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36/50)

4

뜻하지 않은 야근에 몸이 노곤한 날이었다. 진상 고객이 하나 있어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며 도시락을 죄다 엎었고 결국 상가 복도에 쪼그려 앉아 물티슈로 흩어진 음식물을 모조리 정리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정신을 어디다 빼놓았는지 배달지를 잘못 알아 옆 아파트로 갔고, 점심을 먹다가 체한 것이 안 내려가 일하는 내내 손을 눌러 가며 불쾌해했다. 심지어 마지막에 볶음밥을 할 때는 식지 않은 프라이팬을 모르고 옮기다가 손끝도 데였다. 온몸이 쉬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소는 언덕을 올라 욕실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옷을 벗어 내렸다. 해준의 집에 살면서 한동안 상처가 날 일이 없었는데 역시 이래저래 잡일을 하다 보면 손과 팔에 생채기가 났다. 닿을 때마다 쓸려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소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열었다. 바닥에 앉은 엉덩이와 발바닥부터 온수에 잠기기 시작해 서서히 몸을 덥히는 느낌이 좋았다. 이소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졸음에 빠졌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물은 코끝에 걸쳐진 채 찰랑거리고 있었다. 애도 아니고 욕조에서 잠들다니. 이소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문을 바라봤다. 욕실 바깥에서 해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소는 마저 씻고 나가겠다고 말하곤 거품을 냈다. 피곤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작은 방에 있는 해수에게 입을 맞추고 이불로 기어 들어왔다. 오전에 세탁하고 마당에서 말린 이불에서 마른 햇볕 냄새가 났다. 따뜻하다. 이제는 제법 밤공기가 서늘해져서 솜이불을 덮고 자더라도 더운 느낌이 없었다. 이소는 잠들기 전 핸드폰을 들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가운데 더듬더듬 해준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했다.

“저 먼저 자려고요. 너무… 졸려서요.”

- 먼저 자요. 잠시 들러서 자는 얼굴만 보고 갈게.

이소는 해준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곤 옆으로 누웠다. 어차피 잠들 것인데 와서 보고 가든 입을 맞추고 가든 상관없었다. 샤워를 하던 도중 읽지 않은 메시지가 도착한 것을 발견하고 다시 화면을 켰다. 주영이었다.

[마음 바뀌었어. 밥 나중에 꼭 사줘.]

이소는 베개에 파묻혀서 피식 웃었다. 해수의 일만 해결되면 정말 몇 번이고 사줄 수 있다. 엎드려 절이라도 할 수 있다. 그까짓 7년의 세월, 다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해수의 존재는 중요했다. 이소는 핸드폰을 내려 두고 눈을 감았다. 우르륵 구르륵 솔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눈가를 찌푸리며 잠을 청하던 이소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 * *

웅-

웅-

눈꺼풀이 떨렸다.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던 의식이 허공으로 빠르게 솟아 정신을 깨운 순간 눈에 보인 것은 아직도 어두운 하늘이었다. 빛 한 점 없는 장막과 같은 밤, 검은 나뭇가지가 부산히도 흔들렸다. 이소는 천천히 시계를 찾았다. 새벽 세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진동이 몇 번이 울렸는지도 모르겠다. 해수가 깰까 봐 이소는 눈을 비비고 전화를 들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차도 없어 주차 문제도 아닐 것이고 아마 잘못 걸린 전화겠거니, 전화를 받자마자 끊어 버렸다. 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이불을 끌어모았다. 그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웅-

웅-

이소는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또 그 번호였다. 누구지.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사람이 제게는 없는데, 그러다 문득 미국으로 건너간 정숙이 생각났다. 아, 정숙의 시간이라면 아마 낮일지도 모른다. 이소는 천천히 전화를 들고 이불을 나섰다. 장지문을 조용히 닫고 마루로 나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마당은 아무도 없었다. 해준의 안채도 불이 꺼져 있었다. 전화는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이소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무 반가워서 큰 소리를 내면 안 될 텐데.

“여보세요?”

그러나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끊어졌나? 화면을 확인한 이소는 통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귓가에 전화를 갖다 댔다.

“여보세요. 전화 받았어요.”

-띠릭

전화는 끊어졌다.

전화번호를 다시 보니 국제번호가 아니었다. 정숙이 아닌가? 이소는 고개를 기울였다. 전화를 받은 제 목소리를 듣고 잘못 들은 것을 알고 끊었나 보다. 이소는 입술을 비죽이며 다시 들어가려고 미닫이문의 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풀썩, 정원 구석에 기대어 서 있던 빗자루가 돌연 바닥에 쓰러졌다. 이소는 너무 놀라 그대로 문고리를 잡고 굳어 버렸다. 공간을 채우는 고요가 적막에 가까웠던 터라 미닫이문의 맞물리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리는 시간이었다. 자갈과 부딪히는 나무 빗자루가 제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바람이 불었던가? 침을 삼키고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잡았을 때 다시 한번 주머니 속 전화가 울렸다.

웅-

웅-

웅-

제법 길게 울렸다. 잘못 건 게 아니었나. 이소는 전화를 들었다. 같은 번호였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도 여전히 전화를 다시 하는 거라면, 전할 말이 있는 걸까. 이소는 문을 기대고 서서 귓가에 전화를 갖다 댔다. 별안간 도움이 필요해서 아무 번호나 누른 꼬마의 도움 요청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얼토당토않은 망상이 들었다.

“여보세요.”

- …….

수화기 저편은 고요했다. 꼭 이소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소는 다시 한번 대답했다.

“누구세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작은 소리라도 알아챌 수 있을까 해서. 그리고 들렸다. 숨소리가 들렸다. 가르릉가르릉 하는 가쁜 숨소리, 그리고 띠, 띠, 띠, 정박으로 들리는 기계음. 이소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전화를 건 사람을 추측했다. 시선이 마루를 지나 대들보, 정원, 갈라진 벽 사방을 돌 때까지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밭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콜록, 콜록.

“여보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저기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콜록콜록, 콜록, 크흑, 커흡, 켁, 켁켁, 켁켁켁, 끄흡-

이소가 다급하게 묻자 수화기 저편의 기침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종래에는 길고 가늘게 우는 소리로 변했다. 이소는 소리에 집중하며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여보세요, 신고해 드릴까요? 괜찮으세요? 물었다. 지금 바로 신고하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소, 주소 알려 주세요. 제가 지금 신고해 드릴게요. 여보세요!”

끄흑, 끄흐흑, 까흐흐흑, 꺽꺽꺽꺽꺽-

“선생님, 주소를…. 아니, 지금 이 번호로 제가 경찰에, 경찰에 신고할게요.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우당탕,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삐-

들어 본 적이 있는 길게 울리는 기계음, 기침 소리도 함께 멎었다. 이소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어으, 어, 입술을 달싹이며 다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 안 통화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여, 여보세요. 저기요. 선생님, 저기요?”

이소가 전화를 붙들고 나지막이 상대를 불렀다. 무서웠다. 아니겠지,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니겠지. 고개를 숙인 채 전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 흙을 밟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정원 한가운데 해준이 서 있었다.

손에 작은 유리등을 든 채 선 해준은 당황한 듯 보였다. 사각 유리등에 든 양초가 어지럽게 일렁였다.

“……교수님?”

말해야 해, 무슨 일이 난 것 같아.

이소는 해준을 보자마자 신발도 신지 않고 마루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교수님, 교수님. 몇 번이고 해준을 부르며 달려가자 해준은 당황한 듯 풀꽃 사이를 걸어 나왔다. 길게 뻗은 옷자락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해준의 품으로 뛰어 들어간 이소가 전화를 들어 해준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교수님, 여기. 이거, 전화가 왔는데, 사람이…. 사람이 죽은 것 같….”

“이소 씨.”

해준에게 전화를 들려주며 이소는 어버버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자꾸만 기침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삐 소리가 났어요. 아니 그 전에, 기침 소리가 났는데요. 지금 경찰에 신고해야, 신고해야 해요.”

“진정해, 이소 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시간에 왜 이렇게 나와 있어.”

이소는 횡설수설했다. 이소는 해준에게 전화를 쥐여 주었다. 여기요, 저한테 전화가 세 번 왔어요. 근데 아무 말도 안 하더니 바로 끊어졌어요. 그러다가 나중엔 기침 소리가 났어요. 근데 뭐 무너지는 소리도 같이 나고, 무슨 일이 있나 봐요. 제 목소리를 듣고도 전화를 다시 했다고요.

이소가 해준의 옷깃을 잡고 말을 전하는 사이 해준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훑었다. 이소는 해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을 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저를 끌어안은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수님.”

해준은 그제서야 화면에서 눈을 떼고 이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려 흙이 엉망진창으로 묻은 이소의 발을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제대로 비질을 하지 않은 바닥에 자갈이 무성한데 다치면 어쩌려고. 해준은 이소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나 해준은 여상한 말투로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이소, 무서운 꿈 꿨나 봐.”

“네?”

“여기, 아무 전화도 안 왔어.”

해준의 얼굴을 마주한 이소는 고개를 돌려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통화 목록의 마지막은 해준과 한 안부 전화가 끝이었다. 아닌데, 분명 방금까지 저에게 세 번이나 걸었고 마지막에는 길게 통화까지 했는데. 이소는 해준의 손에서 전화를 빼앗아 들었다.

“아닌데, 방금…. 방금 진짜 통화했는데.”

“스트레스가 심한가 봐요, 이리 와요. 맨발로 나오면 다쳐요.”

해준은 허리를 숙여 이소를 안아 들었다. 이소는 해준에게 안긴 채 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정말이었다. 방금 저와 통화한 전화번호는 흔적도 없었다. 해준은 성큼성큼 이소를 안은 채 별채 욕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혔다. 손에 꼭 쥐고 있는 전화도 건네받아 선반에 올려놓은 채 흙바닥에 진창이 된 발을 꼼꼼히 닦였다.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해준은 꼭 깨어 있던 사람처럼 평온했다. 이소는 눈을 깜빡였다.

“교수님. 저 진짜, 진짜예요. 전화…… 전화 분명 받았어요.”

“그랬어?”

해준은 대충 대꾸한 후 발을 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닦았다. 해준은 욕실에 앉은 이소에게 다시 전화를 들어 화면을 켰다.

“자, 봐요. 이소 씨 전화 나한테 마지막으로 했고, 잠들었잖아. 그리고 갑자기 나와서 큰 소리를 내길래 내가 나온 거야. 그런데 통화목록에는 아무것도 없고, 응? 자기 무서운 꿈 꾼 거야.”

“아닌데… 나 몽유병 같은 거 없어요.”

“스트레스 받으면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어. 그래도 어디 안 간 게 다행이야. 오늘 내가 옆에서 잘까?”

해준이 다정하게 물었다. 화면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아무 기록도 없었다. 그런가, 나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오늘 좀 힘들긴 했는데. 정말 꿈꾼 걸까. 이소는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이 자요. 근데 해수 옆 방에서 자고 있어서 제 침대에서 자야 돼요.”

“괜찮아, 안고 자면 안 좁아.”

이소는 해준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와 누웠다. 해준도 곁에 누웠다.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이소는 제 등을 토닥이는 해준을 보며 물었다.

“저 이상해 보였죠. 미친 사람 같아 보였어요?”

“아니, 전혀.”

“혼잣말하고 막 그랬을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지.”

해준이 미소 지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나?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말하는 해준을 보며 이소는 머리를 부볐다. 따뜻하고 약하게 등을 두드리는 온기에 이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쁜 꿈이구나. 내일부터는 다 잊어버리고 좋은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며 다시 수마에 빠졌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이소는 어느새 품에 들어온 해수와 해준에 끼여 있었다. 뒤로는 등 돌려누운 이소를 꼭 끌어안은 해준이 있었고 이소의 품 안에는 해수가 등을 돌리고 자고 있었다. 꼭 새우 세 마리 같았다. 이소는 깜빡깜빡 눈꺼풀을 움직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정말 간밤의 일이 모두 꿈인 듯 눈부시게 밝은 아침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8시 반이 넘어 있었다. 새벽에 한 번 깨서인지 늦잠을 잤다. 이소는 해수를 흔들어 깨워 욕실로 보냈다.

후딱 출근 준비를 마치고 마루에 앉아 신발을 구겨 신고 있을 때 대문을 연 낙원댁이 보약을 든 다반을 들고 다가왔다. 이소는 일어나려다 다시 엉거주춤 앉았다.

“지각한 거 아녀?”

“그러게요. 이것만 마시고 바로 내려가야죠.”

이소는 따뜻하게 데워진 보약을 입술에 대고 꿀꺽꿀꺽 삼켰다. 입술에서 그릇이 떨어지자마자 낙원댁이 박하사탕을 내밀었다. 이소는 미소 지으며 사탕을 입에 물었다.

언덕을 내려오자 행랑채 마당에 대충 모여 선 사람들이 희주의 태블릿에 코를 박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출근이 늦었지만 궁금은 한지라 이소가 다가가자 식구들이 손사래를 쳤다. 이런 거 보지 말어, 으이구. 그러나 희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이거 뉴스에 다 그냥 나온 거라니까요, 그냥 전 사진만 본 거 잖아요. 이소가 고개를 쑥 내밀었다.

“뭔데?”

“억! 혀, 형! 언제 오셨어요?”

“방금. 근데 무슨 사진 봐?”

“아, 형은 이런 거 보시면 안 돼요. 심약해서.”

희주가 태블릿을 품에 안고 몸을 돌렸다. 심약하다는 말에 이소가 눈을 흘겼다. 왜, 그러지 말고 보여 줘. 희주에게 달라붙어 간지럼을 태우자 몸을 배배 꼬다 결국 태블릿을 넘겼다. 무슨 사진인데 그래. 야한 사진인가? 웃으면서 화면을 내려다 본 이소는 이내 웃던 얼굴을 굳혔다.

어디서 많이 본 집이었다. 노송이 잔뜩 심어져 있는 삼 층 전원주택, 육중한 회색 대문, 사자 얼굴을 한 검은색 문고리, 흰 돌담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에 우악스럽게 둘린 가시같은 창살. 그 창살에 무언가 걸려 있었다. 대번에 어떤 형상인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소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사진을 확대했다.

사람이 널려 있었다.

창살에 사람이 빨랫감마냥 축 늘어져 걸려 있었다.

이소는 너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봐요, 형 심약해서 이런 거 보면 놀란다고 했죠.”

“이소 님 보여 주지 말라니께! 그런 건 너 혼자 봐라!”

멀리서 주방 아짐이 소리를 꽥 질렀다. 희주가 억울하다는 듯 맞받아쳤다.

“이거 뉴스 검색만 해도 다 떠요! 기레기들이 너도나도 할 거 없이 죄다 찍었다니까요? 이게 제일 약한 사진이에요. 다른 건 얼굴도 다 떴었는데 지금 범양에서 내리라고 협박한대요.”

“……얼굴도 나왔어?”

이소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희주가 당황하며 말을 물렸다.

“아, 아, 그러니까 형. 형 엄청 놀랬구나. 아니 그 사진은 보지 마요. 어차피 지금 시간이면 다 내려갔을 거예요. 아침에 올라온 건데, 미친 기레기 새끼가 모자이크도 안 하고 그냥 올려서 완전 고소감이에요. 전 새벽에 운동 갔다 오면서 뉴스 봤다가….”

“무슨 뉴스?”

희주가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형, 괜히 검색하고 그러지 마요. 어차피 지금 실검 1위라 알게 되겠지만.

이소는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을 열었다. 검색 엔진 가장 상단에 뜬 실시간 검색어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윤치승 사망]

이어 빠르게 돌아가는 실시간 검색어 2위는 [이명희 사망]. 범양 주식, 윤주영, 윤치승 미담, 윤치승 과거, 이명희 빨래 등이 차례로 떴다. 이소의 손가락이 천천히 가장 상단에 있는 뉴스 동영상을 클릭했다. 아나운서는 빠르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자막을 읽어 내려갔다.

[범양그룹 윤치승 회장이 금일 사망한 채 휘령동 사택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장소에서 처참하게 숨진 모습으로 발견된 이명희 이사의 소식 역시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경찰은 암이 뇌를 포함한 전신으로 퍼져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인 치승을 간호하던 이명희 이사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남편을 방치하다 결국 직접 살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치승 살해 직후 이명희 이사는 곧바로 옥상에서 투신하였고 약 4시간이 지난 직후 동네를 산책하던 주민에게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조사 도중 이명희 이사의 방 안에서 다량의 약물과 우울증 약이 발견된 것을 확인하였고 이에 중점을 두고 조사할 방침이라 전했습니다. 한편 위 소식을 접한 윤주영 이사는 러시아로 가던 비행기를 회항시켜….]

화면 속 아나운서의 말이 느려지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옆에서 이를 쑤시던 식구들의 목소리가 멍멍하게 고막을 때렸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이맹희 여사. 옥상에서 떨어졌는데 해필이면 2층 베란다에 걸리가 튕겨져 나갔다대. 그래서 그 담장에 걸려서 디졌다고 하더라. 동네 사람이 발견할 때 보니까 핏물이 괴기 걸어 놓은 거마냥 질질 났다고.”

“그만 말해라. 듣기 싫다.”

이소는 들고 있던 패드를 떨어뜨렸다. 정신이 멍해졌다.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을 수도 있나? 그것도 이렇게 처참하고 어이없게. 눈을 연신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희주가 바닥에 떨어진 패드를 주웠다. 깨졌을지도 모르는데 희주는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며 이소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아요? 완전 고어예요. 괜히 호기심에 더 찾아보지 말구요, 형도 그냥 출근하세요. 어차피 남 일이잖아요.”

희주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혼이 빠질 것 같았는데 희주가 어깨를 두드리자 정신이 돌아왔다. 이소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침부터 감이 너무 좋지 않았다. 문득 주영의 생각이 났다. 형은 어떻게 하지? 갑자기 부모님이 죽어 버렸으니 무척 놀랐을 텐데. 이소는 주영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그런데 핸드폰이 없었다.

“어, 어디다 뒀지.”

아, 놓고 왔나. 낙원댁이 보약을 주었을 때 옆에 내려 두고 마신다는 게 그대로 두고 내려왔나 보다. 이소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전화를 두고 가서는 일이 안 된다. 이소는 다시 몸을 돌려 언덕을 올라갔다. 바람이 스산했다.

쉰 개의 계단을 다 올라 대문을 밀어젖혔다. 끼익, 턱. 매끄럽게 열리던 문이 갑자기 턱 멎으며 멈췄다. 이소가 몸을 들이밀려다 멈칫하고 고개를 들자 흰 손이 불쑥 튀어나와 대문을 붙잡았다. 해준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깨끗하게 씻은 말간 낯이었다.

“아, 교수님. 저어-”

“전화를 두고 갔더라고.”

부드럽게 내민 손에 들린 전화기는 제 것이었다. 이소는 옅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이거 찾으러 왔었어요. 해준은 전화를 받아 든 이소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으로 이소의 턱을 받쳐 들었다.

“……?”

그리고 가볍게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방금 양치를 하고 나온 듯 입술 끝에서 알싸한 박하 향이 났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톡 떨어지자 이소는 홀린 듯 눈을 맞췄다. 해준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컨디션 괜찮죠? 많이 창백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어제 꿈꾼 거는 다 잊어버렸어요.”

“잘했어.”

해준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통에 내려앉는 무게감이 만족스러웠다. 저 그럼 다녀올게요, 해준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내려오던 이소는 두어 계단쯤 내려오다 다시 얼굴을 보려 고개를 돌렸다. 대문에 기대어 있던 해준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소의 시선이 천천히 해준이 서 있던 기둥 뒤에 머물렀다.

대문 너머로 정원의 구석, 흙 마당에 빗자루가 쓰러져 있었다. 저게 원래 저렇게 바닥에 눕혀져 있었던 거였나. 이소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렴풋이 꿈에서 정원의 빗자루가 쓰러지고 의문의 전화가 왔던 기억이 났다. 꼭 저런 모양이었는데. 꿈이 아니었나? 해준이 꿈이라고 했는데.

이소는 몸을 돌려 계단을 천천히 뛰어 내려왔다. 식구들은 모두 일을 하러 들어간 모양인지 마당이 조용했다. 이 시간에 원래 이렇게 사람들이 없었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소는 정문을 빠져나와 동네를 걸어 내려갔다. 주영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혹은 정신없을 테니 어제 문자에 대한 답장이라도 남겨야겠다. 그러나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켠 이소는 몇 걸음을 채 가지 못하고 또 멈추었다.

어제 주영에게 온 문자가 없었다. 분명 마음이 변했다고, 밥을 산다고 했는데.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대나무가 빽빽한 언덕 위 저택을 바라보았다. 사락사락 바람이 불 때마다 울창한 숲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흔들렸다. 분명 대문을 나오기 전까지는 맑은 것 같던 날씨는 저택을 벗어나자마자 다른 세상에 나온 듯 흐렸다. 눅눅하고 구름이 많은 하늘은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이소는 오늘따라 유난히 제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꿈인가, 꿈이 아닌가. 꿈이라면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가.

‘차 교수, 집착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문득 주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뒷골이 당겼다. 이소는 걸음을 옮기며 제 핸드폰 비밀번호를 바꿨다.

‘별일 아닐 거야. 내 착각이겠지.’

그냥. 그냥 왠지 조금 섬짓한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 * *

그 후 이소는 가게에서 약간 얼이 빠진 듯 일을 했다. 냄비에 손을 몇 번 더 데였고 배달 실수가 잦았다. 외면하고 싶은데 어디를 가나 익숙한 그 이름이 나왔다.

뉴스는 하루 종일 윤치승 회장 내외의 사망 소식으로 도배가 됐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었던 범양의 주가가 회장 부부의 사망 하나만으로 곤두박질쳤다. 범양에서 필사적으로 기사를 막았는지 이명희가 빨랫감처럼 널려 있던 사진들은 모두 내려갔다. 다만 온갖 밈처럼 비슷한 유의 조롱이 올라왔고 남편을 살해한 이명희의 사진이 온갖 고어물에 합성이 되어 퍼졌다. 라디오와 뉴스에서는 윤치승 회장의 건강 상태가 생각보다 악화되어 있었고 이에 대해 가족 간 잦은 다툼이 있었다, 혹은 전염병이어서 사용인들을 모두 내보낸 것이 아니냐 하는 추측과 가설들로 며칠을 떠들었다.

배달이 끝나고 벤치에 앉아 이소는 눅눅해진 빵을 베어 물었다. 오랜만에 배달 온 학교는 해준이 없어서 그런지 배달을 해도 설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기분이 뒤숭숭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소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날 분명 전화를 받았다. 누군가의 숨소리, 기침 소리. 그리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서 선명해졌다.

‘확실해. 전화가 왔었어. 그런데 누구한테? 설마, 윤 회장은 아니겠지.’

해준은 그날 자신이 너무 미친 사람처럼 굴어서 진정시키기 위해 그런 걸까. 그게 아니라면 왜 솔직히 이야기해 주지 않지. 주영의 문자까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니 추측은 확신이 되고 확신은 경계를 갖추게 한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질투인지 보호의 영역인지 애매하다. 그날 밤 그 순간은 분명 무섭고 당황스러웠다가도 해준의 꿈 이야기 한 번에 대번에 떨림이 멎었으니까. 이소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뉴스 기사에 나온 주영의 얼굴은 수척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발갰고 언제나 잘 빗어 내린 머리는 제대로 매만지지도 못한 채 헝클어진 채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아직 서른 하나였다. 보기 드문 수재에 언제나 여유로운 성격의 주영이었지만 양친이 동시에, 그것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같은 날 자살했다는 사건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같이 살고 있지 않은 이소 역시 정신이 쏙 빼앗길 정도인데 주영은 말하나 마나였다.

이소는 주영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어설픈 위로를 건네느니 안 하는 게 나을까. 어차피 정신이 없어서 제 메시지 같은 건 읽지도 못할 텐데. 그러나 그런 생각과 달리 이소의 손가락은 어느새 조심스럽게 자판을 누르고 있었다.

7년 전 제가 혼자가 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은형도 죽고 모든 연락을 끊고 집에서 도망쳤을 때 이소는 오로지 주영의 연락을 기다렸다. 저를 걱정해 주기를 바랐다. 되돌아 오라고 말해 주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렇게 혼자 7년을 바득바득 살아냈다. 제게 필요한 건 그저 하찮은 위로 하나여도 됐었는데. 이소는 더듬더듬 어설픈 위로를 써 내려갔다. 슬픔도 전염되는가. 메시지를 써 내려갈수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백부와 좋았던 기억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막상 사람이 죽으니 오래된 서랍 속 낡은 기억을 꺼내게 된다.

어린이날, 솜사탕을 사 줬더랬지. 파란색이 먹고 싶어요, 하자 백부는 평소처럼 화를 내는 대신 비서를 통해서 파란색 솜사탕으로 바꿔다 주었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감사해서 어린 이소는 환히 웃으며 일기에도 적었었다.

‘그래도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네.’

이소는 메시지를 전송하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날의 하늘도 꼭 저런 색이었다. 이제는 그 괄괄하던 백부도 저곳으로 갔겠지. 이소는 고개를 내리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혹시나 해서 답장을 기다렸지만 10분이 넘도록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소는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만약 제 인생에 해수가 없다면, 해수가 죽는다면 어떨까. 저는 주저 없이 죽을까.

길게 뻗은 언덕 아래로 바퀴가 굴러갔다. 캠퍼스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그렇게 살다가 숨을 거둔다. 의미 있게 혹은 의미 없고 허망하게, 예고를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갑작스럽게 세상에서 사라진다. 신호등의 불이 다시 초록 불로 바뀌었다. 해수가 없다면 자신은? 이소는 페달을 지그시 눌렀다.

아마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죽을 것이다.

어쩌면 주영도 지금 그 기로에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죽음은 여전히 아프다. 세상천지 다시없는 악인이라도 누군가 한 명은 혹은 키우던 개라도 분명 울어 줄 이는 있다.

마음이 더 깊숙이 가라앉았다. 때아닌 빗방울이 톡톡 헬멧에 떨어졌다. 아, 오늘은 배달이 더 없었으면 좋겠다. 젖은 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이소의 오토바이가 점차 멀어졌다.

* * *

그날 밤, 이소는 오랜만에 해준과 섹스를 했다. 윤치승의 사망 이후 얼이 빠져 있다가 손이 데이고 종종 넘어지며 멍한 모습을 보이던 이소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돌연 술을 꺼내들었다. 어영부영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굳이 자신이 내려보내고 오겠다며 다반을 들고 내려간 이소는 백자에 술을 잔뜩 담아 올라왔다.

해준은 웬 술이냐고 물었지만 이소는 옅게 웃음 짓고는 ‘그냥 마시고 싶은 날이라서요.’ 하고 소담히 따라 건넸다. 적당한 안주도 없었지만 둘은 그렇게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해준이 한 잔을 마실 때 이소는 두 잔, 해준이 두 잔을 마실 때 이소는 네 잔, 그리고 종래에는 창고에 있던 담금주까지 꺼내어서 한 잔 두 잔을 더 기울이던 이소는 푸후 긴 숨을 내뱉고 해준에게 기어갔다.

교수님, 교수님. 천천히 바지춤을 더듬던 이소가 벨트를 풀고 복부에 얼굴을 부볐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더운 입술을 해준의 샅에 부비던 이소가 서툰 솜씨로 해준의 셔츠 단추를 끌러 내렸다. 헛손질 몇 번에 단추를 모두 풀어낸 후 해준의 가슴에 이마와 코를 비비던 이소가 해준의 유두를 입에 물었다. 혀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아이처럼 빨아내더니 야금야금 베어 물었다. 해준에게 배운 대로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듯 한쪽만 유독 짓씹고는 다시 다른 쪽으로 옮겨 가던 도중 주륵 미끄러져 밭은 숨을 뱉었다.

아래에 닿은 흉흉한 성기가 이소의 배를 쿡쿡 찔렀다. 이소는 웃음 지었다. 처음에는 흐흐, 하고 바보같이 웃더니 나중에는 아하하하,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이윽고 해준의 허리에 매달려 울음을 참듯이 키스했다. 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분별없이 제게 달려드는 이소를 천천히 자리에 눕힌 후 바지를 끌어 내렸다.

준비된 것은 없었다. 젖은 입 안을 손가락으로 눌러 몇 번 문지르자 질척이는 타액이 엉겨 붙었다. 해준의 긴 손가락이 하얀 둔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 맞닿은 두 성기에서 푹푹하게 젖은 땀과 정액 냄새가 큼큼하게 났다. 손가락 두 개가 무리없이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술을 마셔 평소보다 두 배는 뜨거운 내벽이 손가락을 놔주지 않을 듯 달라붙었다.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해준의 손이 찌걱찌걱 움직일 때마다 이소의 복부에 물이 튀었다. 가랑이가 파드득 파드득 움찔거렸지만 해준의 손바닥이 눌러대 벌건 손자국을 만들었다. 으으응, 으흐으응, 찔러대는 속도에 맞추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몇 번 흔들지도 않았는데 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마치 언덕 아래까지 들으라는 듯 이소는 큰 소리로 울었다.

곧 다리 네 개가 찹싹하게 엉겨 붙었다. 꿍꿍 바닥을 찧을 때마다 이소 역시 윽흑흡- 입술을 물고 때로는 열고 간드러지게 신음했다. 붉은 입술 사이로 타액이 질질 흘렀다. 해준의 좆이 내벽을 가르고 다시 빠지며 서로에게 익숙한 지점을 문지르고 비볐다. 발가락이 곱았고 근육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한 사람은 배 속이 간지러워서, 또 한 사람은 좆이 터질 것 같아서. 서로가 서로를 긁개로 쓰며 아래를 맞대고 경쟁하듯 찧어댔다.

“교, 교수님…. 교수님. 더 할래요, 나 더 할래요.”

답지 않게 이소가 매달렸다. 그렇게 바닥에 엎어뜨리고 주저 없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마치 윤이소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다. 하얀 구멍에 좆을 박는 것은 자신인데 답싹답싹 기둥을 끊어 먹듯이 조이는 것이 꼭 저를 조각내 죽이려는 것 같다. 이소는 바닥을 긁으며 울었다. 그러나 그만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안을 세게 파고들어 짓뭉갤 때마다 이소가 흘린 탁액과 구멍에서 버금버금 새어 나오는 자신의 사정액이 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창이었다.

나중에는 뒤늦게 술기운이 돌아 이소를 엎어 놓고 허리 짓을 하며 술을 한 잔 더, 마주 보고 끌어안은 채 이소의 입술에 술을 쏟아붓고 달려들어 핥아 먹기를 한 잔 더, 흰 목덜미를 지나 흘러든 술이 쇄골에 낭창낭창 고이면 그렇게 또 한 잔. 정신없이 몇 병을 더 마시면서도 좁은 구멍에 박힌 좆을 단 한 번도 빼지 않고 몇 시간을 짐승마냥 흘레붙었다.

“아, 아으, 흐으. 더, 더어-”

“이소 씨, 이소야. 잠시만, 너 잠시만 쉬어야 해.”

“더 해, 교수님. 나 또 할 수 있어. 또 하고 싶어. 내가, 내가 할 거야.”

이소는 완전히 풀린 표정으로 허벅지 위에 주저앉으면서도 제대로 허리를 세우지도 못하고 자꾸만 고꾸라졌다. 가랑이 사이에서 소변마냥 탁액이 줄줄 샜다. 벌어진 구멍은 제대로 다물리지도 못해 질척이면서도 제 손으로 해준의 자지를 잡고 또 끼우려 애를 썼다. 뭐가 그리 너를 공허하고 조급하게 만들었는지. 해준은 그런 이소를 가만히 올려다보다 발그레한 양 볼을 붙잡았다. 붉은 입술이 꽃잎처럼 오므라들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던 눈이 해준과 엉거주춤 시선을 맞췄다.

“뭐가 문제야.”

“…….”

이소의 눈이 느리게 깜빡이고 입술이 오물오물거렸다. 그리고 다시 손을 더듬어 해준의 좆을 잡았다. 자신과 눈을 마주쳤지만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해준은 한숨을 쉬었다. 술에 만취한 사람이라 대화가 불능이다. 잠들지 않고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해준은 이소의 허리를 잡아 돌렸다. 가는 허리가 휙 돌아 다리 사이에 주저앉았다. 해준은 그대로 이소를 끌어안고 옆으로 눕혔다. 그리고 허벅지를 잡아들고는 그대로 등 뒤에서 좆을 문질러 꽂았다.

“아흑…!”

이소가 두 손으로 해준의 팔을 끌어안았다. 도망갈 곳도 없이 누운 자세 그대로 쿵쿵 찧어 박히며 이소는 팔뚝을 긁어내렸다. 이전과는 다르게 공격적이고 깊숙이 들어와 자신도 모르게 발을 구르며 버둥거렸다. 그제서야 평소의 이소처럼 싫다고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준은 이미 골이 났다.

“교수니임, 아파, 나 아파…!”

내장을 꿰뚫을 듯 치받는 기둥에 이소의 몸이 자꾸 앞으로 빠졌다. 그때마다 해준은 단단한 팔로 다리와 배를 동시에 얽어 제 샅에 챡 붙이고 다시 허리 짓을 했다. 첩첩첩첩 둔부와 샅이 무섭게 달라붙는 소리가 빨라질수록 이소의 비명도 짐승처럼 울렸다.

“아흑, 학! 교수님, 하지 마요. 거기 누르지 마요, 누르지 마… 또 나올 것 같….”

“또 하고 싶다며, 응? 하고 싶다며. 내가 도와준다잖아. 왜, 이제 와서, 밀어내.”

아, 아으, 흐으아. 떨어진 추처럼 힘없이 흔들리던 이소의 좆 끝에서 퓩퓩 묽은 정액이 흩어졌다. 딱히 잡고 흔들지 않아도 소변을 보는 것처럼 줄줄 흐르며 바닥을 더럽혔다. 이소의 허리가 둥근 활대마냥 휘었다. 그륵그륵 숨을 들이마시며 발가락으로 바닥을 긁었다. 해준은 낮게 그르렁거렸다.

“사양할 생각 추호도 없어, 난 네가 매달리면 매달리는 대로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네 안에 잔뜩 싸질러 줄 거야. 네가 원하기만 하면 난 네가 하자는 대로 다 끌려다녀 줄 테지만….”

기둥 절반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해준은 이소의 다리를 바닥에 거칠게 던져 두고 허리를 옭아매듯 붙잡아 몸을 뒤집었다. 해준의 몸 위에 겹쳐진 채 돌연 천장이 보이자 이소가 팔을 허우적댔다. 해준이 이소의 팔과 허리를 동시에 끌어안고 내벽을 채우던 좆이 크기를 키웠다. 이소는 온몸이 붕 뜨는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이거 싫어, 무서워. 놔. 놔요!

“적어도 내 밑에 있을 땐, 다른 생각 말고 내게 집중해.”

길게 빠졌던 좆이 구멍을 찢어 버릴 듯 거칠게 파고들었다. 이소의 손톱이 해준의 어깨를 무수하게 긁어내렸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발부리를 들면 해준의 허리가 들리며 좆이 무섭게 달라붙었다.

이소는 해준의 가슴에 뒤통수를 찧고 비비며 비명을 질렀다. 그만, 싫어. 퍽퍽퍽 쳐올릴 때마다 이소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눈 주위가 붉어지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래를 쑤시는 기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해준이 찌를 때마다 얇은 뱃가죽이 들썩들썩 들렸다 홉붙었다. 응, 응, 응…. 규칙적인 신음이 끊어질 듯 계속 이어졌다.

원망스럽게도 다시 빳빳하게 성기가 섰다. 이소는 몸을 떨었다. 교수님, 교수니임. 비명 대신 애달프게 해준을 부르자 둔부를 쑤셔 오던 움직임이 멈췄다. 구멍이 벌벌 떨리며 조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등 뒤를 감싸고 있던 해준이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소가 뻐끔뻐끔 애원했다.

“잘못해, 써…. 잘못, 했어요…. 딴생각, 안 할게. 안 할게요… 그러니까… 천천히, 제발….”

해준은 천천히 이소를 눕혔다. 그리고 부드럽게 성기를 꺼냈다. 좆이 빠지자마자 또 한 번 왈칵 씨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랑이가 힘없이 툭 벌어졌다. 이소는 입술과 손을 벌벌 떨었다.

해준은 이소를 마주 보고 누웠다. 초점이 맞춰진 갈색 동공이 해준을 응시했다. 괜찮은 척을 하려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해준은 또 못난 제가 이 어린것에게 무슨 짓을 했나 싶었다. 심장이 아프다.

“이소야.”

해준이 이소의 뺨을 문질렀다. 나를 제대로 봐.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

“사람은 누구나 다 죽어.”

이소의 눈동자가 약하게 흔들렸다.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울어도 돼.”

해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결국 입꼬리가 주윽 내려갔다. 섹스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내뱉는 숨은 알싸한 알코올 향과 섞여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소는 이마를 기댄 채 서글프게 울었다.

“으흑, 으흐흑….”

“죽어 마땅해, 인간쓰레기들이잖아. 울어 버리고, 흘려보내 버려. 아무리 혈육이라지만….”

그런 새끼들에게는 동정 찌꺼기도 아까워. 해준은 이소를 더 꼭 껴안았다.

윤치승이 죽고 나면 안심할 것 같았던 이소는 왜인지 그날부터 쭉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음을 준다는 것은 제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차는 것과 같다. 십 년 넘게 같이 산 기억은 그 시간이 지옥같다고 해도 꼭 종래에 비겁하게 추억의 조각을 들이밀었다. 그래도 그 시간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지 않느냐고 종용한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여태껏 쌓아 온 자존심을 모조리 무너뜨린다.

이소는 코를 훌쩍거렸다.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술기운에 마구 흘러나온다.

“항상, 매일… 매 순간. 음식에 독을 타는 생각도 했어. 계단에서 밀어 버리는 상상도 했고, 꿈에선 목을 조르기도 했어. 그러고 나면 후련해졌으니까,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놓일 정도인데 진짜로 세상에 없으면 얼마나 후련할까. 날아갈 것 같겠지…. 가벼워지겠지…. 그런 생각을 했거든….”

“응.”

“그런데 정작 죽었다는 소식에…. 영정사진에…. 어떻게 죽었는지 낱낱이 듣고 나니까아, 기분이…. 너무, 개같은 거예요… 너무, 등신 같아요. 나 왜 이러죠, 미쳤나 봐요.”

해준은 이소의 눈가를 닦아 냈다. 문지르면 문지르는 대로 눈물이 꾹꾹 배어 나왔다. 해준은 말없이 이소의 말을 듣고 있었다. 윤치승이 죽었을 때 이후로 내내 닫았던 입이었다. 술을 궤짝으로 마시고서야 무거운 입이 봇물이 터지듯 열린다. 눈을 감고 웅얼거리며 더듬는 너의 삶의 궤적은 외롭고 쓸쓸하다.

“어린이날이었을 거야.”

해준의 긴 속눈썹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이소는 이마를 기댄 채 차분히 읊조렸다. 아름답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솜사탕을 사 줬었어.”

“윤 회장이?”

“응.”

내가 아마 여덟 살인가 그랬을 건데. 이소는 목이 시큰거렸다. 그 어린애한테 고작 그거 하나 사 준 게 뭐 대수라고. 그따위 호의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근데 그게 어린이날만 되면 자꾸 생각이 났어. 그때의 난 그게 퍽 좋았었나 봐.”

그래서 사실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아닐까, 정을 주면 깊게 주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뭐 이렇게 생각했던 걸지도 몰라. 바보같이. 이소는 가볍게 혀를 찼다. 해준은 이소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어릴 땐 아무것도 모르잖아.”

“지금은, 어리지…. 않잖아요. 스물…여섯, 아니… 일… 나 몇 살이지.”

“일곱.”

“응. 나 어리지 않거든. 그치… 다 컸는데.”

이소는 피곤이 몰려오는지 눈을 깊게 감았다 살며시 떴다. 해준은 이소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작 삼 개월이라더라. 어떤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 삼 개월이면, 나중에 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떠한 형태로 상처를 주어도 결국은 ‘그 사람은 사실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로 되돌아온다고. 해준은 심리학 논문에서 읽었던 짧은 문장을 떠올렸다. 좋았던 시절 몇 년이면 그 기억으로 평생을 살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허무해…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지. 실감이, 잘… 안 나.”

그래도 둘은,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거든. 얼마나 힘들면 남편을 직접 죽일 수 있는 거야? 나라면…. 난 못 해. 난 아무리 힘들어도, 교수님 못 죽인단 말이야. 섹스 후 울기까지 해서 그런지 이소는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드문드문 이었다. 허무하고 공허하다고 덧붙인 말에 해준은 왜 오늘따라 이소가 그리 답싹답싹 떨어지지 않고 달라붙었는지를 짐작했다. 해준은 이제는 눈을 감고 입술만 오물대는 제 연인을 끌어안았다. 무척 사랑스럽지만 안쓰럽다.

“금방 잊혀질 거야. 이젠 다 끝났어, 너를 괴롭힐 사람들은 없어.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이제 코 자자, 이소. 코 자, 응? 나쁜 꿈 꿀라.”

뒹굴며 관계해 땀과 정액으로 온몸이 젖어 있는 이소의 어깨에 제 셔츠를 둘렀다. 쉬이, 쉬이. 해준이 아이를 재우듯 두드리며 입으로 바람을 뱉었다. 눈을 감은 이소의 눈가에서 이따금씩 맥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해준은 한참 동안 이소의 머리와 등을 쓸어내렸다. 흐느끼며 떨리던 등이 점차 규칙적인 호흡을 만들어 내자 해준은 고개를 젖혀 이소를 내려다봤다. 발갛게 부은 눈을 한 채 잠든 연인은 이따금씩 입술을 움찔거리며 다시 우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손바닥으로 뺨을 감싸쥐면 다시 편안하게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해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소를 안아 들었다.

해준은 잠든 이소를 씻기고 침대에 눕혔다. 고된 정사 끝에 잠든 이소는 정신을 놓아 버린 듯 깨어나지 않았다. 해준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한 올 한 올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명치께가 울렁거린다. 마음을 놓고 제게 완전히 의지하기를 바라지만 윤이소는 자꾸만 고무공처럼 바깥으로 튀어 나가려 한다. 제게 그리 모질게 굴었던 사람의 죽음을 동정하며 울고, 누가 봐도 개수작을 부리는 남자에게 선의를 기대하며 웃는다. 헤프다. 착한 너는 참 나를 포함한 모든 이에게 헤프다.

어떤 이는 너무 사랑하면 곁에 묶어 두고 싶어 그 사람의 다리를 자른다든가, 자신만 바라보게 백치로 만든다든가 계략을 꾸민다는데.

“안 되지, 안 돼.”

이렇게 고운 님에게 어찌 칼을 댈까. 이 예쁜 마음을 어찌 바보 백치를 만들어. 그러나 이따금씩 이 사람의 선의와 동정조차 모두 제가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손끝이 저려 왔다. 윤이소의 눈길이 머문 곳부터 발길이 닿은 곳까지 모두 제 것이면 좋겠다. 제가 꾸민 공간과 제가 있는 시간에 이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 아닌 다른 이에게 웃어 주지 마. 울어 주지도 마. 네 마음의 조금도 나눠 주지 마.

하지만 그리 말하면 너는 답답하고 무서워 도망가겠지. 나는 지금도 네가 쉽게 잡히지 않는 것 같아 이리 안달이 나는데.

“으응.”

이소가 잠결에 고개를 흔들었다. 해준이 다급히 몸을 돌려 이소의 입술을 매만졌다.

“아니야? 곁에 있을 거야? 어디 가지 않을 거지?”

잠든 이소는 말이 없었다.

“이소야, 착하게 굴게. 내 곁에 있어. 떠나지 마.”

해준은 이소의 곁에 쪼그려 누웠다. 작고 하얀 손을 쥐고 볼을 부볐다. 이런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걷지 않고 주 기사의 차를 타고 학교에 갔더라면, 그날 도시락 배달을 하는 너랑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엘리베이터에 서 있던 너를 무시하고 그냥 돌아왔더라면. 수없이 가정한다. 그래도 너를 언젠가는 만나서 사랑했을까.

해준도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이 사람에게 집착하는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미저리같이 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내 것이었던 것 같은 깊은 소유욕과 독점욕은 이전에는 느껴 본 적 없던 것이라, 아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라 한다면 주저없이 다 버리고 윤이소의 선택만을 기다릴 것이다. 기꺼이 그리 할 것이다.

눈을 감았다. 이소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에 잠이 쏟아졌다.

* * *

그로부터 몇 주가 더 지났다. 연예인 스캔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관심을 옮겨 갔다. 유명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가 마약을 거래한 것이 들통나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재벌 총수 부부의 사망 사건보다 10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국민 보이 그룹의 리더가 마약을 했다는 사실이 더 이슈가 되는 세상이었다. 주영은 그때 즈음 공식적으로 범양을 손에 넣었다. 그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었는지 주영이 이소에게 연락을 했다. 몇 주 만의 연락이었기 때문에 이소 역시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주영은 마침 이소가 배달하던 학교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이소는 주영에게 맛있는 것을 사 주겠다고 했지만 하필이면 입고 온 재킷이 가게에 있었다. 주머니에 든 것은 고작해야 만 원짜리 한 장이 전부였다. 그냥 나중에 사 줄게, 나 지금 돈이 없다. 이소가 멋쩍게 웃었다. 그에 주영은 엄지손가락으로 학교 뒤편 식당을 가리켰다.

“나 지금 배고파, 이소야.”

결국 주영의 손에 이끌려 학교 식당으로 향했다. 괜찮겠지? 사실 값이 싼 학생 식당 밥을 사 주는 게 마음에 걸린다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야, 저 사람 윤주영 이사 아니야?”

“이젠 회장이래.”

“대박, 존나 잘생겼다. 앞에 앉은 사람 누군데 같이 밥 먹냐? 학생인가? 계 탔다. 장학금 주려나.”

5분 만에 바로 후회했다. 31살의 윤주영 회장, 키 187cm의 젊고 잘생긴 CEO. 그리고 무엇보다 본교 예술대에 파격적인 엔터테인먼트 연계 사업을 제안한 인사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넘어선 환대를 받기 마련이었다. 정작 그 관심의 주인공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3500원짜리 돈가스를 잘라 먹고 있었다.

“일부러 여기 오자고 했지.”

“아니, 나 배고파서 오자고 한 건데.”

“나가서 먹어도 되잖아.”

“너 만 원밖에 없잖아. 만 원이면 여기서 김밥 두 줄에 만두 1팩, 라면 하나, 돈가스 하나, 주스 2팩까지 거하게 먹을 수 있는데 왜 나가서 먹어.”

나 파스타 하나 사 주고 너는 손 빨고 있으려고? 주영이 빙긋 웃었다. 이소는 입을 비죽댔다. 태어나서 이런 식사는 해 본 적도 없었을 주영에게 싸구려 학교 밥을 먹이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정작 주영은 ‘너랑 같이 학교에서 밥 먹으니까 대학생 된 거 같고 좋다.’ 하며 속없는 이야기를 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유리창에 여학생들이 연신 붙어 사진을 찍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이소는 얹힐 지경이었다. 해준과 있을 때도 지나가는 학생들이 모두 말을 걸고 사진을 찍는 걸 숱하게 봐 왔지만, 그건 해준이 이 학교 교수였기에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영은 그냥 일반인 아닌가. 이소는 뺨을 긁어내리며 주영이 주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좋아하는 향이었다. 이소는 학교 카페에서 해준이 사 주었던 마키아토를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 쓴 커피 못 마신다길래. 근데 여기는 이런 것만 파네.”

주영이 의자를 빼어 앉았다. 이소는 입 안에 달콤하게 퍼지는 캐러멜 향을 훑어내리며 웃었다.

“나 이거 좋아해. 처음 사 먹은 커피도 이거여서.”

“아, 그럼 기억해 둬야겠네.”

주영은 손을 들어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주영을 보며 이소는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추스른 것 같아 안심했다. 물론 여전히 속은 문드러지겠지만 뉴스에서 보던 만큼은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장례식은 못 갔어.”

이소는 손톱을 매만졌다. 뉴스로만 봤어. 나지막이 꺼낸 위로의 시작은 갈 곳을 잃고 흩어졌다.

“좋은 곳, 가셨을 거야.”

“좋은 곳은 못 가지 않을까.”

주영이 쓰게 웃었다. 너한테 너무 상처를 많이 줬어. 덧붙인 말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죽은 사람들을 까 내리고 싶지 않다. 이소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래도, 그거랑은 별개야. 돌아가신 분들이시잖아. 그냥 난… 형 마음이 어떤지 가늠이 안 가지만, 옆에는 있어 주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신경이 쓰이고… 나도 알거든, 은형이도 죽고…, 형도 못 만나서 혼자가 된 기분. 그러니까…. 미안,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말주변이 없기도 하거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모가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실감을 불러오는지 이소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소의 부모님은 너무 이소가 어릴 적에 죽었다. 슬픔을 알기도 전에 곁을 내어 준 주영의 호의에 서글픔 따위는 금방 잊을 수 있었다.

“내 옆에 있어 주고 싶었어?”

주영이 물었다. 이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하지.”

“당연해?”

“그냥, 이젠 형하고 나뿐이잖아. 아, 해수도 있지만…. 너무 어리고. 아무튼 그렇잖아.”

이소는 쓰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따위 피가 뭐라고, 대단한 결속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혈연의 상실은 남은 사람들을 유달리 고독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형도 너무 참지 말고, 힘들면 얘기해. 뭣도 없어서 도움이 되진 못하겠지만 열심히 들어줄게.”

주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참을 말없이 이소를 바라보던 주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소는 어쩐지 목이 메어 고개를 돌렸다. 아직 고작 몇 주였다. 윤치승 회장이 죽은 지 몇 주, 덤덤해지기는 일렀다. 이소는 한참을 혼자 커피를 홀짝였다. 주영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주영은 몸을 돌려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눈이 발갰다. 이소는 입술을 앙 다물고 모르는 척했다. 주영이 내민 것은 입양 절차에 관한 서류였다. 두툼하기는 했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 사이사이에 주영이 써 놓은 단정한 글씨가 보였다.

“일단 여기 써 있는 대로 진행하면 6개월 안에 바로 넘어갈 거야. 우리나라 입양 요건이랑 절차가 까다로운 듯 허술하거든. 몇 가지 요건들을 충족만 하면 되는 거라 내가 처리했어. 일단 내 귀책을 인정했고, 네가 해수를 키운 기간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 의무를 다했다는 증빙자료, 지금은 일도 다니고 있으니까 직업도 있고. 제일 마지막에 걸렸던 건 양자를 부양하기 위한 충분한 재산인데.”

“어…. 아, 재산.”

이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돈이 있어야겠지, 아무래도. 얼마 정도 있으면 되지. 이소는 눈을 굴리며 주영에게 속삭였다. 몸을 가깝게 기울인 이소가 주영의 귓가에 손바닥을 대자 베이비파우더 향이 났다. 주영은 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돈이 조금 생겨서. 삼천…만 원 정도. 이 정도면 돼?”

주영은 큭큭 웃었다. 얼마나 우스운지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어깨를 들썩였다. 이소는 미간을 찌푸리고 떨어졌다. 왜, 뭐가 우스워.

“3억도 넘게 있어야 할걸.”

“헐?”

“아이 키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들잖아. 그래서 네가 대단한 거지.”

주영은 손을 들어 이소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7년 만에 만났는데도 꼭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이소는 눈을 흘기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주영이 서류를 몇 장 더 넘겼다.

“여기 봐.”

주영이 가리킨 곳에는 한 번에 파악하기 힘든 그래프와 숫자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이소는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상속분의….4 0%…. 직계 비속…. 조금 어려운 말들이었다. 이소는 입술을 매만졌다. 종이의 끄트머리에 적혀 있는 숫자들이 굉장히 많은 금액이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뭔데?”

“네 돈.”

“응?”

“네 거. 네 돈이라고.”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백…. 백이십, 억. 잘못 봤나? 이소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손가락 끝으로 꼼꼼하게 짚어 가며 수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에 이소는 아무 말도 않고 주영을 응시했다. 설명을 부탁하는 눈이었다. 사슴같다. 문득 주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작은아버지, 그리고 작은어머니. 돌아가시면서 네게 남기고 간 유산.”

“우리 엄마 아빠가?”

이소는 혼란스러웠다. 어릴 때 자신이 살던 집은 마당은 꽤 컸지만 그저 작고 오래된 단독주택이었다. 제가 작은 강아지와 놀고 있으면 엄마는 빨래를 널고, 아빠는 잔디를 깎던 그런 평범한 작은 집이었다. 그런 부모님께 그렇게 큰 재산이 있을 리 없었다. 이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거 내 돈 아니잖아.”

“네 거야, 전부. 내가 찾아왔어.”

“어디서?”

그 말에 주영은 살짝 웃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나쁜 사람들한테서. 이소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소는 서류를 다시 들었다. 자신의 이름 아래 적혀 있는 상속금이라는 글자가 낯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저를 데려간 윤치승은 이미 그때부터 커다란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이 주는 위압감에 숨이 막힐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주영은 눈을 감고 미간을 꾹 눌렀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숨겼어. 그걸 뒤늦게서야 알았고, 결국 지금까지 내 아버지가 쌓아올렸던 공적들이 순수하게 아버지의 능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걸 정리하는 작업이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잘 끝냈어. 합법적으로 전부… 네 거야.”

전부 네 거. 이소는 잠시 머리가 띵해졌다. 순식간에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말보다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졌다. 이소는 한참을 그렇게 서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윤치승을 위해 울어 주었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제게 아이만 떠맡긴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빼앗기까지 했다니. 그리고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죽어 버렸다니. 서류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어쩌면 내가 누렸던 모든 것들이 다 네 것이었을 수 있단 말이야.”

설명을 이어 가는 주영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주치의 선생님이 그랬다. 너무 흥분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소 씨는 까무룩 기절해 버리니까, 최대한 잘 먹고 잘 쉬고 틈날 때마다 상담을 받으러 나오라고 했었다. 그렇게까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주영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머리가 아팠다.

이소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잠깐 사이에 뒷덜미가 식은땀에 절어 있었다.

“이소야, 괜찮아?”

“으응.”

“데려다줄게, 나는 그냥 너 기뻐할 줄 알고…. 미안.”

“아니야.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거야. 나 오토바이 가지고 왔어. 안 데려다줘도 돼.”

주영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이소를 일으켰다. 빈 커피잔을 정리하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입양이 곧 결정될 것이라는 말보다 이소의 머릿속을 헤집은 것은 순식간에 불어난 재산이었다. 부자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거짓말 같았다. 1억도 아니고 10억도 아니고 100억이 넘는 금액이 제 돈이라고 말하는 주영은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이소는 오토바이에 오르기 전 주영에게 그럼 이 돈을 다 자신에게 주면 범양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주영은 ‘겨우’ 그 정도 금액을 가지고 회사가 흔들리지는 않는다며 쓰게 웃었다. 이소는 절그덕거리며 열쇠를 꺼내 들었다. 주영이 주었던 빨간 자동차가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주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거기에 달고 다닐 줄이야.”

“예쁘잖아. 항상 볼 수도 있고. 그건 그렇고 이 작은 데에 사이렌 넣을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너 어릴 때 내 경찰차에서는 소리 나는데 네 거에서는 소리 안 난다고 울었었잖아. 마침 하판도 망가져서 끼우는 김에 생각나서 설치해봤지. 마음에 들어?”

이소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소리 요란하더라. 진짜 누가 들으면 화재 경보인 줄 알겠어.”

“최대 출력이 비행기 엔진소리만큼 나게 해놨거든.”

이소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주영이 기계를 잘 만지는 거야 알고는 있었지만 출력까지 조정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너무 시끄러운데 줄일 수 있느냐고 묻자 잘 두었다가 호신용으로 쓰면 좋을 거라 덧붙인 말에 ‘오, 그럴까.’ 하고 혹했다.

“무슨 일 생기면 눌러. 그럼 적어도 골목길에 지나가던 사람이라도 달려와 줄 정도는 될걸. 물론 누를 일이 안 생기는 게 제일 좋지.”

“고마워. 의미 있는 선물이다, 진짜. 잘 쓸게.”

이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바이에 올랐다. 나중에 해수 조금 더 자라면 학교 다닐 때 쥐여 줘야겠다.

“갈게.”

“응, 나도 또 연락할게.”

“그땐 법원 앞에서 봐.”

“말이 재밌네. 꼭 이혼하기 전 부부들 대화 같아.”

주영의 농담에 이소는 눈을 흘겼다. 낮게 울려 퍼지는 엔진 소리와 함께 이소는 주영에게서 멀어졌다. 노을이 길게 뻗은 길을 내려오면서 이소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품에 넣은 입양 서류의 무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소감은? 출처의 대상이 세상에 없다고 해서 홀가분해질 리 없었다. 그저 오늘도 제 삶이 얼마나 더럽게 꼬였는지를 한 번 더 확인했을 뿐이다. 가게 앞에 내린 이소는 조용히 헬멧을 내려 두고 슈퍼에 들렀다. 그리고 담배 한 갑과 막걸리 한 병을 샀다. 이른 퇴근이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늦은 시간까지 마당을 쏘다니며 놀았던 해수는 유모와 함께 잠이 들었고 이소는 해준과 잠을 잤다. 입양 서류를 보고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고 상속금에 대해 말을 꺼내자 해준은 매우 놀라워했다. 금액보다도 그 상속금을 주영이 전해 주었다는 사실을 믿기지 않아 했다.

“이제 진짜 다 끝났나 봐요.”

이소가 워낙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가자 해준은 염려되는 듯 법원에 같이 가 주겠다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이소는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날이 될 테니 그날은 꼭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그날도 해준과 몸을 섞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묵직하게 부푼 해준의 것을 입에 물려고 시도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소가 망설이는 눈을 하고 올려다보자 해준은 그저 웃었다.

‘나중에 해 봐요. 언젠간 기회가 있겠지.’

원래 성기를 무는 일이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고, 역겹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거라고 했다. 정작 해준은 이소의 것을 맛있게도 빨았다. 역겹다고 했으면서 왜 제 것은 없어서 못 먹는 것처럼 그리 핥아대고 삼켜대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역시 해준의 것을 입에 물라고 하면 자신은 아직 무리였다.

몇 번의 섹스 후에 이소는 탈진하듯 드러누웠다. 그나마 요새는 보약을 자주 챙겨 먹어서 해준이 하자는 대로 따라갈 수는 있었다. 이소의 체력이 늘자 해준은 참 체위를 다양하게 바꿔 가면서 많이도 했다. 이소는 그날 처음으로 사람이 거꾸로 선 자세로 섹스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줄줄 터진 정액이 제 얼굴을 적실 때 느낌은 이상했다. 그런데도 해준은 또 그것마저 예쁘다며 제 얼굴에 묻은 탁액을 다 핥아 먹었다. 비위도 좋았다.

이소는 뭉근하게 비벼지는 샅에 나지막이 신음하며 생각했다. 요새 자꾸만 마음이 헛헛하다. 모든 일이 다 잘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쩐지 자꾸만 속이 공허해졌다. 자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데 주변 상황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저를 제외한 모든 것들의 속내가 모두 검었다고 생각하니 몹시 쓸쓸하고 허무해졌다. 저만 바보처럼 아무것도 몰랐다.

“교수, 니임. 교수님….”

“응. 말해요.”

“교수님은, 흣, 저한테, 숨기는 거…. 없으시죠.”

해준이 허리 짓을 멈추고 이소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소가 젖은 눈을 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있으면, 말해 주시면… 안 돼요? 나중에 알면, 더 놀랄 것 같아서… 차라리 지금 알면 좀 나을 것, 같은, 흣, 데에-.”

해준은 이소를 내려다보다 뺨에 코를 부볐다. 그리고 천천히 입 맞췄다. 이소는 대답을 재촉했다. 말해 주세요, 네? 저랑 살기 싫어졌다거나, 감당이 안 된다거나, 또는 제가 너무 많이 울어서 답답하다거나… 횡설수설 말을 이어 가는 이소의 입술을 막아 버리려는 듯 해준의 키스가 이어졌다. 뱀처럼 입 안을 휘젓던 해준의 혀가 치아와 입천장을 긁어내리자 좆을 물고 있던 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간지러웠다. 이윽고 해준이 입술을 떨어뜨리고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런 거라면, 없어.”

“제 눈 보고요. 눈 피하지 말구요.”

해준은 숙였던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마주쳤다. 흔들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쳤다. 해준의 팔 아래 갇힌 채 이소는 그 무겁게 가라앉은 눈을 응시했다. 해준의 입술이 열렸다.

“말은 안 한 건 있어도, 거짓을 말한 적은 없어. 단 한 번도.”

묵직하게 울리는 음성이 널뛰는 마음에 내려앉는다. 안심했다. 이소는 웃는 대신 조용히 해준의 살을 찾아 파고들었다.

“다행이에요….”

“…….”

“교수님도 나중에 말 하고 싶어지면, 그때… 내가 다 들어 줄, 게요…. 다 털어…놔요. 나한테도, 의지…해요.”

“…….”

“…응?”

한참 내려다보던 해준은 가만히 입을 맞춰 왔다. 어쩐지 제 안에서 용적을 더 키우는 것 같아 이소는 슬쩍 웃었다. 해준이 낮은 숨을 토하며 속삭였다.

“…그럴게요.”

이소는 손을 들어 해준의 뺨을 붙잡고 흰 다리로 단단한 허리를 감아올렸다. 그럼 이제 마저 더 해 주세요. 내가 괜한 생각 않도록, 쓸데없는 감정에 잠식되지 않게 힘껏 나를 안아 주세요. 이소의 부드러운 명령에 응하듯 해준이 다시 둔부를 움켜잡았다.

쿵쿵 배 속을 울리는 쾌락이 내장을 짓뭉개고 심장을 휘젓는다. 할딱할딱 숨이 넘어갔다. 이소는 목이 메었다. 갈급하게 해준의 입술을 물어 핥고 빨았다. 장기를 짓이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비명 같은 교성도 커져 갔다. 하, 흑, 흐윽, 좋아요. 계속 해 주, 아으, 안 돼. 교수님, 안 돼. 멈춰요, 멈춰 주세요.

둥, 거대한 범종이 몸을 울린다. 내벽에 뜨뜻하게 퍼지는 탁액을 장기가 받아먹는다. 이소는 길게 신음하며 해준의 등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핏방울이 맺혀 손톱 틈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속에 아주 얕은 고양감이 차오른다. 이소는 그 안에 부드럽게 몸을 눕혔다. 발목에 찰박찰박한 정도라 아직 잠기기는 무리지만 그래도 괜찮아. 언젠간 다 잊어버릴 일들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출처 없는 불안은 사라질 거야.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눈을 감았다.

* * *

서늘한 바람이 부는 언덕, 자박자박 마른 풀잎을 지르밟고 이소는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흰 피부에 꽃잎 같은 붉은 울혈을 달고 해준의 검은 도포를 입은 채 손으로 꽃잎들을 하나하나 만졌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걸음을 떼었다가 다시 또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벽 바람이 서늘했다.

해준의 도포는 따뜻했다. 이소는 정원 곳곳에 퍼지듯 피어난 흰 꽃들을 꺾어 담았다. 어쩌면 이건 희주의 꽃, 이건 용태, 이건 낙원댁. 저택을 떠난 사람도 있겠지만 남아 있는 식구들의 꽃들이 훨씬 더 많겠지. 개중에 순결하고 깨끗한 색의 꽃들을 한 송이씩 꺾었다.

밤을 닮은 검은 도포의 품은 낙낙했다. 열 송이는 족히 넘는 꽃들을 품에 끌어안은 채 조용히 대문을 열었다. 사박사박 계단을 조용히 내려와 길이 아닌 곳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 석탑 앞에 섰다. 단정하게 깎인 받침돌 근처에는 올망졸망하게 마음을 빌어 쌓은 조약돌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 이곳에 이사를 올 때 은찬이 해수에게 알려 주었던 그 소원탑들이었다. 해수와 같이 살게 해 달라고 빌었다던가.

“정말 소원이 이루어졌네.”

이소는 가볍게 미소 짓고 석탑 아래에 꽃을 내려놓았다. 가지런히 놓아두고 그 옆에 조약돌을 주워 작은 탑을 쌓았다. 그리고 정원을 나설 때부터 내내 품에 안고 있던 막걸리와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소는 라이터를 꺼내어 담뱃불을 붙였다. 해준이 끊는다고 해 놓고 서랍에 숨겨 놓은 라이터 하나가 요긴하게 쓰였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부싯돌을 긁자 푸른 불꽃이 타올라 연초 끝에 옮겨붙었다. 불만 붙이고 입을 떼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홉 하고 필터를 빨아들인 이소가 연신 밭은 기침을 뱉었다. 이 독한 것을 무엇이 좋다고 피우는지 알 수 없었다. 이소는 끝이 타들어 가기 시작한 담배를 석탑에 올려 두고 술 마개를 열었다.

어디에 묻혔는지, 어쩌면 화장을 해서 태워졌을지도 모르지만 되는대로 석탑 앞에 살짝 뿌리곤 열어 두었다. 이런 싸구려 술은 입에도 안 댈 사람들이지만 구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적막이었다.

이소는 담배 끝이 타들어 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새벽 공기가 볼을 스칠 때마다 한기가 들었다. 당신들의 삶은 도대체 어떻게 시작을 했길래 그렇게 모질 수 있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여기 서서 당신들의 명복을 빌어 주는 것인지. 주영은 저에게 상속금을 쥐여 주며 부모님이 주고 가신 것이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이소는 제가 물려받은 유산은 밑도 끝도 없는 동정심이 아닌가 짐작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무르게 굴 수는 없는 것이다.

“좋은 곳으로 가세요. 부디 거기서는 나쁜 짓 하지 말고 사시고.”

이소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에게 못된 짓만 한 백부와 백모를 굳이 좋은 곳에 보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이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 만나면…. 꼭 미안하다고 말해 주세요.”

잘못했다고, 내가 네 아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다고.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이소는 제 부모님의 얼굴도 제대로 몰랐다. 어째서인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사진 한 장 남지 않아 평생을 그 분위기와 목소리만 기억하며 살았다. 꿈을 꾸면 언제나 얼굴은 뭉개진 듯 나왔다. 그래도 좋았다. 엄마니까, 아빠니까 꿈에 나와 주기만 해도 고마웠다.

“그리고 백부님, 백모님….”

이소는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는데. 고인이 되어 버린 자에게 복수심은 부질없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결국 미련이 되어 저를 붙잡을까 봐 덜덜 떨면서도 입술을 열었다.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아주 작은 파리로 태어나더라도,

커다란 곰으로 태어나더라도,

혹은 나무나 풀꽃으로 태어나더라도

나와는 절대로 마주치지 말아요.

우연히 나비가 되어 꿀을 찾아야만 한대도

다시 태어난 제 꽃잎에는 절대로 앉지 마세요.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이소는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윤회의 굴레가 서로 엮이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담뱃불이 모두 타들어 갔다. 이소는 남은 술을 모조리 석탑 주변에 뿌렸다. 그리고 작은 불씨 조각 하나까지 모두 확인하고 빈 술병을 들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새벽바람에 나풀나풀 밤의 도포가 펄럭였다. 돌연 이소의 등 뒤로 잠이 없는 나비 두 마리가 날갯짓을 하며 따라 붙었다. 차갑게 식은 대문을 열고 고개를 들자 그사이 안채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제가 자리를 비운 것을 귀신같이 안 해준이 나갈 채비를 하는 실루엣이 보였다.

“이럴 줄 알고 내 금세 왔지.”

이소는 설핏 웃었다. 정원의 대문이 소리 소문 없이 닫혔다. 대문 안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한 나비 두 마리는 어지럽게 곡선을 그리다 이내 숲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고 고요한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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