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5)

다정도 병인가 하여 1권

프롤로그

1부

프롤로그

이번에 천화가 혼인 선물로 보내온 건 금으로 만들어진 발찌였다.

붉은 주단 위에서 발찌가 위협스럽게 반짝였다. 바빠서 직접 오지 못해 미안하니, 혼인 선물로 열두 명의 노비 역시 선물로 받아 달라는 전언이 있었다.

유협은 천천히 다가가 발찌를 받쳐 들고 있는 노비의 턱을 잡았다. 살짝 악력을 가하니 입이 벌어진다. 텅 빈 입 속을 살펴보자 노비의 혀가 뿌리째 뽑혀 있었다. 그 잔인한 광경에 순간 머리가 아찔했다

한편으로는 놀랍지도 않았다. 요새 부쩍 바빠진 천화는 이렇게 선물을 보내고는 했다. 아마 거세도 시켰을 것이다.

유협의 처소에 일하는 노비들은 몇 빼고는 다 이런 모습이었다. 멀쩡히 궁에 왔다고 해도, 잘못을 해서 비슷한 결과가 돌아왔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유협과 지나치게 친해지는 걸 의미했다.

소연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 가장 소름끼치는 건 천화가 혀를 뽑은 소연을 다시 방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혼인을 거부하는 유협에게 경고하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천화가 장미에서 가시를 발라내듯이 유협에게 소연을 돌려줬다는걸. 자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를 빼고, 유협이 아끼는 장난감을 돌려준 것이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소름끼쳤다.

유협은 시종의 턱에서 손을 뗐다. 그렇지 않아도 말을 전하러 온 천화의 시종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던 참이었다. 유협은 무릎을 꿇은 열두 명의 사내들을 외면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천화의 시종이 냉큼 고했다.

“저하께서 발찌를 착용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유협은 들은 척하지 않고 무시했다.

천화의 시종들은 사실 충성스러운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이 절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협의 행동을 감시하고 주인에게 고했다. 아까도 시종을 붙든 손길이 조금만 더 길어졌으면 그 사실 역시 전했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협이 무시한 채 방문을 열자 시종이 애써 불러 세웠다.

“유협 님.”

차마 유협에게는 손가락도 대지 못하고 그가 발을 구른다. 유협은 싸늘하게 말을 잘라 버렸다.

“싫어.”

“하지만…….”

“이런 선물을 가져오려면 직접 오라고 전해.”

시종의 얼굴이 순간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 말을 전했다간 맞아 죽을 테니까.

유협은 잠깐 입꼬리만 올려 비웃고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미쳤다, 미쳤다 하니 정말로 미쳤나 보다.

남에서 발찌는 부인들만 착용하는 장신구였다. 아니면 아주 천한 노비에게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 채웠다. 유협은 여자도, 노비도 둘 다 아니었다. 하지만 천화는 요새 이렇게 뜻 모를 선물을 보내 속을 어지럽혔다.

언뜻 보기에 발찌는 굉장히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귀부인들이 홍옥을 박아 발찌를 만드는 것처럼.

그러나 생긴 모습은 노비의 것과 비슷했다. 귀부인들의 발찌는 발 아래로 흘러내려 금 사슬이 쓸리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천화가 내어 준 발찌는 발목에 딱 붙는 형태였다. 이런 형식으로 만드는 발찌는 시종이 도망가지 못하게 표시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아무도 시종에게 흑요석을 박은 발찌를 주지 않겠지만…….

유협은 한숨을 내쉬며 푹신한 침대에 앉았다. 짚이 아니라 진짜 솜을 넣은 침대는 푹신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이 방과도 안녕이다. 천화가 나름대로 준비한 묘족의 항아리가 놓여 있는 선반도, 은은한 난향도, 나름대로 정갈한 서재도 다시는 보지 못한다. 대신 열흘 후 화려한 천화의 안채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의 부부로서.

동의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혼약을 떠올리자 유협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할수록 답답하게 얹혀 오는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려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숨이 막혔다.

아직도 밖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종의 그림자도, 엎드려 있을 열두 명의 노비도, 그들이 가져온 금 발찌도 전부 다 싫었다. 유협의 답답함을 풀어 줄 방법은 한 가지였다. 천화가 자신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천화는 유협의 요구를 무시한 채 먼저 혼약하자고 속삭였다. 혼인하고 안전해지면 고향에 가는 걸 허락하겠다면서.

유협과 친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의 혀를 뽑아 버리는 남자가 하는 말이었다. 믿음이 전혀 가지 않았다. 마치 돌에 대고 경을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유협이 제안을 거절하는 그날 밤 내내 천화는 입을 맞췄다. 아프지 않게 살살 입술을 씹으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천화를 보며 유협은 그만 눈물까지 보였더랬다.

그 모습에 설핏 웃으며 눈물을 닦아 주던 천화가 떠오르자 다시 한번 숨이 막힌다. 마치 누군가 속을 박박 찢어 갈기는 것 같았다.

유협은 하릴없이 침대에 누웠다. 요즘 하는 일이라고는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 있는 것밖에 없었다. 온몸이 무기력하고 힘이 없었다. 문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보기 싫어, 아예 돌아누운 채로 유협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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