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37/50)

5

벽 곳곳에 낙엽을 붙여 만든 그림 액자가 걸렸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어느덧 두 달이 훌쩍 넘어갔다. 예년과 다르게 올해 가을은 유난히 서늘했다. 이소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통장에 두둑하게 돈이 들어왔지만 해준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익숙했고 편안했고 행복했기에 떠나지 않았다. 가을이 다가와 익어 가는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 해수가 있어 마음을 놓았다.

“이제 더 약 안 먹어도 되겠는데?”

“정말요?”

맥을 짚던 주치의 민병덕이 기기를 정리하며 웃었다. 병덕은 이 주에 한 번씩 이소를 찾아 맥을 짚고 침을 놔줬다. 처음에는 건강한 편이라고 손사래를 치던 이소는 병덕이 지어 준 약을 먹고 어지럼증이 나아지자 제법 말을 잘 들었다. 쓴 한약재도 인상 한 번 안 구기고 꼴딱꼴딱 받아마시는 얼굴이 퍽 예뻤다.

해준이 양반다리를 하고 턱을 괸 채 투덜댔다.

“그럼 다른 보약으로 바꿔 줘요.”

“쉬었다 먹여라, 이놈아. 좋은 것도 과하면 몸에 쓴 법. 넌 밤에 잘 자고?”

“네. 누구 덕에요.”

해준이 이소를 보며 씩 웃었다. 병덕은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거 필요 없어, 잘 먹고 잘 자고. 당연한 얘기지만 너무 큰 스트레스 받으면 일시적으로 잠들거나 기절할 수 있긴 한데 그때 되면 이 구렁이가 알아서 잘 해 주겠지. 귀를 긁적이던 해준이 병덕을 보고 고개를 기울이자 병덕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또 기절할 거 같으면 심호흡시키고 알려 준 혈자리 짚어. 할 수 있지?”

“예. 이만 가 보세요.”

귀찮은 듯 손을 내저으며 문을 열자 병덕이 껄껄 웃으며 방을 나섰다. 이소는 방금까지 침을 맞았던 목 뒤를 주무르며 몸을 일으켰다. 해준이 조금 더 쉬라고 했지만 이소는 괜찮다며 웃었다.

얼마 전 이소는 새 일을 시작했다. 부동산 이 씨가 소개시켜 준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지만 해준의 제안으로 지금보다는 훨씬 덜 고되고 편한 것을 하기로 했다. 무엇을 할까 곰곰히 생각하던 이소는 학교 근처에 작은 북카페를 하기로 했다. 책도 읽고 음식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말에 해준은 그저 이소가 하면 다 좋다고 추켜세웠다. 재산과 마음이 넉넉한 것은 비례하나 보다. 이소는 간만에 마음 놓고 환하게 웃었다.

가게를 열었던 날은 생각보다 너무 정신이 없었다. 쏟아지는 화환의 절반 이상이 해준이 보낸 것이라 결국 전화해서 자리 없으니까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 오후까지 쏟아지던 화분과 선물들은 결국 가게가 아닌 집으로 배달됐다. 소박한 크기의 가게여서 손님들이 매번 미어터졌다. 어째서인지 책보다 먹거리가 더 잘나갔다. 이소는 매번 한 번 펼쳐진 적도 없는 책들을 보며 고민했지만 해준은 백수 되면 이소 씨가 나 먹여 살리면 되겠다고 농담을 했다.

가끔씩 점심시간이 되면 해준이 찾아왔다. 새로 들어온 신간을 정리하느라 리스트를 적다 보면 식사를 놓칠 때가 많았다. 그럼 해준이 커다란 테이블을 가볍게 똑똑 두드렸다. 반쯤 흘러내린 안경을 쓰고 고개를 들면 고운 보자기로 싼 5단 찬합이 코 앞에 있었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으로 해준이 놀리듯 웃었다.

“사장님, 바빠도 식사 챙기면서 일해요.”

먹고 싶을 때 식사하고, 쉬고 싶을 때 쉬었다. 윤치승 회장이 사라지고 난 후 불안감과 출처 모를 경계심도 사라져 해수를 품 안에 끼고 다니는 것도 점차 줄었다. 주 기사님의 차를 타고 등하원을 했고 남은 시간에는 방문 교사를 붙여 공부를 시켰다. 진도가 워낙 빨라 교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저보다 해준이 더 뿌듯해했다. 식솔들과도 터놓고 편히 지냈다. 사람들과 말할 때 주저하며 머뭇거리는 버릇도 줄어들었고, 툭하면 기절하는 습관도 사라졌다. 더없이 행복했다.

* * *

이소는 두툼한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목도리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우선 가방에만 넣었다. 아직 11월인데도 불구하고 꼭 12월의 끝자락처럼 바람이 매서웠다. 매년 지구온난화 때문에 더워질 거라더니 유래없이 서늘한 가을이었다. 이소는 손목에 시계를 차고 방을 나섰다. 문 옆에 걸린 세 사람의 사진을 한 번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소 님, 오늘은 늦게 나가시네요.”

낙원댁이 웃으며 반겼다. 이제는 제법 저 이름 뒤에 붙은 님 소리가 익숙하다. 이소는 가볍게 묵례하며 전언했다.

“어디 들를 데가 있어서요. 저녁 식사는 축제에 가서 먹을 것 같으니 따로 준비하지 마세요.”

“웜머, 어쩐대. 오늘 안 혀.”

“아, 쉬세요?”

당황하는 구석도 없이 바로 오늘 끼니는 쉬냐고 묻는 새 손님의 마음씨가 싹싹하니 참 예쁘다. 농담을 던지려던 낙원댁은 금세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 우리도 가는데-”

낙원댁이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다 같이 가는거면 더 좋구요. 이소는 가볍게 대문을 빠져나갔다.

커다란 산을 주변에 두르고 그 아래 분지에 만든 동네는 매년 큰 불꽃놀이를 연다. 작년에도 한 번 가 볼까, 했는데 해수가 많이 어려 펑펑 터지는 소리를 무서워할까 봐 집에서 텔레비전으로만 보았다. 물론 화면으로 본 불꽃놀이도 제법 볼만했다. 그때는 정숙도 함께 있을 때라 셋이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밤을 지샜다.

이소는 팸플릿을 꺼내 들었다. 15년 만에 유성우가 쏟아지는 밤이라 그에 맞추어 축제를 연다니, 낭만적이었다. 저녁부터 열리는 야시장에는 온갖 음식이 다 있고 물고기도 잡고, 노래자랑도 열린다고 했다. 해수가 엄청 좋아하겠지. 재단 일로 바쁜 해준도 시간 맞춰 데리러 온다고 했다.

노릇노릇 낙엽이 익었다. 바람에 날려 수북이 쌓인 은행잎이 소담히 산을 이뤘다. 분명 해준을 만난 것은 봄의 한가운데였는데 가을의 길목에서 해준을 더 자주 떠올렸다. 아마 코트가 잘 어울려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걷다 예쁘게 지어진 주택을 발견했다. 작은 강아지와 아이가 담벼락 안에서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잘 정돈된 실내에는 하얀 이불도 널려 있었다. 문득 어릴 때 생각이 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자신이 별탈 없이 나이를 먹고 학교를 다니다 대학에 가면 언젠가는 해준을 만났을까. 해준이 여전히 교수님이고 자신이 학생이라면, 혹은 조금 더 나이 들어서 회사에 갔었다면, 배달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해준은 오랫동안 그 집에 살겠지. 우리는 언제쯤 나오게 될까, 해수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도 곁에 해준과 제가 손을 잡고 있을까. 나이가 들어 늙어 죽을 때도 제 손을 잡는 것은 해준일까, 혹은 다른 누구일까.

이소는 자신의 손을 들어 아무것도 끼워지지 않은 약지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인연의 붉은 실이 해준의 약지에도 감겨져 있다면 좋겠다. 아니다, 약지뿐만 아니라 온몸에 감겨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제게서 벗어나지 못하면 좋겠다. 그런 욕심이 들자 이소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별안간 주머니 속 전화가 울렸다. 해준이었다. 정신이 퍼뜩 깨었다. 나쁜 생각, 훠이훠이. 물러가라.

- 저녁에 모시러 갈 건데 몇 시쯤 나오실 건가요, 왕자님.

나긋한 목소리에 이소는 피식 웃었다. 새로 놀리기로 시작한 호칭은 왕자님인가.

“여섯 시 삼십 분이요. 저녁 먹으면서 할 말도 있고요.”

- 좋아, 아홉 시쯤 불꽃놀이 한대요. 볼 거예요?

“네.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라 꼭 볼 거예요. 저 어릴 때 엄청 큰 불꽃놀이 눈 앞에서 본 적 있거든요. 진짜 큰 거.”

- 그랬어? 엄마 아빠랑?

“음, 아마도? 혼자 본 것 같기도 한데, 아마 그 정도로 큰 거였으니까 엄마 아빠랑 본 거였겠죠.”

- 자기가 좋으면 나도 좋아. 바로 코 앞에서 보이는 곳으로 가자. 애들은 유모가 데려간다고 하니까 이소 씨는 나랑 식사하고 나서 해수 만나러 가는 걸로.

“좋아요.”

이소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가게가 아닌 작은 금은방이었다.

“예약한 거 찾으러 왔어요.”

평화로워 마지않는, 해준의 생일 전날이었다.

* * *

이소는 뺨이 살짝 발그스름해진 상태로 길을 걸었다. 샴페인을 한 병이나 마셨다. 함께 일하던 알바생이 지망하던 공기업에 붙었다. 이소와 직원 두 명은 한껏 진지한 얼굴로 노트북에 코를 박고 결과를 확인했다. 알바생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며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눈과 귀를 막았다. 이소가 심호흡을 하고 결과 버튼을 클릭했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뜨자마자 제일 먼저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 넷이서 다 같이 강강수월래를 하며 좋아했다. 알바생은 엉엉 울었고 직원들은 우는 얼굴을 놀렸다. 그리고 문을 일찍 닫고 다 같이 파티를 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무척 좋았다.

해준은 갑자기 일이 생겨 가게로는 못 오고 바로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했다. 다들 어디서 났는지 풍선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다들 축제를 기대하는 얼굴로 웃으며 이소를 지나쳐 갔다. 이소는 전화를 꺼내 해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했어요. 저 지금 거의 다와가요. 여기 엄청 큰 교회 앞. 얼른 가서 손 잡을게요.]

전화기를 다시 집어넣고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금박이 둘린 빨간 상자 안에 든 한 쌍의 반지가 조금 남은 노을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해준이 잠들었을 때 종이로 띠를 만들어 몰래 사이즈를 쟀다. 금은방에서 ‘여자친구분 손이 상당히 크시네요.’라고 물어서 ‘배구 해요.’ 하면서 둘러댔다. 직접 끼워 줘야지.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언덕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 전화가 울렸다. 해준인가 하고 보았더니 간만에 연락이 온 주영이었다. 이소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전화를 받았다.

“형, 잘 지냈어?”

주영은 낮게 웃었다. 범양은 몇 개의 계열사를 통합하고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하도 바빠서 전화하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주영은 입양에 관한 진행 상황을 몇 가지 공유한 후 안부를 물었다. 이소는 얼마 전 작은 북카페를 열었다는 소식도 전하고 간단히 주소도 불러 줬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들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응, 잘 지내긴 했어. 마침 근처인데. 좀 볼 수 있을까?

“응? 우리 동네? 형 안 바빠?”

- 나도 큰일은 정리 다 됐고 슬슬 이제 미뤄 놨던 것들을 진행할 거야. 그전에 오늘은 너한테 중요하게 할 말도 있고.

“그렇구나. 근데 나 오늘은 못 볼 거 같은데…. 저녁 약속 있거든.”

- 누구랑?

이소는 피식 웃었다.

“내가 누구랑 먹겠어. 교수님이지.”

수화기 반대편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운전 중인지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내비게이션 소리가 났다. 이소는 괜히 멋쩍어져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놨다.

“아. 다음 주는 어때? 내일이 교수님 생일이거든, 저녁 먹고 미리 반지도 주고….”

- 무슨 반지? 프러포즈 해?

“어? 아니, 아니, 아니야. 그냥 커플링…이지. 프러포즈는 아직.”

- 아직.

어, 그게. 주영이 말꼬리를 잡을 때마다 이소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자꾸 머릿속에 문장과 단어들이 제멋대로 엉겼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했다. 해준은 제게 어떤 사람이더라. 꼭 눈앞에 그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이소는 배시시 입꼬리를 당겼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상냥하고, 사람들도 잘 챙기고. 나한테도 잘 하고 해수한테도 정말 잘 해 줘.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이 받기만 해서, 선물 주고 싶었거든. 소박한 거야, 작은 거.”

예전이라면 백만 원짜리 커플링을 소박하다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소는 몇 주 사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제 위치와 상황에 얕게 실소했다. 틱톡틱톡, 수화기 너머에서 차를 세운 듯한 신호음이 들렸다. 이소는 술기운에 너무 많이 떠든 것 같아 민망해졌다.

“암튼 그래서 오늘은 못 만날 것 같아, 미안미안. 너무 나 혼자 떠들었-”

- 이소야, 차해준 교수 말이야.

수화기 속 주영의 목소리는 어쩐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소가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저 골목만 지나면 해준이 있는 곳이 코 앞이었다. 주변이 조금 시끄러워 이소는 발걸음을 멈추고 전화기에 귀를 바싹 갖다 댔다.

- 네가 생각하는……. ……아니야.

“응? 형,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려. 나 잠시만.”

이소는 큰 길목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으로 들어왔다. 좁고 긴 골목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아 스산했지만 덕분에 통화 소리는 잘 들렸다.

“다시 말해 줘, 못 들었어.”

-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 아니라고. 아니, 오히려 만나면 안 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주위가 고요한 만큼 수화기 속 목소리가 유독 도드라졌다.

- 가볍게 만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네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사람, 네가 아는 것과 많이 달라.

주영의 말에 이소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했다.

“형이 뭔데 그런 소리를 해. 교수님에 대해 뭘 안다고.”

짓씹듯 경계를 내뱉었다. 그러나 뒤늦게 고개를 든 짐작에 이소는 발걸음을 멈췄다.

“…형 아직도 사람 뒷조사해?”

주영의 옅은 한숨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전화로 할 이야긴 아니야.

“말을 뱉었으면 끝까지 해. 사람 찝찝하게 만들지 말고.”

주영은 한참 말을 고르다 핵심적인 것만 추려서 말을 했다. 사실을 전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영이 중간중간 한숨과 욕지거리를 더했다.

- 그 사람이 네 주변 사람들, 죄다 건드리고 있어. 앞에선 청렴한 척, 깨끗한 척하고 뒤로는 깡패 새끼들 줄줄 달고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다룬다고…. 난 네가 왜 그 사람을 만나는지 이해가 안 가. …혹시 다 알고 만나는 거야? 그럼 해수도 위험한 거 아니니? 하, 그 새끼가 네 시계에 위치 추적기 달 때부터 미친 새끼라 생각은 했는데….

“…뭘 달아?”

이소는 제 귀에 들리는 주영의 말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을 건드려, 사람 목숨, 깡패, 위치 추적기.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 해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이소는 주머니 안에 든 반지 케이스를 으스러질 듯이 잡았다. 절걱, 제 몸처럼 꼭 맞았던 시계는 갑자기 이물감이 들었다. 주영은 격양된 목소리로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 우리같이 정·재계에 몸담은 사람들은 차와 사무실에 불법 추적기나 도청 장치 설치되면 경보가 울려. 내가 너 호텔 데려다줬던 날, 내 차에 네가 타자마자 경보가 울렸어. 착각인 줄 알았는데 네가 내리자마자 소리가 멎었고. 너 그날 네 시계가 그렇게 처참하게 박살 난 거,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어? 조금도 의심 안 했다고?

오늘은 좋은 날인데, 엄청 큰 이벤트도 준비했는데 그동안 잠잠했던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주영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 그 안에서 지름 1cm짜리 고성능 추적기가 나왔어. 내가 박살 내서 버렸고 아마 그날은 네가 어디 있었는지 몰랐을 거야. 잘 생각해 봐, 차해준이 그날 너 쥐잡듯이 잡지 않았냐고. 그동안 네가 어딜 가도 차해준이 널 보고 있었을 텐데. 그걸 정말로 몰랐냐고.

모래바람이 불었다. 가로수 아래 잘 정돈된 낙엽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이소 씨 정말 친구 만나러 가는 거 맞죠?’

약한 돌풍에 사람들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진혁 씨랑 헤어지고 나서 어디 갔었는지 왜 말 안 해 줘요?’

혼란스러운 거리와 동떨어진 구석에서 이소는 말없이 전화를 들고 서 있었다.

‘이소 씨, 데리러 왔어요.’

주영은 지금 바로 이소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했다. 이소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 코앞만 돌면 해준이 서 있는 골목이었다. 아마 저를 기다리며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해준이 그랬다. 자신에게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고 눈을 보고 말해 줬다. 아니, 거짓은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말을 해 주지 않은 것은 있다고 했었지.

- 이소야, 나 지금 일단 내렸어. 너 어디 있는지 지금 말해 주면….

돌연 누군가 멍하게 서 있는 이소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내가 데리러 갈게.’ 하는 주영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야, 이 새끼야, 눈 똑바로 안 뜨냐?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소는 초점 흐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떨어진 핸드폰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을 때 불쑥 튀어나온 검은 구두가 이소의 전화를 지근지근 밟았다. 자갈에 해준이 사 준 핸드폰 액정이 바삭바삭 갈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돌발 행동에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요 몇 달간 잊고 살았던 악마같은 낯을 마주하자마자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이야, 예쁜이. 이렇게 보니까 못 알아보겠다.”

안 본 사이에 때깔 고와졌네. 번듯한 얼굴에 생긴 난잡한 흉터는 전에는 없던 것이었지만 목소리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독사 같은 눈을 번들거리던 고 대표가 고개를 기울였다. 꿈인가,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초가을인데도 검은 가죽장갑을 낀 고 대표가 이소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 찾느라 쌔빠지는 줄 알았는데, 간만에 오빠랑 회포나 풀까.”

눈동자가 떨리던 그때 돌연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눈앞이 깜깜해졌다. 손을 쓸 새도 없이 몸이 기울어졌다. 뒷목이 뻐근했다. 눈이 감겼다. 고 대표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누군가에 의해 몸이 질질 끌려 조용하고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해준에게 반지를 주기로 했는데.

의식이 끊기기 전까지도 이소는 해준 생각을 했다.

* * *

무겁게 내려앉았던 의식이 드문드문 들어왔다 다시 꺼진다. 밤을 지새운 것도 아닌데 눈꺼풀이 무거워 들기가 어려웠다. 누군가 뒷목을 꾹 누른 듯한 압박감과 아릿한 통증이 목을 죄였다. 축축하고 눅눅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소는 쿵쿵 몸이 울리는 진동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환호성,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아이돌 가수의 노랫소리가 귓전을 어지럽게 울린다. 간식 차와 풍선, 솜사탕과 장난감, 어린이용 놀이기구와 거대한 무대는 없었다. 곰팡이가 진 천장과 밟을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가 나는 나무바닥이 깔린 오래된 상가 건물 안, 이소는 포대 자루마냥 바닥에 던져졌다. 매캐한 시멘트 가루가 먼지처럼 풀풀 날렸다. 솔이 고운 카디건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빠져 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았다. 초점이 돌아오자 고 대표가 느른한 미소를 띠고 쪼그려 앉았다.

“왜 놀라.”

“…대표님.”

“우리 너무 오랜만에 본다, 그치.”

소름 끼치게 다정을 연기하는 말투. 이소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누군가 철거 작업을 하다 말고 버리고 간 상가 3층, 고 대표는 전보다 더 나른하고 느릿한 어조로 안부를 물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이소의 턱 아래 여린 살을 살살 쓰다듬었다. 불쾌함에 이소가 고개를 돌렸다. 나가는 문은 하나,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얼핏 봐도 낡고 오래되어 창문을 잡는 순간 붙잡힐 것이다. 이소는 바닥에 눈을 깔고 눈동자를 돌려 저를 둘러싼 구두 개수를 셌다. 방 안의 남자들은 고 대표를 포함해 모두 여덟 명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산 만했다. 도망칠 수 없다. 절망적이었다.

“도망을 왜 가.”

고개를 들자 고 대표가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네가 도망을 왜 가. 뭐 잘못했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묻는 말투에 농이 묻어난다.

“어디 갔었어, 가게도 버리고.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대표님께서 갑자기 없어지셨잖아요. 전 몇 번이나 연락 드리고 찾아도 갔어요. 그런데 사무실이 꼭 도둑 든 것처럼….”

“내가? 갑자기?”

반문하던 고 대표는 ‘아아, 아. 내가, 맞네. 내가 없어졌지.’ 하고 과장되게 검지손가락을 흔들며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옆에 선 사내에게 ‘야, 치영아. 그때가 언제냐, 너 대가리 터져서 뒈질 뻔한 날.’ 하고 묻자 남자는 손가락을 펴고 대표에게 날짜를 전했다. 여름의 끝물, 이소가 사무실에 가기 며칠 전이었다. 남자의 이상한 행태를 이소가 경계하듯 바라보자 고 대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저놈이 원래 존나게 말을 잘하는데, 그날 혀를 썰려서.”

보지 않으려 했는데 저절로 시선이 남자에게 돌아갔다. 남자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아, 하고 웃었다. 혀가 반 토막밖에 없었다. 이소는 움찔대며 몸을 물렸다. 돌연 고 대표가 턱을 쥐어잡았다. 희고 작은 턱이 팩 돌아가 고 대표의 얼굴 코앞에 고정됐다. 볼과 인중에 깊게 파인 상흔이 더 잘 보였다. 낮고 질척이는 목소리는 바깥의 소음을 제치고 귓가를 핥는다.

“왜 왔었어?”

이소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술을 달싹였다. 고 대표와 자신은 채무 관계다.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고 해서 의무까지 소멸되지는 않는다.

“저, 대표님. 빌린 돈 전부, 드릴 수 있어요.”

“전부?”

“네.”

고 대표의 눈썹이 꿈틀댔다. 한쪽 입술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꽤 많은데, 어디서 그렇게 큰돈이 났을까.”

돈의 출처까지 밝힐 수는 없어 입을 꾹 다물자 턱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소는 어금니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커다란 손이 쥐면 쥐는 대로 볼이 밀려 올라가 결국은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와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수치스러웠지만 참았다. 고 대표는 원래 이런 식으로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 애인이 줬나.”

“아니에요.”

“옷차림만 보고서는 못 알아볼 뻔했어, 이게 다 얼마냐.”

고 대표의 눈이 이소가 입은 솔이 고운 카디건에 내려앉았다. 못해도 300만 원짜리 명품. 윤이소는 자신이 입은 옷이 얼마나 비싼 옷인지 모른다. 제 몸에 걸친 옷과 운동화는 그저 해준의 지시로 사람들이 사다 주는 것을 입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그저 서랍 안에 곱게 개어진 옷을 구경하고 갈아입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 나름 해준의 인형 놀이였고, 이제는 그 장단에 맞춰 주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다.

이소는 턱을 쥐어 잡힌 채 우물댔다. 손에서 담배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가게 팔고 나온 돈이랑, 그동안 모았던 돈 전부예요. 안 계시는 동안 모은 것까지 해서 이자와 원금 전부 드릴 수도 있어요. 그동안은 어디 계셨는지 몰라서 못 드렸어요. 계좌 주시면 지금 바로 입금해 드릴게요. 계좌가 싫으시면, 현금으로 드릴 수도 있….”

“이소야.”

말허리를 자른 고 대표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긁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넌 왜 형 잘생긴 얼굴 좆창 난 거는 가타부타 말이 없어. 서운하게 돈 이야기만 하고.”

이소가 말을 멈추고 얼굴을 바라보자 고 대표가 보란 듯이 얼굴을 휘휘 돌렸다. 나 말야, 여기도 찢기고 여기는 구멍 나고, 다행히 혀는 안 잘렸는데 말이지. 아- 하고 입을 벌리자 희고 두터운 혀가 널름널름거렸다. 이소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고 대표는 재미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일어났다. 에휴, 씨발.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무슨 말을 하냐. 야, 그냥 빨리 끝내게 문 좀 잠가 봐. 그 말 한마디에 사내들은 잠금장치를 돌리고 그 앞에 섰다.

고 대표는 천천히 재킷을 벗어 내려 버려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무언가 나쁜 기운을 감지한 이소가 뒤로 팔을 물렸다. 그러나 남자들의 두툼한 종아리에 닿아 갈 곳이 막혔다.

“너 돈 안 갚아도 돼.”

고 대표가 소매를 끌어 올렸다. 색이 다 빠진 문신 사이로 부풀어 오른 상처 자국이 가득이었다. 원래 저런 상처가 있었던가, 2년을 넘게 봐 왔지만 본 적이 없는 흉터였다.

“이미 상환 다 했잖아. 네 서방이.”

이소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멎었다. 어느새 해는 모조리 져 어두컴컴해진 바깥에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만 건물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고 대표가 저벅저벅 걸어올 때마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사라지기를 여러 번. 섬뜩하게 무표정한 낯보다도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이 금시초문이라 이소는 말을 잃었다.

“아, 차해준이가 말 안 해 줬어?”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자신의 앞에 선 고 대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 장부 태운 지 백 일 넘었다고.”

네 애인이 돈을 갚아 주겠답시고 찾아왔길래 이미 여름 초입에 다 받아 냈지. 너무 순순히 턱턱 내놓길래 돈 나올 구석이 있는 선생인가 보다, 하고 몇 번 찔렀다가 이게 웬걸. 이 새끼가 그냥 선생이 아니고 순 깡패 새끼인 거야. 우리같이 깨끗하게 운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다고, 씨발, 무슨 좆 같은 서류를 들이밀어서는 사인을 하라고. 야, 치영아.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고 대표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기억이 났다는 듯 파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맞아. 그 영감 얼굴에 대고 그랬어. 좆 까, 씨발!

* * *

“좆 까, 씨발.”

고태균은 태우던 담배를 서류에 비벼 껐다. 그날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사무실이 쑥대밭이 됐다. 고작 오토바이 배달원의 돈 몇 푼 떼어 먹고 건드려 놨다고 이 지랄을 해 놨다. 좋아하던 난이 죄다 엎어지고 비싼 컴퓨터와 소파가 나뒹굴었다. 데리고 있던 동생들은 모두 바닥에 엎어져서 바들바들대고 있었다.

머리가 터진 놈, 혀가 잘린 놈, 다리가 부러진 놈, 팔이 꺾인 놈. 뭐 하나 몸이 성한 놈이 없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이 새끼는 뭐 이렇게 잔인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 사이로 검은 정장을 입은 중늙은이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서명하세요.”

“영감, 서류 들고 꺼져. 오늘 뒈져서 천국에 있는 할매 만나고 싶지 않으면.”

“서명하세요.”

씨발, 로봇도 아니고. 노인은 차분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노인과 함께 사무실에 쳐들어온 남자들은 품에서 꺼낸 장도리로 가타부타 말도 없이 대가리부터 깨댔다.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후 남은 것은 고태균 하나였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가방에서 꺼낸 흰 비닐봉지를 사무실 구석구석에 쑤셔 박았다. 고태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씹쌔끼들아, 왜 내 사무실에다가 떨을 처넣고 난리야!”

“고태균 대표님은 홍콩에 있는 운반책을 통해 국내 엔터사에 약 12차례에 걸쳐 환각제 엑스터시 280여 정과 동물마취제인 케타민 580여 그램을 반입해 판매하셨고 실제로 본인도 4차례에 걸쳐 투약을 하셨죠.”

“그게 뭐. 영감도 죽은 좆 좀 세우는 명약 좀 넣어 줘? 그리고 이 서류는 전혀 다르잖아. 내가 언제 대마를 취급했어. 이건 위조지.”

“위조가 아니게 될 겁니다. 서명만 하시면요.”

노인이 내민 한 장짜리 종이에는 유명 엔터테인먼트와 연예인 개인, 국회의원 등에게 판매한 대마의 양과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거짓말이다. 대마는 워낙에 취급하는 놈들도 많았고 통로도 많았기 때문에 굳이 취급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 물어물어 엑스터시와 케타민 정도로 소량을 주고받은 것뿐이다. 고작해야 나이 많은 모델 스폰서들한테 밤일이나 잘하라고 넣어 준 게 다란 말이다. 그러나 서류에 기재된 양은 아주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마약사범으로 이름을 올리게 될 수준이었다.

“영감, 도대체 뭐가 문제야? 윤이소 그 새끼 옆에 붙어 있던 놈이 시켰어? 그래, 인정할게. 내가 저번에 원금 덜컥 갚아 주니 간사한 마음이 들어서 몇 번 더 찾아갔었어. 근데 그때마다 뭘 했어, 네 놈 따까리들이 존나게 훼방 놓고 팔다리 못 쓰게 해 놨잖아.”

“그럼 거기서 그만뒀어야지.”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낮은 천장이 아님에도 머리가 닿을 듯 훤칠한 키를 가진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고태균은 남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평생 운동이라고는 담 쌓고 지냈을 것 같은 유약한 인상의 남자는 냉한 눈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봤다.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의자에 기대어 있던 고태균은 직감했다. 아, 저놈이구나. 윤이소 껌딱지.

남자는 쓰러진 사내들을 그저 지르밟고 걸어 들어와 고태균 앞에 섰다. 아름다운 남자다. 그러나 외적인 느낌과 별개로 기분 나쁘고 불쾌한 기운을 잔뜩 풍겼다.

고태균은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10대 시절부터 길바닥에 구르고 온갖 쓰레기 짓을 다 하고 다니면서 자신은 날 것 그대로의 들개 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동류를 보면 코가 먼저 벌름댔다. 저 자식도 쓰레기구나. 저 새끼도 거지 같은 인생이구나. 그리고 그런 데이터베이스들이 두둑히 쌓이면 이제는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눈 앞의 남자는 시체 썩는 냄새를 꽃 향기로 숨긴 더러운 또라이다.

“왜 잘 지내고 있는 애를 자꾸 데려가려고 해. 불안해하잖아.”

남자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비닐봉지를 다 넣었는지 공손히 손을 모으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가 손짓하자 고태균의 수하들을 꽁꽁 포박했다. 능숙한 솜씨였다. 사내들이 고태균의 등 뒤에 섰다. 강제로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손목을 뒤로 묶었다.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가만히 고태균이 묶이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사랑 참 꼴사납게 한다.”

고태균이 웃었다.

“그 새끼 구멍이 어지간히 좋은가 봐. 근데 어쩌냐, 걔 내가 이미 스물두 살에 만났을 때부터 존나게 따먹고 중고품 됐는데. 구멍 허벌이라 잘 열릴 거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깎아 준다니까 좋다고 다리 벌리더라니까.”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듣고 있던 준경이 노골적인 언사에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나 해서 동요할까 해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해준은 차분했다. 하지만 준경은 그럴 때가 오히려 불안했다.

고태균은 마치 도발하려는 듯 해준의 앞에 대가리를 디밀었다. 좋았다니까? 대표니임, 대표님. 해 가면서 살랑살랑 꼬리 흔들고, 뒤에 손가락으로 쑤셔 주면 앙앙 운다니까? 걔 그런 거 좋아해. 강제로 박아 주면 그만하라고 울면서도 꼭꼭 잘 물고 안 놔줘. 비명을 질러대는데 그게 참 재밌어. 고태균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 웃었다.

“이제 곧 우리 애들 도착할 거야. 여기 있는 니 새끼들 다 뒤지고 나면 그 게딱지만 한 가게에 있는 윤이소 년도 내가 꼭 잡아서-”

“니네 애들 안 와.”

남자가 고태균의 입에 굴러다니던 양말을 쑤셔 박았다. 팔 하나 줘 봐,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자 등 뒤에 있던 팔을 잡고 있던 사내들이 고태균의 팔 한 짝을 내줬다. 고태균이 먹먹한 목소리로 억억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남자는 품에서 긴 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족히 20cm는 되어 보이는 긴 바늘이었다.

“읍, 으흐흡-”

장침 끝이 반짝였다. 꼭 무언가 발린 것 같았다. 뭐가 되었건 제 몸에 갖다 박는 것은 사절이다. 발을 구르고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발악했다. 고태균이 하도 몸부림을 치자 남자는 발을 들어 고태균의 고간을 깊숙이 눌렀다. 중심부가 눌리자 압박감에 쉽게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더 아플 테니까.”

그리고 가운뎃손가락 손톱 밑으로 그 긴 장침이 그대로 박혔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뒤틀었지만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고통스러웠다. 고작 바늘 하나가 박혔을 뿐인데 팔이 잘리는 듯한 아픔에 눈과 코, 입에서 줄줄 물이 샜다. 짧은 시간, 장침이 손목까지 닿았다. 남자는 아무 표정 없이 장침의 끝부분을 잡고 손가락을 놀렸다. 손등의 혈관과 신경을 벅벅 긁는 첨예한 고통이 온몸을 퍽퍽 내리쳤다. 고작 엄지와 검지를 놀리는 것뿐이었는데 이를 세운 짐승에게 팔을 물어뜯기는 것 같았다.

“아악! 씨브, 아으아아! 카아악!”

고태균은 책상에 머리를 쾅쾅 내리쳤다.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는데도 타액과 눈물로 온몸이 젖었다. 바늘을 즈윽 꺼내는 동안 고태균은 혼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입에서 양말이 툭 떨어졌다. 어으, 아. 동공이 돌아가려는 것을 남자가 ‘다른 손도 줘.’ 하자 마자 휘릭 돌아왔다.

그 뒤는 어떻게 빌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 사장님, 대표님. 잘못했습니다. 그만해 주세요, 살려 주세요. 꽥꽥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주저 없이 다른 손에도 바늘이 갖다 박혔다. 양말이 떨어지자 듣기 싫은 비명이 사방을 채웠다. 바닥에 엎어진 놈들의 새파랗게 질린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두 손에서 바늘이 빠지자 온몸에 경련이 온 듯 벌벌 떨렸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고문에 바닥을 기었다. 혀가 굳었고 저절로 허리가 떨렸다. 바지가 척척했다. 지린 것 같았다. 남자가 고간에서 발을 뗐다.

“거짓말한 벌이야.”

노인의 손이 고태균의 손을 가져다가 지장을 찍었다. 씨팔, 그래. 니들 쪼대로 해라. 씹새들아. 그리 생각하며 눈이 감겼다.

정신을 차려 보니 마약사범으로 교도소에 옮겨진 후였다. 검게 변한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신경다발이 너무 많이 손상이 되어 그저 달려 있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교도소에 가고 나서야 안 사실이었다.

떨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첫 한 달은 볼 때마다 약쟁이라고 존나게 처맞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약을 구해 달라고 졸졸 쫓아다니던 놈들에게 뒤가 씹창 나게 따였다. 손을 못 쓰게 돼서 매번 반항도 못 했다. 정말 좆같았다. 죽여 버릴 거다, 그 새끼. 저주를 하며 그렇게 백 일이 넘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름 없는 후원인의 보석금으로 뜬금없이 풀려나왔다. 나오자마자 두부를 삼키고 윤이소부터 찾았다. 그런데 그 거지 같은 놈이 그대로 날랐다. 집도 버리고 가게도 버리고, 같이 살던 할멈은 갑자기 미국으로 뜨고 애새끼도 어린이집도 관뒀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물어보니 오래전에 집 무너지고 종적을 감췄다고 했다. 어디 가서 찾지, 이 개새끼들을. 돈도 집도 없던 출소자 고태균은 차갑게 굳은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손 고치셔야죠.

천금과 같은 기회를 얻었다. 차해준 교수 좀 없애 주세요. 선입금이 두둑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자 ‘대표님처럼 잃은 게 많은 사람이죠.’ 하던 남자. 죽은 걸 확인하면 수술에 쓸 수 있게 나머지 금액도 넣어 드릴게요. 원한 관계가 한둘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거야 걱정 말라며, 팩스로 도착한 윤이소의 행적을 받아 들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고태균은 당시에 함께 당했던 수하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했다. 다들 눈을 번득이며 달려들었다. 껍데기집에서 회포를 풀고 작은 반지하 방에서 작전을 짰다. 윤이소는 미끼다. 차해준만 조지면 돼. 죽일 거야, 개새끼. 고통스럽게 죽일 거야.

* * *

두툼한 팔을 따라 떨어진 시선 끝에서 검은색 가죽장갑을 벗어내며 고 대표가 입술을 훑었다. 이소의 얼굴에 짜잔, 하고 보여 준 손은 처참했다. 손끝부터 번개를 맞은 듯 검게 퍼져 내려간 가지가 손등까지 이어져 있었다. 신경이 지나가는 자리가 모두 끊겼다고 했다. 수술을 네 번이나 했어.

“제대로 구부러지지도 않아.”

손을 까닥거리는 꼴이 꼭 마네킹 손 같다. 소름이 끼쳤다. 이소가 이를 악물었다. 고 대표가 굳어 버린 손에 어색하게 담배를 끼우고 고개를 기울였다. 불이 붙은 연초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 사이로 비친 뱀 같은 눈동자가 좁아졌다 크기를 키웠다.

“하나뿐인 애인이 구하러 와 주기를 기다리나 봐.”

후, 내뱉으며 웃는다. 전화해 봐, 아 전화기 없지.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어쩌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소가 고 대표가 서 있던 자리 빈틈으로 몸을 날렸다. 좁게라도 열린 창문으로 몸을 비집고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 대표의 구둣발이 조금 더 빨랐다.

“미친아, 여기 5층이야. 뛰어내리면 뒈져요.”

컥, 하고 다시 옆으로 굴렀다. 주머니에서 도로록 오토바이 키가 빠져나왔다. 이소는 바닥을 기어 키 꾸러미에 달린 자동차 키링을 집어 들었다. 누구라도 제발 들어, 누구라도. 축제 때문에 아무도 모르더라도 지나가는 누군가가 들어 줬으면 하는 심정으로 장난감 키링의 하판 버튼을 꾹꾹 눌렀다. 주영이 그랬다. 비행기 엔진 소리만큼 큰 경보가 울려 퍼질 거라고.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버튼을 눌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큰 소리가 났었는데. 이소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고 대표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애기야. 그 나이 먹고 호신용 딸랑이 들고 다니면 안 쪽팔려?”

얌전히 좀 있으라는 말과 동시에 여러 명이 달려들어 이소의 등과 허리를 마구 때렸다. ‘얼굴은 건들지 마’라는 말에 몇 대 맞던 뺨만 잠잠해졌을 뿐 다리와 팔 할 것 없이 무지막지하게 맞았다. 손에서 키링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팔과 다리를 웅크린 채 맞던 이소의 움직임이 잠잠해지자 폭행도 멎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고 대표가 킬킬 웃었다. 새끼, 맷집 존나 좋아 하여간.

“차해준 금방 와, 걱정하지 마.”

쪼그려 앉은 고 대표가 머리를 썩썩 쓰다듬었다.

“우리 이소는 좋겠어. 나 같으면 쎄하다 싶으면 도망갔을 텐데, 여태 잘 붙어 있네.”

때아닌 다정한 말투에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뜨고 바라보자 씨익 웃는 고 대표가 눈을 맞췄다. 꼭 스물두 살 때 마주쳤던 미소와 같았다. 왜 그때는 저 미소에 홀려서 케이크나 사다 바쳤을까. 피가 맺힌 침을 꿀꺽 삼켰다. 고 대표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평생 봉양하게 생긴 할멈은 미국으로 치워 줘, 지 집에 들일라고 멀쩡히 살고 있는 건물에서 내쫓아, 너한테 조금만 지랄하면 동네 사람들 죄다 썰어 버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겠다고 일도 못 구하게 해, 오래된 친구 만날 때도 사람 붙여, 집에는 카메라 달아, 사진 찍어, 추적기 달아…. 이거, 그 뭐야. 의처증, 아니 남자니까 의부증. 뭐 그런 거 아니냐.”

“…….”

“안 믿는 눈친데?”

야, 나와 봐라. 얘가 내 말을 안 믿잖아. 나 거짓말 하는 거에 민감해. 고 대표가 부르자 검은 모자를 쓰고 있던 남자 하나가 주춤주춤 걸어 나왔다. 인사해, 구면이지. 고 대표의 말에 남자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에 비친 남자의 얼굴에 이소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근이었다.

이미 많이 쥐어 터졌는지 눈 뼈 한쪽은 내려앉았고 입술이 다 터져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해준에게 꼭 그만큼 맞고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었을때와 모습이 비슷했다. 고 대표가 상근의 종아리를 발길질하자 상근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도, 도련…… 차해준이, 철물점 사장 다리랑 팔 부러뜨리라고 해서, 사람들 보냈었고… 그, 이사 가라고 해서 섬으로… 보내 버렸어. 옛날 살던 집에 감시 카메라 달았고, 너한테 사람… 붙이라고 해서 따라다니게 했었어. 사진이랑 문자로 행적 보고하고, 네 핸드폰 기록도 실시간으로 전부 차해준한테 전송되게 되어 있어…. 그게… 아마 6개월 정도 됐어. 그 할멈이… 우리 집에 있을 때 차해준이랑 이야기하고 나서 갑자기 큰돈 받아서 떠났고…. 너 몰래 범양 조사한 지도 꽤… 됐어. 네가 누구 만나는지, 어디로 가는지 다 알아, 그 새끼는.”

“사진도 있다고 했잖아. 새끼야, 그거 꺼내.”

고 대표의 말에 상근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거는, 나랑 일했던 사람들… 거에서, 내가 혹시 쓸 데가 있을까 하고, 가져온 건데….”

“하여간 이 존나게 깜찍한 새끼, 또 쓸 데 있을까 봐 몰래 저장한 거 봐. 개음침해.”

상근은 부정하지 않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소는 상근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들이민 제 얼굴이 무척 낯설고도 익숙해서, 그날은 잊을 수가 없었던 날이라 더 그랬다. 주영과 이야기를 하고 나와서 엉엉 울다가 결국 전봇대에 기대어 모두 게워 냈던 날. 벌게진 얼굴을 하고 비참하게 울었던 날이었다.

“미친 새끼, 토하는 사진은 왜 저장해. 어오, 비위 상해.”

상근에게 욕을 했지만 고 대표는 실실 웃고 있었다. 고 대표가 상근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 봐. 형이 약속 지킨다고 했잖아. 너 돈 안 갚아도 돼. 이제 끝이다. 끝!”

그 말에 상근이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이소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오상근이 돈을 빌린 사람이 고태균이었구나. 상근이 해준의 발에 매달려서 저택을 나가면 죽는다고 애원했던 게 아직도 선명한데 또다시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친다. 고 대표가 손짓을 하며 상근을 보냈다.

“그럼 잘 가고.”

상근이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덩치가 큰 남자가 상근을 잡아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상근이 바깥으로 떨어져 내렸다. 상근이 창문 밖으로 떨어지고 찰나의 시간, 퍽 소리와 함께 사위가 고요해졌다. 방금 전 제가 저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몸을 던지려고 했었던 것이 생각나자 이소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쟤 내 돈 2억 먹고 튀었는데 어디 숨었나 했더니 차해준이 꽁꽁 숨겨 주고 있더라고. 이름도 감추고 얼굴도 바꾸고. 나중에 쫓겨 나와서는 차해준 약점 하나 이야기해 주면 돈 안 갚아도 된다니까 바로 술술 불던데.”

차해준의 약점. 고 대표는 이소를 빤히 바라보며 자박자박 걸어왔다. 차해준이 무얼 하고 지내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부터 어떤 사람들하고 움직이는지, 어떤 회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그 저택에 사는 사람들이 왜 거기에 매여 있는지. 차해준은 무엇에 집착하고 잃고 싶지 않아 하는지.

“저 새끼 음침한 게, 그동안 다 훔쳐 봤었나 봐. 다정하고 좋은 주인이더라. 낮엔 놀아 주고 먹어 주고 밤엔 구멍도 쑤셔 주고.”

너희 떡치다가 가구도 몇 번 부쉈다며. 어우, 우리 이소 후장 남아나겠냐. 질 낮은 농담을 던지며 고 대표는 눈을 접어 웃었다.

“근데 이소야, 좀 의외다.”

고 대표가 이소의 앞에 섰다. 어쩐지 사타구니 중심이 조금 불룩해진 것 같았다.

“내가 자자고 했을 땐 남자여서 싫다며.”

으득,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취향이 변했어? 아니면, 그 새끼 좆이 그렇게 좋아? 맛있어?”

고 대표는 주머니에서 작은 주사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실린더 안에 든 노란 액체가 넘실넘실거렸다. 옆에 선 남자가 ‘형님, 얘는 건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자 고 대표가 침을 뱉었다.

“좆 까. 어차피 쇼크 오고 나면 뭐라고 시부리는지 알 게 뭐야. 야, 잡아.”

돌연 남자들이 다가와 이소의 양팔을 붙들어 맸다. 무슨 일인지 직감한 이소가 발버둥을 쳤다. 고 대표에게 이미 장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여서 그런지 더 무서웠다. 놔, 놔 이 새끼들아!

“이 형님이 교도소에서 속담을 존나게 공부했어요.”

고 대표가 손가락을 세워 주사기 몸통을 탁탁 두드렸다. 방울방울진 액이 바늘 끝에 맺혔다.

“인생은 새옹지마란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고. 근데 그건 평범한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야.”

너같이 재수 없고 팔자 사나운 애들 말고.

하얀 팔뚝에 주저 없이 푹 꽂힌 주사기의 밀대가 주욱 밀려 내려갔다. 정체불명의 액체가 혈관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속이 울렁거렸다. 주삿바늘이 퐁 빠지자 이소가 몸을 뒤틀고 팔을 긁어내렸다. 악! 악! 악! 고 대표가 몸을 일으켰다. 오버하지 마, 뒤지는 거 아니거든.

“대신 뒤질 정도로 좋을 거야. 이게 얼마나 비싼 약인데.”

고 대표를 올려다보는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나 곧 이소의 초점이 갈 곳을 잃었다. 목울대에서 울컥울컥 침이 샜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타액이 터져 나왔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어 빼자 고 대표가 이를 흥미롭게 내려다봤다.

“역시 반응 빠르네. 존나 꼴려. 윗입 푹푹 젖는다.”

히끅히끅 숨을 들이마셨다. 아무리 침을 삼키려고 해도 삼키는 것보다 두 배는 줄줄 새어 나오는 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대로 타액에 질식할 것 같았다. 약이 잘 듣는 제 몸이 너무 원망스럽다. 이소가 바닥에 손을 대고 엎어졌다. 배 속이 간지러웠다. 머리가 울렸다. 고 대표의 목소리가 두 개, 아니 세 개로 들렸다. 최음제 같은 건가, 엑스터시…. 뭐 그런 거. 고 대표가 느리게 걸어와 이소의 옷깃을 슬쩍 밀어냈다.

“씹새끼…. 너 개랑 자냐?”

온몸에 낭자한 상흔, 잇자국에 고 대표가 허,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차가운 두 손을 들어 셔츠 깃을 잡고 우드둑 벌리자 단추 여러 개가 타닥 바닥으로 튀었다. 손자국대로 멍이 든 허리, 부어오른 유두, 발그레한 볼, 젖은 눈. 고 대표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거, 쓸 만한데.

“이소야, 약 어때. 죽이지.”

고 대표가 몸을 일으켜 성급한 몸짓으로 벨트를 끌렀다. 야, 약 하나만 더 줘 봐.

“두 번 쓰시게요?”

“나 쓰게, 씹쌔야.”

교도소에서 존나 뒤를 대주다 보니 나도 돌아 버렸나. 속이 끓었다. 황급하게 주사기를 꺼내 제 팔에 꽂아 넣고 약을 절반만 넣었다. 오늘의 거사는 윤이소가 아니라 차해준이 치를 테니, 적당히 즐기고 버려야 했다.

약을 넣은 지 30초, 이소는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고 대표가 혀를 빼어 볼을 핥았다. 좋지, 이소야. 새끼 웃네. 고 대표가 이소의 뒷머리카락을 잡아 젖혔다. 저절로 혀가 빠졌다.

“이거 그냥 기분만 좋아지는 거 아니야, 머리가 팽팽 돈다? 씨발, 뭐라더라. 뇌가 130%, 150% 활성화가 된대요. 웃기지, 사람 뇌는 살면서 20%도 못 쓰는데 고작 약 하나 먹었다고 그렇게 되는 게. 그런데 정말 그렇다니까. 내가 씨발 이걸 먹고 여섯 살 때 잊어버렸던 할머니 이름이랑 동네 똥개 이름이 생각이 나더라니까.”

고 대표가 이소의 코앞에 팽팽하게 세운 좆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이거 먹고 섹스하면 어떨 거 같아. 어? 고 대표의 좆이 이소의 입술을 툭툭 쳤다. 약효가 완전히 돈 이소의 눈이 멍청하게 끔뻑였다. 분수처럼 붉은 입술에서 타액이 줄줄 흘렀다.

“평생 가도 이날 한 섹스는 못 잊는다는 거야.”

일단 물어. 입이 젖어서 잘 들어갈 것 같으니까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득한 땀 냄새와 비릿한 정액 냄새가 났다. 남아 있는 정신을 쥐어짜 바닥을 기었다. 고 대표가 머리를 잡으려고 하면 뿌리쳤고 마네킹 같은 손으로 볼을 잡으려고 하면 밀어냈다. 손을 제대로 쓸 수 없으니 쉽게 제압할 수 없는지 고 대표는 열이 뻗힌 듯 좆을 덜렁 내놓고 사정없이 이소의 뺨을 쳤다.

“야, 내가 씨발. 5년을 참았잖아. 네가 그때 대 준다고 해 놓고 그렇게 뺑이를 쳤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입 대. 야, 아가리 열라고.”

뺨을 맞을 때마다 골이 울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도망을 가려고 하자 남자들이 발목을 잡고 콱 넘어뜨렸다. 바닥을 기었다.

“신발 벗겨.”

해준이 사 준 운동화가 바닥을 굴렀다. 고 대표가 구석에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집어 바닥에 내리쳤다.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 사방에 튀었다. 고 대표가 낮게 으르렁댔다.

“도망가면 발바닥 씹창 나는 거야.”

솔기가 고운 카디건이 무참히 벗겨졌다. 여러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소가 고개를 저었다. 놔, 놔 이 새끼들아. 그러나 말이 안 나왔다. 속이 덥고 어지러워서 팽팽 돌았다. 머릿속에 해준의 목소리, 해준의 얼굴이 수십, 수백 개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 이소 씨, 잘 어울려요.

교수님, 내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요?

- 이소 씨, 잘 다녀왔어요? 하루 종일 보고 싶었어.

내가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다 보고 있었으면서.

- 그렇다고 하면, 곁에 남아 주려고?

곁에 남기를 바라서 그렇게 했던 거였나.

이소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왜 이러는 거지, 왜 사람들은 나를 이리 막 대하는 거지.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속없고 바보같이 굴었나. 마음을 준 이들은 왜 저를 다 이리 못되게 대하는 건지, 갈기갈기 찢어지는 연심과 순정이 억울하고 화가 나 이소는 우흐흑 울음을 터뜨렸다. 고 대표가 웃음을 잔뜩 머금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달랜다.

“야, 아직 울지 마라. 시작도 안 했는데.”

네 쌍의 손이 이소의 머리와 사지를 결박했다. 고 대표의 비릿한 좆이 굳게 닫힌 입술을 꾹꾹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 으븝.”

“와, 와…. 씨발, 벌려 봐. 오, 오. 들어간다, 들어가.”

더럽게 맛이 없었다. 고불고불한 음모가 코끝에 닿자 이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뒤통수를 꽉 잡은 여러 개의 손은 고 대표의 샅 안쪽으로 꾸욱 힘을 주어 눌렀다.

“아, 아하하하, 아하하하! 야, 씨발. 씨발…. 아, 씨발. 진짜… 존나 좋다….”

돌연 입 안에서 불룩하게 커지기 시작한 성기가 목구멍 안쪽을 깊게 찔렀다. 작지 않은 크기였음에 불구하고 입 안에서 크기를 더 키우자 숨을 쉬는 게 힘들어졌다.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자신도 모르게 파드득거리는 손가락은 잔뜩 구부러진 채 손바닥을 벅벅 긁어내린다. 잡힌 손목이 끊어지도록 버둥거리지만 족쇄에 묶인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 대표가 이소의 머리를 잡고 거칠게 허리 짓을 시작하자 고 대표의 복부가 코를 뭉개며 부딪힌다. 목구멍이 따갑고 아팠다. 비린내 때문에 토할 것 같았다.

“읍, 흐, 흐브으읍, 브극, 흡…!”

“내가, 씨발, 빵에 있을 때 기도를 존나게 열심히 했더니, 이런 날도, 씨발, 오고. 하나님, 감사합, 니다.”

부걱부걱 입 안을 들어왔다 나가는 좆질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고 대표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지퍼를 여는 소리가 났다. 허벅지가 벌벌 떨렸다. 울음소리가 커졌으나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고 대표의 다리 사이로 비죽 나온 발바닥이 시멘트 바닥을 사정없이 벅벅 긁어내렸다. 허리 짓이 빨라지자 그만큼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목구멍을 퍽퍽 쑤시며 부딪히는 고 대표의 복부에 투둑 힘이 들어갔다. 고 대표의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동시에 입 안으로 뜨겁고 찝찔한 탁액이 울컥울컥 넘쳐흘렀다. 이소의 눈동자가 크게 열리며 다리가 거세게 발버둥을 쳤다.

“아, 이소야…. 형 우유 다 받아먹어. 너 간식 좋아하잖아….”

목구멍을 꾸욱 누르곤 퐁 소리가 나게 머리를 빼 주자 이소가 바닥에 엎어진 채 거센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콜록, 크켁, 켁, 웩, 웨엑….”

“일어나.”

“켁, 크흡, 시, 시어.”

“그래, 계속 싫다고 해? 난 싫다는 새끼한테 존나게 꼴리니깐.”

머리채를 잡힌 채 다시 한번 입술이 벌어졌다. 흙이 잔뜩 묻은 매트리스에 눕혀진 채 고 대표의 좆이 다시 한번 밀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게 이소의 얼굴에 주저앉은 고 대표가 한 손으로 머리통을 잡았다. 팔을 들어 밀어내려 했지만 약 기운 때문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들이 킬킬 웃는 소리가 났다.

“나 입 따먹을 동안 바지 벗겨. 어디 얼굴만큼 구멍도 예쁜가 보자.”

완전히 주저앉은 채 좆을 꽂아 넣는 고 대표의 허리 짓이 거셌다. 이소의 팔이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엉덩이를 밀어내려 버둥대자 남자들이 발목을 잡은 채 바지를 벗겼다. 양말만 남기고 아래가 서늘해지자 이소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듯 크게 울었다.

“야, 이소야. 너, 이거, 나 원망하지 마. 차해준 원망해.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흐으….”

네가 이런 일 당하겠니. 다 그 새끼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네 인생 조진 건 걔 때문이라고. 고 대표는 마치 해준 때문에 모든 일이 시작된 것처럼 말했다. 이소의 눈꼬리에 주륵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어이 찢어진 입술 끝이 쓰라린 만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형님.”

“어, 왜, 씨, 씨바알, 왜. 쌀 때 말 걸지 마.”

한참을 이소의 머리통을 잡고 좆질 하던 고 대표가 어어, 어어어,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사정했다. 이번에는 눈과 코에 싼 더운 정액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눈물로 얼룩진 채 고개를 들자 고 대표 말고도 남은 사내들은 엉망이 된 제 얼굴을 보며 자신들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더러운 좆들이 꼿꼿하게 선 채 이소의 앞에 섰다. 지걱지걱지걱 빠르게 움직이는 손 위로 더러운 정액들이 얼굴과 머리카락, 어깨를 적셨다.

다음 타자들 줄 서라. 그 말에 이소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떨었다. 고 대표가 비식비식 웃는 소리가 났다. 다음 놈이 다리를 벌린 채 이소의 앞에 섰다. 고개를 돌리려 하자 두툼한 손이 머리를 잡았다. 또 입술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좆이 역겨웠다.

“야, 이 새끼 털이 하나도 없네. 밀었냐?”

“원래 없는 거 같은데요.”

“아니, 씨발. 세상에…. 이 귀한 백자지를 이제 봤네. 야, 안 되겠다. 나 급체해도 몰라.”

고 대표가 이소의 발목을 집어 들었다. 다리 사이에 흉흉하게 선 것이 두 번이나 쌌는데도 여전히 빳빳한지 허벅지와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이소가 신음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안 돼, 정말 안 돼. 오래된 가로등에 반사된 안광들이 소름이 끼친다. 고 대표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기에 저절로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때마다 고 대표가 힘을 풀라며 둔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파서, 정말 아파서 그러는 건데도 목소리로는 자꾸만 어리광을 피우듯 아흐으으, 으흐으 소리가 났다. 입이 너무 아팠고 아랫배가 저릿저릿했다.

“우는 소리 존나게 꼴려. 차해준도 이 소리 때문에 너랑 떡 못 끊었겠다. 어어, 얘 엉덩이 때리는데 좆 선다. 선다.”

“흐, 흐으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이 개새….”

“마음 바뀌었어. 야, 이소야. 오늘 차해준 안 오면 너 그냥 내 전용 변기 해라.”

일단 어디 한번 조교 잘됐나 보자. 고 대표가 웃으면서 좆 대가리를 골 사이에 비집고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무리 정액이 범벅이 되었다고 해도 좁은 구멍이 갑자기 열릴 리 없다. 이소가 바닥을 긁으며 비명을 질렀다. 돌연 문밖에서 쾅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이소를 제외한 남자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뭐냐.”

“불꽃놀이 시작한 걸 겁니다.”

그러나 불꽃놀이치고는 하늘은 고요했다. 다시 한번 쾅 소리가 나자 서로 눈치를 보던 사내들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소리는 건물 안에서 나고 있었다. 문밖에 있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자 사내들은 바닥에 떨어진 각목을 주워 들고 주머니 속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고 대표는 눈을 치켜뜨곤 귀두를 푹 뺀 뒤 바지를 추어올렸다.

“잠갔지?”

“예.”

또각또각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는 문 앞에서 멎었다. 이소는 웅웅 울리는 귀에 손을 갖다 댔다. 나는 저 소리를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다. 하지만 자꾸만 무서워서 심장이 뛰었다. 이가 덜덜 떨리는 것을 겨우 힘을 주어 참았다. 약 기운 때문일 거야, 이 이상한 약 때문일 거야. 정액으로 얼룩진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철컥철컥, 잠긴 문고리가 몇 번 돌아가더니 이윽고 쿵쿵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통째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동요한 사내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둥그런 문고리가 툭 하고 빠지자 두꺼운 철문 역시 힘없이 달칵 소리를 내며 틈이 벌어졌다. 잠시 고요했다.

쾅- 두꺼운 철문이 움푹 패이며 벽에서 분리된 채 바닥을 굴렀다.

“잠갔다매, 씨발 새끼야.”

“잠갔는데….”

이소는 고 대표에게 뒷목덜미를 잡힌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좁아진 시선이 문 바깥으로 떨어졌다. 검다. 어둡고 눅눅한 건물 한가운데 길고 검은 것이 꼿꼿이 서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그림자처럼 보이는 그것은 제가 기다리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소는 반갑다거나 기쁘지 않았다. 왜 제 마음이 이리 두려움에 떠는지 알 수 없었다.

해준이 서 있었다. 뿌연 콘크리트 먼지 잔해가 걷히자 검은 코트를 입고 선 모습은 꼭 저승사자 같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제대로 재미 보기 전인데. 아깝다.”

우리 애기는 저 새끼 조지고 오빠랑 마저 하자? 고 대표가 이소의 뒷덜미를 집은 채 일으켰다. 숨통이 조여 맥없이 일어난 이소가 버둥거렸다. 정액이 범벅이 된 눈썹 때문에 눈을 겨우 뜰 수 있었다. 해준이 한 걸음, 한 걸음을 차분하고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해준이 걸을 때마다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쏘아대는 전광판 불빛이 번쩍였다. 희고 붉은, 때로는 노란 빛이 어지럽게 해준의 낯을 밝혔다. 해준의 뺨에는 피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고 물기 같은 것이 어리기도 했다. 무엇이 되었던 섬뜩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고 대표가 실소를 터뜨렸다.

“존나게 눈물겹다, 애인 구하러 여기까지 와 주고. 동네 사람들! 이 호모 새끼들의 세기의 사랑을 보세요!”

고 대표가 웃으면서 팔을 흔들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족히 여덟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품과 춤에 칼과 각목을 든 채 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 대표가 알랑거렸다.

“근데 차 교수님, 여긴 어떻게 왔어? 우리 이소 핸드폰도 없고, 본 사람도 없는데…. 반지도… 보자, 없네. 그럼 아, 혹시 이런 거.”

고 대표가 이소의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내어 바닥에 던졌다. 해준은 말없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틱톡, 틱톡. 입 모양으로 시계 초침 소리를 따라 하며 고개를 흔드는 고 대표가 돌연 이를 갈며 낮게 그르렁댔다.

“35억이야, 네가 날린 내 돈만 35억이 넘는다고. 근데 기집년도 아니고 고작 고추 달린 새끼 하나 때문에 우리 애들 작살 낸 것도 모자라 내 손을 반병신을 만들어?”

이 좆같은 애새끼 하나 때문에 내가 십 년을 키운 회사를 공중 분해시키냐고! 고 대표가 흥분하며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기분이 널을 뛰었다. 심장이 쿵쿵 뛰며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이 번갈아 폭발하다가도 갑자기 순식간에 바닥에 지나가는 먼지가 채인다는 이유로 우울해지기도 했다. 약을 맞은 지 고작 30분도 안 된 시간, 감정이 어지럽게 뒤틀렸다.

“뭘 먹였어.”

해준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어오른 입술과 흰 탁액이 얼룩진 뺨과 얼굴, 신발이 벗겨진 채 유리 조각에 긁힌 복숭아뼈가 붉은 것까지 모두 치가 떨리는 광경이었다. 그렇게까지 엉망인 이소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글쎄, 약쟁이한테 약 말고 뭐가 더 있을 거 같냐.”

해준이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고 대표가 눈을 홉떴다.

“네가 그랬지, 인생사 공수래공수거라고. 저승길 갈 때 가져가지도 못하는 돈 뭐가 그렇게 아깝냐고.”

그럼 너는 저승길 갈 때 이 새끼 데리고 가라. 힘없이 떨어진 이소의 고개가 흔들렸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을 것이다. 직감하고 나니 사지에 힘이 풀렸다. 고 대표가 고갯짓을 했다.

“담가.”

해준에게 순식간에 남자 여덟 명이 달려들었다. 고 대표가 이소의 옆에 쪼그려 앉아 초점 없는 얼굴을 싸움질이 일어난 쪽으로 고정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똑바로 보라는 듯 단단하게 잡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잘 봐 둬. 저 새끼는 너 때문에 오늘 여기서 죽을 거고, 넌 저 새끼 시체 앞에서 존나게 구멍 따일 거야.”

가장 뒤에서 각목으로 등을 급습한 사내가 해준의 주먹에 얼굴이 내다 꽂혔다. 파이프로 해준의 정강이를 때리려던 남자는 구둣발에 채였고, 목을 조르려고 달려든 남자는 그대로 해준에게 팔을 잡혀 한 바퀴를 붕 돌더니 평평한 바닥에 등이 팍 채였다. 분명 무언가를 패대기치고 퍽퍽 맞는 소리가 났지만 비명 소리는 여덟 명의 것만 났다. 커다란 주먹이 관자놀이를 내려치면 머리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소의 귀까지 들렸다. 해준이 사람을 죽일 듯이 때렸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토할 것 같았다. 걱정이 되어야 하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메스껍다. 못을 박은 각목이 부러지고 피가 튀었다. 바닥에 깔아 놓은 유리 조각에 남자의 얼굴이 석석 갈리고 비명 소리가 땅을 통해 울렸다.

고 대표가 쯧, 소리를 내며 발길에 채인 남자들을 발로 지근거렸다.

“붓 잡는 새끼가 칼질도 꽤 하네?”

고 대표의 잭나이프가 춉 소리를 내며 날을 드러냈다. 제 발 앞에 굴러온 남자에게 무심히 칼을 던져 주자 악에 받친 남자가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켰다. 해준은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여유는 없어 보였다. 퉷, 하고 침을 뱉자 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다시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배를 꽂는 소리 대신 살갗을 가르고 푹푹 칼을 꽂는 소리가 났다. 어떤 놈은 제가 든 칼에 제 배를 맞아 비명을 질렀고 어떤 놈은 얕게 베이기만 했는데도 온갖 꼴값을 다 떨었다. 그렇다고 해준이에게 타격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마치 하이에나에게 물어뜯기는 사자 같다. 한 마리씩 상대한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지만 떼로 달려들어 이로 물고 뜯어대면 덩치 큰 사자라도 고꾸라지기 마련이었다. 허벅지와 옆구리를 깊게 베이고 주먹으로 얼굴을 두들겨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제 팔과 다리를 물어뜯는 사내들을 하나씩 밖으로 내던졌다. 두꺼운 목을 꺾기도 했고, 콧대를 가루가 되듯 부수기도 하면서 천천히 이소에게 걸어왔다. 쿨럭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입에서 피가 울컥 새어 나왔다. 고 대표가 제 가슴팍을 더듬었다.

“그래, 이 씹쌔기야. 나한테 뒤지자. 내가 너 죽일…!”

고 대표가 품 안의 가스총을 꺼내 들려는 찰나 해준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고 대표의 겨드랑이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푹 꽂힌 살갗을 잡고 아래로 주욱 내리자 고 대표의 옆구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칼을 맞은 고 대표가 바닥을 뱀처럼 기었다. 기괴했다.

이소는 자신을 돌아보는 해준과 눈이 마주쳤다. 해준의 등과 허벅지, 팔에도 자상이 심했다. 고운 입술은 터져 피가 낭자했고 이마도 세게 맞았는지 붉게 쓸려 있었다. 검은 옷이라 티는 심하게 나지는 않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이소가 고개를 들었다. 피가 너무 많이 났다. 정말로 피가 너무 많이 났다.

“이소 씨.”

갈라진 목소리로 이소의 이름을 불렀다.

“이소야.”

이소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서웠다. 이대로 해준이 제 앞에서 쓰러질까 봐 너무 무서웠다. 동시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피를 뒤집어쓴 해준의 모습이 무섭고 기괴해 보이면서도 괴물 같아 보였다.

“교, 교수님….”

“옷…. 옷 입자, 입술이 씨발, 고운 입술이 다 부었…네.”

해준은 욕을 짓씹고 얼굴을 더듬었다. 추울 텐데, 이소 추울 텐데. 놀랐지, 많이 놀랐지. 축제는 못 보겠다. 집에 가자, 집. 이소의 입술을 매만지는 손이 피로 젖어 있었다. 피는 뜨거운 거라고 했는데, 해준의 손이 무척 차가웠다. 이소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둘러 입히는 해준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염려가 덕지덕지 끼었다. 이소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밀어냈다. 다정해서,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다정해서 오히려 사람 같지가 않다. 저를 밀어내는 이소를 보는 해준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소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기억 속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해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소야, 다른 사람이 만지면 ‘싫어요.’ 하는 거야.

누가 너를 데려가려 하면 ‘안 돼요.’ 해야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세요.’ 해. ‘교수님, 도와줘요.’ 해야지.

“안 가… 안 가요, 만지지 마세, 요… 누구, 누구세요. 왜 저, 데려가세요.”

돌연 고개를 흔들며 손을 뿌리친 이소를 보며 해준은 당혹감에 물들었다. 이소야, 하고 다시 부르자 이소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해준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소리가 점점 거칠고 빠르게 변했다. 동공의 움직임도 점점 빨라졌다. 해준이 이소의 손목을 잡았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이소야, 정신 차려. 나야, 나 해준이야. 응? 이소야. 여기 봐, 약 때문이야. 약 때문에 그래.

“도, 도와주세요. 교수님 도와주세요.”

“응, 나야. 내가 네 교수님이잖아. 응? 왜 그래, 나 못 알아보겠어?”

거짓말이야. 거짓말했어. 교수님이 나를 속였어. 나를 속이고 다 잘라 냈어. 이소의 머릿속에 나무가 된 자신의 열매와 가지를 모두 잘라 가는 해준의 모습이 어그러졌다 생기기를 반복했다. 혼자가 된 이소에게 물을 주고 아껴 주며 결국 작은 화분에 욱여넣고 만족해하는 해준의 미소가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소야, 행복하지. 난 행복해. 너랑 함께잖아. 얼굴이 없는 해준의 웃음소리가 하하하하 귓전을 때렸다.

“저기요, 선생님…. 차해준 교수님, 데려오세요. 제 남자친구, 아니…. 아니에요. 교수님 데려오지 마세요… 그 사람 저한테, 거짓말했어요. 저, 그러니까… 제 말은요. 무서워서요, 무서워서 그래요. 그런데, 선생님. 왜 이렇게 머리에서, 피가 나세요… 다치셨어요? 병원, 병원 가셔야 해요. 제가 병원 데려다드릴게요, 근데 저 지금 힘이 안 들어가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후 이소는 귀를 찌르는 이명에 제 귀를 퍽퍽 때렸다. 해준이 황급히 이소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이소야. 내가 잘못했어, 설명할게. 다 설명할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가시처럼 와 박혔다.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소를 보며 해준이 울먹였다.

그 순간 바깥이 환하게 밝아 왔다. 마이크를 쩌렁쩌렁 울리는 사회자의 목소리와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도 덤이었다. 이소의 시선이 저절로 어두운 밤하늘에 가 박혔다.

“지금부터 하늘을 환하게 채우는 불꽃의 서막을 모두 함께 보시겠습니다!”

피요오오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 줄기가 하늘을 향해 피어올랐다. 이소의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포롱, 포롱 밤하늘에 터지는 붉은 꽃잎이 예뻤다. 이소는 넋을 잃었다. 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았다. 폭죽의 크기는 점점 더 커졌다. 주먹만 하던 것이 어느새 축구공만 하게, 어느새 커다란 원반만 하게. 이소의 고개도 점점 뒤로 넘어갔다. 보글보글, 어쩐지 뇌가 간질거렸다. 이소가 배시시 웃었다.

“…나 교수님이랑 불꽃놀이 보러 가기로 했는데.”

핏자국이 낭자한 해준의 얼굴 위로 번쩍번쩍 불이 샜다. 이윽고 가장 하이라이트를 남겨 놓고 있었다. 해준은 이소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느새 진정이 되었는지 아무 말이 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소를 보며 해준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이소를 안느라 힘을 주자 옆구리에서 흥건히 피가 샜다. 씨발, 해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바투 물었다.

흥분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창문을 흔들 정도로 쩌렁쩌렁 울렸다.

“가장 큰 폭죽이 남았죠. 클라이맥스를 주목해 주세요! 우리 축제의 꽃, 개화(開花)입니다!”

이소는 고개를 돌렸다. 불꽃놀이, 보고 가고 싶어. 그런 철없는 생각으로 흐린 초점을 던졌다.

펑, 퍼퍼펑, 펑, 펑-

수십 개의 창문을 한꺼번에 채운 엄청난 크기의 불꽃, 엄청난 소음과 함께 찬란하게 밤하늘을 수놓은 섬광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아, 저 불꽃을 본 적이 있어. 이소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큰 불꽃놀이를 본 적이 있었지. 약에 취한 정신은 출처 모를 기억 속으로 미끄러지듯 유영한다. 이소는 코를 킁킁댔다. 화약 냄새, 타는 냄새, 무언가 터지는 소리, 사람들의 함성, 아니 비명 소리.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 아니 깨지는 소리. 어디지, 어디서 들었지. 어디서 봤지. 이소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이소야, 이소야.”

해준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다. 교수님, 목소리가 잘 안 들려요.

이소야, 엄마 먼저 들어간다.

엄마, 나 여기 사슴벌레 봤어요.

누구 목소리지. 엄마 목소리다. 이소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윤이소.”

얼른 들어와. 저녁 되니까 쌀쌀해서 더 놀면 안 돼요.

으응, 근데 여기 사슴벌레. 이거 잡고 싶은데에-.

사슴벌레를 봤었지. 맞아, 사슴벌레를 봤어. 엄마한테 잡아 달라고 했더니 무섭다고 하셨지. 이소는 피식피식 웃었다. 아, 살던 집이야. 예쁜 내 집. 엄마 아빠랑 살던 집.

“윤이소, 정신 차려. 여기 봐. 나 보라고.”

그럼 엄마가 얼른 카디건 가지고 나올게. 이소 어디 가지 말고 마당에 있어야 해. 다녀와서 이소 생일 케이크 자르자.

응. 나 많이 줘.

그럼, 우리 아들 거 많이.

엄마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자 수풀 안으로 기어 들어갔지. 둥그런 바위 뒤로 기어서 돌아가는 사슴벌레를 발견하고 엉금엉금 기어갔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지 녀석이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오르려던 차였다.

돌연 펑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창문이 깨졌다. 펑, 펑, 펑, 수많은 불꽃이 집 안에서 터져 나갔다. 폭발 진동에 어린 이소의 몸이 낮은 담장에 날아가 부딪혔다. 화르륵, 불길이 치솟았다. 해가 진 밤, 아늑하고 포근했던 집은 지옥 같은 화마에 휩싸였다. 어린 이소의 귀에서 검붉은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 아빠에게 엄청 큰 불꽃놀이를 봤다고 말해 줘야 하는데. 눈을 감기 전까지 어린 이소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엄마….”

이소의 코에서 주르륵 코피가 흘러내렸다. 동공이 맥없이 돌아갔다. 난데없이 입에서 거품이 끓었다.

“윤이소!”

해준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건물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소의 품에서 작은 반지 케이스가 툭 떨어졌다. 그러나 그 소리 역시 불꽃이 터지는 소리에 묻혔다.

* * *

작은 콧구멍에서 꿀렁꿀렁 붉은 피가 많이도 흘러내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흰 거품이 샜다. 해준은 눈을 감은 연인의 뺨을 잡고 흔들었다.

“이소야, 윤이소. 안 돼, 안 돼. 이소야, 나 봐 봐. 이소야, 눈 떠 봐.”

자신의 이마에서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이 이소의 목덜미를 적시자 해준은 연신 문질러 닦으며 애원했다. 눈을 떠, 눈을 떠 봐.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해준은 병덕이 알려 준 혈자리를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좋은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초조해졌다. 해준은 손가락을 들어 목 아래 여린 살을 짚었다. 가늘게 맥박이 뛰고 있었다. 가야 해, 지금 여기를 빠져나가야만 해. 평소에도 가뿐히 들던 몸이었지만 칼에 찍힌 허벅지와 등에서 묵직한 통증이 올라왔다. 쿵쿵쿵쿵 누군가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다. 고 대표의 수하들인가.

해준이 한 팔로 이소를 품에 안고 고개를 들었다. 쉭쉭 대며 숨을 몰아쉬는 꼴이 꼭 피 칠갑을 한 들짐승 같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집사 준경이었다.

“도련님.”

해준의 날 선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잘도, 이런 곳에 겁 없이…. 혼자 왔네.”

“부르셨으니까요.”

준경이 놀란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들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다가온 준경이 피 칠갑을 한 해준과 이소를 번갈아 보았다. 특히나 이소의 코에서 흐르고 있는 코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 준경이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소 님은, 지금….”

“손대지 마.”

준경이 멈칫했다. 제가 만지는 것도 싫다는 건가, 아직도 눈에 살의가 형형했다. 준경이 방향을 틀어 해준의 이마에 손수건을 짚었다. 검붉은 피가 축축하게 배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여덟 구의 시신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 죽인 건가. 일이 커지겠는데. 진회색 눈동자를 굴리자 해준이 목울대에서 넘어오는 침을 퉤 뱉으며 읊조렸다.

“안 죽였어, 급소는 모두 피했고 자상은 심하지 않아. 기절한 것뿐이야.”

“밖에 있던 시신은 어떻게 된 겁니까.”

준경이 건물로 뛰어 들어왔을 때 머리통이 깨져 죽은 시신 한 구가 풀숲에 엎어져 있었다. 해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어떻게 빠져나왔지,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보석금으로 빠져나왔습니다.”

“누구.”

“신원 미상의 남성입니다.”

준경은 순식간에 젖은 손수건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 또 다른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해준에게 내밀자 해준이 이소의 코 아래에 댄 채 고개를 젖혔다. 피가 배어 나오는 속도가 빠르다. 온몸의 피가 코로 다 쏠리는 것도 아닐진대 수도꼭지를 튼 듯 많은 양의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위험하다. 해준은 이소를 끌어안았다.

“조직에 있다더니 그쪽 사람인가. 알아봐. 저것들도 깨어나기 전에 옮겨. 죽으면 곤란해.”

“네.”

해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준경이 부축하려 하자 해준이 고개를 저었다. 피에 젖은 코트가 바닥에 쓸리며 시신이 끌린 것 같은 자국을 만들어 냈다. 해준이 차 앞에서 이소를 안고 숨을 몰아쉬었다. 집으로 갈 생각인가, 주치의 병덕에게 미리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이건 눈에 띄더라도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준경은 차에 오르며 시동을 걸었다.

“우선 병원으로 갈 겁니다. 출혈이 심하니 이것으로 우선 지혈하세요.”

뒤로 건넨 손수건을 제대로 받아 들 힘도 없는 듯 해준이 이소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였다. 발작이 멎은 이소는 눈을 감고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 같다. 가는 내내 해준은 끊임없이 눈을 감은 이소에게 말을 걸었다. 이소야, 이소야. 아프지, 금방 데려다줄게. 조금만 참아, 조금만. 응? 해준의 머리에서 울컥울컥 피가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룸미러에 비친 준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귓가에 들려오는 숨소리가 가쁘다.

“도련님,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입술 새로 피가 흘러나왔다. 해준은 이소의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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