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전쟁 (2/25)

02 전쟁

여름 감기에 시달리던 선대 황제가 갑자기 급사했다. 오메가를 혐오하던 아버지가 사라졌으니 램파드는 세상을 속이지 않아도 된다. 진실을 밝히고 황제로 삼을 알파를 반려로 들여 후계자를 낳았더라면 램파드의 삶은 평온했을 것이다.

즉위를 준비하는 램파드의 표정은 침울하기만 했다. 이때껏 속여 왔는데, 앞으로 언제까지 세상을 속여야 하는지. 무거워진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커틀러가 주고 떠난 검을 만지작거렸다. 램파드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커틀러가 없으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든다. 다행히 그의 소중한 검이 곁을 지켜 적적하지 않았다.

“램파드.”

익숙한 벗의 목소리에 램파드는 걱정을 떨쳐 내며 미소로 회답했다. 접전 지역에 나가 있던 커틀러는 램파드의 소식을 듣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왔다. 아직 옷을 갈아입지 못한 그의 은색 갑옷은 흙과 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다. 전쟁터의 고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램파드의 표정은 괴로움에 사무쳤다. 램파드의 손짓에 곁을 지키던 시종이 자리를 비웠다.

“커틀러.”

도와 달라고 해야 하나. 이때껏 램파드가 위험에 닥치면 도왔던 그니까 이번에도 제 일처럼 나설지도 몰랐다. 하지만 억제제를 구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이번 일을 도운다면 그는 램파드 대신 황제가 되어 멸망이 드리운 제국을 책임져야 한다. 지극히 낮은 승리의 정답을 찾기 위해 수십만 명의 기사를 희생해야 하며, 만약 패배한다면……. 황족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이 잘려 전시될 것이다. 친구에게 그런 큰 짐을 떠넘길 수 없다.

그리고 또, 자신의 반려가 되어 달라는 억지 부탁을 할 수도 없다. 배우자가 되어 달란 말은 커틀러에게 주어질 만남의 기회를 모조리 빼앗겠다는 뜻이었다. 몸과 마음이 단단히 결속될 진정한 각인 상대를 찾지 말고, 몇 년을 함께 지냈는데도 각인하지 않은 오메가 곁에 있어 달란 뜻과 같았다.

주저하는 램파드 대신 커틀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너와 함께 싸우겠어.”

오메가임을 밝히면 전쟁에 나설 수 없다. 제국은 램파드가 필요했다. 마음을 정한 램파드는 커틀러의 검을 강하게 쥐었다. 결정을 내리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무겁게 느껴졌던 머리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황제가 될 거야.”

웃음기가 머물던 커틀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는 미소를 깡그리 지우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바꾸며 태도 또한 공손하게 했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램파드 황제 폐하.”

친구를 졸업하고 주종 관계가 되었지마는 그의 딱딱한 입매 끝에 매달린 옅은 미소 덕분에 램파드는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마음을 다잡은 램파드는 커틀러의 검을 허리춤에 차고, 대관식장으로 이동했다.

국운이 위태롭다고 하나 황제의 즉위식은 호화스럽게 꾸며졌다. 마치 마지막을 화려하게 끝내기 위해 없던 것을 쥐어짜 꾸며 놓은 모양새였다. 금색과 붉은 천으로 호화스럽게 꾸며진 방에서 램파드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태어나 희생당한 루트비안 덕분에 얻은 황제의 자리였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전쟁 때문에 떠밀려 어찌할 수 없이 한 선택이라 변명 따윈 하지 않겠다. 제국을 위험에서 구해 내고,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버지, 그리고 창관. 우리 형제에게 저주를 건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리라.

램파드 클로비스 황제, 스물 셋.

선대 황제가 급사한 후 왕국의 침공이 시작됐다.

원래부터 호시탐탐 제국 땅을 파먹을 기회를 노리고 있던 왕국은 제국의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준비 없이 기습당한 제국에는 순식간에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많은 제국민이 포로로 잡혀갔다.

넓은 영토를 손에 넣었지만, 왕국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다. 두 세력은 오랜 세월 앙숙으로 지내 왔고, 왕국은 제국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할 기세로 진군했다.

형세를 뒤집은 건 갓 즉위한 램파드 황제의 지략이었다. 왕국의 자랑인 군마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점령되지 않은 제국의 목초밭에 독을 뿌렸다. 대량의 말먹이는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데 풀을 뜯어 먹은 말이 쓰러지자 왕국은 본국에서 물자가 지원될 때까지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대군의 발을 묶었지만, 왕국의 정예 부대인 기병은 말이 없어도 여전히 막강했다. 승리를 눈앞에 둔 왕국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물자를 모두 기병을 움직이는 데 활용했다.

램파드는 제국의 주력 기사단 중 하나인 화이트 테일을 전투에 투입했고, 일부러 패배하도록 지시했다. 기병은 도망치는 화이트 테일을 쫓아 얕은 늪지대까지 따라왔다. 그곳에는 굶주린 짐승이 도사리고 있었고, 왕국의 기병을 먹잇감으로 인식하며 공격했다.

램파드의 계략대로 늪지대에 대량으로 서식하는 악어가 왕국군이 자랑하는 기병의 숫자를 절반 이하로 만들었다. 주력 부대를 잃은 왕국군은 주춤했고, 전장에 참여한 램파드가 직접 기사를 이끌어 국면을 타개했다.

현재 램파드 황제와 함께 남부 전선에 뛰어든 기사단은 공을 세워 승승장구하는 화이트 테일이었다. 커틀러가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만든 신생 기사단으로, 출생 신분 상관없이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받아들였다. 덕분에 규율이란 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오합지졸이 탄생했는데, 실력은 또 있어 용병 같은 무리였다.

정통 깊은 기사단이 따로 존재하는데도 황제는 로열 가드와 함께 커틀러 단장이 이끄는 화이트 테일을 측근으로 두었다.

“남부 전선의 진행 상황을 보고해라.”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램파드는 코가 쓰릴 정도로 쓴 사탕을 혀 위에서 굴리며 말했다. 알파 페로몬을 막기 위해 입에 머금는 사탕은 몽롱한 정신을 깨우는 데도 도움을 줬다. 문제는 더럽게 쓰고 맛없다는 것이다.

“예, 폐하. 현재 왕국군은 어림잡아 10만이 넘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반해 아군은 지원군을 합쳐 총합 5만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직 보급품도 도착하지 않아서, 이대로 공격당하면 그대로 사령부까지 돌파될지도 모릅니다.”

“보급 부대가 어디까지 왔는지 파악했는가.”

“오늘 새벽 도착한 전서구에는 쿠와트 숲속에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며칠째 고립된 덕분에 보급품이 떨어졌고, 전염병이 돌았다. 사령부에 있는 기사들의 절반 이상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지만 약이 부족했다. 전염성이 심해 내일 아침이면 건강한 이의 절반이 병에 걸릴지 모르는 일이라 한시라도 빨리 보급품을 손에 넣어야 했다.

또한 램파드의 문젯거리는 가지고 있는 억제제가 얼마 없단 것. 오늘 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는 억제제를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 이틀 정도야 억제제를 먹지 않아도 되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 보급품이 들어오기 위해서라도,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지금 이 사령부는 램파드를 포함해 세 명의 지휘관이 통솔했다. 누군가 앞장서서 길을 만들 수밖에 없는데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어 명령을 내려도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다. 결국, 램파드가 직접 나설 수밖에.

“짐이 직접 로열 가드를 이끌고 전선에 나가겠다.”

기다란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커틀러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서둘러 일어난 탓에 나무 의자가 뒤로 밀려 넘어졌다.

“저들이 여길 포위하고 있는 이유가 황제 폐하를 포로로 삼기 위해서인데, 직접 나서다니요. 며칠 후면 지원군이 추가로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여기서 대기해 주십시오.”

“병사의 절반이나 쓰러져 있는 상태가 아닌가? 역병이 빠르게 돌고 있어 보급품이 한시라도 빨리 필요한 상황이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을 때 포위망을 뚫어야 가망이 있다.”

“그러면 소신도 함께 가겠습니다.”

커틀러는 며칠 전 전투에서 다쳤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적어도 일주일 동안 왼쪽 팔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의 검술은 오른쪽 팔만을 사용하니 문제없지만 말까지 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불허한다. 두 명의 지휘관이 나서면 누가 여길 관리하냐. 부상병인 경은 여기나 지켜.”

“폐하!”

커틀러는 램파드와 아카데미에서부터 알던 사이였다. 저 고집. 끊기지도 않고, 접을 리는 더더욱 만무했다.

“그렇다면 전선 입구까지는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던가.”

램파드의 몸에 시종이 달라붙어 은색 갑옷을 정비했다. 붉은 망토를 어깨에 단단하게 묶고, 램파드의 유언대로 가장 튼튼한 검을 허리에 고정했다.

자신의 선택을 한 치도 후회하지 않는 램파드는 또렷한 시선으로 앞만 보며 막사를 젖혔다.

푸르릉, 램파드의 애마가 콧김을 뿜으며 주인을 반겼고 앞다리를 가만있지 못했다. 빛나는 은색으로 착각할 법한 밝은 회색 갈기 털이 풍성한 것으로 보아 기분이 최고인 듯했다. 램파드는 회색 말을 끌고, 움직일 수 있는 기사가 모인 막사로 이동했다.

황제의 등장에 쉬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짐은 적의 후방을 치러 갈 것이다. 쓰러져 있는 자네들의 동지를 돕기 위해서, 먼 고향 땅에서 우리를 믿고 있는 제국민을 위해 나서는 것이지. 짐과 함께 제국을 위해 싸울 자는 당장 검을 들고 따라오너라!”

아카데미에서 커틀러에게 처절하게 패배한 램파드는 좌절하지 않고 빠르게 일어섰다. 남들보다 몇 배를 매진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썼고, 현재는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검사가 되었다.

제국의 일인자. 아니, 검술을 창조한 신이래도 믿을 법한 실력을 갖춘 황제가 함께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기사들의 사기가 올랐고, 램파드 또한 승리를 확신했다.

램파드는 기사의 환호를 받으며 다리가 가장 빠른 자신의 말에 올라타 적의 후방에 위치한 언덕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언덕 아래로 왕국 기사단의 깃발이 여러 개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램파드가 활을 들어 올리자 곁에 있던 커틀러가 못마땅하다며 끼어들었다.

“미끼는 제가 되겠습니다.”

“한쪽 팔을 다쳐 놓고 말고삐나 제대로 쥘 수 있겠냐.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됐다. 이만 돌아가거라.”

램파드는 가장 큰 먹잇감이 나온 사실을 공공연하게 알리기 위해 화살을 세 개 꽂아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목표는 바람에 맡겨 거대하게 펄럭거리는 왕국군의 국기. 넓은 만큼 대충 쏘아도 맞추기가 수월했으며 세 개 모두 국기를 꿰뚫었다.

왕국군은 기습을 알아차리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정확히 파악했다.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램파드는 투구를 벗어 던졌고, 그의 목 뒤를 가볍게 덮은 허니 블론드가 바람에 나부꼈다.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누구인지 그들은 쉽게 파악했다. 한 번 보면 평생을 기억하고 싶을 외모 덕분에 전쟁이 터진 와중에도 적인 램파드를 찬양하는 시인들의 노래가 왕국까지 퍼졌으니까.

후방을 기습한 램파드는 적의 시선을 제대로 끌었고, 묶여 있던 보급 부대가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는 중 램파드가 커틀러를 감싸다 오른쪽 어깨에 화살이 꽂혀 그대로 낙마했고 포위당했다. 이대로 모두 다 끌려가게 할 수는 없어 커틀러를 후퇴시켰고, 램파드는 꽁꽁 묶인 채 적의 사령부로 끌려왔다.

황제를 사로잡은 덕분에 갈색 늑대 깃을 사용하는 이곳 부대는 축제 분위기였다.

하아, 그러니까 따라올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 거하게 짐짝이 되었으니 돌아가는 대로 두들겨 패야 속이 풀릴 것이다.

“이거이거, 지엄하신 램파드 황제 폐하 아닙니까! 처음 뵙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대륙 전체에 퍼진 시인의 이야기대로 램파드 황제 앞에서는 미의 신조차 자신의 얼굴을 부끄러워하며 날개로 가릴 정도군요!”

“그에 비해 자네는 불어 터진 멧돼지같이 생겼군. 눈이 썩는 듯하니 그 상판대기 좀 가리지 않겠나. 아니면 토악질이 나오는 고문이라도 시도하는 건가? 짐이 불 건 없다만?”

왕국군의 기사단장인 듯한데, 얼굴 전체에 갈색 털이 복슬복슬 올라온 게 진짜 멧돼지같이 생겼다. 승리의 술에 잔뜩 절어 퉁퉁 불어 터진 얼굴도 짐승같아 보이는 데 한 몫 단단히 했다.

램파드의 말에 화가 난 기사단장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곧이어 페로몬을 내뿜기 시작했는데, 얼굴을 닮은 비린내 섞인 짐승 냄새였다. 램파드는 다행히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익숙해져 이런 찌꺼기엔 반응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 그렇지만 역한 냄새를 맡기엔 토기가 올라와 쓴 사탕이 필요했다.

“그런 건방진 말을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일주일 뒤 황제 폐하께서 직접 굴욕적인 패배 선언을 내릴 거니까요!”

“짐이 말인가? 그럴 생각 전혀 없는데? 누구랑 착각하고 있나 보군. 가령, 너희 쪽의 늙은 왕이라든지.”

“소문대로 천국에 온 듯한 미모에 지옥의 업화를 불러일으키는 사나운 입이군요. 더는 말을 섞기 싫으니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흥, 도망가는 거겠지.”

동그란 눈을 뒤룩거리던 기사단장은 화를 삭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있는 기사에게 무언가 말을 하는지 큰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두 명의 기사가 들어왔다. 한 명은 뒤, 또 다른 한 명은 램파드의 앞에 서서 어깨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하, 뭐야. 나간다며?”

나간다던 기사단장이 막사 안으로 도로 들어왔다. 램파드는 밧줄과 함께 두 명의 남자에게 몸을 속박당했지만 여전히 입을 나불댔다.

“재갈을 물려라.”

아직 퍼부을 악담은 더 남아 있는데, 입에 재갈이 물렸다. 상대를 조롱하기 위해 말한 것도 있지만, 팔다리가 묶여 있어 심심한 이유가 컸는데. 더는 떠들지 못하게 됐다.

“벗겨.”

램파드의 몸을 감싼 갑옷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천 옷이 드러났다. 황제의 의복은 화려한 만큼 복잡해서 벗기기 번거롭다. 두 명의 기사가 낑낑대며 램파드의 옷을 한 겹씩 벗기기 시작했다. 앞섶이 풀어지고 쇄골과 가슴이 드러나자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몸 또한 극상의 예술품이군요. 백 년 만에 나올 천재적인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해도 이런 몸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램파드의 몸 시종은 황제 폐하의 몸이 얼마나 예술인지 동네방네 다 소문내고 다녔다. 손은 안 움직이고 침 흘리기 바빠 교체한 시종만 몇 명이었는지 원. 얼굴만큼이나 몸 또한 아름답단 건 램파드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새삼 감동할 리 없다.

램파드의 목선을 유심히 살펴보던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감상은 이만 됐다. 마저 벗겨라.”

기사가 손을 움직였지만 램파드의 옷이 더는 벗겨지지 않는다. 어깨를 파고든 화살 덕분에 옷이 걸쳐졌기 때문이다. 앞쪽에 위치한 기사가 단도를 사용해 화살대를 꺾어 부러뜨렸다. 똑, 소리와 함께 나무가 부러졌고 속에 들어찬 화살촉이 근육을 마구잡이로 찔렀다. 통증을 느낀 램파드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원래라면 귀한 대접을 해 드리려 했는데 말입니다. 제 기분이 매우 언짢으니 거친 방법으로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전염병이 돌고 있단 말과 달리 쌩쌩한 거 같으시니 모르핀 정도야 없어도 되겠지요?”

건강해도 아픈 건 질색이라 마취는 필요하다. 반론하고 싶었지만, 입이 틀어막힌 상태였다. 멧돼지같이 생겼지만 저건 기사다. 기사라면 으레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야 할 터인데, 말로 당했다고 칼질을 하다니. 게다가 반격당할까 봐 재갈까지 물려 놓는 치밀함까지 갖췄다.

“으읍!”

불로 달군 뜨거운 나이프가 화살촉이 박힌 어깨를 찔렀다. 세 치 혀를 놀리는 걸 막은 것도 있지만, 재갈은 고통에 혀를 깨무는 걸 방지하기도 했다. 마취 없이 뜨거운 칼이 생살을 벌리는 건 아팠다. 정말 너무너무 아파 쌍욕을 내뱉고 싶은데 입이 막힌 바람에 열 배 더 화가 난 램파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찡그리는 표정도 아름답군요. 시인이라도 불러 볼까요? 황제 폐하의 표정만으로도 걸작이 탄생할 듯합니다.”

램파드는 고통에 가득 찬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상대를 씹어 먹을 눈빛에 기사단장은 잠깐 긴장했지만 이내 오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게 입을 조심히 놀리셨어야지요. 왜 갑자기 조용해지신 것인지. 반론해 보십시오. 이런, 입이 막히셨단 걸 잠깐 잊었습니다.”

저 멧돼지 같은 놈은 절대 곱게 보내지 않을 거다. 생긴 대로 대우해 줘야지. 사과나무 목재로 오랜 시간 훈연해 베이컨으로 만들 거다. 마지막으로 두툼하게 썰어 낸 뒤 애완 흑표범의 먹이로 던져 줄 계획을 세웠다.

“읍, 으읍!”

박혀 있는 상처 주변이 벌려지고, 살이 익는 냄새가 났다. 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단도 끝이 쇳조각과 부딪혔고 큰 통증에 램파드는 몸부림을 쳤다. 단단한 촉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자 피가 울컥 새어 나온다.

제국군과 달리 보급품이 넉넉한 왕국군은 소독까지 꼼꼼하게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상처 부위를 지혈하며 붕대를 동여맸다. 처치가 끝나고, 램파드는 두 명의 사내에게서 벗어났다. 부드러운 붕대로 감싸 뒀지만 아직까지 날카로운 칼로 쑤시는 느낌이었다. 기절할 듯한 고통인데, 상처 부위가 쓰라려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램파드는 몽롱한 시선으로 적국의 기사가 품을 뒤지는 걸 바라보았다.

“무기는 압수한 검이 전부입니다. 다른 무기는 소지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리고 이건… 뭐지?”

기사들이 꺼낸 건 자그마한 철제 상자였다. 그 안에는 램파드가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굉장히 쓴 사탕이 여러 개가 들었다. 원래라면 흰색의 히트 사이클 억제제도 함께 넣어 두는데 다행히 아침에 먹은 약이 마지막이라 억제제는 들어 있지 않았다.

“재갈을 풀어 줘라.”

“……후우. …으.”

고통을 덜고자 입에 문 재갈을 악물었더니 침에 절어 축축했다. 그 덕분에 몸속에 들어오는 공기까지 습하게 느껴졌었는데, 맑은 산소를 내쉬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램파드 폐하, 이건 무엇이옵니까?”

통증 때문에 열이 오른 램파드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으로 닦아 낼 수 없어 머리를 나른하게 기울이며 기사단장을 바라봤다.

“사탕. 맛이 좋으니까 먹어 봐라. 허락하지.”

두 명의 기사와 단장은 다소 어수룩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적국의 황제가 간식이라 말했지만, 냅다 입에 넣기엔 믿음직스럽지 않다. 단장은 손에 든 자그마한 사탕을 미심쩍게 바라봤다.

사탕을 뚫어져라 바라봐도 정체를 파악하긴 힘들 것이다. 저건 램파드의 식사를 담당하는 시종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사탕이다. 처음 보는 게 당연할 터.

“못 믿겠으면 하나 줘 봐라. 입이 심심하거든.”

“……독 같은 건 아니겠죠.”

“이런 더러운 곳에서 죽을 생각 없는데?”

“알겠습니다. 하나 드시지요.”

기사단장이 철제 상자 안에 있던 자그마한 사탕을 하나 꺼내 램파드의 혀 위에 올렸다. 그는 뜨겁고, 말캉한 램파드의 혀 감촉에 깜짝 놀라며 재빨리 손을 뺐다. 직접 먹여 놓고선 못 만질 걸 건드렸단 표정이었다.

그의 반응을 무시한 램파드는 자그마한 사탕을 입 안에서 굴렸다. 입 안에 쓴 사탕 맛이 퍼지자 램파드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사실 램파드는 혀가 녹아내릴 정도의 단맛을 좋아한다. 알파의 페로몬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이런 사탕 따윈 평생 입에 대지 않았을 것이다. 쓴맛은 싫지만, 멧돼지의 짐승 냄새보단 훨씬 낫다.

램파드의 표정을 보아하니 간식거리가 맞았다. 기사단장은 이걸 굳이 압수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램파드는 작은 사탕을 혀로 굴려 입 구석에 처박았다.

“특별히 주문해서 만드는 귀한 사탕이다. 쉽게 맛볼 수 없을 테니 하나 먹어 보지그래?”

“그렇게 권하시니 어디 한 번…… 우웁! 웃, 퉷!”

램파드는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오르는 멧돼지를 향해 푸하핫, 비웃으며 사탕을 뱉었다. 처음 저 사탕을 입에 머금었을 땐 물만 몇 잔을 들이켰는지 모른다. 입 안을 헹궈 냈는데도, 냄새가 빠지지 않아 괴로웠었지.

“이런… 미친개 같은!”

“미친개라, 너희 왕국이 손수 붙인 짐의 별명이라더군. 매우 마음에 들어.”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 기습에 방어선이 무너진 제국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램파드의 계략으로 전선을 뒤집었고 많은 숫자의 왕국군이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다. 악어에 물려 죽은 시신의 상태는 마치 들개가 뜯어먹은 것 같았고, 그때 이후로 왕국에서는 램파드를 황제가 아니라 개새끼라 불렀다.

“큭! 오늘 하루 이 막사에서 반성하십시오. 너희는 여길 잘 지켜라!”

화가 난 기사단장은 욕지거리하며 밖으로 나갔다. 램파드는 낮게 한숨을 쉬며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이왕이면 푹신한 쿠션도 하나 받쳐 주지 딱딱한 나무 의자가 불편했다.

왕국은 램파드의 입에서 항복 선언이 나올 때까지 험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보급품도 도착했을 터이니, 이대로 얌전히 지내는 게 가장 신상에 이롭다. 하지만 천천히 들끓고 있는 감각 때문에 편히 쉬고 있을 수 없었다.

전장에는 많은 숫자의 알파가 참전한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알파의 페로몬에 억제제를 먹지 못한 램파드의 몸이 천천히 깨어나는 중이었다.

오메가로 밝혀지면 어떤 일을 겪을지 눈에 보듯 뻔했다. 왕국의 귀족 중 한 명에게 각인될 때까지 겁탈당할 것이며 그런 취급을 당할 바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낫다. 그러나 탈출할 기회는 충분하니 비관하지 않고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두꺼운 천으로 뒤덮인 막사는 시야를 모조리 차단해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램파드는 눈을 감고, 바깥의 소리에 집중했다.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근처에 말을 묶어 두는 곳이 있는지, 발굽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램파드는 푹 잠들지 못하고 자주 깨어났다. 상처를 치료했지만, 여전히 쓰라린 어깨의 통증과 함께 히트 사이클의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회를 엿보고 탈출할 생각이었지만 몸이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 없어 계획을 수정했다.

손은 여전히 뒤로 꽁꽁 묶인 상태. 발도 마찬가지였다. 감시병은 두 명 있지만, 저 중 하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둔 의료병이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램파드에게 가까이 다가와 어깨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중 한 명의 검을 빼앗기로 마음먹었다.

“피는 멎었군요. 붕대를 새로 감아 드리겠습니다.”

“손이 저린데, 이것도 풀어 줄 수 있을까?”

“항복하실 마음이 드신 겁니까? 마음을 정하셨으면 손발을 풀어 드리고, 고급 막사로 이동시켜 드리겠습니다. 물론, 모르핀도 챙겨 드릴 거고요.”

“그럴 마음은 없군.”

“그렇다면 아니 됩니다. 어깨 붕대만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의료병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램파드의 어깨를 칭칭 동여맨 붕대를 풀고 거즈를 새로 교체했다. 피는 이미 멎었고, 상처가 덧나지 않게 소독을 한 번 더 했다. 램파드는 자신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는 적군의 기사를 바라봤다.

“자네, 가족은 있겠지?”

쓸데없는 사담은 하고 싶지 않은지 의료병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로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안 된다니 어쩔 수 없었다. 램파드는 자신의 붕대를 감아 주고 있는 의료병이 내려놓은 램프를 바라봤다. 얇은 유리 막으로 막아 둔 램프의 안에는 기름이 채워졌다. 바닥은 쇠로 되었으니, 저곳만을 집중해 노리면 멀리 날아갈 모양새였다.

의료병의 시선이 램파드의 상처에 고정된 사이. 묶여서 하나가 된 발로 램프의 아랫부분을 걷어찼다. 예상대로 짧은 거리를 날아간 램프는 두꺼운 막사 천과 부딪혀 쨍강, 깨졌다. 안에 있는 기름이 새어 나와 순식간에 천을 적셨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두꺼운 천이 활활 타오르기까진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그 전에 무기를 손에 넣어야 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램파드는 양손을 빼내어 의료병에게 내보였다.

“짐의 손은 진작에 풀렸다. 미친개를 묶어 두려면 이런 끈이 아니라 쇠사슬을 가지고 왔어야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는데, 어깨가 쓰라렸다. 바로 자세를 바꿔 팔꿈치로 상대의 인중을 가격했다. 강한 움직임 덕분에 의자에서 굴러떨어졌지만, 급소를 맞은 의료병은 단번에 기절했다. 램파드는 그의 허리춤에서 짧은 단도를 획득했다. 평소 즐겨 쓰는 장검이 아니지만, 다리를 묶은 끈을 자르기엔 충분… 하지 않았다.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다니, 이런 쓰레기 같은 검을 왜 들고 다니는 건가!

“얌전히 계십시오!”

입구에 있던 다른 기사가 검을 뽑으며 다가왔다. 램파드의 손에 단도가 들려 있어 엉겁결에 검을 뽑았지만, 황제를 내리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맨손으로 덤비기엔 겁이 났고, 인질은 불을 피해 빠르게 이동시켜야 한다. 사람을 불러야 하나? 그 짧은 새에 램파드가 도망가든가, 연기에 질식할지도 몰라 섣불리 이동하기 모호했다.

램파드는 당황하는 기사를 향해 소리 없이 싱긋 웃었다. 미의 신도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아름다운 미소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얼굴이군.”

램파드는 당황한 기사를 향해 단도를 내질렀다. 앉아 있는 자세에서 노릴 수 있는 부분은 몇 곳 없다. 기사의 하반신을 노렸는데, 그는 자신의 검으로 쉽게 램파드의 단도를 막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램파드의 검을 막은 기사가 다음 수를 생각하는 틈. 램파드는 그의 검에 다리를 걸어 노끈을 잘라 냈다.

“가까이 다가와 줘서 고맙다.”

결박한 끈을 모두 풀어낸 램파드는 기사의 배를 무릎으로 찍어 기절시켰다.

안쪽을 태우는 불꽃이 바깥으로 퍼져 나가기 전, 계획대로 검을 손에 넣었다. 램파드는 쓰라린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뭉친 목 근육을 풀었다.

기름에 적셔진 두터운 막사 천에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곧 연기를 발견한 기사들이 잔뜩 몰려올 것이다. 그걸 위해 램프를 노렸으니까 계획은 순조로웠다.

램파드는 기절한 기사의 목덜미를 각각 잡아 질질 끌어 입구에 대충 던져 놨다.

여전히 어깨는 아팠다. 빨리 돌아가서 진통제를 먹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램파드는 근처에 있는 말의 등 위에 올라탄 뒤 인적이 드문 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램파드를 지키고 있던 기사의 옷을 빼앗아 변장할 터인데. 시선 분산을 위해 불을 질러서 옷 갈아입을 시간까진 없었다.

등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둠을 달려가는 말 소리보다 ‘불이야’ 사람의 비명이 더 컸다. 램파드가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얼른 불을 끄라는 소리였다.

생각보다 왕국군은 정비가 잘된 모양이다. 갑작스레 발생한 화재를 빠르게 제압하고, 그 안에 있던 램파드가 사라진 걸 파악했다. 책임자인 기사단장은 생긴 건 무식한 멧돼지 같았지만 일 처리는 꼼꼼하고 빠르게 진행했다.

포로가 도망쳤단 걸 확인한 직후 왕국의 기사단장은 추격대를 보냈고, 램파드의 등 뒤로 세 마리의 말이 빠르게 접근했다. 예상보다 빨리 발각되는 바람에 원래 정했던 경로가 아닌 풀이 성인의 키 높이까지 자란 밀림 숲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어제까지 제국군의 보급 부대가 숨어 있던 쿠와트 숲이었는데 지금은 다 철수했는지 제국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어두운 숲길을 내달리는 건 위험하지만 램파드는 전속력을 냈다. 이 주변을 거점으로 삼기 전 숲을 수색했었다. 어느 정도는 길을 외우고 있어 어두운 숲을 노려보며 달려 나갔다.

추격대의 가장 맨 앞에 있던 남자가 소리쳤다.

“거기 서라!”

램파드는 타고 있는 말을 재촉하며 앞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지만, 속도가 시원찮았다. 하필 골라 온 말이 연속 출격으로 쉬고 있는 말이었다니. 포로를 가둬 둔 곳 근처에는 무기고나 좋은 말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대로라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번 탈출은 실패다. 이대로 순순히 항복 의사를 밝히고 다시 붙잡혀 가는 게 몸이 편한 길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심장이 뜨겁고 몸이 달아올랐다. 벌써 배 속이 근질근질한 게, 곧 오메가 특유의 페로몬을 내뿜을 것이다.

램파드는 말고삐를 단단히 쥐어 잡고, 이를 악물었다. 말이 땅을 박찰 때마다 다친 어깨에 충격이 갔다. 고통에 발버둥 치는 몸은 땀으로 적셔졌다.

“램파드 황제, 멈추시오!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단 말이오!”

이곳의 순찰 경로를 짠 장본인이 램파드였다. 그는 숲 안쪽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램파드는 일부러 이쪽으로 온 것이다.

높게 자란 풀숲을 헤쳤고, 길게 늘어진 넝쿨이 등장했다. 잘못 달리면 늘어진 넝쿨에 목이 걸리고, 말에 고정된 하반신은 달려 나가 즉석 교수형에 처해질지도 모른다. 램파드는 주저 없이 앞으로 박차며 들어갔고, 녹색 수풀이 몸을 가려 줬다.

“모두 앞에 달려가는 말에 집중하고 조심해라!”

이 정도로 따돌릴 수 있다면 좋을 터인데, 등 뒤로 말발굽의 소리가 여전히 요란하게 들린다. 기사들이 주춤해 거리가 벌려져 있는 지금, 길게 자란 풀숲으로 떨어져야 했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면 죽든가 최소 팔다리 하나 정돈 부러진다. 어제도 커틀러 대신 맞은 화살 덕분에 낙마했지만 그건 가만히 서 있던 상태였고 지금은 말이 달리는 중이라 상황이 달랐다. 운이 좋으면 길게 자란 풀이 쿠션 역할을 해 줘 다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어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오래 달려 주어라.

램파드는 말의 엉덩이를 검집으로 강하게 후려치며 높게 솟아오른 풀숲을 향해 떨어졌다. 푸르릉, 투레질을 내뱉은 말이 램파드의 바람대로 기수 없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램파드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풀숲으로 굴러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세 마리의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장막처럼 늘어진 덩굴 덕분에 램파드가 떨어진 걸 보지 못한 모양이다. 추격대가 사라지자 램파드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더럽게 아프다. 푹신한 풀 덕분에 어딘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몸 전체에 멍이 든 듯했다. 통증을 호소하는 어깨는 상처가 벌어져 피가 배어 나와 옷을 적셨다.

아, 정말 거지 같은 하루였다.

램파드는 몸을 숨기기 위해 절뚝거리며 밀림 깊숙이 들어갔다.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면 오메가 혼자서는 지금 당장 어쩔 수 없고, 알파의 페로몬이 필요했다. 꼭 알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틀 정도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버티면 가라앉기도 하니까. 아니면 스스로 뒤를 쑤시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아… 하… 아…….”

다리가 점차 무거워졌다. 상처 때문인가. 피로 때문일지도. 뜨거운 몸에서는 땀이 계속 흘러내렸다. 벌려진 입 밖으로는 뜨거운 입김과 거친 숨결이 쉴 새 없이 나왔다. 다리에 힘이 점차 빠져나갔고, 이젠 걷기조차 힘들었다. 움직임이 점점 느려져 근처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잠시 쉬는데 눈이 계속 감겼다.

왕국군이 점령한 지역은 벗어났지만, 제국군 순찰 경로에서 오메가 페로몬을 뿜으며 기절해도 좋을 것 하나 없었다. 램파드는 감기는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제국군 순찰 경로를 피해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좀 더 깊숙이 몸을 숨겨야 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았다.

부스럭, 풀숲이 갈라지며 환한 은발이 드러났다. 자수정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커… 틀러.”

안도감이 밀려왔고, 램파드는 그대로 눈을 감고 쓰러졌다.

오메가는 평생에 걸쳐 두 번 각인한다. 알을 까고 나온 새끼 새가 처음 본 상대를 어미 새라 생각하고 믿고 따르는 것과 같이, 살아남기 위한 본능은 처음으로 각인한 알파를 맹목적으로 믿으며 따르게 만든다.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을 자신의 집이라 생각하며 편하게 느끼게 되는 첫 번째 각인이었다.

첫 각인으로 감정을 배우며 자란 오메가는 자신의 반려를 찾고,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사랑하는 상대를 찾은 오메가가 히트 사이클 때 관계를 맺으면 두 번째인 성적 각인이 이뤄진다.

오메가는 최종 각인 상대인 알파를 평생의 짝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걸 동원해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힘쓴다. 때가 되면 자연히 풀리는 첫 각인과 달리 최종 각인은 상대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램파드에게 커틀러는 첫 각인 대상이었다. 남들은 두려워할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자장가처럼 느껴지고, 편안했으니까. 풀이 무성하고 밤이슬 덕분에 쾌적한 환경이 아님에도 익숙한 페로몬 덕분에 편안하게 몸을 뉘었다.

“램파드, 졸려?”

언젠가부터 커틀러는 존칭을 사용했다. 둘만 있을 땐 전처럼 대해 줘도 좋으련만. 거리가 생긴 거 같아 못내 서운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까운 거리감에 전처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응. 쉬고 싶어.”

“그래? 여기서는 곤란하지 않아?”

“눈이 무거워……. 자고 싶어. 조금만… 잘게.”

눈은 떠지지 않고, 몸 또한 무거웠다. 정신은 이미 반쯤 꿈의 경계에 걸쳐졌지만, 후각은 여전히 깨어 있다. 원초적인 풀냄새가 나는 걸 보아하니 바깥이 분명했다.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익숙한 향기에 모든 긴장이 풀어졌다. 램파드에겐 지금 맡는 페로몬만 있다면 불구덩이 안도 아늑할 테니까.

길고 곧은 손가락이 램파드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욱신거리던 어깨의 통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한동안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이만 푹 쉬어.”

대부분의 오메가는 첫 각인 상대가 짝으로 변한다. 커틀러와 함께 있으면 이렇게나 평온하고, 만족하기에. 믿음이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하는 까닭을 램파드 또한 아주 잘 알았다.

***

“으읏… 응.”

어깨가 가장 아팠는데, 지금은 다른 곳도 쑤셨다. 하긴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졌으니 성한 것이 이상했다. 사람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니,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구르면 멍이 드는 게 당연할 터. 통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몸을 뒤척거리는데, 무거운 돌로 눌러진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천근같이 느껴지는 다리에서는 질척질척 물기 많은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앗, 아… 아……!”

오랜만이라 잊었다. 부끄럽긴 해도, 커틀러가 손으로 뒤를 쑤시면 이런 소리가 났었지. 이 정도로는 부족해 좀 더 그를 느끼고팠다. 램파드는 굉장히 옅어진 커틀러의 페로몬 향을 쫓아 고개를 기울였지만 머리가 뒤로 꺾인 채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야, 깬다. 어떻게 하지. 때려서 기절시킬까?”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는 평소와 달리 힘이 다 빠진 상태니까 걱정하지 말고 박아. 게다가 깨어 있으면 요염한 신음을 흘릴 테니 박을 맛 날걸.”

대화에 참여한 자는 여러 명인지, 다양한 톤의 낄낄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잘 알고 있네. 베타 주제에 오메가를 따먹어 본 적 있었냐?”

“피난 행렬에 떨어져 나온 오메가가 있으면 주워다가 먹었지.”

“민간인은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들키지 않았냐.”

“뭐 들켜 봤자 오메가만 강간하고 죽여서 처벌받지 않았어. 베타를 건드렸다면 달랐겠지.”

램파드는 전혀 모르는 타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단숨에 깨어난 온몸의 감각만으로 지금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파악했다. 옷은 전부 벗겨져 있고, 눈앞에 전혀 모르는 타인이 자신을 바라봤다. 몸을 움직여 봤지만 여러 명의 남자가 몸을 짓누르고 있어 땅바닥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리쳐야 할 상황이지만 목 안에 무언가 콱 들어와 있어 목소리가 막혔다.

“눈을 뜨니 훨씬 더 예쁘네. 늘 멀리 있어서 몰랐는데, 대륙 제일의 미모를 가졌단 소문이 헛소리는 아니었군. 하긴, 오메가였으니 당연한 건가? 알았으면 진작에 따먹는 건데.”

입 안쪽으로 두툼한 물건이 밀려들어 와 있어 눈을 찌푸렸다. 비릿한 남자의 냄새가 입 안에 확 퍼져 있고, 코까지 풍겼다. 낯선 남자가 이상한 자세로 올라타 있어서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입 안에 처넣어진 건 남자의 좆이었다. 정신을 차린 램파드의 눈동자가 점점 확장되었다.

입 안에 페니스가 들어왔단 거와 함께 경악스러운 건 상대의 복장이었다.

맨몸인 램파드와 달리 상대는 상의를 제대로 갖춰 입고, 바지만 풀어 내린 상태였다. 회백색에 짙은 푸른색이 강조된 옷. 커틀러가 이끄는 화이트 테일 기사단의 복장이었다.

램파드가 쓰러진 쿠와트 숲은 화이트 테일의 순찰 지역이라 그들이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어째서 커틀러가 아닌 이자들이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탔는지. 램파드는 분명 커틀러가 내뿜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맡았다.

일단은 벗어나야 했다. 발버둥 쳤지만, 몸을 빼낼 수 없었다. 히트 사이클로 달뜬 몸이 가라앉지 않아 제대로 반항하지 못했다.

숨을 쉬기 힘든 램파드는 고개를 움직이며 입 안에 들어온 살덩어리를 힘껏 깨물었다.

“아, 악!”

램파드에게 성기를 물린 기사가 곧바로 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등신, 상황 보고 도망쳤어야지.”

“원래 기사는 도망치지 않는다는 걸 잊었냐. 아오, 피가 나는 거 같아.”

“넌 떨어져 있어라.”

램파드의 입 안으로 더러운 피가 흘러 들어왔다. 상처를 입은 페니스에서 나온 피 말고도, 찐득한 액이 입 안에 잔뜩 들어찼다. 램파드는 이물질을 뱉어 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아랫배 안쪽이 쑤셔지는 기분은 두 번째 목소리 때문이었다.

“하, 아, …읏!”

램파드는 이를 악물고 아랫배에 힘을 줬다. 통증이 느껴져 몸에 힘을 줬을 뿐인데, 내장 안에 들어찬 남근에 속살이 닿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역겨운 감각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램파드는 입 안에 남은 더러운 이물질을 몇 번 더 뱉어 내고, 허벅지를 붙잡은 상대를 노려봤다.

“으…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보시다시피 길에 쓰러진 오메가를 돌보는 중입니다.”

“당장 비켜라! 짐이 누군지 모르는 거냐.”

상대는 명령을 듣는 대신 허리를 꽉 부여잡곤 강하게 치고 박았다. 찔릴 때마다 안쪽이 쓰라렸다. 퍽, 퍽, 아래에서 마찰음이 들리자 램파드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램파드 폐하.”

“그런데… 앗!”

추삽질을 하던 기사가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고 램파드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몸속이 깊게 찔리자 내뱉을 말을 잊고, 신음이 대신 나왔다. 비음이 섞인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램파드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주무시고 계신 동안에 여기저기 찔러 봤는데 말입니다. 여길 계속 박으면 안쪽이 우물우물 조이더군요. 기분이 꽤 좋으신가 봅니다. 하긴 천성이 음란한 오메가니 당연한 거겠죠.”

기사의 말과 달리 기분 나빠 속이 메스꺼웠다. 그렇지만 몸은 내벽을 파르르 떨어 대며, 발끝까지 모두 곱았다. 램파드의 몸에 즉각적인 반응이 오자 박고 있는 사내는 신이 났다.

“하아, 안이 조이는 게… 역시… 오메가의 구멍은 맛이 좋아.”

“읏… 으, 아! 그… 만… 둬.”

“후음, 우웃, 또 싼다……!”

사정한다는 말에 램파드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램파드의 몸속에 좆을 넣고 있는 사내가 알파라면 그의 아이를 밸지도 모른다.

“싫어……. 읏! 당장, 빼!”

“크흐, 겁먹는 건가요? 제국의 제일의 검이 이깟 일에 겁먹을 줄이야.”

“아… 흐, …읏, 흐읏!”

평소의 몸 상태라면 당장에 상대를 때려눕혔을 텐데, 지금은 무기력하게 다리를 흔들 뿐이었다. 남자의 허리 짓이 빨라지자 공중에 붕 뜬 램파드의 다리가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램파드는 자신의 골반을 붙잡은 남자가 성기를 깊숙이 박고 몸을 떠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장내에 덩어리가 발라지고, 사내가 좆을 빼냈다. 벌려진 구멍에서는 멀건 정액이 울컥 새어 나왔다.

심장을 뜯어내 곤죽으로 만들어 진흙탕에 내친 기분이었다. 질퍽한 진창에 빠진 기분이지만 사정한 상대에게서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아 한편으로 안심했다.

“야, 다음 차례 누구냐. 없으면 내가 또 박는다.”

“나야, 비켜.”

네 명의 눈동자에는 황제가 아닌 하나의 오메가만이 비쳤다. 알파와 베타는 서로 입을 짜 맞춘 것처럼 오메가는 박아 주면 기뻐 자지러진다고 말한다. 막상 당해 보니 몸속을 벌레가 파고드는 듯했고, 메스꺼웠다. 알파와 베타는 오메가가 아니니 기분을 전혀 알 수 없을 터인데. 멋대로 떠들어 대는 그들의 작태에 토할 거 같았다.

램파드가 정신이 들고 나서, 두 번째의 사내가 배 속에 파정을 했다. 여전히 히트 사이클에 돌입한 몸은 전신이 무기력했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개 같은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차례차례 남근을 받아 내던 와중, 점차 열기가 식어 가는 걸 느꼈다. 히트 사이클이 가라앉기 시작한 거였다. 어떻게 약 없이 가라앉았는지 알 수 없지만 반격할 기회가 생겼다.

몸만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얼굴도 모르는 하급 기사 따위는 램파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램파드는 무장한 네 명의 기사를 상대로 무기를 빼앗아 급소에 칼을 찔러 넣었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기사에게는 최고의 굴욕이다. 그렇기에 인질로 잡혀 있던 와중에도 감시하는 자들이 전장이 아닌 곳에서 죽지 않도록 막사 입구까지 끌고 가 주었다. 적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었건만 이 네 명의 아군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달빛에 램파드의 몸이 훤히 드러났고, 곧게 뻗은 팔의 끝에 번쩍이는 칼날이 들려 있었다. 살아남은 유일한 하급 기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램파드를 바라봤다. 자신의 목에 들린 흉기에 집중해야 하건만, 달린 눈은 절로 아름다운 것을 우선시했다.

램파드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내를 서느렇게 내려다보았다.

“너희 말고 누가 더 있었냐.”

“저… 저희 네 명밖에 없었습니다.”

순찰을 나서는 기사는 4인 1조이긴 했다. 그렇지만 램파드의 머릿속에는 한 명의 남자가 더 존재했다.

“짐을 어떻게 발견한 거지.”

“그냥 순찰 경로대로 돌았을 뿐인데, 폐하께서 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낙마한 후 제국군의 눈에 띌까 봐 순찰 경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몸을 피신했다. 아무리 정황이 없다고 해도 착각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누구의 명을 받고 이곳에 있던 거냐.”

“저… 저희는 램파드 폐하의 명에 따라 순찰을 돌았을 뿐입니다……. 그… 일주일 전에 직접 순찰조를 짜고, 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지.”

램파드는 들고 있는 검을 휘둘러 상대의 이마에 찔러 넣었다. 단번에 목숨을 빼앗았지만 속은 답답했다. 시체 네 구의 심장에 재차 칼을 찔러 넣어 만에 하나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을 배제했지만, 여전히 기분은 진창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했다.

살점이 남지 않도록 짓이겨 버리면 기분이 나아질까. 램파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손에 쥔 검을 멀리 던져 버렸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을 테니까.

한숨을 쉰 램파드는 피 묻은 기사의 옷을 벗겨 내 입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겹쳐 쌓아 두 덩어리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품을 뒤져 지닌 소품을 꺼냈다. 하급 기사에게 기본으로 제공되는 소지품 중에는 물이 담긴 철제 병이 있다. 맑은 물이 든 병을 모조리 꺼내 몇 번이고 입을 헹궜다. 남은 잔여물을 물과 함께 뱉어 내고 입술이 까질 정도로 강하게 문질렀다. 깨끗한 물로 입을 씻어 냈지만, 입과 항문 안쪽으로 들어차 움직이는 성기의 감각이 계속 느껴져 소름 끼쳤다.

마지막 병의 물을 입에 흘려 넣고 뱉어 낸 램파드는 기사가 가지고 온 램프를 이용해 시체에 불을 붙였다. 사람의 몸에는 기름이 있어서 그런지 잘 태워졌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사체 덩어리에서는 두 줄기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곧 근처에 있는 사령부에서 커틀러와 함께 기사들이 몰려왔다.

“램파드 폐하! 무사하신 겁니까!”

커틀러는 아까 보았던 다정한 미소와 달리, 질겁한 표정으로 램파드를 향해 달려왔다.

눈썹을 한껏 떨어뜨리고 잔뜩 걱정하는 모습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이미 오늘 얼굴을 한 번 마주했으면서, 몇 년은 못 본 듯한 표정이라니. 램파드의 시선이 자신에게 또렷이 고정되어 있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걱정만 했다.

“폐하?”

램파드가 커틀러의 멱살을 잡고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주변에 있는 기사가 긴장했다. 램파드가 화살을 맞고 낙마한 건 전적으로 커틀러의 잘못이었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한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고 있지만, 황제를 위협에 빠뜨렸단 사실은 그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었다. 목이 잘려도 콘테 공작가에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사 무리가 긴장했다. 두 사람이 오랜 친우 사이란 건 이 자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한들 오랜 벗을 처형시키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화가 난 황제가 단장의 팔다리 정돈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 전쟁에서 중요한 요직을 맡은 커틀러가 쓰러지면 곤란해진다.

기사들은 어느 타이밍에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 빌어야 할지 서로 눈치를 봤다. 하지만 램파드에게는 며칠 전 낙마한 사건은 뒷전이 되어 버렸다.

“오늘 순찰 담당은 네놈이 아니더냐!”

주검이 된 기사의 말대로 일주일 전 순찰조의 순번을 짠 건 램파드였다. 병에 걸려 쓰러진 자가 대부분이라 기사단장인 커틀러까지 함께 순찰하게 지시했다. 그 이후 따로 교체를 명령한 적 없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보급 물자 덕분에 병상에서 일어난 기사들이 많아 저는 사령부에서 대기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었는지요.”

커틀러는 화이트 테일 기사단의 갑옷을 착용했다. 색상은 같지만, 목깃과 어깨 장식이 다르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옷만 보고 하급 기사와 커틀러를 착각한 건가. 램파드는 커틀러를 무죄를 찾기 위해 사소한 가능성도 모두 끌어내는 중이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그리고 그 피는 설마 다치신 겁니까.”

“이건, 내 피가 아니다.”

“화이트 테일의 하급 기사 복장이군요. 램파드 폐하께서 왜 그 옷을…….”

커틀러는 램파드가 만든 모닥불을 발견했다. 구조 신호를 의미하는 두 개의 모닥불은 네 구의 시체로 이뤄졌다. 새까맣게 태워지는 중이라 얼굴을 확인할 순 없지만, 형체만으로도 사람이란 걸 충분히 알아봤다. 삐져나온 타다 만 옷가지들을 보아, 화이트 테일의 기사가 확실했다.

커틀러와 함께 불타는 시신을 발견한 다른 기사들이 모두 불이 붙은 쪽으로 향하였다. 시체를 확인한 기사가 소리 질렀다.

“단장님, 이건 이번 순찰조의 시신입니다!”

커틀러는 여전히 멱살 잡힌 채 조용히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왕국군의 습격을 받으신 겁니까?”

“저들은 내가 죽였어.”

다른 기사는 거리가 있어 조금 전 황제가 내뱉은 말을 듣지 못했다. 커틀러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램파드의 손을 떼어 낸 후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너는 모르는 일이냐?”

“무얼 말입니까.”

“일단 돌아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램파드는 기사가 끌고 온 말 중 아무거나 하나 골라 올라탔다. 말 등 위에 착지하는 순간 유린당한 하반신이 쓰라려, 더러웠던 기분이 다시 상기됐다. 내부는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 그대로 두었건만, 안쪽에서 멀건 액이 흘러나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바지를 벗어 확인하지 않아도 무엇이 흘러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램파드는 이를 악물며 말고삐를 내리쳤다.

제국군의 야영지로 돌아올 때까지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달려왔다. 램파드가 막사에 도착하자, 시종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저마다 손에 갈아입을 옷과 씻을 물을 들었다.

“됐다. 커틀러 단장을 제외하고 모두 물러나라.”

램파드의 몸을 씻기기 위해 큼직한 대야를 들고 있던 시종이 말했다.

“커틀러 단장님을 감싸다 어깨에 상처를 입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염될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어깨의 상처는 이미 모두 처치했다. 나중에 따로 부를 테니 모르핀만 두고 나가라.”

“알겠습니다, 폐하.”

램파드는 시종이 놓고 간 대야에 담긴 물을 바라봤다. 그 안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입가의 말라붙은 정액은 하급 기사의 물통을 이용해 모두 다 헹궈 멀끔했지만 바닥에 구른 덕분에 밝은색의 플래티넘 블론드는 때가 껴 칙칙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램파드의 미모를 가릴 순 없었다.

기사라고 하기에 너무 곱상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램파드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네 아비처럼 얼굴에 칼자국이라도 내 볼까? 거지 같은 취급을 받는 건 아무래도 얼굴 때문인 거 같아.”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폐하의 시종들이 모두 충격에 빠져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시종뿐만 아니라 황궁에서 일하는 귀족까지 병상에 드러누울 겁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내고 싶단 거다.”

턱부터 눈가까지 큼직한 상처가 있으면 좀 더 기사다워 보이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수염이라도 기르면 좀 더 우직해 보일 듯했다. 물에 비친 건 자신이 봐도 완벽한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제삼자의 관점에서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직접 지니면 파리가 계속 꼬여 세상 사는 데 하등 도움되는 것이 없었다. 램파드의 상태를 살피던 커틀러가 조심히 이야기를 꺼냈다.

“보급 물자 속에 있던 억제제는 제가 직접 챙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폐하, 왕국군 사령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히트 사이클은 어떻게 가라앉히셨고요.”

“…….”

“왕국의 억제제를 드신 겁니까? 제국약을 드시겠습니까?”

“약 같은 건 안 먹었어.”

“그러면 어떻게 가라앉히셨습니까.”

턱에서 손을 뗀 램파드는 팔짱을 끼고 몸을 편히 기댔다. 그리고 눈만 위로 치켜떠 곁에 서 있는 커틀러를 바라봤다.

“내가 히트 사이클이 왔단 건 어떻게 알고 있지?”

커틀러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램파드의 질문에 답했다.

“폐하 곁을 지키던 저이지 않습니까. 히트 사이클 주기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왕국군에 잡혀 가실 때 즈음 시작되실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제대로 보호는 못 해 줄 망정 걸림돌이나 되었군. 덕분에 왕국군에 끌려갔고.”

“그 점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테니 명만 내리십시오.”

“내가 너한테 벌을 내리지 않을 거란 건 본인이 잘 알고 있지? 마음에도 없는 말 같은 건 내뱉지 마. 기분 나쁘니까.”

“저는 진심입니다. 그 어떤 벌이라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램파드가 피식 웃었다. 동갑내기 친구에게 각인한 사실이 못마땅해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커틀러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첫 각인의 영향으로 둥지라고 생각하는 커틀러를 쉽게 내치지 못한다는 것을. 혈육처럼 쉽게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또한,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오메가를 발견한 기사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까지도.

“쿠와트 숲에는 정녕 없었던 거냐.”

“그 얘길 계속하시는데 무슨 연유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오늘 쿠와트 숲에 발을 들인 건, 황제 폐하의 구조 신호를 확인한 직후입니다.”

심증만 있는 상황에서 커틀러를 몰아붙일 수 없었다. 기사록을 확인하면 커틀러가 그 시각에 어디에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조작하기에는 시간이 짧았으니 날조도 쉽지 않았을 터. 주저 없이 말하는 걸 보아, 커틀러의 말대로 정말 사령부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커틀러를 본 건 그냥 꿈이었던 건가. 일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킨 램파드는 손을 움직였다. 자신을 범한 사내의 옷을 언제까지고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선을 내린 램파드는 흙과 피가 묻어 엉망이 된 하급 기사 복장을 벗기 시작했다.

램파드가 옷을 벗기 시작하자 곁에 있던 커틀러가 거들었다. 그는 시종이 두고 간 수건을 들어, 물을 적시고 흙이 묻은 램파드의 어깨를 닦아 주었다. 어두운 곳에 있어 몸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흰 피부 위에는 붉고 푸른 멍이 곳곳에 새겨졌다. 매끄러운 살결에 남겨진 이빨로 깨문 흔적도 모두 조금 전에 생긴 상처들이었다.

커틀러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는 묵묵히 램파드의 몸을 닦아 냈다.

“쿠와트 숲에서 화이트 테일의 기사에게 강간당했어.”

램파드는 조용히 고백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커틀러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몇 가지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섞인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중에 기쁨도 느껴지는 거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커틀러를 잘 모르는 사이라면 그 표정을 읽지 못했을 거다. 램파드는 그를 잘 알고 있기에 무뚝뚝하게 굳어진 입매에 걸쳐진 미소를 발견했다.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역시, 아까 전 일은 커틀러가 관여된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각인당한 오메가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을 테니까.

“그 녀석들은 반드시 죽어야 했군요. 폐하께서 죽이지 않았더라면 제가 대신 목숨을 끊었을 겁니다. 쓸모없는 제 부하 때문에 손에 피를 묻히시다니, 사죄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 준 걸 잊었는지 커틀러는 태연하게 램파드의 한 손을 양손으로 받쳐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고, 램파드의 손등에 충성을 상징하는 입맞춤을 했다.

마음뿐만 아니라 입까지 무거워진 램파드는 커틀러의 행동을 바라보기만 했다.

“폐하께서 신경 쓸 가치가 없는 베타일 뿐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깨끗하게 몸을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는데도 램파드의 기분은 여전히 진창에 굴러 묻은 때가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다시 일어난 커틀러가 램파드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고 주물렀고 긴장에 뭉친 근육이 풀어졌다. 커틀러의 손길을 경계해야 마땅할 터인데 소름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은은하게 공기 중에 퍼져 나오는 그의 페로몬 향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램파드는 피곤한 두 눈을 감고, 커틀러의 향을 맡았다. 마음속 깊은 곳을 뒤흔들 정도로 달콤하며 감미로웠다. 처음부터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익숙해지면 안 되었던 거였다. 황제의 자리를 선택한 것은 베타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거였으니까.

“오메가한테는 흔한 일인걸. 떨쳐 내야지.”

램파드는 무거운 입을 떼어 냈다. 커틀러가 램파드의 몸을 취하고 싶었으면 진작에 손에 넣었을 것이다. 무슨 의도로 기사를 이용해 자신을 겁간했는지 램파드로서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혼자서 생각해 봤자 커틀러를 이해하기 힘들고 머리만 아플 뿐이다. 램파드는 손을 뻗어 대야 옆에 놓인 모르핀을 먹었다. 진통, 진정 효과가 있는 약을 먹으니 수렁에 빠진 기분이 한층 가라앉았다. 마음을 다잡은 램파드는 근처에 걸쳐 둔 겉옷을 입고, 망토를 걸쳤다.

“어디 가십니까.”

“사령부 시찰.”

마음은 한없이 꺼졌지만 지휘관인 이상 상처 입고 쓰러져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흔적을 닦아 낸 램파드는 병마에 쓰러진 기사를 살피려 막사 밖으로 나왔고, 발이 멈췄다. 램파드가 지내는 막사 밖에는 많은 숫자의 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냐.”

겁탈당한 흔적을 내보였다간 자신의 비밀이 폭로될 거 같았다. 목까지 단단하게 잠근 겉옷을 입어 상처를 가렸지만 안심되지 않아 걸친 코트를 꽉 움켜쥐었다.

“황제 폐하 덕분에 무사히 보급품을 지원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늦었다면 저와 전우들은 병마에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제국의 태양이시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따르겠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독보적이게 빛나지만, 함부로 바라볼 수 없는 존재. 램파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자들은 황제를 태양이라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

***

남부 전선은 시작부터 꼬였다. 왕국의 책략에 빠져 고립되고, 보급이 뚝 끊겼다. 그 결과 제국군에는 전염성 강한 역병이 돌았다. 고생 끝에 보급 물자를 조달했더니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더위로 기사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비가 자주 내려 습하기까지 해 사소한 다툼이 잦아졌다.

쏴아아. 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한층 더 굵어졌다. 땅바닥을 때리는 세찬 물줄기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비를 뒤집어쓴 램파드는 인근 마을에 도착했다. 곳곳에 만들어진 물웅덩이 덕분에 붉은 진흙이 램파드의 옷깃에 스며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붉게 물드는 바지 자락에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 지역의 흙은 붉은색이었다. 철분이 많기 때문인데 비가 오는 날이면 녹슨 철 냄새가 많이 난다. 이 근방에서 죽은 기사들의 숫자만 몇인지. 흙이 붉게 변한 이유는 기사가 흘린 피 때문일지도 몰랐다. 피비린내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쿠와트 숲 주변에 사는 마을 주민을 피난시키는 중이었다. 그들은 모두 제국의 시민인데, 오랜 전쟁으로 지치고 협조적이지 않았다. 앞으로 전쟁터가 될 작은 마을의 주민은 더위 먹은 기사와 마찬가지로 불만이 가득했다.

첨벙, 첨벙, 첨벙.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한 여자가 다급히 달려왔다. 램파드의 근처에 서 있던 기사 여럿이 검을 뽑고,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를 막았다.

“거기 멈춰라!”

여자의 낯빛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한다. 흉흉한 날붙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 저… 그쪽 분은 기사단장님이십니까. 제발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여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울먹거리며 연신 침을 삼켰다. 그녀는 한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볼살이 빠져 쏙 들어갔다. 들고 있는 무기도 없으니 근방에 사는 민간인일 터. 램파드는 한 손을 들어 올렸고, 기사 무리가 꺼낸 검을 모두 집어넣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아라.”

“기사 여럿이 제 친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오!”

여자의 말에 램파드는 인상을 쓰며 곁에 있는 이 지역 담당 기사를 바라보았다.

“대피시키라고 했지, 마찰을 일으키란 명령은 하지 않았을 터인데.”

“예, 폐하.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곧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됐다. 함께 가지, 안내해라.”

램파드가 나선다는 말에 담당 기사는 긴장했다. 조그만 실수라도 보이는 날엔 자신의 목이 날아갈 테니 마음을 다잡으며 안내했다. 멀지 않은 작은 민가 앞에 제국 소속의 기사 무리가 줄지어 서 있었다.

좁은 집 앞에 여러 명이 모여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하지만 멀리서도 비를 뚫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정도로 많은 기사가 모여 있었다.

램파드는 집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혐오스러운 동족의 냄새가 코를 찔러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램파드가 가진 어중이떠중이 같은 페로몬과 확연하게 다른 굉장히 짙고 농후한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램… 램파드 폐하!”

“걸리적거리니 비켜라.”

램파드가 등장하자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사 무리가 자리를 피해 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매우 좁은 집 안에는 히트 사이클이 찾아온 오메가와 그를 끌어안은 남자가 보였다. 오메가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는 온몸으로 그를 감쌌는지, 귀와 볼이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선 기사는 검을 쥔 채 씩씩거리는 중이었다.

램파드가 등장해 잠시 멈췄지만, 오메가와 대치하는 기사의 눈은 이미 짐승의 것이 되어 버렸다. 러트 상태에 돌입한 알파 기사는 이성이 날아가 황제 앞인데도 불구하고 칼을 들고 날뛰었다. 램파드는 칼을 든 기사를 가리켰다.

“저 녀석은 잠시 끌어내라.”

램파드의 명에 러트 상태의 기사가 밖으로 끌려 나갔다.

“너는 누구냐?”

램파드는 오메가를 부둥켜안은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칼을 꺼낸 기사 앞에서도 온몸으로 보호한다는 것은 상대가 매우 소중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다니. 베타이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 거겠지.

“나는 루사의 약혼자다!”

오메가와 베타 둘 다 한 손가락에 은색의 반짝이는 링을 꼈다. 사내가 램파드에게 악을 쓰자 곁에 있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품에 있는 오메가를 좀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무엄하다!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소리를 지르는 거냐! 당장 고개를 조아리지 못할까!”

“됐어. 그대로 대기해라.”

“하오나.”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쓸데없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페로몬이 없어도 위엄 있는 황제의 목소리에 알파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조용해졌고, 램파드는 피투성이의 베타를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너와 똑같은 베타라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는다. 억제제를 미리 먹지 않은 거냐?”

램파드가 자신의 말을 들어 줄 의향이 있어 보였기에 오메가를 꽉 끌어안은 베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신이 없어 챙겨 먹지 못했습니다. 제 짝은 한번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면 남들보다 빠르게 열이 올라 소용없어집니다…….”

이미 완전히 개방된 페로몬은 억제제를 먹어도 가라앉지 않는다. 이틀 이상 열을 참으며 앓던가, 그게 아니면 알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바깥에 있는 알파 기사는 러트 상태에 돌입해 램파드의 명령을 듣지 못하며 폭주하는 상태다. 적당히 해라 명령해도 히트 사이클이 가라앉을 정도가 아닌, 오메가가 임신할 때까지 겁탈하겠지. 비단 저 기사뿐만 아니라 주변에 대기 중인 다른 기사도 똑같이 오메가를 강간할 생각뿐이다. 지켜 줄 알파가 없는 오메가는 윤간을 당해도 아무런 불만을 토해 내지 못하니까.

“너는 베타라 히트 사이클을 가라앉힐 수 없겠군.”

“……맞습니다.”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겠구나. 여기서 나가거라.”

“안 돼! 내가 곁에 있지 않으면, 내 짝을 누가 지킨단 말입니까!”

아무런 힘이 없는 베타가 스스로 오메가를 짝이라고 생각하다니. 알파처럼 강인하지도 않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며, 권력도 없다. 어떻게 지킨다고 말하는 것인지 가당치 않았다.

“제국법은 오메가와 베타의 혼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겠지? 지금 너희 둘은 위법의 소지가 있다.”

“그렇지만…….”

“남들은 다 한다는 말을 할 생각인 거냐. 기사에게 들킨다면 예외 없이 모두 처벌받는다. 베타인 너는 구금형이고, 오메가는 처형이지.”

“혼인할 생각이 아닙니다! 루사와 저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끼고 있는 약혼반지는 어떻게 해명할 건가. 조금 전 약혼자라고 소개했기도 하고.”

“……큿.”

남자의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오메가를 감싼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메가와 베타는 혼인식을 올려 기분을 낼 수는 있어도, 법적으로 보호받는 관계가 아니다. 법으로 막는다고 하여도 마음까진 어쩌지 못해 암암리에 혼인을 올리는 베타와 오메가가 보였다. 두 사람의 사랑까지 처벌할 생각은 아니지만, 램파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자를 끌어내고, 너희 모두 밖에서 대기해라.”

“알겠습니다.”

“안 돼! 놔!”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는 남자를 여러 명의 기사가 달라붙어 바깥으로 끌어냈다. 잠깐 열린 문틈으로 사나운 알파들의 페로몬이 훅 풍겨 들어왔는데 짐승의 시선도 함께였다. 오메가를 겁탈할 생각에 가득 찬 눈동자가 여럿.

저 정도 숫자의 알파가 한꺼번에 러트 상태로 돌입하면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손을 쓰기 힘든 상태가 된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는 곱절의 기사가 필요하며, 제압 과정에서 필연 부상자가 나온다. 날씨 때문에 기사들이 날카로워졌으니 불만도 나오겠지. 그럴 바에는 오메가 한 명의 희생이 싸게 먹히는 것이다.

램파드는 알파의 향이 역겨워 품속에 넣어 둔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머금었다. 흥분한 알파 무리를 진정시키려면 더 강한 자의 페로몬이 필요하다. 커틀러가 있으면 수습할 수도 있지만 그는 지금 다른 곳을 점검 중이다. 불러오려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릴 터.

램파드는 덜덜 떨고 있는 오메가를 바라봤다.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정도. 지켜 줄 알파가 없는 오메가치고 나이가 많았다. 그를 끌어안았던 베타가 억제제를 구해 준 모양이었다.

엉망이 된 금발 사이로 겁에 잔뜩 질린 푸른빛 눈동자와 파리해진 입술이 보였다. 가만있지 못하는 동공은 주인의 몸과 마찬가지로 부들부들 떨렸다. 알파의 페로몬 때문에 벌벌 떠는 것이었다.

램파드는 허리를 낮춰 바닥에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 램파드가 시선을 맞추자 오메가가 움찔, 튀어 오르며 한층 더 겁에 질렸다. 램파드는 품속에 있는 철제 상자의 뚜껑을 열어 그에게 권했다.

“쓴 사탕이다. 알파의 냄새를 막아 줄 거니 입에 머금도록 해라.”

오메가는 쭈뼛거리며 덜덜 떠는 손으로 사탕을 하나 집어 먹었다. 통 안에는 오메가에게 익숙한 하얀 약도 함께였다. 몸을 떨고 있는 오메가는 그 약이 무엇인지 알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조용히 사탕만 받아먹었다. 코가 막힐 정도로 쓴 냄새가 온몸을 잠식하자 오메가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이제 좀 진정되었는가.”

“……예.”

“너도 알다시피 오메가를 위해 알파인 기사를 처벌할 수 없다. 바깥에 있는 알파에게 몸을 내주고 살아남을 텐가?”

맑은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흑… 흐윽…….”

그는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소리를 죽이고 서럽게 울었다. 전쟁 한복판에서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었을 때 벗어날 구멍이 없다는 걸 막연하게 알았을 테다.

오메가의 몸에서 한층 더 짙은 향이 피어올랐고, 램파드는 눈을 찌푸렸다. 짐승 같은 알파의 페로몬과 마찬가지로 메스껍게 느껴지는 향이었다. 동족만이 이해할 수 있는 역겹고, 연민이 가득한 향. 같은 오메가의 페로몬이 역한 건 저 향기에 휩쓸렸던 자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제가 알파를 받아들이면 그들의 아이를 가지게 되겠지요. 이미 혼인할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절 겁간한 알파에게 각인당해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고요.”

“그 대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그가 눈물을 막던 손을 떼어 냈다. 눈시울이 붉어져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이 사랑은 제 목숨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쉬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면서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목숨이지요.”

오메가는 마지막으로 짜낸 눈물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마음을 정한 건가.”

“네. 저… 천한 것의 부탁이지만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각오를 다진 그의 표정은 굳건했다. 죽음을 앞뒀기 때문에 의연해진 건가. 방금까지 벌벌 떨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예의범절을 익혔는지 램파드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게 자신을 낮추며 협상을 시도했다.

“한번 들어 보지. 말해 보아라.”

“제가 죽으면 분명 애쉬가 화를 낼 거예요. 기사님께 무례한 짓을 할지도 모르지요. 부디 이 하찮은 자의 목숨으로 그의 무례를 한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이자는 램파드에게 위법 혼인이라는 숨은 죄도 용서해 달라고 간곡히 요구하는 중이었다. 램파드는 주저 없이 답했다.

“그가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게 해 주겠다.”

램파드의 답에 오메가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보답의 의미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기사님이 찾아와 주지 않으셨다면 애쉬가… 죽고 전 원수의 아이를 가져 자결했겠지요. 오메가인 저에게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주시고, 부탁까지 들어주시다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괜찮습니다. 애쉬… 그에게는 제가 선택한 일이라 말해 주십시오.”

“그대로 전하지. 고통 없이 보내 주겠다.”

램파드는 검을 뽑아 들었다. 기사들이 잔뜩 날카로워진 마당에 하찮은 오메가를 감쌀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오메가가 아니고 알파였다면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필사의 노력으로 베타인 척하고 있지만, 램파드의 실체는 알파의 향에 벌벌 떠는 오메가였다. 같은 오메가로서 치욕과 목숨 중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검을 뽑아 든 램파드는 눈을 감은 오메가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었다. 불쌍할 정도로 수척한 오메가의 가슴에서 이 마을을 뒤덮은 붉은 진흙과 같은 피가 튀어 올랐다. 작게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은 차가운 검에 꿰뚫려 고동을 멈췄다.

램파드가 오메가의 가슴에 박힌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을 때 닫힌 문이 벌컥 열렸다. 기사의 제압을 뚫고, 애쉬란 이름을 가진 오메가의 약혼자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루사! 아, 아… 아……! 안 돼!”

애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주먹을 쥐어 램파드의 뺨을 후려쳤다. 주먹질에 안쪽 살이 찢겼는지 램파드의 입가에 피가 흘러나왔다. 뒤따라온 기사들이 애쉬를 위에서 짓눌러 바닥에 엎드리게 하였다.

“아악! 루사! 대체… 왜! 왜, 그를 죽인 거야!”

기사들에게 짓눌린 애쉬는 울분을 토해 내며 몸부림 쳤다.

“풀어 줘라.”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낸 램파드가 죽은 오메가를 바라보았다.

“오메가의 시신은 비가 그치는 대로 화장하고 근처에 묻어 줘라.”

램파드는 오메가의 약혼자를 바라봤다. 은색 반지는 램파드의 피가 묻어 붉은 반점이 생겼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그의 표정은 살기를 잔뜩 품고 있었고, 당장에라도 램파드를 찢어발겨 버릴 기세였다. 약혼자가 눈앞에서 살해당했으니 슬프고, 화가 나는 게 당연할 터. 램파드는 주제넘은 말을 무시하고, 우비를 뒤집어썼다.

“너! 기다려! 지옥까지… 따라가서 복수할 거야!”

사무친 증오의 목소리가 램파드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내가 누군지 알고 복수한다고 하는 거냐.”

램파드는 입술을 짓이기면서 악쓰는 남자를 향해 피식 웃었다. 애쉬의 약혼자는 다른 말을 전해 달라고 했지만, 슬픔보단 분노가 살아가는 연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짐의 이름은 램파드 클로비스다.”

“큿, 으윽, 으아아아아악!”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 애쉬는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며 울분을 토했다. 숨이 넘어갈 듯 꺽, 꺽 울어도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통곡은 멈추지 않았다. 이곳은 변방 중에서도 가장 바깥쪽의 변두리 마을이었다. 여기서 살고 있는 남자가 황제를 다시 만날 확률은 희박했다.

충분한 비극이지만 램파드는 전쟁을 치를 동안 더한 참극도 무수히 마주했다. 이번 일도 램파드의 기억 속에서 곧 풍화되어 사라지겠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애쉬라는 이름을 가진 베타와 만났다는 사실조차 잊을 것이다.

바깥으로 나오자 또다시 세찬 비가 램파드를 반겨 줬고, 복받쳐 우는 베타의 소리가 파묻혔다. 더는 램파드의 귀에 연인을 잃은 슬픈 베타의 곡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램파드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신발과 옷자락을 더럽힌 흙탕물을 바라봤다. 붉은 진흙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안에 있던 오메가는 방금 죽었으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 또다시 제국민과 마찰을 일으킨다면 처벌받을 테니 명심하거라!”

오랜만에 오메가를 겁탈할 생각에 눈이 돌아갔던 기사 무리는 불만을 표하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터덜터덜, 주어진 장소로 돌아가는 기사들과는 반대로 램파드에게 한 기사가 다가왔다.

“폐하, 왕국군이 계곡에서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곧바로 집중해야 할 다른 일이 생겼다. 덕분에 조금 전에 있었던 비극을 빠르게 잊을 수 있었다.

“지휘관은 확인했는가?”

“갈색 늑대 깃이라고 하옵니다.”

램파드를 사로잡았다 놓친 기사단장의 부대였다. 멧돼지같이 생긴 기사를 떠올리며 명령했다.

“이전에 지시한 대로 계곡을 메워 버려라. 왕국의 단장은 꼭 생포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잘 마른 사과나무 목재를 구해 둬라.”

“예.”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끝내면 되겠지. 램파드는 투지를 불태우며 곧 전장이 될 계곡으로 향했다.

***

램파드의 바람대로 딱 1년이 지난 당일, 왕국과의 전쟁이 끝났다. 영원히 이어져 지상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막상 종결되니 세상이 평화로워졌다.

막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흉흉한 민심을 살리느라 갖은 노력을 다했고, 램파드는 괴로웠다. 어느 정도였냐면 3년간의 전쟁보다 3년 동안 수습을 하는 일이 훨씬 더 고되게 느껴졌다. 엎질러진 물을 담는 것보다 차라리 전쟁을 치르는 게 나을 정도였다.

무수한 일을 했지만 크게 몇 가지를 꼽자면 아래와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전쟁에서 패배한 왕국의 처분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피의 복수를 원한 제국민들의 의견과 달리 램파드는 왕국을 용서하고, 작위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관대한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수틀린 왕국이 반기를 들지도 몰라서였다. 또다시 전쟁을 진행했다간 얻는 것보다는 손실이 커 내린 결정이지만 제국민의 민심을 잃었다.

제국민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세금을 낮추고, 농작지를 배분해 줬다. 귀족에게는 왕국에서 받아 낸 전리품을 나눠 주고, 파티에 꼬박 참석하며 얼굴도장을 찍었다.

또한,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얼굴로 민심을 사르르 녹이기도 했다. 눈웃음을 지으며 제국민들의 노고는 잘 알고 있다며, 고생 많았다고 말하면 원망은 사라지고 환호와 찬사가 쏟아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 이럴 땐 또 쓸모 있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메가와 베타의 혼인을 합법화시킨 것.

표면적으로는 오메가와 사랑에 빠진 베타를 위해 추진했지만, 실상은 알파로 이뤄진 신흥 귀족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은 기회의 장이었고, 무공을 세운 자는 그에 따른 적절한 작위를 받았다. 업적을 세운 이는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알파가 많았는데, 그들은 황제의 자리를 베타가 차지한 것을 못마땅해했다.

램파드는 신흥 귀족을 꺾기 위해 베타에게 힘을 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암암리에 오메가와 혼인하는 베타가 있었으니 구실 또한 적절했다.

“안 됩니다! 베타와 오메가의 혼인을 합법화시키면, 이후에 베타와 알파라는 끔찍한 조합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역대 베타 황제 중에서는 알파를 첩으로 들인 자가 있네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권력을 가진 베타의 과시욕이란 거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법으로 허용하지 않은 관계는 말이 좋아 첩이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애완동물을 들이는 관계와 같습니다. 오메가와 베타도, 애완동물을 입양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램파드의 결정에 가장 크게 반발하는 귀족은 대번포드 백작이었다. 대번포드 백작가는 알파의 수맥이 흐르는지 다른 귀족에 비해 알파의 숫자가 많았다. 또한 그들은 알파라는 것에 긍지를 가졌으며, 자존심이 높았다.

이러한 대번포드 백작 가문이 알파로 구성된 신흥 귀족과 손을 잡는 것은 당연했으며 더 나아가 우두머리를 자처했다. 특히나 대번포드 백작은 알파 중에서 가장 진귀한 우성 알파였기 때문에 신흥 귀족도 반발 없이 그를 따랐다.

“짐은 마음을 굳혔다. 다음 달 부로 오메가와 베타의 혼인을 허락하겠다.”

“저는 반대합니다! 짝을 찾지 못한 무능력한 오메가는 벌레처럼 살아가는 게 자연의 섭리입니다. 자연이 정해 둔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귀족에게 영향이 올지도 모릅니다.”

대번포드 백작이 저렇게나 반대하는 이유는 오메가와 베타의 숫자 때문이었다. 알파의 숫자는 아침 식사로 나온 조개에서 진주가 튀어나올 확률만큼 적었다. 그에 반해 오메가의 숫자는 월등히 많은데, 베타의 비호까지 받게 된다면 알파의 힘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까닭이었다.

짝을 찾지 못한 무능력한 오메가. 이는 램파드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자네가 능력 있는 알파라면 오메가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는가.”

“벌레인 개미가 뭉치면 코끼리도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요.”

“반면 하늘을 날 수 있는 독수리는 쓰러뜨리지 못하지. 땅에 붙어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해라.”

백작은 이 말을 반란을 일으키란 말로 해석했다. 신흥 귀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의 규모는 상당히 컸지만 한 달 만에 수습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제압하는 모습을 본 자들은 황제의 권위에 함부로 도전하지 못했다.

램파드는 반란의 중심이었던 대번포드 백작의 저택에 친히 찾아왔고, 그 곁에 커틀러가 섰다.

“네놈, 우성 알파라는 놈이 베타에게 달라붙은 거냐! 베타의 숫자가 많다고 붙어 보기도 전에 겁을 먹은 것이냐고! 대대로 알파를 배출한 콘테 공작가의 자긍심은 어디다 버린 거냐!”

가족과 함께 줄줄이 포박된 대번포드 백작은 램파드가 아닌 커틀러에게 성화였다. 커틀러는 그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더는 들을 가치가 없군요. 폐하께 반기를 든 불한당은 소신이 직접 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램파드는 자신의 검을 뽑아 들어 커틀러에게 건넸다. 익숙한 손잡이 모양에 커틀러가 피식 웃었다.

“제가 선물한 검이군요. 챙겨 들고 오신 겁니까.”

“늘 들고 다녔지.”

“전쟁 중에 사용하지 않으시기에 서운해할 뻔했군요.”

화이트 테일은 황제 직속의 로열 가드와 함께 움직였으니 전쟁 중에는 늘 커틀러와 함께였다. 그렇기에 검을 두고 다녔다는 실토는 내뱉지 않았다.

“반역죄를 저지른 대번포드 가를 참수형에 처하도록 하겠다. 단, 대번포드 백작. 자네 한 명은 살려 주도록 하지.”

커틀러는 램파드의 결정이 못마땅했다. 램파드가 직접 행차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모조리 죽여 목을 걸어 놓았을 테니까.

“주동자인 대번포드 백작을 살려 놓으란 말씀입니까.”

“그냥은 아니지. 저자의 바지를 벗겨라.”

황제의 명령에 죄인을 둘러싸던 기사가 달라붙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있는 백작을 일으켜 세워 그의 바지를 벗겼다. 축 처진 알파의 성기가 보였고, 램파드는 눈가를 찌푸렸다. 옷으로 감싸고 있을 땐 몰랐는데 개방하고 나니 짐승의 페로몬이 진하게 느껴졌다. 시선을 돌린 램파드가 명령했다.

“대번포드 백작이 남은 생을 베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라.”

램파드의 결정에 대번포드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차라리 죽이라고 소리쳤다. 기사들은 시끄러운 입을 틀어막고 나이 많은 백작의 음낭을 잘라 거세시켰다.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커틀러가 램파드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했다.

“후환거리는 남겨 두지 마십시오.”

“자식도 만들지 못하는 늙은 자가 무얼 하겠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라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까. 죽느니만도 못한 처지가 된 알파가 어찌할지는 눈에 뻔하지 않습니까.”

“기어오른다면 또다시 짓누를 것이다. 혹여 나를 위한다며 죽이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라. 표정에 다 드러났어.”

꿍꿍이를 들킨 커틀러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살려 놓도록 하지요.”

“나머지는 죽여도 돼.”

“분부대로.”

커틀러는 램파드의 검을 쥐고, 대번포드 백작의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

대번포드 백작을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불만을 표하는 귀족은 없었다. 고생한 보람은 있는지 지금의 제국은 안정기에 돌입해 램파드가 하는 일은 주로 도장 찍기밖에 없다.

오늘도 아침부터 쌓여 있는 서류를 훑어보고 도장을 쾅, 찍었다.

“한스.”

각종 관청에서 정리한 최종 보고서와 각국에서 날아온 서한을 읽어 내리던 램파드가 말했다. 램파드의 집무실 구석에 서서 대기하던 시종, 한스가 허리를 꼿꼿이 펴며 공손하게 답했다.

“예, 폐하.”

“사흘 동안 자리를 비울 거다. 여길 지키도록 해라.”

램파드 황제는 두 달에 한 번씩 자리를 비웠다. 평화가 지속되자 황제가 하는 일이라곤 아까 말한 대로 도장 찍기뿐이라 솔직히 없어도 됐다.

그게 아니면 후사를 낳으라는 잔소리에 ‘짐처럼 몸매까지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조건을 낮춰 얼굴 하나만 봐 주지. 후사를 보고 싶다면 짐보다 예쁜 여자를 찾아와 보던가?’라는 소릴 하며 대신들 속을 태우는 일뿐이었다.

저 말을 들은 최고 대신이 제국을 샅샅이 돌며 아름답다는 베타 여성을 다 만나 보았다고 하는데, 황궁에 데려오지 않았다. 램파드의 말에 반박할 수 없던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의 일을 시종이 대신한다. 과분한 일에 놀라 펄쩍 뛴 적도 있지만,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라 한스는 익숙하게 답했다.

한스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램파드는 떠날 채비를 했다. 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재 등용까지 끝마쳐 능력 있는 자를 골라 관직에 앉혔으니 황제가 며칠 자리를 비운다 해도 제국은 잘 굴러갈 것이다.

황제가 떠난 그날 저녁. 한스는 램파드의 지시대로 책상에 앉아 열심히 도장을 찍었다. 기계적으로 대충 찍어 대는 램파드와 달리 그는 네모 칸 안에 정확히 조준하여 반듯하게 찍었다. 찍힌 도장의 상태만 봐도 램파드 대신 다른 누군가가 대타로 찍었단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스는 방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기에 입을 다물고 빈방인 척했다. 또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조용히 기척을 숨기고 도장에 집중하고 있건만, 예고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 있으면서 왜 답하지 않는 거냐.”

“아, 주인님이십니까.”

한스의 말에 커틀러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주인님?”

“죄,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맡기신 일에 집중하느라 그만 말이 헛나왔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걸 물으러 왔다. 어디 간다는 말을 남기지 않으신 건가?”

“목적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흘 정도 자리를 비우신다고 하시더군요. 남길 말이 있으십니까?”

커틀러는 굳은 입매로 망토를 크게 펄럭이며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화이트 테일의 기사단장은 늘 딱딱한 입매와 살기 어린 시선으로 사람을 대한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맹수와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몸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잔뜩 긴장한 한스는 커틀러가 조용히 밖으로 나가자 다시 묵묵히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커틀러는 긴 회랑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램파드가 목적지를 밝히지 않고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최측근 시종인 한스에게조차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커틀러를 떼어 놓을 속셈이었다.

알파가 아닌 베타와의 관계로 히트 사이클이 가라앉는 특이 체질이란 걸 알게 된 램파드는 베타라면 성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알파가 아닌 베타와 어떻게 놀든지는 관심 없다. 수많은 베타의 좆을 받아들여도 오메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커틀러는 자신의 오메가를 속박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하라며 내버려 뒀다. 제멋대로지만 램파드의 마음이 풀린다면 그것도 좋을 테니까.

하지만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없는 장난감 같은 베타와의 관계는 상관없었는데 최근 들어 거슬려졌다. 어딜 갔으며 누구와 전날 밤 어떻게 섹스했는지, 꼬박꼬박 보고하는 모습이 커틀러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만족한 관계를 맺은 다음 날엔 특히 더 실실대는 꼴이 마치 보란 듯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직접 보기 위해 함께 따라나섰더니, 램파드는 기겁하며 커틀러를 떼어 놓으려 용을 쓰기 시작했다. 도발에 응해 주는 의미도 있었지만, 사실 램파드는 혼자 다니기 힘들 정도로 크나큰 문제를 가졌다.

가장 가까이에서 황제의 시중을 드는 시종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크나큰 흠.

미의 기준이 남들과 다른 건지, 그게 아니면 애초에 미적 감각이 증발한 것인지, 스스로 골라 입는 옷은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끔찍했다. 평소에는 시종이 옷을 고르고, 입혀 주니까 문제없다. 아카데미에서는 교복을 입어서 몰랐는데, 개인적으로 외부에서 램파드를 만났을 땐, 솔직히 눈을 감고 싶었다.

시종은 감히 황제 폐하께 옷을 직접 골라 입지 말라는 간청을 하지 못한다. 결국, 커틀러가 나서서 말해 주었건만 램파드는 자신의 큰 결점을 인정하지도 않고,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면 타고난 문제라 고쳐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변장이랍시고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도 없는 옷을 꺼내 골라 입었을 거다. 솔직히 램파드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꼬여 들 완벽한 외모를 가졌다. 그렇지만 꽃미남 앞에 미친놈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사람들이 되레 경계한다.

뭐, 어쨌든 그 상태에서 누굴 만나든 알파의 페로몬이 그리워 다시 되돌아올 테니 크게 개의치 않는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귀환병처럼 빠르게 돌아올 터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지 못해 히트 사이클이 닥친 상태로 돌아오겠지.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 없을 텐데. 한참 착각에 빠진 램파드가 하루라도 빨리 깨달았으면 한다. 제멋대로인 행동을 참아 주고, 인내할 수 있을 때 말이다.

***

남부에 홀로 찾아온 램파드는 우여곡절 끝에 하룻밤 상대를 찾았다. 상대는 대개 질척한 미련이 생기지 않도록 술집에서 구한다. 서로 밤이 외로워 모이는 장소인 만큼 하루 몸을 섞어도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날만은 달랐다. 빼어난 미모를 이용해 대놓고 낚시해 봤지만, 이상하게 상대가 꼬이지 않았다.

술집 밖으로 나온 램파드는 근처 양조장에서 일을 하는 건장한 사내를 발견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눴고, 남부 지방에 익숙한 그는 램파드를 근처 여관으로 안내했다.

‘사복을 입은 폐하께 접근하는 놈은 사이비 종교의 전도자들이나 인신매매범이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커틀러가 몇 번이고 내뱉은 경고가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램파드는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남자를 따라갔다. 제국의 검이라는 칭호는 한낱 장식품이 아니었다. 램파드를 제압할 사람은 제국 내에서도 몇 명 존재하지 않으니까 안전상 문제는 없다.

“방 안에도 포도 냄새가 진동하는군.”

아까부터 포도 냄새가 계속 풍겼다. 근처에 거대한 양조장이 있으니 그곳에서 나는 향이라 생각했건만, 알고 보니 램파드가 낚아 온 상대에서 나는 냄새였다. 품속에 터진 포도라도 넣어 둔 건가. 좁은 여관방 안에는 과실 향이 은은하게 났다.

“아, 말하지 않았나요? 전 양조장에서 와인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거슬린다면 한 번 더 씻겠습니다.”

“거슬릴 정도는 아니야.”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와인이라. 이곳의 와인은 한 번 먹어 봤는데 신맛이 너무 심하더군. 사 먹는 사람은 있는 건가?”

과육 자체가 신맛이 매우 강한 포도였다. 그걸 가지고 발효까지 시켰으니 이곳의 와인은 코가 뻥 뚫릴 정도로 시큼했다. 두 번 다시 먹고 싶은 맛이 아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상대가 싱긋 웃었다.

“외지인들보단 여기 사람들이 소비하는 게 대부분이죠. 와인이 없으면 잠 못 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왜지?”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은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의 한복판이었으니까요.”

“신맛이 너무 강해 오히려 잠이 달아날 거 같은데.”

“익숙해지면 제법 괜찮은 맛이 납니다. 그리고 제가 만드는 와인은 맛이 뛰어나기로 소문났지요. 단맛이 강해 특별히 잘 팔리는 편입니다.”

과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에게선 시큼한 발효 향이 아닌 풍부한 과즙 냄새가 났다. 코를 감도는 은은한 향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번 맛보고 싶군.”

“기회가 된다면 대접해 드리죠.”

늘 그래 왔듯이 감별지로 베타임을 확인하고 침대에 누워 옷을 벗었다.

“그런데 이런 옷은 왜 입고 있는 겁니까.”

남자는 램파드가 벗어 놓은 알록달록한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어울리지 않나?”

“처음 봤을 땐 광대가 남부 마을로 찾아온 줄 알았습니다. 말 걸기가 두려운 정도더군요.”

커틀러와 똑같은 소릴 하다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점이었다.

“난 벗은 몸이 제일 예쁘거든. 그래서 뭘 입어도 괜찮아.”

램파드의 말에 상대는 낮게 쿡쿡, 웃었다. 수긍하는 웃음은 아니었다.

“잡담은 이만 됐다. 빨리 시작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상대는 램파드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남자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오자 램파드가 제지했다.

“입맞춤은 하고 싶지 않아. 바로 박아.”

“알겠습니다.”

상대는 엉덩이를 부드럽게 움켜쥐고 주물렀다. 천천히 신경을 깨우듯이 살결을 만지고 꾹 맞물린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 속에서 잔뜩 배어 나온 끈적한 애액을 문지르는 그가 말했다.

“……오메가였나요?”

“맞아. 횡재한 기분이지?”

“그렇네요.”

상대는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반응이 생각보다 시원찮은데. 베타는 오메가와 함께 침대에 올라갈 일이 드물지 않아?”

“맞습니다. 당신이 두 번째입니다.”

“나보다 전에 만난 오메가와도 이런 일을 했나?”

“이런 일이요?”

“섹스.”

상대는 램파드의 항문 안쪽에 손을 넣고 자극을 줬다. 평소 만나는 상대와 달리 그는 천천히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요.”

“그러면 지금 바람피우는 거군. 싸웠나?”

“헤어졌습니다.”

좋게 헤어지진 않았는지, 목소리에서 서글픔이 묻어 나왔다. 일방적으로 차인 건가. 하긴 오메가가 베타를 만날 이유가 없긴 하다. 돈이 많으면 또 몰라. 이런 시골에서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돈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아… 내가 경솔했군.”

“아닙니다. 그러실 거 같더군요.”

램파드는 눈썹을 씰룩거렸지만 따로 정정하지 않았다.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된 상대를 유혹해 여관으로 왔으니 경솔해 보일 만도 했다. 상대는 전 연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램파드도 언급하지 않고 관계에 집중했다.

이왕 베타랑 관계를 맺을 거 기분 좋게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램파드 나름 사람을 고르는 기준을 정해 두었다. 우선순위는 테크닉이었는데, 허리 놀림은 한번 엉켜 봐야 아는 것이다.

다음으로 달린 성기의 크기도 크면 클수록 좋았다. 이것 또한 벗겨 봐야 아니까 운동을 열심히 하고, 몸이 좋아 보이는 상대에 먼저 눈이 갔다.

이번에 만난 와인 메이커는 겉모습은 합격이었다. 180이 넘는 램파드보다 키가 크고, 단련된 근육은 옷 밖으로도 도드라졌다. 벗겨 놓고 보니 아랫도리 크기도 만족스럽고, 드물게 오메가를 배려하는 모습도 괜찮다. 침대 매너도 근사해 애무부터 차곡차곡 순서를 밟아 가 오랜만에 설레는 관계를 맺었다. 제대로 충족한 램파드는 기분 좋게 푹 잠들었다.

아침, 침대에서 일어난 램파드는 두 눈을 의심했다. 대다수의 베타는 오메가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막 대한다. 드문드문 예의를 지키는 사람도, 관계를 맺을 때까지만이었지 날이 밝으면 모두 도망치듯 사라졌다. 또는 어디선가 흉기를 들고 와 자신과 함께 살자며 협박하던가.

하지만 어젯밤 상대는 램파드의 곁에 남아 책을 읽는 중이었다. 기척을 느낀 그는 황금색 눈동자로 웃음을 지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잘 잤나요?”

“아……?”

오메가인 램파드가 눈 뜰 때까지 곁을 지킨 사람이 처음이라 당황했고, 김빠진 소리가 나와 버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끌어안고 볼 땐 몰랐는데, 단단한 근육은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색이었다. 버터를 잔뜩 넣어 노릇하게 잘 익힌 듯한 근육은 먹음직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검은색으로 착각했건만 아침 햇살에 본래 색상을 드러낸 그의 머리는 짙은 갈색이었다. 그에 비해 눈은 밝은 노란색을 가져 짙은 색 융단 위에 토파즈가 올라간 모양새였다.

“별일이군. 아직 안 갔다니.”

“눈뜰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헤어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요.”

연인이랑 헤어졌다고 하더니만 책을 들고 있는 남자의 손에는 반지가 끼워졌다. 게다가 약지 깊이 끼어 있는 은색 링은 혼인반지였다. 어젯밤 말한 건 숨겨 둔 연인을 뜻하는 거였나. 이 남자와 관여될 필요가 없으니 괜한 호기심은 접었다.

그보다 램파드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맨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램파드는 자신의 소지품을 찾기 시작했다. 억제제를 넣은 철제 통이 보이지 않았다.

“이걸 찾는 건가요?”

남자의 손 위에는 네모난 철제 케이스가 올라가 있었다. 램파드가 찾는 물건이었다.

“그걸 왜 자네가 들고 있는 건가.”

“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뒀습니다. 궁금해서 안을 열어 보았는데, 히트 사이클 억제제가 들어 있더군요.”

램파드는 철제 케이스를 받자마자 뚜껑부터 열어 봤다. 흰색의 억제제가 총 아홉 개. 사탕은 열두 개 담겼다. 어젯밤 램파드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개수 그대로였다. 확인을 끝마치자마자 하얀 알약 세 개를 꺼내 입 안에 넣었다.

“한꺼번에 세 개나 드시는 겁니까.”

“특이 체질이야.”

약을 먹은 램파드는 근처에 준비된 물을 마시며 방 안을 훑어봤다.

수도로 돌아가기 전 한두 명 더 추가로 상대를 찾아야 했다. 이때껏 만난 놈 중에는 별의별 이상한 취향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때리는 게 취향이라며 엉덩이와 뺨을 내리친 놈. 자신의 물건이 새끼손가락만큼 가늘면서 램파드보고 구멍을 조이라며 목을 죄던 남자. 분명히 거절했는데 입에 성기를 밀어 넣으려던 놈도 있었지. 주먹을 휘둘러 상대의 앞니를 부러뜨렸지만, 한동안 꿉꿉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유추한 결론으로 다음 상대는 똥차일 확률이 높았다. 이왕이면 검증된 사람과 한 번 더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예외적인 일을 만들었다.

“헤어지기 전에 한 번 더 할까?”

한 번 관계를 맺은 사람과 두 번 잠자리를 가지지 않는다. 램파드가 정한 규칙이지만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니 규칙 위반은 아니었다. 램파드는 나른하게 누우며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세상 무엇도 비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거부할 상대는 없을 터.

“좋죠.”

책을 내려놓은 상대가 반지를 뽑아 그 위에 소중히 올렸다. 감별지를 통해 베타라는 건 어젯밤 확인했다. 그러므로 또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램파드는 두 번째의 예외를 만들며 가까이 다가온 상대를 끌어안았다. 검술을 수련한 램파드보다 훨씬 체격이 좋은 그의 넓은 어깨는 양팔을 활짝 벌려야 매달려졌다.

그는 자신에게 엉겨붙은 램파드의 목을 가볍게 깨물며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밤새 남근을 넣고 있던 안쪽이 밀려올 감각을 기대하며 움찔 떨었다. 램파드는 세 번째 예외를 만들었다.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애쉬 테일러입니다.”

잠깐 설렘을 준 그의 이름을 알고 싶어 물어봤지만 후회했다. 상대 또한 이름을 물어볼 확률이 높으니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에 신상 따윈 물은 적 없었다. 어째서 그의 이름을 물어본 거지……. 이상하게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램파드는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다.

“타다 남은… 재라는 뜻이군.”

“네. 이런 이름을 가졌기 때문인가 정말로 전부 다 활활 타 버리더군요.”

몸만 탐하는 담백한 관계로 치기에는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램파드의 정신이 온전했더라면 경계했겠지만, 이상하게 머리가 마비된 듯 멍해져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램파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무거워진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두꺼운 페니스가 램파드의 속을 거칠게 파고 들어왔다.

몸 안에 있는 살이 벌려지며 아랫배에 포만감이 느껴져, 눈을 살며시 감은 램파드가 허리를 세워 그의 등을 껴안았다. 단단한 근육에 파묻히는 기분이 안정감을 줬다.

램파드가 자신의 몸에 기대자 애쉬가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하읏! 응, 뭐… 후으, 뭐가.”

“제 첫사랑은 연인이 살해당하는 순간 타 버렸습니다. 타다 남은 재는 제 가슴속에 묻었지요.”

“살해라니…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건가.”

“네. 살인범의 이름도 제대로 알고 있죠. 램파드 클로비스라고, 제국의 황제 이름과 같더군요.”

반복된 추삽질로 속이 뜨거워진 램파드는 애쉬의 목을 감싸고 그의 품에 무거운 머리를 파묻었다. 가슴이 가까워지자 빠르게 두근거리는 강한 심장 소리가 들렸다. 흥분이 아닌 긴장에 요동치는 심장 박동에 묘한 기시감이 떠올랐다. 램파드는 상대의 목을 풀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

“네.”

반듯하게 격을 차린 건 상대가 예의 바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남자, 애쉬는 제국의 황제 램파드를 알았다.

애쉬는 흔한 이름이었다. 당장 황궁에서 일하는 시종 중에서도 애쉬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가 몇 있을 정도였다. 애쉬가 램파드의 골반을 꽉 붙들었다. 살점을 파헤치듯 거칠게 잡는 통에 램파드는 눈을 찌푸렸다.

“당신에겐 쓸모없는 일이라 잊어버린 거 같군요.”

“읏, 네놈……!”

상대의 악의를 눈치채고 벗어나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근육이 모두 풀린 듯, 노곤해지고 잠이 쏟아졌다. 푹 자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잠이 쏟아지는 걸 막지 못했다. 램파드는 고개를 들어 올릴 힘조차 없어져, 애쉬의 목에 다시 한번 머리를 파묻었다.

“경솔하군요. 의심도 없이 수면제를 세 알씩이나 드시다니.”

아슬아슬 버티고 있던 눈꺼풀이 회색 눈동자를 덮었다. 램파드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고 애쉬의 품에 쏙 들어갔다. 여전히 하반신은 이어져 있는 상태였다.

후우, 아랫배가 뜨거운 애쉬는 낮은 한숨을 쉬며 램파드를 빼내기 위해 움직였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이대로 허리를 쳐올리고 싶은 욕정에 휩쓸렸다. 허리를 움직였단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애쉬는 욕망을 누르며 램파드를 떼어 냈다. 결합이 풀어진 램파드는 침대 위에 쓰러졌다.

기절하듯 잠이 든 램파드의 몸 위에 올라간 애쉬는 아래에 깔린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의 이름을 듣는 순간, 두 번 다시는 만날 일조차 생기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조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램파드를 발견했을 땐 두 눈을 의심했다.

램파드 또한 누군가를 떠올릴 정도로 닮았으니까. 비슷하게 닮은 다른 사람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복수심에 불탄 마음이 만들어 낸 신기루던가. 애쉬는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여러 번 눈꺼풀을 깜빡였다.

복장은 괴이해도 외모만큼은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월등했다. 저 정도의 출중한 사람이 한 명 더 존재할 리 없다.

램파드를 놓치면 다시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마주치지 못할 거였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계획을 세웠는데, 성공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제국에서는 검신. 왕국에서는 목줄 풀린 미친개라 불리는 검사를 평범한 와인 메이커가 감당할 리 없다. 괜히 어설프게 접근했다가 물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니까.

꿈같은 일이지만 복수의 대상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게 현실이었다. 이제 애쉬의 바람을 이룰 준비가 모두 끝났다.

애쉬의 움직임에 맞춰 싸구려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는 램파드의 몸 위에 올라타 꼼꼼히 뜯어봤다. 눈을 감으니 더더욱, 기분 나쁠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애쉬는 떨쳐 낸 일이 생각나 가슴 안쪽이 지끈거렸다. 몇 년간 괴로워했던 마음의 종착지가 멀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의 복수만 끝마치면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질 것이다.

막바지에 다다랐지만 애쉬의 손이 생각한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음을 조이고, 또 죄어 가느다란 목에 양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로 요동치는 강한 맥박이 느껴진다.

램파드가 아무리 강한 검사라고 하나 한낱 인간일 뿐. 이대로 힘을 줘 목뼈를 부러뜨리고, 기도를 막으면 죽을 터.

애쉬는 양 엄지에 힘을 줘 그의 목을 짓눌렀다. 손안에서 느껴지던 심장 박동이 더욱 거세졌다.

“흣……!”

손에 힘을 주자 눈을 감은 램파드가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숨이 막힌 그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몸을 뒤틀었다. 애쉬는 엄지손가락에 힘을 줘 꽉 눌렀다. 한껏 찌푸리며 괴로워하는 램파드의 얼굴에 소중한 이가 겹쳤다. 얼굴만 닮았을 뿐이지 성격, 목소리, 오메가가 뿜어내는 페로몬 향도 전부 달랐다.

그를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 몇 번이나 했는지.

다른 사람이 분명한데 몇 년간 차곡차곡 축적된 그리움은 대리 만족을 느끼며 설렜다. 그렇기에 그를 향한 분노가 더욱 컸다. 이렇게나 닮았는데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칼을 찔러 넣다니. 아니,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칼을 휘둘렀겠지. 그는 램파드에게 큰 흠일 테니까. 램파드가 원망스럽다.

애쉬의 시야가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뿌예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램파드와 그가 계속 겹쳤고, 그리운 얼굴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손을 놓아 버렸다. 램파드의 가느다란 목에는 손으로 죄고 있던 모양대로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아, 하아, 하아……!”

죽이기 전, 얼굴부터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야 했다. 애쉬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주먹을 꽉 쥐어 들어 올렸다. 공중에 붕 뜬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리치면 된다. 찰흙을 뭉개듯 짓이겨 버리면 될 텐데…….

램파드의 얼굴에 주먹 대신 맑은 물이 뚝, 뚝, 뚝, 떨어졌다.

갈 곳 잃은 주먹이 애쉬의 눈으로 돌아왔다.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며 숨을 삼켰다.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가 꽉 조였고, 갈비뼈 아래가 지속해서 지끈거렸다. 흥분한 만큼 몸이 뜨거워지며 머리도 아팠다.

***

눈을 뜬 램파드는 어두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늘한 한기가 돌고 바닥은 단단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짙은 포도 냄새와 수많은 오크통으로 와인 셀러란 걸 파악했다. 여관 근처에 거대한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곳의 지하인가.

자세히 살펴보고 싶지만 몸이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양팔이 쇠 수갑에 고정돼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팔을 거칠게 털어 봐도 절그럭거리는 쇳소리만 들렸다.

“……아!”

램파드는 목이 욱신거려서 신음을 흘렸다. 목 안쪽까지 얼얼한 걸 보아 강하게 움켜쥔 모양이었다. 정신이 돌아오자 머리도 지끈거렸다. 두통이 심해 머리 안쪽이 울릴 정도였다.

“눈뜨셨습니까.”

램파드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자그마한 빈틈조차 없이 양손이 단단하게 묶였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이 수갑은 또 무엇이고?”

몸이 속박된 상태지만 램파드는 턱을 치켜들고 거만한 자세로 심문하듯 물었다.

“와인 도둑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만들어 둔 수갑입니다. 한번 당한 뒤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아 먼지만 폴폴 날렸는데, 제국의 황제께서 사용해 주실 줄이야. 영광입니다.”

애쉬의 담담한 목소리에 램파드가 싱긋 웃었다.

“허술해서 어이가 없군. 이 정도로 나를 묶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한 가지 조언을 해 주지.”

“…말씀해 보십시오.”

“할 수 있을 때 단단히 속박하는 게 좋을 거다. 뒤늦게 후회하면 이미 네놈 목이 몸과 분리될 테니까.”

평범한 와인 메이커의 목숨을 앗는 건 램파드에게는 나이프로 무딘 치즈를 써는 것만큼 손쉬운 일이다. 양손이 포박되어 있다고 해도, 다리가 자유로우니까. 애쉬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를 노리면 그를 죽이고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죽이는 건 잠시 미루기로 했다. 일단 황제로서 무엇을 위해 제국의 시민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지 이야기를 들어 볼 생각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3년간 제국을 살펴본 덕분에 인내심이 늘긴 늘었다. 전쟁 중이었으면 당장 상대의 목숨을 끊고 자유 확보부터 했을 터.

“아으…….”

긴말을 내뱉었더니 목 안쪽이 또다시 욱신거렸다. 성대에 멍이 든 듯한 느낌이었다. 죽일 작정으로 목을 강하게 쥔 듯했다.

“하아… 죽일 생각이었나 본데 도중에 관둔 모양이군. 뭐야, 기절한 짐의 모습에 반한 건가?”

“어제부터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뻔뻔하신 분이군요.”

“이 몸이 어지간히 예뻐야지 말이야. 그게 아니면 한 번 뒹굴었다고, 몸 정이 생긴 모양이지?”

“둘 다 틀렸습니다.”

“후… 인정하기 싫으면 됐다. 이러는 이유나 말해 봐라. 기꺼이 들어 주지.”

“제 이름까지 말해 드렸는데 정말로 기억 못하시는 겁니까.”

어젯밤 연인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했었지. 램파드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짐이 죽인 자가 몇인데 그걸 일일이 다 기억하겠냐. 그래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 거냐. 무릎이라도 꿇으며 사죄하길 원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합당한 보상을 해 줄까? 얼마를 원하는 거냐. 한번 말해 보아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램파드의 태도에 애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죄책감이 한 톨도 없는 모습에 적잖게 실망한 모양이었다.

“반성조차 하지 않으시다니 타고난 본성이 사악하신 겁니까.”

“그런 식으로 악마로 몰아가진 말아 주지그래. 지난 일은 다 그때그때 반성했다. 구질구질하게 과거를 회상하기엔 이 몸은 바쁘거든.”

“바쁘시다는 분이 이 먼 곳까지 하룻밤 상대를 찾으러 오신 겁니까. 하긴, 수도에서 짝을 찾다 오메가라 소문나면 황위에서 내려오셔야 하겠군요.”

“잘 알고 있군. 그래서 짐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세상에 까발릴 생각이냐.”

“다른 방법으로 복수할 겁니다.”

애쉬가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한 병 안에는 연녹색의 탁한 액체가 찰랑거렸다. 숨통을 끊을 기회가 있었는데, 굳이 인제 와서 독 같은 걸 먹일 리는 없다.

“최종 각인을 끝낸 오메가가 다른 이와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글쎄. 아직 성적인 짝을 만나지 못한 순진한 오메가라 잘 모르겠군.”

“각인한 상대가 아닌 자와 관계를 맺으면 페로몬이 뒤틀려 몇 날 며칠 고생하게 됩니다. 여러 번 반복되면 점점 무뎌지긴 하지만요.”

애쉬는 유리병의 틈을 막고 있는 코르크를 뽑았다. 녹색 액체에서 달콤한 향이 강하게 풍겨 왔고, 램파드를 자극했다. 심장 안쪽이 급속도로 간질간질해졌다. 향을 떨쳐 내기 위해 이를 강하게 악문 램파드가 애쉬를 노려봤다.

“평범한 와인 메이커가 발정제를 어디서 구한 것이냐…!”

“이건 오늘 아침에 어렵게 구매한 겁니다.”

발정제는 황실이 직접 관리하는 위험 약물 중 하나이며, 일반 시민이 구할 수 있는 경로 따위는 없다. 돌아가는 대로 불법 브로커들의 씨를 말려야겠다.

하지만 이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발정제 때문에 램파드의 몸이 급속도로 나른해졌다.

“제 짝은 창관의 오메가였습니다. 그곳에서 강제로 최종 각인을 끝마치고 손님을 받았지요. 뒤틀린 페로몬에 익숙해질 때까지 괴롭고 아픈 나날이 계속됐죠.”

램파드는 입을 꾹 다물고 애쉬를 바라봤다. 깨어났을 때 의심이 되는 몇 놈을 떠올려 봤는데, 일치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오메가 짝이라고 말하니 확실히 기억났다. 곧 혼인식을 앞뒀다고 한 연인.

“처음은 발정제를 맞고 여러 날 동안 관리인들에게 돌려집니다. 그중 한 명에게 각인당한 오메가는 손님 받을 준비를 하죠. 모든 사람에게 익숙해질 수 있도록 처음은 80이 넘은 노인에게. 그다음은 변태 취향을 가진 도착증자에게. 마지막으로 도망가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돼지나 말 같은 짐승과 차례차례 관계를 맺게 됩니다.”

“…….”

“어떻게 도망친다 하여도 각인한 관리인을 쉽게 잊지 못해, 저와 함께 있을 때도 오랜 시간 괴로워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루사의 각인 상대가 죽었지요. 오랫동안 괴로워했던 루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준비가 끝났는데, 그걸 망친 게 당신입니다. 제 연인이 당한 일을 고스란히 돌려 드리죠.”

애쉬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발정제의 향이 짙어졌다. 램파드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고, 오메가의 몸은 히트 사이클에 돌입했다.

램파드는 소리 없이 웃었다. 베타가 뭘 어쩐다는 건지. 알파가 아닌 이상 히트 사이클에 돌입한 오메가를 어찌할 수 없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순순히 죄를 인정해라. 자비를 베풀어 주지.”

“손발도 제대로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면서, 입은 여전히 살아 있군요.”

애쉬는 오메가 연인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그렇기에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는 허약한 노인을 제압할 힘마저도 없어진단 걸 잘 알았다. 그는 램파드의 사나운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고, 입을 크게 벌려 눈앞에 있는 먹잇감의 목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래서 그 잘난 복수란 게 강간인 거냐. 아, 살살… 물어!”

목에 이빨을 박아 넣은 애쉬는 힘을 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빨로 동맥을 끊어 버릴 기세로 우물거려, 램파드는 눈을 찌푸렸다.

“…아읏!”

이빨이 살을 파고들자 램파드의 몸이 튀어 올랐다. 통증과 함께 억제제로 강제로 깨워진 쾌락이 뒤섞여 한 번의 자극으로도 신경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양팔이 천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크게 움직이지는 못하고 쇠사슬만 요란하게 절그럭거렸다.

램파드의 목을 깨물고 있던 애쉬가 입을 떼어 냈다. 혀로 윗입술을 할짝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아프다면서 이미 아래는 애액이 흥건하게 흘러내리는군요. 안 풀어도 될 정도로…….”

목을 물었는데 안 아플 리가 있나. 그냥 구멍에다 씹질만 하면 되지, 살결을 물어뜯는 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할 거면 빨리해 버려.”

발정제 향에 잠식된 몸은 나른해지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애쉬와 섹스를 하면 회복될 것이다.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그때는 눈앞의 베타 놈의 제삿날이었다.

애쉬는 벌려 있는 램파드의 다리 사이에 손을 밀어 넣으며 닫힌 구멍을 벌렸다. 뜨거워진 내부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쑤시자 질척질척 물 많은 소리가 들렸다.

“어제처럼 부드럽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애쉬는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던졌다. 힘줄이 붉게 도드라진 성기가 해방되자 알파의 강렬한 페로몬이 풍겨 올랐다. 원초적인 짐승 냄새에 램파드의 목 너머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애쉬는 두르지 말아야 할 기운을 뿜어냈다.

“너… 설마 알파로 발현한 거냐.”

“그런 것 같지요?”

“분명 노란색이었는데…….”

“어제까진 확실히 베타였습니다. 오늘 아침 발현한 것 같더군요.”

“그럴 리가…….”

스물이 넘어서 발현하는 사람도 있나?

열넷에 발현한 램파드도 상당히 늦은 편이었고, 스물을 넘긴 나이로 발현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돌연변이로 태어난 건가.

램파드가 믿지 못하자 애쉬는 익숙한 철제 통을 꺼냈다. 램파드의 소지품 중 하나인 철 케이스였고, 그는 감별지를 꺼냈다. 길쭉하게 잘린 종이를 입에 머금었고, 램파드의 시선이 고정됐다. 처음 애쉬와 관계를 맺기 전에는 노란색이었는데, 지금은 알파를 의미하는 붉은색이었다. 위험을 알리는 붉은색에 램파드의 심장이 요동쳤다.

“황제 폐하를 각인시키고, 제 짝이 당한 일을 그대로 돌려 드릴 겁니다.”

알파와의 관계는 곤란했다. 최종 각인이 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히트 사이클 기간에 알파와 관계를 맺으면 임신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황제의 복장은 몸에 쫙 달라붙는 의장이 대부분이라 부풀어 오른 배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애쉬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오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비열한 놈!”

“검사가 무기도 들지 않은 시민을 죽이는 건 당당한 일입니까? 아무런 힘이 없는 오메가를 비열하게 죽인 게 누구셨는데요.”

“읏… 그건, 그가 원했던 일이었…… 큭!”

애쉬는 램파드의 목을 단단하게 그러잡았다. 이미 한차례 자극받은 목은 힘을 주지 않아도 화끈거리며 쓰라렸다.

“그 더러운 입 다물어. 혼인을 일주일 앞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니, 개도 안 믿을 소리를!”

램파드는 숨을 멈추고 상대를 노려봤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익숙해져, 어지간한 향에는 반응하지 않을 터인데. 애쉬의 페로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발현이 늦은 만큼, 해방되지 못했던 농축된 페로몬이 한 번에 터져 나와 램파드를 포악하게 할퀴는 느낌이었다.

“읏……!”

램파드의 목은 강하게 움켜쥔 손자국과 바로 전에 만든 이빨 자국이 남았다. 애쉬는 새로 만들어진 목가의 상처에 다시 한번 이빨을 가져다 댔다. 한 번 깨물 때마다 램파드의 몸에서 향이 훅 피어올랐다.

여린 향은 애쉬의 코끝을 조금씩 간지럽혔다. 애쉬는 좀 더 향을 맡고 싶어서, 다른 곳을 깨물었다. 살을 씹듯이 잘근거릴 때마다 램파드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좀 더 살을 맛보고 싶은 애쉬는 이빨을 떼어 내고 상처 부위를 핥았다. 말캉한 혀가 상처를 쓸어내리자 통증을 느낀 램파드가 움찔 튀어 올랐다.

“흐, 으읏……. 아, 아… 앗!”

“생각보다 향이 좋은걸. 베타일 때는 오메가의 향 같은 건, 그냥 향수처럼 느껴졌는데…….”

“윽, 닥쳐……!”

램파드가 고통스러워하자 애쉬가 미소 지었다.

아침, 발정제를 구하면서 과연 이게 램파드에게 벌일까 고민했다. 섹스를 좋아하고 음란한 성격이라 오히려 상이 아닌가 싶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은 기대가 아니라 아픔이었다. 램파드가 괴로워할수록 애쉬의 마음의 응어리가 흩어졌다. 좀 더 괴로워하며 절망에 빠진 모습을 보면 괴로움이 사라질 것이다.

“피임제를 먹일 테니, 입 벌려.”

애쉬는 발정제와 달리 노란색의 액체가 든 병을 꺼냈다. 램파드는 병 안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입을 조금 벌렸다. 애쉬는 램파드의 턱을 부여잡고, 벌린 틈으로 액체를 부어 넣었다. 혹시라도 손가락이 닿으면 램파드가 뜯어 버릴까 봐 조심스레 액을 흘려 넣는다.

램파드가 조용히 받아먹자 그가 웃었다.

“이 상황에서까지 경솔하게 행동하다니. 이게 독이면 넌 죽어.”

애쉬가 먹이는 액체는 비릿하고 쓴맛이 났다. 목 안으로 흘러 들어온 액체를 꿀꺽 삼킨 램파드가 입을 뗐다.

“……시체를 안을 생각이 없는 이상 독을 먹이지 않겠지.”

“독이 아니라 아쉽지만 네 말대로 이건 피임제가 맞아. 너와 내 아이가 생기는 끔찍한 일은 방지해야지.”

피임제는 두 종류이며 각각 러트와 히트 사이클에 효과를 본다. 제대로 피임을 할 생각이라면 섭취 전 두 종류를 섞어 마셔야 했다.

“한 병만으로는 확률만 낮출 뿐, 완벽하게 막아 주진 않을 거다.”

“그딴 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다 정말로 아이가 생기기라도 하면은.”

“아이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 너 같은 놈을 진심으로 원하진 않으니까 러트까지 하진 않을 거다. 혹시 임신한다면 책임지고 낙태할 곳은 알아봐 주지.”

램파드는 진심을 담아 애쉬를 노려봤다. 아무리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하나, 힘없는 오메가를 죽인 일은 사실이었다. 혼인을 앞둔 연인을 죽였단 사실에 아무런 죄책감 없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지만 잘못을 저질렀다고 순순히 몸으로 갚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네 녀석은 내년에 해가 뜨는 모습을 보지 못할 거다. 산 채로 찢어 죽여 주지.”

램파드의 살기 어린 눈동자를 바라보며 애쉬가 웃었다.

“폐하께서 창관에 들어온 오메가들이 당한 일을 모두 제정신으로 버티실 수 있다면 그리하시던가.”

애쉬는 램파드의 양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애액으로 부드러워진 입구를 페니스로 눌렀다. 뒷구멍으로 남근을 받아들인 적은 많다. 그렇지만 알파의 것은 처음이었다. 램파드는 아랫입술을 천천히 깨물며 밀려올 정신적 충격에 대비했다. 익숙한 모양의 두꺼운 살덩어리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맹수처럼 느껴졌다.

“아… 악!”

발기한 알파의 성기가 연한 살을 가르고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애액이 흘러나와 충분한 윤활 역할을 해 주었지만, 페로몬에 몸이 쪼개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파와 관계를 한다는 게 이런 건가. 페로몬이 안쪽 내벽을 찌르고 몸속 곳곳에 퍼져 나간다. 애쉬의 날카로운 살의가 램파드의 심장까지 쿡쿡 찔러 따끔거렸다.

램파드의 몸속에 성기를 밀어 넣은 애쉬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욱, 푹. 내벽을 꽉 채운 남근이 쉬지도 않고 안쪽을 여러 번 찔렀다. 내벽에 귀두 끝이 닿을 때마다 램파드의 몸이 튀어 올랐다.

“하읏, 아… 아… 아, 파……. 좀, 천천히! 아… 읏!”

“아프다고? 이때까지 몸을 굴려 왔을 거면서, 내숭 같은 건 부리지 말지그래. 역겨워.”

안쪽을 빠르게 찔러 들어온 성기는 빈틈없이 꽉 채우고, 내벽을 푹푹 찔렀다. 배려 없이 움직이는 허리는 연한 살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듯했다. 뻑뻑한 마찰에 부어오른 내벽이 얼얼했다.

질척거릴 정도로 흥건하게 배어 나온 애액으로 알파의 페로몬을 막기 힘들었다. 애쉬의 페로몬은 살기를 둘렀고, 램파드의 몸속을 갈랐다.

“흣, 으… 읏, 제길…!”

각인은 한 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짓을 몇 번 더 해야 하다니. 차라리 이번 한 번으로 각인되길 바랐다.

팔이 묶인 어중간한 상태라 남근이 전부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 애쉬는 남아 있는 뿌리를 모두 램파드 안으로 넣고 싶었다. 욕망을 쫓아 램파드의 엉덩이를 들어 올려 자신의 다리 위로 포갰다. 맞물린 성기가 중간까지 빠져나왔다 다시 푹 꽂혔다.

“흐… 앗… 아, 아… 아… 아!”

램파드는 자신의 몸무게만큼 아래로 꺼지는 바람에 배 안쪽이 찔렸다. 눈앞이 점멸될 정도로 신경이 자극되어 고개를 뒤로 꺾었다.

“하아… 솔직히 쇠사슬이 걸리적거리긴 하네. 풀어 봤자, 지금 당장 반항하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 줄까?”

“……흐, …으, 힉! 힛!”

“답하기 싫다면 내 마음대로 하고.”

단단한 알파의 성기가 안쪽 내벽을 찔렀고, 램파드는 신음을 흘렸다.

베타의 성기와는 달랐다.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페니스가 아니라 딱딱한 몽둥이를 집어넣은 느낌. 흉기가 내장을 지속해서 때리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지금도 배가 꽉 차서 아팠다. 또다시 찔러 대기 시작하면 장기가 뒤섞일지도 몰라 두려워졌다. 램파드는 이를 악물고 눈을 꽉 감았다.

허리를 붙잡은 애쉬가 램파드를 위아래로 솟아오르게 하였다. 얼얼한 내벽에 자극이 갔고, 장기를 보호하기 위해 애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알파의 성기가 쿠퍼 액을 흘려보내며 장내에서 애액과 뒤섞여 질척거렸다.

“좀 더 깊게 들어갔네. 끝에 닿은 말랑한 부분, 여기가 황제 폐하의 포궁인가? 이대로 사정하면 각인되겠지?”

“흐… 으…….”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오메가는 닫힌 포궁을 열고, 임신을 준비하는 몸으로 변화한다. 몸 안쪽을 활짝 벌린 오메가의 몸에 알파가 파정하면 자지러진다는 걸 애쉬는 잘 알았다. 램파드의 넋 나간 표정이 기대되어,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웃었다.

“아무래도 여기 끝부분이 포궁이 맞는 모양이야. 흥분해서 벌름거리고 있는 게.”

“흐읏… 윽… 하읏, 빼내고… 싸.”

“내가 빼야 할 이유가 있나?”

“임신은… 아, 안, 안 돼……. 빼…! 빼라고!”

초점이 맞지 않던 램파드의 동공이 또렷해졌고, 양발을 허우적거리며 발버둥 쳤다. 쇠사슬에 묶인 팔은 빠져나오지 않고, 절그럭거릴 뿐이었다.

애쉬가 램파드의 허벅지를 꽉 끌어안아 빠져나가지 못했다. 알파의 좆이 램파드의 포궁 입구를 지그시 누르며 꽉 고정됐다.

“내가 왜 원수의 몸을 신경 써야 하지?”

램파드의 말을 무시한 애쉬가 멀건 액을 왈칵 쏟아 냈다. 히트 사이클로 벌려진 포궁 안이 채워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란 램파드가 튀어 올랐고, 절그럭, 절그럭, 쇠사슬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아… 아아, 아, 아……!”

베타가 내뱉는 거와는 다른 많은 양의 정액이 장 안을 흠뻑 적셨다.

처음 뒤로 남자를 받아들인 첫 관계 때. 히트 사이클에 돌입한 램파드의 몸 안에 기사가 사정하자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 벌려진 포궁 안까지 정액이 흘러 들어가는 기분 나쁜 감촉. 그때와 다른 건 알파의 페로몬이 몸속 깊은 곳으로 퍼져 마음이 간질거린단 거였다.

정액을 한번 토해 낸 애쉬의 페니스는 살기를 거두고 달콤한 향을 내뿜었다. 소름이 온몸을 훑고, 솜털까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우리 속궁합은 좋은 거 같지? 이런 어정쩡한 자세로도 단번에 포궁 입구까지 닿다니. 여기, 한번 정액 맛을 봤다고 부드러워졌는걸.”

램파드는 알파의 페로몬에 푹 잠기는 기분이 좋아 하반신을 움찔움찔 조였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더운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 하으… 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밀어 넣을 작정인지, 애쉬는 램파드의 허리를 꽉 잡고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더 들어갈 곳도 없는데 억지로 잡아당기자 램파드의 안쪽이 압박되었다. 알파의 정액을 반기며 벌려진 포궁 입구가 놓기 싫다며 귀두 끝을 야금야금 물었다.

배 속 깊은 곳이 범해지는 기분에 감은 눈 안쪽으로 흰빛이 펑펑 터졌고, 램파드는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몸 안을 벌리던 두꺼운 성기가 파르르 떨며 사정을 끝냈다. 숨을 쉴 때마다 부푼 항문 입구가 벌름거려, 발기한 남근을 오물오물 물었다. 사정해도 알파의 좆은 여전히 딱딱했다. 떨리는 내벽은 화끈거렸다. 애쉬의 성기를 품고 있는 램파드의 양 다리는 파들파들 떨렸다.

“느꼈지?”

램파드는 욕정에 푹 잠겨 붉어진 눈시울로 애쉬를 바라보았다.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지만 애쉬는 램파드가 유혹의 말을 내뱉는 환청을 들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길은 두 갈래뿐이다.

램파드가 부서지든, 자신이 황제의 손에 끝나든. 애쉬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차라리 죽은 연인을 대신해 잘려 나간 마음을 채워 넣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지. 이렇게 닮았으니까. 대용품으로 생각 못 할 것도 없다.

애쉬는 램파드의 입술을 엄지로 쓸어내렸다.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다물린 입술이 열리고 빈틈이 생겼다. 그 안에 품고 있을 말캉한 혀에 홀려 입을 맞췄다. 램파드가 반항해 혀가 잘려 나가도, 그 또한 좋을 거였다.

예상과 달리 램파드는 혀를 천천히 섞었다. 키스가 익숙하지 않은 램파드는 빈틈이 생길 때마다 숨을 들이쉬었다. 혀를 움직이다 머뭇거리며 애쉬의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

섹스는 익숙하면서 입맞춤은 서툴다니. 이마저도 죽은 연인과 닮았다. 애쉬는 좀 더 천천히, 밀어 넣은 혀로 점막을 핥았다. 혀가 깊숙이 들어오자 램파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더운 숨만 내뱉었다. 그렇게 서로의 숨이 섞이고, 눈이 마주쳤다.

“팔… 풀어.”

“날 제압해서 도망가시려고?”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끌어안게 해… 줘.”

애쉬는 주머니 안에 넣어 둔 열쇠로 수갑을 풀었다. 팔이 해방된 램파드는 애쉬의 품에 쓰러졌고, 넓은 등을 꽉 부여잡았다.

애쉬는 다시 한번 정액이 흘러나오는 입구에 성기를 넣어 허리를 움직였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허리를 쳐올리며 램파드의 목가와 볼에 입을 쪽 맞췄다. 확연하게 달랐던 페로몬 향이 과거의 연인과 비슷해졌단 착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향이었다.

***

“이만 일어나시게.”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램파드는 눈을 번쩍 떴다. 창관에 처음 발을 들인 오메가는 강제 각인 후 80이 넘은 노인과의 관계부터 시작한다 말했다. 발정제 향을 맡으면 상대가 노인이라도 반항할 수 없다.

그는 노인을 경계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고, 곧바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생각과 달리 몸이 가벼워 주먹을 풀고 상대를 바라봤다. 반대로 손까지 쭈글한 노인은 톡 튀어나온 놀란 눈이었다. 침대 시트를 화려하게 펄럭거리며 빠르게 기상한 램파드 덕분에 공격하지 않아도 노인의 심장이 멈출 뻔했다.

“뭐… 뭐, 하는 건가. 놀랐잖은가!”

노인에게서 달달한 향이 훅 풍겼다. 경계해야 할 발정제가 아닌 과실 냄새였다. 그것도 램파드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 램파드의 시선이 노인이 들고 온 기다란 접시에 향했다. 겉껍질이 노릇해질 정도로 바삭하게 구운 파이와 차였다.

“방을 같이 묵었던 사람이 절임 딸기를 사 와서 파이를 구워 달라 부탁하더군. 이 근방에선 자라지 않아 금보다 비싼 설탕에 절인 딸기를 몇 년 만에 보는 건지, 원.”

램파드는 노인이 든 접시 위에 수줍게 올라간 딸기 파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파이가 맞았고, 오메가를 덮치려고 온 발정 난 영감탱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자네 파이를 굽는 김에 우리 부부가 먹을 것도 조금 만들었다네. 그럼 여기 놓고 갈 테니 다 먹으면 그대로 놓아 두면 되네.”

“하나만 묻지. 나와 함께 있던 남자는 어디 갔는가?”

“아, 그 청년은 값을 다 지불하고 나갔다오.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상태인가?”

지금 있는 곳은 감금됐던 양조장 근처에 있는 여관이었다. 기절한 틈에 애쉬가 옮겨 둔 것 같았다. 램파드는 양손으로 이불을 콱 부여잡았다. 포궁 안까지 채울 정도로 정액을 받아들였는데, 배 속은 텅 빈 느낌이었다. 램파드가 실신한 사이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끝낸 모양이었다.

저 좋을 대로 몇 번이나 배 속에 사정하고서 사라지다니.

램파드가 입을 다물자 노인은 방 안에 놓인 테이블 위에 파이와 따뜻한 차를 두고 나갔다.

배가 고파 모든 생각이 위장으로 향했다. 일단 먹어야 사고가 돌아간다. 램파드는 노인이 가져다준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워 낸 파이는 설탕에 절인 딸기가 듬뿍 들어갔다. 램파드가 좋아하는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단 파이였다. 황궁에 있는 요리장의 실력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 먹어 줄 만했다.

따뜻한 차에도 절임 딸기가 담뿍 들어가 입맛을 제대로 자극했다. 둘 다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 몇 년 만에 먹어 보는지.

램파드가 단 음식을 좋아한단 건 이 세상에서 커틀러 단 한 명만이 알고 있다. 또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그는 이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파이의 절반을 먹은 램파드는 협탁 위에 놓인 작은 쪽지와 철 케이스를 발견했다.

「들고 있던 억제제는 다시 통 안에 넣었다. 수면제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먹기를. 딸기는 내 월급으로 충당하지 못할 가격을 자랑해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썼다. 추신, 이상한 옷은 죄다 버렸으니 내가 사 온 옷을 입고 돌아가길.」

마지막 문장을 읽은 램파드는 포크를 강하게 깨물었다. 황제가 옆집 강아지인 줄 아나. 제멋대로 와인 셀러로 끌고 갔다가 다시 되돌려 놓고, 이제는 수도로 돌아가라고? 장난해?

램파드는 애쉬가 구해다 준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눈가를 가리는 로브를 걸쳤다. 옷을 갈아입은 뒤 강한 발걸음으로 근처 양조장을 향해 갔다.

애쉬를 찾는 이유는 훔쳐 간 돈을 찾기 위해서였다. 도둑놈을 잡으러 가는 거라고, 몇 번이나 되새기며 걸었다.

“애쉬 테일러! 당장 나오너라!”

무서운 기운을 내뿜는 남자가 양조장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일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곳의 지배인인 듯한 중년 남자가 램파드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서 일하고 있는 애쉬 테일러란 이름의 와인 메이커를 찾으러 왔다.”

“아… 애쉬는 여기서 일하고 있는 게 맞습니다만, 그는 아침에 일을 관두고 떠났는걸요.”

“떠났다고?”

이건 무슨 소린지. 전쟁이 터진 와중에도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남부 지방에서 지내던 자가 어딜 갔단 말인가. 램파드의 눈썹이 위로 크게 치솟자 지배인이 말했다.

“무슨 일로 애쉬를 찾으시는지요. 혹시 그가 무슨 사고라도 쳤습니까?”

지배인은 잔뜩 경계하며 램파드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일한 직원이니 감싸려는 모양이다. 램파드는 품 안에 넣어 둔 주머니에서 금화를 몇 개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애쉬는 어디로 갔지.”

금화 세 닢에 모든 경계심이 사르륵 녹은 지배인이 상세하고 자세하게 애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애쉬는 오늘 아침 갑자기 일을 관두고, 살던 집까지 급하게 팔아 버렸습니다. 살림살이까지 모두 헐값에 팔아넘긴 걸 보아하니, 다른 곳에 정착할 생각인 듯합니다.”

지배인은 고작 금화 몇 닢에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술술 불었다.

“그는 여기서 나고 자랐는데 몇 년 전 전쟁에서 연인이 죽어 괴로워했지요. 아마 그 때문에 훌쩍 떠난 게 아닌가 싶군요.”

“그가 갈 만한 곳이 있는가.”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지배인은 주저 없이 답했다.

“평소 왕국으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 국경을 넘지 않았을까 합니다.”

램파드는 애쉬가 나갔을 양조장 문을 사납게 노려봤다.

이 미친 새끼가. 각인시켜 창관에서 지내는 오메가처럼 굴린다는 둥 뭐라고 주절주절 말하더니 어디로 도망가 버린 거지. 램파드는 양조장으로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발길을 돌렸다.

“애쉬가 만들었다는 와인을 한 병 사고 싶군.”

금화를 받은 지배인은 양손이 닳도록 싹싹 비벼 대며 와인을 꺼내 왔다. 피처럼 붉은 새빨간 와인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