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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주영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5층에서 몸을 던졌으니 온몸이 박살 나는 고통이어야 할 텐데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몸이 허공에 붕 뜬 느낌이었으나 몸은 무거웠고 특히나 손목이 으스러질 듯이 아팠다. 주영은 미간을 찡그리며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팔을 누군가 쥐고 있었다. 주영의 눈가가 떨렸다.
“누구 트라우마를 도지게 하려고 또 몸을 내던지실까.”
차해준이었다. 팔을 쥐고 있는 손아귀 힘이 대단했다. 사람 손이 아니라 무슨 밧줄에 엉기어 있듯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는 힘에 주영은 혀끝을 찼다. 이 새끼는 칼을 맞고 불을 질러도 안 죽더니 사람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하네. 주영이 눈을 부라리고 노려보자 해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내려 줘?”
꽉 잡은 손에 힘이 조금 풀리자마자 덜걱 하고 시야가 낮아진다. 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나머지 한 손을 올려 해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제 와서 무서워졌어?”
“……꺼져.”
“입은 살았네. 다행이다, 우리 바깥양반 화 많이 나셨거든.”
“이 씹…….”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주영은 손톱을 세워 해준의 팔뚝을 옭아맸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발이 닿지 않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주영은 허우적댔다. 문득 손목이 가벼워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닥에 떨어진 트렁크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1층에 있던 경찰들이 주변을 정리하며 손으로 엑스 표시를 쳤다. 처음부터 트렁크 안에 해수는 없었다.
“약은 깼고, 쇼는 끝났어.”
주영이 사색이 되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형형한 분노가 제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홀가분하게 죽을 생각 하지 마. 산 자(者)로 남아 죗값을 치러야지.”
한팔로 주영을 곧게 지탱하고 있는 해준이 냉한 눈으로 일갈했다. 자칫 자신까지 넘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른 손으로 난간을 붙잡은 채 천천히 호흡한 해준은 팔을 구부려 주영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크레인이 들어 올리듯 안정적으로 성인남자를 들어 올린 해준은 그대로 주영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에 주영이 땅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든 이소가 주영의 멱살을 잡고 다시 난간 쪽으로 밀어젖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도 전에 뒤로 넘어진 주영의 등이 바닥에 쓸렸다. 이소가 체중을 실어 목덜미를 내리눌렀다.
“개새끼야, 해수 어디에 숨겼어.”
떨어지려는 놈을 기껏 살려 놨더니 이번에는 서방이 열받아 도로 죽이려고 한다. 해준은 이소의 어깨를 살짝 잡아 흔들었다.
“이소 씨, 진정해.”
“내가 지금 어딨냐고 묻잖아!”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멱살을 잡아 바닥에 내리찍자 주영이 억, 윽 소리를 내며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순식간에 올라온 형사들이 달려와 이소의 팔을 붙잡았다. 윤이소 씨, 진정하세요! 서에 데려가야 합니다! 여기서 기절시키면 안 돼요! 이소가 주영의 얼굴에 주먹질을 하며 오열했다. 이소가 주영의 턱을 갈길 때마다 피가 튀며 고개가 돌아갔다.
“해수 어딨어! 해수 어딨냐고!”
주영은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이소 주먹 존나 맵네…. 코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하, 하…… 끝까지 씨발….”
웃으며 읊조린 주영의 말에 이소가 다시 한번 달려들려는 것을 해준이 가로막았다. 해수 건드렸으면 너도 죽일 거야,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내 손으로 너도 죽일 거야! 이소가 해준의 품에 안겨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주영의 눈이 깜빡깜빡 감겼다 뜨였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경찰들이 달려들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검사가 주영의 뺨을 잡아 눌렀다.
“윤주영, 강해수 양 어디에 숨겼어.”
주영은 물끄러미 검사를 바라보았다. 실소를 터뜨렸다.
“글쎄, 숨바꼭질 중인가 보지….”
“미친 새끼…. 가자, 우리가 데려간다.”
빠르게 모여든 기자들을 피해 수사팀이 주영을 에워쌌다. 주영은 고개를 돌렸다. 말해! 말하라고! 윽박을 지르며 발을 구르는 이소를 끌어안으며 차해준이 달래고 또 달랬다. 결국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했지만 그래도 비행기라도 한 번 같이 타 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저 망할 새끼가 안 죽고 달려오는 바람에 쉽게 잡혔다. 씁쓸했다. 허탈했고 먹먹했다. 뒤늦게 주영의 입술이 떨리고 눈가가 젖어들었다.
“…이소야. ……해.”
마지막으로 건넨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형사들이 주영의 얼굴에 점퍼를 씌웠다.
살인범이 잡혔다는 소식에 안심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해준은 이소의 얼굴을 코트로 가렸다. 코트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내보내 달라고 우는 이소를 끌어안고 경찰들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아직 해수를 찾지 못한 마당에 이소의 얼굴까지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많은 인파가 몰려들기 전 빠져나가는 해준의 곁으로 카메라를 든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점퍼로 가린 주영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며 해준은 오래전 제 연못에서 물어뜯기던 붉은 잉어를 떠올렸다. 그렇게 주영은 인파 속으로 가라앉았다.
* * *
“윤이소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큰일 없을 겁니다. 지금도 해수 양을 찾기 위해서 다들 힘쓰고 있어요.”
이소는 멍한 표정이었다. 그 소란이 있은 지 벌써 2시간째였다. 트렁크에 있을 거라 확신했던 해수는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 트렁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는 순간, 이소는 정말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갔었다. 경찰들이 잡아뜯지 않았다면 해준을 밀치고 당장 윤주영의 손을 놓아 버렸을 것이다.
CCTV를 모조리 뒤졌지만 해수를 찾을 수 없었다. 윤주영은 분명 해수를 안고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서 트렁크를 가지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온갖 나쁜 생각이 다 들었다. 이소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해준이 이소의 등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땀이 흥건했다가 차게 식었다.
“이소 씨, 일단 이거 마셔요.”
해준이 이소에게 데운 우유를 한 잔 건넸다. 해수가 마시던 밀크셰이크가 생각나서 또 눈물이 주륵주륵 났다. 도대체가 뭐 이렇게 복잡하단 말인가. 왜 하나가 마무리되면 또 하나가 터지냔 말이야. 살면서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해수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더구나 해수의 친아빠이자 사촌 형이 그런 짓을 감행했으리라고는 감히 추측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충동적이라고 할지언정 너무 큰 충격이었다.
해준이 한숨을 쉬었다. 있을 만한 곳을 모두 뒤졌지만 없었다. 하다못해 정말 끔찍하지만 쓰레기통도 모두 열어 보았다. 한동안 셧다운이 시작되고 모든 물류 창고 및 비행이 멈췄었지만 살인범이 잡히고 나자 공항 측은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정상화를 요청했다. 이소와 해준을 포함한 몇몇을 제외하고 공항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하, 진짜….”
분명 이 공항 안에 있었다. 이소가 입술을 물어뜯었다. 막막했다. 해준을 만났을 때처럼 붉은 실 같은 것이 데리고 가 준다면 좋을 텐데. 그런 건 허상에 불과하다치고 대충 어디에 있는지 위치라도 알 수 있는 신호 같은 거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초능력자도 아니고. 그런 생각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였다. 위치, 신호, 추적. 문득 이소는 번쩍 머리를 들었다. 설마.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해준을 바라보았다.
“교수님.”
내내 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던 해준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으로 시선을 맞춰 왔다.
“응.”
“이 시점에 대답하기 좀 곤란하다는 거 알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해준이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이소의 또렷한 목소리에 옆에 섰던 준경과 형사들도 모두 이소와 해준을 돌아보았다.
“혹시 해수한테도 위치 추적기 달았었어요?”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담배를 물고 있던 형사들과 입술을 물어뜯으며 전담팀의 연락을 기다리던 검사, 내내 옆을 지키던 준경.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은 해준이 이소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마주했다. 해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최근에도 추적한 적 있어요?”
추궁보다는 기대가 담긴 절실한 눈빛이었다. 해준의 동공이 흔들렸다.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있자 준경이 아이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야이씨, 형사와 검사가 혀를 차며 어이없어했다. 이미 일전에 이 교수 놈이 제 남자 애인에게 위치 추적기며 사람을 붙였었다가 대차게 차였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건만 그 딸애까지 감시를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한참 말이 없던 해준이 주먹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지금 해수가 멘 가방에 예전에 쓰던 전화가 있어요.”
이소는 위치 추적기를 단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다급하게 해준의 말허리를 잘랐다. 짐을 맡길 때 해수는 제가 가방을 가지고 있겠다고 말하며 가슴 위 버클까지 채웠다. 아끼는 책과 작은 인형, 심심할 때 쓸 볼 패드, 그리고 해준이 사 줬던 못 쓰는 전화까지. 주영이 그 가방을 버리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 해수와 연결된 상태라면.
이소가 고개를 들고 해준과 눈을 맞췄다.
“현재 쓰지 않는 전화여도 추적 가능해요?”
“GPS와 와이파이가 꺼져 있어도 정보 파악은 가능해요. 배터리만 남아 있으면.”
해준이 이소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다급하게 제 전화를 꺼내 들었다. 몇 가지 설정을 체크하던 해준이 입술을 물었다. 돼라, 제발 돼라. 어디에 있는지 확인만 하면 오차 범위는 5m 이내였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해준의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사는 금방이라도 전담팀에 연락할 태세로 통화 대기 상태로 숨죽여 있었다.
90%, 91%…… 94%, 느린 속도로 위치를 로딩하던 상태 표시 바가 세 자리 숫자에 도달했을 때 화면이 전환되며 현재 해준의 위치와 추적 대상자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 화면이 떴다. 대상자와의 거리, 방향, 현재 대상자의 배터리 상태까지 모두 표시되었다. 약 6%, 적어도 15분 안에는 해수가 있는 곳까지 도달해야 했다. 위치가 확실해지자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반대 방향, 동문 13번 게이트 수직 방향으로 1층부터 5층입니다. 오차 범위는 최대 5m, 주변에 있는 화장실부터 창고, 라운지에 있는 vip 침실까지 모두 살펴 주세요. 10분 안에 찾아야 합니다.”
“야, 들었지. 동문 13번 게이트 위아래로 싹 다 뒤져.”
지시를 전달하는 와중에도 해수의 핸드폰 배터리가 5%로 떨어졌다. 해준과 이소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곁에서 같이 뛰던 어린 형사가 해준을 걱정했다.
“교수님, 동의 없이 미성년자에게 불법 위치 추적기 부착한 건 진짜 형사처벌 감인 거 아시죠.”
“말 안 해도 이미 감옥 갈 사유들 넘쳐나는 거 압니다.”
“애부터 찾아, 새끼야.”
옆에서 같이 뛰던 검사가 면박을 주었다. 해준은 이소를 돌아보았다. 저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보이지 않는 이소는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품에 안겨서 울기만 했었던 유약한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아이의 행방을 찾고 있는 얼굴이 진지하다 못해 비장했기 때문에 해준은 말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전기에서 계속 전담팀의 무전이 흘러나왔다.
- 터미널 4층에는 연결통로 자리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 터미널 3층 물품 보관함 복도입니다. 전부 확인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전담팀이 말한 곳을 지나쳐 게이트 문을 지나치자 곧 사건과 상관없는 승객들이 공항 중앙홀로 쏟아져 나왔다. 이소와 해준은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경찰들 역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흩어져 움직였다.
해준이 화면을 보고 형사들을 붙잡았다.
“10m 이내.”
그 말에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물렸다. 이소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흔들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추적기의 점이 반짝이고 있는 곳은 너무나도 의외인 곳이었다. 어린 형사가 제 눈 앞에 놓인 커다란 고양이 조형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 여긴 너무.
“너무 보는 눈이 많은데요?”
여객터미널의 가장 중앙. 온갖 놀이방과 환승 호텔, 서점, 약국, 인터넷 라운지가 모여 있는 곳이라 약간의 수상한 행동만 보여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수 있는 곳. 유동인구가 많이 모이는 이 장소에서 아이를 데리고 돌아다닌다면 의심을 사기 쉬운 곳이었다. 검사가 고갯짓을 했다. 일단 10m 이내라고 했으니까 놀이방하고 환승호텔 뒤져 봐. 고개를 끄덕인 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해준이 몸을 돌렸다. 내내 형사들을 따라 뛰었던 이소가 밭은 숨을 뱉으며 연신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해준은 차마 이소에게 말을 걸 수 없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 숨겼을까.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가방을 어디 버려 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찾는 게 막막한데. 주변을 둘러보며 이동하던 해준의 시선이 약국 옆 좁은 복도에 닿았다. 이소의 시선도 동시에 같은 곳에 닿았다.
[유아 휴게실 및 수유실]
이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약국 근처를 수색하던 형사들도 이소를 따라왔다. 좁은 복도에 구석에 비치된 CCTV의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미친, 형사과장이 실소를 터뜨렸다.
이소가 말없이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은은한 조명과 함께 깨끗하고 포근한 파우더 향이 땀에 전 사내들을 반겼다.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던 여성들이 당황하며 물러났다. 갑자기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자 겁을 집어먹은 채 아이들을 안고 뒷걸음질 쳤다. 형사들이 넉살좋게 웃으며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잠시 수색 중입니다. 얼른 애기 기저귀 갈아 주시고 잠시만 자리를 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자들이 우르르 나가자 검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읊조렸다.
“내부에 CCTV가 없어?”
“에이, 검사님도. 젖을 먹이는 공간이라 프라이버시 때문에 내부에 달면 큰일 나죠.”
얼마 전 막 딸을 낳은 신참 형사가 아는 체를 했다. 이소는 천천히 수유실의 커튼을 밀어젖혔다. 한 사람이 겨우 몸을 숙이고 앉아 젖을 물릴 수 있는 공간이 총 8군데, 아기가 쉴 수 있게끔 만들어진 수면실이 1군데.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소는 홀린 듯 뚜벅뚜벅 수면실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수유실 커텐을 열어 보며 아직 다 확인하지 못한 형사가 ‘어, 윤이소 씨. 그렇게 막 혼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라며 이소를 불러세웠다.
이소가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밀었다. 해준이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배터리가 꺼진 해수의 핸드폰, 여기서 찾을 수 없다면 해수를 찾는 것은 다시 원점이 된다. 해준이 고개를 들어 이소를 불렀다.
“이소 씨.”
“쉿.”
웅웅 가습기가 돌아가는 고요한 방 안, 작은 달님 모양 수면등이 걸려 있는 벽. 1m 남짓한 작은 원목 침대 위 아기용 모빌이 오르골 소리를 내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소는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일곱 살 해수가 마치 요람에 들어간 아기 모습처럼 잠들어 있었다. 가방과 신발은 곱게 벗어 두고 이불까지 폭 덮은 채로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이소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으로 눈가가 젖어들었다. 머뭇대는 손으로 해수의 뺨에 손을 꾹 댔다.
“으응.”
해수가 깊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새액새액 어린 생명이 보채는 소리가 이리 안심이 될 줄이야. 형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제서야 이소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팔을 들어 해수를 깊이 끌어안았다. 으흐흑, 터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끅끅 어깨가 들썩였다. 계속 몸을 조여 왔던 극도의 긴장과 불안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안도의 웃음과 기쁨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해준의 눈가가 푹 젖어들었다.
“해수야, 해수야…… 아빠 왔어. 아빠 왔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쓸어내리고 연신 이마에 입을 맞추자 마치 왕자의 키스를 받은 공주마냥 해수가 서서히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눈을 몇 번을 깜빡이자 눈 앞에 보인 아빠의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해수의 좁은 미간이 폭 패였다.
“아빠? 아빠… 울어?”
“으흑, 으응. 해수, 잘…. 흑, 잘 잤어?”
이소가 순순히 운다고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도리어 해수가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으응, 잘 잤지. 왜 울어, 아빠. 왜 울어…?”
“흐, 흐윽…. 좋아서. 좋아서 울어.”
해수는 영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겨 있다가 눈을 돌렸다. 그리고 해준과 눈이 마주쳤다. 해준 역시 해수와 시선이 맞부닥친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명치 아래가 간질거렸다. 제 아빠에게 안겨 있을 때는 내내 괜찮았던 해수는 해준을 한참 바라보더니 입술을 죽 말고 턱 끝에 작은 호두를 만들었다. 이내 이슬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아저씨….”
해준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소에게 폭 안기느라 갈 곳을 잃었던 두 손이 해준을 향해 뻗혔다. 그와 동시에 해준이 성큼 다가가 두 사람을 동시에 품에 안았다. 해수가 엉엉 울었다.
“왜 이제 왔어요,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왜 이제 와요.”
해준이 낮은 목소리로 해수와 이소를 달래고 얼렀다.
“미안해, 아저씨가 늦게 와서 미안해.”
“으허엉….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에-”
세 사람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옆에 선 형사들이 괜히 벌게진 코를 훔쳤다.
“하, 씨. 나 원래 드라마 보고도 안 우는데.”
“누가 뭐래냐.”
따뜻한 소란을 지켜보며 문에 기댄 어린 형사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되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 데려다 놨네요. 저 큰 애를 아기 침대라니, 좁아 보이는데.”
준경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부둥켜안은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을 쓰며 왜 자신은 네 옆자리에 갈 수 없는 거냐고 오열했던 주영을 잠시 떠올렸다. 그 누가 저 틈을 파고들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생각한 일곱 살 아이는 여전히 모빌을 보고 아기 침대를 쓰는 존재인 거죠.”
키워 본 적이 없을 테니 어떻게 케어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허둥댔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데리고는 나왔으나 막상 아이의 얼굴을 보니 죽일 용기나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빨리 띄지 않으면서 안전한 곳. 그러나 불안해하지 않고 오래오래 잠들 수 있는 편안한 곳. 만일의 사태에 제일 먼저 도와줄 사람이 있을 만한 곳.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과 가방, 가슴까지 덮인 이불은 아이를 던져 놓고 허겁지겁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아마 안아 올려 준 뒤 한참을 들여다보다 자리를 떴을 것이다.
“아마 끝까지 미움받는 걸 두려워했을 겁니다. 결국은 사랑받고 싶어 했으니까.”
준경은 씁쓸함에 고개를 돌렸다.
* * *
“수면유도제를 아주 소량 먹은 것 외에는 전혀 문제없습니다. 아마 잠이 덜 깨서 조금 몽롱할 순 있어요.”
검사 측의 배려로 해수는 간단한 증언과 구조대원의 진찰을 받은 뒤 이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소는 무겁지도 않은지 해수를 꼭 끌어안고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 수유실 의자에 앉은 채 연신 데운 우유를 먹이며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묘했다. 해준은 제 머릿속 불순한 상상을 흔들어 없애 버리며 그 곁에 쪼그려 앉았다. 해수가 제 눈높이에 선 해준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저씨, 왜 이렇게 땀이 많이 났어요?”
“해수가 너무 꼭꼭 숨어 있어서 찾느라 그랬지.”
제 머리카락을 당기듯 가지고 노는 해수를 보며 해준이 씩 웃었다. 이소는 해수의 작은 귀를 만지작거렸다.
“해수야, 그런데…. 여기는 삼촌이랑 어떻게 왔어? 책 읽다가 삼촌이 아빠한테 가자고 안 했어?”
해준과 이소는 행여 해수에게 너무 무서운 기억이 남았을까 염려했다. 주영과 데면데면한 해수가 주영이 끌고 가자는 대로 갔을 리도 만무하고 제 아빠와 떨어진 채 두세 시간씩 낯선 곳에 있을 리가 없었는데도 해수는 꽤 평온한 상태였다.
“음. 잠시만 아빠 일로 와 봐.”
대뜸 해수는 이소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소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해수가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하더니 이내 안심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왔다. 다행이다, 열 없네. 꼭 이소의 말투로 말한 해수가 씩 웃었다.
“삼촌이 아빠가 갑자기 쇼크가 와서 119 아저씨들이 왔대. 잠시만 쉬고 있자고 해서 삼촌이랑 여기 왔어. 비타민 먹고 자고 일어나면 아빠가 금방 올 거라고 했거든.”
주영은 아마 해수를 찾아서 이소에게 오는 와중에 이소가 해준의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대로 버리고 도망쳐도 되었을 것을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해수를 굳이 데리고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해수는 제 가방을 뒤적였다. 이소는 해수를 꼭 끌어안았다.
“무섭진 않았어?”
“처음에 잠이 좀 안 왔는데, 삼촌이 계속 옆에서 자장가 불러 줬어. 토닥토닥도 해 주고.”
“자장가? 무슨 자장가?”
그 소란을 피워 놓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는 말에 해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소를 돌아봤다. 그러나 이소는 오히려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해수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거 있잖아요. 섬집아기요. 아, 아빠 이거 봐. 삼촌이 내가 좋아하는 책도 사 주고, 깨어나서 아빠 만나면 이거 주래. 아빠 이거 좋아한다고.”
해수가 손에 쥔 것은 작은 캐러멜이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본 이소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순식간에 눈가가 젖어들었다.
22년 전 주영의 집에 처음 가게 된 날, 천둥이 쳐 잠을 못 이루던 다섯 살 이소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울고 있었다. 베개를 안고 문을 두드린 주영이 이소의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부스럭거렸다. 한참을 뽀시락거리던 주영이 이불 안을 더듬어 이소의 입 안에 넣어 준 달콤한 카라멜, 단맛이 사르르 퍼지자 신기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주영은 꼼지럭거리며 이불 안으로 들어와 이소를 끌어안았다.
이소야. 무서우면 노래 불러 줄까?
무슨 노래?
형이 좋아하는 노래. 들어봐 봐.
그날을 시작으로 습관처럼 제 귓가에 속삭이던 자장가. 주영이 알고 있는 유일한 동요. 22년 전 어린 이소를 멋모르고 재웠을 때처럼 주영은 자신의 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주영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이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쩌면 지독한 애증으로 남은 자신의 딸에게 바치는 헌가가 아니었는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아빠, 울어?”
“아니야아….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이소는 고개를 저으며 해수를 꼭 끌어안았다. 아빠, 이제 괜찮아? 열도 안 나고 무서운 것도 없어졌어? 아직도 무서우면 내가 노래 불러 줄까?
해수가 제 아빠의 등을 끌어안고 연신 토닥이며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이윽고 해수의 노랫소리가 작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어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해준은 이소의 무릎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이소의 손이 해준의 손등에 겹쳐졌다. 하루 온종일 악몽에 가까운 사건들로 까지고 쓸려 거칠어진 손을 이제서야 다시 잡았다. 해준은 이소의 손을 잡은 채, 이소는 해수의 손을 잡은 채 세 사람은 그렇게 몰아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 *
“차 교수님, 여기 이제 불 끄고 나가야….”
주변 정리를 마친 어린 형사가 세 사람을 데리러 왔다가 멈칫하고 섰다. 꽤나 불편할 텐데도 세 사람은 좁은 소파에 서로의 몸을 기대고 잠이 들어 있었다. 새액새액 숨소리만 남았다.
“흠, 꽤 보기 좋네.”
어린 형사는 벽에 걸린 수면등의 불을 밝혔다. 곧 조용히 돌아가는 오르골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폴리스 라인을 조금 나중에 치우는 것도 괜찮겠지. 형사는 세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제 정말로 모든 것이 종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