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5/50)

3

“다녀올게요.”

식구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소 역시 가볍게 묵례를 하며 대문을 빠져나왔다. 안 좋았던 기억은 일상에 치이며 조금씩 마모되어 간다.

이소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11월 7일, 꼭 키가 큰 해준을 닮아 길고 긴 숫자들의 조합이 달력에 자리 잡았다. 얼마 전, 해준의 출장이 조금 길어지겠다는 연락을 받고 안채 여기저기를 구경하던 이소는 준경을 만났다. 준경이 항상 들고 다니던 오래되고 낡은 수첩 달력 칸에 표시되어 있던 작은 동그라미를 보고 이날이 무슨 날이냐 묻자 준경은 고개를 기울였다.

‘도련님 생신이잖습니까.’

마치 모르고 있었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생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네.”

우스운 일이었다. 봄에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나서는 산뜻하고 조촐한 여름을 지나 잎이 노랗게 무르익는 가을까지 해준이 제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그냥도 아니고 언제라도 체온을 맞대고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상대로 곁에 남았다. 올해 초 신년이 밝을 때 제가 바랐던 소원은 그저 이번 해도 무탈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사람이 이소의 삶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이소는 준경에게 이 집에서 해준의 생일은 어떻게 치르냐고 물었다. 틈만 나면 잔치를 열어대는 식구들이기에 해준의 생일 역시 거창하게 준비하려나 싶어 물은 질문이었다. 준경의 대답은 담백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이소는 의아했다. 왜요? 준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부러 그날만 피해서 집에 안 들어오세요.”

본가에 있을 때도 해준은 생일만 되면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아예 해외에 나가 있거나 지방에 출장을 가 있다가 돌아오곤 해서 준경 역시 지난 9년간 한 번도 챙겨 주지 못했다고 했다. 생일이 한참 지나서야 돌아온 해준의 책상에는 식구들이 놓고 간 선물이나 편지만 쌓여 있었다. 워낙에 바쁘시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햇수가 지나다 보니 이제는 눈치껏 생일이 되면 부담스러워서 그러신가 싶어서 가만 놔둔다고. 이소는 입술을 매만졌다.

아무리 그래도 제 생일을 일부러 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축하를 받는 것은 쑥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 기쁘고 설레어 가슴이 너무 뛰는 것뿐, 받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좋은 기억을 남긴다고 믿었다. 이소는 2월생인 해수와 생일파티를 같이 하느라 항상 케이크에 초 하나를 더 꽂아 불을 붙이곤 했다. 이제는 챙길 생일이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날 이후로 이소는 해준이 돌아올 때까지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무얼 선물할지 고민했다. 서재도 들어가 가지런히 걸린 붓들 중 닳고 이가 빠진 것은 없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촘촘하게 꽂힌 책들 중 유난히 해진 것은 없는지 꼼꼼히 만져 보았다. 혹여 아끼는 것은 새것을 구해 주면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죄다 한자와 일본어라서 제목을 받아적는 데만 한참 걸렸다. 그리고 원래 고서적인지 많이 읽어 닳아진 것인지 분간도 안 갔다. 책은 포기했다.

이소는 해준의 서재를 서성이다 책상에 앉았다. 해준이 의자에 걸어 둔 도포를 어깨에 걸친 채 이것저것 뒤져보다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아무리 뒤져도 무엇을 선물해야 할지 가늠도 안 갔다. 저보다 가진 것도 많지만 좋아하는 것을 딱히 알려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항상 관심사를 묻는 것은 해준이었고 이소는 대답만 하다 끝이 났다. 이소가 물어보려고 하면 해준은 대강 대답한 뒤 바로 다른 질문을 했다. 이소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고 안달이 난 사람처럼.

“나만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해준의 도포를 끌어안고 코를 킁킁대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오래된 나무 냄새와 큼큼하고 진한 먹향, 사박사박하고 누릇한 종이 취가 해준과 같았다. 해준의 소파에서 책을 읽으며 뒹굴거리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면 성인 남자인 저를 가뿐히 안아 들고 침실로 옮기던 그 품을 떠올렸다. 이소는 흑색 비단에 얼굴을 파묻고 뺨을 부볐다. 온종일 무엇을 선물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이 오려나 보다. 자고 일어나서 더 생각해야지.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었는데.

‘내 옷 덮고 잠들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어?’

갑자기 들린 해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이소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꿈이었나 보다. 엎드린 상태로 3시간이나 잠들었나 보다. 눈을 뜨자 새벽이었다. 이소는 주섬주섬 도포를 다시 의자에 걸어 두고 별채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 준비를 하던 이소는 아무 생각 없이 습관처럼 셔츠를 꿰어 입고 시계를 차다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반지.’

해준에게 시계를 선물 받았을 때 제가 반지냐고 대뜸 김칫국을 마셨던 때를 떠올렸다. 무슨 자신감과 넘겨짚기였는지. 그때 해준은 웃으면서 반지는 나중에 준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선수를 치고 싶어졌다. 자신이 먼저 반지를 선물한다면 해준이 좋아하지 않을까. 반지를 나눠 끼는 순간 조금 더 서로에게 진지해지고 특별해진다고들 하는데. 스스로도 해준에게 어울리는 연인이고 싶었던 이소는 제 약지를 매만졌다. 그 사람도 피부가 하얀 편이니까 백금을 할까, 이번 생일에는 어디 도망가지 말라고 해야지. 도망가더라도 곁에 꼭 붙어서 반지를 끼워 줘야지 생각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

“이소 씨, 어 잘 왔다. 지금 안 그래도 주문이 막 들어와서 바로 배달 가야 하는, 기분 좋아 보이네?”

“그래 보여요? 가방만 두고 바로 배달 갔다 올게요.”

이소는 웃으며 가게 조끼를 챙겨 입었다. 능숙하게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었다. 지금 있는 돈과 월급의 절반을 모으고 나면 그래도 해준의 눈에 차는 반지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해진 손수건 말고 조금 더 어울리는 손수건도 하나 사 줘야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 * *

이소는 공항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동당거렸다. 여기까지 올 생각은 없었는데 퇴근을 조금 일찍 하게 됐고 내친김에 바로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20분째 주영과 통화 중이었다. 아직도 예전 일을 생각하면 힘든 건 사실이었지만 주영의 말을 곱씹을 때마다 가장 나쁜 것은 역시 윤치승 회장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저와 해수에게 어떻게든 잘 해 주려 애쓰는 모습에 참 사람 일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구나 싶어 무르게 굴게 된다.

“응, 난 아까 퇴근했어. 으응. 사장님이 오늘은 가게 일찍 닫는대서. 형은 무슨 일인데?”

주영의 용건을 듣던 이소는 부산하게 움직이던 발동작을 멈췄다. 입양 요건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고 무리 없이 한두 달 안에 서류 작업이 진행되면 해수를 자연스럽게 입양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확정이 난 것도 아닌데 이미 진짜 제 딸이 된 것 같은 생각에 공항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주영은 한참 말이 없는 이소에게 ‘좋아서 그러는 거지?’라고 물었고 이소가 고개를 끄덕거리다 이내 전화인 것을 알아채고 ‘응. 진짜 좋아.’라고 말하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형, 그….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 내가 살게.”

- 됐어. 네가 뭘 사.

“아니야, 그냥. 이 일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봤는데, 식사도 한 번 제대로 못 했잖아.”

이소는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주영의 멱살을 잡고 윽박을 질렀던 날을 떠올리며 무척 면구스러워했다. 그때는 정말로 사정을 몰랐다. 주영이 저와 해수를 버려 놓고 놀려 먹으려고 오는 줄만 알았다.

주영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다.

- 알았어. 안 그래도 너 얼굴 보고 싶고, 목소리도 듣고 싶고.

“진짜 낯간지럽게 말한다. 형수한테도 평소에 그렇게 말해?”

- 아니.

“어휴…. 됐어. 맨날 티비에 나오거든, 둘이 금실 좋다고. 말해 뭐해.”

- 이소야.

웃으며 고개를 젓는 이소는 제 이름을 부르는 주영의 목소리에 여전히 미소를 매단 채 대꾸했다.

“왜.”

- 다 잘 될 거야. 나만 믿어. 난 그동안 너한테 못 해 준 거 다 줄 거야. 이젠 정말로 웃게만 만들어 줄 거야.

그러고는 마치 자기 암시같은 말을 주억거렸다. 이소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지난 칠 년을 누구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심지어 얼마 전까지도 믿었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은지라 주영의 믿어 달라는 말이 진심과 별개로 참 미묘하게 들렸다. 곧 방송과 함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소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래, 형. 든든하네. 근데 나 이제 전화 끊어야겠다.”

- 어딘데? 왜 이렇게 갑자기 소란스러워?

“아, 공항이야. 교수님 보러 왔거든. 나중에 또 전화할게.”

말을 마치자마자 저 멀리서 불쑥 솟은 장신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검은 셔츠를 입은 해준은 뭐가 그리 바쁜지 양손에 서류와 패드를 번갈아 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바빠 보여서 손만 흔들고 조금 이따 말을 걸까 했는데 몇 번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더니 코앞에 서 있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성큼성큼 지나쳐 가 버렸다. 황당함에 이소는 골이 상했다.

“교수님!”

한 번 부르자 잠시 멈칫하고 앞을 보던 해준은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이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차해준!’ 하고 불렀다. 그제서야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뒤를 돌아본 해준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소의 얼굴을 바라봤다. 뒤를 돌아보고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해준 때문에 이소는 순간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하는 착각도 했다. 하지만 저렇게 잘생기고 덩치 큰 사람은 흔하지 않은걸. 이소가 침을 꼴깍 삼키고 바라보자 해준이 귀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으며 피식 미소 지었다.

와르르-

그러고는 수많은 서류와 값비싼 가방을 모조리 바닥에 떨어뜨리고 팔을 크게 벌렸다. 이소 역시 그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이 주나 떨어져 있었던 것이 그렇게 애가 닳을 일이었는지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펄쩍 뛰어올라 해준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리고 폭 끌어안겼다. 해준 역시 동글게 말린 이소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교수님, 교수님.”

“응. 이소 씨.”

이소는 해준의 목덜미에 뺨을 부볐다. 예전에 해준이 곧잘 하던 버릇이었는데 떨어져 있다 보니 왜 그렇게 해준이 이소에게 이마와 뺨, 입술을 부볐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살갗을 맞대고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큰 위안이고 행복이었다. 이소는 사브작사브작 머리카락이 비벼지는 소리를 들으며 해준의 목덜미와 어깨에 코를 묻었다.

“이소 씨.”

“으응, 네.”

“나도 오랜만에 봐서 너무 좋은데.”

“응, 저도요. 저도 좋아요.”

해준이 웃으면서 살짝 허리를 숙였다. 이소는 그대로 눈을 감고 매달린 상태였다. 해준이 떨어진 가방과 서류를 엉거주춤 주워 들었다. 그때까지도 떨어질 생각을 않고 꼭 안긴 이소가 큭큭 웃었다. 해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아까부터 이 유난스러운 게이 부부를 썩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 괜찮아?”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사람들이 저와 해준의 주위를 빙 둘러싼 채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어떤 이는 저 멀리서 사진도 찍었다. 아, 망했다. 해준을 보는 순간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경주마마냥 달려들어 온갖 애교를 다 부렸다. 저택에서 하던 애정 표현들이 알게 모르게 습관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소는 후다닥 다리를 풀고 내려왔다. 해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왜, 난 좋았어. 기왕 안긴 거 그대로 차까지 가자. 아니다, 아예 안고 식사할까?”

이소는 대답도 않고 빠르게 걸어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어느 순간 보니 달려서 도망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해준은 한참 눈을 접어 웃었다.

* * *

식사는 즐거웠다. 간만에 둘이 멀리서 나와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었고, 풍미가 가득한 식사와 곁들인 공항 뷰는 이소의 눈에는 별천지였기에. 한 그릇에 몇십만 원이 훌쩍 넘는 식사보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에 정신이 팔린 채 이소는 식사를 더디게 이어 갔다.

이 주 동안 별일이 없었냐는 말에 이소는 식구들하고 어느 정도 어색함도 풀었고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낸다고 구구절절 떠들었다. 부디 그 일로 인해서 해준이 식구들에게 괜한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회사도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서 조금 더 다니고 싶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적당한 페이와 적당한 시간, 모난 곳 없이 착한 직원들. 이소는 생계에 쫓겨 허덕거리지 않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후식이 나올 때 즈음 이소는 홍차를 젓다가 해수의 입양 이야기를 꺼냈다. 주영이 영어 발표회에 도움을 주었고 입양을 제안했다는 말을 전하며 이소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설렘으로 달뜬 목소리였다.

정작 해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이소 씨, 윤주영 이사 말이야.”

“네.”

“이번 일만 끝나면 더 이상 안 보는 거야?”

“어… 왜요? 그건 아닐 거 같은데…. 고마워서 식사도 같이하기로 했고요.”

해준은 고개를 기울이며 볼을 쓰다듬었다.

“음, 해수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이야. 물론 윤주영 이사가 이제 와 이소 씨와 해수에게 잘하겠다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범양 측의 움직임도 신중히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윤치승 회장도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한 마당에 사람을 쓰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고 과격하게 움직이다간 괜히 이소 씨한테 불씨가 튈까 봐 걱정돼. 일단은 해수를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까 입양 자체는 조금 더 천천히 진행해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이소는 잔을 매만졌다.

“하지만 저번에 설명 드렸잖아요. 요건만 맞으면 제가 데려올 수 있어요. 합법적으로 입양만 결정되면 그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경찰 도움도 받을 수 있고요.”

“입양이 꺼려진다는 게 아니라, 그냥 좀…. 사실 제대로 연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해수에 대한 입양 절차를 권유하는 게 미심쩍다는 거였어요. 이소 씨한테 해수가 어떤 의미인지 내가 모르지 않아. 하지만 조금만 더 천천히, 응? 급할 거 없어요. 우선 해수 어린이집 옮기기 전까지 편히 집에 데리고 있어요. 공부는 따로 교사 붙여 주면 되지.”

이소는 시무룩해져 입술을 일자로 끌어당겼다. 축하해 줄 줄 알았는데 해준이 너무 정색을 하고 다시 재고해 보라는 말에 어깨가 처졌다.

“교수님이 보시기에는 제가 너무 들뜬 것 같아요?”

“아뇨.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일이 맞아요. 이소 씨 마음 백번 이해하지. 다만 윤주영 이사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지 말고 이소 씨도 동등하게 이 문제에 개입했으면 좋겠거든. 형과 동생이 아니라 친부와 양부로 만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니까.”

해준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이소는 입술을 축이며 주억거렸다. 해준이 마냥 주영을 경계하는 줄 알았는데 질투와 별개로 차근차근 갈 길을 제시해 주니 마음이 놓였다. 이소가 멍한 표정으로 테이블만 응시하자 해준은 손을 맞잡아 왔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이소 씨를 믿고 해 봐요.”

이 주 만에 만난 해준의 손은 여전히 따뜻해서 참 위안이 많이 됐다.

* * *

공항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이소는 해준을 옆에 두고 몸을 일으켰다. 깨끗하게 씻고 말간 얼굴로 로션을 바르는 이소의 곁에 머리가 부시시한 해준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 오랜만에 왔는데, 얼굴도 안 보고 출근하려고.”

이소는 웃으며 해준의 손을 토닥였다. 해준은 홉 붙은 가는 허리를 더듬다가 낡아 해져 버린 옷에 난 구멍을 발견했다.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큰 구멍이었다.

“자기야, 이 옷 구멍 났어.”

“알아요. 입기 편해서 입는 거예요. 어차피 내의잖아요.”

이소는 체크 셔츠 안에 받쳐 입은 오래된 면티를 당기며 웃었다. 어차피 안쪽이라 보이지도 않으니 위에 다른 옷을 겹쳐 입으면 부끄러울 일도 없다고 했다. 해준의 미간이 곱게 일그러졌다.

“새 거 사 줬잖아.”

“아끼느라구요.”

이소는 입꼬리를 끌어당기고 일어났다. 운동화 끈을 묶을 때까지 해준은 팔짱을 낀 채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들어가서 마저 주무세요’ 했지만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저 작은 머리통을 안고 잠들어야 잠이 더 올 텐데 미련도 없이 떠나는구나. 이소는 돌계단을 톡톡 걸어 내려가며 손을 흔들었다. 해준 역시 낭창한 손목을 흔들며 이소를 배웅했다. 언덕을 내려가기 전 붉은 대문에 다다른 이소가 문득 뒤를 돌아보더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내 해준의 주머니 속 전화가 웅 울렸다.

“응, 이소 씨. 역시 가기 싫어졌어? 얼른 들어와.”

- 저, 교수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해준이 고개를 기울이고 이소를 바라보자 멀찍이 서 있던 이소가 멋쩍게 웃었다.

“자기가 말하는 건 다 들어주지.”

- 어려운 건 아니구요.

“응.”

이소가 머뭇거리다 이내 입술을 뗐다.

“잉어 밥 좀 주실 수 있어요? 특히 그때 말씀해 주셨던 작은 빨간 잉어요. 제가 교수님 안 계실 동안 챙긴다고 챙겼는데…. 저번에 보니까 자꾸 치여서 못 먹어요. 덩치도 그래서 작은가 싶고.”

어이없도록 사소한 부탁이다. 해준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구겨졌다. 그깟 잉어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대문 앞에 선 이소가 해준을 보며 어깨를 흔들었다. 응? 부탁해요. 불쌍해서 그래요. 이소의 얼굴을 바라보던 해준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잘 다녀와요. 빨리 와요.”

이소가 환히 웃으며 대문을 나섰다. 해준은 뒷덜미를 쓸며 몸을 돌렸다.

일을 다니는 이소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 가게에 꿀을 발라 놓은 것도 아니면서 지각 한 번을 안 하고 달려갔고, 꼬박꼬박 다섯 시까지 채워서 일을 했다. 배달 일을 다시 시작해서 오토바이 운전도 다시 하고 있고, 가끔씩 요리도 하는지 옷에 기름이 튀어 있을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 사람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해준은 이소가 원한다면 몇 달 더 일하게 해 줄 생각도 있었고, 더 큰 가게나 건물을 아예 이소 이름으로 사 줄 생각도 있었다. 물론 제가 가장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거였지만 아마 이소는 말라 죽을 테다.

해준은 침대에 기대어 베개를 끌어안았다. 아직까지 윤이소의 샴푸 냄새가 난다. 아무 걱정 없이 제 곁에서 놀고먹고 하면 좋겠지만, 당장 어제 들은 해수의 입양 이야기와 윤주영의 호의까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저와 이소를 훑어보던 그 눈을 생각하면 기분이 찝찔하고 불쾌해진다.

한참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순간 해준은 이소가 저를 생각해 돌아온 줄 알고 얼른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아…. 접니다.”

준경이 엄청난 양의 서류 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 노골적으로 실망한 해준의 기색에 준경의 얼굴이 구겨졌다. 원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제 주인이 저를 보고 성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방금 잠 깬 사람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준경은 헛기침을 했다.

“아침부터 보고하긴 그렇습니다만,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들렀습니다.”

“뭔데요.”

해준의 질문에 준경이 자연스럽게 한 걸음 들어와 문고리를 잡았다. 탁, 나무문이 꼭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빈틈없이 닫혔다. 준경이 몸을 돌리며 해준과 눈을 맞췄다.

“지난번 요청하신 범양그룹 윤치승 회장에 관련한 정보입니다. 이소님 일로 긴히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 * *

준경이 자료를 브리핑하기 전 해준은 잠시 씻고 나오겠다고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해준은 주로 새벽까지 늦게 일을 하다가 정오가 다 되어서 깨곤 했었는데 이소가 오고 난 후부터는 심심찮게 9시 전에도 깨어 있었다. 물론 늦은 밤 잠이 드는 습관도 지친 연인을 달래고 씻기느라 남은 체력을 모두 써 버리면 함께 고롱고롱 잠이 들곤 했다. 새 나라의 도련님이 되었다.

해준이 씻고 나올 동안 준경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 해준의 지시로 상근의 꽃이 흔적도 없이 파였다. 일 년 전 이 정원에 붉은색 아마릴리스를 갖다 심을 때 준경은 고개를 기울였다. 크고 투박한 얼굴의 상근은 조금 더 야생초 같은 것이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이건 크리스마스에 장식용으로 쓰는 꽃 아닙니까? 생각보다 화려한 걸 고르셨네요.’

해준은 다른 꽃들 사이에서 유난히도 키가 크고 붉은 꽃잎을 매만지며 미소 지었었다. 그러게, 막상 심고 보니 생각보다 다른 꽃들과 어우러지질 않네. 그래도 예뻐서 고른 건데. 해준이 돌아서고 준경은 정원을 유심히 보았다. 정말로 화려하긴 하나 아기자기한 다른 꽃들과 어우러짐 없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왜 굳이 이런 곳에 심으셨담. 뭐, 정원의 주인 마음대로겠지만. 준경은 아무 생각이 없이 해준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완전히 흙으로 덮인 자리 주변으로 올망졸망하게 틔운 작은 꽃들이 조화로웠다. 처음부터 아마릴리스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준경은 눈썹을 움찔댔다. 해준의 성격은 독특하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정성을 다하는 만큼 마음이 떠나면 싹을 아예 잘라 내 버렸다.

일흔이 넘은 준경의 눈에는 그런 해준의 행동 하나하나가 매번 마음이 갔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허공을 보며 연초를 연달아 태우거나 밤늦도록 수면장애에 시달릴 때도 걱정이 산이었다. 그럴 때마다 저 곰 같은 덩치를 안아 주고 싶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곁에 이소가 있어서 다행이다.

어느새 부스럭 소리를 내며 해준이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흰 티에 대충 도포를 걸친 후 젖은 머리를 한 해준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왔다. 손에는 푸른색 향낭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그건 뭡니까?”

“먹이 주머니. 우리 이소가 예쁘게 여기에 담아 뒀더라고.”

해준은 커다란 손바닥에 알록달록한 먹이를 살살 흔들어 담았다. 준경은 말없이 옆에 서 있다가 서류를 꺼내 들었다. 나이가 열 살만 더 어렸더라도 무리 없이 태블릿을 썼을 텐데, 노안이 와서 그런지 번쩍번쩍한 기계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아팠다. 준경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참, 시계는 고쳐서 이소 님께 다시 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은…. 별 거 없었습니다. 그냥 누르면 소리나는 호신용 사이렌 정도던데요.”

정말이었다. 뚜껑을 열었더니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렌이 내장되어 있었다. 소리가 무척 요란해 준경과 엔지니어 모두 인상을 찌푸리고 귀를 막았었다.

“왜 애들 장난감에 그런 게 달려 있어. 기분 나쁘니까 빼 버려요.”

“그럴 거 같아서 제거한 뒤 돌려드렸습니다.”

사실 그 자식이 준 건 다 버리고 싶어. 해준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 후 도포를 뒤로 펄럭 물린 채 쪼그려 앉았다. 비단 주머니에 소분해 놓은 먹이 주머니를 대충 손목에 걸고 사라락 사라락 잉어떼에게 먹이를 물렸다.

먹이를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잉어떼들이 몰려들었다. 해준은 눈으로 계속 이소가 말한 크기가 작은 잉어를 찾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색이 고운 붉은 잉어 한 마리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30cm는 되는 큰 잉어들 사이에 한 뼘밖에 되지 않은 작은 녀석이 치여서 먹이 근처도 못 가고 있었다.

쯧, 해준은 그쪽까지 먹이를 던져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다른 놈들보다 크기가 몇 센티는 큰 검은 잉어 한 마리가 꼬리로 툭툭 쳐내더니 큰 물살을 만들었다. 덕분에 작은 잉어는 조심스레 올라와 몇 입을 베어 물고 수면을 배회했다.

‘얼씨구.’

검은 잉어 덕분에 작은 놈은 뿌려 주는 것의 1/4는 받아 먹을 수 있었다. 먹이 주머니가 다 비워질 때까지 주면 되겠지, 싶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작은 놈과 색이 비슷한 붉은 잉어 한 마리가 먹이를 빼앗아 먹기 시작했다. 검은 잉어와 몇 번 부딪혔지만 붉은 잉어 역시 지지않았다. 몹시 거슬렸다.

“바쁘시면 나중에 보고할까요.”

“아뇨. 하세요.”

준경은 서류를 꺼내어 들었다. 해준은 손을 내젓고 일일이 읽으라 전했다. 준경은 눈을 찡그렸다. 이 많은 걸 다 읽으라는 건 노인학대다. 준경은 한숨을 쉬고 하나하나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읽어 나갔다.

“지난번 부탁하신 범양그룹에 대한 문서입니다. 처음 요청하신 건은 상반기 국가 지원 사업 부분과 금융 이자 수익만 말씀하셨는데…. 조사하다 보니 감자뿌리마냥 나와서 몇 가지 더 추가했습니다. 우선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정과 세한을 제치고 국가 지원 사업 5개 및 민간 사업 12개를 한꺼번에 독점한 점이 미심쩍습니다. 윤주영의 모친 이명희 이사가 필두에 있는 엠에이치홀딩스가 범양아트센터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의 브랜드를 관리하고 있으며, 수수료 및 컨설팅 명목으로 내부 거래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부분에서 회계에 잡히지 않는 금액이 꽤 많을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장부는 곧 넘어올 겁니다.”

“안 그래도 돈 없는 애들 쪽쪽 빨아먹네. 그 노인네 저번에 봤을 때 영 날카롭게 생긴 게 오래 못 살 것 같더라고.”

“생각 외로 윤주영 이사의 경영 스타일은 깨끗합니다만, 귀국하고 6개월 사이에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한 점이 기존 범양의 행보와 차이가 큽니다. 그 때문에 모친 이명희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하나뿐인 아들하고 사이가 안 좋은 이유는 뭔데.”

준경이 서류를 넘겼다. 5년 전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그래프는 한눈에 봐도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지분 때문입니다. 윤치승 회장 사망 시 외동아들인 윤주영에게 75%가 넘게 넘어갈 예정인데 추구하는 사업 방향이 매우 다릅니다. 윤주영은 벌써 계열사만 8개 이상 늘리려고 하고 있고 이명희는 반대 입장인 거죠.”

“혈기 왕성한 아들 말을 들어야지. 큰돈 들여서 유학도 다녀왔는데.”

해준은 장대를 들어 쿡쿡 빨간 잉어를 찔러댔다. 저리 가, 작은 애 밥 좀 먹게.

“아무래도 얼마 전 이명희 측은 변호사 횡령 사건도 있고 최대한 몸을 사리려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백화점과 호텔은 이명희 것이니까요. 다만 윤주영 이사가 자꾸 매스컴에 노출되면 아무래도 주목을 받게 될 테니 해수 양의 일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다툼이 있는 모양입니다.”

“어릴 때 만든 사생아 문제까지 터지면 아무래도 가꿔 놓은 이미지가 무너질 테니 더 그럴 테지. 지금 윤주영 물 좋거든. 젊고 깨끗한 기업가, 잘생기고 매너 좋은 30대 사업가, 사려 깊고 현명한 후원가 이런 걸로.”

“영국에 있을 때 행적도 조사할까요?”

“아마 거기서도 앞에서는 몸 사리고 있었을 거야. 의료 내역부터 뽑아 봐요. 약을 했다던지, 여자를 만났다던지. 뭐…. 보통 꼬리는 거기서 잡히니까.”

해준의 혀가 나른하게 입 안을 훑었다. 적어도 몇 년간은 회사 일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해준의 양친은 정정한 편이었고 이사진들도 모두 믿을 만한 해준의 사람들이었다. 해준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기업이었고 다른 기업과 합작을 할 정도로 운영상 어려움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이 사랑해 마지않는 교수직을 잠시 미뤄 두고 부친의 제안을 받아 들인 것은 순전히 승부욕 때문이었다.

2년 전 부친의 문예 전당에 범양이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해준은 탐탁잖아 했지만 제 일이 아니니 무시로 흘려 버렸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도 분기별로 끊이지 않고 오는 공격적인 프로젝트 제안에 미심쩍은 해준이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는 눈을 의심케 했다. 범양과 손을 잡은 소규모 재단과 기업들이 갑작스러운 재무 문제와 프로젝트 불이행으로 파산 상태로 전환되었다.

무려 11개의 재단, 26개의 회사가 5년 사이에 사라졌다. 이렇게 많은 재단이 파산한 중심에 범양이 있었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사안은 아니었다. 알아서 각자도생하며 사는 것이 이 바닥 생리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게 무슨 지저분한 도박판 같은 꼴이지. 일이 기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형 그룹은 범양이 건드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만 연이 닿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찝찝한 일이다. 정계와 검경찰에도 사람을 심어 놓았는지 이 허술한 강도짓을 조사하는 이는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그 때문에 부친은 범양의 제안만큼은 꾸준히 거절하고 있었다.

‘뱀 눈 같더구나.’

하지만 몇백 억짜리 프로젝트인데 버리긴 아깝잖아요. 알맞게 우린 홍차를 입에 갖다 대던 해준은 부친의 불안한 어조에 가볍게 말을 얹었다. 부친은 안경을 고쳐 쓰며 돌아보았다.

‘그치들은 영 선해 보이지가 않아. 같이 있으면 은근히 무례한 언사를 하는 것도 미묘하게 거슬리고, 사람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면서 부를 과시하는 것도 보기 안 좋더구나. 우리는 꼭 그 일을 진행시키지 않아도 되지 않니. 당장 돌보아야 할 학생들도 아이들도 많고….’

부친은 미간을 찌푸렸다. 곤란해 보였다. 회장의 사견과 달리 실무에 빠삭한 이사진들은 모두 이 일은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때문에 제 선하고 똑똑한 아들에게 묻고 있었다.

넌 어찌하면 좋겠니. 하지만 저야 일개 학교 선생이 아니던가. 해준은 손가락으로 찻잔 표면을 두드렸다. 자잘한 흠집 하나조차 없는 매끄러운 표면의 도기는 부친의 성격을 말해 준다.

‘저희가 먹힐 가능성은 제로인데 무얼 걱정하세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엮이기엔 격이 떨어지신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해준은 홍차를 마지막까지 털어 마셨다. 아, 씁쓸하다. 맛 좋네. 집에 갈 때 챙겨 가야지.

‘굳이 그런 놈들의 장단에 맞춰 주고 싶진 않아.’

부친은 고고한 학과 같았다. 뱁새들의 장난에 놀아 줄 여유도 급도 되지 않는다. 점잖고 선한 사람이었지만 시혜적이고 은근한 선민사상은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날 때부터 모든 것을 쥐고 태어난 사람이기에 자신이 주는 배려는 너그러운 것이고 이를 받는 사람들은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에 언제나 모든 일을 진행할 때 조심스럽게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부인과 영특한 아들의 의견을 물었다. 해준은 그런 부친을 어려워하면서도 결국은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해준은 홍차 잔을 내려놓고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저에게는 부친과 달리 오물을 뒤집어쓸 손이 많다.

‘땅따먹기라고 아세요?’

‘네가 어릴 때 하던 놀이 아니니. 동네에서 널 이길 아이가 없다고 자랑하던 게 눈에 선한데.’

아홉 살,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힌 채 돌아온 해준을 떠올리며 부친이 웃었다.

‘지금도 잘해요.’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100% 청렴한 기업은 없다. 크게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오수가 묻은 돈이 오가는 것은 어느 정도 감안을 하고 기업 합병과 인수, 파트너십을 맺는다. 사업가라면 괜한 정의감과 고집으로 눈 앞에 있는 큰 먹이를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문어발식으로 온갖 업계에 얽혀 있는 범양의 몸통을 건드리는 일은 신중해야 했다.

여태 뻗대며 고고하게 군 만큼 한 번에 숙이고 들어가면 의심을 산다. 믿을 만한 사람 한두 명을 보내 미끼를 문 척하고 기한이 다 되어 갈 즈음에 결재 서류에 마지못해 서명을 한다. 한꺼번에 수문을 열기보다는 일회성 프로젝트로 인연을 맺은 후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덫을 판다. 먹이를 문 범양이 사업을 확장할 때 즈음 감사에 제 사람을 보낼 것이다.

워낙 지저분하게 얽힌 세력이라 이 바닥에서 완전히 들어내게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를 조각내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다. 조각조각 내어 보란 듯이 효시할 것이다. 물을 흐리지 말고 각자 자신의 파이만 적당히 취하면서 나랏일에 힘쓰자고. 그래야 괜히 남의 것을 넘보는 잡놈들이 없어질 것이 아닌가. 자신이 할 일은 오로지 딱 그것뿐이었다.

해준은 장대를 들어 툭툭 바위를 때렸다. 돌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에 잉어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작은 잉어 놈만 물풀 아래 숨어 눈치만 보았다. 왜 달려들지 못하고 기가 잔뜩 죽어 있어. 그렇게 못 먹으니 너만 그리 작지.

“윤치승은 전과도 있다지.”

“젊었을 때 일이긴 하지만 사기 전과가 세 건 있습니다. 30대 후반에는 용역 깡패들하고 일을 했었고 사기 전과로 교도소에서 오래 살 뻔했지만 물려받은 유산의 규모가 꽤 커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이후 주변 정리 후에 현재 범양까지 몸집을 불렸습니다. 다만 여전히 경비업체 여섯 곳와 용역 계약 중이고 비공식적으로는 지방 조폭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둥 소문이 좋진 않습니다.”

“어린아이들 장학금도 주고 젊은 예술가들 지원도 해 주는 선량한 예술재단이 철거용역 여섯 곳과 계약이라.”

“지난 3년간 범양예술학원 쪽으로 들어간 금액만 140억 원이 넘고 초중고 부지를 확대하면서 밀어 버린 지역이 모두 재개발 후보에 들었던 장소와 밀접합니다. 그중 강경하게 버티던 6곳에서 유혈사태까지 있었고요. 최근 이쪽 부근도 자주 시찰하는 것 같습니다.”

“이 동네가 조개 속 진주인 건 또 어찌 알고.”

붉은 잉어가 다시금 먹이에 달려들어 작은 놈 주위를 배회하자 해준은 장대를 들어 휘휘 저었다. 붉은 놈은 장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지 바위 뒤에 숨어 꼬리만 저어댔다. 어림도 없지 이놈아, 작은 놈 다 먹일 때까진 근처도 오지마라. 검은 잉어는 쉭쉭대며 붉은 잉어가 다가오려 하면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었다.

“우선 범양이 비정상적으로 불린 곳간을 텁시다. 나중에 검찰 쪽하고 나눠 먹을 일이 있으면 조건 걸고 자료 넘기고, 가난한 예술가들 속여서 자기네들 공장 부품으로 쓰려고 하는 계획도 막아야지. 특히나 윤주영 그놈은 제 아비보다 더할지도 모르니 일찍이 사람 붙여야 할 거야.”

해준은 반쯤 비운 먹이 주머니를 들고 흡족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소가 부탁한 오늘 할 일 중 가장 큰 일이 끝났다.

“그런데 윤치승이 물려받은 유산이 ‘대거 상속’ 받을 정도로 많았나 보지. 그 잡범이 졸부 회장까지 올라간 걸 보면.”

해준이 설핏 비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준경이 민망한 듯 볼을 긁었다. 사실은 이게 본론이었다.

“아, 그게… 현재의 범양의 모체가 22년 전 사라진 백영그룹입니다.”

해준은 눈썹을 까딱이며 장대를 품에 낀 채 기억을 더듬었다.

“백영이면, 조부께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 의료원 운영하던 교육자 집안 아닌가. 어릴 때 잠깐 회장님 만나 뵙고 인사드렸다고 이야기만 들었지. 그런데 그런 백영이 범양의 모체라는 건 금시초문이네. 20여 년 전이긴 하지만 백영은 지금의 범양하고는 결이 좀 다를텐데.”

“본래 백영의료원과 백영예술학원을 운영하는 사업적인 면보단 교육자 집안이었던 게 맞습니다. 작은 미술관과 사립박물관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백영 산하의 보육원만 스무 곳이 넘습니다. 운영하고 있는 사업 자체는 소박한 편이었습니다만 주식 및 해외 투자 등으로 현금 자산 자체는 꽤 많았죠. 부동산도 꽤 있어서 지금 대강(大江)일대 알토란 같은 땅은 거의 백영 소유입니다.”

“으흠.”

머리가 아팠는지 해준이 품에 있던 담배를 꺼내어 들었다. 새끼손가락에 대충 끼워 둔 먹이 주머니가 낭창낭창 흔들렸다.

“끊으신다면서요.”

“한 대만.”

이소 없잖아. 해준이 배시시 웃었다. 준경은 말을 계속 이었다.

“다만 회장 부부가 의문의 화재로 사망하면서 유언에 따라 상속분의 절반 이상이 윤치승에게 넘어갔고 범양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백영에 있던 이사진들도 대거 빠져나갔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이사진들은 당시 백영에 있던 사람들 중 반대파였던 듯싶고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윤치승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백영을 범양으로 바꾸었고-”

해준은 고개를 숙여 담뱃불을 붙였다. 후, 내뱉자 머리가 맑아졌다. 간만에 피우니 혀끝에 맴도는 연초 맛이 달다. 한창 달큰한 맛에 취해 있을 때 준경의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아니요. 부친이 아니라 ‘동생 부부’입니다.”

“응?”

잘못 들었나? 담배 연기를 내뱉던 해준이 눈만 들어 준경을 응시했다. 준경은 입을 당겼다.

“윤치승 회장의 남동생 부부가 사망하면서 부동산 795억, 채권 273억 원을 상속받은 겁니다.”

부친이 아니라 남동생이라고? 해준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준경은 조금 더 설명을 더했다.

“윤현승 회장이 사망한 게 22년 전 일이니까 아마 지금 도련님과 비슷한 나이셨을 겁니다. 가스 폭발 화재 사고였고, 당시 방화 용의자는 검거 직전 갑자기 자살했습니다. 당시 다섯 살이던 윤현승 회장의 외동아들은 마당 구석에 쓰러진 채 발견되어 겨우 살았습니다만 충격으로 사고 기억은 전부 소실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주영은 답지 않게 말을 고르며 해준의 낯을 살폈다. 오래되어 이미 단단한 딱지가 앉은 상처를 들추는 일은 매번 망설여진다. 곪은 것을 파내고 다시 조치를 취해야 나은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덮어 두어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영이 깊은 숨을 내쉬며 해준과 시선을 맞췄다.

“당시 백영그룹 윤현승 회장이 이소 님의 망부(亡父)라는 사실입니다.”

바람에 날린 해준의 담뱃재가 비단 먹이 주머니에 또록 떨어져 구멍을 만들었다. 반쯤 남은 물고기 밥이 타들어 가는 붉은 구멍 아래로 와르르 쏟아졌다. 머리가 나쁜 잉어떼들은 방금 전까지도 신나게 처먹어 놓고 또다시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소의 이름에 해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준경은 당시 이소가 윤치승에게 입양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공식석상에 데리고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으며 거짓으로 입양 서류를 작성한 후 이소의 상속분을 모두 사적으로 처리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덧붙였다.

윤치승의 범양, 윤주영과 윤이소의 관계, 양친의 의문의 사망,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유산. 그런데 윤이소는 아직도 그 걸레 같은 티를 주워 입고 제 사촌 형이 버린 아이를 떠맡아 키우며 해실거렸다. 명치께가 시큰거리는 게 또다시 화가 끓었다. 뭐 하나라도 짓이겨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연못에 파동이 일었다. 쏟아진 먹이 주머니가 둥둥 떠다니고 그 주변에서 한바탕 싸움이 일었다. 서로 비슷한 크기의 검고 붉은 것이 뒤엉켜 물어뜯었다. 작은 잉어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우습게도 검은 놈은 먹이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해준은 조용히 제가 품에 끼고 있던 장대를 손에 쥐고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서류를 읽던 준경이 눈을 홉뜨고 말을 멈췄다.

이윽고 작살마냥 매서운 속도로 바닥에 내려꽂힌 장대가 붉은 잉어의 대가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비늘이 빠개지는 소리가 나며 일순간 못이 잠잠해졌다. 장대에 꽂힌 잉어가 몇 번을 퍼덕이다 몸을 늘어뜨렸다. 준경은 말을 잃었다. 해준이 읊조렸다.

“작은 놈 밥 뺏어 먹지 말라니까.”

해준은 장대를 신경질적으로 집어 던지곤 몸을 돌렸다. 먹이를 다 처먹은 잉어들이 피 냄새를 맡고 두둥실 떠오른 붉은 잉어의 몸뚱이에 달려들었다. 텀벙텀벙 신이 나서 육질을 뜯어먹는 꼴이 괴이했다.

어느새 다시 찾아온 검은 잉어가 작은 잉어 주위를 맴돌았다. 두 놈만 유유히 수풀 아래로 사라졌다. 준경은 불쾌한 익숙함에 곱게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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