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스피크 (Doublespeak) 3
수비
10 조사
애쉬가 쓰러진 지 한 달이 지났고 그의 거처는 황제의 침실 근처로 옮겨졌다. 램파드는 바쁜 와중 짬이 날 때마다 애쉬를 찾아갔다. 기대를 품고 찾아갔지만, 실망만 계속됐고 여전히 그는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반복된 낙심으로 램파드의 마음은 넝마가 되어 몸을 병들게 했다. 애쉬가 쓰러진 날부터 램파드는 식욕이 사라졌으며, 억지로 음식을 먹으면 게워 내는 일이 반복됐다.
그를 따라 함께 쓰러질 생각은 아니었다. 알고는 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출구가 없는 긴 갱도에 갇힌 기분이었다.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뜬 램파드는 침대 위에 길게 늘어진 금색 천을 바라보며 배를 쓰다듬었다. 무언가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쉬는지 물방울이 몽글몽글 맺히는 느낌도 났다. 처음으로 몸 안에 자리 잡은 다른 생명체의 존재가 느껴졌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애쉬가 저리되었는데, 배 속의 아이 문제를 따로 생각해야 하다니. 애쉬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해 화가 날 정도였다. 무시하고 싶은 문제지만, 아이는 점점 자라는 중이었다. 해결하기 위해선 수도를 떠나야 하는데 애쉬를 두고 몇 달이나 자리를 비울 순 없어 시간만 흘러가는 중이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램파드는 한숨을 길게 쉬며 시종을 불러 채비를 끝마치고 집무실로 이동했다.
건국기념일과 관련된 행사를 취소시킨 램파드는 그날부터 정무에 치여 살았다. 사소한 일이라도 좋았다. 눈을 감고 있는 애쉬를 잊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 했다. 램파드를 보좌하는 한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램파드 폐하, 수치가 잘못된 듯합니다. 자료를 찾아올까요?”
“다녀오너라.”
램파드에게 허리를 깊이 숙인 한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황제의 방 입구에는 시종 두 명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안으로 들어가서 폐하를 모시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안심한 한스가 램파드를 홀로 두고 도서관으로 떠났다. 사랑하는 이가 쓰려졌다고 해서 허튼 생각을 품을 위인은 아니지만 저렇게 야위어서야 쓰러질까 걱정됐다.
램파드는 내려오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천천히 서류를 확인했다. 혼인 사냥을 램파드 혼자 나가 예산이 절약되었고, 그것으로 기술 학교를 세웠다는 보고서였다. 남는 예산은 학교 인근에 편의 시설이나 주민들을 위해 계획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램파드에게 시종 하나가 조용히 말했다.
“커틀러 단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램파드는 힘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커틀러는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나타났다.
“뭐라도 좀 드십시오.”
“아침은 먹었다. 지금은 생각 없어.”
커틀러에게 실망한 마음은 켜켜이 쌓여 증오로 변했다. 열흘 정도는 커틀러를 볼 때마다 원망하며 화를 냈고,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말이 칼처럼 날카롭고 살을 찢을 수 있었더라면, 그는 이미 살점도 남지 않았을 텐데. 램파드의 기대와 달리 겉만 보면 상처 하나 없이 멀끔했다.
작은 반응도 없자 지쳐 나가떨어진 쪽은 램파드였다. 무의미해진 걸 깨달은 뒤로 가슴 안쪽만 무거울 뿐 더는 커틀러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아졌다.
“폐하를 모시는 시종이 저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억지로라도 음식을 권하라 하더군요.”
커틀러의 손짓에 시종이 쪼르르 달려와 음식을 덜어 내어 상차림을 시작했다. 바삭하게 구운 빵 위에 채소를 켜켜이 쌓고 그 위에 육즙이 가득한 고기를 썰어 올렸다. 그 위에 연둣빛이 나는 소스를 듬뿍 발라 마무리를 하고, 보기 좋게 접시에 담았다. 차갑게 만든 차는 커틀러가 직접 따랐다.
“한 달째 본궁 밖으로 나가지 않지 않으셨습니까. 드시고 산책하러 나가시죠. 오늘은 날이 매우 좋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밖에 나갈 수 없어.”
램파드는 대신들이 해야 할 업무까지 뺏어서 도맡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커틀러가 이미 손을 쓴 상태였다.
“폐하 쪽으로 올라갈 문서는 제 선에서 처리했습니다. 살펴볼 것은 황제의 인장이 필요한 허가서와 지금 들고 계신 보고서뿐입니다.”
커틀러는 은쟁반 위에 방금 만든 샌드위치와 차, 그리고 각설탕이 듬뿍 든 유리병을 챙겼다. 서류를 작성하는 손이 한층 더 느려진 램파드가 느릿느릿 말했다.
“살펴볼 서류가 없다면 본궁 내 시종을 둘러볼 것이다.”
“그 일은 시종장이 할 일이잖습니까. 폐하께서 굳이 아랫것까지 손수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군주는 아랫사람을 돌볼 의무가 있지. 남는 시간이 생겼으니 살펴보는 게 당연해.”
손수 음식을 배달한 커틀러가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와 차를 책상 한구석에 올렸다. 램파드 쪽으로 찻잔을 밀어 놓은 그는 각설탕을 하나씩 꺼내 차 속으로 빠뜨렸다.
램파드는 멍한 눈으로 붉은 물속으로 빠지는 하얀 설탕을 바라봤다. 잘 정제된 각설탕은 차가운 차 속에서도 흔적 없이 흩어졌다. 자신의 마음속에 틀어박힌 정체 모를 단단한 무언가도 각설탕처럼 녹이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 편해질 텐데.
“아랫사람을 돌보기는커녕 쓰러졌다간 짐을 만드실걸요. 지금 램파드 폐하의 팔은 검을 쥐지도 못하겠습니다.”
꾸준히 해 왔던 수련을 멈추고, 검을 쥐지 않은 것 또한 한 달쯤 되었다. 한 달 손을 놓았다고 실력이 무뎌지진 않지만, 이대로 계속 놓았다간 재활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었다. 이제 검을 쓰지 못하게 된다 하여도 상관없게 느껴져 걱정조차 되지 않았다.
“평화로워졌으니 이제 검은 필요 없을 거다. 슬슬 은퇴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지.”
“검은 평생 놓지 않을 거라 하셨잖습니까. 후계자가 생겨 뒷선으로 물러난 뒤에도 기사를 수련시키고 싶다고 하셨죠.”
저 시끄러운 입을 막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다. 샌드위치보다 상대적으로 먹기 편한 차를 마셨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달달한 차지만 입에 들어오자 쓰게만 느껴졌다. 램파드는 절반도 채 마시지 못하고 잔을 내려놨다. 커틀러는 반쯤 채워진 잔을 흘끗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건넸다.
“남김없이 드십시오.”
“먹고 싶지 않아.”
“음식을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지 않은 거겠죠.”
“그럴 생각 없어. 단지, 입맛이 없는 거다.”
“그렇게 야윈 채로 쓰러지면 영영 눈을 뜨지 못할 겁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드십시오.”
램파드는 힘이 빠져 더는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한숨을 길게 쉬고 커틀러가 건넨 접시를 받았다. 순순히 음식 접시를 받아 들자 죽였다 생각한 분노가 잔잔히 일렁거렸다.
대체 누구 때문에 자신이 힘겨워하며 말라 가고 있는데. 커틀러에게 사육당하는 기분이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급여하는 먹이를 받아 가며, 그저 하루하루 목숨만 이어 간다 느꼈다.
구렁텅이에 밀어 놓고선 음식을 억지로 먹이며 만족하는 커틀러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램파드는 그걸 그대로 뒤집어 바닥으로 전부 쏟아 보냈다. 단단한 바닥과 충돌한 샌드위치는 속을 전부 내보이며 흩어져 엉망이 됐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한 표정으로 내려다볼 것이었다.
“램파드!”
천천히 고개를 든 램파드는 그를 바라봤다. 저렇게 화를 내는 표정을 보는 게 몇 년 만인지. 램파드만큼이나 고운 얼굴이 잔뜩 주름졌다.
“네가 왜 화를 내는 거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너의 작품이잖아. 몇 년을 공들여 이리 만들었으니, 제대로 감상해 봐라.”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커틀러가 화를 내자 텅 빈 속이 다시 일렁거렸다. 죽으라며 사지로 내몬 자가 인제 와서 화를 내다니. 기가 차지만 비웃을 힘조차 없었다.
“내가 힘들어하니 괴로워?”
램파드는 마시던 차마저 전부 바닥에 쏟아 버렸다. 그의 눈썹이 크게 떨렸다.
“네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니냐.”
“…….”
“왜 말이 없는 건가.”
주먹을 꽉 쥔 커틀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순풍에 잔잔하기만 하던 그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설마 이렇게 되리라 예상 못 하고 벌인 일은 아니겠지.”
램파드는 손가락에 걸어 둔 빈 잔도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단단한 바닥과 충돌한 찻잔이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내가 그렇게나 거슬렸다면, 이런 식으로 괴롭힐 시간에 차라리 칼로 찌르지 그랬냐. 그랬다면 서로 시간 낭비하지 않았을 테지.”
“제가 어찌… 폐하께 검을 겨누겠습니까.”
격렬한 태풍을 품고 있는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미 했잖아?”
램파드는 굳게 닫힌 그의 입에 집중했다. 그의 생각을 듣고팠지만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쉬는 나 자신과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제발 사라져. 램파드는 뒷말을 삼키고, 커틀러라는 태풍의 영향으로 일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숨을 쉬고 놓았던 펜을 다시 쥐어 서류를 내려다봤다.
“나에 대한 신경은 끄고 새로 만든 짝에게 달려가도록 해라. 화이트 테일의 단장님께서 퇴근하지 않아 밤마다 눈물로 지새운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
“……폐하의 명대로 오늘 밤 릴을 만나도록 하지요.”
“그러도록 해. 이만 물러나라.”
이마의 혈관이 도드라진 커틀러는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커틀러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램파드는 옅게 미소 지었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하도 어이가 없어 입꼬리가 절로 휘어졌다. 눈은 여전히 괴로움에 차 찌푸렸고, 입만 웃는 통에 시종들은 입을 꾹 다물고 램파드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커틀러가 사라지고 대기 중인 시종들은 바닥을 더럽힌 음식을 치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도서관에 갔던 한스가 돌아왔다.
“남부 지방의 개간 사업 통계 자료입니다.”
램파드는 잘못 기재했던 값이 적힌 보고서를 치우고, 새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펜을 놀리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쓸데없이 커틀러가 신경 쓴 바람에 오늘의 일은 이것으로 끝이기에 천천히 적어 넣었지만, 마무리는 빨리도 찾아왔다.
할 일이 없으면 구상한 일을 실행하면 됐다. 램파드는 억제제를 보관하던 서랍 안에 넣어 둔 조사서를 꺼냈다. 대번포드 백작이 가졌던 영지 내에 위치한 창관을 조사한 내용이었다.
램파드의 손짓에 대기 중이던 시종 하나가 다가왔다.
“자네는 대번포드 백작의 전 영지로 떠나 이 문서에 적힌 창관과 수도원을 조사하거라. 짐이 원하는 정보는 알파 귀족의 씨받이로 사용된 오메가에 대한 정보다. 창관 출신의 고아가 어떻게 됐는지 함께 조사하도록 해라.”
“몰수되기 전인 전 영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전쟁 전 일이라면 몇 년 전부터 확인해야 할까요.”
대번포드 백작의 하나뿐인 자식은 전쟁 후 반란죄로 목이 잘렸다. 아이가 살았다는 뜻은 귀족의 아이를 밴 오메가가 백작에게 비밀에 부쳤다는 거였다. 숨긴 이유는 뻔했다. 알려지면 아이가 죽을 테니까.
백작은 후계자 문제가 불거질 게 뻔한 창부의 아이를 굳이 나서서 만들었고, 버렸다. 본처가 아이를 가졌으니 필요 없어졌단 뜻이었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차를 조금이라도 마신 덕분인지 생각이 유연해진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딱 14년 전이군. 씨받이로 선택된 오메가는 죽은 대번포드 백작 부인과 비슷한 외모일 것이다.”
“그 정도로 좁혀 주시면 조사가 수월하겠습니다.”
램파드는 서랍 안에서 금박을 입힌 카드를 꺼내 서명과 황실 인장을 찍어 넣었다.
“짐의 이름을 기재한 허가증이니 예산은 마음껏 쓰도록 해라. 필요하다면 뇌물을 사용하고, 자료 조사를 거부하는 자는 기사를 동원하면 된다. 기간은 일주일이면 되겠지?”
“네, 램파드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국에서 황제의 이름을 사용하면 뭐든 가능했다. 큰 권리를 받은 시종은 인사를 올리고, 떠날 채비를 하러 나갔다.
막 도서관을 다녀온 한스는 벽으로 이동해 한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램파드는 이번엔 책상 위에 있는 쪽지에 짤막한 글을 써, 한스에게 건넸다.
“창관에 유통, 공급하는 양조장의 실태를 조사하고 싶다. 창관과 주점에 납품할 때 물류 비용이 어느 정도 차이 나는지 지역별로 정리해 오거라.”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정리해 올 테니 이만 쉬십시오.”
의자에 편히 앉은 램파드가 엄지로 입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 시간 주겠다. 당장 움직여.”
한스는 도서관의 자료 보관실을 여러 번 왕복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진저리를 치며 서둘러 이동했다. 윗사람이 고되게 일하자 아랫사람은 힘에 부쳤다. 조금 쉬어 주면 좋으련만. 돌아갈 때쯤이면 정오가 지났을 테니 램파드가 즐겨 먹던 간식을 준비해 억지로라도 쉬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세 시간이 지난 후, 자료 정리를 끝마친 한스가 브라우니를 구워 돌아왔다. 일을 시킨 램파드는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고 곁을 지키던 시종이 모포를 덮어 준 상태였다. 애쉬가 쓰러지고 나서 취침 시간마저 늦어졌으니 피곤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터.
“램파드 폐하, 의뢰하신 물류 비용…….”
방 청소를 끝마친 시종이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불편한 자세지만 기껏 잠이 든 램파드를 일부러 깨우지 않고 곁을 지키는 중이었으니까. 알아들은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정돈하고 자리에 섰다. 조용히 자던 램파드의 몸이 크게 떨렸다.
“…읏!”
악몽을 꾸는지 낮은 신음이 들렸고, 한스가 어깨에 손을 올려 흔들어 깨웠다.
누군가 몸에 손을 대자 화들짝 놀란 램파드가 일어났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한스가 자신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괴로워하시기에 주제를 무릅쓰고 깨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램파드는 다른 것보다 경계를 모두 거두고 잔 사실이 가장 충격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댔는데 잠을 잤다니. 자신은 원래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다고 해도 인기척이 느껴지면 금방 일어났다. 몸이 둔해졌단 사실에 위기 의식이 느껴졌다.
“악몽을 꿨을 뿐이다. 괜찮으니 물을 다오.”
“곧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램파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렸다. 화들짝 놀라 일어난 탓에 뛰어올랐던 심장은 가라앉았지만, 꿈속에서 본 애쉬의 모습 때문에 가슴은 여전히 지끈거렸다. 한스가 깨우지 않았어도 편지를 낭송하는 애쉬의 입술에 상처받고 싶지 않아 일어났을 거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복수를 위해 너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을 뿐. 내가 이렇게 되니까 괴롭지?’
눈을 감고 눈꺼풀을 꾹 누른 램파드는 물을 가지고 올 시종이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진정시켰다.
***
황성 인근에 있는 콘테 공작의 저택. 대대로 황가 다음의 권력을 가졌던 명문가의 위상을 뽐내듯 저택의 규모도 상당했다. 손님을 맞는 용도로 사용되는 넓은 응접실에서 세 명의 사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택의 주인인 커틀러는 긴 다리를 꼬아 앉고 상대를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맞은편에 앉은 캐더릭 자작은 긴장했는지 손수건으로 손바닥의 땀을 연신 닦는 중이었다. 자그마한 말실수라도 하는 날에 가문 전체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단어 선택에도 심혈을 기울이느라 땀이 절로 났다.
캐더릭 자작의 왼편에 앉은 릴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기대에 잔뜩 차 있었다.
“릴, 지금부터는 콘테 공작님과 단둘이서 대화를 나눠야겠구나. 나가 보렴.”
“예, 알겠습니다.”
캐더릭 자작은 손바닥을 닦던 손수건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낮추고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젯밤 릴이 막무가내로 콘테 공작가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 아이는 오메가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히 키워 저 모양입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캐더릭도 귀족 가문일 텐데 놀랍도록 버릇이 없더군.”
표정 변화도 없는 커틀러의 눈빛에, 숨이 막힐 정도로 싸한 향으로 목구멍이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기사단 본부에서 회의하는 중 저택에서 긴급한 연락이 오더군. 모든 결정을 다음으로 미루고 급하게 돌아왔건만, 흔해 빠진 오메가 때문이라니. 기가 차서 그대로 캐더릭 가문 일원 전부를 소집할까 생각했다.”
캐더릭 자작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오메가가 기사단의 일을 방해한 건 큰 죄였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부디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커틀러는 긴 손가락을 깍지 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램파드가 릴을 소개한 의도는 매우 뻔했다. 릴에게 각인하고 떨어지라는 명확한 의도로 춤을 권했음에도 받아들인 것은 단순히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궁지에 몰린 애쉬가 일을 치르기엔 건국기념일 축제 기간이 제격이다. 밤새 램파드가 점지해 준 오메가와 함께 있었다는 건 최고의 구실 거리가 되어 줄 터. 축제 첫날에 일을 치를지는 몰랐지만, 릴이 변호해 준 덕분에 램파드는 커틀러를 더 추궁하지 못했다.
하지만 감히 자작 가문의 오메가가 적극적으로 구애에 나설 줄이야. 크나큰 오산이었다.
“캐더릭 자작을 한번 만나 볼 생각이었으니 마침 잘되었군. 릴을 콘테 가문에게 팔아라.”
“혼인을 치르실 생각입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캐더릭 자작을 바라보던 커틀러가 웃었다. 낮게 큭큭대는 커틀러의 목소리를 듣는 캐더릭 자작은 다시 한번 입을 꾹 다물고 긴장에 휩쓸렸다.
“콘테 가가 들고 있는 서북부의 땅 일부를 넘겨줄 테니 릴에게 모든 관심을 끊도록 해라.”
자작 가문의 계승권도 가지지 못하는 오메가를 사서 무엇을 하실 생각입니까. 물어봐야 하지만 전신을 마구 짓누르는 듯한 고압적인 시선에 짧은 한마디를 내뱉지 못했다. 캐더릭 자작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땅을 받고 없는 자식인 셈치든지, 릴을 변호하다 가문이 멸문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커틀러가 가족의 정 때문에 고민하는 자작을 향해 다시 한번 못 박았다.
“저 나이가 되도록 혼인 상대도 찾지 못한 오메가의 값치곤 비싸게 쳐주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당주라면 얄팍한 정이 아닌, 가문 전체를 살펴야 할 텐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결정을 이만 내려라.”
“…콘테 공작님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서는 집사가 작성해 줄 것이다. 이 방에서 나가는 대로 릴에 관한 건 모두 잊도록 해라.”
커틀러의 손짓에 방 한구석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던 늙은 집사가 다가와 캐더릭 자작을 이끌었다. 자작은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옆방으로 이동하기 전, 용기를 내 커틀러에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들의 얼굴을 봐도 되겠습니까.”
“불허하지. 내 저택에 외부인을 들이는 건 썩 좋아하지 않으니 얼른 나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캐더릭 자작은 릴과 서북부의 땅 일부를 교환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사라졌다. 자작을 태운 쌍두마차가 요란스러운 말발굽 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근처 다른 방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던 릴이 커틀러를 찾아왔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건 타고난 재능인 모양이었다. 심기 불편한 커틀러 덕분에 저택의 모두가 긴장했는데, 단 두 사람만이 평소처럼 행동했다.
“커틀러 님, 아버지는 돌아가셨나요?”
귀찮아진 커틀러의 손짓에 집사가 흠잡을 것 없는 깍듯한 예의를 갖추며 릴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앞으로 콘테 저택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쪽으로.”
집사의 말뜻을 좋게 해석한 릴이 활짝 웃으며 커틀러에게 인사하고 사라졌다. 제 아비가 저를 판 것도 모르고, 콘테 부인이 되기 위해 신부 수업을 하라며 내버려 뒀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응접실이 조용해지자 커틀러의 아버지인 전 공작이 찾아왔다.
“서부 지역에 간 이후로 저택에 발을 들이지 않더니 오랜만이구나. 몇 주 만에 저택을 찾다니 그렇게 집이 싫어진 게냐.”
“급환이 생겼다는 연락에 찾아왔을 뿐입니다. 정리를 끝냈으니 곧바로 황궁으로 돌아갈 겁니다.”
“내 편지는 무시하더니, 어머니는 걱정되나 보구나. 너를 낳은 건 나와 잔트의 합작인데, 왜 한쪽만 챙기는 거냐. 섭섭하구나.”
콘테 저택에서 올 예상 가능한 급환은 한 명뿐이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기사단 회의가 우선이었겠지만 램파드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이 걱정돼 달려온 건 사실이었다.
“아버지, 다음부터 용건은 정확히 써서 보내 주시지요. 급환이 아니라 새벽이슬을 맞아 잔기침할 뿐이지 않습니까.”
커틀러는 자신과 정반대로 짙은 색상의 머리, 눈 색을 가진 아버지를 바라봤다. 담배를 문 콘테 전 공작은 아들을 무심히 바라봤다. 닮은꼴 하나 없지만 감정 없는 눈매만큼은 같았다.
“잔트는 공기 좋은 남부 지방의 별장에 휴양 차 떠났다. 걱정되면 만나러 가 보거라.”
“됐습니다.”
커틀러의 무뚝뚝함에 익숙한 콘테 전 공작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자리에 앉았다. 가문의 주인은 오래전 바뀌었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 자리를 지켰다.
“이름도 모를 오메가와 엮인다는 소문만 무성하더니, 실제로 데리고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앞으로 손주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구나.”
콘테 전 공작의 말에 커틀러가 피식 웃었다. 아이를 만들긴 할 거지만 방금 거래한 오메가의 몸에서 받을 건 아니었다. 사실대로 실토하면 아버지가 길이길이 날뛰며 시끄러워질 테니까 착각하라 놔뒀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물던 담배를 손가락에 낀 콘테 전 공작이 섭섭한 투로 말했다.
“한 개비를 채 피우지도 않았는데 일어나는 거냐.”
“회의를 급작스럽게 중단시키는 바람에 일이 쌓여 있습니다. 기사단 건물을 오래 비울 수 없습니다.”
“계획 없이 급하게 꾸린 기사단 같은 건 슬슬 관둘 때가 되지 않았느냐.”
“아무리 아버지라고 하셔도 제 일에 간섭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커틀러를 저렇게 교육한 것은 콘테 전 공작이었다. 그는 아들의 살기 가득한 협박을 호탕하게 웃으며 넘겼다.
“그래, 콘테 가문을 너에게 물려준 순간부터 나에게 선택권이란 없는 게지. 알겠다.”
미리 지시한 대로 릴을 다른 방에 가둬 놓은 집사가 돌아왔다. 커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집사는 채비를 돕기 위해 코트와 장신구를 꺼냈다. 다른 사람은 쉽게 소화하지 못할 은색의 옷에 연보랏빛 자수가 입혀진 화려한 코트였다.
아들의 채비를 지켜보던 콘테 전 공작이 능글맞게 웃었다.
“지금 저 도련님은 너에게 푹 빠진 것 같다만 조심하거라. 오메가는 임신한 순간부터 들짐승처럼 사나워지거든.”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십니까.”
“그래, 잔트도 너를 가졌을 때 어찌나 사나웠는지. 처음 몇 달간은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버티더니, 그다음은 굶을 때 받은 스트레스를 나에게 죄다 풀더구나.”
콘테 전 공작은 자신의 볼을 톡톡 쳤다. 평생 재무 대신으로 일하며 날붙이랑은 연관 없을 아버지의 볼에는 기다란 칼자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관심조차 생기지 않아 연유를 묻지 않았는데, 검술에 능숙한 어머니와 다투다 생긴 상처였다.
연애는 행복했고 신혼은 달콤했건만, 임신을 기점으로 두 부부는 금이 갔다. 아무리 오해였다고 하나 화가 난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의 손은 검을 쥐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각인마저 깨졌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콘테 전 공작이 힘껏 사랑해 주었지만 소중한 것을 잃은 오메가의 마음을 메꾸기란 힘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1차 각인 상대였다. 아직 두 번째 기회가 남아 있다고 하지마는 둘 사이는 영원히 이어지지 못할 듯하다.
“그래서 저에게 하실 말씀이 뭡니까.”
“그 당시의 나와 잔트는 임신 사실을 몰랐지. 미리 알았더라면 이해했을 텐데, 무지한 나는 잔트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어.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니까, 너는 미리 알아 두거라.”
“명심하죠.”
그리 말했지만, 커틀러의 생각은 달랐다.
날개를 꺾은 덕분에 누구보다 뛰어난 오메가가 도망가지 않는 거니까. 파닥거리는 모습이 어여뻐 내버려 뒀지만 도망가겠다면 꺾는 것도 불사해야지.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램파드의 마음이 온전히 애쉬의 손에 넘어가기 전, 부서뜨리는 것이 타당했다.
아버지와 대화를 끝낸 커틀러는 곧바로 황궁으로 출발했다. 기사단 건물로 돌아가 회의를 마저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계획을 변경해 본궁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커틀러는 램파드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단순히 새로운 각인 상대인 애쉬에게 관심이 생긴 줄 알았는데, 몇 가지 조화롭지 못한 점이 눈에 띄었다. 억제제를 오랜 시간 복용하지 않은 것. 화를 내던 램파드가 배를 감싸며 괴로워한 모습도 신경 쓰였다.
램파드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도 눈감아 줬다. 하지만 다른 알파의 아이를 낳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램파드의 배 속에 자리 잡은 종기 같은 것에 절로 불쾌해졌다. 램파드에게 무슨 짓을 해도 각인은 절대 풀리지 않을 테니까, 애쉬의 아이라면 악독한 수를 써서라도 지워 버리리라.
***
없던 일까지 만들어 바쁘게 살아가자 날짜 같은 건 금방 지나갔다.
한계 이상의 일을 해결한 램파드 덕분에 대신들도 덩달아 피곤함에 찌들었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의미로 황궁을 개방해 무도회를 주최했다. 숨 가쁘게 일해 준 덕분에 새고 있는 세금을 정리했고 결과적으로 제국의 국력이 향상되었으니 인정할 만했다.
홀을 내어 준 램파드는 집무실에서 시종과 이야기를 나눴다. 창관을 조사하러 떠난 시종이 일주일을 채우지 않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제국력까지 특정 지어 줬으니 조사에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조건에 부합하는 창부는 단 한 명뿐입니다.”
“창부의 이름은 루사겠지.”
보고서에 적힌 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대답하는 램파드 덕분에 시종이 긴장했다. 사뭇 놀란 듯하지만 바로 표정을 정돈하고 보고를 이어 갔다.
“이미 아셨군요. 다만 조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애쉬의 전 약혼자가 대번포드 백작과 연관이 되었을 거란 것은 가설이었다. 사실을 확정 짓기 위해 조사를 보낸 것이었으며 예상이 맞아떨어졌으니 루사에 대해 알아야 했다.
“말해 보아라.”
“폐하께서 아시는 대로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루사를 산 것은 대번포드 백작입니다. 루사에게서 본 아이를 백작 가문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불임이라던 정부인의 임신 사실을 알고 폐기를 의뢰했습니다.”
“백작의 의사와 달리 아이는 태어났군. 창관에서 의도로 숨긴 건가?”
창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백작 가문의 계승권을 가진 아이였다. 언젠가 이용하기 위해 창관에서 아이를 숨겼을지도 모른다.
“함께 일한 창부를 찾아 물어보니 창관에서는 유산시키려 애를 쓴 모양입니다. 하지만 달이 채워졌고, 아이는 죽은 채 태어났다고 합니다.”
“확인은 한 건가.”
“예. 갓 태어난 아이의 시신은 백작과 창관의 관리인이 직접 확인했답니다.”
여기서 끝났더라면 대번포드 백작이 애쉬를 노렸을 리가 없었다. 램파드는 죽기 전 자신에게 거래를 요청한 오메가를 떠올렸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애쉬를 살리기 위해 제안을 할 정도였다.
“조사한 창관 근처의 고아원은 알아보았느냐.”
“네. 루사의 아이가 죽었을 때, 창관에 있던 다른 오메가가 함께 출산했고 그 아이가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아이에 대한 정보는 알아 왔는가.”
“혹시 몰라 알아봤습니다.”
램파드는 시종이 건넨 아이에 관한 보고서를 받았다. 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열두 살까지 고아원에서 지냈다가 야밤에 도망쳤고, 소식이 끊어졌다는 짧은 보고서였다.
“석연치 않은 점은 무엇이냐.”
“루사라는 오메가가 특이하더군요. 남부 지방에 오기 전까지 창관만 여덟 번을 옮겨 다녔습니다. 제국을 여러 번 횡단할 정도로 아무런 규칙 없이 이동했으며 이름도 매번 바뀌었습니다.”
오메가 창부는 한번 들어간 창관에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이사하는 자가 있긴 하지만 여덟 번이라니. 확실히 숫자가 많았다. 시종이 건네준 이동 경로를 보건대, 한곳에서 며칠 이상 머무르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를 자주 이동했다.
“가장 처음 이름을 올린 기적은 알아 왔겠지.”
“알아봤지마는 루사가 가장 처음 몸을 담은 창관의 정보를 열람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집안에서 창관으로 보냈는지, 신분은 무엇이었는지. 본명까지도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짐의 권한을 빌려 가지 않았느냐.”
“그게… 선대 황제께서 직접 봉한 기록이십니다.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봤지만, 루사에 대한 모든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램파드는 남은 보고서를 모두 건네받았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오메가 창부는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잘못된 정보로 기재되어 있다면 모르겠지만 열람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했다니. 대체 그 창부가 무엇이었기에 황제가 손수 나서 자물쇠를 채웠는지. 그럴 리 없는 작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하도 허망해 기억에 남지 못하도록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보고서를 읽던 램파드의 시선이 책상 너머 시종의 다리에 향했다. 그의 발꿈치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얼른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그의 발꿈치가 얌전히 땅바닥에 닿았고, 얼굴이 붉어졌다.
대신들이 밤낮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은 시종이었다. 그들 또한 제국을 위했으니 특별히 시종 구획 홀을 모조리 개방하여 놀 수 있도록 허락했다. 무도회 준비를 끝낸 시종 구획도 파티가 한창이라 당장에라도 참여하고 싶으리라.
“나머지는 짐이 직접 검토할 터이니 이만 가 보거라.”
“아닙니다. 폐하께서 검토를 끝내실 때까지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램파드는 두꺼운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긴장한 시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조용히 쉬고 싶어 물러나라고 하는 거다. 필요하면 호출할 터이니 가거라.”
“시종장 한스 님도 자리를 비웠으니 제가 폐하의 곁을 지켜야 합니다.”
“한스는 한 시간 뒤에 돌아올 거다.”
“그렇지만 저… 아닙니다……. 감사드립니다.”
표정 관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시종의 뒷모습을 확인한 램파드는 보고서를 들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애써 유지했던 마음이 풀어지자 램파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시종이 조사한 보고서를 몇 번이나 읽어 내렸다. 이미 내용은 다 외울 지경이지만 낯설게 느껴졌다. 중요한 값이 빠진 보고서에 램파드의 어림짐작을 넣으면 정답이 나온다. 선대 황제가 창부를 통해 램파드가 모르는 형제를 만들었든가. 루사라는 창부의 본래 이름이 루트비안이든가.
하지만 두 가지 경우 모두 큰 오류가 발생한다. 부황은 베타였기에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없었으며, 램파드의 형은 이미 오래전 죽은 사람이었다.
램파드는 고개를 여러 번 흔들며 형의 이름을 애써 지웠다. 그는 창관에 보내진 지 1년이 채 안 돼 죽었다. 형일 리가 없었다. 루사가 형이라면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거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가슴을 옥좼다. 사랑해 마지않았던 가족, 램파드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고 기꺼이 내줬던 형. 그런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니. 그를 죽여 놓고 자리를 차지한 거라면 램파드는 자신을 쉽게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램파드는 부황이 뒤늦게 알파로 발현한 가능성을 믿고팠다.
본궁 내 위치한 무도회 홀에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램파드는 차가운 밤공기에 섞인 빠른 박자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기 위해 창문을 열었고, 찬 공기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차가운 밤공기는 임신한 몸에 좋지 않습니다.”
보고서를 쥐고 있던 램파드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간마저 멈춘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덕분에 시간이 흐르고 있단 걸 알았다.
“하나 확인해 보죠. 애쉬의 씨입니까. 아니면 제가 모르는 다른 알파의 씨입니까.”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램파드가 목소리를 정돈했다.
“네놈은 헛소리만 느는군.”
램파드는 유리창에 비친 커틀러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야윈 몸이 보여 주는 환각이길 바라며 감은 눈을 떴지만,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섰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봐야겠죠.”
“의사도 아닌 네놈이 뭘 어떻게 확인한단 말이냐.”
“폐하의 말대로 의사가 아닌 저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 유산시켜 확인하는 수밖에 없지요.”
커틀러가 가까이 다가왔고 램파드의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키와 체구의 차이가 없어 시선이 늘 같았었는데, 한 달 이상 시달리며 수척해진 덕분에 커틀러가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지하 감옥으로 따라오십시오.”
“거절하지!”
“여기서 발정제를 마셨다간 폐하께서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지하 감옥으로 가시지요.”
“거절한다고 하지 않았냐!”
커틀러가 손을 올렸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일었고, 램파드가 들고 있던 보고서는 공중에 흩어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거부하니까 손을 쓰고 말았지 않습니까. 부디 얌전히 따라 주십시오.”
“하… 이 미친 새끼가!”
램파드는 주저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램파드가 내지른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힘을 줘 밀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렇게 힘이 다 빠져서야. 황제 자리를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침대 위에서 몇 시간 버티지도 못하겠군요.”
“이제 너에게 대 줄 마음 없어! 아읏!”
램파드의 움직임을 봉쇄한 그가 무릎으로 가슴을 찍었다. 큰 충격을 받은 램파드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일어나기 위해 팔에 힘을 줬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조금만 움직여도 속이 울렁거려 꼼짝달싹하지 못해 가슴을 감쌌다.
“폐하의 의사 따위 관심 없습니다. 일단 배 속의 걸 빼내고 대신 제 것으로 채워 넣어 드리죠.”
이 등신 같은 놈이. 제 새끼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착각에 눈이 뒤집힌 모양이었다.
반격해야 하는데, 가슴을 강하게 맞은 통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가슴을 감싸며 심호흡하는 램파드를 뒤로한 커틀러가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몇 개 들어 올렸다.
“대번포드 백작을 조사하고 계신 겁니까. 이건 제 일인 걸요.”
“…….”
“당신을 위해 하는 말입니다. 대번포드 백작에게서 손 떼십시오.”
“이제… 너에게 의지하지 않아…….”
숨을 가다듬은 램파드가 바닥에 양손을 딛고 꾸역꾸역 일어나려고 했지만, 커틀러가 등을 꾹 밟아 눌렀다.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점점 힘을 가했다.
“큿!”
짓누르는 힘 때문에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램파드의 몸 전체가 후들거렸다.
“제가 아니라면 옆방에 누워 있는 반시체에게 의지할 생각입니까?”
“더러운 입에 애쉬를… 올리지 마!”
“아직도 그를 두둔하다니 폐하답지 않게 멍청하시군요. 여기까지 도달했으면서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루사의 아이는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짓누르던 힘이 없어졌고, 램파드는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애썼다. 커틀러는 호흡이 거친 램파드를 내려다봤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폐하께서 모르는 사실을 하나 더 말해 드리죠. 그 아이는 알파로 발현했습니다. 이제 폐하께 큰 위협이 되겠죠.”
루사가 낳은 아이가 형제든 조카든, 황위 계승권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도 램파드의 권위에 도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설령 알파라 하여도 황위 찬탈에 쉽게 도전하긴 힘들다. 램파드가 정말 베타였다면 아무런 걱정 없었겠지. 오메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국을 부강하게 가꿔 제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건 베타 황제였다. 알파 황자가 나타난다고 한들 견고한 뒷받침을 무너뜨리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오메가란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업적을 쌓은 램파드보다 무능력한 어린아이를 선택할 테지. 사람들은 오메가가 정상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램파드를 지워 버리기 위해 거리낌 없이 적의를 내보일 터.
“대번포드 백작의 입김이 들어간 이상 어린 황족은 어떻게든 폐하께 위협이 되겠지요. 애쉬 테일러는 폐하가 오메가란 사실을 알면서 알파로 발현한 황족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겁니다.”
커틀러의 말이 사실이기에 반박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거기다가 대번포드 백작이 겁도 없이 황궁에 입궁하는 걸 보면 폐하가 오메가란 사실까지 밝혔을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말대로였다. 루사의 아이가 황실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제대로 파악한 애쉬는 큰 위협을 램파드의 코앞까지 대령한 거였다. 게다가 말할 기회가 무수히 많았는데, 그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마음이 이어졌다고 생각한 것 모두가 램파드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램파드에게 남긴 편지조차 루사의 복수를 위한다고 쓰여 있었으니까. 마음을 얻어 놓고 눈앞에서 죽음을 자초하다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건 분명했다.
“혈육을 죽일 자신이 있으십니까?”
램파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루트비안을 위해 황제의 자리를 버텼건만 만약 그의 아이라면 어찌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당장 기억 안 나는 전쟁터에서 만난 오메가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지니까.
“저는 할 수 있습니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제 가족의 목을 손수 벨 수 있거든요.”
커틀러는 떨어진 서류를 모조리 주워 하나씩 잘게 찢었다. 이미 램파드의 머릿속에 모든 글씨가 남아 있건만 잊으라고 강요했다.
“제 선에서 해결하겠으니 보고서는 기억에서 지우십시오.”
“…….”
“대신 배 속의 아이를 지워요. 한두 달 정도 됐다면 쉽게 지울 수 있으니까.”
억지로 일어났던 램파드는 벽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눈을 뜨지 못하는 애쉬 덕분에 엉망이 된 몸과 마음은 이제 한계였다. 걷어차인 가슴은 물론 배까지 아파져 몸을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순응하기엔 램파드의 심지는 굳건했다.
“다 안다는 듯이 떠들더니……. 5개월이 됐다. 멍청한 새끼!”
램파드의 외침에 커틀러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저놈이라면 제대로 확인할 때까지 램파드의 말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거짓말까지 해서 애쉬의 아이를 지키고 싶은 겁니까.”
“……거짓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커틀러에게 대들어 봤자 제압당하는 걸 잘 아는 몸은 얌전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니 그간 축적된 울분이 몸속을 메우다 못해 넘쳐흘러 터져 나왔다.
“네놈의 아이였단 걸 알았으면 시키지 않아도 진즉에 지워 버렸을 거다. 하… 씹. 안에다 싸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나. 피임제라도 먹어 달라니까 제멋대로 싸지른 건 네놈이지 않냐! 그래놓고 인제 와서 남의 아이라고 걷어차기나 하다니. 낳는 건 해 줄 테니 책임은 네가 져. 후계자로 키우든 노예로 팔아먹든 알아서 하라고! 더러운 새끼, 아!”
악을 쓴 덕분에 배가 아팠다. 말을 쏟아 내도 축적된 울분의 절반도 빠지지 않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램파드는 거친 숨결을 쉬며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이렇게 소리 질렀는데 커틀러는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몸이 야위어 검을 들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애쉬가 눈뜰 때까지 그저 시간에 몸을 맡겨 흘러가고 싶기만 했는데 검을 놓은 것이 엄청나게 후회됐다. 몸이 성했으면 당장 앞니를 부러뜨릴 정도로 휘두르는 건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아 답답할 따름이었다.
“폐하의 말씀을 보아하니 임신은 확실하군요. 지하 감옥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네요.”
“끝까지 제멋대로 듣고 싶은 부분만 골라 듣는군!”
날카롭게 갈아 낸 듯한 시선으로 쏘아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커틀러는 벽에 기대 도망갈 곳이 없는 램파드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제멋대로 구는 건 폐하 쪽이지 않습니까.”
“그런 적 없어!”
커틀러가 가까이 다가오자 램파드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는 구겨진 램파드의 눈가 사이를 검지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사실 폐하도 잘 알고 계셨죠. 처음부터 피임제를 먹고 저에게 부탁하면 될 일이었단 거. 그런데도 다른 남자를 찾아 다리를 벌리기에 이때껏 눈감아 줬습니다.”
“…….”
“스스로 남자를 찾아 안기고선 뭐가 그리 부족한지 매번 정액을 품은 채 저를 찾아 도발하셨죠. 마치 도발에 넘어간 제가 당신을 탐하길 바라는 것같이.”
눈가에 있는 커틀러의 손이 어깨로 내려갔다. 긴장한 램파드의 근육은 그의 손길에 평온을 찾으며 풀어졌다.
“원하는 대로 해 주었건만 대용품을 찾았다고 절 서부 지역으로 내쫓았지 않습니까. 애쉬를 찾아 놓고선 저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말이지요.”
“그만큼 너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거다!”
“쿠와트 숲의 건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몇 번이나!”
그는 램파드와 똑같이 소리를 지르며 어깨가 으스러질 듯 강하게 쥐었다.
“읏!”
램파드가 짧은 신음을 흘리자 어깨에 있는 손을 허리로 내렸다.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뭐, 덩치만 커다란 사내를 황후로 삼는다는 소릴 하지 않나. 마음에도 없는 상대를 들이밀지 않나. 당신의 어리광을 계속 받아 줬지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건 용납 못 해요. 당장 당신의 배를 찔러 버릴 정도로 불쾌해집니다.”
커틀러의 살기에 램파드의 숨이 불규칙해졌다. 그의 손이 배 위에 올라왔고, 이대로 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았다.
“네놈의 아이라고!”
“10년 넘게 제멋대로 군 상대의 말을 쉽게 믿을 것 같습니까?”
그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고, 살기를 머금었다. 램파드의 심장이 더욱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습니다. 누구의 아이입니까.”
“네 아이다…….”
길게 한숨을 내뱉은 커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램파드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따라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책임지지요.”
“그래. 알아먹었으면 낳는 대로 데리고 사라져.”
“일단 몸부터 숨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이 맞지마는 램파드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지금 현재의 문제를 파악한 커틀러가 계획을 설명했다.
“몇 달간 요양을 떠나겠다고 발표하십시오. 지금 폐하의 몸이 좋지 않으니 대신들이 이해할 겁니다. 폐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끽해야 반년. 콘테 가문의 집사를 붙여 드릴 테니 필요한 보고는 모두 서신으로 받으십시오. 실력을 우선시하며 근본 없는 자로 뽑아 둔 황궁에 비해 오랜 세월 저희 가문을 위해 일한 자들이라 뒤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하는 제안이지만 내키지 않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다시 커틀러의 입 안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는 램파드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이어 갔다.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께서 남부 지방의 콘테 가문 별장에 계십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지내십시오. 필요한 건 모두 조달해 드리겠습니다.”
“……애쉬를 두고 떠날 수 없어.”
“폐하, 그는 폐하를 배신한 무뢰한입니다.”
“애쉬한테서 직접 들을 때까지 믿지 않아.”
애쉬의 페로몬 향은 끝내 변하지 않았다. 램파드와 함께 있을 때보다 루사의 환각을 마주할 때의 페로몬이 훨씬 더 달콤했다. 감미로운 향이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향이었으면. 그렇게나 원했지만, 평생 곁에 둬 봤자 변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애쉬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어도 상관없다. 잠에서 깨어났으면, 적어도 그의 마지막 말을 편지가 아닌 직접 듣고 싶었다.
“저는 믿지 않았으면서, 그자는 모든 패가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는군요.”
굽힐 생각 없는 램파드를 바라보던 커틀러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를 좋아하니까 믿는 거다.”
“그 마음이 착각이라는 겁니다. 진정 제 입으로 모든 걸 말해 드려야 되겠습니까. 말해 봤자 믿지도 않으실 테지만.”
“겁쟁이 같긴, 할 말이 있으면 해!”
아주 살짝 힘을 줬을 뿐인데 쇠약해진 램파드의 몸은 커틀러에게 쉽게 끌려갔다. 그는 다가온 램파드를 끌어안고 갈무리했던 페로몬을 흘려보냈다. 애쉬의 향을 잊을 정도로 강하고 짙은 향을 느끼자 이내 마음이 충족됐다. 애쉬 같은 건 잊어버리고 이대로 모든 걸 맡기고 싶을 지경이었다. 램파드는 이런 자기 자신이 싫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기 위해 타고난 형질을 인정했다. 원망해 봤자 변하는 것은 없으니 순응하고, 살아갈 방도를 찾았건만. 커틀러의 향에 따뜻한 피가 돌며 두근거리는 심장이 혐오스럽다. 어째서 그의 향은 이렇게나 감미롭게 느껴지는지. 낯설 정도로 혼자 설레는 몸이 타인의 것만 같았다.
“제 향을 맡을 때 무엇을 하고 싶었습니까.”
증오하는 상대의 향에 쉽게 취하는 오메가의 몸이 역겹게 느껴졌다. 각인은 저주였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한쪽의 죽음뿐. 당장 눈앞의 알파가 사라져 준다면 애쉬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널 죽이고 난 후 나도 죽고 싶어.”
“내린 결론이 그것입니까.”
“그래. 커틀러, 날 위해 죽어 줄 수 있냐. 너에게 해방되고 싶어. 네가 없는 세상에 1초라도 있고 싶단 말이다.”
“아뇨. 죽는다면 폐하부터 가셔야 합니다.”
주저 없이 답하는 커틀러에게서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램파드는 그를 향해 비웃었다.
“그래, 이런 건 또 솔직하지.”
“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보다 오래 살 겁니다.”
“내 마음은 난도질해 놓고, 너의 목숨은 소중하다, 이거지. 어련하시겠어. 귀하디귀한 우성 알파니까 타인이 얼마나 하찮겠어!”
얼마 소리치지 않았는데 지친 램파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커틀러가 램파드를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혔다. 램파드를 앉힌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램파드 앞에 앉았다.
그의 페로몬을 맡았기 때문인지 발로 차 쓰러뜨리고 싶은 욕구와 알파를 원하는 마음이 싸우느라 머리까지 아파졌다. 램파드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제가 죽길 바라시는 겁니까.”
“그래……. 날 놓지 못하겠으면 죽어. 제발!”
네가 없었으면 좋겠어.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내뱉었지만, 커틀러는 동요하지 않았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은 견고했다. 단단했던 램파드의 심지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이 보이니까. 사실상 태연한 척하는 거였다.
“저마저 떠나면 세상을 어찌 살아가실 겁니까.”
“네놈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생각하는 건 오만이지 않냐.”
“램파드 폐하, 제가 곁에 없고, 애쉬마저 영영 눈뜨지 않는다면 혼자서 살아가야 합니다.”
커틀러마저 사라진다면 램파드가 오메가란 사실을 아는 이가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혼자서 베타인 척하며 세상을 속이며 살아가야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쉽게 내뱉지 못하는 건 걸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기에.
“임신한 동안은 괜찮겠죠. 출산 후 억제제는 어떻게 구하실 겁니까. 오메가의 몸으로 황좌를 차지했단 사실이 밝혀지면 대신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전쟁이 끝나는 대로 알파 세력을 꺾은 오메가인 당신을 온전히 둘 것 같습니까? 당신을 폐위시키고 이름을 전부 지워 버리려 노력할 겁니다.”
램파드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얇은 입술이 터지고 붉은 흉이 졌다. 그는 손을 뻗어 램파드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선대 황제가 돌아가신 날, 왕국군이 국경을 밟았을 때. 당신은 제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사실을 밝히고, 후사를 낳는 일에만 집중했다면 이렇게 괴로울 일도 없었겠죠.”
램파드의 해방은 뜻밖에 찾아왔다.
긴 감기를 앓던 아버지가 갑자기 눈을 감았을 때, 저주에서 풀려난 램파드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알파 귀족을 선택해 정치에서 물러났다면 램파드가 짊어져야 할 건 없었을 거다.
편한 길을 버리고, 황금관을 쓴 건 램파드의 결정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제국이 승리하기 위해선 램파드가 필요했다. 오메가란 사실을 밝히면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으니까. 제국을 지키기 위해, 형을 기리기 위해. 그리고 또 스스로의 다짐을 이루고 싶어 황제가 되었다.
“……그래. 그랬다면 아무 걱정 없이 황후궁에 앉아 아이나 돌보며 하루를 보냈겠지.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너와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도 않았을 테고. 각인한 알파가 곁에 있으니 평생 아무런 두려움을 갖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절대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애쉬를 선택한 것도!”
자리에서 일어난 커틀러가 램파드의 책상 위에 있는 쪽지를 꺼내 짧은 글을 적어 내렸다. 무언갈 써 내려가던 커틀러가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 저 스스로 각오를 다졌습니다. 1초라도 더, 폐하보다 늦게 죽으리라는 걸요.”
램파드는 처음 듣는 커틀러의 음성에 그를 바라보고 싶지 않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을 혼자 세상에 버려 두고 먼저 떠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알파를 찾으셨으니 이제 제가 필요 없겠군요.”
이번만큼은 커틀러가 진심을 내뱉었단 게 느껴졌다. 램파드는 고개를 떨구고, 그가 내민 쪽지를 바라봤다. 남부 지방에 소속된 지역명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곳에 계십니다. 정리를 끝마치는 대로 애쉬를 데리고 함께 떠나십시오.”
뜻밖의 대답에 램파드는 커틀러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라면 걸림돌일 뿐인 애쉬를 버리라고 할 게 분명했으니까. 커틀러는 잔뜩 경계 어린 램파드의 표정을 흘끗 바라봤다.
“어머니의 취미는 약제술입니다. 혹시 그자를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르죠.”
“네놈은 애쉬가 죽길 바라는 것이 아니냐.”
“이제 됐습니다.”
그는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로, 잠깐 뜸을 들였다.
“…황궁의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 폐하께선 하루라도 빨리 떠나십시오. 어머니께 연락은 곧바로 보내겠습니다.”
“황궁의 일을 네가 정리한다고? 무엇을?”
“황위 계승권을 가진 아이와 대번포드 백작은 제가 맡겠습니다.”
“대번포드 백작의 일은 내가 직접 해결할거다.”
“안 됩니다.”
“내 일이야.”
굽히지 않는 두 사람 덕분에 주변 공기가 팽팽해진 것 같았다. 의외로 먼저 기세가 꺾인 건 커틀러 쪽이었다. 그는 얇게 벌린 입 틈으로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끝까지 고집은……. 알겠습니다. 대신 대번포드 백작을 만날 땐 제 곁에만 계십시오.”
램파드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커틀러가 깍듯한 자세로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