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인연의 실
구월, 저택의 단풍이 노릇노릇 익은 밤, 만족스러운 정찬이었다. 간만의 해준의 부모님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이소는 어른들이 앞에 계신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식사에 몰두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근래에는 왜 이리 입맛이 당기는지 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으면서도 전과 같지 않게 작은 주전부리를 오물오물 씹어대는 습관까지 생길 정도였다. 온전히 식사 시간만 한 시간 삼십 분이 걸렸지만 수저를 내려놓는 순간까지도 무엇 하나 마음에 차지 않는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한 식사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밤을 졸여 만든 차와 달지 않은 다과를 입에 물기 전까지만 해도 이소의 기분은 꽤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참, 이소 씨. 우리 집에선 결혼식은 전통 혼례로 하고 있어요.”
“콜록.”
따뜻한 밤차를 입에 머금고 얌전히 볼을 훑어 내리던 이소는 백 여사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사레가 들려 볼썽사납게 얕은 기침을 했다. 해준은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냅킨을 꺼내 이소의 턱과 손, 차가 흘러넘친 컵을 닦아 주었다.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인 양 놀라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해준을 보며 차 회장은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저, 전통 혼례요?”
“응. 대단한 건 아니고 아주 가까운 친지들만 모아 놓고 조용하게 치르는 편인데 이번에는 좀 케이스가 특수해서 미리 양해를 구할까 해요. 혹시 결혼식은 둘이서 간소하게 반지만 교환한다거나…. 그렇게 하기를 원해요?”
“어, 그게…. 조금 낯설어서요.”
이소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표정으로 해준을 돌아보았다. 해준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라고 뭐 해 본 적 있을까, 나도 결혼 처음인걸.’ 하고 농담을 던졌다. 괜히 물어봤다. 백 여사가 긴장한 표정의 이소에게 손을 내저었다.
“나도 처음에는 무척 낯설어서 엄청 반대했었거든요. 그렇잖아, 살면서 웨딩드레스 입은 내 모습이나 상상하지 누가 옛날처럼 저고리에 족두리에…. 베르사체 드레스 입고 싶다고 얼마나 남편에게 졸랐는지 몰라요. 그런데 또 막상 치르고 나니까…. 이게 너무 재미있더라고. 이 집안 결혼식이 좀 특이하거든요. 아마 지나고 나면 기억에 무척 남을 거예요. 웨딩홀에서 하는 한두 시간짜리 결혼식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추억일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이소는 어릴 때 보았던 텔레비전 사극 드라마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운데에 그 나무로 만든 새 인형 같은 거 놓고 절하고 신방 가서 촛불 끄는 그런 건가. 이소가 해준에게 몸을 기울이고 차 회장 부부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가운데 놓는 새요. 꿩이었던가요.”
해준은 꿩이라는 말에 눈썹을 움찔했다가 이소가 민망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앙. 비슷해서 헷갈릴 수 있어요.”
“아, 맞다. 원앙. 저도 알아요.”
사뭇 진지하게 대꾸한 이소를 바라보며 해준이 피식 웃음 지었다. 드물게 차 회장이 말을 얹었다.
“당신은 그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옷 한 번 찾아봐요.”
이소가 고개를 돌리자 백 여사가 신이 난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거야 일 년에 한 번씩 꺼내서 장 선생님이 관리해 주시는걸요. 근데 그건 이소 씨 사이즈로 좀 바꿔야겠다. 전통 혼례복 말하는 거예요. 나중에 보여 줄게요. 아우, 너무 재미있겠다.”
“예. 저도 보고 싶어요.”
이소가 백 여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순하고 얌전하게 대답하는 해준의 연인을 보며 백 여사가 다시 한번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소가 너무 예뻐서 자신도 모르게 볼을 꼬집고 싶을 때나 나오는 습관이었다. 물론 차 회장이 이소가 애도 아니고 너무 만지작거리지 말라는 말에 체면을 지키느라 백 여사는 그저 눈만 접어 웃으며 손끝을 꾹 쥐곤 참았다. 결혼식만 올려봐, 맨날 끼고 데리고 다닐 거야.
“이소 씨 부모님이 계셨다면 좋아하셨을 텐데.”
백 여사가 이소의 손을 잡는 대신 아쉬움에 말을 얹었다. 그 말에 이소 역시 쓰게 웃었다. 제 부모님이 아셨다면 아마 엄청 놀라셨을 테지. 그래도 꼭 안아 주시지 않았을까. 결혼식 전에 꿈에서라도 꼭 보면 좋을 것 같아. 이소는 해준과 함께 찍은 사진 속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남은 차를 모두 마셨다.
“아무튼 둘이 남은 이야기도 잘 해 봐요. 결혼식 준비는 전부 우리 측에서 준비할 테고, 이소 씨는 날짜만 정해서 알려 줘요. 친지분들도 얼마나 올지도 알려 주고요.”
백 여사는 말을 마치고 장 선생에게 연락을 해 보겠다며 먼저 일어섰다. 차 회장 역시 서재로 자리를 떴다. 부모님이 떠나고 난 자리, 해준과 이소는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눈을 마주쳤다.
“기대돼?”
“긴장은 조금 되지만…. 무척이요.”
“나도.”
해준이 괜히 눈을 찡긋 접은 채 이소에게 머리를 기댔다. 결혼식, 결혼식이라. 이소의 머릿속에 해준과의 미래가 조금씩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 * *
전통 혼례는 서로 결혼 의사를 타진하는 의혼(議婚), 혼인 날짜를 정하는 납채(納采),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 혼례를 올리는 친영(親迎)의 네 가지 의례로 이루어진다. 의혼은 신랑집과 신부집이 서로 혼사를 의논하는 절차다.
부모님이 안 계셨기에 굳이 집안 간 결혼 의사를 나눌 필요가 없었던 이소는 해준의 부모님이 정식으로 동의를 구하는 자리에서 홀로 고개를 숙였다. 차 회장과 백 여사는 제 아들보다도 한참 어린 남자친구 앞에서 공손하게 절을 올리며 ‘제 아들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경의를 표했다. 이소 역시 얼른 무릎을 굽히며 ‘저도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어설프게 답했다.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분위기가 조금 더 달랐을까. 아직 크게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을 때 제 앞에 앉은 세 사람의 모습이 무척이나 단란해 보여 조금 목이 멨다. 하지만 이소는 환히 미소 지어 보였다. ‘고생이 많았어요, 정말로.’ 이소만 보면 자꾸 애썼다, 고생했다 버릇처럼 말하던 백 여사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팔을 들어 이소를 끌어안고 등을 도닥였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해준과 이소는 가볍게 짐을 챙겨 차에 올랐다. 22년 전 방화 사건으로 시신이 흔적도 없이 타 버렸다는 이유로 윤치승 회장은 동생 부부의 가묘만 만들어 둔 채 방치했었다. 어릴 때는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 그저 넘어갔었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니 제 부모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그리 죄스럽게 다가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영이 남겨 준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해준이 찾아준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이소는 22년 만에 제대로 된 부모님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손톱만큼 작거나 흐릿한 사진이 아니라 제대로 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정말로 엄마는 제 얼굴과 꼭 닮았다.
해준과 이소는 서울 근교에 있는 큰 절에 이소의 부모님 위패를 모셨다. 영가를 모시는 벽에 부모님의 존함을 적고 음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사진 사이로 향이 피어오르자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릴 적 장례식 날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너무 어렸던 자신은 저를 지켜 줄 이가 떠난 줄도 모르고 제 손안에 든 장난감만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한 윤이소. 말없이 눈이 젖어 오자 해준이 이소의 손을 꼭 붙잡았다.
법문이 끝나고 법당 안에 둘만 남자 이소는 한참 동안 말없이 제상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묵히고 묵힌 오랜 감정들은 가볍게 꺼내 놓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나 보다. 입술 끝에서 무어라 말이 나올 것도 같은데 몇 번을 더 뻐끔거리다 다시 다물리곤 했다. 이소가 열두 번째 한숨을 몰아쉴 때쯤 해준이 이소의 손을 가볍게 두드린 채 먼저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해준의 곁이어서 긴장했던 게 아니었는데도 어쩐지 혼자 남자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엄마, 아빠.”
사진 속 부모님은 꼭 자신을 앞에 두고 웃고 있는 듯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할 거라고 상상한 적은 없었는데, 그냥 사진일 뿐인데도 괜히 멋쩍어졌다. 이소가 볼을 긁어내렸다.
“저 결혼하려고요.”
조용한 법당 안에 이소의 목소리만 울렸다.
“조금 놀라실 수도 있는데요. 방금까지 같이 있던 분이 저랑 결혼할 사람이에요. …음, 그러니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엄마 아빠 예전에 보육원 봉사 다니실 때요, 그때 본 적이 있었던 아이가 잘 자라서, 이젠 제 옆에 있어 주겠대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더듬지 않으려 애를 썼다.
“착한 사람이에요. 우리 해수한테도 아주 잘 해 주고, 약한 사람들도 잘 도와주는 그런 좋은 사람이에요. 엄마 아빠 사진도 찾아줬고, 이렇게 절에 위패 모시자고 한 것도 저 사람이에요.”
이소는 천천히 호흡했다. 마른 입술을 적시고 손톱을 매만졌다. 이렇게 쉬운 일을 여태 못 하고 이제야 부모님 앞에 서게 되자 괜히 무안하고 부끄러워진다.
“하하… 하……. 할 말이 엄청 많은데 이렇게 얼굴 보고 말하니까 마음이 조금 벅차서,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앞으로는 자주 올 수 있잖아요. 보고 싶으면, 제가 여기로 올 테니까, …엄마 아빠도 잘 찾아오세요. 나중에는 해수도 꼭 데려올게요.”
입술을 꾹 문 채 느리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왠지 격려를 해 주는 것 같은 부모님의 사진을 보며 이소는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결혼식 하면, 꼭…… 와 주세요. 늦어도 괜찮으니까. 조심히 오세요.”
이소는 계속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 내리며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큰절을 올렸다. 그동안 안부를 묻지 못했던 많은 날을 떠올리며 무겁고 반가운 마음을 담아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이소가 바깥으로 나오자 해준이 서 있었다. 해준은 이소의 눈가가 젖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 후 ‘자기야, 가서 공양 달라고 하자.’ 하며 이소의 엉덩이를 툭툭 쳐 공양간으로 보냈다. 이소가 멀어지자 해준은 그제서야 천천히 법당 안으로 들어가 향을 피웠다. 사진 속 여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시선을 돌려 제가 그리워 마지않았던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려한 인상의 남자는 이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는 차가운 미남이었다. 푸른 대나무 같던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해준은 미소 지었다.
“……약속, 지키려고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아이를 밴 여인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묘한 기대감으로 설렌 경험은 오랜 시간 정착하지 못하고 흔들리던 해준을 지탱하던 포근한 기억 중 하나였다. 당신들에게 주었던 나의 사모(思慕)는 결국 가치를 매길 수도 없는 소중한 인연으로 내게 돌아왔어. 이건 다시 제게 온 기회다. 절대로 놓치지 말라는 당신의 계시다. 기필코 내 모든 것을 바쳐 저 아이를 웃게만 만들 것이다. 당신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소를 꼭 행복하게 해 줄게요. 우리 아가, 걱정하지 마세요.”
문득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해준 쪽으로 불어왔다. 법당 문이 열려 있었던가. 타이밍이 좋아 해준은 피식 웃었다. 뒤로 물러나 절을 올리고 한참을 더 향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문을 나섰다. 공양간 아래서 이소가 준비가 다 되었다며 손을 흔들었다. 단풍이 햇볕에 노릇해지던 날, 두 사람은 이소의 부모님까지 뵙고 돌아왔다.
* * *
“음……. 받으시려나.”
절에 다녀온 다음 날 밤, 이소는 전화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사주단자를 보내고 함을 지는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결혼을 한다 어른께 알려야하는데. 친인척도 따로 없는 제가 아는 가까운 어른으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정숙이었다. 이소는 딱히 정숙에게 나쁜 감정이 없었다. 다만 해준과 맺은 거래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고 나자 자신을 두고 미국으로 가 버린 정숙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쉽게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서운함이라든지 원망 따위가 가로막아서는 아니었다. 같이 있을 때는 언제나 진심으로 이소와 해수를 챙기던 사람이었고, 실제로 정숙이 받은 돈의 출처가 어떻게 되었건 굶는 걱정 없이 잘 산다면 그걸로 충분히 기쁜 일이었다. 다만 그것은 제 마음 상태인 것이고, 정숙이 어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마음 정리를 한 이소는 심호흡을 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 동안 신호음이 울렸다. 미국 시간으로는 오전 열 시,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아마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달칵, 전화 받는 소리가 들리자 이소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 hello.
바꾼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소는 귓가에 들리는 정숙의 영어에 잠시 몸을 굳혔다. 자신도 영어로 대답해야 하나 주춤했다가 ‘저, 사장님’ 하고 여느 때와 같이 입을 뗐다.
- hello?
아, 안 들렸나봐. 목소리가 작았는지 정숙이 다시 물어왔다.
“저, 이소예요. 윤이소.”
번호를 확인하는 듯 덜그덕 소리가 나더니 한동안 수화기 저편이 조용했다. 잘못 걸었나? 이소 역시 화면을 확인하며 번호를 확인하려던 그때 익숙하고 요란한 정숙의 목소리가 귓가를 휘감았다.
- ……이소 씨? 나 전화가 너무 끊겨서 이동했어. 아니,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이게 몇 개월이야, 벌써 거진 육 개월이 다 되어 가네. 목소리 듣고 내가 지금 너무 놀래가지구, 번호는 뭐야? 바꾼 거야? 잘 지내고? 해수는 학교 갔고? 어떻게 지내는 거야. 아이고, 나 정말 눈물이 나려고 해.
정숙은 전화한 사람이 이소라는 것을 알자마자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 냈다. 여전했다. 이름만 정숙이지, 정숙하지 못해 어디를 가나 항상 지적을 받았다는 이정숙 씨. 그래도 참 반가웠다.
“잘 지내시죠?”
- 어우, 나야 늘 똑같지. 변한 게 없어, 손자들 뒤치다꺼리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그래도 다 같이 모여 있으니까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러네. 근데 여전히 음식은 영 파이야. 소주에 삼겹살 구워서 먹어야 하는데 와인에 립 뜯어먹으니까 이게 맛이 안 나네. 이소 씨랑 우리 해수랑… 그 옥상에서 쌈 싸 먹던 생각이 간절하다.
“아하하, 그거 진짜 좋았는데요. 저도 자주 생각나요.”
- 정말 그래. 아유,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다. 이게 얼마 만이야….
이소의 웃음소리에 정숙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난 추억들을 꺼냈다. 많은 나이에 적응 없이 바로 물 건너가 음식이고 생활이고 하나 맞는 것이 없었을 텐데도 가족에 대한 애정 하나로 버티고 사는 정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안정된 듯한 느낌에 이소는 묘한 질투와 만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상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 사실 나, 작년 말에 전화 되게 자주 했었는데……. 통 안 받더라구. 그러다가 어느 날은 전화했는데 없는 번호라는 거야. 그래서…, 이젠 나랑 연락 안 하려고… 번호를 바꿨나 보다 했지.
남들은 싫어했지만 이소는 좋아하는 정숙의 장점 중 하나가 지나친 솔직함이었다. 남들은 이야기하지 못했을 만한 것들을 정숙은 가볍게도 툭툭 잘 던졌다. 대체로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는 정숙의 날것과 같은 마음이 좋았다. 눈치가 부족한 제가 알아듣기에 쉬운 말이었고 계략 없이 깨끗해 믿음을 주어도 뒤탈이 없었다.
“일이 조금 있었어요. 다쳐가지고 병원에 있느라고….”
-에그머니나, 크게 다쳤었어? 어디 다쳤었는데. 해수는? 누가 돌봤어? 차 교수네 있었어? 어딜 어떻게 다쳤었는데.
“…뭐 그냥 사고가 조금 있었어요. 지금은 다 나았어요. 너무 늦게 연락 드려서 죄송해요.”
이소는 교통사고가 있었다고 대충 둘러댔다. 그 난리를 두 눈으로 보았으면 아마 까무러쳤을 것이다. 정숙이 한국에 없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숙은 이소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저 이소가 그랬다 하면 ‘아이고, 너무 고생했네. 아이고, 죽을뻔했네’ 하며 맞장구를 쳤고 혼자 아빠를 기다렸을 해수를 걱정했다. 해준이 해수를 데리고 있었다는 말에 정말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소는 신변잡기로 주위를 환기한 후 심호흡을 했다. 이제 정말 본론을 꺼내야 할 때다.
“그리고…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 응, 말해. 뭔데?
이소는 조금 쑥스러워져 입 안 볼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 결혼…해요.”
수화기 저편은 고요했다. 하지만 전화가 끊긴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정숙의 놀란 얼굴이 눈에 선했다. 이소는 그 잠깐의 적막을 차분히 기다렸다. 조금 뒤 정숙이 마른 입술을 떼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 잘 됐다. 잘 됐어…. 아유, 진짜 이소 씨도 이제, 킁…. 일이 풀리나 봐….
“왜 울고 그러세요.”
정숙을 달래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정숙이 목이 메는지 목소리가 갈라진 채 기쁜 투정을 부렸다.
- 좋아서 그러지. 좋아서. 우리 이소 씨 장가간다고 하니까, 내가, 흑…. 너무 좋아서 그러지.
이소는 괜히 책상 언저리를 검지손가락으로 슥슥 매만지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고맙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입꼬리가 샐쭉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숙이 눈물을 닦아 내며 다시 들뜬 목소리로 새 안부를 물었다.
- 그래, 신부는 어떤 사람이야. 참하고 예쁘고? 마음에 들어? 내가 한 번 봐야 하는데. 식은 언제야, 날짜는 정했고? 내가 이소 씨 결혼식 가도 되지?
“그럼요. 당연히 오셔도 되는데…….”
이소는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정숙을 미국에 보낸 게 해준이라고 들었는데 정숙은 그럼 둘의 관계를 자세히는 모르는 건가. 아니야 알긴 알 텐데 그게 결혼까지 할 사이라고 하면…….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말을 고르던 이소가 ‘저, 사장님.’ 하고 운을 뗐다.
“사실 저 결혼하는 사람 말인데요.”
- 응응. 뭐 하는 여자야.
우선 차근차근 설명하자. 너무 놀라지 않게.
“……여자가 아니고요….”
그 말에 정숙은 다시 한번 조용해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레 속삭였다.
- ……설마 차 교수야?
“…….”
알고 있었나보다. 한 번에 맞췄다. 이소가 말이 없자 정숙은 다시 한번 물었다.
- 차해준이라고?
“……예.”
또 다시 정적이 이어지곤 한참 뒤에 정숙이 아찔하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 ……세상에. 이런… 세상에…….
정숙은 연신 ‘그 방울뱀 놈이 기어코…’라는 둥 탄식을 속사포로 내뱉었다. 한참을 그렇게 중얼거리던 정숙은 이소와 통화 중이던 사실을 깨닫고 얼른 말을 둘러댔다.
- 아니, 내가 둘 사이를, 아주 몰랐던 건 아니고… 그게…….
“괜찮아요. 저 대충 들어서 알아요.”
- 안다고? 뭘 들었어? …차 교수가 무슨 이야기를 했어?
이소는 빙긋 웃었다. 다 말할 필요는 없다. 이제와서 노인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사장님 힘들어 보이셔서 조금 도와주셨다고만 들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 오시면 같이 하고 싶은데……. 혹시 오실 수 있으세요?”
- 내가 가도… 되나?
정숙은 해준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심지어 이소가 해준과 자신의 거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에 주춤하며 말을 골랐다. 이소는 정숙의 치부를 건드리지 않도록 에둘러 말하며 결혼식에 참석해 주면 좋겠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해준이 허락했다는 말도 덧붙이자 정숙은 그제서야 웃으면서 꼭 오겠다고 말했다.
- 나 이소 씨랑 해수 보러 가는 거야. 알지?
“그럼요. 꼭 오세요. 저 기다릴 거예요.”
기다릴 거라는 말에 정숙의 목소리에 들뜬 기대가 묻어났다.
- 그럼 그럼. 축하해, 이소 씨. …정말로 축하해.
떨리는 목소리를 금세 갈무리한 정숙이 여러 번 반복해서 축하를 전했다. 이소는 눈을 접어 웃었다. 처음으로 소식을 알린 사람에게서 참석 약속과 축하까지 받았더니 괜히 마음이 둥둥 뛰며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소는 전화를 끊고 진혁에게도 전화를 돌렸다. 그다음 또 아는 사람, 또 아는 사람.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초대할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 놀라워하면서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소가 남자랑 결혼한다니 신기해하면서 좋아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소는 연락처에 남은 번호를 한참동안 내려다봤다.
[주영이 형]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번호를 여태 지우지 않았었다. 무려 몇 달 전만 해도 해준보다 더 많이 통화하고 연락했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다시는 누르지 않을 번호. 이소는 아주 잠깐 주영이 자신의 얼굴을 보며 축하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제 머릿속의 주영의 표정은 울고 있었다. 어쩌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표정이 되었건 자신의 결혼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아무 감정이 없었더라면, 일반적인 형, 동생 사이였다면 주영은 아마 가장 많이 축하해 주고 지지해 주었을 테지만…. 이소는 볼 안쪽 여린 살을 질겅질겅 씹었다.
“…….”
알리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소식도 전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벌이고 복수였다.
이소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주영의 번호를 삭제했다. 지난겨울 빵집에서 여러 번 제 손을 잡고 자신의 번호를 외우게 하던 주영의 모습은 기억의 서랍 깊숙한 곳으로 넣은 후 천천히 닫았다. 조금씩 흐려지다 종래에는 지워져 버리도록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소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조만간 은형이에게도 한번 가야겠다. 한꺼번에 많은 이에게 연락을 했더니 이제야 긴장이 풀어지며 잠이 오기 시작했다. 한 달, 이제 한 달이 남았다.
* * *
밤바람이 시원해 창을 열어둔 서재 안, 이소는 제 눈 앞에 놓인 함을 난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 백 여사가 치수를 재 가길래 그런가 보다 했건만 제 눈앞에 있는 옷은 알록달록한 색의 활복이었다. 그러니까 혼례할 때 여자가 입는 바로 그 예복. 이소가 해준을 돌아보았다. 해준은 옆에 앉은 채 한자로 된 고서를 읽고 있었다. 해준이 책을 읽을 때는 웬만하면 말을 걸지 않는 이소였지만 이번에는 너무 당황스러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거……. 여자 한복이잖아요.”
“고조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예복이에요. 우리 집은 대대로 그거 입고 혼례했다고 하던데.”
불쾌한 기색을 숨길 수 없는 이소와 달리 해준은 참으로도 평온하고 여상한 말투였다.
“하지만 왜 하필 제가 활복을 입어야 해요?”
해준은 관자놀이를 꾹꾹 매만졌다. 대화와 동시에 한자를 읽어 내려가니 집중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분명 굉장히 재미있는 구간인데 대화 때문에 생각의 흐름이 뚝뚝 끊겼다.
“음…. 일단 뭐, 이소 씨가 차 씨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거니까요. 족보에도 오를 거고.”
이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족보에 오른다는 걸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뭐야. 그런 거 필요 없어.
“…뭐 그런, 제가 며느리가 아니고…. 그래도 여자 옷 입기 싫어요. 저도 관복 입을 거예요.”
해준은 이소를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 가볍게 대꾸했다.
“그냥 의상일 뿐인데 뭐 어때요. 코스튬 이벤트라고 생각해. 연지곤지 찍고, 재밌잖아요.”
재밌어? 이소는 성의 없는 해준의 대답에 조금 짜증이 난 듯 함을 거칠게 닫았다. 그 소리에 해준이 눈썹을 꿈틀대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재미있으시면 교수님이 입으시면 되잖아요.”
아차, 이소 화났다.
“자기야, 내 말은 그러니까….”
달래려는 듯 책을 덮자 이소가 표정을 굳히고 해준을 응시했다.
“아무리 전통이라도 싫어요. 무조건 이거 입고 해야 한다면 이 결혼식 물러요. 안 해도 되니까.”
“이소야.”
“더 얘기하기 싫어요. 저 따라오지 마세요.”
이소가 몸을 돌려 나가며 문을 쾅 닫았다. 해준은 움찔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너무 가볍게 이야기했나. 전통 혼례라고 하지만 정말 말 그대로 가까운 친척들끼리 악기나 두드리며 즐기는 행사에 가까운지라 옷차림쯤이야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활옷을 입을 이소에게는 진지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해준은 자리에서 벗어나 함을 열었다.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린 연지통와 구겨진 옷감을 정성스럽게 펴면서 활복을 입은 이소를 상상했다. 기가 막히게 예쁘긴 할 테지만 아마 결혼식 내내 웃지 않을 것 같다. 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소인가, 고개를 돌리자 준경이 머리를 내밀었다.
“이소님 씩씩거리며 나가시던데, 싸우셨습니까.”
“혼례복 입으라고 했더니 성났네.”
준경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해준이 열어 둔 함을 발견하더니 질색하는 표정으로 목을 움츠렸다.
“…농담이시죠?”
이 집안에 들어오는 여자들이 웨딩드레스를 대신 이걸 입어서 매번 법석을 떨어대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하필 이걸 이소에게 입히려고 했다니. 이건 아무리 여리고 착한 인사라도 화낼 만하다 싶다. 그러나 해준은 멋쩍은 듯 대꾸했다.
“…아니. 진심이었는데.”
해준의 대답을 들은 준경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듯 위아래로 제 주인을 훑더니 고개를 저으며 들어왔다. 해준이 연지 통을 꺼내고 함을 마저 정리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에요. 준경의 손에 들린 낡은 서책을 보며 해준이 흥미를 보였다. 준경이 해준의 책상에 서책을 내려놓았다.
“정원이 있던 자리를 밀어내고 파내던 도중에 발견된 책입니다.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평소 고서적이나 골동품점에 쪼그려 앉아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해준의 취향을 제대로 파악한 준경이 제 도련님을 생각해서 가져온 선물이었다. 방금까지 시무룩해 있던 해준이 금세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책상에 두고 가요. 읽어 볼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괜한 낙서는 마세요. 재산 가치는 없어 보이지만 그런 것들이 본디 귀신이 잘 붙습니다.”
귀신은 무슨.
“기왕 붙을 거 이소처럼 예쁜 귀신이면 좋겠네.”
“늙은이가 말을 하면 좀 들으세요.”
“그럼요, 잘 들리는걸.”
보이는 족족 잡아 족치게 생겨서는 귀신을 무서워하는 준경을 내보내며 해준이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 앉은 해준은 준경에게 받은 서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말이 서책이지 그냥 곰삭은 종이 묶음이로군. 꼭 글씨 연습을 하듯 어설프게 나열한 글자들이 꼭 알고 썼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보고 베껴 쓴 듯했다. 어린아이 글씨 연습장인가. 해준의 눈동자가 천천히 한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駐馬仙樓下
慇懃問後期
離筵樽酒盡
花落蝶啼時
말은 다락 아래 매어 놓고
이제 가면 언제나 오시려나 은근히 묻네
임 보내려는 때 술도 떨어지고
꽃 지고 나비가 슬피 우는구나
이게 왜 내 정원에서 나왔지. 해준은 고개를 기울이며 몇 장을 더 넘겼다. 뒷장은 시구 연습은 하지 않고 모조리 그림만 그려 넣은 듯했다. 게으른 놈, 글씨 연습을 하다 말았네. 매화 치는 솜씨가 형편없었다.
‘이건 또 뭐야.’
그림에 재주 없는 것은 둘째치고 꽃이 피지 않은 가지에 뜬금없이 나비를 그려 넣은 책의 주인은 조화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는 듯했다. 웃음이 다 나왔다.
“어허,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나비를 그려 넣으면 이 녀석은 봄 내내 뭘 먹고 살라고.”
해준이 웃으며 필통에서 붓을 꺼내 들었다. 준경이 귀신 붙는다고 낙서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 해준이 혀에 붓끝을 대어 적시며 웃었다. 기왕이면 붉은색이 좋겠지. 잘 익은 것으로.
“꽃을 그리면 나비가 울음을 그치려나.”
함에서 꺼냈던 연지통에 붓을 콕콕 찍어 매화를 잔뜩 그려 넣어 주었다. 엉망으로 친 가지에 꽃이 한가득 피니 제법 볼만하다. 그린 꽃잎이 마를 때까지 펼쳐 두고 이소에게 전화를 했다. 활옷이 담긴 함 근처에서 요란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성을 내느라 놓고 갔나보다, 토라진 연인을 데리러 가야겠다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눈가가 시큰하게 저렸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아직 자정이었다.
‘보통 이 시간에 피곤한 적은 없었는데.’
해준은 대체로 새벽 세네 시까지 깨어 있다가 잠이 들면 정오나 되어서야 느지막이 일어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일찍 잠이 들고 동이 틀 때즈음 일어나는 이소는 그런 해준을 신기하게 여기곤 했다.
“음…….”
해준은 뜬금없이 어지럽게 흐려지는 시야에 이마를 짚으며 책상에 기댔다. 감이 별로 좋지 않다. 어지럼증, 균형 감각 이상, 시야장애…… 그러니까 보통 이렇게까지 빠르게 의식이 흐려지는 것은 뇌경색 아닌가. 제기랄, 나 이소랑 결혼식 해야 한다고. 대관절 이게 무슨…….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이 더 많아지기도 전에 기울어진 커다란 몸은 쿵 소리와 함께 책상에 엎어졌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의식이 꺼졌다.
별안간 살짝 열어 둔 창틈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돌풍이 찾아들었다. 책상에 대충 쌓아 둔 고서들이 바람에 밀려 힘없이 쓰러지고 그림을 그려두었던 화선지들은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처마에 매어 둔 풍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가지런히 걸어 둔 붓들도 춤을 추듯 서로 부딪혔다.
잠을 자듯 두 눈을 곱게 감은 해준의 머리맡에 놓인 정체불명의 서책은 바람의 방향과 상관없이 소란스럽게 속지를 넘겼다. 그러다 문득 해준이 장난질을 쳐 놓은 매화 그림에 당도하자 거짓말처럼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잠깐의 적막이 찾아왔다. 꼭 어미가 곱게 지은 밥을 어린 자식이 막 엎었을 때와 결이 같은 고요였다.
그리고 곧 시조가 적힌 지면은 바르르 진동하며 움찔대기 시작했다. 바람도 다시 불기 시작했다. 낡고 누런 속지 위에 삐뚤빼뚤하게 먹을 입힌 글자들이 느린 속도로 꿈틀꿈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총 스무 개의 글자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점과 획을 팔다리마냥 부드럽게 움직이고는 이내 무언가를 찾는 듯 책상 주변을 혼잡하게 돌아다녔다. 대단히 요사스럽고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해 발을 구르던 글자들은 자신들 앞에 태평하게 잠이 든 남자를 발견하곤 가만히 지켜보았다.
감당하지도 못할 큰일을 쳐 놓고 한가롭게 수마에 빠졌군.
결국 남자가 깨어날 기미가 없자 책상을 두드리던 녀석들은 곧 일사불란하게 줄을 맞추어 섰다. 적막했던 서재에 다시금 풍경이 요란하게 울리며 소란을 일으켰다. 곱게 걸린 붓들도 주인을 깨우려는 듯 자루를 부딪치며 시끄럽고 어수선하게 굴었다. 그러나 이를 가볍게 무시하듯 글자들은 하나둘 해준의 붉은 입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검은 먹으로 이루어진 글자들이 젖은 입술에 닿아 몸을 눕히면 마치 물에 번지듯 흐릿하게 퍼지다 스며들기를 반복했다. 글자들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고른 호흡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들숨과 날숨이 뜻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 듯 입술이 약하게 움찔댈 때 즈음 마지막 글자가 얼른 입술에 누웠다.
“콜록.”
결국 스무 개의 글자를 모조리 삼킨 해준은 아주 얕게 기침을 한 후 호흡이 편해졌는지 다시 고른 숨을 내쉬었다.
방 안을 휘젓던 돌풍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요란을 떨던 풍경 소리도, 붓대가 부딪히던 기이한 모습도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재는 은은한 등불만 남긴 채 고요해졌다.
덜컹-
자리를 비웠던 이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수님, 아까는 갑자기 화내고 나가서 죄송…. ……주무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이소는 책상에 머리를 엎은 채 잠이 든 해준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해준이 이 시간에 잠든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역시 결혼식 준비로 많이 피곤하기는 했나 보다 생각하며 이소는 해준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닫고 돌아와 함을 열었다. 제가 구기고 간 활옷이 다시 곱게 정리되어 있었다.
‘흐음……. 역시 무리야.’
이소는 미간을 문지르며 해준이 깨면 조금 더 이 문제를 논의해 봐야겠다 생각했다. 별안간 볼이 간지러운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서재의 큰 창이 여태 열려 있었다. 밤바람이 시원해 좋아하는 것은 이해하나 여름에 비해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잠든 해준이 고뿔이라도 들까 이소는 문을 닫으려 창문 걸쇠를 붙잡았다.
“엇, 뭐야…. 아, 나비네.”
난데없는 흰 나비 한 쌍이 창틀에 앉아 있었다.
문을 닫아야 하는데 여기 붙어 있으면 위험하지. 이소는 손을 들어 훠이훠이 나비를 내쫓았다.
“여기는 꽃 없어, 저리 가서 놀아.”
나비 두 마리는 팔(8)자를 그리며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지 끈덕지게 달라붙었지만 이소는 손을 크게 내저은 뒤 얼른 문을 닫았다. 창문 닫는 소리가 제법 컸음에도 해준은 깨지 않았다. 흔들어 깨울까 하다가 조금만 더 재우고 가야겠다 싶어 이소 자신도 창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좋아하던 소설책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기던 이소는 문득 ‘시월에도 나비가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 * *
해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뿌옇고 흐릿한 시야가 맑아지자 어지러운 것도 얼추 가셨다. 해준은 이마를 짚은 채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의식을 잃은 것 같은데 언제 또 방 안으로 기어들어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앉아서 졸 정도로 피곤했던가. 고개를 흔들고 시선을 들어올리자 샹들리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예전 한옥 저택에서나 보았던 대들보와 긴 서까래가 보였다. 눈을 의심했다.
“……?”
본가의 현대적이고 모던한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는 구조물이었다. 해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조금 더 또렷해진 시야에 서까래에 붙은 거미가 집을 짓는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잠이 덜 깼나.
해준은 몸을 일으키려 바닥에 손을 짚었을 때 제 손목을 덮은 소매가 유난히도 치렁치렁하다 느꼈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옷감이 서걱서걱 비벼지는 낯선 소리에 귀를 의심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야, 이거.”
분명 잠들기 전 몸에 딱 맞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해준의 몸에 걸쳐진 옷은 난생 처음 보는 백색 도포였다. 자신의 옷장에는 이런 밝은색의 도포가 없었다. 취향도 아니거니와 한복은 관리도 힘들어 주로 어두운 계열의 옷만 골라 입는 편이었다.
시선을 내려 제 팔과 가슴 언저리를 둘러본 해준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평소 어깨 위에 아무렇게나 대충 걸쳐 입었던 도포가 아니라 집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나 정식으로 갖춰 입은 비단 대창의였다. 허리에 매어진 붉은 세조대를 황급히 풀고 고름을 젖히자 내의는 간데없고 명주로 만든 속적삼까지 입고 있었다. 심지어 발에는 버선까지 신었고 바짓부리에는 대님까지 매었다. 도통 입은 기억이 없어 어찌 된 일인가 당황스러움에 이마를 매만지자 이번에는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착용해 본 적 없는 망건까지 둘려 있었다.
“…….”
평소 어떤 일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해준이었지만 제 기억에도 없는 환복과 낯선 공간을 마주하고 오랜 시간 말을 잃고 말았다.
* * *
해준은 그렇게 한참을 나가지 않고 앉아 있었다. 방 안에는 잘 개어진 이불과 베개 한 채, 생활하는 사람의 살림살이라고는 보기 힘든 간소한 집기들뿐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잘 정돈된 목침과 바늘꽂이 등을 집어들어 매만졌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촉감이 생생했고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모두 진짜와 같았다. 몇 번이나 깨어 보려 눈을 감고 집중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보이는 초라하고 황량한 풍경에 해준은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 바깥은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인 듯 푸른 어둠이 점점 희게 밝아 오고 있었다. 해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갓을 집어들었다. 처음 써보는 것은 아니니 능숙하게 갓끈을 매고 분합문을 열었다. 한눈에 봐도 아주 작은 집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좁은 쪽마루와 하나뿐인 봉창, 마당이라고 부르기도 협소한 공간을 에워싼 싸리 울타리가 보였다. 해준은 한 걸음을 내디뎌 바깥으로 나왔다. 쪽마루 아래 디딤돌에는 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발을 내려 신을 신자 그 역시 마치 처음부터 제 것인 양 크기가 꼭 맞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싸리 울타리를 밀어제껴 집 밖으로 나오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너른 들판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과 눈앞에 몇 그루의 나무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자신과 이 작은 집 하나였다. 분명 귀신에 홀린 게 아니라면 이것은 필시 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본가에서 멀쩡히 책을 읽던 자신이 갑자기 조선의 복식을 하고 여기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해준은 찬찬히 걸음을 떼었다. 집을 뒤로하고 한참을 걸었다. 시계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기에 마음속으로 균일하게 초를 세 가며 걸음을 떼었다. 들판은 끊임없이 길었고 간간이 풀벌레 우는 소리와 해준 자신이 땅을 지르밟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부자연스러운 고요였다. 해준은 다시 한번 팔을 들어 보았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던 허리춤에 작은 비단 주머니가 매어져 있었다. 손바닥에 무게를 달아 보니 꽤 묵직했다. 곱게 묶은 주머니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자 꽤 많은 양의 은화가 들어 있었다.
은화……. 적어도 왜란 이후로군. 해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돈까지 있을 이유가 있나.’
주머니를 다시 묶을 무렵 해준은 제 왼손 약지에 묶여 있는 붉은 실을 발견했다. 본래 이소와 함께 맞춘 반지가 있던 자리였다.
“내 반지는 또 어디가고.”
실은 힘없이 늘어져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해준은 실을 풀어내려 했으나 가볍게 묶인 것 같은 실은 실제가 아닌 듯 잡히지도 않았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결국 해준은 실을 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산 너머에서 완연하게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만물이 생동하고 아침을 깨우는 새 소리가 숲속을 채웠다. 그러나 여전히 저는 이 혼몽한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평화로웠지만 몹시 불쾌하고도 기분 나쁜 꿈이었다.
그렇게 무려 사흘을 걷기만 했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잠을 자지도 않았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온전히 스물네 시간을 꽉 채운 뒤에야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와중에 오래 걸으면 다리는 또 아픈 아이러니함에 욕지기를 뱉으며 해준은 쉬고 다시 걷고를 반복했다. 생각보다 꿈이 길었다.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에는 무척이나 예민하게 날이 서 있어 눈에 보이거나 발에 채이는 것은 모조리 집어 던졌다. 지나간 날을 세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 후로도 또 달포가 지났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홀로 이 끊임없는 산과 들을 걷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고 땅을 밟고 발을 구르기도 했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소가 보고 싶었다. 원래 있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삼십 밤이 넘게 사람은커녕 쥐 새끼 한 마리도 보지 못한 채 홀로 걷기만 했던 해준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씨발! 진짜. 어떻게 된 거냐고!”
그렇게 소리소리를 지르고는 때려치울 거라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허리춤까지 오는 긴 풀들이 풍성한 요가 되어 해준의 등을 감싸 안았다. 하늘의 구름들은 해준의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자적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분명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데, 무슨 책이었지. 해준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더듬었다. 오랜 시간 이 망할 세계에 갇혀 있었지만 먹지도 자지도 않고 심지어 배뇨 욕구도 수염도 자라지 않는다. 세조대와 갓을 멀리 버리고 오거나 두르고 있던 옷과 망건을 찢어 버리면 다음 날 동이 터 순간 멀쩡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뺨을 때리면 볼이 부었고 손톱으로 살갗을 뜯어내면 피가 맺혀 회복이 되지 않았다. 다리라도 부러지는 날에는 입성만 멀쩡한 병신이 되겠지. 기묘한 일이로다.
‘그 낡아빠진 서책 때문인가. 문 집사가 귀신 붙는다고 했었던.’
해준은 곰곰이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그저 선의였다. 조잡한 한시 옆에 자리한 이상한 그림에 연지를 발라 꽃을 몇 송이 그려 주었는데 그 이후 부지불식간에 잠이 들어 버렸다. 해준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출처 불명의 책을 집어 온 준경을 잠시 원망했다.
“망할 영감탱이. 돌아가면 꼭 한마디 할 것이다.”
해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약 그 낡은 서책에 그린 꽃 때문이라고 한다면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그 서책에 나온 꽃을 찾아내거나 혹은.
“그 어설픈 낙서를 만든 인간을 찾아내야겠지.”
해준은 말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손가락에 걸린 실의 정체가 무엇이 되었건 처음 시작한 곳에 연결되어 있다면, 어쩌면 자신이 저지른 일을 처리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겠지. 그렇다면 더욱 지체할 수 없다. 적어도 두 달을 더 채우기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 은화가 있다는 것은 이것을 분명 사용할 만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소리다. 해준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바람이 제 등을 떠미는 듯한 느낌이었다.
*
제 짐작이 맞았는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은 듯했는데 저 멀리 마을 이름이 쓰인 표지석을 발견했다. 입구에 조금 더 가까워지자 반갑게도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을 초입에 형성된 시전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복작복작하게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퍽 자연스러워 해준은 한참 동안을 사람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눈과 귀를 연 채 목소리를 따라가고 행동을 주시했다. 배우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 정말 사람이었다.
다행히 이 세계에서 부여받은 해준의 신분이 아주 낮은 것은 아닌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알아서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피해 주었다. 괜한 시비에 휘말릴 일은 없을 성싶었다. 산과 들이 아니기에 전과 달리 기거하고 짐을 풀 곳이 필요했다. 적어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려면 잠을 자는 척이라도 해야 했고, 자연스레 말을 섞으려면 어조나 방언이라도 습득해야 했다. 길가에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누군가 해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작고 왜소한 체격의 사내였다.
“아유, 나리. 금일 밤 저희 주막서 묵었다 가시는 것이 어떻겄습니까? 저 막포에서 뱃사람들이 한껍에 올라와가, 이제 조오 앞까지는 통 묵어 가실 방이 없습니다요.”
“…….”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쓰는 어조도 아니었거니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해준이 말없이 사내를 내려다보자 양반 나리의 기분을 거슬렀다고 생각한 사내는 이내 허리를 숙이고 무안한 듯 뒤로 물러섰다. 조금 뒤 근처를 지나던 양반 하나가 아낙에게 농을 걸고 있는 것을 주워들은 해준은 잠시 서서 양반의 말투를 따라 하듯 읊조렸다. 그러고는 아까 저에게 말을 걸었던 주막 사내에게 다시 다가갔다.
“저……. 이보게.”
사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수염의 모가 군데군데 빠진 것으로 보아 저보다 연배가 열 살은 더 있어 보인다.
“아직 남는 방이 하나 있는…… 습니까.”
역시 함부로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내는 조금 놀란 듯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곤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다행히 해준의 말투에 큰 위화감은 없었던 모양인지 사내는 얼른 몸을 돌려 해준을 안내했다. 제가 깨었던 방보다는 조금 더 넓었고 창도 컸다. 어차피 더위나 추위도 느끼지 못하고 잠도 잘 필요가 없었지만 편히 쉴 수 있는 이불과 요가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되었다.
“방이 조금 좁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남아 있는 것이 이것뿐입니다.”
“괜찮습니다. 값이 어떻게 됩니까.”
“하룻밤에 30푼입니다.”
해준은 주머니를 열어 은화 한 닢을 꺼내 사내의 손에 올려 주었다. 사내의 눈이 크게 뜨이며 누가 볼까 봐 얼른 제 주머니에 넣었다. 해준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보름 정도 묵을 예정입니다. 혹시 밤마다 소박한 술상을 준비해 주실 수 있습니까. 식사는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씻을 물을 미리 데워서 준비해 주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혹 부족하다면 값을 더 쳐 드리겠습니다.”
이곳에서 은화가 얼마나 큰 가치를 하는지 알고 있는지라 넉넉하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욕심을 부린다면 더 줄 생각도 있었다. 어차피 이 은화 꾸러미 역시 내다 버리면 다음 날 또 버린 만큼 채워졌다.
“아, 아닙니다! 말을 낮추십시오, 나리. 돈은 더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로 술상 봐 오겠습니다. 편히, 편히 쉬십시오.”
다행히도 사내는 약은 편은 아니었던 듯 돈을 더 받지 않은 채 돌아섰다. 해준은 방으로 들어가 갓을 풀었다. 하루에 몇만 보씩 걷는 발을 주무르며 벽에 등을 기댔다. 벽을 타고 은밀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건넛방 남녀의 밀어가 들려왔다. 해준은 손을 매만졌다. 방문 틈 아래로 늘어진 실이 구불구불하게 해준의 손가락에 얽힌 채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슬슬 당겨 보았지만 제 손 안에서 양만 불린 채 좀처럼 팽팽해지지 않는지라 해준은 이내 실 당기기를 그만두었다. 곧 나이 든 여인 하나가 술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색색의 전과 백주 한 병, 수육 한 접시가 놓인 작은 주반이었다. 상을 내려놓고 방을 나서는 여인을 해준이 불러세웠다.
“혹시 발에 뭐 채이는 것 없습니까?”
“예에?”
문을 열 때부터 방 안에 들어오기까지 어지럽게 흩어진 실뭉치가 제법 거슬렸을 법도 한데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아 보여 묻는 것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나리?”
“저 붉은 것.”
해준이 손가락을 들어 실뭉치를 가리켰다. 여인은 아무것도 없는 방바닥을 내려다보다 이내 퍽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히 겁주지 마십시오, 나리.”
“정말로 안 보입니까?”
“쇤네 눈에는 방바닥에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까도 값을 치르실 때 한 번 더 닦았는걸요.”
깔끔을 떠는 양반 하나가 낡은 숙소를 두고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는지 여인이 말을 얹었다. 괜한 것을 물었다가 오히려 불편감만 더해진 해준은 알겠다고 말하고는 여인을 내보냈다.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자 맑은 백주가 꼴꼴 소리를 내며 차올랐다. 입술에 가까이 대자 더운 김이 훅 끼쳤다. 술이다, 진짜 술이었다. 입술을 적시고 고개를 꺾어 툭 털어 내자 따끈한 술이 목젖을 때리고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해준은 또 한 잔을 따라 냈다.
‘다른 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기묘한 일투성이로군.’
그렇게 몇 잔을 더 비우고 해준은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바깥은 여전히 연죽을 태우는 사내들과 장사치들의 무용담으로 시끌벅적했다. 해준은 주막 주인에게 주변 지리를 대충 물은 뒤 사람들 무리를 빠져나왔다. 해준의 존대에 평상에 퍼질러 앉아 있던 양반놈들이 신기한 시선을 던졌으나 이내 거두고 자신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갔다.
해준은 느리게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실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을 것도 짐작했으니 묵을 곳을 정해 놓고 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 곳에서 빠져나갈 단서를 찾을 계획이었다.
온갖 잡다한 시전들이 모인 곳을 천천히 둘러보며 해준은 혹시 있을 작은 점집을 찾았다. 기묘한 일은 기묘한 것으로 풀어내야만 했다. 그러나 반 시진 뒤 점집에서 볼일을 보고 나온 해준은 착잡한 심정으로 빠져나왔다.
‘왜 안 읽히지. 이상허네. 내게 알려 준 생년이 맞소?’
잠시 잊었다. 제대로 알 리가 없지. 점집이 아니라 어디 도사라도 찾아가야 하는 것인가. 해준은 시전으로 다시 향했다. 일찍이 문을 닫은 면포전과 어물전에 비해 비녀와 가락지 등 장신구를 파는 도자전은 늦게까지도 꽤 붐볐다. 장옷을 입은 아낙들이 그 주변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길을 건너가야 하는데 혹여 몸이라도 닿을까 해준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아낙들은 좀체 빠질 생각을 안 했다.
“……작달막한 점포를 참 오래도 구경하네.”
유난히 키 큰 여인이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옹기종기하게 모인 여인들 사이에 드물게 우뚝 솟은 키는 시선을 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저 여인만 조금 비켜 주면 해준은 얼른 골목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한참 동안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여인은 상인이 자리를 파하려고 정리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머리를 들어 올렸다. 오랜 시간 지루하게 서 있던 해준은 여인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인이 장옷을 끌어 올리며 해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해준은 그만 그 자리에서 굳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소?”
장옷을 쓴 여인이 우뚝 멈추어 섰다. 밤이 되어 어두웠지만 초롱불 아래 어렴풋하게 드러난 그 얼굴은 제가 얼마 전까지 입 맞추고 끌어안던 연인의 것이었다. 순식간에 심장이 쿵쿵 세게도 뛰었다. 해준은 성큼성큼 다가가 이소의 손목을 덥석 낚아챘다.
“이소야.”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낯을 하고 돌아본 이는 틀림없는 이소였다.
“자기가 왜 여기 있어?”
반가움과 당혹감이 교차해 해준은 손목을 그러쥔 채 물었다.
“…이게 무슨….”
그러나 그 입술을 통해 나온 목소리는 제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다른 조금 더 여리고 가는 톤이었다. 정말로 꼭… 여인의 것과 같은 목소리. 해준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가는 손목을 그러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려고 할 때 이소보다 훨씬 키가 작은 아이 하나가 해준의 앞을 막아섰다.
“당장 이 손을 놓지 못하겠습니까! 대관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리!”
쩌렁쩌렁하게 저잣거리를 울리는 아이의 목소리에 해준의 정신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해준은 차마 이소의 손목을 놓지 못했다. 결이 고운 눈썹과 커다란 눈, 버선의 끝과 같이 앙증맞게 올라온 코끝, 동백처럼 붉은 입술까지 모두 제가 아는 그이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장옷을 내리자 그 아래 자리한 것은 곱게 빗어 내린 머리와 붉은 댕기, 도포 대신 단정한 치마저고리였다.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저를 아십니까.”
자신을 아냐고 묻는 이는 냉한 표정이었다.
“아씨. 말을 섞지 마십시오. 이상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곁에 자리한 아이가 이소의 얼굴을 한 이에게 아씨라고 부르며 바짝 다가섰다. 해준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림이 없는 눈으로 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연유로 이 밤중에 난데없이 아녀자의 손을 덥석 잡는단 말입니까. …놓아주십시오.”
단호하고도 떨림이 없는 목소리였다. 해준의 손에서 점차 힘이 빠지자 미련 없이 손목이 빠져나갔다. 해준은 입술을 움찔거리다 이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착각했습니다.”
“…….”
아직도 심장이 세게 뛰었다. 이소가 아닐 리 없어, 분명 이소잖아. 그러나 시선은 맞추지 못하고 입술은 제멋대로 사죄의 말을 뱉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낯 어디에서도 그리움이나 반가움을 읽을 수 없었기에 해준은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뒤이어 멀리서 북소리가 나자 아이가 ‘아씨, 이만 가 보셔야 합니다.’ 하고 재촉했다. 다시 장옷을 올려 쓴 여인은 해준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살끔 숙였다.
“앞으로는 조심하십시오. 대뜸 그리 손목을 잡으면 관아에 잡혀 갑니다.”
“…….”
“그럼 이만.”
시전 뒤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치맛자락을 보며 바라보며 해준은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최악은 이미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도대체 이 꿈이 어디까지 잔인해질는지 알 수 없었다.
* * *
“거기 아씨, 이것 하나면 밤이 외롭지 않다니까.”
저를 부르는 상인의 목소리에 이소는 어린 여종 희주와 함께 동상전 앞에 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사내를 만난 날로부터 꼬박 칠 일이 지난 이후였다. 희주가 영 꺼림칙한 사내라며 한동안 시전에 가지 말자고 하여 오랫동안 집 안에 박혀 있었더니 좀이 쑤셔 결국은 또 한 번 걸음을 했다.
“아저씨, 이것이 무엇이오?”
희주가 쪼그려 앉아 상인에게 툭 물었다. 작달막한 인형과 모양이 특이한 몽둥이 같아 보이는 것들이 동상전 가판에 늘어져 있었다. 젊은 상인은 능글맞게 웃어 보이며 이제 갓 열다섯이 된 소녀에게 놀리듯 속삭였다.
“이거는 말이다. 야밤에 사내의 품이 그리울 때 아래가 폭삭 젖어 오면 구멍을 달래는 각좆이지. 여기를 이리 잡고 요래 쑤시면….”
“에그, 망측해라! 아씨, 어서 가요! 이거 인형 아니에요!”
희주의 옆에 서서 반질반질한 인형의 대가리를 잡고 크기를 가늠하던 이소가 시선을 돌렸다. 손에 쥔 것은 동상전에 나와있는 각좆 중에 가장 큰 것이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엄청 밝히는구만. 음흉하게 웃은 젊은 상인이 이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이는 찼으나 아직 댕기를 단 것을 보아하니 아씨 밤이 외롭것어요. 그럼 내 싸게 해 드리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십시오, 기름을 잘 먹인 것으로 골라드리겠습니다요. 여기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 하나 있고, 이것은 밤나무. 크기는 밤나무로 만든 각좆이 조금 더 크고 두꺼운데. 나무가 영 꺼림칙하다, 그러면 여기 소뿔로 만든 것도 있고.”
상인은 인형의 얼굴 모양처럼 생겼으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남성 자지의 귀두 부분을 세밀히 조각한 각좆을 양 손으로 흔들며 히죽거렸다. 한 손으로 쥐기에도 버거운 것을 도대체 어떻게 넣는다는 건지 이소는 파렴치한 농에 미간을 찌푸리고는 몸을 돌렸다. 희주가 상인을 향해 혀를 베 내밀고는 얼른 떡집으로 달려가 맡겼던 떡을 찾아왔다. 희주는 이제 막 찐 백설기와 덤으로 받은 인절미 한 주먹을 면포에 담아 이소에게 내밀었다.
“난 됐어.”
“그러지 말고 하나만 드세요. 저자에 나오면 이 재미죠. 아까도 식사 하시다 마셨잖아요.”
이소는 누가 볼까 얼른 두리번거리고는 희주의 손끝에 놓인 인절미를 합 집어 먹었다. 이제 막 찐 뜨끈뜨끈한 찰떡이 콩가루와 섞여 퍽 맛이 좋았다. 남은 떡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소를 보며 희주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맛있죠.”
“제법.”
그렇게 남은 인절미를 몰래몰래 집어 먹던 중이었다. 저 멀리 다리 근처에 우거진 꽃풀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소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그 안에서 툭 튀어나와 온몸에 묻은 풀을 털어 내는 이를 보고 연신 눈을 깜박였다. 얼마 전 제 손을 덥석 잡은 사내였다. 희주는 그런 사내를 보고는 ‘아, 저분 또 저러고 계시네.’ 하며 아는 척을 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아는 이야?”
“화공(花公) 나리잖아요. 요새 온 동네를 다 쑤시고 다닌대요. 언년이가 그러던데요.”
“화공? 그림을 그려?”
희주는 칠일 전 아씨의 손목을 잡았던 파렴치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 인절미를 우물거리며 제가 아는 바를 주절댔다.
“항상 주막에 앉아 그림을 그리신대요? 그런데 진짜 엄청 잘 그린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엊그제는 성균관 유생들 서책 위에 난을 쳐 주었는데 너 나 할 것 없이 다 그려 달라고 해서 난만 백 서른두 번이나 쳤다고 하더라고요.”
이소가 코웃음을 쳤다.
“고작해야 서른 번 정도겠지, 과장이 심하다.”
“진짜예요! 그리고 그림을 안 그리시는 날은 저렇게 분주하게 꽃을 찾는대요. 그래서 화공(畵工)이라고도 하고 꽃공자님이라는 뜻으로 화공(花公) 나리라고도 한대요.”
“그냥 미친 사람이 아닐까?”
이소의 물음에 희주가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계속해서 담장 아래에 있는 이 꽃 저 꽃 대가리를 다 뜯어다가 비비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심지어 입에 덥석 물기도 하며 무언가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광인 같았다. 어디서 듣기에 얌전하게 미친 작자 중에는 그림이나 소리에 소질이 있는 사람도 있다던데. 이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곱상하게 생겨서 영 못 쓰겠군.
“그런데 무슨 꽃을 찾길래 저리 분주하게 굴까.”
“생화요. 살아 있는 꽃이요.”
어느새 희주는 인절미를 다 씹어 먹고 가루까지 말끔하게 툭툭 입에 털어 넣었다. 이소는 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천에 널린 게 생화가 아니냐.”
“저도 모르죠. 매번 뭐 마려운 개마냥 풀을 뜯고 꽃도 뽑고 하시는데 귀한 것을 찾나 봐요.”
“귀한 것…….”
희주가 턱을 매만졌다. 평소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어린 희주는 매번 뜬구름 잡는 소리를 잘도 했다.
“…혹시 소나 닭 피 먹인 꽃을 찾는다거나 하는 건 아닐까요? 아니면 ……사람 피.”
희주가 작게 속삭이자 이소가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희주가 고개를 떼며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이소를 놀렸다.
“아씨는 심약하시니 이런 이야기는 싫어하시지요?”
“네가 유난히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은 거야. 괜히 괴담집……. 그런 것이나 좋아하고.”
“에이, 원래 날이 더우면 등골이 서늘한 이야기를 듣는 게 또 재미입니다.”
“흐음…. 난 영 안 당긴다.”
이소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 희주는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으쓱하며 이소를 끌어당겼다.
“아씨, 여기 한과 하나만 더 사요.”
“그러든지.”
희주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시선을 다시 돌렸을 때 이소는 저를 발견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이소를 기억하는 듯 손바닥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이소는 양옆을 돌아보았으나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저에게 한 인사가 맞다는 것을 확신한 이소가 당황해 사내를 돌아보자 돌연 사내가 자신의 입술을 톡톡 가리켰다.
“……?”
이소가 반응이 없자 사내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이소를 한 번, 그리고 자신의 입을 한 번 가리킨 후 둥글게 원을 그렸다.
낭자.
입에.
뭐 묻었습니다.
이소는 사내의 손짓을 따라 제 입가에 손을 올려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입술 위에 덕지덕지 묻은 콩가루를 후다닥 털어 냈다. 사내가 멀리서 아하하하, 웃는 소리가 났다. 수치스러웠다.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자 사내는 미소를 띠고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한과를 가득 든 희주가 이소의 옆에 가 붙었다.
“아씨, 저 왔어요. 이거 한과 보자기 하나만 들어 주시면 안 될…….”
“희주야, 가자.”
이소는 희주의 손에서 보자기 하나를 홱 빼앗아 들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당황한 희주가 ‘어, 지전집도 가야 하는데…’ 하고 이소의 뒤를 따랐다. 아씨, 지금 가요? 갑자기요? 저희 나온 지 아직 한 식경도 안 되었는데! 괜한 핑계를 대며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새로 산 신이 작아 발이 아프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이소를 바라보며 해준이 흔들던 손을 내렸다.
‘분명 이소가 맞는데.’
그런데 어찌 말을 걸어야 하나. 이소의 얼굴을 한 다른 이인지, 아니면 정말 이 꿈에 들어온 이소인지를 확인해 보아야 했다. 해준은 왼손 약지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이소와 손가락에 실이 이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가까이에 올 때마다 실은 아주 미세하게 진동했다.
‘영향이 있어.’
해준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소의 뒤를 쫓았다. 어린 나이로 보였는데도 질 좋은 비단옷을 걸치고 몸종을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지체 높은 가문의 규수처럼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소를 쫓아 도착한 저택의 규모가 상당했다. 커다란 대문 뒤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건물이 대여섯 개나 보였다.
이소가 대문 앞에 도착해 커다란 고리를 세 번 두드리자 하인들이 뛰어와 문을 열어 주었다. 해준은 커다란 느티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담장을 주시했다. 웬만한 사내들만큼이나 키가 큰 이소가 담장 위로 휘적휘적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제 연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도 오랜만에 보는 고운 이목구비가 반가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준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날 선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장 서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소는 매번 걸치던 녹색 장의를 꺼내는 대신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붉은색을 집어 들었다. 저고리는 부러 수수한 것으로 골랐다. 평소 같으면 대충 찍어 발랐을 분 역시 정성스레 펴 발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릴 적 처음 광대놀음을 보았을 때의 벅참과 설렘으로 가슴이 자꾸만 뛰기에 그런 마음을 진정시키려 점심 이후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돌계단을 조심스레 걸어 나와 희주를 기다렸다. 희주는 저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배운 것이 없어 꼭 열두 살 아이처럼 순진히도 굴었다. 그러나 성격만큼은 드세고 용감해 마치 작은 삽살개마냥 이소에게 달라붙는 무뢰배들과 상인들을 막아 주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소는 새로 산 신을 흙바닥에 문지르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이제 막 팔월의 무더위가 가시는 중이었다. 이제 장옷 안에서 흠뻑 땀을 흘리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밋밋한 흙바닥에 유난히 샛노란 은행잎 몇 잎이 드문드문 떨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은행잎이 떨어질 시기는 아닌데.”
찢긴 곳이 하나 없이 모양도 온전하고 색도 예뻐 이소는 한참을 그 은행잎을 들여다보았다. 곧 희주가 봇짐을 메고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아씨, 하고 부르는 소리를 몇 번이나 했던지 종래에는 이소의 곁에 다가와 무엇을 그리 보느라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하냐고 구시렁댔다.
“웬 은행이래요?”
“그러게. 하나만 집어 주련, 예쁘네.”
가까이 다가가 은행잎을 주워 든 희주는 얼레,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기에 이소는 고개를 갸웃하며 희주의 하는 태를 지켜보였다.
“아씨, 이거 진짜가 아니고 그림이에요. 화선지에 그린 가짜 은행잎인데요.”
“그림이라고?”
진짜가 아니라는 말에 이소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손바닥을 내밀었다. 희주가 일어나 이소의 손바닥 위에 종이로 만든 은행잎을 얹어놓았다. 사박사박 손안에서 바스라지는 그림이 손바닥 위에서 둥글게 말렸다. 꼭지 끝으로 갈수록 색이 진해 멀리서 보면 진짜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이가 이리도 잘 그렸을꼬. 이소가 손안의 은행잎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 앞서 걷던 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여기도 있습니다. 저기도 있고, 되게 많아요.”
희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종이 은행잎이 멀리 시전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것도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작은 조약돌로 눌러 놓은 것이 여간한 정성으로 벌인 짓이 아니었다.
“따라가 볼까요?”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주는 세 걸음 건너 떨어진 은행잎을 하나씩 주워 주머니에 담으며 저잣거리까지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익숙한 주막 앞이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빽빽한 나뭇가지로 만든 울타리 너머로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들 팔과 손에 여분의 치마를 들고 서서 화공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 나리. 저도 하나만 더 그려 주셔요. 아양을 떠는 목소리에 이소의 눈매가 불쾌하게 가늘어졌다. 사내의 입매가 휘어지자 여인들의 감탄사도 이어졌다.
“어, 화공 나리다. 아씨, 이 은행잎도 화공 나리가 그린 것인가 봐요.”
희주가 눈치 없이 큰 소리로 화공을 아는 체했다. 그 소리에 화공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그림을 그렸는지 얼굴에 노란 물, 검은 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덩치는 대장군만치 큰데 수염이 하나 없는 말끔한 얼굴에서 싱그럽게 웃음이 터졌다. 화공의 시선이 이소에게 향하자 기생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났다.
“이제 일어날까. 모과는 이 정도만 그리도록 하지.”
화공이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펼쳐진 기생의 치맛자락에 노란 모과와 푸른 잎사귀가 구르는 모양새로 구겨졌다. 화공이 얼굴을 닦을 것이 없나 고개를 돌리다 대뜸 옆에 서서 구경하던 주막 주인의 앞치마에 고운 얼굴을 갖다 대었다. 그릇을 닦다 구경 나와 행주치마가 젖어 있던 여주인이 엄메 나리, 소리를 내며 굳어 버렸지만 화공이 얼굴을 묻고 썩썩 뺨을 닦아 내자 싫지 않은 듯 귀를 붉히고 웃었다. 이내 말끔해진 얼굴로 고개를 든 화공이 성큼성큼 평상을 내려왔다.
“아잇, 나리. 어디 가셔요.”
“기다리던 사람이 왔네.”
화공의 말에 순식간에 이소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마치 저와 이미 약속을 했다는 듯 말하는 화공을 보며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로 주춤했다. 그러나 화공은 크게 걸어 나와 이소를 지나쳐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저를 보고 한 말이 아닌가? 이소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화공은 어느새 담장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희주는 그사이 어디를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소는 눈치를 보다가 주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구잡이로 늘어진 화선지와 명주 천, 심지어 값비싼 비단까지 둘둘 말려 평상에 널려 있었다. 물감 한 통을 사려면 꽤나 많은 값을 치러야 할 것인데 저 흰옷의 사내는 어디서 났는지 노랗고 붉은 천연색의 물감까지도 꽤나 많이 가진 듯했다. 화사한 색의 개나리와 모과, 호박, 민들레 같은 잡풀까지도 모두 그림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이소는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살면서 이렇게나 그림을 잘 그리는 이는 처음 보았다.
“어디, 아씨도 하나 사시렵니까?”
친근한 듯 말을 걸어오는 기생의 목소리에 이소가 눈을 들어 올리자 짙은 눈화장을 한 여인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화공 나리께서 기분이 좋으시니 싸게 쳐 줄 겁니다. 지금 입은 치마가 영 밋밋하니 어울리는 것으로 그려 달라 부탁해 보세요. 뭐… 보아하니 아직 젖가슴도 영글지 않은 모양인데 햇병아리 따위를 그리면 어때요?”
재미도 없는 농담에 기생들이 깔깔 웃으며 눈물을 지어 보였다. 이소는 귀를 붉히며 몸을 돌려 대문을 빠져나왔다. 희주 이것은 어디로 간 것이야, 얼른 담장 뒤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덩굴을 기대고 선 화공이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 구경은 다 하셨습니까.”
“네?”
팔짱을 낀 채 이소를 바라보던 화공이 기댔던 몸을 바로 했다. 이소의 시선이 화공의 반반한 낯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항상 늦은 밤에만 보다가 해가 아직 넘어가기 전 밝을 때 보니 왜 그리 여인들이 달라붙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보다 키가 큰 사내는 아직까지 보기 드물었으나 기골이 장대한 이 사내는 고개를 완전히 꺾어 저를 내려다볼 정도로 키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턱은 터럭 한 올 없이 매끈했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컸으나 눈알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눈매가 꼭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었고 그 안에 자리한 눈동자는 깊은 밤 호수를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날렵한 콧날 아래 자리한 도톰한 입술은 꼭 여인들의 연지를 찍어 바른 듯 생생히 붉었다. 긴말 할 것도 없이 지금까지 제가 본 이들 중 가장 수려하고 잘 빚은 옥과 같은 사내였다.
“……자.”
화공의 꽃잎과 같은 입술이 빠끔하고 열렸다. 입술 안쪽은 동굴이 어둡고 깊고, 얌전하게 박힌 치아는 참으로 하얗구나. 생각해 보니 복숭아씨를 박아 넣은 것 같은 목젖과 그 아래 단단한 가슴…… 그리고…….
“……낭자.”
목화솜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어, 목소리?
“엣…, 아, 헉…! 예. 예에.”
“……얼굴이 뚫어지겠습니다.”
그제서야 이소는 자신이 수치도 모르고 화공의 얼굴을 하나하나 핥듯이 훑어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얼른 시선을 내리고 뒷걸음질 쳤다.
“송구합니다. 무례했습니다.”
“눈짓을 하였는데 통 나오시질 않아…. 다시 들어가서 데리고 나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습니다.”
화공은 사과를 받아 주는 대신 이소를 기다렸다고 담백히도 고백했다. 이소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러는지 따로 물을 용기는 없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화공은 대뜸 석반은 들었느냐고 물어왔다.
“금일 석반은….”
“즐겨 드시는 것이 있습니까? 주전부리는 좋아하십니까? 당과나 약과 같은 것이요. 내가 이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유달리 단 것을 잘하는 집을 찾았는데 그대 생각이 나서. 혹시 차는 어떤 것을 좋아하십니까. 아직 날이 후덥지근하니 식혜나 수정과도 좋고 배즙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리고 이어서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여러 차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에 이소는 어떤 것부터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다 곧 미간을 찌푸린 채 화공을 흘겨보았다.
“…그리 많이 물으시면.”
“예.”
한참 만에 이소가 입을 열었다. 화공은 얼른 입술을 닫고 눈을 반짝이며 이소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하기가 벅찹니다.”
“아, 내가 너무 빨랐지요. 말을 섞자마자 반가워서 그만.”
언제부터 저와 그리 친근했다고 반갑다고 말하는 것인지. 이소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화공은 머쓱하게 웃었다. 이소는 딱히 할 말은 없었으나 자리를 피하고 싶지는 않아 그 자리에 섰다. 해가 넘어가고 주막과 시장 곳곳에 초롱불이 켜졌다. 살랑 일렁이는 바람이 코끝을 간질이자 이소가 작게 재채기를 했다. 화공의 옷에 묻어 있던 꽃잎과 먼지들이 풀풀 날렸는가 보다.
“이런, 그리 얇게 입고 다니시면 고뿔이 드십니다.”
화공은 사뭇 걱정스러운 말투로 이소를 내려다보더니 소매를 뒤적여 작은 조각천 하나를 넘겨주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명주천에 그려진 작은 치자색 병아리가 앙증맞았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꼭 금방이라도 파드득거리고 돌아다닐 것만 같아 미소가 지어지다가도 아까 주막 안에서 기생 하나가 저를 놀리듯 한 말이 떠올라 이소는 팩 고개를 돌렸다.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요, 제가 좋아해서요.”
“…….”
이소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화공은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말을 정정했다.
“병아리요.”
“아….”
“종종거리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꼭 누가 생각나 그려 놓고, 언제 전해 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소가 차마 손수건을 받아 들지 못하고 제 말의 의미를 더듬고 있자 화공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다 또 재채기라도 하시면 코가 나옵니다.”
“무, 무례합니다. 그런 것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그 말에 이소는 얼른 화공의 손에서 수건을 낚아챘다. 혹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코가 흘렀나 싶어 몸을 돌리고 인중을 꾹꾹 눌렀지만 조금도 젖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고개를 내려 손안에 들어온 작은 병아리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노란 깃털 가운데 콕콕 찍힌 까만 점 두 개가 저를 올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이소는 고개를 들었다.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그 은행잎도, 나리께서 그리신 것입니까?”
“예. 썩 괜찮았지요?”
“진짜 같았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동하실 것 같아 꽤 정성을 더했는데 이리 얼굴을 마주하니 내 제법 솜씨를 발휘한 듯싶네요.”
“본래 그림을 그리시는 분입니까?”
“흥미가 조금 있지요.”
흥미로 치부하기에는 도화서에 당장 들어가도 될 정도의 실력인데. 이소는 아무 소속도 아닌 선비가 이리 잘 그릴 정도면 도화서에 들어가는 화공들은 얼마나 더 잘 그리는 것인지를 짐작으로 가늠했다. 저 멀리서 홀로 장을 다 본 희주가 부랴부랴 뛰어왔다.
“아씨, 아씨. 어디 가셨었어요!”
그 말에 이소가 괜히 찔려 소매 안으로 손수건을 얼른 집어넣었다.
“너어…. 나를 두고 어딜 다녀왔어.”
이소가 눈을 흘기자 희주가 투덜거렸다.
“아니이, 아씨 따라오시는 줄 알았는데. 당과를 먹다 보니 아씨가 없는 거예요. 시장 다 뒤지고 다녔어요.”
“난 여태 여기 있었거든. 그런데 벌써 혼자 장을 다 보았어?”
“아쉬우세요? 한 바퀴 더 돌까요?”
희주의 작은 손에 들린 것들이 제법 묵직해 보였다. 어린 여자애가 들기에는 역시나 양이 많다. 이소는 한숨을 쉬었다. 둘밖에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항상 이리도 과하게 일을 시킨다.
“이리 줘.”
“아니, 괜찮아요. 또 손에 비린내 배기시면 큰 도련님이 싫어하세요.”
“됐어, 손 닦으면 되지.”
이소는 희주의 손에서 마른 생선과 떡 보자기를 빼앗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해준이 눈썹을 꿈틀댔다. 양갓집 규수 같은데 선뜻 비린 조기 묶음을 쥐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길거리 아무 곳에서나 떡을 주워 먹었다. 잘 배운 듯 고개를 빳빳이 하고 다녔지만 걸음걸이가 단정치 못한 듯 치맛단이 묘하게 해져 있었고 무엇보다 말투가 지난 며칠간 들었던 여느 양반댁 자제들과 달리 가벼운 구석이 있었다.
보자기를 나눠 든 이소가 아쉬운 듯 해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또 봅시다. 병아리 낭자.”
“병아…, 씨이…….”
이소는 끝까지 농을 치는 화공을 한 번 더 흘긴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해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몸을 돌려 시전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얼마 전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 들은 기이한 노파를 찾기 위해서였다. 유난히도 흐린 밤이면 골목 어드메에 등이 굽은 노파가 하나 나타난다고 한다. 마음을 먹고 찾으려 하면 있었다가도 없어지고, 아무 기대 없이 허한 마음을 안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 없었다가도 불쑥 나타난다는 정체불명의 노파. 그 여우 같은 할멈이 사람과 귀신을 그렇게 잘 구분해 알아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다른 것보다도 사람과 귀신을 구별한다는 말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저는 사람도 귀신도 아닌 그 경계선 어딘가에 걸쳐진 존재였으므로. 저녁 장사로 초롱불을 밝힌 시장 안에서 오직 해준만이 어두운 골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공과 헤어지고 저자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희주는 이소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저 없는 새에 화공 나리랑 무슨 좋은 말씀을 나누셨어요?”
“별말 안 했다.”
이소는 앞만 바라본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희주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웃었다.
“에이, 근데 왜 나리께서 아씨 얼굴에서 눈을 못 떼고 계셨어요.”
내 얼굴을 봤다고? 정작 자신은 얼굴에 구멍 나겠다는 핀잔에 얼른 시선을 내렸는데 사내가 자신을 그리 바라보았다니 몹시 진 기분이 들었다. 이소가 아무 말도 없이 앞만 보고 걷자 희주가 씩 웃으며 치대왔다.
“확실해요. 화공 나리가 아씨한테 마음이 있으신가 봐요.”
“또 뜬 소리. 네 말은 맞는 게 하나 없어.”
맞는게 하나 없다는 말에 희주가 발을 굴렀다.
“왜요, 저번에도 종친댁 강 도령님이 금두꺼비 들고 와서 고백하는 것을 제가 미리 맞히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건넛마을 오십 먹은 이 대감도 아씨한테 괜히 집적거리다 혼이 났구요.”
희주가 입술을 앙다물고 곤란했던 기억을 헤집어 냈다. 나이를 스물여섯이나 먹은 노총각 강 도령이 흙바닥에 구르며 낭자는 어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느냐고 떼를 쓰는 것이 소문이 나 애꿎은 이소만 외출금지령을 당했었다. 오십 먹은 이 대감도 윤 대감에게 졸라 첩으로 들이면 안되겠냐고 조르기도 했다. 이소는 대꾸하지 않으려다 제 어깨에 걸쳐진 장옷과 길게 내려온 저고리 고름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이리 입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리 굴 수 있어.”
“물론 오해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아씨는….”
희주가 입을 열 때 즈음 저 멀리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들이 초롱을 걸다 말고 이소와 희주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이소가 희주의 입에 손을 갖다 댔다.
“더는 말 얹지 말거라. 누가 들을라.”
“예에.”
희주가 얼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 대문 앞에 선 하인이 허리를 숙였다.
“도련님이 와 계십니다. 아씨를 바로 찾으셔서…….”
이소는 조기와 꾸러미들을 하인들 손에 쥐여 주며 손을 털었다.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오느라 손바닥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희주는 당연히 제가 들어야 하는 것을 매번 이소가 들고 와 주는 것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며 얼른 장옷을 받아들었다.
“장에 다녀오다가 의복이 더러워졌다. 정갈히 하고 건너간다 일러주련.”
“예, 아씨.”
이소는 후원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머리를 빗고 몸을 씻어 냈다. 마른 조기를 만진 손에서 약하게 비린내가 나 꽃잎을 으깬 물에 오랫동안 손을 담그고 있었다. 더운물에 풀어낸 꽃향기가 천천히 몸을 휘감았다. 희고 고운 손이 꽃잎 아래에서 일렁였다. 손을 꺼내 털어 내려다 화공이 준 손수건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눌러 닦았다. 치자로 그린 병아리가 혹여 번지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잘 마른 모양인지 색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괜히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한참 좋은 기분에 빠져 있을 때 바깥에서 보채는 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왔다.
“아씨, 도련님께서 빨리 오시라고…….”
“응, 곧 가마.”
이소는 얼른 손수건을 소매에 넣고 사랑채로 이동했다.
* * *
사랑채 문이 열리자 꼬박 보름 만에 집에 돌아온 사내가 다리를 접어 앉아 눈을 마주쳤다. 사내는 제게 도착한 서신을 읽어내린 후 고개를 흔들곤 화로에 훅 던져 놓았다. 이내 화르륵 조그라들며 타 버린 종이는 재가 되어 버렸다.
“늦었구나.”
“목간에 다녀왔습니다.”
이소를 기다리며 이미 두 병이나 홀로 마신 듯 볼이 붉었다. 이소가 문 앞에 서서 절을 올리려 하자 사내는 손을 들어 올렸다. 절은 생략하고 어서 제 곁으로 오라는 듯 손짓하자 이소는 손을 모으고 가까이 섰다. 사내가 툭툭 제 무릎을 두드렸다.
“올라오너라.”
이소는 자연스럽게 사내의 무릎에 앉았다. 달큰하게 취한 듯 사내가 이소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이소는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턱이 부딪히지 않도록 고개를 꺾어 주었다. 사내의 큰 손이 이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잘 있었느냐.”
“예. 오라버니.”
윤 가의 장남 주영(朱英). 붉은 꽃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내는 제 아우의 저고리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허리를 쥔 손이 마른 갈비뼈를 더듬거리며 가슴 언저리를 지분거림에도 이소는 한 번을 밀어내지 않은 채 오히려 팔을 들어 그 틈으로 파고들 수 있게끔 도왔다. 주영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내 너를 보고 싶어 생도에서 직무가 끝나자마자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어찌 버선발로 마중을 나오질 않아.”
이소는 눈을 질끈 감으며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시장에 갔다가, 읏…. 돌아왔습니다. 헌데 치마가 더러워져….”
“그래, 오는 길에 꽃밭이라도 다녀왔나 보지. 내 나비.”
주영이 동정을 걷어내고 흰 목덜미에 입술을 찍어누르다 이소의 어깨선에 붙어 있던 꽃잎 하나를 떼어 후 하고 불어 넘겼다. 잘 털어 냈다고 생각했는데도 기어코 잎 하나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나 보다. 주영은 가만가만 눈을 떴다 감으며 이소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고름을 이로 물고 이리저리 흔들며 풀어낼 모양이었다. 이소는 작게 열린 창문 틈으로 아직 안채의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주영의 뺨을 슬쩍 잡았다.
“…아직, 대감마님께서 깨어 계십니다.”
“언제는 신경 썼느냐. 노친네 곧 주무실 텐데.”
이를 세워 문 고름이 허술하리만치 쉽게 풀렸다. 안에 입은 흰 속곳 안으로 색이 연한 유두가 비쳤다. 본디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어야 할 기관은 마치 꼭 젖이 나올 것처럼 봉곳하게 솟아 있었다.
“내 마중은 이 녀석이 대신 나와 있었구만.”
주영은 얇은 옷감 위로 혀끝을 세워 누르며 천천히 적셨다. 불투명한 옷감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며 곧 불그스름한 색이 점점 선명해졌다. 이소가 몸을 떨며 신음을 삼켰다.
“몸이 달았구나. 아래도 젖었는지 한 번 볼까.”
풍성하게 퍼진 치마 안으로 불쑥 손이 들어와 더듬었다. 이소가 얼른 주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직 창이 반이나 열려 있었고 사랑채로 불렀기에 술만 따르다 갈 줄 알았다. 이소가 입술을 물었다.
“으, 으읏…, 오, 오라버니. 제가 준비를, 아직….”
“조급하게 굴긴, 내 구멍이 어디 가지 않고 잘 있나 확인하려는 것뿐인데.”
살이 많은 둔부를 잡아 벌리며 주름진 입구를 천천히 더듬던 주영의 손가락 한 마디가 슬쩍 밀고 들어왔다. 곱게 모여 있던 허벅지를 조이며 허리에 바짝 힘을 주자 주영이 어허, 하며 남은 손으로 볼기를 찰싹 내리쳤다. 힘을 풀라는 것이다.
이소는 병풍을 마주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주영이 집을 떠났다 돌아온 지 꼭 보름이었다. 하얀 목덜미에 주영의 입술이 더운 숨을 토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메마른 손가락이 쑤욱 빠져나갔다. 억누르고 있던 긴장이 한 번에 풀어졌다. 주영이 고개를 떼고 만족스러운 듯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방에 가 있거라. 내 네게 줄 선물을 가져왔으니 오늘은 아래를 풀지 말고 기다리거라.”
“풀지… 않고요? 그럼 오늘은….”
“내가 선물을 준다고 하지 않던.”
이소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주영은 이소를 놓아준 후 술을 기울였다. 주춤주춤 물러서며 이소는 옷깃을 여몄다. 명에 다녀오고 나면 항상 작은 노리개를 사다 주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것이려나. 이소는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물렸다.
이소는 방으로 돌아와 시간을 가늠했다. 주영이 방으로 온다는 것은 어김없이 밤을 함께 보낸다는 의미였다. 더군다나 시간이 늦어 대감과 하인까지 모조리 잠든 시간, 얌전히 기다리란다고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나 하던 짓이다. 이소는 조용히 옷을 벗어 내리고 개켜 넣은 후 머리를 풀어 내렸다. 낮 동안 강하게 빗어 당겼던 머리댕기가 풀어지자 한결 가벼워졌다. 머리카락 안에 흰 손가락을 넣어 두피를 꾹꾹 누르자 가슴 속에 내내 남았던 체증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소는 서랍을 열어 향유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조금 덜고 쥐었다 폈다 하며 체온으로 데웠다. 능숙하게 둔부 아래로 가져간 후 손가락을 세워 구멍 주변을 매만졌다. 손바닥에 있을 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던 향유는 꼭 아래에 바르고 나면 몹시 긁고 싶어지게 만드는 이상한 약이 들어 있었다.
익숙지 않을 때는 요령을 피운답시고 조금씩만 바르거나 아예 바르지 않고 주영을 맞았었다. 그러나 결국 제 손해였다. 향유를 꼼꼼히 바르지 않으면 몸통이 반으로 쪼개지는 고통을 온전히 제 정신으로 느껴야 하기에, 이소는 숱한 밤을 보내고 나서야 값비싼 향유를 제 구멍 안에 듬뿍 밀어 넣는 것이 저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읏…….”
쪼그려 앉은 자세로 손가락으로 몇 번을 들락날락하면 바짝 메말라 있던 구멍이 축축하게 젖었다. 주영은 너무 많이 풀어 놓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적당히 입구 부분만 풀어놓은 후 손을 닦아 내고 속곳을 입었다. 약이 금방 드는지 벌써부터 가려움에 구멍이 옴찔옴찔 오그라들었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오늘 시장도 시장이거니와 화공이라는 낯선 사내와 말까지 섞었더니 머리가 고단했다. 혹여나 제 비밀을 들킬까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긴장을 하고 뒤로 발을 물렸더니 방에 돌아오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아마 주영이 부르지 않았다면 목간을 하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을 것이다.
“벌써 조는 것이냐.”
어느새 고개를 푹 숙인 채 졸고 있었던가. 이소는 가까이서 들리는 주영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노란 초가 일렁이는 방 안에 주영의 얼굴이 코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오신 줄 몰랐습니다. 송구합니다.”
“고단해 보이는데, 내일 다시 올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이렇게 그냥 보내고 잠이 들면 당장 오늘에야 몸은 편하겠지만 내일이 되면 미뤄 놓았던 것을 한꺼번에 치르느라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곤 했다.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조금씩 매일 하는 것이 나았다. 이소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자 주영은 작은 턱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박하 향이 나는 혀가 뱀처럼 파고들었다가 떨어졌다. 습관처럼 눈을 감았다. 여지없이 몸이 통째로 기울어졌다. 주영의 손가락이 속곳을 헤치고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으윽……!”
“풀어 놓지 말라 했거늘, 말을 듣지 않았구나. 문을 열자마자 네 샅 냄새가 진동을 해.”
주영의 손가락이 구멍 주변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이소가 손을 모은 채 손가락을 파드득 떨었다.
“푸, 풀지 않으면…, 너무 아파 받을 수가, 없습니, 다….”
“매번 좋다고 허리를 흔드는 것은 누구였는지 벌써 잊었느냐.”
어느새 꼬리뼈 사이를 둥글게 문지르며 하의를 벗겨 낸 주영이 작은 사탕 하나를 이소의 입 안에 굴려 넣었다. 단맛이 나는 투명한 사탕이 입 안에서 도록 굴러와 볼 안에 닿자마자 달칵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안에 담긴 작은 미약이 목젖을 타고 넘어갔다. 익숙한 불쾌감이었다.
이소는 코로 숨을 참고 목구멍을 열어 사탕을 삼켰다. 언젠가 오랫동안 배를 타고 조선을 떠났다 돌아온 주영이 가져온 희귀한 묘약이었다. 명 황제의 애첩들이 쓴다는 귀한 것을 주영은 동침할 때마다 이소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몸 안에 퍼지는 약 기운에 눈언저리가 진동하듯 아파왔다. 그렇게 향 하나가 다 타들어 가기도 전에 아주 먼 어느 곳에서 쿵… 쿠웅… 쿵… 쿠웅… 쿵… 커다란 북을 내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그것이 자신의 심장 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주영과 몸을 섞고 얼마 되지 않은 후였다. 열락으로 달아오른 이소의 눈가가 젖어 오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선물을 준다니까 왜 벌써 조르고 있어.”
주영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싫습니다, 흐으, ……싫어요.”
발가벗은 이소가 바르작거리며 이불에 머리와 등을 기대고 움찔댔다. 아래는 간지러웠고 가슴은 타는 듯했다. 선물이고 뭐고 당장 제 몸 안에 남근을 넣고 흔들고 싶었다. 윗입이든 아랫입이든 무엇이든 물고 빨고 싶었다.
“오, 오라버니…. 빨리…….”
“이리 조르니 선물은 내일로 미루고 내 것이나 물려 주어야겠어.”
주영이 허리를 묶은 끈을 천천히 풀어내렸다. 이소의 입에서 타액이 줄줄 흘러 넘쳤다.
“아무것이라도, 저 제발, 제발 빨리…….”
“형님.”
촛불이 만들어 낸 빛 그림자가 주영의 낯을 어지럽게 훑고 지나갔다. 낮고 질척한 목소리가 귓가를 녹이며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나와 안고 있을 때는 편히 부르기로 했잖느냐.”
주영의 뜨거운 손바닥이 이소의 샅을 더듬어 타고 올라와 털 오라기 하나 없는 좆을 잡았다. 매끈하게 올라온 좆 끄트머리에서 방울방울 탁액이 새어 나왔다. 이소가 허리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혀, …형님. ……형님….”
“그래, 아우야.”
이소가 좆을 바짝 세우고 주영의 어깨를 잡은 채 벌벌 떨었다.
“아, 아으…. 안이, 안이 너무 간지럽습니다…. 긁어, 긁어내고 싶습니다….”
주영의 허벅지 위로 얹은 흰 다리가 활짝 벌어진 채 얕게 경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른 배가 홉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매끈한 기둥이 까딱까딱 댔다. 대낮에는 붉은 댕기를 하고 다니며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밤이 되면 판판한 가슴 위로 정액을 흩뿌려대며 제게 안기기를 바라는 이소를 보며 주영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내 굵고 단단한 성기가 느물느물하게 풀어진 구멍을 냅다 파고들었다.
“아……! 아흐……!”
“그렇지, 이렇게 예쁘게도 조여야지.”
조르르륵, 구멍을 가득 채운 남근이 배를 짓누르자 하얀 성기 끝에서 조수가 뿜어져 나온다. 이에 주영이 이소의 가는 허리를 붙잡고 치받기 시작했다.
“아, 아윽, 흑, 아! ……으응!”
다정한 말투와 달리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인 허리 짓이었다.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들어왔다 나가기를 수십 번이나 반복하고도 얽힌 혀는 풀어지지 않았고 맞붙은 샅에서 치덕치덕 물이 튀었다. 요가 푹 젖고 집기가 넘어지며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울음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문을 열어 볼 생각을 못했다. 주영이 후원 뒷방을 찾는 날이면 언제나 그랬다.
* * *
방 안이 엉망이 되었다. 경대는 엎어져 깨져 버렸고 물을 따라 놓은 병도 바닥을 굴렀다. 이소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묻은 불투명한 탁액은 땀과 섞여 뺨과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주영은 연죽을 입에 물고 흰 연기를 내뿜었다. 신음이 새어 나갈까 봐 문을 꼭 닫은 채 정사를 치렀더니 온통 습습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늘따라 더 달라붙는 것 같더구나.”
“제가… 그랬습니까.”
목이 다 쉬었다.
“내 등짝에 이 손톱자국을 보거라. 누가 보면 곰에게 찢긴 줄 알 것이다.”
아직도 헐떡이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한 채 엎어진 이소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정사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약을 먹고나면 백치가 되어 몇 번이고 조르고 허리를 흔들고 그것도 모자라 주영의 좆을 물고 빨고 핥으며 소변까지도 받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이런 관계가 된 지 어느덧 삼 년이었다.
“아랫것에게 물어보니 근래 자주 장에 간다지. 외출에 재미가 붙었느냐.”
주영은 이소의 턱을 간질였다. 작은 동물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이소는 불쾌하지 않았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소는 아주 오래전 이 집에 주영의 액받이로 팔려 왔다. 조상의 업보가 많아 좋은 머리를 가지고서도 절대로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말에 윤 대감은 냉큼 사람을 수소문해 액받이용 고아 하나를 찾아냈고 무당을 불러다 아이에게 팥과 냉수를 뿌려 가며 굿을 했다. 그 덕인지 아닌지 주영은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올랐고 단 한 번의 미끄러짐 없이 승승장구했다.
다만 밖에서 데려온 사내녀석이 검을 들고 설치기 시작하면 복이 빠져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귀한 장손마저 해칠 수 있다는 말에 이소는 어릴 적부터 치마를 두른 채 후원 뒤쪽에 있는 작은 별채에서 홀로 지냈다. 근본도 모르는 놈이지만 귀한 액받이를 종놈들과 함께 굴릴 수는 없어 적당한 대우를 해 주었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하인들이 대거 갈음되고 나자 이소가 사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목욕 시중을 드는 어린 여종 희주만 알 뿐이었다.
교육을 철저히 받기도 했거니와 본래 성정이 순하고 선한 희주는 언제나 이소를 챙기고 돌보며 정말 양반집 규수를 대하듯 모셨다. 먹을 것이 있으면 항상 제일 먼저 접시에 담아다 가져왔고, 사내인 자신보다 훨씬 작고 어린 여자아이면서도 노심초사 제 아씨가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는지 살피었다.
어떤 날은 심부름을 하다 다리를 다쳐 절뚝였을 때 이소가 업어 준다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며 ‘같은 여인인 아씨에게 업히는 것을 다른 이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라 하며 부득불 스스로 걸어갔다. 이소는 때때로 희주가 자신을 정녕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헷갈리기도 했다. 이리 생각하나 저리 생각하나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이소는 외출에 재미가 붙었느냐는 주영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대감께서 어린 희주에게 너무 많은 심부름을 시키시니 동행하는 것뿐입니다.”
주영이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장을 나서면 조기 하나 사 오는 데 반나절이 걸린다지.”
“…….”
“이 집에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도는 것이 훨씬 즐거운가 보구나.”
이소는 눈을 피했다. 한 번 나가면 바깥 구경을 하는 게 재미있어 한참을 놀다 들어오곤 했다. 물론 그것도 정해진 외출 시간에만 가능했다. 주머니에 엽전이 넉넉해 작은 여종 하나와 배불리 간식을 먹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광대놀음도 보고, 꽃구경도 하고. 집 안에 갇혀 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즐거운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소는 부러 토라진 듯 웅얼댔다. 이 집에 기거하면서 제 속마음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금기에 해당했다.
“그것은 형님이 집에 자주 오시지 않으니까….”
턱을 괴고 있던 주영의 입꼬리가 활처럼 길게 휘어졌다.
“아하하, 내가 자주 오지 않아서 밖을 나돈다는 말이냐.”
“…….”
주영은 이소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요에 드러누운 채 마주 보는 얼굴은 썩 만족감이 어렸다. 이소는 깜박깜박 눈을 감았다 뜨며 주영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주영이 손을 들어 이소의 턱을 가볍게 움켜쥐고 작은 입술을 꾹꾹 매만지며 흰 치아를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들어와 조막만한 입이 빠끔 벌어지자 치아 뒤에 자리한 혀에 주영의 손끝이 가만가만 닿았다.
“내 탓이라고 핀잔도 줄 줄 알고, 어찌 이리 요망한고.”
“…….”
주영은 입술에서 손을 빼어 부드럽게 뒷덜미를 감싸안았다. 고개를 숙이고 딸려내려가자 주영의 입술이
“예쁜 것. 아주 예쁜 것. 장에 원하는 것이 없으면 언제라도 말하거라. 내가 돌아오는 날 구해다 줄 것이니.”
“……원하는 것이요?”
“왜, 생각해 둔 것이 있느냐.”
이소는 어릴 때부터 제 이름이 새겨진 검이 하나 갖고 싶었다. 열다섯 살이 지나 목소리가 굵어지고 키가 부쩍 자라기 시작하면서 어떻게든 사내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 윤 대감은 더욱 이소를 꽁꽁 숨겨 두었다.
그럴 때마다 이소는 어차피 홀로 지내는 시간, 수를 놓고 바느질을 하며 보내는 것보다는 다른 사내들처럼 검술 연습 따위를 하고 싶었다. 낮에는 하인들의 눈을 피해 방 안에서 글을 읽었지만 밤이 되면 담장 너머 빽빽한 대나무숲에서 부러진 대나무 하나를 주워 와 찌르고 때리는 연습을 했다. 이제는 꽤 긴 장대도 한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졌지만 집 안 어디를 가도 저를 지켜보는 눈이 많아 검 한 자루도 쉽게 쥘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 대장간에서 낡고 이가 빠진 중고 검들을 우르르 쏟아내는 것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이것이 다 무엇이냐 물었더니 관청 나졸들이 쓰고 버린 것을 녹여 농기구를 만든다 하였다. 관졸과 대장장이가 보기에는 전부 하품(下品)으로 칠지는 몰라도 검 한 자루를 제대로 만져 본 일이 없던 이소의 눈에는 그 전부가 보물처럼 보였다. 개중에는 그다지 날이 상한 것 같지도 않은 것들도 눈에 띄었는데, 크기가 작아 품에 숨기고 올 수 있었더라면 아마 값을 좀 치르고서라도 가져왔을 것이다. 사실 나무나 짚을 베지 못할 정도로 낡았대도 상관없었다. 그저 걸어 놓고 쓰지 못해도 좋으니 한 자루 갖고 싶었을 뿐이다.
이소는 입술을 감쳐물며 볼을 붉혔다. 어쩐지 오늘 주영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이가 빠진 낡은 검이라면 허락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사실 대장간에….”
“아, 그 전에. 내가 너를 주려고 봐 둔 비녀가 하나 있는데. 흰 꽃이 잔뜩 달려 있는 것인데 걸을 때마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이 제법 눈길이 가더구나. 네가 하면 좋을 것 같던데.”
이소의 입술이 움찔 떨렸다. 곧바로 미소를 지었지만 목젖이 실룩거리며 어렵게 침을 삼켰다.
“……비녀는.”
비녀는 여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려 했다. 비록 이 집에서 제가 여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주영만큼은 제가 사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인 취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영이 꼭 선물이랍시고 가져오는 것들은 모두 노리개나 장식품 따위였다. 매번 가져오는 신도 제 발보다 조금씩 작아서 주영이 신겨 주는 신을 신고 밖을 나서면 종래에는 절뚝이며 걷게 되는 날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이소는 그저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지금의 삶에 감사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말을 돌렸다.
“…혼인한 여인만 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 혼인한 이만 할 수 있지.”
주영은 이소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러모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제 둔부가 쪼개지도록 박아대던 사내는 한 올 한 올 쓸어 넘기며 애정 어린 눈으로 이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통수가 둥그니 비녀를 하면 어여쁠 텐데.”
조용히 읊조리는 주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소는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 이불을 그러쥐었다. 저 같은 액받이는 감히 바라는 것 없이 목숨만 부지하며 사는 것이 팔자이거늘, 하마터면 덥석 속마음을 말할 뻔했다. 떨리는 눈동자를 들킬까 어깨를 움츠러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 너를 너무 괴롭혀 고단하겠구나. 이리 오너라, 재워 줄 터이니.”
눈을 감은 이소를 보며 주영은 흐뭇한 안색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주영이 등을 두드릴 때마다 가벼웠던 속은 돌을 얹은 듯 다시 체증이 쌓이고 있었다.
* * *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혼자였다.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서 대야에 넣고 집기들을 정리했다. 경대를 세워 얼굴을 비춰 보았다. 저번에 애원했던 대로 목덜미 주변은 일부러 물지 않은 듯 깨끗했으나 쇄골 아래부터는 발진이 올라온 듯 붉었다. 저를 통째로 잡아 씹을 생각이었던가. 잇자국이 없는 곳이 없어 이소는 옷깃을 평소보다 더 꽁꽁 여맸다.
“이게 뭐지…….”
경대 옆에는 주영이 놓아두고 간 선물 보자기가 있었다. 이것이 어제 주기로 했던 것인가. 보자기를 슬쩍 풀어내던 이소는 천 안에 숨겨져 있던 물건이 보이자마자 나지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뒷걸음질 쳤다.
“이건….”
보자기 안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저자에서 본 것과 꼭 같은 외양의 각좆이었다. 주영이 제게 건네준 것은 나무와 달리 매끈하고 단단한 옥으로 만들어져있었고 물건의 끝에는 붉고 긴 술까지 달려 있었다. 연인이 몸을 결합시킨 채 얽혀 있는 모습이 조각된 각좆은 길이와 굵기가 호과(胡瓜)와 엇비슷했다. 매번 손가락으로 아래를 풀어내는 것이 버거워 보여 놓고 가니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헛헛한 속을 달래라는 농이 섞인 쪽지도 함께였다.
만약 어제 보자기를 열어 보았다면 짓궂은 주영은 분명 이것을 직접 제 안에 집어넣고 휘저으며 희롱했을 것이다. 등골이 서늘했다. 이소는 입술을 깨물며 얼른 각좆을 주워 들고 보자기로 꽁꽁 여맨 후 옷장 안 깊은 곳으로 집어넣었다. 저 망측한 물건을 제 안에 쑤셔 넣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꼭꼭 숨겨 두었다.
얼추 정리가 되고 난 후 창문을 열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바로 넘어 들어왔다. 코앞에 둥지를 지었는지 어린 새끼들이 먹이를 달라 보채는 가느다란 울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쩐지 마음이 어수선해져 이소는 정리하다 말고 그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아씨, 저 들어가도 돼요?”
희주가 문밖에서 저를 부른다.
“응, 잠시만.”
몇 년째 듣는 저 ‘아씨’ 소리가 이제는 익숙하다. 희주는 산 너머 마을에서 데려온 순박한 아이였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둘씩 있는 소작농의 오 남매 가장 큰 여식이었고, 언니인지 오빠인지 불분명한 저를 편견 없이 대하며 목욕 수발부터 손발톱 정리까지 모조리 돕는 몸종이었다.
“오늘 새 목간통이 온대요. 도련님께서 조금 더 큰 것으로 바꾸라 하셔서요.”
“그래.”
희주는 물을 받아 놓았으니 씻으라고 전한 뒤 바닥에 떨어진 핏물과 머리카락, 희게 떨어진 정액 등을 말없이 닦아 냈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8척이 훌쩍 넘는 주영과 그에 못지않게 큰 사내인 자신이 목간통에 함께 들어갈 때면 언제나 저는 주영의 품에 안긴 채였다. 지난번 통이 너무 좁아 물이 왈칵 넘치자 주영은 새것으로 바꾸어 주겠다 약조하였다. 착잡했다. 버려진 후원 별채에 목간통과 침금이 새것으로 바뀌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지 뻔한 일이니.
“머리 빗겨 드릴게요.”
목욕을 마치고 식사를 한 후 희주가 머리를 벗겨주는 것을 얌전히 받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아직도 해가 중천이었다. 주영은 노을이 지기 전 궁으로 든다고 하였으니 그때쯤 나갈 생각이었다. 주영의 말대로 근래 자신은 퍽 외출을 자주 했다. 물론 그때마다 희주의 심부름 핑계가 있기는 했지만 머리만 잘 쓰면 한두 시진 정도는 들판이나 시전을 쏘다니다 들어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점점 대담하게 군 지 오래였다.
“오늘은 심부름 없니?”
“예에. 오늘은 그냥 집에 있으려고요. 끊이지 않고 삼 일을 나갔더니 저도 발바닥이 부었어요.”
아쉽다. 희주가 곱게 빗은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땋기 시작했다. 이소는 창가에 턱을 괴고 바깥을 내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오늘 호박엿 아저씨 오는 날 아니니?”
이소가 갑자기 고개를 팩 돌리자 머리카락을 놓친 희주가 쓰게 인상을 썼다. 거의 다 묶었었는데. 억지로 입술을 끌어당기고 다시 결이 고운 머리카락 끝을 잡았다.
“맞아요. 근데 정말 발바닥 너무 아픈데. 그 아저씨는 또 다리 밑까지 걸어가야 한다구요.”
단 것을 좋아하는 희주는 꼭 장이 열리는 날 엿 꾸러미를 사러 멀리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서 팔아야 한다며 그곳만을 고집하는 상인 때문에 부러 그곳까지 걸음 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기도 했다. 이소도 몇 번 따라갔었으나 제 걸음으로도 멀기는 정말 멀었다.
“내가 사다 줄까?”
이소가 묻자 희주가 고개를 저었다. 손이 빠른 희주는 어느새 댕기까지 골라 달고 있었다. 오늘은 군청색을 달아야지. 성격이 까다롭지 않은 이소 덕에 희주는 원 없이 제 아씨를 데리고 인형 놀이를 했다.
“아씨가 번거롭게 뭣 하러요. 담 달에 먹으면 되니까 괜찮아요. 어제 당과도 먹었고.”
“그래두. 좋아하잖아.”
이소가 염려를 담아 덧붙인 말에 희주가 어깨를 잡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꼭 떼쓰는 아우를 달래는 누이 같았다.
“아씨가 종년 간식 사 주러 멀리 갔다고 하면 주영 도련님께서 참 좋아라 하시겠어요. 매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안 들키고 다녀오면 되지. 오라버니는 끼니를 드시고 해가 지기 전 궁으로 가실 테니 그때쯤 나도 나갔다가 얼른 오면 들키지 않고 다녀올 수 있어.”
오늘따라 계속 장으로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희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콧등을 찡그렸다.
“아씨, 뭐 다리 밑에 숨겨 둔 꿀단지라도 있어요?”
“꿀단지?”
희주가 다리를 세우고 앉은 채 이상하다는 듯 이소의 얼굴을 주도면밀하게 따져물었다.
“호박엿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거죠?”
“…….”
잠시 잊었다. 제게 고분고분하게 굴었지만 처음부터 희주는 윤 대감이 자신이 도망칠까봐 감시하려 붙여준 아이라는 것을. 희주의 날카로운 눈빛에 이소는 서글퍼져 하릴없이 창틀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거 아니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적막이 찾아왔다. 입술을 꾹 다물고 파르르 떨리는 턱을 보이지 않으려 몸을 돌려 앉았다. 조금 뒤 희주는 무릎걸음으로 살금살금 기어와 이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꾸만 낯을 살피려 바짝 다가앉는 희주의 행동에 이소는 깊은 한숨을 쉬며 눈을 마주쳤다.
“그런 거 아니라고 했-.”
“화공 나리 보러 가시는 거죠?”
다시금 새끼 노루 같은 순박한 눈으로 돌아온 희주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뺨에는 소담한 보조개가 피어올라 있었다.
“뭐? 아, 아니야…!”
“도련님 오늘 궁에 가시고 나서 해월관으로 가신다고 하셨어요. 아마 약주도 엄청 하실 거고, 새벽이 다 돼서 들어오실 거예요. 편히 놀다 오셔요. 아씨가 아끼는 고양이 밥은 제가 챙길게요.”
속사포처럼 빠르게 쏟아내는 속삭임은 오로지 저를 위한 것이다. 이소가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희주를 바라보자 열다섯 소녀는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제가 아씨 편 아니면 누구 편이겠어요. 오늘 저녁 분도 발라 드릴까요?”
“분은……, 됐어.”
이소는 괜히 얼굴을 붉히며 희주를 밀어냈다. 놀리듯 군 제 태도에 이소가 토라진 듯 보이자 희주는 눈을 접어 웃으며 애교를 떨었다. 아이, 그러지 말고요. 아씨, 여기 보세요. 이소는 괜히 심통이 나 제게 달려드는 희주의 코를 살짝 꼬집고는 웃어넘겼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서책을 열 권을 넘게 읽고, 수를 한참 놓아도 남을 시간이로구나. 그러나 심장은 벌써부터 제멋대로 다듬이질을 시작했다.
‘또 봅시다, 병아리 낭자.’
부드러운 화공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 * *
분이 너무 과했나. 희주가 발라 주겠다고 했을 때 손사래를 쳤다가 그래도 조금 바르는 게 나을까 싶어 펑펑 찍어눌렀는데 요령이 없어 꼭 달걀 귀신마냥 희게 질린 꼴이 되었다.
“지워야지.”
하얗게 들뜬 얼굴을 내려다보던 이소는 희주가 오기 전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입술만 조금 찍어 바른 후 얼른 새 장옷을 썼다. 전에 장에 갔을 때 샀었던 풀색 장옷이었다. 저 멀리 나무 사이로 주영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종종 홀로 나가기도 하는 저자인데도 비밀스러운 목적이 생기자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마냥 가슴이 뛰었다.
주막 앞에 당도하기 전부터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가 났다. 또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잔뜩 모여 있었다. 무슨 잔치라도 났는가 싶어 이소는 사람들 사이에 고개를 빼고 섰다.
‘아, 화공이다.’
노란 돗자리 위에 화공이 앉아 붓을 빼어 아이들 얼굴에 그림을 그려 주고 있었다. 붓을 든 손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내려와 치렁치렁했지만 화공은 무슨 재주를 부리는 것인지 먹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일도 없이 유연하게 붓질을 했다. 세필 붓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니 아이들의 낯은 금세 강아지와 고양이가 되었고, 이내 자신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저런 생각을 다 할까 너무도 신기했다.
어미들은 자식들의 얼굴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는 선비를 보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고 화공 역시 농을 주고받으며 다음 사람 얼굴과 손목에도 그림을 그려 주었다. 여인들의 손목에는 꽃과 나무, 사내들의 어깨와 종아리에는 용과 범, 노인들의 팔뚝에는 짧은 싯구가 새겨졌다.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글과 그림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소를 발견한 화공이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아이고, 더는 못하겠다. 오늘은 이만하지.”
“나리, 저는요. 저도 여태 기다렸습니다요.”
덩치가 산만한 백정 하나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조르듯 보챘다. 화공이 어깨와 팔을 부드럽게 휘저으며 여유롭게 달랬다.
“내 벌써 오늘 이백 명을 넘게 그렸네. 내일 아침 바로 오게. 자네는 등짝 전체에 흑범을 그려 줄 테니.”
종아리나 팔뚝이 아니라 등짝 전체에 그림을 그려 준다는 말에 사내는 만족한 듯 낄낄 웃으며 돌아갔다.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자 주막에는 어느새 이소만 남았다. 순식간에 저만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꼴이 되자 조금 부끄러워진 이소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섰다. 그러나 먹과 벼루를 정리하느라 바삐 보이던 화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소를 불러세웠다.
“낭자도 그려 드리오리까.”
저놈의 다정한 목소리. 이소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여태 기다렸는걸.”
“기다린 게 아니라 지나가다 구경을 한 것입니다.”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었으나 화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본래 우연히 얻은 것이 기억에 남는 법이지요.”
세필 붓을 든 화공이 몸을 일으켜 한걸음 다가왔다. 제법 키가 큰 편인 이소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화공이 성큼 가깝게 붙어 손바닥을 내밀었다. 주막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손.”
이소의 시선이 화공의 낯에 가닿자 시원한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소가 얌전히 손목을 내밀자 화공은 점과 선 몇 개를 슥 그려 내더니 붓을 떼었다. 가는 줄기에 꽃잎이 고작 한 장 달린 심심한 그림이었다. 이소가 불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는 이리 대충 그려 주십니까?”
“나머지 꽃잎은 또 만나면 그려드리겠습니다.”
금세 지워질텐데 이걸 그럼 씻지도 않고 그냥 두라는 말인지 뭔지. 이소는 다른 손으로 그림이 그려진 손목을 부채질하며 투덜거렸다.
“아니, 그려 줄 거면 온전하게 다 그려 주지, 이게 무슨….”
“싫음 마시던지.”
주모, 따로 석찬은 준비하지 마시오. 화공은 이소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돗자리와 물건을 정리해 툇마루에 가져다 놓았다. 미리 떠 놓은 대야에 붓을 잡았던 손을 씻어 내고 땀을 닦아 냈다. 이소는 화공을 보다가 시선을 내려 제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길게 올라온 줄기에 잎사귀가 하나, 꽃대 위에 꽃잎 하나. 꽃잎이 다섯 장짜리면 네 번은 더 만날 것이고 일곱 장짜리면 여섯 번은 더 볼 수 있다. 왠지 그렇게 생각하니 썩 나쁜 그림은 아니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손을 닦아 낸 화공이 갓을 고쳐 쓰고 걸어 나왔다. 새로 꺼내 입은 것인지 연녹색 도포가 제법 잘 어울렸다. 화공에게서는 언제나 코가 뻥 뚫리는 풀냄새가 났다. 비가 잔뜩 오고 난 후 새벽에 마당을 나오면 맡을 수 있는 그런 찬 공기 냄새. 동정 위로 단단하게 뻗은 목덜미에는 땀 한 방울이 없었고 통이 큰 가슴과 등은 꼭 제가 방에서 쓰는 탁상과 넓이가 꼭 같았다. 저 이를 엎어 놓으면 그만치 될 것 같은데. 이소는 물끄러미 화공을 바라보며 쓸데없는 상상을 하다 이내 시선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기왕이면 더 크게 그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 구시렁거릴 줄 알았는데 어여쁜 입술은 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해준의 눈에 웃음기가 일렁였다.
“얼마나요.”
“…아까 그 기생들보다 더 큰 것으로요.”
이소는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비죽였다. 숨길 수 없는 순백의 질투가 이를 드러냈다.
“더 큰 것이라.”
기생들의 팔목에 그려진 수국과 모란의 크기는 제법 컸다. 사내들 앞에서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드러내 보이면서 보란 듯이 그림을 받아 갔다. 저것보다 더 큰 것이라고 하시면 그만큼 제게 속살을 내보여야 할 터인데.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한 듯 이 어린 치는 그저 제게 그려 준 그림이 초라해 시무룩한 모양이었다.
해준은 더 놀리기를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요. 아주 크게. 약조하겠습니다.”
확답을 받은 이소가 장옷을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보자 어느새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군. 바삐 움직여야겠다.
“이제 갈까요?”
“어딜요?”
그림을 보느라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몰랐는데 어느새 바짝 다가온 화공이 저를 앞질러 걸어갔다. 이소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초롱을 한 손에 든 화공이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데이트.”
데……? 난생처음 듣는 말에 눈썹이 보기 좋게 구겨졌지만 이소는 어쨌든 저와 함께 가자는 말인 줄 알고 쫄레쫄레 쫓아갔다. 새로 꺼내 입은 치마가 화공의 도포 색과 비슷한 게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 * *
“호박엿 한 꾸러미와 약과 꼬지 두 개 주시오. 수정과도 한 잔.”
두 사람은 긴 나무막대에 꽂힌 약과 꼬지를 입에 물었다. 밀가루에 기름과 조청을 발라 반죽하여 말린 뒤 다시 기름에 튀겨 꿀에 절여내는 값비싼 과자를 무려 다섯 개나 긴 막대에 꽂아 팔았다. 저런 것을 도대체 누가 산다고, 하고 지나가곤 했는데 제 입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입 안에서 퍼지는 단맛이 씁쓸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돈은 모두 화공이 냈다. 하는 일도 없이 매일 주막에서 술이나 퍼마시는 걸로 보아 벼슬은 없는 것 같은데 집이 잘사는지 언제나 주머니에 짤랑짤랑 돈이 가득했다. 남은 돈을 거슬러 받지도 않았고 잘못 계산되어도 쪼잔히 굴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헤픈데 생색은 또 내지 않아 호방해 보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항상 같이 다니던 아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혼자 오셨습니까?”
화공이 정신없이 약과를 베어무는 이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일이 있다 하여 저만 나왔습니다.”
“다른 몸종을 데리고 다니면 될 텐데요. 이리 혼자 나오시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저를 염려하는 화공의 말에 이소는 눈을 흘겼다.
“나리께서도 혼자 다니시지 않습니까.”
“그야 저는 여인이 아니니까요.”
화공이 생각없이 툭 던지는 말에 이소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혼자 걷는 줄 모르고 앞서가던 해준은 제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소는 대여섯걸음 뒤에 선 채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싶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
제 비밀을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괜한 서운함이 들었다. 화공이 이소의 표정을 살피더니 얼른 가까이 다가왔다. 이소가 올려다보자 마주한 사내는 눈을 접어 웃었다.
“미안합니다. 혼자 나오실 수도 있는 건데 사내고 여인이고가 무슨 상관입니까. 부디 마음 푸세요.”
눈썹을 내리고 당황하며 사과하는 모습은 평소 놀리는 투의 것이 아니었다. 이소는 입에 문 당과를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정말 마음이 풀렸는지 확인한 화공은 이소가 눈을 흘기며 ‘알았다니까요.’ 하자 그제서야 해사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그 이후에도 길을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소가 하도 단답으로 대답해서 대화가 끊길 법도 한데 화공의 말솜씨가 워낙 유려해 이런저런 주제를 넘나들며 담소가 이어졌다. 참으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리.”
“예.”
“꽃을 찾으신다 들었습니다.”
화공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저자는 소문이 빠르군요. 뭐, 일부러 낸 것도 맞지만….”
끄덕이면서도 그 말이 맞는지 또 담벼락에 있는 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약재로 필요하신 겁니까? 진귀한 꽃입니까?”
진귀한 약재가 필요하다하면 제가 잘 아는 약방을 소개시켜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화공은 고개를 저었다.
“진귀한 것 같긴 한데 아직 정확히 어떤 것인지 감이 안 옵니다.”
“감이 안 오다니요?”
“그저 직감적으로 보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직 색도 향도 모릅니다.”
“그런 꽃이 왜 필요합니까?”
“돌아가려고요.”
“돌아가요? 어디로요?”
“집이요.”
집으로 돌아가는데 꽃이 필요하다고? 집에 아픈 홀어머니가 있으신 건가. 이소는 어릴 적 들었던 벼랑 끝에 피어난 꽃을 찾으러 간 아들 이야기를 떠올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노모를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다니던 꽃이 사실은 제 목숨을 주고 가져와야 하는 담보였다든가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소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송구합니다. 그동안 집이 없어 주막에 사시는 줄 오해했습니다.”
“아하하, 오래 있었지요.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기다리는 이도 있고. 준비만 되면 곧 떠날 겁니다.”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말에 이소는 고개를 돌렸다. 역시 홀어머니인가. 아니면 상투를 틀었으니 부인이 이미 있는가.
“혹…혼인을 하셨습니까? 집에 부인이 계셔서….”
화공은 물끄러미 이소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는 말에 이소는 마음을 놓았지만 더 한 것은 꼬치꼬치 캐묻지 못했다. 괜한 소리를 들을까봐였다.
“그럼, 언제 떠나십니까?”
“글쎄요. 기약된 바가 없습니다.”
오늘따라 이소는 화공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원래 계시던 곳은 어디십니까?”
“멀어요.”
화공은 멀다고 말한 후 잠시 숨을 골랐다. 올려다본 낯이 전에 없이 쓸쓸해 보였다.
“아주 멀어요. 걸어서 못 갈 만큼.”
“말을 타고도 못 갑니까?”
“아마도요. 그리고 말도 못 탑니다.”
이소가 말없이 화공의 옆 모습을 응시했다. 알 수 없는 남자다. 수많은 돈을 가지고도 주막에서 생활하질 않나, 온몸을 풀과 흙에 구르면서 꽃을 찾아다닌다는 미친 소문을 안고 있질 않나, 그러면서도 성을 내거나 거만하게 구는 일도 없고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에 조금 특이한 말투. 그런 사내는 돌아갈 곳이 너무 멀어 갈 수 없다고 했다. 단순히 거리가 멀어 못 간다고 하기에는 한 번에 납득하기 어려운 느낌이 일었다.
“오래 계셨으면 좋겠는데…….”
“응?”
속으로만 할 말이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이소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혼잣말이었습니다. 얼버무리자 화공은 더는 묻지 않았다. 다그닥, 말이 없어진 두 사람 곁으로 봇짐장수가 지나갔다. 앞질러 지나가는 봇짐장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소가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말을 타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화공이 고개를 돌렸다.
“고향으로 돌아가시려면, 걸어가는 것보다는 말 타는 법을 배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여인이 말을 타실 수 있습니까?”
이소는 피식 웃었다. 말 못 할 비밀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오라버니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라버니가 좋은 분이시네요. 나중에 꼭 낭자에게 배우겠습니다. 저 금방 배웁니다.”
화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해사하게 웃었다. 무엇이든 잘 배운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어쩐지 이 사람은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어느 순간 저희 집 담장을 살포시 넘어와 줄 것만 같았다.
“천천히 배우셔도 됩니다.”
언젠가는 떠나겠지만 그전에라도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줄 핑계로 몇 번 더 볼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이소는 기분이 나아졌다.
두 사람이 마을을 한 바퀴 다 돌고 다리를 지날 무렵이었다. 좌판에 늘어진 물건을 구경하던 이소는 화공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희주에게 사다 줄 작은 가락지들을 보고 있었다. 곧 희주가 태어난 날이었다. 언제나 제가 머리 장식을 하고 노리개를 걸칠 때마다 눈을 반짝이던 것이 기억이 나 언젠가는 꼭 사 주어야지 했었는데 이리 홀로 나오니 기회가 났다. 작은 옥가락지들을 한참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좌판 구석 어두운 골목에서 돌연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사내도 여인도 아닌 사특한 꼴을 하고 잘도 돌아다니는구나.”
누가 들어도 제 이야기였다. 가락지를 고르던 손이 우뚝 멎은 채 어두운 골목에 시선을 던졌다. 그늘진 처마 아래 한 평 남짓한 작은 돗자리를 편 채 쪼그려 앉은 노파의 누런 눈이 형형히 빛났다. 이소가 아무 말을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노파 하나가 키득키득 웃었다.
“쯧쯔……. 단순 액받이면 좋으련만, 하필 잡혀도 그런 더러운 집안에 얽혀서…매 생을 평생 요절할 팔자라니.”
“…….”
이소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제 처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사는 삶에 만족한 적도 없었다. 체념은 일상이었고 변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기에 그저 우물 위 태양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다. 저는 그저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소를 바라보던 노파가 고개를 기울였다.
“벗어나고 싶지?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지? 이도 저도 아닌 삶을 다 잊고 새로 살고 싶지?”
노파가 킬킬 웃었다.
“백 냥.”
결국 돈인가. 그럼 그렇지 하고 몸을 돌리려던 찰나 절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노파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얼굴에 보기 싫을 정도의 큰 점이 있는 노파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작 백 냥이면 이번 생에서는 네 형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어. 그 후에는 사내의 모습이던 여인의 모습이던 네가 원하는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오늘 나를 지나치면 치르는 값은 두 배야. 흔치 않은 기회거든.”
주영과 저의 관계를 알고 있다. 이소의 두 눈이 떨렸다.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읽어 내린 노파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폈다.
“대신 온전히 깨끗한 것이어야 해. 아주 반질반질한 것으로.”
“정말로 운명이 바뀔 수 있소?”
“바꾸고는 싶고?”
“……할 수만 있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노파와 마주한 눈동자가 깊고 어둡게 침잠했다. 지난 시간을 모두 던져 버리고 새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할멈의 말마따나 백 냥은 큰 값이 아니다. 돌연 이소의 어깨를 누군가가 살짝 감싸 쥐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화공이었다. 언제나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말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감언이설로 눈먼 돈을 뜯어내는 작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교수는 왜 아직 여기 있습니까. 문을 아직 못 찾았…….”
노파의 말에 화공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아……, 아하학, 하하…. 괜한 걱정을 했군요. 벌써 찾아 이리 곁에 두고 있을 줄이야.”
노파는 주름진 얼굴을 잔뜩 구기며 낄낄 웃었다. 그리고는 문이라느니 열쇠라느니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문득 자신의 어깨를 그러쥔 손아귀가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자 이소는 화공을 올려다보았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당황한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이었다. 다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미친 노인네가 뜻 모를 소리만 하는군. 썩 꺼지게.”
화공의 말에 노파는 말없이 골목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소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화공이 뒤따랐다. 언제 사 왔는지 종이로 된 작은 등을 손에 쥐고 있었다. 화공이 이소에게 등 하나를 건넸다. 두꺼운 종이를 하나하나 오리고 접어 만든 등은 안에 초를 넣어 밝히니 그림자가 지며 걸을 때마다 무늬가 땅에 어른거렸다. 새 두 마리가 하늘을 향해 나는 모습이었다. 이소가 부쩍 말이 없어지자 화공은 어린아이를 어르듯 입을 뗐다.
“상인 말은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치도 아마 제가 뱉어 놓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다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지 않았다. 분명 저를 겨냥해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는 심란해하는 제 마음을 위로하려 애써 말을 얹고 있었다. 이소는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에 괜히 나들이를 망친 것 같아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가락지를 하도 집중해서 보기에 홀로 등을 사 온다는 게……. 역시 같이 갈 것을 그랬습니다.”
같이. 이소는 화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를 만나러 몰래 밖을 나섰다. 저도 사내고 화공 역시 사내인데 이이의 목소리만 들어도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목이 메었고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귀가 붉어졌다.
저를 두고 항상 앞서 걷던 주영과 달리 화공은 제 옆에 나란히 서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금 걷다가 갈증이 나려 하면 어느새 식혜 한 잔을 내밀었고 허기가 조금 지면 당과를 입에 물려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제 앞에 필요한 것을 툭툭 잘도 주었다. 무엇보다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어느새 이소의 집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또 만나고 싶다. 두 사람은 멈춰 섰다.
“…저, 나리.”
“예.”
“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존함을 여쭈어도…….”
“오라비께는 발목을 다쳤다 하십시오.”
“네?”
돌연 화공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칼날이 칼집을 빠르게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만으로도 뒷목이 서늘해지고 가슴이 조여들었다.
“누구냐.”
뒤를 돌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는 오늘 걸어서 방 밖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소는 제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 * *
“누구냐 물었다.”
해준의 동공도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인연이라는 것은 마냥 낭만적이라고 할 수 없다. 때로는 지독하게 떨쳐내고 싶은 사람이라도 다음 생에 이어지는 경우가 있었고 잡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일지라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귀찮게 됐군.’
해준은 갓 위에 묶어 놓은 가리개를 풀어 내렸다. 시야만 겨우 확보되는 검은 항라가 장막처럼 어깨에 톡 떨어져 내렸다. 밤이 깊어 어두웠으나 굳이 저놈에게만큼은 제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몸이기에 필요한 것만 취해 얼른 자리를 떴어야 했는데.
저를 아십니까.
그러나 제가 아는 얼굴과 목소리, 너 역시 이 세계에 저처럼 발을 잘못 들인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분칠을 하고 밖을 나선다. 신이 작은지 절뚝이며 걷는 모습에 당장에라도 업어 주고 싶었고,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큰 눈을 보며 예전처럼 마음이 갔다. 그리고 오늘 자신의 옆을 걸으며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옷깃 안으로 보이는 붉은 자국에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너 역시 누군가에게는 귀한 정인일 테지. 그런데 왜 너의 그 사람은 네가 이런 꼴로 다니고 있게 만드는지. 해준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저 놈이 네 정인이라면 내 이 정황이 모두 이해가 가는구나.’
검은 천 틈으로 낯이 익은 사내가 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낯짝이 곱기도 하지.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그건 그렇고 굉장히 진득한 악연이다.
“천을 걷어내라.”
이소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주영이 일찍 돌아올 줄 몰랐다. 분명 희주가 기생집에 간다고 했는데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인가. 입술을 벙긋거리며 놀란 모습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한 것과 같았다. 해준이 이소의 곁에서 한 걸음 멀어졌다.
“오, 오라버니. 이 분은 그저…….”
“우연히 길을 지나다 이 낭자가 발목을 접질려 제대로 걷지 못하기에 댁에 모셔다 드리기만 한 것이오.”
항라 안에서 뻗어 나온 목소리가 또렷하게 주영에게 닿았다. 몸집이 커다랗고 말투에 위엄이 깃든 것으로 보아 무관인가 싶다. 한데 이 시간에 어찌 제 아우와 함께 있단 말인가.
“그 말을 어찌 믿지? 그러기엔 네 놈들이 들고 있는 그 등이 꼭 같은 것이구나.”
이소는 손을 떨며 초롱 등을 든 손을 떨어뜨렸다. 종이 등 안에 붙어 있던 작은 초는 순식간에 새 두 마리를 잡아먹고 자루까지 활활 태웠다.
‘아까워라. 일부러 같은 디자인으로 고른 것인데.’
해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소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듯 입술을 떨었다. 해준이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들었다.
“옹주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곧이외다. 금일 저자에서 이와 같은 초롱을 든 자만 서른이 넘을 것이오. 누이를 아끼는 마음은 이해하나 괜한 오해는 나도 사양하겟소.”
해준의 앞에 날이 선 검을 들이댄 사내는 한참을 그렇게 요지부동의 자세로 해준을 노려보았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같은 양반이고 수상한 낌새는 없어 보인다. 시선을 내려 제 아우를 훑어보자 이소는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 송구합니다. 야시장에 진귀한 등을 판다기에… 그것을 보러 갔다가…….”
“보러 갔다가?”
오라비께는 발목을 다쳤다 하십시오.
화공이 가르쳐 준 대로 말해야 하는데 호흡이 가빠지고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이소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영은 제 거짓말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하지만 제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곁에 선 이 백옥같은 사내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어떻게든 들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사 준 신발이 작아,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습니다. 그때 이 선비님께서 우연히 지나가다 도와주신 것입니다.”
이소가 치마를 꼭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고양이 앞의 쥐 새끼마냥 벌벌 떤다. 해준은 당장 손목을 잡아채 돌아서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주영은 칼을 거두었다. 돌계단 위에서 고압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주영이 해준에게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내 누이를 데려다주어 고맙소.”
“아닙니다. 저라도 늦은 시간 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오라비로서 마음을 많이 졸였을 것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주영의 누그러진 말투에 해준이 능글맞게 답했다. 여태 항라를 벗지 않는 것이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만 주영은 시선을 돌려 이소를 쏘아보았다.
“너는 어서 들어오지 않고 거기에서 무얼 하고 있어.”
“예, 예에.”
이소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종종걸음으로 주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주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몇 번 꺼내 입지 않은 옷의 끝부분이 볼썽사납게 지저분해져 있었다. 어디를 그렇게 쏘다닌 것인지 칠칠치 못하게 진흙도 묻어 있고 입가에는 흰 설탕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거지꼴이 따로 없군. 실상 그렇게 엉망도 아니었지만 제 옷의 주름이 하나라도 가면 심하게 여종을 매질하는 예민한 성질을 타고난 주영은 제 눈 앞에 선 이소의 꼴이 시전 바닥에 구르는 개처럼 보였다.
“선비님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 내 너를 그리 무례하게 가르쳤더냐.”
“아…….”
주영의 곁에 서서 허리를 꾸벅 숙인 이소가 해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 거짓말을 주영이 믿어 주는 눈치에 한결 안심이 된 듯 목소리의 떨림은 많이 줄어 있었다.
“신세가… 많았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세. 해준은 오래전 대학 캠퍼스에서 제게 고개를 숙였던 스물일곱의 어린 청년을 떠올렸다. 성격부터 쓰는 단어까지 어떤 부분은 제가 살던 세계에 있던 윤이소와 꼭 같은 부분이 있다. 오묘했다.
“신세는요. 무사히 모셔다 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다정한 오라비께서 친히 마중도 나오시고.”
이소는 얼굴이 비치지 않는 화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주영은 낯선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소를 내려다보다 축객령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이소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해준 역시 몸을 돌렸다. 아마… 한동안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해준은 이제는 하나둘 불이 꺼져 가는 저자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근 두 달만에 이곳을 빠져나갈 단서를 찾은 듯했다.
* * *
“벗어라.”
“오, 오라버니.”
“내가 벗길까.”
이소는 고개를 저으며 고름을 움켜잡았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다. 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온 후 주영의 손에 질질 끌려 안채까지 들어왔다. 몸을 섞을 때는 항상 후원 뒤에 있는 제 방으로 주영이 왔었는데. 주영의 방에서 윤 대감의 방까지는 고작 열 걸음. 신음 소리가 새어 나가면 그대로 윤 대감과 이 부인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아무리 액받이로 저를 데려와 주영의 밤 시중을 드는 것을 쉬쉬하고 있다 하나 그놈이 안채까지 들어와 교성을 지르는 것까지는 용인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제 앞에 앉은 주영의 푸른 낯을 보고있자니 고집을 피우며 감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이소는 조용히 저고리를 벗어 내렸다. 아직 어젯밤 흔적이 가시지 않은 흰 피부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가득했다. 치마끈을 풀고 버선을 접어 바닥에 내려 두었다. 조막만 한 천으로 아래만 겨우 가린 채 주영의 앞에 서자 새삼스레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젖 봉오리도 없는 밋밋한 몸인데 무엇 하러 가슴까지 가린단 말이냐. 손을 내리고 이리 와 앉거라.”
이소가 조금씩 걸어와 주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돌연 주영이 바짝 다가와 이소를 뒤로 넘어뜨린 후 발목을 덥석 잡은 채 내려다보았다. 팔을 뒤로 물리고 엉거주춤하게 앉은 이소가 얼굴을 붉히며 주영을 불렀다.
“발, 발은 왜.”
“다쳤다면서. 어디가 아픈가 보려 했지.”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꾹꾹 눌러도 보며 어디 부은 곳이 없는지를 살피던 주영은 이내 발가락과 뒤꿈치가 조금 까진 것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 꽃신 중에서는 맞는 것이 없어 신경을 써 달라고 했거늘 여태 그 작은 신을 신고 돌아다니고 있었나. 일을 시킨 화혜장 놈을 족쳐 놔야겠다. 주영은 하얗고 작은 발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꼭꼭 눌러 주었다. 저를 벗겨 놓은 후 시중을 들라 할 줄 알았건만 난데없이 아픈 발을 눌러 피로를 풀어 주니 이소는 천천히 긴장을 풀고 봉침에 머리를 기댔다.
“좋으냐.”
“예에….”
“희주 년의 말로는 네가 몸종도 하나 없이 혼자 나가겠다고 했다던데.”
희주의 이름이 나와 조금 뜨끔했지만 이소는 아까 화공이 알려준 거짓말을 되뇌이며 짐짓 모른 척을 했다.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그리 한 것입니다.”
“그래?”
주영의 손가락이 발바닥의 움푹한 부분을 세게 눌렀다. 종아리가 움찔댔다. 얼마나 세게 누르는지 자갈을 밟은 것 같은 고통에 이소가 허리를 들었다.
“아, 아픕니다.”
“그런데 제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하기에, 내가 조금 타박을 했다.”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아픔이었다. 아프다고 말했는데도 주영은 못 들은 척 발바닥을 꾹꾹 눌러댔다.
“오라버니, 정말 아프…….”
“울더구나.”
이소가 허리를 일으켜 주영과 눈을 마주쳤다. 주영의 눈동자 주위가 유난히 붉어 보였다.
“네 종년은 너를 기다리며 매질을 견뎠다.”
이소의 눈동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일각(一刻)에 열 대씩. 어떤 중한 일이 있더라도 제 주인을 모시는 것이 가장 우선이 돼야 할 종년이, 주인은 발을 다쳐 오밤중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는데 시시덕거리고 있는 꼴이 무척 거슬리더구나.”
“희주는……. 희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발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소는 약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넌 낯선 사내에게 웃음을 흘리며 돌아오니, 희주가 얼마나 너를 원망할까.”
“……아윽, 혀, 형님.”
이대로는 발등이 세로로 접힐 것 같아 이소가 손을 끌어다 주영의 손목을 잡았다. 얼마 전 작은 신에 쓸려 까져버린 살갗이 주영의 손가락에 밀려 발갛게 찢어지고 있었다. 주영은 여상한 목소리로 제 발을 으스러트릴 기세였다.
“기다렸을 텐데. 아씨가 돌아와야 이 매질이 끝날 텐데…. 금방 오신다더니 혹 액받이 질이 이골이 나 도망을 간 것일까, 그럼 나는 여기서 죽는 것일까….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나중에는 물을 뿌려 깨워도 살려 달라 애원하지 않더구나.”
“희주를 어떻게 하신 거냐고 물었……, 으읍!”
이소가 몸부림을 치며 발을 빼자 순식간에 몸을 뒤집은 주영이 이소의 뒤통수를 보료에 깊게 눌렀다. 다년의 훈련과 검술로 다져진 단단한 몸이 허리에 올라타 목을 짓이기자 무게보다도 숨이 막혀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지가 무력하게 파드득댔다.
“거짓말을 할 거라면 적어도 다리를 저는 성의라도 보였어야지.”
“아으윽……!”
“멍청한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나를 졸졸 따라오는 걸음걸이가 참으로 가볍더구나. 맞아, 넌 거짓에 면역이 없어.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가는 목을 누르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입 안에 고여 있던 침이 왈칵 흘러나와 검은 보료를 적셨다. 손바닥으로 뒷목을 강하게 누르며 긴 손가락으로 턱 아래 여린 살을 움켜쥐자 숨통이 조여들었다. 숨이 모자라다. 꺽, 꺼흑, 신음 대신 좁은 목구멍 안으로 공기가 들락날락하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주영은 한참을 더 짓누르다 이소의 눈동자가 희게 넘어가기 직전 손을 떼어 주었다.
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강한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는 이소를 내려다보며 주영은 천천히 허리띠를 풀어냈다.
“하아……. 하… 하으…. 콜록, …하…….”
부어오른 입술 옆으로 타액이 흘렀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꺼덕대는 주영의 좆이 보였다. 무엇 때문에 발기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미 빳빳이 서 있는 검붉은 기둥을 보며 이소의 눈가가 젖었다. 입으로 해야 하나. 파들거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려 일어나려 하자 주영이 고개를 저었다.
“엎드려 있거라. 사내 좆만 보면 빨고 싶어 질질 싸는 꼴이라니.”
“……흐으.”
“그놈에게 웃음을 흘릴 때도 머릿속으로는 그런 음탕한 생각뿐이었느냐.”
화공을 가리키는 말에 이소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분은 정말로 모르는, 아으읏…!”
주영이 제 손가락을 길게 핥은 뒤 봉곳하게 솟아오른 둔부 사이 구멍으로 푹 찔러 넣었다. 들어가는 길이 뻑뻑하다. 무엇도 들락날락한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주영은 내벽 곳곳을 더듬어 걸리는 것이 없는지를 확인하였다. 모르는 놈이라는 말은 거짓일지언정 몸을 섞은 것은 아닌 것이 확실하군. 그러나….
“형, 형님……! 형님, 아픕니다, …약을, 약을 발라야 합니다!”
저를 받아야 하는 날이 되면 언제나 내벽 안쪽까지 물질을 하여 꼼꼼하게 닦아 내던 이소였다. 시중을 하는 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벽이 오물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이 썩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하필 다른 놈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난 직후라 애꿎은 질투가 들끓었다. 손가락을 세워 내벽을 콱콱 찍어 누르자 가는 허벅지가 고통에 버둥댔다.
“으흑, 아…, 아픕니다…. 형님, 흐흐흑, 그리하시면, 아픕….”
“눈을 파 버리고 싶었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넋을 놓고 그놈을 보더구나.”
이소가 바닥에 엎드린 채 꺼이꺼이 울었다.
“아니야, 아……! 흐아…! 아파…! 아파…! 흐으… 아!”
향유 따위는 없었다. 여인이 아니기에 마구잡이로 쑤신다고 젖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요하게 안을 문대고 비비고 쑤셨다. 입구가 꾹꾹 조여들었지만 느껴서가 아니라 칼날 같은 고통에 본능적으로 도망가려고 근육을 조이는 것뿐이었다. 주영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두드러졌다. 고개를 돌려 저녁 내내 마시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아프면 안 되지. 부드럽게 내 것을 받아서 나를 만족시켜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내 술병 입구를 거꾸로 돌려 말랑말랑한 입구에 꾹 밀어 넣었다. 표주박의 꼭지처럼 안으로 말려 들어간 병의 입구 덕분에 술병의 기둥은 붉은 구멍 안으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아……! 아으윽! 싫어, …싫어!”
돌연 내벽 안으로 쏟아붓는 찬술에 이소가 필사적으로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형, 형님! 제발……!”
그때마다 주영의 커다란 손이 볼기를 때렸다. 짜악, 짜아악 흰 살갗에 붉은 손자국이 날 때마다 이소가 주영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크게 울었다.
“아흡…. 끄흐흑…. 흐어엉…….”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내일 네 종년 얼굴은 못 볼 줄 알아라.”
이소는 입술을 물고 버텼다. 손가락과 기둥이 닿았던 내벽보다 한참 더 깊은 곳까지 역류한 술이 장벽에 퍼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병에 반쯤 차 있었던 술을 모조리 구멍 안으로 집어넣은 후 주영은 퐁 소리 나게 술병을 빼냈다.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이소는 다리까지 모은 채 아래로 술을 흘리지 않으려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바짝 오그라든 구멍의 주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흐……아…, 하으…….”
주영이 천천히 손을 들어 이소의 납작한 가슴을 쓰다듬었다. 연한 유두를 간질일 때마다 몸을 뒤틀면서도 허리 아래로는 잔뜩 경직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꼭 보이지 않는 것에 묶어 둔 것 같았다. 주영은 이소의 목덜미를 살짝 베어 물었다. 입술 새로 얕은 신음이 터졌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술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이소야, 좋으냐.”
주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톡 튀어나온 유두를 간질였다. 와중에도 아래가 선연히 발기한 것이 보인다. 내 아우, 내 아이, 내 나비. 이리도 솔직한 몸을 가졌을 줄이야.
“하…, 으응, 흐으……. 으흐흑….”
“내 지금 너를 벌주는 것이야. 좋아하면 안 되지.”
“으응…. 싫…….”
그렇게 고개를 저으면서도 속곳 앞쪽이 축축이 젖어 들고 있었다. 단단하게 만져지는 것이 주영의 배에 닿았다. 주영은 이소의 귓가에 입 맞추며 흐흥, 낮게 웃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하얗고 연한 색의 기둥을 잡고 속곳 밖으로 꺼내 주자 이소가 손톱을 세우고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견디기 힘든 듯했다. 주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아래로 술을 받아먹고도 음탕하게 좆을 세우다니. 앞으로는 상냥하게 풀어 줄 필요가 없겠어.”
이소는 말할 기운도 없는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바닥을 짚은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주영은 그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독한 것. 그 종년이 뭐라고 정말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작정인 거다. 이로 악문 턱이 벌벌 떨렸다. 주영은 서랍 안에서 사탕이 든 자루를 꺼내어 들었다. 다르륵 둥그런 사탕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이소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안 돼…. 안 됩니다, …싫어요. 지금은 싫어요, 형님!”
지금 저걸 먹는다면 온몸에 힘이 빠져 아래 구멍으로 받은 술을 죄다 쏟아 버릴 것이다. 희주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희주를 죽일 수 없었다. 이소가 주영의 팔을 잡고 애원했다.
“괜찮다. 입으로 받을 것이 아니니.”
“……!”
힘을 주어 다물린 다리를 억지로 벌렸다. 이소가 무릎을 붙잡고 애원했다. 싫어요, 싫습니다. 안 됩니다. 그러나 주영은 들리지 않는 듯 활짝 벌린 다리 사이 구멍 입구에 사탕을 갖다 대었다. 이소의 손이 보료를 쥐어뜯듯 긁어내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주영은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왜 자꾸만 화가 치미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 이소가 아까 그놈과 이름 모를 방 안에서 뒹굴고 있는 모습으로 가득했다. 모두가 부정했지만 자꾸만 그런 더러운 상상이 발목을 잡는다.
“엉덩이 들거라.”
“싫어, 싫어…! 하지… 마!”
구슬픈 애원과 비명에도 주영은 사탕을 가랑이 사이에 밀어 넣었다. 이로 깨물지 않는 이상 녹여서 없앨 수밖에 없는 달콤한 구슬이 옴찔대는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머금고 있던 술이 한두 방울 찔끔대며 나왔으나 주영은 모른 척했다. 손안에 든 사탕은 총 세 개. 하나가 들어가고 구멍을 지그시 내려다보았지만 주변 피부가 떨리기만 할 뿐 뱉어 내지는 않는다. 주영은 다시 하나를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치켜든 엉덩이는 마치 처음부터 무언가를 받아먹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하음, 하고 사탕을 잡아먹었다.
“흐즈… 흐으… 마세….”
“하나가 더 남았다.”
마지막 사탕을 꾸욱 밀어 넣자 그제서야 안에서 남은 사탕들이 서로 닿는 듯 달칵 소리가 났다. 주영은 이소의 둔부에 귀를 갖다 대고 입구 주변을 꾹꾹 눌렀다. 달각, 달각. 사람의 내벽 안에서 난다기에는 낯선 소리가 들린다. 여지없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동시에 이소의 절망스러운 울음소리도 커졌다.
“술이 다 데워졌으려나. 그럼 사탕도 곧 녹겠구나.”
“제게…, 제게 왜 이러십니까…. 제게 왜….”
이소는 눈을 가리고 흐느꼈다. 그동안 아무리 괴롭힘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식의 고문같은 화풀이는 없었는데. 짓궂기는 했어도 언제나 제가 싫다하면 다정하게 대해 주었는데. 오늘 마치 주영이 아끼는 장난감을 이소가 부수기라도 한 듯 몹시 괴롭히며 아우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래가 꽉 찬 느낌이 익숙해지려 하면 구슬을 하나 더 밀어 넣었고 입구를 더듬고 배를 눌렀다.
“으……! 으윽, 흐으……!”
오랜 시간 배에 힘을 주고 있어서 그런지 경련으로 온몸이 떨렸다. 아니다. 장벽으로 술을 받았더니 흡수되고 있는 것인가. 그럼 자신이 고통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술이 사지와 머리로 퍼져 양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저 망할 사탕이란 말인가. 온갖 어지러운 생각과 함께 고통과 비슷한 쾌락이 점점 배 속을 타고 오르자 이소는 분노가 일어 주먹으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편해지고 싶으냐.”
“으……! 흐븝…, 이상해…, 이거 정말, 정말 너무 싫…. 싫어, 형님 정말…. 죽을 것 같…….”
“그럼 말해 보거라.”
잘못을 빌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정말로 잘못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흙바닥을 기며 발바닥을 핥으래도 잘못을 고할 수 있었다.
“……자, 잘못했….”
“나를 연모한다고.”
이소의 입술에서 떨어지려던 말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주영은 다시 한 번 이소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그러쥐고 강하게 내리눌렀다.
“나뿐이라고.”
약을 하면 허겁지겁 자신에게 안겨 오는 아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제정신일 때의 이소는 잘 웃었다. 약에 취하지 않을 때는 후원에 올라온 고양이의 밥을 챙겨 주고, 버드나무 가지를 매만지다 책을 읽고, 간식을 먹으며 여종과 종알거리는 그런 평온한 일상을 살았다. 그런 사슴 같은 눈을 하고 있다가도 제가 부르면 언제나 다 죽은 눈을 하고 말없이 옷을 벗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텅 빈 낯이라도 좋았다. 마주하고 있을 수 있었으니까.
“죽어서도, 넌 내 것이라고.”
고통을 참아내던 이소의 눈빛이 멎었다. 수십 번을 짓씹어 피가 맺힌 입술이 붉게 부어올랐다. 주영이 이소의 복부를 지그시 눌렀다. 배 속에 들어 있던 온갖 것들이 한꺼번에 눌리자 이소가 다시 아으윽 하며 얼굴을 구기고 몸을 뒤틀었다. 입술을 물고 말을 아끼며 바닥을 바득바득 기었다. 주영은 이소의 발목을 잡아 주욱 끌어낸 뒤 제 허벅지 위로 이소의 종아리를 얹었다. 다리와 다리 사이에 두 개의 기둥이 꺼덕거렸다.
“그리 말하면 그 희주 년의 목숨도 살려 줄 것이다.”
“아으……! 학……! 아아…!”
고통을 참기가 어려운지 구멍 입구가 조금씩 벌어지며 붉은 내벽에 둘러싸인 사탕의 표면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거칠었던 바깥면이 술과 장액에 녹아 매끈매끈해졌다. 구멍의 틈을 타고 술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주영의 좆 끄트머리가 미끈미끈한 구멍 주변을 문질렀다. 약 하나가 기어코 그 안에서 터져 버렸는지 이소의 동공이 자꾸만 돌아가려 했다. 제대로 정신을 붙잡고 있기에도 힘든 듯 바닥을 긁어내리던 손이 어느새 장골을 붙잡은 주영의 손목에 가 닿았다. 붉은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꺽꺽 넘어가는 호흡에 섞인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형,……형님 것입니다.”
“…….”
쉰 목소리는 껄떡껄떡 넘어가는 타액과 함께 주영에게 닿는다.
“…저, ……저는. 죽어서도… 형님…… 것입니다.”
기어코 받아내고야 마는 반쪽짜리 죽은 연정(戀情). 이소는 주영의 손목을 붙잡은 채 고백인지 부탁인지 모를 것을 애원했다. 그러니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 아이를 살려 주세요. 아래는 빳빳이 세운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종년의 목숨을 구걸한다.
“생각해보마.”
주영은 차갑게 내려다보며 작은 턱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뱀같이 구불거리는 혀로 요망한 입을 막았다. 듣고 싶은 것은 이딴 것이 아니었다. 이런 기분 더러운 고백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흐……!”
주영의 좆이 꾹 다물린 구멍을 무섭게 파고들었다. 선단을 담은 입구가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아직 덜 녹은 사탕들이 기둥 주변을 부드럽게 구르며 달그닥댔다. 내벽 끄트머리에 유달리 질척한 것이 닿았다. 조각조각 깨지고 곧 표면이 물러져 버린 첫 번째 사탕이 귀두 끝에 닿아 질꺽질꺽 녹았다. 꽉 다물린 입구와 달리 근육이 없는 매끄러운 내벽은 꼭 참외 속처럼 부드러웠다. 주영이 허리 짓을 시작하자 이소가 꺽꺽 소리를 내며 몸을 굳혔다.
“흐, 흐읍…! 흡! 흐윽! 읍…! 으으윽…! 읍! 아아악……!”
좆이 빠져나가고 들어오면서 내벽 안을 채우고 있던 술이 저절로 줄줄 흘렀다. 빠져나가는 기둥을 타고 흘러 허벅지와 보료를 여지없이 적셨다. 허리를 들어 강하게 찔러 넣을 때마다 그나마 모양을 유지하고 있던 사탕들이 무력하게 버석버석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주영은 저 역시도 약에 취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윽, 아…! 아으흑, …흐읏! 더…, 더 해…. 계, 계속…. 형님, 형….”
“계속 부르거라.”
이소의 동공이 돌아간다. 신음이 여지없이 터졌다.
“형, 혀엉…. 하앗…, 앗, 아…!”
주영이 체중을 들어 올렸다가 무겁게 찍어 내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단단한 기둥이 푹푹 꽂힐 때마다 이소의 몸 전체가 경련하듯 떨렸다. 이소는 주영의 옷자락을 쥐었다. 어느새 희주의 생사 따위 중요치 않은 듯 오로지 주영의 몸을 원하며 달려들었다. 주영이 아래를 쳐올릴 때마다 숨이 가쁘게 차오른다.
“넌, 내 것이야.”
“으읏……, 윽!”
“사내도 여인도 아닌, 그저 액받이로 쓰고 버리는, 그런 너를 원하는 사람은, 나뿐이야.”
“아……, 으…….”
정신이 아득하게 흐려진다. 점점 쾌감이 아닌 고통만 남는 것 같아 이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주영은 자신을 응시하지 않는 두 눈을 정면으로 고정시킨 뒤 우악스럽게 턱을 그러쥐었다. 칼을 쑤시는 것처럼 허리 짓이 빨라지고 있었다. 이소는 발버둥 쳤다. 무시무시하게 큰 쾌락의 파도가 곧 저를 덮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 턱을 붙잡은 주영과 두 눈이 마주쳤다. 산 채로 잡아먹히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안 돼, 형…, 저…, 저 그만…!”
“한 번만 더 그만 소리를 하면 윗입도 찢어 놓을 것이다.”
질퍽거리며 맞붙은 샅이 빠르게 들쑤시다 종래에 콱 찍어 내렸다. 뜨거운 탁액이 역류하듯 쏟아졌다.
“흐으읏……!”
“씹할.”
이소의 좆에서 희뿌연 정액이 높이 튀었다. 동시에 주영이 이소의 안에 깊게 사정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푹푹 쏟아 낼 때마다 제 몸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남기려는 것 같다. 열이 식지 않았다. 온몸에 기름을 끓인 솥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주영에게 걸쳐진 가랑이가 바들바들 떨렸다.
이소의 안에 방뇨하듯 탁액을 쏟아낸 주영의 좆이 퍽 소리와 함께 빠져나가자 순간 크게 벌어진 구멍으로 남은 술과 사탕 조각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폭포처럼 계속해서 쏟아지는 물에 이소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아……!”
흰 정액과 맑은 술이 섞인 액체가 가랑이 사이에서 댐이 터지듯 콸콸 쏟아져 내린다. 수치스럽고 불쾌했다. 그러나 한 번 벌어진 구멍은 경련으로 다시 다물어지지 않는 듯 활짝 다리를 연 채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내리며 장 안에 담겨 있던 모든 것을 다 배설해 버렸다. 몸을 쥐어짜듯 모조리 쏟아 내고 난 이소는 사지에 힘을 빼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입술이 다 터지고 속눈썹은 멋대로 떨렸다. 아직도 몸 안에 남은 약 기운 때문에 성기만 부자연스럽게 빳빳이 서 있는 상태였다.
주영은 저고리마저 모두 벗어 버린 후 이소를 뒤집어 엎었다. 이소의 몸이 종이짝처럼 쉽게 뒤집혔다. 주영의 목소리가 귓전을 휘감았다.
“도망칠 생각이랑 버리거라. 그때는 이리 다정하게 밤을 보내는 것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번 가랑이 사이에 굵고 곧은 기둥이 푹 꽂혔다. 이소의 몸은 한 번 파르르 떨린 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화공과 함께 한 찰나의 기억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흐릿해졌다.
* * *
“…아씨. 눈 좀 떠 보세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어린 희주의 얼굴이었다. 이소는 눈을 감았다 뜨기를 몇 번 반복하며 희주의 낯을 살폈다. 마음만큼은 벌떡 일어나고 싶었는데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어젯밤 주영의 방에서 온갖 몹쓸 짓을 당한 것과 자신의 방으로 옮겨져 살려 달라고 울부짖으며 아래를 박힌 것. 그 뒤는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뜨니 지금이었다. 이소는 손을 들어 희주의 뺨을 매만졌다.
“미안……. 매질…, 아팠지.”
“…매질이요?”
“……늦어서, 미안해.”
희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소는 찬찬히 희주를 뜯어보았다. 매질을 당했다는 아이치고는 어디 아픈 곳이 없어 보였다. 볼이 터지지도 않았고 눈이 붓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더 엉망이었다. 희주가 물수건을 적셔 이소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어제 주영 도련님께서 일찍 돌아오셨는데 아씨가 없어서 화가 많이 나셨었어요. 다행히 제가 아씨가 곧 주영 도련님 생신에 드릴 선물을 보러 가신 거라고 둘러댔어요.”
“…넌, 어디 해코지당한 곳은 없고? 매질은, 매는 맞지 않았어?”
“네. 아씨께서 워낙 비밀로 하고 싶으셔서 그랬다고 하니 조금 꾸지람만 하시고 마셨어요.”
“하아…….”
희주의 말에 이소는 긴장하고 있던 숨을 놓으며 손을 내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희주에게 화풀이를 하였다는 말은 거짓이었구나. 그리 생각하니 어젯밤 제가 당한 것들이 아프기는커녕 조금 욱신거리는 정도로 느껴질 정도로 고마웠다.
“죽을 좀 올릴까요? 목욕은 상처가 좀 낫고 하셔요.”
“응…. 배고프다….”
희주는 물수건을 개켜 놓고 다시 일어났다. 주영은 궁으로 나갔다고 했다. 이소는 몸살로 앓아누웠다. 며칠을 제대로 변소도 못 갔다. 몸 밖으로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기분이 불쾌할 정도로 후유증이 길게 남았다. 이러다 제 몸이 이상해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되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영은 낮이고 밤이고 불시에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 방이 아닌 후원으로 먼저 걸어 들어와 이소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다정한 말을 건네거나 웃어 주지는 않았다. 이소는 그저 죄지은 사람처럼 한동안 방 안에 앉아 책만 보았다.
*
“내 사흘 안에 돌아올 것이다. 너는 네 주인이 어디 나가지 못하게 잘 보고 있거라.”
“예, 도련님.”
이소는 문 앞에서 희주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주영이 명으로 떠났다. 배를 타고 나간다고 하니 적어도 되돌아온다고 해도 이틀은 집에 없을 것이다. 이소는 희주에게서 간간이 화공의 소식을 들었다. 화공은 여전히 낮이 되면 주막에 없었고 저녁 느지막이 돌아와 술을 기울이다 간다고 했다. 화공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일 이후 이 집 안에 저를 지켜보는 이가 너무 많이 늘었다. 윤 대감은 감히 아비의 방 건너편에서 비역질을 하는 주영에게 버럭버럭 꾸지람을 했고 자신은 따로 불려가 경멸의 눈초리만 받았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제게 해를 가하면 하나뿐인 아들에게 액운이 쏟아질까 봐 차마 모진 말도 못 한 채 말없이 내보냈다.
방으로 돌아온 이소는 제 서랍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함을 열었다. 절그덕, 끈으로 묶어 둔 돈 자루가 세 묶음. 이 집에 들어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은 돈들이었다. 엽전을 한두 푼 모아 100푼이 모이면 한 냥짜리로 바꾸어 보관했다. 머슴의 한 달 치 급여가 일곱 냥, 양반이 입는 고급 누비 솜옷이 넉 냥, 쌀 1섬에 닷 냥. 화대까지는 아니었지만 주영이 준 용돈과 가끔 노리개를 팔아 만든 돈이 서랍 안에 넉넉했다.
‘백 냥.’
백 냥이나 있을 리 없다.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았지만 일흔다섯 냥. 그것도 자신에게는 꽤 큰 돈이었다. 노파가 온전하고 깨끗한 것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으니 구부러지고 못 쓰게 되는 것은 그냥 두고 잘생긴 놈만 골라다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이 집에 있어 봤자 큰돈은 쓸 일이 없고 필요한 것은 주영이 얻어다 준다. 처음 쓰는 복비로는 무척이나 컸지만 제 얼굴을 보자마자 주영과 얽힌 인연을 줄줄 읊어대는 이를 보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생에는 양반으로 태어나게 해 달랠까. 그게 아니면 이번 생은 좀….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밤이 깊어지자 이소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희주에게까지 잔다고 말한 후 하인들의 방에 불이 꺼지자마자 바로 뒷문으로 내달렸다. 시전까지는 고작해야 일각, 지금 뛰어간다면 아마 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나면 오는 길에 잠시 화공을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때 일에 대한 감사 표시를 하지 못했다.
어물전을 지나 어두운 골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이소를 불러세웠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고개를 돌리자 일전에 보았던 그 노파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전에도 여기서 만났었나? 이소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숨을 고르고 그의 앞에 앉았다.
“약속한 것을 가져왔네만, 조금 모자라면… 어찌 되는가.”
노파는 오래 쓴 허리가 뻐근한지 느릿느릿 일어났다.
“고를 수 있지. 이번 생과 다음 생, 또 그다음 생. 네가 원하는 인연은 이어 주고 원치 않는 인연은 잘라 내 줄 수 있지.”
후하다. 물론 얼마를 지불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일흔다섯 냥만큼의 운명은 바꿀 수 있다. 이소는 노파의 앞에 와르르 돈을 쏟아 내었다. 모두 잘 닦아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새 돈이었다.
“이번 생을 바꾸고 싶소.”
노파는 이소가 가져온 엽전들을 내려다보다 불만족스러운 듯 턱을 쓸어내렸다.
“똥물에서 건진 돈이구만. 시작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무슨 소리요, 새 돈이요.”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돈이다. 반질반질한 것만 골라서 가져왔는데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없는 것보단 낫지. 그럼 시작하지.”
노파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놋쇠 항아리에 엽전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기도를 올렸다. 퐁, 퐁 수면을 때리며 잠기는 엽전의 표면에서 바글바글 거품이 일었다. 어두운 밤인데도 유독 그 항아리 안을 비추는 달빛이 밝아 몇 개의 엽전이 안을 채우고 있는지가 훤히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일흔셋, 일흔넷, 일흔다섯, 일흔…, 왜 더 없지.”
“일흔 다섯 냥뿐이오. 조금 모자라게 가져왔다지 않소.”
모자란다길래 아흔 냥은 넘게 가져왔다는 줄 알았던 노파는 미간을 찡그렸다.
“더 없는가.”
“여기 넣은 게 다요.”
노파의 얼굴이 기분 나쁘게 일그러졌다.
“일흔다섯, 그러나 네 놈이 가져온 돈의 출처가 매우 지저분해 이는 반값으로 쳐도 부족하다. 그러니까 고작 서른두 냥도 되지 않는 돈으로는 염라께 기도도 못 올린단 말이지.”
이소는 황당함에 언성을 높였다.
“갑자기 반을 깎는 이유가 무어요? 나는 돈의 출처는 모르오. 그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설명해 주어야 할 게 아니오. …젠장, 다 물러야겠소, 도로 돌려주시오.”
“이미 기도로 올린 돈은 돌려줄 수가 없다.”
화공의 말대로 순 사기꾼이었다. 내 돈 돌려주시오! 항아리를 붙잡고 쏟으려는 이소와 그런 이소의 팔뚝을 붙잡고 이로 물려는 노파의 조용한 싸움이 일었다. 항아리에 든 물이 찰랑찰랑 넘치려 하자 노파가 기겁을 하며 이소를 뜯어말렸다.
“에잇, 이놈이!”
이소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노파가 달려와 항아리를 끌어안았다.
“이미 제를 올렸으면 차라리 서른두 냥만큼이라도 명운을 바꿀 수 있게끔 도와 달라 빌지는 못할망정 어디 신께 올릴 물을 쏟으려 해! 네 놈이 그러고도…!”
촤르르르륵-
그 순간 노파가 안고 있던 항아리에 풍덩풍덩 소리와 함께 희게 빛나는 은화가 와르르 쏟아졌다. 쏟아지고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제가 겨우겨우 모은 엽전이 퐁당퐁당 항아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까워서 발을 동동 굴렀는데, 지금 제 눈 앞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이 엽전이 아닌 귀한 은화라는 사실에 이소는 입이 말랐다. 이 노파와 또 계약한 이가 있었단 말인가. 내가 먼저인데, 내 명운이 먼저인데!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은화의 주인을 마주한 이소는 다시 한번 몸을 굳혔다. 화공이었다.
“이 정도면, 염라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도 마음에 차지 않겠습니까.”
“나, 나리….”
화공이 바닥에 엎어진 이소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소는 화공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치마를 툭툭 털고 일어나 화공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은 다 감언이설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말하는 것이 영 재수가 없어, 내 마음 편하자고 그랬습니다.”
이소를 보며 미소를 지은 해준이 은화가 가득 담긴 항아리를 끌어안은 노파를 응시했다.
“내 오늘 좀 많이 낸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이이의 현생과 후생, 그다음 생까지도 값은 톡톡히 치른 것으로 해 주게.”
“교수가 끼어들어 되는 일이 아니오. 저번에도 말했지만 어서 문이나 찾아서 이곳을 떠야….”
“천지신명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도울걸세. 그리고 이곳에서는 나리라 부르라고 했지.”
해준은 노파가 괜한 소리를 하기 전에 말을 돌렸다. 이만 갑시다. 은화를 모조리 쏟아부은 해준이 주머니를 바닥에 던지고 이소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이소는 엇, 하며 끌려 나왔다.
* * *
두 사람은 밤 시장을 걸었다. 해준은 이것저것 살 것이 많은지 이것저것을 둘러보며 잔뜩 사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은화를 쏟아부었는데도 돈이 남았는지 값도 물어보지 않고 제 눈에 차면 냉큼 사버리곤 했다. 이소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화공의 앞에서 몹쓸 꼴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고 그런 미신에 제 돈을 모조리 쏟아부었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이소가 저를 따라오는 내내 말이 없자 해준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는데.”
“…나리께서 더 많지 않으십니까.”
자신은 고작해야 엽전 일흔 다섯 냥이고 화공은…. 다시 생각해도 그 많은 돈이 항아리에 가득 찰 때까지 쏟아붓는 광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화공은 이소를 내려다보며 놀리듯 웃었다.
“다람쥐 같았습니다. 도토리 안듯 보따리를 잔뜩 웅크리고 가길래 내가 멀리서부터 불러도 못 듣고.”
“……제겐 소중한 돈이라 그랬습니다.”
“다람쥐한테도 도토리가 제일 소중하죠. 뭐, 아무튼 말장난은 관두고. 아, 이거 잘 만들었네.”
해준은 연둣빛 도포와 갓을 하나 샀다. 세조대도 하나 사고 신도 하나 샀다. 항상 흰 옷만 입고 다녀서 질렸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봐 두었던 옷인지 무언가를 사는 데 참 거침이 없었다. 해준이 노리개 상인 앞에 섰다. 이소의 눈이 자연스레 가락지와 노리개에 내려왔다. 해준은 상인과 입씨름 중이었다.
“그러니까 모란이나 종달새 말고, 용이나 봉황 그려진 것은 없소?”
“그런 문양은 나라님이나 하는 것입니다. 나리, 그러지 마시고 옆에 부인 것도 하나 사 주시지 않고. 여기 비녀도 예쁘고 이 꽃노리개도 새로 나온 것인데.”
부인. 이소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상인이 해준의 옆구리를 푹 찔렀으나 해준은 이소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여인 것은 하등 필요 없다. 여기 범 그려진 부채나 주시게.”
“에잉…. 그리 골 부리시다가는 부인께 밥도 못 얻어먹습니다요.”
“갓끈은 붉은색.”
내가 언제 사 달랬나. 이소는 어차피 자신에게 주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괜한 말을 들으니 조금 토라졌다. 그런 이소의 마음을 모르는지 해준은 이것저것 저 혼자만 장을 다 보았다. 손에 신발과 새 갓, 옷감이 바리바리 들렸다.
“잠시 여기 계십시오.”
“어디 가시게요.”
“금방 온다니까.”
해준은 그것을 팔에 걸기도 하고 등에 지기도 하며 혼자 다 들고 잠시 사라졌다가 두 손에 설탕을 굳힌 과일 정과를 들고 돌아왔다. 명에서 유행하는 간식이라 했다. 날이 쌀쌀할 때 즈음 먹으면 좋다고 하여 사 온 정과는 한입 베어 물면 새콤한 과즙이 터지고 유리와 같이 굳은 설탕 벽이 과자처럼 씹히는 신기한 간식이었다. 해준은 이소가 말없이 우물우물 정과를 씹어 넘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맛있소?”
“예, 답니다.”
“그때 댁까지 모셔다 드릴 때 보니 홍문관 교리(校理) 윤 대감 자제인 것 같던데. 그럼 이런 정과는 자주 먹지 않습니까.”
차마 액받이로 그 집에서 살고 있다 말할 수 없어 이소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헌데 그리 맛있소?”
“왜 자꾸 물으십니까,”
맛있다는데도 몇 번이나 묻는다. 사 주었다고 생색을 내는 것인가, 쫌생이. 이소가 해준을 한 번 흘기자 해준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돌연 희고 고운 손가락이 이소의 입가에 톡 닿았다 떨어졌다.
“아이마냥 잔뜩 묻힌 채 혼을 빼고 먹을 줄은 몰라서.”
이소의 입가에 묻은 찐득한 설탕 조각을 떼어 낸 해준이 제 입에 톡 털어 넣은 후 손가락을 쪽 빨았다. 사내치고는 붉은 입술에서 나는 소리가 그리 상스럽게 들릴 줄은 몰랐다.
“그, 그것을 왜 먹습니까.”
“닦을 데가 없어서.”
이소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어 들었다. 해준은 제가 준 손수건을 발견하자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안 버렸네.”
“……이, 이것을 왜 버립니까.”
“소중히 간직해 주다니 감동입니다.”
“간직까지는 아니고…. 이게 쓰다 보니 땀도 닦고 입도 닦고 편해서…그렇습니다.”
어째서 제가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치고는 내가 그려 준 병아리도 안 지워지고 그대로 잘 있고.”
“그, 그건 아껴 쓰느라고!”
“아껴 주다니 고마워라.”
도무지 말로 이겨 먹을 수가 없다. 이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해준과 이소는 한참을 또 걸었다. 해준이 뒷짐을 지고 이소의 앞에서 뒷걸음질로 마주 보고 걸었다. 넘어질 듯도 한데 참 잘도 걸었다.
“넘어지십니다.”
“얼굴 보며 걸으려고요.”
이소는 피식 웃어넘겼다. 해준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요새는 통 안 보이시길래 걱정했습니다. 오라비에게 많이 혼나셨습니까.”
어떻게 혼났는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꾸지람을 많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오늘도 일찍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몰래 나온 것입니까?”
“……엄하셔서.”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오금이 저린다. 정말 빌고 또 빌었음에도 주영은 저를 놔주지 않았다. 폭력에 가까운 밤이었다. 이소는 입 안에서 마지막으로 터지는 당과 과즙을 씹어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항상 주영과 밤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주영을 기다리는 것이 제 일이라고 여겼고 그렇게 사는 것도 제 인생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나은 선택지라 여겼는데.
“응? 왜요?”
자신을 내려다보는 화공의 미소에 자꾸만 마음이 간질거린다. 이 사람이 제대로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저 자신에게 조금 잘 해 주었다고 덥석 마음을 주고 싶어지는 것이 이상했다. 아마 달 때문일까. 언제나 어두운 달밤에 만나다 보니 판단이 흐려지고 감정이 흐트러져 그러는 것일까. 이소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은화는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그림을 그려 팔았지요.”
“병아리와 모과를 그려서 그렇게 많이 벌었습니까?”
“아하하….”
이소의 말을 들은 해준이 큰 소리로 웃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이소가 미간을 찡그린 채 해준을 바라보자 그는 입꼬리를 씰룩대며 바짝 다가붙었다.
“남녀가 교접하는 것을 그려 팔았지요.”
“…예에?”
“사내들끼리 교접하는 것도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은 다 그려서 팔았지.”
이소가 얼른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점잖은 양반인 줄 알았는데 농이라 쳐도 남사스러웠고 진짜라고 해도 듣기에 수치스러웠다.
“그, 그런 것을 그려서 팔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뭐가 부끄럽습니까. 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차라리 솔직한 것이 좋지.”
이소는 얼굴을 붉혔다. 해준은 낭랑한 웃음소리로 다시 뒤를 돌아 몸을 바로 하고 앞서 걸었다. 성큼성큼 걷는 모양새는 여느 양반과 같지 않게 가벼웠으나 경망스럽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걸음걸이를 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듯, 일부러 보란 듯이 춤을 추듯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오히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리께서는 꽃을 찾으면…….”
밤바람에 젖은 흙냄새가 섞여든다. 이소의 홍색 치마가 넓게 나부꼈다.
“이곳을 완전히 떠나십니까?”
“아마도요.”
“그럼 다시는… 오지 않으십니까?”
“그렇겠죠.”
이소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한 치의 서운함도 없이 담백히도 말하는 저 이가 원망스러웠다. 저와 이리 걷고 있으면서도 미련 없이 떠난다고 하는 이가 미웠다. 결국 자신은 화공과 아무 사이도 아니다. 흔한 벗도 될 수 없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세네 걸음 건너에 선 해준은 이소가 훌쩍거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 나직하게 물었다.
“제가 간다 하니 서운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섭섭하면 섭섭하다 말해도 괜찮습니다. 제 앞에서는 편히 말씀하세요. 그래도 됩니다.”
이소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지금도 이리 만나기 어려운데 비밀까지 말해 버리면 저를 괴물 취급할 것 같았다. 해준이 눈물을 툭툭 떨구는 이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참…. 어딜 가도 울보인 건 변함이 없네.”
“그게 무슨 말….”
화공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은 오늘이 처음인데 꼭 저를 오래 보아 왔다는 것처럼 말을 한다. 문득 이소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가볍게 문지른 화공이 미소를 지었다.
“혹 여인의 모습이라 말하기가 어렵습니까?”
젖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제 비밀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알면서도 내내 자신에게 말을 안 한 것인지. 심장이 두려움에 제멋대로 쿵쿵 뛰었다. 혼란한 눈동자를 한 이소를 앞에 두고 해준은 싱글싱글 웃으며 제가 이고 지고 온 봇짐을 슬렁슬렁 풀어 내렸다.
“내가 눈대중으로 대충 맞춰 산 것인데, 아마 맞을 것이오.”
아까 시장에서 산 연둣빛 도포였다. 잘 개켜 놓은 도포를 풀어내려 어깨에 둘러 준 후 고름을 매어 주었다. 고름을 매어 주며 깃은 이리 올리고, 고름은 한 번 둘러매고, 이건 세조대인데 이렇게 차면 되는 것이고……. 한 번만 말해 줄 테니 잘 기억하라고 덧붙이며 이소의 팔을 들어 아이처럼 입혀 주었다.
“이게 다 뭡니까…?”
이소의 젖은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모두 그대를 주려고 한 것이지. 음, 이것만 하면 역시 어색하지.”
해준이 봇짐 끝에 매여 있던 갓을 꺼내 이소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댕기를 매고 있어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머리에 꼭 맞았다. 갓을 고정하는 끈을 턱 밑에 매어 주며 해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따뜻한 체온이 젖은 턱 끝에 가만가만 닿았다. 낙조를 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해가 지나 약관이 되었다 들었습니다. 장옷보다는 갓이 어울릴 것입니다.”
상인에게서 산 붉은 갓끈이 찰랑거리며 쇄골 끝에 닿았다. 갓 아래 두 눈이 마주쳤다. 해준이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잘 어울립니다, 도령.”
결국 이소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터졌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정말 아이처럼 눈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사내 대접을 받은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게 하필 마음을 준 이였고, 하필 떠날 이였다.
“흐으엉……. 진짜 저한테 왜……왜 하필….”
해준은 크게 울음을 터뜨린 이소를 말없이 끌어안고 ‘미안해요.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합니다.’ 하고 또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그 넓은 품에 머리를 기댄 채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기쁘고 벅차서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 * *
“그러니까 저 태우려고 말까지 빌려 오셨다고요?”
이소가 다시 한 번 놀랐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말 타는 것을 좀 배우려고요. 여기 있다 보니 도보로 다니는 것은 영 촉박하여.”
이소는 눈과 코끝이 발개진 채 해준이 신겨 주는 새 신까지 신었다. 여인들이 신는 붉은 꽃신이 아니라 사내들이 신는 발볼이 넉넉한 가죽신이었다. 이리도 편하다니. 처음으로 발가락을 바짝 오므리지 않고도 땅을 밟는 느낌이 어색하면서도 신기했다.
“어찌 제 발 크기를 이리 딱 맞춰 오셨습니까.”
“눈 감고도 압니다.”
신기하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다. 이소는 골목에서 만났던 점쟁이 노파보다 해준이 더 신기했다. 이소는 몇 걸음을 더 걸어보고 뛰어도 보며 좋아했다. 한밤중이었고 들판에는 아무도 없어서 제 어색한 꼴을 들킬 리 없어 더 신이 났다.
댕기를 달고 갓을 썼고, 치마를 입고 도포를 걸쳤지만 뭐 어떤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은 누가 뭐래도 사내였고, 목소리를 죽이고 여인인 척 말하지 않아도 되어 후련했다. 어느새 말에 탈 준비를 마친 해준이 이소를 끌어당겼다. 타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했는데 모는 것은 처음이라 해준은 어설프게 고삐를 쥐었다. 이소가 미소 지으며 말 위에 올랐다. 해준의 가슴에 이소의 등이 닿았다. 달빛이 밝아 달리기 좋은 밤이었다.
이소는 처음으로 여인의 목소리가 아닌 편안한 제 목소리를 내었다. 혼잣말을 하거나 주영과 밤을 보낼 때나 나오는 제 본연의 목소리였다. 아니 어쩌면 화공을 만난 후부터는 자신은 부러 여인의 태를 내려 애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말을 탈 때는 허리를 세우시고 고삐를 바짝 잡으셔야 합니다. 허벅지로 이렇게, 말 허리를 조이세요. 구부정하게 앉으시면 말이 뜀박질을 할 때마다 엉덩이가 아플 겁니다.”
“이렇게 허리를 펴고, 고삐를 바짝 잡고.”
고삐를 쥔 해준의 손 위에 이소의 손이 겹쳐졌다. 치마와 도포가 워낙 풍성해 둘 사이에 옷감이 잔뜩 구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등과 허리가 바짝 맞닿아 있었다. 해준은 아주 오랜만에 이소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다. 물론 제가 알던 짧은 머리도 아니었고 친근하게 웃으며 ‘교수님.’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연인의 얼굴을 한 이에게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모르는 척 어깨에 입술을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말이 걸을 때마다 몸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는 정말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안정적으로 말을 몰았다. 그 순간만큼은 유약한 여인이 아니라 담대한 사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시원합니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조금씩 뜀박질을 시작하자 이소는 고삐를 느슨히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아래로 세게 내리쳤다. 이럇, 소리와 함께 조금 더 속도가 빨라졌다. 해준이 당황한 듯 고삐를 세게 쥐었다.
“자, 잠깐만. 조금 빠른데.”
“긴장하지 마십시오, 순한 녀석 같은데요.”
순하다고? 이게? 살짝 죽을 거 같은데?
“아니, 잠깐만…!”
해준이 긴장해 바짝 고삐를 틀어 올리자 이소가 아하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을 태운 말은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쇄애액, 달빛 아래 갈대를 헤치며 달리는 말에서 한참 동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에서 내려온 이소는 들판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비밀을 말하게 된 후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이소는 눈을 깜박였다. 꿈만 같은 밤이었다. 제가 넣은 일흔다섯 냥이 만약에 화공을 만나기 위한 값이었다면 이미 충분히 치른 것같이 느껴졌다.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응시했다. 유달리 별이 많은 밤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
“고작 옷차림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리도 마음이 후련할 수가 있는지요.”
이소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제 꼴을 보고도 우습게 여기지 않은 것은 나리뿐이셨습니다.”
제가 여인의 모습일 적에도, 지금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적에도 화공은 늘 처음 만난 모습 그대로였다.
“저는 그 집의 액받이로 들어왔습니다. 친아우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두어진 양자도 아니고. 대감마님의 외동아들이 그때 보셨던 제 오라비, 아니 형님이라 부르는 자입니다.”
처음이었다. 제 비밀을 털어놓는 자는 화공이 처음이었다. 마음을 닫고 꽁꽁 숨어 살았을 때는 죽어도 말 못 할 비밀 같았는데 한 번 마음을 털어놓으니 봇물이 터지듯 술술 비밀이 새어 나간다. 화공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이 당신을 힘들게 합니까?”
“……모든 것들이요.”
이소는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이 자신을 조이고 누르고 힘들게 했다.
“나리. 저는요.”
이소는 아주 오랫동안 품어 왔던 제 마음의 조각을 꺼냈다. 액받이로서의 모든 일이 끝난다면, 주영의 업보와 자신의 과오까지 모두 없어지고 유에서 무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제게 다음 생이라는 것이 주어진다면.
“다음 생에는 기필코 여인이든 사내든 평범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여인으로 태어나면 좋은 지아비를 만나 섬길 것이고, 사내로 태어나면 현명한 여인을 만나 비단 관복을 입고 혼례를 치를 겁니다. 아이도 많이 낳고, 벼슬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절대로 이런 여인도 사내도 아닌 반쪽짜리 사람으로는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소가 천천히 숨을 쉬었다. 다시 태어나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주영의 액받이로 들어와 쭉 액운을 받으며 살았는데. 그러면 제 남은 삶에 낀 불운 때문에 파리나 지렁이, 혹은 길가에 채이는 돌멩이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오히려 인간에게 치이는 일이 없이 평화로우니 좀 나을까. 상념에 빠져 있을 때 해준의 목소리가 조용히 적막을 깨뜨린다.
“그럼요. 분명 그렇게 될 겁니다. 제가 대신 값을 많이 치렀잖아요.”
“아하하, 맞아. 그랬지요. 뭐, 사기꾼에게 돈을 다 뜯긴 것 같지만 제법 재미있었습니다.”
해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저를 믿으세요. 다음 생에는 아주 대쪽 같으면서도 선하고 부드러운, 그런 사내로 태어나실 겁니다. 활… 아니, 관복도 입으시고 혼례도 하시고요.”
“여인도 아니고 사내로요? 나리는 꼭 다 내다보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소가 고개를 저으며 못 믿는 눈치로 대꾸하자 해준이 고개를 기울이며 확답했다.
“암요. 제가 언제 실망시키는 거 보셨습니까. 믿으시라니까.”
이소가 기분 좋게 웃었다. 돌연 해준의 손이 이소의 뺨을 살짝 훑어내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다리를 걸으며 보았던 호수보다 깊은 눈동자와 마주한 찰나 숨겨 둔 연정이 고개를 든다. 돌연 몸을 일으킨 이소가 해준의 손을 겹쳐 잡은 후 가까이 다가와 입술을 포갰다. 그의 마음만큼 따뜻한 입술이었다. 몇 번을 더 베어 물던 이소가 문득 황급히 몸을 물렸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앞서 벌인 충동적인 짓이었다. 이런 건 주영과 하던 것이라 너무 당연하게 접문을 했다. 귓불이 새빨개졌다.
“소, 송구합니다. 사내끼리 이런……. 그러니까 저는…. 정말 송구합니다. 잊어 주세요.”
“아니, 나는 괜찮….”
해준이 손을 들어 올렸지만 이소는 그대로 몸을 돌려 인사도 없이 뜀박질을 했다. 얼마나 잘 달리는지 순식간에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이소를 바라보며 해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달렸더니 어느새 사가의 쪽문 앞이었다. 이소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얼른 도포를 벗어 내리고 끌러 내린 갓을 둘둘 말아 숨긴 채 후원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새벽이 깊은 밤, 아무도 이소가 나갔다 온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소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 깊숙한 곳에 갓과 도포를 숨기고 가죽신 역시 종이로 감싸 숨겼다. 언젠가 또 화공을 만나게 되는 날에는 제대로 망건까지 틀어 올리고 만나러 가리라. 새벽 달빛을 받은 옥돌같이 고운 흰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 * *
이틀이 지나고 이소는 윤 대감의 방 안에 불려왔다. 혹시 지난밤 외출을 들킨 것이 아닌가 마음을 졸이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자 윤 대감은 문을 닫고 돌아와 이소의 앞에 오래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한눈에 봐도 낡고 해진 것이 십 년은 더 되어 보였다. 이 집에 들어오며 받은 제 노비문서였다. 윤 대감은 이소가 보는 앞에서 종이를 죽죽 찢어 내렸다. 이소의 눈동자가 커졌다.
“주영이가 곧 부마로 간택될 것이다.”
이소의 시선이 종이에서 윤 대감의 낯으로 옮겨졌다. 문서를 화로에 넣고 모조리 태운 윤 대감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목소리를 낮췄다.
“부마라 하시면….”
“공주의 지아비지.”
이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댔다. 하나뿐인 아들을 굳이 부마로 보내겠다고? 관직에 나갈 수도 없고 첩도 둘 수 없으며, 공주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 다른 이와 재혼도 할 수 없는 허울뿐인 자리. 더구나 막내도 아닌 귀한 아들을 왜 부마로 보내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주영에게 들인 공과 애정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소는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궁에서 사람이 나올 것이다. 액받이를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흠이 잡힐 수 있는 데다, 이리 요사한 꼴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모르니 내 미리 너에게 언질을 두는 것이다.”
윤 대감은 작은 함을 열어 은화 열 냥을 꺼내주었다. 은화 1냥은 400푼. 그에 열 배가 되는 금액을 제 앞에 던져 준 윤 대감은 주영이 궁으로 들어가는 대로 이소에게 조용히 떠나기를 종용했다. 지금 바로 도망을 쳐 버리면 제 아들이 얼마나 길길이 날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최대한 그 놈 모르게 떠나거라. 티를 내지 말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굳이 은화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장 짐을 싸서 나가라면 나갈 수도 있었다. 언제나 바라고 바랐던 일이다. 더구나 부친인 대감이 직접 이리 말씀하셨으니 주영도 더는 어찌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감사합니다, …대감마님. 감사합니다….”
이소는 설레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온 이소는 조용히 붓을 들어 화공에게 서신을 썼다. 곧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염원하며 주영의 혼인 소식도 전했다. 그리고 마당으로 나와 나물을 말리고 있는 희주를 찾았다.
“희주야, 이 서신을 화공께 최대한 빨리 전해 주렴.”
“예, 아씨.”
서신을 전해 주고 마당을 가로질러 방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대문이 열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주영과 맞닥뜨린 이소는 흠칫 놀랐다가 바로 허리를 숙였다. 하루 더 있다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서신을 옮기는 것을 들킬 뻔하였다. 주영은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문을 열자마자 서 있는 이소를 보고 혹 자신을 마중 나온 것인가 기대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소 역시 주영을 보며 살풋 웃어 주었다. 이제는 훌훌 털고 떠날 수 있겠다는 기대가 마음속에 자리하자 그 정도 미소쯤은 어렵지 않게 지을 수 있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주영이 이소의 방을 찾았다. 이소 역시 예정된 수순이라 목욕을 마치고 아래를 혼자 풀어낸 뒤 이불 위에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이제 이 짓도 몇 번만 더 하면 끝이 난다 생각하니 그다지 고역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를 손가락으로 풀어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화공을 생각했다. 제 뺨을 훑었던 그 손가락으로 이 아래를 만져 주면 좋겠다. 그러나 그는 아마 나 같은 사내 말고 여인을 품는 것을 더 좋아하겠지. 그랬으니 그렇게 기생들에게도 웃어 주었을 것이다. 섭섭함이 조금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공의 다정한 눈과 목소리, 시원하게 휘어진 입매를 생각하니 저절로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이소야.’
제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 저를 끌어안은 채 거칠게 허리 짓을 해 주면 좋겠다. 언제나 여유롭고 상냥한 모습이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제게 달려들어 이성을 잃고 입을 맞춰 주었으면 좋겠다. 아래만 풀어야 하는데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손으로 곧게 선 성기를 잡고 찌걱찌걱 위아래를 흔들었다.
“하으…. 나, 나리이…….”
구멍을 넓히는 추삽질과 앞을 쥐어 잡고 용두질을 동시에 하니 금세 이불에 토정을 해 버리고 말았다. 숨을 몰아쉬고 까무룩 잠이 들 뻔했다가 곧 주영이 온다는 생각에 얼른 수건으로 젖은 이불을 닦아 내고 속곳을 갖춰 입은 채 자리에 앉았다. 깔고 앉은 자리가 조금 축축했지만 곧 더 더러워질 것이라 개의치 않았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주영이 방문을 열었고 이내 바로 몸을 겹쳤다. 사흘 만에 만난 주영은 성급하게 몸을 얽었다. 이소는 눈을 감고 익숙하게 주영을 받아 냈다. 여유 없이 아래를 치받는 주영을 끌어안으며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내 선물을 사 왔다.”
“또 말입니까.”
“난 언제나 네 생각뿐이잖느냐.”
두 차례의 색사가 끝나고 늘어진 이소에게 주영이 옷 소매에서 작은 비녀를 꺼내 내밀었다. 전에 말했던 흰 꽃이 잔뜩 달린 화려한 비녀였다. 이소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어코 이것을 사 왔다. 주영은 이소에게 앉아 보라 말한 뒤 머리를 틀어 올려 주었다. 붉은 댕기가 떨어지고 둥글게 말린 머리카락을 단단히 고정한 뒤 가운데 비녀를 틀어 꽂자 영락없는 부녀(婦女)의 모습이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주영이 해사하게 웃었다. 이소는 만족스러운 표정의 주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느냐?”
시무룩한 낯을 한 이소를 보며 주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소는 최대한 주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골랐다.
“형님은…, 제가 여인의 모습이어야 마음에 차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넌 항상 내 마음에 들었지.”
그런데 왜 항상 저를 있는 그대로 봐 주지 않는 것인지. 한때는 주영을 지극히 연모했다. 주영을 보면서 애달파하고 설레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던 어린 날이 있었다. 그러나 제 허리에 둘린 치맛자락과 옥가락지, 노리개 같은 것이 점점 많아지면서 이소는 때때로 혼란스러워했다.
주영은 자신이 사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잠자리에서만큼은 오라비가 아니라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이 사내라는 사실에 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제게 여인의 모습을 덧씌우려고 할 때마다 이이가 원하는 것이 사내인 자신인지 여인인 자신인지 알 수가 없게 돼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소는 말을 돌렸다.
“…부마로 가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버님께?”
“예.”
이소는 손가락을 살살 매만졌다. 주영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러니까, 어차피 부마로 가게 된다면 궁에는 더 영험한 무당들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액받이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소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제 저를 놔주시는 거냐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은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젖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내 혼인 소식에 네가 섭섭했나 보구나.”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주영은 미안한 표정이었다. 이소가 말없이 눈을 깜박이자 주영은 손가락을 들어 이소의 턱을 간질였다. 예의 다정한 눈빛에 이소의 기대감이 고개를 들었다. 티를 내지 말라고 하였으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이소가 손가락으로 이불을 꼭꼭 그러모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제가 어제 대감과 말씀을 나누었는데. 혹시….”
“너도 데려갈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움지락대던 손가락이 우뚝 멎었다. 주영의 손가락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포시 넘겨 주며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셋째 공주 경애는 앞을 보지 못하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지. 이렇게 수려한 신랑이 또 어디 있다고, 이 얼굴을 평생 보지도 못하고 말도 섞지 못하고 산다는 게.”
귀가 들리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공주. 이소의 불안감이 커졌다.
“……형님.”
“너의 집은 똑같이 사랑방 근처에 지어 줄 것이다. 수족들은 모두 내 사람들이니 너는 지금처럼 나와 지내면 된다. 공주는 앞을 볼 수 없으니 오로지 나에게 의지할 것이고, 귀가 들리지 않으니 나와 손으로밖에 대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너는 지금보다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방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부인을 두고 있는 사람과 지금처럼 몸을 섞으라는 말인가. 그러나 주영은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냐는 듯 술술 말을 이었다. 이소는 저를 놓아준다던 윤 대감의 말을 떠올렸다.
“대감마님도… 아십니까?”
“응? 무얼? 아, 너를 데려간다는 것? 글쎄…. 내가 부탁하면 아버님께서도 거절할 수 없을 테지. 내가 부마로 가는 대신 평안도에 있는 땅 천 평을 하사받기로 되어 있거든. 쌀 5천 섬과 정1품의 관직. 아마 궁에서도 천덕꾸러기인 셋째 공주를 데려간다 하니 냉큼 치울 기회라 여겼을 것이다. 누가 눈멀고 귀가 안 들리는 자와 평생을 살 수 있겠느냐.”
“……형님은 그걸 수락하셨습니까?”
이소는 손을 떨었다. 이는 공주나 자신 둘을 동시에 기만하는 짓이다. 아니, 어쩌면 기만당하는 것은 공주뿐일 수도 있겠다. 저 역시 공주 입장에서 보면 주영과 다를 바 없는 몹쓸 놈이었다. 주영이 손가락으로 귓바퀴를 덧그리며 희게 질린 뺨에 입술을 맞댔다.
“그럼. 우리 이소랑 평생 함께 있을 수 있는데 내가 왜 그걸 거절해.”
소름이 끼쳤다. 이불을 그러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벌벌 떨자 주영이 시선을 내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고요가 찾아들자 주영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넌…… 싫어?”
대답할 수 없었다. 이소는 조용히 목울대를 움직여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켰다. 대답 대신 침묵을 삼키자 주영의 시선이 무겁게 이소에게 가 닿았다. 꼭 당장이라도 화병으로 제 머리를 내려칠 것만 같은 긴장감에 이소는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혹시 내가 떠나기를 기다렸느냐?”
“…….”
왜 아니라고 대답을 못 하겠는지. 이소는 천근 같은 혀를 놀려 보려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도리질을 치는 제 모습을 마주하고 거짓을 내뱉기를 관두었다. 초라한 방 안에 갇혀 있던 사내아이가 이제야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다시 평생을 여인의 모습에 갇혀 지내야 한다 생각하니 십 년이 훌쩍 지나서 치졸하고 억울한 마음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뺨을 쓰다듬던 손이 머리채를 잡아 뒤로 눌렀다.
“……흣!”
바닥을 내내 내려다보던 시선이 힘없이 딸려 올라가 주영과 마주쳤다.
“…오늘은 기꺼이 내게 안기기에…, 나와 같은 마음인 줄 알았더니….”
주영의 목소리에 노기가 끓고 있었다.
“혀, 형님.”
“…넌 언제나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는 걸 잠시 잊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쾅 -
부지불식간에 이소의 머리가 병풍을 향해 강하게 밀려났다. 힘없이 딸려간 몸이 모란 병풍에 부딪히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주영이 선물한 비녀가 나뒹굴었다. 쓰러진 집기에 얼굴을 베인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주영이 몸을 일으켜 이소의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으로 내던졌다. 아끼던 화병과 서책, 옷들이 몽땅 바닥에 처박혔다.
“모조리 불살라 버릴 것이다. 네 놈이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다 보니 처지를 잊은 모양인데, 넌 내 액받이로 온 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넌 내 모질고 사나운 운수를 대신 받으며 살아야지.”
“……형님!”
“네가 떠나 버려서 내가 병고에 이르면 이는 누구의 탓이냐. 그것은 네가 날 죽인 것이 아니냐.”
주영이 모진 말을 뱉으며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이소의 눈이 크게 커지며 주영에게 달려들었다.
“안 됩니다!”
“왜, 여기에 뭐 귀한 것이라도 감추어 놨어? 도망칠 때 쓸 패물이라도 숨겨 놓은 것이냐?”
아무리 달려들어 팔과 다리를 저지해 보았자 평생을 검술과 말을 탄 사내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주영은 이소에게 검 대신 붓과 바늘을 주고 말 대신 가마를 태우며 길렀다. 주영이 이소의 댕기를 잡아 휘두르자 이소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주영이 옷장을 통째로 엎어 안에 있는 물건들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이내 허 참, 하며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소는 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갓과 도포…. 가죽신.”
“…….”
“내가 없을 때마다 다른 사내를 끌어들인 모양이로구나.”
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이소의 눈에서 눈물이 토독 떨어졌다. 결국 주영은 곧 죽어도 자신을 사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소가 이를 악물고 해준이 선물한 갓과 도포를 끌어안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주영의 발길질이 더 빨랐다. 콰당탕 하며 뒤로 넘어진 이소의 머리로 무거운 병풍이 쏟아져 내렸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후원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하인들과 대감까지 깨어 후원 앞마당에 섰다. 이소는 숨을 색색 내쉬었다. 주영은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했다. 이소의 눈 앞에서 해준이 선물한 도포를 모조리 찢어발기고는 갓도 구겨 버렸다. 눈물이 났다. 붉은 세조대는 불이 붙은 초를 던져 태워 버렸다. 내 것인데. 화공이 준 내 선물인데. 이소의 코가 붉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물이 주륵주륵 났다.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주영이 엎어진 이소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 내렸다. 저고리에 아래는 속곳만 걸친 채 마당으로 질질 끌려 나온 이소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인들이 히엑 하고 놀라 입을 막았다. 윤 대감과 이 부인 역시 소리를 지르며 주영의 앞에 섰다.
“이놈도 데려갈 것입니다.”
“네 놈이 기어코…!”
“제 혼사를 담보로 아버지가 받은 것들이 그리 큰 데, 저라고 제 것 하나 가져가지 못한다면 이는 불공평한 처사가 아닙니까.”
주영이 발로 이소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소는 힘없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미 못 볼 꼴을 잔뜩 보여 수치스러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린 채 끈 떨어진 인형마냥 정신이 멍했다. 대감은 이 혼사를 진행시키고 싶어 할 것이다. 주영은 자기 자신을 담보로 눈과 귀가 먼 공주에게 장가를 가는 대신 이소를 데려갈 것이고, 윤 대감은 이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자신은 다시 한번 팔려 간다. 윤 대감에게서 그의 아들에게. 이제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속박의 굴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이놈을 데려가지 못하게 한다면, 혼사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이 망할, 썩을 놈아! 저놈이 뭐라고 이 중요한 혼사에 초를 친단 말이냐!”
“제가 제일 아끼는 것입니다.”
주영이 이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제 것이라구요.”
형형히 빛나는 등불이 주영의 낯을 비췄다. 부어오른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주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눈은 이소를 보고 있었지만 낮고 서늘한 목소리는 이 마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선포였다.
“네 놈이 도망친다면, 너와 닿은 것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
“제일 먼저 어린 희주 년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겁간할 것이고, 기생집에 팔아 버릴 것이다. 아직 어리니 찾는 이가 많겠지.”
이소의 눈이 떨렸다. 희주는 여종이라 불리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집에 소속된 것이 아니었다. 액받이인 저를 시중들러 온 아이로, 이소가 자유의 몸이 되면 희주 역시 어머니께 보내 주기로 약조한 바가 있었다. 주영은 냉한 눈으로 이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찬을 봐 주었던 유모의 손을 자를 것이고, 옷감을 대어 주었던 종놈의 눈을 파낼 것이며, 방을 치워 주었던 할멈의 다리를 불로 지질 것이다.”
“……으, 으흑.”
“네 놈이 예뻐하던 고양이는 목에 끈을 매어 준 뒤 달리는 말에 매달아 놓을 것이다. 몸집이 작아 재미도 보지 못하고 금세 죽겠구나.”
“…안 돼, 안 돼….”
이소의 손톱이 흙바닥을 긁어내렸다. 도망을 치면 저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나락으로 굴러 떨어뜨릴 것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주영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주영이 이소의 뒷목을 잡은 후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나와 함께 갈 거지?”
저를 안은 주영의 어깨 너머로 겁에 질린 하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개중 가장 희게 질린 얼굴을 한 어린 희주의 눈과 마주친 이소는 입술을 떨었다. 미안해, 미안해. 결국 이소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습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숨을 죽이고 울자 주영의 손이 이소의 등을 차분히 두드렸다. 주영은 몸을 일으키며 이소를 안아 들었다. 윤 대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주먹을 쥐고 부들거렸다. 주영은 하인들과 대감 부부를 지나 안채로 걸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앞으로 궁에 갈 때까지 이 아이는 내 방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내보내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
액받이 종놈 하나를 갖겠다고 부마가 되기를 자처한 주영은 그렇게 혼사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방 안에 이소를 가두어 놓은 채 며칠을 지냈다. 밤만 되면 몸이 부서져라 색사를 했고 낮에는 방치하듯 내버려 두었다.
방 안에서는 딱히 여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 외 행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변소를 갈 때도 종이 따라붙었고 서책을 읽는 것도 주영이 가져다주는 것만 받았고 책을 돌려줄 때도 주영이 훑어보았다. 혹시 밖으로 빠져나갈 여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희주가 종종 들러 몸을 닦아 주었지만 어떤 이야기도 않았다. 화공에게 보낸 서신의 소식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저 궁금해만 할 수 있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 * *
보름이 더 지났다. 주영의 혼사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공주에게 선택권은 많지 않았기에 주영은 간택령이 내려지자마자 바로 궁으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기존 있었던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정1품만 하사받은 후 궁과 사가를 번갈아 가며 지낸다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량에 가까울 정도의 일상을 지내면 되는 것이었으나 주영은 사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무예를 닦기도 하며 부지런히 지내기로 했다. 그 점을 궁에서는 무척 높이 산 듯싶었다. 또한 앞이 보이지 않는 공주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가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이를 배려해 손바닥에 글자를 써 담소를 나누는 다정한 성격에 감복하여 기존 내리기로 한 현물을 배는 더 주었다. 윤 대감의 입이 귀에 걸렸다.
*
주영의 혼삿날이었다. 산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시간, 관복을 입은 주영의 앞에 앉은 이소는 망연하게 제 앞에 놓인 옷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활복이 아닙니까.”
“내 혼삿날이 아니냐.”
“……형님과 공주의 혼사이지, 제 혼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도 이제는 네가 챙기거라. 오늘 밤 내가 갈 터이니.”
주영은 이소의 말에 답하기 전에 내의 안에 작은 사탕 주머니를 넣어 주었다. 신혼 첫날밤 대놓고 창기 취급이라니. 당장 빼서 산산조각 내 버리고 싶었으나 주영은 옷깃을 단단히 여민 후 입을 맞췄다. 제 의견은 그대로 묵살당했고 이소는 하인들에게 활복이 입혀진 채 밖으로 나왔다.
주영은 제가 주기로 했던 흰 꽃 비녀를 머리 장식으로 올려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윤 대감이 기함을 했으나 이소는 체념한 표정으로 가마에 올랐다. 기만이 하늘을 찔렀으나 누구도 이에 대해 감히 반발하지 못했다. 어쩌면 주영뿐만 아니라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이 혼사를 그저 빨리 해치우고 싶어 하는 행사로 여기는 듯했다. 연지곤지를 찍은 채 가마에 앉아 있을 때였다. 문득 작은 창이 열리며 희주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씨.”
“……희주야.”
활복을 입은 이소를 보고도 희주는 놀라지 않았다. 평소처럼 웃지도 않았다. 함께 저자를 돌아다니던 때가 그리웠다.
“아씨, 너무 걱정 마셔요.”
“……내가 미안해. 나는 도망 안 갈 거야, 너랑 한 약조 지킬게. 내가 궁으로 가면 너는 바로 짐을 싸서 어머니께 돌아가. 그건 내가 도련님께 말씀드려서….”
불현듯 희주의 손이 가마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화공 나리의 답신이에요. 읽고 나면 찢어서 삼키셔요, 꼭.”
“너, 이걸 어떻게….”
이소가 놀란 낯으로 희주를 마주했다.
“아씨, 저희 걱정일랑 마셔요. 아무도 안 죽을 거예요. 그러니 이번에는 부디 멀리 도망가셔요.”
희주가 씩 웃었다. 이소는 당황해 몸을 틀었다. 가마가 소란하게 움직였다.
“나리께서 곧 도착하실 거예요. 도망칠 적에는 거추장스러우니 이 이상한 옷일랑 벗어 버리세요. 그리고 이제는 본래 모습으로 사셔요.”
“희주야, 희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문이 닫히고 이소의 치마폭으로 작은 쪽지가 툭 떨어졌다. 이소는 얼른 고개를 내려 서신을 펼쳐보았다.
[卽迎]
즉령. 곧 데리러 가겠소.
두 글자를 읽자마자 이소는 편지를 얼른 구겨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꿀꺽 삼키고 혹여 누군가 틈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입술을 축이고 창을 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이소는 천천히 족두리를 벗어 내렸다. 화공이 답을 해 왔다. 어쩐지 이번에는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리에 묶은 기물을 모조리 풀어내고 저고리와 당의를 벗어 내렸다. 가마가 좁아 어깨를 뒤척이며 겨우 걸친 꼴로만 만들고 흰 저고리와 속바지만 남겼다. 팔을 들어 머리에 꽂힌 화관을 모조리 뽑아냈다. 얼굴에 찍은 연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흰 소매가 붉게 물들 때까지 문질러 닦았다. 제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는 몰라도 이 거짓이 가득한 혼삿날보다 우습지는 않을 것이다.
돌연 바깥에서 둥둥 북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부마가 행차할 때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는 태평소라고 하였는데 어찌 북이 울리는가. 심지어 무슨 연유로 이리 긴박하게 들리는가. 사람들의 발소리가 다급하게 바닥을 때렸다. 종종 이소가 앉은 가마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지 앉은 자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소는 천천히 가마의 발을 열었다. 그리고 보았다. 타는 노을처럼 붉게 질린 화염을,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달린 불 주머니를. 평온해야 할 셋째 공주의 혼삿날, 부마 주영의 본가로 군졸들이 창과 화살을 든 채 들이닥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윤 대감의 고함이 들렸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칼을 들고 부마의 사가를 넘는 것이냐!”
“이제는 아니지. 지금 당장 모반에 가담한 홍문관 교리 윤자평을 의금부로 압송하라는 명이오.”
“……모반이라니?”
윤 대감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난데없이 집을 털어 가는 군졸들을 바라보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이제야 겨우 궁에 연을 이었는데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의금부 소관이 형지를 열어젖혔다. 지난달 해월관 외 다섯 곳의 기생집에서 좌의정 김중억과의 거래가 있지 않았습니까. 윤 대감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것은 부마 간택을 위해 종친부 어르신들을 뵈러 간 자리였다. 총 열 분이 오셨고 내가 하나하나 모두 술을 따라드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윤 대감은 큰 그릇이 못 되었다. 고작해야 아들을 공주와 이어 주는 대가로 받은 땅과 쌀 몇백 섬이 다였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혼사에 대한 얕은 거래를 한 것뿐이었다. 소관은 울먹이는 윤 대감을 내려다보며 턱을 매만졌다.
“좌의정 김중억이 대감의 장자인 윤주영에게 대군마마를 압살하라는 서신을 전달한 것은 모르셨나 봅니다.”
윤 대감의 눈이 매섭게 흔들렸다. 뭘 전달해? 누가 누구를 죽여? 얼굴이 희게 질린 대감을 보며 소관이 고개를 저었다.
“눈이 멀고 귀먹은 공주와 혼인한 부마만큼이나 써먹고 버리기 좋은 패가 없었나 보죠.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윤주영은 서신을 받았습니다. 대감 역시 추국장에 가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구야! 도대체 누가 그딴 망언을 했단 말이냐!”
윤 대감이 달려들어 소관의 얼굴에 모래를 뿌렸다. 입술을 진득하게 핥은 소관이 허리에 찬 주장으로 대감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골이 울리는 충격에 윤 대감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대감! 하인들은 놀라 말을 잃었고 이 부인만 달려와 남편을 붙잡았다. 소관이 얼굴을 털어 내며 뇌까렸다.
“모두 끄집어내라, 윤주영도 찾아.”
소관은 자기 할 말을 마친 뒤 나장들에게 일갈했다. 의금부 나장들이 저택의 곳간을 열고 안에 있는 물건들을 끄집어내고 하인들을 끌어 내렸다. 곳간 가득 찬 쌀가마와 이 부인의 패물함이 마당으로 옮겨졌다. 예물 명목으로 받은 온갖 재산과 패물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윤 대감과 이 부인의 비명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이소는 그 틈을 타 가마에서 벗어나 뛰기 시작했다.
붉은 관복을 입은 군졸들이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소는 나무 뒤로 숨어 있다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꽃신 따위 내던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소는 대문까지 두어 걸음을 남기고 뜀박질을 멈췄다. 언제나와 같이 낮게 제 목을 조르는 목소리가 저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어딜 가려고.”
관모를 벗은 채 칼을 든 주영이 이소의 앞을 막았다. 이미 어느새 누군가를 베어 낸 듯 얼굴과 관복에 검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몇 걸음만, 정말 몇 걸음만 더 가면 대문이었다. 대문을 지나 냇가를 건너면 들판이 나온다. 들판을 지나 산허리를 향해 내달리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 소란을 틈타 도망쳐야만 했다. 그러나 주영을 마주한 제게는 무기 한 자루가 없었다. 이소는 맨발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이리 자기밖에 모를 줄은 몰랐는데, 그리 달랬음에도 기어코 내게서 도망을 가려는 것이냐.”
“…이미 모든 것이 어그러졌습니다. 의금부 나장들이 찾고 있으니 형님께서도 저를 잡을 것이 아니라 몸을 피하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지 말거라.”
주영이 피식 웃었다. 주영의 뺨이 핏물로 붉었다. 죽어서도 저승에서 기어 나와 이소를 붙잡을 낯이었다.
“네 말대로 모든 것이 어그러졌으니, 이런 불쌍한 나에게…. 너라도 남아야 되지 않겠느냐.”
“……형님.”
“지금이라도 내 손을 잡는다면, 모두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으마.”
칼이 돌바닥을 끄는 소리가 거칠었다. 몇 사람을 베었는지 날 선 칼날에서 떨어진 핏물이 땅을 적셨다. 제게 하인들을 베어 버린다고 말했던 것들은 위선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람을 벌레처럼 죽일 수 있는 이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주영이 이소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너라, 내 손을 잡고 명으로 가자. 함께 떠나자.”
이소의 등 뒤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젖은 기둥이 닿았다. 누군가의 피가 튀어 축축했다. 주영의 등 뒤로 부상을 입은 군졸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평소 주영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수하들이 주영 하나를 지키겠다고 궁에서 내려온 자들을 베고 있었다.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이소의 등 뒤에 섰지만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기둥 뒤에서 주영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참상의 중심에서 주영은 오로지 이소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만 놓으면 편히 살 수 있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야. 이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싫습니다.”
이소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는, 사내도 여인도 아닌 채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형님을 기다리면서 분을 칠하는 것도, 말 대신 가마에 오르는 것도, 내 이름 한 자 없이 누군가의 액받이로 사는 것도….”
이소. 어미와 아비가 모두 죽고 수렁에서 건져온 아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 한자를 받았지만 그조차도 비웃는다는 뜻으로 이소(貽笑)라 불리었다. 자신은 계륵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계륵이어도 스스로는 살아 있고 싶었다. 작은 장닭이어도 좋으니 온전히 내 삶을 살고 싶었다.
“…모두 그만둘 것입니다.”
이소의 입술이 떨렸다.
“…네가 떠나면, 전에 말했듯 네가 아끼는 것들은 모두 죽일 것이다.”
주영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소는 입술을 짓씹었다. 하인들이 뒷문을 통해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희주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소는 달리기 시작했었다. 이소는 끝까지 저를 기만하는 주영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미 모두 떠났다면 무엇을 죽여 저를 붙잡으실 겁니까. 군졸들이 몰려옵니다. 형님, 이제 그만…, 어서 빨리 몸을 피하세요.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청입니다.”
“내가 죽어 버린대도 떠날 것이냐.”
언제나 날이 서 메말라 있던 주영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뒤틀린 연정의 민낯을 마주할 때마다 삼키기 버거웠음에도 불구하고 체념하며 베어 물었었다. 그러나 이미 산산조각 나 버린 파애를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법. 이소의 눈가가 원망과 서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전 이번 생에…, 형님과의 연을 끊어달라 천지신명께 빌었습니다.”
“……뭐?”
“…그러니 다음 생을 기약하고, 이제 그만 보내주십시오.”
검을 쥔 주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소가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렸다. 작은 담장 쪽 후문이 열려 있었다. 주영의 검을 피하기만 하면 달려가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영이 고개를 툭 떨구자 이소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려 재빠르게 달음박질쳤다.
그 순간 주영의 입술이 나지막이 움직였다.
“조여라.”
후문을 향해 뛰어 나가던 이소가 돌연 뒤로 콱 나자빠졌다. 고개를 돌리자 기둥 뒤에 있던 사내가 가는 끈을 바싹 당겨 끌어당겨 주영에게 건넸다. 주영이 목줄을 당기자 이소는 발버둥을 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눈처럼 새하얀 의복이 마구잡이로 바닥에 쓸려 지저분해졌다.
“시체를 데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서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콜록……!”
주영은 한 손에는 이소의 목에 감긴 줄을 잡고서도 다른 한 손으로 저에게 달려드는 군졸들을 모조리 칼로 베어 냈다. 두 명의 수하들은 떼로 몰려드는 군졸들을 막아 내느라 버거워했다. 역시 이미 혼사는 망쳤고 당장 달아나도 모자랄 판에 죽어도 저를 놓지 않는 손에서 배어난 피가 줄을 타고 흘러 바닥을 적셨다. 이소는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내렸다. 정말 여기서 질질 끌리다가 숨통이 막혀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도리어 살겠다고 악을 쓰며 목줄을 잡아뜯었다.
그때였다. 군졸들을 내치느라 미처 뒤를 돌아보지 못한 주영의 팔을 스치고 화살 하나가 빠르게 날아들어 기둥에 꽂혔다. 찢어진 푸른 관복 사이로 붉은 피가 흘렀다. 이내 반쯤 열린 대문이 활짝 열리며 풍채가 우람한 흑마 한 마리가 빠르게 주영에게 돌진했다. 빠르게 달려오는 말은 칼을 들고 있는 주영을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위협을 했다.
“윽……!”
주영이 말을 보고 뒷걸음질을 치자 동시에 말 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공이다. 이소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검은 도포를 입은 해준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넘어진 이소의 팔을 잡아 끌어 올렸다. 가벼운 몸이 순식간에 들려 말 안장에 턱 얹혔다.
“내가 좀 늦었죠.”
“나리……!”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뻣뻣한 목줄이 이소의 목을 강하게 조르자 해준은 말을 돌려 나가려다 기겁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컥, 이소가 해준의 품에서 발버둥을 쳤다. 이를 놓칠세라 주영이 몸을 일으켜 줄을 끌어당겼다.
“죽어서도 내 것이라 한 것은 너였다.”
“아윽……!”
목이 잡힌 이소의 몸이 무력하게 말 아래로 떨어지려던 찰나였다.
“어딜.”
해준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들어 목줄과 긴 댕기 머리를 동시에 끊어냈다. 서걱, 날 선 소리와 함께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카락은 어깨춤에서 댕겅 잘려 나갔다. 붉은 댕기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이소가 파 하고 참았던 숨을 토했다. 힘없이 몸이 기울어지던 이소를 잡아챈 해준이 힘을 주어 단단히 끌어안았다. 넘어갔던 동공이 돌아오고 숨을 몰아쉰 이소가 해준을 올려다보았다.
“흐윽, 말을…, 타실 수 있었습니까?”
능숙하게 말을 모는 모습에 당황해 옷깃을 감싸 쥐자 해준이 씩 웃었다. 그럼요.
“그대가 가르쳐 주셨잖습니까.”
해준이 이소를 팔 안에 가두고 고삐를 붙잡은 채 허리를 낮게 숙였다.
“이대로 도망칩시다. 아마 저쪽은 군졸들이 더 달려들면 따라올 수 없을 테니.”
이럇, 하고 강하게 채찍질을 하자 흑마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렇게 주영의 비명과 고함 소리가 섞인 곳을 빠져나와 냇가를 넘어 달렸다. 뒤로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따돌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해준은 이소에게 말을 배웠다고하기에는 제법 능숙하게, 아니 사실은 무척이나 노련하게 말을 몰았다. 이소는 해준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다각다각다각 빠른 박자로 들리는 말굽 소리와 함께 떠난 두 사람은 그렇게 소란에서 멀어졌다.
*
해가 완전히 산허리를 넘어 붉은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변할 때 즈음 해준은 완전히 잠이 든 이소를 안아 들고 말에서 내렸다. 제 직감으로 약 두세 시간을 넘게 달린 것 같았다. 말에게 여물을 넉넉히 주라고 한 뒤 이소를 품에 안고 오래된 주막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해준은 툇마루에 앉아 술을 조로록 따랐다. 이곳에서 마시는 마지막 술이다. 실컷 마시고 가자. 해준은 입가에 술잔을 갖다 대며 골목의 노파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은화값을 잔뜩 치른 날, 이소를 데려다주고 몸을 돌려 시장으로 가자 기다렸다는 듯 노파는 그 자리에서 해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만 찾는다고 되겠습니까.’
‘그럼.’
‘문이 열려야지요.’
‘문?’
‘교수가 그 장난질을 해 놓은 덕에 틈이 생겨 버렸고, 그곳으로 귀한 생명이 빠져나갔습니다. 도로 찾아오려면 문을 여셔야 할 겁니다.’
‘문을 열려면 열쇠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열지 말지는 교수의 선택이지요.’
노파의 말을 듣고 나서는 오히려 더 아리송해져 해준은 눈을 흘겼다. 손가락에 묶인 실은 여간해서는 줄어들 생각도 당겨질 생각도 않는 것이 답답했다. 그러다 이소를 만나고 나면 먹먹한 속이 조금 풀어지고 어린 것의 안타까운 이야기까지 듣다 보면 자꾸만 며칠만 더 남아 제가 할 수 있는 양 도와주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은화값 넉넉히 치렀으니 기도나 잘 올려 주게. 그 형 놈은 이번 생에는 엮지 않는 것이 확실한가.’
‘염라의 도움으로 낯을 마주해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 생이면 모를까.’
‘일단 다음 생은 됐고, 이번 생에나 잘 봐주게. 난 이제 가야 하니까.’
‘헌데 무얼 그리 도와주려 하십니까. 어차피 당신의 정인도 아닌 것을.’
‘어린 게 유독 신경 쓰이잖아.’
서글픈 눈을 하고 제게 주어진 삶을 버겁게 살아내는 이가 신경이 쓰이고 못내 안타까워 그러지. 적어도 그 답답한 감옥에서 꺼내 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소임을 다한 것이라 여기고 편히 떠날 것이다.
‘쯧…… 오지랖은. 그럼 일을 모두 해결하고 나면 이걸 꼭 드셔야 합니다.’
‘무엇인가.’
‘망각 잎입니다. 여기서의 일을 다 잊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본디 두 세계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인간이 감당하기엔 어려운 일이니까요.’
망각 잎을 은화 주머니에 넣은 뒤 돌아온 해준은 즉시 관아로 가 현감을 만났다. 안타깝게도 돈이 제일인 세상이라, 본래 세상에서 돈으로 사람 다루기를 구슬치기보다 쉽게 해 왔던 해준에게 은화 몇 닢이면 높은 관직에 있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조금만 뒤를 캐니 비리와 횡령의 흔적이 줄줄 터져 나왔다. 그 이후는 이소를 무사히 데리고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오랜만에 탄 말에서 활을 쏘고 칼을 피하는 일이 익숙지 않아 몸이 조금 뻐근할 뿐이었다.
해준은 연죽을 입에 물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제되지 않은 연초의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깊숙이 채웠다.
“나리.”
어느새 다가온 이소가 옷을 갈아입고 해준의 앞에 섰다. 봇짐 아래에 이소의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두었으니 갈아입으라 전했었다. 이소는 홀로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해준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곤 몸을 일으켰다.
“머리 좀 정돈합시다.”
어깨선까지 대충 잘라 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겼지만 여전히 어색한지 비죽비죽 삐져 나와 있는 꼴이 꽤 우스웠다. 해준은 이소를 제 앞에 앉히고 머리를 석석 빗어 주었다.
“본래 약관이 지나면 손윗사람이 상투를 틀어 올려 주는 것입니다.”
“처음 해 봅니다.”
“그러겠지. 나도 이거 처음 해 봅니다.”
해준은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제 머리가 망건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해했던 때를 떠올렸다. 대충 머리카락을 모조리 틀어 올려 말 끈으로 묶은 후 둘둘 말아 정리했다. 그래도 손재주가 제법 있는 편이라 그런지 제법 제 머리와 비슷하게 고정이 되었다. 미리 준비한 망건까지 두르고 단추에 끈을 걸어 고정하니 상투가 꽤 그럴싸했다.
이소는 경대에 제 얼굴을 비추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열 살 때부터 댕기를 달아 치렁치렁하게 내려왔던 머리카락은 간데없고 시원하게 뒷목이 드러난 제 모습을 보자 비죽비죽 웃음이 솟았다. 해준은 다시 몸을 돌려 연죽을 집어 들었다. 이소와 꼭 같은 모습이라 그런지 실컷 여인의 모습도 보고, 상투를 틀어 올린 모습도 보며 해준은 제 만족을 잔뜩 채웠다. 귀엽고 앙증맞은 뒷통수가 보기에 좋더라.
“잘린 머리가 아쉽지는 않습니까?”
“네, 후련합니다.”
이소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더 어려 보였다.
“저 봇짐 안에 내가 미리 준비한 은화가 넉넉히 더 있습니다. 집도 사야하고, 공부도 하려면 필요한 일이 많을 겁니다. 산을 넘어가면 제일 먼저 말을 사서 이동하십시오. 살기에는 여기보다 남쪽으로 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토지가 비옥하고 곡식이 많으며 그대가 할 수 있는 일도 더 많을 것입니다.”
“형님이… 찾아오면 어쩌죠.”
해준이 새로 산 신분과 이름을 적은 종이를 건넸다.
“어떤 이름이 좋을지 몰라 서너 개를 골라왔는데, 이 중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쓰십시오. 성은 여기 그놈과 다른 것이 좋으니 ‘윤’ 대신 다른 것을 쓰시고.”
이소는 한참 동안 종이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인 후 품에 잘 넣었다. 해준은 웃으며 ‘한동안은 수염도 좀 기르시고 얼굴에 점도 찍으셔야 할 겁니다.’ 하고 농담처럼 조언했다. 담소를 나누는 내내 이소는 해준의 눈치를 보았다. 꼭 오늘이 마지막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헛헛해졌다.
“나리는 이제…어디로 가실 겁니까?”
“이제 정말로 돌아가야지요. 도령도 도와주었으니 할 일은 다 끝났고.”
해준은 기지개를 켰다. 여기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졸음이 온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유독 움직임이 많아 그런지 다리고 팔이고 온몸이 쑤셨다.
“꽃도… 찾으셨습니까?”
이소의 물음에 해준이 멋쩍게 볼을 긁었다. 이소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할 순 없었다.
“그게 음……. 찾기야 찾았는데 알고나니 영 열고 싶지가 않아져서 말이죠. 다른 방도가 있겠죠.”
해준이 빙긋 웃었다. 이소는 고개를 갸웃했다. 집에 가고 싶어했는데 알고나니 열고 싶지 않다니. 그러나 그런 의아함 보다도 해준이 이제 저를 두고 떠난다고 하자 몹시 마음이 서운해져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우물댔다.
“……여기 더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해준은 이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 아직…… 모르는 것도 너무 많고. 배운 것이라고는 글 조금이 다입니다. 할 줄 아는 것도 거의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아직 해 보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은 누구나 다 잘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습니다.”
“하지만….”
해준은 따뜻한 시선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어른의 조언을 해 주었다. 꼰대라고 불린대도 뭐 어쩌겠는가. 살면서 자신이 스스로 체득한 것들이 거름이 되고 비옥한 토지를 만드는 것을. 선인들의 말씀이 하나 틀린 것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본래 세상이라는 게 직접 뛰어들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는 것들투성이입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 말고 해 보세요. 기껏해야 조금 까지고 넘어지는 것 말고는 큰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령은 이미 큰 산을 하나 넘었잖아요, 그렇죠?”
해준은 팔을 들어 이소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꼭 남동생을 대하는 듯한 담백한 태도였다. 이소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리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잘 해 주십니까.”
“아뇨.”
아니라는 말에 이소가 고개를 돌렸다. 저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해준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이소의 마음이 툭 하고 떨어졌다.
“정인이 있으셨군요…….”
제발 아니기를 바랐건만 해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시려는 것도.”
“그 사람이 기다리니까요.”
이소는 허탈감에 젖어 시선을 내렸다. 착각했구나. 제게 잘해주고 신경써주어 마음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서운함에 말이 모나게 나갔다.
“그럼 저를 도와주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
“동정하셨습니까.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을 사는 제가 불쌍해 보여서요?”
해준은 조심스레 숨을 들이켠 후 이소를 내려다보았다.
“도령을 보고 있으면… 내 정인이 생각나서요.”
자신을 보면 정인이 생각난다는 말에 이소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화공의 얼굴이 미울 정도로 해사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이리 고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이소는 생각했다. 다정한 화공은 생각보다 잔인한 인사라.
“얼굴만 닮은 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꼭 체념한 듯 무르게 굴면서도 답지 않게 확고한 꿈이 있고, 경험이 부족해 세상 모든 것을 신기해하고 잘 믿는 순진한 구석이 있어요. 당신을 보면 자꾸만 내 사람이 생각이 나서 그랬습니다.”
“…….”
“당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누구보다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도…. 꼭 닮았습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당신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오게 된 이유가 당신이었던 것 같거든.”
이소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잔인하세요…. 정인을 생각하며 곁에 있었다고 하면 어떤 사람이 좋아합니까.”
이소가 젖은 뺨을 슥슥 밀어 닦으며 눈을 흘겼다.
“하하, 그렇지. 하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도 처음부터 그대의 연정을 받아 줄 수가 없는 걸 어쩝니까.”
제 연정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언제나 열렬히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라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이 없었대도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인지.
“……제가 사내라서요?”
맺어 둔 인연이 몇 없어 남녀 사이가 어떤지 모르고, 같은 성별일 때 어디까지 선을 지켜야 하는지 모른다. 적어도 접문을 할 때 화공은 싫어하며 밀어내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사내인 것은 상관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화공은 상관없다 말한다.
“그럼요?”
“내가 여기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도대체 여기 사람, 이 세계 사람, 그게 다 무슨 말입니까! 저번에 노파도 그렇고.”
이소가 분개했다. 저를 거부하려고 지어내는 말이 틀림없다. 해준이 씩씩대는 이소의 뺨을 훑어내렸다. 성나게 해서 미안하지만 앳된 너를 실컷 보고 가니 마음이 즐겁구나. 안쓰럽고 가여운 것. 해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유감스럽게도 말씀드리지 못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것들도 많고요. 다만 한 푼 동정이나 측은지심으로 벌인 일들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두세요.”
납득할 수 없는 말로 저를 거절하는 해준이 미워 이소가 입술을 물고 울먹였다.
“씨이……. 흑….”
그러나 해준은 미소만 띤 채 ‘뚝, 이제 씻고 주무셔야지.’ 하고 볼을 툭툭 건드렸다. 나쁜 사람, 나쁜 인사, 잔인한 양반. 이소가 소매를 강하게 붙잡았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묻자. 킁 하고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리가…, 여기 사람이기만 하면…. 저를 받아 주십니까? 제가 이리 못난…… 이가 아니면….”
“집요한 구석이 있는 건 특별히 다른 점이군요.”
화공이 고개를 저으며 웃어넘겼다. 기다리는 정인이 없고, 사내도 상관이 없으면 과연 저를 받아 줄는지.
“빨리요. 나리가 떠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정인이 없었더라면, 제가 액받이 따위가 아니었다면…….”
이소는 자신이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인지 확인받고 싶은 듯 해준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가만히 이소를 내려다보던 해준이 돌연 고개를 내려 붉어진 뺨을 마주했다.
“별걱정을 다하십니다. 도령은 이미 충분히 사랑스럽습니다. 다만…….”
이소는 입을 맞추려나 싶어 질끈 눈을 감았다. 잠깐, 다만이라고 했나.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눈을 뜨려는 찰나 이마가 꽁 하고 부딪힌다.
“아!”
“너무 어려서 안 됩니다.”
고개를 떨어뜨린 해준이 이를 드러내곤 씩 웃었다.
“먼저 씻고 오겠습니다. 다녀와서 잘 준비를 봐 드리지요.”
미련 없이 자리를 뜬 해준을 바라보며 이소는 엎드려 울며 이불을 그러쥐었다. 저이는 자신을 재우고 떠나려는 것이다. 이리 보낼 수는 없다. 이렇게 보낼 수 없어. 한참을 울던 어린 이소의 눈이 상념으로 젖어 갔다. 꽃을 찾기만 하면 바로 돌아간다고 말했던 이가 어느 순간 불행한 제 곁에 남아 살길을 찾아주더니 별안간 미련 없이 떠나려 한다.
알 수 없는 선의로다. 심지어 그렇게 찾던 꽃을 찾았으나 찾고 나니 열고 싶지 않아진다 하였다…. 한데 이상한 일이다. ‘꽃’과 ‘열다’라는 말은 서로 상치되지 않는다. 젖은 눈동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이불을 쥔 손마디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이소는 문득 화공과 자신이 함께 있을 때 노파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문을 찾아야 하거늘, 아…. 벌써 찾아 이리 곁에 두고 있을 줄이야.
문을 보통 곁에 둔다고 하지는 않지. 문은 여는 것이고, 꽃은 피우는 것이니……. 안타깝게도 해준이 생각하는 것보다 어린 이소는 훨씬 덜 순진했고 훨씬 더 영특한 편이었다. 이소는 검은 눈을 번득이며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
이소는 내의 주머니를 뒤졌다. 활복 안에 주영이 넣어 주었던 사탕 주머니였다. 미약이 든 구슬이 도로록 손바닥에 한 알 떨어졌다. 정말 저 이는 자신을 안지 않고 떠날 생각인 것이다. 어린 저를 두고 홀연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평생을 화공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면 저 너른 품에 안겨 보고 싶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소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단맛이 입 안에 서서히 퍼졌다. 해준이 이소의 이부자리를 펴 준 뒤 손을 씻고 돌아왔다. 이소의 볼이 볼록하게 나와 있는 것을 본 해준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하하, 자기 전에 무얼 먹으면 어떻게 합…….”
성큼 다가온 이소가 해준에게 입술을 포갰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무서운 기세로 파고들어 잇새를 벌렸다. 해준이 이소의 어깨를 잡고 뒷걸음질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말을 하려 숨을 들이마시던 그때 목구멍 안으로 동그란 무엇인가가 도록 하고 굴러 들어왔다. 콜록, 해준은 제 목을 붙잡고 뒤로 쿵 넘어졌다. 숨을 몰아쉰 이소가 입술에 묻은 타액을 닦으며 해준을 내려다보았다. 해준이 제 가슴을 세게 두드리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무슨……!”
“노파가 말한 문(門). 혹시 그게 접니까.”
해준이 넘어진 채 이소를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순식간에 어그러졌다. 이소의 목소리가 두세 번씩 울려 들렸다. 나리는… 문, 왜…, 나를…, 않으십니까…. 미간을 누군가 세게 두드리는 듯한 두통에 해준은 눈썹을 찡그린 채 팔을 휘저었다.
“도, 대체……, 무엇을 먹인 것입니까!”
“제가 나리가 찾는 문이고, 꽃이라면 안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아니야…. 제멋대로 추측, 하지… 마세요.”
해준이 손에 잡히는 대로 팔을 휘젓자 선반에 올려 둔 이불이고 봇짐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자꾸만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토할 것 같지는 않았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닥치는 대로 잡고 삼키고 싶었다. 불쾌하면서도 속이 끓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언제나 말끔한 모습에, 주막에 물으니 식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하시고, 잠도 주무시지 않는다고요.”
“비…키세요, 도령…. …놔, 놓으세요.”
“나리의 말대로 이곳 사람이 아니시라면, 무조건 돌아가셔야 하는 거라면 괜히 다른 방도를 찾지 말고 빠른 길을 택하세요.”
“놓으라고!”
해준이 답지 않게 고함을 치고 벽에 비틀대며 기대어 섰다. 제기랄, 미약이다. 유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바에서 코카인을 했을 때 이런 비슷한 어지럼증이 있었는데. 그때도 아무나 붙잡고 모텔방에서 뒹굴면서 몇 날 며칠을 나오지 않았는데 결국 끝나고 나서 정말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 죽을 만큼 힘들었다. 해준은 가슴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랫도리에 제멋대로 힘이 들어갔다. 뇌와 심장이 아니라 생식기관이 모든 혈류를 통제하는 듯한 빠듯함이 일어 입술을 물고 겨우 참고 있었다.
“저를 안으세요, 나리.”
“대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정말 울고 싶었다. 이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소가 아니다. 그 정도도 구분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가끔씩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곤 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제 정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위로받고 싶어 드는 생각인 것이지 이 사람에게 제 마음을 덜어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하셨잖아요. 여기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신다는 말,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정말로, 정말로 안 오시는 거죠.”
“여기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 습니까. 내가 설명하지, 못할 것들이 아직, 많아서…. 아무튼 이것 좀 놔요, 가까이 오지 마요. 정말이야. 더 가까이, 오면, 흐읏…. 씨발, 진짜 뭘 먹인, 거예요. 기분이, 왜 이리…, 왜 이리 좆같아.”
이소는 해준이 욕지거리를 내뱉자 소매를 잡으려다 주춤하며 물러섰다. 해준은 숨쉬기가 버거운 듯 벽을 잡고 호흡을 조절하려 애썼다. 눈앞의 사물들이 어그러져 빙글빙글 돌았고 이소의 목소리가 에코를 단 듯 멀리서 울렸다. 무엇보다도 자꾸만 갈증과 허기가 졌다. 입에 아무거나 넣고 씹고 싶었다. 정말 기분이 더러운 약이었다.
“제게 먼저… 다가오셨잖아요. 제게 잘 해 주시고 친절히 굴어 주셨잖아요.”
“…그건, 내가…. 네가 너무 신경이…, 쓰이니까…. 그 사람이, 생각이 나서…, 그렇다고 했잖, 아….”
이제는 존대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소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해준의 곁에 바짝 다가왔다.
“노파가 그랬습니다. 곁에 두고도 여태 열지 않으신다고. 그러지 마세요. 지금 절 안으세요. 제가 돌아가실 수 있게 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싫, 어.”
“제가 뭐라도 해 드릴 수 있게, 기회를 달라구요.”
“싫다고……. 누가 그딴 거…, 준대…….”
이소가 해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입술을 떨며 해준의 손을 제 가슴에 댔다. 해준은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사특한 말을 내뱉는다고 해도 이소의 모습을 한 사람을 밀쳐내거나 할퀼 수가 없었다. 저에게 이소는 그런 사람이었다.
“……교수님.”
거칠게 들락거리던 숨이 삽시간에 멎었다. 사정없이 경련하던 눈가의 떨림도 동시에 멈췄다. 해준이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다. 홀리려고 하는 말이다. 이 사람은 제 연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꼭 같은 목소리로 제 앞에 서서 요사스럽게 저를 부른다. 해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이게 진짜 구해 줬더니 나를 홀리려고 작정을 했나.
“노파가 나리를 이리 부르던데. 본래 이리 불리던 것…. 맞죠.”
“내가,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 하…… 씹, 어지러워.”
그러나 이소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해준의 품에 안겨들었다. 연약해진 틈을 완전히 파악한 후였다.
“……교수님.”
숨이 멎는다. 익숙한 분내가 난다. 해준의 입술이 젖고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는 것이 보인다. 여태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이소는 해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아, 화공의 냄새구나. 좋다. 이소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안아 주세요.”
그 말에 해준이 이소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치아와 입천장을 훑어내렸다. 해준이 단단한 팔로 이소의 허리를 받친 채 다른 손목을 쥐고 몸을 밀착시켰다. 어느새 단단하게 발기한 것이 이소의 허벅지에 닿았다. 제 허벅지에 닿는 기둥의 크기가 선연히 느껴지자 이소가 흠칫 놀라 입술을 뗐다.
“나리… 아니…교, 교수…!”
눈이 돌아갈 것 같다. 당장이라도 치받고 싶은 욕구가 배 속을 때리고 있었다. 해준이 주먹으로 벽을 세게 치며 으르렁댔다.
“젠장…. 안아 줄 테니…, 제발 그리 부르지 마세요.”
“…….”
“지금은… 도령이 부르고 싶은대로, 부르세요.”
돌아간 고개가 다시금 해준의 손에 의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해준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뺨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줄 수 없습니다.”
그리 덧붙인 해준이 거칠게 입술을 포갰다. 숨이 막힐 때까지 깊게 파고드는 입맞춤과 아래를 뭉근하게 비비며 문지르는 애무에 이소의 다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입술에서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온 해준이 앞섶을 풀어 헤치고 작은 유두를 흡입하듯 빨았다. 정말로 먹어 치우듯 유두 하나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이소는 해준의 귀를 잡고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읏…, 자, 잠시만, 거긴…!”
“다정을 바라지 마세요.”
판판하게 내려앉은 가슴을 쥐어짜듯 모은 후 유두가 벌겋게 변할 때까지 빨아 올린 해준이 곧이어 반대쪽 가슴까지도 입에 물고 희롱했다. 이로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말없이 한참을 혀로 핥아대며 빨아 올렸다. 해준의 코가 가슴을 문지르고 찌를 때마다 이소는 아래에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단에서 조금씩 탁액을 찔끔찔끔 싸질렀다. 가슴이 봉곳하게 부어오르고 해준은 쇄골뼈와 갈비뼈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고 씹어댔다. 주영의 밤 시중을 할 때는 그저 엎드린 채 허리 짓을 받기만 했는데, 해준은 아직까지 제 아래는 손톱만큼도 건들지 않은 채 반 식경을 그렇게 희롱만 했다. 덕분에 목덜미와 배꼽 주변이 온통 해준의 잇자국과 울혈들로 가득했다.
“으…앗, 기분이…, 기분이 이상…….”
“입으로… 할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네? 입, 입은 제가……! 아윽!”
한참을 바르작거리던 이소는 바로 제 아래를 덥석 무는 해준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언제나 혼자서 손으로 용두질을 쳐서 해결하던 것을 누군가 입으로 물고 핥아 올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이소가 고개를 들고 해준의 머리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며 도리질을 쳤지만 해준은 오히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기둥을 즈윽 핥아 올렸다.
“좋은가 봅니다, 도령.”
“아니에…, 하으읏…!”
흰 기둥을 입에 문 채 몇 번 깊게 빨아 올리자 해준의 어깨를 짚은 이소의 발끝이 바짝 선 게 느껴졌다. 능숙하고 진득하게 입에 넣으며 고갯짓을 했다. 사정은 빨랐다. 이소의 허벅지가 경련하며 답싹 들렸다. 해준이 입을 떼고 음낭을 한 번 핥아 올린 후 크게 베어 물자 이소가 높게 비명을 질렀다.
“아……!”
그와 동시에 발발 떨리며 까딱대는 기둥 끝에서 희고 뿌연 정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해준이 그 정액들을 한 군데 모아 손가락에 치덕치덕 발랐다. 향유가 없는지라 입으로 풀어 주고 싶은데 다리를 잡고 혀를 갖다 대자마자 하도 몸을 뒤틀어 그냥 손가락으로 풀어 주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울먹이는 이소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 끌어안았다. 해준은 제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는 것 같아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며 이소의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살냄새라도 잔뜩 맡으면 조금 진정이 될까 해서였다. 그러나 이게 무슨 장난인지 살냄새조차도 제 연인과 꼭 같았다. 씨발, 욕지거리가 올라옴과 동시에 해준은 예고도 없이 제 기둥 끝을 이소의 아래에 맞추고 밀어 넣기 시작했다.
“나리, 나리…! 아직…! 아, 직 좁습니다! 아직……! …아악!”
압박감에 놀란 어린 것이 마구 고개를 내저으며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이성이 날아간 해준을 밀어낼 힘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으윽, 흐으, 윽. ……아!”
곧고 단단한 기둥이 끝도 모르고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아파, 아파요….’ 하고 울먹였다. 마주 보고 앉은 채 좆을 모조리 집어넣고 나자 제 복부에 선연히 드러난 기둥의 모습에 이소가 다시 한번 질겁을 했다. 빨랫방망이를 집어넣어도 이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저절로 눈물이 나고 손이 벌벌 떨렸다.
“…나리, ……나리이.”
죽을 것 같습니다. 너무 아파요.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빠르게 뱉어 내고 훌쩍거렸다. 해준이 더운 숨을 토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소가 흐느끼는 박자에 맞추어 제 것을 문 구멍이 시시각각 움찔거렸다. 간헐적인 떨림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도령, 도령…. 나지막이 부르자 흐느끼던 이소가 고개를 든다. 해준이 심호흡을 하며 어린 것을 달랬다.
“내가 지금…, 조금, 참기가…, 힘들어요. 이해해…?”
눈동자를 마주하기만 했음에도 얼굴이 닳아 없어져 버릴 것 같다. 이소는 겨우 입을 열어 대꾸했다.
“예, 예에. 그 약이…… 원래, 조금 독합…니다.”
해준이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이소의 말에 본능보다 잠시 이성이 정신이 들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의 해준을 보며 이소가 말을 더듬었다.
“……형님과 할 때, 항상 먹던….”
“뭐?”
“……그, 그게.”
이소는 해준이 욕을 할 때마다 너무 놀라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미친 새끼가… 진짜. 이 좆같은 걸 어린 너한테… 항상 먹였다고?”
“송, 송구합니다. 송구…….”
“미안하다고 하지 마, 네 잘못 아니니까.”
그러나 주영의 이야기에 열이 나 몸을 일으키려 했던 해준은 다시 한번 아래를 콱 조이는 느낌에 얼굴을 구기며 호흡을 다스렸다. 자꾸만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다. 제 좆이 이소의 구멍 안에 들어와 있는 것과 별개로 당장 이 성욕을 해소하지 않으면 뭐라도 하나 찢어발기고 싶은 파괴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딴 걸 매번 먹고 연을 이어 갔다니, 미리 알았더라면 염라의 멱살을 잡고 저승에 은화로 산을 쌓아 놓고 왔을 것이다.
“도령.”
“예에.”
부르기만 해도 아래를 움찔거린다. 그게 또 못 견디게 큰 자극이라 해준은 어린 것의 안에 들어간 제 좆을 마음껏 놀리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다.
“내가 원래, 잠자리에서…. 좀……, 원, 래… 제멋대로야.”
한참 어린 것이다. 본래 해준이 하던 대로 굴었다가는 절정에 이르기도 전에 기절할 것이다. 제 정인인 윤이소마저도 스물일곱을 먹고도 저와 잠잘 때마다 기절을 하지 않았던가.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해야만 해. 이러다 정말 사람 잡겠어. 해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씨발, 내가 지금 약까지 먹어서, 널 좀 아프게…, 할 수도…. 하아…… 있어요.”
해준이 괴로운 숨을 몰아쉬었다. 아프게 할 거라면서 미리 허락을 구한다. 다정을 바라지 말라면서 이리 다정할 수 있는가. 이소는 해준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 주세요. 전 괜찮습니다….”
“정말 너무 힘들면…, 뺨을 갈기거나, 목이라도 졸라.”
“예?”
등을 움켜쥔 손이 희게 질렸다. 후욱 하고 뒤로 빠진 허리가 돌연 세차게 샅을 내려찍었다.
“아……!”
다리 사이에서 순식간에 철썩하고 물기가 튀었다. 그저 한 번 빠져나갔다가 끝까지 들어온 것뿐인데 거대한 파도가 저를 덮친 것 같은 충격에 이소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아으으윽……! 으응, 아……! 앗, 흐윽!”
가는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한 뒤 온몸을 부딪쳐 온다. 단단한 허리가 커다란 통나무처럼 제 몸을 쿵쿵 찍어 박았다. 좁은 구멍이 기둥이 빠져나가고 다시 들어올 때마다 흰 정액을 부글부글 뱉으며 움찔댔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 안으로 기둥이 무섭게 파고들었다. 빠져나가는 것이 한 뼘, 들이치는 것이 한 뼘, 쩌억쩌억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몸으로 저를 죽이려는 것만 같았다.
“화, 화공…! 나리…! 나리, 아…!”
“이소…… 이소야.”
꼭 은애하는 이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른다. 이소는 한 번 보지도 못한 해준의 정인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으응, 으……, 흐윽…! 아읏, 기, 기분, …으응, 이상해……!”
곧 해준이 구멍을 넓히기라도 하려는 듯 둥그렇게 진득하게 돌리며 몇 번을 더 풀어 주다가 숨을 고르고 나면 다시 한번 찍어 누르기를 여러 번, 다리 하나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걸치고는 허벅지를 붙잡고 짧게 끊어서 또 자극되는 지점을 누른다. 이소가 이불을 그러쥐고 눈을 가린 채 울었다. 쿵쿵쿵 마치 북을 치는 듯 쾌감이 터지는 지점을 빠르게 건드리고 짓이기자 견디기가 힘들어 팔을 허우적댔다.
“안,…돼요, 흐윽…, 읏! 거기는, 그렇게, 아으읏…, 하시면!”
이소는 도리질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화공은 여유가 없어 보였다. 두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리를 놓고 허리를 숙여 바로 입을 맞춰 온다. 이소는 으응, 하며 입맞춤을 받아 주었다. 다정한 그의 성정만큼이나 상냥한 입맞춤이었다. 눈물이 났다. 이리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정인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가 부럽다. 이소는 팔을 걸어 해준을 끌어안고 눈꼬리를 적셨다.
“으응…, 갈, 갈 것 같아요….”
“도와줄게. 내 손에 싸.”
해준의 손이 이소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따듯한 손이었다. 그가 먹은 미약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도 제게 안겨 주니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맞춤을 하면서도 이소는 다시 한번 힘을 빼고 푹푹 파정했다. 허리를 부르르 떨며 끝까지 내보낼 때까지 해준의 입술은 이소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아, 하아…….”
입술이 맞붙은 채로 해준이 이소를 들어 올려 제 위에 앉혔다. 이 자세는 주영과도 해 본 적이 있었다. 앉아서 하는 것은 기둥이 더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허리를 꼿꼿이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라 중심을 잡는 것이 힘들다. 이소는 자연스럽게 해준의 어깨를 잡고 무릎을 세웠다. 제가 받아 본 이는 주영 하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의 것은 편안히 앉기에는 너무 컸다. 잘못하면 제 배가 정말 뚫릴지도 모른다. 해준의 어깨를 잡은 이소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해준이 피식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근사해 이소의 것이 다시 한번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 텐데.”
“이 자세는 원래…. 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한참 어린 아이에게 내가 이런 걸 시킬까.”
도대체 얼마나 나이가 많길래 자꾸만 어리다고만 하는지. 저도 약관이 다 되었는데, 이제 어른인데, 상투도 틀었는데. 이소가 눈을 흘겼다.
“나리께서도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데 자꾸만 저보고 어리다고만 하시고. 저도 올해 약관입니다. 어른이란 말입니다.”
“아아, 그러십니까. 어르신.”
해준이 쿡 찌르자 히익 소리를 내며 이소가 해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해준이 쿡쿡 웃었다.
“…갑자기 그리 움직이시면!”
“그럼 내가 친히 어른 공경을 해 드려야지. 편히 앉아 계십시오.”
빠르게 치받아오자 이소가 어깨를 잡은 손이 희게 질리며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허리를 숙일 수가 없었다. 제 허리를 붙잡은 손이 너무 단단해 몸을 뒤틀기만 해도 아래를 쑤시는 기둥이 온갖 곳을 찔러 오는 바람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고 고개가 젖혀졌다.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이소가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아, 제발…! 제발 좀…, 멈춰 주세요…, 그만…!”
“벌써 지치시면 안 됩니다.”
해준이 입술을 다시 가슴에 묻었다. 이소는 손톱을 세웠다. 성기가 자꾸 해준의 배에 닿아 비벼지는 통에 앞뒤로 난리였다. 고개를 흔들며 제발 멈춰 달라고 울먹였다. 이를 악물고 소리를 참아내려 하자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가 바들바들 떨리고 턱이 움찔대자 해준이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신음을 참는 것이 듣기는 좋은데…. 그리 세게 이를 물면 턱과 이가 다 상합니다.”
“으흑…. 으흐윽…. 밖에서… 다, 들을까 봐아…. 으응, 응!”
“그 값마저 치렀지.”
말은 상냥하게 하면서도 허리짓은 멈추지 않아 이소는 앉은 채로 엉엉 울었다. 이소의 눈과 코에서 주륵주륵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멈춰 달랬건만 이 크고 굵은 것으로 그리 아래를 쑤시니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하하, 아기처럼 우는군요.”
해준이 다시 허리를 끌어와 이마를 맞대고 좌우로 문대며 웃었다. 야차 같은 아래는 여전히 흉흉하게 서 있었다. 이소가 으흐흑 하고 울었다. 해준은 손을 들어 이소의 뺨을 닦아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마치 자기 암시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해준이 이소의 옷가지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 어린 것은 자신이 선물한 것을 잘도 가지고 다닌다. 축축이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주고는 두 겹을 접어 이소의 입가에 물려 주었다. 이소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해준을 올려다보았다. 해준이 볼을 쓸어내리곤 이소를 잘 편 요 위에 천천히 눕혔다.
“빨리 끝내 주겠습니다.”
이소가 손수건을 문 채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으읍, 싫……!”
그렇게 말한 해준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 이소는 손수건을 입에 문 채 마구 흔들리면서도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빨리 끝내지 마세요. 이대로 가 버리지 마세요. 그러나 제 바람과 달리 해준이 치받을 때마다 죽을 것만 같은 쾌감과 고통의 경계에서 이소는 계속해서 먹먹한 비명을 내질렀다.
“으읍, 응……! 흑, 흐윽, 읏!”
“하…….”
너무 좋아, 하지만 동시에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다. 몇 번이고 더 더 파고들었으면 좋겠다. 해준의 낮은 신음 소리가 이소의 귓전을 휘감는다. 흔들리는 것이 제 몸인지 이 방 전체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빠르게 흔들렸다. 거세게 진동하는 몸과 함께 이소의 동공이 뒤로 넘어갔다.
“아……!”
손수건이 입에서 떨어지고 가는 비명이 터졌다. 이소의 엉덩이 골 사이로 희뿌연 정액이 팍팍 튀었다. 여리고 부드러운 엉덩이가 발갛게 익을 때까지 몇 번이고 굵은 좆이 푹푹 쑤셔 들어갔다. 다리 사이로 흐르는 탁액이 가득이라, 이미 한 번 간 것 같은데도 해준이 계속해서 예민한 지점을 찍어 누르자 이소는 이를 악물고 허우적거렸다. 정말이지 혼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읍…. 으흑, 그만, 윽, 그마안…!”
“……하, 도대체 왜 가라앉지가, 않는…. 씹….”
“으흑, 나, 리이…! 아읏…! 잠깐만, 아……!”
여유 없이 치받은 해준이 강하게 콱 찍어 올리자 이소의 여린 몸이 붕 떠올랐다. 제 몸에 꽉 들어찬 화공의 성기에서 더운 사정액이 터져 나와 내벽에 퍼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이소의 배 위로는 언제 터졌는지 모를 조수가 흥건했다. 두 사람의 몸에서 터져 나온 것들이 시큼한 냄새와 함께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소가 해준을 끌어안고 흐느끼며 고백했다. 마지막이니까, 정말 이제는 끝이니까. 가지 마세요. 한 번만 더 안아 주세요. 조르고 또 졸랐다.
“나리…. 나, 으응, 나리……. 제가 정말 연모합니다….”
“…….”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고운 얼굴이 마구 구겨졌다.
“제가 나리를…, 많이 연모…….”
“압니다. 울지 마세요.”
해준은 요망하게 제 마음을 흔드는 이소에게 입술을 포갠 후 귀를 닫았다. 그렇게 한참을 약 기운이 가실 때까지 몇 번을 더 몸을 섞었다. 이소는 제 고백을 거부한 해준에게 매달려 눈을 감았다. 약에 취한 화공은 무섭도록 집요하게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지만 울음을 터뜨리면 달래고 다시 어르며 끝까지 저를 안아 주었다. 몸을 찧을수록 아쉬움과 서러움이 커졌지만 이것으로 족했다.
* * *
결국 가랑이가 닫히지 않을 만큼 접붙고 나서야 몸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점잖아 보였던 화공이 그리 범처럼 달려들 줄을 몰랐기에 어린 도령은 종래에 그가 시키는 대로 뺨을 때리고 목을 조르며 그만하라 애원했다. 제 몸에는 약에 대한 내성이 있어 반 시진이면 깨는 것을 이이는 두 시진을 눈이 풀린 채 저를 안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공과 몸을 맞대었다는 사실이 기껍고 감사해 허리를 감고 꼭 붙어 있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몸을 섞은 후 이소는 완전히 탈진해 누워 버렸다. 해준은 말없이 이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울혈이 온몸에 퍼져 마치 누가 보면 발진으로 의원이라도 불러야 할 수준이었다. 해준은 약 기운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하자 제 눈을 꾹꾹 눌렀다. 벌써 동이 터 오는 것 같다. 몇 시진을 이리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저야 잠을 자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이 어린 것을 데리고 기절할 때까지 몰아붙이다니. 해준은 하얗고 여린 뺨을 훑어 내렸다. 마음이 착잡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기 더 남아 이 아이의 운명을 모두 건들 수도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이소의 몫이었다. 이제 그만 젖은 몸을 닦아 주려 얽은 다리를 내리던 해준은 문득 물끄러미 이소의 몸을 바라보았다. 새액새액 숨을 내쉬는 가슴과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온몸에 핀 울혈은 꼭….
‘꽃잎 같군.’
해준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설마, 노파가 말한 꽃이 그것인가. 해준이 몸을 돌려 제 봇짐에서 붓을 꺼내 들었다.
달그닥거리는 소리에 이소가 지친 눈을 떴다. 해준이 제 위에 올라탄 채 붓을 들고 있었다. 이것은 또 무슨 해괴한 짓인가.
“나, 나리…. 더 못 합니다.”
“누구보다 크고 화려하게 그림을 그려 달라 했었지요.”
“…그랬습니다만 그걸 왜 지금 하시려는….”
“내 지금 문을 열 겁니다.”
곧 먹을 푹 적신 붓이 이소의 배꼽에 내려앉았다.
“읏……!”
이소가 차가운 붓이 닿는 느낌에 흡 하고 배를 붙여 내렸다. 해준의 눈이 더 깊어졌다. 붓을 툭툭 찍어 내려 뿌리를 내릴 땅을 그린다. 천천히 배꼽부터 늑골까지 역으로 타고 올라가니 긴 잎이 나타난다. 이소는 간지러운 듯 고개를 틀었지만 시선은 떼지 않았다.
붓질은 거침이 없었다. 마치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대고 그리듯 빠르고 정확하게 난이 쳐졌다. 해준이 만들어 낸 줄기와 잎이 울혈 끝에 가서 멈추고 다시 돌아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종이가 아닌 몸에 그리는 그림이기에 이소가 움찔댈 때마다 꽃과 잎이 살아 움직이는 듯 넘실거렸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우면서도 사특한 느낌을 주었다. 힘있고 부드러운 붓질이었다. 일부러 유두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아닐 텐데도 유두를 입술로 짓이기고 물었던 자리에 꽃잎을 그려 넣을 때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으흐응, 하며 신음을 내고 허리를 떨었다. 다시 한번 성기가 꼿꼿이 섰다. 약을 먹은 것이 화공이 아니라 자신인 것 같았다. 몇 번의 붓질이 더 왔다 갔다 할 때 즈음 이소는 다시 한번 묽은 정액을 파정했다. 난이 지나간 자리에 희뿌연 정액이 섞여 색이 뭉개졌다. 붓이 떨어지자 해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소의 몸에 한가득 수십 개의 붉은 매화가 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열어 둔 창문을 통해 밤바람이 타고 들어왔다. 해준이 붓대를 들어 창문을 톡 치자 조금 더 열린 틈으로 흰 나비 두 마리가 엉기듯 들어왔다. 해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나비 두 마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해준의 눈 앞에서 날갯짓을 했다.
“틈으로 빠져나갔다더니, 네놈들이로구나.”
나비 두 마리를 보자마자 오랫동안 자신이 찾던 것임을 직감한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소는 드러누운 채 그 광경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리는, 신선…입니까? 이게 어찌 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비들은 이소의 배 위에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꽃인 줄 아는 모양인지 몸에 그려진 꽃잎마다 이리저리 앉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곧 나비는 긴 대롱을 내리고 해준이 잔뜩 싸질러 놓은 정액과 이소의 땀, 어지러진 검은 먹과 해준이 잔뜩 싸질러 놓은 정액, 이소의 땀과 붉은 울혈을 쭙쭙 빨아먹으며 분주히 날개짓을 했다.
“꽤나 음탕한 나비로군.”
해준은 천천히 붓을 내려놓고 손을 펼쳤다. 제 손가락에 걸린 실이 어느 사이엔가 팽팽해졌다. 언제나 바닥에 늘어져 있었던 붉은 실은 이제 창문 너머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끼손가락으로 살짝 실을 튕기면 낮은 파동을 만들어 내며 저 멀리서 즈윽 끌어당겼다. 근 백 일 만의 반응이었다. 이불에 누운 이소에게 다시 한번 다가가려 하자 마치 실이 화를 내듯 신경질적으로 저를 끌어당겼다.
“알았어, 닦아는 주어야지.”
꽃도 찾았고, 문도 열었다. 해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가야 할 시간이다.
해준은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와 이소의 배를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먹과 정액을 모조리 닦은 후 누운 이소의 뺨을 쓸어올렸다. 해준은 눈을 뜨고 가만가만 저를 바라보는 이소와 시선을 맞췄다. 어린 것의 눈이 조금 젖어 있었다.
“…이제 끝입니까?”
해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소의 입술이 구겨지며 턱에 조글조글한 주름이 잡혔다.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눈꼬리를 따라 주욱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시는…, 만날 수 없습니까?”
해준이 고개를 저으며 이소의 눈물을 부드럽게 문질러 닦았다.
“언젠간 또 만날 겁니다. 그때도 내가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해준이 자신의 입에 망각 잎을 올려 두었다. 노파는 해준만 먹으라 일렀지만 자신과의 시간을 기억한다고 남겨진 이 아이에게는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쓴맛이 나는 잎을 혀끝에 올려놓고 천천히 녹인 후 이소와 입술을 포갰다. 부드럽게 얽히는 혀에서 타액의 단맛과 마른 잎의 쓴맛이 어지럽게 섞였다. 이제 곧 잊혀질 것이다. 꿀꺽 소리와 함께 잎에서 녹아 든 약을 삼킨 이소의 눈이 잠시 크게 뜨였다가 점차 빛을 잃고 흐려졌다.
“내가 치른 현생의 몫까지 끝까지 행복하세요.”
이소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해준은 이소의 눈꺼풀을 살살 매만지다가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오자 주막 주인이 벌써 가시는 거냐고 웃으며 물었다. 고개를 숙이며 주인에게 은화를 한 잎 더 내밀었다.
“안에서 쉬시는 나리가 깨어나시면 드실 수 있도록 고깃상을 준비하게. 일어나시면 남쪽으로 가는 길도 알려 주시고.”
주막 주인은 허리를 숙이고 얼른 닭을 잡으러 들어갔다. 툇마루에서 신을 고쳐 신고 일어설 때 즈음 언덕 너머에서 한 남자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해준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갓 위에 쓴 천을 내렸다. 주막 주인이 ‘나리, 한 그릇만 올릴까요.’ 하고 해준을 붙잡았다. 해준은 뒤를 돌아보고는 ‘지금 들어오는 사내 것까지 두 그릇 준비해 주시게.’ 하고 몸을 돌렸다. 사내가 올라오며 얼굴을 가린 해준과 스치고 지나갔다. 저와 꼭 같이 생긴 사내는 훨씬 앳돼 보였고 깨끗한 얼굴이다.
‘여기 남는 방이 있습니까.’
돌연 방문이 덜컥 열리며 잠시 잠이 들었던 이소가 튀어나왔다.
“나리!”
이런, 약을 나누어 먹어서 그런지 완전히 잊히지 않았나. 이소가 미처 보지 못하고 툇마루에서 휘청였다. 마루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놀라 이소를 덥석 잡았다. 두 사람이 마주했다.
“괜찮소? 갑자기 그리 방에서 뛰쳐나오면….”
사내는 이소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여인으로 착각할 만큼 희고 아름다운 이. 말간 눈을 하고 저를 올려다보는 것이 무척이나 시선이 간다. 사내는 미소 지으며 이소에게 정중히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잠시 부축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소에게 더 묻지도 않은 사내는 가뿐하게 이소를 안아 올렸다. 이소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반항하지 않았다. 다행이군. 해준은 갓을 내리고 완전히 빠져나왔다. 이제 둘의 몫이다. 많은 값을 치른 보람이 있다.
* * *
“이 집엔 없구나.”
주막 주인은 바닥에 엎어져 벌벌 떨었다. 갑자기 칼을 차고 들이닥친 사내들이 집기를 부수기 시작하더니 무언가를 찾는 듯 위협적으로 굴었다. 개중 가장 몸집이 크고 수려하게 생긴 양반 하나가 주인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인이었다.
“이렇게 생긴 이가 오지 않았느냐. 키가 큰 사내 하나와.”
키가 큰 사내가 오기는 했으나 여인과 오지는 않았기에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찾는 것이 여기에 없자 주영은 몸을 일으켰다. 이 마을의 마지막 주막인데 여기도 없다. 그럼 도대체 어디로 숨었단 말인가. 소란을 틈타 제 수하들과 몸을 피했다. 주영 자신 역시 군졸에게 쫓기는 몸이지만 그전에 이소가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알고 죽어야 했다. 다친 어깨가 욱신거렸다.
“이번 생에는 찾으신다 하여도 이어지지 못하십니다.”
돌연 들리는 목소리에 주영이 고개를 돌렸다. 분명 들어올 때는 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새 주막 울타리 옆에 쪼그려 앉은 노파가 저를 올려다보고 웃고 있었다. 얼굴에 있는 큰 점이 거슬렸다. 주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노파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찾으시는 놈은 이미 이곳을 뜬 지 오래, 붙잡는다 한들 나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인데 어찌 떠난 인연에 그리 목을 매십니까. 귀한 시간을 낭비 마소서.”
“…미친 늙은이로군.”
주영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다시 말에 오르려 했다.
“이 주머니, 나리의 것이지요.”
주영은 날선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이소에게 주었던 비단 주머니였다. 명에서 장인이 만들어 특별히 가져다준 것인데 어찌하여 이 노파가 가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영이 저벅저벅 다가와 노파의 손에서 주머니를 빼앗으려 하자 메마르고 건조한 손은 주머니를 얼른 제 품속에 감추었다.
“내놓아라.”
“은화 일백 냥이면 다음 생의 인연을 붙잡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전에 그놈도 제게 그렇게 돈을 가져다주더니 제 인연을 찾아 훌훌 떠나지 않았습니까.”
주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다 이내 칼을 뽑았다.
“네 년이 도운 것이구나.”
“정확히 말하면 그분이 원했기에 방법만 알려 주었을 뿐.”
전 이번 생에 형님과의 연을 끊어달라 빌었습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이었단 말인가. 칼자루를 쥔 주영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본디 절실한 자가 원하는 바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절실할 정도로 나를 떠나고 싶었나. 주영의 입술이 서글픔에 작게 벌어졌다. 저를 보며 웃어 주던 그 미소가 좋았던 것뿐이었는데. 칼을 쥐고 다시는 자신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이소의 모습이 낯설어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상념에 빠진 주영을 바라보며 노파는 말을 이었다.
“원하신다면 천지신명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윤주영 나리.”
“이만 가시지요, 나리. 미친 늙은이입니다.”
난생처음 보는 이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주영은 저를 말리는 수하들을 뒤로하고 노파에 앞에 섰다. 노파는 미소 지으며 항아리 하나를 내밀었다. 은화 백 냥, 혹은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어도 좋습니다. 내세의 목숨과 인연 값이라는 것이 은화 백 냥으로 치환되는 것이라면 값싸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노파는 사특한 말로 자신을 홀린다. 주영은 항아리를 내려다보았다. 특별할 것이 없는 물이 든 것뿐인데.
“정말 다음 생에는 이어질 수 있는 것이냐.”
“그것 역시 나리 하는 양에 달려 있습니다. 본디 사람이라는 것은 제게 다정히 굴어 주는 이에게 약한 법이지요.”
“이어진다고 보장할 수 없는데 은화 백 냥은 너무 과하다.”
노파가 눈을 접어 웃었다.
“본디 이 값은 아닙니다만 나리께서 찾으시는 놈의 몸값이 간밤 사이 매우 불었습니다. 같이 있던 놈이 녀석의 몸값을 열 배는 더 치렀기 때문이지요.”
노파의 말에 주영은 품에 담아 두었던 쪽 비단을 꺼내 조심스레 열었다. 백금으로 만들어진 흰 꽃 비녀. 소란의 틈바구니에서 주운 이소의 흔적이었다. 제 피가 지워지지 않아 몇 번이고 문지르고 닦아 보았지만 그새 스며들어 얼룩덜룩해진 비녀대가 예전만치 아름답지 않았다. 반추해 보니 이소는 이 비녀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까지도 나는 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주영은 미련 없이 항아리 안으로 백금 비녀를 떨어뜨렸다. 항아리 안으로 떨어진 비녀가 돌연 부글부글 끓으며 가라앉았다. 주영은 목이 멘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어지지 않는대도, 억겁의 생마다 만날 수만 있어도 좋겠구나.”
“약속해 드리지요.”
주영은 가라앉은 비녀를 말없이 바라보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다음 생에는 부디 마주 보며 활짝 웃을 수 있게 되기를. 감히 그렇게 염원했다.
* * *
해준은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동이 튼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았는데 자신이 걸어 들어온 이 숲길은 아직도 어슴푸레한 안개와 푸른 어둠이 내려앉아 있어 적막한 느낌이다. 무릎을 스치고 지나가는 풀꽃들에 맺혀 있는 이슬이 도포 끝을 적신다. 폐부 깊숙이 스며 오는 찬 공기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성한 초목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넓은 들. 그 중심을 가로질러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미련 없이 가벼웠다. 어느덧 깊숙이 들어온 숲, 해준은 완연히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숲의 입구가 아침이었다면, 자신은 지금 밤을 향해 걸어 들어온 것이다.
약지에 걸린 붉은 실이 자신을 끌어당긴다. 어스름한 달빛을 모조리 받아 형형하게 반짝이는 실은 해준은 강하게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조여 올 정도로 끌어당기자 해준은 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더 걷자 눈에 익숙한 작은 문이 보인다. 후원이다. 해준은 고개를 숙여 그 작은 문을 통과했다. 전에 없이 불에 타 사라지기 전 자신의 한옥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운 나의 집. 이렇게라도 보니 반갑다. 실은 해준을 정원 한가운데로 끌어당겼다.
문득 이소의 말이 떠올랐다.
‘그 정원에서는 종종 마법같은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 같아요.’
네 말이 맞아, 이소야. 하나 틀린 게 없어. 해준은 불퉁한 표정의 제 연인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도포와 소매를 간질인다. 문득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해준은 풍성한 속눈썹을 감았다 뜨며 싱그럽게 웃음지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붉은 입술을 천천히 열고 숲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그리고 이내 후으- 하고 내뱉자 입 안에서 툭, 투툭 하고 작은 글자들이 줄을 지어 빠져나왔다. 하나, 둘, 셋……열 둘, 열 셋……열아홉, 스물. 마지막 녀석이 입술 끝에 걸려 버둥거리길래 해준은 짓궂게 푸 하고 세게 불어넣었더니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지며 풀숲으로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이 세계에 두고 갈 것이다. 이 곳에 있으면서 답답하고 묵직했던 기분도 가벼워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해준은 이제 정원 한가운데 자리한 연못 앞에 섰다. 실은 수면을 지나 연못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해준은 난감해하며 눈썹을 끌어 올렸다.
“아, 정말. 거짓말이지.”
그러나 그 물음이 무색하게도 붉은 실은 얼른 돌아오라는 듯 팽팽히 당겨졌다.
“수영 못하는데.”
해준은 머리를 짚었다. 할 일 다 하고 돌아왔더니 물에 빠져야 하는 거야? 설마 어린 너와 잤다고 심통 부리는 건 아니지. 왜 굳이 많은 문을 놔두고 연못이야. 해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자 실은 신경질적으로 해준을 끌어당겼다. 이대로라면 손가락이 잘리거나 그대로 끌려서 머리부터 빠질 기세였다. 해준은 제 연인의 투정이 귀엽게 느껴졌다. 이어 해준이 갓끈을 풀어 내렸다. 망건까지 모조리 벗어 버리고 고개를 흔들자 찰랑찰랑한 앞머리가 이마를 덮었다. 실이 묶인 약지가 다시 한번 움찔댔다.
“알았어요. 지금 가요.”
해준이 정원을 돌아보았다. 또 불러낼 일은 없겠지. 해준은 심호흡을 하고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풍덩, 한바탕 물보라가 친 후 이어 고요해진 정원에 평소처럼 적막이 찾아들었다.
* * *
“…교수님. 정신이 좀 드세요?”
해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린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자 눈 앞에 선 이소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묻는 이소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던 해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책이 가득 꽂힌 서재, 갖가지 인테리어 장식품과 조명, 제 앞에 선 이소의 옷차림까지 모두 자신이 익숙하게 여기던 풍경과 모습이었다. 긴장이 풀어져 다시 한번 털썩 몸을 기댔다.
“……하.”
“무슨 잠을 그렇게 깊게 주무세요. 주무시는 자세 불편해 보여서 제가 간이 침대로 옮겼어요.”
얼마나 깊게 잠드시면 옮겨도 몰라요. 진짜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다행히 창문 좀 여니까 바로 깨시네요. 이소는 놀리는 듯 배시시 웃었다. 해준은 제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연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꼭 끌어안자 매일 맡았던 이소의 비누 냄새가 난다. 이 나이를 먹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기야, 나 좀 안아 줘요.”
“무서운 꿈 꾸셨어요?”
이소가 해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니, 좋은 꿈.”
“무슨 꿈이요?”
해준은 눈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침과 분침이 정확히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체감하기로는 약 백 일이었다. 지독히도 외로웠고 쓸쓸했고 답답했지만 또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약간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무엇보다 꿈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 기를 쓰고 자세히 떠올리려 하면 도리어 조금씩 희미해지고 만다. 제 앞에서 우물우물 당과를 먹던 모습, 말을 타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던 모습, 볼을 붉히고 연모한다 고백하던 모습까지. 망각 잎을 반절을 먹어 언젠가는 완전히 잊히겠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종종 꺼내어 볼 수 있게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이소 씨를 봤어.”
“매일 보시면서.”
“그러게. 매일 보면서도 또 보고 싶어서 꿈에서도 만났지.”
해준은 그리웠던 제 연인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이소는 해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다 꼭 안아 주었다.
“나 많이 깨웠어요?”
“네. 처음에는 조금 흔들다가 나중에는 하도 안 일어나셔서 볼도 꼬집고 뽀뽀도 하고 뺨도 때렸어요.”
“뺨도 때렸어…?”
이소의 말에 해준이 고개를 들고 믿기지 않다는 물었다.
“농담이에요. 제가 그러겠나요.”
해준은 웃으며 이소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니야, 이소 씨는 내 뺨 때려도 돼. 마구마구 때려도 돼. 안 일어나서 답답했겠어. 웅얼거리며 또다시 버릇처럼 얼굴을 묻고 이마를 부볐다.
“이소 씨, 결혼식은….”
“네.”
이소의 목소리가 듣기 좋게 누그러졌다.
“내가 알아서 할게. 자긴 관복 입어. 자기 관복 입어야 해. 무조건.”
이소는 눈을 깜박이며 해준을 끌어안았다. 귀엽다. 조금 성을 냈다고 바로 마음을 돌려주다니.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한참을 치댔다. 이소만 모르는 백 일 만의 상봉에 해준은 질릴 때까지 이소의 목덜미와 어깨에 코를 묻고 살냄새를 맡았다.
창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낡은 서책의 지면을 제멋대로 넘겼다. 시조 한편 붉은 꽃 위에 나비 두 마리는 어느새 날아 들어와 사이좋게 꽃잎 위에 앉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