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어린 후원자 (47/50)

목차

외전 1. 어린 후원자

외전 2. 인연의 실

외전 3. 신랑 차해준 신랑 윤이소

외전 4. 다정의 정원

외전 1. 어린 후원자

내가 이렇게나 길치였던가. 이소는 다시 한번 이마를 매만졌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길을 맴돌았는지 모른다. 분명 기분 전환을 위해 조금만 걷다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해가 거의 넘어가 붉은 하늘은 어느새 보랏빛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여전히 이소는 저택의 첨탑조차도 보지 못한 채 빽빽한 나무숲 아래 서 있었다.

‘집이 조금 커요. 미아 되지 않게 조심해요.’

처음에 이 집에 들어올 때는 해준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제 나이가 몇인데 길을 잃는다고 그러는지. 그러나 호기롭게 걸음을 옮겼던 처음과 다르게 이제는 정말로 못 찾아갈까 봐 식은땀까지 삐질 흐르기 시작했다. 고요한 숲에서는 드물게 푸드덕거리며 새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소리만 났다.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숙소로 돌아간 시간, 인적이 드문 이곳에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이소뿐이었다. 심지어 업데이트를 한답시고 핸드폰도 책상에 놓아두고 그대로 나왔다. 정신 빼놓고 다니지. 이소는 깊게 숨을 토하며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이게 그놈의 결혼 때문에 그래.”

물기 가득한 여름 바람이 소매 사이로 파고든다. 이 저택에 온 후 오랜 시간 홀로 고민해 왔지만 혼자서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생각의 매듭은 날이 갈수록 더욱 엉키기만 했다. 스무 살 적 어린 저는 훨씬 무겁고 어려운 결정을 대책도 없이 잘도 내렸으면서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은 허울뿐인 결혼식을 가지고 몇 달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결혼이 하기 싫어서?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반대에 가까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결혼을 외치던 차해준이 이제 와 제가 다가갈라치면 한 걸음씩 뒤로 걸음을 물렸다. 장난스럽게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해준은 아주 진지하게 결혼 자체를 재고해 보라며 이소를 설득하고 있었다.

‘신중하게 생각해요. 허울뿐이래도 나랑 결혼하고 나면 이전으로는 못 돌아가요.’

이소는 발에 채이는 돌을 괜히 툭 쳐 멀리 보내 버렸다.

“누가 되감기 안 되는 거 모르나. 먼저 마음 들뜨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왜 발 빼.”

이소는 투덜거리며 다시 한번 저택 쪽으로 짐작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오백 미터 정도 길게 뻗은 메타세쿼이어 숲길은 빠져나가는 길이 세 갈래, 선택만 잘한다면 오늘 안에 아늑한 침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지난겨울, 이소가 해준의 본가에 들어오고 해준의 부모님을 만난 날부터 시작되었다.

* * *

겨울의 끝, 악몽 같던 소란을 겪은 후 이소는 일주일 을 호텔에서 지냈다. 주영의 일로 증인으로 출석하고 병원을 다니면서 통원 치료를 하느라 바쁜 것도 있었지만 치료 기간동안 해수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경호원 없이 해수와 단둘이 데이트를 실컷 했다. 해준은 같은 호텔 건너편 방에 머물며 매일 아침 조식을 함께했다.

‘이소 씨, 오늘은 어디로 가요? 놀이동산? 식물원?’

‘맞혀 보세요. 저녁 먹을 때 맞춰 찾으러 와도 좋구요.’

‘아…자기야, 제발….’

제 대꾸에 이마를 짚는 해준을 보며 이소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소는 그 사건 이후에도 해수의 추적기를 여전히 해준에게 연결해 놓기로 했다. 속박에 익숙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연락을 않더라도 언제 어디라도 해준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달까. 무엇보다 얼마나 좋은 기기를 달았는지 공기업에서 나온 등하원 알리미보다 위치나 시간 면에서 정확했기 때문에 마냥 떼어 버리기도 아까웠다.

턱을 괸 채 제 아빠가 해준을 놀리는 것을 지켜보던 해수가 아저씨가 안쓰러운지 자신의 감자튀김을 덜어 해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부녀가 하는 짓이 귀여워 해준은 그만 웃어 버렸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고 세 사람은 언덕 위 저택을 확인하러 갔다. 손바닥만 한 잔열까지 모두 잡아내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해준의 저택은 건물의 기둥을 받쳐 주는 주춧돌까지 새카맣게 탄 상태였다.

‘해수야, 그럼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러 갈까?’

해준의 말에 세 사람은 검게 그을린 지난 계절의 추억을 뒤로하고 해준의 본가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 치료가 필요한 성인 둘과 돌봄이 필요한 아이 하나를 태우고 준경의 차는 유유히 오래된 동네를 빠져나갔다.

준경의 차를 타고 도심에서 두 시간 반을 떨어진 해준의 본가에 도착할 때까지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잤다. 잠들기 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깍지 낀 손의 엄지를 해준의 손바닥에 슬슬 문질렀다. 얼핏 아직 처리되지 않은 해수의 입양이라든지, 경찰 진술과 트라우마 상담이라든지의 산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해준이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부드럽고 나긋한 음성을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나 보다.

“이소 씨, 다 왔어.”

그러나 몇 번을 졸다 깨다 하며 해준의 본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이소는 해준이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준경의 차는 양옆으로 광활한 들판을 낀 도로를 한참 지나 커다란 비석이 세워진 곳 앞에서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구불구불한 길 주변으로 키가 작은 풀꽃과 나무들이 잘 정돈된 채 늘어서 있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집들이 길목 사이사이에 지어져 있었다. 꼭 동화책 삽화처럼 아기자기한 풍경을 보며 이소는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준경의 세단이 미끄러지듯 언덕을 올랐다. 푸른 초목이 늘어선 길을 지나며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길이 예뻐서 좋겠어요. 아니다, 관광지인가?’ 하고 읊조리자 준경이 룸미러를 보며 담백하게 대꾸했다.

“회장님 저택에 진입한 지는 한참 되었습니다. 아까 보신 비석부터가 쭉 사유지입니다.”

“네?”

그 말에 이소는 농담하지 말라며 해준을 돌아봤지만 정작 해준은 준경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마을 입구가 아니라 본가로 들어가는 입구였단 말인가. 이소는 문득 제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조금 전 자신이 가진 것은 집뿐이라고 투정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아니 더 많이 상식을 벗어난 것 같은 이 사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곧 도착합니다.”

준경의 차가 저택의 입구에 다다르자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비로소 저택의 안까지 들어오게 된 이소는 창밖을 보며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일렬로 줄을 세워 자를 대고 깎은 듯한 나무들이 수십 그루. 그 사이로 깨끗하게 정돈된 산책로가 있었고, 중앙 광장으로 추정되는 곳에 해준의 키보다 훨씬 높은 화려한 분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백색 대리석 계단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진회색 지붕이 얹어진 크림색 외관의 거대한 궁전 같은 저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소는 입을 가린 채 자기도 모르게 해준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소의 순진한 반응에 해준이 큭큭 웃었다.

“교수님 집이 작아 보일 지경이에요.”

“항상 나보고 소박하게 사는 거 지겹지도 않냐고 하시거든. 정작 본인들 집이 큰 줄 모르셔.”

해준이 웃으며 자신의 소매를 쥔 이소의 손등을 살짝 두드렸다. 자다가 깬 해수는 차에서 내린 후 설마 오늘도 호텔에 온 거냐며 몇 번을 더 물었다. 준경은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어른들 이야기 나눌 동안 얌전히 있으면 친구들에게 데려다주겠다며 달랬다. 은찬과 친구들을 곧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해수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분수대와 석조계단을 지나 유달리 커다란 대문에 카드키를 대고 나면 자동으로 현관문이 열렸다. 이끼가 하나 끼지 않은 깨끗한 수조가 양옆으로 장식된 복도를 지나면 비로소 생활공간에 다다랐다. 여기까지만 와도 벌써부터 진이 다 빠졌다. 이런 곳에 사는 해준의 부모님은 배달 음식 같은 건 주문하지 않겠지만 어쩐지 음식을 주문한다고 하더라도 배달원이 벨을 누르고 10분을 더 기다려야만 비로소 계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앉아 있어요. 사용인들은 다 내보냈고 오늘은 간략히 구조 설명만 해 줄게요. 자긴 커피?”

“네. 단 거요.”

“알지. 해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완전 좋아요.”

이소는 해준의 손에 이끌려 본관의 다이닝 룸 의자에 몸을 기댔다. 준경은 재킷을 벗고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저택 안내문을 꺼내 들었다. 본가 첫 방문에 당황하고 어색해할 이소를 위해 사용인들을 잠시 물린 해준이 직접 커피를 내리고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지루함에 몸을 뒤틀던 해수가 얼른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텔레비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소는 제 앞에 선 준경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안내문을 펼쳐 들었다. 한눈에 봐도 빼곡하게 채워진 글씨와 그림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지도와 안내문까지 필요한 정도…라는 거죠?”

준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들어 지도 위 건물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이곳은 단순한 가정집이 아닙니다. 차 회장님과 사모님께서 주로 지내시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비즈니스와 업무를 보기 위해 들르는 곳이기도 하죠. 정규 계약된 사용인들만 백 명이 넘고, 그중 일흔두 명이 이 저택에서 기거하고 있습니다. 그중 도련님의 저택에 있었던 사람들은 제외합니다. 회장님과 계약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차 회장이 부리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정식으로 고용된 사람들이라 했다. 그들은 사용인들이라고 불리었고 주어진 일만 하고 출퇴근을 하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새삼 해준의 저택에 있었던 식구들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실감이 갔다.

“저택 내부에는 재단에서 직접 관리하는 미술관도 있으며, 종종 저택 중앙홀에서 행사가 열리기도 합니다. 프라이버시를 위해 각 공간들의 거리가 꽤 먼 편이고 전체적으로 길이 조금 복잡합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물이 많기 때문에 잠깐 들르시는 분들은 길을 자주 잃곤 하시죠. 공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딱히 팻말을 세워 놓는 것도 아니고요.”

“외우는 수밖에 없겠네요.”

해준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이 이국적인 디자인의 저택은 해준이 어릴 때부터 쭉 살았던 곳이라고 했다. 저택의 외관은 고풍스러웠으나 내부는 꽤나 현대적이고 모던한 인테리어였다. 크기가 컸지만 가구나 집기가 많지 않아 간결하면서도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이소는 자신이 지금 미술관에 와 있는 것인지 가정집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집 안을 걸을 때마다 흰 대리석 바닥에 흙이라도 묻진 않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손으로 무늬를 하나하나 그린 듯한 벽지, 군데군데 자리한 조각상과 미술품, 테니스코트와 수영장, 본관에는 사용하는 방만 12개, 게스트 룸으로 쓰는 방은 6개. 통창으로 만들어진 와인 룸과 아트 갤러리, 해준을 위한 작업실까지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는 길에 본 건물들도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많았다. 자신이 다 보지 못한 것들도 있겠지. 여기가 대학 캠퍼스야, 집이야. 도대체 뭐가 집뿐이라는거야. 준경의 설명을 듣다가 조금 질린 이소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기억도 다 못 할 것 같았다. 해준이 웃으며 커피를 내려왔다.

“아버지가 어머니 지루하지 않게 뭘 많이 만들어 놨거든. 미로도 있어요.”

“미로요?”

커피를 든 이소가 눈을 깜박였다. 집에 미로가 있다고? 해준이 눈을 접어 웃었다.

“별관 뒤에 있는 랠란디 정원인데 심심하면 들어가서 놀아도 돼요. 못 나올 것 같으면 전화하고. 내가 찾으러 갈게.”

“못 나올 정도로 복잡해요?”

“조금.”

이 사람의 ‘조금’을 믿지 못하겠다. 보나 마나 엄청 복잡할 것이다.

“교수님은 잘 찾으시고요?”

“지금은 눈 감고도 찾지. 어릴 땐 아버지에게 혼이 나면 열받아서 들어가곤 했는데, 혼자 힘으로 나오지 못해서 많이 울고 그랬어요.”

미로에 갇혀서 울고 있는 어린 해준이라니. 어쩐지 나비넥타이를 하고 반바지에 멜빵을 찬 채 울고 있는 몸집 작은 도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소는 옅게 웃음을 터트리곤 다시 턱을 괴고 준경의 설명을 마저 들었다. 도착하면 예전처럼 마당에서 저택 식구들을 모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우선은 눈을 붙인 후 내일 아침이 되면 만나러 나가 봐야겠다 생각하며 짐 가방을 챙겨 들었다. 준경은 이소의 남은 짐을 받아들고 ‘회장님께서 도련님 잘 도착했는지만 확인하시면 일주일 정도 더 계시다 오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해준에게 말을 전했다.

“댁에 계시는 게 아니었어요?”

“어머니 쇼핑하시는데 끌려가셨어.”

“어디로요?”

“프랑스.”

“…….”

이소는 다시 한번 이 남자가 자신이 살던 세계와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우선 지금 당장은 해준의 부모님을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바짝 긴장했던 몸이 다시 노곤노곤 풀어졌다. 해준이 타 온 커피를 마저 마시면서 이소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

“그럼 해수 그냥 거기로 갈 거야?”

“응. 아빠가 허락해 주면 나 거기서 잘래. 준경 할아버지한테 여쭤봤는데 아직 친구들 깨어 있대.”

해수는 벌써부터 신이 난 듯 가방을 둘러멨다. 이소는 어쩐지 해수가 저와 해준의 사이를 알고부터 부쩍 자리를 피해 주는 느낌이 들어 현관을 나가려는 딸을 덥석 붙잡고 속삭였다.

‘아빠 괜찮으니까 오늘은 같이 자자.’

이소의 말에 해수는 조금 당황하더니 이내 마치 아이를 달래듯 아빠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빠, 미안해. 나도 친구랑 좀 놀자.’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내일 데리러 오고.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준경의 차에 올라탄 해수를 바라보며 이소는 머쓱한 듯 코를 훔쳤다. 아니 무슨 애가 혼자 컸어.

해준의 식구들이 지내는 숙소는 본관에서 또 5분을 차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조금 전 들어오면서 보았던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본가의 사용인들과 달리 상당히 독립적인 공간에서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묘하게 안심이 되는 것은 왜일까. 이소가 팔짱을 낀 채 현관에 서서 준경의 차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해준이 이소의 등을 끌어안았다.

“해수 방은 조만간 만들어야겠어.”

“뭘요. 얼마나 지낸다고.”

“그래도. 남는 방은 많으니까 내일 중에 가구 들여오면 돼. 잠깐 있더라도 해수 공간은 있어야지. 우선 들어가요. 자기도 고생했어.”

해준이 자연스럽게 이소의 몸을 돌려 별관으로 안내했다. 어느 순간부터 꽤 자연스럽게 따로 생활하게 된 해수가 의젓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커 가면서 아빠와 함께 잠을 자지 않게 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해수가 자신과 해준의 관계를 매우 배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마냥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고 자신 역시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소는 괜히 눈이 시큰해져 한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해준의 손을 잡고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에 도착한 이소는 고개를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준경이 있을 때는 너무 모양이 빠지는 것 같아 구석구석을 둘러보지 못했는데 해준과 단둘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져 벽을 만져 보기도 하고 조명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해준은 도어록을 연 뒤에도 현관에 기대어 서서 이소가 집 외관을 모두 구경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감탄은 집 안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천장이 되게 높아요.”

해준은 입을 벌리고 천장 위 샹들리에를 구경하고 있는 이소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별관은 본관과 꼭 닮아 있었지만 크기는 조금 작고 울타리가 높아 사생활이 철저하게 보장된 공간이었다. 본관에 비해 조금 더 생활감이 있었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강했다. 무엇보다 문을 열자마자 해준의 냄새가 났다.

2층 침실에 도착하자 창문을 열어 놓았는지 하얀 커튼이 소란스럽게 펄럭였다. 해준은 한쪽 구석에 짐을 옮겨 놓고 창문을 꼼꼼히 닫았다. 아직 밤바람이 따뜻한 편도 아니었고 숲 한가운데 있어 커다란 벌이 종종 들르곤 했다. 이소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방을 돌아보다 커다란 창문을 마주하고 있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이 방에서 지내셨구나.”

언덕 위 한옥에서는 보지 못했던 오래된 추억들이 사진으로 남아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얼굴에 흙이 잔뜩 묻은 채 웃고 있는 어린 해준의 사진,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찍은 사진, 대학 시절인지 한자로 된 고서를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 학사모를 쓴 사진…. 이소는 정말 정신없이 구경했다. 하나같이 다 귀엽고 잘생겼다. 찍은 사람의 애정이 느껴지는 사진들이었다.

“응. 어릴 때부터 내가 쓰던 방. 따로 나가서 산 지는 오래되었는데 그래도 본가 내려오면 생활하는 공간이지.”

“뭔가 신기해요. 꼭 어제까지 쓰던 방 같아요.”

“사용인들이 매일 쓸고 닦으니까.”

“흐음, 그렇구나.”

이소는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를 기분 좋게 두드리며 해준의 흔적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한옥에 있을 때는 그저 예스럽다 못해 고루한 취향의 인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모던하고 감각적인 인테리어에 녹아든 해준을 보고 있으니 또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약간 뭐랄까, 드라마에 나오는 본부장님들이 이런 인테리어에서 빌딩 숲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여기는 빌딩 숲이 아니라 진짜 숲이네. 여유롭게 앉아 맥락 없는 상상을 해대자 이소의 입매가 둥근 호선을 그리며 내려올 줄을 몰랐다.

앞뒤 없는 상상에 빠져 있는 것은 이소뿐만은 아니었다. 해준 역시 팔짱을 낀 채 자신의 방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는 이소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 있었다. 이 안정을 찾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습게도 손에 꼭 쥐려고 하면 홀연히 날아가 버릴 것 같았던 제 연인은, 도리어 자신의 밑바닥을 보고 나서야 돌아왔다. 아직도 해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까운 자신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면 이렇게 무척이나 원초적이고 초라할 뿐인데. 제 날것의 마음을 어여삐 여기고 감싸 안아 준 이소는 과연 자신을 동정해서 돌아온 것은 아닌지, 아주 가끔씩 그런 불안을 곱씹곤 했다.

“교수님.”

이소의 목소리에 어지러운 상념이 깨진다. 깊게 침잠하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고 복사꽃 같은 제 연인을 마주했다.

“교수님도 쉬세요. 피곤하실 것 같아요.”

“괜찮아요. 별로 한 일도 없는걸. 이소 씨 먼저 씻어요, 나는 잠깐 짐 정리하고 있을게.”

해준이 허리를 숙여 짐가방을 살짝 들추며 이소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짐 정리는 나중에 해도 되는데.”

이소의 단정하고도 새침한 목소리가 방 안에 톡 떨어진다.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응?”

“…나중에 해도 된다구요.”

이소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침대 시트를 손가락으로 슬슬 밀어냈다. 말없이 이소를 바라보던 해준은 다소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이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르륵 접히는 눈꺼풀이 완만한 반달을 그리며 해사한 낯을 만들어 냈다.

“이소 씨, 뭐 다른 거 하고 싶구나.”

이소는 시선은 맞추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다 이내 입술을 우물거렸다.

“……저만 그런가요.”

저도 안다. 고작 소란이 보름 전이었다. 해수는 무사했지만 이소는 경찰 증언을 위해 몇 번이나 서를 왔다 갔다 했고 이후에도 티 나지 않게 악몽을 꿨다. 호텔에서도 식은땀에 절어 눈을 뜨면 바로 곁에 잠을 자고 있던 해수를 더듬어 찾았다. 다행히 곤하게 잠들어있는 딸을 발견하면 숨을 몰아쉬며 말없이 끌어안았다. 후유증은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무서운 기억이었다. 해수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일부러라도 더 둘이 시간을 보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해준 역시 혼을 빼놓을 정도로 피곤했는지 바로 맞은편 객실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때만 겨우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잠에 빠져 살았다. 눈을 뜨면 범양재단 관련 사건을 마무리하느라 낮 시간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고, 아주 늦은 밤 돌아와서 잠을 잤다. 그렇게 해준과 이소 두 사람은 보름 가까이 얼굴만 마주하며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 이제야 비로소 마주했다.

“아니요, 저도 그렇죠.”

고작 보름 동안 따로 지낸 것뿐인데도 연인과 단둘이 남는 순간은 언제나 애달프다. 가까이 다가온 해준이 몸을 기울여 이소의 턱을 살포시 쥐고 입을 맞췄다. 자신의 입에서는 씁쓸한 커피 맛이 났는데 해준은 언제 양치를 하고 왔는지 시원한 박하 향이 났다. 가볍게 포개진 입술은 따듯했고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는 부드러웠다.

살금 열린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해준의 혀가 혀 아래 여린 살을 간질였다. 이소야, 성대를 울리지 않은 채로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턱 끝을 잡았던 손이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뒷목을 감싸 안았다. 이소의 고개가 젖혀지자 한층 더 진득하게 들어오기 시작한 혀는 입천장을 긁어내리며 호흡을 끌어당긴다.

“흐…….”

필사적으로 따라가려 애를 쓰지만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듯 이소가 입술 새로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자 해준이 나른한 숨을 토하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붉은 입술 끝에 미처 배웅을 끝내지 못한 혀가 젖은 채 매달려 있었다. 먼저 조른 것치고는 그새 기력이 다하기라도 한 듯 호흡이 불규칙했다. 해준이 입술 끝에 매달린 작은 혀를 바라보다 부드럽게 핥아 올리자 이소는 그제야 제가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입을 합 다물었다. 이소는 민망한 듯 입술을 꾹꾹 감쳐물다가 팔을 들어 해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누가… 안 오겠죠?”

해준이 이소를 천천히 침대에 눕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매번 느끼는 건데, 왜 이리 누가 오는 걸 걱정해요. 도대체 누가 본다고.”

해준의 입술이 이소의 목덜미와 곧은 쇄골뼈에 찬찬히 내려앉았다. 이소는 아무 말 없이 눈을 흘겼다. 자꾸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입을 맞추고 바지를 끌어 내렸던 사람이 누구인데.

“…문 잠갔으면 좋겠단 말이에요.”

“여긴 아무도 안 올 텐데도?”

“그래도… 둘만 있는 게 좋아요.”

느리게 끌어 올린 니트 안으로 부드러운 손이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흠칫 몸을 떤 이소가 이불을 살짝 그러쥐며 다리를 바르작거리자 해준이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매번 반응이 귀엽다.

“자기는 꼭… 둘만 있으면 다 해도 된다는 것처럼 굴어.”

해준이 이소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이제는 옅어진 상처는 희미한 자국만 남아 있었다. 이 여린 목을 너무 세게 물었었다. 이를 감춘 채 혀끝을 세워 베어 물듯 키스하자 이소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움찔거렸다.

“흣…. 그게 왜요. 둘만 있으면, 읏… 괜찮잖아요.”

목덜미를 살짝 빨아올리던 해준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요 맹랑한 것을 보게, 라는 표정이었다. 정작 이소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저를 내려다보는 해준의 눈에 섞인 장난을 읽어 낸 이소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다 벗기고 스타킹만 신은 채 하기도 했었는데…. 얼마나 더 심한 짓을 하시겠어요.”

스타킹을 신은 것도 제 인생에 정말 큰 충격이었는데 심지어 그것만 입고 섹스를 했다. 이소가 그날을 생각하며 큭큭 웃었다. 그러나 정작 미소를 띤 채 이소를 내려다보고 있던 해준은 제 음침한 욕망을 순진한 제 연인이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민망해졌다.

“음.”

“왜요? 더한 게 있어요?”

“아니, 그냥….”

해준은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를 두고 밀어내고 몸을 떨던 이가 조르듯 몸을 겹쳐 온다. 그것만으로도 해준은 충분히 기뻤다.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가 어쩌다 자신처럼 깊고 검은 것에게 빠져 이리도 마음을 놓고 자신을 열어 주는지. 네가 원한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설사 그게 시체 위에서 몸을 겹쳐 달라고 할지라도 나는 기꺼이 그리할 것이다.

“이소가 나를 정말 예쁘게 봐주는 것 같아, 좋아서 그러지.”

해준은 코끝으로 이소를 콕콕 찌르고 부비며 연인의 투정을 여유롭게 받아 주었다. 문을 잠그라 채근하면 초승달처럼 작은 귀를 살짝 덮어 주며 내 목소리가 아닌 것은 듣지 말라 일렀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그러쥐고 밀어내려하면 보들보들한 복부에 입을 맞추며 애교를 부렸다. 해준이 이소의 바지를 살짝 끌어 내리며 도톰하게 올라온 앞섶을 입으로 살짝 물었다 놓았다. 만족스러운 신음이 터지며 허리가 크게 휘자 몸을 일으켜 다시 올라온 해준이 이소의 코끝과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사실 아직도 망설여.”

“뭘요?”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와 달리 속옷 주변을 느리게 간질이는 손길은 섬세하면서 노골적이다. 차츰 단단해지는 아래를 가볍게 쥐었다 펴며 문지르자 이소의 손이 해준의 팔을 엉금엉금 붙잡았다.

“…다정하게 안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너를 아프게 할까 봐.”

속옷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 손가락이 체모 하나 없는 살갗을 진득하게 문지른다. 해준은 털 오라기 하나 없는 매끈매끈한 이소의 성기를 좋아했다. 하루 종일 물고 있으라면 기꺼이 물고 있을 수도 있었고 종종 입에 문 채로 잠들고 싶기도 한데 아마 이소는 무척 싫어할 것이다. 이를 세워 씹어 보고 싶기도 하고 이소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주 세게 빨아 보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 또 엄청 울어 버릴 테니까 그건 정말 하지 말아야겠지. 해준은 고작 성기 한 번을 쥔 잠깐 사이에도 온갖 못된 상상을 하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이소에게 내보이면 안 될 더러운 욕심들은 꾹꾹 내리누른 채 점잖게 말을 이었다.

“두 번 안고 싶은 걸 한 번 안고, 남은 한 번은 지켜보는 걸로 만족하기도 해.”

“아……. 교수, 님….”

귀두 근처를 엄지손가락으로 긁어내리며 남은 손가락으로 기둥을 세게 쥐자 이소가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떨군다. 발기 상태의 이소의 성기는 많이 작은 편은 아니었다. 해준의 것이 흉흉할 정도로 커서 그렇지, 오히려 체모가 없어 뿌리까지 희게 드러난 것이 꽤 인기가 좋았을 정도로 곧고 긴 모양이었다. 해준이 입에 물고 목 끝까지 깊이 찌르면 목젖이 얼얼할 정도로 단단하기도 했고, 정액의 점도도 아주 묽지 않고 적당히 미끈거려 좋았다.

담배를 태우는 것도 아니고, 커피와 고기보다는 물과 과일을 많이 먹고, 과자보다는 초식 동물마냥 당근을 오독오독 씹는 습관이 있는 사람. 이소는 도대체 왜 이렇게 제 성기에 집착하냐고 질색을 했지만 해준은 그 비누 냄새 나는 가랑이에 제 코를 파묻고 한입 한입 먹어 치우듯 입술을 옴찔대는 행위를 좋아했다. 무엇보다 음낭과 닿아 있는 허벅지 안쪽이 무척이나 예민해 그곳을 문지르거나 때리면 울컥울컥 속옷을 적시는 것이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 않고 야해 빠져 좋았다.

“자, 잠깐만……. 같이… 흐… 해야, 하는…데….”

완두콩 같은 이소의 발가락이 동그랗게 말린다. 일부러 사정을 유도하듯 기둥을 잡은 채 무거운 리듬으로 쓸어올렸다 내리기를 여러 번, 손가락 사이로 빼꼼 솟아난 선단에서 투명한 애액이 찔끔찔끔 흘러 속옷 끝을 적셨다. 어떻게든 사정하지 않으려고 가는 허리가 자꾸만 뒤로 빠진다. 다급하게 내려온 이소의 손이 해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기다려, 이번에는 나도…. 나도 해 줄 거란 말이에요.”

젖은 눈동자가 원망을 달고 고개를 젓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천천히 얽혔다. 해준이 움직임을 멈추자 이소의 손이 해준의 바지 버클을 느리게 매만졌다. 혼자 불규칙하게 집어삼키던 호흡은 다른 형태로 조용히 떨리기 시작한다.

“교수님. 기억…하세요? 제가 교수님보고 제 약이라고 한 거요.”

“응. 기억해.”

이소는 천천히 버클을 풀고 해준의 속옷을 살짝 끌어 내렸다. 한 손으로 다 쥐기에는 빠듯한 굵기의 기둥이 툭 하고 제 성기와 부딪힌다. 언젠가는 꼭 입으로 해 줘야지, 결심했지만 예전에 귀두와 기둥 중간 부분까지만 겨우 입 안에 담았었다가 턱이 아파 금방 그만두었었다. 손바닥을 들어 천천히 자신의 성기 위에 굴리듯 문지르자 귓가에서 해준의 낮은 숨이 터진다. 상냥한 말투, 부드러운 어조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성기를 더듬으며 발정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두 기둥을 가까스로 겹쳐 잡은 채 이소가 해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낮게 속삭였다.

“진짜예요. 같이 있으면 불안한 것도… 아픈 것도 다 나아요.”

가볍게 입술을 찍은 이소가 고개를 젖힌 후 해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흥분으로 입술과 뺨이 새빨갛게 익었다.

“손잡고 있을 때보다 안고 있을 때 더, 안고 있을 때보다 입 맞출 때 더, 입 맞출 때보다 교수님 것이 제 안에….”

이소는 말을 멈추고 해준의 것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젖은 눈동자와 벌어진 입술 새로 보이는 붉은 혀가 해준을 홀리듯 끌어당긴다.

“그러니까… 안아 주셔도 돼요. 교수님이 다정한 건, 제가… 이미 다 알아요.”

경애하는 연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해준은 단번에 이소의 속옷을 동시에 아래로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벗겨진 바지가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이소의 다리가 해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해준의 손바닥이 기둥을 그러모은 이소의 손바닥 위로 포개졌다. 위아래로 왕복하며 나란히 선 귀두를 엄지로 짓이기듯 세게 문지르자 이를 악문 이소에게서 새끼강아지 같은 신음이 터진다. 허벅지를 조이며 조르는 듯하다가도 자극이 조금만 강해지면 금세 도망치듯 허리를 뒤로 물린다. 해준은 더 움직이지 못하게 선단을 강하게 움켜잡으며 기둥뿌리까지 한 번에 세게 밀어 내렸다.

“아으읏……!”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 틈으로 애액이 스며들면 기둥에 붙은 손이 미끄러지며 치골 위 여린 살에 부딪힌다. 섹스할 때 그곳을 엄지손가락으로 진득하게 눌러 주면 이소는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렀다.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사정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두 손으로 내리누를 때 발버둥 치는 이소를 보면 더 강하게 발정하곤 했다. 손으로 해 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계속해서 같은 부위를 망치질하듯 자극하면 이소는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열락에 취했다.

“으흑…. 아…… 너무, 아으흑…. 좋….”

이소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충분했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이 떨어질 듯 말 듯 했다. 사정이 다가올 기미가 보이자 이소는 어깨를 움츠리고 등을 바르작댔다. 니트 안으로 바짝 선 유두가 옷감이 움직일 때마다 위아래로 쓸려 움찔거렸다.

“이소야, 나 봐야지.”

“으응, 네에….”

해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소는 얼른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마냥 입을 벌려 해준의 입술을 덥석 물었다. 호흡이 달려 죽을 것 같다. 해준이 뿌리 끝부터 선단까지 빠르게 비벼 올릴 때마다 홧홧하게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성기를 문지르는 자극만큼이나 복부 아래를 세게 때리는 충격으로 자꾸만 몸 전체가 울리는 것만 같다. 해준이 감싸 쥔 제 손이 멋대로 움직인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자신도 모르게 더 세게 쥐자 도리어 자극은 배가 됐다.

“아…! 아흑…… 흐윽…! 아! 교, 교수님!”

해준의 몸통을 조인 이소의 허벅지가 빠르게 경련하고 가는 허리가 동그랗게 말렸다. 남아 있던 손 하나가 시트에서 떨어져 해준의 등에 매달린 채 손톱을 세웠다.

“아, 안 돼…! 아……! 아, 교수, 님……!”

절정의 순간, 참을 수 없다는 듯 이소가 이마를 떨어뜨리고 해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가늘게 흐느꼈다. 땀이 밴 해준의 셔츠를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몇 번이나 다시 더듬어 올라가 그러쥐었다. 삽입한 것도 아닌데 기침을 하듯 입술 새로 비집고 나오는 신음이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해준이 손바닥으로 선단을 감싸 쥐며 따뜻하게 튀는 정액을 모조리 받아 냈다. 두 사람의 탁액이 섞이며 손바닥 안에 가득 남았다. 해준의 어깨를 틀어쥔 하얀 손 끝에 차츰 색이 돌아올 때 즈음 이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기 젖었던 붉은 입술은 거친 호흡을 뱉으며 그사이 바싹 말랐고 홍조가 어렸던 뺨이 조금씩 본래의 색을 찾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본 해준의 얼굴에도 볼 웃음이 소복이 올라왔다.

“정말… 이소 씨도 은근 밝혀.”

“……전 딱 보통이에요.”

이소가 시선을 피하자 해준이 코끝으로 이소의 뺨을 슬쩍 부볐다.

“맞아요, 자기는 오늘도 사특한 내게 휩쓸린 거예요.”

해준은 또 한 번 져 주었다. 이소는 제 투정을 기꺼이 받아 주는 해준이 좋아 다시 한번 품에 파고들었다. 이렇게 따뜻한 품을 그동안 여태 잊고 살았다니. 이소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고 재회의 여운을 길게 만끽했다. 해준의 말처럼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소는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교수님.”

“네, 이소 씨.”

해준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나 진짜 은근 많이 밝히는구나. 정말 해준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이소가 피식 웃었다.

“우리 또 해요. 이번엔 제대로.”

둘에게 남은 것은 긴 밤뿐이었다.

* * *

그렇게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소의 인생에도 도통 올 것 같지 않았던 따뜻한 봄은 해준의 곁에서만 벌써 두 번째로 맞았다. 처음 학교 캠퍼스에서 해준을 만나 난리법석을 피워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의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이리 태평하게 누워 있어도 되는 것인지. 이소는 별관 뜰 앞에 해준이 마련해 놓은 라탄 의자에 기대어 누운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본가에서의 생활은 꼭 긴 휴가를 온 것 같았다. 밤마다 해준이 꽃을 잔뜩 사 들고 돌아오면 뛰어나가 끌어안기도 하고, 가끔씩 일하는 아주머니를 내보내고 제 식대로 음식을 잔뜩 차려 해준이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걸 보며 흐뭇해하기도 했다. 해수가 친구들과 자겠다고 준경의 차를 타고 멀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해준이 맨발로 뛰어나와 이소를 번쩍 안고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종종 그렇게 뛰쳐나오는 해준을 약 올리려고 뜰에서 술래잡기하듯 도망 다니기도 했다.

사용인들이 모두 자리를 물린 시간, 문을 잠근 것을 두세 번씩 확인하면 밤새 살을 맞대고 밤을 보냈다.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별관에 있는 모든 방에서 한 번씩 섹스를 했고, 거실 소파와 주방 테이블, 욕실 4개를 거쳐 발코니에서 별을 보다가도 입을 맞추고 몸을 겹쳤다. 이소는 해준이 하자는 대로 맞춰 주는 편이었고 대체로 잘 따라왔다. 정신없이 섹스에 몰입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더 해 달라며 조를 때도 있었고, 안 해 본 것들에 호기심이 생겨 도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문을 잠그고 충분히 준비를 한 후 몸을 섞길 원했던 이소와 달리 해준은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었고 그 때문에 매번 긴장감에 외줄을 타느라 이소는 홀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안 온다니까요. 울지 마, 착하지. 쉿.’

그러나 결국 이소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군 해준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들킬 뻔한 날도 있었다.

‘이소 님 여기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럴 리가. 오늘 통 못 봤는걸.’

해준이 책상에 턱을 기댄 채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단정한 방 안에는 해준이 평소에 즐겨 듣던 해금 연주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금까지 책을 읽고 있었던 듯 해준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준경이 문을 닫고 방 안을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해준이 몸을 살짝 돌리자 책상 밑에서 작은 머리통이 슬쩍 올라왔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아래를 헐벗고 무릎을 꿇은 이소가 해준을 향해 눈을 흘겼다. 해준의 것을 입에 문 이소는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코와 입으로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예쁜 눈가가 푹 젖어 있었다. 해준이 눈썹을 내린 채 입술을 감쳐물며 미소 지었다.

‘미안, 자기야. 놀랐지. 집사님 들어올 줄 몰랐네.’

‘으븝……! 브븝……! 내가, 지짜…! 무, 당그다고…! 흡!’

무어라 성을 내고 싶은데 입에 물린 것이 하도 크고 깊게 들어와 있어 이소는 해준의 허벅지를 때리며 화를 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며 해준은 또 무슨 버튼이 눌렸는지 ‘미안, 다시 호흡 조절해.’ 하고 연신 사과하며 천천히 허리 짓을 했다. 그러나 결국 이소는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입으로 할 때마다 실패했다. 아무리 잘 가르쳐 줘도 호흡이 달리는지 꼭 잠수하다가 도망치는 아이마냥 콜록대곤 했다.

몇 번의 시도가 이어졌지만 결국은 해준의 허벅지에 손톱자국만 잔뜩 남긴 채 포기선언을 했다. 그러면 그날은 지친 윗입 대신 아랫입으로 해준을 받아야 했다.

매일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온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 시골이라 공기가 좋아서 그런 건지, 스트레스가 없어서 그런 건지 기절하는 일 없이 다음 날도 잘 일어났다.

“왜 자꾸 배고프지.”

쫓기는 일이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잠도 많이 오고, 먹을 것만 탐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지금도 앉은 자리에서 전에 없이 꿀에 절인 방울토마토만 삼십 개가량을 해치운 상태였다. 읽다 만 책들은 간이 테이블에 대충 올려 둔 뒤 시원한 이불을 덮고 잠시 잠을 잤다가, 깨어나면 읽다 말았던 부분을 마저 읽으며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휴식을 즐겼다. 물론 이소가 본가에 온 뒤 늘상 이렇게 퍼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근래에는 꽤 바쁘기도 했다.

몇 주 전에는 해준과 함께 주영의 면회를 갔었다. 주영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날까지도 덤덤했던 이소는 별안간 구속된 주영이 제 다리를 잡고 잘못을 빌다가 창문에 목을 매달고 자살해 버리는 끔찍한 악몽을 꿨다. 그냥 더러운 꿈 정도로 치부해 버려도 되는 일이었지만 이소는 그날 바로 해준을 졸라 주영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찾았다. 해준이 이소 대신 주영을 만나고 돌아와 ‘죽지 않고 잘 있다’는 안부를 전해 주자 내내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자기가 마음의 짐을 느낄 필요가 뭐가 있어.’

‘아픈 손가락 같은 거죠. 알아요, 저 무른 거. 그래도 이해하세요.’

‘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언제라도 말해요. 같이 갈게.’

이소는 주영이 자신에게 잘못을 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깊은 애정에 단 한 번도 자신이 화답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주영을 그렇게 망친 것일까 하는 애꿎은 자조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소는 고개를 저으며 ‘윤이소, 정신 차려.’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더 이상 해준이나 주변 사람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다독일 수 있어야 유사한 일이 생기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같은 날, 해준은 이소에게 민들레가 가득한 정원을 보여 주었고 둘은 그곳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온몸에 민들레 씨가 덕지덕지 붙을 정도로 정원을 굴렀고 결국 흙을 털어 내다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며 돌아오던 날. 그 날 이후로 이소는 단 한 번도 제 인생을 한탄하며 울지 않았다.

그리고 가지 끝에 꽃봉오리가 맺히던 삼월, 해수는 일반 공립 학교로 진학했다. 영재원이니 국제학교니 해수의 가치를 알아보고 연락을 주는 곳은 많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어른도 소화하기 힘들 정도의 빽빽한 일정과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홀로 기숙학교로 보낸다는 게 이소로서는 여전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검정고시를 볼 수도 있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경험 자체는 꼭 해 보고 싶어 해서 본가에서 멀지 않은 초등학교에 원서를 넣었었다. 더불어 해수가 해준에게 조른 덕분에 저택에 있던 아이들까지도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해준은 기어코 그 입학식에 이소와 해수의 손을 잡고 참석했다.

‘셋 하면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중 단연 그 세 사람이 눈에 제일 잘 띄었다.

해수가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법원에서도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훨씬 빨라 이소는 처음에는 서류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우려와 달리 안정적으로 허가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친부인 주영이 무기징역으로 구속된 점, 해준이 이소의 후견인으로서 양친 교육 이수에 대한 부분을 대신 보증한다는 점, 이소에게 양친으로서 입양에 필요한 자금이 넉넉히 있다는 점과 이소가 그동안 주 양육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점 등을 높이 사 법원에서 무려 한 달 만에 허가가 났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소는 법원 앞에서 해수의 이름 앞에 붙은 제 성을 보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펑펑 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울기보단 웃음이 배실배실 났다.

‘제가요, 원래 딸이 있는데요. 오늘 진짜 제 딸이 되었거든요?’

‘사장님, 제 딸이 엄청 예쁘거든요. 사진 보실래요?’

‘아! 문 집사님, 바쁘세요? 오늘 제가요. 어, 어디 가세요….’

와인을 잔뜩 마신 이소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해수가 제 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횡설수설 전했다. 말이 앞뒤가 안 맞고 두루뭉술해서 듣는 사람마다 무슨 사연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 워낙 밝으니 그저 ‘네가 기분이 좋은가 보다’ 하고 웃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그날 해준은 말없이 이소의 뒤를 쫓아다니며 이소가 집어 든 것들을 모조리 계산해 주고, 헤프게 나누어 주고 자리를 뜨면 쫓아가 대신 설명을 덧붙이며 수발을 드는 하루를 보냈다. 방에 돌아와서도 자신에게 ‘해수가요, 교수님. 오늘 드디어 윤해수가 됐어요. 제 딸이 되었어요. 신기하죠. 저 너무 행복해요.’ 하며 했던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제 연인이 기쁘다면 자신 역시 기쁜 것이라 여기며 만취한 이소를 구석구석 씻기고 재웠다.

그렇게 매일이 바쁘면서도 평화로웠다. 숨 가쁘게 달려왔었던 지난 시간들과 달리 느긋하게 초침이 가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기도 하는 지금. 이소는 달라진 제 일상과 태도가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이제 해준의 부모님을 만나고 인사를 드리고 나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미래를 그릴 수 있으려나. 이 휴식이 조금 지루해질 때 즈음이 되면 소원으로 미뤄 두기만 했었던 내 집도 짓고, 하고 싶은 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문득 물방울이 터지는 듯한 아이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뜰의 건너편 작은 냇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해수와 은찬이 보였다. 가까운 곳에 돗자리를 펴고 준경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문 집사님은 여기 와선 주로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하시는구나. 어쩐지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나도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야지, 이소의 눈꺼풀이 차츰 감겼다. 봄 햇살이 참 따사롭다.

*

해수와 은찬은 정자 아래 냇가에 앉아 다리를 동당동당 까딱거렸다. 원래도 천방지축인 승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까부는 편인 은찬은 해수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키가 부쩍 자랐고 퍽 차분해졌다. 지난겨울 해수가 경찰에게 인계된 후 시장에 갔다 뒤늦게 저택에 돌아온 은찬은 해수가 떠났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해수 금방 올 거예요.’

그러나 짐을 싸서 이곳으로 내려올 때까지도 해수는 돌아오지 않았었다. 문 집사에게 소원 탑에 있었던 제 소원 쪽지를 다시 돌려받은 후에도 은찬은 여전히 숙소 바깥을 바라보며 해수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비에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쪽지를 고이 접어 책 사이에 꽂아 두고 밤마다 창문에 앉아 제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다 언젠가 문득 정자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던 저택의 주인에게 다가간 은찬은 대뜸 제 속상한 마음을 털어놨다.

‘도련님. 소원 탑이요. 소원을 이루어 주지 않기도 하나요?’

‘왜,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그건 비밀이에요.’

‘그럼 못 들어주지.’

‘도련님께 말해야 하는 거예요?’

도련님은 피곤한 듯 보였다. 신발도 없이 더러워진 맨발로 정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저택에서는 보지 못했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아이 이야기보단 집주인의 말을 더 듣지 않겠니.’

‘저 해수랑 다시 살고 싶어요.’

그때 도련님은 어떤 표정이었더라. 잠시 저를 바라보다가 ‘찬아. 이리 와 보련.’ 하고 안아 주시고 귓가에 ‘나도 그래…. 나도 꼭 같은 마음이란다.’ 하고 속삭여 주셨었다. 은찬은 자신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던 큰 손을 기억한다. 그리고 결국 소년의 바람대로 소원은 이루어졌다. 어린아이치고는 묵묵하고도 집요한 기다림 끝에 받은 귀한 결실이었다. 은찬은 제 옆에 앉은 소녀가 물장구를 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 모습을 꼭 다시 보고 싶었다.

“아무튼 그래서 앞으론 강해수 아니고 윤해수야.”

“윤해수….”

강해수든 윤해수든 해수는 해수지. 은찬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보자기에 곱게 싸 온 곶감의 꼭지를 살살 돌려 뺐다. 부드러운 감 속살이 금세 달큰한 향을 풍겼다. 은찬은 과육의 양 끝을 잡은 채 양옆으로 주욱 찢어 냈다. 해수는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게 우리 아빠한테는 엄청 중요한 문제였거든.”

“네가 강해수 아니고 윤해수가 되는 게?”

“응. 엄마는 나 어릴 때 하늘나라에 갔는데, 내가 엄마 성을 따라서 이름을 쓰니까… 사람들이 그게 되게 이상해 보였나 봐. 내가 아빠 딸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은찬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지만 엄마와 같이 있으면 그냥 다들 엄마 아들이라고 그랬었는데. 해수네는 무얼 더 증명했어야 하는 것이었나. 은찬은 착잡한 표정을 한 해수의 낯을 살피다 무겁게 위로했다.

“너도 많이 힘들었겠다.”

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빠는 참 많이 울었다. 어린 저보다 눈물이 많았고 울음을 참으려고 할 때마다 저를 끌어안고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막 세 살이 된 직후부터 기억했다. 자신은 아주 어리고 작은 몸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도, 아빠는 그게 뭐가 큰 위로가 된다고 어린 자신을 안고 놔주질 않았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 정확히 알진 못해도 아빠의 마음이 아주 많이 너덜너덜해지고 있다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해수는 아빠가 우는 게 정말로 싫었다. 아빠를 울리는 것들이 전부 미웠다.

“지금은 좋으니까 됐어. 여기 없을 때, 우리 아빠 정말 많이 아팠는데 거의 다 나았거든. 해준 아저씨 덕분이기도 하고.”

은찬이 설핏 웃었다.

“도련님이 이소 님 많이 안아 주셨나 보다. 도련님 품 완전 약인데.”

“아저씨가 너도 안아 줬어?”

해수의 말을 들은 은찬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해수의 입에 잘 자른 곶감을 물렸다.

“커서는 가끔. 아기 때는 많이 안아 줬을걸? 지금은 엄마가 못 하게 하는데… 가끔 생각나. 도련님 이렇게 안으면, 시원한 나무 향이 나거든.”

막 돌이 지난 은찬이 제 엄마의 열감기를 옮아 고열에 시달릴 적 해준은 서른도 안 된 나이였다. 지금보다 훨씬 날카로웠던 청년은 열이 식지 않아 늘어진 아이를 안고 눈이 내리던 마당을 걷고 또 걸었다. ‘찬아, 여기 봐. 이게 눈이다. 열이 식으면 나와 함께 눈밭을 걷자. 여기에 네 발 도장을 찍어 줄게.’ 은찬의 엄마는 마루에 걸터앉아 아들을 안고 속삭이는 어린 주인을 바라보며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해했다. 은찬 역시 그 품에서 나는 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있다면 꼭 그런 향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 맞어. 아저씨 나무 냄새 나.”

은찬이 준 곶감을 얌전히 받아먹으며 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쩍 해준과 친해져 자주 목마도 타고 업히기도 하는 해수는 아빠의 냄새만큼 해준의 냄새도 좋아했다. 그리고 종종 해준이 저와 아빠를 동시에 안아 주면, 해수는 자신이 사랑하는 두 사람의 냄새가 섞이는 그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제 곁을 스쳐 지나간 센터 선생님, 진혁 아저씨, 정숙 할머니도 모두 자신을 좋아했지만 해수의 마음 속 단연 일 등은 해준이었다. 먹을 것과 장난감을 잘 사 줘도 아니고, 제게 공부를 잘 가르쳐 줘서도 아니었다. 아저씨와 함께 있으면 아빠가 참 잘 웃었다. 아주 크게 많이 웃었다. 그게 참 좋았다.

“난 해준 아저씨가 아빠랑 오래오래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그럼 다 좋아. 이렇게 여기 있는 것도 좋고… 학교 다니는 것도 재밌고, 집에 오면 친구들이랑 언니, 오빠들 있는 것도 좋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알지.”

해수의 말에 은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나도 너랑 오래오래 살고 싶어.”

은찬은 냇가에 곶감 묻은 손을 살살 씻어 낸 후 가재수건으로 슥슥 닦았다. 항상 입성 곱게 다니라는 해준의 말마따나 몸가짐을 조심하려고 하는 편이었다. 은찬은 수건을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있다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해수가 곶감을 꿀꺽 삼키며 은찬에게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야, 너 그런 말 진짜 어디서 배우냐.”

“왜, 뭐가. 진짠데.”

은찬은 말없이 눈을 깜박이다 이내 싱긋 웃어 보였다. 여덟 살이라고 하기에는 유독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은 저보다 한참 앞서 있는 소녀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해수는 말투는 조금 퉁명스러운 것 같아도 항상 저보다 몇 수는 더 내다보고 말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도 많아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발랑 뒤집어진 벌레를 다 일일이 풀에 돌려놔 주고, 꺾인 풀도 지지대를 세워 주기도 한다. 자기 아빠에게 배운 것이라 덧붙이며 묵묵히 약하고 작은 것들을 도와준다. 해수는 얼굴도 무척 예뻤지만 마음씨가 고운 아이였다. 은찬이 해수의 눈을 보고 말했다.

“윤해수.”

“왜.”

“해수야.”

은찬이 기분 좋게 말꼬리를 늘이며 해수의 입에 다시 한번 감 조각을 물렸다. 신경질을 내면서도 받아먹고 해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왜애. 왜 자꾸 불러.”

“전에 내가 소원 탑에 소원 쪽지 넣으면 이뤄진다고 했던 말, 아직 기억해?”

은찬의 말에 해수가 곶감을 꿀꺽 삼켰다. 꿀에 재운 것도 아니면서 볼 안쪽이 빠듯하게 당길 정도로 단 곶감이 부드럽게 입 안을 휘젓고 넘어간다. 입술 끝에 묻은 과육을 은찬이 작은 손가락으로 톡 떼 주었다. 냇가에 담갔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 아직도 가지고 있거든.”

그거 산타보다 더 효과 좋더라. 은찬이 가볍게 덧붙인 말에 해수가 아하학,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그럼 나도 하나 빌래. 무슨 소원 빌지. 아빠랑 아저씨 그리고 나. 평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할까. 그런 미신 따위 믿지는 않지만 괜히 설렜다. 윤해수로 맞은 첫 계절, 은찬이 제 이름 세 글자를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부르는 걸 들으며 해수는 눈을 감고 잔디에 풀썩 누워 버렸다. 풋풋한 풀 내음,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바람의 온기, 눈꺼풀을 보듬는 볕뉘… 좋은 친구까지.

“아, 봄은 봄이다.”

오래전 아빠가 했던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 * *

프랑스에 쇼핑을 갔다가 한 달을 넘겨서 귀국한 해준의 부모님이 본가에 도착하는 날, 이소는 긴장으로 입술이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해준이 전화 통화를 할 때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드려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그냥 친구 부모님도 아니고 회장님하고 사모님이신데, 분위기가 장난 아니겠지. 사귀는 사이인 거 알면 뺨 맞는 거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밤새 잠도 못 잤다. 이소는 침대 위에 가진 옷을 죄다 꺼내 놓고 한숨을 쉬었다.

‘뭐 입지. 로션밖에 없는데, 향수라도 뿌릴 걸 그랬나. 아, 나 향수 없지.’

해준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는 자리니까 정장을 입어야 하나, 아니면 평소 입던 대로 카디건에 바지를 걸쳐야 하나. 그러나 자신에게는 정장 따위는 없었고 있는 옷이라고는 그저 몇 벌의 카디건과 점퍼 따위가 다였다. 평소에 좀 사둘 걸 그랬나 싶었지만 도통 입을 일이 없었던지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결국 이소는 즐겨 입는 셔츠를 꺼내어 주름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꼼꼼히 다렸다. 다림질을 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인사하는 연습만 했다.

수차례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봇마냥 딱딱하고 어색한 어조는 나아질 기미가 없어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그냥 포기하고 나와 버렸다. 거실에 앉아 이소를 기다리던 해준이 긴장하지 말라며 이소의 양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해준은 이소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며 꾹꾹 내리누른 머리카락을 손바닥을 부스스하게 헝클어트렸다. 이소가 올려다보자 ‘자연스러운 게 좋아.’ 하고 웃어 주었다.

“우리 어머니 과하게 친하게 굴 거예요.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아버지는 원래 말씀 별로 없으시고.”

해준이 말을 덧붙였지만 이소는 입술을 모으고 손을 털었다. 벌써부터 손끝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죽을 거 같아요. 심장이 너무 뛰어요.”

“나 있으니까 괜찮아. 무서운 분들 아니에요. 너무 불안하면 아무 말 하지 마, 내가 자기 대신 다 말해주면 되지.”

이소는 심호흡을 했다. 부디 자신과 더불어 해준이 쓸데없는 소리만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반가워요, 백윤경이에요. 우리 준이한테 얘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해준이 엄마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요.”

자신을 해준의 어머니라고 밝힌 백윤경 여사가 해사하게 웃었다. 훤하게 트인 이마와 또렷한 눈매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백 여사의 옆에 선 나이가 지긋한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흰 셔츠에 질이 좋은 카디건을 걸친 남자는 이소를 바라보며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해준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이소입니다.”

도시락집을 운영할 때와 달리 자신을 소개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이소는 가볍게 이름을 소개한 후 아이마냥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얼른 허리를 숙였다. 특히 해준과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름만 겨우 말하고 좀처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이소를 바라보며 백 여사가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집이 너무 시골에 있어서 차 타고 오는 데 지루하진 않았어요? 우리 아기 천사는 어디에 있나, 내가 프랑스에서 선물도 사 왔는데.”

백 여사가 해수를 찾았다. 해준의 연락처에 저장된 ‘우리 공주님’을 기억하고 있던 이소는 저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 어머니를 닮아 그런가 보다 하고 짐작했다. 하긴 들어오자마자 해준을 ‘우리 준이’라고 불렀다. 사랑받는 아들이구나 싶었다. 해준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코트를 받아들고 이동했다.

“자기 친구들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또래가 있다 보니 저희 둘하고는 같이 안 있으려고 하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아빠 둘하고 같이 있기 얼마나 따분하겠어.”

아빠 둘…. 저와 해준을 자연스럽게 동시 지칭하는 말에 이소가 조금 움찔했다.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제 걱정과 달리 해준이 이미 이소와의 사이를 부모님께 귀띔한 듯싶어서 그랬다. 불쾌하지 않을까, 아들의 남자 애인이라는데. 그러나 백 여사는 이소를 해준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살갑게 굴었고 차 회장 역시 딱히 경계하거나 멸시하는 눈초리는 아니기에 이소는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조금씩 풀려 애썼다.

“이제 그만 식사하러 가지.”

현관에서 시작된 백 여사의 수다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차 회장은 간결하게 내뱉곤 먼저 이동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묵직하고 진중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해준이 나른하게 책을 읽을 때나 수업을 할 때, 혹은 식솔들 하고 있을 때 무표정하게 있으면 아버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받았던 것도 같다. 이소는 천천히 해준을 따라가며 백 여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5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여인은 해준의 팔에 매달려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을 자랑하고 있었다. 키가 큰 아들에게 완전히 기댄 채 무얼 보고 샀는지 재잘재잘 말하는 엄마와 몸을 숙인 채 가만가만 들어주는 아들의 모습이 사이가 돈독한 모자처럼 보였다.

내내 속닥거리며 느리게 걷던 두 사람은 돌연 백 여사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해준의 볼을 톡톡 두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빠르게 테이블로 돌아왔다. 평소 장난기 많고 능글맞으면서도 다정하고 상냥하게 구는 모습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모습인가 보다. 질투보다는 가슴 벅찬 동경이 피어올랐다. 좋은 기운을 내뿜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대화를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기분 좋은 소란을 일으켰다. 오전부터 있었던 불안은 가라앉은 채 해준의 말마따나 따뜻한 환대에 괜스레 입꼬리가 씰룩였다.

식사 시간은 조용한 편이었다. 해준의 저택에서 창을 열어 두고 새 소리를 들으며 그릇을 달그닥거리던 때가 생각났다. 식사를 어느 정도 끝내고 나면 찬모들이 소쿠리에 간식을 잔뜩 담고 돌아왔고 창문에 팔을 걸친 해준이 ‘우리 이소 좋아하는 것만 잔뜩 담아왔네.’ 하며 웃었던 날들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여전히 그 한옥에서의 일상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여기서 오래 지내지 그러니.”

차 회장은 생선을 발라 백 여사에게 얹어 주며 해준에게 말을 건넸다. 백 여사는 남편이 발라주는 생선 살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먹으면서 해준을 바라보았다.

“한동안만이요. 아무래도 한옥이다 보니 건축할 때 부지부터 자재까지 신경 쓸 게 많아요. 당장 아버지가 부탁하신 재단 일도 산더미고.”

“그놈의 한옥은. 나는 너희 집 갈 때마다 그 언덕이 너무 많아서 귀찮더구나. 집도 작고.”

이소는 ‘집도 작고’라고 덧붙이는 부분에서 다시 한번 그 집을 떠올렸다. 눈을 감으면 그려지는 건물과 정원, 작은 연못과 장독들. 작다 작다 하니 추억 속에 남은 그곳이 꽤나 아기자기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운동 되고 좋으시잖아요. 그리고 이 집이 과하게 큰 거예요.”

해준이 이소의 밥그릇 위에 달걀말이를 올려 주었다. 어쩐지 백 여사와 자신의 앞에만 반찬이 몰려 있는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두 남자는 자신들의 사람에게 경쟁하듯 반찬을 얹어 주고 있었다. 이소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달걀을 집어 먹었다. 백 여사는 익숙한 일인 듯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소에게 말을 걸었다.

“준이에게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병원에서 치료는 더 안 해도 돼요? 다니던 병원이 여기서 너무 멀면 병원을 옮겨도 될 텐데. 우리 해준이가 잘 해 줘요? 불편한 건 없고?”

백 여사는 한참 어린 자신에게 계속 존댓말을 했다. 나이가 있었지만 소녀 같은 발랄함이 있었고, 얼굴에 자리한 주름에서조차 기품이 느껴지는 단아한 미인이었다. 이소는 손을 모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교수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교수님? 학생이었나?”

차 회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 호칭 정리가 아직 안 됐어요.”

이소가 눈을 깜박이며 ‘어, 그게’ 하고 더듬자 해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으며 미소 지었다. 백 여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사귀는 사이에 그럼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귀여워라…. 해준이 너는 뭐라고 부르는데?”

“이름 부르죠.”

거짓말.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자기야, 여보야, 달링, 병아리, 왕자님…. 온갖 애칭으로 부르면서 그런 일은 전혀 없다는 듯 말을 아낀다. 하긴 생각해 보면 괜히 가족 앞에서 ‘애칭’을 설명할 사람은 없겠지.

“세상에, 너무 담백해서 건조할 지경이야. 나 연애할 땐 이이가 나를 ‘경아, 공주야, 부인, 콩아, 아가야.’ 하고 불렀는데 말이야….”

그런 사람이 코앞에 있었다. 백 여사는 과거 차 회장이 자신을 부르던 애칭이 ‘콩’이라고 설명하며 지난 연애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했다. 어쩜 저렇게 물 흐르듯 대화를 재미있게 이어 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였나. 으아, 형이라니.’

호칭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딱히 없었는데 남들이 듣기에는 조금 이상해 보일 수 있겠구나. 나도 바꿔야 하나. 그러나 어떤 대화를 나누더라도 이소에게 가장 신기한 것은 아무 위화감이나 경계심 없이 자신을 해준의 애인이라고 받아들이는 해준의 부모님들이었다. 백 여사는 물론이거니와 차 회장 역시 백 여사가 이소에게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딱히 말을 자르거나 불쾌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둘 사이를 인정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원래 이런 건가? 뺨 맞을 각오부터 했던 자신이 생각나 조금 민망해졌다. 백 여사가 이소의 밥그릇 위에 동태전을 올려 주며 방긋 웃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아이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정말 기특해요. 그렇죠, 여보.”

“응, 고생이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건.”

차 회장은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이소와 시선을 마주치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와 눈을 마주치는 것 같은 긴장감에 입에 물고 있던 밥이 목구멍으로 천천히 넘어가는 느낌은 지독하리만치 생생했다. 이소는 머쓱하게 미소 지은 뒤 얼른 고개를 내렸다. 잠시 착각했다. 인정은 무슨.

젓가락으로 밥알을 살살 셌다. 생각해 보면 차 회장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이유가 이 밥알만큼이나 많다. 첫째, 일단 남자고. 둘째, 그놈에게는 애까지 있고. 셋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애 딸린 가난뱅이 남자 하나 때문에 칼까지 맞아 목숨까지 잃을 뻔했고. 넷째, 살해 혐의를 뒤집어쓰고 경찰서까지 끌려갔다 왔고. 다섯 번째, 잘 다니던 학교는 그만두고 헛것까지 보았고…. 하나둘 세다 보니 나라도 해수가 그런 놈 데려오면 싫을 것 같다.

수많은 이유를 곱씹다 제 앞에 앉아 점잖은 낯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회장 부부를 마주하니 이소는 왠지 미안해져 가슴이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제는 어느덧 회사 이야기로 넘어갔기에 이소는 말을 못 하면 밥이라도 깨끗이 비우자는 요량으로 열심히 숟가락을 놀렸다. 첫 식사 자리는 무던하게 넘어갔다. 아주 불편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냥 편하지도 않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에도 일주일에 두 번에서 세 번 정도는 종종 해준의 부모님과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했다. 해수를 처음 소개시켰고 백 여사는 해수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선물을 잔뜩 안겨 주며 살갑게 굴었다. 해수 역시 자신을 할머니라고 불러도 된다며 웃는 백 여사를 조금 낯설어하기는 했지만 도리어 첫날의 이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자신이 키웠지만 해수는 이럴 때 보면 정말 자신과 닮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담대한 구석이 있었다.

주로 집에서 쉬고 있는 이소와 달리 차 회장은 회사에 나가 있는 날이 많았고 백 여사는 미술관과 손님 접대를 하는 시간이 길어 자주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이소는 피하지 않고 달려 나가 꼭 먼저 인사를 했다. 우스갯소리로 ‘아들은 나와 보지도 않는데 이소 씨는 다르네.’ 하며 백 여사가 어깨를 두드리면 괜히 마음이 동동 뜬 채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다음 계절이 찾아왔다. 저택의 여름은 도시의 여름과 감각이 다르다. 아스팔트가 열기에 달아오르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입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고 다니는 것으로 여름을 맞이했다면, 숲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새 계절은 품이 큰 바람이 불면 무수히 많은 잎들이 사박사박 서로 비벼지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실감하곤 했다.

작열하는 무더위 아래 매미의 울음이 들려오는 것은 조금 더 나중. 초목과 미풍이 어울려 춤을 추는 초여름의 틈, 이제는 제법 해준의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백 여사는 제 곁에서는 도통 티를 내지 않았지만, 식사 자리가 끝나고 현관문이 닫히기만 해도 아들이 연인을 가볍게 안고 혹 땅에 발이라도 닿을까 애지중지 아끼며 귀가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저리 좋을까. 문득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운을 떼고야 만 것이다.

* * *

“그래서, 둘이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에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식사를 하던 도중 두 사람 앞에 떨어진 질문에 이소가 당황한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해준은 못 들었는지 말없이 입 안의 음식을 오물오물거리고 있었다. 이소는 다시 시선을 돌려 백 여사를 바라보고 대꾸했다.

“결혼…이요?”

“응. 둘이 언제 말해 주나… 기다리는데 통 소식이 없어서요. 전에 해준이 말로는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고 있다던데.”

“아…, 그게, 그건….”

백 여사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이소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해준과 사귀는 사이라는 것은 인정받은 지 오래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법적으로 혼인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고 가족으로 묶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이소는 해준의 부모님이 결혼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이냐 물었을 때 당혹감에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응? 맞아요?”

물론 해준이 항상 결혼, 결혼 노래를 부르기는 했었다. 부모님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정말로 해준은 저를 두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맞는데, 머뭇거리는 저를 말없이 응시하는 차 회장과 눈이 마주치니 대답은 쉬이 나오질 않고 오금만 저렸다. ‘너 따위 것이 내 아들과 결혼을 한다고?’라는 것 같기도 했고 ‘애까지 딸린 남자인 주제에 감히 내 아들과의 결혼을 바로 승낙하지 않고 고민을 해?’라는 표정 같기도 했다. 사실 무엇보다 ‘뭐야, 두 분 모두 전혀 아무렇지 않은 거야? 우리는 애초에 결혼이 성립이 안 된다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심장이 거세게 뛰기만 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고 있는 이소의 옆에서 차분히 식사를 마치고 입가를 닦아낸 해준이 툭 끼어들었다.

“갑자기 그런 거 물어보시면 당황해요. 이 사람 아직 어리고요.”

“스물여덟이면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잖아.”

“한참 어려요. 천천히 해도 돼요.”

“얼마나 더 기다려. 너 서른 중반이야. 네 아버지 곧 일흔이고.”

“아버지 연세 때문에 제가 결혼을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죠.”

백 여사는 나이 공격이 먹히지 않자 이소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러지 말구, 엄마는 이소 씨 생각도 들어 보고 싶어.”

“아니요. 이소 씨, 대답 안 해도 돼요. 어머니, 지금 의논할 단계 아니에요.”

“아직 안 했으면 우리랑 같이 해.”

“두 분은 재촉밖에 더 하세요.”

해준은 이런 식의 잔소리에 익숙하다는 듯 차를 홀짝이며 백 여사의 말을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이소는 당황했다. 매번 자신에게 매달려 결혼을 조르던 해준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소를 등 뒤에 감춘 채 어머니의 집요한 질문을 방어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차 회장은 아내와 아들의 말씨름을 조용히 관전했다. 자주 있는 일 같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의 입씨름을 바라보던 이소는 ‘저…’ 하고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단정하고 깨끗한 목소리가 끼어들자 모자는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두 호랑이의 조용한 기 싸움에 이소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마른침을 삼키고는 입술을 열었다.

“……저희가 결혼을 할 수 있는 건가요?”

그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린 채 이소를 응시했다. 식탁 밑에 있는 손은 긴장으로 연신 꼬물댔지만 눈과 입술은 최대한 떨지 않으려 애를 썼다.

“왜요. 할 수 있다고 하면 하고 싶고요?”

백 여사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눈매가 두 번 접힌 웃음에서 인지함과 다정함이 묻어났다. 이소는 잠시 입술을 우물대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저희 둘이 남자인 건…. 두 분은 아무 상관이 없으신 건지….”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해준은 얕게 숨을 내쉬곤 시선을 거두었고 백 여사는 고운 손을 살짝 그러쥐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고작 그런 문제 때문에 여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인지, 순하고 앳된 얼굴을 한 사내를 퍽 따뜻한 눈으로 응시했다.

“응. 오히려 여자를 데려왔으면 더 놀랐을걸요.”

“어머니.”

해준이 백 여사의 말을 잘랐다. 이소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차 회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올 뜨는 것도 없이 정갈하게 다듬은 머리카락과 범털 같은 회색빛 눈썹, 매섭고 형형한 눈빛을 가진 사내는 아내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소를 바라봤다.

“나도 좀 듣고 싶은데, 자네 생각을.”

“아버지까지 왜 그러세요.”

차 회장까지 한마디 얹자 해준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백 여사는 지지 않고 덧붙였다.

“어찌 되었건 준이 네가 정식으로 소개할 정도면 둘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냥 이소 씨 생각이 궁금한 것뿐이야. 당장 확답을 달라는 건 아니구.”

백 여사는 아들을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날이 선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이소는 대답할 타이밍을 찾지 못해 눈만 돌리고 있다 백 여사의 입에서 제 이름이 떨어지자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대답을 아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교수님과의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감사한 제안이지만….”

감사한 제안이라는 말에 백 여사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소는 다시 한번 백 여사의 말에 거짓이 하나 없다는 것을 실감하며 제멋대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저 때문에 세 분 입장이…, 난처해지실 것 같아서요….”

백 여사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을 모은 채 큰 눈을 깜빡거렸다. 나이가 육십이 다 되었지만 굉장히 소녀 같은 구석이 있는 여인이었다. 이소가 긴 대답을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회장님과 사모님 두 분은 자주 인터뷰도 하시고 종교계 행사도 자주 참석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도 학교 다니시면서 전시회도 종종 여셨고, 가끔씩 책도 내시고 그래서 알아보는 분들도 많으시고요…. 그런데 교수님이 남자랑, 그것도 애까지 있는 남자랑 결혼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모두 곤란하실 거예요. 지인분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고…. 결혼한 걸 비밀로 한다고 해도 매번 거짓말을 하시는 건…. 아버님 어머님 마음도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난생 처음 들어보는 낯간지러운 호칭에 차 회장과 백 여사는 모두 입술을 조금 벌린 채 눈을 깜박였다. 평소 언론에 자주 모습을 비치는 해온그룹 회장부부는 금실 좋기로 유명했고, 기품 있고 청렴한 이미지로 재계와 예술계에 오랜 인사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대체로 차 회장 부부에게 우호적이었지만 개중에는 티를 내지 않아도 꽤 고지식한 문인들도 많았고 의견 타협이 안 되는 종교계 인사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해준이 다시 학교로 복직하게 된다면 학생들 사이에서도 분명 사생활에 관한 뒷말이 나올 것이다. 이소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세 사람의 일상에 굳이 제가 끼어들어 흠을 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준을 포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교수님과 헤어지고 싶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 역시도 오랜 시간, 가족을 갖고 싶었고…. 현재 제 옆에는 교수님이 있으니 그런 욕심이 드는 건 당연하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냥 지금처럼 같이 지내기만 해도 저는 무척 감사한 일이라고….”

탁-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말을 하던 이소가 어깨를 움찔거렸고 차 회장과 백 여사 역시 마른 눈동자를 제 아들에게 고정한 뒤 분위기를 살폈다. 해준이 냅킨으로 우아하게 입을 닦아냈다.

“어쩌죠. 진 부장에게 메일을 보내 준다고 하고서는 잊어버렸네. 급한 건인데,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누가 봐도 이소의 말을 자르는 행동이었다. 해준은 소란스럽게 식기를 정리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 그… 그런 일이 있었어? 저녁 시간인데 좀 쉬지 그러니….”

“그러게요. 아쉽네요.”

전혀 아쉽지 않은 아들의 말투에 백 여사가 해준의 눈치를 보며 잔을 매만졌다. 이소 역시 당황해 고개를 들자 해준은 정말로 약속이 있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소 씨는 식사 더 하고 오려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해준의 눈빛이 너무 서늘해 이소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 아니요. 같이 가요. 죄송합니다. 저희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마저 식사하세요.”

“그래요, 이소 씨. 너무 마음 무겁게 해서 미안해요. 준이도 가서 쉬어.”

이소는 해준의 낯을 살피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의자를 곱게 집어넣고 얌전히 해준을 따라나서는 이소의 뒷모습을 보며 차 회장과 백 여사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제 아들의 성깔머리에, 그걸 다 받아 주고 있는 저 여린 인사의 성정에 대한 염려를 더하며 고개를 저었다.

* * *

해준은 이소와 함께 별관을 향해 걸었다. 흰 자갈이 깔린 산책로 사이사이에는 무릎을 조금 넘는 작은 동물 동상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빠 토끼, 엄마 토끼, 아기 토끼. 하필 식사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난 직후 제일 먼저 만난 게 저런 동물 가족이라는 점이 이소의 마음을 조금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조용히 뒷짐을 지고 앞서 걷던 해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소의 이름을 불렀다.

“이소 씨.”

부모님 앞에서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나 싶어 미안하면서도 마냥 미룰 수도 없는 문제라 마음이 좋지 않다.

“알아요, 서운하신 거.”

“…….”

해준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소는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해준에게 선수를 뺏기고 또 얼레벌레 넘어갈 것 같아 이소는 제 머릿 속에 있는 오랜 생각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근데 전 가볍게 생각할 수 없어요. 저 때문에 다치신 것도 얼마 전이잖아요. 그것도 모자라서 누명까지 쓰고 학교까지 그만두셨잖아요. 교수님을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도 보여지는 것만 믿고 다들 말을 얹었구요….”

이소가 불안한 듯 손톱을 매만졌다. 주영과 함께 지낼 적 해준의 소식은 듣기 싫어도 여기저기서 잘도 들려왔다. 텔레비전만 틀면 국립대 교수가 사람을 죽였다는 기사와 논평이 끊임없이 쏟아졌고 늦은 밤 시사 프로에서는 사건이 일어났던 그 건물 근처를 촬영한 영상이 집요한 분석과 함께 송출되곤 했다.

일부러 흘려들으려고 딴짓을 하기도 했고 자는 척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주영은 일부러라도 이소에게 들려주려는 듯 그 프로그램을 유심히도 봤다. 이제 와 짐작하건대 분명 의도가 개입되었으리라. 제가 직접 본 해준의 모습과 프로그램 안에서 묘사되는 해준의 모습이 어지럽게 섞여 더욱 큰 괴물을 만들게끔 의도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해준이 몰랐을 리 없다. 애초에 저보다 눈이 밝은 사람이기에 지금껏 쌓아 온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평판이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가열차게 짓뭉개지는 과정을 누구보다 똑똑히 목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소는 해준에게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는 걸 용인할 수 없었다.

“이제야 겨우 잠잠해졌는데, 저랑 결혼하는 일로 신문 1면에 날 순 없잖아요. ‘해온그룹 장남 차해준, 동성과 결혼’ 이런 기사도 대문짝만하게 날 거라고요.”

“이소 씨.”

해준이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이소를 불렀다.

“잠시만요, 저 아직 말 안 끝났어요.”

보지말자, 일단 지금은 보지말자. 눈을 쳐다보면 할 말을 다 잊을 것 같아 이소는 숨을 몰아쉬고 머릿속에 있는 문장들을 모두 꺼내 놓을 요량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저는… 교수님이 정말 좋지만요, 결혼도 하고는 싶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제가 교수님한테 폐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해준의 말 한마디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결혼하고 싶냐고? 결혼을 안 한다고 해서 화가 났던 게 아니었나? 이소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결혼은…….”

파노라마처럼 제 머릿속에 펼쳐지는 수많은 고백. 예전에는 흐릿했을지언정 지금의 이소는 하나하나를 모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교수님이 먼저 하자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농담…이셨어요?”

이소는 또 어리숙한 자신이 해준의 농담들을 온전히 믿고 있었던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해준은 예의 짓던 미소도 한 점 지운 채 진지한 말투로 즉각 대답했다.

“아니. 난 매번 진심이었지. 단 한 번도 결혼을 가지고 농을 친 적은 없는걸.”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이소는 해준이 이리 나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느리게 시선을 맞췄다. 해준은 차분히 고개를 기울였다.

“난 자기가 결혼을 내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거절했었잖아.”

“……그건.”

이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해준은 자신과 연애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입버릇처럼 결혼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

이소 씨, 결혼하자.

이소랑 결혼하고 싶단 이야기였는데.

신혼여행은 해수 초등학교 입학식 하기 전에 돌아올까.

여보.

이소는 그때마다 장난하지 말라며 눈을 흘기며 고개를 젓곤 했다. 그저 해준의 애정 표현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고 오랫동안 함께하자는 일종의 자기암시 같은 거라 여겼다. 때문에 만약에 자신이 농담으로라도 ‘그럼 우리 진짜로 결혼할까요?’라고 묻는다면 해준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너무 좋지, 지금 당장 할 거야.’라고 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님 입에서 정식으로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해준은 단호하게 상황을 종결시키고 말을 잘랐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부모님을 부추겨 저와의 결혼을 밀고 나가는 것이 평소의 해준답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 당황스러웠다.

‘아, 어쩌면…….’

모든 게 다 자신의 오만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해준이 자신만을 바라봐 줄 것이라고 여긴 건방. 이소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궜다.

“…죄송해요. 항상 장난처럼 말씀하셔서 진심인 줄 몰랐어요.”

해준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린 이소의 뺨을 살포시 매만졌다. 책망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들렸나 보다. 해준이 여상한 목소리로 이소를 달랬다.

“아니야. 나도 자기 생각 제대로 들은 게 처음이라 놀란 것뿐이지. 오히려 부모님 앞에서 용기내 말해 줘서 고마운걸. 다만…….”

“다만…?”

해준이 마주친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니까 떠밀려서 결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소 씨 아직 어리고, 안 해 본 것도 많잖아. 결혼하고 나면 시간과 생활에 제약도 많을 거고…. 결혼하지 않은 지금하고는 많이 다를 거예요. 한 번 결정하면 무를 수도 없는 건데 어른들이나 내 입장 고려하지 말고 이소 씨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해.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물론 결혼식만 겨우 올리고 어떠한 법적인 책임도 의무도 지지 않는 결혼생활일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자신보다 결혼을 원했던 것은 해준이었는데. 지금 이소 앞의 해준은 꼭 선을 긋고 밀어내는 것만 같이 말을 한다. 이소는 못내 서운해졌다.

“…이제는 저랑 결혼하기 싫어지신 거예요?”

매번 결혼하자고 매달려 놓고 갑자기 한 발 빼서 나를 불안하게 하려는 작전인가. 이러면 내가 덥석 잡을 것 같아? …안타깝게도 정답이다. 이소는 해준의 손목을 가만가만 매만졌다. 무언가 부탁하거나 요청할 때 해준의 소매 끝을 구기듯 쥐는 것이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아니, 무조건 너랑 하고 싶지.”

해준은 다시 한번 이소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별안간 이소는 마음속에 있는 이성이 뚝 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 같은 마음인 건데, 왜 자꾸 밀어내세요?”

“밀어내는 거 아니에요.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거죠.”

해준이 눈을 접어 웃으며 이소의 코를 톡톡 두드렸다. 마치 자신이 사탕을 사 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 이소가 말없이 바라보자 해준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이소와 눈을 맞췄다.

“자기야, 나 알잖아.”

“뭘요. 몰라요.”

이소가 토라진 듯 고개를 저었다. 해준은 그런 모습조차도 귀여워하며 차근차근 대답해주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여유로운 척하지만…, 아마 결혼하고 나면 난 지금보다 더할 거라 확신해. 난 어딜 가도 이소 씨가 내 배우자라고 말할 거고, 숨기지 않을 거예요. 자기한테 말 섞는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대놓고 질투할 테고, 공개적인 장소든 아니든 키스하고 싶으면 할 수도 있어요. 이소 씨는 이제 해수에게 아빠가 둘이 되었다고 말해 줘야 할 거고, 학부모 상담지 아빠 이름 적는 공란에 자기 이름 옆에 내 이름도 올릴 거예요.”

해준이 마지막 계획을 전하며 꽤나 결연한 표정이기에 이소는 진지한 상황임에 불구하고 그만 풋 하고 웃어 버렸다.

“학부모 상담지에 이름 적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당연하지. 내가 평생 학부모 될 일이 있었을 것 같아?”

“아하하, 그게 아니라….”

긴장이 조금 풀어진 이소가 웃음을 터트리자 해준은 이소의 흰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만큼 누구에게도 숨기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기자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난 이소 씨랑 결혼했다고 말할 거예요.”

“…….”

이 사람은 무서운 게 없는 걸까. 사람들이 얼마나 헐뜯고 손가락질하고 수군대는데. 가진 것도 많으면서, 다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해준은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군다. 이소는 옅게 한숨을 쉬며 해준을 바라봤다.

“교수님은 안 무서우세요? 정말 다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 누가 욕할까봐 숨어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어요.”

실력과 능력만으로 인정받았던 지난 날들과 다르게 성향에 대한 노골적이고 무례한 질문과 편견에 가득찬 시선을 받을 수도 있다. 해준이 이소의 밀랍같이 매끈한 귀를 매만졌다.

“이소 씨, 무섭구나.”

“…….”

무서워하는 건 나였나. 이소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해준이 고개를 내려 가볍게 입 맞췄다. 입술이 떨어지자 ‘나는 괜찮아요. 무섭지 않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안을 달랜다.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으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지금이 좋다면 지금처럼 지내도 되고, 가족이 필요한 거면 계속 함께 살아도 돼. 그래도 계속 마음속에 나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그 결심을 하기까지 용기가 조금 더 필요한 거라면… 아주 천천히 시간을 두고 고민해도 된다구요. 조급해하지 말고.”

바닥에 내리깐 이소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그래도.”

“이소 씨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이소는 말을 더 하지 못하고 해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거야.’라고 확언한 그의 눈에는 차해준만이 줄 수 있는 단단한 애정이 충만했다. 이소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너무 오래 걸리면요? 제가 막 10년 있다가, 20년 있다가 하자고 하면요?”

“괜찮아.”

해준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어깨를 들어올렸다. 이소는 눈을 깜박였다.

“기다려 주시는 거예요?”

“아니.”

해준이 나른하게 웃음 지었다. 제게서 한 발짝 물러난 해준이 이소의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왼손 약지의 셋째 마디, 반지가 끼워지는 자리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감히 기대를 품고 기다리겠어요. 다만 이소 씨가 부족한 나를 어여삐 여겨 선택해 준다면….”

해준은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자신을 두고 ‘어떻게 감히’라며 과장하듯 표현했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지 않았다. 해준이 이소의 손을 들어 손등에 가볍게 입 맞췄다. 해준이 알려 주었던 손등 키스의 의미가 떠오른다.

존경과 헌신.

해준의 속눈썹이 우아하게 겹쳐졌다 떨어지자 그 사이 깊고 따뜻한 눈동자가 이소를 응시했다. 마주친 시선은 진실만을 전한다.

“황송해하면서 평생 모시고 살게.”

이내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입꼬리를 바라보며 이소는 얼굴을 붉혔다. 방 안으로 돌아가는 길, 짧은 거리였지만 이소는 해준에게 팔을 뻗었고 해준은 자연스럽게 이소를 안고 다리를 건너고, 냇가를 지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으면, 누구도 보지 않으면 이렇게나 쉽게 안겨 오는 사람이건만. 해준은 작은 고양이 같은 제 연인의 걱정 많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만 해도 이소는 이런 고민은 길지 않을 거라 여겼다.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해준이 다시 제게 결혼을 조를 것이라 생각했다. 늘 그래 왔고 몇 번이고 기회를 주었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날 이후로 해준이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윤이소만의 순진한 오만이었다.

* * *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해준의 본가에서 지낸 지 반년이 훌쩍 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세 끼 식사를 하고 해준이 출근했다 늦은 밤 돌아오면 담소를 나누다가 잠이 드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외출을 했다 돌아온 해준은 언제나 꽃과 선물을 안겨 주었고 매일매일 잠들기 전에도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였다. 단 한 번도 관성적으로, 습관적으로 던지는 말이 아닌 진심을 다해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예전처럼 결혼하자 보채지 않았다. 이소의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고 굳이 화제를 피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입술에서 먼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종종 이소가 ‘결혼 말인데요.’ 하면 ‘응.’ 하고 다정히 들어 줄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이소가 머뭇거리다가 ‘아니에요. 나중에 말할게요.’ 하고 말을 돌리면 더는 되묻지 않았다. 왜 더 집요하게 굴지 않느냐고, 말을 하다만 저를 붙잡고 조르지 않느냐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해준의 그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되물을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있어요? 나와의 결혼, 숨기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럼 또 대뜸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소도 제 마음이 왜 이러는지 몰랐다. 분명 함께 오래 있고 싶은데 몇 번이고 되묻는 해준 앞에서 당당하게 ‘그래! 내가 그것도 감당 못 할 거 같아? 그러니까 빨리 나랑 결혼하자고!’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제 사랑이 겨우 그 정도였나. 이 사람의 마음을 모르겠다. 속 시원히 내보일 수 없는 우울만 더해지는 날이 쌓여 갔다.

* * *

그렇게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이소는 혼자 산책을 했다. 워낙 저택이 넓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나면 진땀이 배어날 정도로 오래 걷게 됐다. 결혼 문제와 별개로 이소는 자신의 집을 짓기로 한 계획도 충실히 진행 중이었고, 곧 있을 해수의 여름방학에 맞추어 해준과 여행도 다녀오기로 약속도 되어 있었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날 테이블을 박차고 나간 이후에도 해준의 부모님과의 식사는 계속 이어졌다. 해준이 무어라 언질을 했는지 그 이후 결혼 이야기는 다시는 나오지 않았지만 종종 이소가 홀로 있으면 백 여사는 은근슬쩍 다가와 ‘해준이랑 잘 지내죠? 둘이 싸운 건 아니죠?’ 하며 안부를 묻곤 했다. 괜히 미안했다.

신중해지라는 말은 참 사람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이미 마음 먹은 결정을 두세 번 더 재고해 보게 하고, 분명 옳은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피어오르게도 했다. 해준에 대한 제 마음이 너무 가볍게 비쳤던 것은 아닌가, 그 사람처럼 확신을 주지 못하는 제가 너무 부족해 보이고 못나 보였다. 장난기 많고 애교도 많은 해준이었지만 이럴 때는 꼭 저보다 한참 어른인 것이 티가 났다.

‘너무 따라가기 어려워. 항상 나만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

한 시간을 넘게 헤매다 겨우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이소는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 제가 지내는 별관 저택의 지붕이 보였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슴슴한 칠월의 봄바람에 물기가 섞인 밤, 긴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해준과 함께 가벼운 저녁을 먹은 이소는 발코니에 기대어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 노란 조명등이 켜지자 2층에서 내려다보아도 정원이 대낮처럼 밝았다.

저녁 만찬 때 와인을 한 병 마신 해준은 기분이 좋은지 해수를 포함한 저택의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었다. 이소 역시 술을 조금 마신 상태였지만 왠지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해져 나가진 않은 채 해준과 아이들이 하는 양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해준과의 관계, 저와 해수의 미래, 앞으로의 계획 등으로 생각이 많기도 했기에.

“우리 아들 보고 있느라 내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가 보구만.”

돌연 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소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일찍이 방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한 차 회장이 맥주 두 캔을 쥔 채 가볍게 흔들었다. 말을 길게 섞어 본 일이 없지만 그래도 지난 시간 꽤 빈번하게 식사 자리를 만들어 왔던 터라, 둘만 남은 시간이 아주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소에게는 여전히 대하기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소 씨, 별일 없으면 술 한 잔 더 할까요.”

차 회장의 말에 이소는 고개를 돌려 해준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분명 저와 눈을 맞추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는지 실루엣만 보였다 말았다 하며 시야에서 흐릿해졌다. 이소는 몸을 돌려 차 회장에게서 맥주 캔을 받아들었다.

“내려와요. 바깥을 좀 걷지.”

차 회장이 웃으며 발코니를 벗어났다. 간간이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이소는 차 회장을 따라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후원으로 향했다.

* * *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에서 비에 젖은 나무 냄새가 났다. 이소는 얼마 전 집을 지을 때 골랐던 목재에서 제법 익숙한 향을 맡고 신기해했었다. 예전 해준의 집에서 맡았던 냄새였다. 한옥의 바닥을 덮는 장판지의 냄새. 콩기름과 들기름을 한 겹 도포해 만들었다는 장판지에서는 대추와 계피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비가 오거나 습도가 올라가면 따뜻한 향이 마법처럼 집 안을 가득 채우곤 했다.

집 기둥을 세울 때 쓰는 목재를 고르면서도 해준이 떠오르다니 저도 참 유난이다 싶었지만, 그래도 그게 참 마음에 들어 이소는 기분 좋게 그 나무로 기둥을 만들기로 했다. 두 사람은 일전에 해준이 말했던 미로의 입구 앞에 섰다. 낮에 왔다면 꽤나 싱그러워 보였을 곳이었겠지만 밤을 삼킨 미로의 입구는 어둡고 까마득해 보였다. 정작 차 회장은 아이처럼 들떠 보였다.

“여기는 내 아내를 위해 만든 곳이긴 하지만, 해준이가 더 좋아했던 곳이었어요.”

“교수님이요?”

차 회장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숨으면 비서는 물론이고 유모들도 못 찾았어요. 그 작은 몸을 웅크리고 숨으면서 얼마나 골탕을 먹이던지. 녀석은 나중엔 혼자 있고 싶을 때마다 이곳에 오곤 했지.”

웅크리고 숨으면 보이지도 않았을 작은 해준이라니. 예전에 이소가 살던 빌라 현관문에 들어올 때마다 머리를 찧었던 해준을 떠올리면 상상이 잘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해준이는 다 자라고 나서도 생각할 게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면 이곳을 몇 번이고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생각을 정리하곤 했어요. 막히는 길을 걷고… 돌아서서 또 걷고 하다 보면 꼬여 버린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곤 하니까요.”

차 회장이 천천히 미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소가 다급하게 차 회장을 불러세웠다.

“저, 아버님. 너무 어둡습니다. 밤에는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미로 앞에 선 이소는 앞서 걷는 차 회장을 불러세웠다. 차 회장이 맥주를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조명이 은은하게 들어와 있다 하더라도 막상 들어가면 벽과 벽 사이의 공간은 무척 어두울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소와 차 회장은 모두 술을 마신 상태라 판단이 흐릴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들어가서 못 나오면 어쩌지. 이소는 책상에 놔두고 온 핸드폰이 떠올랐다. 그러나 차 회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소를 보며 놀리듯 대꾸했다.

“그 재미로 가는 거지.”

웃으며 말한 차 회장이 먼저 자취를 감췄다. 저 분이 원래 저런 무모한 면이 있던가. 아니면 부전자전인가. 이마를 짚은 채 고민하던 이소는 주변을 둘러보다 얼른 차 회장의 뒤를 쫓았다.

* * *

다행히 미로 안 어둠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눈에 조금 익어 제법 걸을 만했다. 높이가 3m는 되는 것 같은 미로의 수벽을 따라 걸으며 이소는 왔던 길을 기억하려 계속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차 회장은 ‘앞에만 보고 걸어요.’ 하며 이소를 이끌었다. 길을 전부 외우고 있는 건지 거침없이 걷는 걸음에 망설임이란 없었다. 알딸딸하게 올라온 술기운 때문인지, 제 머리보다 한참 높은 나무 사이를 차 회장과 말없이 걷고 있어서인지 심장은 평소보다 조금 빨리 뛰고 있었다.

“결혼 이야기는 어느 정도 진전이 되었어요?”

문득 제게 던지는 차 회장의 질문에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해준이가 싫다고 해요?”

“하하…. 아니요, 아니에요.”

이소는 웃음을 터트리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문제였다. 둘 다 결혼은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쉽게 결정은 못 하겠어요. 너무 어린애 같은 고민이라 말도 못한 채 웃음만 나왔다. 어쩐지 해준의 아버지 앞이라서 더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음, 음 하며 어떻게 하면 말을 예쁘게 할까 단어를 고르고 또 골랐다.

“사실…. 교수님이 항상 먼저 결혼을 하자고 하셨었거든요. 이 나라에서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해외로 나간다든지…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그동안은 제가…. 여러 가지 산재한 문제들이 많기도 했고, 무엇보다 제 마음에 확신이 별로 없어서 매번 거절했었습니다…. 그리고 음….”

“그리고?”

남겨진 이유가 또 있냐는 듯 차 회장이 말을 덥석 물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농담으로 여기기도 했고요.”

이소는 약간 머쓱해져 코를 훔쳤다. 아들의 프러포즈를 들을 때마다 거절했다는 고백을 그의 아버지 앞에서 하게 되다니 실로 면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차 회장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긴요. 현실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걸. 무엇보다 내 아들 성격에 아마 집요하고 끈덕지게 매일매일 말했겠지. 누구라도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더구나 둘은 남자고.”

이소의 마음을 대변하듯 콕콕 집어 답답한 부분을 공감해준 차 회장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내 아내도 해준이와 비슷한 성격이에요. 장난처럼 진심을 툭툭 말하지. 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아껴 두며 말하는 편인데, 아내는 떠오르는 즉시 표현하곤 하거든요. 그 표현이 가볍든 무겁든 애정의 무게는 같다는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았지만.”

차 회장의 첨언에 이소는 옅게 숨을 들이마셨다. 표현과 상관없이 애정의 무게는 같다는 말이 자신의 마음을 짓누른다. 이소는 자꾸만 차 회장 앞에서 오랜 고민을 털어놓는 이 상황이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저 지금은 누구라도 자신을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정말 이럴 땐 제가 살아오며 한 경험이 너무 부족한 게 티가 났으니까. 이소는 긴 손가락으로 느릿느릿 맥주 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사실, 예전에 두 분 앞에서 결혼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교수님이 의논할 단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게 좀….”

“당황스러웠겠네.”

“네. 많이요.”

이소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에 저희 둘 다 같은 마음인 건 확인했지만, 교수님은 제게 신중하게 고민해 보라고 하셨어요. 가볍게 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그래서 그런지 자꾸… 제 생각과 다르게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습니다. 둘의 마음만 잘 맞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또… 막상 그냥 지금처럼 지내자고만 하면 섭섭함이 자꾸 올라오고… 죄송해요. 잘 모르겠습니다. 정작 교수님은 되게 여유로워 보이시거든요.”

이소는 해준을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 외에도 이소는 술이 올랐는지 쓸데없이 말문이 터져 ‘아버님, 교수님 진짜 너무 멋진 것 같습니다….’라든지 ‘정말 다정하시고 엄청 잘 해 주시고….’처럼 맥락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준을 좋아하는 마음뿐이었다. 찬사가 끊어지고 난 후에는 또다시 이소의 한숨 섞인 적막이 감돌았다.

차 회장은 상념에 빠진 이소를 가만히 바라보다 미로의 잎들을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젖은 잎이 파르르 떨리며 물기를 튀겼다.

“해준이가 옛날이야기 해 준 적 있어요? 어릴 때라든지.”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양되었다는 말은 해 주신 적 있어요. 보육원에서 아홉 살쯤 이 집으로 왔다고요. 물론 그 나이도 정확하지 않아서 대략적으로 짐작만 해서 출생신고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만나고 나서도 적응을 잘 못 해서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간략하게는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단 많이 알고 있네.”

차 회장은 턱을 매만졌다. 차 회장과 이소, 두 사람 말고는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없는 적막한 공간은 오래된 비밀을 털어놓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 늙은이가 조금 도와줄까요?”

“어떻게요?”

이소가 발그스름한 뺨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비만 해 줄 수 있는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줄까 해요.”

고집이 센 내 아들 때문에 이소 씨가 고민이 많으니,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이소는 걸음을 멈추고 차 회장을 바라보았다. 해준은 이소에게 자신의 비밀을 남김없이 이야기해 줄 사람이었지만, 해준도 모르는 옛날이야기라면 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밀을 듣는 즉시 제 마음의 서랍에 넣고 꼭꼭 잠가야지. 더구나 지금 자신의 고민을 풀어낼 열쇠가 되는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 회장은 다행이라는 듯 푸근하게 미소 지으며 맥주를 한 모금 털어 마셨다. 아주 잠깐의 침묵 끝에 차 회장은 입을 열었다. 해준이 열 살도 채 되기 전 이야기였다.

* * *

“어렸을 때 해준이는 우리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어요.”

차 회장은 어린 해준을 떠올렸다. 아홉 살이라는 나이도 불분명한 아이. 다리 밑에서 동냥을 하다가 기절한 녀석을 데려와 먹이고 재우며 2년을 돌보았다고 했다. 처음 데려왔을 때 나이가 몇이냐 묻자 대충 다섯 살이라고 대답한 녀석은 또래 다섯 살보다 유독 골격이 다부지고 키가 커 두어 살은 더 먹었겠거니 생각하고 시설장은 해준을 일곱 살 아이로 등록했다.

시설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전부 시설장의 성을 따서 똑같이 ‘이’씨였다. 그러니까 당시 해준의 이름은 ‘이해준’이었다. 그러나 정작 해준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만 이야기할 뿐 성을 붙여 말하지 않았다.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 어린 것은 제가 다짜고짜 보육원으로 온 후 이름을 받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온갖 몽니를 부렸다. 그 시절 보육원에서 알아주는 고집쟁이였다.

차 회장이 해준을 입양하기로 결정하고, 본가로 데려오는 차 안에서 해준은 웃음은커녕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도 마치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고갯짓으로만 ‘예, 아니요’ 의사 표현을 했고 그것마저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영혼 없는 인형마냥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도 그저 시간을 보내다 올 뿐이었다. 결국 차 회장은 해준의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다행히도 차 회장과 백 여사는 인내심이 많은 타입이었고 어느 정도 트러블은 각오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닦달하지 않고 해준의 변화를 기다려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준의 방에 들어간 백 여사가 한참을 나오지 못했다. 의아하게 여긴 차 회장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은 해준의 책상 앞에 서서 꽤 오랫동안 난처해했다. 해준의 소지품에 붙여 둔 이름표에서 ‘차’라는 성씨가 모두 지워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건 북북 지워 없앴고, 지워지지 않는 것은 검은 매직으로 완전히 가려서 없앴다. 보육원에서 불리던 제 이름만 남기고 이곳에서 새롭게 부여받은 차해준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부모를 빼앗았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에 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차 회장은 이소의 부모님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모르는 걸까. 이소는 사진 속에서 수줍게 이소의 엄마 손을 잡고 있던 어린 해준을 떠올렸다. 해준과 자신의 부모님의 인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자신의 부모님이 해준을 선택했다면 정말 자신의 형이 되어 살았을까. 그럼 지금과 같은 관계는 되지 못했겠지. 이소는 잠시나마 자신의 부모님께 선택받지 못한 해준의 삶을 다행이라고 여긴 제 이기심에 혀를 찼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방법이 없었어요. 어른들의 입장에선 미안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이의 토라진 마음이 풀릴 때까지 계속해서 사과하고 인정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해수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소는 차 회장의 말을 꽤 많이 공감했다. 이소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 회장은 혀로 볼 안쪽을 훑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아이에게 안전한 대상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어야만 했고, 나아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새로운 보호자라는 걸 인식시켜 줄 필요도 있었거든. 무엇보다도….”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아이가 우리를 선택한 게 아닌 우리가 아이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차 회장과 백 여사는 해준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정말 오래 인내했다. 아무리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고 한들 친부모도 아니었고, 당장의 성과를 위해 그 부부와 교류를 하며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아이가 자신들을 인정할 때까지 거절당하고 또 거부당하는 일을 반복해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해준이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그 시간들은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통스러웠던 지난 10년만큼이나 지독하게 외롭고 힘든 날들이었다. 그래도 기다렸다. 해준은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학교도 다시 나가기 시작했고 종종 웃기도 했다. 호칭은 여전히 ‘저기요.’ 였지만 차 회장 내외는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생각하며 채근하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의 인내심이었다.

해준은 눈에 띌 정도로 영특했다. 성격도 모난 구석이 하나 없어 좋은 것을 주면 모조리 흡수했고 나쁜 것은 알아서 경계하고 피했다. 백 여사의 밝고 장난기 많은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티 없이 밝게 자랐고, 차 회장의 엄격함과 철저함을 배우며 재계 도련님으로서의 기품과 태도도 갖추어 나갔다.

특히나 그림에 흥미와 소질을 보여 백 여사는 매주 함께 미술관에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 따로 미술 선생을 붙여 주기도 했다. 해외로 나갈 땐 해준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틈틈이 박물관과 골동품점도 들렀다. 그 덕에 해준은 중학생이 되기 한참 전부터 스스로 미술관과 박물관, 고미술품 상점을 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취향으로 자랐다. 어쩜 이렇게 귀한 아이가 자신들에게 왔나 싶어 매일매일을 성당에 나가 감사 기도를 드릴 정도로 행복하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 녀석이 어느 날은 뭘 자꾸 주워 오더라고.”

처음에는 지렁이 한 마리로 시작했다. 길을 가다가 지렁이를 보면 꼭 구해 주더니 나중에는 허리가 반절이 짓이겨진 지렁이를 데려와서는 새 흙과 풀, 영양제를 주어 가며 무려 일주일을 더 살렸다. 그 이후에는 다리가 부러진 새를 주워 와 먹이고 재우고 보내 주고, 길을 잃어 끙끙대는 작은 강아지나 병에 걸린 고양이도 곧잘 주워 왔다. 다친 동물들을 돌보겠다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붕대를 칭칭 묶어 놓은 것을 보고 차 회장은 놀라 병원에 함께 동행했었다.

‘네 마음은 잘 알겠지만 무언가를 돌보는 일은 어설프게 하면 안 돼. 이렇게 요령 없이 굴면 도리어 더 악화시킬 수 있어. 네 능력 안에서 책임질 수 있는 것들을 거두는 방법들을 알려 주어야겠다.’

그 후 차 회장은 해준에게 아이 한 명을 후원할 수 있는 작은 통장을 만들어 주었다. 자신보다 고작 두 살밖에 어리지 않은 아이에게 해준이 후원하는 금액은 매달 10만 원. 열세 살 어린 해준이 관리하기에 큰 돈은 아니었지만 해준은 제 용돈에서 그 아이에게 들어가는 후원금만큼은 미리 빼 두고 매달 꼬박꼬박 선물까지 준비할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그 이후에도 소동물을 주워 오는 일은 계속되었지만 전처럼 서툴게 돌보기보다는 동물병원에 데려다주거나 유모들을 통해 먹이를 챙겨 준 뒤 보내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어느 날 해준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는데요

새 연필로 썼더니

백 점을 맞을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재단에서 해준의 앞으로 도착한 수혜자의 감사 편지였다. 자신을 후원한 사람이 몇 살인지도 모르고 그저 고맙다며 꾹꾹 눌러쓴 글씨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 사생활 침해 문제 때문에 수혜자들의 신상정보를 후원자에게 공개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완전히 오픈된 시혜적인 1:1 후원 방식이 보편적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두 줄짜리 편지를 받은 해준은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그 편지를 제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 제법 어린 것의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생각을 하고 차 회장과 백 여사는 어린 해준을 귀여워했다. 그렇게 별일이 없을 줄 알았다. 세 달 뒤 백 여사가 통장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 * *

“준이 잠깐 아빠 좀 보자.”

취미로 검도를 다녀오던 해준을 차 회장이 불러세웠다. 해준은 여전히 차 회장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부부는 자신들을 꾸준히 ‘아빠’ 와 ‘엄마’로 지칭했다. 시간이 꽤 흘러서인지 해준은 전처럼 아주 큰 거부감을 드러내진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후원 금액 내역서를 보던 차 회장이 난감한 듯 이마를 매만졌다.

“왜요?”

어린 해준은 백 여사가 가져온 주스를 마시며 눈을 깜박였다.

“음…….”

고작 열셋밖에 되지 않은 녀석이 후원하는 아이만 무려 스무 명이었다. 차 회장이 용돈 명목으로 넣어 주는 돈 이백만 원을 해준이 제멋대로 쪼개서 모조리 후원금으로 사용해 버린 것이다. 통장 내역을 보자 기가 찼다. 용돈이 들어오면 약 15일간 한 푼도 인출되지 않고 있다가 같은 날 스무 개의 출금 건이 우르르 찍혀있었다.

“수혜자를 늘린 거니?”

“네.”

“왜?”

“어차피 저는 쓰지도 않는 돈이 매달 들어와서요. 전 그 이백만 원이 없어도 충분히 먹고 자고 할 수 있는데 이 아이들은 당장 천 원이 없어서 밥을 굶는대요. 겨울에도 덮고 잘 이불이 없어서 곰팡이가 난 여름 이불을 덮고요. 그래서 줬어요.”

해준은 아이들의 처지를 설명하며 착잡한 듯 한숨을 내쉬다 이내 명분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똑바로 들고 부친을 응시했다. 차 회장은 아찔했다. 아마 500만 원씩 넣어주었으면 모조리 또 후원금으로 처리했을 녀석이었다. 이 어린 녀석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어렵사리 입을 뗐다.

“음…. 그렇지만,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주어야지.”

“네. 제 용돈인걸요.”

백 여사는 소파 옆에 선 채 부자(父子)의 설전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차 회장이 다시 한번 설명했다.

“아니, 그건 내가 너 쓰라고 준 돈이야.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네가 가진 것을 남김없이 전부 줘 버리면 안 돼. 너 스스로 돌보기도 해야 하고, 갖고 싶은 것을 사기도 해야지. 후원은 여유 자금으로 하는 거야. 네가 돌볼 수 있는 한계를 정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결국 다 어그러질 거다.”

차 회장이 짐짓 엄하게 조언했다. 그러나 해준은 시무룩해졌을지언정 고집은 꺾지 않았다.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죄송해요. 하지만 사람들 돕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요.”

“하…….”

차 회장은 고민했다. 씀씀이가 분명 헤픈 것이 맞는데 사람을 돕는 데 썼다고 하니 마냥 꾸짖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나이인데 용돈을 더 늘려 줄 수도 없었다.

“그럼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보거라. 대신 이제 정말 네 힘으로만 해 봐.”

차 회장은 해준의 용돈을 절반으로 깎았다. 통장에 들어오는 금액이 백만 원으로 줄자 해준은 심히 당황했다. 당장 다음 달에 후원금을 보내야 하는데 돈이 부족했다. 백 여사의 지갑에는 지폐가 한가득이었고 차 회장의 금고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지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해준은 우선 제 저금통을 깨기로 했다. 저금통에서 고작 구 만 몇천 원이 나왔다. 동전이나 지폐를 모을 일이 없었던 어린 도련님이 모은 것치고는 꽤 많은 금액이었지만 남은 후원금 백만 원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해준은 제가 가진 것들을 팔기 시작했다. 선물 받은 시디, 가방, 아끼던 장난감, 옷과 신발. 나중에는 책꽂이에 있는 책들까지 헐값에 팔아넘겼다. 차 회장은 해준의 방이 점점 허전해지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말을 얹지 않았다. 아들의 조급함과 안달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이 눈에 선했지만 한 번은 스스로 깨우쳐야 할 때였다.

그렇게 한 달, 두 달까지는 어찌어찌 후원금을 맞춰 보냈다. 가진 것을 탈탈 털어서 주고 나니 공부고 취미고 그저 머릿속에는 다음번에는 무엇을 팔아서 아이들에게 보내나 하는 고민뿐이었다. 백 여사가 한정판으로 사 준 운동화까지 팔아 20만 원을 손에 쥐고도 돈이 한참 모자라 입술을 깨물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무시하는 어른들도 많았고 제멋대로 값을 깎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제 곁에 있는 비서를 들들 볶아 대신 나가 팔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렇게 세 달을 채워 갈 무렵, 해준은 운동화 한 켤레, 코트 세 벌, 책 몇 권만 남은 허전한 방에 홀로 남았다.

“없어……. 돈이 없어….”

세 번째 달, 해준이 온갖 물건을 팔아치워 겨우겨우 모은 돈은 181만 원이었다. 열세 살짜리가 스스로 모은 것치고는 꽤나 많은 금액이었지만 해준은 후원 명단을 내려다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두 명. 이번 달에는 돈을 보내 줄 수 없었다. 배를 곯고 있을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렸다. 명단을 내려다보며 그나마 더 돈이 급한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올리고 덜 급한 아이를 추렸다. 19번째, 20번째에 자리한 이름을 보며 해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돈을 못 보내서 밥을 못 먹으면 어쩌지, 입을 옷이 없으면 어쩌지. 해준은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단에 전화를 했다.

“이번 달에 두 명은 후원금을 못 보낼 것 같아요.”

- 친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님 바꿔 줄 수 있어요? 이거 해지할 때는 부모님 동의 있어야 하거든.

해준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쁜 사람들. 돈을 받아 갈 때는 부모님 동의도 없이 서명만으로 덥석덥석 받아 가더니 후원을 동결하거나 중단할 때는 부모님 동의가 필요하다니. 해준은 한참을 씩씩대다가 결국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자존심이 상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이백만 원을 채워야 아이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다. 거실로 내려가자 백 여사가 차 회장과 함께 체스를 두고 있었다.

“준아. 왜 안 자고 나왔어.”

해준은 쭈볏거리며 백 여사에게 다가섰다. 근래 들어 부쩍 친해진 두 사람은 이제 웬만한 이야기 정도는 터놓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백 여사가 해준을 꼭 끌어안았다. 오랫동안 생기지 않은 아이 대신 제게 온 아이는 천사 그 자체였다. 자신을 끌어안은 백 여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해준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속을 썩이고 싶지 않았는데. 여태 잘 해 왔는데, 괜한 고집을 부려서 제 양부모가 저에게 실망할까 봐 몹시 겁이 났다.

백 여사가 웃으며 뺨을 어루만졌다.

“요즘 엄마가 바빠서 우리 아들 얼굴을 통 못 보네. 오늘은 방에서 아들이 나오질 않았구.”

“…….”

해준이 아무 말을 않고 시선을 떨고 있자 백 여사가 고개를 기울이며 코를 살짝 꼬집었다. 어리고 예쁜 것을 보면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책이라도 읽었…, 준아. 너 왜 그래.”

백 여사의 목소리를 들은 어린 해준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넘어져도 금세 툭툭 털고 일어나던 씩씩한 아이였는데 아닌 밤중에 뜬금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자 차 회장과 백 여사가 모두 놀라 몸을 돌렸다. 해준이 큰 눈에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손을 떨었다.

“저… 저, 돈 좀… 빌려주세요.”

“돈? 아니, 갑자기 무슨 돈.”

해준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썩썩 닦아 내며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책도 다 팔고……, 장난감도 다 팔았어요…. 저금통도 다 깼어요…. 그런데도 돈이, 돈이 부족해요. 후원금을 보낼 아이가 두 명, 남았는데에……, 제가 혼자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진짜 너무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다음 달에, 갚을게요. 진짜 갚을게요…….”

차 회장과 백 여사는 해준의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적당히 하다가 자기 능력이 안 되면 가볍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해준은 필사적으로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갚는다니. 남도 아닌데 빌린 돈은 갚아야 한다는 개념은 또 어디서 배운 것인지 해준은 제 양부모 앞에서 몸을 떨며 애원했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이에게 자신들은 어려운 사람들이었나 보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부모가 처음인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결정이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것만 같아 착잡해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도와줄게. 차근차근 얘기해 보자.”

차 회장과 백 여사는 흐느끼는 해준을 끌어안았다. 뭐가 그리 억울하고 서러운지 해준은 한참을 울었다.

*

“자, 다 됐어.”

차 회장이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며 모자란 금액을 입금해 준 뒤 해준을 안심시켰다.

“……고맙습니다.”

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후원자금을 테이블에 놓아두고 부부는 턱을 쓸어내렸다.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해준은 백 여사가 타 준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젖은 눈을 닦아 냈다. 차 회장은 낮게 허리를 숙여 아들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빠가 용돈을 줄여서 속상했겠구나.”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잘못이에요. …전 제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고마워하니까…, 제가 준 돈으로 먹고 자고 한다고 하니까, 그게 되게…… 우쭐했었나 봐요. 그냥 그러다 보니 한 명이라도 더 해 주려고 그랬던 거였는데…. 결국 제힘으로 한 게 아니었어요.”

해준은 숨을 내쉬며 잔을 만지작댔다.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는 사람 이전에 해준 역시 부모의 손길과 보호가 필요한 어린 소년이었다. 선의를 가지고 시작한 일일지라도 제 능력 밖의 일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면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 모두가 다칠 수 있었다. 다행히 오늘 해준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후원도 밀리지 않고 해낼 수 있었고 그 덕에 큰 죄책감은 면할 수 있었다. 다만 차 회장은 이제 동식물, 사람, 심지어 무생물일지라도 해준에게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에만 마음을 나누어 주라 일렀다.

“저 그럼……, 이젠 더 못 도와주나요?”

차 회장은 커다란 손으로 해준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코코아를 쥔 제 손보다 훨씬 따뜻한 아버지의 손이 포개지자 해준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도와줄 수 있어. 아빠는 해준이의 사랑이 커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 다만 후원은 네가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을 때까지 다시 한 명으로 줄이자. 해준이가 돕고 싶은 열아홉 명은 엄마 아빠가 끝까지 책임질게. 어때?”

“……좋아요.”

그제서야 해준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후원자는 다시 평범한 소년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아이 한 명을 후원하고 있었으며 가끔 다친 동물들을 홀로 동물병원에 데려다주는 등 독특한 취미 생활을 이어 오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크게 돌출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평범한 어느 날, 집에 돌아온 해준은 특별한 예고도 없이 차 회장 내외에게 ‘…아빠, 엄마. 저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하고 운을 뗐다. 해준의 입에서 나온 아빠와 엄마라는 호칭에 아내는 정말 많이 울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도 해준은 여러 방면에서 특출난 아이였다. 평범하게 공부를 이어 갔고 책에 빠져 살았다. 단란하고 평범한 가족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해준은 돌연 제가 가진 자금을 주식과 펀드에 쏟아부었다. 차 회장 밑에서 배운 지식을 빼놓고도 돈에 대한 천부적인 감이 좋았다. 손을 대는 것마다 가볍게는 두 배, 세 배까지도 올랐다. 그 덕에 해준은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즈음이 되어서는 아예 서울 중심에 빌딩 한 채를 가지고 독립할 수 있을 만큼 잔고가 넉넉해졌다.

그리고 해준은 기다렸다는 듯 차 회장에게 5년 전 양도했던 열아홉 명의 명단을 받아 와 자신이 관리하기 시작했다. 18살밖에 되지 않은 해준이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어린아이들이 다시 스무 명이 되었다. 해준은 어릴 때와 달리 후원 금액도 대폭 늘렸고 개중 머리를 잘 쓰고 예체능에 특기가 있는 아이들은 유독 더 신경을 썼다. 석박사 준비를 하면서도 그 스무 명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얼굴 한 번을 비추는 일은 없었지만 단 한 번도 후원을 밀리는 일은 없이 제 새끼처럼 키워 냈다. 집요하고 오래된 애정이었다.

“대단해요…. 어릴 때부터 사람을 거뒀구나….”

이소는 해준의 저택에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집사님, 희주, 용태, 춘식 아저씨, 낙원댁, 목포댁, 동희 씨와 아이들, 그 외 제게 잘 해 주던 많은 사람들. 아무리 마음의 빚을 지고 해준과 계약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이소는 그들과 해준만의 독특한 연대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자신이 그 저택에 기거하는 동안 모두들 해준을 동경하는 것이 티가 났고, 해준 역시 식구들을 제법 아끼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말로는 매번 ‘그치들은’, ‘어차피 줘도 잘 고마운 줄 모르고’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시장에 나가거나 어디 좋은 곳을 가면 해준은 자주 식구들 것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매일 말로는 틱틱대면서 강원도에 갔을 때도 식구들 줄 떡을 스무 박스나 보내는 것을 보며 이소는 몰래 웃음 짓곤 했다.

“정이 엄청 많으신 게 눈에 보여요.”

“좀 독특하죠? 해준이는 꼭 제가 가진 것을 나눠 주지 못해 안달 난 아이 같아요. 누군가를 돌보고 사랑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우리가 걱정한 건 조금 다른 부분이었어요.”

“어떤 거요?”

차 회장은 대답하기 난감한 지 걸음을 멈추고 말을 골랐다. 해준을 입양하고 나서 쭉 가지고 있는 오랜 고민 중의 하나였다.

“해준이가 쏟아붓는 애정을 감당할 사람이 없었어요.”

키가 큰 나무 사이로 여름의 밤바람이 불어왔다. 사랑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 고민이 될 수 있을까, 차 회장의 말을 들으며 이소의 눈매가 좁게 가늘어졌다. 차 회장은 볼 안쪽을 지그시 훑어내렸다.

“해준이가 우리 곁에 온 지 20년이 넘었어요. 그동안 쭉 지켜봐 온 해준이는……. 마치 밑 빠진 독에 제 사랑을 밀어 넣는 것처럼 유독 주는 것에 집착했어요. …하지만 일방적인 사랑은 사람을 숨 막히게 해요. 그 사람의 관심과 호의에 질리다 못해 익사하고 말거든. 그런데 정작 그 관계가 끝날 즈음에야 알게 돼요…. 이 애는 돌려받는 게 너무 없는 거지. 자신이 주는 것에 비해서.”

설마 처음이려고. 그럼에도 매번 믿었어. 쉽게도 마음을 줬고….

내겐 정말 이소뿐이네.

날 버리지 않을 거지? 착하게 굴게, 떠나지 마.

문득 이소는 수많은 꽃이 피어 있던 그 정원 한가운데 쓸쓸히 서 있던 해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짓궂게 장난을 걸면서도 어느 순간은 주춤하며 물러나 제 안색을 살피던 사람. ‘이소 씨는 나 좋아하니까.’ 하고 웃으면서 저를 휘두르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저와 해준의 관계에서 해준은 언제나 기꺼이 ‘을’을 자처해 주었다.

지금 이 결혼 문제도 다르지 않았다. 이소는 바닥에 남은 맥주를 마시지 못한 채 빙빙 돌렸다. 차 회장은 벌써 몇 번째 들어갔다 돌아 나오는지 모를 미로 안을 걸으며 쓰게 웃었다.

해준의 곁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이 항상 넘쳤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여자고 남자고 수많은 편지와 선물을 처리하기 난감해 곤란해하기도 했고, 석사를 할 때는 나이 든 노교수가 아내까지 내팽개치고 발목을 잡으며 구애를 해 차 회장까지 나서서 돌려보내기도 했다. 아들 치정 문제에 남자까지 끼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부부는 적잖이 놀랐지만 성향은 억지로 바꿀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무라지는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우관계도 원만해서 제 마음을 뚝뚝 잘도 떼 줬어요. 정이 많아 뒤통수를 맞는 일도 종종 있었고, 그만큼 상처 받는 때도 많았지. 그래도 또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을 찾았어요. 그러나 모두들 하나같이 나가떨어졌어. 보통 사람들이 느끼기에 이 애의 사랑의 방식과 무게가 너무 무거운 거야. 유독 이것만 참…….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더라고.”

사람은 식물이 아니기에 매분 매초 들여다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서투르고 정제되지 않은 열렬한 마음은 상대의 숨통을 조이고 막다른 길까지 몰아세운다. 부모가 된 입장으로서 위태위태한 해준을 지켜볼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아들아, 그런 관심과 사랑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단다. 언덕 위 해준의 정원이 꽃으로 가득 찰수록 도리어 해준은 허무함에 깊이 가라앉곤 했다. 부부는 이제 제발 아무나 나타나서 아들을 잡아 주었으면 했다.

이소와 차 회장은 다시 한번 막다른 길에 섰다. 다섯 번째로 몸을 돌리면서 이소는 이대로 미로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차 회장은 주변을 힐긋거리는 이소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말라니까, 이 노인을 좀 믿어 봐요. 다 왔어요. 출구가 곧이에요.

해준의 나이가 서른이 훌쩍 넘어갔을 때부터는 아들의 연애사에 간섭하는 것을 그만뒀다. 어차피 하나같이 다 남자일 텐데 관심을 가져 봤자 집안에 들일 수도 없고, 또 곧 헤어질 것 같아 애써 모르는 척을 했다. 그러다 언젠가 본가에 왔을 때 해준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히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응, 그럼. 나 밥도 먹었고 잘 씻었구. 당연히 이도 닦았지. 옷은 검은색, 바지는…. 자기는 왜 내 양말 색도 궁금해요? 내가 다 궁금해? 정말로? 나도 그래요.’

그저 연인 간의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문 뒤에서 아들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괜히 마음이 벅찼다. 어떤 이가 저리 살갑게 관심을 가지고 물어 주나, 꼭 아이가 엄마에게 칭찬받고 싶어 조곤조곤 제 일과를 이야기하듯 해준이 전화를 붙들고 웃고 있었다.

이소는 어렴풋이 언젠가 저와 해준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게 혹시…….”

차 회장이 씩 웃었다.

“맞아요, 이소 씨예요. 준이가 꼭 이소 씨 앞에서는 그렇게 조곤조곤 말이 많아지더라고. 꼭 다른 사람처럼. 아니, 어쩌면 그게 해준이의 본 모습일 수도 있지.”

어느새 미로의 끝에 다다랐는지 시야가 밝아져 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로 대화를 나눈 것 뿐인데, 이소는 어쩐지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출구를 앞두고 차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소 씨, 결혼이라는 건 말이에요.”

두 사람은 미로와 정원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밝은 달빛 앞이었다.

“이런 복잡한 미로를 두 사람이 함께 빠져나가는 여정과 같은 거예요. 분명 끝은 있지만 그 길에 다다르기까지 막다른 벽이라는 위기를 수십 번, 수백 번 만나면서 시간을 공유하는 거예요. 서로 탓하고 날을 세우고 싸우다가… 다 관두고 되돌아가려고 하면 또 걸어온 시간만큼 헤매고 부딪히면서 혼자 떠나게 되죠. 하지만 막다른 길 앞에서도 두 손을 놓지 않고 웃으면서 꾸준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두 사람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어요.”

물론 삶 자체가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지만, 어떤 것에 비유하든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끝은 있다는 결말은 공통된 것이었다. 이소가 살아온 삶이 그랬고, 육아가 그랬고, 우정과 사랑이 그랬다. 끝까지 안고 가지 못해 중간에 놓아 버린 것들도 있었고,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문제들도 많았다. 이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미로 안을 걷고 있었다.

“그럼 아버님과 어머님도 여전히 미로 안에 계시는 거네요.”

차 회장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맞아. 하지만… 우리는. 음…. 우리는 말이지.”

즐거운 듯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윤경이. 내 아내. 문득 차 회장은 지난날 아내와 지지고 볶으며 살았던 날들을 떠올렸다.

“즐기는 단계에 왔지. 이제는 미로를 빨리 빠져나가는 것보다 차라리 이 안에서 몇 분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게 좋은 나이가 됐거든.”

차 회장이 허허 웃으며 이소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짐작대로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미로에 들어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일 테고…. 이제는 누가 먼저 손을 잡아 주느냐가 남은 문제인 것 같은데.”

이소의 어깨를 쥔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해준과 닮지 않았지만 해준과 비슷한 분위기의 사내. 해준의 아버지인 차종규 회장은 이십여 년을 넘게 해준을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해준과 어울리는 짝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해준은 이소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어미에게 재롱을 부리듯 제 사랑을 가감 없이 내보였고 이소는 그것을 귀여워하고 예뻐했다. 반대로 가난과 열등감에 찌든 이소의 투정을 해준은 무한한 사랑과 포용으로 감싸 안아 주었다. 더할 나위없이 서로에게 잘 맞는 짝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그런 건 애초부터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좋으면 됐다. 정말로 둘만 좋으면 됐다. 긴장한 이소를 바라보며 차 회장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소 씨는 충분히 자격 있어요.”

“…아버님.”

이소는 단단한 고목과 같은 차 회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못난 아들을 잘 좀 이끌어 줘요. 이소 씨보다 여덟 살이나 더 먹었지만 아직도 정말 가르칠 게 많은 아이거든.”

이소는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항상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은걸요.”

얼굴을 붉히는 이소를 보고 차 회장이 진심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냐, 쟨 지가 가진 거 퍼 주는 거 말고는 죄다 서툴러요. 적당한 때를 못 끊어서 몰입하면 달려드는 꼴이 꼭 고장 난 불도저 같지. 아, 녀석 아직도 놀고 있군.”

거기까지 말하곤 차 회장은 미로 바깥으로 발걸음을 뗐다. 달빛이 완연했다. 미로의 출구에서 두 사람은 뒷짐을 진 채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해준을 마주쳤다. 해수를 포함한 여러 명의 아이들이 몰려다니는 것이 성가실 만도 한데 해준은 긴 다리로 휘적휘적 잘도 도망 다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꽃망울이 터지는 것처럼 듣기에 좋았다. 이 역시 해준이 만들어 낸 변화일까. 차 회장은 말없이 아이들과 해준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소 씨를 만나서 정말 많이 변했어요.”

쥐고 있는 맥주 캔을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차 회장은 어린 해준의 모습을 상기했다.

“내가 이십여 년 전에 준이를 데려왔을 때는 부모 앞에서도 꼭 잔뜩 경직된 신입사원 같아 보였는데 말이에요. 오히려 지금의 해준이는 꼭 순진한 아이 같아. 어릴 때 저렇게 웃고 뛰어노는 걸 못 본 게 언제나 아쉬워.”

“오히려 의외예요. 저랑 같이 있을 땐 저택에서 항상 저렇게 아이들과 놀아 주셨는걸요.”

해준은 대체로 바쁜 편이었지만 시간이 나면 행랑채 평상에 앉아 해수의 공부를 봐주기도 했고, 아이들의 글씨를 교정해 주기도 했고, 스무 살이 된 희주나 용태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소 눈에는 그런 일들을 해준이 귀찮아한다거나 억지로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참 신기한 거지. 고작 일이 년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있다는 게. 내 아들이 아닌 것 같다니까.”

차 회장이 정말로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맥주를 다 마셨는지 빈 캔을 흔들며 이소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이제 좀 고민이 풀렸어요?”

“네. 이야기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소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 회장의 말처럼 답답했던 머릿속 고민이 모두 휘발되어 버린 듯 날아가 버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들어갈까, 차 회장이 가볍게 몸을 돌리려는 찰나 이소가 ‘저, 아버님.’ 하고 붙잡았다. 뭔가 할 말이 남았는지 이소가 차 회장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가 얼른 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습관이 돼서.”

제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이소는 화들짝 놀라며 닿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작은 입술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낯간지럽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제게 교수님은…. 연인이면서 동시에 은인이기도 합니다.”

차 회장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이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해준의 애인은 얼굴만큼이나 참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다. 말투와 어조, 입 안에서 고르고 골라 단정하게 내뱉는 단어들은 모두 말의 주인을 닮아 동글동글하고 흰 자갈처럼 예뻤다.

“제가 어려울 때 정말 많이 도와주셨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과분할 정도로 많은 사랑도 주셨어요.”

풀벌레 우는 소리 사이사이로 이소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해준과 처음 만난 학교 복도, 커피와 롤케이크, 초밥과 손수건, 업고 걸었던 대나무숲, 복작복작한 잔칫날 밤, 몸을 섞고 사랑을 속삭이던 무수한 밤……. 차 회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소는 소원했다. 차해준이 쏟아붓는 애정을 한 톨도 빠짐없이 품어 주는 커다란 단지가 되고 싶다고.

“때문에 전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전처럼 또다시 후회하고 아파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동안 제가 받은 것, 혹은 그 이상으로 꼭 웃게 해 줘야 하거든요.”

“이소 씨…. 유약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든든한 구석이 있네….”

차 회장이 혼잣말을 하듯 감탄했다. 이소는 괜히 민망해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축였다.

“그냥…. 제 마음도 교수님만큼이나 크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정말 잘할게요. 교수님을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하하, 거참.”

차 회장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 아들과 그 연인은 서로 자신들의 사랑이 더 크다고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이 얌전해 보이는 인사 역시 제 아들 만만치 않게 무거운 사랑의 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안 차 회장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저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터졌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분수대로 이동해 놀던 녀석들이 해준에게 무차별적으로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차 회장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고고한 학 같던 아들이 당하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퍽 재미있었다.

“사실 이소 씨가 마음에 들었던 건 외모나 성격도 있었겠지만 다른 이유가 컸거든.”

내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하던 차 회장이 시선을 거두지 않고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해준이 분수대에서 한 번씩 발을 굴러 물을 왈칵 쏟아 주면 한두 녀석이 울음을 터트렸고 그 모습을 보고 남은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해준은 허리를 숙여 물 먹은 아이의 코를 풀어 주며 달래자 그 뒤로 해수가 달려들어 결국 해준이 분수대에 고꾸라져 푹 젖었다.

‘에고, 해수야.’

이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수대에서 몸을 일으킨 해준이 해수를 끌어안고 웃었다. 해수가 해준에게 계속 물을 뿌리며 웃었다. 해수 역시 일이 년 전에 비하면 무척 아이다워졌다. 해준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어느 날 해준이가 대뜸 딸이 생겼다길래 별안간 이게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아…….”

이소가 고개를 돌렸다. 해준의 화법을 생각하면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게이로 알고 있었던 부부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갔다. 차 회장이 해준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푸근하게 웃었다.

“천사를 둘이나 데려올 줄은 몰랐네.”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대는 건 부자(父子)가 똑같다. 이소는 얼굴을 붉혔다. 저 멀리서 해수가 이소와 차 회장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차 회장은 마저 놀라며 손짓을 했다. 분수대에서 허리를 일으켜 세운 해준이 머리를 털었다. 뒤늦게 이소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차 회장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저거 봐, 애비는 보이지도 않지.’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집에 편히 있어요. 기왕이면 오래 있어 주면 좋고. 내가 저놈한테 시킨 일이 좀 많은 게 아니라서 아마 한동안은 학교 복직이고 뭐고 서울 올라갈 일 없을 겁니다. 그동안 미루었던 것들을 몸 아프다고 못 했는데, 지금 애들 놀아 주는 걸 보아하니 살 만해 보이는구만. 이제 슬슬 일 좀 시켜야겠어.”

해준은 교수 때보다 재단 전무 일을 맡으면서 조금 더 바빠졌다. 아버지가 선생질 그만하고 내려와서 일 도우라고 들들 볶았다던 해준의 말이 떠올라 이소는 피식 웃었다. 그때만 해도 무슨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속아 버렸다.

“…저야말로 부족한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더 어리광 부려도 돼요.”

차 회장이 이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도 아들 하나 더 생기니까 든든하거든. 아버님 소리 듣는 것도 좋아하고.”

차 회장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들. 그렇게 말하는 차 회장의 목소리에서 묵직한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이소는 문득 제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네, 아버님.”

단정한 목소리로 다시 차 회장을 부르자 정말 듣기 좋은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자신이 며느리도 아닌데 그리 좋을까. 이소는 조금 민망했지만 같이 미소 지었다.

* * *

차 회장은 빈 캔을 흔들며 느린 걸음으로 본관으로 돌아갔다. 이소는 정원 앞에 서서 차 회장과 걸어 들어왔던 미로의 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막다른 길을 더 많이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만 뜻하지 않게 오해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날들도 찾아올 것이다. 사소한 일로 토라지게 되고, 질투에 눈이 멀기도 하고, 앞뒤 안 가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상처를 주는 날들도 생길 것이다. 평생을 같이 한다는 건 마냥 희망을 품고 안온한 날들만 기대할 수는 없기에.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미로를 빠져나와 비로소 당신의 얼굴을 제일 먼저 마주쳤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건 이소 씨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당신의 마음의 무게를 굳이 재지 않아도 이제는 알 수 있다.

멀리서 바퀴가 자갈을 지르밟고 진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경과 동희 씨가 커다란 수건을 들고 물에 푹 젖은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얼마나 법석을 떨며 놀았는지 안 젖은 놈이 없었다. 멀리서 준경과 동희 씨가 이소에게 허리를 숙인 뒤 해수를 데려갔다. 오늘 밤도 일찍 자기는 글렀다.

손을 흔들며 해수와 아이들을 배웅한 해준이 몸을 돌렸다. 물에 푹 젖은 셔츠를 입은 채 물기를 머금은 머리를 털며 돌아오던 해준은 정원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이소를 보며 싱그럽게 웃으며 바삐 뛰어왔다.

“이소 씨, 나와 있었네.”

이소는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해준은 폭삭 젖은 저와는 달리 보송보송한 이소를 보며 조금 멋쩍어졌는지 코를 훔치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나 완전 다 젖었어요. 애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물을 뿌리는데 피할 수가 있어야지. 해수 정말 짓궂던데. 은근 자기 닮은 것도 같고, 나중에 이소 씨도 나랑 같이 편 먹고 아이들하고 놀면 좋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소가 해준에게 성큼 다가가 입술을 포갰다. 차갑게 젖은 입술에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온기에 조금 놀랐지만 해준은 이내 천천히 눈을 감고 키스에 화답했다. 칠월의 달빛만큼 부드럽고 느린 입맞춤이었다. 더운 숨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가며 해준이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고개를 흔들었다.

“자기야, 나 지금 다 젖었어.”

“알아요.”

이소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해준을 마주했다. 해준은 제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에 눈을 찡그리며 큭큭 웃었다. 저를 안고 있는 이소의 옷도 축축이 젖고 있었다. 이러다 둘 다 감기에 걸리겠다. 해준이 이소의 허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

“감기 걸려, 나 지금 무척 비 맞은 생쥐 꼴이라 안아주지도 못해요. 봐, 자기도 다 젖고 있잖아…. 왜 갑자기 이렇게 달려드는지는 짐작도 안 가는데, 나 일단 우선 옷부터 갈아입고…….”

“결혼해요.”

고요한 밤, 입술 새를 가르고 나온 차분한 목소리는 사고를 멈추게 한다. 해준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보기 좋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천천히 제자리를 찾으며 내려왔다. 농담인가, 그러나 이소의 낯에는 장난기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맞춘 이소는 다시 한번 말했다.

“교수님, 저랑 결혼해요.”

“……이소 씨. 결혼은….”

“충동적인 결정도 아니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러는 것도 아니에요. 저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고민했어요.”

이소가 해준과의 거리를 조금 떨어뜨렸다. 바짝 안겨 있을 때보다 한 걸음 뒤로 멀어졌을 때 제 연인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이소는 해준의 손등을 느리게 매만졌다. 그의 손을 좋아한다. 하얗고 긴 손가락과 손등에 가느다란 힘줄, 매끈한 살갗, 잘 깎아 단정한 손톱, 단단한 마디, 그리고 손바닥을 겹쳤을 때 선연히 느껴지는 맥동과 온기. 이소는 이 손의 주인을 사랑했다.

다시는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아.

이소는 천천히 해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해준의 얼굴에 당혹감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것이 어렸다. 이소가 옅게 미소 지었다.

“교수님, 전 교수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말 많이 교수님을 좋아해요. 사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을 넘어서… 깊이 사랑하고 있고…. 그렇다고 해서 그 설레는 감정만으로 결혼을 재촉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기엔 우리 사이에 말로 설명하기 힘든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이소는 해준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렸다.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날 때까지 파노라마처럼 수많은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추억이고 흔적이었다.

“이제는 제 옆자리에 교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교수님이 남기신 궤적이 너무 커서… 아마 이대로 놓쳐 버리면, 이 기회를 지나쳐 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소는 면밀하게 해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날 선 콧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오래전 자신이 비에 젖은 채 해준의 앞에 섰을 때 해준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당황에 젖은 눈동자조차도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예뻐 보였다.

“…교수님이 그랬죠. 널 보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거라고. 결혼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이 집착할 테고, 안 놔줄 테고, 떠나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요.”

“…….”

해준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똑똑 떨어져 이소의 손등을 적셨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에게 그런 사소한 불쾌함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도 다르지 않아요. 어쩌면 교수님보다 더 심할 수도 있어요. 사실…….”

거기까지 말한 이소는 고개를 떨구고 해준의 손을 세게 쥐었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해준이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 속이 끓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누군가와 말을 섞으면 그 주변 사람들을 다 쫓아 버리고 싶었다. 해준을 다치게 하는 사람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꼭 두 배만큼 다치게 해 줄 것이다. 해준을 울게 하는 사람은 똑같이 울리고 말 것이다. 이소는 손자국이 빨갛게 패일 때까지 해준의 손목을 꾹 눌렀다. 해준의 손이 움찔하고 떨렸지만 놓아줄 수 없었다. 이소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전 교수님이 다른 사람하고 말을 오래 섞는 게 싫어요. 다른 사람에게 환히 웃어 주는 것도…, 특히나 남자보다도 여자들에게 더 신경이 쓰여요…. 아무에게도 웃어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밥도 같이 드시지 마시고, 차도 마시지 마세요. …모조리, 모두 다 거절하세요. 손도 잡지 마시고, 입도 맞추지 마시고…. 잘해주지… 마세요.”

“……이소 씨.”

“…저만, 저만 사랑하세요.”

“…….”

해준이 입을 열었지만 이소는 고개를 젓고 머릿속에 있는 말을 모조리 토해 냈다. 너무 날 것의 고백이라 유치하고 부끄러웠지만 실상 제 마음은 이리도 어리고 모자랐다. 갓난아기가 어미에게 본능적으로 매달리듯 일차원적인 애정을 갈구하고 토로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속사포로 내뱉는 고백의 끝은 그래도 이런 못난 자신을 인정해 달라는 거였다.

“저만 생각하시고 저만 보셔야 돼요. 평생 안 돼요. 교수님이 죽을 때까지 절대 안 돼요. 교수님은…. 교수님은 이제 제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절대 못 줘요. 그러니까, 이런 못난 저라도…. 괜찮으시면….”

“약속할게.”

해준의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뺨을 쓸어올렸다. 홀리듯 고개를 든 이소가 젖은 눈을 하고 해준과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죽어서도, 이소 씨 거예요.”

물기 어린 뺨을 한 해준이 입매를 느리게 끌어 올리며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물론 이소 씨가 죽어서도, 여전히 난 이소 씨 거일 테고.”

누가 먼저 죽는대도 ‘차해준의 소속은 오로지 윤이소’라는 말에 이소는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러니까.”

언뜻 들으면 무시무시한 고백으로 화답한 해준이 천천히 입술을 맞대었다가 가볍게 떨어졌다.

“지금 말해 줘요, 어떤 고백을 하더라도 이제는 다 승낙할 테니.”

“정말로?”

이소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재차 물었다. 해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정말로.”

입을 열기도 전에 마음이 놓이는 확답부터 받았다. 이소는 환하게 웃으며 해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젖은 목덜미와 옷깃이 축축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수님.”

“네.”

이소의 부름에 해준이 즉시 대답했다.

“차해준 교수님.”

“네, 윤이소 씨.”

늘상 부르던 제 이름을 불러주었다.

“해준 씨.”

“…….”

이번엔 이소가 해준을 따라 이름을 불렀다. 해준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맞췄다.

“해준 형.”

해준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접어 웃었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응. 이소야.”

해준의 깊은 눈동자에 어리는 애정이 이미 수백 번, 수천 번 대답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물었다.

“저랑, 결혼해 주실래요?”

해준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연인들의 코끝이 가볍게 부딪히자 꽈리꽃 같은 웃음이 톡 터졌다. 해준이 웃음을 머금으며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을 살짝 베어 물고 낮게 속삭였다.

“네. 기꺼이 그렇게 할게요.”

이내 두 사람은 서로에게 파고들 듯 입을 맞췄다. 푸른 수국이 가득 핀 정원 한가운데서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해준은 이소의 허리와 목덜미를 감싸 올린 채 입술을 베어 물었다. 돌연 고개를 뗀 해준의 입꼬리에 개구진 미소가 걸렸다. 이소 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름을 부르며 덥석 허리를 숙여 이소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우선 둘째부터 만들자.”

그놈의 둘째 타령. 이소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도 진심이세요?”

“난 너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면서도 해준은 이소의 목덜미와 뺨에 입술을 흔적을 찍어 내렸다. 해준에게 안겨 눈을 감은 채 이소는 문득 자신과 해수, 해준이 오래전에 함께 찍은 사진을 떠올렸다. 이렇게 마음이 설레고 벅찬 건 어쩌면 연인에서 부부가 된다는 사실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던 것이 이루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세 분 꼭 가족 같아요.’ 흘러가는 말에 이제는 웃으며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저희 가족 맞아요.’라고. 차해준과 윤이소, 윤해수는 이제 정말로 항상 함께라고. 칠월의 밤, 이소는 비로소 완전하게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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