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38/50)

6

“윤이소 환자분 혈액에서 약물 양성 반응 확인했습니다. 이쪽 환자분도 바로 수술실로 옮기겠습니다.”

해준과 이소 모두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각각 수술실과 중환자실로 찢어졌다. 해준은 약 16군데의 창상, 셀 수 없는 타박상, 이마와 눈가가 찢어졌고 어깨에 못으로 찍힌 것 같은 자상으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이소는 급성 약물 투약으로 인한 쇼크로 의식을 잃었지만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기에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소 님께서, 몰래 생일파티 준비하시는 거 아십니까.’

‘알지, 엄청 귀여워요. 그냥 끝까지 모르는 척할까 봐.’

‘기왕이면 그날은 들어오시죠. 다들 이소 님과 처음 맞는 생일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문 집사도?’

‘그럼요. 제가 이소 님 다음입니다.’

준경답지 않은 말에 해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바로 얼마 전이었다.

“해준아….”

준경은 피에 푹 젖은 해준의 셔츠를 움켜쥐고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해준은 약 12시간 동안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외상뿐만 아니라 깊숙이 찔린 칼들이 장기를 손상시켜 안쪽까지 꼼꼼하게 붙이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소의 뇌파는 불안정했다.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 안에서도 빠르게 춤을 추는 눈동자를 확인한 준경은 꽤 시간이 필요할 것을 직감했다. 병원 관계자에게 최대한 이소를 신경 써 달라고 전언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폐건물에 모습을 드러낸 준경은 주변을 살폈다. 정말로 죽인 것은 아니었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은 핏자국만 남기고 사라져 있었다. 청소업체를 불러 핏자국을 제거하고 풀숲에 떨어진 시신을 찾으러 일 층으로 내려갔다. 얼굴이 돌에 찍혀 알아볼 수 없는 남자의 시신을 두고 준경은 고 대표의 사람일 거라 추측했다. 시신은 들것에 실려 청소업체가 가져갔다. 건물을 홀로 올라간 준경은 해준이 남긴 것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낡은 폐건물에는 CCTV도 목격자도 없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청소업체 직원이 흰 운동화 두 짝을 들고 준경을 마주했다. 이소의 운동화였다. 어쩐지 신을 벗고 있더라니. 준경은 잠시 고민하다 버려 달라고 했다. 여기서의 기억은 모조리 두고 가야 한다. 문득 해준의 품에서 낭창거리던 그 작은 발을 떠올렸다. 이소의 발이 땅에 닿는 것도 아까워 안고 다니던 해준의 모습이 선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날 저택에 돌아온 준경은 문간에서 식솔들을 마주쳤다. 다들 어제 축제를 신나게 즐기고 돌아온 여흥이 남아 표정이 밝았다. 낙원댁이 기분을 내어 해준의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다. 오늘은 이소 님이 도련님을 어디 못 가게 잡아 두신다고 하셨으니 해준의 생일을 다 함께 보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 때문이었다. 문 앞에 선 준경이 불안한 표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자 식솔들의 표정이 하나둘 굳기 시작했다. 준경의 전언 이후, 케이크를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애써 만든 하얀 케이크는 흙바닥을 굴렀다.

준경은 옷을 갈아입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 해수를 불러세웠다. 어젯밤부터 다음 날 점심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는 아빠에 대해 궁금치도 않은지 은찬과 희주와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해수야, 할애비 좀 보자꾸나. 해수가 흙이 묻은 바지를 털며 준경의 곁에 앉았다.

“해수야, 아빠가 지금 병원에 계시단다.”

“왜요?”

천진함을 담고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맑았다. 준경이 해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조금, 조금 아프셔서 병원에 계시는데 약을 좀 먹어야 한다는구나.”

“아저씨도 병원에 같이 있어요?”

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빠랑 아저씨 언제 오는데요? 묻는 말에 준경이 조용히 해수를 끌어안았다. 걱정 마라, 금방 올 거다. 금방. 문득 교통사고로 먼저 간 딸 애 얼굴이 떠올랐다. 딸 아이의 사고 이후 준경은 젊은것들의 목숨이 간당간당하면 심장이 설깃해졌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해준의 생일은 어김없이 주인이 없이 지나갔다. 늦은 밤, 일곱 살 해수는 말없이 행랑채 툇마루에서 안채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진 안채와 별채, 어린 것의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 * *

“왜 깨어나지 않는 겁니까.”

소란스러웠다. 범양의 회장 윤주영이 중환자실을 찾았다. 밝은 갈색 머리와 부드럽고 길게 빠진 눈매를 가진 사내를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앞다투어 고개를 뺐다. 간호사들이 눈을 흘기며 병실 문을 닫았다. 짙은 밤색 코트를 입은 범양의 젊은 주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병원 관계자를 내려다보았다. 이소를 담당했던 전공의와 병원장까지 모두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게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소변과 혈액에서 어느 정도 농도가 짙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양성 반응이 나옵니다. 의식을 찾지 못하는 것도, 뇌파가 불안정한 것도 모두 환자분이 투여했던 마약 때문에….”

“약속을 깨 버렸네….”

“네?”

주영은 말없이 잠든 이소의 얼굴을 살폈다. 지난 일주일간 이소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하루에도 십여 차례의 발작 증세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눈을 뜰 때마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려 간호사들이 달려와 묶어 놓았고 눈을 감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급성 쇼크의 여파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많았다.

의식을 잃은 지 3일이 지났을 무렵, 신경과 정신의는 고요했다 요동을 치는 뇌파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의식은 없지만 뇌는 계속해서 활동을 하고 있어요. 보통 사람과 다르게 매우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입니다. 다만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활성화가 되면 분명 충돌할 것이고, 이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

신경의는 머뭇거렸다. 주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지긋이 바라보자 얼굴을 붉혔다.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야 했다.

‘기억이 온전치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변해 불안감과 초조,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투약을 중단했으니 깨어남과 동시에 금단증상이 올 겁니다. 구토, 설사, 발열을 겪을 수 있지만 다시 약에 손대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안정제를 처방할 거고요. 자주 먹여 주셔야 해요. 환각을 볼 수 있습니다. 곁에 사람이 필요해요. 신경의는 파일을 닫으며 뒤로 물러섰다.

주영은 그날을 생각하며 이소의 하얀 뺨을 훑어내렸다.

“괜찮아, 기왕이면 다 잊어버려. 그래야 다시 시작하지, 이소야. 잘하고 있어. 이제 진짜 집에 가야지.”

이소는 간간이 고개를 흔들다가 웃기도 하며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주영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몸을 돌렸다. 바깥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사내 둘이 몸을 일으켰다. 주영이 손짓하자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차해준, 같은 병원의 다른 층에 잠들어 있는 남자. 그 잘난 면상을 한 번 들여다보고 갈까 싶었지만 주영은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며 전화를 들었다.

“경찰이죠. 제보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주영은 오랜 시간 동안 떠돌던 이소를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 * *

“선생님, 윤이소 환자 지금 막 의식 찾았, 아! 깜짝이야.”

이소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병실 바깥에 앉아 있던 해준이 제일 먼저 튀어 들어갔다. 입원하고 2주를 꽉 채우고 나서야 이소가 정상적으로 눈을 떴다. 꽤 오래 감겨 있었던지라 눈꺼풀이 제 기능을 하는 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아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이소의 눈동자는 제가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해준이 들어가고 뒤늦게 의사와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이렇게 갑자기 들어오시면 환자가 놀랍니다. 나가 주세요.”

“보호자야? 보호자세요? 환자 아니에요? 환자분, 나가시라구요.”

의사와 간호사가 성을 냈지만 해준은 더듬더듬 이소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럽게 잡힌 손에 이소가 움찔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연신 깜빡였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갈 곳을 잃었다. 해준은 베인 상처가 가득한 거친 손으로 이소의 작은 손을 쥐었다. 14일 만에 눈을 뜬 연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이소야.”

손이 잡힌 이소는 말이 없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혹여 환자가 더 큰 반응을 보여 줄까 내심 기대하며 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병동에서 의식을 되찾자마자 붕대를 친친 감고 나타난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병실에 있는 남자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종종 정장을 차려입은 노인이 데리고 가면 식사를 하고 오거나 치료를 하고 올 때를 제외하고는 그 작은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자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가족이겠거니 혹은 아주 친한 친구이겠거니 여기며 두 사람이 처음 병원에 실려 온 날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해준은 이소가 반응이 없자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이마는 아직도 발갰고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몸 구석구석이 멍과 상처로 얼룩덜룩했지만 해준은 자신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 않았다. 커다란 몸이 이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해준은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나는 괜찮아, 너는 괜찮아? 해준은 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럼 제 연인이 차분한 음성으로 ‘교수님.’ 하고 자신을 부를 것 같았다.

이소의 눈동자가 천장을 지나 제 손을 잡은 남자의 얼굴에 가 닿았다.

교수님. 교수님이다.

끔뻑끔뻑, 느리게 깜빡이던 눈동자가 점차 한곳에 고정되며 해준의 얼굴을 훑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서린 걱정과 염려, 불안이 뚝뚝 떨어진다. 왜 저를 보고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신가요. 그리고 이내 해준의 얼굴은 어두운 밤, 피를 뒤집어쓰고 제 얼굴을 내려다보며 울부짖는 모습과 겹쳐졌다. 또다시 눈을 깜빡이면 꽃이 잔뜩 핀 정원에서 푸른 달빛을 받아 웃고 있기도 했다.

나는 이소 씨를 내 별채에 가두고 나만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눈을 깜빡, 또 깜빡일 때마다 해준의 얼굴은 매번 다르게 변했다. 웃었다 울었다 다시 웃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제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종래에는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네 발로 제게 기어 오는 기괴한 모습의 괴물이 되었다. 남자가 제 이름을 부른다. 이소야, 이소야, 이소야. 이소의 눈동자가 점차 흐려졌다. 이 사람은 나를 해칠 거야, 교수님은 나를 죽일 거야.

“이소야.”

초점을 잃어 가는 눈동자가 불안하다. 해준이 이소의 손을 잡고 의사를 돌아봤다. 선생님, 지금 눈이 너무 심하게 깜빡이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소가 잡았던 손을 팩 뿌리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가, 가아…!”

링거가 꽂힌 손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해준이 뒤로 물러서자마자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들었다. 이소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머리를 웅크리고 이불을 뒤집어쓰려고 했다. 작지 않은 키의 이소가 버둥거리자 침대가 덜컹거렸다. 성인 남자가 작정하고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직이자 웬만한 사람들이 당해 내기가 힘들었다.

심박수와 혈압이 엄청난 속도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소의 코에 피가 맺히고 눈에 핏발이 섰다. 난장판이었다. 이소는 귀를 막고 꽥꽥 비명을 질렀다.

“환자분, 나가세요! 당신 때문이잖아, 나가세요! 저 사람 좀 누가 내보내 봐!”

의사가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피 칠갑이 된 베개에 이소가 뒤통수를 비비며 발작했다. 뒤늦게 소란을 눈치채고 달려온 준경이 해준을 잡고 끌어냈다. 끝까지 눈을 마주친 해준을 보며 이소가 젖은 목소리로 오열했다.

“가! 저리 가! 오지 마!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자 간호사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병실 안쪽으로 진정제를 챙긴 몇 명의 간호사가 더 뛰어 들어갔다. 해준이 눈에 보이지 않자 과호흡이 온 이소가 꺽꺽대며 숨을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들이 수를 세며 이소의 위에 올라탔다.

“윤이소 씨, 여기 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 보세요!”

호흡을 들이마시던 이소의 신음이 점차 잦아들다 조금씩 흐느끼는 소리로 변했다. 무서워요, 무서워. 선생님, 저 저 사람 너무 무서워요. 오지 말라고 해요, 오지 말라고 해요. 이윽고 이소는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머리 아파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어지러워요. 이소가 머리를 감싸 쥐고 울먹이자 의사는 약을 맞고 잠들면 괜찮아질 거라며 달랬다.

진정제를 투여하고 다시 잠든 이소는 마치 처음부터 깨어난 적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다. 문을 열고 나온 의사는 한참을 말없이 해준을 바라보다 팩 돌아섰다. 준경은 그런 의료진들에게 연신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괴롭히던 것, 그 말을 곱씹으며 해준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속이 텅 빈 인형마냥 앉아 있었다.

* * *

“심리 치료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네요.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거의 전쟁 후유증 같은데.”

의사는 걱정스럽다는 듯 차트를 닫았다.

그 후 몇 번을 찾아가도 결과는 같았다. 깨어 있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경과가 좋아지고 있는 이소에게 해준이 찾아가기만 하면 발작 증상이 나타났다. 뭐가 그리 무서운지 해준의 소매 끝만 봐도 호흡이 거칠어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침대 밑에도 숨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기도 했다. 심지어는 소변도 지렸다. 결국 해준은 이소가 있는 병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의료진들에 의해서 접근 금지 권고를 받았다. 원인은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는 환자의 치료에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요인이기 때문이었다.

“이소야, 나 왔어. 오늘 늦게 와서 미안, 바빴어. 형 기다렸어?”

주영은 바쁘지만 짬 내어 이소의 병실에 매일같이 들렀다. 길게는 2~3시간을 있다 가기도 했고 짧을 때는 30분만 있다 가기도 했다. 윤주영 회장이 제 사촌 동생을 보러 병원에 왔다는 말은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빠르게 퍼졌고 그가 자신의 세단을 타고 빠져나가면 또 잠잠해졌다.

해준은 그저 가끔 이소가 간병인과 함께 밖으로 산책을 나오면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다. 날이 부쩍 차졌기 때문에 등과 다리에 담요를 두른 채 휠체어를 탄 이소는 무표정하게 병원 한 바퀴를 돌다 들어가곤 했다. 준경은 데워 온 죽을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그전에도 식사는 자주 걸렀지만 이소가 깨어난 이후 해준의 불안증이 더 심해졌다. 이소가 외출하는 날은 창문만 내려다보며 하염없이 눈으로 이소를 쫓았고, 이소가 없는 날은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도련님, 회장님과 사모님 오셨습니다.”

“그냥 둬요. 아픈 애한테 인사 받으려고 온 건 아니니까.”

치료가 될 때까지는 모든 일을 다 놓았기 때문에 준경 역시 재단 일과 학교 업무를 모두 중단시키고 연기시켰다. 해준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해준의 부모가 다녀갔다. 별안간 이게 무슨 일이냐며, 살다 살다 칼을 맞을 줄은 몰랐다고 그 자식들을 잡아서 똑같이 해 줄 거라며 노발대발했다. 평생 점잖으셨던 인사인지라 준경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아들이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굳이 시시콜콜 다 전달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 부장님, 해준이를 잘 좀 부탁해요. 곧 퇴원하니까, 본가로 내려와서 지내면 좋겠어. 준이 너도 일단은 아무 생각 말고 쉬는 데 집중하렴.”

해준의 모친이 준경의 손에 두꺼운 봉투를 쥐여 주었다. 준경은 자신이 부장일 때부터 얼굴을 트고 지낸 해준의 모친에게 여태 문 부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었다.

“치료 끝나는 대로 모셔 가겠습니다.”

해준은 부모가 나가는데도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점잖은 두 노인은 그저 아들을 안타까워하며 걱정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준경은 더운 물을 따라 해준에게 건넸다.

“해수가 곧 올 겁니다.”

주 기사님 차를 타고요. 해준이 고개를 돌렸다.

“이소 님에게 데려다 드리고 오겠습니다. 일곱 살 아이에겐 2주는 너무 긴 시간이니까요.”

해준이 준경의 손을 붙들어 잡았다. ‘나도’라고 말하는 듯한 눈이 깊고 또 깊었다. 해준과 눈을 마주친 준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 계세요.”

준경은 해준의 손을 내려놓고 홀로 병실을 나왔다.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척 차분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준경은 다른 병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소뿐만이 아니었다. 해준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해준을 무서워했다. 면이 깨끗할 때도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었던 사람이 피 칠갑을 하고 그 소란을 떨어댔으니 의료진들과 환자들 눈에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수술이 끝나고 의식을 되찾자마자 이소가 있는 병동으로 가겠다며 몇 번이나 걸음 했으나 그때마다 다른 환자들이 화들짝 놀라고 불쾌해해서 병원 측에서 여러 번 항의를 받았다.

병원을 옮길까도 했지만 해준이 극구 반대했고, 준경 역시 이소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게 급선무인지라 의료진들에게 돈을 쥐여 줘 가며 혼란을 무마시켰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라면 해준이 퇴원을 하고 나서라도 이소가 이전의 상태로 돌아올지는 미지수였다.

그날 있었던 일로 해준에 대한 공포심이 커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그동안의 일이 모조리 들킨 것인지 이소는 필사적으로 해준을 거부했다. 이소도 해준도 이 사달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준경은 그저 짐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해수를 기다리며 준경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처음부터 해준을 말렸어야 했나. 그리 사람을 품 안에 끼고 돌면 안 된다고. 언젠가 알게 되면 정말 크게 튕겨져 나갈 수도 있다고. 그러나 이소를 볼 때마다 넋을 놓고 있는 해준을 발견할 때면, 오랜 시간 동안 마음 둘 곳 없이 떠돌던 것이 안쓰러워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 이소, 참 예쁘죠. 어쩜 저리 예쁠까.’

고개를 기울이고 질리는 것 없이 바라보고 있는 낯이 참 행복해 보여 준경은 묘한 불안함이 싹터도 그냥 두었었다. 윤이소를 바라보는 눈이 점점 침잠해 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묵인했다. 마치 추위에 떠는 어린 것을 따숩게 해 주겠다고 아가리를 벌려 제 배 속에 집어넣은 뱀을 보는 듯했다. 그런 점에서 준경도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남지 않았나.’

씁쓸한 자판기 커피를 털어 넣고 몸을 돌렸다. 검은 세단에서 해수가 내려와 준경에게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저택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집사님이 아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이. 준경은 해수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올라가자.”

아빠 만나러 가야지. 해수가 스케치북을 들고 환히 웃었다.

* * *

3주 만에 이소를 만난 해수는 아빠의 낯선 모습에 준경의 뒤에 숨어 쭈뼛거렸다. 안 본 사이에 살이 6kg이나 빠졌다. 안 그래도 마른 편이었던 이소의 목선이 더 날카롭게 드러났다. 준경은 혹여 해수를 보고서도 발작을 일으키거나 기억을 못 하지는 않을지 긴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을 때 준경을 본 이소는 뒤에 해준이 있지는 않은지 베개를 움켜잡았지만 뒤이어 따라오는 작은 아이를 보고 안심했다.

“아빠가 많이 아팠어, 해수야.”

준경이 등 뒤에 숨은 해수를 도닥였다. 해수는 좀처럼 앞으로 나오질 못했다. 이소는 아무 말도 없이 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막이 계속되자 해수의 입이 비죽거렸다. 저를 보며 아무 말도 않는 이소를 보며 울먹거리기 직전이었다. 이소는 당혹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이다 천천히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상자를 든 이소는 주섬주섬 비닐을 깠다. 상자를 톡톡 털어 내자 각진 모양의 노란 캐러멜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이소가 옅게 웃었다.

“해수 몫.”

울먹이던 해수는 팔을 벌려 달려들었다. 링거를 꽂은 마른 팔로 이소는 해수를 바싹 끌어안았다. 3주 만에 상봉한 부녀는 서로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쓰다듬고 문지르며 끌어안았다.

한참 동안 해수는 조잘조잘 떠들었다. 이소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종종 왈칵 끌어안고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보는 이소의 편안한 모습이었다. 준경은 멀찍이 서서 이소와 시간을 보내는 해수를 기다렸다.

“윤이소, 차해준 환자분의 보호자 되시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의사가 준경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병원장이었다. 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저와 이야기 좀, 복도 끝에 다다른 준경에게 의사가 목소리를 죽였다.

“차해준 환자가 내일 퇴원하시는 거, 맞고요.”

“맞습니다.”

병원장이 오랫동안 입술을 매만졌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합니다만, 퇴원 이후에는…. 차해준 씨가 윤이소 환자를 찾아오시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병원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때문에 지금도 충분히 거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해준은 이소의 병실에 찾아가는 것을 지양하고 있었다. 현재는 치료 중에 있지만 퇴원 후에는 직접 이소의 보호자로서 치료비 지불과 간호를 맡을 예정이었다. 준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병원장이 머뭇거렸다.

“그게…. 솔직하게 말씀 드리자면, 의료진 소견상 차해준 씨가 윤이소 환자에게 극심한 트라우마를 야기하고 있는 점, 차해준 씨가 현재 정상적인 보호자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 상태가 불안하다는 점 때문에 조금 더 강력한 규제가 필요한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저희 의료진들은 차해준 씨가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났을 때부터 주욱 윤이소 씨에게 어떤 폭행을 가하진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병원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경이 발끈했다.

“무슨 소립니까, 전에 말씀 드렸다시피 폭행 사건에 휘말렸던 윤이소 씨를 구조하느라 차해준 씨가 다친 거라고 설명을 드렸지 않습니까. 때문에… 윤이소 환자의 보호자는 오늘부터 윤주영 님으로 변경될 겁니다.”

준경이 주춤했다.

차해준 씨는 윤이소 환자분과 피를 나눈 가족도 아니고, 심지어 먼 친척조차 아니시기에 어떠한 권리도 권한도 없습니다. 애인…이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변함없습니다. 문준경 씨 역시 오늘 이후로 면회를 오시는 것도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병원 측에서 요주 인물로 차해준 씨를 지목했고 문준경 씨는 차해준 씨의 지시로 움직이시는 것 같아… 저희로서는 환자의 보호를 위해 내린 결정입니다. 병원장은 이소의 병실을 힐긋 보며 말소리를 죽였다. 준경이 불쾌하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자 병원장은 눈동자를 좁히며 준경을 향해 미소 지었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범양그룹 윤주영 회장님이 윤이소 환자분의 보호자로서 치료비 일체를 지불하실 예정이고 병실도 가장 상급으로 올려 주실 겁니다. 지금도 특실이긴 하지만 보다 침구나 식사 등 더 나은 서비스를….”

“원래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문준경 씨. 이건 윤이소 환자도 동의하신 겁니다.”

준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병원장은 말없이 바라보다 다시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표정에서 묘한 조소가 묻어났다.

“문준경 씨께서 원하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윤이소 환자분께서 윤주영 회장님의 사촌 동생이라는 사실만큼 확실한 신원은 없으니까요. 저희 병원은 vip를 극진히 모실 의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vip인 윤이소 환자가 적극적으로 차해준 씨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봐야겠네요, 그럼 내일 차해준 환자분 퇴원 무사히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병원장은 제 할 말을 마친 후 그대로 돌아서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준경은 할 말을 잃었다.

“할아버지, 이제 아빠 졸리대요.”

해수가 문을 열었다. 천천히 걸어 나온 이소가 해수의 손을 가볍게 잡고 있다 놓았다. 이소의 손에는 해수가 붙여 주었는지 공주 캐릭터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한 통을 다 쓴 건지 열 개는 넘게 붙어 있었는데도 이소는 불편한 티도 내지 않았다.

“해수, 그림 잘 봤어.”

“응, 다음번에는 둘만 그려올게.”

“응.”

해수를 바라보며 웃었던 이소는 고개를 들어 준경을 올려다보았다. 어떠한 감정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소의 눈이 무감했다. 가벼운 묵례도 없이 병실 문이 스르륵 닫혔다. 익숙했다. 이소는 해수를 데려다주는 준경마저도 무척이나 경계했다. 다만 딸애 때문에, 자신의 치료 때문에 최대한 참고 있는 듯했다. 난생처음 보는 냉랭한 이소의 표정에 준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준경이 허리를 숙여 방금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물었다. 해수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거요. 스케치북을 열자 미처 찢어 주지 못한 그림이 여전히 스케치북에 남아 있었다.

[아빠랑 해수랑 아저씨]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케이크를 불고 있는 해준의 생일을 축하하는 둘의 모습이었다. 이소는 이 그림을 받지 않았다. 딸의 선물이라면 작은 풀꽃이라도 기쁘게 받는 사람이었는데 고작 일곱 살 딸 애의 선물을 돌려보냈다. 준경은 마음이 헛헛했다.

* * *

빛이 푸른 새벽, 이소는 맨발로 잔디를 밟으며 걷고 있었다. 흙 사이사이에 채이는 돌멩이 하나 없었고 발가락과 발등을 간질이는 풀의 느낌이 좋아 마음이 편안했다. 손을 내려 뻗으면 강아지풀과 허리가 긴 꽃들이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고 꽁지에 빛을 내는 신기한 풀벌레들이 이소가 걸음을 뗄 때마다 날아올랐다. 달이 참 밝았다.

이소는 손을 들어 제 약지에 걸린 붉은 실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은 붉은 실은 손을 휘저을 때마다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며 저를 끌어당겼다. 실의 반대편, 꼭 이소에게 이리 오라 이르는 것 같다. 이소는 옅게 웃음 지었다.

“누가 이어져 있길래.”

이소는 말없이 걸었다. 걷고 걸어도 평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루하다거나 싫지 않았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저를 괴롭게 했던 생각의 고리들을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모조리 흙바닥에 던져 두고 걸었다. 아아, 이대로 여기 쭉 있는 것도 나쁘지 않네. 밤이 어두웠지만 어쩐지 하얀 달과 붉은 실의 주인이 함께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돌연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가볍게 눈을 감았다 뜨니 제 약지와 손목을 빙빙 두른 붉은 실이 너울너울 바람에 흔들렸다.

“놀아 달라고?”

실은 춤을 추며 이소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이소는 그렇게 실을 당기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며 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둥근 고리를 만들기도 하고 이소의 코끝을 간질이기도 하던 실은 종래에는 여분을 잔뜩 풀어내어 이소의 손바닥 안에 안착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온 작은 실뭉치는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며 시선을 끌었다. 실 끝이 여전히 평원의 저편에 이어진 채 둥둥 떠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이소는 미소를 띠고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모양도 바꿀 수 있어?”

작은 털 뭉치는 요란하게 움직이더니 작은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두근두근하며 심장이 뛰는 것을 따라 하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이소는 흐흣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꽤 오랜만에 웃는 것 같아 제 웃음소리를 듣고 어색해 귀를 붉혔다.

“토끼.”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토끼가 보고 싶어졌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소의 손바닥 위에서 붉은 실뭉치 토끼가 뛰어놀았다.

“하하, 깡총.”

콩콩 손바닥을 뛰던 토끼는 이소의 어깨를 톡 치고 올라가 머리 위를 폴짝폴짝 뛰어놀다 내려왔다. 이소는 한참 그 귀여운 것을 내려다보다가 말을 걸었다.

“원래 네 모습도 보고 싶어.”

손바닥 위 토끼가 앞발을 들고 고개를 기울였다. 말을 못 알아듣는 듯한 고갯짓이었다. 이소가 고개를 내려 흰 뺨에 토끼의 얼굴을 부볐다. 보고 싶어, 응? 애원하듯 장난스럽게 조르자 토끼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폴짝폴짝 뛰었다. 기분 좋은 건가. 이소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작은 토끼는 몇 차례 뛰기 시작하더니 손바닥에서 톡 튀어 내리며 다시 느슨한 실로 돌아갔다. 가 버린 건가, 실망하고 있을 때 손가락에 얽힌 실이 사락사락 모이며 형상을 만들어 냈다. 꽤 많은 양의 여분이 필요한 것인지 한참을 얽히고 꼬이며 모습을 드러낸 실이 이소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혔다.

“같이 가자는 거구나. 그래, 가자.”

손이었다. 커다란 손이 이소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얽혔다. 이소는 붉은 실로 만들어진 손을 잡고 평원을 걸었다. 단단하게 얽힌 손의 감촉은 어쩐지 익숙하고 포근하기까지 해 이소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맞잡았다. 겹쳐 잡은 손바닥에서 온기가 올라왔다. 행복한 꿈이었다.

* * *

이소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상아색 천장과 가습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간만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꿈을 꾸었다. 아직도 손에 남은 감촉이 생생했다. 병원에 온 뒤 발작을 하거나 불안증이 심해질 때를 제외하고 대체로 잘 자는 편이었으나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드문드문 생각날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무수하게 몸을 때리던 주먹과 다리, 벨트가 떨어지는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 수많은 남자들, 다리 사이를 더듬던 손, 목과 입술이 찢어지게 아팠던 기억, 피범벅이 되어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 풀벌레가 다리를 비비는 소리까지 날 정도로 기민했던 청각, 온몸에 거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예민한 촉각, 흙내음과 교묘하게 섞인 피 냄새까지.

살면서 그렇게 무서운 밤은 없었다. 저를 때리고 가두는 백부 앞에서 벌벌 떨었던 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공포였다. 이소는 의식적으로 그 밤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 꿈 꿔 놓고 굳이.’

머리를 매만지려 팔을 든 이소는 그제서야 누군가 제 손끝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이소는 순간 몹시 놀라 숨을 왕창 집어먹었다.

해준이었다. 핏자국이 없는 셔츠, 깔끔하게 걸친 코트를 입은 해준이 앉아 있었다. 꿈을 꾸며 행복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식은땀이 흘렀다. 당황에 물든 이소의 눈동자와 마주친 해준은 제 손끝에 닿았던 이소의 손이 빠져나가자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예상했지만 가슴이 미어졌다.

이소가 입술을 떨며 비상벨을 누르려 하자 해준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서….”

“…….”

“무서워하는 거 알지만, 잠시만… 보고 가려고 왔어.”

해준을 한참 바라보던 이소는 조용히 제 손끝을 말아 쥐었다. 둥둥 심장이 뛰었지만 참을 만했다. 아마 꿈의 여파가 마음을 안정시킨 건지, 아니면 정말 한 달 가까이 못 만났기 때문에 악몽 같은 밤이 희석되어 버린 건지는 몰라도 전처럼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틱-톡-틱-톡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병실은 시계 초침 소리만 울렸다. 이소는 소리를 지르지도 고함을 치지도 않았고 해준과 있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멍해 보이기도 했다. 해준은 이소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소는 손끝만 꼼질거렸다.

한참 후에서야 이소의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다친 건… 괜찮으세요?”

수술은 잘… 끝나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 아주 오래 수술을 하셨다고 집사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는 걱정보다는 들은 대로 사실만을 나열하는 듯한 무감함이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에 제대로 듣는 이소의 목소리에 해준은 목이 메어 차마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노라고 투정조차 부리기 힘들 정도로, 저를 낯설게 대하는 이소가 무서웠다. 또 한 번의 적막이 지나고 시선 한 번을 마주하지 않은 채 이소가 입을 열었다.

“깨어나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비명이나 윽박이 아닌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번 고민하고 또 곱씹었어요.”

이소는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상처투성이였던 손이 해준과 살면서 조금 나아졌다. 알고 있다. 해준의 곁이 아늑하고 안전한 품이라는 것을.

“교수님, 저는요.”

지난 시간을 통틀어 가장 편안하게 잠들고 쉬었다는 것을.

“교수님이 제게 해 주신 것들이 제 인생에는 다시 없을 것들이라, 고맙고 감사하고… 동시에 항상 미안했어요. 항상, 매 순간…. 교수님께 미안했어요.”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작은 선물부터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이소는 제가 더 주지 못해 안달이 나고 조급했다.

“나는 더 줄 것이 없는데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교수님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착한 사람이 내게 왔지. 실수투성이에 사고만 치고, 사는 것도 지지리 궁상에 자존감도 낮은 나 같은 멍청이를 왜 사랑한다고 하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위로해 주셨잖아요. 전 귀하다고, 내가 너를 아끼니까 그런 거라고. 사실, 겉으로는 고맙다고 했지만…. 미안했어요. 벅차고 행복했지만 동시에 불안했고 초조했어요.”

“이소 씨.”

“사랑하니까.”

사랑이라는 말을 내뱉은 이소의 목소리가 떨렸다. 해준은 다시 입을 닫았다.

“사랑하면 다 그런 거라고. 주는 것 하나 없어도 이소 씨는 받기만 해도 충분하다. 고생 같은 건 말고 이젠 편히 쉬어도 된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점차 나아지겠지, 내가 아직 받는 것에 익숙지가 않아서 그런 거야. 아직 내가 너무 가진 게 없으니까 열등감에 찌들어 이러는 걸 거야.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소야….”

해준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소의 이름을 불렀다. 이소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울 것 같은 마음에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해 주신 대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해수 일이 풀려 가면서 조금씩 마음의 짐을 덜었어요. 다행이다, 앞으로 조금 더 상황이 나아지면 떳떳하게 교수님의 옆에 설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처럼 신세 지면서 살지 말고, 바보처럼 어디서 당하지 말고, 무시 받지 말고.”

동네 사람들이 때리지 않게 된 것도, 고 대표가 사라진 것도, 정숙 사장님이 미국에 가게 된 것도 모두 다 제 일이 잘 풀려서, 이제는 교수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해서 오래오래 옆에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평등하고 동등한 연인으로, 친구로, 가족으로 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감히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게 다 교수님이 짜 놓은 연극인 줄도 모르고.”

목구멍에서 다시 타액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약을 빼먹었었나, 아닌데. 분명 챙겨 먹었는데도 해준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소는 정신을 붙잡았다.

철물점 주인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을 때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정숙의 아들이 미국으로 불러서 가게 되었다고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말했을 때 얼마나 순진해 보였을까. 고 대표의 돈을 갚으려고 매달 전전긍긍하고 있는 저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을까. 보호 때문에 사람을 붙였다고 했을 때 왜 제게 미리 말해 주지 않았을까. 사진이 찍히고 일상을 사찰당하는 것은 싫지만 그래도 해준이 원한다면 제가 스스로 일일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 주었을 텐데. 그렇게 내가 못 미더웠던 건가.

“전 이제 교수님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요. 너무, 숨이 막혀요.”

자신이 어렵사리 비밀을 털어놨을 때…. 교수님은 어쩌면 안심했을까. 더욱더 해준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신을 보며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제 사랑은 저를 유리온실에 가두고 관찰하고 예뻐했다. 온실은 따뜻했고 안락했지만 과연 나는 오로지 감사해야만 하는 걸까. 왜 내 인생인데 해준이 멋대로 길을 닦아 놓는 걸까. 왜 언질 한 번이 없었을까.

해준이 주춤 다가왔다.

“이소 씨, 내가 설명할게. 내가 잘못했어. 다 말하려고 했어, 내가-”

“정말요?”

“…….”

“교수님 또 거짓말하신다.”

해준이 말을 잃고 이소를 바라봤다.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가르쳐 주셨잖아요.”

오래전 밤, 저를 제외한 모든 상황이 뒤틀어져 가는 것 같은 혼란에 이소는 해준의 품을 찾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해준의 대답을 얻어 내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믿고 싶었기 때문에. 온전히 마음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울부짖듯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나 이제 이소는 자신 앞에 있는 남자의 품이 더 이상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준이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슬프고 답답해 보였다. 이소는 메슥거리는 속을 참아 내려 애를 썼다. 금방이라도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말해야 한다, 이대로 또 정신을 잃고 발작하기 전에 다 말해야 했다.

이소는 말없이 침대 옆 서랍장 깊숙한 곳을 열어 지퍼백에 담긴 시계를 해준에게 내밀었다.

“이거….”

눈을 감고 있다 뜬 해준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이소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준경 집사님이 챙겨 주셨었어요.

“돌려 드릴게요.”

이제는 저 필요 없어요. 시트 위로 주욱 밀어 해준에게 돌려주었다. 이소는 차근차근 핸드폰도 꺼내어 내려놨다. 모두 해준이 사 준 것들이었다. 해준의 눈가와 손이 떨렸다. 이소는 조금 곤란해하며 입을 열었다.

“옷은…. 죄송해요. 그때 다 망가져서. 나중에 변상해 드릴게요.”

신발도, 병원에 오니 없어졌어요. 그것도 갚겠습니다. 이소는 손가락을 꼬물댔다.

“하지 마, 그딴 거. 할 필요 없어요.”

“카페도 정리해 주세요. 직원들한테는 미리 전화했어요. 직원들 많이 놀랐을 텐데 설명 잘 해 주세요. 아, 선영이 대학 입학 선물 사 주기로 했었는데. 그건 못 사 주겠네.”

이소가 쓰게 웃었다. 꼭 어디를 떠나는 사람처럼 말했다.

“생일은…. 지났지만 축하해요. 내년엔 꼭 식구들하고 보내시고요. 다들 많이 서운해했어요.”

“생일은…, 씨발.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이소 씨.”

“농담, 아니에요.”

이소는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반지 케이스를 기억에서 지우기로 했다. 이제는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말없이 눈을 몇 번 깜박이던 이소는 뒤늦게 생각난 게 민망한 듯 해준의 안색을 살폈다.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는 이소를 해준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마주했다.

“간호사가 그러는데요. 불면증이어도 자꾸 일찍 눕는 연습하고 그러면 조금씩 좋아진대요. 그러니까… 집에 가서 약도 꼭 챙겨 드시고 잠도 너무 늦게 주무시지 마시고-”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이소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저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너무 많이 다치셔서… 계속 걱정했어요. 근데 제가 속이 시끄러워서 직접 가서 살피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교수님. 정작 이소 자신은 아직도 링거를 줄줄 꽂고 있으면서,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제 병실을 못 찾아오기도 하면서도 해준을 걱정했다고 했다. 해준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이소가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수록 말문이 막혔다. 이소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 병원비도…. 저 이제, 돈 많아졌어요. 제가 낼 수 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동안 내주신 것도 다시 돌려 드릴게요.”

“이소 씨, 왜 이렇게 잔인해…….”

이소는 마치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려는 듯 잔인하게 감사해하고 미안해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도 해준에게 신세 지고 갚아야 할 것들이 또 무엇이 있는지를 가늠하고 떠올리려 애를 썼다. 해준의 눈이 발개졌다. 이소는 아직 끝난 게 아닌지 시트를 구겨 쥐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해준이 우는 걸 보고 있는 게 힘들었다. 그렇다고 안아 줄 수도 없었다. 이 관계는 병들었다.

“집도… 정리할 거예요.”

눈이 젖어 있던 해준이 순식간에 무섭게 표정을 굳히고 반문했다.

“…뭐?”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에요. 이소가 해준을 돌아봤다.

“처음부터 눌러살 생각은 아니었어요. 집이 무너지고 옮긴 거처였고, 임시였으니까… 돈을 벌어서 나오게 되면 해수랑 살면서 종종 교수님을 초대하는 그런 상상을 했었어요. 기왕이면 마당도 있고, 작은 강아지도 키우는.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하면 되잖아. 나랑 같이 살면서, 그게 아니어도 지금처럼 같이 지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고….”

“…같이 하고 싶지 않아요.”

해준의 집, 해준의 사람, 해준의 것이 아닌 제 것. 제가 해준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하며 기대하고 설렜던 적이 있었다. 받기만 하는 그런 시혜적인 사랑 말고 자신도 넘치는 사랑을 해준에게 조각내어 줄 수 있는 여유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 제가 그린 미래에 해준이 없었다. 이소는 문득 뒷덜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그만 할래요.”

이소는 해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

“고마워하는 것도…”

이이가 이렇게 차가운 인상이었던가, 문득 해준은 발밑이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안해하는 것도….”

말하지 마. 저 예쁜 입에서 나오는 가시 같은 말이 밉다. 너무 밉다. 말하지 마, 제발 더 이상 말하지 마.

“이제 그만둘래요. 그러니까,”

그러나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툭 떨어진 말은 해준의 목을 바싹 조였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도록 흘러내렸다.

* * *

이소의 입술에서 떨어진 말에 해준은 몸을 굳혔다.

커다란 트럭에 온몸이 치인 것 같다. 두 쌍의 눈동자가 깊이 얽혔다.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꿈인가 싶어 고개를 내리자 시트를 쥐고 있는 이소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소의 밭은 숨이 병실을 채웠다. 꿈이 아니다.

“……왜?”

왜 이렇게 되어야 해? 그러나 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뇌에 손상이 있어 저와의 추억이 어긋나 이리 모질게 구는 것일 수도, 아니면 제가 그날 벌였던 일들이 여린 너에게 너무 충격적이라 감정적으로 이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역시 제 더러운 밑바닥을 다 알아 버려서 질겁해 버렸나. 하지만 네가 너무 가여워서 잘 해 주려고 그런거야. 네게 시선이 가서, 네가 조금 더 편했으면 해서. 이소 네가 웃었으면 해서. 사랑해서 그랬어, 이소 너를 사랑해서 그랬어.

바닥을 기라면 길 수도 있었다.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었다. 알 수 없다.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 불구하고 해준은 윤이소가 없으면 살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차해준에게 윤이소는 세상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세상이 저를 두고 혼자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로지 자신이 싫어서, 제가 미워서. 해준이 볼 안쪽 여린 살을 깊게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온다.

나는 너를 위해 다 버릴 수도 있는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쉽게 놔. 순식간에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원망이 이성을 무너뜨리고 해준을 집어삼켰다. 여유와 다정의 껍질은 다 집어 던지고 가장 깊은 내면이 제멋대로 괴물처럼 몸집을 불린다. 그래, 이게 진짜 내 사랑의 모습이었다.

“……싫어.”

해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가가 젖은 이소가 고개를 돌렸다.

“안 돼.”

돌연 해준이 이소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목이 델 듯이 뜨거웠다. 이소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침대에 요란하게 눕혀졌다. 해준이 이소의 양 손목을 침대에 깔아 눕히고 올라탔다. 해준이 거칠게 이소의 옷깃을 풀어 헤쳤다. 손목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뜨거웠다. 언제 이렇게 열이 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이를 악문 해준이 낮게 그르렁댔다.

“난 너 절대 못 놔줘, 절대로.”

“이거 놔!”

이소가 버둥거렸다. 알아듣게 설명했잖아, 손 놔! 해준이 이소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이를 세워 크게 베어 물었다. 날을 세운 앞니가 여린 목덜미에 가 박혔다. 아아아악! 살갗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았다. 이소는 미친 듯 발버둥을 쳤다. 해준은 마치 제 목을 물어뜯어 죽이려는 듯 턱에 힘을 더했다. 심박수가 미친 듯이 올라갔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 마요, 싫다고! 물지, 마, 아파! 아파…!”

쿵쿵쿵쿵,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귀까지 들린다.

거지 같다. 해준이 올라타자마자 배 속이 울리고 아래가 반응한다. 이 개좆같은 정신 착란, 또다시 빨갛고 노란 폭죽이 머리 위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해준을 마주치면 머릿속은 자꾸만 그 축제의 밤으로 돌아갔다. 약을 맞은 지 보름이 지났건만 자꾸 그날의 몽환적이고 안달 난 기억 때문에 속이 간지러웠다. 의사는 약효가 3일이면 다 빠진다고 했는데 해준이 제 몸을 옭아매는 순간부터 다시 속이 끓었다. 해준의 체향이 났다. 익숙하고 포근한 향이 이제는 무섭고 기분 나빴다. 다시 피 냄새가 진한 축제의 밤이 떠오른다.

“교수님, 흣, 아파…. 흐윽…. 아….”

둥둥둥둥, 머리가 울린다. 상상 속의 해준은 저를 질질 끌고 가 별채에 집어넣고 문을 잠근다. 그리고 밤새도록 저를 안는다. 싫다고 울고불고 외쳐도 아래가 터지도록 치받고 목을 졸랐다.

목덜미를 깨무는 치악력이 점점 강해지자 가늘게 신음하던 이소는 결국 욕을 하면서 몸을 뒤틀었다.

“…개새끼, 미친 새끼. 사람을 뭘로 보고….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너랑 안 살아, 너랑… 너랑 안 살 거라… 으, 으븝-!”

이소는 고개를 꺾으며 소리를 질렀다. 해준의 커다란 손이 입을 막았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해준이 뜯듯이 씹은 목덜미를 혀로 깊게 빨아올리며 몸을 눌렀다. 혀를 세워 방금 씹어 문 상처를 후비자 이소가 몸을 굳히고 움찔움찔 떨었다. 배 속이 간질거린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구멍을 움찔거린다. 작게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며 이내 파르르 열렸다. 고작 목덜미를 베어 문 것뿐인데 이소의 하의가 축축히 젖어 들었다. 해준에게 이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가장 밑바닥까지 마음이 처박혔다. 우흑, 으흐흑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개새끼…. 차해준, 이 개새…끼야…. 왜 그래, 마지막까지…. 나한테 왜 그래….”

무서워, 무서워서 너랑 못 살아. 해준을 보면 자꾸만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던 그 밤이 떠오르고 비명 소리와 폭발음이 연달아 터졌다. 흰 얼굴에 붉은 피를 뒤집어쓴 해준이 네 발로 기어 왔다. 차해준은 너 때문에 죽는거야. 너는 차해준 때문에 죽는거야. 너희 둘은 오늘 다 죽을거야. 고 대표의 목소리가 머릿 속을 울린다.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았다. 이소는 흐느껴 울었다.

해준은 입술이 떨어뜨리고 얼굴을 마주했다. 이소의 목덜미에 붉다 못해 피가 고인 보랏빛 상흔이 올라왔다. 해준의 커다란 손이 이소의 목덜미에 남긴 상흔을 지그시 눌렀다. 마치 제가 찍은 낙인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내 것이라고. 흉포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 해준은 도리어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버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갈라진 목소리가 주저 없이 흩어졌다. 해준의 얼굴이 일렁일렁 눈물로 얼룩졌다. 눈앞의 미인이 아름답게도 울었다.

“곁에 있는다고 했잖아….”

결국 일그러진 얼굴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잘못했어, 이소 씨… 마지막이라고 하지 마…. 해준이 손목을 쥐고 흐느꼈다. 이별을 말하고 더 많이 무너지는 것은 자신일 줄 알았는데 자신보다 훨씬 많이 가진 해준이 고작 저 하나 잃는다고 이리도 서럽게 울었다.

‘아, 욕심 많은 사람.’

이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작은 턱이 가늘게 떨렸다.

해준의 저택에 있는 사람들처럼 자신 역시 그 거대한 정원에 심어진 꽃 한 송이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라고. 언젠가 당신이 내게 시들해지면 나 역시 당신의 삶에서 파내 버릴까. 그럼 모든 관계가 다 잘려 버린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차라리 지금 끝내는 게 서로에게 맞는 게 아닐까.

이소는 해준에게 처음 마음을 주었던 벚나무 아래를 떠올렸다. 제 목에 둘린 온기가 좋아서 몇 번이나 그를 떠올리고 가슴 뛰었었던 밤을 기억했다.

‘날이 차요, 사장님.’

이리될 줄 알았다면 그리 설레지 말 것을. 이리 내게 다디단 독을 먹일 줄 알았다면 홀리지나 말 것을.

둥둥둥둥 다시 한번 머릿속에 큰 북이 울렸다. 아, 싫은데 이 느낌. 꼭 머릿속에서 북이 울리고 나면 정신을 잃었다. 온몸을 할퀴고 머리를 찧고 나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는… 그런 괴물이 되어 버리는 같은 느낌은 이제 싫은데. 그러나 더 이상은 해준을 볼 자신이 없었다. 저녁에 먹은 진정제 약효가 벌써 다 됐나 보다. 정말 타이밍이 병신같다.

“흐읏….”

발작의 전조다.

이소는 눈을 감았다. 꾹 감은 눈썹 아래로 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미간에 피가 몰렸다. 참을 수 없이 목울대에서 깔딱깔딱 침이 섞인 거품이 차올랐다. 마지막까지 정말 꼴사납다. 해준을 밀어내야 했다.

“보지 마요.”

“이소야.”

어깨를 잡고 애원했다. 이렇게 또 쇼크가 오면 기억의 절반이 날아간다. 이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두려운 감정이 커졌다 하더라도 저와 지냈던 시간들을 모두 잊은 것은 아니었다. 제게 잘 해 주려 애를 쓴 해준을 몽땅 잊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가슴 아프더라도 온전한 기억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그러니 빨리 내보내야 했다. 숨이 가빠져 온다.

“…빨리 나가, 흐흑, 지금 나 보지- 흐윽, 마아-”

“이소야, 너 왜 그래. 왜 또 숨을-”

해준이 다급하게 이소의 뺨을 붙잡았다. 한계다.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이소는 해준의 가슴을 퍽퍽 치며 오열했다.

“보지 마, 보지 말라고!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들어! 왜, 왜 이렇, 게-헥, 마지막, 까지… 나를, 힘들게- 흐윽…….”

이윽고 이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동자가 휘깍 넘어갔다. 코피가 왈칵 터졌다. 들이마시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자 몸이 반사적으로 경련하며 허리가 저절로 휘었다. 해준이 이소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덜컹덜컹 침대 위에서 몸을 뒤트는 이소가 제 손으로 팔에 꽂힌 링거를 잡아 뜯고 팔을 휘저었다. 와장창 침대 근처에 있던 화병이 바닥에 나뒹굴며 산산조각이 났다. 해준이 이소의 몸을 잡아눌렀다. 이소가 반쯤 눈을 감은 채 쉬어 빠진 목소리로 빌었다.

“……가- 가세…요…. 제발…….”

“이소야, 안 돼. 숨 쉬어, 응? 숨 쉬라고!”

히끅히끅 몰아치듯 숨이 치받자 이소는 침대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며 괴로워했다. 아윽, 흐흑- 손톱을 세우고 벅벅 긁을 때 즈음 복도를 달리는 소리와 함께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해준이 이소를 끌어안고 고개를 흔들었다. 버둥대는 이소를 끌어안고 일그러진 얼굴로 울었다.

“숨을, 숨을… 못 쉬어요. 선생님, 이 사람이 지금 숨을 못 쉬어요….”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차해준 씨! 의사 말을 뭘로 알아듣는 겁니까! 지금 바로 윤이소 환자 보호자한테 연락해, 나가세요!”

의료진이 해준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도 이소의 발작은 계속됐다. 정말로 곧 죽을 것 같았다. 코에서 줄줄 흐르는 코피가 인중을 지나 붉은 입속으로 타고 들어갔다. 의료진이 해준을 밀치고 이소의 옆에 서 응급조치를 했다. 건장한 간호사들이 이소의 사지를 붙잡았다. 침대가 올라가 이소를 강제로 앉힌 의사는 주사를 꺼내 들었다. 주사기를 본 이소가 더 발악하며 몸을 뒤틀자 간호사들이 눈을 가렸다.

“무, 무서워! 선생님! 주사 싫어, 주사 안 맞을래요, 내 몸 건드리지 마…!”

이소가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요, 윤이소 환자. 괜찮아. 괜찮아요. 숨 쉬어요. 숨. 팔뚝에 주사가 놓이고 이소가 아이처럼 발버둥 치며 엉엉 울었다. 해준이 벽에 기댄 채 얼굴을 가렸다. 진정제가 투여되자 날 선 비명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초점없는 이소의 눈동자가 해준을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감겼다. 해준의 입술이 사정없이 떨렸다. 쉼 없이 흐르는 눈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위태위태했던 관계의 끝, 차해준의 손을 먼저 놓은 것은 윤이소였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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