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50)

3

또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소의 환각은 해가 넘어가서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처음에는 말을 걸기도 하고 심하게 놀라기도 했지만 부자연스러운 저의 시선 처리와 표정을 알아챈 주영이 건강을 염려하자 이소는 그날부터 해준의 환상을 보아도 그럴싸하게 모르는 척할 수 있게 되었다.

‘이소 씨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1층에 갔다 방으로 돌아온 이소의 침대에 해준이 앉아 이것저것을 들춰 보고 구경을 했다. 그럼 이소는 문 앞에 기대어 한참 동안 제 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해준을 구경했다. 무섭다거나 정신이상증 취급을 하기에는 그가 하는 짓이 퍽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고 이 지루한 일상에 단비 같은 유희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소는 서랍을 열어 두툼한 스웨터를 꿰어 입고 코트를 걸쳤다. 단단히 목도리도 했다. 어느새 바짝 다가온 해준이 서랍장에 기대어 턱을 괴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소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아주 천천히 양말을 골랐다가 다시 집어넣는 등 시간을 끌었다. 해준의 고개가 옆으로 포옥 돌아갔다.

‘발목이 가늘어서 뭘 신어도 예뻐.’

이소는 피식 웃었다. 해준표 칭찬은 언제 들어도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 나오게 만들었다. 그게 제 마음속에서 멋대로 단어를 조합해 만들어 낸 것이건 뭐건 간에 기분은 좋았다.

양말을 꺼내어 신고 거울 앞에 서서 이번에는 목도리를 풀었다 다시 묶기를 여러 번, 해준이 바짝 다가왔다.

‘여길 붙잡고 고리를 만들어서, 넣으면 되지.’

선이 곱고 하얀 손이 제 앞에서 목도리를 매만졌다. 이소는 해준이 가르쳐 준 대로 목도리를 꼼꼼히 묶었다. 단단히 잘 매졌다. 해준은 어깨를 토닥였다.

‘잘 다녀와요. 기다릴게.’

오늘따라 방문 앞에서 배웅만 한 해준의 환영은 두어 걸음 갔다가 다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오랜만의 주영과 단둘이 하는 외식이었다. 해수는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겠다고 일찍이 잠이 들었다. 기다린다고? 고작 환영이 건넨 말인데도 유난히 신경이 쓰여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문 앞에서 주춤주춤 거리고 있을 때 주영이 1층 계단 앞에서 이소를 향해 손짓했다.

“이소야, 가자. 시동 걸어 놨어.”

“아, 으응.”

어두운 밤거리, 이소는 주영의 차에 올라탔다. 별장을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이소는 제 방 창문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환영일 테다. 그러나 묘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 * *

새해를 맞아 무척이나 유명한 내한 뮤지컬 한 편을 관람하고 주영이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영은 메뉴를 기다리며 이소에게 노란 봉투를 하나 꺼내 주었다. 이소는 편지치고는 퍽 두툼한, 그러나 봉투의 색깔이 워낙 화려해 공적인 서류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물건을 받아 들고 의아한 눈으로 주영을 바라보았다.

“이거 뭔데?”

“이른 발렌타인데이 선물.”

봉투를 뜯으려고 할 때 즈음 음식이 도착했다. 이소는 종업원의 눈치를 보다 옆에 살포시 내려 두었다.

“아버지 어머니 사택에서 이것저것 추리다가 숙부님이랑 숙모님 사진을 발견했거든. 아마 되게 작게 나오거나 흐릿한 사진이 많을 텐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가져왔어, 너 부모님 사진 하나도 없잖아.”

이소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주영은 능숙하게 와인을 건네며 이소에게 미소 지었다.

“보육원이랑 학교, 여기저기서 봉사한 사진도 남아 있어서 뒤져서 가져왔어.”

“그런 건 어떻게 찾았어? 큰아버지 방에선 못 봤는데.”

“돈 주면 우리 할아버지 돌 사진도 찾아 주는 세상이야. 사람 쓰면 못 할 것 없어.”

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소는 연신 주영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봉투를 쓰다듬었다. 지금 안 열어 볼 거야? 묻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

“괜히 지금 열었다가 들떠서 식사를 망칠 것 같기도 하고. 집에 가서 자기 전에 혼자 볼게.”

“그러든지.”

이소는 얼마나 좋은지 식사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몇 번이나 주영에게 ‘고마워, 형 고마워.’ 하며 웃었다. 이제는 꽤나 능숙해진 칼질과 서양식 식사 예절이 몸에 뱄다. 이소가 어설프게 와인을 홀짝였다. 주변을 돌아보자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우아한 태도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유난히 많았다. 주영도 아마 형수와 사이가 좋았다면 저렇게 평범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겠지, 서른이 다 된 동생을 돌보는 일이 아니라. 그러나 괜한 사과는 하지 않았다.

“형은 회사 일은 잘 돼 가? 연초라서 더 바쁠 것 같아.”

“항상 비슷하지. 그래도 너랑 여행 갈 정도의 여유는 있어.”

“당장 내일이라니. 비행기 안 타 봤는데 긴장된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니야.”

크리스마스 당일 밤, 주영은 영국행 티켓을 내밀었다. 새해가 되면 회사 일이 여유가 있어질 테니 길게 여행을 가자고. 짐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간소하게 챙기라는 말에 이소는 당황하기는 했지만 수락했다. 담당의는 비행기에서 혹시 있을 일에 대비해 비상약만 미리 챙겨 주곤 잘 다녀오라는 안부도 전했다. 무슨 부산 놀러 가듯이 영국이라니. 그래도 해수 초등학교 가기 전에 해외여행을 한 번 갈 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평소보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절반씩은 먹었다. 다른 메뉴를 고를 것을 그랬나. 주영은 더 먹이지 못한 것을 퍽 아쉬워했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주영은 창 밖의 야경에 시선을 던졌다. 이소는 차를 마시며 조용히 바깥을 내다봤다. 도로 위를 빼곡하게 채운 차들의 노랗고 빨간 헤드라이트가 꼭 반짝이는 은하수처럼 보였다. 무수하게 많은 점들이 느릿느릿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

주영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이소가 물끄러미 주영을 바라보았다.

“7년 전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면 너랑 나는 어땠을까 하는.”

말이 조금 묘했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기에 이소는 한참을 바라보다 조용히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 형을 따라 영국을 갔겠지. 공부를 계속했을 거고, 아마 지금쯤 형 밑에서 비서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고등학생이었던 이소는 그래도 꽤 공부를 하는 축에 속했다. 원하는 대학도 붙었고 학비만 무리 없이 소화한다면 졸업하고 취직 걱정 없이 주영과 함께 회사에 다녔을 것이다. 이제 와 꼬여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수가 제게 온 것도, 이제사 주영과의 오해가 풀린 것도 모두 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이었다.

주영은 가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뭐, 지금도 나쁘진 않아.”

“뭐가?”

“최후의 승자가 된 기분이랄까.”

“형은 가끔 진짜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주영은 그런 이소를 바라보다 고개를 주억거리곤 남은 와인을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꽤 많은 양이었는데 남은 한 병을 모조리 비운 주영이 나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 좀 걸을까.”

기분 좋게 풀어진 얼굴로 바짝 다가온 주영이 속삭였다. 이소는 서둘러 옷을 챙겨 주영을 따라 나왔다.

* * *

2월의 밤공기는 찼지만 추위에 떨 정도는 아니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돈 채 서로의 어깨를 붙인 채 걷던 주영이 문득 이소의 목도리를 다시 가다듬었다.

“나 괜찮아, 대충 매면 돼.”

“있어 봐. 내가 해 주고 싶어.”

아까 나올 때는 분명 꼼꼼하게 잘 맸는데 레스토랑에서 서둘러 나오다 보니 엉망진창으로 묶은 목도리를 주영이 풀어내 다시 매만졌다. 알싸한 향수 냄새가 났다. 어쩐지 독하게 느껴졌다. 온기가 빠져 나간 목덜미로 찬 기운이 스치자 이소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코 끝에 닿은 공기가 축축했다. 비가 오려나, 눈이 오려나.

“커피 사 올게, 단 거 좋아하지.”

“응.”

같이 갈 거냐고 물었지만 이소는 근처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몸을 돌렸다. 한참 시선이 빼앗겨 있자 주영은 피식 웃으며 그럼 혼자 다녀오겠노라며 이소를 두고 카페로 갔다.

주영이 떠난 자리, 이소는 광장의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겨울인데 춥지도 않은지 사람들은 낡은 한복만 입고 원을 만들고 서서 장구와 북을 쳤다.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배우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걸 보고 있으니 이소 역시 조금씩 흥이 나 발끝을 두드렸다.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 공연을 보는 사람들 모두 표정이 밝았다.

어디서 봤더라, 꼭 저렇게 웃는 얼굴을. 아, 맞다. 춘식이 아저씨. 장구를 엄청 잘 치셔서 내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 품바가 뭐예요?’

‘오래된 뮤지컬.’

평상에 기대앉았던 해준은 그렇게 말했다. 오늘 봤던 뮤지컬하고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앉아서 자막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듣기 좋았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즉흥적으로 대사를 하는 배우들의 표정이 생기 있었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봐.”

어느새 다가온 주영이 커피를 건넸다. 달큰한 냄새가 났다. 한입을 마시자 버터 맛이 강했다.

“이거 뭐야?”

“너 좋아하는 거.”

“어, 맛이 조금 다른 것 같아.”

주영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캐러멜 마키아토 같은 건 없길래, 그냥 버터 스카치로 샀어. 싫어? 싫으면 이거 마실래?”

주영이 내민 것은 아메리카노였다.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써서 싫어. 주영은 이소의 곁에 서서 커피를 홀짝였다. 배우가 코앞까지 다가와 노래를 하고 돌아갔다. 주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되게 시끄럽네.”

“형, 혹시 품바라고 알아?”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자주 보러 다니는 주영이기에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왠지 저런 종류의 공연이라면 해수도 같이 웃으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거지들 동냥하는 내용의 길거리 공연이야. 시끄럽고 격 떨어져.”

“재미만 있구만.”

“저런 거 좋아했구나.”

“신나잖아.”

이소가 어깨를 으쓱하며 배우가 재주 넘기 하는 것에 눈을 반짝였다. 저렇게 신기한데 어떻게 흥미를 안 가지나 싶었다. 그런 이소를 바라보며 주영이 한숨을 쉬었다.

“7년이 길긴 길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예전엔 네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다 알았는데 지금은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어.”

“별걸 다.”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이소가 코웃음을 쳤다. 취향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바뀌기 마련이고 달뜬 감정도 마모되기도 하는걸. 주영은 종종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고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이소야, 나는….”

주영의 시선이 이소에게 가 닿았다.

“네가 여기서 있었던 일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했으면 좋겠어. 너랑 나랑, 그리고… 해수랑.”

주영의 손이 살포시 이소의 손 위에 겹쳐졌다.

“우리끼리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방금까지 커피를 들고 있던 주영의 손은 차가운 공기와 달리 따뜻했다. 제 손등을 감싸 쥔 주영의 손을 두어 번 두드린 이소가 눈을 접어 웃었다.

“걱정 마, 나 좋아지고 있어. 형 덕분이야.”

이소는 주영의 손을 슬며시 빼내곤 커피 한 입을 더 마시고 공연에 시선을 돌렸다. 주영은 그런 이소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마시던 커피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우리 이제 가자, 여기 너무 시끄러워.”

“아? 어? 벌써?”

“나 피곤해.”

주영은 이소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주영의 손에 이끌려 몸을 돌렸다. 둥둥 장구 소리가 멀어졌다.

* * *

집에 돌아온 이소는 간만에 오래 걸어서 그런지 피곤이 몰려와 몸부터 씻었다. 머리를 털고 쪼그려 앉아 단출하게 짐을 쌌다. 속옷과 세면도구, 간단한 책을 꼼꼼하게 넣었다. 어느새 꼬물꼬물 다가온 해준의 환영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디 가나 봐.’

“여행.”

이소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이제는 하도 자주 보이니 사라졌다가도 또 나타날 것을 안다.

‘나도 같이 가고 싶다.’

이소는 눈동자를 들어 해준을 한참 바라보았다. 스웨터를 입고 편안한 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채 곁에 앉은 모습에 위화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소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도 아니고 조르기는.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이소 씨.’

해준은 또 속삭였다. 이소는 짐을 꾹꾹 눌러 담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안 돼. 그리고 그만 나타나.”

‘왜.’

“네가 자꾸 나타나니까 내가 미친 것 같잖아.”

‘이소 씨 보고 싶으니까 그렇지.’

“안 된다고 했지.”

‘멀리 가지 말지.’

“아, 진짜! 힘들게 하지 말라고!”

이소가 팩 몸을 틀었다. 해준이 큰 눈을 껌뻑거렸다. 한 대 치면 환영이 사라지려나. 그러나 이소는 주먹을 꼭 쥐었다가 풀며 다시 몸을 돌렸다. 해준의 모습을 한 환영을 때릴 수는 없다. 이소는 트렁크를 요란하게 닫은 후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홱 덮어썼다. 한참 조용했다. 이불을 빼꼼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방 안에는 이소 혼자뿐이었다. 또 사라졌다.

“상처 받았나.”

이런, 미쳤다. 이소는 고작 환영의 마음 따위를 걱정하는 자신의 뺨을 탁탁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건 내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이야. 아마 아까 길거리 공연하는 사람들처럼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혀서 상상하면 해준의 환영은 또 싱긋 웃으며 나타날지도 모른다.

‘화 풀고 나타나라. 나타나.’

그러나 아무리 눈을 감고 애를 써도 해준은 다시 나타나 주지 않았다. 왠지 맥이 빠져 이소는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새로 시작하자. 감정과 의지라는 게 무 자르듯 뚝 잘려 새것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엉긴 미련은 떨어져 나갈 줄을 모르고, 식은 마음은 쉬이 붙지도 않았다. 언젠가 제 마음이 다 식어서 단단해지면 그 악몽 같던 날들도 잊히고 해준의 환영도 사라질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은 행복해질까?

이소는 이불을 끌어모았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밤, 그게 첫 비행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싱숭생숭한 미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아, 목말라….”

어두운 새벽, 이소는 몸을 일으켰다. 갈증이 심했다. 주방에 가서 물을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해수의 방에 들러서 잠자는 해수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나왔다. 푸짐하게도 챙긴 짐을 보며 조금 웃었다. 누가 보면 아예 영국에 살러 가는 줄 알겠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깐 몸을 움직였다고 잠이 홀딱 깨 버렸다. 내일 점심 전에 떠나려면 푹 잠들어야 할 텐데. 멍하게 앉아 있던 이소는 문득 주영이 주었던 노란 봉투가 생각나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가슴이 뛰었다.

‘엄마 아빠 사진.’

봉투를 뜯는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았던 얼굴들인데 이제 와 본다고 부모님 같을까. 안전 비닐로 둘둘 말려 있는 사진들은 열 장 남짓 되었다. 노란 탁상등을 켜고 책상에 기대앉았다. 몇 장의 사진을 제외하곤 거의 사람들 뒤에 가려 엄지손가락만 하게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엄마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를 하고 백부의 뒤에서 웃으며 남편을 바라보는 얼굴에서 빛이 났다.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빠 같았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이소는 어쩐지 웃음과 함께 눈물도 났다.

“와, 이건 진짜.”

다른 사진은 백부의 대학교 졸업사진이었다. 옆에 젊은 아빠가 서 있었다. 둘의 나이 차이는 꽤 나는지 아직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빠가 웃고 있었다. 이소는 잠시 고개를 돌려 책상 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은 느낌에 또 마음이 간질거렸다. 이것 역시 처음 안 사실이었다.

다음 사진은 단독으로 꽤 잘 나왔다. 어느 보육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 사진이었다. 엄마가 아이들의 식판에 밥을 퍼 주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었다. 또 다른 사진 속 아빠는 어떤 아이를 무등 태운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숙인 얼굴 아래로 볼이 통통하게 올라온 것이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보기 좋았다. 엄마 아빠가 이런 일을 하셨었구나.

문득 바람이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손등을 간질였다. 고개를 들자 어두웠던 밤하늘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달이 밝은 날인가, 창문을 닫으려 몸을 일으켰던 이소는 돌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번 겨울 내내 앓아 누워 있느라 제대로 본 적 없던 이소만의 첫 눈이었다.

입자가 굵은 눈이 펄펄 날려 창틀과 지붕에 소복이 쌓였다. 사진을 다 보고 나면 조금 밟고 올까. 바깥을 내다보는 데 정신이 팔려 몇 장의 사진이 바람에 날려 바닥을 구르는 것을 잡지 못했다. 이소는 허리를 숙여 제 발 끝에 채인 마지막 사진을 집어들었다.

사진 속 엄마는 크림색의 플랫 슈즈를 신고 하얀 원피스 차림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여름에 찍은 사진인지 푸른 잔디밭에 선 엄마는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찬찬히 사진을 들여다보던 이소는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이 사진,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사진 속 엄마의 미소는 분명 처음 보는 것이 맞는데 엄마의 등 뒤로 펼쳐진 배경이 썩 눈에 익었다. 사진 아래에 날짜를 보면 제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푸른 잔디밭과 유난히도 파란 하늘, 등 뒤로 보이는 건물 모두가 꼭 언제 본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이건….”

돌연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시선이 멈춘 곳은 엄마의 손목이었다.

색이 알록달록하고 어설프게 감긴 실 팔찌. 아이의 손을 꼭 쥐고 있는 엄마의 손목에 걸려 있는 그 팔찌는 분명 제 기억에 있었다.

‘누구 손을 잡고 있는 거예요? 엄마? 이모?’

‘글쎄, 어머니도 이모도 아닌데.’

이소의 머릿속에 해준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고개를 돌렸지만 해준의 환영은 없었다. 방 안에는 자신뿐이었다.

‘선생님?’

‘음, 첫사랑.’

머리가 어지러웠다. 해준의 환영이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다.

“이게 왜 여기에….”

사진을 다시 봐도 또다시 봐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 해준이었다. 해준의 방에 있던 그 작은 액자 속 여자였다. 반지를 낀 손, 색실로 엮은 팔찌, 그리고 꼭 쥔 아이의 손. 다른 각도와 자세로 찍혀 있기는 했지만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은 분명 엄마와 어린 해준이었다.

이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알고 있었을까? 이것도 알고 있었을까? 둘이 무슨 사이지? 엄마랑 사진을 남겼으면 이 사진을 찍어 준 건 우리 아빠인데. 도대체 이 세 사람은…. 이소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진을 쥔 손이 떨렸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마음이 파도가 치듯 크게 일렁였다.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았다. 어느새 소복이 쌓인 눈으로 거리가 온통 희게 물들었다. 쿵쿵 요동치는 마음은 고무공처럼 제 속을 시끄럽게 했다. 다시 해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소야.’

주먹을 쥔 손이 간지러웠다. 손바닥을 펴자 어느새 꿈에서 보았던 붉은 실이 손가락에 감겨 있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이런 유의 환영까지 보다니. 이소는 손을 털어 냈다. 그러나 실은 바닥에 떨어졌다가도 다시 감겨 오고 또 감겨 왔다. 이소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나 보러 와.’

“아니야.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이소가 고개를 저었다. 미쳐 가고 있다. 이건 분명 미친 거야. 꿈에서 보았던 실까지 보일 줄이야. 해준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요동쳤다.

‘기다릴게. 곧 만나.’

손목에 감겼던 실이 사라락 풀려 방문 아래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이소는 벌컥 문을 열었다. 집은 고요했다. 밤 열두 시,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다. 내일 떠나야 하는데, 이런 미친 짓은 하지 말고 그냥 바로 잠이 들어야 하는데. 이소의 숨소리가 씨근덕거리며 거칠어지고 있었다. 주영이 알면 아마 심각히 생각해 여행도 취소하고 다시 안정제의 복용량을 늘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동심이 요동쳤다.

이소는 방으로 뛰어 들어와 점퍼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에 사진을 구겨 넣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눈발은 훨씬 약해져 있었다. 이소가 바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빠드득 빠득 눈을 밟는 소리가 급했다. 먼 곳에서 들려오던 해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환영(幻影)의 마지막 전언이었다.

‘이소야. 우리 겨울까지 같이 살까.’

문득 등 뒤를 떠미는 바람에서 익숙한 이의 온기가 느껴졌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기다려.”

겨울은 아직 안 끝났어.

이소는 해준과 약속했던 마지막 계절로 달려들었다.

* * *

별장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 번화가로 나오자 오래된 기사식당 앞에 콜을 부른 택시 몇 대가 서 있었다. 이소는 주머니를 뒤졌다.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주영의 카드뿐이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현금으로 돌려줘야지 생각하며 택시에 올라탔다. 눈이 많이 와서 기사가 투덜거렸지만 이소가 간곡히 부탁하자 기사는 구시렁거리며 시동을 걸었다.

새벽의 어둠을 가르고 택시는 한참을 달렸다. 잠도 오지 않았다. 주머니 속 사진을 움켜쥔 채 빠르게 뭉개져 가는 야경에 시선을 던졌다.

‘한 번만, 한 번만 보고 오는 거야.’

익숙한 동네에 다다르자 이소는 몸을 일으켰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이소는 후다닥 정문을 향해 뛰었다. 혹시나 그사이 누군가 돌아와 문이 열려 있을까 봐였다. 그러나 전에 왔을 때와 꼭 같이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후문.”

이소는 바로 발걸음을 돌려 후문을 향해 언덕을 내달렸다. 그 큰 저택을 꼼꼼하게 관리하면서도 해준은 항상 후원으로 가는 쪽문만큼은 종종 열어 두었다. 함께 살지 않았을 때도 이소가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게끔 그 작은 문에 걸쇠를 걸어 두지 않았다. ‘이러다가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면 해준은 ‘뭐 가져갈 것이 있다고.’ 하고 청량한 웃음소리로 아하하 웃어넘겼다.

쪽문의 담장은 힘이 좋은 사람이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턱이 낮았다. 문이 잠겨 있다면 이 담장을 넘어서라도 올라가리라. 이소는 천천히 손을 들어 나무 문을 밀어젖혔다.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힘주어 밀자 삐그덕 소리를 내며 밀린 문에 이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개를 들자 검고 어두운 대나무 숲이 아가리를 벌린 채 이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으….”

이소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빛 한 점 없는 밤 산길에다가, 도착해 봤자 그 큰 한옥에 쥐새끼 한 마리가 없으면 썩 음산하겠지. 그래도 이제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배터리는 충분했다. 이소는 핸드폰 손전등을 작동시키고 침을 삼켰다. 한겨울이고 사유지인지라 산짐승 따위는 없을 테지만 이소는 나뭇가지를 밟는 작은 소리에도 기민하게 귀를 기울이며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서웠어.’

짧은 길이었음에도 숲을 빠져나가는 시간은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끼익-

후원 문이 열렸다. 눈에 덮인 정원은 새벽 달빛을 받아 환한 편이었다. 굵은 눈발은 어느새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 알갱이 같은 눈발만 남았다. 이소는 옷깃을 여몄다. 정신없이 나오느라 잠옷 위에 점퍼만 걸쳤고 맨발에 운동화만 욱여 신고 나왔다. 정원에 제법 쌓인 눈은 운동화 끝에 걸쳐진 복숭아 뼈에 닿았다. 시렸다.

한겨울에 푸른 잎사귀의 정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모습에 이소는 할 말을 잃었다. 노랗게 시든 갈대들과 얼어 버린 연못, 닦는 이가 없어 먼지가 뽀얗게 앉은 대청마루까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인 듯했다.

이소는 마당에 서서 안채를 올려다보았다.

‘이소 씨, 어서 올라와 다과 들어요.’

활짝 열린 창에 걸터앉아 정원을 구경하던 자신에게 손짓하던 해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나비가 날갯짓을 해 안채 창으로 날아들면 해준의 시선이 따라 올라가던 것도, 그 녀석이 이소의 간식에 내려앉아 꿀을 발라 먹으면 훠이훠이 손을 내저으며 쫓아 버리던 것도 코 앞에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그리운 이는 간데없고 불이 꺼지고 문이 닫힌 창문만 애석하게 남아 있었다.

이소는 천천히 행랑채로 내려갔다. 눈이 쌓인 계단에는 사람 발자국이 하나 없었다.

‘이소 님, 내려오시는 길 미끄러우니까 옆에 낙엽 쌓은 길로 내려오시지 않구. 아, 그럼 더 미끄러우려나.’

‘어어, 넘어진다. 앞에 보고 걸어유!’

‘털 장화도 안 신고 내려왔어? 도련님께서 분명 이번 겨울에 이소 님 것으로 하나 장만하라 했을 텐데.’

함께 겨울을 맞은 적도 없는 저를 걱정하는 식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만큼 저택 곳곳에 해준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추억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이소 님, 해수랑 같이 사니 좋아요.’

계단에 쪼그려 앉아 개미들의 행렬을 지켜보던 은찬의 미소도 보이는 것 같다. 이소는 소원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덕 중턱에 자리한 소원탑 안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남은 양초 더미와 오래된 동전들이 즐비했다. 버려진 석탑은 남은 소원 한 장 없이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다.

이소는 행랑채 마당까지 내려왔다. 여전히 고요했다. 열 칸 방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이 하나 없었다.

“실례합니다.”

이소의 목소리가 절간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마냥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소는 마루를 올라가 방 곳곳을 둘러보았다. 살림살이가 없었다. 기본적인 가구와 가전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외 자잘한 집기들은 모두 통째로 사라졌다. 동희 씨 방, 여기는 낙원댁 방, 여기는 일꾼 아저씨들 방, 마지막으로 준경의 방까지 들른 이소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서재로 사용하던 준경의 책상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사람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이 집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전부 꿈이었던 것마냥 깨끗하게 사라졌다. 이 집에 있던 사람들 모두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온전히 믿지 않았다. 고작 저와 있었던 일 때문에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떠난 직후 저택은 거짓말처럼 황폐해졌다. 이소는 목이 메었다.

이소는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계단에 내린 눈을 사박사박 지르밟는 소리가 숲의 고요에 먹혀 들어갔다. 시선을 따라 올라간 계단에는 제가 내려오며 만든 발자국 한 쌍만 남아 있었다. 그마저도 내리는 눈에 덮여 조금씩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먼지처럼 작은 눈발이 뺨을 훑었다.

이소는 붉은 대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린아이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밝았던 길이 구름에 달이 가려지자마자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꼭 제 추억들이 어둠에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소는 대문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단단하고 폭이 넓은 문지방은 하도 밟고 넘어 다녀 붉은 칠이 다 벗겨져 있었다. 이소는 손을 들어 그 거친 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우스웠다. 나뭇결 틈틈이 해준과의 추억이 스며 있었다.

해준은 범같이 큰 덩치를 가졌음에도 걸음걸이가 하늘하늘 사뿐거려, 움직일 때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특히나 제 앞에서는 뒷짐을 지고 걸어가다 문지방을 가볍게 지르밟고 뒤를 돌아 웃곤 했다. 그 모습이 가히 절경이라 이소는 그런 해준의 모습을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수많은 꽃의 군락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외롭고 쓸쓸한 등을 가졌던 이. 이소는 그런 해준의 서글픈 뒷모습까지도 사랑했다. 제게 내미는 고운 손을 주저 없이 잡고 도톰하게 깍지를 낀 채 곁에 서서 정원을 걸었다. 입맞춤을 하지 않아도, 끌어안지 않아도 그것 하나만으로 몹시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소 씨가 놓기 전엔 난 절대로 이소 씨 손 안 놔요.’

색색의 풍선이 하늘을 수놓았던 봄, 해준이 처음 제 손을 잡고 약속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후 무수한 봄을 지나, 찬란한 여름을 건너, 나직한 가을의 품에 뛰어들 때까지 해준은 이소의 손을 단 한 번도 먼저 놓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한 걸음 앞서 걸으며 이소에게 손을 내밀었고, 다가가면 끌어안아 주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몇 번이고 속삭였다. 그때는 그 말이 벅차고 낯간지러워 대꾸하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뒤늦은 미련과 후회에 어린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무너진다.

‘이소 씨는 비누 냄새, 꽃 냄새밖에 안나.’

궁핍하고 가난한 저를 끌어안고 어르고 달래며 언제나 좋은 향이 난다 해 주었다.

‘결혼할까, 이소 씨.’

장난처럼 항상 결혼, 결혼 노래를 불렀다. 남자끼리 할 수 없다고 뺨을 밀어내면 ‘그럼 평생 무릎을 빌려주면 되지. 그리 살면 부부지.’ 하며 웃었다.

이소의 뺨에서 주륵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년 봄이 되면 이소 씨 꽃이 이 정원을 모두 뒤덮을 만큼 아주 많이 날 거야. 그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해준은 정원을 걸으며 싱긋 웃었다. 아직 싹이 트지 않았지만 너를 생각하며 심은 꽃이 잔뜩 날 테니, 그때를 기대하라며 꼭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사는 게 즐거워졌다. 시린 겨울이 지나고 천지가 색으로 물드는 봄이 오면 그때도 해준의 손을 잡고 해수가 뛰노는 것을 바라보며 그렇게 또 시간을 보내야지, 기대했던 시간이었다.

‘힘들면 와서 쉬는 그늘이 되어 주고, 아프면 약이 되어 주면 되지.’

이소는 소리 내어 울었다.

다치고 넘어질 때마다 아이처럼 저를 앉혀 놓고 연고를 발라 주고 밴드를 붙여 주며 뺨을 쓸어내리던 손의 온기를 기억해 냈다. 바람이 불어 정원의 버드나무가 사라락 눈을 털어 냈다. 이소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오지 말걸, 오지 말 걸 그랬어. 허상을 쫓아 무모하게 그의 흔적을 되밟지 말 것을.

알고 있었다.

해준의 환영 같은 것은 모두 핑계라는 걸, 엄마의 사진 같은 것은 모두 구실에 불과하다는 걸. 이 정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절대로 돌이키지 못할 것을 이소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의식이 꾹꾹 눌러 참아내던 그리움은 사방천지 떨어진 추억더미들을 밟는 순간 하늘로 훅 날아올라 수억 개의 꽃잎이 되어 떨어졌다.

해준과 보냈던 모든 시간의 흔적이 꽃잎이 되어 살갗에 닿을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어떤 기억은 간질거렸고 어떤 회상은 먹먹했고 또 어떤 순간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주영에게는 미안했지만 제 방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해준의 환상이 자주 보일 때마다 이소는 이대로 미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이렇게 쭉 제 눈에만 보이면 좋겠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 주지 않고 꼭꼭 감춰 둔 채 제가 보고 싶을 때만 꺼내 보게. 해준이 보이는 채로 평생 미쳐 버리는 것도 좋겠다. 그리 생각했다.

‘아빠, 사랑은 나만 보고 싶은 거야. 아무한테도 안 보여 주고 싶어서 감춰 두는 거야.’

일곱 살 해수의 말이 아프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으흑….”

다 제 잘못이다. 그리 칼에 찔려 피를 분수처럼 흘리면서도 제게 기어와 뺨을 훑고 다친 곳이 없는지를 먼저 살피는 이를 무섭다고 밀어내고 모진 말을 했다. 함께 사는 식솔들을 생각하며 풀꽃을 심는 괴상한 취미를 가졌으면서 정작 쉬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근처를 맴돌기만 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손을 제가 먼저 놓아 버렸다. 감당하기 힘들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던 자신은 해준에게 기다릴 시간조차 주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보고 싶어.”

조각났던 기억들이 제멋대로 엉긴다. 해준이 오열하는 제 어깨를 잡고 애원했다.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절대로 놔주지 않겠다는 무서운 말을 하면서도 젖은 눈으로 저를 애달피 바라보던 해준은 이제 여기 없었다.

“너무 보고 싶어…….”

바람이 불며 대문이 흔들렸다. 찬 바닥에 걸터앉은 엉덩이가 시렸다. 희게 질린 발목을 물어뜯으려 냉기가 답삭답삭 이를 드러냈다. 운동화 위로 올라온 복숭아뼈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소는 무릎에 머리를 파묻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어깨와 등이 바르르 떨렸다.

이소 씨.

바람이 해준의 목소리를 담아 왔다. 해준의 공간에서 듣는 해준의 목소리가 너무 오랜만이라 이소는 코를 훌쩍이며 웃었다.

“으응. 나 왔어.”

이소 씨.

해준의 목소리가 계속 이소의 이름을 불렀다. 응응, 미안, 늦어서 미안. 이소는 바람에 떠밀려 목소리가 사라져 버릴까 봐 연신 대답했다.

뽀득뽀득 눈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이소는 제 팔을 더 깊게 끌어안았다. 그렇게나 어두운데도, 아무도 없는 저택의 한가운데 혼자 있으면서도 무서운 줄을 몰랐다. 이소는 울다가도 어이가 없어 푸흐 웃었다. 정말로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고 까무러쳤을 것이다. 잠옷 차림,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는 꼴이 꼭 그렇다.

그럴 리 없는데 문득 바람에 먹을 갠 벼루 냄새가 났다. 이소는 제 팔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 이제는 기억 속 향까지 꼭 그 사람의 것을 잘도 쫓는다. 쪼그려 있던 이소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스락, 무언가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에 제 소란한 울음소리를 듣고 일찍 겨울잠에서 깨어난 산짐승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그리운 옛 연인의 낯이었다.

* * *

밤하늘을 닮은 먹색 코트에 회색 목도리를 걸친 해준이 계단 아래 서 있었다. 어느새 눈구름이 자리를 비켰는지 달빛이 서슴없이 두 사람이 자리한 곳에 내리쬐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갠 듯 환해졌다.

이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꼭 진짜 같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해준의 환영도 충분히 기꺼웠음에 불구하고 저택에 나타난 모습은 정말로 살아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모습이라 가슴이 선덕선덕 뛰었다. 당장에라도 이리 오라 팔을 벌릴 것 같다. 제 눈 앞에 선 해준은 꼭 그만큼 실재하는 것같이 보였다. 이소는 옅게 미소 지었지만 정작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마주한 해준의 환영은 울고 있는 이소를 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이소는 코를 훌쩍거렸다. 그리 찾아오라 불러 놓고선 어째 말이 없어. 주영의 별장에서도 그렇게 한참 저를 성가시게 해대고는 정작 저택에 나타난 해준의 환영은 그 어떤 말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하리. 이소는 저를 마주 보고 선 해준에게 웃어 주었다. 비록 얼굴은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배시시 웃어 주었다. 억눌러 왔던 감정은 봇물 터지듯 터져 저를 다 보여 주어도 되는 사람 앞에서는 무방비로 흐트러진다.

“웃네.”

해준이 말했다. 아, 교수님 목소리다. 이소는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서 보니까 좋아서.”

“그리 울더니만.”

“내가?”

응. 해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위에 솜솜히 달라붙은 눈송이가 많아지고 있었다.

“꿈속에서 항상 그렇게 등을 돌리고 울었거든. 내가 다가가면 저 멀리 도망을 갔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대문을 기웃거리면서 돌아오곤 했어.”

별장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저택에서 만난 해준의 환영은 조금 더 말을 많이 했다. 저도 환영 따위에 불과하면서 자신의 꿈에 이소가 그렇게 자주 나왔다고 말했다. 이소는 그저 맞장구를 쳤다. 그랬어? 내가 그렇게 교수님 꿈에 많이 나왔어? 묻자 해준의 모습을 한 이는 그렇다 말했다.

“그래서 하루 이틀, 붙잡고 같이 울기도 하고 달래기를 수일… 아, 이이가 얼마나 내가 무섭고 싫으면 이리 꿈에서도 매일 울까 싶어 놓아주기로 했지. 그렇게 몽중에 우는 너를 이제 다신 오지 말라며 대문 밖으로 밀어냈었는데.”

해준도 많이 힘들었을 테다. 이소의 꿈에 나온 해준 역시 서럽게도 울었다. 그 꿈을 생각하며 이소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랬는데. 해준은 입술을 달싹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꿈이 아니라 해가 뜬 날에도 자꾸 네가 내 일상을 헤집고 들쑤셔 어지럽게 만들기 시작했어.”

해준이 계단을 한 걸음 올라왔다. 사박 눈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이것마저 환청일까.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날은 형상은 간데없고, 형상이 보이던 날은 말은 못 하고 주위만 맴돌고.”

해준이 또 한 계단을 올라왔다. 해준의 향취가 점점 강해졌다. 이소는 연신 눈을 깜빡였다.

“이제는 제법 사람 모습을 하고 내 주변에 남아 있은 지가 두어 달이 넘었지 아마.”

해준의 환영이 제 앞에 나타난 게 한 달 남짓, 해준은 이소보다 조금 더 먼저 연인의 모습을 쫓기 시작했었나 보다. 이소의 코앞에 해준의 얼굴을 한 이가 바짝 다가섰다.

“물론 장난이 심해 진짜 네가 아닌 줄은 일찍이 알았지만, 그것 또한 기꺼워 그냥 두었지.”

이소의 모습을 한 녀석은 해준의 안채를 들쑤시고 다녔다. 평소 얌전하고 쓴 물건은 모두 제자리에 놓는 단정한 성격의 이소와 달리 그 환영은 가는 곳마다 사고를 쳤더랬다.

“무슨 장난을 쳤어?”

“하루는 벼루에 간 먹을 모조리 엎어 놓고는 모르는 척 정원의 꽃을 구경하다 걸리고.”

“아하하.”

“잠깐 눈을 떼면 버드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그네를 타기도 하고. 그때는 진짜가 아닌 줄 알면서도 다칠까 봐 얼마나 조바심이 나던지.”

분명 책망을 하는 것인데도, 환상이 아닌 진짜의 목소리는 온기를 담고 있어 들을 때마다 차갑게 언 몸이 녹는 것 같다. 이제는 가까이 다가온 해준이 제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해준은 천천히 목도리를 풀어내며 말을 이었다.

“책을 읽을 때면 곁에 앉아 못 보게 손으로 글자를 가리고. 조반을 차려 놓으면 언제 나타났는지 배가 고프니 어서 와 앉으라며 심하게 보채고.”

해준의 곁에 남은 저는 꼭 그리 아이처럼 굴었구나. 해준이 꽁꽁 언 이소의 목에 천천히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해준의 숨 냄새와 겨울의 공기가 미묘하게 섞여 볼을 녹였다. 언뜻 스치는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왜 따뜻하지. 문득 해준이 걸어온 계단 아래에 시선을 던진 이소의 눈동자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눈 계단을 걸어 올라온 발자국이 두 쌍이었다.

이제는 눈이 조금 쌓여 희미하게 옅어진 제 발자국 옆으로 방금 찍힌 해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어쩌면 환영 따위가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목이 아프고 눈자위가 시큰해지기 시작했다.

해준은 말없이 매듭을 묶어 내곤 이소와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알아채지 못한 듯 덤덤한 어조였다.

“특히나 잠을 잘 땐 꼭 나와 같이 자겠다고 그렇게 품을 파고들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지.”

“…….”

“재워 주지 않으면 잠을 자질 않아서.”

밤마다 같이 잠들었구나. 어쩌면 해준은 그런 이소를 밀어내지 않고 기꺼이 품을 내주었을 것이다. 반가이 여기며 환영이라도 좋으니 가슴을 토닥이며 잘 자거라, 좋은 꿈을 꾸거라 하였을 것이다. 이소의 눈에서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투둑 하고 떨어져 흘러내렸다.

해준이 이소의 머리를 썩썩 쓰다듬었다. 정수리에 닿는 온기가 뜨끈했다.

“한동안 울지 않아 이제는 잘 살고 있나 보다 했는데, 오늘은 왜 들어오질 않고 대문 앞에서 울고 있어.”

윤주영이가 속상하게 해? 아니면…. 또 나 때문에 많이 아파? 그럼 또 미안해.

질책이 아닌 다정한 어조였다. 해준이 고개를 기울이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소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차가운 손가락이 뺨을 훑어 물기를 닦아 냈다. 이소의 입꼬리가 사정없이 내려갔다. 해준이 웃으며 ‘못난이 됐네.’ 하고 놀렸다. 이소는 으흐엉, 흐어엉 소리내어 울었다.

“이소야.”

“으흑, 흑….”

“들여다보고 싶고 만지고 싶어도 참고 기다릴 걸 그랬지. 왜 너만 보면 자꾸 어린아이처럼 밑도 끝도 없이 욕심이 나는건지… 한두 번 무시하다 보니 또 나는 제멋대로 너를 휘두르고 가두려 하고… 분명 내 성정에 큰 문제가 있어.”

해준은 쓰게 미소 지었다. 주변인들이 모두 말릴 때는 들리지 않았다. 제가 이소에게 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그를 위한 일인 줄만 알았다. 그럼 고마워하며 제게 눈웃음을 치며 안겨 올 줄 알았다. 오만이었다.

“지금도 당장 우는 너를 끌어안고 샅을 부비고 싶을 뿐인 내 지독한 광증을 알면, 넌 또 도망을 갈 테지.”

해준의 손가락이 이소의 턱 끝을 살살 쓸었다. 시린 기온에 얼어 버린 손 끝이 찼다. 이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 집을 벗어나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돌아오자마자 네가 보이는 걸 보니 역시 나는 이미 미쳐 있구나.”

나직이 읊조린 말에 으흑 하고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해준은 환영이라고 말하며 참 정성스럽게도 이소의 뺨을 닦아 내고 또 닦아 냈다. 그러나 전처럼 끌어안지도 않았고 입을 맞추지도 않았다. 그게 뭐라고 서운하고 섭섭했다. 서러움에 휘몰아치는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아흐흑, 흐윽… 아니야, 그게 아니고-”

“그래도 이젠 날이 차니 꽃 피는 봄에 다시 오렴. 오늘 여긴 잠시 들른 것뿐이니.”

그렇게 말한 해준이 몸을 일으켰다. 미련 없이 떨어지는 눈동자에 이소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잡을 새도 없이 대문을 밀고 들어간 해준을 향해 이소가 몸을 돌렸다. 그러나 내내 쪼그려 앉아 있던 탓인지 다리에 힘이 풀리며 앞으로 털썩 고꾸라졌다. 차가운 눈바닥에 해준이 둘러 준 목도리 끝이 살짝 쓸리며 눈송이가 얼기설기 달라붙었다. 그것마저도 실재의 증거였다. 이소는 울먹이며 고개를 돌렸다. 정원 안쪽으로 사라져 가는 해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교수님….”

우느라 잠긴 목소리는 젖은 채 바닥에 떨어졌다.

턱이 높은 대문을 넘어 흙을 밟고 내달렸다. 자신이 만든 환상 따위가 아니다. 허무맹랑한 꿈이 아니다. 해준은 자신이 미쳤다고 말했지만 이소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해준에 대한 미련과 연정의 찌꺼기로 만든 허상으로 연인의 빈자리를 그럴싸하게 위로하곤 했다.

해준이 아무렇지 않게 제 얼굴을 매만지며 말을 걸었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나보다 더 깊이 그리워하고 더 많이 아파했구나. 고작 몇 번 본 것만으로도 흠칫 놀라는 저에 비해 해준은 너무나도 덤덤하고 자연스러웠기에, 그게 저를 잊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알기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가지 마… 가지 마요….”

다시 한번 불렀다. 그러나 해준은 계속 걸었다.

못 들었을 리 없다. 이소는 눈 덮인 정자를 지나 정원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병원을 전전하며 더할 나위 없이 약해진 체력 때문에 고작 대문을 넘어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끝까지 찼다.

“가지 마…… 가지 말라고!”

이소의 목소리가 적막한 정원에 울려 퍼졌다. 해준이 걸음을 멈췄다. 눈이 펄펄 날리는 재회의 밤, 땅을 지르밟는 소리가 다급했다.

이소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등을 돌린 연인에게 주저 없이 달려들었다. 포근하고 넓은 품, 단정하고 깨끗한 냄새가 나는 살갗, 이소는 체면도 자존심도 모두 내려놓은 채 해준의 등을 끌어안고 울음을 토했다.

“저예요….”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저라구요….”

“…….”

“환각 같은 거 아니에요, 저 진짜 이소에요… 저 왔어요….”

정말 해준이었다. 잡으면 사라지거나 부르면 없어지는 그런 환상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안을 수 있는 진짜 차해준이었다. 이마를 맞댄 등에서 두근두근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팔을 놓으면 그대로 사라져 버릴까 봐 이소는 해준의 허리를 으스러질 듯이 끌어안았다.

울음이 섞인 어깨가 들썩였다.

“제가 밉고, 서운하실 거 알아요. 기억도 추억도 다 잊어버리고 바보가 되어 버려서, 정 다 떨어졌는데 마음을 바꾸고 갑자기 찾아와서…. 질리고 싫으실 것도 알아요…. 관계를 끝낸 건 저라고 밀어내도… 여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씀하셔도, 할 말 없는거 알아요. 그런데요… 그런데, 교수님… 죄송해요. 제가… 제가 아직도….”

눈물이 후두둑 뺨을 타고 내렸다. 아이처럼 흑 하고 울음이 터진다.

“좋아해요.”

내내 혼자서만 읊조리던 말이 주인을 찾아간다.

“정말로 많이….”

“…….”

“사랑하고 있어요.”

구질구질한 고백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소의 몸이 휘청였다. 휘어지는 허리를 단단한 팔목으로 붙잡은 해준이 젖은 뺨을 붙잡고 깊게 입술을 포갰다. 제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라 입을 맞출 때마다 짠맛이 섞여 들어갔다. 서로의 입술을 머금고 더운 숨이 오갈 때마다 빈틈없이 몸이 답싹 안겨들었다.

아주 느린 키스였다. 내린 눈송이들이 달뜬 피부에 내려앉을 때마다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두 사람의 코끝과 입술에 솜솜 내려앉으며 겨울의 맛을 알게 했다. 올해 겨울은 차갑고도 달았고 따뜻하면서 썼다.

“흣….”

입술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해준이 이소의 허리를 잡고 안아 올렸다. 이소 역시 다리를 들어 해준의 허리에 감아올렸다. 흙이 묻은 이소의 운동화가 해준의 코트를 더럽혔고, 얇은 잠옷 바지가 끌려 올라가며 가느다란 발목이 드러났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다시는 없는 순간인 것처럼 숨을 나누고 혀를 섞으며 더 깊이 교감했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고 이소는 해준의 뺨을 붙잡고 천천히 눈을 떴다. 단단한 팔로 저를 안아 올린 해준을 내려다봤다. 다시 보아도 진짜 해준이었다. 저만큼이나 잘 우는 사내는 오늘도 역시 잔뜩 젖은 눈을 하고 뺨을 훑어 내린다. 그마저도 그리던 순간이었다.

해준의 입술이 조용히 열리며 소담히 말려 올라갔다.

“정말 이소네.”

입술이 떨어지고 눈이 마주치고 나면 울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이소는 다시 한번 해준의 낯을 마주하고 입술을 우그러뜨렸다. 얼마 만에 다시 보는지 모를 다정한 연인의 얼굴은 마치 단 한 번도 원망이나 미움 따위는 없었다는 듯 한결같았다.

“나의 이소가 왔어.”

조용히 읊조린 해준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다부진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해준을 내려다보던 이소 역시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왔어요.”

그 말에 해준이 웃으며 다시 한번 입술을 포갰다. 고요히 쌓여 가는 눈처럼 할 말은 수많았지만 그저 지금은 서로의 체취를 맡고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굴었다. 그렇게 겨울의 정원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다시 연인이 되었다. 봄을 맞고 여름을 지나 가을을 건너, 결국 또다시 이소는 해준의 계절 안에서 살기로 했다.

* * *

해준이 이소를 안은 채 미간을 찌푸렸다. 이소는 얼굴이 벌게졌다. 침대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안채와 달리 별채의 이소 방은 모든 집기가 그대로 있었다. 마치 아주 잠시 외출한 사람의 방 같았다.

“둘이 눕긴 좁은데.”

여기 들어와 해준과 입을 맞춘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저는 해준의 품에 아기마냥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이소는 더욱더 해준을 꼭 끌어안았다. 이소의 뺨이 해준의 코에 답싹 달라붙자 해준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코를 부볐다. 간지러워 아하학 하고 웃었다.

“전 지금도 좋아요.”

이소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포근하고 향긋한 냄새, 이소는 해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주영의 걱정과 염려도, 해수의 원망도 잠시 내려 두고 그저 차해준의 연인 윤이소로 있고 싶었다. 해준은 매달린 이소를 토닥이며 침대 시트를 걷어 냈다. 그리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난 아냐. 백 일 동안 독수공방했거든.”

이소는 해준이 하는 짓을 보고 까르르 웃었다.

차게 식은 발목이 아직도 발갰다. 해준은 침대에 이소를 걸터앉게 한 후 이소의 발목을 감싸 쥐었다. 해준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천천히 살갗을 타고 올라와 종래에는 손끝까지 녹이는 듯했다.

“날이 찬데 맨발로 오고.”

“급해서….”

해준이 피식 웃었다.

“내가 오늘 여기 안 왔으면 어쩌려고.”

그러게. 해준이 말을 하고나서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이소는 볼을 붉혔다.

“그건 생각 안 해 봤어요.”

“대책 없는 건 여전하네.”

해준의 말에 이소가 토라진 듯 발에 힘을 주어 해준을 밀었다. 해준이 웃으며 발목을 잡은 채 뺨을 부볐다. 차게 식은 발등이 해준의 더운 뺨에 닿자 이소는 움찔 떨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은 잊어버리고, 혹시 아직도 무섭다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해준이 따뜻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많이 아팠고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었다. 이소는 눈을 깜빡이다 수줍게 웃었다.

“…괜찮아요. 천천히만 하면….”

이소가 쑥쓰러운 듯 시선을 내리자 이내 따뜻한 입술이 발등에 쪽 하고 내려앉았다. 이소가 흠칫 놀랐다.

“더러운데.”

“한 번도 그리 생각한 적 없어.”

통이 크고 얇은 잠옷 안으로 해준의 손이 기어 들어왔다. 눈에 젖어 속이 비치는 옷감 아래로 해준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었다. 이소가 뒤로 몸을 물렸다. 차라리 벗기면 될 것을 해준은 굳이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살살 사타구니 근처를 간질이고 오금 뒤를 문질러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소의 몸이 점점 뒤로 기울다 종래에는 완전히 침대에 파묻혀 버렸다. 동시에 해준이 허벅지를 잡아 올린 후 고개를 푹 숙였다.

“아……!”

해준은 굳이 바지를 벗기지도 않고 다리 사이에 코를 묻은 채 얼굴을 부볐다. 입을 벌려 한 움큼 베어 물기도 하고 길을 뚫듯이 진득하게 얼굴을 파고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소는 해준의 머리를 잡고 벌벌 떨었다. 간지러우면서도 자극이 강했다.

“바, 바지는…… 읏, 바지는 차라리 벗고….”

“네 샅에서 겨울바람 냄새가 나.”

해준이 웃으며 옷감 위를 덥썩 물었다.

“아흑…!”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은 해준은 이소의 양쪽 무릎을 잡고 활짝 벌렸다. 바깥으로 단단히 고정된 다리는 아무리 힘을 주어 오므리려 해도 되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이내 해준이 고르고 흰 이를 세워 이소의 것을 가볍게 물었다 놓기를 여러 번, 잘근잘근 깨무는 듯했다가 곧 턱을 크게 벌려 음낭과 성기를 한꺼번에 입에 담았다.

“물지 마……! 물지 마요……! 입에 넣지 마…!”

넓게 벌어진 다리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애꿎은 허리만 퉁퉁 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마다 해준의 얼굴에 부딪히는 제 샅이 원망스러웠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도 꼭 더 핥고 물어 달라는 듯 조르는 꼴이었다.

“이소야, 벌써 다 젖었다.”

한참을 깨무는 행위에 열중하던 해준이 이번에는 한 손으로 바지를 잡고 휙 벗겨 내렸다. 성급하게 끌러 내린 바지가 발목에서 간당간당 매달렸다. 해준은 곧바로 혀를 빼어 이소의 것을 입에 담았다.

“힉!”

냉골처럼 찬 뺨과 달리 해준의 입 안이 미치도록 더웠다. 이소가 새된 신음을 뱉었다. 이제 막 고개를 들기 시작한 성기가 무섭게 크기를 키웠다. 볼에 꽉 찰 정도로 빳빳해진 성기를 문 채 해준은 정성스럽게 핥고 빨았다. 체모가 하나 없는 성기에서 고급스러운 바디 로션 냄새가 났다.

해준은 이것마저도 모두 주영이 준 것이라 생각하니 미치도록 질투가 들끓었다. 모두 핥아 제 타액으로 범벅을 해 놓더라도 이 향만은 없애 버리고 싶었다. 볼이 얼얼해질 정도로 빨고 또 빨았다. 이소가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으응, 교수님…. 그만, 그마안…. 너무, 세요… 너무, 세단 말…이에, 흣-”

깊이 빨아들여 쪼옵 하고 떨어지자 이소가 입술을 벌리고 몸을 떨었다. 사정 직전이었다. 빳빳하게 선 성기가 탁액을 내보내지 못한 채 꺼떡거렸다.

“아직 모자라죠?”

“…흐, 흐읏….”

이소는 말없이 끄덕거렸다. 해준이 몸을 일으켜 커다란 패딩에서 이소를 꺼내듯이 위로 안아 올렸다. 침대 한가운데 내려놓은 채 이소의 발목을 잡아 올렸다. 이소의 몸이 둥글게 말렸다. 해준의 어깨에 한쪽 다리를 걸치자 가감없이 헐벗은 아래가 드러났다.

입술이 또다시 겹쳐졌다. 그동안 미뤄 두었던 키스를 한꺼번에 받아 내려는 듯 해준의 혀가 이소의 안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이소 씨는 다 잊어버렸다고 했는데.”

해준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손가락 두 개가 이소의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소는 혀를 내어 정성스럽게도 핥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질척한 타액으로 적시고 고개를 돌려 쭉 내어 뺐다.

“어째 전보다 더 잘할까.”

해준은 초점 없는 눈으로 이소의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미끈한 회음부 아래가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주륵주륵 단단한 성기에서 새어 나온 쿠퍼액이 손을 흠뻑 적시고 흘러내렸다. 해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리 물이 많은 것도 특이 체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해준의 손가락이 입구를 꾹꾹 더듬다가 쑤욱 파고들었다. 따뜻한 내벽이 허겁지겁 손가락을 잡아먹었다.

“읏, 으응….”

이소의 발가락이 안으로 곱으며 즈윽즈윽 시트를 밀어냈다. 헤어지고 난 뒤 한 번도 아래쪽을 건드린 적조차 없어 감각이 예민했다. 해준의 손가락이 들쑤시는 곳보다 손마디 아래의 판판한 손바닥이 회음부를 탁탁 쳐올리는 느낌이 자극적이었다. 손바닥이 얼얼하게 맞부딪힐 때마다 배 속이 웅웅 울렸다. 해준이 이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아픈 걸 좋아하진 않았잖아.”

“앗, 아읏- 흑!”

“그새 취향이 바뀌었나.”

해준이 손가락을 구부려 구멍을 긁어내리면서도 바짝 편 손바닥으로 성기 아래 매끈한 부분을 찰싹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끈적끈적한 탁액이 손바닥과 고환에 엉겨 붙으며 쩌덕쩌덕 난잡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얼마나 세게 부딪히는지 구멍 주변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데도 싫다거나 안 된다는 소리 한 번이 나오질 않았다. 오히려 배 속이 간질거렸다. 이소는 무의식중에 버둥거렸다.

“아, 아아, 하윽, …으읍!”

“입술 물지 마요.”

해준이 이소의 한쪽 허벅지를 내리눌러 가슴에 가 붙였다. 압박감에 숨이 막히자 파하 하고 입술이 열렸다. 다리 한쪽은 해준의 어깨에, 한쪽은 접어 누른 상태로 해준의 손에 구멍이 거칠게 쑤셔졌다.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교수님, 저 가요, 갈 것 같아요. 시트를 쥐고 머리를 쿵쿵 찧던 이소가 이내 허리에 바짝 힘을 주고 구멍을 조였다. 제가 싼 탁액이 코와 얼굴에 푹푹 쏟아져 내렸다. 해준의 시선은 정액이 난잡하게 엉긴 이소의 얼굴을 진득하게 훑어 내려갔다.

“숨 고르고 있어요.”

해준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이소는 파르르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준이 옷을 벗어 내렸다. 그러나 해준의 몸을 목도한 이소는 흥분도 잊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

흔한 흠집도, 문신도 없이 깨끗했던 몸에, 촘촘하게 짜인 근육과 터럭 하나 없이 완벽했던 해준의 몸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흉터가 가득했다. 팔과 어깨, 가슴과 복부… 장골을 지나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모든 부위를 찌르고 벤 잔인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완전히 낫기까지 몇 개월은 걸렸을 텐데, 이 몸을 하고 그렇게 저를 찾아다니며 마음의 병까지 얻었었다. 이소의 눈이 죄스러움으로 푹 젖었다.

“……어떡해. 이거 어떡해요….”

“거의 다 나았어요. 괜찮아.”

그러나 이소는 해준을 끌어안은 채 뚝뚝 울었다. 너무 미안해서, 자신 때문에 이렇게까지 망가진 해준이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끌어안은 등 위로 또 다른 흉터가 만져지자 이소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어디를 더듬어도, 어느 곳을 만져도 모두 지옥 같던 그 날이 새겨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

해준은 자신을 끌어안은 이소의 머리통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괜찮아, 네가 살았잖아. 네가 무사했잖아. 그럼 된 거지. 그 말에 이소는 더 크게 울었다. 오히려 이소가 더 크게 울자 해준은 바람이 빠지듯 웃어 버렸다. 살아 있는 게 실감이 났다. 제 품 안에서 훌쩍이는 이소가 몸을 더듬으며 호흡할 때마다 꿈이 아니라 진짜로구나, 내가 진짜 이소를 만났구나 하며 위안했다. 정작 제 연인은 너무 심각해서 정사를 나누는 중인 것도 잊고 흐느끼고 있었지만. 해준이 고개를 내렸다.

“윤이소.”

“흐윽…….”

“이소.”

“흐으…….”

“대답해야지.”

“으응, 네…. 듣고, 있…어요….”

해준이 아주 오래전과 같이 이마를 맞대고 천천히 문질렀다.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고 천천히 속삭였다.

“괜찮아. 오히려 이 흉터 때문에 잊지 않을 수 있었어.”

“…….”

“내가 네게 했던 잘못과 과오…. 다시는 번복하는 일이 없어야겠지. 다시는 너를 옭아매지 않아야 할 거고…. 자유롭게…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이소 네가 싫다면 하지 않을 거고….”

해준은 제 흉터를 더듬는 이소의 손을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푹 젖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오랫동안 해 주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오로지 이소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둘 거야. 이 상처들은…, 내가 네게 주는 약속이야.”

이소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난…, 이제 정말 괜찮아. …이소가 다시 왔으니까.”

이소는 팔을 들어 해준을 꼭 끌어안았다. 아직도 따뜻하게 젖어 있는 뺨과 떨리는 입술을 숨길 수 없었지만 한결 진정된 호흡으로 해준의 귓가에 느리게 속삭였다.

“죽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

“절 놓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해준만 다친 것이 아닌데도 이소는 꼭꼭 울음을 삼키며 무거운 제 사랑을 뱉어 냈다.

“정말로, 정말로 많이 사랑해요. 제가 정말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해준의 입술이 포개졌다. 눈물이 섞인 키스 맛은 달콤하지만은 않았지만,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달라붙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맞대고 혀를 섞고 싶었다. 호흡을 나누고 교감하며 사랑한다 속삭이고 싶었다. 뺨을 훑으며 젖은 자국을 닦아 내고 속눈썹에 그렁그렁 매달려 있던 남은 눈물방울도 모조리 훔쳐 냈다.

이소가 해준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입을 맞추고 호흡을 나눌수록 점점 더 갈급해졌다. 더 많이 이어져 있고 싶다, 더 깊게 파고들고 싶다는 욕구가 커지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천천히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게 되자 깊은 열락이 들끓는다.

“자기야.”

부드럽게 사랑을 담아 부르는 애칭에 이소의 달뜬 눈동자가 돌아온다. 해준은 그렇게 몇 번을 더 ‘자기야, 이소야, 이소 씨.’ 하며 이마를 부비작댔다.

“으응.”

“다 울었으면 마저 해야지.”

이제는 완전히 눈물이 말라 버린 이소가 해준의 뺨을 붙잡고 빤히 바라보자 마치 신호라도 된 듯 해준이 입술을 쪽 하고 가볍게 붙였다 뗐다. 애절한 감정은 갈무리하고 더 깊게 이어질 차례였다.

곧 몸을 떨어뜨리고 오금을 잡은 해준이 제 쪽으로 이소를 주욱 끌어당겼다. 이소는 몸에 힘을 빼고 끌려 내려갔다. 정해진 수순이었다. 해준은 자신의 허벅지 뒤로 이소의 다리를 넘기고 자리를 잡았다.

“흣…….”

해준이 허리를 숙이고 가슴을 그러쥔 채 한참 빨았다. 판판한 유두가 봉곳하게 솟아오를 때까지 해준은 젖도 나오지 않는 가슴을 맛있다는 듯 핥고 빨았다. 몸이 이상했다. 해준이 닿는 곳곳마다 열이 나서 묽은 정액이 찔금찔금 샜다. 중추신경에 자극이 너무 세서 아래가 고장 나 버린 걸까. 이소는 민망하고 힘들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자꾸 나오는 걸 참을 수도 없었다.

양쪽 유두가 퉁퉁 불어 댈 때까지 해준은 씹고 빨았다. 한쪽을 다 빨고 나면 한쪽을 꼬집으며 잡아당겼다. 해준의 머리카락에 손을 얽고 이소는 버둥거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도 해준이 한 번씩 허리를 쳐올리면 맞닿은 성기가 배에 비벼졌다. 넣지도 않았는데 닿는 것만으로도 못 견디게 좋았다.

“으…, 으응….”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제 샅을 해준의 기둥에 비비며 몸을 틀었다. 음낭 아래가 잔뜩 예민해져 누르고 비비기만 해도 또 성기가 빳빳해졌다. 너무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아니면 해준을 만나 애가 닳아 그런가. 이소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무안할 정도로 매달리고 있었다.

가슴까지 온통 해준의 타액으로 젖어갈 때 즈음 해준이 몸을 일으켰다.

“헤어지고 나서 혼자 한 적 있어요?”

이소는 눈을 들어 올렸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해준에게까지 들렸다. 두툼한 끝이 좁은 구멍 근처를 매끄럽게 문질렀다.

“응? 내 생각 하면서 한 적 있어?”

있었다. 해준의 환영이 보이고 난 후 이소는 주영의 눈을 피해 침대와 욕실에서 해준을 생각하며 자위했다. 해준이 앞을 만져 주는 상상, 저를 안고 뒤를 쑤셔 주는 상상, 온몸을 거칠게 물어뜯는 상상을 하며 아래를 문지르곤 했다.

이소가 말을 않고 시선을 피하자 구멍 주변을 훑어내리던 귀두가 돌연 푹 찔러 들어왔다 다시 뒤로 물러 나갔다. 바짝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추자 해준이 되물었다. 왜 또 말이 없어졌어, 이소야.

“환영 같은 거 말고…. 진짜 나랑 하고 싶진 않았어?”

“그건….”

“난 항상 진짜 이소와…, 이러고 싶었는데.”

부정할 수 없다. 베개를 뜯고 바닥을 기고 해준의 몸에 매달려 정신없이 흔들리고 싶었다. 고작 백 일을 떨어져 있었던 것뿐인데 마치 처음 해준에게 안겼었던 때처럼 몸이 달고 심장이 요동쳤다. 연신 눈이 깜박였다. 해준이 더 이상 참기 힘든 것 같은 낮은 신음과 함께 귓가에서 이소의 이름을 불렀다.

“이소야.”

“으응, 네, 네에.”

“말해 줘야지….”

해준의 좆이 구멍 끝을 아주 조금씩 들어올 듯 말듯 문질렀다. 성급히 들어오지 않고 슬슬 입구를 문지르기만 하는데도 근육이 움찔움찔 떨렸다.

“이젠 진짜 이소 말 잘 들을 건데….”

“…….”

“싫다면 하지 않을 거고, 멈추라면 멈출 건데….”

응? 어떻게 할까. 해준은 이소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고 부비적댔다. 다리를 벌리고 졸라야 하는 사람이 누군데 꼭 해준이 부탁하고 애원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소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긴 숨을 내뱉었다.

“울어도…….”

이소는 흐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응, 울어도.”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말하고 나면 내가 원하는 것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더구나 들어주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소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멈추지 마세요….”

섹스할 때 우는 건 습관이었다. 너무 좋으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났다. 하지만 해준이 그때마다 멈춘다면 아예 시작도 못 할 것이다. 지금도 벌써부터 아래가 간지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그럴게.”

해준이 미소 지으며 발그스름하게 붉어진 이소의 뺨에 입술을 포갰다. 기대감에 또 한 번 배 속이 간지러웠다.

해준은 이소의 작은 손을 들어 홉 붙은 배 위에 올려 두었다. 단단한 귀두가 구멍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 천천히 할 거야.”

땀이 식어 가며 차가워진 손등을 따뜻한 손바닥이 감싸 쥐었다. 해준의 손가락이 배꼽 언저리를 지그시 눌렀다.

“여기까지 들어갈 거고….”

해준은 나직하게 숨을 뱉으며 허리를 꾹 밀기 시작했다.

“아…… 읏.”

좁게 오므려 있던 입구가 귀두를 감싸며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각오하고 있었지만 긴장감에 할딱할딱 숨이 넘어갔다. 두꺼운 귀두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기둥이 쑤욱 밀고 들어온다.

“자, 잠까, 잠깐마…안!”

“조금도 남김없이 모두 다 넣을 거예요.”

여지없이 이소가 손톱을 세워 허우적댔다. 끝을 모르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성기는 구물구물거리며 내벽을 파고든다. 손가락으로 닿았던 지점은 가볍게 뭉개고 장골 근처 이소의 성기가 빳빳하게 선 지점까지도 지나친다. 해준이 벌벌 떠는 허벅지를 꽉 잡아 눌렀다. 벌어진 입으로 신음이 터진다.

“아, 아……!”

둔부가 조여들며 눈물이 났다. 어디까지 닿는 거지, 정말로 배 끝까지 들어오는 걸까. 배 속까지 좆이 꽉 차자 목구멍 끝에 숨이 매달렸다. 부드러운 체모가 구멍 끝에 간질거리며 닿는 느낌까지 선연했다. 이소가 몸을 떨었다. 해준의 웃음이 연결된 몸을 타고 진동했다.

“다 들어갔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숨을 쉴 때마다 조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이소가 손을 들어 배를 더듬었다. 배꼽 아래 단단한 기둥 같은 것이 만져졌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준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기둥이 살짝 빠지자 이소의 성기가 까딱거리며 반응했다.

“조금만 참지, 또 금세 가 버리려고.”

“아니, 아니에요.”

“천천히 한다니까.”

해준이 무게를 실어 이소를 완전히 끌어안았다. 겹쳐진 두 사람의 몸이 완전하게 맞물렸다. 이소는 팔을 들어 해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지만 해준의 배 위로 비벼지는 제 성기가 제멋대로 젖고 있었다. 민망했다. 해준이 큭큭 웃을 때마다 이소는 눈을 꼭 감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내 해준의 성기가 주윽 빠져나갔다. 바짝 긴장한 상태였던 내벽이 딸려 나가는 대로 성기를 붙잡는다.

“아……!”

그리고 다시 꾸욱꾸욱 밀려 들어왔다. 더 깊이도, 더 얕게도 아닌 처음 들어왔던 만큼 꼭 그만치 파고들었다. 해준이 다시 한번 허리를 물렸다. 맞붙었던 아래가 살짝 떨어졌다가 다시 후욱 쑤시고 들어왔다. 다시 즈윽 나갔다 찌걱, 천천히 빠져나갔다가 지걱, 그렇게 몇 번을 질걱질걱 땀에 전 아래가 연신 부딪혔다. 이소의 입에서 목이 막힌 신음이 터져 나갔다.

“아, 아으흣! …교! 교수니임…! 윽, 으응…! 앗!”

속도는 느렸지만 빠져나가도 들어올 때마다 치받는 힘이 너무 세서 온몸이 울렸다. 해준이 아래를 쑤실 때마다 또다시 푹푹 흰 탁액이 배를 적셨다. 손톱이 하얘지도록 어깨를 쥐어뜯었다.

“으흑, 아! 세, 세에…!”

이소가 고개를 젖혔다. 수십 번 같은 자리를 찧고 누를 때마다 쾌락에 머리가 날아갈 것 같다. 입 안으로 가득 찬 타액이 주저 없이 흘러내렸다. 조르고 또 졸랐다.

“아흐, 흐읏, 조, 좋아…. 교, …수님, 좋아-, 좋, 으응…!”

“나도 좋아해. 많이 사랑하고.”

성기를 서로에게 꼭 물린 채 간지럽고 자극적인 부위를 연신 긁어내리고 비비는 행위만으로도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효율적인가. 이소는 다리를 들어 해준의 허리를 감아올렸다. 깊이, 더 깊이 들어오기를 바랐다. 그에 답하는 것인지 해준이 허리를 훅 빼고 체중을 실어 찍어 내렸다.

“……아! 하으……윽!”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지르며 이소가 해준의 등을 긁어내렸다. 손톱을 세우지 않으려 했지만 땀에 젖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갔다. 해준이 구멍을 콱콱 쑤셔 내려 박을 때마다 몸이 무의식중에 도망가려 했지만 이내 덥썩 잡혀 작살에 찍힌 물고기처럼 잡혀 퍼덕거렸다. 해준이 가슴을 떼고 아래만 붙인 채 이소의 허리를 쥐었다.

“흣, 아니야, 그건-”

“좋아하잖아, 여기 긁어내듯 쑤셔 주는 거.”

곧 휘어진 성기가 찍어 박히듯 올려 치자 이소의 입에서 듣기 상스러운 신음이 마구 터졌다. 흡사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창기의 아양 같기도 했다. 먹기 좋게 부어오른 내벽을 꼿꼿한 성기가 덕덕덕덕 찍어 올리자 이소의 분홍빛 성기에서 질질질 물이 샜다.

“으흐슷, 흐, 흐아, 아으아……! 아! 안 돼! 아, 안… 돼!”

소변의 냄새는 아니었으나 시큼하면서 맑은 물이 퓨퓻 새어 사방에 튀었다. 이소가 시트를 쥐고 몸을 틀며 애원했으나 해준은 아랑곳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꿔 가며 아래를 맞붙였다. 해준이 싸지른 정액이 내벽을 꾹 채워서 졸지에 부륵부륵 새어 나오면 해준은 그걸 또 제 성기에 문질러 비빈 후 또 쑥 밀어넣었다. 이소는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해준을 받아 냈다. 해준의 몸이 쿵쿵 내려찍을 때마다 울고 또 울었지만 기뻤다. 숨이 가빴고 볼기가 얼얼했지만 행복했다. 이소는 엎어진 채 제 뺨 옆에 지탱한 해준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이내 해준의 손가락이 이소의 입 안으로 말려 들어왔다.

“으, 으응….”

엄지로 혀를 누르고 턱을 움켜잡은 채로 해준이 몸을 다시 겹쳐왔다. 사정감이 몰아치는 듯 이소를 끌어안고 허리를 털기 시작했다. 해준의 손가락을 문 이소의 입술 새로 줄줄 침이 샜다. 문득 해준이 이소의 목덜미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포개진 입술이 무섭게 열렸다. 해준의 행동을 예상한 이소가 손가락을 문 채 몸을 굳혔다. 아래를 치받는 힘에 온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흐, 흐으…! 교스…니임……! 으흣…!”

몸 전체를 꿰뚫듯 기둥이 중심을 파고들고 동시에 여린 목덜미를 강하게 베어 문 자리가 아려 왔다. 해준이 물고 있는 제 목덜미에서 펄떡이는 맥박이 느껴졌다. 이대로 해준이 고개를 털어 물어뜯는다면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가리라. 이소는 호흡을 멈추고 고통을 참았다. 참을 수 있었다. 참아야 했다. 자신 때문에 온몸에 칼을 맞고 죽을 뻔했던 해준을 생각하면 이까짓 목이야 몇 번이고 물어뜯게끔 내어 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해준은 얌전히 놓아주었다. 잇자국이 선명한 자리에서 이소의 혈맥이 퍼덕퍼덕 뛰었다. 쾌락에 잠겨 먹먹한 신음은 해준의 손가락을 강하게 깨물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엉망으로 던져진 옷가지와 시트 커버가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로 두 사람은 침대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해준의 성기가 천천히 빠져나가자 연한 분홍색의 구멍에서 우윳빛 정액이 도록 딸려나왔다. 해준은 비위가 상하지도 않은지 또 아래로 내려가 이소의 구멍에 고인 제 정액을 모조리 핥았다. 저를 잡아먹는 것 같은 해준의 행동에 이소는 그저 숨을 고르며 가만히 두었다. 이대로 다 씹어 먹어 버린대도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눈꺼풀이 가만가만 감겼다 뜨였다.

* * *

콸콸 더운물이 욕조 안을 가득 채웠다. 한동안 비워 놨던 집은 온수조절기가 동파에 고장이 나서 아주 절절 끓는 물이 나왔다. 해준은 불만이었지만 이소는 그나마 냉수가 아닌 게 어디냐며 웃었다. 두 사람 모두 식지 않은 물에 들어갔다가 낮은 신음을 내지르며 뛰어나왔다. 꼭 어제 만난 연인 같았다.

함께 목욕을 하며 이소는 해준에게 식구들의 행방을 물었다. 얼마 전 해수와 함께 왔다 갔더니 동네 사람 말로는 모조리 이사를 갔다더라 하며 실망해 돌아간 날이 있었다고 했다. 저 역시 해준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해 섭섭했다 전했다.

해준이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카락에서 똑똑 더운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본가에 있었어요. 이소 씨도 이소 씨 나름대로 치료에 집중하는 동안 나 역시도 생활이 정상이 아니어서 모두들 걱정했거든.”

“제가 보여서요?”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보여서, 너를 보고 싶어서.”

정확히 이야기하면 헤어지고 난 후부터 해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검찰의 연쇄 살인 무혐의 처분이 떨어지자 준경은 이후 정정 기사를 몇 개 내보낸 후 모든 방송과 가십에서 해준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막았다. 덕분에 쉽게 사람들 기억에서 잊혔다.

해준은 범양을 조사하는 것도 관뒀다. 윤주영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별장에 이소를 옮겨 두었다는 전언을 듣고 난 후 해준은 안심했다. 매일매일 의사가 들락날락거렸고 간간이 바깥에 얼굴을 내비친 윤주영은 볼 때마다 바싹바싹 말라 있었다. 어떤 날은 주영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길게 나 있는 것을 보고 이소의 상태를 가늠하기도 했다.

해준은 아주 가끔씩 직접 이소를 보러 다녀왔다. 아주 멀리서, 정말 아주 멀리서 이소가 산책을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따금씩 이소가 힘없이 쓰러지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몇 분 되지도 않는 사이 주영이 뛰쳐나왔고 경호원들이 달려들었다. 어린 해수는 가만히 서서 제 아빠가 우는 것을 겁에 질려 보고 있었다.

몇 번을 더 보아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더 올 수가 없었다. 제가 이소를 망쳤다. 저 고운 사람에게 너무 큰 독이 되어 버려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관뒀다. 윤주영을 치더라도 제게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왔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잤다. 밤이고 낮이고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물론 이소에게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해준은 이소의 머리를 살살 쓸어내리며 왜 본가에 내려가게 되었는지만 설명했다.

이소만큼 큰 발작이나 패악질은 없는 대신 해준은 벽이나 허공을 보며 누군가와 대화를 했다. 처음에는 혼잣말인 줄 알았으나 이후 준경과 식솔들이 본 것을 기록하자면 꼭 ‘이소’와 대화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아직도 살림살이를 치우지 않아 그대로인 별채를 매일 열어 보며 가만히 웃기도 하고 툇마루에 기대앉아 있기도 했다. 부러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만든 가옥이라 이소의 별채는 언제나 따뜻했다.

식사도 거르고 입술이 바짝 마를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던 해준은 이소의 환상을 보고 나서부터는 곧잘 식사도 했다. 다시 그림도 그렸고 책도 읽기 시작했다. 식구들은 그런 해준을 보며 오히려 더 걱정했다. 정말로 자신들의 도련님이 미쳐 버린 것인가 싶어 매일 집사 준경을 붙들고 어서 빨리 병원에 데려가라며 애걸복걸했다.

‘아무래도 이 집에 있는 게 더 악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모시고 내려가세요.’

결국 주치의 병덕의 진단으로 본가로 내려가 있기로 하고 준경과 해준이 먼저 해준의 부친의 집으로 내려갔다. 하나뿐인 아들이 상사병을 가장한 조현병이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하던 양친이 해준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다.

이후 식구들은 해준의 증세가 나아질 기미가 없자 모두들 지방 본가로 내려왔다. 해준은 그곳에서 치료도 받고 요양을 하며 지냈다. 우습게도 그곳에 있으면 이소의 환영이 보이지 않았다. 병덕이 달여 준 한약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다.

그럴 때마다 해준은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혼자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처음 본가에서 저택으로 올라왔던 날, 거짓말처럼 별채 툇마루에 이소가 앉아 있었다.

‘교수님, 나 계속 기다렸어요.’

환히 웃는 그 모습에 결국 해준은 팔을 벌려 이소의 허상을 껴안았다.

“만질 수가 있었어요?”

만지고 나니 더 힘들긴 했어. 해준이 쓰게 웃었다.

“보기만 했을 때보다 더 놓고 싶지 않았거든.”

해준은 손끝으로 이소의 턱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처음에는 한겨울인데도 맨발에 얇은 반팔을 입고 있는 모습이라 허겁지겁 제 코트를 벗어 주었다. 그 이후에는 도톰한 후드티를 입고 나오더니 어느 날엔가 제가 사 준 노란 스웨터를 입은 채 툇마루에 잠들어 있는 이소를 보고 해준은 한참을 서서 울었다. 이소야,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그러나 해준은 이소를 만나러 갈 수가 없었다.

제 민낯을 알아 버린 연인은 저를 볼 때마다 비명을 질렀고 정신을 잃었다. 그런 불쌍한 사람을 두고 정작 저는 즐거웠던 한때를 그리며 그의 얼굴을 꼭 닮은 허상까지 만들어 냈다. 정말 끝까지 이기적이고 개차반인 제 성격에 스스로도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며 ‘교수님, 이거 보세요. 겨울인데 개나리가 피었어요.’ 하는 이소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미쳐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해준은 이소가 떠난 제집의 구석에서 말라 죽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저를 처음 보았을 때도 믿지 않으신 거네요.”

“올 때마다 보았으니까. 오늘은 옷차림이 조금 특이해서 나 보여 주려고 바꿔 입은 줄 알았지.”

해준의 말에 이소가 실소를 터뜨렸다. 저 역시도 해준을 코앞에 두고 못 알아보았으니 저나 해준이나 둘 다 바보였다. 한참을 웃다가 두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이소가 먼저 입술을 맞대어 왔다. 문득 이소가 해준의 뺨을 붙잡은 채 물었다.

“지금은 믿으세요?”

해준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응. 내가 사랑하는 이소잖아.”

사랑하는 이소. 톡 던진 말을 곱씹으며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다시 웃었다.

* * *

“금방 올 거예요. 일주일 정도 있다가요.”

이소가 주영과 영국 여행을 다녀올 것이라 하자 해준은 미심쩍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두 달 전 저를 유치장 앞에 세워 두고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던 모습과 달리 이소에게만큼은 이빨을 숨기고 돌보는 모양이었다. 물론 자신 역시 이소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이소 앞에서의 모습이 180도 다른 것을 생각하면 이해는 갔다. 주영과 저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윤주영이 그렇게까지 잘 해 줄 줄은 몰랐는데.”

해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회장직에 오른 이후 주영은 재단이나 기업 일보다는 이소를 돌보는 일에 더 집중했고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았다. 사촌 형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애틋한 느낌이 영 싸했다. 그러나 주영은 제게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고, 이소 역시 고개를 저었다.

“형이 원래 저를 많이 아꼈어요. 형제가 없던 탓에 친동생보다 더 많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칠 년 넘게 헤어져 있었고 회장님, 사모님까지 그렇게 되고 나니 이제 가족이라고는 저랑 해수뿐이잖아요. 그래서 제게 그렇게 애틋하게 구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하지만?”

이소는 안타까운 듯 입술을 달싹였다. 주영은 부인하겠지만 이소는 자신이 곁에 있어 오히려 주영에게 해가 된다 여겼다. 아직 너무 젊었고 주영 하나만 믿고 매달린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해수가 갑갑한 생활을 너무 힘들어했다. 간호가 아니라면 굳이 같이 살 이유는 없었다.

“형은 형의 인생이 있으니까요. 이미 저로 인해 너무 많은 걸 포기했어요. 오해는 풀렸고 저 역시도 앞으로 아프지 않을 테니 형의 보호에서 나와야죠. 이번에 다녀오고 나면 집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하고, 독립할 거라고 말하려고요.”

심리치료는 꾸준히 다닐 거고, 해수 역시 아직 어린데 너무 공부에 치이는 것보다는 친구들하고 뛰어놀게 하고 싶어요. 저도 저 나름대로 해 보고 싶은 일도 있고요. 무엇이 되었건 이젠 진짜로 자립하고 싶어요. 이소는 볼을 붉혔다.

해준이 엄지로 이소의 볼을 쓸어내렸다.

“내 집도 더 안 들어올 거예요?”

이소는 눈을 마주친 후 미소 지었다.

“저에게도 집이 있었으면 해서요.”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의탁하는 삶 말고 온전한 내 것이요. 이소는 이후 자신이 갖고 싶은 작은 집에 대해 조곤조곤 떠들었다. 볕이 좋은 날 이불을 널 수 있게 마당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고 하얀 강아지 한 마리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둘이 살 것이라 이 층까지는 필요 없으나 옥상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어 해준이나 저택 식구들이 오면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고 했다. 꽤나 구체적인 것이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티가 나 해준은 피식 웃었다.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후기는 하지만 내일 비행도 있고 이소를 재워야 했다. 해준이 젖은 머리카락을 한 올씩 넘겨 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제법 달뜬 숨이 가라앉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소야.”

“네에.”

“아까는 날 보고도 말을 놓던데.”

“아, 그건…….”

해준의 말에 이소는 눈을 깜빡였다. 아까라고 하시면…. 눈동자를 굴리던 이소는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바보같이 해준의 말에 대답하던 자신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때는 진짜 해준인 줄 못 알아봤다. 달빛이 없었더라면 아마 발자국도 발견하지 못했을 테고 그대로 떠나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소는 얼굴을 붉혔다.

“한 달 전부터 교수님 모습이 계속 보였을 때, 그래도 어차피…. 제가 만들어 낸 허상이니까, 그냥 저리 가, 가라니까, 하던 게 습관이 돼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해준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나한테 저리 가라고 했다고?’ 하며 웃었다. 이소는 사실이니까 그저 눈썹을 긁으며 끄덕였다. 해준이 부드럽게 뺨을 훑어 올렸다.

“듣기 좋아서 그래.”

이소가 눈을 맞췄다.

“또 해 봐, 친근하게. 편하게.”

이소가 고개를 저으며 파고들었다. 해준이 이소의 뺨을 잡은 채 입을 맞췄다. 살짝 떨어진 입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해 봐, 반말해 봐. 이름 불러도 좋다니까, 응? 하고 속삭였다. 코끝을 살짝 부딪히며 낮은 목소리로 조르고 또 졸랐다. 그게 퍽 간지러워 웃고 또 웃었다.

그러다 마주친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용기를 낸 이소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사랑해.”

이소가 얼굴을 붉히고 웃었다. 그리고 또다시.

“많이 사랑해.”

이소가 해준의 뺨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정말로 많이 사랑해, 차해준.”

정작 고백을 들은 해준의 표정은 묘했다. 이소는 해준의 뺨을 매만졌다.

“교수님, 얼굴이 빨개요.”

“으응.”

해준이 시선을 피했다. 이거 봐라. 이소는 이를 드러내고 놀리듯 웃었다. 귀를 매만지자 분명 차게 식었던 귓불이 탈 듯 뜨거웠다.

“귀도 뜨거워요.”

“만지지 마, 보지 마요.”

이소가 웃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서 빨개진 거예요, 제가 이름을 불러서 빨개진 거예요? 더 불러 줄까요? 해준은 꼬물꼬물 이불로 들어갔다. 이소는 허리를 간지럽히며 이불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한참 이불 안에서 몇 번의 폭신폭신한 사투가 벌어졌다. 이내 잠잠해진 이불 안에서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정말 많이 사랑해. 해준 형. 해준아. 해준 씨. 차해준. 윤이소가 너를 정말로 많이 사랑해. 이소의 속삭이는 고백이 뭉개지듯 새어 나왔다.

* * *

아침 6시, 이불 안 고백 이후에 두 사람은 좁은 침대에 몸을 얽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항상 해준의 팔에 머리를 베고 잤었던 이소는 제 가슴에 머리를 댄 채 매달리듯 잠든 해준의 정수리를 보며 씩 웃었다. 귀여워. 아가 같아.

“교수님, 나 이제 가야 해요.”

“으응…….”

“배웅 안 해 줄 거예요?”

“가지 말고 더 자자….”

“잠보.”

이소는 웃으며 고개를 숙여 해준의 뺨에 키스를 한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거울을 바라본 이소는 흠칫 놀랐다가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목덜미에 진한 잇자국이 선명했다.

‘이거였구나…. 예전에 내 목에 있었던 거.’

왜 그렇게 물어뜯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해준이 원하니 가만두었다. 그리고 보다 보니 해준의 흔적이 깊게 남은 제 몸이 나름 나쁘지 않았다.

“아, 맞다. 완전 잊어버릴 뻔했어.”

이소는 절뚝이며 속옷과 바지를 주워 입었다. 주섬주섬 점퍼 주머니 속 사진을 꺼내어 책상에 올려 두었다. 해준이 가지고 있는 사진을 이어붙여 본다면 조금 더 확실하겠지만, 제 추측이 맞다면 이 사진 속 작은 손의 주인은 해준이 맞았다.

이소는 침대에 걸터앉아 해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완전히 잠이 깊게 들었다.

“우리 엄마는 어땠어요?”

사진으로는 엄청 예쁜데. 첫사랑이라고 할 정도면 엄청 엄청 좋아한 거죠. 일어나서 이 사진 보고 나면 전화해 주세요. 나도 이 우연이 믿기지가 않으니까.

이소는 해준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옷을 꿰어 입었다.

“다녀올게요. 우리 다녀와서 이야기 많이 해요. 사랑해.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해.”

이소는 완전히 단잠에 빠진 해준에게 손을 흔들고는 천천히 방 안을 빠져나왔다. 밤새 쌓인 눈이 정원 가득이었다. 해수랑 같이 눈싸움하면 좋아할 것 같은데. 여행 같은 거 가기 싫다고 입이 댓 발 나온 채 잠들어 있는 해수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미어지면서도, 곧 다시 친구들을 만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뽀득뽀득 눈을 밟아 나왔다. 정원 한가득 자신의 발자국을 처음으로 찍으면서 이소는 몇 번이나 또 돌아보고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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