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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진실 (13/25)

13 진실

마음 같아선 당장 황궁으로 향하고 싶지만, 램파드는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조용히 넘어가자니 신경 쓰인다.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으니 요양을 핑계로 잔트의 별장으로 와도 좋으련만. 커틀러는 회복되자마자 기사단장 업무에 복귀했고, 램파드는 그에게 찾아오길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연락은 편지였다. 처음에 보낸 편지는 평소와 같이 본론만 한 줄 짧게 적었다. 황성까지 우편물이 가는 데만 5일이 걸린다. 느긋하게 2주를 기다렸건만 소식이 없어 다시 펜을 들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 없어 사연이 붙여졌다. 커틀러의 안부를 걱정하고, 궁금하지도 않은 황궁 소식을 물었다. 회답이 오지 않자 내용이 점점 불어났고, 네 통째가 되었을 땐 편지지만 세 장 분량으로 늘어났다. 이마저도 답신이 오지 않아 황제의 인장을 찍은 공식 문서를 화이트 테일로 보내서야 반응이 왔다.

콘테 가문의 별장 앞이 소란스러웠다. 요양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고 하나, 갑자기 없던 황자가 생겨나 황궁은 일이 늘어났다. 램파드는 정무를 진행하기 위해 소수에게만 별장 주소를 알려 서류를 받았다. 드물지만 그런 손님이 찾아오니 익숙한 풍경일 터.

3층 베란다에 양팔을 걸쳐 무료하게 아래를 바라보던 램파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회백색과 짙은 푸른색이 섞인 갑옷은 화이트 테일의 제복이다.

“램파드 폐하, 화이트 테일에서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시종은 돌돌 말려진 두루마리를 쥐고 있었고, 보라색의 왁스를 녹여 찍은 기사단장의 마크가 보였다. 봉인을 뜯어낸 램파드는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내렸다.

쌓인 일이 많아 출두 명령을 거부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사심 같은 건 단 한 숟가락도 들어가지 않은 딱딱한 공문서 그 자체였다. 심지어 대필을 썼는지 커틀러가 아닌 다른 자의 필체였다. 섭섭해진 램파드는 두루마리를 꼬깃 구겨 테이블 위로 던졌다. 용건이 끝났는데도, 시종은 자리를 지켰다.

“다른 용건이 더 있는가.”

“예, 화이트 테일의 기사가 주고 간 것이 있습니다.”

따로 쪽지를 끼워 보냈을지도 몰랐다. 아주 조금 기대치가 올라갔건만 시종이 꺼낸 물건을 보고 램파드의 기분은 다시 진창에 처박혔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가거라.”

“알겠습니다.”

시종이 방 밖으로 나가고, 가느다란 노끈에 꽉 묶인 편지 꾸러미를 쥐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리본은 커틀러가 묶은 듯 좌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대칭을 이뤘다. 빈틈없는 그의 성격과 똑같은 매듭이었다.

손끝으로 리본의 고리를 걸어 쭉 잡아당긴 램파드는 끌러진 봉투를 뜯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 애초에 램파드가 봉인한 이후 뜯은 흔적조차 없으니, 열어 볼 필요가 없기에.

몇 주 뒤, 콘테 가문의 의사가 램파드를 살펴보기 위해 먼 거리를 찾아왔다. 그는 램파드가 별장에서 지낸 이후로 2주일에 한 번씩 왕진했다.

“원래 튼튼하시다 보니 회복이 굉장히 빠릅니다. 폐하의 몸도 괜찮아졌고, 아이도 건강해졌군요. 이제 마음껏 움직이셔도 좋습니다.”

의사의 진단이 없어도 온몸의 근육이 말을 타고 달리고 싶어질 정도로 근질근질했다. 램파드의 몸이 들썩거리자 의사가 단단히 못 박았다.

“저택 안에서만 마음껏 움직이십시오.”

“……그 외 조심해야 할 것은 없는가.”

“네, 뭐… 별장에 계실 테니까 필요 없는 말이긴 한데 발정제 때문에 쓰러지신 거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발정제를 보관하는 병도 쳐다보지 마십시오.”

“참고하지.”

한번 솟아오르기 시작한 배는 한껏 부풀었다. 이제 옷 같은 것으로 숨길 수 없는 정도가 되어 황궁에 가라고 해도 못 간다. 그리고 또, 누구를 닮았는지 배 속의 아이는 가만있질 않고 난리를 피워 조금 걸으면 금방 지쳤다. 안쪽이 출렁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하게 움직였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조용했다. 오히려 가만히 있어 걱정됐는데 건강하다니 한시름 놓았다.

“진찰은 다 끝나셨나요? 시장하실 테니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숱이 많은 긴 머리를 무겁게 흔들며 직접 손수레를 끈 잔트가 나타났다. 커틀러의 상태를 전하고 난 뒤, 처음 몇 주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매일 얼굴을 마주치니까 마음을 정리한 듯 지금은 전처럼 램파드를 대했다.

잔트가 끌고 온 손수레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빻은 견과류를 듬뿍 넣어 구운 빵과 남부 지방에서 난 신 포도를 섞은 크림치즈를 꺼냈다. 와인으로 만드는 포도보다 빨리 수확하는 청포도는 절반으로 잘라 부드러운 크림치즈와 섞어 신맛을 줄였다. 신맛을 싫어하는 램파드의 입맛에 맞춰 조리한 거였다.

손수 음식을 차린 잔트는 주머니에서 기다란 끈을 꺼냈다.

“식사 전 머리부터 묶어 드릴게요.”

“부탁하지.”

잔트는 램파드의 가는 모발을 꽃다발 엮듯, 부드럽게 끌어모아 동여맸다. 남들보다 손가락 개수가 부족해도, 그에겐 방해조차 되지 않았고, 능숙하게 머리를 묶었다.

“머리가 많이 길었네요. 자르는 건 어떤가요?”

램파드는 잔트를 흘끗 봤다. 머리 하나 길렀을 뿐인데, 같은 얼굴이 달라 보였다. 똑같이 생겼지만 좀 더 차분해 보이기에 대하기 편했다.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긴 잔트와 비교해서는 짧지만, 등을 덮는 길이도 평생 처음 가져 본다. 램파드는 흘러내린 옆머리를 손끝으로 쭉 잡아당겼다. 검사에게 긴 머리는 성가실 뿐 불필요한 장식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검을 사용할 일이 없으니 그냥 두고 싶어졌다.

“나중에 한 번에 자르도록 하지.”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램파드의 머리를 묶어 준 잔트는 테이블로 이동해 잔에 음료를 따랐다. 임신한 램파드는 발효차를 먹을 수 없어 시원한 과일 음료를 준비했다. 준비한 음료는 설탕에 절인 청포도 차. 이 근방의 흙은 철분이 많아 지하수에도 영향을 끼친다. 탄산질이 풍부해 톡 쏘는 맛이 나는 물은 상큼한 과일과 특히 잘 어울렸다.

“출산일까지 한 달 조금 남았네요. 이름은 정하셨나요?”

애쉬가 정해 준 이름이 있긴 하지만 어쩔지 결정을 못 내렸다. 아이의 아버지인 커틀러에게 물어보는 것이 먼저니까. 그의 의견을 듣고 싶지만, 편지조차 보내지 않으니 말을 꺼낼 기회가 없었다.

“생각해 둔 건 있지만, 커틀러의 의견도 한번 들어보고 싶군.”

“생각하신 이름이 뭔가요?”

“커틀러에게 가장 처음 말해 주고 싶다.”

“그것도 좋지요. 말이 나온 김에 커틀러를 별장으로 불러들이는 건 어떤가요? 저도 오랜만에 아들 얼굴이 보고 싶어요.”

잔트는 램파드가 편지를 여러 번 보냈다가 퇴짜 맞은 사실을 몰랐다. 그 후로도 개인적인 편지를 여러 개 보냈지만 묵살당했다. 굳이 커틀러가 답하지 않아도, 황궁의 소식은 근근이 들려오니 그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진 잘 안다. 기사단장 업무에 복귀한 커틀러는 전과 다름없는 속도로 사건을 해결했다.

사건을 조사하고 추리하는 거야 검을 쥘 필요가 없으니까 변함없겠지. 그의 몸 상태가 어떠한지 직접 보고 싶었다. 잔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를 깨뜨릴 수 없어 마음을 진정시켰다.

“자네가 불러 보는 건 어떤가?”

“제가요? 그 아이는 연락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아 안부 인사도 잘 안 보내요. 제가 먼저 연락했다간 큰일이 난 줄 알고 걱정할지 몰라요.”

“자네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는가. 불러올 이유가 될 것인데.”

“이제 거의 다 나았는걸요. 심하게 앓은 것도 아니고, 미열만 조금 있는 감기였어요.”

이제 램파드의 손은 컵에서 떨어져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올라갔다. 좋아하는 음식을 한껏 차려 뒀는데도, 잔트와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손이 멈췄다.

“완전히 나은 게 아니니 문병 오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나.”

한층 속도가 빨라진 램파드의 말을 듣던 잔트가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커틀러가 보고 싶으시군요?”

“아니, 전혀.”

한 치의 주저 없이 답한 램파드는 실수를 깨닫고 귓불이 붉어졌다. 좀 뜸 들이고 대답할걸. 이래서야 완전히 긍정하는 꼴이었다. 다과회가 길어질 듯하자, 잔트는 빈 잔에 음료를 채워 넣었다.

“오메가가 임신하면 자신의 알파가 보고 싶어져요. 쑥스러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런 게 아니다. 게다가 그는 내 알파도 아닌걸.”

잔트의 한쪽 보조개가 쏙 들어갔고,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의 웃음은 퍽 오랜만에 봤다.

“저도 임신 중에 불화가 있었는데도, 남편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싸운 건가.”

“네. 그때 손가락도 잘렸고요. 그이가 싫어졌는데, 출산일이 다가오니까 이상하게 보고 싶어졌어요. 덕분에 화해했긴 하지만 완전히 용서하진 않았어요.”

잔트는 손이 불편한데도 커틀러 정도의 검사를 키워 냈다. 그만큼 검과 함께한 세월이 길었을 건데, 강제로 떨어졌다니. 상심이 컸을 것이다. 커틀러 또한 마찬가지겠지.

“콘테 전 공작에게 자네를 제대로 보필하라고 단단히 일러 둬야겠군.”

“지금도 제 말에 꼼짝 못 하고 있긴 하지만, 폐하께서 한마디 해 주시면 더욱 좋죠. 감사드리는 의미로 이번 일은 도와 드릴게요.”

두 번째 잔을 깨끗이 비운 잔트는 시종을 불러 테이블을 치웠다.

늘 곁에 두는 시종을 데리고 방으로 간 잔트는 커틀러에게 보낼 편지의 내용을 말했고, 받아쓰게 했다. 잔트는 외부인을 좋아하지 않아 별장에 손님을 들이는 것을 꺼렸다. 커틀러가 사정해 램파드와 황궁 식구를 받아들인 것이니, 보답으로 수도에서만 파는 장미꽃을 담뿍 넣은 초콜릿을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아프다는 내용도 빠짐없이 넣었건만, 열흘이 지난 후 도착한 건 전혀 다른 내용의 편지였다.

잔트의 얼굴이 파리해지자 램파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가.”

“커틀러가 북부 지방의 경비대에 지원했다는 내용입니다. 며칠 뒤에 출발일이 잡혀 여긴 못 오겠다며 물건만 보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비슷한 내용의 서류가 왔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 램파드는 침대 곁,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에서 문서를 몇 개 꺼냈다. 북부 지방의 경비를 맡던 기사단의 계약 기간이 만료돼, 새로이 모집한다는 보고서였다. 그사이 커틀러가 지원한 모양이었다.

중요 자원이 묻혀 있는 북부 지방은 매서울 정도로 추운 날씨 덕분에 도시가 들어서지 못해 얼음과 백곰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중요 지역이긴 하나, 북부 지방을 침범하면 잃는 것이 더 많아 딱히 노리는 자가 없어 설렁설렁 경비를 서도 된다. 춥고 따분한 일이기에 어중간한 죄를 지은 자들을 모아 사면을 대가로 몇 년 처박아 두는 지역이었다. 커틀러가 자진해서 갈 필요가 없건만.

“폐하…….”

수도와 최대한 먼 곳에 가려는 뜻은 램파드에게서 멀어지고 싶단 말이었다. 커틀러의 결정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램파드뿐이기에 잔트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사정했다.

“커틀러를 막아 주십시오. 북부 지방이라니……. 거긴 아니 됩니다.”

램파드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자와 똑같은 얼굴의 그는 한껏 눈썹을 떨어뜨리고 얇은 입술을 살짝 벌린 무방비한 모습으로 애걸복걸했다. 이제껏 감히 램파드에게 미인계를 시도하는 자는 없었고, 램파드는 처음 당하는 공격에 크게 당황했다.

사실, 커틀러는 가만히 놓고 뜯어보면 타인을 압도할 외견을 가졌다. 찢어 죽일 듯한 시선을 죽이고, 독설 대신 보드라운 입술을 휘어 주기만 한다면 뭐든 들어줬을지도 몰랐다. 티끌 하나 없는 순도 높은 은을 갈아 만든 조각인 듯한 미인이 모든 걸 제치고 부탁하면 걱정은 뒷전, 달랠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마음에 뒀던 그가 이러했다면 제국을 통째로 갖다 바쳤을 테지.

홀랑 넘어가 그렇다고 답하기 전에 벗어나야 했다.

“하루만 생각하게 해 다오.”

“알겠습니다. 저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램파드가 혼자 생각할 수 있도록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잔트가 인사를 올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방에 혼자 남게 된 램파드는 손에 든 문서를 침대 위에 흩뿌리고, 빤히 쳐다봤다.

단순히 머리를 식히기 위해 먼 곳으로 간다고 하기에는 규모가 남달랐다. 북부 지방은 한 번 들어가면 최소 5년은 갇혀 지내야 하니까 어지간한 각오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떨어져 지내겠다는 속셈인가. 북부 지방을 선택한 걸 보면 아예 작정한 것 같았다.

곧 자신의 아이를 낳을 오메가를 내버려 두고 말도 없이 대뜸 떠나겠다니, 너무하지 않는가.

혹, 자신을 잡아 달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곁에 둬 봤자 예전으로 돌아갈 리도 없을 터. 그를 붙잡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오래전 과거에 쌓았던 우정보다 실망한 마음이 컸으니까. 그건 커틀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구겨진 서류를 바닥으로 대충 밀어 버린 램파드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루를 달라고 한 건 램파드의 영악한 꾀였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파발을 보내야 커틀러의 출발을 간신히 막는다. 내일이면 마음이 바뀐다 하여도 이미 그는 북부 지방을 향해 출발해 손쓸 수 없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 긍정의 답을 기대한 잔트는 램파드의 대답을 듣고 눈에 띌 정도로 실망했다.

“너무하십니다. 북부 지방이 어떤 곳인지 알고 그러시는 겁니까.”

“짐이 보낸 것이 아니다. 커틀러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지.”

“자진해서 북부 지방을 지원했을 리 없지요. 분명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다. 팔도 성치 않은데, 추운 북부 지방이라니. 너무 고된 여행길입니다.”

성가신 램파드는 인상을 쓰며 의자에 기댔다. 자진해서 가겠다고 지원한 커틀러를 막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이나 설명했다.

“어차피 지금 쫓아가 봤자 결정을 번복하기엔 늦었다. 파발을 보내도 화이트 테일은 이미 출발했을 테니까.”

“너무하시는군요. 그래서 저에게 하루를 더 달라고 하신 겁니까!”

드물게 목소리를 올린 잔트가 원망을 담아 램파드를 노려봤다. 그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수분을 머금은 자수정 보석이 이채를 뿜어냈다.

“커틀러를 막지 못한다면 당장 나가십시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램파드는 잔트의 손가락질이 황당했다. 그는 별장 입구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륙의 일인자를 내쫓겠단 의사를 확실히 표했다. 램파드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뭐라…….”

“심하게 다퉜다고 앙심을 품으며 위험한 사지로 몰아넣으시는 건 아닌가요! 막지 못하겠으면 다시는 폐하를 모시지 않을 겁니다. 나가세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 자진해서 지원했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어찌 폐하를 도운 커틀러를 내버려 두는 겁니까!”

커틀러는 램파드를 돕다가 검술을 잃었다. 램파드가 직접 잔트에게 설명했으니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가 날 도운 건 내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커틀러가 제멋대로 군 것이지.’

입 안에 머무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꾹 삼킨 램파드는 잔트를 노려봤다. 커틀러가 다시 검을 들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몹시 슬프고 화가 났다. 또다시 그의 소중한 것을 강제로 빼앗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원인을 제공한 라이와 함께 자기 자신 또한 증오스러웠다.

대번포드 백작을 심문하기 전 의장을 넘기라는 커틀러의 말을 거절해서 그가 다친 게 아니었다. 커틀러를 향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증오를 품은 자신이 낳은 결과였다.

증오해 마지않는 상대가 바스러져도, 기쁘긴커녕 마음만 아프다. 대신할 자를 찾았는데도 후련하지 않다. 애쉬가 좋지만 마음 놓고 그를 선택하기엔 미안해진다. 커틀러에 대한 증오를 싹트게 한 씨앗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짓이라 굳게 믿으며 세운 단단한 벽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무너뜨려야 하건만 오랫동안 품어 왔을 애정과 증오가 뒤섞여, 되레 견고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화가 치솟아 테이블을 뻥 차 버려 쓰러뜨렸다.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는데도 잔트는 자리를 지키며, 램파드를 노려봤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작은 의심에 속절없이 흔들린 자신이 환멸스럽다. 성가신 마음 따위 파내 버리고 싶었다.

“정말 한심하군요.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지만 제 손이 성치 않아 그럴 수 없다는 게 슬픕니다.”

“건방지게 입을 놀리지 마라!”

램파드는 자리를 지키는 잔트의 멱살을 쥐어 잡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이성이 날아간 램파드를 노려보며 제 할 말을 꿋꿋이 했다.

“손찌검할 생각이라면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화가 풀린다면 커틀러의 북부행을 다시 한번 검토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

램파드가 손에 힘을 풀자 잔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램파드에게 위협당해 겁을 먹었음에도, 떨리는 손끝을 가리며 자리를 지켰다.

“거기, 너!”

램파드의 지목에 한스가 화들짝 놀랐다.

“네… 넵!”

“지금 당장 파발마를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황궁으로 보내면 됩니까?”

“북부 지방의 국경 수비대에게 보내거라. 황명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제국 밖을 벗어날 수 없다 전해라!”

한스는 국경을 폐쇄하란 명령에 토를 달고 싶었지만, 지금 램파드에게 기름을 끼얹었다간 폭발한다. 궁금증을 내던진 한스는 램파드의 명령에 따라 황제의 명령서를 만들었다. 주변이 어수선했고 램파드는 잔트를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어떻게든 이곳으로 불러와 주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내겠다.”

잔트는 대답 없이 자리를 지켰다. 양손을 모으고, 바닥을 바라보는 그의 오뚝한 콧날 위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보인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북받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숨을 쉰 램파드가 자리를 비켰고, 명령서를 든 한스가 쪼르르 달려왔다.

“폐하께서 지시한 문서를 준비했습니다. 지시서는 따로 첨부하지 않아도 됩니까? 북부 지방만 차단한다지만 며칠간 모든 물자와 여행객의 발이 묶일 예정이라 황궁으로 연락이 쏟아질 겁니다.”

“최고 대신 그놈에게 모든 권한을 준 이유가 왜겠냐. 짐이 없을 때 대신 일하라고 앉혀 놓은 것이다. 알아서 해결하라 해라.”

네 개밖에 없는 국경의 관문 중 하나를 차단하면 상당히 많이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한스는 황궁이 아닌, 램파드 곁에 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분명 이번 사건으로 모든 대신과 시종이 며칠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철야를 할 게 분명했다. 그만큼 원망도 클 터.

자세히 설명할 필요 없다. 필요로 국경을 차단했다는 짧은 의사를 전달해 주기만 해도 황궁에서는 이해해 줄 터인데 램파드는 사소한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보였다. 한스는 재량껏 황궁에 보낼 안내문을 작성해 문서에 첨부했다.

“황궁에는 그리 전하겠습니다. 북부 지방의 국경 수비대에게는 추가 요청할 사항이 없으십니까.”

“있지.”

“말씀해 주십시오.”

“화이트 테일이 도착하는 대로 커틀러만 여기로 오라고 전해라. 다른 놈들은 수도로 돌아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하고. 만약 거부한다면 북부 지방에 주둔하는 기사 모두를 동원해 강제로 끌고 올 테니, 순순히 따르라 전해라.”

황제 앞만 아니었다면 한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을 게 분명했다.

아주 조금만, 상냥하게 굴어 줘도 좋으련만. 램파드는 무언갈 인정하기 싫은지 커틀러에게만 유달리 높다란 장벽을 세워 박해했다.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이를 갈며 커틀러를 경계하는 모습만 몇 년을 보았다.

커틀러의 명령에 10년이 넘도록 램파드를 모셔 왔지만, 한스는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다. 커틀러를 위해서 램파드를 설득시키고 싶지만 자신 없어 관뒀다. 까딱 잘못했다간 마지막 말뚝이 뽑히고, 저택 안을 공동묘지로 만들지도 모르니까. 목줄을 다시 채울 사람도 없으니, 입을 꾹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파발꾼을 북부 지방의 국경으로 보내겠습니다.”

“중간 보고는 필요 없으니까 하지 말아라.”

“예.”

판은 깔아 뒀다. 화이트 테일을 이용해 황명을 무시하고 국경 수비대와 전투를 벌이지 않는 이상 커틀러가 방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제 램파드가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

막상 그가 찾아온다고 하니 왠지 꺼려졌다. 편지를 보낼 때까지만 해도 커틀러의 방문을 기꺼워했을 터인데. 그깟 종이 쪼가리 몇 번 거절당했다고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그의 입을 통해 진심을 듣지 않았는데도, 마치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램파드는 커틀러가 평생의 짝이라고 점찍어 뒀다. 하지만 커틀러는 아니었다. 그는 여태껏 각인 상대를 찾지 않았으며 이번 일로 램파드에게 크게 실망해 남은 정이 모조리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램파드는 그를 만나고 싶은 한편 또 겁이 났다. 그가 정말로 자신에게 질렸다고,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찌해야 할지 상상조차 두렵다. 관계가 끝났단 생각만으로도 섬뜩해졌고, 심장이 터질 듯 뛰어오르니까. 혹여나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정리해야 할지도 몰랐다.

연인같이 몸을 섞지 않아도 아카데미에서부터 우정을 쌓아 왔으니까. 친구라는 이름의 형태로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커틀러를 상처 입힌 일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외적인 부분은 물론, 그를 부정하며 폭언을 내뱉었으니 분명 마음 깊숙한 내적인 곳까지 상처 입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틀러는 램파드의 곁에 계속 남아 주었다.

이번에도 전처럼.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고, 태연하게 굴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어떻게든 커틀러를 곁에 두고 싶어 작은 가능성을 끌어모았다. 이때껏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 같은 모습이길 바랐다.

***

비가 맹렬히 쏟아지는 날은 전쟁터를 상기시킨다.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남부 지방에 있는 별장 주변의 흙은 붉었고, 여기저기 고인 빗물 때문에 피 웅덩이같아 보였다.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깨어난 램파드는 초에 불을 붙이고, 읽다가 만 서류를 들었다. 서기가 작성한 라이와 애쉬에 대한 일과였다. 둘은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어두웠던 바깥의 방문 틈 사이가 환해졌다. 세찬 빗소리를 뚫을 정도로 별장이 소란스러워졌고, 누군가 램파드의 방문을 두드렸다.

“램파드 폐하, 주무십니까?”

“아니다. 들어와라.”

끼익, 문이 열리며 상기된 얼굴의 한스가 보였다.

“밤도 늦었는데 소란스럽군. 무슨 일이냐.”

“주인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램파드는 읽던 애쉬와 라이의 기록을 내려놓았다. 커틀러를 만나는데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느꼈다. 한 글자도 보이지 않게 두꺼운 표지로 덮어 버렸다.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으니 이곳으로 바로 데려오너라.”

“예.”

오래간만에 진짜 주인을 보는 한스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발걸음까지 가벼워진 양, 빠르게 사라지는 한스를 바라보며 램파드는 미소 지었다. 하긴 그를 만나는 것은 몇 달 만이라 반갑기 마련일 테지.

램파드 또한 정리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가슴 안쪽이 일렁거리며 초조할 정도로 그의 방문이 기다려진다. 뭐가 어떻든 오랜 친우인 것만큼은 변함없으니까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며 그를 기다렸다.

램파드는 의자를 창문가로 바짝 끌었다. 별장의 불을 환히 밝혔다지만 바깥은 비가 거세게 내리는 한밤중이라 어두웠다. 빗물로 얼룩진 창문에 바짝 붙어 아래를 내려다봐도 그의 모습은 형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당도하기 전, 조금이라도 먼저 파악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애쓰지 않아도 잠시 후면 그를 만날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굳게 다문 듯, 하지만 사실 미미하게 미소를 머금으며 새삼스럽게 예상 밖의 행동을 할 테지. 늘 그래 왔으니까.

램파드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배 속의 아이 또한 설렘에 움직였다.

“주인님을 모셔왔습니다. 초를 더 켤 터이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커틀러를 데리러 간 한스가 먼저 올라와 어두웠던 방 안을 환히 밝혔다. 기뻐하던 한스는 온데간데없고, 침울한 표정으로 교체되었다. 그의 표정을 보자 램파드 또한 마음이 덜컥거렸다. 걱정 때문인지 부푼 배 위에 올라간 손끝이 간지럽게 느껴져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비에 쫄딱 젖은 커틀러가 나타났다. 화려한 은발은 비가 스며들어 무겁게 내려앉아 눈가를 덮었다. 입지 않고 대충 걸친 제복 코트 또한 빗물이 배어 무거워 보였다.

비 때문에 핏빛으로 물든 회백색의 바짓단보다 어깨 붕대로 단단히 동여맨 팔이 눈에 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삼가 명을 받아 폐하께서 머무르는 곳에 찾아왔습니다.”

제국 기사의 인사를 올린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땐, 겉껍데기만 놔둔 채 속 알맹이가 바뀌었다 느껴질 정도로 낯설었다. 황좌에 앉아 있으면 화이트 테일의 커틀러 콘테 경에 관한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깨진 유리를 긁어모아 만든 검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자. 살기를 잔뜩 품은 시선에 찔릴까 봐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냉혈한. 감정을 모조리 죽였는지, 단단하게 굳은 입매는 좀처럼 휘는 꼴을 보지 못한다. 그의 살기에 놀란 신임 기사 중에는 졸도하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그를 낳은 어미조차, 웃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리라.

전혀 아닌걸.

세간의 평가와 달리 커틀러는 꽤, 오히려 램파드보다 훨씬 더 잘 웃는 편이다. 다만 웃음이 크지 않을 뿐, 희박할 정도로 옅은 미소가 눈가와 입술에 머무른다. 얇은 종잇조각이 들어갈 만큼 살짝 입술을 뗄 때는 드물게 낮은 웃음소리도 들린다.

무수히 들려오는 그의 평가를 헛소문으로 생각했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커틀러를 마주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풍문을 그저 뜬소문으로 치부하며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이 마주하는 낯선 커틀러가 램파드 눈앞에 섰다.

무수히 돋아난 가시에 찔릴까 봐 다가가기 힘들었다.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램파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팔은 괜찮은가.”

“폐하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상세히 말해 보아라. …회복될 가망성은 있는가?”

“신경이 전부 죽어 움직이기 힘들다 들었습니다.”

실제로 마주하니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은 통증이 일어 이를 악물었다. 램파드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자신의 잘못을 곱씹었다. 미안하다는 말로 넘길 수 없다. 진심을 담은 사죄를 해야 하건만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황제에게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한 수많은 자의 모습이 스쳐 갔다. 잘못을 빌어 본 적은 없지만 그들의 모습을 따라 시늉하면 될 것이다.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커틀러가 용서하지 않으면 지금의 서먹한 관계가 끝까지 유지되는 것인가. 그건 싫었다.

주제를 바꿔야 했다. 그와는 늘 깊이 생각하지 않고 편히 대화를 나눴는데, 전처럼 담화를 나누기 버거웠다. 사고를 거치니 더욱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다.

램파드가 주저하자 드센 빗소리를 뚫고,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공하옵니다만 별다른 지시 사항이 없다면 이만 쉬러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고, 아침 일찍 보도록 하지.”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커틀러가 사라지자 램파드는 빗물이 흐르는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그렇게나 매몰차게 굴었으면서 무언가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던 모양이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마음은 저 혼자 상심해 일렁댔다.

자신 혼자서만 기다렸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져 눈을 감았고, 태동조차 사라지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램파드가 머무르는 방과 멀지 않은 곳에 커틀러의 침실이 마련됐다. 비를 맞고 온 커틀러는 씻으러 갔고, 잘 말린 옷가지를 든 한스가 그의 방에 찾아갔다. 이미 방의 주인은 샤워를 끝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갈아입으실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힉!”

물기 묻은 머리를 한 손으로 털어 내던 커틀러가 인상을 썼다.

“시끄럽다. 소란 떨지 말아라.”

밤이 늦은 별장은 작은 발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저렇게 오두방정 비명을 질렀다간 다른 방의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의도를 파악한 한스는 숨을 크게 쉬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매끈했던 너른 등 피부가 엉망으로 난도질이 된 모습에 신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몇 달 전 입은 상처는 새살이 돋아났지만, 그의 피부는 워낙에 하얬고, 붉은 선이 마치 핏물이 밴 새로 입은 상처 같아 보인다.

“저, 죄송합니다. 바를 약을 챙겨 올까요? 마님이 만드신 약은 상처에 잘 듭니다.”

“이미 다 아문 상처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 상처에 한스는 걱정스레 그의 등을 바라봤다. 저렇게까지 깊은 상처를 입었다니. 자신의 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커틀러의 붕대를 푼 오른손은 검은 광물로 만든 고정대를 장착해 움직이지 않았고, 한 손으로 머리를 털어 내는 중이었다. 한 손으로 생활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그는 한눈에 봐도 불편해 보였다.

필요하다면 묻지 않아도 커틀러가 명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기에 한스가 먼저 물었다.

“도와 드릴까요?”

“머리는 이미 다 말렸다.”

“그렇다면 옷을 입혀 드리겠습니다.”

커틀러는 잔트의 별장에 종종 쉬러 왔다. 올 때를 대비해 마련된 사복이 많았고, 한스는 잠자리가 편할 포엣 셔츠를 골라 왔다. 커틀러의 손을 부드럽게 쥔 시종은 천천히 옷을 입히고, 검은 끈을 사용해 허리를 질끈 동여맸다.

옷깃을 정돈하던 커틀러가 가슴 장식으로 사용된 레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이 옷, 누가 입던 것이지 않나.”

콘테 가문 소유의 별장에서 그 누가 함부로 주인의 물건을 건들까. 가능성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는 근거 없는 헛소릴 할 위인이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한스는 아차 싶었다. 부른 배를 숨기기 위해 램파드가 한 번 입은 적이 있던 셔츠였다.

“죄송합니다. 램파드 폐하께서 한 번 입으신 적이 있습니다.”

빨고 햇볕에 바짝 말리기까지 했는데 알아차린 것이 놀라웠다. 사죄하듯 고개를 숙인 한스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커틀러가 손을 움직였다. 헐렁한 옷은 한 손으로도 쉽게 벗겨졌다.

“다른 옷을 가지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곧바로 치우겠습니다.”

“됐으니까 다녀오너라.”

한스는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방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커틀러는 벗어 던진 옷가지를 들고 비가 내리는 창문 틈에 기댔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부드러운 천을 코끝으로 쓸었다. 피부에 자극이 전혀 없을 정도의 부드러운 천에는 오래 남지 않을 정도의 굉장히 옅은 향이 난다.

그는 램파드가 가진 특유의 살 냄새를 좀 더 맡고자 천에 코를 파묻었다.

다음 날 아침.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 무색할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램파드는 뚱한 표정으로 침대에 기댔다. 문안 인사를 시킬까. 황궁이 아니니 그러한 절차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별장의 주인은 커틀러니까 램파드가 만나러 가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만나러 가자니 너무 이른 아침이었다. 어찌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창문을 열겠습니다.”

램파드를 깨우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온 한스는 꾸벅 인사를 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전날 밤 세찬 비가 쏟아진 덕분에 아침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침 공기가 서늘하네요. 문을 닫을까요?”

“아니, 시원해서 좋군. 열어 두거라.”

“알겠습니다. 오늘 아침은 어떤 음식으로 준비할까요?”

저택의 주인은 따로 있지만 늘 램파드가 정했다.

오랜만에 커틀러가 왔으니,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좋겠지. 잠시 생각에 빠진 램파드는 이불을 부여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커틀러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을 잊은 게 아니라 애초부터 몰랐다. 램파드의 심기가 나빠지자 한스가 눈치를 슬쩍 봤다.

“입맛이 없다면 간단한 음료와 빵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아니다.”

그와 단둘이서 식사한 적은 많다. 함께한 음식은 모두 커틀러가 준비한 음식들로, 램파드의 사소한 식성까지 파악해 준비해 왔다. 채소는 좋아하지 않으며 선호하는 음식은 고기 요리. 특히 시어링 과정을 거쳐 겉껍질이 바싹 익을 정도의 고기 요리를 선호한다. 식감을 중시하기에 빵은 발효시켜 성형한 후 겉면에 버터나 견과류를 듬뿍 발라 바삭하게 구운 것. 디저트는 딸기를 좋아하며 설탕과 꿀을 넣어 먹는다.

늘 함께한 음식은 모두 램파드가 좋아했던 것들이었고, 커틀러의 개인적인 취향은 몰랐다. 어떻게 10년이나 알고 지낸 사이인데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수가 있지. 이마에 손을 올린 램파드는 인상을 한껏 썼다.

“하나 물어보지. …커틀러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

백날 머리를 쥐어짜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바로 곁에 커틀러의 심복이 떡하니 있으니,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창문을 열고, 커튼이 흩날리지 않도록 끈으로 꽉 묶던 한스가 미소 지었다. 램파드가 커틀러에게 관심을 보여 주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주인님은 생선 요리를 좋아하시죠. 레몬이나 검은 후추로 살짝 간을 한 것을 좋아합니다. 산속이라 신선한 활어를 구할 수는 없고, 보관 중인 그라브락스가 있는데 핑크 페퍼 콘을 곁들여 빵과 함께 준비할까요?”

“그러도록 해라.”

“따로 더 주문은 없으십니까.”

“곁들일 차는…….”

또 다른 고비에 램파드는 뒷말을 흐렸고, 한스가 빠르게 대꾸했다.

“잘 말린 페퍼민트로 차를 끓이겠습니다.”

한스의 답을 들은 램파드는 주먹으로 입술을 톡톡 쳤다. 그의 식성은 램파드와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후추의 톡 쏘는 맛을 싫어하는 램파드로서는 어지간하면 선택하지 않는 요리들이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단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친구는 무슨, 우정이라 생각한 것 또한 램파드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렇다면 커틀러와 자신의 관계는 무엇인가.

식사가 준비될 동안 침대에 편히 기대 생각해 봤지만 정리되지 않는다. 한번 마음속에 무언가 걸리기 시작하자 점점 답답해졌다. 해결하지 못한 채 램파드는 한스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이동했고,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커틀러와 잔트가 인사를 올렸다.

커틀러는 헐렁한 포엣 셔츠를 입었다. 램파드에겐 여기저기 남는 천이 많은 옷이었건만 그가 입으니 쇄골과 목선이 도드라져, 그 아래 단단한 가슴이 예상된다.

옷만 바꿨을 뿐인데 커틀러가 한층 더 낯설게 보였다. 화이트 테일의 전투용 갑옷이나 생활복인 제복만 봤을 뿐, 사복은 제법 오랜만이었다. 그는 무도회 같은 행사도 기사단장복을 챙겨 입고 오기에 지난번 릴을 소개해 줬을 때를 제외하고는 참으로 간만이었다.

아침 식사는 조용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커틀러와 얼굴이 닮은 잔트가 나란히 앉으니 형제 같았다. 아들의 얼굴을 봐서 기분 좋아진 잔트가 평소와 달리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달 허브와 함께 땅속에 묻어 뒀다 꺼낸 그라브락스다. 입에 맞느냐?”

“예, 괜찮군요. 어머니께서 신경 써서 준비해 주신 상차림입니까?”

아침치고는 비교적 화려했고, 조촐한 정찬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다. 술안주로 만들어 둔 것인데 폐하께서 드시고 싶다 하여 특별히 꺼냈지.”

커틀러는 램파드가 아닌, 그 곁에 선 한스를 바라봤다.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램파드는 커틀러의 식성 따윈 모른다. 누군가 조언하지 않았더라면 램파드가 생선 요리를 선택할 리 없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램파드에게 익숙한 커틀러라면 적절한 놀림거리를 찾았다며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길게 이야기를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본론만 이야기한 커틀러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조용한 분위기가 싫어 잔트가 계속 이야기를 꺼냈다.

“예정일이 한 달 남았는데 기다렸다가 가는 것은 어떠니?”

“예정일 말입니까.”

“너와 폐하의 아이가 태어나는 날짜 말이다.”

머쓱해진 램파드는 모자끼리 대화하라며 못 들은 척, 음식에 집중했다.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커틀러를 위해 미리 한입 크기로 썰린 그라브락스를 빵 위에 올렸다. 막상 커틀러는 좋아하는 음식이라 하더니만 몇 입 먹지 않고 손이 멈췄다.

“기사단을 정리할 예정이라 며칠 후 황궁으로 떠나야 합니다.”

램파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파삭, 반으로 갈라진 빵이 접시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둘이서 이야기하라며 넘어갈 생각이었건만,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램파드는 눈썹을 치켜떴다.

“화이트 테일을 정리한다고?”

“네. 기사단을 해체하고 저 혼자 북부 지방의 경비로 지원할 겁니다.”

“……거긴 죄인이나 가는 곳이다. 네가 갈 필요 없어.”

“폐하 덕분에 석방되었지마는 귀족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요. 자진해서 가는 겁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언짢아진 램파드는 손을 내려놓았다. 큰 손해를 감수하며 국경까지 막아 데리고 왔는데, 이해해 줄 법도 하지 않나. 그는 램파드에게서 벗어날 거란 생각을 아직 접지 않은 모양이었다. 못마땅해 당장 화내고 싶어졌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삭이며 이유를 물었다.

“북부 지방으로 가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해되는 이유라면 지체 없이 위임장을 써 주겠다.”

“릴이 눈을 좋아한다고 해서 가는 겁니다.”

릴은 이미 호적이 옮겨져 콘테 가문의 본가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그럴 의도로 커틀러에게 소개해 줬건만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낙심은 나중으로 미루고, 램파드는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커틀러의 발언을 떠올렸다.

“그자를 처리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구태여 북부 지방으로 데려갈 필요는 없지 않나. 다른 이의 눈을 피할 곳은 북부 지방이 아니더라도 넘쳐 난다.”

“무언가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릴이 저희 가문으로 거처를 옮긴 후 함께 지내다 보니 정이 붙었습니다.”

램파드는 실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수많은 오메가에게 관심 한 점 주지 않던 커틀러가 끝끝내 한 사람을 선택한 모양이다. 릴과 춤을 추고, 하룻밤을 보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릴을 선택했다고 하니 입맛이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릴의 존재를 모르는 잔트가 물었다.

“릴이라니?”

“제 약혼자입니다. 북쪽 지방에 가서 조용히 혼인식을 치를 겁니다.”

잔트는 커틀러의 행동을 몰염치하게 느꼈다. 자신의 아이를 배고 있는 오메가가 곁에 있는데 다른 자와 혼인한다고 발표하다니. 상황만 보면 커틀러만 죽일 놈이기에 잔트가 램파드의 편을 들었다.

“폐하께서는 우리 가문의 후계자를 품고 계신다. 어떻게 다른 오메가를 만날 생각을 한 것이냐.”

“어머님. 저에게 릴을 소개해 준 것은 램파드 폐하십니다.”

열기가 날아가 미지근해진 차를 한 모금 마신 커틀러가 말뚝을 하나 더 박았다.

“제 아이를 밴 몸으로 약혼자를 소개하셨지요.”

한 번 더 따지려고 시동을 건 잔트는 입을 다물고, 램파드와 커틀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올려 톡톡 치고 있던 램파드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감은 눈을 떴더니, 콘테 가문의 두 사람이 램파드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한층 서먹해진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인 램파드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 말이 맞다. 그래… 그렇군…….”

릴은 램파드처럼 오메가란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다. 번거로운 절차 없이 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며 축복받을 수 있는 어엿한 관계였다.

자신을 위해서 오랫동안 힘써 준 커틀러가 비로소 걸맞은 짝을 찾은 것이다. 축하해 줘야 마땅했다.

“축하한다…….”

담담한 두 사람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잔트는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제 식사고 뭐고 넘어가지 않고, 앞에 앉은 두 고집쟁이를 어떻게든 치워 버리고 싶어졌다. 잔트는 커틀러를 다그치기 위해 신경 써서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 폐하의 아이는 어떻게 하려고.”

아픈 이마를 쓰다듬던 잔트가 커틀러에게 물었다.

“제가 끝까지 책임지기로 말했으니까 콘테 가문의 첫째로 키울 겁니다. 가문 밖에서 아이를 데리고 온다고 하니, 릴도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 릴이라는 자는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순순히 허락하던?”

“예. 자신의 아이로 키운다고 말하더군요. 좋은 사람이지요.”

“하지만… 너는…….”

잔트의 말이 이어지지 못하도록 커틀러가 끊었다.

“이미 전부 끝난 일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맞은편에 앉은 램파드를 똑바로 바라봤다. 램파드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경사스러운 발표니까 웃어 줘야 한다. 엉망진창 꼬여 있던 끈이 풀렸고, 제자리를 찾아갔으니 기쁘다. 오랜 세월 짝을 찾지 못하던 커틀러가 각인 상대를 정했고, 그와 혼인까지 올린다. 친우의 경사스러운 소식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웃었다.

웃고 있는 게 맞나?

확실히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램파드의 눈가 사이는 여전히 주름이 졌다. 이마가 아플 정도로 힘을 준 것이 느껴졌다. 램파드는 손을 들어 올려 이마를 꾹 눌렀다. 웃어야 하는데, 입꼬리가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배가 부르군. 방으로 돌아가겠다.”

램파드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입구에 서있던 한스가 커틀러를 걱정스레 흘끗 바라보며 따라나섰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램파드는 여전히 머리가 아파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마찰로 손바닥의 열기가 안구에 스며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얼굴에 감돌지만, 마음은 돌처럼 딱딱하게 식어 간다.

램파드는 커틀러와의 각인이 끊어지길 간절히 바랐다. 그를 온전히 신뢰했다간 돌아올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여기까지라며 선을 그었다. 일말의 마음을 열었다간 그를 굳게 믿을 것이고, 다시 한번 더 배신당하면 죽고 싶어질 테니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감정을 부정했지만, 질투로 쓰라린 속마음을 더는 외면하기 힘들었다.

마음을 인정한 이유는 이때껏 그를 밀어내기 위한 행동은 쓸모없던 짓이며, 오히려 자신이 먼저 의리를 저버렸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커틀러가 릴과 혼인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니까 인정해야 한다.

후우, 한숨을 쉰 램파드의 손바닥에 미지근한 물기가 묻어났다. 이렇게 되길 원했기에 커틀러에게 릴을 소개해 줬고, 떨어지라며 그를 밀쳐 냈다. 막상 그의 마음이 떠났단 것을 알게 되자 슬퍼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심하고 멍청했다.

램파드는 이런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서 따라오는 한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훔쳤다.

방 안, 커튼이 가지런히 묶인 창문가로 다가간 램파드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인제 와서 혼자 상처받으며 우는 꼬락서니가 추했다.

“혼자 쉬고 싶으니 나가라.”

양손을 배 아래로 가지런히 모은 한스가 며칠 전, 꺼내지 못한 말을 용기 있게 했다.

“주인님이 내뱉으신 말은 진심이 아닙니다.”

“무엇을 말인가.”

“혼인하신다고 하는 건 본심이 아니니까 진중히 말해 보심이…….”

“나가거라.”

램파드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걸 알아챈 한스는 입을 다물고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램파드는 창문에 이마를 기대 입을 틀어막고, 볼 사람도 없으니 참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커틀러와 엮이는 것이 두려워 부러 가시를 세워 그를 찔러 댔다. 실컷 상처 입혀 놓고선 한 번 당했다고 서운해하다니, 꼴좋았다. 자초한 일인데 누구를 원망하겠나.

아침 식사 도중 자리를 뜬 램파드는 아프다는 핑계로 온종일 방 안에 처박혔다. 실컷 울고 난 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되레 자극만 될 뿐, 가슴 안쪽은 여전히 쓰렸고 그 탓에 내리 울었다.

커틀러를 믿지 못해 너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를 향한 의심이 사라져 거리낌 없이 마음을 밝혀도 되지만 이제는 그가 떠난다고 한다.

커틀러에게 자신은 친구였을 뿐이다. 최근 그 선을 넘고 몸을 탐내기에 내줬지만, 사실 먼저 커틀러를 유혹한 쪽은 램파드였다. 알파인 그를 자극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가진 후 보란 듯이 감상을 말하곤 했으니까. 원하는 대로 몸이 이어진 후에도 커틀러는 램파드에게 각인하지 않았다.

그래도 몸이 이어졌으니까 언젠가 그도 램파드를 온전히 원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이제 평생을 함께할 오메가를 찾았으니 더는 전처럼 밀회하지도 못하고, 램파드에게 마음이 끌릴 가능성도 없어졌다. 그런 어중간한 경계의 일마저 없어지면 커틀러와 자신은 무엇이 되는 걸까.

마음이 아팠고, 몸 전체가 멍이 든 듯 욱신거렸다. 생각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고 미쳐 버릴 것 같아 양손으로 이마를 꽉 눌렀다.

“후우…….”

이대로라면 머리가 과열되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커틀러를 막아야 하는데 결정을 내린 그는 쉽게 번복하진 않을 터. 그가 선택한 오메가가 사라지면 다시 돌아오려나. 힘이 없는 오메가 따위 황명으로 처형시키는 건 매우 손쉬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램파드는 침대 시트를 꽉 부여잡으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웃었다. 애쉬는 램파드의 손에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다. 커틀러에게 똑같이 해 봤자 그의 마음은 죽은 이한테 갈 것이 분명했다.

상황이 거기까지 간다면 램파드는 맨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터. 지금 당장 그가 북부 지방으로 떠난다는 것만 생각해도 돌아 버릴 것만 같은데 모든 검증 과정을 통해 커틀러가 자신에 대한 마음이 한 점 없다는 결과를 마주하면 실성할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친우의 인생을 방해하지 않고자,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방을 찾았다.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어 술이라도 마셔야 했다.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온 램파드는 식료품 창고에서 처음 보는 술을 두 병 꺼냈다. 자신을 품고 있는 램파드의 마음 상태를 아는지, 배 속의 아이가 움직이며 요동쳤다. 램파드는 그 반응을 무시하고, 술병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임신부를 온종일 굶길 수 없기에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한스가 음식을 챙겨 왔다. 오랫동안 램파드를 모셔 온 그는 황제의 식성 같은 건 꿰차고 있었기에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 차려 왔다.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두고 가거라.”

이불을 뒤집어쓴 램파드는 손만 꺼내 까딱까딱했다.

쟁반에 담긴 음식을 하나씩 꺼낸 한스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밤 주인님께서 떠나신다고 합니다.”

“그렇군.”

여전히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램파드의 목소리는 동굴 속에 있는 듯, 웅웅 울렸다. 한스는 침착하게 음식을 차려 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북부 지방으로 떠나십니다. 경비 계약이 끝난 후에도 북부 지방에서 지내실 요량인지 저택을 지을 땅을 알아본다 하셨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았으니 지원금은 모두 황실에서 대 주지. 저택을 지을 기술자도 가장 실력이 좋은 자를 고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전해라.”

램파드는 일부러 신경을 써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지만, 한스에게 먹히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한스의 손짓이 빨라졌고 식기끼리 달그락 부딪치는 소리가 유달리 컸다.

그는 어젯밤, 램파드가 걱정되어 방 안에 몰래 들어왔었다. 울다 잠들었는지 눈가를 잔뜩 붉혀 놓은 것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면 울 필요도 없었을 건데. 부끄러운 건 아는 모양인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튀어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음식을 전부 차렸습니다. 이불에서 나와 드시지요.”

“먹을 테니 나가거라.”

“폐하…….”

평소라면 군말 안 하고 나갔을 텐데, 잔트가 밥을 제대로 먹이라며 단단히 일러 두었기에 나갈 수 없었다. 주인의 별장에 주인님까지 있으니 없던 용기가 생긴 한스는 처음으로 램파드의 명령을 거슬렀다.

“일어나십시오. 수저를 드시는 걸 확인하면 나가겠습니다.”

램파드가 튀어 오를 것을 예상한 한스는 거리를 지키며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램파드는 주먹도 짜증도 아닌 아무런 반응 없이 이불 속에 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시 눈이 퉁퉁 부어서 부끄러워진 것인가. 일부러 침대 쪽이 아닌 방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려 간곡히 부탁했지만, 여전히 램파드는 꼼짝달싹하지 않는다.

우환을 느낀 한스는 램파드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불을 흔들었다.

“폐하, 혹시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일어나 보십시오.”

걱정을 한껏 담아 흔들었지만 튀어나온 것은 램파드의 몸이 아닌 빈 병이었다. 굴러 떨어진 빈 병은 바닥을 도로로 구르며 한스의 발끝을 쳤다. 한눈에 무엇임을 알아본 한스의 얼굴은 핏기가 싹 가시며 백지장이 됐다.

“혹시 술을 드신 겁니까?”

“…….”

“램파드 폐하!”

“시끄럽다. 한 잔밖에 먹지 않았으니까 소리치지 마라.”

여전히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는 램파드는 번데기처럼 이불 속에서 꿈틀거렸다. 한스는 아직 혼인하지 못해 자식을 못 봤지만,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이런 기분인 걸까. 180이 넘는 장신의 아이를 돌보는 느낌에 기가 찼다.

램파드가 몸만 큰 아이같이 느껴지니 담력까지 강화된 한스가 이불을 잡아당겼다.

“임신한 몸으로 다른 건 몰라도 술을 드시다니 큰일 나십니다. 의사를 모시고 올 테니 일어나십시오.”

밖으로 튀어나온 램파드의 유일한 신체인 손이 움직였고, 한스의 팔을 꽉 붙잡았다. 강한 압력에 한스는 흔들던 것을 멈췄다.

“의사는 됐다.”

여전히 램파드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고 보면 이불 속에 한 병 더 숨겨 놓은 것 아닌가. 이미 마셔 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더 먹는 것은 곤란했다. 한스는 자신의 힘으로 램파드를 이길 재간이 없어 아군을 불러오기로 했고, 일단은 물러나는 척했다.

“알겠습니다. 나갈 터이니 꼭 드시기 바랍니다.”

램파드가 정신 놓고 술병을 끼고 있는 것은 커틀러가 원인이었다. 북부 지방으로 떠나겠다고 보고를 끝마친 커틀러 또한 램파드를 꺼리는 듯했지만 저대로 술에 취하게 둘 수 없기에 결국 주인을 불러왔다.

머리끝까지 덮은 이불 밖으로 묵직한 한숨이 들렸다.

“이 무슨 추태입니까. 제가 본 폐하의 행실 중 가장 고약하군요.”

램파드는 익숙한 비아냥에 무언갈 기대하며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빠르게 낙심했다. 커틀러는 여전히 싸늘했다. 정확히는 서늘한 것도 아니었다. 마치 너에게는 그 어떤 감흥이 없다는 듯. 램파드를 보는 것보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더 흥미롭게 볼 법할 정도로 무심했다.

목 안쪽까지 무언가 콱 틀어막히는 기분이 든 램파드는 숨을 천천히 쉬었다.

“……이놈의 저택은 축하주도 허락받아 마셔야 하느냐.”

커틀러는 대꾸하기조차 귀찮아졌는지 입을 꾹 다물었고, 곁에 선 한스가 나섰다.

“이미 한 병 드셨잖습니까. 더는 안 됩니다.”

“한 잔만 먹었다. 그 정도로 취할 리 없지.”

한 잔이 아니고 분명 한 병을 다 마셔 버렸으면서. 한스는 커틀러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제발 한마디만 거들어 달라며 애원 가득한 눈빛을 보냈고 그에 응한 커틀러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계속 누워 계실 겁니까.”

“머리가 아파.”

“그렇다면 의사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싫다면 약을 받아 올 터이니 어디가 아픈지 말해 보십시오.”

여전히 쌀쌀맞은 커틀러는 등을 떠밀려 억지로 걱정하는 척했다.

램파드의 행동으로 상처받아 실망한 것까진 좋았다. 그렇게 의도한 일이니까. 온갖 정이 떨어졌다고 해도 10년 넘게 쌓인 관계마저 없던 것 취급할 생각인 건가. 꽤 오랫동안 한 방을 같이 쓰면서 지내 온 세월이 얼마인데. 친구조차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 안쪽이 더욱 답답해졌다.

사소한 관계에 매달리는 이유는 커틀러와 헤어지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없어진다는 게 와닿자 슬펐고, 이내 미칠 것 같았다. 당장 내일부터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자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진다. 또다시 찌르는 듯한 두통에 램파드는 인상을 쓰며 이마를 붙잡았다.

이미 반성은 어젯밤 내내 울면서 했다. 커틀러와 멀어지길 바랐지만 비겁하게도 이 정도로 남남이 되긴 싫었던 모양이었다. 온갖 막말은 다 내뱉으면서, 어떠한 형태로 곁에 있기를 바랐다니. 얼마나 이기적이었는가.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막상 입으로 꺼내려니 힘들었다. 목 안에 콱 들어찬 돌멩이를 억지로 토해 내듯 말했다.

“미안.”

램파드의 사과에 자그마한 소음까지 날아간 것처럼 고요해졌다. 램파드가 주는 자극은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지 커틀러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친구도 아닌 사이에서 몸까지 멀어진다면 진짜 뭐가 되는 거지.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인 램파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새 긴 머리는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엉켰지만, 미모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내가 다 잘못했다. 그러니까 북부 지방으로 떠난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왜 막으시는 겁니까.”

“몇 년 동안 널 못 보게 되니까.”

“북부 지방에 간다고 해도, 가끔 수도에는 들릅니다. 정기 보고를 해야 하니까요.”

“틀려. 이대로 보내면 영영 멀어질 것만 같단 말이다.”

드디어 씨알도 먹히지 않던 커틀러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술주정을 상대하기 매우 성가시다는 부정적인 표정이지만은 작은 반응을 보였고,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모습에 램파드의 마음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커틀러가 램파드에게 이때껏 비아냥거린 건 친밀한 사이를 과시하며 놀린 것이었다. 진심으로 거슬렀다면 진작에 먼 곳으로 유배 보냈지. 애정을 기반으로 한 빈정거림이란 것을 아니까 농을 받아들이며 곁에 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내다 버릴 것을 보는 듯, 불필요해져 치워 버리고 싶다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램파드는 식후 살점이 깨끗이 발려진 남은 잔뼈가 된 것 같았다. 당장 버리는 물건 취급에 울분이 울컥 솟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에게 모진 말을 내뱉지 않고 삭였다. 여기서 더 미움받았다가는 쓰레기 취급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만 같았다.

“가지 마라. 혼인 때문이라니, 그런 이유는 납득 못 해. 계속 갈 생각이라면 북쪽 국경은 영영 폐쇄할 것이다.”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왕국으로 망명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공작 작위를 반납할 테니까 앞으로 당신의 신하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것이냐!”

“네, 맞습니다. 폐하께서도 원하셨잖아요?”

말문이 막힌 램파드는 입 속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가 곁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커틀러에게 온갖 행패를 부려도 자신을 놓을 리가 없단 확신이 들었었다. 그라면 뭘 해도 받아줄 테니까. 오히려 더 소중히 대하며, 누구보다 믿어야 했다. 인제 와서 후회해 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큿… 본심이 아니었어. 네가 영영 떠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미쳐 버릴 것만 같아!”

“……하.”

“네가 나한테 각인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널 좋아하니까 각인 같은 건 필요 없어. 혼인하는 것도 참고 봐줄 테니까 그냥 곁에 있어 줘.”

커틀러의 표정이 한껏 더 구겨졌다. 날파리같이 성가셔서 당장 쳐 내고 싶지만, 아이를 품고 있어서, 황제라서 참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조건을 하나 내걸죠.”

“그래, 뭐든 말해 봐.”

“일주일 안으로 애쉬 테일러의 목을 치십시오. 그리한다면 원하는 대로 계속 폐하 곁에 남겠습니다.”

눈에 띌 정도로 램파드의 어깨가 튀어 올랐고, 갑자기 꿀 바른 벙어리가 된 듯, 꾹 다물린 입은 작은 미동조차 없어졌다.

자존심이 꺾이다 못해 바스라진 램파드를 보기 힘든 한스는 시선을 회피하며 듣지 않으려 애썼다.

“왜 그러십니까. 못 하겠나요?”

커틀러가 다그치자 램파드의 팔이 덜덜 떨려 왔다. 쯧, 그가 혀를 찼고 램파드의 고개는 더욱 아래로 숙여졌다.

“자존심 다 내다 버리면서 절 보내기는 싫고, 애쉬도 가지고 싶으시다? 사랑하는 애쉬의 곁에 계십시오. 그도 알파잖습니까.”

“아냐!”

“…….”

“사랑하는 건 너다!”

“거짓말 마십시오. 진정 원하는 건 애쉬잖습니까.”

“애쉬는…….”

그는 여태껏 루사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이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데리고 온 자였다. 곁에 두니까 안식 장소를 찾은 것처럼 안락했고, 함께 있고 싶어졌다. 그가 사라진다면 형을 잃은 것처럼,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커틀러가 사라진다니 미칠 것 같았다. 하루 고민했을 뿐인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진다. 생각만으로 이 정도인데 몸이 떨어진다면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폐하의 답은 이미 알았으니까 이만 됐습니다.”

“기다려.”

더는 술주정을 감내할 수 없는 커틀러가 유감의 뜻을 표했다. 청초할 정도로 하얗고 고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고, 경멸을 힘껏 담아 램파드를 바라봤다. 그래도 마지막 한마디는 들어 주려는 모양인지 다리가 멈췄다.

“내가… 그의 행복을 빼앗았다. 애쉬뿐만 아니라 형의 행복한 미래까지 함께 짓밟았는데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냐.”

“그래서 손수 죽인 연인을 대신해서 몸 바쳐 희생하겠다는 겁니까?”

기가 찬 커틀러가 턱을 들어 올렸고, 한쪽 입꼬리를 뒤틀며 조소했다.

“다른 방법으로 상환할 수 있으면서 굳이 황후로 삼아서까지 곁에 두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몸이 좋다고 사실대로 말씀하시지, 구차한 변명 같은 건 더는 늘어놓지 마시길. 당신이 천해 보이니까요.”

할 말을 내뱉은 커틀러는 한스를 이끌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의 등은 램파드가 만들었던 허상의 벽같이 느껴졌다. 증오로 다진 램파드의 벽과 달리 실망과 상심이 뒤섞인 벽이었다. 저 벽을 부수지 않고, 나서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

침대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커틀러의 어깨를 꽉 붙잡아 돌려 보게 하였다. 그 또한 참았던 울화를 터뜨리려는 듯, 벌려진 입술 사이로 악문 이가 보였다.

차이가 얼마 없기에 똑같다며 박박 우겼지만, 커틀러가 좀 더 크단 것을 드디어 인정했다. 램파드는 그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발돋움하여 입을 맞췄다.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입술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향을 음미할 새도 없이 포갠 입술을 거부하는 것이 느껴져, 양손으로 그의 볼을 감쌌다.

한쪽 팔뿐이지만 커틀러의 힘으로 램파드를 떨어뜨리긴 손쉬웠다. 그러나 힘껏 밀쳐 냈다간 램파드가 다칠까 봐 부딪힌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저항했다. 아랫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일어도 램파드는 떼어 내지 않았다. 구태여 힘껏 반항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라 느껴졌기에 아직 남아 있는 듯한 작은 부분에 매달렸다.

결국, 손을 들어 올린 커틀러가 램파드의 가느다란 목을 꽉 붙잡아 떨어뜨렸다. 램파드가 물러서자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조금이라도 램파드의 흔적이 남는 것이 싫은지, 연거푸 문질렀다.

“뭐하는 짓입니까.”

커틀러가 깨문 램파드의 입술에 붉은 잇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따끔한 입술의 통증 따위, 마음이 갈라지는 아픔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쪼개지는 것 같은 심장이 버티는 것은 작디작은 희망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조그마한 희망에 매달리기로 작정한 램파드는 단추를 풀어 내렸다. 목 부분을 고정한 단추를 풀고, 헐렁한 옷가지를 벗어 던졌다. 품이 넓은 헐렁한 셔츠가 사라지자 도도록하게 솟아오른 배가 눈에 띈다. 얇은 바지까지 사라지자 백옥 같은 뽀얀 나신이 드러났다.

“몸 같은 건 원한다면 줄게.”

“…….”

“지금 이 자리에서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가지 마.”

“필요 없습니다. 더는 폐하께 바라는 것이 없어요.”

“커틀러!”

신경 쓴다고 했건만 습관이란 것은 무서웠다. 그에게 악쓰는 건 만성이 되어 버린 듯, 큰소리가 튀어나왔다. 커틀러의 눈가가 꿈틀대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목소리를 죽였다. 성대에 힘을 다 뺀 것처럼, 기운이 쫙 빠진 목소리였다.

“부탁이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 줘. …그러고 나서도 떠나겠다면 깨끗이 포기할 테니까.”

언짢은 마음을 다스린 커틀러와 마주하자 램파드의 가슴은 더욱 아파졌다. 여기까지 내던졌는데, 저렇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을 줄이야.

한없이 내려앉는 가슴을 진정시킨 램파드는 자리를 지키며 버텼다. 하지만 고개가 절로 아래로 내려갔고, 시선이 커틀러의 발끝에 향했다. 그는 멈춰 있었다. 무시하고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램파드는 여전히 멈춰 있는 그에게 먼저 다가가 등을 감싸며 껴안았다.

나신의 램파드가 매달렸지만, 그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다.

“폐하께서 몸을 던지는 건 쓸모없는 짓입니다. 해 봤자 제 마음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또다시 가슴을 짓누르는 말이었다. 그래도 몸까지 내어 줬는데 거부당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일말의 희망에 기댔다.

“각오했어…….”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은 커틀러가 램파드 쪽으로 몸을 기대며 한쪽 팔로 등을 감쌌다. 그는 날갯죽지가 아플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며 램파드를 침대로 쓰러뜨렸다.

두 사람이 침대로 쓰러지자 놀란 한스가 숨을 쉬는 것도 멈췄다. 나간다고 보고는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기척을 죽이고 문을 닫으며 조용히 나갔다.

커틀러는 램파드의 부푼 배를 피해 올라탔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날렵한 코끝끼리 닿자 램파드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바람과 달리 커틀러 쪽에서 먼저 입을 맞추지 않아 눈을 떴고 찢긴 입술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감정 없는 그의 표정만큼이나 목석같이 딱딱한 분위기 때문에 램파드의 몸도 따라 굳었다. 관계를 맺으려면 애액이 흘러나와야 하는데, 이래서야 시작도 하기 전에 말라붙을 것만 같다.

“너도 벗어.”

“됐습니다.”

“팔이 불편해서 벗기 힘들다면 벗겨 줄까?”

“아뇨. 적당히 한 번 하고 끝낼 거니까 번거롭게 벗을 필요 없습니다.”

미끼로 몸을 던진 것은 램파드 쪽이라 상처받으면 안 됐다. 생각과 달리 쌀쌀한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하염없이 시간이 가는 것을 기다릴 수만은 없기에 커틀러는 손을 움직여 허리띠를 풀고 지퍼만 내렸다. 벌려진 깃 사이로, 육중한 성기를 압박한 천이 보였다. 앞섶이 부풀었지만 발기한 상태는 아니었고, 본디부터 크기가 컸다.

커틀러의 행동이 멈추자 램파드는 천천히 숨을 내쉬기만 했다. 억제제 대용이랍시고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어 봤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램파드의 알몸만 보면 알아서 페니스가 기립하며 발정했다. 벗은 몸을 보이면 어떻게 해결될 줄 알았건만 계산을 단단히 잘못 했다.

시작부터 큰 난관에 봉착하자 섹스를 처음 하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누워 봐.”

램파드는 커틀러의 가슴을 꾹 눌렀다. 한 번 한다는 계약은 이행할 셈인지, 그는 따로 거부하지 않고 손길에 이끌려 침대에 누웠다. 허리를 세운 램파드는 침대 아래로 내려가 커틀러의 속옷을 벗겼고 페니스를 꺼냈다.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살을 붙잡고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겉면을 훑었다. 그의 성기를 머금은 램파드의 입술이 미미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렇게 싫어하는 짓을 자진해서 할 정도로 애쉬를 붙잡고 싶습니까.”

성기를 물고 있다는 핑계로 말하지 않고 행위에만 집중했다. 변명거리를 주고 싶지 않은 램파드는 둥그런 끝부분을 입에 넣고, 고개를 움직였다. 여러 번 침이 덧칠해진 성기에서 츄릅, 습한 소리가 났다. 구멍에 박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여 봤지만, 남근은 반복된 마찰로 습지고 따뜻해질 뿐이었다.

빠는 것으론 발기하지 않아 혀를 내밀어 사탕을 녹여 먹듯 움직였다. 갈라진 끝부분부터 시작해 곧은 기둥을 혀로 쓸어내리고 부푼 음낭 쪽은 입술로 잘근 물어 슬쩍 잡아당겼다.

“그만하십시오.”

쌀쌀맞고 단호한 명령에 램파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사형 선고를 예상하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고, 그가 내릴 판결을 두렵게 기다렸다.

“쓸모없는 짓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폐하께 반응조차 않는군요.”

그의 서느런 선고에 램파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더 하면…….”

“폐하.”

“……후.”

마음이 콱 조여드는 답답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갈 구석이 없이 막다른 길에 몰린 기분이었다. 궁지에 몰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생각했다. 램파드가 해답을 찾기도 전에 커틀러가 입을 열었다.

“이 이상은 시간 낭비니까 관두지요.”

다그치는 낮은 음성에 정말로 끝이라는 기분이 든다.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는 커틀러를 향해 씁쓰레한 미소를 짓던 램파드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까 보았던 작은 희망은 처참히 부서졌고,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마음이 조각난 것 같았다.

어젯밤 펑펑 울었건만 아직도 서러움이 잔뜩 남은 모양이었다. 커틀러 앞에서 울고 싶진 않았는데, 무심히 내려다보는 그의 앞에 무릎 꿇은 램파드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꼴사나워 숨을 참으며 소리를 죽였지만, 양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며 고개가 한없이 내려갔다. 찌푸린 램파드의 시야가 희뿌옇게 변했고, 악문 입술 위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려 입 속이 짭짤했다.

“하, 진짜 조금은 봐줘도 되지 않나…….”

램파드의 작은 목소리는 발음이 뭉개졌다. 흉한 모습을 더는 보이기 싫어 손바닥으로 두 눈을 막았지만,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히려 억지로 막는 통에 마음이 더욱 서러워져 펑펑 울어 젖혔다.

전에 약속한 대로 마음껏 울 수 있도록 가슴을 빌려준다는 기대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램파드의 자존심이 고매한 걸 잘 알고 있는 그니까 적어도 고개라도 돌려 줬으면.

바람과 달리 그는 시큰둥하게 내려다볼 뿐이고, 램파드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파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렸다.

“왜 당신이 우는 겁니까. 울고 싶은 건 저이건만.”

흐느끼는 램파드의 머리 위로 몰인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후읏… 우는 거… 아냐……. 아니, 읏… 울어서 미안.”

“미안하다면 그치십시오.”

잔인할 정도로 매정한 태도에 갈라진 마음 안쪽에서 피가 울컥 배어 나오는 듯했다. 주어진 무수한 기회를 내친 건 램파드 쪽이었다.

커틀러에게 각인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건만 못마땅해하며 마음을 무시한 죗값이었다. 그를 향한 감정을 하찮게 여겼으니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였다. 인정해야 하건만 버티기엔 괴로워 거부하고 싶다.

“미안… 미안해.”

명령 하나로 수십억의 인구가 살아가는 대륙을 뒤흔들 권한을 가지면 뭐하나. 눈앞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마음조차 움직일 수 없건만.

매정한 커틀러의 목소리는 기회가 지나갔음을 알렸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커틀러의 옷깃을 붙잡고, 숨겼던 얼굴을 내보였다. 램파드가 자신에게 매달리자 커틀러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계속 의심해서 미안하다.”

악문 커틀러의 잇새로 한숨이 배어 나온다. 불쾌하다는 기분을 담았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 없다.

“보란 듯이 다른 남자를 찾아간 것도… 네 말을 듣지 않아 다치게 한 것도 미안해. 고작 자존심 때문에 사랑한다는 감정을 무시한 전부… 내 잘못이야. 용서해 줘……. 이대로 너를 보내기 싫어.”

커틀러의 옷깃을 붙잡은 램파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발… 널 사랑해. 가지 마……!”

냉랭하게 내려다보던 커틀러가 허리를 굽혀 램파드의 팔을 잡아끌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램파드를 일어서게 하고, 다리는 바닥에 상반신은 침대에 엎어지게 하였다.

“그리 원하시니 한 번 박아 드리죠.”

한층 더 싸늘해진 커틀러의 무거운 목소리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긴장한 몸과 심장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고, 고개를 들기 힘들어 침대 시트에 파묻었다.

“폐하께서 원하는 대로 해 줄 터이니, 스스로 구멍을 쑤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지요. 박아 넣으려면 일단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램파드는 눈물이 맺힌 눈가를 팔목으로 슥 닦았다.

그가 준 기회를 붙잡으려면 뭐든 하고 싶어 주저함은 없었다. 일단 우는 것부터 그치기 위해 눈물을 훔쳤지만, 그는 성미가 급했다. 커틀러는 램파드의 팔을 낚아채 손끝을 엉덩이 부근으로 끌어당겼다.

“어서 하십시오.”

뒤로 간 손끝에 자신의 구멍이 닿는 게 느껴졌다. 램파드는 눈에 남은 물기를 침대 시트에 고개를 처박아 비벼 닦아 냈고 하얀 손을 움직였다. 검사의 손이라 믿겨지지 않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주름진 구멍을 지그시 누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욕구가 일면 상대를 찾아 나설 생각만 했지 스스로 뒤를 쑤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경한 경험에 램파드의 손은 어수룩할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몸속으로 파고든 손가락은 주름진 내부를 훑고, 따뜻한 온기에 감싸였다. 자신의 몸속 체온을 느끼자 소름이 쭈뼛 솟았다. 안쪽 볼살을 잘근 씹으며 좀 더 깊숙이 넣어 질구를 슥슥 문질렀다.

커틀러의 업신여김에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멸시에 짓눌려졌으며, 자그마한 수치심이 피어올랐다. 램파드는 부끄러움을 밀어내며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방 안은 조용했다. 등 뒤에 있는 커틀러의 낮은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고, 그보다 좀 더 큰, 램파드의 몸속에서 액이 축축하게 배어 나오는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후읍… 으.”

제 속에서 들리는 찰진 소리가 점차 커지자 야릇하게 느껴졌고 램파드의 몸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이제는 소리까지 외면하려 애썼지만 끈적한 액끼리 달라붙다 똑,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나도 커 램파드와 커틀러의 귀에 숨김없이 전해졌다.

“솔직히 제 것은 필요 없겠군요. 혼자서도 이리 잘하시니까요.”

여지를 줬다간 감흥 없는 커틀러가 문을 박차고 나갈 것만 같았다. 붉어진 체온으로 그의 냉대 따위 녹여 버린 램파드가 다급하게 아무 말이나 소리쳤다.

“하으… 아, 아니! 손가락으로는 부족해!”

“요새 계속 고상한 척하시기에 잊었는데, 폐하께서는 남자 좆을 좋아하셨죠.”

가리지 않고 아무나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램파드는 상처 난 입술을 살짝 물며, 커틀러를 붙잡기 위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커틀러의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등 뒤에 위치해 그의 표정을 몰랐다.

“그런 폐하께서 몇 달째 남근을 품지 못해 허전하셨겠습니다.”

“맞아…….”

“제가 무엇을 해 드리길 바라는 겁니까.”

“그걸…….”

쯧, 성가시다는 게 분명한 혀를 차는 소리에 램파드의 등이 움찔 떨렸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간 영영 끝날지도 모르건만 아직도 자존심 같은 걸 붙잡고 있다니. 수치를 느낀 램파드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치욕을 밀어냈다.

“네… 네 걸로… 해 줘.”

“뭐를 원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명확히 말하십시오.”

겨우 밀어낸 램파드의 수치가 순식간에 크기를 부쩍 키웠고 몸이 잘게 떨렸다. 어정쩡하게 손가락을 넣은 안쪽에서 맑은 액이 흘러나와 램파드의 손목까지 적셨다. 침대 시트에 눌린 램파드의 심장이 콩닥콩닥, 큰 소리로 울렸다.

“큿…!”

커틀러가 지시하는 대로 명확한 요구 대신 신음이 튀어나왔다.

“지금 제가 장난치는 것 같습니까.”

“……!”

“관두지요.”

곁에 서 구경하던 커틀러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문으로 완전히 향하기 전. 램파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나가지 마! 내 구멍에… 네 좆을 쑤셔 넣어 줘. 부탁해……. 제발……!”

다행히 그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멈췄다. 반대로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램파드는 심호흡을 했다.

“술에 취해 내뱉은 헛소리였다면 무시하고 떠났을 겁니다. 처음으로 폐하의 진심을 들었으니 부응해 드리죠.”

커틀러의 말에 침대에 엎어진 램파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세차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외면했던 수치는 창피로 바뀌었고, 램파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커틀러는 흘러내리는 램파드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목 뒤를 드러나게 하였다. 드러난 피부는 여름 햇볕을 받아 태양만큼이나 시뻘겋게 타오른 장미꽃처럼 붉었다.

그는 가느다란 목 뒤 완만하게 솟아오른 뼈를 꾹꾹 누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손이 멈추셨네요. 움직이시지요.”

램파드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온갖 망신을 당할 예정인 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쑤시고 있는 내부는 액이 흘러넘쳤다. 내부에 들어찬 손가락에 진득한 애액이 엉켜들었고, 밖으로 흘러내려 음낭 밑으로 고였다. 그의 경시에 오싹거리며 반응하는 몸은 수치심이 넘치다 못해,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였다.

알아차렸으면 빠르게 끝냈으면 했다. 이 상황이 지속되자 심장에 무리가 올 것만 같아 용기를 내 조심스레 말했다.

“언… 언제부터… 알아차린 거냐.”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요.”

“어떻게…….”

“그렇게 독한 술을 한 병 깨끗이 마신 것치고는 멀쩡하시더군요.”

“읏…!”

“어머니가 마시는 술은 여간 독한 게 아닙니다. 이불을 뒤집어써서 붉어진 정도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달아오르지요.”

따뜻한 물에 넣어 익은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램파드의 살갗이 벌겋게 변했다. 커틀러는 손등으로 붉은 살결을 톡톡 치며 손가락을 움직이라며 재촉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척하며 매달리다니. 제가 용서하면 술김에 한 사과라며 뒤늦게 부정할 생각이셨습니까? 정말 비겁하군요.”

“후… 아냐…….”

부끄러워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지고픈 램파드의 목소리는 벌레의 날갯짓만큼 작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는 램파드를 향해 커틀러가 웃었다. 평소처럼 램파드만이 듣던 작은 웃음소리도 들린다.

냉하기만 했던 그가 드디어 따뜻함이 묻어난 웃음을 내뱉었지만 램파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으니까.

“아니라면 이왕 들통난 거 한 번 더 말해 주십시오.”

“뭘…….”

“제가 좋다는 말이요.”

부끄러운 램파드의 가슴이 마구잡이로 벌렁거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램파드의 등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던 커틀러가 명령조로 말했다.

“그새 잊으신 것 같군요. 전 아직도 화가 많이 났습니다.”

기회를 줄 때 잡으라는 말이었다.

부정하는 마음을 인정하고 말하면 된다. 술 핑계를 댈 수 없다는 생각에 더 뜨거운 열기가 올랐고 현기증이 돌 지경이었다. 몸속의 체온에 데워진 손가락이 뜨겁게 달아오를 것만 같아 손가락을 빼내려 했지만, 커틀러가 제지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많고 많은 동기 중 한 방을 같이 쓰게 되었을 때. 도망갈 기회는 사라진 모양이었다.

“좋아…….”

“잘 안 들립니다.”

가까스로 입을 떼어 냈건만 모른 척하는 그의 태도에 넘쳐흐르던 수치심이 폭발했다. 온몸에 강한 열기가 들어찬 것 같았고 주저 없이 크게 토해 냈다.

“좋아해! 널 사랑한다고! 이제 잘 들리냐!”

답답하던 속이 조금은 풀린 기분이었다. 등 뒤에 있는 커틀러가 낮게 웃더니 램파드의 팔을 붙잡아 구멍 안에 어정쩡하게 자리 잡은 손가락을 빼냈다.

램파드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맑은 액이 길게 늘어나 공중에서 톡, 끊겼다. 그는 애액이 묻은 램파드의 손을 입가로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줄곧 당신뿐이었는데 알아보지 못해 서운했습니다.”

주변 공기를 얼어붙게 하여 램파드의 마음을 쿡 찌르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졌다. 어렵사리 익숙한 커틀러를 만났기 때문인가, 전처럼 뺨을 갈기고 싶은 생각뿐이지만 가라앉혔고 대신 울분을 토해 냈다.

“섭섭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그리 서운하셨습니까.”

“줄곧 나뿐이었다고? 웃기지 마라. 날 이때껏 버려둔 건 네놈이잖아!”

“전 계속 당신 곁에 있었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곁에 있어도 무언가 외롭게 느껴졌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알 수 없는 태도로 곁에 있어 봤자지. 각인이라도 했으면 차라리 안심했을 것인데…….”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에 각인했습니다.”

“말로 그래 봤자 안 믿겨.”

“당신 덕분에 성가신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걸요. 이래도 못 믿겠습니까?”

커틀러는 공작 작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카데미도 기사가 되기 위해 입학한 거라더니, 정작 졸업하고 나서 바로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었지.

“무슨 말이냐.”

“제가 기사를 목표로 삼은 건 남작 작위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알고 있어.”

기사가 되겠다는 건 콘테 가문을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폐하를 위해 제 인생 계획을 수정한걸요.”

“나 때문에?”

“예. 성인이 된다고 하여도 황궁에는 아직…….”

집중하는 램파드의 표정이 성가셨는지 커틀러가 입을 다물었다.

“됐습니다. 지난 일은 말하고 싶지 않군요.”

“말해 줘.”

“싫습니다. 그나저나 팔 하나가 부러져서야 드디어 절 돌아봐 주시고. 곱씹을수록 화가 나는군요.”

커틀러가 몸으로 짓누르자 램파드는 침대로 엎어졌고, 팔꿈치로 딛어 반쯤 일어났다.

“계약은 그대롭니다. 만족스럽지 않으면 당신을 버리고 떠날 테니까 잘해 보십시오.”

“…몸 쓰는 건 뭐든 너보다 자신 있다.”

램파드의 엉덩이 위에 살포시 올라간 그의 성기는 언제 세워졌는지 당장 넣어도 될 정도로 딱딱했다. 발기시키기 위해 입에 넣어 핥을 땐 무심한 듯 잠잠했다.

평소보다 웅대한 크기를 보건대, 참은 욕망이 터져 나온 모양이었다. 발기를 대체 어떻게 참아 낸 건지. 램파드의 본심을 듣기 위해 필사로 억누른 게 기막힐 정도로 놀라웠다.

“폐하께서 또한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보이십시오. 배 눌리니까 허리는 들어 올리시고요.”

보통의 그라면 말 대신 램파드의 몸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다친 한쪽 팔로는 램파드를 온전히 부축하기 힘들 테고 램파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순순히 따랐다.

손가락을 넣고 휘저은 덕분에 주름진 구멍이 살짝 열렸다. 그 부근에 위치한 살덩어리가 앞뒤로 움직이는 게 곧 삽입될 것 같았다. 단단한 귀두가 아랫구멍을 뚫었고, 이어서 허튼 부분 없이 단련된 그의 몸과 닮은 단단한 살덩어리가 쭉 밀려 들어왔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성기에 집중하는 램파드는 눈을 감고 숨을 멈춘 채 모양을 머릿속으로 그려 냈다.

“후으…….”

등 뒤에서 커틀러의 낮은 한숨이 들려, 화들짝 놀란 램파드가 눈을 떴다. 참았던 만큼 큰 호흡을 하며 이번에는 청각에 집중했다.

커틀러는 워낙에 체력이 좋다 보니 먼저 신음을 흘리는 일이 없었다. 익숙지 않은 느낌이 들어 동요한 램파드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심장과 마찬가지로 내장 안까지 반응하는지 벌렁거리는 기분이 들었고 좀 더 깊은 곳이 징 울렸다.

기대하는 부분이 찔렸으면 했건만, 커틀러의 페니스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멈췄다.

“인제 와서 묻지마는, 해도 되는 겁니까?”

출산이 임박해 크게 부푼 배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램파드 또한 홧김에 몸을 내던졌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무언가 죄스러워졌다. 마음이 들떠서 그런가? 배 속의 아이가 요동치는 바람에 민망하기까지 했다. 자기가 곁에 있다며 관두라고 하는 것 같아 차마 하고 싶다 더는 내뱉지 못했다. 그렇기에 커틀러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로 했다.

“…넣고 나서 물으면 어쩌라는 거냐.”

“설마하니 또 대책 없는 짓을 벌이셨습니까.”

한심하다며 낮은 탄식을 내뱉은 커틀러가 삽입한 페니스를 뽑기 시작했다. 임신한 램파드의 몸이 퍽 신경 쓰이는지, 넣을 때처럼 조심조심 천천히 빼낸다.

“빼지 마……!”

램파드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귀두가 장 안 윗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뭉근히 눌리는 기분이 좋아 램파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의 자극이기 때문인가. 끝부분에 걸쳐 있는 적은 부분만으로도 소름 끼치게 기분이 좋았고, 감각이 등까지 올라와 오싹했다. 램파드의 양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대책 없는 건 아니다. 며칠 전… 의사가… 전처럼 건강해졌다고 했으니까…….”

램파드는 의사가 아니라 신빙성이 떨어졌다. 근질근질한 행위를 이어 가기 위해 전문가의 의견을 잽싸게 덧붙였다.

“수도에 있는 의사한테 물었는데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수도의 의사 말입니까?”

수도에 있는 병원은 애쉬와 함께 갔으며 커틀러는 모르는 일이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을 내뱉은 뒤였다.

등 뒤에 있는 커틀러가 부푼 램파드의 배를 피해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한동안 제대로 된 운동을 하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 단련된 램파드의 몸은 탄력을 유지했다. 그는 적당한 근육이 배긴 평평한 가슴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한 손뿐이라도 완력은 강해, 갈비뼈가 짓눌릴 정도였다.

“수도 의사에게 이 몸을 보였다는 말입니까. 전 모르는 일이건만 설명해 보시죠.”

“변장해서 정체를 숨겼…… 앗!”

커틀러는 원하는 대답이 아닌 변명을 내뱉는 램파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꽉 움켜진 가슴 위, 뾰족 튀어나온 유두를 꼬집었다.

“왜 갔으며, 누구와 갔는지 자세히 설명하십시오.”

겨우 화해했는데 또 싸우긴 싫었다. 이런 고문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순순히 말을 내뱉을 것인데. 신뢰를 잃어버린 램파드는 성질을 죽이고 원하는 대로 해 줄 뿐이었다.

“후으… 읏, 걱정하는 일은 없었어. 아, 아.”

유두를 한계까지 잡아당긴 그는 이제는 반 바퀴 뱅글뱅글 꼬기까지 했다. 자극이 간 젖꼭지는 터질 듯 탱탱 부어올랐다.

“걱정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제가 모르는 장소에서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억제제 때문에……. 네가 뒤로 억제제를 넣어서… 걱정되어 찾아간 거다.”

“누구와 말입니까.”

사실 정답을 알고 있는 커틀러는 기분이 급속도로 언짢아졌다.

“아뇨, 말하지 않아도 알겠으니 관두십시오. 여기서 그놈 이름을 듣고 싶진 않습니다.”

그는 램파드의 젖꼭지에 자극을 더욱 강하게 줬다. 한계까지 돌린 젖꼭지를 터뜨릴 기세로 강하게 누르는 통에 통증이 일었다.

“아파……!”

아래쪽에 가해지는 뭉근한 자극을 잊을 정도로 젖꼭지가 아팠고, 램파드가 몸을 뒤틀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위험을 감수하고 수도 내 병원에 간 것은 커틀러 때문이었다. 원인을 제공한 자는 손을 놓긴커녕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손톱 끝으로 갈라진 유두 끝을 꾹 찔렀다.

“으, 읏… 너 때문에 병원에 간 것이니까… 솔직히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쓸데없는 요구는 하지 마십시오.”

젖꼭지를 아쉬운 듯 놓아준 커틀러가 램파드를 앞으로 쓰러지게 하였다. 램파드는 양손으로 침대를 디뎠고, 성기가 빠져나가는 게 싫어 무의식에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절 만족하게 할 처지란 것은 잊지 않았군요.”

언짢은 와중 램파드의 행동은 귀엽게 받아들이는 커틀러가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빼낸 성기를 다시 천천히 밀어 넣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몇 번 왕복운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램파드의 허벅지는 벌써 덜덜 떨렸다.

“으… 응, 읏.”

“제가 폐하의 몸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거나 쑤셔 넣었겠습니까? 제가 당신의 구멍에 넣는 건 좆이랑 정액뿐인 걸요.”

“억제제가 어떤 성분인지 너도 알고 있… 잖아.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목소리가 올라갈 때마다 그는 드러난 등을 꾹 눌러 램파드의 몸이 아래로 꺼지게 하였다. 램파드는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침대를 꽉 부여잡으며 버텼다.

“폐하께 드린 약 말입니다. 실은 억제제가 아닙니다.”

“……으?”

“고조부 때 저희 가문에 오메가가 셋이나 나왔거든요. 억제제가 발명되기 전이었죠.”

커틀러가 콘테 가문의 과거를 말해도 쾌감에 말랑말랑해진 내벽에 집중하는 램파드는 한 귀로 대충 흘리는 중이었다. 솔직히 옛날이야기는 관심 없기도 하고.

램파드는 콘테 공작 가문에 오메가가 나온 과거보다는 커틀러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이 간다. 빠르게 속도를 올려 내부를 휘저어 줬으면 하건만, 미미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감질이 나 자꾸만 뒤를 강하게 꽉 조였다.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으응…….”

“오메가는 알파의 정액을 먹으면 어느 정도 히트 사이클이 예방되지요.”

“알고… 있어.”

“폐하께서 드신 건 방부 처리해서 굳힌 제 정액입니다.”

“하……!”

없던 집중력이 깨어났고 그의 말이 빠르게 이해되었다.

이 미친 새끼는 설명 없이 이때껏 뭘 먹으라며 준 건가. 미안한 일만 잔뜩 해서 성질 죽이고 받아들이는 중인데 이건 넘어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커틀러는 램파드의 저항을 쉽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길게 자란 램파드의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침대에 처박았다.

“뺄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계십시오.”

“우읍……. 너… 설명도 없이… 그런 걸!”

침대에 볼과 입이 짓눌려 말할 때마다 시트가 램파드의 입술을 스쳤다. 그는 한 손으로 램파드의 머리를 꾹 누르며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램파드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뒤로 잔뜩 드셨잖습니까. 입으로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으… 읏, 읏, 우읍. 달…라!”

“그래도 효과는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까. 각인한 알파의 정액이라 약발이 더욱 잘 받은 거지요.”

“맞지만은……. 읏, 너는 진짜 미친놈이야!”

“그래서 싫습니까?”

커틀러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고개를 짓누르는 힘이 없어지자 램파드가 머리를 들어 올렸다.

“아니.”

램파드는 몸을 슬금슬금 빼냈다. 머금은 걸 빼내긴 아쉽지만 당장 커틀러의 얼굴이 보고 싶어 자세를 바꿨다. 몸을 돌려 침대에 대충 걸터앉은 뒤 귀한 은발과 값진 자안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커틀러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램파드가 익히 아는 대로, 미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램파드도 그를 따라 좀 더 크게, 눈꼬리를 살짝 휘며 웃었다.

“아까 한 말은 다시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미쳤어도 좋아.”

“폐하.”

“이제 슬슬 전처럼 램파드라 불러 줄 때도 되지 않았나?”

“마음대로 요구하지 말라 했을 텐데요.”

시선을 피한 그는 램파드의 한쪽 허벅지를 벌리게 하였다. 램파드는 순순히 다리를 벌리며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역시 상태가 평소와 달랐다. 커틀러의 눈 밑은 붉게 홍조가 들었고, 약간 벌려진 입술 사이로 더운 숨결이 자꾸만 나왔다.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기에 힘이 부친 것인가. 걱정되는 마음에 땀으로 젖어 들어간 그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커틀러는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램파드의 손을 떨쳐 냈다.

“아프면 크게 소리 지르십시오.”

“뭘 하려고…….”

램파드는 몸속으로 삽입되는 남근과 커틀러의 경고에 아랫배에 힘을 줬다.

“제대로 자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까요. 큰 소리 치면 누군가 도와주러 올 겁니다.”

분명히 페로몬을 완벽히 억누르고 있을 터인데, 커틀러의 몸에서 사나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향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번만큼은 짐승과도 닮았다. 역겨운 낯선 짐승의 냄새가 아닌, 마치 자신이 손수 키워 길들였다고 생각한 야생 동물의 냄새였다.

램파드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잘못 건드렸다. 각인한 알파는 욕구가 쌓이면 폭발하며 짐승이 된다. 그의 상태를 알아본 램파드가 숨을 들이쉬었을 때, 커틀러의 허리가 크게 움직였다.

장시간 러트 상태의 페로몬에 노출된 램파드의 피부는 열이 올랐고, 몸은 붉었다. 열이 차오른 살갗은 침대 시트가 스칠 때, 헐렁이는 커틀러의 옷자락이 쓸어내릴 때도 바로 반응해 움찔움찔 떨어 댔다.

커틀러가 한 번 허리를 쳐올릴 때 맞닿은 피부는 파르르 떨리며, 몸 안쪽까지 진동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포악한 페로몬이 꿈틀거리며 램파드를 짓눌렀고, 비명을 질렀다.

“후으… 으… 읏, 아아! 아!”

한번 붙기 시작한 속도는 탄성을 얻어 빨라졌다. 뭉근했던 자극은 내장 안이 쾌락으로 범벅되어 화끈거릴 정도로 커졌다.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린 램파드는 열락에 취해 헐떡였고, 납작한 가슴에 비해 솟아오른 배가 버거워 양손으로 감쌌다. 안에 채워진 양수가 커틀러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느낌에 몸을 고정하기 버거웠다.

“으… 윽, 흐읏, 커틀러……. 좀… 살살 해……!”

부탁이 들리지 않는지 그는 되레 램파드의 어깨를 잡아 고정했고, 강하게 쳐올렸다. 마치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씨를 내뱉기 위한 추삽질에만 집중하는 꼴이 발정기가 와서 아무 데나 매달려 허리를 흔드는 수캐 같기도 했다.

“하으… 으… 응!”

닿은 살끼리 찰싹거렸고, 조금 전 푹 찔린 억센 감각에 램파드는 발을 안쪽으로 구부렸다. 발끝까지 힘을 주는 통에 남근을 품고 있는 내벽까지 강하게 조였다.

“…큭!”

외마디 짧은 신음을 흘리던 커틀러가 삽입한 채로 사정했다. 이미 내부를 차지하던 정액과 새로운 것이 뒤섞였고 받아들이는 램파드도 그와 호흡을 맞춰 씨근덕거렸다.

램파드의 몸 안에 길게 사정을 하는 커틀러는 러트의 영향인지 여유가 없어 보였다. 한쪽 눈을 찌푸리며, 이를 악문 모습이 평소와 확연하게 달랐으니까.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리던 커틀러가 행위에 집중하는 모습이라니. 램파드는 자신도 모르게 색다른 그의 얼굴에 집중했다. 얼마나 몰두했는가 하면, 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 때문에 젖은 앞머리 끝이 달라붙었다가 흐트러지는 것까지 집중해 보았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램파드의 심장은 쾌락과 함께 새로운 환락이 뒤섞여 뜨겁게 달궈지는 듯했다.

“뭘… 그리 뚫어지게 봅니까.”

커틀러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램파드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몇 번 사정을 한 커틀러는 사라졌던 이성이 드디어 돌아온 모양이었다.

“네 얼굴…….”

잠깐의 휴식을 취하려는지 커틀러는 삽입한 채로 허리를 곧추 폈다. 그는 램파드가 바라본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고, 매끈한 이마가 드러났다.

“제 얼굴이요? 오랫동안 보셨잖습니까.”

“찡그리는 건 처음인걸.”

영문 모를 램파드의 말에 그의 미간이 주름졌다.

“그렇게 찌푸리는 건 많이 봤고…….”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 쪽이든 좋아. …너, 설마… 또 선 거냐.”

숨을 쉴 때마다 정액으로 칠해진 내장이 단단한 페니스의 존재를 재차 확인하듯 꼭꼭 물었다.

“폐하께서 이상한 소리를 하시니까 반응하잖습니까.”

“뭐든 내 탓이군.”

답 대신 찌푸린 인상을 푼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이마에 흐르는 땀만큼이나 커틀러의 헐렁한 포엣 셔츠도 땀에 적셔졌다. 얇은 천은 수분을 머금어 그의 몸을 드문드문 비쳤다. 몸의 곡선보다 눈에 띄는 건 램파드 때문에 엉망이 되어 검은색 고정대로 감싼 오른팔이었다.

램파드는 그가 완전히 옷을 벗지 않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아 시선을 돌렸다. 단단한 벽을 무너뜨렸지만 이름 대신 호칭을 부르는 것처럼 아직 얇은 막은 남은 모양이었다.

“배가 불편하면 옆으로 누우십시오.”

조금 전까지 그의 팔을 걱정한지라 군말 없이 냉큼 몸을 돌렸다. 확실히 아까보다는 몸을 지탱하기가 편해 램파드는 긴장을 풀었다. 등 뒤에서 램파드의 가슴을 끌어안은 커틀러는 페니스를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천천히 움직였다.

자극은 조금 전까지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충분해 램파드의 내부는 작은 움직임에도 찌르르 떨었다. 달뜬 신음으로 램파드의 가슴이 벌렁거리자 커틀러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램파드의 등과 커틀러의 가슴이 단단하게 밀착되었고, 두근거리는 강렬한 심장 소리가 전해져 온몸에 퍼져 갔다.

처음 히트 사이클을 겪었을 때, 방 안을 울릴 만큼 거대하게 느껴졌던 커틀러의 심장 소리는 경황없는 미성숙한 아이들의 호기심으로 치부했다. 램파드 또한 급작스러운 히트 사이클에 너무 놀라 마음에 신경 쓸 겨를 없이 곁에 있는 알파인 커틀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깊은 교감으로 인한 각인이 아닌, 한순간의 착각이라 생각했건만. 그의 심장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램파드와 함께 합주하듯 강하게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그의 행동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는 기억하면서, 처음으로 그를 친우가 아닌 짝으로 인정했을 때의 감정을 오랫동안 잊었다니. 서로의 페로몬이 뒤섞였던, 짧지만 강렬하게 느낀 감정을 떠올렸다면 그를 의심하지 않았을 터.

이미 사과의 말을 전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은 커틀러의 손을 꽉 잡았다. 램파드와 함께 오랫동안 검을 잡은 그의 손은 멀리서 보면 가지런하고 예쁘장하지만 만지면 달랐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의 손이니까 뭐든 좋다. 단단한 굳은살과 뼈마디를 천천히 꾹 누르고 그의 체온을 느끼며 열에 빠져들었다.

실신하듯 잠이 든 램파드가 눈을 떴을 땐 몇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밝았던 창문 밖은 이미 해가 떨어졌는지 새까매졌는데 밤인지 새벽인지 구분이 안 됐다.

“으…….”

건강을 되찾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막상 몸을 크게 움직인 적은 적었다. 환자처럼 침대와 일체화가 됐던 램파드의 몸은 오랜만의 격렬한 운동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근육통이 온 듯 뻣뻣했다.

배 근육이 뭉친 것 같았는데 아직 이름도 제대로 지어 주지 못한 아이가 움직이는 기분이 들어 안심하며 옆자리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야말로 아이의 이름을 짓자고 커틀러에게 말할 요량이었건만 침대 옆이 비었다.

램파드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떴다. 달빛마저 어두운 날이었건만 필사적으로 옆자리를 확인하는 시선은 부엉이의 눈처럼 밝았다. 놓친 부분이 있을까, 침대 시트의 구겨진 작은 부분까지 꼼꼼히 확인했건만 커틀러는 없었다.

그의 품에 안기며 따뜻한 열기를 잔뜩 머금은 덕분에 갈라진 마음의 파편이 잘 이어 붙여졌나 했건만. 심장이 산산조각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개자식…….”

맨 정신으로는 실행할 자신이 없어 술에 취한 척 모든 걸 내던지고 그에게 매달렸다. 안고 나서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떠나도 좋다고 말했긴 하지마는, 진짜로 버리고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만큼 릴에게 마음이 가 버린 것인가. 추하게 매달리는 것으론 램파드에게 받은 상처는 어루어 만질 수도 없다는 뜻인가.

원통한 마음에 램파드는 어금니를 까드득 갈며 주먹을 쥐었다.

“너무한 것 아니냐…….”

들을 상대도 없건만 애석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였다. 한번 억울함을 토해 냈더니 몸 안쪽으로 화가 자꾸만 쌓여 갔다. 양손을 주먹 쥐고 죄 없는 침대를 몇 번이나 치고는 큰소리쳤다.

“커틀러 이 씹새끼야!”

몸속으로 온갖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기분이었다. 갈 곳 잃은 화는 램파드의 몸속을 데우기만 했다. 손에 잡히는 베개를 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이 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아 혼자 씩씩대며 남은 베개를 잡고 던지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또 우는 겁니까. 임신해서 그런가 눈물이 많아졌군요.”

제복으로 멀끔하게 갈아입은 그가 열린 문틈에 기대섰다.

“아직 안 울었어!”

“눈가가 붉잖습니까.”

램파드는 저도 모르게 눈가를 슥 문질렀다. 커틀러의 말과 달리 눈물 같은 건 맺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조금 더 늦게 들어왔다면 잔뜩 성을 낸 후 울었을지도 몰랐다. 놀란 가슴은 슬픔이 섞여 벌렁거렸으니까.

큰 죄를 지은 것은 안다. 커틀러에게 검술을 빼앗고, 그의 마음을 유린했다. 곁에 남아 준다면 이때껏 쌓아 올린 죄를 갚고 싶건만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것인가. 슬픔과 분노가 뒤엉킨 램파드는 손에 든 베개를 커틀러에게 휙 던졌고, 그는 여유롭게 고개만 슬쩍 움직여 피했다.

“제가 말도 없이 떠난 줄 알았습니까?”

“그래.”

“그럴 리가요. 제가 폐하께 보고 없이 사라진 적이 있습니까.”

“이번엔 정말로 사라진 줄 알았단 말이다!”

무언가 더 던질 거리가 없나 더듬더듬 침대 위를 훑었지만, 시트밖에 잡히지 않았다. 커틀러는 램파드의 그런 행동에 미소 지었다.

“왜 그리 생각하신 겁니까.”

“……솔직히 이때까지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왜 계속 곁에…….”

“평소 잘못하신 건 아시나 봅니다.”

“조금은…….”

문틈에 기댄 커틀러는 고개를 뒤로 꺾으며 다소 시건방진 태도로 램파드를 흘끗 바라봤다. 한번 본심을 트기 시작한 램파드는 이제 거리낌 없이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그 점이 갸륵해 평소보다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렇게 불안해하시다니, 앞으로 함께 잠들면 눈뜰 때까지 곁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떠나지 않았다는 기쁨도 잠시. 제복 위에 여행자용 코트까지 갖춘 것이 떠날 채비가 분명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설명해.”

“무엇을 말입니까.”

“왜 당장에라도 떠날 채비인지.”

그는 램파드를 한 번 떠보기 위해 놀려 먹을 생각이 만만했건만 정말로 눈물을 터뜨릴 듯해 드물게 바른말부터 했다.

“경비 계약은 이미 해 버렸으니까요.”

“그딴 계약 파기해라!”

“저도 그러고 싶지만 창관의 중심 조직과 손을 잡은 북부 지방에 있는 소수 민족이 냄새를 맡고 도망치기 전에 쳐야 합니다.”

“그 일을 왜 네가 하는 거냐.”

“창관을 없애는 건 폐하의 오랜 염원이었잖습니까.”

램파드의 소망이 커틀러의 목표였다. 그는 굳이 뒷말은 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램파드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가 부푼 배를 만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아비를 알아보는 것인지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너에게 그런 일 부탁한 적 없어.”

“제 오메가가 애쓰는 일을 그냥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내 오메가. 각인한 상대임을 확실하게 밝히는 말이었다. 커틀러는 램파드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재차 확인을 해 줬다.

“……정말 나 때문에 북부 지방에 간다고?”

“그렇습니다.”

“릴은…….”

“핑곗거리죠. 제 오메가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오롯이 당신 하나뿐입니다.”

“북부 지방에 저택도 지을 거라며. 내가 너를 놓아주면 얼음덩어리 위에 눌어붙을 속셈은 아니냐.”

재밌는 소리를 한다는 듯 커틀러는 입술을 실룩이며 램파드의 말을 즐겁게 들었다. 그는 여전히 램파드의 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저를 그토록 싫어하니까 정말로 사라져 줄까 싶기도 했습니다.”

“싫어한 거 아냐.”

“그런가요.”

“……경황이 없어 당황한 거지.”

“두 번 놀라시면 진짜 저를 찌르시겠군요.”

“그럴 일은 없다. 이제 네가 무엇을 해도 깜짝 놀라지 않을 테니까.”

램파드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커틀러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뭘 할 건지 확실히 말해 줘.”

고개를 끄덕인 커틀러는 램파드가 안심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창관을 다스리는 조직의 중추를 치면 나머지는 폐하께서 손쉽게 해결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네 도움 따위 없어도 나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건만…….”

“폐하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정무 때문에 뒷전이지 않았습니까. 출산 선물이라 생각하십시오.”

“그 후로는 어쩔 거냐.”

“거기까지가 제가 할 일이었으며, 그 후는 북부 지방에서 여생을 보낼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수정했으니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이 아이는 곧 태어날 거다.”

“첫울음을 함께 듣고 싶지만, 오늘 떠나야 합니다.”

“정말로 돌아올 거지?”

“네. 사랑스러운 당신을 다시 안을 날만을 고대하며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잔뜩 쌓아 두고 올 테니 기대하십시오.”

마지막 말은 안 붙여도 될 것을. 그의 품에 안긴 것이 떠올랐기에 램파드의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기분 좋은 심장 박동에 아직 이름이 없는 아이가 동요하듯 움직였다.

“조심하거라. 다치지 말고.”

“지난번과 달리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램파드의 배에서 손을 뗀 커틀러가 이번에는 볼을 쓰다듬었다. 커틀러 덕분에 몸이 따뜻해졌기에 볼은 기분 좋을 정도의 온기를 머금었다.

“……늦게 오면 정말로 혼인식을 치러 버릴 거니까 빨리 돌아와.”

“마음대로 하십시오.”

“뭐?”

조용히 그의 손길을 즐기던 램파드는 황당함에 헛바람이 빠져나왔다. 한번 할 수 있으면 해 보든지, 라며 떠보는 것이 아닌 하든 말든 관심 없다는 투였다.

“무엇을 그리 놀라십니까.”

“혼인을 치르라고?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앞으로 귀찮은 혼담이 들어올 바에 위장 혼인을 해 두는 것이 좋겠지요. 이름뿐인 부부 같은 게 되더라도 폐하의 마음은 제 것이니 상관없습니다.”

“차라리 네가 입후보하지 그러냐.”

“거절합니다. 현재 가진 지위도 거슬리는 마당에 황족이라뇨.”

“……그래서 다른 사람과 부부가 되는 건 괜찮다고? 너 좀 이상해.”

“앞으로 폐하의 마음은 변함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떵떵거리는지. 뻔뻔한 커틀러의 행동에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혼인을 하지 않으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잔소리의 강도가 심해질 것이다. 후계자를 만들 생각 없는 황제라는 빌미로 반란을 일으키는 겁대가리 상실하는 놈도 나올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후계자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라이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이왕이면 배 속의 아이를 추대했으면 했다. 램파드가 생각했던 이름을 붙여서.

“그나저나 아이의 이름 말입니다. 정하셨지요?”

“그래.”

“폐하께서 첫 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붙일지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사용하는 건 나중에 하고, 성인식을 치르기 전까진 루안이라고 하죠.”

램파드는 속속들이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는 커틀러에게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온다는 말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옅은 미소로 그를 배웅한 램파드는 곧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잔트의 별장은 벽이 얇아 간밤에 램파드의 신음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래도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화해했다는 걸 모두가 다 알았으니 번거로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부끄러운 상황이건만, 황제의 성생활을 그 누가 지적하겠나. 감히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기에 램파드는 되레 떳떳했다.

비록 몸은 떨어졌지만 날마다 커틀러의 소식이 들렸다. 그는 매일같이 편지를 보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내건만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얇은 종이가 빼곡히 들어찼다. 커틀러가 보낸 편지는 램파드의 생각을 하며 써 내렸는지, 듬뿍 묻은 페로몬 덕분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아마 램파드를 떠올리며 적은 게 맞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치 곁에 있는 듯한 이런 짙은 향이 나지.

이제 습관이 되어 버린 램파드는 아침에 도착한 편지의 봉투를 뜯고, 종이가 머금은 옅은 향을 쫓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잘 말린 종이와 단단하게 굳은 잉크의 냄새가 뒤섞였지만, 속에 숨겨진 커틀러가 가진 매혹적인 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배인 향 덕분에 가슴속 깊은 곳까지 일렁거리면 찬찬히 글을 읽어 내렸다. 커틀러가 직접 적었지만 익숙한 필체가 아니었다. 왼손으로 적어 다소 거칠었지마는 커틀러가 가진 특유의 유려한 곡선을 발견해 절로 미소 지어진다.

램파드는 일주일 후 도착한 커틀러의 이야기를 읽고 답장을 적기 시작했다. 아마 이전 같았으면 그의 편지를 받기만 하고 읽고 무시했을 것이다.

마음을 정한 램파드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그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별것 아닌 종이쪼가리라 생각했건만 이 작은 편지가 거부당했을 때의 마음을 똑똑히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처음 며칠은 성가시단 생각을 약간 했다. 하지만 몸이 떨어진 만큼 만나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고, 작은 종이에 적힌 그의 소식은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커틀러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

예정일이 일주일 남은 시점에 진통이 시작되었다. 혹시 모를 사태까지 계산한 커틀러는 2주 전부터 콘테 가문의 전용 의사를 별장으로 보내 뒀다. 그 덕분에 램파드는 별다른 탈 없이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

별장에서 일하는 소수의 인원은 숨을 죽이고 대기하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다. 목청 크게 울부짖는 갓난아이는 깨끗한 면포에 감싸 잔트가 안아 들었다. 땀범벅의 램파드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했고, 의사가 몸을 살펴보았다.

의사의 처치로 램파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잔트가 안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를 살펴보던 잔트가 램파드를 향해 미소 지었다.

“건강한 사내아이예요. 보실래요?”

숨을 몰아쉬는 램파드는 잔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았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새 생명이라니, 신기하다기보다는 무언가 두려웠다.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 궁금함이 충돌했다. 램파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잔트는 허리를 굽혀 편히 볼 수 있도록 했다.

흰 천으로 감싼 아이는 갓 태어나 쭈글쭈글했다. 피부는 커틀러를 닮았는지 삶은 달걀처럼 뽀얗고 말랑말랑해 보였다. 부드러운 천에 돌돌 말린 채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신기해서 계속 바라봤다.

아이를 확인한 램파드는 훗, 하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피부 말고도 가느다란 은실 같은 머리는 누가 봐도 커틀러의 아이란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닮았군.”

“그렇죠? 이목구비는 폐하를 쏙 닮았어요.”

“아니, 커틀러랑 빼닮았는걸.”

“머리카락 색 말고는 전혀 딴판인 걸요. 두고 보십시오. 크면 제 말이 맞을 테니까요.”

몇 마디 나누지 않았건만 힘이 부친 램파드는 도로 누웠다. 뼈와 근육이 모조리 늘어나 비명을 지르는 기분에 주먹도 제대로 쥐기 힘들었다. 커틀러와 비슷한 아이라면 하나 더 만들까 싶었지만 빠르게 포기했다. 한 번은 모르고 낳았지, 이런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하나 더 낳을 자신이 없었다. 의사는 램파드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손끝을 주물러 줬지만 소용없었다.

“폐하, 황궁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황궁?”

감은 눈을 슬쩍 뜬 램파드는 시종을 바라보았다. 황궁에서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아, 한 명이 존재했다. 그 또한 커틀러와 마찬가지로 종종 편지로 안부를 나눴다. 확실히 알려야 할 사실이 있건만 내일, 모레 미루다 보니, 결국 오늘까지 다다랐다.

아이를 끌어안은 잔트가 무릎을 굽히며 램파드와 시선을 맞췄다.

“죄송합니다. 폐하와 의논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불러들였습니다. 곧 아이를 낳으셔야 하는데, 폐하께서는 출산하기 힘든 몸이라 혹시 몰라 알파를 불렀습니다.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은 회복을 돕기도 하니까요.”

미안해하는 잔트를 딱히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눈을 감은 램파드는 애쉬와 나눠야 할 이야기를 정리했다. 한쪽을 선택하기로 했으니 그와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해야 했다.

애쉬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하지마는 커틀러를 향한 마음과는 확실히 방향이 달랐다. 그 또한 옛 연인을 잊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이 외면하기에는 힘들었다. 두렵다며 도망간 애쉬를 잡아 온 것은 램파드니까 어떤 원망을 들어도 책임은 져야 했다.

“데리고 와라.”

시종이 나가고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의 애쉬가 들어왔다. 그는 힘이 쭉 빠진 램파드를 발견하자마자 잔뜩 걱정하는 표정으로 주저 없이 달려왔다. 아이를 안고 있던 잔트는 의사만을 놔둔 채 자리를 비켜 줬다.

“램파드…….”

애쉬는 예정일이 한참 남은 램파드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쉽게 알아챘다. 처음 그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생애에 단둘뿐이 없던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니까 학수고대하기도 했다. 부족한 자신이라도 그와 확실히 연결된 흔적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즐거웠건만 이제는 빈약한 자신의 부분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침을 꿀꺽 삼킨 애쉬가 램파드의 손을 꽉 붙잡아 줬다. 아마 램파드는 애쉬가 상처 입지 않도록 먼저 사과의 말을 내뱉을 것이다. 몇 번이나 램파드를 상처 입혔으니 한 번 정도는 고통을 삼키도록 했다.

“아이 낳느라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애쉬가 먼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램파드는 말문이 막혔다. 벌린 입을 살며시 닫은 램파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는 그를 향해 애써 태연하게 웃어 보였지만, 어딘가 슬퍼 보였다. 램파드의 표정 또한 점차 어두워지자 애쉬는 뻣뻣한 입 근육을 신경 써서 움직여 평소의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다. 비록 두 사람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어진 증거가 아직 하나 더 남았다. 각인이 끊기지 않았으니, 함께할 명분은 충분했다.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야 애쉬는 겨우 밝은 미소를 지었다. 표정은 어떻게 되찾았지마는 심란한 마음의 영향인지 말투가 어색했다.

“아이…… 이름은 다시 지어야겠네.”

아직 몸을 일으키기 힘든 램파드는 푹신한 베개에 푹 파묻히며 중얼거렸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둔 이름이 있어.”

“괜찮다면 나한테도 알려 줄래?”

고개를 끄덕이던 램파드는 오래전부터 생각한 첫아이의 이름을 밝혔다.

“루트비안.”

“……좋은 이름이야.”

“그렇지? 다음 대 황제의 이름이니까 기억해 둬. 우선 콘테 가문과 담판을 지어서 클로비스 황가로 데리고 와야 하지마는.”

베개에 파묻혔던 램파드는 깜짝 놀라 통증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을 듣던 애쉬가 결국 눈물을 떨구고, 고개를 푹 숙였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채신없는 말을 내뱉은 자신을 책망하며 애쉬를 끌어안았다. 그의 등은 여전히 매우 크고 넓었다. 하지만 작게만 느껴졌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줘 감쌌다.

“먼 길을 찾아오게 하였는데……. 큰 실망만 안겨 주다니. 또다시 경솔하게 굴었구나.”

“아니, 난 괜찮아…….”

“애써 태연한 척하지 말아라.”

램파드는 뼈마디가 쑤시고 시큰거리는 걸 잊고 꽉 끌어안았다. 감정이 수습되지 않는 그의 몸에서는 알파의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애쉬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램파드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멈췄다. 애쉬의 페로몬은 그의 피부처럼, 햇볕을 잔뜩 머금어 탐스럽게 열매를 맺은 과실 같았다. 살짝 베어 먹으면 농후하고 상큼한 맛이 퍼질 듯한 감미로운 향이었는데 마치 들짐승처럼 변했다.

애쉬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페로몬에 램파드의 몸이 움찔 떨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숨기기 위해 애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했는데. 출산 후 약해진 램파드의 몸은 알파의 페로몬에 쉽사리 반응했다. 진정하기 위해 애쉬를 끌어안았지만 되레 램파드의 오메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램파드?”

애쉬는 램파드의 반응을 알아챘다. 자신을 꽉 끌어안은 램파드의 심장이 세차게 뛰며, 겁을 먹었으니까. 오메가인 그가 알파의 페로몬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라이를 감싼 애쉬를 바라보던 램파드는 크게 낙심했었다. 절망과 맞먹은 상심을 보인 램파드는 애써 태연한 척 애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떠나보냈다.

그때였구나. 애쉬에게 주어진 기회가 모조리 소진된 것이. 과분한 욕심이란 것을 알지만, 램파드를 놓고 싶지 않다. 함께하고 싶건만 더는 매달릴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램파드 또한 더는 애쉬와 자신을 잇는 부분이 남지 않은 것을 안다. 하지만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이나 페로몬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애쉬를 놓치기 싫어 꽉 끌어안았다. 그 점이 고마워 애쉬는 본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애쉬의 페로몬에 계속 노출되면 램파드의 몸에 부담이 갈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램파드의 손을 떼어 내 부러 거리를 벌렸다.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램파드는 곧바로 평정심을 찾고, 해답을 제시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경거망동한 선택이지만 램파드의 능력으로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회복하는 대로 황궁으로 돌아가 혼인을 치르자. 제국민 전체에게 너를 공표하는 것이다.”

“곤란하지 않아?”

“괜찮아. 그도 허락했으니까. 나랑 혼인해.”

샛노란 아카시아 꽃의 꿀을 모아다가 만든 듯한 화사한 허니 블론드가 가볍게 출렁였다. 그새 기른 머리는 램파드의 움직임에 맞춰 하늘하늘 움직였고, 달달한 맛이 날 듯해 애쉬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꿀같이 달콤한 제안을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으랴.

감미로운 프러포즈에 울던 것도 잊고, 애쉬의 오뚝한 콧날 끝에서 콧바람이 튀어나왔다. 콧등이 붉어진 그는 페로몬을 깔끔하게 갈무리하며 웃었다. 끝내 답하지 않았지만, 입에 머무른 미미한 웃음이 긍정을 표했다. 적어도 램파드는 그렇게 느꼈다.

***

애쉬와의 혼인 날짜를 공표한 램파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황궁에서 온 수많은 안건과 혼인 준비까지 더해져 쉴 시간이 부족했다. 또한 혼인 준비를 위해 애쉬를 황궁으로 보냈다.

그 와중에도 커틀러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가장 먼저 혼인 소식을 알렸건만 정말 관심 없는 모양인지, ‘그렇군요. 속히 일을 정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라는 시시한 반응만 돌아왔다. 이전의 커틀러라면 혼인식장에 난입해 하객을 모조리 몰살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심경의 변화를 겪긴 했는지, 대수롭지 않아했다.

사실 발톱을 숨기고 있을 뿐, 광기를 숨기며 기회를 엿보는 것은 아니겠지. 램파드는 터무니없는 아수라장을 생각하며 커틀러가 꾸며 놓은 아기방으로 향했다.

이 방은 특별히 벽지 도배부터 새로 했는지 방 전체가 햇볕을 머금은 것 같은 화사한 색을 띠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을 막은 커튼은 꼭 필요한 빛만을 투과시켜 방 안을 밝게 만들었다. 램파드는 방 한가운데, 요람에 누워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며칠 만에 눈을 뜬 아이는 아버지와 같은 제비꽃 색 눈동자로 램파드를 바라봤다. 시선이 따라오는 것이 신기한 램파드는 요람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움직였다. 자그마한 아이는 똘똘한 시선으로 램파드를 쫓으며 까르르 웃었다.

“한번 안아 보실래요?”

“그러지.”

아이의 곁을 지키던 시종이 루안을 들어 올려 램파드에게 건넸다. 신경 써서 조심히 안았건만 아이는 몇 초를 참지 못하고 울음을 빵 터뜨렸다. 목청 크게 우는 모습에 당황한 램파드가 달래 보려 노력했건만 오히려 루안은 발버둥 치며 램파드를 격렬하게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답답하게 바라보던 시종이 결국 한 소리 했다.

“그렇게 안으면 안 되십니다. 목을 단단히 받치셔야지요.”

시종의 지적에 곧바로 손을 움직여 목을 받쳤지만, 이번에는 아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댔다.

“엉덩이를 받치셔야 합니다. 이렇게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서…….”

시종이 손짓으로 정확하게 지시했건만 램파드는 절반도 따라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 우는 루안과 램파드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램파드는 아이가 자신 쪽으로 기대게 한 뒤 등을 토닥였지만,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고막을 찌를 기세로 악 울었다.

결국, 아이를 안는 것을 포기한 램파드는 시종에게 루안을 건넸고, 그가 토닥이자 언제 울었느냐는 듯 조용해졌다. 일하는 도중 짬이 나는 대로 아이를 안는 법을 배웠건만 램파드에겐 무리였나 보다. 램파드의 눈에는 비슷하게 안는 것이구먼, 왜 품에만 넣으면 저렇게 우는 것인지 원.

“그렇게 보니 자네가 아이의 부모 같군.”

“네? 아… 아니, 누가 봐도 폐하의 아이입니다. 그런 가당찮은 말씀 하지 마십시오.”

놀란 시종은 빠르게 정정했고, 램파드는 부러운 듯 바라봤다.

아이는 정말 싫었다. 저런 갓난애 말고도, 아직 미성숙한 사람도 싫다. 시끄럽고 제멋대로이며 거슬리니까 싫다. 그러나 막상 낳고 보니 없던 애정이 생겨 났다. 아무래도 온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빼어난 외모 덕인 듯했다. 직접 낳은 자식이지만 미의 신의 축복을 독차지한 모습에 종일 보고 있고 싶어질 정도였다.

앞으로 아이를 두고 떠나야 한다니.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폐하, 새로운 유모 후보를 셋 구해 왔습니다.”

방문을 슬며시 열며 서류를 든 잔트가 들어왔다.

만삭일 때 잠자리를 가진 커틀러가 램파드의 젖꼭지를 힘껏 비틀었지만, 모유 같은 건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남성 오메가 중에는 모유가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던데 하필 램파드가 당첨됐다.

결국, 모유가 나오는 유모를 구할 수밖에 없었고, 램파드는 잔트가 추려 온 자들의 인적 사항이 적인 서류를 읽어 보았다.

“여기, 아이를 잃은 여인이 괜찮아 보이는군. 신원도 확실하고. 짐이 직접 면접을 볼 수 없으니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아이에 관한 일은 확실히 수행하겠습니다.”

“믿음직스럽군.”

“그도 그럴 것이 저희 가문의 귀한 후계자니까요.”

“준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건만?”

서류에 집중하던 램파드가 시선을 올려 잔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커틀러를 닮은 아이가 나오면 저희 가문에 주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확언하진 않았다. 그리고 자네는 날 닮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저는 당주가 아니라서 잘 모르니까 커틀러와 담판을 지으십시오. 그때까진 콘테 가문의 아이입니다.”

배 아파 낳은 사람은 따로 있건만. 눈 뜨고 빼앗긴 기분이 든 램파드는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누가 들으면 자네가 낳은 아이인 줄 알겠군.”

“차라리 그렇게 공표할까요? 사생아가 생겼다는 소문에 아들의 혼삿길이 막히는 것보다 차라리 나은 듯하군요. 전 상관없기도 하고요.”

잔트는 램파드가 혼인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약간 날이 섰다. 그가 달라진 걸 알아챈 램파드는 커틀러가 원치 않아 했다고 설명했지만, 여전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짐이 낳은 자식이다.”

“아이를 제대로 안지도 못하시면서 그리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사옵니다.”

한 달 내내 아이를 안으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램파드를 잘 아는 잔트가 장난스레 웃었다. 반박할 말이 없는 램파드는 불쾌한 듯 미간에 인상을 썼다.

“제 농이 과했군요. 사과드립니다.”

“…….”

“후계자 문제는 커틀러가 돌아오면 한번 나눠 보도록 하십시오. 결과에 수긍할 테니까요.”

“그래.”

램파드는 잔트의 품에 안긴 아이의 말랑말랑한 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치며 건성으로 답했다. 영 안 되면 모든 진실을 밝히고, 진짜 낳은 자식은 이 아이노라고 밝히면 되지 않을까. 아수라장이 예상되어 생각만 해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커틀러가 전문이었다. 그를 믿기로 했으니 자신 없는 대책은 그에게 맡기면 될 것이었다.

***

혼인식 준비가 끝나고, 몸이 회복된 램파드가 황궁으로 돌아왔다.

굳이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황제의 혼인 소식은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에도 퍼졌다. 커틀러의 귀에도 똑똑히 들어갔을 테지만, 램파드는 손수 적은 편지를 보냈다.

혼인식이 끝나고 나면 제국 순방을 나서야 하며 바빠질 터라 한동안 연락을 받기 힘들게 된다.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을 때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건만 해결한다는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는지 커틀러는 끝내 오지 못했다.

“램파드 폐하, 어디 가십니까.”

“신부를 맞이하러.”

“……거듭 말하지만, 손은 대지 마십시오.”

“기껏 입은 성가신 옷을 벗었다가 다시 입을 생각 따위 없다. 우려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램파드의 대답에 수긍한 대신이 떨어져 나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황후 대기실로 이동하는 램파드의 발걸음은 굉장히 무거웠다. 제국의 중요 행사를 위한 황제 복장은 무겁고 불편하다. 빈틈없이 온몸을 꽉 조이는 제복에 금으로 만든 장신구가 여기저기 달려 있어 조금만 움직여도 쩔렁거리는 통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거기다 무거운 털이 달린 망토까지 한 벌이라 혼인식을 하는 것인지, 체력 과시를 위한 공연을 벌이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황후 대기실 앞에 선 램파드는 옷이 무거워 숨을 깊게 내쉬고 문을 벌컥 열었다. 황후 대기실은 두세 사람이 들어갈 만큼 좁았고, 애쉬는 홀로 의자에 앉은 채였다. 무거운 램파드의 복장과 달리 그는 흰색 계열의 수수한 정장 차림이었고, 눈을 덮는 짧은 면사포를 손에 든 채 심각한 표정으로 꼼지락댔다.

“긴장되느냐.”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

“앞으로 여러 행사에 불려 다닐 것인데, 슬슬 익숙해져 봐라.”

애쉬는 답 대신 딱딱한 표정을 지우고 애써 미소 지었다.

“램파드,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말해 봐.”

“각인이 풀린 것은 알고 있지?”

램파드가 움직이자 가슴에 매달아 놓은 금 사슬이 부딪치며 짤그랑 소리를 냈다. 역시 이 옷, 서서 이야기하기에는 불편하다. 램파드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알고 있어.”

“그런데도 나와 혼인할 거야?”

“응.”

“각인한 알파는 따로 있잖아. 단단히 결속된 상대가…….”

“그는 나와 혼인할 생각 같은 건 없어. 더 큰 권력을 가지는 것이 싫은 모양이야.”

램파드는 사뭇 아쉬운 듯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위장 혼인이니 누구와 하든 상관없긴 했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진실한 상대와 하고 싶었다.

날 때부터 귀족인 커틀러는 큰 권력을 가진 자의 책임을 잘 알아 황족의 자리를 거부했다. 이미 한 번 거절당했으니 두 번 권하진 않았다.

“나를 선택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램파드는 애쉬와 커틀러 둘 중 하나를 선정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다 각자 함께하고 싶은 연유가 다르니까 비교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커틀러는 사랑하니까, 애쉬와는…….

“이때껏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았으니까 형을 대신해서 주고 싶어. 너와 가족이 되고 싶다.”

드디어 애쉬가 품었던 의아함이 사라졌다. 각인이 풀린 램파드가 한참이나 부족한 자신을 끝까지 원하는 이유를 말이다. 램파드는 자신이 저지른 죄, 애쉬의 연인이었던 루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애쉬를 보살피는 것이었다. 사랑이 아닌 동정이었으며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 위한 속죄였다.

램파드의 생각과 달리 애쉬는 이미 넘칠 정도로 과분한 것을 받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로 쌍방향으로 각인한 알파와 오메가의 깊은 유대감과 정을 느끼며 달콤함에 흠뻑 취했다. 여한이 없을 정도로.

남은 의문이 모두 사라진 애쉬는 각오를 결심했다.

“어전 회의를 위해 최고 대신을 백작령으로 부른 날 기억해? 무사히 임무를 마치면 뭐든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던 말.”

“그랬지. 정한 것이 있다면 말해 보아라.”

“남부 지방에 있는 보리수나무. 거기에 루사의 뼈를 뿌려 놓았어.”

“…….”

애쉬와 함께 첫 춤을 췄던 날이었다. 그는 혼인 후 신혼여행으로 남부 지방에 있는 커다란 보리수나무를 보여 준다 말했다. 애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몹시 간절하게 청했다.

“황성을 떠나 루사의 곁에서 살고 싶어.”

“애쉬…….”

확실히 각인이 풀린 모양인지 그가 다른 오메가를 떠올려도 가슴이 찌르듯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기엔 섭섭한 마음도 없진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생각한 일이야. 라이와 함께 모든 일이 끝나면 고향인 남부 지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거든.”

“라이도 함께 말인가?”

“그 근처에 남부 지방 사람을 위한 학교가 새로 세워졌단 소식을 들었어. 라이는 거기서 약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면 되니까.”

램파드가 곰을 직접 때려잡아 남았던 예산으로 만든 학교였다. 제국민의 편의를 위해 세운 학교가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거긴 수도보다 개발이 덜 되어 생활하는 데 불편하다.”

“그새 잊었어? 나는 오랫동안 시골에서 살았으니까 익숙해.”

“황궁에서 오래 지냈지 않은가. 다시 적응하긴 힘들 테지.”

“나에게는 자갈밖에 없는 남부 지방보다 황궁이 더 황무지 같았어. 개척하기 힘든 곳에 정착했으니까……. 다시 돌아가는 것쯤이야 손쉬워.”

램파드는 그를 보내기 싫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원하고 있으니 보내는 것이 마땅하기에 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이미 라이와도 이야기를 끝냈어.”

“라이는 루안이 자랄 때까지 황자가 되어 줘야 한다. 함부로 보낼 수 없어.”

“라이도 자신의 의무를 잘 알고 있어. 엉망이 된 남부 지방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13년 동안 계속 너의 후계자인 척할 테니까…….”

“하…….”

“황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는 나이인 열세 살이 된 루트비안을 데리고 오면 라이는 깔끔하게 자리를 포기할 거야.”

애쉬의 간절한 표정에 램파드는 시선을 돌렸다.

“그 애는 창관만 사라진다면 권력 따윈 관심 없으니까. 힘들어도 그때까지만 황제로 버텨 줘.”

아직 커틀러가 돌아오지 않아 후계자 문제는 어찌할지 확실히 결론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애쉬는 램파드가 구태여 루트비안이라 이름 붙인 첫아이가 황제가 되길 바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다.

이미 램파드에게 받은 값진 것은 범람할 정도였다. 오히려 애쉬가 그에게 주고 싶을 지경인데 조금이나마 갚을 길을 찾았다.

“부탁할게.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야.”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애쉬를 똑바로 바라봤다. 딱히 제 의견을 밝히지 않던 애쉬의 첫 부탁이나 다름없었고, 그는 마음을 다잡았는지 굳건했다. 피할 수 없는 답이기에 무겁게 느껴지는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애쉬는 혼인을 원치 않아 했다. 그를 억지로 붙잡은 마음에 램파드는 죄스러워졌다. 어떤 형태로든 함께했으면 했기에 애쉬와 혼인을 치르는 것이었다. 혼인 말고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하나. 작위라도 내려 주기적으로 회의가 열릴 때마다 찾아오게 하는 방법도 좋을 터. 하지만 이미 판이 벌어져 무르기 힘든 상태였다.

“가는 것은 허락해 주지, 하지만 혼인식 직전이다. 당장 나와 혼인할 다른 자를 찾을 수는 없으니 적어도 혼인은 치르고 떠나거라. 라이는 10여 년 동안은 황자일 테니까 황후인 네가 함께 있는 것이 명분도 맞겠지.”

애쉬는 손에 든 면사포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시간 됐네. 준비하러 가.”

옷과 장신구의 무게뿐만 아니라 마음조차 무거워진 것 같은 램파드는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서기 전 애쉬를 돌아봤다.

“……미안.”

“뭘 미안하다는 거야?”

“미래를 빼앗아 억지로 내 곁에 묶어 미안하다.”

“나한테 큰 걸 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미안해할 필요 없어. 평소와 같이 당당하게 웃어. 기쁜 날이잖아.”

쓰라린 미소를 지은 램파드가 밖으로 나갔다.

황족의 혼인식은 황후를 태운 마차가 수도를 순방할 동안 황제는 미리 식장에 가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 애쉬는 몸단장을 마무리할 것이고, 램파드는 세례를 받기 위해 이동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세 사람이 들어가면 가득 차는 황후 대기실은 이미 만원이었다. 램파드가 사라지자 좁은 가림막 뒤 숨어 있던 커틀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애쉬와 똑같이 자수가 들어간 흰 정장을 입은 차림새였다.

“분수를 깨닫지 못하는 한심한 자인 줄 알았건만 마지막은 깔끔하게 정리하는구나.”

“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 듯하군요.”

“건방진 의견을 내뱉었으면 납득할 이유를 들먹이고 하여라.”

“비록 식견이 짧은 저지만 램파드에 관해서는 당신보다 잘 알고 있으며, 분수를 모르지 않습니다.”

커틀러가 소리 없이 피식 웃었고, 애쉬는 못마땅한 듯하지만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네까짓 게 램파드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주제를 모르는 사내였군.”

자신은 눈앞에 있는 커틀러는 물론 램파드보다 능력이 부족하다. 그의 곁에 남아 봤자 램파드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할 것이다. 고집부려 곁에 있어 봤자 더 큰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르니까 이대로 멀어져 차라리 램파드의 행복을 비는 편이 나았다.

그렇기에 혼인식을 준비하는 동안 커틀러에게 먼저 연락을 넣었다. 루안이 자랄 때까지 황제로서 일해야 하는 램파드 곁에는 커틀러가 잘 어울리니까. 그의 지위와 능력은 램파드를 충분히 보필할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램파드 눈에 띄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나 조용히 살 테니, 대신에 그를 보살펴 달라 했다. 커틀러는 그런 애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깔끔하게 일이 진행되나 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램파드는 애쉬에게 속죄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이 분명 존재했다. 모든 것을 아는 알파가 버젓이 곁에 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상대를 찾는 것 또한 이상했다. 무엇을 간절히 원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알파를 찾았는지.

마지막까지 램파드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야기를 듣던 커틀러의 행동으로 그들 사이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램파드는 커틀러를 온전히 믿지 않았고, 애쉬에게 신뢰를 갈구했다.

커틀러의 행동은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애쉬가 느낄 정도였으니 램파드 또한 그의 미심쩍은 부분을 간파했을 터. 커틀러는 램파드의 유일한 이해자이자 우군이며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자를 온전히 믿지 못한 램파드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애쉬는 램파드의 고독을 이제야 이해했다. 다른 알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쉬를 찾아 신뢰를 갈구한 까닭이 이제야 납득됐다.

램파드는 자신을 실각시키기 위해 기만한 상대를 용서할 정도로 믿음이 고팠던 것이다.

“끝까지 숨어 엿듣다니. 혹시, 램파드를 시험한 겁니까?”

“글쎄. 이제 네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조금 전 저보고 분수를 모르는 놈이라고 하셨죠. 그러는 콘테 공께서도 램파드가 원하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애쉬를 내려다봤다.

“램파드가 원하는 것이라. 신뢰 말인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니. 애쉬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구겨졌다.

“당신… 역시 램파드에게 해악이야.”

애쉬가 살기를 머금으며 커틀러를 노려봤지만, 그는 태연했다.

“그래서 어쩐다는 건가. 나와 겨뤄 보겠다는 것이냐.”

적어도 각인이 유지되었다면 끝까지 겨뤘을 테지만 지금 와서 소용없는 짓이었다. 내키지 않지만 램파드를 지킬 자는 커틀러였다. 애쉬는 이를 악물었다.

“각인만 꼬이지 않았더라면 제가 직접 램파드를 행복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능력도 없는 네놈이?”

“능력 따윈 없어도 충분합니다. 당신보다 내가 더 그를 사랑하니까!”

초지일관 태연하게 비웃음을 머금던 커틀러가 미소를 싹 지우고 애쉬를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서느런 살기에 애쉬는 목덜미를 감싸며 그를 노려봤다. 커틀러는 램파드를 향한 사랑을 의심하는 애쉬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커틀러는 앉아 있는 애쉬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는 근육과 뼈가 압박되어 통증이 일 정도로 강하게 부여잡으며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나는 우둔한 네놈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램파드를 사랑하고 있다. 감히 네놈의 작은 감정 따위에 비교한다며 운운하지 말아라.”

어깨뼈가 부러질 듯한 통증이었지만 애쉬는 그의 세찬 기에 맞서며 커틀러를 노려보았다. 커틀러는 그의 반항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이런 하찮은 자에게 열을 낼 필요 따윈 없지. 손을 거칠게 떼어 내자 애쉬는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어깨를 감쌌다.

애쉬는 그를 경계하며 노려보았고, 커틀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무던한 표정으로 돌아가 덤덤히 섰다.

“그가 나 또한 제대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쯤은 알고 있다.”

어깨를 감싼 애쉬의 시선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커틀러는 비웃음조차 머금지 않고 가느다란 속눈썹까지 돌인 것같이 딱딱한 태도를 고수했다.

“오랫동안 생각했지. 한 번 잃어버린 신용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를.”

몸과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여 신뢰를 쌓았더니, 단번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깨진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얻지 못하는 정신을 깨뜨릴까 싶었다. 생각하지 못하는 인형이 된다면 평생 보살피면 된다. 어떠한 형태로든 램파드가 곁에 있기만 하면 좋으니까.

램파드를 데려다 둘 새장까지 마련했지만, 막상 장시간 천천히 무너지는 램파드를 보기엔 힘이 부쳤다. 차라리 새장에 집어넣고 포기할 때까지 마주치지 말까.

애쉬가 벌여 놓은 일이 한꺼번에 터지지 않았으면 생각을 실행에 옮겼을지도 몰랐다. 그랬더라면 램파드의 마음을 얻기는 영영 글러 먹었겠지.

“꽤 오랫동안 고민했건만 너를 살려 두긴 잘한 것 같구나. 네놈이 일을 저질러 준 덕분에 쉽게 되찾았으니까.”

커틀러는 시선을 아래로 흘끗 내려 애쉬를 바라보며 단단하게 고정한 자신의 오른팔을 가볍게 문질렀다.

“당신을 위해 한 일이 아니야!”

“램파드를 위해 벌인 일도 아니지 않으냐.”

램파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벌였던 일이었기에 애쉬는 입을 다물며 분해했다. 애쉬가 조용해지자 커틀러가 허리를 굽혀 그가 쥔 면사포를 뺏어 들었다. 뒤집어쓰면 눈 코 입을 가릴 정도로 불투명했다.

생각을 정리한 애쉬의 시선이 다시 또렷해졌으며 커틀러를 쏘아봤다.

“제가 깨어나지 못하는 혼수상태였을 때 일부러 대번포드 백작을 방치했군요.”

백작을 가만뒀다간 램파드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커틀러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 백작이 램파드에게 접근하도록 내버려 뒀다. 엄밀히 말하자면 애쉬가 죽지 않아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거지만은 만약 애쉬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애쉬에게 제안을 할 시간에 백작부터 제거했다. 램파드의 안전이 우선시되어야 하니까.

“램파드를 위험에 빠뜨린 후 돕기 위해서… 백작과 저를 이용하셨군요.”

돌로 만든 것처럼 무거워 보이는 커틀러의 입매가 다시 휘었다. 조소가 아닌, 흥겨워 짓는 웃음이었다.

“그 정도 위협은 내 선에서 수습할 수 있으니까.”

설령 백작의 계획이 성공하고 램파드의 비밀이 폭로되어 황좌에서 끌어내려진다고 해도 커틀러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램파드는 이 세상에서 오롯이 커틀러에게만 기대게 될 테니까.

“그 일로 램파드가 상처 입었는데도 즐거우신 겁니까!”

“램파드에게 사실대로 말해 보든가.”

“…큿!”

애쉬는 진심으로 분해 이를 갈았다. 램파드는 애쉬의 말을 믿어 줄 거지만 인제 와서 진실을 말해 주기엔 그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각인 상대를 의심해야 한다니. 이미 타인과 진실된 교류를 하지 못해 사무치는 외로움을 겪은 램파드를 또다시 홀로 만드는 짓이었다.

“믿는 것은 둘째치고, 각인이 풀린 네가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그가 낳은 아이도 내 피를 이었고. 이제 너는 램파드에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 것보다 램파드를 위험에 빠뜨려서까지 신뢰를 얻고 싶었던 겁니까. ……아, 그렇군요. 당신 또한 램파드를 믿지 못한 거군요!”

애쉬도 커틀러와 똑같이 램파드를 속였다. 라이를 백작의 품에 보내 놓고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램파드 앞에선 순진한 양처럼 굴었다.

뒤늦게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깨닫고 후회했을 때도 램파드에게 사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매도하며 증오할까 봐 두려웠다.

커틀러 또한 같을 것이다.

“당신의 본성을 파악한 램파드가 떠날까 봐, 좋은 상대를 만날 능력도 갖췄으니까 두려웠던 겁니까!”

웃음기를 머금던 커틀러의 입매가 또다시 순식간에 굳었다. 평소 감정을 정돈하며 덤덤한 모습과는 다른, 작은 기척조차 사라졌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따뜻한 피가 흐를 터인데, 그는 몸속의 혈액마저 차가울 것같이 서느런 느낌. 애쉬는 인간이 아닌 날카롭게 갈아 낸 칼날을 마주한 느낌이었고, 그의 기백에 목이 여러 번 찔린 듯했다.

애쉬는 오싹한 기운에 덜덜 떠는 손을 들어 올려 목 뒤를 쓰다듬었다.

조금 흥분했는지 호흡이 거칠어진 커틀러의 눈가가 실룩거렸고, 그는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애쉬를 내려다봤다.

“네놈 탓에 팔도 이렇게 되어 시건방진 라이와 함께 찢어 죽일까 싶었지만, 관용을 베풀어 주지. 네 덕으로 램파드를 온전히 얻었으니까 기어오른 것은 용서해 주겠다.”

“이왕 베풀 자비는 저 말고 램파드에게나 하십시오. 그를 조금은 믿어도 되지 않습니까.”

숨긴 비밀이 무엇이든 램파드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면 용서해 주고 믿어 줬을 것이다. 램파드는 자신을 배신한 애쉬에게 그랬으니까.

“거짓으로 자신을 꾸며 램파드를 가지게 되어 좋으십니까? 그건 램파드의 마음을 진정으로 가진 게 아닙니다!”

“애쉬 테일러.”

차가운 저음으로 내뱉은 자신의 이름에 애쉬가 고개를 들어 올렸고, 경고 없이 강철 같은 주먹이 얼굴에 날아왔다.

“큿……!”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애쉬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의 하얀 옷은 코에서 흐르는 피로 얼룩졌다. 단순한 폭력으로 끝낼 것이 아닌지, 커틀러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 애쉬는 몸을 압박하는 공기에 짓눌리면서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미 오래전 램파드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인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건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그를 위해 한 몸 불태워 재가 되어도 상관없다 느껴졌다.

“제가 당신이었다면 램파드를 끝까지 믿었습니다. 램파드를 혼자로 만들어 각인한 알파만 의지하게 하다니……! 우성 알파에다가 제국의 공작 작위까지 가졌으면서 뭐가 그리 자신 없으셨습니까.”

애쉬는 잠깐 주저했지만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본심을 조금만 알려 줬더라면 램파드는 저 따위에 매달리지 않았을 겁니다.”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은 애쉬는 목 안쪽이 쓰라려졌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실히 인지하고 믿었더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서 있지조차 못한다. 작은 새끼손가락 하나도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단단했을 테니까.

미소를 깡그리 지운 커틀러가 애쉬에게 다가왔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별것 아니라는 듯, 그의 표정은 단 하나의 흔들림이 없었다.

***

식을 올리기 전 램파드는 기도실에 홀로 멍하니 앉았다. 오메가가 되기 싫다는 기도를 무시한 신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도 있지마는, 전쟁이 끝난 후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를 없애 버려 기도를 드릴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도 대신 애쉬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엄숙하게 지어진 예배당은 조용히 생각할 장소가 되어 줬다.

황제인 이상 황후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우지 못한다. 적절한 위장 혼인 상대를 찾았으니 기뻐야 마땅하건만. 막상 혼인식을 앞두니까 자꾸만 마음이 일렁거리고 진정되지 않는다. 적어도 몇 달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건국기념일 철, 혼인을 앞둔 램파드는 애쉬와 함께 춤을 췄다. 그때만 해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하루빨리 혼인을 올리고 싶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으면 했다. 기다리는 만큼 행복은 눈 덩어리처럼 불어났는데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불안했다.

원인은 애쉬의 입에서 직접 원치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겠지. 혼인을 반기지 않는 애쉬를 잡아다 억지로 개목걸이를 채우는 듯해 떨떠름하다. 램파드의 이익을 위해 그의 새로운 미래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니까 당연할지도.

그리고 또, 커틀러도 신경 쓰인다.

“정말 괜찮은 거냐…….”

제단에 기댄 램파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귀족인 커틀러는 램파드의 혼인을 정확히 이해한다. 황제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는 이상 황후를 꼭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마저 이해될까. 양쪽 모두에게 죄를 짓는 기분에 머리가 과열되는 듯, 어질어질했다.

하아, 깊이 한숨을 내쉰 램파드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차가운 제단에 이마를 눕혔다. 찬 기운이 숯처럼 달궈진 램파드의 머리를 조금이나마 식혀 주는 것 같았다.

“램파드 폐하, 황후가 되실 분의 마차가 황궁에 들어왔사옵니다. 준비하시옵소서.”

“알겠다. 곧 나가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는데 식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미 판은 벌어졌고, 황제로 군림할 이상 싫고 좋고를 따질 겨를 따윈 없다.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마음을 진정시킨 램파드가 두터운 망토 자락을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치 않는 연기에 어울려 주는 애쉬는 앞으로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마음을 편치 못하게 했으니까 적어도 몸만이라도 안락할 수 있도록.

커틀러에게는 돌아오는 대로 이때껏 해 주지 못한 사랑의 말을 잔뜩 전할 것이다. 비록 대중의 눈에는 램파드가 선택한 짝이 애쉬로 보일 테지만은 마음으로 정한 짝은 오롯이 너 하나뿐이라고.

혼인은 황후의 대관식과 함께 이뤄진다. 대관식장의 웅장한 천장은 천국을 묘사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고, 섬세한 조각이 된 기둥이 지탱했다. 무거운 금술이 달린 붉은 천들이 곳곳에 늘어져 진중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장대하고 거대한 대관식장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관중이 모였다. 대부분 귀족과 왕국에서 찾아온 왕족들이었으며, 그들은 시종과 경비들의 지도로 자리를 지켰다.

“제국의 태양, 램파드 클로비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관중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램파드는 갈라진 인파 사이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식을 진행할 최고 대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껏 치장한 램파드의 미모는 당연히 돋보이며 태양이라는 칭호만큼 빛날 것이 분명했다. 굽힌 허리를 감히 허락도 없이 펴, 황제의 용안을 1초라도 빨리 보고 싶은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인내를 끌어모아 황제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 버텼다.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고, 관중들이 숙인 허리를 폈다.

그들의 예상대로 예복을 입은 램파드는 평생 잊지 못할 정도의 강렬한 모습이었다. 혼인식에 참석한 자들은 눈에 담은 황제의 모습을 죽는 날까지 몇 번이고 이야기할 것이었다. 당장 찬사를 늘어놓고 싶었지만, 아직 식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축복의 말은 잠시 미루고, 모두 아름다운 이와 평생 함께할 부러운 사내를 기다렸다.

닫힌 문이 열리며 램파드의 어두운 제복과 달리 밝은 정장을 입은 이가 등장했다.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고,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던 램파드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떼어 낸 입술을 도로 붙였을 땐 혼인식에 걸맞은 기쁜 미소로 변모했다. 벅찬 마음에 입꼬리가 절로 휘었고, 그를 향해 웃었다.

“저분이 애쉬 테일러 님이군요.”

애쉬라고 하기에는 키부터 다르다. 190이 넘는 애쉬에 비해 커틀러는 램파드보다 조금 더 크지만 크게 차이 나진 않는다. 애쉬가 아니라는 것은 램파드만이 파악한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가까이 다가온 커틀러를 향해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려 맞잡았다.

최고 대신이 황후에게 관을 씌워 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는데, 램파드는 자신의 관을 한 손으로 대충 벗어 그 곁에 놓았다. 황제의 행동에 장내 사람들이 술렁였다.

“기회를 주지. 어느 쪽을 원하는지 골라 봐.”

나지막한 램파드의 목소리는 커틀러와 최고 대신에게만 들렸다. 최고 대신은 불투명한 베일에 얼굴이 가려진 커틀러를 뚫어져라 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장내의 사람들도 모두 황후가 될 자를 바라보며 의견을 교환했다.

베일을 벗으면 다들 기절초풍할 것인데 벌써 이렇게 들썩이다니. 기도실에서 혼자 심란함에 빠져 있던 것을 깡그리 잊은 램파드는 소란스러움을 즐겼다.

“오른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커틀러의 목소리에 최고 대신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꿈틀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한숨을 내뱉더니, 황후의 관을 들어 올렸다. 곁에 있던 커틀러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고, 램파드는 대신이 든 관을 뺏어 들었다.

“폐하, 전통대로라면 제가…….”

대륙의 지도자를 유지하기로 한 이상 전통 따위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램파드는 최고 대신의 말을 무시하며 관을 들어 올려 무릎을 꿇은 커틀러의 머리 위에 살며시 씌웠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자신의 관도 직접 쓴 램파드가 최고 대신에게 명했다.

“시작해라.”

그리고 1분도 채 안 돼 후회했다. 할 말을 잔뜩 준비했는지 매우 길고 지겨운 주례가 시작되었다. 장내의 소란스러움도 잠재워졌는데, 최고 대신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함이 아닌 절로 잠이 오기 때문이었다.

램파드는 나란히 곁에 선 커틀러의 손끝을 장난스레 톡톡 치며 소곤거렸다.

“싫다며?”

“여전히 싫습니다.”

그의 대답에 램파드는 눈에 띌 정도로 기운이 없어졌다. 집중력이 떨어져 자세가 흐트러진 램파드와 달리 그는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앞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성가신 권력보다 평생 폐하와 나란히 언급될 자가 다른 이라는 것이 더 싫습니다.”

“……그거 질투야?”

“네.”

기쁨도 잠시, 질투에 눈멀어 혼인식장에 난입한 것까진 좋았다. 시기의 대상인 애쉬를 어떻게 한 것인지. 램파드는 미소를 지웠다.

“애쉬는.”

“그는 얌전히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램파드와 커틀러의 소곤거림이 성가신 최고 대신은 일부러 크크흠, 기침 소리를 내며 주례를 계속 진행했다. 램파드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며 끊었다.

“시시콜콜한 주례가 너무 길어서 도저히 못 들어 주겠군. 모두 그리 생각하지 않는가.”

램파드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 관중이 듣도록 만들었다. 황제가 저리 말하니 관중 또한 열띤 호응으로 응했다. 최고 대신은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황제가 제멋대로 구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기에 주례를 끊고, 다음을 진행했다.

“자, 그럼 사랑의 맹세를 위한 입맞춤을.”

황후의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은 수도를 한 바퀴 돌 때였다. 지금은 입술만을 드러내는 것이 맞지만, 관을 씌웠던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했다. 램파드는 커틀러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잡아 뜯어내듯 거칠게 벗겼다.

램파드의 완력에 찌이익, 베일이 찢어지며 머리 위를 장식한 관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금색 관이 단단한 바닥과 포옹하는 격렬한 소음 따위 모기 날아다니는 소리가 될 정도로 장내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커틀러 경?”

커틀러를 알아보는 귀족들은 많았다. 곳곳에서 그의 이름이 터져 나왔으며 램파드는 놀라 자빠질 귀족들의 표정이 기대되어 장 안을 흘끗 바라봤다. 예상대로 경악한 자들이 한가득하다. 눈앞에서 입까지 맞추면 정말 볼 만할 것이다.

램파드는 가벼운 입맞춤을 위해 커틀러의 턱을 살며시 부여잡았다. 반대로 그는 한 손을 뻗어 램파드의 목덜미를 부여잡으며 강하게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관계 때 입맞춤을 하지 않았지.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뭐든 낮춘 상태여서 요구하지 못했다. 이제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려드는 혀를 받아들였다.

입맞춤 한 번에 불안했던 램파드의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씻겨져 나갔고, 만족으로 채워졌다. 이때껏 커틀러와 함께하면 둘도 없을 충족을 느꼈으면서 거부하기에 급급했다. 램파드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더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며 그를 느꼈다.

커틀러의 입술이 방향을 바꿔 가며 애무하듯 격렬히 움직였다. 램파드의 생각과 달리 그는 짧게 끝낼 생각 따윈 없는 것 같았다. 바라던 일이었기에 양손을 그의 목에 감아 밀착했다.

소란스러운 혼인식은 제국이 건재하는 이상 역사에 계속 남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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