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스피크 (Doublespeak) 1
01 아카데미
제국의 수도와 멀리 떨어진 남부 지방은 특출 날 게 하나도 없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자라나는 거라곤 식초만큼 시큼한 포도뿐. 신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특산품으로 내세웠지만 굳이 찾아와서 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다 할 특색이 없어 외부인의 방문이 뜸한 소도시에 두어 달에 한 번씩,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남자들이 찾아왔다. 달콤한 벌꿀 같은 황홀한 플래티넘 블론드를 가진 남자는 어두운색 로브를 걸쳤다. 코까지 덮은 마스크 덕택에 금발과 새벽안개를 닮은 회색 눈동자만이 드러났지만, 윤곽만으로도 빼어난 미모를 가진 자였다.
그의 곁에 서 있는 남자 또한 수려했다. 빛의 파편 같은 은백색의 머리카락과 짙은 향이 날 듯한 보라색 눈동자. 날카로운 코와 굳은 입매를 가졌는데, 미소를 짓는다면 제국의 시인들이 앞다투어 찬양할 정도의 예술품이었다.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외모를 가진 두 사람은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불행히도 남부 지방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미남자는 미친개라 불리는 제국의 황제 램파드 클로비스였다. 그는 영토 절반을 왕국에 빼앗긴 전쟁 도중 황제가 되었다. 세상 모두가 왕국의 승리를 확신할 때 황제가 된 램파드는 직접 전장에 참여하여 형세를 뒤집고 제국에게 승리를 안겨 줬다. 하지만 베어 넘긴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했기에 제국을 승리로 이끈 영웅에겐 미친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명성만큼 두려울 것 없는 사내였지만 그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황궁과 멀리 떨어진 남부를 찾아와 하룻밤 상대를 찾았다.
술집에서 만난 이름 모를 상대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온 램파드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 시트는 언제 세탁을 했는지 노란 때가 꼈다.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허름한 침대는 조그만 움직임에도 요란스럽게 삐걱거렸다. 1박에 10실링밖에 하지 않는 싸구려 방이지만 잠깐 쓰고 말 거니 장소야 뭐 어떠리.
“뭘 멍하니 있어? 얼른 벗어.”
침대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은 듯, 만난 지 30분이 채 안 된 남자가 분수도 모른 채 황제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램파드는 분부대로 옷을 벗고 알몸이 되었다. 처음 본 상대에게 맨몸을 보이는 것은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일 테지만 램파드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부끄러움은커녕 자신의 무기인 매력을 뽐내며 쭉 뻗은 다리를 서로 얽었다. 흠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가 움직이는 걸 바라본 베타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네. 이름이 뭐야?”
램파드 또한 상대의 이름을 모른다. 하반신에 달린 물건만 제대로면 됐지, 한 번 배를 부딪치고 헤어질 상대의 이름 같은 건 알 바 없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그때 가서 알려 주지.”
“그렇게 빼지 말고 지금 가르쳐 줘. 널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단 말이야.”
“마음대로 불러.”
“야! 뭐 대단한 이름을 가졌다고 숨기냐.”
엎드린 채 양다리를 까딱거리던 램파드가 피식 웃었다. 알몸인 램파드의 이름을 듣는 순간 오금을 찔끔찔끔 지릴 게 분명했다.
“이름 같은 건 됐고, 빨리 옷이나 벗지그래.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지?”
순종하지 않는 오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베타는 뚱한 표정으로 옷을 벗기 시작한다. 검은 셔츠가 사라지자 램파드의 예상대로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램파드의 시선이 단단하게 짜인 가슴에 향해 있는 와중 상대는 빠르게 바지까지 벗었다. 근육 진 몸과 어울리는 굵고 짙은 색상의 페니스였다. 오늘 밤은 상대를 제대로 뽑았다.
“베타치고는 괜찮은 물건을 가졌군.”
“너 또한 오메가치고 말투가 상당히 시건방져. 이렇게 거만한 오메가는 처음 보는걸?”
“그런 말 많이 들어.”
나체가 된 상대가 가까이 다가와 램파드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모든 감각이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 발전한 오메가답게 램파드의 피부는 티 하나 없이 부드러워 만지기 좋았다.
“…정말로 오메가였네.”
“안쪽을 만지지 않았는데도 알아보나?”
“몇 번 봤거든.”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빠르게 만끽하고자 다물린 구멍에 성기를 들이밀기부터 했다. 애무도 없이 바로 박아 넣을 생각인 듯하다.
“잠깐 기다려.”
램파드는 한 손을 들어 올려 달라붙은 남자를 밀어냈다.
“먼저 유혹하더니 인제 와서 뺄 생각이야? 늦었어.”
“아니, 박는 건 좋지만 지킬 순서가 있지 않나?”
베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연인 사이가 아니니 사랑의 말을 속삭이며 달콤하게 입맞춤할 필요는 없을 텐데. 괜히 오메가의 마음이 바뀌어 난동을 피우면 저만 손해다. 그는 램파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끌어안고, 입술을 내밀었다.
“이봐, 뭘 착각하는 거야.”
램파드는 상대의 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옷가지를 붙잡았다. 그는 조끼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철제 상자를 꺼내 들었고, 그 안에서 얇은 종이를 꺼냈다. 길쭉한 네모로 잘린 감별지였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베타라고 말했는데, 그새 잊어 먹었냐.”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믿는 주의라. 싫다면 방 밖으로 나가겠어.”
램파드는 감별지를 빨리 가져가라며 재촉하듯 팔랑거렸다. 공짜로 오메가랑 붙어먹을 기회는 좀처럼 오는 것이 아니다. 아쉬운 건 좆을 세운 베타 쪽이었다. 그는 램파드의 손에 붙들린 종이를 거칠게 빼앗아 팔랑거리는 얇은 종이를 입 안에 머금었다. 흰 종이는 침이 묻자 노란색으로 변했다.
“좋아. 이리 와.”
베타의 색을 확인한 램파드는 침대에 드러누워 벗은 몸을 데굴 굴렸다. 치켜 올라간 자그마한 엉덩이가 부드럽게 맞물려 있었고, 베타는 안쪽의 감촉을 기대했다. 그가 램파드의 엉덩이를 잡아 벌렸고, 닫힌 주름 위에 남근을 올렸다. 상대는 아무런 전희도 없이 하반신을 움직여 발기한 좆을 밀어 넣었다. 흥분시키지 않아도 이미 안쪽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남근을 부드럽게 감쌌다.
베타는 오메가가 가진 명기의 온기를 느끼며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퍼억, 퍽. 질척거리는 애액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반복 운동으로 여러 번 자극당한 안쪽은 쿠퍼액과 애액이 뒤섞여 끈적거린다. 흘러내리는 애액이 성교를 도왔기에 애무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오메가라지만 이렇게 축축하다니. 뭐야, 이미 붙어먹고 온 건가?”
“흐읏… 아, 무슨 상관이냐. 안에 있는 정액은 다 치웠으니까 박는 데나 집중해.”
“오만한 태도 때문에 고귀한 정부인 줄 알았는데, 더러운 남창이었군.”
“하… 으… 읏! 으, 으읏.”
지금 램파드의 항문에 좆을 박고 허리를 쳐올리는 이 남자는 오늘 두 번째로 만난 남자였다. 해가 한창 머리 위에 떠 있을 때 만난 놈은 정력이 좋아 자정이 지난 지금까지 붙어먹을 수 있었지만 욕구를 채우기엔 조금 부족했다.
램파드의 머리를 짓눌러 침대에 처박은 상대가 신이 난 듯 엉덩이를 세차게 흔들었다.
“큿, 역시 오메가의 구멍이 최고라더니…….”
“흐, 아… 아, 아!”
베타는 네발로 몸을 지탱하는 램파드의 뒤에 서서 열심히 허리를 쳐올렸다. 싸구려 침대는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끽끽,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삐걱거리는 침대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정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화음에 베타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뒷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에서 달콤한 냄새가 나. 기분 좋나 봐?”
“흐읏… 아, 아… 좋아. 하읏!”
쾌락에 젖어 가는 오메가, 램파드의 몸에서 페로몬이 풍겼다. 비싼 향료를 닮은 귀한 향기는 둔감한 베타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특이했다.
“좋은 냄새가 나는데… 너 설마 히트 사이클이 온 거야? 억제제는?”
“하읏, 으, 신경… 끄고 박기나 해…….”
“돈이 없어서 억제제를 사지 못한 거라면 사실대로 말해 봐. 한 번 만날 때마다 약을 구해 줄게.”
억제제는 귀족 가문의 오메가를 위한 약이다. 가격이 비싸 평범한 시민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베타는 약을 빌미 삼아 램파드를 마음대로 휘두를 생각이었다.
“필요 없어. 얼른 멈춘 허리나 움직여……. 아!”
램파드의 뒤에 자리 잡은 그가 허리를 크게 쳐올렸다. 잔뜩 예민해진 안쪽 살이 찔리자 신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박히면서도 여전히 건방지네. 안에 싸도 되지?”
“으응, 읏… 응, 마음대로…….”
램파드는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 다섯 살 때부터 억제제를 먹었다. 어릴 때부터 약을 먹어 왔기 때문인가 부작용이 생겨 다른 오메가처럼 억제제만으로 히트 사이클이 막히지 않는다. 우연히 베타와의 관계로 히트 사이클이 억제되는 특이 체질이란 걸 알고 나서부터는 미리미리 관계를 맺어 방지했다. 램파드가 원하는 건 억제 효과뿐, 성가신 임신을 피하고자 베타만 골라 관계를 맺었다. 감별지를 이용해 제대로 확인까지 했으니 몸 안에 사정해도 임신 걱정은 없다.
골반을 잡은 베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들락날락하던 움직임이 멈추고, 좀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온 남근이 정액을 흘려보냈다.
“하으… 으, 읏.”
베타의 나이는 어림잡아 20대 초반. 혈기왕성한 나이만큼 한 번 뿜어내는 정액의 양이 많았다. 파르르, 길게 몸을 떨어 댄 베타가 성기를 뽑아냈다. 램파드의 내부에서 나온 좆은 끈적한 액이 잔뜩 묻었다.
“후우……. 똑바로 누워서 다리를 벌려 봐.”
램파드는 상대의 요구에 따라 익숙하게 다리를 벌렸다. 성기를 품고 있던 구멍에서 흰 액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방금 막 사정했지만, 베타의 성기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램파드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욕구를 충족하기엔 한참 부족했는데, 금방 부활해서 다행이었다. 번거롭게 다음 상대를 찾아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램파드의 몸속으로 베타의 페니스가 비집고 들어왔고, 오입질이 반복됐다. 젊은 만큼 체력도 좋은 상대였다. 억제제를 먹으면 한동안은 온전히 베타로 살 것이다.
잠이 든 램파드가 일어났을 때 상대는 사라진 뒤였다. 동이 트기 시작할 때까지 엉겨든 덕분에 하반신은 정액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씻은 기억이 없는데 램파드의 몸은 깨끗하게 닦여 있고, 멀끔한 새 옷을 입었다. 구멍 취급당하는 오메가를 배려해 줬을 린 없을 것이고.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햇살에 맞춰 커틀러의 은발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햇살보다 눈부시게 느껴져 램파드는 눈가를 찌푸렸다.
“언제 온 거냐.”
“폐하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간 남자가 나오는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늦은 오후에 회의가 있으니까 서둘러 출발하셔야 합니다.”
램파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커틀러를 바라봤다. 처음 본 상대와 배를 부딪칠 만큼 뻔뻔한 성격의 소유자지만 날마다 얼굴을 보이는 상대에게 정사 장면을 보이는 건 꺼려졌다.
“매번 떼어 내도 기어이 달라붙는구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폐하께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셨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나.”
“어떤 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소신은 폐하를 보호하기 위해 따라왔습니다. 여기는 왕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입니다. 호위도 없이 변방에 혼자 가시니까 신하 된 도리로서 따라가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이 대륙에서 검을 든 짐을 이길 자가 없단 것은 네가 가장 잘 알지 않느냐. 말은 똑바로 해라. 베타가 아닌 알파랑 붙어먹을까 봐 감시하기 위해 따라오는 거면서.”
이러한 램파드의 도발은 커틀러에게 익숙한 일인지 그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태연했다.
“솔직히 저도 이런 시골까지 따라오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앞가림을 잘하신다면 바쁜 제가 시간을 낭비해야 할 필요 없을 텐데요.”
커틀러는 램파드의 짐 안에 섞여 있는 옷가지를 꺼내 보란 듯이 흔들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이런 괴상망측한 옷은 대체 어디서 구해 오는 것인지. 램파드가 베타를 유혹할 동안 구매한 그의 몸에 알맞은 무난한 정장을 건넸다.
“이 몸에 건방진 소리를 하는 건 네놈밖에 없을 거다.”
커틀러는 익숙하게 깨끗한 물과 약을 건넸다.
“이왕 잔소리를 꺼낸 김에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출발하기 전 약부터 드십시오.”
보통의 오메가는 한 알 정도면 충분할 터인데, 램파드는 한 번에 세 알씩 복용했다. 이마저도 부족해 미리 베타들과 몸을 섞어 성적 욕구를 충족해야 했다. 성가시긴 해도 예상치 못한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는 것보단 낫다.
램파드는 커틀러가 건넨 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곁에 선 그는 황제의 목울대가 꿀렁대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무엇을 해도 태연하게 지켜보기만 하니 원.
“어젯밤 상대는 허리 놀림이 끝내주더군.”
“그러십니까.”
“이렇게 제대로 느낀 건 오랜만이라 한 번 더 만나고 싶을 정도야.”
램파드가 입을 로브를 챙긴 커틀러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도발해도 그는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언제까지 저런 근본도 모르는 자들을 상대할 생각입니까.”
“왜, 짐이랑 자고 싶은가? 하지만 넌 안 돼.”
“그럴 생각은 없지만 여쭙고 싶군요. 왜입니까.”
“잘 알고 있지 않나? 넌 제국에 셋밖에 없는 귀중한 우성 알파지 않냐.”
제국을 수호하는 화이트 테일 기사단의 단장 커틀러 콘테.
태어났을 때부터 차기 공작으로 정해진 커틀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무 대신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 가문의 기대와 달리 그는 아카데미에 들어가 기사단을 꾸렸고, 업적을 세워 당당히 황제의 오른팔이 되었다. 커틀러가 제국에서 세 명밖에 없는 우성 알파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모른다면 왕국의 첩자일 거고.
“폐하께서 억제제를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는 건 페로몬이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베타보단 알파와 관계를 맺으시는 게 페로몬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랬다간 너에게 각인할지도 모르지. 왜, 공작으론 만족하지 못해서 차기 황제라도 되고 싶나?”
“저는 권력에 관심 없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받은 작위보단 기사단장의 자리를 만족스러워한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콘테 공.”
“경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커틀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램파드가 던진 빈 약봉지를 주워 갈무리했다. 처음 베타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고백했을 땐 얼굴을 한껏 구기고는 화낼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제는 그 어떤 도발을 해도 빙긋 웃었다. 재미없긴.
“아이가 가지고 싶어지면 그때 가서 너에게 부탁할게.”
“램파드 폐하께선 아이를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짐의 빼어난 외모를 닮은 아이면 좋아할지도 몰라. 솔직히 이 정도 외모를 가지면 누가 미워하겠어?”
“폐하를 닮은 아이라면 제 쪽에서 거절하고 싶군요. 어떤 골머리를 썩일지 모를 테니까요.”
한마디 지지 않고 꼬박꼬박 대드는 걸 보니 아까 도발이 조금은 먹혀들어 간 모양이다.
***
개체가 희소한 알파로 태어나면 적어도 준남작 작위는 따 놓은 격이다. 제국은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알파에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귀족이 될 수 있도록 도왔다. 반면 베타의 숫자와 비슷한 오메가는 강인한 알파의 몸과 정신을 흔드는 영악한 생물로 평가됐다. 싸구려 몸을 이용해 알파를 유혹하고 붙어사는 기생충 같은 존재. 베타의 시각에서 오메가는 하찮을 뿐이지만, 알파에게 각인당해 권력을 나눠 받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알파는 매우 드물고 그에 반해 오메가는 흔해 빠졌다. 사랑하는 자와 쌍방향으로 각인하지 못한 오메가의 삶은 정해져 있었다.
평범한 시민은 억제제 값을 감당치 못한다. 가족에게조차 버려진 대다수의 오메가는 베타에게 핍박당하며 원치 않은 각인을 당해 창부나 노예로서 인생을 끝마친다. 알파보다 많이 태어나도 서른이 넘어서부터는 오메가가 드물어진다. 어린 나이에 많은 숫자의 상대를 받아 내고, 배려 없는 행동에 빠르게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귀족 가문의 오메가로 태어나면 살 만했다. 작위를 물려받진 못하지만, 권력이 있는 부모는 오메가 자식을 감싸고 보호한다. 히트 사이클 억제제를 만들어 낸 것도 한 세기 전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오메가를 위해서였다. 귀족의 재력과 힘은 오메가 자식을 성인까지 무사히 성장시키고, 괜찮은 알파 짝을 찾아 줄 능력을 갖췄다.
그렇지만 제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황제는 달랐다.
22년 전, 램파드 클로비스 다섯 살.
어린 램파드는 황궁에서 일하는 모든 이의 관심이 다른 아이에게 있단 걸 알았다. 차기 황제는 첫째 몫이기에 둘째인 램파드는 방치 아닌 방관을 당했다. 황자이기 때문에 모자람은 크게 없었지만, 시종의 배려가 부족했다.
“2황자 전하는 더 드시면 안 돼요. 남은 간식은 전부 루트비안 황태자 전하의 몫이잖아요. 이만 공부방으로 들어가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저희가 일을 못 해요.”
램파드가 탐내는 간식을 줬다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번거로운 일을 굳이 감수하고 싶지 않은 시종이 혀를 찼다. 황족에게 건방진 짓거리를 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테지만 보는 눈이 없는 곳이라 대충 대꾸하는 거였다.
“그렇지만… 더 먹고 싶다구…….”
“안 돼요.”
“흑, 흐흑… 흣…….”
단호한 시종의 목소리에 램파드는 지레 겁을 먹고 눈물을 흘렸다. 커다란 눈망울에선 방울진 눈물이 넘쳐 났다.
“우셔도 안 돼요. 램파드 황자 전하가 다 드셨잖아요.”
황자에게 간식은 하루에 두 번. 정해진 시간에 정량만 제공한다. 시종이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귀찮은 어린애라 생각하며 설렁설렁 넘길 생각이었다.
“무슨 일인데 소란스러운 것이냐.”
“루트비안 황태자 전하.”
램파드와 똑같은 밝은색 플래티넘 블론드를 짧게 자른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직모인 램파드와 달리 곱슬한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눈동자 또한 푸른색이 섞여 맑은 하늘 같았다.
울고 있는 동생을 발견한 루트비안은 주저 없이 램파드에게 달려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램파드, 왜 우는 거니?”
“형아…….”
램파드는 맑은 콧물까지 쿨쩍, 쿨쩍 흘리며 달려갔고 루트비안을 꼬옥 끌어안았다. 자신의 옷에 눈물과 콧물이 묻어나지만 황태자는 개의치 않고 동생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흐어어어엉!”
아이는 달래 주면 더욱 서럽게 운다. 이제 램파드는 목청을 놓으며 꺼억꺼억, 숨넘어가는 소릴 내며 울었다. 루트비안은 램파드가 진정할 수 있도록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일정한 박자로 토닥였다.
가까이 다가온 시종이 난처한 표정으로 두 황족을 바라봤다. 루트비안은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램파드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한 손으로 형의 손을 꼭 잡은 램파드는 아직 훌쩍였지만 어느 정도 울음을 그쳤다.
“무슨 일인 거냐.”
“그게 저… 램파드 황자 전하께서 루트비안 황태자 전하의 간식을 탐내셔서… 오늘 준비한 간식은 이것뿐이라 더 드리지 못한다고 말씀해 드리고 있었습니다.”
루트비안은 시종이 들고 있는 접시 위에 올라간 블랑망제를 바라봤다. 탄력 있는 부드러운 흰색의 디저트는 램파드가 탐낼 설탕에 절인 딸기가 듬뿍 올라갔다.
“곧장 내 방으로 가져다 둬라. 금방 올라가지.”
“알겠습니다.”
시종은 두 황족에게 인사를 올린 후 곧바로 디저트를 운반했다. 형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램파드는 또 다시 울 기세였다. 루트비안은 무릎을 꿇고 자신보다 훨씬 작은 동생과 눈높이를 맞췄다.
“램파드, 딸기가 먹고 싶니?”
그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램파드의 눈물과 콧물을 꼼꼼하게 닦아 줬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에 기분이 풀린 램파드가 형을 향해 웃었다.
“응…….”
“형이랑 같이 방으로 올라가자. 울음을 그쳤으니까 상으로 줄게.”
루트비안은 조그마한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살며시 토닥였고, 손을 내밀었다. 신이 난 램파드는 방실방실 웃으며 형과 함께 방으로 이동했다.
“황태자 전하, 간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잠시 쉬시지요.”
“조용히 먹고 싶으니 모두 다 물러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인사를 올린 시종이 바깥으로 나가고, 방 안에는 두 황족만이 남았다. 루트비안은 소파를 장식한 쿠션을 하나 빼 의자 위에 겹쳐 올렸다. 램파드는 쿠션 덕분에 테이블에 알맞은 눈높이를 얻었다.
“램파드, 딸기가 좋아?”
“응, 굉장히 맛있어!”
딸기는 루트비안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방 안에 절임 딸기를 한 병 몰래 숨겨 놨었다. 아끼던 절임을 꺼내 램파드에게 맛보여 준 계기로 형제는 함께 딸기 추종자가 되어 버렸다.
“딸기도 좋지만, 형은 램파드가 더 좋아. 넌?”
“어…….”
생각 없이 솔직하게 모든 걸 내뱉는 어린아이한테도 고민되는 말이었다. 램파드는 조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한참 고민했다.
“형아!”
즉시 답하지 않고 한참 고민을 한 뒤 내린 결론이었지만 그래도 루트비안은 만족스러웠다. 정답을 말했다고 생각한 램파드는 기세등등하게 테이블 위를 장식한 포크를 들어 올렸다. 루트비안은 양손에 포크를 하나씩 들고 있는 램파드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램파드는 루트비안의 포크까지 뺏어 들고 있었지만 동생이 하는 행동은 모두 귀여웠다.
“먹어도 돼?”
“응, 오늘 간식은 램파드 거야.”
형이 허락하자 램파드는 활짝 웃으며 포크를 움직였고, 딸기가 올려진 부분을 크게 퍼 입 안에 넣었다.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입에 넣자마자 양 볼을 붉게 물들이며 기뻐했다. 루트비안 또한 먹고 싶었지만, 동생의 입에 들어가는 게 마냥 좋았다.
새콤달콤한 딸기를 우물우물 씹은 램파드는 곁에 놓인 홍차를 들어 올렸다.
“우… 써.”
루트비안은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설탕에 절인 딸기를 꺼냈다. 그리고 유리병 안에 들어찬 딸기 절임을 한 숟가락 크게 덜어 내 홍차에 섞었다. 붉은 딸기와 만난 쌉쌀한 차는 향긋하고 달아졌다. 램파드는 마시기 좋게 달아진 차를 호로록, 단숨에 마셨다. 찻잔 아래에 그려진 장미꽃 문양이 드러나자 램파드는 뒤늦게 형의 눈치를 봤다.
“형아도 먹어.”
“난 배부르니까 괜찮아.”
단순한 어린애는 배부르다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걱정 근심 없이 먹기 시작했다.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이 귀찮을 법도 하지만 루트비안은 늘 함께 놀아 줬다. 자기 전에는 같은 침대에 누워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하고, 천둥이 치는 날에는 고어로 된 자장가를 불러 주기도 했다. 램파드는 형의 손을 꼭 붙잡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램파드에게 형은 아버지이자, 스승이었고, 친구였다. 그런 형이 계절이 바뀌기 전에 오메가로 발현했다. 아침 해가 뜸과 동시에 침대에서 함께 자던 루트비안을 황궁의 로열 가드 여럿이 둘러쌌다. 루트비안은 본능적으로 어린 동생부터 감쌌지만, 우악한 로열 가드의 손이 달라붙은 어린아이를 떼어 냈다.
“놓아라!”
“형아!”
제복 차림의 로열 가드가 루트비안에게 달려가는 램파드를 끌어안았다. 양발이 공중에 붕 뜬 램파드는 발버둥 치며 루트비안에게 달려가기 위해 애썼지만, 형은 멀어지기만 했다. 로열 가드는 잠옷 차림인 루트비안을 옷도 갈아입히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짐승처럼 끌고 나갔다. 그것이 램파드가 기억하는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더러운 오메가라니! 어쩐지 내 자식답지 않게 모든 면에서 뒤처졌었다! 그 녀석은 내 자식이 아니다. 하찮은 오메가를 당장 창관으로 보내 버려라. 그 누구든 오메가와 연락을 시도한다면 같은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뒤늦게 호출되어 알현실에 선 램파드는 양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2황자 램파드에게 명한다. 루트비안에 대한 기억은 모조리 잊어버려라. 그러지 못하겠다면 너 또한 내 아들로 생각하지 않겠다!”
불같이 호통치는 황제 앞에 선 램파드는 잔뜩 겁을 먹었다.
잊으라니. 아직도 램파드의 망막에는 화사하게 웃으며 저에게 모든 걸 양보한 형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지만 램파드의 본능은 형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자신 또한 불꽃에 휩쓸릴 거란 걸 경고했다. 살기 위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 남아 있던 루트비안의 초상화가 모두 불태워졌다. 그가 남긴 글, 사용한 물건이 모두 부서졌다. 두 명이 함께 사용한 방은 오롯이 램파드만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넓은 침대에 홀로 누운 램파드는 잠자리에 들기 전 다정한 형을 떠올렸다. 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어두운 침대 시트를 손으로 훑어 봤지만 따뜻한 손이 잡히지 않았다.
“형아…….”
형을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이제 매일 밤 램파드는 혼자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다섯 살 어린아이의 몸에 크나큰 상실감이 찾아왔고,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램파드, 자고 있니?”
잠자리에 들었던 램파드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났다. 눈두덩이가 붉게 부어오른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왔다.
“어마마마…….”
“늦은 밤에 미안하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구나.”
그녀는 램파드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램파드, 잘 들어라.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한다. 검술도, 학문도 절대로 뒤처지면 안 된다. 모든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어머니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램파드의 답이 마음에 든 황후는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에 온종일 생각해도 풀어지지 않는 궁금증을 여쭸다.
“어마마마께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형을 만날 수 있나요?”
“램파드, 루트비안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절대 꺼내면 안 된다.”
“그렇지만…….”
램파드의 표정에 미련이 잔뜩 남았다.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지지 않자 고개를 푹 숙이고 수긍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녀는 품속에 숨겨 둔 약을 꺼내 들었다. 동그란 알약으로 된 억제제를 으깨 가루로 만든 거였다.
“이걸 먹어라. 그리고 명심하거라. 네가 이걸 먹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램파드는 하얀 가루를 먹었고, 그녀는 곧바로 맑은 물을 마시게 했다. 입 안에 들어온 약은 매우 썼으며, 눈가에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써요…….”
“참고 전부 다 삼켜야 하느니라.”
다섯 살인 램파드는 어머니가 건네준 쓴 약을 먹기 시작했다. 히트 사이클 억제제를 어린 나이에 미리 복용하면 오메가의 페로몬이 약해져 베타가 될지도 모른다는 속설이 존재했다. 대신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하면 부작용이 컸다.
램파드는 아직 발현 전이라 무엇이 될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알파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황후는 미리 보험을 들었다. 첫째 아들이 창부로서 비참하게 살게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해 마지막 기억은 형의 죽음이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인지 못 하는 램파드는 형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떴다. 지난달 사냥개 텐이 죽었는데, 흙 속에 파묻히기 전 만났기 때문이었다.
소식을 전한 황후는 램파드의 손을 잡고 인적이 드문 숲 입구로 향했고 고운 손으로 직접 흙더미를 쌓아 올렸다. 사냥개 텐과 달리 그 아래는 텅 비었고, 어머니의 굳게 다문 입매 때문에 램파드는 형을 찾지 못했다. 의미 없는 흙더미를 보며, 상실 다음으로 죽음이 무엇인지 배웠다.
다시는 형에 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그의 모습조차 잊기 위해 마음 한편에 묻었다.
몇 년이 지나고, 램파드는 자신이 먹어 온 약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형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았기에 약을 털어 넣으며 제발 오메가는 되지 말아 달라 신에게 빌었다. 그러나 자비 없는 신은 램파드를 오메가로 발현시켰고, 황제가 되자마자 한 일 중 하나는 화풀이로 국교를 파면시키는 거였다.
전쟁에 참여했을 때도 ‘내가 죽으면 단단한 검을 함께 묻어 다오’라는 유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 가서 증오스러운 신 나부랭이의 목을 치기 위함이었다. 기사들은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죽어서까지 검을 들고 제국을 수호한다는 각오를 보이셨다며 감복했다. 사기가 올라갔으니 진실은 알리지 않기로 했고, 유언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무사히 열네 살이 된 램파드는 제국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제국의 인재가 모이는 아카데미는 오메가 출입 금지 구역이었고, 베타와 알파가 득실댔다.
어린 알파는 자신의 페로몬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다. 오메가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페로몬이 흩어져 있었지만, 베타인 램파드는 아무렇지 않았다. 알파와 오메가는 대부분 열두 살에 정해진다. 열넷인 램파드는 몸의 변화를 겪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메가가 아니라고 스스로 확신했다.
하지만 중독된 것처럼 억제제를 끊지 못했다. 베타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혹시 모를 작은 불안함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으니까. 오메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혐오로 바뀌었다. 그 혐오가 극에 치달았을 때 커틀러를 만났다.
“난 같은 학년의 커틀러 콘테라고 해. 반가워.”
2인 1실로 운영되는 아카데미에서 램파드의 클래스 메이트가 될 남자는 콘테 공작 가문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제국의 재산을 관리하는 대단한 가문의 자식은 귀한 우성 알파로 발현했다. 혹시라도 오메가로 발현돼 내쳐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램파드와 달리 앞날이 탄탄하게 정해져 있는 남자였다.
커틀러는 검은색 아카데미 교복을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게 입었으며, 목깃을 고정하는 자주색 끈 리본마저 말끔하게 묶었다. 혈관이 비쳐 보일 정도로 창백한 피부와 진주 같은 고운 은발. 옷 빼고는 새하얗기에 불붙이기 전의 양초 같은 커틀러가 활짝 웃었고,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넌?”
올곧고 또렷한 제비꽃을 닮은 보라색의 눈이 입술과 마찬가지로 호선을 그렸다. 커틀러는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는데, 악수하자는 의미인 듯했다. 방금 막 방 안에 들어온 램파드는 양손 가득히 상자를 안고 있어 응해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입은 자유로웠다.
“램파드 클로비스.”
커틀러는 램파드라는 이름을 듣고도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 이름은 알고 있을 터인데, 그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램파드구나. 앞으로 잘 부탁해.”
커틀러는 황제와 콘테 공작이 정계의 적이란 것을 모르는 듯 구김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냥 사람 좋은 놈인 거 같았다. 나쁜 말로는 머릿속이 꽃밭이란 거고.
방 안에 책상은 두 개가 놓여 있다. 하나는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으니, 텅 빈 쪽이 램파드의 몫이었다. 들고 있는 상자를 책상에 올린 램파드는 정리 정돈을 하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이런 사소한 일은 모두 시종이 해 줬는데, 아카데미에서 지낼 동안은 스스로 해내야 했다.
램파드는 닫힌 상자를 열고 빼곡히 들어찬 서적을 꺼냈다. 아카데미는 기사 과정을 밟기 위해 입학한 거라 검술 교본 등이 들어 있었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았다. 상자 안에 있는 책을 모조리 꺼냈는데, 여전히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커틀러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뭘 봐. 할 말이 남아 있는 거냐.”
“아, 아니… 예뻐서.”
퍽! 주먹을 꽉 쥔 램파드가 커틀러의 얼굴을 후려쳤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은 커틀러는 뒤로 넘어지며 책상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얼마나 힘껏 후려쳤으면 커틀러의 볼은 붉게 부어올랐고, 코피까지 터졌다. 커틀러의 눈동자 또한 동그랗게 변했다.
“뭐야! 쓰레기 같은 오메가로 취급하는 거냐!”
“읏, 그런 뜻이 아니야. 쓰레기 같다니…….”
“나한테 오메가에게나 붙이는 수식어를 쓰지 마!”
램파드는 커틀러가 자신을 오메가로 취급한 것만 같아 기분 나빴다.
오메가가 먹는 억제제를 먹고 있지만, 오메가의 특징인 알파를 유혹하는 페로몬,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히트 사이클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램파드는 자신을 베타라 굳건히 믿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혹시나 하는 의심이 존재했고 그 점이 램파드를 항상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약을 끊어도 좋다고 말씀하셨지만, 습관처럼 계속 먹었다. 만에 하나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는 오메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데 알파가 저런 말을 하다니.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사과할게.”
“죽고 싶지 않다면 다음부터 말조심해!”
남들보다 빠른 나이에 우성 알파로 발현하고, 페로몬을 완벽하게 갈무리까지 할 줄 안다는 놈이 오메가 취급을 하니 더더욱 거슬렸다. 개 같은 새끼.
첫날에 주먹질,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때렸으니까 커틀러와 램파드의 사이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이다. 화해한다 쳐도 기사 수업이 시작되면 헤어질 상대였다.
콘테 가문은 대대로 재무 대신을 배출하는 공작 가문으로서, 커틀러 또한 경영학이나 배울 예정이었다. 숫자 놀이를 싫어하는 램파드와는 선택하는 과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잠잘 때 말고는 만날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는 수업마다 빛나는 은발이 눈에 띈다. 그가 가진 보라색 눈동자만큼이나 은발은 제국에서 가진 이가 몇 없을 정도로 드물기에 절대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한술 더 떠 그는 뭐가 그렇게 반가운지 보일 때마다 한 손을 크게 붕붕 흔들며 램파드를 반겼다. 같은 방을 공유하고 있으니, 질릴 정도로 얼굴을 보는데도 말이다.
“너도 검술 수련을 받는 거야?”
“하…….”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놈이랑 대련장에서 마주쳤다. 깊은 한숨이 램파드의 입 밖으로 절로 튀어나왔다. 전략, 전술학 정도야 교양으로 배울 수 있다 치는데,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검술 수련에서도 만나다니. 저놈 정체가 뭐지?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커틀러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램파드가 날카롭게 쏘아봤지만, 어깨를 으쓱거린 커틀러는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기사가 되고 싶어서.”
“콘테 가의 장자인 네가? 재무 대신인 콘테 공이 들으면 뒤로 넘어갈 소리군. 얄팍한 펜이나 들고 숫자 놀음하는 놈이 검을 휘두를 수 있겠냐.”
“맞아. 숫자 놀음만 하는 우리 아버지는 연습용 검도 무겁다며 들지 못하셔.”
제 아버지를 욕했는데 그는 헤실 웃을 뿐이었다. 키가 비슷하지만, 시야를 높이고 싶은 램파드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주제 파악을 잘하고 있군. 그렇다면 다치기 전에 꺼져.”
“나도 아카데미 학생이야. 어떤 수업을 들을지 선택할 권리는 나한테 있어.”
커틀러는 램파드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공손히 말했다. 그의 말대로 어떤 수업을 선택하는지는 본인이 선택할 일이었다. 이대로 물러설 거면 애초에 시비도 먼저 걸지 않았다.
“네놈이 있었다면 난 이 수업을 선택하지 않았다. 뒤늦게 과목을 선택한 네 잘못이니, 대련장에서 사라져.”
억지를 부렸지만 커틀러는 여전히 담담했다. 무언가 말을 생각하는 듯 아래를 바라보던 커틀러가 입을 열었다.
“램파드, 넌 왜 그렇게 날 미워해?”
왜라니. 한 대 때린 껄끄러운 관계란 건 둘째 치더라도 저놈 아비인 콘테 공작과 클로비스 황가는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다. 그 관계는 램파드가 황위를 잇고 나서도 이어질 거고.
이런 문제도 있지만, 램파드는 커틀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색 머리카락 한 올만 바라봐도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눈앞에 없어도 커틀러를 떠올리면 읽고 있던 책을 집어 던지고 싶어진다.
램파드는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체격도, 키도 비슷한 동배의 사내는 램파드가 가지지 못한 걸 지녔다. 옹졸하고 유치한 질투란 걸 알지만 그를 보면 마음이 콱 조였다. 아카데미에 알파는 커틀러 말고도 여러 명 있지만, 우성은 하나밖에 없기에 시기하는 마음이 더욱 컸다.
뜨겁다 못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램파드를 마주하고 있는 커틀러가 예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춤에 연습용 검을 꽂았다.
“대련 상대가 되어 줘.”
“거절한다면.”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건 어때? 네가 날 이기면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고, 다른 방으로 이동할게.”
“귀찮게 한 건 알고 있는 모양이군.”
“친해지고 싶어 한 행동인데, 표정이 늘 좋지 않았으니까.”
혹하는 제안이었다. 눈에 띌 정도로 방방 대며 반기는 녀석이 없어진다면 램파드는 정말 기쁠 거였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를 향한 시기 어린 질투도 무뎌지겠지.
한 달 먼저 검술 수련을 받은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는 뒤늦게 수강 신청을 하고, 어슬렁거리며 왔다. 램파드는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정확히는 베타의 몸으로 알파를 뛰어넘기 위해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검술 수련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수업이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야 나타난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늦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사정이 있었으니까.”
“알파의 사정이라면 뻔하지.”
“알파의 사정이라니?”
“다리나 벌리는 오메가를 만나고 온 거잖아.”
황궁에서 본 알파의 대다수가 오메가와 엮인 추문을 일으켰다. 알파와 오메가는 서로 이끌리기 때문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커틀러는 상당히 빼어난 외모를 가진 자였다. 제국에서 세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성 알파이기까지 하니 가만히 있어도 수많은 짝 후보들이 달라붙을 터.
실제로 커틀러는 매일 밤 기숙사 방을 나섰고, 샤워를 끝마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숙사 근처에는 사창가도 있겠다 오메가와 실컷 나뒹굴고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램파드가 비아냥거리자 커틀러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를 설득하느라 늦었어. 검술 수련을 하다가 다칠까 봐,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으셨어.”
“그런 사소한 일도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거냐. 한심하긴.”
“…아버지는 재무 대신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면 하시니까. 이번 기회에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
“하, 기사가 된다고? 검을 들어 본 적은 있는 거냐.”
“응.”
“쥐어 보기만 한 건 아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얼간이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어.”
램파드는 눈앞에 있는 우성 알파가 진심으로 싫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짜를 일방적으로 때려눕히며 자기만족에 빠질 쓰레긴 아니었다. 커틀러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한번 슥 훑어봤다. 아무도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단 걸 확인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소곤댔다.
“솔직히 다른 애들의 실력은 형편없잖아. 너랑 대련할 만한 실력을 갖춘 건 나뿐일걸?”
그 말대로였다. 미리 황궁에서 검술 수업을 받고 온 램파드는 대련 상대가 성에 차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커틀러 또한 기사가 되기 위해 미리 수업을 진행한 모양이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램파드가 도발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대련이 아닌 시합을 하는 건 어떠냐?”
램파드의 도발 어린 시선에 커틀러가 이빨까지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좋아.”
오만한 미소를 지은 램파드는 한 손을 올려 검술 교관을 불렀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아카데미의 검술 교관은 은퇴한 나이 많은 백작이었다. 현장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페로몬을 갈무리해도 젊은 학생들을 억누르는 강인한 기운이 느껴졌다.
“램파드 클로비스 군이군. 무슨 일인가.”
교관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두 학생이 황태자와 공자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런 작위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반 학생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대했다.
“커틀러와 시합하고 싶습니다.”
램파드는 눈앞에 있는 커틀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앞에 있는 우성 알파에게 지고 싶지 않다. 커틀러가 내건 조건도 끌리지만, 그보다 좀 더 깊은 내면에 있는 감정의 문제였다. 투지에 휩쓸린 램파드를 바라본 교관은 커틀러에게 물었다.
“커틀러 군은 한 달이나 수업을 진행하지 않았지. 불리한 조건인데도 이 시합에 동의하는 건가?”
“네, 제가 먼저 부탁한 일입니다.”
“좋다.”
교관의 주관하에 두 사람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램파드의 예상과 달리 커틀러는 완벽한 자세로 검을 쥐고 섰다. 검을 만져 봤다는 말은 허투가 아닌 거였다. 잔뜩 독이 서린 램파드와 달리 커틀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기했다.
집중력이 떨어진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램파드와 커틀러를 둘러쌌다. 많은 숫자의 관객이 모이기 시작했지만, 램파드는 오직 눈앞에 있는 커틀러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합 시작!”
교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손으로 검을 꽉 쥔 램파드가 공격했다. 날이 무딘 연습용 검은 상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남들보다 좀 더 빨리 내지르기 위해 같은 동작을 몇천, 몇만 번이나 반복하여 익힌 동작이었다. 램파드와 함께 검술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 중에서 이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카앙, 날끼리 부딪쳤다. 커틀러는 기본 자세뿐만 아니라 방어 동작까지 훌륭했다. 이제 막 검술 수련을 시작한 햇병아리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어때? 역시 널 만족하게 할 사람은 나뿐이지?”
“건방진 놈…….”
커틀러는 아무런 악의를 섞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에 한해 끓는점이 낮은 램파드는 모든 걸 한 바퀴 꼬아 들었다. 우성 알파가 까마득한 높은 위치에서 자신을 얕잡아 보는 듯한 그런 느낌. 울컥, 뜨거운 피가 들끓었다. 커틀러의 페이스에 휘말린 램파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유로웠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졌고, 빈틈이 보일 때마다 찔러 넣었다. 빨리 결단을 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만든 신중하지 않은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공격이 무산될 때마다, 램파드의 분노 수치가 점점 올라갔다. 두 번의 베어 넘기기로 램파드의 옆구리에 빈틈이 만들어졌다. 알아차렸을 땐 이미 방어하기엔 글렀다.
커틀러는 놓치지 않고 텅텅 빈 허리를 노려 검을 휘둘렀다. 램파드 또한 뒤늦게 커틀러의 턱을 노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시합은 램파드의 패배다.
램파드의 몸에 검이 닿기 전 쨍그랑,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졌어.”
양손을 들어 올린 커틀러가 순순히 패배를 시인했다. 램파드의 검은 커틀러의 턱을 향해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더라면 허리를 가격당하는 게 먼저였다.
“승자, 램파드 클로비스.”
교관이 판결을 내렸고, 시합은 끝이 났다. 원하던 승리지만 램파드는 기쁘지 않았다. 분명히 커틀러의 공격이 훨씬 더 빨랐다. 일부러 져 준 게 분명했다. 설마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램파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커틀러를 바라봤다.
그는 시합 시작 전과 똑같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눈이 마주치자 커틀러의 눈썹이 아래로 떨어졌다.
“약속한 대로 다음 주 내로 방을 바꿀게. 짧지만 즐거웠어, 램파드.”
커틀러의 눈빛에서 쓸쓸함이 엿보였다. 일부러 져 놓고선 상처받은 표정을 짓다니. 원치 않은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는 램파드의 기분은 더욱 진창에 빠져들었다. 램파드는 커틀러가 바닥에 떨어뜨린 연습용 검으로 시선을 고정한 뒤,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진정하느라 애썼다.
기숙사 방에 틀어박힌 램파드는 굳게 닫힌 문을 하염없이 노려봤다. 머쓱하게 웃으며 등장할 동갑의 사내에게 내뱉을 말을 양피지 열 장 분량으로 준비했다. 그렇지만 새까만 밤이 될 때까지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램파드는 연습용 검 두 자루를 쥐고 직접 그를 찾아 나섰다.
“커틀러는?”
“식당에 혼자 있던데……. 저기 램파드? 검은 뭐하러 들고 있어?”
“신경 꺼.”
“…응.”
램파드는 동급생이 말해 준 식당으로 향했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 즐비해 있는 식당에는 늦은 밤, 야식을 먹으러 나온 학생 몇 명만이 존재했다. 대충 훑어보았지만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은발이 보이지 않아 나갈 참이었다.
“램파드 황자님이랑 콘테 공자의 시합 얘기 들었어?”
“당연히 들었지. 베타의 몸으로 우성 알파를 이기다니 정말 대단해. 찌르는 검이 굉장히 빨라 우성 알파가 쩔쩔맸다고 하던걸.”
“선대 황제께서도 베타셨지만 알파를 지휘할 정도로 위엄 있으셨잖아. 그 피를 확실히 물려받았나 봐.”
이야기를 들은 램파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기척을 숨기며 조용히 식당 밖으로 나왔다. 커틀러가 일부러 져 준 사실은 램파드만이 알고 있는지, 램파드가 뛰어난 실력으로 커틀러를 멋지게 쓰러뜨렸단 과장된 이야기밖에 없었다. 이러한 말들은 램파드의 기분을 쓰레기통에 처박기 충분했다.
식당, 휴게실, 도서관. 몇 군데 돌아다닌 램파드는 마지막으로 훈련장으로 향했다. 저 멀리 어둠이 찾아온 넓은 훈련장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무언갈 휘두르는 듯 양팔이 위아래로 열심히 까딱댔다. 검은 그림자같이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인영만으로도 램파드가 찾던 커틀러가 맞았다. 새벽에 훈련하는 램파드와 달리 그는 늦은 밤 홀로 검술을 단련했다. 이때까지 마주치지 않은 이유였다.
“잡아.”
램파드는 들고 있던 연습용 검 중 한 자루를 바닥에 던졌다. 흘러내린 땀이 턱까지 맺혀 있는 커틀러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해가 되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램파드 또한 이상하게 커틀러를 보기만 해도 절로 불쾌해져 인상을 썼다.
커틀러는 꽤 오랜 시간 검을 휘둘렀는지 평소 깔끔하게 정돈했던 머리카락이 땀에 절어 축축했다. 온몸은 땀으로 샤워를 했고, 팔뚝까지 걷어붙인 셔츠 또한 젖었다. 땀범벅이 된 커틀러를 바라보자 배 속부터 무언가 올라오는 역한 기분이 느껴졌다. 토기가 쏠리며 울렁거리는 이유는 종일 커틀러를 생각하며 진창에서 허우적댔기 때문일 거였다. 램파드는 불쾌한 기분에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어.”
“뭘.”
“낮의 시합, 속여 넘겼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번에는 봐주지 말고 제대로 해.”
“…아, 봐준 거 아냐.”
커틀러는 바닥에 떨어진 검 대신 그 옆에 놓인 마른 수건을 들어 올렸다. 작게 접힌 수건을 펼쳐 들고, 태연하게 땀을 닦아 내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거짓말하지 마! 일부러 검을 놓다니 그런 승리, 난 인정하지 않아!”
“정말이야. 맞으면 아프잖아. 그래서 검을 내려놓은 거야.”
“연약한 오메가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지!”
“베타라도 맞으면 아파.”
턱까지 흘러내린 땀을 닦은 커틀러는 사용한 수건을 대충 걸어 놓고 램파드가 던진 검을 쥐었다.
“한 번 더 시합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넌 왜 그렇게 오메가를 싫어해? 오메가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무능력한 기생충을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아카데미는 사적인 대결이 금지되어 있다. 특히 검을 쥔 승부의 경우 검술 교관의 감독하에 진행해야 했다. 지금 당장 주변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들켰다간 한 소리 듣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싫어하는구나. 좋아, 교관을 불러올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램파드는 답하지 않았다. 램파드의 시선은 커틀러가 땀을 닦아 낸 수건에 고정되었다. 역겨움의 근원은 저거였다.
“램파드.”
귀가 먹은 듯, 램파드는 커틀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커틀러는 한 번 더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램파드.”
“……뭐.”
“집중해. 대련이 아닌, 시합을 하자며?”
해가 져 주변은 어두웠다. 그렇지만 푸르른 달빛 덕분에 상대의 모습은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커틀러는 낮과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램파드를 응시했다. 긴장한 램파드도 검을 양손으로 강하게 쥐고 말했다.
“교관에게는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냐.”
생뚱맞은 질문에 커틀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무엇에게 그리 홀렸는지. 램파드는 조금 전 커틀러가 한 말을 기억조차 못 했다.
“아, 상관없어.”
커틀러는 평소와 달리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밤이 늦었으니 지나가는 사람도 없을 테고, 시합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번거롭게 교관을 부를 필요는 없겠지. 뜻을 이해한 램파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정돈했다. 그리고 또다시 허튼수작 부리지 못하게 미리 쐐기를 박았다.
“이번에는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끝까지 제대로 상대해.”
“원하는 대로, 내 모든 실력을 발휘해 최선을 다해 임할게.”
그렇지만 제대로 하겠단 커틀러의 모양새가 이상했다. 양손으로 단단하게 검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한 손으로만 검을 가볍게 쥐었다. 다른 빈손은 등 뒤로 향한 채 가슴을 쭉 내민 낯선 자세였다.
“뭐하자는 거냐.”
“제국인이 아닌 사람에게 검술을 배워서, 내 본 실력을 발휘하려면 이렇게 시작해.”
굳은 입매와 상대를 주시하는 날카로운 눈동자. 거짓말을 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좋아. 시작하지.”
기억이 맞다면 저 자세는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왕국식 검술의 대기 자세였다. 문헌으로 접한 적이 있지만, 실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콘테 공작가의 검술 선생은 서왕국 사람인 건가. 처음 보는 방식이라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낯선 자세 말고도 램파드의 몸을 옭매는 요소는 또 하나 더 존재했다. 아까부터 벌레가 온몸을 기는 듯,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램파드가 주춤하는 틈에 먼저 공격을 한 건 커틀러였다. 그의 몸이 앞으로 넘어질 듯 휘청거리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뒤늦게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한 램파드가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틀러의 검이 옆구리를 가격했다. 연습용 검에 맞은 부분이 욱신거리며 열기가 훅 피어올랐다. 램파드는 통증에 눈살을 절로 찌푸렸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허리를 내줬다는 충격을 받을 새가 없었다.
“어때, 아프지?”
낮의 시합은 마지막 그 한 수만을 봐준 게 아니었다. 그 하나의 시합을 통째로 접어준 거였다. 승패의 문제가 아니었다. 램파드는 굴욕이란 진창에 빠져 굴려지는 기분을 느꼈다. 처음부터 커틀러가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패배했다면 이렇게까지 치욕스럽진 않을 텐데. 제대로 놀아났단 사실에 머리로 피가 몰려, 두통이 일었다. 가슴 또한 계속 조여 와 이를 악물었다.
램파드는 꽉 막혀 있는 속을 풀고자 몸을 움직였다. 단단하게 검을 쥐었지만 한 번의 공격이 허용되지 않았다. 몇 번은 검끼리 닿았지만, 결정적인 공격은 넣지 못했다.
남들보다 몇 배를 노력해 온 램파드는 어느 정도 검술에 자신이 붙은 상태였다. 그렇지만, 까마득한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이것이 우성 알파의 힘인가. 태어났을 때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거였다니. 선택받지 못한 베타는 어떠한 노력을 해도 우성 알파의 털끝도 스치지 못하는 걸 깨달았다.
“…큿!”
두 번이나 공격당한 허리가 쓰라려, 한 손으로 감싸며 물러났다. 날이 없는 검은 몽둥이와도 같았다. 베이진 않지만 얻어맞은 충격이 천천히 밀려온다. 상처 부위부터 시작해 온몸으로 열기가 퍼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하아… 하…….”
램파드는 그 자리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더운 열기를 내보내도, 몸은 식을 생각 없이 여전히 뜨겁게만 느껴졌다.
램파드의 움직임이 멈추자 상대 또한 멎었다.
“어때? 내 검술은 어머니한테 배웠어.”
멍이 든 듯한 허리를 지그시 누른 램파드가 커틀러를 노려봤다. 콘테 가의 안주인. 커틀러와 같은 은발을 가진 자가 오메가라는 건 제국의 귀족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서왕국 귀족 출신이었다.
“그 말을 왜 지금 꺼내는 거지.”
“오메가가 무능력하단 건 사실이 아니야. 난 한 번도 널 깎아내린 적 없어. 이걸 알아줬으면 해.”
커틀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의 말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러 나온 칭송이었고, 편견으로 똘똘 뭉친 램파드는 모든 걸 아니꼽게 대했던 거란 거. 이해는 되지만 역겨웠다. 그가 가식적이라서? 아니, 역겨운 건 말이 아니라 냄새였다.
“우웁, 욱!”
갑자기 눈을 크게 뜬 램파드가 입을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역겨운 향이 코끝에 감돌다 못해 질식할 것 같았고, 결국 속을 게워 냈다. 이물질을 뱉어 내도 몸속 깊이 무거운 향기가 꾸역꾸역 쌓여 갔다. 속에 있는 모든 걸 토해 내도, 배 속에 있는 더러운 물질이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더 토했더니, 나올 것이 더는 없었다. 그렇지만 위장은 속에 있는 무언갈 자꾸만 뱉어 냈고, 멀건 위액이 역류해 식도까지 쓰라렸다.
“램파드?”
“저… 리 가! 나한테서 당장 떨어져!”
램파드는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이 무엇인지 막연하게 알았다. 몸살이나 감기 같은 가벼운 병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눈앞에 있는 우성 알파를 멀리 떨어트려야 한다는 것뿐.
몸 전체가 고장 난 기분이었다. 감각이 예민해지고 이때까지 살아온 세계가 낯선 세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검은 곰. 회색 늑대. 갈색 털의 이리.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포식자들이 내뿜는 원초적인 짐승의 냄새가 램파드의 몸을 사로잡았다. 인간의 여린 몸이 사나운 짐승에게 유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램파드 너…… 오메가였어?”
커틀러는 눈앞에 있는 황태자에게서 날 수 없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았다. 다른 냄새로 착각한 거 같아 여러 번 숨을 내쉬었는데, 몸속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냄새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확실했다.
한없이 여리고, 자그마한 냄새. 이제 막 흙을 파헤치고 고개만 삐죽 내민 싱그러운 떡잎 같았다. 하나씩 잎이 풀어헤쳐지며 그 속에 품고 있는 짙은 향을 내보이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터.
“기분 나쁠지도 몰라. 나중에 뺨이라도 내줄 테니 지금은 참아.”
“우웁… 뭐… 뭘… 하려고.”
헛구역질하며 헐떡이던 램파드는 숨을 멈췄다. 온몸의 구멍이 지금까지 맡아 온 향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차올랐다. 사납고 맹렬한 기운은 램파드의 몸속을 헤집었다.
“흐윽… 윽… 아, 아악!”
강렬한 기운에 램파드는 몸을 덜덜 떨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떠는 램파드의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커틀러가 지탱해 줬다. 그는 램파드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 따뜻한 온기를 나눠 주며 강하게 끌어안았다.
“조금만 참아.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니까.”
괜찮긴커녕 커틀러의 페로몬이 램파드의 살갗을 뜯어먹는 기분이 들었다. 램파드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손톱을 세워 등을 벅벅 긁었지만, 커틀러는 요지부동했다.
몸속 전체가 그의 기운으로 가득 찼을 때. 커틀러의 품속에 안겨 있던 램파드의 떨림이 멈췄다. 주변에 있는 여러 마리 짐승들의 향이 사라지고, 단 하나의 강인한 존재만이 남았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램파드는 분해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고?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온몸을 감싸는 그 순간, 완벽한 평온을 느꼈다. 이대로 파묻히고 싶은 생각을 한 나약한 자신을 책망했다.
“약은 가지고 있어?”
“무슨… 약.”
이미 오메가의 페로몬을 내뿜고 있는 마당에 속일 순 없지만, 순순히 인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커틀러는 오메가가 내뿜는 달콤한 향에 현혹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사정으로 오메가인 네가 아카데미에 있는지는 지금 묻지 않을게. 어머니가 우성 오메가라서 특유의 페로몬 향에는 익숙해. 네 앞에서 이성을 잃든가 고발하진 않을 테니까 얼른.”
램파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기 전 1초라도 빨리 억제제를 먹어야 하는데, 답답한 건 커틀러뿐인 듯했다. 오메가를 순종시키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램파드는 조금 전, 자신의 몸을 감싼 페로몬과 같은 향을 느꼈다. 이번에는 부드럽지 않고, 사납고 맹렬한 기운이었다. 날카로운 기류가 목을 조이는 듯한 기분. 흠칫, 몸을 잘게 떨며 곁에 있는 커틀러를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램파드.”
“……방 안 책상 서랍 속에.”
커틀러는 램파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갑자기 몸 전체가 공중으로 치솟자 균형을 잃어 엉겁결에 커틀러의 목을 감쌌다.
“뭐, 뭐하는 거냐.”
“기숙사로 돌아가야지.”
“내려놔!”
“안 돼. 기숙사까지만 참아.”
“내 발로 걸을 테니까 내려!”
“그 상태로 어떻게 걷는다는 거야.”
커틀러는 기어코 램파드를 들어 올린 채 기숙사로 향했다. 커틀러의 품에 안긴 램파드는 분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렇게나 오메가를 혐오했는데, 자신의 발버둥은 모두 쓸데없던 거였다.
베타의 한계를 느낀 날 오메가가 되어 버리다니. 몸을 잠식한 더운 열기가 이대로 끓어올라, 쓸모없는 자신을 태워 버렸으면 했다. 단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밤이 늦은 덕분에 기숙사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사람을 마주치지 않았다. 방에 도착한 커틀러는 문을 잠그고, 램파드를 침대 위에 눕혔다. 2인실로 사용되는 방 안에 스멀스멀, 오메가의 향기가 채워졌다.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면 강하게 뻗어 나가 아카데미에 있는 다른 알파들이 알게 될 거다. 페로몬을 갈무리할 줄 모르는 램파드에게서는 가만히 있어도 오메가의 향이 뻗어 나왔다.
“억제제는 어디에 뒀어?”
“책상… 서랍 마지막 칸.”
커틀러는 램파드의 말대로 맨 아래에 있는 칸을 열었다. 양피지와 교환용 잉크가 잔뜩 들어찼고, 억제제는 없었다. 손을 넣어 꼼꼼히 살펴보자 바닥이 나무판으로 덮여 있었다. 아래쪽에 있는 얇은 나무판을 들어 올려 납작한 상자를 발견했고,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 억제제를 꺼냈다.
“약은 몇 개를 먹어야 해?”
“몰라…….”
“모른다니…….”
“모른다… 고! 하, 읏… 흐윽!”
커틀러의 페로몬을 뒤집어 쓴 건 임시방편이었다. 기숙사는 다양한 짐승들의 냄새가 났다.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알파의 몸에서 풍기는 페로몬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못해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벌써 몸이 뜯겨 나가는 거 같아 이불을 끌어모아 웅크렸지만, 알파의 페로몬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램파드, 너 혹시 처음 발현한 거야?”
램파드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처음 겪는 상황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을 터이니, 램파드에게 판단하라기엔 무리였다. 책으로 배운 지식에 의하면 처음 오메가로 발현했을 때 한 알을 먹는다고 쓰여 있었지. 커틀러는 흰색 알약 하나와 물을 가지고 와 램파드에게 먹였다.
억제제를 먹었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히트 사이클에 개방된 페로몬의 영향으로 몸의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피부는 뜨거워졌지만, 램파드의 마음은 한없이 차가웠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한기가 느껴져, 제 몸을 감싸며 벌벌 떨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꽁꽁 얼어붙는 게 당연했다.
아버지가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형과 마찬가지로 사창가로 내쫓기려나.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오메가가 된 형은 창부가 되었고,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형이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해가 뜨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었다.
끼익, 침대 스프링이 짓눌리는 소리가 났다.
“약을 먹는 게 늦었나 봐. …버티기 힘들지?”
가까이 다가온 커틀러가 램파드의 바지에 손을 댔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긴 쉬웠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이미 시작된 히트 사이클은 약으로 가라앉힐 수 없어. 너도 알겠지만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은 알파랑 관계를 가지면 가라앉아.”
원치 않은 관계는 오메가에겐 흔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당하긴 싫어 커틀러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질렀다.
발길질을 피한 커틀러는 램파드의 허리띠를 풀고, 지퍼를 내려 바지를 벗겼다. 램파드가 격렬하게 발버둥 쳤기에 끝까지 벗기진 못했다. 반쯤 벗겨지다 만 바지가 램파드의 종아리에 걸쳐져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질긴 가죽으로 된 바지가 수갑처럼 발목에 묶였다.
“이거 놔!”
“진정하고 내게 몸을 맡겨.”
“너에게 각인되는 건… 싫어!”
“안 할 거야. 안 한다고. 손으로만 할 테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
손으로? 뭐든 간에 속옷 안쪽의 치부를 남에게 보이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싫… 어! 저리 가!”
램파드는 가까이 다가온 커틀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단단한 턱뼈가 부딪혔고, 커틀러의 입에서 ‘윽’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금 건 정말 아팠는지, 얼얼한 턱을 감싼 커틀러의 보라색 눈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반항하지 마.”
또다시 강인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온몸을 죄었다.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커틀러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램파드는 몸에서 힘을 풀고 무기력하게 침대 위에 늘어졌다.
내 몸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는데, 상대에게 순종했단 사실이 큰 기쁨으로 와닿았다. 머리로는 커틀러의 손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반항할 마음이 작은 한 톨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
짐승과도 같은 감각에 완전히 복종하게 되다니. 진짜 오메가가 맞았던 모양이다. 램파드는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숨겼지만 닫힌 눈꺼풀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최후의 마지막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흘러내리는 족족 손등으로 닦아 없앴다.
“…마음껏 비웃어.”
램파드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안 웃어.”
“왜? 웃기잖아.”
“전혀.”
램파드는 자신의 처지가 정말 웃겼다. 같은 오메가였으면서 동족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데 앞장섰다. 오메가를 핍박한다고 그들을 착취하는 알파가 되진 않을 터. 알파처럼 행동하며 자기만족에 빠진 자신이 한심했다.
“…으?”
램파드의 속옷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달아오른 램파드의 피부보다 차가운 커틀러의 손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몸에 힘을 풀고, 편하게 누워 있어. 다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뭘… 할… 거야.”
“포궁과 가까운 질구 안쪽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자극할 거야. 히트 사이클은 알파의 페로몬을 맡으며 뭐든 삽입해야만 가라앉으니까. 아니면 혼자 해 볼래?”
“둘 다 거절하겠어……!”
“그럴 줄 알았어. 그냥 내가 해 줄게.”
부드러운 엉덩이를 만지던 손가락이 맞물려진 주름을 짓눌렀다. 지문이 있는 손끝으로 항문을 톡 건드리더니 이내 살을 비집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아!”
다물린 입구가 벌려질 땐 살이 찔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생살이 눌리는 압박과 아픔은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다. 곧은 손가락이 들어오자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고, 램파드의 내벽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꽉 조였다. 가는 손가락 하나만이 들어왔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램파드는 앞으로 변화할 자신이 점점 더 두려워졌다.
커틀러는 손가락 마디 하나만 집어넣고, 항문 입구를 부드럽게 누르며 둥글게 움직였다. 밖으로 내보내는 감각만이 익숙한 곳에 길쭉한 손가락이 넣어지자 색다르고 달콤한 기분이 몰려왔다. 숨을 쉴 때마다 입구가 움직이며 손가락을 우물우물 조였다.
“하으……!”
“아파?”
전혀. 오히려 심장에 달콤한 기운이 천천히 스며들어 기분 좋아졌다. 커틀러의 손가락이 닿지 못하는 안쪽이 자극을 기대하며 벌렁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좀 더 크나큰 만족을 느끼고 싶다고, 차마 말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몸속으로 들어온 한 개의 손가락은 이제 두 번째 마디까지 들어왔다. 더듬더듬 내벽을 누르는 커틀러의 손가락이 안쪽을 파고들었고, 램파드의 아랫배가 움찔 떨렸다.
“저기, 램파드…….”
“읏, 으… 뭐…….”
“속옷 말이야. 거치적거리는데 전부 다 벗겨도 될까.”
커틀러가 붉어진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저런 얼굴을 해 놓고 뭘 믿으라고 하는 것인지.
“제멋대로 벗길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물어보긴…….”
그는 허락으로 해석했다.
걸쳐 있던 바지가 사라지고, 마찬가지로 팬티까지 모두 벗겨졌다. 페로몬을 흘리는 오메가의 하반신이 완전히 드러나자 커틀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램파드는 교복 셔츠 한 장만을 걸친 채 페로몬을 줄줄 흘리며 흐트러졌다. 분명 알파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향일 텐데, 어딘가 이상했다. 온전하지 않은, 꼭 무언가로 덮어 놓은 듯한 페로몬이었다.
“후읏…….”
하나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램파드는 또다시 안쪽이 후끈거렸다. 근질근질한 부분을 긁고 싶어 연신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괴롭지? 곧 편하게 해 줄게.”
램파드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땀에 절어 있던 커틀러의 상의에서도 짙은 향기가 풍겼다. 역겹기만 하던 짐승 냄새를 잔뜩 맡고 싶었다. 페로몬 향을 쫓아 킁킁, 램파드의 코가 벌름거렸고 커틀러는 자신의 셔츠를 벗었다. 땀 냄새를 싫어한다고 해석했던 거다. 커틀러는 벗은 셔츠를 침대 위 아무렇게나 던졌다.
램파드는 대충 벗어 던진 커틀러의 셔츠를 자신의 얼굴로 끌어당겼다. 짙은 우성 알파의 체취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줘 향을 맡고 싶었기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내 냄새가 좋아?”
램파드는 자신이 커틀러의 체취를 맡기 위해 셔츠를 끌어안았단 걸 깨달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커틀러가 빙긋 웃었다. 그는 다시 램파드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허벅지를 벌려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이번엔 두 개를 한꺼번에 천천히 속으로 집어넣었다. 다물린 내벽이 손가락의 모양대로 벌려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애액이 질척거리며 물기 많은 소리를 냈다. 램파드는 자신의 아랫배에서 나는 소리에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램파드 클로비스 군! 뭐하는 겁니까. 램파드 군!”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다시 이성이 돌아온 램파드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넘쳐흐르는 오메가의 페로몬에 기숙 사감이 찾아온 모양이다. 이미 방 안은 히트 사이클에 돌입한 오메가의 페로몬으로 짙게 채워져 있어, 어떠한 변명이 통하지 않을 터. 새하얗게 질려 있는 램파드의 몸 위에 이불이 내려앉았다.
“내가 수습할 테니까 제대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 단 한마디도 하지 마.”
지금은 커틀러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램파드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엉겁결에 벗은 커틀러의 셔츠까지 딸려 들어와 이불 안쪽은 우성 알파의 페로몬 향이 났다. 고작 벗은 옷가지 하나가 참담한 마음이 진정되게 도와주다니. 눈을 꼭 감고 커틀러의 향에 집중했다.
램파드가 몸을 숨기자 커틀러는 상의를 벗은 모습 그대로 문으로 향했다. 잠가 놓은 문은 다행히 불청객이 예고 없이 들어오는 걸 막아 줬다. 손잡이에 손을 올린 커틀러가 문을 열지 않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라뇨! 여긴 오메가 금지 구역이란 걸 모르는 겁니까? 빨리 문 여십시오!”
기숙 사감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말했다. 커틀러는 순순히 문을 열어 줬다. 열린 문틈 사이에 선 기숙 사감은 램파드의 몸에서 흘러나온 달콤한 페로몬을 맡았다. 오메가의 흔적에 잠시 멍하니 있던 사감이 뒤늦게 정신 차렸다.
“커틀러 콘테 군이었습니까? 램파드 군은요?”
아카데미까지 창부를 끌고 들어온 대담한 자는 황태자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 정도 권력을 가져야 이런 사고의 뒷수습도 가능할 터.
“램파드는 훈련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에게 할 말이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돌아오는 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램파드 군은 됐어요. 커틀러 군은 지금 제정신입니까? 어디 신성한 아카데미에 창부를 데리고 온 겁니까! 이봐요, 거기 오메가, 당장 나와요!”
자신을 지칭하자 램파드는 이불을 더욱 꼭 끌어안고 몸을 숙였다. 쿵쾅쿵쾅.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강하게 울렸다. 들키면 한 시각 이내에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터. 그렇게 되면 아침 해는 창관에서 보게 될 거였다. 눈을 질끈 감고,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길 간절하게 빌었다.
“당장 나오란 말 못 들었습니까! 신성한 아카데미에서 나가요! 이곳은 더러운 오메가가 들어올 곳이 아닙니다!”
기숙 사감이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커틀러가 더는 열리지 못하게 문을 강하게 쥐어 잡고, 몸으로 막아섰다.
“여기는 저밖에 없습니다.”
“저기 저 침대 위에 천박한 냄새를 줄줄 흘리는 오메가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겁니까? 비키십시오!”
“저밖에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천박한 오메가라고 말씀하시는 건 절 지칭하시는 겁니까?”
“커틀러 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지금 자네의 벗은 꼴만 봐도 창부를 끌어들인 게 확연하지 않습니까!”
기숙 사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올라갔지만 커틀러는 침착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사감님이 하실 일은 저 혼자 있었다고 보고를 하는 겁니다. 콘테 공작가의 후계자인 제가 하는 말에 따라 주십시오.”
더는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선 커틀러가 싸늘하게 말했다. 제국의 권력 순위는 첫 번째가 황제, 그다음이 콘테 공작가다. 모르고 있진 않지만, 아카데미에서는 학생 위에 교사가 존재한다.
“여긴 아카데미입니다. 제국의 작위는 관계없는 장소입니다!”
커틀러는 미소를 싹 지운 채 사감을 사납게 내려다보았다.
“작위도 물려받지 못한 일개 귀족 나부랭이가 콘테 공작의 권위에 도전하는 겁니까? 자비를 베풀 수 있을 때 돌아가십시오, 사감님.”
대드는 학생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닌지라 사감은 커틀러의 맹렬한 기운을 무시했다.
“감히 학생이 교사에게!”
커틀러는 갈무리한 사나운 페로몬을 거침없이 내뿜었다. 몸을 숨기고 있는 램파드는 그의 강렬한 기운에 먹혀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커틀러의 손이 자신의 목을 꽉 잡은 느낌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아카데미 교사진은 알파로 이뤄져 있다. 많은 숫자의 교사 중에서도 우성 알파는 존재하지 않았고, 학생을 다 합쳐도 커틀러 하나만이 존재했다.
커틀러의 강인한 기운에 짓눌린 기숙 사감의 몸이 덜덜 떨려 왔다. 같은 알파의 페로몬에 밀리는 건 상당한 치욕이었다. 버텨 보았지만 몸은 솔직하게 반응해 허리를 굽히며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었다.
“큭! 돌아…가겠습니다…….”
목소리를 쥐어짜 내기도 힘든 사감은 몇 마디 띄엄띄엄 말하고는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하던 학생들도, 강한 페로몬에 눌려 호기심을 거두고 머리를 숨겼다. 램파드와 커틀러가 사용하는 기숙사 방을 중심으로 강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뻗쳐 나왔으니 이제 함부로 다가오는 자는 없을 것이다.
커틀러는 다시 한번 문을 잠그고 페로몬을 갈무리하며 램파드에게 다가왔다. 문이 잠기는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램파드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너…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짓거릴 한 거냐. 내일 당장 무슨 말이 나돌지 예상 못 한 건 아니겠지…….”
아카데미는 오메가 출입 금지 구역이다. 그런 금오메가 구역에 뻔뻔하게 연인을 끌어들인 호색한으로 소문날 터.
“뭐, 아버지한테 몇 대 맞는 거로 그칠 거야. 그 덕분에 위기를 넘겼잖아?”
커틀러가 이상한 오해를 뒤집어써 준 덕분에 램파드는 지금 당장은 고비에서 벗어났다.
“……고마워.”
“뭐? 뭐라고?”
분명히 제대로 들어 놓고 저러는 것이다. 한 번 더 말해 주기는 싫었다.
“아냐. 아무것도.”
사감이 사라진 후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고, 커틀러는 아까 하던 일을 계속 진행했다.
시간은 오래 걸려도 약속대로 손으로만 해 준 덕분에 램파드의 히트 사이클이 해소되었다. 커틀러 덕분에 램파드는 긴장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진정되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램파드의 머리가 앞날을 걱정했다. 형제가 없으니 차기 황제는 램파드였다. 베타는 몰라도 오메가는 황제가 될 수 없다. 군중 앞에서 감별지를 이용해 감정을 끝마쳐야 대관식이 종료되는데, 오메가의 푸른색이 뜨면 모든 게 끝이었다.
램파드는 커틀러가 구해 온 감별지를 입에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던 커틀러가 감별지를 뺏어 들어 램파드의 입술에 가져갔다.
작게 입을 벌린 램파드는 종잇조각을 넣고 곧바로 꺼냈다. 푸른색, 이라 생각했지만 감별지는 노란색을 띠었다.
히트 사이클을 겪은 이상 오메가인 건 확실할 텐데, 어린 나이 때부터 복용한 억제제가 부작용을 일으킨 듯했다. 황후의 노력 덕분에 대중을 속이며 베타로 살아가게 됐지만, 발현 사실은 어머니에게조차 비밀에 부쳤다. 어머니께 지원받던 억제제도 더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 대신 램파드에게 꼭 필요한 히트 사이클 억제제는 커틀러가 구해다 줬다.
지금 당장은 주변 사람을 기만하며 숨겼지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들킬 일이었다. 혼자서는 세상을 속이기 힘들었지만, 비밀을 함께 진 우성 알파 덕분에 위험에 처할 때마다 벗어났다. 그를 향한 신뢰는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
진정한 램파드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숨소리는 일정했고, 개방된 페로몬은 모두 사라졌다. 커틀러는 몸에 달라붙은 농후한 향에 진정하기가 쉽지 않아 더운 숨결을 내뱉었다.
램파드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커틀러는 샤워를 하러 이동했다. 램파드 또한 씻기긴 해야 하지만 지금은 잠시 눈을 붙이라고 내버려 뒀다. 밤이 좀 더 늦으면 깨워서 보낼 생각이었다.
오메가 냄새를 펄펄 풍기며 샤워장으로 향하는 도중 몇몇 학생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우성 알파의 몸에서 저런 강렬한 오메가의 향이 나는 거라면 하나의 일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오메가의 몸속 깊은 곳에 파고들고 나왔단 뜻이었다.
커틀러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면 저들끼리 험담을 나눌 게 분명했다. 날이 밝으면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제국 귀족 전부가 알게 되겠지. 굳이 퍼져나갈 유언비어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멀리멀리 퍼졌으면 했다. 소문이 그치지 않으면 램파드는 도움받았단 사실을 자주 떠올릴 거니까.
사실, 커틀러는 좀 더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능력을 갖췄다. 램파드의 페로몬은 오메가치곤 여렸으니까. 바깥에 두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 램파드를 숨겨 둔 뒤 혼자서 약을 가지고 오는 방법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일부러 알파가 많은 기숙사로 램파드를 이끄는 방법을 선택했다. 첫 발현으로 제정신이 아닌 램파드는 커틀러가 주도하는 대로 움직였다.
한 번의 구원으로 꽉 막힌 마음의 문을 열었으니 두 번, 세 번째는 어쩔까. 스스로 몸을 내던지며 짝이 되길 애원할지도 모른다. 커틀러는 확실하게 마음을 얻기 위해 램파드의 몸을 가르고 싶은 걸 인내했고, 그 대신 신뢰를 얻었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샤워실 안에 들어온 커틀러는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활짝 벌려진 입술이 언뜻 보였다. 아까부터 참아 왔던 웃음이 뒤늦게 터져 나와 막을 수 없었다.
내 오메가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상했다. 우성 알파가 생기다 만 베타에게 끌릴 리는 없을 터. 그렇지만 램파드는 오메가라 하기엔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베타라고 하기엔 어딘가 묘한 이상한 존재였다. 그런 램파드의 몸에서 오메가의 페로몬이 흘러나오는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독특한 체향은 오메가 중에서도 귀하다는 우성.
지금은 제대로 개방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완벽한 오메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신이 내린 나의 짝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