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균열 (3/25)

03 균열

램파드는 원래 일정보다 하루 빨리 황궁에 도착했다. 램파드의 몸은 애쉬를 두 번째 짝으로 선택해 버렸다. 알파인 그의 정액을 잔뜩 받아들이기까지 해 전처럼 억제제를 먹고, 열기를 식혀 줄 남자를 더 만나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페로몬이 안정되어 수도로 향했고 환궁하자마자, 숨어 있던 시종이 튀어나와 램파드에게 달라붙었다.

“지금은 쉬고 싶다. 전부 물러가거라.”

손을 들어 올려 휘젓자 모두 다 흩어졌다. 정신이 피곤해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황궁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장소는 몇 곳밖에 없다. 램파드는 그중 집무실을 선택했다. 황제의 방 입구를 지키는 시종 두 명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책상에 앉아 도장을 찍던 한스가 황급히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며칠 자리를 비웠지만 황제의 인장을 맡은 한스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상태로 청소까지 해 두었다.

“하루 일찍 돌아오셨군요. 이번 유흥은 즐거우셨습니까.”

“쓸데없는 건 묻지 말아라.”

즐겁긴커녕 당장 와인을 병째로 마셔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잊고 싶었다. 램파드의 눈가가 꿈틀거리자 한스가 눈치를 봤다.

“주제넘은 질문이었군요. 사죄드립니다.”

“됐다. 짐이 자리를 비운 동안 별일은 없었겠지.”

“아시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실 동안 왕국의 사절단이 방문했습니다.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시기에 방을 내어 드렸습니다. 오늘 밤 연회를 준비할까요?”

남부 지방으로 떠나기 전 왕국이 보낸 사절단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다. 둘째 공주를 보내겠다는 전갈이었다. 안 봐도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했다.

“오늘은 쉬고 싶군. 며칠 후에 진행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이번 연회의 가드는 화이트 테일이 맡기로 되어 있습니다. 호위 준비도 그에 맞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자네와 커틀러 단장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단장님께는 곧바로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책상에 앉은 램파드는 손에 든 새빨간 와인을 책상 위에 올렸다.

한스는 아까부터 램파드가 들고 있는 시뻘건 액체가 든 유리병을 경계했다. 투명한 병에 담긴 붉은 액체는 피 같았다. 아니, 피일지도 몰랐다. 황제라면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든 자의 멱을 따다 비료로 쓰겠다며 피를 담아 올 테니까.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닌 게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핏기 가신 얼굴로 병을 바라보고 있는 한스를 향해 램파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와인이다. 괜한 상상 하지 말아라.”

뻘쭘해진 한스가 자세를 빳빳하게 정돈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투명한 병에 담는 와인도 있습니까. 특이하군요. 잔과 음식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스는 도망치는 것처럼 붉은 와인에 곁들일 음식을 준비하러 갔고, 램파드 혼자 집무실에 남게 되었다. 자신만의 공간이 조용해지자 드디어 휴식을 취했다.

램파드는 손바닥을 꾹 누르고, 팔목을 문질렀다. 최종 각인이 되었다고 하나 별다른 신체 반응이 없어 실감이 되지는 않았다. 겨우 네 번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각인되다니. 숫자를 세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안겼는데, 이렇게 느낀 적 또한 처음이라 진 기분마저 들었다.

“하아…….”

한숨을 내뱉은 램파드는 이마를 괴어 자기반성 상태에 들어갔다. 평범한 시민인 애쉬에게 작은 경계조차 품지 않았다. 어지간한 상대는 한 손으로 제압할 자신이 있으니까 사소한 행동을 무시한 것이다.

조끼 안에 밀어 넣었을 철제 통을 애쉬가 가지고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애쉬의 말대로 경솔했다. 깊게 후회해 봤자 엎어진 물을 담을 수 없었다.

똑똑.

공손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음식을 준비한 한스로 치기에는 돌아오는 시간이 빨랐다. 이마를 괸 손을 풀고 의자에 기대자 문 앞을 지키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이트 테일의 커틀러 단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램파드 폐하, 곧바로 들이겠습니다.”

커틀러는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입장시키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따로 램파드가 허락하지 않아도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올 권리가 있는데 지금은 좀 곤란했다. 가장 보기 껄끄러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오메가가 최종 각인을 끝마쳤다는 건 첫 번째 상대에서 독립했다는 뜻이다. 사랑을 찾아 떠난 오메가는 둥지가 필요 없으니까 자연스레 첫 각인이 풀린다.

커틀러를 향한 마음이 차갑게 식어 버렸으려나. 원치 않는 일이었다.

잠깐, 이렇게 생각하니 마치 커틀러를 진심으로 마음에 뒀다는 뜻 같았다.

순간 램파드의 얼굴에 피가 몰렸고 광대뼈도 분홍색으로 변해 버렸다. 볼 위를 살짝 물들인 붉은 기운을 없애야 하는데, 손으로 가리면 수상해 보일 터. 램파드의 눈에 책상 위에 올라간 차가운 와인병이 띄었고, 빠르게 낚아챘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커틀러가 망토를 펄럭이며 들어왔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각 잰 듯 번듯한 인사를 올린 커틀러는 황제의 기묘한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 와인병을 볼에 대고 문지르는 기이한 모습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인 커틀러가 입을 열었다.

“환궁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날짜를 칼같이 지키시는 분이 하루 일찍 돌아오시다뇨. 그건 그렇고… 제가 동행하지 않았는데 폐하의 옷차림이… 기함할 정도로 정상이군요.”

커틀러는 와인병을 문지르고 있는 모습보다 멀쩡한 옷을 보고 한층 더 놀랐다.

“평소에는 정상이 아니란 말인가.”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잔소리는 됐어. 무슨 용건이지.”

“이번 연회는 소신이 직접 경비를 맡기로 했습니다. 따로 지시 사항이 없다면 임의로 기사를 배치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그리고 또, 북부 지방에 사소한 분쟁이 일어났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 호위 임무가 끝나고 한동안 자리를 비울 것 같습니다.”

“그래.”

램파드는 와인병을 책상 위로 도로 원위치시켰다. 와인에 붙어 있는 상표를 곁눈질로 확인한 커틀러가 입을 열었다.

“남부 지방에 가신 겁니까. 거기 와인을 그렇게나 싫어하셨으면서 직접 가지고 오시다니 별일이군요. 마음에 든다면 진상을 올리라 하면 되지 않습니까.”

“겨우 한 병 가지고 번거롭게 일을 만들 필요가 있나.”

램파드는 좁은 와인병 입구를 부드럽게 쥐며 병을 돌려 상표를 바라봤다. 남부 지방의 지역명과 함께 제작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상표에 시선을 빼앗긴 램파드는 목덜미에 따끔한 느낌을 받았다. 커틀러가 자신을 탐색하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 말고 다른 알파랑 잠자리를 가졌다가 각인했단 걸 파악한 건가? 램파드는 태연한 표정으로 와인을 책상 위에 도로 올렸다.

“그러고 보니 커틀러 경은 그 나이 되도록 제대로 된 혼담이 없지. 아카데미에 창부를 끌어들였다는 소문 덕분에 귀족들은 귀한 자식을 너에게 보내지 않는다고 하더군.”

“폐하께서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귀한 자식을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는 자에게 보낼 수 없고, 그래도 콘테 가문은 탐이 나니 없어도 그만인 자식들만 보낸다지, 아마?”

“누군갈 돕다가 이렇게 되었죠. 실제로 오메가들과 질펀하게 노는 중이라면 억울하지 않을 겁니다.”

“네가 깨끗하단 건 내가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래서 콘테 공작님은 남을 도운 걸 후회하나?”

램파드의 도발적인 시선에 그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제국에서 가진 이가 드문 자수정을 닮은 눈이 은빛 술 여러 가닥으로 덮였다. 다시 눈을 뜬 커틀러가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또렷한 시선으로 램파드를 응시했다.

“한 점 후회 없습니다. 또다시 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그를 도울 겁니다. 저의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예상 밖의 대답에 기껏 식힌 열이 다시 몰렸다. 램파드의 광대뼈 위에 연분홍색의 얼룩이 퍼져 순식간에 귀까지 물들였다. 가리고 싶지만 이미 커틀러는 램파드의 표정을 다 보았기에 무의미했다.

“친우로서인가?”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드물게 본심을 내뱉고 답을 듣고 싶을 땐, 세상이 램파드를 방해했다. 마치 커틀러의 진심을 듣지 못하게 하늘의 신이 방해라도 하는 듯 기막힌 개입이었다.

훼방꾼 한스가 음식용 수레를 끌며 들어오자 커틀러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연회 준비를 끝마치면 호출해 주십시오.”

깍듯이 인사를 올린 커틀러가 조용히 사라졌다. 램파드는 열이 올라 따뜻해진 자신의 볼을 쓱쓱 문질렀다. 애쉬에게 각인된 게 아닌가?

네 번째로 절정에 다다랐을 때 램파드의 몸은 애쉬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그의 페로몬 향이 세상 둘도 없을 진미처럼 느껴졌다. 짐승 같던 향이 달달하게 바뀌었으니 각인이 분명했다.

“어디서 드시겠습니까? 옆방에다 꾸릴까요?”

“여기서 먹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바로 테이블을 꾸미도록 하겠습니다.”

한스는 집무실에 놓인 테이블 위를 분주히 꾸리기 시작했다. 깨끗한 천을 깔고, 음식용 수레에 넣어 둔 접시를 꺼내 음식을 덜어 냈다. 소고기를 다지고,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요리는 생바질을 더해 향이 풍부했으며 레드 와인과 잘 어울리는 요리였다.

램파드가 자리에 앉자 한스가 먼저 붉은 와인을 한 모금 맛보았다. 기미를 끝낸 한스가 램파드가 쥔 잔에 와인을 따랐다.

입에 머금지 않았는데도 압축된 걸 풀어내듯 강한 향이 피어올랐다. 램파드는 천천히 잔을 기울여 향을 음미했다. 남부 지방의 와인은 못 먹어 줄 정도로 신맛밖에 느껴지지 않았는데, 쌉쌀한 오크향이 났다. 또 끝맛은 햇볕을 잔뜩 머금은 포도 과즙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것이 태양에 잘 그을린 그의 피부와도 같았다.

과연 애쉬 스스로가 칭찬할 정도로 괜찮은 맛이었다. 한 모금 맛을 본 램파드가 한스에게 잔을 건넸다.

“좀 더 마셔 보거라.”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한스는 램파드가 마신 잔을 받아 마셨다. 그는 조용히 입을 떼어 내고, 와인이 조금 남은 잔을 들었다.

“이 맛을 기억할 수 있겠느냐.”

“네,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램파드는 와인병에 붙어 있는 상표를 손톱으로 톡톡 건드려 떼어냈다.

“이 와인을 만든 와인 메이커를 찾아와라. 이름은 애쉬 테일러라고 하나 가명을 쓸 확률이 있다.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은 남부 지방이고, 집을 팔고 왕국으로 떠났다.”

“예, 폐하. 명을 받들어 은밀히 찾도록 하겠습니다.”

부유하지 않은 서민 놈이 먹고살 만한 건 배운 기술밖에 없을 터. 친인척도 없는 제국민이 왕국으로 갔으니, 와인이라도 만들며 생활할 테지. 아니면 다른 비슷한 술을 만들거나.

먼저 잘못을 한 건 램파드였다고 하나,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고 가만히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끌어내서 합당한 대우를 해 주기 위해서는 숨어 버린 자를 찾아내야 했다.

굳이 램파드가 나서지 않아도 커틀러가 알게 되었으니, 끌려 나오는 건 시간문제였지만 커틀러보다 먼저 찾아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는 채가 아닌 시체로 마주할 테니까.

***

브루툴 궁전.

본궁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는 작은 궁전은 파티나 모임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굳이 멀리 떨어진 장소에 만든 이유는 경관 때문이었는데, 넓은 호수와 수도가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브루툴 궁전은 연분홍색의 장미가 화려하게 펴 볼거리를 제공했다.

저녁인 지금은 꺾여진 장미꽃이 테이블을 탐스럽게 장식했다. 오롯이 황제와 공주만을 위해 준비된 테이블 위는 제국에서 나는 각종 진귀한 재료들로 만든 음식들이 차려졌다.

“램파드 폐하, 소녀는 사브로 왕국의 두 번째 공주인 린델 아쥴린이라고 하옵니다. 제국의 황궁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시고, 이렇게 아리따운 궁전에 초대까지 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밝은 갈색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린 왕국의 공주는 여러 명의 시종을 대동한 채 등장했다. 그녀는 정원을 장식한 장미와 잘 어울리는 크림색 드레스를 화려하게 꾸몄고, 찬란한 빛을 머금은 보석이 그녀의 목과 귀를 장식했다.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편 그녀가 등장하자 주변의 공기가 한층 짓눌린 기분이 들었다.

늙은 왕이 늦은 나이에 얻어 감싸고 돈 탓에 둘째 공주에 관한 정보는 적었다. 페로몬을 갈무리했지만, 기백만으로도 느껴졌다. 그녀는 우성 알파였다.

제국의 역대 베타 황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알파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혼인을 올려도 후사를 가질 수 없는 관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레뿐인 관계였다. 사브로 왕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터. 베타 황제에게 우성 알파인 귀한 딸을 보내다니. 그만큼 제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고 싶단 의미였다.

“이렇게 아리따운 공주를 오래 기다리게 하다니, 오늘 밤은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책임지지.”

“아닙니다. 제국 유일의 태양이신 램파드 폐하를 뵐 수만 있다면 기약 없어도 기다리는 게 당연한 겁니다.”

여러 겹의 레이스가 달린 치마의 양 끝을 잡은 공주는 허리를 깊이 숙여 공손한 인사를 올렸다.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드레스는 노출이 있었지만 천박해 보이진 않았다. 신분에 걸맞게 절제된 아름다움을 내보였다.

“이쪽으로 이동하지.”

램파드는 비단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린델 공주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램파드의 손을 잡고 연회가 준비된 장소로 이동했다.

황제가 건물 안으로 이동하자, 왕국의 시종과 경비를 서는 화이트 테일의 기사들이 천천히 뒤를 따랐다. 가장 앞줄에는 기사단장인 커틀러가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며 따라왔다.

궁 안은 솜씨 좋은 요리사가 실력을 발휘한 요리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메인 요리는 제국에서만 둥지를 트는 거대한 뇌조 구이였다. 뇌조 구이는 빈속을 다양한 과일로 채워 넣고, 꿀과 견과류를 곁들인 소스를 보기 좋게 끼얹었다.

음료는 정원과 잘 어울리는 장미술이 준비되었다. 램파드가 빈 잔을 들어 올리자 제국의 시종이 다가와 술병을 들었다.

“램파드 폐하, 소녀가 직접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한 나라의 공주가 직접 술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성의를 봐서라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잔 부탁하지.”

린델 공주는 램파드의 곁으로 다가와 빈 잔에 장미술을 천천히 부었다. 투명한 잔은 연분홍색 꽃잎으로 만든 술로 가득 채워졌다. 공주의 잔은 시종이 채워 넣었다.

“짐의 앞이라고 체통 같은 건 차릴 필요 없다. 오늘 하루는 마음껏 여흥을 즐기도록 하여라.”

램파드의 말에 공주와 왕국 대신들이 잔을 들어 올려 황제를 칭송했다. 잠시 멈춘 연주가 다시 시작되었고 연회는 무르익어 갔다.

“폐하, 왕국에 퍼진 소문을 아시옵니까?”

“무엇을 말인가.”

술김에 경계가 풀어진 공주는 양 볼을 붉게 물들이며 웃었고,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었다. 램파드 또한 오랜만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왕국에서는 황제 폐하를 인간이 아닌 무서운 괴물이라 하더군요.”

“아쉽게도 짐은 자네와 같은 인간이다만.”

“맞습니다. 특히 이렇게나 아리따우신 분인데 돌아가는 대로 잘못된 소문은 고쳐야겠어요.”

왕국 땅을 몇 번 밟지 않은 램파드는 직접 듣지 않아도 어떤 소문인지 짐작했다. 전쟁 중에 미친개라 불렀을 정도니까. 더한 별명도 무수히 많을 테지.

“공주는 짐이 무섭지 않은가?”

마시던 잔을 내려놓은 공주가 램파드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참여하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두렵지 않은 게 이상하죠. 즉위 두 달 만에 전세를 역전한 이야기는 아직도 오싹거릴 정도예요.”

“사브로 왕국의 왕도 너무하는군. 겁먹은 공주를 보내다니.”

얼굴을 붉게 물들인 공주가 까르르 웃었다.

“이번 방문은 제가 직접 아버지께 간곡히 부탁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왕국까지 퍼진 짐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러 온 건가?”

“대륙에 둘도 없을 보배라는 시인의 이야기 말입니까? 솔직히 그 점도 궁금했어요.”

“그래, 짐을 직접 본 감상은 어떠하냐.”

아쥴린 공주는 잠시 머뭇거리며 수줍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름답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륙의 모든 이를 빼어난 순으로 세워 놓는다면 단연코 램파드 폐하께서 가장 앞에 위치하시겠죠.”

그녀의 칭찬에 램파드가 피식 웃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칭송을 들었기에 이제 무슨 말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공주가 제국에 직접 온 목적 중 하나는 달성했군. 그렇다면 다른 목적은 무엇이냐.”

아쥴린 공주는 볼과 귀가 새빨갛게 변했지만, 정신은 온전했다. 딱 램파드가 말을 섞어 줄 정도로만 마신 그녀는 목적이 있어 직접 제국에 찾아온 거였다.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은 그녀는 감히 램파드에게 요구했다.

“폐하께 간곡히 요청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감사드립니다. 황실에서 관리하는 발정제의 제작 방법을 소녀가 직접 배우고 싶습니다.”

새로 채운 장미술을 홀짝이던 램파드가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발정제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어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약물 중 하나였다. 임신한 오메가가 발정제 향을 잘못 맡았다간 아이가 유산될 수도 있다. 귀족의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황실이 직접 관리하여, 필요한 이들에게만 절차를 밟아 건넨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정제는 돈이 된다. 창관을 찾는 사람은 발정난 오메가를 안고 싶어 한다. 창관은 오메가를 흥분시키기 위해 황실로부터 발정제를 대량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창관을 없애기 전까지는 괜찮은 벌이 수단이기에 제조권을 독점하며 주변 국가에 발정제를 수출하고도 있었다.

“돈이 필요한 건가.”

“맞습니다.”

“발정제 독점권으로 괜찮은 수입을 올리고 있어 함부로 수락하긴 힘들군. 짐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는 가지고 왔겠지?”

“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실 겁니까?”

“말해 보아라.”

“아시다시피 사브로 왕국은 형질에 상관없이 첫째가 왕권을 물려받습니다. 저는 오라버니를 제치고 차기 국왕이 되고 싶습니다.”

누가 왕이 됐건 왕국은 제국의 속국이었기에 왕위 다툼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램파드는 쿠션에 편히 기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을 홀짝였다. 그녀는 램파드를 설득시키기 위해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폐하께 이득이 가는 건 당장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왕이 된다면 제국이 원하는 양질의 군마를 드리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제국과 왕국이 조약을 맺을 때, 그대의 아비가 군마만큼은 지킨 걸 알고서나 하는 말인가.”

“네. 솔직히 저는 군마를 육성할 시간에 국토를 가꾸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성질이 사나운 군마 같은 건 전쟁에나 필요하지 농사일에는 필요치 않으니까요.”

“제국이 군마까지 가진다면 그때야말로 왕국이 멸망할지도 모른다.”

“지난 전쟁에서 제국은 불리한 형세를 뒤집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사브로 왕국이 포함된 동맹 전체를 멸망시킬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왕국을 헤아려 주신 폐하의 처사를 보건대,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램파드가 왕국의 이름과 작위를 유지한 건 패전국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제국과 왕국은 기후가 다른 만큼 문화가 크게 달랐다. 억지로 섞어 놓고 힘으로 짓눌러 봤자 언젠간 터질 게 분명하기에, 비극 투성이였던 전쟁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아 왕국을 용서했다. 그녀는 램파드가 전쟁을 원치 않아 하는 걸 정확히 판단한 것이다.

나이가 어려 왜소한 체격을 가진 그녀에게서 대장군에서 볼 법한 기백이 느껴졌다. 램파드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 올려 악수를 청했다. 램파드의 행동에 놀란 공주는 머뭇거리고 시선을 맞추며 손을 꽉 붙잡았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아… 감사합니다! 연회가 끝나는 대로 곧장 서약서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램파드가 입꼬리까지 휘며 웃었다. 아직 국왕도 되지 못한 그녀가 들고 있는 도장에 효력 같은 건 없었다. 재밌어하는 램파드의 웃음 의미를 알아차린 공주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 제가 사용하는 도장은 공주를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죠. 그러나 제가 국왕이 되는 날, 오늘 서약서에 찍은 도장을 국새로 지정해 사용할 겁니다.”

“서약서는 잘 보관하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의 큰 은혜에 비해 사소한 보답이지만 개인적으로 부리는 정보꾼이 있습니다. 왕국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때 꼭 저를 찾아 주세요.”

“기억해 두도록 하지.”

램파드에게서 긍정의 뜻을 받아 낸 그녀는 긴장이 풀려,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수줍고 앳된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일 얘기는 이만 관두고, 연회를 즐겨 보지.”

“좋아요!”

그녀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졌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왕국에서 진행할 농사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제국과 완전히 다른 방식을 고수하는 농사법은 램파드의 흥미를 끌었다.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고 린델 공주의 얼굴은 처음과 달리 새빨개졌다. 한껏 취한 그녀는 램파드 쪽으로 다가오며 몸을 부대끼기 시작했다. 술버릇인 모양이었다.

“폐하…….”

린델 공주는 양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램파드에게 다가왔다. 위치로 보아 가슴이나 어깨를 감쌀 생각인 듯했다. 그녀가 알파라고 하나 가벼운 신체 접촉 정도야 괜찮았다. 램파드는 딱히 제지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 뒀다.

그러나 한 발짝 뒤에서 호위를 맡고 있던 커틀러가 빠르게 다가와 린델 공주의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꺅! 뭐… 뭐예요.”

커틀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입매를 유지했다. 그는 감정 한 톨 없는 눈으로 공주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몸수색을 하지 않으신 분은 황제 폐하의 신체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물러나 주십시오.”

“뭐라구요?”

당연히 왕국 공주의 몸을 수색하지 않았다. 그러한 절차를 밟았다면 기껏 구축된 왕국과의 신뢰가 무너질 테니까. 커틀러가 린델 공주의 손을 거칠게 쥐고 있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왕국 시종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새 소식을 들은 왕국의 경비들이 바깥에서 우르르 몰려왔다.

“무슨 짓입니까! 일개 기사 따위가!”

공주를 호위하는 기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처음 맡는 알파의 날카로운 페로몬이 훅 풍겨 나와 램파드의 눈썹이 꿈틀댔다.

“난 됐다. 잠시 물러나라.”

램파드에게 상냥했던 린델 공주는 냉랭한 목소리로 자신을 두둔하는 기사를 막아섰다. 그녀는 왕국의 기사가 한 발짝 물러나자 커틀러를 사납게 노려봤다.

“제복을 보아하니 그쪽은 황제 폐하를 모시는 화이트 테일의 기사단장 커틀러 콘테 공이군요. 감히 누구의 손을 붙잡고 있는지, 이만 주제를 파악하고 물러나시지요.”

“공주께서 먼저 황제 폐하께 다가가지 말고 물러나십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몸수색하지 않은 분은 폐하께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둘 사이에 자리 잡은 램파드는 숨을 멈췄다. 짙은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뻗어 나와 서로 사납게 할퀴기 시작했기에, 심장이 요동쳤고 호흡이 힘들었다. 처음 맡는 우성 알파의 향이기 때문인가. 램파드는 자신의 발아래가 사라지고,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페로몬 향에 취해 버리면 덜덜 떨며 웅크릴지도 몰랐다.

퍽! 주먹을 쥔 램파드가 커틀러를 후려쳤다.

램파드의 몸을 뜯어먹을 듯한 페로몬 중 하나가 사라졌다. 막힌 숨이 튀어나왔고, 역으로 다른 우성 알파의 사나운 페로몬이 몸 안을 파고들었다. 역한 짐승의 냄새에 당장에라도 코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코로 숨을 쉬는 걸 멈춘 램파드가 크게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커틀러 경! 여긴 전장이 아니다, 정신 차려라.”

램파드에게 얻어맞은 커틀러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정체가 탄로 나게 생겼는데 커틀러를 돌볼 여유 따위는 없다. 램파드는 짙은 페로몬 향을 애써 외면하고 공주를 향해 변함없는 미소를 보였다.

“부하가 실례를 저질렀군. 전쟁터에서 워낙에 많은 암살 시도를 받았기에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거지.”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램파드의 미소에 공주의 페로몬이 사라졌다. 사나운 페로몬이 잠잠해졌고, 다시 숨을 쉬기 편해졌다.

“커틀러 경. 오늘 밤은 책임지고 공주가 만족할 때까지 직접 연회를 이끌어라. 린델 공주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너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는 답하지 않았고 여전히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램파드는 커틀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공주를 바라봤다. 두려워하는 기색을 가라앉히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면 린델 공주, 짐은 이만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소. 남은 날 동안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시오.”

램파드는 아쉬워하는 공주에게 미소로 화답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도망치기 위한 구실이었다. 둘 다 페로몬을 갈무리했지만 강렬한 기운은 아직까지 몸속 세포를 공격하는 기분이었다.

브루툴 궁전 밖으로 나온 램파드는 코와 입을 막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쓴맛이 나는 사탕까지 입에 머금었지만, 짐승을 닮은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역겨운 기분에 당장 토악질을 하고 싶어 짧은 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출발하기 전 마부가 램파드에게 찾아왔다.

“본궁으로 돌아갈까요?”

“별궁으로 이동해라.”

“알겠습니다.”

마차가 출발하자 깊은숨을 내쉬며 몸을 기댔다. 뒤늦게 세포가 발작하듯 떨려 와 한 손으로 어깨를 부여잡았다. 알파에게 두려움을 느낀 건 첫 발현 이후 오랜만이었다. 사나운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조금만 더 노출되었으면 램파드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질질 흘리며 덜덜 떨었을 테지.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벌렁거리는 심장이 가만있지 않고 자꾸만 두근거렸다. 램파드는 두 눈을 감고 일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라앉히자 커틀러에 대한 미안함이 솟구쳤다.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였다는 듯, 그의 피부에 닿았던 손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커틀러를 후려친 오른손이 여전히 덜덜 떨렸으니까. 빠져나오기 전에 사과했어야 하는데, 제 몸만을 챙기느라 그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처받았으려나.

“…….”

양손으로 눈두덩이를 꾹 누른 램파드는 부조리를 느끼며 눈을 떴다. 조금 전 일은 커틀러가 제멋대로 나섰기에 벌어진 일이었으며, 까딱 잘못했다간 램파드의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몰랐다.

게다가 몇 년 전, 커틀러는 그보다 훨씬 더한 짓을 벌였는데 사과나 변명조차 없었다. 고작 한 대 때렸다는 이유로 이렇게나 마음이 일렁거리며 죄스러워지다니.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이 하찮게 느껴져,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연회 장소를 빠르게 빠져나온 마차가 본궁과 멀리 떨어진 별궁에 도착했다.

흥분한 가슴은 오는 도중 진정되었다. 마차에서 내린 램파드는 요란스러운 어두운 정원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지내고 싶어 별궁에 찾아왔건만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이 어수선했다. 예고 없이 황제가 찾아와서 소란스럽다기엔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기사들의 숫자가 많았다.

“무슨 일이냐.”

“정원에 들어온 세 뿔 사슴을 잡는 중입니다. 잡는 대로 내일 진상을 올리겠습니다.”

별궁은 숲과 가까워 세 뿔 사슴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제멋대로 들어온 짐승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램파드는 곧바로 건물 안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램파드는 푹신한 모피로 덮어 둔 의자에 편히 기대 두 눈을 감았다. 정원에 들어온 네발짐승 한 마리를 아직 못 잡았는지 창문 밖이 소란스럽다.

“피곤하십니까? 휴식을 위한 향이라도 준비해 올까요?”

“필요 없다. 조용히 있고 싶으니, 사슴을 잡는 대로 경비도 최소한의 숫자만 맞춰라. 방문 또한 전부 거절할 테니 모두에게 전해라.”

“커틀러 단장님도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조용히 문밖으로 나간 시종은 입구에 서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은 새벽까지 사브로 왕국의 공주와 함께 지내기 위해 일정이 비었다. 중간에 빠져나왔으니 통째로 램파드의 휴식 시간이 되어 버렸다.

날뛰는 사슴을 잡았는지 별궁은 드디어 램파드가 원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어둠에 파묻혔다.

인기척에 눈을 뜨자 모피를 든 시종이 보였다. 그는 램파드에게 덮을 요량으로 두터운 모피 가죽을 들고 있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그는 램파드를 깨운 것이 미안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서 주무시면 피곤이 풀리지 않으십니다. 침실로 이동하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술기운이 돌아 어지러웠다. 잠에 취한 램파드는 시종을 향해 한껏 눈을 찌푸렸다.

“세 뿔 사슴 스튜가 먹고 싶군.”

“지금 시각에 말입니까? 아직 피가 제대로 빠지지 않아 칼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서둘러 만든다고 해도 족히 세 시간은 걸릴 겁니다.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으면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룻밤 정도는 문제없지 않은가.”

세 뿔 사슴은 사후 경직이 심해 두터운 칼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손질하는 데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 밤새 피를 빼 살이 부드러워진 다음 날 조리를 시작한다. 피가 덜 빠진 지금 조리를 시작하면 문자 그대로 생고생이었다.

시종은 램파드가 자비를 베풀었으면 해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가련한 시종의 눈빛을 무시한 램파드가 입을 열었다.

“육수는 목뼈를 이용하고, 고기는 뒷다릿살만을 오래 익혀서 만든 게 가장 좋겠군. 지금 당장 만들어 오너라.”

“알겠…습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시종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잠든 램파드를 깨워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속으로 투덜대는 시종이 사라졌고, 방 안에는 램파드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부드러운 모피 가죽에 몸을 기댄 램파드는 창문 밖을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근처에는 세 뿔 사슴 머리가 박제되어 있고, 그 아래. 교차하여 장식된 두 개의 가검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날이 세워지지 않은 장식용 검이지만 실력자가 쥐면 훌륭한 흉기로 돌변할 터.

한 손에 검을 쥔 램파드는 기척을 숨기며 조용히 문을 응시했다. 램파드는 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왕국 기사의 목을 벴다. 공주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자 중 원한을 가진 자가 한둘쯤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곧이어 벌컥, 문이 열렸고 램파드는 침입자를 향해 자비 없이 검을 내리꽂았다. 침입자가 검을 막았지만 램파드는 여유로웠다.

“왕국의 암살자냐? 쳐들어오기엔 이른 시간 같은데?”

캉! 날카로운 쇳소리 뒤에 있는 침입자는 뻔뻔하게 얼굴도 가리지 않고 정체를 드러냈다. 상대를 확인한 램파드의 미소가 지워지고 표정이 굳었다. 야심한 밤이지만 반짝이는 은발이 눈에 띈다. 제국, 아니 대륙을 통틀어 은발을 가진 자는 드물었다.

불청객은 램파드의 검을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아는 사람임을 확인한 램파드가 중얼거렸다.

“내 명령을 허투루 들은 거냐. 왜 여기 있는 거냐.”

“지금이 몇 신지 모르시는 겁니까. 새벽 2시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공주님 접대는 제대로 끝마쳤습니다. 만족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분을 에스코트까지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잠깐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었다. 램파드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강하게 쳐 낸 뒤, 커틀러에게 찔러 넣었다.

커틀러는 살해 의사가 없는 검을 받아 내고, 오직 방어에만 신경 썼다. 두 개의 쇠붙이가 얽혔다. 램파드의 가검과 맞닿은 커틀러의 진검에는 붉은 피가 엉켜 있었다. 아직 흘러내리는 거로 보아 조금 전에 묻은 피였다.

“사람을 죽인 거냐.”

“네. 폐하께로 가는 길을 막아서니까 제거해야지요.”

“대체… 몇 명을 죽인 거냐!”

“제 얼굴을 알아보고 반항하는 놈 하나만 죽였습니다. 나머지는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 기절시켰고요. 전부 죽일 걸 그랬습니까?”

“미친 새끼.”

“그러니 제 방문을 왜 막으신 겁니까. 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지 않고, 마치 원하는 듯 문을 열어 놓으셨으면서.”

커틀러는 공격하지 않고 램파드의 검을 막기만 했다. 이대로 쓰러뜨려 봤자 불쾌한 기분은 가라앉지 않는다. 램파드가 검을 내려놓자 커틀러도 방어를 멈췄다. 그는 검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고, 허리춤에 꽂았다. 능청스럽게 할 일 다 하는 커틀러의 모습에 기가 찼다.

“나가.”

“볼일은 끝마치고요.”

“무슨 볼일?”

“폐하께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조금 전 한 대 후려친 건에 대한 거라면 할 말 없으니까 당장 사라져라.”

“잠시 잊고 있었군요. 그 얘기도 함께 들어야죠.”

램파드는 이를 악물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둘의 위치가 확고해진 후 커틀러는 상하 관계를 확실히 지켰다. 지금 그 선을 없애 버리며 기어오르려고 한다. 몇 년 얌전히 지내기에 겪은 일을 새까맣게 잊고 그의 페로몬에 해롱거리기만 했다. 커틀러는 램파드를 진창에 밀어 넣은 전적이 있었건만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는가.

“분명히 해야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닥치고 북부 지방으로 꺼져 버려.”

훅 피어오르는 강한 향에 램파드는 코를 틀어막았다. 린델 공주의 우성 알파 페로몬뿐만 아니라 커틀러의 향에도 몸이 반응한 것이다. 짙은 향에 살갗이 파르르 떨렸고, 속이 벌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입까지 강하게 틀어막은 램파드가 커틀러를 노려봤다.

“아까 폐하의 반응만을 보고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정말로 다른 알파에게 각인했군요. 어중간한 반응을 보아하니, 썩 좋은 상대가 아니었나 봅니다?”

피부를 뜯어먹을 듯한 강인한 향이 잦아들었고, 램파드의 막힌 숨이 트였다.

“그래서. 내가 다른 알파에게 각인한 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제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알파랑 붙어먹을 생각을 하신 겁니까.”

램파드의 입꼬리가 한쪽만 쭉 올라갔고, 피식 바람 빠지는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멋대로 착각하지 마라. 단 한 번이라도 너의 것이 된 적은 없으니까.”

“폐하께서 스스로 제 품속으로 들어오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거라면 미숙한 어린애의 착오일 뿐이다. 아쉬운 마음이 든 모양인데 이미 늦었어.”

“늦지 않았습니다. 전 폐하가 완벽해지길 기다린 거니까요.”

커틀러는 램파드의 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빈손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램파드는 모피가 깔린 의자에 도로 앉았다.

커틀러가 가까이 다가오자 심장이 두근거린다. 긴장한 램파드는 손잡이를 꽉 부여잡았고, 손등의 뼈가 도드라졌다. 그 위에 커틀러의 단단한 손이 겹쳐졌다. 그의 입과 램파드의 귀가 가까워졌고, 숨을 내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찔러 넣지도 않을 검은 왜 들고 계신 겁니까.”

램파드가 사납게 노려봤지만, 커틀러는 태연했다.

“그렇게 날 세우지 마십시오. 폐하를 도울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까요. 평소 들고 다니시던 케이스는 어디에다 두셨습니까.”

램파드가 입을 굳게 다물자 커틀러는 직접 손을 움직여 황제의 품을 뒤졌다. 굳어 있는 몸에 손을 대고, 조끼 주머니 안에 넣어 둔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그는 상자 안에 들어간 얇은 감별지를 꺼내 흔들었다.

“자신의 향이 달라졌단 걸 본인은 모르실 법도 하겠군요. 대개는 제 몸에서 나는 페로몬의 향이 어떤지 잘 모르니까요. 아직 확인하지 않으셨죠?”

램파드의 시선이 커틀러가 흔드는 작은 종잇조각에 꽂혔다. 설마. 감별지를 낚아채 곧바로 입 안에 종이를 넣고 뺐다. 흰색인 종이는 램파드의 타액에 반응해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고, 램파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곁에서 오메가의 색을 확인한 커틀러가 감별지를 빼앗아 불붙은 초를 이용해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회색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감별지를 바라보는 램파드는 마음이 무거워 입을 열 수 없었다.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 떡잎 같은 상태였는데, 이제 저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오메가가 되었군요.”

굳어 있는 램파드의 얼굴에 손을 올린 커틀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쿠와트 숲에서 있었던 일을 고백했을 때와 같이, 분노와 슬픔. 그리고 기쁨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손대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나. 아직 제대로 발현하지 않은 어중간한 오메가라서?

램파드는 커틀러의 손을 쳐냈다. 아래로 한없이 꺼져 가는 무거운 입을 억지로 열었다.

“네놈 짝으로 만들기 위해 기사들을 풀어 날 덮치게 한 거냐. 그딴 이유로 그런 짓거릴… 그러지 않았어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커틀러에게 자연스럽게 이끌렸을 텐데. 뒷말을 내뱉지 않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가 근본도 모르는 놈들에게 폐하를 내던졌을 거 같습니까? 사고였습니다.”

“개입하지 않았다. 그리 믿으란 거냐?”

“네. 저만 믿으십시오.”

램파드는 이를 악물며 커틀러를 쏘아봤다.

“뭘 믿으란 거지. 기뻐하지 않았느냐!”

위로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함께 화를 내 주고 걱정해 주었다면, 커틀러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입술은 그때와 같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입꼬리가 기쁜 듯 살짝 휘었다.

“램파드 폐하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으니까 기뻐 마땅하지요.”

분한 마음에 지금 당장 커틀러를 베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의 말대로 램파드가 오메가란 걸 알고 있으며 도와줄 유일한 알파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첫 번째 각인 상대인 커틀러를 쉽게 베어 넘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작 주먹으로 한 대 쥐어 팼다고 램파드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근원이 그를 지키고자 마음을 후벼 팠다. 검으로 찌른다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 발겨지리라.

오메가에게 첫 각인 상대는 부모이자 형제, 절대로 저버릴 수 없는 절친한 벗이니까.

램파드는 진심으로 분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나, 이렇게나 자신을 보잘것없이 취급하는데도 커틀러를 향한 각인의 끈이 묶여 있다니. 어떻게든 그를 원하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당신을 각인시킨 망나니를 죽일 때까지 얌전히 황궁에 계십시오. 당신을 지킬 알파는 저뿐입니다.”

그는 램파드의 등 뒤로 다가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진짜 오메가가 되었다고, 우성 알파의 말에 순종한다 생각하는 건가. 이 정도로 안위를 가질 램파드가 아니었다.

“너에게 주어진 기회는 이미 모두 사라졌어. 무슨 짓을 해도 네가 날 각인시키는 일은 없을 거다. 게다가 동정 주제에 날 각인시킨다고? 건방진 소리를.”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충분히 만족하게 해 드릴 테니까요.”

“기가 차는군. 널 받아들일 바에 린델 공주를 맞이하겠다. 그녀 또한 우성 알파로서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있을 테고, 외교적인 측면으로써도 좋겠지. 그게 아니면 사브로 국왕의 첩이 되는 게 너의 짝이 되는 거보단 나을 거다. 그 늙은이 또한 알파니까!”

램파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이 멈췄다. 커틀러의 손이 점점 내려왔고, 램파드의 목덜미에 위치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다른 알파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열불 났으니까. 다음에 또 알파 앞에서 웃었다간 연회장을 피바다로 만들 겁니다.”

“베타들에겐 내던졌으면서, 알파와 함께 있는 건 못 봐주겠다, 이건가? 왜? 같은 알파끼리는 비교당할까 봐 겁이 나냐.”

램파드의 양 볼에 따뜻한 손이 올라왔다. 등 뒤에 있는 커틀러는 램파드의 목을 뒤로 꺾어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커틀러가 무슨 말을 내뱉을까. 그의 입술에 집중했다.

“그 어떤 악담을 내뱉어도 진심이 아니란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절망한 폐하께서는 끝까지 저를 놓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저 하나만을 믿고 다른 알파를 아군으로 만들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래, 전쟁 때까지는 커틀러 한 명만을 온전히 믿었다. 그 믿음에 배신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멍청한 자신은 커틀러를 두둔하며 잊기 위해 애썼다.

“게다가 이번 각인도 원해서 되신 게 아니잖습니까.”

“내가 진심으로 원한 상대일 수도 있지. 안 그래?”

“처음 보는 자를 간절히 원할 리가 없지요.”

램파드의 도발에 그는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폐하께서 들고 있던 와인을 만들던 자의 이름은 애쉬 테일러. 남부 지방에서 와인을 만들던 하찮은 놈이지요. 갈색 머리에 노란 눈동자를 가졌고, 나이는 30대 중반이지요?”

“쥐새끼처럼 뒷조사를 한 거냐.”

“조사뿐만이 아니죠. 조금만 기다리시면 그자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때 폐하는 완벽하게 제 오메가가 되는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꿈도 꾸지 마.”

“두고 보시지요.”

램파드의 손을 들어 올린 커틀러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가검에도 입을 맞추며 기사의 맹세를 하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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