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백유협은 본래 묘족 출신이었다. 묘족은 영혼과 신의 세계를 중시하며 주술을 믿는 변방의 소수 민족 중 하나이다.
반면 중앙을 재패한 남족은 무술과 정치, 철학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였으나, 주술에 약한 피를 가졌고 귀신과 영혼을 두려워했다. 소수 민족을 학살하고 흡수하기로 유명한 남족이 묘족을 살려 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남족이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칭한 지 2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묘족은 남족의 주술사가 되어 표표히 살아남았다.
대신 일정 나이가 되면 그해 묘족 중에서 가장 맑은 기운을 가진 이가 황궁에 들어왔다. 그는 남족을 위해 주술을 쓰고, 귀신을 내쫓고, 밝은 기운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1년을 빠듯하게 채워 의무를 다하면 그 후에는 자신의 재량껏 돌아갈 수 있었다.
묘족 소년 유협이 남족의 수도 청원에 올라온 까닭도 같았다. 변방에서만 살던 유협은 처음으로 대도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마차가 달릴 수 있도록 정비된 넓은 길과, 천막과 천막 끝이 맞닿아 끝이 보이지 않는 장터, 화려하게 치장하고 시끄럽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때문에 모래 먼지가 올라왔다.
비단옷을 선녀처럼 차려입은 여자들과 부채를 허리춤에 꽂고 떵떵거리는 남자들,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종들이 색달랐다.
묘족과 다르게 남족의 남녀는 누구나 공작새처럼 꾸미길 좋아했다. 여인은 물론이고, 남자도 귀걸이를 끼었으며 기름으로 머리를 빗어 넘겼다.
묘족이 사는 거친 변방에서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 묘족은 직접 실을 잣아 옷을 입었고, 금은보화는 모두 팔아 공평하게 양과 말로 바꾸어 나눴다.
아무래도 이렇게 수수하게 살다 보니 유협이 상경했을 당시, 그는 머리를 꽈배기 모양으로 땋은 묘족식 모양이었고 남색의 평복을 입고 있었다. 청원에서는 거렁뱅이로 보일 만한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남족의 취향에 맞을 만큼 화려한 게 있었다.
바로 백유협의 외모였다.
유협은 피어나는 나이로 아직 소년과 어른의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얼굴은 귀족처럼 깨끗하고 하얬으며, 입술은 봉숭아로 물을 들인 것처럼 붉었다. 개중 가장 시선을 끄는 건 묘하게 올라간 눈이었는데,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보면 어쩐지 넋을 잃게 되었다.
남족이 생각하는 묘족은 거친 사투리를 사용하고, 모래바람을 맞아 피부가 두껍기 그지없는 유목민이었다. 하지만 청원에 갑자기 등장한 소년은 비싼 백합 다발과 같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물론 상인들까지 힐끗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구경거리가 된 유협은 남족 특유의 유려한 발음이 왁자지껄하게 들리는 시장통에 정신이 쏙 빠진 상태였다. 이런 곳에서 산다면 평생을 살아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런 순진한 생각이 보여 주듯이 유협은 호기심이 많은 천상 소년이었다. 한 가지 더 특징적인 사안은 그가 묘족 중에서 유달리 재주가 빼어났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더해지자, 유협은 묘족 대표로 입궐하는 걸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원으로 가는 일이 기다릴 정도였다. 남족에서 주술사로 일했던 어른들에 따르면 남족은 별천지와 같다고 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해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유협이 입궐하기 전, 역시나 입궐한 경험이 있는 장로님이 그를 불러 설명했다.
‘남족은 자기 뒤에 있는 귀신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둔해. 그러니 묘족을 더욱 대접하지. 아마 궁에서 입지가 섭섭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장로님은 남족의 궁이 아주 크고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그만큼 살벌하다고 말했다. 남족의 황제가 계속해서 묘족들을 찾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유협이 이해하지 못하자, 장로님은 친절하게 황제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황제는 절대 권력을 가졌고, 이 때문에 남족은 서로를 해칠 수밖에 없단다. 궁에는 피바람이 매번 불고 이익에 어긋나면 친구도 곧바로 적이 되지. 내가 본 바로 남족들은 금전 한두 개로도 인심이 달라지기 때문에 섣부르게 판단하면 안 된다.’
또한 황제의 시선을 받기 위해 서로를 죽음에 몰아넣는 것을 망설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렇게 주술을 부리고 귀신을 내쫓아도 항상 원기가 흉흉하게 몰려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얌전히 듣고 있는 유협의 머리를 땋아 주며 장로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나 주의해야 하는 곳은 후궁전이다. 나랏일이라면서 궁에는 잘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만 후궁에서 생기는 잡일은 거의 떠맡아야 할 거다.’
그 말에 유협이 고개를 갸웃했다.
‘후궁전이면 여자들이 있는 곳 아닌가요?’
남족은 여자를 남자들보다 낮은 계급으로 취급한다고 했는데? 남족은 철저하게 부계 사회였다. 그런데 왜 여인들이 무섭단 말인가?
‘그렇지. 원래 약자들의 한이 가장 무서운 법이란다.’
남족은 황제의 핏줄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때문에 아이를 낳기 위해 일부다처가 당연했고, 한 번 황제와 결혼하면 영원히 그의 후궁으로 남아 후궁전에 갇혀 살아야만 했다. 심지어 가족을 만나는 일도 요원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부고를 들어도 후궁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남족의 황제는 자신의 후궁들이 ‘죽어서도 남족의 후궁’이길 원했나 보다. 그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많은 혼령이 후궁전에 몰려 있다고, 장로님이 설명했다.
귀신을 보지 못하는 남족들마저 후궁전의 특정 몇몇 곳에서는 섬뜩한 기분을 느낀다나. 유협이 맡은 소임 중 하나는 후궁전에 몰려 있는 원기들이 악한 기운을 불러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장로님은 모래바람에 거칠어진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협아, 가여워어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라. 후궁에 남은 귀신들은 평생 남의 의지로 살아야 했다. 애석하게 여겨다오. 정말로 그곳을 떠나고 싶었던 이는 이미 다 하늘로 올라갔고 남은 건 슬픈 원한들뿐이다.’
장로님의 당부는 유협의 마음속에 기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세상의 권세를 머리에 이고 사는 여자들. 그 누구보다 화려한 인생을 살지만 한쪽에서는 새장 속의 새와 다를 바 없는 삶 아닌가. 묘족의 사람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었다.
영혼의 덧없음을 알고 있는 묘족 사람들은 안타까운 이들을 돕고, 모든 게 자연의 이치로 돌아가는 일을 중요시했다.
그 해, 더운 사막의 바람을 맞으며 처음 들은 남족의 속사정은 유협에게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온갖 금은보화를 준다고 해도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리라.
그래서였을까, 유협이 여섯 번째 황자 천화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날은 유협이 건녕궁에 있는 원귀를 마주한 날이었다. 종종 원한이 깊은 귀신들은 자신이 죽던 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처럼 강력한 악귀는 남족의 눈에도 나타나 그들의 심경을 어지럽혔다.
귀신이 나타난 다음 날 아침, 건녕궁에 거주하는 여귀인과 우귀인이 몸을 떨며 앞다투어 유협을 불렀다. 어젯밤 새벽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귀신을 목격한 여인 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보았다. 두 발은 허공에 뜬 채로 목을 꺾고 있었다. 목이 졸리는 소리를 내면서 문 앞을 돌아다녔어. 내 방과 우귀인 방 앞을 계속 번갈아 가며 기웃거리더라.”
여귀인이 손수건을 쥐어짜며 떨었다. 옆에 있는 궁녀가 떨리는 손에서 얼른 찻잔을 잡아 치웠다. 우귀인은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목에, 목에 비단 끈이 감겨 있었다. 머리카락이 다 쏟아져서 얼굴을 볼 수 없었어…….”
그 순간 우귀인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화비요. 분명 화비야. 제 아들이 여기 있는 줄 알고 찾으러 온 거야.”
“정말이냐? 정말로 죽은 화비가 제 아들을 찾아서 건녕궁까지 온 게야?”
유협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두 여인이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비는 살아생전에도 대단하고 포악한 성질로 유명했다. 유협은 두서없이 떠드는 여자들을 보며 조용히 마시던 찻잔에서 입을 뗐다.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화비의 아드님이신 육 황자께서 여기 계십니까?”
“그러네. 2년 전에 난이 일어나고 멸문당한 후에 화비가 자살하고……. 그 아들만은 목숨을 건져 우리 궁에서 거두었지.”
“그게 큰 문제라도 되겠나? 내 말은…… 귀신이 우리 궁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는 말이다.”
평정을 잃은 목소리에 유협은 나이대답지 않은 침착함으로 대답했다. 묘족은 날 때부터 귀신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일에 있어서 떠는 일은 없었다.
“살아생전 애착을 가지고 키웠다면 죽고 나서도 본능적으로 알 수도 있습니다.”
유협의 덤덤한 말에 두 여인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순간 유협은 뭔가를 눈치챘다. 두 사람은 과할 정도로 화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여귀인과 우귀인은 화비가 죽고 나서야 입궁했다. 그러니 딱히 원한을 살 일이 없었다면 아들 이야기에 이렇게 무서워할 리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협은 결정을 내렸다.
“육 황자님을 봬야겠습니다.”
“그게 도움이 되겠는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도 우귀인과 여귀인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원귀가 정말로 아들을 찾으러 건녕궁을 찾은 것이라면 여인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육 황자께서 같은 핏줄이시라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유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쉬이 동의하지 않았다. 몇 번의 설득 끝에야 여인들은 망설이다 위치를 알려 줬다.
“꼭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게나. 지금은 아마 정원에 있을 거야.”
여귀인이 궁녀에게 손짓하자 여인이 재빠르게 일어났다. 유협은 두려워하는 귀인들을 안심시킨 후에 궁녀를 따라서 궁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좁은 궁이었지만 안에는 여인들을 즐겁게 할 만한 정원이 갖춰져 있었다. 낮고 붉은 구름다리를 몇 번 건너자 작은 호수가 나왔다.
유협은 곧 호수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인형을 발견했다. 여덟 살 남짓 됐을까. 옅은 갈색 머리의 작은 뒤통수가 눈길을 끌었다.
남족들은 나이가 차면 아무리 어린 남자아이라도 머리를 뒤로 빗어 관으로 고정했다. 그러나 아이의 머리카락은 풀려 있었다. 아직 어려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빗겨 주지 않았는지 머리카락이 엉킨 채 그대로였다.
뒷모습만 봐도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표시가 났다. 난감함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뒤돌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협은 여태까지 만났던 황자, 황녀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제멋대로에 곱게 큰 티가 팍팍 나는 아이들이었다.
육 황자는 과연 어떨까? 그의 어머니가 후궁에서 세를 불렸을 때 매번 피바람이 불었다니 성격이 좋진 않을 성싶었다. 저번에 한 황자에게 뺨을 맞을 뻔한 이후로 유협은 황궁의 아이라면 치를 떨고 있던 참이었다.
안내를 끝낸 궁녀가 조용히 뒤로 물러나자 더 이상 망설일 수도 없었다. 유협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육 황자에게 다가갔다. 그 소리에 육 황자가 뒤를 돌았다. 순간 유협은 숨을 들이켰다.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만한 날이었다.
황자는 놀랄 만큼 눈이 크고 동그랬다. 아직도 젖살이 잡힌 뺨에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이 보인다. 피부가 어찌나 하얀지 잘못하면 분을 발랐다고 오해할 것 같았다. 어머니 화비가 후궁 내에서 제일가는 미모로 유명세를 떨쳤다더니, 그 얼굴을 그대로 물려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유협의 눈을 사로잡은 건 어린아이의 말도 못 할 미모가 아니었다. 인형같이 생긴 눈이 텅 비어 있었다. 섬세하게 뻗은 속눈썹 안에 숨어 있는 갈색 눈동자가 놀랄 만큼 무감각했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협은 황궁의 예의에 따라서 무릎을 꿇으면서도 얼떨떨했다. 황가에 이런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아이가 과연 움직이기나 할까 걱정마저 들었다.
“육 황자를 뵙습니다.”
역시나 육 황자는 대답이 없었다. 힐끗 올려다보니 어린 얼굴에 얼핏 당혹감이 비쳤다. 그제야 유협은 육 황자가 이런 식으로 인사를 받은 게 한참 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년 전 어머니가 죽고 난 후로 설마 아무도 아이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았던 것인가? 아니면 설마 백치인 건가?
유협이 퍼뜩 생각을 떠올렸을 때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라.”
유협은 천천히 고개를 일으켰다.
유협은 늘씬하고 키가 큰 소년이었다. 허리를 들어 올리자 황자가 고개를 올려야만 시선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이를 눈치챈 유협이 먼저 고개를 살짝 내려 황자와 눈을 마주쳤다.
유협은 일단 아이가 멀쩡한지 확인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대화의 물꼬를 텄다.
“황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소인 유협이라고 합니다.”
“…….”
“잉어를 보고 계셨네요.”
“…….”
“날이 덥지 않으십니까?”
괜한 잡담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여름에 들어서는 계절에도 육 황자는 목까지 올라오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 역시 길어 손등까지 덮었다. 아무리 어머니가 죽고 귀인들의 궁전에 얹혀사는 신세라지만 궁분까지 나오지 않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갑자기 번쩍하고 단서가 하나씩 맞춰졌다.
말하지 않는 모습, 긴 옷, 심각하게 긴장한 얼굴.
‘학대를 당하고 있나?’
유협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모르게 천화에게 손을 뻗었을 때였다. 유협의 하얀 손이 자신을 향하자 아이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 하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그대로 헛디뎌 연못으로 떨어져 나간 게. 얼떨결에 육 황자를 잡으려 한 유협 역시 균형을 잃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협은 아이를 안은 채로 연못에 풍덩 빠졌다.
다행히 연못은 딱히 못이라고 부를 만큼 깊지 않았다. 겨우 잉어 몇 마리를 위해서 만들어진 못이라 서 있으면 허벅지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이 정도면 육 황자의 목까지 올라오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는 유협에게 안겼을 때 잔뜩 굳어 버린 아이의 몸이었다.
마치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몸에 유협은 자꾸만 미끄러지는 황자를 제대로 일으키느라 애를 썼다. 결국 두 손을 겨드랑이 밑에 넣어 들어 올린 후에야 황자를 물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콜록, 콜록.”
“괜, 괜찮으세요?”
유협 역시 막힌 숨을 내뱉으며 묻자 황자가 도리질 쳤다. 황자를 들어 올린 자세가 심히 무엄해서 유협 역시 머쓱해지고 말았다. 바닥에 작은 아이를 내려놓자 경계심이 독처럼 바짝 오른 눈이 그를 쳐다본다.
자기도 모르게 황자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즉각 처벌까지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권세를 잃은 꼬마 아이가 부릴 수 있는 행패는 아니었다. 아이는 그저 유협이라는 낯선 인물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길을 잃은 양의 새끼 같았다.
너무나 딱한 모습에 유협이 가능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어 물었다.
“황자님 괜찮으세요?”
“…….”
“소인의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박고 석고대죄라도 해야 하나?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던 순간이었다. 물에 젖어 위로 올라간 소매에서 유협은 이상한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이의 하얀 피부 위에 빨간 점들이 여러 개 올라와 있었다.
마치 뾰족한 무언가로 살을 찍힌 것 같았다. 순간 멍하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눈에 힘을 주고 보자 팔뚝 쪽으로 울긋불긋한 멍 자국이 보였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황자님.”
유협이 돌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물에 젖고 날도 더우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이 물에 빠진 순간부터 우왕좌왕하던 궁녀는 그 말을 듣고 거의 본능적으로 육 황자에게 손을 뻗었다. 데려가려는 손짓에 육 황자가 뻣뻣하게 굳는다.
그럼 그렇지. 궁녀 역시 황자를 함부로 대했음이 틀림없었다.
유협이 중간에 끼어들어 그 손길을 막아섰다.
“황자께서 갈아입을 옷을 좀 부탁드립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닙니다, 봐야만 하는 게 있습니다.”
유협의 단호한 말에 궁녀는 물론 황자까지 놀란 눈치였다. 궁녀는 어쩔 줄 모르고 유협만 쳐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옷을 준비하러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유협은 쫄딱 젖은 채 눈만 굴리는 황자를 보았다. 어른을 두려워하고, 온몸에 붉은 흉터가 있고, 방치한 태가 나는 황자라. 무엇이 귀신을 불러오는지 뻔했다.
육 황자의 처소는 우귀인의 방 옆이었다. 작은 방은 말이 좋아 방이었지 거의 헛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벽과 흔해 빠진 의자 하나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불이 개켜져 있는 침대마저 없었다면 그저 휑하니 빈 궁으로 보였으리라. 아마도 혼자가 되고 나서는 이 처소에서 혼자 쭉 살아온 모양이었다.
자신의 방인데도 육 황자는 어색하게 유협을 힐끗거렸다. 젖은 갈색 머리가 아마색으로 반짝거리며 빛났다. 아까의 텅 빈 얼굴에 어린아이다운 경계심이 올라오자 그나마 생동감이 있어 보였다. 황자다운 기품은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 같긴 했다.
방에는 궁녀가 준비해 둔 수건과 옷가지가 있었다. 유협은 수건을 먼저 챙겼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육 황자는 또다시 대꾸가 없었다.
그 침묵이 익숙해진 유협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황자의 몸이 대번에 뻣뻣하게 굳었다. 불시에 날아들 손길이 두려운 것처럼 황자는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황자의 머리에 떨어진 건 폭, 소리가 나는 부드러운 수건이었다.
유협은 천천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갈색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기 시작했다. 힘이 너무 들어갈까 봐 한껏 힘을 빼서 오히려 너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물기를 터는 게 아니라 마치 황자를 조물조물 만지고 있다고 착각할 지경이다.
하지만 행위에 집중한 유협은 자신의 손길이 어떤 느낌인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황자의 어깨가 움칫 떨리자 유협이 깜짝 놀라 물었다.
“불편하십니까?”
“……아니.”
유협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빠르게 사라졌지만 육 황자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린아이의 창백한 얼굴에 명백한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유협은 누군가 이 아이를 보고 따뜻하게 미소 지은 게 까마득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가련한 마음이 마구마구 들었다.
어린아이는 이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곤란한 모양이었다. 순진함으로 범벅된 얼굴을 보자니 마음이 찡해져 왔다. 유협은 수건을 털어 내며 황자의 마음을 모르는 척 말했다.
“이제 머리는 대충 마른 것 같습니다. 옷시중을 들겠습니다.”
황자는 뻣뻣하게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옷시중 역시 누구도 들어준 적이 없는 듯했다. 아주 아이가 죽을 날을 받아 둔 것처럼 함부로 대했구나.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까지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면서도 유협은 속으로 ‘그깟 남족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은 인사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다.
소년은 젖은 옷자락을 무시하고 무릎을 꿇었다. 우귀인의 다른 방과 다르게 황자의 방은 바닥에 어떤 것도 깔려 있지 않았다. 거의 흙바닥에 무릎을 꿇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이동 가옥인 게르에서 살아온 유협에게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릎을 꿇자 아이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더 잘 들렸다. 그제야 유협은 물에 빠져 황자가 무척 놀라고 지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늘씬하고 생기 넘치는 소년과 다르게, 거의 먹지도 못하고 잠자리도 편치 못한 아이에게는 너무 힘든 시련이었을 터다. 순간 안타까운 마음이 울컥 들었다. 결국 유협도 어쩔 수 없는 묘족이었다.
남족의 사회는 화려하긴 해도 인정머리 없는 곳이었다. 어찌 어머니를 잃고 혼자가 된 아이를 이렇게 박대하고 홀로 둔단 말인가. 권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후궁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아직 부모님의 품이 필요한 아이였다.
심지어 궁녀가 새로 갈아입으라고 가져온 옷마저 낡아 빠지고 시류에 맞지 않게 길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이.
유협은 울적해지는 기분을 숨기고 아이가 입고 있는 옷에 손을 올렸다.
“소인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육 황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잠잠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얀 손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유협의 손길은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아이의 옷을 벗겼을 때는 그만 숨을 흡 들이키고 말았다.
유협의 예상대로였다. 아이의 몸은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었다. 또래보다 작다는 정도로 생각했던 몸은 도저히 황자 같지 않았다. 빼빼한 몸통은 말라서 갈비뼈가 드러났고, 허리는 한 줌이 될까 말까였다. 비쩍 마른 모습에 황가의 품위를 찾을 수 없었다. 되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팔뚝 위로는 피멍이 붉게 번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팔뚝을 세게 꼬집은 것 같았다. 어린아이를 어떻게 마구 당겨 대고 함부로 굴었을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여인네들의 악독한 씀씀이에 멍해져 있던 유협은 문득 아까 보았던 붉은 점이 팔뚝뿐 아니라 가슴, 배에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황자 저하, 이 점은……?”
흰 살 위에 수놓인 작은 구멍들을 보던 유협은 순간 번개같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후궁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궁녀를 괴롭히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바늘로 찌르는 것이었다. 자신이 떠올리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유협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팔뚝을 잡아 이리저리 뒤로 돌렸다. 순간 육 황자가 밀어 내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잡고만 있었을지도 모른다. 육 황자는 아프게 자신을 잡은 유협을 노려보며 팔뚝을 꼭 감싸 안았다.
망연자실하게 그 모습을 보던 유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하, 어머니가 기억나세요?”
“…….”
“조금이라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몰라.”
“……그렇군요.”
어젯밤, 귀신이 나타나 애타게 찾았던 아들이 여기 있었다.
유협은 무릎을 꿇은 채로 황자의 팔뚝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황자가 어색하게 몸을 빼려고 할 때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저하, 이곳이 싫으신가요?”
“…….”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더 이상 누군가 저하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시나요?”
“……응.”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수 적은 꼬마가 한 것치고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유협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협은 아이가 자신의 기분을 말하기 두려워한다는 걸 눈치챘다.
“황자님, 황자님.”
그가 두 팔을 잡고 흔들자 꼬마 아이가 서서히 눈을 들어 마주쳤다. 죄라도 지은 듯 낮게 가라앉은 낯에 유협은 도리어 밝게 말했다.
“제가 묘족인 건 아시죠?”
“…….”
“모르셨나요?”
황자가 눈을 깜빡거렸다.
몰랐나 보다. 이미 후궁전의 다른 황자, 황녀들은 유협을 찾아와 재주를 보여 달라고 조르다 못해 지루해 나가떨어진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소식을 전해 주지 않는 육 황자는 묘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더운 날씨에도 긴 팔에 아랑곳 않고, 멍하니 잉어를 바라보던 모습…….
‘가엽게, 불쌍히 여겨라.’
장로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이런 아이라면 천 번은, 아니 만 번은 불쌍하게 여길 수 있었다.
유협은 빙그레 웃었다.
“묘족은 신비한 재주를 부릴 줄 안답니다. 제가 재주로 저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아.”
생각보다 대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그리고 황자는 잠깐 꼬물거리며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싫다고 말했는데 손찌검을 하거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하지 않자 황자는 마음을 놓은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눈치를 보는 건 여전했지만 아까처럼 기죽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유협은 괜히 더 방긋방긋 웃으면서 황자를 마저 안심시켰다.
“제가 재주를 부리는데 황자님께서 꼭 주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빌려주실련지요?”
“무엇인데?”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담은 목소리가 작게 물었다.
유협은 고개를 숙여 황자에게 얼굴을 바싹 붙인 채 작은 귀에 속삭였다.
“머리카락입니다.”
✾✾✾
유협이 머리카락과 짚 인형을 가지고 나왔을 때, 여귀인과 우귀인은 벌써 하얀색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머리까지 편하게 묶은 여인 둘은 유협의 말대로 궁녀를 한 명씩만 대동한 채 귀신이 서성였던 문가에 도착했다.
어젯밤 한바탕 소동을 겪어서 그런지 두 사람 모두 다 얼굴색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언제 귀신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육 황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까딱하면 안타까움을 느낄 법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두 여인이 작은 아이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아는 유협은 안타까움보다는 조용한 적개심을 느꼈다. 아이는 유협이 궁에서 만났던 중 가장 순수한 생명체였다.
그런데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토록 구박하다니. 그러다가 아들의 안위를 걱정해 땅 밑에서 올라온 어머니가 무서워 죽을 지경인 것이다. 자승자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두려워도 귀인은 귀인이라고, 곧 죽어도 기품이 넘치는 태도로 여귀인이 물었다.
“그래, 어찌하여 그 흉측한 것이 나타나는지 알아냈는가.”
유협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 생전에 설움을 풀지 못한 원한이라 추측됩니다. 원혼만 풀어 주면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물론 곧이곧대로 ‘귀인분들이 귀신의 하나 남은 아들을 학대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순간 두 여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유협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원한만 풀면 바로 성불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한을 풀어 주시게나.”
“그 부분 때문에 마마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여귀인과 우귀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소년 점술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품을 뒤져 부적 두 장을 꺼냈다.
“귀신에게 보이지 않는 부적입니다.”
“그것이 왜 필요한가?”
“마마님 두 분이 이 궁에 사시기 때문에 귀신은 마마님들의 냄새를 알고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서 부적을 갖고 계시는 게 좋습니다.”
여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 부적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 것 아닌가.”
“오늘 새벽에 필요할 것입니다. 귀신을 쫓기 위해서 인형 밟기를 할 것입니다.”
“인형 밟기……?”
두 여인이 의아해 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런 둘에게 유협이 알려 준 방법은 이러했다.
두 여인이 각각 자신이 머무는 방의 문지방 위에 선다. 각각 남쪽과 동쪽을 마주 보는 방향이다. 짚 인형을 먼저 남쪽에 있는 여귀인이 가져간다. 그리고 ‘동쪽으로 가거라’ 외치며 세 발자국을 걸어 인형을 두고 돌아온다.
그러면 다시 우귀인이 인형 쪽으로 다가가 ‘동쪽으로 왔다’라고 말한다. 그 후 일다경이 지나면 다시 우귀인이 세 발자국 걸어 인형을 남쪽으로 놓으며 ‘남쪽으로 가라’ 외치고, 여귀인이 인형을 가져가며 ‘남쪽으로 왔다’고 말하는 것을 반복한다.
그동안 귀신은 인형을 쫓아서 동쪽과 남쪽을 반복해서 가다가, 닭이 울 때면 저절로 인형을 들고 사라질 것이다.
얼이 빠진 여인들을 보며 유협은 이 방법밖에 없다고 신신당부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귀신이 인형을 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인형이 아니라 마마님들을 찾아다닐 수 있으니 반드시 시간과 걸음에 유념하셔야 합니다.”
멍하게 유협의 설명을 듣던 여귀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지금 이걸 귀신 앞에서 하란 말인가?”
“본디 인형 밟기는 원한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귀신이 이를 가져가게끔 하는 방법입니다. 지금 이 인형 속에는 중요한 분의 머리카락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여귀인의 얼굴에 얼핏 분노가 지나갔다. 감히 천한 묘족 주제에, 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억울해도 방법이 없었다. 정말로 화비가 올라왔다면, 그리고 자신들이 한 행각을 전부 보았다면 믿을 구석은 이 묘족 꼬마밖에 없었다.
“궁녀를 시키면 되지 않아?”
귀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지 얼굴이 퍼렇게 질려 있던 우귀인이 물었다. 그러나 유협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미 귀신이 마마님들의 냄새를 알고 있기에 궁녀로는 되지 않습니다. 만약 두 분이 아니라면 피만 더 흐를 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말씀드린 대로만 하신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공포에 질린 여인들에게 유협이 떠올랐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러나 사실 이쪽이 본심이었다.
“아 그리고, 앞으로 이런 상황을 없애기 위해서는 제사를 지어 주는 게 좋습니다. 귀신의 남은 핏줄이 다음 해에 같은 날 진수성찬을 대접하게끔 하고, 명패를 모시게 해 주십시오.”
“……정말 그러면 사라지는가?”
“애초에 핏줄에 남은 미련이 붙은 귀신입니다.”
차마 우귀인, 여귀인이 육 황자를 학대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잘 먹이고 잘 돌보라는 말은 알아들었는 두 귀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유협은 짐짓 자신이 한 말의 뜻을 모르는 척해야 했다.
새벽이 되자 점점 더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유협이 뒤에서 지켜본다고 하더라도여인네들이 귀신을 대면하는 일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다. 하필 그날따라 달도 뜨지 않는 밤이었다.
유협은 부적을 그려 붙이기 위해 육 황자의 방에 있었다. 부적에 이름을 써야 했기에 물었더니, 천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쁜 아이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유협은 곤히 잠든 아이를 보았다. 귀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두 여인이 그날 저녁 한아름 먹을거리를 보내왔다. 천화는 그간 굶었던 만큼 어마어마하게 먹었다. 작은 몸에 어디로 다 들어갈까 싶게 포식한 후, 꾸벅꾸벅 조는 것을 유협이 안아다 침대에 눕힌 참이었다.
“……어머니가 올라오셨어요, 저하.”
잠든 얼굴이 곤했다. 앳된 얼굴을 바라보던 유협이 속삭였다. 비록 원한을 가지고 나타나 악령이 되었으나, 어쨌든 여인이 올라온 이유는 천화였다.
“누군가는 지하에서도 저하를 아끼고 있어요.”
어린 것의 처지가 씁쓸해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처음 만난 아이지만 차마 매정하게 굴기가 어려웠다. 유협은 속으로 천화에게 사과했다.
‘어머니를 뵙지 못하게 해서 미안해요.’
만약 화비의 원한이 제 아들을 보았다가는 천화에게 더 큰 위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살이가 그렇게 논리적으로만 정리되는 게 아닌지라, 유협은 아이의 유일한 가족을 해치는 기분이었다.
‘대신 다시는 그 사람들이 당신 아들에게 손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속으로 화비에게 약속한 유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적을 그린 유협은 대문에 크게 붙이고 나서 숨을 내쉬었다.
두 귀인이 천화에게 한 일에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같은 날 새벽 두 여인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끄윽끄윽 거리는 소리를 내는 귀신을 마주하자마자 품위도 잊고 그만 졸도를 하고 말았다. 유협은 그 모습을 보고 아무도 보지 못하게 빙긋 웃었다.
그리고 품 안에 인형을 밖으로 던지며 ‘잘 가시오’ 하고 속삭였다. 귀신은 그 인형의 방향대로 사라졌고, 유협은 화비의 조촐한 마지막에 작별 인사를 더했다.
사실 여기에는 유협만 알고 있는 작은 비밀이 있었다. 애당초 두 여인이 화비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즉 애초에 인형 밟기는 유협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우귀인과 여귀인을 방 밖으로 끌어내 귀신을 보게끔 만든 것은 육 황자를 위한 작은 복수였다.
유협의 간단한 술수가 통했는지, 그날 이후로 우귀인과 여귀인이 작당하여 아이를 해치는 일은 사라졌다. 그러나 유협은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특히 그날 밤 귀신에게 했던 약속이 마음에 묵직하게 걸렸다.
유협의 처소는 후궁전에 가장 인접한 작은 전각이었다. 원칙대로라면 평민 신분인 그는 시종들의 처소에 머물러야 했지만 묘족은 손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후궁전에 가까이 있는 이유는 후궁에 나타나는 귀신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은 후궁전에 들어가 별다른 일이 없는지 순찰을 도는 게 그의 일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유협은 평소처럼 시종의 부름에 깨어났다. 하지만 벌떡 일어나지 않고 어떤 고민에 빠져 천장만 쳐다보았다.
가까스로 일어나 흐트러진 긴 머리를 정리하고, 하얀색 수가 들어간 남색 정복을 차려입을 때도 유협은 한 생각에 푹 잠겨 있었다.
‘육 황자를 다시 한번 만나야겠다.’
사실 무엄한 동기를 가진 마음이었다. 동정 때문이 아니라고 완전히 말을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누가 감히 남족의 황자를 동정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만으로도 치도곤을 당할 일이었다. 그러나 천화는 여태껏 봤던 남족과는 달랐다.
처음 천화를 만났을 때 하얗고 무표정한 그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겁에 질려 눈치를 살피는 모습도,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먹는 모습까지……. 마치 길거리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딱했다.
동백기름을 발라 머릿결을 정리해 주던 시종이 질문할 때까지 유협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은 머리를 올려 드릴까요?”
시종이 관을 보여 주며 물었다. 늘 끈질기게 하는 질문이었다. 머리를 올리지 않는 남자도 있다는 사실을 시종은 통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유협은 늘 그렇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공자, 머리를 올리면 더욱 품위 있고 멋있어지실 거예요. 지금도 묘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멋있으세요.”
돌려 까는 건가?
혼란에 빠져 시종을 봤지만 진심으로 칭찬을 한 모양이었다. 유협은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거리고 관을 물렸다.
“정말 괜찮습니다.”
시종이 아쉬워하며 관을 치우자 유협은 직접 머리를 하나로 길게 묶었다.
간단한 방법이었고 유협이 생각하기에 스스로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실 기름을 바르는 일도 거북해서 싫었으나, 이마저 하지 않으면 귀족들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할까 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단장을 다 끝내고 나자 유협이 몸을 일으켰다. 천자가 붙여 준 시종이 순종적으로 유협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역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후궁을 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종에게 먼저 목적지를 이야기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건녕궁을 찾아 방문해도 될지 우귀인과 여귀인께 여쭤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조반을 드시고 계시면 다녀오겠습니다.”
유협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탁에 앉았다. 조금 있다가 절인 청경채와 부드러운 연두부로 만들어진 요리가 나왔다. 조반은 간단하지만, 점심은 소고기나 양고기가 반드시 들어가 구성이 화려했다.
삼시세끼를 챙겨 먹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남족에게 감사하며 유협은 수저를 들었다. 궁에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부분이 바로 식사였다.
유협이 막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전달이 돌아왔다.
“귀인들께서 언제라도 궁에 드시라고 하십니다.”
화비 귀신을 쫓아낸 후로 귀인들은 유협을 껄끄럽게 여기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언제 귀신이 다시 올라올지도 모르고, 또 다른 원한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협은 수가 섬세하게 들어간 귀한 신발을 신고 후궁의 문을 통과했다. 매번 얼굴을 보는 시위가 유협의 묘족 표를 보고 통과시켜 주었다.
날은 점점 더 더워졌고 유협은 마차 하나 없는 몸이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여기서 마차를 탈 위세를 부릴 수는 없었다. 건녕궁은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유협은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그 옆을 간혹 종종걸음 치며 궁녀나 시종이 지나가기도 했다.
‘걷는 게 일상인 나도 힘든데, 저 치들은 또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그중에 나이가 어린 자가 대부분이었다. 한숨이 푹 나왔다. 그렇게 건녕궁에 도착하면 땀방울이 맺혔다. 유협은 얇은 소맷자락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닦아 내고 건녕궁에 들어섰다.
두 귀인은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맞춰 하늘하늘하면서도 밝은 색의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마당에 있는 전각에 앉아 시녀들이 가져온 냉차와 떡을 먹던 귀인들과 눈이 마주치자 유협은 무릎을 꿇었다.
“귀인 분들을 뵙습니다.”
“일어나시게.”
귀인들의 어색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유협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몸을 일으켰다.
지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유협은 단 한 번도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분노만이 남아, 그 감정을 숨기느라 태연한 척을 해야 했다. 어쨌든 유협은 후궁의 안전을 책임지는 묘족이었다.
우귀인이 그 수고라도 치하하기 위해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늘 수고가 많네.”
“아닙니다.”
어차피 서로 어색한 사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다. 우귀인은 우아하게 손수건을 들어 그만 나가 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갑자기 옆에서 냉차나 홀짝거리던 여귀인이 물었다.
“그래서 오늘도 육 황자님을 뵈러 갈 것인가?”
“예, 황자님의 안위 역시 살펴야 합니다.”
“누가 살피지 말라고 했나? 굳이 변명을 붙일 필요 없네.”
여귀인이 붙이는 괜한 시비에 우귀인이 얼굴 안색이 좋지 않아졌다. 여귀인은 내도록 유협이 육 황자를 챙기는 것에 불편함을 내비쳤다. 우귀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거기에 말을 보태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귀인은 그때 봤던 귀신의 형체만 생각해도 등에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 이상 여귀인이 유협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원래도 창백한 얼굴에 입술이 붉어 보일 정도로 핏기가 빠졌으나, 유협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잠시, 잠깐만.”
우귀인이 허겁지겁 유협을 불러 세웠다. 까칠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여귀인을 뒤로하고 그녀가 궁녀를 불렀다.
“가서 냉차 두 잔과 떡을 가져다 육 황자를 모셔라. 기왕지사 백 공자도 함께 하고 가시게나.”
“……감사합니다.”
여귀인의 심술은 못마땅했으나, 육 황자에게 떡을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자기들은 간식을 먹으면서 아이는 신경도 안 쓴 건가, 하고 쓴 웃음이 나왔다.
유협은 공손하게 포권을 하고 나서 건녕궁 안쪽의 정원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역시, 익숙한 뒤통수가 쭈그려 앉아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굳었던 얼굴이 얼핏 풀렸다.
유협이 일부러 에헴, 인기척 소리를 내자 천화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웃음을 참고 유협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유협은 몸을 일으킨 뒤 망설이지 않고 천화에게 척척 다가갔다. 묘족 특유의 검은 눈동자에 생기가 어리며 반짝거렸다
“또 연못 구경을 하고 계셨군요.”
천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협 얼굴에 한층 더 깊은 미소가 어렸다.
육 황자는 이제 유협의 말에 어떻게든 대답하곤 했다. 귀신을 쫓아낸 지 열흘이 고작 되었을까 그동안 아이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를 따지자면 우선 옷이었다.
천화는 계절감이 전혀 없던 답답한 긴 옷 대신 얇은 천으로 만든 시원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감출 멍이나 상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는데, 아이는 제법 살도 붙어 더더욱 뽀얗고 귀여워졌다.
그러면서 천화는 천천히, 아주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옷이 달라지고 음식이 달라지니 표정이 달라졌다. 돌처럼 무감했던 눈동자에 다시 한번 빛이 어리고, 곧잘 눈을 깜빡거리거나 어색한 몸짓을 해 보이기도 했다.
천화가 점점 생기를 찾는 모습을 볼 때마다 유협은 뿌듯함을 느꼈다. 적어도 지하에 있는 화비가 다시 올라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을 보고 생긋 웃는 유협을 향해 천화가 어색하게 손짓했다.
“떡.”
“네?”
천화가 먼저 말을 걸어 준 건 거의 없다시피 하던 일이었다. 처음 있는 일에 유협이 눈을 깜빡거리자 천화가 어색함에 몸을 꼬며 말했다.
“냉차도 있어.”
“아.”
황자는 같이 간식을 먹자고 청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린아이다운 어설픔이 귀여워서 유협은 속으로 웃었다.
다시 한번 생각하여도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은 황제와 그토록 무서웠다는 화비 사이에서 이렇게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가 나온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아, 아니다.”
어색함을 잔뜩 품고 천화가 제법 의젓하게 대답을 해 왔다. 그러면서 먼저 앞장을 서서 도도 걷는데 발걸음을 너무 빨리하지 않도록 쫓아가느라 고역이었다. 열심히 걷는 천화를 보고 있자면 그대로 앞질러 놀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그런 행동을 하면 천화가 어떤 충격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유협은 최대한 점잖은 척하며 천화를 따라 전각에 도착하였다.
“앉아.”
“네에, 감사합니다.”
오늘 무슨 날인 걸까. 말수도 적은 아이가 열심히 유협에게 앉으라고 자리까지 정해 준 후에 자신도 의자에 올랐다. 아직은 천화 혼자 오르기 높아 보이는 의자를 타고 올라가더니, 애써 어색하지 않은 척 떡을 보여 주었다.
“자.”
“감사합니다.”
천화가 다람쥐처럼 의자를 타고 올라갈 때부터 속으로 웃음을 터트린 유협은 천화가 떡을 직접 밀어 주자 숫제 감격에 젖었다. 유협은 망설이지 않고 금으로 끝부분을 덧칠한 젓가락을 잡았다.
제철에 맞는 재료를 사용해 먹음직스러운 떡은 실제로도 입에서 살살 녹았다. 난생처음 이런 음식을 먹어 본 유협이 눈이 동그래지는 순간, 맞은 편 천화 역시 똑같이 토끼처럼 눈을 뜨고 있었다.
천화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협은 그 장면을 고스란히 보았다.
‘귀여워…….’
황자가 아니라 토끼나 다람쥐 같았다. 왜 천화가 오늘따라 부산했나 알 것 같았다. 간식이 내려온 건 처음이었고, 그만큼 유협에게 똑바로 대접하고 싶었나 보다.
혼자 먹고 싶었던 것도 참았겠지?
유협은 일부러 젓가락질을 느리게 하기 시작했다. 천화는 눈치채지 못하고 입에서 살살 녹는 떡을 작은 입으로 옮기기 바빴다.
마침내 그릇이 거의 비어 갈 무렵 천화의 젓가락질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떡을 더 먹고 싶긴 하지만 손님인 유협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빤히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이거 더…….”
천화가 무어라 말을 꺼내는데 유협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정말 맛있습니다, 저하.”
“그럼 더 들거라.”
“황송하게도 오늘 아침을 거나하게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요. 허락해 주신다면 차를 좀 더 마시고 싶습니다.”
천화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자신의 차까지 밀어 주는 관대함까지 보였다.
전부 다 황실의 예법에 어긋나지만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덕분에 유협은 입맛에도 맞지 않는 씁쓸한 차를 태연하게 두 잔이나 마셨다.
더 이상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편안했다. 황궁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알고 보면 저잣거리만큼 사람이 많은 곳이 궐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런 평안함을 느껴 본 적이 얼마나 오래전이던가. 마치 자신의 게르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조용히 떡을 먹고 있는 작은 토끼 하나가 유일한 차이점이었는데, 유협은 그 점이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볼을 콕 찔러 보고 싶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천화가 깜짝 놀랄까 봐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천화가 먹는 모습만 구경했을 뿐인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후궁 절반은 돌았어야 하는 시간이다.
유협이 황급히 천화의 처소를 떠나려는데 누군가 소맷자락을 잡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뜻밖에도 육 황자였다.
“저하?”
“……내일도 와?”
작게 묻는 목소리에는 어떤 거짓 위엄도 없었다. 그저 작은 아이의 간절한 소망만 담겨 있었다. 마음이 찡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유협은 당장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소맷자락을 당기는 손이 힘없이 풀려 나갔다.
순간 아이의 눈썹이 아래로 처지는 것을 본 유협이 덥썩 천화의 손을 잡았다.
“네.”
천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
“네. 내일도 오고, 내일 모레도 오고, 언제든지 오겠습니다.”
“그렇구나.”
천화가 말끝을 늘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분하게 말했지만 기뻐하고 있었다. 유협은 미소를 짓고 그날 가장 하고 싶던 일을 했다.
창백한 손이 천화의 연한 갈색 머리를 차분하게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 사이를 사르르 지나가는 손가락에 천화가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은 유협이 씩 웃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응.”
양 볼이 장밋빛으로 물든 천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는 유협이 떠나는 동안 오래오래 문간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따가운 여름 햇살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유협과 천화는 천막을 펴고 연못 돌담 위에 쪼그려 앉은 채 잉어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잉어 구경은 뒷전이었다. 유협이 소근소근 물었다.
“황자님은 그럼 정말 말을 타 본 적이 없으세요?”
“응.”
천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유협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유협의 얼굴은 유달리 창백하고 하얬다. 얼핏 보면 냉정해 보일 수도 있는 차가운 인상이다. 그런 얼굴에 미소가 어리자 순식간에 느낌이 달라졌다.
이제 막 소년 시절을 지나가는 유협은 아름다웠다. 골격은 제법 늘씬하게 갖췄지만 얼굴의 선이 고왔다. 전체적으로 중성적인 느낌이 강했다. 더욱이 생기발랄한 표정에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시선을 끄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유협은 짐짓 걱정을 가득 담아 말했다.
“이럴 수가, 정말 큰일이네요.”
연못 속에 비단잉어를 바라보던 천화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유협을 바라봤다. 유협의 조용한 호들갑에도 아이의 눈에는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기적인 만남 끝에 유협은 천화가 그저 표현이 어설플 뿐, 감정이 뚜렷한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귀여운 뺨을 쿡 찔러 보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유협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에 말을 여태까지 타 본 적이 없다니, 황자님. 큰일 나셨습니다.”
천화의 눈동자가 떨렸다. 뭐가 큰일인지 감을 잡지 못하겠지만 일단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유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말을 못 타 보시다니…….”
“……?”
“정말, 그 재밌는 걸 모르셨다니. 너무 아까워서 큰일입니다.”
“…….”
순간 아이의 얼굴이 뚱하게 변했다. 그 변화를 참지 못하고 유협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천화가 작게 질책했다.
“황자를 놀리면 안 돼.”
“그렇군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매번 말로만 잘못이었다.
유협이 스리슬쩍 건녕궁을 찾는 일이 늘어난 후, 천화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처음에는 말로라도 우귀인과 여귀인의 안부를 살피러 왔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인사치레도 적어질 정도였다.
그사이 유협의 장난기는 슬슬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화를 보며 망설였던 일들을 전부 하고도 모자라서 장난의 수위는 아슬아슬하게 높아지기만 했다.
처음 유협이 장난으로 뺨을 쿡 찔렀을 때 천화는 예상대로 깜짝 놀라며 유협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협의 농간이 계속되자, 이제는 아무런 의심 없이 유협을 질책했다.
키들거리던 유협은 천화가 고개를 훽 돌리자 웃음을 간신히 멈췄다. 토라진 뺨이 너무 귀여웠다. 목소리에 저절로 따뜻함이 듬뿍 담겼다.
“황자님, 황자님.”
천화가 대답하지 않을 걸 알았던 유협은 아이를 은근히 꼬였다.
“말 이름 지어 주는 방법 아세요?”
“……몰라.”
“말 이름을 지을 때는 말의 성질을 잘 보고 지어야 해요. 만약 성질이 급한 말이면 차분한 이름을 지어 주고, 반대로 침착한 말이면 빨리 달릴 수 있는 이름을 지어 주고요. 이름이 성격의 부족한 점을 채워 줄 거예요.”
천화의 머리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알아?”
“네?”
“성격을…….”
아이가 손을 꼬물거렸다. 귀여웠다. 유협은 감히 애정을 숨기지 못하고 천화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황자에게 함부로 손을 올리다니, 만약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대로 치도곤을 치를 상황이었다.
그러나 둘만의 조용한 시간에 끼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화는 강아지처럼 눈을 깜빡거리며 쓰다듬을 받았다.
“이건 묘족만 아는건데.”
유협이 목소리를 낮추자 천화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가까이 붙였다.
“말의 눈을 보면 성격을 알 수 있어요.”
앞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이제 뒷머리로 넘어갔다. 동그란 뒤통수를 쓱쓱 쓰다듬자 부들부들한 느낌이 들었다. 천화는 너무 집중해서 거의 유협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보면 영락없이 그 나이대 어린아이가 맞았다.
“눈을 봤을 때 말의 눈이 올라가고 검으면 심지가 강한 말이에요. 갈색 눈이면 참을성이 많지만 잔인한 성격이고, 해바라기씨 모양에 차가우면 고집이 엄청난 놈이니 주의하셔야 해요. 가장 좋은 말은 순한 말이죠. 눈이 꽉 찬 검은색에 콧등이 하얘요.”
황자님처럼요.
유협이 마지막 말을 삼키고 천화의 콧등을 톡 건드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천화는 한 마리의 순한 망아지와도 같았다. 말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성격 역시 유순한 구석이 있었다. 대화에 적극적이지 않은 건 아무래도 학대를 당해서 아닐까.
본래라면 좀 더 활기찬 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짐작한 유협은 천화가 극단적으로 말이 없어도 이해했다. 무엇보다 천화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유협이 하는 말이라면 모두 흡수하듯 들었다.
지금도 말을 상상하는지 눈이 초롱초롱하다.
유협은 저도 모르게 설핏 미소 지었다. 궁에서 인간다운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천화뿐이었다.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상관없었다. 처음에 유협이 입궐했을 때 많은 사람이 관심을 표했다. 묘족이라는 특이성에 눈에 띄는 외모가 겹친 탓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관심은 시들해져 갔고, 유협을 사람답게 대접하는 경우도 적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깍듯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유협의 위치는 다시 외지인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유협은 천화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궁이 넓은데 이상하게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지금은 자신이 건녕궁에 왜 이리 마음이 쓰였는지 알 것 같았다. 혼자 앉아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던 작은 등. 그 등이 왜 이리 쓸쓸해 보이던지.
천화는 외로움을 알기에 너무 이른 나이였지만 이미 크게 실감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천화는 유협의 손길을 좋아하면서도 크게 무언가 조르는 법이 없었다. 그 나이대, 거기다 고귀한 핏줄의 아이라면 마음껏 붙어서 어리광을 부려도 좋으련만 늘 어색한 거리감을 거두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오고 싶어도 다가오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한 유협은 그때부터 천화를 무릎에 앉히거나 쓰다듬기 시작했다. 천화는 그 손길에 말없이 고개를 내어 주거나 어색하게 안겨 있었다.
얌전히 손길을 타는 아이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유협이 말했다.
“황자님이 말을 타실 나이가 되면 제가 이름을 지어 드릴까요?”
“응.”
순간 천화의 눈에 반짝이는 이채가 지나갔다. 유협은 짧게 웃었다. 만약 천화가 동생이었다면 코에 뽀뽀라도 한 번 했을 터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무례를 저지를 순 없었다. 대신 다시 한번 말했다.
“약속해요.”
“응.”
꼭이야, 소리 없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유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보통 황실에서 말을 배우는 나이는 10살에서 11살 남짓이었다. 만약 천화도 제때에 승마를 배우게 된다면 유협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말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챙겨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때맞춰 맑은 얼굴을 한 천화와 눈이 마주쳤다.
……육 황자도 묘족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아이를 보고 있자니 곧 헤어져야하는 자신들의 팔자가 서글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유협은 남몰래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고 가자고 다짐했다.
그런 속도 모르고 천화는 유협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너는?”
아이가 꼬물거리며 묻는다.
“말이 있었어?”
“아. 지금도 있지요.”
자신의 흑마를 생각하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새별이는 4살 난 젊은 암컷이었다. 성정이 곱고 우아한 녀석이다.
회상에 빠진 유협에게 부드러운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천화는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유협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새별이라고, 순하고 착한 아이에요. 저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보고 싶어.”
“네. 저도 보고 싶네요.”
“…….”
유협이 아련하게 말하는 순간 천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유협의 옷자락을 꾸욱 쥐었다. 그러나 그 작은 힘을 소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깐 추억에 빠져 있던 유협은 뒤늦게야 이상함을 눈치챘다.
“응? 황자님?”
“…….”
“왜 그러세요.”
천화를 집요하게 바라보던 유협은 아이가 토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왜? 하지만 의문이 생기기 무섭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협이 고향의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천화는 유협이 묘족인 걸 안 순간부터 그가 떠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순간 속이 쓰렸지만 유협은 짐짓 놀란 시늉을 했다.
“아니, 누가 우리 저하의 심기를 어지럽혔나요?”
“…….”
“설마 저예요? 세상에 이렇게 기분이 상하셔서 저는 어쩜 좋아.”
“기분 안 상했어.”
“정말요?”
어휴, 다행이다. 유협이 과장되게 안심하는 흉내를 냈다.
“황족을 진노케 했으니 벌을 받을 뻔했네요.”
빙긋 웃으면서 거는 장난에 천화가 입술을 삐죽였다.
유협은 적어도 자신이 궁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황자가 행복했으면 했다. 아무런 걱정할 것 없이. 자신이 돌아가면 이제 누가 어린 황자에게 말을 걸어 줄까.
되도록 헤어짐은 둘 다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았다. 묘족의 시조는 유목민이었다. 지금은 많이 정착하는 분위기지만 지금까지도 게르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게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협에게도 어린 천화와의 이별은 쉽지 않을 것이라 느낌이 왔다. 그래서인지 불쑥 말이 나왔다.
“그럼요, 저하. 이렇게 할까요?”
유협이 찬찬히 천화의 얼굴을 구석구석 들여다봤다. 맑은 갈색 눈동자, 밝은 기운이 맴도는 이마, 하얀 피부 모든 게 다 예뻤다.
“제가 복을 부르는 좋은 이름을 지어 드릴게요. 절대로 주인을 떨어트리지 않고, 말도 잘 듣고, 충성심 높게 만드는 이름으로요. 어때요?”
구슬 같은 천화의 눈에 빛이 어렸다.
“정말? 그럴 수 있어?”
“그럼요. 저는 묘족이잖아요. 제가 짓는 이름이 주술이 된답니다.”
불쑥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에 들었다. 유협이 떠나고도 든든한 친구가 되어 줄 동물이 있다면 천화의 외로움도 한결 덜할 것이다.
“지어 드릴까요?”
“……응.”
“나봄이라는 이름은 어떠세요? 봄에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봄을 닮아 부드러운 성정을 가진 쾌활한 말이 될 것이다. 천화의 겨울 같은 인생에 찾아와 줄 꽃 한 송이가 되었으면 했다.
천화는 나봄이, 나봄이 입 안으로 말을 굴려 보았다.
“마음에 드세요?”
대답 대신 천화는 동그란 머리를 끄덕거렸다. 양 뺨이 붉었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라서, 유협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첫 말을 타게 되시면 나봄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사랑과 애정으로 보살펴 주신다면 아무리 천한 짐승이라도 사랑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응.”
천화가 다시 한번 옷자락을 꼬옥 쥐어왔다. 사랑과 애정. 그 말이 왜인지 모르게 어린아이의 가슴을 울린 탓이다. 그런 천화의 허리에 유협의 늘씬한 팔이 감겼다. 그대로 유협의 품에 안기자 부드러운 백단향 향기가 났다.
유협은 천화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꼭 안아 주었다. 작은 품이 뜨끈뜨끈했다. 천화를 안고 있으면 마음 역시 편안해졌다. 천화가 점점 몸에서 힘을 빼며 유협에게 기댔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오래가지 못했다.
뒤에서 타닥타닥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유협은 재빠르게 품에 안고 있던 손을 떼었다. 천화 역시 아쉬운 듯 간신히 품에서 빠져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발걸음의 주인공은 궁녀였다.
하지만 건녕궁 출신은 아니었다. 여의궁에 머무는, 품계가 귀인보다 훨씬 높은 덕빈의 궁녀가 표표하게 서 있었다. 아이 하나, 소년 하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궁중 생활에 밝은 여성은 아무 일도 보지 못한 척 예에 따라 절을 올렸다.
천화 역시 머뭇거리며 예를 따랐다. 그러나 일어나라고 말을 한 후 다음이 문제였다.
‘어쩌면 좋으냐.’
천화는 아직까지도 어른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세 명 중에서 먼저 말을 꺼내고, 대화를 주도해야 하는 사람은 천화였다. 궁녀에게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냐고 물어야 하는 사람이 천화라는 뜻이다.
그러나 궁중 예법에 어둡고, 아직도 소극적인 아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 나아진 줄 알았더니.’
나하고 있을 때만 그런 거였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당연히 천화가 한심해서가 아니었다. 아이를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한 두 사람에게 분노가 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궁녀를 계속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협은 슬그머니 천화의 시선을 끌었다.
“저하, 덕빈께서 계시는 여의궁과 여기까지는 먼 거리인데, 덕빈께서 수고를 다 하셨군요.”
“……응.”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궁녀가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하, 송구하오나 덕빈께서 지금 당장 백 공자를 뵙고자 하십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2년 내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빈이 갑작스럽게 천화를 찾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천화와 오래 시간을 보내느라 매번 도는 순찰이 늦어진 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의궁에 나타났을 귀신이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천화가 예법에 맞게 유협을 덕빈에게 보내느냐였다.
어른, 그것도 여자에게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격상, 유협에게 가 보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천화가 또박또박 궁녀를 향해 물었다.
“왜?”
유협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천화가 왜라고 물은 거 맞나? 분명 얼굴도 아직까지 좋지 않고 두려움을 품고 있었지만, 어쨌든 제대로 된 대꾸가 맞았다. 이런 건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유협은 당황스러운 한편, 새삼스러운 자부심이 차오르는 것도 느꼈다. 아이는 분명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궁녀는 유협처럼 천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저 황제의 아들이 반문하는 것이라 생각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덕빈께서 여의궁에 좋지 못한 일이 생겨 걱정하고 계십니다. 아마 백 공자라면 일을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거라 믿어 그 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유협이 뭘……?”
작은 입술에서 나온 이름에 유협은 그만 빙긋 웃고 말았다.
천화가 유협의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아이는 단 한 번도 유협을 부르지 않았다. 그저 유협이 오면 다가올 뿐이었다. 그런데 이건 마치 천화가 먼저 첫 발자국을 내딛어 준 것 같지 않은가.
“아마도 저하, 사특한 것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유협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천화는 시무룩해졌다. 비록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여전히 무표정이겠지만 유협의 눈에는 정확하게 보였다.
“그럼 가야해……?”
“덕빈께서 고생을 하신다니 한시라도 급하게 가는 게 신하의 도리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당장?”
아, 이걸 어쩜 좋냐?
유협은 천화의 머리를 마구 헤집는 상상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덕빈의 궁녀 역시 기정사실이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화만은 아쉬움이 가득 담겨, 이만 가 보라는 축객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미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협의 머리에 갑자기 환한 촛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하, 그러면 저와 같이 가시는 건 어떠세요?”
천화가 토끼 눈을 뜨고 유협을 보았다.
“같이?”
“네, 여의궁까지 갔다가 저와 함께 돌아오시는 거 어떠세요?”
생각해 보면 천화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내 건녕궁에서 갇혀 살다시피 했다. 귀신을 쫓는 김에 천화와 궁궐 나들이를 하면 아이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과연 천화의 얼굴이 대번에 환하게 빛났다.
“좋아!”
궁녀는 황자를 데리고 간다는 사실이 꽤 불안한 듯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불온한 곳으로 황손을 데려가는 일이니 어련히 찜찜할 법했다.
하지만 유협이 미리 그려 둔 부적을 천화의 옷 속에 넣어 주는 걸 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빨리 준비해 달라고 어찌나 볶아 대든지 아까까지 용케 참았다 싶을 정도였다.
귀인들에게 따로 말을 올리고 나서면서 유협은 흥분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천화를 보고 웃음을 꾹 참았다. 마치 갓 태어난 망아지가 처음으로 들판에 나설 때 반응을 보는 것 같았다.
때는 마침 무르익은 여름이었고, 그늘 하나 없이 햇볕이 내리 쬐고 있었다. 덕빈의 궁까지 가는 길에는 그림자 하나 없이 무덥기만 했다. 그나마 시종이 들고 있는 큰 차양이 그림자를 만들어 망정이었다.
처음에는 눈을 둥글게 뜨고, 바깥을 구경하던 천화의 표정에 슬슬 실망감이 차올랐다. 종종걸음치다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시종들 빼고는 볼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마가 다녀야 하는 길은 뻥 하니 뚫려 있긴 했지만,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 심지 않았다. 암살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천화의 손이 살그머니 유협의 하얀 옷자락을 잡아 왔다.
“언제까지 가야 해?”
아이가 제 따름에는 소곤소곤 물어 왔다. 하지만 주변에 다 들리는 크기였다. 노련한 궁녀는 천화의 투정을 못 들은 척했다. 유협 역시 웃음을 참고 대답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하실 겁니다.”
“조금만, 얼마나 더?”
유협의 걸음으로는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총총거리고 걸어야 하는 천화에게는 부담이 가는 모양이었다. 주변에 볼거리도 없겠다, 차츰 인내심이 동나는 게 실시간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숨길 수 없는 순수함이 사랑스러워 유협은 큭큭 웃었다. 그러다 천화가 뚱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그는 얼른 모른 척했다.
마침내 여의궁에 도착했을 때 유협의 즐거운 기분은 싹 가셨다. 여의궁은 과연 품계 높은 빈의 궁답게 꾸며져 있었다. 싱싱한 나무와 피어난 꽃들이 주인의 위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곱게 꾸며진 궁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중을 나온 궁녀 역시 다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섣부르게 유협에게 덕빈이 기다렸다고 하려던 궁녀는 문득 유협의 뒤에 서 있는 천화를 발견했다. 천화에게 인사를 올리는 그녀의 몸짓은 흠잡을 곳이 없었으나 다급해 보였다.
“백 공자,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유협은 당연히 궁 안쪽으로 가서 덕빈을 만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궁녀가 안내한 곳은 정원이었다. 궁녀 둘이 다급하게 앞장을 서자, 천화가 유협의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협은 문득 얼굴을 풀었다.
“괜찮으세요?”
“응.”
“제 손을 꼭 잡으세요.”
유협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천화는 망설이지 않고 답싹 손을 잡아 왔다. 작은 얼굴에 불안감 대신 홍조가 피어 있었다. 천화 곁에는 든든한 유협이 있었다. 그가 있어서 그런지 천화는 어른들과 다르게 지금 상황이 무섭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유협이 어김없이 생긋 웃어 왔다.
“가 볼까요?”
유협이 워낙 가벼운 투로 말을 해 천화는 마치 이 일이 작은 모험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유협은 천화의 속도에 맞춰서 걸었다. 구불구불한 정원의 숲길을 지나, 두 사람이 안내 받은 곳은 작은 사당이었다.
보통 후궁의 궁에는 작은 사당이 딸려 있는 게 당연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후궁들은 그곳에서 가족의 안녕을 빌고 덕을 쌓았다. 보통 불상을 모시고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덕빈은 바로 그 사당 앞에 서 있었다. 덕빈은 황제의 후궁답게 아름답고 위엄 있는 여인이었지만, 지금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죽 혈색이 빠졌는지 연지를 바른 입술이 유독 눈에 띄었다.
“백 공자 오셨는가.”
덕빈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애써 인사를 건넸다. 천화를 보고서도 별다른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 여인은 사당 안에 있는 것에 너무 정신이 팔려 천화가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에도 감흥이 없는 눈치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마.”
“아닐세. 저 안에 자네가 한번 봐야 할 게 있네.”
말을 전하면서 덕빈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에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모양이었다. 궁녀들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천화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데 유협이 스윽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춰 왔다.
“저하, 제가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싫어.”
순간 천화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럴 줄 알았다. 천화는 아직까지도 성인 여성과 궁녀들을 두려워했다. 덕빈과 둘이 남는 상황을 반길 리가 없었다. 천화는 여기 혼자 남느니, 유협과 함께 귀신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유협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신 제 손을 놓치면 안 돼요.”
“응.”
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협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 줬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유협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희한했다. 분명 천화에게 떨어지면 안 된다고 경고하긴 했으나,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는 평온한 태도였다. 천화가 가진 일말의 두려움이 유협의 행동에 날아가 버렸다.
정작 유협이 천화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할 때 말리고 나선 것은 덕빈이었다.
“자네 지금 육 황자와 함께 들어가려 하는가?”
유협은 그제야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빈이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충격이 너무 크네.”
창백한 궁녀 한 명이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백 공자. 지금 안쪽에는…….”
안에 있는 광경이 대체 얼마나 사특한지 모르겠지만, 궁녀가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러나 천화에게 귀신보다 더 두려운 건 지금 이 상황에 혼자 남겨지는 일이었다. 천화는 있는 힘껏 손에 힘을 줘서 유협을 붙잡았다.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손을 붙잡으면서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유협이 고작 자신을 위해서 이 무서운 여인들의 명령을 거절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유협이 천화가 붙든 손에 힘을 주어 잡아 왔다.
유협이 차분하게 말했다.
“황자께서는 저와 함께하시는 게 더 안전하십니다.”
“하지만, 저 안에…….”
궁녀가 망설이며 막아섰다. 천화는 멍하니 유협이 궁녀를 달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어떤 것이 있든 마마님께나 저하께 어떤 힘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황자 저하께서 혼자 남기 꺼려하시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자네가 안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해서 그래.”
덕빈이 쉰 목소리로 말하자, 유협이 불쑥 물었다.
“안에 있는 것이 경을 읊고 있지요?”
순간 덕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유협의 말에 너무나 놀란 덕빈이 순간적으로 비틀거리자 궁녀들이 깜짝 놀라 부축했다.
“어, 어떻게.”
“소리가 들립니다. 마마.”
덕빈은 그 말에 어찌나 놀라고 싫었던지 눈물까지 보였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닦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그게 내 옷을 입고 있네.”
“간혹 있는 일입니다.”
“무릎을 꿇고, 경을 읊고 있었어.”
처음에는 말도 꺼내기 싫어하더니, 말하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는 모양이었다. 덕빈이 횡설수설했다.
“문을 여니까 그게 무릎을 꿇고 있었어. 처음에는 뭔가 했는데 키가 너무 크고 팔도 너무 길어서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었네. 그대로 나와 자네를 부른 참이야.”
“잘하셨습니다.”
유협이 마치 들었냐는 듯이 천화를 내려다보았다.
사당으로 들어가면 귀신이 있다. 경을 읊고 있는 키가 큰 귀신이…….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천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협은 귀신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세계에서도 그 일이 당연하게 일어났으면 했다.
그러나 막상 사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긴장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처럼 천화는 살면서 귀신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유협의 손을 힘 주어 잡자, 그가 천하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잡지 않은 손으로 천화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저하,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모시고 오게 되었네요.”
천화는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두려우시다면 지금이라도 여기 계셔도 괜찮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유협은 손을 놓지 않았다. 천화는 막연하게 유협이 자신을 지켜 주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실제로 유협은 정말로 어떤 귀신이 있든 천화를 지켜 낼 자신이 있었다. 유협은 다정하게 갈색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쓸어 넘겼다. 천화가 괜히 자신을 짐으로 여길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아냐. 같이 갈래.”
“그럼 한 가지만 명심하세요, 저하. 귀신은 실제로 무서울지 몰라도 사실은 딱한 존재들이 많습니다.”
“……응.”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천화는 일단 알았다고 대답했다. 야무진 표정을 보던 유협이 웃었다.
“무서우면 제 손을 꼭 잡고 눈을 꽉 감으세요.”
“알았어.”
“저하에게는 어떤 해도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협이 장난기를 담아 천화의 입술을 툭 쓸었다. 별것 아닌 그 행동, 미소에 천화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고 있었다.
유협은 한결 편해진 천화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사당 문을 열었다.
사당 안에서 희미하게 향냄새가 퍼졌다. 사당은 촛불하나 켜지지 않은 상태로 어두웠다. 사당의 문을 넘는 순간 갑자기 천화의 귀에도 또렷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아주 빠르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천화는 저도 모르게 유협을 올려다보았다.
유협의 시선은 앞을 향했다. 천화도 그를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처음 눈에 보인 건 덕빈의 파란색 비단옷이었다. 끝부분을 나염해 하얀색으로 만들어 덕빈의 품위를 나타내는 겉옷이었다. 그 옷이 누군가의 몸을 덮고 있었다.
‘사람?’
저게 뭐지? 사람인가? 그러나 어린 천화도 한순간 분명하게 느꼈다. 저건 사람이 아니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그제야 천화는 그것의 손과 팔뚝이 말도 되지 않게 길다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비명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덕빈의 옷을 걸친 귀신은 제단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천화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유협이 강하게 손을 꽉 잡았다. 경악에 흔들리는 눈으로 천화는 유협을 올려다보았다. 유협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귀신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귀신의 속삭임을 들은 유협이 말했다.
“거꾸로 읊고 있잖아.”
그 순간부터 천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신 죽을힘을 다해 유협의 손을 꽈악 잡았다. 갑작스럽게 사당을 가득 채운 속삭거리는 소리가 뚝 끊겼다.
“거꾸로 읊으니 소용이 없지.”
유협이 뚜벅뚜벅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문득 그곳이 귀신 방향이라는 걸 알아차린 천화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자 유협이 멈춰 섰다. 그리고 한순간 갑자기 천화의 두 발이 땅에서 번쩍 들렸다.
유협은 눈을 꼭 감고 있는 천화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천화는 몰랐겠지만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웃었다.
천화를 아기처럼 안은 유협은 그대로 귀신에게 다가가 딱하다는 듯이 다그쳤다.
“사람이 아니니 사람 행색을 해 봤자, 거꾸로밖에 말이 나오지 않는 것 아니냐.”
그리고 귀신이 보던 경을 잡아 뒤집었다.
키가 팔척은 되는 귀신이 읊고 있었던 건 불경이었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외우고 있었다. 피부가 하얗다 못해서 푸른 귀신이 고개를 들어 유협을 보았다.
입과 눈이 뻥 뚫려 있었다. 귀신이 고개를 기울였다. 유협은 천화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거리며 음산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보아하니 극락왕생을 바라는 것 같은데, 여기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 오히려 덕만 떨어지는 법이다.”
“다이법는지어떨만덕려히오면하게라놀을들람사서기여데은같것는라바을생왕락극니하아보.”
귀신이 빠르게 속삭거렸다. 순간 천화의 머리카락이 삐죽 섰다. 한발 뒤늦게야 이 귀신이 유협이 한 말을 그대로 거꾸로 뱉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귀신의 고개는 이미 유협에게 바짝 들이 민 상태였다. 말을 할 때마다 입 구멍이 옴쭉거렸다. 천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까무러칠 광경이었다. 그러나 유협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네 무덤은 어디냐?”
“냐디어은덤무네.”
“어디냐니까.”
짧은 호통에 귀신이 느릿느릿 손가락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 손길이 불길하여 유협이 혀를 찼다.
“작은 문으로 나갔구나, 그렇지?”
속칭 작은 문은 궁인의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었다. 보아하니 살아생전 궁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해 여태까지 궁을 떠돌았던 것이다. 대충 사정을 알 것 같았다.
귀신은 대답 없이 유협에게 손을 천천히 뻗었다. 유협은 힐끗 그 손이 향하는 방향이 천화 쪽인 것을 눈치채고 쯧 혀를 찼다.
“네가 살아서는 비록 고귀함과 비천함 사이에서 억울했다지만, 죽어서도 그럴 필요는 무엇이냐. 마마의 옷을 훔쳐 입은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겠으나, 그러다 생사람 잡으면 너만 힘들어지는 법이다.”
덕빈은 아마 매일 사당을 들러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귀가 자신 역시 극락왕생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녀를 따라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산자가 아닌지라 말은 거꾸로 나오고, 행동 역시 제대로 따라 주지 않으니 덕빈의 옷을 훔쳐 입은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나마 고귀함을 훔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황손인 천화를 보자 더더욱 음기가 짙어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네 대신 기도를 올리고 제를 올릴테니 너는 이만 돌아가라.”
유협이 단호하게, 하지만 달래듯 말했다. 귀신은 유협을 빤히 바라보았다. 곧 귀신이 빠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라가아돌만이는너니테릴올를제고리올를도기신대네가내.”
눈을 감고 있는 천화가 소름이 다 돋을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유협은 눈썹도 꿈쩍하지 않았다.
“후회하지 말고 돌아가.”
순간 귀신이 따라하던 말을 뚝 멈췄다. 사이한 침묵이 흘렀다. 귀신은 느릿느릿 천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협은 귀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인상을 썼다. 귀신은 천화를 원하고 있었다.
“산자의 목숨을 원하다니 건방지구나.”
그 거절에 가만히 있던 귀신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릿한 우는 소리였다. 장례식 겉옷 통곡 소리를 흉내 내며 귀신이 손을 천화에게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천화에게 닿으려던 손가락이 갑자기 멈춘 것이다.
유협은 침착하게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천화의 품에 부적을 넣어 준 것은 물론, 묘족인 유협과 닿고 있을 때 귀신이 천화를 데려갈 방법은 없었다.
그 사실이 분에 차는지 귀신의 통곡 소리는 점점 더 길어졌다. 소름이 돋는 울음소리에 천화가 바르르 떨었다. 유협이 조심스레 천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저하, 괜찮습니다. 제가 있잖아요.”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천화의 머리를 쓸어 준 후, 계속해서 우는 소리를 내는 귀신을 쳐다보았다.
“내가 가게 해 줄까, 네가 갈 테냐?”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가 선명했다. 공기를 찢는 비명 소리가 천화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비명 소리가 점점 옅어짐과 동시에 갑자기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어깨를 누르고 있던 답답함이 사라졌다. 사당에는 여름의 소리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저하,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유협이 속삭였다. 눈을 뜨자 사당에는 덕빈의 겉옷만 남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유협이 생긋 웃었다. 천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이 무서우셨어요?”
“응.”
천화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반대로 저었다.
“아니.”
“뭐예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괜찮았어.”
유협의 목에 손을 걸고 눈을 마주친 채 천화가 말했다. 무서워서 아직도 아기처럼 안겨 있고 목소리도 시무룩한 채였다. 유협이 천화가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해 웃으려는 순간 천화가 말했다.
“안아 줘서 괜찮았어…….”
헉, 유협이 숨을 들이켰다. 자신보다 배는 큰 귀신을 타이를 때도 미동도 없던 마음이 흔들렸다. 투명한 눈을 하고 아직도 두렵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는 천화가 너무 귀여운 탓이었다.
“그렇군요, 제가 안아 드려서 괜찮으셨군요.”
유협이 참지 못하고 마구 뺨을 비비며 말하자 천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순순한 모습에 유협은 불쑥,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뱉고 말았다.
“저하, 궁인들을 소중하게 대해 주세요. 그들도 한이 많은 존재들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천화가 눈을 끔뻑거렸다.
천화는 아직 제대로 부리는 궁인이 없었다. 아마 입지를 보건데 나이를 먹고 출궁할 때까지 지금과 비슷한 처우를 받을 터였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천화는 일단 으응, 대답을 뱉고 보았다. 유협의 말이니 일단 긍정하는 모양이었다.
천화가 너무 사랑스러웠던 유협은 팔에 힘을 주며 조근조근 일렀다.
“아주 작은 일에도 사람의 한이 얽히면 귀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하가 마음을 상냥하게 갖으신다면 그런 귀신들도 저하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정말?”
귀신이 무섭긴 무서웠던지 천화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럼요, 대답한 유협이 오늘 밤은 재워드릴까요? 하고 덧붙여 물었다. 천화가 어찌나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던지 유협의 입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백 공자!”
더 깊은 시간을 갖기도 전에 밖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움에 찬 목소리였다.
“백 공자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유협은 소리 높여 대답한 후 천화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구겨진 옷 정리를 도왔다.
“이제 나가서 덕빈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해드리면 됩니다.”
유협이 참 쉽지 않냐는 듯이 물어 왔다. 그의 말이라면 다 옳은 줄 아는 천화는 일단 고개를 끄덕거리고 보았다.
밖으로 나가자 여름의 뙤약볕에도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세 사람은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였다. 덕빈은 천연덕스럽게 나온 유협을 보고 허둥지둥 다가왔다.
“자네 괜찮나? 갑자기 통곡 소리가 나다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걱정했네.”
“괜찮습니다. 마마.”
“그럼 그건? 그것은 어찌 되었나?”
“귀신은 작은 문으로 나갔습니다.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부적을 써 드릴 테니 궁의 입구와 작은 문의 입구에도 붙여 두는 게 좋겠습니다.”
유협의 말을 들은 덕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니?”
“귀신은 궁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 죽은 지 모르나 아마도 여의궁 출신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제사를 지내 주어야 해결이 될 듯 한데, 죽은 날짜를 모르니 마마께서 무명상을 하나 차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유협의 말에 덕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은 언제든지 차릴 수 있네. 그럼 되겠나?”
“네. 제사상을 차리고 불경을 읊어 주신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겠네. 아……. 육 황자는 괜찮으신가?”
덕빈이 황급히 천화에게 눈을 맞췄다. 천화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육 황자께서는 다행히 아무런 탈이 없으십니다.”
유협이 대신 대답하자 덕빈의 얼굴에 걸렸던 구름이 드디어 조금 걷혔다.
“묘족이 신통방통하다고 하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정말 고맙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유협이 공손하게 인사치레를 물리쳤다.
덕빈은 안도감이 몰아쳐 피로가 된 표정으로도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니, 유협과 천화는 언제라도 자신의 정원을 찾아오라 말했다.
천화는 처음에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덕빈에게 차를 대접받으며 언제든 유협이 순찰을 돌 때 따라와도 된다는 뜻이라고 알려 주자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그날 밤 유협은 약속대로 천화가 잠들 때까지 이야기를 해 주며 잠을 재웠다. 그러자 낮에 봤던 귀신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천화는 아주 깊게 잠들었다.
유협은 천화가 악몽을 꾸지 않는지 확인하고 본인의 처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며 머리를 완전히 풀고, 옷고름을 잡아당겨 편한 복장으로 환복하였다. 궁인이 길러 온 물에 세안하고, 부드러운 이불에 머리를 맞대니 한결 나른해진 기분이었다.
넓은 대륙의 끝자락에서 살아 온 유협에게 남의 여름은 색다른 계절이었다. 추위가 차라리 익숙하면 익숙했다. 추위가 심하게 찾아오는 날이면 모닥불을 피우고 개를 끌어안고 자곤 했다.
그러나 이곳은 비록 몸은 따뜻해도 마음의 서늘함을 달래 줄 것이 없었다. 유협은 아쉽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천화를 떠올렸다. 아직 어린아이인 황자는 따뜻했다.
‘황자를 고작 이런 이유로 떠올리다니.’
유협은 여름 이불 속에서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천화가 자면서 품으로 파고들었던 모습을 떠올리자 속이 간질간질 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천화는 남의 귀족이라기보다는 산속의 다람쥐 같은 구석이 더 많았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모습을 보다 보면 너무 귀여워서 신분도 잊고 장난치기에 바빴다. 만약 천화가 남의 황자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묘족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말의 자유가 있는 평민 신분이었다면…….
‘이거야말로 경을 칠 생각이다’
사람이 피곤하니 별별 생각을 다 하는 모양이다.
사실, 궁궐에 갇혀 살아야 하는 여인들만 빼고 보자면 남의 귀족은 해보다는 이득이 더 많은 자리였다. 아마 천화도 자라나면서 자신의 부를 받고, 출궁하게 되면 귀족의 자태를 갖출 터였다. 그게 어떤 모습일지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천화와 황제는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화비 그림이라도 한 필 있었다면 천화가 어떻게 클지 상상이라도 해 볼 텐데. 지금 또래보다 키가 작은 편인 것을 보아, 키는 어쩌면 많이 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만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남족 식으로 올리고, 소매에 금사가 수놓아진 정갈한 옷을 입은 모습은 떠올릴 수 있었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은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하얀 피부에 살짝 무표정하지만 입술 끝으로 기분을 알 수 있는 그런 모습.
그때쯤이면 천하를 호령하는 정도는 아니어도 한 부의 주인으로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터였다. 앞으로 5년이나 남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찾아가도 되겠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문득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뻥 뚫린 것 같았던 마음의 구멍이 채워졌다.
유협은 솔솔 밀려오는 잠에 몸을 맡겼다. 내일 후궁을 다 돌기 전에 천화를 데리러 가야겠다. 아이가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하자 잠결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그날 아침 궁인이 평소 기상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유협을 흔들어 깨웠다.
“공자님, 공자님.”
유협이 앓는 소리를 내자 손길은 더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를 흔들었다. 이러다가 멱살이라도 잡겠다, 서러운 마음에 눈을 뜨자 다급한 얼굴을 한 궁인이 보였다.
“벌써 시간이 됐습니까?”
“아뇨,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유협은 그 말에도 태평하게 눈이 감길 만큼 어리석은 종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눈이 번쩍 뜨이고 등 뒤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폐하께서요??”
반쯤 몸을 일으키며 묻자 궁인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태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환복하고 단장하시기 바랍니다.”
유협은 군말 없이 세안하고, 그가 주는 검은색 옷과 하얀 허리띠를 걸쳤다. 그사이 궁인은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꺼내 왔다. 유협도 이번만큼은 반대를 하지 못했다. 채 일각이 되기도 전에 유협은 남족의 귀족처럼 변해 있었다.
궁인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공자께서는 무엇을 입어도 기품이 넘치십니다. 이제 바로 가시죠.”
그리고 유협을 거의 문짝 밖으로 밀어내다시피 떠밀었다. 굽이 살짝 있는 남족식 신발 때문에 비틀거리는 것도 거의 무시한 채였다. 마치 장터에 내다 팔기 위해 온갖 멋을 다 낸 수말이 된 기분으로 유협이 떨떠름하게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반백의 남자에게 무릎을 꿇었다.
유협이 뭐라 인사치레를 시작하기도 전에 태감이 서둘러 말했다.
“지금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인사는 그때 가서 하시지요.”
“예?”
하지만 태감은 유협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가마를 준비했다며 어서 타라고 성화였다.
유협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황제였다. 정말 어디 팔려라도 가는 건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가마에 오르자마자 가마꾼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협이 종종걸음 치는 태감을 불렀다.
“태감 어른, 어찌 된 일입니까?”
“가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황제의 집무실에 귀신이라도 나타났나? 그러나 오랫동안 묘족이 강력한 부적을 쓴 덕분에 황제에게는 어떤 귀신도 달라붙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실제로 유협도 궁궐에 도착하자마자 황제의 궁에 피를 쏟아 강력한 주술을 걸어 놓은 참이었다.
유협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다물었다. 늙은 태감이 가마꾼과 비슷한 속도로 걸어오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보기만 해도 기가 죽는 크기의 대문에 두 명의 호위 무사가 서 있었다. 황제는 제일 안쪽 방, 커다란 병풍 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길을 빼앗는 병풍이라 해도 황제의 위엄을 가리지는 못했다.
당황한 유협은 가까스로 예법을 기억해 내고 무릎을 꿇어 절을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무뚝뚝한 목소리에 유협은 눈을 내리 깔고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가 눈이 뽑힐 수도 있었다. 황제는 얼핏 보기에도 역시 천화와는 영 다른 인상을 주었다. 곡선이 부드러운 천화와 다르게 그는 무섭도록 냉정해 보였다.
황제는 장계를 읽으며 무심하게 물었다.
“요새 네 활약이 크다 들었다.”
“송구합니다.”
“알고 있나? 짐에게는 황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 있다.”
순간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유협이 눈을 깜빡거렸다. 황제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장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어미가 있는 황자가 더 많지. 없는 쪽보다는.”
유협의 눈이 커졌다. 여기서 왜 천화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황제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눈을 들어 유협을 쳐다보았다. 마치 유협이 귀찮은 일이라도 벌였다는 투였다. 설마 천화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한순간이 짧게 지난 후에 유협은 자신이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일이 생긴다면 천화가 아니라 본인에게 생기리라. 그러자 이상하게도 간신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협이 머리를 숙이고 얌전히 답했다.
“예, 폐하.”
“짐은 바쁘다.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지.”
황제가 장계를 툭툭 손가락으로 쳤다.
“네가 후궁전에서 큰 활약을 한다고 들었으니, 이번에는 육 황자가 아니라 삼 황자를 위해 나서 줄 일이 생겼다.”
아. 다행이다. 천화나 본인을 해하려는 게 아니라 출궁을 명하려는 모양이었다. 유협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쉴 뻔한 마음을 달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명하신 무엇이든 해내겠습니다.”
“그토록 빨리도 자신할 수 있더냐?”
황제가 의심을 담아 물었다. 유협이 대답하자 그가 잘됐다는 듯 장계를 치워 버렸다.
“그렇다면 사가로 나가 삼 황자를 돌봐라.”
“예, 폐하.”
유협이 단정하게 말하니 황제가 말을 끊고 빤히 보았다.
“네가 생긴 것은 우유부단하나 솜씨는 좋다는 말을 믿겠다. 그럼 지금 당장 출궁하거라.”
유협이 그 말에 멈칫하자 황제가 의아하다는 시선을 쏘았다. 뒤늦게 아차 싶은 유협이 인사하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황제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뭐냐?”
“폐하께 고하기도 부끄러운 생각입니다.”
“그건 짐이 판단해야지. 뭣 때문에 망설였지?”
“……육 황자께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잠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유협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자 황제가 기가 막힌 듯이 코웃음 쳤다.
“여기는 말이 달리는 전쟁터나 동물 우리가 아니다. 네가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짐의 자식에게 해가 갈 것 같으냐?”
“아닙니다. 실언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협이 무릎을 꿇자 황제가 혀를 찼다.
“됐다. 가서 삼 황자를 돌봐라. 더 이상 그 녀석의 상소를 받는 것도 지겨우니 네가 가서 처리해라. 그렇다면 그렇게 바라던 육 황자를 만날 수 있겠지.”
“명을 받듭니다.”
유협은 뒷걸음질로 자리를 뜬 후 한숨을 푹 쉬었다. 같이 후궁전을 돌아다니면서 함께할 생각을 한 게 고작 어제였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눈앞이 깜깜했다. 도대체 삼 황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렇게 부름을 받았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 황제에게는 총 열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유협은 후궁전에 있는 아이들밖에 몰랐다. 장성한 다른 자녀들은 이미 결혼했거나 궁을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궁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라도 볼 텐데.’
남의 궁에서는 철저한 이방인인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삼 황자는 궁 바로 밖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황제가 하사한 말 한 필이면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출궁을 하는 길이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 단 한 번도 밖으로 나돌지 않았으니, 거의 1년 이상을 궁에만 있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전혀 신나지 않았다. 사실 삼 황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면 거짓말이다.
삼 황자의 안위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무엇보다 천화가 자신을 찾고 있을 시간인 게 마음에 걸렸다.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모습이 뻔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원래라면 주변에 널린 포목점이나 음식점을 구경하며 천천히 여유를 즐겼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유협은 능숙하게 말에 올랐다. 안장에 앉자마자 저절로 박차를 가했다. 유협은 부드럽게 말을 달래 가며 삼 황자의 집에 도착했다.
삼 황자 천강의 집은 시내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그의 외조부가 어지간한 세도가였기 때문에 집의 크기는 거의 황제의 집무실만 했다.
붉은 나무로 정성스럽게 칠한 대문에 이를 세우고 있는 짐승의 조각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담 너머로 보이는 집이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으나 유협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아주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게 살아 있는 사람의 집에서 풍길 기운인가. 폐가와 다를 게 뭐야.’
집 꼴이 이 정도 되면 그곳에 살고 있는 주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유협은 한숨을 쉬고 말에서 내렸다. 대문을 두드리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묘족인 유협이라고 합니다.”
일부러 황제의 명을 꺼냈으나 대문은 한참 동안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문이 조금 열렸다.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가 미심쩍은 눈을 하고 유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도 그럴 게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 최고로 좋은 옷을 입고 머리도 남족 식으로 올리다 보니, 유협은 마치 화화공자(花花公子)의 모양새였다.
뒤늦게 자신의 꼴이 어떤지 깨달은 유협은 한숨을 쉬며 머리의 관을 풀어 내렸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입니다. 삼 황자의 건강을 염려하셔서 폐하께서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유협이 호소하자 시종의 얼굴에서 얼핏 의심이 가셨다.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들어오십시오.”
하지만 시종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유협이 갑자기 귀신으로 돌변해 자신을 덮치기라도 할 것 마냥. 귀신들린 집에서 살다보니 으레 그런 것이라 생각해도 미묘하게 억울했다.
남족은 예의를 모른다고 혀를 차며 한 발자국을 저택에 내딛었을 때였다. 그 순간 이명 소리가 강하게 들렸다. 귀를 찢는 듯한 소리에 유협이 인상을 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체불명의 소리는 마치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겁을 주면 다들 떨어져 나갔으리라. 그러나 유협에게 귀신은 실체가 있는 존재였다. 이 정도 겁박이야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애꿎은 사람을 부러 놀래키다니, 어지간히 악심을 품었구나.’
유협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시종을 뒤따라갔다. 걸으며 요모조모 뜯어보니 이상한 광경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여름인데도 화단이 텅 비어 있었다. 또한 이 큰 저택에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시종 한 명이서 저택을 관리할 리가 없는데도 주방에도, 대청마루에도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협이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저택에 더 부리는 사람은 없습니까?”
유협의 질문에 시종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있었죠. 있었는데 집이 귀곡 산장이 되어 가니 거의 도망가고 이제 없습니다.”
“그래서 화단을 가꿀 사람도 사라진 건가요?”
“아 그건 아닙니다. 어떤 꽃을 심던 말라 죽어 버립디다.”
그러면서 시종은 유협을 힐끗 보았다. 여태까지 찾아온 도사니 무당이니 하는 종자들 중에 유협은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이제야 소년티를 막 벗고 있는 모습은 풋풋하니 아름다웠고 검은 눈은 영민해 보였다. 전혀 귀신을 때려잡을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령께서는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보셨습니까?”
이 집에 발을 딛자마자 그대로 돌아가 버린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사람은 유협이 처음이었다. 유협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원귀의 원한이 강하면 살아 있는 것들이 자리를 잡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해가 될 텐데 그쪽은 왜 떠나지 않았습니까?”
유협의 질문에 시종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택의 주인이 웬만한 세도가기만 했어도 저도 이미 줄행랑을 쳤을 텐데 상대가 황자님이다 보니. 이대로 두었다가 탈이 나면 정말 크게 경을 칠 것 같았습니다.”
삼 황자의 얘기가 나오자 유협은 목소리를 줄인 채 소곤소곤 물었다.
“제가 사실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입궁하느라 이쪽 사정에는 어둡습니다. 삼 황자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유협의 말에 시종이 처음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렇게 뜬 얼굴에 그나마 생기가 좀 어렸다. 역시 주인을 욕하는 일만큼 시종들에게 즐거운 건 없는 모양이다.
“아니 정말 주인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씀입니까?”
“어떤 소문이 돌기에 그렇습니까?”
시종이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역시나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인물입니다그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구멍만 있다면 냅다 쑤셔 박을 인물 아닙니까. 귀신병 나기 전까지는 눈에 안 띄는 게 사는 방법이라고 유명했었죠.”
그 말을 듣자 왜 집이 이 꼴이 났는지 알 것만 같았다. 유협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개중에 이 저택에 잡혀 와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많겠군요?”
순간 시종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발작을 하듯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말이었지만, 시종은 공포에 질려 유협을 보았다. 마치 귀신이 자신도 모르게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귀신이 보이는 겁니까? 여기 있나요?”
“아직 보이는 건 없습니다.”
반응을 보아하니 엄청난 겁쟁이거나 제 주인이 하는 일을 방관한 모양이었다. 유협은 도대체 세도가들이 하는 짓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을 수없이 해치고도 멀쩡할 수 있다니, 그렇다면 법은 왜 만들어 둔단 말인가.
시종은 그 후로 입을 꾹 다물더니 커다란 문 대청마루로 올라갔다. 그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일렀다.
“주인님, 황궁에서 술사가 왔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문이 벌컥 열렸다. 얼떨결에 황자와 눈이 마주친 유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방금까지 시종에게 빌어먹을 엽색가라고 들었던 것과 다르게 셋째 황자 천강은 남자답게 잘생긴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이 얼마나 잘났건, 너무나 핼쑥한 나머지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여기에 더해 유협을 더 놀라게 만든 건 그를 끌어안고 있는 한 귀신이었다. 귀신은 피부가 거무스름하고 바짝 말라 있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옷은 걸치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얼마나 말랐는지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거의 해골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협은 귀신을 뜯어보다가 문득 자신이 황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자 역시 그런 유협을 관찰하고 있었다. 유협은 냉큼 무릎을 꿇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이게 뭐냐.”
천강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유명한 술사라더니 어린애잖아.”
그가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괜히 시종에게 윽박질렀다. 황제인 아버지를 달달 볶아서 겨우겨우 유명한 술사를 찾아냈다더니, 수염이나 날까 싶은 아이가 온 것이다. 천강이 분노를 삼키며 물었다.
“네가 정녕 황궁에서 명을 받고 온 묘족이 맞느냐?”
“맞습니다, 저하.”
“어이가 없군. 황제 폐하께서는 늘 이렇게 무심하시다. 너는 그만 헛재주를 부리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라.”
“저하 요새 제대로 잠을 주무시지 못하시죠.”
유협이 침착하게 묻자 천강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는 시종과 다르게 그다지 순진한 인물이 아니었다.
“내 안색만 보고서도 그런 말은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너만 이 집 대문을 넘었는 줄 아느냐? 나라에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을 다 모았는데 고작 개소리들만 하더군.”
거칠게 욕설까지 섞는 태도에도 유협은 기가 죽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를 보탰다.
“같은 꿈을 계속 꾸실 겁니다.”
순간 천강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유협을 쳐다보았다. 천강이 상체를 유협 쪽으로 내밀자 귀신의 긴 손가락이 그의 상체를 꼭 껴안았다. 잠깐 유협을 보던 그가 시종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러가라.”
시종까지 물리고 나자, 천강은 구멍이 날 정도로 유협을 바라보았다.
“계속해 봐라. 내가 꾸는 꿈이 어쨌단 말인지.”
유협은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어떤 남자를 안는 꿈을 꾸실 겁니다. 매우 아름답고 보고 있자면 차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들어 매번 안고 마셨겠지만…….”
“그렇지만?”
“그게 바로 귀신입니다, 저하. 지금 악령과 귀접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천강의 눈이 커졌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추궁했다.
“귀접이라니? 네가 소문을 어디선가 듣고 짐작한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저하. 사실 지금도 저하의 뒤에 귀신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하께서 생기를 다 빨아들일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천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협은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어째 귀신을 떼는 것보다 귀족을 다루는 일이 더 어려웠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도 천강은 펄펄 날뛰었다. 어딜 봐도 곧 죽을 사람 같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욕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유협은 침착하게 말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뭐라고?”
유협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강을 마주 보았다. 천강의 눈동자 속에 얼핏 공포가 숨어 있었다. 유협은 자신의 엄지를 깨물어 찢었다. 피 냄새가 나자 천강이 그제야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랐다.
“무례한 것,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고귀한 사람 앞에서 아랫것들은 피도 보이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주술의 매개로 묘족의 피 만한 것이 없었다. 유협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지금 귀신은 원한이 너무 강하고 지독해서 쉽게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계속 돌려 말하고 있지만 이대로 두었다가는 천강은 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궁에서 치도곤을 당하거나 아니면 쫓겨나게 될 터다. 두 경우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천화를 두고 궁에서 나가게 되면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직접 보신다면 제 말을 믿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강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유협이 무릎을 다시 꿇었다.
“저하, 저는 지엄하신 폐하의 명을 따르러 왔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부모 된 도리로 저하의 심신을 걱정하시니, 저하도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천한 것 주제에 말은 잘도 번드르르하게 하는구나.”
마침내 천강이 욕설을 내뱉듯 말을 뱉었다.
“네 마음대로 한번 해 보거라. 다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났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저하.”
유협은 그렇게 말하고 대청마루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거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섰다. 순간 천강의 얼굴에 당혹이 스쳐지나갔으나 유협은 알지 못했다.
유협이 붉은 입술을 열어 조곤조곤 말했다.
“눈을 감아 주시면 됩니다.”
천강이 웬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갑자기 얌전해진 영문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루기 편했다.
유협은 천강의 눈꼬리를 따라서 붉은 피를 발랐다. 그러면서 천강 뒤에 붙어 있는 귀신을 한 번 더 보았다. 귀신은 유협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히 원한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천강이 눈을 뜨자 유협과 시선이 마주쳤다. 유협은 그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말했다.
“우선은 제 눈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유협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실 겁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명심하셔야 합니다.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됩니다. 귀신은 자신을 보는 자가 있으면 좋아서 더 날뛰는 법입니다.”
“……알았다.”
“준비가 되셨으면 이제 아래를 내려다보시기 바랍니다.”
천강은 속으로는 내심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순간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유협은 비명을 지르면 안 된다고 했지만, 비명은커녕 숨도 쉬기 어려웠다.
길쭉한 손가락이 자신의 상반신을 단단하게 껴안고 있었다. 손가락에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손톱이 하나도 없었다. 회색 손가락이 자신을 껴안은 걸 보자 기절할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유협의 손이 재빠르게 천강의 입을 막았다.
“보시다시피 원귀가 붙으신 상태입니다.”
“이런 미친, 당장 내게서 떼어 내라. 당장!!”
“저하 진정하셔야 합니다. 상태를 보아하니 당장 떼어 낼 수 없겠지만, 몇 가지 방법을 통한다면 오늘내일 밤 사이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떼어 내라니까!”
유협은 같이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품을 뒤졌다. 노란색 종이가 나왔다. 유협은 다시 한번 손가락을 물어서 피를 냈다. 그리고 부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부적이 완성되자 유협은 이를 천강의 품에 넣었다.
“이는 귀신을 잠시 내쫓는 부적입니다. 이 정도로는 잠시나마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과 눈이 마주칠 수 있으니 눈을 씻으시고, 제게도 시종 한 명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천강은 덜덜 떨면서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유협의 말대로 자신을 꽉 움켜쥐고 있었던 기괴한 손가락이 사라져 있었다. 천강은 두려움에 이를 악물었다.
“시종을 붙여 줄 테니 가서 무슨 짓이든 해 봐라. 다만 이 녀석을 꼭 떼어 내는 게 네 신상에도 이로울 것이다. 아니면 너도 귀신으로 살아가게 될 줄 알아라.”
천강은 유협이 여태까지 봤던 남의 귀족 중에 가장 천박한 편에 속했다. 이러니 황제가 유협을 내보낼 때 그토록 짜증이 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유협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말씀 받잡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강이 뒤집어진 속을 달래기 위해 끓인 대추차를 마시고 있을 때 아까 길을 안내했던 시종이 찾아왔다. 천강은 대화 내내 흙바닥에 서 있었던 유협에게 쉬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당장 일을 해결하라 명했다.
천강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유협은 시종에게 물었다.
“최근에 이 집에서 사람이 죽은 방이 있지요. 그 방으로 저를 안내해 주십시오.”
시종은 유협을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쳐다보더니 입을 쓱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말없이 유협을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방이되 방이라 할 수가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창문이 트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방은 창문이 하나도 없어 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더구나 문밖에는 걸쇠를 걸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많이 걸쇠를 사용했는지 그 부분의 나무문이 잔뜩 긁힌 채였다. 시종은 방을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유협은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문을 닫아 보았다. 끼익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닫히자 아직 대낮인데도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유협은 더듬더듬 문을 만져 보다 누군가 손톱으로 문 안쪽을 잔뜩 긁었다는 걸 눈치챘다.
‘여기서 사람을 가둬서 죽였구나.’
귀신의 손톱이 다 빠지고, 피가 난다 했더니 문을 열려고 긁다가 죽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치 아사를 한 것 같은 꼴을 하고도 굶어죽은 아귀가 되지 않았다. 정력을 빼앗아 사람을 죽이는 색귀가 된 것을 보아하니 죽음의 원인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유협은 어둠 속에서 꼼꼼하게 방을 돌아다녔다. 그 흔한 이불마저 없는 것을 확인하니 이곳은 평범한 이유로 들어올 방이 아니었다. 결론을 금방 내릴 수 있었다.
‘삼 황자가 누군가를 여기 감금하고 강간해서 죽였구나.’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 지금 그 귀신일 것이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정말 도와주기 싫다.’
아무리 봐도 남족의 황제 일가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천화를 바늘로 찌르고 괴롭히질 않나, 간살을 하질 않나. 고귀한 피가 흐른다면서 하는 짓은 변방의 묘족만도 못했다. 이러니 주기적으로 묘족을 불러서 정화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결국 유협은 문을 열고 나섰다. 그 앞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경악한 얼굴로 유협을 바라보다 물었다.
“공자는 두렵지도 않으세요?”
“본래 하는 일이 이러해서 두렵지 않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이 방은 무엇을 하는 방입니까?”
시종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확실한 대답이 필요했던 유협은 다시 한번 재촉했다.
“평범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벌을 주는 방입니까?”
“……맞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연유로 여기 들어가게 됐습니까?”
모든 사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묻는 유협의 말에 겁먹은 시종은 결국 사실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저하를 모시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 치는 본래 평인이었는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져 저하와 연이 닿았습니다. 그러나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고집을 부리기에…… 잠시 벌을 준다는 게 몸이 약해져서 허무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달리 풀어 말하면, 이 방에 사람을 가둬 두고 삼시 세끼를 굶겨 가며 박대하다가 억지로 안아서 죽음을 맞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러니 원한을 품고 원귀가 되지. 만약 묘족처럼 귀신을 볼 수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하께 제가 처리하겠다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다만 귀신을 부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저하께서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예? 저하께서요?”
시종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유협 역시 삼 황자가 순순히 협조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빠르게 손을 쓰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천화는 유협이 왜 오지 않는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누군가 천화에게 소식을 전해 줄 사람도 없으니 아이 혼자 외로워하고 있으리라. 그 생각을 하니 누군가 턱, 목을 조르는 것 같아서 유협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황자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는 게 나았다.
실제로도 삼 황자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천강은 욕설부터 뱉고 보았다.
“내가 귀신을 잡는 일에 나설 거면 네가 왜 필요한 거지? 어쭙잖은 소리는 집어 치워라.”
이런 반응을 보아하니 살살 달래고 구슬릴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아까부터 참기도 많이 참았겠다, 유협은 살그머니 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저하, 귀신을 쫓는 부적은 오래 가 봤자 3일입니다. 부적을 자주 그리면 그릴수록 그 효과도 떨어져 결국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유협의 말에 천강이 치를 떨며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네놈이 해결하라는 것 아니냐?”
“저하, 지금 저하께 붙은 귀신은 색귀입니다.”
유협이 딱 잘라 말했다. 순간 천강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뱀처럼 사나운 인상이 된 그가 차갑게 물었다.
“그래서?”
행실을 조신하게 하지 못한 건 천강 본인이면서, 유협이 색귀라는 이야기를 꺼내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협도 눈이 있고 귀가 있었다. 저택에 사람을 가둬 죽이는 행위를 보고 온 직후인데 참 별 시시한 이유에도 발끈한다 싶었다.
“색귀는 주로 꿈을 꿀 때 나타납니다. 오늘 밤 주무실 때 꿈을 꾸기 시작하면 제가 처리해드릴 수 있습니다.”
“네가 뭐라고 그렇게 장담하느냐?”
“저하, 색귀에 밤낮으로 시달리면 결국 정력을 빼앗겨 만사가 피곤하고 거칠어지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생명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유협이 천강의 새카만 눈 밑을 보며 말했다. 귀신을 쫓는 부적도 임시방편일 뿐, 이런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쫓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맡겨만 주신다면 꿈속에서 완벽하게 쫓아 버리겠습니다.”
천강은 도무지 유협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침에 보았던 귀신을 떠올리니 등 뒤에 소름이 다 돋았다. 게다가 유협의 말대로 계속해서 꿈을 꾸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하려면 분명하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천강이 사납게 말하자 유협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밤이 깊어질 무렵, 천강은 유협이 준 부적을 머리 위에 둔 채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런데 막상 잠을 자려고 하니 심난해져 잠이 통 오지 않았다. 그가 몇 번이나 뒤척거리는 동안 유협은 병풍 뒤에 앉아 정갈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피곤함이 경각심을 덮어 버리는 때가 왔다. 천강의 눈꺼풀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감겼다. 숨소리가 점점 더 깊어지면서 밤의 어둠도 짙어지기 시작했다. 유협은 촛불 하나 켜 않고 어두운 방에 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밤이 더욱 깊어지는 시각, 마침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왔구나.’
문 쪽에서 서서히 천강 앞으로 다가온 것은 아침의 그 귀신이었다. 천강에게서 떨어진 모습을 보니 더욱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이 뼈가 보일 정도로 말랐는데 배만큼은 아귀처럼 불뚝 나와 있었다.
유협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마침내 귀신이 천강의 침상에 다가가 고개를 숙이자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죽밖에 없던 귀신의 몸에 서서히 살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듬성듬성하게 자란 머리카락도 풍성하게 바뀌었다. 눈이 뻥 뚫려 있던 곳에는 살이 차오르며 눈알이 생겨났다. 손가락도 점점 얇고 짧게 변하자 순식간에 눈길을 사로잡는 미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은 침대 위에 걸터앉더니 천강의 가슴께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귀신이 서서히 천강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귀신이 거의 다 꿈속에 들어갈 무렵 유협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다.’
병풍 뒤에서 때를 노리던 유협은 가지고 있던 단도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피를 냈다. 그리고 냉큼 천강의 몸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 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천강 머리 위에 둔 부적에 단도를 꽂았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유협은 눈이 감기는 걸 느꼈다. 천강과 귀신의 꿈속에 들어가는 술법이었다. 정확히는 귀신이 천강을 쫓아갔으니 유협도 그를 따라 천강의 꿈에 들어가는 술법을 쓴 것이다.
천강의 꿈속에는 안개가 자욱이 껴 있었다.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곳에 저 멀리 청년의 뒤통수가 보였다. 머리를 높게 묶어 관을 썼고 걷는 자세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유협은 본능적으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꿈속에서 천강의 집이 보였다.
천강의 집은 사실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 집에 머무는 사람 숫자는 확연히 달랐다. 대문 멀리서도 웃는 소리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서로를 희롱하고 노는 소리였다.
‘참 본인 같은 꿈을 꾸는구나.’
아마도 귀신에 씌기 전에 풍경은 이랬을 터였다.
대문 앞에 선 미청년이 문을 두드리자 곧 문지기가 나왔다. 그가 청년을 보더니 곤란한 기색을 했다.
“눈치는 도대체 어디 팔아먹었나. 지금은 주인님을 뵐 수 없네.”
“죄송합니다. 그저 말만 전해 주십시오. 말씀하신 돈은 다 모았다고, 제가 왔다고 말만 전해만 주십시오.”
청년이 어찌나 간곡하게 말을 하던지 유협이 나서서 돕고 싶을 판이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귀찮은 내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지금은 안 되네.”
“그렇다면 연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문지기가 대놓고 기분 나쁜 기색을 보였지만, 청년은 꿋꿋하게 나무에 기대 앉아 기다렸다. 연회는 길게 이어졌다. 그동안 청년은 일어나기도 하고, 천강의 집 주변을 뱅뱅 돌기도 하면서 대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어느새 시간은 한밤중을 지나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년 역시 피곤한 기색으로 나무에 기댄 순간 대문이 열렸다. 아까 봤던 문지기가 퉁명스럽게 청년을 불렀다.
“정말 지금까지 기다리다니 자네도 참 경우가 없군.”
“죄송합니다.”
시종의 투박에도 청년의 얼굴은 불안과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협은 열린 대문을 따라 슬그머니 들어갔다. 이제 연회는 보기 힘든 수준으로 치달아 있었다. 마구 엉켜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유협은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천강이 보였다. 정자 위에 앉은 그의 주변으로 많은 남녀가 웃고 떠들고 있었다. 꿈속의 천강은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준수하고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년을 발견하자 천강이 크게 아는 척했다.
“아! 드디어 오셨군. 워낙 다망하셔서 오늘 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말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청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유협은 혀를 차며 기둥 뒤에 숨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그리 오래 찾았나? 드디어 와서 한잔 받아 갈 마음이 든 건가?”
“아닙니다, 저하. 저는 단지…… 약조를 지키러.”
청년이 말을 하며 품에 손을 넣었다. 하얗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꺼내 든 것은 돈이 든 주머니였다. 천강은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 사람들 역시 일제히 비웃었다. 그럼에도 청년은 꿋꿋했다.
“아니 이걸 어쩌나? 정말로 약속을 이리 지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순간 청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마도 이 돈을 마련하느라 어지간히 애를 쓴 게 틀림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제가 이리 약조를 지켰으니, 저하께서도 이를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나? 내가 무슨 약속을 했지?”
“금 십만 냥을 가져오면 동생의 몸종 신분을 면천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 그랬던가.”
정말 기억을 못 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천강은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어쩌나. 요새 연회가 끊이질 않아 부엌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네.”
그 말에 청년이 강하게 항변했다.
“금 십만 냥이면 집안일하는 시종 열 명을 구하고도 남습니다. 제가 약속을 지켰으니 부디 저하께서도…….”
순간 천강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감히 천 것 주제에 약속을 운운하는 게 거슬렸기 때문이다. 다 망해가는 집안에서 동생을 부엌데기로 팔아, 겨우겨우 입에 풀칠한 주제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강이 싸늘하게 물었다.
“내가 그 돈이 훔친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아나?”
그 말을 듣고 청년이 흠칫 놀랬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죄는 지은 적 없습니다. 과거 은사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청년이 숫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를 보이자, 천강이 귀찮다는 듯이 손짓했다.
“알겠으니 일단 나가 보게. 연회를 자네가 다 망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저하!”
그러나 천강이 손짓하자 문지기 두 명이 다가와 청년의 팔을 붙잡았다. 유협은 다시 한번 내동댕이쳐진 청년을 따라서 밖으로 나섰다.
“왜, 왜!”
온몸에 흙이 묻은 채로 청년이 절규하자 문지기 한 명이 혀를 찼다. 그리고 그에게 고개를 숙여 답했다.
“내 말했지 않나. 삼 황자님 마음에 들려면 돈이 아니라 몸을 바치면 된다고. 자네 여동생이야 미색이 뛰어나지도 않은데 저하께서 굳이 데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순간 청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유협은 그제야 사건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청년의 동생을 인질로 천강이 제멋대로 청년을 가지고 놀고 있던 셈이다. 이쯤만 해도 평생 갈 원한을 쌓을 만했다. 그러나 다음 장면은 더 심각했다. 유협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처음보다 확연하게 마른 청년이 두 팔이 묶인 채 침상 위에 있었다. 천강은 청년의 날씬한 허리를 껴안고 목덜미를 깨물었다. 누가 봐도 겁간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니 좀 좋은 게 아니구나.”
천강이 흡족하게 말하며 청년의 귀를 깨물었다. 그가 몸서리를 치자 천강이 더욱 기뻐하며 웃었다. 천강은 고통스러워하는 청년을 눕히고 발목을 잡아 두 발을 피게 만들었다. 사건이 이쯤 되자 유협은 누구를 처치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꿈속에서 천강은 자신이 즐거울 때까지 마음대로 청년을 유린했다. 청년은 내내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버텨냈다. 마침내 일이 끝났을 때 청년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만 내쉬고 있었다.
“잘 했다. 한 번만 더 참으면 내 그 아이를 면천시켜 주마.”
천강이 달콤하게 말했다. 청년은 그 말만을 믿는 것 같았다.
“얼굴, 얼굴이라도 보게 해 주시면…….”
청년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하자 천강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야밤에 이 꼴로 가서 남자에게 안겼다고 자랑할 일이 있나? 내 말했지. 우리 약속이 끝나면 둘이 사이좋게 돌아가게 해 주겠다고. 내일 밤도 이리 와.”
그 말에 청년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유협은 병풍 뒤에 쪼그리고 앉아 꿈이 흘러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사가 치러진 방을 정리하러 온 시종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저렇게 순진해서 세상을 어찌 살려고…….”
“그 망나니가 죽여 쫓아낸 시종만 몇인데. 찾으려면 시체 더미를 뒤져야지 죽은 사람을 어떻게 보여 줘.”
“이미 맞아죽은 지 오래인데 딱하기도 하지.”
사건의 흐름이 믿기지 않아 유협은 눈을 깜빡거렸다.
천강은 애초에 청년을 얻기 위해서 동생을 데려가 놓고, 얼떨결에 죽인 뒤 청년에게는 몸을 바치게 한 것이다. 천강은 색골인 정도가 아니었다. 만약 황제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죽어도 백 번은 죽어 마땅한 범죄자였다.
다음 장면은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청년의 저항이 심해지자 천강은 그를 유협이 보았던 징벌방에 가두도록 명령했다. 거기서 그는 지독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건을 대충 알게 된 유협은 으리으리한 대문을 나섰다. 길을 쭉 따라가니 처음 보았던 안개가 펼쳐져 있었다. 안개 속에서 유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천강이 지금 꾸는 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개가 쳐진 침대 위에서 천강은 아름다운 미남자와 뒹굴고 있었다.
청년이 천강의 위에 올라타자 천강이 앓는 소리를 냈다. 천강이 남자의 허벅지를 조금 더 벌려 자신의 양물이 들어갈 수 있게끔 만들었다. 행위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청년은 빛이 나게 아름다워 보였다. 반면 천강의 안색은 점점 더 죽은 사람의 것으로 변했다.
‘차라리 죽게 둬야 맞는 것 아닌가.’
유협은 잠시 그 꼴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귀신이 산 사람을 해치게 둘 수는 없었다. 잠깐 갈팡질팡하던 유협은 결국 단도를 뽑아 들고 슬그머니 침대 머리 쪽을 향했다. 그러자 격렬한 정사를 나누는 사람들 위로 현실과 똑같은 부적이 보였다.
유협의 손 역시 아까 전 현실에서 낸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칼날을 상처가 없는 쪽으로 꽉 쥐자 꿈속에서도 단도가 피에 젖었다.
‘여기서 헤매지 말고 극락왕생하세요.’
귀신을 향해 조용히 기도를 한 유협이 피 묻은 단도를 냅다 부적 위로 내리 꽂았다. 곧 머리가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 들더니 순식간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치 물속에 빠져 있다 정신을 차린 듯 가쁘게 숨이 몰아닥쳤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유협의 아래 누워 있는 천강 역시 갑작스럽게 깨어나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유협이나 천강이나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문득 유협은 자신이 천강을 올라 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내려가려 했으나 어깨가 붙잡혔다.
“지금 방금, 네가……?”
“귀신은 쫓아 버렸습니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만한 악령이라면 제사를 지내는 것도 소용없었다. 그저 비슷한 죄를 저질러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었다. 유협은 천천히 천강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천강은 아직도 정신이 맑지 못한 듯했다.
“꿈을 꾸실 때 만약 그 남자가 다시 나온다면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잘 처리됐겠지만 유협은 괜히 말을 남기고 고개를 숙였다. 방을 떠날 구실이 필요했다. 천강은 아직도 얼이 빠져서 유협이 방문을 열고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을 나서자 유협은 말을 타고 달려서 천화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천강처럼 잔인한 사람의 집에는 하루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저지른 범죄를 생각하면 머리가 찡하고 아팠다.
그러나 밤이 너무 깊었다. 이런 시간에 말을 달리면 순찰대에 붙잡혀 어떤 곤경을 치를지 몰랐다. 여기서 밤을 세고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게 나았다. 유협은 시종에게 잠자리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저택은 손님방만 수십 개는 될 것 같았다. 한때는 이 방이 유희를 즐기던 사람들로 꽉 차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오묘해졌다.
‘찝찝해.’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유협은 한숨을 쉬며 겉옷을 벗었다.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고 침대에 앉자, 시종이 촛불에 불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과하게 정중한 태도로 자리를 떴다. 유협이 자기 등 뒤에 귀신이라도 있다고 말할까 봐 겁먹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유협의 걱정은 그게 아니었다.
‘오늘 밤 꿈은 분명 개꿈이다.’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는 건 혼을 섞는 것과도 비슷한 일이었다. 천강의 꿈을 향해 가면서 유협이 자신의 꿈도 열어 두었기에 다른 혼의 기운이 들어오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꿈이 연결되면 미래를 보거나 과거를 보거나 개꿈을 꿨다.
유협은 상처가 남은 양쪽 손을 수건으로 단단히 묶으며 한숨을 쉬었다.
‘개꿈 아니면 보기 싫은 걸 보게 되겠지.’
미래나 과거를 보는 일은 결코 즐겁지 않았다. 특히나 자신의 무의식을 기억하게 되는 일은 질색이었다. 그 때문에 유협은 촛불을 켜둔 채 눈을 부릅뜨고 버티려 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황제를 알현한 데다가 천강의 꿈에 들어간 피로가 결국 정신을 흐렸다.
눈을 떴을 때 유협은 자신이 안개가 자욱한 곳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어코 잠이 든 것이다. 유협은 한숨을 쉬며 안개 속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안개가 점점 옅어지자 저택이 하나 나타났다.
꿈속의 저택은 처음 보는 모양새였다. 천강의 집처럼 컸지만 섬세했다. 화려한 맛이 떨어지는 대신 담백한 미가 있었다. 유협은 가만히 서서 그 대문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들어가기 싫기도 하고, 반대로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달려들어 가고 싶기도 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대문 너머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유협은 저도 모르게 담벼락 너머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그 순간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말을 탄 사내들이 보였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남족으로 키가 크고 진중한 인상이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 차려입은 것과 반대로 사내들은 말을 박차고 나가지 않고 대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유협은 그사이에 한 명, 한 명씩 얼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나도 모르는 인물 투성인 걸 보니 개꿈이구나.’
유협은 짜증이 났지만 그나마 속으로 조금 안심했다. 과거를 보거나 미래를 보는 일보다는 나았다. 특히 미래를 보는 일은 아주 피곤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말을 타지 않고, 고삐를 잡은 채 나타났다. 그러자 남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펴고 그를 맞이했다. 누가 봐도 이 무리를 이끄는 자였다. 그 사람의 얼굴은 담벼락에 가려서 옆모습만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살짝 보이는 윤곽만으로도 미색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드럽게 손질된 옅은 갈색 머리에 하얀 피부, 붉은 입술이 마치 화장이라도 한 여인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잘 차려입은 옷은 갑옷이었고, 누가 보아도 늘씬한 몸을 가진 청년이었다. 게다가 뭔가 조금 이상했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유협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보아도 남족인데 묘족 출신인 본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협은 슬그머니 까치발을 들고 담벼락에 바싹 붙었다. 그 순간 번개처럼 고개를 돌리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유협은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머리카락만큼 밝은 눈동자와 촘촘한 속눈썹, 하얗고 고운 피부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유협이 놀란 이유는 남자의 미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육 황자님?”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남자는 천화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천화가 볼 살이 빠지고, 머리카락을 자르면 딱 이렇게 될 것 같았다. 더 신기한 건 천화가 자신을 보고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버렸다.
유협이 퍼뜩 이건 꿈이라고 상기하는 순간 천화가 한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왔다.
“유협?”
설마, 설마. 유협은 눈만 깜빡거렸다. 내가 지금 미래를 보고 있단 말인가?
천화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게 되었다. 정확히 마주 보는 자세는 아니었다. 천화가 유협보다 세 뼘은 더 컸다. 천화를 마주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황자님.”
확인차 유협이 부르자 천화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한동안 입을 달싹거리던 그가 뒤의 남자들을 보고 불쑥 말했다.
“유협이 방에 있는지 확인해.”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린다. 남자 한 명이 말에서 내려 부지런하게 뜰 안쪽으로 향했다.
내가 방에 있는지 확인하라고?
어리둥절한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천화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뒤에 있던 남자들이 경악해 말리기 시작했다.
“저하, 위험합니다!”
그러나 천화는 아랑곳 않고 유협의 뺨을 감쌌다. 한 손으로도 충분할 만큼 손이 컸다.
“네가 요괴든, 요물이든”
천화가 유협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벨 수 있을까.”
그가 소곤소곤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유협은 번개라도 맞은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거기다 ‘유협’이 방에 있는지 확인하라는 말은 성인이 된 자신도 함께 있다는 뜻인가?
혼란해진 유협이 천화의 손을 떼어 내려고 하자 천화가 양손으로 두 뺨을 잡아 왔다.
“처음 만났을 때 네 모습이구나. 그때는 그리 커 보이더니.”
그가 소중하다는 듯 뺨을 쓸었다.
“사실은 이렇게 어렸던 거지.”
유협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았다.
이게 개꿈인지, 예지몽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천화가 애틋하게 뺨을 쓸고,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동안 유협은 입을 조개처럼 꾹 닫고 있었다. 차라리 성격이 어렸을 때와 비슷하다면 모를까, 지금 천화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예지몽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지만, 천화는 유협의 상태를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정적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 뜰로 향했던 남자가 다가왔다. 그가 유협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천화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진짜는 지금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구나. 그렇다면 너는 무엇이냐?”
유협은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그 질문은 자신이 하고 싶었다. 귀엽고 다람쥐 같은 내 황자님은 어디 갔냐고.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말이 나갔다.
“개꿈인가…….”
“꿈? 이게 꿈이라면 길몽이겠지.”
천화가 부드럽게 말하며 유협의 머리를 쓸었다.
“그때도 네가 머리를 풀고 다니는 게 참 좋았는데.”
자꾸만 소름 돋는 소리를 하면서도 눈은 맑고 깨끗했다. 마치 사슴 같았던 눈망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개꿈이구나.
유협은 마음을 정했다. 천강이 천화의 이복형제라는 사실 때문에 천화를 겹쳐 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천화가 눈앞에 있는 사람처럼 기묘하게 질척거리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유협은 이만 깨어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 순간,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깜빡 잠들어서 부적을 챙겨 오지 않았네.’
꿈을 안전하게 왔다 갔다 하려면 부적과 같은 매개가 꼭 필요했다. 그러나 천강의 문제를 해결할 때처럼 부적을 그리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 선택지는 하나였다. 직접 충격을 줘서 깨는 수밖에.
때마침 천화의 허리에는 검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너무 길지도 않은 것이 적당히 베일 수 있어서 좋아 보인다. 그러나 무인의 칼이었다. 말로 해도 줄 것 같지 않았다. 유협도 적당한 핑계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자결해야 해서 칼 좀 빌려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유협이 생각해 낸 방법은 절도였다. 유협은 재빠르게 손을 칼 쪽으로 뻗었다. 그런데 바로 손목이 잡히더니 두 다리가 허공에 둥실 떴다. 천화가 칼로 가는 손을 낚아채 아예 유협을 둘러업은 것이다.
“놔!!”
“그건 안 되지. 칼은 어디에 쓰려고?”
유협이 칼을 훔치려 하자, 일사분란하게 일제히 손을 칼 손잡이에 댔던 사내들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봐도 요괴인 것 같습니다.”
“귀신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내들의 말에 천화가 짧게 인상을 썼다.
“귀신이라니. 귀신은 죽어야만 될 수 있는 게 아니더냐?”
천화가 평이하게 묻자 사내가 괴롭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 이 아이가 요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냥 유협이 깰 때까지 기다리지, 뭐.”
태연한 천화의 말에 사내들이 침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급하게 길을 떠나던 모양새였는데, 천화가 마음을 바꾸자 좌절한 모양새들이었다.
유협은 팔을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고 애썼다. 그 몸부림이 거칠었음에도 천화는 기어코 유협을 들고 저택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저항이 뚝 멈췄다. 안뜰의 모양새를 믿을 수 없었다.
“너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천화가 다정하게 물어 왔다.
묘족이 사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관상용 나무가 꽃을 만개하고 있었다. 고향의 향기가 퍼지자 유협은 무심코 관심이 가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꽃과 나무가 변방에서만 자라는 종류였다. 참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유협은 잠시 넋을 잃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작은 손님방에 갇히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 말았다.
“유협이 피곤할 것 같아서. 일어날 동안 잠시만 기다리렴.”
마치 착한 강아지라도 쓰다듬는 것처럼 천화가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 행동이 또 믿기지 않아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천화가 짧게 웃었다. 여전히 순수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천화는 유협의 눈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하, 미친 거 아니야?”
뒤늦게야 터진 말은 이미 가 버린 사람에게 닿지 못했다.
유협은 한참 동안 자신이 미친 거 아닌가, 이게 개꿈인가 미래인가를 두고 갈등하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살아 보면 알 터였다. 중요한 건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협이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작은 손님방이었지만 정갈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유협은 바구니며 선반 같은 살림살이를 자신의 것처럼 거리낌 없이 뒤졌다. 그러다 마침내 아름다운 도자기 잔을 찾아냈다.
도자기 잔은 틀림없이 잘 깨지지도 않고, 제대로 날카롭지도 않아 단검처럼 깔끔하게 베기 어려울 터였다. 그렇다면 손등에 쑤셔 박는 수밖에 없다.
유협은 한숨을 쉬고 잔을 바닥에 던졌다. 두꺼운 잔은 세 번 만에 금이 가며 완전히 부서졌다.
‘아프겠지.’
그나마 날카롭게 깨진 조각을 들고 유협은 심호흡했다. 꿈에서 다치면 현실에도 다치게 된다. 그러니 최대한 깔끔하게 찌르는 게 좋았다.
유협은 뾰족한 부분을 잡아서 그대로 살에 박아 넣었다. 천강의 꿈에 들어가느라 만들었던 상처가 헤집어지며 눈물이 찔끔 흘렀다. 바닥에 피가 뚝뚝 흐르며 눈앞이 흐려졌다. 마치 머리가 산산조각 나는 기분을 느끼며 유협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숨이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헉헉거리며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비단신이었다. 멍하니 누구의 신발인지 생각하는데 코앞으로 천강의 얼굴이 다가왔다. 유협이 깜짝 놀라서 뒤로 몸을 빼자 천강이 인상을 살짝 썼다.
“감기라니? 내 눈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그…… 그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몸이 뜨겁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셔서.”
등 뒤로 시종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침이 되어 시중을 들러 왔다가 유협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걸 알고 의사를 부르도록 허락을 받으려던 참이었다. 천강은 힐끗 유협의 드러난 쇄골을 쳐다봤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열은 모르겠고, 손은 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군.”
유협의 손은 베인 자국과 찍힌 자국으로 묶어 놨던 천이 붉게 물들어 난리였다. 유협은 한숨을 쉬며 다치지 않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괜찮습니다.”
“그 상태로 어떻게 말을 타려고? 내 저택에서 상처가 치료될 때까지 머물 생각이라면 말리지 않으마.”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협이 입을 다물자 천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기 힘들어 유협은 애써 말거리를 꺼냈다.
“어젯밤 달게 주무셨습니까?”
“그걸 어찌 하룻밤 만에 알겠느냐.”
천강은 유협 때문에 목숨을 구하고도 아직도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유협은 속으로 배려도 없는 남족 놈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렇지만 천강에게 제대로 된 부적을 써 주는 일도 필요했다.
“의원이 오는 동안 부적을 써 드리겠습니다. 서쪽의 창문에 붙여 두시면 됩니다.”
“그 손을 해서 부적을 쓰겠다고?”
절대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미심쩍어하는 천강을 보니 한숨만 나왔다.
“부적은 피로 쓰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마침 생피가 흐르는 도중이니 지금 쓰면 좋습니다.”
아직도 의심을 품은 천강을 앞에 두고, 유협은 손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피를 이용해 부적을 그려 냈다.
천강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바닥에서 일하는 유협을 구경했다. 유협이 부적을 그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넉넉한 침의 사이로 가슴이 얼핏 보였다.
몸은 날씬하고, 처음 봤을 땐 묘족인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색이었다. 거기다 성격도 순순하고 재주가 많으니 참 만족스러웠다. 검은 머리가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것도 미모에 한몫했다.
유협은 천강의 시선이 온몸을 꼼꼼하게 뜯어보는 걸 느꼈지만 철저하게 모른 척했다. 이 집에서 빠르게 나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때맞춰 의원이 도착했다. 나이가 지긋한 의원은 이 손으로 정말 말을 탈 거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더니, 요새 젊은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손에 최대한 붕대를 두껍게 감고 나니 그나마 피가 멈췄다.
유협은 의사에게 한 번 인사하고 천강에게는 이만 떠날 의사를 고했다. 침의 위에 얇은 외투 하나만 걸치고 있던 천강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답례는 직접 하러 가마.”
“답례라니, 폐하께서 자식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명하신 것이니 제가 감사 받을 일이 아닙니다.”
네 얼굴은 백리 밖에서도 보기 싫다는 의사가 통했는지 천강은 그저 픽 웃고 말 뿐이었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말을 끌고 나오자 천강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유협은 고슴도치처럼 경계심이 삐죽 올라오는 걸 느꼈다. 반대로 천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네가 육 황자와 함께 머문다고?”
“……그렇습니다.”
“육 황자라면 아직 아이일 텐데, 불편한 건 없느냐?”
천강이 의뭉스럽게 물었다. 분위기가 끈적한 게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 유협은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저는 거친 변방 출신이라 모든 것 하나하나가 눈에 차고 즐겁기만 합니다.”
“그러냐? 묘족들은 참 딱딱한 인종들 아닌가.”
천강이 웃었다.
“어쨌든 감사하게 될 일이 있으면 그쪽으로 내 직접 찾아갈 테니 싫은 티를 내진 말아라.”
“송구합니다.”
끝까지 유협을 잡고 늘어지는 천강 때문에 처음에는 어제 꾼 꿈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말을 달리면 달릴수록 머리가 터질 것처럼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어제 꿈속에서 본 천화는 과연 미래였을까? 아니면 그저 개꿈에 불과한 걸까.
입궁하면서도 생각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황제를 알현하는 것도 깜빡할 뻔했다. 정신이 들어 겨우 찾아간 황제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음장 같았던 모습과 다르게 지금은 미세하게 인상만 쓸 뿐이다.
유협이 엎드려서 절을 올리자, 황자가 일어나라 손짓하며 물었다.
“셋째의 질환을 다스리기 전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예. 폐하.”
“그렇다면 지금.”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썼다.
“고작 하룻밤 만에 치료가 끝났다는 것이냐?”
황제는 유협이 사기라도 치는 것처럼 매도하고 있었다. 누가 천강의 아버지 아니랄까 봐,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유협은 꿋꿋이 말했다.
“셋째 황자님께서 아프셨던 이유는 병환이 아니라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를 쫓아내니 자연스럽게 건강이 회복되셨습니다.”
황제는 잠시 말없이 유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혼잣말처럼 말했다.
“남에 존재하는 모든 주술사와 의사가 고칠 수 없다고 했다던데.”
그리고 그가 눈길을 힐끗 주었다.
“너희 묘족이 정말로 귀에 관해서는 고매한 술법을 가졌나 보군.”
“황공하옵니다.”
“됐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라.”
유협은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섰다. 그동안 황제는 뚫어져라 유협을 보고 있었다. 황제는 묘족이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유협에게 중요한 건 묘족의 명예가 아니었다.
유협은 후궁전으로 다급히 발을 옮겼다. 마침내 건녕궁에 도착했을 때 유협은 거의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천화를 봐야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화를 떠올리면 묵직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 꿈을 꾸고 나서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유협은 이래서 미래를 보는 일을 싫어했다. 꿈속에서 천화가 어떻게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뒤에 무장을 한가득 데리고 있었다.
유협이 생각한 천화의 미래와 무척 달랐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은 천화의 태도였다. 그는 꿈속의 유협이 무척 귀엽다는 것처럼 굴었는데 어딘가 미묘하게 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동안 천화와 함께 생활하면서 놓친 부분이 있는 건 아닌가?
유협은 지울 수 없는 의문을 품고 건녕궁에 도착했다. 그러나 새벽같이 찾아간 건녕궁의 문은 닫혀 있었다. 유협을 본 궁녀가 나와 말을 전했다.
“마마님들은 황후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셨습니다.”
유협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왔음을 알았다. 그러나 돌아갈 마음이 영 들지 않아서 문제였다. 유협이 초조함을 감추고 물었다.
“그렇다면 육 황자님을 잠시 뵐 수 있을까요?”
“귀인분들의 허락이 없이는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유협의 섬세한 얼굴에 얼핏 실망감이 비쳤다.
“그럼 죄송하지만 황자님께 유협이 뵈러 왔다고 말씀드려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건 전해드리겠습니다.”
궁녀가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 문을 닫았다. 잠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터라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유협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어느 순간 단단히 닫힌 문이 열리더니 작은 인형이 폴짝 뛰어나왔다.
얼떨결에 작은 몸을 마주 안고서야 유협은 그게 천화라는 걸 알았다. 품 안이 따끈했다. 유협은 손에 힘을 꽉 주고 아이를 안았다가 아예 들어 올려 껴안았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는데 온몸으로 안겨드는 아이가 찡했다.
한동안 아이를 끌어안던 유협은 뒤늦게야 궁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천화를 내려놓았다. 천화는 떨어지기 싫다는 듯 손에 힘을 주다가 겨우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바싹 붙은 채였다. 유협이 먼저 예를 취했다.
“저하, 말씀드리지 못하고 떠나 송구할 뿐입니다.”
천화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도리질 쳤다. 다시 한번 품 안으로 파고드는 몸짓에 유협은 얼마나 천화가 기다리고 기다렸는지 알아차렸다. 아이의 진심이 느껴지자, 더 이상 예의라는 명목으로 밀어 낼 수 없었다. 유협은 그저 천화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내내 기다리셨어요?”
나직한 질문에 작은 머리가 끄덕거렸다.
유협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꿈속에서 받은 혼란이 확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유협은 천화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무척 고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천강이 벌인 죄를 지켜보는 것부터, 천화의 꿈을 꾼 것까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유협이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천화가 숨을 쉴 때마다 작게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유협은 천화가 조금씩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저하.”
유협은 어린아이를 잡아 달래며 얼굴을 가슴에서 떼어 냈다. 그러자 정말로 천화의 눈매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을 보니 가슴이 배로 아픈 기분이다.
이런 아이가, 미래에 무엇이 되던 나를 해칠 수 있을까? 그 꿈이 사실이어도 아무래도 좋았다. 천화는 절대 유협을 해하지 않을 것이다.
유협은 손을 뻗어 통통한 얼굴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우리 저하, 어쩌면 좋아요. 많이 속상하셨어요?”
천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두 눈은 좌절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제가 너무 오래 밖에 있었죠?”
“……알았어.”
“네?”
“간 줄 알았어.”
훌쩍거리는 목소리에 유협이 흠칫 놀랐다. 천화의 뒷배경을 생각해 보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우는 게 이해가 됐다. 갑자기 사라진 어머니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천대하는 상황에서 천화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리고 유협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을 때 기분은 어땠을까. 유협은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했다.
“밖에 계신 형님을 도와드리러 간 거였어요. 가지 않아요.”
“그렇지만 갈 거잖아.”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서럽게 말했다. 그러더니 설움을 참지 못하고 그만, 어헝 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협은 잠시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천화는 묘족인 유협이 묘족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10살 아이가 이렇게 영민할 수 있나? 의문을 품으면서도 유협은 천화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저하 제발, 제발 옥루를 멈춰 주세요.”
“가잖아아”
“가지 않을게요. 가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거짓마알…….”
“정말이에요.”
유협의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천화는 버려져 있던 서러움이 폭발해 주체하지 못했다.
“이제 곧 마마님들이 오세요!”
두 사람이 건녕궁 대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궁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말에 유협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이른 아침에 문안 인사도 하지 않고, 대문 앞에서 눈물이나 보이다니 귀인들이 알면 진노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천화에게 함부로 가겠다, 가지 않겠다 약속을 미루고 당길 수도 없었다. 결국 유협은 천화를 번쩍 안아 들었다.
“마마님들께서 돌아오시면 황자께서 산책을 하러 갔다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세요.”
궁녀가 진땀 난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한 손에는 서럽게 허엉 우는 천화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등을 토닥이며 유협은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어디든 가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저하 울지 마세요. 가지 않았어요.”
“싫어……. 가지 마.”
“제가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웠죠. 죄송해요.”
천화를 도닥이면서 유협은 아이를 떨어트리지 않게 팔에 힘을 주었다. 어리고 작은 생명체가 바싹 붙자 뜨거운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문득 꿈속에서 자신의 양 뺨을 잡던 단단한 손이 생각났지만 유협은 고개를 털어 생각을 몰아냈다.
‘천화가 무장이 된다고?’
말도 되지 않았다. 천화의 성품은 무르고 부드러웠다. 한 번 정을 주면 뗄 줄을 몰랐고 평소에는 차분하고 얌전했다. 만약 벼슬길에 오른다고 해도 검을 쓰는 쪽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건지.’
아직도 불길함이 남아 있었지만 유협은 애써 생각을 정리했다. 천화의 키가 그만큼 커지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있어야 했다. 고작 꿈 하나 때문에 천화를 다르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시면 힘들어요.”
유협은 안타까워하며 몇 번이나 천화의 등을 토닥거렸다. 얼핏얼핏 자신을 내려다보는 꿈속의 천화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어 잊어버렸다.
마침내 울음을 다 쏟아낸 천화가 히끅거리며 유협의 품에 완전히 기댔다. 울어서 발개진 얼굴과 통통한 볼이 불쌍하면서도 귀여웠다. 유협은 그런 천화를 보다가 약속했다.
“저하 앞으로는 나갈 일이 있으면 꼭 저하께 말씀 드릴게요. 지금처럼 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황제가 부르면 오늘처럼 긴급하게 나가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출궁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천화에게 쪽지 한 장은 전해 달라고 해야겠다.
천화가 울먹거면서 물었다.
“정…… 정말?”
“네. 정말요.”
유협은 손에 감긴 부드러운 천으로 천화의 눈물을 찍어서 닦아 냈다. 유협이 붕대를 감은 손으로 가만가만 눈물을 닦아 주자 아이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잠시 꾸벅꾸벅 조는 것 같더니만 유협에게 고개를 뒤로 기대며 잠들어 버렸다.
‘밤을 새서 기다렸구나.’
그 생각을 하니 또다시 가슴이 찡해졌다. 어젯밤 꿈 때문에 천화를 경계했던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유협은 천화의 앞머리를 넘겨 주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닮긴 했다.’
언젠가 생각하려다 실패했던 다 큰 천화의 모습이 꿈에서는 생생했다. 하지만 유협은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추하는 걸 그만두었다. 예지몽을 꿨다고 해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다가올 일을 미리 알게 되는 것뿐이었다.
‘만약 그 사람이 천화가 맞았다면, 그런 사정이 있었겠지.’
더구나 꿈속의 천화는 아마도 유협 한 명만을 위해서 정원을 가꾼 사람이었다. 그 정도 정성이라면 분명 둘의 사이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생각해 보면 그리 기분 나쁘지도 않았어.’
논리적인 귀결을 건너뛰고 마음대로 이어지는 건 꿈의 특성이었다. 천화는 꿈속에서 시종일관 유협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따지고 보면 수상한 일을 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안도가 몰려왔다.
‘천화가 내게 나쁜 일을 할 리가 없지.’
천화는 꿈결에 만나도 믿었지만 유협이 황궁에서 가장 껄끄러워하는 일은 황자, 황녀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살이 보기에도 좋게 오른 아이들은 사랑스러워 보이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사랑스러움과는 달리,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그런지 성질이 강하고 집요했다. 유협이 미처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떼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한 그들을 마주하다 보니 천화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고 유협은 생각했다. 건녕궁에서 뛰어노는 두 아이를 보자니 그 확신이 더더욱 강해졌다.
오늘도 마침 두 귀인에게 다른 후궁이 찾아왔는데 각자 황자와 황녀를 대동한 채였다. 어른들이 홍소를 나누는 동안 간식을 다 얻어먹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에 지루함을 느낀 티를 잔뜩 냈다. 결국 그들은 마음껏 놀 수 있는 정원으로 뛰쳐나왔다.
정원에는 당연히 천화와 유협이 있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여름 햇살 아래서 개미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날은 천화가 여름 곤충을 소개해 준다는 날이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고요한 순간을 꺄르르 웃는 소리와 강아지의 발소리가 깨트렸다. 보모상궁을 대동한 황녀와 황자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 강아지까지 끼고 정원을 침범했다.
순간적으로 놀란 유협과 천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쳐다봤다. 황녀의 옥빛 귀걸이가 여름 햇빛에 찬란하게 빛났다. 황자는 강아지를 쫓아가다 넘어질 뻔하며 소란을 일으켰다. 유협은 저도 모르게 천화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천화를 자신의 뒤로 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요란하게 쳐들어온 그들은 딱히 천화와 유협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토실토실한 새끼 강아지를 쫓아서 정원을 빙빙 돌았다. 숨 막히는 소음 끝에 황자가 강아지의 꼬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어린 것은 깽 소리를 내며 질질 끌려가 황자의 품에 안겼다.
황녀는 자신이 잡으려고 했던 강아지를 황자가 잡자 대뜸 심술이 났다. 일부러 강아지에게 관심 없는 척 뒤를 돌아 멍하니 서 있던 유협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왜 여기 있어?”
그 질문에 천화가 움찔했다. 작은 손으로 옷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유협에게 괜한 시비가 걸릴까 봐 긴장한 모양이었다. 유협은 안심하라는 의미로 천화의 손을 다독거리며 대답했다.
“황자님과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천화의 우려와 다르게 황녀는 유협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있었다. 대신 힐끔힐끔 황자가 강아지를 잡고 있는 모습만 보았다. 황자가 강아지를 아직도 갖고 놀고 있는 걸 본 황녀는 다시 한번 관심을 끌기 위해 목소리를 키워 물었다.
“그런데, 너…… 음 니가 귀신 볼 줄 알아?”
아직 어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황녀가 당당하게 물었다. 유협은 웃음을 참고 대답했다.
“네. 제가 맞습니다.”
“율아야! 여기 귀신 볼 줄 안대!”
황녀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보모상궁들은 물론 황자까지 유협에게 시선이 꽂혀 왔다. 그러자 천화가 아예 유협의 허리를 꼭 껴안고 그 뒤로 숨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너무 큰 압박이 아닌가 싶어 유협은 자신을 껴안은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여기도 있어? 보여?”
황녀가 재촉하듯 묻자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저 멀리서 황자까지 강아지를 안고 어설프게 달려왔다. 아이가 헉헉거리며 물었다.
“진짜? 진짜 볼 줄 알아?”
황녀의 말에 단번에 속은 아이는 그럼에도 강아지는 꽉 안고 있었다.
“네. 그런데 여기는 혼령 없이 깨끗하고 단정하네요, 저하.”
유협이 다정하게 대답하자 뒤를 옭아매는 손길이 더 깊어졌다. 자신보다도 나이가 한참 어린데, 천화는 그런 아이들까지 경계하고 떨떠름해하는 모양이었다. 천화를 위해서라도 그만 관심을 가져 줬으면 싶었지만, 어째 아이들의 얼굴에 광택이 돌았다.
“귀신은 어떻게 생겼어?”
“각각마다 다르게 생겼답니다.”
“나도 귀신 볼 수 있어?”
“제가 있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뭐야……. 왜?”
“제가 귀신을 내쫓으러 왔으니까요.”
유협이 장난치듯 말하자 황자와 황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실제로 귀신을 본다면 까무러치겠지만 어린 나이에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얼마나 많이 내쫓았어?”
“귀신은 내쫓으면 울어?”
“아직 많이는 보지 못했고, 쫓아낸다고 우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 짧은 질문이 끝나는 새를 못 참고 황녀는 집중력을 잃기 시작했다. 황자가 안고 있던 강아지의 발을 당기더니 끝내 황자를 잡고 다른 놀이를 하자고 졸랐다. 그동안 천화는 마치 유협과 한 몸 같이 붙어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귀신을 보면 무섭지 않아?”
황자가 황녀를 무시하고 물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보아서 무섭지 않습니다.”
“그럼 나도 볼 수 있어?”
“가끔 무서운 귀신이 나타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유협과 황자의 대화에 불쑥 황녀가 끼어들었다.
“있잖아, 강아지도 귀신이 될 수 있어?”
“강아지요?”
유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황녀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동물도 귀신이 돼?”
“생전에 주인을 훌륭하게 따랐거나 사랑을 많이 받았다면 간혹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 말에 아이가 눈을 빛냈다. 황녀가 황자의 어깨를 잡더니 강아지의 발을 잡아당겼다.
“그럼 얘도?”
“네?”
유협은 아직 귀도 채 펴지지 않은 강아지를 당황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아이들이 하도 조물락거려 작은 강아지는 혀를 빼물고 헥헥 거리고 있었다. 그저 불쌍하기만 한 모습에 귀신은커녕 꿀밤을 놓으며 내려놓으라고 구박하고 싶었다.
유협이 자신의 신세를 조금 한탄하는 사이에 황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유협과 천화가 수시로 잉어를 보는 연못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강아지의 발을 끌고 그 쪽으로 가려했다. 어른들은 갑작스러운 행동에 영문을 몰라 깜짝 놀랐다.
물론 황자가 재빠르게 품에 힘을 줬기 때문에 황녀의 시도는 낑 소리와 함께 무산되었다. 황자는 인상을 쓰고 강아지 얼굴을 자기 품으로 돌려서 꼭 껴안았다. 황녀는 그러자 더욱 화가 난 듯했다.
“아기씨, 아기씨 강아지를 데려올까요?”
보다 못한 보모상궁 하나가 말하자 황녀가 버럭 외쳤다.
“싫어! 그건 털이 막 이렇지 않단 말이야!”
아이는 강아지의 왼쪽 눈에 검은 털이 있는 걸 가리키며 역정을 냈다. 그 모습에 황자는 강아지를 숨 막히게 껴안았다. 유협은 보기 답답한 광경에 인상을 썼다. 참으로 생명이 중한 줄 모르는 다툼이었다. 황녀가 이제 대놓고 징징거렸다.
“나 줘. 나 줘어.”
“싫어!”
황자가 황녀의 어깨를 탁 소리 나게 쳤다. 그러다 강아지를 안은 손에서 힘이 주르륵 빠지더니 순식간에 강아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귀찮은 손길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강아지는 그대로 정원 덤불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내 강아지!”
황자와 황녀가 동시에 손을 뻗다 어깨를 부딪쳤다.
“내 꺼야!”
황자가 퍽 소리 나게 황녀의 얼굴을 밀자 보모상궁들이 난리가 났다. 귀한 아기씨 얼굴에 상처라도 났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보모상궁들이 아이를 잡아 어르고 달래며 떼어 놓았다. 이미 두 아이는 엉엉 울고 있었다.
“아기씨, 아기씨도 강아지가 있잖아요.”
“싫어어어어 쟤 줘어.”
황녀가 엉엉 울며 엎어졌다. 황자는 반대로 뒤로 누워 떼를 썼다.
“내 꺼야! 내 꺼야! 내 꺼야!”
순식간에 일어난 난장판에 어리둥절해진 건 유협과 천화였다. 어쨌든 정리는 해야겠다 싶어서 유협은 스르륵 천화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꾹 하고 옷깃을 누군가 당겨 왔다. 돌아보니 천화가 입술을 꾹 물고 유협을 보고 있었다.
“네? 황자님?”
“싫어.”
“네?”
“가지 마.”
천화가 워낙 조그맣게 중얼거려 유협은 다시 천화를 향해 돌아섰다. 그 순간 바로 천화가 품에 뛰어들어 안겨 왔다. 유협은 자연스럽게 작은 몸을 받쳐 안았다. 지금 보니 갈색 눈동자가 슬픔과 우울에 젖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니 심란하구나.’
유협은 잠시 난리통을 뒤로하고 천화에게 이마를 꿍 부딪쳤다. 그러자 천화가 부드러운 뺨으로 목덜미를 비벼 왔다. 작은 동물이 안겨 오는 기분이 들어 찡했다.
‘그래 내가 뭐라고 끼어드냐.’
유협은 천화를 고쳐 안으며 생각했다. 자신은 저런 고귀한 분들에게 울지 말라고 눈물이라도 닦아 줄 처지도 못 됐다. 유협과 천화는 머리를 나란히 대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봤다.
엎어진 황녀가 어찌나 엉엉 울던지 세상 서러워 보였다. 같이 흐느껴 울며 떼쓰던 황자가 벌떡 일어선 건 그 순간이었다. 울면서도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덤불 속으로 손을 넣어 휘저었다. 마침내 강아지가 발부터 점점 끌려 나오며 몸부림쳤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 모습을 본 황녀는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내 꺼야!”
“내 꺼거든?”
“내 꺼란 말이야!!”
황녀가 울면서 손으로 황자의 머리를 때렸다. 퍽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황자가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머리가 다 아픈 보모상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기씨, 궁에 강아지가 많잖아요. 황녀님께 한 마리만 드리는 게 어때요?”
그 순간 아이는 머리가 올올이 서는 것처럼 화를 냈다. 유협은 물론 천화까지 움찔할 정도로 크게 외쳤다.
“싫어!”
그러더니 안고 있던 강아지를 바닥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진 강아지가 케켁 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눈만 깜빡거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보모상궁은 헉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치 다친 강아지로부터 황자를 지키는 것처럼 아이를 물러나게 했다. 그 광경을 보던 황녀가 코를 훌쩍거리며 황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천율이 강아지를 죽였어.”
“안 죽였어!”
유협은 더 이상 끔찍한 이 꼴을 천화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아이를 품에 내려 제 뒤에 숨겼다. 천화가 다시금 유협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황자는 씩씩거리더니 손으로 철썩 철썩 강아지를 내리쳤다. 그때마다 강아지는 움찔움찔 거리긴 했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죽였어.”
황녀가 이상한 감명을 받고 중얼거렸다. 황자도 인상을 점점 쓰더니 뒤로 휙 돌아 버렸다.
‘남의 정원에 아픈 강아지를 설마 이렇게 던지고 갈 건 아니겠지.’
유협이 속으로 발을 구르고 있을 때였다. 황녀가 조심스럽게 강아지에게 다가가 더러운 것을 만지듯 강아지의 귀를 조금 당겼다.
강아지가 그대로 질질 끌려오자 황녀는 문득 아까 실현하려다 실패한 계획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황녀는 강아지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줌도 안 나가는 머리가 빠지든 말든 질질 끌면서 천화와 유협이 사랑하는 연못 앞에 멈춰 섰다.
보모상궁은 물론 유협까지 황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아차리고 등이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황녀님, 귀신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유협이 한 발자국 나서며 말하자 황녀가 고개를 젓더니 강아지를 머리째로 끌고 연못에 풍덩 빠뜨렸다. 그리고 마치 요리솥 여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숙여 강아지가 잠겨 드는 걸 보았다. 순간 황자도 도도도 달려가서 연못에 빠진 강아지를 보았다.
원래라면 수영을 할 수 있었겠지만 머리를 부딪쳐 이상해진 강아지는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연못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신기한 광경에 아이들은 홀린 듯이 강아지가 물속에서 흐물거리는 광경을 지켜봤다.
‘아니, 이런 미친!’
유협이 황급히 발을 뗐을 때였다. 다시 한번 뒤에서 작은 당김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역시나 천화였다. 천화는 아까보다도 낙담한 얼굴을 한 채로 유협을 바라보았다. 유협은 아차 싶었다.
‘이런 광경을 봤으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하지만 강아지의 목숨도 한시가 급했다. 유협은 무릎을 꿇고 천화의 어깨를 잡았다.
“금방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천화가 잡으려는 손 사이로 가볍게 빠져나가 연못으로 향했다. 보모상궁들은 날카로운 얼굴이 됐으나 이런 일은 수십 번 봤다는 듯 냉정했다.
그래서 유협은 신발을 신은 채로 풍덩 연못 속으로 들어갔다. 허벅지부터 보이게 트여 있는 남색 옷과 하얀 바지가 순식간에 물에 젖었다. 황자와 황녀가 빤히 바라보던 강아지를 유협이 들어 올렸다.
아직 살아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꺼내고 난 후 곧바로 코에 입 맞춰 인공호흡을 했다. 그러나 강아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온몸이라고 해 봤자 한 손에 들리는 강아지의 꼬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유협은 씁쓸한 표정으로 강아지를 꺼내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 강아지는 유협이 내려놓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불쑥 황자가 울먹였다.
“내 강아지…….”
황자가 그렁그렁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상한 감동을 받던 황녀는 갑작스러운 울음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자 황자가 황녀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퍽퍽 소리를 냈다. 당연히 황녀는 같이 울음을 터트렸다.
유협은 처참한 심정으로 천화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천화마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유협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미치겠다.’
아이들 울음은 전염성이 있다고 했다. 천화가 황녀, 황자보다 나이가 조금 많긴 했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 때문에 따라 우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 순간이었다.
천화가 먼저 품을 벌렸다.
“안아 줘.”
작은 품을 보니 찡해졌다. 살아 있던 강아지가 생으로 죽는 걸 봤으니 천화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지금에야 걱정이 들었다. 더구나 천화는 외부인이 들어왔을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을 터였다.
유협은 기꺼이 손을 뻗어 천화를 끌어안았다. 천화는 자꾸만 유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새끼 강아지 같아서 저절로 뒷머리를 쓰다듬게 됐다.
“앞으로는 가지 마.”
“네?”
“전에 안 가겠다고 했잖아…….”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얼핏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유협은 천화가 무언가 겁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오늘 일어난 난장판 때문에 애나 어른이나 모든 충격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협은 천화를 소중히 안아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행여 악몽을 꿀까 봐 걱정이었다.
황자와 황녀는 보모상궁이 어르고 달래도 계속 뚱하게 서로를 대했다. 그러다 제 어머니가 오자 서로 달려가 이르기 바빴다. 다행히도 강아지는 황자가 챙겨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됐고, 오후가 다 져갈 때쯤에야 객들은 돌아갔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웬만하면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유협은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원에서 처소로 돌아온 천화는 여전히 사슴같이 우울한 얼굴이었다.
몇 번이나 돌아갈 때를 재고 또 재는데,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가고 밤은 기분 나쁘게 찐득하기만 했다. 여름밤이 이렇게 우울해도 되는 건가.
밤 매미가 울기 시작하자 천화는 잠을 자러 침상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유협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모습이 못내 아기 강아지 같았다. 천화가 잠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유협은 아이를 번쩍 들어서 침상에 눕혔다. 창백한 얼굴을 쓸어 주자 천화가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오늘 많이 놀라셨죠?”
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강아지는 죽었어?”
순간 유협은 천화의 눈치를 살폈다. 진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구나.”
천화가 작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유협이 조금 당황할 때, 천화가 유협의 손을 잡아 왔다. 그리고 늘 그렇듯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아지 귀신이 돌아다니면 어떡해?”
“동물은 쉽게 원한을 품지 않아요.”
그래서 딱하죠. 유협은 뒷말은 삼키고 천화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천화가 으응, 말을 늘리면서 유협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래도 혼자 자기 무서워.”
“아.”
“같이 자자, 응?”
예상했던 어리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유협도 도무지 이 밤에 혼자 천화를 남겨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유협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코를 살짝 꼬집자 천화가 어깨를 웅크리며 웃었다.
천화의 방에는 유협이 잘 만한 침대는 없었지만 바닥에 이불을 깔면 나름 잠자리가 됐다. 유협은 젖은 바지와 상의를 벗어 잘 치워 두었다. 내의 차림이 되었지만 여름이라 추울 것도 없었다. 천화가 다람쥐처럼 몸을 말고 있는 걸 보고 유협은 이불을 잘 둘러 주었다.
“황자님.”
“응.”
“오늘 우리 둘만 있던 걸로 할까요?”
“응?”
천화가 눈을 깜빡이며 침대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유협은 그런 천화의 이마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황자님과 황녀님은 오지 않고, 저와 함께 정원에서 곤충 구경을 하고 노신 거예요.”
이해하지 못하는 갈색 눈동자를 쓸어주자 천화가 고분고분하게 눈을 감았다.
“그래서 오늘 개미도 보고, 매미도 보고, 저한테 사마귀도 보여 주셨어요.”
“응.”
“오늘은 그렇게 재밌게 지냈던 걸로 해요. 어때요?”
천화는 눈을 잠시 감았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 유협이 자신의 손을 놓고 사라져 버리는 감각이 온전했다. 그 감각이 너무나 기분이 나빴다. 등골이 다 오싹할 정도였다. 분명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문제가 생기자 유협은 천화의 손을 바로 놓았다.
‘거짓말쟁이.’
그런 생각이 들며 마음속이 차가워졌다. 마치 자신이 귀신이라도 된 듯 얼굴과 온몸이 검붉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유협이 같이 잠을 자고 가는 게 좋아 화를 낼 수 없었다. 대신 천화는 몸을 좀 더 동그랗게 말았다.
“추우세요?”
유협이 걱정하며 물었다. 강아지가 죽은 후에 유협은 계속 저런 표정이었다.
천화는 도대체 유협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천화의 하얀 손가락이 유협의 까만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옛날이야기 해 줘.”
유협이 기꺼이 대답했다.
“어떤 걸로 해 드릴까요?”
“노래 나오는 걸로.”
묘족의 옛날이야기에는 시와 노래가 많이 섞여 있었다. 유협은 머릿속을 뒤져 강아지가 들어가지 않는 노래를 찾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조른 것과 다르게 채 얼마 되지 않아서 천화는 잠들었다.
‘가엾어라. 얼마나 놀랐으면.’
유협은 누운 채로 천화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부디 오늘 일을 완전히 잊었으면. 그렇게 기도하며 유협은 가만가만 잠에 빠졌다.
✾✾✾
유협이 눈을 떴을 때 이미 해가 높이 떠 있었다. 지겨운 맴맴 소리가 온 방 안을 채운다. 유협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가렸다.
대륙의 끝에 위치한 변방의 특성상 여름도 그렇게 덥지 않았다. 그런데 대륙 가운데 위치한 남은 아침이 넘어가기만 하면 열이 정수리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그 덕분에 바닥에서 잠들었던 유협은 온몸이 끈적거리는 기분 나쁜 느낌에 깨고 말았다. 심지어 긴 머리카락이 목뒤에 달라붙으며 심하게 자기주장을 했다.
유협은 대충 풀어 치워 뒀던 끈을 가져와 입에 물었다.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게 머리를 다 묶은 후에 유협은 아직도 잠에 깊게 빠져 있는 천화를 살살 깨우기 시작했다.
“저하, 저하.”
“우응…….”
아이가 웅얼거리며 잠투정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유협의 눈이 반달로 변했다. 침대에 폭 몸을 묻어 갈색 머리카락만 빼꼼 나온 게 너무 귀여웠다.
‘아 진짜 내 동생이었으면 한 번 꼬집어 보는 건데.’
통통한 하얀 뺨을 보고 있자니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나 여기는 남, 천화는 황제의 아들이었다. 슬프게도 여태껏 집적거린 것만 걸려도 유협은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나중에…….’
나중에 천화가 다 커서 변방에 오게 되면, 혹은 유협이 떠나기 전에 반드시 꼬집어 보리라.
음험한 속내를 감추고 유협은 쿡쿡 계속해서 천화를 찔렀다. 이제 후덥지근한 기운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저하. 저 잠시 제 전각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으응?”
잠에 취한 눈동자가 그제야 조금 또렷해졌다. 그러자 눈매 역시 위로 올라갔다. 아이가 워낙 예쁘다 보니 그렇게 눈매가 잡히자마자 인상이 변했다.
유협이 감탄하는 사이 천화는 몇 번 힘들게 눈을 깜빡거리다가 마침내 머리를 들어 올렸다. 한 자세 그대로 누워 잤는지 머리가 눌려 있었다. 유협이 큭큭 거리고 웃자 천화가 영문을 몰라 했다.
아직도 잠에 취한 채로 눈을 비비던 천화는 유협이 같은 말을 반복했을 때 눈을 번쩍 떴다.
“제 처소에 좀 다녀올까 합니다.”
“왜? 밥은?”
“그곳에서 상을 받으려고요. 씻고 옷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유협이 자신의 젖은 옷에 눈짓했다. 천화는 그 시선을 따라가다 옷 뭉치를 발견했다.
“으응.”
대답은 ‘응’이라고 하면서 천화는 추욱 늘어졌다. 하여튼 어찌나 사람을 타는지 한 번 두고 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천화가 버릇없는 큰 황자님이라면 마음이 아프지도 않을 텐데, 천화는 유협이 잠시 떠나는 걸 진심으로 힘들어했다.
이 시간까지 천화를 깨우러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 봐도 사람이 얼마나 그리울지 알 만했다. 궁녀들은 적당한 수준으로만 천화를 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협이 일부러 밝게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동안 황자님은 오늘은 뭐 하고 놀지 생각해 보실래요?”
천화가 눈을 깜빡거렸다. 아이는 자주 눈만 깜빡거리며 어떤 의사 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 버릇을 잘 아는 유협은 손가락으로 천화의 눈 밑을 쓰다듬었다. 아이가 눈을 꼬옥 감자 입술이 올라가며 저절로 사랑스러운 표정이 만들어졌다.
유협은 낮게 웃고 눈 밑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천화가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생각해 두셔야 해요?”
“……응.”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옷가지를 줍기 위해 방구석으로 가자 벌써부터 시선이 달라붙었다. 뒤를 돌아보니 투명한 눈에 벌써부터 투정이 가득했다. 정말 아기 사슴 같다고 생각하며 유협은 꾸벅 천화에게 인사를 전했다.
“식사하고 계셔요.”
천화가 뚱한 표정으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 정말, 정말 내 동생이었으면 씹어 먹었을 텐데. 뺨도 빨아먹어 보고 머리도 묶어 주고 무릎에도 앉히고. 누이도 늘 귀여운 동생을 갖고 싶다고 했으니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
사사로운 망상을 하다 보니 처소까지 가는 길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환상은 처소로 돌아가자마자 와장창 깨졌다. 유협이 대충 구겨진 옷을 입고 온 걸 보고 시종은 그야말로 눈물까지 지어 보였던 것이다.
“세상에, 백 공자. 이게, 이게 무슨…….”
시종이 손을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생각보다 더 큰 반응에 민망해진 유협이 황급히 말했다.
“어제 실수로 연못에 빠졌습니다.”
“네? 아니 그게 무슨.”
시종이 어이가 없다는 듯 유협을 훑어보며 말했다. 백유협은 이미 장성한 소년이었다. 연못에 실수로 빠질 나이는 한참 지났다는 뜻이다. 그 눈빛에 얼굴이 뚫릴 것 같았다.
유협은 애써 모른 척하며 열심히 옷을 벗어 한구석에 두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잔소리를 피해 변명을 꺼냈다.
“씻고 상을 받자마자 황자님께 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럼 백 공자가 그 외에 갈 곳도 있습니까?”
시종이 괜한 신경질을 부렸다.
유협은 모르는 척 재빠르게 욕실로 들어가 시원하게 물을 펐다. 그사이에 물이 미지근해졌지만 여름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대로 몸에 물을 쏟아 부으니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렇게 물에 피는 꽃처럼 씻고 나오니 떡하니 새 옷이 놓여 있었다. 시종은 상을 차리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옷을 침상에서 들어 올린 유협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머리가 제대로 박혔으면 절대로 입지 않을 유별난 파란색 옷이었다. 이런 색은 후궁들도 축제 때나 입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받아왔을까. 이거 복수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에 시종이 상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어서 옷 입고 식사하세요.”
시종이 하도 여상하게 말해서 하마터면 그대로 입을 뻔한 유협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유협이 조심스럽게 옷을 들어 보였다.
“이 옷을 입으라고……?”
말이 저절로 흐려졌다. 그러니까 이걸 사람이 입으라고 가져왔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시종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뭐가 문제십니까?”
“아니. 그게…….”
유협은 기가 막혀 옷을 흔들었다. 문제가 떡하니 손에 들려 있건만 시종은 무심했다.
“백 공자는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검어 그런 화려한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립니다.”
“싫어요.”
남에 도착해서 거의 처음으로 싫다고 해 봤다. 시종이 놀란 듯이 쳐다봤다. 유협은 더 간절하게 옷을 흔들었다.
“이건 후궁분들이나 입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이보다 훨씬 화려하게 치장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싫습니다.”
두 번째 싫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이런 파랗고 반짝이는 옷을 입었다가는 당장 건녕궁 궁인들부터 씹고 나설 게 뻔했다. 그러나 정작 옷을 입으라고 준 시종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남에서는 흔한 옷감이니 부담 갖지 마세요.”
시종은 아예 유협이 왜 질색을 하는지부터 이해하지 못했다. 막연하게 묘족들은 가난하니 저런 옷을 처음 봐서라고 생각했다. 그 표정이 훤히 드러나 유협은 이마를 꾹꾹 눌렀다. 뭐라고 이해를 시켜야하나 고민하던 유협이 입을 열었다.
“너무 여자 것 같아요.”
유협의 불만이 무엇인지 알아챈 시종이 말이 없어졌다. 이번에는 시종이 뒤통수를 쓱쓱 쓸더니 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유협에게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손에서 옷감을 빼앗아 갔다.
“다시 새 옷을 꺼내 오겠습니다.”
금방 사라질 줄 알았는데 시종이 슬쩍 뒤를 돌았다. 유협을 의식한 눈이었다.
“남에서는 물론 지위에 따라 옷을 입지만, 공자는 몹시 유려하니 별로 신경 쓰실 게 없습니다.”
시종은 그리 말하며 옷에 맞춰서 가져온 부드러운 머리끈까지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유협은 어색하게 침상에 앉아서 머리를 말렸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유협은 당연히 시종이 덜 눈에 띄는 옷을 준비해 주리라 믿었다. 마침 옷장에서 꺼내는 옷도 검은색이라 안심하고 시종을 내보냈다.
그런데 막상 입고 나니, 손등을 모두 가리는 데다 아래까지 벙벙해 마치 치마 같은 옷이 아닌가.
‘남족 사내들은 다 미쳤나?’
유협은 입을 딱 벌리고 제 꼴을 여기저기 보았다.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천이 분명 여름에 입어도 시원할 터다. 그러나 얼마나 한량 같은 꼴일지 감도 오지 않았다. 천화에게 금방 가겠다고 해 놓고 유협은 한참을 끙끙거리며 망설였다.
마침내 마음을 먹고 후궁전으로 향했을 때 얼마나 심장이 튀어나오려 했는지 몰랐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었다. 유협은 아직도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믿기질 않았다. 재빠르게 건녕궁 문을 두드리자 궁녀가 나왔다.
궁녀는 어련히 유협이려니 생각하고 시큰둥하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선 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못 박힌 듯 쳐다보게 되었다. 유협은 가면 갈수록 소맷자락이 옅어지는 여름용 옷을 입고 있었다. 목 부분에 옷깃을 묶는 끈이 하얀색인 것만 빼면 크게 장식이 없었다.
그러나 누가 입느냐에 따라서 옷의 태가 바로 달라졌다. 유협을 내심 무서워하면서도 만만하게 생각하던 궁녀는 검은색 옷에 하얀색 끈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소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궁에서 한평생을 살면서 많은 여인을 봤지만 이처럼 또 아름다운 얼굴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변방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까만 눈동자가 빛을 머금었다.
이 총명한 눈이 부드러운 입술과 더해지면 전체적으로 고고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의 미남자가 되었다. 분명 약관도 넘기지 못했을 텐데, 순간 유협의 몸짓이 느리게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반면 유협은 궁녀의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식은땀이 한줄기 흐르는 기분이었다.
“황자님을 뵈러 왔습니다.”
유협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궁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유협을 미워하기로 다시 맹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냉정한 얼굴이 되었다. 세상 전국을 뒤져도 나오지 않을 미인이지만, 그럼에도 출신은 한참 천한 게 너무 자신의 신분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정원에 계십니다.”
궁녀의 다소 냉정한 태도는 유협에게 다른 생각을 불러왔다. 귀 뒤가 다 화끈했다. 자기라도 다 큰 남자가 여인이나 입을 것 같은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있으면 시선이 한 번 더 갈 것 같았다. 그나마 그 파란 옷을 말리길 망정이지 정말 추한 꼴이 날 뻔했다.
천화에게 가는 동안 궁녀 두 명을 마주쳤고, 개중 한 명은 들고 있던 빨래거리를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생각보다 과격한 반응에 유협은 이제 반쯤 겁에 질려서 작은 정자로 뛰어갔다. 유협과 천화가 암묵적으로 만나서 노는 곳이었다.
멀리서 점점 다가가니 귀엽고 동그란 뺨이 보였다. 천화는 손에 나뭇잎 두 개를 들고 팔락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점점 두려움이 적어지는 대신 울컥 억울함이 올라왔다. 자기가 얼마나 핍박받는지 알아줄 사람은 천화뿐이었다.
“황자님!”
정자 아래서 손을 휘젓자 천화가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했다. 재빠르게 유협 쪽으로 몸을 돌린 천화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서러운 마음까지 다 잊을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황자님. 늦어서 죄송해요.”
유협이 넋이 나가 말하자 그의 작은 다람쥐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도도도 정자에서 뛰어 내려왔다. 아이는 유협의 옷차림에 하나의 의구심 없이 소맷자락부터 잡아 왔다. 다른 사람처럼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거나, 어린아이가 할 만한 감탄사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유협이 왔으니 됐다는 태도로 아이는 폭 감겨들었다.
날이 더워 벌써 땀이 맺힐 지경이었는데, 유협의 손을 잡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그랬다. 유협은 그 작은 손을 고쳐 잡아주다가 나뭇잎을 발견했다.
“이거 왜 갖고 계셨어요?”
그 말에 천화가 약간 쑥스러워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있잖아.”
“네.”
“왜 여기 이렇게 줄이 있어?”
천화가 잎맥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며 물었다.
유협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창 궁금증이 많을 나이인 천화는 종종 유협에게 이런 질문들을 해 왔다. 오늘도 나뭇잎을 주우며 놀다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주술에 대해서 물어보면 모를까,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다 온 유협에게 이런 질문은 가혹했다. 유협은 나뭇잎을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가 진지하게 몰두할 때 천화는 그때서야 유협이 허리띠를 졸라맨 치마 차림인 것을 알아차렸다.
유협은 턱을 톡톡 치며 대답했다.
“이건 잎맥이라고 하는데, 영양을 받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천화의 역습을 기다렸다. 요즘에서야 세상에 대해 배워 가는 천화는 질문을 하루에 백 개 정도는 했다. 분명이 ‘영양이 왜?’라며 질문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천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협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왜 치마에 허리띠를 했어?”
아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유협은 황망하게 천화를 쳐다봤다. 아까 쳐다보던 궁녀들은 적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화의 맑은 눈은 순수한 질문만 가득 담고 있었다. 유협은 눈물을 삼키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하. 왜 여기서는 사내가 치마를 입고 허리띠까지 하는 거예요?”
“……나도 몰라.”
천화가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그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결백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무심코 자신의 옷을 내려다 봤다.
천화는 분홍색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다지 고급스럽진 않았지만 이제는 계절에 맞았다. 천화는 자신을 한 번 보고, 유협을 한 번 보고 이걸 반복하더니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
“어른이 되면 치마도 입나 봐.”
작은 입술에서 조곤조곤 나오는 말에 집중하던 유협은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어린 천화가 치마를 입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여자아이라도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되는군요.”
“으응.”
천화가 마땅한 결론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런데 왜 머리는 안 묶어?”
유협은 자신이 묘족이라는 뜻으로 머리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천화가 이 사실을 지적할 줄 몰랐던 유협이 망설이는 사이 천화가 다시 질문했다.
“치마를 입었으면 머리를 묶어야 되는데.”
그런 뜻으로 머리를 묶으라는 거였구나. 안심하는 순간 대뜸 천화가 나섰다.
“내가 묶어 줄까?”
“네?”
“내가 묶어 줄래.”
무표정하게 유협을 바라보는 천화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저건 정말로 흥미를 가졌을 때 짓는 표정이다. 유협은 거절을 돌려하기 위해 물었다.
“황자님 여자 머리도 묶을 줄 아세요?”
당연히 아니라고 할 줄 알았지만 이런 구석에서 천화는 제법 집요했다. 특히나 유협과 닿는 일이라면 마다하질 않으니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응!”
“아닐 것 같은데…….”
유협이 슬프게 중얼거렸다.
천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협의 손을 잡아 자신의 처소로 잡아당겼다. 그 작은 힘을 뿌리칠 수 없어서 유협은 천화의 손에 그대로 천화의 낡은 집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 와중에 믿는 건 하나 있었다. 어린 천화가 여성용 장신구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고, 하다못해 머리끈도 없을 터였다. 머리카락을 몇 번 만지고 가지고 놀다가 말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천화는 머리끈을 가지고 있었다. 천화의 지시대로 침대 아래 앉아서 기다리던 유협은 서랍을 열어 머리끈을 꺼내는 모습에 뜨악하고 말았다.
“머리끈이 있으시네요?”
“응. 기니까.”
천화가 자신의 갈색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천화도 관을 올리기 위해서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유협의 패착이었다.
“고개 숙여 봐.”
침대에 앉은 천화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유협은 귀여운데 어이가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숙여 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다. 그 긴 머리를 하나로 모은 천화가 작은 손으로 열심히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겨우 제 구실하는 바닥의 융단을 내려다보며 천화의 작은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나른해졌다. 유협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모양으로 묶어 주실 건가요?”
“으음. 동그란 모양.”
“땋아 주시는 건가요?”
“으응.”
천화가 자신 없이 대답하면서도 손을 분주히 놀렸다. 어찌나 빠르게 꼬물락거리는지 기대가 될 정도였다. 천화는 천화 나름대로 있는 힘을 다해서 유협의 비단 같은 검은 머릿결을 만졌다. 그 손길에 기름을 바른 부드러운 머리가 여기로 꼬였다 저기로 꼬였다 난리였다.
천화는 머리끈까지 아낌없이 쓰며 유협의 뒷머리를 만졌다. 사실 만질 때마다 부드러운 향기가 나서 좋기도 했다. 한참을 원하는 대로 머리를 만지작거린 후에야 천화는 머리 묶기를 마쳤다.
“다 됐어.”
천화가 아이답지 않은 침착함으로 끝을 알렸다.
그사이 궁금증이 커진 유협이 더듬더듬 손을 뒤로 해서 머리를 만졌다. 대충 만져 보니 알알이 땋아 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볼래?”
아이가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다. 거울은 비싼 물건이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버젓하게 천화의 방에 하나 놓여 있긴 했다. 천화가 손가락으로 유협의 손을 쓱쓱 문질렀다.
유협은 그 손가락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 묶기가 충분히 놀잇감이 될 수 있던 것이다.
“왜 저만 묶어요?”
“응?”
“저도 저하 머리 묶어 드리고 싶어요.”
유협이 일어난 그대로 천화 옆에 풀썩 앉았다. 천화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네. 정말로요.”
“좋아.”
천화는 신이 난 듯했다. 아이는 서랍을 뒤지더니 한 주먹만큼 끈을 꺼냈다. 궁녀들이 집에서 털어갈 건 다 털어가 놓고 이런 잡스러운 물건은 다 남겨 둔 모양이었다.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유협은 활짝 웃으며 끈을 받았다.
“자아, 저하. 어떻게 묶어 드릴까요.”
“양치기처럼.”
“네에?”
뜻밖의 대답에 유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을 거라고 예상도 못 한 말이었다. 그러나 천화는 이미 기대하는 눈빛으로 유협을 보고 있었다.
“양치기들은 추울 때 머리카락으로 목도리를 하는 것처럼 묶는다며.”
“그렇죠…….”
유협이 쨍하게 내리쬐는 밖을 보며 말했다.
천화가 침대에서 발을 덜렁덜렁 흔들며 유협의 부드러운 손에 자신의 손을 문질렀다. 천화는 툭하면 유협을 건드리거나 살결끼리 문지르곤 했다. 그게 무슨 뜻인 줄 아는 유협은 아이가 충분히 외로움을 채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묶어 줄 거야?”
“그럼요.”
유협은 일단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나서 멈칫했다. 자신이 천화의 머리를 묶기 위해서는 마땅한 자세가 없었다. 천화를 침대 아래 앉힐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협이 서서 묶기에 그의 키가 너무 컸다. 고민하던 유협은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여기요, 저하.”
유협이 벌린 다리의 사이를 팡팡 손으로 쳤다.
천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재빠르게 그 사이로 들어갔다. 아이의 눈이 다시 한번 반짝반짝 빛났다. 유협의 품에 안겨 본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폭 감싸인 적은 처음이었다.
“좋아요. 제가 열심히 묶어 보겠습니다.”
유협은 아직 다 길지 않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넣어 쓰다듬었다. 그 순간 이게 황족 모독죄라는 건 두 사람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유협은 그저 머릿결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도 충분할 정도로 머릿결이 사르륵 손가락에서 흘러내렸다. 타고난 건지도 몰랐다. 유협은 그 얇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땋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사륵거리며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천화가 간지럽다는 듯 몸을 웅크렸다.
작은 목덜미를 다 덮을 정도로 큰 유협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유협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다 묶은 후 멈췄다. 아직 목을 한 바퀴 감기에는 머리가 너무 가볍고 짧았다.
“자 다 됐어요. 우리 보러 가요.”
“좋아!”
천화가 유협의 무릎을 짚고 일어나더니 그의 손을 당겼다. 귀여운 재촉에 유협은 벌떡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갔다. 유협은 자신의 긴 머리를 끌어당겨 천화의 솜씨를 구경했다. 과연, 머리카락이 다 삐져나오고 끈 사이사이로 잔머리가 다 일어나 있었다.
엉망진창인 천화의 솜씨와 다르게 아이의 머리는 깔끔하게 잘 땋여 있었다. 천화는 자꾸만 거울에 자신의 머리를 비춰 보며 목에 감아 보려 했다. 아무래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이 놀이가 재밌어진 유협이 물었다.
“묘족이 어렸을 때 머리를 묶는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도 묶어 드릴까요?”
“응! 좋아!”
천화가 토끼처럼 통통 튀었다.
정말, 황자만 아니었어도 납치했다. 그런 유협의 마음도 모르고 천화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아 왔다. 유협이 등을 도닥거리자 그대로 허리를 껴안은 채로 두 사람은 침대에 올랐다.
아까처럼 유협의 다리 사이로 천화가 들어왔다. 유협은 이번에 열심히 머리를 양 옆으로 땋아 주었다.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자 슬슬 예의범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협은 아예 천화를 자신의 무릎에 앉혀 두고 섬세하게 온갖 예술을 펼쳐 보였다.
그동안 천화는 손길에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유협의 무릎에 뺨을 기대며 누워 있었다. 지나가던 궁녀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감히 취할 수 없는 자세였지만,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덕분에 유협은 마음껏 방자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천화의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준 후에야 유협의 놀이가 끝났다. 그때서야 너무 자신만 신나게 놀았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동안 천화는 거의 무릎에 파고들어 있는 게 다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천화가 나름의 재미를 찾아서 무릎에 기댔다가, 배에 턱을 댔다가, 아예 누웠다가 등등 자세를 바꿨다는 점이다.
“저하 어느새 저녁상 받으실 시간이 됐네요.”
유협이 천화의 머리를 하나하나 풀어 주며 말했다.
유협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있던 천화가 반쯤 감긴 눈을 비볐다. 유협의 손길이 너무 포근해서 보모상궁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 파고들어 버린 듯했다.
“벌써?”
“드셔야죠.”
늘어지는 말투를 보니 싫은 모양이었다.
유협은 무심코 천화의 앞머리를 걷어 그 위에 쪽 뽀뽀했다. 몸이 먼저 움직여 놓고 그 후에야 굳었다. 아까부터 계속 예쁘다고 만지작거리다 보니 한계가 자신도 모르게 사라진 탓이었다.
당장이라도 절을 올리며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당황해서 천화와 떨어지려고 할 때 아이가 강하게 허리를 안아 왔다. 그리고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유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저하…….”
천화는 대답 없이 유협에게 뺨을 비볐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유협은 숨 막히게 긴장하고 있었고, 천화는 어쩐지 대여섯 살은 어려진 아이처럼 눈이 촉촉했다. 손가락이 저절로 떨렸다.
“죄송해요.”
유협이 낮게 말하자 천화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유협은 천화의 마음을 대충 알아챘다. 그래서 떨어트리는 대신 무릎 위에 올려 자신도 등을 껴안고 도닥였다.
“다음에도 이 놀이 할까요?”
유협이 속삭이며 묻자 천화가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짠한 마음이 다시 한번 솟구쳤다. 예의랍시고 아이와 거리를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나마 사랑을 주는 게 더 낫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화가 상을 받기 시작할 때쯤에야 유협은 자리를 떴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아직도 밝았다. 덕분에 마주치는 궁녀들마다 유협을 빤히 쳐다봤다. 심난해서 이제 그런 거에 신경 쓰기 지친 유협은 무심하게 그들을 지나쳤다.
유협이 터덜터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짓던 시종의 얼굴이 무심코 굳었다. 저 공자는 멀쩡하게 내보내면 엉망진창이 되어 오는 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백 공자. 어디 아프십니까?”
“네?”
생각에 잠겨 있던 유협이 깜짝 놀라 묻자 시종이 허탈하게 머리카락을 툭툭 쳤다. 아까 천화가 묶어 준 그대로였다. 유협은 그때서야 시선들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했다. 얼굴이 천천히 붉어지는데 시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들어오세요. 머리 정리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변명할 말도 없었다. 그냥 내일은 다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어 어깨가 축 쳐졌다. 하여튼 망신살이 제대로 낀 날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예전처럼 일말의 거리 두기도 어려워졌다. 한 번 천화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유협은 차마 손 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선물이 들어왔을 때도 유협은 어디까지 해야 하나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선물은 의외의 곳에서 들어왔다. 정원에서 강아지를 죽인 황자 측에서 그들에게 귀한 얼음에 담긴 화채를 보낸 것이다. 유협은 간간이 서리 낀 얼음을 봤지만, 천화는 얼음이 처음이었다. 얼음은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다. 유협에게도 얼음이 투명하다는 점이 너무 신기했다.
천화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과 유협 사이에 화채를 내려놓았다. 황자인 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것마냥. 처음 보는 제철 과일이 가득 든 얼음 그릇을 보니 유협도 마다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둘은 한참 동안 얼음을 만져 보았다. 천화는 한참 동안 그릇을 쓸어 보다가 갑자기 울상이 되었다. 물론 남이 보면 울상은커녕 무표정이었지만 유협은 단번에 무엇인가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저하?”
“손가락이 너무 차가워.”
그러고 보니 정말로 천화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얼음을 너무 많이 만져서인 모양이었다. 유협은 덥석 하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호호 불어 주었다.
천화가 놀란 눈을 하고 유협을 보았다. 유협 역시 천화의 손을 내린 후에야 아차 싶었다. 누가 감히 황자의 손을 함부로 낚아채 이리 방자하게 군단 말인가. 평소에도 장난을 많이 쳤지만 머리 땋기 이후에는 조금 심하게 선이 사라졌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또 사과하려 해도 이미 사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다고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서 유협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을 때 천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더 안 해 줘?”
갈색 눈을 깜빡이는 아이에게서 노여움이라곤 한 톨이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 자진 납세가 절로 됐다.
“저하, 제가 계속해서 무례를 행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로 끝났어야 하는 말은 천화가 손가락으로 막아 멈춰졌다. 천화는 다소 의아하고 원망하는 표정으로 유협을 보았다. 그리고 유협의 부드러운 입술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더 해 주면 안 돼?”
아이가 다시 한번 물었다.
사실 유협의 양심도 여태껏 많은 타격을 입었다. 아무리 황자가 동생처럼 귀엽다고 해도 정말로 동생처럼 대해도 되는가 많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천화가 궁중 예의범절을 모른다고 해도 유협이 제대로 대처해야 하는 문제였다.
“저하, 이런 건 제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입니다.”
“왜?”
아이가 슬픔을 가득 담아 물었다.
유협은 그 원통한 목소리에 그만 깜짝 놀랐다. 차라리 천화의 태생이 원망스러워질 정도였다. 정신을 꽉 잡으려 힘을 주는데 천화가 물어 왔다.
“명령이라도 안 돼?”
“네?”
의외의 말에 유협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천화가 힘없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명령이라도 안 해 줘?”
“해…… 해 드리죠. 당연히 해 드리죠. 전하.”
유협은 다급하게 천화의 차가운 손을 잡아 문질러 주었다. 그동안 천화가 낙심한 표정으로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죽하면 유협이 아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화채를 쓱쓱 옆으로 밀어 주었음에도 기쁜 구석이 없었다.
마침내 유협이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자 그때서야 천화가 유협을 쳐다봤다. 그런데 눈의 동공이 텅 비어 있는 것 아닌가.
“이제 더 이상 그런 거 안 해 줘?”
“그게 저하,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제발 해 주면 안 돼?”
천화의 무뚝뚝한 말에 유협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제발이라니. 명령을 해서라도 자신을 달래 달라고 했던 천화였다. 그런데 지금 천화의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말은 애절한 부탁이었다.
그 말을 듣자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팠다. 속이 상해 유협은 다짜고짜 천화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누가 보든가 말든가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껴안았다. 천화의 가벼운 몸은 훌쩍 딸려와 품 안에 안착했다.
자기보다 훨씬 바싹 마른 등을 쓰다듬은 유협은 어깨를 밀어 내 서로 마주 봤다. 천화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지만 겁먹은 기색이 보였다. 유협 역시 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천화를 불안하게 한다면 한 번은 이야기를 해야 했다. 천화의 마른 팔뚝을 잡고 유협이 진지하게 눈을 마주쳤다.
“저하, 저는 감히 무례하게도 저하를 제 동생마냥 사랑하고 있습니다.”
“…….”
“저하가 웃으시면 기분이 좋고 슬퍼하시면 저 역시 슬퍼요. 그러니 예의범절은 뒤로하고서라도 저하를 웃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천화가 또다시 눈을 깜빡거렸다. 텅 비어 있던 갈색 눈에 천천히 물이 차올랐다. 유협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눈물이 났다. 유협은 그런 천화를 아기 달래듯 껴안고 토닥거렸다.
“앞으로 저하는 제게 부탁하실 필요가 없어요. 어느 때라도요. 아셨죠?”
“……응.”
천화가 찡해 하는 모습을 보자 유협도 괜히 코끝이 아려 왔다.
두 사람은 귀한 화채를 앞에 두고 서로만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심지어 유협은 옆에 유리 같은 얼음을 두고서도 천화의 눈 끝에서 아롱지는 눈물 한 방울방울이 아까워 발을 굴렀다.
사태가 겨우 진정되고 나서야 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무척 달큼한 과일이었지만 천화는 유협 옆에 바싹 붙어서 입에 넣어 주는 것만 받아먹었다. 그런 투정 같은 애정 행각이 아직까지 살짝 어색하긴 했지만 유협은 앞으로 천화를 동생처럼 대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유협은 생각했다. 무엇보다 천화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 쏟아붓는 애정이니까. 하지만 사실 천화에게는 단순히 유협의 마음으로 채울 수 없는 부족한 게 많았다.
가장 처음 화두에 오른 건 바로 천화의 옷이었다. 여름옷은 그럭저럭 찾아 입힐 수 있었지만 가을이 차츰 찾아오기 시작하자 영 걸칠 만한 것이 없었다. 여름에 걸치고 다녔던 소매가 긴 옷 몇 벌이 다였다.
‘황자보다 내가 더 옷이 많다니.’
천화의 옷장을 둘러보던 유협이 혀를 내둘렀다. 필요하지 않은데도 비단옷까지 갖춘 제 옷장을 생각하자 한숨이 더 나왔다. 이 점은 궁녀들도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들이 귀인들과 함께 천화의 옷감을 빼돌리지 않았나.
그러나 갑작스럽게 황족의 옷감을 내놓으라고 한다고 돌려받을 수 있을 리가. 그렇다고 천화에게 낡은 겉옷을 입히자니 성이 차지 않았다. 결국 유협은 자신의 옷장을 뒤져 비단옷 세 벌을 꺼냈다.
“백 공자, 갈아입을 옷을 고르는 건가요?”
아침부터 옷을 늘어놓는 모습을 본 시종이 반색하며 묻자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이 세 벌을 명주방 궁녀들에게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그러세요?”
시종이 온화하게 물어 왔다. 그렇다면 곧장 새로운 옷을 주겠다는 기세였다. 유협은 고개를 저었다.
“대략 10살에서 11살…… 아니다. 체구가 좀 작은 편이니 8살가량의 아이가 입을 만한 옷을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옷을 사용해서요.”
“예? 하지만…….”
“지체가 높으신 분이라, 명주방의 일반 옷감을 사용하면 품위가 떨어질까 고민입니다.”
침착하게 말은 했지만 사실은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명주방 옷이 촌스럽기 그지없다고 하지만, 유협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옷감이었다. 그러니 옷을 함부로 써도 되나 의문이 들었다.
변방에 살면서 비단 옷감은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유협이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대로 비단옷을 기워 천화의 옷을 만들어도 될까? 시종의 얼굴에 금방 의문이 스쳤다 사라졌다.
“이번 가을 의복은 이미 다 명주방에 들어갔습니다. 백 공자님 옷도 이미 비단옷만 여섯 벌입니다.”
그 말에 유협의 눈이 커졌다.
“예? 여섯 벌이나요?”
시종 역시 당황한 투로 말했다.
“모르셨군요. 이번에 삼 황자께서 사가에서 명품이라고 불리는 비단옷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명주방에서 만드는 게 두 벌이고, 나머지 네 벌은 보내 주시겠다 하니 여섯 벌입니다.”
천강의 이름이 나오자 의문은 소름으로 바뀌었다. 기분이 영 찝찝했다.
“저는 그저 편한 옷이면 그만입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유협이 평소에 잘 입고 다니는 단정한 검은 옷을 바라보며 시종이 한탄하듯 말했다. 하다못해 허리끈에 장식 하나라도 더 달려고 하면 적어도 서너 번은 말다툼해야 해서 시종은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하사품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공자,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이런 말이 잘못 들어갔다간 괜한 망신을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압니다만, 그러느니 그냥 없는 이들이나 도왔으면 해서…….”
유협이 한숨을 섞어 말하자 시종이 보다 못해 말을 돌렸다.
“그래서 그 세 벌은 명주방에 보내어 새로 아이 옷으로 만들라고 할까요?”
그 말에 유협의 얼굴이 조금 개었다.
“네. 지금 명주방이 한참 손이 모자란 것은 알지만 최대한 빨리 부탁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거기에 사람만 80명인데 아이 옷 하나야 금방 짓습니다.”
시종이 안심하라고 말하고 옷을 챙겨서 자리를 떴다.
괜한 수고를 끼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황자에게 입힐 옷도 한 벌 준비하지 않는 게 말이 되냐는 심정이었다.
과연 시종의 말대로 옷은 삼 일 만에 지어져서 돌아왔다. 감색 비단, 은색 비단, 남색 비단옷과 남은 비단과 털을 붙여서 사용한 외투 두 벌이었다. 옷은 깔끔하게 만들어져 누구도 다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상태였다.
후궁들은 명주방의 옷 솜씨가 촌스럽고 세심하지 못해서 싫어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유협이 보기에는 이 정도면 매우 훌륭했다.
그날 건녕궁을 찾으면서 유협은 유달리 기분이 좋았다. 평소의 날랜 걸음으로 알림을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눈에 익은 상궁이 재빠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
나한테 하는 말인가?
유협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자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귀인들께서 손님을 받을 상태가 아니십니다.”
“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상궁의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태황태후께서 몸이 편치 않으십니다. 오늘 새벽부터 나가서 기도하고 막 돌아오셨습니다. 백 공자, 이런 때에 손님을 받지 못하는 건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태황태후가 아프다니 유협에게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내 건녕궁에서 귀인들과 있던 상궁은 궁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다소 당황한 유협이 품에 안고 있던 옷 꾸러미를 보자 상궁의 눈길이 향했다.
“황자님께 올리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상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옷 꾸러미를 유협의 손에서 빼앗듯이 채갔다. 그리고 어서 가 보라고 눈짓한 뒤에 빠르게 사라졌다. 순식간에 선물을 빼앗긴 유협만 멍하니 서 있다가 터덜터덜 돌아갔다.
처음에는 금방 일이 마무리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하루, 이틀, 사흘을 넘어가면서 유협은 바싹 애가 탔다. 궁에서 천화를 만난 후 둘이 이처럼 어울리지 못했던 때는 없었다. 특히 천화를 누가 제대로 돌봐주고 있을지, 혼자 외롭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이제는 궁의 변방에서 지내는 유협마저 태황태후가 오늘내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문이 짜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각 후궁전마다 매번 기도하러 태후궁을 찾아야 했다. 그러자 저절로 후궁에서 인심이 각박해지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오전까지 바른 자세로 앉아서 기도를 드리고, 돌아와서는 식단을 청결하게 조절해야 했다. 그렇게 꼿꼿하게 버티다가 마침내 잠이 들면 또다시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손님은 모두 받지 않았다.
“태황태후께서 본디 건강하지 않으셨습니까?”
천화를 보지 못한지 나흘이 넘어갈 무렵 답답해진 유협이 잠자리에서 물었다. 그가 머리를 다듬는 동안 옷을 정리하던 시종이 조심스레 한숨을 쉬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모래찜질을 즐기실 정도로 건강하셨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을이 오자마자 앓으셔서 환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벌써 태황태후의 나이가 여든이라고 하니 환절기에 심하게 앓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유협은 속절없이 아쉬움만 느꼈다. 천화가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잘 버텨 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설마 귀인들이 화풀이 하는 건 아니겠지. 쉽게 잠들지 못하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더욱이 요새는 후궁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어서 아주 늦은 시간에나 겨우 눈꺼풀이 감겼다. 겨우 단잠에 빠져갈 무렵 누군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누구……?”
유협이 눈을 비비며 묻는 순간 방문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 행차요!”
간신히 잠들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일이 한 번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유협은 비몽사몽간에도 용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깨웠던 시종이 재빠르게 침의에다 겉옷을 입혀 그럭저럭 예를 차리게끔 만들었다.
그대로 침대 아래서 불편한 자세로 부복하고 있자니 횃불을 든 사내들이 먼저 길을 밝히며 들어섰다. 그리고 한밤중인 시간을 잊은 듯 완전히 성장한 황제가 들어섰다.
금색 모자에, 산호석으로 만들어진 반지와 목걸이, 날아가는 용이 수놓아진 검은색 옷, 코끝이 살짝 올라온 가죽 신발을 신은 황제의 눈은 붉었다.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하기도 했다.
“황제 폐하의 용안을 뵙습니다.”
“일어나라.”
황제가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명령했다.
유협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자세를 공손이 잡았다. 도대체 아닌 밤중에 황제가, 그것도 업무를 막 끝낸 것 같은 차림으로 자신의 처소까지 발걸음을 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긴장되는 순간에 황제는 턱을 만지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유협의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인생의 최고 위기라고 해 봤자 누이랑 장난치다가 양을 잃어버렸을 때가 다인 유협에게는 너무 심한 자극이었다.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셋째에게 들으니 네가 꿈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다더구나. 정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다면.”
황제가 눈가를 쓸며 주먹을 꽉쥔 채로 물었다.
“그렇다면 죽어 가는 사람의 꿈에도 들어갈 수 있느냐?”
“……가능합니다.”
황제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유협은 내심 그가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자신의 셋째 아들이 죽을 위험에 처했어도 눈도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귀찮아하던 사내 아닌가.
황제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태황태후께서 많이 편찮으시다. 무언가 남기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꿈속에 들어가면 이런 것도 알 수 있느냐?”
“가능하기도 합니다.”
꿈은 무의식의 결정체였다. 때문에 뒤죽박죽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을 집요하게 하는 경우 그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만약 죽어 가는 사람이 유언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한마디라면 나타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당장 태황태후께서 계신 궁으로 따라라.”
황제가 먼저 걸음을 옮긴 후, 같이 걸음을 옮기는 상궁들을 보며 유협은 그가 내내 태황태후를 간호하다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황제가 직접 유협의 처소까지 행차했다는 건 태후의 병세가 심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마지막까지 어머니에게 충성스러운 아들이 되고자 유협에게 찾아온 것이다.
날씨가 쌀쌀했으나 옷을 걸칠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유협은 침의에 겉옷만 걸친 상태로 황제를 따라나섰다. 코끝이 빨갛게 변하고 손이 저릿저릿해질 무렵 그들은 태황태후의 궁에 도착했다.
대기하던 호위 둘이 문을 열자 갑자기 후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황제는 혹시라도 어머니가 추울까 봐 온 방에 아낌없이 장작을 태우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때문에 태황태후의 안녕을 기도하고자 모인 후궁들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의원 역시 열기에 얼굴이 벌겋게 익었고, 태황태후를 모시는 궁녀들 역시 더위에 시달리는 참이었다. 그러나 오직 태황태후만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황제는 유협을 이끌고 후궁들 사이를 지나갔다.
유협 역시 열기 때문에 눈을 찌푸리고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침대 양옆에는 장성한 남자 셋이 서서 태황태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그들은 태후의 뺨을 만지거나 손을 잡는 등 지극한 모습을 보였다.
‘또 다른 아들인가?’
무심코 생각했던 유협은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충격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만물의 지배자이자 천하를 가진 자였다. 설령 형제라고 해도 황제가 방에 들어왔을 때 감히 부복하지 않는 것은 큰일이었다.
그러나 세 명의 남자는 전혀 황제를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황제 역시 그 세 남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황제는 마치 그 세 명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유협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침상 옆에 자리를 잡은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자 유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폐하 무엄하지만 질문 하나만 드리고 싶습니다.”
“태후께 필요한 질문이더냐?”
“예.”
“그렇다면 해 봐라.”
유협은 황제와 그 옆에 선 남자의 얼굴을 비교하다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폐하, 혹시 제가 말하는 인상착의의 남자를 알고 계신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리를 땋아 관으로 묶었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미남입니다. 눈썹이 짙고 눈망울이 큰 편이기도 합니다. 이마에는 옅은 화상 자국이 있습니다.”
순간 황제가 완전히 얼어 버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유협을 빤히 쳐다봤다. 황제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짐의 동생이다.”
유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저 말을 물었다.
“돌아가셨지요?”
순간 황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 이게 태황태후와 어떻게 관련이 있다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다른 비빈들은 재빠르게 엎드렸지만 유협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두 명의 형제분이 더 있으셨던 것 같은데 맞으십니까?”
유협의 뜻밖의 물음에 당황한 황제는 잠시 무릎을 짚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곧 느릿느릿 대답했다.
“무엇 하는 짓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 그들의 탈을 둘러쓴 귀신 셋이 태황태후마마께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순간 황제가 진노해 옆에 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유협은 재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분을 못 이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감히 천한 네놈 따위가 감히 삿된 소리로 천씨를 욕보여?”
황제가 손가락질하며 다그쳤다.
유협은 보이는 것을 말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황제는 유협을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끌려 나가면 살아날 길이 없는 걸 안 유협이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만약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면 분명 귀들이 원인일 것입니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노에 꽉 차 실핏줄이 올라온 눈이 얼핏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나 황제는 곧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이 자리에서 태황태후께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
“예, 폐하.”
황제의 분노는 매서웠다. 유협은 떨리는 손을 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궁들의 시선마저 등 뒤에 날카롭게 꽂혔다.
어의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어디 한번 해 보려면 해 보라는 태도로 침상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방 안의 모두가 유협이 협잡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유협은 침대로 다가가 세 남자 중 한 명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어르신, 바쁘신데 질문 하나만 드리고 싶습니다.”
순간 태후를 돌보던 귀신들이 동시에 유협을 쳐다보았다. 태후를 돌볼 때는 안쓰럽다는 듯 굴었던 세 명이었다. 그러나 유협이 말을 붙이자 동시에 무표정으로 돌변했다.
셋 중 가장 선인 같은 인상을 가진 남자가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소인처럼 미천한 자의 이름을 기억하실 필요는 없고, 백 공자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어르신 제가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세 명의 남자는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근엄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어머니가 몸져누워 계시니 바쁘다. 네놈의 한담을 들어줄 시간 따위 없으니 썩 꺼져라.”
유협은 미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주 간단한 질문입니다.”
그 말에 세 남자가 또다시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이번에는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남자가 나섰다.
“우리는 먼저 앞서 떠나 자식 된 도리를 충분히 하지 못해 평생을 후회했다. 때문에 어머니께서 오실 때는 편히 모시고자 하니 네가 우리의 효심을 시험하지 말라.”
그 말에 유협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구의 어머니를 논하는 것입니까?”
순간 세 남자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유협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던 그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차가운 침묵 속에서 유협이 기가 막혀 웃었다.
“사람의 목숨을 해치면서 어머니에 대한 충심을 다한다고?”
유협은 손가락을 세워 남자 중 한 명을 지목했다.
“이제부터 질문할 테니 똑바로 대답해라. 그렇지 않으면 혼의 조각조차 건지지 못할 것이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이 몸은 사한 천씨의 천이율이다.”
유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유협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성큼성큼 방의 한쪽으로 다가갔다. 유협이 걷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흩어져 길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눈에는 허공에 대고 자문자답하는 유협이 한없이 괴이해 보였다. 그래서 유협이 태황태후의 서랍장을 여는 데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유협은 서랍을 열어 작은 반짇고리를 꺼냈다.
“내가 맞춰 보마.”
태황태후는 시집을 오기 전부터 수를 놓는 일을 즐겼다. 때문에 혼수로도 바늘을 챙겨 왔는데, 그중에는 벌써 3대 째 간직한 바늘이 있었다. 유협은 여러 바늘 사이에서 정확하게 그 바늘을 집어 들었다.
“네 놈의 이름은 바늘이겠구나.”
순간 귀신의 얼굴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며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본 두 마리의 귀신 역시 유협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유협이 더 빨랐다. 그는 바늘을 꺾어 버렸다.
그 순간 천이율인 척한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사라져 버렸다. 정말 혼의 조각도 챙기지 못하고 산산이 흩어진 것이다. 다른 귀신들이 이 광경을 보고 허겁지겁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유협은 그들이 도망을 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태황태후의 옆에 있는 상궁에게 물었다.
“혹시 태후께서 궁에 오실 때 따로 챙겨서 가져오신 물건이 더 있습니까?”
당황한 나머지 상궁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리고 유협의 부탁대로 순순히 태황태후의 물건을 가져왔다. 유협은 그 물건들 사이에서 묵주와 유리 주전자를 꺼냈다. 그리고 바늘을 분질렀던 것처럼 거침없이 묵주의 줄을 끊어 버리고 주전자를 밟아 부셨다.
모두들 유협이 하는 행동이 질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만류하지 못했다. 괴괴한 침묵 끝에 황제가 겨우 말을 이었다.
“어의는 태황태후의 건강을 살펴라.”
그 말에 어의가 재빠르게 달려가 맥을 잰 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태황태후께서 맥이 돌아오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방 안이 침묵에 잠겼다. 황제는 천천히 유협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유협이 공손이 아뢨다.
“태후께서 물건을 검소하게 사용하시니 혼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물건을 아껴 쓰고 정을 주면 간혹 혼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오래 사용한 물건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더 쉽습니다.”
그리고 태황태후의 곁에 머물며 아들인 척하고 있었다고, 태후를 자신과 함께 저승길로 데려가려 나타난 것이라 덧붙이자 황제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황제는 처음으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유협을 쳐다봤다가 손짓했다.
“됐다. 태후께서 건강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너는 일단 침소로 돌아가라. 어의는 부족함 없이 태후를 모셔야 할 것이다.”
그 말에 유협은 절을 하고 물러났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 누군가는 믿지 못했고, 누군가는 겁에 질렸고, 누군가는 비웃고 있었다. 남에 와서 그런 시선을 많이 받았던 유협은 신경 쓰지 않고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태후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말을 들었다. 유협은 기쁜 나머지 재빠르게 환복하고 머리를 올려 묶었다. 시종이 알아서 준비를 끝내는 유협을 보고 조금 웃었다.
“그렇게 기대가 되십니까?”
“한참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머쓱해진 유협이 대답하자 시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궁에서 내려올 선물을 기다리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 말에 유협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물을 기다려야 합니까? 지금 나가 볼일이 있는데.”
시종은 실망했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육 황자님을 뵈러 가시는 거였군요.”
유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난 시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또 날이 점점 쌀쌀해지는데 자신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싶었다.
유협이 어린아이처럼 기대했던 게 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종이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반드시 사람을 보내실 것입니다. 앉아서 대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유협이 조금 안달 난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만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얼굴을 뵙지 못한 지 한참이 됐습니다.”
유협이 조르자 시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빨리 오셔야 합니다.”
유협은 생긋 웃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의 뛰듯이 달려가는 걸음걸이로 건녕궁에 도착했다. 때맞춰 상궁이 꽃에 물을 주는 궁녀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분주하게 귀인들이 좋아하는 꽃을 돌보던 여인과 유협의 눈이 마주쳤다.
유협은 평소처럼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상궁은 마저 인사하는 게 아니라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라면 육 황자가 무얼 하고 있다고 일러줬을 텐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유협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간만입니다.”
상궁은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벙긋거렸다 닫았다. 눈길도 유협을 피해 바닥으로 향해 있었다. 의아해진 유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궁이 간신히 말했다.
“백 공자 오셨습니까.”
“예.”
유협은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아직도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순간 상궁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유협은 상궁도, 귀인도 그때 그 방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의 원인은 그것뿐이었다. 인과관계를 알게 되자 속이 썼다. 유협은 간신히 입을 뗐다.
“오늘은 귀인분들께서 공사다망하신 것 같아 황자님께만 인사를 올릴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러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귀인들도 유협을 대하기 껄끄럽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이 처음에 봤던 귀신은 실체가 있는 경우였지만 어젯밤의 경우에는 유협의 눈에만 보였다. 어쩌면 완전히 미쳐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유협은 상궁의 말대로 조용히 안뜰을 향해 갔다.
오랜만에 찾은 뜰은 예전과 그대로였다. 무심코 황자와 항상 만나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던 유협이 한숨을 쉬고 발길을 돌렸다. 그 긴 시간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천화는 아무래도 자신의 처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설마 내내 여기 나와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뒤를 돈 순간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고 뒤를 돌았을 때 천화가 손을 뻗어 유협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황자님!”
유협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천화가 뺨이 붉게 물들어 유협을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비단옷에 망토를 두른 차림의 천화는 두 눈에 다 담기지 못할 만큼 귀여웠다.
“기다렸어!”
천화가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로 말했다.
“안 울고 기다렸어.”
칭찬해 달라는 투였다. 순간 유협은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눈꼬리가 저절로 접혔다.
“정말요? 대단하세요.”
“응. 안상궁이 알려 줬어. 잠시 바쁜 일이 있는 거라고.”
“그럼 매일 여기서 기다리신 거예요?”
유협이 안뜰에서 기다렸냐고 묻자 천화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 대답과 순수한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유협은 번쩍 천화를 끌어안았다. 여름 이후로 부쩍 가까워진 둘이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에 자신의 뺨을 대고 비비자 천화가 냉큼 목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뺨이 차가웠지만 말랑한 천화와 꼭 붙어 있다 보니 나빴던 기분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유협은 안도의 한숨을 깊게 쉬었다. 이 궁에도 온전한 자신의 편이 있었다. 한 자리에서 내내 유협을 기다려 주는 존재가 있었다.
‘나중에 누이한테 말해 줘야지.’
천화라는 아주 예쁜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가 크면 같이 남에 가서 만나 보자고 그렇게 청해야겠다.
천화는 유협의 품에 안겨 자신이 세었던 낙엽의 숫자와 매일 아침 날아오르던 새들의 색깔을 다양하게 조잘거렸다. 그 얘기를 어찌나 진지하게 하던지 유협은 그만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깜빡 잊고 천화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때문에 황제는 유협을 찾아 몸소 건녕궁까지 와야 했다. 천화가 왜 나뭇잎이 빨갛게 변하냐고 물어서 유협이 당황했을 때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설마 황제 본인이 왔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던 유협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본 적이 손에 꼽는 천화는 더욱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귀인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유협은 재빠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천화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하라고 눈짓을 주었다. 천화가 어설프게 무릎을 꿇고 앉는 순간 곧바로 황제가 문간을 넘어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은 황제는 어제와 다르게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둘 다 일어나라.”
황제를 위한 의자가 안뜰로 옮겨졌다. 황제는 의자에 앉자마자 말을 시작했다.
“두 사람이 각별하게 친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나.”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기는. 네가 귀신에게 쫓기는 짐의 부인들과 아들을 구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황제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일을 끄집어내며 칭찬했다. 그리고 힐끗 잘 차려입은 천화를 보더니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거라.”
이는 엄청난 혜택이었다. 황제는 본래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에게 싸늘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천화를 무릎에 앉혔다.
유협은 천화가 울까 봐 식은땀이 다 흘렀다. 평소의 천화라면 울음을 터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멍한 표정을 보고 유협은 천화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빨리 황제와 대화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무의식적으로 무릎에 앉은 천화의 등을 쓸며 말했다.
“소식은 들었느냐? 태후께서 오전에 정신을 차리시고 수라를 받으셨다. 어의 말에 따르면 내일부터는 천천히 산책을 하셔도 무리가 없다고 하더군.”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황제가 천화의 작은 망토를 잡아 요리조리 살펴보며 말했다.
“어제 일은 네 덕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어의도 인정하더군. 그러니 네 공을 무시하면 세상 사람들이 은인도 몰라본다며 손가락질할 것 아니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유협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본래 귀신을 쫓으러 입궐했다. 그런 그가 밥값을 못하면 큰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매번 찾아오던 묘족들은 영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너만큼은 신뢰가 가는구나. 원래라면 곧 궐 밖으로 나갔을 터지, 맞느냐?”
유협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얼른 소리 내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본디 남은 풍요로운 곳이지만 묘족이 거주하는 곳은 변방에 척박하다고 알고 있다. 겨울에는 궁핍함을 못 이겨 남으로 몰래 들어오는 묘족들도 있지. 너도 그곳에서 자라며 고생이 많았을 것으로 안다.”
유협은 황제의 말뜻을 얼른 이해하지 못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이 답답하다고 느끼는 곳은 남이었다. 변방에서 말을 달리고, 쌍둥이 누이와 양을 치는 일은 무척 고되지만 재밌는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꽃보다도 못했지만 그곳에서는 짐승 한 마리도 헛되게 해코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에게 대놓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변방보다 남에서 훨씬 편안하고 안전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유협이 눈을 깔고 대답하자 황제가 만족스러운 듯 소리를 냈다.
“원래라면 너는 남족이 아니라 일정 시간이 되면 떠나야 하지. 하지만 네가 혼약을 치르는 일을 허락하겠다.”
“예?”
유협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새된 반응에 황제의 무릎에 앉아 있던 천화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그런 유협을 빤히 바라봤다.
관찰하는 듯한 눈길에 유협은 저절로 고개를 다시 숙였다. 하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네가 고르라고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네 혈통을 생각하면 먼저 나설 사람이 없을 터다. 그러니 곧 좋은 소식이 올 것이라는 것만 알아 두어라. 너희 묘족은 동성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지. 남에서도 후비로 남성을 들이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
순간 머리에 벼락이라도 맞는 것 같았다. 그저 머리가 멍해졌다. 황제가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황제를 쳐다보고 있자 옆에서 무엄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뒤늦게 유협은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족에게, 특히 후비에게 결혼은 족쇄나 다름이 없었다. 평생 담 안에 살면서 바깥을 통해 들어오는 소식을 듣는 게 다였다. 가끔 외출은 할 수 있겠지만 그때도 혼자일 수 없었다. 시종을 달고 다니는 게 너무 당연했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느냐?”
황제가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은 곧 반역이다. 반역을 저지르면 무조건 사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머릿속에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천화와 눈이 마주쳤다. 천화의 유순한 눈은 동그랗게 변해 공포에 젖어 있었다. 유협은 단박에 천화가 두려워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천화에게 아버지란 어머니를 죽인 인물이었다.
그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이상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유협은 혼인을 선택할지, 죽음을 선택할지 어떤 결심도 서지 않았다. 지금 뭐든 결정을 내리는 건 섣부른 일이었다. 유협은 천화 때문에라도 신중해야 했다.
“……황공하옵니다.”
황제는 얼핏 무표정한 유협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폈다. 그리고 어찌됐든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천화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보모상궁에게 아이를 넘기며 말했다.
“단자가 곧 도착할 것이다.”
“예.”
유협은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고 대답했다.
황제는 할 말이 끝나자 그대로 궁을 나섰다. 이제 남은 사람은 유협과 천화와 두 귀인뿐이었다. 귀인들의 시선이 사방에서 찔러 왔다. 유협은 모른 척하고 애써 천화에게 시선을 두었다.툭
“황자님 괜찮으세요?”
그러자 뒤에 있던 여귀인이 툭하고 대답했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뵌 것뿐인데 괜찮지 않을 건 또 무엇인가?”
유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우귀인이 감쌌다.
“그만두게. 백 공자는 그저 오랜만의 행차에 놀란 건 아닌지 물은 것뿐이잖나.”
그리고 동정 어린 시선으로 유협을 보았다.
“자네도 놀랐을 텐데, 이만 들어가 보게.”
유협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천화를 안았다. 아까 아버지의 무릎에 앉았을 때와 다르게 천화는 스스럼없이 유협의 목에 손을 걸었다. 목뒤에 닿는 아이의 숨결에 유협은 묘하게 슬퍼졌다.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직감적으로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 두 사람은 완전히 똑같은 위치에 있었다. 유협은 황궁을 내심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한 감옥이 되어 버렸다.
천화가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자유라는 것을, 이제 유협 마저 잃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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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이 처음부터 망나니였던 건 아니다. 모두들 살면서 한 번쯤은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는 하니까. 그러나 천강의 경우 계속해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만들 요소가 곳곳에 있었다.
일례로 천강의 외가는 비록 권세는 부족하지만 재물만큼은 충분한 세양 명씨였다. 더구나 천강은 어머니 은비가 본 유일한 후사이기도 했다. 때문에 은비는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어렸을 때는 아예 발에 땅이 닿지 않게 이 사람 저 사람이 안고 다녔고, 나이를 먹고 나서는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사 주었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천강이 출궁할 나이가 되자 이 세상에 더 건방진 사람은 없을 법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젊었을 적 천강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기루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녀에게 춤을 추게 하고, 시를 읊게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곧 동년배들과 하는 시시한 놀이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천강은 결혼해서 이미 부인만 세 명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화목하기는커녕 세 명 모두 천강의 잔인한 성격에 치를 떨었다. 천강은 지나치게 색을 밝히는 데다가 사람을 묶는 등 색사를 즐기면서도 변태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런 천강이 언제부터 양민에게 손을 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장포를 쓰고 지나가는 여인네를 붙잡아 억지로 벗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며 비웃기 시작했다.
‘더럽게 못생겼는데 뭐 하러 가리고 다니는 거냐? 어떤 남자를 속이려고.’
저잣거리에서 망신을 당한 여자는 울면서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천강과 그 친구들은 끝끝내 여인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이때를 기준으로 천강의 무도한 행동이 한층 더 깊어졌다.
천강에게 양민은 놀잇감에 불과했고, 시종은 팔아 치우는 가축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는 멀쩡히 있는 부인을 마다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아 괴롭혔다. 워낙 사납게 굴었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몇몇 사람은 죽어서 실려 나가기도 했다.
은비는 이때부터 천강을 염려하며 황제에게 아들을 돌봐 달라 졸랐지만, 황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마침내 천강이 귀신에 씌었다는 말이 돌자 그제야 유협을 시켜 황가의 평판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인연이 생각보다 더 길고 악랄한 방법으로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삼 황자님일 것 같죠?”
유협이 머리를 빗는 걸 도와주며 시종이 제멋대로 지껄였다.
“첫째, 둘째 분은 덕이 깊고 넓으시지만 후비가 이미 많고, 나머지 분들은 아직 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이니 셋째 황자님일 거예요.”
유협은 그 말에 숨이 턱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첫째든 둘째든 셋째든 다 싫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기가 모시던 분이 높은 지위를 얻게 돼 신난 시종은 눈치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일은 정말 역사상 처음이에요. 비록 후비지만 황가에 일원이 되시는 거잖아요.”
하루에도 열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하는 유협에게는 너무 가혹한 말이었다. 유협은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머리는 이제 그만 빗어도 될 것 같습니다.”
유협의 냉정한 반응에 그제야 시종이 눈치를 슬그머니 살폈다. 오늘은 드디어 남의 복식을 해 보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런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실제로도 유협은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태황태후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걸 그랬다.’
남족이 이처럼 후안무치하게 굴 줄 알았다면 태황태후가 차라리 저승으로 건너가게끔 둘 것을 그랬다. 유협은 자꾸만 그날 황제의 오만한 얼굴이 떠올라 분노가 차올랐다.
‘도망 갈 거야.’
도망가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갈 거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반역자는 씨를 말리는 게 남의 법칙이었다. 그러니 만약 도망간다면 황제가 유협의 가족들을 모두 찾아내 죽일 것이다.
‘그럼 혼약을 해?’
이건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유협은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 예정이었다. 이곳에서 혼약을 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남의 부인들은 수를 놓으면서 평생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산단다. 그게 훌륭한 모습으로 귀감이 된다나.
유협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그렇게 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가장 유력한 신랑 후보가 천강이라지 않나.
‘그런 미친놈의 집에서 어떻게 버티고 살라고. 황제고 뭐고, 자기 아들이라고 너무 평가가 후한 거 아닌가.’
유협이 보기에 천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귀신들보다 천강이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차라리 퇴치해 달라고 부르던가. 혼약은 무슨 혼약.’
혼약 이야기가 나온 이후로 유협은 처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일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다 사라져 버렸고 매일이 나른하고 졸리기만 했다. 가끔은 누가 가슴을 누른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속에서 불이 끓었다.
차라리 아주 무서운 귀신이 나타나서 황제와 그 일가를 습격이나 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 상태가 이 모양이니 다른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유협은 심지어 천화에게 가는 일도 그만뒀다. 그저 계속해서 자거나 멍하니 앉아 있고 싶었다.
삶을 포기한 태도를 보고 시종은 충고를 건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백 공자. 하지만 황궁에서는 이처럼 낙담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됩니다. 특히나 황자님과 혼약을 한다면 말이 바람보다도 빠르게 돌 수 있습니다.”
그럼 죽이던가.
이제 만사가 시큰둥하니 별다른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협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온 가족이 멸문당한다, 혼자서 죽는다, 혼약한다. 이 세 가지뿐이었다.
혼자 죽는다는 선택지는 생때같은 목숨을 잃기 아까웠지만,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나머지는 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렇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무기력하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이제는 스스로에게도 짜증이 났다.
‘뭘 잘했다고. 좀만 더 신경 썼으면 좋았을 일을.’
유협은 황제 일가를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금자를 내리거나, 말을 주거나, 겨울을 나기 힘들어하는 묘족에게 구휼미라도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황제는 유협을 새장에 가두겠다고 말한 셈이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치가 떨려 천장만을 노려보고 있자, 시종은 어디선가 얻어 온 홍시를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백 공자님 일어나서 이거라도 드셔 보세요.”
“별로 생각 없습니다.”
“요즘 철에 먹는 게 가장 달다고 해서 특별히 받아 왔어요.”
유협은 그 말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풀어 헤친 채로 침상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벌써 오후에 가까워지는 시간이건만 아직까지 침의 차림이다. 시종이 홍시 그릇을 유협의 머리맡에 올려 두고 한숨을 쉬었다. 곧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협은 눈을 감은 채 그저 숨만 쉬었다. 시종마저 성가셨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종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크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유협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 침의 차림이냐?”
순간 몸이 굳은 유협은 눈만 깜빡거렸다.
천강이었다. 천강이 찾아왔다. 천강이 유협의 처소로 찾아왔다.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한 나머지 유협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자 천강이 피식 웃었다.
“벌써부터 늦잠이라니 어떻게 데리고 살지 막막하군.”
데리고 산다니…….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밖으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슴을 누가 때린 듯 아팠다.
유협이 대답하지 않자 천강은 아예 침대 머리에 걸터앉았다. 그가 힐끗 홍시에 시선을 주었다.
“홍시를 좋아하나 보지?”
“삼 황자님을 뵙습니다.”
“인사 한번 참 빠르게 하는구나.”
그렇게 면박을 주면서도 천강은 내도록 싱글벙글이었다. 그 미소를 보기만 해도 죽고 싶었다. 천강은 괜히 홍시를 둘러보는 척하다가 유협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협은 덮개가 있는 그늘 쪽에 앉아 살쾡이처럼 경계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천강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오늘 아침 황제께서 네 상대로 나를 정해 주셨다. 네가 비록 신분이 미천하고, 남족이 아니라지만 아이를 생산할 것도 아니니 나는 괜찮다.”
천강은 거의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날 아침 천강은 오랜만에 입궐하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후비로 유협과 혼약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천강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쁘장한 유협에게 계속해서 마음이 가던 차였다. 다만 유협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사람을 수십 번 억지로 취해 본 천강은 몸을 내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나흘
“네가 기분이 심히 오락가락하는 모양인데, 그래서 황제께서 이런 혼약을 명하신 이유를 모르나 보구나.”
황제가 혼약을 명한 이유? 유협에게 주는 보상 아니었나?
유협이 한층 더 경계의 시선을 보내자 천강이 부드럽게 말했다.
“황제께서 너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신다.”
유협이 눈을 깜빡거렸다. 천강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궁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묘족들을 찾아갈 수는 없지. 그러니 네가 혼약해서 나와 함께 산다면 필요할 때마다 너를 부르실 수 있지 않나.”
순간 발끈한 유협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묘족들은 언제나 남족을 도왔습니다. 제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올 겁니다.”
유협이 말려들자 천강은 입술 끝만 올려 웃었다.
“하지만 너만큼 실력이 좋진 않겠지.”
유협은 순간 굳어 버렸다. 설마 남족의 황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너를 남에 머무르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뭐, 시종으로 만들어도 되겠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태후를 살린 너에게 가장 관대한 방법을 베푸신 거다.”
그런 이유였다니. 순간 거짓말처럼 온몸에 힘이 빠졌다. 천강이 하는 말은 이치에 닿았다. 황제는 참 단순한 이유로 하나만으로 유협의 인생을 망치려 하고 있었다.
본래도 유협은 느긋하게 출궁할 생각이었다. 천화가 자라는 것 까지만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제는 유협이 장난감이라도 되는 냥 천강에게 줘 버렸다.
“그러니 너는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고 혼약 준비를 하거라. 만약 한 치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폐하는 물론 나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거다.”
지긋한 협박에 유협은 이를 꾹 깨물고 참았다. 당장 욕설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천강이 유협보다 몇 배는 큰 손으로 팔뚝을 잡아 왔다. 뿌리치려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잡혀 천강 바로 앞까지 끌려왔다.
한 대 얻어맞는 건가?
눈을 질끈 감는데 천강이 유협의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하나씩 펴기 시작했다. 곧 차가운 물건이 손에 놓였다. 눈을 뜨고 보자 흰 옥으로 만든 비녀가 보였다. 예스럽게 만들어진 비녀는 누가 봐도 고가의 물건이었다.
어느 귀부인이나 할 것 같은 비녀를 유협 손에 억지로 쥐여 주며 천강이 말했다.
“머리를 올려 보아라.”
유협은 순간 말문이 막혀 천강을 쳐다보았다. 남족들은 남자는 머리에 관을 올리고 여자는 비녀를 사용했다. 그런데 천강이 몸소 가져 온 선물이라는 게 여성의 비녀였다.
“저는 여인이 아니라 비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유협이 떨리는 목소리를 어떻게든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천강은 무자비했다.
“지금 여기서 네가 남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하지만 이제부터는 머리를 올려야 할 테니 지금 사용해 봐라.”
유협의 당황은 이제부터 머리를 올려야 한다는 부분에서 정점을 찍었다. 양 귀가 붉어진 유협이 말없이 비녀를 주먹으로 꽉 쥐자 천강이 다시 한번 그 손을 폈다.
“내 집에 들어올 터니 말해 주마.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한다.”
“소인은 남자입니다.”
순간 천강이 다시금 유협의 팔뚝을 아프게 잡았다. 그리고 자신과 눈을 맞췄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하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는 묘족이라 치장하는 법도 모릅니다.”
유협이 또박또박 대답하자 천강이 하, 코웃음을 쳤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유협의 뺨을 때릴지 말지 고민했다. 하지만 곧 기강은 나중에 세워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강이 스르륵 유협을 잡은 손을 놓았다.
“그렇다면 시종을 불러서 묶어 달라고 하거라.”
“저는.”
“제대로 묶지 못하면 내가 묶어 주마.”
유협은 무거운 비녀를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집어 던져 버릴까? 아니면 천강을 이걸로 찔러 버릴까? 절대로 머리를 올리기 싫었다. 심지어 관도 아니라 비녀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천강이 했던 말이 가슴에 고였다. 이 혼인의 배후에는 황제가 있었다. 숨을 쉬기 어렵고 온몸이 무거워졌다. 황제가 그 정도로 마음을 먹었다면 도망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갑자기 일족이 말살 될 위험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유협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비녀를 내려놓았다. 천강이 인상을 쓰는 그 순간 유협은 흩어져 있던 제 머리카락을 얌전히 등 뒤로 모았다. 그리고 하얀 비녀를 잡아 올린 머리를 고정했다. 천강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잘 어울리는구나.”
천강의 눈에 흐르는 잔인한 만족감을 보아하니 알 것 같았다. 천강은 일부러 비녀를 가져왔다. 이건 길들이기였다. 천강에게 복종하게끔 만드는 의식이다. 천강이 손을 뻗더니 유협의 턱을 잡아 살짝 들었다.
“앞으로는 이런 모습을 기대하겠다.”
그리고 유협을 한 번 훑어보더니 뒷짐을 지고 가 버렸다.
홀로 남은 유협은 수치심과 그에 대한 증오가 너무 큰 나머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유협은 비녀를 뽑아 욕설과 함께 힘껏 던져 버렸다. 운 없게 곁에 있던 주전자가 비녀에 맞고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러나 비녀는 너무 튼튼해 금도 가지 않았다.
“개새끼.”
유협이 묘족의 언어로 욕설을 지껄이는 도중에 시종이 들어왔다. 손에는 색색의 비단옷을 공손하게 든 채였다. 시름 어린 표정으로 들어오던 시종은 그 꼴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자! 무슨 일이세요?!”
유협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남족이라면 쭉 돌봐주었던 시종조차 싫었다.
자초지종을 듣지 못한 시종은 당황한 표정으로 비단옷을 침대 위에 수북이 내려놓았다. 그 후 깨진 유리 조각을 잡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협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비단옷 이었다.
“이게 천강이 보낸 옷입니까?”
그 말에 시종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공자, 황자님 성함을 함부로 말하시면 안 됩니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습니다.”
시종이 어물어물 유협의 눈치를 보았다. 저번에 천강이 보냈다던 그 비단옷이 완성된 게 분명했다. 유협은 지체하지 않고 옷을 잡았다. 과연 돈이 썩어 나는 집안이라, 비단은 잡기만 해도 부드럽고 아름답게 너풀거렸다.
가슴 쪽에는 간단한 자수가 들어가 있었다. 어찌나 공들여 만들었는지 거의 후궁에서 생활하는 유협도 이처럼 아름다운 옷은 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만 닿아도 감촉이 매끈한 게 입으면 걸친 것도 모르게끔 편안할 게 틀림없었다.
유협은 그 옷을 쓸어 보다가 자수가 들어간 옷깃 부분을 붙잡고 거침없이 찢었다.
“백 공자!”
깨진 도자기를 주워 치우던 시종이 한순간 도자기가 뭔지도 잊어버리고 달려왔다. 그 광경을 믿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였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유협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다음 옷을 잡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누더기로 만들기 시작했다. 비단 찢는 소리가 가득 울리자 넋을 놓던 시종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그러세요? 예? 백 공자!”
시종이 달려와서 만류했지만 유협은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반면 시종은 너무 충격적인 광경에 작정하고 덤비지 못했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시종이 떨어지는 옷 조각들을 긁어모으며 애타게 말했다. 그 말에 상관없이 유협은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옷을 모조리 찢어 버렸다. 시종이 뒤늦게 손을 잡아 말리려 했지만 단호하게 뿌리쳤다. 마침내 비단이 다 찢어지자 유협이 경고했다.
“앞으로 삼 황자가 무엇을 보내거든 절대로 받아 오지 마십시오.”
“아이고 이를 어째. 아까워서…… 세상에.”
시종은 코까지 훌쩍거리며 비단 조각을 모았다. 유협은 그 모습을 무시하고 이번엔 비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시종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거긴 아직 유리 조각들이 남아 있습니다!”
유협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다가가 비녀를 주워 왔다. 아까 함부로 대했던지라 미세하게 긁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모자랐다. 눈앞에서 치워 버려야 했다.
유협이 비녀를 들고 막 발걸음을 떼자, 시종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옷깃을 붙잡고 늘어졌다.
“백 공자 진정하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유협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부셔지지 않는다면 그대로 물속으로 던지면 그만이었다. 얼핏 유협의 마음을 읽은 시종이 필사적으로 앞을 막았다.
“셋째 황자님은 자비로운 분이 아니세요. 필히 경을 치실 겁니다.”
시종은 자신을 지나쳐 걷는 유협을 따라 종종걸음 치며 말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유협은 끝내 자신의 처소에서 벗어나 잘 조경된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물이 말라가는 연못에 거침없이 비녀를 던져 버렸다.
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백옥이 연못에 빠졌다. 진흙 범벅이 되어 빛을 잃은 비녀를 보고 시종은 바람 빠지는 비명 소리를 냈다.
그러나 유협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될지 미래가 불투명해졌지만 하나 분명한 게 있었다. 유협은 누군가의 후비로 살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두고 보자.’
이 순간부터 유협은 천강이 아무리 시련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순순히 듣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정말로 천강과 혼례를 치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을 천강이 영원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천강은 지금 웃고 있지만 후일 적어도 유협만큼 괴로워질 것이다.
비녀를 던져 버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유협은 강한 권태에 두통을 느꼈다. 순간 구역감까지 치솟았다. 유협은 미간을 짚었다. 평소라면 차라도 한 잔 내 왔을 시종은 기가 질렸는지 구석에서 유리 조각을 치우는데 몰두하는 척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와 한기에 유협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이곳을 떠나고 싶다. 아예 들어온 적이 없는 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멍한 정신으로 유협은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갔다. 침의 차림에 겨우 겉옷만 두른 채였다.
하지만 가을바람의 서늘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걷고 걸어 마침내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건녕궁 앞에 서 있었다.
유협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발걸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천화가 있는 궁 앞에 서 있었다.
천화.
천화는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지금 유협은 남족이라면 지나가는 거지도 싫었다. 그런데 천화는 남족인 데다가 심지어 황손이었다. 이전에는 없었던 묘한 거부감이 유협의 마음에 쌓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넓은 궁에서 유일하게 사랑할 만한 아이는 천화뿐이라는 마음도 변치 않았다.
‘그 어린아이한테 무슨 위로를 받겠다고.’
그 와중에도 발걸음이 닿은 곳이 건녕궁이라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유협은 한참 미간을 문지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침의만 입은 상태라는 것도 깨달았다.
‘정말 미쳤나 보구나.’
부끄러운 꼬라지를 하고 후궁을 헤치고 다녔다니. 그런데 너무 미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던가. 정신을 놓고 건녕궁까지 왔더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했다. 지독하게 아팠던 머리가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었다.
유협은 겉옷을 잘 여몄다. 어쨌든 풍기문란은 후궁에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 꼴로 뭘 어쩌려고 여기까지 왔을까.’
스스로에게 한탄하며 유협이 뒤를 돈 순간이었다. 건녕궁 문이 열리더니 궁인과 딱 마주쳤다. 소주방에 가려는 듯 소쿠리를 옆구리에 낀 채였다. 유협을 본 순간 궁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유협이 반쯤 뒤로 돌아 있어서 궁인은 한 번에 유협이 침의 차림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궁인은 화들짝 놀라며 유협을 보았다.
“백 공자! 혼인 때문에 바쁘신 줄 알았는데.”
“아…… 네. 뭐.”
유협의 대답이 시큰둥하자 궁인은 민망한 듯 화제를 돌렸다.
“황자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잘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셔서요.”
순간 유협이 멈칫했다.
“……황자님이요?”
“네. 건너 듣기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정원에 나와서 기다리신다고. 그래서 혼약을 준비하느라 바쁘신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바위가 가슴에 턱 얹히는 기분이었다. 유협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자 궁인은 그제야 침의를 발견했다.
“에구머니나! 세상에 백 공자! 어찌 이런 모습으로 후궁전에 들어오셨어요?”
“걷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궁인의 눈에 미친놈이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듯했다. 유협은 순순히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이리 됐습니다.”
“……백 공자.”
궁인이 측은하다는 듯이 유협을 보았다. 당시 황제를 알현했던 곳이 건녕궁이었기 때문에 알 만한 궁인들은 전부 다 당시 유협의 모습을 보았다.
“공자, 셋째 황자께서는 황자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신 분으로—.”
순간 울컥한 기분이 들어 유협은 칼같이 말을 끊어 냈다.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황자님께 제가 바빠서 뵙지 못한다고 전해 주세요.”
그 말에 궁인이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한숨을 쉬었다.
“공자, 제가 쉽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황자께서는 식사도 잘 못 넘기시면서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 번은 뵙고 가시지요.”
불길처럼 치솟았던 짜증이 단번에 확 사그라들었다.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해 유협은 멈칫했다. 그 모습을 보고 궁인이 손짓했다.
“저기 저 담벼락 뒤에서 기다리시면 황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리고 유협이 차마 된다, 안 된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몸을 돌려 다시 건녕궁 안으로 총총걸음 했다.
유협은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과거에는 유협에게 말을 걸기 그렇게 꺼려 하더니 혼인한다는 소식에 태도가 달라진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제일 심란한 일은 역시나 천화였다.
‘식사도 잘 못 넘기시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분명 천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다 내려앉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다. 보지 않아도 연못 근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뒷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무언가 울컥해서 유협은 겉옷 소매로 입을 가렸다. 갑자기 마음이 시렸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걷는 것도 아니고 빠른 속도로 도도도 달리는 소리였다.
유협이 자세를 바르게 하기도 전에 천화가 툭 튀어 나왔다. 아이의 하얀 얼굴은 달려오느라 분홍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기쁨과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유협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천화를 보았다.
마치 버려진 강아지가 이러할까.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발길질 당한 후에도 누군가가 손을 내밀면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동시에 유협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니.’
설령 남의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적으로 돌린 후라도 유협은 이 작은 아이에게는 사랑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유협은 입을 가렸던 손을 내려 천화에게 뻗었다.
“황자님.”
유협의 목소리를 들은 천화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유협을 발견한 천화의 눈이 빛을 듬뿍 받아 반짝거렸다. 아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와락 유협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능숙하게 천화를 끌어안은 유협이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잘 지내셨어요?”
본인은 전혀 잘 지내지 못한 와중에 이런 질문을 하려니 속이 쓰렸다. 게다가 천화가 잘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협은 애써 태연한 척 굴기로 결심했다.
유협의 겉옷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안긴 천화가 숨을 깊게 쉬었다가 뱉었다. 이제 안심했다는 양 긴 한숨이었다.
유협은 별다른 말없이 손을 뻗어 천천히 천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계속 강아지 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헐떡거리던 숨결이 점점 가라앉았다.
“왜 여태 안 왔어?”
마침내 천화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유협은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 냈다. 적어도 혼례 소식이 전해진 후 처음으로 지어 본 미소였다.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하고 혼약하는 거야?”
천화가 물은 질문에 유협은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당연히 천화도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황제가 명을 내렸을 때 천화도 같이 있지 않았나. 그러니 아이가 사실을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유협은 잠시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천화가 유협의 품 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럼 또 언제 올 수 있어?”
천화가 조금 다급하게 물었다. 유협은 한숨을 쉬고 이마를 문질렀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자님, 제가 혼약을 치르면 출궁을 하게 됩니다.”
“응.”
“출궁이 뭔지 아세요?”
천화가 어물어물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궁에서 나가는 거?”
“맞습니다.”
유협은 더 말하지 못하고 혀를 살짝 깨물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천화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걸 아는 데도 그랬다. 결국 천화가 먼저 유협의 손을 잡아당겼다.
“말해 줘.”
“제가 궁에서 나가야 해요. 형님 댁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순간 천화의 얼굴에 불안이 나타났다. 설마설마하면서도 정말로 그래야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럼, 그럼 나는?”
천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에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천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유협과 자신의 형님이 결혼한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황자님은 나중에 나이가 차면 출궁하실 거예요.”
유협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가만 가만 받고 있던 천화가 불쑥 물었다.
“나중에 나랑 같이 나가면 안 돼?”
“……나중에 황자님께서도 형님들처럼 멋지게 자라서 나가시게 될 거예요. 그때까지만 기다리시면 돼요.”
하지만 유협의 말에도 천화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협이 뺨을 쓰다듬었다. 천화의 하얀 얼굴은 밀가루라도 바른 양 완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지 마.”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말에 잠시 유협이 주춤했다. 천화가 간절하게 유협의 겉옷을 잡고 힘을 주었다.
“응? 가지 마.”
유협은 입을 달싹거렸다. 여태까지 자신만 생각하고 있었다. 천화에게 이 궁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붙일 상대는 유협뿐이었다.
유협의 대답이 없자 천화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가지 마. 명령하면 안 갈 거야?”
“저하…….”
입을 여는데 입술까지 마르는 기분이었다. 천화의 고개가 추욱 쳐졌다. 아이가 유협의 손에 손톱을 박을 것 같이 잡아 왔다.
“안 간다고 했잖아, 전에.”
“…….”
“부탁이야. 안 가면 안 돼?”
누군가 심장이라도 후려친 것 같았다. 유협은 자신이 벌여 놓은 거짓말들을 보았다. 과거에는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거짓말들에 불과했다.
유협이 대답이 없자, 천화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부탁하면 안 간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싫어.”
천화가 입술까지 새파랗게 질린 채로 말했다. 엄마를 찾는 아이 같은 모습에 일단은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협은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는 천화의 등을 두드렸다.
“왜 나는 지금 못 가?”
“나이가 어리셔서 그래요.”
“그럼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가. 응? 제발.”
천화가 두 손으로 유협의 허리춤을 간절하게 잡았다. 예쁜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맹목적이었다. 천화는 거의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래도 저하가 출궁하신다면 저와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쟁이.”
“네?”
“거짓말쟁이야.”
천화가 붙잡고 있던 손을 팍 놓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가슴에 누군가 칼을 꽂은 것처럼 아팠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하. 하지만 제가 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요.”
유협이 변명하자 천화가 고개를 들었다. 멍한 아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순간 유협의 가슴이 와르르 무너졌다.
“저하. 이러지 마세요. 제발요.”
유협이 천화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아무런 힘도 없이 끌려와 품에 갇혔다.
“저는 멀리 가지 않아요. 약속드려요.”
천화를 다독이는 자신의 손을 보니 어느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천화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천화가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유협은 천화가 이렇게 슬퍼하는 이유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제 유협은 천화에게 단순히 궁에서 의존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유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마치 형제처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큰 궐 안에서 유협이 사라진다면 천화는 출궁할 때까지 그저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 또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보자면 혼약을 올린 유협은 부인 취급을 받아 외출을 자유롭게 할 수 없을 터였다.
한참을 말없이 안겨 있던 천화가 유협의 품을 밀어 냈다. 또다시 화를 내는 건가 싶어 다급해진 유협이 팔을 잡았지만, 도리어 자신이 아이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천화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응시하더니 입술을 죄 씹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랑 하면 안 돼? 응?”
“네?”
“나랑 혼례하면 안 돼?”
순간 유협은 눈을 깜빡였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혹하는 말이었다. 어차피 후비 신세인 것 천화가 자랄 동안 돌봐주고, 나중에 현명한 정실을 얻었을 때 청을 올려 변방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천강의 구역질 나는 얼굴을 보고 살기, 혹은 천화와 둘이 살며 아이를 돌봐주기. 물을 필요도 없이 후자를 선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관도 못 올린 아이와 혼례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유협은 간신히 웃음을 담아 물었다. 입꼬리가 떨렸다.
“저하 혼약이 뭔지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
“맞습니다. 저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하셔야죠.”
“몇 살부터 할 수 있는데?”
유협은 천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하가 키가 저보다 더 커질 때면 할 수 있는 거예요.”
“혼약은 두 사람하고도 할 수 있어?”
천화의 질문에 유협은 혼란을 느꼈다. 그러자 천화가 유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채 오래 노려보지도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아니잖아.”
“저하, 이렇게 해요. 저랑 저하는 언제까지나 형제예요. 서로가 어디에 있어도 서로를 도와주고 아끼는 거예요.”
유협은 고개를 저으며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하는 천화의 어깨를 잡았다.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저는 저하를 그렇게 생각할게요.”
“형님도 그렇게 사랑해?”
천화가 갑작스럽게 따지듯 물었다.
유협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천화가 기꺼워할 줄 알았으나 아이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이런 목소리로 말을 하는 건 처음 들었다.
“형님도 형제처럼 사랑하는 거야?”
“……전혀요.”
“그럼 왜 형님과 혼약해? 나랑 해. 응?”
천화가 반쯤은 신경질적으로 졸랐다. 왜 자신의 말이 맞는데 들어주지 않느냐는 투였다. 어서 빨리 그러자고 인정하라는 기세가 흉흉할 정도였다.
유협은 할 말을 잃고 작은 머리꼭지를 보았다. 이런 모습의 천화는 처음 보았다. 유협은 더 이상 회유가 아니라 진실을 말해야 하는 때라고 느꼈다. 그는 천화를 붙잡고 자신의 눈을 보게 만들었다.
“저하, 지금은 제가 저하를 두고 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아니에요. 만약 이 궐 밖에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이해하실 거예요.”
천화의 영문 모르는 눈을 보고 유협은 동글한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저하 저는 원망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솔직히 아직도 복수에서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잊지 않고 저하의 안녕과 축복을 기도하겠습니다. 꼭 건강하게 자라셔야 해요.”
“싫어.”
“저하.”
“제발…….”
아이의 목소리가 마치 첫눈처럼 흩어졌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닦아 주지 못할 정도였다. 유협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가는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쓸어 주었다. 명령에도 부탁에도 애정에도 기댈 수 없는 천화가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협은 그 심정을 잘 아는 듯 천화 앞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만 닦아 주었다. 그러나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
혼례는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이뤄졌다. 유협은 천강의 요청에 따라 신부복으로 붉은 면사를 쓰고, 머리를 비녀로 올렸다. 황가의 혼인이니 만큼 많은 고관대작들이 모여들었다. 술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협은 붉은 비단 아래서 어떠한 설렘도 없이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천강이 축제를 좋아하는 만큼 혼인 절차가 길게 이어졌다. 마침내 모두가 신혼부부의 행복을 빌며 흩어졌을 때 천강은 서슴없이 유협의 손목을 잡았다.
“신방으로 가자.”
유협은 퉁명스럽게 손을 쳐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천강을 무시한 채 직접 신방으로 향했다. 신방은 주변에 깨를 뿌려 두고 붉은 꽃으로 장식을 해 두어 알아보기 쉬웠다.
유협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얼마 되지 않아 천강이 기분 상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한 채만 깔린 이불과 유협을 번갈아 보던 천강이 한숨을 쉬며 을렀다.
“네가 예의 따윈 모르는 천박한 출신인 건 알지만, 가장에게 지켜야 하는 예만큼은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도 내 손을 뿌리친다면 손목이 부러질 줄 알아라.”
윽박질에도 유협은 무표정하게 천강을 보았다. 천강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기 시작할 때쯤 유협이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비녀를 느릿느릿 풀었다. 검은 비단 같은 머리가 폭포수처럼 흐르자 천강의 표정이 조금 멍하게 변했다.
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긴 유협이 천천히 말했다.
“저하, 묘족의 피로 부적을 쓰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것 아시죠.”
유협이 입을 움직이며 조심스레 붉은 색 옷고름을 풀어냈다. 나비의 날개처럼 옅은 옷이 흘러내리자 천강은 이제 그 모습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협은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그런데 그 역이 가능할지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뭐? 뭐라고?”
천강이 뒤늦게 퍼뜩, 유협이 하는 말을 듣고 물었다. 진짜로 물었다기보다는 신경을 다른 곳에 쓰느라 기계적으로 대답한 것에 가까웠다.
“피요. 피로 귀신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없냐는 뜻입니다.”
그제야 천강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그가 서서히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저는 오늘 이 방에서 혼자 자도록 하겠습니다. 저하께서도 동침을 원하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잠자리가 그리 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협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허리춤에 있던 부적 하나를 꺼내들었다. 피로 쓴 게 분명한 부적은 어딘가 스산한 기척이 느껴졌다. 천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협이 부적을 찢었다. 순간 기분 나쁜 바람이 훅 불었다. 분명 방 안이었음에도 바람이 불자 천강의 눈동자가 떨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원한이 깊은 귀는 작은 요청에도 요란을 떨며 응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신다면 다음 날 안전하게 눈을 뜨실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순간 뜨겁고 단단한 손바닥이 유협의 뺨을 갈겼다. 그대로 휘청한 유협의 어깨를 붙잡고 천강이 으르렁거렸다.
“오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그리고 다시 한번 뺨을 갈기기 위해 손을 든 순간이었다. 기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든 천강은 난데없이 방구석에 앉아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여인만이 기묘하게 뚜렷이 보였다.
피 묻은 소복을 입은 중년의 여자는 머리가 길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천강의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유협은 그 꼴을 보면서 입에 고인 피를 닦아 냈다. 그리고 천강이 어깨를 잡은 손을 뿌리쳤다. 천강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이게, 이게, 어떻게……. 분명히 죽었는데.”
“사람 목숨을 생으로 해치면 그 원한은 백 년이 가도 사라지지 않는 법이지요.”
유협이 비웃으며 말했다. 비꼬는 말에도 천강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로 중년 여성을 바라보았다. 유협은 그 귀신이 천강이 죽인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여기서 주무신다면 큰일이 나지 않을 성싶습니다.”
“이…… 개자식아. 너. 너.”
퍼뜩 정신을 차린 천강이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화려한 혼례복을 입은 그는 처음에는 뒷걸음질하다가 곧 완전히 뒤돌아서 뛰쳐나갔다.
그 꼴을 보던 유협이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자조적인 웃음은 사라져 버렸다.
‘원한이 있는 혼을 나 편하자고 사용하다니.’
자신처럼 천강의 희생양이었을 여인을 훑어보다가 유협이 한숨을 쉬고 마저 옷들을 벗어 던졌다. 마침내 침의만 남았을 때 유협은 푹신한 금침 속으로 파고들었다.
‘천강이 이대로 물러나 주면 좋겠지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협도 순순히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그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면 그 길을 반드시 가시밭길로 만들고 말겠다. 그런 결심을 하면서도 마음이 한없이 무너져서 유협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2권에서 계속
다정도 병인가 하여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