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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짓말 (12/25)

12 거짓말

눈을 떠도, 감아도 똑같은 칠흑. 작은 램프조차 넣어 주지 않은 독방은 온통 검정뿐이며, 이곳에 갇혀 있으면 시간 감각이 사라진다. 며칠이 지났을까. 몸 상태가 전쟁 중 열흘 동안 행군을 강행한 때와 비슷했다. 적어도 열흘은 지난 모양이었다. 절그럭, 지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쇠끼리 마찰한다. 우성 알파를 제압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쇠사슬은 커틀러의 양팔을 단단하게 속박했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며, 작은 램프를 손에 든 로열 가드가 나타났다. 그는 커틀러 앞에 섰고, 보고서 읽듯 사무적인 목소리로 심문을 진행했다.

“오늘부로 이곳에 갇히신 지 열흘이 되셨습니다. 바깥 상황이 궁금하시죠?”

“…….”

“폐하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애쉬 님과 함께 휴양을 떠난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혹시 애쉬 님을 이미 죽이신 건 아닙니까?”

커틀러는 상대를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애쉬의 이야기는 작은 흥미조차 생기지 않는다.

“내일부터 콘테 공작가의 저택 수색이 시작됩니다. 계속 입을 다물면 저택 수색으로 끝나지 않고, 당신 또한 고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커틀러가 입을 열지 않자 로열 가드가 눈앞에 램프를 들이밀었다. 며칠째 지속된 심문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커틀러는 밝은 빛이 눈부셔 인상을 썼다. 노란 램프에 비친 커틀러의 모습은 지독했다. 깔끔하게 정돈했던 은발은 피가 엉켜 든 채로 굳어 지저분했다. 쉬지도 못하게 몰아붙여 지친 기색이 다분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양팔을 단단히 고정해 속박했지만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 든 로열 가드가 침을 꿀꺽 삼키며 거리를 벌렸다.

“이대로라면 이상 성욕 때문에 램파드 폐하를 납치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실 겁니다. 아니, 사실은 그리한 걸지도 모르죠.”

커틀러는 며칠째 입을 꾹 다물고 로열 가드의 말을 듣기만 했다. 대중 앞에서 램파드에게 고백한 전적이 있는 커틀러가 결국 미쳐, 황제를 납치한 것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며 저렇게 오해해 주는 편이 더 좋기에 입을 다물었다.

커틀러가 갇힌 방문의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벌써 교대 시간인가 보군. 이 안에 있으면 시간이 지난 걸 알 수 있어야지 원.”

두꺼운 쇠문이 다시 한번 열렸고 이번에는 네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그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절반 정도도 되지 않는 키를 가졌다.

“이봐, 구시렁거리지 말고 얼른 나와.”

“더 있으라고 해도 여기서 연장은 사양하지. 그럼 수고들 하십시오.”

바깥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어둠 속에 있고 싶지 않은 로열 가드는 자신이 들고 온 서류와 램프를 챙겨 바깥으로 나갔다. 인원수만큼의 램프가 추가되자, 모든 사람의 얼굴이 파악될 정도로 밝아졌다. 세 명의 로열 가드 앞에는 화려한 정복을 입은 라이가 섰다.

며칠 전, 커틀러 앞에서 당당히 꾀부리던 모습은 사라졌고 그 나이의 어린아이답게 순수하게 겁을 먹은 라이는 잘게 몸을 떨며, 커틀러를 흘끗 바라봤다. 겁먹은 라이를 독려하듯 로열 가드 중 한 명이 어깨를 감싸며 커틀러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기억나십니까?”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라이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지하 감옥에 갇힌 커틀러는 바깥 사정을 알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정신을 차린 라이는 충격에 기억을 잃은 모양이고, 누가 봐도 황실의 피를 이은 게 확실한 모습이라 황족 대우를 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일한 목격자인 라이가 기억을 잃었다면 진실은 커틀러의 입을 통해서만 들어야 한다. 귀족이 죄를 지으면 적어도 한 달 동안의 유예 기간을 준다. 황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퍼지면 로열 가드에게 질타가 쏟아질 테니 그들은 절차를 무시하고 커틀러를 다그칠지도 몰랐다.

앞으로 심문 강도가 높아질 테지만 커틀러는 기뻤다. 램파드가 빠르게 황궁으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이가 살아 있다는 말이니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는 그의 모습에 겁먹은 라이가 로열 가드의 등 뒤로 도망갔다.

***

며칠 만에 눈을 뜬 램파드는 커틀러의 생뚱맞은 모습에 적잖게 당황하며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그라면 절대 지을 리가 없는 모든 것을 포용할 것만 같은 자애로운 미소였다. 램파드와 눈이 마주친 그는 배시시 웃으며 램파드의 안색을 살폈다.

또다시 그의 새로운 표정을 발견하자 램파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꿈인가, 생시인가. 커틀러와 함께 죽어 지옥으로 떨어진 것일지도. 헛것이 보이자 당혹스러워 온갖 생각이 다 났다.

“일어나셨습니까.”

얼굴은 같지만, 목소리가 달랐다. 점점 시야가 또렷해지자 커틀러와 비교하면 체격이 왜소하고, 허리까지 기른 머리가 눈에 띄었다. 손가락은 양손을 다 합쳐 다섯 개밖에 남지 않았고, 오랫동안 검을 잡지 않았던 듯 굳은살 하나 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램파드는 그제야 눈앞의 상대를 파악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무성한 소문으로 접했던 콘테 공작 가문의 잔트였다.

“……읏.”

램파드는 몸을 일으켰지만, 현기증이 핑 돌아 도로 침대 위에 누웠다. 온몸이 물을 먹은 것처럼 무거웠다.

“폐하께서는 출혈이 심해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하셨습니다. 계속 누워 계십시오.”

“……여기는 어디지?”

“이곳은 남편이 꼴 보기 싫을 때마다 찾는 남부 지방에 있는 제 소유 별장입니다. 산 전체가 개인 사유지로 되어 있고, 소유자가 불명확하니 주소를 정확히 알지 않는 이상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지요.”

답을 들은 램파드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소란스러운 틈에 황궁을 빠져나오고, 준비된 마차에 오르자마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대로 커틀러가 준비했다던 콘테 공작 부인의 별장으로 이송된 모양이었다.

커틀러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대번포드 백작에 동조한 로열 가드 탓에 심문실은 전쟁터가 되었다. 함께 싸우지 못하고 홀로 둔 그를 생각하자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치, 죽으라며 사형 선고를 내리고 떠민 느낌이었다.

“하나 더 묻지. 커틀러는 어떻게 되었나?”

잔트의 미소가 사라지고, 눈꺼풀이 축 처졌다. 그는 커틀러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듯 몇 번 입술을 움직였다. 꼭 들어야 하는 말이지만, 한편으론 답을 듣기 두려워졌다. 램파드가 이불을 꽉 붙들자 잔트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오랜 여행을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커틀러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귀족을 다섯 명이나 죽였으니 아마 곧.”

그가 입을 다물자 램파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머리가 팽 돌며 어지러워졌고, 잔트가 일어나 넘어지지 않도록 거들었다.

“배 속의 아이는 무사하니까 제발 누워 계십시오. 하혈하셔서 침대에 계속 누워 계셔야 합니다.”

마차에서 정신을 잃기 전, 찌르는 듯한 복부 통증에 유산됐다고 생각했다. 커틀러의 아이는 잘 버텨 준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순순히 침대에 걸터앉았고, 이를 악물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커틀러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그는 귀족과 로열 가드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갇혔을 확률이 높다. 램파드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반란죄까지 덤터기 써 고초를 겪고 있을 터. 한시라도 빨리 램파드가 살아 있단 걸 밝히고, 그를 석방해야 했다.

“내일 당장 황궁으로 떠나겠다.”

“이곳의 주인으로서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건방진……!”

커틀러와 닮은 꼴인 그는 램파드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표정만은 당장 램파드에게 매달려 아들을 살려 달라 애원하고 싶은 듯했지만, 그의 입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약해진 폐하의 몸은 먼 거리 이동을 버티지 못하십니다.”

“아무리 공작 가문이라고 하나 귀족을 다섯이나 죽인 일을 쉽게 넘어가기 힘들 거다. 늦어질수록 사태는 악화한단 걸 알고 있지 않으냐.”

“알고 있습니다.”

“커틀러의 유예기간이 남아 있을 때 돌아가야 한다. 짐이 무사하단 것을 확인한다면 로열 가드를 설득시키기 쉽겠지.”

“그 점은 저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기 남아 계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아들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아…….”

램파드는 이마를 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잔트의 마음도 램파드와 같다. 알고 있으니 설득을 시도하기 힘들었다. 로열 가드만이라면 모르겠지만, 귀족을 다섯이나 죽였다니. 지금 당장 램파드가 황궁에 복귀한다 해도, 어지간한 이유로는 빼내기 힘들다. 적어도 램파드의 생사가 확인될 때까진 목숨이 붙어 있겠지만, 돌아가는 대로 손수 처형 명령을 내려야 할지도 몰랐다.

통탄스러워 앞머리를 쥐어뜯듯 꽉 붙잡았다. 심문에 참석하기 전 그의 말을 듣고, 의장을 넘겼어야 했는데. 큰 약점을 안고 있으면서, 이때껏 들통난 적이 없어 막연하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얼마나 안일하고 멍청하게 굴었는가.

램파드는 꼬여 있는 실타래를 풀기 위해 손끝으로 이마를 톡톡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심문에 참석한 귀족은 대번포드 백작을 포함하여 다섯. 하지만 그가 남긴 위협은 아직 남았다.

“황궁에서 온 시종은 어딨는가.”

“그들은 모두 아래층에서 쉬고 있습니다.”

“불러와라.”

“…아직은 아니 됩니다. 폐하께서 회복하신다면 불러 드리겠습니다.”

“한시가 급하다. 황궁의 상황을 알아야 하니 당장 불러오너라.”

흘러내린 어깨 숄을 정돈한 잔트는 단호했다.

“시종 중 몇 명은 폐하보다 3일 정도 늦게 출발해 황궁의 소식을 가져왔긴 합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혹 황위 계승권을 가진 아이 때문인가요.”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모든 정보를 놓쳤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큰 수확을 가지고 있었다. 놀란 램파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자세히 말해 봐라.”

“그 아이는 커틀러가 체포된 곳에서 발견됐으며 로열 가드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아이에 관해서는 황궁에서 일하는 자 중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며, 모두 입단속을 했다고 하더군요. 천천히 소문이 퍼질 듯합니다.”

라이가 그 장소에 있었다니.

램파드는 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킹이 쓰러지진 않았지만, 이미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체크메이트 상태였다. 황위 계승권을 가진 라이가 램파드의 비밀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더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커틀러를 살려 내긴커녕, 램파드마저 구렁텅이에 떠밀려지게 된다.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꾹 눌렀다.

차라리 전쟁을 일으킬까. 램파드에게 호감을 보이던 공주를 꾀어내 죽여 버리면 대륙은 다시 불바다가 될 것이고, 능력 있는 지휘관인 커틀러를 사면할 수밖에 없다. 램파드의 전투 능력 또한 이미 과거 전쟁으로 증명됐으니, 당장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겨 줄 거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램파드는 헛웃음이 나왔다.

제 손으로 죽인 형의 하나뿐인 자식. 사랑스럽기 그지없을 아이보다 어떻게든 커틀러를 살려 낼 생각이 앞섰다.

“적어도 열흘간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이제 곧 배도 불러 올 테니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잔트의 입매가 굳었다. 표정까지 비슷해지니 착각할 정도로 커틀러와 흡사해졌다. 분명히 고집도 같겠지. 램파드는 일단 수긍한 척하고 침대에 도로 누웠다. 잔트가 사라지는 대로 아래층에 있다는 시종을 만나 정확한 사실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계획을 세웠지만, 잔트는 여전히 곁을 지킨 채였다.

“계획을 짜는 표정이시군요.”

정곡이지만 당황해할 필요가 없으므로 램파드는 태연했다.

“지금 당장 황궁에 대한 생각도 버리고, 쉬십시오. 그 상태로는 오판을 내리기에 십상입니다.”

“말은 쉽지.”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잔트는 가지런히 모은 숄 밑에 무언가 숨겨 두고 있었다. 나무 상자 안에서 유리관을 꺼낸 걸 확인한 램파드는 몸을 일으켰지만,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램파드의 어깨에 뾰족한 침이 박혀 있는 유리관을 과감히 꽂아 버렸다.

램파드는 자신의 몸이 침대로 아니, 바닥 밑으로 급속하게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

정신은 또렷하지만,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이 미친 집안은 예고 없이 손부터 나가는 게 내력인가. 램파드는 있는 힘을 끌어모아 곁에 앉은 밉상과 똑같이 생긴 자를 노려봤다.

램파드를 공격한 그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시선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폐하께서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잔트에게 저 말을 전한 건 대체 누군가. 커틀러겠지. 눈꺼풀이 점점 감겨 왔지만, 잔트를 쏘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지만, 눈이 감기는 걸 막기 힘들었다.

램파드의 몸속으로 약이 모두 스며들었고, 그는 빈 유리관을 뽑아 들었다.

“이것은 저희 가문에서 직접 만든 수면제입니다. 오메가의 몸을 회복시키는 데도 탁월한 효과가 있으니까 한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주무십시오.”

이제 잔트가 뭐라 말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램파드는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램파드가 잠든 것을 확인한 잔트는 흘러내린 침구를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린 문밖에서 기다리던 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램파드를 바라봤다. 한 달 내내 시달린 램파드의 몸은 야위어 있었고, 요 며칠 유산 위험을 겪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숨소리가 작아 잠든 게 아니라 마치 영영 눈을 감은 듯해 걱정스러웠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을 자는 만큼 회복되실 겁니다.”

“저도 열흘 넘게 맞은 약이니 잘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회복되었고요.”

“알파에게도 효과 있는 약이니까요.”

애쉬는 램파드의 곁에 조심스레 앉아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칼로 후벼 팠던 깊은 상처는 아직 남았다. 죽을 작정으로 내질렀으니 상처 또한 깊고 흉했다. 이런 큰 상처를 얻었어도 계획대로 죽지 못했다. 손목이 아니라 목을 그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했다.

몸에 남은 흉터보다 가슴에 박힌 아픔이 더 크게 느껴졌다. 살아남아 기쁘다는 생각보다, 절망이 먼저 닥쳤으니까. 제대로 죽지 못했기 때문에 커틀러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램파드에게만은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그는 이미 모든 걸 알아 버렸다. 염치가 없어 램파드의 눈앞에 나타나기 두려웠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건지 결정을 내렸습니까.”

잔트는 눈을 뜬 애쉬에게 램파드 대신 황궁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아직 커틀러가 심어 둔 시종 몇 명이 황궁에 남아 있으니, 그들을 이용하여 아들을 구해 낼 계획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제 책임입니다. 램파드 대신 제가 황궁에 가겠습니다.”

“수도에 있는 저택에서는 힘을 보태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부리는 시종을 붙여 드릴 순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애쉬는 램파드의 손을 잡았다. 가느다란 손은 살점이 적어 뼈마디가 단단하게 잡혔다. 그는 램파드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입술에 살짝 가져다 댔다. 작은 접촉이지만 애쉬의 몸속까지 기쁨의 파문이 일 정도로 그리운 손이었다. 정리를 끝낸 잔트가 방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사흘간은 눈뜨시지 못하게 시간 맞춰 투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동안 전 황궁에 잠입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네, 부탁합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오직 한 사람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애쉬는 각오를 다졌다.

며칠 후, 황궁에 잠복 중인 콘테 가문의 시종과 연락이 닿았다. 그들은 콘테 가문을 위해 신분을 위장한 채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황궁의 소식을 들은 애쉬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원래부터 가진 것이 없는 애쉬의 짐은 아담할 정도로 간소했다. 짐을 꾸리는 애쉬에게 오랫동안 램파드 곁을 지킨 한스가 다가왔다.

“폐하께서는 오늘 저녁에 눈을 뜨실 예정입니다.”

“램파드가 깨어난 뒤는 잘 부탁하지.”

“저는 주인님의 명에 의해 램파드 폐하를 10년 넘도록 모셔 왔습니다. 앞으로도 쭉 그러할 거고요. 그나저나 애쉬 님. 당신은 폐하와 대화 하나 나누지 않고 그냥 떠날 생각입니까?”

“내가 무슨 말을 나누겠나.”

애쉬는 램파드를 만나기 두려웠다. 파렴치한 원흉이 어떤 낯으로 램파드를 만날 수 있을까. 적어도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해야지 그의 앞에 설 위신이 회복될 것만 같았다.

“말없이 떠난다면 깨어난 폐하께서 서운해하실 겁니다.”

“배웅한다며 바깥으로 나오면 회복이 더뎌질걸. 신경 쓰이게 할 바에는 조용히 가는 게 좋겠지.”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애쉬의 답은 변명이었다. 그 점을 한눈에 파악한 한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폐하를 위하는 척하지 마십시오. 혼자 남겨진 사람의 기분이 얼마나 불쾌한지 생각하지 않고 도망가는 거잖습니까.”

명치를 찌르는 정곡이었기에 애쉬는 할 말이 없어졌다. 램파드를 위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스스로 낯짝이 부끄럽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미안함에 온몸의 피가 펄펄 끓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두려웠다.

눈을 뜬 램파드가 자신을 향해 원망을 쏟아낼까 봐.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후회하며 슬퍼할 램파드의 모습이 보기가 무서워 그가 기뻐할 일을 만들기 위해 황궁으로 도망가는 거였다.

“회복된 폐하께서는 작은 별장 따위 손수 난장판으로 만드실 겁니다.”

잔트가 만든 약으로 기력은 회복했다지만 몸이 완전히 치유된 건 아니었다. 앙상한 몸으로 날뛰진 않겠지만, 램파드라면 예측하기 힘들긴 했다. 애쉬가 동요하자 한스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꺼냈다.

“애쉬 님을 찾으실 게 뻔하고요. 폐하께서는 당신이 아직 잠들어 계시는 줄로만 알 건데, 제 발로 황궁에 갔다는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애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뜬 램파드는 잔뜩 걱정하며 커틀러부터 찾았다. 그의 마음에 자신은 안중도 없단 것이 느껴져 저지른 일이 후회됐었다.

사실 마음속 욕망은 램파드의 눈동자에 자신을 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팠다. 얇은 입술을 움직여 이름을 불러 줬으면 좋겠고, 자연스레 눈꼬리를 휘며 웃어 주길 바랐다. 자신이 원하는 건 얻지 못할 것이다. 바라는 것은 없고, 증오와 비난이 쏟아질 테니까.

결국, 애쉬는 자신의 본심마저 외면하고 두려운 상황을 피해 달아나는 거였다. 지난번과 같다. 램파드를 위한다고 해 놓고, 그에게 큰 짐만 떠넘기고 편한 길을 찾아 도주한 거다. 애쉬는 자기 자신을 주먹으로 때리고 싶었다. 정신 좀 차리라고, 뼈가 나갈 정도로 강하게 후려치고 싶어졌다.

“……출발을 하루 미루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밤이 되려면 반나절은 기다려야 하지만 곧장 램파드에게 갔다.

화를 내려나. 주먹이나 손바닥이 날아올 가능성이 컸다. 애쉬 또한 자신을 죽일 만큼 패고 싶으니까 오히려 환영이었다. 하지만, 한 번 마주했던 것처럼 램파드가 자신을 진심으로 경멸하며 증오할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지휘관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복수한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관계를 맺으며 램파드의 마음을 이용했으니까.

램파드의 멸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안쪽이 콱 조여 왔다. 두려운 마음뿐이지만 죗값은 받아야 한다. 램파드의 곁을 지키며 그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램파드의 두 눈꺼풀은 여전히 감겨 있으며, 조용한 방 안은 작은 숨소리만 들렸다. 애쉬는 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해졌다. 눈을 뜬 램파드를 마주하기 두려웠다. 눈꺼풀이 올라가기 전 의자에 달라붙은 엉덩이를 떼 도망가고 싶었다. 입 안에 고이는 침을 꿀꺽 삼킨 애쉬는 손을 모아 억지로 자리를 지켰다.

예고한 시간이 되자 램파드의 닫힌 눈꺼풀이 천천히 떠졌다. 한여름 새벽에 마주하는 자욱한 안개를 닮은 회색빛에 생명력이 돌자, 도망가고 싶은 마음 같은 건 모조리 사라졌다. 역시 이 눈은 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사과의 말을 건네야 하는데 애쉬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묵을 지켰고, 애쉬를 발견한 램파드의 눈꼬리가 점점 삐죽 올라갔다.

“……아.”

양팔을 디딘 램파드는 마음과 달리 느릿느릿 일어났다.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 있어 온몸이 삐걱거리는 모양이었다. 당장 부축하고 싶지만, 그의 몸을 만져도 될는지. 손을 쳐 내며 거부할까 봐 여전히 자리만 지켰다.

램파드가 뻣뻣한 손을 들어 올리자 애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불타오르는 듯한 화끈한 통증 대신, 그리운 온기가 목가에 둘렸다. 램파드는 애쉬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빠른 숨결을 내뱉었다. 그의 심장 또한 애쉬처럼 빠르게 뛰었다.

“미안.”

애쉬의 목가에 얼굴을 파묻은 램파드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꿈속에 나타난 애쉬에게 몇 번이고 사과했으니까. 연습만큼은 잔뜩 했기에 주저 없이 내뱉었다.

막상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은 애쉬는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숨을 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램파드는 그의 목을 좀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널 다시 만났을 때 이 말부터 해야 했다. 네 연인을 살리지 못해 미안하구나.”

“……읏.”

“그러니까 울지 말아라.”

크게 토해 내려는 통곡을 참다 보니 몸 안쪽이 따끔했다. 막지 못해 넘쳐나는 눈물은 볼을 따라 흘러 턱 아래에 송골송골 맺혔다. 애쉬는 고개를 푹 숙였고, 그의 코끝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가 떨어졌다. 램파드는 애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램파드 또한 모든 것을 다 알게 됐다. 자신이 죽인 오메가가 누구인지. 크나큰 후회를 저질렀단 걸 알면서, 제 상처보다 애쉬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팔을 뻗었다. 애쉬는 제 짧은 식견으로 램파드를 판단한 것이 죄스러워졌다. 체구도, 나이도 작은 사내는 자신보다 훨씬 강하며 큰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자인데. 지레 겁먹어 램파드에게 숨기기만 급급했다.

“램… 파드.”

울음이 섞인 애쉬의 목소리는 떨리며 발음이 엉망이었다. 램파드는 흐느낌에 섞인 애쉬의 목소리를 정확히 듣기 위해 그의 몸에 좀 더 단단히 밀착했다. 애쉬는 자신에게 기대는 램파드의 몸을 끌어안으며 훌쩍였다.

“남겨 둔 편지……. 읏, 너한테 마음 없단 건… 거짓말… 이야.”

“알아.”

애쉬는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의 죄를 하나씩 떠올렸다. 너무나도 많아 어느 것부터 사죄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뒤범벅된 기억 속에서 하나씩 죄를 꺼내며 이야기했다.

“백작을… 끌어들이고 라이를 데려온 건 내가 한 짓이야.”

“알고 있어.”

“루사를 데리고… 벗어났어야 했는데. 그와 네가 우연히 만난 것도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형을…….”

“내 형은 전쟁 전에 죽었다.”

애쉬가 자책하지 않고, 오롯이 램파드 탓으로 되돌렸으면 했기에 빠르게 들통날 거짓말을 해 버렸다. 덕분에 애쉬의 떨림이 더욱 거세졌다. 램파드의 어깨에 얼굴을 박고, 눈물을 흘리던 애쉬가 웅얼거렸다.

“미안해…….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는데.”

“쓰러져 있는 너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도 말아라.”

“응.”

아직 눈물이 멈추지 않는 그는 램파드의 어깨를 적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램파드는 애쉬가 진정할 수 있도록 짧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고, 코를 훌쩍이던 애쉬는 램파드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난 내일 황궁으로 떠날 거야.”

램파드는 애쉬의 양 볼을 잡고 쭉 밀었고, 그는 순순히 떨어졌다. 눈물을 펑펑 쏟아 낸 덕분에 애쉬의 눈은 토끼처럼 붉었다. 윽박지르기 위해 눈썹이 삐죽 올라갔던 램파드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황궁에? 뭐하러.”

램파드는 그의 볼에 남겨진 물기를 엄지로 닦아 주며 물었다.

“내가 벌인 일이니까 수습해야지.”

한동안 잠만 잔 램파드는 지금 상황을 몰랐다. 애쉬는 황궁에 잠복했던 시종들이 보고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라이는… 현재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야. 덕분에 네 비밀 또한 지켜졌고. 로열 가드는 사라진 황제를 찾기 위해 콘테 공을 심문하고 있어.”

“그래서, 네가 황궁에 가서 무얼 한다는 말이냐.”

“아직 파혼당한 건 아니니까, 황제의 약혼자 신분으로 황궁에 입성해 콘테 공을 만날 거야. 큰일을 겪기 전에 빼내야지.”

중죄인으로 잡히면 무슨 꼴이 되는지 램파드는 잘 안다. 커틀러는 작위가 있으니 곧바로 시행하지 않았을 테지만 한번 고문이 시작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태가 될 것이다. 램파드 또한 그가 걱정되긴 했다.

“너 혼자서?”

“몇 명 남지 않았지만, 콘테 가문의 시종이 황궁에 남아 있어. 그들이 날 도울 거야.”

램파드는 인상을 한껏 썼다. 애쉬를 노리던 대번포드 백작이 죽었으니까 그를 위협할 자는 더는 없긴 했다. 하지만 아무런 뒷배가 없는 애쉬 혼자 보내는 것이 께름칙했다. 맹수와도 같은 귀족들 등쌀에 치이며 램파드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건 상당히 고된 일이니까.

안 된다고, 램파드가 입을 열기 전 애쉬가 먼저 선수 쳤다.

“황궁까지 가기엔 몸이 많이 약해져 있어서 너는 안 돼. 여기 있어.”

“며칠 전과 비교하면 몸이 가벼운걸.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아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제대로 걷기도 힘들 거라고 의사가 말했어. 부탁이니 여기 있어 줘.”

“그러면 너 혼자 보내라는 거냐. 말이 되는 소릴!”

“화이트 궁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밀러가 말했어. 황궁에 들어선 순간 나의 몸은 모두 황제의 소유라고. 이번엔 정말로… 주인의 허락 없이 죽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황권은 아직 살아 있으니 램파드의 생사가 확인될 때까지 약혼자인 애쉬는 보호받긴 하겠지.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물가에 내놓는 느낌이 들었다. 램파드의 목소리는 한층 가라앉았다.

“……주인 말을 안 듣는 개를 교육하는 법은 잘 알고 있지.”

살기 어린 목소리에 애쉬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맞을 각오는 했지만, 한층 폭풍우가 지나간 뒤라 다시 마음을 준비해야 했다. 눈을 질끈 감은 애쉬는 주먹이 날아오지 않자, 한쪽 눈을 살짝 떴다.

“하아.”

애쉬가 잔뜩 겁먹자 램파드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조카를 끌어들인 건 네 작품이지. 그 애를 황궁에 데리고 와서 무얼 할 생각이었냐.”

“그 애는 나와 목표가 같아.”

“이번에는 숨기지 말고 말해 봐라. 상세히.”

램파드의 기억과 달리 형이 살아 있었고, 아들까지 낳았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지만 램파드는 담담하게 인지하며 버텼다. 강한 그의 모습을 보자 애쉬는 더욱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라이와 함께 루사의 복수를 하고 싶었어.”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까지 죽였으니, 이제 나에 대한 증오가 더욱 커졌겠군.”

“아니, 나와 그 애는 대번포드 백작도 죽길 바랐어. 루사를 괴롭히고, 태어나지도 않은 라이를 죽이려던 사람이니까.”

친아버지를 황궁에 잠입하기 위해 이용했다니. 애쉬의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을 정리하던 램파드가 말을 이어 갔다.

“그래, 그다음은?”

“마지막으로 라이를 황제로 만들고 창관을 모두 없애고 싶었어. 루사를 괴롭힌 것들이니까.”

램파드는 황당함에 피식 웃었다.

“대단한 조카로군. 내가 해내지 못한 일을 갓 즉위한 햇병아리 황제가 할 수 있을 것 같나.”

램파드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애쉬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거야.”

어두운 곳에 깊게 뿌리 내린 창관은 어지간한 힘으로 뽑아낼 수 없단 걸 알았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 황제가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어린 라이가 꿈을 이루려면 막대한 노력이 필요했고,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램파드는 달랐다. 역대 황제와 달리 제국민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는 그라면 창관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램파드가 같은 목적을 가졌다는 걸 늦게 알아 버렸다.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으려나. 처음부터 그에게 화풀이하지 않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더라면 좋았을지도.

애쉬는 자신이 점점 더 부끄러워져 고개를 절로 숙였다. 꾸중을 듣는 듯, 기가 죽은 애쉬의 볼을 부드럽게 감싼 램파드가 눈을 맞췄다.

“창관을 없앤다는 목표는 내가 이뤄 주지. 그다음 나에게 복수를 하든 말든 알아서 해. 내 역할도 거기까지가 끝이니까.”

“이미 복수할 마음 같은 건 버렸어. 아니, 애초에 복수 같은 걸 품을 상대가 아니었어.”

“그렇다면 용서해 주는 건가?”

애쉬는 멈췄던 눈물이 또다시 차올랐다. 용서고 자시고, 그건 자신이 램파드에게 구해야 했으니까.

“…또 우는 거냐. 너도 참 보기보다 눈물이 많군.”

“흣, 아니… 이건…….”

또다시 눈가가 빨개지며 당황한 애쉬를 바라보며 램파드는 눈웃음을 쳤다. 덩치는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사내가 뻘뻘대는 꼴에 절로 미소 지어졌다.

“일단 조카랑 만나 봐야겠군.”

“그건 위험해서 안 돼.”

“그 애는 기억을 잃지 않았나. 위험할 건 없을 텐데.”

애쉬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라이는 내가 돕기 전 스스로 계획을 세워 수도원을 탈출할 정도로 영특한 아이야. 자신을 지켜 줄 어른이 없단 걸 판단하고,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을지도 몰라.”

램파드는 훗, 코웃음을 치며 침대에 편히 기댔다. 다정하고 상냥한 형이었기에 아직 만나지 못한 조카 또한 참할 것만 같았다. 생각처럼 고분고분한 아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애쉬 덕분에 머리가 맑아진 램파드는 얻은 정보를 토대로 계획을 세웠다. 커틀러를 빼내려면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했다.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있는 건 파기해라.”

“일주일 동안 세운 계획이야. 성공 확률이 높아.”

“황궁의 주인은 이 몸이거늘. 네놈들 멋대로 세운 계획은 들을 가치도 없다. 기억에서 당장 지워라.”

커틀러를 무죄로 만들 방도가 없으니 끽해 봤자 몰래 탈옥시키는 것뿐일 거다. 몇 명이 황궁에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콘테 가문의 시종이 돕는다면 탈옥시키는 건 무리 없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탈옥하면 죄를 인정한 꼴이라 램파드가 감싸 줄 수 없어지며, 평생 기사단에 쫓기며 살아야 했다.

“일단 한번 들어 봐.”

애쉬는 램파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울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램파드는 힘을 준 그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자른 짧은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날 배제하고 세운 계획은 무엇을 해도 실패다. 일단 모두를 불러와라.”

불만이긴 하지만 이야기는 들어 봐야 하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애쉬는 바깥에서 대기 중인 시종에게 모두를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시종은 잔트와 수도에서 함께 온 자들을 데리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램파드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 애쉬에게 타월을 던졌다.

“그 꼴로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거냐. 눈물이나 닦아.”

그제야 자신이 펑펑 울었다는 사실이 생각나 서둘러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았다. 애쉬의 허둥대는 모습을 바라보던 램파드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바르게 걸터앉았다. 한참 침대에 누워 있던 덕분에 몸 전체가 뻑뻑했다. 적어도 걸을 수 있게 되려면 며칠이 필요할 듯했다.

허리를 쭉 펴고 자세를 잡자 시종과 함께 잔트가 등장했다.

“램파드 폐하, 부르셨사옵니까.”

잔트는 램파드를 경계하며 공손히 인사했다. 회복한 램파드가 황궁에 간다고 소란을 피울까 봐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짐이 직접 황궁에 갈 생각은 없으니까.”

감시하듯 뚫어지게 바라보던 잔트가 긴장을 풀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다행이군요.”

“일단, 한스 자네는 아래층으로 가서 식사 준비를 하여라.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더니 배가 고프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한스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따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십니까.”

“아무거나 좋으니 잔뜩 만들거라.”

“알겠습니다.”

한스는 아래층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나머지 사람은 자리를 지키며 허리를 굽혀 램파드의 지시를 기다렸다.

“진짜 주인인 커틀러가 걱정되어 막무가내로 탈옥 계획을 세웠겠지.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지금 로열 가드를 지휘해 커틀러를 심문하며 사건을 함구한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잔트보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시종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행방불명된 상태입니다. 지침서에 따라 최고 대신이 폐하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계십니다. 로열 가드 또한 최고 대신께서 직접 지휘하시겠지요.”

“로열 가드는 황족만이 지휘할 권한을 가진다. 짐이 직접 위임하지 않는 이상 대리인 최고 대신은 정무만 맡을 수 있지. 따로 위임한 기억이 없는데, 황궁에 대기해야 할 로열 가드가 움직인다는 것이 이상하군.”

심문실에 있던 로열 가드는 램파드의 진실을 알아 버렸다. 오메가는 기사들의 주군이 될 수 없기에 대번포드 백작의 말에 현혹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조리 죽어 버렸고, 남은 로열 가드는 램파드가 오메가란 사실을 모른다. 황제의 생사가 확인될 때까지는 빈 황좌를 지키고 있어야 할 터.

“…누군가 폐하가 없는 빈 황실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킨 거라 하시는 겁니까.”

“황실에서 나에게 대적할 자는 없다.”

“그러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짐 말고 황족이 하나 더 있지 않으냐. 로열 가드를 움직여 짐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며 추적하는 자는 요망한 조카 녀석이겠지.”

피바다 속에서 후계자가 없는 황제가 사라졌다면 제국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쓸린다. 최고 대신은 라이를 램파드의 대타로 생각하며 황족 신분을 부여하되, 공표하지 않고 사라진 황제를 찾는 중일 것이다. 커틀러의 처분 또한 일단 램파드의 생사를 확인하고 의견을 물을 생각일 테지.

그런 최고 대신이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유예 기간을 무시하고 커틀러를 심문한 점이 이상했다. 귀족이 죄를 지으면 최소한 한 달 정도 유예기간을 둔다. 황제를 찾는단 명분으로 모든 과정을 무시하고 램파드를 찾기 위해 용쓰는 건 라이일 것이다.

애쉬가 라이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귀여운 조카라고 마냥 두리뭉실하게 넘길 뻔했다. 램파드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라이는 짐을 찾아내 황궁으로 끌고 갈 작정이다. 짐을 구경거리로 만들려면 관객이 많아야 하니까 사람이 많은 황궁에서 내 정체를 밝힐 생각일 테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애쉬가 나섰다.

“그렇다면 더욱더 내가 직접 황궁에 가겠어.”

램파드는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로열 가드가 라이를 버리고 나에게 달려오게 만들 거야.”

“어떻게?”

“주군인 내가 살아 있단 사실을 알게 되면 시키지 않아도 찾아오겠지. 잔트 공.”

“예, 폐하.”

“황궁까지는 무리겠지만, 남부 지방에 있는 백작령까지는 이동해도 괜찮은가?”

“한 시간 거리 정도는 괜찮으십니다. 왕복은 힘드시고 그곳에서 하루 이상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돌아오셔야 합니다.”

지금 침대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오랫동안 침대 신세였으니 체력이 없을 만도 하지. 몸이 좋지 않으니 램파드가 수도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고 그들이 찾아오게 할 수밖에 없었다. 좁은 심문실에서 모반이 일어났고, 상처를 입어 움직일 수 없다는 거짓말로 불러들이면 될 터.

“좋다. 3일 뒤 그곳에서 어전 회의를 개최하도록 하지. 서신을 작성해야 하니 편지지를 준비해 다오.”

뜻을 모르는 애쉬는 덤덤히 곁을 지켰고, 잔트가 사뭇 놀란 듯 입을 벌렸다.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잔트가 고개를 공손히 숙였다.

“남부령에서 어전 회의를 개최하신단 말입니까.”

“그래.”

“황궁이 아닌 곳에서 어전 회의를 진행하다니. 500년이 넘는 제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군요.”

어전 회의는 최고 대신을 포함한 중책들이 모이는 중요한 행사였다. 제국의 주요 인사가 전부 모이는 자리인 만큼 안전에 신경 써야 하며 황궁에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램파드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의 일을 저질러야 황궁에 얼굴을 비치 않아도 짐이 살아 있다고 믿지 않겠느냐.”

“…걱정되는군요.”

“무엇을 말인가.”

“최고 대신은 폐하께서 실종된 줄 압니다. 램파드 폐하의 생사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그가 순순히 따를까요…….”

“황명이다. 따르지 않는다면 모두 반란죄로 집어넣어 버리면 되지.”

“폐하께서 친히 작성하신 서신이 있으니 그냥 무시하진 않겠죠. 하지만 어전 회의가 아닌, 폐하를 사칭하는 자를 잡아들인단 명목으로 로열 가드를 이끌고 쳐들어올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혹여 최고 대신이 라이에게 동조할 경우 로열 가드를 이용해 사기꾼 오메가를 처단할지도 몰랐다.

“짐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으냐.”

슬슬 힘이 부쳐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램파드는 잔트에게 필기구를 요구했다. 램파드의 지시에 잔트는 시종을 부려 편지지와 만년필을 가지고 왔다. 휴식을 위한 침실이 다소 부산스러워졌고, 램파드는 글을 적어 내렸다. 완성된 편지는 두 통이었다.

“한 통은 황궁으로 다른 한 통은 서부 지역에 주둔한 화이트 테일에 보내도록. 아래층에 내려간 김에 주방에 있는 한스를 불러 추가 서류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거라.”

화이트 테일은 램파드의 명에 따라 전원 서부 지역의 홍수를 수습하러 떠났다. 단장인 커틀러만 호출해 그들은 아직 물에 잠긴 마을을 수습하는 중이었다. 단장이 붙잡혔으니 연유도 모른 채 묶여 있겠지.

“알겠습니다.”

잔트는 램파드의 뜻을 알아챘다. 혹여 로열 가드와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화이트 테일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황궁에 남은 시종을 부려 커틀러를 탈출시키는 것보단 훨씬 괜찮은 계획이었다. 표정이 한층 밝아진 잔트는 램파드의 서신을 들고 시종들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애쉬, 너는 계획대로 황궁에 가도록 해라.”

“…어떤 일을 할 건지 미리 물어봐도 될까?”

“네 말대로라면 라이는 나와 목적이 같다. 목표를 이뤄 줄 수 있다고 설득해 봐야지. 통하지 않는다면 화이트 테일을 이용해 반역자를 처단할 뿐이다.”

기억을 잃은 척하는 걸 보아하니, 라이가 최고 대신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 최고 대신의 눈을 피해 로열 가드를 이용하는 중일 테지. 어전 회의를 개최해 최고 대신과 로열 가드를 불러들이면 라이는 그냥 어린애에 불과하다.

혹여 전투가 벌어지고 형세가 불리해지면 라이는 필연 램파드의 비밀을 최고 대신에게 폭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이트 테일을 지휘해 모두 섬멸하면 되겠지. 전쟁 경험이 없는 어린애 따위, 죽이는 것은 손쉬웠다.

램파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고, 애쉬는 라이가 걱정됐다. 램파드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붙잡았다.

“나도 형의 아이를 죽이는 건 원치 않는다. 그러니까 미리 황궁에 가서 라이와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해라.”

“…어떤 이야기를 하면 돼?”

“대번포드 백작이 범인이었다고 증언해 준다면 죄를 묻지 않으며 원하는 대로 살게 해 주겠다고. 그리고… 내키지 않겠지만, 커틀러를 도와줘. 너를 호위하도록 지시한 로열 가드는 라이가 아닌 네 명령을 따를 거다.”

램파드가 먼저 모습을 나타낸다면 궁지에 몰린 라이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절차를 무시할 정도니까 램파드의 계획을 불라며 심한 고문을 할지도 몰랐다.

애쉬를 붙잡은 램파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명한 상처가 애쉬의 손목에 남아 있었다. 커틀러의 개입에 상처 입은 그에게 부탁하기 미안하지만, 애쉬 말고는 지금 당장 황궁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자가 없다.

“부탁하지…….”

남은 손까지 애쉬에게 포갠 램파드는 고개를 숙였다.

“램파드.”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린 램파드가 애쉬를 바라봤다. 램파드를 향해 미소 지은 애쉬가 말했다.

“부탁할 필요 없어. 평소의 너처럼 거만하게 명령 내리면 돼.”

미안한 부탁인지라 평소처럼 오만하게 굴기 힘들었다. 뻣뻣한 램파드의 손을 떼어 낸 애쉬가 기억을 더듬어 기사가 램파드에게 행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어색한 흉내지만 그의 몸은 웬만한 기사보다 다부졌기에 겉은 그럴싸했다.

“제국의 태양의 명을 받들어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이 한 몸, 당신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혼자 멋은 다 부리더니 이 다음을 모르는 애쉬가 무릎을 꿇은 채 굳었다. 그의 행동에 램파드는 웃음을 터뜨리며 발을 꺼내 코앞에서 까닥였다. 원래는 검이지만 없으니까 주군의 몸을 만지는 크나큰 영광을 주기로 했다. 애쉬는 램파드의 발을 조심스레 받아 들어 끝부터 입을 맞췄다.

“다시 만나면 더 큰 상을 주지. 기대해.”

“이왕이면 받고 싶은 걸 줬으면 하는데.”

“좋아. 뭐든 말해 봐라.”

“다 끝나면 말해 줄게.”

애쉬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평온했다.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그의 몸에서 페로몬이 뻗어 나오지 않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 지어졌다. 원하던 램파드의 웃음을 본 애쉬의 표정이 보다 편안해졌다.

램파드의 예상대로 화이트 테일은 최고 대신의 명령에 따라 서부 지역에 묶인 상태였다. 황제가 사라졌단 사실은 황궁에서 일하는 소수만 알아 램파드의 권력은 유지되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 황제의 명령보다 우위에 있는 건 없다. 황제의 친필이 들어간 명령서가 전달되자마자 화이트 테일은 비어 있는 대번포드 백작의 영지로 이동했다.

백작령에 화이트 테일을 주둔시킨 램파드는 떠날 준비를 했다. 램파드 곁에 선 잔트가 채비를 돕는 중이었다.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자 근심에 휩쓸렸던 잔트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요청하신 휠체어는 준비했습니다. 아직 배가 크게 부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모포를 무릎 위에 올리면 괜찮을 듯합니다.”

“제대로 위장하려면 다리에 붕대도 둘러야겠군.”

“출발 전에 감아 드리겠습니다.”

친필 서명이 들어간 편지를 보낸 램파드는 회복에 전념했다. 예전만큼 식성이 돌아와 원 없이 고기를 먹었더니, 배 속의 아이도 기력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태동이 시작된 아이는 배 끝을 톡톡 치고 난리가 났다.

“원래 이렇게 심하게 움직이는 건가?”

“저는 태동이 심하지 않았는지라.”

“황가의 핏줄이 유별나다고 치지.”

“그런 뜻은 아닙니다.”

공손한 태도였지만 어딘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잔트는 묘하게 가시가 선 느낌이 들었다.

“짐의 아이가 콘테 가문을 잇는 게 썩 못마땅한 모양이구나.”

따로 변명이나 거짓말을 할 마음은 없는지 잔트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생겨났다.

“황실의 피를 이으면 권력 싸움에 휩쓸릴 테니까요.”

“콘테 공작 가문의 피를 이은 아이도 권력 싸움에 휘말리는 건 마찬가질 텐데.”

“그렇긴 하지마는. 손주는 다른 귀족의 피가 섞이지 않길 바랐습니다. 오롯이 저희 가문의 일만 집중할 수 있게요.”

“짐 또한 황위 계승권을 가진 아이를 계획 없이 만들 생각 없었다.”

“폐하께서는 원치 않으신 일입니까?”

램파드는 잠깐 주저했다. 커틀러의 아이를 원치 않았던 것은 숨기기 힘들어서였다. 그가 애쉬처럼 흔한 형질을 가졌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래.”

커틀러와 달리 잔트는 표정 연기가 능숙하지 않았다. 그는 입가에 있는 미소를 지우고, 아쉬운 듯 눈썹을 떨어뜨렸다. 그의 표정은 점점 슬픔에 물들었고,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아들을 대신해 사죄드립니다. 두 사람 모두 원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똑 닮은 얼굴로 실망한 낯을 보이자 램파드는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커틀러의 마음이 상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감정을 능숙하게 숨겨 본심을 좀처럼 알기 힘드니까. 실망한 커틀러를 떠올리자 속이 쓰라렸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램파드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인상을 썼다.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 텐데.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굴러다니는 생각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니…… 황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는 필요했지. 커틀러를 닮으면 대신을 속이기 힘드니까 곤란하다는 뜻이다. 적어도 날 닮은 아이라는 게 확실하다면 기뻐했을지도……. 됐어.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사과할 필요는 없다.”

램파드는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놓은 게 후회됐다. 상심한 마음을 감싸 주고자 되는대로 내뱉었더니 조금 낯부끄러워졌다.

“폐하를 닮은 아이라면 황족으로 키울 생각이십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잔트는 아쉬운 기색을 내보였다.

“조금 섭섭하군요. 한동안 얼굴조차 보이지 않던 애가 오래간만에 웃으며 나타났거든요.”

“누가?”

“제 아들이요.”

아이를 좋아했던가. 한두 번 아이에 관한 화제가 몇 번 나왔긴 했지만 그 또한 내키진 않아했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걸.”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아이로 착각해 때리기나 했지. 그의 무릎에 걷어차인 걸 떠오르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럴 리가요. 저에게 보고한 그날 바로 아기방도 만들었는걸요. 싫어한다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겠죠.”

너무 황당해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커틀러가?”

“예. 본가에서 키우기 싫다며 이곳에 마련해 뒀지요. 보시겠습니까?”

“됐다.”

행동력 하나는 기막혔다. 말문이 막힌 램파드는 갑자기 더위를 느꼈다. 주변 공기가 후끈해진 기분에 괜히 호흡에 신경 썼고, 숨소리가 크게만 들렸다.

“잔뜩 꾸며 뒀는데, 폐하를 닮으면 쓸모없어지겠군요. 들인 정성이 아까우니까 첫아이는 누굴 닮든 콘테 가문에 주십시오.”

“어이가 없군. 황위는 어떻게 해결하란 말인가. 그대는 제국의 안정보다 공작 가문의 앞날이 더 중한 것이냐.”

“하나 더 낳으시면 해결되는군요.”

“거절하지.”

“그렇다면 조카분에게 황위를 넘기실 겁니까?”

제국은 안정기에 들어갔고, 주변 국들과도 사이가 좋아져 평화가 지속될 거다. 전쟁이 끝나고 제국의 힘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니 이만 쉴 때도 됐지.

라이는 알파로 발현했으니까 할 수 있다면 황위를 넘기고 사람을 속이는 연기는 관두고팠다. 모든 직무를 다 내려놓고, 조용한 산골에 들어가 검술 교사나 하고 싶건만. 모든 걸 내려놓고 쉬기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았다.

“후사에 관해서는 좀 더 생각해야 할 문제다.”

램파드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잔트가 포엣 셔츠를 꺼내 들었다. 품이 넓고, 헐렁헐렁하며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려 램파드가 꺼리는 옷이었다. 그러나 아랫배가 불러 전처럼 달라붙는 정복을 입을 수 없으니 순순히 입어야 했다.

“커틀러가 입던 옷입니다. 한번 입어 보시고, 부족한 부분을 수선하겠습니다.”

함부로 시종을 내보낼 수도 없으니, 저택에 마련된 물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램파드는 잔트가 건넨 옷을 받아 들어 걸쳤다. 편하게 입는 셔츠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져 피부에 닿는 감촉이 좋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은은하게 배인 체향이 맡아진다. 햇볕에 잘 말렸지만 짙은 페로몬은 쉽게 지울 수 없고, 램파드에겐 강하게 느껴졌다.

통통 구르는 듯한 태동이 거짓말같이 사라졌고, 이상하게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입매가 굳었고, 램파드는 걸친 옷을 벗어 던졌다.

“불편하십니까? 다른 옷을 꺼내 드릴까요?”

여기 있는 건 전부 다 커틀러의 옷이었다. 뭘 입어도 같으니 선택지는 없다.

“헐렁거려서 불편하군. 하지만 배가 잘 가려지니 출발 전 갈아입겠다.”

“알겠습니다.”

잔트는 램파드가 벗어 던진 옷을 바르게 개켰다.

“식사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어제처럼 드셨다간 다른 배가 나올 테니, 자중해 주십시오.”

식욕이 돌아온 램파드는 고삐 풀린 것처럼 잔뜩 먹었다. 구워 낸 새끼 양을 한 마리 다 썰어 먹고, 거기서 부족하다며 양념에 절인 칠면조 고기까지 챙겨 먹었다. 시종이 구운 파이를 한 홀 깨끗이 비우고 나서야 램파드의 폭주는 멈췄다.

“……짐이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배 속의 아이가 먹고 싶어하는 거지.”

변명을 시도했지만 잔트는 콧방귀를 꼈다.

“폐하의 식성은 유다르다 들었습니다. 식료품 저장고에 육류를 왕창 채워 둔 것은 커틀러의 지시입니다. 그 애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램파드 폐하 혼자서 식량을 거덜 내셨을 겁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까지 한 것이냐.”

“예, 굉장히 많이요. 아카데미 입학 때부터 만나면 폐하의 이야기밖에 꺼내지 않았습니다.”

“보기보다 입이 싼 놈이었군.”

무신경한 램파드는 잔트 앞에서 아들의 악담을 내뱉었다. 램파드와 함께 지내 본 잔트는 그의 성격을 파악했기에 넘어갔다.

“사실 언젠가 램파드 폐하의 첩실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꺼낼 것만 같아 오래전부터 각오했을 정도입니다.”

어쩐지 잔트는 제국의 황제가 손주를 임신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담력이 세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커틀러가 램파드와 이어질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잔트의 예상대로 베타 황제의 첩이 되겠다고 달려든 건 아니지마는, 결과는 비슷했다.

“자네의 예상과 달리 짐이 콘테 공작 가문에 들어갈 생각을 했었지.”

“폐하라면 환영입니다. 황궁에 비해 작다지만 저희 저택으로 오실래요?”

“됐구나.”

커틀러와의 거리는 이대로가 딱 좋았다. 몸마저 가까워지면 그를 지나치게 믿을 것이고, 자신이 변화할 것만 같으니까.

***

허리를 곧게 펴고, 가슴을 쭉 내밀며 턱을 바르게 치켜든다. 기백만으로 상대를 압도해 상대에게 아랫사람임을 상기시켜야 한다. 화이트 궁전에 돌아온 애쉬는 밀러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램파드처럼 몸에 밴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상기해야 귀족 특유의 위엄 있는 자세가 취해졌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평범해 보였기에 바짝 신경 썼다.

“애쉬 테일러 님, 돌아오셨군요!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쳤군. 미안하다.”

“아닙니다. 이렇게 건강을 다시 찾으셔서 기쁩니다.”

스승이 되어 준 밀러는 애쉬를 반갑게 맞이했다. 램파드가 없는 황궁은 한층 더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라 느껴지는 곳에 한 사람이라도 아는 이가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몸은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오랫동안 누워 있던 탓에 몸이 뻐근한 것 빼고는 괜찮다.”

“그 정도라 천만다행입니다. 하긴, 폐하께서 함께 계셨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긴 했죠. 그나저나 램파드 폐하를 두고 혼자 오신 겁니까?”

“램파드 폐하께서는 암살 사건에 휘말려 크게 다치셨다.”

“예?”

처음 듣는 이야기에 밀러는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창문 밖으로 쓰러진 라이를 발견한 시종과 커틀러를 체포한 로열 가드를 제외하고는 비밀에 부쳤으니 모를 법도 했다. 애쉬는 미리 램파드와 맞춘 말을 떠올리며 품속에 넣어 둔 위임장을 꺼내 들었다.

“램파드 폐하께서는 황위 찬탈을 꾀하는 불한당들에게 습격당하셨고 현재 회복을 위해 요양 중이시다. 오랫동안 황궁을 비울 수 없으시다며 나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지.”

어안이 벙벙한 밀러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잠깐, 잠시만요. 황위 찬탈이라뇨? 저는 줄곧 황궁에 대기했습니다만 그런 큰 사건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게다가 램파드 폐하께서 다치셨다니…….”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던 밀러는 무언갈 떠올린 듯했다.

“아, 대번포드 백작을 심문하던 장소를 어떤 괴한이 습격했다던데……. 혹시 그 장소에 폐하께서 계셨던 겁니까?”

“그래, 대번포드 백작이 반기를 들어 폐하를 공격했지.”

“그 사건은 커틀러 단장님께서 범인으로 지목되었단 소문이 돌더군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통 모르겠군요.”

“자세한 건 최고 대신을 만난 뒤 말하겠다.”

밀러는 애쉬가 꺼내 든 위임장을 받아 들었다. 황제의 서명이 남겨진 이상, 적혀 있는 대로 행동해야 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최고 대신을 뵈러 가야겠군요. 본궁에 연락을 넣을 테니 곧바로 채비하십시오.”

화이트 궁을 지키는 밀러는 다른 이들을 불러와 애쉬의 채비를 도왔다. 애쉬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코트가 마음조차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압박감에 짓눌려 큰 숨을 들이쉬며 램파드가 말해 준 계획을 몇 번이나 떠올렸다.

유일한 목격자인 라이가 거짓 증언을 해 준다면 황족으로 대우해 주며 앞날을 보장한다. 끝까지 램파드와 대치하겠다면 화이트 테일을 이용해 로열 가드를 쓰러뜨리고, 라이까지 처단한다는 말을 전해야 했다. 어린아이에게 선택을 강요하다니. 내키지 않지만, 한쪽을 선택하기로 한 마음은 변함없었다.

“이건, 램파드 폐하의 필체와 서명이 맞군요.”

흘러내린 안경을 갈무리한 최고 대신이 심각한 표정으로 위임장을 읽어 내렸다. 램파드가 작성할 때 곁에서 살펴보았는데, 애쉬 또한 황제 대리로서 취급하라는 내용이었다.

“램파드 폐하께서 지시하신 이상 군말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그전에 이야기는 들어 봐야지요. 심문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 얘긴 라이를 만난 뒤 말해 드리죠.”

들고 있던 임명장을 책상 위로 던진 최고 대신이 깍지를 꼈다.

“램파드 폐하와 닮은 아이의 이름이 라이입니까. 외모 덕분에 황족과 관련된 아이라는 건 한눈에 알겠더군요. 아수라장의 유일한 생존자인데 그 아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상관없습니다. 만나서 대화해 보겠습니다.”

안경을 벗은 대신은 한숨을 쉬며 눈 사이를 꾹 눌렀다. 통증이 이는지 여러 번 꾹꾹 누른 그는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일단 램파드 폐하께서는 무사하단 거군요. 연락 없이 종적을 감추셔서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애쉬는 바짝 긴장하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램파드가 미리 말해 준 정보에 의하면 최고 대신은 제국의 안정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황족의 유일한 후계자인 라이를 챙길지도 몰랐다. 되레 정보를 캘 수도 있으니, 함부로 말을 섞지 않고 램파드가 지시한 내용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에서 답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조만간 폐하를 직접 뵐 때 여쭤보십시오.”

“조만간이라니. 이른 시일 내 폐하께서 돌아오신다는 말입니까? 폐하께서 귀환하시면 이런 임명장 같은 건 필요 없을 텐데요.”

임명장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황제의 직인이 필요했다. 몰래 도장을 찾아 찍어 넣든가 그것이 무리라면 최고 대신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애쉬의 능력으로 철통 경비 중인 황제의 집무실은 뚫지 못하니까 최고 대신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서명을 써넣지 않고 애쉬를 경계할 것이다. 램파드는 몇 가지 상황을 예측했고 애쉬에게 미리 일러 두었다. 애쉬는 상대방이 얕잡아 볼 수 없도록 곧은 자세를 취했다.

“램파드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번포드 백작의 영지에서 어전 회의를 진행하실 겁니다. 후계자 문제와 함께 국책 사업을 주제로 토론할 예정이니 최고 대신께서는 라이와 함께 필히 참석하라 명하셨습니다.”

최고 대신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구겨졌다. 램파드의 말을 한 톨도 빠짐없이 전달한 애쉬는 바짝 긴장했다. 설명을 듣지 못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내뱉은 말은 꽤 큰일인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애쉬에게 만약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품속에 있는 서류를 추가로 꺼내라고 지시했다. 이걸 꺼내면 대신의 혈관이 터져 나갈지도 모르니까 마지막까지 상황을 보다가 건네라고 해 잠시, 그의 반응을 살피기로 했다.

또다시 머리가 아픈지 손끝으로 이마를 꾹 누른 그는 펜을 들어 올려 유려한 필치로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이 사건은 대신 중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습니다. 살해당한 귀족의 가족에게조차 범인이 누구인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함구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된 라이는 특히 엄밀히 숨겨 두었습니다. 출입이 적은 별궁에 모셔 두었으니 오늘 밤에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최고 대신이 건네준 임명장을 받은 애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램파드가 지시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최고 대신과 함께 황제의 권한을 이어받은 애쉬는 대기 중인 시종에게 램파드가 전한 내용을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들은 로열 가드의 기숙사로 애쉬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제 램파드가 맡긴 일은 두 가지가 남았다. 그중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밀러를 이끌고 지하 감옥으로 이동했다. 램파드의 예상대로라면, 최고 대신이 부르지 않아도 이곳에서 라이를 만나게 될 거다.

“이 앞은 어두우니까 저희가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양조장에서 일할 때, 종종 지하에 있는 셀러에 내려갔었다. 지하 감옥은 셀러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 존재했으며, 앞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밀러를 앞세운 애쉬는 새까만 어둠 속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시야가 적응되자 차분한 암흑은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소중한 사람의 부탁이라고 하나, 죽으라 명령을 내렸던 자를 만나긴 꺼려졌다. 솔직히 말해 겁도 난다. 그는 램파드와 애쉬의 촌극을 알고 있는 자라, 황제의 약혼자라는 지위 또한 헛것으로 취급할 것이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됐다. 커틀러 콘테라는 남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까.

그는 공작 작위를 가진 제국의 귀족으로서, 화이트 테일이라는 기사단을 운영한다. 화이트 궁에 지내면서 들은 이야기로는 제국에서 셋밖에 없는 우성 알파이며 아직 짝이 정해지지 않았다. 일터에 오메가 창부를 끌어들일 정도로 문란하게 노는지라 마땅한 맞선이 들어오지 않는단다.

느닷없이 램파드의 입술을 훔치는 것으로 보아 둘은 심상치 않은 관계인 것 같았다. 알파인 그는 오메가인 램파드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이때껏 램파드가 황제의 자리에서 버틴 이유는 우성 알파인 그가 곁을 지켰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애쉬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커틀러와 함께한 거였다.

되돌릴 수 없기에 시간은 소중하다. 귀중한 순간마다 함께해 온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정도일까. 세월을 이길 자신이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봤지만 이미 내린 답이었다. 마음의 크기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마음을 정한 애쉬는 턱을 끌어당겨, 축 처진 어깨를 바르게 세웠다.

***

최고 대신은 지하 감옥 근처 별궁에서 지내는 라이를 찾아갔다. 라이는 다소곳하게 앉아 최고 대신을 맞이했다.

나이가 많은 그는 램파드의 어린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과거 두 황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램파드보다는 그의 형, 루트비안 폐태자가 새로이 태어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오늘은 기분이 어떠십니까? 무언가 떠오른 게 있습니까?”

장신의 남자가 말을 걸어오는 게 무서운지 살짝 겁먹은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머뭇거리던 라이의 입술이 우물쭈물 열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렇습니까. 오늘 당신을 알고 있는 자가 황궁에 찾아왔습니다.”

“누군가요?”

“애쉬 테일러라는 알파로 램파드 폐하의 약혼자십니다. 아는 사람입니까?”

라이는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그렇군요. 그가 폐하의 소식도 가지고 왔는데 다행히 무사하십니다.”

최고 대신은 수염을 여러 번 쓰다듬으며 라이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라이는 얌전히 대신의 말을 기다렸다.

“폐하께서는 며칠 후, 어전 회의를 개최하실 거란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며, 당신도 함께 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제가… 황제 폐하를 만나나요?”

“네. 당신이 누구인지 폐하께서 직접 밝히실 모양이군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을 폐하께서 아시는 걸 보아하니, 황족과 긴밀한 관계가 맞으신가 봅니다.”

“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며칠 후면 모든 걸 알게 될 터이니 그때까지 얌전히 지내십시오.”

라이는 아무런 꾸밈없는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손끝으로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최고 대신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별궁에 오기 전, 지하 감옥을 잠시 들렀습니다. 어린아이라 보호할 생각만 했는데, 알고 보니 감시를 해야 했군요. 죄인이라고 하나 제국 귀족을 고문하다뇨. 가학성 기질이 있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를 알아내려 그러신 겁니까?”

가지런히 모은 라이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거짓말은 이미 탄로 난 거였다.

“뭐, 폐하께서 당신에 대한 지시는 따로 내리지 않았으니 됐습니다. 노파심에 말해 두는 것이지만 로열 가드를 이용하는 짓은 여기서 관두기 바랍니다. 시신의 상태로 보아 커틀러 경이 범인인 게 확실한 것 같지만 그는 폐하께서 꽤 아끼는 자거든요.”

들통났지만 라이는 연기를 관두지 않고 순박한 표정을 지었고, 최고 대신은 껄껄 웃으며 퇴장했다. 라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황족은 분명했다. 차기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보다는 잔꾀를 부리는 영특한 자가 나았다.

최고 대신이 나가고 다시 자리에 앉은 라이의 손끝이 떨렸다. 어린 양 같은 순한 눈동자는 점차 살의를 머금고 날카로워졌다.

우성 알파라고 떵떵거리던 백작은 하나하나 지시를 해 주었건만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발정제 향에 취해 괴로워하는 램파드에게 주절주절 떠들 시간에 칼을 사용해 마무리 지었어야지. 승리에 도취해 떠들기 시작하는 대번포드 백작이 한층 더 한심해 보였다.

그의 목이 단칼에 잘려 바닥에 구르자 복수는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지하 감옥으로 가겠어요.”

라이는 로열 가드를 이끌고 별궁 근처에 있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램프가 없으면 맹인과 마찬가지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두운 장소였다. 10대 소년이라면 두려울 법했지만 어두운 골방에 자주 갇혔던 라이에게는 익숙했다.

돌을 깎아 만든 계단을 내려오자 두꺼운 쇠문으로 만들어진 감옥이 등장했다. 이곳에 수용된 죄수는 오직 한 명. 여러 번 방문한 감방의 문이 열리고, 라이는 노련하게 들어갔다.

“황제를 어디에 숨겼나요?”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로열 가드가 심문하는 걸 곁에 서서 두려운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하던 라이의 눈빛이 변했다. 당돌한 애송이의 모습에 기가 찬 커틀러가 피식 웃었다. 갑자기 내숭을 버린 걸 보아하니, 회복한 램파드가 황궁과 연락을 한 모양이다.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대답해요!”

커틀러가 지하 감옥에 갇힌 지 한 달이 넘었다. 바깥의 상황을 알 리 없으니 라이를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조급해진 라이는 커틀러의 앞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아직 램파드가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곧 로열 가드 모두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로열 가드를 제멋대로 부리지 못한다. 어떻게든 불게 하여 최고 대신보다 먼저 램파드와 만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램파드를 찾으려면 커틀러가 알고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로열 가드는 중죄를 지었지만 증거가 없단 이유로 기껏 잡아 둔 커틀러를 지하 감옥에 처박아 두기만 할 뿐, 써먹을 생각이 없었다.

‘저… 기억났어요. 그… 은발의 무서운 사람이…… 램파드 폐하께 달려들었어요.’

‘칼을 들고 말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폐하께서 크게 놀라셨어요…….’

흐릿하지만 기억이 떠올랐다며 로열 가드를 살살 꼬드기자 그제서야 그들은 시키지 않아도 커틀러를 심문했다.

램파드는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 황제가 사라졌다면 로열 가드는 책임은 물론 제국민 모두의 질타를 받을지도 몰랐다. 황제의 실종 기간이 길면 길수록, 제국민의 분노는 커져만 갈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단순히 직위를 해제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로열 가드가 책임을 지고 공개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면책을 피하려면 누구보다 먼저 로열 가드가 황제를 찾아야 했다.

‘하나…… 더… 기억났어요. 황제 폐하는 피를 흘리고 계셨어요.’

온전한 황제를 찾아 모셔 와도 시원찮을 마당에 크게 다쳤다니. 거기다가 한술 더 떠 황제가 서거한다면 로열 가드 전원이 공개 처형당하는 것으론 제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아직… 전부 다 떠오르지 않아서 흐릿해요……. 그렇지만 황제 폐하는 칼에 배를 찔리셨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황제가 실종됐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 황제의 안위를 파악해야 했다. 황제를 살릴 수 있다면 커틀러를 고문한 죄 따위는 하찮았다. 이미 유예 기간 없이 심문을 시작한 마당인 데다 커틀러를 범인으로 오해한 그들은 고문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램파드를 숨긴 위치를 불라며 손톱을 뽑았다. 큰 고통일 테지만, 그는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통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 로열 가드는 고문의 강도를 높였다. 식사를 굶기고 휴식 시간도 주지 않으며 채찍질을 했지만, 커틀러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단단하게 다물린 입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초조해져 손톱을 물어뜯던 라이는 옅게 풍기는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무슨 냄새가 나지 않아요?”

아주 희박하지만 거슬리는 향이었다. 라이는 주변 로열 가드에게 물었지만, 그들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수도와 멀리 떨어진 수도원에서 자란 라이는 자신 말고 다른 알파를 만나지 못했다. 친아버지라는 놈은 우성 알파라면서, 거시기가 없는 통에 페로몬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처음 맡아 본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라이가 생각한 것과 달리 여리게 느껴졌다. 마치, 초식 동물 같은.

“……아, 이게 러트인가?”

라이의 말에 곁에 있는 기사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는 베타라 잘 모르겠군요.”

“일단 저자의 오른쪽 손을 풀어 주세요.”

속박된 커틀러의 손 중 하나가 풀렸고, 몸이 아래로 축 떨어졌다. 램파드를 지키기 위해 로열 가드와 싸우다 부러진 팔은 치료받지 못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러트를 앓으면 알파는 점점 약해진다고 하죠. 여긴 제가 한번 해 볼 테니까 잠시 자리를 비켜 주세요.”

오늘 아침과 달리 라이의 태도가 당돌해졌다. 낯선 라이의 모습에 로열 가드는 당황했다.

“기억이 완벽하게 돌아온 겁니까?”

“조금은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성 알파라고 해도 약해졌다면 제 페로몬으로 누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자리 좀 비워 주세요.”

황당한 요구에 로열 가드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어린아이와 죄수를 한곳에 두라니. 최고 대신이 라이를 황족으로 대우하며 지키라 명해 따르고 있긴 하지만 터무니없는 말까지 들어야 하나 고민됐다.

라이는 살짝 곱슬기 있는 자신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로열 가드를 오만하게 올려다봤다.

“당신들은 황족의 명령을 듣는다면서요?”

“그렇습니다.”

“명령이에요. 나가 줘요.”

어른들을 향해 생글생글 웃던 표정은 사라지고, 서늘함만이 남았다. 기백에 짓눌린 로열 가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호신용으로 단도를 건네줬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큰소리를 질러 주십시오.”

“네.”

로열 가드는 방 밖으로 나가 두꺼운 문을 닫았다. 라이는 바깥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이제 단둘이 남게 됐네요. 최고 대신한테 들었어요. 숙부님이 당신을 꽤 아낀다면서요?”

“…….”

“당신을 앓게 하는 사람도 숙부님이고요. 쌍방향으로 각인했는데, 함께 있지 못하고 떨어지다니 슬프네요.”

라이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커틀러에게 다가갔다. 좁은 감옥 안은 알파의 페로몬으로 채워졌다. 커틀러의 몸이 덜덜 떨렸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괴로워했다.

혈육이라면 페로몬 향이 닮기 마련이지만 라이의 것은 확연하게 달랐다. 만약 램파드가 알파라면 이런 향을 지녔으려나. 썩 유쾌하지 않은 향에 커틀러의 미간이 좁혀졌다.

“숙부님을 생각하면 괴롭죠? 이왕 팔이 풀렸는데 한번 혼자 해 봐요.”

안전거리를 확보한 라이는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봤다. 지친 커틀러는 푹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몸을 잘게 떠는 거로 보아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체력이 한계까지 고갈된 모양이었다.

라이는 피가 엉겨들어 지저분해진 커틀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좀 더 짙은 페로몬을 내뿜었다.

“어서요.”

약해진 커틀러의 몸에서 엉망진창이 된 페로몬이 한층 더 뿜어져 나왔다. 백작이 죽고 이제는 둘밖에 남지 않은 우성 알파. 페로몬 하나로 모든 알파를 짓누르며 우위에 설 수 있는 짐승이 벌벌 떠는 꼴이라니.

라이는 옅게 퍼지는 커틀러의 향이 역겹게 느껴졌다. 같은 알파의 향이라 기분 나쁜 건 물론 커틀러가 침묵을 유지하는 바람에 램파드의 거처를 알아내지 못하고,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거부하는 그가 상당히 거슬렸다.

“못하겠으면 관둬요.”

아랫입술을 짓씹은 라이는 커틀러를 서늘하게 바라봤다. 손을 뻗으면 증오해 마지않는 램파드를 죽일 기회가 잡힐 것만 같은데. 원하는 것이 손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갈 곳 잃은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했다.

눈앞의 남자는 복수의 대상자인 램파드와 쌍방으로 각인했다. 커틀러를 상처 입히면 램파드가 괴로워할 것이 분명했다. 라이는 맥 빠진 모습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커틀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보라색 눈은 굉장히 귀하다고 하죠? 당신의 눈을 뽑아 숙부님에게 선물로 주면 슬퍼하겠지요……. 황좌에서 끌어내리기 전 내가 겪은 만큼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거든요.”

호신용으로 받은 짧은 단도를 뽑아 든 라이가 커틀러에게 다가왔고, 자그마한 손으로 커틀러의 턱을 움켜쥐었다. 입술은 터졌고, 볼과 눈가엔 푸르른 멍이 들었다. 찢어진 눈꺼풀 아래로, 귀한 보석을 닮은 자색 눈동자가 자리 잡았다.

라이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려 거친 숨결을 몰아쉬는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다른 손으로 나이프를 쥐어 들었다.

“손톱 뽑을 때 조용히 버티던데, 귀족이라 체면을 지키는 거예요? 눈을 뽑아도 참을지 궁금하네요.”

정확히 눈을 조준한 단도가 내질러지기 전, 커틀러의 무릎이 라이의 배를 가격했다.

“하……!”

커틀러의 체력이 약해졌고, 라이가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알파라 단번에 쓰러뜨리진 못했다. 오른팔은 제멋대로 축 처져 있지만, 어깨는 괜찮았다. 그는 풀려난 어깨로 라이를 쳐 내 쓰러뜨렸다. 요란한 움직임에 쇠사슬이 절그럭거렸다.

“그런 햇병아리 같은 페로몬에 굴복당할 것 같더냐.”

“윽! 귀족이 광대 노릇을…… 아!”

커틀러는 무릎을 구부려 드러누운 라이의 목을 짓눌렀지만 죽이기엔 역부족이었다. 목줄 묶인 개처럼, 쇠사슬이 방해해 강한 힘을 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걸려도 이대로 질식사시킬 수밖에. 라이는 양손으로 커틀러의 무릎을 빼내기 위해 용을 썼다.

“흐읍… 읍!”

라이는 기도가 눌려 호흡이 힘들어졌고 이를 악물며 숨을 쉬었다. 제대로 된 호흡을 하지 못한 라이의 숨이 점차 가빠졌다.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커틀러의 무릎을 떼어 내기 위해 힘썼다.

그때 두꺼운 문이 끼익, 마찰음을 내며 열렸고 빛이 새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역시 신경 쓰여서 그만.”

아무리 황족의 명이라고 하나 검 한 번 써 보지 못한 가는 팔을 가진 소년과 커틀러를 함께 두기 껄끄러웠다. 두 사람의 인영이 얽혀 있는 걸 발견한 로열 가드가 소리쳤다.

“아니, 당장 떨어지십시오!”

소리치는 로열 가드의 목소리에 바깥에서 대기 중인 다른 자들도 들어와 라이를 떼어 내고, 커틀러를 붙들었다.

“큿, 콜록! 콜록, 콜록!”

눈가에 눈물이 잔뜩 맺힌 라이는 목을 감싸며 기침했다. 부족한 숨을 쉬기 위해 크게 호흡하며 제압당한 커틀러를 노려봤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치료하러 이동하십시오.”

“후읍, 후… 아직. 저 사람 꽉 붙잡아 줘요…….”

서슬 퍼런 라이의 살기에 로열 가드들은 커틀러의 양팔을 꽉 붙들었다. 막바지에 몰렸으면서 여전히 무덤덤한 그의 얼굴이 짜증 날 정도로 얄미웠다. 눈 하나만 파낼 생각이었는데 두 번이나 목숨을 위협당했으니 양쪽을 파내 실명시켜야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뭘 하실 겁니까.”

“잡고나 있어요.”

어린애가 칼을 쥐고 있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커틀러를 속박한 로열 가드들은 어쩔 줄 몰라 불안한 눈동자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곳에 모인 로열 가드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수석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귀족은 함부로 죽이면 안 됩니다. 황제 폐하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는 구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이 제대로 못 하니까 내가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한 달이나 시간을 줬는데, 정보를 알아내지 못하는 거예요?”

“저희도 노력은 했습니다.”

“됐어요. 죽이진 않을 거예요.”

라이는 로열 가드의 손에 단단히 속박된 커틀러의 앞머리를 움켜쥐었다. 이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다니. 두 번이나 자신의 간담을 내려앉게 만든 사람이니, 그의 괴로운 표정이 보고 싶었다. 잔뜩 찌푸릴 얼굴을 감상하고자 고개를 치켜들게 만들었다.

“라이, 그만둬!”

그 순간, 불빛을 확인한 애쉬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힘껏 달린 탓에 목 끝까지 숨이 차오른 애쉬의 등 뒤로 램프를 든 밀러가 쪼르르 달려왔다. 감옥 안의 상황을 확인한 밀러는 질겁해 램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피투성이인 커틀러의 모습,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모를 아이까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모든 상황이 놀라울 뿐이었다.

단도를 꽉 쥔 라이가 애쉬를 노려보았다.

“저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줘요.”

라이의 말에 로열 가드 중 한 사람이 입구로 다가갔다. 애쉬는 자신에게 다가온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익히 만난 적 있는 자임을 알게 된 애쉬는 출발하기 전 램파드가 전한 말을 똑똑히 떠올렸다.

‘최고 대신이 라이의 존재를 숨겼다면, 그 아이 곁을 지키는 로열 가드 또한 최정예의 몇 명뿐일 거다. 로열 가드 내에서도 몇 명 없는 수석 기사들이겠지.’

애쉬는 전혀 모르는 생판 남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자주 만나는 시종이야 낯익어 괜찮지만, 낯선 사람에게 명령하는 건 서먹했다. 아랫배에 힘을 강하게 주고, 다가오는 로열 가드를 향해 말했다.

“수석 기사 엘 커프만 경. 황제 폐하께서 경의 사용권을 내게 넘기신 것을 잊었는가. 내 명을 따르도록 해라!”

사람을 부릴 줄 모르니 이러한 대사 또한 애쉬가 생각해 낸 것은 아니었다. 미리 램파드가 알려 주었기에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

애쉬를 향해 싱긋, 미소 짓던 수석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명령을 내리십시오, 애쉬 테일러 님.”

“경에게 황제 폐하의 전언을 전달하겠다. 램파드 폐하의 명에 따라 대번포드 백작령으로 지금 당장 떠나거라.”

“폐하께서 무사하시단 거군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석 기사는 다른 로열 가드에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커틀러를 속박한 가드의 손이 풀렸고, 화들짝 놀란 라이가 그에게서 멀어졌다.

여전히 커틀러의 표정은 변화 없었지만 마치 비웃는 듯한 기분이 들어, 단도를 쥔 라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번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하자 점점 자신의 손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이게 다 자신을 믿으라며 먼저 손을 내민 애쉬 탓으로 느껴졌다.

“애쉬 형! 나를 배신하는 거예요?”

“이런 복수는 이제 무의미해졌어. 그만두자.”

단도를 꽉 쥔 라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애쉬는 라이에게 미안해져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나와 당신이 불행해진 건 전부 다 황제 때문이에요. 잊었어요?”

“똑같은 짓을 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없어. 네가 황제가 되어도 꿈을 실현하지 못해.”

“어째서요? 나도 똑같이 황족의 피를 물려받았어요!”

그 말을 들은 커틀러가 웃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황제가 될 생각마저 품었다니. 가소롭고 가증스러워 웃음이 절로 나온다.

“램파드가 너와 똑같은 나이였을 때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에 모두 커틀러의 말에 집중했다. 라이는 여전히 그를 잔뜩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반년 만에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따내 월반했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 검술까지 연마해 교관을 이길 정도였다. 그런데 짧은 단도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애송이가 황제가 되겠다고?”

쓸데없이 말을 섞을 상대가 아니지마는 그냥 지나치기엔 거슬리는 말이었다. 아카데미를 입학한 램파드는 이미 남들보다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안위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부단히 노력했다.

오메가인 자신이 열등해 보일까 봐 노력한 거지만은 이를 악물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램파드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비록 커틀러에겐 경쟁심을 불태우다 못해 화까지 냈지만, 그 점까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그런 램파드와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하찮은 자가 감히 그의 자리를 넘보다니.

“그 당시 램파드도 너처럼 신경질적이긴 했지만, 소리만 떽떽 지르는 무능력자는 아니었다. 황제가 될 자질을 갖추기 위해 양손이 피로 물들 정도로 노력했지.”

“닥쳐요! 지금의 황제는 모두를……!”

램파드의 진실이 튀어나오기 전, 주머니에 넣어 둔 유리관을 꺼낸 애쉬가 라이의 어깨에 찔러 넣었다. 콘테 가문에서 사용하는 익숙한 약을 눈에 담은 커틀러는 인상을 썼다.

저 약은 잔트가 직접 만드는 약이었다. 램파드의 요청에 애쉬 또한 잔트 곁으로 보냈으니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지만 저런 것까지 들려 황궁으로 보냈을 줄이야. 커틀러의 앞에 선 라이가 날뛸 것을 예상해 애쉬의 손에 약을 들려 보낸 거겠지.

애쉬 스스로는 로열 가드를 저리 능숙하게 활용하지 못한다. 진저리 날 정도로 거슬리는 사내를 커틀러 앞으로 보낸 것은 램파드였다. 그는 자신이 애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 원치 않는 도움을 주기 위해 보냈다. 처음 애쉬가 나타났을 때 알아봤지만, 이 상황까지 예견한 사실에 커틀러의 입매가 더욱 단단히 굳었다.

약에 취한 라이는 눈을 감으며 쓰러졌고, 애쉬가 받아 들었다. 로열 가드들이 놀라 달려왔고, 애쉬가 그들을 제지했다.

“단순한 수면제일 뿐이다. 눈을 뜨는 대로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볼 터이니, 그대들은 대번포드 백작령으로 떠나도록.”

“알겠습니다. 저… 커틀러 경을 심문한 건 황제 폐하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로열 가드는 램파드가 돌아올 것을 대비해 살 구멍을 뚫고자 변명했다.

“폐하께 전해 드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들은 애쉬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비웠다. 애쉬의 등 뒤에 대기하던 밀러가 램프를 들어 올려 주변을 밝혔다. 소란이 잠잠해지자 커틀러가 애쉬를 향해 말했다.

“그 아이는 장차 램파드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죽여라.”

“라이의 생사는 램파드가 직접 판단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석방하기 위해서는 라이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그런 배려는 부탁하지 않았다. 석방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작은 불씨일 때 없애. 하지 못하겠으면 넘겨라.”

애쉬는 제 품에서 쓰러지듯 잠이 든 라이를 내려다봤다. 창관에서 태어난 라이는 쓰레기 처리하듯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창부의 아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는 부품처럼 취급되었으며 고된 노동의 보상은 사료 같은 음식쓰레기였다. 게다가 쉴 틈을 주지 않고, 수도사들의 화풀이로 쓰이며 애쉬가 찾아갈 때까지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래도 라이는 희망이 있었다.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루트비안이 작은 뇌물을 보내면 적어도 그날은 제대로 된 밥이 나왔다고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몰랐지만 자신을 챙겨 주는 가족에게 정을 느꼈는데 언젠가부터 소식이 뚝 끊겼다. 마지막 희망에게 버림받은 줄 안 라이는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워 갔다.

라이가 겪은 일을 알았더라면 더 빨리 찾아갔을 텐데. 복수를 다짐하고 나서야 라이를 찾은 애쉬 또한 죄를 받아 마땅했다.

“제가 설득시킬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임을 파악한 커틀러는 애쉬를 사납게 노려봤다. 맹수와도 같은 그의 기운에 짓눌린 애쉬는 라이를 꽉 끌어안았다.

“이 아이가 죽으면 램파드가 슬퍼할 겁니다.”

“마음 같은 건 회복하면 된다. 하지만 추락한 지위는 다시 되돌릴 수 없어.”

“괴로워하는 램파드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커틀러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램파드의 금이 간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답지 않게 세운 계획을 무르고, 고집을 허용했으니까. 그 결과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해 모든 게 엉망이 됐다. 한 번 겪었으면 됐지, 두 번은 사양이다.

또다시 일을 그르칠 것만 같은 애쉬의 선택이 성가셨다. 램파드도 허락했으니까 애쉬를 보낸 거겠지.

“하아, 피곤하군…….”

“예?”

커틀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애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되묻는 답을 무시한 그는 힘이 부치는지 벽에 등을 기댔다. 감옥 안이 조용해지자 잔잔하게 퍼지는 페로몬 향이 맡아졌다. 엉망진창으로 흘러나오는 페로몬과 그의 몸은 한눈에 봐도 좋지 않았다.

애쉬는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올려 커틀러에게 고정했는데, 해방된 한쪽 팔이 이상하게 축 처진 게 보였다.

“팔을 다치신 겁니까.”

“보면 모르겠냐.”

한심하다는 투로 답한 커틀러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애쉬는 곁에 있는 밀러에게 의사를 불러오게 하였다.

빠르게 도착한 의사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커틀러의 팔을 살펴보기 위해 남은 수갑을 풀고 셔츠를 벗겨 냈다. 등에도 큰 상처가 남았는데, 찢긴 살점에 셔츠가 달라붙어 한눈에 봐도 아파 보였다.

“팔은 오래전 다치셨군요. 얼마나 되셨습니까.”

“한 달 됐다.”

의사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제 와서 치료한다 해도 전처럼 검을 들기는 힘들 겁니다.”

검사가 검을 놓는 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검사인 램파드라면 그 의미가 더욱 와닿을 것이다. 잠이 든 라이를 끌어안은 애쉬가 걱정스레 물었다.

“팔도… 라이가 그런 겁니까.”

긴장한 애쉬는 호흡이 가빠졌다. 커틀러의 검사 생명줄을 끊어 놓은 것을 알게 된 램파드가 라이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의 말이 거슬린 커틀러는 인상을 조금 썼다.

“로열 가드와의 격전에서 입은 상처다.”

라이가 한 짓이 아니라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마음 한쪽은 무거웠다. 커틀러가 다친 것은 자신이 원인이었다.

“불편하겠지만 회의가 끝날 때까지는 여기 계셔야 합니다. 대우는 다르게 대하라고 명했으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만사 귀찮아진 커틀러는 애쉬를 바라만 볼 뿐 대답조차 해 주지 않았다. 커틀러는 애쉬를 고까워했고, 애쉬 또한 마찬가지. 한 번 거절당했으니 또다시 권하진 않았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도 분수를 깨달았습니다.”

“참 빨리도 깨닫는구나.”

“램파드 덕분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당신부터 찾더군요……. 회의가 끝나고 석방되면 그에게 가 주십시오.”

커틀러는 라이가 마음을 돌리지도 않았는데 회의가 끝나면 석방된다 생각하는 꼴에 기가 찼다. 분수도 모르면서 배짱만 있는 한심한 놈이라는 평가는 여전했다. 저런 자가 램파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물 났는데. 이제 지쳤다.

답이 없는 커틀러에게 인사를 한 애쉬는 자리를 비웠다. 깨어나는 대로 라이를 설득하고, 램파드를 만나야 했다.

***

대번포드 백작의 영지는 램파드의 상상 이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몇 년째 고혈을 짜낸 영주민들은 지치고, 병들었다. 이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할 법도 했건만, 자신이 축적한 그릇된 부와 영지에 기생하는 조직을 숨기기 위해 영주민의 고통을 무시했다.

본디 이 땅을 회복시킬 귀족은 사태에 휘말려 사라졌다. 적임자가 있어야 할 텐데, 마땅한 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램파드가 직접 관리하고 싶지만, 황제는 한곳에 오래 집중할 수 없다.

휠체어에 앉은 램파드는 높은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그 곁에 화이트 테일의 부기사단장이 섰다. 부기사단장은 무언가 석연찮은지, 찝찝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심각한 그의 얼굴이 램파드가 바라보는 창문 유리에 비쳤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느냐.”

“그야…… 까딱 잘못하면 로열 가드와 붙게 된다면서요. 승리할 자신이 없습니다.”

“가문 중심으로 뽑는 다른 기사단에 비해 너희들은 커틀러가 직접 뽑은 실력자들이 아니더냐.”

“하지만 폐하. 다른 것도 아니고 엘리트 집단인 로열 가드입니다. 저희는 용병 같은 무리니까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지요.”

“화이트 테일과 로열 가드의 전적은 비슷하다만? 그대는 스스로 선택한 기사단을 믿지 못하는 거냐.”

“솔직히 저도 능력이 됐으면 로열 가드에 지원했을걸요……. 떨어질 것 같아 화이트 테일에 지원한 거죠. 아, 이 말은 단장님한테 비밀로 해 주십시오.”

걱정스럽다고 하기엔 장난스러운 투였기에 램파드는 피식 웃었다. 부기사단장의 걱정은 전투가 아니라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혹여 로열 가드와 충돌이 일어난다면 짐이 직접 지휘할 것이다. 짐의 능력에 의문을 품지 말아라.”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하지만 여전히 그대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는군.”

“실은……. 단장님께서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황궁이 아닌 이곳에서 어전 회의를 진행하는 겁니까. 게다가 로열 가드가 폐하의 명을 무시할지도 모른다니.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로열 가드는 커틀러가 짐을 납치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오명을 뒤집어쓴 커틀러는 투옥된 상태지.”

“아, 그들은 폐하께서 무사하단 사실을 믿지 않나 보군요……. 하긴, 단장님이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면 그렇게 오해할 법도 합니다.”

황제를 납치한다는 것은 곧 반란을 일으켰단 의미였다. 부기사단장은 화이트 테일과 함께 영문을 모른 채 서부 지역에 발이 묶인 채, 반역죄로 함께 싸잡힐 운명이었다. 놀랄 법하지만 뜻밖에 그는 침착했고, 창문 밖에 있는 먼 산을 보며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 애썼다.

“놀랄 법하지 않느냐? 꽤나 태연자약하군.”

“……폐하께 반한 단장님이 언제 한번 사고 칠 줄 알았습니다. 진짜로 폐하를 납치했다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겁니다.”

“그가 정말로 짐을 납치했다면 자네는 어찌할 건가?”

“솔직히 말해도 되는 겁니까.”

“다소 무례한 발언이라도 허락하지. 말해 보아라.”

“허락해 주신다니 솔직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랫동안 단장님의 사랑을 응원했으니까 도울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커틀러가 램파드에게 고백한 것은 지난 황실 기사 서임식장에서였다. 그 일로 인해 황성에서 지내는 모두가 커틀러가 램파드를 짝사랑한다고 오해하기 시작했다.

“예. 제가 화이트 테일에 입단했을 때부터니까… 숫자로만 따지면 10년이군요.”

잔트에 이어 화이트 테일의 부기사단장까지 커틀러가 지닌 마음을 파악했다. 정작 램파드는 타인이 말하는 그의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다. 본인이 느끼지 못했으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같이 느껴진다.

그는 예고 없이 찾아와선 몸만을 탐한다. 마음이 이끌리는 게 아닌,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것처럼.

“그나저나 단장님을 살리려고 폐하께서 손수 움직이시다니. 단장님이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폐하께서도 마음이 있으신가 봅니다.”

“짐이?”

“그야… 램파드 폐하께서는 한 번 당하면 배로 갚는 무자비한 분이시니까요. 단장님은 몇 번이나 결례를 저지르셨는데 다 넘어가지 않으셨습니까. 학우라고 하기엔 봐주는 정도가 지나쳤는걸요.”

그 말을 인정할 수 없는 램파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들은 커틀러와의 사정을 정확히 모르니까 그리 보는 것이다. 커틀러는 봐줄 수밖에 없었다. 램파드가 오메가인 것을 알며, 도와줄 사람이 그밖에 없으니까.

“억측하지 말아라. 쓸 만한 부하를 새로 구하기 힘드니까 보호하는 것이지.”

“그렇군요.”

비친 유리창으로 램파드의 안색을 살피던 부기사단장이 시선을 회피해 먼 곳을 바라봤다. 부기사단장은 램파드의 말에 전혀 수긍하지 않는다며 입을 삐죽 내밀기까지 했다.

호통칠 시간도 주지 않으려는지, 저 멀리 먼지를 일으키며 마차가 여러 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로열 가드가 아닌 대신이 탄 마차였다. 애쉬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낸 모양이었다.

“램파드!”

마차에서 내린 애쉬는 시종의 안내에 곧장 램파드에게 달려갔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예법이고, 나발이고 내팽개치며 달려든다. 휠체어에 앉은 램파드는 양손을 뻗어 그를 받아 들었다. 단단한 근육이 박힌 거대한 곰 인형을 끌어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못 본 새 어린애가 다 됐군.”

“꽤 오랫동안 못 봤으니까.”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며칠 전이 한 달 만에 보는 건데 이렇게 격한 반응이지 않았는걸? 너답지 않게 침착해서 잠들어 있는 동안 마음이 다 식은 줄 알았지.”

“콘테 별장은… 다른 사람 집이라서 좀…….”

“여기도 다른 사람의 저택이다.”

“주인이 없잖아.”

“제국의 주인이 나란 것을 있었나 보군. 어디서든 거리낌 없이 굴어도 된다.”

램파드는 피식 웃으며 그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이대로 애쉬의 머리나 만지작거리며 쉬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램파드는 조금 들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맡긴 임무는 무사히 완수한 것이냐.”

“응. 최고 대신은 준비를 위해 아래층 회의장으로 먼저 갔어. 라이는 마차에 있는데 회의가 시작되기 전 한번 만나 볼래?”

애쉬의 앞머리를 어루만지던 램파드의 손이 굳었다. 애쉬가 복수를 위해 찾아 온 아이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형의 아들은 어떤 아이일까. 기대보다는 잔뜩 날이 선 모습을 마주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

램파드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애쉬의 머리를 매만졌다. 무수히 많은 고비를 뛰어넘어 왔으면서 이깟 사소한 일에 겁을 먹다니, 답지 않았다.

“데리고 와라.”

램파드의 무릎에 기대 있던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 중인 시종에게 지시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쉬가 타고 온 마차에서 대기 중인 라이를 데리고 왔다.

“램파드 폐하, 데리고 왔습니다.”

“들여보내라.”

시종이 데리고 온 어린아이는 로열 가드의 손에 끌려간 형의 뒷모습 다음이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얼마나 닮았는지, 현재가 꿈같이 느껴지고 시간이 되돌아간 것 같았다.

선대 황제는 루트비안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기 위해 작은 초상화까지 불태워 버렸다. 다섯 살에서 끊긴 형의 모습은 점차 색이 바랜 듯 잊혀졌는데 이제 확실히 떠올랐다. 다시는 망각하지 않기 위해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라이라고 해요. 성은 없어요.”

램파드의 눈치를 흘끗 보던 라이가 먼저 인사를 올렸다.

터무니없게도 목소리까지 같다니. 이왕이면 형과 만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이란 생각에 목이 점차 멨다. 곁에 있는 애쉬가 램파드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울렁거리는 마음이 가까스로 진정됐다.

“가까이 오너라.”

라이는 램파드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 황제가 되고 싶다고?”

“그런 자리 원치 않아요. 애쉬 형이 말한 약속만 지켜 준다면, 숙부님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창관을 없애 줘요. 지금 당장.”

휠체어에 비스듬히 앉은 램파드는 볼을 괴며 라이를 바라봤다. 황제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제 할 말을 똑똑히 하는 아이였다. 된통 당할 뻔했으니, 말을 들어 봐야 했다. 문제는 아이를 차분히 설득시킬 대화 방법 같은 건 램파드의 머릿속에 없단 것. 램파드는 자신의 방식대로 라이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창관을 없애다니, 그건 곤란한걸.”

라이는 감췄던 얼굴을 순식간에 드러냈다. 이빨을 드러내고 털을 부풀려 봤자 새끼 고양이가 뭘 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 작은 몸에 품고 있는 분노를 모조리 꺼내, 램파드를 위협했다. 알파의 페로몬을 힘껏 뿜어내 봤자 피부가 살짝 따끔거릴 정도였다. 발톱으로 할퀼 실력도 되지 않다니. 램파드는 손끝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치며 미소를 머금었다.

“짐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당연히… 약속했잖아요!”

“짐은 약속을 한 기억이 없네만. 증명할 수 있는가.”

“애쉬 형이 꼭 이뤄 줄 거라고 말했어요!”

램파드가 곁에 있는 애쉬를 바라봤고, 그는 머쓱해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대번포드 백작이 죽고, 램파드의 암살을 실패한 라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패인 로열 가드를 최대한 활용해 계획을 세웠다. 치밀하게 모사를 짜고 움직이는 전략가인 줄 알았건만.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벌거숭이였다. 오히려 이런 점은 루트비안이 아니라 램파드를 닮았다.

“창관을 없애 봤자 이름만 바뀐 새로운 창부 체계가 생길 뿐이다. 창부는 오메가들이 스스로 원하는 일이거든.”

“거짓말 마요. 그런 짓을 스스로 원할 리가 없잖아요!”

황제 앞에서 제 속마음을 모조리 까 버리고 악쓰는 자를 얼마 만에 보는지. 시끄럽게 소리를 버럭 지르는 모습이 싫지 않아 램파드는 미소를 머금었다.

“오메가는 값비싼 억제제를 사기 위해 창부가 될 수밖에 없다. 창관을 없애면 억제제를 구하지 못한 발정 난 오메가가 길가에 넘쳐날 거고 속절없이 당해 죽겠지.”

“……숙부님은 황제잖아요? 능력도 있다면서요. 다른 일을 찾아 줄 수 있잖아요!”

“평범한 일로는 평생 일해도 억제제를 몇 통 사지 못해.”

“그렇다고… 그런, 더러운 일을…… 흣.”

당돌하게 따져 들던 라이가 의기소침해졌다. 양 볼이 붉게 상기된 라이는 느닷없이 맑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기세 꺾여진 모습을 마주하자 램파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이가 애쉬를 도운 이유는 단순히 루트비안이 살해당한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무언가 말 못한 사정이 있는 모습에 램파드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감은 두 눈을 뜨고, 곁에 선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 자리를 비워 줘. 조카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

고개를 끄덕인 애쉬가 방 밖으로 나갔고, 램파드 앞에 선 라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대며 울기 시작했다. 단순히 라이의 속마음과 목적을 알기 위해 떠보았을 뿐인데, 상태가 이상했다.

창관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라이는 다른 곳에서 자랐으며 알파로 발현했다. 저렇게까지 오메가의 처지를 개선하고 싶다고 하기엔 핵심이 빠졌다. 창부인 루트비안이 안쓰러워서? 그보다 라이가 무엇을 증오하는지, 속마음을 조금 엿본 것 같았다.

램파드는 라이가 울도록 내버려 둔 뒤, 차분히 기다렸다. 들썩이던 어깨가 가라앉자 허리를 굽혀 라이와 시선을 맞췄다.

“수도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우읏.”

램파드는 권위 있는 모습을 거두고 어릴 적 형이 자신에게 해 준 것처럼 부드러운 시선과 음성으로 아이를 달랬다.

“괜찮으니 말해 보아라.”

“창부한테서 태어났으니까 똑같다고……. 우리도 배워야 한다고… 수도사들이… 매일 밤……. 읏……. 엄마도… 창관에서 친구들과 똑같은 일을 당하고 죽은 줄 알고…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어…….”

울먹이는 소리를 끈기 있게 들어 준 램파드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램파드가 해체한 국교를 모시던 수도원은 각 마을에 하나 이상 있으며, 오래전부터 고아를 살피는 장소였다.

전쟁 후, 부모를 잃은 아이가 많기에 아직 수도원을 유지하고 있건만. 썩어빠진 선대의 유산은 어떤 이유에서든 남겨 두는 게 아니었다. 이미 죽은 선대를 생각하면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드러난 백골에 쐐기를 박고 싶었다.

램파드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는 조카를 바라봤다.

“너무 몰아붙였구나. 미안하다.”

“사과는 필요 없어! 못하겠으면 황제 자리를 내놔요!”

“그전에 내 얘기를 들어 다오.”

손등으로 눈을 뻑뻑 문지른 라이는 램파드를 올려다봤다. 램파드는 라이가 안심할 수 있도록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죽은 형의 모습을 흉내 냈지만, 램파드 자신에겐 어색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라이에겐 먹혀 들어갔고, 잔뜩 흥분한 어린아이가 조금은 얌전해졌다.

“내 형은 아버지의 명령에 창관으로 보내졌다. 형이 죽은 줄만 알아 황제가 되고서도 찾으러 가지 않았지. 한 번 꼭 만나고 싶었건만, 눈앞의 형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 손으로 죽였고.”

“…….”

“그가 창관에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알고 있다. 원치 않는 관계가 얼마나 괴로운지 아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창관을 없애기 위한 밑 작업은 진행하고 있다. 엮여 있는 사업이 많아 정리하는 데 몇 년 걸릴 터이니, 조금 더 기다려 다오.”

“숙부님이 말했잖아요. 당장 사라져도 또 생길 거라고.”

“일자리를 잃고 난민이 될 오메가의 처우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 중이다. 새로운 억제제를 개발하는 건 구상만 했을 뿐, 적임자를 찾지 못했는데, 네가 맡아 보겠느냐.”

“제가요? 전…… 약 같은 건 못 만들어요. 수도원에서 몰래 책을 읽었지만… 제대로 못 배워서, 잘 읽지 못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가 도와주지. 그러니까 너도 날 도와주렴.”

“그런 일 못할 거예요…….”

“솔직히 말해 이대로 다시 만난 가족을 떠나보내긴 싫구나. 너는 적당한 작위를 받아 그냥 내 곁에서 함께 지내 주면 된다.”

날이 섰던 라이의 기운이 줄어들었다. 램파드는 아이의 시선에 맞춰,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무서운 사람, 절 죽이려고 했어요.”

“내 가족이 되면, 지켜 주마.”

라이는 계속 주저했다.

“너를 괴롭힌 수도사들은 모두 끌어내 처벌하겠다.”

“…할아버지한테도 복수해요.”

라이에게 악수를 권한 램파드는 미소를 머금은 입술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라이가 원하는 일은 하나같이 어려운 일이다.

“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없애 주지. 역사서에도 단 한 줄의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선대의 기록을 수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난 기록을 함부로 수정할 수 없으니 보관된 장서를 통째로 불태울 생각이었다. 종이로 기록된 역사 같은 건 불길에 휩쓸려 쉽게 사라질 테지.

“좋아요.”

머뭇거리던 라이는 램파드의 손을 꽉 붙잡았다. 기세 좋게 손을 붙잡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지 램파드의 손바닥 안에서 꼬물꼬물 움직였다. 다른 손을 들어 올린 램파드가 라이의 손을 강하게 감쌌고, 결심을 굳히게 도왔다.

“성이 없다고 했지. 많이 늦었다만 네 성을 돌려주겠다. 나와 함께 클로비스 황가의 이름을 사용하자꾸나.”

“라이 클로비스…….”

“그래. 이제부터 네 성과 이름이다.”

라이는 펑펑 울음을 터뜨린 덕분에 눈꺼풀이 도톰하게 부풀었지만 표정은 한껏 밝아졌다.

“황궁에서는 숙부님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하거라.”

광대뼈를 분홍빛으로 물들인 라이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애쉬를 데리고 와 주렴. 너는 곧바로 아래층 회의실에 먼저 가면 된다.”

“네.”

모든 응어리가 풀리진 않았겠지만 라이는 램파드를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라이는 신뢰의 의미로 램파드를 향해 웃었는데, 평소와 같은 애간장을 살살 녹일 눈웃음이 아닌 멋쩍은 웃음이었다.

라이가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곧바로 애쉬가 올라왔다. 둘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파국으로 치달았을까 걱정하던 애쉬는 램파드의 표정에 한숨 놓았다.

“잘 해결됐어?”

“라이는 내가 원하는 대로 증언을 해 줄 것이고, 앞으로 황궁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다행이야. 고생 많았어.”

“뭘, 라이의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인걸. 손을 만져 봤는데, 근육이 하나도 없더군.”

“먹고 살기도 바쁘니까……. 서민 중에서는 검술을 배우는 사람이 적거든.”

“검술을 배우기엔 늦었으니 학자로 키울 거다. 내가 돌아가는 대로 아카데미에 입학시킬 건데, 남들보다 몇 년 늦었으니 호되게 공부시켜야겠지.”

애쉬는 램파드의 하반신에 악마 꼬리가 살짝 보인 기분이 들었다. 램파드가 만족하려면 그냥 공부하는 것 정도로 되지 않을 터인데. 여러 명의 가정 교사에 둘러싸여 고생할 라이의 모습에 씁쓰레한 미소가 지어졌다.

“돌아가는 대로라니……. 램파드 넌 황궁에 바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이를 낳아야 하니까 못 돌아가는 거지. 꽤 오래 비울 거라 그동안 라이를 가르칠 적임자가 필요한데…….”

램파드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애쉬를 흘끗 바라봤다.

“애쉬, 네가 라이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 줘.”

램파드에게 가까이 다가온 애쉬는 휠체어의 손잡이를 부드럽게 움켜쥐며 딴청 피웠다.

“내가 누구를 가르치다니 주제넘은 일인걸.”

“넌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는 게 문제야. 라이는 수도원에서 기본적인 글공부조차 못 배웠더군. 글을 읽는 방법 정도야 충분히 가르칠 수 있지 않나.”

“하긴, 네 부탁인데 열심히 가르칠게. 황성에 돌아올 때쯤이면 제국의 역사서 정도는 손쉽게 읽을 거야.”

램파드는 자신의 곁에 다가온 애쉬의 목을 양손으로 감아 끌어당겼다. 애쉬는 고개를 숙여 앉아 있는 램파드가 자신을 편히 안을 수 있도록 몸을 숙였다.

“고마워.”

“감사받을 일이 아냐.”

애쉬를 끌어안은 램파드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 가족을 찾아와 줘서 고마워. 데리고 와 주지 않았더라면 조카의 존재를 평생 몰랐을 거야.”

램파드에게 감사받을 일이 아니기에 애쉬의 마음이 욱신거렸다.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게 아냐.”

“결과가 좋으니 된 거 아니냐. 난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어.”

램파드는 팔 안에 가둔 애쉬의 목가에 입을 쪽, 맞췄다. 열이 훅 오른 애쉬는 온기가 빠져나가는 게 싫어 팔을 들어 올려 램파드를 꽉 끌어안았다. 램파드를 놓치고 싶지 않다. 분수에 넘치는 사람이지만 함께하고 싶다. 램파드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기운 걸 느꼈지만, 추를 옮길 방법이야 얼마든지 많으니까.

***

회의장에는 수석 로열 가드와 함께 최고 대신, 제국의 중책을 논할 때 모이는 귀족 여럿이 모였다.

버려진 저택은 청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어설펐으며,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건물을 쉽게 무너뜨려 제국의 주요 인사를 모조리 생매장시킬 수 있겠다는 실없는 상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램파드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화이트 테일이 경비를 선 덕분에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고, 밀려 있던 제국의 안건을 차례차례 해결하며, 어전 회의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황제의 위치는 커튼으로 시야를 차단한 높은 자리였다. 모든 안건이 정해질 때까지 램파드는 경청만 할 뿐. 문제 있는 발언이 없는 한 따로 의견을 내진 않았다.

시야만 가렸을 뿐이지만 대신들은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데 거리낌 없었다.

“커틀러 경을 발견한 장소에는 귀족과 로열 가드의 시신이 함께 있었습니다. 커틀러 경이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신의 상태는 어떤가요.”

한 대신이 일어선 로열 가드에게 물었다. 그는 잠깐 주저하더니, 가져온 다른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훼손이 심해 조사 기간이 오래 걸리는 모양입니다.”

“훼손이 심하다니 이상하군요. 커틀러 경이 범인이라면 시신의 상태가 온전할 것이며 꼭 있어야 할 흔적이 있을 텐데요?”

“하지만 커틀러 경이 들고 있던 검은 베기에 적합한 무기였습니다. 완전 범행을 위해 평소 사용하던 찌르기용 검과는 다른 무기를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로열 가드의 사건 설명을 듣던 라이가 손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많은 숫자의 사람이 라이를 바라봤지만 기백에 눌리지 않고, 태연했다.

“제가 그곳에서 모든 걸 봤어요. 대번포드 백작께서 먼저 램파드 폐하를 공격하셨어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대신 중 하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커틀러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 아닌, 황제가 기사단장을 이용해 귀족을 처리한 것도 큰 문제였다. 대신은 마음에 걸리는 찝찝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생각을 밝혔다.

“……램파드 폐하께서 다른 사람의 공격을 얌전히 받을 위인이 아니잖습니까.”

대번포드 백작이 황제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단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홀로 곰까지 때려잡아 온 황제가 손쉽게 당했다니,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폐하는 눈에 띌 정도로 몸이 좋지 않으셨는걸요. 솔직히 쓰러지실까 걱정될 정도였는데……. 그런 생각 저만 했나 봐요?”

훼방꾼이 끼어들었지만 라이는 당황한 기색조차 없었으며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하긴, 한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하실 정도셨죠.”

따로 지시한 적 없는데, 라이는 술술 말을 지어내며 잘 대응했다. 커튼 뒤에서 회의를 듣던 램파드는 앙큼한 거짓말에 수긍하는 대신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쓰러진 폐하께서는 정신을 잃으셨고, 커틀러 경께서 대번포드 백작을 제지하다 싸움이 벌어졌어요. 백작의 편에 선 로열 가드가 다른 귀족을 죽였고요…….”

유일한 생존자의 입에서 나오는 증언인 이상 뒤엎으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딱히 반론을 펼치는 자도 없어 커틀러가 엮인 사건도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귀족 중 한 명이 사건 외의 질문을 꺼냈다.

“그나저나 저 아인 누구입니까. 갑자기 황궁에서 발견됐다는 설명 말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최고 대신이 신호를 보냈고, 애쉬가 끄는 휠체어에 탄 램파드가 커튼 밖으로 나왔다. 황제가 등장하자 앉아 있던 대신들이 모조리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라이가 허리를 깊이 숙인 대신의 숲을 헤치고, 쪼르르 달려왔다.

“아버님!”

어떻게 불러도 좋다고 하긴 했지만 예상 밖의 칭호가 등장했다. 당황스러운 칭호에 램파드가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허리를 들어 올린 대신이 있을 정도였다. 대신은 램파드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하자 곧바로 다시 허리를 숙였다.

램파드는 호흡을 깊게 내쉬었다. 설명하기 힘든 조카보다 램파드의 아들로 있는 편이 황궁에서 지내기 더 편할 것이다. 후계자 문제도 잠재워질 것이니, 아버지와 아들인 척 해도 나쁠 건 없었다. 그렇지만 어린애가 제멋대로 굴다니. 앞으로 훈육은 엄격하게 해야 할 듯했다.

“모두들 고개를 들라.”

일제히 허리를 들어 올린 대신들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당혹감에 휩쓸린 자, 한시름 놓았다며 기뻐하는 자, 다들 제각각이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니까 소개하지. 라이 클로비스는 오늘부터 황자로서 지낼 것이다.”

질문거리가 넘쳐나는 대신들은 서로 앞다투어 순서를 매겼다. 저들끼리 알아서 순번을 정하더니 한 사람씩 말을 꺼냈다.

“무사하다 연락하지 않고 왜 이곳에 계셨습니까.”

“대번포드 백작과 내통한 자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 황궁에서 벗어나 남부 지방에서 지낸 것이다. 다친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마련한 곳에서 지내겠다.”

“숨겨 둔 자식 같은 건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짐이 그대에게 사생활을 숨김없이 공개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정녕 폐하의 자식이 맞사옵니까? 느닷없이 다 자란 아이가 나타나니까 믿어지지 않습니다.”

“대신은 이런 빼어난 외모를 지닌 자가 짐 말고 또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누가 봐도 짐의 혈통이지 않느냐. 자, 다음.”

제국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었다. 거침없이 말하는 램파드의 대답에 대신들은 저 나름의 수긍을 하며 궁금증을 해소시켰다.

“늦었지만 감축드리옵니다. 이제 제국의 앞은 빛이 꺼지지 않겠군요.”

“축하받을 일은 하나 더 있지. 지금 이 시간부로 애쉬 테일러는 공식적으로 짐의 황후가 되었음을 선포하겠다. 혼인은 추후에 진행할 터이니, 제국에는 그대로 공표하거라.”

램파드에게 사전 설명을 듣지 못한 애쉬는 대신과 함께 매우 놀랐다.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황후라면 라이를 데리고 함께 지내도 된다. 또한,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 요리하기 힘든 최고 대신보다 램파드의 입김이 확실한 황후가 하나쯤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놀란 애쉬에게는 나중에 설명하면 됐고, 램파드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따로 교육시키지도 않았는데 라이는 대신들과 이야기를 잘 나눴다. 수도원에서 지내면서 나이 많은 수도사들과 대화를 많이 나눴기 때문이었다. 황궁의 식구들과 친해지는 것도 좋으니 라이를 내버려 두고 애쉬와 최고 대신을 이끌고 작은 방을 찾아갔다.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최고 대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죽은 시신들의 상태는 제가 직접 손을 써 함구시켰습다. 전부 단 한 번의 공격에 쓰러졌던데, 그 정도의 일격을 넣을 수 있는 자는 대륙 내에서 커틀러 경뿐일 테니까요. 부검 기록을 제출했으면 빠져나가기 힘들었을 겁니다.”

“시키지 않아도 그런 문제는 잘 처리하는군.”

“폐하를 오랫동안 모셔 왔으니까요.”

“짐보다는 제국을 우선시하는 게 문제지만 이번 처치는 마음에 드는구나.”

수염을 쓰다듬던 최고 대신이 싱긋 웃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램파드는 능구렁이 영감 곁에서 오만 방정 떠는 애쉬를 바라보았다. 방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애쉬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폭발할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뭘 그렇게 허둥대는 것이냐. 황후가 되기로 한 각오는 이미 오래전에 하지 않았냐.”

“그렇지만…… 이제 정식 부부가.”

애쉬는 최고 대신을 한 번 흘끗 바라보더니,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정식 부부가 된 것이지 않습니까. 공식으로 말이죠!”

“맞아.”

혼자 당황하는 애쉬는 부끄러움이 더해져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건강하게 탄 피부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바라보며 램파드는 자신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분명 얼굴뿐만 아니라 옷 속에 숨겨진 몸까지 새빨개졌을 터.

대부분이 해결되었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램파드는 최고 대신에게 손짓했고, 그는 등 뒤로 양손을 차분히 모으며, 황제의 명을 듣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지금 당장 파발을 보내 커틀러 단장을 석방하도록 해라. 원하는 만큼 휴가를 줄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 전하고.”

“알겠습니다. 한데 지금 커틀러 경은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 폐하께서 직접 휴가를 정해 주셔야 합니다.”

“……말을 하지 못한다니. 무슨 일인가.”

“제가 황궁에서 출발하기 전 들은 소식입니다. 체력이 소모된 커틀러 경이 쓰러졌고, 황급히 치료를 진행했습니다.”

“커틀러가 쓰러져?”

“그렇습니다. 투옥 중 고문을 당했으니 쓰러지는 것도 무리 없지요.”

램파드의 낯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무리 험난한 행군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견고한 체력을 가진 자가 커틀러였다.

“고문이라니. 이제 막 유예 기간이 지났지 않은가!”

램파드가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최고 대신은 담담했다. 애쉬는 점점 불씨가 붙어 가는 램파드라는 장작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황제를 찾겠다는 명목으로 로열 가드 내에서 제멋대로 진행한 모양입니다. 저 또한 보고를 제대로 듣지 못해 일이 진행된 후 알게 되었습니다.”

“보고는 됐어! 커틀러의 상태는 어떠하냐.”

“체력 문제로 쓰러진 것이니 며칠 치료를 받아 쉬면 깨어날 겁니다. 다른 상처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부러진 한쪽 팔은 회복되기 힘든 모양입니다.”

가슴 속에서 피워진 작은 불씨가 화르르 타올랐다. 온몸이 분노로 작열한 램파드는 다리를 다친 체하며 휠체어에 앉은 사실을 잊고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도 치렁치렁하고 헐렁한 옷을 입었기에 소복이 솟은 배는 숨겨졌다.

새로 만든 기다란 검을 꽉 잡은 램파드를 바라보던 최고 대신은 다음 행동이 예측되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상치 않은 행동에 놀란 애쉬가 램파드에 다가갔다.

램파드의 시선은 보이진 않아도, 닫힌 문 밖에서 대신들과 대화를 나누는 라이 쪽으로 향했다. 곁에 선 애쉬가 느낄 정도로 거대하고 날카로운 살기를 머금은 시선이었다.

그는 라이가 소중한 사람을 상하게 하여 화가 난 것이었다. 몇 년 전, 눈앞에서 루사를 잃은 애쉬가 램파드에게 품었던 감정이었다. 어떤 연유를 갖다 붙여도 이해되지 않는다. 분노로 들끓은 몸은 이성을 흔적도 없이 녹여 버려, 모든 것이 상대의 잘못이라 느껴지리라.

라이에게 앙갚음할 생각뿐인 램파드는 나중에 진실을 알고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애쉬와 똑같이 자신의 무지에 탄식하며 뼛속까지 괴로움에 사무쳐 평생을 괴로워할 것이다.

화가 난 램파드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다. 램파드의 흉흉한 모습에 대신들의 이목이 쏠렸다. 커틀러의 팔을 다치게 한 것은 라이가 아니라고, 설명할 시간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애쉬는 램파드의 등을 껴안아 전진을 막았다.

등 뒤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에 램파드는 몸속의 혈관이 뚝 뚝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큰 중심이 되는 근간이 똑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환청이 들렸고, 손에 쥔 검을 떨어뜨렸다.

“램파드…….”

램파드의 움직임이 멈췄고, 최고 대신이 그들을 방 안으로 이끌며 문을 닫았다. 더는 타오를 것이 없는 것처럼 연소한 램파드는 애쉬의 이끌림에 순순히 휠체어에 앉았다.

분노보다 더 큰 슬픔이 몰아친 램파드는 애쉬를 싸늘하게 바라봤다. 이미 진작 알고 있던 마음이었다. 애쉬 테일러라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른 자가 있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았다. 사랑하는 자의 진짜 자식이 나타났으니, 가짜 대용품에는 눈이 가지 않는 거겠지.

“역시 너한테는 형님이 우선이구나.”

애쉬가 램파드를 막은 건 루사나 라이 때문이 아니었다. 오롯이 램파드의 마음을 우선시하기 위해 막아선 거였다. 하지만 큰 실망에 휩쓸린 램파드의 표정은 슬픔에 차올라,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믿을 수 없는 사내의 앞이기에 울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모든 말이 변명일 게 뻔했기에 애쉬는 입을 꾹 다물고, 괴로워하는 램파드의 시선을 피했다.

“라이를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가.”

램파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다. 애쉬의 눈에는 괴로움에 사무친 억지 미소로 보였다.

대신과 애쉬는 라이를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램파드는 영지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음 날 콘테 가문의 별장으로 향했다. 콘테 별장 입구에서 램파드를 맞이하러 나온 한스는 커틀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손에 든 짐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저… 마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램파드는 한스의 가슴을 밀며 제지했다.

“짐이 직접 말하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커틀러와 애쉬 생각에 잠을 설친 램파드의 눈가는 그림자가 짙게 졌다. 혼자 생각해 봤자 뾰족한 수도 없는데 생각은 멈추지 않고 자꾸만 뻗어 갔다. 차라리 술에 취해 잊고 싶은데,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해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걱정스러운 한스의 시선에 램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틀러가 다친 것은 짐이 원인이니까 직접 말해야지. 희생양으로 누굴 대신 세우겠느냐.”

별장의 문이 열렸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잔트가 밝게 맞이해 줬다. 램파드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뜻은 일이 잘 해결되었단 말이었다. 콘테 가문에 씌인 누명이 벗겨졌고, 커틀러가 석방되었으니 기쁘게 마련이다. 하지만 램파드의 표정은 어두웠고 잔트는 긴장했다.

“혹시, 커틀러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램파드는 커틀러가 다치게 된 경위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설명했다. 떨리는 손끝을 부여잡은 잔트는 괴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눈꺼풀을 떨어뜨렸다.

“그렇습니까. …원래라면 목숨을 잃었을 일.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큰 원인 중 하나인 램파드에게 원망이나 욕지거리가 쏟아질 게 마땅해야 하지만 잔트는 쓴 마음을 삼켰다. 차라리 욕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냥 넘어가 램파드의 마음 한편이 더욱 쓰라렸다.

그날 저녁, 잔트의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이 얇은 별장은 큰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고, 램파드는 슬피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다. 잔트의 원망을 받으면 속이 좀 편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해 나선 거였다. 황제에게 쓴소릴 함부로 내뱉지 못할 것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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