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40/50)

2

이소는 눈을 떴다. 병원인가, 상아색의 천장이 눈에 띄었지만 조금 더 높은 천장에 커다란 창문이 붙어 있었다. 내가 지금 벽에 붙어 있는 건가. 눈을 깜빡거리고 다시 한번 보자 역시 천장에 창이 달려 있는 것이 맞았다. 여기는 어디지. 고개를 내리자 제 품에 해수가 안겨 있었다. 해수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팔이 뻐근했다. 링거가 꽂혀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수액이 3팩이나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크고 깨끗한 방. 커다란 침대와 침대만큼 큰 창. 몇 겹의 이불과 쿠션 외에는 이렇다 할 가구가 없는 방에 자신과 해수가 누워 있었다. 아직 꿈에서 안 깬 건가. 그때 방문이 열렸다.

“깼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주영이었다. 주영의 손에는 막 만들었는지 김이 나는 죽이 들려 있었다. 주영은 니트 차림이었다. 벌써 날이 그렇게 추워졌나.

“바로 일어나지 마, 너 어지러워.”

이소는 제 팔을 베고 잠든 해수를 살짝 눕혀 놓은 채 허리를 일으켰다. 주영이 커다란 베개를 등에 받쳐 주었다.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여기 어디….”

“우리 집,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내 별장.”

이소는 당황스러웠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 병원에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별안간 주영의 별장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주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검은 목티에 베이지색 니트를 걸친 주영은 정장을 입을 때와는 달리 더 어리고 편안해 보였다.

“병원에서 그 소란이 있고 나서 관계자들하고 한바탕했어. 차해준이 치료에 도움이 안 된다, 안정을 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분명 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밤중에 네 병실에 찾아간 걸 모르고 있더라고. 아무리 국내 최고 수준의 의료진이라고 해도 그 병원은 이미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래서 옮길 수밖에 없었어.”

다른 병원으로 갔어도 되지 않나. 이소가 멀뚱히 쳐다보자 주영이 쓰게 웃었다.

“너 사람만 지나가면 자꾸 흠칫흠칫 놀라서.”

차해준 때문에 불안해하는 거 다 알아. 주영이 이소의 손을 잡았다. 해준의 이름을 듣자 이소가 또 몸을 떨었다.

“여기로 매일매일 담당의가 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여긴 아무도 못 들어와. 안팎으로 경호원들도 여러 명이고 화장실까지 CCTV 달려 있으니까.”

화장실? 이소가 화들짝 놀라자 주영이 씩 웃었다.

“농담이야. 그런 거 없어. 편안히 있어. 감시하는 사람도, 쫓아다닐 사람도 없어.”

주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죽을 휘휘 저어 가며 말을 이었다. 병원에서 그랬어. 너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심리적인 부분이 신체에 너무 많이 영향을 끼쳐서 종종 너도 모르게 몽유병마냥 돌아다니게 되거나 헛것을 보거나, 많이 심하면 저번처럼 과호흡이 오고 발작을 할 거라고.

마침 확인을 하겠다는 듯이 주영이 이소의 안색을 살폈다.

“기억나는 거 있어? 병원에서의 일. 말해 주면 내가 의사한테 이야기해 줄게, 도움이 될 거야.”

이소는 눈을 깜빡였다. 해준이 왔었다. 해준이 왔었고…. 자신이 헤어지자고 이야기를 했고. 무어라 했는지 모든 것이 기억나진 않지만 드문드문 자신은 울음을 삼켰고 도리어 해준이 아이처럼 운 것이 떠올랐다. 이소는 고개를 기울이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잘 모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목 언저리가 저릿했다. 손을 대 보니 커다란 붕대가 붙어 있었다.

“이거 뭐야?”

“별 거 아니야, 다쳤더라고.”

주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동안은 여기서 지내도록 해. 가지고 있던 짐은 아깝긴 하지만 그냥 다 새로 사면 될 거고, 혹시 그 집에서 가져오고 싶은 거 있어? 주영의 물음에 이소는 고개를 내저었다.

“없는 거 같아.”

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급할 건 없으니까 생각나면 말해. 일단 식사부터 하자. 주영은 죽을 후후 불었다. 아, 해 봐. 먹여 줄게.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 둬, 내가 먹을게.”

“너 손목 봐 봐, 바보야.”

양 손목에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다.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또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손목을 매만지자 뼈가 욱신욱신했다. 숟가락은커녕 연필 한 자루도 제대로 쥘 수가 없을 정도로 뼈마디가 아팠다. 주영이 숟가락을 들어 이소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자, 형 말 들어. 아-.”

결국 이소는 군말 없이 입을 벌렸다. 입술도 조금 따가웠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죽의 맛도 미끔미끔했지만 그냥 죽지 않기 위해 먹었다. 다 먹고 나자 주영이 약을 건넸다. 신경안정제라고 했다. 주영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조금 있나, 읊조린 주영이 체온계를 꺼내 열을 쟀다. 38도가 조금 넘었다. 해열제까지 꼼꼼하게 챙겨 먹인 주영은 볼이 달아오른 이소의 뺨을 제 차가운 손으로 꾹꾹 눌렀다.

“이제 자.”

“형도 가.”

“너 자면 갈게.”

무슨 애도 아니고 잠이 들면 가겠다고 하는 건지. 주영은 이소의 옆에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 누가 얼굴 본대? 책 볼 거야, 넌 잠이나 자.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 주영은 들고 있는 책에 시선을 돌렸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해수가 꿈지럭대며 이소의 품을 파고들었다. 여태 잠들어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침구가 포근해서 그런지 또 잠이 쏟아졌다.

“이소야.”

“으응.”

“잘 자. 사랑해.”

“으응….”

잠들기 전 주영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어루만졌다.

꿈을 꿨다. 이소는 붉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해준이 대문 안쪽 정원의 한가운데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소 씨, 들어와. 해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소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이소 씨, 이소 씨. 날 두고 가지 마, 집으로 돌아와. 나 여기 있어. 해준이 울음을 매달고 애원했으나 이소는 계속 뛰었다. 한참을 달려 뒤를 돌았다. 여전히 저는 그 붉은 대문 앞이었다. 이소는 주저앉아 울었다. 돌아봐도 돌아봐도 그 정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무서웠다. 그 사람의 곁에 있는 건 역시 너무 무서웠다.

* * *

[차해준 교수 쪽에서는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칼자루랑 문고리의 지문이라든지, 핏물을 의도적으로 지운 것 같은 그 현장에 왜 하필 평범한 대학 교수의 흔적이 남아 있느냐. 또 웃긴 건 이 차 교수와 가까운, 속칭 애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빚이 있었단 말이에요? 근데 그 관련 대부업체 직원들이 싹 실종됐어요. 바닥에 뿌려진 혈흔의 양을 보면 이건 단순 실종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살해한 후에 시체를 유기했다. 현재까지도 시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추측을 하고 있는 거죠.]

“말도 안 되지. 혼자서 시신 몇 구를 어떻게 옮기냐.”

“그런 거 아니야? 앞에서는 평범한 직장인인 척하고 뒤에서는 조폭 보스 같은 거.”

“난 그것도. 그 집에서 일하던 젊은 남자가 그날 이후로 죽어서 안 보인대.”

“어우, 소름.”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논객 둘이 나와 떠드는 대담 영상을 보며 구시렁거렸다. 이소는 듣기 싫어 자리를 옮기고 목도리를 끌어 올렸다. 아직 12월인데도 뼛속까지 시렸다. 이렇게까지 몸이 차거나 약하지 않았는데도 바람이 불면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따뜻한 차를 홀짝이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손등을 덮은 코트는 주영의 것이었다. 주영이 워낙 얇게 입고 다니길래 생각보다 덜 추운 줄 알고 니트만 걸치고 나왔다가 큰코다쳤다.

주영이 커피와 빵을 든 쟁반을 들고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영은 몸이 부쩍 약해진 이소를 데리고 다니며 어디 바람이 드는 곳은 없나 살피는 습관이 들었다.

“여기 커피 괜찮은데, 아쉽네.”

“괜찮아. 차도 좋아.”

“아-”

주영이 일일이 빵을 찢어 이소의 입에 넣어 주었다. 처음에는 주영이 먹여 주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 고개를 젓곤 했지만 이제는 퍽 익숙해졌다. 양 손목을 쓸 수 있을 때까지만, 몸살이 나아질 때까지만, 고뿔이 지나갈 때까지만 하며 받아먹던 것이 이제는 꽤 습관이 되었다.

주영의 집에서 지낸 지 몇 주가 흘렀다. 주영은 회사는 어떻게 한 건지 대부분의 시간을 이소를 간호하는 데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해준이 보이지 않으면 나아질 것이라 여겼던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담당의 말로는 뒤늦게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으니 경과를 지켜보아야 한다고 했다. 가장 기본적인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2층짜리 별장은 언제나 불이 켜져 있었다. 환각을 보거나 환청도 종종 들었다. 2층 창문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며 계단을 뛰어 내려오다가 구르기도 했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는데 제 이름을 부른다며 귀를 막고 침대에 기어 들어가기도 했다.

잠이 들었다가 해수인 줄도 모르고 몸을 만지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 난리가 있을 때마다 어린 해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주영은 옆 방에서 자다가 뛰어나와 제압하느라 갖은 고생을 했다. 기억에 없던 밤의 흔적은 부서진 집기와 긁힌 가구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주영은 더 간소하고 미니멀하게 인테리어를 유지했다. 이소가 다칠까 봐서라는 이유였다. 경비는 삼엄해졌다. 이소는 나갈 때마다 주영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았다. 진정제 투여량도 잦아졌다.

“새로 산 전화는 쓸 만해?”

“전화할 데가 없어서 모르겠어.”

나랑 통화하면 되지. 주영은 물티슈를 꺼내 이소의 입을 닦아 주었다. 이소야, 전화번호 외웠어? 묻자 이소는 더듬더듬 숫자 열한 자리를 읊었다.

“뒷자리 틀렸잖아. 다섯 번 알려 줬지.”

“으응. 다음번엔 안 틀릴게.”

“그래, 차근차근 하자.”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뉴스 이야기를 했다. 이소가 우울한 표정으로 우물우물 빵을 삼키자 주영이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 이야기 듣기 불편하면 나갈까?”

“괜찮아. 나 빵 더 먹구 갈래.”

“어차피 감옥 갈 사람이야. 너무 불안해하지 마.”

“으응.”

디저트를 다 먹은 두 사람은 차를 타고 근교를 드라이브했다. 이소는 창문을 열고 겨울바람을 맞았다. 주영이 회사에 가는 날을 제외하곤 웬만해선 항상 주영의 차로 외출을 했다. 해수는 같이 갈 때도 있었지만 주영이 교사를 여러 명 붙여 주어 여유 없이 공부를 하고 운동을 했다. 그동안 좋은 머리를 썩히는 것이 아깝기도 했거니와 제 아빠가 또 발작을 할까 봐 마음을 졸이느니 다른 쪽으로 신경을 돌리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였다.

이소는 밤이 되면 종종 해준의 꿈을 꿨다. 꿈에서 자신은 해준에게 모질게 굴기도 했고 때로는 예전처럼 머리를 부비며 친근하게 안기기도 했다.

‘교수님.’

한동안 입에 올리지 않아 어색하기 그지없는 호칭으로 해준을 부른다. 그럼 여느 때와 같이 긴 도포를 걸치고 꽃을 어루만지던 해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 것은 온몸에 수많은 자상을 입은 채 울컥울컥 피를 흘리고 있는 해준의 모습이었다. 어두운 밤이어서, 옷감이 먹색이라 검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검붉은 핏물에 온몸을 푹 담갔다가 느리게 걸어 나온 해준의 발밑으로 핏물이 진창이었다. ‘이소 씨, 내가 많이 사랑해.’ 소름 끼치는 고백을 하며 제게 다가왔다. 이소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 소리에 주영과 해수가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아……. 또 숨이….”

가슴을 쥐어뜯는 통증에 몸부림치는 이소에게 주영은 얼른 서랍을 열어 신경안정제 한 알을 털어 먹였다. 주영의 품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며 이소는 다시 눈을 감았다. 서글프다. 고작 꿈인데, 상상을 한 것뿐인데도 이렇게 아프면 이제 평생 잊어버리고 살아야 하는 건가. 이렇게 제 시간은 망가지고 마는 건가. 이소의 뺨으로 긴 눈물이 타고 흘렀다.

‘이소 씨, 보고 싶어.’

의식이 흐릿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해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제게 했던 말이었던가, 아니면 어디선가 그가 저를 그리며 부르는 말인가. 이소는 알 수 없었다.

* * *

“이 그림, 그때….”

“네가 좋게 봐 줬던 그림.”

이소의 방 벽 한편에 미술관에서 한참을 바라보았던 그림이 걸렸다. 그때 그 소란이 있고 나서야 주영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났었는데. 이소는 말없이 그림을 올려다봤다. 주영이 옆에 섰다.

“작가 유족들한테 설명하고 사 왔어. 이 작가가 이 그림 그리면서 병을 이겨냈대.”

“의미 있네.”

주영이 이소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예전처럼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라 받치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주영이 속삭였다.

“좋아?”

“응.”

“뭘, 그럼 사랑한다 하든지.”

“간지럽게 무슨. 고맙다, 형.”

이소가 옅게 웃으며 제 어깨에 얹은 주영의 손을 토닥였다. 주영은 눈을 힐끗 내려 이소의 목덜미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이소가 목덜미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많이 옅어졌지. 형이 준 약 계속 발랐더니 이젠 안 가려도 될 정도야.”

“다행이다.”

이소는 여전히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무슨 상처인지 기억이 안 나. 꼭 잇자국 같기도 하고…. 형은 알아?”

주영은 대꾸 없이 어깨동무를 풀었다. 식사 준비할게, 그림 조금 더 보다가 내려와. 이소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림과 함께 남은 고요한 방, 이소는 턱을 기울였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물감은 색이 아름다웠지만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이 없었다. 그때는 매일매일 보고 싶을 정도로 갖고 싶었는데. 이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녁 식사를 하러 계단을 내려왔을 때 주영은 꽤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수프와 스테이크는 주영이 직접 요리한 것이었다. 이소는 주영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주영은 주로 양식을 먹거나 가벼운 샐러드 따위로 식사를 했다. 주영을 만나 알게 된 것은 원두커피 한 잔도 식사에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숭늉이랑 갈비찜 먹고 싶다….’

문득 속을 데울 만한 뜨끈한 고기탕이 먹고 싶었다. 그러나 이 집에 그런 것은 없다. 해수와 이소는 주는 대로 군말 없이 잘 먹었고 딱히 탈도 나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그런 한식이 먹고 싶으면 주영은 유명한 밥집에서 사다 바쳤다. 혹시나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먹고 싶을 수 있을까 봐 요리하는 아주머니에게 이런저런 레시피도 알려 주었다. 분명 집에서 만든 요리인데도 묘하게 아쉬웠다.

‘혼자 먹어서 그런가.’

저와 해수뿐인 이 별장은 언제나처럼 넓고 적막했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꼬막, 김이 나는 뜨끈한 파전, 밤과 대추가 들어간 잡곡밥, 식사를 다 마치고 나면 제 입으로 들어오던 식혜의 맛이 기억 속 가장 낮은 곳에서 찰랑거렸다. 제 입가에 잔을 대어 주며 꼴깍꼴깍 마시게 했던 커다란 손도 떠올랐다.

“하, 일이 복잡하게 됐네.”

“왜?”

이소가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주영을 올려다봤다. 소매가 손등 언저리에서 놀아 양념에 닿을락 말락 하자 주영은 한숨을 쉬며 이소의 소매를 사뿐사뿐 걷어올려 줬다.

“입양 센터인데…. 최근 병원 기록 열람하더니 지금 정신과 치료 중이어서 입양 확정해 줄 수가 없다고 하네.”

“…어?”

이소의 손에서 나이프와 포크가 툭 떨어졌다. 주영이 입가를 매만지며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거의 다 된 거라 최근 검사받은 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는데… 이소야, 괜찮아. 금방 다시… 아, 왜 울어….”

이소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 금방 된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 입양이 거부될 줄은 몰랐다. 널을 뛰는 마음 상태 때문에 이렇게까지 울 일이 아닌데도 서럽고 화가 나자 눈물부터 주륵주륵 흘렀다. 주영이 이소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다시 하면 돼, 어? 약 먹고 좋아지면 또다시 신청하면 된대. 지금 다른 건 다 통과되었고 전혀 문제 없는데 네가 지금 조금 몸이 아프니까, 해수 돌볼 상태가 아니라서 그런 거야. 괜찮아. 울지 마, 뚝.”

입맛이 없어졌다. 식어 버린 스테이크에서 핏물 비린내가 올라왔다. 이소는 습관적으로 안정제를 털어 먹고 또다시 침대에 누웠다. 죽은 듯 잠이 든 이소를 바라보며 주영이 가슴을 토닥였다. 병원에서 나왔을 때보다 더 많이 말랐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 먹여도 쉬이 살이 찌지 않는다. 주영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소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쭉 써 내려갔던 일지였다. 분명 좋아지고 있다. 호전되고 있다. 다만 이렇게 일이 하나씩 어그러질 때마다 다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12월 xx일 날씨 흐림

이소가 또 발작을 했다. 검은 그림자가 쫓아온다며 창문을 열고 2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20분을 울었다. 물을 마시다가 컵을 떨어뜨림. 숟가락질을 잘 못 해서 먹여 줘야 함. 바지에 소변. 약 거부.

12월 xx일 바람 많이 붊

발작 1번.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무섭다고 내 방에 와서 자자는 걸 끌어안고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다. 새벽엔 일어나서 벽을 쳐다보고 쪼그려 있었다. 또 울었다. 보고 싶다길래 토닥거려 재웠다.

12월 xx일 맑음

계단에서 굴렀다. 해수를 못 알아봤다. 안정제 먹고 일어나서 알아봤다.

12월 xx일 비

비 내리는 걸 하염없이 보길래 데리고 나갔더니 우산없이 맞고 싶다길래 잠깐 내버려 뒀다. 시원하다고 한참을 맞고 서서 잔디를 밟다가 들어왔다. 감기 걸릴까 봐 뜨거운 물로 씻겼다. 별일 없이 잤다.

12월 xx일 비

많이 좋아졌다. 증상 호전, 말수는 줄었지만 tv도 보고 정상적인 대화도 가능. 담당의는 3일에 한 번으로.

12월 xx일 맑음

외출도 가능. 대화 가능. 차해준 이야기도 거의 안 함. 대신 인지가 조금 흐릿해 도움 필요.

.

.

.

12월 xx일 흐림

입양 보류, 식사는 거의 안 함, 또 욺. 안정제 1알.

마지막 줄에 오늘 있었던 일을 기록하곤 전화를 밀어 놓았다. 곱게 감긴 눈에 아직도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주영은 이소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널 웃게 해 주고 싶은데….”

그 사람보다 더. 그동안 못 한 만큼. 덧붙이지 못한 마음은 목구멍 깊숙이 삼키고 오랫동안 이소의 얼굴을 바라봤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 * *

며칠 뒤 주영은 사흘 정도 집을 비웠다. 연말이라 회사 일도 바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말한 주영은 돌아오자마자 이소에게 꽃다발을 안겨 줬다. 커다란 안개꽃이었다. 저번에 장미도 그렇고 이번 안개꽃도 그렇고 참 희고 풍성하다.

“형은 참, 흰 꽃 좋아해.”

“네가 좋아하잖아.”

“내가?”

주영이 코트를 벗어 걸며 웃었다. 왜, 너 고등학교 때 항상 방 안에 하얀 장미꽃이 꽂혀 있었잖아. 이소는 기억을 더듬었다. 눈동자를 조금 굴리며 당시를 떠올리려고 애쓰는 이소를 보며 주영은 ‘됐어, 기억 안 나면 억지로 쥐어짜지 마.’ 하고 볼을 꼬집으며 웃었다. 5분 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눈동자를 좁히던 이소가 돌연 주영에게 환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났어!”

“뭐가?”

“그 꽃. 그때 나 좋아하던 여자애가 매일 가져다주던 거 내가 가져와서 화병에 꽂아 놨던 거거든. 걔네 엄마가 꽃집을 했었는데 그 여자애가 자기가 좋아하는 꽃이라고….”

“…네가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주영이 말허리를 잘랐다. 이소는 눈을 깜빡였다. 응. 걔가 좋아하던 거였지.

“자기가 하얀 꽃 좋아한다고 보면서 자기 생각을 해 달라나. 백합, 카라, 안개꽃, 장미도 흰 장미만-”

“이소야.”

주영이 별안간 이소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겨울의 냉기를 줄줄 달고 돌아온 주영의 볼이 유독 찼다. 여태 따뜻한 집에서 누워 뒹굴거리며 책을 읽던 이소와 달리 주영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는지 몸을 움찔댔다. 이소는 조금 당황했지만 팔을 들어 주영의 등을 토닥였다. 고생했어, 밖에 춥지.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였다. 주영은 이소의 어깨에 코를 파묻고 들이마셨다. 벽난로의 온기가 묻어 있는 살결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나 오늘 은형이 납골당, 옮기고 왔어.”

이소가 몸을 움찔거렸지만 주영은 고개를 부볐다.

“그 작고 초라한 곳 말고. 더 높고 화려한, 우리 어머니 아버지 모신 곳에서 더, 더 위로.”

은형이 발밑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있어. 주영의 마지막 말이 묘했다. 이소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주영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형. 내가 하려던 거였는데….”

“내가 했어야 하는 일이지. 괘념치 말아. 아, 그리고….”

주영은 조금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나 이혼했어.”

“뭐?”

이소는 얼른 주영을 몸에서 떼어 내고 눈을 마주쳤다.

“진짜야?”

“응. 그런 일로 농담을 하려고.”

“아니,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하니까, 당황스럽잖아.”

왜? 갑자기? 그러나 생각해 보니 주영은 두 달 가까이 저를 돌보며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저를 챙기느라 아내에게 소홀히 해서 이혼까지 가게 된 건가. 이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소의 표정을 예상했다는 듯 주영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괜찮아, 부모님이 원해서 한 결혼이었고 비즈니스로 엮여 있던 거라 큰 탈 없이 합의 이혼했지.”

“아니, 어… 그래도 집안 대 집안 일인데… 그렇게 쉽게 결정하면 어떻게 해.”

“처음이 쉬웠으니까 끝도 쉽게 끝났지.”

이소가 흔들리는 눈으로 주영을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총 세 번 만나고 그다음이 식장이었다니까. 그 사람도 지난 2년 동안 정 없는 결혼생활 유지하느라 스트레스였는데 이혼하자고 말하자마자 홀가분한 것 같더라.”

이소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혼이라니. 평생 법적으로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본 적이 없는 이소에게 결혼이라든지 이혼이라든지는 모두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더구나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 놓고도 미련 하나 없이 각자도생하기로 한 주영과 형수의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형, 괜찮아?”

이소가 주영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주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소야, 부르는 이름에서 묘하게 외로움이 묻어났다. 응.

“걱정되면 위로해 주든지.”

“뭘 어떻게. 토닥토닥이라도 해 줘?”

“응. 꼭 안아 줘. 아주 꼭.”

“애냐.”

이소가 손을 들어 주영은 토닥토닥 두드렸다. 주영이 눈동자를 굴리다 여유롭게 웃음 지으며 이소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두 사람은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겹치고 양옆으로 살살 흔들었다. 이소는 주영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그저 안고 있어 주기로 했다.

“우리 나중에 다 같이 영국 갈까. 해수랑, 너랑, 나랑 셋이서.”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나 예전에 너랑 가려고 생각해 놨던 데가 많았거든. 칠 년 전이라 거리의 음식점은 많이 바뀌었을 테지만 그래도 밤에 보는 타워브리지랑 빅 벤이랑, 런던아이에 가서 대관람차도 타고….”

이소가 피식 웃었다.

“회사는 어쩌고.”

“아, 늙다리들밖에 없어 너무 재미가 없어. 다 아버지 어머니가 부리던 인사들이라 나를 못마땅해하는 게 눈에 훤하고. 그냥 다 나눠 먹으라고 하고 우리는 영국 가서 놀고 먹고 자면서 사는 거지. 해수는 국립학교 보내고 너랑 나는 그냥 남는 시간에 커피나 마시고, 책이나 읽고.”

“듣기만 해도 아주 대단히 게으른 여행 계획이십니다, 윤주영 회장님. 일은 안 하시고.”

“여행 말고, 아예 가서 살까 봐. 나는 어차피 발목 잡을 거 없고, 넌 요양 겸 회복하고 새출발하고.”

“됐거든. 잠이나 주무셔.”

이소가 고개를 저으며 주영의 이마를 밀어냈다. 아 왜, 거기서 살자. 한국보다 살기 좋아. 이 형이 영국에 있으면서 좋은 데 많이 찍어 놨어. 주영이 이소의 허리를 간질였다. 이소가 몸을 접어 웃으며 피했다가 종래에는 주영이 이소의 위에 올라타 간질이는 바람에 두 사람은 한참 뒤엉켜서 웃었다. 10대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거실 바닥에 아이처럼 널브러진 채 주영이 머리통을 콩 부딪쳐 왔다.

“정말 안 갈래? 난 너만 있으면 어디든 갈 건데.”

이소는 천장에 달린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영의 별장은 공기가 맑아 별이 참 많이 보이는 곳에 지어졌다. 천장에도 커다란 창이 하나씩 달려 있는 특이한 구조라 집 안에서 언제라도 고개를 쳐들면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오늘도 별이 많았다.

“쭉 영국에서 사는 건 아직 무서워. 영어도 못하고, 막막할 것 같아. 대신 여행은 가 보고 싶어. 핫도그도 먹고, 대관람차도 타고, 배도 타 보고….”

“좋아.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주영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 오늘 좀 피곤해서 먼저 잘게, 일으켜 줄까? 이소가 손을 저었다. 별 좀 보다 잘게. 주영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든지. 별을 더 잘 보라며 주영은 벽난로만 두고 거실 불을 끄고 2층으로 올라갔다. 불이 꺼진 어두운 거실, 카페트 바닥에 몸을 누운 채 창을 바라보던 이소는 문득 해준 생각을 했다.

‘그 사람도 별을 보고 있을까?’

별똥별 하나가 또옥 떨어져 시야에서 벗어났다.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고요하게 뛰었다. 이소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가슴을 매만졌다. 이제는 해준을 생각해도 호흡이 가빠지거나 식은땀이 흐르지 않았다. 이소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 불이 꺼져 있었음에도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다행이다, 거의 다 나아가나 봐.’

그러나 계단을 올라 2층 자신의 방에 도착한 이소는 문을 닫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발작이 문제가 아니었다. 증세가 호전된 걸 안 순간부터 머릿속에 온통 해준 생각이 났다. 그동안 미뤄 왔던 추억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 이소를 허겁지겁 끌어안기 시작했다. 이소는 다리를 끌어모으고 고개를 묻었다. 마음은 간사하다. 간사하고 교묘해서 내 몸이 정상인 걸 깨닫자마자 이제는 마음을 파고들고 흔든다.

‘이소 씨, 내 생각 했어?’

다정한 음성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방 안 달빛을 받은 한 남자가 이소의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이 여기 있을 리 없는데, 두려움보다는 놀라움이 앞서 바짝 다가갔다.

“교수님?”

‘나도 그랬어.’

이소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방 불을 켰다.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좁게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바람 소리를 잘못 들었나. 한참 동안 이소는 창문을 바라보다 말없이 옷깃을 여몄다.

그리고 그날 이소는 일부러 창문을 조금 열어 두고 잤다.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또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이불 두 채를 덮고 잠이 들었다. 물론 밤새 창을 두드린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 * *

이소는 옷장에서 겨울 스웨터를 뒤적거렸다. 주영이 사 준 옷들은 전부 검은색, 회색, 흰색 등이었다. 이소가 어릴 때 좋아하던 색들이라 나름 취향을 고려한다고 골라 놓은 것들이었다. 이소는 그냥 오늘따라 조금 화사한 색이 입고 싶었다. 누가 봐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제가 아끼는 노란색 스웨터는 없었다. 조금 아쉬웠다. 나중에 다시 살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거실로 나왔다. 주영이 막 내린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약 잘 먹고 있지?”

“응, 걱정 마. 먹고 내려왔어.”

거짓말이었다.

이소는 그날 이후로 주영 몰래 안정제를 드문드문 안 먹는 날이 잦아졌다. 발작도 얼추 멎었고 불안증도 사라지고 있어서 스스로 내린 판단에도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약을 먹고나면 아무 고민도 생각 없이 잠이 들어 버리는 것도 아쉬워 그랬다.

주영은 가끔씩 재단 일로 해준이 다녔던 학교에 다녀왔다. 그날만큼은 해준과 있었던 일들을 마음껏 떠올리면서 주영의 앞에서 표정을 갈무리했다. 해준의 생각을 해도 점점 심장이 아프기보다는 간질간질한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내내 궁금하지 않았던 해준의 생각들이 우후죽순으로 돋아날 때면 커피를 따르다가도 왈칵 쏟아 버렸고, 걷다가도 멍하게 허공을 보는 날도 많아졌다.

“아야.”

‘이소 씨, 앞에 봐. 조심해야지.’

혼자 마당을 산책하다 넘어질 뻔했던 어느 날, 해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 멀리 대문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을 제외하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마당에는 저 혼자였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자신이 정말 미쳐 버린 것일까. 그러나 이소는 주영에게 말하지 않았다. 조금 더 지켜보자,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해준의 잔상과 해준의 목소리, 해준의 모습을 한 작은 것들이 책상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차 뒤에 앉아 있기도 하고 잠들기 전 침대 옆에 누워 한참을 쳐다보다 사라지기도 했다. 해준의 환영은 지독하게 이소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는 예전처럼 약을 먹는다거나 소리를 지르며 내쫓지 않았다. 그저 금방 또 사라져 버릴까 봐 멀찍이서 제 머릿속에서 만든 망상이 방을 휘젓고 다니고 물건을 만지고 다가와서 볼을 쓰다듬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이소 씨, 책 읽어 줄까.’

쉽사리 말을 걸 수 없어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그 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가 씩 웃곤 했다.

‘우리 이소 책 읽기 싫구나. 그럼 옆에서 노래해 줄까.’

그럼 이소도 같이 웃었다. 정말 조금 미친 것 같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소는 주영이 나간 틈을 타서 인터넷에 해준의 이름을 검색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휘말려 있는 일이라 아직까지도 회자될 줄 알았던 사건은 적당히 인터넷 페이지 저 멀리 밀려났다. 대신 한참을 뒤적여 찾은 정보에는 [일음동 살인 사건 용의자 차해준 무혐의로 판결, 사건은 미궁 속으로]라는 칼럼뿐이었다. 이소는 책상에 머리를 대고 엎드렸다. 무혐의라고.

“그럼, 그 집으로 돌아갔을까.”

그 집에 가면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 * *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졌다. 이소의 옷차림도, 해수의 장화도 포근포근해졌다. 내내 강원도 별장에만 박혀 있던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다시 서울에 왔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고작해야 20명 남짓이었던 별장 근처에 비해 서울에는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만 20명이 넘었다. 몰려드는 인파에 잠시 눈앞이 아찔했다. 이소와 해수는 간단하게 주영에게 줄 넥타이핀을 사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해수는 거리를 걸으며 연신 뒤를 힐끗거렸다. 이소가 갓 구운 붕어빵을 건넸다.

“아빠.”

“응.”

해수가 붕어빵을 베어 물었다.

“뒤에 아저씨들 따라오는 거 너무 신경 쓰여. 오늘 둘이서만 놀기로 했잖아.”

이소는 해수의 목도리를 정돈하는 척하면서 눈을 힐긋거렸다. 경호원 두 명이 세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주영이 외출할 때 붙여 준 사람들이었다.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멀리까지 나올 때는 차를 운전해 주기도 했고 잠시 화장실을 갈 때 해수를 맡기고 다녀올 수도 있었다. 이소는 쓰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 아빠 다 나으면 그땐 우리끼리 다니자.”

“아직도 약 먹어?”

“음….”

이소는 해수의 귀를 끌어당겼다. 요새는 가끔 빼먹어. 해수가 눈을 크게 뜨고 이소를 바라보자 이소는 손가락을 들어 ‘쉿, 비밀이야.’ 하고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한참 거리를 걸어 번화가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트리 앞에 섰다. 소원을 적는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소는 노란 포스트잇 두 장과 펜을 들고 다가왔다.

“소원 뭐 적지?”

“산타 같은 거 없잖아.”

“아빠가 들어주면 되잖아.”

해수는 고개를 저으며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은찬이랑 소원탑에 소원 비는 거 해 보고 싶었는데.”

그랬어? 이소는 약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잠깐 상상했을 뿐인데 해준의 집 정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너른 마당을 지나 돌무더기가 깔린 바위 계단을 총총 오르면 중간 지점에 커다란 석탑이 있었다. 그걸 소원탑이라 부르며 아이들이 빙글빙글 돌았지. 너랑 같이 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다던 은찬이가 드디어 같이 살게 되어서 좋다고 방방 뛰었던 게 눈에 선했다.

회상을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환상으로 홀리듯 걸어 들어간 이소는 어느새 그 돌계단을 성큼성큼 오르고 있었다. 서른 개가 넘는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양 옆에 피어 있는 들꽃들을 실컷 구경하고, 커다란 대문 앞에 서서 고개를 빼면 연둣빛 덩굴이 휘감긴 담장 너머 수 많은 꽃이 핀 정원이 나온다. 이소는 천천히 대문을 열었다. 노란 등이 들어온 안채와 그 옆에 은은한 흰 등이 들어온 별채가 나란히 이소를 맞이했다.

‘이소 씨, 늦었네.’

해준의 정원에 있는 커다란 노송에 작은 전구를 잔뜩 달았다. 플라스틱 구슬 대신 색색의 종이꽃을 달며 해준이 해수에게 속삭였다. ‘이건 아빠 보고 달아 보라 할까.’ 상상 속 해수가 환히 웃으며 달려왔다. ‘아빠, 이거 아저씨가 달아 보래.’ 근래 통 웃는 낯이 없었던 해수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얼굴에는 흙이 잔뜩 묻었다. 이소가 해수의 얼굴을 털어 주며 손에 종이꽃을 받아 들었다. 종이꽃 안에 작은 전구가 들어 있어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퍽 예뻤다.

‘예쁘지.’

어느새 제 앞에 성큼 다가온 해준이 눈을 마주쳤다. 네, 예뻐요.

‘안아 올려 줄 테니 가장 높은 곳에 달아 볼래요?’

이소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가벼운 몸이 훅 들렸다. 어어, 어. 허리에 닿은 손이 따뜻했다. 노송의 가장 윗부분,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은 곳에 종이꽃을 달자 토록, 떨어지며 걸린 둥그런 모양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예쁘다.”

‘잘했어.’

해준이 이소를 천천히 내려 주었다. 이소는 고개를 돌렸다. 노송 옆에 선 해수와 해준이 이소를 보고 빙긋 웃었다. 해준의 겨울옷은 아직 본 적이 없었는데 반가웠다. 해준이 하얀 손을 들어 이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럼 또 봐.’

방금 우리 대화한 건가?

“응?”

“아빠, 내 말 들었어?”

해수가 이소의 손을 덥썩 당겼다. 이소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 또 멍 때리고 환상을 봤나. 이소는 펜이 번진 포스트잇을 구겨서 버렸다. 응, 해수야. 뭐라고?

“그럼 나중에 아빠가 무조건 소원 하나 들어주라구. 내가 비는 거 아무거나.”

“그래, 알았어.”

“약속한 거야.”

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한참 동안 제 허리를 잡고 트리 위로 올려 준 해준의 환상을 떠올렸다. 제대로 된 대화는 아니었지만 분명 같은 것을 보고 말을 나눴다.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뺨도 조금 붉어졌다.

이소와 해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앉아 있던 주영이 책을 덮었다. 잘 다녀왔어? 웃는 낯이 기대에 차 있었다. 이소가 주영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자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주영이 당황했다. 이소는 조금 민망한 듯 ‘명품샵 처음 가 봤는데… 그냥 제일 예쁜 거 샀어.’ 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대로 볼 줄 아는 것도 없지만 그래도 평소 주영이 즐겨 하던 브랜드를 기억하고 있었던 이소는 어울릴 만한 것으로 골랐다. 주영이 준 것에 비해 너무 작은 선물을 샀나 걱정했지만 주영은 얼마나 좋은지 그 자리에서 이소를 꼭 끌어안았다.

이소는 먼저 씻는다고 말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해수는 쭈뼛쭈뼛 몸을 돌려 올라가려던 때였다.

“해수야, 잠시만 와 볼래?”

주영이 해수에게 손바닥만 한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연락이 되는 게 좋겠지. 이제 학교도 다녀야 하고.”

해수의 첫 핸드폰은 해준이 사 준 것이었다. 주영의 집으로 옮기고 난 후에 해준의 배려인지 핸드폰은 먹통이 되었다. 해수는 그 점이 못내 서운했다. 아빠랑 안 만난다고 내 전화까지 못 쓰게 만들 건 뭐야. 그렇게 전화 없이 몇 달을 지냈다. 상관은 없었다. 원래 연락할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수는 주영에게 전화를 받아 들고 머뭇거렸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기종에 기능도 많은데 불구하고 덥썩 받기가 어려웠다. ‘괜찮아, 써.’ 주영의 말에 해수는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핸드폰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은 채 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계단을 막 오르려던 찰나 주영이 해수를 불러세웠다.

“참, 해수야.”

“네.”

“그 전에 쓰던 건 삼촌 줄래? 버려 줄게.”

주영이 손바닥을 내밀며 친근하게 웃었다. 해수는 주영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 제가 전에 살던 집에 두고 왔어요. 이제 안 쓸 거 같아서요.”

“아, 그래? 잘했어. 올라가서 쉬어.”

“네, 삼촌도요.”

해수는 1층 소파에 앉은 주영을 내려다보다 마저 계단을 올랐다. 작은 방문을 콩 닫으며 아직도 어색한 제 방을 둘러보았다. 이렇다 할 장난감도, 책도 없다. 바깥에서 뛰어노는 대신 발레를 했고 영어와 중국어, 독서와 국어 공부를 했다. 책장에는 그림책 대신 글밥만 잔뜩 있는 지루한 역사서뿐이었고 잠도 정해진 시간에 칼같이 자야 했다.

“하아…. 피곤해….”

주영과 같이 있는 것은 어색하다. 사람들은 일곱 살 난 자신을 무척 어리게만 봤지만 해수는 제 감을 믿었다. 이곳은 저나 아빠에게 편안한 곳은 아니다.

언젠가 고열에 달뜬 아빠를 만나러 갔던 자신은 문틈으로 주영이 이소의 이마에 입 맞추는 것을 보았다.

‘저건 해준 아저씨가 하던 건데.’

지금까지 살면서 해준을 제외한 누구도 이소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친한 어린이집 친구들 엄마도 이소에게는 그렇게까지 친하게 굴지는 않았다. 똑똑, 노크를 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문을 열었었다. 주영은 여느 때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영이 이소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해수는 모르는 체하며 주영을 올려다보았다.

‘아빠 걱정되어서요.’

‘그치, 나도 그래.’

‘괜찮아지겠죠? 금방 일어나겠죠?’

그럼 다 원래대로 돌아오겠죠? 해수의 마지막 질문에 주영의 눈썹이 움찔했다. 해수는 생각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얼마 안 되어 이곳을 나가서 해준 아저씨를 만나고, 그 집으로 돌아가기를. 아줌마, 아저씨와 함께 다시 밤새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 수 있기를. 자신을 내려다보던 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아빠가 다 잊어버리면 돼.’

‘다 잊어버리면요?’

‘응. 아빠가 속상한 일이 많았거든. 그래서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다 잊어버리고 깨끗해지면… 그럼 괜찮아져.’

주영은 그렇게 말하곤 이소가 얕은 기침을 하자 따뜻한 물을 가져오겠다며 일어났다. ‘넌 방으로 안 가니?’라는 말에 해수는 눈을 접어 웃으며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요.’ 하고 대꾸했다. 주영이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해수는 주영이 입 맞추었던 이소의 이마를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묘하게 더럽게 느껴졌다.

해수는 이소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또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미간이 조금씩 움찔댔다. 아빠, 나쁜 꿈 꾸는 거야? 오랜 시간 이소가 뒤척일 때마다 수차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제 자신도 일곱 살인데, 많이 컸는데도 이소는 여전히 자신을 아이로만 본다. 해수는 이소의 볼을 작은 손으로 문지른 뒤 귓가에 속삭였다.

‘잊어버리지 마, 절대로.’

이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나도 잊어버리면 안 돼. 속상하고 아픈 기억 때문에 힘들면, 내가 다 안아 줄게. 아빠가 울면 내가 옆에 꼭 있을게. 그러니까 절대로 잊어버리지 마. 다 기억해 내야 해. 알았지.’

해수는 발부리를 들어 이소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깊게 패여 있던 미간이 부드럽게 풀어지자 해수는 제 아빠의 뺨을 몇 번 더 쓰다듬다 주영이 오기 전 자리를 떴다.

때문에 그날 이후 주영이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잘 해 주려 하면 도리어 묘하게 불편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어 오히려 과장되게 미소 짓곤 했다. 하루 종일 같이 있을 때면 볼이 다 아팠다.

“문 잠갔나.”

해수는 문이 제대로 잠긴 것을 확인하고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가방을 꺼냈다. 주영에게는 안 쓸 거라고 놓고 왔다던 제 첫 핸드폰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해준이 사 준 핸드폰을 켜서 통화 목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랑하는 아빠’와 ‘사랑하는 아저씨’ 두 사람의 이름이 번갈아 찍혀 있었다. 언젠가 해준이 제 이름은 왜 ‘차해준 아저씨’로만 되어 있냐고 입을 비죽거렸을 때 해수는 눈을 깜박이다 잠들기 전 이름을 바꿔 주었다. 뭐 어차피 자신만 볼 건데 낯간지러워도 보기 좋은 이름이면 좋겠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정작 이 나쁜 ‘사랑하는 아저씨’는 제가 필요할 때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열 통 넘게 했는데.

“내 번호도 차단하고.”

해수는 한참 제가 걸었던 발신 목록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주영의 집에 오고 나서도 전화가 다시 걸려오는 일은 없었다. 당연했다. 먹통이니까. 해준은 그렇게 저희를 떠났다.

해수는 앨범에 들어갔다. 카메라를 제대로 쓸 줄 몰라 어지럽게 찍은 사진들을 한 장씩 넘겼다. 팔이 짧아 셀카를 찍어도 얼굴의 반이 잘리거나 한 사람의 얼굴만 대문짝만하게 나왔지만 저택에 사는 식구들의 그리운 얼굴이 화면 안에 있었다. 해수는 누가 보기 전에 핸드폰 전원을 끄고 다시 집어넣었다.

해수는 창문을 열었다. 커다란 마당도 없고 친구들도 없었다. 예전에 작은 빌라에 살 때는 그래도 할머니와 함께 놀이터도 자주 갔었는데, 이곳에는 마땅한 놀이터도 산책로도 없다. 밤이 되면 해수가 있는 이 커다란 별장만 불이 들어왔고 가끔씩 우르륵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났다. 어쩐지 은찬이, 세현이가 살던 그 저택과는 아주 먼 곳에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나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어….”

해수는 이제는 어두워 검게 물든 산등성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외롭고 쓸쓸한 크리스마스였다.

* * *

“해수가 이번 테스트에서도 C를 받았어요. 저번 주만 해도 B였는데 이번 주엔 아예 숙제를 안 했더라고요. 기초적인 문법을 틀릴 리가 없는데… 생각보다 수재는 아닌가 봐요.”

“아이가 힘들어하긴 해요. 우선은 쉬는 게 좋겠네요, 다음 주에 뵐게요.”

이소는 방문교사를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성질머리하고는. 아이가 듣는 앞에서 저렇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은 무례하고 이기적이다. 저렇게 말하고 나면 아마 오기로 달려들어 공부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건 그저 자존감만 뭉개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해수야, 선생님 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아, 정말 싫어.”

해수는 방금 받았던 학습지를 북북 찢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를 대충 쓰레기통에 밀어 넣고 해수는 책상에 엎드렸다. 이소는 해수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해수가 울먹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거 18살이 하는 수준이랬단 말이야.”

“알아, 해수 대단하지.”

“어제도 발레 하는데 다리 아프다고 쉬고 싶다고 했는데 선생님이 다른 애들은 다 하는데 왜 넌 못 하냐고 그랬어. 다른 애들 다 잘하는 걸 내가 못할 수도 있는거 아니야?”

“맞아.”

“그런데 왜 어른들은 다 잘해야 한다고만 말해?”

그러게. 해수는 휴지를 퍽퍽 뽑아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정말 힘들어, 못 살겠어. 일곱 살인데 못 살겠다는 말을 한다. 이소는 해수의 곁에 가까이 앉아 두 손을 모아 잡았다.

“해수야, 아빠가 오늘 소원 들어줄게.”

“무슨 소원?”

“그때 해수가 말하는 거 아무거나 아빠가 들어주기로 했잖아.”

이소의 말에 해수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들어줄 거야?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듯 해수가 벌떡 일어나 돌연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랍 속에 몰래 숨겨 둔 간식과 고급 연필과 지우개 세트, 과자를 먹고 모은 스티커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양말과 속옷도 챙겼다. 이소가 다급하게 해수를 붙잡았다.

“왜, 왜. 어디 여행 가려고?”

해수가 목도리를 둘러맸다.

“나, 다시 그 동네 가 보고 싶어.”

“어디.”

“우리 살았던 동네.”

가서 친구들한테 선물 주고 오고 싶어. 이소는 말을 잃었다. 거기를 다시 가자고? 이소가 머뭇거리고 말을 못 하자 해수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안 돼? 자고 오는 거 아니고 그냥 선물만 주고 올 거야. 내가 얼른 들어가서 문 앞에서 선물만 주고 올게.”

나 혹시 몰라서 이번에 애들 선물도 엄청 샀거든. 해수가 신이 나서 가방을 열어 보여 주었다. 이소는 입술을 매만졌다. 혹시나 마주치거나 내가 그 사람을 발견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소는 마른침을 삼켰다. 또 그때처럼 발작을 하거나 기절해 버릴까 봐 솔직히 무서웠다. 무엇보다 주영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해준은 자신에게 접근 금지 명령도 받았다. 경찰이 개입할 것이다.

“해수야, 근데 그거는….”

“아빠, 제발. 아빠가 싫으면 아빠는 그냥 저기 멀리 서 있어. 나 길 다 아니까 혼자 갔다 올 수 있어.”

이소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망설인다는 것은 단지 해수의 요청을 들어주기 곤란해서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궁금했다. 해준이 혹은 그 식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먼 발치에서라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직 점심시간이니까 지금 갔다가 얼른 돌아오면 저녁 시간 전에 주영 몰래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 생기면 해준이 접근한 것이 아니라 제가 원해서 간 것이라고 둘러대면 된다.

“아빠아- 소원 들어준다며어-”

“그럼 준비하고 나와, 옷 단단히 입고.”

“꺅!”

해수가 방방 뛰며 이소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좋을까. 이소는 해수에게 준비를 하라고 말한 뒤 방으로 돌아와 안정제를 두 알이나 털어 먹었다. 혹시 모를 진정제 주사도 챙겼다. 옷을 단단히 입고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던 이소는 문득 1층에 서 있는 경호원이 생각나 이마를 쳤다. 이러고 나간다면 분명히 들킬 텐데.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소는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척을 하며 경호원에게 ‘약을 먹었더니 졸리네요. 해수랑 같이 2층에서 잘게요. 내려올 때까지 따로 깨우지 마세요.’ 하며 거짓말을 했다.

경호원이 안 볼 때 두 사람은 살금살금 내려와 주방 뒤쪽에 있는 쪽문으로 나가 동네 어귀에서 택시를 탔다. 더블로 준다고 했더니 총알처럼 달렸다. 따라오거나 감시하는 사람 하나 없이 자유롭게 바깥을 나선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동네는 여전히 적막했다. 택시 기사마저도 ‘이 동네는 뭐가 이렇게 조용하고 사람이 없소.’ 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소와 해수는 입꼬리가 올라가 도통 내려올 줄을 몰랐다.

해수가 즐겨 가던 놀이터에 사람이 없어도 즐거웠다. 한겨울이었지만 거기서 미끄럼틀을 한 번 타고 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정숙과 함께 살았던 빌라 자리는 깨끗하게 밀려 있었다. 원래 건물이 있었던 곳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빈 공터만 남았다. 주위에 부동산이나 정육점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가 집이 있던 자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수와 이소는 천천히 발길을 언덕으로 옮겼다. 걸음걸음을 옮길수록 심장이 뛰었다. 약 먹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해수의 손을 쥔 주먹에서 땀이 배어났다. 익숙한 담장이 보일 때 즈음 해수가 먼저 이소의 손을 놓고 달려 나갔다. 누군가 대문을 열고 나올까 봐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해수는 멀찍이 서 있으라고 했지만 어떻게 일곱 살짜리를 혼자 보내나 싶어 이소는 한 걸음 뒤에 서있었다.

해수는 문을 두드렸다.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은찬아!”

대문을 흔들었지만 안쪽은 고요하고 조용했다. 꼭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이소도 목을 빼어 담장 안쪽을 훑어보았지만 인기척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이 집에 살았던 몇 달이 꿈같이 느껴졌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쓰레기를 줍던 환경미화원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부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이 집에 저희 애기 친구가 있어서.”

“여기 사람들 몇 개월 전에 이미 다 나갔는데?”

“네? 어디로 갔는데요?”

해수와 이소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미화원은 자세한 것은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야 모르죠. 그 전에 여기서 일하던 사람이 집주인하고 쌈 나서 죽었다잖아요. 그 뒤로 사람들이 쉬쉬하고 영 께름칙해하더니 어느 날은 보니까 짐을 우르르 싸서 나가더라고. 가끔 영감 하나가 왔다 갔다 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사람 죽어 나간 집에 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다지만 영 찝찝하잖어.”

이소는 해수가 들을까 봐 귀를 막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는 식구들이 모두 떠나 버렸다는 말에 시무룩해졌다. 외출이라도 했으면 편지라도 놓고 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놀이터 그네에 걸터앉았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이소는 해수의 안색을 살피며 맘을 졸였다.

해수가 그네줄을 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빠, 우리는 이제 그 집 다시는 안 가?”

“다들 떠났다잖니.”

이소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오늘 드라마틱하게 마주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나오기 전에 머리도 일부러 두 번씩 감고 향수도 뿌렸는데 섭섭하고 아쉬웠다.

“아빠는 아저씨 안 보고 싶어?”

이소가 대답하지 않자 해수가 발끝으로 흙바닥을 긁었다. 지난 몇 달간 한 번을 보챈 적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생활을 바꾼 것이 어린 해수에게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였는지 알면서도 살뜰히 보살피지 못해 미안했다. 체념을 너무 빨리 알려 준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해수는 이소가 대답이 없어도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꼭 예전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말을 나누던 때와 비슷했다.

“난 보고 싶어. 아저씨도 보고 싶고, 은찬이도 세현이도 희주 오빠도 보고 싶어. 주방 아주머니랑 건넛방 아저씨도 보고 싶고, 친구들하고 학교도 같이 다니기로 약속했었어. 약속했었다구.”

“해수야.”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고, 설날도 같이 보내고 추석에는 송편도 빚기로 했었어.”

“알아, 아빠도. 근데 지금은 상황이….”

“아빠도 보고 싶잖아.”

“…….”

“그래서 밤마다 창문 열어 놓고 자는 거지. 나도 친구들 보고 싶어서 자주 창문 열고 밖에 봐.”

해수가 그렇게까지 그리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가끔씩 창문이 덜 닫혀 있으면 고뿔이 들까 봐 닫아 두곤 했는데 그런 이유일 줄은 몰랐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저씨는 아빠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그럴까.”

이소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넌지시 기대를 내비쳤다. 일곱 살 난 아이 앞이어서 제 마음을 다 내보일 수 있는 게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주영의 앞에서는 일부러 꼭꼭 감춰 뒀던 무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응. 사랑하니까.”

눈이 오려나. 축축한 한기가 섞인 바람이 불었다. 이소가 바람이 빠지는 소리로 웃어넘겼다.

“우리 해수가 사랑도 알아?”

“응. 왜 몰라.”

“사랑이 뭔데?”

기껏해야 안아 주고 싶다든지, 옆에 있고 싶다든지, 같이 놀고 싶다든지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해수는 한참 동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똑똑해도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다. 이소가 숨을 들이켜려던 때 해수의 작은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사랑은 나만 보고 싶은 거야.”

다른 사람한테 보여 주기 싫어서 숨겨 두고 나만 보려는 마음인 거야. 해수는 사뭇 진지했다.

“아빠가 그랬잖아. 나 애기 때 장롱에 들어가고 이불 속에 왜 숨어야 하냐고 물어보면, 아빠가 나를 사랑하니까 아무한테도 안 보여 주고 싶어서 감춰 두는 거라고 했잖아.”

해수의 존재를 들킬까 봐 꼭꼭 숨겨 두고 키우는 지난한 시간들, 어린 해수를 설득하기 위해 그럴싸한 이유를 골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해수의 귓가에 ‘아빠가 해수를 너무 사랑해서 해수만 보고 싶어. 해수가 어디 안 갔으면 좋겠어. 아빠 옆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하고 속삭이곤 했다. 그럼 어린 해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응! 옆에 있을게!’ 하고 폭 안겨 오곤 했다. 그렇게 재우고 도망다녔던 숱한 밤들이 있었다.

“해준 아저씨는 아빠를 많이 사랑해. 그러니까 항상 아빠만 보고 싶다고 하고, 아빠 옆에 있으려고 그랬지. 다칠까 봐 맨날 안고 다니고, 아빠 아프면 제일 먼저 달려오잖아. 그리고 아저씨 나랑 약속했거든.”

해수는 그네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언제 이렇게 훌쩍 컸지. 바닥에 발돋움을 하고 몸을 일으킨 해수의 키가 부쩍 자라 있었다.

“아빠 울리지 않기로 했어.”

이소를 바라보며 씩 웃은 해수가 얼른 시계를 보며 손짓을 했다. 이소 역시 천천히 일어나 놀이터를 벗어났다. 택시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제멋대로 만들어 낸 기억 속 해준은 ‘또 봐.’라고 했었다. 또 볼 수 있는 걸까. 나는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걸까. 어지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릎을 베고 누운 해수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이소는 미소 지었다.

이 어리고 예쁜 것에게 이제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듣게 되는 날도 오네.

집에 돌아가는 한 시간, 이소는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해준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어쩐지 무섭지는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