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사냥 (7/25)

07 사냥

며칠째, 온종일 메스꺼운 감각에 제대로 앉아 있기조차 힘들었다. 불쾌한 기분이 온몸을 잠식했고,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여 버린 듯해 두통이 일었다. 원래부터 없어진 입맛은 더욱 심해져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산 채로 말라 가는 기분이었고, 불쾌한 감각은 가라앉지 않았다.

몸이 피곤해져 옥좌에 비스듬하게 앉아 휴식을 취하던 중 곁에 있는 한스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식을 미루고, 요양을 떠나시는 건 어떠십니까.”

알현실에 앉아 있는 램파드는 아침부터 제국 밖에서 찾아온 사신의 이야기를 들었고, 자정이 지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혼인이 끝나는 대로 제국 순방에 나갈 거다. 1년 정도 자리를 비울 테니까 요양도 그때 함께 하도록 하지.”

“외람되지만 곧 있을 사냥을 나가시기 위해서도 빠른 시일 내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국의 황제는 혼인을 치르기 전, 황금 털을 가진 곰을 잡아야 했다. 전통대로라면 혼자서 해내야 하지만 곰에게 당하는 자가 생겨났기에 요즘은 얕은수를 쓴다. 기사단과 사냥개 여러 마리를 풀어 미리 곰의 힘을 빼게 한 다음 뒤늦게 나타난 황제가 활을 쏘아 맞혀 쓰러뜨렸다.

“슬슬 때가 되었군. 이번 사냥은 애쉬와 단둘이서 나가겠다.”

“혼인 사냥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곰 한 마리 정도야 혼자서도 상관없다. 사냥 준비 비용은 그대로 남부 지역 예산에 추가해라.”

“결정은 현명하십니다. 하지만 제국을 생각하는 만큼 폐하 자신의 몸도 헤아려 주십시오. 마침 화이트 궁에서 지내는 애쉬 님도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하니 함께 휴식을 취한 후 사냥을 진행하는 건 어떠십니까.”

황좌에 비스듬하게 기대 있던 램파드가 한스를 바라보며 자세를 고쳤다. 다툰 이후로 화이트 궁으로 향하는 발길을 뚝 끊었다. 애쉬에 관한 소식도 따로 묻지 않았기에 며칠 만에 듣는 안부였다.

“몸이 좋지 않다니, 무슨 말인가.”

“고열에 시달렸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지방 출신이니 아무래도 풍토병에 걸린 듯합니다. 오늘 아침에 열이 내렸다고 하더군요.”

램파드는 한동안 화이트 궁에 관한 소식을 전하지 말라 명했다. 황궁은 황제의 허락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지원을 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필요한 황의를 제때 부르지 못하고, 애쉬를 모시는 시종끼리 해결 보았던 것이다.

큰 병에 걸렸다면 황의가 필요했을 텐데, 제대로 처치받지 못해 악화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욱 쓰라렸다. 눈을 감은 램파드는 생각에 빠졌고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소보다 일찍 알현실 개방을 접고, 용한 황의를 골라 준비하게 시켰다.

오후에는 램파드를 알현하기 위해 먼 남부 지역에서 찾아온 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다. 홍수가 잦아지고 있는 요즈음 추가 지원을 원해서 대표로 찾아온 자였다. 황제와 직접 대화를 나누기 위해 몇 날 며칠 기다린 자들을 뒤로하다니 황제의 자질마저 내팽개친 듯해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황의를 대동한 램파드는 지체 없이 화이트 궁으로 향했다.

애쉬의 침실 입구에서부터 짙은 약 냄새가 풍겨 왔다. 램파드의 예상대로 화이트 궁에서 애쉬와 함께 생활하는 밀러가 그를 간호하는 중이었다. 애쉬는 약을 먹고 잠이 들었는지, 램파드의 방문에 주변이 어수선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못했다.

“애쉬의 상태는 어떠한가?”

“예, 폐하. 사흘 전부터 고열이 시작되었는데 아무래도 풍토병인 듯해 미리 지은 약을 구해다 드렸습니다. 다행히 오늘 아침부터 약이 들기 시작하는지 열이 가라앉은 참입니다.”

제국 수도에는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는 풍토병이 존재했다. 어린 나이에 앓고 나면 성인이 된 이후에는 잘 걸리지 않는다. 다 큰 성인이 걸린다면 수도 밖 외부인인 경우가 많다.

애쉬는 수도 태생이 아니므로 이제 와서 시달리는 듯했다. 램파드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든 애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고열에 시달렸는지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고, 호흡이 일정하지 않으며 괴로워 보였다.

으윽, 굳게 다문 애쉬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튀어나오며 몸을 꿈틀댔고 램파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꼭 감겨 있던 두 눈이 힘들게 열렸다.

뒤늦게 정신이 든 애쉬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램파드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애쉬의 시야는 사람의 인영밖에 보이지 않는다. 눈꺼풀을 뜨는 것조차 힘이 드는지, 이내 곧바로 양 눈을 감고 다시 잠에 빠졌다.

램파드의 손짓에 한걸음 뒤에 물러나 있던 황의가 애쉬에게 다가와 진찰을 하기 시작했다. 황의는 애쉬의 팔을 짚으며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흐음, 이상하군요.”

황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가방 안에서 약병을 몇 개 꺼냈다. 그는 곧바로 애쉬의 손끝을 바늘로 찔러 피를 받아 낸 후, 꺼낸 약병에 섞어 가며 무언가 조사했다. 진찰이 길어지자 램파드는 밀러를 포함한 애쉬를 돌보는 시종을 모조리 밖으로 내보내고, 황의 곁에 서서 감시하듯 행동을 지켜봤다.

“오래 살피는 걸 보아하니 평범한 풍토병이 아닌 모양이구나.”

애쉬의 피와 섞은 약병을 유심히 살펴보던 황의가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독에 중독된 모양입니다. 알파라서 이 정도로 그쳤지, 베타였으면 목숨을 건지기 어려웠을 겁니다. 후유증이 이 정도라면 러트를 겪었을 때 먹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독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합성독이 사용되었습니다.”

“자연에서 발생한 독이 아니군.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느냐?”

“이미 대부분이 몸 밖으로 배출된지라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사실이 몇 가지 없습니다. 금색 목화 씨앗이 섞인 합성독이며 다른 재료는 파악하기 힘듭니다.”

램파드는 애쉬가 누운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생명력이 강한 알파가 이 정도로 힘겨워한다면 상당히 강한 독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램파드와 말다툼하였다고 음독자살할 위인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몰래 독을 먹인 것이다. 대체 누가 왜, 그에게 독을 먹였는지 파악해야 했다.

애쉬와의 혼인은 램파드가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황후 후보는 이웃 나라의 공주였으니 베타 딸을 가진 귀족이 손쓰진 않았을 터. 얼굴 모르는 암살자의 의도를 알기 전까진 램파드는 알게 된 걸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애쉬가 독을 마셨단 사실을 함구해라. 외부에는 풍토병 때문에 쓰러졌다고 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램파드는 눈을 감은 애쉬의 앞머리를 정리하며 조용히 물었다.

“회복은 언제쯤 될 것 같으냐?”

“해독제를 먹였으니 내일 아침쯤이면 회복할 겁니다. 밤새 땀을 많이 흘릴 테니, 시종을 불러 곁을 지키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됐다.”

램파드는 손을 들어 올려 황의를 제지했다. 그는 애쉬에게 가까이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자세를 공손히 고쳤다.

“말씀하십시오.”

“화이트 궁 안의 시종 중에 애쉬를 노리는 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시종장 밀러에게 화이트 궁 전체를 비우라고 전하거라.”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더 하달하실 지시가 있으십니까.”

황궁에 잠입해 황후 후보를 노리는 짓은 어지간한 담력으론 힘들었다. 간 큰 암살자가 한 번의 실패로 포기할 리는 만무할 터.

“자네는 곧장 본궁의 한스와 로열 가드에게 연락해 화이트 궁 정원과 입구를 지키도록 지시하여라. 명목은 짐의 안전이다.”

“알겠습니다. 애쉬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애쉬는 짐이 직접 돌보겠다.”

“밤새 수시로 몸을 닦아야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램파드는 고개를 끄덕이곤, 황의에게 나가라며 손짓했다.

“그러면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램파드는 애쉬의 침대 곁에 검을 세워 놓고, 황의를 내보냈다. 황의가 자리를 비우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한스가 도착했다. 램파드는 한스에게 화이트 궁 소속 시종의 인적 사항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화이트 궁은 일하는 자가 적어 금방 조사가 끝냈다. 한스가 정리해 온 짧은 보고서를 읽어 내린 램파드는 화이트 궁 시종에게 문제가 없단 걸 파악하고 그를 내보냈다. 앞으로 애쉬의 호위를 늘릴 것이고,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램파드가 친히 살피기로 했다.

한스마저 자리를 비우자 화이트 궁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오후, 궁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쉬고 있는 사람에게 밝은 빛은 좋지 않아 초를 켜지 않고, 어두운 상태 그대로 뒀다. 램파드는 방 안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침대 곁에 놓고 앉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적막한 침실은 애쉬의 거친 숨소리만이 이따금 들렸다.

애쉬는 장난감으로 삼기 위해 데리고 온 자였고, 부서지면 다른 걸 구하면 될 일이었다. 굳이 나서서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텐데 가만히 두기 싫었다.

“으, 으윽.”

황의가 말한 대로 애쉬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땀을 많이 흘렸다. 잔뜩 찌푸린 미간 사이가, 날카롭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그가 얼마나 괴로운지 반증했다.

황궁에 데려오지 않았으면 겪지 않을 고통이지만 까놓고 말해 자업자득이었다. 복수해도 죽은 이가 돌아오지 않을 텐데, 어쩌자고 일개 서민이 황제에게 덤빌 생각을 했는지. 그만큼 램파드가 죽인 연인을 사랑한단 뜻이었다.

강제로 각인시켜 나름대로 복수를 한 모양이지만 애쉬의 생명줄은 결국 램파드가 쥐게 됐다.

램파드는 꽉 다물린 애쉬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고, 물로 적신 천으로 그의 몸을 닦아 주었다. 차가운 천이 금방 미지근해질 정도로 피부가 뜨거웠고, 깨끗한 물로 여러 번 헹궈 가며 그의 몸을 꼼꼼히 쓸어내렸다. 서늘한 물로 몸을 닦아 주니, 찌푸린 얼굴이 풀어지며 진정되었다. 애쉬를 닦은 수건을 대충 던져 놓은 램파드는 침대에 기댔다.

램파드도 휴식이 필요했고, 애쉬의 페로몬이 가득 찬 공간은 그대로 안식처가 되어 줬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에 평온함이 스며들어, 침대에 엎드려 부족한 잠을 청했다.

잠깐 잠이 든 램파드는 애쉬의 잠꼬대에 일어났다. 이를 악문 그는 날카로운 숨과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서둘러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은 없었다. 땀도 더는 흘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악몽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져 악몽 같은 걸 꿀 새가 없지만 겁이 많은 어린 램파드는 종종 자면서 끙끙거렸다. 그럴 때면 함께 침실을 사용하던 형이 깨어나, 이마를 문질러 주며 자장가를 불러 줬다.

램파드는 익히 배운 대로, 애쉬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오래된 옛 자장가를 불렀다. 노랫가락을 내뱉는 건 이번이 처음이기에 익숙지 않았지만, 따로 경청할 이도 없다.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게 한 음절씩 차분히 음을 이어 갔다. 조용히 읊조렸지만, 램파드의 목소리에 애쉬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났느냐.”

그는 반쯤 감긴 눈동자로 램파드를 바라보았다. 애쉬는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듯 눈꺼풀을 여러 번 깜박거리며 램파드를 바라봤다. 꿈속에서 뭘 보았기에. 파리하게 질려 있는 그는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미아가 되지 않게 손을 잡아 주어야 할까. 램파드의 손이 움직이기 전에 애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어떻게… 네가 왜 여기에? 방금 전에 분명히…….”

“짐의 꿈을 꾸었느냐.”

앙숙이 나타나 그렇게나 괴로웠던 건가. 꿈속의 램파드는 말로 그치지 않고 지난달 예고했던 대로 애쉬의 팔다리를 전부 잘라 버렸을지도 모른다. 애쉬는 꿈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램파드는 잠꼬대의 연장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루사, 내 사랑. 정말 보고 싶었어…….”

한겨울 빙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램파드는 입을 다물고 애쉬를 살폈다. 그는 연인과 램파드를 착각했고,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환희에 겨운 그의 눈동자는 촉촉해졌고, 당장에라도 기쁨의 눈물을 쏟아 낼 모양새였다. 처음 보는 표정의 그는 덜덜 떠는 손을 들어 올려 램파드의 어깨를 보드랍게 감쌌다. 혹여, 램파드가 깨질까 봐 조심조심 손끝을 움직여 체온을 전하며 끌어안았다.

램파드는 황궁 무도회에서 서로 각인한 알파와 오메가를 보았다.

크리스털로 이뤄진 샹들리에 아래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알파와 오메가 부부는 찬란하게 빛났다.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고, 램파드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엇이 저 둘을 저렇게나 견고하게 이어 놓았는가. 당연히 서로를 유혹하는 감미로운 페로몬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 중 하나가 베타였다면 그런 신뢰는 생기지 않을 터.

램파드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지금의 애쉬는 사랑하는 연인을 품에 넣은 알파의 얼굴과 같았다. 루사를 사랑한 애쉬는 베타였다. 사랑은 페로몬 같은 게 없어도 충분히 이어질 수 있던 거였다. 애쉬가 보내는 무한한 신뢰는 부부가 가졌던, 램파드가 부러워했던 감정이었다. 가지고 싶지만, 이 마음은 램파드의 것이 아니었다.

루사, 한 번 듣고 잊어버린 이름이었지. 망각한 이름을 기억해 내자 램파드와 같은 허니 블론드를 가졌던 비쩍 마른 오메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애쉬와 똑같은 은색 반지를 꼈고, 단칼에 쓰러졌다. 죽은 이를 반환할 수 없는 것처럼, 램파드와 애쉬는 되돌릴 수 없는 관계였다.

전쟁 통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았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생명을 끊는 일은 즐겁지 않고 마음 한편이 무겁지만 뉘우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를 후회하기 시작하면 이때껏 만든 시체 더미 모두에게 사과해야 하니까. 지난 일을 되돌아보며 멈춰 있을 시간 같은 건 램파드에게 없었다. 그런 램파드는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검을 휘두른 일을 후회했다.

애쉬와 맞닿은 심장이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다고 뛰어올랐지만, 마음의 주인인 램파드는 무덤덤하게 안겼다.

방이 어둡고, 언뜻 보면 착각할 만하겠지. 악몽의 원인을 제공했으니 지금만큼은 원하는 만큼 착각하라며 입을 다물고 기척을 숨겼다.

“루사…….”

그는 품 안에 들어온 램파드가 혹여라도 부서질까 봐 손가락 끝까지 조심스레 움직이며, 볼끼리 마찰했다. 말하지 않아도 따뜻한 온기 교환으로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느껴 왔던 페로몬과는 다른, 이 품에 몇 번이나 안겼지만 생소할 정도의 낯선 향이,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난생처음으로 느끼는 따스한 감정이 몸 안 깊숙이 스며들자 램파드의 피가 화끈 달아올랐다. 몸을 가득 채우고 범람하는 애정은 다른 이의 것이었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램파드가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착각이 시작되었을 때 애쉬를 흔들어 깨워 정신 차리게 하여야 했다.

판단을 잘못했지만 벗어나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애쉬의 부드러운 페로몬에 푹 잠긴 램파드의 신경이 기분 좋다며 울렸다. 램파드는 아늑한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죄책감이 뒤섞여 마음은 불편했다.

두근두근, 강하게 맥박 치는 애쉬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램파드는 애쉬의 단단한 등을 부드럽게 껴안으며 호흡을 맞췄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쉬는 것도 신경 써 그의 품에 안겼다.

탄로 났다간 이미 깨어진 그의 마음이 산산이 조각나 버릴 것만 같아 필사적으로 연기했고, 무사히 속여 넘겼다. 다행히 약에 취해 있던 애쉬는 곧 정신을 잃었고, 램파드는 조심스레 몸을 빼내 애쉬를 침대 위에 도로 눕혔다. 그의 숨소리는 일정했고, 푹 잠이 들었다.

누군가의 대용품으로 생각한다는 것쯤은 진즉에 알았다. 램파드의 성감이 아닌 곳을 몇 번이고 자극하며 움직일 때부터 눈치챘지만 애쉬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램파드 또한 애쉬의 품에 안기며 커틀러를 떠올렸으니까. 피차일반이니 참담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상하게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램파드는 애쉬를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 해가 뜨고 어두운 궁 안이 밝아지자 애쉬가 잠에서 깨어났다. 무겁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렸고, 그는 여러 번 눈을 깜박거렸다.

“결국 저는 성격 더러운 황제의 손에 처형당했군요. 사신이 눈앞에 있으니 이곳은 지옥이 확실하겠습니다.”

밤을 새워 피로가 누적되었건만 거슬리는 소리에 잠이 전부 날아갔다. 아침부터 겁대가리 없이 주둥아리를 놀리는 걸 보아하니 기력이 모조리 회복된 모양이었다.

“하찮은 날개 달린 새들조차 감히 넘보기 힘든 미모건만. 굳이 분류하자면 천사지 않겠느냐? 여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니까 이만 정신 차리거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성깔 사나운 천사가 어딨다고 그러십니까. 신성 모독입니다.”

“신성 모독이라니. 네놈, 인제 보니 왕국의 염탐꾼이었나 보군. 국교를 해체한 지 몇 년이 지났는지 아느냐.”

“7년이 지났죠. 황제가 바뀐 지도.”

“잘 알고 있군. 하나 널 처벌하는 건 허상의 신이 아니라 눈앞에 존재하는 짐이라는 사실은 모르나 보군. 다시 한번 묻겠다. 누구에게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느냐?”

며칠 침실에 누워 있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애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램파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국의 태양이시여.”

램파드는 밤새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오만하게 알파를 내려다보았다. 램파드가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자 애쉬는 곁눈질로 주변을 슥 살펴보았다. 아침이 되었건만 황제의 명이 없기에 화이트 궁은 여전히 텅텅 비었다.

“……뭐야.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시종을 모조리 물러나게 하였군. 지금 여기는 너와 나 단둘이만 남았나?”

“그런데?”

윤허를 내리지도 않았건만 건방진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램파드에게 가까이 다가와 방금까지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로 이끌었다. 램파드의 엉덩이가 푹신한 매트리스에 닿았고, 애쉬의 양손이 어깨 위에 올라왔다. 램파드는 자신의 어깨를 딛고 있는 애쉬의 손을 파리 내쫓듯 떼어 냈다.

“허락하지 않았는데 발정부터 하는 건가?”

“원하는 게 있으니까 예고 없이 몸소 찾아온 거 아닌가. 시종까지 모조리 물러가게 만들어 놓고 드물게 빼다니. 혹시 내가 자는 동안 벌써 한탕 치르셨나?”

하아, 한숨을 길게 내뱉은 램파드가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 일을 잊어 먹은 건가. 애쉬는 독을 빼내기 위한 해독제를 먹었다. 독과 함께 기억까지 몸 밖으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화가 난 채 화이트 궁 밖으로 빠져나왔고, 그 후 애쉬와 말을 섞은 적 없었다. 고로 아직 못마땅한 상태였다.

“며칠 전 무례는 이걸로 용서해 주겠다. 이 악물거라.”

“뭘.”

램파드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애쉬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짝! 넓은 방 안을 울릴 정도로 찰진 소리였다. 각오했지만 버티기 힘든 강도의 폭력이었으며 애쉬는 눈앞에 불꽃이 펑 터져 침대로 고꾸라졌다. 그는 끄윽,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꿈틀댔다.

지난 밤. 애쉬의 병간호를 하며 밤새 생각해 보았는데, 며칠 전 일은 애쉬의 잘못이 명백했다. 몇 번이고 나눈 대화를 곱씹어 봤지만 여지없을 정도로 애쉬의 탓이었다.

제가 뭔데 남의 가족사에 제멋대로 끼어들어 나대는지. 램파드를 뿔나게 할 의도였다면 성공한 거였다.

램파드가 진심으로 내리쳤다면 이빨이 나갔을 테지만, 힘을 조절 했기에 얼굴만 부어오르고 끝났다. 처음 맛보는 통증에 시끄러운 입을 다문 애쉬가 램파드를 바라보며 뻐끔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막힌 속이 풀어지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침대 곁에 세워둔 검을 쥐어 들었다.

“요새 수도에서는 어린아이도 잘 걸리지 않는 풍토병에나 걸리다니 진성 촌놈이었구나.”

여전히 통증에 이를 악문 애쉬가 램파드를 바라봤다. 풍토병은 수도와 멀리 떨어져 지내는 자일수록 걸릴 확률이 높으며, 촌뜨기란 걸 확증하는 병이기도 했다.

“오늘부터 아침, 저녁 식사는 짐의 집무실에 꼬박꼬박 찾아와서 먹도록 해라. 입맛 떨어지는 건 이쪽에서 사양할 터이니 제대로 꾸미고 오도록.”

램파드가 후려친 볼을 쓰다듬는 애쉬는 답이 없었다. 램파드는 그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한층 키웠다.

“곧바로 시종을 부르고, 채비를 끝마치는 대로 오너라.”

이쯤 되면 엄살이 아닌지. 애쉬는 아직도 볼을 부여잡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알아들었으면 고개만 끄덕거려라.”

마음은 수긍하지 않은 모양인데 애쉬의 머리는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확인한 램파드는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본궁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서류를 정리하며, 옆방에 식사를 차리도록 지시했다. 메뉴는 평소 램파드가 주로 먹는 고기 요리와 함께 바삭하게 구워 낸 빵이었다. 애쉬의 입맛은 모르지만,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상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메뉴였다. 식사 준비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쉬의 입궁 소식이 들렸다.

“이렇게 식사를 초대해 주시고 폐하께서 내려 주신 큰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램파드가 애쉬를 힐끗 바라봤다. 애쉬는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 올리고, 램파드 앞에 공손하게 섰다. 따로 지시하지 않았지만 애쉬는 본궁에 오는 길에 잃어버렸던 개념을 되찾아 장착한 모양이다.

본궁에 초대받았다고 하자 화이트 궁에서 지내는 밀러와 시종이 뭉쳐 그 짧은 시간 동안 힘을 썼다. 이런 일을 대비하여 미리 맞춘 애쉬의 예장을 꺼내고, 머리부터 신발까지 신경 써서 골라 입혔다.

기본 옷걸이가 되는 자라 걸맞은 옷을 갖추니 한 번쯤 시선을 돌려 봐 줄 만해졌다. 좋은 체격이 드러난 옷은 은실로 마무리가 되어 고풍스럽지만, 눈길을 사로잡을 보석 브로치가 하나쯤 더 있으면 좋을 법했다. 화이트 궁에는 예산을 분배해 주지 않았으니, 저 정도면 선방이긴 했다.

“다행히 입맛을 해치진 않겠구나.”

“아직 폐하의 취향을 파악하지 못해 제 나름대로 힘을 썼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건방지게도 그 정도로 내 마음에 들 생각을 한 것이냐? 황후가 될 자치고는 하찮을 정도로 허름하구나.”

애쉬는 고개를 숙였지만 못마땅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주변에 두 사람을 살피는 밀러가 없었더라면 시건방지게 굴게 분명한 표정이었다.

램파드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돌아가는 대로 보석을 내릴 터이니 너에게 맞는 브로치를 만들도록 지시해라.”

“하나하나 손수 신경 써 주시니 감복하였습니다.”

램파드의 사복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 애쉬는 분명히 다른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밀러가 눈에 불을 밝히고 있어 마음과 달리 공손히 입을 놀렸다. 저런 성격이었으면서 처음 며칠은 어떻게 순한 양인 양 굴었는지. 램파드는 처음 화이트 궁에 발을 들였던 애쉬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로열 가드를 대령해라.”

램파드의 명에 황제의 집무실 앞을 지키던 로열 가드 세 명이 나란히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애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은 로열 가드 소속의 수석 기사 엘 커프만입니다. 앞으로 엘이라 불러 주십시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애쉬는 받아들일 줄 몰라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지키고 있는 모습에 서류를 내려놓은 램파드가 대신 응해 줬다.

“앞으로 널 호위할 로열 가드들이다. 네 명령을 우선시하는 자들이니 편히 부리면 된다.”

로열 가드는 황실을 수호하는 기사단이었다. 아직 황실 일원이 되지 않았는데 황제가 부리는 개인 호위병을 붙여 준다는 건 굉장히 파격적인 대우였다. 하지만 엄청난 특례를 받은 당사자는 그 뜻을 몰라보아 램파드가 붙여 준 시종의 연장이라 생각했다.

제국의 검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램파드는 따로 호위를 데리고 다니지 않지만 평범한 서민이었던 애쉬는 경호가 필요했다. 나무로 만든 연습용 검조차 들어 보지 못했을 자이니까, 특별히 검술 실력이 뛰어난 수석 기사를 셋씩이나 붙였다.

“마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풍토병 하나 걸렸다고 이렇게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으십니다. 누구나 걸리는 흔한 병이지 않습니까.”

“흔하긴. 황궁 안에서 걸리는 자는 처음 보았다.”

“…죄송합니다.”

“의술도 익힌 자들이라 곁에 두면 쓸모가 많을 테니, 데리고 다니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램파드는 독을 먹고 쓰러진 당사자에게 비밀로 부칠 생각이었다. 평범한 서민이었던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단 사실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애쉬를 죽이기 위해 누군가 독을 썼단 사실을 감당하는 건 램파드만으로 족했다. 사실을 몰라도 램파드가 지켜 주면 될 일이니까.

독살은 실패했다고 하나, 암살자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완전히 위협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정체가 밝혀질 때까지는 번거롭지만, 매번 함께 식사하며 꾸준히 그를 살펴봤다. 램파드는 한결같이 애쉬를 식사에 초대했다.

다음 번 방문 때 애쉬의 가슴에는 램파드가 하사한 토파즈로 만든 브로치가 자리 잡았다. 그의 눈동자색과 같은 샛노란 색의 맑은 보석이었다.

***

애쉬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자갈 같은 회색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렇지만 자갈이 많은 토양에서 자라는 포도는 짙은 향을 지니기에 따로 골라내진 않았다. 포도 뿌리는 죽을 만큼 노력해 자갈보다 더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영양분을 섭취해 달아졌다. 인간은 자갈을 이용해 포도나무를 괴롭혀 맛과 향을 얻었다.

하필 램파드는 애쉬가 싫어하는 회색 눈동자를 가졌다. 남을 괴롭히는 자갈처럼 감정 없는 딱딱한 눈 대신 생명력 넘치던 하늘 같은 푸른색이었으면. 그러면 똑같은 허니 블론드를 가진 사랑하는 사람이라 착각하고 용서할지도 모를 텐데.

날 때부터 황제로 점찍어진 듯, 오만한 눈매를 가진 램파드는 루사랑은 전혀 다르다. 언제나 상냥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입술은 독설을 내뱉는다. 근육 한 점 없으며 뼈가 도드라져 보이던 몸은 오랫동안 단련한 검사의 단단한 근육이 배어 있다. 수줍은 듯 눈을 꼭 감고 애쉬의 품에 안겨 있던 남자 대신 욕망을 숨기지 않는 탐욕스러운 자가 있다. 언뜻 보면 닮은 듯하지만 역시나 다른 사람이었다.

분명 남을 괴롭히는 자갈 같은 눈을 가진 낯선 원수를 싫어해야 하거늘. 이상하게 램파드가 낯설지 않다. 서먹하기는커녕 오히려 익숙했다.

“애쉬 테일러 님. 램파드 폐하께서 기껏 식사에 초대해주셨건만 그 태도는 무엇입니까.”

화이트 궁에 돌아오자마자 밀러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능숙하게 속였다고 생각했건만. 램파드 앞에서 온갖 불만을 품은 걸 다 들켰다. 그래도 애쉬 나름 표정 관리를 한 거였건만. 밀러의 눈에는 억지로 끌려와 아니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애쉬의 속마음을 정확히 판단한 것이다.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램파드 폐하 앞에서 그런 되바라진 태도를 보인 이유를 한번 말해 보십시오!”

주군 앞에서 시건방지게 군 것이 거슬렸는지 평소와 달리 밀러는 잔뜩 화나 있었다.

애쉬 또한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야 램파드가 주제도 모르고 복장 지적이나 했으니까. 솔직히 그가 손수 골라 입던 옷은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다. 아무리 모든 걸 무시할 정도로 빼어난 얼굴을 가졌다지만 그가 골라 입은 옷은 심각했다. 그쯤 되면 주먹만 쓰지 않았지, 폭행당한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런 심각한 감각을 가진 자가 복장이 어쩌고 지적하는 게 못마땅했다.

그보다, 램파드 덕분에 행복한 기분이 싹 가셔 불쾌한 기분에 표정 관리가 안 된 것이다. 아주 행복하고 그리운 기분이 들었건만 곁에 앉아 있던 남자 때문에 황홀한 감정이 증발했다.

램파드는 애쉬의 남근만을 원한다. 그런 그가 걱정된다며 찾아왔을 리 만무하다. 평소와 같이 욕구 해소를 위해 찾아온 것이 분명했기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램파드와 몸을 섞는 횟수가 늘어나자 그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 가셨다. 행복한 듯, 양 볼을 붉히며 동생 이야기를 했던 루사의 영향 때문인가. 램파드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10년을 함께 지낸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진다. 루사가 몇 번이고 되풀이한 램파드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증오가 녹고 허물없어져 갔다.

실제 램파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루사의 영향 덕분에 그가 친동생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아주 조금 우애를 느꼈건만. 아무리 음란한 성격을 가졌대도 며칠째 병을 앓고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사람의 좆이 필요하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오다니. 램파드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따져 들며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어질 정도의 무례한 일이었다.

밀러의 잔소리를 듣던 그는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애쉬가 답 없이 못마땅하게 눈동자만 굴리자 밀러의 눈꼬리가 한층 더 치켜올라 갔다.

“폐하께서는 앞으로 매일 아침마다 애쉬 테일러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매일… 매일 말인가.”

어쩌다 한번씩. 쌓인 욕구를 풀겠다며 찾아오는 것도 성가셨는데 이제 아침마다 만나야 하다니.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툰 애쉬의 눈썹이 불유쾌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그런 애쉬의 태도에 밀러는 한층 더 단단히 화났다. 저대로 뒀다간 폭발하여 적어도 세 시간은 잔소리를 쏟아 낼 터. 얼른 그가 화를 내고 있는 부분에 대해 사죄해야 하건만 원인 제공은 램파드가 한 것이라 굽히고 싶지 않았다.

“…이제 머릿속까지 귀족이 되셔서 아랫것한테 생각을 밝힐 필요가 없다고 느끼시는 건가요. 나쁜 변화는 아니라지만 폐하께는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으로 폐하 앞에서 버릇없이 군 겁니까.”

“그대는 거슬려 한다지만 폐하께선 나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으시지 않나. 둔감하지 않으시다면 이미 나의 태도를 아셨을 텐데.”

램파드는 눈치가 없으므로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지 못하던걸. 그런 뜻으로 내뱉은 말이었고 밀러의 얼굴이 한층 굳어졌다.

사실 애쉬는 밀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황제 앞에서 시건방진 태도를 고수한다. 반말은 물론, 천박하게 몸을 놀리는 태도에 맞춰 싸구려 취급을 해 준다. 그의 몸에 환장하며 성기를 박아 넣는 자신 또한 문제 있지만 뭐, 당하는 본인이 좋다니까. 자기 합리화하며 막소리 한 것이다.

“폐하께서는 진즉에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당신을 생각하여 봐주고 계시는 거죠.”

“봐준다라…….”

원하는 대로 남자 좆을 준다니까 램파드는 되레 성질이나 피웠다. 밀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어느 지점에 울컥했는지 램파드는 참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진심으로 거슬렸다면 오늘 아침처럼 뺨을 후려칠 것이 분명했다.

램파드에게 뺨을 맞은 순간 눈앞에 불꽃이 여러 방 터지는 듯한 환각을 보았고, 아직 볼이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감사하다며 인사를 올려도 모자랄 판이지 않습니까.”

애쉬가 조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진실을 몰라 착각하고 있다지만 불유쾌한 오해를 받자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폐하 덕분에 황궁에 끌려 왔고, 앓지 않아도 될 병을 얻었지. 며칠 동안 침상에 일어나지 못한 것을 감사해야 하는가.”

애쉬는 램파드에게 풀지 못한 화풀이를 밀러에게 해 버리고 말았다. 너무 과한 말을 내뱉었단 생각이 들었지만 주워 담기엔 이미 글렀다.

“그 까닭으로 폐하께 화가 나신 겁니까.”

한껏 뾰족하게 날이 선 밀러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애쉬 님이 모르시는 것 같아 제가 말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저녁 일을 감사드리란 말입니다.”

“무엇을 말인가.”

“램파드 폐하께서 직접 애쉬 님을 간호하셨습니다.”

“램파드… 폐하께서?”

“그렇습니다. 밤새 애쉬 님의 몸을 닦으며 한숨도 주무시지 않고 당신 곁을 지키셨지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침대 주변은 물에 젖은 수건 등이 나부끼고 있었다. 양이 꽤 많았는데 밤새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다니.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 자가 중노동을 사서 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시종은 무얼 하고 폐하께서 직접 일하셨단 말인가.”

“그야 당신을 염두에 두셨으니 그러신 거죠. 얼마나 걱정하셨으면 뜬눈으로 밤을 보내셨겠습니까.”

애쉬는 숨기지 못할 정도로 낯빛이 어두워졌다. 루사의 설명 속에 존재하는 램파드는 남을 생각하느라 솔직하게 생각을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아이.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났고, 현재의 램파드는 친형을 손수 죽이고도 태연하기만 한, 본성이 악한 자라고 느꼈다. 그렇기에 그에게 악담을 퍼붓는 데 서슴없었거늘. 자신이 한참 착각하고 있는 건가.

애쉬가 파악한 대로 천성이 악독한 자라면 자신을 강간하고, 푸대접하는 사람을 가만둘 리 없다. 그는 지위와 능력을 갖췄으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곤죽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램파드는 애쉬의 행동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곁에 뒀다. 성욕을 풀기 위해 알파의 성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착각한 것은 애쉬 쪽일지도 몰랐다.

설마, 죄책감을 지닌 건가. 그래서 도를 넘은 건방진 남자를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이며, 손수 간호까지 한 것일까.

루사라면 분명 램파드를 알아봤을 것이다. 그라면 사랑하는 동생이 히트 사이클을 겪는 오메가를 도우려고 기사의 반발을 사는 것 따윈 원치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해 일이 원만히 해결되길 바랐을 테지.

애쉬는 이미 마음 한편에 램파드는 잘못이 없단 걸 알고 있었다. 램파드는 사실 오메가니까. 루사의 페로몬을 맡고 성욕에 지배된 알파를 저지하고, 형을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설령 그가 진짜 베타라 하여도, 하찮은 오메가 하나를 두둔했다간 기사의 신뢰를 저버리게 되겠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다만 인정하기 싫었다.

“혼자 깊이 생각하시고, 내일 아침은 다른 행동을 보이시길 바랍니다. 혹여 램파드 폐하께 불만이 생기셨다면 배운 대로 아랫것인 저한테 푸십시오.”

시시때때로 애쉬의 표정이 변하자 곁에선 밀러가 혼자 생각하라며 자리를 비워 줬다.

혼자 남은 애쉬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며칠 전 램파드를 향해 폭언을 내뱉었고, 그는 실망한 낯을 한 채 사라져버렸다. 그 후로 연락을 끊어 버렸으니, 이제 애쉬에게 정이 다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을 사람이 꿈속에서 나타났고, 주저 없이 그를 껴안았다. 꿈이라면 서슴없이 행동해도 상관없다 느꼈기에 마음이 시키는 대로 팔을 뻗었다.

원하는 대로 그를 꼭 안았고, 자갈 같은 눈동자가 당혹감에 휩쓸렸다. 회색은 애쉬가 싫어하는 색이니까 착각할 리 없거늘.

***

목숨을 위협받은 애쉬는 별 탈 없이 며칠을 보냈다. 램파드는 정무를 보며 종종 애쉬의 안부를 확인하러 화이트 궁에 직접 찾아갔다. 목숨이 붙어 있나 확인을 하러 가는 거지만 대신들 눈에는 애쉬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한시라도 떼어 놓기 싫은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그들의 착각 따위 알 바 아니었고, 램파드는 오늘도 화이트 궁을 찾아갔다. 이번 방문은 목적이 있었기에 등 뒤로 여러 명의 시종을 대동한 채였다.

애쉬는 램파드가 붙여 준 로열 가드와 시종에게 둘러싸여 책을 읽었다. 원래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독서로 빠르게 익힌 애쉬의 예법은 점점 괜찮아졌다. 이제 슬슬 귀족들 앞에 내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시종을 전부 물러가게 만들겠습니다.”

램파드를 발견한 그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시종을 부려 방문자를 반겼다. 말 대신 손짓으로 시종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제법 귀족 같아졌다. 확실히 첫날과 비교하여 이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모양새였다.

“오늘은 함께 밖으로 나갈 것이다.”

“황궁 밖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런 좁은 곳에서 지내다 보면 지루하지 않겠느냐. 수도 밖 교외로 나갈 터이니 준비해라.”

램파드의 말뜻을 알아챈 밀러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사냥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세 명의 로열 가드도 미리 말과 마차를 점검하기 위해 밖으로 나서자, 유일하게 황제의 말귀를 알아먹지 못한 애쉬만 남았다.

둘만이 남게 되자 애쉬가 기껏 마음속으로 칭찬한 예법을 버리고, 건방지게 굴기 시작했다.

“황제라는 자리는 사실 놀고먹는 자리인 거냐? 틈만 나면 씹질하러 찾아오더니 놀러 나갈 시간까지 있는 모양이군.”

“지난번에 맞은 거로는 정신 못 차렸구나. 이번에는 손 말고, 채찍으로 맞고 싶은 거냐.”

“교양 있는 척… 하는 편이 더 좋으시군요.”

기세등등하던 애쉬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평범한 서민인 그는 살아오면서 주먹다짐조차 몇 번 하지 않았다. 램파드를 만나고 나서 칼에 찔리고, 뺨을 맞았다. 모두 첫 경험이었으며, 아픈 걸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불평이 얼굴에 다 드러났으니 연기는 관둬라. 농을 건넨 거니 이전처럼 편한 대로 해.”

“……단둘이 있을 땐 마음대로 말해도 되는 건… 가?”

“두 번이나 허락받다니 잘못한 마음이 조금은 있나 보군?”

“없진 않아.”

“단둘만이 있을 때는 허락하겠다.”

완만하게 아래로 떨어졌던 그의 어깨가 다시 곧게 펴졌다. 말 한마디에 시시때때로 표정이 빠르게도 변하는 게, 강아지 같았다. 애완견은 제멋대로 굴어야 귀엽고 키울 맛이 났다. 램파드는 꼬리 없는 큰 강아지의 턱을 쓰다듬었다.

“후사를 만드는 건 황제의 중요 업무 중 하나다. 본래대로라면 여러 명의 첩을 두고 일주일에 두 번 정해진 시간에 관계를 맺어야 하지. 체력이 따라 주면 더 하기도 하고. 배우지 못한 거냐?”

“여기 끌려온 첫날에 배웠다. 알고 싶지 않은 예비 시아버지의 성생활까지 생생하게 듣고 말았지. 그렇게나 했는데 자식이 둘밖에 없는 것도 신기해.”

자신의 아버지를 깎아내리는 애쉬의 말에 램파드는 실소를 터뜨렸다. 램파드 또한 선대 황제의 합방 기록을 보며 얼마나 비웃었는지. 그는 성욕이 왕성했지만, 정력이 따라 주지 못했다.

“네가 나의 황후가 되면 똑같이 합방 기록이 대대로 남게 될 거다. 제국이 사라질 때까지.”

애쉬는 자신의 몸에 파리 떼가 달라붙은 양 몸을 움츠러뜨리며 램파드에게서 떨어졌다.

“……내 쪽에서 파혼할 수 있을까?”

“허락 안 해.”

단호한 램파드의 거절에 애쉬는 무언가 떠올랐다.

“잠, 잠깐. 횟수까지 정확히 남아 있다는 건 기록관이 대동했다는 말이지 않으냐. 어떻게… 설마 남들 앞에서 하는 거냐!”

“황제의 공식 업무니까 기록관이 있는 게 당연하지. 황후가 없는 나는 합방을 하지 않아 시간이 남는 거다. 어때, 이제 이해가 되느냐?”

램파드의 말에 질린 애쉬는 진심으로 혼인을 물리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잔뜩 당황한 모습에 램파드는 드물게 소리 내며 웃었다. 화이트 궁의 새 주인이 생기고 나서부터 큰 웃음이 많아졌다. 생각 없이 뒹굴고, 실컷 웃는 건 몇 년 만이지. 애쉬 앞에서는 비밀을 지키려 경계할 필요가 없으니, 절로 편해지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봐라. 내가 오메가인데 어떻게 기록관을 대동하고 합방을 하겠느냐. 혼인을 올린 후 너는 평생 황제의 손을 타지 않은 비극의 황후가 될 거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나와 네 아이는 따로 밖에서 낳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밀회는 기록하지 않으니까 마음껏 해도 돼.”

“외출의 목적은 밀회로군.”

“절반은 맞아.”

“나머지 절반의 목적은?”

“사냥. 알았으면 너는 단장을 시작해라.”

슬슬 준비를 끝마친 시종들이 돌아왔고, 램파드는 사냥에 걸맞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곁에서 함께 치장한 애쉬는 램파드의 지시대로 예복을 갈아입었다.

우선 부드러운 셔츠로 단단한 몸을 감쌌다. 목 장식은 램파드가 하사한 노란 토파즈로 만든 브로치. 겉옷은 애쉬와 잘 어울리는 검은색 정장이었으며 은색과 푸른 실로 수수한 장식이 수놓였다. 애쉬의 몸 구석구석까지 치수를 재서 만든 옷은 틀에 넣어 찍어 낸 듯, 딱 맞았다.

보기에는 좋지만 사냥에는 적합하지 않은 옷이었다. 사냥이라면 편한 복장을 해야 하건만, 황제가 직접 지시한 일이라 따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랐다.

뜬금없이 사냥을 왜 나가는지, 램파드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한 애쉬는 치장을 끝내고 등 떠밀리듯 화이트 궁 밖으로 나왔다.

고기와 가죽을 파는 사냥꾼이 직업이 아닌 이상 야생 동물을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 피 보는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닌 이상 죽일 필요가 없기도 해 애쉬에게는 사냥이 생경한 일이었다. 옷마저 불편하기에 앞일이 걱정됐고, 그새 표정에 드러났다.

화이트 궁 입구에는 눈치 빠른 로열 가드들이 끌고 온 램파드의 애마가 있었다. 관리를 잘 받은 회색마는 갈기까지 은은한 빛이 나 멀리서 보면 은으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주인을 알아본 말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왔고, 램파드가 콧등을 부드럽게 쓸어 줬다.

“사냥을 해 본 적은 없을 테고. 원래 네가 살던 곳은 사냥을 좋아하는 백작령이니 몇 번 본 적은 있겠군.”

“네, 여우 사냥을 나온 귀족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우 사냥이라. 짐은 그런 어중간한 맹수는 잡지 않으니 각오 단단히 하여라.”

“무엇을… 잡으러 가시는 겁니까.”

“금색 곰.”

경악한 애쉬와 달리 곁에 있는 로열 가드와 밀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양 놀란 척도 하지 않았다. 애쉬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자세인지라 밀러가 냉큼 설명을 꺼냈다.

“무얼 그리 놀라십니까. 황금 곰 사냥은 제국의 황제께서 황후를 들이기 전 거쳐야 하는 필수 의례 중 하나입니다. 원래라면 신부는 멀리서 구경만 하는 경우가 많지만 애쉬 님은 알파시니까 폐하 곁에서 도우십시오.”

애쉬가 탈 말의 주둥이를 고정한 재갈과 고삐를 손수 확인하던 램파드가 웃었다.

“초짜가 돕다니 무얼 말인가. 아… 미끼 역할 정도면 할 수 있겠군. 이번에 성체가 된 곰은 사나워서 사람을 몇 번 습격했다지. 애쉬의 몸은 탄탄해서 맛있어 보이니 맛난 먹이라 착각할 법도 하겠구나.”

특별히 골라온 순한 말의 안장까지 확인한 램파드가 자신의 말을 살펴봤다. 전쟁에서 함께 활약한 회색마는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 튼튼했다. 회색마는 오랜만에 찾아온 주인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애정을 표했고, 램파드는 계속해서 쓰다듬어 줬다. 애쉬 쪽에서 답이 없자 그를 흘끗 바라보았는데, 여전히 질겁한 상태였다.

“널 데리고 가는 건 바람을 쐬라는 의미니까 걱정하지 마라. 혹여 도울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네…….”

준비가 끝나고 출발 전 램파드를 모시는 한스가 다가왔다.

“폐하의 솜씨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마는 요새 편찮으셨으니 걱정됩니다. 역대 황제들처럼 기사단을 이끌고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짐승 한 마리 정도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의식은 홀로 해내어야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금색 곰은 발정기가 오면 사나워져 민가를 여러 번 습격했다. 수도 근교에 나타난 금색 곰은 램파드가 직접 사냥을 나가 여러 마리를 잡기도 했다. 곰을 잡는 것은 램파드 혼자선 무리 없다.

하지만 애쉬를 홀로 두자니 신경 쓰인다. 지켜 줄 자가 없다면 암살자가 다시 애쉬를 노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램파드의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게 안전할 것이고, 단둘이 있어야 부족한 다른 부분도 해결할 수 있다. 램파드의 속셈을 전혀 알지 못한 한스는 걱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혼자시면 상관없지만 애쉬 님까지 함께 가지 않습니까. 미숙한 자가 폐하의 발목을 잡을까 걱정됩니다.”

“보기에는 저래도 애쉬도 알파니까 믿어 보거라. 오늘 밤은 산장에서 묵을 터이니 영 걱정이 된다면 내일 저녁 기사단을 이끌고 찾아오너라.”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비를 끝낸 램파드는 애쉬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창문 근처로 다가왔고, 램파드는 편히 앉으며 말했다.

“출발해라.”

“알겠습니다.”

마차 뒤로는 램파드와 애쉬의 말을 끄는 기사와 로열 가드가 동행했다. 곰이 서식하는 숲까지는 호위를 받으며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램파드가 도착하자 산지기가 나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안내했다. 넓은 산은 두 개의 산장과 하나의 오두막이 존재했다. 마구간이 딸린 작은 오두막에 도착하고 나서야 줄줄이 따라왔던 호위 기사와 로열 가드들이 모조리 물러났다.

“필요하신 건 오두막 안에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별말씀을요. 오늘은 밤에 비가 내릴 터이니 해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하십시오. 그럼 이만 저는 숲 입구로 돌아가겠습니다.”

산지기까지 사라지자 광활한 자연 속에 애쉬와 램파드 단둘만이 버려졌다. 램파드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애쉬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보기와 달리 겁이 많은 놈이었군. 왜, 무서운 건가?”

“당연하지. 금색 곰은 식인 곰으로 유명한 대형 동물이지 않냐! 대륙에서 금색 곰보다 큰 동물은 없어!”

“누가 보면 네가 사냥하는 줄 알겠군. 이미 나 혼자서 여섯 마리 정도 잡아 봤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곰을 잡았다고?”

“그래.”

“혼자서?”

애쉬가 되묻는 게 귀찮아진 램파드는 그를 무시하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활과 단도, 부싯돌로 쓸 차돌 등이 들어간 주머니를 가장 먼저 챙겨 들었다. 그 외에 산지기가 챙겨 놓은 짐은 식사거리 등이었다.

램파드는 식사가 들어간 주머니를 던져 놓고 무기만 챙겨 바깥으로 나왔다. 이 정도 양으로는 간에 기별도 차지 않으니 짐이 될 바에 버리는 게 나았다. 애쉬는 램파드와 한 발짝도 떨어지기 싫은지 새끼 오리처럼 딱 달라붙어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무서워할 거 없어. 정말로 위험했다면 호위 없이 널 데리고 왔겠느냐.”

“…….”

“겁대가리 없이 나한테 덤벼들 땐 언제고, 보기보다 어수룩하구나. 사냥은 금방 끝날 거고 너는 말 위에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램파드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애쉬의 볼을 감싸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왕 나온 거 정력에 좋은 사슴을 한 마리 잡아 줄 테니 얌전히 비축이나 하고 있어.”

“……평소처럼 화이트 궁에서 하면 될 것을.”

“거기서는 한동안 하지 않을 거야.”

“왜지.”

약에 취해 있던 애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램파드는 똑똑히 기억했다. 잊고 싶어도 애쉬가 지내는 방에 들어가는 순간 향기에 휩쓸려 강제로 상기되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렸던 애쉬의 달콤하고 감미로운 페로몬이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방 안에 배어 있었다. 미미하고 옅은 향이지만 그에게 각인한 램파드에게는 꽃다발에 파묻혀 있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짙게 느껴진다.

쌍방향으로 각인한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오메가를 떠올리며 내뿜은 페로몬을 맡으며 안길 수 있을 리가. 생각만 해도 들끓은 성욕이 싹 가시고, 죄책감이 자리 잡는다.

“촌뜨기나 걸리는 병을 여기저기 묻혀 놓았을 테니까 거절하지. 나한테 옮길 속셈이냐.”

“남부 지방은 시골이 아니다!”

“그건 네 생각이지, 촌놈.”

가지고 나온 주머니를 말안장에 고정하는 램파드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애쉬가 입을 열었다. 기세등등한 걸 보아하니 꼬투리 잡을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먼발치에서 지켜본 게 다지만 여우 사냥을 나온 귀족은 거느리는 사람도 많고, 화려하던걸. 사냥에 처음 나가는 서민과 오메가 단둘이라니 황제치고는 너무 허름한 규모가 아니냐. 알고 보면 황궁에서 푸대접받는 신세라던가?”

사냥을 홀로 나온 이유는 애쉬와 단둘이 있고 싶다는 사심도 있지만 다른 명목도 있었다. 황제가 사냥을 나가면 몰이꾼, 사냥개 관리인, 시종, 기사단의 식량을 준비해야 하고 그들에게 줄 포상금도 필요했다.

제국의 재정은 풍부했기에 이 정도 유흥은 전혀 무리 없지만, 황제의 기쁨을 위한 사냥 한 번으로 교육 기관 하나를 지을 수 있는 돈이 움직인다. 램파드가 홀로 사냥에 나서면 남는 예산으로 지방에 아카데미가 하나 더 지어진단 뜻이다. 며칠 전, 애쉬를 만나느라 폭우 피해를 본 남부 지방 사절단을 뒤로했다. 예산은 그들에게 사용할 것이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속마음 일부를 그에게 말해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빠르게 결론 내렸다. 자신의 업적을 그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기에 애쉬가 원하는 답만 했다.

“대다수 귀족에게 사냥은 놀러 나가기 위한 핑계다. 사냥이라고 해 봤자 몰이꾼이 몰아오는 지친 동물을 쏘는 게 전부고, 술과 음식을 곁들여 야유회를 개최하는 게 목적이지. 야유회를 개최하는 귀족은 여우같이 순한 동물을 잡고, 맹수를 잡았다며 남들 앞에서 뽐내는 것이다.”

“그래서 힘을 과시하기 위해 곰을 잡으시겠다?”

“이번 곰 사냥은 밀러가 설명한 대로 혼인 준비를 위한 의례 중 하나일 뿐이다. 황제는 곰을 잡고 의식을 치러야 황후를 맞이할 수 있거든. 정비는 끝났으니 얌전히 말 위에 올라타 있거라. 힘들면 도와줄까?”

상처는 아물었지만, 손상 입은 다리를 아직도 절뚝거려 제대로 말에 오르기 힘들어 보였다. 애쉬는 됐다며 손짓을 하고 말고삐를 단단히 쥐어 천천히 올라탔다.

“길들이기 힘든 사나운 사내 몸에 자주 올라타서 순한 말은 손쉬워. 안 그래?”

“건방 떠는 것치고는 쥐고 있는 말고삐가 흔들린다. 여차하면 지켜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평생을 살면서 오메가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어.”

“오메가가 못마땅하다면 검이라도 쥐고 있겠느냐?”

“검 같은 건 쓸 줄 몰라.”

“활은 쏠 줄 아나?”

“활은 포도밭에 숨어든 여우를 내쫓으려고 사냥꾼에게 배운 적 있어.”

자신의 말 정비까지 모두 끝낸 램파드가 무기로 사용할 활시위를 미리 당겨 보았다. 문제없는 걸 확인하며 하나는 애쉬에게 건넸다.

“검 대신 활이라도 들고 있어라. 함부로 쏠 생각은 하지 말고, 호신용이라 생각해.”

“그건 그렇고 사냥개는 어딨어?”

“개를 좋아하나?”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램파드는 곤란했다.

“네가 겁낼까 봐 미리 말하는 건데, 고양이 두 마리만 데리고 갈 것이다.”

“고양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닫혀 있는 마구간 안에서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질겁한 애쉬가 말에 올라간 채 소리가 난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린 마구간 문틈 사이로 괴물 한 마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했다.

“덩치만 크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램파드가 말안장에 넣어 둔 생고기를 들고 마구간 안에 들어갔다.

잠시 후 램파드는 거대한 검은 짐승 두 마리를 끌고 왔다. 램파드가 처음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선물받은 흑표범 두 마리로서 평소에는 산지기가 돌봤다. 사람만 한 짐승 두 마리는 주인인 램파드의 몸에 달라붙으며 서로 만져 달라 아우성이었다. 램파드가 목 아래를 부드럽게 긁어 주자 기분 좋다며 그릉그릉 우는데 덩치만큼 그 소리도 매우 커 숲이 울릴 지경이었다.

“이리 와서 만져 봐. 내 명령 없이 물진 않으니까.”

“명령하면 문다는 건가…….”

“시키면 먹기도 하지.”

“……사람을?”

램파드는 마음대로 생각하라며 답 대신 미소 지으며 표범을 쓰다듬었다. 겁을 잔뜩 먹은 애쉬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기척을 죽이느라 애썼다. 괜히 겁을 준 건가. 램파드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새끼 때부터 사람 손에 길러져서 사람을 공격하진 않아. 나에게 위협이 되면 또 모를까.”

두 마리의 표범은 이제는 먼저 만져 달라며 몸을 숙이고 램파드에게 들러붙었다. 램파드가 말한 대로 외모만 컸지 검은 고양이 같은 행동을 보다 보니 애쉬가 가진 두려움도 점차 가셨다.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애쉬는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어느 정도 적응된 것 같군.”

“멀리 떨어져서 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좋아. 그러면 출발하지.”

램파드는 말에 오르기 위해 쓰다듬는 것을 관두고 허리를 폈다. 두 마리의 표범은 램파드가 말을 타지 못하도록 부대끼며 방해했다.

“동물이 잘 따르는 체질인가 봐.”

램파드는 표범 두 마리의 애교에 눈꼬리까지 부드럽게 휘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인간도 개 같은 놈들만 달라붙으니 맞는 거 같군.”

램파드의 악담에 애쉬는 대꾸를 하지 않고 얌전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위협으로 느낀 표범이 달려들까 봐서는 아니었다. 애완동물의 애교에 경계를 푼 램파드의 모습에 넋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램파드는 잘못 없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 그가 신경 쓰였다.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은 꿀 같은 허니 블론드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 덕분에 보석 파편이 달라붙었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보석은 저마다 광채를 발했다. 진귀한 보석에 둘러싸였지만 그 무엇보다 눈에 띄는 영롱함은 한 사람이었다.

“뭘 넋 놓고 있나. 이만 출발하지.”

“어……? 어.”

“정신 차려. 그러다 큰 올빼미가 낚아채 갈지도 몰라.”

램파드는 혼자 웃으며 앞장섰다. 애쉬 본인은 몰랐지만, 귓불이 붉게 변했다. 우거진 숲은 밝은 해를 어느 정도 차단해서 어두웠기에 그의 표정을 램파드 또한 알지 못했다.

사냥을 나설 때는 짐승의 냄새를 쫓는 개가 필요했다. 표범 두 마리는 싸울 때는 몰라도 수색에는 불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애쉬의 예상과 달리 금색 곰은 포효하며 빠르게 등장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다른 맹수의 냄새를 맡고 튀어나온 것이다.

램파드의 금발만큼이나 고운 빛깔의 털이지만 그보다 더 멀리서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기에 애쉬의 머릿속에는 두려움이 가득 찼다. 거대한 덩치의 곰을 본 애쉬는 용기를 내 활을 꺼내 들었다.

“넌 기사가 아니니까 나설 필요 없다. 안전하게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네 일이야.”

“저렇게 큰 걸 혼자서 상대한다고?”

“그래. 오히려 네가 곁에 있으면 방해되니까 멀리 떨어져 있어.”

램파드는 표범 한 마리를 애쉬 곁에 붙여 놓고, 활을 꺼내며 곰 가까이로 다가갔다. 애쉬의 심정은 이왕이면 아예 혼자 뒀으면 했다. 걱정과 달리 애쉬 곁에 있는 또 다른 맹수는 하품을 길게 찍 하며 다소곳하게 앉았다.

곰은 단단한 뼈와 두꺼운 가죽으로 무장해 어지간한 곳은 찔러도 피를 보기 힘들다. 단번에 쓰러뜨리기는 힘들고 활이나 창으로 상처를 여러 개 내 지칠 때까지 피를 흘리게 하여 잡는다. 풀숲에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다가간 램파드는 활시위를 당겨 곰의 부드러운 눈을 꿰뚫었다.

짐승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고, 멀리 있는 애쉬까지 짜릿해질 정도로 맹렬한 기세였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후각으로 램파드의 위치를 파악한 곰이 달려들었다. 램파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성난 맹수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한 발 더 쏘았다. 두꺼운 털 뭉치에 묻혀 깊이 박히지 못해 큰 타격은 없어도, 생채기를 만들었다.

거대한 짐승은 램파드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이를 드러내며 돌진했고, 맹수 앞에서 평정을 지키던 회색 말의 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대로 곧장 달려 나무가 우거지지 않은 동산 쪽으로 곰을 유인했다.

거대한 곰이 램파드를 뒤쫓자 애쉬는 두려움을 잊고 등 뒤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 들었다. 사나운 맹수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금색 곰이라니. 자리를 지키라고 했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시선이라도 끌면 램파드가 편해질까 싶어 활을 들어 올렸다.

“나서지 마!”

곰만큼이나 큰 포효에 애쉬는 깜짝 놀라 들어 올린 활을 내려놓고 이를 갈았다. 생태계 꼭대기에 있다는 알파가 밑바닥에 깔린 오메가의 기세에 짓눌려 몸을 쉽게 움직이기 힘들었다.

애쉬가 활을 내려놓는 걸 확인한 램파드는 미리 점찍어 둔 동산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시야를 가리던 빽빽한 나무가 없는 공간이 등장하자 손가락을 입에 가져 대 휘파람을 불었고, 풀숲에 납작 엎드려 잠복하던 흑표범이 숨겨진 발톱을 꺼내 곰에게 달려들었다. 잘 훈련된 흑표범은 가죽에 상처를 입히지 않게, 곰을 위협했다. 시선이 분산된 틈, 램파드는 활을 쏘아 곰의 턱을 맞췄다.

크아악,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기다리던 애쉬의 귀에 짐승이 울부짖는 비명이 연이어 들렸다. 울창한 나무 숲 틈 사이로 파고든 포효에서 짐승이 얼마나 분노에 차 있는지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니 괜히 더 신경 쓰였다.

램파드는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노련한 사냥꾼이 아닌 이상 혼자서 곰을 잡긴 힘들었다. 자신이 나서 봤자 도움이 되긴커녕 먹잇감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은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애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그날의 기억이 환영처럼 떠오르는 듯했다.

제국의 기사가 남부 지방의 작은 마을에 당도했고, 피난 준비를 도왔다.

경황이 없던 루사는 억제제를 챙겨 먹는 걸 잊어먹고, 히트 사이클에 돌입하고 말았다. 애쉬의 집은 남부 지방에서도 가장 외곽에 있었던지라 그대로 루사를 데리고 숲으로 도망갔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숲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왕국군 때문이었다. 적군보다는 차라리 아군인 제국군이 낫지 않을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틈, 피난을 돕던 알파 기사가 루사를 발견하고 말았다.

가장 처음 루사를 발견한 기사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으면 도망갈 수 있었을 테지. 하다못해 주먹을 휘둘러 기절시키기라도 해야 했다. 좋은 수를 생각하느라 도망갈 시간이 없어졌고, 결국 비극이 일어났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가. 짐승이 우짖는 소리에 애쉬의 심장이 동요했다.

애쉬는 램파드의 사냥을 방해하지 않도록 말발굽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말을 몰아 그가 달려 나간 쪽으로 이동했다. 애쉬가 움직이자 곁에 있던 흑표범도 어슬렁어슬렁 천천히 쫓아왔다.

빼곡히 채워진 나무 탓에 주변이 어두웠지만, 소리 덕분에 위치를 파악했다. 저 멀리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눈이 부셔 찌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해를 가리는 장막 같은 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는 영웅담을 재현한 무대가 보였다. 무대 위가 밝은 이유는 빛을 가린 나무가 없는 것보단 스스로 빛나는 태양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은빛으로 발하는 말 위에 올라탄 사람에게서 압도적인 생명력이 느껴져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태양은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이 램파드에게 붙여 준 애칭이었다. 존경의 의미로 붙인 칭호가 이제는 황제에게 올리는 인사처럼 사용됐다. 대외적으로는 베타지만 실제로는 오메가인 그를 따르는 많은 기사의 마음이 단번에 이해됐다.

램파드의 미모를 칭송하는 이야기는 먼 남부 지방까지 퍼져 있었다. 둘은 없을 외모의 황제를 모신다는 사실에 제국민은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실제 황제를 마주한 사람은 그의 능력을 더 높이 살 거였다.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 손색없는 자. 제국의 검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으며, 그의 권위에 절로 무릎을 꿇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크아악! 몸 곳곳에 퍼져 있는 급소에 여러 발의 화살을 맞은 곰이 발작하며 숲의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램파드에게 이길 수 없단 걸 깨닫고 짧은 꼬리를 말아 도주하는 거였다.

궁지에 빠진 짐승이 달아나는 건 예상했지만, 모피가 상할까 봐 검을 꺼내 마무리를 짓지 않았다. 인제 와서 도망쳐도 상처 입은 곰은 멀리 가지 못한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피를 추적하며 쓰러진 곰을 주워 가기만 하면 램파드의 일은 끝이었다.

짧은 시간 온몸을 빠르게 움직였더니 근육이 탈력했다. 램파드는 함께 고생한 말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달려 나가는 곰을 바라보다가 활을 떨어뜨렸다.

곰이 향하는 방향, 나무 숲 사이로 저 멀리 떨어뜨려 둔 자가 보였다.

순간 램파드는 너무 놀라 온몸의 세포가 터질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앞섰고, 말고삐를 세차게 내리쳐 속도를 냈다. 허리춤에 찬 검을 뽑고, 말을 재촉하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램파드의 마음에 부응한 말이 신속하게 다리를 움직여 준 덕분에 늦지 않았다.

램파드는 꺼낸 검을 곰의 목덜미에 재빨리 찔러 넣었지만, 가죽이 두꺼워 치명상이 되지 못했고, 여전히 곰은 달리는 상태였다. 돌처럼 단단한 근육에 꽂힌 검은 빼내기 쉽지 않아 그대로 내버려 뒀다. 램파드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 위에서 곰의 등으로 뛰어올라 어중간하게 박힌 검을 양손으로 잡아 찔러 넣었다. 두 다리로 벌떡 일어선 곰이 등 뒤에 달라붙은 사냥꾼을 떼어 내기 위해 발악했다.

“램파드!”

거대한 곰 위에 올라탄 사람의 몸은 쉽게 찢길 거였다. 양손으로 자신의 등 쪽을 긁는 곰의 모습에 애쉬는 곰에게 달려들었다.

쿵, 거대한 물체가 쓰러졌다. 말에서 내린 애쉬가 절뚝거리며 달려갔고 곰 위에 올라탄 램파드를 발견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램파드는 무사했지만 오랜 시간 사용했던 검이 절반으로 부러졌다.

이건 커틀러가 건넨 소중한 검이었다. 램파드의 비밀을 아는 커틀러가 곁에 없으면 세상에 홀로 있는 듯해 사무치게 외로웠다. 하지만 그의 검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기에 램파드에게는 소중한 물건 중 하나였다.

램파드의 시선은 부러진 자신의 검을 향했다. 오랜 친구를 잃은 기분이었다. 꿉꿉한 기분을 떨쳐 내고자 이를 악문 램파드가 소리쳤다.

“죽고 싶은 거냐! 얌전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나!”

램파드는 애쉬 곁에 쓰러진 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맹수의 생명력은 끈질겼기에 완벽하게 목을 자르지 않는 이상 안심은 섣불렀다. 그가 무사한 걸 확인했지만, 아직도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시선은 쓰러진 곰에 고정한 채 물 흐르듯 말을 쏟아 냈다.

“기다려라, 짐승도 알아듣는 단순한 말을 정녕 이해하지 못한 거냐? 발목 인대까지 잘라 버려야 가만히 있을 셈인 거냐. 이 내가 그렇게나 만만하게 보여 사소한 명령 같은 건 듣지 않는다는 거냐. 내가 너한테 서열 정리당하는 개처럼 대 주고 있다만, 위계질서까지 인정한 건 아니다. 명령하면 들어, 애쉬 테일러!”

램파드는 촉촉한 곰의 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호흡이 완벽하게 멈춘 곰은 작은 움직임도 없었다. 놀란 심장은 그대로 피를 데우며 분노로 감정을 바꿔 버렸다. 램파드는 쉬지 않고 계속 소리쳤다.

“말이 제 속도를 내지 못했더라면 네놈의 몸은 찢겼을 거란 걸 알고 있나. 전력 질주한 말은 한동안은 달리지 못한다. 군마가 아니었다면 넌 지금쯤 찢겨 죽었단 말이다! 알고서 그런 거냐, 진짜 죽고 싶었던 거냐고! 애쉬 테일러, 말해 봐라. 죽고 싶다면 사실대로 고해. 온전한 모습으로 죽을 수 있도록 당장 목을 베어 줄 테니까!”

이쯤 되면 변명이나 오히려 뻔뻔하게 반론을 펼칠 법도 한데 조용했다. 선 채로 기절한 건 아니겠지.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애쉬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이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저 혼자만의 세계로 떠난 듯했다.

무엇을 보고 달아올랐는지, 잘 익은 앵두처럼 시뻘겋게 된 얼굴을 보니 기가 막혔다.

“정신이 나간 거냐. 대체… 뭘 보고 혼자 달아오른 거냐.”

예상치 못한 반응에 램파드는 당황했다.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절절한 시 한 편 쏟아낼 것 같은 애쉬의 표정에 더는 윽박지를 수 없게 됐다. 애쉬 때문에 놀란 심장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검이 부러진 원인 제공자에게 화풀이도 못 하게 됐다. 갈 곳 잃은 마음이 램파드 몸속에서 방황하는 바람에 가슴 안쪽이 울렁거렸다.

“미안, 나 때문에 검이 부러져서……. 걱정돼서 찾아 왔건만 오히려 방해만 하다니…….”

애쉬의 사과에 램파드의 눈가가 꿈틀댔다. 램파드가 사용하는 검은 아카데미 졸업 후 커틀러가 쥐어 줬다. 애초에 선물용으로 작정했는지 램파드의 작은 습관까지 배려해서 만든 손에 딱 맞는 검이었다. 오랜 세월 사용한 검이 부러져서 더욱 화났는데, 순순히 사과하다니. 평소의 건방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고, 순순히 인정하는 꼴에 램파드는 부러진 검을 검집에 대충 꽂아 버렸다.

“창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멀리서 활만 쏠 뿐인데 대체 무엇이 걱정된 거냐. 네놈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나약하지 않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몸이나 간수해!”

“응…….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정말 대단해. 영웅담 같은 거로 네 용맹함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느껴졌어.”

잘못 들었나. 너무 놀라 또 다른 인격이 깨어났는지 순순히 칭찬하는 모양새가 평소의 애쉬가 아니었다. 한 번쯤 칭찬을 듣고 싶긴 했지만 이대로 대화를 이어 가면 해가 질 때까지 찬사를 쏟아 낼 듯했다. 램파드는 한숨을 푹 쉬고, 잡은 곰의 팔을 들어 올렸다.

“멍하니 보기만 할 거냐. 무거우니까 돕거라.”

꼴에 알파라고 애쉬가 도우니까 말의 등 위에 곰 한 마리를 턱 올릴 수 있었다.

푸르릉! 회색 말이 짜증을 가득 담아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투레질하며 앞발까지 강하게 땅바닥으로 내리찧는 모양새가 무겁다며 불평을 표하는 모습이었다. 애쉬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말이 그러든지 말든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램파드는 마무리로 말안장에 넣어 둔 방수용 모포를 꺼내 곰 위를 덮었다.

이제 말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데, 회색 말은 주인을 태우기 싫은지 뱅글뱅글 돌며 램파드를 피했다. 램파드는 그제야 말 위에 거대한 짐짝이 올라간 걸 깨닫고, 고삐를 잡고 산장 방향으로 걸었다.

산장까지 가는 길에 램파드는 약속한 대로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 사슴을 시작으로 토끼, 꿩 두 마리. 눈에 닥치는 대로 활을 쏴 잡아 버렸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램파드는 분주히 몸을 움직였고, 애쉬는 조용히 그를 따랐다. 일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활시위를 힘껏 당겼지만,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다. 애쉬는 표정을 철저하게 숨기지 못하고, 감정을 쉽게 내보인다. 그런 그가 램파드를 사랑스럽게 바라봤고 램파드는 동요했다.

애쉬의 태도가 왜 갑자기 바뀐 거지. 이때껏 원수의 속을 뒤집는다고 비아냥거리든가 시건방지게 굴더니, 갑자기 호감을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손바닥 뒤집듯 적의가 호감이 되었으니 경계해야 마땅하건만 램파드는 이상하게 그의 태도가 싫지만은 않았다. 페로몬이 정한 운명의 짝이기 때문일까. 죽을 때까지 이어져 있을 각인 상대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기분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문제는 느닷없이 별안간 반했다는 것인데. 하긴, 램파드 정도의 미색이라면 한눈에 빠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둔한 애쉬는 남들보다 뒤늦게 반응한 모양이었다.

애쉬의 얼빠짐이 옮았는지, 램파드는 정신이 멍해 쓸모없는 사냥을 잔뜩 해 버렸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말의 등 위에 노획물을 올리려 하자, 한계까지 다다른 회색 말이 램파드의 등을 이마로 찧어 버렸다.

“읏! 아, 좀만 버텨 봐라.”

이제야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냐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던 말이 코끝으로 램파드의 허리를 계속 꾹꾹 밀었다. 말의 투정이 멈추지 않자 램파드는 턱밑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달래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말을 진정시키며, 회유하느라 예상 시간보다 늦게 산장에 도착했다. 덕분에 램파드와 애쉬는 갑자기 쏟아진 비를 맞고 그대로 온몸이 젖어 버렸다.

곰의 등은 미리 방수 모포로 덮어 둔 덕분에 목표였던 모피는 지켰다. 내일 기사단이 도착하는 대로 들고 가라 하면 될 것이다.

램파드는 말과 곰 사체를 마구간에 둔 뒤 산장 지하에 있는 와인 셀러로 내려갔다. 황족이 사냥 나올 때 쓰는 산장이다 보니 평소 관리가 잘 되었지만, 목욕물은 데워도 차가웠다. 이대로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라 술이라도 마셔야 했다. 램파드는 와인병을 하나 들고 1층으로 올라왔다. 램파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애쉬는 난로에 장작을 넣어 불을 지폈고, 그 앞에는 쫄딱 젖은 표범 두 마리가 불을 쬐는 중이었다.

“애쉬.”

램파드는 애쉬의 이름을 부르며 산장 안을 걸었다. 삐걱, 나무로 만든 산장은 움직일 때마다 나무가 짓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쉬는 거대한 욕조에 금방 식어 미지근해진 물을 채웠다.

“이렇게 큰 욕조는 처음 봤어. 물을 한참 채워 넣었는데도 절반도 안 차다니…….”

“그 정도면 됐다. 한잔하고 씻어.”

램파드는 잔과 와인을 애쉬에게 건넸다.

“리카드 지방의 30년 산 포트와인이네. 브랜디를 넣어 발효한 거라 향이 좋은 와인으로 유명하지.”

“그런 건 모르고, 몸을 데우기 좋은 와인이라 골라 온 거다. 그러고 보니 네놈 직업은 원래 와인을 만지는 거였지. 어때, 추억이 되살아나느냐.”

“아니. 와인을 만든 건 돈이 필요해서 한 거고 노동에 그리움은 느껴지지 않아.”

“그런 것치고는 맛이 좋던걸.”

“내가 만든 와인을 먹어 봤어?”

“네놈이 강간한 날 남부 지방을 뜨기 전에 한 병 구매했지.”

애쉬는 순간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램파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안해…….”

“됐어. 그런 것보다 맛이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나?”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램파드에 비해 애쉬는 지난 과오를 인정하며 죄스러워했다. 그는 램파드의 질문에 편치 않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피부와 닮은 맛이더군. 뜨거운 태양을 농축한 듯 매우 진하면서, 단맛이 상당히 괜찮았어.”

“입에 맞아 다행이야…….”

애쉬는 미소를 지으며 램파드의 잔에 붉은색 와인을 가득 채웠다. 램파드는 잔을 천천히 흔들고, 입에 머금었다. 도수가 높은 와인이라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따끔했고, 순식간에 몸이 따뜻해졌다.

“와인을 만든 것처럼 날 상대하는 것도 추억 따윈 존재하지 않겠군.”

“왜?”

“권력을 대가로 하는 노동이니까.”

애쉬는 자신의 잔에 와인을 채워 넣어 쭉 들이켜 마셨다. 램파드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너는 내가 지내는 화이트 궁에 여덟 번 찾아 왔지. 그중 세 번은 발정제까지 챙겨 들고 오셨으며, 천한 것의 씨를 배겠다며 고군분투하는 게 재밌던걸. 꽤 즐거운 추억거리지 않아?”

술기운이 확 돌아서인가 솔직해진 애쉬의 입은 평소 생각한 말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램파드가 피식 웃으며 잔을 천천히 돌렸다.

“그런 것치고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던걸. 날 안으며 누굴 생각했느냐.”

“누구라니.”

“아니, 됐어.”

이미 알고 있는 답의 질문을 해 버리다니. 램파드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말까지 삼켰다. 산장 밖으로 세찬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으니 배가 고팠다.

“먼저 씻고 있어라. 나는 사슴이랑 새를 구울 테니까.”

“요리… 할 줄 알아?”

“사냥감을 손질하고 굽는 것 정도는 할 줄 안다.”

의기양양한 램파드의 표정을 보며 애쉬가 피식 웃었다.

“의외네. 음식이 어떤 공정으로 나오는지 과정조차 모를 줄 알았거든. 취미인 건가?”

“취미긴. 기사 수행을 나가면 일주일 이상 산속에서 생존해야 하거든. 그때 익힌 거지. 이야기는 이만 됐다. 빨리 씻고 나와라.”

와인을 마신 애쉬는 열이 차올라 더워졌다. 그는 비에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욕조에 들어가는 대신 램파드가 든 와인병을 빼앗아 들었다.

“요리는 끝나고 내가 할 테니까 같이 씻을까? 나는 열이 많아서 함께하면 따뜻할 거야.”

술을 마셨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있어 몸이 조금 떨렸다. 이대로 감기에 걸리면 혼인식이 미뤄지고, 일에 지장이 생긴다. 램파드는 들고 있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애쉬와 함께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는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넓었고, 애쉬는 램파드가 편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품 안에 넣었다. 램파드보다 훨씬 덩치가 큰 남자이다 보니, 품 안에 쏙 들어간 모양이 되어 버렸다.

미지근한 물은 차갑게 느껴졌지만 뜨거운 체온의 남자가 등 뒤에서 끌어안으니 따뜻해졌다. 물속에 몸을 집어넣은 램파드는 발끝을 꼬물꼬물했다. 술기운이 도는지 발끝까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애쉬의 손이 램파드의 어깨에 닿았고, 아릿한 통증이 일어 몸을 움츠렸다. 램파드의 어깨는 긁힌 상처가 있었고, 물에 닿아 핏물이 고였다.

“이 상처는 조금 전에?”

“조금 긁힌 거니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된다. 노심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 거지만, 내 욕심에 호위도 없이 홀로 널 데리고 왔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미안…….”

“곰이 달려들었는데 이 정도 상처라면 선방한 거다.”

긴 한숨을 내뱉은 애쉬는 고개를 숙여 램파드의 목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무거운 숨을 내뱉는 그의 입술이 램파드의 목에 살짝씩 닿았다. 램파드는 저도 모르게 애쉬와 호흡을 맞췄다.

“밀러에게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들었어.”

“무슨.”

“속을 썩인 자를 밤새워 간호했다고. 옮는 게 걱정된다면서 실제로는 밤새 내 곁을 지켰던 거였지.”

당황한 램파드는 깨끗한 물 아래 위치한 자신의 발끝에 집중했다. 애쉬는 복수 상대를 끌어안으며 사랑의 감정을 흘려보냈다. 황홀할 정도로 감미로웠던 페로몬은 램파드가 아닌 루사를 떠올리며 내뿜은 사랑의 냄새였다.

이제 막 호감을 표하는 램파드에겐 그런 향을 품지 않을 테지. 마음을 고백하는 그의 향이 다르면 어쩌지. 비교하며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꿈을 꿨어.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당장에라도 끌어안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어. 네가 곁에 있었기 때문인가.”

“…….”

“이상하지. 너는 내 소중한 걸 빼앗은 장본인인데. …램파드,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애쉬의 품에 안긴 램파드의 몸이 움찔거렸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그가 내뱉을 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애쉬의 잠꼬대를 들은 램파드는 그의 진실한 마음이 누구에게 향했는지 확실히 안다. 혼동하는 그가 착오를 속삭여도 페로몬은 속이지 못한다. 램파드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이 루사와 다른 페로몬을 내뿜는다면 서로 괴로워질 게 분명했다.

찰박, 욕조 안에서 몸을 돌린 램파드는 애쉬를 바라보며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허튼소리를 내뱉지 못하게. 착각한 그가 후회할 말을 내뱉지 못하게 입술로 말을 차단했다.

애쉬는 키스보다는 말을 하고 싶은 욕망이 큰지 램파드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램파드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입술을 떼어 내지 못하게 혀까지 깊숙이 밀어 넣었다. 떨어지려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램파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혀를 섞었다. 미미한 포도 과즙 맛이 났다.

“후…….”

부드러운 혀는 램파드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조심스레 움직이며 간을 봤다. 혀끼리 포옹하자 램파드의 몸에 열이 천천히 차올랐다. 새로운 반응을 찾기 위해 천천히 입 안을 헤집던 애쉬의 입이 떨어졌다. 그의 입술에 고정된 램파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술을 먹어서인가? 평소보다 팔팔한걸.”

넣지 않아도 수면 위로 살짝 튀어나온 성기는 딱딱해 보였다. 다급한 손이 램파드의 몸을 감쌌고, 당연히 다물린 구멍 안으로 성기가 들어올 거라 생각했다. 삽입 대신 그의 입술이 목가에 닿았고, 애쉬는 혀로 램파드의 몸을 쓸었다.

쪽, 램파드의 몸에 입맞춤하며 고개를 숙인 애쉬가 톡 튀어나온 유두를 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말랑한 젖꼭지를 이빨로 살짝 깨물고, 입에 넣고 혀로 자극했다.

“뭐하는 거냐. …그냥 넣어.”

“내일 밤까지는 단둘뿐이잖아.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해.”

애쉬는 입 안에 유두를 머금은 채 말했다. 발음이 뭉그러졌지만, 램파드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천천히 하자고 하지만 애쉬의 몸은 전혀 딴판이었다. 수면 아래에 있는 알파의 성기가 램파드의 아랫배에 닿았는데, 지금 당장 살점을 파고 싶다며 성난 듯 움직였다.

구태여 시간을 끄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르르 내려온 애쉬의 혀가 갈비뼈 사이를 훑자 램파드의 몸이 움찔거렸다. 조금 전의 반응을 재현하려는 듯 애쉬의 혀가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건드렸다. 작은 간지러움이 시작된 곳부터 신경이 깨어났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는 가슴 언저리까지 간질간질했다.

“간지러워. 읏, 그만 핥아…….”

“참아 봐. 조금만 더.”

“후읏, 뭐… 하는 짓이냐.”

살갗이 예민해져 애쉬의 손가락이 조금만 움직여도 피부가 움찔 떨렸다. 더듬거리는 애쉬의 손가락이 램파드의 배꼽 주변을 꾹 눌렀고, 첨벙, 물을 튀기며 램파드의 몸이 솟아올랐다.

“이런 곳을 꼼꼼하게 만져 준 사람은 처음이야? 예민해서 반응이 격한걸.”

“쓸데없는 짓거리… 는 필요 없… 으니까. 그냥… 해.”

“쓸모없지 않은걸. 네 걸 봐, 굉장히 커졌지?”

“알면 빨리 가게 만들어.”

좀 더 천천히 몸 구석을 쓰다듬으며 애무하고 싶건만, 램파드는 급해 보였다. 애쉬는 뻣뻣하게 세워진 램파드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손의 마찰 덕분에 뜨거운 열기가 성기를 감쌌고, 속도가 빨라지자 물장구 소리가 요란해졌다. 애쉬의 손안에 들어간 램파드의 성기는 말랑한 부분이 전부 단단해졌다.

예민한 피부 덕분에 빠르게 발기했지만, 램파드가 오메가인 이상 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정은 힘들었다. 램파드는 다리를 벌리고, 애쉬의 무릎 위에 앉았다.

“장난 그만하고 넣거라.”

“그게 부탁하는 태도인가? 나는 급하지 않은걸.”

“한심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명령 말고 사근사근하게 부탁해 봐. 그러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이 자식이…….”

애쉬는 자신을 노려보는 램파드의 입술을 살짝 쪼았다. 쪽, 쪽. 그래도 어두운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굳은 입매로 쏘아보는 램파드의 시선을 무시한 애쉬가 뻣뻣한 귀두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무릎 위에 올라간 램파드의 엉덩이가 움찔 조였고, 애쉬는 낮게 웃었다.

“급하지 않아?”

“넣어… 줘.”

산장 밖은 비가 세차게 쏟아져서 시끄러웠다. 하지만 애쉬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웅얼거리는 램파드의 목소리를 정확히 들었다. ‘넣어’ 뒤에 한마디 더 붙인 것뿐이지만, 저 정도면 램파드로서는 힘낸 거였다.

“뭐라는 거야. 빗소리가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리는걸?”

“하…….”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삐죽 움직였다 멈췄다. 이내 램파드는 짜증 섞인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장난은 적당히 쳐야 했지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윽!”

램파드의 주먹이 애쉬의 쇄골 뼈를 강타했다. 인간의 급소 중 한곳이라 힘 조절하여 내리쳤지만 애쉬에게는 눈앞이 번쩍일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학습 능력이 없는 거냐. 시키면 얌전히 순종하고 박아!”

“저명한 태양께서는 뭐든 폭력으로 해결하는 거냐! 덕분에 쪼그라들었잖아. 오늘 치는 이미 끝났어!”

한 방에 죽었다는 말은 정말로 충격이었는지 기세등등하던 램파드의 기운이 한풀 꺾였다.

“뭐……? 허읏!”

램파드의 기가 죽은 잠깐의 그 틈. 애쉬는 램파드의 엉덩이를 벌려 자신의 페니스를 빠르게 밀어 넣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램파드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고, 톡 튀어나온 유두를 이빨로 잘근 문 애쉬는 허리를 써 좁은 내장 안으로 페니스를 삽입했다.

내벽이 벌려지며 성기가 몸 안으로 들어오자 램파드가 허리를 들썩였고, 편하게 자리 잡기 힘들어 욕조를 붙잡았다. 물기에 적셔진 욕조는 미끄러웠고, 램파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애쉬는 램파드의 손을 풀어 자신의 목을 감싸게 하였다.

“눈앞에 각인한 알파가 있는데 욕조에 기대는 건가. 나한테 안겨.”

“그전에 술부터.”

“이제 따뜻해질 건데 술은 뭐하러 찾아.”

애쉬는 램파드를 꽉 끌어안으며 시선은 와인병을 향했다. 와인은 팔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위치에 놓였다.

“맨 정신으로 있다간 네놈을 패대기치고 싶어질 테니까. 인내를 발휘할 때 가지고 오너라.”

애쉬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팔을 쭉 뻗었지만 와인병이 닿지 않았다. 와인병을 들어 올리려면 애쉬의 품에서 빠져나와 일어나야 했는데, 그건 또 추워서 싫기에 손만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고작 기습 한 번 당했다고 주먹을 휘두를 참이냐. 이제 시작했으니까 참아 봐. 원하던 거잖아?”

둥그렇고 하얀 엉덩이를 붙잡은 애쉬가 하반신을 천천히 움직였다. 투덜대는 입과 달리 램파드의 내벽은 놓치기 싫다며 성기를 조였다. 말로만 툴툴거리는 램파드를 무시하며 애쉬는 하반신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욕조에 담긴 물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내벽에 자극이 가자 램파드의 심장은 금방 두근거렸고, 출렁이는 물의 소리가 야살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품 안에서 쾌락 섞인 숨을 내뱉던 램파드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원하던 쾌락이긴 한데 역시 이대로 당하기에는 못마땅했다. 기어오르기 시작할 때 우위를 정해야 했다. 램파드는 고개를 천천히 숙였고, 애쉬는 흘러내리는 젖은 금발을 쓸어내렸다.

물에 적셔진 귀한 금실 머리카락은 신이 정성껏 키운 꽃의 수술 같았다. 심혈을 기울여 피워 낸 꽃의 수술을 하나하나 떼어다 엮으면 이런 아름다움을 가지려나. 정말 예뻐 멍하니 한 가닥씩 조심스레 매만졌다.

“큿, 아파!”

램파드는 눈앞에 보이는 애쉬의 유두를 잘근 깨물었고, 곧장 반응이 왔다. 가슴이 얼얼한 애쉬는 허리를 움직이는 걸 멈추고 램파드를 내려다봤다.

“이대로 물어뜯기 전에 냉큼 대령하거라.”

램파드는 붉은 혀로 입가를 할짝대며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품 안에서 성기를 받아들이고 농염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내뱉다니. 애쉬의 가슴 안쪽이 저릿해졌고, 몸에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커졌군……. 알고 보면 맞는 걸 즐기는 거 아니냐?”

“그런 건 아니고.”

“그러면?”

애쉬는 답하지 않았고 피부색만 한층 더 짙어졌다. 몸에 뜨거운 피가 빠르게 도는지, 물에 적셔진 애쉬의 체온이 올라갔다. 따뜻한 온기에 램파드는 좀 더 그의 품에 기대며 눈웃음쳤다.

“인제 와서 내 미색이 신경 쓰이나 보군. 참으로 둔한 놈이구나.”

만일 술에 취했다면 램파드에게 단단히 도취되었단 말을 꺼냈을 거다. 마음을 숨겨도 붉게 변한 그의 얼굴이 어느 정도 긍정을 표했다. 단단한 가슴에 기대 있던 램파드가 좀 더 편히 몸을 움직였고, 이어져 있는 하반신이 움찔 떨렸다. 한층 크기를 키운 애쉬의 페니스가 내벽을 지그시 눌렸다.

목까지 새빨개진 애쉬가 팔을 뻗어 와인을 병째 들어 올렸다. 잔에 붓는 것도, 술을 원하는 램파드에게 건네주는 것도 아닌 그대로 병 입구를 잡고 자신이 마셨다. 끝까지 반항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램파드가 한 소리 했다.

“얼마 남지도 않은 걸 왜 네가…….”

날카로운 말을 더는 내뱉지 못하게 애쉬의 입이 램파드의 입술을 막았다. 애쉬는 램파드가 쉽게 받아먹을 수 있도록 턱을 들어 올렸다. 벌린 틈으로 온기를 머금은 와인이 흘러들어왔다. 액체 다음은 말캉한 혀였다. 톡 쏘는 맛이 나는 브랜디가 섞인 와인이 램파드의 입 안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다.

목 아래로 도수 높은 술이 흘러 들어가자 램파드의 몸에 열이 돌기 시작했다. 애쉬의 페로몬 향이 섞인 와인이라 그런가 아까 전 마신 액체보다 훨씬 더 맛나게 느껴졌다. 램파드는 입 안에 남아 있는 와인의 흔적을 쫓아 혀를 움직였다. 램파드의 목울대가 꿀렁이는 걸 확인한 애쉬는 입을 떼어냈다.

“달군.”

고급 브랜디와 풍미가 가득한 포도의 만남, 거기다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알파의 페로몬이 섞여들었으니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달게 느껴졌다. 높은 도수의 술을 먹어 급격하게 몸이 데워졌고, 애쉬의 농후한 입맞춤까지 더해 가슴까지 뜨거웠다.

볼 위를 붉게 물들인 램파드를 바라보던 애쉬가 다시 한번 더 와인을 입에 머금고 입을 맞췄다. 고개를 숙여 램파드의 입을 탐하던 애쉬가 엉덩이를 꽉 끌어안고 안쪽으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박기 편하게 다리를 활짝 벌려 주고 싶지만, 욕조 안은 좁아서 자세가 제한되었다. 어정쩡하게 삽입되어도 애쉬는 전혀 무리 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첨벙, 첨벙. 램파드는 요란스러운 물장구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잔뜩 붉히고 애쉬의 목에 매달려 작은 신음을 띄엄띄엄 흘렸다.

“어때, 좀 따뜻해졌지?”

“아직… 하으, 읏. 좀 더.”

열이 오른 램파드는 몸 안쪽까지 달아올랐다. 박아 넣은 애쉬 또한 뜨뜻한 체온이 전해져 녹아내릴 듯했다. 좀 더 열기를 만끽하고 싶어 램파드의 골반을 꽉 붙잡고 밀어 넣었다.

열에 취한 램파드의 표정은 한껏 풀어져, 솔직하게 쾌락을 표현했다. 성기가 내부를 파고들 때마다 살짝 벌린 입에서 기쁨에 겨운 울음이 튀어나오고, 애쉬의 몸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빠져나가는 따뜻함이 아쉬워 아래를 조였다.

“흐읏… 응, 아……!”

램파드의 신음 덕분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애쉬는 찡그리고 있는 램파드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램파드만큼이나 뜨거워진 애쉬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몸속까지 따뜻한 기운이 쾌락과 뒤섞여 순환했다. 손끝까지 열이 올랐고, 애쉬의 단단하고 뜨거운 손이 얽혀 든다. 몸 전체가 체온에 녹아내릴 거 같았다.

“하아… 하아… 더…….”

애쉬는 고개를 끄덕이며 램파드의 목가에 입술을 파묻었다. 자세를 잡은 그는 욕조 밖으로 물이 튀어나갈 정도로 강하게 움직였다. 애쉬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램파드의 하반신이 위아래로 빠르게 솟구쳤다. 애쉬의 품에서 흔들리는 램파드는 그 두꺼운 걸 꽉 조여 가며 숨결과 시선을 맞췄다.

“흐읏, 앗, 아… 안… 까지 찔러서. …아!”

“크읏, 흑… 흣!”

램파드의 허리가 뒤로 꺾였고, 애쉬는 단단한 팔로 그가 쓰러지지 않게 제대로 지탱해 줬다. 램파드는 하반신을 벌벌 떨며 사정했다. 마찬가지로 애쉬도 램파드 몸속 깊숙이 페니스를 박아 넣고 씨물을 뱉어 냈다.

사정하는 알파의 몸에서 페로몬이 뻗쳐 나왔는데, 술에 취해서 그런가 향을 제대로 구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편해져 램파드는 눈을 감고 앞에 있는 남자의 입술을 탐했다. 공간이 협소해 필연적으로 상대를 꽉 끌어안게 되었다. 좁은 욕조 안이 아니어도, 양팔로 부둥켜안으며 숨결을 교환했을 거였지만.

정액을 받아들인 내부는 아직 화끈거렸지만 반대로 체온은 급속도로 식어 몸이 떨렸다. 램파드는 잘게 떨며 단단한 가슴에 기댔다.

“춥지? 자리를 옮긴 후 더 하자.”

애쉬의 품 안에 있던 램파드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미지근했다.

“아직까지 정신이 나간 거냐. 네 입으로 더 하자는 말을 하다니. 열은… 없군.”

자신의 이마에 있는 램파드의 손을 낚아챈 애쉬가 손끝에 입을 맞췄다.

“아쉽게도 술에 취하지도 않았어. 한 번으로는 만족 못 해. 네 안에 계속 파묻혀 있고 싶어.”

“계속?”

“싫어?”

그동안 관계는 램파드가 일방적으로 원했고 애쉬는 입만이라도 수긍하지 않고 툴툴댔다. 지쳤냐는 둥, 일부러 신경 거슬릴 말을 틱틱 내뱉던 그가 램파드에게 허락을 구했다. 사정으로 축 처진 램파드의 심장이 다시 쿵쿵 뛰었다. 촤아악, 답지 않은 그의 애교에 램파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움직임에 맞춰 물이 쏟아졌다. 램파드는 근처에 벗어 둔 옷가지를 집어 팔에 걸쳤다.

“손.”

늘씬한 다리를 한 발씩 욕조 밖으로 꺼낸 램파드가 애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애쉬는 램파드의 손을 붙잡았다. 램파드는 그대로 그를 끌어올려 안아 들었다. 포옹이 끝이 아니라 그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고, 양발이 붕 떠 순간 놀란 애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보기보다 무겁단 말이지.”

애쉬는 램파드보다 손바닥 한 뼘 정도 더 컸다. 몸무게도 그만큼 더 나가는 게 당연한데 그걸 꽃잎이 들어찬 가벼운 포대 자루처럼 번쩍 들어 올리다니. 램파드에게 무력으로 반항할 수 없단 걸 잘 알게 된 애쉬는 품에 안긴 강아지 꼴이 됐다.

“무거우면 관둬. 내 발로 걸어갈 수 있어.”

“얌전히 안겨 있어라. 절뚝거리며 이동하는 건 느려서 못 기다리니까.”

몇 발짝 되지도 않는데 그만큼 급한 모양이었다. 애쉬를 안아 든 램파드는 욕조가 있던 방 바로 옆에 있는 난로 앞으로 이동했다. 따뜻한 열기를 쬐자마자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미리 난로 앞을 선점한 표범 두 마리가 엉킨 채 뒹굴며 다가오는 두 사람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반대로 애쉬가 보드라운 융단 위에 눕힌 램파드를 올라탔다. 머리는 물에 젖어 엉망진창이지만 램파드의 미모에 조그마한 흠집도 되지 않았다. 애쉬는 난로가 선사하는 따뜻한 열기를 고스란히 받으며 램파드의 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다시 따뜻해졌네.”

“아직 부족해. 속은 식었으니까, 얼른 데워 봐.”

“응. 나도 네 열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

램파드는 자신이 들고 온 옷가지 안에 넣어 둔 발정제를 꺼내 들었다. 노란색의 액체를 확인한 애쉬가 병째 뺏어 난로 근처에 올렸다.

“이런 건 그만 사용해.”

“…내놔.”

애쉬의 시선은 램파드의 손에 고정됐다. 다행히 가지런한 손가락은 달려들지 않았고 바닥에 얌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후유증이 심한 약을 계속 먹으니 이렇게 말라 가지. 화이트 궁에 있는 시종까지 네 몸을 걱정할 정도야. 약 같은 거 없이도 뇌까지 녹아내리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냥 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기분 좋은 건 부가적인 거고, 아이가 필요해서 발정제를 먹는 거다. 너한테 안기는 것 또한 같은 이유고.”

“알고 있어. 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지도.”

“그렇게나 잘 알고 있는 놈이 황제의 책무를 방해할 셈이냐.”

손이나 발이 튀어나올까 봐 주시하던 애쉬가 램파드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몸속에 있는 정액은 이제 막 녹아내려 스멀스멀 흘러내렸다. 자신의 씨를 품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한 자극이 됐다. 알파의 성기는 부쩍 크기를 키우며 위로 기립했다.

“원한다면 임신할 때까지 해 줄 테니까 이런 건 먹지 마.”

“너와 내 아이는 끔찍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건 그때고 지금은 너와의 아이를 원해……. 뭐든 함께한 흔적을 남기고 싶거든.”

“얄팍한 다짐 같으니라고…….”

뻣뻣이 세워진 자신의 페니스를 붙잡은 애쉬가 정액이 들어찬 램파드의 항문 안으로 단숨에 콱, 밀어 넣었다. 열기는 식었지만, 알파의 씨를 머금은 안쪽은 아직 예민한 상태였다. 원하는 페니스를 받아들인 내벽이 꿈틀댔다.

“새로 한 다짐은 각오 단단히 할게. 실망하지 않도록 잔뜩 싸서 노팅까지 해 줄 테니까.”

“……으, 흡!”

램파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움찔댔다. 절반쯤 머금은 내부는 기대감에 벌름거렸고, 램파드는 벌써 달뜬 숨을 내뱉었다.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가슴 위 유두가 움직이는 게 눈에 띄었다. 톡 튀어나온 램파드의 유두가 맛나 보이기에 애쉬는 고개를 숙여 잘근 깨물었다.

“…아, 아앗!”

비명 섞인 주인의 신음을 들은 흑표범이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램파드의 젖꼭지를 잘근 깨물던 애쉬가 허리를 펴 표범을 바라보았다. 두 마리의 흑표범은 당장에라도 애쉬에게 달려들 기세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꺼내 들어 천천히 다가왔다. 애쉬는 두 마리의 표범을 바라보며 엉덩이를 움직여 램파드의 구멍에 남근을 콱콱 박아 넣었다.

벌려진 램파드의 발끝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잔뜩 흥분한 오메가의 몸에서 정액과 뒤섞인 애액이 질질 흘러내렸고, 애쉬의 허리 짓은 점차 빨라졌다. 쾌감에 사로잡힌 램파드의 표정이 찌푸려지자 흑표범들의 경고 어린 소리가 높아졌다. 송곳니까지 드러냈지만, 자신의 오메가를 탐하는 알파의 페로몬에 짓눌려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저것들 수컷인가 봐.”

“하아……. 아… 으… 으?”

포궁 입구까지 박아 넣은 페니스를 뽑아 든 애쉬가 램파드를 엎드리게 하였다. 그는 램파드의 머리를 융단에 처박히게 하고, 엉덩이만 들어 올려 삽입했다. 빼내어 잠깐 쉴 동안 증발한 여운을 한 번에 채워 넣듯 단번에 박아 넣고 빠르게 앞뒤로 허리를 움직였다.

애쉬의 격렬한 움직임에 램파드의 몸이 앞으로 밀려갔다. 쓰러지지 않도록 양손에 힘을 줘 받아들였고, 고개를 치켜들며 앞을 바라봤다.

램파드의 눈앞에는 하늘로 코를 들어 올려 킁킁대는 표범 두 마리가 보였다. 오메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맡는 것이다. 짐승의 눈동자에 남근을 받아들이는 램파드의 모습이 비쳤다. 램파드의 아래가 한껏 조이자 애쉬가 낮은 음으로 웃었다.

“저 두 마리, 아무래도 우리가 교미 중인 걸 알고 있는 모양이야. 날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는걸.”

“아… 아, 잠, 잠깐만 놔. 놔줘, 읏!”

“안쪽이 굉장히 조이는데 놓으라니, 인제 보니 지엄하신 태양께서는 짐승 취급당하는 게 취향이었던 모양이야. 아니면 누군가에게 보이는 게 좋은 건가?”

등 뒤쪽에 자리 잡은 애쉬는 램파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 뒤까지 완전히 빨개진 피부로 예상하건대, 치욕에 찌들어 달아올랐을 것이다. 애쉬는 열기로 붉게 변한 램파드의 목을 쓰다듬었다. 램파드의 어깨가 애쉬의 손길에 움츠러들었다. 유린당하는 와중에도 오만함을 잊지 않던 램파드가 작은 자극에도 쉽게 반응을 보여 애쉬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램파드의 목에 위치하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일부러 피부에 자극을 주기 위해 천천히. 볼록 튀어나온 견갑골을 손끝으로 툭, 툭 치고 스르륵 아래로 내려왔다. 등 사이 움푹 팬 곳을 손끝으로 쓸어내리자 램파드의 양어깨가 안쓰러울 정도로 파르르 떨렸다.

“하으… 아, 아읏!”

애쉬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엉덩이 사이에 들어찬 검붉은 성기를 빼냈다 다시 푹 꽂아 넣었다. 숨바꼭질하듯 구멍 사이로 좆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아, 짐승의 것을 뺏어 교미하는 느낌이군. 나만 하기에는 미안하니까 좀 더 잘 보이게 엉덩이를 들어 봐.”

“아흣, 흑, 싫… 싫어!”

눈앞의 짐승을 바라보기 힘든 램파드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고, 팔 아래로 얼굴을 숨겼다. 애쉬는 램파드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려 하반신을 박아 넣었다.

검은 털을 가진 수컷 짐승 두 마리가 램파드의 눈앞에 들이닥쳤다. 진짜로 뭘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눈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듯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애쉬의 것을 물고 있는 뒷구멍에 힘이 들어갔고, 남근이 속을 파고들 때마다 경련하듯 조였다.

“무슨 생각해?”

“흐윽…….”

“검은 짐승 두 마리 밑에 깔려서 받아들이는 중인가?”

“아, 아……. 읏… 그럴 리 없지 않나!”

남근을 물고 있는 내벽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경련하면서 목소리는 여전히 사나웠다. 애쉬는 램파드의 귀를 오물오물 물었다. 붉게 변한 색만큼이나 따뜻한 온기가 입술 끝에 전해졌고, 체온을 느끼고 싶어 말랑한 귀를 혀로 할짝댔다.

엎드린 채 받아들이는 덕분에 램파드는 애쉬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하고 기습당했다. 온몸에 소름이 쫙 올라와 오싹해졌다.

“지금 내가 아닌 짐승의 것을 품은 상상을 했잖아.”

“하아, 하아, 아……!”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쾌락에 찌든 램파드의 눈에 사냥감을 물색하는 행동을 보이는 흑표범 두 마리가 보였다. 마치 저를 노리는 듯했고, 짐승의 시선에 배덕감을 느껴 배 속 안쪽이 짜릿해졌다. 호기심 가득한 수표범 두 마리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상상하기 싫지만 이미 머릿속에 그려졌다.

“램파드 말해 봐. 하나야? 아니면 두 개를 한꺼번에 넣었나?”

“아, 아… 아! 후읏, 흣!”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램파드의 성기에서 희뿌연 액이 나왔다. 몸 밖으로 배출된 정액은 램파드가 품고 있는 오메가의 향을 고스란히 머금었고, 짐승들은 끌리듯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애쉬의 성기를 품은 내벽이 꿈틀 조였고, 그는 여전히 허리를 쳐올렸다.

철썩, 엉덩이와 허벅지가 달라붙는 소리가 램파드의 귓가를 때렸다. 그 사이로 목울대에서 들끓는 수컷 짐승 두 마리의 울음이 들렸다.

“네 냄새를 맡고 흥분했나 본데.”

“하으… 으……. 하아, 아… 하아.”

애쉬 말대로 오메가 향에 끌렸는지, 그게 아니면 주인이 괴로워해서 지키기 위해 달려드는 건진 모르겠지만 쫓아내긴 해야 했다. 저리 가라고 명령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쾌감에 녹아내린 몸은 달뜬 숨결만을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 난 아직 싸지도 않았는데, 양보할 생각은 없어.”

램파드의 허리를 붙잡은 애쉬가 힘을 줘 끌어 올리고 그를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램파드는 삽입된 채로 그대로 애쉬의 품에 들어가 표범 두 마리가 꼬리와 귀를 내리고 물러가는 걸 바라봤다. 겁을 잔뜩 먹은 이유는 경고의 의미로 보내는 알파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페로몬… 조절… 은 못… 한다더니…….”

“네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됐어. 페로몬 조절은 이렇게 하는 건가?”

“혼자서 뭘 뿌듯해하는 거냐. 곰을 상대했을 때 사용했더라면 내 검이 부러질 리도 없을 거였…… 앗!”

밀착한 애쉬가 램파드의 배꼽 주변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동그란 배꼽 모양대로 주변을 쓸어내리다 손가락으로 안쪽을 꾹 눌렀다. 아랫배에 자극이 가 램파드의 성기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내 쓸모는 다른 곳에 있잖아. 안 그래?”

“후으… 아……. 내쳐지기 싫으면… 잘해!”

“응, 열심히 할게.”

그는 램파드의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애쉬가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감쌌다. 술기운이 가시기 시작하는 램파드의 후각은 그의 페로몬을 제대로 맡았다. 원하는 향이 아닌 여러 번 맡은 익숙한 향에 마음 한구석에 무거운 파문이 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정신 바짝 차려.”

램파드를 꽉 끌어안은 애쉬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짝 벌린 램파드의 양다리가 파들파들 떨렸고, 질퍽한 소리를 내며 몸이 솟구쳤다.

돌아올 시종도 없겠다 애쉬는 램파드를 마음껏 탐했다. 임신할 때까지 해 준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지 여러 번 사정하고, 노팅까지 끝나서야 램파드를 풀어 줬다. 막 해가 질 때 시작했는데, 모든 게 끝나니 비가 그치고 해가 뜰 낌새였다.

램파드는 신경이 녹아 뼈로 스며들고, 또 그 뼈마저 녹아내린 듯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애쉬는 발끝만 꼼지락거리는 램파드의 몸을 닦아 주고, 모포로 돌돌 말아 난로 앞에 던진 뒤 주방으로 향했다.

애쉬가 사라지자 그의 페로몬에 짓눌렸던 흑표범 두 마리가 램파드 곁으로 다가왔다. 표범은 고롱고롱, 목울대를 울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주인의 얼굴에 자신의 머리를 비벼 댔다. 아무런 의도 없는 순수한 애교지만 잠깐이나마 불순한 생각을 한 것이 떠올라 쑥스러워졌다.

“주방에 가 보니 식자재 준비를 잔뜩 해 뒀네. 나보고 만들어 널 먹이라는 뜻 같은데, 원래라면 며칠 묵을 생각이었나? 준비된 식량이 상당한걸.”

몸 상태가 최상일 때의 램파드가 한 끼에 어느 정도를 먹는지 아는 한스가 지시해서 준비한 하루분이 맞을 것이다. 애쉬의 생각을 정정해 줄 생각은 없어 흑표범의 애교를 바라봤다. 모포로 둘둘 말아진 램파드가 꼼짝달싹하지 않자 애쉬가 가까이 다가왔다.

“스튜를 끓이고 있는데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려. 이거라도 먹고 있어.”

애쉬는 깨끗한 천에 감싼 산딸기를 가지고 왔다. 이 근방 사냥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열매로 비가 내리기 전 산지기가 따 놓은 모양이었다.

모포 안쪽이 따뜻해 손을 뻗고 싶지 않았다. 램파드는 손 대신 입을 벌렸고, 한숨을 쉰 애쉬가 산딸기를 하나 들어 올려 입 속으로 넣어 줬다. 작디작은 붉은 열매를 깨물자 새콤달콤한 향이 퍼졌다.

“후계자가 생기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대개는 죽을 때까지 황제 자리를 차지하던데 넌 그럴 수 없을 테고.”

램파드는 애쉬가 먹여 주는 산딸기를 오물오물 받아먹었다. 그는 답을 하라는 뜻인지 더는 산딸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입가에 있는 애쉬의 손끝을 물었다.

“후계자가 생기면 대신들이 더는 혼인하라고 등 떠밀지 않겠지. 애먼 여자와 혼인해야 할 필요도 없어지니 나로서도 안심이고. 음, 그 뒤의 일은 생각해 본 적 없어.”

램파드는 입술로 애쉬의 손끝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진심이야? 제국 전체를 속이려고 작정한 일이면서 계획이 허술하기 짝이 없네.”

모포째로 데굴 구르던 램파드가 눈만 치켜떠 그를 바라보았다. 애쉬는 기가 차다는 표정이었다.

“설령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에게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있나? 너의 무얼 믿고 모든 걸 말해 줘야 하지.”

“이상하네. 우리 사이가 좀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근거로 도출해 낸 결론이냐. 붙어먹는 건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했는 것을.”

애쉬가 남은 산딸기를 다시 램파드의 입 속으로 넣어 줬고,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먹여 주는 산딸기를 받아먹었다. 입을 다문 램파드는 한쪽 볼만 잘게 움직였다. 애쉬는 고개를 숙여 램파드의 볼에 입을 맞췄다.

“말해 줘. 듣고 싶어.”

“약아빠진 놈…….”

몇 가지 생각해 뒀긴 하는데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정말 별것 아닌 선택지뿐이라 무얼 말해야 할지 고르는 시간이 더 걸렸다.

“황제 자리를 물러난 후 인적이 드문 지방에 기거할 생각이다. 거기서 검술 학교나 꾸릴까 싶군.”

“너 혼자서?”

“함께 가겠나?”

“거절할게. 수도 생활이 익숙해져서 떠나고 싶지 않아.”

램파드는 입 안에 남아 있는 산딸기의 향을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잘됐군. 애쉬 테일러, 이참에 황제가 될 생각은 없나?”

능청스레 말했기에 진담이 아니란 건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얼굴에 있는 미소를 전부 지웠다. 램파드는 그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그는 평생을 모를 것이다. 적들에게 포위당했을 때조차 공포를 느끼지 않은 램파드가 애쉬의 침묵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숨을 멈추고 그의 입에 집중하던 램파드가 좀 더 이야기를 덧붙였다.

“가끔은 모든 걸 밝혀 볼까 싶거든. 오메가가 작위를 받은 선례가 없었으니까 사실을 알게 된 대신들의 반응이 어떨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마, 정력 좋은 알파한테 팔려 가 후계자를 여러 명 낳는 씨암탉 신세가 되겠지.”

“그래서. 내가 황제가 되고, 네가 황후의 자리에 앉겠다?”

“맞아. 황족에 오메가밖에 없을 땐 유력 가문의 알파와 혼인해 황제로 삼는 게 원칙이지. 원래라면 나 또한 처음부터 황제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생각한 방법 중 하나였다. 황제로 추양(推讓)1)할 자는 따로 있으나 그는 능력은 되어도, 성품이 되지 못한 자였다. 차라리 능력 면에서 부족해도 두 번째로 등장한 알파가 낫지 않을까 싶지만 어차피 실행하지 못한다.

램파드는 오메가의 몸으로 오랜 기간 황제로 군림했고, 모든 게 밝혀지면 책임을 져야 했다. 하찮은 오메가가 다시는 권력 욕심을 내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이는 데 쓰일 확률이 높았다.

권력을 빼앗긴 램파드의 편을 들어줄 대신이 많으면 내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메가를 두둔할 자는 많지 않을 터.

애쉬가 훗,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기에 램파드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었다.

“너와 비교해서 나는 능력이 한참이나 부족해. 제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대지를 풍요롭게 가꿨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건 너잖아. 오메가지만 무슨 상관일까. 아니 오히려 스스로 후계자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네가 제격이라 생각해.”

솔직하게 말하는 애쉬의 태도에 램파드의 마음 안쪽이 저렸다.

“칭찬이 늦었어. 그런 말은 저번에 듣고 싶었다.”

“저번? 아… 이미 지난 일이지만 미안하다. 사과하지.”

“오늘은 여러 번 사과하는군.”

“너한테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그래…….”

“사과는 나 또한 하지 않았는걸.”

애쉬의 연인의 심장에 칼을 꽂은 것을 후회한 날부터 꾸준히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그릇된 일이지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잘못된 결정도 필요했다. 좀 더 자신을 생각한다면, 그의 연인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애쉬는 만나지조차 못할 인연이었다.

램파드의 이기적인 생각을 알고나 있는지, 그는 말랑한 램파드의 입술을 부드럽게 만졌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루사는 다른 사람의 짐이 될 바에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을 거야.”

애쉬의 말대로 루사는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오히려 그를 구할 방도를 찾으며 램파드에게 제안을 꺼냈다. 램파드는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만 했다.

“루사가 그랬으리란 걸 알았지만… 나는 한심하게도 너를 찾아 복수할 생각만 했어…….”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했지.”

“맞아…….”

애쉬의 목소리에 힘이 없어졌다.

“자책하지 말아라. 네가 찾아온 덕분에 이리 함께 다닐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넌 정말 강하구나…….”

“아무리 촌구석에서 살았다지만 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거냐. 대륙에서 나를 이길 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기분이 풀린 듯 애쉬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너를 직접 만나기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굉장히 여린 사람이라 생각했거든.”

황태자로 봉해진 순간 램파드의 미모를 칭송하는 음유시인의 노래가 제국 밖 왕국까지 퍼졌다. 램파드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자들은 저마다 환상을 품으며 이야기했고, 애쉬 또한 죽은 연인과 황제를 주제로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애쉬가 지내던 남부 지방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야기도 좀 더 황당무계했을 터.

“새로운 황제는 유리 조각으로 만들어져 깨질지도 모르니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하더냐?”

“아니.”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하군.”

“잘 울던 어린아이 이야기야.”

“이 내가? 어떻게 울었는지 한번 말해 봐.”

애쉬는 램파드의 입술 위로 산딸기를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어린 네가 새콤한 산딸기보다는 단맛만이 있는 딸기, 그것도 설탕에 절인 여름 딸기를 가장 좋아한다는 걸 자주 들었지. 간식을 좋아하다 못해 형의 몫까지 다 뺏어 먹었을 정도라는 이야기도. 오래되었지만 사소한 습관은 남았는지 아직도 단 걸 좋아하는구나.”

애쉬의 따뜻한 손길을 즐기던 램파드의 표정이 굳었다. 애쉬가 달콤한 디저트를 챙겨 오는 건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램파드가 숨긴 입맛을 제대로 알고 준비한 것이라니.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당연히 본인한테 들었지.”

순간 주변의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램파드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오메가로 발현한 열두 살의 형이 창관으로 내쫓겼다. 창부가 된 형은 그해를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며, 황제의 눈을 피해 어머니가 손수 무덤을 만들었다. 반년 동안 창부로 지낸 형을 만난 자들은 창관의 관리인 아니면 손님이란 뜻이다.

창관의 관리인은 알파만이 될 수 있으므로, 그 당시의 애쉬는 창부를 산 손님이란 뜻이었다. 어떻게 그런 어린아이를 구매해 안을 생각을 했는지. 램파드는 순간 역겨워졌고, 얼굴에 서슴없이 드러났다.

진정하자.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어린아이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건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니까. 램파드는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 벌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꾹 눌렀다. 애쉬의 상대가 루트비안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확인해야 했다.

“알고 있는 걸 더 말해 봐.”

애써 진정한 게 분명한 듯 램파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애쉬는 램파드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와 손을 들어 올렸다. 볼을 향해 접근하는 손이 역하게 느껴진 램파드가 그의 손길을 피했다. 갈 곳 잃은 그의 손이 얌전히 내려앉았다.

“음식에 욕심이 많아 제 것을 다 먹고 시종이 일하는 곳까지 찾아가 떼를 쓸 정도였다고 들었어. 그때마다 네 형이 자신의 방으로 데려와 설탕 절임을 넣은 차까지 내어 줬지. 또 같은 방을 썼으며 잠이 들 때까지 책을 읽어 줬고 옛 고어로 된 자장가를 불러 줘야 잠이 들었고…….”

“됐어, 그만!”

애쉬가 말한 건 모두 어린 날의 추억이었다. 이 정도 정보라면 루트비안의 입에서 나온 경험담이 분명했다. 확인까지 끝마치자 배 속이 뒤틀리고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역겨워서 숨을 쉴 때마다 신물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램파드는 토기가 올라오는 입을 틀어막고, 애쉬를 노려봤다.

“어린 창부를 사러 창관에 간 것이냐. 게다가 그렇게나 잘 알고 있다면 한두 번 찾아가서 들은 말이 아니란 거군!”

“창관에 여러 번 드나든 건 사실지만 와인을 배달하기 위함이야. 창부를 산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럴 생각도 없고.”

“되지도 않는 변명 하지 마라! 내 형이 몇 살 때 창관으로 간 줄 아나? 지금 네놈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는 열둘이었다.”

“……알고 있어.”

“역겨운 새끼. 창관에 발을 들인 오메가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그렇게나 잘 알고 있는 놈이 창부를 안을 생각을…… 읏.”

소리를 질렀더니 뒤틀린 배 속이 경련했다. 그대로 역류할 거 같은 기분에 입을 틀어막고 숨을 삼켰다. 후우, 여러 번 숨을 크게 내쉬며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고 속은 여전히 좋지 않다. 램파드는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떨어진 모피를 주워 든 애쉬가 가까이 다가와 램파드의 등을 감쌌다. 맨 피부에 그의 손이 닿자 소름이 쫙 돋았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램파드가 애쉬의 손을 강하게 쳐 냈다. 그는 붉게 부어오른 자신의 손등을 쓸어내리며 램파드의 안색을 살폈다. 걱정이 잔뜩 서린 눈. 가증스럽고 더러웠다.

“지난번에 화를 낸 건 형을 알고 있어서였군. 고작 몇 번 안았다고 형에게 정분을 느낀 거냐. 그래서 황제인 내가 형을 빼내지 않은 게 원망스러워서 화를 냈던 거냐? 너같이 역겨운 자식 때문에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창관에서 홀로 죽고 몸이 태워졌다!”

“1… 년?”

“1년도 많이 쳐준 거지. 봄에 끌려간 형은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그해 겨울에 눈을 감았으니까. 왜? 제대로 자라지 않은 아이에게 손댔다는 것이 이제야 가책이 느껴지는 거냐. 너 같은 놈이 없었더라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살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형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 충격받았는지 낙담한 애쉬가 램파드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등까지 앞으로 푹 구부린 게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 램파드는 이를 으득 갈며 그를 향해 살기 어린 말을 내뱉었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네놈 같은 건 죽여 버렸어야 했다. 널 처음 보았을 때, 연인의 곁으로 함께 보내 버렸어야 했다고! 아직도 그자를 잊지 못하고 사랑하지? 그렇게 만나고 싶다면 그냥 지금 당장 죽어서 곁으로 가 버려.”

콱 틀어막힌 속은 이 정도 외침으로 풀리지 않았다. 마음만큼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뜨리며 절규하고 싶지만 오랜 시간 가장 높은 지위에 앉아 있었기에 울어 본 기억도 까마득했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램파드는 나무 바닥에 주저앉아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놈이 죽을 때까지 패는 건 손쉽지만 더러운 자의 몸에 손끝조차 대기 싫었다. 램파드가 입을 다물었고, 근처에 앉아 있는 애쉬도 숨소리도 내지 않아 산장 안이 고요해졌다.

목청 높인 램파드의 큰소리에 깜짝 놀라 구석에 박혀 있던 흑표범 두 마리가 눈치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왔다. 두꺼운 꼬리를 천천히 흔들며 바닥에 앉아 있는 램파드에게 다가와 몸을 숙였다. 램파드는 광택이 흐르는 검은 모피를 멍하니 바라봤다. 작은 빛조차 없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이 새까만 머릿속과 닮았다.

램파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돼먹은 인생이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지. 앞으로 풀어야 할 방향이 어느 쪽인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다. 혼인, 후사, 황좌, 각인. 그 어느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조용한 수도원에 반년 정도 처박히고 싶어졌다.

“네놈 처분은 황궁에 돌아가는 대로 정하겠다. 두렵다면 지금 당장 절벽 밑으로 떨어져도 좋…….”

속이 역류하는 느낌에 입을 틀어막았다. 우웁, 램파드의 몸이 덜컥거리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으웁, 욱! 계속되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푹 숙였지만 고통은 계속됐다.

멈추지 않는 구역질에 몸도 괴롭지만, 마음이 조여지는 기분이었다. 애쉬의 행동이 역겨워서 시작된 토역이 아니었다. 그에게 넌더리 친 이 순간에 계획 일부가 실현되어 버리다니. 지금 속을 뒤틀게 하는 원인이 정말 배 속에 자리 잡은 아이 때문이라면 당장 사라졌으면 했다.

램파드가 괴로워하자 애쉬가 벌떡 일어나 접근하다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이내 서서 멈췄다. 그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는 듯 헛구역질하는 램파드를 괴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여러 번 헛구역질했지만, 밖으로 나오는 게 없으니 속만 답답해졌다. 몸 안으로 들어가는 숨과 올라오는 구토가 맞물려 몸을 콱 막아 버린 느낌이었다. 램파드는 숨을 쉴 수 없어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익숙한 과실 향이 피어오르자 막힌 숨이 트이고, 속이 편하게 가라앉았다. 제 형을 죽인 원인 중 하나가 내뿜는 페로몬에 진정되는 몸이라니, 쓸모없게 느껴졌다.

“축하해. 원하는 대로 날 닮은 흔한 아이가 나오겠구나.”

램파드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애쉬는 목 아래로 침을 여러 번 꿀꺽 넘겼다. 자신을 경멸하며 바라보던 우성 알파의 표정을 떠올리고, 싸늘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지껄이지 말고 닥쳐.”

눈만 치켜든 램파드가 애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머리를 조아리고 빌어도 부족할 마당에 이죽거리는 꼬락서니를 보자 목구멍에 검을 쑤셔 넣고 싶어졌다. 검을 쓰면 손이 닿지 않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더러운 피가 쏟아지는 건 피하면 될 테고.

램파드의 명령을 듣지 않는 그의 혀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왜 화를 내는 거지. 계획한 대로 되었으니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태어날 아이가 은발에 자안을 가지면 곤란하니까 나한테 안겼지 않아?”

안 그래도 엉망이던 램파드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지칭하지 않아도, 가진 이가 드문 은발에 보라색 눈을 가진 자를 쉽게 떠올렸다.

“뭘 그리 놀라나. 같은 오메가를 공유하는 사이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커틀러와 언제부터 알던 사이였냐…….”

“그걸 알아서 무얼 하려고. 그보다 내일부터 아침 일찍 침실에 찾아가지. 앞으로 내가 지낼 곳도 본궁에 마련해 주길 바래.”

태연한 척 말하고 있지만 애쉬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분노에 휩싸인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오르는 램파드는 그의 작은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본궁? 개를 훈육하는 방법이 틀렸으니 이제라도 바로잡아야지. 네놈이 갈 곳은 지하 감옥의 고문실이다!”

눈가가 붉게 변한 애쉬는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연거푸 삼키며 입을 떼어 냈다.

“한번 입덧이 시작되면 아침마다 괴로울 거다. 다른 각인 상대가 자리를 비웠으니 돌아올 때까지 내가 필요하지 않나? 아니면 네 정체를 알지 못하는 다른 알파를 찾을 셈인가? 이미 알파를 둘이나 거느렸으면서 욕심도 많구나.”

램파드는 손톱을 세워 자신의 배를 긁었다. 강하게 움켜쥔 덕분에 하얀 배 위에는 가느다란 상처가 남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게나 원했던 아이지만 지금은 독처럼 느껴졌다. 마음만은 당장 검으로 배를 찔러, 더러운 씨를 빼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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