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다정의 정원
“나는 아예 여기서 합쳤으면 싶은데.”
백 여사가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이소와 지내는 시간, 정도 많이 들었고 무엇보다 해수가 얼마나 귀여움을 떠는지 생각지도 못한 손녀의 재롱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때문에 매번 나가는 모임도 미룬 채 손녀와 때늦은 데이트 계획을 세우느라 매일매일이 즐겁던 차였다.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거였다.
“다 큰 애들이 노인네들하고 사는 거 불편하지. 그리고 멀리 사는 것도 아니고 차 타고 나가면 20분이잖아.”
차 회장이 거들었다. 본가와 멀지 않은 곳에 마련한 부지는 크지는 않았지만 등 뒤로는 적당한 높이의 산을 끼고 있는 전망 좋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조금만 걸어서 내려오면 커다란 호수를 낀 공원이 있었고 해준의 미술관과 해수의 학교 역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차 회장의 마음에는 더할 나위 없이 꼭 들었다.
“그 작은 집에서 어떻게 살려고.”
“이 사람 소원이었어요. 작은 집에 셋이 사는 거요.”
“그래도. 빨래도 해야 하고 음식도 직접 해야 하는데 바쁘지 않겠어? 이소 씨 나랑 공연도 보러 다녀야 하고, 운동도 같이 다니기로 했는데.”
음식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고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알아서 해 줄 텐데도 백 여사는 여전히 아들들이 고생을 할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사 일에 치여서 자신과 보낼 시간이 부족할까 봐 염려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평생을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산 사람이라 더 그랬다. 이소가 백 여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언제든지 부르시면 시간 낼게요. 어머님.”
어머니라는 말에 백 여사가 볼을 붉혔다. 능글맞고 익살스럽게 치대는 해준과 달리 이소는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입으로 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단정하고 자상했다. 어디서 이런 귀한 사람이 제 가족이 되었는지 백 여사는 때때로 이소를 볼 때마다 마음이 벅찼다.
“그럼 오늘 집 보고, 저녁은 먹고 들어올 테냐?”
“아마도요. 새집이니까 가전도 좀 보고 가구도 보고 와야죠.”
“번거로울 텐데, 사람 시키지.”
“재미있을 거예요.”
밤에 돌아올게요. 해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안 해 본 것들투성이였다. 해준이 먼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이소가 백 여사와 차 회장에게 가볍게 포옹을 한 뒤 멀어졌다. 영락없는 부부의 모습이었다.
*
차를 돌려 대문을 빠져나와 키가 큰 소나무 숲길을 지날 때까지 이소는 창밖을 바라보며 묘하게 말이 없었다. 분명 아침까지는 저와 같이 들떠 있었던 것 같은데, 본가를 두고 다시 한번 이사를 한다니 마음이 헛헛해서 그런가. 해준은 이소가 말을 먼저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십 분쯤 달렸을까, 이소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교수님, 우리 식사 먼저 할까요?”
“그럴까? 자기 배고프면 그렇게 하고.”
그렇게 둘은 오랜만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하는 내내 이소는 해준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지만 때때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시선을 돌리고 상념에 빠졌다. 종종 결혼을 하고 나면 그 직후에 메리지 블루가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해준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고 이소를 부드럽게 불러 대화를 이었다. 그럼 이소도 얼른 표정을 갈무리를 하고 다시 미소를 띄웠다.
커피를 마신 후 다시 차에 올라 주소를 찍었다. 해준은 처음 이소가 부지를 보여 주었을 때의 빈 공간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몇 번을 찾아가려고 했었지만 꼭 완성된 뒤에 보여 주고 싶다는 이소의 말에 해준은 더 채근하지 않았다. 해준은 예전에 살던 동네에 있던 작은 주택을 떠올렸다. 아기자기한 이소의 성격상 아마 쓸모없는 공간 하나 없이 이곳저곳을 잘 꾸며 놓았을 것이다.
작은 텃밭이 갖고 싶다고 했었지, 마당에 빨래를 널고 싶다고 했었고, 어린 새끼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도 했었다. 해준은 언덕을 오르며 이소와 함께 강아지 집을 함께 만드는 상상을 했다. 물조리개로 꽃밭에 물을 주고, 이소가 과일을 깎아 오면 계단에 쪼그려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가끔 고장 난 벨을 수리하기도 하고, 전등을 갈기도 하고. 해준은 이소가 원하는 것은 다 함께 나눌 생각이었다. 그게 설령 자신이 살았던 삶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그리 살 것이다. 내 이소가 원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즐거울 것이다. 내 이소와 함께니까.
언덕 아래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바닥에 밟히는 파쇄석이 꼭 예전 집에 있던 것과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차 앞으로 나온 이소가 문득 손을 내밀었다. 해준이 그 손을 꼭 붙잡았다.
“집도 왠지 이소를 닮았을 것 같아.”
“좋아하실 거예요. 비슷하게 만들려고 노력했거든요.”
“응? 뭘요?”
이소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언덕 위에 지어진 집은 주차한 공간에서 계단을 조금 올라서야 대문이 보인다고 했다. 생각보다 집이 조금 높은 곳에 있어 해준은 의아하다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이 땅을 보러 왔을 때 이렇게까지 높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섰을 때 해준은 정면을 응시하며 한참 말을 잃었다. 제가 생각한 소박한 전경이 아니었다.
푸른 기와를 얹은 솟을대문이 바라보이는 큰 마당터, 양옆으로 늘어진 긴 행랑채, 마당 한가운데 선 커다란 느티나무. 마당의 중앙에는 오 평 남짓한 작은 연못과 넓적 바위, 붉은색 도료를 칠한 정자와 그 주변에 평상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곱게 휘어진 와송이 심어진 뜰의 낮은 담장 아래 아기자기하게 심은 풀꽃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연못 너머에 자리한 커다란 사랑채와 그 곁에 작은 별채. 단순한 기시감이 아니었다. 단단히 잡은 두 손이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졌다. 해준이 이소의 소매를 잡으려 했지만 이소는 부드럽게 걸음을 옮기며 걸음을 뗐다.
“…이소 씨.”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이소는 문지방을 넘어 사뿐히 땅을 지르밟은 후 몸을 돌렸다. 내내 긴장하고 굳어 있던 낯은 간데없고 평소의 이소로 돌아와 있었다.
“행랑채 식구들 먹이고 재울 공간도 많고, 시장도 가깝고 아이들 학교도 가까워요. 주방은 조금 손봐서 더 편하게 요리할 수 있을 테고 심심하지 않게 지내시라고 텔레비전과 서재도 다 갈음했어요.”
“…….”
이소는 두세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연못 위 작은 다리를 저벅저벅 걸었다. 두 사람이 올라서면 꽉 차는 다리는 꼭 예전 집에 있던 것의 절반만 했다.
“식구들 언제든지 편히 드나들라고 우리 안채는 멀지 않은 곳에 두었어요. 별채는 해수가 쓸 테고 아이들도 편히 놀 수 있게끔 일부러 다락은 아무것도 두지 않았어요.”
세 사람만 살 것이 아니었다. 본가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던 해준의 식솔들을 이소는 모두 데려오기로 했다. 내내 차 회장의 눈치를 보며 지냈던 이들은 다시금 모여 살 수 있다는 말에 좋아하면서도 또다시 신세를 져야 한다는 사실에 미안해했다. 하지만 이소는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설득했다. ‘제가 여러분과 같이 살고 싶어요. 가족처럼요.’ 가족이라는 말에 식솔들은 이소의 손을 잡고 또 한 번 울었다.
“여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있어요. 빨래를 널 수 있는 마당도 있고, 물을 줄 수 있는 꽃밭도 있고, 교수님 저택에서 가져왔던 어린 대나무도 뜰에 예쁘게 심어 놨어요. 참, 강아지는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오기로 했고요. 식구들도 모두 허락했고, 해수도 좋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제 하나 남았어요.”
작은 마당 한 바퀴를 다 돌고 돌아온 이소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요.”
노을을 닮은 따뜻한 시선이었다. 여리고 약한 것들을 따뜻하게 안아 줄 것 같은 미소였다.
“올해 생일은 어디 가지 말고, 함께 보내요.”
이소의 담백한 고백이 계속 이어졌다.
“둘째도……. 갖고 싶으시면 말하구.”
남자끼리 결혼도 했는데 뭐, 방법은 많겠죠. 그쵸. 이소가 초승달 같은 눈을 접어 웃었다.
“딸은 있으니까 아들이 좋으려나. 신혼여행은 일단 셋이 다녀올까요. 나 비행기 타 보고 싶거든요. 저번에 못 간 거요. 우리도 어머님처럼 프랑스로 쇼핑 다녀올까요? 다녀올 땐 식구들 선물도 사 오고. 다녀오고 나서는 식구들도 여행 보내 주고….”
이소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마음을 포근하게 헤집는다.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고운 얼굴에 소담한 보조개를 피우며 웃었다.
“비록 크고 화려한 정원도 없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제 앞으로 걸어온 이소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교수님을 닮은 꽃을 심어 놓지도 않았지만….”
이소가 만든 정원에는 소박한 들꽃과 작은 나무들이 가득했다. 붉은 벽돌을 비스듬히 꽂아 만든 마당 울타리의 주변에 아무렇게나 자란 민들레가 드문드문 보였다.
“같이 살아요, 저랑.”
해준이 쏟아부었던 사랑을 한꺼번에 되돌려 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소가 제 마음에 해준을 풍덩 빠뜨린다. 차해준, 네가 주었던 사랑을 내가 이리도 잘 담아 두었어.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너에게 돌려주려고.
“서로가 서로의 정원이 되어 주면서…. 그렇게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해준이 대답을 못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해준이 대답을 못 하고 오랫동안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자 이소가 고개를 톡 기울이며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채근했다.
나랑 같이 살자, 교수님.
자기야, 여보야. 해준 형.
응? 이소랑 같이 살아.
부드럽게 올라간 입매에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흘러나온다.
결국 해준은 한달음에 달려가 이소를 끌어안았다.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제 삶에 떨어진 선물 같은 이, 너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고개만 끄덕이는 해준을 이소는 가만가만 도닥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교수님, 그거 아세요? 벌써 사계절이 두 번이나 지나 우리가 함께 맞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요. 교수님은 제게 새봄의 꽃이자, 한여름 초목이고, 늦가을의 낙엽이며, 매 겨울의 첫눈이에요. 교수님의 정원에서 내가 사랑을 머금고 예쁘게 자랐듯, 앞으로는 제 정원에서 마음껏 당신의 사랑을 틔우셔도 돼요.
약속할게요. 언제까지고 제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교수님, 듣고 있어요? 많이 사랑한다구요…. 아주… 많이요.
<다정의 정원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