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덫
각인을 해도 여전히 히트 사이클은 찾아온다. 애쉬와의 관계로 임신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라 반가웠지만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이전처럼 약을 먹고, 베타와 잠자리를 가졌는데도 몸을 잠식하는 나른함이 히트 사이클이 임박했단 것을 알렸다.
“윽… 우웁!”
새벽. 베타와 관계를 맺고 황궁에 돌아가는 도중 램파드는 어느 한 도시의 골목에서 입을 막고 쓰러졌다. 최종 각인을 끝마친 오메가는 본능이 짝으로 인정한 상대 외에 관계를 맺으면 페로몬이 꼬인다.
몸속에 흐르는 피와 같은 페로몬이 제 몸을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페니스를 받아들였던 내장 안을 몽둥이로 때리는 거와 같은 통증이 지속해서 일었고, 온몸으로 퍼져 갔다. 몸 전체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양, 뼈와 피부가 욱신거렸다.
황궁까지 어떻게 도착했더라. 이대로 쓰러져 실신할 거 같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도착했다. 환궁하자마자 진통제를 한껏 먹었지만, 여전히 고통은 지속했다.
하루가 지나고, 어제보단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램파드의 페로몬은 스스로의 몸을 괴롭혔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통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쉬고 싶지만, 북부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 덕분에 황좌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오늘 도착한 전령에 의하면 커틀러 단장이 이끄는 화이트 테일 기사단 전원, 북부 지방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회유할 목적으로 보낸 사절단의 목이 성 앞에 전시되어 있다는 소식도 함께 동봉되어 있습니다. 커틀러 단장은 후작과 전투를 시작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램파드는 뼈까지 뻗어 간 통증과 고열을 참으며 황좌에 앉았다. 열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져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기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황제 곁에 서 있는 시종이 램파드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가지런히 정돈했던 플래티넘 블론드는 이마에 맺힌 땀 때문에 적셔졌다. 마른 손수건으로 램파드의 이마를 수시로 닦아 주었지만 땀은 계속 삐져나왔다.
“램파드 폐하, 몸이 좋지 않으신 거로 보입니다. 이렇게나 땀을 많이 흘리시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괜찮으니까 마저 보고하거라.”
“하오나… 보고는 이쯤 끝마치고 쉬시는 게 어떻사옵니까.”
머리가 아파 옆에서 떠드는 시종의 말이 성가시게 들렸다. 램파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시종은 입을 다물고 황제의 곁을 조용히 지켰다.
이미 진통제는 먹었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제대로 된 처방을 받으려면 오메가임을 밝히고, 최종 각인한 채 다른 이와 관계를 맺었다 고백해야 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오기로 버티던 램파드는 오후가 되자 결국 쓰러졌다.
병치레 한 번 하지 않은 튼튼한 황제가 갑자기 쓰러지자 황궁은 뒤집혔다. 황의들은 램파드가 누워 있는 침실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몸살인 듯한데 약이 쉽게 들지 않는군요.”
램파드는 더운 열기를 내뱉으며 황의가 주는 쓸모없는 약을 먹었다. 몸을 일으켜 쌉쌀한 가루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잔뜩 모여 있는 황의들을 향해 말했다.
“됐어. 모두 물러가라.”
“이마가 이렇게나 뜨거우신데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후사도 없으신데 폐하께서 쓰러지시면 제국은 어찌 될지 생각해 주십시오.”
후사보다는 이대로 계속 죽치고 있다가 오메가라는 사실이 탄로 나면 곤란해진다.
“시끄럽다. 됐다고 하지 않았는가!”
램파드의 호통에 황의들이 튀어 오를 듯 놀랐고, 서둘러 사라졌다.
입고 있는 옷은 금세 땀범벅이 되어 찝찝했다. 램파드는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 파묻혔다. 하루 이틀이면 엉망이 된 페로몬도 원래대로 돌아올 터. 부드러운 침구를 끌어안고, 지금 당장 커틀러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밖으로 뛰쳐나간다 해도 하루 이틀 내로 닿을 수 없는 위치니까 몸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다행히도 램파드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정무를 진행했다. 일하는 데는 문제 없지만,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히트 사이클이 닥칠까 봐 계속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전처럼 베타와의 관계로 미리 히트 사이클을 예방할 생각이었지만, 고열에 시달렸다. 이제 전과 같은 얄팍한 수단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완벽하게 발현했으면 다른 오메가처럼 약도 들으면 좋을 텐데. 억제제에 내성이 생겨 히트 사이클을 완벽하게 막아 주지 못했다. 언젠가 한 번 불시에 페로몬이 터져 나올 생각만 하면 벌써 두통이 일었다.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램파드는 슬슬 걱정이 됐다. 감별지의 색마저 바뀌었으니 전쟁터에서 맡아 본 적 있는 강렬한 오메가의 향을 뿜어낼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 때문에 기사가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자신이 시킨 일이기 때문에 보고를 듣는 시늉은 했다.
“발정제를 판매하는 루트를 모두 확인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불법 거래가 종종 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했으며 관련자를 모두 처벌했습니다.”
“불법 거래를 하는 자들에 대한 처벌도 강화해라.”
“알겠습니다.”
이 일을 마지막으로 램파드가 해결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났다. 커틀러가 돌아올 때까진 전처럼 도장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면 됐다. 황좌 손잡이를 장식한 금색 조각상을 손끝으로 툭툭 치던 램파드가 입을 열었다.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울 거다. 모든 연락은 편지로만 하도록 해라.”
히트 사이클이 닥치면 이틀 정도 앓으면 되지마는, 억제제가 어중간하게 들어 램파드는 자신이 언제 히트 사이클이 닥칠지 정확히 몰랐다. 넉넉하게 한 달이면 충분할 테니까 이번 기회에 심란한 마음도 함께 정리하고 싶었다.
“네, 개인 호위와 함께 황제 폐하를 모실 시종을 준비하겠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니 조용히 휴양하고 싶군.”
“그렇다면 황의를 대기시키겠습니다.”
“혼자서 푹 쉬고 싶다. 아무나 발을 들이지 말라고 전해라.”
한 번 쓰러지기도 했으니까. 요양 간다는 황제의 뜻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수도와 멀리 떨어진 숲속에 있는 작은 저택에서 아무도 없이 홀로 히트 사이클을 보냈다.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유혹의 페로몬을 뿜어냈지만 램파드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흐윽… 읏. 아……!”
씨를 받아 아이를 가지고 싶단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몸에 열이 올랐고, 특히 포궁이 열린 배 속은 뜨거워서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커틀러의 얼굴을 사라지게 만들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떻게 그자를 떠올릴 수 있는 건지. 자신의 얄팍한 심지가 한심스러웠다.
이를 악물고 달뜬 마음을 진정시키지만 욕망은 커져만 갔다. 커틀러가 보고 싶었다. 그의 향이 그리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안으라며 몸을 던지고 싶은 욕망에 휩쓸렸고, 버텨 내기 힘들었다.
이 정도 욕구를 참지 못하다니. 램파드는 안쪽에서 문을 잠그고 열쇠를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제 방 밖으로 나갈 출입구는 3층 높이의 창문밖에 남지 않았다. 남근을 받아들이고 싶어 환장했다 하여도 자살 생각까지는 하지 않을 테니까 방 안에서 괴로워하면 됐다.
“아, 아… 하읏!”
램파드는 양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부여잡고 헐떡였다. 몸 안쪽이 열렸고, 하반신이 축축해질 정도로 애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끈적한 맑은 액에서 달콤한 향이 퍼져 나왔다. 전과 달리 짙게 퍼지는 페로몬 때문에 램파드는 이제 제 몸에서 나는 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농후하게 익은 과일같이 달달한 냄새가 가슴을 흠뻑 적시고 심장까지 간지럽게 만들었다.
이런 냄새를 풍겨 대는데, 오메가임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석 달 후. 반란을 일으킨 북부 지방을 제압한 커틀러가 돌아왔다. 이미 서류로 모든 보고를 들었지만, 기사단을 통솔하는 커틀러가 직접 결과를 말하기 위해 본성에 방문했다.
“화이트 테일의 커틀러 콘테,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지금 막 귀환했습니다.”
턱을 괴고 있는 램파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커틀러를 한 번 힐끔 내려다보았다. 생채기 하나 없이 멀끔한 모습이었다.
“기사 서약도 한 자가 맨 뒤에 숨어 있기만 한 것이냐.”
“저는 석 달 동안 치러진 모든 전투에서 가장 선두에 서 활약했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스친 흔적 하나 없군. 어디 한두 군데는 부러진 채 돌아와도 되는데 말이지. 가령 목이라든가.”
램파드의 농담 아닌 진담에 주변에 선 시종들이 숨을 멈추고 긴장했다. 원래부터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커틀러에게만큼은 사근사근한 편이었다. 갑자기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듣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램파드가 적의를 내보였지만, 커틀러는 내색 없이 겪었던 일을 보고했다.
“북부 지방의 로젤린 후작이 지휘했던 반란군은 모두 제압했습니다. 전 후작을 포함하여 그의 식솔까지 전부 처형했습니다.”
황좌 곁을 지키던 시종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차 사라져갔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틀러는 보고를 이어갔다.
“후작이 다스렸던 영지민 또한 반란에 가담하였기에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산 채로 매장했습니다.”
램파드 곁에 있던 시종의 표정이 파리해졌다. 대체 몇 명이나 죽이고 온 것인지. 대량 학살을 하고 왔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아 마치 악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수고했군. 이만 나가라.”
턱을 괴고 황좌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램파드를 향해 커틀러가 공손하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보고 드릴 일이 더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 조용히 전해 드리고 싶은데 여기는 눈과 귀가 많군요.”
“널 위해 번거롭게 자리를 옮길 생각은 없다만.”
“폐하께서 찾으시는 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움직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쯧, 이동하지.”
램파드의 또 다른 각인 상대, 애쉬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키지 않지만, 결국 커틀러가 원하는 대로 둘만 이야기할 수 있는 조용한 집무실로 이동했다. 방 안에 둘만이 남게 되자 램파드의 표정이 점점 더 사나워졌다. 알현실에서 내보였던 적의는 어느 정도 감춘 거였다.
램파드의 심기 따윈 무시한 커틀러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연회 이후로 저에게 신경질만 내시는군요.”
“당연하지. 네놈만 보면 역겨워지니까.”
“다른 감정으로 착각하는 거 아니십니까. 아니면 인정하기 싫어서 부정하시는 건?”
뜨끔했다. 오메가인 램파드는 커틀러에게 각인했고, 그에게 해를 끼치면 마음이 괴로웠다. 강간 사주를 한 커틀러보다 혐오스러운 건 그를 두둔하는 자기 자신이었고,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오기 부리고 있었다. 램파드는 이를 악물었다.
“됐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다른 알파에게 안기셨습니까?”
커틀러의 말 한 마디에 램파드의 눈썹이 불쾌한 듯 움직였다.
“베타한테는요? 제가 없는 동안 폐하께서 쓰러지셨고,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웠다더군요. 단 한 명의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휴식을 취하러 가셨다고 하던데,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네게 알려 줄 필요는 없어. 본론만 말하고 나가.”
“기분이 언짢으신가 보군요. 마음에 드실 걸 구해 왔습니다.”
“그놈의 목이라도 가져온 거냐.”
“가져올 걸 그랬군요.”
램파드는 커틀러를 노려봤다. 커틀러가 북부 지방에 신경 쓸 동안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서민 놈이 어떻게 숨었는지 의외로 찾기 힘들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신 겁니까. 진심으로 그 서민을 걱정하는 거 같잖습니까.”
“그래, 솔직히 말해 너보단 신경 쓰여. 내 낭군이 될 사람이니까.”
“그런데 작은 흔적조차 찾으시지 못한 겁니까. 애쉬는 북쪽 지방을 통해 왕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커틀러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그 안에는 흰색의 약이 자리 잡았다.
“서민 얘긴 이만 됐습니다. 이건 기존에 드시던 약보다 더 강한 억제제입니다. 짝을 찾은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이 오면 힘들다고 하니 미리 먹어 두십시오.”
“너의 뭘 믿고?”
충실한 부하로 위장한 커틀러는 숨겨진 발톱을 드러냈다. 주인을 할퀼 태도를 취했으니까 전처럼 그에게 호의적일 필요는 없다. 가슴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음이 어떠한들 램파드는 커틀러를 인정하면 안 됐기에 그를 강하게 부정하여 악의를 내뿜었다.
미소를 지운 커틀러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램파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책상 곁에 놓아 둔 검을 뽑아 들었지만, 커틀러가 램파드의 멱살을 쥐는 게 더 빨랐다.
“칼을 들지 않은 맨손으로는 절 이기지 못합니다. 그게 오메가와 알파의 차이니까.”
커틀러는 램파드를 거칠게 바닥으로 끌어 내려 무릎으로 등을 찍어 눌렀다. 램파드는 커틀러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놔!”
커틀러는 바닥으로 함께 굴러떨어진 유리병을 들어 그 안에 들어간 흰 약을 꺼냈다. 그리고 램파드의 입술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먹이기 시작했다. 램파드는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온 커틀러의 손을 강하게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의 상처라 아플 법도 하지만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램파드가 계속 반항하자 손을 빼긴커녕 되레 목 안 깊숙이 넣었다. 목젖에 손가락이 닿자 토기가 올라와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그 틈에 약이 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윽, 쿨럭! 흑… 쿨럭! 쿨럭!”
램파드의 몸 위를 올라탄 커틀러가 비켜 나갔다. 토해 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미끄러지듯 식도 아래로 내려가는 알약의 감촉이 느껴졌다. 뭔지 모르지만, 커틀러가 먹이는 약을 고분고분 먹을 순 없었다. 억지로라도 토하기 위해 손가락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틈에 커틀러는 물을 가지고 와 램파드에게 건넸다.
“다치게 하는 건 싫으니까 고분고분 드십시오. 다음에 또 저항하면 뒷구멍으로 약을 넣어 먹일 겁니다.”
“큭, 개 같은 새끼가…….”
커틀러는 자신의 손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램파드를 무덤덤하게 바라봤다. 아직도 숨이 진정되지 않은 램파드는 커틀러를 사납게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 속에 독사를 품고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권력과 지위를 줬다니. 사사로운 감정에 눈이 멀어 보았어야 할 부분을 모두 놓친 것이다.
“각인 상대에게 개라니,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난 네놈 따위에게…….”
각인하지 않았다. 당당히 말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커틀러가 몰랐을 리 없다.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램파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너와 꽤 오랫동안 지냈고, 그 세월을 통틀어 친구로 생각했다.”
턱을 치켜든 커틀러는 창밖을 바라보며 피가 묻은 손을 꼼꼼히 닦았다. 오랜 세월 어울려 온 상대였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커틀러의 속을 지금은 알기 힘들었다. 이해한 모습이 전부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하시는군요. 친구를 보는 눈이 아니었잖습니까. 절 당신의 알파로 봤으면서.”
말문이 막힌 램파드는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그렇게나 원했는데 이때껏 모른 척하고 있었다니. 귀한 우성 알파니까 이도 저도 아닌 오메가를 안을 수 없던 건가. 램파드는 참담한 심정에 입 안쪽 볼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아 낸 커틀러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카데미에서부터였죠. 저한테 다른 이들과 다른 웃음을 보여 줬던 것이요. 처음 볼 땐 가시를 세워 잔뜩 경계하더니, 한 번 풀어지고 나서는 곁에 있던 다른 이들도 알아차릴 정도로 절 사랑스럽게 보셨단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눈치채지 못한 건 둔한 폐하뿐이시죠.”
그는 램파드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가까이 다가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똑바로 바라보는 통에 시선을 피한 건 램파드였다.
“쿠와트 숲에서 겪은 일로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마음은 폐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쭉 그대로인데.”
“…….”
“아직 절 보는 시선이 바뀌지 않았단 건 알고 계십니까?”
정곡을 찔린 램파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런 억제제가 아닌 저를 원하는 마음도 그대로시잖아요.”
강하게 부정해야 하건만 램파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낮게 속삭이는 커틀러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입술끼리의 거리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을 남겼을 때 램파드가 고개를 돌렸다. 커틀러는 입꼬리를 완만하게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계시는군요.”
“설레서 두근거리는 게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어련하시겠습니까.”
피식 웃는 커틀러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왔다. 두 번째는 피하지 않았고, 입술끼리 부딪쳤다. 말랑한 입술이 닿자 비어 있던 심장 안에 피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나 원했던 관계였다. 따뜻한 피로 꽉 들어찬 심장은 기분 좋게 두근거리며 이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서로의 온기만을 전하며 가볍게 맞닿은 입술이 떨어졌다. 살짝씩 닿는 속눈썹이 간지러웠다.
“아직도 제 착각입니까?”
“……그래.”
“거짓말이 서투시네요, 램파드 폐하.”
기다린 세월이 얼만데, 커틀러에게 쏟아 낼 말은 하루종일 떠들어도 부족했다. 램파드가 시동을 걸자 변명을 듣기 싫은 건 커틀러 쪽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입술로 램파드가 내뱉으려는 말을 막아 버렸다. 커틀러는 빈틈없이 부드럽게 메운 입술을 움직이며 램파드의 코트를 벗기기 시작했다.
똑딱, 단단히 이어져 있던 단추가 풀어지는 소리가 띄엄띄엄 들린다. 짙은 남색의 코트가 벗겨지고, 안쪽에 입고 있는 하얀 셔츠가 드러났다. 겉옷 하나가 벗겨졌을 뿐인데 램파드의 가슴에서 들리는 소리가 더욱 큰 듯했다.
셔츠를 벗겨 내면 속살을 내보일 거다. 흰 셔츠의 단추가 세 개째 풀어 내려졌을 때, 램파드가 그를 피해 몸을 빼냈다. 몸이 멀어지지 않도록 램파드의 허리를 붙잡은 커틀러가 말했다.
“이제 와서 겁먹으신 건 아닐 테고…….”
“네 멋대로 지껄이지 마. 페로몬 때문이니까.”
“방금 먹인 약은 효과가 뛰어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셔츠를 풀어 내려던 손은 곧바로 램파드의 바지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따뜻한 자신의 피부보다 상대적으로 차가운 손이 닿자 램파드는 움찔, 잘게 떨었다.
더듬더듬, 천천히 안쪽으로 파고든 커틀러의 손가락이 다물려 있는 항문 입구를 꾹 눌렀다. 램파드는 커틀러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비집고 들어오는 손가락의 모양을 천천히 그려 냈다. 그저 손가락을 넣었을 뿐인데 잔뜩 기대한 램파드의 몸에서 애액이 흘러나와 손가락을 흠뻑 적셨다.
“보십시오. 괜찮지 않습니까.”
커틀러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램파드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낮게 속삭였다. 램파드는 아래 감촉을 느끼느라 목소리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부드러운 내벽은 하나밖에 들어오지 않은 손가락을 오물오물, 따뜻하게 감쌌다. 액이 천천히 흘러나왔고, 들어찬 손가락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렇게 해 드리는 거 오랜만이군요. 기분 좋으십니까?”
“별로… 하읏!”
단번에 손가락 두 개가 더 비집고 들어왔다. 커틀러의 품 안에 있던 램파드의 몸이 크게 튀어 올랐다. 몇 번의 자극으로 램파드의 바지 앞섶이 눈에 띌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발기하셨네요.”
고작 손가락 몇 개 들어갔을 뿐인데.
뒷말을 내뱉지 않아도 커틀러의 눈빛만으로도 환청이 들렸다. 양손을 들어 올린 램파드가 딱 붙어 있는 커틀러의 단단한 가슴을 힘차게 밀어냈다.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우성 알파가 순순히 물러났다. 거부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평생 커틀러에게 옭매여 있을지도 모른다.
숨을 크게 들이쉰 램파드가 말했다.
“문부터 잠가.”
잔잔한 눈웃음을 지은 커틀러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 하나뿐인 출입구를 잠그고 커튼까지 꼼꼼하게 쳤다. 밝은 달빛이 가려지자 방 안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되돌아온 커틀러가 램파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 했다. 한 손을 들어 올린 램파드가 그의 입술을 막았다.
“또 뭡니까.”
“바닥에서 하면 등 아파.”
“소파로 이동하죠.”
그는 아카데미 시절 첫 히트 사이클이 찾아온 램파드에게 해 줬던 거와 똑같이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근처에 있는 소파로 이동했다. 램파드를 눕힌 커틀러는 신발을 벗겨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옷을 벗으며 램파드의 몸 위에 올라탔다. 금색 어깨 술이 달린 기사단장 코트를 벗고 안쪽에 입고 있는 셔츠를 풀어헤치자 단련된 근육으로 잘 짜인 몸이 등장했다.
직선으로 튀어나온 쇄골과 너른 어깨. 연한 색상의 제복 안에 숨겨져 있던 단단해 보이는 가슴과 배 근육은 모두 낯선 풍경이었다. 키도 체형도 비슷해, 안쪽도 똑같을 거라 생각했건만 전혀 딴판이다. 커틀러가 숨을 쉴 때마다 잘 짜인 복근이 꿈틀댔다. 낯모를 부끄러움에 램파드의 몸에 피가 빨리 돌기 시작했다. 램파드는 시선을 피했다.
“더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책상 맨 아래 칸.”
상의를 벗은 커틀러가 옷가지를 대충 걸쳐 놓고, 램파드가 지시한 책상으로 이동했다. 아카데미 기숙사에서 억제제를 숨겨 놓았던 것과 똑같이 잔뜩 쌓인 서류 뭉치 아래. 얇은 나무판으로 위장 바닥을 하나 만들어 작은 상자를 숨겨 놓았다. 그 안에는 노란 액체가 들어간 자그마한 유리병이 두 개 놓였다. 커틀러는 그중 하나를 골라 좁은 병 입구를 잡고 램파드에게 다가왔다.
“말씀하시는 게 이 병입니까? 폐하께서는 이런 것으로 적실 필요 없지 않습니까. 오메가니까요.”
“그건 약이다. 두 병 모두 챙겨 와.”
억제제는 방금 먹었으니 또 챙겨 먹을 건 없을 터. 커틀러는 찰랑거리는 노란 액체를 바라보았다.
“피임제군요. 어떤 알파랑 붙어먹을 생각에 집무실에 이런 걸 놔둔 겁니까.”
램파드가 피임제를 준비해 둔 이유는 오롯이 커틀러 때문이었다. 본능이란 건 쉽게 억제할 수 없는 거니까. 언젠가 터져 나온 성욕이 그를 향할 때 챙겨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뒀다. 히트 사이클이 아니니까 임신할 확률은 낮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야 했다.
노란 액체를 무료하게 내려다보던 커틀러가 입구를 막고 있는 마개를 열었다. 퐁, 막힌 유리병이 뚫리는 소리가 났고 이어 액체가 쪼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건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제 아이를 배셔야죠.”
“뭐……?”
“놀라실 일은 아닙니다. 다른 오메가와의 사이에서 얻은 제 사생아라 밝히고, 콘테 공작가의 후계자로 키울 테니까 낳기만 해 주십시오.”
커틀러는 병을 크게 기울여 남은 피임제를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 버렸다. 투명한 빈 유리병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추락했고, 굴렀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램파드의 어깨를 강하게 짓누른 커틀러가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커틀러!”
버클을 푼 그가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으로 램파드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둘 다 검술을 연마하고 몸을 단련했지만, 태생이 달라 오메가의 힘으로는 우성 알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지금 이 상황을 누군가에게 들킬 생각입니까?”
“읍…!”
바지와 함께 속옷까지 모두 벗겨진 램파드의 다리가 벌려졌고, 그사이에 반쯤 발기한 좆이 다가왔다. 커틀러의 페니스를 마주한 램파드의 동공이 점차 확대됐다. 남자의 성기라면 많이 보았지만 저런 물건은 처음이었다.
처음 보는 그의 페니스는 곡선 없이 길게 쭉 뻗었으며 우락한 힘줄이 돋았다. 대물은 꽤 여러 번 보았지만, 저런 크기는 처음이었다. 여러 번 남근을 받아 본 구멍이 겁을 먹어 바짝 조일 정도로 두려운 크기였다. 흉악한 크기도 그렇지만, 알파의 좆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곱상한 외모만큼이나 곧게 뻗은 굵은 페니스의 겉면에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난 것 같았다.
한 번 당한 경험이 있어 쓰라린 통증이 벌써 밀려오는 듯했다. 입이 틀어 막힌 램파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뭘 그리 겁먹으셨습니까. 섹스 같은 건 많이 해 보셨잖아요.”
“흐읍… 읍……!”
“저에게 자랑하듯 떠벌리실 땐 언제고, 두려워하시다니. 램파드 폐하답지 않군요.”
변명하지 못하게 입을 강하게 틀어막은 커틀러가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쥐어 잡아 항문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허리를 움직여 천천히 램파드의 내장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단정한 손가락 사이 좁다란 빈틈으로 바람 빠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읍… 흣… 으읏…….”
다물린 주름을 벌리며 알파의 사나운 페로몬이 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뒤쪽에 커틀러의 물건이 닿자 램파드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오래전부터 원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관계였다. 한 번 그를 받아들이게 되면 더 심한 짓을 해도 용서하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램파드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주 약간만 이어졌을 뿐인데 벅찬 환희와 감동이 느껴져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댔다. 끔직하다는 머리와 따로 노는 램파드의 몸은 그의 좆을 받아들이기 위해 힘을 풀었다.
몸속으로 들어온 두꺼운 귀두 끝이 내벽을 꾹 눌렀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던 램파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제 얌전해지셨네요.”
그는 막은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죽어 버려!”
“본심이 아니면서.”
비웃는 듯 앞니를 살짝 드러낸 커틀러가 허리를 움직였다. 살점을 파고 들어오는 알파의 좆 때문에 램파드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몸 안에 꽉 끼워진 페니스가 내벽을 슥슥 문지르며 움직였다.
“하, 하읏… 으, 으윽!”
퍼억, 퍽, 퍽! 아래서 위로 치고 올라오자 램파드의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많이 대 줬으면서 생각보다 좁군요. 속에서 꽉 조여들어 잘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램파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의 구멍 규격은 평범하고, 네놈 게 크다고 소릴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터운 성기가 내벽을 벌리고 성감을 처음부터 누르는 통에 입만 벌리면 신음이 튀어나왔다.
“으, 읏… 읏……. 아… 아아, 앗!”
성교에 익숙한 램파드의 몸이 버거울 정도로 큰 페니스였다. 몸이 편해지기 위해 낮게 숨을 쉬며 천천히 힘을 풀었고, 커틀러의 배가 가까이 기울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조금 남아 있는 틈이 꽉 메워지고, 아랫배 안에 가득 차자 신경을 긁는 듯한 자극이 왔다.
램파드는 쾌락을 무시하려 애썼지만, 페니스의 움직임에 맞춰 발가락이 튀어 오르며 안쪽으로 오므라들었다. 온몸에 힘을 줬지만 신경은 계속 쭈뼛 서서 소름 돋았다.
커틀러가 램파드의 한쪽 다리를 구부리게 하여 발바닥을 핥았다. 그는 보드라운 램파드의 피부가 마음에 들어 천천히 혀로 쓸어 올리며 발끝까지 다다랐고, 그대로 발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뺐다. 커틀러의 입 안에 들어간 엄지발가락이 말랑말랑하게 녹는 기분이 들었다.
“폐하의 페로몬을 맡을 수 없는 게 아쉽긴 하네요.”
“후으… 읏, 으…….”
발을 붙잡은 손을 내려놓은 커틀러가 이번에는 램파드의 허벅지를 좌우로 쫙 벌렸다. 내부를 찌르고 있는 페니스가 안쪽으로 미끄러지며 파고들었다. 커틀러의 허리 짓에 따라 램파드의 양다리가 덜렁거렸고, 쯔걱쯔걱 액과 살이 달라붙는 진득한 소리가 났다. 커틀러의 얼굴도 슬슬 붉어졌다.
커틀러는 자신의 행동에 반응하는 오메가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램파드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벌써 임신한 거처럼 불룩 튀어나왔습니다.”
두툼한 성기가 내장 안에 들어찼으니 그만큼 배가 살짝 불렀다.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램파드의 뱃가죽이 호흡에 맞춰 움직였다.
“…앗!”
“여기 제 물건을 품고 계시죠?”
커틀러가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읏?”
쾌감을 억누르는 데 집중하고 있는 램파드는 화들짝 놀라 신음을 토해 냈다. 좆이 들어간 아랫배를 꾹 누르자 꼿꼿하게 세워진 램파드의 성기에서 흰 액이 질질 흘러나왔다.
커틀러는 램파드가 흘린 정액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발달한 램파드의 복근에 희뿌연 정액을 치덕치덕 발랐다. 그는 방울진 램파드의 정액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지르며 말했다.
“사정해도 곧바로 서네요. 처음인 제가 잘하는 겁니까. 아니라면 폐하가 잘 느끼는 예민한 몸을 가진 겁니까.”
램파드는 흐릿해진 시선으로 배 위로 솟구친 자신의 성기를 바라봤다. 한 번 사정을 했지만,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다. 몸속에 삽입된 페니스를 빼낼 때까지 반응하며 서 있을 것이다.
멈췄던 커틀러가 다시 움직였다. 퍽, 퍽, 퍼억.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내벽이 자극되는 감촉은 버티기 힘들었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폐하.”
“……으, 으읏… 흣… 닥… 쳐!”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걸요.”
“듣고 싶… 지… 읏. 하으, 으… 않아……. 말하지 마.”
온 신경이 아랫배에 집중됐다. 경계하는 머리와 달리 각인 상대인 커틀러의 좆이 내부를 쑤시는 기분은 신경이 녹아내릴 정도로 좋았다. 상대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로 대화를 진행하다 보면 마음속 숨겨 놓은 본심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커틀러가 램파드의 발목을 잡고 위로 끌어 올려 자세를 바꿨다. 완만한 엉덩이가 위쪽으로 향했고, 그 위에 성기를 꽂으며 내려앉았다. 자신의 무게까지 더해 깊게 파고들 셈인가 본데, 남은 틈이 없어 속살을 찌르기만 했다. 주름진 내벽이 쫙 펴진 듯한 감각. 온몸의 세포가 커틀러의 페로몬과 뒤섞여 기쁘게 경련했고, 세워진 램파드의 성기에서 정액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사정했지만 쾌락은 끝나지 않았다. 아래부터 화끈한 감각이 온몸에 퍼져 들어 램파드가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힛!”
성기를 빼냈다, 넣었다. 커틀러가 단련된 허벅지에 힘을 줘 강하게 움직였다. 세찬 움직임에 램파드의 정신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벌써 또 이렇게 섰네요.”
커틀러가 램파드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갈라진 틈을 엄지로 꾹 눌렀고, 행동에 맞춰 램파드는 아래를 연신 조였다.
“우읍… 흐윽, 흣.”
신음이 새어 나가지 못하게 입을 막은 손에 힘을 줘 눌렀다.
“기분 좋으십니까?”
“후으… 끗.”
“솔직히 여기보단…….”
남근에 가해졌던 자극이 사라졌다. 곧이어 부풀어 오른 항문 주름을 찌르는지 아래에서 자극이 찌르르 올라왔다.
“여길 찌르는 게 더 좋죠?”
커틀러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램파드는 허벅지를 자신의 배로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리려 했지만 제지당했다. 커틀러가 손으로 찌르는 부분부터 폭발하는 듯한 감각이 터져 아랫배가 뜨거웠다. 성기를 머금은 내벽이 램파드의 피부와 마찬가지로 달달 떨었다.
“이렇게나 좋아하시면서, 왜 그렇게 절 거부하셨을까.”
“흐응… 응… 으, 으… 으으읏.”
“동갑이라서요?”
“하… 으, 으읏.”
“제 얼굴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빈틈없이 꽉 들어찬 입구를 건드리던 손가락이 찔러 들어왔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손톱이 밀려들어 오자 터져 나온 쾌락이 머리까지 솟구쳤다. 온 신경을 세워 쾌감을 버티는 램파드의 몸이 연신 꿈틀댔고, 결국 양손을 놓아 버렸다.
“으, 으… 아, 아흐. 시, 시… 시… 시러……. 어, 어… 어! 그만! 그만해, 커틀러!”
“멋진 표정이네요. 저보다 먼저 마주했던 이들을 모조리 찾아 죽여 버리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하으… 응… 으, 흐으! 손… 손… 가락. 히익, 빼! 하으!”
빼라는 말과 반대로 손가락이 안쪽으로 치고 들어왔다. 파고든 손가락의 단단한 뼈마디가 느껴져 온몸의 솜털이 삐죽 서는 느낌이었다. 커틀러는 내부에 들어간 손가락과 함께 페니스를 움직였다.
“아, 아… 앗! 아!”
성기와 함께 단단한 뼈마디가 동시에 느껴졌다. 서로 엇박자로 움직여 대는 통에 계속 밀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램파드의 고개가 뒤로 꺾인 채 흔들렸다. 배 속을 파고든 살덩어리가 돌아다니며 자신의 흔적을 뿌리듯 페로몬을 퍼뜨렸다. 찌릿하게 퍼지는 체향에 취해 정신이 아득해진다.
“히잇, 힉, 히, 흣… 흐읏! 좋… 좋아, 좋아. 아!”
“정해진 짝의 좆이 파고 들어갔으니 당연히 기분 좋겠죠.”
“흐읏, 아… 아니……. 하읏! 내 짝은… 아… 앗!”
“다른 사람들과 떡 칠 때도 이렇게 기분 좋으셨습니까?”
“으흑, 흑……. …흐, 아니… 아냐… 앗!”
“애쉬랑은요?”
솔직히 허리 움직임은 애쉬 쪽이 훨씬 좋았지만, 페로몬은 커틀러가 월등했다. 램파드가 잠시 생각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커틀러는 자신의 오메가의 등을 감싸 페니스를 콱콱 박았다.
“하으… 아, 아… 커틀러…….”
“읏. 하아, 폐하께서 제 이름을 불러 주시니 기분 좋네요.”
“힛, 힉… 안… 안 돼. 악!”
“무엇을요.”
수많은 남자의 물건을 받아 봤으니까 잘 알았다. 램파드의 몸을 자극하고 있는 남근은 곧 씨가 들어찬 물을 뿜어낼 거였다. 임신 걱정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던 홍조가 점차 가라앉았다.
커틀러는 램파드의 이마에 달라붙은 땀에 절은 앞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 줬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플래티넘 블론드는 그의 손길에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벌렁였던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여러 번 이마를 쓰다듬으며 볼에 입을 맞췄다.
“임신할까 봐 걱정하는 겁니까.”
“하아… 하, 안… 안에는 싸지 마…….”
“히트 사이클이 아니잖습니까. 임신할 확률은 지극히 낮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멈췄던 움직임이 계속됐다. 배끼리 달라붙을 땐 램파드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잘게 떨었다.
“…흐윽, 응……. 으흑… 그렇… 지만……. 읏!”
“마음 같아서는 제 첫 경험으로 당신의 배를 부풀게 하고 싶지만요.”
커틀러의 손길에 긴장이 풀린 램파드가 눈을 크게 떴다. 들어찬 성기가 이상했다.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은 램파드조차 처음 겪는 생소한 느낌이었다.
“잠… 깐… 커틀러……. 뭐… 뭘! 아래, 이상… 해……. 아, 아… 앗!”
장 안을 들어찬 남근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내벽이 벌려졌다. 이 이상 커질 리가 없는데.
“아악!”
착각이 아닌 게 성기가 점점 부풀었고, 주름진 입구부터 질구 안이 한계까지 벌려졌다. 오메가의 몸으론 성교할 때 통증을 앓지 않을 터인데, 내벽이 강제로 벌려지고, 몸이 쪼개지는 통증이 일었다.
곧이어 안쪽에서 시작된 통증은 뼈를 타고 하반신 전체에 뻗쳤다. 램파드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꽉 끌어안는 통에 도망갈 수 없었다. 주먹을 쥐어 커틀러의 가슴을 내려쳤지만 소용없었다.
“얼른 놔… 줘……. 흐읏. 아래… 아파……. 찢길 거 같… 아! 하읏, 아파. 아프다고! 앗!”
램파드의 하반신이 경련하며 덜덜 떨었다. 쾌락과 함께 크나큰 통증이 일어 정신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절로 맺혔다. 커틀러는 혀를 내밀어 램파드의 눈가를 핥았다.
질구가 있는 오메가의 몸은 성교에 익숙해 좆만 받으면 애액이 질질 흘러나와 아프지 않다. 지금 통증은 아래가 찢어졌을 게 분명할 정도로 아팠다. 램파드는 막연하게 이 행위가 무엇임을 알아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하아… 노팅해도 될까요.”
“히잇, 흐… 아… 안 돼……. 빼, 빼……. 빼라… 고! 하읏! 아! 커틀러, 제발! 빼!”
“이미 늦은 거 같지만요. 그도 그럴 게 전 처음이니까요.”
“미친……. 씨발 새… 끼. 흑, 허윽, 읏… 아…….”
램파드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그가 얼굴을 꽉 끌어안았다. 램파드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커틀러의 넓은 어깨를 이빨로 힘껏 깨물었다. 원하는 거와 달리 그는 램파드를 풀어 주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끝날 때까지 그러고 계십시오.”
이만한 고통을 주었는데도 알파의 좆은 여전히 팽창해 받아들이는 오메가의 양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생살을 짓이기자 아팠고, 꼬챙이에 꽂혀 있는 기분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반신에 있는 통점을 모조리 건드리는지 쓰라림이 계속됐다.
고통에 조금 익숙해지자 흉기 같은 좆에서 정액이 꿀렁꿀렁 나왔다. 관계를 맺었던 베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내부를 가득 채웠는데 한 방울도 빠져나오지 않는다. 부풀어 오른 알파의 성기가 포궁까지 가는 내부 질구를 모두 꽉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정액은 그대로 램파드의 아랫배를 채웠고, 조금만 움직여도 많은 양의 정액이 몸속에서 꿀렁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알파의 정액을 받아 내는 하반신이 짜릿했다. 이제는 통증과 함께 강한 쾌락이 동반되었고, 톡 쏘는 페로몬 향에 취한 램파드는 입을 떼어 냈다.
커틀러의 어깨에는 핏물이 밴 이빨 자국이 크게 남았다. 통증이 있을 법했지만 그는 앓는 소리도 내지 않고, 램파드를 끌어안았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램파드는 숨넘어가듯 꺽꺽, 목 안을 울렸고, 커틀러는 볼에 입을 맞췄다.
“……움직이지 마. …읏.”
지금의 행위가 너무 괴로워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커틀러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부가 함께 움직이는데 살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이 아팠다.
“폐하,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허읏… 윽, 움… 직… 이면……. 아!”
한계까지 벌려진 내부가 찢기는 듯했다. 칼로 아랫도리를 난도하는 것처럼, 통증에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램파드는 눈을 꽉 감고 고통을 견뎠다. 하반신을 단단하게 고정한 커틀러가 팔을 천천히 움직여 램파드가 자신의 품에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만들어 줬다.
“윽… 흐윽… 읏, 아파……. 제발 제발, 제발! 가만히 있어!”
“…자세를 바꿔 볼까요. 엎드리시면 좀 편할 겁니다. 문헌에는 그렇게 적혀 있더군요.”
커틀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램파드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 상태로 어떻게 자세를 바꾼다고. 그보다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에 커틀러 앞에서 네발로 기고 싶진 않았다.
램파드를 부드럽게 내려다보는 커틀러가 미소를 지으며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램파드의 피부가 튀어 올랐고, 쓰다듬이 여러 번 반복되자 점차 가라앉았다.
노팅의 통증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의 손길에 신경이 천천히 깨어났다. 자신은 지금 배 속에 커틀러의 씨를 잔뜩 받아들인 상태였다. 몸속에서 그의 냄새가 퍼져 나오자 어떤 행위를 했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커틀러와 닿고 있는 성기가 움찔, 움찔 떨었다. 램파드의 반응에 커틀러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영원히 끼워져 있을 것만 같았던 알파의 좆이 점점 원래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램파드의 몸 밖으로 커틀러의 성기가 나오자 많은 양의 정액이 왈칵 쏟아졌다. 내부에 얼마만큼 싸 내렸는지 질질 흘러나온 정액은 항문 밖 허벅지, 다리, 발목까지 빠르게 흘러내렸다.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온 커틀러가 램파드의 몸을 부드럽게 닦아 냈다.
“어떠셨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진짜 베어 버리고 싶으니까.”
“전 정말 좋았습니다. 솔직히 넣은 채로 온종일 있고 싶을 정도더군요.”
몸이 가라앉은 램파드는 커틀러의 턱을 발로 차 버렸다. 한 대 얻어맞은 커틀러는 한 손으로 턱을 감싸며 웃었다. 여전히 램파드의 다리 한쪽을 잡고 있던 그는 옆으로 쫙 벌렸다. 다물어지지 못하는 입구에서는 정액이 흘러나왔다.
“제 씨를 계속 물고 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얌전히 계십시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장 안을 정액으로 적셔 놓은 듯해 찝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램파드는 커틀러에게 몸을 맡겼고, 그는 수건을 든 손을 움직였다.
“몇 번이나 간 겁니까. 제 정액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입 닥치고 몸만 닦아 내면 될 터인데, 저 혼자 들뜬 커틀러가 계속 나불댔다.
“다물라고 하지 않았나…….”
처음 겪는 노팅에 살과 뼈가 한계 이상으로 벌려 아팠지만 강렬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 덕분에 쾌락이 뒤섞였다. 램파드는 노팅당하며 몇 번이나 사정했다. 아무리 우성 알파라고 하나 동정을 상대로 쾌락을 느껴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너… 정말 처음이 맞는 거냐.”
머릿속으로 생각한 본심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와 버렸다.
“저는 다른 사람을 상대로는 서지도 않습니다.”
“……뭐?”
“동정을 상대로 쾌감을 느껴 분하신 겁니까.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도록 연습은 꾸준히 해 왔습니다.”
램파드가 눈썹을 치켜뜨자 오해를 사기 싫은 그는 냉큼 고했다.
“제 처음은 폐하께 드리기 위해 정교하게 만든 인형과 연습했으니 외도를 했다고 느끼지 마십시오.”
또라이 같은 행각에 말문이 막힌 램파드는 인상을 팍 쓰고 커틀러를 바라봤다. 램파드의 시선을 무시한 커틀러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유리병을 들어 올려,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렸다. 안쪽에는 하얀색 약이 들어차 있었다. 하나는 램파드의 목 안으로 넘어갔으니 남은 알은 이제 두 개.
“전처럼 한꺼번에 여러 알을 드실 필요 없이 하루에 한 알만 드십시오. 약이 떨어지면 절 부르시면 됩니다. 찾아오셔도 좋고요.”
램파드의 집무실 밖으로 나가던 커틀러가 잠시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 혹시 방금 전 관계로 임신을 하셨대도 절 부르십시오.”
“히트 사이클도 아니고 겨우 노팅 한 번으로… 임신할 리 없어.”
“혹시 모르죠.”
커틀러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뒤 방 밖으로 나갔다. 램파드는 책상 위에 올라간 유리병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가 원하는 대로 된 것만 같아 못마땅했다.
다음 날, 침상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진정하기 위해 볼을 문질렀다. 제대로 사고 쳤으니까. 어젯밤 커틀러를 받아들이며 녹아내릴 뻔한 몸 안쪽이 감각을 기억해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전날 밤일을 회상하면 혼자서 열락에 빠져들지도 몰랐다. 떠오르려 하는 온기와 손길을 떨쳐 내고자 눈을 떴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숨겨 둔 약병을 꺼내 커틀러가 건넨 억제제를 하나 먹었다.
“한스.”
“예, 램파드 폐하. 부르셨사옵니까.”
한스를 불렀건만 처음 보는 시종이 침실로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 보니 한스는 애쉬를 찾으러 보냈지. 램파드는 스스로가 지시했던 내용을 뒤늦게 떠올렸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상 썼다.
“시장하십니까? 식사를 내오려면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만 차를 먼저 준비할까요?”
“차는 됐다. 아침 회의 준비를 하여라.”
“알겠습니다.”
램파드의 명령에 시종은 정복을 준비하고 채비를 도왔다. 분주히 손을 움직이는 시종은 오늘 하루 램파드의 일정을 이야기했다.
아침 회의 후에는 폭우로 피해를 본 지역에 대한 보고서를 처리해야 한다. 이후 개인적으로 램파드를 알현할 귀족과 면담하고, 열흘 뒤 있을 황실 기사단 임명식 준비를 지시하면 된다.
다행히 화이트 테일과 관련된 정무는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커틀러를 봐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램파드는 커틀러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마지막의 막바지에서 다다라 커틀러를 거부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건만. 스스로가 정해 둔 선을 넘고 커틀러를 끌어들인 것은 램파드의 의지였다.
이때껏 버텨 왔건만 그 한 번을 못 참고 받아들이다니. 본인이 결정한 일이지만 후회가 막심했다.
커틀러를 만나고 싶지 않다.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마음으로 그를 마주했다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흠뻑 빠져들 것만 같았다. 고작 쾌락 몇 번 느꼈다고, 그에게 끌리는 것은 아녔다. 어제 자신을 탐하는 커틀러의 눈동자에서 전에 없을 욕망을 엿봐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램파드가 그토록 바란 커틀러의 각인이 이뤄졌다면. 커틀러의 마음속에 램파드 클로비스가 자리 잡은 것이 확실하다면. 창관을 없애겠단 목적 따윈 모두 다 버리고, 황금관을 내려놓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온전히 믿고 맡기면 안 되기에 커틀러를 보면 안 됐다.
“제국의 태양 램파드 클로비스 폐하를 뵙습니다.”
아침 회의를 끝내고, 폭우로 피해를 본 지역에 대한 보고를 들으며 집무실로 이동하던 램파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맞닥뜨렸다.
절도 있는 자세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 커틀러를 마주한 순간 램파드의 얼굴 전체가 열이 오른 듯 화끈거렸다. 뒷구멍으로 남자를 받아들인 적이 한두 번 아닐 텐데. 어째서 어젯밤의 관계는 이토록이나 신경 쓰이고 마음이 동하는지. 램파드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숨도 멈춘 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허리를 편 커틀러가 램파드와 눈을 마주쳤다. 붉어진 귓불을 숨기느라 고개를 치켜든 램파드와 달리 그는 아무런 감흥 없는 담담한 시선이었다.
“소신은 기사단 회의가 있어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마지막으로 목 인사를 가볍게 한 커틀러가 떠나자 멈춰 있던 램파드가 움직였다. 어젯밤 일을 신경 쓰는 건 램파드 혼자뿐인 듯했다. 몸이 이어졌다고 마음마저 연관된 것처럼 기뻐하며 두근거렸단 사실을 램파드는 뒤늦게 깨달았다.
커틀러의 모습이 사라졌고, 램파드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잔뜩 화난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뭘 또 혼자서 착각한 것인지. 여전히 그의 마음은 변함없건만. 관계에 진전이 생겼다며 기대감을 부풀린 자신이 멍청할 정도로 환멸 났다.
“램파드 폐하, 집무실로 이동하시는 게 아니옵니까?”
몇 발짝 떨어져 램파드를 따르던 시종이 말했다. 램파드는 꾹 다문 입을 떼어 냈다.
“침실로 갈 것이다. 곧바로 이동할 테니 자네는 먼저 집무실에 가 있도록 해라.”
화가 난 게 분명한 램파드의 목소리에 시종은 눈치를 보며 시선을 낮췄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집무실에 입이 무거운 황의를 골라 한 명 대기시키도록.”
지시를 받은 시종이 떠났고, 침실로 돌아온 램파드는 커틀러가 건네준 약병을 꺼내 들었다.
조금 전 커틀러를 마주한 순간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심장이 요동쳤고 몸 전체가 뜨거워졌지만, 페로몬 같은 건 내뿜지 않았다. 그가 건넨 약은 뛰어난 효과를 보였지만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커틀러는 억제제를 딱 3일 치만을 준비해 램파드에게 건네줬다. 만나고 싶지 않아도 3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그를 만나야 했다. 약만 건네받으면 상관없는데, 익숙한 페로몬에 취해 버리면 저도 모르게 품속에 안겨 신음을 흘릴 게 분명했다. 안기기 전이라면 모를까, 그의 몸을 알게 된 램파드는 커틀러를 거부할 자신이 없었다.
약을 들고 집무실을 찾자 황의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램파드는 손짓으로 시종을 내보내고 황의와 단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흔치 않은 원료를 사용했군요. 몇 가지 약재를 섞어 조합한 거 같은데 좀 더 조사해 봐야 할 듯합니다.”
“수도에 있는 약재상을 통해 알아보면 되지 않는가?”
“약재상에서 구할 수 있는 약이 아닙니다. 실례지만 램파드 폐하, 이걸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그건 자네가 알 바 아니다. 자네가 할 일은 그 약의 출처와 함께 제조 방법을 찾는 거다.”
“살펴보지 않아도 억제제에 들어가는 기본 약재는 모두 같습니다. 여기서 어떤 재료를 추가로 넣는지는 제작한 사람만이 압니다.”
“사제란 말이군.”
“맞습니다. 종종 오메가가 나오는 귀족 가문은 직접 약을 만들어 먹기도 하지요. 이것 또한 그중 하나인 듯한데, 가문의 일원이 아닌 이상 알아내기 힘들 겁니다.”
히트 사이클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진 약재가 정해져 있단 건 램파드 또한 잘 안다. 원료로 사용되는 약재는 수확량이 적어 억제제 값을 자연스레 비싸게 만들었다.
대체할 식물이 없는 약재. 커틀러는 거기에 무엇을 섞었기에 여러 알을 먹고 베타와 뒹굴어야 예방되던 램파드의 몸이 곧바로 안정되었는지. 물어 봤자 순순히 답해 줄 리는 만무했다.
결국, 커틀러와 꼬박꼬박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억제제를 빌미로 램파드의 몸을 원했다. 커틀러가 먼저 원한 거니까 변명거리는 충분했다. 효과가 뛰어난 억제제를 받아야 하니까. 램파드는 못 이기는 척, 몸이 끌리는 대로 그에게 안겼다.
몸을 겹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커틀러를 향한 의심이 녹아내렸다.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일인데, 품에 안겨 신음을 흘리면 과거 따위 어떻든 상관없게 느껴졌다.
기쁨에 굴복하면 더는 베타로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커틀러와 멀어져야 했다.
***
첫 관계를 맺고 밖으로 나온 커틀러는 입구에 서서 사색이 된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늘 앞을 지키고 있는 한스 녀석은 어디 갔는지. 익숙하지 않은 얼굴인 걸 보아하니 어쩌다 한 번 황제의 집무실 앞을 지키게 된 재수가 없는 녀석인 듯했다.
램파드는 전투에 관해서는 남들보다 몇 수나 앞서 생각하지만, 그 외의 곳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무인도에 던져 놓으면 사냥을 하며 잘 살아남을 테지만 반대로 문명이 있는 도심에 던져 놓으면 헤맬 사람이었다. 문만 잠글 생각을 했지 문 앞에 대기시킨 시종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커틀러는 시종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편이 좋았으니까.
“저… 그게…….”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온 커틀러를 바라보는 시종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북부 지방의 귀족을 모조리 몰살시켰다는 커틀러.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을 베어 넘긴 램파드. 살인귀 둘의 관계를 원치 않게 알아 버린 것이었다.
시종의 눈에는 베타와 알파의 이상 관계로 보였다. 손쉬운 입막음을 위해 하찮은 시종의 목 따위를 날려 버릴 게 분명했다.
눈에 띌 정도로 팔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 시종을 내려다보던 커틀러가 씩 웃으며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가져갔다. 쉿, 시종은 숨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시종의 키에 맞춰 머리를 숙인 커틀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몰래 듣고 있었다니, 버릇이 없군. 네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겠지?”
커틀러의 낮은 소곤거림에 입을 틀어막은 시종이 울먹였다. 조용히 하란 명령만 했기에 울며불며 살려 달라 외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살고 싶으냐?”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답했다.
“네가 들은 걸 모두 고하고 다녀라.”
떨고 있는 시종의 이마에 손을 올려 눈가를 덮고 있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 올렸다. 두려움에 가득한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램파드와 같은 색이지만 가치가 확연하게 달라 하찮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소문이 돌고 돌아 다시 내 귀로 들어오게 되면 눈감아 주지. 열흘 주겠다.”
실신하지 않도록 정신을 끌어모은 시종은 답 대신 머리를 세차게 끄덕였다.
손쉬운 입막음을 위해 분명 살해당하리라 생각했다. 어째서 이상 관계를 숨기지 않고 소문내라는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지만 지금 당장 살기 위해 생각을 멈추고 커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머금은 미소를 깡그리 지운 커틀러는 시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커틀러의 눈은 인간이 아닌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날카로운 눈과 닮았다. 경고의 의미를 담은 시선을 거둔 커틀러가 사라지고 나서야 혼자 남은 시종의 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
막 아침 식사 시간이 끝난 시종은 빗자루나 먼지떨이를 잡은 손을 멈추고, 입술만 열심히 움직였다.
“저기, 너 그 소문 들었어?”
“황제 폐하와 화이트 테일의 커틀러 단장과 관련된 이야기 말이지?”
“뭐야, 벌써 알고 있네.”
“소문이 쫙 퍼졌는데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야.”
“알고 있다면 설명 안 해도 되겠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해하기 힘든 관계지만 베타였던 황제나 귀족 중에서 알파를 노리개 삼는 사람이 종종 있었으니까. 우리 같이 아랫것들은 모른 척해야지.”
소문이 퍼지는 데는 열흘까지 필요 없었다. 황궁은 일하는 자가 많고, 자극적인 소문은 조금만 흘려도 쉽게 퍼져 나간다. 3일이 지난 지금은 황궁에서 일하고 있는 시종 대부분이 소문을 알았다. 하지만 커틀러와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귀에 들어가게 하려면 더욱 힘내야 했다. 그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좀 더 흘려보냈다.
“알파가 황제의 성노예가 아니니까 이상하단 거야. 베타가 오메가 노릇을 자처하다니, 얼마나 좋으면 그렇게까지 할까?”
남자의 말에 먼지떨이를 들고 있던 시종이 다시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질이 없는 베타는 알파 거시기를 받아 내기 힘들어.”
“진짜라니까?”
“네가 알파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 소릴 하는 거 같은데……. 예전에 일하던 집 마님이 알파였거든. 아침에 모시러 가면 세워져 있는 게 어찌나 흉악한지. 우리 마님과 달리 커틀러 단장은 남성 알파잖아?”
“그렇지.”
“크기도 더 클 건데, 베타가 받아 냈다간 아랫도리가 찢어져.”
“그런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 되는 소릴 해라. 황실 모독죄로 끌려가고 싶지 않다면 손이나 움직이셔.”
이제 남자의 말에 관심이 없어진 그녀는 먼지떨이로 창틀을 분주하게 털어 댔다. 흥미를 잃은 여자와 달리 남자는 마음이 조였다. 램파드를 베타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는 방문 밖으로 들린 몇 마디 비명으로 상황을 유추해 떠들어 댔다.
“노팅까지 당했다는 말이 돌던데.”
“노팅은 오메가도 아픈데 베타가 어떻게 받아 내냐…….”
말꼬리를 늘어뜨리던 그녀는 무언갈 깨달았다.
“혹시 램파드 폐하께서 오메가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거냐?”
“생각해 봐.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두어 달에 한 번씩 자리를 비우는 게 수상했잖아. 그것도 커틀러 단장과 함께 둘이서만…….”
“아, 그러고 보니 튼튼한 폐하께서 지난달 쓰러지신 일도 있지. 병이라고 하기엔 하루 만에 털고 일어나셨고.”
“봐 봐. 히트 사이클이 찾아와서 쓰러지신 거 같지 않아? 수상하지?”
“그렇지만 아서라, 오메가가 어떻게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자의 눈에 사라졌던 흥미가 감돌았다. 몇 가지 상황을 끼워 맞춰 보니 제법 그럴싸한 소문이 만들어졌다. 제국에서 둘도 없을 램파드의 미모 또한 오메가란 억측에 힘을 실어 주었다. 하지만 램파드가 오메가라면 알파가 득실대는 아카데미에서 버틸 수 없을 것이고, 오랜 기간 전쟁도 치르기 힘들 거였다.
커틀러가 시종에게 준 열흘.
딱 열흘이 채워진 그 날, 소문은 황제에게 흘러 들어왔다. 남들은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 비웃었지만 정작 본인은, 오메가인 램파드는 한 귀로 듣고 흘리기 어려웠다.
***
형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더라.
20년 넘게 잊고 있던 형의 마지막 모습이 꿈속에서 등장했다. 루트비안과 함께 사용하던 방 안에 황제의 로열 가드가 들이닥쳤고, 잠옷 차림이던 황태자가 끌려간다. ‘놓아라.’ 또렷한 발음으로 말하지만, 귀가 막힌 양 기사들의 무례는 멈추지 않았다. 형이 사라지고 나서 혼자 남은 램파드는 한참 울었다.
그렇게나 슬펐는데 지금은 얼굴마저 기억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난 램파드는 자신의 양팔을 기사가 붙잡고 끌고 가는 중이라 느꼈다. 착각이 분명한 통증에 손목을 여러 번 문질렀지만 느낌은 여전했다. 인제 와서 지난 일을 상기해 봤자 바뀌는 건 없을 터인데. 루트비안은 며칠째 같은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났고, 램파드는 지쳐 갔다. 소문에 엉켜든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며 현실로 구현된 것처럼 느꼈다.
형을 창관에 집어넣은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의 일인자인 황제는 램파드 자신이니까 두려워 할 것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남들에게 헛소리인 소문은 램파드가 서 있을 장소를 사라지게 하였다.
모든 게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황좌에서 내려와야 하는 건 당연하고, 정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컸다. 오메가의 몸으로 알파 세력을 꺾었으니까 호된 일을 당할지도 모르고.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음 세대를 잇는 후계자를 낳고, 유력 가문의 정실 혹은 첩으로 들어간단 것. 나중에 들킬 바엔 자진 납세해 콘테 공작 가문에 들어가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적어도 다른 오메가보다는 나은 삶을 살겠지만, 램파드는 그런 인생은 원하지 않는다.
손목을 문지르던 램파드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얻게 된 자리를 지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먼저 태어나 희생된 형을 위해서라도 멈출 생각 따윈 없다. 스스로가 황제로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런 일로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황궁에는 다양한 용도의 건물들이 존재한다. 황제의 휴식처인 화이트 궁전은 황궁 안에 지어진 건물 중 가장 넓은 장소였다. 2층으로 된 건물은 널따란 정원을 끼고 있고, 햇볕이 잘 들어오는 곳에 지어진 덕분에 푸르른 잎들이 풍성했다.
램파드는 화이트 궁전 안, 천장 전체가 유리로 된 침실에 편히 누웠다. 얇은 천이 하늘에서부터 바닥까지 내려와 있어 따가운 태양 볕을 막아 주고, 따뜻한 온기를 머금었다. 주로 낮에 휴식을 취하는 이 궁전은 깃털이 잔뜩 들어간 푹신한 쿠션이 잔뜩 깔려 있어 새 둥지 같은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쿠션 더미 위에 몸을 누이고 편히 눈을 감았다.
방문객이 찾아왔는지 열린 방문 밖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옅게 흘러나오는 페로몬만으로 누군지 알았다. 완벽하게 페로몬을 갈무리할 줄 아는 자가 램파드를 만나러 올 때면 일부러 옅은 흔적을 내보냈다. 내가 왔노라고. 미리 준비를 하라는 신호같이 느껴졌다.
흰색 타일에 제복 구두가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그가 다가오자 램파드의 심장 또한 크게 울렸다.
“램파드 폐하,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솜털처럼 부드러운 쿠션 뭉치에 엎드린 램파드는 방문객을 무시했다. 커틀러가 쿠션 위에 걸터앉았고, 그의 무게만큼 쏠려 기울어졌다. 하지만 램파드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았다.
엎드린 램파드의 부드럽게 휜 등. 그 아래 위치한 곡선이 들어간 허리. 얇은 천으로 대충 덮어 놓은 뽀얀 허벅지 위로 차례차례 알파의 손이 닿았다. 근육 잡힌 허벅지를 주무르던 손은 탄력 있는 엉덩이를 움켜쥐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느껴지는 자극에 램파드는 시트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입술을 가져간 커틀러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계속 주무신다면 이대로 박을 겁니다.”
램파드의 눈꺼풀은 여전히 닫혀 있지만 가느다란 속눈썹과 시트를 쥐고 있던 손가락이 움찔, 동요했다. 마치 제 것인 양 태연하게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밀려들어 왔다. 램파드는 간지러움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엉덩이의 주인이 깨어 있단 걸 알고 있는 커틀러가 능청스레 물어본다.
“대낮인데 아직 채비하지 않으셨다니. 혹시 절 유혹하기 위해 이러고 계시는 겁니까?”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한 번 좆질을 한 커틀러는 얼굴이 보일 때마다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한 번 시작하면 반나절은 그의 품에 안겨 있어야 했다. 결국 램파드는 눈과 입을 떼어 냈다.
“늦잠 잔 거다.”
“이만 일어나십시오. 폐하의 눈을 보고 싶습니다.”
엎드려 있다간 진짜 엉겁결에 몸을 섞을 거 같아 부스스 일어났다. 램파드가 일어남에 따라 몸 위를 덮고 있던 얇은 천이 흘러내렸고, 커틀러는 근처에 있는 가운을 들어 올려 입혀 주었다. 커틀러의 시선은 램파드의 눈에 고정되었다.
“돌멩이처럼 흔한 색의 눈이 볼 게 뭐가 있다고 그러냐. 거울 들고 희귀한 보석인 네 눈동자나 실컷 쳐다봐라.”
“폐하는 자신의 매력을 모르시나 보군요. 새벽안개같이 짙은 눈동자가 당신의 매력을 감소시킨다고 생각합니까? 오히려 흔한 색상의 눈동자라는 점이 당신의 미를 부각한다는 사실을…….”
램파드는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커틀러의 손을 냉큼 떨어뜨렸다. 입 발린 칭송은 질리다 못해 감흥조차 생기지 않는데, 그가 내뱉는 말은 달콤하게 녹아들었다.
“대낮부터 낯부끄러운 소리 하지 마.”
“밤에는 괜찮습니까?”
“밤에도 안 돼.”
“침대에서는.”
“하지 마.”
“저와 한 침대를 쓰실 거란 걸 잘 알고 계시는군요.”
어느새 제비꽃을 닮은 자색 눈동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말씨름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허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거였다. 몇 번 몸을 섞었다고 이렇게나 손길에 익숙해져 버렸다니.
“지금은요?”
“안 돼.”
램파드가 인상을 한껏 찌푸리자 커틀러가 냉큼 입을 맞췄다. 말하지 못하게 빈틈없이 입술을 틀어막고, 고개를 천천히 움직이다 떼어 냈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보이는 건 괜찮습니까?”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또다시 입술이 막혔다. 이번에는 굳게 다물린 램파드의 입술을 커틀러의 말캉한 혀가 비집고 들어와 가지런한 이빨과 잇몸, 이빨 뒤, 입천장까지 세심하게 핥아 냈다.
애무처럼 입 안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혀의 감촉에 램파드의 몸이 나른해졌고, 다시 쿠션 숲으로 몸을 뉘었다. 그 위를 입술이 겹쳐져 있는 커틀러가 내려앉아 침까지 전부 핥아먹을 기세로 달라붙었다.
“후읏… 끈질… 겨.”
잠깐 떼어진 틈에 고개를 피해 말을 내뱉었지만, 램파드의 머리를 감싼 커틀러가 다시 입을 공략했다. 종일 붙어 있을 셈인지 그는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램파드가 온몸에 힘을 풀고 늘어지자 그제야 커틀러의 입이 떨어져 나갔다. 램파드의 몸 위에 올라탄 그는 볼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폐하는 진실로 아름다우십니다.”
“입에 발린 칭찬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점이다. 그런 말은 날마다 들어서 질리니까 관둬.”
“이상하군요. 폐하는 늘 봐도 질리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런 흔한 단어로 날 평가하다니 건방지군. 감동을 주려면 좀 더 창의적인 소리를 해 보던가.”
벌려진 가운 사이로 램파드의 맨몸이 보인다. 커틀러는 좀 더 몸을 밀착하며 램파드의 급소를 지그시 눌렀다.
“솔직히 입담으로 폐하를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제 진심을 어떻게 전해 드리면 좋을까요.”
아래까지 내려온 손이 가운을 벌리며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멈추지 않고 항문 안쪽을 파고들자 애액이 찐득하게 묻어 나왔다.
“손은… 떼… 고… 읏, 말해.”
“그 명령은 들을 수 없습니다. 평소도 아름다우시지만 제 남근을 받아들일 땐 한층 더 돋보이시거든요. 몸으로 제 진심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또다. 엉겁결에 커틀러에게 휘말린 것만 몇 번인지. 오늘은 정말 곤란하기에 램파드는 몸을 슬쩍 빼냈지만, 소용없었다. 커틀러는 도망가는 램파드의 허벅지를 꽉 붙잡고, 손가락으로 내부를 슥슥 문질렀다.
“평소보다 손가락이 더욱 조입니다.”
“네놈 때문에… 그만… 해……. 정말 오늘은… 안… 돼……. 아, 아!”
그냥 평범하게 관계만 맺으면 상관없지만 커틀러는 램파드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그렇게나 남기고 싶은지 할 때마다 노팅하는 통에 몸이 성치 않았다. 팽창하는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였던 입구는 도톰하게 부어올랐고, 내부 또한 부르튼 듯했다. 가만있어도 쓰라린 정도였는데, 손가락을 집어넣으니 죽을 맛이었다.
“벌써 느끼십니까? 섰네요.”
통증 때문인지, 그 안에 섞여 있는 쾌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얇은 가운을 밀어내며 남근이 뻣뻣해졌다.
“폐하의 애액에 제 냄새가 섞여 든 걸 알고 계십니까? 아쉽게도 3일 전에 비해서는 옅어졌지만요.”
커틀러는 조곤조곤 조용히 말했고, 손가락은 여전히 내부를 파고들었다. 여러 번 자극당한 안쪽에서 미끈한 액이 흘러나와 손가락에 얽혔다. 커틀러는 끈적거리는 애액을 듬뿍 묻혀 내 주름진 내장 안을 문질렀다.
“네놈 덕분에 평소보다 오래 씻고 있으니까.”
“물로 씻어 내도 괜찮습니다. 새로 칠해 드리면 되니까요.”
커틀러의 손길을 받아들이던 램파드가 웃었다. 하는 꼴이 제 물건을 빼앗길까 봐 감추는 데 애쓰는 강아지로 느껴졌다.
“오줌 갈기듯이 싸 놓는 꼴이 개새끼랑 똑같군.”
“제 행위를 어떻게 개랑 비교하는 겁니까. 혹시 짐승이랑 해 보신 겁니까?”
“응.”
한 치의 주저 없이 곧바로 대답하자 커틀러의 손이 멈췄다.
“언제…….”
저 혼자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램파드만큼이나 고운 눈 사이가 좁아지며 주름졌다. 램파드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3일 전에. 네놈은 두 발로 서서 다니는 개새끼다.”
“폐하.”
그는 언짢은지 한층 더 눈살을 찌푸렸고, 그건 램파드에게는 기회였다. 양다리를 버둥버둥하자 커틀러는 뜻밖에 손을 떼어 냈다. 표정은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지마는.
“다음에 마음껏 하게 해 줄 테니까 오늘은 참아.”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 황실 기사 서임식이 있었죠.”
포기했다 싶은 알파의 손이 램파드의 발목을 낚아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양쪽 발목을 붙잡힌 램파드는 다리를 벌린 채 커틀러에게로 질질 끌려갔다.
“답지 않게 서임식을 진행할 기사들을 위해 몸을 청결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런 겁니까?”
“……놔.”
“국교 같은 건 전쟁 후에 해체시켰잖습니까. 인제 와서 그런 고리타분한 규칙 지킬 필요 없으실 텐데요. 어떻습니까. 제 정액을 배 속에 품고 기사들 앞에 서 보시는 건.”
“그런 추잡스런 일은 거절하지.”
커틀러가 몰아붙일 때 못 이기는 척 안긴 건 램파드 하나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번은 새로 수여식을 받는 기사들에게 피해가 가는 문제였다. 램파드의 눈꼬리가 한층 더 날카롭게 올라갔지만, 그는 여전히 변함없이 내려다보았다.
“거부하신다고 해도, 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겁니다. 몇 번 겪으셔서 잘 알고 계시죠?”
“커틀러…….”
몇 번의 관계로 둘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윽박지르고 소리쳐 봤자 램파드 쪽이 손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런 고압적인 태도보다 확실하게 효과 있는 건 표정이었다. 마음이 상해 실망한 빛을 내보이면 의외로 커틀러는 행동을 멈췄다.
이번에도 잘 먹혀들어 갔고, 커틀러가 램파드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런 표정은 짓지 마십시오.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마음 없다는 놈이 손가락은 왜 집어넣나.”
“안쪽 상처를 살펴보려고요. 소문 때문에 오메가의 약을 구하기도 쉽지 않으실 거고, 황의들에게도 보이지 못할 곳이지 않습니까.”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커틀러가 자신의 품속에서 자그마한 통을 꺼냈다. 그는 꺼낸 통의 둥그런 뚜껑을 열어 무른 고약을 보였고, 손가락으로 듬뿍 덜어 내 램파드의 입구에 발랐다. 오메가의 치부에 바르도록 개발된 약은 효능이 좋아 금세 통증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기껏 생긴 신뢰가 금방 사라졌다. 다물린 입구를 세심하게 문지르던 손가락이 안쪽으로 쑥 파고들어 내벽을 슬슬 만져 댔으니까. 둥그런 손끝으로 안쪽을 살그머니 누르는 자극에 벌려진 램파드의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정말… 약만 바르는 거 맞지?”
“네. 안쪽에도 약을 바르게 다리를 좀 더 벌리십시오.”
램파드는 시선을 내려 커틀러의 하반신을 바라봤다. 발기해서 좆을 꺼떡거리는 자신과 달리 그의 앞섶은 평온했다. 억울하게도 자신은 커틀러의 사소한 행동에 몸이 반응하는데, 상대는 그러지 않는다. 페로몬이 선택한 운명의 짝이라면 미미한 몸짓 하나만으로 응답할 터.
“그런데 폐하, 표정을 보아하니 피곤하신 듯 보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위로 올려 커틀러를 바라봤다. 꿈속에서 등장하는 형 때문이기도 하지만 커틀러 또한 고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 어떻게 보이는 족족 떡 칠 생각밖에 하지 않는지. 램파드가 입을 열지 않자 커틀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황궁에 소문이 돌더군요. 그 때문이시죠?”
형의 꿈과 커틀러. 다른 두 가지보단 상대적으로 램파드를 덜 피곤하게 하지마는 소문 또한 피곤의 원인 중 하나였다.
“맞아.”
“황의들이 하는 말은 들으셨습니까?”
“어느 쪽을 말인가.”
황궁에서 돌고 있는 램파드에 관한 소문은 두 가지였다. 황제가 오메가일지도 모른다는 것과 커틀러가 밤일 상대라는 소문. 황제가 알파를 상대로 고통을 참으며 다리를 벌린다는 건 갓 시종이 된 어리숙한 자도 알 정도로 구설에 올랐으니 램파드가 모를 리 없다.
커틀러 앞이라 담담한 척 포장했지만, 램파드는 두 소문 다 신경 쓰였다.
잘게 떨리는 램파드의 목소리가 마음에 든 커틀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약이 묻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램파드 폐하께서 오메가 억제제에 대해 의뢰를 하셨다는 말이요. 하필 고르셔도 입이 싼 놈을 선택하셨군요.”
“아, 그 소문 말인가…….”
램파드가 사용하는 오메가 약은 대부분 커틀러가 구해 줬다. 커틀러의 어머니는 오메가이기도 하고, 아카데미에서부터 시작된 추문으로 명분도 있다. ‘숨겨 놓은 오메가 애인에게 줄 약이다.’ 우성 알파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의심 한 톨 없이 약을 건넸다.
램파드가 나서서 약에 관해 알아보면 소문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소문을 퍼뜨린 황의는 이미 잡아 놨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오늘은 서임식이 있으니, 피를 볼 순 없지. 내일 아침, 해가 뜨는 대로 목을 자를 거다.”
램파드의 말에 커틀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처음 황의에게 억제제에 대해 의뢰할 때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저야 숨겨 놓은 오메가 연인에게 구해 준다는 핑계로 매번 약을 구해 오지만, 대체 폐하는 어떤 구실을 사용하셨을까요.”
“잘난 알파께서 직접 한번 맞혀 봐.”
내부에 약을 치덕치덕 바르던 손이 빠져나왔다. 커틀러는 깨끗한 천으로 램파드의 하반신과 자신의 손을 말끔히 닦아 내고, 풀어헤쳐 진 가운의 허리끈을 동여매어 주었다.
“설마 제국의 황제가 다른 알파에게 각인당한 오메가를 돌보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건 너무 멋없지 않습니까.”
“틀렸어.”
옷가지를 정돈해 준 커틀러가 램파드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걸터앉은 램파드의 무릎 위에 양손을 올리며 고개만 들어 시선을 맞췄다.
“폐하 일이라면 뭐든지 알고 싶습니다. 말해 주십시오.”
아무런 설명 없이 조사해라 말했지만, 램파드는 아까 전 느낀 부조리함을 확인하기로 했다.
“내가 먹을 약이니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했지.”
무덤덤하던 커틀러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황제의 자리를 내려놓고 싶으신 겁니까.”
“못할 것도 없지.”
“황좌를 내려오시면 폐하께서는 오메가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실 겁니까.”
“네가 나에게 각인했다면 콘테 가문으로 들어갈지도 몰라. 그래서 물어보는데 콘테 경, 나에게 각인했나?”
램파드의 무릎에 얼굴을 기댄 커틀러는 심드렁했다.
“폐하답지 않으시군요. 내뱉으면 흩어질 말 따위로 확신이 얻어지십니까.”
“행동으로는 전혀 모르겠으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다.”
“제가 뭘 해 드리면 만족하실 겁니까. 명령하신다면 혈육도 주저 없이 베어 버릴 수 있으니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램파드를 또렷하게 바라봤다. 정말 명령을 내린다면 콘테 공작 저택에 사는 모든 사람을 베어 버릴 듯한 시선이었다. 저런 열렬한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램파드는 발을 움직여 그의 어깨를 꾹 밟았지만, 자세가 무너지지 않는다.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커틀러의 가슴을 발끝으로 노크하듯 톡톡 건드렸다.
“그런 살벌한 짓을 해 봤자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아. 너의 여기로 생각한 답을 내놔 봐. 최종 각인을 한 내가 커틀러 콘테라는 둥지에서 독립하기 전에 말이야.”
램파드의 발끝이 위치한 곳에는 요동치는 심장이 존재했다. 평소라면 램파드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을 커틀러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을 꾹 다물고 무언가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꼴에 절로 미소 지어졌다.
성적인 짝을 찾았으니, 안정을 얻던 상대에서 독립할 시기가 곧 찾아올 것이다. 램파드는 드물게 동요하는 커틀러에게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내가 언제까지 너의 오메가로 있을까.”
“아직은 저와 잠자리를 가지는 거로 페로몬이 안정되시잖습니까.”
“그래, 아직은. 하지만 금방 역겨워져 거부할지도 모르지.”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도왔던 커틀러의 행동에 갑작스레 각인되었던 것처럼.
1차 각인이 풀리는 거 또한 뜻밖의 사소한 계기겠지. 다 자란 성조는 어느 날 예고 없이 훌쩍 날아올라 둥지를 떠나니까.
커틀러에게 향한 각인이 사라지면 완전한 남으로 느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알파를 곁에 두기만 해도 혐오스러워진다. 당연히 관계도 거부하게 될 터. 그러기 전에 커틀러는 램파드의 두 번째 각인 상대의 목숨을 취해 제 위치를 보존해야 할 것이다.
램파드는 커틀러가 애쉬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으면 했다. 자신보다는 대외적으로 활동하기 편한 커틀러가 애쉬를 찾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는 대로 목을 베어 버릴 생각인 커틀러와 달리 램파드는 애쉬를 품을 생각이었다. 애쉬에게 마음을 주고 반려로 인정할 생각은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가둬, 억제제 대용으로 삼으면 지금처럼 베타로 지낼 수 있다. 친인척 하나 없는 서민 하나쯤, 찾기만 하면 램파드의 손아귀에 넣고 은닉할 자신이 있으니까.
“폐하, 준비하실 시간이옵니다.”
침묵이 찾아온 황제의 휴식처에 시종이 여러 명 찾아왔다. 하나같이 램파드가 갈아입을 옷가지와 걸칠 장신구를 들었다. 커틀러는 기사단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럼, 램파드 폐하, 서임식에서 뵙겠습니다.”
“잠깐, 커틀러 경.”
“예, 폐하.”
“늦기 전에 손쓰도록 해. 그런 행운, 두 번 다신 없을 거다.”
행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떡잎 시절, 램파드가 커틀러에게 각인한 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황제의 몸에 많은 숫자의 시종이 달라붙어 가려지자 커틀러는 화이트 궁 밖으로 사라졌다. 처음으로 커틀러의 마음을 구겨 놨다는 생각에 램파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날 저녁. 황좌가 놓인 알현실은 찾아올 손님을 위해 화려하게 꾸며졌다. 서임식 뒤에는 축하를 위한 연회로 무도회가 준비되었다. 무도회를 대비해 화려하게 차려입은 많은 숫자의 귀족이 작위를 받을 기사와 함께 램파드를 기다렸다. 빈 황좌 앞은 네 명의 수습 기사가 무릎을 꿇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앳된 기사들은 많은 숫자의 인파 덕분에 잔뜩 긴장했다.
“제국 유일의 태양, 램파드 클로비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호명관의 우렁찬 목소리에 시끄러운 소란이 사라지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알현실에 모인 귀족들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제국의 황제를 맞이했다.
붉은색으로 된 제복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검은 띠가 둘러매어 있고, 가슴에는 주렁주렁 무거운 메달들이 매달렸다. 그 덕분에 걸을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램파드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금실을 꼬아 만든 어깨 견장은 램파드의 움직임에 맞춰 하늘하늘, 검은 망토와 함께 흔들렸다. 목깃과 소매는 황가의 문장을 세심하게 수놓아 눈길을 사로잡았다.
보는 이야 눈이 즐겁지만, 막상 정복을 입은 램파드는 지금 당장 벗어 던져 알몸이 되고 싶었다. 원래도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를 더욱 조여 놔서 숨을 쉴 때마다 가슴까지 답답했다. 열흘 전, 신체 치수를 새로 재서 만든 옷인데 그간 살이라도 찐 건가. 몸을 옷에 맞춰 억지로 집어넣은 듯한 착용감 최악의 옷 때문에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경사스러운 자리에 죽을상으로 서 있을 수는 없으니,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황좌에 앉았다.
황좌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화이트 테일 기사가 서 있었고, 가장 앞은 기사단장이자 콘테 공작인 커틀러가 무덤덤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잔뜩 도발했으니까 램파드의 생각대로 애쉬를 찾을 생각밖에 없을 테지.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한 모습 뒤, 초조해서 발을 구르고 있을 커틀러의 모습을 생각하자 갑갑한 옷도 잊을 정도로 미소가 지어졌다. 램파드가 커틀러에게 시선을 빼앗겨 있는 사이. 서임식이 순서대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오늘 기사 작위를 받을 자는 총 네 명이었다. 서임식을 준비한 기사들은 과거 예배당이었던 건물에서 밤새 기도를 드리고, 몸을 정갈하게 준비했다. 예비 기사들은 피를 의미하는 붉은 망토와 순결을 상징하는 흰 허리끈을 단단하게 동여매고 황제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한 세기 전에는 기사의 뺨을 코피 터질 정도로 강하게 후려친 뒤 복종의 의미로 입맞춤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경사스러운 자리에 누가 피를 보고 싶어 하겠는가. 지금은 귀족들의 입맛에 맞춰 좀 더 고상하게 변해 뺨을 후려치든가 볼에 입을 맞추진 않는다.
“제국 유일의 태양, 램파드 클로비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저의 전부와도 같은 검을 받아 주시고, 황제 폐하를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들은 차례차례 램파드에게 검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램파드는 기사의 검을 받아 들어 어깨 위에 올려 축복과 함께 작위를 내렸다. 충성을 맹세한 기사는 마지막 절차로 램파드가 쥔 검에 입을 맞추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그대는 나의 검으로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날을 닦는 걸 소홀히 하지 마라, 밀리어 남작.”
마지막 기사의 서임식이 끝나고, 박수가 쏟아졌다. 막 남작의 작위를 받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램파드를 포함해 알현실을 가득 메운 귀족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혀 생뚱맞은 인물이 앞으로 나와 램파드의 축복을 받기 위해 섰기 때문이다.
예고 없이 등장한 커틀러는 화이트 테일의 단장복인 백회색에 푸른빛 장식이 들어간 옷을 입었다. 평소와 다른 점은 짙은 남색의 망토가 붉은색이란 점. 그리고 허리끈 또한 흰색으로 동여맨 점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모인 기사의 모습과 같았다.
사전 동의 없이 알 수 없는 짓거릴 하는 커틀러의 행동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램파드는 커틀러를 경계하며 허리춤에 꽂아 둔 검 손잡이에 살며시 손가락을 올렸다. 서임식을 진행한 자들은 모두 알파였다. 한 번만 더 다른 알파에게 살갑게 구는 모습을 보였다간,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였긴 했는데 진짜 실행할 생각인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티를 팍팍 내는 커틀러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방금 막 서임식을 진행한 기사와 똑같은 행태였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램파드는 지금 당장 저놈의 가슴팍을 발로 차 내동댕이치고 싶어졌다. 축제 분위기를 깰 수 없어 오른발이 튀어 나가려는 걸 몇 번이나 참아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게 무슨 짓거린가, 커틀러 경.”
“저는 다른 분께 검을 하사받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램파드 황제 폐하께 새로이 충성을 맹세하고, 주군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커틀러는 램파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선대 황제의 가호를 받으며 기사 서임식을 진행했다. 검을 하사받은 것 또한 선대 황제에게서였다.
그렇지만 서임식 자체가 형식적인 의례였다. 평범한 서민으로 태어난 알파 기사와 작위를 받지 못하는 둘째 이상의 귀족은 사교계에서 인맥을 쌓을 시간이 없다. 때문에 기사 수행이 끝난 후 서임식을 열어 공식으로 데뷔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커틀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이건 분명 네 곁에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도발에 대한 보복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기사도 정신이 투철해 지금의 주군을 모시고 싶어 안달이 난 착실한 기사로 보일 테지마는. 태연한 척, 공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커틀러의 얼굴을 갈기고 싶어지는 걸 참고, 또 참아 냈다. 램파드가 분을 삭이는 걸 뻔히 아는 커틀러가 태연스레 말했다.
“제국 유일의 태양, 램파드 클로비스 황제 폐하를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소신은 일부일 뿐인 검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 제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뭐?”
“집안, 검술, 몸, 저의 심장마저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드릴 테니 당신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
주변이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기사 서약식에서 사용되는 선서문의 내용은 정해져 있다. 커틀러는 정해진 규약을 깨고 제멋대로 입을 나불거렸다. 심지어 그 내용은 각인한 알파가 평생의 반려가 될 오메가에게 사랑 고백할 때나 쓰이는 말이었다.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커틀러를 내려다봤다.
공개 석상에서 오메가 취급을 하는 건가. 당황하면 끝이기에 별것 아니라는 듯, 천연덕스레 시치미를 뗐다.
“오메가 취급을 하며 날 욕보일 생각이냐. 네놈이 우성 알파라고 하나 나한테는 짐승 우리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와 같을 뿐이다.”
세상은 베타는 베타끼리,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에게 끌리도록 정해졌다. 알파가 워낙에 귀해 남는 오메가 중에서 베타랑 이어지는 자도 있지마는, 알파와 베타라니. 먹잇감일 뿐인 오메가는 몰라도 포식자끼리는 공생하기 힘들다.
이해하기 힘든 관계라 조금이라도 수락하는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실제로는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지만, 뭐 이쪽을 인정하는 것 또한 곤란했다.
“폐하께서는 제 하찮은 페로몬이 통하지 않는 베타셨죠. 그렇지만 상관없습니다. 역대 황제처럼 절 오메가로 취급해 주셔도 좋으니 그저 평생을 곁에서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입을 꾹 다문 램파드가 노려보자 커틀러가 몇 마디를 더했다.
“아카데미에서 당신에게 반했고, 이제 마음을 추스르기 힘듭니다.”
커틀러는 램파드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불필요한 연극은 빨리 끝내고 싶어졌다.
“커틀러 경. 발정 난 아랫도릴 휘두르려면 돼지우리나 찾아가도록 해라.”
“장난이나 유희가 아닙니다. 저는 진심입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커틀러가 세상 둘도 없을 공손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램파드를 제외한 사람들이 기억하는 커틀러는 석상같이 감정 한 톨도 내보이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모습뿐이었다. 눈빛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시선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찔러 죽일 만큼 냉기를 잔뜩 두르던 커틀러가 꿀이 한껏 떨어지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알파의 모습이었다. 저 인간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나. 이 자리에 참석한 귀족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감히 짐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냐!”
“아직 제 주군이 되어 주지 않으셨잖습니까.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 검을 받아 주십시오.”
“커틀러!”
램파드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커틀러 혼자만 모르는지 그는 양손에 받쳐 든 검을 머리 위로 올려 램파드에게 대령했다.
램파드가 이걸 쥐고 어깨에 올리면 서약이 끝난다. 공개 석상에서 저런 부탁을 듣고 승낙할 수 없다. 실행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기분만큼은 커틀러의 검을 빼앗아 어깨가 아니라 가슴에 내리꽂고 싶어졌다.
“받아들이지 못하시겠다면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제 전부인데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는 들고 있는 자신의 검을 거꾸로 쥐었다.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유리 같은 은발과 밝은 피부. 심혈을 기울여 정제한 보석인 듯한 제비꽃 눈동자. 겉은 훤하면서 반대로 속은 알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커틀러가 자신이 만든 구렁텅이로 램파드를 이끌었다.
자신의 심장 위에 칼날 끝을 겨눈 커틀러가 손을 내질렀다. 갓 발현한 어린 오메가가 살기 위해 찾은 보호자일 뿐인 첫 번째 각인 상대. 다른 오메가들이 그러하듯 자연스레 사랑으로 발전하던 알파가 눈앞에서 죽으려고 한다. 램파드는 생각도 하기 전 몸을 숙여 커틀러의 손을 붙잡아 검이 전진하는 걸 막았다. 심장을 향해 직진하던 검이 멈췄지만 반대로 커틀러가 다가왔다.
“이렇게나 견고하게 각인한 오메가가 독립할 생각을 한 겁니까. 가당찮네요.”
램파드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소곤거리던 커틀러가 볼에 입술을 부딪쳤다.
커틀러에게 휘말렸단 걸 알게 된 램파드는 참고 있던 노기를 주먹에 담아 그를 후려쳤다. 한참 화를 참았던 만큼 램파드의 일격은 강렬했다.
퍼억, 주먹질에 뒤쪽으로 내동댕이쳐진 커틀러의 볼이 부어올랐고, 코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등으로 닦았고, 바닥을 바라보며 우물우물하더니 변명이 아닌 어금니 하나를 퉤 뱉었다. 단단한 뼈에 부딪친 램파드의 손등 또한 찢어져 상처가 났다.
주변에 있는 로열 가드 여러 명이 검을 뽑아 달려들어 커틀러를 제지했다. 서늘한 칼날로 만든 우리 안에 갇힌 커틀러는 길들이지 않은 들짐승이었다. 그는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등으로 연신 훔쳐 내며 웃었다.
“성사됐네요. 150년 전의 거친 방법이지만.”
“저자를 감옥에 처넣어라.”
한껏 경멸을 담아 커틀러를 바라보던 램파드가 명령 후 사라졌다. 뒤로 수군거리는 귀족 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많은 귀족 앞에서 단단하게 망신을 줬으니 다들 커틀러 혼자만의 짝사랑이라 생각할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