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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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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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가 잠이 들고 나서야 병실 문이 닫혔다. 복도 벽에 기대선 해준은 마치 속이 빈 밀랍 인형 같았다. 본래도 창백했던 낯이 더 희게 질렸다.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때아닌 소동에 웅성거리며 모여들었고 의사와 관계자들이 어서 들어가 쉬라며 사람들을 물렸다. 그 사이를 몸이 건장한 남자 두 명이 가로질러 걸어왔다.
“차해준 씨.”
해준이 가라앉은 눈동자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채가 사라진 지 오래인 눈은 탁한 호수와 같다.
“차해준 씨, 당신에게 윤이소 씨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여 면회를 요청하였고 불법 감시 및 물리적 폭행이 의심되는 바 지금 즉시 접근금지 가처분을 발효합니다. 윤이소 씨를 포함한 가족 구성의 주거 또는 직장에서 100미터 이내로의 접근이 금지되고 핸드폰, 인터넷 등을 포함한 전기 통신을 이용하여 연락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지금과 같은 사례에서는 윤이소 씨와의 따님과의 연락도 일체 허용되지 않습니다. 말을 덧붙인 형사들이 해준의 양옆에 섰다.
“…해수를 데려간다고요?”
갈라진 목소리에 담긴 다급한 속내가 드러났다. 형사는 예상했다는 듯 입술을 축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해수 양의 신변 보호를 위해 윤이소 씨가 미리 부탁하신 겁니다. 두 분 사이도 그렇고 차해준 씨 평판이 나쁘지 않아 그래도 설마 했는데, 오늘 저지르신 일을 보니 윤이소 씨가 제대로 사람 봤네요.”
“…….”
“우선 서로 가시죠.”
해준은 굳게 닫힌 병실 문을 한 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다급하게 달려온 주영이 이소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이소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손을 잡는 주영을 보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차해준 씨. 형사가 해준을 채근했다. 해준은 목이 메어 왔다.
* * *
“교수님, 좀 드셔 보실래요?”
어린 형사가 유치장 앞에 짜장면을 쥐고 쪼그려 앉았다. 해준은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나하게 취한 취객이 웨엑 구토를 하며 해준의 허벅지에 이마를 기댔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야, 교수는 개뿔. 신경 쓰지 마라.”
“에이, 어떻게 그래요. 이분 어제저녁에 들어와 놓고 여태 한 끼도 제대로 안 먹었는데.”
“야, 일로 와 봐.”
어린 형사가 경위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경위가 귀를 잡아끌고 속삭였다. 애인한테 접근 금지 처분 당했는데 억지로 보러 갔다가 차여서 지금 사람 꼴 아니야, 내버려 둬. 어린 형사가 눈을 크게 떴다. 애인이요? 그 병원에 있던 게 애인이었어요? 경위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짜장면이 들어가겠냐.
“대박.”
갓 스물여섯이 된 어린 형사가 고개를 흔들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불어 터진 짜장면을 내려놓고 턱을 괬다. 어젯밤 조용히 서에 들어온 저 남자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속이 텅 빈 인형처럼 저러고 있는 걸까 싶었는데.
얼마나 사랑하면 고작 이별 따위에 저렇게 넋을 잃는 거지. 남자들의 사랑은 좀 더 특별해서 애절하고 그런 건가. 어린 형사는 코를 긁어내리며 서류를 내려다봤다.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해온그룹 외동아들, 해온예술재단 전무이사… 재산이… 와, 존나 재벌이네. 어디 하나 빠질 것도 없고 잘나기만 한 저 사람을 찰 만한 사람이면 존나 대단한 사람이겠지.
웅-웅-웅-
해준이 제출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린 형사는 화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우리 공주님]
“경위님, 차 교수님 결혼하셨어요?”
“미혼이라고 하던데.”
“딸 같은 사람한테도 자꾸 전화 오는데요.”
“냅둬. 아마 윤이소 씨 딸일 거야. 애가 어려서 뭘 몰라서 전화하나 보다. 어차피 접근금지 때린 상태니까 그 번호도 삭제하고 차단해라. 만나게 하면 안 돼.”
“예에.”
어린 형사는 벌써 열 통이 넘게 걸린 부재중 전화를 내려다보며 착잡하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연신 걸려오는 전화를 거절한 뒤 말없이 조용히 번호를 차단하고 삭제했다.
돌연 깨끗한 구두 소리가 서의 눅눅한 바닥을 차분하게 가르고 들어왔다. 의자에 기대어 이를 쑤시던 소장이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켰다.
“엇, 윤 회장님 아니십니까. 여기는 어쩐 일로-”
“면회를 좀 할까 하는데요.”
“아이고, 그럼요. 얼마든지 하십셔. 근데 여기가 좀 누추해서. 야, 거기 토한 거 치워라, 씨발 냄새난다.”
순경들이 분주하게 토사물을 치우고 유치장에 널브러진 취객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어린 형사가 눈치 없이 주영에게 ‘면회는 10분만 가능합니다.’라고 알려 주다 뒤통수를 맞고 끌려 나갔다. 주영은 창살 앞에 섰다. 해준은 주영이 온 것을 보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차해준 교수님.”
해준은 말이 없었다.
“이소의 발작은 멎었습니다. 현재까지 안정된 심박수를 유지 중이고 조금 전엔 미음도 먹었어요.”
주영은 이소의 상태를 전해 주었다. 해준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주영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차 교수님이 저를 못 믿는 거 알고 있습니다. 이소의 상황을 모두 들었을 테고, 그동안 이소가 얼마나 많이 힘들어했는지 옆에서 지켜보시면서 저에 대한 적의나 불쾌함이 크다는 것 역시 이해합니다.”
주영의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이소와 음색이 비슷했지만 어조는 보다 더 단단하고 차분했다. 오랜 시간 다져진 기품과 여유가 묻어 있었다.
“이소가 차 교수님과 지내면서 안정적이고 편안한 생활을 지속한다면야 저 역시 말리거나 이별을 권유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동안 이소는 정말 많이 외로워했고, 곁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난 7년간 제가 떨어져 있어 이소와 해수를 돌봐 주거나 보호할 수가 없었어요. 때문에 차 교수님께서 이소에게 해 주신 금전적, 정신적인 보살핌은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죽어 있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주영과 메마른 시선이 얽혔다. 정중한 어조와 달리 눈동자에는 적의가 감돌았다. 어쩐지 눈동자에 조소가 섞인 듯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이소에게 현재의 차 교수님은 위협적인 존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연인에 대한 근거 없는 의심과 집착, 불법 감청과 사생활 침해, 폭행 사주 및 협박 등 여러 사유가 있겠지만서도.”
주영을 마주한 해준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 동생이 그런 처참한 일을 당해야 했던 이유가 다른 사람도 아닌 차 교수님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제 기분을 정말 좆같게 만들어요.”
주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이소의 열쇠고리를 철창 안으로 툭 밀어 넣었다. 처참하게 밟혀 망가진 빨간 자동차 키링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내부에 있던 사이렌을 제거하셨더라고요.”
해준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자동차에 닿았다. 기분 나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장난감 자동차에 설치된 사이렌치고는 고기능 경보기였고 분명 무슨 의도가 있겠거니 해서 제거해 버렸다.
“차 교수님 곁에 있다간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호신용으로 넣어 놓은 겁니다.”
주영은 숨을 몰아쉬었다. 병실에 앉아 있던 이소는 장난감 자동차를 만지작거렸다.
‘형, 이거 작동이… 안 됐어. 그때 분명 소리 났었는데 고장… 났나 봐.’
고장이 난다고. 주영은 이소가 제 손에 쥐여 준 장난감 자동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미세하지만 뜯었다 붙인 흔적이 있었다. 기술자의 짓이다. 자동차를 내려다보고 있는 주영에게 이소가 쓰게 웃었다.
‘하필 그때 고장이 나서…. 너무… 무서웠거든…. 그때 그 남자들이….’
‘더 말 안 해도 돼. 이소야, 더 말하지 마.’
이소는 손을 떨며 머리를 감싸 쥐고 눈을 감았다. 주영은 이소를 끌어안았다. 무서웠지, 그 쓰레기 새끼들 내가 다 죽일 거야. 울지 마, 울지 마. 그리고 이 꼴 당하게 한 그 사람도 나는 용서 못 해.
주영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쯤 이소는 곤히 잠든 채 제가 관리하는 별장으로 이동 중일 것이다. 차해준은 모르는, 안다고 해도 접근할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이소를 성심성의껏 돌봐야 했다.
“제가 이소에게 기꺼이 내민 선의까지 당신이 직접 잘라 낸 결과는….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축제 때문에 거리 곳곳에 경찰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으로 경보가 울렸다면 아마 더 빨리 구출될 수 있었겠죠. 그 험한 꼴 안 당하고. 주영은 볼 안쪽을 느리게 훑었다.
“부친께서 해온그룹 차종규 회장님 맞으시죠. 저희랑 과거에 연이 좀 있던데.”
“그쪽도 사람 캐는 게 취미신가 보지.”
해준이 낮게 뇌까렸다. 해온그룹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준경을 포함한 몇몇 주요 인사들을 제외하곤 비밀에 부쳐진 사안이었다. 해준은 자신의 이름이 부친의 회사와 엮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으며 드러내놓고 다니는 편도 아니었다. 이미 지금 가진 제 커리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소에게도 언질은 했지만 순진한 이소는 그저 회사 하나 더 다니시나 보다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무렴요. 차 교수님께서도 저희 그룹에 관심 많으신데.”
주영이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청렴하신 부친과 달리 아드님께서는 구정물에 손 담그는 것을 개의치 않아 하시는 것 같아 좀 의외였습니다만, 전날 하는 양을 보아하니 길바닥을 구르던 습관은 못 버리는 것 같네요.”
고아 출신이라더니. 나른하게 웃던 주영은 주머니를 뒤적이다 ‘아, 여기 실내지.’ 하며 담배를 구겨 넣었다. 필요 없는 제 과거사까지 늘어놓는 주영을 바라보며 해준은 하,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출신 자격 운운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비아냥대는 건 이쯤 하죠.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자면, 이소의 상태가 생각보다 많이 안 좋습니다.”
주영이 천천히 눈을 치켜떴다. 윤이소보다 훨씬 밝은 담갈색의 눈동자는 오만하고 차가웠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고 환각을 자주 봅니다. 그날 있었던 일이 어떤 것인지 이소 역시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는 상태라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일반인은 구하지도 못하는 환각성 마약이 다량 주입되었고 이로 인해서 반영구적인 뇌손상이 올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이런 이소가 현재 안심하고 만나는 사람은 저와 딸 해수뿐이에요.”
차 교수님이 아니라. 주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해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철창만 없었으면 당장 저 목을 잡고 입을 찢어 버렸을 것이다. 주영은 못 참겠는지 고개를 돌려 ‘소장님, 담배 한 대 태워도 됩니까.’ 물었다. 어린 형사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소장은 ‘예예, 그러믄요.’ 하며 창문을 열었다. 추적추적 비가 열린 창문 틈으로 탁탁 소리를 내며 새어 들어왔다.
주영은 담뱃불을 붙였다. 후, 천천히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이소 참 예쁘죠.”
착하고 순하고 누구 미워할 줄을 모르고. 주영은 지난 시간을 회상하듯 시선을 내렸다. 빗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평생을 그 좁은 방에서 갇혀 살았어요. 내가 해 주는 것이 아니면 금전적인 지원도 없었고, 언제나 눈치 보며 생활하고. 그게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땐 저도 너무 어려서 적극적으로 손을 써 줄 수가 없었어요.”
고작 4살 차이라. 툭툭 떨군 담뱃재가 바닥에 무심하게 떨어졌다.
“그래서 유학할 때 데려가려고 했었습니다. 똑똑한 아이니까, 커다란 세상에서 헤엄칠 수 있도록 풀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학대와 구박없이 자유롭게 웃길 바랐고, 공부가 끝나고 나면 제 곁에 비서로 둘 생각이었습니다. 적어도 제 밑에서 일하면 평생 잘릴 걱정은 없을테니까요.”
“당신들이 가로챈 상속금을 이소 씨가 정당하게 돌려받기만 했어도 그럴 일은 없었겠지.”
“그랬으면 더 돈독했겠죠.”
주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지막 필터를 깊게 빨아들인 후 내뱉은 주영이 눈을 마주쳐 왔다.
“착한 이소는 가진 것 없는 우리를 기꺼이 품어 주었을 테니까.”
가엾은 사람들을 보면 제 것을 다 나누는 심성을 가졌거든요. 그래서 차 교수님까지도 불쌍히 여겼겠죠. 담배를 다 태운 주영은 꽁초를 바닥에 떨궈 비벼 껐다. 이 미친 새끼가, 해준이 이를 악물었다. 주영이 관자놀이를 긁어내렸다.
“저 역시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소의 몫으로 돌려놓은 지분도 온전히 전달할 거고, 신분 회복도 시켜 줄 겁니다. 저희 아버지가 꾸민 일들이 워낙 지저분한 것들이라 제가 수습하는 데 조금 애를 먹었지만…. 아무튼 제가 이소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차 교수님과 한 배를 탔다고 해 두죠.”
“개소리.”
주영은 여전히 적의를 드러낸 해준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제가 영 뒤가 구린 것 같고, 속이 검은 것 같고….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으시죠. 당신처럼 뒷공작을 꾸미는 것 같고, 이소를 감금하고 구속할 것 같고. 하지만 전 차 교수님과 다릅니다. 진정한 가족으로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요.”
“…….”
“괜한 피해망상으로 저를 미워하는 건 그만두세요. 집착이 병이라는 사실은 고매하신 교수님께서 잘 아실 텐데요. 지금은 누가 더 이소를 사랑하는지 저울을 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전 지금 이소의 가장 가까운 법적 친족으로서 심신이 불안정한 동생을 돌보고 챙길 의무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온 겁니다.”
주영이 철장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자세를 정갈히 다듬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영에게 가 닿았다. 해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영이 철창 안에 선 해준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에 대한 개인적인 적의는 부디 접어 두시고, 이소를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이소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 전…. 더 이상 이소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이소가 없는 지난 시간 후회와 슬픔에 빠져 살았어요. 다시는 동생을 잃고 싶지 않아요.”
갑작스러운 주영의 행동에 서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채 당황했다. 해준은 말을 잃었다. 철창 안에 있는 일개 교수에게 굴지의 기업 회장이 머리를 숙이고 동생을 놓아 달라 간언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주영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진심이 전해졌길 바랍니다.”
해준이 말없이 주영을 내려다보자 주영은 시선을 떨구고 몸을 돌렸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구두 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맙소사, 어린 형사가 과장되게 입을 벌리며 고개를 저었다. 소장과 여타 경찰들은 주영이 나간 자리를 보며 역시 교양 있는 사람은 다르다며 박수까지 쳤다.
철창 앞에 선 해준의 코에서 돌연 후두둑 코피가 흘러내렸다.
‘정말 좆같군.’
머리가 어지러웠다. 과다출혈 후유증으로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로 피가 몰려 약해진 혈관이 터졌다. 때로는 눈의 실핏줄이 다 터졌고 종종 코피가 흘러 오래도록 멎지 않았다. 어어, 교수님 코피 나세요! 뒤늦게 해준을 발견한 어린 형사만 황급히 휴지를 밀어 넣어 주었다. 뚝뚝, 핏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주영이 떠나고 난 자리, 불쾌감은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 * *
“교수님이 오후부터 열이 좀 났어요. 해열제도 안 드셔서….”
어린 형사가 문 앞에서 끝까지 배웅을 했다. 준경은 가볍게 묵례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
준경이 경찰서의 바깥에 선 해준에게 두부를 내밀었다. 해준이 피식 웃었다.
“누가 유치장에 하루 들어갔다 나온 걸로 두부를 먹습니까.”
해준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한입 베어 물었다. 준경은 해준이 한 입 베어 문 두부를 잘 감싸 다시 검은 비닐봉지에 넣었다. 해준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준경은 말리지 않았다.
“문 집사님.”
“네, 도련님.”
오전부터 내린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없었다. 구두가 젖어 들었다. 해준의 담배 연기가 내리는 비에 맥없이 흩어졌다.
“…내가 정말 그에게 독(毒)일까.”
“현재로서는요.”
해준이 힐긋 준경을 흘겨봤다. 이럴 때는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해 주면 덧나? 그러나 준경은 네온사인이 비치는 비 웅덩이에 시선을 던졌다.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얼마나.”
“…꽤 많이요.”
“기다리라고 하면 얼마든지 기다릴 텐데.”
“…….”
“영영 내게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준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해도 오고 가는 감정에 대해 쉽사리 말을 얹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것이 사랑이라는 형태라면 더 그랬다. 해준은 그 후로 몇 개비를 더 피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해준은 결국 고열을 안고 잠들었다. 주영은 주치의 병덕에게 연락을 했고 한 시간 정도 후 도착한다는 말에 해준을 좀 더 재우려고 부러 멀리멀리 돌아 집으로 향했다. 이소 역시 정신적인 충격과 외상이 크겠지만서도 해준의 자상 역시 만만찮게 심각했다.
수십 번을 칼에 찔리고 온몸에 멍을 달고서도 이소를 보겠다고 병실을 건너가고 거부당하고 다시 찾아가기를 여러 번. 세상 알기를 우습게 알았던 해준의 마음에도 여러 겹의 상처가 덧입혀졌을 테다. 해준 역시 오랜 치료가 필요하다.
이소를 원망할 수도, 해준을 탓할 수도 없었다. 나이 든 준경이 보기에는 두 사람은 같이 있을 때 무척이나 서로를 위했으며 사랑해 마지않았으니. 상황과 방법이 어긋났을 뿐이다. 결핍된 구석이 비슷했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꼭 맞는 것 같은 인연이라 준경은 못내 둘이 이렇게 되어 버린 지금 상황이 아쉽고 안타까웠다.
시동을 끄고 차 밖에 나와 옷매무새를 정돈할 때 즈음이었다. 저 멀리서 동희 씨가 달려 나왔다. 다급해 보였다.
“집사님.”
“잘 왔어요, 민 의원 곧 도착해요. 미음을 미리 준비해 줘요. 도련님 열이 심하니.”
“아이,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동희 씨가 헉헉대며 입술을 머금었다. 감이 좋지 않았다.
“해수요, 조금 전 경찰이 데려갔어요. 도련님께서 이소 씨 접근 금지 명령 떨어지면서 해수도 지금 보호자에게 이관할 거라고 말하곤 데려갔다고요. 이소 씨 지금 병원에 누워 있을 텐데 해수는 누가 돌보죠? 보호자가 바뀌었어요? 왜 제 전화 안 받으셨어요!”
준경의 동공이 흔들렸다. 동희 씨는 안달복달을 하며 발을 구르더니 핸드폰을 들어 준경의 눈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10분 전에 뜬 속보예요. 이거 도련님 얘기죠.”
준경은 핸드폰 화면에 뜬 영상에 시선을 두었다. 등산객이 발견했다는 피 묻은 천에서 와르르 흉기가 쏟아져 내렸다. 준경은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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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일음동 폐건물 근처 산기슭에서 발견된 흉기들의 정체가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피가 묻은 칼과 손도끼 등을 미루어 보아 근처 조직폭력배들의 알력다툼이 있었다고 예상한 가운데, 칼날과 도끼 자루에서 난데없이 국립대 미술 대학 교수로 재임중인 차 모씨의 지문과 혈흔이 나온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근처 건물을 조사한 결과 버려진 폐건물 5층 바닥과 벽면에서 다량의 루미놀 반응이 일어나면서, 단순 폭행사건이 아닌 시신을 의도적으로 폐기한 살인사건이 아닌지 현재 확인 중에 있습니다. 이에 검찰은 현재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다 퇴원한 차 모 교수를 위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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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이 화면에서 눈을 떼자마자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경찰차 5대가 도착했다. 차 문이 열리자 중무장을 한 경찰들이 총을 겨누며 준경과 동희 씨, 해준의 차를 에워쌌다. 동희 씨는 당황해 짧은 비명을 지르며 준경의 등 뒤로 숨었다. 준경은 말없이 양손을 들어 머리 위에 올렸다.
경찰들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차해준 씨, 당신을 현 시각으로 고태균 외 여덟 명 살해 혐의 및 불법 감청, 청부 폭행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동희 씨가 질린 얼굴로 입을 막았다. 준경이 슬쩍 시선을 내려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소란에도 해준은 새액새액 잠만 잘 자고 있었다.
‘성가신 일에 휘말린 줄도 모르고 안쓰럽게 잘만 자는군.’
열에 달뜬 두 뺨이 붉었다. 가더라도 약은 먹이고 가야 할 텐데. 준경의 한숨이 차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