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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수도에 유례없을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숲속에 위치한 아카데미 주변은 사람 키만 한 높이의 눈이 쌓였고, 마치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섬처럼 고립되었다. 폭설이 내리기 며칠 전, 땔감을 실은 마차가 도착한 덕분에 난방 용품이 넉넉히 준비되어 보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부족하다면 널려 있는 책이나, 필기하여 쓸모없어진 종이를 연료로 사용하면 되고.
문제는 식료품 쪽이었다.
마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이 쌓이는 바람에 부족한 식량을 채워 넣지 못했고, 식료품 창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학생에게 배급되는 음식의 양은 점점 줄어들었고, 어젯밤은 손바닥만 한 고기 한 덩어리밖에 지급되지 않았다.
기다리면 눈은 녹아 사라지겠지마는 이대로 가다간 그동안 야채 우린 국물을 먹으며 연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마치 잔칫집에 찾아온 것처럼 성대하게 접시를 가득 채워 먹는 램파드는 죽을 맛이었다.
“아직도 대책을 내놓지 못하다니. 한심하긴!”
아카데미는 재난 상태에 돌입하여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쉬게 했다. 기숙사에 처박힌 램파드는 부족한 허기만큼 짜증이 치솟는지 어제 저녁부터 성화였다.
그의 짜증을 온전히 받고 있는 커틀러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조용히 곁을 지켰다.
“공부를 하러 왔지 기아 체험을 하러 아카데미에 온 것이 아니건만, 이 상황은 대체 뭐야! 아니, 굶는 건 둘째 치고 수업까지 중지하다니.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제자리에 있으란 말인가.”
“어쩔 수 없잖아. 눈이 그치지도 않고 계속 내리는 걸. 다른 건물로 이동하기도 쉽지 않아.”
“……넌 어째 태연한걸.”
오늘은 수요일. 커틀러가 정말로 싫어하는 요일이다.
수요일은 램파드와 겹치는 수업이 하나도 없는지라 잠잘 때 말고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내리는 폭설 덕분에 수요일도 램파드와 함께 지내게 됐다.
곁에 램파드만 있으면 뭐든 좋은 커틀러기에 지금 이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성화를 내는 중인 램파드를 부드러운 눈매로 바라봤다.
“가끔은 조용히 쉬는 것도 좋지 않아?”
“쉬는 건 늙어서 해도 충분해.”
“젊어서 힘을 다 뺐다간 늙어서는 쉬는 게 아니라 그대로 영면할지도 몰라.”
커틀러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낼 정도로 혼자 씩씩거리던 램파드를 바라보며 눈웃음쳤다. 혼자 씩씩대며 화를 냈단 것을 알게 된 램파드는 진정하려 애썼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푹 꺾은 램파드가 드디어 평정을 되찾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
“진정했으면 점심 먹으러 가자.”
며칠 전부터 원치 않는 식이 요법을 진행 중인 램파드는 밥이라는 소리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기껏 투덜거림이 사라졌건만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램파드를 자극하는 말이 들려온다.
“육류, 빵과 치즈는 지금 식사가 마지막입니다. 오늘 저녁부터는 부득이하게 야채 스튜만을 배급하겠습니다.”
커틀러의 곁에 서서 전달 사항을 듣던 램파드의 미간 사이가 한층 좁아졌다.
“스튜가 아니라 채소 우린 물이겠지.”
램파드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커틀러가 피식 웃었다. 그가 동조해 주자 램파드는 불평을 늘어놨다.
“이곳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이 몇 명인데 식료품 창고에 남은 식자재가 없다니.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놈은 상당히 무능력하군.”
“램파드, 너 때문이 아닐까.”
“나?”
“예산을 관리하는 이들도 설마 제국의 황태자께서 혼자 10인분을 해치운다는 것까지 예상하지 못한 거지.”
램파드가 인상을 한층 더 썼고 커틀러는 그가 폭발하기 전, 말릴 요량으로 덧붙였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황태자인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 주니까 조리사들은 기뻐할지도 몰라.”
여전히 기분 나쁜 듯 인상 쓰던 램파드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시선을 내리깔던 램파드가 커틀러만이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소곤거렸다.
“나도…….”
“응?”
“나도… 최근에는 자제하고 있단 말이야.”
적대 관계인 왕국과 국경이 맞닿은 남부 지방은 기근인데도 불구하고 재정이 부족해 지원이 적절하게 가지 못했다. 그 결과 제국민이 배를 곯고 있단다. 그들을 생각하면 죄스러워져 램파드는 인내를 발휘해 배를 채우지 않았다.
“진심으로 너 때문이라 생각하는 거야?”
“조금은… 책임을 느끼고 있어.”
“바보 같긴. 네가 처음 말한 대로 사람이 많은 곳은 당초에 여분을 들여오는 게 정상이야. 아카데미 인원이 몇 명인데 고작 10인분 더 늘었다고 창고가 바닥났다니. 그 흔한 말린 육포조차 없다면 재정이 잘못되었단 말이지.”
귀족은 가만있어도 어느 정도 자리가 떨어지니까. 무능한 자가 아카데미 재정을 관리하니까 이 모양 이 꼴인 것이다.
“슬슬 음식을 받으러 가야겠는걸. 늦게 가면 기름 덩어리만 남을지도 몰라. 서둘러.”
램파드는 식당으로 향하는 커틀러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따라갈 생각이 없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안 갈 거야?”
“입맛 없어.”
“거짓말.”
반박거리가 없어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자.”
팔짱을 끼고 벽에 달라붙은 램파드는 시선만 피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커틀러는 자기 반성 중인 램파드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끌어 식사를 받아 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육류는 통째로 구워 스테이크가 되었다. 램파드의 접시 위에는 손바닥만 한 고기가 한 덩어리 올라갔다.
황태자라 신경을 써 준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본디 잘 먹는 램파드를 배려해서인지 다른 학생에 비해 남달리 큰 덩어리였다. 정작 램파드 본인은 참새 모이만큼의 양이라 느꼈지만 아무런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기운 빠진 램파드의 모습을 보던 커틀러는 한숨을 내쉬더니 손대지 않은 자신 몫의 고기를 포크로 푹 찍어 램파드의 접시 위로 덜어 냈다.
“필요 없어.”
램파드가 중얼거렸다.
“잔말 말고 먹어. 네가 쓰러지면 내 일만 늘어나.”
“됐다니까.”
“램파드.”
커틀러의 고운 눈썹이 서로 맞닿을 듯 거리가 가까워졌고, 입매가 단단히 굳었다. 그는 평소엔 램파드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지만, 저 표정일 때만큼은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단호한 커틀러의 표정에 항복한 램파드는 그가 건네준 고기를 썰어 먹었다. 램파드가 식사를 시작하자 커틀러의 표정이 풀어졌고, 그는 따뜻한 차에 구운 빵을 곁들여 먹기 시작했다.
고기를 꼭꼭 씹어 먹는 램파드가 커틀러를 흘끗 바라봤다.
“그거 먹고 힘이 나?”
“난 이 정도로 충분해.”
“하긴 넌 평소에도 적게 먹지.”
커틀러는 다른 사람에 비해 소식하는 편이었다. 이상하게 식사 시간은 비슷했는데, 그는 음식을 굉장히 천천히 먹기 때문에 램파드와 저절로 맞춰졌다.
가만 보면 둘은 정반대의 성격과 행동을 가져 함께 행동하는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이런 의문을 품은 동급생이 가까이 다가왔다.
“옆에 앉아도 되지?”
커틀러와 램파드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려 동급생을 바라봤다.
커틀러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오래 머물지 않고, 차를 홀짝이며 램파드를 바라봤다. 동급생이지만 램파드는 그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커틀러는 한 모금 따뜻한 차를 마시곤 조용히 읊조렸다.
“남은 자리니까 마음대로 해.”
“고마워. 늦게 온 바람에 식당에 자리가 없어서…….”
자리에 앉은 동급생은 치즈를 덜어 내어 빵에 펴 발랐다.
램파드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몇 번 지나가다 본 적 있으며, 귀족인 것은 확실한데. 뇌 속 어딘가에 있을 동급생의 정보를 찾는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는 곧바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퍼니어였지.”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지? 너희 둘은 워낙에 딱 달라붙어 있어 끼어들기 힘들었어.”
손에 쥔 나이프를 내려놓은 램파드가 눈을 치켜떴다.
“붙어 있던 적 없어.”
“늘 딱 달라붙어 있잖아.”
“무… 무슨 소릴! 한 번도 껴안은 적 없어.”
램파드가 화를 내자 퍼니어가 당황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빠르게 정정했다.
“아니. 부둥켜안는 것처럼 붙은 게 아니고 함께 다닌단 말이야. 사이좋다고…….”
“나랑 커틀러가?”
“그것도 그렇고. 이상하게 커틀러에게만은 화내지 않잖아?”
“잘못 본 거겠지.”
“아니야? 누가 봐도 사이좋아 보이는걸. 성격이 이렇게나 다른데 같이 다니는 거 보면 친한 거 맞잖아.”
커틀러와 잘 어울린다는 말로 들려 램파드는 이상하게 심기 불편해졌다. 램파드의 미간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자 기가 팍 죽은 퍼니어는 그의 눈치를 봤다.
“내가 말실수 한 건가?”
저대로 퍼니어가 대책 없이 떠들었다간 램파드가 온종일 화를 낼지도 모른다. 램파드가 씩씩거리는 모습도 귀엽지마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몸으로 화내 봤자 좋을 것 없다.
“그냥 가만있으면 돼.”
램파드 곁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퍼니어를 보던 커틀러가 한입 거들었다.
“…미안.”
기죽은 퍼니어가 조용해지자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램파드는 두 사람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식사를 끝마친 커틀러는 퍼니어에게 인사를 하고, 램파드를 데리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램파드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커틀러도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커틀러.”
“응?”
“너도 언젠가 짝을 찾겠지.”
“이미 찾았어.”
뜻밖의 이야기에 램파드는 눈을 크게 떴다. 하긴 몇 없는 우성 알파니까 수많은 오메가가 그에게 달려들 것이었다. 의절당하는 바람에 사교계 모임은 나가지 않지만 아카데미 문밖에만 나가도 오메가는 넘쳐 난다. 램파드가 모르는 사이, 어디서 오메가를 만난 모양이었다.
알파가 짝을 찾은 것은 축복해야 할 일이다. 축하한다고 말해야 하건만 램파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두통이 일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누구?”
“너.”
장난이란 걸 알게 되자 머리로 몰린 피가 순식간에 진정되었고, 이번엔 또 다른 열기가 일었다. 동요한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램파드는 태연하게 넘겼다. 그의 장난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순 없으니까 대신에 피식 웃었다.
“농담은 됐고, 네 상대를 찾으면 주저 없이 말해 줘.”
“뭐하러?”
“퍼니어처럼 오해하는 자가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써서 거리를 둘 테니까. 걱정 말고 말해.”
낮은 한숨을 쉰 커틀러가 읽던 책을 들어 올렸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하는 커틀러의 행동에 램파드 또한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
쌓였던 눈이 녹고 아카데미는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램파드의 접시는 구운 고기로 이뤄진 탑이 놓였다. 적어도 열 명이 먹어도 될 법한 양은 오롯이 램파드 한 사람만의 몫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받아 온 램파드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썰어 내 먹었다. 속도는 빠르지만, 예법은 잊지 않아 하나하나 썰어 먹는 중이었고 시간이 꽤 오래 걸릴 모양새였다.
이미 식사를 끝낸 퍼니어가 기가 질린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식당에서 만난 퍼니어는 그 후로 꾸준히 마주쳤고, 지금은 허울 없이 이야기를 털어놓는 친구가 되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그 많은 게 어떻게 다 들어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램파드는 고기에 집중해 퍼니어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답을 듣지 못한 퍼니어는 혼자서 계속 떠들었다.
“몇 주 뒤면 졸업이네. 램파드는 황궁으로 돌아가려나?”
램파드 곁에는 커틀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 몫의 고기를 썰어 낸 족족 램파드의 접시 위로 슬쩍슬쩍 올렸다.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 퍼니어는 기가 찼다.
“램파드 혼자서 식당을 거덜 낼 작정인 것 같은데. 이봐, 황태자님. 제국의 식량을 혼자서 다 동낼 작정이냐.”
자신의 몫의 고기를 한입 크기로 썰어 내 램파드의 접시로 모조리 옮긴 커틀러가 대신 답했다.
“나와 램파드는 졸업하는 대로 황궁으로 돌아가야지.”
“아아, 너희들은 작위가 있어서 걱정 없겠다. 우리 집은 누나가 작위를 받는 바람에 나는 따로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커틀러는 램파드의 접시 위에 쌓인 고기 덩어리 중 하나를 자신의 접시로 옮겼다. 그는 다시 램파드 대신 먹기 좋게 썰어 내며 말했다.
“퍼니어도 기사가 된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너랑 램파드와 달리 검술 성적이 썩 좋지 않아 기사가 되긴 글러 먹었고…….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막막해.”
“재무 대신의 자리가 빌 예정인데 노려 보는 건 어때?”
“거긴 대대로 콘테 가문의 차지지 않았냐.”
“난 재무 대신의 자리에 관심 없어. 알파라면 노려 볼 법할 거야.”
“…커틀러 넌 뭘 할 건데.”
“기사단을 만들 거야. 단장님이 되는 거지.”
램파드는 어느 정도 배가 차자 그제야 둘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잠시 식기를 내려놓고 대화에 참여했다.
“기사단을 만든다고?”
“맞아.”
“하급 기사부터 시작할 거라며?”
“생각을 바꿨어.”
“콘테 공작을 설득한 거냐?”
“응.”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퍼니어 앞이라 의절당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나중에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면 자세히 묻긴 하겠지만은 이 정도 답이면 충분했다. 설득했다는 말은 다시 콘테 가문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말이니까.
친우에게 좋은 일이 생겼단 사실에 램파드의 입매가 기쁘게 휘었다.
“잘됐군.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러. 다음은 내 아버지를 설득해야 하니까.”
기사단을 만들려면 황제의 허락이 꼭 필요하다. 현 황제는 콘테 공작가의 세력이 커지는 걸 더는 원치 않는다. 다른 고비가 남아 있건만 커틀러는 난처한 기색 없이 장난스레 말했다.
“솔직히 말해 황제 폐하를 설득할 자신은 없으니까 램파드 네가 황위에 오를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을까 봐. 너라면 허락해 주겠지?”
커틀러가 썰어 준 한입 크기의 고기를 포크로 꾹 찍은 램파드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막 굴려 주지. 각오해.”
“이왕 굴릴 거라면 황제 직속으로 삼아 줘. 월급이 훨씬 더 많잖아.”
“아서라, 신생 기사단에 내 등 뒤를 맡기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이름이라도 지어 줄래?”
몇 년 동안 아카데미 수석을 자랑하는 램파드도 작명은 자신 없었다.
아직 배가 덜 차서 그런가. 머릿속에서 동동 떠다니는 단어는 스테이크, 스튜, 초콜릿 같은 것뿐이었다. 눈알을 굴려 필사적으로 식당 안을 살펴보던 램파드의 눈에 하얀 토끼가 보였다. 조리장이 키우는 토끼였는데 탐스럽게 부푼 꼬리가 매력적이다.
“화이트 테일. 멀리서 보면 네 머리도 똑같이 복스럽거든.”
힘을 중시하는 무력 집단의 이름을 연약한 토끼에서 따오다니. 퍼니어가 혀를 내둘렀고, 반대로 커틀러는 진지했다.
“내 머리는 흰색이 아니라 은색인데?”
“그거나, 그거나.”
의뢰를 무사히 끝마친 램파드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기사가 되기 위한 최종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떠나 열흘 동안 훈련을 하는데, 집 나가면 개고생이니 미리미리 많이 먹어 두는 거였다.
최종 시험 파트너 추첨이 끝나고, 램파드와 짝이 된 사람은 커틀러 다음으로 친해진 퍼니어였다. 억제제도 넉넉히 챙겼으며, 검술에 자신 붙은 램파드는 두려울 것 없었다. 간과한 점이 있다면 퍼니어의 실력이 램파드의 생각보다 훨씬 더 부족했단 것.
퍼니어는 최근 램파드, 커틀러와 함께 다녀 덕을 봤을 뿐 검술이 형편없었다. 생존술마저 최악이라 램파드가 노획해 온 사냥감이 없었더라면 두 사람은 쫄쫄 굶어 탈락했을 것이다.
평범한 최종 시험이었으면 발목을 잡아도 문제가 없었을 텐데 시험관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등장했다. 램파드와 퍼니어가 지내는 구획에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늙은 금색 곰이 나타난 것이다. 곧바로 공격 태세를 취한 램파드와 달리 퍼니어는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다.
“으… 으아아아아!”
잔뜩 겁먹은 퍼니어는 곰에게 등을 보이며 도망갔다. 곰은 육중한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굉장히 빠른 동물이다. 저렇게 등을 내보이며 도망가면 좋을 것 하나 없건만. 공포에 질린 퍼니어는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스스로 먹잇감이 되길 자처했다.
“퍼니어!”
말릴 새 없이 빠르게 따라간 곰이 앞발로 퍼니어를 쳤다. 곰의 앞발에 맞은 그는 짧은 거리를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다.
“아악! …으으으.”
나무 밑에 쓰러진 그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습 기사용 갑옷을 입었기에 망정이지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퍼니어가 주춤하자 곰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가까이 접근했다.
램파드는 피나는 노력 끝에 뛰어난 검술을 손에 넣었다. 이제 아카데미에서 램파드와 자웅을 겨룰 자는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언제나 사람이었다. 아무리 늙었다고 하나 몇 배나 더 큰 곰이 상대라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만히 있다간 몇 없는 소중한 친구가 곰의 저녁이 될 것이다. 램파드는 우렁차게 기합을 넣으며 곰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영역 다툼에서 막 밀려난 늙은 곰의 몸에는 잔상처가 많았다. 램파드는 그중 물어뜯긴 게 분명한 큰 상처를 발견했고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곰을 쓰러뜨렸다.
“램… 램파드.”
날카로운 앞발에 여러 번 맞은 램파드의 어깨 갑옷이 찌그러졌고, 주머니가 스치는 바람에 유리병이 깨지며 속에 넣어 둔 억제제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퍼니어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램파드와 바닥에 흩뿌려진 억제제를 바라봤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 억제제? 이걸 네가 왜 들고 있어.”
“…….”
“아… 그러고 보니 기숙사에서 오메가 페로몬이 퍼진 적 있었지. 커틀러가 창부를 끌어들였다며 소문났었는데……. 혹시 너였어?”
램파드는 답 없이 흙 묻은 억제제를 하나씩 주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오메가가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건만, 변명거리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귀에 들어간다면 당장 내일이 없다. 아카데미에 들이닥칠 황제 직속의 로열 가드에게 끌려갈 모습을 떠올리자 손끝이 벌벌 떨렸다. 흰색 약이 집어지기는커녕 램파드의 손톱을 거부하며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신 퍼니어가 억제제를 하나씩 주워 묻은 먼지를 깨끗이 털어 램파드의 손 위에 올렸다. 램파드의 손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메가를 혐오하는 황제 폐하 때문에 숨기고 살았구나.”
램파드의 시선은 손 위에 올라간 억제제에 고정됐다. 차마 퍼니어의 눈을 바라볼 수 없기에 하염없이 약만 바라봤다. 이대로 몸 전체가 흙 속에 파묻혀 꺼져만 가는 기분이 들었다.
“힘들었지?”
램파드는 무거운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내 목숨을 살려 줬으니 너의 비밀도 평생 지켜 줄게.”
“퍼니어…….”
뒷머리를 긁적이던 퍼니어가 장난스레 웃었다.
“커틀러한테만 밝히다니 서운한걸? 나도 친구가 아니었나.”
“…….”
“좋아, 내 장래를 정했어. 황실에서 일하는 시종이 될 거야. 널 도울 테니까 월급은 곱절로 챙겨 줘야 한다?”
“알파가 하기에는 하찮은 일이야.”
“내 꿈을 낮잡아 보지 말아 줘. 결심했으니까.”
퍼니어는 세상 그 무엇보다 환하게 웃었다.
램파드는 곧 오메가를 혐오하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 아카데미엔 커틀러가 있으니까 괜찮지만 황궁으로 돌아가면 혼자서 세상을 속이게 된다.
발각되면 어떻게 될지,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램파드의 삶은 짐승조차 다니지 않는 험난한 길과 같았다.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은 생소한 길은 혼자서 탐험하기엔 벅차다고 느꼈다. 하지만 퍼니어가 시종이 되어 곁에 있어 준단 말 한마디만으로 두려움이 가셨다. 그는 알파니까. 좋은 사람을 만날 게 분명한 커틀러와 달리 오랜 시간 곁에 있어 줄지도 몰랐다. 힘든 싸움이지만 잘 헤쳐 나갈 수 있단 믿음이 생겼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램파드와 퍼니어는 가장 빨리 결승선에 도달했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걸 얻은 램파드의 표정은 밝았다.
퍼니어와 함께 결승선에서 대기 중이던 램파드는 다음 도착자인 커틀러를 발견했다. 커틀러는 자신의 파트너를 버리고, 곧장 램파드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램파드와 가까워질수록 고운 미간 사이를 좁혔다.
“어깨 갑옷이 왜 이래?”
“아… 곰에게 습격당했어. 쓰러뜨렸으니 걱정하지 마.”
“곰?”
커틀러는 인상을 쓰며 퍼니어를 바라봤다. 찌그러진 갑옷을 입은 램파드와 달리 그는 멀쩡했다. 못 미더울 놈인 건 알았지만, 램파드를 방패 삼아 어딘가 숨어 있던 모양이다.
“당장 의료실로 가자.”
“갑옷만 조금 찌그러졌을 뿐이지 다치진 않았어.”
“판단은 의사가 내릴 거야. 가자.”
램파드는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강한 척한다. 아픈 것도 꾹 참고 태연한 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커틀러는 조바심을 냈다.
“램파드!”
“알았어, 알았어. 간다고 가.”
괜찮다는 램파드를 부축한 커틀러가 살기 어린 시선으로 퍼니어를 바라봤다. 우성 알파의 날카로운 시선에 관통된 퍼니어는 몸을 움찔 떨었고, 자리에서 고정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커틀러의 걱정과 달리 램파드는 큰 부상이 아니었다. 약간의 타박상을 입었을 뿐, 푹 쉬면 나을 정도의 상처란 말에 커틀러는 안도했다.
“거봐. 별것 아니라고 했잖아. 난 괜찮으니 표정 풀어.”
“…….”
“어디서 싸우다 도망친 곰인지 나랑 붙기도 전부터 지쳐 있었거든. 한두 번 공격하니 그냥 쓰러졌어.”
정작 다친 램파드는 무언가 흥에 취해 들떠 있었고, 커틀러의 심기는 불편했다. 인상을 팍 쓴 커틀러의 눈치를 보던 램파드는 연신 괜찮다며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방금 봤잖아. 스친 상처도 없어.”
“…….”
“왜 그렇게 심각해? 난 괜찮다니까?”
“램파드 너…….”
“응?”
“왜 그렇게 들떠 있는 거야?”
곰과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하기엔 램파드는 과할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 퍼니어는 알파였다. 최종 각인 상대를 정하지 못한 램파드는 커틀러의 눈 밖을 벗어나 그와 단둘이서 며칠간 지냈다. 램파드가 저리 흥분한 걸 보아하니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커틀러는 그 점이 못마땅했다.
커틀러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램파드는 떠드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방으로 향했다.
함께 방으로 돌아온 램파드는 품에 넣어 둔 억제제를 꺼내 종이 위에 올렸다. 억제제는 작은 병에 넣고 다녔는데 곰과의 전투에서 받은 충격에 깨져 버렸다.
작고 튼튼한 무언가가 없을까. 적당한 보관함을 찾기 위해 연신 방을 뒤적거렸다. 커틀러는 램파드가 꺼내 둔 지저분한 억제제를 하나 쥐었다.
“땅바닥에 떨어뜨린 거야?”
“곰하고 싸울 때 유리병이 깨져 버렸어. 충격받아도 쉽게 깨지지 않을 튼튼한 보관함이 필요해.”
무언가를 떠올린 커틀러가 책상 서랍을 열어 자그마한 철제 통을 꺼냈다. 의절당한 뒤, 오랜만에 저택에 갔다가 단 것을 좋아하는 램파드가 생각나서 사 온 초콜릿이었다.
“이걸 써.”
그가 건넨 건 딱 램파드가 원하는 크기의 작고 튼튼한 통이었다. 뚜껑을 열자 동글동글한 초콜릿이 빼곡히 들어찼다. 짙은 장미향을 내는 걸 보아하니, 커틀러의 저택 부근에서 판매하는 고급 초콜릿이 분명했다.
“먹어도 돼?”
“응. 너 주려고 산 거야.”
속에 든 동그란 초콜릿을 모조리 입으로 쏟아 버린 램파드가, 입을 우물거리며 억제제를 넣었다.
“곰하고 싸울 때 병이 깨졌다면 퍼니어도 본 거야?”
“응.”
“들킨 거야?”
아둔한 놈이니 히트 사이클 억제제란 걸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커틀러의 기대와 달리 램파드의 입에서는 다른 답이 나왔다.
“……비밀은 지켜 준대.”
“믿을 수 있어?”
램파드는 입에 넣은 초콜릿을 꼭꼭 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나도 믿을게.”
믿기는. 위험 요소는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
며칠 후, 졸업식을 앞둔 퍼니어가 절벽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그의 몸은 세차게 쏟아진 폭우 덕분에 진흙에 절반쯤 파묻힌 상태였다. 빗물에 미끄러져 절벽에서 떨어지며 목뼈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대체 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절벽 끝에 다다랐는지. 친우인 램파드조차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카데미의 강사들이 모두 나와 조사했지만 쏟아지는 빗물에 모든 증거가 흘러갔다. 사고사로 마무리되었고, 퍼니어의 가족이 아카데미를 찾아와 시신을 수습했다. 그의 시신을 마주한 램파드는 형을 잃었을 때와 같이 큰 상실감을 맛봤다.
퍼니어의 죽음 때문에 졸업식이 미뤄졌다. 램파드는 새까만 옷을 입고, 퍼니어가 사용하기로 예정되었던 은색 칼을 허리에 차고 친구의 장례에 참석했다. 진흙으로 엉망이 된 그의 몸은 깨끗하게 변했고, 잠을 자는 것처럼 조용히 누워 있었다. 언제나 시끄러울 정도로 곁에서 떠들던 친구였는데, 조용한 모습이 낯설 정도였다.
램파드는 검을 뽑아 벗의 몸 위에서 두 번 휘둘렀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불온한 기운을 베어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검을 돌려주며 명복을 빌었다.
또렷하게 보였던 길이 다시 흐릿해졌다. 램파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비밀을 온전히 알고 있는 자는 아직 커틀러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를 의지하고 싶진 않았다.
램파드에게 그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이왕이면 자신의 곁이 아닌 제대로 된 짝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한다. 그가 행복해지려면 램파드의 곁에 있으면 안 됐다.
힘없는 걸음으로 장례식장에서 나온 램파드는 커틀러를 발견했다. 그는 램파드보다 앞서 장례식장에 도착해 국화를 헌납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침울한 램파드의 표정을 보던 커틀러가 자신의 검을 건넸다.
“받아.”
램파드는 커틀러가 건넨 검을 힘없이 받아 들었다.
“졸업하면 한동안 만나지 못할 거야.”
“……너도 떠나는 거야?”
혼자 남기 싫은 램파드의 목소리에 드물게 투정이 섞였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수많은 시종이 황태자인 램파드 주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 진짜 램파드를 대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황태자를 베타로 알고 있으니까. 램파드는 그들의 생각에 맞춰 베타로 연기해야한다.
“전에 말한 대로 기사단장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있어.”
“얼마나 걸려?”
“반년 이상.”
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커틀러가 먼 여정을 나갈 이유는 몇 가지 없다. 의심되는 일은 하나뿐. 램파드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아버지가… 사절단에 너를 포함시켰구나…….”
커틀러는 답 대신 긍정의 의미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몇 주 전, 왕국과의 국경 부근에서 제국 대신의 목이 잘린 채 발견됐다. 누가 봐도 왕국 소행이 분명한 일이었고, 제국은 유감을 표했다. 왕국은 무죄를 입증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되레 제국의 사절단을 요구했다. 직접 찾아와 이야기를 들으면 의심이 사라질 것이라 하지만 누가 봐도 함정이었다.
그런 위험한 일에 황제는 공작 가문의 후계자를 보낸 것이었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다고, 가지 말라 말리고 싶지만 황제의 명은 절대적이다.
“조심히 다녀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램파드로서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빌 뿐이다.
“금방 돌아오진 못할 테니 대신 내 검을 맡아 줘.”
램파드는 커틀러가 건넨 그를 닮은 은색 검을 꽉 쥐었다.
기사의 첫 검은 평생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다.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검이건만 커틀러의 검술에 맞춘 한손검이 아닌 양손검이었다. 마치, 램파드를 위해 만든 것 같은.
“그 검은 나라고 생각해. 색만 보면 비슷하지 않아?”
램파드의 시선이 검에 꽂혔다. 정말 그의 말대로 흠 없이 매끈한 은색이 커틀러를 떠올리게 하였다.
“소중히 보관하다 돌려줄 테니까 돌아오는 대로 나를 찾아와.”
“당연하지. 누굴 또 만나러 가겠어.”
“다치면 돌려주지 않을 거야.”
“그건 곤란한걸.”
“돌아오는 대로 구석구석 확인할 거야. 스친 흉터라도 있으면 이 검은 평생 내 것이야.”
램파드의 투정에 커틀러가 웃었다.
“오메가가 내 등을 할퀴어 놓은 건?”
“……작위도 받지 못한 햇병아리 귀족에게 어느 오메가가 달라붙겠냐.”
“61장.”
뜬금없는 숫자에 램파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틀러는 무언가 큰 장난을 터뜨릴 생각인지 기대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지난번 본가에 갔을 때 받은 편지의 숫자야. 전부 오메가가 보낸 거지.”
“……고작 그 정도로 으스대기는. 작위를 가진 정식 귀족은 없고 갈 곳 없는 서출이 보낸 편지뿐이잖아. 그런 후보라면 너네 아버지부터 허락하지 않을걸.”
“당연하지. 너 때문에 제대로 된 혼사가 하나도 오지 않아.”
“그것참 미안하군.”
“사실 전부 안 읽어 봤는데……. 꼼꼼히 살피면 몇 개 정돈 제대로 된 상대가 있을걸?”
하긴 60명이 넘는 사람이 보냈으면 정식 귀족이 한둘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이번 임무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기사단을 설립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수많은 오메가의 추파를 받을 것이다.
수려한 외모에 눈부신 가문. 거기다가 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사랑하는 짝을 만나면 걱정 근심 없는 행복한 인생이 펼쳐지겠지. 램파드가 그걸 막을 자격은 없다. 오히려 친구의 인생을 축하해 주는 게 마땅하지.
“제대로 된 상대가 있으면 대충 골라 혼인이나 해라.”
검은 정장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커틀러가 고급진 종이로 만들어진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사실, 괜찮은 후보가 하나 있기에 가져왔어. 네가 직접 보고 판단 내려 줄래?”
순간 램파드는 입매가 굳었고, 그가 신경 쓸까 봐 편지를 빠르게 뺏어 들었다. 그리고 안을 확인했다가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커틀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어때,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사실은 너희 아버지가 짝 후보를 찾은 것 아니냐.”
“설마. 그 사람은 내 아버지보다 12살이 더 많은걸. 알고 보면 아픈 다리를 주물러 줄 사람이 필요해서 보낸 편지일지도 몰라. 우성 알파가 손힘은 강하잖아.”
변함없는 농담에 무거운 램파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심란함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파악한 커틀러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널 혼자 두고 죽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
“무슨 일이 생겨도 평생, 네 곁에 있어 줄게.”
그랬으면 좋으련만. 아카데미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수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중에는 필연코 커틀러의 평생 짝이 될 사람도 있겠지. 그를 위해 이제 거리를 두고 헤어지는 게 맞다.
“응.”
하지만 커틀러마저 잃으면 두 눈이 먼 것과 같이 될 게 분명하기에 램파드는 욕심을 부려 답했다.
***
콘테 가문의 주인인 공작은 창문가에 서서 대기 중인 마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닮은꼴인 남자가 나왔고, 집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 모두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뒤 집사가 찾아왔다.
“커틀러 도련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주인님을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찌할까요?”
“데리고 오너라.”
잔트의 손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콘테 공작이었다. 그 점이 내심 미안해 커틀러에게 검을 가르치는 잔트를 외면했더니, 괜히 헛바람이 들어 기사가 되겠단다.
콘테 공작 가문은 대대로 재무 대신을 배출하는 가문으로, 커틀러에게도 보장된 자리였다. 사람을 죽이는 저급한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들은 기사가 되겠다며 태어나 처음으로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나 다른 직업을 원한다면 시키지 못할 것도 없지마는 기사는 아니다.
기사도로 허울 좋게 포장했지만, 실상은 살인을 저지르는 집단이었다. 또한,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지 않았는데 기사가 된다면 제 명에 살지 못할 확률이 높다. 자식이 위험한 길을 걷겠다는데 부모로서 막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콘테 공작은 표현 방법이 거칠었다.
그는 윽박지르며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아들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양 볼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여러 번 가격했지만, 커틀러는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공작은 아들을 내쫓아 버렸고, 커틀러 또한 변명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을 말리던 잔트까지 덩달아 짐을 싸 들고 나가 버렸다. 가족 모두가 뻔히 살아 있는데 넓은 저택에 혼자 살아가다니. 적적했던 공작은 아들의 방문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거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락을 끊고 몇 년 만에 만나는 아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다시는 저택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 커틀러가 어쩐 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나쁜 소식은 아님을 바라며 한숨을 깊게 내쉬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제국의 중책을 맡은 공작도 크게 다툰 아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일은 사뭇 긴장된다. 친히 응접실까지 나온 콘테 공작은 가장 정중앙에 있는 주인의 자리에 앉아 곧 열릴 문을 탐탁지 않게 바라봤다.
“커틀러 도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은 허리를 굽혀 커틀러를 맞이했다. 공작의 손을 떠나 훌쩍 자란 커틀러는 성인식을 치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성장해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잔트만큼이나 고왔던 손은 굳은살이 박여 투박해졌고, 드러난 손목과 팔뚝은 근육으로 짜였다.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어깨가 넓어지고 드러난 몸이 단단해진 것으로 보아 기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단련한 모양이었다.
커틀러는 자신을 살펴보는 공작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 때문에 동요한 공작은 마음 한 조각 내보이지 않기 위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집을 나가 기사가 된다던 다짐은 어찌 된 것이냐. 가문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며, 하급 기사가 되어 독립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기사가 되겠다는 결정은 번복하지 않겠습니다.”
콘테 공작은 의절하기로 결정 내린 자식의 시건방진 소리를 들어줄 인내 같은 건 없었다. 이번에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불쾌하다며 인상 썼다. 아버지가 심기 불편해졌지만, 커틀러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무덤덤하게 그 앞에 섰다.
“그렇다면 왜 찾아온 것이냐. 부자상봉을 바라서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작위를 잇겠습니다.”
볼을 괴고 있던 공작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가문을 나가 기사가 될 것이고, 부모가 물려준 것이 아닌 새로운 성을 만들어 사용하겠다는 시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건 커틀러 너이건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미 자식은 없는 셈 치기로 했다.”
커틀러는 동요 하나 없이 자리를 지켰다.
“가문을 중시하는 아버지께서 오랜 전통의 콘테 공작 가문이 사라지게 두지 않을 거란 것을 잘 압니다. 저 대신 고아를 구해 올 생각이시겠죠. 어정쩡한 자들보다 확실하게 능력 있는 절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공작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 커틀러를 바라봤다. 그렇게나 크게 다퉜으니 어지간한 흥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다른 부탁이라면 못 이기는 척, 들어줄 수도 있지만 기사가 되겠단 결심은 들어줄 생각 따위 없다. 생각을 바꾸지도 않았으면서 왜 찾아왔는지 원. 콘테 공작은 아들을 보며 비웃었다.
“한심하긴. 능력 없는 서민이나 택할 하급 기사 자리를 원하면서 공작 가문을 잇겠다고? 너의 행동은 가문의 명예에 금이 갈 뿐인데 허락할 성싶으냐.”
커틀러는 아버지의 조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일개 기사가 아닌 기사단을 만들어 제가 직접 이끌 것입니다.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기사단장이 될 테니 허락해 주십시오.”
뜻밖의 소리에 콘테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사단장 정도라면 공작 작위에 걸맞은 자리였다. 하지만, 탐탁지 않은 것은 여전했다.
“기사단을 꾸린다고? 클로비스 황제가 허락할 성싶으냐? 그는 귀족의 힘이 세지는 것을 원치 않아 한다.”
“그 점이 문제인 겁니까? 황제의 발을 핥아서라도 허락을 받아 오겠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뚝뚝한 아들이지만 그 속을 이루고 있는 자존심이 얼마나 견고한지는 잘 알았다. 한번 큰소리친 일은 절대 굽히지 않는 커틀러가 자진해서 저택으로 찾아온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자존심을 버렸단 것이었다. 한번 굽히기로 한 자존심, 황제 앞에서 치욕을 견디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힘을 원하는 거냐.”
“네.”
제국의 공작 작위 하나만으로도 둘도 없을 큰 권력이었다. 그 정도로 그치지 않고 무력까지 필요로 하다니. 대륙을 손에 넣겠다는 둥 허황한 꿈이라면 동조할 가치가 없다.
기사가 되겠다.
1절만 듣고 손을 올려 커틀러를 내쫓은 전적이 있으니, 이번만큼은 한 번의 인내를 발휘했다.
“단순히 독립을 바라던 네가 작위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말해 보아라. 가문의 미래를 맡기는 일인데 이유라도 들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공작은 커틀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떤 각오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아들의 눈동자는 단 한 점의 흔들림이 없었다.
“클로비스 황제에 대적할 힘이 필요합니다.”
대륙 통일 수준에는 미치지 않지만 터무니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쾌한 이야기라 불쾌함에 굳었던 콘테 공작의 입매가 휘어졌다.
“크큭, 뭐? 공작 작위로 만족하지 않고 기사단을 만든다니, 모반을 꾀할 생각이냐. 콘테 공작 가문을 황가로 만들려고?”
“여차하면 황가를 차지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견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 속을 숨기고 허락받을 수 있겠느냐.”
“예, 허락은 제가 받을 것이며 실패한다면은, 치욕을 보는 것 또한 제 선에서 끝내겠습니다.”
언짢음이 싹 가신 공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아들을 바라봤다. 커틀러가 아카데미에서 일으킨 추문은 익히 들었다. 마음에 둔 오메가가 황제의 노리개라도 되는가. 뭐가 어떻든 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독립을 원한다며 기사가 된다는 소리보단 낫다.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기사단장인 모양새도 나쁘지 않고.
“좋다. 원하는 대로 한번 기사단을 만들어 보아라.”
기쁠 법도 하건만 커틀러의 입매는 여전히 단단히 굳어 있었으며, 태도는 꼿꼿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데도 커틀러는 물러서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뭔가 더 원하는 것이 있느냐.”
“네.”
“말해 보아라.”
기분이 좋아진 공작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기사단장이 되면 그 즉시 콘테 공작 작위를 물려주십시오.”
대개는 선대가 죽고 나서 작위를 물려받는다. 혹은 선대의 나이가 예순이 넘어 황혼에 접어들면 작위를 내려놓는다. 콘테 공작은 아직 40대 초반. 한창 전성기인데 자리에서 물러나라 하다니 어지간히도 힘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콘테 공작 가문이 사병을 가질 수 있다면, 빠르게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좋다. 클로비스 황제에게 허락을 받고, 기사단을 출범하는 그 즉시 작위를 물려주도록 하지.”
딱딱할 정도로 굳어 있던 커틀러의 입매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다.
공작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은 커틀러는 허리를 굽혀 아버지께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다. 완전히 화해하고 화목을 되찾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전처럼 척지고 살진 않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몇 개나 쏟아진 콘테 전 공작은 온종일 뒷목을 부여잡으며 지냈다.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샌드위치처럼 몇 가지가 포개지다니. 쓰러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시작은 커틀러의 투옥 소식이었다.
기사 서임식 때, 램파드 황제에게 고백하는 기행을 벌여 놓고 수용된 것으로는 정신 차리지 못한 것인가. 이번에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죄목조차 감춰진 커틀러는 감옥에 갇히고 공작 가문은 제국의 감시하에 들어갔다.
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감시로 그치지 않고, 저택에 로열 가드가 들이닥쳐 침구를 뜯어 그 속을 살펴볼 정도로 민낯을 다 내보였다.
이대로 가문이 몰락하나 싶었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커틀러가 석방됐다. 풀려난 커틀러는 한쪽 팔을 잃은 상태였으며, 이번에는 설명도 없이 릴과 함께 북부 지방으로 떠난단다. 먼 북부 지방으로 떠나는 것은 못마땅했지만 과열된 혈기를 가라앉히기에는 추운 지방도 나쁘지 않았다.
북부 지방으로 떠나기 전 신변을 정리하던 커틀러는 결정을 번복하고, 함께 데려간다던 릴을 저택에 던져 두고 혼자 떠났다.
명색이 며느리 후보니까 잘 대해 주려고 했건만 릴은 극소수만 걸리는 전염병에 시달려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전염성이 강한 병이라고 하나 환자의 혈액이 묻지 않는 이상 전이되지 않을 터. 의문투성이지만 릴의 시신은 전염을 막기 위해 빠르게 화장 처리했다. 몸이 약한 오메가니까 그럴 수 있지.
그렇게 넘겼건만 모든 일은 계획된 것이었다.
드디어 멈추나 싶었던 커틀러의 폭주는 여전했던 것이다. 릴은 커틀러의 연애 사업에 방해되는 인물이라 직접 손을 쓴 것이 명료했다. 지금 콘테 전 공작의 눈앞에 악몽이 펼쳐진 까닭일 테니까.
분명, 램파드 황제와 애쉬 테일러라는 서민 알파와의 혼인이었다. 전 공작을 포함하여 식장에 있는 모두가 그리 안내를 받았지만, 면사포를 뒤집어쓴 새신부의 모습에 나자빠질 뻔했다.
자신은 전혀 닮지 않고 잔트와 쏙 빼닮은 커틀러가 왜 저기에 있는 건가. 무너지는 다리를 가까스로 유지했을 땐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은 채였고, 식은 종료되었다.
전 공작은 아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반기는 가족 하나 없는 넓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주인어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스, 오랜만이군.”
커틀러의 심복 중 하나인 한스가 콘테 전 공작을 반겼다. 아마도 한스가 여기 있는 이유는 커틀러의 기행에 관해 설명하기 위함이리라. 어째서 커틀러가 클로비스 황가에 시집을 갔는지. 우성 알파가 베타인 램파드 황제의 황후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을 것이다.
기대와 달리 콘테 전 공작의 이마에 혈관이 한껏 더 도독해졌다.
“콘테 가문의 후계자가 태어났습니다.”
“뭐라고?”
단어 하나하나. 분명히 똑똑히 들었건만 너무나도 황당한 이야기에 콘테 전 공작은 한 번 더 되물었다. 허리를 구부린 한스는 한 번 더 못 박았다.
“주인어른의 손주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며칠 후 잔트 님께서 모시고 오실 겁니다.”
“잔트가?”
“예, 나눴던 집을 다시 합칠 테니 미리 준비하라 일러 두셨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먼저 본가에 찾아온 것입니다.”
아무리 작위를 물려주고 뒷선으로 물러났다고 하나 이것은 너무했다. 우성 알파라는 놈이 본디 짝으로 삼아야 할 오메가를 손수 죽여 놓고, 스스로를 낮춰 베타의 짝이 되어 놓고선 뒤에서는 아이를 만들었다? 도를 넘은 커틀러의 독선에 전 공작의 표정은 점점 구겨졌고,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충격적인 일이 여러 개 발생해서인가. 이제 그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버틸 재간이 있었건만, 그리도 보고 싶던 사랑하는 이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전 공작을 쓰러지게 하였다.
“이 아이는 이제부터 당신과 제 아이입니다.”
잔트를 바라보며 양손을 들어 올린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공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혈관이 도드라진 이마를 한껏 구겼다.
“설마… 다른 알파를 찾은 것이오?”
잔트가 답하지 않자 공작은 마음을 진정시키도록 노력했다.
아무리 남편에게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지만 다른 알파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 온 것은 너무하지 않는가. 심지어 다른 사람과의 자식을 순순히 키울 리가 만무했다.
전 공작은 몹시 화가 났지만, 기껏 제 발로 찾아온 잔트가 저택 밖으로 나갔다간 또다시 긴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한다. 진정하고 한스가 말한 이야기를 되짚었다. 분명 손주라고 했다.
“아니, 당신의 아이일 리가 없지. 커틀러의 아이라고 들었거든.”
잔트의 품에 안긴 갓난아이는 누가 봐도 커틀러의 자식임이 분명해 보였다.
나이가 들어 빠진 색상이 아닌, 순도 높은 은을 녹여 만든 듯한 은발은 은은한 광채를 발했다. 귀한 재료로 만든 머리만큼이나 값진 자색 눈동자 또한 햇빛에 비쳐 반짝임을 감상하고 싶을 만큼 영롱했다. 가진 이가 드문 은발과 자안, 두 가지 모두 커틀러처럼 소유한 아이가 손주가 아닐 리 없다. 문제는 잔트와도 닮았단 거지마는.
“맞아요. 황위를 물려받을 열셋까지는 저희 두 사람의 늦둥이로 키울 겁니다.”
대체 얼마나 잘나신 손주님이기에 신분을 숨기고 키워야 하나. 얼토당토않은 소릴 들은 공작의 이마에 자리 잡은 혈관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머리에 피가 몰려 어질어질해진 공작의 뇌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커틀러는 우성 알파니까 저 아이를 낳은 것은 오메가였다. 저 아이를 낳은 오메가가 무엇이기에 이런 번거로운 짓거리를 하는 것인지. 모든 걸 버리고 램파드 황제의 황후가 된 커틀러의 행동을 보건대, 구태여 다른 이를 통해 아이를 만들 것 같진 않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콘테 전 공작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램파드 폐하께서는 오메가였군.”
잔트는 답 대신 아이를 사랑스럽게 끌어안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답은 없지만 확실하단 뜻이었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이때껏 숨기고 있었다니, 커틀러는 내가 못 미더운가 보군.”
“그래도 아이를 맡긴 걸 보면 조금은 당신을 믿는 게 아닐까요?”
“내가 아니라 부인에게 맡긴 거잖소.”
“그러니까 평소 잘하셨어야죠.”
정곡을 찔린 전 공작은 입 안이 떨떠름해져 입맛만 다셨다.
커틀러가 아카데미를 다녔던 시절, 오메가 창부를 끌어들였단 소문이 돌았다. 오메가인 램파드 황제와 룸메이트였으니 그때부터 알게 된 모양이다.
작위를 달라며 느닷없이 저택에 찾아왔을 때, 커틀러는 이미 램파드의 비밀을 알아 기사단을 만들기로 각오를 다짐한 것이다. 선대 클로비스 황제가 살아 있을 때, 램파드의 비밀이 밝혀지면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루트비안 황태자가 그랬던 것처럼 램파드 또한 창관으로 내쫓길 터. 혹여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황명을 거슬러 램파드를 보호하기 위해, 클로비스 황제와 대적할 힘을 가꾼 것이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역풍을 맞아 가문이 몰락할 일이건만.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숨기고, 작위를 달라고 하다니.
“미친놈.”
남편이 욕지거리를 내뱉자 잔트가 바라보았다. 전 공작은 기껏 마음을 바꾼 부인이 또다시 짐을 싸 들고 바깥으로 나가 버릴까 봐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당신한테 한 말이 아니오.”
“알고 있어요.”
다행히 잔트는 개의치 않아 했다.
잔트를 향한 마음은 변치 않았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 서먹했다. 공작은 아이를 빌미로, 계획을 세우기 위한 이야기를 꺼냈다. 좋은 핑곗거리였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오.”
“늦둥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세간이 믿도록 금실 좋은 척 연기를 해야지요. 앞으로 귀족의 연회나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할 겁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니까 구태여 연기할 필요가 없는데도?”
아이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꽉 끌어안던 잔트는 사뭇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전 공작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고, 아주 잠깐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평소처럼 생활하면 되겠네요.”
전 공작은 잔트를 향해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딱딱한 입가를 원만하게 만들기는 처음 한 번이 어렵지 이제 원한다면 솔직히 내보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늦었지마는 기회를 주겠소? 앞으로 당신한테 잘할 테니까…….”
아이를 요람에 넣은 잔트는 양손으로 전 공작의 손을 맞잡았다. 속만 썩이는 아들이라 생각했는데 덕분에 잔트와 다시 합치게 되었으니 최고의 선물로 효도한 셈이었다.
커틀러 콘테, 램파드 클로비스 마침
커틀러 클로비스, 램파드 클로비스
혼인이 끝나고 준비된 축하연장. 경비는 로열 가드와 화이트 테일이 함께 맡았다. 각 기사를 배치한 화이트 테일의 부기사단장이 커틀러에게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커틀러 단장님, 지시한 대로 기사들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좀 더 허리를 숙이더니, 커틀러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소곤거렸다.
“이건 애들이 준비한 겁니다. 예고 없이 갑자기 혼인을 치르시는 바람에 이런 것밖에 준비하지 못했지만… 혼인 축하드립니다.”
그는 뚜껑을 살짝 열어 안을 확인하고,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부기사단장에게 덤덤한 투로 말했다.
“이제 앞으로 클로비스 단장이라고 부르거라.”
“알겠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부르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커틀러는 한 손을 들어 올려 부기사단장을 물러가게 했다. 그는 깍듯이 인사를 올린 후 자신이 맡은 경비 지역으로 사라졌다.
램파드는 부기사단장이 사라지자마자 커틀러가 앉은 좌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있는데 램파드를 쏙 빼놓고 말하다니. 둘이서 어떤 말을 나누며 선물을 건네받았는지 궁금하지만, 그보다 커틀러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다.
“성으로 불리는 걸 싫어하지 않았느냐.”
“제가 싫어한 건 아버지의 성입니다. 이제 폐하와 같은 성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늘 듣고 싶군요.”
램파드는 미소 지으며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귀족의 의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커틀러는 큰 권력을 가진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혹여 그가 부담스러워 하거나, 내키지 않아 하면 어쩌지. 이제 그런 불안한 생각 따윈 모두 사라졌고, 그도 램파드와 마찬가지로 이 혼인을 반긴다는 것이 느껴졌다.
***
“잠자리 준비가 끝났습니다. 침실로 드시지요.”
램파드는 침실로 안내하는 한스를 흘끗 바라보며 커틀러와 함께 거대한 침대 위로 올라왔다.
혼인의 끝은 새로이 탄생한 황실 부부가 함께 침대로 드는 것이었다. 후사를 낳는 일이 황제의 중요 책무 중 하나인 이상, 앞으로 함께 잠자리에 들 때마다 기록관이 대동하게 된다. 그 일을 한스가 맡은 모양이었다. 긴 천이 늘어진 널찍한 침대에 엎드린 램파드가 낮게 쿡쿡 웃었다.
“한스한테 못 할 짓이 아니냐.”
“그는 이미 저희의 관계에 익숙해졌을 겁니다.”
램파드는 딱히 기억나는 일이 없어, 침대에 걸터앉은 커틀러를 올려다봤다. 식에서 사용한 면사포는 램파드가 찢어 버린지라 급하게 불투명한 천으로 신부인 커틀러의 얼굴이 가려졌다. 이 천을 벗는 것은 수도를 한 바퀴 돌고 제국민에게 황후를 공표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 황제가 직접 벗긴다.
그는 아직 얇은 베일을 벗지 않은지라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은은한 빛이 나는 면사포 아래로 흘끗 보이는 입술이 원만한 것으로 보아 웃음기를 머금은 모양이었다. 비록 천으로 가려져 있지만, 커틀러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 것 같았다. 램파드는 드러난 입매만을 감상했고, 매끈한 커틀러의 입술이 떨어졌다.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와 전 집무실에서 관계를 맺은 적이 많을 텐데요.”
“최근에는 잔트의 별장에서도 했지.”
그의 말대로 불쌍한 한스는 이미 익숙해졌을 것이라 신경 쓸 필요 없어 보다. 램파드는 양팔을 쭉 펴며 침대 위에 나른하게 늘어졌다.
혼인을 올릴 동안 꾸며진 침실은 긴장을 풀어 주는 효과가 있는 꽃향기로 가득 찼으며, 태양 빛을 잔뜩 머금은 시트는 부드러웠다. 램파드는 침대 시트에 몸을 맡기며 꾸물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랑 혼인할 생각이 없었지 않나.”
흘끗 보이는 커틀러의 입술은 여전히 굽은 선을 그렸다.
“맞습니다.”
“급하게 준비한 것치곤 여전히 철두철미하구나.”
“침대 위에서 마음껏 하려면 준비를 했어야지요. 제가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폐하께선 어떻게 넘길 생각이셨습니까.”
“최고 대신이 직접 뽑은 기록관을 매수했겠지.”
램파드의 대답에 커틀러의 입매가 한층 더 크게 휘었다. 최고 대신이 뽑은 기록관을 매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것을 둘 모두가 잘 알았다.
“계획이 없단 말이시군요.”
“아냐. 생각해 둔 건 있었어.”
“뭡니까.”
“기록관이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만 네가 연기하면 되잖아.”
“폐하께 안겨 신음을 흘리라는 말입니까.”
“…하는 척만… 하는 거지.”
램파드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를 흘끗 바라봤다. 그의 입술은 유쾌한 듯 호선을 그리더니 곧이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고 싶으신 겁니까?”
“뭘?”
“폐하께서 절 안는 걸요. 제 처음을 전부 당신에게 드리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군요.”
생각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애초에 그에게 안기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럽기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고.
“…그랬다간 네놈이 앓아누울 건데?”
“상관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고 싶다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알파가 오메가 역을 자처했다간 페로몬이 꼬여 고생한다고 했지. 램파드는 최종 각인을 끝낸 채로 다른 베타를 찾았다가 며칠 고생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고통을 커틀러가 떠안는 건 원치 않았다.
“돼… 됐어.”
“제 몸이 그리 걱정되시는 거라면.”
그는 제 품에 넣어 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축하연장에서 부기사단장이 커틀러에게 건넨 선물이었다. 그 안에는 작은 병이 들어가 있었는데, 램파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끈적끈적한 질감의 액체는 관계를 돕기 위한 윤활제였다.
“이걸 사용하면 되겠군요.”
램파드는 당황했고, 윤활제를 꺼낸 커틀러는 태연했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커틀러가 깔리는 거로 보여 저런 걸 선물로 준 모양이었다.
램파드가 뻣뻣하게 굳어 있자 커틀러가 설명을 덧붙였다.
“기사들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이건 단순히 관계를 돕는 것뿐만 아니라 성감을 증폭시킨다고 하더군요. 써 보실래요?”
“내놔.”
말과 동시에 커틀러의 손에 있던 병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바닥으로 휙 던졌다.
“이런 건 필요 없어.”
그는 조용히 램파드를 내려다봤다.
“이런 거 없어도 네놈이 만져 주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피식 웃은 커틀러가 허락도 없이 쓰고 있던 면사포를 벗어 램파드에게 씌웠다.
은은한 초로 밝혀진 방 안은 아무래도 어두웠다. 불투명한 천이 램파드의 시야를 가리자 커틀러의 인영만이 흐릿하게 보였다. 시각이 어느 정도 차단된 만큼 작은 소리를 인지할 정도로 귀가 예민해졌고, 따뜻하며 단단한 그의 손가락이 램파드의 귓불을 만졌다.
“눈감으십시오.”
“이미 아무것도 안 보여.”
조금 전처럼 커틀러의 표정을 읽을 순 없지만, 그가 다가오는 건 잘 알았다. 그는 침대에 엎어져 있는 램파드의 고개를 들어 올리게 하여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자마자 램파드는 양팔을 뻗어 커틀러의 목에 걸어 끌어당겼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면사포가 흘러내렸다.
이제 전처럼 시간에 쫓기듯 서두를 필요가 없어 아주 천천히. 상대의 체온, 피부, 감정을 느끼며 느긋하게 입술을 섞었다. 램파드의 뒷머리를 쓰다듬던 커틀러의 손이 목으로 내려와 옷깃을 풀어헤쳤다. 샤워를 끝마친 램파드가 입은 가운은 좌우를 벌리는 것만으로도 쉽게 벗겨진다.
상반신을 드러낸 램파드가 손을 움직여 커틀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황제의 의복과 달리 황후의 복장은 목가가 단단히 여밈되었다. 선물 상자를 포장해 놓은 듯한 크라바트를 풀고, 단추를 열 때마다 램파드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이상하게 부끄러움이 확 몰려온 램파드의 손이 정지되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느릿느릿해졌다.
“왜 그러시죠. 손이 멈추셨습니다.”
지적당하자 램파드의 손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커틀러는 돌 석상처럼 굳은 그를 가만두고 피식 웃었다.
“긴장되십니까.”
이때껏 그와 맺은 관계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성욕만 급급하게 처리했다. 이번은 전과 달리 둘 사이의 관계를 감출 필요 없고 오히려 축복하에 이뤄지는 잠자리였다.
그토록 원하던 당당한 그와의 관계. 꿈이 막상 이뤄지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처음인 양, 부끄러움을 느낀 램파드의 귓불이 붉어졌다. 커틀러는 사랑스러운 사람의 작은 반응을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저는 조금, 긴장되는군요. 폐하께서는요?”
“나도 마찬가지다…….”
“오늘 밤은 서로 미숙하겠군요.”
“하반신까지 미숙하면 용서 못 해. 첫날밤 기억이 오래갈 거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버림받지 않도록 울 때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램파드의 말랑한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커틀러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자 부드러운 침대가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램파드의 눈앞에 바르게 선 커틀러는 한 손으로 익숙하게 단추를 푸르고 상의를 벗었다. 그의 속살이 드러나자 램파드는 숨을 쉬는 것을 멈추고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가만 보면 그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것을 이용할 줄 몰랐을 뿐이지, 본격적으로 미인계를 쓰자 그에게 시선이 절로 꽂힌다. 램파드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커틀러가 옷에서 손을 뗐다.
“나머지는 폐하께서 벗기시겠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빛을 발하는 듯 환한 피부를 가져서인가. 방이 어두워도 그의 몸에 서로 엉킨 단단한 근육은 세밀화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램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을 뻗어 천천히 벗겨 냈다.
“손이 떨리시는군요. 아직도 긴장되십니까.”
“네 옷을 벗기는 건 처음이니까.”
“고작 옷 벗기는 것 가지고 떠시다니. 누가 보면 전쟁터에 나가 적을 베어 넘기던 램파드 황제는 진짜가 아닌 대타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천천히 시작하는 것도 처음이잖아.”
“이때까지는 시간이 여의찮았으니까요.”
작게 웃으며 커틀러의 옷을 벗기던 램파드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어깨에 남겨진 붉은 상처를 발견하자 웃음이 사라지고,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커틀러…….”
진주를 닮은 곱고 하얀 어깨에 남겨진 상흔은 램파드를 감싸다 생긴 것이다. 고집으로 인한 오판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완벽한 몸에 흠집이 남지 않았을 터인데. 램파드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에 머물자, 커틀러의 눈가가 부드러워졌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저 스스로 판단해 행동한 일입니다.”
램파드는 커틀러의 어깨에 손을 올려 손끝으로 상처를 그렸다. 어깨에 그려진 흉측한 붉은 선은 시작점일 뿐이었다. 천천히 선을 따라가자 엉망으로 난도질된 그의 너른 등을 발견했고, 가슴 안쪽이 콱 조여 왔다.
스스로 선택하여 황제가 된 이후로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아픔 앞에서는 과거 맹세 따윈 한낱 어린아이의 투정만큼이나 쓸모없어졌다.
“내가 황제의 자리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오메가로 태어난 운명을 순응하고 받아들였다면.
“너를 오해하며 상처 입히지 않았을 텐데.”
어금니를 꽉 문 램파드가 커틀러의 어깨에 기댔다. 어떻게 사죄해야 할까. 그의 마음을 난도질한 잘못은 이미 사과했건만 여전히 죄스럽다. 확실한 증거인 붉은 흉터가 램파드가 저지른 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축 처져 있는 램파드의 볼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폐하께서 스스로 판단하여 내린 선택을 후회하지 마십시오.”
“할 거야.”
커틀러는 램파드의 대답을 기다리는지 볼을 천천히 쓰다듬을 뿐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램파드는 그의 태도에 호응하며 투정 부리는 듯, 고개를 천천히 숙이며 떼를 썼다.
“…할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언제로요.”
“즉위식을 치른 날짜로.”
“선택을 바꾸실 겁니까.”
“응. 널 황제로 추대하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혼인을 올리는 거지.”
“램파드 폐하께서 황후가 되시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폐하께서 불참한다면 패배할 전투만 다섯이군요.”
커틀러의 손바닥 안에 얌전히 기대 있던 램파드가 시선을 치켜떴다. 그는 작은 미소조차 없었고, 그저 담담하게 아무런 감정 없이, 램파드가 만들어 냈을 과거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상상해 읽어 나갔다.
“최종 방어선이었던 남부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제국은 몰락입니다. 황제이자 기사단장인 저는 책임을 뒤집어써 처형당하고, 오메가인 당신은 그대로 왕국의 전리품이 되죠.”
“…꼭 진다고 할 수만은 없어. 네가 제국군 전부를 통솔해 형국이 달라질 테니까.”
“저는 화이트 테일의 인원만으로도 벅찬 걸요. 다섯 개의 기사단을 통솔할 자신이 없습니다.”
“겸손하기는. 내가 지시했다고 하나, 전투가 발생했을 때 기사를 통솔한 건 너의 능력이잖아. 심지어 출전한 전투는 전부 승리했지.”
“폐하 곁이라 이길 생각만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없는 전장이라면 승패 따윈 안중에 없었겠지요.”
램파드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으로 발언했지만, 커틀러가 모두 차단했다. 커틀러의 손바닥에서 벗어난 램파드는 다시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리광 부리듯 고개를 천천히 움직이며 커틀러의 품에 볼을 문질렀다.
솔직하게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이 얼마 만인지. 커틀러는 램파드와 갈라서기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때를 떠올리며 상냥하게 굴었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과거를 뉘우치다니,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선택이 후회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커틀러가 황제가 되었다면 형 또한 살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애쉬 또한, 루트비안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보냈을지도.
하지만 아무리 선택을 후회한다고 한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몇 번이고 반성해 봤자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그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커틀러의 살결에 따뜻한 입김이 닿았다.
커틀러의 몸에는 아직 풀어내지 못한 램파드를 향한 앙금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크고 단단한 설움이 존재할 거라고 램파드는 생각했다.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으니까. 침전되어 쌓인 설움의 두께는 제법 될 테지. 평생을 함께할 검을 뺏어 버리기까지 했으니 빈틈없이 꽉꽉 메워졌을 터.
램파드는 차라리 그가 자신을 매도했으면 한다. 너의 그릇된 선택 덕분에 고통받고 괴로웠다며 마음의 앙금이 사라질 정도로 크게 발산했으면 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답을 듣기 두려운 질문을 했더니 램파드의 몸이 뻣뻣이 경직됐다. 먼저 물어봐 놓고 답이 듣기 싫어 한쪽 귀를 막을 거라며 커틀러의 목가에 머리를 문질렀다.
“전혀요. 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에 비해 등의 상처쯤이야.”
그는 자신의 목가에 달라붙은 램파드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새 기른 머리카락이 곱디고운 커틀러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도록 해.”
“정말입니까.”
“그래. 뭐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도 않으시고?”
얼굴을 파묻은 램파드는 그의 목소리로 감정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무덤덤한 그의 목소리는 점점 냉담해졌으며 살기가 느껴졌다.
그의 어깨에 코를 박은 램파드는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한때 차라리 커틀러가 죽길 바랐다. 각인이 풀릴 방법은 그의 죽음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에게서 한순간이라도 해방된다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 같았다.
그가 같은 감정을 품었다고 해서 억울하거나 항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마음대로 해.”
정말 죽어도 상관없었기에 램파드가 중얼거렸다. 램파드를 품에서 떼어낸 커틀러가 그를 침대 위로 눕혔다. 아무런 저항 없이 몸에 힘을 뺀 램파드는 커틀러의 손길대로 침대 위에 늘어졌다.
매끄러운 선을 그리는 램파드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도톰하게 솟아오른 목젖을 건드렸다. 긴장한 램파드는 고인 침을 삼켰는데 목울대가 단단하게 굳으며 살짝 움직이는 것이 커틀러의 손끝에 전해진다.
“눈 감으십시오.”
이번에는 항의하지 않고 그의 뜻대로 눈을 살며시 감았다. 커틀러의 입술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가 떨어졌고, 목에 있는 손이 가슴을 덮었다. 램파드의 가운을 벌리며 들어온 손은 막 샤워를 끝내 촉촉함을 머금은 피부를 쓸어내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더니만. 오히려 평소와 달리 매우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램파드는 그의 손가락이 급소와 가까워질수록 몸을 잘게 떨었다. 커틀러가 몸을 숙여 램파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엎드리시죠.”
“눈은 감고?”
“뜨라는 명령은 안 했잖습니까.”
램파드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움직여 그대로 침대에 엎드렸다. 램파드의 움직임대로 대충 벗겨진 가운이 흘러내렸고, 커틀러가 엉덩이를 감싸 쥐더니 곧바로 박아 넣었다.
“…아!”
“오늘 밤은 천천히 하고 싶었습니다.”
소곤거리며 성기를 욱여넣은 그가 힘을 줘 허리를 쳐올렸다. 푹, 그의 움직임대로 내벽이 늘어지며 두꺼운 남근을 남김없이 받아먹었다.
“후회하려면 먼 과거가 아닌 지금 당장 하십시오.”
뭐든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램파드는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램파드의 목가에 커틀러의 따뜻한 한숨이 닿았다. 무언가 속이 답답한 듯한 한숨이었다.
램파드가 반항 없이 자신을 받아들이자 커틀러가 허리를 쳐올렸다. 삽입하여 허리를 움직이는 건 평소와 같았다. 평소와 같은 그의 몸이건만 이상하게 추삽질이 반복될 때마다 램파드는 마음이 무거웠다.
별다른 대화 없이 관계는 지속됐고, 살끼리 달라붙는 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몇 번이나 배 속에 파정을 했지만 서로 말없이 행위에만 집중했다. 살끼리 부딪쳐도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따금 램파드가 흘리는 신음과 달라붙은 살만이 감정 교류의 전부였다.
“후으… 흣… 읏.”
양손으로 침대를 딛고 엎어진 램파드는 쓰러지지 않도록 몸에 힘을 줬다. 양손과 다리를 모두 동원하여 지탱했지만 과격할 정도로 힘을 쏟아 넣으며 몰아붙이는 커틀러를 버티기 힘들었다.
“…앗!”
결국, 램파드의 양손이 무너졌다. 침대로 쓰러지기 전, 손을 뻗은 그가 램파드의 머리를 꽉 부여잡았다. 그는 강한 악력으로 램파드의 머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램파드의 목은 자연스레 뒤로 꺾이며 벌려진 입으로 탄식을 토해 냈다.
“전 아직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버티십시오.”
무서운 놈. 평소 뭘 먹고 살면 몇 번이나 사정하고도 저렇게 쌩쌩한지. 뭐든 마음껏 하라고 했지만 연속된 절정으로 소모된 램파드의 체력은 한계였다.
하지만 그의 답답한 마음은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것 같아 차마 힘드니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전부 받아 냈다. 여러 번 정액이 칠해진 램파드의 배 속에서는 커틀러가 움직일 때마다 희멀건 액이 삐져나왔다.
커틀러와 이어진 구멍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정액이 천천히 흐르는 게 느껴진다. 분명,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번 관계는 마음만 무거울 뿐, 기쁘지 않았다. 하다못해 커틀러가 성욕이라도 제대로 풀었으면 좋겠거늘. 그 또한 평소와 달리 입을 꾹 다물고 허리를 움직일 뿐이라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램파드의 몸에 삽입된 그의 성기가 뻣뻣해졌다. 또 한차례 정액을 뿜어낼 준비를 해, 램파드는 신경 써서 몸 안쪽을 조였다. 힘을 준다고 했지만 이미 체력이 한계였고, 하반신을 부들부들 떨 뿐.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허리가 푹 꺼졌다. 커틀러가 머리카락을 꽉 붙들지 않았으면 진작에 침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하아. 하.”
램파드의 귓가에 커틀러의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계속 엎어 놓고 뒤로만 박을 뿐. 그의 얼굴조차 보여 주지 않으니 이따금 들리는 숨결로 기분을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벅찬 만큼 그의 숨소리를 듣는 것도 버거워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램파드는 커틀러의 작은 소리를 듣기 위해 힘이 들어가지 않는 허리를 천천히 폈다. 삽입된 성기가 빠져나오자, 좀 더 힘을 내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램파드가 자신의 가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커틀러는 붙잡은 머리를 풀고 하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팔로 몸을 지탱해 줬다. 그렇게 커틀러의 품속에 안겼고 그의 오뚝한 코가 램파드의 볼을 비볐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램파드는 그제야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눈을 차분히 깔고 무덤덤해 보이지만 어딘가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커틀러는 모든 것을 가졌다. 권력, 재산, 외모, 능력까지도. 그런 그에게 램파드가 줄 것이라곤 오메가의 몸뿐이며 마음껏 사용하도록 가만히 있는 것이 속죄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 방법은 틀린 거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잖아.”
“폐하의 명대로 제가 원하는 대로 했습니다.”
“하…….”
커틀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램파드의 바람대로 움직였다. 램파드가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써 용서받길 원한다는 마음을 알아 그대로 행한 것이다.
램파드는 그제야 커틀러가 무엇을 후회하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먼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당장 눈앞에 있는 커틀러를 그만두게 해야 했다. 그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램파드가 원한다면 기꺼이 해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커틀러는 자신의 소망보다 램파드의 마음을 중히 여기며, 그것을 기쁨으로 느꼈다.
“멍청한 자식…….”
램파드는 커틀러에게 욕지거리하며 그의 목가에 머리를 편히 기댔다. 그를 욕해도 답답한 마음은 여전해 커틀러를 책망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을 확실히 정할 때까지 아랫도리 간수하고 손으로 버틴 거냐. 몇 년이나?”
“예. 폐하께서는 아직 준비되지 않으셨으니까요.”
“미련하기는… 그냥 참지 말고 덮치지 그랬나.”
“솔직히 한 방에서 함께 지낼 때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참기 힘든 날은 종종 새벽에 일어나 당신의 입술을 건드리며 수음했지요.”
“……뭐?”
커틀러와 몇 년이나 같은 방을 사용했다. 함께 잠든 것만 센다면 적어도 꼬박 3년 이상이건만. 자신의 곁에서 자위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자… 잠깐, 아카데미에서 뭘 했다고?”
“자위요.”
“내 곁에서 했다고?”
“그렇습니다. 많이 한날은 5번은 뽑아냈는데, 꿈쩍도 하지 않으시더군요. 솔직히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 같아 황궁에 돌아가서 어찌 버티실지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커틀러 곁이라 안심하고 잠만 쿨쿨 잤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램파드는 못마땅한 듯 눈알을 굴렸다.
“날 생각하며 한 거냐?”
커틀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에 힘을 줬다. 램파드의 등이 그의 가슴에 좀 더 단단히 밀착됐다.
“당신 말고 누굴 떠올리겠습니까. 한 번은 버티기 너무 힘겨워 그냥 제 좆을 당신의 입에 처박을까 고민한 적도 있었죠.”
그 말을 듣자 램파드는 뒤늦게 현기증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커틀러의 속풀이를 위해 제멋대로 흔들려서 체력이 소진된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충격적인 발언에 머리가 다 아팠다.
“아… 생각하니 폐하께서 계시지 않을 때도 했군요. 건국기념일 행사 때문에 황궁에 불려 가신 날은 폐하께서 두고 간 벗은 교복에 얼굴을 박고 했습니다.”
“미… 미친놈이……!”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전쟁 때도 퍽 힘겨웠죠. 피 냄새에 흥분해 버티기 힘겨워서 폐하의 막사에 찾아갔는데 마침 계시지 않더군요. 그때 자리를 지키셨다면 좀 더 빨리 당신을 가졌을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또 했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커틀러는 부정할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쟁 중 한 번, 어느 정신 나간 놈이 램파드의 막사 안에 정액을 찍 싸질러 둔 적 있었다. 종종 램파드의 미모쯤이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다며 달려드는 겁대가리 상실한 놈이 등장했다. 그런 놈은 램파드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고, 잡히는 대로 모조리 처형당하든가 다리 사이의 덜렁이는 물건이 사라졌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버러지의 연장선인 줄 알았는데 커틀러가 범인이었다니.
“…하, 내 막사 안에서 발견된 정액 말이다. 인제 보니 네가 한 짓이군. 죄 없는 기사만 여럿 심문하지 않았느냐!”
“사실대로 말하기엔 그때의 폐하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셨으니까요.”
“거짓말 마. 속으로 신이 났겠지.”
커틀러가 램파드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고 큭큭, 웃었다. 심란한 램파드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투정 부렸지만,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램파드는 한숨을 쉬곤 투정을 관뒀다.
커틀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한 놈이었다. 원하는 것이 분명 있으면서 램파드를 배려한답시고 이때껏 욕망을 외면했다. 정확히는 제대로 참은 것도 아니지.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아챌 정도로 마음을 발산하고 종종 폭주까지 했는데, 램파드 혼자서만 눈치채지 못했다.
“네가 뭘 해도 도망치든가 거부하지 않을 테니까 겁먹지 마.”
“당신의 수족을 잘라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온종일 달라붙어 보살피고 싶어도 말입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커틀러가 피식 웃었다.
“잠깐 그런 생각도 했죠. 하지만 폐하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깨달아서 다행이구나.”
“예. 당신의 손이 제 볼을 감싸는 것이 좋거든요. 또, 절정에 달했을 때 제 허리에 다리를 둘러 힘을 주는 것 또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습니다.”
“이유가 건전하지 않은걸…….”
“궁금하시다면 폐하의 아름다움을 온종일 칭송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한둘이 아니니까요.”
“됐어…….”
그의 품에 꽤 오래 안겨 있었기 때문인가. 체력이 회복된 램파드는 품에서 빠져나와 커틀러를 바라봤다. 자신이 오메가란 사실을 부정하고 싶던 램파드를 배려하기 위해 욕정을 외면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는 좀 더 많은 것을 참아 냈다.
램파드를 지키기 위해 원치 않은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애쉬도. 그를 죽이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결국 램파드가 괴로워해 거뒀다. 아마 커틀러가 좀 더 스스로를 위했더라면 애쉬는 차가운 흙 속에 파묻혔을 것이고, 램파드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져 있을 것이다.
아리따운 외모 속에 정상이 아닌 욕망을 품고 있는 커틀러는 폭탄과도 같았다. 예쁜 은색 폭탄. 남들이 보기에 뒤틀린 욕구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지만 램파드는 그가 자신을 위해 참아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타인의 시선과 달리 램파드의 시선으로 커틀러는 위험해 보이지 않으니까.
“사랑해.”
램파드의 속삭임에 커틀러가 사뭇 놀란 듯 입술을 살짝 떼어 냈다.
“제가 두렵지 않습니까.”
“두렵기는. 네놈이 미쳤단 건 진즉에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보다…….”
양손을 들어 올려 커틀러의 가슴에 댔다. 그리고 힘을 줘 꾹 밀었고, 커틀러는 아무런 저항 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기념해야 할 첫날밤인데 이렇게 끝낼 건 아니지? 난 아직 울지 않았어.”
커틀러를 눕힌 램파드는 그의 몸 위에 올라가 뻣뻣이 세워진 성기에 정액이 질질 흘러내리는 구멍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몸을 내려 단단한 남근을 머금었다. 이미 한창 뒤엉킨 후라 체력 소모가 심하지마는 관계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느껴졌다.
하지만 램파드의 머릿속엔 위험 신호가 켜졌다. 이대로 더 했다간 분명 내일은 온종일 일어나지도 못하고 녹아 있을지도 몰랐다. 내일 당장 해결해야 할 정무가 떠올랐지만 알 바 없다. 일단 지금은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공통된 욕망을 해소하고 싶었다.
커틀러는 아무런 저항 없이 램파드를 받아들였고 아까와 달리, 둘은 서로 호흡을 맞추며 원 없이 뒹굴었다.
남근을 받아들이는 데 남은 모든 힘을 썼더니 손발이 저릿해질 정도였다. 이대로 더 했다간 나올 정액이 없어 피를 뿜고 죽을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슬슬 두려워졌지만 거부할 기색을 내보일 힘조차 남지 않았다.
온몸의 뼈가 녹아내린 듯,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진 램파드를 바라보던 커틀러가 웃더니 그를 품속에 넣으며 움직임을 멈췄다.
램파드는 덜덜 떨리는 손끝을 조금씩 움직여 커틀러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램파드의 신호를 받은 그는 한쪽밖에 사용할 수 없는 팔을 움직여 램파드가 쉽게 기댈 수 있도록 자리 잡아 주었다.
“하… 후으…….”
드디어 몸을 편하게 뉘인 램파드가 신음을 흘렸다. 대체 얼마만큼 한 건지. 물론 하자고 그를 눕힌 것은 램파드라지만 진짜 울며불며 매달려도 관두지 않을 줄은 몰랐다.
‘허읏, 읏……. 커틀러… 그만… 이제. 아, 앗!’
‘폐하께서 먼저 유혹하지 않으셨습니까.’
‘읏, 응. 그만……. 이제… 더는!’
붉게 달뜬 양 볼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멈출 줄 모르는데 그의 허리 짓은 계속되었다. 힘들다고 그만하라 소리쳤지만, 커틀러는 계속, 계속해 대다가 결국 램파드가 반쯤 실성한 것처럼 정신을 놓자 풀어 줬다.
내일 하루는 고사하고 적어도 3일간은 침대랑 일체화가 될 듯해 걱정이 앞선다. 3일 후엔 단둘이서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건만. 이 상태로라면 누운 채로 마차로 옮겨질지도 몰랐다. 물론 신혼지에서도 환자처럼 침대에 드러누워 꼼짝달싹 못 하겠지.
“…너는 적당히 하는 걸 모르는 거냐!”
한참 울었더니 램파드는 눈이 따끔거려 찌푸렸다. 커틀러는 엄지손가락으로 램파드의 붉은 눈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너무 과한 것 같군요. 다음부터는 조금 자중하겠습니다.”
“조금?”
“네, 한 번 정도는 줄일 수 있지요.”
“한 번?”
이런 양심도 없는 놈. 아니, 원래 없었지. 램파드는 화낼 힘도 없어서 커틀러의 품에 얌전히 안겼다. 한참 시달린 안쪽은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고, 양다리와 손끝이 아직 저렸다.
램파드가 커틀러의 가슴에 좀 더 밀착했다. 램파드가 지친 원흉은 커틀러였건만, 그의 품은 회복을 돕기도 했다. 커틀러는 램파드의 머리카락을 여러 번 쓰다듬었고,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꿀 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머리는 왜 기르신 겁니까.”
“잔트가.”
“어머니께서 기르라고 조언하시던지요.”
“아니. 너랑 얼굴이 같은데, 머리만 기르니까 차분해 보이더군. 나도 나이가 있는데 사납다는 이야기만 들으니까 차분해 보이려나 싶어 길러 봤지.”
제멋대로 황후 후보를 바꿔 놓은 혼인식을 치르고 나서 본 최고 대신의 눈빛은 당장에라도 손자를 향해 호통치려고 준비 중인 할아버지 같은 표정이었다.
‘커틀러 경을 선택하실 거라면 미리 언질이라도 하지 그러셨습니까! 이미 애쉬 테일러를 황후로 공표해 두었건만, 식을 올린 건 커틀러 경이라니. 지금 폐하께서는 황후가 두 명이라는 전무후무한 상태신 걸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해결하실 겁니까!’
‘차차 해결하겠다.’
‘대체 언제요! 아니, 폐하께서 답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한 달 안에 해결하십시오!’
램파드는 몇 마디 더 꺼내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수긍했다. 그를 더 자극했다간 최고 대신이 화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으니까. 안 그래도 일이 많건만 최고 대신까지 침상에 드러눕는다면 램파드가 모조리 떠안아 신혼여행이고 뭐고 취소될지도 몰랐다.
꼭 그 일이 아니어도. 애쉬가 몇 번이나 지적한 대로 성질 머리를 죽여야겠단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그렇기에 한번 길러 봤다.
“머리 길이에 상관없이 폐하는 폐하십니다.”
길러 봤자 성격은 그대로란 뜻이었다.
“…그렇지.”
“그래서, 이대로 어머니처럼 기르실 겁니까?”
램파드는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쳐 냈다. 좀 더 기르면 램파드의 가슴까지 내려올 길이였는데 벌써 불편했다. 묶어 볼까 싶었는데, 역시 이전이 더 편하다.
“번거로워서 이만 자를 거야.”
“그냥 이대로 기르시지 그러십니까. 전 마음에 들거든요.”
그는 램파드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입술로 훑었다. 뭐가 마음에 든다는 거지. 조금 전, 커틀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고 흔든 것이 생각났다.
“내 머리는 말고삐가 아니다. 그런 용도로 사용할 생각 하지 말아라!”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놈이 붙잡고 신나게 흔들어 댔으니까 알 수밖에 없지.”
“짧을 때랑 비교해서 붙잡기 편해졌더군요.”
“역시 잘라야겠어.”
커틀러는 붙잡은 램파드의 머리카락을 해방하고 그의 어깨를 감싸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속눈썹끼리 부딪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자르게 해 주십시오.”
“내 몸을 누구에게 맡기겠냐.”
미소로 회답한 커틀러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램파드는 꼼짝달싹할 힘이 없건만 그는 아직도 체력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와 가위를 찾으러 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커틀러는 태양 아래서 활동하는 기사의 피부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뽀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다. 넓은 등과 허리, 그리고 작은 엉덩이까지 단련된 근육이 엉겨 있었고,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의 몸을 베개를 끌어안고 감상했다.
티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는데. 이제 그의 등에는 난도질된 붉은 선이 여럿 보인다. 램파드는 단단한 근육 위에 새겨진 선명한 상처를 바라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램파드가 심란해하는 상처를 가리고자, 커틀러는 근처에 걸어 둔 가운을 걸쳐 허리끈을 묶었다. 가운을 걸친 그는 머리를 자를 가위를 가지고 왔고, 램파드는 그에게 모든 걸 맡겼다.
2
커틀러는 추운 북부 지방에 똬리 틀었던 창관과 관계된 조직의 중추를 괴멸시켰다. 큰 세력을 꺾었어도 좀벌레처럼 제국에 기생한 조직은 곳곳에 찌꺼기를 남겼다. 램파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완벽하게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천천히 돌아가는 방법은 자연스레 일이 많아졌고, 램파드는 서류의 산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후으.”
긴 한숨을 내쉰 램파드는 따끔한 눈꺼풀 위를 꾹 눌렀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생활이 지속되자, 피곤했다.
커틀러와 함께하면 할수록 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단 마음이 커졌다. 램파드의 바람대로 오직 둘만이 만끽할 시간을 가지려면 하루라도 빨리 일을 처리해야 했다. 크나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단 생각을 하자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폐하, 황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주 약간 지친 램파드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들라 해라.”
살펴보던 서류를 책상 위에 대충 던진 램파드가 다시 한번 눈 사이를 꾹 눌렀다. 램파드의 쉼터가 되어 주는 사람은 커틀러였다. 마침 그가 필요한 참이었기에 램파드는 잠깐 한숨 돌리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후, 문 앞을 지키던 한스가 커틀러를 데리고 왔다.
“그럼 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십시오.”
눈치 빠른 한스는 두 사람만 남게 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고대했던 둘만의 공간이 만들어졌지만, 램파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한스가 나가자마자 눈동자에 그의 모습을 잠깐 담고, 아쉬운 듯 고개를 떨궈 서류를 붙잡았다. 한숨을 내쉰 램파드는 멈춘 손을 움직여 글을 써 내렸다.
램파드가 권하지 않아도 근처 소파에 앉은 커틀러는 다리를 꼬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직도 일이 남으신 겁니까.”
“오늘 해야 할 일은 이게 마지막이다.”
“도와 드릴까요?”
“됐어. 너 또한 피곤할 텐데 잠시라도 쉬고 있어라. 부탁하지 않아도 조금 이따가 일을 건네줄 테니까.”
램파드가 건넬 일의 내용을 대충 파악한 커틀러가 먼저 운을 뗐다.
“창관과 관련된 조직 대부분은 괴멸되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여전하군요.”
“억제제 문제 말인가.”
램파드는 시선을 책상 위 서류에 고정하며 대꾸했다.
“예. 라이에게 맡기신다더니, 그 녀석의 성적을 보면 무리일 듯하더군요. 이 성적대로라면 억제제 개발은커녕 가벼운 감기약조차 만들지 못할 겁니다. 무능력자는 이만 지원을 끊어 버리고 제거해 버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의 말에 램파드가 피식 웃었다. 사실 커틀러와 마찬가지로 라이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억제제 개발은 무리라도 약사가 된다면 남부 지방의 주요직을 하나 내려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애쉬와 함께 살아가는 데 무리 없을 터.
“라이 대신 내가 몇 배로 열심히 일하지 않나.”
“그 점이 못마땅한 겁니다.”
“정무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
가까이 다가온 커틀러가 램파드의 눈가를 문질렀다. 램파드는 그의 손길에 따라 살며시 눈을 감았다.
“요즘 제대로 쉬지 않으셨군요.”
마음 같아서는 서너 달은 커틀러와 단둘이서 보내고 싶었건만, 창관을 괴멸시키려는 계획을 실행하자 쉴 새 없이 서류가 몰아쳤다. 고대했던 신혼여행조차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둘만의 시간을 일주일밖에 가지지 못한 채 황궁에 돌아와 그 후로 램파드는 커틀러의 품이 아닌 종이 서류의 품에 안겼다.
이렇다 할 특산품이 없고, 관광 자원마저 없는 지역은 창관이 생존 수단이었다. 그런 지역의 땅을 개간하고, 알맞은 농작물 재배를 시작한다. 그마저도 없는 황폐한 땅은 가축을 기를 방안을 마련하든가 어떻게든 숨겨진 자원이나 관광지를 찾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가 생기자 제국을 튼튼하게 만들어야겠단 생각도 들었다. 램파드 때문에 루안은 다른 자들보다 어린 나이에 황위를 물려받아야 하니까. 그 점이 미안해서라도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힘썼다. 때문에 램파드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심지어 침대까지 서류를 들고 와 살펴볼 정도로 정무에 시달렸다.
“괜찮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다 끝내고 쉴 거야.”
눈을 뜬 램파드는 커틀러의 손길을 피해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이대로 그의 따스한 손길을 느낀다면 서류 따윈 다 내팽개치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지도 몰라 애써 외면했다.
“…억제제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건데요.”
“새 약을 만드는 것은 힘드니까 다른 방향으로 시도할 생각이다.”
억제 효과를 가진 재료를 새로이 찾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수확량을 늘리기로 했다. 있을지도 모르는 약재를 찾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더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별별 노력을 해 봤는데 수확량은 변함없었고 이 사안은 왕국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제국과는 다른 방법으로 작물을 재배하는 왕국과 손을 잡아 억제제에 들어가는 주요 약재의 수확량을 늘릴 방법을 찾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왕국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끝내지 말고 대륙 전체를 통일해 버릴 걸. 그러면 조금이라도 커틀러와 함께할 시간이 남을 텐데 말이다.
“억제제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 너는 이걸 받아라.”
램파드는 책상에 펼쳐 둔 서류 뭉텅이를 커틀러에게 건넸다. 그는 램파드가 전달한 서류를 들고 소파에 앉아 읽어 내렸다.
“지난번 도주한 조직의 두목이군요. 용케 찾으셨습니다.”
“나도 개인적으로 부리는 방법이 있으니까. 네 생각보다 쉽게 찾았어.”
다리를 꼬고 있던 커틀러가 램파드를 흘끗 바라보며,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그 방법은 저에게도 알려 주지 않으실 겁니까.”
“비밀 하나쯤은 간직해도 되지 않나.”
“기껏 부부가 되었건만 저에게 숨기는 사실이 있으시다니.”
“왜, 실망했어?”
“그럴 리가요. 당신이 숨긴 방법을 파헤치는 것도 하나의 재미죠.”
“이번엔 꼭꼭 숨겨 둘 테니까, 재주껏 알아봐.”
커틀러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램파드의 손이 빨라졌다. 그와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활력이 돌았기에 정체된 듯 멈춰 있던 서류를 살펴보며 커틀러에게 몇 마디 전했다.
“그 녀석들을 처리하면 더는 귀족이 뒤를 봐주지 않을 것이다.”
악당과 다름없는 조직은 제약 없는 큰 힘을 장점으로 내세워 귀족과 손을 잡았다. 이들의 주요 자금원인 인신매매단을 치면 더는 전처럼 힘쓰지 못하며, 내세울 강점이 사라진다. 힘을 잃은 조직의 뒤는 귀족들도 더는 봐주지 않을 터.
이번 일이 해결된다면 앞으로 램파드의 계획을 막는 장애물은 사라진다. 큰 문제를 하나 덜어내는 거니까 이제 램파드도 여유로워질 테지. 그러면 커틀러와 함께 쌓아 갈 시간이 생기는 것이다.
“이번에는 서부 지역입니까. 게다가 여기는 전염병으로 폐쇄해 유령 도시가 되어 버린 곳이군요.”
“맞아. 죽은 시신은 전부 화장해 공동으로 장례를 치렀고, 소도시 두 개는 뒤처리가 힘들어 통째로 태워 버린 그곳이다.”
커틀러의 말에 램파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창관을 없앤다는 계획을 위해서라지만 커틀러를 그런 장소에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고는 믿을 자가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잿더미 속에 은신처를 만든 겁니까. 징한 놈들이군요.”
“원래부터 그 지역은 지하 동굴이 있던 모양이더군.”
“알겠습니다. 당장 내일 출발하겠습니다.”
잔당 처리라고 하지만 아무한테나 쉽게 부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여 램파드의 진의가 귀족에게 들어갔다간 겨우 기껏 사이를 떨어뜨려 놓은 귀족과 조직, 두 세력이 다시 결탁하여 반발할지도 몰랐다. 조직의 힘이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진 방심할 수 없었다.
“부탁할게. 너밖에 없구나.”
“괘념치 마십시오. 폐하를 위해 움직이는 일은 그 어떤 것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내가 탐탁지 않아서 그런 거다. 로열 가드를 몇 명 데리고 가는 건 어떠하냐.”
팔을 다친 커틀러보다 자신이 직접 처리하는 것이 좋으련만. 황제가 홀로 은밀히 활동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해결해야 할 일도 쌓여 있고. 이럴 땐 황제의 자리가 성가실 정도로 램파드의 발목을 붙잡는다.
램파드가 건넨 문서를 한번 훑어본 커틀러는 완벽하게 암기한 후 양초의 불꽃을 입혀 재로 만들었다.
“괜히 폐하의 의도를 파악하는 자가 생기면 성가실 뿐이니 저 혼자 다녀오는 편이 좋습니다. 이 정도면 저 혼자 충분하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적어도 한스라도 데리고 가거라.”
“한스를 말입니까?”
“거긴 도시가 사라져 여관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 오랫동안 야영을 해야 하니 그에게 식사라도 만들라고 해라.”
“그러도록 하지요.”
“…조심히 다녀와.”
커틀러는 맥이 빠진 램파드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제 실력 아시잖습니까.”
“알아. 왼손도 능숙하단 거.”
“그렇다면 걱정 따윈 접으시고 웃으며 배웅해 주십시오.”
그의 실력에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을 텐데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램파드 본인의 가슴 안쪽에 자리 잡은 찜찜함은 커틀러의 신변이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커틀러를 배웅하는 길이니 꺼림칙한 마음은 떨쳐 내고, 웃음 대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보냈다.
커틀러를 보냈지만, 여전히 탐탁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혼자가 된 램파드는 생각에 집중했고 원인을 찾았다.
이 일은 램파드가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순간 각오한 맹세를 지키기 위한 램파드만의 소망이건만, 저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타인을 보내는 것이 떨떠름한 것이었다.
***
커틀러는 서부 지방의 조사를 위한 명목으로 파견되었다. 전염병을 막고자 빈 도시를 통째로 태워 버리는 바람에 주둔하는 기사단조차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예상 밖의 일이 발생해도 지원을 받을 수 없단 말이지만 실력에 자신 있기에 그 점은 개의치 않았다.
커틀러는 불태웠던 서류에 적힌 주소를 완벽하게 기억했고, 그를 토대로 지하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았다. 며칠 잠복한 결과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의 숫자와 규모 등을 알아냈는데, 램파드가 조사한 내용과 일치했다. 이제 커틀러가 할 일은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며 습격할 기회를 노리는 거였다.
며칠은 괜찮았지만, 하루 이틀 램파드와 떨어져 있는 나날이 길어질수록 커틀러는 갈증을 느꼈다. 물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원인은 당연하게도 램파드였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로 그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기쁨으로 가득했던 몸 안이 허전해졌으니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건 당연할 터.
“오늘 저녁에 습격하겠다. 너는 자리를 지키도록 해라.”
“돌격일은 내일이지 않습니까?”
“너는 이런 곳에 하루 더 있고 싶은 건가.”
한스는 꽤 오랜 세월 커틀러를 보좌했지만, 그가 계획을 수정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평소답지 않은 주인의 대답에 사뭇 놀랐지만 구태여 티를 내진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으니까. 서로를 원하는 마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램파드가 건넨 서류에 적혀 있던 습격 최적일은 내일 밤이었다. 얄쌍한 그믐달이 뜨는 날이라 어둠을 이용해 급습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며칠 살펴본 결과 그들은 검술 실력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둠 따위 없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거다.
다음 날 커틀러는 야영지에 한스를 홀로 두고, 조직원의 본거지인 지하 동굴로 향했다.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황량한 도시. 따로 보초를 서야 할 필요가 없는지라 입구를 지키는 자는 몇 명 없었다. 커틀러는 그들을 손쉽게 제거해 안으로 들어갔다. 문제는 중간 지점부터 적들이 뭉쳐 있었단 거지만 커틀러의 실력으로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두 명의 시체를 만들어 낸 커틀러는 왼손에 쥔 검을 가볍게 흔들어 봤다. 확실히 오른손보다 불편했다. 자신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곳에 똬리를 튼 조직원 중 커틀러의 실력에 비견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화… 화이트 테일의 커틀러 콘테?”
이곳에 잠입하여 열세 번째로 만난 검사가 커틀러를 향해 소리쳤다. 드문 색상의 머리와 눈으로 커틀러의 정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번 적은 기사단에 몸을 담고 있었는지, 다른 자들에 비해 움직임이 괜찮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커틀러는 자신을 알아보는 상대의 말을 무시하며 검을 곧게 내질렀고 그의 이마를 꿰뚫었다. 또 하나의 시체가 만들어졌고, 무덤덤하게 그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정말, 시시할 정도로 따분한 일이었다.
램파드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롭고 고양되건만 그의 곁을 떠나면 모든 것이 하찮아지며 지루해진다. 너무나도 무료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램파드를 보고팠다. 그를 자신의 품에 가두고, 온종일 껴안고 싶었다. 매번 욕심내서 그를 안아도 부족하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둘만의 공간에서 램파드를 탐했으면. 상상만으로도 몸속의 피가 말라 버리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고, 이딴 일은 빨리 끝내고 하루라도 빨리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램파드를 갈구하는 욕망이 거세지자 목숨을 아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조차 배제된다. 위험해지든 말든, 1분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남은 적을 한꺼번에 소탕하기로 했다.
커틀러는 손에 쥔 단단한 검집으로, 지하 동굴의 벽을 지속해 내리치며 걸었다. 깡, 깡, 깡. 튼튼한 검집이 동굴 벽에 부딪힐 때마다 큰소리를 냈고, 메아리가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졌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자신의 위치를 알렸건만, 일정한 박자로 울려 퍼지는 정체불명의 소리는 오히려 적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크읏, 네놈은 누구냐!”
남은 여덟 명은 큰 소리를 듣고 모두 한데 뭉쳐 있었다. 자기들 딴에 방어진을 짜고, 경계했지만 커틀러의 눈에는 모래성과도 같았다. 발을 들어 올려 툭 치기만 해도 허물어질 듯한 모양새였다.
“정말 귀찮군.”
그는 중얼거리며 검집을 허리에 꽂았다. 적들이 잔뜩 경계하며 자신을 바라보건만 커틀러는 천천히 태연하게 채비를 끝마치고 검을 뽑았다. 검집에서 단단한 검을 빼내자 적들이 비명 질렀다. 잔뜩 피를 묻히고 흉기를 빼 든 사내의 모습은 두려울 수밖에.
“시끄러워.”
그렇게 생각했지만, 커틀러가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를 탐하고 싶은 마음에 환청이라도 들었나. 그렇다고 하기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의 존재가 너무나도 컸다.
“돌격일은 내일이었는데, 하루 먼저 달려들다니. 뭐가 그리 성급해?”
“…폐하.”
“게다가 암살자가 큰 소리를 내며 진입하다니, 네가 미친 줄 알았어.”
램파드는 덤덤한 표정으로 선 커틀러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곤 한마디 더 붙였다.
“하긴, 원래 미친놈이었지.”
램파드는 소란스러운 적들을 한번 흘끗 바라봤다. 상대편의 숫자가 두 배 이상 많건만 두려움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기를 꼬나든 모습이 하나같이 어색해 램파드의 눈에는 어린아이가 부지깽이를 든 모습과도 같았다.
시선을 둘 가치도 없어, 그런 그들을 향해 피식 웃고 커틀러를 다시 바라봤다.
“여긴 뭐하러 오셨습니까.”
“너와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함께 돌격할 생각으로 찾아왔지. 왜, 방해돼?”
램파드는 자신의 큰 소망이 종착지에 다다라, 스스로 끝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떻게든 커틀러와 단둘이 있고 싶기도 했고.
“그런 건 아니지마는, 로열 가드를 이끌고 오신 겁니까.”
“아니. 혼자 잠행 나왔어.”
커틀러는 램파드의 위아래를 흘끗 바라봤다. 잠행에 걸맞은 수수한 정장이지만 램파드가 손수 고를 리 없는 옷이었다. 그가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의 의미를 아는 램파드가 입을 샐쭉 내밀었다.
“네 충고를 받아 시종들에게 옷을 고르라 명했다.”
“잘하셨습니다. 하마터면 제 시야가 멀어 버릴 뻔했군요.”
“…하, 쓸모없는 잔소리를 하면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갈 거다.”
램파드가 코웃음을 쳤고, 커틀러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입을 다물었다. 커틀러가 입을 다물자 램파드가 신난 듯 떠들었다.
“시키는 대로 조용히 있으면 이딴 일은 빨리 끝내고, 본래 내 계획대로 하룻밤을 보낸 뒤 내일 함께 황궁으로 돌아갈 거다.”
그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지키자 만족한 램파드는 적들 앞에 나섰다.
“네놈은 누구냐!”
“짐이 너희들의 질문에 답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적들을 향해 비웃음을 머금은 램파드가 턱을 치켜들며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영문 모를 습격을 당한 조직원들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굴 입구에서 사람이 죽는 단말마가 들렸고, 정체불명의 큰 소리가 지속해서 나서 겁이 났다.
하지만 램파드를 보자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이상하게 피가 끓으며 활력이 도는 느낌이었다.
“잠… 잠깐. 저 얼굴 어디선가, 낯이 익어!”
두 번째로 등장한 사내는 커틀러와 달리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멀끔했다. 그렇기에 화사한 미남자의 모습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는데, 마치 자신들의 목을 쳐 하늘로 끌고 갈 듯한 아리따운 천사의 모습이었다.
폐하라는 칭호와 뒤늦게 등장한 금발 사내의 뛰어난 외모. 제국 절세의 미인이라는 남자가 떠올랐다.
“램파드 황제?”
“그렇다. 제국을 다스리는 자가 너희들 눈앞에 있는 짐이도다.”
“어째서 여… 여기에 황… 황제가!”
“짐의 황후를 만나러 왔지.”
그의 말에 적들의 시선이 커틀러에게 쏠렸다. 대번포드 백작이 죽고, 이제 우성 알파는 대륙에 둘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베타 황제의 황후로 들어갔단 사실은 다들 익히 알고 있었다.
“시선을 거두거라. 감히 짐의 알파에 허락도 없이 시선을 두는 것이냐.”
무게감 있는 램파드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적들은 위엄 있는 어조에 커틀러를 향한 시선을 황급히 떼어 냈다. 그들은 램파드의 신하가 아니지만, 대륙 일인자의 목소리에 반항하기 힘들어 순종했다.
커틀러를 향한 시선을 떼어 낸 적 중 하나가 뒤늦게 용기가 샘솟는지 램파드에게 대들었다.
“황… 황실에 뇌물을 그렇게나 바쳤건만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것이오!”
그 말에 램파드는 허리춤에 고정한 주머니를 풀어 던졌다. 얇은 끈으로 묶인 주머니는 바닥과 충돌하며 터졌고 촤르륵, 속에 든 검은 보석을 내보였다.
그것은 대륙에서 가장 귀하다는 검은 보석으로, 한 알로 저택 여러 채는 지을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그런 값나가는 보석으로 주머니 안이 빼곡히 채워져 있으니, 저 정도면 작은 소국을 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건 전부 돌려주지. 목숨이 위험하단 생각에 이런 걸 재빠르게 찔러 넣을 줄이야. 덕분에 너희들의 위치를 손쉽게 파악했다.”
램파드의 아버지인 선대 황제는 창관의 조직과 손을 잡아 부를 쌓았다. 그들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수많은 뇌물을 받아먹었으며, 그건 램파드에게도 이어졌다. 램파드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적들을 쳤다.
몇 년간 얌전히 뇌물을 받아먹기만 했으니 그들은 이번 황제도 자신을 돌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뒤통수를 칠 발톱을 숨긴 줄도 모른 채.
“큭… 황제가 창관을 쳐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있지.”
“있을 리가 없지요. 몇 년간 뇌물을 얌전히 받아먹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의 돈으로 배불러 놓고서 인제 와서 배신하다니!”
“짐은 너희들이 건넨 보석 따윈 하나도 삼키지 않았다. 맡은 걸 돌려줄 테니 가지고 가거라.”
그들은 램파드가 던진 주머니를 흘끗 봤다. 묵직하게 채워진 것으로 보아 몇 년간 건넨 양 그대로였다.
“보석을 하나도 쓰지 않을 리가……. 전쟁 후 도시를 재건하는 데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맞아. 몇 년간 고생 꽤 했지.”
밤낮 정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들이 건넨 검은 보석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창관을 없애겠다고 마음먹은 마당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제국을 가꾸는 건 램파드에겐 굴욕이나 다름없으니까.
눈앞에 저택 몇백 채가 흩뿌려져 있건만 그들은 주워 갈 생각을 못 하고 램파드를 주시했다. 적들을 향해 조소를 짓던 램파드가 발로 주머니를 뻥 차서 그들 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중 일부는 날아가는 도중 이곳저곳으로 튀어나왔다.
“또 하나 너희들을 칠 이유가 더 있지. 짐은 오메가라 창관이 신물 날 정도로 혐오스럽다. 그러니, 보석 보관료는 네놈들의 목숨으로 받도록 하겠다.”
이야기를 듣던 적들은 머리에 제대로 입력되지 않는지, 램파드의 말을 믿지 않고 경계했다. 램파드가 감별지를 물지 않는 이상 진실을 밝혀도 믿지 않는 자가 대부분일 것이다. 오메가가 모두의 머리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몇 없을 테니까.
램파드의 폭탄 같은 발언에 커틀러는 깊게 한숨을 쉬고 손에 쥔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커틀러의 행동을 흘끗 바라보던 램파드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왜 집어넣나.”
“제가 나설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 이야기까지 하셨으니 적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제거하겠단 뜻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마는. 정말로 돕지 않을 텐가.”
“예. 한동안 책상에 얌전히 앉아 계셔 답답하지 않으셨습니까. 마음껏 날뛰십시오.”
커틀러는 램파드의 실력을 믿었다. 자신이 돕지 않아도 머리카락 한 올도 해치지 않고 적들을 모두 섬멸할 테지. 혹여 그들이 램파드에게 생채기를 낸다면 분풀이는 남은 가족들이 받을 테고.
“너랑 할 체력은 남겨 둘게.”
“움직일 힘이 남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리를 쳐올리는 건 제가 하는 일이고, 폐하께서는 얌전히 받아들이시면 되니까요.”
적들 앞에서 시시콜콜 떠들던 커틀러가 한 손을 허리에 짚고, 동굴 벽에 등을 기댔다. 축 처진 반대 팔은 어깨 망토에 자연스레 가려졌다.
램파드가 난입하여 자기 일을 가로챘지만,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가상할 지경이었다. 창관을 없애는 건 램파드가 간절히 바라던 일 중 하나였다. 그라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없애길 바랄 테니까. 이번은 얌전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내버려 뒀다.
“에잇, 적은 둘밖에 없다. 얘들아, 모두 쳐라!”
검이나 창을 꼬나든 적들이 방어진을 짠 채 달려들었다. 자신의 검을 꺼내 든 램파드가 커틀러 앞에 섰다.
동굴 벽에 편히 기댄 커틀러는 다가오는 적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죽으러 달려드는 불나방에 관심을 주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태양에게 달려들어 곧 형체도 없이 타 버릴 나방보단 램파드를 감상하느라 바빴다.
커틀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오메가가 마음껏 활개 치는 장면을 즐겁게 감상했다.
이 일이 끝나면 이제 창관을 없애는 건 시간문제였다. 억제제라는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마는 램파드라면 머지않아 돌파구를 찾겠지. 그의 소망이 다 이루어진다면 그때야말로 커틀러의 바람을 이룰 시간이 찾아온다.
타는 듯한 갈증을 채워 넣어 줄 때까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램파드와 함께 시간을 공유하며, 밤새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는 소망을.
3
램파드가 부탁한 서부 지역의 일을 끝마친 커틀러는 황궁에 복귀하자마자 새로운 임무를 받아 먼 곳으로 떠났다.
창관의 문제는 대부분 해결했고 이제 남은 것은 억제제였는데 이는 제국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왕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고, 늙은 왕은 램파드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램파드는 자신을 지지하는 아쥴린 공주를 도와 그녀를 왕위에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제안을 받아들인 아쥴린 공주에게 신분을 위장한 커틀러를 은밀히 보냈고, 그렇게 몇 달간 헤어져 지내다가 겨우 다시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무사히 임무를 끝마치고 온 커틀러는 또 기사단의 업무에 치였고 키스조차 만족스럽게 나누지 못한 시간만 계속됐다. 이 날도 한 침실을 함께 사용하고 날이 밝는 대로 각자의 일터로 향했다.
화이트 테일 기사단 본부 건물의 최상층은 커틀러의 집무실이었다. 양손을 쭉 뻗어도 끝이 닿지 않는 널찍한 책상 위는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류가 빼곡히 채워져 있으며, 자리에 앉은 커틀러가 하나하나 살펴보는 중이었다.
“부탁하신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 부기사단장이 건넨 서류를 조용히 받아 든 커틀러는 문서를 읽어 내렸다. 바쁜 커틀러와 달리 오늘 할 일을 끝낸 부기사단장은 입이 심심한지 허락도 없이 떠들었다.
“단장님의 부모님이 다시 합치셨다면서요?”
귀족 사회는 좁아 작은 소문이라도 빠르게 돈다. 클로비스 황가 소속이 되어 버린 커틀러를 대신해 전 공작이 다시 콘테 공작이 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공작 부부가 집을 합쳤단 이야기까지 함께 돌았다.
부모님의 이야기지만 관심이 생기지 않아 커틀러는 일에 집중했다.
“사실 두 분이 다시 합쳐지기 전 아이를 만드셨단 소문이 더 뜨거워요.”
커틀러는 여전히 답이 없었고, 부기사단장은 혼자 열심히 떠들었다. 진심으로 거슬렸다면 커틀러는 사라지라고 명령을 내렸을 터.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듣는 거라면 더 말해도 되는 거였다.
“단장님도 이제 내일 모레면 서른인데, 동생이 생기시다니……. 알고 보면 단장님의 숨겨 놓은 자식 아니에요?”
저 혼자 떠드는 건 봐주겠지만, 실속 없는 이야기는 거슬렸다. 커틀러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부기사단장을 바라봤다. 아무런 감정 없는 듯하지만, 원체 날카로운 시선을 가졌기에 상대는 양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농담입니다. 그렇게나 원하셨던 램파드 폐하와 혼인을 하신 마당에 숨겨진 아이 같은 게 있다면 큰일 나겠죠.”
“쓸모없이 입을 놀릴 시간이 있다면 밖에 나가 수습 기사들이나 살펴보거라.”
“저는 온종일 기사들을 훈련했다고요. 오늘은 이만 쉬고 싶습니다.”
팔짱을 끼고 툴툴거리는 부기사단장의 불평을 무시한 커틀러는 서류에 서명을 넣고, 봉인했다. 커틀러의 일이 끝남을 확인한 부기사단장은 잠깐 다물었던 입을 다시 뗐다.
“한 번쯤 단장님의 동생분을 데리고 와 주세요.”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나.”
“어린아이는 다들 어여쁘지 않습니까. 거기다 단장님의 동생이니까 무진장 예쁠 것 같단 말이죠. 헉, 황제 폐하!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건들건들하던 부기사단장은 시종을 거느리며 방문한 램파드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곧게 펴고 인사를 올렸다. 봉인한 문서를 책상 한 귀퉁이에 던진 커틀러는 램파드를 흘끗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램파드가 부탁한 일을 끝낸 커틀러는 귀환과 동시에 왕국으로 보내졌다. 헤어지기 전 종일 끌어안고 뒹굴었지마는 그 정도로는 한참 부족했다. 램파드는 커틀러를 보고픈 마음에 없는 시간을 쥐어짜 화이트 테일 본부에 찾아온 것이었다.
커틀러야 램파드를 볼 수 있으니 기쁘지만, 솔직히 기사들에게는 곤욕이었다. 상관 하나만으로도 바짝 정신 차려야 하는데, 황제가 직접 찾아오니까 불편한 게 당연했다.
램파드는 자신을 향해 부자유스러울 정도로 허리를 굽힌 부기사단장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자가 저렇게까지 깍듯이 굴진 않았는데, 무언가 찔리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 들떠 있다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느냐.”
램파드의 목소리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자, 부기사단장은 잔뜩 긴장했다. 램파드로서는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지만, 부기사단장은 다그치는 것으로 느꼈다.
혹시, 커틀러에게 수작 부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는 알파를 덮치는 취향 같은 건 없사옵니다. 그러니 노여움 마십시오, 라고 당장 외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커틀러에게 목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럴 땐 사실대로 고하는 편이 좋다.
“콘테 공작 부부께서 낳은 아이에 관해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아, 커틀러의 동생 말인가.”
램파드는 동생을 강조하며 커틀러를 흘끗 바라봤다. 그는 부러 쓸데없는 소릴 꺼낼 위인이 아니니 부기사단장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이리라. 황성에 돌고 있는 가십거리를 당사자 앞에서 내뱉다니, 부기사단장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그의 동생이 어쨌다고 그러느냐.”
“별건 아니고 한번 보고 싶어서 데려오라 부탁드렸습니다.”
“경이 아이를 좋아했었나?”
램파드의 기분이 평소와 같단 걸 알게 된 부기사단장이 딱딱한 자세를 조금 펴며 말했다.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폐하, 단장님의 동생이라지 않습니까.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램파드는 턱을 치켜들고 무덤덤하게 서 있는 커틀러를 바라봤다. 그는 매일 콘테 저택으로 돌아가 루안을 보고 안는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잠깐 만나는 것이 전부인 램파드로서는 부러워 마지않는 일이었다.
“짐도 클로비스 단장의 동생이 궁금하군. 한번 황성에 데리고 오는 것은 어떤가.”
“그 아이는 아직 한 살밖에 안됐습니다.”
잔트가 보낸 편지에는 요즘 루안은 옹알이와 함께 일어서는 것까지 한단다. 직접 눈으로 보고픈 램파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궁과 콘테 공작가는 가까우니까 괜찮지 않으냐.”
무심하게 자리를 지키던 커틀러의 눈썹 사이가 한없이 좁아졌다. 일직선으로 닫혀 있는 입은 열리지 않았지만, 커틀러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절대로 안 된다고, 눈빛으로 말하는 커틀러의 의사를 무시한 램파드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자네 동생의 안전이 걱정된다면 그 날은 짐이 직접 호위를 맡도록 하겠다. 그러면 불만 없겠지?”
“어린아이는 손이 많이 갑니다. 아무래도 정무가 많으신 폐하께서 신경 쓰신다면 피로하실 겁니다.”
“마침 내일은 백작 부인의 주최로 가든 파티가 열릴 예정이다. 장성한 자식이 집을 나가 버려 외로워진 귀부인들이 대부분이니, 아이를 잘 돌볼 테지.”
담소를 좋아하는 백작 부인은 황실에 요청해 장미꽃이 화려하게 핀 정원을 통째로 빌렸다. 소수로 운영되는 가든 파티의 참석자는 램파드가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콘테 공작 부인도 참석하면 되겠군. 요즘 친분을 쌓는다며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 잦다고 들었다.”
“초대장은 왔습니다. …저한테도 한 장 왔지요.”
“마침 짐을 만나기 위해 백작 부인이 황궁을 방문했다. 답장을 보낼 필요 없이 바로 전달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공식적으로 커틀러는 램파드 황제의 황후로 되어 있기에 잔트는 물론 그 또한 초대장을 받았다.
솔직히 모자 모두 바깥에 나가 노는 것보다는 집에서 루안을 돌보는 일이 훨씬 더 즐겁다. 그렇기에 무시했건만 이렇게 참석해야 한다니.
커틀러의 입매는 공손한 듯하지만, 불쾌함이 가미되었고 램파드는 그 점을 인지했다. 그가 언짢음을 숨기지 않아도 물릴 생각 없다. 어쩌다 한번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당장 콘테 저택으로 달려가 루안을 안아 들고 싶은 생각뿐인데, 매일 얼굴을 보는 커틀러에게 한 번쯤 고집부려도 상관없을 터였다.
화려한 여름 꽃이 활짝 핀 정원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에 한껏 고양되었다.
“잔트 공, 아이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루안이라고 합니다.”
잔트의 품에 안긴 루안은 자신을 둘러싼 귀족들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호기심 많은 아이는 낯선 사람에게 둘러싸였는데도 울지 않고, 오히려 방실방실 웃었다. 루안의 미소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웃는 것 좀 봐요. 두 형제 모두 잔트 공을 닮아서 이렇게나 예쁘네요.”
루안을 살피던 다른 귀족은 멀리 떨어진 커틀러를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램파드의 명령으로 가든 파티에 참석한 커틀러는 다양한 디저트가 차려진 테이블에서 떨어져 루안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담소를 위해 참석했다기보다는, 무장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지키기 위해 경비를 서는 모습이었다.
입을 다물고, 기둥에 기대 있는 그는 화이트 테일의 단장복을 입고 있었는데, 기다란 코트 자락이 바람에 나부낄 때마다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잃어버린 한쪽 팔이 부자연스럽게 축 처져 있지만 워낙에 출중한 걸작에게 작은 흠조차 되지 않는다. 시선에 찔릴까 봐 피해 다녀서 그렇지 커틀러 또한 탄식이 절로 나오는 근사한 미남자가 확실했다.
“하긴, 램파드 폐하가 없었더라면 대륙 최고의 미인이라 불릴 사람은 클로비스 단장이었을 테니까요.”
모인 귀족들은 다들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맞는 말이었기에 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조차 하는 자가 없었다.
“그나저나 정말 아쉬운 일이네요. 램파드 폐하와 클로비스 단장의 사이에서 아이를 볼 수 없다니 말이죠.”
루안을 바라보는 귀족들을 향해 웃던 잔트가 커틀러를 흘끗 바라봤다. 그는 인상을 그으며 불쾌하단 감정을 숨김없이 표하고 있었다. 아들의 성격을 익히 아는 잔트는 차라리 커틀러를 보내는 게 낫다 판단했다.
“커틀러.”
잔트의 부름에 커틀러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커틀러에게 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잔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살짝 허리를 굽힌 그는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기운이 조금 사그라든 모습이었다. 그 기회를 놓칠라. 곁에 있던 귀족들은 미의 순으로 나열하면 대륙에서 이인자라 의심치 않을 커틀러를 꼼꼼히 바라봤다.
그는 귀족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없앴던 경계를 다시 둘렀고, 염탐하듯 바라보던 자들은 부채를 부치는 시늉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님.”
“네가 직접 폐하를 모셔 오는 건 어떠니.”
“알겠습니다.”
루안이 황궁에 도착했단 소식은 이미 램파드의 귀에 들어갔을 터. 찾아오지 못하는 건 일이 쌓였다는 뜻이었다. 시종이 가 봤자 일이 줄어들지 않을 테니, 잔트는 도움이 될 커틀러를 직접 보냈다.
잔트의 예상대로 램파드는 왕국과 개시할 무역 건으로 머리를 싸매는 중이었다. 커틀러의 방문을 확인한 램파드는 곧바로 고개를 떨구고 서류에 집중했다.
커틀러는 램파드가 대충 섞어 놓은 서류를 몇 장 들어 올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살펴봤다. 무역을 시작하려면 왕국의 해역을 이용해야 하고, 해상 경비 사용 관련으로 왕국과 사소한 마찰이 발생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애써 왕국과의 합의점을 찾을 필요 없이 그냥 강제로 해역을 뚫으라 협박하면 될 터인데. 기껏 유지되는 평화가 깨지는 걸 원치 않는 램파드는 제 몸을 혹사해 정무에 시달렸다.
“폐하의 고집대로 루안을 데리고 왔건만 계속 집무실에 틀어박히실 생각이십니까?”
“나도 당장 만나러 가고 싶다.”
커틀러는 읽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건 자신이 돕는다고 하여도 한두 시간 만에 끝낼 안건이 아니었기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램파드의 손놀림을 바라봤다.
램파드가 쥔 펜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루안을 만나러 가고 싶은 생각에 손이 앞서가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서둘러서야 일을 그르치고, 제시간에 끝낼 일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할 게 뻔했다.
상의도 없이 루안을 황성에 데리고 오라 명한 것에 대해 보복할 생각이지만, 램파드는 이미 어느 정도 죗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한스.”
“예, 주인님.”
램파드를 도와 자료를 정리하던 한스는 커틀러의 손짓에 따라 집무실과 연결된 테라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막혔던 빛이 집무실 안으로 쏟아져 내리지만, 서류에 집중한 램파드는 신경 쓰지 않고 글을 써 내렸다. 한스가 뒤로 물러났고, 커틀러는 테라스에 기대 아래를 살펴봤다.
황궁의 가장 높은 층에 있는 황제의 집무실은 여름이 만든 걸작인 장미 정원을 감상하기 적절한 명당이었다. 한 잎, 한 잎 활짝 펼쳐져 품고 있는 수술을 내보인 장미가 만발한 정원은 멀리서도 짙은 꽃향기가 날 정도였다.
모든 사람의 눈길을 훔칠 것 같은 정원의 아름다움도 커틀러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미련도 없이 고개를 돌려 장미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커틀러의 시선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램파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저리 뻘뻘 대는 램파드는 아카데미 이후로 처음 보는 듯했다. 다소 귀여워 보일 정도의 모습에 커틀러는 피식 웃었다.
“너는 나가 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한스는 커틀러의 명령에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자리를 비켰다.
글씨와 싸우고 있는 램파드는 커틀러가 시종을 물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끙끙대는 중이었다.
“폐하, 이리 와 보십시오.”
“바빠.”
낮은 한숨을 쉰 커틀러가 램파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에 붙잡힌 서류를 빼앗았다. 공중에서 멈칫한 램파드의 손이 책상에서 커틀러의 손으로 따라 이동했다. 커틀러는 들어 올린 서류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고 램파드의 손과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그 고생을 해서 창관의 뒤를 봐주는 조직을 모조리 제거했는데도 아직도 일이 쌓인 겁니까.”
서류를 따라 움직이던 램파드의 손이 얌전해졌다. 빼앗긴 서류를 되찾는 걸 포기한 램파드는 지친 듯 중얼거렸다.
“갑자기 생긴 일이다.”
“지금 이걸 들고 머리를 싸매 봤자 오늘 안에 끝내기는 무립니다. 테라스에서는 루안이 보이니까 움직이십시오.”
집중이 끊긴 램파드는 눈을 내리깔며 쌓여 있는 서류를 바라봤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해 밤새 매달렸지만, 절반도 채 끝내지 못했다. 커틀러의 말이 맞다. 갑자기 쏟아진 안건인 만큼 준비한 자료가 적었고, 오늘 안에 끝내긴 글러 먹었다. 램파드는 손에 쥔 펜을 잉크통에 대충 쑤셔 넣으며 의자에 편히 기대 눈꺼풀을 꾹 눌렀다.
“…피곤해.”
말하지 않아도 고단해 보이는 램파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고, 양팔을 걸쳐 늘어졌다. 단단한 테라스 손잡이에 몸을 지탱한 램파드는 눈알만 굴려 정원을 주시했다.
분홍색 장미들이 핀 정원의 한 중앙에 여름 꽃만큼이나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천으로 만든 꽃바구니 사이에 꽃망울같이 자그마한 은빛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잔트의 옷자락을 쥔 루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귀족들을 향해 자그마한 얼굴을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아이의 작은 행동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좀 더 편히 테라스에 기댔다. 함께 저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들 루안을 보며 뭐라고 하던가.”
어느새 다가온 커틀러가 램파드의 곁을 지켰다. 커틀러는 고개를 숙여 램파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색색의 정원보다 램파드에게 더욱 관심이 갔다.
“어머님을 닮아 미인이라 하더군요.”
“…내가 낳은 자식이건만.”
“잘 압니다. 폐하를 닮았으니 미인인 거죠.”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램파드는 낮은 소리로 툴툴댔다.
콘테 저택에 방문한 귀족들은 입을 모아 커틀러 수준으로 아름답다며 칭찬한다. 진짜 아버지인 커틀러의 눈에는 아직 자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훨씬 더 빼어나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아니 훨씬 더 램파드가 사랑스럽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 순간마다 새로운 기분을 선사한다. 커틀러는 매번 경신되는 그의 모습을 잠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램파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루안에게 시선을 빼앗긴 램파드는 자신 곁에 선 커틀러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 것을 보지 못했다.
“아직 걷지는 못하는 건가?”
“예. 저녁마다 걸음마를 연습을 시키고 있습니다. 아직 다리에 힘이 없는 것 같더군요.”
“이상하군. 나나 널 닮았으면 체력이 좋을 텐데.”
램파드의 말에 커틀러는 피식 웃었다. 분명 아카데미에 갓 입학한 램파드의 몸은 근육량이 적고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했다. 고된 훈련으로 만든 단단한 몸이란 것을 잊은 모양이다.
“검술 훈련을 시키기 전에 체력부터 길러야겠군.”
“루안에게 검술을 가르치실 생각입니까?”
“스스로 몸을 지킬 정도는 돼야 안심하지.”
“호신용 검술은 제가 가르칠 수 있습니다. 명령하신다면 그 이상도.”
“왕국 검술을 가르치려고? 그건 안 돼.”
커틀러는 주로 사용하던 오른손을 잃었지만, 왕국 검술은 한 손만을 이용해 구현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오른손으로 검을 잡았을 때와 달리 위력은 약해졌지만 제 한 몸 지키고, 적을 쓰러뜨릴 실력은 충분히 된다.
남을 가르치는 것 또한 무리 없는데 램파드는 한 손을 휘휘 저으며 거부 의사를 표했다.
“폐하만큼은 아니지만 제 검술도 꽤 쓸 만합니다. 왼손이 익숙해진 지금은 어지간한 검술 교사보다 제가 더 낫습니다.”
“네 실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왕국 검술은 한 명씩밖에 상대 못 하잖아. 다수 전에서 불리해.”
“높은 곳에서 지휘하는 사람이 다수에게 둘러싸이는 경우는 뭔지 아십니까.”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라가 멸망할 때겠지.”
“잘 아시는군요.”
“루안이 황금관을 썼을 땐 그런 위협 따윈 조금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제국을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하게 만들어 둘 테니까.”
말뿐만이 아닌 것이 램파드는 1년 새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게 제국의 국력을 튼튼하게 만들었고, 대신 건강을 깎아 먹은 듯했다.
커틀러는 그 점이 못내 불만이지만 램파드가 그렇게나 원하는 일이라 묵묵히 도왔다.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기를 쓰며 몸을 혹사할 테니, 차라리 그냥 곁에서 돕는 편이 나았다.
이런 커틀러의 마음을 아는지. 램파드의 머릿속은 일 생각뿐이었다.
좀 더 일해야 하건만 고달픈 램파드의 몸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니 피곤이 몰려왔고, 램파드는 테라스에 늘어졌다. 빛을 쬐어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지, 램파드는 머리까지 테라스에 눕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차라리 왕국 전부 멸망시키고 대륙을 통일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또다시 전쟁에 나가는 건 싫어. 뭐, 왕국이 우호적이니 구태여 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기도 하니까. 오히려 내부의 적을 신경 써야지.”
“그래서 결론은 제국 검술을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여러 명의 암살자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루안은 꽤 젊은 나이에 즉위할 거니까…….”
커틀러는 램파드의 방침에 수긍하지 않지만 반론 대신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루안은 콘테 저택에서 자랄 테고, 램파드가 어찌한다며 해 봤자 커틀러 마음대로 가르치면 된다.
커틀러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램파드는 남은 체력을 긁어모아 루안에게 집중했다. 잔트에게 꼭 붙어있는 루안을 보자 무언가 먹먹해졌다. 피를 이은 가족은 자신인데, 내가 낳은 자식이건만. 다른 사람의 아이로 포장하고, 원할 때 만날 수도 없다니.
램파드는 탐스럽게 핀 장미꽃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은발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안지 못해서 아쉬우신 겁니까?”
“됐어……. 내가 안으면 울기만 하는걸.”
태어난 지 1년이 된 루안은 램파드가 안아 들면 울기 바빴다. 처음에는 서툰 램파드의 손길이 달갑지 않아 우는 것 같았는데, 지난달 아이의 표정을 보고 파악했다. 루안은 램파드를 싫어한다.
루안을 배 속에 품고 있을 때, 램파드는 이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커틀러의 아이란 사실을 빠르게 알았더라면, 낙태해 태어나지도 못할 아이였으니까. 루안은 그런 부정의 감정을 기억하는지, 램파드를 거부했다.
그렇기에 더욱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으면 한다. 잠깐이나마 나쁜 생각을 품었던 것을 잊을 수 있도록. 많은 시간을 공유하며 사랑해 주고 싶건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대로 점점 더 멀어지고 회복되지 않을 정도로 골이 깊게 패이겠지.
“루안이 나를 계속 미워하면 어쩌지.”
테라스에 기댄 램파드의 어깨가 축 처지고, 한층 더 힘이 없어 보였다.
“루안이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되면 셋이서 여행을 떠나도록 하죠.”
“어디로?”
“어머니가 사용하신 남부 지방의 별장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처분한다고 하지 않았나.”
“추억이 있는 곳이니 팔고 싶지 않아 그대로 뒀습니다. 시종을 몇 명 남겨 두어 꾸준히 관리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가서 지내도 괜찮을 정도로 깨끗합니다. 이번 왕국과의 무역이 체결되는 즉시 떠나도록 하지요.”
“그래.”
이번 일만 제대로 성사된다면 이제 램파드가 신경 쓸 일은 없었다. 억제제 문제를 해결하고, 창관을 없애면 산처럼 쌓여 있는 일과도 헤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아이와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을 터. 램파드는 하루라도 빨리 그 날이 오길 바랐다. 이렇게 짬짬이 커틀러를 만나며 사랑을 속삭이지만, 한없이 부족하다. 그를 향한 마음은 사랑한단 한마디로 부족하니까. 온종일 껴안으며 너가 좋다고 행동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을 제 품에 가둘 테지.
생각만으로도 봄바람을 맞이하는 듯, 마음이 포근해진다. 조금은 기운이 난 램파드가 답했고, 커틀러가 어깨를 감쌌다.
“폐하의 고집대로 루안을 데리고 왔으니까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원하나?”
그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일 셈인지 램파드의 엉덩이에 하반신을 밀착했다. 몇 번이나 품어 본 적 있는 단단한 살덩이가 엉덩이를 꾹 누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피곤하다 했잖아…….”
“아직 일을 다 끝내지 않으셨으니까 오늘은 온종일 피곤하실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체력이 남았을 때 해야지요.”
얼마 남지 않은 체력으로 일해야지 섹스하는 데 사용한다면 오늘은 종일 침대 신세일 것이다. 우선순위는 서류였지만 일에 지친 램파드는 거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커틀러의 손길을 가만히 즐겼다.
사실, 램파드 또한 오랜만에 느끼는 커틀러의 손길이라 크게 거부하고픈 생각까진 없었다. 오히려 환영이었다.
그는 가슴으로 램파드의 등 뒤를 지그시 눌렀고, 목 뒤에 입을 맞췄다. 쪽, 커틀러의 입술이 램파드의 살결에 닿고 떨어질 때 짧은 입맞춤 소리가 난다. 램파드는 경쾌한 입맞춤 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고집을 들어줬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말캉한 입술 감촉에 집중하며 늘어졌다.
드러난 램파드의 살결을 입술로 희롱한 커틀러가 떨어지자, 램파드는 소파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집무실에서 관계를 맺을 법한 곳은 책상이나 소파뿐이니까. 책상은 서류가 많아 체액이 튀기라도 하면 기껏 처리한 일이 엉망이 되어 버리니 소파가 제격이었다.
“잠깐, 여기서 하자고?”
아래로 내려간 커틀러의 손길에 깜짝 놀란 램파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커틀러는 이미 이성의 끈을 내다 버렸는지, 눈매가 날카로우며 숨결이 거칠었다.
“피임약도 안 먹었어.”
풀린 고삐를 묶고자 꺼낸 말이지만 커틀러에게는 소용없었다. 오히려 기폭제가 된 듯, 궁둥이에 닿은 성기가 점점 흉흉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천을 뚫고 박아 넣을 것만 같았다. 흉기 같은 그의 페니스라면 얇은 천 따위 뚫을지도 몰라 램파드의 몸이 긴장해 뻣뻣해졌다.
“잘됐군요. 이 기회에 어떠십니까.”
“뭐를.”
램파드는 커틀러가 답하기 전에 빠르게 정답을 찾았다.
“…둘째를 말인가?”
“네. 루안이 저렇게나 얌전하니까 자식이 한 명 더 있어도 괜찮습니다. 낳기만 해 주신다면 육아는 제가 다 도맡죠.”
램파드는 잠깐이나마 그의 말을 고려해 봤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밤낮으로 정무에 매진하는 중이라 쉴 틈 같은 건 없었다. 낳는 것도 그렇지만 1년 정도 잠적을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안 돼. 1년 가까이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전 둘째를 보고 싶거든요.”
아이를 싫어했던 램파드지만 막상 제 자식이 생기니까 기뻤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 더욱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기쁨은 클수록 좋은 것이니까 하나 더 있어도 나쁠 건 없지마는. 대수롭지 않게 하나 더, 외치는 커틀러의 태도가 언짢았다.
“네놈은 찍 싸고 끝이지만 나는 1년 가까이 고생해야 하거든. 게다가 임신한 몸으로 일하란 말이냐!”
그냥 꺼낸 말은 아닌지, 이미 그는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둔 모양이었다. 커틀러는 램파드의 투정에 막힘없이 답했다.
“제가 황제의 업무까지 도맡아 하는 건 어떱니까. 1년 정도는 마음 놓고 푹 쉬십시오.”
“그건 좀 끌리는군.”
“그러면 정하신 겁니다.”
램파드의 확답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커틀러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는 램파드의 바지 버클을 풀고, 흘러내리는 천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제멋대로 결정한 것이 못마땅해 램파드는 우위를 잡고 싶었다.
“혹시라도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고. 일단은 뭐, 오늘은 해도 좋아.”
“굳이 허락받을 생각 없습니다.”
“…….”
“허락하지 않아도 할 생각이니까요.”
“커틀러.”
램파드가 언성을 높였지만, 커틀러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양, 손을 분주히 움직여 램파드의 바지와 속옷까지 건드렸다. 램파드도 관계를 바라지마는 여기서는 역시 좀.
램파드는 남은 이성을 끌어모아 커틀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댔다. 그는 한 손으로 테라스를 단단히 붙잡아 램파드를 자신의 품에 가뒀다. 램파드는 흥분한 짐승의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진정하고… 조금만 움직여. 저기까지만.”
“폐하…….”
갑자기 시선을 내린 커틀러가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도 아름다운 커틀러가 상당히 공들인 표정을 짓자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양 볼도 붉어진다.
처음 보는 커틀러의 표정이건만 램파드는 이 얼굴을 보았다. 어디선가 분명히 보았는데. 램파드가 시선을 떼지 못하자 커틀러는 눈꼬리까지 휘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분명 먹혀들 것을 알고서 자신의 얼굴을 이용하는 거다. 뻔히 의도를 알고 있지만, 램파드는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뭐… 뭐하는 짓이냐.”
“폐하껜 이 표정이 잘 먹힌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미인계를 사용하는 커틀러의 행동에 램파드는 크게 당황했고, 도망칠 생각 같은 건 이미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굳어 있는 램파드를 향해 눈꺼풀을 떨어뜨리고, 한껏 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램파드는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않고, 커틀러를 감상하느라 바빴다.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미인계 분명히 어디선가 봤다.
램파드의 29년 인생 통틀어 미인계를 쓴 자는 오롯이 한 명뿐이었다. 커틀러가 스스로 미인계를 떠올리긴 만무하고, 분명 잔트의 입김이었다. 그가 조언한 것이 확실했다. 잔트는 대체 아들한테 뭘 가르친 건가.
“…잔트에게 뭘 배워 온 거냐!”
“뭐긴요. 미인계죠.”
“하지 마. 그냥 평소처럼 굴어!”
귓불까지 붉어진 얼굴로 당황하자 커틀러가 한층 더 처연한 눈빛을 지었다. 저런 자연스러운 표정은 하루 이틀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닐 텐데. 저런 청승맞은 짓을 하기 위해 시간을 쏟아부은 커틀러의 노력이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문제는 너무 완벽해 램파드에게 필요 이상으로 잘 먹힌다는 것.
“커틀러!”
“설마 했는데 상당히 잘 먹히는군요. 폐하, 제 얼굴이 좋으십니까?”
“스스로가 그런 말 하면 부끄럽지 않은가!”
“전혀요. 폐하께서 기뻐하신다면야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커틀러의 손은 입과 따로 놀았다. 그는 굳어 있는 램파드의 속옷을 슬쩍 내렸다.
“정말. …여기서 하자는 거냐?”
“가끔은 색다른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램파드의 가슴은 염치를 모르는 그의 행동에 강하게 두근거렸다. 여기서 엉겨 붙었다간 지나가는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 램파드는 끊어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냐!”
“폐하, 부부끼리 아이를 만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있지! 내가 박히니까 문제라고. 황후한테 겁탈당한단 소문이 돌 게 뻔하지 않으냐.”
“생각해 보니 꽤 자극적인 소문이군요. 당장 하고 싶어질 정도로.”
커틀러의 눈꺼풀이 차분히 가라앉았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처연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실로 방탕하고 음란한 말이었다. 괜히 말을 섞었다간 대강대강 넘어갈 듯해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커틀러의 표정을 봤다간 넋 놓고 시키는 대로 할 것만 같기도 하고.
“이대로 박으면 발로 차 버릴 거다…….”
그는 램파드의 협박에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대신 처연한 표정을 깡그리 지웠다. 미인계가 통하지 않자 노선을 변경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냥 밀어붙이기로.
“저 또한 돌아오자마자 일부터 하느라 피곤합니다. 폐하를 제압하기엔 힘이 부치니까 얌전히 대 주십시오.”
“이 뻔뻔한 놈이…!”
“평소처럼 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는 품 안에 든 램파드의 몸을 돌려 테라스에 가슴이 짓눌리게 했다. 이제 램파드의 얼굴은 외부로 빠져나왔다. 커틀러는 반쯤 벗겨진 램파드의 속옷에 손가락을 넣어 쭉 잡아당겼다. 보드라운 천 안쪽에 둥그런 엉덩이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얼른 그 속을 벌려 보고 싶었다.
“박을 곳만 드러나게 여기까지만 벗길 겁니다. 표정관리만 제대로 하신다면 들킬 염려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헛소리하지 마.”
“일단 한번 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바깥에 내놓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속살은 보이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다 똑같이 민망하다. 그렇기에 꽁꽁 싸매고 남들 모르게 조용히 이뤄져야 하건만. 구태여 이런 위급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안에 들어가서 하자고…! 왜, 하필 여기서 이러는 거냐. 남한테 보이는 게 좋으면 혼자 벌거벗고 황궁을 뛰어다니든가!”
“폐하, 제가 이러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 터무니없는 소릴 내뱉을 것이다. 어느 누가 성교하는 걸 모든 이에게 내보이며 자랑하고 싶겠는가. 커틀러가 말할 사연 따윈 듣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기사들이 그러더군요. 황제의 집무실 난간에서 하면 끝내줄 것 같다고.”
“뭐……?”
“여기서는 황궁 전체가 다 보이니까요. 평소보다 더욱 기분 좋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대체 기사단에서 무슨 이야길 듣고 다니는 거냐……. 그리고 그런 말 들었다고 곧이곧대로 실행한다는 거냐고!”
“그야, 전 잘 모르니까요.”
커틀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이럴 때만 순진한 척하지 마!”
“척이라뇨, 전 정말 경험이 적어 모르는 겁니다. 폐하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제 나름대로 조언을 구한 거고요.”
남들이 보기에 램파드는 상대를 수시로 바꾸는 문란한 사람일지 몰라도, 평범한 섹스만 했지 저런 기상천외한 짓거리를 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커틀러가 램파드의 입에 성기를 처음으로 밀어 넣었던 날. 그때도 화이트 테일 기사들이 오메가의 입을 사용한 성행위가 기분 좋다던 말을 했다. 저런 불필요한 소릴 기사단장에게 주입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다니.
“미친놈들! 화이트 테일, 네놈들은 전원 일주일 근신이다. 마구간에 처박혀 말똥이나 치워!”
“좋습니다. 그러면 허락하신 겁니다?”
염치를 모르는 자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 거리낌 없었다. 램파드를 짓누른 커틀러는 속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엉덩이를 문질렀다. 애무는 길지 않았고, 가볍게 주무른 손이 다물린 구멍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몇… 발짝만… 이동하면 되잖아.”
“싫습니다.”
“하… 읍!”
안쪽으로 빠르게 파고든 손가락에 램파드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세련된 그의 얼굴만큼이나 우아한 손가락이 외견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난폭하게 움직였다.
다소 다급한 손가락은 그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것을 알렸고, 램파드는 삽입을 상상하며 몸을 움찔 떨었다.
“정말로 거부하실 거면 제 뺨을 치십시오. 그러면 관두겠습니다.”
“…너!”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 할 겁니다. 보십시오. 안쪽은 벌써 잔뜩 흥분해 애액이 흥건하군요.”
“그야… 당연히!”
누군가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울분을 삼킨 램파드는 손을 떼어 내고 난간을 꽉 붙잡았다.
“당연히… 부끄러우니까 그런 거지……!”
램파드의 상반신은 옷을 입었다지만 훤한 대낮에 바깥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부끄러운 만큼 몸이 예민해져 자그마한 자극에도 금방 반응했다. 커틀러의 빠른 손짓에 습한 내부는 금방 액이 넘쳐흘렀고, 질척질척 물 많은 소리가 램파드의 귓가를 때렸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커틀러의 뺨을 때리고 싶진 않았다.
“정말 할 거냐.”
“네.”
이런 장소는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 램파드도 그를 원하긴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해괴망측한 일에 동참해 주니 그만큼의 합당한 대가를 받지 않으면 한동안 죄 없는 베개를 뚜드려 팰 것만 같았다.
“하려면… 적어도 내 부탁을 들어줘.”
“뭡니까. 폐하의 부탁이라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 빼고는 들어 드려야죠.”
“그놈의 폐하라는 말 좀 갖다 버려……!”
커틀러 스스로 전처럼 편히 불러 줄 때까지 기다렸건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평생 램파드 폐하라고 불릴 것만 같아 불만이 가득했다. 예전에도 한 번 편히 불러 달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번에도 결과는 같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좋아.”
“어?”
“램파드, 나랑 아기 만들자.”
램파드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무언가가 펑 터진 것 같았다. 시키는 대로 냉큼 말이 짧아진 커틀러 덕분에 온몸이 벌겋게 변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고작 이 정도로 새빨개지긴.”
등 뒤에 있는 커틀러가 콧소리 내며 웃었다. 열기로 잠식된 램파드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피부가 빨개진 만큼 몸속도 달떠 애액이 넘쳐 커틀러의 손가락을 과하게 적셨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마는. 집무실 바로 아래층에는 대신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대로 삽입했다간 잔뜩 흥분한 램파드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 높여 신음할 게 분명했다. 커틀러가 원하는 건 짜릿한 전율이었지, 램파드의 모습을 공개하는 건 원치 않았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오메가였다.
“이리 와.”
커틀러가 램파드의 손을 풀어 꽉 잡았다. 가지런한 손가락이 서로 얽혔고 힘을 주자 단단히 꽉 붙들린다. 그는 램파드의 손을 꽉 쥔 채 집무실 안으로 끌어당겼다. 테라스에 몸을 걸친 채 딱딱하게 굳은 램파드는 그의 손길대로 집무실로 이끌렸다. 그는 붙잡은 손을 풀지 않고 램파드를 소파에 앉혔다. 손끝까지 새빨개진 램파드는 열기를 잔뜩 머금은 채 소파에 어정쩡하게 앉았다.
커틀러는 붙잡은 램파드의 손을 들어 올려, 공중에서 만지작거렸다. 꼬물꼬물, 움직일 때마다 손마디의 뼈끼리 단단하게 닿는다. 뼈마디를 부드럽게 쥐던 그가 손등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시선은 맞춘 채, 램파드를 응시하며 손등에 입을 맞춘다.
램파드는 그를 바라보기 버거워 고개를 돌렸다.
“램파드.”
고작 이름 한 번 불렸을 뿐인데, 열이 확 오른다. 괜한 소릴 내뱉었다. 그냥 전처럼 폐하라고 부르는 쪽이 훨씬 더 나았다.
“애무해 줄까?”
“마음대로 해…….”
아까처럼 처연한 표정은 아니지마는, 미소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그의 입매 또한 램파드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작은 미소를 보이던 그가 계속 싱긋 웃으며 대하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커틀러는 능숙하게 손을 놀려 램파드가 입고 있는 옷을 벗겨내 알몸으로 만들었다. 티 한 점 없는 매끄러운 피부는 잘 익은 자두처럼 붉었다. 알몸이 된 램파드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은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알몸이 되어 한기를 느낀 램파드는 잘게 떨었고, 손을 뻗어 커틀러의 양 볼을 감싸 응했다.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을 점점 단단히 밀착했고, 커틀러는 천천히 얼굴을 움직였다. 입술이 벌려지고, 말캉한 혀를 한참이나 섞으며 온기를 교환했다.
진득하게 닿은 입술이 떨어졌고, 아쉬워진 램파드가 이번에는 그의 목을 감싸 입을 맞췄다. 입맞춤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아 이대로 계속 달라붙고 싶을 정도였다.
“하아…….”
입을 떼어 낸 램파드가 깊게 숨을 내쉬었고, 커틀러가 그의 목에 입술을 파묻었다. 방금까지 램파드의 입 안을 돌아다니던 혀가 곧게 뻗은 목선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혀로 몸을 쓸어내리는 감각이 아찔해 기분이 좋아진 램파드는 작은 자극에도 몸을 떨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긴 램파드는 달뜬 숨을 내쉬며 가슴을 들썩거렸다.
그가 만져 주는 피부는 그 어느 곳 빠지지 않고 기쁘다고 울렁거렸다. 기분이 좋긴 하다만 이왕이면 함께 호흡을 맞추며 열락에 빠지고 싶었다. 핥기만 하는 커틀러는 영 재미가 없어 보인다.
“읏… 읏, 후으……. 커틀러…….”
“응?”
“그냥… 박아도 돼…….”
피식 웃은 그는 램파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굴었다. 뾰족하게 내민 혀로 램파드의 유두를 핥더니, 이내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고, 연분홍빛 유두를 빨아 먹듯 쪽쪽 잡아당기다가 놓았다.
“하으…!”
램파드의 반응을 살피던 커틀러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는 붉은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왜. 내 애무가 서툴러?”
그럴 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기만 해도 심장은 기쁘다며 징, 울었다. 굳이 이렇게 혀를 사용하지 않고 손을 얽는 것만으로도, 이름을 불러 주는 그 목소리가, 입술이 맞닿은 피부까지 모든 것이 너무 좋았다. 싫을 리가 없는 램파드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나만 기분이 좋으니까…….”
램파드를 앉힌 커틀러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램파드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박아 남근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램파드의 양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쯉, 쯔읍. 램파드의 성기를 입에 넣은 커틀러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야들야들한 볼살에 둘러싸인 급소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구강성교는 여러 번 받아 본 적 있지마는 이렇게 큰 자극으로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하… 아, 아… 아……!”
예민한 성기에 자극이 가자 램파드는 하반신에 힘을 주며 몸을 숙였다. 생경한 자극에 벌써 눈앞이 팽팽 돌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며 밀어냈지만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양손으로 커틀러의 머리를 붙잡은 램파드는 어깨를 움츠리며 벌벌 떨었다.
“하읏, 그… 만, 나와……!”
배설감을 느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램파드는 결국 커틀러의 입 안에 정액을 내뿜었다. 사정감을 느끼며 몸을 잘게 떠는 와중에도 커틀러는 혀를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는 램파드의 남근 끝부분에 묻은 정액까지 샅샅이 핥아 먹고선 입을 떼어 냈다. 침과 정액이 묻은 커틀러의 입술은 윤택이 흘렀고, 그는 엄지로 제 입술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램파드의 몸에 성기를 밀어 넣어 허리를 움직이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흥겨워진다. 하지만 제 손길에 몸을 떠는 사랑하는 오메가를 바라보는 것 또한 기쁜 일이었다.
“굳이 네 몸에 남근을 넣지 않아도 이렇게 즐거운걸.”
한 번 절정에 달한 램파드는 짧은 여운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로 재밌는지 커틀러는 계속 웃었다. 그는 제 입술을 빤히 보는 램파드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입에 묻은 정액을 엄지로 쓸어 내고, 그것을 입 속에 넣어 쪽쪽 빨았다.
“맛있어.”
“…그런 걸 왜 먹나.”
고개를 숙인 커틀러가 입을 맞췄다. 키스는 원했던 거지만은 그의 입술에는 자신의 정액이 묻어 있다. 또한, 입 안 가득히 페니스를 넣고 빨기까지 했으니 체향 같은 게 남아 있을 것 같아 꺼려졌다. 거부감이 들어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지만 떨어지지 않고, 입술을 벌려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한 혀가 서로 엉키자, 램파드는 제 정액 맛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비릿하고 씁쓸한 맛. 옅게 남은 정액 냄새가 다 빠질 때쯤에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어때?”
램파드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최악이다.”
“난 맛있는걸. 한 번 더 맛보고 싶을 정도로.”
커틀러의 시선이 빳빳하게 세워진 램파드의 성기로 향했다. 램파드는 시선이 못마땅해 다리를 모으며 숨기려 애썼지만, 그런다고 가려질 남근이 아니었다.
결국, 숨기는 건 포기하고, 다른 요청을 하기로 했다.
“빠는 건… 됐어……. 그냥 빨리 박아 줘.”
“좀 더 섹시하게 유혹해 봐.”
그는 아카데미를 함께 다닌 시절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늘은 무슨 특별한 날일지도 몰랐다. 하나도 귀한 커틀러의 드문 표정을 잔뜩 보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섹시하게라. 그냥 몸 자체가 무기라고 생각했건만 이 이상 뭔갈 더하라니, 램파드에게는 생소한 요청이었다.
무도회나 연회에는 황후의 자리를 노렸던 귀족 여인들이 많았다. 비어 있던 황후 자리를 노리는 그녀들이 램파드를 유혹하기 위해 취했던 자세를 어정쩡하게 따라 해 양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어색하게 꼬았다.
“…이렇게?”
정답이 아닌지 커틀러가 되레 웃었다. 놀림을 당한 기분에 아무래도 부끄러운 램파드의 몸이 한층 더 열기에 휩쓸렸다.
“그냥 해.”
“아깐 하기 싫다며?”
아까와 달리 장소가 바뀌어서 안심되기도 하고, 커틀러의 흔하지 않은 모습을 잔뜩 봤으니까 램파드가 좋아하는 표정도 보고 싶었다.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건 오늘 잔뜩 보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네가 느끼는 표정도 보고 싶으니까.”
“내가?”
“여러 번 하고 나서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보기 좋거든…….”
그의 피부는 티 한 점 없는 도화지같이 하얗기에 조금만 달떠도 티가 난다. 하얀 피부 위에 연분홍색의 열기가 모여지면 램파드의 심장도 덩달아 빨라진다. 절정에 달한 커틀러의 볼이 살짝 붉어진 모습은 온전히 램파드만이 만끽할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커틀러의 표정이기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램파드의 요구에 커틀러가 허리를 굽혀 가까이 다가왔다. 코끝끼리 닿았고, 간지러움을 느낀 램파드가 눈을 반쯤 감았다.
“그렇다면 여러 번 해야겠네?”
램파드가 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그가 낮게 소곤거렸다.
“다리 벌려.”
램파드는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램파드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커틀러가 제 성기를 꺼냈고, 페니스끼리 맞닿았는데 크기 차이가 굉장했다. 크단 건 알았는데, 이렇게 막상 놓고 비교하니까 저런 게 어떻게 몸 안에 들어가는지. 램파드가 침을 꿀꺽 삼키는 틈, 두툼한 성기가 속살을 벌리며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아아!”
“지금도 좋아 죽겠는 건 알겠지만 좀 더 넣어야 해. 힘 빼.”
고대했던 관계라 그런가. 힘을 뺀다고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지마는 램파드의 몸은 따라 주지 않았다. 약간 삽입된 부분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꽉꽉 조여 가며 몸을 움츠러뜨렸다. 벌써 자극이 강해 이대로 가만있어도 만족할 것만 같았다.
“그냥 넣을게.”
다행히 예고해 주었건만 소용없었다. 머리로는 쾌락을 대비했지만 빠르게 잠식된 열기를 따라가지 못한 몸이 화들짝 놀라며 큰 반응을 보였다.
“하으… 으, 아, 아… 아앗!”
램파드의 여린 살점은 커틀러의 단단한 물건을 꽉 물며 바짝 조였다. 그와 동시에 벌린 입 밖으로 아무런 여과를 거치지 않은 농후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 아으… 응……. 좋… 좋아.”
커틀러는 한 손으로 램파드의 허벅지를 꾹 누르며 퍽, 강하게 밀어붙였다.
“하… 아, 아, 아… 앗, 아!”
목울대를 글썽거리던 램파드가 교성을 흘렸고 커틀러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커틀러의 손바닥에 램파드의 따뜻한 숨결이 여러 번 닿았다가 흩어졌다.
“…목소리 좀 죽여.”
커틀러가 책망하듯 낮게 읊조렸지만, 램파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더운 입김을 내뿜었다.
“후으… 으우… 으.”
커틀러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입술과 턱을 훑었다. 램파드는 잘 길들여진 애완동물처럼 그의 손길대로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며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이 어여쁘게 느껴진 커틀러는 곧은 손가락으로 램파드의 입술을 벌리며 속으로 파고들었다. 자연스레 벌려진 램파드의 입 안은 침이 흥건했고, 성기를 머금은 뒷구멍만큼 축축했다.
“달아오른 건 알지만, 아래층은 한창 회의 중이잖아?”
“하아… 으… 으… 그렇지만.”
“그렇지만?”
“좋아서…….”
램파드는 자신의 입 속에 들어온 그의 손가락을 물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했다. 말을 내뱉을 때마다 말랑한 혀에 사랑하는 사람의 손가락이 닿았다. 사람의 살갗이 달게만 느껴져 사탕을 빨듯 쪽쪽 빨았다.
더는 참기 힘든 램파드가 먼저 요청했다.
“그냥… 빨리… 움직여 줘.”
잔뜩 흥분해 애액을 질질 흘리는 램파드와 달리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견고한 모습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돌 석상이라 생각할 만큼 딱딱한 그의 표정 속에 숨겨진 짙은 욕망을 램파드는 쉽게 알아봤다.
“제발… 못 버티겠어……. 커틀러!”
램파드는 그의 목에 양팔을 감으며 꽉 끌어당겼고, 커틀러는 램파드의 한쪽 허벅지를 벌리게 하여 습하고 좁은 곳에 페니스를 남은 부분 없이 욱여넣었다.
“하아… 읏, 응…….”
램파드는 팔에 힘을 강하게 줘 그의 몸에 매달렸고, 커틀러는 몸을 숙여 서로의 가슴이 닿게 했다.
마치 히트 사이클에 돌입한 것처럼, 성욕이 들끓는 램파드의 몸은 그의 움직임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아래층 회의 따윈 상관없게 느껴졌다. 앓는 소리를 듣든 말든 관심조차 가지 않는다. 램파드가 중요시하는 건 오롯이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쾌락에 빠지는 것이었다.
“커틀러…….”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읊조리며 램파드는 달뜬 숨을 내뱉었다. 커틀러는 자신의 볼에 닿은 램파드의 볼이 열이 나는 것처럼 뜨거운 것을 알아챘다.
“억제제 안 먹었지?”
“먹었는데… 부족해. 후읏, 알잖아…….”
마지막으로 한 관계는 두 달 전. 램파드가 적을 모조리 섬멸하고, 인근 마을 여관으로 이동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대로 함께 황궁에 귀환하자마자 커틀러는 새로운 임무로 출장 나갔으니, 제대로 된 입맞춤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준 약은 제대로 먹어야지.”
커틀러가 말하기 시작하자 움직임이 느려졌다. 램파드는 그 점이 못마땅해 양다리를 그의 허리에 걸고 팔 만큼이나 강하게 포옹하듯 꽉 끌어안았다.
“약 같은 거로 정제하지… 말고……. 그냥 안에 싸 줘. 잔뜩…….”
“그냥 싸는 거로 끝나지 않을 건데.”
“노팅도… 좋아. 뭐든 좋으니까 빨리… 하읏!”
“해 줄게.”
커틀러가 허리를 과감하게 움직였고, 램파드의 고개가 꺾였다.
“후읏… 응… 읏.”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은 램파드는 좀 더 몸속으로 들어오길 바라며 다리를 벌렸다. 남근이 몸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자 램파드의 내벽이 파르르 떨리며, 빠르게 사정했다.
퍽, 퍽. 움직임에 맞춰 양다리가 속절없이 흔들리고, 위로 솟은 램파드의 성기도 희뿌연 정액을 질질 흘리며 분주히 끄덕였다. 커틀러의 성기가 뒤로 물러났다 다시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램파드의 입에서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램파드의 몸을 바짝 당겼다. 램파드는 응하고 싶은 마음에 커틀러의 목을 감싼 팔을 풀어 넓은 등을 꽉 껴안았다.
“꼭 아기처럼 매달리네.”
“후, 으… 으응…….”
“덕분에 마음껏 움직일 수 있겠어.”
커틀러는 램파드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작은 행동에도 램파드의 몸은 행복에 겨워 파들파들 떨며 응답했다. 자신의 오메가가 이렇게나 원하고 반응해 주다니, 알파로서 본분을 다하고자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잔뜩 달궈진 램파드의 몸은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갈라진 성기 끝에서 맑은 정액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절정에 계속 다다라도 여전히 그를 원해 숨을 헐떡거리며 다리를 벌려 성기를 받아들였다.
이제 곧, 램파드가 원하는 그의 달뜬 모습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드.”
“으음…….”
“램파드.”
“하…….”
“램파드 폐하.”
램파드가 감은 눈을 반짝 떴다. 사정할 때마다 몸속에 있는 원기를 끌어다 쓰는 기분이었는데, 그게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체력이 고갈되어 잠깐 정신을 놓은 모양이었다.
커틀러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나른한 몸을 움직였다.
“…아!”
“가만있어.”
예민해진 하반신에 힘을 주니 뻣뻣한 성기가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 느껴졌다.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통증이 느껴져 한숨을 내쉰 램파드는 얌전히 그의 가슴에 기댔다.
“이것도 여러 번 겪으니 익숙해진 것 같군…….”
“그래?”
커틀러의 노팅을 받아들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니 몸이 기억해 전보다 참을 만했다. 가슴끼리 맞닿은 상태에서 램파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목에 입술을 박았다.
커틀러는 제 품에 안긴 오메가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후으… 그래도… 움직이면 아파.”
힘이 부친 램파드는 웅얼거리며 그의 목가에 머리를 기댔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커틀러가 램파드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이 머리를 만져 주니, 기분이 다시 나른해지며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잠이 들고 싶지 않아 램파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힘들면 한숨 자. 끝나는 대로 정리해 놓을 테니까.”
“…이왕이면 끝까지 느끼고 싶어.”
머릿결을 쓰다듬던 손이 램파드의 볼까지 내려왔다. 매끈한 턱을 쓸던 그는 램파드의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렇게 야한 말 하면 끝나는 대로 또 할지도 몰라.”
말뿐만이 아닌지 노팅으로 부푼 채로 꽉 박혀 있는 성기가 더욱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그의 도발에 지고 싶지 않은 램파드는 도전을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면 해 봐.”
잔뜩 지친 목소리로 도발하는 꼴이라니. 커틀러는 아직 지치지도 않았고, 램파드의 몸은 여러 번 탐해도 부족했다. 그와 한 몸이 된 순간은 타는 듯한 갈증이 사라지고 만족스러우니까. 이대로 영원히 그와 섞이고 싶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램파드가 쓰러질지도 모른다.
눈을 내리깔고 램파드의 얼굴을 조물조물 만지던 커틀러가 조용히 말했다.
“됐어. 이렇게 지쳤는데 끝나는 대로 쉬어.”
“난 더 해도 괜찮다니까? 그래, 이왕 하는 김에 둘째가 생길 때까지 해 보는 것도 좋겠지.”
“힘들다며.”
“네놈의 미인계에 넘어가 버렸거든. 널 닮은 딸이 가지고 싶어졌어.”
여전히 손을 가만히 두지 않는 커틀러가 이번에는 램파드의 귓가를 가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램파드가 좋아하는 단맛을 내는 꿀과 닮은 색. 커틀러의 은발에 비해 금발은 흔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고, 이왕이면 램파드 널 닮았으면 하는데.”
“싫어. 딸, 아들 둘 다 널 닮아 은발이었으면 하거든. 양손에 하나씩 잡아 데리고 다니며…….”
새치름하게 의견을 굽히지 않던 램파드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사랑하는 오메가의 목소리는 마치 노랫가락 같다. 그의 목소리를 즐겁게 감상하던 차 소리가 뚝 끊기고 말았다.
램파드의 목소리가 멈추자 커틀러가 의아해하며 그를 내려다봤다. 양손으로 코를 틀어막던 램파드가 고개를 한층 더 숙였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면 노팅된 내장 안의 통증이 상당할 터인데. 커틀러는 그의 통증을 덜어 주고자, 허리를 붙들어 단단히 지지해 줬다.
“…후.”
신음하며 코와 입을 틀어막은 램파드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멈추지 않고 피가 흐르는 모습에 커틀러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구겨졌다. 당장 램파드의 상태를 살펴보고 싶건만 크게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커틀러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그의 심장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무척 놀랐는지 커틀러의 심장 소리는 매우 크고 빨랐다. 이대로 빠르게 심장이 뛰면 터져 버릴 것 같을 정도로.
자신을 걱정하는 그를 진정시키고자 램파드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별것 아냐. 그냥 코피다……. 게다가 이제 멈췄어.”
램파드는 코를 막은 손을 떼어 내고 슥 문질렀다. 볼까지 피로 만든 선이 생겼고, 오히려 역효과였다. 한눈에 봐도 흘린 피의 양이 상당했다.
“오늘 한 관계가 좋아서 이러는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별것 아닌 듯 태연하게 말하지만, 커틀러의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램파드는 여러 번 손바닥으로 피를 닦아 내다 소용없어진 걸 파악하고 태평하게 웃었다.
“게다가 코피쯤이야 최근 종종 흘렸는걸.”
“최근? 얼마나 자주?”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왜 말하지 않았어.”
“그냥 코피 정도야 뭐가 대수라고.”
“됐어. 말하지 말고 그냥 자.”
태연자약하게 구는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의 기분은 한층 가라앉았다. 몸이 단단히 고정된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램파드가 편히 있을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 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램파드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품 안에 편히 있게 만들어 줬다. 결국, 램파드는 눈을 감고 그의 뜻대로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커틀러의 노팅이 풀렸을 즈음에는 램파드는 이미 정신을 놓고 실신한 것처럼 잠이 들었다.
“한스.”
혹여 누군가 찾아올까 봐 바깥에서 감시하던 한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램파드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낯부끄러운 상황일 법도 하지만 일류 시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든 담담히 표정을 유지하며 눈치 빠르게 집무실과 연결된 작은 방으로 이동해 욕조에 물을 채웠다.
한스가 준비를 할 동안 커틀러는 램파드의 얼굴을 살펴봤다. 많이 수척했다. 창관을 없애는 작업은 그가 원하는 일이라 지지해 주고 있건만 그의 소망이 램파드를 해칠 줄이야. 이럴 거라면 그의 꿈 따위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축 처진 램파드의 팔을 들어 올린 커틀러가 손등에 입술을 조용히 댔다.
“목욕 준비가 끝났습니다.”
욕조에 물을 넣고 데우기까지 한 한스가 수건을 들고 찾아왔다. 그는 커틀러의 곁에 기절하듯 잠든 램파드를 조심스레 안아 들어 욕실로 데리고 가 씻기기 시작했다.
한스가 일을 할 동안 대충 가운을 걸친 커틀러는 램파드의 책상으로 이동해 그가 하다 만 일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짙은 고동색 책상 위에는 램파드가 적다 만 서류가 흩어졌고, 그는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날짜를 보아하니 최근 2주 동안 작성된 서류들이었다. 한스가 도운 흔적은 있으나 짧은 기간에 해결하긴 많은 양의 일이었다.
램파드가 작성하다 만 서류를 살펴보는 작업이 끝날 때쯤. 램파드를 씻긴 한스가 집무실로 다시 찾아왔다.
“오랜만에 푹 주무시는군요. 정리를 끝낸 후 밖에 나가 주변을 조용하게 만들겠습니다.”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다.”
질책하는 커틀러의 음성에 한스의 손이 멈췄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자리를 비울 동안 폐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구나.”
“…사실대로 고하겠습니다. 램파드 폐하께서는 두 달 가까이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온종일 정무에 시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침실까지 서류를 들고 가 살펴보시더군요.”
책상에 앉은 커틀러가 눈동자만 천천히 치켜떠 한스를 바라보았다. 변명할 시간을 잠시 주었건만 한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쓸어내리던 커틀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시종의 할 일이 무엇이냐.”
“모시는 주군께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겁니다.”
“한데 너는 휴식을 취하라는 단순한 요청조차 드리지 않은 거군. 너를 감시하는 용도로만 붙여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커틀러는 그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표정은 무덤덤하며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그를 모셔 온 한스는 커틀러가 심기 불편해진 것을 파악했고, 공손한 자세로 변명이 아닌 진실만 고했다.
“휴식하시라며 몇 번이나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폐하의 고집이 조금도 휘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램파드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한스에게 진심으로 화내지 않고, 어찌 된 일인지 연유를 물어본 거였다. 그리고 한스를 처벌하면 램파드를 보좌할 사람이 없어지고, 자연스레 그의 일은 증가할 뿐이었다. 커틀러는 시선을 내리깔고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았다.
이깟 일 따위 하루라도 빨리 끝내 버려야 램파드가 편히 쉴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때려치우고, 자신에게 집중하라 하고 싶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쉽게 저버리지 않을 터.
그렇다고 강제로 못하게 밀어붙였다간 전과 같이 램파드의 무언가를 부숴야 한다. 몸이든 정신이든 깨트려야 램파드는 비로소 포기할 테니까.
하지만 커틀러는 온전한 램파드가 너무나도 좋다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의 램파드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으니까. 그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 그는 램파드가 작성한 서류를 한 번 훑어보며 부족한 자료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메모지에 적어 내렸다.
“왕국의 무역 자료가 필요하군. 3년간 제국에 들어온 선단을 정리해서 가지고 와라. 혼자서는 힘들 테니 시종 셋을 추가로 데리고 가거라.”
“알겠습니다.”
한스가 자리를 비우자 황제의 집무실에는 램파드의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램파드에게 시선을 잠깐 돌린 커틀러는 그가 작성해 둔 서류를 이어 살펴봤다.
기사단 업무에 외교 중심으로 이루어진 황후의 일. 거기다가 황제의 업무까지 끼얹게 되었으니 커틀러는 앞으로 휴식 시간이 없어질 정도로 바빠질 것이다. 고생은 하겠지만, 대신에 램파드가 쉴 수 있다면 기쁜 일이었다.
후일, 커틀러는 다시 전처럼 존칭을 사용했다. 그것이 불만인 램파드는 당장 따져 들었지만 그는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안 되겠습니다.’ 이 말만 반복했다. 남들이 보기엔 고작 칭호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말 한마디에 그와의 거리가 성큼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기에 램파드는 불만이 가득했다. 적어도 둘 만 있을 땐 편하게 불러주길 원했지만 커틀러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램파드는 못내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