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귀환
황궁 식구는 곰 사냥을 끝마친 개선장군을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사나운 짐승 같은 황제를 영접하게 됐다. 당장에라도 송곳니를 꺼내 물어뜯어 버릴 듯한 날카로운 기운의 황제에게 그 누구도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만 조아렸다. 눈에 띄었다간 질타가 집중될 테니까 램파드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기 급급했다.
일행의 맨 마지막, 원래라면 램파드와 나란히 환궁해야 할 애쉬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누가 봐도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애쉬 테일러였다.
황제가 황후 후보를 없는 사람 취급하니 다른 이들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단 한 사람, 애쉬의 예절 교육을 담당하던 밀러만은 조용히 기척을 숨기고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애쉬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신경 써서 조심히 소곤거렸다.
“애쉬 테일러 님. 당신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겁니까.”
“아무것도.”
저 먼발치 황제가 없었더라면 당장 실토하라 큰소리를 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심호흡을 여러 번 한 밀러가 애쉬를 흘끔 바라보았다.
“하아, 무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입궁하는 대로 엎드려 싹싹 비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물론 괜한 사람의 목이 여럿 날아갈 겁니다.”
단순히 사죄한답시고 비는 거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저 노기를 잠재울 방법은 사실을 밝히는 방법 하나뿐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램파드에겐 노기 대신 절망과 슬픔이 자리 잡겠지.
애쉬는 밀러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차마 램파드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고 경멸받는 일 또한 괴롭긴 하지마는, 그 누구보다 소중해진 램파드가 슬퍼할 바엔 욕을 먹으며 고개를 숙이는 편이 나았다.
램파드가 애쉬를 향해 폭언을 쏟아붓고 화를 내는 이유는 그만큼 형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껏 형이 말하는 아우의 이야기만을 들었다. 반대로 아우가 형을 어찌 생각할지는 애쉬의 추측뿐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염두에 뒀었다. 애쉬는 램파드가 죽인 오메가가 사실은 형이었단 사실을 밝히기 두려웠다.
본궁에 입궁하자 애쉬를 호위하도록 지시한 로열 가드가 따라붙었다. 램파드는 그 모습을 짜증스레 바라봤다. 단순히 거슬리는 정도가 아닌 누가 봐도 철천지원수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저 황제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살려 두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인내를 발휘하는 거다. 그렇기에 밀러는 다시 관계가 회복될 가망성이 있다고 판단해 애쉬를 도우리라 마음먹었다.
“며칠이 지나고 폐하의 기분이 풀리시면 간청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만 부디 폐하의 기분을 거스르지 말고 쥐 죽은 듯 지내십시오.”
그 말은 지키지 못할 게 분명했기에 애쉬는 답하지 않았다. 콘테 공작이라고 했던가. 대화를 나눠야 하지만 어딨는지도 모르는 그자를 호출할 방도가 없었다. 램파드에게 부탁해 봤자 순순히 들어줄 리 만무했다. 각인한 알파를 곁에 두지 않고 왜 내쫓았는지 속사정은 모르지만, 썩 좋은 이유는 아닐 터. 쫓아낸 알파보다 더 거슬리게 하면 다른 알파를 불러올지도 몰랐다.
조용히 속삭이던 밀러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물러났다. 램파드의 살기 어린 시선이 애쉬의 몸을 관통했다.
“따라오너라.”
“네.”
목적지는 전혀 익숙지 않은 장소였고, 넓은 무도회장을 지나 광활한 회랑에 다다랐다. 가장 앞장서고 있는 건 입을 굳게 다문 램파드였고, 그 뒤로 애쉬, 바로 뒤로 영문을 알 리 없는 로열 가드들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따라갔다.
대낮인데도 어둡고 칙칙한 장소가 등장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금색 빛으로 반짝이는 본궁과 달리 회색빛의 넓은 장소였다. 어두운 장소지만 황궁 그 어느 곳보다도 활기차고 사람이 많은 장소였다.
이곳은 시종이 공동으로 머무르는 구획으로 그들의 일터와 기숙사가 위치했다. 찾아올 리 없는 황제가 등장하자 사무실에 앉아 있던 시종장이 뛰쳐나왔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인 일로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는지요.”
시종장이 등장하자 주변에서 휴식 중이던 시종이 전부 나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램파드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모인 이들이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기숙사 내에서 가장 작은 방을 찾는다.”
“빈방을 찾으시는 거죠? 지금 이 구획에는 남아 있는 방이 없어 이동하셔야 합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램파드는 애쉬에게 고갯짓했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죄인처럼 램파드의 뒤를 따랐다. 차가우리만큼 딱딱한 램파드의 표정에 애쉬는 은연중 느꼈다. 이제 램파드가 전처럼 웃어 주지 않을 거란 것을. 당연히 감내해야 할 부분이건만 마음이 쓰린 것은 막히지 않았다.
시종장이 안내해 준 방은 기숙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방이었다. 입구에는 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고, 시종장이 문을 열었다. 첨탑 꼭대기 층에 위치한 덕분에 방의 모양은 삼각형이였으며 겨우 침대만 하나 놓일 정도로 작았다.
다행히 햇볕은 밝게 들어와 있었는데, 한동안 사용을 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램파드 폐하, 여기가 기숙사에서 가장 작은 방입니다.”
눈으로 방을 훑어보던 램파드가 애쉬의 멱살을 잡고 방 안으로 처박았다. 배려 없는 거친 손길에 애쉬는 그대로 땅바닥으로 쓰러졌고, 먼지로 된 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애쉬가 입은 검은 정장에는 회색 먼지가 달라붙었으며, 램파드의 거친 행동에 브로치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깜짝 놀란 시종장은 애쉬와 램파드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였다.
“시종장, 앞으로 이자는 부엌 일꾼으로 취급해라.”
“알겠습니다. 따로 지시할 사항이 있으십니까.”
“매일 새벽 4시. 짐의 침실로 갓 구운 빵을 배달하도록 지시하고 평소에는 이 방에 가둬 두도록. 그 누구도 짐의 명 없이 애쉬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전 시종에게 알려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좁은 방에 애쉬를 던져 놓은 램파드가 밖으로 나와 입구를 지킨 로열 가드에게 손짓했다.
“저런 자에게 수석 기사를 붙여 줄 필요는 없지. 말단 기사를 감시용으로 붙이도록 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램파드의 지시를 받은 로열 가드가 열린 문을 닫았다. 애쉬는 닫히는 문틈 사이로 경멸 어린 램파드의 시선을 마주했다. 자신의 무능력으로 연인이 죽고, 램파드를 원망하던 애쉬의 시선과도 같았다. 애쉬는 차마 끝까지 램파드를 마주하기 힘들어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애쉬는 다른 이의 소지품에 둘러싸였다. 남의 것이라는 생각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리가 무겁게 느껴져 푹 숙여 쓰러지지 않도록 손으로 지탱했다. 혼자가 되자 단단하게 졸인 마음을 드디어 풀 수 있었고,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비극은 램파드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아무리 몰랐다지만 제 형을 죽였으니 램파드에게도 큰 비극이었다. 사실을 알게 되면 램파드의 가슴에도 애쉬만큼이나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남을 터.
앞으로 그가 겪을 일은 온당한 대가라고 합리화를 시키고 싶지만, 마음이 머리를 배신했다. 괴로움에 찌든 심장은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램파드를 향한 위협을 제거하라 난리였다.
오랜 세월 루사의 이야기로 인해 그가 동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인가. 몇 번 몸을 섞었다고 몸 정이 들었든 뭐든, 램파드에게 닥칠 후환을 생각하면 막고 싶었다.
후환은 알파로 발현한 루사의 아이였다. 오랜 세월 부모가 누군지도 몰랐던 아이를 램파드의 손에 망한 대번포드 백작가에게 되돌려 주는 것만으로도 복수는 시작됐다. 지금 와서 사실을 밝혀 봤자 램파드는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루사의 아이를 램파드와 만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썰미 좋은 그라면 어린 알파가 누구의 핏줄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테니까. 애쉬가 기댈 이는 자신을 경멸해 마지않던 공작뿐이었다.
***
황제의 하루는 남들보다 일찍 시작된다. 해가 뜨지도 않은 야심한 새벽에 일어나 전날 밤 건네받은 서신부터 살핀다. 답장을 쓰고 왁스를 녹여 봉인까지 끝마치면 대륙 정세에 대한 보고서를 읽는다. 이후 아침 식사 시간까지는 부족한 잠을 자든가 로열 가드가 사용하는 연병장에 가서 검술 수련을 하기도 한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무겁고 메스꺼웠다. 며칠간 괜찮았는데 오늘은 또 왜 이러는지. 한 손을 이마에 올리고 심호흡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똑 똑 똑, 침실 문을 두드리는 불유쾌한 소리가 들렸다. 찾아올 놈을 떠올리자 배 속이 더욱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상쾌해야 할 아침마다 구더기 같은 놈을 만나니까 아침에 일어나는 게 매일매일 곤욕이었다.
“어제는 멀쩡해서 실망했는데 오늘은 괴로운 모양이야.”
침대에서 일어나긴 힘들지만, 눈알을 굴리는 건 쉬웠다. 램파드는 진심을 담아 상대를 노려보았다. 빵이 담긴 쟁반을 든 애쉬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고생하는 꼴을 보니 기분이 한결 좋은걸.”
“널 살려 놓은 이유를 잘 알고 있지 않나……. 할 일만 하고 냉큼 썩 꺼져.”
“내 향이 필요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말하면 원하는 걸 주지 않을 건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현기증이 핑 돌아 도로 누웠다. 램파드는 느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며 애쉬를 노려보았다.
그는 제멋대로 의자를 끌고 와 램파드 곁에 앉았다. 꾀병은 아닌지 침대에 드러누운 램파드는 괴로워 보였다. 양손을 깍지 끼고 무릎 위에 올린 애쉬가 그 모습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고약한 성격을 가졌으니 입덧도 유다르지.”
“아무래도 내년에 살아 있을 생각이 없나 보군. 내가 계속 이 신세라 생각하는 거냐.”
“입덧 같은 건 두어 달 고생하면 괜찮아지겠지.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때 가서 자비를 베풀기 원한다면 얌전히 기어.”
정말 목숨을 갖다 버릴 생각인지, 그는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었다.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오래 살 거라 생각하지 않아. 죽더라도 복수는 제대로 끝내야지.”
램파드는 자신의 작태에 환멸이 느껴져 이를 갈며 상대를 노려봤다. 애쉬가 용서해 준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어떻든 각인한 오메가를 소중히 대해 줄 거라는 큰 착각을 했다. 그의 달라진 행동은 과거 잘못을 포용한다는 뜻으로 비쳤으니까. 아주 잠깐, 램파드는 애쉬가 자신을 이해해 줬다고 느꼈다. 연인을 죽인 건 전쟁 중 어쩔 수 없던 일이었다고.
한 번 덫을 놓은 자를 또다시 믿다니. 어떻게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전적이 있는 자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며 유혹했을까. 램파드는 이를 으득 갈며 애쉬를 노려보았다.
“능력도 없는 무뢰한 주제에 꿈도 야무지군.”
한쪽 입꼬리를 쭉 끌어 올려 비웃음을 머금은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왔다. 또다시 역겨운 손이 다가오자 램파드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누워 있는 상태로 움직여 봤자였다. 애쉬의 손이 램파드의 턱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의 손이 닿는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었고, 램파드는 당장 떼어 내고 싶어 고개를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실현 가능한 꿈인걸. 지금 당장 수도 내에서 널 도울 자는 나밖에 없어. 총명하신 분이 설마 머저리같이 몰랐던 건 아니겠지?”
“……개자식.”
램파드가 욕설을 내뱉자 애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가 뜨면 시종이 들이닥칠 건데, 침대 신세면 곤란하지 않나? 임신 사실을 들켜 황제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는 것도 나한테는 기쁜 일이지. 아, 혹시 또 몰라. 차기 황제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대신이 대용으로 쓸 알파를 잔뜩 데리고 올지도. 도와준 알파의 자식을 밴다는 조건으로 말이지.”
램파드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단순히 램파드를 죽이든가 폐위시킬 작정이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짓거릴 할 리 없었다.
“그러게 각인한 알파를 왜 내쫓은 거냐. 그자라면 널 지켜 줄지도 모를 텐데.”
“입 닥쳐.”
“힘이 넘쳐 보여 다행이야. 알파의 페로몬, 필요하지? 입은 멀쩡한 거 같으니까 빨아 봐.”
턱뼈가 아릿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쥐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네놈은 가치가 없어지는 대로 죽을 줄 알아라.”
“되다 만 오메가라 각인을 별것 아니라 생각하나 본데 램파드, 넌 날 쉽게 죽이지 못해. 그딴 협박 통하지 않으니, 나불거릴 시간에 좆이나 물어. 사람 오기 전에.”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램파드는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 램파드만 손해였다. 애쉬를 향해 쏘아 보내는 날카로운 시선을 죽이고, 입술을 씹었다. 닥친 상황을 피할 도리가 없으니 기세가 한껏 죽었고 자존심이 꺾여진 모습이었다.
그런 램파드를 바라보는 애쉬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입덧으로 수척해진 램파드의 몸은 안타까울 만큼 약해 보였다. 자신의 아이를 밴 사람을 보듬어 주고 지탱해 주지는 못할 망정 벼랑으로 내몰기나 하다니.
애쉬는 당장 램파드를 꽉 끌어안아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램파드는 생명력 넘치고 강인한 자지만 애쉬에겐 친동생 같은, 아니, 가슴 안쪽을 빈틈없이 메운 누구도 대치할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소중한 자였다. 그런 귀중한 사람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바라보자 가슴 안쪽이 사무치도록 쓰려 왔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을 모조리 걷어 내고, 밝은 웃음을 돌려주고팠다. 모든 게 장난이었다고.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전처럼 내 앞에서 편히 웃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절을 베풀면 램파드는 애쉬에게만 기댈지도 모른다. 하루라도 빨리 램파드의 진실을 알고 있는 다른 알파를 불러오려면 마음을 모질게 먹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애쉬가 램파드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불안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램파드의 가슴 위에 걸터앉아 바지 버클을 풀어 내렸다. 태연하게 자신을 유지하던 램파드의 표정이 점점 깨어져 가는 게 보였다.
“죽은 형 대신 황좌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더니만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냐. 협상하고 싶으면 혀를 천박하게 놀려.”
입을 꾹 다문 램파드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입 안에 뭔갈 넣고 있으면 비역질은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초 하나에만 의지한 방 안은 어두웠고, 애쉬의 얼굴에 음영이 짙게 드리웠다. 단단하게 굳은 입매와 싸늘한 눈동자가 램파드에겐 저를 심판하러 온 악마같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국교를 파면시켰기 때문에 벌을 받는 건가. 아니, 애쉬를 저렇게 만든 것은 램파드 본인이었다.
램파드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아직 어둡지만 해가 뜨기 시작하면 순식간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무엇을 위해 이때껏 버텨 온 자리인데, 자존심 하나 때문에 잃기엔 쌓아 올린 시간이 귀했다. 램파드는 저 스스로 만들어 낸 재앙을 달게 받아먹기 위해 애쉬가 원하는 대로 입을 벌렸다.
“생각보다 입이 작네. 더 크게 벌려 봐.”
단단한 손가락이 램파드의 입 속에 들어와 좀 더 크게 벌리도록 만들었다. 램파드는 마디 사이를 깨물어 끊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며 숨을 천천히 쉬었다. 눈을 감으니 입 속에 들어찬 게 뱀같이 느껴졌다. 꾸물꾸물, 꿈틀거리는 새끼 뱀이 빠져나가면 독을 머금은 굵은 뱀이 들어올 거였다.
“……읏.”
“목 안쪽 구멍이 보이도록 크게 벌려. 이 정도는 부족하거든.”
강제로 벌려진 램파드의 입은 한계였고, 턱이 아릿해질 정도였다. 한계로 벌려진 턱이 덜덜 떨렸고, 닥쳐올 고통에 램파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금니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파고든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끈적한 침이 묻은 손가락이 램파드의 볼에 닿았고, 소름 끼치는 손길에 램파드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벼랑 끝에 몰아넣은 것도 부족해 램파드의 등을 떠밀기까지 하다니. 애쉬는 이 이상 램파드를 몰아세울 자신이 없어졌다. 이렇게나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그를 위해서지만 램파드를 더는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램파드는 큰 상실을 겪어 텅 비어 버린 애쉬의 인생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준 사람이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살아갈 마음이 생기건만, 어찌하여 자신은 그를 죽음과도 같은 괴로움에 밀어 넣는가.
“하아…….”
입 속으로 성기가 파고드는 대신 지친 기색이 역력한 깊은 한숨이 들렸다. 곧이어 콧속으로 차오르는 페로몬 향에 램파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독니를 가진 악마가 아니라 당장에라도 엉엉 울 듯한 어린아이가 보였다.
애쉬의 저런 모습이 가증스러워야 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가족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 짐승이 순간 가엾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라면 남을 속일 필요 없어 거리낌 없이 자신을 내보였던 전적이 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지낸 애쉬 테일러를 온전히 파악했다고 생각해서일까.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지만은 각인으로 엮인 누구보다 가까운 친밀한 사이라 느껴져서일지도 몰랐다.
문득 말하지 못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겪었으면서 또다시 믿지 못할 사내를 마음속으로 두둔하다니.
램파드는 벌려진 입을 천천히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계속 보고 있으면 양팔을 뻗어 끌어안을 것 같아 그를 외면했다.
삐걱, 램파드의 몸 위에 올라탄 애쉬가 바지를 정돈하고 비켜났다. 그는 짧은 머리를 신경질 내듯 털어 내며 무언갈 떨쳐 내려 애썼다.
외면한 램파드의 시선이 다시 애쉬에게로 향했다. 그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으며,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했다. 분명 밝히지 못한 진실을 품고 있단 모양새였다.
애쉬는 램파드의 소중한 형을 죽음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에게 기회를 주고팠다. 램파드 또한 애쉬의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앗았으니까. 그의 연인을 죽여 행복한 미래를 빼앗은 것에 대한 사죄로써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한심한 놈. 복수한다며 호기롭게 말하더니 정말로 몸 정이 든 것이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애쉬가 의자를 힘껏 차 버렸다. 쨍그랑, 쓰러지는 의자 덕분에 근처에 있는 꽃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의자 하나로 분이 풀리지 않은 애쉬가 씩씩댔다.
“램파드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램파드의 침실 앞에서 경비를 서던 로열 가드였다. 황제의 침실은 방음이 되어 목소리는 흘러나가지 않지만, 물건이 깨지는 소리는 매우 컸다. 램파드는 문밖에서 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키워 말했다.
“아무 일 아니다. 물러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여전히 그는 진정하지 않고 흥분에 몸을 맡겨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애쉬는 램파드의 숨통을 끊기 위해 매복한 짐승같이 느껴졌다. 달콤한 말로 램파드를 꾀어내 숨통을 끊을 기회만 엿보는 짐승. 마침 비가 내려 잔뜩 부풀린 털이 젖었는데, 본 모습은 자그마했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있나 보군.”
“그런 거 없어.”
“내 형, 루트비안과 무슨 일이 있던 거냐.”
“그런 거 없다고!”
“애쉬.”
“창관에서 오메가랑 만났는데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어린애 구멍이 궁금해서 죽을 때까지 붙어 있었다. 내 좆물을 받아먹은 오메가의 비명이 궁금하냐. 아니면 어떤 체위로 안았는지 궁금해? 가격이 얼마였는지 알려 줘?”
그는 감정을 조절하는 데 아직도 서툴렀다. 짐승의 울음을 흉내 내고 있지만 사람의 형상을 유지했다.
“연기하려면 제대로 해라. 그렇게 덜덜 떨면서 대체 무얼 믿으라는 거냐.”
“연기가 아니라고! 그의 첫 손님은 나였어. 짐승과 교미를 한 다음 날 곧바로 구매한 첫 손님이 나라고!”
“거짓말 말아라.”
꿰뚫어 보는 듯한 램파드의 시선에 장악당한 애쉬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없는 말을 지어내며 루트비안을 욕보이다니.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더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하아, 하아, 하!”
“널 도울 자는 나다. 뭘 잡았는지 모르나 썩은 줄 같은 건 버리고 사실대로 말해.”
“오메가… 주제에… 뭘 돕겠다고.”
갈라진 목소리에는 더는 전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공을 들여 회유하기엔 램파드의 인내심도 밑바닥을 드러냈다. 램파드는 애쉬의 상처란 걸 뻔히 아는 이야기를 무기로 선택했다.
“그래. 난 오메가라 너와 똑같이 떨기만 하던 오메가를 돕지 못했다. 만약 내가 알파였다면 흥분한 기사를 누르고, 네 연인을 구했을지도 모르지.”
애쉬의 떨림이 더욱 거세졌다.
“반면에 너는 알파로 발현할 놈이었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못할 정도로 사랑한 짝이 위험에 처했는데, 저만 살겠다고 기운을 숨긴 것이냐. 알파 보호자가 있는 걸 알았더라면 기사들도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그 전에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그 순간 곧바로 해결했겠지.”
“입 닥쳐.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넓은 보폭으로 다가온 애쉬가 램파드의 멱살을 잡고 쓰러뜨렸다. 그의 손이 부드러운 가운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매끄러운 램파드의 가슴을 거칠게 문지르고, 톡 튀어나온 유두를 꼬집었다. 램파드의 심장이 위치한 곳에 애쉬의 손바닥이 멈췄다.
“왜 손이 멈췄지. 나한테 복수하려던 거 아닌가?”
“흡… 흐으읍… 큿.”
전의를 상실한 애쉬는 램파드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사실을 내뱉도록 유도하기 위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몸을 맡겼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되레 울기 시작했다.
한번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볼을 적시고 램파드의 가슴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램파드는 제 몸에 떨어진 물방울을 무심히 바라봤다.
“끝까지 루트비안 형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냐? 사실대로 고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죽일 놈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너에게 밝힐 사실은… 더는 없어. 그게 전부니까.”
“전부긴. 네놈의 약혼자도 원래는 창부였다고 했지. 형님과 같은 창관에 있었던 거냐.”
애쉬는 울음을 삼켰지만 딱할 정도로 몸이 떨렸다. 그의 진실을 듣기 위해 태연한 척하지만, 램파드의 마음 안쪽은 점점 괴로움으로 조여 왔다. 애쉬는 어울리지 않는 연기를 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이를 상처 입힐 배짱도 없는 나약한 놈이 애쓰기는.”
애쉬의 연인이 죽었던 그 날, 황제의 이름을 가르쳐준 의미는 복수 같은 걸 한답시고 허튼 마음 품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 뜻은 애쉬에게 불똥이 튈까 봐 냉큼 목숨을 내놓은 오메가 연인의 의지였기도 했다.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죽은 연인이 복수 같은 걸 원했을 거 같나.”
“흡… 아니……. 루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도 앙갚음을 하러 나타나다니 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놈이군.”
“…….”
“…형에 관한 이야기를 폭로해 내 마음에 상처 입힐 생각이었냐. 어지간한 각오로 찾아온 건 아닐 텐데 참으로 시시한 복수 방법이지 않나.”
“나는… 큽…….”
멈추었다 생각한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고, 램파드의 마음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방울져 떨어진 눈물은 피부를 적시진 못해도 그 아래 위치한 마음은 축였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장난감이라 생각했는데, 마음 한편에 애쉬의 자리도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힘낸 건 인정해 주마. 하지만 여기까지 하고,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라. 더는 묻지 않고 얌전히 놓아줄 테니까.”
램파드가 기억하는 형의 마지막은 여러 명의 기사에게 둘러싸여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애쉬는 그다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썩 좋은 이야기가 아닐 뿐더러 사실을 안다고 해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형에 대한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추슬렀으니까 이번에도 빨리 정돈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에 살아 있는 자에게 집중하고팠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진 못해도 울고 있는 남자를 달랠 순 있으니까.
손을 뻗은 램파드가 애쉬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의 몸에서 막 흘러나온 눈물은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직… 웃, 끝나지 않았어.”
“왜지? 네 능력으로는 어찌하지 못한단 거 잘 알고 있지 않냐. 계속하다가는 너 또한 고통받을 거다.”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거라면 찾아오지도 않았어.”
“단단히 각오했나 보군. 그런 것치고는 막바지에 다다라 손이 멈췄구나.”
감정을 쏟아 내도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였고, 눈물 또한 멈출 기미가 없었다. 막판에 손을 멈춘 건 램파드에게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전 연인의 바람을 배반하면서까지 복수하고 싶은 증오와 어느 정도 크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램파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그의 몸속에서 다투는 중이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해 뒤섞인 마음이 싸움터인 그의 몸을 좀먹었다.
어느 한쪽이든 결정을 내리면 편해질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니. 램파드는 애쉬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목을 쥐게 하였다.
“복수를 하기 위해 날 겁탈하려던 것이 아니냐. 그자를 향한 마음이 시킨다면 한번 해 보아라.”
“큿……!”
“왜 그래, 지난번엔 잘 하지 않았느냐.”
램파드의 목에 둘린 애쉬의 손이 떨렸다. 벗어나려는 그의 손을 램파드가 꽉 붙들었다. 마음만큼이나 흔들리는 눈동자는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말고, 어느 쪽인지 결정을 내려.”
램파드는 발버둥 치는 애쉬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고 노려봤다. 시선을 피하지 못하는 애쉬는 어정쩡하게 램파드의 몸 위에 올라탔고, 입 안쪽 볼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는 큰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포기했는지 몸의 힘을 풀었다. 애쉬가 진정하자 램파드도 한쪽 팔만을 풀어 줬다.
자유로운 애쉬의 손이 램파드의 가운 사이로 파고들었다. 드러난 허벅지를 주무르며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자가 아닌 다른 쪽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줄 걸 그랬나. 아니, 시간을 주어 봤자 결과는 매한가지였을 거다. 램파드는 잊어버려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죽은 사람한테 졌다는 생각에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고, 남은 한 손도 풀어 주었다.
아주 약간, 애쉬에 대한 마음을 인지했는데 이번 관계로 싹 정리될 테지. 몇 번 몸을 부딪쳤고, 다른 이들보다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고 하나 진심이 다른 곳에 있는 자를 붙들 만큼 외롭지는 않았다.
그는 흘러내린 램파드의 앞머리를 정돈하며 몸을 밀착했다. 하반신이 짓눌렸고, 애쉬의 무게가 점점 느껴졌다.
온전히 그의 품에 안기자 램파드는 모든 걸 포기하며 눈을 감았다. 애쉬의 손길에 따라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며 눈가를 간지럽혔다. 쪽, 드러난 이마에 말캉한 입술이 닿는 소리가 났다. 한 번이 끝이 아니라 연거푸 쪽, 쪽 입을 맞추는 소리가 났다.
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든 램파드가 눈을 떴고, 멍청한 선택지를 고른 그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애쉬는 인상을 쓴 램파드의 눈 주변을 엄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확실하게 답해 줄게.”
애쉬는 이 한 번의 기회가 얼마큼의 천문학적인 숫자의 확률로 주어졌는지 모르는 듯했다. 이딴 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심한 놈이라니, 램파드는 팔꿈치로 상대를 밀어 버렸다. 단칼에 잘라 냈지만 크게 미련 없는지, 그 또한 매달리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 내렸지 않나. 내가 무엇을 더 해야 답한다는 말인가. 죽은 이를 잊고 나를 선택하라며 비참하게 매달렸으면 하는 것이냐.”
“…….”
“듣고 싶다는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건만 너는 숨기기만 하는구나. 더는 너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애쉬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안색을 살피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급급했는데, 모든 행동이 부질없다 느껴졌다. 울렁거리던 마음이 급속도로 식는 기분이었다. 여기까지란 말이겠지. 전쟁터에서 끝난 관계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만 해도 기특했다. 램파드는 그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애쉬는 황제의 중대한 비밀을 품은 자였다.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목숨을 취하는 게 맞지만, 그는 쓸데없이 입을 놀릴 자는 아니었다.
“다른 놈이 돌아오는 대로 남부 지방으로 돌아가라.”
축 처져 있던 그에게서 약간의 화색이 감돌았다.
“콘테 공을 말하는 건가. …염치없지만 그와 한번 만나고 싶다.”
한숨 놓은 듯한 애쉬와 달리 램파드는 그의 말이 신경 쓰였다. 경이 아닌 공이라니. 커틀러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공작 지위를 달가워하지 않아 자신을 소개할 땐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은 기사 작위만을 밝혔다. 귀족이 그를 부를 땐 콘테 공작이 아닌 화이트 테일의 커틀러 경으로 부를 정도였다.
콘테 공으로 불리는 걸 싫어하는 커틀러가 자신을 공작으로 소개했다면 애쉬에게 모든 걸 밝히지 않았으며, 지위가 필요한 상황이었단 것이다.
“가소로운 부탁이군. 제국의 공작을 만나야 하는 이유 따윈 없을 텐데.”
“떠나기 전 마무리는 하고 싶다.”
마무리라니. 오메가 하나를 두고 마지막으로 결판을 내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애쉬는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커틀러에게 쓰러질 거였다. 1분도 많이 쳐준 것이다. 눈이 깜빡거리는 그 순간 모든 게 끝나 있을 테지.
램파드는 애쉬를 보며 비웃었다.
“혹여 커틀러 앞에서 새끼 쳤다는 이야기를 꺼낼 생각 같은 건 하지 마라. 그랬다간 너의 몸은 그 자리에서 바람구멍이 여섯 개 뚫릴 것이다.”
“임신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배 맞은 상대의 의리로 한번 만나 보게 해 주겠다. 단, 단둘이는 허락하지 않고 내 눈앞에서 만나는 거라면 허락하지.”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커틀러가 자신의 지위를 들먹였다면 애쉬를 하찮은 물건으로 봤다는 뜻이었다.
독살과 연관시켜 봤지만, 커틀러라면 번거롭게 독 같은 걸 사용하지 않았을 테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직접 나서 애쉬의 심장에 칼을 꽂았을 터. 누군지 몰라도 애쉬의 목숨을 노리는 배후는 따로 존재했다.
로열 가드를 붙여 놓았으니까 적어도 황궁 안에서는 안전했다. 밖으로 내보낸 뒤로도 애쉬 몰래 가드를 한둘씩 붙여 놓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흐트러진 가운을 정돈한 램파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신이 쌓여 있는 책상으로 이동했다.
“황궁 밖에 나간다면 쥐 죽은 듯이 지내라. 조용히 지내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거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어.”
만나고 싶은 사람은 저승에 있으니까 어련하시겠어.
램파드는 애쉬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보내며 지방에서 지내는 귀족과 주변 국가에서 보낸 서신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펜을 들어 올렸다.
황명으로 시킨 일을 끝내기 전에 소환하려면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했다. 구실은 몇 가지 있지만, 커틀러에게 구구절절 연유를 설명할 필요 따윈 없었다.
「당장 돌아와」
단 한 줄, 휘갈겨 쓴 서신에 녹인 왁스를 올려 봉인까지 끝마쳤다. 짧은 일을 끝내고 조용해진 사내를 흘끗 바라보았는데 애쉬는 무언갈 생각하는지 혼자 진지한 표정이었다. 본격적으로 하루의 일정을 시작하기 전, 애쉬부터 해결해야 했다. 램파드는 의자를 돌려 애쉬를 바라보았다.
“이만 시종 구획으로 돌아가라. 내일 아침에 만나도록 하지.”
램파드에게 큰 미련이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듯, 그는 매달리지도 않고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전혀 상관없는 자라 생각했건만 막상 그가 밖으로 나가자 식었다고 생각한 마음이 일렁거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무거워 침대까지 걸어가기 힘들었다. 작성한 서신을 은쟁반 위에 던진 램파드가 책상에 엎드렸다. 후계자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으니, 램파드가 연기하는 황제 역할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위를 계승할 나이까지 후계자를 키우고, 그 다음은. 인적이 드문 시골에 들어가 검술 교사나 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함께할 자는 애쉬였으면 했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었다. 앞날이 흐릿해졌다.
***
커틀러에게 편지를 보낸 지 며칠이 지났다. 하루 만에 올 거리도 아니니까 답장부터 느긋하게 기다렸다.
애쉬는 매일 아침 램파드가 지시한 대로 갓 구운 빵을 가지고 왔다. 그는 매일매일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빵을 건네주고 페로몬을 흩뿌린 뒤 쓸쓸하게 퇴장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지시한 건 빵뿐일 텐데, 이건 뭐지.”
애쉬가 차린 테이블 위는 바구니에 담긴 빵과 멀건 액체가 담긴 납작한 그릇이 놓였다.
“차가운 감자 수프. 조리장도 모르기에 설마 했는데, 수도에서는 먹지 않는 음식인가 보네. 좋은 재료로 직접 만들었으니 한번 먹어 봐.”
램파드는 은 식기로 연노란색의 멀건 국물을 휘저었다. 짙은 감자 냄새가 났으며 건더기가 들어가지 않은 맑은 수프였다. 숟가락 끝에 묻은 적은 양을 입에 머금었다. 울렁거리는 속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페로몬은 필요 없을 거야. 이만 나가 볼게.”
짙은 감자 향을 음미하던 램파드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애쉬.”
“응?”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때도 나에게 존대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 봐라.”
빵을 배달한 애쉬는 들고 온 쟁반을 들고 방밖으로 나섰다. 빵과 수프를 내려놓았으니 쟁반은 매우 가벼울 텐데, 무엇이 힘이 드는지 어깨가 축 처졌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장신의 사내가 유달리 고독해 보였다.
침실에 혼자 남은 램파드는 그가 준비해 온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끝마쳤다. 입덧이 심하지 않은 날도 속이 메스꺼워 기분이 불쾌했는데, 찬 수프 덕분에 편해졌다. 이 정도면 입덧이 심하지 않다면 간단한 요기로 해결 볼 수 있을 것이다.
입덧이 심한 걸 알고 일부러 준비해 온 것인가. 그런 것보다는 빵과 수프가 잘 어울리니 준비했겠지.
식사가 끝나고 램파드의 단장을 돕기 위한 시종이 주르륵 들어왔다. 평소보다 화려한 정복을 챙겨 온 걸 보아하니, 램파드가 가장 싫어하는 날이란 뜻이었다.
석 달에 한 번 황제를 직접 알현할 수 있는 이날에는 많은 사람이 램파드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다. 무거운 장신구로 치장한 옷을 종일 입어야 하고,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들으며 관련 전문가들을 연결해 주는 일은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알현실과 연결된 대기실은 군중들로 가득히 메워졌다. 순서대로 이야기를 듣던 램파드는 진이 빠져 갔다. 바깥이 슬슬 어두워졌고, 소란스러웠던 대기실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이 거의 다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호명관이 인적 사항을 적은 금색 카드를 램파드에게 정중히 건넸다.
“오늘의 마지막 알현자인 드미트리 자작 부부입니다.”
“들라 해라.”
알현의 마지막은 어떤 일이든 허락해 주는 게 관례였다. 팔려 간 가족을 찾아달라는 요청, 감옥에 갇힌 죄수를 풀어 달라는 부탁까지 들어준다. 그렇기에 알현을 요청하는 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마지막 골드 티켓을 얻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였다. 이날의 우승자는 멀리서 찾아온 귀족 부부였고, 램파드에게 요청하지 않아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먼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 부부는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 올렸다.
“드미트리 자작 부부로군. 굉장히 멀리서 찾아왔을 텐데 고생 많았다.”
“즉위식 때 이후로 처음 뵙는데 기억해 주실 줄이야. 영광입니다.”
얼굴을 본 지 오래되었지만 갓 혼인을 올린 부부가 기억났다. 여성 쪽이 작위를 가진 알파였는데 쑥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오메가 남편을 램파드 앞에 데리고 와 소개한 적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발길이 쉽지 않겠지. 그래, 승리를 거머쥔 자작 부부는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저희 부부는 오랜 세월 아이가 생기지 않아 황실로부터 직접 발정제를 받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굳이 먼 길을 찾아오지 않아도 귀족이라면 요청서를 보내면 됐지 않나.”
“지방에서 불법으로 유통된 발정제 때문에 폐하께서 신경 쓰셨단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오랜만에 폐하의 안부를 묻고, 수도 관광도 하고 싶기에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감옥에 넣어 둔 커틀러를 빼내기 위해 몇 가지 업적을 떠넘겨 줬다. 그중에 불법 발정제에 관한 서류도 포함됐었지. 브로커는 모조리 잡아 처벌했지만, 원제작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인근 지방에서 사는 귀족들은 소식을 들었을 테니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직접 찾아온 모양이었다.
브로커를 잡아넣은 이후로 불법 약에 관한 소식은 뚝 끊겼다. 불법 발정제 건은 커틀러에게 넘겼으니 그가 돌아오는 대로 이 건에 대해 마무리도 지어야 했다. 커틀러의 말로는 램파드가 멸문 직전으로 몰아붙인 대번포드 백작 가문이 수상하다 했다.
“내일 아침 서류를 작성해 줄 터이니 그걸 들고 관리실에 찾아가도록 해라. 필요한 만큼 기재하면 된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메가가 수줍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고, 그의 곁에 서 있는 알파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 주었다. 미소 짓고 있는 부부에게서 무한한 신뢰와 행복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후계자가 기대되는군.”
“기쁜 소식이 생기면 가장 먼저 폐하께 소식을 알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지 않았어도 단단하게 연결되었음이 느껴졌다. 행동으로 보이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확신하는 속삭임도 나눌 필요 없었다. 몸이 떨어져도 서로가 자신에게 끌려 있단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관계라니, 어쩐지 그들이 부러워졌다.
마지막 알현이 끝나고 황좌에 늘어진 램파드는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몇십 명의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절로 피곤해졌다.
오늘 일정은 끝일 텐데 램파드에게 호명관이 달려왔다.
“램파드 폐하, 오늘 한 분이 급히 추가로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푹신한 침대에 파묻히고 싶지만, 램파드를 만나러 온 사람에게는 일각이 아쉬운 일인지도 몰랐다. 한 번쯤 숨겨진 골드 티켓이 있는 것도 좋을 터.
“들라 해라.”
자작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면이라 모르는 이였는데, 긴급하게 추가된 알현자는 램파드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램파드를 오랜 세월 모셨던 시종 밀러였으며, 지금은 애쉬의 교육을 위해 화이트 궁으로 보낸 자였다.
“자네였나. 무슨 연유로 알현을 요청했지?”
“애쉬 테일러 님에 대해 아뢰고 싶습니다.”
아직 혼인식을 무른다고 발표하지 않았지만, 램파드는 마음을 정했다. 파혼 사실은 커틀러가 돌아오고 나서 공개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기에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한번 말해 보아라.”
“너무 오랫동안 화이트 궁을 비워 두었습니다. 이만 제가 모실 분을 돌려주십시오.”
“흥이 떨어졌다. 그자는 앞으로 황궁의 요리사로서나 사용할 생각이다.”
“이미 손을 댄 자를 폐하 곁이 아닌 다른 곳에 보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시는 게 아니잖습니까. 괴롭힐 생각이 아니시라면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황제의 손을 탔는데 황후나 첩으로 들이지 않는다면 창부 취급을 받을 터였다. 애쉬는 멸시를 받기 전,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려 보낼 거라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 없었다.
“애쉬 님께서 어떤 일을 저지르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분께 받은 걸 단 한 번만 답해 주십시오.”
“황궁에 온 그는 호의호식을 받기만 하지 않았느냐. 짐은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다만.”
“저는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순간부터 모셔 왔습니다. 대륙 전부를 손에 넣으셨지만 채워지지 않은 빈 곳이 느껴졌지요. 애쉬 님을 위해 사냥을 준비하던 폐하의 모습을 보고, 그분이 빈 곳을 채워 넣을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대의 억측이지 않나.”
“아뇨, 확실하다고 생각하옵니다. 근래 들어 폐하의 표정이 한결 환해지셨으니까요. 곁에서 완전히 떼어 놓기 전, 한 번만 확인해 보시길 간곡히 요청합니다.”
시종의 말대로 애쉬와 함께 지낸 짧은 시간이 즐겁긴 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말해 보라며 기회를 주었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떤 진실을 품고 있는지 굳게 다문 애쉬의 입매와 아침에 나간 쓸쓸한 뒷모습을 생각하자 가슴 안쪽이 지끈거렸다.
마지막 기회를 주었건만 한 번 더라니. 연인을 죽인 것이 못내 미안해 이미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는 소진되었으며 두 번 자비를 베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는 밀러가 간곡히 요청하는 것이었다. 램파드의 자의가 아닌 외부의 개입이니 한 번 더 기회를 줘도 나쁠 건 없었다. 손끝으로 황좌를 톡톡 치며 생각에 잠긴 램파드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요청대로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하지.”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알현이 끝나고 램파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지끈거린 순간부터 마음이 무거워져, 몸까지 답답했다. 방에 돌아가자마자 무거운 정복을 벗어 던졌지만, 여전히 몸 전체가 둔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램파드는 밀러의 요청대로 마지막으로 애쉬와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야 잘게 남은 자신의 감정도 정돈될 것이다.
무른 결정을 내린 램파드는 휴식을 취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했고 한스가 달라붙었다.
“온종일 정무를 보셨는데 쉬지 않으실 겁니까?”
“쉬는 건 나중으로 미루지. 지금 당장 시종이 사용하는 기숙사로 갈 것이다. 준비하거라.”
“알겠습니다.”
램파드는 램프를 든 한스를 대동하고 황궁 구석에 있는 기숙사 구획으로 이동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온 시각, 황궁에서 일하는 시종은 대부분 잠이 들었다. 깨어 있는 자들은 내일 아침 사용할 식자재를 손질하는 자와 늦게까지 일하는 대신들을 위해 야식을 만드는 자들뿐이었다. 굳이 깨울 마음까지는 없기에 조용히 가로질러 목적지로 향했다.
주방이 있는 구획을 지나 많은 숫자의 방이 존재하는 기숙사 구획에 도착했다. 고된 일과를 끝낸 자들은 대부분 잠이 들어 복도는 어두웠고 조용했다.
애쉬가 지내는 곳은 기숙사 내에서도 가장 높은 층이었다. 환한 램프를 든 한스가 앞장서고 램파드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계단에 올랐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나?”
“예? 소인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단단한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소리가 난 쪽에 집중했지만 조용하기만 했다. 잘못 들은 건가. 시종이 사용하는 기숙사는 요리하는 자 말고는 날붙이를 소지하지 않는다. 경비를 서는 기사는 모두 아래층에 있으니 위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날 까닭이 없었다.
애쉬의 방 앞은 온종일 로열 가드 두 명이 지키고 있지만, 순간 불길한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램파드가 멈춰 서자 램프를 든 한스도 더는 올라가지 않고, 발아래만 밝게 비췄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주변에 집중하자 옅은 피 냄새가 풍겼다. 이 정도로 냄새가 난다면 상당히 많은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이었다.
“피 냄새가 나는군.”
“그럴 리가……. 기숙사는 무기 소지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일단 올라가 보지.”
한스는 램파드의 말 덕분에 앞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불빛이 닿는 시야를 주시하며 앞장서다 이내 멈췄다. 램프의 빛이 닿는 계단 끝, 로열 가드 정복을 입은 자가 피투성이로 쓰러져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여러 번 침을 꿀꺽 삼킨 한스는 마음을 부여잡고 상황을 살피기 위해 앞장섰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로열 가드의 상태를 확인한 램파드가 한스의 어깨를 부여잡고 뒤쪽으로 쭉 밀었다.
“네가 나설 필요 없다. 이대로 아래로 내려가 기사들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폐하께서 앞장서시면 제가 뒤를 살피겠습니다!”
잔뜩 긴장한 한스의 목소리가 매우 컸다. 램파드는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적이 어딨는지 모르니 조용히 말하거라.”
한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고, 막은 입을 풀어 줬다.
“죄송합니다.”
“됐어. 혼자 내려가도록 해라.”
“무기도 없으신데 여기 계실 생각이십니까?”
한스가 속삭였고, 램파드는 쓰러진 로열 가드를 살펴봤다.
“짐은 걱정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라.”
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한스가 램프를 램파드의 발밑에 내려놓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향했다. 한스가 사라지고 램파드는 무릎을 꿇어 죽은 로열 가드를 살펴봤다. 가슴에 큰 상처가 뚫려 있었고, 온몸을 적신 피는 그 구멍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시신은 온기가 남아 있었으며 손마디가 부드럽게 풀렸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그녀가 쥐고 있던 검을 챙겨 들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층이 다르지만, 사람이 죽었는데 시종이 단 한 명도 뛰쳐나오지 않는다니. 황궁에 숨어든 쥐새끼가 로열 가드를 단칼에 쓰러뜨린 실력자란 말이었다. 램파드는 램프의 불을 끄고 어둠에 파묻혀 조심스레 걸어 나갔다. 발소리까지 죽이자 너무나도 고요해졌다.
이미 모든 게 끝난 건 아니겠지. 로열 가드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비관만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가던 램파드는 애쉬의 방 입구에 쓰러진 두 번째 로열 가드의 시신을 발견했고, 들끓는 듯한 피가 머리까지 물렸다. 머릿속이 익은 것처럼 뜨거워져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애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자였다. 물건같이 사용하고 버리기 위해 데리고 온 자였는데, 쓰러진 모습을 떠올리자 괴로워졌다.
그에게 실망해서 마음 접을 준비를 했다고 하나 느닷없이 이별이 닥치는 건 원치 않았다. 아침, 빵과 수프를 건네주며 조용히 나가던 쓸쓸한 뒷모습이 마지막이라니. 적어도 떠나보내는 마지막 모습은 제대로 두 눈에 담고, 기쁘게 보내고 싶었다. 마지막 모습이 타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지는 경우는 두 번 다시 원치 않는다.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램파드는 애쉬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틈이 벌어지자 날카로운 살기가 램파드를 덮쳤다.
카앙, 생각도 하기 전,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예상치 못한 램파드의 등장에 상대는 잠시 주춤했고, 램파드는 주저 없이 공격했다.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큰 소리만 날 뿐 사람의 살을 베는 감각이 없었다.
“뭐야, 호위 기사는 단둘밖에 없다고 하던데……. 넌 대체 뭐냐. 운 없이 지나가던 경비인가?”
달빛에 드러난 얼굴이 낯설었다. 설령 아는 이라고 하여도 소유 중인 알파에게 위협이 된 상대를 곱게 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램파드는 양손으로 검을 꾹 쥐고 베어 넘겼지만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암살자는 가볍게 피했다.
상대가 거리를 벌린 사이, 램파드는 눈동자를 굴려 애쉬를 찾았다. 그를 찾자마자 과열되어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던 기운이 가라앉았다. 창문가에 기댄 채 사색이 된 그를 발견했기에,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올렸다.
램파드와 시선이 맞닿은 애쉬의 입술이 달싹였다. 황제라는 사실을 알면 상대가 겁을 먹고 도망갈지도 몰랐다. 애쉬를 왜 죽이려고 하는지, 이유를 듣기 위해서는 산 채로 잡아야 했다.
“애쉬 테일러! 아무 말 하지 말고 대기해라.”
램파드의 시선이 애쉬에게 쏠려 있자 암살자가 덤벼들었다. 램파드는 그의 공격을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군. 로열 가드라는 새끼들이 수도 못 쓰고 죽어 상당히 싱거웠던 참인데, 잘됐어.”
답해 줄 가치도 없는 자이기에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눈에 보이는 빈틈을 찔러 넣었다. 암살자는 램파드의 공격을 모조리 막았지만 점점 반응 속도가 느려졌다. 단칼에 쓰러뜨리진 못해도, 여러 번 공격하면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다.
램파드와 몇 번 검을 섞은 상대가 킬킬 웃었다.
“곱상한 오메가처럼 생긴 놈이 내 검을 막아서다니 흥분되는걸. 네 얼굴 보고 섰는데, 검 말고 아랫도리도 상대해 주나?”
“시끄러운 놈이군.”
“화내는 표정도 멋진걸. 서로 힘쓰지 말고 하반신으로 붙자니까?”
슬슬 힘에서 밀리기 시작한 걸 상대도 눈치챘다. 입으로는 램파드를 도발했지만, 그에게서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상대의 검을 손쉽게 막은 램파드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발이 점점 느려지는데, 여유 부리기엔 성급하지 않나.”
자신이 궁지에 몰렸단 걸 들킨 암살자가 쯧, 혀를 찼다.
“하! 수도는 샌님들만 모인 곳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자가 있었다니. 즐겁긴 하지만 난 검술 시합 같은 걸 하러 찾아온 게 아니야. 승패가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지.”
램파드의 검을 강하게 쳐 낸 남자가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매끄러운 검날은 끝이 세 갈래로 쪼개져 있으며, 장미처럼 가시가 삐죽삐죽 돋았다.
전쟁 중 여러 종류의 암기를 겪어 본 램파드는 저 은폐 무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박히면 쉽게 빼낼 수 없고, 오히려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 치명상을 입히는 단도였다. 급소 부근에 박힌다면 빼내는 도중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남자의 손에 꽂혀 있던 단도가 애쉬를 향해 날아갔다. 검으로 쳐 냈다간 방어 자세를 모조리 풀게 되어 램파드가 당하게 된다. 램파드가 쓰러지면 애쉬 또한 무사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저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을 암기가 날아갈 예상 궤도로 들어 올렸다. 푹. 날카로운 단도가 램파드의 손바닥을 꿰뚫고, 손등으로 삐져나온 흉스런 날이 보였다. 램파드의 살에 꽂힌 단도는 날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램파드!”
애쉬의 외침에 암살자가 주춤했다.
“뭐… 뭣, 설마 램파드 황제인 거냐!”
검을 쓴다는 놈이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램파드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예상대로 상대는 곧바로 내뺄 준비를 했다. 여기서 잡지 못하면 애쉬를 노리는 자에 대한 단서를 영영 놓칠지도 몰랐다.
꽂힌 단도는 쉽게 빠지지 않아 한 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커틀러와 여러 번 겨루며 익히 접했던 검술을 모방하며, 도망가는 상대의 허벅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손 검술은 썩 능숙하지 않지만, 램파드의 이름을 듣고 당황한 상대는 한쪽 허벅지를 내주고 말았다.
“끄아악!”
암살자가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램파드는 쓰러진 남자의 목덜미를 검 손잡이로 후려쳤다. 급소를 가격당한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곧 있으면 한스가 불러올 기사들이 몰려 닥칠 테니 포박할 필요가 없어 잠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상황이 종료된 걸 확인한 애쉬가 램파드에게 절뚝거리며 달려왔고, 시선은 피투성이가 된 램파드의 손에 고정됐다. 존대하란 말은 충격에 잊어먹었는지, 질겁한 표정으로 피가 흐르는 손을 바라봤다.
“램파드, 얼른 치료하러 이동해! 빨리!”
램파드는 멀쩡한 손으로 애쉬의 귓불을 잡고 자신 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그리고 애쉬의 얼굴부터 시작해 몸까지 시선을 내렸다. 다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외상은 없어 보이는데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누가 봐도 큰 상처를 입은 건 램파드 쪽이었다. 잔뜩 파리해진 애쉬와 달리 램파드는 인상조차 쓰지 않고, 애쉬의 몸을 훑어봤다. 말없이 꼿꼿이 서 있는 걸 보아하니 어디 보이지 않는 안쪽이 다쳤는지도 몰랐다. 램파드는 풀어 내린 애쉬의 코트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살펴봤다. 오른손에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일었다.
“읏!”
화끈거리는 통증에 애쉬의 품속에 넣은 손을 빼냈다. 그제야 자신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는데, 깊이 박힌 단도의 칼끝은 램파드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큰 상처지만 램파드는 거기엔 안중도 없고 눈앞 사내의 안위에만 관심이 쏠렸다.
“난 괜찮으니까 제발 네 몸부터 살펴봐.”
애쉬는 부상자인 램파드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손에 힘이 없는 게 수상한데 어디 스친 곳이라도 있느냐.”
“램파드…….”
“저 자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얼른!”
흥분한 램파드가 소리쳤다. 아플 법도 한데 손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자신만을 걱정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애쉬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고개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난 괜찮으니까 진정해……. 응? 램파드…….”
애쉬는 화가 나 몸이 떨리는 램파드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램파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몇 번이고 진정하라며 이름을 불러 주는 애쉬의 목소리 덕분에 램파드도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진정이 되자 애쉬가 자신을 끌어안았단 걸 파악했다. 정황 없는 틈, 과한 손길을 내밀다니. 그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못마땅해져 눈동자를 굴렸다.
“네놈. 허락도 하지 않았건만 은근슬쩍 다시 말을 놓는군.”
“미… 아니, 죄송합니다.”
“사과하긴 늦었으니까 마음대로 해.”
“……응.”
애쉬는 편하게 말하는 쪽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단단한 팔로 자신을 꽉 끌어안는 애쉬를 향해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숨 막힌다……. 이만 놓거라.”
진정한 램파드의 숨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애쉬가 그를 놓아줬다. 못마땅한 표정의 램파드를 살펴보던 애쉬는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손을 살폈다.
“이거… 어떻게 뽑을 수가 없겠는데. 당장 황의를 불러올게.”
“넌 내 곁에 있어. 뭐가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램파드는 애쉬의 등 뒤에 있는 암살자를 주시했다.
“……큭!”
바닥에 엎어져 꾸물꾸물 움직이던 암살자가 정신을 차렸는지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장식된 보석을 빼내 작은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입에 머금었다.
램파드는 애쉬를 밀치며 남자에게 달려가 무릎으로 그의 명치를 가격했다.
“커억!”
남자는 비명과 함께 입에 들어찬 무언가를 뱉어내며 쓰러졌다. 남자의 손에서 빠져나온 보석은 바닥을 도로록 굴렀다.
“독을 먹어 자결하려고 하다니. 지난번 범인도 네놈이었군.”
램파드의 말을 무시한 남자는 자신이 떨어뜨린 독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 램파드는 자신의 일격을 받아 침까지 뚝뚝 흐르는 남자의 손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손등의 살이 쓸리자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하아… 큽!”
“감히 짐의 물건에 손을 대고 쉽게 죽으려고 하는 것이냐. 쥐어짤 대로 정보를 짜내고 죽여 주마.”
“램파드 폐하, 원하는 건 얻지 못할 거야!”
독약을 먹어 자결하지 못한 암살자는 자신의 혀를 힘껏 깨물어 끊어 버렸다. 그는 죽지는 못했지만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램파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고, 애쉬는 한층 더 핏기가 가셨다.
“크윽… 큿! 크흐, 흐!”
혀를 스스로 잘라 버린 남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괴이하게 웃었다. 광기 어린 모습에 애쉬의 몸이 꼿꼿하게 굳어 버렸다. 램파드는 애쉬의 팔목을 잡아, 남자가 아닌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램파드 폐하! 무사하십니까!”
“무사하다.”
열린 문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니, 무사하다는 분이 피투성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깊이 다치시다니! 폐하께 변고가 생길 줄 알았더라면 떠나지 않고 남아 앞장섰을 겁니다.”
램파드의 오른손은 단도가 박혀 있는 채로 피범벅이었다. 여러 명의 기사가 먼저 방 안으로 들어왔고, 뒤따르던 한스가 오열하며 다가왔다.
“짐이 이렇게 다쳤건만 자네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도 그렇군요.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기죽을 필요 없다. 사망자가 더는 나오지 않았으니 된 일이지.”
죽은 이를 수습하는 로열 가드를 바라보던 한스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로열 가드를 두 명이나 쓰러뜨리다니, 황궁 내 호위를 강화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단도는 여기서 뽑아 내지 못하겠군요. 기술자를 불러 해체해야겠는데, 황의와 함께 불러올까요?”
램파드는 애쉬의 안위부터 확인하느라 자신의 손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이제야 살펴보게 됐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뼈를 피해 깊이 박힌 단도는 손바닥을 뚫어 흉물스러운 날을 내보였다.
“걸어갈 수 있다. 본궁으로 돌아가서 치료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다친 손은 움직일 수 있으십니까.”
램파드는 쓰라린 손을 움직여봤다. 통증은 심했지만, 천천히 움직여졌다.
“움직이는 데 문제없군.”
“뼈는 피했나 보군요. 기사들을 시켜 미리 준비하라 지시하겠습니다.”
한스는 기사 중 한 명을 밖으로 내보내 황의가 치료를 준비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이쪽도 해결해야겠군.”
램파드는 쓰러진 암살자를 바라봤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느라 힘을 다 써 버린 암살자는 거친 숨만 몰아쉬는 중이었다. 램파드는 쓰러진 남자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아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애쉬, 이쪽으로 와라.”
애쉬가 피를 뱉어내는 암살자를 걱정스레 내려다봤다.
“아는 놈인가?”
한스와 기사를 한번 둘러보던 애쉬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처음 보는 자입니다.”
램파드에게 머리카락을 붙잡힌 암살자가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자의 목표는 애쉬가 확실했다. 빈 황후의 자리를 노린 귀족 가문의 짓인가. 굳이 애쉬를 죽일 필요 없이 황비의 자리를 노려, 실력으로 탈환하면 될 일이었다.
다음 의심 상대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쪽도 아쥴린 공주를 황후로 앉히기 위해 유일한 후보자인 애쉬를 암살할 이유가 모호했다.
이런 시도를 했다가 들통나면 제국은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국에 베푼 자비를 거둘 것이고, 제대로 된 속국 취급을 하며 착즙하듯 왕국을 착취할 거였다. 제국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황후가 아닌 두 번째 황비로도 충분했다.
함께 온 기사에게 지시를 내리던 한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자, 살아 있군요. 숨통을 끊을까요?”
“이놈은 본궁으로 끌고 가 치료하도록 해라.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다.”
램파드의 말에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거린 한스가 쓰러진 암살자를 살펴봤다. 혀가 잘린 남자는 고통에 힘겨워했다.
“혀가… 잘렸군요.”
“글은 쓸 줄 알겠지. 입의 상처는 치료해 주고,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애쉬, 너는 나와 함께 침실로 이동하지.”
“알겠습니다.”
황제의 침실에는 램파드를 치료하기 위한 황의가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황제가 도착하자마자 기술자와 함께 램파드의 손을 꿰뚫은 단도를 해체했다. 막힌 칼날이 사라지자 피가 울컥 배어 나와 천을 적셨다. 황의가 환부에 바를 약을 제조할 동안 램파드는 손끝을 움직여 봤다. 손가락은 움직여지지만, 관절 부분을 오므리는 건 힘들었다.
“주먹을 쥐기 힘들군. 앞으로 오른손으로는 검을 잡기 힘들겠나?”
곁에 있는 애쉬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다친 것은 램파드인데 정작 애쉬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표정이었다. 황의는 애쉬를 흘끗 바라보며 램파드의 손에 집중했다.
“다행히 뼈와 근육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손을 움직이기 힘드실 테지만 상처가 아문다면 검을 사용하시는 데 전혀 무리 없으실 겁니다.”
램파드가 다시 검을 쓸 수 있다는 말에 애쉬는 한시름 놓으며 안도했다. 황의는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깨끗한 붕대로 상처를 동여맸다.
“상처 부위는 매일 소독해야 합니다. 아침마다 폐하의 침실로 방문하겠습니다. 오늘 밤은 통증이 심할 터이니 약을 드십시오.”
치료를 끝낸 황의는 주변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서 지켜보던 한스는 황의가 가지고 온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며 램파드에게 인사를 올렸다.
“앞으로 폐하를 호위할 경비를 강화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소인은 이만 나가 볼 터이니 필요하시다면 호출하십시오.”
“애쉬랑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방 앞의 경비는 한 시간 뒤에 세워 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램파드의 말에 방 안을 정돈하던 시종들도 인사를 하고 모조리 밖으로 나갔다. 피에 익숙하지 않은 애쉬는 아직도 수척한 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두꺼운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창문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황실에서 일어난 암살 미수 사건 때문에 한밤중인데도 사람들이 잔뜩 나와 어수선했다.
“이렇게 된 이상 숨기는 건 무의미하겠군.”
“숨기다니?”
“암살은 오늘이 첫 시도가 아니었다. 지난번에 네가 앓은 것은 풍토병이 아니고 독을 먹어 쓰러진 거지.”
램파드는 창문에 비치는 애쉬의 모습을 살펴봤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파리해진 안색이 한층 더 창백해진 듯했다. 저렇게 놀랄 거란 예상에 비밀에 부쳤건만. 일이 터진 이상 숨기는 건 무의미해졌다.
“뭘 숨기고 있는지 말해.”
암살자를 심문할 거지만 어느 정도 정보는 필요했다. 암살 목표인 애쉬라면 이유를 알고 있을 거였다.
“무엇을…….”
“이번 일이 누구와 연관이 되어 있는지, 배후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걸 모조리 말해. 널 지키기 위해서라도 알아야겠다.”
애쉬는 램파드가 다친 것이 미안해 스스로 반성하며 고개를 숙였다. 램파드는 맑은 유리창에 비친 애쉬의 모습을 계속 살펴보았다.
“배후 같은 건 없어……. 누가 이러는지 정말로 몰라.”
“또다시 입을 다물 생각이라면 내가 추측해 보지. 네 약혼자는 창관 소속의 오메가였지. 창부는 죽을 때가 아니면 바깥으로 나올 수 없는데, 그는 어떻게 너와 함께 남부 지방에 있었지? 창관의 관리인을 죽이기라도 한 거냐.”
애쉬는 눈에 띌 정도로 놀라 어깨가 경직됐다. 램파드가 등지고 있기에 그는 표정 변화가 평소보다 더 잦았다. 깨끗한 유리창에 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대답해.”
“…도망만 쳤을 뿐, 사람을 죽이든가 다치게 하지는 않았어.”
“너는 불쌍한 오메가를 구원했다고 생각하지만, 관리인으로서는 큰 재산을 잃은 거지. 화가 났겠군.”
무언갈 생각하는지 애쉬는 바닥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램파드는 시선을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창관 소속의 오메가는 큰돈을 벌어 오는 물건이며 그들 관점에서 애쉬는 도둑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창부여도 황궁에 잠입하여 복수할 정도로 가치가 있지 않았다.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오메가를 애쉬가 훔쳤다는 걸 알았다면, 차기 황후에게 돈으로 갚으라 요구하면 될 일이니까.
입막음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황궁에 잠입해 암살하려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램파드는 창관의 오메가가 권력자와 연관된 상황을 상상했다. 가끔 오메가 창부를 두고 귀족끼리 치정극을 벌인다. 알파 귀족과 오메가 창부와의 추문은 램파드 귀에도 종종 들어올 정도였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 답을 찾은 램파드는 유리창 밖을 바라보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너와 함께 지낸 오메가는 귀족의 아이를 가졌군.”
애쉬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그런 일은 없었어.”
“여전히 감정을 숨기는 게 서툴러.”
반응을 보니 정답이 확실했고, 몇 가지 정보가 더 필요했다. 귀족의 아이를 밴 오메가가 사실을 숨기고 도망갔다면 큰일이었다. 후계자 문제가 불거질지도 모르며, 누군가 이용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애쉬를 죽여 입막음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암살자가 애쉬를 죽이려 드는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됐다지만 그가 커틀러를 만나려 하는 까닭은 여전히 미궁이었다. 커틀러 또한 알파니까, 설마 그의 아이는 아니겠지. 터무니없는 상상에 램파드가 웃었다.
창문에 기대 바깥을 바라보던 램파드는 익숙한 검은 말을 발견했다. 어수선한 황궁 입구에서 검은 말을 타고 검문을 받는 자는 흔하지 않은 은발을 가졌다. 답장을 보내는 대신 곧바로 달려온 모양이다.
서부 지역에서 황성까지 거리는 상당했다.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려올 정도로 애쉬와 함께 있다는 게 상당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방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램파드 폐하, 입궁을 요청하는 자가 있습니다.”
“커틀러 단장이겠지. 데리고 와라.”
“알겠습니다.”
램파드는 몸을 돌려 애쉬를 바라봤다. 정곡을 제대로 찔렀는지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네가 원하던 콘테 공이 곧 들이닥칠 거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지. 잘 말해 보아라.”
잠시 후 시종을 대동한 커틀러가 등장했다. 장거리를 이동할 때 입는 활동용 제복을 입은 그는 떠나보낼 때보다 앞머리가 약간 길어 눈가를 가릴 정도였다. 커틀러의 손짓에 함께 들어온 시종이 모조리 밖으로 나갔다.
“잘 다녀왔느냐.”
방 안에 있는 애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커틀러가 곧장 다가왔다. 그 난리를 쳐서 주군의 맹세를 올렸으니, 복종의 입맞춤을 손등에 할 모양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커틀러는 무릎을 꿇지 않고 오히려 뻣뻣하게 펴며 램파드의 허리를 감싸 입을 맞췄다. 다짜고짜 들이닥친 입술에 램파드는 머릿속까지 굳어 버렸다.
생각을 시작할 수 있기까지 조금 걸렸고, 정신을 차린 램파드가 몸부림쳤다. 아픈 손으로 밀칠 수 없어 왼손으로 그의 가슴을 꾹 밀었지만 단단한 돌 석상처럼 꼼짝 않았다. 힘으로 떼어 내기 힘들어 무릎을 구부려 그의 급소를 쳤다. 아플 법도 하지만 그는 오히려 램파드를 더 강하게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이 공간에 단둘이 있는 게 아니란 건 램파드만 인지했는지 커틀러는 입술을 마음껏 탐했다. 램파드는 귀가 예민해져 커틀러의 심장 소리, 천끼리 부딪히는 아주 작은 소리, 그보다 좀 더 뒤쪽 자신들을 바라볼 애쉬에게 집중했다.
평생의 연인으로 점찍은 최종 각인 상대 눈앞에서 다른 이와 입을 맞추고 있다니. 당당하지 못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램파드의 몸이 한층 더 뻣뻣해졌다. 혀가 입술을 핥았고, 입을 벌려 받아들이던 램파드가 안에 들어온 것을 깨물었다. 한쪽 눈을 찡그린 커틀러가 떨어져 나갔다.
“다짜고짜 뭐하는 짓이냐!”
“제가 언제 입 맞추는 걸 허락받고 했습니까? 답지 않게 왜 빼시는지요. 아, 사람이 있었군요.”
커틀러라면 시종이 있는 곳에서 실수를 벌일 리는 없을 텐데, 그는 애쉬를 바라보며 마치 처음 보는 양 시치미 뗐다. 분명 애쉬를 알고서 저러는 거였다. 허리를 감싼 커틀러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램파드의 엉덩이 윗부분을 꽉 잡고 애쉬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와 폐하의 밀회를 봐 버렸으니 죽여서 입막음해야겠군요.”
황제의 침실은 무기를 들고 들어올 수 없었고 그는 빈손이었다. 커틀러는 근처에 놓인 편지봉투를 뜯을 때 쓰는 종이칼을 쥐었다. 커틀러 정도의 실력자라면 종이를 자르는 무딘 칼로도 사람의 목숨을 손쉽게 빼앗는다.
“하찮은 눈에 담을 상대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라.”
같잖은 연기에 램파드는 기가 찼다. 커틀러는 연기에 몰입했는지 표정까지 생생했다. 애쉬를 주저 없이 썰 수 있는 스테이크용 고기로 보는 눈이었다.
“……하지 마.”
“램파드 폐하, 왜 이런 하찮은 놈을 두둔하시는 겁니까. 시종 따윈 길가에 보이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잖습니까. 눈치 없이 방 안에 남는 시종 따위 죽여 버리고 괜찮은 자로 새로 뽑으십시오. 제가 쓸 만한 자를 골라오겠습니다.”
램파드가 눈치챘다는 걸 알지만, 그는 천연덕스럽게 능청을 떨었다. 더욱 못나 보였다.
“눈에 뻔한 연기는 집어치워. 재미없으니까.”
“무슨 연기요. 처음 보는 시종이 우리 둘의 사이를 알았다, 죽이는 게 당연한 수순 아닙니까.”
종이칼을 내려놓은 커틀러는 램파드를 품 안에 넣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반신을 강하게 밀착했다.
“너와 내가 무슨 사이였다고. 네놈의 일방적인 착각일 뿐 아니냐.”
램파드의 입술을 보며 미소 짓던 커틀러가 애쉬를 향해 씹어 버리겠단 살기를 내보였다.
“굳이 말리시는 걸 보니 이자가 그놈인가 보군요. 널린 게 알파인데 하필 고르셔도 이딴 걸 선택하신 겁니까.”
날카롭고 사나우며 맹렬한 페로몬이 애쉬를 덮쳤다. 애쉬는 동족의 불쾌한 냄새에 코를 막고, 쓰러지지 않도록 벽에 기댔다. 우성 알파가 살기를 담아 보내는 페로몬은 알파가 버티기엔 치욕스러우며 두려울 거였다.
커틀러의 품에 안긴 램파드가 그의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보십시오. 적은 양으로 벌벌 떠는 하찮은 자군요. 저런 놈이 곁에 있으니 폐하의 몸에 흠이 생기는 거지 않습니까.” 커틀러는 붕대를 두른 램파드의 손을 들어 올려 손끝에 입을 맞췄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로 이동하면서 하나하나 입술로 손끝에 인사했다.
램파드는 애쉬를 걱정스레 바라보느라 커틀러의 행동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성 알파의 적의를 고스란히 받은 그는 버티는 게 힘겨워 보였다.
“커틀러… 그만 거둬.”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만두라는 짐의 말에 거역하는 건가. 기사라면 주군의 명에 따라!”
“저대로 질식해서 죽어 버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겁니다.”
퍽, 커틀러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다친 손으로 후려치는 바람에 흰 붕대는 피가 배어 나와 붉은 반점이 생겼고, 점점 커져 나갔다. 페로몬을 갈무리한 커틀러가 램파드를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손을 크게 다치셨군요. 평소 주먹질과 비교해서 간지러울 정도네요.”
“건방진 태도는 고치라고 했을 텐데! 또다시 지방으로 좌천당하고 싶은 거냐. 이번에는 영영 수도로 돌아오지 못하고 서부 지방에 처박히고 싶은 거냐고!”
살기를 거두지 않은 짐승이 램파드의 목을 바라봤다. 서늘한 눈빛에 피부가 떨릴 정도였다. 램파드는 그의 살기에 정면으로 맞서며 상대를 노려봤다.
애쉬는 그냥 바깥으로 조용히 내보낼 생각이었다. 커틀러의 행동을 보건대, 대화는커녕 살려 둘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이런 놈이란 걸 뻔히 알기에 애쉬를 커틀러의 눈 밖으로, 수도와 떨어진 원래 살던 먼 곳으로 되돌릴 생각이었건만.
“이자는 앞으로 내 황후가 될 자니까 날 대하듯이 섬기도록. 거부한다면 기사 작위를 박탈할 테니 알아 두도록 해라.”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램파드의 발언에 언짢은 듯 입매가 굳은 커틀러가 말했다.
“그 결정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런 되다 만 알파 새끼를 주워 와 황후감으로 삼으시겠다니 어이가 없어 황궁으로 달려올까 싶었지요.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으로 보잘것없는 사내군요.”
“애쉬를 네놈 마음대로 넘겨짚고 판단하지 마.”
살기를 거둔 커틀러가 애쉬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여러 번 살펴볼 필요도 없이 한 번 쓱 보는 것만으로 판단을 끝냈다.
“외모도, 지위도, 능력도 제 쪽이 훨씬 더 뛰어나단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겁니다. 매력은커녕 우습기만 한 놈을 고르신 이유가 뭡니까. 애완동물이라면 이해해 드리죠.”
우성 알파의 사나운 기운에 노출되었어도, 무릎을 꿇기 싫은 애쉬는 그 자리 그대로 바르게 섰다. 램파드는 커틀러의 팔을 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고, 그는 의도대로 램파드에게 시선을 맞췄다.
“알고 싶나?”
“알 바 없는 사내지만 폐하의 생각은 듣고 싶군요.”
램파드는 자신에게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떳떳한 커틀러가 당황했으면 했다. 어떻게 하면 이놈이 굴욕에 찌들어 패배했다는 표정을 지을지.
커틀러의 시건방진 행동에 이성 같은 건 먼지가 되기 시작한 램파드는 수습하지 못할 거란 예상을 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너보다 밤일이 뛰어난 자거든.”
발언을 꺼낸 램파드는 태연했고, 듣고 있던 애쉬가 익어 버린 듯 새빨개졌다. 비교당한 커틀러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램파드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놈이 반응했으니 램파드는 목적을 달성한 거였다.
“저자랑 잔 겁니까.”
“그래.”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 말이죠?”
“짐이 네놈한테 허락받고 남자와 뒹굴어야 하는가.”
“폐하, 제 말을 잊으셨군요. 다른 알파랑 붙어먹지 말라 경고했잖습니까.”
말투는 여전히 고르지만, 그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잔뜩 묻어났다. 드러난 피부에 냉한 기운이 감돌았고, 램파드는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커틀러는 뻣뻣하게 긴장한 램파드의 허리를 감아올렸고,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십시오. 아직은 화를 내지 않을 거니까요. 우선은 어느 쪽이 더 잘하는지 확인해 보죠.”
커틀러의 손이 바지 안으로 밀어 넣은 램파드의 셔츠를 빼냈다. 밖으로 빠져나온 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고 램파드의 피부를 문질렀다. 승마용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맨 피부에 닿았다.
“무슨 뜻이지.”
“어느 쪽의 허리 놀림이 뛰어난지 그 몸으로 직접 판단하라 하는 겁니다.”
“뭐라고?”
노골적으로 문지르던 손이 바지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램파드가 뻣뻣하게 안겨 있자 커틀러가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왜 그러십니까. 먼저 꺼낸 말이지 않습니까. 셋이서 하면 되니까 바지를 내리고 다리를 벌리십시오.”
셋이서 하다니, 뭘? 도를 넘은 뻔뻔함에 램파드의 얼굴도 화끈 달아올랐다. 농이 아닌 진심인지 커틀러는 허벅지를 세워 램파드의 성기 부근을 슥슥 문질렀다. 아랫배에 열기가 몰린 램파드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발정 난 건 혼자 해결하고, 네놈 둥지로 돌아가 쌓인 여독이나 풀어!”
여전히 배 속은 뒤틀리지만, 평정을 되찾은 커틀러가 애쉬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회복하고 나서 저자와 자웅을 겨뤄 보죠.”
“그럴 리 없으니 냉큼 사라져라!”
램파드의 노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틀러는 제 할 말만을 했다.
“추가로 할 말씀이 있다면 화이트 테일로 연락 주십시오.”
순순히 램파드를 풀어 준 커틀러가 손등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나가는 대로 황의를 부를 터이니 벌어진 상처를 치료하시고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커틀러는 자신의 기사단이 있는 건물로 사라졌고, 램파드와 애쉬만이 침실에 남았다. 그가 사라졌지만 한번 휩쓸고 간 열기는 아직 남았다. 깊게 한숨을 내쉰 램파드가 애쉬를 바라봤다.
“저런 놈하고 대화하겠다고 간곡히 요청한 거냐.”
“…….”
“지난번에 거둔 기회를 이번에 돌려주도록 하지. 오늘부터 다시 화이트 궁에서 지내도록 해라. 호위는 두 배로 늘리겠다.”
램파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창문가에 기댔다. 괜히 불러들였나. 아무리 생각해도 커틀러를 수도로 불러들인 건 잘못된 결정인 듯했다.
***
숨겨진 골드 티켓을 지닌 밀러의 소망대로 애쉬가 화이트궁으로 돌아왔다. 원위치로 돌아오게 된 건 그의 공로였지만 애쉬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환대하며 램파드가 있는 본궁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애쉬 테일러 님, 귀가가 늦으셨군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암살 목표였던 애쉬는 두려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반기는 밀러 앞에서 내색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오랜만이군.”
애쉬는 자신의 기분을 완전히 숨겼다고 생각하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근심이 섞여 든 표정이었고, 밀러는 애쉬의 일상을 찾아 주기 위해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며칠 쉬신 만큼 내일부터 몰아쳐서 수업을 진행할 겁니다. 각오하십시오.”
“명심하도록 하지.”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램파드 폐하께서 로열 가드를 여섯이나 보내 주셨습니다. 화이트 테일에서도 추가로 기사를 보낸다고 하더군요. 소식 들으셨습니까?”
호위를 두 배로 늘린다더니, 막상 안심되지 않은 램파드는 세 배로 보내 버렸다.
“폐하께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겠군.”
“밤이 늦었으니 내일 일찍 찾아뵙도록 하십시오. 침실을 정돈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애쉬의 방을 정돈하기 위해 낯선 시종이 한 명 들어왔다. 황궁의 시종은 배치가 바뀌는 경우가 잦지만,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마당이니 경계해야 했다. 애쉬는 이불과 커튼을 정돈하는 시종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방 정리를 끝낸 시종은 대뜸 잠겨 있는 창문을 활짝 열고 애쉬를 바라보았다.
“저는 콘테 공작저의 사람이니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시오. 저희 당주님께서 전언을 전달하셨습니다. 자정까지 창문을 열고 계시라 지시하셨습니다.”
로열 가드가 정문을 지키고 있으니 남들의 눈을 피해 창문으로 들이닥칠 예정인 것 같았다. 자정까지는 앞으로 몇 분 남지 않았으니 그대로 문을 열어 두기로 했다.
“그러도록 하지.”
“당연히 이 일은 램파드 폐하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함구해야 한다는 사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지요?”
화이트 궁에서 일하는 밀러는 서민 출신인 애쉬를 거리낌 없이 대했다. 그렇지만 콘테 가문에서 일하는 시종은 사람을 철저히 계급으로 나누며 천시하는 게 보였다. 우성 알파인 공작을 모시는 그에게 애쉬는 굴러 들어온 떠돌이 개와 같기 때문이었다.
“램파드의 귀에 들어가게 할 생각은 없다. 그쪽이나 조심하라고 전해라.”
시종이 가까이 다가왔고 그에게서 냉대가 느껴졌다.
“램파드 황제 폐하와 콘테 공이십니다. 아직 작위를 받지 않은 당신은 일개 서민일 뿐이니 입을 조심히 놀리십시오.”
그는 한층 고압적인 태도로 애쉬에게 말했다.
“콘테 공작저였으면 시건방진 입부터 교정했을 텐데, 아쉽게 되었군요.”
성격 더러운 주인만큼 저택에서 일하는 자도 만만치 않았다. 커틀러에게 부탁할 게 있는 터라 소란을 피울 수 없기에 그와 기 싸움하지 않고 흘려보냈다.
정리를 마무리한 시종이 밖에 나가고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오는 침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애쉬는 아직 진정 안 되는 마음을 수습하기 위해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었다. 초를 피워 방 안을 밝혔지만 흰 종이 위에 올라간 검은 글씨가 집중되지 않아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정확히 자정, 활짝 열린 창문으로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훌쩍 넘어 들어왔다. 늘씬한 몸을 가진 남자가 로브를 벗었고, 달빛을 머금은 밝은 은발이 드러났다. 애쉬는 예고를 미리 받았기에 놀라지 않고, 그의 행동을 조용히 주시했다.
커틀러는 애쉬를 위해 멀쩡한 출입구가 아닌 창문으로 넘어왔단 사실이 심히 거슬렸다. 검은 로브를 벗자마자 뒷머리를 신경질 내며 긁더니 애쉬를 걷어찼다.
“큭!”
“시끄럽다. 입구에 서 있는 놈들의 목숨을 지키고 싶다면 큰 소리 내지 마라.”
임무를 끝내지 않았는데 돌아오게 된 건 전적으로 애쉬의 입김이었을 테다. 그 사실이 커틀러를 격분하게 하였다. 램파드 앞에서야 반죽음 만들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고 참아 냈지만 단둘이 있는 마당에 거칠 것 없다. 커틀러는 잠시 미룬 일부터 해결하기 위해 바닥에 엎어진 애쉬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를 소환하기 위해 램파드를 이용한 모양이구나.”
커틀러는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애쉬의 짧은 머리를 잡고 들어 올려, 무릎으로 배를 가격했다.
“……윽!”
배 속에 뜨겁게 달군 돌이 들어간 듯한 통증이 일었지만, 바깥에 있는 로열 가드가 들이닥치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 애쉬가 이를 악물고 참자 커틀러는 거리낌 없이 주먹과 발을 사용했다. 그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죽을 만큼 아프지만, 커틀러는 애쉬를 죽이지 못할 테니까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최종 각인 상대를 죽이면 램파드가 커틀러를 진심으로 증오할지도 모르니, 찢어발기고 싶은 기분을 애써 참고 있는 걸 애쉬는 잘 알았다.
여러 번의 발길질에 통증을 참지 못한 애쉬가 몸을 굴렀다.
“상처가 남을 곳은 알아서 피해 줄 터이니 괜히 통증을 줄여 보겠다고 움직이지는 마라. 조금만 빗나가면 급소가 가격될 거니까. 겨우 날 불러냈는데 기절하면 곤란할 테지?”
상대가 우성 알파라고 하나 자신의 오메가를 건드는데 참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램파드의 입술을 탐하는 커틀러를 떼어 내고 싶었다. 당장 그에게 달려들어 관두라며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은 이유는 그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제 와서 모든 걸 수포로 되돌릴 수 없기에, 업신여김을 온전히 받아 냈다.
“하, …짜증 나는군.”
화풀이로 애쉬를 걷어차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애쉬의 배를 여러 번 찼지만, 커틀러의 뒤틀린 속은 풀리지 않았다. 흘러내린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린 커틀러가 애쉬의 허리를 밟아 몸을 굴렸다. 샛노란 눈동자가 보였는데, 당장 칼로 파 버리고 싶었다. 이 눈동자로 램파드를 담았을 테니까.
“네놈도 알파니까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을 거다. 엄살 따윈 관두고 당장 일어나도록 해라.”
“하아… 아……. 쿨럭, 큿…!”
엄살이 아니라 정말로 몸속의 장기가 한 바퀴 꼬여 버린 듯 얼얼했다. 애쉬는 자신의 아랫배를 부여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심드렁하게 애쉬를 바라보던 커틀러가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대충 기대앉았다.
“그래, 주제넘게 날 부른 이유를 한번 들어 보지. 말해 봐라.”
몸 밖으로 무언가 역류하는 감각을 애써 억누른 애쉬가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관여하고 있는 대번포드 백작가의 일. …그 집의 아이를 램파드와 만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제국의 공작이라면…… 귀족의 사생아 하나쯤 멀리 보내 평생을 조용히 살아가게 할 수 있겠지요.”
“손쉽지만 같잖은 일이군.”
“그렇게 해 주신다면 당신이 권했던 일을 해내겠습니다.”
팔짱을 끼고 열을 삭히던 커틀러가 애쉬에게 집중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애쉬가 홀로 살아가는 집에 들이닥친 커틀러가 권한 일은 두 가지였다.
‘램파드가 평생 증오할 수 있도록 미움받을 짓을 하든가, 램파드의 눈앞에서 스스로 죽어라.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네 몫이다.’
커틀러의 음성까지 기억하고 있는 애쉬는 둘 중 한 가지를 정했다.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각인을 풀게 되면 램파드에게 평생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애쉬를 향해 비웃던 커틀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무사히 완수한다면 그 즉시 대번포드 백작의 아이를 숨겨 주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거래지만 애쉬에게는 충분한 값어치였다. 살아생전 처음으로 목숨을 위협받아 벌렁거리던 심장이 드디어 차분해졌다. 각오를 다진 애쉬를 바라보던 커틀러가 말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혼자 죽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꼭 램파드 앞이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상대가 죽고 각인이 풀렸는데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며 믿지 않을지도 몰랐다. 램파드라면 충격으로 사실을 부정하기보다 빠르게 냉정해지며 커틀러를 의심할 확률이 더 높았다. 램파드 앞에서 애쉬 스스로 자결한다면 커틀러가 귀찮아질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거래가 끝나자 커틀러는 벗은 로브를 다시 뒤집어썼다. 가만히 둬도 빛날 것 같은 밝은 은발이 새까만 로브에 가려졌고, 그는 어둠 속에 파묻혔다.
“빨리 손을 쓰는 게 좋을 것이다. 초조해진 대번포드 백작이 당장에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깜짝 놀란 머리가 차분해지니까 애쉬는 자신을 노린 암살 사건의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 갔다. 대번포드 백작의 입장에서 애쉬는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자니까 후환이 생길 것을 염려해 제거하려는 모양이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려도 됩니까.”
“이미 목숨을 준 처지에 무엇을 담보로 거래할 거냐. 싸게 먹히지 않을 텐데.”
“제가 죽기 전에 무엇이든 시키십시오.”
눈까지 가린 로브 아래로 드러난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듣고 판단하지. 말해 봐라.”
“대번포드 백작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가 살아 있으면 언젠가 램파드 귀에 들어갈 겁니다.”
대번포드 백작에게 황가의 피를 이은 루사의 아이를 데려다준 건 애쉬였다. 그렇기에 백작이 모든 정보를 쥐었단 걸 잘 알았다. 지금 당장 백작이 황궁에 들이닥치지 않는 이유는 램파드의 입지가 크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램파드의 처지가 난처해질 때 아이를 데리고 와 황위를 찬탈할 거였다. 애쉬는 죽더라도 위협 요소를 제거하고 싶었다.
“좋다. 대번포드 백작은 내가 친히 손을 써 제거해 주지.”
애쉬는 알지 못하지만, 커틀러는 이미 대번포드 백작을 제거할 기회만 엿봤다. 부탁하지 않아도 손을 쓸 거지만 애쉬에게 선심을 쓰는 양 자비를 베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받은 커틀러는 등장할 때와 같이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커틀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애쉬는 창문을 닫고, 고리를 단단하게 걸었다.
홀로 남게 된 애쉬는 방 안을 밝힌 초를 모조리 끄고 침대에 걸터앉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커틀러가 밟은 부분이 욱신거려 윗배를 한 손으로 감싸며 침대 위로 쓰러진 것이다.
몸은 아팠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은 차분했다. 누군가 자신을 암살 시도 했단 사실이 두려웠는데, 램파드를 위해 죽기로 마음먹은 일은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근심스러운 건 자살 방법이었다. 칼을 써야 하나. 익숙하지 않은 무기보다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편이 좋을지도. 애쉬는 램파드 앞에서 죽을 방법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램파드의 눈앞에서 칼로 가슴을 찔렀다간 그의 괴물 같은 반사 신경 속도 때문에 무산될 거였다. 역시, 어디서 떨어져 죽는 편이 나은 것 같았다.
죽을 각오를 다졌는데 두려움이 들지 않는다. 잠깐 쐬었던 찬바람이 아니더라도 피와 몸이 차분하게 식어 이미 죽은 사람이라 느껴졌기에.
처음 램파드에게 복수를 다짐했을 때. 루사의 죽음에 눈이 돌아간 애쉬가 황제에게 주먹을 날렸을 때, 이미 죽었을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운이 좋아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이 질긴 목숨을 램파드에게 돌려주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최종 각인 상대가 죽었단 걸 깨달은 루사의 흔들렸던 눈동자가 생각났다. 램파드 또한 충격받을 테지만 그의 곁에는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알파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강인한 램파드라면 상처를 받는다 하여도 금방 회복하고, 살아갈 거라 확신도 들었다.
***
아침에 눈을 뜬 램파드는 이상하리만큼 배가 고팠다. 몇 주 동안 괴롭혔던 메스꺼움도 사라지고, 그 자리를 허기짐이 차지했다. 어젯밤 피를 흘려서인가, 갑자기 폭발한 식욕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애쉬는 화이트 궁으로 되돌려 보냈으니 빵을 가지고 올 사람이 없었다.
“아침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애쉬 님과 함께 드시겠습니까?”
화이트 궁에서 내쫓기 전, 아침은 늘 애쉬랑 먹기로 정해 두었다. 애쉬는 어젯밤 큰일을 당했다. 불러오는 것보다는 호위를 잔뜩 붙여 둔 화이트 궁에 내버려 두고, 램파드가 직접 찾아가는 편이 좋았다. 일단 배는 채우고 찾아가기로 했다.
“양고기 요리가 먹고 싶군.”
램파드의 말에 한스가 활짝 웃었다.
“드디어 식욕을 되찾으셨나 보군요. 예전에 드시던 대로 준비할까요?”
“차가운 감자 수프도 함께 준비하도록 지시해라. 애쉬가 먹을 음식은 짐의 것과 함께 조리하고, 똑같은 걸 내어 주거라. 식사가 끝나는 대로 화이트 궁으로 곧바로 갈 터이니 준비하라 미리 알려 두도록.”
램파드의 식욕이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주방장은 솜씨를 제대로 발휘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아침 식사용 빵과 잘 어울리는 양고기 요리가 잔뜩 등장했다. 하지만 기다린 아침 식사에는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덤으로 딸려 왔다.
“아침부터 기름진 식탁이네요. 드디어 입맛이 돌아오셨나 보군요.”
“오늘 아침부터 돌아왔어.”
“좋은 일이 생기셔서 그런 겁니까. 제가 돌아와서겠지요.”
어제만 해도 음식 냄새도 맡기 싫었는데, 하루아침에 식욕이 당기다니. 램파드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다. 영문을 알 수 없으나 커틀러가 말한 이유는 절대 아니었다.
“뭐냐. 그 어이없을 정도로 뻔뻔한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커틀러는 품 안에 넣어 둔 편지를 꺼내 들었다. 돌아오라고 한 줄 찍 갈겨 쓴 전언이 적힌 편지였다.
“급하게 쓴 티가 나더군요. 그렇게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
“네 멋대로 확대 해석하지 마라. 네놈의 편지를 쓰는 데 1초라도 할애하고 싶지 않아 대충 적은 거지.”
커틀러가 쥐고 있는 편지를 무시한 램파드는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헤매지 않고 곧장 입으로 들어갔지만, 포크를 쥐고 있는 램파드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기술자를 동원해 단도를 뽑아 치료했어도 하루 만에 아물 상처가 아니었고, 통증은 여전했다.
커틀러는 붕대로 동여맨 램파드의 손을 바라보다 서랍이 놓인 장소로 이동했다. 그는 방 주인의 허락도 없이 닫힌 서랍을 열어 힐끗 살피고는 이내 닫았다.
“저를 수도로 소환한 것이 참으로 못마땅하신 모양입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른 채 유배당한 저를 불러낸 용건이 무엇입니까.”
“있었는데 사라졌어. 이왕 온 김에 밀린 일부터 해결해라.”
“한창 일이 쌓여 있었는데 폐하께서 내쫓는 바람에 몇 배로 불어나 있더군요.”
“우선 불법 발정제 문제부터 해결하면 되겠군.”
램파드는 커틀러를 향한 마음을 어떻게든 접기 위해 그를 수도 밖으로 내쫓은 것이었다. 대책 없이 커틀러를 신뢰하는 자신이 싫어 멀리 보낸 것이지만, 그의 처지에선 영문 알 수 없는 추방이었다.
돌아오자마자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얌전해진 걸 보면 반성한 것인지도 몰랐다. 가만 생각해 보면 커틀러의 잘못은 무궁무진했으니까.
그렇게 아주 잠깐, 그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다.
“그보단 우선, 지금 당장 제가 할 일은 폐하를 살피는 것 같군요. 나이프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시다니 생각보다 훨씬 더 심하게 다치신 모양입니다. 크게 다치신 건 전쟁 이후로 처음이시죠?”
“누구 때문이었는데. 네놈이 없었더라면 전쟁 도중 활을 맞을 일도 없었지.”
“이번에도 누군갈 감싸다 다친 겁니까?”
그냥 답해 버리면 되는 일인데 램파드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썰어 둔 고기를 입에 넣으며 음식에 집중하는 척했다.
“왜 답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내가 누굴 감싸든 무슨 상관이냐.”
“그놈을 감싸다 다친 게 맞으시군요.”
커틀러는 램파드의 포크를 뺏어 들었다. 기껏 입맛이 돌아와 부족한 영양 공급을 하는 중인데, 방해하다니. 신경이 거슬린 램파드의 눈가가 꿈틀거렸지만 커틀러는 다른 손에 있는 나이프까지 뺏었다.
식기를 든 커틀러가 램파드의 등 뒤로 이동했다. 자리를 잡은 그는 허리를 숙여 램파드의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며 고기를 썰었다.
“폐하께서는 입이 작아 제 성기를 다 머금지 못하실 정도였죠.”
그는 램파드가 썰어 낸 조각보다 조금 더 작게 썰어 냈다.
“……입맛 떨어지는 소리는 그만둬.”
“뒤로는 그렇게나 맛있게 드셨으면서 솔직하지 않으시긴. 어떠십니까. 후식으로 제 걸 드시는 건?”
“거절하지.”
“그러지 마시고 정중히 권할 때 드십시오. 약을 숨겨 놓는 서랍 안을 살펴봤는데 제가 떠나기 전이랑 변함없더군요.”
램파드는 커틀러가 떠나기 전 일방적으로 하고 간 약속이 생각났다.
“억제제를 드시지 않았으면 상당히 굶주렸을 텝니다. 다른 허기짐은 이런 음식으로는 채워지지 않을 테니 신경 써서 권하고 싶군요.”
썰어 낸 고기를 포크로 꾹 누르자 머금고 있는 붉은 육즙이 배어 나왔다. 그는 고기를 램파드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음식을 시큰둥하게 내려다보던 램파드가 입을 열었다.
“……못 본 새 성격이 더 나빠졌군.”
“폐하 때문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서부 지역에 한 달이나 박혀 있었는데, 멀쩡하겠습니까. 자, 드십시오.”
여기서 애쉬의 아이를 뱄단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짓을 벌일지 상상조차 안 된다. 기분이 좋아지면 절로 떨어져 나갈 테니까 입을 벌려 커틀러가 건네준 고기를 먹었다. 램파드가 순순히 받아먹자 그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고기를 썰어 먹이기를 반복했다. 그는 식사가 끝난 램파드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꼼꼼하게 닦더니 양팔로 몸을 감싸 달라붙었다.
화이트 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커틀러를 떨어뜨려 놔야 했다. 램파드는 그가 제풀에 지쳐 떨어질 때까지 입을 다물고 방구석을 노려봤다.
“노파심에 여쭤보는 겁니다만 상처는 손뿐이겠죠?”
“그래.”
커틀러가 램파드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 부근에는 곰에게 당한 상처가 있어 순간 몸이 경직됐다. 램파드의 어깨를 부여잡은 커틀러가 슥슥 문질렀다.
“짐작해 본 것인데 어깨도 다치신 겁니까. 다른 곳은요?”
램파드는 자신의 어깨를 문지르고 있는 커틀러의 손을 쳐서 떼어 냈다.
“더는 없으니까 이만 물러가라.”
“거짓말일 수도 있으니까 한번 확인해 보죠.”
그의 손이 램파드의 허리로 내려갔다. 손에 힘을 주고 꽉 붙드는 바람에 몸을 틀기 힘들 정도였다.
“커틀러, 놔!”
“제가 분명히 말했죠. 돌아오는 대로 다른 알파와 뒹굴었는지 검사한다고.”
“들은 기억 없어!”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놈 앞에서는 그냥 넘어가 줬지 않습니까. 눈감아 주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셨겠지요.”
한 손으로 램파드를 붙잡은 커틀러가 자신의 코트 안쪽에 넣어 둔 유리병을 꺼냈다. 작은 병 안에는 하얀 알약이 들어찼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히트 사이클 억제제였다. 애쉬와 관계를 하면 오메가의 페로몬이 진정됐기에 약 생각은 놓고 지냈다.
“아래쪽 간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램파드의 배를 꾹 누른 손이 바지 후크를 풀어 내렸다. 개방된 틈에 손을 밀어 넣어 공간을 넓히고 성기가 있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팔을 구부린 램파드가 등 뒤에 있는 커틀러를 가격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발버둥 칠수록 손에 힘을 주며 몸을 압박하듯 조였다.
“너, 이 자식!”
커틀러는 몸부림치는 램파드의 상처 입은 손을 꾹 눌렀다.
“아, 읏!”
아까 일어나 새로 소독하고 처치를 끝낸 상처 자리가 쓰라려 이를 악물었다.
“이래서야 저 말고 다른 알파에게도 쉽게 제압당하시겠네요. 손은 잘 지키셨어야지요.”
“황궁에서 미친놈은 너 하나뿐이니 손 하나 정도 다쳐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정신 차려.”
“제 마지막 고삐를 푼 건 당신입니다.”
자신의 미친 짓을 램파드에게 전가한 커틀러가 주저 없이 손을 움직였다. 신경이 예민한 급소가 잡히자 소름이 등을 훑고, 자연스레 커틀러의 품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램파드의 성기 기둥을 붙잡은 그는 쭉쭉 잡아당기다가 음낭을 주물렀다. 압박될 정도로 힘을 줘 주무르는 통에 복근이 잘 잡힌 램파드의 아랫배가 움찔 움찔, 떨렸다.
그는 좀 더 만지기 쉽게 바지를 벗기며 램파드의 귀 뒤에 입을 쪽 맞췄다.
“약을 드시지 않았잖습니까. 하지만 폐하의 냄새가 나지 않는군요.”
“읏, 이제 조절할 수 있어…….”
물론 거짓말이었다. 커틀러가 황궁을 비운 새 지하 감옥의 빈방에서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법을 연습해 봤지만 소용없어 포기했다. 약을 먹지 않아도 페로몬이 안정됐으니 더는 연습 같은 게 필요 없기도 하고.
커틀러는 램파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이상하군요. 약은 한 병도 줄지 않았던데.”
“침실 말고 다른 곳에 뒀으니까 없는 거다.”
“침실에 오기 전 폐하의 개인 집무실도 모두 살펴보고 왔습니다. 제가 건넸던 열 병이 그대로더군요. 거짓말이 느셨네요, 램파드 폐하.”
손길에 익숙해져 쾌락에 젖어 가던 램파드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약 따위 줄든 말든 알 게 뭐냐!”
커틀러가 자신의 성기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몸을 빼내 빠져나왔다. 커틀러의 품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 전, 그의 팔이 램파드의 몸을 옭아매더니 테이블 위로 잡아 이끌었다.
램파드의 몸이 테이블 위에 엎어지자 텅 빈 식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한 번만 하고 놓아 드릴 테니, 발버둥 치지 마십시오. 곧 혼인도 하실 분이 시종에게 저희 둘의 관계를 들킬 작정이십니까.”
“좆질에 환장한 거냐. 놔!”
“말씀대로. 폐하의 몸에 환장한 제가 한 달이나 하지 못했으니까요.”
드러난 엉덩이가 벌려지며 주름을 비집고 손가락이 아닌 무언가가 들어왔다. 크기로 보아 성기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작고 단단한 물체에 램파드는 내벽을 꽉 조였다.
커틀러는 구멍이 오므라드는 걸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건, 지난번 경고를 숙지하지 않으신 벌입니다. 제가 말해 드렸죠.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아랫구멍으로 먹게 해 드릴 거라고.”
몸속에 들어온 손톱만 한 물체의 색과 모양이 그려졌다. 동그랗고 하얀 억제제가 체온에 끈적하게 녹아내리는 게 느껴진다.
“한동안 드시지 않았으니 전처럼 세 알은 드셔야겠죠.”
오무려진 틈으로 단단한 억제제가 하나 더 들어왔다.
“제대로 개수를 맞춰 챙겨 드셔야죠.”
놀란 램파드의 몸이 경직된 순간 억제제가 추가로 하나 더 들어왔다.
“미… 친, 빼!”
이번에는 곧은 손가락이 내벽을 벌리며 쑥 들어왔다. 입구까지의 길이 막히는 바람에 녹다 만 알약은 계속 몸속에 남았다. 그는 약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속으로 밀어 넣으며 애액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안쪽을 자극했다.
“벌이니까 참으셔야죠. 저는 폐하를 위해 견뎌 냈건만 곧바로 다른 알파와 붙어먹다니. 솔직히 화가 많이 났습니다.”
길고 곧은 손끝이 몸속에 들어온 둥그런 약을 쿡쿡 찔렀다.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알약의 감촉이 적나라했다. 커틀러에게 하반신을 붙잡혀 움직일 수 있는 건 손과 입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엎드린 램파드는 자유로운 손끝을 더듬거려 유리로 된 찻주전자를 발견했고, 그것을 꽉 붙들어 커틀러의 머리를 가격했다.
쨍그랑, 유리 주전자가 깨지며 식은 차가 커틀러에게로 쏟아졌다. 램파드에게 맞은 그의 왼쪽 이마는 찢긴 생채기가 생겼고, 식은 차와 피가 섞여 흘러내렸다.
성난 짐승에게 물을 끼얹으면 역효과만 난다. 램파드가 끼얹은 건 사실은 기름이었던 듯, 커틀러의 투지가 사납게 불타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선을 넘었다는 게 느껴졌다.
“마지막 경고다. 날 적으로 삼고 싶지 않다면 멈춰.”
램파드는 주전자의 깨진 조각을 커틀러에게 들어 올렸다. 그는 자신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훑었다. 커틀러의 하얀 손가락에 갓 흘러내린 찐득한 피가 엉켜 들었다. 손끝에 묻어나는 붉은 피를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램파드가 들고 있는 조각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비웃었다.
“어떤 죄로 절 포박하시려고요. 황실 모독죄인가요? 성립을 위해 저에게 강간당하셔야겠군요.”
“그딴 이유 갖다 붙이지 않아도 너 하나쯤 유배할 수 있어.”
“뭐, 할 수 있다면 해 보십시오. 제가 포박되는 그 순간 작성한 유언이 공개될 테니까요.”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내뱉었지만 램파드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유언?”
도를 넘은 장난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디가 틀어졌는지 커틀러의 모습이 온전하지 않고 크게 삐뚤어진 듯 보였다.
“폐하께서 저를 서부 지역에 보낼 때 작성했습니다. 당신이 오메가이며 제국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요. 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공개하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커틀러는 10년이 넘도록 램파드가 오메가란 사실을 함구하며 곁을 지켜 준 사람이었다. 어떤 관계가 되어도 평생 비밀로 간직해 줄 거라는 믿음은 램파드만의 착각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먼저 저를 배신한 건 램파드 폐하십니다.”
“…읏!”
램파드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고, 쥐고 있던 깨진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온 커틀러가 램파드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크게 움직인 탓에 상처가 벌어졌고, 하얀 붕대는 이미 붉은 천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저만 믿으라고 했잖습니까. 저를 믿으셨다면 이렇게 다칠 필요도 없고 서로 힘을 뺄 필요가 없었을 텐데요. 걱정 마십시오. 저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부드럽게 할 테니까.”
조금 전 광기는 사그라들고,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변했다.
반항이 무의미해졌기에 램파드는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커틀러는 테이블 위에 올라간 접시를 한구석에 밀어 버리고, 자세를 잡았다. 흘러내린 애액 때문에 몸속의 약이 미끄러지며 빠져나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데, 발기한 페니스가 역으로 밀려들어 와 막았다. 단단한 귀두 끝에 녹다가 만 약이 닿았다.
“아프셨습니까?”
그는 삽입된 채로 램파드의 몸을 일으켜 세워 손을 맞잡았다. 램파드의 손은 붕대를 동여맨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피로 얼룩졌다. 아프냐고 묻는 건 손이었는데 그곳보다 갈비뼈 아래가 시큰거리며 더 아파졌다.
“위하는 척하기는. 손… 떼고 빨리 끝내.”
“바쁘신가 보군요. 빨리 끝내고 싶다면 협조하십시오.”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진 램파드의 몸속이 울렁울렁했다. 심장 부근이 지끈거리며 사라졌던 입덧이 다시 도지는 기분이었다. 램파드의 하반신을 붙잡은 커틀러가 허리를 움직였다. 굵은 성기가 빠르게 움직이자 램파드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으… 읏!”
원하는 대로 다리를 벌렸지만, 마음 깊숙이 거부된 관계라 몸이 절로 저항했다. 커틀러가 움직일 때마다 세포가 반항하는지 몸 안쪽이 지끈거리며 쑤셨다.
“…하읏!”
굳은 램파드의 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찬 남근은 성이 난 듯 빠르게 움직였다. 커틀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가 허리를 쳐올리면 몸속의 약들이 서로 부딪혀 달칵거린다. 눈을 감으면 배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아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예상한 대로 얼굴을 마주한 커틀러가 자신을 주시했다. 램파드는 한층 더 얼굴을 찌푸려 불만을 표했다. 네놈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는 거라며, 부정적인 감정을 똑똑히 보라며 주름을 잔뜩 만들었다.
“하……. 아, 아파……!”
살이 맞닿고, 내벽을 벌릴 때마다 통증을 느낀 램파드의 배가 위아래로 크게 헐떡였다. 퍽, 퍽. 멀어진 허벅지가 달라붙을 땐 내벽에 녹다가 만 알약마저 꽉 닿았다.
“흑… 후읏……!”
여러 번 추삽질이 반복되자 통증이 느껴지는 부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억지로 뚫어 대는 아래쪽인 줄 알았는데, 좀 더 깊은 곳에 숨겨진 마음이었다. 몸의 통증 따윈 별것 아니었고 커틀러에게 상처받은 마음이 괴롭다며 버둥거렸다.
조그만 움직임에도 램파드가 거친 숨결을 내뱉자 커틀러의 움직임이 점점 잦아들었다. 멈춰 있다 생각할 정도로 움직임이 사라졌지만, 끝까지 성기를 빼내지는 않았다. 그는 간지럽히듯 매우 천천히 하반신을 움직였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열기를 느낀 램파드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미지근한 열이 감돌기 시작했지만, 가슴 안쪽 마음은 여전히 찌르는 듯 아팠다. 배신당했다고? 커틀러가 피해자라 주장하고 있지만 배신당한 건 램파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마음이 배신당한 적은 여럿이었다. 익숙해졌을 텐데. 가슴 안쪽을 후벼 파는 듯한 아픔이 느껴져 감은 눈꺼풀에 힘을 줘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약속한 대로 딱 한 번 사정한 커틀러의 성기가 몸속에서 빠져나왔다. 커틀러의 물건은 여전히 딱딱하게 세워져 있었고, 당장에라도 박을 듯한 기세였지만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램파드는 미간과 콧등에 잔뜩 주름을 만들었다.
제 옷을 먼저 챙겨 입은 그는 물을 적신 수건으로 램파드의 하반신을 닦았다. 녹아서 형체가 사라진 억제제와 뒤섞인 정액을 닦아 내고, 깨끗한 속옷과 바지를 입혔다.
바지는 입혀 주더니 반대로 셔츠를 풀어 내린다. 옷깃이 벌려지고, 어깨 상처가 드러났다. 짐승에게 당한 붉은 흔적이 램파드의 어깨에 자리 잡았고, 커틀러의 시선을 뺏었다. 두 줄로 길게 난 붉은 선을 확인한 그가 천천히 단추를 여몄다.
“폐하.”
램파드는 눈만 굴려 그를 바라봤다. 이대로 입을 열면 황궁 전체가 떠나갈 듯 큰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을 게 분명했기에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서민 놈이 좋습니까.”
램파드는 큰소리가 나오려고 해서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어떤 쪽을 말하는 거냐. 몸? 마음?”
“몸뿐인 줄 알았는데, 마음마저 반응한 겁니까.”
“뭐든 간에 신경 쓰지 마. 입막음 비용으로 대 준 거니까 사생활까지 간섭할 생각 하지 말고.”
램파드의 말이 심히 거슬리는 듯 커틀러의 눈가가 경련했다. 정말 한 대 칠 분위기였고, 램파드는 그를 노려봤다.
“한 대 쳐 보던가.”
“……제가 폐하를 왜 때리겠습니까.”
“네가 하기 싫으면 내가 하게 해 줘.”
“어딜 때리고 싶으신 겁니까.”
“아무 곳이나 대라.”
그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는 램파드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 내밀었다. 이 흔치 않은 예술품은 오똑한 콧날과 가는 속눈썹을 가졌으며, 그 안쪽으로 보석 같은 눈동자를 품었다. 완벽한 작품을 바라보자 때릴 마음이 싹 가셨다. 한 대 쳤다간 기껏 심혈을 기울여 세공한 조각상이 깨질 것 같았고, 장인의 완성품을 존중하고 싶어졌다.
입맛이 싹 가신 램파드는 주먹을 거뒀다. 커틀러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 팔짱을 끼며 발로 볼을 밀어 버렸다.
“맞는 게 취향인 거냐. 변태 새끼.”
“아픈 걸 즐기는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 하고 싶으시다기에 등대(等待)하는2) 겁니다.”
“됐어. 얼굴 치워.”
갈 곳 잃은 분노가 램파드의 몸속에서 날뛰었고, 눈알만 굴렸다. 역시 한 대 패야 하나. 그 짧은 새 마음이 바뀐 램파드는 고민에 빠졌고, 커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올렸다.
“곧 시종이 들이닥치겠군요. 이만 일어나십시오.”
팔짱을 낀 램파드는 그의 손을 거부했다. 커틀러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안아서 옮겨 드릴까요.”
“그런 짓을 했다간 나이프로 목을 찔러 죽어 버릴 거야.”
“평소라면 저를 향해 죽인다고 하셨을 텐데, 유언장의 효과가 꽤 뛰어나군요. 오메가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게 죽기보다 싫으신 겁니까.”
“그래. 너와 비교해서 우위를 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싫은 일이다.”
램파드는 테이블 위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다행히 몸 안쪽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만상을 다 찡그리며 커틀러를 받아들였더니, 저 나름의 힘 조절을 했나 보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피곤하긴 해도 몸을 움직이는 데는 문제없었다.
몸을 추스른 램파드가 푹신한 침대로 향하자 그는 엉망이 된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마에 묻은 피를 닦고, 깨진 찻주전자의 파편을 하나씩 주워 한곳에 모았다.
“그렇게 미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자리를 지키려면 서민 놈이 아닌 저를 계속 두셔야 하니까요.”
“누구 마음대로 정하는 거냐.”
“폐하께서는 선택지가 없으신걸요.”
“네 말대로. 내 선택지는 정해졌어.”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셨단 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네놈이 아니란 건 알고 있구나.”
난장판이 된 테이블 위를 어느 정도 수습한 커틀러가 램파드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말 잘 듣는 서민이 아니니 조심하십시오. 저와 달리 폐하께 숨기고 있는 게 아주 많지요.”
램파드의 이마를 여러 번 문지른 그는 하고 싶은 말만을 내뱉으며 조용히 미소 짓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커틀러가 사라졌지만, 램파드는 화이트 궁으로 향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암살 사건에 대해 귀띔을 해 준 거였다. 이왕 알려 줄 거 정답을 알려 주지, 두리뭉실한 정보 덕택에 할 일만 새로이 생겨났다.
그가 애쉬를 처음 보는 사람인 양 군 게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하루 만에 태도를 바꿔 애쉬와 자신이 관련 있다고 못 박았다.
“식사는 끝나신 겁니까. 방을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램파드가 식사한 테이블을 치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온 한스가 손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커틀러 단장님과 싸우신 겁니까!”
커틀러가 어느 정도 치웠다고 하나 싸움판이었던 게 분명한 테이블을 보던 한스가 램파드의 손을 뒤늦게 발견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침, 황의가 처치한 손은 그새 피가 배어 나와 붉게 변했다.
“학창 시절부터 주먹다짐을 나눈 친밀한 사이라고 하나 슬슬 두 분 나이를 생각하십시오!”
아침 댓바람부터 한스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램파드는 슬슬 짜증이 났고, 표정에 전부 다 드러났다. 황제의 표정이 한층 구겨지자 한스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손을 놀려 청소를 시작했다. 테이블에 차려진 빈 식기를 치우기 시작한 한스가 램파드의 손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아니, 눈치를 봤다.
“……황의를 부를까요?”
“하는 김에 화이트 테일의 기록 보관소에 들러 커틀러 단장이 최근에 맡았던 수사 기록을 모조리 가지고 와라.”
“알겠습니다.”
시종은 사람을 부려 램파드가 원한 수사 기록을 찾아왔다. 단장이 직접 맡는 일은 비중 있는 큰 사건뿐이며 그마저도 서부 지역의 정비를 맡는 통에 몇 개 없었다.
수도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 베타를 오메가라고 팔아넘긴 인신 매매 사건을 순서대로 살펴보던 램파드는 지방에서 벌어진 불법 발정제에 관한 서류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램파드가 넘긴 자료였으며, 이후에 추가된 서류는 커틀러가 조사해 덧붙인 내용이었다.
대번포드 백작. 왕국과 전쟁이 끝난 후, 제국을 정비하는 램파드의 의견과 충돌하며 반기를 든 집안이었다. 늙은 가주를 거세시키고, 그 집안의 사람을 모조리 참수형 시키는 것으로 반란은 끝이 났다.
설마 다 쓰러져 가는 대번포드 백작 가문과 애쉬가 연관된 건가. 그러고 보니 남부 지방에서 만난 애쉬는 쉽게 구할 수 없는 불법 발정제를 가지고 있었다.
사건의 실마리를 잡은 램파드는 가둬 놓은 암살자를 찾아갔다. 추가 정보를 얻기 위해 그를 심문했지만, 암살에 실패하자마자 자결하려던 자였던 만큼 정보를 쉽게 내뱉지 않았다.
얻은 정보는 자결하기 위해 사용한 독이 대번포드 백작의 영지인 남부 지방에서 나는 독초로 만든 환이라는 것뿐. 썩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지마는 사건의 실마리가 어느 정도 잡혔다. 램파드는 커틀러가 흘려 준 정보를 토대로 조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