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스피크 (Doublespeak) 외전
수비
커틀러 콘테, 램파드 클로비스
아버지는 어머니의 첫 번째 각인 상대였다.
순서가 어떻든 둘은 서로에게 각인하여 마음을 키워 갔고, 사랑이 싹텄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둘은 당연하다는 듯 식을 올릴 준비를 했다.
콘테 공작은 최종 각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주변의 만류를 무시하고, 혼인을 올려 부부가 되었다. 평생 남은 시간을 공유할 테니 언제든 두 번째 각인도 할 터. 하지만 두 사람이 기다리던 잔트의 최종 각인은 찾아오지 않았고, 공작은 불안했다. 저러다 잔트의 마음이 다른 알파에게 가면 어쩌지?
공작이 애태워 봤자 최종 각인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위태로운 관계는 단번에 깨져 버렸다.
어느 날부터 잔트가 부부 관계를 피하기 시작했다. 공작은 저항하는 오메가를 억지로 눕혀 몸을 섞었고, 그 뒤로 잔트는 앞으로 잠자리를 가지고 싶지 않다며 완강히 반항했다. 자신을 거부하는 잔트의 행동에 공작의 마음속에 싹튼 불신이 터져 나왔다.
‘어떤 알파를 선택한 것이오!’
‘그런 거 아니에요. 당신뿐이에요!’
남편이 자신을 믿어 주지 않자 잔트는 진심으로 화를 냈고, 그는 오메가가 자신의 품에서 도망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공작은 오메가가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도록 그에게서 검을 빼앗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둘 모두 자라기 시작한 커틀러의 존재를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잔트는 임신한 몸이 힘들어 무의식중에 관계를 피한 것이었다. 마음이 떠나서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첫 번째 각인이 깨져 감정이 사라졌다.
오메가의 두 번째 각인이라는 기회가 남아 있긴 했지만, 태어난 커틀러가 걷고 말을 하기 시작하고, 글을 배운 뒤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짝이 없는 오메가는 이따금 세상이 두려워 벌벌 떨었고, 한쪽 매듭만 풀린 알파는 큰 상실감이 주기적으로 온몸을 덮쳐 괴로워했다.
그들 밑에서 자란 커틀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진정한 짝을 찾게 된다면, 아버지처럼 일을 그르치지 않고 인내를 가져 오메가가 완벽해질 순간을 기다리겠다고.
***
수석 커틀러 콘테. 차석 램파드 클로비스.
램파드가 첫 히트 사이클을 겪은 다음 주.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반년이 지나 첫 성적표를 받는 날이었다. 결과가 바뀔 수 있는 중간 성적표를 신경 쓰는 자는 적었다.
하지만 램파드는 맨 위쪽에 자리 잡은 커틀러 콘테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미간 사이를 좁혔다. 일등 자리를 커틀러에게 빼앗긴 것이 못마땅해 한참을 바라봤다.
자는 시간을 쪼개 가며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했건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니.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뒤처지는 부분이 발견된다면 아버지가 자신의 비밀을 눈치챌지도 몰랐다. 오메가란 사실은 절대로 들키기 싫으니 남들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야 했다.
“저녁 식사도 거르더니 아직까지 공부해?”
아침 일찍 수련하는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는 다른 사람들이 잠든 밤늦게 혼자 검술 연습을 하고 돌아온다. 그는 제국에서는 보기 드문 서왕국식 검술을 구사했고, 괜히 사람 많은 곳에서 선보였다간 시끄러워진다. 소란스러운 것은 싫다는 이유였다.
샤워까지 끝마친 커틀러는 짧은 머리에 달라붙은 물방울을 한 손으로 탈탈 털어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와 책상에 달라붙은 클래스 메이트를 불렀다.
“램파드, 내 말 듣고 있어?”
커틀러는 종이에 매달려 있는 램파드의 이름을 부르며 한숨을 쉬었다.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졌는데 그 뒤로 저녁도 거르고 공부를 하는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중간 성적표가 나붙여진 이후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알파인 자신에게 진 것이 그렇게나 분한 것인가. 어차피 성적 따위 아카데미 내에서만 통하는 것이고, 졸업하여 실전에 나가면 아무런 소용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적 순으로 해결된다면 대대로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들은 하나같이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 승진했을 테지. 하지만 수석 졸업자 중에는 실전에 나가 혜성처럼 잠깐만 반짝였다가 빠르게 사라진 자들도 많았다.
“램파드.”
얼마나 몰두했는지 방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자신의 이름을 불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뻔히 듣고 있지만, 공부가 더 중요하다며 무시하고 있을지도.
커틀러는 침대에 걸터앉았고, 등을 굽힌 채 열심히 필기하는 램파드를 바라봤다.
월등히 빼어난 잔트를 보고 자라서인가 커틀러의 눈에 타인은 어린아이가 찰흙으로 대충 빚어 놓은 하찮은 물건같이 느껴졌다. 특이한 모양새에 잠깐 흥미는 생기지만 그래 봤자 어린아이의 실력으로 만든 형체. 커틀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램파드는 단번에 커틀러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빼어났으며, 함께 지낸 지 반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늘 새로웠다.
커틀러는 기다란 다리를 편히 꼬고 한쪽 발끝을 천천히 까딱거리며 램파드라는 예술품을 감상했다.
꿀 냄새를 잔뜩 머금은 듯한 화사한 금빛 머리카락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가볍게 흔들거렸다. 긴 속눈썹이 드리운 회색빛 눈은 여름 안개를 떠올리게 하여 현실이 아닌, 몽환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날렵한 콧날과 완만하게 솟아오른 입술은 절묘한 곡선을 그렸는데 날마다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예뻐.”
커틀러의 한마디에 가지런히 정돈된 램파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시하고 공부한 것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작은 반응을 발견한 커틀러는 미소를 머금으며 솔직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램파드, 넌 정말 예뻐.”
펜을 내려놓은 램파드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뒤를 돌아봤다.
“예쁘다는 말, 듣기 싫다고 분명히 말했지 않냐.”
“네가 싫다고 말한 사실을 떠올리기 전에 입이 제멋대로 내뱉는걸.”
“하…….”
램파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화를 내고 싶은 듯한데, 램파드는 첫 히트 사이클 이후로 커틀러의 눈치를 봤다. 진심으로 거부하며 싫어했다가 커틀러가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다면 램파드는 곤란해지니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커틀러는 화를 억누르고 참는 램파드를 보며 즐거워했다. 악쓰며 덤비는 모습이 싫었다면 히트 사이클을 가라앉힐 때 순종하라 요구했을 건데,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화났어?”
“시끄러워…….”
“답지 않게 참는 거야?”
인상을 팍 쓴 램파드의 시선이 한층 날카로워졌지만, 전처럼 막말을 내뱉지 않는다.
램파드의 고운 눈썹의 사이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커틀러의 입술이 좀 더 크게 휘었다.
“왜 내 눈치를 봐?”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너의 눈 밖에 났다간 히트 사이클을 겪을 때 부탁할 사람이 없는걸.’
램파드의 자존심으로는 절대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애써 진정시킨 램파드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고, 커틀러는 그 모습이 못마땅했다. 참지 말고 성격대로 쏘아붙이면 될 것을. 본래 가진 성격을 죽이고 제 몸을 해치는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마디 쏘아붙이는 것으로 널 떠날 리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
“이미 한 대 쳤지 않아? 그것도 얼굴을 쳐 놓고선 아직 사과도 하지 않았지.”
몇 달이 지난 일이지만 램파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히 울컥한 마음에 주먹을 휘둘러 놓고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예쁘다는 말에 진심으로 화났긴 했지만 때린 건 전적으로 램파드의 잘못이었다.
“미…….”
“사과 같은 건 됐어.”
커틀러는 단호한 목소리로 빠르게 램파드의 입을 틀어막았다. 램파드에게 얼굴을 맞은 일이 불쾌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사과를 요구했을 테니까. 이미 몇 달이나 지난 일을 새삼스레 꺼내 사과받고 싶지도 않았다.
“너에게 맞은 건 기분 나쁘지 않았어. 조각 같은 예쁘장한 손으로 때리니까 불쾌한 생각도 들지 않던걸? 막말을 내뱉는 것 정도는 내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넌 화내는 표정도 예쁘거든.”
“네놈은 정녕 미친 거냐!”
기가 죽은 듯, 커틀러의 눈치를 보던 램파드가 드디어 기운을 차렸는지 본래 성격대로 버럭 화를 냈다.
램파드는 전처럼 오메가 취급을 당했다는 생각에 근본적으로 역겹고 혐오스럽진 않았다. 이때껏 예쁘다는 말에 과잉 반응했으니까 습관처럼 화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 증거로 램파드의 광대뼈 위와 귀 끝이 붉게 변했다.
“거봐. 화내는 표정도 참 예쁘다니까?”
“개소리도 정도껏 내뱉어라!”
“나 말고도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거야. 너는 그만큼 아름다운 미인이야.”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너뿐이다.”
여전히 한쪽 발을 까닥이던 커틀러가 팔짱을 끼며 그 나이 대의 소년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램파드, 넌 뜻밖에 귀가 어둡구나? 아카데미에 있는 모두가 너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걸.”
“헛소리 마!”
“헛소리긴. 하긴, 입으로 내뱉는 자가 적긴 하지.”
램파드가 지나가기만 해도 몰두하던 일을 놓고 한눈을 팔며,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자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다. 그가 제 갈 길을 가고 모습이 온전히 사라진 후에도, 감상의 여운을 즐기느라 뒤늦게 이야기를 꺼낼 정도였다.
굳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지 않아도 램파드의 빼어난 미모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아는 그 사실을 램파드 혼자만 인정하지 않았다.
점점 얼굴이 붉어져서 열기를 뿜어내기 직전인 램파드를 바라본 커틀러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말싸움은 이만 됐어. 집중이 끊겼을 테니 야식이나 먹으러 가자. 계속 굶고 공부하다간 쓰러져.”
“누가 방해하는 바람에 제대로 끝내지 못했지. 다 끝날 때까지 나갈 생각 없어.”
화가 쌓인 램파드는 커틀러를 사납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아 했다.
“방해라… 이래 봬도 난 너의 공부를 도울 생각인걸. 굶으면 머리가 굳어.”
“효율이 떨어지진 않았으니까 간섭하지 마.”
커틀러는 램파드의 필기를 흘끗 바라봤다.
“제 34대 황제 제임스 클로비스가 황위를 찬탈한 해, 왕국은 무슨 일이 있었어?”
“제임스에게 놀아났지. 그는 마음 놓고 황위 쟁탈전을 치르기 위해 제국의 종교를 이용해 왕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밝혀진 건 무려 2세기가 지난 39대 황제의 대에서였지.”
“한 끼 굶는 것 가지곤 끄떡없구나.”
“당연하지.”
램파드는 커틀러를 이겼다는 생각에 기세등등해졌다. 노기가 순식간에 진정된 그는 도로 자리에 앉아 펜을 들어 올렸다. 한 끼 굶는 것으로 공부에 전혀 지장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이제 커틀러도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
램파드의 생각과 달리 커틀러는 고작 한 번으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저대로라면 밤새 굶으며 공부할 테니까. 커틀러는 램파드를 자극하기로 했다.
책을 읽는 양이라든지. 밥을 먹는 속도, 하다못해 강의실에 들어가는 순서까지. 램파드는 사소한 모든 것까지 커틀러를 이기기 위해 애를 쓴다. 그 점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커틀러는 램파드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대로 굶고 밤까지 새운다면 더는 자라지 않을 거야. 지금은 비슷하다만 곧 있으면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커질걸.”
램파드의 양어깨가 움찔거렸다.
“겨우… 하루 굶는다고 차이가 크게 나진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내가 더 큰걸.”
“네 머리숱이 더 많아서 커 보이는 거지. 키는 지금도 내가 좀 더 커.”
“틀려!”
커틀러는 자신의 예상대로 얼굴이 다시 붉어진 램파드를 향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고 가까스로 참아 냈다. 커틀러가 원하는 것은 순순히 식당까지 따라오는 것이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램파드가 밤새 씩씩거리는 게 아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램파드는 커틀러와 시선을 마주했다.
서로 등을 맞대고 비교한 적이 없으니 누가 더 큰지는 사실 모르지만, 눈을 깜빡이지 않고 또렷하게 시선을 주시하는 램파드를 보아하니 어림잡아 키를 재는 듯했다. 한쪽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아하니, 커틀러의 말대로 자신이 좀 더 작은 것을 파악한 모양이었고.
“갈 거지?”
“……그래.”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램파드는 커틀러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자정이 지난 야심한 시각임에도 휴게실로 쓰이는 식당가는 조금 어수선했다. 램파드처럼 밤새 공부를 하기 위해, 혹은 잠이 오지 않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걸로 배가 차겠어?”
심야에는 밤늦게 야식을 찾는 학생을 위해 미리 샌드위치나 쿠키를 구워 준비해 둔다. 오늘은 유달리 찾는 학생이 많았기에 샌드위치가 몇 개 남지 않았다. 커틀러는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시종을 시켜 자는 요리사를 깨워 다소 무리한 식사를 요구했다. 날벼락 맞은 요리사들은 제국의 소공작이 지시한 일이니 대놓고 토를 달지 못하며 주방으로 이동했다.
램파드라면 적어도 스무 개는 먹어야 배가 찰 것인데, 세 개밖에 없다니. 간에 기별도 가지 않지만, 요리가 완성될 때까진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보드라운 흰 빵 사이에 얇은 햄과 채소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램파드의 미간 사이가 점점 좁혀졌다. 맞은편에 앉은 커틀러 때문이었는데, 본인이 식당에 가자 해 놓고 정작 먹지는 않고 뚫어지게 관찰만 했다.
방에서 다퉜던 것처럼, 또다시 예술품 취급하며 감상에 빠진 모양이었다.
“적당히 좀…….”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램파드의 등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들려와 입을 다물었다.
서로의 이야기에 푹 빠진 상급생은 당사자가 있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드는 중이었다.
“이번에 새로 입학한 꼬맹이 중 끝내주는 미인이 있던데.”
“금발 머리의 신입생 맞지?”
램파드보다 뒤늦게 상급생의 목소리를 들은 커틀러가 맞은편에 앉은 끝내주는 미인을 향해 싱긋 웃었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굳게 다물린 커틀러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들려온 듯해 램파드는 샌드위치를 먹던 손을 내려놓고 인상을 썼고, 상급생의 이야기는 여전했다.
“어떻게 아는 거지. 혹시 너도 눈여겨본 거냐?”
“……반했어?”
“그 정도 미인인데 한눈에 반했지. 누가 선수 치기 전에 먼저 접근해야겠어.”
“혹시 고백할 생각이라면 관둬. 걘 베타야.”
“뭐 어때. 일파께서 품어 준다는데 베타가 뭔 상관이래.”
공기 빠지는 것처럼 파하하, 낮은 웃음소리가 함께 들렸다.
“멍청하긴. 그 금발 절세미인이 제국의 황태자 전하라는 건 모르나 보군. 잘못 들이댔다간 내일 아침 목이 잘리는 수가 있어.”
“정말?”
“수업을 빼먹으니 소식이 느리지. 아쉽게도 사실이야.”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 황족이 입학했군. 황태자라면 뛰어난 가정교사를 황궁에 불러들이면 될 텐데, 왜 굳이 서민들이 섞인 아카데미에 온 걸까?”
“여긴 귀족 후계자가 많잖아.”
“그게 왜? 황궁에도 귀족은 많아.”
그들은 모략이라도 꾸미는 양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지만 램파드에게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듯, 큰 소리로 느껴졌다. 이야기를 꺼낸 상급생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러 뜸을 들이는 중이었고, 램파드에게도 효과를 봤다. 그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램파드 황태자는 황제 폐하와 사이가 좋지 않거든.”
“왜?”
“모임에 나간 아버지께서 그러시던데, 램파드 황태자가 황제를 꺼리는 기색이 보인다 하셨어. 아마, 파벌이 필요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한 걸 거야.”
“굳이 이런 곳에 들어와 고생하지 않아도 그 얼굴로 꼬여 낸다면 누구든 넘어갈 건데. 난 태어나서 그런 미인은 처음 봤거든.”
“하긴. 얼굴이 그 정도면 몸도 끝내주겠지.”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교복 밖으로 드러난 몸 선만으로도 죽이던걸. 알고 보면 공용 목욕탕에서 함께 씻는 남자들 고추를 전부 세운 건 아니냐.”
커틀러의 말대로 다른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 도를 넘은 상급생의 말에 램파드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테이블에 양손을 올렸다.
램파드보다 앞서 자리에서 일어난 커틀러가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말릴 생각 하지 마.”
이런 모욕을 당한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당장에라도 끓어오르려는 램파드의 목소리는 분노에 휩쓸려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들만의 이야기에 푹 빠진 상급생 두 명은 이제 램파드의 벗은 몸을 자기네들끼리 망상하기 시작했다. 얼굴 피부가 뽀야니까 몸도 그만큼 하얗고 매끈할 게 분명하다고. 보지도 못한 램파드의 알몸을 저희끼리 상상하며 열정적으로 떠들었다.
커틀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램파드의 어깨를 꾹 누르고, 먹다 남은 샌드위치가 올라간 쟁반을 뺏어 들었다. 그대로 곧장 이동해 상급생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왁, 씹! 뭐야!”
표정 하나도 바뀌지 않은 커틀러가 덤덤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유난히 더러워 보이기에 쓰레기통인 줄 알았습니다, 선배님.”
금발의 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급작스레 은발의 미소년이 나타났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소년의 모습에 그들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들끓는 분노에 쉽게 몸을 맡겼다.
그들은 커틀러의 목에 있는 리본 색상을 훑어보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낮은 학년인 걸 파악하자마자 참지 않고 화를 냈다.
“신입생이 상급생에게 덤비는 거냐! 죽고 싶어 환장했어?”
황태자에 관한 소문에 집중하느라 콘테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입학한 사실은 잊은 모양이었다. 눈앞에 있는 은발의 곱상한 소년이 콘테 가문의 사람이란 걸 알았더라면 바닥에 넙죽 엎드렸을 테지만, 분노로 뒤덮인 그들은 하급생인 커틀러를 아랫것으로 보았다.
무덤덤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던 커틀러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 수 가르쳐 주시죠.”
“건방진 새끼. 넌 오늘 죽었어!”
입꼬리를 한쪽만 쭉 올린 커틀러가 보류해 뒀던 빈 쟁반으로 상급생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돌멩이에 쇠가 부딪히는 듯한 큰 소리가 났고 커틀러의 일격을 맞은 상급생이 단번에 쓰러졌다.
“이 새끼가!”
남은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커틀러는 소년의 티를 채 벗지 못했고, 졸업을 앞둔 상급생은 성인과 마찬가지기에 덩치 차이가 월등했다.
상급생은 자신의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커틀러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방향을 잃은 주먹이 공중에서 휘청거렸고 커틀러는 긴 다리를 구부려 상대의 명치를 가격했다.
“커, 헉!”
짧은 단말마와 함께 상급생이 쓰러졌다.
커틀러는 쓰러진 상급생을 발끝으로 툭툭 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램파드의 맞은편에 태연하게 앉았다.
“……생각 이상으로 정신 나간 놈이군.”
“누구?”
“너.”
“도와준 사람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교사들의 귀에 들어가면 반성실에 끌려가 이틀 정도 갇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짓거릴 저지른 커틀러는 자신의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도와 달라고 한 적 없어.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네 실력이 뛰어난 건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내 도움이 성가셨나?”
아무리 몸집 차이가 심하다고 하나 쓰러진 상급생 둘 모두가 합심해서 덤벼들어도 털이 북슬북슬한 고양이의 솜방망이같이 느껴질 터.
하지만 방금까지 성적 대상으로 희롱하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휴게실에 있는 학생들이 모두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떠들었을지도 몰랐다. 승리를 쟁취해도 많은 사람 앞에서 모욕당하는 건 썩 좋은 기억이 아닐 것이었다.
“아니. ……하, 그래. 고마워.”
“뭘. 그나저나 깨어나는 대로 입을 놀릴지도 모르겠는데, 뒤처리는 어떻게 할 거야? 도와줄까?”
“둘 다 하급생한테 한 대 맞고 기절한 것이 부끄러워 쓸데없는 소릴 하진 않겠지마는. 혹, 입을 놀린다면 후회하게 해 줘야지. 그보다 넌 네 걱정이나 해. 고분고분하게 반성실에 들어갈 생각은 아닐 테지?”
한 손으로 볼을 괸 커틀러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미소 지었다.
“황태자 전하, 황족만큼은 아니어도 당신 앞에 앉은 사람도 권력을 가졌다는 걸 수시로 잊는 모양인데?”
커틀러는 저 멀리 음식을 가지고 오는 요리사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커틀러와 램파드에게 인사를 올린 후 쟁반 가득, 구운 사슴 요리와 고기를 듬뿍 넣은 파이를 대령했다.
“잊지 않았어. 그리고 권력은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데 쓰는 것이 아니다.”
램파드는 앉아 있는 테이블 위를 음식으로 가득 채우는 시종과 요리사를 바라봤다.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분명 속으로 새파랗게 어린 것이 늦은 밤에 깨워 요리를 시켰다며 화를 내고 있을 것이다.
“명심하지요.”
“건성으로 답하긴.”
“들켰나?”
램파드는 드디어 커틀러에게 경계를 풀며 호의를 보였다. 매끈하고 얇은 입술을 살짝 벌리며 둘도 없을 찬란한 미소를 보였다.
커틀러는 경계심을 모두 거둔 램파드의 미소를 즐겁게 감상했다.
“역시, 넌 정말 예뻐.”
“마음대로 말해.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굉장히 빠르게 인정하는걸.”
“몇 번이나 말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멍청이가 아니거든.”
“좋아. 허락도 받았으니 이제 자주 말해 줄게. 예쁜 네 모습을 못 보면 슬프니까, 반성실에 들어가지 않도록 손도 쓸 거고.”
커틀러가 장난스레 웃었고, 이번에는 램파드의 눈썹 사이가 가까워지며 주름이 생기지 않았다. 눈썹 사이는 여전히 거리를 유지했지만, 커틀러와 램파드의 사이는 조금 가까워졌다.
그날 이후로 커틀러가 램파드를 챙기기 시작했는데, 꼬박꼬박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워서인가. 몇 주 뒤, 최종 시험에서 램파드는 수석을 차지했고 월반을 요청했다. 물론 커틀러도 함께 한 학년을 건너뛰기로 했다.
***
램파드와 같은 저학년이 사용하는 검술 훈련장은 활기가 넘쳐 났다. 실력은 없지만, 열정과 체력이 넘쳐 나는 학생들은 우렁찬 소릴 내지르며 연습용 검을 휘둘렀다.
소란스러운 군중 안에 섞인 램파드 또한 이름조차 모르는 동급생과 따분한 대련을 진행했다.
“램파드 클로비스 군.”
“예.”
대련 중이던 램파드는 검술 교관의 부름에 손을 멈추며 그를 주시했다. 훈련 중이던 학생들도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하던 일을 멈추며 교관과 램파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교관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램파드는 덤덤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상급반으로 올라가도록. 상급생 검술 교관에게는 미리 말해 두었으니 곧바로 이동하면 된다.”
월반은 검술만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과목도 소홀히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므로 전체 성적이 좋아야 했다. 지난번 수석은 램파드였으니까 자격은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현재 램파드가 소속된 검술 수업은 막 검을 쥐기 시작한 초짜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두 다리로 걷고, 뛰기까지 할 줄 아는 램파드에겐 걸음마를 배우는 듯해 불만이 가득했다. 다행히 기초반을 생략하고 상급반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상급반은 졸업하자마자 기사가 되는 자들이 대부분이라 제대로 된 검술을 연마할 수 있을 터. 램파드는 자신의 실력을 부쩍 키울 수 있겠단 생각에 들떴다.
“그리고 커틀러 콘테 군. 자네도 상급반으로 가겠는가?”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는 따로 요청하지 않았지만 기초반 교관이 보기에 커틀러 또한 상급반으로 올라갈 실력을 충분히 갖췄기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커틀러는 잠깐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네.”
그렇게 두 사람은 기초 검술반을 생략하고 곧바로 상급생 검술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상급생 훈련장은 다소 먼 곳에 떨어져 있어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숲을 가로질러 갔다. 울창한 나무숲이 등장했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나뭇잎 모양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 번 상급생 훈련장을 찾아가 본 적 있는 램파드가 앞장섰고, 그 뒤를 커틀러가 보폭을 맞춰 따라갔다.
“커틀러.”
“응?”
“넌 왜 기사가 되고 싶은 거냐.”
공작 가문의 외동아들이면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을 할 수 있건만, 그는 선택지 없는 하급 귀족이 별다른 수가 없어 선택하는 기사가 되겠단다.
“가문을 나가 자립하고 싶어.”
램파드는 문무를 두루 갖추기 위해 다소 부족한 기사 수업을 중점으로 듣는 것이었다. 커틀러도 비슷한 이유이려나 했는데 뜬금없는 대답이 나왔다.
까닭이 궁금해진 램파드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고, 커틀러도 맞춰 천천히 걸었다.
“남들을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공작 가문을 버리고 독립한다는 말이야?”
“맞아. 귀족 작위 같은 건 관심 없거든.”
“네가 나가면 콘테 공작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너는 형제도 없잖아.”
콘테 공작 부부는 각인이 깨어진 이후로 방을 따로 쓰고 있다. 그 사실을 잘 알지만 굳이 램파드에게 설명할 필요를 못 느껴 몇 가지 가능성을 늘어놓았다.
“부모님 두 분 다 아직 젊으셔. 내가 집을 나가면 동생을 하나 낳지 않으실까. 그게 아니면 능력이 뛰어난 고아를 데려오겠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 램파드를 향해 커틀러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이 얘기가 사교계에서 나온다면 적어도 두 달간은 식지 않는 화제로 사교계를 뜨겁게 달굴 것인데, 말을 꺼낸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콘테 공작이 알면 졸도하겠군.”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셔.”
“설마, 공작이 그런 터무니없는 요청을 수락한 것이냐.”
“아니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화를 내셨고, 그대로 의절당했어.”
램파드의 두 발은 이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췄고, 드물게 입이 떡 벌어졌다. 반면 커틀러는 태연스럽게 램파드를 지나쳐 걸어갔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램파드는 뒤늦게 자신을 앞지른 커틀러를 뒤따랐다. 그는 천천히 따라오는 램파드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차분히 이야기를 진행했다.
“어머니가 말려서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는 콘테 가문 소속이지만은……. 기사 작위를 받고, 성을 바꾸면 공작 가문 소속이 아니게 돼. 콘테 공작 가문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나면 서민이 되려나.”
“네 실력이면 준남작부터 시작할 거다.”
“다행히 자그마한 저택을 살 돈은 받겠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는 수도 외곽의 숲속에 움막이라도 만들까 싶었거든.”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냐.”
“콘테 가문이 싫거든.”
“가문이 싫다면 오메가밖에 없는 가문의 사위로 들어가도 되지 않나. 밀리어스 백작 가문도 자식 셋 모두가 오메가니까 우성 알파인 널 반갑게 맞이할걸.”
“어중간한 귀족 가문에 들어갈 바에 작위가 없는 평민이 되고 말지. 차라리 부족해도 나 스스로 살길을 찾겠어.”
커틀러는 평소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가 아닌 진중하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클로비스 황실은 어때?’
램파드는 순간 오메가인 자신에게 커틀러가 오는 건 어떤지 생각했고, 후회했다.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인데 턱도 없는 소릴 내뱉을 뻔하다니. 어쩔 수 없이 알파인 그의 도움을 받지만, 서로 각인된 것도 아니었다. 혼자만 앞서 나갔단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평소라면 생각 없이 말부터 내뱉었을 것인데 드물게 입 밖으로 나오기 전 생각부터 했다. 그가 오메가 집안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와 함께 왜 콘테 가문이 싫은지를 생각하느라 생각이 섞여 버려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램파드에겐 천만다행이었다.
우선 콘테 가문이 왜 싫은 것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상급생 검술반에 도착하여 궁금증은 다음에 해소하기로 했다.
졸업을 앞둔 상급생 반에서 램파드와 커틀러는 굳이 신입생이라 소개하지 않아도 한눈에 파악되었다. 오랫동안 검술에 매진한 상급생들은 성인식이 지난 자들이었고, 다들 근육이 단단하게 붙은 몸을 과시했다. 한창 자라는 중인 램파드와 커틀러는 동급생 중에서 결코 작은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난쟁이와 거인처럼 차이가 크게 났다.
갑자기 등장한 어린아이 두 명에 상급반 교관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를 똑바로 주시한 램파드가 당당하게 말했다.
“기초반에서 올라왔습니다.”
“아, 자네들이! 그쪽이 램파드 군인가?”
교관은 램파드의 뒤쪽에 자리 잡은 커틀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커틀러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공손히 숙였다.
“커틀러 콘테라고 합니다. 램파드와 함께 상급반으로 올라왔습니다.”
“기초반 교관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점잖아 보이는 자네 쪽이 램파드 군 같았다네. 착각해서 미안하군. 그러면 이쪽이 램파드 황태자인가?”
커틀러와 비교하면 경망스럽게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돼 램파드는 살짝 언짢아졌다. 그러나 여러 명의 동급생과 생활하면서 불쾌한 일을 몇 번 당했고, 그때마다 성질을 죽이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했다. 이 정도 불쾌함은 가볍게 넘기며 커틀러와 마찬가지로 공손히 인사했다.
“램파드 클로비스입니다.”
“황족이라고 하나 내 수업을 듣는 이상 다른 학생과 동등하게 대할 것이다.”
“예, 교관님.”
“좋아. 상급반은 자네 두 명을 반갑게 맞이하겠다.”
램파드의 대답이 마음에 든 교관은 호탕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기초반 교관에게 자네들의 실력은 이미 들었다. 이리 오게.”
교관은 가까이 다가온 두 사람의 어깨를 붙잡으며 상급생 무리의 정중앙으로 이동했다. 훈련 중인 상급생들은 자신들의 시점으로 보기에 꼬맹이인 게 분명한 두 사람의 등장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몇 년 만에 월반한 뛰어난 학생들이다. 앞으로 함께 훈련을 할 테니 잘 지내도록!”
잔뜩 모인 상급생들은 두 사람을 반겼다.
“월반이라니, 우리 대에서는 처음 보는걸. 반갑다.”
“이쪽은 상급반 소속 중 가장 실력이 월등한 자다. 졸업하자마자 로열 가드가 될지도 몰라.”
여러 명의 상급생이 몰려와 자신들의 눈엔 귀엽기 그지없는 하급생에게 반갑다며 한마디씩 더했다. 램파드는 오랜만에 겪는 환대에 능숙하게 인사를 하며 무리와 어울렸다.
환한 얼굴로 자신을 소개하는 무리에 불만이 가득한 자가 둘. 뚱한 표정의 두 사내는 몇 주 전 커틀러가 손수 뚜드려 팬 상급생이었다. 하급생한테 당한 것도 화가 나는데, 공작 가문을 등에 업은 커틀러가 작은 처벌조차 받지 않아 불만이 가득했다.
“자, 자! 자기소개는 이만 됐다. 수련을 마저 시작하도록.”
교관이 손뼉을 치자 다들 ‘네’ 짧은 대답과 함께 멈춘 손을 움직여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자율 훈련에 돌입하자 연습용 검을 든 교관은 램파드와 커틀러에게 다가왔다.
“나는 자네들의 실력을 익히 들었지마는 자네는 상급반의 수준을 잘 모르겠군. 어때, 한번 대련을 해 보겠나?”
램파드는 교관이 건넨 연습용 검을 받았다.
기초반이 사용하던 나무로 만든 연습용 검과 달리 날만 없앴을 뿐, 실전에서 사용하는 진검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 묵직함부터 달랐다. 진검과 다름없는 느낌에 램파드는 고양되었고,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바라던 바입니다.”
“호기로워 마음에 드는군. 적절한 상대를 정해 주지.”
하라는 연습은 하지 않고, 하급생과 교관의 이야기를 엿듣던 상급생이 손을 들며 다가왔다.
“교관님, 제가 하고 싶습니다.”
“자네가?”
“예, 몇 년 후 제가 받들어 모실 황태자 전하와 검을 나누는 영광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입은 공손했지만 눈빛은 시건방졌다. 그는 몇 주 전 식당에서 램파드를 욕보인 자였다. 램파드와 커틀러를 해코지하기 위해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달려든 것이었다.
“자네도?”
두 사람은 이번 기회에 치욕을 해소할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하급생에게, 정확히는 커틀러 쪽에게 거대한 적의를 내뿜으며 이죽거렸다.
램파드는 커틀러에게 적대를 보이는 두 남성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리 불쾌한 일이었다고 하나 램파드 인생에서 그 둘은 쓸모없는 자였다. 잠깐 지나친 쓰레기는 기억할 가치가 없어 빠르게 잊고 툴툴 털어 냈기에 크나큰 적대를 보여도 무덤덤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커틀러는 두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으며, 대신 나섰다.
“교관님, 저 또한 대련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지키려는 듯 나선 커틀러의 행동에 램파드도 뒤늦게 두 상급생의 정체를 파악했다. 몇 주 전, 커틀러에 손에 쓰러졌던, 입으로 램파드를 희롱한 오물 같은 놈들이었다. 이것은 램파드 자신에게 좋은 기회였다. 램파드는 두 사람을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교관님이 권해 주셨으니 학생으로서 응하는 게 당연하지요. 저부터 상대 부탁합니다, 선배님들.”
그들에 비해 한참 작은 램파드가 상대를 대수롭지 않게 올려다보며, 조각 같은 입술 끝을 끌어 올려 도발 섞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하급생이 가소로워진 상급생의 적의는 이제 커틀러뿐만 아니라 램파드에게도 쏟아졌다.
“좋다. 램파드 군부터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갑자기 대립하는 학생들을 보며 교관은 난처해했지만 그들의 투지를 외면하지 않고 승낙했다. 저렇게나 불타는 투쟁심을 내버려 뒀다간 언젠가 터져 나올 것이고, 큰 사건을 일으킬 바엔 여기서 해소하는 것이 낫기에.
“시합 시작!”
시합을 알리는 교관의 외침에 두 사람은 검을 쥐었다. 월반한 학생의 실력이 궁금한 상급생들이 모여들었다. 램파드는 자신에게 시선이 쏟아져도 개의치 않으며 검을 꽉 쥐었다. 커틀러에게 패배한 이후 곱절로 노력하여 실력을 끌어 올렸다.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진 모르지만 어지간한 적은 쓰러뜨릴 자신 있다.
상급생이 사용하는 대련장은 초급반과 비교하면 말을 타고 뛰어다닐 정도로 넓었다. 큰 소리를 치지 않는 이상 대련장 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상급생은 램파드를 보고 히죽거리며 겁도 없는 소릴 조용히 내뱉었다.
“부부처럼 함께 꼭 붙어 오다니. 혹시 너희 둘이 사귀냐?”
작은 목소리지만 똑똑히 들렸고, 램파드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뻔한 도발이 분명해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하건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소리였다.
아카데미는 귀족 작위가 아닌 학년으로 우위를 정한다. 상급생에겐 존댓말을 써야 하지만 램파드로서는 눈앞의 상대를 존중할 필요가 없었다.
“겁도 없는 소릴 지껄이는 걸 보니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하급 귀족인가 보군.”
당돌한 램파드의 태도에 상급생을 코웃음을 쳤다.
“램파드 황태자 전하. 아직 어려서 뭘 잘 모르시나 본데, 이렇게 먼 자리에서 우리 둘만 나눈 대화를 가지고 처벌했다간 귀족들의 반발을 살 거야. 게다가 황제 폐하랑 사이도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던데 나를 처벌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안쪽 볼살을 잘근 씹은 램파드는 빠르게 진정했다. 앞으로 이런 쓰레기를 무수히 만날 건데 일일이 도발에 넘어갔다간 시간 낭비였다.
창관을 없애는 하나의 목표만으로도 램파드는 인생을 바쁘게 살아가야 하므로 하찮은 일은 여유롭게 넘겨야 했다.
“시끄럽고 덤비기나 해. 설마하니 겁먹어서 입으로만 대드는 거냐?”
“건방진 꼬맹이. 울고 불며 빌게 해 주지.”
램파드를 향한 악의가 한층 더 커졌다. 처음으로 겪는 살의가 섞인 투쟁심에 램파드는 긴장하여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아, 그래. 내 몸이 궁금하다고 했지? 네놈이 이기면 못 보여 줄 것도 없지.”
상대에게 도발당한 램파드는 동요한 마음을 감추고자 역으로 그를 자극했다. 상급생이 태연하게 받아넘겼더라면 긴장한 램파드의 태도를 한눈에 알아봤을 텐데, 그는 분노에 온몸을 맡겼다.
“너, 너, 이 새끼. 그 자리에서 다 들은 거냐.”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무시했는데 한 방에 나가떨어질 줄이야. 알파라는 놈이 상상 이상으로 연약하더군.”
“입 다물어!”
그의 검이 램파드를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하찮아 보이는 상급생의 실력에 램파드는 도발당해 일렁거리는 마음을 빠르게 정돈했다.
램파드는 황궁에서 로열 가드들의 지도를 받으며 검술을 배웠다. 그들은 막 검을 쥐기 시작한 램파드를 상대로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는 기초반 학생들과 검을 겨누었기에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적의를 가진 진짜 적의 검이라는 생각에 사뭇 긴장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 램파드는 상대의 검을 가볍게 쳐 내고, 빠르게 이동하여 반격했다. 상급생은 퍽 당황한 듯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중급반도 뛰어넘고 상급반으로 월반하더니 역시 굉장한걸!”
대련장 밖에서는 어린 램파드를 응원하는 큰 소리가 들렸고, 상급생은 얼굴 근육을 몹시 구기며 인상 썼다. 하지만 처음으로 적과의 싸움에 임한 램파드의 몸과 마음은 잔뜩 고양되어 응원이 들리지 않았다. 투쟁심에 모든 걸 맡긴 램파드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카앙, 캉. 날이 없는 쇠칼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대련장 밖을 둘러싼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상급생은 램파드의 검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검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 두 번, 합이 더해질수록 무게는 더해졌고 부담이 간 손이 벌벌 떨렸다.
“……위험한 거 아니야?”
두 사람의 대련을 구경 중이던 상급생이 말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학생도 램파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움직임이 과격했다. 그리고 그런 램파드의 검을 받는 상급생의 쩔쩔매는 모습도 좋지 않았다.
“윽, 이 자식!”
램파드의 대련 상대가 악을 쓰며 공격했지만 무산되었다. 저 작은 몸으로 저런 속도와 힘은 어떻게 나오는지. 상급생은 달려오는 램파드의 공격을 피할 재간이 없었고, 뿜어내는 살기에 순간 뒷걸음질 쳤다.
“히이익!”
정확히 급소를 노리는 램파드의 검이 마치 진검처럼 느껴졌다. 어느 정도 숙련자가 휘두른다면 날이 없는 가검이라도 치명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살기 위해 뒷걸음질 쳤지만 도망치긴 글렀다.
램파드는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상급생에게 빠르게 달려들었지만 가로막혔다. 중간부터 램파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챈 교관이 개입한 것이었다.
“램파드 군, 정신 차려라!”
교관의 진검이 램파드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램파드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정신 차렸다.
“……교관님.”
이렇게까지 검에 몰두하여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집중한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뒤늦은 후유증에 두통이 와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리며 손에서 힘을 뺐다.
램파드의 움직임에 맞춰 교관도 검을 천천히 아래로 떨어뜨렸다.
“크크흑… 윽…….”
잡아먹힐 듯한 살기가 없어지자 양다리를 부들부들 떨던 상급생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불유쾌한 냄새를 풍기며 노란 오줌을 질질 쌌다. 그의 한심한 모습을 내려다보던 램파드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어떠한들 다음 황제는 나다. 네놈의 얼굴은 제대로 기억해 두지.”
오줌을 지린 상급생은 그제야 자신의 분수를 깨닫고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이렇게까지 모두의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다시는 전처럼 입을 싸게 놀리지도 않을 것이다.
램파드의 예상대로 효과는 뛰어나다 못해 증폭되기까지 했다. 신입생인 램파드가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알파, 그것도 상급 검술반의 학생을 몰아붙였단 소문이 아카데미 전체에 퍼졌다.
쉽게 잊지 못하는 고운 외모 때문에 뒤에서 나도는 소곤거림까지는 완전히 못 막았지만, 적어도 램파드가 졸업할 때까지 그의 앞에서 더러운 희롱을 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살 희망자가 아닌 이상 램파드가 거슬려 할 말을 내뱉긴 두렵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