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말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서역 출신 씨수말의 가치를 알 것이다. 좋은 품종이라면 몸무게만큼 황금을 쌓아도 구할 수 없다는 게 씨수말이다. 천화는 바로 그 귀하다는 씨수말을 두 마리나 사들였다. 순전히 집에 있는 예비 신부가 말을 좋아한다는 이유였다.
천화에게 깜짝 선물로 낙점당한 녀석들은 그만한 노고를 겪어야 했다. 일례로 거의 새로 털이 나다시피 박박 씻김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거친 성정을 가진 씨수말 때문에 노비 몇 명이 다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매우 근사한 모습이 되었다. 오죽하면 마구간지기마저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다.
까맣고 갈색인 거구의 두 말이 콧김을 내뿜으며 마사에 서 있는 장면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특히 갈기를 땋아 검은 줄로 묶어 둔 것이 새신랑이 신부에게 바치는 선물 느낌이 팍팍 났다. 마구간지기는 하루빨리 천화에게 말을 보일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다음 날, 마구간 안에서 오물의 냄새가 훅 끼쳐 왔을 때 마구간지기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말 두 마리가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흘린 채로 죽어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투기 넘치게 서 있던 놈들이었다. 마구간 지기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천화는 오늘 이 말들을 유협에게 줄 생각이었다.
마구간 지기 앞에 여러 가지 소름끼치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천화는 계획이 어긋나는 일을 싫어했다. 그리고 아랫사람에게 자비와 손속이 없었다. 설령 말들이 해외에서 와서 낯선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천화는 마구간지기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천화가 하도 많이 가손들 경을 친 광경을 본지라, 자신의 뼈가 부러지는 광경이 저절로 그려졌다. 천화는 아마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냥 마구간지기를 보다가…… ‘때리고 내쫓아라.’라고 말하겠지.
마치 지난여름 엄마와 헤어져 팔려 온 아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가 없으니 얼마나 적적하고 괴로울까, 다른 노비들이 모두 다 가엾게 생각하던 아이가 있었다. 너무 어려 저택의 규칙을 아직 깨치지도 못할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졌다.
그러니 그 어린 것 눈에 아침상에 올라갈 식사가 얼마나 먹음직했을까. 식모가 발견했을 때 아이는 이미 천화의 상에 손을 댄 후였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적당히 어를 수 있는 것을 유별난 식모가 천화에게 바로 일러바치고 말았다.
그때도 별생각 없이 아이를 한 번 본 천화가 말했다.
‘도둑질했으니 손목을 잘라라.’
그 말에 심지어 천화의 곁을 지키는 가신들마저 천화를 바라봤다.
사위에 죽음과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천화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본인의 할 일로 돌아갔다. 아무리 저택에서 도둑질하면 손목을 자르는 게 일반적이라고 해도 그건 다 큰 어른이 패물에 손을 댔을 때 일이었다.
그러나 천화는 귀찮다는 듯 형원을 한 번 쳐다보는 게 다였다. 결국 아이는 울면서 밖으로 끌려 나갔고 곧 한 손목에 피에 젖은 헝겊을 둘둘 만 채로 돌아왔다. 그 후로 시름시름 앓았다는데 결국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몰랐다.
그런 천화에게 가서, 주인께서 비싸게 구매한 말이 갑자기 두 마리 다 죽었다고 한다면 천화의 반응은 어떨까. 눈앞이 다 아찔해져서 무릎이 벌벌 떨렸다. 멍석말이 채로 몽둥이질을 당한 다음 집 밖으로 내던져질 자신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구간지기는 노비들을 쥐 잡듯이 잡았다. 도대체 너희가 무슨 짓을 했기에 멀쩡했던 말이 죽은 거냐고 그렇게 윽박질렀다. 그러나 얼굴이 허옇게 변한 노비들도 필사적이었다. 마구간지기에게 얻어맞는 것과 천화의 앞에 끌려가는 건 달랐다.
그 결과 마구간 밖에서 옥신각신하는 그림만 그려지고 말았다.
“네 이놈들 오늘 날 잡은 줄 알아라!”
“어르신, 어르신이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저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이 시키는 대로 씻기고 풀을 줬는데 그게 어찌 저희의 잘못입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했으면 말이 이렇게 될 일이 있느냐?”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왜 이 사단이 났는지 찾는 게 먼저 아닙니까?”
옳은 말이었다. 덜컥 겁을 먹은 마구간지기가 책임 소재를 찾을 때, 한 용감한 노비가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누가 말에게 독이라도 먹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를 타고 건너온 녀석들이 식욕이 없었는지 건초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누가 직접적으로 해를 끼쳤나 하는 의심이 두 번째였다. 꼼꼼히 확인하기 위해 배를 훤히 보이고 죽은 말을 여러 명이 뒤집었다. 그러나 어제 씻긴 그대로 번드르르한 몸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노비들 중 누군가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고 죽은 것을 보니 놀라서 죽은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래서 마구간 안에 누가 들어온 건 아닌가 의심했지만. 노비들이 밤새워 교대로 문 앞을 지켰고, 문 외에는 막힌 창문밖에 없었다.
결국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주인이 산 아주 비싼 말이 돌연사했다는 어이없는 결론만 나왔다.
결국 마구간지기와 노비들은 서로를 탓하던 것을 멈추고 천화를 찾아가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 생겼다고 알리는 게 최선이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암묵적으로 없는 귀신이라도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그들이 천화를 찾아갔을 때, 그는 회색 옷에 금색 자수가 놓인 겉옷을 걸치고 예산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의는 편안하게 입은 것을 보아 외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구간지기와 노비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천화를 돕던 가신들은 인상부터 쓰고 보았다.
천놈들이 들어와서가 아니라, 이번에는 또 어떤 이유로 피를 보게 될지 떨리고 걱정스러워서였다. 천화는 일을 하느라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구간지기와 노비들이 단체로 무릎을 꿇었을 때야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그 투명한 갈색 눈이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마구간지기는 눈물이 찔끔 났다.
“주인님, 마구간에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마구간지기가 말을 떼자 몇 명의 노비들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어깨를 떨었다. 몇몇 가신들은 눈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천화는 그들의 반응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물었다.
“새로 산 말에게?”
“……예.”
“어떤 사고가?”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갑자기 오늘 아침에 보니 녀석들이 죽어 있어서, 저희가 다 같이…….”
마구간 지기가 허겁지겁 변명의 말을 꺼냈다. 그러다 천화의 눈길에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 천화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마구간 지기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말이 다 죽었다고?”
“예, 예. 그런데 아무런 원인이 없습니다. 저희 모두가 다 증명할 수 있습니다.”
천화는 오랜 시간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생각에 잠겼을 뿐이다. 그러나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끔찍한 형벌을 내리곤 했기에 마구간지기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마침내 천화가 입을 뗐다.
“말의 시체는 불태우고,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함구해라.”
“예…… 예?”
“한 번만 더 이 소식이 내 귀에 들어오면 너희 넷은 살 수 없을 줄 알아라.”
“예. 예. 알겠습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천화는 흐느낌이 섞인 그 인사를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모두 다 이 일이 절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해라. 누구든 가리지 않고 소문이 돌면 전부 다 책임이 있는 걸로 여기겠다.”
가신들이 놀라서 큰 눈을 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원래 천화라면 저 네 명을 죽이고 사건을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마저 해할 것이라 하다니 도대체 왜? 소문이 퍼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말의 원래 주인이 될 자가 실망할까 봐? 하지만 한마디도 물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허리를 굽혀 복종했다.
천화는 자신을 둘러싼 난리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귀신 들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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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협이 남의 풍습을 알아보기 위해 공부한 것처럼, 천화 역시 묘족의 풍습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남의 언어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진 묘족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통역까지 구했었다. 그 통역이 챙겨 온 것 중에는 묘족에게 약탈한 책이 있었다.
개중에 천화의 흥미를 특별히 끌 만한 책은 없었다. 그저 묘족을 이해하기 위한 기계적인 작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머릿속에 그 책의 내용이 전부 다 담겨 있었다. 묘족은 기록을 잘 남기지 않아서 기본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천화는 같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었다. 통역이 가져온 ‘귀신 설화집’ 역시 천화는 달달 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어렸을 때 유협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직접 귀신을 보지 않았다면 조금도 믿지 않을 만한 내용들이 가득한 책이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달라붙는 귀신, 수십 가지 모양으로 변하며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귀신, 원한을 너무 많이 산 사람에게 붙는 생귀신. 천화의 기억 속에 생귀신은 특히나 주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묘족은 이 생귀신이 붙기 위한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고 적어 두었다.
첫 번째로 갓난아기를 해친 적이 있어야 했다. 두 번째로 그가 죽인 시체만을 밟아서 넓은 강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살인을 했어야 했다. 셋째로 그 사람들을 죽이는데 조금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야 했다.
이런 무자비한 경우를 보통 찾아보기 힘들어 생귀신은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나타나면 해치우기 무척이나 어렵고 두려운 귀신이었다. 생귀신이 나타났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주변의 사람, 말과 소, 양 등등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는다. 또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집안에 재산이 빠져나가며, 원한을 가진 사람 주변을 맴돌며 평생을 괴롭게 만든다고 한다. 묘족은 생귀신을 만드는 인간은 금수라고 마지막에 분명히 명시해 놓았다.
글쎄……. 천화는 다른 건 다 모르겠지만, 유협이 자신을 금수라고 생각하게 두기 싫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눈치챘던 사실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언제 알아차렸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언젠가부터 천화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잠이 들면 우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거나, 새벽에 혼자 있을 때 주변을 누가 돌아다니는 느낌은 예사였다. 멀쩡하게 정신이 깨어 있을 때도 뒤에서 알 수 없는 말로 저주가 들려오거나 , 차가운 무언가가 몸을 꽉 잡는 느낌이 들곤 했다.
천화는 그저 두렵지 않았을 뿐 귀신이 붙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분명 천강의 집에 갔을 때까지만 해도 귀신이 붙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오자 귀신이 붙었다. 지난주만 해도 농사일을 돕는 노비 셋이 이유 없이 죽어서 우물 안에서 발견되더니, 이번에는 말과 소까지 죽었다.
자신에게 붙은 게 생귀신이라고 확신한 천화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유협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시장을 구경하러 갈 때 천화는 거짓말을 했다. 하나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물론 천화의 기준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그는 늘 법칙을 지키며 정도를 따랐다. 다만 전혀 손속을 두지 않고, 유연함이 없어 자비 역시 없었을 뿐이다.
처음에 수상함을 눈치챘을 때 천화는 단번에 유협도 알아차릴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문밖에 걸쇠를 걸 수 있도록 만들어 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협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 듯했다.
다행히 유협이 더없이 행복해 보이긴 했으나, 천화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사라에게 더 꼼꼼하게 유협의 눈치를 살피고 하나라도 이상한 모습을 보인다면 허투루 보고 넘기지 말라 당부했다. 다행히 천화의 수족들은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유협은 정원에서 꽃이 피듯이 나날이 안색이 피어 가고 있었다. 아침에 말 두 마리를 태워 죽이라고 명령한 후 유협을 찾아갔을 때, 그는 정원 문가에서 천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조팝꽃을 소복이 든 유협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활짝 웃었다.
“천화 님!”
그리고 난데없이 달려와 풀꽃을 천화 머리에 꽂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말 두 마리가 비명횡사했다는 말을 들으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천화는 유협이 꽃을 좀 더 잘 꽂을 수 있도록 머리를 숙여 주며 물었다.
“갑자기 뭐야?”
“하얗고 여린 걸 보니 갑자기 천화 님이 생각나서요. 어렸을 때 딱 이러셨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너무 깜찍하게 들려 천화는 웃어 버렸다.
유협은 남은 풀꽃을 그대로 천화에게 안겨 주었다. 예쁜 얼굴이 순간 얼마나 만족스러워 보이던지 천화는 그 장면을 영원히 담아 두고 싶어졌다.
“맘에 들어?”
“네. 어울려요.”
유협이 천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어느 순간 천화의 손에 들려 있던 꽃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소 급한 감이 있는 입맞춤에 유협은 천화의 소맷자락을 꼭 잡고 응했다.
곧 두 사람의 손이 깍지로 얽혔다. 부드럽게 얽히던 혀가 쪽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이로는 모자라서 천화가 두 번 뺨에 입 맞추자 유협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밖이라서 부끄러운 건가? 생각할 때 유협이 천화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아 왔다. 그 손길에 이제는 천화의 귀가 붉어졌다. 저절로 앞섶이 단단해질 정도로 끌렸지만 만나자마자 침실로 끌어당기는 불한당이 되기는 싫었다.
천화는 짐짓 다정하게 허리를 끌어안은 유협의 손을 잡았다. 유협이 냉큼 깍지를 껴 왔다.
“뭐 하고 있었어?”
“풀 뜯고 있었지요.”
유협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천화가 힐끗 곁눈으로 유협을 살폈다. 할 일이 없다는 뜻을 돌려하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요새 심심하지 않아?”
“음. 이러다 고양이처럼 되긴 하겠어요.”
고양이처럼 되다. 고양이는 난로 곁에서 붙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몸을 불려 가는 동물이었다. 묘족의 속어를 알아들은 천화가 잠깐 웃다 심각해졌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곁에 없는 동안 유협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유협에게 너무 무심한 것은 아닌가 하고 죄책감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천화가 물었다.
“듣자 하니 밖에 악사가 왔다는데 알고 있었어?”
천화의 손을 잡고 걷는 일에 집중하던 유협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천화는 유협의 검은 눈이 반짝거리는 걸 분명히 봤다.
“악사요?”
“응. 제법 유명한 악사라던데.”
“악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천강의 연회에서 몇 번 악사가 노래하는 걸 듣긴 했지만 연회 자체가 악몽 같았기에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유랑 악사가 왔다니, 유협은 저도 모르게 천화를 조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같이 가실래요?”
‘제발’이라고 양쪽 눈에 써 붙인 채로 유협이 물었다. 천화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밖에 나가는 건 좀 힘들 것 같아.”
“아. 할 일 때문에요?”
“응.”
거짓으로 대답하자니 양심이 찔렸다. 사실 일은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다만 많은 사람이 유협을 쳐다볼 게 뻔해서 싫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붙은 귀신이 주변 사람에게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다면 유협이 단숨에 눈치챌 것이 두려웠다.
“그럼 어떻게 보러 가죠?”
유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주 오랜 세월 한곳에 갇혀 있었다 보니, 유협은 때때로 흔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고는 했다. 지금처럼.
천화는 유협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우리가 가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오게 하면 돼.”
“아…….”
그러고 보면 유랑 악사들은 돈을 받으면 그 집에 가서 노래를 불러 준다고 들었던 것 같다. 유협의 얼굴이 다시 한번 밝게 개었다.
자신의 한 마디 마디에 희비가 갈리는 게 너무 귀여워서, 천화는 고개를 숙여 유협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입술 사이로 혀가 파고들자 유협이 고개를 뒤로 슬그머니 뺐다.
“천화 님, 악사요.”
“데려오라고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내친김에 유협의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사라에게 고갯짓하자, 사라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됐어?”
묻기가 무섭게 유협이 천화의 목에 팔을 둘러 왔다. 뾰족한 혀가 파고들어 질척하게 섞였다. 잠시 입맞춤을 받고만 있던 천화는 결국 유협의 허리를 끌어안고 열렬히 응했다.
사라가 악사에게 저녁에 저택에 오라고 약속을 받고 돌아왔을 때, 유협과 천화는 낮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사라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다 젖어 있을 침상을 치우라고 노비 둘을 들여보냈다. 할 일이 많았다. 저녁상도 차려야 했고, 술상을 봐서 악사가 노래를 부를 때 드실 수 있도록 준비도 해야 했다.
사라의 꼼꼼한 성격에 단순히 악사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자가 도착했을 때, 사라는 다짜고짜 악사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더러운 옷을 벗게끔 한 뒤 깨끗하고 소매가 넓은 옷을 꺼내 왔다.
악사는 순순히 사라의 말을 따라 사부작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사라가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 혼자 왔는가?”
낮에 보니 남자 소리꾼과 함께 있던데, 지금은 비파만 하나 달랑 들고 혼자 찾아왔기에 물은 말이었다. 악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디 소녀 혼자서도 극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그 소리꾼은 오늘 장에서 만나 우연히 공연을 같이 했을 뿐입니다.”
“그랬으면 그 소리꾼도 데려왔어야지. 혼자서 두 사람 몫을 할 수 있겠는가?”
“네. 장담드릴 수 있습니다.”
금전을 나누기 싫어서 혼자 왔을 게 뻔했지만 그 자신감이 거슬리는 건 아니었다. 사라는 마지막으로 옷차림을 꼼꼼하게 정리한 뒤에 신신당부했다.
“지금 기다리시는 분은 자비심이 그렇게 많은 분이 아닐세. 명령하시는 것만 조용히 따르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말을 하게.”
“네, 알겠습니다.”
악사가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 준비해 둔 무대로 나갔다. 사라가 하는 말은 어련히 높은 분들을 모시는 사람들이 매번 하는 말이기에 별달리 담아 두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무대에 선 악사, 소연을 놀라게 한 건 앉아 있는 관객의 얼굴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두 사람은 술상을 보며 소연이 노래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외모라는 게 평생 거리를 떠돌고 산 자신의 입장에서도 처음 보는 수준이었다. 얼굴이 꽃인데 성격이 더러운 게 무슨 상관이냐 생각할 정도였다.
소연이 인사를 올렸다.
“어르신들 안녕하십니까. 저는 거리의 소리꾼 소연이라고 합니다.”
최대한 또랑또랑하게 말하며 소연은 두 사람을 재빠르게 훑었다. 검은 머리 쪽은 자신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는 반면에 갈색 머리는 술잔을 들고 상대방만 보고 있었다. 소연은 기민하게 누구를 만족시켜야 하는지 단번에 눈치챘다.
“오늘 제가 이야기를 세 개 준비해 왔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리들의 심금을 울릴지 선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연이 준비한 이야기는 첫 번째로 신분의 벽에 갇혀 금단의 사랑에 빠진 남녀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는 으스스한 이야기로 귀신이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영혼을 가는 이야기였다.
세 번째는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활약한 장수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어 절망하는 이야기였다.
어떤 이야기도 맛깔나게 풀어 낼 자신이 있기 때문에 소연은 소리 높여 세 가지 선택권을 주었다. 소연의 선택권을 듣던 검은 머리 남자가 슬쩍 웃었다. 그리고 갈색 머리에게 속삭였다.
“선택권이 하나네요.”
“금단의 사랑이라, 엄청 궁금하군.”
귀신 이야기는 너무 새삼스럽고, 그렇다고 소박맞은 장군 이야기를 하기에는 이쪽이 전쟁 영웅이었다. 결국 약혼한 그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극은 하나였다. 천화가 맞장구 쳐 주자 유협이 사라에게 손짓했다.
사라가 첫 번째 이야기를 하라고 신호를 보내자 소연이 재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솔직히 사내 둘이서 이런 이야기를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은 덤탱이를 쓰게 된 장군 이야기를 좋아하고는 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이 첫 번째를 선택했다면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핵심은 눈물 나게 안타까운 감정을 절절하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남자의 집안이 높고, 여인은 노비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정말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야 마음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기다 악인으로 나오는 여자의 주인마님이 너무나 가혹하고 냉정한 여인이었다. 노비 주제에 서로 짝사랑 상대가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님은 여자를 매질한 후에 광에 가뒀다.
여기서 이야기가 또 갈렸다. 만약 규슈들만이 듣는 이야기라면 굶기는 것으로 끝났지만, 사내들을 위해서는 좀 더 야한 이야기가 들어갔다. 여기는 아무래도 사내만 두 명이니 여자가 외간 남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걸로 가면 되겠다.
마음을 정한 소연이 시원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 그런 남자가 있었고, 저 마을에는 이런 여자가 있었는데 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귀에 쏙쏙 들어왔다.
노래 길이와 몰입도에 따라 떨어지는 금자 숫자가 달라지기 때문에 소연은 어려서부터 상황을 자세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유협이 차를 홀짝거리던 것도 멈추고 집중하자 천화는 은은한 미소를 띠우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래, 바쁘다고 매일 그 시간을 비워 두지 말고 유협이 원하는 걸 하나라도 더 해 주자. 유협을 바라보는 천화의 시선이 못내 뜨거웠으나, 유협은 모르는 척했다.
여기서 눈길을 주면 분명히 애정 표현 때문에 극에 집중이 깨져 버릴 게 틀림없었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악사를 위해서라도 이 분위기에 쪽쪽거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곡은 지금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도령과 사랑하는 티를 내 버리고, 이를 알아차린 마님은 마치 썩은 피를 마시는 것처럼 속이 뒤집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한 마님의 악독한 행동이 지금부터 시작됐다.
한편 이 부분이 방금 한 이야기에서 두 번째로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마지막에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여자가 겪는 고통이 적절하면서도 악랄해야 했다.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거리의 악사들은 많은 고민을 한다.
소연은 이 부분을 짤 때 한때 높은 귀족이었던 천강의 만행을 주로 예로 삼았다. 그의 엽색, 변태적인 성향, 아예 집 안에 만들어져 있던 징벌방 등등을 생각하니 여인이 겪을 고난이 술술 나왔다. 대신 너무 변태적이지 않도록 징벌방은 곳간으로 변경했다.
어느 집이나 노비들은 입이 쌌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소문이 돌기 마련이다. 소연은 천강이 자신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노비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소연은 이게 사실이면 대박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소연은 극을 완성했고, 여인은 다양한 수모를 겪게 된다. 사소하게는 집 밖에 내쫓겨서 잠들 곳 없이 새벽 내내 숨어서 추위에 떨거나, 손목에 끈이 묶여 퉁퉁 붓도록 풀어 주지 않는 못된 장난질을 당했다.
그러나 마침내 진심으로 두 사람이 통한 걸 알게 된 마님은 분노가 폭발한다. 마님은 여인을 끌고 가, 정인을 만날 수 없도록 곳간에 가둔다. 그리고 순결을 잃게 만들 속셈으로 사내들을 끌어들여 저항하는 여인을 묶게 하고…….
본인도 극에 심취해 노래를 부르던 소연은 문득 사위가 싸늘함을 눈치챘다. 슬쩍 노래를 부르며 보자, 아까까지만 해도 집중하던 검은 머리 남자가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의문을 갖는 순간이었다. 비파 소리를 뚫고 무거운 유리 파열음이 들렸다.
순간 유협이나 소연이나 동시에 놀라 천화를 바라봤다. 천화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천화가 손에 쥐고 있던 도자기 잔을 깨버린 것이다. 두꺼운 유리잔 때문에 피가 흐르는 걸 본 유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유협이 어쩔 줄 몰라하다 손을 뻗어 상처가 난 손을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감쌌다. 그 손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천화는 시리다 못해 그대로 베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소연을 보았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소연은 냉큼 비파를 내려놓고 그대로 엎드렸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높은 분의 성미를 건드렸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소연의 어깨가 떨렸다.
유협은 어린 여자가 엎드려 떠는 모습을 보자 심기가 어지러웠다. 가뜩이나 극의 내용으로 속이 울렁거리는데 저런 모습은 보기 싫었다.
“천화 님…….”
‘그만두세요’라고 말하려던 입이 갑자기 딱 다물렸다. 붙잡은 천화의 손이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차가워졌다. 순간 유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소름이 손끝에서 온몸으로 돋았다.
유협은 저도 모르게 천화의 손을 놓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사람이라기보다 무언가 다른 것에 가까운 온도였다.
“사라, 가서 의원을 불러오세요.”
유협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사라가 달리다시피 사라지자, 유협은 천화의 뺨을 쓰다듬어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괜찮습니까?”
천화가 유협의 질문에 대답 없이 명했다.
“끌고 나가.”
두 명의 문지기가 소연의 어깨를 잡았다. 금화는커녕 뒈지게 얻어맞고 쫓겨나겠구나, 눈물이 찔끔 났을 때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화내지 마세요.”
“화? 그대는 이게 화를 내는 거라고 생각해?”
천화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진심으로 살의에 차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 얼마 만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천것들이 길거리에 뭐라고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줄은 알았지만, 감히 대담하게도 이런 이야기를 직접 꺼내는 잡것은 처음 봤다.
“저 어린 소녀가 뭘 알겠습니까.”
“저 어린 소녀가 그대보다 아는 게 백배는 많을걸?”
“아는 게 없으니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유협이 피가 뚝뚝 흐르는 단단한 손을 잡고 달래자 천화가 한숨을 푸욱 쉬었다. 차갑기가 한겨울 바람보다도 심했던 눈빛에 슬쩍 온기가 돌아왔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가.”
“원래 3일을 노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게 숙소로 돌려보내시지요.”
“뭐?”
천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유협이 의사에 이렇게까지 반대한 적은 처음이었다. 유협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손가락으로 천화의 미간을 살살 문질러 주름을 폈다.
“저는 더 듣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데려올게.”
“저는 저 사람이 마음에 듭니다.”
한참 말이 없던 천화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엎드려서 벌벌 떨고 있는 소연을 한참 쳐다보던 그가 유협을 다시 바라봤다. 유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화가 눈을 꾹 감았다가 문지기에게 명령했다.
“손님을 방으로 안내해라.”
“예, 주인님.”
그렇게 명해 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천화가 한숨을 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유협은 고맙다는 의미로 그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곧 의원이 왔고 의원은 단단한 도자기 잔을 어떻게 깼는지를 더 궁금해하며 손을 치료했다. 그 광경이 어이가 없어서 유협이 한마디 하자 의원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워낙 건강하신 분이라 이런 상처는 흉도지지 않게 나으실 겁니다.”
“환자를 앞에 두고 무슨 헛소린가. 꼼꼼히 봐.”
유협이 닦달하자 천화가 그제야 웃었다.
천화가 유협의 허리를 껴안고 자신의 허벅지로 당겨 앉히려 해서, 유협의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모든 사건이 정리됐다. 천화는 아까처럼 기분이 상해 보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유협에게 지나치게 치대는 게 그를 위로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둘만이 조용히 남았다. 천화가 습관처럼 유협을 끌어안았다.
“천화 님, 오늘도 자고 가실 거죠?”
유협이 천화에게 거의 매달다시피 하고 물어봤다. 천화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목덜미에 쪽 입 맞췄다. 분명한 잠자리 신호에 유협은 그를 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의 열기가 훅 끼쳐오자 갑자기 피곤해진 유협이 눈을 비볐다.
“혼자 씻을 수 있으시겠어요?”
“응.”
“그럼 먼저 씻고 오세요.”
손 때문에 안 되겠다고 어리광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천화는 말없이 순순히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는 것도 혼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걸 보니 새삼 천화도 무인이라는 게 떠올랐다.
천화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유협은 침대에 기대서 꾸벅꾸벅 졸았다. 아까 그 노랫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천강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산산이 부서지며 깨졌다. 어두운 방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가 흩어졌다. 뒤죽박죽한 꿈 사이로 유협은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창호지 밖에 있었는데 그림자가 이상했다. 아주 둥그런데 무언가 여러 개 꽂혀 있는 모습이었다. 또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마룻바닥을 걸어 다녔는데, 어쩐지 유협은 원래 저것이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상한 물체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냄새가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무엇인가 하던 유협은 그게 피 냄새임을 알았다. 점점 진해지는 악취에 참지 못한 유협이 창호지에 가까이 다가가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게 이마에 똑 떨어졌다.
“윽…….”
눈을 뜨자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천화가 그를 보고 있었다. 거기서 물방울이 떨어져 유협의 이마를 적셨다.
“졸려?”
“천화 님.”
유협이 습관처럼 손을 뻗어 천화의 목을 껴안았다. 천화가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도 거뜬하게 유협을 받쳐 안아 주었다.
“졸리면 자자.”
“저도 씻어야죠.”
유협은 쪽 소리 나게 천화에게 입맞춤하고 몸을 씻은 다음 돌아왔다. 천화는 그사이에 머리를 정리하고 침대 한편 앉아 있었다. 아까 극을 볼 때 화를 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유협은 천화가 비워 둔 자리에 앉아 단단한 천화의 등을 껴안았다.
“피곤하세요?”
“아니. 그대는?”
“조금 피곤하네요.”
그러자 천화가 몸을 돌려 유협을 제대로 껴안아 주었다. 천화가 통통한 입술에 입 맞췄다. 아쉬운 듯했지만 짧고 깊은 입맞춤에서 배려가 느껴졌다. 유협은 그의 어깨에 뺨을 대고 비비다가 자신의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화에게 어서 누우라고 자리를 팡팡 쳤다. 그 손길에 천화가 미소 지으며 눕자 유협은 그대로 천화를 껴안았다. 껴안았다지만 사실은 거의 안겨드는 손길에 천화가 유협의 허리를 꼬옥 안았다.
“내일 뵈어요.”
“잘 자.”
곧 입맞춤 몇 번이 떨어지고 촛불이 꺼졌다. 천화는 유협이 무겁지도 않은지 매번 그를 껴안은 상태로 잠을 자곤 했다.
그래서 유협은 숨을 죽이고 천화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숨소리를 조절하며 잠든 척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천화는 빠르고 깊게 잠드는 사람이었기에 유협은 그저 고요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래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세 식경은 기다린 후에야 유협은 목소리를 키웠다.
“천화 님.”
일부러 평소의 목소리로 불러 봤으나 천화는 대답도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유협은 슬그머니 천화의 손을 밀어 내고 좀 더 바짝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 다가가는 수준을 넘어서서 얼굴과 얼굴의 틈이 종이 한 장 들어갈까 말까 하게 가까이 붙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까 천화의 살기와 함께 느꼈던 싸늘한 기운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귀신 중에서도 악질 귀신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그러나 그런 귀신이 갑자기 나타날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이 이미 천화와 함께 산 지 한참이 되었는데, 귀신이 붙었으면 진작 알았으리라. 그러니 이 귀신은 최근에 붙었다고 봐야 옳았다.
유협은 조심스럽게 천화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눈과 눈을 맞대게 했다. 이런 간단한 주술이라면 천화가 보는 세상을 잠시나마 훔쳐 올 수 있었다. 유협이 눈을 뜨자 눈빛이 황금색으로 변했다. 유협은 황금색으로 변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이상이 있다면 분명히 천화 눈에는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보는 시야와 다를 게 없었다. 착각이었나? 하지만 분명 죽은 자의 섬뜩한 악의가 느껴졌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악랄한 감정.
유협은 이제 천화의 숨결을 확인했으나, 거기서도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유협은 천화의 옷으로 손을 옮겼다. 잠자리 내의를 한 손으로 풀어헤쳐 열어 보자, 평소에 유협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단단한 가슴이 나타났다.
저 묵직한 몸에 눌리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알고 있어서 괜히 침이 꿀꺽 넘어갔다. 하지만 오늘 잠자리를 거부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아닌가. 흐르는 침을 닦고 유협은 꼼꼼하게 근육질의 몸을 살폈지만 여전히 별다를 게 없었다.
유협이 찾는 건 썩어 가는 피부나, 피로 물든 문장, 무언가를 자신의 몸에 욱여넣고 꿰맨 자국 등등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천화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굳이 하의를 헤쳐 볼 마음은 들지도 않았다.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는 몸에서 색다른 무언가가 발견될 리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뭔가 있었다. 유협은 잠든 천화에게 속삭였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해 주세요.”
마치 천화에게 말하듯 유협이 유려하게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했다.
실상은 그 몸에 들어 있을 수도 있는 귀신에게 거는 말이었다. 마침 무장이었으니 손에 피를 묻혔겠다, 귀신이 들어오기 좋은 환경이 됐으리라. 이는 혹시 악귀가 천화의 몸속에 있을 수 있단 뜻이었다.
유협이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으나, 천화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건 없었다. 그저 고요하게 쌕쌕거릴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유협은 한숨을 쉬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유협은 재빨리 뒤를 돌아 천화를 봤다. 천화는 다행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유협은 빠르고 큰 걸음으로 자신의 경대 앞으로 향했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서랍을 열자, 그 속에서 남성용 비녀가 여러 개 굴러 나왔다.
유협은 비녀를 한 번에 쥐고 달빛에 비춰 보았다. 개중 가장 적절한 건 검은 구슬이 달린 얌전한 비녀였다. 끝이 가장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나머지는 다시 서랍장에 넣고 유협은 한숨을 살짝 쉬었다.
묘족의 술법들은 귀신에게 참 잘 먹혔다. 그러나 딱 하나,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는 피를 봐야 했다. 누군가 보면 참 아픈 걸 좋아하는 족속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속으로 한탄하며 유협은 길쭉한 손가락을 잠시 바라봤다.
천화가 잡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손인데…….
새삼 자신의 손을 아기 새처럼 붙잡는 천화가 애틋했다.
‘내가 꼭 구해 주고 만다.’
어떤 악랄한 놈이 걸렸든 단단히 혼을 내고 쫓아낼 생각이었다. 유협이 추측하기로는 지나가던 귀신이 천화의 피 냄새에 끌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천화가 보통 매력적인가. 그래서 묘족인 자신이 옆에 떡하니 있음에도 달라붙은 거다.
그렇게 전제하고 술법을 시작했다. 술법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유협이 정작한 건 쭈그려 앉아서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이빨로 피가 날 때까지 찢어 내는 것이었다. 요령이 생겨 송곳니로 짓이기자 곧 짜고 비린 맛이 입에 느껴졌다.
그 상태로 유협은 앉은 자리에서 둥그런 원을 그렸다. 그리고 부적에 비방을 적듯 빠른 속도로 글을 적어 나갔다. 채 한 식경이 지나기도 전에 마루 한쪽에서 피 냄새가 흐리게 났다. 유협은 마지막 글자를 적고 나서, 비녀 역시 피 칠갑을 만든 후 가운데에 꽂았다.
그리고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채 세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방 안에 거대한 바람이 몰아쳤다. 머리카락까지 휘날리는 바람에 마치 유협의 방에만 돌풍이라도 몰아친 것 같았다. 실내에서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은 곱게 잠들어 있던 천화마저 깨웠다.
인상을 쓰고 일어난 천화는 문득 옆자리에 유협이 없는 것을 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다행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유협은 방 한쪽 구석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안도한 천화가 이름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화 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유협이 물었다. 천화는 움찔했다. 다른 게 아니라 뒤를 돈 유협의 얼굴이 너무나 창백해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유협이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걱정된 나머지 천화는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도 멈추고 유협의 말에 집중했다.
“무슨 말이지?”
그러나 집중은 오래 가지도 못했다. 어둠 속에서 문득 피 냄새를 느낀 천화가 유협의 오른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대 손에서!”
벌떡 일어난 천화가 한 걸음 내딛자 유협이 꾸욱 손을 쥐었다.
“천화 님. 이 저택 자리가 한때 공동묘지였나요?”
“무슨 소리야. 청원 한가운데에 공동묘지가 있을 리가 없잖아.”
천화가 다가가며 유협에게 손을 달라고 까딱였다. 유협의 상처 때문에 머리가 올올이 설 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제는 숫제 피 냄새가 코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멍청한짓을 한 건지. 욕설을 짓씹으며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유협이 울적하게 말했다.
“천화 님. 아까 그 바람은 비명 소리에요.”
“뭐?”
“제가 쓴 건 귀신이 집에 붙었나 알아보기 위해 쓰는 주술이에요.”
순간 천화가 입을 다물었다. 유협은 가만히 피가 떨어지는 손을 보았다. 천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유협의 귀에는 사람들의 절규가 들렸다.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요.”
유협이 중얼거리며 비녀를 놓아 버렸다.
피에 젖은 비녀가 툭 떨어지는 걸 보니 천화는 할 말이 없어서 잠시 가만히 있었다. 천화는 그 비명의 정체를 알았다. 생귀신이다. 설마 천화도 그만큼 많이 붙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제와 밝히는 건 전혀 선택지에 없었다.
다행히 유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언지 몰라도 제 앞에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리하게요.”
“그렇군.”
“한동안 이 녀석을 쫓아서 내보내야겠습니다.”
“아냐.”
천화는 드디어 고개를 저으며 유협의 손을 잡았다. 이제 흐르는 피가 소매를 적시고 있는 손을 보자니 천화의 속 안에서 무언가 울컥 터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나는 그대가 이러는 꼴을 또 볼 수는 없어.”
“제 피 몇 방울보다 사람 목숨이 중합니다.”
“내 생각과는 다르군.”
“천화 님.”
유협이 조금 난처한 듯 천화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천화가 챙겨 주는 것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천화는 진심으로 속이 상해, 짓씹어진 손가락을 보았다.
“이러다 손톱 빠지겠어. 좀 살살 물어.”
“옛날처럼 차라리 칼을 가지고 다닐 걸 그랬어요.”
유협의 태평한 말에 천화가 찌릿 눈초리를 세우고 노려봤다. 유협은 귀여운 약혼자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어 냈다. 그리고 천화에게 잡힌 손을 조르듯 흔들었다.
“이런 귀신은 일반인은 상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처리하는 게 가장 빨라요. 저택의 누군가를 해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들어온 귀신인 건 모르는 거야?”
유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추측으로는 천화를 따라온 것 같았지만, 이만한 귀신이 천화 한 사람만을 뒤따르는 건 말이 안 됐다. 분명 다른 일이 있을 터였다.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저택에 술사를 부르겠어. 그대는 신경 쓰지 말고 악사의 노래나 들어.”
“하지만 천화 님.”
천화는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몸짓이었다.
“한 번만 더 그대의 몸에 손을 댄다면, 용서하지 못할 거야.”
“제가 무슨 보물이라도 된답니까?”
살 한 덩이에 금화 한 닢도 아니고, 기가 막혀 유협이 물었다. 그러나 천화는 대답 대신 자신의 비싼 침의를 쭉 찢어 냈다. 유협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그가 상처를 부드러운 천으로 감아 꾹 눌렀다.
천화가 조금 냉정하게 말했다.
“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 문제지. 아파도 조금만 참아.”
그리고 유협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위를 지키고 있던 노비 두 명이 다가오자 천화는 가서 의원을 데리고 오라고 명했다.
“손을 다친 거니 고약을 반드시 가져오라 전해.”
이쯤 되니 유협도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시무룩해진 그를 붙잡고 천화가 물었다.
“왜 한밤중에 혼자서 이런 일을 한 거야? 뭔가 느꼈어?”
“……네.”
“그럼 나를 깨워도 되잖아.”
“미묘한 문제라, 물어보는 것보다는 직접 알아보는 게 빠릅니다.”
“피를 내서 말이지?”
비비 꼬인 말투에 유협이 항복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노래를 들을 때 이상한 기운이 들어서 찾아보려 한 겁니다.”
“그럼 나와 함께 있을 때 할 수는 없는 거야?”
천화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천화는 분명 자신이 원인임을 알고 생귀신이 붙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숨겨야 할 문제지만 진심이었다. 만약 유협이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면 분명히 알아낼 터다. 그럼 차라리 자신이 깨끗하게 도와주고 싶었다.
“나한테 부탁했으면 되잖아.”
“천화 님이요? 제 손가락을 긋겠다구요?”
유협이 약간은 비웃는 투로 말했다. 발끈한 천화가 반박하려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유협이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며 피를 좀 내달라고 한다면 천화는 절대 안 된다고 하며 하지 말라고 조르기만 할 터였다.
“그래도 숨어서 하는 건 그만둬.”
“숨은 건 아니지만, 알겠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는지 천화가 미간을 문질렀다. 한밤중에 난리굿을 부린 샘이 되어 유협도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은 천화에게 결국 유협이 먼저 사뿐히 걸어갔다. 그가 천화를 도닥거렸다.
“천화 님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뭐?”
이번엔 천화가 놀랄 차례였다. 그가 눈을 깜빡거리며 유협을 바라봤다.
“잡스러운 기운이 아니라 정말로 악랄한 기운이 주변을 떠돌고 있어서, 천화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이 돼서…….”
유협이 슬그머니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 따뜻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유협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천화가 단단히 그를 껴안고 목덜미에 이마를 댔다. 속상했던 마음이 따뜻하게 젖어 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걱정됐어?”
“……네.”
당연하죠. 유협이 뒷말을 이어 붙이자 천화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대가 너무 걱정돼. 손가락에 피만 봐도 싫어. 그러니까 내 말을 따라 줘, 응?”
“알겠습니다. 대신 실력 있는 사람으로 데려오셔야 해요.”
“방을 써 붙이는 건 형원이 할 테니, 면접은 그대가 봐.”
천화가 애정의 표시로 목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유협은 큰 개에게 물리는 사람마냥 천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날 밤 소동 때문인지 두 사람은 늦잠을 잤다. 사실 천화는 잠에서 일찍 깨어났지만, 붕대가 감긴 손가락을 쳐다보았다가 유협을 보았다 하느라 제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이보다 더한 상처도 물론 봤지만 이만큼 가슴을 저리게 한 상처는 처음이었다.
천화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붙은 귀신이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유협이 귀신을 떼어 내려고 할 것은 알았으나, 설마 그 이유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 줄은 몰랐다. 당장 유협이 사실만 알아차려도 그를 비난하겠지만, 천화는 못내 그게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잠든 유협의 얼굴을 보다가 천화가 붕대가 감긴 손에 입을 맞췄다. 유협은 그를 사랑했다. 그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평생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던 존재가 드디어 천화의 마음을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천화는 오늘따라 유해진 상태로 아침을 맞이했다. 심지어 잠에 조금 취한 유협이 천화가 어디에 입을 맞추건, 어딜 만지건 순순히 껴안아 주었기 때문에 더욱 행복했다. 야들야들한 몸을 실컷 주무르고 나자 유협이 그제야 좀 잠에서 깬 눈을 했다.
“천화 님, 안 피곤하세요?”
깐 달걀처럼 매끈한 얼굴을 보면서 유협이 필요 없는 질문을 했다. 천화는 상냥하게 웃어 보이며 유협의 눈을 다시 감겨 줬다.
“조금 있다가 일어나면 악사를 방으로 불러서 놀도록 해.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네에…….”
잠들어 가는 목소리가 작았다.
그것마저 너무 귀여워서 천화는 반쯤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대문을 나섰다. 원래라면 소연을 철저히 감시하라고 명령했겠지만, 이제 악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천화가 떠난 유협의 일과가 뭐 대단할 게 있을까. 유협은 점심쯤 일어났다. 너무 많이 자서 그런지 머리가 아팠다. 본래는 움직이는 걸 좋아했는데, 어느새 귀족처럼 시간을 허공에 뿌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에게 언짢음을 느낀 유협은 바로 악사를 데려와 달라 부탁했다.
소연은 그날 밤 일이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른 채 날을 새웠다. 푹신한 침대와 호화로운 저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분명 잘나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높은 분이 역정을 내서 분명 죽을 판이었다. 그 검은 머리가 말려 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고 감이 왔다.
내가 뭘 잘 못 했냐고, 인생 참 엿 같다, 생각하다가 날을 꼴딱 새운 소연에게 사라가 찾아왔다. 그리고 두려운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 귀한 분이 노래를 듣고자 하시니 따라오시게.”
어제보다 백배는 더 차가워진 것 같은 사라가 말했다.
소연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억울해서 가슴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텐데……. 첫 번째 기회가 있었다고, 두 번째도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소연은 눈을 딱 감고 차가운 시종에게 물었다.
“저, 어르신. 제가 어제 실수한 점이 있을까요?”
그 말에 힐끗 사라가 악사를 쳐다봤다. 그러다 순순히 입을 열었다.
“어딜 감히 그런 천박한 노래를 배워서 불렀나. 그러니 당연히 괘씸하게 여기시지.”
“천…박이요. 아…… 예.”
소연은 벙쪄서 대답했다. 이 노래는 길거리에 널리 퍼진 것으로 소연이 뼈대는 그대로 두고 잔가지만 조금씩 바꾼 것이었다. 저잣거리의 아이들도 아는 이야기를 천박하다고 화냈다는 건가. 높으신 분들은 정말 이상하구나.
비파를 껴안은 소연은 괴팍한 높으신 분을 만나기 위해 안뜰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천상계 사람을 보았다. 어제는 멀어서 확인이 잘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눈에 띄더니, 지금 방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은 차분한 서생 같기도 하고 옥황상제의 서기 같기도 했다. 오목조목한 얼굴은 그만으로도 빛이 났다.
‘어제 날 살려 준 사람이 이 사람이지.’
소연은 숨을 흡 들이키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눈치를 보아 여기서 절을 올리고 감사를 표하면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 같았다.
유협은 재빠르게 일어나라고 명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올리고 봐도 참으로 잘생긴 얼굴이라, 소연은 괴팍한 귀족과 유협의 얼굴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해 괴로워졌다.
유협이 먼저 말을 꺼내 물었다.
“어제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왔는데 고생을 참 많이 해서 미안하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아…… 아닙니다, 나리. 이것의 이름은 소연이라 합니다.”
“소연아.”
유협이 입을 열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심장이 바닥끝까지 떨어지는 줄 알았다. 얼굴만 봐도 즐거운데 이름까지 불러 주자, 자신의 하잘 것 없는 존재가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모든 귀족이 이렇기만 했어도 떠돌이 악사 따위는 없었을 터다. 얼굴이 이렇게 재밌는데…….
소연이 딴 생각에 몰두할 때 유협이 말을 이었다.
“어제 이야기가 두 가지 더 있다고 했지.”
“예, 나리.”
“그걸 좀 듣고 싶구나.”
유협이 생긋 웃었다. 누가 봐도 유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 앞에서 그런 노래를 불러서 천박하다는 건가? 소연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나리께서 듣고 싶다면 당연히 연주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잣거리 이야기다보니 천박하여 나리께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흡하나마 풍월 설화나 난백요를 들은 적이 있으니 그건 어떠신지요?”
그 말에 유협은 고개를 갸웃했다. 난백요나 풍월 설화는 글을 깨나 읽은 귀족을 위한 노래로, 글자와 거리가 먼 유협으로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실 소연도 완벽하게 해낼 자신은 없었다.
유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를 나리라 칭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저잣거리에 가까운 사람이다. 어려워하지 말고 어제 하려던 이야기 중 하나를 해 다오.”
설마 저 얼굴로 말 타고, 매사냥하고, 활쏘기가 취미일 줄은 예상도 하지 못한 소연은 망설였다. 머리를 굴려서 남은 이야기 속에서 선정적인 장면을 재빠르게 훑어봤다.
장군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색정적이고 우스운 부분이 많아서 전체적으로 수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소연은 냉큼 고했다.
“그럼 귀신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게 궁금했다.”
유협이 웃으며 말했다. 괜히 귀신도 보지 못하는 남족을 놀리려는 게 아니었다. 남족이 보는 귀신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소연은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처음에 가난한 집에 사는 노모와 아들의 이야기가 등장했다. 생각보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에 유협은 빠져들었다. 뒷산 묘지에서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부분에서는 나름 이유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듣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소연은 악사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서 노래를 계속 불러야 했다.
그래서 유협은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찻잔에 차를 가득 채워 두고 소연에게 손짓했다. 얼핏 유협의 마음을 읽은 소연이 천천히 이야기를 끊고 냉차를 받아 마셨다. 속이 시원하고 머리가 깨는 느낌이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나가는 터라 유협이 물었다.
“언제부터 길거리 악사였느냐?”
“소녀 기억나지 않지만 소리꾼인 아버지를 세 살부터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지금은 몇 살이냐.”
“열여섯입니다.”
생각보다 더 어린 나이에 유협은 속으로 놀랐다. 게다가 자기 사정 때문에 소연은 어제 기겁하지 않았나. 괜히 저 어린 것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든 게 미안하기도 했다.
“이제는 아버지와 다니지 않고?”
“아버지는 어느 산골에서 발을 헛디뎌…… 더 이상 운신이 쉽지 않으십니다.”
“그럼 어머니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소연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또 아팠다. 유협은 인상을 쓰다가 물었다.
“그럼 평생 거리를 헤매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다녔느나?”
“소녀 가진 재주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서…….”
유협이 닦달한다고 느꼈는지 소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협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여자아이가 저잣거리를 홀로 떠도는 것도 위험한데, 아픈 아버지까지 있다니 마음이 좋지 않구나.”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소연은 경계심을 품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협은 톡톡 자신의 턱을 두드리다 물었다.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면 하루에 얼마쯤 벌어들이느냐?”
“하루에 좋으면 은자 두 냥, 좋지 않을 때는 아예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 하루에 은자 세 냥을 벌 수 있다고 하면, 이 집에서 일을 할 것이냐?”
순간 소연의 눈이 커졌다. 세 냥이라니 생각해 보지도 못한 수입이었다. 소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이것은 알지 못하는 노래가 많아서 아직은 모자란 몸입니다.”
“무얼 그렇게 신경 쓰느냐. 이 저택이 조용한 게 보이지?”
유협이 자신과 소연 외에는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저택을 손짓했다. 겉과 속은 으리으리했지만 유협은 종종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홀로 전각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경할 만큼 외로웠다. 물론 천화가 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가 계속 함께할 수는 없었다.
“내 말벗도 해 주고 이야기도 해 준다면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 같구나.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연은 입을 뻐끔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저택이 처음에는 무섭기 그지없었다. 어제 당장 매질을 당하고 쫓겨날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지금 보니 이쪽 주인은 온화하고 성격이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실제로 외롭기도 하겠지만 척 봐도 소연의 사정을 봐주려는 게 느껴졌다.
소연은 잠긴 목을 큼큼거리며 물었다.
“저따위를 말벗으로 삼아 주시려는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젯밤 나리가 두 분 이시던데 그분께도 노래를 해 드려야 할까요?”
돌려 말하긴 했으나 소연이 하고 싶은 말은 ‘너희 무슨 관계냐’였다. 만약 이 남자가 그 갈색 머리 남자의 비서쯤 되면 소연은 그냥 자리를 거절할 생각이었다. 주인이 행패를 부릴 때 말려 주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목숨이 위험할 곳이었다.
“아…… 어젯밤 일을 마음에 두고 있구나.”
유협이 상냥하게 말했다. 속을 간파당한 기분이라 소연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는 이 저택의 주인이다.”
아, 그래서는 안 된다. 저택의 주인이 갈색 머리 남자라면 정말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이 있을 터였다. 정말 아쉽지만 거절해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유협이 말했다.
“나는 그의 약혼자고.”
그 말에 바닥으로 점점 향하던 소연의 고개가 팍 올라갔다. 유협은 소연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어제는 정말 미안하게 됐다. 네가 한 이야기 중에 듣고 싶지 않았던 게 있어서 주인이 그리 화를 낸 것이란다. 그러나 평소에는 온화한 사람이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평소에는 온화한 사람……? 그런 사람이 한순간의 살의로 도자기 잔을 부술 수 있나? 의아했지만 소연은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받아만 주신다면야 충심을 다해 노래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유협이 사라에게 손짓했다. 뒤에 서 있던 사라가 냉큼 다가왔다.
“배고플 테니 상을 차려 주고 앞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나면 들여보내도록 해라. 숙소는 지금 쓰는 곳으로 잡아 주고.”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생긴 꿈만 같은 일에 소연은 눈을 빛내며 사라를 뒤쫓아 갔다.
첫날 그 남자 소리꾼이 같이 가자고 윽박질렀을 때 거절하기를 정말 잘했다. 은화 세 냥이면 쌀도 사고 아버지를 치료할 수도 있었다. 여태껏 빠듯했던 생활비가 한 번에 충당되는 것이다. 콧노래라도 부르려던 소연은 문지방을 넘자마자 사라에게 붙잡혔다.
“어…… 어르신?”
“잘 들어라. 저 분은 주인께서 가장 위하는 분으로 한 치의 어리석음도 없이 꼼꼼하게 모셔야 할 것이다.”
“네, 네. 물론입니다.”
“거짓이 아니다. 만약 저분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으면, 네 목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아라.”
일을 조금 쉽게 생각하고 있던 소연이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사라는 가엾은 목숨 하나 구하고자 마지막으로 조언을 하나 덧붙였다.
“주인께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명이다. 그 외에 다른 생명은 딱히 다르게 대하지 않는 분이니 내 말을 명심해라.”
“……네.”
소연이 기가 죽어 대답했다. 아무래도 신입 기죽이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라는 이만하면 조언을 잘해 줬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소연의 거처는 천화의 저택에 있었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파악할 터였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유협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하루 만에 알게 될 거다.
사라는 소연에게 손님방을 내주고 식사를 시켰다. 그리고 앞으로 유협과 말할 때 주의할 점과 그의 여러 사항들을 설명해 주었다.
소연은 유협이 사실은 묘족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체해서 죽을 뻔했다. 사실상 수도에 올라와 있는 묘족은 과거 천강의 아내뿐이었다. 즉 자신이 떠벌린 이야기는 유협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숟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소연은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그렇다면 이 집의 주인은 육 황자라는 거다. 등 뒤에 소름이 쭉 끼쳤다. 왜 그렇게 황자가 화를 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유협의 자비로움을 깨치며 소연은 새로 만난 주인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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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애를 들였다고?”
“네. 아, 아얏. 천화 님 좀…….”
“도대체 그대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네.”
“하…… 지금 마음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한 번의 정사를 끝내고 유협과 천화는 이부자리에 누워 서로를 껴안은 자세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입맞춤을 핑계로 야금야금 씹힌 입술이 아팠다. 유협이 어깨를 밀어 내자 천화가 순순히 밀려나며 물었다. 소연 이야기로 더 이상 귀찮게 할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천화가 바라보는 곳이 손가락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손가락은 좀 어때.”
“어떨 게 뭐가 있나요. 그냥 그렇습니다.”
“왜 더 빨리 안 낫는 거야.”
천화가 싸늘하게 유협의 손가락을 보았다. 붕대가 얇게 붙어 있는 손가락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괜히 의원을 데리고 와서 이리저리 고집을 부려 댈까 두려워진 유협은 천화가 잔소리할 기미를 보이자 재빠르게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아직은 술사들이 몇 찾아오지 않았나 봅니다?”
“아니.”
천화가 유협의 아프지 않은 손들을 주물럭거리며 말했다.
“제법 왔다가 묘족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고 하더라고.”
“괜한 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묘족이 있다는 말에 옳다구나 할 남족의 술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 일에는 끼어들게 하지도 못하면서. 유협이 투덜거리자 천화가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차라리 실력 없는 것들을 거르고 시작하는 거니 나쁘지 않아.”
유협은 천화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어두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보통 기운이 아니었는데. 하루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알았어. 그렇게 말해 두도록 할게.”
천화가 유협을 끌어다 제 무릎에 또 앉혔다. 아마도 유협을 제 무릎에 앉히는 게 새로운 취미 생활이 된 듯했다. 유협은 한숨을 쉬면서 천화의 머리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쪽 천화가 가볍게 입맞춰 주며 유협의 내의 사이로 손을 넣었다.
부드러운 손이 가슴을 쓸어내리다 튀어나온 유두에 걸렸다. 유협이 윽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리자 천화가 팔에 머리를 비벼 왔다.
“또 하실 거예요?”
“해도 돼?”
천화가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어제는 자신이 주술한다고 피하느라 아무런 행위 없이 잠들었다. 유협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화가 조심스럽게 그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
포근한 천화의 향기가 유협을 감쌌다. 잠결에 유협은 미소를 흘리며 손을 뻗어 천화를 감싸 안았다. 아니, 안으려고 했다. 무언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 강하게 누르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터다.
침대에 파고들 정도로 손목이 꽉 잡혔다. 유협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거기엔 천화가 있었다.
“천…화?”
유협은 잠기운에도 자신을 붙잡은 천화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애썼다. 그러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제대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유협의 손목을 아프게 잡고 있는 천화의 긴 손가락이 차가웠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생각을 하자 퍼뜩 잠이 깨어났다. 동시에 유협은 천화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건 천화이되 천화가 아니었다. 분명 그 아름다운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나 눈은 충혈된 듯 붉었다. 입술 역시 피라도 머금은 것처럼 새빨겠다.
무엇보다 그 시선. 정신없이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유협을 발끈하게 만들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무슨, 떨어…….”
떨어지라고 화를 내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불쑥 다른 팔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유협의 입을 틀어막아 베개 위로 꽉 눌렀다. 역시나 시체처럼 차가웠다. 팔이 잡히고 입을 막힌 상태에서도 유협은 겁먹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어떤 손이 무릎을 잡아 왔다.
평정심을 유지하던 가슴이 오싹해졌다. 이런 일이 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그때 일은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결코 좋은 추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신경도 안 쓴다는 것처럼 손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벌려 왔다.
유협은 버둥거리다 못해 무릎을 붙잡은 상대를 걷어차려 했으나 허공뿐이었다.
‘손 빼고는 실체가 없구나.’
여기서 그나마 완벽하게 실체를 유지한 건 천화의 모양을 본뜬 귀신이었다. 나머지는 유협을 압박하고 있는 손이 전부였다. 유협은 애써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보았다.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거친 손은 네모난 손톱이 모두 깨져 있었다. 손끝은 파랗게 썩어 가며 시취를 풍겼다. 누군가의 주술이 아니었다. 분명 시체였다.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손만 뚝 떨어트려 가져온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유협은 입을 틀어막는 큰 손에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대체 왜 팔만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과거 때문인지 다가오는 손길에 소름이 꼬리뼈까지 타고 올라왔다.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졌다.
‘설마 색귀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바지와 속옷이 벗겨졌다. 유협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소리를 냈지만 새어나가지 못했다. 새벽까지 천화의 것을 품고 있었던 아래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또 다른 손은 그걸 눈치채고 있었는지 거침없이 안을 파헤치고 들어왔다.
늘 배 속에서 받아들이는 천화의 그곳은 버겁지만 따뜻했다. 천화과 함께 연결이 이어지면 절로 신음이 터졌다. 고통과 아픔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협은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이윽고 배가 맞닿을 정도로 꽉 들어갔을 때 충족감에 몸이 떨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천화는 유협의 손목을 잡고 침대에 누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유협은 아래가 억지로 벌어지는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누군가 묘지에서 떼어온 것 같은, 역시나 그런 시체 손이 아래를 쑤시고 있을 터였다.
유협이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역겨움에 몸을 부르르 떨자, 갑자기 천화가 고개를 숙여 왔다. 두려울 정도로 새빨간 입술이 각도를 맞춰 서서히 유협의 입술과 닿아 왔다. 어느새 유협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은 없었다. 고개를 비틀어 피하려고 했지만 기어코 입이 맞닿고 말았다.
귀신이 붉은 입을 벌려 유협과 입을 맞췄다. 마치 잡아먹는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새빨간 혀가 색정적이기 그지없었다. 혀를 빠는 소리가 귓속에 울려 유협은 눈을 꾹 감았다. 귀신의 혀는 사람보다 더 길었다. 혓바닥이 목구멍을 찌르는 느낌에 유협은 몸부림쳤다.
유협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 천화의 입맞춤에서 벗어났다. 저절로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귀신은 화내지 않았다. 대신 미묘하게 웃었다. 마치 지을 수 있는 표정이 그것뿐인 것처럼. 그러는 사이 차가운 손이 유협의 성기를 붙잡았다.
“이런 미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놀라운 건 그 말에 천화가 웃으며 답했다는 것이다.
“왜 좋아하잖아.”
이렇게 요도를 주무르면 줄줄 싸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동시에 손길이 기둥을 돌리며 요도를 만지작거렸다. 지끈거리는 자극에 유협은 이를 악물었다. 눈을 질끈 감자 천화가 귀에 속삭였다.
“여태는 못 해 봤던 걸 해 줄게.”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가락이 구멍을 다시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마치 유협이 느끼는 부분이 어디인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숨에 내벽을 짓눌렀다. 저도 모르게 입이 벌려졌다. 눈앞이 반짝거릴 정도로 괴로웠다.
“그만…… 그만.”
“왜. 넌 이런 거 좋아하잖아.”
“싫어, 아니야.”
유협은 가열차게 고개를 저었다. 순간 차가운 손이 귀두를 꾹 눌렀다. 유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안이 쑤셔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애타는 신음을 뱉어 버렸다.
“참지 마.”
천화가 친절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두 손이 자유가 되었지만 유협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유협이 헐떡거리는 소리 역시 방 안을 울렸다.
“갈 때까지 못 끝나.”
천화가 상냥하게 말했다. 제정신처럼 보이지 않는 것 치고는 제법 이성적이였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유협이 저도 모르게 벅차게 올라오던 오르가슴을 놓아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하…… 하읏”
백탁액이 튀어 흘러내렸다. 낭패라는 기분과 동시에 이제는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기 무섭게 안을 쑤시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숫제 쿨쩍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말도 안 되게 무언가 축축한 점액질이 흘러나와 구멍 안을 적시고 있었다.
“착하다.”
천화가 유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왜?”
유협이 간신히 묻자 귀신이 웃었다.
“넌 우리 거라서.”
“우리가, 누군데…….”
하지만 질문의 답은 듣지 못했다. 마치 구멍을 푸는 건 이걸 위해서였다는 것처럼 무언가 두꺼운 게 유협의 아랫배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손가락이 빠져나간다 싶더니 갑자기 구멍에 묵직한 것이 닿았다. 틀림없이 누군가의 물건이었다.
말도 안 돼, 말을 채 하기도 전에 두꺼운 윗부분이 젖은 구멍을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반되는 고통에 유협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군가가 위로 잡아 고정시킨 무릎 덕분에 성기가 천천히 뱃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름까지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좆 때문에 유협은 토할 것 같았다.
이건 마치 강간이 아니라, 누군가 인형 놀이를 하듯 유협을 강제로 잡아 성관계를 시키는 것 같았다. 귀신들과 기꺼이 어울리는 그림을 억지로 만드는 것이다.
성기가 유연하게 작은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까 젖었던 부분에서 쿨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부터 갑자기 움직이려는 몸짓에 유협이 퍼뜩 놀라자 천화가 그를 토닥여 주었다.
“곧 있으면 익숙해 질 거야.”
“곧…… 이 언젠데.”
유협이 이를 악물고 묻자, 천화가 물건이 들어오고 있는 배를 꾹 눌렀다.
“하지 마!”
“두렵지 않을 때가 올 거야.”
천화는 기어코 손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꿈틀거리는 성기가 배 끝까지 치받자 숨이 막혔다. 차가운 손이 배를 누르자 내벽이 긁히는 감각과 압박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유협이 아는 성관계란 이런 게 아니었다. 입 맞추고, 껴안고, 파고들어 하나가 되는 일이었다. 절대로 익숙해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마침내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성기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협이 느끼는 부분은 물론이고, 한참 위까지 올라와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갑자기 속도를 빠르게 해 쾅쾅 부딪힐 때면 유협은 비명과 함께 몸서리쳤다.
하지만 반대로 속도를 천천히 줄여 내벽을 슬슬 문지르기만 해도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쾌락이 너무 심해서 죽고 싶을 정도였다.
“제발, 제발 그만.”
마침내 유협이 천화의 소맷자락을 잡고 애원했다. 그는 힐끗 아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야.”
“언제까지인데?!”
“네가 정액을 품을 때까지.”
그 말을 듣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 말은 사정할 때까지 이 고문을 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네가 노력하면 일찍 끝날 수 있다는 거 알잖아.”
천화가, 아니 귀신이 느긋하게 말했다.
유협은 입술을 악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귀신에게 사로잡힌 것만 해도 분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천화와 신뢰를 깨고 이따위 일에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천화가 웃었다.
“괜찮아. 네 안이 어지간히 좋아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성기가 뱃속을 찢어 낼 것처럼 들어왔다. 유협은 결국 얼굴을 가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내려 눈초리를 적셨다. 고통과 쾌락이 번갈아가는 어느 순간 갑자기 성기가 떨렸다. 곧 아주 차가운 액체가 배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유협이 몸서리 쳤다.
여태 유협의 배 위에 앉아 모든 일을 구경한 천화 귀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유협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곧 있으면 익숙해 질 거야.”
정말이야.
속삭임을 들으면서 유협은 눈을 번쩍 떴다. 새소리가 들렸다. 침대 휘장 너머로 황금빛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감각에 유협은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을 짓누르던 천화가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아니지.’
유협은 부스스하게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장로님은 늘 꿈은 꿈이지만, 꿈이 현실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밖의 햇살은 따뜻한데 유협은 춥기만 했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래를 더듬었다. 다행히 차가운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소름 끼쳐서 안심이 되지 않았다.
유협은 스스로를 껴안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괴상한 꿈? 이건 분명 귀신에게 휘말린 것이다. 유협이 귀신에게 당한 셈이었다.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그 말인즉슨 묘족을 짓누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귀신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가장 지독했던 귀신은 천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협은 곁눈질로 옆자리를 보았다. 당연하다는 듯 천화가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화는 어젯밤 한바탕 사랑을 나눠 아침까지도 잠들어 있었다. 금빛 햇살이 그의 얼굴을 화사하게 밝혔다. 곱게 감긴 눈은 속눈썹이 가지런했고, 조용히 내쉬는 숨은 안정적이었다.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유협은 그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마침내 시선을 느낀 천화가 눈을 떴다. 천화가 눈을 뜨는 광경은 기묘하게도 신성했다. 닫혀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맞닿아 있던 아래위 속눈썹이 떨어지며 밝은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짐짓 무심해 보였던 눈이 유협과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마치 불이 켜진 것처럼 천화의 눈에 금빛이 어룽졌다. 보지 않아도 눈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 훤했다.
“좋은 아침.”
천화가 툭 유협의 허벅지를 치며 말했다. 낮게 잠긴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유협은 평소처럼 고개를 숙여 쪽 하고 천화의 이마에 입 맞췄다.
“좋은 아침입니다.”
천화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있어?”
어제 잠자리 강도를 봐서 유협도 아직 잠들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유협은 희미하게 웃었다.
“잠자리가 불편해서요.”
“왜? 침대가 불편해?”
천화가 반쯤 취했던 잠에서 깨어나며 물었다.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꿈을 꿨어요.”
“악몽이었어? 무슨 꿈이었는데?”
천화가 몸을 일으켜 물었다. 유협처럼 머리가 부스스한 상태였지만 무척 진지했다.
“그냥 잡스러운 꿈이었습니다.”
“괜찮아?”
천화가 손을 뻗어 유협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에 차가운 손이 겹쳐서 생각났다. 절로 움찔하자 천화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가늘어진다.
“꿈속에 내가 나왔어?”
“아뇨.”
유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천화가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다. 그 모습에 천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손을 놓아주었다.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자 천화가 좀 더 자자며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얌전히 그 품에 안겨 천화가 다시 잠드는 소리를 듣는 유협의 눈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
무언가 있다. 유협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어제 그 귀신은 ‘우리’라고 스스로를 지칭했다. 그 말인 즉 귀신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유협은 주술을 썼던 날 밤에 들려온 거대한 비명 소리를 기억했다. 온 방이 흔들릴 정도로 악의에 찬 목소리들이 가득했다. 모든 게 다 착착 맞아 떨어졌다.
가장 큰 단서는 어젯밤 귀신이 나타난 모습이었다. 귀신은 다름 아니라 천화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목소리마저도 천화의 목소리를 본따 내고 있었으니 만약 귀신에 면역이 없는 남족이었다면 꼼짝없이 속았으리라. 천화와 황홀한 잠자리를 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왜 귀신은 천화의 모습을 썼을까.’
추측하기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유협을 위협하기 위해서 천화의 모습을 본떴을 수도 있다. 유협이 자신들의 잡으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가장 친숙한 천화의 모습으로 겁주는 거다. 하지만 이 가설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천강의 껍데기를 쓰는 게 낫지.’
유협이 성적으로 가장 두려워했던 상대는 천강이었다. 그런데도 천화를 선택했다는 건 개인적인 원한이 천화에게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추측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지금 이 저택에 쓰인 귀신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천화 한 명이서 그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살 리가 없다.’
이 정도로 원한을 쌓으려면 아마 사람을 동물처럼 잡았을 터다. 비록 천화가 전쟁터에서 활약했다고는 하지만 모든 상대를 죽이면서 지나치진 않았을 테니. 천화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원한이었다.
“주인님, 식사는 언제 올릴까요?”
점심이 넘도록 유협이 내의에 겉옷만 걸치고 정원을 왔다 갔다 하자 사라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천화는 유협이 한 끼라도 굶는 일에 굉장히 예민했다. 따로 보고를 받고 있으니 유협이 식사를 벌써 두 번이나 건너뛰었다는 걸 알게 되면 노비들의 무능함을 따질지도 몰랐다.
“입맛이 없으니 오늘은 괜찮습니다.”
“그럼 차를 올리겠습니다.”
유협은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아.’
이토록 많은 귀신이 한자리에 모여들 수 있던가? 귀신도 귀신 나름이라 원한을 가졌다가 스스로 풀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가기도 하면서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이 집에 넘치는 악령들로 봐서 여기서 매우 잔혹한 일이 있었거나, 잔혹한 일을 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더더욱 고민이었다. 묘족인 유협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귀신이 있을 수 있나. 마치 눈을 뜨고 장님이 된 기분이라 답답했다.
하지만 어젯밤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일도 있었다. 귀신들은 유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화를 내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천화의 모습을 하고 있고, 묘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색귀 노릇까지 했다. 그런 귀신을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유협은 풀리지 않는 생각에 빠져 사라가 떡과 차를 두고 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모습을 슬쩍 보던 사라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사라는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사람 둘에게 손짓했다.
“가서 악사를 데려와라.”
이대로 혼자서 골몰하게 두었다간 오늘 저녁까지 굶을지도 몰랐다. 적절하게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누구라도 하나 필요했는데 다행히 그 악사가 있었다.
소연은 본인 기준 호화로운 점심을 먹고 비파를 켜며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다. 서글서글한 성격상 시종들과 말을 트고 싶었지만 재수 없게도 이곳의 시종들은 소연을 본체만체했다. 마치 곧 죽을 사람 보는 것처럼 굴면서 어찌나 잘난 체하던지.
“지들은 노비면서.”
나는 적어도 양민이라고. 투덜거리면서 비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급한 일이 있다면서 호출당했다. 적어도 하루는 쉬게 할 줄 알았는데, 생각하며 가 보니 왜 급한 상황이라는지 알 것만 같았다.
유협은 소연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심각하게 생각에 빠져 있었다. 벌써 점심에서 저녁을 향해 가는 시간인데 아직도 내의를 입은 차림이기도 했다. 문득 섬망증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르신을 바라보자 사라가 조용히 설명했다.
“주인님께서 오전부터 생각에 잠겨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시네. 자네가 가서 식사하시는 동안 노래나 불러 보게.”
“아, 예.”
소연은 개인적으로 유협보다도 사라가 어려웠다. 고개를 숙여 사라에게 인사한 후 소연은 슬그머니 유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었다. 유협이 그래도 눈치채지 못하자 목소리를 슬쩍 높여서 인사를 올렸다.
“주인님, 소연이 왔습니다.”
멍하니 귀신, 천화, 살의, 살인을 번갈아 생각하며 피폐해져 가던 유협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곱단하게 차려입고 비파를 든 소연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순간 유협의 눈매가 유해졌다.
이제 열여섯이라지만 마치 어린아이 같은 소연이 앞에 서 있으니 한순간 분위기가 환기됐다.
“부르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냐?”
유협이 부드럽게 묻자 소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소녀 어제 은혜를 입었음에도 말씀 한마디 드리지 못한 게 죄스러워 오늘 저절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올리시라 하면 노래를 올리겠고, 필요하시다면 무슨 말씀이든 달게 듣겠습니다.”
제법 또랑또랑하게 말하는 소연의 모습에 몇 시간을 괴롭히던 잡념이 조금 수그러드는 기분이었다. 유협은 아픈 미간을 문지르다 문득 사라가 올린 식어 가는 차를 발견했다. 괜히 미안해진 기분이 들어 유협은 소연에게 물었다.
“식사는 했고?”
“네. 챙겨 주신 덕에 이것, 생전 걱정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잘 되었구나. 이리 와서 차를 좀 마셔라. 사라 미안하지만 상을 한 번만 더 봐주세요.”
“네, 주인님.”
사라가 못내 기쁜 얼굴로 사라졌다.
소연은 눈치를 좀 보다가 슬그머니 가서 상을 옆에 두고 앉았다. 상을 받는 자세로 앉으면 유협과 같은 신분이 되는 것 같아서 간이 졸렸다. 유협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질문을 던질 뿐이다.
“고작 하루 지났지만 저택 생활은 어때?”
여기서 재수 없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미주알고주알 떠들 성격이었으면 여태 거리에서 살아남지도 못했다. 게다가 따돌림보다 훨씬 좋은 따스한 침대에 황홀한 밥, 넘치는 돈을 받고 있으니 그깟 것 신경 쓰이지 않았다.
“생전 살아 본 중에 가장 좋습니다.”
순간 유협이 하하 웃었다. 본인도 늘 하던 생각을 소연의 입에서 듣자 아이가 못내 귀여웠던 탓이다. 유협의 웃음소리에 소연은 깜짝 놀랐다.
“놀라지 말거라.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서 그렇다.”
“네에.”
잠깐 웃음을 갈무리하던 유협은 문득 소연을 자세히 보았다. 조그만 덩치에 아직도 앳된 티가 났지만 곧 있으면 혼인을 치를 것이다. 묘족이었다면 한없이 어릴 나이였지만, 그도 남의 사람인 것이다. 그만큼 유협보다 남에 대해서 훨씬 잘 알기도 했다. 문득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느냐?”
“예?”
소연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인님께서 명하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내가 알기로 너는 본채 손님방에 머무르고 있지. 맞느냐?”
“네, 맞습니다.”
원래라면 시종들과 방을 썼을지도 모르나 유협의 말동무 상대라는 신분이라 손님방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그게 꽤 뿌듯해 소연의 목소리에 절로 힘이 실렸다.
“그렇다면 본채에 무슨 이상한 일이 생기면 말해 줄 수 있겠니?”
“네?”
이상한 일? 알아듣지 못하고 소연이 고개를 갸웃하자 유협이 하나하나 예시를 들어 주었다.
“갑자기 동물이 죽거나, 사람이 다치거나, 귀신을 보거나 하면 말해 주면 좋겠구나.”
“귀…… 귀신이요?”
노래로 귀신 타령은 많이 해 봤으나 실제로 귀신을 믿지는 않았던 소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생각해 보니 이쪽 주인님은 묘족이라 귀신을 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귀신이 그럼 정말 있단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소연에게 유협이 강조했다.
“꼭 귀신일 필요는 없단다. 그냥 이상하고 불길한 일이 일어나면 말해다오.”
“네, 알겠습니다.”
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사라가 있었다면 본체에서 무슨 일이 있던 절대로 유협에게 고하지 말라고 했겠으나, 그녀는 지금 부엌에 있었다.
“네가 한 말이 내게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으니 꼼꼼하게 관찰해 줬으면 좋겠구나.”
“네!”
예쁜데다가 온정이 많고, 목숨 줄도 구해 준 주인이 한 말이니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날부터 소연의 본체 탐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막상 본체를 탐방하려 해도 금지된 구역이 너무 많았다. 일개 악사가 손님방을 차지한 것도 죄스러울 지경인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연은 본채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손님방에서 다른 사람들과 별다른 교류 없이 지냈다.
그러다 보니 주로 저택의 가장 안쪽에 있는 천화와는 마주칠 일도 없었다. 솔직히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자신을 노려보던 새빨간 눈만 생각하면 다리가 벌벌 떨렸다.
게다가 얼굴에 대고 약혼자에 대한 음담패설을 한 건 소연 저 아닌가. 그래서 천화와는 가급적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합을 넣은 것과 다르게 주인에게 고할 일이 별로 없었다. 이러다간 그냥 본인이 먹은 식단이나 골고루 읊게 될 것 같았다. 희한한 일이라고는 시종들에게 완벽한 무시를 당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손님 취급을 당하니까 아니꼬워서 저러는 거겠지.’
오늘도 밥상을 대충 던져 넣고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는 시종을 보자 투덜거림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밥맛은 있어서 젓가락으로 밥을 퍼서 먹는데 문득 좋은 생각이 하나 들었다. 소연은 차근차근 밥을 맛있게 먹은 후에 밥상을 마루로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과연 조금 있다 밥상을 찾으러 온 시종이 짜증 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연 생각보다 훨씬 기분 나빠 보여서 찔끔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렇게 짜증이 났으면 한마디 구박이라도 할 법한데 시종은 그저 밥상만 챙겨서 나가려고 했다.
결국 소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언니.”
순간 시종의 눈길이 팍 꽂혔다. 분명 그쪽은 스무 살이 넘어 보이니 언니라는 말이 자연스러웠지만 엄청난 거부감이 느껴졌다. 소연은 내심 쪼그라들려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말했다.
“우리 주인님…… 그러니까 백유협 님이.”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짜증이 그득했던 얼굴에서 어느새 표정이 사라졌다. 대신 시종이 경계심이 가득한 태도로 소연을 바라봤다.
“그분께서요?”
짐짓 냉정한 목소리 같았지만 시종은 분명 초조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변화는 소연에게 호재였다. 소연은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노래를 창작할 거리가 없으니 바깥채를 한번 둘러보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허락해 주셔서요.”
“여기는 저하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나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거의 겨울의 광풍처럼 목소리가 딱딱 끊어지게 차가웠다. 그러나 소연은 꿋꿋했다. 사라의 경고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를 똑같이 여긴다.’
“그럼 제가 내일 주인님께 가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시종의 얼굴에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만약 자신이 유협의 명령을 거부해서, 유협이 그걸 천화에게까지 부탁하게 된다면 큰일이 나는 것이다. 이처럼 살얼음판 걷듯이 살고 있으니 사람이 각박해지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소연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정말로 그걸 허락하신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애써 표정을 고치지 않고 소연이 대답했다. 실제로도 저택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못할 테니 큰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저택의 바깥쪽을 돌게 될 터다.
“알겠습니다. 대신 안채 깊이는 못 가십니다.”
“예! 감사합니다.”
소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정말 노래 소재도 부족했겠다, 소재도 모을 겸 유협에게 하나라도 좋은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귀신이 나타나면 꼭 말해 달라고 했겠다,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알려 드려야겠다.
소연은 다짐하며 시종의 뒤를 따라나섰다.
✾✾✾
유협은 잉어 밥을 떼서 하나씩 던지고 있었다. 그냥 주는 것도 아니고 전각에 몸을 반절 빼고 던져 주니 긴 머리카락이 저절로 바람에 휘날렸다. 소연이 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약속한 지 삼 일째였다.
다행히 귀신은 바로 다음 날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첫날에는 누군가 우는 소리를 들었고, 둘째 날에는 장지문을 왔다 갔다 하는 커다란 뱀의 소리를 들었다. 유협이 그렇게 견디고 있을 때 소연은 별다른 소식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었다.
귀신에게 겁간당한 그날 밤, 유협은 자신을 찾아온 천화에게 분명히 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무래도 천화가 이 모든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귀신이 천화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보통 천화가 올 시간이 되면 유협은 정원에서 기다리거나, 아니면 같이 놀 만한 것을 준비해 기다리고는 했다. 그러나 오늘은 초롱불만 위태롭게 켜 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곧 천화가 자갈을 걷는 소리가 났다. 유협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어 잠시 숨을 들이켰다.
방문이 열리고 유협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왔다. 하얀색 옷과 붉은 허리띠를 맨 모습이 고귀해 보였다. 이런 남자 집에 피비린내 나는 귀신이 붙어살고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리라.
천화는 집에 들어오며 의아해했다.
‘유협?’
‘천화 님.’
천화가 하다못해 찻잔도 없는 방을 둘러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오늘은 일찍 자려고?’
‘천화 님, 이리 와 앉아 보세요.’
유협이 자신의 침대 옆자리를 팡팡 쳤다. 천화가 순순히 암묵적으로 자신의 자리라고 정해진 침대 위에 앉았다. 유협과 눈과 눈을 마주 보기 충분한 거리였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묻는 목소리가 한없이 순수하기만 했다.
유협은 다짜고짜 일단 천화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천화가 움찔하는 것과 상관없이 깊게 숨을 들이켜 냄새를 맡았다. 천화의 몸에서는 사향과 부드러운 살결의 향이 났다. 피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천화 님. 제가 어제 꿈을 꿨습니다.’
‘아침에 말했던 악몽?’
‘네.’
유협은 머리가 지끈 아파 오는 내용을 떠올리다가, 천화가 무슨 내용이냐고 묻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 집에 귀신의 쓰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귀신?’
천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말했던, 비명을 지르는 귀신 말이야?’
‘네. 그놈들이 제 말대로 생각보다 위험한 것 같습니다. 술사를 불러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확실한 것 맞아? 귀신이 있었다면 그대가 진작 눈치를 챘을 거 아냐?’
천화의 반박에 유협은 입맛이 썼다. 아닌 게 아니라 진작 귀신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이 무척 교활하고 악랄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보지 못하게 몸을 숨기고 있다가 힘이 커지니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런 것도 가능한 건가?’
‘집에 붙어서 어떻게 몸을 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나타나는 것을 봐서는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 생각인 것 같습니다.’
유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힐끗 본 천화 얼굴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귀신이 있다고 놀라지도 않고, 걱정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순간 이상함을 느낀 유협이 물었다.
‘천화 님 혹시 이 귀신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게 있습니까?’
‘귀신에 대해서?’
유협이 똑바로 천화의 눈을 바라봤다. 지금은 아름다운 갈색 눈이 꿈속에서는 길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붉게 핏줄이 다 선 징그러운 모습이었던 것도, 분명히 놈들이 천화의 모습을 취한 까닭이 있을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알고 계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천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귀신에 대해서라면 문외한이야.’
‘……그러시겠죠. 그럼 최근에 짚이는 일이 있으세요? 천화 님 전쟁터에서 유독 민간인이 많이 죽은 곳이 있습니까?’
‘딱히 생각나는 일은 없는데. 그게 문제가 될까?’
‘그 정도의 귀신을 혼자 몰고 다니려면 보통 악독해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분명 단체로 원한을 샀을 텐데 제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천화 님과 무장들뿐입니다. 전쟁에 다녀오시는 동안 정말로 귀신이 붙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을까?’
‘귀신의 원혼을 달래 줘야 합니다.’
‘말은 단순하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천화 님.’
‘저번에 전쟁터에 다녀온 모두가 악령이 붙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귀신이 붙은 거지?’
유협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선 단체로 잘못된 곳에 발을 디뎠을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당시 이상한 일을 겪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아니면 단체로 이상한 일을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미안, 그런 일은 없었어.’
천화가 유협의 턱을 살짝 건드리며 답했다. 유협이 움찔하고 몸을 뒤로 빼자 그가 바라보았다.
‘왜 그래?’
‘네?’
‘그대야말로 무슨 일이 있었어?’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밤새 천화를 닮은 귀신에게 겁간당하느라 기분이 불쾌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천화가 유협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왔다.
‘거짓말.’
‘천화 님…….’
‘뭔가 있군, 그렇지?’
‘다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귀신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어디에 숨어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아요.’
‘지난 밤 내가 잠들었을 때 귀신이 들어왔나?’
예리한 추리에 순간 유협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천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도 그대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거지?’
‘…….’
‘탓하는 게 아니야. 무슨 해코지를 당한 건 아닌지 걱정될 뿐이야.’
‘그저 그런 악몽이었습니다.’
‘됐어. 형원에게 술사를 빨리 찾아오라고 해야겠어.’
유협이 천화의 손을 붙잡았다.
‘그것 말입니다, 천화 님. 제가 진행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그대는 어젯밤 한 번 실패했잖아.’
울컥,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지만 천화는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여기서 그대를 뛰어넘는 술사는 없겠지. 그런데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세 명이라면 자네 몫을 할 수도 있어. 그러니 내일은 당장 술사를 찾아내는 데 집중해야겠군.’
‘……정말로 그게 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시도를 해 보자는 거야. 화난 것 아니지?’
그러면서 천화가 유협을 끌어당겨 안아 왔다. 유협은 따뜻한 품을 마주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러나 유협은 이미 화가 난 상태였다. 우선은 귀신에게 화가 났다. 자신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한 것은 분명히 보여 주고자 한 악의적인 행동이다. 분명 유협의 기억에서 가장 끔찍했던 때를 끄집어낸 것이리라. 다음으로 화를 부치기는 사람은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천화였다.
그리고 물론 마지막으로 제일 유협을 열받게 하는 건 스스로였다. 어째서 귀신이 찾아왔는데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분명 귀신이 집에 붙어 있는 데도 그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는 걸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분에 찬 유협이 잉어 밥을 마구 떼서 물에 던져 넣었다.
“그러다 떨어져.”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만류해 왔다. 유협은 흥 소리 나게 대답했다.
“그러면 구경거리 하나 추가하는 셈이 되겠군요.”
“왜 이리 심통이 났어.”
천화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가와 유협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유협은 순순하게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천화가 유협의 이마의 가르마를 타 주다가 쪽 입을 맞췄다.
“그렇게 화가 나?”
정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쫓아내 줄게. 그 말에 유협은 픽 웃었다.
지금 유협이 울분에 차서 잉어 밥을 주고 있을 때 천화가 초청한 세 명의 술사가 집을 조사하고 있었다. 집에 귀신이 붙었다는 유협의 말에 동의한 그들은 이상한 막대기를 가지고, 땅을 치고 다니며 귀신을 불러내고 있었다.
“심정 같아서는 쫓아내라고 바닥이라도 구르고 싶은데…….”
“엄청 귀엽겠네.”
“천화 님이 이런 식으로 나와서 그것도 못 하겠습니다.”
유협이 한숨을 푹 쉬고 천화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귀신에게 겁간을 당한 후 천화를 두려워하게 될까 봐 가장 걱정했다. 그러나 그 음침한 모습과 생기 넘치는 천화는 너무 달라서, 그저 모습만 같은 것이구나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와 별개로 유협은 술사들이 절대로 귀신을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괜한 오기가 아니었다. 술사들이 오기 전날 유협은 그들에게 전해 줄 말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처음으로 장지문 안에서 봤을 때, 귀신은 둥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그 형태를 드러냈을 때는 천화의 모습이었다. 유협은 이놈이 모습도 바꿀 수 있을뿐더러, 살의도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술사 셋 중 둘이 이 말에 동의했고 한 명은 너무 허황된 추측이 아니냐고 반박했다. 어쨌든 네 명 다 이 집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동의했다. 비록 겉은 화려하고, 그 주인 역시 미려했지만 속을 까보면 완전히 썩어 버린 상태다.
유협은 천화의 손을 꼭 잡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천화 님, 정말로 뭔가 생각나는 게 없으세요? 귀신을 부를 만한 거요.”
“음. 약탈해 온 물건들?”
“물건에 붙은 귀신이 아닙니다.”
천화가 부드러운 손으로 유협의 뺨 한쪽을 비볐다. 유협이 내심 정말로 화가 나고 속상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뭔가 떠오르면 바로 그대에게 말할게.”
“알겠습니다.”
유협이 토닥거리는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한시가 급하게 느껴졌지만, 천화가 일단은 반대하고 나서니 적당한 명분이 없었다. 내가 그날 밤 놈들을 다 잡기만 했었어도, 이를 악물자 곧 천화가 톡톡 뺨을 잡아 왔다.
“화내지 마.”
어쩐지 부추기는 것 같은 위로였다. 결국 유협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밤이었고 그대도 귀신이 나타날 줄 몰랐잖아.”
그 말에 유협은 조금 슬픈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마치 자신의 쓸모가 다 해 버린 기분이었다. 그나마 천화에게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이제 그것마저 빼앗겼다. 아니 그 전에 무능함을 만천하에 알렸다.
자신이 생각보다 낯이 두꺼워서 살고 있는 것이라 깨닫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천화는 그런 어깨를 끌어안고 이마를 댔다.
“초조해할 필요 없어.”
유협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다시 한번 그 귀신과 조우하고 싶었다. 만약 이번에도 천화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사지를 찢어 버리리라. 그렇게 천화는 모르는 분노를 활활 태워 가는 도중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급하게 술사 두 명이 들어왔다.
“황자님, 무언가 찾았습니다!”
“지금 당장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죽 급한 일인 듯 초조하게 발까지 구르는 놈들을 보고 천화가 일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유협과 있는 시간을 방해하면 누구든 죽여 치워도 아깝지 않았다. 천화가 고압적으로 굴자, 술사들이 눈치를 보듯 시선을 땅으로 향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 유협이 먼저 대답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 말에 천화가 깜짝 놀라 유협을 제 얼굴을 보게끔 휙 돌렸다.
“아깐 가지 않기로 했잖아.”
“당연히 뭘 찾았으면 가 봐야죠.”
“위험하면 어떻게 할 거야.”
술사들은 아무래도 권한이 없다 보니, 둘이서 하는 아등바등을 지켜만 봤다. 한시가 다급해 죽겠는데 이것들은 쌀을 쒀서 개죽으로 만드는 놈들이구나, 저절로 혈압이 올라갔다.
마침내 유협이 천화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서 가서 확인해 봐요.”
천화는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유협의 뒤를 따랐다.
술사들이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본채였다. 그것도 천화같이 높은 신분의 인물이 발을 디디기엔 불경한 마구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노비들은 모두 불안한 표정이었다. 특히 천화가 나타났을 때 누군가가 작게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다행히 유협은 긴장감 넘치는 그들의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대신 그의 시선을 빼앗은 건 무서울 정도로 잔인한 기운이었다. 술사들은 다급하게 여기서 무언가 나쁜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지만 유협은 그만 얼이 빠져 버렸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천화가 팔짱을 끼고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술사들에게 묻고 있었다. 술사들은 어리석은 말을 했다. 이곳에서 인간이 도살했는데 그것들의 혼령이 귀신이 돼서 나타난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유협은 인과관계가 완전히 반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귀신이 여기서 피를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무언가가 죽어 나갔다. 유협은 고개를 돌려 천화를 바라보았다.
“최근에 말 두 마리가 여기서 죽었습니까?”
순간 노비들이 거의 전부 고개를 쳐들었다. 눈에 혼란과 경악이 가득했다. 자신들은 말하지 않았다고 마구간지기를 간절히 쳐다보는데 마구간지기도 욕지기가 났다.
뭔가 이 ‘약혼자’께서는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 오래전 상황이 보인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묘족인가? 심장 떨린다고 생각하는데 유협이 인상을 썼다. 그리고 천화에게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말이 죽었는데 서쪽 문으로 나가게 해 불태웠습니까?”
순간 마구간 지기의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말을 바깥으로 데려와 불에 태웠는데, 저분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까딱하다간 천화의 명령을 무시하고 바깥에서 다 떠들고 다녔던 것처럼 보이겠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편 술사들은 그들대로 기분이 상했다. 자신들이 찾아내기로는 뒤도 돌아볼 것 없이 말의 소행이었다. 무언가는 아마도 말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구간지기일 거다. 저것 봐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죽은 사람 같지 않은가.
천화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그대 눈엔 뭐가 보여?”
“이건 장난입니다. 귀신은 본래 자신을 알아줘야 하는 법이라 장난을 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기운마저 이토록 살벌하고 잔혹하다면……. 아마 이 저택에 있는 사람을 몰살시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해?”
“귀신이 처음부터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마소가 몇 마리 죽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기현상이 몇 번이나 벌어지니 저절로 죽은 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군.”
천화가 톡톡 턱을 치며 고민에 빠졌다. 그사이 술사들이 끼어들었다.
“전하 분명 이분의 말씀대로 무척 강력한 혼이라 보이지만 그 외 저택을 다 몰살시킬 기운이 있는 귀신이 아닙니다.”
술사는 열렬히 유협의 이론을 깍아내리다가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천화가 무심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술사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천화는 당연히 술사보다는 유협을 믿고 있었다. 고민에 빠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걸 걸릴 줄은 몰랐는데?’
그의 유협은 유능하다 못해 두려울 정도였다. 설마 죽은 장소를 찾자마자 치운 곳까지 알아내다니. 웃기는 장난을 치는 술사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이유는 변명에 써먹기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공평한 척은 해야 했다. 유협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누가 말을 죽여 태웠다면 왜 밖에서 행했다고 생각하지?”
천화가 누구랄 것 없이 물었다. 술사가 침묵에 빠질 때 유협이 다시 한번 말했다.
“말을 불태운 건 귀신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마구간지기와 노비들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천화가 그쪽으로 눈길도 주고 있지 않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번에는 유협이 골몰하다가 마구간지기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 그것이.”
마구간지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듬성듬성한 수염에도 땀이 흐를 정도였다. 유협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입에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비싼 씨수말이었습니다. 두 마리나 되다 보니 아무래도 덩치도 크고 해서. 밖에서 가죽을 벗기고 정리한 후에 불에 태웠습니다.”
“……?”
예상보다 허술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특히 말을 평생 가족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족속 출신인 유협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기가 막혀서 천화를 보자 그가 그럴 수 있다는 듯 설명해 줬다.
“부산물은 귀찮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유협이 또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분명 말이 죽은 상태가 정상이 아니고, 정정한 말 두 마리가 죽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그걸 그냥 가죽을 벗겼습니까?”
“제가 마구간지기를 30년 넘게 하는데 나리.”
마구간지기가 이번에는 좀 자신 있게 말했다.
“마구간에서 별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뱀 한 마리만 잘못 들어가도 다음 날 축사 상태를 알 수가 없는 게 마구간이죠. 또 들어갔을 때 말 두 마리는 그냥 죽어 있어 환경 차이 때문에 안타깝게 떠났구나 싶었지요.”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유협이 결이 맞는 듯 맞지 않는 변명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천화가 턱 하니 그의 어깨에 고개를 올렸다.
“왜? 못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요.”
술사들 말은 아예 빼 버리고 생각해도 마구간지기가 한 말이 시원하게 대답이 된 건 아니었다. 천화가 힐끗 눈짓했다.
“아예 사실을 말할 때까지 문초할까?”
“천화 님!”
유협이 화들짝 놀라 천화를 보았다. 천화가 슬쩍 미소 짓고 있었다. 유협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심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이분은 진실된 말을 하는 것 같네요.”
유협이 빠르게 마구간지기의 편을 들고 섰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마구간지기를 계속 몰아가면 괴상한 책임이 쓰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이 사람들에게는 귀신의 역겨운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귀신이 말을 죽이는 일이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거기에 집중해야 했다.
“술사분들이 무엇이라 생각했든 제 생각은 다릅니다. 집에 방비를 조금씩 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좋아. 방비는 어떻게 하면 되지?”
그 말에 유협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내내 태연했던 천화가 자세를 바로 하고 기함했다.
“설마 또 손을 찌르겠다고??”
“묘족의 피만큼 주술에 좋은 게 없습니다.”
“그대 혼자서 방비를 하다가는 피가 말라 죽고 말거야. 이 작자들은 안 되는 건가?”
천화가 술사들을 빙 둘러 손가락질했다. 가만히 있다가 피 부적이 되게 생긴 술사들은 난처함에 어쩔 바를 몰랐다.
“글쎄요. 제가 남족 피로 부적을 그려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려 봐. 너, 이리로.”
순간 젊은 술사 하나가 떠밀려 앞으로 나왔다. 얼이 빠진 표정의 그에게 유협이 말을 걸었다.
“저와 의견이 다르신 건 압니다만, 생명을 위해서 도와주실 생각이 있습니까?”
여기서 없다고 하면 미친놈이었다. 그들은 아까부터 천화의 싸함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오직 유협만 꽃밭에 있듯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예에…….”
그러자 유협이 품고 있던 작은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 부적 용지 두 장을 꺼낸 후 마구간 벽에 댔다.
“제가 그리는 시범을 할 테니 그대로 따라 그려 주시면 됩니다.”
“예.”
기가 죽은 술사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며 유협이 단도로 제 손을 쓱, 그었다. 천화가 제가 아픈 듯 인상을 썼다. 유협은 그 단도를 술사에게 넘겼다.
“너무 깊이 찌르실 필요 없습니다. 한 번에 많이씩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조금씩 많이 조집시다. 해석하면 그리 되는 말을 하며 유협이 부적에 그림을 그렸다.
술사는 어쩡쩡하게 피로 그림을 따라 그렸다. 두 부적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술사도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부적을 본 유협은 조금 실망했다.
“아무래도 남족에게는 없는 재주인가 봅니다.”
묘하게 같이 실망한 남족 술사에게 유협이 수고했다 말했다. 그러나 천화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여기 세 명이 있는데 왜 한 명만 쓰는 것이지? 너, 앞으로.”
결국 세 명다 유협의 무명검에 손가락이 살짝 찢겼다. 그러나 결과는 다 실패였다. 그러자 천화가 눈 밑에 그늘이라도 진 것 같은 섬뜩한 얼굴이 됐다. 그 얼굴을 보고 유협은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아야 했다.
“정말? 거짓말하는 것 아니고 정말이야?”
“제가 왜 이런 일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유협이 다치지 않은 손가락으로 천화의 뺨을 비볐다.
“진정하세요. 어차피 피 몇 방울만 있으면 되는 일이잖아요.”
“그대 성격이라면 분명 이 집을 다 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그래서 몇 방울이라고 하는 거예요.”
천화가 이제 대놓고 콱 인상을 썼다.
“몇 방울이라니. 손을 아예 다 찢어 놓으면서.”
“그럴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천화는 유협의 손을 잡고 너무 아까워 쓸어 만지기만 했다. 유협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천화의 어리광을 받아 줬다. 시종들 앞이라 조금 눈치가 보였으나 어차피 약혼할 것을 다 아는 마당에 천화가 이렇게 낙심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시종들은 눈치가 있어서 서둘러 한둘씩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우리도 이만 가요.”
“그럼 내 방에서 써.”
천화가 뾰로통하게 투정부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결국 유협은 천화에게 작은 입맞춤을 남기고 말았다.
“얼마든지요.”
천화의 처참한 얼굴에 그나마 안색이 돌았다. 그렇다고 역시 웃고 있는 건 아니었다. 뾰로통한 아이처럼 굴며 유협을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천화의 방은 여전히 천개를 다 내리면 아침이라도 빛이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 구조였다. 유협을 위해서 손수 천개를 다 올려 준 천화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해.”
“할게요.”
유협이 손을 긋지도 않았는데 천화는 눈을 반절 감은 상태였다. 상황이 조금만 덜 심각했어도 손가락으로 딱밤 한 대는 놓았을 텐데, 아쉬워하며 유협이 작게 손가락을 그었다.
“하…….”
유협이 진짜로 손가락을 베어서 부적을 그리기 시작하자 천화가 인상을 썼다. 분위기상 자신도 유협에게 동조하는 척, 걱정하는 척해야 할 것 같았지만 요만큼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주변을 말려 죽인다고 해도 묘족인 유협에게는 소용이 없을 터다.
그리고 본인만은 아마도 멀쩡하리라. 멀쩡하지 않더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유협과 함께 있으면 된다. 그러니 남은 사람들이야 길 가다 나자빠져 죽든 말든 천화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살살 그어.”
“여기서 어떻게 더 살살 그겠어요.”
유협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것을 설명해 줬다.
“이 부적을 붙여 두면 방 안으로 귀신이 못 들어오게 될 거예요. 장지문 앞을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지만 무시하면 될 겁니다. 모두에게 말해 주세요.”
유협의 다정함에 속상함을 느끼면서도 천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내 유협이 수십 장의 부적을 만든 다음, 널어 놓고 말리기 시작했다. 노란 종이 위에 빨간 글씨가 인상적이긴 했다.
유협이 그중 한 장을 챙겨 천화의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자, 천화 님이 먼저예요.”
가장 먼저 붙이시라고 생긋 웃는 유협의 미소에 천화는 하마터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 뻔했다.
유협의 눈웃음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부적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말도 안 되게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한겨울 호수에 손을 담근 것 같았다. 게다가 추위는 천화에게 무척이나 적대적이었다.
“고마워.”
“어디다 붙이실 거예요?”
다른 부적이 말랐나, 확인하며 유협이 물었다.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드네.”
“네?”
예상과 다른 대답에 유협이 쳐다보자 천화가 자신의 손을 한참 바라보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침상이 좋겠지?”
“네에, 나쁜 생각은 아니네요.”
천화는 두말없이 피 묻은 부적을 자신의 침상 옆에 붙였다. 그러나 아직도 손바닥은 차갑게 불타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귀신들이 묘족의 부적을 두려워하는 건가? 생각하던 천화는 문득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귀신은 내 속에 있다.’
묘족인 유협이 집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고, 부적을 만졌을 때 어디서도 느껴 보지 못한 살의를 느꼈다. 귀신은 집에 붙은 게 아니라 자신에게 붙어서 그런 것이다.
‘그럴 것 같더라니.’
천화는 무감각하게 되뇌었다. 유협이 알게 된다면 분명 화를 내고, 최악의 경우에는 떠나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유협을 속이는 건 얇은 천 하나로 그의 눈을 가리는 것에 불과했다. 천화는 아무래도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천화가 유협의 허리를 껴안자 부지런히 부적을 준비하던 유협이 조금 웃었다.
“웬 어리광이세요.”
“하고 싶어서.”
할 수 있을 때.
천화는 말을 삼키고 더더욱 유협에게 파고들었다.
✾✾✾
소연의 대모험은 시시하게 끝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깥을 조금 도는 것만으로도 뭔가 정보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오자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소연자의 그림자만 보면 모두들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도 소연의 말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확실히 유협의 저택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사람들은 차가웠고, 자기가 할 일만 목숨 걸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나 허탕을 치다 보니 슬슬 주인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의리가 있지 목숨 살려 줘, 밥값 올려 줘, 음담패설 한 것도 용서해 준 사람에게 빈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이 저택에는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천화를 닮아서 그런지 집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명탐정처럼 저택을 헤매면서 오늘도 허탕치고 있을 때였다. 터덜터덜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소녀가 보였다. 조금은 느린 태도로 쇠죽을 쑤고 있는 소녀였다. 무심히 지나가려던 소연은 문득 소녀의 한 쪽 손이 없는 걸 발견했다.
‘세상에.’
아직 작은 한 소녀가 자신보다 훨씬 큰 물건들을 한 손으로 옮기고 정리하는 일이 신기했다. 소연은 궁금증이 돋아 소녀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말을 걸었는데도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소연은 다시 한번 소녀를 불렀다.
“저기요!”
그제야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무척 느린 속도였다. 소연은 이제야 왜 소녀가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지 알아차렸다. 돌아선 소녀는 얼굴은 무척 깨끗하고 예뻤으나 어쩐지 눈이 혼탁했다. 별로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차, 싶었지만 곧이어 뭐 어떠냐는 생각이 지나갔다. 소연은 별다른 준비도 하지 않고 불쑥 칭찬부터 했다.
“한 손으로 일을 그렇게 잘하던데, 처음 봤어요, 그런 사람은.”
그러자 눈이 혼탁한 소녀가 수줍게 웃었다. 대충 말이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연은 슬그머니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그런데 이 일을 다 혼자 하고 계세요?”
“할 일이 없으면 안 되니까…….”
목소리가 하도 작아서 알아듣지 못할 뻔했다.
“왜 할 일이 없으면 안 돼요?”
“쫓겨나니까.”
다음으로 웅얼거리는 말은 뭐라고 하는지 몰라서 대충 얼버무려 듣는 수밖에 없었다. 소연은 마음을 먹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손은 왜 이렇게 되셨어요?”
아직은 어린데 선천적인 기형이었나? 아니면 병에 걸렸었나?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소녀가 시무룩해졌다.
“내가 잘못해서.”
“잘못이요?”
돌아다니다 넘어지기라도 했나? 소연이 묻자 소녀가 차분히 대답을 하였다.
“내가 주인님 상에 있는 음식을 훔쳐서. 배고파서…… 그래서 7살 때 잘렸어.”
“……네?”
충격적인 말에 소연이 좀 더 자세히 물었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만의 고장 난 머리로 이것저것 대답해 주었다. 어머니와 떨어져서 심하게 추웠던 일, 따스한 밥을 보고 배가 고파진 것. 그래서 직접 천화의 명령 하에 손목이 잘린 일까지. 심지어 이렇게 사람과 의사소통이 힘들어진 것도 그때 열병을 앓고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정말이에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요?”
“정말이지 그럼.”
소녀가 조금 언짢게 대답하더니 마저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는데 한 남성이 외양간에서 불쑥 나왔다.
“섬매야. 쇠죽은…… 거기 누구십니까?”
깜짝 놀란 소연은 얼른 자신을 높여서 소개했다.
“저는 저쪽 저택의 손님입니다.”
나리가 특별히 저에게 이곳을 탐방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쩌구저쩌구 변명을 떠들려고 했는데 남자는 ‘저쪽 저택’ 이라는 말을 듣고 신경을 꺼 버렸다. 저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가장 목숨에 이로웠다.
“섬매야 일은 다 됐냐?”
“네, 아저씨.”
“그럼 가지고 들어와야지 여태 밖에서 놀고 있으면 어째?”
섬매는 ‘죄송해요’ 하고 작게 사과한 다음, 소연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연은 그 틈을 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자신을 붙잡는 손길은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소연은 아까 섬매의 말을 맞춰 보기 시작했다.
‘배고픈 노비가 자신의 음식에 손을 댔다고 손목을 잘라?’
만약 사실이라면 이거 완전히 제 형과 똑같은 놈 아닌가. 그러자 말도 없이 일만 하는 이곳 노비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7살짜리 아이의 손도 자르는데 더 못할 일이 있을까? 소연은 얻어 낸 정보에 흥분해서 자리에 앉아 있질 못했다. 내일 당장 유협에게 찾아가 이 일을 고할 생각이었다.
유협이 기분 나빠하거나, 천화를 모욕한다고 생각해 벌을 줄 수도 있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며칠 지내 보니 유협은 성격이 무른 두부 같았고 자신을 아이처럼 귀여워하고 있었다. 또한 본인 입으로 이상한 일을 찾아보라고 했으니 정당한 사람이면 남을 괴롭힐 리가 없었다.
다음 날 소연은 초조하게 유협이 점심상을 받을 시간까지 기다렸다. 자신의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치우던 와중 퍼뜩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말이 거짓이면 어떡하지?’
무척 구체적인 증언이었지만, 자리에서 흥분한 까닭에 교차 검증을 해 볼 생각을 못 했다. 그제야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소연이 밥상을 또 일부러 내놓지 않았다.
역시 곧 차가운 얼굴을 한 노비가 들어왔다. 노비가 밥상을 가져가려고 할 때 소연이 슬그머니 말했다.
“섬매 이야기가 사실이에요?”
“섬매?”
뜬금없는 소리에 노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곧장 쏘아 죽일 것 같은 눈을 했다.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냥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이라.”
“그런 떠도는 말이 그럼 진실이겠습니까? 답답한 소리 하지 마시고 앞으로는 밥상을 제때제때 내놓으셔요.”
“저는 제 주인께 거짓말을 고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잖아요.”
“그러니 섬매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아이가 열병을 앓더니 그만 정신을 놓아서 하는 이야깁니다.”
“그럼 손은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까?”
“그걸 왜 바깥손님께서 신경을 쓰십니까?”
그리고 상을 가지고 슉 나가 버릴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방문이 닫혔다. 어두운 방 안에 둘이 남게 되자 소연은 노비가 얼마나 적대적인지 알 수 있었다. 노비는 주변을 살피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일을 떠벌리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네? 네?”
“이 일을 누구에게 전달할 생각입니까?”
“아니 저는 그냥. 주인께 들려드릴 노래나 만들 셈입니다.”
소연이 두려움에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그러나 노비는 차갑게 코웃음 쳤다.
“처음하고 말이 많이 다르신데. 모르겠지만 그딴 태도로는 오늘 당장이라도 멱이 따일 수 있소.”
노비가 사납게 말했다.
“나는 이런 일에 말려드는 건 질색이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비의 눈은 무감각하고 차가웠다. 네깟게 뭘 아냐는 눈이었다.
순간 소연은 노비가 당장 자신의 목을 찢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슬그머니 일으켰다.
“저도…… 저도 밖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제 몸 하나는 사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노비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한결 태도가 나아졌다. 노비가 가서 방문을 다시 탁 열고 밥상을 들고 나갔다.
노비가 나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소연은 정신없이 신을 찾아 신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걸었으나 마침내 저택에서 나가자 불이 나게 달려갔다. 유협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름답게 웃는 유협의 얼굴이 아른아른하게 떠올라서 눈물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유협을 찾아갔을 때 변수가 하나 있었다. 보통 소연은 점심을 먹고 유협을 찾곤 했는데, 하필 오늘 천화가 자리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소연이 왔다고 사라가 알리자 힐끗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이 무심한 듯 차가웠다. 이걸로 두 번째 만나는 데 처음이나 지금이나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사라가 절을 올리자 천화가 귀찮다는 듯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유협과 다정하게 앉아서 과일을 먹던 중 나타난 소연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거기다 천화는 유협에 관한 일이면 거의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 소연의 첫인상도 나빴다.
소연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어 가며 말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척해야 했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알긴 아는구나.”
시큰둥한 대답에 유협이 보이지 않게 천화의 어깨를 퍽 때렸다. 아야, 조그맣게 말을 흘린 천화가 어깨를 쓱쓱 문질렀다.
“원래 이 시간에는 소연이 와서 말벗을 해 줍니다.”
“여태 알고 있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아이가 너무 작군.”
“그게 문제가 됩니까?”
유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묻자 천화가 픽 웃었다. 그가 귀여움에 취해 유협의 귓불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니, 이렇게 작은 아이가 어찌 말벗이 될까 해서.”
“소연이가 키는 좀 작지만 야무지고 자신의 일은 다 해내는 아이입니다.”
그 말에 천화가 소연을 똑바로 바라봤다. 소연은 움찔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래. 그래야겠지.”
불안해진 소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협의 부탁이 있었다고 해도, 이 저택의 실질적인 주인은 천화였다. 위압적인 저택에 서 있는 천화를 생각하니 왈칵 두려워졌다. 자신이 인의에 너무 취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구는 건 아닐까.
“천화 님, 기왕 오셨으니 소연이 노래나 들으시렵니까?”
그 말에 과일을 아삭거리던 천화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마다 천화가 한없이 어려 보여 저절로 손이 갔다. 유협이 하얀 뺨을 조물조물 당기자 천화가 뻔뻔하게 고개를 더 들이 밀었다.
두 사람은 무척 다정해 보였지만 소연의 속은 다 뒤집어진 채였다. 편안하게 노래할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순간 노래를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더 수상하게 보일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가지고 등 뒤를 뒤지는데 천화가 턱을 괴고 지적했다.
“비파가 없군.”
유협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신 대답했다.
“아, 오늘은 실수로 챙기지 못했나 봅니다.”
소연은 바싹 마른 목에서 애써 소리를 꺼냈다.
“네, 소녀 이렇게 쓸모가 없어 죄송합니다.”
이제 천화의 얼굴은 무감각했다. 천화는 사람을 쓸모와 무쓸모로 나누었는데 소연은 벌써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두 번이나 들었다. 그러나 유협이 워낙 외로울까 봐 남겼다. 그랬더니만 정말로 쓸모없는 짓을 벌써 세 번째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가 너무 나이가 어린 것 같은데. 그대가 원한다면 다른 악사로 바꿔다 줄까?”
그 말에 유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화를 나무랐다.
“아니, 천화 님. 이런 사소한 실수로 사람의 밥줄을 끊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인심이 너무 각박하십니다.”
소연은 차라리 저택에서 나가고 싶었으나 유협이 다독이며 말했다.
“부엌에 가면 지금쯤 남은 과일들로 간식을 먹고 있을 텐데, 너도 가서 좀 끼거라. 왜인지 오늘은 무척 피곤해 보이는구나.”
“아닙니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연이 발걸음을 부엌으로 옮겼다. 소연이 사라지자 천화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째 곧 쓰러질 것 같군. 설마 병이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감기라도 유협에게 옮았다간 당장 사라와 소연 둘 다 족칠 셈이었다. 그런 마음은 하나도 모르고 유협이 과일을 한 조각 더 천화의 입에 밀어 넣었다.
“가끔 보면 천화 님도 염려증이 너무 심하십니다.”
“내가?”
“사실상 제가 나이는 더 많은데, 나무 위에 올라간 어린아이 취급하시지 않습니까.”
천화는 어린 유협이 나무 위에 올라간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내려오지 못하고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천화를 쳐다보는 모습까지. 무척 귀여워서 내려 주고 싶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결국 도와주게 되겠지…….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상상에 빠진 채로도 유협 말은 놓치지 않은 천화가 대답했다.
“소연이 맘에 꼭 맞고 좋으니 다른 악사를 쓰기 싫다고.”
“네. 다 듣고 계셨군요.”
유협이 천화의 머리카락을 복슬복슬 쓰다듬었다. 천화의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더 해 달라는 듯 치대는 그 때문에 유협이 밝게 웃었다.
한편 높은 분들이 사이좋게 놀고 있는 가운데 소연은 부엌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 집 시종들도 다 똑같다고 생각하니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대신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집 뒤로 향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웬만한 세도가의 집이라 부러워했는데, 이 집이 이제는 귀신의 집처럼 보였다.
문제는 천화였다. 듣자 하니 천화가 수도에 집을 사들인 게 얼마 되지 않았다던데, 그럼 그는 옛날 집에서부터 노비들에게 자비가 없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해친 사람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자비 없이 잘린 손, 발은 또 얼마이고 서슴없이 행해진 형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다만 유협의 앞에서는 한없이 좋은 사람처럼 보여 소연도 속고, 유협도 깜빡 속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유협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소연이 보기에도 천화에게 유협은 가볍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연은, 천화가 보기에 파리만도 못한 목숨이었다.
만약 이 파리만도 못한 것이, 유협에게 쪼르르 달려가 천화의 실체를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유협은 차라리 이 행복한 곳에서 영원히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나 곧 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서 평생 아무것도 모를 수는 없었다. 피 냄새가 그리 지독한데 당연히 언젠가는 담장 너머까지 풍겨 오리라. 그럼 그때 자신의 주인은 어떻게 될까.
소연은 눈을 꾹 감고 심호흡했다. 순전히 소연의 손에 달려 있었다. 가서 유협에게 천화의 실체를 말하거나, 이제부터 소연도 노비들처럼 입을 다물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척하며 사는 것 둘 중 하나.
소연은 쭈그려 앉아서 마른세수했다. 자신은 인의를 아는 여자였지만, 그러기에는 목숨도 너무나 귀중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시간은 상당히 흘러 있었다.
멍하게 있는 와중에도 목숨을 구제할 생각을 해서, 소연은 유협과 대화하기 위해 그의 방 앞으로 향했다.
노을이 지는 시간, 방문은 닫혀 있었고 사라만 조용하게 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유협은 방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사라는 흐물흐물한 상태로 집 뒤에서 나타난 소연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주인이 부른 시간이 아닌데 저게 왜 아직도 저기 있단 말인가. 사라가 손을 까딱했다. 그 부름에 문간 앞에 서 있던 문지기가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그들이 사내고 걸음도 빨랐지만 집이 원채 큰 게 문제였다.
소연은 볼 것도 없이 냉큼 소리를 질렀다.
“어르신!”
사라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잡아다 가죽이라도 벗길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유협이 더 빨랐다. 편안한 옷을 입고 손에 책 한 권을 든 유협이 의아하다는 듯 문을 열어 보았다. 문지기들이 순간 얼음이 되었고, 사라는 나무토막 같았다. 그 와중에 소연만 외쳤다.
“주인님, 이것이 감히 주인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 무례하게도 이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소연이 무릎을 꿇으며 말하자 유협은 더더욱 놀란 듯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의 목소리에 의문이 가득 묻어 나왔다.
“소연아, 여태 네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
그게 바로 소연이 부탁하려던 문제였다. 지금 천화가 내어 줬던 그 방에 들어가면 그 독사 같은 노비 때문이든, 천화 때문이든 어쩐지 살아서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소연은 결연하게 말했다.
“본채는 너무 크고 손님방은 또 너무 화려해 소녀가 부끄럽습니다.”
“갑자기 무슨?”
본채 손님방에서 묵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뛸 듯이 기뻐하더니 지금 소연은 어디 가서 한 바퀴 구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폭행이라도 당한 몰골이라 순간 유협이 마루를 내려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어린아이를 손수 일으켜 세웠다.
유협의 따뜻한 손길이 닿는 순간 바싹 말랐던 소연의 마음에 누가 물 한 방울을 준 것 같았다. 멈추지 않고 유협은 소연을 일으켜 세워 먼지를 털어주고, 얼굴을 자세히 여기저기 살펴보며 물었다.
“누군가 괴롭히기라도 했느냐?”
이 조그만 것을 누가 못살게 구나 싶었지만 노비들 간의 위계질서에 밀렸나 싶어 유협이 물었다.
그 다정함이 문제였다. 그때까지도 소연은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늘은 그냥 손님방에서 유협의 저택으로 이사 오고 싶다는 말만 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유협이 빨랐다.
“만약 저택에 돌아가기 껄끄러우면 일단 오늘 밤은 내 저택 침실을 이용하거라. 내일 완전히 짐을 싸서 오렴.”
유협이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여 주며 말했다.
부끄럽게도 꺽꺽거리며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마른 것처럼 간신히 한 방울 나왔던 눈물이 눈에 한가득 차는 데는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엉엉 우는 아이는 이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 유협은 일단은 나쁜 일이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다. 쉬이.”
그 말에 여태의 죄책감까지 섞여 들어 소연은 귓불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아이가 눈물을 멈추지 못하자 유협은 사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유협은 소연을 이끌어 불이 따뜻하게 켜진 자신의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손에 말아 들고 있던 책을 대충 침대에 던져 버리고 소연을 의자에 앉혔다. 맞은편에 앉아 소연이 히끅거리는 것을 보자 뭔가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울면서 천화가 자신을 붙잡았었는데…….
그러나 곧 사라가 보리차를 들고 오자 상념은 깨졌다.
“자, 이걸 좀 마시고 진정하거라.”
유협이 직접 보리차를 쥐어 주었다. 따뜻한 차를 손에 쥐고 소연은 천천히 물을 마셨다. 울어서 통통하게 부은 얼굴이 아래로 향했다. 유협은 그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물었다.
“그래, 소연아.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느냐.”
울음에 잔뜩 지쳐 버린 소연은 대답 대신 힐끗 사라를 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유협이 사라에게 나가라고 신호하자 사라는 고분고분 사라졌다. 그제야 소연은 입을 열었다.
“주…주인님, 제가, 제가 죽일…… 놈입니다.”
“응?”
어린아이 입에서 나오기에는 다소 놀라운 말이라 유협이 당황했다.
“제가, 감히…… 부탁을 어기고, 제 살 자리만, 찾으려다가…….”
“설마 내 부탁 때문에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것이냐?”
“소녀가…… 소녀가 제깟게 목숨이 귀하다고 생각해서.”
“네 목숨이 귀하지 그럼 어디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도 되느냐? 무슨 말인지 자세히 고해 봐라.”
소연은 한참이나 보리차 바닥을 보았다. 이미 마음은 유협에게 쏠려 버린 채였다. 이제는 말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유협은 천화의 성품을 이제 알았냐고, 자신도 이미 다 아니 걱정 말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협의 한없이 부드러운 성격을 보면 그런 반응은 그저 자신의 희망사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연은 숨을 가다듬으며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협은 집중해서 소연의 작은 목소리를 따라갔다.
“제가 하루는 섬매라는 노비를 보았는데 팔이 없는 소녀였습니다. 그럼에도 재주 부리듯 일을 잘하여 어쩌다 손을 잃었냐고 물었더니.”
유협은 어쩐지 긴장되는 마음에 보이지 않게 살짝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에 파고들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물어 보았더니?”
“그게 전하께서 손을 자르시라고 명령하신 거라고 했습니다.”
집중하던 유협은 깜짝 놀라며 음울한 표정의 소연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지금 발언이 참담할지 언정, 거짓말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왜?”
유협이 다급하게 물었다. 때때로 노비에게 손을 자르는 형벌을 내리는 일이 있었다. 일을 빨리 하지 못했거나, 주인의 물건을 훔쳤거나 하면…….
유협은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일단은 천화에게 정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소연의 대답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아이가 7살에 저택에 왔는데 엄마 없이 덜렁 왔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챙기지 못하는 사이에 밥상에 있는 찬을 좀 집어 먹었는데. 전하께서 그것을 도둑질로 보고 손을 잘랐다고 했답니다.”
순간 듣는 말이 이해가 안가서 유협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유협이 되물었다.
“천화 님이 아이의 손을 도끼로 내리치라고 했다고?”
“네.”
“그깟 이유로?”
“…….”
“울고 있는 아이를 주변 어른들이 다 잡았겠구나. 몸부림치지 못하게. 그리고 손을 도끼로 내리쳤겠지. 살아남은 게 기적이다.”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유협은 이성적인 사고를 포기한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그 반응에 소연이 조금 움찔했다.
유협은 잠시 시선을 돌려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뱉었다.
“소연아, 이 말이 사실이라고 목숨을 걸고 확신할 수 있느냐.”
“이 말을 전해 들었던 걸 알았더니 노비가 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렇구나. 고생이 많았다. 오늘 피곤할 터인데 안전하게 내 곁방에서 쉬도록 해라.”
두려움에 덜덜 떨던 소연은 제안을 거절할 여유도 없었다. 유협의 제안에 응하고 자리를 떴다.
소연이 고개를 숙인 채로 곁방으로 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걸 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유협은 허, 하고 숨을 내뱉었다. 방금까지 침대에 누워서 ‘매의 종류와 서식처’를 읽으며 평온하게 있었는데. 그 시간이 일그러지듯 구겨지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유협은 벌떡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겉옷을 입고 방문을 열어 재꼈다.
대기하던 사라가 일어나 물었다.
“주인님, 어디로 뫼실까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유협은 대답도 하지 않고 가려다 아, 하고 멈칫했다.
“지금 곁방에 소연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만약 제가 나갔다 오는 사이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모두에게 그리 일러두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저택을 지나 어둠속으로 거침없이 녹아 들어갔다.
✾✾✾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하자 본채 횃불이 올라가고 있었다. 유협은 위용이 대단한 저택 앞에 홀로 섰다. 문지기들은 처음에 웬 잡것이냐는 표정을 지었다가 자세히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재빠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문을 좀 열어 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나리.”
본채에서 유협은 본인 저택보다 신분이 높았다. 모두들 유협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눈으로 천화를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꾸준히 보고 살았다.
그렇게 간단하게 문간을 지난 유협은 제법 익숙한 천화의 방이나 한 번 가 봤던 마구간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다른 곳을 들릴 것도 없이 외양간으로 향했다. 내보냈던 소들을 몰고 들어와 분주해진 외양간에 불쑥 찾아온 손님을 처음에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유협은 그들 하나, 하나의 얼굴을 뒤져 섬매를 직접 찾아 낼 수 있었다. 눈이 혼탁하고 한쪽 손목이 없는 아이였다.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그 아이는 정말로, 소연이 묘사한 그대로였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가 심장에서 보이지 않는 피가 뚝뚝 떨어질 쯤 유협은 기척을 냈다.
“이보게.”
“왜? 뭐 도와줘?”
대충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던 노비의 고개가 저절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귀한 공자가 문간에 서 있는 걸 보자마자 상대가 누군지 바로 감이 왔기 때문이다. 즉각 무릎이 떨려서 후들거리는데 유협이 성큼성큼 외양간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천화만 섬겼지, 유협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련히 천화의 짝이니 그쪽도 제정신은 아니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천화가 유협에게 미쳐서, 완전히 자신의 본모습까지 감춘다고 한다. 손님방을 관리하는 노비 하나가 악사를 죽여야 한다고 그리 말하고 다녔다.
유협은 노비의 어깨를 다독이며 물었다.
“저 섬매라는 아이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노비는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다른 의미로 두려움이 확 밀려왔다. 그러게 그때 섬매를 죽게 두자니까, 괜히 살려서 이 지랄이 나 버렸다. 만약 섬매 때문에 주인에게 언짢은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같이 말려들 게 틀림없었다.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도 노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가 불러드리겠습니다. 섬매야!”
유협이 오든 말든 자신의 할 일만 하던 섬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노비의 말에 따라 쪼르르 다가왔다.
섬매가 가까이 올 때마다 유협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정작 섬매가 코앞에 섰을 때는 고개를 모로 돌려 버리고 말았다. 심장이 쾅쾅 뛰었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섬매는 아무것도 모르고 유협을 보고 서 있었다.
자신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 행동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유협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꼭 지나쳐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몇 번이고 가다듬고 나서야 용기가 났다.
“섬매야. 나는 저쪽 저택에서 온 백유협이라고 한단다.”
“네.”
과연 전해 들었던 대로 섬매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한 번 건너야 했으니 그럴 수 있었다. 유협은 다정하게 물었다.
“네가 주인님의 찬을 훔치려다가 손이 이렇게 됐다는데 맞느냐?”
“응. 맞아요.”
섬매가 숨길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노비는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기분으로 그 광경을 쳐다봤다. 섬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멍석말이를 당할 사람으로 지목될 터였다. 그런데 유협은 더 끔찍한 질문을 했다.
“그럼 혹시 섬매는 또 다른 사람들을 알고 있니? 주인님이 괴롭힌 사람들?”
“네.”
“내게 다 말해 줄 수 있겠니?”
그러자 기억력은 비상한 섬매가 모두가 지워 버리고 싶은 일을 읊기 시작했다.
“신 아저씨가 산에서 떨어져서 다쳤어요. 의원을 불러 달라고 갔다가 발길질 당하고…….”
섬매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말했다.
“쫓겨났대요. 회의를 하는 건 중요해서요.”
“……그렇구나.”
“연씨네 아들이 실수로 우물에 빠져 죽어서, 연씨 부부가 물을 못 마셔 죽었어요. 원래 우물을 더럽게 만든 사람은 물을 마시지 못한대요. 그게 법이래요.”
“그렇구나. 섬매야, 이 정도면 됐다. 가서 해야 할 일을 하렴. 고맙다.”
유협이 어깨를 다독여 주자 섬매가 생긋 미소 짓고 사라졌다.
섬매가 일하는 소리 빼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죽음과 같은 침묵 사이에 노비와 유협이 마주 보고 섰다. 처절한 진실을 깨닫게 된 유협은 조용조용하게 물었다.
“섬매가 한 말은 다 사실이군. 안 그런가?”
“어르신, 저 녀석이 똑똑은 해도 오락가락할 때가 많습니다.”
“그만.”
유협이 단호하게 말하자 노비의 눈이 떨렸다. 진짜로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섬매야 진작 죽었을 걸 살려 놓은 거니 상관없지만 본인은 무슨 죄냔 말이다.
그사이 유협은 조용히 외양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화려하게 빛나는 천화의 방을 바라보았다. 천화의 방은 이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면서 유협은 아주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던 사람이 허상이었다면? 아니 본인은 진심이었지만 세상 만물을 모두 해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가정할 필요가 없었다. 천화는 그런 인물이다.
마침내 문 앞에 섰을 때 유협은 그만 그대로 뒤로 돌아서 계단을 밟고 도망칠 뻔했다. 소연이 찾아온 그날 밤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영혼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협은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순간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누구냐?”
안에서 차갑고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화는 이 주변을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누구든 여기 서 있다면 명령을 어기는 셈이다. 주인의 명령을 어기면 즉참이었다.
끌고 나가라고 명하기도 귀찮아서 천화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예상외의 인물에 천화는 눈을 깜빡거렸다. 문밖에 서 있는 건 유협이었다. 어쩐지 유협은 안색이 하얗다 못해 시체 같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누군가가 죽도록 괴롭혔다는 듯 마음이 찢어지게 가련해 보였다. 그 무기력한 얼굴에 천화는 그만 이유도 묻지 않고, 와락 유협을 안아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쉬이. 그대 울어?”
천화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러나 유협은 눈길을 피했다. 피한다기보다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상태에 왈칵 두려워진 천화가 인형 같이 늘어진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비비고 입 맞췄다. 속으로는 의원을 불러야 하나 걱정까지 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응?”
“천화 님…….”
“응. 나 여기 있어.”
그 말에 유협이 서서히 손을 빼냈다. 문득 두려워진 천화가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빠져나간 후였다. 유협이 이제는 천화를 바로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검은 눈에서 눈물이 쉼 없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나 깊게 다쳐 말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천화는 갑자기 너무나 두려워졌다. 마음이 불안하여 당장이라도 유협에게 입 맞추고 침대로 끌어당겨, 그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안고 싶었다.
그러나 유협은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천화 님. 묘족들이 믿는 귀신 중 가장 악랄한 게 있습니다.”
“……뭔데.”
“겉모습은 사람의 모양인데 속은 귀신이 살 만큼 어지러운 사람입니다. 사람과 귀신의 경계에 있다고 해서, 생귀신이라 부릅니다.”
이제 천화는 할 말이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유협을 붙잡고 무슨 소리냐고 물어야 하나. 아니면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까. 서서히 고개를 든 유협은 기묘하게 슬픈 웃음을 지었다. 천화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알고 계셨군요. 그렇죠?”
“……나에게 붙은 것인 줄은 몰랐어.”
“차라리 저택에 붙은 것이었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유협이 중얼거렸다. 천화는 침묵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손이 긴장으로 미끈해졌다. 유협은 어떻게 할 것인가.
유협은 자신이 올라온 계단을 힐끗 보았다.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높은 품격을 가지는 건 아닙니다, 천화 님.”
“나도 알고 있어.”
“그러세요? 그럼 왜 그 많은 사람들을 해치셨습니까?”
순간 천화는 할 말이 없었다. 왜? 왜냐니. 지금은 황자로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지만, 만약 한 푼도 없게 태어났어도 천화의 행동은 같았을 것이다. 아니, 그때는 법이라는 미명하에 사람을 해치진 않았겠지.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거슬리는 것들을 참고 볼 필요도 없었다.
“왜 안 되지?”
“그게 무슨 뜻이세요?”
유협은 바보 같은 문답이라 생각하며 물었다. 천화는 자신이 사람을 해하는 데 서슴없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사람 목숨을 쉽게 앗아간 것이다. 가슴이 차갑게 식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사이에 혹사당한 마음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가만히 한자리에 있을 뿐이야. 그러나 한 사건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되지. 많은 사람이 손을 뻗어 도와 달라고 말해. 그러면서 타인의 의견은 배제하고 자신의 말만 맞다고 고집 피우지.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가장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야.”
연씨 아들이 우물에 빠져 죽었을 때도 많은 사람이 뒤에서 연씨 부부에게 욕을 했다. 그리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천화를 졸라 댔다. 그래서 천화는 법대로 해결했을 뿐이다. 그러자 성가시게 구는 사람들이 싹 사라졌다.
그렇게 주장하는 천화를 보고 유협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천화의 뺨을 쓸어 봤다. 천화는 유협이 뺨을 쳤어도 기꺼이 맞았을 태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럼 저는 왜 속이셨습니까?”
“……미안해.”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잘못된 일을 한다 생각해 숨긴 것 아닙니까?”
“그대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걸 싫어하니까 그랬어.”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마치 어린아이가 할 만한 대답이었다. 아주 기본적인 자비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천화는 유협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희미하게 켜져 있던 유협 눈 속의 불이 꺼지자, 천화가 침착하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마음과 같아서는 이 계단에 머리를 찧고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괴로움과 슬픔, 아득한 고통을 느끼는 건 유협뿐인 듯했다. 이 순간조차 천화는 유협이 괴로워했을 걸 예상한 듯했다.
유협이 입술을 짓씹고 말했다.
“천화 님, 저는 천화 님이 기르는 꽃이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그렇게 사랑했던 이유는 당신이 내게 유일해서였지만, 이제는 그 유일함이 문제가 되는군요.”
“무슨 뜻이야?”
“당신이 해 준 모든 게 그저 고통으로 남습니다.”
유협이 중얼거렸다. 그가 말하는 건 물질이 아니었다. 천화의 웃음, 입맞춤, 다정한 공기, 뜨거웠던 사랑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협은 도저히 그걸 끌어안고 살 자신이 없었다. 너무 큰 배신감에 온몸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아팠다. 제정신을 차리려면 몇 년이 걸릴지 자신할 수도 없었다.
“널 해친 게 아니잖아.”
천화가 애절하게 물었다.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천화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들어 유협의 팔을 꽉 잡아 왔다.
“알았어. 당장 재촉은 하지 않을 테니까 쉬면서 결정해.”
유협에게는 결정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천화와 한 번이라도 더 눈이 마주치면 죽을 것 같았다. 유협이 눈을 피하자 천화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대 말이 맞아. 나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귀신인 것 같아.”
천화는 적어도 유협에게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지만 현실은 유협에게도 귀신이었다.
유협이 놔 달라고 팔을 빼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천화는 유협의 손목을 천천히 문지르며 물었다.
“내가 귀신처럼 보이지?”
유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천화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대를 다치게 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지금 이 순간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따져 물으려던 유협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천화는 맑고 투명한 눈으로 유협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마치 이런 날이 올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천화는 목소리를 키웠다.
“여봐라, 그 방을 준비해.”
“그 방?”
유협이 인상을 쓰며 되물었지만 천화는 다시 한번 맹세하듯 말할 뿐이었다.
“내가 너를 다치게 할 일은 절대 없어. 나를 믿어 줘.”
✾✾✾
이번에 천화가 혼인 선물로 보내온 건 금으로 만들어진 발찌였다.
붉은 주단 위에서 발찌가 위협스럽게 반짝였다. 바빠서 직접 오지 못해 미안하니, 혼인 선물로 열두 명의 노비 역시 선물로 받아 달라는 전언이 있었다.
유협은 천천히 다가가 발찌를 받쳐 들고 있는 노비의 턱을 잡았다. 살짝 악력을 가하니 입이 벌어진다. 텅 빈 입 속을 살펴보자 노비의 혀가 뿌리째 뽑혀 있었다. 그 잔인한 광경에 순간 머리가 아찔했다
한편으로는 놀랍지도 않았다. 요새 부쩍 바빠진 천화는 이렇게 선물을 보내고는 했다. 아마 거세도 시켰을 것이다.
유협의 처소에 일하는 노비들은 몇 빼고는 다 이런 모습이었다. 멀쩡히 궁에 왔다고 해도, 잘못을 해서 비슷한 결과가 돌아왔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유협과 지나치게 친해지는 걸 의미했다.
소연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 가장 소름끼치는 건 천화가 혀를 뽑은 소연을 다시 방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혼인을 거부하는 유협에게 경고하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장미에서 가시를 발라내듯이 유협에게 소연을 돌려줬다는걸. 자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를 빼고, 유협이 아끼는 장난감을 돌려준 것이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소름끼쳤다.
유협은 시종의 턱에서 손을 뗐다. 그렇지 않아도 말을 전하러 온 천화의 시종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던 참이었다. 유협은 무릎을 꿇은 열두 명의 사내들을 외면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천화의 시종이 냉큼 고했다.
“저하께서 발찌를 착용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유협은 들은 척하지 않고 무시했다.
천화의 시종들은 사실 충성스러운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이 절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협의 행동을 감시하고 주인에게 고했다. 아까도 시종을 붙든 손길이 조금만 더 길어졌으면 그 사실 역시 전했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협이 무시한 채 방문을 열자 시종이 애써 불러 세웠다.
“유협 님.”
차마 유협에게는 손가락도 대지 못하고 그가 발을 구른다. 유협은 싸늘하게 말을 잘라 버렸다.
“싫어.”
“하지만…….”
“이런 선물을 가져오려면 직접 오라고 전해.”
시종의 얼굴이 순간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 말을 전했다간 맞아 죽을 테니까.
유협은 잠깐 입꼬리만 올려 비웃고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미쳤다, 미쳤다 하니 정말로 미쳤나 보다.
남에서 발찌는 부인들만 착용하는 장신구였다. 아니면 아주 천한 노비에게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 채웠다. 유협은 여자도, 노비도 둘 다 아니었다. 하지만 천화는 요새 이렇게 뜻 모를 선물을 보내 속을 어지럽혔다.
언뜻 보기에 발찌는 굉장히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귀부인들이 홍옥을 박아 발찌를 만드는 것처럼.
그러나 생긴 모습은 노비의 것과 비슷했다. 귀부인들의 발찌는 발 아래로 흘러내려 금 사슬이 쓸리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천화가 내어 준 발찌는 발목에 딱 붙는 형태였다. 이런 형식으로 만드는 발찌는 시종이 도망가지 못하게 표시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아무도 시종에게 흑요석을 박은 발찌를 주지 않겠지만…….
유협은 한숨을 내쉬며 푹신한 침대에 앉았다. 짚이 아니라 진짜 솜을 넣은 침대는 푹신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이 방과도 안녕이다. 천화가 나름대로 준비한 묘족의 항아리가 놓여 있는 선반도, 은은한 난향도, 나름대로 정갈한 서재도 다시는 보지 못한다. 대신 열흘 후 화려한 천화의 안채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의 부부로서.
동의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혼약을 떠올리자 유협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할수록 답답하게 얹혀 오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려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숨이 막혔다.
아직도 밖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종의 그림자도, 엎드려 있을 열두 명의 노비도, 그들이 가져온 금 발찌도 전부 다 싫었다. 유협의 답답함을 풀어 줄 방법은 한 가지였다. 천화가 자신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천화는 유협의 요구를 무시한 채 먼저 혼약하자고 속삭였다. 혼인하고 안전해지면 고향에 가는 걸 허락하겠다면서.
유협과 친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혀를 뽑아 버리는 남자가 하는 말이었다. 믿음이 전혀 가지 않았다. 마치 돌에 대고 경을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유협이 제안을 거절하는 그날 밤 내내 천화는 입을 맞췄다. 아프지 않게 살살 입술을 씹으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천화를 보며 유협은 그만 눈물까지 보였더랬다.
그 모습에 설핏 웃으며 눈물을 닦아 주던 천화가 떠오르자 다시 한번 숨이 막힌다. 마치 누군가 속을 박박 찢어 갈기는 것 같았다.
유협은 하릴없이 침대에 누웠다. 요즘 하는 일이라고는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 있는 것밖에 없었다. 온몸이 무기력하고 힘이 없었다. 문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보기 싫어, 아예 돌아누운 채로 유협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유협은 꺾인 적이 없었다. 어떤 난관이 와도 버텨 냈다. 마침내 영혼이 별로 돌아갈 때까지 그렇게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천화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힘이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새벽으로 넘어가는 저녁이었다. 유협은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니 몸이 축축 늘어졌다.
‘죽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누가 가져왔는지 모를 구운 달걀과 견과류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유협은 그릇을 당겨 땅콩을 우물거렸다. 겨우 허기가 가라앉자 이번엔 밖으로 나갔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발만 대충 신고 걷다 보니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유협은 서슴없이 불빛을 따라 걸었다. 곧 무표정을 하고 있는 무장 두 명이 나타났다.
천화의 신분을 생각하면 대단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그들이 지키는 대문이 유협의 안채라는 것만 빼면 신기한 것도 없었다.
유협이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나오자, 무장 두 명이 곧장 고개를 숙여 보였다. 유협은 그들을 무시하고 대문에 손을 댔다. 그러자마자 무장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외출 가십니까? 저하를 모셔 올까요?”
“밖이 어두워 위험합니다. 이리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늑대도 있고 또…….”
“그냥 문 좀 열어 보려 하는 겁니다.”
“그럼 저하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유협이 짜증 섞인 한숨을 뱉었다.
“제가 식객으로 집주인을 어찌 이리 귀찮게 하겠습니까? 차라리 집을 나갈 테니 비켜 주십시오.”
무사 두 명은 그냥 깔끔하게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에 유협의 새로운 집 앞을 지키라면서 천화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감시가 아니라, 보호를 하러 가는 거다.’
그러나 막상 갔더니 집주인은 나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이건 감금이잖아요, 저하. 문제는 감금당하는 사람도 당연히 어지간히도 화가 나는지 매일 밤 찾아와서 따져 묻는다는 거였다.
유협의 소식을 듣게 된 사라를 포함한 사람들은 어련히 그가 실망하고 괴로워하리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침대에 누운 채 가짜 혼인식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유협의 성품상 그런 일은 없었다. 천강 아래서도 몇 년을 버텼는데 이 정도면 장난이었다.
“저에게 공연히 화풀이 당하는 것도 지겹지 않습니까?”
유협은 대놓고 자기가 화풀이를 하는 게 맞다며 빈정거렸다. 그 외에도 무장이 되어서 하려고 했던 일이 주인 첩이나 감금하는 거냐는 둥, 지금 모습을 보면 참으로 어머니께서 감동을 하시겠다는 둥 온갖 잡소리로 사람의 심경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보호하라고 명령 받기도 했고, 생긴 건 꽃처럼 생겼기에 저 양순한 양반을 좀 도와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유협은 매일 낮 시간에 창의적인 욕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밤이 오면 무장들은 한숨이 퍽퍽하니 나왔다.
그런 유협이 이렇게 악독하게 욕설을 퍼붓다가도 귀신처럼 사라지는 시간이 있었다.
곧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 맹세코 이 발자국 소리가 반갑게 들리는 건 처음이었다. 상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화가 또 여기 있었냐는 듯 다가왔다. 유협은 순식간에 말이 없어졌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그 말에 유협은 뒤로 돌아 뚜벅뚜벅 자신의 안채로 향하기 시작했다. 천화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염려하는 걸음걸이였다.
천화는 그에 상관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천화가 손을 뻗어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유협은 그 손을 매섭게 쳐냈다. 그럼에도 천화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협을 보았다.
“요새 움직이지도 않고, 잠만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던데.”
“저하께서 어떻게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유협이 선을 긋고 이야기했다.
천화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컸다. 그는 그날 이후 일방적으로 같은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와 같은 충격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밤잠을 설칠 만큼 큰 배신감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쓸까. 선물들도 거부한다던데 요새 걱정이 많아.”
순간 조금 울컥 했다. 가슴에 담아 둔 참을 수 없는 감정들 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다. 천화가 이렇게 말을 할 때마다 누군가 자신의 살을 조금씩 뜯어가는 것 같았다. 천화가 어리석은 죄로 유협이 아팠다.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죽고 싶었다.
유협은 도저히 말로는 천화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천화는 그런 감정을 아예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유협이 차분하게 꺼낸 말은 해결 방법이었다.
“이곳에서는 가슴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방을 바꿔 줄까?”
천화의 말에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천화가 인상을 썼다. 그가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유협은 시선을 바닥으로 깔았다. 그런 모습조차 아름다운데 너무나 속이 썼다. 천화가 유협을 달랬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면 혼인 후에 같이 나가자.”
“저하, 저는 그러다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 됩니다.”
정말이었다. 천화의 성품상 누군가 마차 앞을 지나가면 말을 멈추지 않고 몰아, 그대로 사람을 쳐 죽이고 지나갈 것 같았고. 거슬리는 상인이 있다면 베어 죽일 것 같았다.
대체로 무해하게 지내는 천화이지만 단호할 땐 엄청나게 단호했다. 유협이 소연에게 손대지 말라고 빌었을 때도 그는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이제는 천화와 하는 혼인 따위는 더 이상 원하지도 않았다. 거대한 저택에 갇혀 사는 꼴도 바보 같기만 했다.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느라 더 이상 감정을 붙잡을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천화가 이상한 말을 했다.
“나도 변방에 한번 가 보고 싶긴 해.”
놀란 유협이 천화를 바라봤다. 그러자 천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거의 처음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힌 순간이었다.
“그대의 가족이 있는데 당연히 가 보고 싶지.”
이성이 찾아오기 전, 본능적으로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가족을 천화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그 생각은 현실을 깨달으며 금방 꺼져 버렸다.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남에서 변방까지 적어도 30일은 걸립니다.”
“도착할 때까지 사고가 날까 두려워?”
천화가 농담인 척 진심으로 물었다. 유협의 시선이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대답했다.
“네.”
“혼자서 가는 건 불가능해.”
“가는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왜?”
천화가 손을 뻗어 유협의 턱을 잡았다. 힘이 한 번 꾹 들어갔다가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유협이 밀어 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맞닿은 입술은 부드러웠다. 꼭 예전하고 같았다. 입술을 떼어 내기 싫을 만큼 포근했다.
유협은 결국 독하게 천화의 입술을 물어 버렸다. 까드득 소리와 함께 피 맛이 흘러들어 왔다. 천화는 그럼에도 한 번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갔다. 그가 피가 묻은 입술을 닦아 냈다. 문득 유협의 표정을 본 그가 픽 웃었다.
“나 좀 봐줬으면 했거든.”
유협은 침묵했다.
“저하가 자비심을 배울 때까지 저는 혼자 떠나는 게 좋습니다.”
“혼자는 안 돼.”
유협은 한숨을 쉬고 침대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차라리 천화가 천강처럼 굴었으면 좋겠다. 자신을 억압하기 위해 뭐든 사용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천화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품에 안은 사람을 어르고 달래듯 유협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강보다 지독한 건 천화였다. 천강이 그의 신체를 좀먹게 했다면 이제 천화는 마음을 깨트리고 있었다. 유협은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고통 때문에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으면서도 천화는 여전히 옛날과 같았다.
“쉽게 생각해. 나와 혼인하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천화가 유협의 뺨을 쓰다듬었다.
천화 역시 요새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눈앞에 유협을 두고 그저 구경만 하는 건 천화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성욕에 미친 건 아니었지만, 확인받고 싶었다. 기꺼이 품에 안겨 오는 유협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남의 문화와 맞지 않는 것도 알아. 여자로 살라고 강요하지도 않을 거야. 그저…… 나랑 있어 줘.”
천화가 진지하게 말했다.
유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천화의 노력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맹목적인 순종이자,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천화 님, 생귀신이 붙는 조건 중에 한 가지 끔찍한 게 있습니다.”
천화의 눈이 흐려졌다.
“또 뭔데.”
“생귀신은 살육을 멈출 마음이 없는 자에게 붙습니다.”
“…….”
천화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대신 그가 기가 막히다는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미치겠네.”
유협은 오늘 치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천화는 숨이 턱 막혀 화가 났다. 그러나 유협에게 화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협의 말을 믿어 버리고 마는 자신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신도 묘족을 한낱 어리석은 종족으로 보면 좋으련만.
“그래, 알겠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둘 다에게 좋겠군.”
저 눈이 자신을 보지 않는 게 거슬리고, 저 품이 열리지 않는 게 화가 났다. 그러나 억지로 취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마치 유협이 저택에 주술을 쓰지 않는 것처럼.
“나는 혼례를 연기하지 않을 거야.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해.”
천화가 벌떡 일어나서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떠나는 소리를 듣고서야 유협은 숨을 몰아쉬었다.
맘만 같아서는 이 저택에서, 천화의 인생에서 조용하게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도저도 못하는 잡것이구나.’
절개 있게 죽으려면 차라리 머리라도 벽에 박아야 했다. 천화를 적극적으로 말릴 거라면 주술이라도 사용해야 했고. 아니면 반대로 천화를 완전히 받아 주고 같이 사는 방법도 있었다. 천천히 그에게 자비를 가르치며…….
‘꿈 깨라.’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유협 쪽이 물들 가능성이 높았다. 귀신과 천화 둘 다에게 희롱당하며 살게 될 터다.
오늘도 가슴이 답답해서 유협은 한숨만 쉬었다. 돌아보니 자신 사는 처지가 너무하여, 누구에게라도 따지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지금 사치였다. 어떻게 해야만 천화를 멈출 수 있을지가 유일한 문제였다.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유협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주원인이다.
유협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계속 식사를 건너뛰고 잠만 자 배가 고팠지만 자꾸만 잠이 왔다. 유협은 몸을 웅크리고 스스로를 껴안는 자세로 잠에 빠졌다.
“……!”
얼마나 잠들었을까, 누군가 어깨를 잡아 거칠게 흔들었다. 묵직한 사내의 손길이었다. 누군가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유협은 놀라서 눈을 떴다. 그리고 더욱 번쩍 놀라 잠기운이 사라졌다.
유협의 방에 들어온 사람은 천화가 데려온 노비 중 하나였다. 혀가 없어서 유협을 깨우지 못하고 손으로 흔든 것이다. 그건 크게 놀랍지 않았으나 노비의 꼴이 너무나 징그러웠다.
노비답게 땋은 머리를 제외하면 온몸에 작은 물집이 난 상태였다. 피가 함께 고인 것 같은 물집은 사람의 모공만 한 크기로 전신을 전부 덮고 있었다. 살이 있는 부분이라면 몸 어느 곳이든 보였다. 다닥다닥 올라온 물집은 심약한 사람은 기절이라도 하게끔 끔찍했다.
그러나 유협은 심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눈물이 고여 있는 노비의 눈을 보고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만약 급한 일이 아니었다면 노비는 유협의 방에 발도 못 붙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방을 감시하는 무사들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유협은 급한 대로 노비의 팔을 붙잡아 소매를 까 보았다. 소매 안쪽까지 물집이 돋아 있었다. 이를 누르며 유협이 물었다.
“아픈가요?”
노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노비가 우우 소리를 내며 방 밖을 가리켰다.
그 의미를 눈치를 챈 유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뾰족한 물건을 찾았다. 그러나 천화가 워낙 철두철미하게 그런 물건들을 치워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급해 하는 동안 밖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들이 들려왔다.
“갑시다.”
유협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뛰어갔다. 문을 열어젖히자 밖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유협을 돕는 노비도, 선물로 온 노비도, 매일 밤 욕설을 걸판지게 먹는 무장들도 난리가 났다.
서로 위계를 잊은 채로 그들은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나무에 몸을 긁기도 하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모두 하나 같이 똑같은 물집이 자라 있었다.
유협은 혹시 자신도 물집이 생겼나 살폈지만 다행이 아무런 것도 손에 걸리지 않았다. 하룻밤 만에 물방울 같은 물집이 자라나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밤도 지나지 않았다. 유협은 이게 누구의 소행인지 알 것 같았다.
‘귀신이 장난질을 쳤구나.’
천화가 왔다 가는 사이 따라와 이딴 장난을 쳐 놨다. 앞으로 천화가 있으면 이런 식으로 주변인에게 재난이 찾아올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유협은 필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여전히 뾰족한 물건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손가락 정도로는 안 된다.’
그 순간이었다. 눈꺼풀을 마구 문지르는 무장이 매고 있는 칼집이 눈에 들어왔다. 유협은 옳다구나 생각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무장은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달려 다니고 있었지만, 유협은 그를 따라잡으며 외쳤다.
“칼집을 제게 주세요!”
그러나 무장은 미친 사람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마구 달리기만 했다. 결국 유협은 적당한 거리에서 그의 칼을 빼들었다. 스르릉 소리가 났지만 무장은 눈치도 채지 못했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른 유협이 일단은 사람의 숫자를 세었다. 다행히 자신의 저택에는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손바닥이면 된다.’
유협은 자신의 옷깃을 찢어 입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쪽 발을 무릎 꿇고, 한 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준비를 마친 유협은 스스로에게 경고하듯 하나, 둘, 셋을 셌다. 무사의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손바닥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등 뒤에서 차가운 땀이 줄줄 났다. 이가 저절로 악물렸다. 순간 눈앞이 팽 돌았으나 이럴 때가 아니었다.
유협은 눈을 꾹 감고 이제는 긴 칼날을 손에서 빼냈다. 손을 관통해서 그런지 살점이 끈덕하게 차가운 철에 달라붙었다. 그 때문에 칼을 뽑는 순간이 더더욱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칼을 다 빼냈을 때 유협은 숨을 몰아쉬며 휘청거렸다.
옆으로 쓰러질 뻔한 것을 다른 손으로 땅을 짚어 균형을 잡았다. 가슴 안쪽으로 꾹 쥔 손에는 뜨거운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더운 숨을 몰아쉬며 유협은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부터 눈물을 단 채 자신을 쫓아다니던 노비를 돌아봤다. 유협을 깨우러 들어온 자였다.
유협이 손짓을 까딱하자 노비가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유협은 물집이 잔뜩 난 이마에 자신의 손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얹었다. 그리고 노비의 눈을 꼭 감게 만든 후 얼굴 전체에 피를 발랐다.
어깨와 손 정도까지 문지르자 어느 순간부터 물집이 알아서 줄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피고름 냄새가 역하게 났지만, 터져 버린 물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확인해 보십시오.”
유협이 말하자 노비가 빙글빙글 돌면서 자신의 옷을 젖히더니 물집을 찾았다. 그러나 단 한 개도 찾을 수 없었다. 노비의 눈에 다른 의미의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몇 번이나 감사해 하는 걸 토닥인 유협은 이번에는 다른 장소로 뛰어갔다.
날이 밝아올 무렵에는 모든 사람이 피만 묻었을 뿐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어제의 난장판이 꿈인 것 같았다. 그들은 유협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방으로 부축해 준 후 의원을 부르러 갔다.
유협은 멍하니 헤집어진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어젯밤 생난리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손이었다. 반쯤은 미쳐 버린 사람들을 잡아 얼굴에 피 칠갑을 해 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여자의 경우에는 더더욱 손대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유협은 도망가는 사람, 숨는 사람, 미친 듯이 자해하는 사람 등등을 모아서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렸으나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유협은 너덜거리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달려다니다가 피가 모자라지면 유협은 칼로 상처를 헤집었다. 아예 손바닥을 가로 세로로 그어 버리기도 했다.
‘어리석었어.’
뜨거운 피가 어찌나 많이 흘렀는지 유협은 조금 어지러웠다. 정말 멍청한 짓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유협은 시끄러운 새벽이 지나고서야, 피 묻은 자신의 옷자락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간단하게 피가 많이 나는 곳을 찌른 후, 피를 대접에 받는 게 가장 똑똑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유협은 희미하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젯밤처럼 행동했다. 귀신은 천화를 따라붙는다. 귀신 때문에 사람들은 다친다. 그러면 곧 유협도 다치게 된다. 칼을 손에 쑤셔 넣을 때마다 유협은 피로 얼룩진 회개를 했다. 이게 천화를 흔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귀신은 핑계고…….’
귀신은 정말 반쯤은 핑계였다. 자신을 여기에 가둬 버린 천화에게 보여 주는 시위였다. 유협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무엇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대한 복수였다.
‘천화는 화내려나?’
멍청하니 생각하다 유협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잠과 피가 너무 모자랐다. 남에 와서는 너무 기절을 잠자듯이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의식이 뚝 끊겼다.
✾✾✾
이른 아침이었다. 황실 회의를 나가기 위해 차려입고 있던 천화는 무사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보통이라면 신경 쓰지 않고 할 일을 하겠지만 하필 달려오는 놈이 별채를 지키는 무사였다.
천화의 대저택 속 숨겨져 있는 별채에는 유협이 있었다. 당연히 무사 역시 비밀리에 그를 지키는 소중한 존재였다.
천화는 옷시중을 드는 시종의 손을 쳐서 떨어트리고 몸을 돌렸다. 허리를 묶던 끈이 풀어져 긴 치마처럼 나풀거렸다.
“무슨 일이지?”
“저하. 그게…….”
올 때는 숨이 넘어오게 달려오더니, 도착하고 나자 어쩔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거린다. 누가 봐도 수상했다.
천화는 당연히 별채 상태에 매우 예민했다. 때문에 저택 사람 하나하나 다 관리를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산이 깎여도 태연할 것 같았던 무사의 눈에는 긴장이 잔뜩 어려 있었다. 천화의 눈에 어두운 빛이 번뜩였다.
“똑바로 고해라.”
“어제 그게…… 방문하신 후에 귀신이, 귀신이 장난질을 했습니다.”
무사의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만약 상대가 천화만 아니었어도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천화 역시 불길함에 가슴이 쿵 떨어졌다. 귀신이라고 하면 바로 생각하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천화는 타오르는 불안함을 분노로 바꿔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갑자기 온 사람들 몸에 이상이 생겨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유협 님께서 급히 밖으로 나오셔서.”
“네가 막았느냐?”
그러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시 무사는 징그러운 물집이 진 얼굴을 박박 긁으며 터트리려 애를 쓰고 있었다. 무사의 어깨가 쳐지자 천화의 눈빛이 더더욱 살벌해졌다.
“그래서?”
“그래서…… 나오셔서 치료를 해 주셨습니다.”
“……치료?”
천화의 산호 같은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치료, 천화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무사가 몸을 떨었다.
천화는 무사를 보다 눈을 한 번 굴렸다. 그건 치료가 아니라 주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마도 유협의 ‘치료’를 받았겠지.
무사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을 때 천화는 거침없이 그의 정강이를 발로 차 넘어트렸다. 큰 덩치가 단숨에 넘어 가며 쿵 소리가 났다. 머리가 깨질 뻔한 무사가 머리를 껴안고 비명을 참았다.
천화는 지금 당장 그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장 별채로 간다.”
여기서 황궁 회의를 지적하며 운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화는 옷을 차려입다 말고 급한 걸음으로 별채로 향했다.
별일이 없는 한 조용하기 그지없는 별채였다. 인원 중 대다수가 말을 못하는데다가 말을 할 줄 알아도 혀가 없는 듯 살았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조그맣게 수다를 떠는 소리들이 들렸다. 함께 재난을 이겨 내고 피어난 동료애가 그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러나 천화가 걸어 들어오는 걸 보는 순간부터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올리는 인사를 전부 무시한 천화는 기다릴 것도 없이 유협의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유협이 대답하지 못할 상태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과연 약재향이 풍기는 방에서 유협은 쌔근거리며 잠에 빠져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다. 천화는 유협이 저렇게 자는 듯 기절한 꼴을 벌써 백 번은 본 것 같았다.
시선을 돌려보자 한 손은 거의 팔까지 두둑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천화는 그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침대 옆에 앉았다. 시선이 유협을 향해 꽂혀 있었다.
여태 저택을 지키다 그를 따라 조용히 들어온 무사에게 천화가 물었다.
“상태는?”
“관통상을 입으셔서…… 한 계절은 고생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잘못 치료되면 손가락을 쓰는데 어려움이 있으실 수도 있다고 합니다.”
“…….”
무사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젯밤에 자신을 도와준 유협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아무 말 없는 천화가 두렵기도 했다.
천화는 조심스럽게 유협의 손등을 쓸어 보다 물었다.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이냐?”
“귀신이 노비와 시종을 놀리려고 온몸에 물집이 돋아나게 했습니다. 유협 님은 묘족이라 그런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알아채신 유협 님이 모두를 피로 씻겨 치료해 주셨습니다.”
“손은 무엇으로 뚫었지?”
“무장의 검으로 그러셨습니다.”
그 말에 천화가 고개를 돌려 무장을 보았다. 천화가 애틋하게 유협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에 거의 핏발이 선 천화는 무척 화가 나 보였다. 그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네 것으로?”
“아…… 아닙니다.”
사실 워낙 난리통에 누구의 물건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화의 눈빛을 보자, 아니라는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왔다. 천화는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유협을 바라보았다. 무장은 슬그머니 뒷걸음으로 도망쳤다.
차라리 그렇게 도망을 놓는 게 다행이었다. 천화는 속이 갈기갈기 찢겨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협이 잠든 것처럼 기절한 걸 처음 본 것도 아니고, 주술을 사용하는 걸 처음 보는 것 때문도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큰 분노와 낙담 때문에 천화는 더 이상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천화에게 유협은 봄에 내리는 눈 같은 존재였다. 보기만 해도 설레고 기적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꾸만 주변에서 그의 화원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이번에 불을 놓은 사람은 다름 아니라 천화 그 자신이었다. 천화가 오고 간 다음에 생겨난 귀신이니까.
이 난리가 벌어질 줄 몰랐다는 건 차지하고, 유협의 대응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유협은 어리석지 않았다. 만약 하루 종일 피를 흘려야 할 일이 있다면 아무렇게나 계속해서 상처를 낼 필요가 없다는 걸 알 터다. 그러니까 이번 행위에는 자해가 포함되어 있다고 봐도 좋았다.
순간 천화는 새빨개진 눈을 쓸며 유협을 보았다. 따로 마련해 둔 별궁에 가두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제한하면 분명히 화를 낼 것은 알았다. 하지만 유협은 고작 그 정도로 자기 스스로를 해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무언가 불씨를 당긴 게 분명했다.
천화는 턱을 괴고 유협을 빤히 보았다.
‘나군.’
나 때문에 화가 난 거였군. 유협은 계속해서 천화가 무자비하며 잔인하다고 비난해 왔다. 천화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만약 어젯밤 상황에서 자신이 있었다면, 그는 유협을 억지로 끌어냈을 터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명했겠지.
그런 천화가 싫어 유협도 마음대로 자신의 몸을 찢어 냈다. 천화가 가슴 아파 할 것을 아니까. 참 괘씸한 행보였다. 유협이 아닌 다른 사람이 시도했다면 천화가 직접 오장육부를 열어 줬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유협이라고 생각하면 차마 괘씸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사람 마음을 언제까지 들었다 놓았다 할 건지.’
천화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비볐다. 고집이 센 줄도 알았고, 사고뭉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당해 보니 정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곧 있을 황실 회의도 까맣게 잊을 만큼 유협의 행동이 기가 막혔다.
천강과 다툼이 컸을 때 유협은 귀신들로 천강을 괴롭혔다. 천강의 집을 귀신 소굴로 만들었지 않는가.
그때와 달리 자신과의 다툼에서는 유협이 한 발자국 물러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마음을 놓은 대가로 다름 아니라 유협이 피를 봤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천화는 반드시 유협과 혼례를 할 것이고, 그와 평생을 함께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협이 보여 준 잔인한 가능성이 천화의 마음을 통째로 흔들었다. 불안했다. 심장이 쾅쾅 뛸 정도였다.
‘주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도 없고.’
피 값을 갚게 하겠다고 그날 밤 도움을 받았던 자들에게 딱 그 만큼씩 피를 뽑아낸다면 유협은 이제 더 이상 천화를 사람으로도 보지 않을 것 같았다.
천화는 아직까지 자신이 파악하지 못했던 유협의 모습이 남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제 보니 숫제 혼례 전에 도망쳐 버릴 것 같았다.
‘경계를 삼엄하게 해야겠군.’
더 이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유협은 한다고 결심하면 했다. 그 말을 긍정적으로 보자면 아직까지는 천화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도망가지 못하게 꼼꼼한 관리가 필요했다. 바깥에 자물쇠를 달고, 호위를 붙이는 게 하루 종일 감시하기에 좋을 터다.
천화는 한숨을 내뱉고 약향이 나는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쪽 가볍게 입맞춤했다.
“제발 나도 생각해 줘.”
간절한 바람에도 무심하게, 유협이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천화는 그날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유협의 별궁에 머물렀다. 상처가 크지 않아서 유협은 저녁이 되기 전에 깨어났다.
눈에 껍데기가 낀 것처럼 눈앞이 가물가물 했다. 무심코 눈을 비비려는 손을 다른 이의 손이 붙잡았다. 깜짝 놀란 유협이 굳어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쉬이. 다친 손은 조심해야지.”
“천화 님?”
“설마 그대 방에 들어와서 이러는 놈이 또 있어?”
천화가 살짝 웃으며 유협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유협은 누운 채로 고개를 올려보았다. 어째 상의는 근사한데 하의는 대충 간추리기만 한 천화가 있었다. 자신이 깨었있을 때까지 있었나 싶으면서도 유협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
“천화 님, 여기 계시면 안 돼요.”
“왜?”
“또다시 귀신이 나타날 수 있어요.”
“아, 마침 나도 그 건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천화가 웃음을 지웠다. 그가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언짢은 표정으로 유협을 내려다보았다.
천화가 떠나라는 말에 화낼 줄 알았는데, 다른 사안이 있는 것처럼 정색하고 나오자 당황한 유협이 입을 다물었다. 천화는 애써 태연한 척 유협의 다친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 생귀신이라는 것 그냥은 떼어 낼 수 없는 거지?”
“……귀신이 따라붙은 자가 살심을 지워야 해요.”
“그럼 그대 말처럼 별궁은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는 거군.”
천화는 유협에게 할 수 없는 걸 있다고 말할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의 밑바닥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게 기가 막히는지 유협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천화 역시 자신이 한 말에 픽 웃으며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러니 차라리 내 옆의 방을 써.”
“네?”
유협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살짝 경계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천화는 유협이 뭘 경계하고 있는지 알았다. 이해했다. 천화도 천강처럼 유협에게 반응할 때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결코 함부로 손대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기에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얼굴을 보는 날보다 보지 못하는 날이 많을 거야.”
“저는…….”
“부담스럽다고?”
유협이 그렇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화가 온화하게 말했다.
“그럼 이 별궁에 있는 시종과 노비들을 다 죽일 거야. 그럼 그대가 잘 자겠지.”
“네? 지금 뭐라고…….”
“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이 돼서 나도 잠을 못 자겠어. 미리미리 걱정거리를 줄여 두는 게 낫겠지.”
유협의 검은 눈동자가 있는 대로 흔들렸다. 그는 천화가 그저 겁을 주고 있는 건지, 진심인 건지 알아내려 무던히도 애썼지만 천화의 태도나 목소리는 흠잡을 것 없이 예전과 같았다. 사실 생귀신이 알아서 붙을 정도라면 진심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협의 낙담한 얼굴을 본 천화는 가슴이 딱해졌다. 지금 유협은 몰랐지만 이제는 방 밖으로 나오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게끔 바꿨다. 하루에 나갈 수 있는 때도 두 번. 그리고 만약 귀신 소동이 한 번 더 일어난다면 일단 방에 가둬 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대.”
천화가 달래기 위해서 가까이 가자 유협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내 옆방으로 오기 그렇게 싫어?”
“그냥 천화 님이 이러시는 게 싫습니다.”
“좀 봐줄 순 없겠어?”
유협의 입술이 떨렸다. 왜 천화는 자신이 하는 소리가 미친 소리인 걸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별궁에 있는 가솔들을 다 죽인다는 게 말이나 되나? 이런 개소리가 천화에게는 말이 되는 모양이었다.
유협은 손을 꾹 쥐고 버티며 말했다.
“천화 님, 이런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해요.”
유협이 천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의 냉랭한 목소리와 달리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천화가 눈을 깜빡거렸다. 유협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어르고 달래는 게 더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괜히 자신의 마음을 끄집어 냈다.
“시간 낭비 하지 말고 혼약을 바로 하자고?”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서로 갈 길을 가자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유협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유협도 나름 각오를 하고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천화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살짝 고개만 저었다.
“같은 이야기를 몇 번 하는 거야.”
“그야…….”
유협이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천화가 두 손을 잡아 왔다. 앗 하는 사이에 끌려간 유협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됐다.
“나는 그대가 없으면 못 살아. 그대는?”
“……삶의 가치는 그렇게 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대는 거짓말도 참 못해.”
어이가 없어진 유협이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리는데 천화의 얼굴이 따라왔다. 그가 왼손으로 유협을 고개를 고정하고 입을 맞췄다. 천화의 입술을 너무 따뜻했다. 도깨비나 귀신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온기가 있었다. 유협은 순간적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입맞춤이 끝나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유협을 본 순간, 천화는 한순간 뚝 이성이 끊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유협이 천화를 밀어 내 한순간 설렘이 깨졌다.
유협은 눈가를 바로 닦아 내며 아까 그 마음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나가 주세요.”
뭐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천화는 유협의 눈물 가득한 얼굴에 귀신이라도 쓰인 것처럼 자동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대도 쉬어야지.”
천화는 하려던 말의 반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쫓겼다. 사실 훈계하듯 화도 낼 생각이었는데 그 역시 시도조차 못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밖이었다.
‘대체 눈물이 뭐라고.’
약간 어이가 없어져서 별궁을 바라보던 천화는 결국 자신의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천화의 걸음 소리가 사라진 후에야 유협은 허무하게 앉아서 꾸역꾸역 나오는 눈물을 흘려보냈다. 모든 게 다 슬프고 어리석게 느껴졌지만, 역시 가장 답답한 일은 천화를 너무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사실을 직시하자 더더욱 스스로가 초라했다. 자신을 소유하려고 해도, 자유를 뺏으려고 해도 천화가 좋았다.
유협은 침대에 앉아서 한없이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이 방의 모든 것과 작별할 텐데 잠이 도무지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하늘이라도 보기 위해서 방문을 열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방문만 덜컥거리고 문이 정작 열리지 않는 것이다. 아까 천화를 내보낼 때는 수월하게 열리던 문이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유협이 장지문을 툭툭 두드리며 물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유협은 다시금 문을 콱 잡아당겼고, 뒤늦게 손의 아픔에 악 소리를 냈다. 그러자 장지문 밖에서 화들짝 놀란 거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게 누구십니까?”
유협이 아픈 손을 싸매고 인상을 썼다.
누군가가 문 밖에 있는데 열리지 않도록 막고 있었다. 천화에게 들은 말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저절로 의심이 들었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마침내 밖에 있던 이가 대답했다.
“유협 님의 호위 무사입니다.”
“호위 무사?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입니다.”
“천화 님의 명령이십니다.”
유협은 눈썹을 구겼다. 호위 무사라고? 말이 좋아야 호위 무사지 지금 문도 못 열게 만들었지 않나?
유협이 문고리를 덜컹덜컹 당기며 말했다.
“그럼 호위 무사라는 자가 왜 남의 방문을 지키며 출입을 방해합니까?”
“……그게, 앞으로 외출은 두 번만 가능하십니다.”
무사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유협은 당연히 벙쪘다.
갑자기 침묵하는 방 안에 호위 무사만 발을 동동 굴렀다. 천화는 아마도 유협이 ‘화’를 낼 것이라며 무슨 일이 있든 그를 지켜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과연 돌연 돌아온 대답이 서늘했다.
“네?”
“천화 님의 명령입니다.”
순간 유협의 이가 빠드득 갈렸다. 아까 흘렸던 눈물을 죄다 주워 담아서 다시 쓸어 넣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까 그에게 입을 맞춘 건 뭔가? 안타깝게 쳐다보던 건? 그런 행동과 상관없이 천화는 유협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죄책감 없이 떠났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 유협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니, 됐습니다. 천화 님께 제가 묻겠습니다. 저는 오늘 나간 적이 없으니 직접 천화 님을 뵙겠습니다.”
무사가 또다시 곤란한 듯 입을 한참 다물다가 열었다.
“심야에도 역시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순간 참지 못하고 유협이 들고 있던 베개를 출입문에 던졌다. 퍽 소리가 나며 문짝이 흔들거렸다. 누구에게 화를 내는 건지 주체를 찾지 못하겠다. 그저 거친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 나갔다.
“내가 노예로 보입니까?”
금 발찌를 선물하거나 여성용 비녀를 쥐어 주는 일은 이제 농담거리도 못됐다. 자유를 통제한다고? 아마 혼인하고서도 이따위로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남편과 둘이 나가야만 하는 귀부인이 되는 거다.
천화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든 죽어 마땅했다. 유협을 위해서 했든, 정말로 가두기 위해 했든 후회하게 해 주리라.
유협은 자신이 하루 종일 갇혀 있어야 하는 방을 보았다. 천화의 말을 생각해 보면 오늘 밤만 가둬 둘 곳이겠지. 내일은 새로운 곳에 갇힐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유협은 눈에 이 방은 천화의 재물로만 보였다.
그 생각이 지금은 이성을 앗아 가고 말았다.
화풀이 첫 번째로 유협은 화장대를 발로 차서 우르르 부셔 버렸다. 값비싼 비녀, 온갖 보물들이 쏟아졌고, 유리로 만들어진 상단은 깨 져버렸다.
안에서 큰 소리가 나니 무사가 그만두시라고 외치는 걸 무시하고 유협은 그 비싼 물건들을 열리지 않는 문에 닥치는 대로 던져 댔다. 날카로운 물건들이 날아 왔지만 안타깝게도 장지문에는 구멍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사는 이미 심장이 쪼그라들 만큼 쪼그라든 상태였다. 이렇게 귀신 들린 것처럼 화낼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다. 분명 천화가 경고했지만 저 예쁜 얼굴에 깽판을 쳐 봐야 얼마나 칠까, 했는데 아주 지랄이었다.
방 안에서 유협은 난초를 잡아 천화의 머리채라고 생각하고 뽑아 냈다. 화분은 천화의 머리통이라고 생각하고 작살내자 힘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렸다.
왜 한집에서 개새끼 두 마리가 못 나오겠는가? 그 생각을 하자 코끝마저 시큰해졌다. 자신을 이리 가두는 행동은 천강이나 하던 일이다.
이번엔 유리 조각을 천을 감아 침대 천개를 찍었다. 주우욱 칼처럼 내려가며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리자 무사는 문을 되려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협은 그의 외침을 무시하고 침대로 향했다. 푹신푹신하게 만든 침대를 벅벅 긁어 내자 털이 날아다녔다. 유협은 이번엔 옷장 문을 열어 젖혔다.
비단이 죽죽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무사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천으로 묶어 둔 문고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집 안을 더 망치겠다 싶어서였다. 또 발광이라도 하다가 다친 손이라도 건드리면 자신은 천화에게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진정하세요.”
문이 열어젖혀 안을 본 무사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6척이 넘는 덩치의 그를 놀라게 한 건 방 안 꼴이었다. 분명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방 안에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물건이 없었다. 옷장이나 자개장처럼 무거운 물건은 넘어진 대신 다 깨져 있었다.
그 살육의 현장에서 유협은 다음 희생자인 비단옷을 쥐고 있었다. 내일 천화 옆방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물건이었다.
“유협 님!”
무사가 허둥지둥 달려오자 유협이 차갑게 째려봤다. 얼마나 사람을 얄밉다는 듯 보는지 무사는 억울해서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유협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협이 신경질이 나 물었다.
“내가 내 물건 맘대로 하겠다는데 난립니까?”
글쎄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제대로 대꾸할 수도 없었다. 무사는 애써 유협을 달랜답시고 헛소리만 늘어놓았다.
“조금만 참으시면 곧 며칠 안에 혼약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그때는 자유롭게 다닐 수도 있고. 조금만 참으시면…….”
유협은 한숨을 쉬며 옷을 던져 버렸다. 순수한 남인인 그는 유협의 분노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유협이 힘을 빼자 무사도 천천히 힘을 빼고 그의 옆에 앉았다. 경계하는 눈으로 유협을 힐끔힐끔 보던 무사가 물었다.
“다치지 않게 제가 모셔도 되겠습니까?”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세요.”
“유협 님, 여기서 주무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혹시 다른 곳으로 모셔도 될까요?”
“됐습니다. 괜히 밖으로 내보냈다고 그쪽 목이라도 떨어지면 제가 그게 퍽이나 기쁘겠습니다.”
무사는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다. 결국 발바닥을 다치게 할 것 같은 유리 조각들을 집어 들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오늘은 편안한 밤 되시고 내일은 방을 바꿔 준다니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누가 물어나 봤나? 나가세요.”
무사는 유협의 말투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분명 저번에 대화했을 때는 정상인이었는데. 워낙 사람이 고생하다 보니 악심에 미쳤나 보다, 혀까지 끌끌 차면서.
그날 밤 유협의 잠자리는 무척이나 뒤숭숭했다. 천개가 찢어진 침대에서 찢어진 이불을 덮고 털이 이리저리 날아다녀서가 아니었다. 잠이 막 들자마자 안개 낀 거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까마득하게 오래 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유협은 안갯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아득하나마 이상하게 앞으로 계속 걷다 보면 집이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유협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기억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묘족의 백유협이고, 황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향할수록 짙은 안개가 점점 걷히기 시작했다. 옅어지는 안개 사이로 보기만 해도 위용이 대단한 집이 나타났다. 유협은 어째 조감도로 그 집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갑자기 알 것 같았다. 저기서 한 남자가 나올 것이다.
역시나 대문이 쿵,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말을 탄 남자들이 나왔다. 제일 마지막에 나온 남자가 시선을 사로 잡았다. 빛나는 갈색 머리에 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마치 치명적인 꽃처럼 아름다웠다.
유협은 문득 이 광경을 본 적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선가.
저쪽에 숨어서 남자를 바라보는 검은머리 꼬마아이 역시 익숙했다. 아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검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윤기를 머금었다.
‘나잖아.’
유협은 남자가 자신을 발견하는 광경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었다. 남자가 아이를 발견하고, 데리고 들어가고, 작은 집 안에 넣는 광경까지 훤히 보였다. 아이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대로 집에 갇혀 버렸다. 이제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랬던가? 아니면 이대로 끝인가?
유협이 고개를 갸웃 하는 사이에 갑작스럽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개꿈인지 예지몽인지는 나중에 알 수 있겠지.’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도자기 조각을 꽉 쥐었다. 순간 현재 유협에게도 손이 아픈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아이의 손에서 붉은 피가 철철 흘렀다. 유협은 손의 상처가 터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유협은 아이와 함께 꿈에서 동시에 깨어났다.
배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던 유협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달빛이 은은히 들어오는 방에서 유협은 입을 벌린 채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지몽이었구나!’
발끝에서 머리까지 희열이 몰아닥쳤다.
과거 천강을 치료하고 꿨던 꿈이 예지몽이었다. 그때 당시 천화는 여러 무장을 이끌고 가다가 어린 자신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었다. 그때 어린 유협이 보기로는 방문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대문이 열려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얼마 안 있어서 진짜로 일이 벌어진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혼례보다 빠르게…….
유협은 그날 밤 계획 하나를 짜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아침 무자비하게 부서진 방을 보고도 천화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유협의 손발 중 다친 곳이 없는 걸 확인했다. 피 한 방울이라도 묻어 있으면 무사 목을 쳐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지는 손이 말랑하여 잠시 그런 생각마저 잊었다.
반면 노비들은 천화처럼 차분하지 못했다. 높으신 분이 꼼꼼하게 피워 놓은 난장에 소리 없는 경악이 이어졌다. 주변에서 부지런하게 부서진 물건들을 치우는 동안, 천화는 마음대로 유협을 주물럭거렸다.
따끈한 뺨이나 한 품에 안기는 허리, 보들보들한 엉덩이를 마음껏 추행하고 있으려니 유협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일어났어?”
천화가 귀에 대고 속삭이자 유협이 눈을 깜빡거렸다. 잠에 덜 깬 맑은 얼굴이 귀여웠다. 그러나 한순간의 이성이 돌아오자마자 유협은 벌떡 일어났다.
“천화 님!”
“어제 화가 많이 났었나 봐.”
천화가 노비들이 열심히 치우는 방을 힐끗 눈짓하며 말했다. 유협이 미간을 구겼다.
“어제 여기 계셨다면 방으로만은 안 끝났겠죠.”
유협이 가차 없이 잘라 말하자 천화가 시무룩해졌다. 눈초리가 내려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마치 슬픈 강아지 같았다. 그러나 여우도 개과였다. 유협은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독설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천화 님, 스스로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
그 말에 천화가 으음, 고민하는 척하다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대 하나 갖자고 별짓을 다 하는군, 그렇지?”
“예. 피는 한 줄기라는 걸 잘 입증하셨습니다.”
천강의 이야기가 나오자 천화는 눈썹을 흘끗 들었다 내렸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변명이라도 하면 안 될까?”
“저하, 남에서도 사냥감이 한 번에 죽지 못하고 괴로워하면 숨을 끊어 주지요. 묘족도 그러합니다. 저희 관계 역시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글쎄 그대는 사냥감이 아닌데.”
“제가 사냥꾼입니다.”
그 말에 천화가 픽 웃었다. 유협의 완강한 거부로 약혼한 부부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천화는 이 시기를 오순도순하게 보내지 못하더라도 유협과 평생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협이 원한다면 사람이 없는 오두막에서라도 살 테니 일단 그를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게 1순위였다.
“그대도 참 대범해.”
“저하 흘려듣지 마세요.”
유협이 무뚝뚝하게 말하더니 겉의를 챙겨 입고 호의 무사를 따라 새로운 방으로 향했다. 엉망이 된 방 안에서 가만히 서 있던 천화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이제 3일 후면 혼례가 시작될 터였다. 그러나 어째 유협의 말이 머리를 울렸다.
겨우 기분을 추스르며 유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마치 제가 황제라도 되는 것처럼 긴 의자에 기대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천상 문인처럼 생겼지만 사실 책 읽는 건 꺼려 하는 걸 알기 때문에 천화는 숨을 죽이며 안을 들여다봤다.
‘매의 종류와 서식처’ 과연 또 저 책이구나.
유협이 마르고 닳도록 관심을 보이는 책에 안심하고 떠나려는 순간, 유협이 책을 한 장을 넘기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방문 안 닫고 뭐 하십니까?”
하루에 두 번만 외출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 말을 들은 무사가 어쩔 줄 모르고 유협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질문에 천화가 픽 웃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분명 처음 혼례하자고 했을 때 유협은 눈물까지 보이며 그만두자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방까지 옮겨졌는데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엄청 우울해할 줄 알았는데? 의아한 생각이 마음을 스쳐 지나갔지만 일단 넘어갔다.
“아냐. 빛이 좋으니 열어 두게 둬.”
그리 말하며 발을 안 떼고 유협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곧 책을 팽개친 유협이 다가왔다. 그가 천화를 보고 똑바로 말했다.
“천화 님도 저를 하루에 딱 두 번 보실 수 있습니다.”
유협이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무사는 유협의 지랄에 살이 떨려서 살 수가 없었다. 천화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허수아비는 맞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허수아비였다.
그러나 천화는 처음에는 벙찌더니 나중에는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방으로 가 버렸다.
“…….”
무사만 영문을 몰라 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
천화는 방에 돌아와 벽에 손을 대 봤다. 지금 이 방 바로 너머에 유협의 방이 있었다. 문득 유협을 구하러 가기 위해 천강의 안채에 숨어들었던 게 생각났다. 그때 유협은 증오만 남은 생물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고자세로 나오면 천화가 성가시다는 듯이 굴었지만, 천강을 보듯 악독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계속 가슴 한쪽이 불안하지?
천화는 성큼성큼 방 안을 돌았지만 별다른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
천화가 돌아가고 나서 유협은 책을 베개 삼아서 눈을 감고 낮잠에 빠져들었다. 남들이 보면 하루 종일 잠만 자니 게으름이 늘었다고 할 터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었다. 오늘 분명히 꼬마 유협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천화와 다른 무장의 정신을 완전히 쏙 빼놓을 게 분명했다.
아직 방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문고리를 묶어 두지 않았다. 대신 양옆으로 문지기가 한 명씩 서 있을 뿐이다. 그때를 노려야 했다. 최대한 조용하게 빠져나가야 한다.
천화의 저택은 숲길 제일 꼭대기에 있었다. 따라서 말을 타고 내려간다면 붙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최대한 내려가서 마을에 섞이는 것, 그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곧 기다렸던 소리가 들렸다.
“요괴일지도 모릅니다, 저하!”
“함부로 만지시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유협은 벌떡 일어났다. 마치 누가 시간이라도 재는 것처럼 몸이 떨렸다. 하지만 계획을 이미 충분히 만들어 두었다.
먼저 유협은 들키지 않기 위해 문 옆 옷장에 가서 섰다. 이미 침대는 사람이 자는 것처럼 꾸며 놓은 후였다.
과거에서 천화는 유협이 아직 방에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곧 걸음 소리가 뚜벅뚜벅 들리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유협 님?”
당연히 방은 조용했다. 확인을 마쳤는지 방문이 닫혔다.
푸하, 참았던 숨을 뱉으며 유협은 주비해 놓았던 보따리를 슬쩍 꺼냈다. 편안한 신발과 삯비로 쓸 돈이 들어 있는 보따리였다.
유협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대문이 훤히 열린 것과 문지기 두 명도 없는 게 보였다. 천화가 그 중심에 있었다. 유협은 한눈에 천화가 어린아이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유협은 열린 대문 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달렸다.
심장이 벌떡거리고 뛰었다. 꼬마 유협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꼬마 유협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유협은 다시 잡히는 건가? 그건 절대 싫었다. 도망갈 계획을 짰기 때문에 의연한 척이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천화와 다시 살아야 한다면 유협은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천화 때문에 미쳐 가는 스스로를 생생히 느끼면서도 천화를 사랑하기에 울며 매달릴지도 몰랐다. 그런 꼴은 절대로 되기 싫었다. 그러나 천화는 그런 유협마저도 사랑할 것 같아서 문제였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달리는데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마침내 숲길이 시작된 것이다.
유협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바로 길 옆에 덤불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저택 근처인 이곳이 가장 위험한 구간이 이곳이었다. 만약 제 시간에 끝까지 도망치지 못한다면 산에서 수색을 당해 결국 위로 몰릴 것이다.
유협은 머리 좋은 산토끼처럼 행동해야 했다. 최대한 속도를 높이면서도 귀로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신이 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언제쯤 알게 될까. 천화는 분명히 그 꼬마가 떠나면 유협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방에 직접 들어와 늘 그렇듯 머리를 쓸어 넘기겠지. 그와 동시에 머리가 바닥에 덜컥 떨어질 것이다.
장면을 상상하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을 생각하기만 해도 천화의 기분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협은 얼른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이 근처에 천화와 같이 갔던 시장이 있었다. 그곳까지만 우선 도달하면 됐다.
그리고 그 순간 말 여러 마리가 박차를 가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말이 내려온 것이다. 유협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이었다.
일단은 재빠르게 몸을 숙이고 숨을 헐떡였다. 잡히면 안 된다. 그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헉헉대는 숨소리도 줄이기 위해 유협은 자신의 입을 막았다.
잠시 후, 유협이 있는 쪽으로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나 있는 길을 무시하고 산길까지 들어온 것을 보면 유협을 찾는 게 맞았다.
유협은 눈까지 굳게 감고 웅크려 있었다. 어두운 옷을 입고 덤불 아래 숨어 있었지만 어느 각도에서는 보일지도 몰랐다.
과연 말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협은 꽉 감았던 눈을 떴다. 슬그머니 고개를 올리자 거대한 검은 말이 먼저 보였다. 말의 근육이 울룩불룩하고 땀이 흐르는 것이 여기까지 단숨에 내려온 듯했다.
조금 더 시선을 올린 유협은 순간 딸꾹질할 뻔해 고개를 푹 숙였다.
‘천화!’
천화는 평소의 강아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장난기 많은 젊은이는 아예 천화 내부에서 죽어 버린 것 같았다. 대신 천화는 유협이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천화의 눈은 마치 귀신의 것과 같았다.
울컥 슬픔이 차올랐다. 그에게 귀신이 붙으면 제가 떼어 주겠다고 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저게 생귀만 아니었어도…….’
설령 피를 쏟다가 죽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천화를 지켜 줬을 텐데.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지금은 천화를 피해서 자신을 지켜야 할 시기였다. 특히 저 눈을 한 천화에게 붙잡혔다가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조용히 사방을 둘러보던 천화가 낮게 읊었다.
“유협.”
어렸을 때 빼고는 부르지 않던 이름을 천화가 조용히 속삭였다. 유협의 가슴이 덜컹거렸다. 설마 여기 있는 걸 알고 그렇게 부르는 건가?
“백유협.”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천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그저 사람을 찾고 있었다. 마치 그가 부르면 대답해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유협은 울컥하는 마음에 이마를 짚었다. 저 아이를 저렇게 망가지게 한 채로 떠나도 될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두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천화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말이 뚜걱뚜걱 소리를 내며 가까이 오더니 천화가 검집을 덤불 속으로 불쑥 넣는 게 아닌가. 아무렇게나 휘저으며 사람이 숨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유협은 깜짝 놀라 덤불 뒤에 있는 돌멩이에 몸을 기댔다. 검집이 눈앞을 휙휙 지나쳤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천화는 칼을 꺼내들어 다시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곧 말이 달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천화가 떠났음에도 유협은 몸을 웅크리고 입을 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그가 느끼는 절망감이 자신의 목 끝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유협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을 막심한 분노, 후회. 그리고 어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
유협은 제가 천화에게 몰입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분명히 관계의 끝을 내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천화가 흘려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굳건히 위로하는데도 눈물이 조금 나서 큰일이었다.
이렇게 있을 거면 아예 도망을 놓지 말던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유협은 살그머니 덤불 밖으로 기어나왔다. 그리고 천화가 향했던 방향에서 슬쩍 틀어 계속해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아무도 발견한 사람이 없다고.”
“네. 형원 님.”
“됐다.”
묘족은 도사처럼 사라지는 재주도 있나 보다.
형원이 여태 산을 뒤지고 다니느라 땀범벅인 부하들을 위로했다. 아니 실제로도 묘족이라면 뭔가 특이한 술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몸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쯤 백유협은 룰루랄라 이 산 따위 다 내려가 버렸을 수 있단 뜻이다.
그럼에도 그만두자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천화의 지금 상태를 보고 차마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형원은 천화를 인간적으로 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냥 첫사랑의 아픔을 지나고 있는 거라고……. 그러나 갖은 애를 다 써 봐도 천화는 첫사랑에게 차인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아니, 그냥 사람 같지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금빛으로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그만하자는 말이 나오려다가도 본능에 막혀 들어갔다. 지금 저런 천화에게 말을 걸고 싶은 사람? 없다.
그런데 천화는 말에 앉아 턱을 툭툭 두드리고만 있었다. 그가 공허하게 앞을 보며 물었다.
“이 시간까지 말을 피하면서 산을 내려가는 게 가능한가?”
“어…둠이 도왔을 수도 있습니다. 저하.”
형원은 힘을 내서 말했다. 힐끗 형원을 내려다 본 천화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만약 산에 아직 있다고 하더라도 이 저녁까진 움직이지 못하십니다.”
형원은 애원하고 싶었다. 부하 모두가 힘들어하고 있으니 제발 그만하자고. 그러나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 이 잔인한 놈이 형원을 발로 차 쓰러트리고 목을 벨지도 몰랐다.
천화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돌아가며 불침번을 선다.”
“네.”
드디어 살았다. 형원은 몸을 돌리며 기뻐했다. 그런데 뒤에서 절그럭 거리며 말안장에서 내려온 천화가 거침없이 어두운 숲으로 발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저하?”
천화가 귀찮다는 시선으로 형원을 보았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으나 형원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해야 하는 말을 해야 했다.
“이런 때 산을 혼자 들어가시면 위험—.”
천화는 말을 끝낼 시간도 주지 않고 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머지 무장들도 벙쪄서 쳐다보다가 황급히 그를 따라 말에서 내렸다. 결과적으로 쉬는 것은 말뿐이었다.
유협이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천화의 심장 어딘가 부러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흐르듯 살아 온 그의 어딘가가 아득하게 막히며 터질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살 수 없다는 두려움에 잠깐 정신을 놓을 뻔했던 그는 다음 순간 유협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섰다. 망설임은 없었다. 천화는 부하들을 챙길 여력도 없었다. 그저 말을 타고 먼저 출발하자 그들이 뒤를 따라왔다. 수색조도 자신들이 짰다.
그러나 그렇게 숲을 뒤져도 유협은 없었다. 유협을 영원히 못 보게 되면 어떻게 하지?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들어 천화는 몸서리쳤다.
방에 가둬 둔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큰 잘못이었나?
아니, 천화의 가장 큰 잘못은 유협을 환멸나게 한 것이었다. 유협이 늘 지적해 오지 않았던가. 천화와 자신은 같이 살 수 없다고, 천화의 행동이 너무 잔인하고, 인간의 정도를 넘었다고…….
누군가 내부에서 속삭였다.
‘유협을 다시 만나고 싶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천화가 제멋대로 살던 흐름은 완전히 부셔진 것과 다름없었다. 삶의 공고한 이유, 방식마저 사라졌다.
말에서 내린 천화는 홀로 숲길에 들어서서 어둠을 지켜봤다.
만약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유협을 볼 수 있을까? 유협은 귀신이 된 자신을 볼 수 있을 테니 그와 그렇게 함께해도 좋았다.
천화가 어떤 마음인지 안다면 유협이 다시 돌아와 줄까? 유협은 무척이나 다정한 성품이니까. 그러나 그런 유협을 악귀처럼 잡고 가둘 자신이 보였다. 혼례도 올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저택에 가둬 두고 평생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러니까 나를 싫어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천화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붙여 온 불이 일렁이며 빛을 만들어 냈지만 고작 눈앞만 밝히는 정도였다.
유협을 고향으로 보내 줬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정말로 나에게 돌아와 줬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남은 유협에게 끔찍한 공간이다.
게다가 자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천화가 알고 보니 끔찍한 괴물이었다. 자신은 유협이 무엇이라도 상관없었지만 유협은 아니었다.
“저하, 속도를…… 어서 빨리 가서 보필해라!”
뒤에서 따라오는 무인들은 자꾸만 어둠으로 녹아드는 것 같은 것 같은 천화를 따라잡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천화의 뒤를 쫓아가도 그가 늘 한 발자국 빨랐다. 처음에는 의아함을 느끼던 부하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하!”
목소리가 큰 장군이 그를 불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무리가 잠깐 멈춘 사이 어둠이 천화를 삼켜 버렸다. 기겁한 부하들이 달려가 봤지만 바로 앞에 걷고 있던 천화가 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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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협은 호숫가에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꽉 묶인 발이 아팠지만 내일이면 산을 다 타고 내려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건 천화도 마찬가지라서 주의해야 했다.
이렇게 천화를 주의하고 있으면서도 눈만 감으면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백유협.’
그 우울한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보다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마치 목숨줄을 놓친 사람 같았다.
애써 머리를 흔들어 잔상을 지워 낸 유협은 잠이 들기 전, 내일 떠나야 하는 일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먼저 내려가서 완전히 남족 복장으로 갈아입고 마을을 떠나서 배를 타는 곳을 찾는 게 좋겠다.
우선은 어디로 가는 행인지 찾아보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인기척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유협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태껏 부스럭거리는 동물은 사슴밖에 없었지만 그 소리에 내내 놀라던 참이다.
첫 번째 놀람이 가시자 당연히 사슴이려니, 하던 유협은 순간 숨을 헉 들이쉬었다. 어둠 속에 인형이 선명하게 서 있었다. 그림자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또다시 천화였다.
정말 죽을 정도로 놀란 나머지 유협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어둠을 뚫고 눈에서 빛이 나는 듯 이상하게도 천화가 잘 보였다. 산길에서 이렇게 사람이 보일 리 없는 법이다.
유협은 어둠 속으로 더 몸을 숨겼다.
‘설마 아직까지 수색 중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유협은 퍼뜩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천화가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오직 호숫가만 보고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밤에 호숫가를 어떻게 찾았으며 그의 부하들은 어딨는 건가. 유협은 두리번거리며 무리를 찾아봤지만 아무리 봐도 천화 혼자였다.
그 모습을 보자 단번에 결론이 내려졌다.
‘귀신이다.’
분명 생귀신의 장난질이었다. 과연 천화는 고개 한 번 흔들리지 않고 호숫가에 도착했다. 잠시 무엇을 하나 인상을 찡그리고 보던 유협은 숨이 턱 막혔다. 천화가 홀로 호숫가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물이 마치 깊은 바다처럼 천화를 삼키고 있었다.
순간 유협은 망설이지도 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겉옷을 껴입거나 밖에서 소리를 질러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맨발 그 상태로, 부은 발을 하고 천화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너무 절박한 나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유협은 그저 물에 첨벙첨벙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발목에 닿자 헉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추워할 틈도 없이 유협은 손을 뻗어 천화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리고 힘껏 당겼다. 그러나 귀신에 쓰인 사람을 힘으로 이긴 사람이 있다던가.
“천화 님!”
드디어 비명 같은 외침이 터졌다. 유협은 잔물결을 만들며 천화를 계속 꾹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천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천화는 점점 더 깊이, 어두운 호수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유협은 그의 옷깃을 잡은 채 같이 끌려 들어갔다.
‘이렇게 가다간 둘 다 죽는다.’
그러나 손을 떼어야겠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결국 유협은 옷깃을 놓고, 발을 박차 천화의 몸을 뒤에서 껴안았다. 잠시 유협이 짐처럼 매달리자 천화는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몇 번 귀신에게 조롱당한 적은 있지만, 천화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즉 천화는 그만큼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는 뜻이다. 유협은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는 천화의 등에 뺨을 비비며 애걸했다.
“대체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온몸이 점점 떨리고 입술도 색깔이 변해 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두 사람 다 얼어 죽게 생겼다. 빨리 대처를 하는 게 좋겠다. 웬만한 귀신이라면 유협이 욕설 몇 번 하는 것으로도 쫓아낼 수 있겠지만 상대는 천화의 생귀신이었다.
피를 볼 수밖에 없다.
유협은 떨리는 검지를 천화의 입에 집어넣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점막이 기분 좋게 손가락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를 음미하기도 전에 유협은 천화의 다른 어깨를 껴안은 상태로 두 손이 자유롭게 만들었다.
마침내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유협은 주먹을 쥐고 천화의 턱을 퍽 소리가 나게 위로 후려쳤다. 순간 까드득 소리가 났다. 천화의 턱이 유협의 손가락을 완전히 물었다. 피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유협은 욱신거리는 손을 무시하고 천화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목구멍까지 피가 제대로 넘어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천화는 여전히 거침없이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상태였다. 이대로는 안 됐다. 결국 유협은 천화가 물었던 곳을 정확하게 다시금 물었다. 피가 몰리는 걸 혀로 핥으며 기다렸다. 천화는 떨지 않는데 유협은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추웠다.
그렇다고 천화가 물에 빠져 죽는 꼴을 볼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 안가서 유협은 진짜로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유협은 천화를 놔주고 이번엔 그의 앞으로 향했다. 그의 단단한 두 어깨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곧 피가 고인 입술과 천화의 입술이 마주 닿았다.
유협은 애타게 혀로 천화의 혀를 헤집었다. 피가 제대로 넘어갈 수 있도록 혀 뒤를 살짝 누르자 순간 입이 더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유협은 고개까지 꺾어 가며 왼쪽과 오른쪽 골고루 타액과 피를 섞었다.
마침내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떼어 냈을 때, 유협은 천화가 자신의 허리를 꾹 껴안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갈색 눈과 검은 눈이 마주쳤다.
“우리…… 이제, 올라가요.”
유협이 덜덜 떨며 말하자, 천화가 유협을 꼭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천화는 춥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물살을 가르고 호수로 올라왔다. 그리고 덜덜 떨며 어떻게든 따뜻해지려고 애쓰는 유협에게 다소 무심하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설…명, 해 줄 테니까…… 내려놔요.”
그러자 천화가 자신의 상의을 벗었다. 어차피 그 옷도 젖어서 덮어 줘 봤자 소용이 없다고 하려는 순간, 천화가 유협의 옷도 벗겨 왔다.
히익 놀라는 유협을 보고 천화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체온을 데우려는 거야.”
그리고 호숫가에서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무심한 듯했지만 유협의 손목을 꽉 잡은 채였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자국이 날 지경이었지만 유협은 뿌리치지 않았다.
모닥불 피우는 곳을 찾는 천화에게 유협은 자신이 숨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천화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유협을 쳐다봤지만 그는 꿋꿋했다.
다행인 점 하나는 둘 다 모닥불을 피울 줄 안다는 것이었다. 천화가 재료를 모아 오고 유협이 불을 피웠다. 그리고 나란히 앉아 있으려니 죽음 같은 침묵만 흘렀다. 다만 한 가지 천화가 유협의 손목을 아직도 잡고 있었다.
결국 유협이 먼저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천화 님 귀신에 쓰이셨어요. 그리고 하필 이 호숫가에 오셨어요.”
천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울컥한 유협이 살짝 그를 노려봤다.
“놀라지도 않으시네요?”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이 잡힐 터였다. 천화는 대충 전후 사정을 듣자, 자신이 죽으려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협을 찾았다. 천화는 잠시 생각했다.
“그대도 정말…….”
“?”
“정말, 물러.”
내가 빠져 죽어야 족쇄 따위는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천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유협은 천화에게 꽉 잡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렇게 잡고도 그 소리가 나오세요?”
“이게 제일 참은 거야.”
귀신에게 홀리기 전 천화는 유협을 찾으면 별짓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눈을 빛내고 자신을 꾸중하는 모습 생기어린 모습을 보니, 다 무의미했던 생각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낮에 천화 꼴을 봤던 유협이 움찔하더니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불타는 소리만 들렸다. 마침내 유협이 한숨을 쉬었다.
“왜 아무 말씀도 안하세요?”
“뭐라고 해야 하는지 말을 고르고 있었어.”
“제가 먼저 말씀드리면, 사람을 그렇게 가두는 게 잘못된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도요. 됐죠?”
어차피 듣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유협이 와르르 뱉어 냈다. 천화는 그 말에 늘 농담처럼 대답하거나 유협이 유난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천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화 님?”
천화가 손목을 잡고 유협을 바싹 끌어당겼다. 모닥불 때문인지 유협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떻게 하면 나를 그만 미워할 거야.”
“……천화 님을 미워한 적 없어요.”
“말한 대로 함부로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있어 줄 거야?”
“……네?”
갑자기 나온 말에 유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천화는 내내 음울해 보였다. 그러나 진실 되어 보이기도 했다. 유협은 정신을 간신히 찾았다.
“살심을 다스리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알아. 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요.”
유협이 서서히 충격에서 깨어나 물었다. 천화는 여리게 웃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처음으로 죽고 싶었어.”
“네?”
“네가 떠나 버리면 못 살 것 같아.”
“……그게 결심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유협이 쾅쾅대는 심장을 간신히 다스리며 말했다. 천화가 별로 미련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무나 무감각한 모습에 유협이 다 아팠다.
“그따위 일로 너를 잃으면 다 무슨 상관이지?”
“아.”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천화가 애교를 부리듯 유협의 머리에게 머리를 비볐다.
유협은 정말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겨 드는 천화는 새끼 강아지 같았다.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추운 공기 속 따뜻한 몸이 주는 신뢰감이란 대단한 것이라, 유협은 자연스럽게 천화의 머리를 껴안았다.
“천화 님, 정말 제가 싫어하니 더 이상 함부로 굴지 않으실 거예요?”
“응.”
천화가 아픈 듯 대답했다. 유협은 그의 몸을 힘 있게 한 번 안아 주었다. 천화가 유협의 마른 등을 도닥거렸다. 유협은 따뜻하고 보드라운 살갗에 안겨 있다가 물었다.
“그럼 저도 변방으로 돌려보내 주실 거예요?”
말을 하자마자 양 팔뚝이 붙잡혔다.
유협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천화의 눈 속에서 불길이 타닥타닥 튀는 게 비췄다. 유협은 자신의 눈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하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를 돌려보내?”
“저는 그 약속을 10년도 더 전에 들었고 지금까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천화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큰 충격에 빠진 것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유협은 마치 천화를 배신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유협의 예상으로는 천화가 화를 낼 줄 알았다. 유협이 떠난다고 하니 귀신에 홀려 자신의 목숨까지 끊으려던 남자다.
그런 천화가 과연 유협을 스스로 놔주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천화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
“그럼 돌아오는 거야?”
“남에 돌아오는 건 죽어도 싫습니다.”
유협은 이제 천화가 다시금 소유욕을 발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깨를 꽉 잡았던 천화의 힘이 풀렸다.
“맞아. 약속을 했었지.”
“…….”
“그대는 묘족의 사람이야.”
말끝이 갈라졌지만 천화가 인정했다.
유협은 곧 천화가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라는 걸 눈치챘다. 당황해 천화의 눈 부근을 손으로 가리자 그가 푹 유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살고 싶지 않아.”
돌아오는 어리석은 말이 황당했다. 그 많은 살의는 어디가고 천화는 삶의 의지를 전부 다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결국 유협이 고백했다.
“저는 남에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울고 있는 저하 옆으로 가는 건 괜찮아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하던 천화가 확신을 받아 냈다.
“……정말?”
“천화 님이 약속하신 걸 정말로 지키신다면, 저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유협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천화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유협은 귀가 달아오른 채로 천화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럼 어떻게 증명하지? 내가 더 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한걸?”
“우선 가서 수색단을 돌려보내요. 그 다음에는 제가 알아볼 방법이 있습니다.”
유협과 천화가 가까스로 수색단을 찾았을 때는 해가 막 떠오르는 새벽이었다. 수색대에는 말 여러 마리만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이 교대로 말을 지키고 있었다.
유협은 살아생전 그렇게 불쌍한 꼴은 또 처음 봤다. 온몸이 땀범벅에 피곤에 절은 얼굴에 죄책감이 한가득 했다.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이 이 야밤에 혼자 뛰쳐나갔으니 누군들 잠을 잘 수 있었겠는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꼴로 돌아다녔는데.
천화의 모습을 보자마자 무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낮에 뜬 달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이 커지더니 그가 높은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다. 말들이 덩달아 울부짖기 시작하며 고요한 산을 울렸다. 동료들에게 찾았다는 신호를 보낸 무사가 달려왔다.
그리고 젖은 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유협은 냉큼 말을 가로챘다.
“저 때문에 다들 수고가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저. 그. 아닙니다.”
분명 유협을 잡으러 나왔는데 어째 분위기가 다시 변한 것 같았다. 천화가 보호하듯 유협을 두고 서 있었고 유협도 평소의 방긋 방긋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사는 어째 화가 났지만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분통함을 느끼는 무사들을 데리고 천화와 유협은 말을 달렸다. 내려갈 때와 다르게 수색 따위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길만 따라가면 됐다. 그렇게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대문을 넘기 전이었다.
유협이 대문 앞에서 딱 멈췄다.
무사들의 심장도 덩달아 멈췄다. 설마 무엇을 하려고.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서 일을 꾸민 건 아닌 듯했다. 유협이 천화에게 손짓했기 때문이다.
“천화 님, 여기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가서 잡초를 가져오라고 한 후 불을 피워야 합니다.”
쓰러져 죽을 것 같은 무사들이었지만, 만약 주군께 무슨 사특한 일이 일어나선 안 됐다. 그들은 씻지도 못한 채로 대문 앞에 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았다. 만약 유협이 괴상한 짓을 하거든 바로 붙잡아야 했다.
그러나 유협은 혼자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 그가 잔잔하게 설명했다.
“지금 생귀신을 내쫓는 의식을 치를 겁니다. 필요한 건 제 머리카락과 천화 님의…… 신체의 일부입니다.”
“뭐?”
순간 천화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일제히 겹쳤다. 무사들이 안 된다고 뜯어 말리는데 천화는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그대 머리카락도 들어가야 해?”
“네.”
“그런…….”
천화가 놀란 이유는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고작 그런 일을 두고 시무룩해진 천화를 무시하고, 유협은 외양간에서 가져다 준 풀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무사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협이 주술을 행하고 다니는 거야 자신들이 알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시는 주군의 신체 일부가 날아가는 걸 보느니 자신의 것을 자를 기세였다.
“반드시 저하의 신체가 들어가야 합니까?”
“무슨 엽기적인 짓을 하려고!”
“신체라면 얼만큼을 말하는 거요?”
각종 질문이 쏟아졌다.
유협은 이미 생각해 뒀던 부위가 있었다. 그는 무장들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화를 보고 새끼손가락을 접어서 보여 줬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천화는 칼을 쓰는 무장이었다. 비록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자른다지만 이는 너무 치명적인 일이었다.
유협은 차라리 천화가 검을 잡지 못했으면 했다. 잠시 유협을 바라보던 천화가 픽 웃었다. 뭔가 귀엽다는 웃음이라 조금 성질이 났지만, 천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군의 반응에 무장들이 절대 안 되신다며 무릎까지 꿇었다.
유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원래 천화의 성격이라면 다 끌고 가서 죽도록 패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천화 역시 유협의 시선을 느낀 듯 수수하게 그 자리를 피하기만 했다. 그리고 명령까지 내렸다.
“그만. 이미 정해진 일이다.”
“귀신이 계속 따라붙으면 본인을 포함해서 주변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반발은 계속되었다.
유협은 불안 불안한 마음으로 천화를 지켜봤다. 이런 일은 천화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였다. 말도 없이 냅다 사람을 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천화는 잠시 고민하더니 목소리를 키웠다.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도 의무다.”
순간 천화의 입에서 나온 옳은 말에 유협을 포함한 모두가 넋을 잃었다. 본인을 주인이라고 칭하며 정당하게 명령을 내리는 천화는 정말 황자의 기품이 있었다. 다른 무사들도 정신을 놓았으니 유협이라고 어쨌을까. 잠시 정신을 차리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무사들도 그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추세였다. 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일단은 물러났다. 그제야 천화가 유협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천화는 품 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건넸다. 그런 천화를 묘하게 슬프게 바라보던 유협은 일단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줌 잡았다.
워낙 오래 길었기 때문에 거의 등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잡아 올려 아무렇게나 자르자, 뒤늦게 말리려던 천화의 손이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단발머리가 된 모습을 보고 천화가 갈색 동공을 흔들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잘라 넣어야 해?”
“그래야 술사의 힘이 강해집니다.”
유협이 대충 잘린 머리카락을 한 번 손으로 쓸어 버린 후 천화를 바라봤다.
천화가 온도차 없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협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가 천화의 왼손을 잡았다. 잡은 손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체 부위를 넣는 것은 속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군.”
변명하듯 말한 유협이 반듯하고 단단한 손을 보았다. 저 손가락을 잘라야 했다. 이 예쁘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유협은 검을 천화의 살갗 옆에 댔다. 살이 긁혀 묘하게 핏자국이 남자 유협이 화들짝 놀라 검을 뗐다.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제 새끼손가락을 자르겠다.
“이리 줘 봐.”
천화가 까딱거리며 검을 요구했다. 망설이던 유협은 단검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천화가 왜 자신이 피를 뽑을 때마다 싫어했는지 알게 됐다.
천화는 단검을 받아 가더니 후우 한숨을 한 번 내뱉었다. 자르는 게 싫은 게 아니라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곧바로 대문에 대고 인정도 사정도 없이 새끼손가락을 박아 버렸다.
손이 망가지는 건 정말 한순간 이었다. 손가락 근육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손바닥과 대롱거리며 붙었다. 천화는 단검으로 손에 붙어 있는 살점을 끊어 버렸다.
“하아…….”
주변에 괴괴한 침묵만이 흘렀다. 아팠는지 식은땀을 닦는 천화를 보면서 유협은 기절할 것 같았다. 천화가 신체를 훼손하는 걸 보는 게 싫은 정도를 넘어서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천화가 손가락을 잡고 타오르는 불을 보며 ‘여기에 넣어?’라고 질문한 걸 듣지 못했다.
“유협.”
유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겁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사들이 황급히 천화의 손을 잡고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누군가는 유협의 얼굴이 너무 하얗게 질려 있으니 괜찮냐고 묻기까지 했다. 너무 안 괜찮아서 유협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귀신을 쫓아내고 뭐고 너무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천화는 대체 내가 손에서 피를 뽑고 살았을 때 어떻게 참은 걸까. 앞으로 하지 말라면 좀 들어줘야겠다. 급기야 반성까지 하는데 누군가 재촉했다.
“그래서 술사 양반,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 저하는 손가락도 잘랐는데?’라는 뾰족한 말투가 느껴졌다. 저택에 같이 살아 온 유협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그는 술사 양반이 되었다.
유협은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불이 그냥 타오르면 귀신이 남은 것입니다. 불이 검붉게 타오르면 귀신이 쫓겨난 것입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불길로 향했다. 특히 천화는 뚫어져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불길을 바라봤다. 유협 역시 속으로 빌고 빌며 불길을 바라보았다. 천화가 약속했을 때 절대 거짓말 같지 않았다.
비록 이상한 애정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 살심을 녹일 수 있었다고 천화는 고백했다. 그 기운빠진 목소리, 호수로 걸어 들어가던 모습, 자신의 삶이 가치 없어졌다고 털어놓는 모습이 훤했다.
제발 거짓말이 아니기를. 제발……. 왜냐면 거짓이었어도 자신은 천화를 사랑할 테니까. 제발, 멀쩡한 사람 망가트리지 말고 진실이길 바랬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내내 붉었던 불빛이 크게 요동쳤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불길이 검게 변했다. 타오르는 열기도 모두 사라진 채 불길은 거대하고 음울한 기운을 만들어 냈다. 비명 소리와 흡사한 우는 소리까지 얼핏 들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점점 커지는 불에 사람들이 기겁하고 유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협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두근거리고 뛰고 얼굴에는 홍조가 돌았다.
“나타났다.”
유협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천화가 유협을 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유협 역시 그 얼굴에 밝은 미소로 답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몸을 불리던 검은 불꽃은 새벽 내내 타오르다가 정오에야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야 다시 일반적인 불로 돌아왔다. 그동안 검은 불꽃이 닿는 곳은 스산하고 우중충해져서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유협과 천화 역시 천화의 방으로 들어와 몸을 피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충만한 기분이었다. 약간 어색하지만 드디어 이어졌다. 몇 년 만에 느끼는 완전한 감정이었다. 행복이 차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천화와 유협은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거나, 손을 뺨에 비비며 애정 표현을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을 단번에 자른 탓인지 천화는 열이 조금 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하게 유협을 끌어안고 자신의 품에 눕게 만들었다.
“이러는 게 더 좋아.”
유협은 대답 없이 천화의 체취를 더 느끼고자 파고들었다. 천화의 심장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유협은 내심 속상한 마음을 감추며 다친 손 반대쪽을 슬그머니 건드렸다. 그러자 천화가 손을 꽉 잡아 줬다. 유협이 내심 뿌듯해할 때였다.
“내일이면 우리 혼례 날인데.”
순간 유협이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하자 천화가 아프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눌러 토닥거렸다.
“혼례 대신 고향에 가도록 해.”
“……네?”
“몇십 년을 잡아 둬서 미안해. 이제는 그대가 말한 대로 돌아가.”
“아니, 천화 님.”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유협은 너무 갑작스런 소식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황하여 싸야 하는 짐이 얼마인데 내일 가느냐고 물었더니, 천화는 그럼 내일 짐을 싸고 가까운 때에 떠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묘하게 유협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느껴졌다.
그 마음을 알게 되자 유협은 조금 섭섭해졌다.
자신은 천화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데 본인은 괜찮다는 말인가? 괜한 시비에 가까운 말이라 참았지만 속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연한 척하고 있는 것 일수도 있다. 그럼 불안에 떨고 있을 천화를 달래는 게 먼저였다.
유협은 천화의 머리를 꾹 잡아 입을 맞춰 줬다. 과연 유협의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더욱 짙어졌다. 몸에서 편하게 힘을 쭈욱 빼고 유협이 천화의 귓가에 속삭였다.
“남에는 안 돌아와도 저하의 곁으로는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말썽부리지 말고 잘 계셔야 해요?
유협의 질문에 천화가 짧게 웃었다. 아까보다 힘이 실린 웃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시무룩했다.
유협은 조금 약이 올랐으나 천화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천화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을까. 결심하기 위해 뭘 희생해야 했을까.
천화가 진짜 진심으로 떠나라고 하는 게 맞나, 덜컥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천화가 유협의 뺨을 쓸어 올렸다.
“사랑해.”
순간 유협의 모든 기능이 멈췄다. 어리석게도 머릿속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기능마저 멈춰버려서, 유협은 불쑥 엉뚱한 말을 뱉었다.
“다시 한번만 해 주세요.”
“사랑해.”
유협은 넓은 품으로 파고들 듯 안겼다. 귀가 붉었다. 두 사람은 실제로 은애하는 관계가 맞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들으니 창피함과 기쁨으로 온 몸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저도 사랑해요.”
“응, 고마워.”
천화가 귓바퀴에 입을 맞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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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협이 떠나는 날이 되었다. 막상 날이 잡혀서 짐수레들이 바깥에 서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것도 모른 채 유협은 근래 본 중 제일 밝은 얼굴로 말을 쓸어 주고 있었다.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치솟았다.
절대 돌아가지 못하게, 여러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바람이 한 번 불며 음흉한 생각 역시 같이 날아갔다.
천화는 새로운 걸 깨달았다. 유협이 없으면 자신도 없었다. 만약 유협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영원히 도망쳐 버린다면 자신은 제정신으로 살지 못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양보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유협과 공존하기 위한 쉬운 방법이었다.
천화가 뒷짐을 지고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삿갓을 쓴 유협이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머리를 다듬어 상고머리를 한 채였다.
“천화 님.”
유협이 조용조용 천화를 불렀다.
천화는 시선을 내려 유협을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분명 떠난다고 신이 나서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유협의 미소는 나른하고 만족스러울 뿐 침착했다.
“천화 님, 저를 믿으세요?”
차분하게 유협이 물었다. 천화는 고개를 저으려다 끄덕거렸다. 그렇게 믿고 싶은 속마음이 훤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만약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서신이라도 한 통 보내 주겠어?”
천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협은 다소 뚱하게 그 얼굴을 보더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천화의 심장이 쿵 바닥에 찧었다. 그러나 유협은 참지 못하고 천화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전 돌아올 거라고요.”
“……알고 있어.”
“누이를 만날 준비나 단단히 하세요. 혼례하려면 가족이 대면하는 게 관례잖아요?”
천화가 멈칫했다. 머리가 고장난 사람처럼 서 있는 그에게 유협이 다시 한번 다정하게 약속했다.
“사고치지 말고, 조용히 잘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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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는 최근에 일을 하라고 뽑은 노비들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거와 다르게 주인께서 온정을 베풀어 두 자매를 같은 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줬더니, 그것들이 말을 크게 벌리고 다녔다. 처음 시작은 주인의 얼굴 찬사였다.
눈을 내리 깔고 있어도 그분이 지나가면 알 수 있겠다는 둥, 자기가 직접 주인님의 옷 시종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침에 그분이 일어날 수 있게 도와드리고 싶다……. 다 징글징글한 소리였다.
천화 밑에서 5년 일을 한 나래는 오로지 딱 하나 때문에 살아남았다.
우선 눈에 띄질 않았다. 기존 종들이 팍팍 갈려 나가는 와중에 실수도 하나 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빌빌거리며 살지도 않았다. 당연히 천화는 잡것 따위에게는 관심이 없으니 굳이 천화와 맞부딪힐 일이 없어 오래 살아남았다.
그래서 저것들이 하는 말이 더 황당무계하게 들렸다.
“어쩜 한숨을 쉬는 것도 우아하실까.”
“그런데 좀 많이 쉬는 것 같지 않아?”
“그런가?”
“맨날 방문을 열어 놓고 천개까지 치우신 다음에 한숨을 푹푹 쉬며 일을 하잖아.”
그랬다. 천화에게 같잖은 않은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지만 1년 전쯤에 이곳에 살았던 젊은이가 하나 있었다. 상냥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이었는데 유독 천화와 다툼이 심했던 걸로 안다.
그리고 어쩌다 화해를 했는데 약혼을 하기로 하고 그냥 그대로 튀었단다. 그 청년이 참 못됐다고 생각하기에는 애초에 천화를 약혼자로 찍은 눈이 문제였다.
지금이야 무슨 바람을 맞았는지 개과천선하여 새사람이 되었지만, 그때 천화를 좋아하는 건 진짜 눈이 발바닥에 달려 있어야 가능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천화는 반 폐인이었다. 매일 ‘그러는 게 아니었어’라고 중얼거리거나, 복도에서 휘청거리고 돌아다니는 장면이 몇 번이나 목격됐다. 처음에 나래를 비롯한 그의 동기들은 천화가 정말로 이제는 미쳤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무사 하나가 ‘저게 짝사랑인지 정신병인지…….’ 하고 흘린 말을 보아서는 그 도망쳤다는 청년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었다.
뭐, 저 나이에 다른 사람과 약혼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지, 그것도 유난은 유난이다 싶은데, 더 화가 나는 건 젊은 여자애들의 반응이다.
천화가 사람을 해치지 않게 된 이후, 슬슬 천화의 관심을 끌어 신분 상승을 꿈꾸는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사랑으로 얻은 슬픔이라면 사랑으로 푸시는 거라면서 홍홍거리며 다홍치마를 챙겨 입는 모습을 보면 꿈이나 깨라는 마음이 들었다.
과거 천화였다면 시종이 자신에게 이런 관심을 가졌다고 해서, 즉 낮은 잡것이 높은 사람을 탐했다고 해서 눈을 파 버렸을 거다. 그러나 지금 천화는 누가 다홍치마를 입든, 연두치마를 입든. 심지어 옷을 걸쳤든 안 걸쳤든 별로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그러니 저택에는 꽃비처럼 화려한 치마들이 늘어지고, 봄의 꽃들과 휘황찬란하게 어우러져 누가 보면 축제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저 중에서 하나 골라잡으시지 왜?’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사기꾼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이중, 삼중 결혼을 해 버리는 게 나을텐데.
나래가 정말 믿는 동료들에게만 이 말을 꺼내자 몇 명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나래, 니가 그 양반을 못 봐서 그래.”
저 꽃보다 화려한 치마를 입고 춤을 추어도 그 사람의 발끝도 못 간단다.
그렇다. 여자애들이 천화를 얼굴 때문에 사랑하는 것처럼, 천화 역시 어지간히 얼굴을 봤던 것이다. 나래는 그렇게 잘못된 믿음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벚꽃과 함께 나래의 망상도 점점 커질 무렵이었다.
조용하고 풍요로운 저택에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올 손님이 없는데?’
나래는 오랜 습관으로 자기 대신 받을 사람이 있나 훑어보고서야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나래가 처음 보는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양반이, 얼굴이……! 세상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천녀가 그렇게 생겼나 싶었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남자가 삿갓을 쓰고 혼자 올라왔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남자는 집을 잘 안다는 듯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내부 구조를 살폈다.
“혹시, 천화 님은 출타해 계시나요?”
나래가 입만 벌리고 아무 접대도 하고 있지 않는데도 남자가 상냥하게 물었다. 나래는 어버버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방에 계십니다만, 혹시 누구라고 전할까요?”
“아, 그러면 됐습니다.”
남자가 오묘하게 말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무척 떨리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나래가 안내를 도와드리겠다고 하자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천화의 방으로 가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입은 검은 철릭이 우아하여, 다홍치마를 입고 일을 하던 여자애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는 앞만 보고 쭈욱 올라갔다.
순간 어떤 촉이 왔다.
‘저 남자가 그 사기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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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협은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어째 휙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오면서 유협은 단 하나만 생각했다.
천화의 방으로 가는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과연 천화는 약속을 지키고 살고 있었을까? 자신만 보면 지어 주던 눈 웃음은 그대로일까?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할까?
유협은 그랬다. 이 마음이 너무나 끈질겨 고향에 돌아가서도 차마 툭 하니 버릴 수가 없었다. 자유로운 바람을 맞으며 마침내 스스로를 되찾았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메마른 땅 위를 걸으며 그대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을 좀먹는 존재가 있었다. 유협은 종종 남이 위치한 곳을 바라보며 천화를 떠올렸다. 서신 한 장이라도 보내 달라는 말이 머리를 스칠 때마다 기가 막혔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서신은 무슨 서신.’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속이 탈 때마다 유협은 천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잘라 버린 새끼 손가락도. 유협을 위해서라면 무정할 정도로 자기 자신마저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천화였다.
‘혹시 그 새끼 미친놈 아니냐?’
그렇게 묻는 누이를 끌고 남으로 돌아오게 된 사연도 결국 여기 있었다.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살이 조금 빠진 듯 했다. 하지만 준수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천화는 대문을 앞에 두고 일거리를 처리하고 있었다. 유협은 봄바람에 그 옷자락이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야 하는데 어째 입꼬리가 굳어 버렸다.
유협은 천화를 부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천화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집안의 장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시선을 느껴졌다. 또냐. 요즘 하도 시선을 보내 오는 시종들이 많아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판이었다. 어련히 하다가 그만두겠지, 생각하며 무시하던 순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화님.”
드디어 환청까지 듣는 건가? 멍하니 고개를 들자 그 앞에 유협이 서 있었다. 평생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천화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잊어버렸다.
대신 큰 강아지가 사람에게 뛰어가듯이 강아지가 돌진했다. 안 돼, 떨어진다 하는 순간 강아지가 날렵하게 유협을 잡아서 끌어올렸다. 팔뚝을 잡힌 채 어버버한 유협과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인 천화가 마주쳤다.
“그대, 돌아왔어.”
“하하. 천화 님.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식겁하고 놀라는 모습이 귀여워 웃자, 천화가 정신없이 유협에게 고개를 파묻었다. 마치 냄새를 맡는 것처럼. 그리고 유협의 팔을 똑바로 잡아 세우더니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곳이라 살짝 빼려했던 유협도 곧 참지 못하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홍치마를 입은 여자애들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천화에게 생전 저런 열기는 처음 보았다.
천화는 상대와 입을 떼고서도 믿지 못하고 유협을 쓸어 보았다. 유협은 마음대로 하라고 몸을 맡겼다.
“정말…… 돌아와 줬어.”
목소리에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천화는 정말 한순간도 손을 떼지 못했다. 유협은 흥분한 자신의 강아지를 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오면서 부모님까지 모두 모셔 왔어요. 마음만 괜찮으시면 저랑 혼인해 주실래요?”
—다정도 병인가 하여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