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스피크 (Doublespeak) 2
수비
06 화이트 궁
황궁에 도착한 램파드는 곧바로 궁전을 하나 비워 애쉬를 밀어 넣었다. 적어도 귀족 앞에 내세울 정도로는 만들어 놔야 했다. 화이트 궁을 관리하는 시종 밀러가 램파드가 던지듯 떠넘긴 애쉬를 가르치기로 했다.
“이자가 황실 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교육해라.”
애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살펴본 밀러는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봤다.
“제대로 된 몫을 할 수 있게 만들려면 석 달 정도 걸리겠습니다.”
“길게는 못 기다린다. 한 달 만에 끝내라.”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램파드는 곧장 알현실로 이동했다. 알현실에 모여 있는 대신들은 램파드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보다 빠른 파발을 먼저 보내 황후 후보가 정해졌단 소식을 전했으니까 쏟아 낼 질문만 양피지 열 장 분량은 될 테지.
“제국 유일의 태양 램파드 클로비스 황제 폐하십니다!”
호명관의 목소리와 함께 바글바글 모여 있던 대신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허리를 들어 올렸을 땐 다들 당장이라도 말을 토해 내기 위해 준비를 끝마친 모습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며칠 전 황후를 들이라며 첨언했던 거와 달리 램파드의 혼인 소식을 썩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짐에게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구나. 한번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아라.”
램파드의 말을 기다렸단 듯,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최고 대신이 가슴을 쭉 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시니 주제를 무릅쓰고 이야기 꺼내겠습니다. 저런 근본도 모르는 자를 어디서 데리고 오신 겁니까.”
“애쉬는 남부 지방에서 데리고 왔느니라.”
“그곳을 지배하던 유일한 귀족은 대번포드 백작뿐이지요. 그렇다면 저자는 서민이 확실한 거군요.”
“그래. 하지만 애쉬는 알파니까 남작 작위라도 쥐여 주면 되겠군.”
황제와 혼인해야 하니까 적어도 준남작은 되어야 한다. 남작은 알파라면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작위니까 가문을 하나 건네주면 해결될 것이다.
“작위를 못 받은 알파라니……. 그런 자와 혼인을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램파드 폐하, 알파와의 혼인은 한 번 더 헤아려 주십시오.”
“알파라도 좋으니 비어 있는 황실 자리를 채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고했지마는 상대는 고르시는 게 어떻습니까. 사브로 왕국의 둘째 공주라는 탄탄한 배경이 있는 우성 알파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내잖습니까. 알파인데 남작 작위조차 없다니 대체 뭐하는 자입니까?”
“와인 메이커. 그가 만드는 와인은 맛이 꽤 좋더군.”
순간 할 말이 없어진 최고 대신이 벌린 입을 주체하지 못했고, 침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런 자라면 요리장으로 두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 관뒀으면 좋겠는데, 의견을 굽히지 않을 모양이다. 오랜 세월 제국을 위협했던 왕국과의 관계를 정리한 건 램파드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보단 외모로 얻은 호감인 듯하지만 제국민의 열렬한 지지마저 받고 있으니 어떻게 밀어붙인다고 하면 그들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강하게 몰아붙이면 뒷맛이 좋지 않다. 설득시키긴 해야 하는데, 무언가 귀찮아졌다.
“저자가 마음에 든다. 혼인은 한 달 뒤에 올릴 터이니 그리 알도록 해라.”
“폐하…….”
램파드는 고개를 조아리는 자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은 램파드의 결정을 탐탁지 않아 했다.
“신분이 어떻든 제대로 모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긴 하지만 아이도 낳지 못하는 알파를 들이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부디 명을 거둬 주십시오.”
“그럴 일은 없다. 혼인은 한 달 후, 건국기념 축제일에 맞춰 치르도록 하겠다. 일정에 맞춰 혼인 사냥까지 모조리 준비하도록 해라.”
최고 대신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지만 마음까지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램파드는 회의가 끝나는 대로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의견을 굽히지 않은 최고 대신이 램파드의 개인 집무실까지 졸졸 쫓아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물고기 똥처럼 램파드 뒤에 바짝 붙어 생각을 거둬 달라는 말을 반복하는 최고 대신은 자신보다 뛰어난 미인을 찾아오면 혼인하겠단 램파드의 말에 제국 전체를 돌아다닌 전적이 있다. 그만큼 끈질긴 자였다.
최고 대신이 하는 말은 모두 다 같은 뜻이었다. 생각을 바꿔 달라. 알파를 들이고 싶다면 하다못해 귀족가의 자제 중 골라라.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으니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충성심이 뛰어난 자를 귀찮다는 이유로 손찌검은 할 수 없으니 미간에 주름살을 만들고 들리지 않는 척했다. 목을 자른다고 윽박질러도 바른말을 할 최고 대신은 램파드의 미간 주름을 보고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램파드 폐하, 제 말을 듣고 계십니까. 혹시 저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저런 자를 데리고 온 겁니까?”
램파드 스스로 생각해 봐도 최고 대신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 단 1분도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니까. 이럴 땐 무논리로 응하는 게 최고였다.
“합방해 봤는데 허리 놀림이 상당하더군. 그렇기에 곁에 두는 것이다.”
“혼… 혼인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이미 손을 대신 겁니까!”
“유희를 즐기는 것도 그대에게 허락받아야 하는가?”
“그런 건 아니지만 황후감으로 생각하셨다면 조심하셨어야죠. 혼인을 준비할 동안은 절대로 손대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인정한다는 말이겠군. 이야기는 이만 끝내거라.”
책상에 걸터앉은 램파드는 귀찮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휙휙 흔들었다.
“인정한 건 아닙니다. 램파드 폐하, 그런 이유라면 황후가 아닌 후궁으로 들이십시오. 욕구를 풀기 위한 첩이라고 하시면 저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반대로 당한 거지만은 거기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같은 얘기를 여러 번 하게 하지 마라. 후궁이 아닌 황후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대신들을 화병에 쓰러져 죽게 할 생각이십니까. 저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차라리 관직을 파해 주십시오.”
“결정을 무르지 않겠다. 이만 나가 보거라.”
내일, 아니 오늘 밤에 또다시 찾아오겠다는 눈빛의 최고 대신은 일단은 물러났다.
***
세 번째 러트가 끝났다.
처음은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것처럼 괴로웠지만, 몇 번 겪으니 익숙해졌다.
러트를 앓는 도중 이름도 알지 못하는 오메가가 애쉬의 페로몬을 맡고 찾아왔다. 자신을 마음대로 사용해 주라며 눈앞에서 옷을 벗는 오메가에게 화를 냈고, 쫓아냈다. 모든 걸 제치고 페로몬의 노예가 되어 성욕구가 우선시 되다니.
원래 베타였기 때문인가. 알파와 오메가가 가진 강렬한 짝짓기 본능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과 달리 알파가 된 이상 페로몬을 무시하기란 힘들었다. 애쉬는 성욕을 억누르기 위해 자신의 팔을 힘껏 깨물었다. 꽉 다문 이 사이로 붉은 피가 스며들어도 입을 떼어 내지 않고, 더욱 강하게 물었다. 통증을 느끼면 정신이 분산되어 한결 버티기가 수월했다.
평생 사랑하기로 맹세한 루사를 떠올리면 차마 다른 이를 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이를 안아 버렸으니 이는 모순된 생각이었다. 램파드를 안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복수는 해야 하니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 편히 생각지 못하는 건 램파드에게 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램파드를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에 둘 수가 있었는지. 순간적으로 페로몬 향이 같아졌기에 착각한 게 분명했다. 램파드에게 다가간 건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복수는커녕 되레 각인이나 하고 말았다니. 고작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복수심은 이렇게나 얄팍한 것이었나.
막무가내로 도망친 지금은 사그라든 복수심이 다시 불타올랐다. 하지만 만나고 싶어도 만날 방법이 없었다. 반대로 램파드가 자신을 찾아올 리는 더더욱 만무했다. 일순간의 착오는 애쉬의 정신을 지속해서 갉아먹었다.
이대로 사랑하는 자의 복수를 이루지 못한 채 죽는 걸까.
애쉬라는 이름처럼 하얀 잿가루로 산화되기 전, 루사의 복수는 이루고 싶었다. 애쉬는 다음 러트를 겪기 전, 복수를 위해 루사가 낳은 아이, 황족 계승권을 가진 아이를 찾기로 했다.
루사가 남긴 이야기를 토대로 고아를 보호하는 수도원에서 발견한 아이는 그와 판박이였다.
“제가 대번포드 백작과 클로비스 황족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네요. 아저씨의 말이 사실인가요?”
“그래.”
“좋아요. 아저씨의 말대로 할게요.”
애쉬는 루사를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램파드를 혐오해 마지않는 대번포드 백작에게 보냈다. 애쉬만큼이나 램파드 황제에게 큰 원한을 가진 대번포드 백작은 아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부자를 상봉시키는 것만으로도 복수가 시작됐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만은 가벼워진 애쉬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램파드는 몰락할 것이다. 복수가 이뤄지길 기다리던 중 처음 보는 사내가 애쉬를 찾아왔다. 회색 로브를 벗은 그는 제국에서 가진 이가 얼마 없는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순도 높은 은을 녹여 만든 듯한 귀한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애쉬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 거래를 하겠느냐.”
***
램파드가 애쉬를 위해 비운 궁전은 종종 휴식을 취하러 홀로 찾아가는 화이트 궁이었다. 정원까지 포함하면 황성에 있는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지만,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만을 보면 작은 축에 속하는 궁이었다.
하지만 애쉬에게는 삶을 살아오며 보았던 그 어떤 건물보다 크고 웅장했다. 건물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니란 걸 절실하게 느꼈다. 대리석으로 꾸며진 입구에 서 있는 자신이 얼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면 작은 얼룩 따위 주저 없이 닦여지겠지.
애쉬는 램파드가 붙여 준 밀러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절뚝절뚝. 애쉬는 칼에 꿰뚫린 상처 덕분에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절었다.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애쉬의 다리를 살펴보던 밀러가 입을 열었다.
“다리를 다치신 겁니까. 치료는 먼저 씻으신 후 진행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단단히 명심하십시오. 당신의 몸은 황제 폐하의 소유입니다. 앞으로 상처를 입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황제 폐하께서 친히 꿰뚫은 상처였다. 애쉬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밀러의 안내를 받아 몸을 씻을 수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네 곳의 모서리를 대리석 기둥으로 지지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천장을 장식한 공간이 등장했다. 호수라고 착각할 정도의 광활한 공간은 깨끗한 물로 채워져 있었다.
시종 셋이 애쉬에게 달라붙더니 그의 옷을 벗기고, 물속으로 인도했다. 김이 올라올 정도의 따뜻한 물이었고, 향유가 섞여 들어가 은은한 향이 났다.
목욕 정도는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곁에 있는 밀러가 아낌없이 향유를 부어 가며 거들었다. 갓난아이였을 때를 제외하고는 누군가 목욕을 시켜 준 적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대접이 부담스러웠고, 혼자 씻고 싶었다. 애쉬는 달라붙은 밀러를 떨쳐 내기 위해 손을 털었다. 램파드의 명령을 받든 밀러가 입을 열었다.
“미천한 신분이라 들었습니다. 그러하니 이러한 손길이 익숙하지 않으신 거지요. 황제 폐하의 곁에 서서 그분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시종의 손길에 익숙해지십시오. 귀족에게 저희의 손길은 몸을 닦는 해면 스펀지와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습니다.”
“아랫것에게 말을 올리시다뇨. 다시 한번 아랫배에 힘을 주고 또렷하게 답하십시오.”
“알겠다.”
애쉬는 입 밖으로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밀러는 만족하지 않았지만, 우선은 이 정도만 할 생각인지 다시 손을 움직여 향유를 발라 주며 몇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황궁에 있는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소유입니다. 지금 당신의 몸에 끼얹고 있는 따뜻한 물, 향기로운 향유, 앞으로 당신을 모실 화이트 궁에서 일하는 시종 전부, 심지어 애쉬 테일러 님도 황궁에 들어왔으니 그 한 몸 전체가 폐하의 것이지요.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시고, 태양을 섬기십시오.”
“태양이라…….”
“예, 램파드 황제 폐하는 제국의 태양이십니다. 그분이 계셔서 제국의 어둠이 걷혔고, 밤에도 밝은 겁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기억하도록 하지.”
“단번에 알아들으셔서 다행이군요. 앞으로 수업이 힘들지만은 않겠습니다. 그러면 애쉬 테일러 님. 자리를 비워 드릴 테니 폐하의 은혜를 홀로 만끽하십시오.”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올린 밀러가 자리를 비웠고, 애쉬는 주변을 편히 둘러보았다. 넓은 공간을 채워 넣은 따뜻한 물 덕분에 기둥과 천장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졌다. 한 사람을 씻기기 위해 이 넓은 공간에 따뜻한 물을 채워 놓다니.
서민들은 우물이나 호수 곁에 사는 사람은 축복받은 거고, 대개는 먼 거리에 있는 물을 길어 오기 힘들어 아껴 사용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물을 사용하는 목욕탕은 호화스러움을 넘어 낭비라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공간은 어찌나 넓은지. 자신의 집보다 훨씬 더 넓은 공간이 오로지 목욕만을 위한 장소였다. 황제가 누리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직접 경험하자 목 아래가 꽉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원래 이건 램파드가 아닌 루사가 향유해야 했다.
***
“이봐요, 애쉬 테일러 씨. 제 말 듣고 있습니까?”
애쉬의 시선은 창문에 붙어 헛구역 중인 오메가에게 향했다. 베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애쉬에게 남자가 임신한 모습은 생소했다. 그는 제대로 먹지 못해 체구가 왜소했으며 손대면 부러질 정도로 팔다리가 가늘었다. 그런 몸으로 배만 툭 불렀는데 어떻게 버티는지 안쓰러울 정도였다.
“테일러 씨!”
“죄송합니다. 임신한 창부도 있군요.”
“아, 저걸 말하는군요.”
창관의 관리인은 기다란 담뱃대에 마른풀을 넣고 불을 붙이며 창부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오메가는 좀 더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겼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밝은 피부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천천히 드리웠다.
“귀족 가문의 씨를 받은 창부입니다. 특별히 외모가 마음에 든다며 임신시켜 놓고선 부인이 아이를 배 버리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렇게 배가 부른 상태에서 낙태시키면 오메가도 함께 죽으니까 곤란하게 됐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겁니까?”
“후계자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아이는 죽여야죠. 귀족 나리가 몸값 비싼 창부까지 함께 죽이려는 걸 겨우 뜯어말려 놨으니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받아 없애야 합니다. 유산시키기 위해 며칠째 굶겼는데 독하네요.”
관리인은 혀를 쯧 차며 오메가를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래서 홑몸이 아닌 자가 저렇게 방치당하고, 마른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혈관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피부는 곳곳에 푸른 멍이 들었다. 굶겼다는 말만 했지만 그보다 더한 일도 당했으리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오메가는 외풍이 심한 창문에 기대 양팔로 몸을 감싸 덜덜 떨었다. 창부들이 입는 얇은 옷은 찬바람을 제대로 막아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은 이유는 창관 밖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연민을 자아내는 모습에 애쉬는 눈을 떼지 못했다.
“잡담은 이만 됐고 70병 전부 확인했습니다. 테일러 씨가 만드는 와인은 인기가 좋군요. 덕분에 매상이 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지난번 주문량의 두 배로 주문하지요. 다음 주까지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일정에 맞춰 충분히 가능한 양입니다.”
“좋습니다. 대금은 다른 관리인을 통해 곧바로 양조장으로 보내도록 하지요.”
애쉬는 단골손님을 향해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허리를 폈을 때 관리인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빈 나무 상자를 정돈하고, 양조장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문밖으로 나가기 전 감시인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창부에게 또다시 눈이 갔다.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도와줄 수 없다.
무시하고 지나치려니 양심에 기반을 둔 마음 안쪽이 콱 조였다. 애쉬는 들고 있는 나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입고 있는 겉옷을 벗으며 감시인의 눈치를 봤다. 감시인은 손님이 아닌 자가 창부에게 가까이 다가가도 딱히 제지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애쉬는 자신의 체온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따뜻한 겉옷을 창부의 등 위에 덮었다.
부푼 배를 양손으로 힘겹게 받쳐 든 창관의 오메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애쉬를 바라보았지만 서로 아무런 말을 나누지 못했다. 첫 만남은 아쉽게도 눈빛만 교환하고 헤어졌다.
양조장으로 돌아가는 길, 애쉬는 그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다. 달콤한 꿀을 담은 곱슬곱슬한 허니 블론드에 맑은 하늘 같은 푸른 눈동자. 애쉬가 사랑한 루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루사와의 다음 만남은 한 달 후였다. 배달을 끝마치고 돌아가려던 참, 창관 뒷문에 있는 좁은 방에서 손이 뻗쳐 나왔고, 애쉬는 맥없이 끌려들어 갔다.
“청소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게 보여서 제멋대로 굴었어요. 죄송해요. 갑자기 끌고 와 깜짝 놀라셨죠?”
느닷없이 좁은 창고로 끌려와 진정하지 못한 애쉬가 눈꺼풀만 여러 번 깜박였다. 애쉬를 깜짝 놀라게 한 창부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렸다.
“여기가 아니면 대화를 할 때 관리인의 눈치를 봐야 하거든요.”
“아, 아… 이곳은 조용하군요.”
“그렇지요. 창관은 술 취한 손님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휴식이 필요할 땐 종종 여기에 와요.”
솔직히 매우 놀랐다. 어릴 때 괴담으로만 들었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괴물 같은 게 끌어당긴 건 줄 알아 아직도 심장이 쿵쿵거렸다.
애쉬를 놀라게 한 장본인이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예쁘장한 얼굴로 수줍게 웃는데 지난번과 달리 안색이 좋았다. 애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의 배를 확인했다. 터질 듯했던 부푼 배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인사가 늦었네요. 안녕하세요, 테일러 씨. 전 창부인 루사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 관리인과 하던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하긴 제법 큰 소리로 말했으니 들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당사자를 두고 앞에서 이야기하다니 멋쩍어진 애쉬는 하하, 웃을 뿐이었다. 루사도 애쉬를 따라 살며시 미소 지었다.
“지난번에 주신 겉옷은 빼앗기는 바람에 돌려 드리지 못하게 되었어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드린 겁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덕분에 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아이를 낳았어요. 감사해요.”
그가 낳은 아이가 죽임을 당할 거라는 창관 관리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정을 느낀 애쉬가 그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저 같은 걸 걱정해 주시는군요. 지난번에도 관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 안쓰럽게 여겨 주셨죠. 몰래 말해 드리는 건데요, 제가 낳은 아이는 무사히 수도원으로 보내졌답니다.”
나중에 시끄러워질 귀족의 사생아를 그냥 뒀을 리 없다. 다행이긴 하지만 믿기지도 않는 말이었다. 루사는 말하지 않아도 솔직하게 표정으로 다 드러나는 애쉬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딱하게도… 함께 출산한 친구의 아이가 바깥에 나오자마자 눈을 감았어요. 마침 같은 금발을 가진 아이라 친구와 합의해서 바꿔치기했어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애쉬가 이 사실을 고발하면 루사의 목숨 또한 없을 텐데, 그는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알았다.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애쉬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그 후로 감시인의 눈을 피해 한두 마디씩 섞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함께 도망쳤다. 루사의 아이는 위험한 도피길에 데려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수도원에 두었다.
1년은 추격자의 눈을 피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애쉬의 고향인 남부 지방에 정착했다.
루사는 종종 어릴 때 헤어졌다는 동생 이야기를 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의 동생이 마치 친동생처럼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막만 한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쥐며 무언갈 달라고 하면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동생.
가족의 이야기를 하는 루사는 얼굴을 붉혔고, 생기가 돌았다. 그만큼 루사에게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몸에 생명력이 감돌자 애쉬의 표정 또한 절로 밝아졌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자와 함께 생활하는 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루사는 오메가였고, 각인한 창관의 관리인은 살아 있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그는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죽었어.”
평소와 다름없이 악몽에 시달려 괴로운 표정으로 일어난 루사가 중얼거렸고, 애쉬는 소름이 돋았다. 집과 창관은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다. 각인은 소식을 끊은 지 오래된 사람의 생사를 곧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게 결합된 것이었다.
얼마나 깊은 상심을 느끼고 있을까. 베타인 애쉬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를 위로하기 위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에 휘말린 모양이야…….”
“그렇겠지. 애쉬, 난 괜찮아. 애써 위로하지 않아도 돼.”
되레 루사가 심각한 표정의 애쉬를 위로했다. 애쉬는 각인이 풀린 루사를 보고 다짐했다. 더는 그를 옭매는 자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을 실행할 때가 온 거였다. 애쉬는 루사에게 청혼을 했고, 그는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청혼한 날 루사는 자신의 과거를 밝혔다.
“루사는 창관에 들어와서 새로 지은 이름이야. 루트비안 클로비스. 창관에 들어오기 전에 사용했던, 태어났을 때 부모에게 물려받은 내 원래 이름이지.”
클로비스는 황실 가문의 성이었다. 애쉬가 눈만 껌벅거리자 그는 배시시 웃으며 이야기를 마저 이어 갔다.
루사는 13년 전 오메가로 발현해 아버지에게 내쫓기고, 이름까지 모조리 지워졌다. 그의 자리는 귀여운 동생이 대신해 황제가 되었다.
좋은 형제로 느껴졌다. 그의 동생이라면 사랑을 쏟아 주던 형을 도울지도 몰랐다. 램파드를 찾아가자는 애쉬의 제안에 루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창부로 지내면서 받은 손님 중에는 질이 나쁜 이가 많았다. 전쟁 중 즉위해 아직 황권이 약한 램파드 앞에 창관에서 구른 형이 나설 수 없단 거였다.
세상의 밑바닥까지 보고 왔으면서 그는 동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자였다.
“다시 한번 램파드의 얼굴을 보고 싶지만……. 평생… 동생 앞에 나서지 않을 거야……. 내 욕심으로 램파드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애쉬는 마음이 쓰라렸다. 루사의 양팔은 뼈가 꺾이고 깃이 빠진 날개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이야기를 듣는 자신도 안타까운데 당사자인 그는 얼마나 서럽고 괴로웠을까.
애쉬는 루사를 힘껏 끌어안았다.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만큼 잔뜩 사랑하고, 생활도 되돌려주고 싶었다. 애쉬는 열심히 일하며 루사의 추억을 하나둘씩 구해다 줬다.
동생과 함께 읽었다는 동화책. 소중한 동생과 함께 마셨다는 허브티. 아쉽게도 전쟁이 터졌고 딸기만큼은 구하기가 힘들어 끝내 맛보여 주지 못했다.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호화스러움에 파묻힌 애쉬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직 황실의 일원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벌써 이만큼이나 편하고 호사스러웠다. 이 정도의 호화로움은 애쉬가 그를 평생을 사랑해 봤자 조금도 되돌려줄 수 없었다.
물속에 잠긴 애쉬는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렸다. 루사를 위해 오랫동안 울었지만 마음에 박힌 납덩어리는 그대로였다. 복수를 이루지 못했으니까. 무거운 감정을 계속 품어야 했다.
루사가 각인한 창관의 관리자는 전쟁 통에 죽었지만, 복수할 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어린 오메가를 창부로 썼던 창관의 주인. 제대로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오메가를 임신시킨 대번포드 백작. 루사의 가슴을 뚫어 버린 램파드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피가 묻은 칼을 들고 있는 친숙한 얼굴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
애쉬를 화이트 궁에 처박아 둔 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램파드는 당장 손을 댈 수 있는 알파보다 다른 이를 떠올렸다. 자각한 건 사소한 계기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을 먹다 의자도 놓여 있지 않은 맞은편의 빈자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날도 여전히 음식이 목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 커틀러의 눈치를 보기 위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 편식하는 램파드를 찾아와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지 감시하던 그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램파드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이 직접 내쳐 놓고, 찾고나 있다니. 전에 없을 부끄러움을 느껴 아무래도 먹기 싫은 음식이 더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무슨 일을 해도 신경 쓰인다.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익숙한 자가 없어 허전함이 느껴졌다.
온전히 휴식을 취할 시간에 나타나던 커틀러가 없어졌으니, 방해 없이 푹 쉬었다. 부족한 휴식을 충분히 취했는데도 이상하게 공허함이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빈 부분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틈이었다. 날마다 조금씩 비어 간 부분이 축적되어 이제는 큰 구멍이 만들어졌고 서늘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커틀러가 없다고 쓸쓸하다 느끼다니. 마치 자신이 그를 진심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으로 비쳤다. 커틀의 본심을 듣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마음은 그에게 단단히 꽂혀 있는지. 호되게 당하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램파드는 흥미가 가셔 잔불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알파를 찾으러 갔다. 약으로 페로몬을 조절하고 있지만, 몸이 외로운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다. 늘 단단한 남자들의 품에 파묻혀 있었으니까 지금도 몸이 허전한 거겠지. 커틀러는 떠나기 전 애쉬로 해소할 생각하지 말고 약을 챙겨 먹으라고 했지만 알게 뭐람. 램파드는 화이트 궁에 가둬 놓은 애쉬를 찾으러 발길을 옮겼다.
“제국 유일의 태양 램파드 클로비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애쉬는 만나지 못한 일주일 동안 기본적인 예절 교육을 끝마친 모양이다.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공손하게 램파드를 맞이했다.
“고개를 들어 봐라.”
내적인 교육을 겸해 외적인 부분도 신경 썼는지 때 빼고 광을 내니 훨씬 보기가 좋아졌다. 대강대강 자른 머리는 깔끔하게 정돈했고, 향유를 발라 관리해 윤기가 흘렀다. 정해진 규격에 대충 만든 기성품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벗겼을 때 체격은 좋은 자였다. 체형에 딱 맞춰 제작한 코트를 입혔더니 넓은 어깨와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허리선이 잘 빠졌다. 본판이 괜찮아서 그런가 꾸며 놓으니 꽤 그럴싸해졌다.
램파드는 애쉬의 볼이 눌릴 정도로 꽉 붙들고 얼굴을 뜯어봤다. 다소 거친 손길이었지만 애쉬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램파드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일주일 만에 이 정도로 바뀌다니, 몰라볼 정도군.”
“마음에 드신다니 기쁩니다. 폐하를 위해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복수한답시고 지하실에 가뒀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 생각할 정도로 공손해졌다. 이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애쉬와 처음 만난 그 날의 일이 한둘씩 기억났다. 램파드에게 복수하겠다며 이를 갈던 애쉬의 모습은 서슬 퍼랬고 원한이 깊었다. 램파드를 향한 증오는 쉽게 가시지 않을 터.
원래 애쉬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장난감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계획이 바뀌어도 쓰임 용도를 변경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어 애쉬를 바라보던 램파드가 말했다.
“약혼자랑 단둘이서 대화하고 싶다. 자리를 비워라.”
램파드의 말에 애쉬를 보좌하던 밀러가 다른 시종을 이끌고 사라졌다. 평소 휴식을 취하기 위해 화이트 궁을 방문했을 때와 같이 주변이 조용해졌다. 램파드는 지난달까지 뒹굴던 하얀 쿠션 덩어리에 앉아 늘씬한 두 다리를 꼬았다.
“일주일 만에 낭군을 만났는데 떨어져서 고개만 조아리고 있을 건가? 가까이 다가오너라.”
애쉬는 눈을 차분히 내리깔고 램파드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램파드가 뚫어 놓은 다리는 완전히 낫지 못한 것인지 절뚝거리며 천천히 다가와 조용히 섰다.
램파드는 키가 훨씬 더 큰 사내가 시야를 막고 있으니 무언가 답답함이 느껴져, 애쉬의 손목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거치적거린다. 곁에 앉아라.”
손길에 따라 끌려온 애쉬는 램파드 곁에 앉았다. 애쉬가 자리에 앉자 램파드는 드러누우며 주변을 어지른 물건을 살펴보았다.
“뭐지 이건.”
하얀 쿠션 더미 위에는 책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램파드는 몸을 편히 뉘고 책표지를 살펴보았다. 예절 교본, 귀족 가문의 문장록, 제국의 연대록. 하나하나 표지를 손으로 쓸어 보며 살펴보던 램파드가 멈칫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이 섞여 있는데 그중 특출 나게 화려한 표지를 가져 이질감 드는 동화책이 보인다.
램파드는 이 동화의 내용을 아주 잘 안다. 손이 조막만 했을 때, 잠자리에 들기 전 형이 읽어 주던 동화책이니까. 다섯 살의 기억은 대부분 잊어 확실하지 않지만, 몇 가지는 확실하게 기억한다.
이 동화책은 램파드가 좋아했던 이야기로, 형이 읽어 주는 것을 들으며 설렜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다시 읽어 달라고 몇 번이고 졸랐으며, 루트비안은 싫은 기색 없이 여러 번 읽어 주었다. 덕분에 단어 하나하나, 문장을 통째로 전부 외울 정도였다.
램파드가 책표지에 집중하자 애쉬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차분히 말했다.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할 때 읽는 책입니다. 교본이 따로 없다 해서, 스승님께서 읽기 쉬운 책을 구해다 주셨습니다.”
동화책은 문장이 짧아 말하기 연습으로 좋으니 밀러가 구해 온 모양이다. 램파드는 금실로 엮어 만든 화려한 동화책을 애쉬에게 휙 던진 후 쿠션을 끌어안으며 엎드렸다.
“한번 읽어 봐라.”
“서툴러도 양해해 주십시오.”
“네놈이 서툰 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짐의 말에 함부로 토를 달지 말고 냉큼 시작해라.”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인 애쉬가 램파드가 던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램파드는 또박또박 읽어 내리는 애쉬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형에 대한 건 대부분 잊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잊어버린 기억 속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건 자신을 위하던 형의 모습뿐이었다. 형은 언제나 곁을 지켜 주며 필요할 때마다 영웅처럼 나타났다. 바빴을 차기 황제가 램파드를 위해 구태여 시간을 만들어 찾아와 놀아 준 것이다.
루트비안은 많은 숫자의 시종과 유모에게 둘러싸여 낮잠을 자는 램파드에게 동화책을 읽어 줬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책을 읽으며 거대한 손으로 램파드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른 이에게는 둘 다 어린이로 보였겠지만 램파드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큰 손으로 느껴졌다.
과거와 똑같이 램파드의 이마에 조심스러운 손이 올라왔다. 램파드는 굳이 제지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라 내버려 뒀다. 눈부신 자가 눈을 감고 엎어져 있으니 손이 절로 가겠지. 이미 배까지 부딪친 마당, 이 정도 무례는 봐줄 수 있었다.
사락, 속눈썹을 간지럽히던 앞머리가 이마 위로 밀려 올라갔다. 두꺼운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피어난다.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던 램파드는 거슬리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 부분은 틀렸어.”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난 램파드가 애쉬가 읽던 부분을 지적해 줬다. 남부 지방은 수도랑 워낙에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 글을 읽는 방법에서 조금 차이가 났다. 램파드는 글귀를 보지도 않고, 바로 정정해 주었다.
“내용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흔한 동화가 아니더냐. 이런 것쯤 한 번 읽으면 기억하는 게 당연하지.”
램파드가 다시 쿠션 뭉치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생각보다 목소리가 괜찮고, 막힘없이 읽는군. 그 정도면 딱히 연습이 필요 없겠는걸.”
“그렇습니까? 스승님께 쓸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어제였습니다.”
애쉬가 차분히 말했고, 램파드가 피식 웃었다.
“공부를 하러 짐을 따라 황궁에 온 것은 아닐 테고, 넌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냐.”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미련이 없다면 황궁 밖으로 내쳐도 괜찮겠군.”
다 읽은 책을 덮은 애쉬가 램파드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그 무엇보다 큰 권력을 나눠 받게 되었는데, 그 누가 잃고 싶어 하겠습니까.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말은 제대로 해라.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네놈이 멋대로 꼬여 든 거지.”
“제멋대로 굴었는데도 불구하고, 벌하지 않으셨단 건 마음에 드셨단 거지요?”
그러고 보니 화이트 궁에 찾아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런 공부 말고 네가 힘써야 할 건 다른 일일 텐데?”
“어떤…….”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애쉬 덕분에 날카로웠던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았으니 관용을 베풀어 친히 설명했다.
“짐을 만족시켜라. 만족이 무엇인지조차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함께 쿠션 더미에 걸터앉아 있던 애쉬가 램파드 앞으로 이동해 무릎을 꿇었다.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은 애쉬는 엉덩이를 땅바닥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뭘 하려나, 램파드는 즐겁게 내려다봤다. 그는 램파드의 허벅지에 양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급소 주변 피부를 자극하고는 입으로 바지 지퍼를 풀어 내렸다. 지익,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램파드가 피식 웃었다.
“꽤 능숙하군. 입궁해서 배운 것이냐, 그게 아니면 연인에게 해 주었던 거냐.”
잔뜩 도발해 본심을 드러나게 만들고 싶었기에 자신이 직접 죽인 연인을 입에 올렸다. 한 손으로 램파드의 성기를 꺼내 든 애쉬가 입술로 겉면을 훑었다. 눈은 차분하게 내리깔고 있었고,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기 와서 배웠습니다. 황제 폐하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나에게 안기는 방법만을 가르칠 터인데, 몸을 열 생각이냐.”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이미 각오를 끝냈는지 애쉬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알파의 몸으로 오메가 역할을 자처하면 큰 고통이 따라올 건데 알고서 저러는 건지. 각인한 오메가가 다른 이의 남근을 받아들여 끙끙 앓는 것처럼 알파도 페로몬이 꼬여 고통 속에 파묻힐 거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을 위해 인내하는 거라면 각오가 대단했다. 램파드는 그의 담담한 행동에 미소 지었다.
“이미 각오를 끝마쳤나 보군.”
“황제의 승은을 입는 것이니 큰 영광으로 여기며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벗으라고 하면 지금 당장 알몸이 되어 다리까지 벌릴 모양새였다. 램파드는 애쉬를 바라보며 앞니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황후감이라고 데리고 왔긴 하지마는 말과 행동은 완전히 창부나 다름없다. 그는 이미 램파드의 원래 계획대로 자존심을 버린 장난감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말을 잘 들으니 구태여 팔다리를 자를 필요 또한 없어졌다.
“짐이 직접 몸을 움직여 널 즐겁게 하고 싶지 않군. 힘써서 허리를 움직일 건 너다, 애쉬 테일러.”
애쉬는 답 대신 발기하지 않아 말랑말랑한 살덩어리를 입에 머금고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단단한 이가 예민한 페니스에 닿지 않도록 살며시 혀로 감싸 정성스레 빨았다. 남근을 빠는 건 처음인지 매우 조심스레 고개를 움직인다. 쯉, 쯔읍, 쯉. 타액과 볼살이 밀착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애를 쓰는 것 같지마는 영, 발기는커녕 배 속이 간지럽지도 않았다. 램파드는 자신의 좆을 빨고 있는 애쉬의 귓불을 꾹꾹 누르며 재촉했다. 램파드의 독촉에 혀를 뾰족하게 내민 애쉬가 갈라진 끝부분을 핥았다. 부드러운 혀가 귀두 끝을 파고들 기세로 집요하게 쿡쿡 찔러 댔다.
조금 전보다는 효과가 좋았다. 민감한 부분이 몰두되자 따뜻한 피가 성기 끝으로 조금씩 퍼져 가는 게 느껴졌다. 램파드의 아랫도리에 슬슬 열이 오르자 애쉬는 도톰하게 부푼 귀두와 기둥의 경계선을 둥그런 손톱으로 자극했다. 매끈하고 단단한 손톱이 급소에 닿을 때마다 램파드의 아랫배가 미세하게 떨렸다.
“후으…….”
축축한 입 안에 성기를 넣어 봤자 별 반응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등허리부터 점차 짜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램파드의 페니스가 뻣뻣해지자 애쉬가 입을 크게 벌려 그의 성기를 목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램파드의 허리가 들썩였고, 뒷구멍이 움찔대며 맑은 액이 흘러나왔다.
램파드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물건을 빨고 있는 애쉬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쾌감에 열이 올랐고, 좀 더 큰 자극이 왔으면 했다. 나쁘지 않지만, 오메가인 이상 앞을 자극하는 거로는 부족했다.
“하아… 후으… 읏, 좀… 더…….”
아랫배가 간질거려 무의식중에 내뱉었다.
“모자라시다면 뒤쪽도 해 드릴까요?”
“……됐어.”
“앞만으로는 부족하잖습니까.”
램파드는 다리를 움직여 애쉬의 성기 부분을 꾹 눌렀다. 급소와 천이 함께 짓눌리자 애쉬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움찔 떨었다. 멈추지 않고 발끝으로 꾹, 꾹 애쉬의 남근을 짓눌렀다.
“네놈 걸 해소할 속셈이 아니라?”
“몸뿐만 아니라 제 모든 것은 램파드 폐하의 소유입니다. 제 성욕 또한 폐하의 것이기 때문에 허락하실 때만 욕구를 풀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지금 당장 허락해 달라는 건가?”
“손이나 혀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램파드는 발끝으로 짓누른 성기를 뱅글뱅글 돌렸다. 엄지, 검지 발가락 아래로 단단한 기둥이 느껴졌다. 알파의 좆을 건드렸더니 목 아래까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든다. 이걸 품었을 때 기분만은 좋았었다.
“기특한 소릴 하는군. 상을 줄까?”
“상이라고 하심은.”
“이걸 쓰게 해 준다고.”
램파드는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발끝에 힘을 줬다. 꾹 눌렀을 뿐인데 애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커틀러가 아닌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짐승 냄새처럼 느껴져 역했다. 하지만 그의 향은 좋아하는 음식처럼 느껴졌기에 램파드는 혀로 윗입술을 할짝댔다.
“기쁜 제안이지만 이번만큼은 죄송합니다. 최고 대신께서 식전까지는 관계를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램파드가 파면시킨 국교는 식을 준비하는 한 달여 동안 신부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규율이 존재했다. 최고 대신이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생각을 바꿔 달라 말하는 통에 이미 안아 버렸다는 발언을 했다. 그걸 또 애쉬에게 찾아와 미리 경고하다니 치밀한 놈이었다.
전설 때문이라고 하나 감히 서민 주제에 황제의 제안을 거절할 줄이야. 램파드의 발끝에 들어가는 힘이 강해졌다.
“너는 짐의 말보다 대신의 말을 우선시하는 거냐.”
“당연히 모든 걸 제치고 폐하의 말이 우선시되지요. 그렇지만 혼인 준비 기간 때 신부와 결합하면 신랑이 불운해진다는 제국의 전설이 있잖습니까.”
“하, 이미 국교도 파교된 마당에 신의 저주 따위 두렵지 않아.”
“폐하께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행위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파의 페로몬이 짙어져 짐승 같은 본능을 억누르긴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각인 상대인 오메가가 노골적으로 유혹하는데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램파드에게 각인했다. 억누르며 참고 있는 욕정은 각인한 오메가를 향한 순수한 욕망이었다. 각인하지 않은 커틀러와 달리 애쉬는 감정을 숨길 수 없으며, 입으로 거부해 봤자 믿기지 않는다.
이미 당장 박아도 될 정도로 아랫도리를 꼿꼿이 세웠으면서 램파드를 위해 참는다고 말하는 꼴이라니. 본심은 그게 아닐 텐데 입은 다른 소릴 하는 애쉬의 성기를 계속 자극했다.
더는 참기 힘든지 자리에서 일어난 애쉬가 램파드의 양손을 붙잡고 자신의 볼로 이끌었다. 열로 달아오른 그의 피부는 뜨거웠다.
“폐하를 위해 참을 테니까… 기쁨은 다음으로 미뤄 주십시오.”
애쉬는 사랑스러운 사람을 바라보듯, 눈꼬리까지 부드럽게 휘며 램파드를 바라봤다.
램파드는 기가 찼다. 황궁, 더 나아가 제국에서 선택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램파드는 애쉬의 목깃을 잡고 쿠션 더미로 끌어내 눕혔다. 체격은 애쉬가 월등하지만 여러 해 단련한 검사가 와인 메이커를 제압하는 건 쉬웠다. 애초에 애쉬는 반항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감히 짐의 말에 불응할 줄이야. 기회를 한번 줄 터이니 이번에는 잘해 보아라. 네놈에게 각인당하는 바람에 전처럼 남자들이랑 놀지 못해 아랫구멍이 허전하거든.”
허전하니까 떠올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생각나는 것이다. 램파드는 찐득하게 달라붙은 미련을 끊고 싶었다.
애쉬를 깔아뭉갠 램파드가 그의 목가에 쪽, 쪽 입을 맞췄다. 깔아뭉갠 애쉬의 하반신은 당장 삽입할 수 있을 정도로 빳빳이 세워진 게 천 위로도 느껴졌다. 램파드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애쉬의 바지를 벗겨 냈다. 두툼한 성기가 속옷을 밀어낼 정도로 곧게 섰다.
“이렇게 세워 놓고서는 뭐, 짐을 위한다고? 개도 안 믿을 소리를.”
“폐하…….”
바지를 벗은 램파드가 애쉬 몸 위에 올라타 한 손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벌렸다. 찌걱, 램파드의 구멍은 이미 충분한 애액이 흥건하게 흘러내렸고, 애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억제제 덕분에 오메가의 페로몬이 피어오르지 않지만, 각인 상대가 눈앞에 있으니 큰 자극으로 올 터.
“목울대를 꿀렁거리긴. 맛있겠느냐?”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폐하께 위해가 갈지도 모릅니다.”
당장에라도 성욕을 토해 낼 듯 빵빵하게 오른 페니스를 꺼떡대며 하는 소리라니. 저 혼자 성인군자인 척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램파드는 상대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짓눌렀다.
“위해를 끼친다니. 짐이 쓰러질 만큼 잘할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그거 기대되는걸?”
“제가 아니라 신께서 저주를 내릴지도 모릅니다.”
“신 따위 믿지 않아.”
“폐하, 역대 황제 폐하 중에서 규율을 지키지 않아 봉변을 당하신 분도 있습니다. 걱정돼서 하는 말입……!”
계속 주절주절 나불거리는 입이 거슬려 램파드는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램파드의 볼일은 그의 아랫부분이지, 입 달린 위쪽은 필요 없었다.
“시끄러워. 침상에서 날 부르는 칭호는 폐하가 아니라 램파드다. 좆질 중에 폐하라는 소리를 한 번만 더 꺼내면 네놈 다리 인대를 끊어 영영 걷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램파드는 바지를 마저 벗고,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공기에 노출되어 오므라드는 항문 입구를 피가 몰려 불그스레진 애쉬의 귀두 끝에 가져다 댔다. 안 된다는 말을 하던 애쉬는 더는 피할 생각이 없는지, 얌전히 누워 있기만 해 허리를 내렸다. 오밀조밀 잡혀 있는 항문 주름이 두꺼운 귀두를 빨아들이며, 천천히 펴졌다.
“이름을 부르기 싫다면 오메가라고 부르든가. 흐읏…….”
몸의 무게를 싣고 아래로 내려가자 애쉬의 페니스가 빨려 들어오며 내장 안에 자리를 잡았다. 살짝 휘어진 그의 성기는 한쪽 방향을 꾹 눌러 색다른 자극을 선사했다. 절반 정도 파고들었을 뿐인데, 꼿꼿하게 세워진 램파드의 성기가 위아래로 꿈질댔다. 아까부터 배 속이 근질거렸기에 남근을 품는 거로도 충족됐다.
다만 기세 좋게 밀어 넣었지만 이 이상은 움직이기가 버거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태롭게 서 있는 램파드의 허벅지도 바들바들 떨렸다. 애쉬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버티기 힘들면 직접 움직여도 좋다.”
“폐… 아니 램파드 님. 피임은 하셔야…….”
램파드는 이미 후사를 직접 낳기로 마음먹어 주저 없이 움직였다.
“언제부터 내 몸에 신경을 썼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그리고 기껏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했는데 존대는 하지 마라. 지난번에는 허락 없이 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가?”
뒷구멍으로 애쉬의 성기를 머금은 램파드가 허리를 숙이고 그의 옷 단추를 풀러 내렸다. 똑, 똑. 단추가 좁은 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때마다 팽팽한 옷감이 좌우로 벌려지며 그 속에 품고 있는 짙은 색 피부를 내보였다. 잘 익은 과실같이 먹음직스럽게 탄 피부는 눈에 띌 정도로 불그스레한 기운을 품었다.
램파드는 손등으로 애쉬의 단단한 근육과 복근을 훑었다.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길에 애쉬의 가슴이 움찔거렸다.
“어때, 마저 넣고 싶지 않으냐?”
램파드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허리를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애쉬의 손은 어찌할 줄 몰라 하며 허공에서 움찔거렸다. 램파드는 공중에서 머뭇거리는 애쉬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게 했다.
갈 곳 잃은 어린애 같은 애쉬의 손은 뻣뻣하게 굳었고, 램파드가 움직일 때마다 남근과 아랫배를 건드렸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램파드는 자신이 깔아뭉갠 애쉬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물론 목까지 시뻘겋게 물들여 놓고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회피하는 모양새라니. 발톱을 죄다 숨긴 솜방망이로 얼굴을 가린 새끼 고양이 같았다.
오메가로서 만난 상대는 모두 램파드를 짓누르고 우위에 서고 싶어 했는데, 역전된 상태에 아랫배가 두근거렸다.
“지난번엔 짐승같이 굴더니, 왜 그러지. 인제 와서 겁이 나는 게냐?”
“……아닙니다.”
“그새 잊었군. 너의 오메가로 있을 때는 존대를 관두라고 말했거늘.”
“…….”
“후으……. 아니면 뭔가. 읏, 봐라. 이 안에 들어찬 물건은 오메가의 목소리에 반응해 이렇게나 벌벌 떨고 있는데, 좆의 주인께서 억누르는 이유를 친히 들어 주지.”
애쉬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고, 램파드는 피식 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이대로 몸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면 단번에 절정에 달할 게 분명했다. 모처럼이니까 긴 쾌락을 느끼고 싶어 애쉬의 성기를 절반쯤만 머금으며 허리를 솟구쳤다.
절반만 들어간 단단한 살덩어리가 빠져나갈 때 램파드의 입구는 모자란 듯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질척이는 애액과 섞인 입구가 아쉬움에 젖어 들어 성기를 우물우물 물고, 안쪽으로 넣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큿!”
폭발할 것처럼 시뻘건 애쉬의 입 밖으로 낮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의 몸은 긴장에 휩쓸려 뻣뻣하게 굳었고, 돌처럼 느껴졌다.
마음대로 하라며 기껏 다리까지 벌려 줬는데 왜 저렇게 벌벌 떠는지 원. 이왕이면 함께 움직이는 게 좋지만 혼자 해도 상관없었다. 램파드는 더는 재촉하지 않고 허리를 천천히 내려 남은 성기를 모두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
흥건하게 젖은 내벽이 애쉬의 페니스 모양대로 벌려지며, 단단한 남근을 꽉 조였다. 딱딱한 알파의 좆이 몸 안을 압박하자 근래 느낀 부족함이 채워졌다.
“……후, 다른 건 몰라도 네놈 좆이 쓸 만하단 건 인정해 주지. 크기나 모양이 넣기에 딱 좋아. 기분도 좋고…….”
완만한 곡선을 가진 엉덩이가 애쉬의 허벅지에 딱 달라붙었다. 몸속을 파고든 성기가 램파드의 내벽을 강하게 압박하며 비트는 게 느껴졌다. 그의 성기는 당장에라도 내벽을 푹푹 찌르고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어 죽겠다는 듯 꿈틀꿈틀거린다. 하늘로 솟아 있는 램파드의 성기도 그에 맞춰 함께 끄덕이며 맑은 액을 찔끔씩 흘려보냈다.
“램… 파드. 읏…….”
광대뼈 부근을 연분홍색으로 물들인 램파드가 미소 지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베타와 관계를 맺을 땐 이름을 숨겼고, 커틀러는 꼬박꼬박 폐하를 붙였다. 수식어를 버리고 알맹이만 불렸을 뿐인데, 심장 언저리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놈의 폐하를 떼 버리니 훨씬 더 좋군. 그래, 뭐든 말해 봐라.”
애쉬의 복근 위에 양손을 올린 램파드가 허리를 움직였다. 찌걱, 쯔걱. 흘러나오는 애액이 애쉬의 성기를 포장하듯 감쌌고, 램파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왔다. 램파드가 허리를 들썩이며 움직였고, 애쉬의 복근이 꿈틀 강하게 움직였다.
“큿, 더는 못 참겠… 으니까……. 제발!”
애쉬의 답에 램파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이제 막 배 속에 품고 허리를 움직였는데 못 참겠다니. 이대로 찍 싸 버리면 다리 인대를 끊는 거로는 화가 풀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벌써 내보내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
“그럼 뭐냐.”
“윽, 떨어져……!”
애쉬의 부탁과 다르게 램파드는 허리를 크게 들어 올려 아래로 내리찧었다. 성인 남성의 무게까지 더해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푹푹 찔리는 감각이 좋아 램파드는 얼굴을 붉히며 상대를 비웃었다.
“이제 막 기분이 좋아지려던 참이라 빼내기 싫은걸.”
“후읏, 계속 이렇게 자극하면 멈출 수 없으니까…….”
“생각보다 머리는 좋지 않은가 보군. 몇 번이나 말했냐. 램파드라 부를 때만큼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램파드도 슬슬 그가 관계를 거부하는 까닭을 알았다. 제국의 국교에서 말한 혼인 준비 기간 때 신부와 합방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공기 중으로 스멀스멀 퍼진 알파의 페로몬이 애쉬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는 모양이다.
러트를 세 번이나 홀로 보냈다고 했던가. 이대로 계속 자극했다간 오롯이 종족 번식을 위해 몸을 움직이겠지. 램파드는 각인한 알파가 자신에게 욕정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그의 욕망은 램파드를 향한 것이니까.
“짐승이 되는 게 무서운 건가. 지금 이 궁엔 너와 짐 단둘뿐이니 걱정하지 말고 내보내라. 응? 애쉬 테일러.”
으득, 남은 이성을 끌어모으는지 애쉬가 이를 갈았고, 토파즈를 닮은 샛노란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애쉬는 램파드의 팔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거부할 마음이 딱히 없는 램파드는 그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끌려갔다.
그는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으로 램파드의 볼을 감싸고, 탐욕스레 입술을 맞췄다. 빨리 삽입하고 싶은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말캉한 혀가 가지런한 이빨을 쓸어내리고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애정 기반의 입맞춤이 아닌 음식을 먹기 전, 간을 보는 듯한 행동이었다.
애쉬의 손에 점점 힘이 더 들어갔고 램파드는 그의 몸에 단단하게 밀착됐다. 가만히 둬도 도망가지 않고 욕정을 풀 때까지 매달려 있을 건데, 그는 램파드를 꽉 끌어안으며 입 안을 탐했다. 따뜻한 호흡을 교환하던 맛보기는 길지 않았다. 하아, 하아. 입을 떼어 낸 애쉬가 거친 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램파드는 침으로 매끈해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보기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었네. 입맞춤을 하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입 정도야 내줄 터인데.”
자리에서 일어난 애쉬가 램파드의 어깨를 감싸며 또다시 입을 맞췄다. 애쉬의 성기를 넣고 있는 구멍이 움직임에 맞춰 늘어지며 머금었던 페니스가 절반 정도 빠져나왔다. 램파드를 뒤로 밀어 똑바로 드러눕게 한 애쉬가 빠져나온 만큼 성기를 몸 안쪽으로 짓이겨 넣었다.
“분명히 도망갈 기회는 줬으니까.”
눈이 아닌 램파드의 입술에 집중한 애쉬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절박하게 입을 맞추며 먼저 매달릴 때는 언제고, 시선 교환은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램파드가 원하는 건 애쉬의 몸이었기에 마음의 교류 같은 건 이쪽 또한 필요 없었다. 그의 쌀쌀맞은 태도 같은 건 안중에 없어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확인하는 건 이만 됐다. 제대로 움직여 봐.”
그는 입맞춤만으로도 크게 흥분했다. 배 속에 있는 성기가 한층 더 단단해졌고, 애쉬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달달한 알파의 페로몬에 몸을 맡겼다.
최근, 후계자 문제와 커틀러의 소행은 엉킨 실타래처럼 느껴졌고 그것은 램파드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늘 맡았던 날카로운 향과는 다른 낯선 페로몬이 얽힌 일 덕분에 격양된 감정을 진정케 도와줬다. 골머리를 앓던 램파드는 평온한 향에 진정되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걱정을 떨쳐 냈다.
역시, 멀리 보낸 커틀러가 생각나는 이유는 몸이 달아올라서가 맞았던 모양이다.
“아…!”
퍽, 퍽. 램파드의 허벅지를 한계까지 벌린 애쉬가 허리를 쳐올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여러 번 움직여 준 덕분에 램파드의 내벽은 남근을 감싸기 좋게 부드러워졌다. 흥건해진 속살은 애쉬의 거친 움직임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양손으로 램파드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꽉 붙든 애쉬가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속도가 빨라지자 살끼리 달라붙으며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 스스로 움직일 때와는 다른 달콤한 감각이 몸 안쪽을 휘저었고, 램파드의 몸 또한 그와 똑같이 붉어졌다.
“하아… 하아…….”
턱까지 땀이 송골송골 맺힌 애쉬가 힘에 겨운 거친 숨을 내뱉었다. 몸속에서 날뛰고 있는 페로몬을 억제하느라 힘이 드는 모양이다. 애쉬는 아직 몸속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원초적인 욕망을 분출하지 않았다. 여러 번의 러트를 홀로 보내며 알파의 페로몬을 억제하는 방법을 어떻게든 익힌 것이다.
램파드는 손을 뻗어 애쉬의 볼을 감쌌다. 열이 차올라 뜨거워진 볼의 온기에 데일 것만 같았다.
“참기 힘들지? 나 혼자 즐기는 건 미안하니까 페로몬을 개방해도 좋아.”
나긋나긋한 램파드의 목소리가 기폭제였는지 애쉬의 몸에서 강렬한 페로몬이 뻗어 나와 몸속을 휘저었다. 평범한 오메가라면 코를 막고 헛구역질할 정도로 짙은 페로몬 향은 램파드에게는 평온한 쉼터가 되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익히 알았던 것처럼 익숙한 냄새를 잔뜩 들이마시자 부족한 마음이 빠르게 채워졌다.
“하아… 으응, 좋아…….”
단숨에 큰 만족을 얻자 램파드의 하반신이 위아래로 헐떡대며 사정했다. 뻣뻣하게 세워진 오메가의 성기에서 희뿌연 정액이 튀어나왔지만 애쉬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파르르 떠는 램파드의 골반을 꽉 부여잡고, 푹푹 안쪽을 찔러 넣었다.
겨우 한 번으로 만족하며 떨어질 생각은 램파드 쪽도 없었다. 애쉬가 편히 움직일 수 있도록 다리를 벌리며 쿠션 더미에 몸을 맡겼다.
절정에 여러 번 달한 램파드의 하반신이 경련하며 꿈틀거렸고, 양다리가 파드득 떨렸다. 몇 번이나 사정했던가. 숫자를 까먹을 정도로 지속된 쾌감에 놀란 신경이 가라앉지 않았고, 가만있어도 헐떡이며 신음을 흘린다. 램파드는 추삽질에 집중하느라 상의를 벗지 못한 채였다. 달뜬 숨을 내쉴 때마다 셔츠가 꽉 조여 더 답답했다.
“페로몬 향이 굉장히 진하군. 이때껏 참고 있었던 거냐. …아!”
“알고 있으면 계속 벌리고 있어.”
습한 내벽에 여러 번 파정을 한 애쉬는 러트의 영향인지 내숭을 갖다 버렸다. 이쪽이 본모습인 건가. 날카롭게 으르렁거려 봤자 램파드는 비웃음을 흘렀다.
“이미 한계까지 벌렸다만.”
“구멍까지 잘 벌리던가.”
램파드의 몸에 달라붙어 추삽질에 집중하는 애쉬는 짐승이 되어 버렸다. 오롯이 자손을 남기는 목적밖에 남지 않은 몸뚱이가 눈앞에 있는 구멍에 집중하며 하반신을 퍽, 퍽 쳐올렸다. 포화 상태인 항문에서 정액이 넘쳐흘렀고, 남근을 머금은 입구는 찐득한 액이 잔뜩 달라붙어 늘어졌다.
“이렇게 질질 흘러서야.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니까 부족하겠군. 더 먹고 싶지 않나?”
정액으로 가득 찬 배가 눌릴 때마다 복통이 느껴졌다. 알파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좆물을 쏟아내는데, 몇 번이고 받아 낸 덕분에 움직일 때마다 장 안이 꿀렁거렸다. 덕분에 램파드는 정액을 빵빵하게 채워 넣은 주머니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솔직히 정도라는 게 있지. 이러다 혈관에 피 대신 정액이 흐를 것만 같았다.
“후으, 읏, 아니…… 이제 배불러. …아!”
애쉬는 램파드의 골반을 꽉 끌어 잡고 페니스를 콱콱 박아 넣었다. 거친 움직임에 맞춰 수용하지 못한 정액이 튀어 오르듯 빠져나왔다. 속도가 붙는 걸 보아하니 사정이 임박한 모양이다. 여기서 또 싼다는 건가. 한계까지 차오른 게 느껴졌는데, 정말 터질지도 몰랐다.
베타와 달리 페로몬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나 그래도 인간이었다. 히트 사이클에 돌입하면 성욕이 우선시되지만 약간의 이성은 남아 있었는데, 오메가와 달리 알파의 러트는 씨를 내뱉는 일 말고는 모든 게 배제되었다.
“설마… 또 싸는 건 아니겠지.”
“맞아. 네가 원하는 정액이잖아. 잘 받아먹어 봐.”
“잠깐… 읏, 조금 이따가 해.”
램파드는 애쉬를 진정시키기 위해 단단한 가슴을 꾹 눌렀지만 멈추기에 역부족이었다. 꽉 붙들린 다리를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큿, 좀… 안에 찬 걸 빼내고 하든가……. 더는 못 받아먹어……. 배 아파, 하으!”
짐승으로 변한 알파의 급소를 찔러 봤지만 단단한 석상처럼 달라붙은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쯧, 가만히 받아먹기나 해.”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오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알파가 사나운 기운을 내뿜었다. 빠져나온 페로몬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세찬 빗줄기의 소나기에 빠르게 적셔지는 것처럼 한차례 쏟아진 페로몬으로 램파드도 젖었다.
기분 좋은 향기도 과하면 숨이 턱 막힌다. 달콤한 기운에 머리끝까지 퐁당 담긴 램파드는 호흡하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발버둥 칠수록 짙은 페로몬이 몸 안쪽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왔다. 몸 안에 알파의 페로몬이 가득 차자 사정으로 축 처진 성감이 빠르게 눈을 떴다.
몸속에 들어찬 좆이 내벽을 슥슥 문질렀고, 페니스가 다시 기립했다.
“히익, 힛, 흑……. 윽, 으으… 읏!”
페로몬에 취한 램파드의 상반신이 퍼득거렸다.
인간이 아닌 듯한 날카로운 눈동자가 램파드가 입은 상의에 고정되었고, 찌이익 옷이었던 천이 나부꼈다.
천에 감싸져 있던 달뜬 피부가 농도 짙은 알파의 페로몬과 만나 붉게 익었다. 애쉬는 잘 익은 과실의 색을 품고 있는 피부에 이빨을 박아 넣고,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근육이 발달한 두꺼운 양팔로 램파드의 얇은 몸을 단단하게 옥죄며 뼈가 으스러질 듯 강하게 안았다.
가슴이 압박된 램파드는 숨을 쉬기 힘들어 헐떡였고, 눈앞에 있는 애쉬의 등에 손톱을 세워 박아 넣었다. 램파드가 자신의 몸에 매달리자 애쉬는 허리 짓을 시작했다. 잘 파여진 등이 움직임에 맞춰 꿈틀댔다.
몸속 깊은 곳에 파고든 애쉬는 성기를 빼내지 않고 하반신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램파드의 목에 코를 문지르며 냄새를 찾는 듯 연신 킁킁댔다.
"뭘 찾느라 그렇게… 애쓰는 거냐."
"오메가 냄새."
“맡아 봤자 네놈… 냄새밖에 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페로몬이 나올 때까지 해야지.”
억제제를 먹어 내뿜고 싶어도 오메가의 페로몬이 나오지 않았다. 램파드는 그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농담이지?”
“친히 그 입으로 마음대로 하라며? 도발까지 하시더니 벌써 지치신 건가?”
체력은 문제없는데 애쉬가 몇 달 치인 듯한 정액을 한꺼번에 쏟아 버려 내부가 꽉 찼다. 움직일 때마다 정액이 스멀스멀 빠져나오는 걸 보면 모르나. 애쉬는 눈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 주긴 할 텐데 밖에다가 싸……. 더는… 안에 읏!”
원하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찾지 못한 애쉬가 램파드를 뒤집었다. 엎드린 덕분에 정액으로 가득 찬 아랫배가 눌리고 아파, 주먹을 꽉 쥐었다.
푹신한 쿠션 더미에 파묻힌 램파드는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 애쉬의 좆을 받아들였다. 그는 램파드의 몸을 배려하지 않고 험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물렁물렁한 쿠션 덩어리는 램파드를 제대로 지탱하지 못했고, 그가 허리를 쳐올리는 대로 흔들렸다.
매끈하게 드러난 램파드의 목덜미를 애쉬가 잘근잘근 물었다. 페로몬을 잔뜩 끼얹어 예민해진 피부가 움찔 떨었다.
“하… 하아, 아파……. 윽, 잠깐 풀어……. 속… 가득 찼어.”
“조금 더 버텨 봐.”
“하으… 으, 으… 흐윽, 빼… 빼고 해, 터질 거 같…… 아, 아, 히잇!”
램파드의 목덜미를 꽉 문 애쉬의 좆이 점점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램파드는 꽉 벌려지는 내벽의 통증에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당하면 몸이 성하지 못 할 거였다. 빠져나오려 몸을 틀었지만 빠르게 부푼 알파의 좆에 꽉 걸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학자도 아닌데 인체를 탐구하게 되다니. 이미 가득 찬 정액으로 숨쉴 때마다 배가 부푼 게 느껴지는데, 노팅된 채 사정당하면 몸이 터질지도 몰랐다.
커틀러의 노팅을 받아 낸 적 있는 내벽은 쏟아질 씨물의 양을 걱정하며 벌벌 떨었다.
“날 도발하여 덮치게 만들더니 인제 와서 떠는 건가?”
“건방진 것도 정도껏!”
“오메가 취급해 달라면서요?”
“하… 시발.”
정액으로 배를 터지게 만들려는 새로운 복수 방법인가. 엎드린 채 노팅한 페니스를 품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지만 등 뒤에 서 있는 알파가 비웃는 것만 같았다. 빠르게 팽창한 알파의 좆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미 많은 양의 씨물을 쏟아 낸지라 노팅 후 배출한 정액은 소량이었다. 노팅 중인 애쉬는 정액으로 찬 램파드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감싸 바닥에 닿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 옆으로 드러누워 편한 자세로 만들어 줬다.
그는 오메가의 페로몬 향을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는지 램파드의 목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만 슬슬 일어나지그래.”
램파드의 아랫배에 양손을 넣고, 몸을 포갠 애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등 뒤로 끌어안고 있어, 램파드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봐, 애쉬 테일러.”
노팅되었던 알파의 성기는 본래의 크기가 되었다. 다 끝났는데 여전히 성기를 삽입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마저 없다. 램파드는 애쉬의 품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났고, 황망하게 바라봤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어린아이처럼 세상 편하게 잠들었다. 선례가 있어 일하는 시종을 모조리 궁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지만 해가 지면 돌아온다. 들키면 어쩌려고, 성기를 램파드 몸에 삽입한 채 쿨쿨 자고 있다니.
“일어나.”
램파드는 그를 깨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볼을 쳤다. 찰싹, 찰싹 볼을 가볍게 때렸지만 감은 두 눈은 떠지지 않았다. 한꺼번에 몇 달 치의 묵은 페로몬을 쏟아 낸 그는 잠이 든 게 아니라 기절한 모양이었다. 흔들어 보고, 주먹으로 어깨를 툭 쳤지만,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이런 대책 없는 놈을 보았나. 어수룩한 자의 계획에 속아 강제로 각인당한 자신이 새삼 한심해졌다. 정사를 나눈 모습을 시종이 보면 분명히 최고 대신의 귀에 들어간다. 온종일 잔소리를 듣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램파드는 잠든 애쉬를 일으켜 세워 업었다. 그는 보기보다 무거웠다. 험하게 박아 준 덕분에 안쪽부터 허리까지 시큰한 통증이 일기도 했다. 업혀 가도 모자랄 판에 반대로 짊어졌더니 당장 패대기치고 싶어졌다.
이왕 선심 쓴 거 인내를 발휘해 근처에 있는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실로 이동했다. 넓은 욕실은 자연에서 솟아 나오는 따뜻한 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램파드는 짊어진 애쉬를 짐짝 던지듯 던져 넣었다.
첨벙! 거대한 욕실에 큰 물보라가 일었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애쉬가 첨벙대며 연거푸 물장구를 치는 꼴에 램파드는 욕실 바깥에서 쭈그리고 앉아 웃었다. 크게 웃는 바람에 방금까지 노팅당한 안쪽이 쓰라렸지만,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멍청하긴. 호수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자는 사람을 던져 넣다니, 몰상식한 짓만 골라 하는군!”
“제국의 주인에게 막말하는 놈은 상식 있고?”
“제국의 태양께서 오메가로 있을 땐 막 대하라 했지 않았나?”
“다 쌌으니까 이제 베타다. 억울하면 더 세워 보든가.”
머리까지 전부 물에 젖은 애쉬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램파드도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실에 들어왔다.
배가 터지지 않을까 온갖 생각을 하며 이를 갈았는데, 관계가 끝나고 나니 이상하게 기분 좋아졌다. 알파와의 관계로 그간 쌓였던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진 모양이었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애쉬를 무시한 램파드가 자리를 잡았다.
“뭡니까. 베타 취급해 줄 테니 나가시죠.”
“짐은 제국 그 자체이자, 모든 것을 결정한다.”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이 목욕탕도 짐의 것이니까 마음대로 할 거란 말이다.”
벌린 입을 꾹 다문 애쉬는 뚱하긴 하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램파드는 그의 곁에 앉아 수증기가 만들어 낸 물방울에 시선을 고정했다.
***
화이트 궁은 램파드가 홀로 휴식을 취하는 용도의 장소였다. 애쉬에게 내주는 바람에 집무실에 딸린 침실에서 쉴 때가 많았는데, 요새는 그를 찾아가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애쉬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평온했다. 몸과 마음에 쌓여 있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인데, 그의 향을 마시며 품에 안기면 조용한 장소에서 낮잠을 푹 자는 것처럼 완벽한 휴식이 취해진다.
억제제 역할은 물론 속궁합도 좋으니, 찾아가는 길이 절로 즐거웠다. 이대로 애쉬의 씨를 받아 후계자 문제까지 해결된다면 램파드가 고민해야 할 걱정거리는 모두 비워진다.
애쉬의 목적이 어떠한들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기에 점차 경계가 사라진 걸지도 몰랐다.
쌓인 피로를 풀고 싶으면 애쉬, 정확히는 그의 페로몬이 필요했다.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 같은 알파인 그는 페로몬 조절이 미숙했다.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을 억제하는 건 잘하더니만 반대로 내뿜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알파의 페로몬을 들끓게 만들려면 화를 내게 하든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든가, 램파드가 가진 오메가의 향을 이용하면 됐다.
램파드는 발정제를 마셔 유혹의 페로몬을 옅게 둘렀고, 향에 취한 애쉬는 뿌리치지 않으며 자연스레 섞여 들었다. 그렇게 그와 꼬박 여러 일을 함께 보냈다.
관계가 끝난 램파드는 양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벽에 기대 쭉 뻗었다. 양손은 가지런히 모아 배에 올리고, 꼬물꼬물 발끝만 움직였다. 정사를 끝낸 안쪽은 뒤처리하지 않아 끈적한 액을 머금고 있었고, 배 속에 있는 정액이 슬슬 녹아내렸지만 다리를 위로 뻗은 덕분에 흘러내리진 않았다.
두 사람의 밀회 장소가 되어 준 화이트 궁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얇은 가운을 걸친 애쉬가 차와 다과를 준비해 온 것이다.
“마실 거리를 끓여 오는 것보단 네놈 페로몬이 더 효과적이다.”
그는 관계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따뜻하고 달달한 차를 끓여 왔다. 램파드의 취향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각설탕을 여러 개 넣은 과일차와 시종이 준비한 스콘이 들려 있었다.
“그런 건 못해.”
“덜떨어진 알파 같으니라고.”
지금 화이트 궁에는 애쉬와 램파드 단둘만이 남았다. 밀러의 특별 지도를 받은 효과가 나타나는지 그는 램파드가 나타나면 능숙하게 시종을 부려 둘만이 만끽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처음과 달리 태도 또한 공손을 잃지 않으며 당당해졌다. 공손은 램파드와 단둘이 있을 땐 흔적조차 사라지지만.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관두고 차나 마셔라.”
“잘 단련되었나 싶었더니 아직이군. 그런 자잘한 일은 급사에게 맡기는 거다.”
“발정 난 폐하께서 예고도 없이 찾아오시는 바람에 궁이 텅 비지 않았습니까? 그 덕분에 제가 직접 몸을 움직여 끓인 거고요.”
“말대꾸하는 솜씨는 늘었군.”
“입만 싼 오메가를 다루는 방법이 늘었지. 먹기 싫으면 이건 버릴 테니, 욕조 물이나 마시든가.”
“기다려. 10분 정도만 더 하고.”
다가온 애쉬가 램파드를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저번부터 관계가 끝나면 양다리를 하늘로 쭉 뻗고 몇십 분 동안 저러고 있는데, 새로운 단련법인가. 저런 꼴을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번에는 아예 식어도 향이 보존되는 차를 끓여 왔다.
괴이한 짓을 하는 램파드의 곁에 앉은 애쉬가 턱을 괴고 램파드를 바라봤다. 몇 분은 기다려 줬지만,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는지 원. 결국, 먼저 입을 떼어 냈다.
“저번부터 기이한 짓거릴 하는 이유가 뭐지.”
“이것 말인가? 시종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액을 품고 이 자세를 취하면 임신이 잘 된다고 하더군.”
태연한 램파드와 달리 애쉬의 미간 사이가 구겨졌다.
“황제 자리를 내려놓고 싶다면 번거로운 짓거리는 관두고 대신들 앞에서 감별지를 물어. 그 즉시 폐위당할 테니까.”
여전히 발끝만 움직이던 램파드가 애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이군. 황제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 같은 건 없어.”
“임신을 한 채 황제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임신해서 들키는 것보다는 후사 없이 자리를 꿰차고 있다 들통나는 쪽이 더 빠르다. 임신을 하는 대로 제국 순방에 나설 거고, 그때 아이를 낳으면 돼. 아, 그땐 너도 함께 떠날 거야.”
지금 당장 마실 생각이 없는 램파드를 뒤로하고, 애쉬는 홀로 차를 마셨다. 애쉬는 램파드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정말 듣고 싶은 이야기는 목 밖으로 나오지 않기에 식은 차를 홀짝거렸다.
제국의 황제에게 막말하는 배짱은 생겼지만, 본심을 들을 용기는 아직 없었다.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은 애쉬가 입을 뗐다.
“그렇게 권력이 탐나는가?”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이미 주어진 자리인데 차지하고 싶어 탐낼 필요가 있는가?”
겁을 상실하고 황제에게 따박따박 말대답 하던 애쉬가 입을 다물었다.
“짐이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드나 보군. 몇백 년간 이어진 왕국과의 분쟁을 해결한 것. 제국이 건설된 이후로 가장 큰 영지를 가지게 된 것도 짐의 대에서지. 자연까지 따라 주지는 않아 홍수 때문에 몇몇 지역이 힘들긴 해도 피해 지역에 넉넉하게 지원할 정도로 곡식이 풍부한 시대다. 하지만 그런 소릴 하는 걸 보아하니 네놈이 보기엔 짐은 황제의 자질이 없어 보이는군?”
“솔직히 널 보기 전까지는 불만이 많았다. 여기 와서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는데 발정 난 수캐치고는 이룬 업적이 많아 놀랐어. 지어낸 이야기인가 싶더군.”
“직접 보니까 어떠하냐?”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이룬 업적은 존경할 만해.”
다리를 하늘로 쭉 뻗고 있던 램파드가 애쉬에게 다가왔다.
“그건 칭찬인 건가?”
램파드는 애쉬의 볼에 남은 약간의 홍조를 발견하고 웃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애쉬는 예절에는 익숙해졌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데는 서툴러 솔직하게 드러났다. 저 스스로 말해 놓고 머쓱해하는 모양이었다.
커틀러를 제외한 모든 이를 베타라 속이며 살아가니, 종종 인생이 하나의 연극으로 느껴졌다. 언젠가 커튼이 올라가면 박수가 아닌 비아냥을 들을 인생. 여러 겹의 거짓말이 덧씌워져 있으니 돌아올 후폭풍은 매우 클 터.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인생의 목표를 누군가 들어 줬으면 했다. 하지만 거짓 인생에서 속마음을 털어 내고 말할 수 있는 상대 같은 건 없었기에 깊은 곳에 본심을 감췄다.
정사를 나누며 그의 페로몬을 잔뜩 마신 뒤라 그런지 마음이 편해져 자연스레 입이 움직였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인생의 목표를 누군가 들어 줬으면 했고, 애쉬는 신뢰해도 되는 남자였다. 적어도 램파드는 그렇게 생각했고, 처음으로 깊은 곳에 감춰진 속마음을 꺼냈다.
“난 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다.”
“왜지?”
“사실 나한테는 느닷없이 떨어진 거와 마찬가지인 자리야. 원래 주인을 대신해서 무사히 끝마치고 싶어.”
무엇에 반응했는지 자유자재로 페로몬을 내뿜지 못하는 애쉬에게서 짙은 향이 느껴졌다. 평온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평소와 달리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원래 주인이라니.”
“돌아올 리 없는 사람이라 황좌를 빼앗길 염려는 없어. 네 자리 또한 무슨 일이 생겨도 지켜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곁에 앉아 있던 애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램파드는 고개를 들어 올렸고, 입을 꾹 다문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감정 조절이 서툰 그가 한껏 구겨진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엇이 그리 거슬렸는지 알파의 몸에서 날카로운 페로몬이 스멀스멀 빠져나오기까지 한다.
램파드는 갑자기 기류가 바뀐 그의 분위기를 읽기 힘들었다. 편해진 분위기에 친우라 느끼며 솔직한 말을 했건만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분을 삭이며 할 말을 고르던 애쉬가 드디어 입을 뗐다.
“그 말은 형제가 더 있다는 말이군.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후계자는 첫 번째 자식의 자리니까.”
표정을 애써 수습했지만 감당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페로몬은 날카로웠다. 억누르는 방법을 터득한 그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라면 상당히 화가 많이 났다는 뜻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램파드의 가족 관계가 실제 사실과 달라서 화가 난 건가? 첫째가 있는데 오메가인 램파드가 황제라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일지도.
램파드는 애쉬가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거짓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만난 두 번째 인연이었다. 오해 같은 건 원치 않고, 딱히 거짓말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맞아. 굳이 숨길 생각은 없어. 나는 선대의 두 번째 자식이고, 나이가 많은 형이 하나 있었지. 형에 대한 기록은 모두 삭제되었으니까 제국의 역사를 공부해도 몰랐던 거다.”
“네가 제국의 주인이지 않나? 잘못된 기록이라면 바로잡으면 되지 않는가.”
애쉬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지만, 램파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황제라도 선대의 기록은 함부로 수정할 수 없다. 그랬다간 한 황제의 변덕으로 제국의 역사가 모조리 교체될 테니까.”
자신과 똑같이 오메가로 발현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형의 처지가 안타까운 건 누구보다도 램파드였다. 마음 아프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대로 형의 이름을 사라지게 할 생각도 없다. 선대 황족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봉해진 과거 기록을 수정할 수 없으니 그의 이름을 가진 자를 황제로 만들 생각이었다.
램파드 다음 대의 차기 황제, 아직 생기지도 않은 후계자의 이름은 그렇게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졌다.
애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고 하나 그에게 이미 죽은 형의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 설명이면 충분했다. 램파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애쉬는 여전히 램파드를 몰아붙였다.
“도둑질을 시인했으면서도 돌려주지 않겠다는 건가? 본래 주인이 너의 능력에 미치지 못할 터이니 돌아와 봤자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가. 오만한 생각이지 않냐!”
담담했던 램파드의 표정에도 금이 갔다. 애쉬가 저렇게 화를 내는 이유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서라 느껴졌기에. 애쉬 앞에서는 구멍을 벌렸고, 그가 몇 번이나 언급한 경솔한 오메가이기 때문일 테지.
“형도 나와 같은 오메가였다. 대체 뭘 비아냥거리는 거냐. 나에게 불만이 있다면 화내지 말고 제대로 말해!”
성이 난 램파드의 삐죽 선 목소리에 애쉬가 다가왔다. 배 속부터 욱한 심정이 올라온 그는 들끓는 감정을 몇 번이나 억누르며 말했다.
“저명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형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겠지? 네가 생각하기에 부족한 형이 지금 당장 돌아온다면 어찌할 거냐. 지금처럼 건방진 태도를 고수하며 원래 있던 장소로 내쫓을 텐가?”
“아버지가 내 눈앞에서 창관으로 내쳤으니 형에 대한 건 아주 잘 알고 있다.”
“하, 그래서 너와 경쟁조차 안 되는 자라 생각하는군. 창관에서 구르고 구른 자는 황궁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란 이와는 비교조차 안 되겠지!”
“무슨 답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형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애쉬 중심으로 공기가 폭발하는 듯, 강렬한 페로몬이 뿜어졌다. 그는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은 손으로 램파드의 양어깨를 꽉 쥐었다.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 했어. 다 알고 있었던 거군.”
“내 가족의 일인데 당연하지 않은가.”
살기를 머금은 눈동자는 짐승의 것처럼 사나웠다. 몸속에 저장된 페로몬을 모조리 꺼냈는지, 당장에라도 램파드의 목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을 듯 서슬 퍼런 기세였다. 악문 이빨이 떨어졌다.
“너와 지내면서 혹여나… 그러할 리 없지만 만일…….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거라… 생각했다. 모르니까… 몰랐으니까 그런 거라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램파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애쉬를 노려봤다.
터져 나온 페로몬은 이내 점점 줄어들었고, 애쉬의 등이 물먹은 곡식처럼 축 처졌다. 마주한 애쉬의 눈동자에서도 살기가 사라졌고, 텅 빈 공허만이 남았다. 왠지 모를 서글픈 감정이 느껴졌다.
램파드가 생각하기에도 루트비안은 서러운 인생을 살다 갔다. 램파드가 다섯 살 때 창관으로 끌려갔고,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단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죽은 루트비안은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황궁에서 기르는 사냥개가 죽어도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는데, 황태자였던 형의 초상은 아버지 몰래 어머니와 단둘이 조촐하게 치렀다. 오메가 창부의 시신은 창관에서 불태워 바람에 날려 보내 단 한 곳도 돌려받지 못했고, 무덤 아래는 지금도 텅 비어 있었다.
황실과 관계없는 애쉬가 20년 전에 죽은 형을 걱정하며 윽박지르는 까닭을 이해하기 힘든 램파드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애쉬가 화를 내는 원인을 찾기 위해 내뱉은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죽은 형을 대신하여 황제의 자리를 무사히 끝마친다는 게 그렇게나 거슬리는 발언이었나. 같은 오메가가 혈육을 내쫓고 자리를 빼앗았다 생각하는 모양일지도. 피도 눈물도 없는 본성이 사악한 사람. 애쉬는 램파드에게 그리 말한 적 있었고, 첫인상이 변하지 않은 것이다.
기껏 속마음을 말했더니 돌아온 것은 경멸뿐이라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 램파드는 애쉬를 뿌리쳤다. 그리고 근처 아무렇게나 던져 둔 가운을 걸쳐 입고, 씻기 위해 욕실로 이동했다. 램파드가 말없이 방 밖으로 나갔지만 애쉬는 말리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똑, 똑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방울 소리에 램파드의 마음이 진정됐다. 애쉬가 화를 내는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이제는 자기 언행을 생각하며 돌이켜 보았다.
제국의 황제 곁에는 유능한 자가 많고, 올바른 첨언을 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램파드를 베타로 알고 있다. 바른말을 들어도 어딘가 낯설게 느꼈다. 자신은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에게 무언가 듣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애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둔 본심을 꺼내 버린 것인지. 램파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소리였다.
그는 램파드 때문에 사랑하는 자를 잃었다. 자신을 증오하는 걸 알면서도 필요로 곁에 둔 자였다. 몸 몇 번 부딪혔다고 그새 잊어 먹은 모양이었다. 애쉬의 말대로 경솔한 자가 맞았고 부정할 수 없어졌다.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내뱉었는지, 뉘우쳐도 이미 꺼낸 말을 주워 담지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조였다. 고작 이 정도 일 가지고 가슴 안쪽이 지끈거리다니. 애쉬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램파드가 정해 둔 인생의 목표로 향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배반당했다며 상처받은 모양이었다. 비관할 일도 아니지만 무언가 원했던 마음이 자꾸만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