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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을 각인한 오메가와 함께 보내는 것은 고문이었다. 커틀러는 날마다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는 기분을 만끽하며 눈뜬다.
“하아…….”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난 커틀러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신음했다. 램파드는 약이 제대로 듣지 않아 잠결에 아주 옅은 페로몬을 흘려 커틀러를 자극했다. 각인하지 않은 알파가 맡았더라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옅은 향으로 느껴졌을 터. 커틀러에겐 향기를 지닌 온갖 꽃을 엮어다 만든 꽃다발같이 진했다.
램파드의 향이 커틀러의 몸속을 파고들자 온몸에 열이 오르고 하반신이 뻣뻣해졌다. 당장이라도 오메가의 속살을 파헤치고 몸 안으로 파고들고 싶다는 듯, 단단하게 기립한 성기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본능을 거부하자 온몸의 세포가 제 몸을 공격하는 듯해 괴로웠다.
알파의 본능대로 오메가의 몸을 탐하면 해결되는 일이지만 인내를 끌어모아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오메가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램파드를 안았다간 아버지와 어머니 꼴이 될 게 뻔했으니까.
삐걱, 커틀러는 자신의 침대에서 일어나 램파드에게 다가갔다.
“나중을 위해 지금은 참을 테니까.”
커틀러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램파드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말랑말랑한 입술은 커틀러의 손길대로 움직였다. 자신의 살결을 탐내는 커틀러가 곁에 있는데도 램파드는 세상모르게 잠들었다. 그를 신뢰하기에 함께하는 순간은 모든 경계를 풀고 잠든 것이었다.
커틀러는 남은 다른 손으로 바지와 속옷을 내려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쥐었다.
“후으… 램파드.”
몸속을 파고들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간질간질하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램파드가 마음을 정했으면.
아카데미는 램파드의 짝이 될지도 모르는 알파가 넘쳐나니까 그의 곁에 다른 알파가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고 고이 간직하는 중이었다. 괜히 조급해하면 일을 그르칠 뿐이니까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좋을 터. 램파드의 최종 각인이 끝나길 바라며, 이날도 혼자 욕구를 해결했다.
제국의 행사 중 가장 거대한 규모를 지닌 건국기념일 축제가 시작되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한 달 동안 아카데미는 휴관에 들어간다. 학생과 선생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갈 곳 없는 학생들은 기숙사를 지켰다.
건국기념일의 황궁은 매우 소란스럽고 어수선해 성가시다. 중요한 건국기념일 당일 행사만 참가한 램파드는 곧바로 아카데미로 돌아와 부족한 공부를 마저 했다.
의절당해 돌아갈 곳을 잃은 커틀러는 이른 아침, 분주하게 움직여 방 청소를 하더니 지금은 침대에 걸터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책을 읽었다.
“이봐, 커틀러! 너는 안 나가냐?”
램파드와 커틀러가 함께 사용하는 기숙사 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렸다. 입구 근처에 앉아 공부 중이던 램파드는 집중력이 흐트러져 짜증 냈다.
“예의는 어디다 팔아먹었지. 네놈 집안에서는 문을 열기 전 노크하라고 가르치지 않더냐!”
문에 기댄 동기들은 책상에 앉은 램파드의 모습에 적잖게 놀랐다.
“…허. 이런 날까지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건 몰랐는걸.”
“놀 생각밖에 하지 않는 네놈들이 이상한 거다.”
“아니야, 밖에 있는 애들한테 물어봐. 다들 램파드 너보고 제정신 아니라고 할걸? 그건 됐고, 램파드 너도 함께 가자.”
“어디를.”
“창관에.”
“……창관?”
“공부만 하면 가랑이 사이에 달린 거시기가 제구실 못 해. 네 것도 가끔 써먹어 줘야 하지 않겠냐.”
램파드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고,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커틀러가 일어났다. 그는 읽던 책을 침대 위에 엎어 놓고 천천히 문 쪽으로 향했다.
이런 날까지 공부하는 별종을 보며 눈살 찌푸리던 동기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커틀러의 모습에 구겨진 얼굴을 환하게 폈다.
“오, 커틀러. 역시 넌 갈 마음이 있지? 건국기념일을 맞이해서 경험 없는 오메가들이 대거 입고됐대. 끌리지 않냐.”
열린 문손잡이를 붙잡은 커틀러가 자신보다 한참 작은 동급생을 거만하게 내려다봤다.
“예의 바르게 문 열기부터 다시 해라.”
명령조가 분명한 커틀러의 말에 동급생들은 눈에 띄게 표정이 바뀌었다.
“뭐!”
몇 명이 더 있는지 아우성이 합쳐 들렸고, 문이 닫히자 조용해졌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노크부터 한다는 선택지 대신 소리를 냅다 질렀다.
“부탁해도 데리고 안 가!”
대체 몇 명이나 우르르 몰려왔는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커틀러 저 새끼는 평소 창관에 자주 가니 질렸을 거야. 야, 우리끼리 가자.”
그냥 가기엔 약이 오르는지 마지막까지 입을 놀렸다.
“너무 자주 해서 조루가 왔겠지!”
자신을 깎아내리는 악담에 커틀러는 작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되레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커틀러를 바라보던 램파드의 신경이 거슬려 인상을 팍 썼다. 동급생은 자기네들끼리 가기로 마음먹었는지, 비아냥과 함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야, 그래. 이런 황금 같은 휴일에 칙칙한 놈들끼리 기숙사에 처박혀 있어라, 버러지들!”
문을 닫은 커틀러는 침대로 돌아와 중단한 책을 마저 읽었다.
마찬가지로 멈췄던 공부를 시작한 램파드는 집중이 흐트러져 심기가 불편했다. 글자가 점점 날카로워지자 펜을 대충 던져 놓고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기댔다. 램파드가 낮게 한숨을 쉬자 커틀러가 무릎 위에 책을 덮어 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황제가 되면 작위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인재를 등용할 것이다. 작위를 가졌다고, 우대하는 짓 따윈 내 대에서 끝낼 거야.”
“황제가 될 거야?”
“당연하지.”
“왜?”
의외의 질문이 돌아오자 램파드는 몸을 돌려 커틀러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읽던 책은 더는 안중에 없는 듯 램파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답이 없기에 램파드가 한 번 더 되물었다.
“황족으로 태어났는데 황제가 아니면 무엇이 되라고?”
“넌 오메가잖아. 역대 황족들이 그러한 것처럼 알파를 반려로 맞이해 황후가 될 생각이 아니었어?”
커틀러의 질문에 램파드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각인한 반려같이 흥분한 오메가의 몸을 직접 어루만져 주며 진정시킨다. 몇 번이나 오메가의 깊은 곳을 매만지지만 그의 마음은 변함없다. 램파드에게 각인해서가 아닌, 난처한 친우를 돕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램파드는 지난번에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도는 것을 느꼈다. 괜히 입 밖에 꺼냈다가 거부당하면 상당히 수치스러울 것이다. 동요한 마음을 한 점 내보이고 싶지 않은 램파드가 태연하게 웃으며 진심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것도 생각해 봤지. 알파를 황제로 올리고, 난 뒤로 빠져서 후계자만 남기는 인생을 선택할 거라면 이런 공부 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걸. 그래도 기껏 아버지 눈에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으니까 황제 노릇도 해 봐야지. 안 그래?”
“성인이 되어서도 황제를 속일 생각이야?”
제국의 지도자이자 자신의 아버지를 막 불렀지만, 램파드는 그에 관해서는 지적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 작자는 내가 성인이 되고, 자신은 늙어 후계자를 얻지 못하는 몸이어도 주저 없이 나를 창관으로 팔아 버릴걸. 아버지가 죽고 내가 황제에 오를 때까지는 비밀로 해야 해.”
램파드는 자기 일이면서 별것 아닌 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지켜 줄게.”
말문이 막힌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몸까지 숙이며 크게 웃는 통에 숨이 막혀 끅끅거리며 등을 들썩였다.
램파드가 자신을 비웃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단정하게 자리를 지켰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슥 닦아 낸 램파드가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커틀러의 입매와 눈꼬리가 굉장히 유연하게 휘었다.
“생각 있어.”
“그것참 못 미덥군.”
“네가 놀랄 정도의 꽤 근사한 계획이야.”
“준남작부터 시작한다며. 하급 귀족이 무엇을 한다는 거냐.”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공작 가문도 멸족시킬 권한을 가진 절대 권력자에게서 지켜 준다니. 계획이 없을 게 분명하기에 램파드는 장난스레 넘겼다.
한창 웃었더니, 동기들이 쳐들어와 훼방 놓은 불쾌한 기분이 사라졌다. 램파드는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책상에 바르게 앉아 펜을 들어 올렸다. 종이에 글씨를 써 내리기 전, 무언가 생각나 커틀러에게 말했다.
“워낙에 튼튼한 양반이라 그럴 리는 없지만……. 아버지가 빨리 죽으면 황제든 황후든 내가 직접 선택할지도 몰라.”
“그렇게 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거야?”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아버지가 무서워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황제를 목표 삼아 열심히 공부했다. 황후가 되길 바란 적은 없지만, 만약에 커틀러가 자신에게 각인했더라면 주저 없이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그는 이때껏 램파드의 곁을 지켜 주었으며, 함께 있으면 온몸의 세포가 커틀러를 반기며 만족감에 파묻힌다. 그라면 반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관계긴 하지마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무언가 조금 부족했다. 좀 더 큰 기쁨을 느낄 방법이 있을 텐데, 욕심을 부렸다간 지금의 관계가 깨어질 듯해 애써 마음을 외면했다. 우리는 친구니까. 이 이상 깊은 관계는 곤란했다.
램파드는 커틀러를 생각하는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 눈앞에 놓인 종이와 펜에 집중했다. 램파드가 공부에 몰두하자 커틀러는 피식 웃으며 침대에 기대 마저 책을 읽어 내렸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램파드가 펜을 내려놓자 커틀러가 넘기는 책장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다른 과목을 시작하기 전, 의자에 앉은 채로 팔을 쭉 뻗어 뭉친 근육을 푼 램파드가 커틀러를 흘끗 바라봤다.
“너는 안 가 봐도 돼?”
“왜, 공부에 방해돼?”
“아니, 나 때문에 기숙사에 남는 건가 신경 쓰이니까. 난 혼자여도 괜찮으니까 나가서 놀고 와.”
“뭐야 그 자신감은. 내가 왜 너 때문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읽던 책을 곁에 내려놓은 커틀러가 램파드를 향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확실히 심심한 모양인지. 평소와 다르게 장난기 가득한 비아냥이었다.
램파드는 이제 커틀러의 저런 행동이 우정에 기반을 둔 장난이란 것을 잘 알았다. 일일이 반응했던 전과 달리, 램파드 또한 장난으로 받아넘겼다.
“그야 이런 최상의 미모를 가진 날 놔두고 떠나기 아쉬울 테니까. 멀리 떠났다간 계속 생각날 거 아냐?”
거만한 램파드의 태도를 바라보던 커틀러가 피식 웃었다.
“나갈 생각은 없지만. 널 못 보면 슬프긴 할 것 같아.”
“낮에도 보고 매일 밤마다 지켜보면서 질리지도 않는 거냐. 난 네 얼굴이 벌써 질렸는걸.”
웃기지 말라며 대충 넘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순간 커틀러가 입을 다물고 옅은 페로몬을 흘렸다. 그림자 진 곳에 앉아 있는지라 그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램파드는 커틀러의 페로몬 향에 그의 기분이 느껴졌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타개하고자 램파드는 아무 말이나 막 내뱉었다.
“놀러 갈 곳이 없다면 아까 그놈들을 따라가도 되는데.”
“……창관에?”
“너도 알파니까 내 몸을 만지는 것으론 풀리지 않을 거잖아. 알파면 오메가를 안고 싶어지는 것 아냐?”
“별로? 알파를 뭐로 보는 거야.”
“들은 이야기로는 오랫동안 참으면 힘들다고 했어. 거기다 다른 알파가 손을 댄 오메가는 영역 싸움을 하는 느낌이라 불쾌하다고 하던걸. 아까 걔들이 말한 오메가는…….”
삐걱, 침대에서 일어난 커틀러가 램파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는 평소처럼 램파드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익숙한 벗의 모습에 램파드는 긴장을 풀었다.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램파드. 너는 창관을 싫어하잖아.”
“아까 말한 대로. 내가 기숙사에 혼자 남아 있을까 봐 가지 않는 것 같아서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하지 않잖아.”
“별일이네. 자기밖에 모르는 네가 남을 생각하다니.”
“기껏 생각해 줬건만……. 여기 남아 있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는 뻣뻣해진 램파드의 목 뒤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주물러 줬다. 긴장 때문인지 오래 앉아서인지는 모르지만, 램파드의 어깨 근육이 단단했고 커틀러는 여러 번 주물렀다.
“미안하면 램파드, 네가 다른 오메가들 대신 놀아 주던가.”
“좋아.”
창관의 창부 대신 놀아 달란 말이었는데, 예상 밖의 답에 놀라 커틀러의 입술이 살짝 떼어졌다. 램파드는 커틀러의 손을 가볍게 떨어뜨리고, 다시 펜을 꽉 쥐었다.
“이것만 마저 끝내고.”
“기다릴게.”
다시 침대로 돌아온 커틀러는 이제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늦은 새벽, 깊게 잠이 든 램파드는 어지간한 반응에 일어나지 않는다. 커틀러는 조용히 다가가 기척을 숨기고 잠이 든 램파드의 얼굴을 바라본다.
방 안은 윤곽만 파악될 정도로 어둡지만 작은 숨소리를 내며 푹 잠든 오메가를 감상하기엔 충분했다. 옅은 불빛에 드러난 램파드의 오뚝하고 매끈한 콧날. 도톰한 아랫입술과 부드럽게 감긴 눈꺼풀을 보고 있으면 욕정이 일었다. 즉시 손을 뻗어 엉망으로 만들고픈 페로몬을 진정시키고 램파드를 바라보기만 하며 여러 번 수음했다.
매일 밤 자신을 지켜봤다는 사실을 램파드가 알았다니. 그런데도 밀어내지 않는 것을 보면 램파드는 진작에 마음을 연 모양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자위하고 욕정한 모습을 지켜봤다는 생각에 커틀러의 심장이 일렁거렸다.
최상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지금 당장 램파드의 몸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흥분한 페로몬을 가까스로 제어하고 있지만, 커틀러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사정이 임박한 듯, 욕망에 잠겨 붉어졌다.
등을 돌린 채 글씨에 집중하는 램파드는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손으로 자신의 입술과 턱을 여러 번 쓰다듬은 커틀러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램파드.”
“응?”
책에 몰두한 램파드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점은 아쉽지만 조금 있으면 원 없이 바라볼 것이다. 커틀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먼저 씻으러 갈게.”
램파드는 별생각 없이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뭐해, 자세를 취해.”
하, 그러면 그렇지. 커틀러의 입가에 머물던 옅은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싸늘한 시선으로 램파드가 휙 던진 연습용 검을 바라봤다.
램파드는 그냥 한번 장난스레 떠본 것일 뿐이었다. 자신은 그의 농담을 좋을 대로 받아들이고 혼자 설렜던 것이고.
램파드는 커틀러가 품은 욕망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얼굴을 보며 남근을 박아 넣고 싶어 하며, 입술을 살짝씩 건드리며 자위하는 사실 또한 꿈에서도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램파드가 뭐가 그리 신나는지 검을 쥐곤 떠들었다.
“너와 검을 맞부딪히는 건 오랜만이군. 작년에 단둘이서 몰래 진행한 시합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으니까 재밌을 거야.”
램파드가 공부를 끝내기만을 기다렸던 커틀러는 무언가 울컥,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된 거 램파드의 뼈나 근육을 엉망으로 만들어, 건국기념일 행사 기간 내내 침대 신세로 만들까 싶다. 의료진도 모두 자리를 비웠으니까 램파드를 간호할 자는 커틀러 하나밖에 없다.
사적인 시합은 금지지만 연습이라면 상관없다. 연습을 좀 더 진지하게 임하면 되겠지.
“진심으로 대할 거야.”
커틀러가 중얼거렸고, 램파드가 으쓱거렸다.
“바라던 바야.”
“다쳐도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은 물론 하루 종일 딱 달라붙어 간호할 생각이지만 나중에 투덜거릴 램파드의 입을 틀어막고자 마음에도 없는 소릴 내뱉었다. 커틀러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 램파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나를 다치게 할 정도의 투지가 있어?”
“물론. 걱정되면 힘 조절할까?”
“쌓인 게 있다면 풀어야지. 전력을 다해 휘둘러 줘.”
램파드에게 허락도 받았겠다, 커틀러는 본심을 담은 검을 내질렀지만 허무할 정도로 공격이 막혔다. 봐준 것이 아닌 진심을 담은 공격이었건만 램파드가 쉽게 방어해 적잖게 놀랐다.
동요한 것이 분명한 커틀러의 표정을 확인한 램파드는 자신을 잃지 않고, 담담히 그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본래의 램파드라면 쉽게 동요하며 상대에게 휘말릴 테지만 검을 잡았을 때 자신을 다스리는 법 또한 익혔다.
이날 램파드는 커틀러를 상대로 진정한 승리를 얻었다.
***
아침 일찍 일어난 커틀러는 샤워를 끝마치고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짧은 머리를 털어 내며 닦던 중, 샤워실 입구가 열리며 램파드가 들어왔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샤워실을 찾았는지 머리는 엉망으로 엉켜 새집 같았고, 총명한 눈은 흐리멍덩했다. 램파드는 오메가인 게 들통날까 봐 일부러 사람이 적은 아침 일찍, 혹은 새벽에 샤워실을 찾는다. 바라던 대로 현재 샤워실을 이용 중인 사람은 커틀러뿐이었다.
“어… 커틀러……. 우으… 음……. 우, 잘 잤어?”
혀까지 꼬부랑거리는 걸 보니 씻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씻고 공부하라니까. 끝내고 씻는다더니만 밤새워 공부한 뒤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들어갔을 게 뻔했다. 타올을 내려놓은 커틀러가 머리를 손으로 털었다.
“다 씻을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 대충 물만 끼얹고… 돌아갈 거야. 오늘은 아침 수업… 들어야 해……. 중요하거든.”
“왕국 실정에 관한 수업이지? 나도 들어야 하니까 함께 가. 아, 씻고 나서는 꼼꼼히 닦아. 오늘은 아침 바람이 차가워.”
“으… 응.”
“방은 내가 치울 테니까, 씻고 곧장 아침 먹으러 가자.”
“응……. 후아암.”
램파드는 하품을 찍 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고, 커틀러는 자신의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커틀러는 샤워실 입구에서 동급생 무리를 발견했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부터 샤워실을 찾다니. 커틀러나 램파드 말고 별종은 더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 모두 베타였기에 무시하고 램파드와 함께 사용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램파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커틀러는 홀로 방을 정돈했다.
가장 먼저 램파드의 책상 서랍을 열어 억제제를 살펴봤다. 혹여 잊어먹고 안 챙겨 먹지 않았을까, 개수를 세어 봤다. 램파드는 잊지 않고 일어나는 대로 억제제부터 챙겨 먹었는지 수가 줄어 있었다.
다음은 램파드의 책상 위를 정돈했다. 커틀러가 잠들고 나서, 밤늦게까지 공부한 램파드의 책상은 잉크와 종이로 엉망이었다. 가장 위는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메모였는데, 램파드만큼이나 고왔던 글씨가 아래로 갈수록 삐뚤삐뚤했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이건 다 끝내야 한다며 꾸역꾸역 적은 모양이었다. 필기한 종이를 한곳에 모아 두고, 아무렇게나 막 꽂은 책장을 정리했다.
뭘 먹으며 공부한 램파드의 책상은 난장판이었다. 먹다가 만 빵 조각은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책상 위를 더럽힌 빵가루를 모아 털어 냈다. 램파드의 책상 위가 반짝거리며 윤이 나자 그는 그제야 손을 뗐다.
정작 커틀러의 책상은 깔끔했기에 손댈 곳이 없었다. 잠시 한숨을 돌리는 사이 문이 열리고, 램파드가 등장했다. 커틀러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너…… 그 꼴로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램파드는 작은 타올 한 장으로 하반신을 대충 가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에 쫄딱 젖은 채였다. 추운 날 홀딱 벗고 걸어온 바람에 흰 피부가 연분홍색으로 물들었고, 붉은빛이 감도는 유두는 추위에 도독하게 섰다. 그리고 매끈한 피부는 물기를 머금어 어딘가 요염했다.
마치 램파드의 피부가 당장 베어 먹으라는 듯, 속에 품은 과즙을 내보이며 유혹하는 것 같았다. 커틀러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다 씻고 나왔더니 옷이랑 타올이 전부 다 사라졌어. 들짐승이 물어 갔나.”
“……다른 사람한테 빌리지 그랬어. 어떻게 그 꼴로 걸어올 생각을 한 거야.”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왔지. 누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잖아.”
램파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단 한 장뿐인 무장을 풀었다.
어정쩡하게 걸친 흰 타올이 없어지자 완벽하게 떨어지는 잘록한 허리선과 자그마한 골반이 눈에 띈다. 램파드의 호흡에 맞춰 쏙 들어간 배꼽이 헐떡댔고,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허벅지는 뽀얬다.
커틀러와 오래 생활한 램파드는 그가 알파란 사실을 잊어먹은 모양이었다. 알파 앞에서 오메가가 알몸이 되는 건, 덮쳐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건만. 동급생에게 맨몸을 보이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램파드는 홀딱 벗고 방 안을 가로질렀다.
“가만히 있어. 닦아 줄게.”
“공작가의 사람이 시종 흉내를 내는 건 아냐. 내가 닦으면 돼.”
“아직 시간이 남으니까 이리 와.”
램파드는 커틀러를 무시한 채 젖은 꼴로 방 안을 휘적거리며 옷가지를 찾았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커틀러가 램파드의 팔목을 부드럽게 감싸 자신의 책상 의자에 앉게 하였다.
“물에 젖은 채로 돌아다니지 마. 기껏 청소한 방이 엉망이 되잖아.”
“아, 그렇군.”
순순히 인정한 램파드는 책상에 얌전히 앉았고, 마른 타올을 가지고 온 커틀러가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그는 램파드의 머리가 엉키지 않도록 가볍게 털어 내며 물기를 닦아 냈다.
램파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말려 주는 것이 기분 좋아 살며시 눈을 감았다. 사락, 수건으로 둘러싸인 머리카락이 서로 스치며 기분 좋은 소릴 냈다. 커틀러가 만져 주기 때문에 더욱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커틀러는 첫 각인 상대니까.
그와 함께 있으면 가슴 안쪽까지 저릿해지며 따뜻해진다. 좀 더 따뜻한 피가 온몸으로 퍼졌으면. 램파드의 바람대로 커틀러의 손이 목과 어깨를 이어 주는 곳에 닿자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손이 닿은 램파드의 피부가 살짝 떨렸지만, 커틀러는 모른 체했다.
“돌아앉아 봐.”
램파드는 순순히 돌아앉았다. 커틀러는 쇄골을 따라 천천히 램파드의 몸을 닦아 냈다. 꾸준한 훈련으로 근육이 붙기 시작한 램파드의 가슴과 복부의 물기도 쓸었다. 납작한 복근을 훑고, 예민한 급소가 가까워지자 램파드의 숨결이 점차 가빠졌다.
움푹 들어간 배꼽이 빠르게 떨리는 걸 바라본 커틀러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손 줘.”
램파드는 잘 훈련된 개처럼 커틀러의 명령에 맞춰 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받은 커틀러는 이미 수분이 증발해 뽀송뽀송해진 팔을 닦으며 꼼꼼히 살펴봤다. 램파드의 손끝은 손톱이 몇 개 빠졌고, 속살이 드러나 붉었다. 손등 말고 손바닥도 물집이 터져 엉망진창이다.
램파드 곁에 타올을 내려놓은 커틀러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넣어 둔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
손길을 즐기던 램파드가 화들짝 놀랐다.
“그건, 싫어…!”
“잘못 덧나면 그렇게 좋아하는 검을 한 달간 못 잡을 수도 있어. 얌전히 받아.”
“하지… 마! …아악!”
커틀러는 도망가려는 램파드의 손을 꽉 붙들어 소독약을 끼얹었다. 손끝부터 쫙 올라오는 저릿한 통증에 램파드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고, 이를 악물었다. 쓰라림에 발작하듯 팔을 털어 냈지만, 커틀러의 완력에서 빠져나오긴 힘들었다.
“아, 으, 읏으…….”
램파드의 앓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반항이 멈췄다. 소독약이 끼얹어진 손끝과 손바닥은 얼얼하지만 이제 참을 만했다. 구급상자의 뚜껑을 닫은 커틀러는 다시 타올을 양손에 들어 램파드의 몸을 마저 닦기 시작했다.
“검지 손톱은 두 번째로 빠진 거지? 기초 수련은 이만 됐으니까 무리하지 마.”
“……아직 부족해.”
“나는 물론 검술 교관까지 이길 실력을 갖췄으면서, 수련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뭐야? 그러다 몸 상해.”
“최고가 되어야 하니까.”
커틀러가 낮게 웃었다.
“황제가 아니라 소드 마스터가 될 생각이야? 지금 네 실력이면 황실의 로열 가드도 이겨 먹을걸. 아니, 대륙 검술 시합에서 우승하는 것도 꿈은 아닐 거야.”
“그 정도로 안 돼. 더 강해질 거야.”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강자가 된다면, 램파드를 오메가라 생각할 자가 없을 테니까.
“왜, 대륙 통일이라도 할 생각이야?”
“한번 해 볼까?”
허황한 소리가 아닌지 램파드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커틀러는 답 대신 웃으며 램파드의 몸을 마저 닦았다. 보호자를 찾아 각인한 오메가라면 안정에 기대 현상이 유지되길 바랄 건데. 아직 여물지 못한 탓일까, 램파드는 뭐가 불안한지 자꾸만 힘을 원했다.
“나머지는 내가 닦을게.”
“아니. 이왕 시작한 거 마저 닦아 줄게.”
맨발로 여기까지 오는 바람에 물기 젖은 발은 지푸라기 같은 찌꺼기가 달라붙었다. 커틀러는 허리를 굽혀 램파드의 발끝까지 꼼꼼히 살펴봤다.
달라붙은 이물질을 털어 내고, 발톱이 매끈해질 정도로 꼼꼼히 닦아 냈다. 그는 발뒤꿈치를 닦기 위해 램파드의 허벅지를 벌리게 하였다. 무릎 꿇은 커틀러는 램파드의 다소 민망한 곳까지 볼 것이다. 램파드는 시선을 돌려 방구석만 바라봤다.
조용한 방 안은 살을 스치는 타올의 소리와 두 사람의 호흡만이 들렸다. 적막에 집중하자 거칠게 숨을 쉬는 건 램파드 혼자라는 걸 알았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보니 커틀러가 입을 꾹 다문 채 발끝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커틀러.”
“…….”
“숨이 멈췄어.”
“…….”
“……혹시 나한테서 냄새 나?”
킁킁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만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페로몬 향도 맡을 수 있다고 하는데 램파드는 코가 막힌 듯 느낄 수 없었다. 뜸을 들이던 커틀러가 답했다.
“조금.”
“씻었는데. 억제제도 제대로 챙겨 먹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커틀러가 옷장에서 램파드의 셔츠를 꺼내 던졌다. 램파드는 방을 가르며 휙 날아오는 셔츠를 능숙하게 받았다.
“좋은 냄새야, 걱정하지 마.”
“역시… 억제제 개수를 늘려야겠어.”
“많이 먹으면 좋을 것 없어.”
“들키는 것보단 부작용이 낫지.”
한쪽 팔만 대충 끼워 넣은 램파드는 손을 뻗어 서랍 안에 숨겨 둔 억제제를 한 알 더 먹었다. 커틀러는 한꺼번에 두 알씩 먹기 시작한 램파드를 주시했다.
억제제는 먹을수록 내성이 생겨 더 많은 양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는 약이 통하지 않는 몸이 되고 그때가 되면 알파를 찾아야 한다. 약이 통하지 않으면 몸이 여물지 않아도 알파를 원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커틀러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터. 옅은 미소를 머금은 커틀러는 단추를 잠그는 램파드를 도우려고 나머지 옷도 꺼내 줬다.
아침을 먹고, 원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램파드는 곯아떨어지듯 잠들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 기숙사는 잠겨 있어 잠을 잘 수 있는 장소는 얼마 없다. 램파드가 낮잠 장소로 찍어 둔 곳은 햇볕이 잘 드는 정원에 놓인 정자였다.
흰 꽃이 활짝 핀 정원 한 중앙에 놓인 정자에 누워 잠든 램파드의 곁은 커틀러가 지켰다. 꽃이 만개한 봄이 됐지만, 아직 날이 쌀쌀했다. 그는 책을 읽는 도중 자신의 외투를 벗어 램파드에게 덮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지 1년밖에 안 된 램파드는 사람 많은 곳이 두려웠다. 사람이 많은 낮 수업은 정말 중요한 것만 골라 듣고, 강의가 끝난 늦은 밤 교수를 찾아가 질문과 답변을 받고 나머지는 스스로 공부한다. 그리고 낮에는 아카데미 구석 어딘가에 박혀 잠을 잔다.
지나가는 동기의 눈에 램파드는 온종일 잠만 자는 게으름뱅이로 보일 터. 저렇게 잠만 자는데 아카데미 입학 이후, 한 번을 제외하고 꾸준히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는 이유가 수긍되지 않겠지.
그들은 램파드가 외모, 혹은 지위로 교수를 꾀어내 성적을 받아 냈다고 생각한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지만 황태자이기 때문에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샤워실의 옷을 훔치는 치졸한 짓거릴 한 거겠지.
“넌 몰라도 돼. 내가 해결할 테니까.”
잠이 든 램파드의 앞머리를 쓸어내린 커틀러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