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건국기념일
처음 계획과 달리 램파드는 거의 해가 진 늦은 밤에 화이트 궁을 찾았다.
그는 밀러와 함께 제국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었다. 램파드를 발견한 애쉬는 여러 명의 시종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제국의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램파드는 애쉬의 근처에 놓인 푹신한 쿠션 더미에 시선이 갔다. 부드러운 털 뭉치를 바라보니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고, 파묻히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애쉬는 피곤함에 찌든 듯한 램파드의 모습에 밀러를 포함한 시종을 모조리 물러가게 만들었다.
“간밤이 두렵지 않았느냐.”
“로열 가드를 여섯이나 붙여 줬는데 두려울 리가 없지. 아주 푹 잘 잤어.”
“다행이군.”
램파드는 손을 뻗어 애쉬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태연한 척 하는 겉과 달리 그의 눈가는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모양이었다.
“황궁 안에서 목숨이 위협당할 일은 더는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래…….”
여전히 그는 수심이 가득했다. 램파드는 애쉬를 뒤덮은 그림자를 하루라도 빨리 걷고 싶어졌다.
“누가 너를 노리는지 아직도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이냐.”
“……모르겠어.”
“그래. 내가 알아볼 테니까 몰라도 된다.”
램파드는 애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짙은 그림자가 진 눈 아래에서 천천히 귀 쪽으로 이동했다. 전쟁 때 얻은 가느다란 상처는 희미해졌지만, 신경이 쓰여 여러 번 만지작거렸다.
“큰일을 겪었지만 혼인식은 계획대로 진행할 것이다. 곧 있을 건국기념일에 치르도록 하지.”
“혼인식은 결국 진행하는 건가?”
“내가 바깥에 나가 아이를 낳기 위해서라도 해야지. 왜, 싫으냐?”
“싫은 건 아니지만.”
“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라. 혼인을 올리기 전 작위라도 하나 내려 줄까?”
“귀족 작위라는 거, 그렇게 손쉽게 막 줘도 되는 거야?”
“나라면 못할 것도 없지. 백작이든, 자작이든. 그게 아니면 사치를 해 보고 싶은 건가… 읏!”
램파드는 갑자기 찾아온 통증에 배를 감쌌다. 손길을 즐기던 애쉬는 램파드의 신음에 깜짝 놀랐고, 그를 근처 쿠션 더미로 이끌었다. 푹신한 쿠션 더미에 누운 램파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마른 수건을 챙겨 온 애쉬가 땀을 닦아 주며 걱정스레 내려다봤다.
“배가 아픈 건가? 진찰은 받아 본 적 없지?”
“…진찰을 어떻게 받겠냐.”
아침에 커틀러와의 관계 때문인가. 그 자식의 뻔뻔한 행동을 생각하면 짜증이 솟구쳐 머리가 과열되는 느낌이었고, 배가 더 아파졌다.
안절부절못하고 몸을 들썩이던 애쉬가 주변을 살폈다. 램파드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건 없기에 찾는 것을 관두고 곁에 앉아 자리를 지켰다.
“진찰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면 밖에 나가 처방을 받아 올 테니까 형질을 알려 줘.”
“…….”
“램파드?”
우성인지 열성인지. 그게 아니면 그냥 평범한 오메가인지 답하면 되는데 램파드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의 의미를 깨달은 애쉬가 한 번 더 되물었다.
“설마 자신이 어떤 형질의 오메가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
“당연히…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겼으니 검사 또한 하지 않았다.”
“열성 오메가라면 아이를 낳다가 죽을지도 몰라.”
“그러냐.”
램파드는 본인의 일이지만 관심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오히려 애쉬 쪽이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누가 보면 애쉬가 임신을 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열성이 아니어도, 남자 오메가 중에서는 아이를 낳기 힘든 체질도 있지. 포궁 외 임신도 많이 되는 편이고.”
“그랬군.”
여전히 놀란 기색도 표하지 않기에 애쉬만 답답해졌다.
“합병증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검사는 한번 꼭 받아야 해. 이런 것도 모르는 황제께서는 용케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셨군.”
“하… 아이 같은 건 몸속에 넣고 있으면 때에 맞춰 나오는 게 아니냐. 정말 성가시군.”
애쉬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전투에 관해서는 혼자 둬도 백만 대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넘쳐 났는데, 임신에 관해서는 갓 입대한 수습 기사, 아니 그보다는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철부지 어린아이 같게 느껴졌다.
입은 덤덤했지만, 몸은 아픈지 램파드가 다시 쿠션에 파묻혔다. 숨을 내쉬며 꾸물거리는 램파드를 바라보던 애쉬가 입을 열었다.
“나 혼자 밖에 나가 봐도 될까?”
부드러운 쿠션에 파묻힌 램파드가 통증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빠르게 일어난 통에 아픈 머리가 찡 울려 양손으로 부여잡고 인상을 썼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은 살아 있어 시선으로 애쉬를 찌르는 것 같았다.
“암살 위협을 받은 놈이 혼자서 밖에 나간다고? 제정신인가.”
“너의 상태를 말하고 약이라도 받아 와야 할 거 같아.”
“필요 없어.”
“아니, 필요해.”
처음 보는 단호한 태도의 애쉬에 램파드는 순간 말문을 잊었다. 그의 기세에 눌린 것이 아닌, 키우던 강아지가 앞발로 물구나무 선 모습을 본 것처럼 어처구니없기 때문이었다.
램파드가 조용해지자 애쉬는 다시 평소와 같은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밝혔다.
“……외부 의사를 만날 거라 호위가 있어도 곤란해. 황제와 혼인할 내가 오메가를 살핀다는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당연하지. 그러니까 안 돼.”
“그러면 남들 몰래 함께 나가자. 진료도 한번 꼭 받아야 하니까.”
“……몰래라고?”
“한 번쯤 밖에 나가야 할 거 같아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
램파드가 눈썹을 크게 치켜떴다.
“내 눈을 피해 바깥에 나갈 생각을 한 거냐.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잠깐, 분명 함께라고 했어.”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올 게 분명했다. 맞기 싫은 애쉬가 냉큼 말을 정정해 그의 주먹이 뻗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하!”
짧은 한숨을 푹 내쉰 램파드가 가라앉지 않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애쉬를 노려봤다.
“밖에 나가 뭘 어쩐다는 거냐. 수도에는 귀족은 물론 서민 중에서도 내 얼굴을 아는 자가 많다.”
“생각이 있어. 한번 믿어 봐.”
램파드는 저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하는 애쉬가 못 미더웠다. 내키진 않지만 애쉬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임신 중 관계가 문제가 된 거라면 빨리 살펴보고 적절한 처치를 해야 했다.
역시 아무리 홧김이라고 하나 커틀러를 데려오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다시 내쫓을 수도 없고. 막막한 자신의 현실에 머리가 한층 더 아파졌다.
“아직도 많이 아파?”
애쉬가 걱정스레 물어봤다. 배는 괜찮아졌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이 한 행동이 고스란히 돌아온 거니 누굴 탓하겠나. 커틀러를 원망하려는 마음을 일단은 넘기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알파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없애기로 했다.
***
황궁의 주인이 남들 눈을 피해 몰래 빠져나와야 하다니. 램파드는 밖으로 나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불평하는 램파드의 로브가 흘러내렸고, 애쉬는 눈과 코가 그림자에 가려지도록 다시 씌워 줬다.
얼굴이 완전히 가려지도록 만든 애쉬가 자신의 팔을 벌렸다. 램파드가 꿈쩍도 하지 않자 팔을 여러 번 털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팔짱을 끼란 뜻이었는데 램파드는 알아채지 못하고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살만 찌푸렸다. 애쉬가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걸었다.
“놓아라. 걷기 불편하다.”
아팠던 머리와 몸도 괜찮아졌으니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수상해 보여. 연인처럼 보여야 임신 사실을 말하기가 쉽잖아.”
한밤중 램파드가 호출해서 본궁에 함께 있는 것으로 된 애쉬는 황궁에서 입는 옷이 아닌, 평범해 보일 정도로 단순한 정장을 골라 입었다. 애쉬에게는 고급품이지만 램파드의 눈에는 장식 하나 없는 밋밋한 천 쪼가리였다.
램파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호기롭게 말하는 애쉬를 바라보며 일단은 삼키기로 했다.
두 사람의 첫 번째 행선지는 여관이었다. 팔짱을 낀 램파드는 애쉬의 몸에 얌전히 달라붙어 방을 빌리는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무슨 말을 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라는 시건방진 명령을 일단 들어줬다.
조용히 시키는 대로 따랐건만 애쉬는 예고도 없이 램파드의 속을 긁는 말을 내뱉었다.
“오메가 창부를 부르고 싶군요. 가능한 곳입니까?”
“……뭐!”
애쉬는 튀어 오르려는 램파드의 로브 머리 부분을 잡고 아래로 쭉 내려 버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램파드의 고개가 푹 숙여졌고, 밖으로 나오려는 목소리도 막혔다. 여관 주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램파드와 애쉬를 번갈아 바라봤다.
“추가 요금만 내면 가능하고 창부는 제가 직접 불러 드립니다. 두 명을 받아들일 오메가를 찾으면 되는지요?”
“아뇨, 한 명만 상대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쪽은…….”
여관 주인이 램파드를 가리켰다. 당장 로브를 벗어 던지고 장난질은 그만두라 말하고 싶지만 애쉬가 램파드의 팔을 꽉 끌어안고 조용히 있으라며 신호를 보냈다.
“이쪽도 오메가입니다. 제 연인이죠.”
애쉬는 태연한 척 웃으며 램파드의 어깨를 사랑스럽다는 듯 감쌌다.
여관 주인은 할 말이 참 많다는 표정이었지만 난잡한 관계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었다. 애쉬는 품속에서 금화를 꺼내 줬고, 여관 주인은 곧바로 사람을 부렸다.
“방에 올라가 있겠습니다. 바로 올려 보내십시오.”
램파드를 감싼 애쉬는 여관 주인이 알려 준 대로 일단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도착한 램파드는 주먹이 떨렸고 가만있을 수 없어 애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약한 공격이지만 그는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뭐, 오메가 연인? 누가 네놈 연인이냐.”
애쉬는 말없이 옆구리를 감싸며 허리를 숙였다. 꼴값 떠는 줄 알았건만 정말로 아픈지 침대로 픽 쓰러지는 그를 황망하게 바라봤다. 오메가 창부를 왜 부르냐, 따져야 했지만 애쉬의 안위부터 걱정됐다.
“튼튼한 알파라는 놈이 이 정도로 쓰러지는 거냐.”
“읏… 아니 속이… 안 좋아서.”
힘 조절을 해서 옆을 툭 쳤을 뿐이었다. 몸 안에 있는 장기까지 영향이 갈 리가 전무하기에 램파드는 그에게 다가왔다.
“다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구나.”
로열 가드를 둘이나 쓰러뜨린 암살자가 쳐들어왔으니, 멀쩡한 건 기적이었다. 혹시라도 발견하지 못한 상처가 있는 건가. 램파드는 애쉬가 부여잡은 배를 살펴보기 위해 다가갔다. 그는 램파드가 살펴보지 못하게 몸을 데굴 굴렀지만 먹히지 않았다. 램파드는 반항하는 애쉬의 목을 꽉 붙들어 잡았고, 그는 저항을 포기했다.
램파드는 애쉬의 상의를 위쪽으로 훌렁 올려 살펴봤지만 상처 같은 건 보이지 않고, 단단하게 짜인 복근뿐이었다. 놓친 흔적이 있는지 손끝으로 그의 몸을 살펴봤다.
“거봐, 다친 건 없다니까. 아침부터 고기 반찬을 대령해 주시니 소화가 안 되는 거지.”
“그 입 다물어 봐라.”
램파드는 애쉬가 감쌌던 부위를 슬쩍 눌러 보았고, 애쉬의 아랫배가 경련하듯 떨렸다. 암살자가 애쉬를 가격했다면 급소를 노렸지, 일부러 상처가 남지 않을 자리를 손수 쥐어 팼을 리는 만무했다. 익숙한 폭력의 흔적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간밤에 커틀러가 찾아왔구나.”
애쉬는 상처만 보고 모든 것을 간파한 램파드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어.”
“개소리를.”
모면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애쉬는 답하기 전 뜸을 들였다. 둘러댄 게 분명했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램파드는 더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애쉬는 양손을 뻗어 흘러내린 램파드의 로브를 황급히 뒤집어 씌웠다.
여관 주인이 문을 열었고, 그의 곁에는 오메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두 시간에 골드 한 닢입니다. 모쪼록 즐겁게 지내시길.”
등을 떠밀 듯 오메가를 집어넣은 여관 주인이 사라졌다. 오메가는 통성명도 없이, 다짜고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램파드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시선을 창문 밖으로 돌렸다.
“옷을 벗을 필요는 없습니다.”
허리끈을 푸르기 시작하는 오메가를 향해 애쉬가 말했다.
“아, 입고 하는 쪽을 더 선호하시는군요.”
풀어 내린 허리끈을 정돈한 오메가가 하반신을 감싼 천만 벌렸다. 고개를 좌우로 흔든 애쉬의 행동에 오메가는 행동을 멈추고 겁을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때… 리는 게 취향이신가 봐요. 저… 아픈 건, 아니, 살살해 주세요.”
“그게 아니라 화장 도구를 빌리고 싶습니다.”
“네?”
“여벌의 복장도 있지요? 그건 따로 구매하고 싶군요.”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손님인 애쉬의 명령에 오메가는 챙겨 온 소지품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갈아입을 새 옷과 다음 손님을 찾아가기 위한 화장품 등이었다. 램파드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애쉬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오메가를 따로 불러낼 수 있기도 하는군. 능숙할 정도로 잘 아는데?”
“오해하지 마. 와인 배달 다니면서 몇 번 본 거니까.”
“일단 그렇다고 해 두지.”
“오해가 쌓이는 건 싫은데……. 오메가도 같은 사람인데 물건처럼 돈을 주고 거래하는 것이 싫어. 그리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 말고는 관계를 맺지 않았어.”
뻔뻔한 소리에 램파드는 그의 가슴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마음 같아서는 꾹 찌르고 싶지만 아파할 게 분명하기에 힘 조절이 절로 됐다.
“나와의 처음은 복수를 위한 강간이지 않았냐.”
“그 한 번은 그랬지.”
핑계라면 한 박자 답이 느릴 텐데. 진지한 표정의 그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고, 또 다른 뜻도 인정했다.
“뭐에 빠진 거냐. 역시 얼굴이지?”
“네 매력은 그게 전부가 아닐 텐데.”
“그렇다면 몸이겠지.”
“아닌걸?”
다툼을 시작한 두 사람을 흘끗 바라보던 오메가가 쭈뼛거렸다. 애쉬가 요구한 걸 실행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는 걸 바라볼 수만은 없으니 용기를 내 재촉했다.
“화장하고 벗으면 화장이 옷에 묻어 엉망이 돼요. 옷… 먼저 갈아입으셔야 해요.”
오메가는 갈아입을 새 옷을 조심스레 램파드에게 권했다. 얇은 재질의 옷은 지금 창부가 입고 있는 옷과 같았다. 옷을 받은 램파드는 고개를 푹 숙인 오메가를 향해 말했다.
“이걸 나에게 주면 곤란한 일이 발생하진 않겠지.”
애쉬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파악했다. 램파드의 변장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오메가에게 피해를 주긴 싫어 미리 물어봤다.
“손님이 찢어서 버렸다고 하면 돼요. 자주 있는 일인걸요. 그래서 여벌을 챙겨 다니는 거고요.”
램파드는 담담하게 말하는 오메가가 측은해져 품에서 금화를 꺼내 들었다. 곁에 있던 애쉬가 램파드를 제지하고, 오메가가 건넨 옷을 받아 들었다.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옆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와.”
그의 의도를 파악한 램파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옆방으로 이동했다. 오메가가 건네준 옷은 굉장히 얇아 바람막이용으로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해가 진 밤은 온도가 내려가 쌀쌀했는데, 이런 걸 입고 다니면 없던 병도 생길 정도로.
짝을 찾지 못한 오메가의 삶은 램파드의 생각보다 험난했다. 알지 못하는 사실이 훨씬 더 많겠지. 커틀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열넷의 램파드는 이 옷을 입고 일터로 내쫓겼을 것이다.
옷을 갈아입은 램파드는 근처에 놓인 거울을 바라봤다. 무대 위에서 정해진 역할은 황제인 줄 알았건만 인제 보니 시시때때로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 광대였다. 베타 황제. 임신한 오메가. 다음 역할이 무엇일진 모르지만 하나만으로도 힘겹게 느껴진다.
램파드는 옷을 갈아입고, 로브를 걸쳐 밖으로 나왔다. 램파드가 옷을 갈아입고 오자 애쉬가 부른 창부가 화장품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로브에 가려 램파드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졌지만 오메가는 몇 년간 해 왔던 일이라 능숙하게 치장을 끝마쳤다. 모든 일을 끝마친 오메가는 여관 주인의 손에 이끌려 창관으로 돌아갔다.
램파드는 얼굴을 덮은 로브를 내렸다. 곁에 있는 거울을 흘끗 바라봤는데 화장의 효과는 확실히 있어 인상이 달랐으며 얼굴마저 다른 사람이라 느껴졌다.
“내 평생 이런 우스운 꼴을 할 줄 몰랐군. 하긴 네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면 선방했지.”
조용히 램파드를 내려다보던 애쉬가 뒤늦게 답했다.
“매… 맨 얼굴로 진료를 받다간 들킬지도 모르고……. 저… 너 정도 외모를 가진 오메가라면 소문이 날 거 같으니까……. 화장을 짙게 한 얼굴이면… 평소와 다르니까…….”
“말은 왜 더듬는 거냐. 마음에 든 모양인데, 평소에 네놈 앞에서 똑같이 화장해 줄까?”
“아니, 무엇을 해도 예쁘니까 편한 대로 해.”
램파드는 다시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렇게 얼빠진 걸 보니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얼굴을 가려야겠군. 날 끌고 나왔으면 제대로 안내해라.”
램파드는 손을 들어 올렸고, 애쉬는 팔짱을 낄 수 있도록 품을 벌려 줬다. 한 번의 가르침으로 제대로 학습한 램파드는 익숙하게 그의 팔에 자신의 팔을 걸었다. 누가 봐도 연인 사이 같아 보였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쌀쌀한 바람이 반겼다. 예상대로 얇은 옷은 밤바람을 제대로 막아 주지 못했다. 애쉬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 램파드에게 두르고, 팔을 꼭 껴안았다. 팔짱을 꼈을 뿐인데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 따뜻함이 유지됐다.
“이렇게 얇은 옷을 입고 바깥에 돌아다녀야 한다니.”
“그래도 지금은 초여름이라 괜찮지. 겨울에도 같은 옷을 입어.”
애쉬와 팔짱을 낀 채 자신의 옷을 만지작거리던 램파드가 인상을 팍 썼다.
“하는 짓이 정말로 역겹군. 역시 창관은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겠다.”
사뭇 놀란 듯 애쉬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중앙 귀족뿐만 아니라 변방 귀족마저 손을 대고 있고, 엮여 있는 조합도 수가 많아 쉽지 않을 텐데.”
“잘 알고 있군.”
“그야 내가 일하던 양조장이 소속된 연합의 규모만 해도 상당했으니까. 대부분 창관에 술을 납품했지. 창관에 관여한 귀족이 많아서 힘들지 않아?”
“알고 있어. 한 번 손댔다가 물러섰으니까.”
“그런 적이 있었구나.”
“귀족만이 참여할 수 있는 회의에서 몇 번 언급했지만 반대 세력의 영향이 커서 밀어붙이기 힘들었지. 정공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들여 돌아가면 될 거다. 하나씩 관련 사업을 접게 해야지.”
램파드의 이야기를 들은 애쉬가 몸을 좀 더 밀착하며 어깨를 감쌌다.
“뜻대로 되기를 응원할게.”
“너 또한 창관이 싫지 않나?”
“맞아. 그런 곳은 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졌으면 좋겠어.”
“황후가 되면 함께할 수 있을 거다. 후계자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실행할 터이니, 창관 제도가 무너지는 걸 감상해라. 비록 몇 년이 걸릴 테지만, 하나하나 부서지는 모습은 퍽 즐거울 거야.”
“내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을 거야. 램파드 너는 혼자서도 충분히 잘해 낼 테니까.”
원치 않는 주제인지 애쉬는 무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이야기했다. 양조장에서 일하면서 자주 창관에 드나들었다니 못 볼 꼴을 다 본 모양이었다. 함께 도망쳤다는 연인 또한 창관 출신이었고. 아픈 과거를 생각나게 한 듯해 대화 주제를 돌렸다.
“길은 알고서 앞장서는 거냐.”
“이곳 길은 잘 모르지만 밤늦게 여는 병원이 도시마다 하나쯤 있어. 수도는 넓으니까 더 많겠지. 주로 외곽에 자리 잡으니까 이 부근에 하나 있을 거야.”
도시 외곽의 건물은 대부분 불이 다 꺼져 있어 굉장히 어두웠다. 램프는 없지만 절반쯤 채워진 달빛이 은은하게 길을 비쳐 주어 걷는 데 무리는 없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모였다. 램파드와 애쉬를 흘끗 바라보는 자들이 많았지만 누가 봐도 귀족과 그가 편애하는 총희의 모습이라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 밝은 등을 걸어 둔 병원을 하나 발견했다. 약초나 치료제를 판매한다는 작은 팻말이 걸려 있는 곳은 규모가 작았고 다른 건물에 가려 있어 밤이 아니면 오히려 발견하기 힘든 모양새였다.
“오메가 진료를 보는지 물어보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혼자 있어도 괜찮지?”
그의 코트로 몸을 감싼 램파드가 애쉬를 향해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달려들었다가 시체가 될지도 모르는 행인을 걱정하는 거지.”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반죽음도 안 돼.”
“…….”
“기절시켜도 안 되고.”
적당히 끝내면 좋을 텐데 애쉬는 꼭 한마디씩 더했다. 주변은 어두웠고, 몇몇 보이던 사람도 이런 외진 곳까지는 없었다. 램파드는 고갯짓으로 얼른 들어가라며 재촉했다. 애쉬는 램파드를 혼자 두는 것이 불안했지만 하염없이 서 있을 수만은 없기에 빠르게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동행인이 사라지자마자 보이지도 않던 행인이 불쑥 등장했다. 1분도 참지 않은 모양새를 보아하니 골목 어귀에 숨어 있다가 혹시라도 램파드가 혼자가 되지 않을까 상황을 지켜본 것 같았다.
그들을 한 번 흘끗 바라본 램파드는 시선을 둘 가치도 없어 애쉬가 들어간 병원 입구를 바라봤다.
“불쌍하게 버림받았나 보군. 값을 좀 더 올려 줄 테니 어때, 우리랑 놀래?”
램파드는 가까이 다가온 건달 셋을 무심히 바라봤다. 그들은 군침을 다시며 슬금슬금 다가왔는데, 램파드를 사람이 아닌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는 것 같았다.
애쉬는 반도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세상을 위해 쓰레기는 청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기껏 변장까지 하고 나왔으니 소란을 일으키는 건 좋지 않고, 세 명이니 각각 한 번씩, 세 번 참아 주기로 했다. 우선은 한 번.
“겁먹은 모양인데? 말도 못 하잖아.”
가까이 다가온 건달이 램파드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로브와 외투를 걸쳤지만 다리 쪽은 창부가 입는 얇은 천이 보였다.
“팔리지 않으니까 창관에서 쫓겨나 바깥에서 영업질하는 거잖아. 어디 얼굴 좀 보자.”
그들은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양 허락 없이 손을 움직였다. 뻗어 오는 손을 쳐 내고 패대기칠까 싶었지만 우락부락한 손이 전혀 위협되지 않아 내버려 뒀다. 아직 기회가 두 번 남기도 했고.
로브가 벗겨졌고, 병원 입구에 걸어 둔 램프의 불빛에 꿀을 바른 듯한 달콤한 색상의 금발이 드러났다. 그들은 램파드의 모습에 눈과 입이 함께 멀어 버렸는지, 급격히 조용해졌다. 수도에 사는 자라면 황제의 얼굴을 본 사람이 한둘쯤은 있을 텐데, 화장 덕분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아직 한 번의 기회가 있으니까 이들을 죽여 놓는 건 미뤘다.
“너, 정말 끝내주게 생겼는걸. 얼마야… 아니 아니, 어디 소속이냐. 내가 금고를 털어서라도 빼내 줄게.”
마치 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출 모양새였다. 칭송은 질릴 정도로 들었기에 그의 말은 단 한 마디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렇게 빼지 말고. 잘해 줄 테니까 나랑 가자.”
이런 놈을 위해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법 따위는 몰랐다. 욕설밖에 떠오르지 않아 램파드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새침하게 굴지 말고 말 좀 해 봐. 응?”
꼼짝 안 하는 램파드 때문에 남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들은 하찮은 오메가를 위해 큰 인내를 발휘하지 않았다.
“하, 이렇게 좋게 말하는데 말을 듣지 않네. 말 안 듣는 오메가는 매가 답이지! 나중에 울고불고 해 봤자 이미 거래는 끝났어!”
램파드가 반응 없이 무뚝뚝하게 서 있자 남자들은 행동으로 옮겼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램파드의 등 뒤를 둘러싸고, 팔목을 붙잡았다.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사이좋게 불알 한쪽씩 터뜨릴 생각이었는데, 병원 안에서 나오는 자의 주먹이 그들의 목숨을 지켰다. 애쉬의 공격을 받은 남자는 볼을 부여잡으며 램파드의 팔을 놓았다.
“주접떨지 말고 꺼져.”
풀려난 램파드를 자신의 품으로 이끈 애쉬가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데. 정말로 화가 난 그의 표정을 보아 얌전히 있기로 했다. 일행이 지켜 주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니까.
“하, 씹! 이봐 형씨. 좋은 말 할 때 같이 나눠 먹자고.”
사람을 음식으로 생각하는 모양새에 인상이 절로 써졌다. 건달들에게 10년치 자비를 베풀고 있는 램파드를 품에 넣은 애쉬는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기다란 발을 뻗어 상대를 차 버렸다. 다친 애쉬의 몸에도 타격이 왔지만 품에 넣은 사람을 꽉 붙들고, 경고의 페로몬을 내뿜었다.
사납고 강렬한 애쉬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자가 하나. 건달 중에 알파가 하나 섞여 있었는지, 맹렬하게 이를 갈며 비린내를 내뿜었다.
“병원 앞에서 뭐하는 짓입니까. 기사를 부르기 전에 썩 물러나세요!”
병원 안에서 키가 큰 여성이 나와 소리 질렀다. 그녀의 손에는 숙련자인 램파드가 보기에 날이 닳은 게 분명한 검이 들렸다. 저런 걸 휘둘러 봤자 사람의 살갗을 뚫기는커녕, 날이 부러져 사용자가 다칠지도 몰랐다. 그러나 버러지 같은 건달의 눈에는 날카로운 흉기로 보였고, 그들은 램파드와 애쉬를 흘겨봤다.
“시발! 다음에 눈에 띄면 곱게 넘어가지 않을 거다!”
한 사내가 상스러운 소리와 함께 침을 퉤 내뱉었다. 예의를 어머니 배 속에 두고 나왔는지, 지저분한 행동에 램파드의 주먹이 떨렸다. 저들의 말대로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곱게 관에 들어갈 리 만무했다. 제국의 황제께서 손수 목과 머리를 분리해 버릴 테니까.
건달 무리가 사라지자 여인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으며 병원 안으로 이동했다.
“진료를 보신다고 하셨죠. 추우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앞장선 여인은 병원 안으로 사라졌다. 애쉬는 쌀쌀한 바람에 노출된 램파드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난 이만 됐으니 페로몬을 거둬라. 의사가 힘들어하지 않나.”
애쉬가 인상을 팍 썼다. 페로몬을 갈무리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양인데,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욱한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지, 강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램파드에게 전해졌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왜 나선 거냐. 그대로 싸웠다면 네 쪽이 쓰러졌을 거다.”
그는 램파드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결과는 붙어 봐야 나오지마는 세 명을 상대로 홀로 싸웠다간 썩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할 거였다.
“그렇게 저자들의 목숨이 걱정되더냐. 약속한 대로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이번 꾸지람에는 반론 거리가 넘쳐 났다. 그런 건달은 천 명, 아니 만 명을 둬도 램파드와 비교할 게 못 됐다. 네가 얼마나 소중한데, 어떻게 비교 선상에 둘 수 있는가. 여러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그중 일부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저런 것들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큰 소리로 말했지만 애쉬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램파드를 걱정하는 마음에 제 몸이 성치 못한 것도 잊고 달려든 모양이었다. 잔뜩 날이 선 그의 모습이 기특해 램파드는 팔을 뻗어 애쉬의 머리를 기울게 하고, 상을 줬다.
흥분한 만큼 체온이 높아졌는지, 애쉬의 입술은 따뜻했다. 온기를 빼앗을 듯, 램파드는 그의 입술을 여러 번 머금었다. 용기를 낸 보상인 입맞춤을 받은 애쉬는 그제야 진정이 되는지 숨결이 고르게 변했다.
“입맞춤이 네 약인가 보군.”
또 다른 열기로 몸이 채워진 애쉬의 볼과 귀가 붉게 변했다. 램파드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몸이 지탱되었고, 손을 뻗어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억과 달리 애쉬의 머리가 뻣뻣했다. 암살 사건, 그보다 훨씬 더 이전. 아마 램파드가 애쉬를 기숙사의 가장 좁은 방에 던져 놨을 때부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1초가 아쉬웠다. 얼른 황궁에 돌아가 애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의사가 기다리고 있겠군. 이만 들어가지.”
아직 귓가가 붉은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함께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지저분한 건물 외관과 달리 실내는 좁지만 깨끗했다. 애쉬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몇 가지 약병을 챙겼다.
“진료실은 이쪽이에요. 좁으니까 알파분은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입술을 가볍게 쪼았을 뿐인데, 애쉬의 열기는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의 홍조는 건달을 내쫓고 의사가 자리를 비운 그 짧은 틈, 우리 둘이 무언가를 했다는 티를 팍팍 냈다.
램파드는 의사를 따라 짙은 약 냄새가 풍기는 안으로 들어왔다. 확실히 세 사람이 들어오기엔 좁은 방이었다.
“귀족과 엮인 창부라면 사연이 있을 테니까요. 단둘이 있어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겠지요. 그래야 정확하게 진료할 수 있고요.”
애쉬와 사연을 맞추지 않았지만, 귀족과 그가 총애하는 창부 애인으로 된 모양이었다. 의사는 램파드의 곁에 앉아 약재를 섞기 시작했다.
“창관에 일찍 발을 들이는 바람에 형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들었어요. 이건, 당신이 어떤 오메가인지 알려 주는 약입니다. 조금 있다가 손끝을 찔러 피를 받아 섞을 거예요.”
램파드는 두 가지 약물이 섞여 하늘색이 된 액체보다, 눈앞에 있는 오메가에 관심이 더 많이 갔다. 수많은 서민이 램파드를 알현하기 위해 찾아왔는데, 그중 오메가는 한 명도 없었다. 귀족 가문의 오메가가 아닌 일반 서민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오메가가 혼자서 병원을 꾸리다니. 위험하지 않나?”
섞던 약을 옆에 올려 둔 의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병원은 베타와 오메가 환자만 받아요. 이때껏 베타로 잘 속이고 있었는데, 당신이 데리고 온 귀족 때문에 들통날 뻔했어요. 아픈 환자라고 해서 받아들인 거니 부디 바깥에선 오메가가 병원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 주세요.”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준다면 함구하지.”
램파드는 장난스레 웃었고, 의사의 광대뼈가 살짝 물들었다. 같은 오메가끼리는 유혹의 페로몬이 통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미모는 남녀불문 누구에게나 먹혀들었다.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병원인데 그는 급환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병원은 제국의 비호를 받는 곳이니까 크게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아요.”
“알파와 지낸다면 걱정 없겠군. 공부도 그가 가르쳤나?”
“특이한 말투만큼 궁금한 게 많으신 분이네요.”
“가르쳐 다오.”
“제 남편은 베타고, 그가 저를 가르쳤어요.”
예쁜 걸 봐서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인가. 의사는 숨겨야 하는 사실을 저도 모르게 내뱉어 버렸다.
정식 의사가 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했을 텐데 오메가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신분을 속이고 시험을 보았던가, 의료 자격이 없는 것이다. 당장 황궁으로 끌고 가 심문해도 모자란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눈감기로 했다. 오메가의 몸으로 베타를 자처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램파드는 잘 알았기에.
“고생 많았군.”
불법을 자행했다며 포박하는 대신, 위로의 한마디를 건넸다. 의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말씀대로 정말 고생 많이 했죠. 그래도, 램파드 폐하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요.”
의사의 발언에 램파드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창부의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했지만, 눈썰미가 좋다면 알아볼지도 몰랐다. 의사는 손을 분주히 움직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오메가와 베타의 혼인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아서 곤란한 일이 많이 발생했어요.”
“아… 그랬었지.”
“램파드 폐하 덕분에 혹시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남편이 보호자를 자처할 수 있게 됐지요. 그분께 감사해하고 있어요.”
뜻밖의 칭찬을 받게 된 램파드는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일은 오메가를 위한 일이 아니라 큰 세력을 가진 알파 귀족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발안(發案)만 했지 그 이후 오메가의 생활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칭찬을 받기 미안해질 정도였다.
“황제에게 감사해야 할 필요 없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안정이니까, 자부심을 느껴라.”
램파드의 말에 의사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이봐요, 곱게 생긴 환자분. 오메가가 함부로 그런 말 하면 황궁에 끌려갈지도 몰라요.”
“사실이지 않나. 사랑하는 이를 찾은 것, 의료 기술을 배운 건 모두 네 능력이다. 다른 누가 도와줬다고 생각할 필요 전혀 없지. 스스로 대견해할 만한 일이다.”
“오메가가 스스로 무언갈 해냈다고 주장하면 돌팔매질 받아요. 그런 말 어디 가서 하지 마세요.”
다소 화가 난 표정이 된 의사가 입을 샐쭉 내밀었다. 그녀는 화를 낼 필요가 없단 걸 곧바로 깨닫고,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램파드의 손끝을 소독 솜으로 꼼꼼히 닦던 의사가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잡담은 이만 됐고, 약이 완성되었으니 살펴볼까요. 결과는 곧바로 나와요.”
의사는 램파드의 손끝을 찔러 피를 받았다. 약병은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했다.
“축하해요. 우성 오메가군요. 임신은 굉장히 잘될 거예요. 이제 몇 달인지 확인해 볼까요?”
임신 여부를 판단하는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 속의 아이는 튼튼해요. 밖에 있는 알파분의 말로는 배와 머리가 아팠다고 하는데, 신경 쓰는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포궁이 깊은 곳에 있어서 유산 위험은 적다지만 절대 안정을 취하세요.”
당장 해결해야 할 안건만 몇 개라 안정을 취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램파드는 일단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최근 발정제를 사용한 적 있나요?”
언제 임신을 했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애쉬를 만나고 나서 몇 병 사용했다.
“한 달 동안 네 병 정도 사용했다.”
의사는 경악하고선 눈알을 굴렸다.
“어쩐지, 아기집이 많이 약해져 있어요. 앞으로 발정제는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유산할지도 몰라요.”
“명심하지.”
“그리고… 포궁이 이렇게 깊이 있는 오메가는 저도 처음 봐요. 출산할 때 꽤 고생할 거예요. 아이를 낳을 때는 수도 중앙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꼭 입원해야 하는가.”
“상대가 귀족분이니 전속 의사가 있겠군요. 귀족의 아이를 뱄으니까 요구할 수 있는 건 다 해 버려요. 어디 조용한 별장이라도 구해 달라고 하면 되겠네요. 4개월이 지났으니 금방 배가 부를 테니 고생하기 전에 이동하는 게 좋겠네요.”
“……4개월.”
애쉬와 재회한 지 두 달이 채 안 되었는데 ‘4’라는 숫자가 나올 리 없다. 의사는 의아해하는 램파드를 향해 한 번 더 못 박았다.
“네. 곧 있으면 다섯 달이 될 거예요."
“그 정도로 지났으면 배가 부풀지 않나.”
“배가 늦게 부푸는 건 체질이에요. 종종 여섯 달이 육박해야 배가 부푸는 사람이 있어요.”
세상일은 언제나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신이라는 작자는 그렇게나 거부하는 램파드에게 오메가라는 시련을 주고, 첫 각인 상대를 내줬다. 우군인 줄 알았던 커틀러는 램파드를 장난감처럼 굴릴 생각만 만반이었다.
제멋대로 굴러온 두 번째 알파는 램파드의 뒤통수를 후려칠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애쉬는 커틀러보다 나았다. 적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있으니까. 속을 알 수 없는 알파보다는 훨씬 낫다. 저를 향한 애쉬의 증오도 점차 줄어들었고, 이대로 흔한 형질을 가진 애쉬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고 짐을 덜어 내나 싶었건만. 신이라는 작자는 끝까지 램파드를 붙잡고 늘어졌다.
램파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곁에 있던 의사도 무슨 일인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크게 동요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숨을 내뱉었다.
“입막음 비용으로는 얼마면 되나.”
“……안 돼요. 후환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사실대로 말할 거예요.”
램파드는 품속에 담아 둔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냈다. 의사에게 건네줄 건 꺼낸 동전이 아닌 주머니 전부였다. 짤랑거리는 가죽 주머니는 무수히 채워져 있을 금화를 쉽게 떠올리게 하였다. 이런 병원은 열 채 정도 지을 수 있는 액수였다. 쉽게 유혹을 뿌리치긴 힘들 것이다.
“비밀로 하겠느냐?”
어떻게 오메가 창부가 이런 거액을 들고 있는지. 궁금한 게 산더미 같지만, 어느 것도 물어보지 못했다. 뿌리치기 쉽지 않은 액수의 금화에 의사의 눈동자가 두려움과 뒤섞여 요동쳤다. 램파드의 손 위에 올라간 주머니가 자신의 목숨값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입막음을 위해 죽임당할 터.
애쉬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양손을 모으고 땅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손마디를 문지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끼익, 오래된 경첩의 마찰음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고, 램파드와 의사가 함께 나오는 걸 보았다.
의사는 기다림에 지쳐 초조해진 애쉬에게 다가왔다.
“축하해요. 임신이 확실해요.”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할 애쉬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램파드는 애쉬의 표정을 보기가 힘들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배랑 머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요?”
“스트레스 때문이에요. 신경 쓸 일이 생기면 임신부에게 영향이 가니까 앞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의사의 말에 애쉬의 어깨가 늘어졌다. 진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지만 임신한 램파드를 몰아붙이며 스트레스 준 기억이 났으니까. 처진 애쉬의 어깨를 바라보는 의사가 말했다.
“큰 키만큼 거기도 크신가 봐요?”
“……예?”
“남자 오메가는 포궁이 깊숙이 숨겨져 있긴 한데 저렇게 속에 있는 분은 처음 보거든요. 만족시키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셨을 거예요.”
의사의 말에 애쉬의 표정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밤일할 때는 세상 기술을 다 배운 것처럼 능숙하게 말하더니, 바깥에서 노골적인 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숙맥처럼 굴었다. 누가 보면 동정 딱지가 떼인 지 얼마 안 된 줄 알 거였다. 목까지 새빨개진 애쉬를 바라보던 의사가 쿡쿡 웃었다. 애쉬를 놀리는 데 재미가 든 모양이었다.
“가장 궁금한 거 알려 드릴게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면 해도 괜찮아요.”
“무얼 말씀입니까.”
“이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사는 손짓으로 내보였다.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고, 그 사이에 다른 손가락을 푹 찔러 댔다. 의사의 손가락에 집중하던 애쉬는 몇 번 반복 운동하는 모양새에 그 의미를 파악했다.
“엎드려서 하는 건 임신부에게 영향이 가니까 천장을 보게 눕혀 놓고 하세요. 배가 부풀면 옆으로 누우면 되고요. 너무 좋아 죽을 때까지 하면 큰일이니까 적당히 만족시켜요. 알았죠?”
“그… 저, 안 할 겁니다.”
“참기 힘들잖아요? 적절한 관계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니까 조심히 하면 돼요. 임신부가 기뻐해야 배 속의 아이도 좋아해요.”
램파드는 어찌할 줄 모르는 애쉬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속은 아직도 잔잔하게 일렁거렸다. 애쉬에게 비밀로 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실망할 모습이 두렵다. 애쉬가 듣고 싶다는 이야기는 모두 들려줬건만 드디어 비밀이 생겨 버렸다.
하아, 연거푸 한숨을 내쉰 램파드는 조만간 마음을 다잡고 밝히기로 했다.
“이만 돌아가지.”
“아, 그래.”
해가 뜨기 전 옷을 갈아입고 몰래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움직여야 한다. 램파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애쉬가 곧바로 다가왔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받아 주십시오.”
애쉬는 품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램파드가 건넨 주머니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긴 해도 진료비치고는 큰 금액이었다.
“앞으로는 저희 가문의 의사에게 맡기겠습니다. 오늘 저희를 만난 건 함구해 주시길 바랍니다.”
애쉬가 건넨 주머니를 받은 의사는 램파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이 나가는 순간 잊도록 할게요.”
의사는 의문투성이인 방문자들이 병원 밖을 나가는 순간 망각하기로 다짐했다. 자신의 남편에게조차 그들의 비밀을 숨길 거라고.
애쉬는 들고 있던 겉옷으로 램파드의 어깨를 감싸 밖으로 나왔다.
길을 은은하게 밝혀 주던 달이 그새 사라졌고, 램프가 걸려 있는 병원 입구 말고는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병원에서 램프를 빌려 와야 했었나. 돌아가는 대신 앞을 주시하며 걸었다. 곁에 있는 애쉬의 시선은 램파드에게 집중됐다.
“계속 시선이 가는 미모라는 건 알지만 이렇게 어두운데 앞을 안 보고 걷다가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 뻔뻔함도 진료받았어야 했는데.”
“이건 치료 안 받아도 돼. 사실이니까.”
애쉬의 손이 램파드의 손끝을 부드럽게 쥐었다. 전처럼 팔짱을 끼고 몸을 밀착하기 조심스러워진 모양이었다.
“임신이 확실하다고 하나 특별 취급받진 않을 거다. 전처럼 하던 대로 행동해라.”
“신경 쓸 일이 생기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조심해야지.”
“그렇게 티를 팍팍 내면 누가 눈치챌지도 모르지. 게다가 네놈이 하지 않던 일을 하는 게 더 성가시다.”
램파드에게 야단맞은 애쉬가 손을 풀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팔짱을 꼈다. 몸이 가까이 밀착되는 편이 램파드 또한 좋았다.
어두운 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데 저 멀리 골목의 끝. 램프를 들고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이 든 램프 덕분에 상대의 얼굴이 쉽게 파악됐다. 아까 전 도망친 건달들이었는데, 새로운 사내가 몇 명 추가되었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일행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좁은 샛길로 애쉬를 이끌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램프의 빛을 피하고자 좀 더 샛길 깊숙이 들어갔다. 다행히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걷고 있는 램파드와 애쉬를 발견하지 못했다.
“왜?”
“쉿, 조용히 해.”
램파드의 명령에 애쉬는 숨을 쉬는 것조차 멈추고 조용히 기척을 숨겼다. 숨까지 참을 필요는 없는데, 곧바로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모습에 램파드는 작게 미소 지었다.
좁은 샛길에 들어찬 두 사람은 어둠을 방패 삼았고, 한 무리의 사람이 지나가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램파드는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봤다.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늙은 남자는 램파드도 익히 아는 대번포드 백작이었다. 램파드의 명령에 고자가 된 영감탱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마주치면 좋을 거 하나 없다. 변장했다고 하나 귀족이라면 램파드의 얼굴을 알아볼 확률이 높으니까. 그들이 덤벼 봤자 램파드에게 생채기조차 내지 못하지만, 변장으로 인한 쪽팔림은 다른 문제였다.
램파드와 함께 벽에 달라붙어 있는 애쉬도 그의 얼굴을 보았고, 순식간에 동요로 물들었다. 암살자를 보낸 자가 대번포드 백작이라는 건 가설일 뿐이었지만 애쉬의 반응에 사실로 확정되어 버렸다.
램프의 밝은 빛이 이내 사라졌고, 소란스러운 소리도 사라졌다.
대번포드 백작은 전쟁이 끝난 후 램파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거세당했다. 애쉬와 함께 있던 오메가는 전쟁 전, 대번포드 백작가의 아이를 밴 것이었다.
“제길,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병원 앞에 죽치고 앉은 건달 무리가 소리 질렀다. 병원 안은 이미 텅 빈 상태였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질문에 의사 부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병원 앞에 있어 봤자 오메가 창부가 다시 나타날 리는 없을 텐데, 미련을 쉽게 떨쳐 내지 못했다.
“쓸 만한 얼굴을 가진 오메가가 밖으로 나다니는 경우가 없을 텐데. 잘못 본 거 아니냐.”
“아닙니다, 나으리. 제가 본 창부 중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졌습니다.”
“너희 수준으로 최고란 말이겠지.”
“정말로 아닙니다. 이래 봬도 소인이 인신매매 경력만 자그마치 15년입니다. 나리께서 아기집을 빌린 오메가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아니, 훨씬 더 빼어납니다!”
호들갑 떠는 건달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백작이 떠날 채비를 했다.
“어디 소속인지는 알아봤느냐.”
“그 또한 잘 모르는데……. 아! 오메가는 크게 다쳤는지 한 손을 붕대로 동여맸더군요. 다친 오메가는 흔하지 않으니까 알아보면 되겠죠.”
“또 헛걸음하게 하지 말고,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봐라.”
“알겠습니다.”
뒷배를 탄탄하게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황제가 발정제 판매 냄새를 맡았으니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중이었다. 바깥에 돌아다니는 오메가는 변변치 않지만 드물게 쓸 만한 자가 보였다. 주인이 있는 창관 소속의 오메가도 상관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납치해 수도 밖, 먼 곳에 팔아 버리면 찾지 못하니까. 오메가 거래는 상당히 괜찮은 수입원이었고, 재산을 불리기에 좋았다.
하늘과 땅을 합쳐 이만한 오메가는 본 적 없다며 호들갑 떠는 건달의 말에 새벽 일찍 행차했지만 허탕이었다. 큰 수익을 올리려나 했는데, 시간만 낭비했다.
***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 6월. 제국에서 가장 큰 축제인 건국기념일이 개최된다. 왕국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마찬가지로 6월이었기에 건국기념일 행사 규모는 해마다 커져만 갔다. 올해는 황제의 혼인 소식까지 더해 유례없을 규모로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축제 분위기로 들뜬 제국과 달리 램파드의 머릿속은 한시라도 빨리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 아이를 낳는 것뿐이었다. 마음만은 이미 인적이 드문 국경 지역에 있지만,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연례 행사에서 황제가 빠질 수 없기에 자리를 지켰다.
축제가 준비되는 한 달 동안은 변방에서 올라온 귀족을 위해 황궁을 개방하고 무도회를 개최했다. 오늘은 무도회장 개방 첫날이라 황제가 직접 참여했다.
램파드는 황좌에 앉아 둘씩 짝을 맺어 뱅글뱅글 돌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램파드가 앉은 황좌의 오른쪽, 황후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왼편에 반듯한 정복을 입은 애쉬가 섰다. 그의 가슴은 램파드가 건네줬던 금색 토파즈로 만든 브로치가 장식했다.
“사람이 아니라 동상을 세워 둔 것만 같군.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 있지 마라.”
황후가 될 애쉬를 처음으로 내보이는 자리였는데, 애쉬는 잔뜩 긴장해서 숨도 쉬기 어려운 모양새로 서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는 처음이니 긴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한 손으로 턱을 괸 램파드가 애쉬를 흘끗 바라봤다. 긴장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티가 났다. 표정까지 돌처럼 딱딱했고, 자그마한 움직임 없이 꿋꿋하게 선 모양새가 인간 형상을 한 돌멩이였다.
“네놈 표정만 보면 처형장에 끌려가는 죄인과도 같다.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끌고 나온 거 같으니 좀 웃어.”
“힘은 내고 있습니다.”
애쉬는 온몸에 힘을 줬고, 어깨까지 경직되었다.
“힘을 주지 말고 빼라는 말이다.”
램파드의 조언 때문에 애쉬의 몸이 한층 더 뻣뻣해졌다. 저대로 뒀다간 오늘 밤 근육통을 호소할지도 몰랐다. 흰 장갑을 낀 램파드의 손이 눈앞에 있는 애쉬의 엉덩이로 달려들었다.
주물, 램파드는 만질 것 없는 단단한 엉덩이를 여러 번 주물렀다. 애쉬가 화들짝 놀랬고, 램파드가 웃었다.
“뭐, 뭐, 뭐……! 하는… 겁니까.”
막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애쉬는 가까스로 막았다.
“긴장 풀라고. 이왕이면 앞을 만져 주고 싶은데 그쪽은 사람들 눈에 띄니까.”
“손 치우십시오.”
“그러지.”
미련 없이 손을 뗀 램파드가 애쉬의 손끝을 잡았다. 그의 손은 램파드와 세트로 맞춘 예식 장갑으로 감싸졌지만 따뜻한 온기는 고스란히 전해진다. 좀 더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손끝에서 손바닥으로 이동해 꽉 붙들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누가 볼지도 모릅니다.”
“마음껏 보라 해. 어차피 혼인할 사이인데 이 정도야 뭐 어때.”
램파드는 애쉬를 향해 구김 없이 미소 지었다. 해야 할 일은 많지만, 하루 정도야 축제 분위기에 파묻히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슬슬 입장도 끝난 것 같고, 애쉬를 데리고 회장 아래로 내려가 함께 춤을 추고 싶어졌다.
램파드가 일어나기 전. 귀빈이 입장하는 입구 부근이 소란스러워졌고 호명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화이트 테일 기사단의 커틀러 콘테 단장님이십니다.”
입가에 머무른 미소를 싹 거둔 램파드는 무도회장 입구를 바라봤다. 건국기념일 당일은 모르겠지만 준비 기간인 오늘은 참여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는 보기 드물게 화려한 정복을 빼입은 채 등장했다. 커틀러는 사람 많은 곳을 썩 좋아하지 않아 무도회 같은 건 참여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별일이었다.
공작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연주되던 곡이 잠시 멈췄다. 조용해진 장 안을 가로지른 커틀러는 황좌가 위치한 단상으로 곧장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태양이신 램파드 폐하를 뵙습니다. 램파드 폐하께서 건재하시기에 어두운 밤에도 제국은 환합니다.”
커틀러는 붕대로 동여맨 램파드의 오른 손등에 입을 맞춘 뒤 한 발짝 물러나 뒷짐을 지고 가지런히 섰다.
“네가 무도회장에 등장하다니 별일이군.”
“홀로 지내려니 밤이 외로워 찾아왔습니다.”
“경과 마찬가지로 홀몸인 자가 넘쳐 나니, 마음껏 활개 쳐라.”
귀찮은 듯 대충 손을 털어 내는 램파드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커틀러가 답지 않게 조용히 물러갔다. 커틀러가 단상 아래로 내려오자 멈춰 있던 왈츠가 다시 연주됐다. 여러 악기가 섞인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고, 저마다 짝을 찾아 무도회장을 움직였다.
짝을 찾지 못한 자들은 회장 바깥쪽에서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커틀러 또한 한 손에 늘씬한 샴페인 잔을 든 채 회장 바깥쪽에 섰다. 램파드와 함께하지 않은 그는 입매가 단단하게 굳고 시선이 따가워 가벼운 안부조차 묻기 힘든 분위기를 내뿜었다.
살기 어린 시선에 접근은 고사하고, 커틀러의 시야를 벗어나기 위해 피하는 자들만 한가득하다. 어쩌다 눈이 마주친다면 가벼운 목 인사를 건넬 뿐, 커틀러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빼어난 외모를 가졌기에 입과 눈매를 조금만 휘어 주면 사람들이 절로 다가올 것이건만.
무도회장에 찾아왔으면 사교적으로 굴어야지. 저럴 거면 뭐하러 쫙 차려입고 찾아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램파드가 시선을 회장으로 돌렸다. 춤을 추는 여러 쌍의 짝을 바라보던 램파드의 눈에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더티 블론드를 가진 남자는 자작 가문의 넷째인가, 다섯째였던가. 몇 번째 자식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자는 오메가였다.
커틀러와 눈이 마주칠까 봐 애써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 귀족과 달리, 저 오메가의 시선은 우성 알파에게 향했다. 황좌에 좀 더 편히 몸을 기댄 램파드가 오메가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애쉬에게 달라붙은 대번포드 백작을 떼어 내고, 제국 순방 핑계로 여행을 떠나려면 커틀러도 해결해야 했다. 얌전히 말을 들어주면 좋을 터인데, 어떤 이유를 들먹이며 램파드의 발목을 잡을지 상상조차 안 됐다.
알파라면 각인한 오메가를 우선시할 것이다. 램파드가 아닌 다른 오메가가 생긴다면 절로 떨어질 테지. 황명으로 혼인을 치르라고 명령하는 방법도 있지만, 괜히 잘못 소개했다간 램파드 자신에게 역풍이 불지도 몰랐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이어 줘야 했다.
몇 가지 생각을 끝낸 램파드가 애쉬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꾹꾹 찔렀고, 그가 내려다보았다. 램파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가까이 오라 지시했다. 애쉬는 등 쪽으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만 숙였다.
“건국기념일 축제가 끝나는 대로 혼인을 올릴 거다. 여행도 곧바로 떠날 것인데 어디 가고 싶은 장소라도 있느냐.”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이어야겠죠.”
“그러는 게 좋다지만 네가 가고 싶다면 어디든 상관없어.”
“그렇다면 전에 살던 집을 보고 싶습니다.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주변에 인사하지 못했지요.”
램파드가 크게 미소 지었다.
“신분이 상승하였으니 다들 놀라겠군.”
“와인 상표에 제 얼굴을 그려 붙일지도 모릅니다.”
“한다면 내 얼굴도 나란히 붙여 주라 해야겠군.”
램파드는 남부 지방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기도 하고, 볼거리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길은 애쉬와 함께하는 거니 즐거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길잡이는 너에게 맡기지.”
“폐하는 남부 지방에 여러 번 오셨죠. 기억에 남는 곳이 있으십니까.”
전쟁 중에는 지형만 신경 쓰느라 주변 자연 경관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하룻밤 상대를 찾으러 갔을 때는 땅 전체가 황폐해져 포도나무밖에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곳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를 가도 포도나무밖에 자라지 않아 지루했던 곳이야. 포도 넝쿨이 없으면 커다란 자갈이 굴러다니는 돌밭뿐이고.”
“잘 찾아보면 300년이 넘은 거대한 보리수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지역보다 더워 열매가 빨리 맺히니까 폐하께서 찾아가실 때쯤이면 붉은 보리수 열매가 가득할 겁니다.”
“절경이겠군.”
“전 그곳을 특히 좋아합니다. 풍경만 봐도 술맛이 절로 나는 곳이지요.”
“술은 곤란하지만, 나무는 한번 보고 싶군. 남부 지방에 도착하는 대로 그곳부터 찾아가지.”
짧은 대화가 끝났고, 애쉬는 굽혔던 허리를 꼿꼿이 피고 단상 아래 커틀러를 바라봤다. 대번포드 백작이 수도에 있는 이상 커틀러와 계약했던 일을 빠르게 행해야 했다.
그전에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싶었다. 가진 게 없으니 죽음에 대비할 건 몸뚱이뿐이었다. 이왕이면 수도가 아닌 고향에, 과거 사랑했던 사람의 뼛가루가 뿌려진 곳에 묻히고 싶었다. 애쉬가 죽어도 램파드에겐 커틀러가 있지만 루사에겐 아무도 없으니까. 애쉬는 자신이라도 그의 곁에 남아 주고 싶었다.
만약 일이 닥친 후 램파드가 자비를 베푼다면 고향 땅에서 가지를 뻗은 보리수나무 아래 묻힐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램파드가 애쉬를 기억해 준다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했던 형의 명복도 함께 빌겠지.
“뭘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나. 우리도 이만 아래로 내려가지.”
램파드가 애쉬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곡 추지 않겠나?”
“춤은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한 달 동안 궁정 예절을 배우며 춤까지 익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끌 테니 몸만 맡겨.”
커틀러를 바라보던 애쉬의 시선이 회장 안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춤에 문외한인 애쉬가 봐도 돌출된 사람 없이 능숙한 자들뿐이었다. 미숙한 애쉬가 참여하면 혼자 툭 튀어나와 이목이 쏠릴 터.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상관없지만 램파드에게까지 번지는 건 원치 않는다.
“기껏 권해 주셨는데, 소인의 실력이 부족해 폐하를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누를 끼치기는 싫사오니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말아라. 혹여 널 비웃는 자가 있다면 그 즉시 가문을 통째로 멸할 테니까.”
애쉬가 약간 곤란한 듯,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원한다면 장내에 있는 사람 모두 네 춤이 끝날 때까지 허리를 굽히게 하여 주마. 아무도 네 실력이 부족하다며 바라보지조차 못할 거야.”
“그런 과분한 일은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소인이 힘써 보겠습니다.”
“그러면 짐과 춤을 춘다는 말인가?”
한 손을 들어 올린 램파드가 애쉬를 향해 빙긋 웃었다. 세상 누구라도 홀릴 법한 미소를 내보이는데 감히 거절할 수 있을까. 애쉬는 답하기도 전, 램파드의 손부터 잡았다. 애쉬의 손을 꽉 잡은 램파드가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황제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홀 안을 울리던 연주가 멈췄다. 춤을 추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고, 시선에 익숙한 램파드는 긴장한 애쉬의 손마디 뼈를 문질렀다.
“너는 다리가 불편하니까 쉬운 동작으로 움직일 거다. 내 몸에 기대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애쉬가 램파드를 내려다봤다. 말과 달리 반대로 램파드가 애쉬의 몸에 기댄 채 눈웃음을 치며 소곤거리는데, 품 안에 넣어 안은 것만 같았다. 많은 사람 앞에서 껴안은 거라니. 아무리 한시라도 놓지 않고 품에 넣고 싶은 사람이라지만 관중 앞에서는 낯간지러웠다. 애쉬의 몸이 도로 뻣뻣하게 경직되었고, 램파드의 허리에 두른 손을 떼어 냈다. 램파드는 도망가는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몸에 두르게 하였다.
“내 허리를 좀 더 감싸 봐.”
애쉬의 손이 램파드의 허리를 잡고 자세가 갖춰지자 연주가 시작됐다. 독무대를 장식할 곡은 무도회장에 놓인 모든 악기가 동원된 교향곡이었다. 무도 음악 1번이란 이름이 붙여진 곡은 제국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황제만을 위한 음악이었다.
장 안을 메운 귀족이 자리를 비켰고 둘만의 공간이 완성됐다. 램파드는 곡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고, 애쉬가 따라왔다. 발은 잘 움직이지만, 손이 흡족하지 않았다. 애쉬의 손은 램파드의 몸에서 떨어지고 싶어 안달 났다.
“나한테 박을 때는 시키지 않아도 떨어지기 싫다며 달라붙잖아. 그때처럼 꽉 끌어안아.”
램파드의 말에 애쉬의 놀란 입이 벌어졌고, 빠르게 꾹 다물렸다. 그는 침을 몇 번 삼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말조심하십시오.”
램파드는 애쉬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지 않고 도망가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꼭 끌어안은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 피식 웃었다.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고, 연주 소리가 커서 아무도 못 들어. 이 목소리는 오직 너한테만 들리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조심성 없기는.”
램파드는 일부러 그의 몸을 지탱한 부분에서 힘을 뺐고, 애쉬가 휘청거렸다. 쓰러질 뻔한 애쉬는 램파드의 몸을 꽉 붙들어 위기를 모면했고, 엉겁결에 달라붙어 가슴과 하반신이 밀착됐다.
다시 여유롭게 움직이는 램파드의 동작에 섞여들어 간 애쉬가 한숨을 쉬며 그를 내려다봤다. 제 품에 밀착한 채 움직이는 램파드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분명 저를 놀리려는 의도로 손에 힘을 푼 거였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표정에서 드러났다. 애쉬는 씰룩거리는 입가를 애써 진정시키고 표정 관리했다.
“억지로 웃는 거 티 난다.”
“누구 때문인데.”
“내 얼굴 보고 화 풀어.”
램파드가 하얀 앞니까지 드러내며 웃었고 애쉬의 입가가 따라 부드러워졌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는 램파드를 향해 심술부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미인계를 쓰다니. 실망인걸.”
“싫은 건가?”
“그래.”
“내 나름대로 생각해서 웃어 주었건만 싫다니 아쉽군.”
사실 애쉬는 쓰러질 뻔해 놀란 마음 같은 건 순식간에 잊었다. 그는 이미 램파드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으니까.
“이미 나를 따라 웃고 있지 않으냐.”
“아닌걸. 잘못 봤겠지.”
누가 봐도 명백한 거짓말이었기에 램파드는 장난스레 말했다.
“무엇에 실망했는지 한번 말해 보아라. 신경 써 고쳐 줄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 대화는 나와 너만의 것이지만 표정만큼은 아니잖아.”
거리가 떨어져 있어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음악에 파묻혀 새어 나가지 않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웃지 마. 밖에 나가 단둘이 있을 때 다시 한번 웃어 줘.”
다소 시건방진 요청이었지만 램파드는 단번에 응해 주었다. 애쉬를 향한 미소를 접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귀엽기까지 한 그의 주문에 미소 짓는 걸 억지로 참아 내는 램파드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애쉬는 그런 램파드의 표정을 보며 자신이 되레 웃었다.
긴장 풀린 애쉬의 표정이 밝아지자 램파드는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한쪽 다리를 절고 있는 애쉬가 부담되지 않게 그의 몸을 꽉 붙들어 이끌었다. 램파드를 온전히 믿는지, 애쉬는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왔다.
황궁을 개방할 때마다 램파드는 선두에 서서 춤을 췄다. 다른 사람의 흥을 위해 춤춰 온 것은 여러 번이지만 스스로가 즐거운 건 처음이었다. 함께 행동하며 시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차오른다.
비단 이번 춤뿐만 아니라 화이트 궁에서 함께 뒹굴 때도, 그의 곁에 서서 사소한 대화를 하는 것도 모두 소중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그와 함께한 기억이 램파드의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만있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큰 만족을 준다. 좀 더 여러 가지 경험을 함께 공유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질 정도였다.
“내년에는 왈츠를 추고 싶군. 제대로 춤을 배워 둬.”
애쉬는 말이 없었다. 주저 없이 답해야 할 텐데, 가슴 안쪽에서 울컥 올라온 감정이 목을 막았기에 램파드의 요청에 답하지 못하고 억지로 입 끝만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조금 전까지 활력 넘치던 애쉬의 눈매가 쓸쓸하고 힘이 없어졌다. 잘 어우러졌던 움직임이 조금씩 삐끄덕거렸다.
램파드는 다시 속도를 줄여 처음으로 돌아왔다. 넘쳐흘렀던 만족이 이제는 가슴을 압박했고, 죄스러워졌다. 애쉬와 함께하며 그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또 다른 감정도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간사하게도 네 행복을 뺏은 나는 즐겁기만 하구나.”
혼인을 앞둔 램파드는 싸구려 은반지를 꼈던 애쉬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루가 일주일 같으며,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맹세처럼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 놓을 때까지. 상대방과 일생을 함께 보낸단 서약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천되리라 의심치 않았을 터. 하지만 애쉬는 꿈꾸던 혼인을 올리기 전 그를 잃었다.
애쉬에게는 비극이었지만 램파드에게는 희극일지도 몰랐다. 그가 겪은 불행이 없었더라면 램파드는 영영 그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램파드 개인의 욕심뿐만이 아니라도, 루사의 죽음을 정당화할 거리가 넘쳐났다. 전쟁 중 사용한 검은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휘두른 검이 아니어도 잘못을 뉘우치는 건 혼자만의 몫이다. 애쉬의 약혼자를 죽인 것은 램파드니까. 그의 원수가 램파드란 사실은 변함없었다.
괴로워하는 애쉬를 볼 때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아픔의 흔적을 발견할 때면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행복을 뺏은 자가 뻔뻔하게 사과해도 되는 걸까.
마음을 정하기 전 곡이 끝났다. 둥근 홀 가장자리에서 애쉬와 램파드를 바라보던 귀족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움직임이셨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지금 사과의 말을 건네 봤자 박수 소리에 파묻힐 것이다.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손에 넣은 램파드는 애쉬를 곁에 둔 채 커틀러를 바라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인 커틀러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램파드를 바라봤다.
“짐의 다음은 늘 최고 대신이 맡았는데, 오늘은 커틀러 경이 찾아왔으니 다르겠군. 오래간만에 행차했으니까 어떤가.”
워낙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니 그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본 것 또한 손에 꼽았다. 아카데미 졸업식 때 열린 무도회장에서 능숙하게 추었으니 간단한 춤 정도야 무리 없을 것이다. 마시던 잔을 시종의 은쟁반 위에 올린 커틀러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쉽게도 저에게 접근하는 자가 없어 파트너가 없군요. 폐하께서 직접 상대해 주시겠습니까?”
“알파한테는 오메가가 알맞지.”
장 안을 둘러보며 물색하는 척, 고개를 기울이던 램파드는 아까부터 점찍었던 자작가의 남식과 시선을 맞췄다. 황제와 시선이 닿은 오메가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의도를 알아챘을 텐데 시선을 피하는 오메가에게 가까이 다가간 램파드가 그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캐더릭 자작 가의 남식이었지. 자네 이름은?”
“릴 캐더릭… 입니다.”
“어떤가, 커틀러 경의 춤 상대가 되어 줄 텐가?”
금으로만 이뤄진 램파드와 달리 군데군데 갈색이 섞인 더티 블론드를 가진 오메가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밝은 하늘색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저, 저… 말씀인가요?”
“이미 마음에 둔 자가 있다면 거절해도 좋다.”
“아, 아뇨. 열심히 하겠습니다!”
릴이 입가에 있는 보조개를 쏙 넣으며 활짝 웃었다. 누가 봐도 기다렸다는 모습이었다. 램파드는 그의 손을 커틀러에게 건넸다. 상대를 전달받은 커틀러가 램파드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릴을 바라보며 움직였다. 순순히 춤을 추는 커틀러를 바라보던 램파드는 곧장 애쉬에게 다가왔다.
잠시라도 혼자 두면 애쉬는 혼자 무언갈 생각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익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램파드는 애쉬를 이끌어 기다란 소파에 앉혔다. 샴페인이 채워진 은쟁반을 든 시종이 다가왔고, 램파드는 대기하라며 손짓했다. 무릎을 살짝 굽힌 시종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바르게 섰다.
“당장 화이트 궁으로 함께 향하고 싶지만, 마저 행사를 진행해야 한다. 먼저 돌아갈런가?”
“어찌 저 혼자 편하겠다며 돌아가겠습니까. 폐하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쉬고 있거라.”
애쉬와 함께 소파에 앉은 램파드는 예상과 달리 능숙하게 춤 상대를 이끄는 커틀러를 바라봤다.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공작의 춤은 본 실력을 발휘한 램파드보다 훨씬 뛰어나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검술을 제외하고 모든 게 램파드보다 뛰어났다. 커틀러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점을 발견하면 뛰어넘으려는 욕구가 일었는데. 들끓었던 경쟁심이 전부 사라졌는지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냉정한 머리와 마음으로 그의 춤을 바라보면 둘은 잘 어울린다. 누가 봐도 흠잡을 것 없는 이상적인 알파와 오메가 한 쌍이니까. 램파드는 그의 손을 붙잡은 릴 대신 자신을 넣어 봤다. 상상일 뿐인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애써 움직였지만 삐거덕거리며 어울리지 않았다.
커틀러의 동작에 감탄한 귀족의 탄식이 들렸다. 누가 봐도 탄복할 한 폭의 명화지만 램파드의 시선은 미련 없이 애쉬에게 향했다.
“저렇게 시선을 사로잡아 버리다니 이번 무도회의 주인공은 커틀러가 확실하군. 너를 주인공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괜한 일을 벌였어.”
“정작 중요한 사람의 시선은 뺏지 못했는걸요.”
“저렇게 화려하게 움직이는데 관심이 생기지 않는 건가. 저런 춤을 어디서 보겠느냐.”
“저 말고 폐하의 시선 말입니다. 그린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도 절 보시고 있잖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커틀러에게 쏠려 있는 사이. 애쉬는 평소 램파드에게 보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램파드는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대놓고 유혹하긴. 조심성이 없군.”
그 또한 램파드가 내뱉은 말을 그대로 사용했다.
“혼인을 할 사이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램파드의 손짓에 술을 접대하는 시종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은쟁반 위, 샴페인 한 잔을 들어 올려 입에 가져 댔다. 혀 위에서 톡톡 터지는 샴페인의 청량한 맛이 램파드에게 잠깐의 휴식을 줬다.
“폐하!”
입에 술을 가져다 대는 램파드의 행동에 애쉬가 놀랐다. 램파드의 손을 낚아챘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친 애쉬의 손이 공중에서 방황했다. 주변에 눈이 많아 임신한 몸으로 술을 마시지 말라며 소리치지 못해 답답한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잔을 천천히 돌렸다. 램파드의 움직임에 따라 금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목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았으니 그렇게 놀라지 말아라. 혀만 축였을 뿐이니까.”
램파드는 입을 댄 잔을 애쉬에게 건넸고, 그는 양손으로 공손히 샴페인 잔을 받아 들었다. 혹시라도 뺏어 마실까, 애쉬는 단숨에 절반 이상을 마셔 버렸고, 잔을 꽉 붙들었다. 관중에게 돌아가기 전, 램파드는 허리를 굽혀 애쉬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그 샴페인, 지금 내 입맞춤과 똑같은 맛이야. 지금 당장 할 수 없어 대신 주는 거니 제대로 음미하며 마시거라.”
커틀러의 춤이 끝났고 장 안은 어수선했다. 애쉬의 입꼬리가 완만하게 그려지는 걸 확인한 램파드는 자신을 기다리는 회장 중앙으로 향했다. 램파드가 새로운 잔을 들어 올렸고 관중도 따라 샴페인을 하나씩 쥐었다.
“그대들의 노고 덕에 제국이 527년을 맞이했군. 왕국 연합이라는 어두운 먹구름을 걷은 건 그대들이 짐과 함께 제국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이 날을 기리노니 앞으로 한 달간 먹고, 마시며, 즐기도록 해라.”
저마다 잔을 머리 위에 올려, 황제와 제국을 칭송하는 말을 쏟아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복하는 이곳. 잔을 높이 들지 않고, 오만하게 고개를 들어 황제와 시선을 교환하는 남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시끄러움을 핑계로 말하지 않은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는 똑똑히 하고픈 말을 전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십시오.’
입술 모양으로 추측했을 뿐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램파드는 그의 도발적인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 모금 마시는 시늉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별궁은 방이 여러 개 비어 있다. 날이 밝은 뒤까지 사용해도 좋으니 마음껏 즐기도록 해라.”
성적 농담에 장 안이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무도회 개막식을 진행했으니 황제가 할 일은 뒤로 빠져, 즐기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무도회는 혼인 상대를 찾기 위한 거대한 사교장이었다. 황후 후보도 정한 황제가 남아 있으면 다른 귀족이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하니까. 흥을 돋우기 위한 애피타이저는 빠르게 퇴장하는 게 상책이었다.
램파드는 애쉬와 함께 화이트 궁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심각한 표정이군. 별궁의 방을 사용하지 못해 아쉬운 건가.”
램파드는 애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장난스레 입꼬리를 끌어모아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농담은 하지 마.”
“좋지 않았나.”
무도회장 밖으로 나온 애쉬는 갑갑하게 채워 둔 목 단추를 몇 개 풀어 내렸다. 목깃이 느슨해지자 표정도 한층 풀어졌다.
“너무 좋아서 문제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애쉬 덕분에 짧게 웃음을 터뜨린 램파드가 그의 하반신을 바라봤다.
“돌아가는 대로 시종을 무르도록 할까? 이번 주 횟수는 아직 남아 있는데.”
“아서라, 오늘은 종일 움직였잖아. 돌아가는 대로 쿠션 더미에 얌전히 파묻혀 잠이나 자.”
“벌써 잘 생각 없어.”
“설마 제국의 황제께서는 자장가를 불러 주며 재워 줘야 잠자리에 드시는 건가? 아니면, 어부바라도 해 줄까?”
회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건방지게 굴다니. 이대로 소박맞히고 본궁으로 되돌아가느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무도회장 앞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마차가 램파드의 시선을 사로잡아 생각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 시간에 마차가 도착하다니. 어느 얼빠진 귀족인지, 지각해도 한참이나 했다. 지금 등장하면 춤출 상대는 물론 대화조차 끼기 힘들 테니까. 지각한 귀족 따위 신경조차 쓸 필요가 없기에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참. 마차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등장한 노신사가 램파드를 일방적으로 반겼다.
“램파드 폐하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서 만나 뵙는군요.”
“대번포드 백작이군.”
며칠 전, 지나가다 보았지만 시치미를 뚝 뗐다. 대외적으로 대번포드 백작을 만난 건 그의 가문을 몰락시키며, 백작을 거세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알아봐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소인은 일이 있어 무도회에 늦게 참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제국의 태양을 뵙게 되다니, 놓친 시간이 아쉽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군요.”
“나이 찬 그대면 늦는 것보단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낫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만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귀족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대번포드 백작은 애쉬를 흘끗 바라보며 다시 램파드를 향해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군.”
“폐하의 자비 덕택이지요. 그날 이후로 폐하를 뵙는 건 처음인데, 여전히 용모가 눈이 부실 정도시군요. 태양이란 이름이 걸맞으십니다.”
대번포드 백작은 죽이라며 바락바락할 땐 언제고, 입에 발린 소리를 내뱉었다. 혀에는 달콤한 꿀을 발라 뒀지만, 몸 안쪽으로 다른 속셈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 대번포드 백작은 무슨 연유로 수도로 왔는가.”
“건국기념일을 축하해야 하건만 보낼 자식이 없으니 소인이 직접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거리가 멀어 힘들지만, 예상 밖의 친구를 갖게 되었으니 수도로 올라오기 잘한 것 같습니다.”
백작이 혀를 놀리며 애쉬를 바라봤다. 애쉬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고, 램파드는 그 점이 못마땅했다. 감히 자신의 알파에게 시선을 주다니. 고환 다음으로 눈알을 뽑고 싶었다. 그러기엔 명분이 필요했다.
“뒤늦게 후사를 가지고 싶어진 모양이구나. 어린 오메가를 희롱하기에 자네는 너무 늙지 않았느냐. 자네가 찾아야 할 곳은 무도회가 아니라 고아원일 텐데?”
“하하, 이래 봬도 아직 젊은이에게 뒤처질 정도는 아닙니다. 후계자는 천천히 정할 생각이지요.”
“짝을 찾을 생각이 아니라면 입장하지 말고 그대로 돌아가도록 해라. 늙은 영감이 끼기에는 무도회장 분위기가 좋으니까.”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오늘은 물러나야겠군요. 몸을 데워 줄 이를 찾는 것보다 남은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더 중하니까요.”
“살고 싶은 생각이었다면 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어야지.”
페로몬을 잃은 알파는 램파드의 살기 어린 시선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제야 애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몸을 굽혔다. 아래로 향한 백작의 시야에 붕대로 감싼 램파드의 오른손이 들어왔다.
“며칠 전 짐의 처소에 꼬리 잘린 쥐새끼가 한 마리 들어왔다. 배를 곪아 길을 잃은 들쥐인 줄만 알았는데, 인간에게 먹이를 받아먹고 사육된 애완 쥐더군. 백작은 쥐새끼의 주인을 알고 있는가?”
“쥐는 해로운 동물이지 않습니까. 제 주변에는 쥐를 싫어하며 박멸하는 자들뿐이옵니다.”
“짐이 잡은 쥐새끼는 남부 지방에서 자라는 독초로 만든 환을 가지고 있더군. 백작이 관리하는 지역이지.”
붕대로 동여맨 램파드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대번포드 백작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에 다다른 램파드는 명백히 백작을 도발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잘못 넘어갔다간 황제의 남자에 손을 댔다는 죄목으로 목이 잘릴 거였다.
“저는 영지를 관리하는 일에서 손을 뗐습니다. 폐하께 영지 대부분을 반환하였고, 소수의 영지민이 살아갈 자그마한 경작지만 가지고 있습니다. 농작물 이외에 재배하는 것은 보고한 대로 목화뿐입니다. 독초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대번포드 백작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에 맺혔고, 그는 연신 침을 삼켰다.
“왜 그리 겁을 먹었느냐. 짐이 자네를 벌할 것 같으냐.”
“아닙니다.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폐하께 반기를 든 벌은 이미 받았습니다. 경사스러운 날이니 부디, 과거의 부끄러운 잘못은 들추지 말아 주십시오.”
그는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백작의 머리 위로 램파드의 싸늘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쥐꼬리 끝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그대의 남은 명줄도 잘릴 줄 알아라.”
심증만 있을 뿐 암살자가 대번포드 백작과 연관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거슬린다고 해도 연유 없이 귀족을 처벌할 수 없기에 이번에는 경고로 넘어갔다.
램파드와 애쉬의 인영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때, 대번포드 백작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마차 앞에 선 백작은 이를 으득 갈며 얼굴을 한껏 구겼다. 전쟁 탓에 황권이 위태로웠지만, 결과적으로 램파드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제대로 된 아군을 만들지 못하고 황제가 된 램파드는 전쟁으로 귀족과 제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까. 그런 천운이 없었더라면 저런 햇병아리 황제가 알파의 지지를 받는 백작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을 터.
치욕을 씻을 기회는 언젠간 찾아올 거였다. 조금이라도 파고들 틈이 있다면, 쐐기를 박아 넣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려 낼 패가 백작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대번포드 백작은 살짝 열린 마차 창문 안을 바라봤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분이네요. 순간 페로몬을 내뿜을 뻔했어요.”
“라이, 엿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페로몬을 완벽히 갈무리하고 있던 어린 알파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죄송해요……. 아버님이 경고하셨지만 너무너무 궁금했어요. 제가 고개를 내밀었을 땐 저기, 저 건물 끝에 다다랐으니 조금밖에 못 봤어요.”
마차 창문을 연 소년은 창틀에 기대 대번포드 백작을 바라봤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향해 생긋 웃었다.
“저분이 제 숙부님이군요.”
루트비안 황자가 창관에 끌려갔을 때와 같은 나이인 소년은 총기가 넘쳐났다. 얼굴은 같지만, 성격은 전혀 다른 라이는 혼자 들떴다.
“맞다.”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숙부님이 저를 알아보실까요?”
“너를 낳은 어미랑 판박이니 못 알아볼 리가 없다. 황제뿐만 아니라 그 당시 루트비안 황태자를 본 자라면 모두 알아볼 것이다.”
“기대되네요.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백작은 라이의 머리를 몇 번 토닥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창문을 닫고, 수도 구석에 빌려 둔 저택으로 향했다. 황궁을 빠져나온 마차는 거리를 가로질러 달렸다. 창문 밖으로 며칠 전, 허탕을 쳤던 골목이 보였다. 기껏 시간을 내 찾아갔더니만 수확은커녕 시간 낭비만 했던 병원 근처 골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놓친 오메가는 한 손을 붕대로 동여맸고, 배를 빌린 루트비안 황태자의 닮은꼴이라고 하였다.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나 세상에 둘도 없을 모습이라 했지. 알파를 황후로 앉히려는 기상천외한 짓거리를 하는 황제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설마.
같은 시각 화이트 궁. 대번포드 백작이 눈앞까지 성큼 다가오자 애쉬는 궁지에 몰렸다. 한 발만 헛디뎌도 추락하는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이었고, 빠져나갈 구멍은 눈앞의 백작을 쓰러뜨리는 것뿐이었다. 맨손인 애쉬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고, 안전지대에서 상황을 보고만 있는 커틀러가 무기를 쥔 상태였다. 계약을 이행시키려면, 커틀러가 검을 들어 올리게 만들려면 한시라도 빨리 램파드의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화이트 궁에 도착한 애쉬는 램파드를 푹신한 쿠션 더미에 눕히고, 장식장을 뒤적거렸다. 램파드는 쿠션에 드러누워 심각한 표정의 애쉬를 빤히 바라봤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도회장부터 계속 어두운 표정이었다.
“애쉬, 이리 오너라.”
“잠깐만.”
평소라면 보이지 않는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며 다가올 터인데, 그는 찬장을 뒤지는 데 여념 없었다. 그의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오고 가라는 명령 따위 무시해도 좋았다. 램파드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고 애쉬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피곤해? 그냥 잘래?”
눈을 뜬 램파드의 앞에 애쉬가 다가왔다. 애써 미소를 짓고 있지만, 수심이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이 나아질까. 램파드는 그의 얼굴을 가린 그림자를 외면하며 밝게 웃었다.
“기껏 시종을 다 물러가게 만들었는데 그냥 자기엔 아깝지 않으냐.”
“애석하게도… 오랜만에 생긴 휴식 시간인데 오늘은 일찍 자.”
“싫다만?”
눈까지 가늘게 뜨며 웃어 주었지만 애쉬의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미인계가 통하지 않자 램파드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있는 거냐. 표정 풀거라.”
애쉬는 손에 든 것을 근처 협탁 위에 올리고 램파드를 끌어안았다. 애쉬보다 한 뼘 이상 작은 그는 자라나는 아이 때문에 몸이 수척해져 더욱 여리게 느껴졌다. 겉보기와 달리 강인하단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대로 끌어안아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싶을 만큼 작게 느껴진다. 목울대로 넘어오는 진실을 꾹 눌러 담은 애쉬가 말했다.
“애가 애를 가졌으니 날마다 걱정해도 부족하지. 또 뭘 주워 먹을지 알 수 없으니까 온종일 곁에 붙어 감시하고 싶은 심정이야.”
“기껏 걱정해 줬더니 네놈은 꼭 한마디씩 더해 매를 버는구나.”
“입을 다물어도 수틀리면 주먹부터 쓰지 않나. 그 버릇 고칠 때까지 오른손이 낫지 않을 것 같은걸. 안 그래?”
램파드의 팔을 푼 애쉬가 그를 똑바로 앉혔다. 램파드는 말을 쏟아 낼 준비를 했지만 애쉬가 챙겨 온 스콘으로 입이 틀어막혔다. 주먹만 한 스콘에 입이 막힌 램파드는 애쉬를 노려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시종을 시켜 말린 크랜베리를 구해 와 만든 거야. 한번 먹어 봐.”
신경 써서 만든 스콘은 촉촉해 부드럽게 베어졌고, 크랜베리를 잔뜩 넣어 새콤달콤한 맛이 진했다. 식욕을 당기는 맛에 램파드는 한 손으로 스콘을 쥐고, 우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행사에 끌려 다니느라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해 출출했다. 꽤 큰 크기였는데 한번 먹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애쉬는 램파드의 손이 빌 때마다 새로운 스콘을 하나씩 쥐였다.
램파드가 맛있게 먹자 애쉬의 얼굴을 차지하던 걱정이 조금 덜어졌다. 스콘을 건넨 애쉬는 들고 온 잔을 하얀 천으로 문질렀다. 그는 작은 먼지도 남지 않게 뽀도독 소리가 날 때까지 유리잔을 세심하게 닦았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술은 금지야.”
“그딴 건 알고 있어.”
“알고 있다면서 도수 높은 샴페인을 입에 댄 거냐. 다시는 그러지 마.”
“이미 마신 적도 있는데, 뭘. 맛만 보는 것 정도야 상관없지 않나.”
애쉬는 거울로 써도 될 만큼 깨끗해진 유리잔에 붉은 액체를 채워 넣었다. 새콤한 과실 향이 확 피어오르는 걸 보아 와인인 듯했다.
“곰 사냥 나갔을 때 말하는 거지. 몰랐던 건 어쩔 수 없고, 앞으로 혀끝으로도 건드리지 마.”
잔을 채워 넣은 애쉬가 단호한 표정으로 램파드를 바라봤다. 경고할 거리가 더 남았단 표정이었다. 램파드는 순순히 인정했다.
“발정제도 건드리지 말라는 표정이군. 말하지 않아도 발정제 향을 잘못 맡으면 유산되는 것 정도는 안다. 제조실 근처에도 접근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애쉬는 빈 잔에 술을 채워 넣었고 램파드에게 건넸다. 술만 보면 달려드는 주정뱅이인 줄 아는 건가. 시험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안 마셔.”
“이건 마셔도 돼. 양조장 다닐 때 임신부를 위해 개발한 음료거든. 취기는 돌지 않고, 맛만 술과 비슷해. 네 입맛에 맞춰 특별히 달게 만들었으니까 한번 먹어 봐.”
램파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술잔을 바라봤다. 색과 냄새, 아무리 봐도 레드 와인이었다. 알고 보면 이중으로 준비한 시험대일지도 몰랐다.
“이런 걸 만들 새가 있던 거냐.”
“다시 화이트 궁에 돌아오는 대로 만들었어. 정성을 봐서라도 얌전히 마셔 주지 않을래?”
“내놔.”
먹다가 만 스콘을 받아 든 애쉬가 램파드에게 잔을 건넸다. 서로 한 잔씩 쥐고 가볍게 부딪힌 후 잔을 기울여 마셨다. 그의 말대로 술과 비슷하게 톡 쏘는 맛이지만 몸이 데워지진 않았다. 새콤한 과실이 톡톡 터지는 맛에 램파드는 한 잔을 깨끗이 비웠고, 애쉬는 빈 잔을 받아 들어 정돈했다.
“한 잔 더 마실래?”
“지금은 됐고, 내일 아침 본궁으로 직접 가져오너라.”
“입에 잘 맞지?”
“공교롭게도 그렇군.”
“이건 밤에만 먹는 음료야. 화이트 궁 지하에 있는 조리실에 몇 병 만들어 놨으니 기억해 둬.”
달콤한 맛의 음료를 먹었기 때문인가. 언짢았던 램파드의 기분이 풀렸고, 몸이 나른해졌다. 램파드를 다시 쿠션 더미에 눕힌 애쉬가 이마와 볼을 부드럽게 문질러 줬다. 술기운은 없지만 애쉬의 손길에 마음이 풀린 램파드는 얌전히 누웠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며칠째 정무에 시달렸으니까. 그래도 이제부터 푹 쉴 수 있으니 좋군.”
눈을 감은 램파드가 애쉬의 손길을 즐겼다. 마찰하는 감촉을 즐기는 모양새가 햇볕 잘 드는 곳에 누워 있는 고양이 같았다. 애쉬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고, 램파드의 앞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했다.
눈을 감은 램파드는 애쉬와 하고 싶은 일을 한 가지씩 떠올렸다. 혼인을 치르면 출산 준비도 해야 해서 바빠질 테니까. 무언갈 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램파드는 눈을 감은 채 이야기했다.
“내일은 오전 행사가 끝나는 대로 정원에 갈 것이다. 한창 붓꽃이 필 시기라 볼 만하지. 너도 따라 나와 함께 산책하자꾸나.”
천천히 쓰다듬던 애쉬의 손길이 멈췄다. 램파드는 눈을 떴고, 다시 수심에 빠진 애쉬와 마주했다. 큰 걱정거리를 안고 있는 그의 모습에 머금었던 램파드의 미소가 사라졌다. 속 시원하게 말해 주면 좋으련만, 물어봐도 답하지 않을 테지. 조사하는 중이니 빠른 시일 내에 진실은 드러날 터. 언젠가 드러날 사실을 숨기느라 고생하는 모습에 가슴 먹먹해졌다.
램파드의 표정이 굳자 애쉬가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 이름은 정했어?”
“……아직.”
루트비안의 이름을 딴 자식을 황위에 올릴 생각이었다. 지금 램파드가 품고 있는 아이는 낳는 대로 콘테 공작가로 보낼 거라 이름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이름도 커틀러가 알아서 붙이겠지. 낳은 뒤는 신경 쓰지 않을 거였다.
“방금 말한 붓꽃을 따서 아이리스는 어때?”
“기억해 두지.”
이름을 받아들이기 전, 진실부터 밝혀야 했다. 배 속의 아이는 커틀러의 자식이라고, 신경 써 줄 필요 없다고. 하지만 힘들어 보이는 애쉬의 표정에 오늘도 진실을 숨기기로 했다. 양심의 가책이 무거워 램파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무거운 마음은 정신마저 끌어당겼고, 램파드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삐걱, 램파드 곁에 앉아 있던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램파드에게 먹인 음료는 불면증에 걸린 임신부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다. 몸에 가는 부담은 없애고, 긴장을 풀어 숙면을 도와주는 음료로, 아침까지 푹 잠들어 있을 테지. 수면제 같진 않지만, 피곤했던 램파드에게 뛰어난 효과를 보였다.
계약을 이행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내일 아침 깨어나는 램파드를 향해 같은 방법에 또 속았냐며 한껏 비웃어 줬을 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일 그를 생각하자, 딱딱하게 굳은 애쉬의 입매가 휘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애쉬는 가림막으로 가려진 욕조에 천천히 물을 채워 넣었다. 온갖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램파드 앞에서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
직접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램파드는 애쉬에게 끌린 게 확실했다. 한번 이끌린 마음은 빠르게 크기를 키웠기에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램파드의 마음은 이미 애쉬를 선택한 듯했으니까.
애쉬는 그 감정을 한참 전에 알아챘고, 그가 안심할 수 있게 내 마음도 너와 같다며 먼저 말을 꺼낼까 싶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자신이 저지른 복수의 계획이 실행되는 중이기 때문이었고. 결국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차라리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게 잘된 일이었다.
절반 정도 물을 채운 애쉬는 다시 램파드에게 돌아왔다. 부드러운 쿠션에 몸을 맡긴 램파드는 푹 잠들어 있었다. 꼭 감은 눈은 애쉬가 바라는 대로 아침이 될 때까지 떠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스러진다면 분명 램파드는 크게 상심하고, 놀랄 테지. 낙심한 램파드를 본다면 애쉬의 몸이 죽기 전 마음부터 죽게 될 거였다. 몸속 깊은 곳에 박힌 마음을 지키고자, 손이 멈출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된다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선 램파드의 곁이지만 그의 눈이 없는 곳에서 실행해야 했고, 조건에 들어맞는 날이 오늘이었다.
램파드를 좀 더 편하게 눕힌 애쉬는 그의 곁에 앉아 짧은 편지를 써 내렸다. 진실은 없고, 거짓말로 점철된 글은 램파드의 마음을 찌르는 내용뿐이었다.
램파드가 애쉬를 원망할 수 있게, 마음을 채워 넣은 감정을 모조리 긁어 낼 수 있게 원망을 토해 내는 거짓 글을 작성했다. 그것을 작게 접어 램파드의 머리맡에 놓은 애쉬는 마지막으로 그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모든 게 미안했다. 어떻게든 루사를 설득해 제국 기사가 들이닥치기 전에 산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램파드가 친형을 죽인다는 비극 또한 피했을 텐데.
“미안…….”
루사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을 때, 제국의 황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죽지 않은 것은 루사가 램파드에게 부탁을 했고, 그 제안을 황제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루사라면 연인을 살려 보내는 대가로 주저 없이 죽음을 선택했을 테니까.
모든 것을 램파드의 잘못으로 돌리며 그를 상처 입히기 위해 애쓴 자신을 생각하자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였을까.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였다.
“미안해……. 절대로 용서하지 마.”
결국, 마지막까지 램파드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데, 보듬지 못하다니. 애쉬는 스스로가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으로 느껴졌다.
램파드의 눈가를 쓰다듬던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 꼭 하고 싶은 말은 끝내 내뱉지 못하고, 물이 채워진 욕조로 향했다. 그는 가슴에 매달아 둔 토파즈 브로치를 떼어 내 근처에 올리고, 단검을 쥐었다.
각오를 다진 애쉬가 구두를 신은 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천이 젖으며 몸이 점차 무거워졌다. 그는 단검을 꽉 쥐며 주저 없이 손목을 찔렀고, 고통이 밀려왔다.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깊게 내질러 이번에는 좀 더 깊은 곳의 혈관을 찔렀다.
***
램파드는 꿈을 꾸는 경우가 적었다. 온종일 몸을 움직이고 바쁘게 살아가기에 꿈꿀 새 없이 푹 잠이 든다. 가끔 얕은 잠이 들고 꿈을 꾸게 된다면 악몽뿐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쁜 꿈이 찾아왔다.
악몽의 주제는 몇 가지 정해졌다. 환한 해가 뜨는 아침 끌려가는 형의 뒷모습을 무기력하게 보는 어린 날의 초상, 전쟁 중 마주친 비극들.
이번 악몽은 내린 비로 붉은 진흙이 핏물같이 변한 남부 전선의 비극이었다. 램파드의 기억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 순식간에 물이 고여 붉은 강을 만들었기에 꿈이란 걸 알아챘다.
시끄러울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남자의 통곡이 섞였다. 램파드는 허리까지 차오른 물길에 저항하지 않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것은 램파드의 행동에 가슴이 찢어져 슬피 우는 애쉬의 곡소리였다. 그의 울음소리가 칼날로 변해 램파드의 가슴 안쪽을 후벼 판다. 꿈속에서는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하는데, 램파드의 가슴 안쪽은 지끈거렸다. 당장 그를 찾아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했다. 네 마음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제발 울지 마라.
짙은 피 냄새를 맡은 램파드가 눈을 떴고 냄새가 흩어졌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꿈을 꿔서 현실과 착각한 모양이었다. 잠에 취해 어지러움을 느낀 램파드는 손을 뻗어 옆자리를 만졌다. 서럽게 우는 애쉬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기에 당장 그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애쉬? 어딨느냐.”
답이 없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누웠던 머리맡에 작은 종이 쪼가리가 놓여 있었다. 살펴보는 건 나중이고 우선 애쉬부터 찾아야 했다. 방 안은 비가 내리는 날처럼 공기에 습기가 많이 섞였고 서늘했다.
흘러내린 옷을 정돈한 램파드는 방구석 가림막 뒤, 인영을 발견했다. 야밤에 목욕이라도 하는 건가. 화이트 궁이라면 아래층에 있는 대욕실을 사용하는 편이 더 좋을 텐데.
램파드는 애쉬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발바닥에 물이 묻었다. 맑지 않고 진득하게 늘어지는 액체는 물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피로 온몸이 뒤덮였던 램파드에게 익숙한 질감의 액체였다.
“애쉬!”
덜컥 겁이 났지만, 그의 안위가 우선이었고, 가림막을 세차게 걷었다.
악몽처럼 욕조 가득히 붉은 피가 채워져 있었고, 애쉬의 몸이 절반쯤 잠겼다. 그제야 방 안 가득한 피비린내가 착각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피 냄새에 오장육부가 전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냄새. 죽음의 냄새였다.
“……아!”
아직 꿈에서 깬 게 아닐까. 악몽을 계속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눈을 뜨면 세상모르게 잠이 든 애쉬가 누워 있을 거였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 램파드가 애쉬에게 다가갔다. 현실을 부정하며 안도했다간 영영 늦을지도 몰랐기에. 이를 악물고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무너지듯 무릎을 꿇은 램파드가 손을 뻗어 애쉬의 팔목을 붙잡았다. 칼로 난도질 된 팔은 엉망이었다. 굳어 버린 듯한 손을 억지로 움직여 그의 목을 쓰다듬었다. 램파드의 몸이 크게 떨렸기에 맥박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다. 진정해야 하는데, 뛰어오르는 심장만큼이나 온몸이 덜덜 떨렸다.
“눈떠 봐…….”
애쉬의 몸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지만, 눈은 여전히 꼭 감겨 있었다.
“애쉬……. 제발… 제발, 눈떠. 눈뜨라고!”
체온을 전해 주면 눈뜰지도 몰랐다. 손길대로 휘청이는 애쉬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온기를 전했지만,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안 된다. 이대로 절대 보낼 수 없어!”
볼끼리 마찰해도 그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램파드의 심장 또한 함께 멈추는 기분이었다. 여러 갈래로 찢긴 심장 조각이 날카롭게 변해 온몸으로 퍼져 찌르는 듯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하지 않았더냐. 왜 반응이 없는 거지, 응? …애쉬, 제발!”
램파드는 물속에 잠긴 애쉬의 손을 끌어내 자신의 얼굴에 가져갔지만, 손끝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운 손끝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 속에 있어야 할 따뜻한 피가 존재하지 않음이 느껴졌다. 몸에서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지. 현실 같지 않아 자꾸만 정신을 놓으려고 했다.
“큭……!”
당장 목 놓아 울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번 통곡하기 시작하면 몸속에 박힌 납덩어리를 뽑아 낼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을 게 뻔했다. 울음을 토해 낼 시간에 움직여야 했다.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애쉬를 안아 들어 쿠션 더미로 옮겼다. 쿠션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램파드는 모포를 길게 찢어 애쉬의 손목을 꽉 묶고, 그를 내려다봤다. 푸른빛이 도는 입술은 따스함은 사라지고, 차가움만이 남았다. 생명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시종을 물러가게 만들었기에 직접 움직여야 했다. 램파드는 피로 엉망이 된 차림 그대로 화이트 궁 입구로 달려갔다. 램파드가 지나간 자리는 붉은색 발자국이 그대로 남았고, 점점 옅은 자국이 생겨났다. 가슴 아래뿐만 아니라 배까지 아팠지만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램파드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입구에 서 있던 기사 둘은 피투성이의 황제에게 황급히 달려왔다. 거친 숨을 내뱉던 램파드가 큰 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황궁에 있는 황의를 한 명도 빠짐없이 불러 모아라. 서둘러!”
램파드의 호통에 경비를 서던 기사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큰 소리로 주변 기사를 불러 모아 본궁에 소식을 전했다. 기사들은 최대한 속도를 내며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램파드는 답답하기만 했다.
이성은 이미 늦었다며 쓸데없는 짓거릴 관두라고 하지만 마음만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살릴 수 있다면 모든 걸 동원해야 했다. 몇 번이고 주저앉으려는 무릎이 거슬려 이를 악물었다. 빠르게 달린 덕분에 심장이 쿵쿵 뛰고, 몸의 체온 또한 높아졌다. 램파드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애쉬가 누워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지혈해 둔 게 효과를 봐 눈을 떴을지도 모른다. 떠져 있는 애쉬의 눈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향했지만, 그는 여전히 잠을 자듯 누웠다. 아주 약간이지만 애쉬의 목울대가 움직였기에 램파드의 다리가 허물어지듯 꺾였고,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니, 애쉬 테일러 님. 대체… 이 무슨?”
들이닥친 시종과 황의들이 서둘러 애쉬에게 다가왔다. 마음만은 계속 애쉬 곁에 있고 싶었지만, 황의들을 위해 자리를 비켰다. 날은 춥지 않지만, 램파드의 몸은 계속 떨렸다. 두려움에 장시간 노출된 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애쉬의 상태는 어떤가.”
진맥을 보던 황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곁에 앉은 다른 황의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불경한 소리를 내뱉으면 목을 잘라 버릴 테니 신중하게 말해라.”
“폐하… 하오나.”
“분명히 조금 전까지 목이 움직였다. 어떻게든 눈을 뜨도록 만들어라.”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황의가 겁대가리 없이 입을 열었다.
“심장이 너무 약해지셨습니다. 이미…….”
화가 난 램파드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큰 소리에 바로 전에 말을 올린 황의가 찔끔 튀어 오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짐이 네놈을 치지 않는 건 하나라도 손이 더 필요해서다. 양손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당장 애쉬를 살피거라.”
“알… 알겠습니다!”
램파드의 살기 어린 시선에 황의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숨을 돌린 램파드의 시선에 자그맣게 접힌 종잇조각이 보였다. 불면 날아갈 종이 한 장일 뿐인데,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종이를 펼치자 애쉬가 써 내린 글이 램파드의 남은 마음 조각을 공격했다. 램파드의 마음을 공격하기 위해 날카롭게 갈아낸 듯한 글은 맹렬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방금까지 함께 춤을 추며 램파드를 진심으로 걱정하던 애쉬가 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반항흔이 없으니 손목의 상처는 애쉬 스스로가 만든 거지만 그를 몰아넣은 진범은 따로 있다 느껴졌다. 그는 램파드와 함께하고 싶다고 온몸으로 표출했으니까. 램파드를 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떠날 리 없었다. 비록 편지의 내용은 자신의 죽음으로 램파드에게 복수한다는 의미였어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암살의 연장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하다. 애쉬를 궁지로 몰아넣어 스스로 해할 수 있었더라면 진즉에 했지, 암살자 같은 걸 보낼 리 만무했다. 목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큼 완벽한 암살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렇게까지 일 처리를 깔끔하게 진행할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애쉬를 노릴 법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들고 있던 종이를 꽉 쥔 램파드가 파리해진 밀러에게 명했다.
“당장 커틀러 경을 끌고 와라.”
명령을 내린 램파드는 한 손에 편지를 꽉 쥔 채 애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슴 안쪽은 지속해서 일렁거렸고, 배도 계속 아파 자꾸만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픈 티를 내면 황의의 관심이 램파드에게 쏠릴 터. 황의를 분산시킬 수는 없어 램파드는 통증을 억누르며 벽에 기대 애쉬를 주시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별궁에 있는 커틀러가 화이트 궁으로 소환됐다. 그는 무도회가 끝난 후에도 별궁에 계속 있었는지 어젯밤 복장 그대로였다.
“폐하, 저를 부르셨사옵니까.”
램파드는 눈알만 굴려 커틀러를 확인한 후 다시 애쉬를 바라봤다. 그 또한 침상에 누워 황의에 둘러싸인 피투성이의 애쉬를 바라보았다.
기사단을 운영하는 커틀러는 대번포드 백작이 수도로 입성했단 소식을 들었다. 그 때문에 조바심이 생긴 서민 놈이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자결이라는 손쉬운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다니. 아직 숨통이 붙어 있는 모양에 커틀러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죽는 방법까지 손수 지시해 줬어야 했던 모양이었다.
뻔뻔하게 애쉬를 바라보는 커틀러의 시선에 걱정으로 뒤틀린 램파드의 몸속이 분노로 들끓었다. 램파드는 대기 중인 기사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검집째 뺏어 들고, 애쉬를 커틀러의 시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움직였다.
“따라와.”
“예.”
황제가 검을 쥐며 커틀러를 지목하자 방 안의 사람들 모두 긴장에 휩쓸렸다. 누가 봐도 램파드가 커틀러를 의심하는 모습이었다.
애쉬가 누워 있는 옆방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작은 응접실이었다. 커틀러와 둘만이 남게 되자 램파드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이번 일도 네놈이 꾸민 일이겠지.”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번처럼 화이트 궁에 몰래 잠입해 애쉬에게 손을 댄 것이 아니냐고 묻는 거다.”
램파드의 추궁에 커틀러는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간밤에 화이트 궁에 잠입해서 저걸 저 꼴로 만들었다고 하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추측한 것과 달리 저는 어젯밤 내내 별궁에 있었으며, 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너는 어찌 계속 거짓말만 하는 거냐!”
커틀러는 시야를 내려 램파드의 손을 봤다. 한 손은 조금 전 기사에게 뺏어 든 검이 들렸고, 다른 손은 종잇조각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램파드가 쥐고 있는 종잇조각을 뺏어 들었다.
“뭐가 적혀 있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커틀러는 빼앗은 편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보란 듯이 흔들었다. 그는 램파드가 노려보기만 하자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렸다.
“제 필체가 아닌 게 확실하며 폐하를 원망하는 말뿐. 저에 대한 말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군요. 대체 무엇으로 절 의심하는 겁니까.”
램파드가 생각하기에도 애쉬가 남긴 글은 읽는 와중에도 헛웃음이 나오는 허망한 내용이었다. 누군가 시키지 않았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허무맹랑한 거짓말이었다.
“네가 거짓말을 쓰도록 지시한 거겠지.”
“제가 관여했으면 저런 반사체 꼴이 되었겠습니까. 확실히 숨통이 끊겼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흘려 말하는 커틀러의 행동에 참고 있던 램파드의 마개가 뽑혀 나갔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흥분한 램파드는 발을 들어 올려 커틀러의 복부를 차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이성을 잃은 램파드의 공격은 허점투성이였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커틀러는 작은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 바른대로 고해라……!”
대책 없는 공격에 복부를 가격당한 커틀러는 바닥에 나뒹굴다 자세를 잡아 앉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램파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무얼 말하라는 겁니까.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둘러말하지 말고, 말해 보시죠. 당신이 내뱉는 대로 따라 말할 테니까요.”
램파드는 머리의 혈관이 터져 버리는 기분이 들었고, 검을 뽑아 들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를 한때, 잠시나마 평생의 반려로 느낀 감정 따위는 찢겨 사라졌다. 오직 적으로만 판단되었으며 애쉬 대신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너를 벨 수 없을 거라고 가증스럽게 말한 적 있지. 지금 이 자리에서 시험해 보자꾸나!”
“잠… 잠시만요!”
램파드의 앞을 가로막은 건 커틀러와 춤을 췄던 릴이었다. 황궁이 소란스러워져 걱정되는 마음에 커틀러와 함께 화이트 궁으로 향한 릴은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칼을 뽑아 드는 램파드의 행동에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램파드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커틀러 님은 암살 같은 걸 하지 않으셨어요!”
눈을 질끈 감은 오메가는 잔뜩 겁을 먹었고, 그의 표정에 램파드의 손이 공중에서 멈칫했다. 눈앞에 있는 오메가는 검 같은 걸 휘두를 필요도 없이 맨손으로 죽여 버릴 수 있는 상대였다. 벌벌 떨면서 도망가지 않는 금발의 오메가가, 전쟁터에서 죽였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오메가와 같게 느껴졌다. 차마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이성이 조금은 돌아온 램파드가 혀를 차며 들었던 검을 내려놓았다.
“네가 어떻게 아느냐.”
“저… 그게…….”
램파드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릴이 고개를 푹 숙이며 우물쭈물했다. 잠시 되찾은 이성이 다시 사라짐을 느낀 램파드가 소리쳤다.
“자작가의 후계자도 되지 못한 자가 감히 황제의 질문을 회피하느냐!”
“히익, 그… 그게… 지… 지금까지 계속.”
검을 꽉 움켜쥔 램파드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릴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말을 더듬는 릴을 제치고 커틀러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죠. 별궁의 방이 비어 있으니 날이 밝을 때까지 사용해도 좋다고. 말씀하신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커틀러를 막아선 릴의 표정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램파드의 인상은 더욱 무서워졌고, 짧은 비명을 지른 릴이 고개를 푹 숙이며 우물우물 말했다.
“저… 커틀러 님은 밤새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자리를 비우시지 않았구요……. 화이트 궁에 갈 시간은 없으셨… 어요.”
커틀러는 모르겠지만, 온몸을 달달 떠는 오메가가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진 않았다. 두둔하는 오메가를 방패 삼은 커틀러의 표정은 한 점 변화 없이 무덤덤했다.
지끈, 램파드는 온몸이 욱신거려 검을 바닥에 대충 던져 놓고 배를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여러 번 했지만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이 피를 데우는 느낌이었다. 분출하지 못한 분노에 몸이 점차 떨려 왔고, 혈관이 터질 듯이 팽팽해진 것 같았다.
“……큭!”
램파드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근처 벽에 몸을 기댔다. 걱정스레 바라보는 릴을 제친 커틀러가 램파드를 끌어안았다.
램파드를 꽉 끌어안은 커틀러는 옅은 페로몬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곁에 있는 다른 오메가가 두려움에 벌벌 떨 정도로 우성 알파의 향은 사나웠다. 하지만 램파드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진미였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제가 계속 곁에 있을 테니까.”
역겨운 목소리에 구역질이 올라와야 했다. 스무 갈래로 조각내 죽여 버리고 싶은 머리와 달리 램파드의 심장은 그의 박동에 맞춰 점차 진정했다. 이미 멀어지다 못해 혐오스러운 그의 향이 어째서 이렇게나 달콤하며 평온하게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없는 램파드의 머릿속이 또다시 뒤죽박죽 섞여 버렸다.
커틀러의 품에 안겨 점차 안정을 찾아가던 램파드의 뇌리에 커다란 의문이 자리 잡았다. 어째서 아직도 연결되어 있지. 어떤 일까지 당해야 그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건가.
램파드는 양팔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 떨어졌다. 그는 순순히 램파드를 놓아줬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심각한 표정의 황의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램파드를 찾아왔다. 황의의 설명을 들을 필요 없이 램파드는 곧장 옆방으로 이동했다. 애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고, 주변을 둘러싼 황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닦달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내리며 숨을 깊게 내쉰 후에야 램파드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말해 보아라.”
황의들은 누가 먼저 나서길 바라는 듯 서로 눈치만 봤다. 커틀러의 페로몬에 환장하는 자신의 몸에 경멸을 느낀 램파드의 인내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약병을 들어 맨 앞에 있는 황의에게 던져 맞췄다. 쨍그랑, 유리병이 깨지는 큰 소리에 황의들이 화들짝 놀랐으며 이마를 맞은 황의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당장 말하라고!”
“그, 그… 게……. 애쉬 님은 앞, 앞으로 영영 눈을 뜨지 않으실… 겁니다.”
“분명 눈을 뜨게 만들라 했을 텐데!”
순순히 고한 황의가 램파드의 발길질에 쓰러졌다.
“히익, 최선은 다했습니다. 아악!”
엎어진 황의의 등 뒤로 무자비한 폭력이 내려앉았다. 땅바닥에 얼굴을 부딪친 황의는 앞니가 부러져, 살려 달라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경비를 서던 기사들은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치지 않도록 숨을 참고 기척을 죽였다.
하고 싶은 대로 날뛰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쓸모없는 것들……. 모두 죽어라.”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램파드가 검을 쥐었다. 두려움에 잠식된 자들은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만하십시오.”
황의가 내지르는 비명을 들은 커틀러가 램파드에게 다가왔다.
“꺼져!”
커틀러는 램파드의 명령을 무시하고 다가갔다. 아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가시를 세운 램파드가 커틀러를 공격했다.
그러나 잔뜩 흥분해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공격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커틀러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날을 꽉 붙잡았다. 하얀 면장갑이 베이고 피가 흘러내렸다. 제대로 휘둘렀다면 뼈가 부러지고, 손이 잘렸을 거지만 램파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검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눈이 뒤집힌 채 씩씩거리는 램파드의 팔을 꽉 붙잡은 커틀러가 검을 뺏어 멀리 던졌다. 무기를 빼앗겨도 램파드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놔!”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당한 커틀러는 램파드의 허리를 끌어안아 움직임을 봉쇄했다.
“폐하의 뜻으로 신분 관계없이 실력자만 뽑아 놓은 황의들이잖습니까. 이런 식으로 죽이기 위해 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재 등용을 실행하신 겁니까.”
“닥쳐!”
램파드는 커틀러를 공격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되레 속박될 뿐이었다. 단단한 쇠사슬에 온몸이 칭칭 동여매진 듯, 벗어날 수 없었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벗어나기 위해 온몸의 힘을 짜낸 램파드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진정은커녕 되레 흥분만 시킨 듯, 램파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눈매가 사나워졌다. 커틀러는 램파드를 꽉 끌어안은 채 황의와 시종, 기사에게 명했다.
“여긴 내가 해결할 터이니, 모두 자리를 비우거라.”
“괜, 괜찮으시겠습니까.”
“책임은 내가 진다. 나가라.”
커틀러에게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올린 황의들이 다친 자를 부축하며 밖으로 사라졌다. 연신 발버둥을 친 램파드는 지친 와중에도 날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램파드 폐하, 이만 됐습니다.”
“닥쳐, 닥치라고!”
그는 램파드의 양손을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짜낼 힘도 없는 램파드는 이를 악물고 반항했다. 꽉 붙잡혀 있으면서도 팔을 비트는 통에 손목이 붉게 변했다. 손을 놓아준 커틀러가 램파드의 머리를 감싸 자신의 품에 넣었다.
“모두 물러가게 했으니까 그만 참으십시오.”
“큭… 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커틀러는 자신의 품을 빌려줄 뿐, 입을 다물었다.
“네놈이…… 너 같은 새끼를 만나지 않았다면!”
“…….”
“꺼져, 커틀러. 제발 내 인생에서 이만… 사라져……!”
커틀러에게 증오를 담아 욕지거리를 내뱉던 램파드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흣, 애쉬……. 흐윽… 흣……!”
그간 참았던 설움에 복받친 램파드는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방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흐느꼈지만 몸 안쪽에 박힌 슬픔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가슴 안쪽이 너무 아파 한 손으로 꽉 붙잡았고, 괴로움을 토해 내고 싶어 울었다.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절망하지 않고, 저항해서인가. 시련은 극복할수록 난도가 높아져만 갔다. 오메가의 운명을 거부한 대가로 애쉬를 잃은 거였다. 고난을 뛰어넘는 걸 포기하고, 적당히 순응하고 살았으면 애쉬가 곁에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램파드의 몸이 무너졌고, 품을 빌려준 커틀러도 따라 주저앉아 품을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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