도 독수공방을 해야 하다니. 램파드의 욕구는 켜켜이 쌓여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루는 곁에서 자는 커틀러의 성기를 세워 몰래 박을 생각까지 했다.

계획만 세운 것이 아닌 진짜 시도했지만 빠르게 일어난 그는 키스만 맹렬히 퍼붓고 다시 잠들어 불발되었다.

“정말 안 할 거야?”

“예.”

“밀린 일은 전부 끝냈는데도?”

“무역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한동안 더욱 바빠질 건데 오늘 밤은 부족한 피로를 풀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언제 한다는 말인가.”

램파드의 질문에 커틀러는 한 손을 허리에 짚었고, 어깨 망토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외팔이 된 이후로 자주 취하는 버릇이었다.

“첫 배가 출항한 뒤로는 쉴 시간이 생기겠죠. 거사는 그때 치릅시다.”

“일주일이나 더 참으라고? 싫어!”

“참으십시오.”

커틀러는 한 손을 공중에 휘휘 젓더니, 그대로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불만 가득한 램파드는 그를 따라갔다.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문을 활짝 열었고, 호명관이 큰 소리로 제국의 황제와 황후를 소개했다. 연회장을 찾아온 귀족과 왕국의 인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히며 두 사람을 반겼다.

“드디어 왕국과의 무역이 개시되었군. 그대들의 공로를 높이 기리는 바, 오늘은 짐의 권한 아래에 마음껏 즐기도록 해라.”

황좌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포도주로 가득 채운 잔을 높게 들어 올리며 찬사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를 싫어하므로 요점만 몇 마디 더 전하고 연회를 시작하려고 했건만, 램파드는 손에 든 잔이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얇은 잔이 이렇게 무거울 리 없을 텐데. 바위를 들지 못하는 여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으며, 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램파드의 손에서 벗어난 잔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램파드의 몸도 깨진 잔처럼 바닥으로 힘없이 무너졌다.

“램파드 폐하!”

곁에 앉은 커틀러가 빠르게 움직였지만 이미 램파드의 몸은 바닥에 흩어졌다.

“램파드 폐하!”

“황제 폐하!”

주변에 앉은 제국의 대신과 왕국의 사신들이 모두 일어났고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램파드를 품에 안은 커틀러가 그를 흔들어 봤지만, 꼭 감은 램파드의 두 눈은 어찌나 무거운지 떠지지 않았다. 램파드를 지탱하는 커틀러는 점점 더워졌다. 끌어안고 있는 램파드의 몸이 불덩어리처럼 뜨거워 커틀러마저 데웠기 때문이다.

연회장에 들어서기 전 잠깐 닿은 램파드의 피부는 이렇게 뜨겁지 않았다. 단시간에 열이 빠르게 오르진 않을 터인데. 설마 잔에 독이라도 묻혀 있던 것인가. 커틀러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주변의 로열 가드에게 침착하게 지시했다.

“주변을 모두 봉쇄하고, 당장 황의를 불러와라. 폐하는 내가 모시도록 하지.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차분히 지시하는 것과 달리 커틀러의 속은 모든 장기가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기분이었다.

커틀러는 아주 오래전 맹세했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램파드보다 먼저 눈을 감지 않을 거라고. 램파드가 생을 이어 간다면 어떤 형태로든 질기게 살아갈 것이며 단 일분일초라도 그보다 오래 살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만 막상 코앞까지 와닿자 평정을 유지하기 점점 힘들어진다.

램파드가 없는 세상은 살아갈 의미조차 없으니까. 품에 안은 그가 숨을 쉬지 않는다면 이대로 자신 또한…….

“황의를 모셔 왔습니다!”

빠르게 다가온 황의의 모습에 커틀러의 시선이 다시 또렷해졌다. 그는 램파드의 임신과 출산을 돕던 콘테 가문의 전용 의사였다. 제대로 된 진료를 하기 위해서는 램파드의 비밀을 아는 의사가 필요해 커틀러가 손수 황의로 임명한 자였다.

황의는 커틀러의 품에 안긴 램파드를 살펴보았다. 이마와 팔이 불에 데운 듯 뜨겁게 열이 올랐다.

“다행히 위급하신 건 아닙니다. 좀 더 자세히 진료하기 위해 침실로 이동해야겠습니다.”

커틀러가 시종과 로열 가드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여기 남아 연회장을 봉쇄하거라. 그 누구든 연회장을 함부로 나갈 수 없도록 감시하고 기다리도록 하여라.”

커틀러는 연회장 안을 훑어봤다. 가장 가까이에 앉은 아쥴린 여왕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호위 기사들과 시종들 또한 별다른 악의는 보이지 않지만,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황후 마마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커틀러의 지시에 우왕좌왕하던 시종들이 마음을 다잡고 주변을 정돈했다. 램파드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한시라도 빨리 침실로 옮겨야 했다.

“램파드 폐하를 침실로 옮기도록 해라. 서둘러.”

로열 가드 중 하나가 램파드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램파드와 커틀러가 함께 사용하는 침실로 향했다.

이동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진료가 시작되었다. 간단한 조사를 끝마친 황의의 표정이 풀어졌다.

“램파드 폐하께서는 독이나 병으로 쓰러지신 게 아닙니다. 좀 더 살펴봐야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 없으십니다.”

일단 고비는 넘겼다는 뜻이었다. 커틀러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침실 안에 대기 중인 시종에게 하나하나 일을 지시했다.

“너는 연회장에 돌아가 남아 있는 로열 가드를 돕도록 해라. 혹시 폐하를 해하려 하는 자가 왕국 사절단에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감시하되, 무례는 저지르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쓰러졌단 소문이 바깥으로 퍼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거라.”

“네. 본궁에 있는 시종을 단단히 감시하겠습니다.”

“지시는 여기까지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맡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라.”

커틀러의 명령에 허리를 깊숙이 숙인 시종들이 차례대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갔다. 방 안은 이제 램파드와 황의, 그리고 커틀러만이 남았다.

낮게 한숨을 쉰 커틀러는 황의 곁에 앉아 램파드를 살펴봤다. 램파드의 상의는 진료를 위해 벗겨져 있었고, 뜨거운 피부는 익어 버린 것처럼 붉었다. 살짝 벌려진 입에선 거친 숨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황의는 괜찮다고 하지만 램파드의 상태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꿈틀거리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숨을 쉬는 램파드의 입술에 집중했다.

분주히 움직이던 황의의 손이 멈췄고, 반대로 입이 열렸다.

“폐하께서는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지신 겁니다.”

황의는 고개를 숙이며 커틀러의 눈치를 봤다.

램파드가 쓰러진 다른 원인이 추가로 더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 세월 콘테 가문에서 일한 그는 커틀러가 둘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 구태여 눈치를 보는 이유는 램파드가 쓰러진 원인이 커틀러라는 뜻이었다.

“말해 봐라.”

“램파드 폐하는 아이를 낳기 힘든 몸이십니다. 출산만으로 몸에 큰 타격이 오셨는데, 산후 제대로 쉬지 않고 황제의 업무에 기사까지 손수 가르치시니 과로로 쓰러지신 겁니다.”

무덤덤하게 황의를 바라보던 커틀러의 눈빛이 날이 선 검처럼 날카로워졌다. 황의는 어깨를 흠칫 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작 램파드가 임신 중일 때 입을 다물었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여쁘다. 아무리 좋다고 하나 램파드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출산이 램파드의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친자식이라도 주저 없이 지워 버렸을 터.

황의는 몇 대째 콘테 가문을 위해 일하는 자였다. 가문의 후계자를 품고 있어 함부로 말하지 못한 것이겠지. 커틀러에게 공작 가문 따윈 램파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건만. 그냥 넘어가기엔 커틀러의 살기가 점점 커져만 갔다. 황의는 연신 침을 삼켰고,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낳기 힘든 만큼 어느 정도 자란 아이를 지우는 것 또한 몸에 큰 부담이 갑니다. 이미 폐하께서는 여러 달이 지난 터라……. 그 당시 아이를 지웠으면 건강을 크게 해치셨을 겁니다.”

“…눈은 언제 뜨시겠나.”

다행히 커틀러는 조용히 넘어갔다. 황의는 커틀러가 이번 일을 넘어가 준 것이 감사하지만,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괜한 쓸모없는 소릴 덧붙였다간 누그러든 커틀러의 살기가 다시 솟구칠지도 몰랐으니까.

“적절한 약을 처방했으니 몇 시간 안에 일어나실 겁니다.”

“수고했다. 한스를 불러 함께 폐하를 살피도록 해라.”

커틀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이대로 램파드가 눈을 뜰 때까지 곁을 지키고 싶지만 진정 램파드가 원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몸을 혹사한 것은 이번 무역을 위해서였다. 이제 램파드의 꿈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여기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 수 없기에 램파드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내기 위해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모습이 되어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커틀러를 바라보던 황의가 조용히 말했다.

“주인님.”

이미 커틀러의 심기를 한 번 거슬렀으니까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맞다. 그러나 목숨이 아깝다며 바른말을 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오랜 세월 콘테 공작 가문을 모시는 자로서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용기를 냈다.

“말해 보아라.”

“눈뜨신 폐하께서 전과 같이 정무를 진행한다면 입에 담기도 불경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반년만 쉬시면 전처럼 회복될 것이니 살펴봐 주십시오.”

“알겠다. 내가 손쓰지.”

커틀러는 자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램파드 대신 연회를 무사히 끝마치기 위해 연회장으로 향했다. 적어도 램파드가 눈을 뜨기 전에 돌아와 곁을 지키려면 서둘러야 했으니까.

커틀러가 도착하자마자 아쥴린 여왕과 왕국의 대신들은 진심으로 램파드를 걱정했다. 큰 병은 아니고, 최근 무역 건으로 피로가 축적되어 쓰러진 것이라고 설명하니 다들 왕국에서만 나는 귀한 약초를 진상하겠다며 난리였다.

못다 한 연회가 진행되었고,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은 자정이 지난 후였다. 커틀러는 서둘러 침실로 돌아왔다. 램파드와 함께 사용하는 침실의 문을 열었는데 기류가 무거웠다.

“무슨 일이냐.”

황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램파드 폐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이제 막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커틀러의 표정이 차가운 얼음처럼 단단해졌다. 램파드의 몸이 저리된 것은 세찬 소나기처럼 쏟아진 정무, 그리고 임신의 영향이었다. 아이를 하나 낳은 것으로 저 정도로 건강을 해쳤는데 둘째라니.

“폐하께서는 알고 계시나.”

“아닙니다.”

“콘테 저택에는 알리지 말고, 이만 물러가라.”

“예. …그럼 소인들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한스와 황의가 밖으로 나갔고, 커틀러는 잠이 든 램파드의 곁을 조용히 지켰다.

둘째를 가지고 싶단 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램파드 또한 마찬가지다. 이미 오래전 각인을 했다지만 이 둘 사이에는 다른 오메가와 알파처럼 서로를 향한 신뢰가 없었다. 비로소 램파드가 커틀러를 믿게 되었고, 커틀러 또한 그가 영원토록 곁에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이제 이 두 사람도 여타 다른 오메가와 알파같이 서로의 각인이 풀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서로의 각인이 영원할 거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려움 따윈 없어진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진 믿음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각인한 상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두 사람의 두 번째 각인과 마찬가지였다. 하나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은데, 그러한 증표가 하나 더라니. 아이를 볼 때마다 두 사람의 신뢰와 믿음이 굳건하단 것이 또 한 번 증명된다.

그렇기에 하나의 증표가 추가로 늘어났으면 했다. 수를 불려 갈 때마다 행복은 더욱 커져만 갈 테니까.

그렇게나 바랐던 일이 사실은 램파드의 목을 죄는 일이었다니. 사실을 알게 되면 램파드는 쉽게 아이를 지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낳는 시도를 해 보겠다며 우길 게 분명하다.

차라리 그에게 비밀로 하고 몰래 낙태약을 마시게라도 해야 할까. 예전이라면 이러한 고민 따위 없이 곧장 실행했을 터인데, 램파드의 믿음을 배반하고 싶지 않으니 끝끝내 손은 못 쓸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커틀러의 소중한 사람이 눈을 떴다. 램파드는 눈꺼풀을 여러 번 깜박이며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단 걸 확인하고 커틀러를 향해 변함없는 미소를 보여 줬다.

“이제… 정말… 내가 눈뜰 때까지 곁에 남아 주는구나.”

“약속했으니까요.”

서로 화해하고 끌어안은 날부터 커틀러는 램파드의 곁을 늘 지켰다. 아침이든 밤이든. 눈을 감았다가 뜬 램파드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계속 그의 곁에 남아 줬다. 사소한 약속을 계속 이행해 주는 커틀러가 고마워 램파드는 한결 더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줬다.

“왜 그렇게 심각해.”

커틀러의 표정은 남이 보면 전과 다름없이 딱딱해 보인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램파드의 눈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커틀러의 표정을 분명 한 번 더 봤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지난달 노팅을 할 때. 좀 더 오래전 기억은 애쉬가 쓰러지고 나서 힘들어하는 램파드를 봤을 때도 똑같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는 늘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었는데, 그 당시에는 증오에 눈이 멀어 알아보지 못했다. 커틀러가 답이 없자 램파드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놀란 눈 하지 마. 난 괜찮아.”

“…하아.”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라. 내 병명은 뭐라고 하더냐.”

멀쩡한 사람이 갑작스레 쓰러지진 않을 터. 램파드는 곧 죽을병이라고 하여도 놀라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물었다. 커틀러는 그런 램파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병인지 모르면서 괜찮다고 하는 겁니까.”

“네가 걱정하고 있잖아.”

그는 또 한 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든 이겨내 보일 테니 사실대로 말해 줘.”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지신 겁니다. 한동안 정무 따윈 모두 집어던지고, 푹 쉬십시오. 오늘부터 며칠간 연회와 정무는 모두 제가 이끌어 가겠습니다.”

“맞아, 연회……. 어떻게 되었나.”

“무사히 끝났습니다. 왕국의 사절단은 모두 잠자리가 마련된 별궁으로 이동했습니다.”

“아쥴린 여왕은 어떻게 반응하더냐.”

“그녀는 언제 폐하의 편으로 만들어 두셨습니까. 제국의 황제가 쓰러졌으면 침략할 생각을 해야 할 건데, 폐하를 진심으로 걱정하더군요. 연회에 참석한 왕국 쪽 사람은 몇 되지 않으니, 알아서 입단속을 시키겠다고 전했습니다.”

“따로 꼬시진 않았어. 내 외모에 알아서 넘어온 거지.”

램파드가 장난스레 웃었지만, 커틀러의 입매는 여전히 딱딱했다. 단순히 피로로 쓰러졌다고 하는데 커틀러의 표정은 아직 좋지 않았다. 뭔가 숨기는 것이 더 있었다.

“놀라지 않을 테니 사실대로 말해 줘.”

“…….”

“커틀러…….”

그가 눈꺼풀을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램파드를 미인계로 꼬시기 위한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진지해진 그의 표정 덕분에 램파드도 미소를 지우고, 그를 응시했다.

“폐하의 몸이 약해진 건 출산 때문입니다.”

램파드는 애쉬와 함께 방문한 수도의 의사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이를 낳을 때 꽤 고생할 거란 이야기를 이때껏 잊고 있었다.

“아……. 비슷한 이야기 들었던 것 같아.”

못마땅한 커틀러의 눈썹이 꿈틀댔다. 램파드 또한 알고 있었다니. 알면서 숨기고 출산한 것이 퍽 못나 보인다.

“알고 계신 겁니까.”

“응.”

“그런데도 아이를 낳은 겁니까.”

“네 아이잖아. 당연히 낳아야지.”

축 처진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루안을 임신했을 땐 램파드와 커틀러 둘 다 뒤늦게 알았다. 이미 여러 달이 지난 후에 알아 버린지라 출산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내 각오한 듯 자색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둘째는 안 됩니다. 당장 지우십시오.”

“둘째라고?”

“지금 폐하께서는 회임하셨습니다. 이제 막 한 달이 되었다고 하니 약으로 쉽게 지울 수 있습니다.”

램파드는 더듬더듬 자신의 배를 문질렀다. 둘째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긴 하지만 이렇게 덜컥 임신해 버리다니. 당혹감보다 기쁨이 먼저 다가왔다. 커틀러와의 아이는 하나만으로도 큰 축복이었는데, 이제 두 배가 되는 거였다.

아쥴린 여왕이 왕권을 잡아 준 덕분에 생각보다 무역이 빠르게 성사되었고, 창관과 관련된 조직도 정리가 전부 다 되어 휴식을 취해도 된다. 이대로 요양하며 아이를 낳아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 한동안 쉴 수 있겠지.”

“그래서요.”

“남부 지방 별장으로 요양을 떠나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조금 전 설명한 걸 잊으셨습니까. 아이는 폐하께 독입니다. 지우십시오.”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아니다.”

“폐하.”

커틀러의 목소리도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래서 램파드에게 모든 것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해결하고팠건만. 램파드를 다그쳤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첫째도 무사히 낳았잖느냐. 충분히 쉬면 둘째도 괜찮아.”

“안 됩니다. 그러다가 폐하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괜찮아. 설령 내가 잘못된다고 하여도 네가 남아 있으니까 루안과 제국은 걱정 없어.”

담담히 표정을 유지하던 커틀러가 깨어졌다. 역린이 제대로 건드려졌고, 그의 표정은 사나운 짐승처럼 맹렬해졌다.

“램파드 폐하. 혹여 폐하께서 먼저 눈을 감으신다면 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협박은 통하지 않아. 어차피 너 말고 다른 이들이 알아서 장례를 치러 줄 테지.”

“폐하의 장례식이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전 당신이 눈을 감은 후 곧바로 따라갈 거니까요.”

“무슨 소리냐.”

“저에겐 당신이 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제 역할은 당신보다 좀 더 오래 사는 것뿐. 폐하가 없는 세상 따윈 제게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 주저 없이 목을 그을 겁니다.”

램파드는 순간 섬뜩해졌다. 저 표정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눈을 감은 후 남은 생명이 어떻든 주저 없이 목을 찔러 버릴 표정이었다.

“날 따라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어째서입니까. 당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치가 없건만, 그런 폐하께서 사라진 세상에서 무엇을 하란 말입니까.”

만약 반대라면. 커틀러가 먼저 눈을 감고, 램파드 혼자만이 남는다면……. 램파드는 커틀러를 기리며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을 이루려 노력할 것이다. 또한,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제국민들과 대신들을 위해 눈을 감는 순간까지 제국을 걱정할 테지.

그러고 보니 커틀러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뭐였지. 그는 창관을 없애고 싶어 하는 램파드를 따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와 주었건만 막상 그가 이루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램파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커틀러는 소망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소망을 품고 있을 터인데, 그는 아무런 꿈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오롯이 램파드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함께 움직일 뿐이었다.

저런 앞뒤 꽉 막힌 답답한 놈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램파드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인생의 목표가 없으니 그의 말대로 목숨을 끊는 것이 주저 없을 터. 램파드는 어떻게든 커틀러에게 꿈을 만들어 주고 싶어졌다. 혹여 램파드가 먼저 눈을 감는다고 하여도 혼자 남은 그가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램파드는 그 덕분에 새로운 소망이 생겨 버렸다.

“알았어. 너 때문이라도 오래 살 거니까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마.”

“이해하셨다니 다행이군요. 낙태약은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아니, 둘째를 낳고 오래 살 거란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실력을 행사할 겁니다.”

그는 경고를 담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진짜 이대로 손을 뻗어 입에 낙태약이라도 들이붓겠다는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아직 해 보지도 않은 일이지 않냐. 전처럼 건강하게 회복하면 무사히 낳을 수도 있다고!”

“…만약 폐하의 몸이 회복되지 않으면요? 여러 개월이 지나면 뒤늦게 어찌하지 못하고, 몸속에 독을 품고 계셔야 합니다.”

계속 도돌이표였다. 지금으로선 커틀러를 설득할 방도가 없었다. 슬슬 인내심이 떨어지기 시작한 램파드가 먼저 손을 올렸다.

퍽! 과로로 쓰러진 몸이었건만 황의의 적절한 처치로 몸을 움직이는 데 무리 없었다. 램파드는 있는 힘껏 그를 후려쳤고 커틀러가 휘청거리는 틈에 침대에서 빠르게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입구에는 로열 가드 두 명이 호위를 서는 중이었다. 황제의 침실은 방음이 잘되어 있어 안의 대화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큰소리로 옥신각신하는 잡음이 들렸기에 황제 부부가 싸운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램파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재빠르게 몸을 굽혔다. 램파드가 로열 가드를 향해 손짓했다.

“커틀러가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쇄해라.”

램파드의 명에 로열 가드는 빠르게 움직여 침실의 문을 단단히 막았다. 쾅! 방 안쪽에서 큰 소리가 한 번 들렸다. 화가 난 커틀러가 문을 한 번 내리친 모양이었다. 이제 곧 가구 같은 걸 집어던져 문을 박살을 내겠지.

그 전에 램파드는 다른 곳으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스를 대동한 최고 대신이 램파드를 알아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쓰러지셨단 소식을 방금 막 전해 들었습니다. 벌써 밖으로 나오시다니. 좀 더 쉬는 게 어떠십니까.”

“열흘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

“예?”

“일단 도착해서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빠른 걸음으로 마구간으로 향하는 램파드의 뒤를 졸졸 쫓아오던 최고 대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램파드는 자신의 회색 말 위에 주저 없이 올라타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잠… 잠깐, 램파드 폐하. 어딜 가시는 겁니까!”

말 위에 올라탄 램파드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황실 소유의 별장이야 널렸지만, 이번만큼은 누군가에게 사정을 털어 내고 위로받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속사정을 털어놓아도 될 상대는 커틀러를 제외하면 한 사람뿐이 남지 않는다.

“친정.”

한마디 내뱉고 마구간 밖으로 튀어 나갔다. 최고 대신은 멀어지는 황제를 향해 몇 가지 더 질문을 내뱉었지만 이제 램파드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난 램파드를 깨운 애쉬가 그를 식탁으로 이끌었다. 램파드가 방문했기에 밀러는 제대로 장을 봐 와 실력을 발휘했다. 평소 간단한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었는데, 이날은 램파드의 식성에 맞춘 고기 요리가 잔뜩 준비됐다. 램파드는 제 앞에 마련된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여긴 무슨 일로 찾아왔어?”

식사를 다 하고 준비한 차를 홀짝이던 램파드가 눈동자를 굴렸다. 답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굳이 비밀로 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신세를 져야 하니 말하는 편이 좋았다.

“…커틀러랑 싸워서 홧김에 왔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던 애쉬의 입이 일자로 굳었다. 그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잊으려 애쓰는지 시선까지 회피했다.

“왜, 걱정되느냐.”

“그 사람이라면 널 찾는답시고 여기까지 쫓아와 난장판을 만들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 한동안은 못 올 테니까.”

“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있는 검문소의 규칙을 모조리 바꿔 뒀거든. 쉽게 통과하진 못할 거다.”

커틀러가 쉽게 못 올 거란 확신을 하는 램파드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원래 검문소는 신분 증명서와 다음 도시로 넘어가는 이유를 밝히면 쉽게 통과한다. 하지만 램파드는 남부 지방까지 오는 검문소마다 새로운 규칙을 하나 추가했다. 겸사겸사 검문소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남부 지방까지 달려왔다.

“…뭘 어떻게 한 거야.”

“화이트 테일을 뭘 보고 작명한 건 줄 알아?”

“글쎄?”

“아카데미에서 사육하던 토끼 꼬리를 보고 지은 이름이거든. 그에 맞춰 화이트 테일 소속의 기사들은 전부 토끼 흉내를 내야 통과할 수 있다.”

다른 기사들이면 몰라도 커틀러라면 짐승 흉내 내면서까지 검문소를 통과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공작 작위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뼛속까지 귀족이라 체면은 차린다. 그런 부끄러운 행동을 검문소의 기사들 앞에서 할 수 있을 리 없다.

살짝 걱정되는 건 그런 짓을 할 바에 무력으로 검문소를 돌파한다는 것. 혹시 커틀러가 폭주할까 봐, 미리 어디서, 어떻게, 몇 주 쉬다가 돌아갈 거니 얌전히 있으라 서신을 보내 뒀다. 금방 돌아간다고 했으니 그 정도까지 하진 않겠지.

“어쩌다 싸운 거야.”

“그놈이 먼저 대들었으니까.”

애쉬는 쉽게 믿지 않았다. 커틀러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램파드라면 잘 알고 있다. 분명 먼저 고집부리고 욕설이나 손을 날린 건 램파드 쪽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유치한 복수를 해?”

“이 정도면 많이 봐준 거지.”

미안한 건 아는지 램파드가 애쉬의 시선을 피해 빈 접시를 바라봤다. 그런 램파드를 보며 애쉬가 낮게 웃었다.

솔직히 둘이 혼인을 올렸을 땐 걱정되기도 했지마는 애쉬의 우환과 달리 둘은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티격태격하는 것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니까.

“그래서 싸우고 갈 곳이 없어서 막무가내로 여길 온 거야?”

“그래.”

“뭐 때문에 싸웠는지 이 형에게 말해 봐.”

인제 와서 형 노릇을 하는 애쉬가 못마땅했지만, 램파드 또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왜 싸웠는지, 다른 사람에게는 밝히지 못할 이유였으니까. 애쉬에게는 사실대로 솔직하게 터놓고 말할 수 있기에 이곳을 찾아온 거다.

“둘째를 임신했어.”

“…….”

“네놈까지 놀라지 마라. 나도 며칠 전에 알아서 퍽 놀랐으니까.”

“어… 축하해…….”

“축하는 이르지. 무사히 낳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가 둘째는 싫대?”

램파드는 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무런 연유 없이 아이를 지우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잠깐 지낸 콘테 별장에 손수 아기방을 만들 정도였다니까 무언가 까닭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도 될까?”

“내가 아이를 낳다가 위험해질 수 있다더군.”

애쉬는 둘째를 임신했다는 말보다 한층 더 놀랐다. 하긴, 여러 문제가 겹쳤긴 하지만 아이를 품었던 램파드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힘겨워하는 램파드의 모습을 한 번 더 보는 것은 퍽 괴로울 것이다. 커틀러가 둘째를 지우라고 말한 까닭이 이해가 됐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일단 오는 길에 약은……. 구해 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애쉬는 램파드의 매끈한 이마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제 자신의 페로몬으론 그가 진정하지 못할 테니, 손바닥의 온기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기에, 천천히 여러 번 쓸어내렸다. 이런 행동보다 램파드의 마음의 무게를 덜기 위해선 제대로 된 조언을 해 주는 것이 좋으련만.

그렇지만 애쉬는 자신이 이 문제에 끼어들어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부부끼리 대화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램파드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어느 정도 자신에게 기대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애쉬는 램파드의 바람을 이뤄 주기 위해, 편한 휴식처가 되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황궁에 돌아갈 때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해. 우선은 푹 쉬고.”

“그래.”

“뭐 필요한 거 있어? 먹고 싶은 거라던가.”

“네가 만든 와인이 먹고 싶다.”

“알코올이 없는 거로 준비해 한 병 꺼내 올게. 먼저 침실로 가 있어.”

그의 지시대로 램파드는 얌전히 침실로 돌아갔다. 화가 나서 커틀러를 한 대 두들겨 패고, 황궁을 박차고 나왔을 때 어딜 가야 할지 몰랐다. 램파드가 소유 중인 별장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어느 곳도 가고 싶지 않았다.

램파드에게 가족이라곤 커틀러와 루안뿐이니까. 차라리 몇 명 없긴 하다지만 램파드의 비밀을 알고 있는 콘테 공작 저택으로 갈까. 그곳보단 확실히 램파드의 편인 사람이 있는 장소로 절로 향했다. 귀찮다며 내쳐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다행히 애쉬는 전처럼 거리낌 없이 받아 줬다.

마치 가족같이. 그 덕분에 마음을 진정시키고 푹 쉴 수 있었다.

***

애쉬의 저택에 마련된 응접실. 남부 지방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라이와 애쉬가 한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양손을 깍지 끼고 턱을 괴던 라이가 입을 열었다.

“분명 그 사람 조만간 쳐들어올 거예요.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

“내 생각도 그래.”

“형 생각도 같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한시라도 빨리 숙부님을 내쫓아 버려요.”

“내쫓다니……. 어디로?”

“여기서 1시간만 더 달려가면 새로 부임한 남작이 한 명 있잖아요. 그 사람 저택으로 보내 버려요.”

“모르는 사람에게 램파드를 보낼 순 없어.”

“귀족은 모두 황제의 가신이잖아요. 요양이든 잠행이든 뭐든 핑계를 갖다 붙여 버려요. 못하겠으면 그냥 내다 버려요. 인간 흉기인 숙부님이라면 어디다 던져 놔도 알아서 잘 살 테니까.”

괜히 램파드를 애쉬 곁에 뒀다가 어떤 오해를 살지 모른다. 눈이 돌아간 커틀러를 한 번 마주한 적 있는 라이는 1초라도 빨리 근심거리를 없애고 싶었다. 시한폭탄인 램파드를 멀리멀리 보내 버리고 우리는 관여 없다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황제를 어떻게 내쫓아. 스스로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지.”

라이가 인상을 팍 썼다. 사신이 다가오는데 애쉬는 걱정도 되지 않는지,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고나 있다. 말해 봤자 집주인인 애쉬는 꿈적도 하지 않으니 램파드를 설득하는 쪽이 가망이 있다.

램파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대로 남부 지방에 새로 만들어진, 라이가 다니는 남부 아카데미에 갔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고 기사 수행을 받는 자들을 가르치겠다며 아카데미에 갔으니, 라이가 그곳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라이가 생글생글 웃었고, 차를 끓여 온 밀러가 각자 앞에 한 잔씩 놓았다. 밀러도 함께 동석하나 했건만 그는 구워 놓은 다과를 챙겨 오겠다며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라이는 밀러가 따라 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걸 다 마시면 전 이만 아카데미로 돌아갈게요.”

“가서 램파드의 등을 떠밀려고?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내버려 둬.”

“제가 감히 숙부님께 뭐라 함부로 말하겠어요.”

얌전한 척하지만, 라이는 꿍꿍이가 가득해 보였다. 애쉬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램파드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배 속의 아이에 대해 고민이 끝날 때까지 여기 있어 주었으면 하지만. 한편으론 라이의 말대로 커틀러가 찾아와 괜히 큰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곳으로 빼돌리는 편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하면 램파드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애쉬는 커틀러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기도 하니까.

“알겠어.”

“뭘요?”

“남작한테 편지를 한 통 미리 보내 둘 테니까 램파드를 잘 설득해 봐.”

그편이 애쉬에게도 좋았다. 아직 램파드에게 마음이 어느 정도 남아 있으니까. 괜히 램파드가 이곳에 오래 머물면 애써 추스른 그를 향한 열렬한 마음이 다시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좋아요.”

애쉬의 허락도 받았겠다, 라이는 먹기 좋게 식은 차를 단숨에 호로록 마셔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참, 다과를 챙기러 아래층에 내려갔던 밀러가 다급하게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했다.

“아, 아래층에…….”

새파랗게 질린 밀러 때문에 무엇이 나타났는지 알아챘다. 애쉬는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불청객이 당도한 것이 먼저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절도를 지킨 자세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커틀러의 입매는 단단하게 굳어 있으며, 양 눈은 애쉬를 씹어 먹듯 날카로웠다. 가까이 다가온 커틀러가 애쉬의 멱살을 잡았다.

한 손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쉬를 가볍게 끌어 올려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쾅, 큰소리와 함께 애쉬의 등이 벽과 충돌했다.

“큭…!”

“램파드는 어딨느냐.”

깜짝 놀란 라이가 허둥지둥 의자에서 일어나며 대신 답했다.

“숙부님은 학생들에게 검을 가르치겠다며 아카데미에 가셨어요. 여기에 안 계셔요.”

커틀러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오로지 한 사람, 애쉬만 신경 썼기에 라이는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시건방진 꼬맹이는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커틀러를 똑바로 바라봤다.

“시선 내려라.”

라이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팽팽한 기류가 지속됐고, 애쉬는 커틀러의 팔을 붙잡아 떼어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떻게 한 손으로 이런 완력을 가지는지. 아무리 같은 알파라 하여도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란 걸 깨달았다.

“그러잖아도… 큿, 램파드는… 돌려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커틀러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목가를 강하게 압박하자 천이 애쉬의 목을 조였다.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니지만 버거워 거친 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성난 짐승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는지. 램파드 또한 드센 야생 동물 같았으니 비슷하게 대하면 되지 않을까.

“이곳에 온 걸 보아하니… 램파드가 변경한 검문소 규칙을… 수행하셨나… 보군요?”

커틀러에게 도발이라니. 숨이 가빠 와서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가, 멀쩡한 애쉬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쉬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커틀러가 그를 내팽개치듯 풀어 줬다.

“콜록, 콜록!”

애쉬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으며 부족한 숨을 쉬었다. 커틀러는 애쉬가 사용했던 의자를 빼앗듯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편한 자세를 취하던 그는 자신이 들어온 입구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시선이 마주친 밀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차를 새로 내오거라.”

“…….”

“이 저택은 시종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군. 손님 대접을 이렇게밖에 못하는가?”

“아… 알겠습니다!”

사색이 된 채 자리를 지키던 밀러가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라이와 애쉬는 그를 걱정스레 흘끗 봤고, 커틀러는 그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아 하며 자리를 지켰다.

***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하늘은 다양한 색으로 물들었고, 커틀러의 은발도 시시때때로 변화했다. 테이블에 앉은 커틀러는 조용히 램파드를 기다렸다. 라이와 애쉬 또한 한곳에서 대기했는데, 커틀러 때문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커틀러가 곁에 떡하니 있어 라이는 램파드를 찾아갈 생각을 접어 버렸다. 이제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고, 램파드가 오기만을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응접실 창문 밖이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고, 하얀 별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하자 어린 기사를 가르치던 램파드가 돌아왔다. 그는 심상치 않은 저택의 분위기에 경계하며 애쉬를 찾았고, 응접실에서 커틀러와 눈이 딱 마주쳤다.

태연한 척, 신경 써서 표정 관리를 한 램파드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내뺄 준비를 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램파드를 향해 눈을 가볍게 감은 커틀러가 여전히 자리를 지킨 채 말했다.

“도망가지 마.”

당장 밖으로 튀어나갈 자세를 취한 램파드의 팔다리가 얌전히 멈췄다. 그리고 인상을 썼다.

“너… 이럴 때만 말이 짧아지는군.”

눈을 뜬 커틀러가 램파드를 바라봤다. 도망치길 포기한 램파드는 시키지 않아도 가까이 다가와 빈 의자에 앉았다.

커틀러가 날뛰지 않아 램파드는 일단 라이와 밀러, 애쉬를 밖으로 내보냈다. 싸울 게 분명하기에 괜히 곁에 있다가 불똥이 튈까 봐 피신시킨 것이다.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

커틀러의 얼굴을 후려치고 도망친 것이 미안해 마음이 편치 않은 램파드는 그를 흘끗 바라봤다. 정말 있는 힘껏 내리쳤건만 다행히 얼굴이 부어오르든가 멍들진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흘끗흘끗 바라보는데도 커틀러는 무언갈 생각하는지, 입을 다물고 램파드를 덤덤히 바라볼 뿐이었다. 차라리 할 말이 있으면 속 시원하게 내뱉어 줬으면 좋겠는데. 커틀러의 설교를 기다리는 램파드는 조급하여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렇지만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커틀러였고, 램파드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생뚱맞은 소리가 이해되지 않아 미간에 주름을 살짝 만들며 질문했다.

“무엇을 말인가.”

“애쉬랑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할 테니까.”

“그러니까 뭘.”

“섹스.”

“…하!”

얼토당토않은 추정에 램파드의 눈썹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커틀러는 램파드가 남부 지방까지 달려온 것이 애쉬의 몸이 그리워서라고 해석한 모양이었다. 최근 커틀러는 램파드의 털끝조차 건드리지 않았고, 욕구가 잔뜩 쌓인 램파드는 눈만 뜨면 그를 유혹했다.

커틀러를 유혹한 것은 남자의 몸이 그리워서가 아닌 사랑하는 알파와 쾌락에 빠지고 싶어서였다. 함께 절정을 맞이해 기분 좋아지고 싶어서였지, 오랫동안 섹스를 하지 못한 욕구 불만으로 그의 좆만 찾은 게 아니었다.

멍청한 새끼,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욕설을 삼킨 램파드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넌 내가 아무나 침대로 막 끌어들여도 좋다는 거냐.”

쾅, 큰 소리가 나도 커틀러는 속눈썹조차 흔들리지 않고 평온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아무 남자랑 자고 싶어 환장한 창놈으로 보이는 거냐.”

“…….”

“커틀러……!”

아랫입술을 씹으며 화를 삭이는 램파드는 씩씩댔다. 분노에 찬 램파드의 목소리를 듣던 커틀러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정말로 램파드가 다른 남자와 자는 건 상관없는지 그는 평소와 같이 담담했다.

“정말 원한다면 하도록 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램파드가 커틀러의 멱살을 잡았다. 램파드에게 붙잡혔는데도 그는 놀란 척도 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그래.”

진짜 괜찮다는 건가. 만약 혼인까지 치른 커틀러가 다른 오메가와 잠자리를 가졌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램파드는 즉시 화를 낼 것이다. 당장 상대 오메가를 찾아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배신한 커틀러 또한 가만두지 않을 테지.

그리고 불륜을 저지른 두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참지 않고 분노를 표출하며 닥치는 대로 살육해, 기껏 안정된 정세를 갖게 된 대륙을 발칵 뒤집어엎을 테니까. 먼 훗날 이 시대를 조사하던 역사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악랄한 일을 서슴지 않을 거고, 모두 램파드가 미쳤다고 평가할 테지.

그 정도의 큰일을 저질러도 배신당한 마음이 진정될 리는 만무할 터. 커틀러를 향한 신뢰가 그만큼 거대하기에 배반당한 마음은 무슨 짓을 해도 안정되지 않고 폭주할 거다. 커틀러의 멱살을 꽉 붙잡은 램파드가 그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조롱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딱히 숨길 필요 없겠군. 이미 네놈이 찾아오기 전에 잔뜩 뒹굴었으니까.”

남부 지방에 찾아온 램파드가 애쉬와 한 일은 형의 추억을 들은 것. 함께 와인을 마시며 안부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거짓말에 애쉬를 끼워 넣는 것은 못내 미안하지마는 분노로 뒤덮인 램파드는 그런 걸 따질 겨를 없이 커틀러를 공격했다.

“다른 놈이 쑤셔 댄 구멍이 좋단 거냐. 더러운 구멍이 좋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황궁에도 남자는 넘쳐나건만.”

뭐라고 항변이라도 해 주길 바랐건만 커틀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램파드는 그의 태도에 더욱 마음이 뒤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남자랑 잠자리를 가졌다고 밝혔는데도 태연하다니, 진정으로 화가 나지 않는 건가.

“뭐야, 다른 남자와 자는 게 괜찮았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 괜히 예전일 가지고 미안한 마음을 가졌지 않나.”

“괜찮을 리 없잖아.”

램파드는 인상을 쓰고 그를 내려다봤다. 커틀러의 속눈썹이 천천히 떨렸고, 그는 덤덤한 척을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표정이 깨졌다. 태연한 게 아니라 괜찮은 척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는 그의 멱살을 잡고 있을 수 없어 램파드는 힘을 풀었다.

그는 변함없이 조용한 듯, 하지만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자는 걸 맨 정신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

상상만으로도 이미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기에 램파드는 순순히 인정했다.

“아니지. 네가 다른 오메가를 안았다면 난 세상 모두를 죽이고 싶어질 거다.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도 화가 풀리지 않아 마지막으로 남은 내 목숨도 끊어 버릴 테지.”

“나는 그런 감정을 몇 년이나 참아 가며 마음을 죽였는걸. 몇 번은 더 버틸 수 있어.”

“…….”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

램파드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여러 번 반복하며 이를 악물더니 자신의 자리에 도로 앉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였던 램파드는 한숨만 연거푸 쉬고, 턱을 치켜들어 맞은편에 앉은 커틀러를 사납게 노려봤다.

“내가 왜 다른 남자랑 자야 하냐.”

“뭐든 하고 싶은 걸 하면 마음이 풀릴 거 아냐.”

깨어졌던 커틀러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는지, 평소와 같아졌다. 램파드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커틀러가 내뱉을 허황한 소릴 인내를 끌어모아 기다려 줬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커틀러의 입이 힘겹게 떨어졌다.

“그렇게 해야 내 부탁도 들어줄 테니까.”

“아이를 지우는 거?”

커틀러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램파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예전의 커틀러라면 램파드의 의사 따윈 묻지 않고 일단 약을 입에 쏟아 넣어 해결했을 테지. 혼인을 치르고 저놈도 나름 성격 죽이고 맞춰 준다는 걸 파악한 램파드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싫어하는 애쉬를 살린 것처럼. 자신의 오메가가 애쉬와 뒹구는 걸 봐주겠다는 다짐이 얼마나 큰 각오인지 알기에 당장 커틀러의 뺨을 힘껏 후려치고 싶은 걸 버텼다. 분을 삭인 램파드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병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병 안엔 새까만 약물이 채워져 있고, 커틀러는 그것을 무료하게 바라봤다.

“이건 아이를 지우는 약이다.”

커틀러가 가만히 자리를 지키자 램파드는 검지로 병을 톡톡 치며 말했다.

“…네놈이 신경 쓰던 표정을 떨칠 수 없어 오는 길에 구해 뒀다.”

“램파드.”

“멍청한 놈……. 아무리 아이가 좋다지만 곁에 있는 네가 당장이라도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데 밀어붙일 수 있을 것 같냐. 그리고… 여기 온 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약을 마시려면 각오해야 하니까…….”

손끝으로 병을 건들던 램파드는 다시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커틀러가 애쉬와의 관계를 잘못 짚었을 때부터 무언가 속이 답답해져 한숨을 쉬었지만, 여전히 속풀이가 되지 않았다.

“이미 너를 선택했는데……. 그딴… 소릴 지껄일 줄이야…….”

답답한 마음을 쥐어짜 목소리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램파드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고, 계속 말을 내뱉었다간 울음을 터뜨릴 거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설움을 삼켰다. 코로 깊게 심호흡을 하며,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 힘썼다.

서러운 감정을 여러 번 외면한 적 있던 램파드는 이번에도 어떻게든 참아 내 커틀러를 사납게 노려봤다.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냐!”

기를 쓰며 성내면 눈물을 삼키기 쉬웠다. 램파드는 펑펑 우는 대신 막힌 속을 뚫기 위해 커틀러에게 거침없이 노기를 퍼붓기로 했다.

“냉큼 와서 위로해!”

삐걱, 커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무 의자의 마찰음이 들린다. 그는 그대로 천천히 램파드에게 다가와 한쪽 팔로 어깨를 감싸 주며 등을 굽혔다. 고개를 숙인 램파드는 그의 그림자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가히 충격이라 정신이 아득해져 주먹부터 휘둘렀다. 화가 잔뜩 나 커틀러를 때리고 말에 올라탄 램파드는 자신이 무엇에 분노했는지 생각했다. 커틀러가 아이를 지우라고 밀어붙인 것이 화가 난 것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보다 커틀러가 훨씬 더 소중하니까.

램파드는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았다. 사람의 일이란 것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영원토록 함께하겠다는 맹세를 해도 누구의 수명이 먼저 스러질지는 램파드가 증오해 마지않는 신만이 아는 것이었다.

오메가는 본디 몸이 약한 자들이 많아 냉철하게 판단하면 램파드가 먼저 세상을 뜰 확률이 높았다. 램파드보다 오래 살겠단 커틀러의 맹세와 상관없이 우성 알파인 그는 오래도록 장수할 수 있을 테지. 그런데 자신의 수명에 상관없이 램파드의 죽음을 목도한 순간 함께 눈을 감는다니.

아무리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하며, 매 순간 사소한 것까지 공유하고 싶지만 그가 제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저승길에 같이 오르는 것은 원치 않는다. 혼자라도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지, 따라 죽는 것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는 쉽게 목숨을 버린단다. 그 얘길 듣는 순간 커틀러에게 진심으로 화가 났다.

남부 지방 길에 오른 램파드는 다음 검문소를 통과할 때 곧바로 아이를 지우는 약을 구했다. 램파드 혼자만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도전했을 것이다. 목숨을 잃는 것 따윈 두렵지 않으며, 아이가 태어나는 기쁨은 한번 걸어 볼 가치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거기에 사랑하는 남자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램파드는 자신의 생명보다 커틀러를 더 중히 여겼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중한 커틀러의 마음을 상처 입히며 배반하면서까지 다른 남자와 몸을 섞을 일은 없을 텐데. 램파드는 커틀러가 좀 더 자신을 믿어 줬으면 했다. 하지만 램파드의 어깨를 감싼 커틀러의 팔이 잘게 떨렸기에 날 좀 믿어 보라며 소리치는 건 다음으로 미뤘다.

커틀러가 램파드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까닭이 있으니까. 과거 그의 마음을 시험하고 상처 입혔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 램파드는 양팔을 조심스레 올려 커틀러의 등을 감쌌다. 작은 온기 교환이라도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도록.

***

아침, 커틀러와 램파드는 애쉬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묵고 근처에 있는 콘테 가문 소유의 별장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아이를 지우는 약을 먹고 나서는 적어도 일주일은 침대 신세여야 하니, 조용한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콘테 별장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소식을 듣고 몰려와 채비를 도왔고, 곁에서 설명을 듣던 라이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와……. 진짜 숙부님… 대책 없는 일을 저지르셨네요.”

그 고생해서 왕국과의 무역을 성사시켜 놓고선 커틀러와 다퉜다고 곧바로 남부 지방으로 달려왔단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라이는 가감 없이 감상을 내뱉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순화해서 말한 것이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든 생각은 답이 없다, 무책임할 정도로 한심하다였으니까.

“맡은 일을 제대로 끝내고 나서 남을 평가하거라.”

“…읏!”

채비를 끝낸 커틀러가 불쾌한 음성으로 지적했고, 성적이 좋지 않은 라이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라이 나름 노력하고 있지만, 성적이 썩 좋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평민이라도 실력이 있으면 공평하게 관직을 내려 주니 공부의 기회를 잡은 사람은 죽기 살기로 집중해 라이가 따라가기 벅찬 거였다.

기세가 한풀 꺾인 라이는 커틀러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왕 일을 내팽개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거. 약을 먹고 정무 같은 건 한동안 잊고 푹 쉬기로 했다. 어차피 무역 성사 이후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으니까, 좀 더 빨리 휴가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터. 목깃을 정돈하던 램파드가 말했다.

“남부 지방에 좀 더 남아 있을 생각이다.”

“그러면 제가 대신 황궁으로 갈게요.”

“뭘 할 생각이냐.”

“무역이 개시되는 중요한 일에 황실 사람이 빠지면 모양이 안 서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가서 왕국 사람들 접대할게요…….”

라이는 램파드의 눈치를 흘끗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매달 제 생활비와 학비를 황실이 대 주니까 돈 받은 만큼은 일할게요. 저 어른 상대로 말은 잘하거든요.”

하긴 라이는 현재 제국의 단 하나뿐인 황자로 되어있다. 남들 눈에는 차기 황제로 보일 것이니, 무역 개시 행사에 황제 대신 참여하기엔 적합했다. 게다가 라이는 몇 번 황궁에 방문할 때 대신들과 대화를 잘 나눴으니, 왕국 사람들 앞에 내놔도 괜찮을 것이다.

대신 가 준다면 귀찮은 행사에 나갈 필요가 없어지니, 램파드로서는 오히려 환영이었다.

“그러도록 해라.”

“알겠어요. 나머지 행사도 제가 전부 참여할 테니까 숙부님은 푹 쉬세요.”

“그러지. 한스에게 모든 일정을 돕도록 지시하겠다. 사정을 적은 서신을 줄 터이니, 그의 말만 따르면 될 것이다.”

“예. 그럼 두 분은 쉬다 돌아가세요.”

라이는 황궁행 마차에 올랐고, 램파드와 커틀러 또한 근처 별장으로 이동할 준비를 끝마쳤다. 집주인인 애쉬가 어색하게 웃으며 램파드를 배웅했다.

“마차 준비는 끝났어.”

“며칠 신세를 졌군. 보답은 황궁에 돌아가자마자 보내지.”

거리를 지킨 커틀러를 흘끗 보던 애쉬가 램파드에게 살짝 고개를 기울여 소곤거렸다.

“됐어. 저 사람이 또 못살게 굴면 찾아와.”

애쉬의 속삭임에 램파드가 눈웃음 지었다.

“그럴 거다.”

램파드의 어깨에 애쉬의 손이 올라왔다. 그는 가볍게 토닥거리더니, 그대로 램파드를 떠나보냈다.

애쉬는 램파드를 만나기 전까지 그리움과 미련이 가득했다. 깊게 연결된 각인 상대였으니까 행여나 램파드 또한 자신과 같이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 떠올리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이번 만남으로 서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단 걸 느꼈다.

램파드는 애쉬에게 마음 한 점조차 남겨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다. 그는 여전히 애쉬를 의지했고, 힘들 때 찾아와 줘 기뻤다. 그만큼 자신을 편안하게 생각한단 것이고, 연인이 아닌 친구도 오랜 세월 함께 인연을 쌓을 수 있는 거니까. 확실하게 선을 그어 버린 램파드 덕분에 애쉬도 미련을 전부 털어 낼 수 있었다. 다음번 방문 땐 좀 더 확실하게 반가워하며, 진심으로 기뻐할 자신이 있었다.

안녕, 또 봐.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넨 애쉬는 램파드가 탄 마차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콘테 가문이 소유한 별장은 산속 깊은 곳에 있었다. 마차는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천천히 달렸고, 이따금 덜커덩거렸다. 과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다소 불편하게 앉아 있던 램파드가 결심했는지 맞은편에 앉은 커틀러를 똑바로 바라봤다.

램파드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 또한 조용히 시선을 맞췄다.

“너도 작은 꿈 하나 정돈 가지고 있겠지?”

“꿈?”

홀로 살아가려면 무언가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이 있어야 했다. 커틀러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를 파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어.”

“왜?”

“네가 날 도왔으니, 이제는 내가 널 돕고 싶다. 하지만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나도 꿈 같은 건 있어.”

커틀러의 답에 램파드는 화색이 돌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텅텅 빈 상태인 줄 알았는데, 그 또한 소망을 지녔던 것이다. 이제 램파드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니, 남은 생은 커틀러의 꿈을 함께 꾸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을 테지.

“말해 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종일 널 끌어안고 있는 거.”

램파드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램파드가 생각하기에 딱할 정도로 자그마한 꿈이었다. 꿈은 눈을 감고 잠이 들면 누구나 꿀 수 있다. 그렇기에 다소 허무맹랑하고, 실현될 가능성이 적은 것 또한 꿀 수 있다.

커틀러의 능력이라면 다른 이들은 감히 꿔 보지도 못할 포부를 가져도 될 텐데.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황위 찬탈을 노려 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 뛰어난 역량을 가진 커틀러가 품은 꿈이 남들 눈을 피해 어딘가 콕 박힌 다음 온종일 끌어안고 싶다는 거라니, 기가 막혔다.

“내 꿈을 무시하는 표정이네.”

“…진심인 거냐.”

“응. 생각보다 이루기 힘든 꿈이니까. 그 외 다른 꿈 같은 건 없어.”

램파드가 그의 볼을 살며시 감싸 이마를 부딪쳤다.

“이런 거로 만족하지 못하는 거란 말이냐.”

자신의 볼에 닿은 램파드의 손을 커틀러가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램파드의 한쪽 손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좋지만 부족해. 하루라도 좋으니까 온종일 너와 단둘이서만 지내고 싶어.”

이런 소원 말고, 혹여 자신이 없을 때도 커틀러가 혼자 살아갈 꿈을 가졌으면 하지만 지금 당장 새로운 소망을 심어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커틀러의 꿈을 전력으로 이뤄 주고 싶었다.

“약을 먹고 회복되는 대로 시종을 전부 무르도록 하지.”

“…….”

“네 꿈을 곧바로 이뤄 준다는데 기쁘지 않은 거냐.”

“아니, 기뻐.”

여전히 램파드의 손안에 얼굴을 기댄 커틀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기뻐하는 게 분명하지만 어딘가 다소 부족해 보였다.

램파드는 커틀러를 향한 마음을 인정하고 나서, 모든 것이 흡족했다. 그가 곁에 존재하기만 해도 작은 티끌조차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마음이 메워지건만, 커틀러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자신이 무엇을 주어야 하려나.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줘도 커틀러는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다. 어떻게 해야 그가 안심할 수 있을까.

“내 곁에 수많은 사람이 있어도, 널 대신할 자는 아무도 없어.”

“응.”

“내가 사랑할 사람은 커틀러, 너뿐이니까 불안해하지 마라.”

램파드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커틀러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처음 각인부터 커틀러의 계획이었단 것을 알면 램파드는 어떻게 반응하려나. 히트 사이클에 제정신이 아닌 램파드를 위해서가 아닌, 한눈에 반한 오메가를 쟁취하기 위해 위험에 빠뜨린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실망하겠지.

지금도 램파드의 죄책감을 이용하기 위해 팔이 부러진 척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램파드는 분명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갔을 테니까. 억지로라도 그를 붙잡아 자신 곁에 둔 것을 기뻐해야 하건만 아직 불안을 떨쳐 내기엔 부족했다. 방해물은 회복되어 가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다.

커틀러는 또다시 갈증을 느껴 연거푸 침을 삼켰다. 그렇게 해도 계속 목이 말랐다. 램파드의 온기는 마른 목을 축이고, 넘쳐날 정도건만. 어딘가 꽉 메워지지 않고 줄줄 새는 느낌이었다. 팔을 자르면 구멍이 메워지려나.

커틀러가 나쁜 계획을 세우는지도 모르는 램파드가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다시 전처럼 불러 주는군. 기뻐.”

“여기에 있을 때까지야.”

“그렇다면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지는군…….”

커틀러는 램파드의 투정에 답하지 않았다. 이대로 전처럼 편하게 대했다간 저도 모르게 그에게 사실을 고백할 것만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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