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인가 하여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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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부
남의 수도인 청원에 요새 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바로 삼 황자에 관한 소식이었다. 물론 그 괴팍한 성질을 가진 인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집안에 넷째 부인이 들어오면서부터 소문의 결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과거에 천강은 주로 양민들을 괴롭히며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고 원성을 샀다. 그러나 최근 소문에 따르면 천강의 집은 귀신 소굴이나 다름이 없었다. 원한을 피처럼 머금은 귀신들이 난장질을 부려 정원에 꽃 한 송이 피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귀신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천강의 후비인 유협은 묘족 중에서도 주술을 부리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를 눈여겨본 황제가 비록 천한 신분이지만 남의 황족과 혼인하는 영예를 안겨 주었다. 뭇사람이라면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천강과 유협의 결혼 생활은 재난 그 자체였다. 천강은 본디 사람이 음험하고 타인을 조정하는 것을 좋아하는 무뢰배였다. 그런 천강이 자신보다 다섯 살은 어린, 그것도 눈에 띄게 미색을 갖춘 유협을 후비로 들였으니 그 기대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런데 유협은 묘족의 사나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때문에 변방에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지아비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소문으로는 자신에게 손가락이라도 한 번 데려고 하면 귀신으로 겁박하기 일쑤라고 했다.
묘족인 유협이 귀신을 부리는 재주가 있어 이를 가지고 천강과 혼약에 반항을 표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강이라고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몇 번이나 무산되었지만 유협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한 치의 꺾임도 없었다.
처음에는 미색에 반해 안고자 했지만 뒤로 갈수록 자존심을 무너트리기 위해 수치를 주는 데 서슴없었다. 그 때문에 갖은 학대는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더구나 유협이 점점 커가며 유려하면 해질수록 천강의 불만도 심각해지고 있었다.
어느 평범한 아침, 세 명의 부인과 식사를 들면서 천강은 노비에게 물었다.
“넷째는 며칠째 굶었지?”
부지런히 식사 시중을 들던 노비가 움찔하며 대답했다.
“사흘째입니다.”
천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가지를 볶아 만든 요리를 집어 입에 넣었다.
“아직은 더 굶겨도 되겠구나, 됐다. 죽을 정도만 아니면 된다.”
지난 주 유협이 천강을 닮은 귀신을 풀어놓은 대가였다.
천강은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일주일 정도는 굶길 생각이었다. 본인 생각으로는 나름 많이 타협한 결과였다. 유협이 죽을 때까지 핍박한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천강이 원하는 사람을 취하려다 죽게 만드는 일은 예사였지만, 유협에게 함부로 손을 쓸 수는 없었다. 그 원인은 바로 황제였다. 유협과 결혼에서 주선을 선 사람은 무려 황제였다. 황궁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입궁을 시키려는 의도도 그대로였다.
그러니 만약 손을 잘못 써서 유협이 죽게 된다면 그 진노를 어떻게 감당할지 생각도 못할 만큼 두려웠다. 물론 유협이 본인의 방보다 징벌방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있었지만, 천강의 악심으로 아직까지는 죽을 만큼 고생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잘 처신하고 있다고 생각한 천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 만찬에 젓가락질했다. 다만 그의 부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두려움에 떨었다. 남편의 얼굴 표정 하나만 바뀌어도 큰일이 날 수 있기 때문에 식사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그렇게 천강만 기분 좋은 식사 자리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우두머리 노비가 기겁한 얼굴로 식사 자리에 들이닥쳤다.
“주인어른, 그 넷째 부인께서!”
천강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짜증난 표정으로 노비를 바라봤다.
“뭐냐. 죽기 전에는 말을 올릴 필요가 없다고 일렀을 텐데.”
하지만 노비는 더듬거리면서도 용건을 전했다.
“방에 계시지 않습니다.”
“뭐라고?!”
순간 천강이 벌떡 일어섰다. 탁자에 펼쳐진 음식들이 위험하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전히 새로운 소식에 쏠려 있었다. 화가 난 천강이 소매를 떨치며 일갈했다.
“분명히 문을 잘 잠그라고 했을 텐데?!”
“그…… 그랬는데 방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런 쓸모없는 놈을 보았나!”
천강이 버럭 화내며 펄펄 끓는 찻물을 냅다 노비에게 뿌렸다. 뜨거운 물을 얼굴에 맞은 노비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자 부인들이 따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천강이 바닥에 유리잔을 던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는 말이 우습게 들렸나 보다. 가서 찾아와라. 내 오늘 아주 경을 쳐야겠다.”
천강이 으르렁거리자 옆에서 시중을 들던 노비가 냉큼 뛰쳐나갔다.
부인들은 숨 막히는 분노에 공포에 질려 천강의 눈치만 보았다. 네 번째로 들어온 후비, 유협 때문에 요즘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얼음판 위를 걷는 불안한 마음에 세 명은 서로 눈길만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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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먼지만 피어오르는 조용한 청원의 아침거리를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장신의 남자는 시선을 단번에 끌었다. 혼자 거리를 배회하니 그게 첫 번째 이유요. 그 와중에 입술은 붉고, 한쪽으로 내려 묶은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니 그게 두 번째 이유였다. 누군가 경극 배우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남자는 비틀거리면서 잠시 숨을 골랐다.
평범하게 걷기만 하는데도 세상이 핑핑 돌았다. 다 남편이라는 개새끼 덕분이었다. 유협은 잠시 건물의 벽을 짚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삼 일쯤 되었나?’
어느 순간부터 방에 들어오던 음식이 뚝 끊겼다. 그나마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물뿐이었다.
천강의 수법이 진화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주먹질하고, 뺨을 치는 법만 알더니 이번에는 음식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혔다. 개 같은 놈이 머리도 더럽게 썼다.
‘뭐라고 했더라.’
이제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천강은 유협에게 ‘절대로’ 방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했다.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분명 그렇게 명령했다. 그래서 유협은 죽을 만큼 힘든 몸을 이끌고 직접 ‘밖으로’ 나오는 수고를 한 참이었다.
‘진심으로 죽을 것 같다.’
덕분에 제대로 천강을 열받게 할 수는 있었으나 온몸이 후들거려 서 있기도 힘들었다. 돈 한 푼 없는 신세니 당연히 갈 곳도 없었다. 유협은 어지러운 머리를 가라앉히며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부드러운 비단옷이 바람에 펄럭였다. 천강은 학대를 모자라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유협에게 아름다운 옷만 입혔다. 참 역겨운 버릇이라고 유협은 혀를 찼다.
차라리 상거지 꼴이라도 하고 있으면 누군가 동정으로 먹을 것이라도 줄 수 있을 텐데, 지금 유협은 화화공자가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모양새였다. 특히나 머리카락을 아래로 흐트러지게 묶었다는 점이 그랬다.
유협은 혼인을 맺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머리를 올린 적이 없었다. 비녀는 물론이고, 천강이 제 목덜미를 빤히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머리를 위로 묶지도 않았다. 덕분에 유협은 남들이 보기에 머리채가 엉망이 되도록 술을 퍼마신 꼴을 하고 있었다.
아침이라 고요함이 가라앉은 거리를 보는 유협의 눈이 침침했다. 사방에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 있다 나오니 바깥이 한층 더 밝고 아프게 느껴졌다.
세상 참 모를 일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협은 자신이 귀신을 쫓아 줬던 그 방에 갇힐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천강의 심기를 거슬러 방에 갇히기 일쑤였다.
“개 같다 정말.”
물론 유협이라고 얌전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할 수 있는 난장은 다 부렸다. 귀신을 불러내는 건 이제 천강이 놀라지 않았다. 가위에 하도 눌려서 몸이 부쩍 쇠약해지자 천강은 모든 분노를 유협에게 퍼부었다.
그럼 유협은 묘족의 언어만 사용해서 천강을 골리기도 하고, 멱살잡이하기도 했다. 유협도 천강이 함부로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황제가 하사한 신부니 겉으로 보기에도 이상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아비의 멱살을 잡는 부인이라는 그림이 아름답진 않았다. 다른 세 명의 부인들은 유협의 그림자만 봐도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며 흩어졌다. 유협은 천강의 학대에 수긍만 하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안중에도 없었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유협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천강을 미치게 만들까 그 고민뿐이었다.
‘또 뭘 해야 할까.’
유협은 무릎을 올린 채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문득 천강이 억지로 자신을 굶긴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먹는 게 좋겠다. 천강이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는 게 신조가 된 지 벌써 몇 년이었다. 유협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일단 뭐든 먹고 생각하자.’
그러고 보니 음식을 먹지 못해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천강을 엿 먹일 방법만 생각하다 보니 본인이 원하는 건 뒷전이었다. 사실 천강이 밥을 굶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성장기였던 유협이 혼인을 하자, 천강은 유협이 키가 너무 많이 클까 봐 일부로 식사를 제한시켰다. 지금은 기운을 빼겠다고 굶겼다. 그야말로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보다도 못한 처사였다.
유협은 흙바닥에 앉아서 대충 아무 음식점이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곧 있으면 천강이 보낸 사람들이 잡으러 올 것이다. 그 전에 최대한 천강의 기분을 망치고 싶었다.
설령 죽어라 맞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유협은 이미 채찍질이 얼마나 아픈지 경험해 봤다. 손톱이 빠질 만큼 주먹을 쥐어 본 적도 있었다. 천강이 귀신에 익숙해지는 만큼, 유협은 고통에 익숙해졌다.
박살 난 자신의 혼인 생활을 떠올리며 멍하니 기다리다 보니, 마침내 맞은편에 있던 작은 음식점이 영업을 시작했다. 주인은 문을 열면서도 유협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주정뱅이가 첫 손님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유협은 돈 한 푼 없으면서 태연자약한 걸음으로 식당에 들어갔다. 이 역시 천강을 위한 안배였다. 천강의 후비가 머리가 살짝 돌아 버렸다는 소문이 이미 돌고 있었다. 유협이 적극적으로 부채질한 결과였다.
천강은 그 소문을 들었을 때 황가의 이름에 먹칠했다고 유협을 죽이려 들었다. 그때 유협은 간만에 무척이나 즐거웠더랬다. 천강은 화가 나면 이마에 핏줄이 서곤 했는데 유협은 그 모습이 정말 좋았다.
‘또 그 꼴을 보겠구나.’
남편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상상한 유협은 끝끝내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인에게 손을 들었다. 유협이 술에 취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한 주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주인이 오자 유협이 느긋하게 말했다.
“미음 한 그릇만 끓여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면 될까요, 나리?”
잘 차려입은 남자가 아침부터 들어와 밥을 끓여 달라니 주인장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천강의 밑도 끝도 없는 돈으로 음식 좀 팔아 줄 생각이었다.
“아뇨.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부탁드립니다.”
유협은 차림판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손가락을 그으며 말했다.
주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유협을 위아래로 흩어 보았다. 처음에는 주정뱅이, 그 다음에는 화화공자인 줄 알았더니 상당한 재력가인 모양이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겉옷조차 무척 값비싼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옷조차 이리 비싸게 입는다면 돈이 무척 많을 터다. 결국 주인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금 끓인 미음을 가지고 돌아왔다.
“손님이 더 오시나 보죠?”
“네.”
유협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곧 떼지어 올 겁니다.”
그 웃음에 주인은 어리둥절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일단 손님이 많을 거라는 유협을 믿고 보았다.
“그럼 천천히 드세요.”
주인장이 미음을 밀어 주었다.
주방에서는 벌써 다른 요리 준비가 시작됐는지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다. 오랜만에 침이 고였다. 유협은 미음을 숟가락으로 휘적거리며 식혔다. 그리고 천천히 한 입 조심스럽게 넘겼다.
‘맛있다.’
고작 물에 끓인 밥인데도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그러나 유협은 경험을 통해서 이럴 때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큰 탈이 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수저를 천천히 놀리며 한 입, 한 입 음식을 먹었다. 죽을 것처럼 괴롭던 속이 조금 나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던 몸이 풀어졌다.
곧 천강의 노비들이 들이닥칠 테지만 그전까지만이라도 즐겨 두고 싶었다. 끌려가면 며칠 동안 또 밖을 보는 건 힘들 터였다. 이번엔 뭐 토할 때까지 때리라지. 그렇게 생각할 때 정말로 문이 벌컥 열렸다. 순간 깜짝 놀란 유협이 문 쪽을 쳐다보았다.
벌써 찾았단 말인가?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처음 보는 남자 둘이었다. 두 사람은 말을 급하게 달려온 듯 온몸이 흙먼지 투성이었다. 게다가 허리춤에는 장검을 차고 있었다. 꽤 살벌한 모습이었지만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주인은 넉살 좋게 물었다.
“아이고, 무사님들. 시장하시겠네.”
“말도 마시오. 아주 죽겠소.”
“밖에 말이 있으니 물 좀 챙겨 주시게.”
남자들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를 잡았다.
유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원에 이렇게 무사들이 먼지를 뿌리고 달려오게끔 할 만한 일이 있나 싶었다. 남자들은 오죽 피곤했는지 구석에 앉아 있는 유협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밤을 새도록 말을 달렸나 보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리는 알아 보셨다고 했나?”
“아니, 택도 없는 소리. 형님은 그렇게 겪고도 모르시오? 먼저 그 댁을 방문할 생각뿐이라 본인 집은 안중에도 없으셨답니다.”
“하이고 나 참. 미치겠다. 그럼 여태껏 여관에 계신 것이냐? 형원이 그 녀석은 옆에서 제대로 모시지도 않고 뭘 한 거냐.”
“형원이가 말한다고 들으실 분입니까? 그런 분이면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지도 않지.”
굳이 엿들을 생각이 없었는데 두 사내의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가게에 다 퍼지고도 남았다. 대화를 들어보니 막연하게 집을 구하려는 모양인데, 청원에서는 소개도 없이 집을 구하려면 아주 힘들었다.
누구를 모시는지 몰라도 고관대작의 신하들이구나, 유협은 납득하고 식어가는 미음을 한 입 더 떠먹는 데 집중했다.
한편 사내들은 다른 주제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드디어 그 양반을 만나게 생겼구만.”
“이놈아 말조심해라. 그 양반이라니.”
“아니 나라님도 없는 곳에서는 욕한다는데 이 정도도 못합니까?”
“나리가 마냥 유하신 사람처럼 보여도, 한편으로는 절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들을 거냐.”
“거참 웃기네. 누가 우리 나리가 또라이 인 것을 모른다고.”
“어허 이놈 봐라.”
두 사람이 푸닥거리를 막 시작하려 할 때 그들이 주문한 요리가 상에 올랐다. 국수와 만두 술 한 병이었다.
유협은 어차피 미음만 먹을 터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주인이 유협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이분들 먼저 요리 좀 내겠습니다. 대신 맛있게 해 드릴게요.”
주인의 말 때문에 유협의 존재를 눈치챈 두 사내의 눈길이 꽂혔다. 무장답게 마치 매와 같은 무서운 눈짓이었다. 무장을 볼 일이 영 없었던 유협은 속으로 조금 놀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이 유쾌한 미소를 짓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어째 두 사내의 시선은 그대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심쩍다는 듯이 유협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어찌나 집요하게 쳐다보던지 시비라도 거는 것인가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유협의 눈매부터 시작해서 옷차림, 머리카락까지 보며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산같이 큰 사내 둘이서 그렇게 쳐다보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내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형님 나랑 같은 생각 하오?”
나름대로 속삭이는 것 같은데 목청이 목청이라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유협은 애써 못 들은 척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형님이라는 작자는 한술 더 떴다. 아예 구멍이 뚫릴 지경으로 유협을 빤히 쳐다보는 것 아닌가.
“그래. 내가 너랑 같은 생각을 하는 날도 오나 보다.”
“어찌할까요.”
“일단 가만히 있어 봐라.”
그러더니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 나름 온화하게 유협에게 말을 걸었다.
“거, 청년. 물어볼 게 하나 있소만.”
유협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자 형님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자신 쪽으로 오라고 숫제 손짓까지 해 왔다. 유협은 미음이 담긴 그릇을 소중하게 잡고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호기심이 이기고 말았다.
유협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험상궂은 사내에게 순순히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거…… 뭐. 큼. 밥 먹는 데 미안한데.”
막상 유협이 다가오자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가 주춤거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생이 답답한 듯 끼어들었다.
“거 여기 토박이요?”
“아닙니다.”
“그런 것 같았어. 말씨에 조금 뭐가 섞였더라고. 그럼 어디서 왔소?”
유협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남자를 보았다.
몇 년 전 혼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 유협은 남족을 통째로 싫어하게 됐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누군가 신분을 물으면 기분이 무척이나 나빠졌다. 억지로 혼인하게 된 까닭도 자신이 묘족이라서가 아닌가.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온화하게 보였던 유협이 까칠하게 대답하자 남자가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자 이번엔 형님이 다시 나섰다.
“아니 우리도 지방에서 올라온 참이라 반가워서 그냥 물어봤소. 큰 뜻은 없었고.”
그럴 리가. 동생이나 형님이나 의미심장한 시선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거짓말은 잘했다. 유협이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순간, 동생이 갑자기 물었다.
“여기 셋째 황자네 댁이 있다던데 어딘지 아시오? 워낙 촌구석에서 올라와서…….”
“……여기에 그 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아무에게나 물어보시죠.”
유협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기가 죽을 만한 말투였다.
그런데 사내들은 갑자기 더욱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이 어찌나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던지 유협은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수상한 시선 교환 끝에 형님이 말을 꺼냈다.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뭡니까.”
“이름이 뭐요?”
단도직입 적인 질문에 유협이 황당해서 그들을 쳐다봤다. 난데없이 왜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묻는단 말인가. 그런데 옆에서 동생이라는 작자가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형님도 참, 그렇게 말하면 놀라지 않겠소. 거 우리는 여기 사람을 한 명 찾으러 왔소. 흑발에 외모가 뛰어나며 변방 출신인 남자를 말이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청원에 뭐 그런 사람이 한둘 인줄 아십니까.”
“아 알지. 그런데 그 사람이 셋째—.”
동생 쪽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문득 뒤를 돌아본 유협은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었던 현실을 떠올렸다. 천강의 집에서 힘쓰는 일이 있을 때마다 도맡아서 하는 노비 여러 명이 서 있는 것이다.
유협은 늘 이때가 제일 싫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끌려가야 하는 현실에 무기력하면서도 천강을 화나게 했다는 게 참 재밌었다.
노비는 유협이 또 무슨 사고를 쳤는지 긴장한 표정으로 가게로 들어왔다. 그리고 손님을 맞으러 나온 주인장을 손짓해서 물리쳤다.
“됐소. 우린 금방 갈 거요. 부인, 가시죠.”
“부인이라니?”
유협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동시에 주인장이 깜짝 놀라 말했다.
“아직 계산을 하지 않으셨는데요.”
“계산?”
노비가 어리둥절하게 유협을 보았다.
유협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노비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주인장,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말해 보시오.”
“아니 무슨 일이 있기는, 식당에서 밥 먹는 것 외에 할 일이 있긴 있나? 이 손님이 오셔서 음식을 전부 주문하셨는데 그 값을 아직 안 주셨소.”
노비가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유협을 보았다. 아마 급하게 나오느라 금전을 갖고 나오지 않았을 터다. 거기다 천강에게 금전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분노한 그에게 얻어맞을 공산도 컸다.
노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본인만 힘들어집니다.”
저절로 비웃음이 새어 나오는 협박이었다. 이보다 더 떨어질 바닥이 어디 있다고.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옆에서 이 광경을 무뚝뚝하게 보던 사내가 말했다.
“어디 한번 보자, 얼마나 힘들어질지.”
척 봐도 덩치부터 다른, 거기다 검까지 찬 남자가 끼어들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당장 유협조차도 이유를 모르고 눈을 깜빡거렸다.
노비는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무사님, 다른 곳에서 오셔서 모르나 본데 신경 끄시지요.”
“왜? 네 놈은 마음대로 떠드는데 나는 내 할 말도 못 하느냐?”
유협은 슬그머니 그 옆에 앉아 있던 동생 쪽을 보았다.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시골무사가 이러다 경을 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말려야 할 성싶었다. 아무리 유협의 인생이 바닥을 쳤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말아먹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유협의 시선을 받은 동생은 정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했다. 동생 쪽이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가 먼저 이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듣지 못했느냐? 할 말이 있으면 정중하게 순서를 기다렸다 해야지 어디 예의를 빼먹고 끼어드나.”
순간 노비가 발끈했다. 그가 인상을 쓰고 윽박질렀다.
“당신들 뭐가 뭔지 몰라도 고개 잘못 들이밀었소. 지금 조용히 꺼지면 내 주인께 아무 말도 하지 않겠지만, 이 이상 방해한다면 이 행동을 고할 수밖에 없소.”
그러자 사내 두 명이 동시에 웃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유협은 물론이고 노비들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동생이 간신히 웃음을 다잡았다.
“하이고 내가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어. 그래 네 주인이 셋째 황자가 맞느냐?”
그 말에 노비의 눈이 튀어나올 듯 둥그렇게 변했다. 유협 역시 깜짝 놀라 동생 쪽을 보았다. 그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거 안 그래도 만나러 가려 했는데 잘됐네.”
그리고 앉아 있던 동생 쪽이 벌떡 일어섰다. 유협도 키가 큰 편에 속했지만 그 만큼은 아니었다. 덩치도 좋고 누가 봐도 칼밥 먹은 것 같은 무사가 일어나자 노비들이 주춤주춤 뒤로 걸음을 물렸다.
“너희들과 인사는 나중에 하자. 어차피 그 댁에 갈 일이 있을 테니 그때 보면 된다. 그렇게 알고 썩 꺼져라.”
노비들이 우물쭈물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유협이 무사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미안하지만 선생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선생님이라니 편하게 부르십시오. 저는 한석이라고 합니다.”
“…….”
유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석이 씨익 웃었다.
“성명이 백유협 맞으시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유협이 무심코 중얼거리자 한석이 키야, 어찌 이리 운이 좋을까 중얼거렸다. 한 번에 만났다 한 번에 만났어, 부산스럽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반면 형님 쪽은 좀 더 정중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겹쳐 인사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제 이름은 한태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두 장승에게 인사를 받게 된 유협만 눈을 깜빡거렸다.
맹세코 살면서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변방에서 뛰어 놀았고, 소년 시절에는 궁궐에 있었고, 청년이 되고 나서는 남의 집에 갇혀 살았다. 아는 얼굴이라고는 자신을 괴롭히는 노비와 천강뿐이었다.
“실례지만 저를 아십니까?”
유협이 묻자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한석이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게 안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모른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이놈아 그렇게 말씀드리면 뭐가 설명이 되냐. 그……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순간 유협은 그들이 말하는 ‘말씀’이라는 게 청원에 퍼지는 소문인가 생각했다. 천강과 혼인을 한 후로는 미친놈처럼 살고 있으니 지방에도 그 소문이 퍼졌을 수 있었다.
알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유협은 인상을 쓰고 물었다.
“그런데 왜 존대를 하십니까?”
누가 봐도 유협은 그들보다 연배가 낮았다. 거기다 미친놈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정중하게 포권하는 게 이상했다.
순간 형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아, 하고 말했다.
“아, 저희 주인께서 나리를 보면 각별하게 대하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전혀 답이 되는 대답이 아니었다. 유협은 경계심에 몸을 물렸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편을 들고 나섰는데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거기다 주인이라면 고관대작을 의미할 텐데 맹세코 유협은 단 한 명의 권력자도 몰랐다. 천강 빼고 그의 인생에서 주인이라고 불릴 만한 자는 없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시기에 마주치게 된 것 같습니다. 일단은 다음에 이야기를 하지요.”
유협은 뒤에서 우물쭈물하는 노비들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노비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다가왔다.
“가시지요.”
노비가 유협의 팔뚝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칼집이 날아들었다. 무거운 칼집으로 손목을 맞은 노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깜짝 놀란 유협이 뒤를 돌자, 한태가 굳은 얼굴을 하고 칼집을 회수하고 있었다. 한석 역시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노비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감히 어딜 손을 올려.”
한석은 한술 더 떴다.
“버르장머리를 보아하니 오늘 안 되겠다. 너희 다 다리뭉둥이가 부러지기 전까지는 돌아갈 생각도 말아라.”
순간 유협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원하지도 않는데 누군가 자신을 비호하고 나서자, 그 때문에 일이 점점 더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당신들 대체 누구십니까.”
유협이 제법 날카롭게 묻자 한태가 얼른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일단 이 녀석들 혼쭐을 내주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제 발로 갈 테니 그만두시지요. 주인장,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유협이 한 발자국 노비들 쪽으로 걷자 한태가 엇 소리를 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유협의 앞길을 막고 싶으나 차마 그러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가지 마시고, 잠깐만 시간 좀 내 주실 수 없을까요?”
유협은 기가 막혀서 잠시 한태를 바라보았다.
한태, 한석은 마치 유협이 건드리면 깨질 도자기라도 되는 양 굴었다. 노비의 손목은 검집으로 쳐서 부러트려 놓고 유협의 앞길조차 막지 못한다. 마치 귀부인을 대하는 것 같은 태도가 황당했다.
물론 지금 신분이 후비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유협은 장신의 남자였다. 그런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 올리지 못해서 쩔쩔매다니 유협은 기분이 상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굽니까?”
유협이 적의를 가지고 묻자, 한석과 한태는 더욱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마치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이 공손하게 말했다.
“미리 말 올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말단에서 군용식이나 축내는 무인입니다. 그런데 저희 주인께서 공자를 알고 계셔서 이렇게 만남을 청하게 된 겁니다.”
“설마 여기서 뵐 줄은 몰라서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중한 인사에 유협이 당황했다. 본인은 적의를 품고 물었는데 상대방은 마치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지금 유협을 잡으러 온 노비 놈들도 저렇게 말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누군가 공자라고 부른 것 역시 오랜만이었다.
유협이 잠시 멍한 얼굴로 쳐다보자 한태가 한석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한석이 냉큼 노비들에게 일렀다.
“구경났느냐? 오늘은 부러지는 곳 없이 보내 줄 테니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러나 한 번만 더 이런 무도한 광경이 눈에 띄면 그때는 무사히 걸어가지 못할 거다.”
노비들은 한석의 말에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처음에는 상대가 장검을 들고 있어 불리한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을 하는 걸 들어보니 칼을 꺼내 피를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노비 중 우두머리에 속하는 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분은 셋째 황자님의 부인입니다. 속한 곳이 분명한데 어찌 모실 곳이 따로 있단 말씀입니까? 더구나 당신들은 칼까지 들었으니 더더욱 그냥 갈 수 없습니다.”
마치 그쪽이 유협을 해칠 위험이 있어서 그냥 갈 수 없다는 투였다. 그 말을 들은 한석의 얼굴이 험악하게 찌그러졌다.
“야 웃기지 마라. 여기서 너희들 목을 다 치면 쳤지 이분은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게 할 성싶으냐? 거기다 셋째 황자의 부인이라고 말은 하면서 그렇게 무작정 사람을 끌고 당기느냐? 그게 어딜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냐.”
한석이 깡패처럼 묻자 노비 역시 이를 세웠다.
“지금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관원을 부르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저희 주인에게 들어가면 살아갈 성싶습니까?”
“그럼 뭐 죽어 나자빠지겠냐? 말 듣고 썩 꺼져.”
어째 한가운데서 이 말을 듣고 있는 유협만 머리가 다 아팠다. 그러고 보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을 만하긴 했다. 유협은 마른세수하고 한숨을 쉬었다.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태도에 한씨 형제는 움찔했지만, 노비들은 그런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제와 말싸움했던 노비가 손짓했다.
“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
유협은 한숨을 한 번 더 쉬고 한태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쪽의 말이 맞습니다.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면 위험하니 조용히 할 일을 하고 돌아가시지요.”
유협의 말에 한태가 손을 양쪽으로 휘저으며 빠르게 말했다.
“여기서 할 일이 많긴 하나, 가장 중요한 일은 공자님을 모시는 거였습니다. 운이 좋아 이렇게 마주쳤으니 저희도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끌고라도 가시렵니까?”
유협이 조용히 지적하자 한태가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아닙니다. 공자님 혹시 궁에 계실 때 일을 기억하십니까?”
순간 유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추억이 지나갔다. 천화와 연못에 앉아서 잉어들에게 밥을 주던 일, 잠이 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때 그 기분, 처음으로 얼음을 먹어 봤을 때 얼굴.
궁궐에서 유협이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모두 천화가 끼어 있었다. 그래서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때 후궁에 거의 거주하다시피 해서 높으신 분들의 일은 모릅니다.”
자신들은 말단이라고 했지만 한태와 한석은 누가 봐도 훌륭한 무장이었다. 분명 모시는 자가 굉장한 능력을 지닌 게 틀림없었다.
유협의 말에 한태가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럼 혹, 여섯째 황자님은 기억나십니까.”
순간 유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천화의 이름을 들어본 지 족히 몇 년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유협이 온 세상 사람들을 싫어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사랑했던 존재가 바로 천화였다.
“기억합니다.”
입이 열리고 저절로 대답이 나왔다. 그 대답에 한태가 안심한 듯 얼굴을 폈다.
“저희가 모시는 분이 바로 천화 님입니다. 이번에 공을 세워 수도로 오시게 됐는데 반드시 공자님을 찾으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한태의 말에 유협은 눈만 깜빡거렸다. 순간 머리가 아찔하고 흔들렸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껴 유협은 냉큼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막았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유협의 반응에 한태는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주인장, 여기 물 좀 가져다주시오.”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태의 옷깃을 잡았다.
“천화가, 아니 여섯째 황자님이 수도에 와 계신다고요?”
정확히는 잘 살아 있냐고 물어볼 뻔했다.
유협에게는 그만큼 멀고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귀엽게 짓던 미소와 그보다 많았던 눈물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서로 끌어안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천화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유협의 혼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천화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아이는 자신과 혼약하자며 엉엉 울었었다.
“정말 여기 계십니까?”
태도가 싹 바뀐 유협의 질문에 한태는 드디어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오자마자 백 공자를 찾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본인 집을 구하는 일보다도 더 중하게 처리하라고 하셔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천화는…… 아니, 아니.”
유협이 잠시 어지러운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육 황자께서는 잘 계십니까?”
그 말에 한태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십니다.”
옆에서 한석이 ‘잘 지내기는 한데……’ 하고 말을 흐리자, 한태가 보이지 않게 옆구리를 찍었다.
그러나 힘이 다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은 기분인 유협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기운이 너무 빠진 유협은 옆에 있던 의자를 빼서 그 위에 주저앉았다.
난리가 난 건 노비들이었다. 처음에는 유협이 따라 나설 것처럼 굴다가 아예 의자에 앉아버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맨손으로 집으로 돌아갔다간 천강에게 어떤 취급을 받을지 몰랐다. 유협을 굶기고 얻어맞게 하는 게 훨씬 마음 편한 장사였다.
“부인.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 말에 한석이 천장을 보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런 시벌 놈들을 언제까지 봐줘야 합니까.”
“공자, 이제는 저희와 함께 가실 마음이 들었습니까?”
한태가 유협 쪽으로 몸을 숙이고 정중하게 물었다.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한 번 더 묻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한태가 갑자기 욕설을 뱉었다. 한석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형님 미쳤소?”
한태는 한석의 말을 무시하고 유협의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었다.
“공자님, 공자님?”
한태의 손길에 유협의 몸이 무기력하게 끌려다녔다. 그걸 보자 한석의 눈도 동그랗게 뜨였다.
“설마, 기절하셨소?”
“이놈아! 보면 모르냐! 이 분이 왜 그러는 거요. 원래 지병이 있다거나 그런 건가?”
한태가 노비들을 보고 물었다.
노비들은 어물어물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그들은 유협이 쓰러진 이유가 어두운 방에 갇힌 채 삼 일을 굶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실직고를 했다가는 유협 옆에 같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될 것 같았다.
“우린 잘 모릅니다.”
노비가 얼버무리자 한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유협을 부축해서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의자를 붙였다.
“석아, 가서 의원을 좀 불러오너라.”
“형님. 형님만 여기 처음 오셨소? 의원이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주인장한테 물어서라도 찾아와! 아니면 네가 직접 주인께 가서 이분이 왜 정신을 놓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하던가.”
“주인장!”
한석이 성난 사자처럼 뒤를 빙글 돌았다. 그래서 음식 값은 어떻게 되는 건지 걱정을 품고 있던 주인이 깜짝 놀아서 대답했다.
“어디에 가야 의원을 찾을 수 있소?”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러자 노비가 그 앞을 막아섰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이 분은 남에게 몸을 함부로 보일 수 없습니다. 주치의가 따로 있으니 집으로 모시고—.”
그 말을 끝으로 노비는 힘없이 날아갔다. 한석이 말이 끝나는 걸 듣지도 않고 멱살을 잡아서 바닥에 던져 버린 것이다.
당황한 노비들이 어, 하는 사이에 한석이 주먹질을 해 가며 길을 열었다. 어찌나 다급한 몸짓이던지 몇몇 노비는 당황해서 피하기도 했다.
“이런 썩을…… 어쩐지 운이 좋다고 했더니, 여기 꼼짝 말고 있으시오.”
“빨리 다녀와라.”
한석이 문을 거의 부술 기세로 열어젖혔다. 주인장에게 다시 한번 위치를 물은 그가 휑하니 사라졌다. 몇몇 노비들을 멍하니 서 있다가 어쩔 줄 모르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한태는 마치 그들이 존재도 하지 않는다는 양 신중한 얼굴로 유협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절한 얼굴마저 천화가 묘사했던 그 얼굴과 똑같았다.
‘하여튼 우리 주인께서 미친 양반이긴 하다.’
유협을 찾고 처음 좋았던 기분이 점점 착잡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인상착의만 가지고 이 넓은 청원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실물을 만나고 나니 바로 이거다! 싶었다. 그놈의 인상착의를 백 번, 천 번 말하더니…….
한태가 자신들을 신경도 안 쓰고 있자 노비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사님. 도대체 부인을 어디로 모시고 가시려 합니까. 정말 농담으로 던지는 말이 아니라 청원에서 셋째 황자님을 거스르면 엄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엄한 처벌을 내가 받지 네가 받느냐? 괜한 헛소리 그만하고 너희들은 집으로 썩 꺼져라. 집주인이 공자를 찾으시면 동생이 모셔갔다고 하면 될 일 아니냐?”
노비들은 머뭇거렸지만 그 외의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한쪽에서 수런거리던 그들이 마침내 한 명씩 사라졌다.
한태는 한숨을 내쉬며 동생이 의원을 데리고 돌아오길 기다렸다. 정말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만약 큰 병이라도 있다고 하면 어쩌지.’
그러자 처음 천화를 만났던 때가 떠오르며 소름이 돋아 올랐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태는 의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
달콤한 향기가 났다. 잠시 향기를 맡던 유협은 만리향의 향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이가 유난히 좋아하던 꽃이다. 고향에서만 자라는 꽃이라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때 질리도록 맡은 향이었는데…….
후각 다음으로 살아난 건 시각이었다. 유협은 천천히 흐린 눈을 떴다. 하얗게 꾸며진 천장이 보였다. 눈을 깜빡거리자 시야가 점점 깨끗해졌다.
‘여긴 대체 어디지.’
깨끗한 천장, 단아하게 놓인 가구, 화분들, 푹신한 침대 모두 다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다.
유협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휙휙 돌렸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고,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다.
‘천강의 집은 아닌데.’
일단 본인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천강의 집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왜 정신을 놓았더라?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서 세상이 빙글빙글 돌던 기억이 났다.
머릿속을 되짚던 유협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아픈 머리를 붙잡고 신음했다.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기억은 똑똑하게 났다.
‘천화!’
천화가 자신을 찾는다고 했다. 또 본인은 건강하다고 했다.
유협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자세를 다잡았다.
옷은 그사이에 누군가 침의로 갈아입혀 둔 상태였다. 그러나 옷가지에 신경 쓸 정신이 없는 유협은 일단 문부터 열고 봤다. 그리고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유협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데 여자가 침착하게 절을 올렸다.
“기침하셨습니까, 주인님. 앞으로 뫼시게 된 사라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였다. 게다가 사라는 고풍스러운 차려입고, 귀부인처럼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묶어 전혀 시종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유협을 주인이라고 불렀다.
“밖이 아직 춥습니다. 겉옷을 준비해 드릴까요?”
마치 유협이 문을 대차게 열고 나올 걸 알기라도 했다는 투였다. 어떤 일을 해도 그녀를 놀라게 할 수 없어 보였다. 대체 언제부터 방 밖에 있었던 걸까?
눈을 떴더니 별세계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협은 망설이다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삼화각입니다.”
삼화각은 수도 한 가운데 세워진 아주 비싼 여관이었다. 돈만 많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신분 역시 아주 중요하게 따지는 곳이라 웬만하면 유협이 갈 일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예? 어떻게 여길…….”
“한 장군께서 모시고 오셨습니다.”
“한 장군?”
누굴 말하는지 알 수 없어서 유협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사라가 친절하게 ‘한태 장군님께서 모시고 오셨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유협은 이번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처음부터 보통 사람은 아니겠구나 생각 했는데 무려 장군이란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주인이 천화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유협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육 황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잠시 장군을 뵈러 가셨습니다.”
유협은 눈을 깜빡였다. 사라의 말은 꼭 천화가 여기 있었다가 잠시 자리를 떠났다는 것처럼 들렸다.
“깨어나시면 기다리지 말고 식사를 먼저 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지금 준비할까요?”
“육 황자께서 여태 여기 계셨습니까? 아니 그 전에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나요.”
“꼬박 반나절을 주무셨습니다. 황자님께서는 자리를 지키시다 한 식경 전에 자리를 뜨셨습니다.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순간 천화를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머리가 다시 아팠다. 몸이 많이 약해진 탓인지 감정이 조금만 요동쳐도 힘들었다. 한숨을 몰아쉬자 사라가 재빠르게 말했다.
“지금 식사를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들어가서 조금만 쉬고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유협은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사라의 얼굴에 걱정은 떠나지 않았다.
“의원이 오늘부터 한 끼도 거르지 말고, 미음을 천천히 드시라고 말했습니다.”
“의원이요?”
유협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러다 곧 깨달았다. 사람이 눈앞에서 기절했으니 당연히 의원을 불렀을 터다. 유협의 양쪽 귀가 조금 붉어졌다.
온몸에 흉터가 늘어나면서부터 유협은 다른 사람에게 몸을 보이는 일을 꺼려했다. 흉터가 흉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유협이 어떤 취급을 받고 사는지 아는 게 비참했다. 가뜩이나 남자의 몸으로 후비에 들어 고통이 컸던 유협이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일은 예사로 일어납니다.”
유협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사실 천화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의원 이야기는 유협을 현실로 되돌렸다. 천화가 찾는 유협은 어렸을 적 그였다.
그 당시 유협은 밝고 선량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지금 유협은 살아가는 이유마저 찾을 수 없는 우울한 남자에 불과했다. 이런 모습을 그때 그 사랑스러웠던 아이에게 죽어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생겼다.
또한 유협의 머릿속에 있는 천화 역시 많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유협은 아직도 천화라고 하면 눈물이 글썽글썽 고인 눈과 수줍게 웃는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눈물만큼 미소가 많은 아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가 검을 잡고 장군에게 지휘를 한다니 그 모습만큼은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제야 유협은 두 사람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집에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라기보다 금수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천강이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었다. 천화에게 이런 못난 모습을 보이느니 그냥 천강에게 가는 게 나았다.
유협이 섬돌 위에 있는 자신의 신발을 찾자 사라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 변화를 보지 못한 유협이 나갈 채비를 시작하자, 차마 주인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사라가 만류했다.
“의원이 기력이 쇠한 거니 최대한 쉬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돌아가서 쉬겠습니다.”
유협은 간단하게 말을 끊고 섬돌 앞에 앉았다.
유협이 정말로 떠나려는 모습을 보자 사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잿빛이 되었다. 그리고 한순간 갑자기 그녀가 마루에 무릎을 꿇더니 대뜸 절을 올렸다.
“주인을 편히 모시지 못한 죄 죽어서 갚겠습니다. 부디 떠나시려면 이 못난 것의 목숨도 함께 가져가 주세요.”
유협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만나지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사라는 심각했다. 심지어 식은땀이 그녀의 목뒤를 타고 흐르는 게 보였다. 유협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라가 손등까지 떨며 말했다.
“주인께서 떠나신다면 이 목숨 그저 부질없을 뿐입니다.”
“일어서세요,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협이 기막힌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하지만 사라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마치 유협이 떠나면 정말로 자신이 죽는 것처럼 절박하게 엎드려 있었다.
난감함에 유협의 얼굴이 흐려졌다. 천화가 돌아오기 전에 자리를 뜨고 싶었다. 유협이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추태냐.”
유협이 사라에게 그만하라고 말하려 할 때 나직한 소리가 일갈했다.
유협은 그제야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엎드려 있던 사라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쪽을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유협은 그제야 사라가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해서 소란을 피웠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오고 있는지는 뻔했다. 그런데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두려울 뿐이다.
마루를 걸어오던 인물이 마침내 유협 앞에 섰다.
그러나 유협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대로 기절할 수 없다는 의지만으로 유협이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긴 그림자가 유협의 위로 드리웠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그의 턱에 닿았다. 뿌리치기에는 너무 따스한 손이었다. 유협은 그 온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속눈썹이 긴 갈색 눈이 유협을 보고 있었다.
“숨 쉬어야지.”
그제야 유협은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손의 주인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듯 유협의 등을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어서.”
유협은 그 손을 따라가 주인을 바라보았다. 목까지 오는 갈색 머리, 크고 깊은 눈동자. 하얀 피부에는 어렸을 때 인상이 뚜렷하게 묻어 있었다. 섬세하게 긴 목과 달라진 눈높이를 확인하고 있자니 지나간 세월이 느껴졌다. 천화는 누가 봐도 인정할 만큼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내로 자랐다.
몸을 숙이고 유협과 눈 마주치고 있는 천화에게서 온기가 느껴졌다. 심장이 뛰는 것마저 잊은 것 같았다. 유협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저하.”
“아.”
유협이 꽉 막힌 목소리로 부르자 천화가 눈을 깜빡거리며 작게 웃었다.
“응.”
나 맞아.
천화가 속삭이며 유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떨결에 그 손을 잡자 몸이 쑥 끌어 올려졌다. 어정쩡하게 선 몸이 마루 바깥으로 기울자 천화가 서슴없이 허리를 껴안아 왔다. 유협은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 품에 안겨 있었다.
어렸을 때 토끼 같았던 황자님은 어느새 유협보다 머리 반은 큰 장신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기는 걸 좋아하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분명 유협보다 커졌으나 그는 마치 품 안에 안기는 것처럼 유협을 껴안았다.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유협은 천화를 밀어 냈다. 천화는 순순히 손을 풀고 밀려나 주었다. 유협의 시선이 여기저기 꽂히자 그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낮았다.
과거 유협은 천화가 소박하나마 굶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과분하다고 한숨을 쉬던 때가 있었는데……. 유협의 눈에 나타난 천화는 그런 걱정을 모두 깨트렸다.
단단한 상체를 가리는 하얀 상의는 옷깃에 금색으로 자수가 있었다. 자수가 무척 잘 어울려 누가 봐도 고귀한 신분을 알 수 있었다. 겉옷은 걸치지 않았지만 하의는 유협은 본 적도 없는 광택이 부드럽게 흘렀다.
여느 수도의 사람들처럼 복잡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그 부를 티 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천화는 어엿하게 황자로 보였다. 단 하나, 허리에 매인 장검이 눈에 띄었다.
천화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보고 싶었어.”
유협은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천화는 그대로인 동시에 많이 바뀌었다. 통통하고 장밋빛이 돌던 뺨이 날렵해졌고, 눈동자에는 다정함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 자상한 시선이 못내 이상해서 유협은 눈을 아래로 깔았다. 천화는 천화이나 그 동심이 가득했던 아이는 사라진 것 같아 위화감이 들었다.
역시 괜히 남아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서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천화가 유협의 손목을 잡았다.
“식사는 하고 일어나는 거야?”
이 또한 이상했다. 어렸을 때 천화가 하던 하대와 똑같은데 어색한 감이 있었다. 달라진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천화가 사라에게 손짓해 보였다.
“가서 상을 올려라.”
“네.”
사라가 재빠르게 일어나 사라졌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천화가 유협의 팔을 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해 유협은 방금 일어났던 그 방으로 끌려들어갔다. 그제야 만리향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천화는 조심스럽게 유협의 몸을 침대로 이끌었다. 눕히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앉기를 종용하는 눈치였다. 유협은 침대에 앉아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했다.
군인들이 자주 신는 가죽 군화 차림의 천화 발이 언뜻 보였다. 천화의 온기가 바로 옆에 있었으나 차마 고개를 들어 마주 볼 자신이 나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방에 흐르는 침묵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때 천화가 유협의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조금만 참아.”
순간 유협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천화와 눈을 마주쳤다. 갈색 눈이 다정하게 휘어 있었다.
가슴이 쿵 떨어졌다. 마치 어렸을 때와 같았다. 순수하게 빛나는 눈동자. 눈이 마주치자 천화의 눈썹이 모로 휘었다. 그가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걱정했어.”
“아…….”
“좀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눕는 게 어때?”
천화가 서슴없이 진심을 뱉으며 유협의 어깨를 잡았다. 유협의 눈이 일렁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유협은 간신히 열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저하.”
유협의 부름에 천화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눈동자가 조금 반짝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응.”
그가 낮게 대답하며 유협의 손을 잡아 왔다. 따듯한 손은 유협의 것보다 컸다.
잠시 숨이 막힌 사이 천화가 부드럽게 유협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치 실재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처럼 천화는 유협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정신을 빼앗겼던 유협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천화의 친밀한 손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저하, 무인이 되셨나요?”
형편없는 질문이었다. 유협의 귀 끝이 다시 조금 붉어졌다. 천화가 이끄는 장군이 자신을 구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장군에게 어디까지 전달을 받았을까. 그 생각을 하자 고개가 다시 바닥을 향했다.
온갖 추태란 추태는 다 보여 주지 않았던가. 애초에 유협 말고는 이 넓은 땅에서 자기 집의 노비에게 이렇게 하대당하고 사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무척 다정한 목소리였다.
“맞아. 출궁하고 나서 의탁할 곳이 없어서 차라리 서쪽으로 가자 싶었거든.”
“서쪽이요?”
남의 제국은 아직도 많은 곳과 전쟁 중이었다. 특히 서쪽의 전쟁은 치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유협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작은 헐떡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니, 그렇게 험한 곳에.”
저절로 튀어나온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천화가 생긋 웃었다.
“생각보다 괜찮았어.”
정작 힘든 건 다른 거였지. 그가 속삭이며 유협의 어깨를 다시 한번 토닥거렸다.
“식사가 곧 올라올 텐데 그래도 눕는 게 좋겠어.”
사실 지금도 눈앞이 핑핑 돌긴 했다. 옛날 같았으면 본인이 알아서 천화를 끌어당겨 껴안고 침대에 뒹굴었을 유협이었다.
하지만 다 큰 천화가 눈앞에 있자 황족 앞에서 차마 불경하게 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황족이 서 있는데 침대에 눕는다는 말인가.
그 머뭇거림을 눈치챈 천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름다운 미간에 금이 가자 서러움이 듬뿍 묻어 나왔다. 충격적일 만큼 예쁜 모습이었다.
“그대와 내가 그렇게 내외할 사이던가?”
“…….”
유협이 머쓱해서 고개를 돌리자 천화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어렸을 때 일이라고 해서 내가 다 잊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하나도 잊지 않았거든. 그대가 나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따주던 일도 다 기억한다는 뜻이야.”
순간 유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천화가 소리 내서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괜히 버티지 말고 누워. 어차피 황족 모독죄는 이미 충분히 저질렀어.”
민망함에 어깨까지 화끈화끈했다. 설마 다 큰 천화와 이런 대화를 나눌 일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유협은 순순히 침상에 누웠다. 천화가 픽 웃었다. 유협은 얼굴을 잠시 가리다 낮게 웅얼거렸다.
“정말 많이 바뀌셨네요, 저하.”
“그대는 어째 하나도 바뀌지 않았어.”
천화가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단순한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쩐지 서러워 차라리 눈을 꽉 감아 버리자 천화가 뺨을 쓰다듬어 왔다.
“마치 시간을 건너뛴 것 같아.”
“……그건 아니에요, 저하.”
“그래? 어디가 바뀌었는데?”
어디 말해 보라는 듯 천화가 물었다.
유협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해야 하는 말이 너무 많았다. 아마도 청원에서 시종보다 유협의 처지가 더 할 터였다. 심지어 천강은 유협에게 시종이 가지는 주박흔을 남기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자신의 성심까지 달라졌다고 말을 해야 하나? 유협은 더 이상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둘 다에게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유협이 길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을 때 천화가 손을 잡았다.
“적어도 내게는 아니야.”
천화가 생각에 잠긴 유협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유협이 무언가 달라졌든, 달라지지 않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굳건한 태도였다.
천화는 아무것도 몰랐다. 유협이 천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듯이. 하지만 몇 년이 지나서 나타난 남자는 유협이 망가지기 전의 모습을 알고 있음에도, 어떠한 거리감도 느끼지 못한 모양인지 한결같았다.
어렸을 때 곧잘 자신을 따랐던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유협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어쩌면 저하도 많이 달라지신 건 아닌가 봐요.”
그 말에 천화가 눈을 마주쳤다. 유협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보자 천화의 입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니까.”
만개한 듯한 천화의 미소를 보며 유협은 눈을 감았다. 빙빙 돌던 천장이 드디어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천화가 조심스럽게 이마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자면 안 돼.”
식사는 하고 자야 해, 천화가 다정하게 일렀다.
천강은 자신을 쳐다만 봐도 증오스러웠는데, 이상하게 천화가 이마를 쓰다듬는 건 기분이 좋았다. 천화는 어쩌면 유협이 그동안 천강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든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더욱 편해졌다. 몸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천화가 툭 유협의 이마를 손등으로 건드렸다.
“일어나.”
“식사는 꼭 해야지, 응?”
천화가 다정하게 어르는 소리를 듣자 과거가 생각했다. 제가 저 황자님을 자상하게 어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천화가 유협을 어르고 있었다. 기묘한 감상을 느끼며 유협은 눈을 떴다.
사라가 챙겨 온 소반에는 미음과 몇 가지 부드러운 음식이 다였다. 그걸 보니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지만 유협은 애써 티 내지 않았다. 어쨌든 천화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유협이 미음을 천천히 먹는 동안 천화는 그를 지켜봤다. 생각에 골똘히 잠긴 천화는 식사하는 동안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신 간혹 유협을 뚫어지게 쳐다봐 민망하게 만든 게 다였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자 유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귀한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저하. 그런데 집에서 사람이 찾고 있어서 이만 가야할 성싶습니다.”
솔직히 떠나고 싶지 않았다. 천화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는 아직 회포를 풀기 부족했다. 천화가 예전과 같이 자신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 그랬다. 그러나 유협은 황제의 명령에 매인 몸이었다. 가장 혐오하는 남자와 살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천화는 아직 잘 모른다지만 천강의 입지는 단단했다. 비록 황제가 총애하지 않아도 가문의 배경을 뒤에 업고 못할 일이 없었다. 이제 막 수도에 도착한 어린 동생에게 해코지하기 충분하단 뜻이다.
“간다고?”
천화가 한쪽 눈썹을 휘며 여상하게 물었다. 생각보다 유한 말투였다. 유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우리 사이에 폐가 어딨나.”
반박하기 애매한 말에 유협은 그저 웃어 보였다. 사실 천화에게 폐를 운운하기에는 두 사람이 넘은 선이 한두 개가 아니긴 했다. 그러나 그건 어렸을 때 일이었다. 만약 천화가 지금처럼 장성만 했다면 유협은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으리라.
그 모습을 보던 천화가 픽 웃었다.
“그렇게 웃기만 하면 다야?”
“네?”
유협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거렸다.
“새삼스럽게 생각하는 거지만 그대는 너무 과해.”
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쳐다보자 천화가 다시 웃었다.
그 미소에 유협의 귓가가 붉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다 큰 천화는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눈꼬리를 한 번 휘며 웃을 때마다 심장이 덜컹덜컹했다. 유협은 애써 천화의 미모를 탓했다.
천화가 느긋하게 물었다.
“형님의 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겠지?”
“……아무래도 지금 의탁하고 있는 곳이 그곳이라서.”
“그거라면 나랑 함께 가지. 걱정하지 마.”
“네?”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천화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유협을 쳐다봤다.
“몰랐나 본데, 전리품으로 셋째 형님께 드린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야. 부탁도 특별히 따로 드렸지만 그건 무시하신 모양이고.”
“왜 하필 천강한테……? 아니, 대체 무슨 부탁이요?”
그 금수가 멀리 떨어져서 고생하는 동생이 보낸 금은보화를 얻어먹고서 입을 닦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천화가 턱을 괴고 유협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너를 잘 부탁한다고.”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유협은 설마 장난치나 싶어서 천화를 바라봤다. 천화는 느긋해 보이긴 했지만 거짓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별로 소용은 없었던 것 같지만 말이야.”
“그건.”
“괜찮아. 그대한테 물을 생각 없어.”
어쩐지 숨이 턱턱 막혔다. 눈가가 뜨거워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 힘들었다. 천화는 유협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었다. 어쩐지 천화의 말이 단 한 번도 유협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처럼 들려서 숨을 쉬기 벅찼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내가 그대를 쉽게 잊을 수 있을 리 없잖아.”
마치 유협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천화가 말했다. 그가 손을 뻗어 뜨끈한 유협의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니 일단 마음 편하니 쉬어.”
“……네.”
“아, 그 전에 하나만.”
천화가 손을 떼고 생긋 웃었다.
“만리향은 마음에 들었어?”
“아.”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답은 쉽게 나왔다.
“네.”
“그래. 예전에 그대 누이가 좋아한다고 말해 준 적이 있는 것 같아서. 맞나?”
“……기억력이 그렇게 좋으신 편인 줄 몰랐습니다.”
“그대에 관한 건 하나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거든.”
천화가 농담처럼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픈 사람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어. 이제는 그만 쉬도록 해.”
천강을 뒤에 두고 마음 편히 쉬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천강의 말을 대놓고 거역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는 특히 마음이 불편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천화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래, 천강이 해 봤자 때리는 것 외에 또 뭘 할 수 있겠나. 그렇게 생각하자 몸이 조금 풀렸다. 유협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천화가 그 모습을 다정하게 보며 말했다.
“한숨 자. 일어나면 그때 출발하도록 하자.”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
천화가 다가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부드러운 시선이 유협에게 닿았다. 그러자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나? 내가 처음으로 귀신을 봤던 날.”
“아…….”
덕빈의 사당에 귀신이 나타났던 날이었다. 귀신을 본 천화가 두려워하자 유협은 끝까지 천화가 잠들도록 옆자리를 지켜 주었다. 천화는 그날을 말하고 있었다.
“그대가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 줬는데.”
“지금 이 나이에 옛날이야기는 조금 그러네요.”
“사실 내가 아는 얘기는 전부 그대가 해 준 거라, 별로 소용도 없을 거야.”
천화가 담담히 고백했다. 유협은 짧게 웃었다. 그 미소를 다정하게 바라본 천화가 손을 뻗어 이불에 잘 덥힌 유협의 가슴을 도닥였다.
“잠들 때까지 기다릴게.”
“생각해 보니 제가 참 단순한 사람이었군요.”
무서운 귀신을 본 어린아이에게 해 준 일이라고는 옛날이야기와 가슴 도닥이기 뿐이었다니.
생각에 잠긴 유협을 바라보며 천화가 친절하게 말했다.
“그걸로 충분했어.”
“저하는 어렸을 때 감수성이 그렇게 깊은 편은 아니었어요.”
귀엽기는 했지만, 천화는 감정폭이 그렇게 큰 아이는 아니었다.
유협의 말에 천화가 큭큭 웃었다.
“지금도 그래.”
느긋한 말투에 유협의 몸에 힘이 빠졌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천화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는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나이를 먹어 가며 성숙해지고, 의사를 전달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저 그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협은 까마득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천화는 죽은 것처럼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미색이 그대로였지만 확실히 고생으로 안색이 까칠해졌다. 청원에 도착하기 무섭게 수소문한 결과 천화는 유협이 미쳤다는 소문이 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본인을 만나 보니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로 미쳤어도 상관없었지만.’
덤덤하게 생각하며 천화는 손을 뻗어 유협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짧은 순간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유협은 천화의 손길도 느끼지 못했다. 그 얼굴에서 눈길을 떼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사라야.”
문밖에 있는 인물을 부르자 곧 문이 조용히 열렸다. 사라가 고개를 공손하게 숙인 채 서 있었다.
“부족함 없이 잘 모셔야 한다.”
이르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사라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주인은 결코 격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늘 목소리를 키우는 적도 없고, 화를 내는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었다.
“네, 저하.”
천화의 가장 무서운 점은 정도를 모를 정도로 인정사정이 없다는 점이었다. 과연 유협에게도 똑같은 면모를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사라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남자가 맹목적으로 변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다음 날 유협이 눈을 떴을 때 이미 정오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은 어찌어찌 사라가 깨워서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후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늦장을 부릴 생각은 아니었다. 문득 불안감이 몸을 감쌌다.
‘이러다가 나 때문에 천화도 불벼락을 맞으면 어떡하지.’
천강의 성격을 봤을 때 뒷배도 없는, 그저 한미한 곳에서 전쟁이나 하고 온 동생을 좋게 취급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동생이라는 사람이 유협을 데리고 가서 나타나지도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마당에서도 지랄을 마다할 인물이 아니었다.
생각이 확신을 가지자 도무지 더 이상 팔자 좋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유협이 일어나자 옆에서 대기하던 사라가 반갑게 맞이했다.
“주인님, 점심을 준비하라 할까요?”
딱 맞게 일어나셨다며 사라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사라가 그렇게 말을 걸 때마다 현실감이 없어 유협은 속으로 움찔거리곤 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람 취급당한 게 얼마만인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천…… 아니 저하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저하께서는 지금 본당에 계십니다. 깨어나셨다고 지금 연통을 넣겠습니다.”
“아니, 잠시만.”
유협이 만류했지만 사라는 그저 빙긋 웃으며 밖으로 나가 노비에게 말을 전했다. 어쩐지 이쪽도 만만치 않은 기분이라 속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룻바닥을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천화가 나타났다.
오늘 천화는 무복 차림이 아니었다. 검은색 정장에 은색 실이 들어간 우아하고 묵직한 옷차림이었다. 도무지 천화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막상 입은 걸 보자 찰떡같이 어울렸다.
유협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사라가 무릎을 꿇고 천화에게 인사를 올렸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자신은 아직까지 침상에 앉아 있었다. 속으로 기겁한 유협이 인사를 올리려 하자 천화가 손을 들어 막았다.
“이미 그런 예의를 지킬 때는 지났다니까.”
하지만 그건 천화가 까마득하게 어릴 때 일이 아니던가. 유협도 그다지 철들었다고 할 수 없을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천화가 워낙 단호해 할 말이 없었다.
천화는 대신 유협에게 물었다.
“식사는 했어?”
다들 유협이 밥 한 끼라도 굶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무슨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밥 타령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협은 순순히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그러자 천화가 사라를 쳐다봤다. 사라가 재빠르게 말했다.
“이제 곧 상이 올라옵니다.”
“좋아. 점심은 먹고 출발하는 게 좋겠지?”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유협은 한숨을 잠시 참았다.
“속이 다 얹힐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에 갈까?”
그렇게 말하며 천화가 침대에 앉아 있는 유협에게 몸을 숙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에 닿았다. 어쩐지 소름이 올라와 유협은 잠깐 몸을 떨었다. 저번에 한 장군에게 느꼈던 이상한 기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당시 한 장군은 유협의 지체가 너무 높아서 무슨 억지를 써도 다 들어줘야 한다는 것처럼 굴었다. 지금 천화의 태도는 조금 다르지만 그 결은 같았다. 마치 유협이 가지 않겠다고 떼쓴다고 해도, 그대로 다 들어줄 것 같은 말투였다.
유협은 애써 말을 돌렸다.
“식사를 미루는 게 아니라요?”
“의원이 식사는 꼭 챙기라고 했어.”
밥 먹는 건 미루면 안 돼.
천화가 제법 엄격하게 말했다. 유협은 그저 푸스스 웃고 말았다. 이 상황이 우스워서였다.
실제로 식사가 끝나기 전까지 천화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그저 서 있었다. 누가 밥을 먹고 있는 걸 뚫어져라 쳐다봐 어색해진 유협이 말없이 수저를 빨리했다. 마침내 차까지 마시자 상이 빠르게 치워졌다.
그 후 사라가 외출복까지 들고 오자 유협은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천화의 동행은 뒤로하고, 유협은 천강의 집 귀신이 될 신세였다. 어제 천강의 말을 어긴 일이 무마될지 의문이었다.
설령 무마가 된다고 할지라도 아마도 천화를 이렇게 만나는 일은 다시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유협의 심정을 모르고 사라와 천화는 진지하게 유협에게 입힐 외출복을 고르고 있었다.
천강이 유협에게 늘 입히는 하늘하늘한 외출복은 아니었지만 귀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늘 검은색이 잘 어울렸어.”
천화가 짙은 검은색 외출복을 가리키자 사라가 냉큼 남색에 황금 줄이 달린 외출복을 들어올렸다.
“이 남색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천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치 큰 칭찬이라도 받은 양 웃는 그 얼굴에 유협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 미소를 보자 천화가 픽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잠깐 자는 사이에 사라가 사 온 옷들이야.”
“마음에 드세요?”
사라가 공손하게 물어 왔다.
차마 천화 앞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유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천강이 주는 옷만 아니라면 뭐든 좋았다.
물론 그래도 천화에게 이런 신세까지 진 게 부담스럽긴 했다만. 유협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한 벌이면 될 텐데.”
“옷장을 채우려면 멀었어.”
“네?”
무슨 옷장이요? 묻고 싶었지만, 두 사람 다 옷에 집중하고 있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침내 유협은 사라의 공손하지만 강한 주장으로 남색 옷을 입게 되었다. 갈아입기 위해 겉옷을 벗고 침의에 손을 올리던 유협은 문득 천화가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에는 따로 옷을 갈아입을 방이 없었기 때문에 천화에게 비켜 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망설이던 유협은 천화를 바라봤다.
“저하.”
“응?”
천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순간 어렸을 때 토끼 같던 모습이 확 떠오를 정도로 예뻤다. 숨이 턱 막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얼굴을 하고 전쟁터를 누빈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그래서 더 부담스러웠다. 유협은 간신히 말했다.
“소인 맨살을 저하께 보일 위치가 아니라…….”
“음?”
잠깐 유협을 쳐다보던 천화가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아직 아니긴 하지.”
그러더니 순순히 뒤를 돌아 방을 빠져나갔다.
아직은? 아까부터 뭔가 애매하다고 생각하며 유협이 침의를 풀자 사라가 냉큼 다가왔다. 유협은 아무리 시종이라고 하더라도 온몸에 상처가 남은 몸을 보여 주기 싫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행이 사라는 유협의 몸에 남은 이상한 흉터들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유협이 정신을 잃었을 때 옷을 갈아입힌 사람이 사라였을지도 모른다. 의복을 정리한 사라가 빗을 들고 다가왔다.
유협이 머리를 올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전에 사라는 그의 머리를 가지런히 빗기더니 그대로 뒤로 넘겨 정리했다. 유협이 평소에 하고 다니는 모습 그대로였다. 정리가 다 끝나고 나자 유협은 단정한 차림의 공자처럼 보였다.
부름을 받고 다시 들어온 천화는 유협의 모습을 보고 생긋 미소했다.
“정말 옛날과 달라진 게 없어.”
“……그런가요?”
유협도 평소보다 이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물론 천강이 얼마나 우스워할지 뻔했지만 적어도 선택권이 있을 때는 이처럼 남자답게 입고 싶었다.
천화는 마음에 든 듯 다시 한번 유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라를 칭찬해 줘야겠군.”
“이제 출발하실 건가요?”
옷 이야기가 더 나오기 전에 유협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 유협을 보고 천화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빨리 가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는데.”
“전혀 아닙니다.”
막을 새도 없이 진심이 튀어나갔다. 말투가 제가 듣기에도 너무 정떨어지게 단호해서 유협은 머쓱해졌다. 천화는 그런 유협을 바라보다 천천히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네, 저하.”
“천강과 함께 하고 싶은가?”
“…….”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유협이 천화를 바라보았다. 천화는 무표정했다. 어쩌면 소름끼치게 차가워 보이기도 했으나 유협에게는 익숙한 표정이었다.
어렸을 때 천화는 자주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진실된 감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유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유협은 천화가 당연히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강과 함께 하고 싶냐는 질문은 너무 뜻밖이었다. 당연히 숨을 끊고 싶을 만큼 진저리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순간 천화가 유협의 턱을 잡아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미안해.”
“네?”
“그냥 확인차 물어봤을 뿐인데.”
네가 그렇게 상처받을 줄 알았다면 묻지 않았어.
천화가 그리 중얼거리며 유협을 끌어 당겼다. 정신을 차려 보니 유협은 어느새 천화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당황한 유협이 꼼지락거리자 천화가 팔에 힘을 줬다.
“그대 마음은 충분히 잘 알고 있어.”
“…….”
“애초에 너를 잊어 본 적도 없어.”
유협은 그만 할 말을 잃고 천화를 바라봤다. 천화가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희미한 미소가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기억해? 내가 혼인해 달라고 한 거?”
농담이 섞인 말투였다. 유협은 침을 삼키고 간신히 농을 섞어 대답했다.
“키가 제 허리에 올까 말까 할 때 한 말씀 말이죠?”
“그래. 그때 그대가 한 말도 기억나?”
“어린아이는 혼인을 할 수 없다고 했죠.”
“아니. 그대보다 커지면 할 수 있다고 했지.”
그 말에 유협이 눈을 깜빡거렸다. 천화는 전쟁터를 나돌아 다니면서도 무슨 재주인지 키가 유협보다 더 커진 상태였다.
“그대가 많이 크지 않아서 기쁘다고 해야 하나.”
“저도 작은 편은 아닙니다.”
“알아.”
천화가 팔에 힘을 줘 유협을 한 번 껴안고 손을 풀었다. 그가 다정한 눈으로 유협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기뻐.”
자신을 바라보는 다갈색 눈동자에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유협은 홀린 듯이 그 눈을 바라보았다. 점점 다갈색 눈이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연분홍색 입술도 가까워졌다. 여인의 것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었다.
어느새 천화의 손이 유협의 날씬한 허리를 감싸며 팔에 힘을 주었다.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순간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저하, 한태가 인사 올립니다.”
“한석도 형원이도 있습니다요.”
문득 천화가 인상을 쓰고 멈췄다. 그제야 유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천화가 입을 맞추려고 하지 않았나? 당황에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데 천화가 유협을 부드럽게 놓아주었다.
“갈 준비가 다 됐지?”
아까 일어날 뻔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천화가 물었다. 유협이 당황해서 대답을 못하자 천화는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준비가 다 되면 이쪽으로 오라고 일러뒀거든.”
별채에서 본당까지 가려면 너무 멀어서 여기서 출발하려 했지.
천화가 조근조근 설명하며 유협의 손을 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세웠다. 그리고 아까 일에 관해 유협이 묻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마당에는 두 명의 장정과 한 명의 왜소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이 말을 별채로 나가는 문에 대기시켜 놨다고 보고하는 동안, 유협은 천화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까 천화가 자신을 바싹 끌어안았을 때의 숨결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던 심장 소리와 따스한 온기가 제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밖에서 소란이 났을 때 천화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었던, 신경질적인 표정을 떠올리자 머리가 돌이 된 것처럼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유협이 멍하니 사태를 파악하려고 하는 사이에 천화는 이미 마루 아래로 내려간 후였다. 그가 유협을 불렀다.
“옛날에 지어 줬던 말 이름, 기억나?”
천화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물었다.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표정을 보자, 뭐라고 할 수 없는 기분이 됐다.
유협이 간신히 ‘나봄이요’ 하고 대답하자 천화의 눈꼬리가 완전히 휘었다.
“맞아.”
지금 나봄이가 기다리고 있어.
천화가 유협에게 손을 뻗었다. 유협은 망설이다 그 손을 잡고 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병자를 대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연인을 대하는 태도처럼 느껴져 혼자 얼굴이 화끈했다. 그러나 한 형제를 포함한 다른 사람은 천화의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는 것처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자.”
천강의 집에 가자는 말을 하는 것치고 너무나 밝았다. 참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유협은 천강의 집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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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기와들이 늘어선 청원에서도 가장 부유한 집을 꼽으라면 천강의 집을 빼놓을 수 없었다. 반듯하게 창호지를 바른 창문들이 늘어져 있고, 검은색으로 염료를 입힌 가구들, 휘황찬란한 수집품들을 보면 누구든 기가 죽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안채 말고도 이런 건물이 세 채나 되었으니, 그 부귀가 과연 황궁에 지지 않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과거 유협이 귀신을 물리치러 갔을 때 살풍경했던 정원은 이제 꽃이 만발했고, 도망쳤던 노비들이 다 돌아와 인기척으로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이런 넘쳐나는 부귀영화 주인은 정작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 고귀한 기분이 틀어진 이유로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이제 막 수도에 도착한 어린 동생이었다.
과거 몇 년 동안 천화가 천강에게 서신을 보낸 건 황가에서는 비밀도 아니었다. 장계가 올라오는 날이면 반드시 천강에게 보내는 물건이 딸려 있었다. 황제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치고 나면 다음 순서가 천강이었다.
다른 형제들 역시 선물을 받긴 했지만, 천강의 물건이 가장 좋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천강은 오랜 시간 왕래가 없던 동생이 보낸 선물에 의구심을 품었더랬다. 형제들 사이에 불화를 조장하려는 얄팍한 수작인가 수상쩍게 여겼다.
하지만 천화가 매번 지치지도 않고 보내는 편지를 보고 점차 믿기 시작했다. 귀족적이라기보다는 생활형이라고 칭할 수 있는 문필로 또박또박 쓰인 글은 천강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끝에 가서 유협에게도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천강은 곧바로 자신의 넷째 부인이 과거 천화와 오순 도순한 사이였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러자 그 많은 보물들이 왜 자신의 차지가 되었는지 납득하게 되었다. 욕심 많은 돼지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이었다. 그렇게 달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황제에게 명을 받고 올라온 천화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이 천강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감히 내 집안에 망신을 줘?’
유협을 놓친 노비들이 아우성치며 천화의 죄를 주장할 때 천강은 오랜만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이 차이도 10살이 넘게 나는 동생이 자신의 첩을 데려갔다. 수도가 끓어오를 만큼 적나라한 소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렇다고 직접 말을 달려 손을 잡아끌고 가기에 민망한 그림이 그려졌다. 어린 동생과 첩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했다는 소문은 이제 사양이었다. 천강은 최대한 사건을 쉬쉬하며 끓는 속만 달래고 있었다.
그랬으니 천화가 유협을 데리고 저택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분노가 얼마나 깊었으랴. 마침 그들이 도착한 때도 거지 같았다.
천강이 안뜰 정자에 앉아 혼자 장기를 두며 차를 마시던 참이었다.
분노를 다스리며 우아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앳된 티를 간신히 벗은 문지기가 달려왔다. 그의 눈은 동전만큼 커다래졌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채였다. 천강이 흐트러진 모습을 몹시 싫어하는 걸 아는 데도 그랬다.
“주인님, 주인님. 지금 밖에…….”
“밖에?”
천강이 싸늘하게 말을 잡아챘다. 까딱하면 이 녀석을 끌고 가서 몽둥이질하라고 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 말에 천강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본인을 여섯 번째 황자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천화?”
천강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묻자 문지기가 움찔했다. 그리고 서둘러 덧붙였다.
“그리고 넷째 마님도 계십니다.”
저절로 찻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핏줄이 솟아올랐다.
“이것들이 미쳤나.”
순간 눈앞이 붉어졌다. 둘이 사이좋게 도주한 것도 열이 받는데, 설마 당당하게 저택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당연히 천화도 유협도 너무 괘씸해서 누굴 먼저 족쳐야 할지 감도 안 올 지경이었다. 천화는 감히 제 형을 망신 줬으니 반드시 그에 준하는 응징을 받아야 했다.
유협의 문제는 좀 더 복잡했는데, 오랜 시간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증오와 경멸이 일반적인 수준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천강은 천화에게 줄 적절한 선의 벌을 생각해 낼 수 있었지만, 유협에게 줄 벌로는 극단적인 생각만 떠오를 뿐이었다.
죽지만 않으면 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천강이 사납게 말했다.
“두 놈 다 들어오라고 전해라.”
“저, 일행이 같이 있으신데…….”
“그럼 둘만 들어오라고 해!”
천강이 버럭 일갈하자 문지기가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심기가 잔뜩 상한 천강은 그대로 장기판을 손으로 쓸어 버렸다. 옥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장기 말들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성이 풀리지 않아 장기판에 남은 장기말도 모두 다 집어 던졌다.
부잣집 후계자답게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문제의 두 명이 정원의 입구에서 나타났다.
유협은 천강이 어느 정도 화가 났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한두 번 그 성질을 받아 낸 것도 아니었겠다, 점점 저택이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고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천강이 천화의 앞에서 자신에게 손찌검할 거라는 확신과 동시에 천화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이 말 속도를 느려지게 했다. 점점 뒤처지는 유협을 보고 천화는 말을 유협의 옆에서 달렸다.
마침내 대문이 나타났을 때 유협은 내내 생각을 지배하던 말을 뱉었다.
“저하,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나오면 그때 들어가시죠.”
유협 나름대로 신경을 쓴 말이었다. 천화 앞에서 맞는 모습을 보여 충격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 같이 있다가 천강의 성질을 더 긁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천화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불안해?”
“아뇨 그게 아니라…….”
“나는 그대가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서 안 돼.”
천화가 간단하게 잘라 말하고 문을 두드렸다.
유협은 천화의 부하가 문지기와 대거리하는 동안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그것이 현실이었다. 유협에게는 반복되는 일상과도 같았다.
아무리 숨겨 봤자 결국 제 한심한 신세를 천화도 알게 될 테니, 그게 오늘이든 내일이든 상관없다고 되뇌었다. 한마디로 유협은 모든 걸 내려놓고 천강을 만나러 갔다.
천화는 유독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천화를 옆에 두고 걷자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끝내 천강의 정자에 도착했을 때 유협은 그 표정만 읽고도 얼마나 천강이 화가 났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눈빛만 봐도 알았다.
‘거의 미쳤군.’
두 사람이 대문을 넘었을 무렵 천강은 정자 위에 서서 서성이고 있었다. 편안하게 입은 붉은색 겉옷 자락이 너무 빠른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몸에 휘감겼다. 그렇게 이를 갈고 있던 천강은 유협이 들어오는 순간 얼굴이 분노로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유협이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닌 남색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 옷이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마치 주인과 하나인 것 같았다. 그럼 지금 일부러 자신이 준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차려입은 것인가? 유협은 천강을 화나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자세가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천화와 하룻밤을 보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은 자연스럽게 유협의 옆에 서 있는 천화를 보자 더욱 진해졌다. 동생은 황제의 눈마저 즐겁게 했다는 화비의 미색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다. 그런 천화 옆에 유협이 서 있으니 절로 이가 갈렸다.
천강이 바닥에 떨어진 장기말을 주워 힘껏 유협을 향해 던졌다. 묵직한 옥으로 만들어진 장기말이 얼굴을 향해 날아오자 유협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타격이 없었다. 대신 퍽 하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 유협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눈 바로 앞에 커다란 손이 있었다. 천화가 날아오는 장기말을 잡아 챈 것이다.
유협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천화의 손목을 잡았다. 반사 신경도 믿을 수 없었지만 소리가 너무 컸다. 천화가 다쳤을까 봐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 광경을 보자 천강의 얼굴은 이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마에 혈관까지 돋아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정분이 났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천화는 손바닥을 빨갛게 만든 옥돌을 쥐고 천강의 얼굴을 바라봤다. 분기탱천한 천강과 다르게 호수처럼 고요한 무표정이었다. 천화의 속을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던 유협이 먼저 입을 열려는 순간 천강의 분노가 먼저 터져 나왔다.
“너.”
천강이 손가락으로 유협을 가리켰다.
“너는 일단 네 방으로 꺼져.”
죽여 버리겠다는 의사가 충분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유협은 차마 자신만 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천화는 사태가 이렇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유협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천화 혼자서 천강의 지랄을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적어도 여기 함께 있는다면 천화보다는 유협이 분풀이 상대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천화는 천강의 분노에서 안전해진다.
허수아비처럼 서 있던 천화가 유협이 생각을 마친 찰나에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낮고 부드러운 미성이라고 생각했던 천화의 목소리가 조금 무뚝뚝하게 들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내용이었다. 천강의 귀에 ‘죄송하다’는 말은 마치 불륜을 저질렀다는 말처럼 들렸다. 순간 두 사람이 얽히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랐다. 화가 났다. 정말 괘씸한 건 유협이었다. 저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품을 내어 주지 않았으면서, 천화에게는 단 하루 만에 정을 주었단 말인가?
천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는 정녕 네 어미의 자식이 맞구나. 혈육을 배반하는 일이 너에게는 그리 쉽더냐?”
천화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유협이 기함했다. 어떻게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 반란 사건까지 끄집어내서 욕할 생각을 했을까.
거기다가 가만히 보아하니 무언가 오해를 하는 듯했다. 자신은 천화에게 밥을 얻어먹고 옷을 새로 받았을 뿐이었다. 가만히 자신을 도와준 천화에게 무슨 실례인가. 유협은 발끈해서 말을 했다.
“설마 지금 저와 육 황자님을 더러운 시선으로 보신 겁니까?”
“입 닥쳐! 네 방으로 꺼지라고 했지.”
“오해입니다!”
“여봐라, 거기 아무도 없느냐?”
천강이 목소리를 높이자 밖에 있던 노비 두 명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유협은 긴장해서 천화의 곁에 살짝 붙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런데 이번 외출은 백 공자가 마음대로 한 게 아닙니다.”
“어디서 거짓을 고하느냐!”
“정말입니다.”
유협은 눈앞이 아찔해져서 저도 모르게 천화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무래도 천화는 촌에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천강은 동생이라고 해서, 개선장군이라고 해서 내버려 둘 인물이 아니었다.
설령 눈앞에서는 얌전히 군다고 하더라도 뒤에서는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인물이기도 했다. 분노한 천강 앞에서 이렇게 대거리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심지어 천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절박함조차 없었다.
“백 공자를 우연히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배고픔을 달래러 갔다가 웬 녀석들이 지체 높은 부인을 함부로 다루려고 해서 저희 사람들이 조금 손을 봤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유협은 지체 높은 부인이 되었다. 속으로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유협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천강은 말을 끊으려고 손을 움찔했으나 일단은 대답이 없었다. 천화가 평화롭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한눈에 부인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제가 청원에서 원래 사람을 뿌려 부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천화가 힐끗 유협을 보았다. 천강의 따가운 시선도 동시에 꽂혀왔다.
“하필이면 청원으로 돌아오라는 교지를 받고 난 후에 원귀가 붙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 공자와 우연히 만나 제가 살길이라 생각하고 그만, 이를 쫓아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유협은 도무지 어쩔 줄 몰라서 천화를 바라봤다. 설마 준비해 온 변명이 이게 다였단 말인가? 이 정도로는 천강의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이건 그냥 천강의 인간성이 얼마나 더러운지 얕보는 말에 불과했다.
초조한 마음에 유협이 끼어들고자 했지만 천화가 담담히 뒷말을 이었다.
“형님, 제가 아무리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았다고 해도 기본적인 예의는 알고 있습니다. 어찌 형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형수에게 피를 달라 상처를 낼 수 있겠습니까?”
“뭐?”
천강이 인상을 썼다. 유협도 당황해서 천화를 보았다. 전혀 뜻밖의 말이긴 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천강이 넘어갈 리 없었다.
“그럼 형의 안사람을 하룻밤 마음대로 데리고 있는 건 가능한 거냐?”
“그건 백 공자가 기절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말에 천강이 움찔했다. 유협이 빈사 상태까지 간 건 천강이 저지른 짓이었다. 이치에 닿는 말이 나오자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화가 본론을 꺼냈다.
“듣자 하니 제게 쓰인 귀신이 어지간히 강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 번 손을 써 서는 안 되고 여러 번 힘을 써야 한다는데. 그래서 백 공자께 부탁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천강이 호통을 치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유협이 밖의 빛을 보는 것 하나도 제 명령을 따라야한다고 생각하는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천강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눈은 타오르는 구슬 같았다.
“너는 생각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구나.”
“죄송합니다. 형님은 물론이고, 형수님까지 손을 얹어야 하는 일인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나가 줘야겠다.”
천강이 반쯤은 조롱하듯 말하자 천화가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유협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으로 천화를 쳐다봤다. 천강의 말투에 제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천화가 대충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속을 몰라서 답답했다. 설마 이대로 포기하고 떠나는 건가? 그러나 천화는 이런 천강의 태도까지 예상했던 사람처럼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을 단순히 형제의 우애에만 기대서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형님도 외간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 피곤하실 일이고, 형수님도 피를 보아야 할지 모르니. 금수가 아니라면 필히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해야 하는 법입니다.”
“뭐라고?”
천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천화가 줄줄이 늘어놓는 이야기가 뭔가 대본이라도 읽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유협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또 유협과 작정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네가 내 집을 보지 못했구나. 감사를 어떻게 표할 생각이냐?”
본채부터 시작해서 안채까지 화려하게 꾸며진 방을 보지도 못했냐고 천강이 비웃었다.
천화는 그러나 무척이나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가 들어온 노비 둘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온 사람 중에 형원에게 물건을 챙겨 오라고 전해라.”
노비가 눈치를 보며 천강을 쳐다봤다. 천강이 턱짓으로 허락하자 노비가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형원이 올 때 동안 불온한 침묵이 감돌았다.
유협은 초조하고, 천화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고, 천강은 손에 핏대가 서서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족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곧 형원이 말에 달아 두었던 자루를 풀어냈다. 천화가 턱짓했다.
“형님께 드려라.”
형원은 그 말에 계단을 올라 묵직한 보자기를 천강이 엉망으로 만든 장기판 위에 올렸다. 그리고 깊이 인사하더니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호기심이 분노를 이겼다. 분명 가진 게 없는 녀석이니 선물로 바친다는 것도 그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천강은 보자기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 한순간 할 말을 잃고 물건을 보았다.
포장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속에 든 물건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황제도 보기 어려울 순금으로 이뤄진 황금이 쌓여 있었다. 어지간히 좋은 물품인지 광이 나서 천강의 얼굴까지 비춰 보였다.
분명 황제에게 바쳐야 하는 물건이 제 앞에 있자 천강이 어리둥절해서 천화를 쳐다봤다. 분명 황궁에 들렀다 왔을 터고, 그렇다면 전리품을 황제께 바쳤을 터였다. 그런데 어찌 이런 막대한 황금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
천강이 넋이 빠져서 황금을 쳐다보자, 천화가 설명해 줬다.
“변방의 부족은 금이 신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신전을 찾아가면 이런 것들이 수십 개는 있지요. 그걸 다 모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본래 제 소관이지만, 아니 제 소관이기 때문에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처음에 모았을 때는 한 닢도 채 되지 않아서 그저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으고 보니 그 양이 상당합니다.”
뻔뻔하게 천화를 무시했던 천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금을 보다가, 천화를 보다가를 반복하던 천강이 마침내 물었다.
“지금 그래서 뭘 하겠다고……?”
“귀신이 떨어질 동안 제가 저택을 찾아 백 공자에게 치료를 받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게 언제까지…… 아니. 아니. 그건 상관없고. 이걸 그래서 바치겠다고?”
“피차 손이 많이 가는 일인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천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표정만 보면 천강에게 떡이나 좀 먹어 보라고 준 것 같았다. 그러나 천강은 경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유협은 기분이 이상했다. 천강도 이상했지만 천화가 가장 이상했다.
“황자님, 이건.”
유협이 한 발자국 나서서 천화의 소매를 잡았다.
물론 유협이야 천화가 매일 이 집에 찾아온다면 정말 다시 없이 행복할 일이었다. 마치 천화가 어렸을 적 유협이 매번 찾아갔던 것처럼. 하지만 이를 위해서 저렇게 막대한 황금을 생으로 주는 건 말도 안 됐다. 차라리 그 돈으로 유협을 사겠다고 하는 게 더 말이 될지 몰랐다.
행동을 만류하려 하자 천화가 유협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황금을 신경 쓰는 천강을 눈짓해 보이며 천화가 속눈썹이 긴 예쁜 눈을 깜빡거렸다.
‘나만 믿어.’
연분홍색 입술로 말하는 모습에 유협은 할 말을 잃었다. 뭐가 됐든 천화가 무슨 계략을 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해가 되지 않아야 했다.
천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금을 신중하게 만져 보고 있을 때 형원이 불쑥 또다시 나타났다. 그는 천화에게 호리병을 바치더니 다시금 뒤로 돌아갔다.
천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이렇게 된 거 술이나 한잔 어떠십니까?”
“술? 변방에서 가져온 술이냐?”
“그렇습니다.”
“……이리 가져와 봐라. 그리고 거기 너. 여길 다 정리하고 술상을 봐 와라.”
천강은 언제 불같이 화를 냈냐는 듯이 노비에게 명령했다. 노비가 재빠르게 정리하러 오자 천강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금을 다시 천으로 감쌌다. 그리고 유협에게 눈짓했다.
“사정은 알았다. 내가 천화와 이야기해 볼 테니 너는 방으로 들어가서 자숙하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이게 뭐지. 천강을 만났는데 아무 일 없이 끝나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천강을 달랬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유협은 징벌방이 아니라, 그대로 자신의 원래 방에 돌아갈 수 있었다. 심지어 잠시 침대에 앉아 있었더니 식사까지 들어왔다. 역시나 미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상황을 떠올리니 기가 다 막혔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맑고 착하던 아이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의 신전을 털어 황금을 한가득 가져왔다. 과거에 유협은 천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만 봐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황금이 천강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순도가 높은 금을 보는 천강의 눈이 번질번질 빛났다.
유협은 그 밤 내내 걱정거리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금을 본 후 천강은 천화가 이틀에 한 번씩 방문하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천화는 멈추지 않고 선물을 가져왔다.
오늘 천화가 챙겨 온 건 육각형 모양 술병에 든 과실주였다. 남의 과실주와 비슷한 맛이 나면서도 특별한 맛이 생생하다고 한다. 선물을 대접하며 형원이 과실주를 소개하는 목소리가 창문을 타고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협은 기대하며 바깥채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과연 형원과 함께 천화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역광 때문에 천화가 입고 있는 녹색 겉옷이 한층 진해 보였다.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찡긋거리자 천화가 눈꼬리를 예쁘게 휘어 웃었다.
살살 녹는 그 눈웃음을 볼 때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유협이 한없이 쳐다보자 천화도 역시 유협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탁자 하나를 두고 마주 않을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흠.”
옆에서 난 기침 소리에 유협이 깜짝 놀라 옆을 바라봤다.
옆에는 첫째 부인의 시녀가 앉아 있었다. 어린 첫째 부인을 키웠다는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다. 그 세월만큼 굳어진 고집과 융통성 없는 성격은 어디 가서도 꺾이지 않을 정도로 유명했다.
천강이 두 사람 사이에 굳이 ‘시녀’를 붙여 주겠다며 데려온 여자였다. 유협은 그 수작이 투명하게 보여 경멸 어린 표정으로 천강을 쳐다봤지만, 천강은 천화가 전리품으로 가져온 패배한 귀족들의 문장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뭐 덕분에 결과적으로 맞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인을 떨궈 내지는 못했기 때문에 두 사람을 감시하는 시선이 온종일 진득하게 붙었다. 지금도 감시자는 유협과 천화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차를 준비할까요?”
시녀, 난난이 노골적으로 천화를 보며 물었다.
자신의 주인이 유협에 가까운 데도 난난은 늘 천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보통 이런 행동을 했다간 한겨울에 물을 끼얹어 밖에 방치되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협은 시녀나 노비들이 본인을 무시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더불어 유협 역시 그들 사이에 섞일 마음이 콩알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천화 앞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건 조금 괘씸했다. 유협이 천화의 대답을 가로챘다.
“요새 날이 풀려서 그런지 벚꽃차가 괜찮습니다.”
“그럼 마셔 봐야지.”
천화가 망설임 없이 유협을 보고 대답했다. 난난이 슬쩍 인상을 썼지만, 곧 다른 시녀 한 명을 불러 벚꽃차를 준비하게끔 했다.
그동안 천화는 두 손을 뻗어 유협의 손을 잡았다. 그가 살짝 장난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때, 그제보다 좀 귀신들이 사라진 것 같아?”
“아뇨.”
있지도 않은 귀신이 사라질 터가 있나. 서로를 속일 필요가 없는 두 사람이었다. 유협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수족 냉증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커서 생겼지.”
“맞아요. 어렸을 때 저하는 온몸이 다 따끈따끈 했습니다.”
“어릴 때니까.”
천화가 살짝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창백한 뺨에 복숭앗빛이 돌고, 부드러운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니 유협도 저절로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보면 웃음만 나오니 참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천화도 비슷한 심경인지 가끔씩 아련한 눈을 했다. 어느 날에는 말없이 유협의 눈초리를 쓰다듬은 때도 있었다.
유협은 천화의 손을 잡아 탁자 위에 올렸다. 그렇게 양손을 꼭 잡은 채로 유협이 말했다.
“처음에 저하가 변하신 줄 알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천화가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그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유협은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시는 줄 알았어요.”
“싫어하는데?”
천화의 태평한 대답에 유협이 웃었다. 타인과 교류를 싫어한다고 하기에 천화는 제 형님인 천강에게 무척 잘했다. 거기다 유협을 대하는 태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늘 대문부터 웃으며 넘었고, 유협과 눈이 마주치면 그 눈웃음이 짙어졌다.
뻔히 알면서도 악귀가 아직도 많이 붙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해 달라며 손을 잡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래서 천화의 말이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 그대가 없었으면 큰일이 나지 않았을까 생각해.”
“저하…….”
“불쌍하게 여길 필요 없어. 그대가 구해 줬잖아.”
천화가 향기라도 날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가슴이 더 찡했다. 생각해 보면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믿을 사람이라고는 간신히 코흘리개 신세에서 벗어난 유협뿐이었으니, 정말 어렸을 때부터 악운만 껴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다 커서는 전쟁터로 향했으니……. 결국 이렇게 부와 권력을 가졌지만, 거기까지 오르면서 겪은 고생이 너무나 컸다.
유협이 속을 태우고 있자니 따뜻한 손이 뺨을 감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화를 바라보자 그가 속삭였다.
“이렇게 다정하고 마음이 약해서 어쩐다.”
“……제가요?”
누군가 특기를 묻는다면 천강 혈압 높이기, 천강 열받아서 반쯤 죽게 만들기 등등을 댈 수 있는 유협이었다. 오죽했으면 천강을 포함하여 이 집의 식구들까지 유협을 멀리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훌륭한 미남자로 성장했지만, 그에 준하는 덕은 하나도 쌓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웃는 것만으로도 신선 같아.”
“…….”
“설마 그런 옷도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담담한 고백에 유협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지금 유협이 입고 있는 옷은 옷자락이 부드럽게 물결치는 황색 겉옷과 하얀 내의였다. 옷장에 있는 옷이 다 비단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밖에 없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협의 취향은 이전에 천화가 사 줬던 옷과 비슷했다.
하지만 막상 천화도 유협이 부드러운 비단에 감겨 있는 걸 보니 마음에 들었나 보다.
“큼큼.”
난처한 순간을 난난이 적절하게 깨부쉈다.
주변을 둘러보자 벚꽃차가 준비되어 시녀가 하나씩 옮기고 있었다. 유협과 천화 앞에 놓인 차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러고 보니 벚꽃차도 마셔본 지 오래됐다. 유협이 손을 풀자 천화도 순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잠시 벚꽃차를 마셨다. 그러나 금세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대다수는 천화에게 장난을 거는 말이었다. 그 외에는 함부로 질문하기에 너무 무거운 말뿐이다.
결국 유협은 무난한 대화를 시작했다.
“차가 다네요.”
“단 게 좋아?”
“아뇨. 어렸을 때 저하가 단 걸 좋아하셨잖아요.”
옛날 기억이 떠올라 작게 웃자, 천화가 유협을 빤히 쳐다봤다. 마치 홀린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대가 정말…….”
유협은 고개를 기울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천화가 무슨 말을 뱉으려 하다 입술을 닫았다. 궁금해진 유협이 천화의 찻잔을 툭 건드렸다.
“제가 뭘요?”
천화가 대답하려 했을 때 여종이 총총거리며 들어왔다.
여종은 난난에게 가더니 무어라 속삭였다. 천화와 유협은 말을 잠시 끊고 난난을 쳐다보았다. 대개 난난에게 여종이 올 때마다 천화는 자리를 떠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난난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잠시 황자님을 뵙자고 하십니다.”
순간 천화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걸 굳이 감추지도 않은 채 천화가 난난을 돌아봤다. 난난이 조금 움찔하긴 했으나 천화는 이후 무릎을 세우고 일어났다.
“조금 더 치료를 받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진단을 빙자한 만남이었지만, 간혹 이런 일이 종종 생겼다. 대다수 천강은 천화를 불러서 술친구로 써먹었다.
유협이 진심으로 아쉬워 쳐다보자 천화가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아쉬워?”
“……가셔야죠.”
“응. 다음에 또 봐.”
천화가 잠깐 유협을 눈에 담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뗐다.
난난이 대놓고 짜증은 부리지 못하고 한숨만 푹 쉬었다. 유협은 이를 양껏 무시하며 자신의 처소로 가기 위해 일어났다. 마루로 나왔더니 형원이 아직 마당에서 천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도록 천화를 따라다니며 내조하는 형원에게 이미 유협은 정을 준 후였다. 마치 한씨 형제를 좋아하게 된 것과 같았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도 처소에서 할 일 없이 굴러다니기만 할 터라 유협은 기분 좋게 형원을 불렀다.
“책사님.”
“아, 유협 님.”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유협이 형원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진중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천화도 든든할 터였다.
“오늘은 빨리 끝나셨군요.”
“아, 네.”
천강의 이름을 꺼내기도 싫은 유협은 다소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형원도 왜 만남이 일찍 마무리됐는지 아는 터라 별달리 더 말을 붙이진 않았다. 괜히 형원에게 말을 걸고 싶어 근질거리던 차, 유협은 정말로 걱정거리를 찾아냈다.
“책사님. 저하는 매번 선물을 가지고 집을 방문하실 정도로 상냥하신데, 이러다 부귀를 다 낭비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괜찮은 거 맞나요?’ 하고 유협이 묻자, 형원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족히 30초는 아무 말도 없이 응시해서 겁을 먹을 지경이었다. 질문을 잘못한 건가…….
형원이 고개를 돌린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요?”
말을 이렇게 길게 빼는데 어찌 믿으랴.
그러나 형원은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말해 주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는 정자로 가서 주인님을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유협 님은 무언가 생각나시거나 필요하실 경우 망설이지 말고 저를 불러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형원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 과도한 인사를 처음 받았을 때 유협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은 위대한 전쟁 영웅이었고, 유협은 한갓 남첩에 불과했다. 그것도 아직까지도 잠자리를 거부해서 그 처지가 시종보다도 못하였다. 유협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지만 형원은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의 은인이신데 어찌 저보다 낮기를 자처하십니까.’
‘그 일은 몇 년 전 일입니다.’
‘주인님께는 오늘 일어난 일과 같습니다.’
형원이 그 말을 할 때 묘한 분위기가 감돌긴 했다. 유협은 그게 부담스러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자 형원은 좋을 대로 유협을 굉장히 높은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말을 섞으며 그만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유협은 모른 척했다. 대신 본인도 형원에게 똑같이 예의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유협은 형원과 인사하고 마루를 빙 돌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직도 날이 쨍하니 할 일이 없었다.
간혹 천강이 이렇게 천화를 거둬 갈 때마다 유협은 천강이 몹시 싫고 짜증이 났다. 여기서 더 싫어질 수 있을까? 싶었는데, 과연 천강의 재주는 무한했다. 벚꽃이 흐드러져 있는 모습을 봐도 한숨만 나왔다.
만약 술 마실 친구를 찾고 싶으면 자기의 난장꾼 친구들을 데려오거나 할 것이지, 꼭 천화와 함께 있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줄이게 만들었다.
‘누가 보면 나 말고 천화랑 혼인한 줄 알겠네.’
물론 그런 일이 생겼다면 유협이 그날이야말로 천강을 죽이고 말겠지만, 어쨌든 천강의 호의가 지금 전부 다 천화에게 간 것은 사실이었다. 천강은 요새 천화가 가져오는 이국적인 술에 특히 흠뻑 빠져 지냈다.
천화는 매번 다른 술을 챙겨 왔고, 그 중에 천강이 잘 마시는 술은 따로 기억을 해 뒀다가 다시 챙겨 오는 등의 성의를 보였다. 거기다 심심하면 귀중한 물건들까지 얹어서 주니, 미치지 않고서야 천화를 싫어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유협은 그 술이나 금은보화들이 정말 아까웠다. 할 수만 있다면 천강이 당장 죽어서 그 물건들이 주인을 찾아갔으면 했다. 아들이 아직 없는 천강이 죽으면 그 재산은 친척들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저쯤 해도 생귀신이 안 따라붙는단 말인가.’
본적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가장 악한 귀신이 바로 생귀신이었다. 악랄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에게 붙는다는데 천강을 잡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유협은 한숨을 푹푹 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천화가 오면서 유협의 처소에도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달랑 화병과 그림 하나만 걸려 있는 방에 천화가 물건을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천강이 꾸려 준 방에는 침대와 천개, 심지어 화장대까지 있는 데도 유협이 원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저번에 천화가 선물로 책장과 책을 주었다. 유협이 아직도 남족어를 잘 쓰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그러더니 다음번에는 사내용 부채를 선물했다. 곧 날이 무더워질 것 같으니 유협이 생각나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유협은 그 순간 떠올릴 때마다 천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채 나뭇잎이 영글어지지도 않은 나무 밑에서 그림같이 서 있던 천화, 선물을 건네는 게 약간은 부끄러운지 홍조를 띤 얼굴, 눈을 마주칠까 유협을 살짝 빗겨 보던 시선, 아무것도 아닌 척 말을 하지만 긴장한 모습.
그 얼굴을 떠올리면 유협도 가슴이 뛰었다. 마치 자신은 영영 보지 못할 10대 천화를 훔쳐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순수함을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천화에게 유협은 잘 쓰겠다며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부채를 받아 갔다.
천화는 손에서 빠져나가는 부채를 보며 아쉽기도 하고, 속 시원하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솔직한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천화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유협은 그저 부채를 소중하게 껴안는 걸로 자신의 의사를 표했다.
그때 천화의 표정이 얼마나 밝아지던지. 유협의 표정 하나하나에 희비를 보여 주던 어릴 때로 돌아간 거 같았다.
과거를 추억하며 유협은 느긋하게 천화가 준 책 중 하나를 뽑아 들었다.
남족의 전래 동화였는데 그들의 생활관이나 상식을 알려 주는 책이라 제법 재밌었다. 중간에 읽었던 부분을 찾아 읽는데 무도한 이야기에 절로 혀가 차졌다.
도대체 왜 선녀의 옷을 감춘단 말인가. 이거 완전 쓰레기 아냐?
비범한 서사에 홀려 한참을 독서하다 보니 어느새 밥상이 들어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단 말인가. 유협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르는 사이에 벌써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유협은 한숨을 쉬며 눈을 비볐다. 어쩐지 눈이 뻑뻑하다 했다.
‘천화가 갈 시간이군.’
보통 천화는 날이 저물면 저택을 떠났다. 그쯤 되면 천강도 천화를 순순히 보내 줬다.
책을 덮어 둔 유협은 마중을 위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향했다. 그러다 우뚝 발걸음이 멈췄다. 당연히 천화와 형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리에 꼴 보기도 싫은 인간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니 올터냐?”
“어찌 형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거절하겠습니까. 다만 그때는 일이 있어 저녁 시간에 꼭 참여하겠습니다.”
“저녁이면 언제? 너무 늦으면 안 된다.”
“네. 연회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오겠습니다.”
천강의 목소리도 듣기 싫고, 여기 왔다는 것도 들키기 싫어서 유협은 조심조심 뒷걸음질 쳤다. 뜻밖에 천강을 마주친 바람에 신난 기분이 다 박살이 났다. 그놈의 남편, 아까 읽었던 전래동화처럼 사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중을 포기하고 조심히 돌아서 방으로 가려는 순간 천강이 다소 부드럽게 그를 불러 세웠다.
“유협아.”
“……네.”
이렇게 친근하게 부른 건 몇 년 만이었다. 유협은 그 정도로 천강이 기분 좋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천화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천강이 저렇게 잘 처먹은 돼지처럼 고롱고롱거리고 있을까.
“보름이 뜨기 전에 연회를 하려 한다. 그런데 네 환자가 낮에는 안 된다고 하는구나. 너도 천화에게 일찍 와 달라고 청해 보거라.”
천강이 시키지만 않았다면 유협이 알아서 조를 일이었다. 그러나 천강이 나서자 기분이 더러웠다.
유협은 아랫입술을 짓씹고 천천히 말을 탄 천화에게 다가갔다. 말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화를 보자, 갑자기 ‘일찍 집에 가시고 몸조심하세요.’라고 괜한 충고 후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천화가 있는 데서 천강을 망신 줬다가는, 어쩌면 그 화가 천화에게까지 번질 수 있었다.
달빛이 구름에 은은하게 가려 천화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유협은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천화를 불렀다.
“황자님.”
“말씀하십시오.”
“……연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바쁜 이유가 있으신 거죠?”
만약 천화가 그 사정을 이야기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천강을 포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 천화가 고개를 저었다.
“형수님이 그렇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는 걸 무시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닙니다.”
토끼처럼.
뒷말은 유협만 들을 수 있게 천화가 속삭였다. 순식간에 놀림당한 유협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슬쩍 천강의 눈치를 살폈다. 천강은 썩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천화가 온다는 말에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천화가 다시 몸을 일으키고 천강에게 물었다.
“술은 어느 정도 챙겨 가면 좋을까요?”
“외국의 술을 여러 병 챙겨 오너라. 나머지는 내가 준비하마.”
“감사합니다.”
“다들 네 술을 맛보고 싶어서 난리가 났다.”
“기대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가기 전 천화는 한 번 더 유협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천강과 유협에게 동시에 인사를 남긴 후 말을 타고 사라졌다.
남은 천강과 유협은 서로를 힐끗 보다가 오늘은 싸울 때가 아님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돌아섰다.
✾✾✾
물론 다음 만남 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협은 치료하는 척 천화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그래서 그 연회가 뭡니까?”
“형님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 연회야. 정자에서 다들 술을 마시고 즐기는 거지.”
유협은 잠시 말을 잃었다. 천강의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누구를 망신 주냐는 그때그때마다 달랐지만 연회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선 옷을 거의 헐벗은 유희들이 나온다. 그리고 한 사람도 걸어 나가지 못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런 난잡한 속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유협이 답답함을 참고 천화를 쳐다봤다. 그는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천강의 연회가 어떤지 아십니까?”
“어떤데?”
“천강의 연회는 지독해서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모욕 주는 일이 많습니다. 조심해야 해요.”
“응. 고마워.”
말로만 고맙다고 하면서 천화가 양손을 꽉 잡았다. 집중해서 듣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여튼 애들은 이래서……. 남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천화 때문에 속을 치며 유협이 덩달아 천화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이에요, 저하.”
“그래. 고마워. 그러니 그대도 그때 특별히 조심하도록 해.”
“저는 제 방에 처박혀만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세요.”
“가끔 사람은 정말 악독해질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천화의 말에 놀라 유협은 주춤했다. 천화는 천강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고, 천강의 성격이 어떻든 동생의 의무를 충실하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천화 입에서 천강이 악독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저 놀라웠다.
가만히 유협의 얼굴을 바라보다 천화가 입을 열었다.
“백 공자.”
“네에.”
오랜만의 호칭에 가슴 속이 간질간질했다. 천화 역시 이름을 부르더니 생긋 따라 웃었다.
“이렇게 부르면 옛날 생각이 나.”
“그러게요. 실은 그렇게 부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있잖아, 하나 물어봐도 될까?”
“그럼요.”
“그날에 혼인했어야 하는 상대가 나였어도 했을 거야?”
웃으며 대답하려던 유협이 굳었다. 너무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요즘 애들, 아니 천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옆에 있던 난난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천화는 그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했을 거야?”
“……그때 저하는 울기만 하는 애였어요.”
“그건 좀 섭섭한데? 우리 친구였잖아.”
“그건 맞아요. 맞는데 누가 친구 인생을 나락으로 빠트리고 싶어 하겠어요?”
“나와 혼약하는 게 나락이야?”
“혼약을 하는 게 나락이라는 거죠.”
“그럼 형님이 아니라 나였어도 할 거야?”
어떻게 넘겨 보려 했던 질문이 다시 돌직구로 들어왔다. 난난의 눈은 이보다 커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때 혼약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땠더라. 분명 천화와 혼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큰 천화와 말고, 작았던 과거 시절의 천화와 하고 싶었다. 일종의 현실 도피였다.
게다가 천화와 사랑을 바탕으로 혼인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몇 년을 그저 천화를 돌봐 주는 데 쓰고, 천화가 다 컸을 때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짝을 맺어 줄 마음이었다. 그 뒤에는 천화의 허락을 받아 묘족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루지도 못한 꿈을 생각하니 입이 썼다. 유협이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흠. 나는 가끔 그대의 삶이 불행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천화가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제 형의 집에 와서 형수의 삶이 불행해 보여서 다행이란다. 얼마든지 왜곡의 여지가 있는 말을 듣고 유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하세요.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나와도 혼인해 줄지 궁금했어.”
“……선택권이 있었다면 누구와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 나와도 했겠군.”
천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결국 그 말이 유협을 자극하고 말았다. 천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위험한 화제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유협을 심하게 자극했다.
“가끔은 저하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
천화가 고개를 들어서 유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협은 움찔하며 아몬드 색 눈을 마주 보았다. 어렸을 때 많은 감정으로 반짝반짝 빛났던 눈이 텅 비어 보였다. 눈동자의 경계가 선명하기 때문에 아무런 감정을 못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순간 유협은 몹시 우울해졌다. 아까까지 천화는 분명 사랑스러운 청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걸 망친 사람처럼 보였다. 혹시 천화가 변방을 돌면서 고생하다 보니 어떤 때는 이런 눈을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유협은 숨을 들이쉬었다.
먼저 진정한 유협이 천화의 손목을 잡았다. 천화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유협을 다시 쳐다봤다.
“저하, 괜히 얘기가 꼬인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저하가 저밖에 없었듯이, 저 역시 어린 시절에 저하의 기억이 가장 생생합니다. 인륜을 거스르지만 않는 일이었다면 저 역시 저하와 혼인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천화가 눈을 깜빡깜빡했다.
마치 어렸을 때 같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천화는 많은 게 부족했던 게 아닐까? 남의 품에서 온기를 느껴 본 것도 유협을 빼면 없었고, 누군가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준 것도 유협과 있었던 어렸을 때였다. 전쟁터면 말해 뭐하겠는가.
유협은 진심으로 천화가 안타까워졌다. 난난이 보고 있든 말든 유협은 손을 뻗어서 천화의 팔꿈치를 다정하게 잡았다.
“그러나 그러기엔 세월이 조금 부족했지요. 저는 우연히 이렇게라도 만난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나도 감사해.”
“저하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다시 청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제게는 신의 안배입니다. 그 거친 곳에서 어떻게 버티셨어요.”
“힘든 곳이 맞긴 하지만 그렇게 못 견딜 곳은 또 아니었어.”
천화의 말에 유협은 조금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렸을 때는 사소한 말에도 울음을 터트렸는데, 지금은 가장 거칠다는 전쟁터에서 굴러 놓고 태연하게 말을 한다. 천화가 정말 변하긴 변했구나. 씁쓸하고도 귀여운 감정이 들었다. 결국 그도 사춘기를 거쳐 어른이 됐을 거다.
그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으니 서로 관계에 공백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치 오늘 끝장을 보겠다는 듯이 천화가 다시금 질문했다.
“그럼 지금 소원이 하나 있다면 뭐야?”
“제 소원이요?”
“응.”
“이렇게 갑자기…….?”
“아무런 소원도 없었어?”
“……있긴 합니다.”
“말해 줘.”
유협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넘겼다.
이건 어쩐지 어린애가 묻는 질문 같았다. 그러나 유협의 소원은 이 저택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말에 천화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당황해서 유협도 당황스러웠다. 천화가 정말로 놀라며 말했다.
“정말이군. 형원이 한 말이 맞아.”
“……책사님과 제 얘기를 하십니까??”
유협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형원과 천화는 도대체 등 뒤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반면에 천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도 널 기다리고 있어.”
“아, 사라.”
유협이 자리를 그냥 뜨려고 하자 자결까지 하려고 했던 시종이 떠올랐다. 설마 했는데 아직까지 자신의 수발을 든답시고 시종을 낭비하고 있을 줄 몰랐다.
“한태, 한석도 알고 있다.”
태연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쏟아 내는 걸 유협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대관절 무슨 이유가 있다고 자신이 입담 거리가 되었느냔 말이다. 유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은 이를 갈며 살고 있지만, 어쨌든 본심으로는 사람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는 사람들의 심리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러다간 천화가 이끄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할 판이었다.
“아니…… 대체 왜요?”
경악한 유협이 따져 묻자 천화가 으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협이 눈을 무섭게 빛내자 결국 난색을 표하며 진실을 토했다.
“곧 그대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해 주고 싶어서, 다 같이 고민을 좀 했어.”
“아니? 네?”
무슨 짓을 하려고 이렇게 괴상한 질문들을 한 것인가. 게다가 일개 사람 하나가 좋아하는 걸 알고 싶다고 충복들에게 다 물어보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너무 과하지 않냐고…….
순간 머리가 아파서 유협이 앓는 소리를 냈다. 천화는 눈치를 보다가 털어놓았다.
“형원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할 거랬는데, 정말이더군.”
“잠깐만요. 저하. 그럼 저하는 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발랄한 청소년기에 거의 잡히듯이 억지로 머물게 된 사람의 소원이 뭐겠는가.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 아닐까? 고향으로 돌아가서 쌍둥이 누이를 만나고, 말을 타는 일이 유협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이었다.
유협의 질문에 천화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나는 네가 다정하다는 걸 잊고 있었어.”
“네?”
“말하지 않을래.”
“좋아요. 그럼 저하도 전쟁터에서 빈 소원을 알려 주세요. 공평하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협은 천화가 화가 난 건 아닌지 문득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천화와 눈이 마주쳤을 때 전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천화의 눈은 또다시 웃음을 담뿍 담아 휘어져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을까,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미소였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소원을 이뤄서.”
“소원이 무엇이었는데요?”
“살아서 너를 다시 보는 거.”
유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유협에게 천화는 손을 뻗어 뺨을 만졌다. 곤란했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아서 너무 곤란했다. 유협은 문득 자기가 이 황자님을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대도 고생이 많았어. 살아 있어 줘서 기뻐.”
살면서 누가 이런 말을 순수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유협에게 부딪혀 온 말은 진심 그 자체였다. 눈물이 조금 고일 지경이라 유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귀가 끝까지 붉어진 느낌이었다. 천화가 부드럽게 뼈가 잘 드러난 손을 쓰다듬었다.
“다음에도 선물을 가져올게.”
“……굳이 안 주셔도 돼요.”
여기에 천화가 규칙적으로 와 주기만 한다면 유협은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었다. 천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받고 나서 말해.”
“네…….”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유협이 대답했다.
뒤늦게야 난난이 생각났지만 이미 다 저지른 후였다. 난난이 그 깐깐한 얼굴과 특유의 뻣뻣한 자태로 천강에게 다 일러 버리겠지. 천화는 지금 천강에게 예쁨 받고 있으니, 주로 유협이 천화를 꼬셨다는 쪽으로 말을 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막 봉오리 터지듯 감정을 자각한 유협에게는 두려울 게 없었다. 머리 한쪽에서는 천강이 천화와 놀이를 중요하게 여겨 자신 따윈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마음마저 들었다.
약간 머리가 어질어질한 기분으로 천화와 대화를 마치자 그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형원이 멀리서 보조할 뿐 천강이나 다른 노비가 없었다.
천화가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알겠어요. 저하, 다만 다치는 일을 하시면 안 돼요.”
“너도. 너는 반드시 조심해야 해.”
천화가 차가운 손으로 유협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쓰다듬었다.
“그 시종이 문제가 될까?”
“난난이요? 괜찮을 겁니다.”
천화가 이토록 예쁨을 받고 있는데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
유협은 원래 귀족처럼 행동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귀한 집안에서는 나름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침실 시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귀족들은 옷을 겹겹이 입기 때문에 이를 풀어 줄 노비가 필요했고, 머리 역시 장식이 많아 일일이 빼내는 것도 일이었다.
유협은 애초에 자신의 몸을 남에게 맡기지도 않았고, 머리를 묶지도 않으니 거의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보통 침실 시중은 남편과 동침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여인은 온 방에 향을 뿌리고, 아예 얇은 침의를 입은 채로 기다리기까지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유협에게 잠은 휴식 그 자체만을 의미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혀 주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처음에 천강은 유협과 동침하려고 시도만 수십 번을 했지만, 들친 이불에서 귀신만 자꾸 튀어나온 후 그만뒀다. 그보다 더 해괴한 일이 수천 번 일어나고, 더 일어나자 유협과 천강의 사이는 아예 돌이킬 수 없게 일그러졌다.
천강도 그제야 유협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전에 역겹게 여겼다. 유협은 진작 천강을 벌레만도 못한 자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문을 열었을 때 침대에 앉아 있는 천강을 보고 유협은 당황했다. 그는 갈색 겉옷에 침의를 입고 머리는 아직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유달리 밝은 달 때문에 천강의 표정이 그림자 져서 보였다.
순간 유협의 심장이 덜컥했다. 즐거웠던 기분이 방의 어둠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분명 본인의 방인데 들어올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천강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지체할 것 없이 저벅저벅 다가와 유협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방 안으로 끌어당기며 문을 닫아 버렸다. 유협 얇은 천 옷이 천강의 손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협은 힘을 줘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대로 방 한가운데로 질질 끌려갔다. 애초에 힘으로는 천강을 이길 수 없었다. 어찌나 살벌하게 끌고 가는지 화분 하나를 쳐서 쓰러트렸음에도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천강이 향하는 곳은 침대였다. 아무리 팔을 비틀어 보아도 천강은 성인 남성의 힘을 거뜬하게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천강은 유협을 침대로 밀어 쓰러트렸다. 저절로 욕설이 튀어 나갔다. 벌떡 일어나는 순간 천강이 목을 잡아 눌렀다.
유협은 그 손을 뿌리치려 천강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이를 악물고 노려보아도 그가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핏줄이 돋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천강이 서서히 유협의 목을 졸랐다.
“허억. 컥…….”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번쩍거리는 느낌이 났다. 유협의 두 손이 저절로 천강의 단단한 왼손에 매달렸다. 소매가 떨어지며 하얀 손이 유려한 선을 그려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뿌리치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천강의 손을 떼어 낼 방법이 없었다.
점점 숨이 차올라 미칠 것 같았다. 숨을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협은 천강의 왼손을 손톱으로 긁다가 마침내 반쯤 실신하고 말았다. 손으로 힉 소리가 날 정도로 목을 조른 후 천강이 손을 풀었다.
갑자기 터진 숨에 콜록거리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막혔던 기도가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천강이 뺨을 갈겼다. 순간 귀에서 삐 소리가 들렸다. 채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오른쪽 뺨도 인정사정없이 후려쳐졌다.
유협이 고통스러워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천강이 그를 비웃었다.
“괴로우냐?”
엿 먹으라는 말 한마디도 못 하겠다.
유협이 고통에 저절로 몸을 구부리자 천강이 돌연 불타는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황족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려고 해?”
분노로 질식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여태까지 천강이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경우는 없었다.
유협이 가까스로 콜록거리자 천강이 다시 한번 뺨을 갈겼다.
“네가 천화에게 집적거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디 몸가짐을 그 따위로 하지?”
아…… 일이 그렇게 된 거구나.
그러나 납득과 별개로 유협은 조금 억울한 심정이 됐다. 언제부터 둘이서 그렇게 알콩달콩한 부부였다고 사람을 이렇게 패나.
난난이 일러바친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야기 속에서 유협은 요부나 다름없었을 터다. 최대한 천화의 잘못을 가려서 말했을 테니까. 어차피 난난은 유협을 싫어하기도 했다. 다른 모든 노비처럼.
그런데 난난과 유협에게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최대한 천화의 잘못을 덮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천강마저도 차라리 잘못을 유협에게 몰아주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맞고 끝낸다.’
차라리 천화한테 지랄을 하지 않고, 나한테 이 지랄을 하는 게 다행이었다.
천강은 유협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다만 죽이지는 못했다. 지금은 천강의 손에 있지만 유협은 황제의 물건이었다.
황제는 신년이 될 때마다 유협을 불러 궁궐을 축복을 했고, 궁에 기이한 일이 생기면 여전히 유협을 불러왔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천강 손에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치만 천화는 다르니까.’
천화가 얽혀 들어가면 갑자기 사건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유협의 눈 색이 탁해지자 천강이 툭툭 뺨을 두드렸다.
“정신 차리지 그래?”
뺨 안쪽이 터져서 비린 맛이 났다. 유협은 바닥에 피를 뱉어 낸 뒤 입술을 소매로 닦아 피를 막았다. 가슴이 아직도 벌컥벌컥 뛰었으나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잃은 적 없습니다.”
“뻔뻔한 놈.”
천강이 사납게 노려봤다.
유협은 움찔 몸을 떨면서도 기가 막혔다. 자신이 이 집을 떠나고 싶다는 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었나? 아니면 천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그렇다면 천강이 미친놈이었다. 유협은 이 사실을 단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으니까.
지금 이렇게 때리고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이유는 딱 하나, 천화 때문인 듯싶었다. 그래서 유협은 숨을 간신히 몰아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편이 이로웠다.
“정말 네 잘못을 모르는군?”
천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유협도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이 일이 큰 파장을 낼 수 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여긴 천강의 집이었다. 유협이 계속해서 첫날밤을 미루자 노비를 보내 팔다리를 결박시켰던 남자의 집이다.
“그렇다면 내가 똑똑히 알려 주마. 아니 애초에 내 죄기도 하다. 너에게 정숙을 가르치지 못한 건 나니까.”
뜨겁고 잔뜩 긴장한 손이 다시 한번 목에 얹혔다. 유협이 공포에 질려 발버둥 쳐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목을 졸랐다. 그러다 유협의 얼굴이 붉어질 쯤에야 힘을 풀었다. 숨이 간신히 들어왔다가 입으로 흘러나왔다.
천강은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대신 증오를 담아 수십 번 이 미친 짓을 반복했다. 마침내 유협의 눈이 풀리고, 흐려지고, 탁해졌을 때쯤 천강이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반쯤 의식을 잃은 유협의 머리 뒤에 끼워 넣었다. 자세가 조금 안정적으로 변하자 천강은 망설이다가 유협의 허리춤을 풀었다.
천강은 유협을 아마 장안에서 제일 싫어할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옷을 걷었을 때 드러나는 살결에 그만 반응하고 말았다. 상의를 헤치자 하얀 피부에 부드럽게 마른 쇄골이 나타났다. 이를 박고 모양을 새기면 듣기 좋은 신음을 뱉을 터다.
갑자기 불이 타오른 천강은 마른 침을 삼키며 이번엔 허벅지를 짚어 유협의 다리를 벌렸다. 활짝 벌린 허벅지를 짚자 유협이 낮게 끙끙거렸다. 천강은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하의로 손을 넣었다.
처음 손에 닿은 건 뜨거운 살덩이었다. 무려 혼약한 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만져 보는 신부의 살결이었다. 천강은 하의를 좀 더 끌어내려 몸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차라리 창부로 내다 팔았으면 떼돈이라도 벌었을 거라 한탄했다.
살짝 내려서 본 허벅지는 하얀색이었다. 그리고 촉감도 아주 부들부들했다. 처음 보는 성기 역시 연한 색으로 꼿꼿하게 설 때 길이가 딱 좋을 것 같았다. 천강은 반쯤 눈을 감고 있는 유협 옆에 팔을 기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유협의 아래를 훑었다. 손등에 핏줄이 돋은 단단한 손등이 땀이 고인 부드러운 아래를 자극했다. 긴 손가락으로 기둥을 타고 올랐다. 그러다 아예 귀두를 감싸고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쯤 기절한 유협이 반응했다.
“흣…….”
유협이 무의식적으로 자극을 주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천강이 유협을 껴안고 있는 자세가 되었다. 천강은 바지를 내려 유협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어깨를 뺨에 비볐다. 이렇게 훌륭한 자극제가 있었는데 여태 따먹지 못했다는 게 참 웃겼다.
성기가 점점 미끈해졌다. 천강이 손에 힘을 주자 유협의 신음이 더 얕아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유협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천강의 손은 여전히 유협의 성기에 있었고, 상의와 하의는 거의 벗겨진 상태였다.
순간 상황을 파악한 유협이 온 힘을 다해 천강을 침대 아래로 떠밀었다. 천강이 욕설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게, 이게 대체…….”
유협이 수치심에 몸을 떨며 말했다. 낮까지만 해도 천화에게 사랑받는다는 소중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 모든 것에서 내쳐진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바로 잡자, 천강이 오히려 비꽜다.
“이미 볼 장은 다 봤는데 처녀처럼 굴기는.”
그 말에 유협이 입술을 꾹 깨물고 천강을 노려보았다.
지금 천강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협에게 교육을 시킬 생각으로 온 것인데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욱 꼴렸다. 천강은 망설임 없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아니,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유협이 침대 위에서 천강의 어깨를 발로 내리눌렀다. 처음에는 그 무게에 멈칫했지만, 곧 천강은 되레 발목을 잡고 유협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갑작스러운 반격 때문에 침대 뒤로 넘어가게 된 유협이 기겁하며 천강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유협이 먼저 으르렁거렸다.
“정말로 다치고 싶지 않으시면 놓으십시오.”
“참으로 무섭구나.”
유협이 입술을 깨물었다. 천강에게 얻어맞은 몸이 욱신거리고 졸린 목이 아팠다. 하지만 더 두려운 건 파헤쳐져 있는 옷자락과 천강의 번들거리는 눈빛이었다. 만약 천강이 이 이상으로 몸을 붙여 오면 유협도 무리수를 써서라도 그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천화에게 끼칠 영향이 걱정됐다. 그 생각에 마음이 약해진 유협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천강이 갑작스럽게 웃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뭐?”
“네가 그토록 나와 하는 잠자리를 싫어하니,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좋겠지.”
그렇게 말하고 천강이 머리채를 잡고 사납게 입을 맞춰 왔다. 일부러 찢어진 입 안쪽과 입술을 핥자 소름 돋게 아팠다. 천강은 기어코 유협의 입에서 신음소리를 끌어낸 후 지그시 웃었다. 그리고 노비들을 불렀다.
✾✾✾
형원은 요새 목숨을 건사하느라 너무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자, 황자의 신분을 단 애송이 때문이었다.
그 애송이를 주인으로 섬기는 시련에 요새는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평소라면 속이 편하게 있을 한태와 한석마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슬쩍 찔러 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긴. 좆같이 돌아가고 있지.’
원래라면 이틀에 한 번씩 천화를 만나기로 했던 유협이 약속을 두 번이나 파기했다. 심지어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오지를 않았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천화는 처음 유협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직접 천강을 찾아갔다. 높은 단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천강은 태연하게 그를 반겼다.
“천화 아니냐?”
“형님.”
천화가 정중하게 포권하며 인사를 올렸다. 뭇사람이 본다면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검은색 천에 은색 실을 걸어 만든 옷은 묵직했고, 그걸 입은 천화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형원은 천화가 포권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못 볼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옆에 있던 허수아비가 갑자기 일어나서 큰절을 올린다면 사람들이 느낄 법한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아,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
천화는 고개를 저었다.
“치료를 위해 왔는데 형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순간 천강이 눈매를 올리며 웃었다. 천씨의 피가 어디로 가진 않아서 준수한 미남자인 그가 웃자 주변이 다 환해 보였다. 그러나 형원은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형원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또라이를 잘 구별했기 때문이다.
비록 전쟁이 다 끝나고 보니 천화의 편에 서 있었다는 아주 큰 실수를 하긴 했지만…….
“아 내가 말을 못 해 미안하구나. 네 형수가 바쁜 모양이다.”
“……몰랐습니다.”
“전달을 진작 할 걸 그랬지? 어쩔 테냐. 온 김에 술이나 한잔할까?”
“네. 형원아.”
천화가 힐끗 형원을 쳐다봤다.
형원은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에 묶어 두었던 호리병을 꺼냈다. 적정량을 가져가니 천화가 그 정도면 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리병을 들고 천화가 천강이 기대 있는 단으로 올라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황제에게 걸어가는 젊은 장군 같구나.
실상은 황제는 개뿔, 돈과 색에 미친 잡놈과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개새끼인데도…….
당연히 천화는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늘 그렇듯 형원의 추측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자부할 수 있는 게 천화는 유협이 관련되면 일반 사람처럼 행동하고 움직였다. 그러니 아마도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고 추측이 가능했다.
말을 타고 한 손을 허리에 짚은 채로 무언가를 고민하던 천화가 불쑥 물었다.
“난난을 죽였어야 했을까?”
‘아니요. 이 살인귀야. 사람을 죽이는 걸로 일을 해결하지 말라고.’
하지만 목숨이라는 게 뭔지, 형원은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투명한 갈색 눈으로 보던 천화가 느릿느릿 말했다.
“나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제가, 무슨 말이라도……?”
“난난은 죽일 거야. 그렇게 알아 둬.”
“……네.”
천화는 늘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게 신분이 높든, 낮든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만약 형원이 황제였다면 천화 같은 야생 동물은 절대로 청원으로 불러들이지 않았으리라. 봐라, 오자마자 제 형을 잡아먹으려고 수풀에 엎드리고 있는 꼬락서니를.
그날 하루 천화는 내내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형원이 주변 사람들에게 조심하라 말하자, 누구도 천화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인은 양심이 없고 체면도 없었다. 어떤 짐승이 사냥하는 데 양심과 체면을 차리겠는가. 천화가 괜히 전쟁터의 빛이 된 게 아니었다. 천화는 원한을 잘 가지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감정적으로 전략을 짜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놈의! 유협이!
정말 유협을 처음 봤을 때 형원은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섬세한 얼굴이나 미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잠들어 있는 유협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바라보는 천화의 눈빛이…….
‘주인님이 계속 말하던 유협이라는 자가 저자구나.’
천화의 모습에 심란해진 형원은 옆에 서 있던 사라에게 말을 걸었다. 사라는 천화와 유협을 계속 반복해서 보며 약간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제가 한 식경이 넘도록 보았는데 손을 계속 잡고 계셨어요.’
‘아, 책사님 오셨습니까.’
이미 질린 듯이 한석과 한태가 말했다.
그들이 직접 유협을 데려왔다고 했다. 기절한 채 업혀 들어오는 유협을 보는 천화의 눈동자가 떨렸다나 뭐라나. 처음에 한씨 형제 말이 진짜면 성을 갈겠다고 한 덕분에, 요새는 친척에게 양자 입적이라도 부탁해야 하나 고민했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유협을 천강에게 돌려보낸 후에 천화는 당장 형원과 나머지 부하들을 불러 말했다.
‘천강을 죽일 거다. 나와 함께 죽기 싫다면 좋은 방법을 찾아내도록.’
모두가 아닌 척 형원을 보았다.
책사라는 직책 상, 주인이 너무 심하게 가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천화까지 형원을 바라보자,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나섰다.
‘죽이는 게 아니라 간단한 교환이 어떻습니까. 황금 무더기를 주면 바꾼다고 하고도 남습니다.’
‘그렇게 쉽게 내놓진 않을 거다. 그러니 죽일 거야.’
간단한 말에 형원은 그냥 네 마음대로 쳐 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청원의 세도가인 천강을 죽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천화의 성격대로 한다면 대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 천강의 목을 딸 가능성도 있었다.
‘저하. 반드시 죽이셔야 하는 이유가 있으신지,’
‘있다. 유협은 내 친구거든.’
형원은 육성으로 미친, 이라고 말하려다 가까스로 스스로를 다잡았다. 경악에 떨리는 눈빛들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사정이 비슷한가 보다. 아마 ‘너한테 친구가 있냐?’라고 묻고 싶은 거겠지. 아니면 ‘너만 친구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라든가.
하지만 그 청년 역시 천화를 볼 때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고, 천화는 유협이 있을 때 무려 옷을 맞춰 오거나 방긋방긋 웃거나 무난하게 말을 걸었다.
저게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었구나. 마치 들개에게 키워진 사람이 갑자기 허리띠에 옥까지 매고, 부채 부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형원은 천강을 독살하기로 했다.
일은 쉬웠다. 남 제국에는 없는 아주 독특한 술이 있었다. 이 술의 특징은 마시면 마실수록 음독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특별한 날에만 딱 한 잔씩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발작을 시작으로 죽음으로 가는 모든 증상을 겪게 되었다.
더 좋은 점은 이 술의 독은 아직 나라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들의 목을 치고 전리품으로 빼앗아 온 천화와 몇몇 사람만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만 나쁜 점은 한두 번 마셔서는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독살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형원은 따로 천화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하, 소인이 미련해서 최선의 선택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냥 독을 쓰거나 유협 님이 귀신을 부리는 상황에서 천강이 죽게 된다면, 오히려 유협 님에게 의심이 갈 우려가 있습니다.’
형원은 잔뜩 긴장해서 나머지 말을 뱉었다.
‘때문에 독살이 되기 전까지는 두 분이 떨어져서 지내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저 얼굴을 보는 정도로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대답이 없었다.
슬쩍 눈을 돌려서 바라보니 천화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남의 말을 안 듣는 것 같지만 다 듣고 있을 때 저랬다.
‘알았다.’
그때 천화는 ‘알았다’라고 했지, ‘참겠다’라고 한 적은 없었다.
두 번째로 유협이 약속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 형원은 그 차이를 퍼뜩 떠올렸다.
✾✾✾
오늘도 응접실에 유협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고고한 척 하는 난난이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난난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고하려 할 때 천화가 손을 들어 끊어냈다.
“오늘도 유협이 바쁜 모양이군,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느라 바쁜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나는 절박한 심정인데 자꾸만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기니 별로 좋지 않다.”
“그 또한 죄송합니다.”
“원래 주인의 죄는 노비가 받아야 하는 법이다.”
그 말에 난난이 고개를 팍 쳐들었다. 늙은 시녀의 하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한두 가닥 쏟아졌다. 이를 바라보는 천화의 눈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무릎 꿇어라.”
천화가 늘 차고 다니는 장검을 뽑으며 말했다. 스르릉 소리가 나자 난난이 혼비백산해 주저앉았다. 무릎에 힘이 풀린 것이다.
“무릎 꿇어.”
천화가 가차 없이 발을 들어 난난의 어깨를 흙바닥에 짓눌었다. 천화는 그 자세로도 목을 치기 좋다고 판단했다.
놀라서 눈이 커져 있던 난난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절박한 비명이었는지, 바깥채에 있던 노비들이 거의 다 뛰어든 모양새였다. 그러나 칼을 든 사람이 하필 천화라 모두 말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언제든지 칼날이 떨어질 모양이라 아찔해진 노비 하나가 얼른 고했다.
“그 시녀는 큰 마님의 유모입니다.”
“유협이 뭘 하고 있지?”
천화는 주변의 난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말했다. 한 번 더 어깨를 짓누르자 난난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난난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저는 정말 모릅니다. 모릅니다.”
“네가 모를 리가.”
그 뒤 천화는 칼을 거침없이 내리쳤다. 순간 모두의 비명으로 안채가 가득 찼다. 천화의 칼이 무자비하게 여인의 늙은 살에 꽂혀들었다. 뒤늦게야 자신의 유모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 달려오던 첫째 마님은 잔인한 광경을 목격하고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유모!”
“아. 형수님.”
젊은 여자가 얼굴을 가리고 한없이 경악해 울부짖었다. 보기 괴로운 장면에 노비들이 치를 떠는데, 천화는 반쯤 들어갔던 칼날을 빼고 노인의 어깨를 지탱하던 발을 치웠다. 난난의 몸이 스르륵 무너졌다. 천화는 허공에 피를 털어내 태연하게 칼을 검집에 넣었다.
“형원아.”
“…….”
이럴 때는 천화의 책사인 게 싫었다. 아니 아예 형원이라는 게 싫었다. 그러나 주인을 잘못 선택한 죄로 형원은 재빠르게 주머니를 주인에게 건넸다.
천화가 그 주머니를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자 주변의 사람들이 죄다 물러났다. 신경도 쓰지 않고 첫째 마님에게 다가간 천화는 그 앞에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시녀를 저런 자로 두면, 오히려 형수님의 체면에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천화가 주머니를 슥 첫째 마님에게 밀었다.
“젊고 영리한 아이 두 명은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체면에 맞게 보필하는 자를 갖추셔야죠.”
그렇게 기함하는 첫째 마님 앞에 돈주머니를 놓고, 천화가 검붉은 피를 흘리는 시신을 툭 하고 두드렸다. 그리고 젊고 기가 세 보이는 노비 두 명을 불렀다.
“너, 너. 적당히 옮겨서 치워라.”
그렇게 자신의 집인 양 금수 같은 짓을 저지른 후, 천화는 경악하던 노비 하나에게 손가락질했다. 노비는 그 손짓에 온몸을 떨며 다가왔다. 첫째 부인이 오열하는 가운데 천화는 또렷하게 말을 남겼다.
“내일 연회에서 내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라고 전해라.”
“예, 나리. 예. 분명히 저하겠습니다.”
노비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붉은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천화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안채를 나섰다. 가기 전에 시신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는 첫째 마님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나가 버렸다.
‘이러다 유협 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려고…….’
아니 어쩌면 괴상한 성격을 아예 감출 마음이 없는 건가? 천화를 따라 말을 타면서 형원은 심란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더 지나니 연회날이 되었다.
✾✾✾
천화는 원래 연회 같은 건 지겨워하는 성품이라 천강에게 독을 먹일 저녁에야 참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을 바꾸게 된 그 날만 생각하면 기분이 짜릿했다. 자신을 배웅하며 올려다보는 하얀 얼굴에 큰 눈이 너무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기꺼이 천강에게 어울려 줄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유협이 바람같이 사라진 지금, 천화가 연회에 참여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로 변했다. 만약 오늘도 유협의 소식을 듣지 못한다면, 천강의 집을 불태우고 모두의 피를 봐서라도 유협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런 살벌한 생각을 하면서도 천화는 차분한 무표정이었다. 연회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녹빛이 도는 검은색 옷을 걸칠 때도, 허리띠에 옥으로 된 술을 달고 코가 긴 귀족용 신발을 신을 때도 아무 말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몇 번은 겪어 본 천화의 수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오늘은 한태, 한석이도 따라와라.”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한태와 한석은 천화가 피를 볼 때 자주 데리고 다니는 인원이었다. 결국 형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하, 오늘 특별한 계획이 있으십니까?”
“있다.”
그리고 대화 종결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여느 사족을 붙여 상황을 설명하겠지만, 천화는 그런 인간성이 발달하지 못한 종자였다.
형원은 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천강의 집에 불을 지르고 목격자를 모두 죽일 생각이십니까?”
천화가 힐끗 그를 내려다봤다.
“어.”
“다시, 다시 생각해 보심이 어떨까요.”
“왜?”
“계획에 어긋납니다, 저하.”
형원이 덜덜 떨면서도 꿋꿋하게 말했다.
천화는 다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왜 계획을 어기기로 했는지 꼼꼼히 따져 보기라도 하는 얼굴이었다. 곧 천화가 온화하게 말했다.
“유협이 없잖아.”
오직 한 사람만 바라보고 하는 말인데, 어째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았다. 만약 유협이 닭이었다고 해도 천화는 똑같이 남의 저택을 불태우고, 그 안의 사람을 전부 몰살시킬 인물이었다.
“계획이 곧 끝이 납니다. 저하, 오늘 밤 천강을 치게 된다면 손해 볼 것이 많습니다. 더구나 천강도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하니 곧 유협 님을 만나실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술을 준비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다행이다. 천화가 인간성은 종말했어도 아직까지 머리는 쓸 만했다.
이제 나머지는 천강에게 달렸다. 유협을 보여 주느냐, 아니냐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줄은 모르겠지만.
천화는 한씨 형제와 수하들을 데리고 천강의 집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도 천강의 집이 화려하게 꾸며진 걸 볼 수 있었다.
대문에 옻칠을 다시 했는지 멀리서도 그 큰 문이 햇빛에 빛나 번쩍거리는 게 보였다. 담 역시 새로 닦아 냈는지 새겨진 무늬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저 멀리 변방에 처박혀 있던 놈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웠다. 한태와 한석마저 잠시 기가 밀렸다.
그러나 천화는 태연하게 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문지기가 쑥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마 천화가 단칼에 시녀를 죽인 일이 일파만파 퍼진 모양이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저하.”
육척 장신의 노비가 다리가 풀려 덜덜 떨며 인사했다.
천화는 대꾸도 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고삐를 그에게 쥐여 줬다. 다른 사람들도 차례로 고삐를 넘겼지만 시종은 오히려 천화가 사라져서 기쁜 모양이었다.
마당을 넘어 바깥채로 들어가니 이미 축제 분위기는 달아올라 있었다. 천강은 상을 양 옆으로 여덟 개씩 차려 사람들을 대접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돈이 좀 된다 싶으면 자리에 앉아서 큰 소리로 웃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천화가 미리 천강에게 건네 준 사막주였다. 사막주는 독성이 없는 술이라 괜찮다. 천화와 그 무리가 바깥채에 올라가자 순간 소음이 잦아들었다.
오늘따라 화려하게 차려입은 천화는 그 자체로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장정들을 뒤에 달고 오니, 마치 개선장군 같아서 아예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제일 높은 단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천강도 천화를 발견하고 서서히 웃음을 지웠다.
“왔느냐.”
“예, 형님.”
천화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천강의 낯에 느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시녀를 죽이고 말도 없이 떠나 버린 일로 분명 심사가 상했을 텐데 여유가 있는 얼굴이었다. 천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천강이 고개를 까딱하며 물었다.
“술은 챙겨 왔느냐?”
술만 아니었다면 너와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은근한 암시는, 천화의 두꺼운 면피 앞에서 소용이 없었다.
술을 꺼내 올리기 시작하는 천화의 수족들을 보자 천강이 픽 웃었다. 그 웃음이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하지만 천강은 적당히 웃음을 마무리하고 천화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만 올라와서 놀아라. 충복들은 아래서 마음껏 즐기게 하고. 아무래도 높은 사람이 있으면 거북하기 마련이지.”
“형님의 말씀 들었지? 술은 적당히 하도록 하거라.”
천화가 무뚝뚝하게 당부하자 다들 인사를 올리고 차려진 술자리 하나에 모여 앉았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고기와 품질 좋은 술이 상에 올라왔는데도, 뭔가 불길하고 분위기가 영 좋지 못했다. 아까 천강이 자신들, 아니 정확히 천화를 쳐다보는 태도가 이상했다.
어째 인성이 파탄 난 사람 둘이서 잘도 만난다 했다. 부하들은 잘 넘어가지 않는 고기를 뜯고, 술을 마시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가 무슨 전쟁터도 아니고 어떻게 일반인을 해할 수 있겠는가.
한편 천화와 천강은 사이좋게 서로를 보며 마주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엽색가인 천강의 친구답게 누군가는 천화의 미모에서 고개를 떼지 못하고, 누군가는 천화의 옷을 보며 돈이 꽤나 된다고 생각했다.
천강이 고개를 까딱하며 술잔을 내밀었다.
“형님께 한 잔 따라 보아라.”
“예.”
천화는 불만 없이 천강의 잔을 맑은 술로 가득 채웠다. 순간 대나무 냄새가 퍼지며 모두의 머리를 맑게 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천강이 술을 들이키는 광경을 보았다. 청강은 술을 다 마신 후 입술을 닦아 냈다.
“역시 이 만한 술은 본 적이 없구나. 다들 한 잔씩 하지.”
천강의 친구들이 너도나도 호리병에서 술을 받았다. 한 입씩 마실 때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천화는 그 모습을 구경하며 전혀 다른 술을 넣어 둔 호리병에서 잔을 채웠다.
곧 흥이 올랐는지 천강이 여인들을 들여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단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환호가 울려 퍼졌다. 살결이 다 비치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나타나 정신을 쏙 빼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연거푸 술을 마시며 박수를 치고 여인들에 애교에 녹아내렸다.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던 천강은 힐끗 천화를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천화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다가오려고 하면 먼저 쳐다봐 상대방이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누가 보면 고자인 줄 알겠구나, 동생아. 그러나 천강은 이미 천화가 욕망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힐끗 보니 시간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천강은 손가락을 까딱해서 노비를 불렀다.
“술이 멈추지 않도록 하고 음식도 계속 대접해라.”
그리고 호리병 하나를 끼고, 다른 하나는 천화에게 건네주었다. 별생각 없이 받아 든 천화에게 천강이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별 재미를 못 보고 있는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천화가 간단하게 부정했다.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은 천강이 말했다.
“네 회복이 자꾸 느려진 건 미안했다.”
“시녀를 벌했으니 괜찮습니다.”
“이 녀석아, 그건 말이다.”
천강이 짐짓 화가 났다는 듯이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형님 집에서 노비를 죽이면 어떡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첫째가 징징거려서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사실은 뺨을 치고 입 닥치라고 일갈했지만 천강에게는 그게 달래는 셈이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께도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됐다, 됐어. 너를 가지고는 무슨 농도 던지지 못하겠다. 보는 것과 다르게 이렇게 딱딱해서야, 원.”
천화는 이런 잡소리 말고 궁금한 게 있었다. 아무래도 천강이 답해 줄 거 같아 입을 열었다.
“넷째 마님께서는 바쁜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아, 그럼. 한동안 정말 바빴단다. 그래도 한번 보러 갈 테냐?”
이미 그럴 속셈으로 제 옆에 호리병까지 들고 왔으면서 웃기는 수작이었다.
천화는 대답 없이 몸부터 일으켜 세웠다. 다만 뭘 보여 줄지 걱정됐다. 긴장이 너무 심해서 손이 살짝 떨리는 지경이었다. 저 개새끼가 유협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너무 걱정됐다. 하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해야 했다.
천강은 겉으로 보기에 눈도 깜빡이지 않는 아우의 모습을 보고 혀를 살짝 찬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는 데도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다. 천강과 천화는 그대로 어두운 복도를 따라서 안채로 들어섰다.
안채도 건물만 세 개였다. 천강은 그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곳으로 천화를 인도했다. 풀숲이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멀리서 웃음소리만 잔잔히 들렸다. 이 건물 역시 방 불이 다 꺼져 있었기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천강을 찌르고, 바깥으로 시신을 꺼내 묻어 버리면 딱일 것 같았다.’
동생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천강은 어두운 안채로 들어섰다.
안채의 어떤 방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곡선이 진 구간을 돌자 문이 닫힌 하나의 방이 보였다. 순간 천화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저 문 뒤에는 뭐가 있을까. 만약 천강이 유협의 손이나 발을 잘랐다면? 아니면 말도 안 되지만 이미 죽인 후라면? 긴장으로 땀이 배어 나왔다. 천강이 눈치채지 못하게 칼자루를 잡으며 천화는 속으로 마음을 다졌다.
‘만약 이 개새끼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다면, 이 집에서 살아 나가는 사람은 없다.’
천화의 긴장 어린 눈동자를 보고 천강이 픽 웃었다.
“들어가 보지 않고 뭐하느냐.”
“……실례하겠습니다.”
천화는 떨리는 손으로 미닫이문을 잡았다. 그러나 여는 모습은 거침이 없었다. 천강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반응을 구경했다. 마음을 다잡고 들어갔지만, 막상 방에 들어가자 눈앞의 모습에 손힘이 빠져나갔다.
영혼도 나간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자 뒤에서 천강이 낮게 웃었다.
“뭣 때문에 그렇게 놀랐느냐? 나는 네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
천화는 말없이 천강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천강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직 가져다 팔기에는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말이다. 지금까지 버릇이 없어서 그런데 네가 좀 도와주는 게 어떠냐?”
문간에만 서 있던 천화가 방으로 한 걸음 디뎠다. 그러자 유협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유협은 침대에 팔목이 묶인 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완전히 가려 놓았고, 입 역시 재갈을 물려 턱이 아릴 지경이었다. 다리는 종아리 쪽을 묶어 개각된 상태였다. 천강은 정말로 유협을 암말 취급하기로 했는지 침대 옆에는 채찍까지 있었다.
“네 마음은 내가 진작 알고 있었다. 오늘 만한 기회는 없을 테니 네 마음대로 해라.”
천강이 관대하게 말했다.
천화가 멍하니 가까이 다가가자 유협이 팔을 빼내려 몸부림쳤다.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니 그럴 만했다. 심지어 누군가 이미 앞섶을 다 풀어헤쳐 놓았다. 하얀 피부에 잇자국이 가득했다.
그러나 가장 심한 건 유두였다. 원래라면 산호색으로 천화를 홀리기 충분했을 곳이 피가 비치도록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신음이 나다 못해 아픔에 몸부림을 칠 정도로, 그러나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누군가 가지고 논 흔적이 빼곡했다. 쇄골 쪽에도 잇자국이 가득했다.
천화는 힐끗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줄로 묶였던 자국이 검은 멍이 되어 남아 있었다. 하얗고 깨끗한 살결에는 거미줄 같은 빨간 실선이 가득했다. 누군가 허벅지 역시 물고 빨았는지 잇자국과 입술 자국으로 가득했다.
치마처럼 내려온 겉옷이 허벅지 안쪽을 가리고 있었지만, 천화는 차마 그 아래를 볼 자신이 없었다.
유협은 천화가 가까이 오자 거부감에 숨소리가 빨라졌다. 이미 열이 올라 뺨에는 홍조가 피었고,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개를 가로저어 몇 번이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오히려 하얗고 긴 목이 강조되어 음심만 자극했다.
천화는 유협이 놀라지 않게 한쪽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늘이 지나면 정말 맛도 보는 게 불가능할 테니 네 마음대로 해라.”
천강이 뒤에서 하는 말을 무시하고 천화가 허리춤에 꽂아 놨던 단검을 꺼냈다. 천강이 어깨를 움찔하는데 천화는 그대로 유협의 턱을 옥죄던 재갈을 끊어 냈다. 차가운 물체가 닿아서 긴장하던 유협이 깜짝 놀란 듯 잠시 멈췄다.
천화는 그제야 손을 뻗어 재갈을 잡아 끄집어냈다. 그리고 유협의 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루만 재갈에 묶여 있어도 그 고통이 큰데, 만약 며칠째 이어졌다면 유협이 말을 곧 바로 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천화는 다음으로 물이 든 호리병을 꺼냈다. 거침없이 한 모금을 들이킨 후 유협의 목을 받쳤다.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고, 붉은 입술이 가까워졌다. 여태껏 천화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다. 천화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고개를 꺾으려던 유협이 흘러들어오는 물에 도망을 멈췄다. 물 한 모금이 간절했던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천화의 혀를 타고 핥았다. 애가 닳는지 미약한 신음 소리도 났다. 천화는 유협이 만족할 때까지 입을 맞췄다.
마침내 유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가로저었을 때 천화는 단검으로 팔목의 끈을 잘라 냈다. 갑자기 침대에 머리가 닿자 유협이 움찔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끌어모았다. 마침내 발까지 다 끈이 잘려 나가자 유협이 어깨를 떨며 온몸을 말았다.
“괜찮아.”
천화가 말하자 유협이 몸을 잘게 떨었다.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 같았다. 천화는 마지막으로 안대를 끊어 주고, 자신의 품에 유협을 완전히 끌어안았다. 늘씬한 몸이 따뜻하게 안겨 왔다.
등 뒤를 보면 천강이 서 있을 거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는 걸 원하지 않던 천화는 부러 유협의 고개가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끔 만들었다.
“천…화님?”
마른 목소리로 유협이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게 빌어먹게 마음이 아파서 천화는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유협의 몸을 살펴보니 거친 자국이 남지 않은 곳이 없었다. 팔목과 허벅지는 이미 검게 멍이 들어 있었다. 지금 일어나라고 해도 일어날 수 없을 터다.
가슴이 터지게 아팠다. 화가 너무 나서 머리가 띵하기도 했다. 천화는 묵묵히 자신의 겉옷을 벗어 유협을 감쌌다.
“이게…… 무슨.”
그 와중에도 큰 눈을 깜빡거리고 묻는 것이 애잔했다. 천화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유협을 안아들었다. 특히 머리를 잘 감싸 천강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천강은 따분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실망한 티를 내는 천강을 무시하고 천화는 방을 나왔다. 잠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제일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와 이불이 있었다.
천화는 조심스럽게 유협을 내려놓았다. 최대한 섬세하게 힘을 뺐는데도 유협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쉬이.”
“천화 님이 여길 어떻게…….”
“지금은 신경 쓰지 마.”
유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천화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가 한숨을 쉬고 눈을 가렸다.
“천화 님, 저 옷…이 너무 흉측하니 정리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유협의 옷은 아직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하얀 가슴을 그대로 내놓은 채였다. 순간 천화는 방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에 얼굴이나 붉어지는 잡한으로 찍히고 싶지 않았다.
천화는 최대한 손가락을 떨지 않도록 조심하며 유협의 내의를 잡아 정리해 주었다. 중간중간 참기 힘든지 유협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천화는 눈을 질끈 감고 이겨 냈다. 마침내 옷이 다 정리되자 천화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더 불편한 곳 있어?”
“물을, 조금만 더…….”
너무 피곤한지 유협은 아까의 입맞춤을 떠올리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천화는 달콤한 신음과 자신의 혀를 감싸며 조르던 모습, 입맞춤 후 붉어진 입술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러나 상대는 빈사 상태였다. 천화는 묵묵히 호리병을 풀어 누워 있는 유협에게 조금씩 넘겨주었다.
“언제부터 갇혀 있었어?”
“기억이, 안…… 나요.”
마지막 문장은 잠에 휩쓸려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이걸 두고 나흘이나 기다렸다니 정녕 미친놈이었구나. 한숨을 쉬며 천화가 유협의 머리를 정리했다. 따듯하게 자신의 겉옷까지 걸쳐 놓고 나오자, 천강이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줘도 못 먹는구나.”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본색을 드러낸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천강이 혀를 쯧쯧 찼다.
“저 놈이 다루기 얼마나 힘든지 넌 모르지. 이제 두 번은 이런 기회가 없을 거다.”
“무슨 짓인지 물었는데…….”
반말에 기가 막힌 건 천강이었다. 천화가 괴로워할 거라고 생각했지 성질을 낼 줄은 몰랐다.
“네 것으로 해 준다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하는군.”
“사람이 어찌 물건입니까?”
주변 사람들은 전부 다 허수아비로 생각하는 주제에 천화가 차갑게 대거리했다. 이번엔 천강이 성을 낼 차례였다. 그가 허리춤에 달려 있는 술을 흔들며 비꽜다.
“네 놈들이 접붙는 걸 보면서 한잔하려고 했는데 다 글렀다.”
“그건 아쉽지 않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천화가 담백하게 말하더니 순간 천강의 목을 잡아 벽에 눌렀다. 깜짝 놀란 천강이 뭐하는, 까지 입을 열었을 때 천화가 호리병을 잡아 입에 술을 처넣기 시작했다. 특유의 시원한 대나무향이 복도에 훅 퍼졌다.
강제로 쏟아 붓는 술이 입과 코로 넘어가는 바람에 천강이 콜록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사이 천화는 그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는 바람에 등선할 것처럼 생겼지만, 천화는 발끝까지 무장이었다. 강한 힘을 못 이기고 천강이 무릎을 꿇었다.
천화는 호리병을 던져 버린 다음 자신의 호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천강의 머리채를 붙잡고 목을 뒤로 당겼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천화가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술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네놈이 지금 정녕 돌아서―.”
마침내 천강은 호리병의 내용물을 다 마시게 됐다. 컥컥거리는 천강의 입을 닫아 모두 다 마시게 한 후, 천화는 기진맥진한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냈다. 저 멀리서 연회의 불빛이 보였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천강은 잡힌 멱살을 풀려다가 포기했다. 그러나 입으로는 천화의 어설픈 행동을 나무랐다.
“지금 내 집에서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무사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천화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 침묵에 오히려 불길함을 느낀 천강은 발을 끌며 세차게 저항했다. 그러나 천화는 더 이상 주먹을 쓰지 않았다. 천강의 몸에 멍을 만들면 살인이라고 알려 주는 셈이다. 천화는 그저 상처가 남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썼다.
그렇게 끌고 간 곳이 섬돌이 훤히 보이는 마루였다. 거기서야 천화가 힘을 풀어 줘 천강은 간신히 손을 뿌리치고 제대로 섰다.
“네가 정녕 형제의 우애를 이렇게 망가트리는구나.”
이렇게 된 이상 천강이 천화를 용서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었다. 세도가인 외가를 이용한다면 천화를 다시 변방으로 내치고도 남았다.
천화는 그 말을 듣더니 묘한 표정이 되었다.
“망가트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겁니다.”
똑바로 대꾸하는 말에 천강은 불쑥 열이 올랐다. 여태껏 예뻐해 줬더니, 남첩 하나에 신의를 다 져버려 놓고 뭐라는 건지.
괴상한 말을 지껄인 천화가 다시 힘을 썼다. 이번에는 갑자기 관을 올린 머리를 채로 잡았다. 동생에게 무려 머리채를 연속으로 두 번이나 잡힌 천강은 드디어 참을 수 없어 목소리를 높였다.
“배은망덕한 놈아!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독살은 무슨, 엿 같은 소리를.”
그리고 머리채를 잡은 채로 힘을 줘 정면으로 천강의 머리를 기둥에 박았다.
힘이 너무 세서 뿌리치지도 못했다. 어찌나 아프던지 한순간 천강은 신음만 뱉으며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해도 마음을 섬뜩하게 스친 말은 기억에 남았다.
‘독살?’
그러자 천화가 아낌없이 가져오던 최상급 술들이 떠올랐다. 애초에 황금 무더기를 준 것도 마음을 놓게 할 위한 수작이었구나. 등골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에는 천화와 천강 단 둘뿐이었다. 서서히 천강은 천화가 자신을 진짜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이렇게 수작을 부리면 누구나 네가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 거다.”
“아닙니다. 형님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다 실수로 기둥에 부딪혀 떨어졌고, 섬돌에 머리를 맞아 돌아가실 겁니다.”
기겁한 천강이 안간힘을 다해 천화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든 머리채를 잡은 손을 풀어 보려고 손등을 긁고 발악했다. 그러나 핏줄이 돋은 손은 풀리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천화야!”
천화는 가뿐하게 그 말을 무시했다. 천강은 힘이 세다지만 훈련 한 번 받아 보지 않은 귀족이었고, 천화는 몇 년은 전쟁터에서 구른 무인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방법부터 달랐다. 그래서 천강은 잠시 천화가 자신의 머리채를 놓았을 때 기회를 놓치고 움직이지 못했다.
천강이 놓친 그 짧은 시간에 천화는 천강의 오금을 발로 차서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채를 잡았다가 던져, 천강이 날아가듯 떨어지게 만들었다. 천화의 명중 실력은 좋았으나 안타깝게도 한 번에 죽을 만큼 세게 던지지는 못했다.
한숨을 쉰 천화는 피가 철철나는 머리를 감싸고 충격에 몸을 일으키는 천강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잡았다.
“실…… 싫다. 안 돼.”
천강이 그제야 천화의 팔을 잡고 매달리며 빌었다.
그러나 천화는 망설이지 않고 머리를 잡아 섬돌에 세게 찧었다.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중에는 비명이 아니라 억억거리는 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연달아 퍽퍽 거리는 소리와 앓는 소리가 교차로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천화는 고개를 숙여 천강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광경을 지켜봤다. 위쪽 머리가 깨져서 눈도 뜨지 못하고 절명한 꼴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붉은 겉옷과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이 잘 어울렸다.
머리라도 한 번 밟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술을 많이 마시고 취해서 죽었다는 장면이 연출되지 않았다.
죽은 형을 바라보던 천화는 샛별이 뜨기 전에 연회장으로 향했다. 이제 술에 떡이 된 사람들이 점점 추접스럽게 놀고 있었지만, 천화의 수하들만큼은 눈에 핏줄이 서도록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천화가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어둠 속에서 나오자 그들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천화는 마치 산책이라도 다녀오는 것처럼 간단히 다가왔다. 그가 형원의 등을 툭툭 치더니 말했다.
“천강은 죽었다.”
마치 천강이 자연사했다는 투였다. 하지만 천화가 죽였을 걸 짐작한 형원이 기겁해서 물었다.
“카, 칼로 찌르셨……?”
형원이 제대로 말도 끝내지 못하고 물었다. 천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침 좋은 때가 있어서 이용했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며 연회를 즐겨. 취하기도 하고.”
마침 죽도록 취하고 싶은 참이었다. 그들이 묵묵히 술병을 따서 마실 때 천화는 천강의 시신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 위에 챙겨 온 술 한 병을 뿌렸다.
다음으로는 유협의 방에 들어갔다. 앓으며 잠들어 있는 그는 누가 봐도 학대를 당해 살인을 저지를 수 없는 꼴이었다. 침대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머리를 넘겨주던 천화는 조심스럽게 유협의 몸에도 술을 뿌렸다. 그리고 잠든 뺨에 입을 맞췄다.
“늦어서 미안해.”
속삭이며 천화는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침내 해가 떠오르기 시작해 날이 밝기 전까지.
✾✾✾
뭔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천강이 유독 잔인하게 굴었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서 저항하지 못했…… 아. 천화. 천화에게 위협이 갈까 봐 버텼다.
유협의 눈이 확 뜨였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갈색 물결이 들어간 아름다운 천장이었다. 이런 무늬는 처음 봤다. 어째 요즘 부쩍 기절했다 눈을 뜨면 낯선 곳인 경험이 많은 것 같았다. 혀를 차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향초 냄새가 훅 끼쳤다. 유협은 그제야 누군가가 방에 약향을 피웠다는 걸 알았다.
‘여기는 또 어디지.’
천강에게 고문 아닌 고문 같은 꼴을 당하고 나면 유협은 반드시 복수했다. 천강 역시 자신처럼 죽지 못해 사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힘도 없었다. 설령 천강이 자신을 진짜 기루에 팔았다고 하더라도 아무 복수도 할 수 없을 터다.
게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뭣해서 유협은 일단 상황이나 파악하려 했다. 그렇게 일어나 앉으려 하자 거짓말 하지 않고 팔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윽.”
팔뿐이 아니었다. 허리, 등, 목, 다리 등등 몸에 있는 근육이랑 관절이 다 비명을 지르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목소리를 듣고는 더 놀랐다. 죽은 사람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당황해서 목을 짚었던 유협은 누군가가 목에 붕대를 감아 놨다는 걸 알았다. 깜짝 놀라 손을 뗐는데 손 역시 손목부터 팔뚝까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허벅지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치료해 줬다. 그렇다면…….
‘천강의 집이 아니군.’
천강은 유협을 치료해 줄 인사가 아니었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하기 전에는 마음 편하게 쉬지도 못한다. 천장이나 구조를 봤을 때 고급스러운 집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유협을 치료해 줄 만한 권세가는 청원에 없었다. 분명 집 규모를 보면 부자일 텐데 누구일까.
유협은 이를 악물고 팔꿈치로 침대를 짚어 일어났다. 하얀 천개를 걷자 탁상 위에 물그릇과 수건이 놓여 있었다. 약통이 바로 맞은 편 탁상에 뚜껑이 열린 채로 놓여 있었다.
‘누군가 간호했군.’
어떤 이상한 사람이 청원에서 천강이 싫어하는 사람을 간호하는가?
이 동네 주민은 모두 천강이 유협을 벌레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자 갑자기 연이어서 아주 불쾌한 광경이 떠올랐다. 천강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팔을 묶고……. 순간 머리가 찡하니 아팠다.
유협은 애써 기억을 떨쳐 버린 후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썼다. 막 땅바닥에 발을 붙여도 괜찮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들어왔다.
“주인님!!”
물그릇을 들고 있던 사라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달려왔다.
사라가? 여기에?
어안이 벙벙해진 유협이 눈을 깜빡 거리는 동안 사라는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거의 유협을 껴안을 듯이 주위를 빙빙 돌며 이야기를 쏟아 냈다.
“어젯밤에 열도 심하게 올라서 다들 걱정했는데! 어디 어지러운 곳은 없으신가요? 아니면 춥다거나? 세상에 신도 무심하진 않으시네요.”
사라가 눈물까지 닦아 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가까운 사이인가?
유협이 멍하니 사라 쳐다보자, 그녀가 그제야 자신이 들고 있던 물그릇을 내밀었다.
“미지근한 물이에요. 천천히 마시셔야 해요.”
“여기는 대체…… 어디.”
여기는 어디냐고 한마디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사라가 깜짝 놀란 얼굴로 가까이 와 심각하게 말했다. 기침 한 번 했다고 마치 유협이 죽기라도 한다는 태세였다.
“먼저 물을 드시고, 그 다음에 천천히 말씀하셔야 해요. 목을 여러 번 다치셔서 많이 상했을 거라고 의원이 그랬어요.”
유협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사라가 건네준 물을 천천히 마셨다. 마른 목구멍에 물이 흘러들자 조금 살 것 같았다. 몸에도 활력이 도는 느낌이었다. 유협이 그릇을 돌려주자 사라가 소중히 받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주인님, 여기가 어딘지 하문하셨나요?”
그런 존칭은 받기 싫었지만, 어쨌든 대답하기 힘든 상태였다. 유협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사라가 기쁨으로 한껏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는 위연이에요. 처음 오셨겠지만 천화 님의 저택이랍니다.”
기운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화가 청원에 저택이 있다니? 보통 사람의 재력으로는 되지도 않는 일인 데다가, 반드시 높은 사람의 추천이 있어야 했다.
유협이 눈으로 묻자 사라가 용케도 눈치채고 대답했다.
“천화 님의 지금은 돌아가신 형님, 천강 님이 추천해 주셨어요. 재화는 천화 님이 충분히 갖고 계셨고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다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유협이 간신히 입을 뗐다.
“천강이…… 죽, 었다고?”
“……아.”
사라가 제 입을 가리더니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년이 입을 멋대로 놀려서.”
사라가 자신의 입을 한 대 찰싹 쳤다. 그러나 유협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움직이면 아찔하게 아픈 팔을 뻗어 사라의 얇은 손목을 잡았다.
사라가 깜짝 놀라는 데도 유협은 다시 한번 물었다.
“천강이, 죽었…나요.”
“죄송합니다.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함부로 말씀드리고. 안타깝게도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사고? 사고로 죽었다고?
유협이 눈을 황망하게 감았다 뜨자, 사라가 안타까웠는지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연회 당시에 천강 님이 유협 님께 갔다는 게 밝혀졌는데요. 그런데 정사를 치르고 내려오시는 길에 그만 변을 당하셨어요.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실수로 기둥에 머리를 박았다가 섬돌에 머리가……. 안타깝게도 아침이 넘도록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유협은 그저 멍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풀려나다니. 순간 기운이 쭉 빠져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 폭 엎어졌다. 사라가 깜짝 놀라서 유협을 바라봤다.
“괜찮으신가요?”
“모르겠…습니다.”
멍한 대답에 사라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그리고 인사를 올리더니 갑자기 방을 뛰쳐나갔다.
유협은 사라가 사라지거나 말거나 천천히 그녀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았다.
천강, 그 생귀신 같은 작자가 섬돌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고? 게다가 죽기 전에 나와 동침을 했다고?
기억을 싹싹 뒤져도 그런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떠오르라는 천강은 뒤로하고 순간 얼핏 천화가 자신을 안아 준 게 생각났다.
천화? 천화가 거기 있었나?
유협이 미간을 구기는데 마루에서 황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천화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큰 키의 미남자가 거의 돌진하듯이 다가오자 유협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천화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괜찮아? 아니면 아직도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게 싫은가?”
사람이 다가오는 게 싫으냐고?
왜냐고 물으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몸이 마음대로 떨렸다. 눈을 가렸던 일, 그동안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몸을 함부로 만졌던 기억, 제대로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를 가지고 놀았던…….
유협이 눈을 질끈 감자 천화는 애가 닳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뒤따라온 사라를 보자, 사라가 자신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결국 천화는 한 걸음 다가가 서서히 몸을 낮췄다. 그리고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살그머니 유협을 껴안았다.
천화의 단단한 어깨가 유협의 턱을 받쳤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걸 조심스럽게 걷어 내고, 천화는 그의 몸을 힘주어 안았다.
“이제 다 끝났어. 괜찮아.”
“고맙…… 아니 감사—.”
“내가 그대 마음을 모를까. 억지로 목 쓸 필요 없어.”
그 말에 눈물이 고였다. 천화를 보자 애써 잊고 싶었던 기억이 쏟아져 나왔다. 부끄러웠다.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안심이 됐다. 천화는 유협이 눈물을 보이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엄지로 뺨을 쓸어 줬다.
유협은 어떤 강렬한 기분에 휩싸여 천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흐르는 눈물이 어깨 위에 떨어졌다. 천화는 조용히 유협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유협이 기진맥진했을 때 천화가 그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몸이 놀랐을 거야. 조금만 참아.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얘기해 줄게.”
“네. 저, 천화 님.”
“응?”
“내일…도 오시나요?”
어린애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천화는 눈꼬리를 휘며 함박 웃었다.
“그럼.”
그거면 됐다.
유협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천화가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난데없는 입맞춤에 귓가가 확 붉어졌다.
그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보던 천화가 유협의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어서 자.”
유협이 서서히 잠들자 천화가 사라에게 까딱까딱 손가락질했다. 가까이 오라는 신호에 사라는 살그머니 다가갔다.
“세 끼 다 먹는지 확인 잘하고. 혹시나 모르니 더 이상 천강 이야기는 꺼내지 마.”
“네, 알겠습니다.”
“갑자기 이상 증상을 보이면 반드시 나를 불러. 내가 뭘 하고 있든 알아서 찾아내.”
“네, 그것도 명심하겠습니다.”
잠든 유협을 애틋하게 한 번 바라본 천화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천강 일의 뒷정리가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냥 저택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만 끝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유협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 생각 덕분에 기운이 났다.
모든 일이 계획대고 흘러가고 있고 흘러갈 것이다. 재산 문제도 청원에 유일하게 있는 형제인 천화가 자신이 기여한 정도를 내밀며 축적했다. 황제에게 받칠 황금 덩어리도 충분했고, 천강의 장례식도 척척 이뤄지고 있었다. 만약 차질 없이 계획이 흘러간다면 천화는 유협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마음이 컸다. 천강이 해 놓은 짓을 목격했을 때 천화는 이미 천강을 죽일 마음을 먹었다. 그 현장에서 최대한 조용히 죽여야 했지만, 할 수만 있다면 끌고 와 지하에 가둬 두고 싶었다.
그리고 유협이 괴로워할 때마다 손가락을 썰고 발톱을 뽑으려고 했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니. 이런 이유 때문에 권세가랑은 싸우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형원이 들었으면 아니라고 속 터져할 생각을 떠올리며 천화는 걸음을 옮겼다.
✾✾✾
반면 유협은 새로운 안식처에서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천화의 저택은 무척 편안했다.
우선, 사라는 좋은 시종이자 좋은 말동무였다. 유협이 회복하는 동안 옆에서 열심히 소식을 전해 주는 사라 덕분에 재밌는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요새 좋은 말이 들어와서 모두가 탐내고 있다든가, 천화는 자주 검은색 옷을 입는다는 소소한 소식이었다.
그렇게 삼 일쯤 지났을까 유협이 목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을 때, 사라는 발랄하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잊지 않고 소식을 하나 물어 왔다.
“주인님! 드디어 주인님의 안채가 완성됐나 봐요!”
“네?”
따듯하게 옷을 여미고 녹차를 마시던 유협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요새 침대를 거의 벗어나지 않아도 돼서 천화의 저택을 높이 평가하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자신의 안채가 생겼다고 하니 황망했다.
반면 사라는 저택을 꾸미는 일은 빤히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는 듯, 외려 왜 놀라냐는 투였다.
“……아. 이 저택은 원래 가장 안채가 마음에 들어서 천화 님이 특별히 봐 두신 저택이랍니다. 주인님도 가서 보시면 마음에 드실 거예요.”
유협은 큰 충격을 받아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천강이 죽었으니 유협이 갈 곳이 애매해졌다. 남에서는 여인의 재혼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별한 여성들은 친가로 돌아가 영원히 기도하며 살았다.
유협의 문제는 조금 첨예했는데. 자신은 묘족이라 본가가 멀리 떨어져 있고, 황제도 유협을 멀리 보내기 꺼려 했다. 그래서 내심 어찌할까 고민했는데, 갑자기 천화가 자신을 위해서 안채를 꾸몄다고 하니 불편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천화 님의 집에 왜 제 안채가 필요한가요?”
올라오는 경계심을 감추고 묻자 사라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많이 놀라셨나요?”
“아뇨. 그냥 이상해서요.”
“천화 님은 어리셨을 때부터 유협 님과 우정의 마음으로 집을 같이 쓰고 싶다고 하셨어요. 전쟁터가 워낙 거칠다 보니 다 그런 희망이 필요하잖아요.”
아, 그런 의미였구나. 순간 안심했다. 전쟁터에 갔을 당시 천화는 아주 어렸고, 그렇게 어릴 때라면 충분히 바랄 수 있는 소원이었다. 슬픈 건 장성하고 나서도 그런 꿈을 가졌다는 거다. 좀 더 좋은 것을 바라지 않고…….
유협이 안쓰럽다고 생각하며 녹차를 홀짝거릴 때 사라는 모른 척 화제를 다시 바꿨다.
“그래서 이번 집을 꾸미는 일이 다 완성됐는데 구경하러 가 보실래요?”
“좋습니다.”
“지치기 전까지 모시겠습니다.”
사라가 지팡이를 가지고 왔다. 아직 걷는데 통증이 느껴져 어쩔 수 없었다. 유협은 사라가 겉옷을 정리하도록 내버려 둔 후 동그란 옥이 달린 지팡이를 잡았다.
‘이걸 짚으면 벌써 다 늙은 기분이란 말이지.’
하지만 막상 늙은 자신을 떠올려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보러갈 수 없으니 고향은 없는 것과 같았다. 친구라고는 자신보다 신분이 훨씬 높은 천화뿐이었다.
성격이 모나지 않았으니 새 친구를 사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유협은 자신이 없었다. 일단은 스스로가 아직까지 정상일지 판단이 들지 않았고, 다음으로는 처지가 어찌 될지 단언할 수 없기에 걱정되었다.
그런 우울한 생각은 몇 걸음 걷자 날아가 버렸다. 걷는데 온몸에 통증이 느껴져서 끙끙 소리가 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천강, 이 개새끼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술을 처먹고 머리나 깨져서 죽다니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귀신으로 나타나서 난리를 치면 좋겠다만, 천강만큼 사악한 사람은 보통 바로 저승으로 가는 법이었다. 받아야 하는 벌이 많기 때문에 사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으리라.
사라의 부축을 받으며 그렇게 욕을 퍼붓고 있던 유협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안채에서 분명 여기서 날 수 없는 향기가 나고 있었다. 의아한 기분으로 문을 연 유협이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변방에서나 자라나는 작은 꽃나무, 식물들이 화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마른 가지들 같고, 별달리 아름다울 것도 없는 나무들을 유협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향의 향기가 났다. 고향의 모습이었다.
떨리는 손이 저절로 지팡이를 떨어트렸다. 사라가 지팡이를 짚는데 문득 큰 손이 지팡이를 가져갔다. 천화였다.
갑자기 나타난 천화가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는 유협의 허리를 껴안았다. 몸이 기울자 자연스럽게 유협이 천화에게 기대서 서게 되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음에 들어?”
천화가 살짝 걱정이 섞인 어투로 물었다.
유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원을 바라보았다. 거의 영혼을 뺏겼다 싶은 반응이었다. 천화는 씩 웃고 유협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다른 쪽도 보여 줄게.”
“다른 쪽도 있나요?”
유협이 화들짝 놀라자, 천화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팡이가 다시 유협의 손에 쥐어졌다. 유협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천화가 다른 한 손을 부축해 유협을 데리고 집의 뒤로 향했다. 유협은 순순히 따랐다. 천화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솟아올랐다.
천강이 죽은 일도 대신 처리해 주고 있다고 들었으니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만들어 준 섬세한 정원은 유협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아프고 나서 내내 방에 처박혀 어두워져 가고 있던 마음에 빛이 드는 것 같았다.
정원 덕분에 유협의 하루 일과가 달라졌다. 기상하면 취향에 맞는 옷을 골라 입은 후 약방에 갔다가 정원으로 향했다. 그럼 천화가 무표정으로 마루에 앉아 있거나, 혹은 일을 끝내고 뒤늦게 왔다.
키가 큰 두 남자는 작은 나무 하나를 앞에 두고 몸을 굽혀 가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유협은 천화가 심어 둔 한 식물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하, 이건 양의 밥이에요.”
“양의 밥?”
“네. 양을 칠 때 이 풀이 많은 곳에서 풀어 줘요.”
“그럼 양을 사 올까?”
천화의 엉뚱한 물음에 유협은 또 웃었다. 천화가 너무 귀여웠다. 유협은 그 기분을 참지 못하고 천화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머리가 옆으로 넘어가자 투명하고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나왔다. 머리카락이 사르륵 내려가며 눈을 가렸다.
찰나이지만 유협은 아차 싶었다. 어렸을 때는 친밀함의 표현이었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지난 관계가 있었다. 그러니 마치 연인에게 하듯 친밀한 행동으로 보일까 부끄러웠다.
괜히 찔린 유협이 살짝 거리를 벌리려 할 때 천화가 손목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 손목을 잡자 유협은 움찔했다.
“저하라고 부르지 말아 줘.”
“네?”
갑작스러운 말에 유협이 눈을 깜빡이자 천화가 다른 손까지 겹쳐 유협의 손목을 간절히 잡았다.
“천화라고 불러.”
“하지만, 저하.”
“아직 부담스럽다면 천화 님도 괜찮아. 그래도 앞으로는 저하라고는 부르지 말아 줘.”
유협의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반면에 천화는 간절해 보였다. 뻣뻣해진 유협이 간신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순간 천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욕심 없어 보이는 갈색 눈이 반으로 휘었다. 눈초리 역시 내려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유협은 문득 자신이 천화의 갈색 눈과 머리카락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그리고 그가 유협의 턱을 잡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온기가 닿았다 떨어졌다.
그날 밤 유협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원래 남에서는 친밀감의 의미로 뺨에 입을 맞추나?’
그러나 남에서 거의 반강제로 청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 살아 본 유협에게, 그 누구도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그건 내가 천강의 부인이라서?’
그건 좀 납득이 갔다. 그러나 곧바로 다른 사람들이 뺨에 입 맞추는 광경을 본 적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천강의 집에는 서로 친한 시녀와 노비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누구도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입을 맞추지 않았다.
설마설마…… 옛날에 천화가 토끼처럼 귀여웠을 시절 유협도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몇 번 입을 맞추고는 했었다. 그런 친밀한 행동이 원인일까?
그러나 마음의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부정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내가 천화를 은애하는 거라면.’
유협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 짧은 찰나 온몸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남의 황족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감정은 다른 말을 했다. 감정은 천화와 천강은 종자부터 다르지 않으냐고, 천화는 그렇게 착하고 귀엽고 상냥한데 천강은 날 때부터 뒈질 놈이지 않았냐고 말했다. 생각을 아무리 돌려 보려고 해도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심장은 왜 이렇게 빨리 뛰는지 입이 마를 정도였다. 유협은 뒤척거리다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알아내야겠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천화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알아내야 했다. 집이 걸린 문제인 만큼 속전속결로 움직이는 게 중요했다. 만약 유협은 천화를 은애하고 있는데 천화는 그저 우정일 뿐이라면 그만한 신파도 없을 거다.
한숨을 쉰 유협은 잠들기 쉽도록 창문을 모두 닫았다. 그러나 반듯이 누워도 천장 무늬나 세고 있을 뿐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날이 밝자 유협은 퀭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나왔다. 세숫물을 들고 바깥에서 기다리던 사라가 인기척에 문을 열었다.
“헉, 주인님!”
그가 깜짝 놀라서 유협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주무셨나요?”
“아뇨.”
해가 다 뜨기 전에는 잠들었으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가 어렴풋이 뜨던 건 기억난다. 어느 순간 사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약을 추가할까요?”
“아뇨. 다 나앗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열이 나시나? 안색이 너무…….”
사라가 말을 흐렸다.
그렇게 처참한 꼬라지인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본 유협은 흠칫했다. 하얀 피부에 멍이 생긴 마냥 그늘이 져 있었다. 하필 눈 바로 밑에 생겨서 동공이 탁 풀려 보였다. 유협이 놀라서 다시 한번 거울을 바라보자 사라가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가끔 사라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유협의 시중을 들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그럴 필요 없다고 불러 세우기도 전에 사라가 결연하게 뛰쳐나갔다.
“가서 분을 좀 빌려 올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사라가 워낙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마지막 말은 채 제대로 들었을지나 의문이었다. 한숨을 쉬며 유협은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여기는 천강의 집도 아니었고, 천화도 뭐든 자유롭게 하라고 말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게 바뀌는 건 어색했다. 그 전에는 묶여서 매질을 당하다가 오늘은 갑자기 귀빈 취급이니, 제가 어쭙잖게 행동해서 천화를 욕보이는 게 아닌가 많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사라의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제대로 성장하는 방법까지 배웠다. 유협은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옷의 끈을 당겨 정리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아, 사라…가 아니라 천화 님!”
유협이 깜짝 놀란 만큼 천화도 놀랐다. 천화가 저벅저벅 들어와 뺨을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천화는 다소 심각하게 물었다.
“누가 이런 거야?”
“……제가요.”
“?”
천화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아, 어릴 적과 똑같았다. 순간 유협은 자신이 천화를 귀엽게 생각한다는 정보를 습득했다. 미치겠다. 천화가 너무 귀엽고, 그걸 귀엽게 생각해서 골이 아팠다. 유협이 잠시 대답이 없자 천화가 한층 걱정스러운 표정이 됐다.
“어디가 아팠던 거야?”
“아뇨. 하릴없이 날이나 샜더니 이런 거예요.”
“날을 샜어? 왜?”
천화가 침착하게 물었다.
너 때문이라고 곧이 곧대로 말할 수도 없으니, 유협은 조신하게 그냥 넘어갈 속셈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사라가 문을 열고 헐떡거리며 외쳤다.
“주인님! 받아 왔습니다!”
“아…… 아니.”
“뭔데 그러냐?”
유협이 말릴 새도 없이 천화가 사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라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손에 들고 있던 함을 넘겼다.
배신자! 이러면 마치 유협이 분칠하고 싶어서 가져오라고 한 것 같지 않은가!
역시 천화는 뚜껑을 열어 보더니 분? 하고 의문을 표했다.
“이게 필요했어?”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천화의 시선이 사라에게 꽂혔다. 똑같은 표정인데도 사라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왜 이게 필요했지?”
“그…… 주인님이 아파 보이셔서 그랬습니다.”
천화가 고개를 돌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유협을 보았다. 그가 함을 한 손으로 잡으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원래 필요했던 건데 사라가 갖춰 놓지 않았던 거야? 사 줄까?”
순간 사라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 주인에게 혼날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전혀 갖고 싶지 않았던 유협이 단호하게 말했다.
“둘 다 아닙니다. 저는 분칠이라면 끔찍합니다, 천화 님. 그리고 저런 비싼 분을 살 거면 차라리 괴황지를 받아 부적이나 적겠습니다.”
“알았어. 사라, 들었지?”
“네. 바로 들었습니다.”
천화가 사라에게 함을 안기더니 다시 등을 밀어 쫓아냈다. 의문이 싹 풀려 속 시원한 표정으로 천화가 다가왔다.
“오늘은 내가 시간이 비어서 왔는데.”
그리고 살짝 웃어 보인다. 아, 광채가……. 유협은 갈팡질팡했다. 천화를 보고 외모에 홀리는 건 정상이었다. 천화에게 마음이 없어도 대화 몇 마디만 하면 일향도 안 돼서 은애하게 되어 있다.
‘은애라니!’
유협은 자신이 한 생각에 놀라서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천화가 조금 기가 죽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응? 그대도 시간이 빌 거라고 생각했어.”
마치 강아지 같았다. 유협은 조금 자유분방하게 입을 놀렸다. 이 정도면 사실이 조금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천화 님이 오지 않으시면 제가 뭘 하고 시간을 보내겠어요. 오셔서 기쁩니다.”
유협은 차분히 말하며 천화를 마주 보고 웃었다. 천화는 입을 꾹 다물고 그 모습을 보다가 유협의 머리카락을 괜히 한 번 쓸어 보았다.
뭐지, 무슨 뜻이지?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천화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유협은 괜히 다른 쪽 머리를 어색하게 쓸다가 물었다.
“오늘은 어디 가실 곳이 있나요?”
“평소처럼 안채를 보여 주려고 했는데, 이제 완성됐거든.”
“정말요?”
순간 유협의 눈에 별이 비췄다. 그러다 본인도 왜 그렇게 기뻐하는지 모르겠어서 멈칫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본 천화는 갑자기 유협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유협이 완전히 돌덩이가 된 사이에 천화가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웃었다.
“좋아하는 모습이 너무 기뻐.”
“저…도 정말 감사합니다.”
“응.”
가 보자, 천화가 부드럽게 유협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유협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뒤를 따랐다.
유협의 상식선에서 손에 입을 맞추는 건 부부끼리나 하는 행동이었다. 뒤늦게 귀가 붉어졌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생각해 보면 천화는 어렸을 때부터 원래 다정한 성품이었다. 그 증거로 전쟁터에서부터 그를 따르는 부하들도 많았다. 한씨 형제, 형원, 사라, 기타 등등의 많은 사람들이 인성도 보지 않고 천화를 따랐을 리가 없었다.
잠깐, 그럼 천화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누구에게나 입을 맞추고 손을 잡고?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손을 뿌리치과 싶었으나, 다 큰 어른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참았다.
그러나 막상 안채에 도착하자 모든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안채는 푸릇푸릇해지는 고향이 떠오르게 했다. 이제 막 솟아나는 생명, 멀리서 들려오는 독수리 소리, 누이가 턱에 어깨를 대는 느낌, 평화롭게 개가 뒤를 따르던 광경.
유협이 한참 말도 없이 정원을 보자 천화가 그를 끌어당겨 허리를 안았다. 그렇게 자기 품에 가둔 뒤에 속삭였다.
“보기만 해도 좋아?”
“……고향 생각이 나서요.”
그 말에 유협을 안고 있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잠시 아파서 윽 소리를 내자 천화가 손을 풀어 주었다. 유협이 허리를 쓰다듬으며 의문을 담고 쳐다보는데 천화는 모른 척이다. 그가 괜히 유협의 시선을 무시하는 척하며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봐야지.”
“……아.”
이상하게도 정원은 수십 번 와 봤는데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유협이 머뭇거리며 천화를 보자 그가 생긋 웃었다.
“이제부터는 네 집이야.”
“제 집이요…….?”
물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귀로 들으니 부담이 컸다. 유협이 어쩔 줄 모르고 쳐다보자 천화가 돌연 짧게 웃음을 흘렸다.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뒷말은 맞닿은 가슴에서 들려왔다. 천화가 힘을 주어 아예 꽉 껴안았다. 유협은 숨이 막혀 탁탁 천화의 등을 쳤다. 천화가 장난처럼 짧게 웃다가 손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유협의 얼굴이 붉어지고 남은 시간이었다.
유협은 얼굴을 들킬까 봐 어서 들어가자고 말하며 빠르게 현판을 지나쳤다. 마당 한 곳에 말이 매여 있었다. 유협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천화가 바로 뒤에서 설명했다.
“눈이 꽉 찬 검은색에 콧등이 하얀 말이 가장 좋다며?”
과연 말은 까만 갈기를 가졌고, 눈이 크고 맑았다. 무엇보다 콧등 부분에 하얗게 무늬가 있어 아름다워 보였다.
유협이 홀린 듯 다가가 콧등에 손을 올리자 녀석이 부드럽게 푸륵거렸다. 성격이 순한 말이었다.
“이름은 네가 더 잘 지으니까 내버려 뒀어. 그래도 잘 고심해서 짓도록 해.”
천화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나봄이를 소개했을 때처럼.
유협은 기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 웃음이 터졌다. 까마득한 이야긴데도 천화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같이 보낸 세월이 허투루는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에 조금 설렜다. 유협이 눈에 띄게 좋아하자 천화 역시 만족하는 눈치였다.
“아직 안 끝났어. 본인 집이 얼마나 큰지는 알아야지.”
천화가 유협의 팔을 이끌고 들어갔다. 방은 천강의 집에서 여인들과 쓰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유협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고, 비싼 물건이 장식으로 턱 놓여 있어 유협을 놀라게 했다.
방을 중간쯤 돌아봤을 때 유협이 벌써 기진맥진한 기분으로 물었다.
“세상에 제가 여길 어떻게 다 쓰죠?”
“손님을 많이 초대해.”
“손님이요? 저는 아는 사람도 없어요.”
“내가 있잖아.”
천화의 말대로 유협이 남에서 유일하게 가진 친구인지 무엇인지, 하여튼 소중한 사람은 천화뿐이었다. 갑자기 천화가 어깨를 빌려주었을 때 느껴졌던 강렬한 기분이 다시 느껴졌다.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따뜻하고 긍정적이었다.
뭔가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천화를 슬쩍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괜히 깜짝 놀란 유협이 고개를 돌리자 천화가 옆으로 살짝 다가왔다.
“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당장 바꿔 줄 테니 말하라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유협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이나, 다른 보물들은 어떻게 얻으신 건가요?”
“음, 글쎄 변방에는 금이 많아. 전리품으로 가져오기 가장 쉽지. 폐하를 감동시키기도 쉽고.”
“황제 폐하를 그렇게 지칭하시면 안 되죠.”
유협이 따끔하게 혼내는 척 말했다. 과거처럼 선생님 행세를 하고 나온 것이다. 천하가 기분 나빠할까? 조마조마하며 기다려졌다.
“응. 알았어.”
천화가 입가에 미소를 살짝 그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과거처럼 순하게 유협을 보았다.
그 때문에 유협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여기서 항복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정리해 보자. 우선 본인은 천화를 우정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천화가 무슨 행동을 하면 할 때마다 쳐다보게 되고, 웃게 되고, 무엇보다 심장이 떨리고 기뻤다. 평생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런 기분을 터였다.
그런데 천화는 어떨까?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태도가 좋으면서도 마음이 찝찝했다. 만약 천화가 누구에게나 친절한데, 본인이 착각해서 그만 너무 앞서간다면? 이 집에서 마주 보며 살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아니 잠깐…… 집. 집??
너무 정신이 빠져 있어서 여태 생각도 못 한 부분이 있었다. 유협이 고개를 휙 돌렸다. 천화는 여전히 유협을 구경하고 있다가 눈을 깜빡였다.
“천화 님.”
“응.”
“왜 이 집을 저에게 주시는 거죠?”
그러고 보니 두들겨 맞고, 못된 짓당하고, 건강을 회복하느라 내내 천화에게 직접 물어볼 새가 없었다. 그 후에는 정원에 감동해서 생각도 못 했고.
어렸을 때 소원을 이루느라 돈을 퍼다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분명 사라가 말해 준 부분도 사실이겠지만, 이런 일은 본인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
유협이 의지를 담아 쳐다보자 천강의 눈빛이 바뀌었다. 너무 예쁜 걸 보듯이 바라보는 통에 유협은 바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네가 갈 곳이 없잖아.”
“아예 갈 곳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다시는 황실 손에서 고생하는 걸 보기 싫었어.”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나요?”
유협이 저도 모르게 따지자 천화가 눈을 깜빡거렸다. 진실을 말할까, 거짓을 말하고 넘어갈까 하는 모양새였다.
눈에 보이는 행동에 유협이 고개를 훽 돌렸다. 그러자 순간 천화가 다가와 뒤에서 허리를 껴안았다. 한 걸음 걸으려던 유협이 멈칫했다. 힘이 얼마나 세던지 순간 휘청하는 걸 천화가 안정적으로 받았다.
“네가 남에 친우가 나밖에 없듯이, 나 역시 그래.”
“천화 님…….”
“나는 주변 사람이 별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아. 너만 빼고.”
천화의 말에 유협은 가슴이 찡해졌다. 어린 애가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런 식으로 말할까. 전쟁 때문에 귀족 사회에서 배척받고, 사회적으로는 고립되어 하는 말일 터였다.
천화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마음에 들어?”
“어떻게 마음에 안 들겠어요.”
유협이 조곤조곤 대답하자 천화가 귀 뒤에 입맞춤을 쪽 하고 떨어졌다. 유협이 반사적으로 귀를 가리고 쳐다보자 천화가 웃었다.
“놀란 토끼 같아.”
“아니, 갑자기 무슨.”
“가자. 더 구경해야지.”
천화가 손을 잡고 이끌었다. 유협은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녔다. 집을 보기에는 충분했지만 그날 성과는 없다시피 했다.
이불을 반듯하게 덮은 유협이 멍하게 또다시 물결무늬 개수를 셌다. 천화가 가고 난 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밥을 먹은 기억도 씻은 기억도 희미한데 어쨌든 이불 속이다. 그리고 천화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무한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름은 네가 더 잘 지으니까, 그래도 잘 고심해서 짓도록 해.’
‘그래서 우리 둘이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마음에 들어?’
동시에 천화가 환하게 웃거나 햇빛에 눈을 찌푸리는 모습 등등이 떠올랐다. 이제 자신의 감정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천화였다. 천화는 정말로 우정으로 유협을 대하는 걸까? 어쩌면 우정이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천화가 직접 친우가 유협뿐이라 같이 살자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친구가 별로 없는데, 하나 있는 친구한테 그렇게 대한다고?’
허리를 끌어안고, 귀 뒤에 쪽 소리 나게 입맞춤하고, 손목을 잡고 돌아다닌다니.
유협이 친구가 없긴 했지만 그게 보통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만약 천화에게는 보통 일이라면…….
이불만 하릴없이 덮고 있던 유협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렇게 된 거 내일부터 천화의 지인을 소개받고 싶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천화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면밀히 관찰한다면 민망한 일을 줄일 수 있으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으니 어떻게든 잠이 왔다. 유협은 결전을 준비하며 다음 날을 맞이했다.
✾✾✾
“형원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지?”
“네…….”
“좋아, 그럼 다음.”
유협은 지금 염라대왕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지금 그는 옻칠이 된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이 집 가솔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를 받아 보고 있었다. 옆에서 천화가 호명하면 일렬로 기다리던 사람들이 한 명씩 나와 유협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사라졌다.
‘아니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천화와 함께한 전쟁 동료들로 시작해서 곡식 빻는 노비까지 빼곡하게 들어간 명부를 보며 유협이 소리 없이 절규했다.
오늘 아침 유협은 그냥 ‘지인들을 소개받고 싶다’고 말했을 뿐인데, 천화가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냅다 집의 모든 가솔을 불러 모은 것이다.
종종 천화가 ‘이쪽은 손이 빨라’, ‘얘는 쓸 만해’ 같이 쌀알만큼도 필요 없는 조언을 덧붙이는 걸 보니 유협이 개인 시종을 찾는다고 여기는 거 같았다.
결국 의미 없는 짓을 하다가 점심을 날린 유협은 천화가 일부러 이러나 했다. 그러나 하지만 천화는 너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약 천화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유협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유협은 저녁을 내온 사라를 붙잡았다.
사라는 보통 저녁 반상을 내주고 밖에 나가 있는 편이었다. 그러니 유협이 갑자기 안에 있어 달라고 하자 놀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노련한 시녀답게 그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유협이 말을 꺼내는 걸 기다렸다.
사라가 차분한 사람이라 용기 있게 붙잡은 건 좋은데, 막상 입을 열려니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 맞은편에 앉혀 놓고 밥만 먹고 있기에는 더 불편했다. 유협은 결국 고뇌를 떨치고 입을 열었다.
“저어, 천화 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언제든지 하문하세요.”
“천화 님은 그러니까.”
유협이 한 번 쉬고 물었다.
“천화 님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살가운 편이신가요?”
용기를 가까스로 내서 사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눈이 크게 뜨인 인형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 표정을 왜 짓나 마음이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사라는 한층 더 입을 다물고 몸을 뒤로 피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화살이라도 겨누고 있다는 듯.
사라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소곤 물었다.
“혹시 천화 님이 살갑게 대하세요?”
질문하면서도 사라는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유협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사라가 흐음 하며 고민에 빠졌다.
“혹시 어느 정도로 살갑게 대하시나요?”
“네?”
“어떤 행동 때문에 그렇게 느끼셨어요? 천화 님이 살갑다면 살가운 분이세요.”
어떤 말에도 흔들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라의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했다. 역시 천화는 아무에게나 그렇게 상냥한 걸까? 하긴 유협만 따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해도 이상했다. 마음이 심하게 떨렸지만 유협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냥 단순히 우정이라고 하기엔 애정 어린 표현을 많이 보아서요.”
“예를 들어서요?”
어쩐지 사라는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유협은 고민하다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밖으로 말하기에는 민망했다. 그러나 자기가 물었으니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몇 가지는 추려내고 말했다.
“허리를 껴안거나 손을 잡거나.”
입맞춤까지 한다는 것은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라는 모든 행동을 마치 상상해 보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고민했다. 민망해진 유협은 음식만 찔렀다. 마침내 사라가 심사숙고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그건 아무래도 직접 물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대와 영 다른 말에 유협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 물어보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때 사라가 덧붙여 말했다.
“물어보실 거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이기 시작했다.
✾✾✾
이제 막 여름 초입으로 들어가는 날씨였다.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간질여 부채가 따로 필요 없었다. 유협은 지금 약방과 안채에서 벗어나 정자에서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른 우아한 정자처럼 섬세한 맛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유협은 그 밋밋한 정자가 마음에 들었다.
하늘의 별들이 바람처럼 스쳐 빛나는 게 너무 아름다워 유협은 넋을 잃고 감탄했다. 한 남자가 조용히 다가왔다.
“뭐 해?”
따뜻한 손이 목덜미를 감쌌고 유협이 좋아하게 된 향이 딸려 왔다. 위를 보자 천화가 별빛을 뒤로 하고 서 있었다. 그렇게 본 천화는 몹시 아름다웠다. 유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목을 감싼 천화의 팔을 쓰다듬었다.
저녁에 사라가 했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님도 똑같이 해 보세요. 그리고 나면 저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죠.’
사라는 이 방법을 쓰면 반드시 알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말만 들어도 낯부끄러운 행동이라 귀가 다 홧홧했다. 그러나 이왕 물어본 방법을 써 보기 위해서 천화에게 밤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청한 참이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천화의 눈을 보자 천화가 구름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어.”
천화가 유협의 오른손을 잡고 입 맞췄다.
아니 이럴 땐 어떻게 해?! 어찌할 바를 모르던 유협이 일단 천화의 왼손을 마주 잡았다.
나도…… 나도 입을 맞춰야 하는 건가. 눈치만 보다가 결국 깍지를 껴잡았다. 상당히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천화도 힐끗 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어? 추운 거야?”
천화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으려 하며 말했다. 유협은 괜찮다고 천화를 말려야 했다.
아…… 역시 괜히 따라했어.
눈을 질끈 감고 부끄러움을 참는데 천화가 자신을 마주 보고 앉는 게 느껴졌다. 슬그머니 눈을 떠 보자 천화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기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왼쪽을 보는 얼굴은 냉정했고 차가워 보였다.
그러나 유협과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그린 것처럼 내려왔다. 천화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응? 왜?”
따라서 웃어야 했다. 그런데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때문에 잠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유협은 아무 순간에 천화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천화가 무슨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다시 한번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을 넘기다가 유협과 눈을 마주쳤다. 천화는 이번에 웃지 않았다. 대신 유협의 손을 살며시 잡아 왔다.
유협은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붙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 천화가 다시 맞잡은 손을 보더니 이번엔 힘을 꽉 줘서 옭아맸다.
“술상은 내가 봐오라고 해 뒀어.”
“아, 저도 사라에게 말했는데…….”
“어차피 둘이 부엌에서 만날 거야.”
어색한 침묵이 떠돌았다. 차라리 사라라도 달려와 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천화가 반대쪽 손으로 유협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
“이렇게 머리 묶는 걸 좋아하는구나.”
“……네.”
아…… 정말 심장을 토할 것 같았다.
유협은 애써 떨림을 감추고 다른 손으로 천화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별안간 천화의 눈이 별이라도 들어간 양 환해졌다.
유협은 이제 아무 말이나 뱉기 시작했다.
“천화 님은 왜 머리를 안 기르세요?”
“관까지 하기 귀찮아서. 그렇다고 긴 머리로 두면 불편해.”
무의식적으로 유협이 천화의 짧은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나요?”
남에 와서 지겹도록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던 것 같은데, 천화는 괜찮았을까?
천화가 유협의 올라온 손을 잡더니 자신의 뺨에 댔다.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응.”
대답은 짧았는데 여운은 길었다. 천화는 유협의 손바닥 안쪽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귀가 다 붉어졌다. 유협이 어쩔 바를 모르고 눈만 깜빡거리자 천화가 웃었다.
“왜 이제는 안 따라해?”
“네?”
순간 얼굴이 화끈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천화가 엄지 위에 입술을 비볐다.
“따라해 줘.”
“저는…… 그냥. 천화 님.”
계속 부드러운 뺨에 손이 비벼지자 유협은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다못해 풍성한 소맷자락을 들어 천화와 본인의 사이를 가리자 그가 짧게 웃었다.
“천화 님은 지인한테 다 이러시나요?”
어쩐지 약이 오른 유협이 말하자 천화의 웃음소리가 끊겼다.
아무 대답이 없자 슬그머니 불안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나마 유일한 친구가 천화인데, 그리고 어쩌면 첫사랑인데 뭔가 말을 잘못한 걸까? 만약 기분이 상한 거라면 굉장히 민망할 것 같았다.
유협이 슬그머니 소매를 내리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천화의 눈은 굉장히 진지해 보였다. 유협 역시 덩달아 진지해졌다. 천화가 유협의 팔을 잡아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소맷자락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
유협은 화들짝 놀랐다. 반면 천화는 여태 참았다는 듯이 입꼬리를 휘었다. 천화가 천천히 고개를 가까이 했다. 유리 구슬 같은 갈색 눈동자와 신비할 정도로 예쁜 눈, 겨울에도 도화가 내린 것 같은 입술이 다가왔다.
유협은 어디다 눈을 둘지 몰라 당황했다. 마침내 유협과 이마와 이마가 닿았을 때 천화가 어린아이처럼 유협에게 이마를 비볐다.
“절대로 안 해.”
“그…… 그럼. 저한테는 왜 그러세요?”
유협이 묻자 천화가 그를 빤히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봤다. 그러다 고개를 꺾었다. 천화의 입술과 유협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처음에는 쪽 소리가 나는 정도였는데 당황함에 눈이 커지는 사이 천화가 벌어진 입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안쪽까지 빨아들이자 츕 하는 짙은 소리가 났다.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고 놔주니, 가뜩이나 복숭앗빛이 돌던 입술이 붉어져 있었다. 천화는 쌔근거리는 유협에게 이마를 대고 비볐다.
“입 벌려 줘.”
그 말에 유협이 얼이 빠져 입을 벌렸다.
천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유협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자신보다 딱 좋게 작은 몸이 좋았다. 향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씹어먹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쪽을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가자 유협이 놀란 듯 등을 뒤로 뺐다.
천화는 마른 등을 끌어안으며 좀 더 진득하게 유협의 혀를 문질렀다. 놀라지 말라고 입천장 오목한 곳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읏.”
입맞춤이 길어지자 저절로 신음이 나온 모양이었다. 유협은 그제야 천화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천화는 마지막으로 유협의 아랫입술을 핥은 뒤 떨어졌다. 그사이 유협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겉옷의 한쪽은 어깨가 내려와 있었다.
무엇보다도 황망해 보이는 표정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한 손으로 입술을 닦아 주자 유협의 어깨가 튀었다.
“그대랑만 하고 싶어서.”
“아니, 이게 무슨.”
서서히 유협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천화가 손을 뻗어 겉옷을 정리해 주자 약간 울상이 되었는데 그것도 너무 예뻤다. 여름밤 아래 보는 유협은 정원에 잠깐 내려와 풍경을 즐기는 선인 같았다.
그와 입을 맞추고, 동그래진 눈을 보자 어딘가 자극됐다. 하지만 더 이상 했다가는 뒤도 안 보고 도망갈 것 같았다. 천화는 뭣보다 유협의 고집을 잘 알기 때문에 타협했다.
“그대가 사라지고 난 후에.”
“네.”
유협의 작은 얼굴에 죄책감이 스쳤다. 천화는 유협의 분홍빛 뺨을 문질러 줬다.
“처음에는 아주 오래 기다렸어.”
“…….”
“그러다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지. 출궁하게 되는 날 천강을 찾아가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는데 대문도 열어 주지 않더라고.”
순간 울컥한 유협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인간 말종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어린 천화가 어렵게 찾아간 집 앞에서 박대당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아서 바닥으로 고개를 숙이자 천화가 턱에 쪽 입을 맞췄다.
“괜찮아. 그래서 변방으로 가서 돈을 벌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그래야 천강이—.”
“상대해 줄 거라고 생각하셨겠죠.”
유협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화가 났다. 그럼 그 어린 것을 전쟁터로 떠민 책임의 반은 천강이었다. 만약 그때 얼굴을 보게 해 줬다면 차라리 유복하진 않지만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지도 몰랐다.
천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무 화내지 마.”
“말도 하기 싫어요.”
천강 이야기를 하다간 분명 뒷목 잡고 넘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건 싫었다.
“그래도 그대 얼굴을 다시 볼 방법이 생겼잖아. 그때 말이야, 다시 만난 처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던 거 알아?”
천화의 솔직한 고백에 유협의 얼굴이 붉어졌다. 큼큼, 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어쨌든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다면 좋겠지만, 어쩌다 형님이 과음하셔서 기회가 생겼지.”
“제가 운이 좋은 거였군요.”
여태까지 그 개새끼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딱 죽어 주다니 유협에게는 천운이었다. 참, 세상사 모르겠다. 그 누구에게나 도움도 안 될 쌍놈이 하필 이런 때 고꾸라져 죽을 줄이야.
“운이 좋은 건 나야.”
천화가 웃으며 자신을 보라는 듯 유협에게 촉 입을 맞췄다. 유협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다른 사람과 닿고 싶은 기분이 든 건 처음이야.”
천화가 진지하게 유협의 양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하얀 손을 잡고 그가 양손에 입맞춤 했다.
“그대는…… 어때?”
“저는.”
“그대는?”
천화가 힘을 주자 손이 아팠다. 그러나 긴장을 해서 딱딱해진 얼굴을 보자 조금 웃음도 나왔다. 거의 반쯤은 자신이 키웠던, 같이 놀았던 아이가 이렇게 장성해서 멋진 얼굴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시겠지만 저는 마음에 차지 않은 사람은 제 곁으로 다가오기만 해도 참지 못해요.”
“응.”
“그래서 천화 님을 뿌리칠 수가 없었어요.”
말의 뜻을 이해한 천화가 품을 벌렸다. 유협은 조금 망설이다가 그에게 기댔다. 날씬한 듯 근육이 잡힌 천화의 몸이 든든하게 유협을 떠받쳤다. 그러자 몹시 행복해지며 그때 그 강렬한 기분이 다시 들었다. 유협은 문득 천화의 팔에 안겨서야 깨달았다.
“천화 님.”
“응?”
“천화 님은 저를 몇 번이나 구해 주셨어요.”
천화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한 집안에서 개새끼만 나오라는 법은 없잖아.”
“그건 맞네요.”
유협이 천화의 팔을 끌어당겨 좀 더 단단히 안겼다. 마음이 좀 더 편안해졌다. 유협은 그제야 그 강렬한 기분이 뭔지 알 거 같았다.
천화는 유협의 구원자이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유협의 ‘편’이었다. 천화를 볼 때마다 든든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기쁨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천화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유협은 껴안긴 품을 살짝 뿌리쳐 천화의 얼굴을 보았다.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짓는 얼굴을 보자니 너무 너무 귀여웠다. 결국 유협은 살짝 천화의 뺨에 입 맞췄다.
천화가 자신의 뺨을 감싸더니 눈이 울 것처럼 반짝였다.
“그대 나를 은애하는 게 맞지?”
순간 어린애를 울리는 잡한이 될까 봐 안절부절하던 유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옷자락으로 천화의 눈가를 두드렸다.
“울지 마세요.”
“안 울어.”
천화의 눈물이 그쳤는지 요리조리 살펴보던 유협이 망설이다 입을 뗐다.
“그…… 천화 님도 저를…… 사랑하시는 거 맞죠?”
순간 천화가 마치 귀여운 무언가를 보듯, 너무너무 행복한 얼굴을 했기에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응.”
“……알겠어요.”
“오해하지 마. 나는 그대만 좋아.”
“이제 절대 오해 안 할게요.”
부끄러움에 그만 쳐다보라고 천화의 뺨을 누르고 있을 때였다. 정자 아래서 사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술상을 올려도 될까요?”
유협이 천화를 힐끗 보자 천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올라오세요.”
사라가 제법 무거워 보이는 상을 혼자서 들고 나타났다. 유협이 음식이 무엇인지 구경하는 사이에 사라는 재빠르게 분위기를 살폈다. 천화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유협은 뺨이 붉었다.
‘잘 되었구나.’
속으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은 사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정자를 내려갔다. 유협은 모르겠지만 본인이 야수의 목줄을 쥔 것과 같았다.
✾✾✾
그날을 기점으로 저택에 놀라울 정도로 생동감이 돌았다. 늘 시들시들하게 딴짓하던 천화가 유협의 방에 처박혀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안심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협이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워 나갈수록 피를 보는 일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천화는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혀를 자르거나 손가락을 잘랐지만, 최대한 유협의 앞에서는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격이 변한 거 아닐까요?”
밥을 먹던 시녀 한 명이 말을 꺼내자 사라가 코웃음 쳤다.
사라는 이중에서 유일하게 천화를 따라서 전쟁터에 갔던 사람 중 하나였다. 거기서 사라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빠릿하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내쳐지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분이 피를 피하려고 그러는 거겠니? 주인님께 들키면 말이 커질까 봐 그러는 거지.”
천화는 어쩔 때는 돌덩이 같으면서, 어느 때는 또 귀신같다고 욕이 자자했다. 그러나 유협은 천화가 세상 착하고, 상냥하고, 귀여운 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유협이 떨어지기 싫어서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것도 봤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천화 역시 그 감정에 반응한다는 거다. 천화는 누가 슬퍼하든, 아파하든, 기뻐하든 전혀 반응이 없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화도 잘 내지 않았고, 귀찮으면 자신이 빙 둘러 갔는데 확실히 예전과 차이가 있긴 했다.
유협이 천화가 너무 상냥해서 걱정이라고 한 후에 유협과 마음에 거리를 둔 형원도 동의했다. 마치 허수아비 같았던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 오로지 한 사람 앞에서만.
“나는 우리 주인님이 걱정된다.”
사라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유협이 천강의 집에서 개고생한 걸 뻔히 알고 있으니 이제 좀 행복해졌으면 좋으련만, 어쩐지 자꾸 불안했던 탓이다. 그러나 말을 함부로 놀려서 인생 그렇게 빨리 끝낼 필요는 없었다. 사라는 유협이 썩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그래서 사라는 오늘 외출할 거라는 말에 유협이 입을 여름옷을 묵묵히 꺼내 펼쳐 놓았다.
유협이 씻으러 간 사이 좋아할 만한 허리끈과 머리빗까지 준비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이제 이 방문을 활짝 열고 닫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오셨습니까.”
사라가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천화는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자여서가 아니라 싸가지가 없어서라는 걸 익히 아는 사라는 조용히 침대 뒤로 물러났다. 오늘도 천화는 흠잡을 곳 없이 반짝거려 뭐 도울 것도 없었다.
은색 옷에 갈색 허리띠, 손등까지 덮는 각반, 힘을 열심히 준 게 보였다. 덕분에 젊고 아름다운 무장처럼 보였다. 주인님이 또 홀딱 넘어가겠구만. 혀를 끌끌 차는데 목간 쪽에서 머리를 털며 유협이 나타났다.
순간 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협이 목욕을 끝마치고 나오면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리고, 물에 젖어 투명해진 옷만 걸쳤기 때문이었다. 별생각 없이 나오던 유협 역시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천화 님! 언제 오셨나요? 좀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네요.”
“사라야.”
“네.”
유협에겐 대답도 하지 않고 천화가 밖으로 턱짓을 해 보였다.
“나가.”
“네.”
어리둥절한 유협만 두고 사라가 재빠르게 몸을 물렸다.
유협을 위해 준비한 머릿기름까지 착실하게 두고 사라진 사라를 유협이 붙잡으려 했지만 천화가 더 빨랐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와 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사라를 왜 내보내셨어요?”
“평소에도 이러고 나와?”
두 사람의 질문이 엇갈렸다. 유협이 먼저 대답했다.
“목간을 할 때만요.”
천화의 시선이 물에 젖어 드러난 쇄골부터 희미하게 비치는 가슴, 날씬한 허리까지 훑었다.
“평소에 이 장면을 사라가 봤다고?”
“제가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했나요.”
유협이 별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웃었다. 천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유협이 뒤를 돌아보라고 손짓하자 인상을 찌푸려 왔다.
“왜.”
“뒤를 좀 돌아 주세요. 같은 남자라도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와 같은 남자가 되고 싶지 않은데.”
“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잠시만 돌아 주세요.”
이럴 때만큼은 꼭 떼쓰는 애 같았다. 유협이 천화 어깨를 쭉쭉 밀며 돌리자 일단은 손길을 따랐다. 하지만 곧 천화가 다시 뒤를 돌았다.
“어…… 천화 님. 지금 눈 돌리셨죠.”
“차라리 나보고 나가라고 해.”
천화가 슬픈 강아지 같은 눈으로 말했다. 그게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유협이 짧게 웃었다.
“그럼 나가실래요?”
“싫어.”
그리고 꾸물꾸물 유협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젖은 옷을 막 벗으려는 참이라 상의가 반쯤 벗겨져 있었다. 별다른 신경을 안 쓰려는데 천화의 신경이 어디론가 쏠려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맨가슴에 닿았다. 유협은 흠칫했다. 가슴 쪽 옷은 벗다 말아서 유두까지 노출이 되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을 한 손으로 가리자 천화가 불쌍한 눈으로 힐끗 쳐다봤다.
“정말 나가 주실래요.”
“미안한데, 못 가겠어.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야.”
그러면서 천화가 손을 뻗어 유협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천화의 팔뚝에 엉덩이가 닿았다. 다리가 달랑거리며 떴다. 키도 비슷한데 힘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유협이 기겁하자 천화가 교태를 부리듯 가슴을 머리에 비볐다.
“그대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해.”
천화가 정말 괴롭다는 듯이 말했다.
“고작 이 정도로 힘들어하시는 천화 님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유협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의외의 모습을 보니 천화가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너무 귀엽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난 후 입맞춤 외에는 별다른 신호가 없기도 했다.
‘원하시는 줄 몰랐는데.’
손을 잡거나 허리를 껴안는 적은 많았지만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유협은 슬그머니 천화의 어깨에 두 손을 겹쳐 안았다. 순간 천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유협은 마치 어렸을 때 천화를 달래는 말투로 물었다.
“그럼 단장 도와주실래요?”
원래라면 정말 무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과연 생각대로 천화는 미소를 지었다.
“응.”
“내려주세요.”
천화의 이마에 쪽 입 맞추며 말하자 천화가 유협의 턱에 입 맞추고 그를 내려주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마주 보게 됐다.
유협은 바보처럼 웃지 않기 위해 살짝 입술을 깨물고 우선 수건을 천화에게 넘겼다.
“몸을 좀 닦아 주실래요?”
“영광이야.”
천화가 농담하자 두 사람은 잠깐 웃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정말 짧았다.
유협이 정말로 옷깃을 젖혀 상의를 내놓자 천화가 침묵했다. 하얀 피부를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그가 손을 뻗어 한때 천강의 학대로 얻었던 상처를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천화의 무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 유협은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문질렀다.
“천화 님. 저 고뿔 들겠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스럽게 말하자 천화가 퍼뜩 수건을 어깨에 댔다. 그러나 또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엔 무슨 일인가 봤더니, 막상 수건을 어깨에 대고 가슴께로 문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유협이 웃음을 터트렸다.
“도와드릴까요?”
“놀리지 마.”
천화가 툴툴거리며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런데 수건은 뒤로하고 맨손을 올렸다. 조심스럽게 닿은 손가락이 거칠었다.
살짝 부끄러워진 유협이 천화를 올려다보자 마치 신기하다는 듯이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천화가 손을 좀 더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뭐 하는 건가 싶었지만 문득 그가 심장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장난도 치지 못하고 유협은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눈을 뜬 천화가 물었다.
“입 맞춰도 돼?”
“이대로요?”
천화가 옆에 있던 유협의 옷 중 겉옷을 들어 그의 어깨에 둘러줬다. 그리고 유협을 침대에 앉게 했다.
“응?”
“……좋아요.”
그러고 보면 천화는 입맞춤을 정말 좋아했다.
유협이 고개를 들자 천화가 조심스럽게 입 끝 쪽에 입술을 맞췄다. 기분 좋은 촉촉함에 유협이 고개를 조금 더 추켜들자, 쪽 소리와 함께 입이 열렸다. 혀가 부드럽게 들어왔다. 어느새 천화의 손이 유협의 턱을 잡아 올렸다. 유협은 천천히 따듯하고 말랑한 혀를 받아들였다.
분명 경험이 없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천화와 입맞춤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천화가 입술을 꾹 눌러 입이 좀 더 벌어지도록 했다. 심장 박동이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닿아 온 그가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그리고 유협이 가장 좋아하는 자리인 천장을 쓸었다. 혀가 엉키면서 척추가 찌릿했다.
“읏.”
소리가 절로 튀었다. 본능적으로 천화의 양쪽 팔을 잡았지만 되려 천화가 유협을 밀었다. 두 사람은 같이 침대 위로 넘어졌다.
“아, 하아.”
떨어진 입술이 아쉬워 입을 핥자 천화가 유협의 위에서 쪽쪽 입 주변에 잘게 입을 맞췄다. 유협은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즐기다가 두 손을 뻗어 천화를 끌어안았다. 따뜻하게 안겨 오는 품을 꼭 잡으며 유협이 물었다.
“천화 님.”
“응?”
“하고 싶으세요?”
천화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새로 잠시 굳었다. 유협이 손을 뻗어 뺨을 쓸고 머리카락을 넘겨 주자 마치 강아지처럼 그 손에 기대기만 했다. 유협이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기다리자 천화가 갑자기 유협의 두 손을 잡아 침대에 꾹 눌렀다.
“참을 수 있겠어?”
“네?”
유협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천화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남자와 하는 것인데 참을 수 있겠어?”
순간 유협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천화와 해 왔던 건 무엇인가. 남자끼리 입맞춤만 가능하고 살은 여자와만 섞어야 한다는 깜찍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어이가 없어서 입을 열려는 순간 천화가 작게 말했다.
“천강 때문에 고생했잖아.”
“아.”
가슴이 찡해졌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기특하면서도, 욕망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끌어안아 입을 맞춰 온 천화가 너무 귀여웠다. 유협은 천화의 뺨을 한 손으로 당기며 키득거렸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어요.”
“정말이야?”
“네.”
유협이 무릎을 세워 천화를 가운데 앉혔다.
“완전히 잊었어요.”
천화가 유협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천화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럴 때면 정말 천녀가 따로 없다고 유협이 멍하니 생각했다.
천화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이번에는 조금 간지러운 입맞춤이었다. 혀가 부드럽게 드나드는 자극이 오묘했다.
“응, 읏”
저도 모르게 발로 침대를 밀어 내자 천화가 허벅지를 잡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몸이 움찔했다. 질척거릴 정도로 입을 맞추던 천화가 귀 쪽을 핥았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감각에 유협의 입에서 신음이 샜다. 귀에서 핥짝거리는 소리가 배는 더 크게 들렸다. 정말 색사를 하고 있다는 감각에 몸이 떨렸다. 유협이 어깨를 수그리자 천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귀를 물었다. 따끔한 감각이 자극됐다.
하필 천화가 다른 손으로 유협의 손을 잡아 내리고 있어 완전히 빠져나가지도 못했다.
“하아, 읏…… 으”
천화의 다른 손이 유협의 맨 살결을 쓰다듬었다. 차가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호색 유두에 손가락이 올라갔다. 기다란 손가락이 작은 몽우리를 부드럽게 긁었다. 순간 유협의 몸이 움찔했다. 고작 위만 만졌을 뿐인데 생경한 감각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아, 하아…… 천화 님, 잠시만. 잠시만.”
천화가 유협의 목덜미에 입을 쪽쪽 맞췄다.
“괜찮아. 민감해서 그래. 조금만 참아 봐.”
그러면서 유두를 빙빙 돌리는 손길에 유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륜을 긁는 자극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유협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가 손이 잡혀 다시 눕혀졌다. 천화가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조금만 참아 봐, 응?”
“알겠어…… 읏, 어요.”
허리가 저절로 들썩거리는 걸 참자니 점점 아래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보지 않아도 알았다. 허벅지를 벌리고 있는 상태를 자각하자 부끄러워졌다. 유협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천화가 살짝 웃었다. 그가 무릎으로 꾹 회음부를 눌렀다. 순간 눈앞이 반짝 했다.
“아…… 천화 님. 하아, 방금 그거 뭐예요?”
“기분 좋은 부분.”
천화가 다시 유협의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모든 일이 다 처음인 유협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곧 천화가 얇은 면속으로 손을 넣었다. 순간 차가운 손이 닿아 유협이 움찔했다. 천화가 기다리라는 듯이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불편하면 말해.”
“으으, 이 이상 이상해지면 말씀 드릴게요.”
천화가 픽 웃더니 유협의 콧대를 살짝 깨물었다. 그가 벌어진 한 쪽 다리를 조금 더 밀어 냈다. 유협은 부끄러움을 참고 다리를 조금 더 벌려 주었다. 천화가 잘했다는 듯 허벅지를 쓰다듬더니, 순간 고개를 숙여 허벅지를 깨물었다.
“아!”
“아팠어?”
“조금요.”
“미안. 자국이 남을지도 몰라.”
천화가 미리 말하며 유협의 허벅지를 핥듯이 물었다. 몇몇은 자극이 너무 심해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천화는 그때마다 허벅지 안쪽을 핥거나 가슴을 매만졌다. 기진한 유협이 신음을 뱉을 때였다. 천화가 무는 걸 멈추고 허리띠를 잡았다.
“풀어도 돼?”
“……저만 벗는 거잖아요.”
“나는 그대 단장을 도와주려고 하는 거잖아.”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뻔뻔하게 구는 게 귀엽기도 했다. 천화의 뺨을 잡아당겨 입 맞추는 사이, 단단한 손가락이 허리에 있는 끈을 풀어 내렸다.
“아…….”
유협이 부끄러워 움츠러들기 전에 천화가 이를 악물었다.
“너무 예뻐.”
정말 예뻐서 못 참겠다는 듯이 천화가 손을 짚고 천천히 나신을 훑었다. 하얀색 피부와 산호색 유두도 미칠 지경이었지만, 성기까지 옅은 색으로 곧고 예뻤다.
천화의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유협은 부끄러움에 미칠 지경이 되자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 손에 입 맞춘 천화가 자신의 겉옷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유협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차려입었던 은색 옷, 갈색 각반, 허리끈이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근육으로 잘 잡혀 있는 몸이 드러났다. 천화가 그 상태로 유협을 끌어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함께 겹쳐 들렸다. 따뜻한 살갗이 서로 닿기만 해도 너무 좋았다. 단단한 아랫배에 끙 소리가 날 정도였다.
천화는 이불을 들어 유협에게 덮이고 자신도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협의 몸 뒤에서 천화가 끌어안는 자세였다. 곧 한 손이 유협의 유두를 짓눌렀다. 다른 손은 대담하게도 바로 성기를 잡았다.
“아…….”
유협의 입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터졌다. 가슴에서 오는 느낌은 찌릿하고 이상했다. 아래를 부풀리기엔 충분했다. 거기다 천화의 까슬한 손이 직접 성기를 자극하자 너무 자극이 심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던 유협은 발을 뒤로 해 천화의 종아리를 문질렀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럼에도 손이 멈추지 않았다. 유협은 그 손길에 몸을 그대로 맡겼다.
“읏…… 하”
천화가 뒤에서 귀를 깨물어 왔다. 유협은 결국 몸을 비틀어 그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천화가 목뒤를 깨물어 행동을 저지했다.
“쉬잇.”
“하읏…… 너무 이상해요.”
“괜찮아.”
천화가 유협의 목뒤를 다시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천화 역시 단단해진 게 느껴졌다. 천화가 자신의 성기를 유협의 부드러운 엉덩이에 비볐다.
“조금만 참아. 간단하게 하자.”
“간단하게요?”
유협이 물었지만 천화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움직였다.
“아…….”
유협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천화의 손바닥에 연신 자극된 귀두가 쓸려서 미칠 것 같았다. 근질근질해서 천화의 속도를 견딜 수 없었다. 더 빠르게, 더 더 자극적이게 눌러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차마 조르지 못하고 그 느릿한 간격을 견뎌 냈다. 그러자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천화 님, 천화 님…….”
유협이 애타게 부르자 천화가 귀에 입 맞췄다.
“좀 더 해 줄까?”
“네, 네.”
“알겠어.”
성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단한 손바닥이 꽉 쥐자 뜨끈한 자극이 몰려왔다. 그 상태에서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몸을 비틀어도 쾌감은 따라붙었다. 성기가 뜨끈해지더니 뭔가 분출되는 느낌이 났다.
“아! 아읏.”
유협이 허리를 비틀자 천화가 낮은 소리를 냈다. 천화의 성기는 부드러운 유협의 몸에 문질러지며 고초를 치르고 있던 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협이 사정하며 뜨거운 액체가 뿌려졌다. 잠시 헐떡이는 순간이 지나갔다. 천화가 정액이 묻지 않은 손으로 유협의 머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러나 이미 하얀 허벅지에는 끈적거리는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협이 몸을 일으키자 천화가 따라 일어났다. 이상하게 부끄럽지 않았다. 유협은 무릎걸음으로 일어나 천화를 끌어안았다.
“좋으셨어요?”
“그대는?”
“오늘은 외출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네요.”
“나도야.”
두 사람은 키득키득 웃었다.
결국 그날 아침은 목간에서 지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됐다. 씻으러 들어가서도 천화가 입맞춤과 간지럼을 멈추지 않았고, 유협도 그만두라고 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겨우 점심이 되어야 욕실에서 나왔다. 거의 잠들 뻔했는데 천화가 유협에게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뭐 하세요?”
졸린 눈을 비비며 말하자 천화가 태연하게 말했다.
“감기 걸리잖아.”
그러나 입히는 옷은 엉망진창이었다. 알몸에 겉옷을 감고, 그 위에 허리띠를 맸다. 마치 베갯잇으로 싸 둔 것처럼 말이다. 어이가 없어서 유협이 쳐다보자, 머리카락도 앞으로 당겨 단정히 땋아 주었다. 유협이 베개로 천화를 툭 쳤다.
“저를 어디로 팔기라도 할 작정이세요?”
“이 꼴을 하고 팔려 간다고? 그럴 자신 있어?”
그 말에 유협은 조용히 복수했다. 천화의 앞머리를 실컷 엉망으로 만든 것이다.
천화가 소리 내 웃었다. 순간 그 모습이 뭉클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천화가 살아 있다는 게, 그것도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이게 천화의 기분이었구나, 이해가 갔다. 유협은 그대로 털썩 천화의 무릎에 누웠다.
“피곤하니 이렇게라도 자야겠어요.”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기 위해 가만히 있자, 천화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그대로 유협에게 덮었다. 바람이 들지 않게 꼼꼼하게 이불 사면을 꼭 여며 주기도 했다.
‘귀여워.’
남들은 천화를 보면 귀엽다기보다 아름답다고 하겠지만 유협에게는 영락없이 처음 만났을 때의 천화였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눈물이 사라진 것만 빼면 어렸을 때랑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다.
유협은 천화의 허리를 안고 대뜸 뒤로 밀어 넘어트렸다. 천화가 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나쁜 짓이라도 저지르는 기분에 유협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이대로 같이 주무실래요?”
“그 모습으로?”
“뭐 어때요.”
유협이 천화를 꼭 껴안았다. 여름의 낮은 굳이 뭔가를 덮지 않아도 따뜻했다. 방금까지 물장난을 했으니 딱 좋은 정도였다. 천화의 맨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자 잠이 솔솔 왔다. 아까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다. 심지어 천화가 등을 다독여 주기 시작했다.
곤히 잠들기 직전 천화가 물었다.
“저녁에는 뭘 하고 싶어?”
“장을…… 구경하러 가고 싶어요.”
“응. 그러자.”
“응…….”
잠에 취해 가물가물하게 대답하자 천화가 픽 웃었다. 천화는 체력이 좋아 힘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덧 유협이 새근새근 잠이 들자 천화가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우스울 만큼 큼직하게 엮은 머리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조금 못났으면 좋았을 걸……. 이상한 한탄을 잠시 한 천화가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유협은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천화는 조금 더 유협을 안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존재가 찾아왔나 알 수 없었다. 유협이 귀여운 토끼처럼 느껴져 귀를 몇 번 더 깨물었더니 끙끙거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묵직한 아래가 아쉬웠지만 벌써 삽입을 조르는 건 이성적으로 아닌 것 같았다.
유협은 정말 숨만 쉬며 잤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한참 기다리던 천화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유협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불을 안겨 주고, 아래에 있는 바지와 윗도리를 대충 찾아 입었다.
“사라야.”
옷을 여미며 부르자 곧 사라가 문을 열었다.
천화의 꼴은 노골적이다 못해 색기가 뚝뚝 떨어졌지만 사라의 눈에는 허수아비가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네, 저하.”
“저녁에는 장에 간다. 적당한 사람 두세 명 추려서 준비 시켜.”
“네.”
“그리고.”
하필 인사하고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숨막히는 정적에 사라는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주인님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있던가? 아니면 저하의 눈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거나? 그렇다면 다른 기회는 보통 없었다. 운이 좋으면 그냥 보직이 변경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운이 나쁘면 저택 밖으로 쫓겨나거나, 심지어 사지 한 군데를 잃을 수도 있었다.
긴장한 사라를 무감정하게 보던 천화가 말했다.
“유협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더군.”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 목욕 시중만 들지 말도록 해.”
“네.”
뒤로 돌아서 손님방으로 가는 동안 사라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부처에게 빌듯이 손을 싹싹 비벼 가며 사라는 유협이 선하게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예민하지 않은 유협의 성격상, 사라가 무슨 실수를 하건 그냥 넘기고 잊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라는 진심으로 유협에게 감사를 저하며 손님방의 문을 두드렸다.
“계시나요.”
“들어오너라.”
마침 한태와 한석, 형원에 다른 부하들끼리 모여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자신의 검은 돌을 옮기던 한석이 힐끗 사라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너 어디 귀신이라도 봤느냐?”
사라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 얼굴을 본 한태가 혀를 쯧 찼다.
“혹시 저하가 부르셨더냐.”
“예.”
“나쁜 일이냐?”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좋은 일에 속했다. 그러나 신중하게 사람을 고를 필요는 있었다.
“저하께서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숙련된 사람 두셋 정도를 오늘 장터에 데려간다고 하십니다.”
“경호용이냐?”
한태가 묻자 사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라가 아직까지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유는 천화가 대충 지껄인 말을 찰떡같이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바둑알을 보고 있던 무장들이 일제히 모른 척하며 슬슬 빠지려 했다. 하지만 한태가 그냥 두지 않았다.
“석이는 시끄러워서 안 되고…… 너, 너, 그리고 너. 따라가거라. 적당한 거리 유지하는 것 잊지 말고.”
뽑힌 자들이 한숨을 쉬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전에 사라가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뭐에 놀라?”
“저하가…… 음 뭐랄까 조금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
“무슨 연유로?”
그 말에 형원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유협 님 때문이겠지. 다들 저하보다 유협 님을 신경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저하는 따로 지켜 줄 사람이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들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형원을 봤다.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협을 우선시하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하를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갸웃하던 그들은 저녁이 되자 그 말을 이해했다.
✾✾✾
이번엔 천화가 장난을 치지 않았기 때문에 유협은 나풀나풀한 옷에 머리를 묶은 차림으로 밖으로 나섰다. 갖춰 입은 상태는 아니었으나 소박한 옷차림 정도로는 미모를 감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청순한 느낌으로 눈이 다 시원해졌다. 그러나 유협의 미모에 놀라기에는 천화가 더 경악스러웠다.
그들의 인간 허수아비가 무려 웃었다. 그리고 무려 유협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자고 제안하며 전쟁터에서 있던 일을 몇 가지 이야기해 줬다.
“그런데 왜 나는 귀신이 붙지 않지?”
경악하는 경호원들의 존재를 무시하며 천화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 유협이 적어도 뒤에 다섯은 있다고 지적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유협은 살짝 웃었다.
“귀신의 일은 사람의 마음으로는 잘 모르지요.”
“그럼 왜 귀신이 붙는지 묘족도 잘 모르는 건가?”
“인과관계가 뚜렷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전 아낌을 받던 물건이 귀로 변하거나, 행복하게 살던 부부 중 하나가 귀신이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건 좀 이해가 되는데?”
“어느 부분이요?”
유협이 고개를 갸웃하자 천화가 생긋 웃었다.
“부부 중 하나가 귀신이 되는 일.”
그가 장난을 거는 걸 알아채고도 유협은 모른 척 물었다.
“어떻게요?”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천화가 바싹 붙었다. 그가 ‘맞아?’ 하고 물어 오며 기습적으로 유협의 뺨에 입을 맞췄다. 유협은 기가 막혀 웃었다.
“네. 저라도 그럴 것 같네요.”
“정말?”
“어느 나라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같이 묻어 준다는데, 그런 나라나 찾아볼까 봐요.”
“그대 무덤이라면 생매장도 꽤 괜찮게 들리는걸?”
천화가 진지하게 맞받아치자 유협에게 꼬집혔다.
꼬집는 걸 모든 경호원이 봤지만 썰렁한 침묵만 흘렀다.
“그럼 정말로 내게 귀신이 조금도 붙지 않았던 건가?”
“지금은 그러합니다. 한 장군님은 물론 다른 분들도 전쟁터에서 귀가 붙은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집안일로 붙은 것 같은 분은 한둘 있었는데 참견할 일이 아닌 것 같아 가만히 있었고요.”
“신기하군.”
천화가 생각에 잠길 때 유협이 말했다.
“아, 그런데 법칙 하나는 꼭 있습니다.”
“어떤 법칙?”
유협이 갑자기 천화의 손을 잡았다. 걸음도 멈췄다. 마치 명심하라는 듯이 그가 천화를 보았다.
“어렸을 때 있었던 일들 기억하세요?”
“그대와 있던 일이라면 책으로 낼 수도 있어.”
“하여튼, 저는 그때 모든 사람을 가엽게 여기라 말씀드렸습니다.”
“왜?”
“왜냐면 보통 귀들은 복수를 하러 지상에 올라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하, 단순한 법칙이지만 악인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귀신이 붙습니다.”
천화가 눈을 깜빡거렸다. 유협이 어렸을 때를 기억해 보라는 듯 천화를 툭툭 두드렸다.
“같은 전쟁터에서도 누군가는 정말 피도 눈물도 없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나마 인간성에 눈물지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 인간성에 홀려 귀신이 붙을 일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살면서 귀신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피도 눈물도 없었던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원래 잔인한 자라면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반드시 복수를 꿈꾸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 악귀가 등장하게 됩니다.”
꼭 알겠다는 말을 듣겠다는 표정으로 유협이 천화를 바라봤다. 천화는 손가락에 턱을 대고 밝은 밤하늘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마침내 그가 물었다.
“귀신에 씌면 뭐가 안 좋지?”
“다 안 좋습니다. 생기도 빼앗기고, 계속해서 나타나는 통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천천히 사람을 말려 죽입니다.”
설명하던 유협이 퍼뜩 눈을 가늘게 뜨고 천화를 보았다.
“저하, 나쁜 짓이라도 저지르신 거 아니죠?”
“응. 아마도 나쁜 짓 한 건 없을 거야.”
“다행이에요.”
유협이 순순히 대답하고 천화의 입 끝에 쪽 입 맞췄다. 천화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나쁜 짓 안 하고 살게.”
“네. 꼭이에요. 그래도 귀가 붙는다면, 제가 떼어 내 드릴게요.”
“든든하네.”
“그래도 저 믿고 막 사시면 안 돼요.”
그렇게 티격태격 하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풍등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광경을 처음 보는 유협이 어린애처럼 감탄하자 천화가 그를 이끌어 길 가운데 세웠다. 그러자 풍등과 함께 아래 펼쳐진 시장이 작게 보였다. 빛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마치 보석 같았다.
유협이 빛에 홀린 사이 천화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목에 입 맞췄다.
“마음에 들어?”
“정말 아름답네요. 이런 건 살면서 처음 봐요.”
그야 묘족은 기마 민족이니 밤에 시장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황궁에 올라가서도 장을 구경할 여유를 부리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옷 끝을 꼭 잡고 유협이 풍등 하나를 제 쪽으로 당겼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죠?”
어지럽게 쓰인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유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장사 대박을 비는 글이야.”
아. 유협이 감탄하고 풍등을 멀리멀리 올려 주었다.
“장사가 대박 나길 바래야겠어요.”
“직접 대박을 나게 하자.”
천화가 챙겨 온 주머니를 흔들며 말했다. 유협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니, 어디서 이런 돈을.”
“자꾸 상처 주는데, 그대의 연인은 부자라고.”
그대의 연인이라는 말에 유협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워낙 새하얘서 어둠 속에서도 붉어진 게 보였다. 천화는 짧게 웃고 주머니를 유협의 손에 넘겨 주었다. 생각보다 묵직한 주머니에 유협이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어디 만족할 만큼 써 보자.”
천화가 덥석 유협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협이 어어 하는 사이에 산길을 내려와 시장에 도달했다. 한 겹의 소나무 너머로 시끌벅쩍한 소리가 한결 더 가까이 다가왔다. 환한 불빛이 천화와 유협의 얼굴을 비췄다. 마침내 장에 도착하자 어린아이 한 명이 늦은 시간에도 휙 앞을 달려 지나갔다.
양 옆에 가게들이 쭉 서 있어 누군가는 물건을 사고 있었고, 처음 보는 음식을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잠결에 보채는 아이를 안고 곤란한 표정을 한 부부까지 보고 있을 때, 천화가 어깨에 턱을 툭 얹었다.
“신기하다, 그렇지?”
“천화 님은 많이 오시지 않았어요?”
“장보는 일은 보통 아랫사람들을 시키거든.”
“저 때문에 나오신 거예요?”
유협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천화는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뺨에 입술을 댔다. 유협이 쪽 소리에 놀라 옆으로 떨어지며 다급히 말했다.
“천화 님,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그래도 물어 버리는 것보단 낫잖아.”
“네?”
“방금 정말 깨물어 버리고 싶었어.”
황당한 말에 유협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화가 모르는 척 유협의 팔을 잡았다.
“빨리 가 보자.”
막상 시장에 들어서자 시끄러운 소리가 여기저기서 날아다녔다. 가격을 가지고 다투기도 하고, 서로 길을 막았다고 툴툴거리거나, 뭔가를 사 달라고 조르는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 사는 것 같은 북적한 광경에 유협은 은근히 기분이 들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자유롭게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구나.’
유협이 잊지 않고 손깍지를 끼자 천화는 또다시 깨물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그 맘도 모른 채 유협은 장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언제나 비싼 옷을 입어야 했던 유협은 다양하고 싼 물건들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머리 형태나 옷을 보고 낯설어하며 재밌어했다. 그가 앞머리를 모두 밀고, 뒷머리를 말총머리로 묶은 사람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천화 님, 천화 님.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다녀요?”
“아. 샨시족이야. 남자들은 전부 머리를 밀고 여자들은 얼굴을 가리고 다녀.”
즐거워하던 유협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이전에 느꼈던 즐거움도 조금 희석되는 것 같았다.
“왜 다들 여자를 그렇게 핍박하나 모르겠어요.”
“응?”
“묘족 눈으로 보면 남족도 이상한 거 아세요?”
돌진하는 아이를 피해 유협을 자기 쪽으로 당긴 천화가 물었다.
“어떻게 다른데?”
“혼약했다고 사람을 집에만 가둬 두는 게 어딨어요.”
“가둔다라, 어떻게 보면 맞는 생각이군.”
“그리고 여자들은 늘 착해야 해요?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나 하나요.”
“그것도 맞는 말이네.”
천화가 순순히 대답했다. 마치 자기 나라가 아닌 것 같은 시원한 대답이었다. 그게 어이가 없어서 유협이 천화의 뺨을 쭈욱 당겼다.
“이 나라 사람 아니세요?”
“맞는데,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아.”
순간 이 남자가 죽을 만큼 귀여워서 입 맞춰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동성혼이 흔하지 않다니 거리에서 입을 맞추는 게 남사스러웠다. 대신 머리를 쓰다듬자 천화가 더 편하게 쓰다듬어 달라며 고개를 숙여 왔다.
“묘족에 가족이 몇 명이나 있어?”
천화가 묻자 문득 유협의 손길이 멎었다. 가족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벌써 가슴이 철렁했다. 천화가 유협의 손깍지를 껴서 꽉 잡았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쌍둥이 누이요.”
“쌍둥이?”
천화가 유협을 달래 주려는 듯 일부로 더 놀란 척하며 물었다. 유협도 쓰린 속을 다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닮았어?”
“얼굴은 많이 닮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성격은 정반대예요.”
어렸을 때 많이 맞고 컸다고 고백하자 천화가 눈웃음 지었다.
대화를 하며 유협이 작은 보라색 꽃을 한 다발 사서 향기를 맡아 보고 천화에게 넘겼다. 천화는 향기를 맡고는 하나를 뽑아 자신의 귀에 끼웠다. 제대로 꽃을 고정하게끔 도와주며 두 사람은 계속해서 묘족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유협이 사랑한 새별이나 장로님, 할머니가 이미 세상을 떴을지 몰라도 가족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유협이 유리사탕을 천화 입에 물리고 말을 이어 나갔다.
“누이는 너무 발도 빨라서 때리러 오면 피할 길이 없었어요. 저보다 점도 잘 보고 부적도 더 잘 썼는데 분명 황실에 오면 사고를 친다고 해서.”
유협이 이번에는 꼬치를 사서 손에 들려 주었다.
“제가 대신 오게 된 거예요.”
천화가 흠 소리를 냈다.
“언제 한번 만나 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순간 유협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뛰었다. 희미한 희망이 가슴에 불을 켰다. 하지만 희망을 가졌다 포기한 전적이 너무 많아서 티가 나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저도 그런 날이 오면 좋겠네요.”
“나도.”
천화가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사탕 때문에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씁쓸했다. 당장이라도 천화가 보러 가자고 하면 끝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 뭘 사 볼까요?”
옷이나 허리띠 등 비싼 물건들은 이미 집에 있는 것들이 더 가치가 있어 사지 않았다.
대신 유협은 천화에게 사탕, 물엿, 달콤한 꿀을 바른 과일, 꼬치 등을 마구 사 주었다. 게다가 지나가는 길에 이상한 머리띠를 발견하고 미련 없이 사서 천화의 머리에 씌웠다. 덕분에 천화는 지나가는 아이들의 부러움을 남부럽지 않게 샀다.
정작 천화는 유협이 하도 간식거리를 사다 주는 바람에 손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머리띠 역시 착용한 것만으로도 황실의 위엄을 떨어트린다고 엄벌에 처해지게 생겼다. 그런데도 유협은 더 사 줄 만한 걸 찾고 있었다.
“새별이한테 줄 건 샀어?”
유협이 고개를 돌려 가며 먹을 것을 찾자, 어쩐지 여유를 잃은 천화가 말했다. 더 이상 더 쓸 손가락도 없었다. 새로 산 말에게 새별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 정도로 녀석을 아끼는 유협이었다. 다행히도 천화의 주의 돌리기는 먹혀들었다.
유협이 ‘아 맞다!’ 하며 야채 팔이에게 갔다. 그리고 토실토실한 당근에 혼을 빼앗겼다. 가끔 이렇게 변방에 사람이라는 티가 이렇게 났다.
변방에서는 사냥으로 먹고 살며 야채를 먹을 일이 적다고 한다. 그래서 활을 잘 쏘거나 매를 길들이는 방식으로 토끼, 꿩과 같은 소동물을 사냥했다고 유협이 말했다. 허나 야채는 사냥할 수 없기에 말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시장을 만나면 최대한 사거나 미리 구비하였다고 설명했다.
“천화 님, 당근이 아주 토실토실해요.”
유협이 어린아이처럼 신나하자 천화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새별이가 좋아할 거예요. 말은 당근이 없어서 못 먹으니까.”
“꼭 본인이 먹을 것처럼 기뻐하지 말고.”
“어떻게 알았어요?”
유협이 실없는 천화의 농담을 쳐내 버리고, 그 자리에서 당근만 몇십 개를 샀다. 그걸 다 둘러매고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잠깐, 주인장.”
기뻐하며 당근을 싸던 주인을 천화가 막았다.
“지금 말고, 조금 있으면 무사 한 명이 올 텐데 그 사람에게 맡기시오.”
가게를 떠나는데 유협이 물었다.
“무사는 뭐예요?”
“내 무사야. 그대가 자주 잊는 모양인데, 나는 황가의 핏줄이잖아.”
“잊은 적은 없어요. 그러고 보니 천화 님이 검을 쓰는 걸 본 일이 없네요.”
“평화로운 곳에서 검을 쓸 일이 뭐가 있겠어. 그냥 무장이다 보니 차고 다니는 거지.”
이번엔 천화가 손에 든 굳은 물엿으로 유협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별생각 없이 받아먹으며 유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이야기했는데 천화 님은 과거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신 적이 없네요. 사라랑도 전쟁터에서 만났다던데.”
“응. 사라는 뒤에서 보급을 돕는 시종이었는데 눈치가 빠르고 일을 잘해서 내가 샀지.”
“그런 거였군요. 음 그럼…… 전쟁터에서는 뭐가 제일 어려웠어요?”
천화가 흐음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겼다. 유협은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당연히 힘든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을 터다. 그 말랑한 아이가 거친 전쟁터를 돌아다녔을 걸 생각하니 더더욱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천화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기다려야 하는 거.”
“기다리는 거요?”
“응. 전쟁은 아주 지루하고 답답하게 진행되거든. 한 번 시작되면 일 년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 게 너무 지겨웠어.”
천화의 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유협이 되물었다.
“전쟁터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었단 말씀인가요?”
정확히는 그냥 싸우면 되지 무슨 전략을 짜고 함정을 파며 머리 굴리는 게 지겨웠지만 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을 거기서 보냈는지 모를 정도니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너무 지루해졌지.”
“그렇군요.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순간 천화는 누굴 말한 것인지 의아해서 되물을 뻔했다. 그러다 문득 유협이 형원이나 한씨 형제를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귀하진 않지만 어쨌든 전쟁에서 이기게 도운 건 맞았다.
“응. 비슷해.”
이번엔 유리 구슬 사탕을 하나 입에 쏙 넣어 주자 유협이 인상을 썼다.
“이건 뭐예요. 너무 달아요.”
“그대가 준 사랑의 선물 중 하나야.”
천화가 웃으며 유리 구슬 사탕이 잔뜩 든 종이봉투를 흔들었다.
“버릇 잘못 들겠네. 이리 주세요.”
싫어, 주세요! 하고 둘이 아웅다웅 장난을 치다가 유협이 문득 물었다.
“천화 님은 두렵지 않으셨어요?”
“뭐가?”
“전쟁터잖아요.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곳인데 두렵지 않으셨어요?”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물론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하셨어요.”
유협이 천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천화는 이상한 머리띠를 벗지 않은 채로 더 쓰다듬어 달라고 고개를 숙였다.
“천화 님, 이제는 전쟁 때문에 힘든 것 없으시죠?”
종종 천강이 떠올라 지긋지긋한 유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면 천화 역시 전쟁의 환각에 시달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천화는 고민하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힘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허세를 부리는 건가? 유협이 모른 척 걱정했다.
하지만 천화의 머릿속에 전쟁이란 어딘가에 쳐들어가 보석을 긁어모으는 행위에 가까웠다. 부가적으로 사람이 죽고는 하지만, 어차피 죽으라고 만들어진 판 아닌가? 다행히 이런 소름 끼치는 말을 내뱉지 않은 눈치는 있었다.
“그래도 전쟁 때 힘들었던 적은 있었지.”
“언제요?”
“그대 생각이 날 때.”
천화의 얼굴에 우울함이 비쳤다. 유협은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두드렸다.
“이제 여기 있어요.”
“응. 잘 알지. 그래도 못 보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정말 잘 지내는지 숨 막히게 힘들었어.”
“천화 님.”
유협이 찡해 천화를 껴안았다. 천화는 간식을 잔뜩 든 손으로 어설프게 유협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천화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천강이 그렇게 쉽게 죽어서 아쉬워.”
“저는 그렇게라도 죽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은 남은 시간 동안 배도 타고, 다른 꽃도 사서 서로의 머리에 꽂아 주고 놀다가 먹다 남은 간식들을 호수에 버린 뒤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만하면 그만 돌아갈까?”
“좋아요.”
산을 다시 타고 올라가는 동안 천화는 머리띠를 벗지 않았다. 유협도 너무 눈에 익어 그가 머리띠와 꽃 장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다음번에는 정말로 술을 같이 해요.”
“응, 좋아.”
천화가 사근사근 대답했다.
두 사람이 알록달록한 꽃을 꽂고 도착하자, 문지기가 얼굴에 근엄한 얼굴로 문을 열어 주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오늘 수고 많았어.”
“천화 님도요.”
아무도 없는 사이 유협이 재빠르게 천화에게 쪽 입을 맞췄다. 천화가 피식 웃더니 유협의 턱을 잡고 고개를 꺾었다. 곧 낮은 신음과 부드럽게 앓는 소리가 났다. 진하게 입을 맞춘 천화가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어 냈다.
유협이 한숨을 쉬고 노려보자 오히려 이마에도 쪼개듯 입맞춤이 돌아왔다.
“남들이 다 보고 있을텐데.”
“괜찮아. 다들 귀찮게 할 생각 없을 거야.”
“?”
천화가 유협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유협이 아무 생각 없이 펄럭펄럭 소매를 휘두르며 자리를 뜨는 모양새가 너무 귀여웠다. 작은 동물 보듯이 그 모습을 구경하던 천화는 세 명이 돌아오는 인기척을 듣고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당근은?”
“잘 챙겼습니다.”
“마구간 근처에 챙겨 둬.”
부하들은 상관인 천화가 머리에 하얀 꽃을 꼽고 이상한 머리띠를 끼고 있었지만, 못 본 척하며 자신이 맡은 바를 수행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반면 유협이 한들한들 안채에 들어갔을 때는 난리가 났다. 사라는 일부러 하고 온 건지 아닌지 헷갈려 일단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뜬금없이요?”
‘모르시는구나.’
사라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유협의 머리카락에서 꽃송이를 한 송이 뽑아 들었다.
유협은 그제야 기겁하며 머리에서 꽃을 전부 다 떼어 내느라 고생했다. 머리가 길어 섞여든 꽃이 워낙 많아 다른 시종까지 도와야 했다. 결국 밤이 늦어져서야 겨우 몸을 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고생을 하고도 눈이 감기지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천장을 바라보던 유협은 천화를 생각했다.
‘같이 자고 싶다.’
옆에 따뜻하게 붙어 있는 온기가 없자 갑자기 신경 쓰였다. 평생을 혼자 살아왔는데 단 하루 만에 천화가 없는 게 이상했다. 그 생각에 몸을 뒤척거리다 유협은 간신히 잠들었다.
—3권에서 계속
다정도 병인가 하여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