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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취.”
때아닌 감기인가. 이소는 서랍에서 얇은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달력이 벌써 9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란이 있은 후 트러블은 어영부영 해감되었다. 상근은 이소에게 대거리를 한 것 말고도 광에서 물건을 훔친 것을 인정했고, 경찰에 넘기는 대신 저택에서 내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짐을 챙겨서 나가는 상근을 배웅하는 사람은 준경뿐이었다. 이소는 제가 내다보면 오히려 분위기가 더 가라앉을 것을 우려해 일부러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근의 그런 축 처진 모습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비겁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동희 씨의 말처럼 괜한 동정으로 사람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일은 없어야지, 하며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조금 착잡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이소 님, 정말로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 않어. 참말이여.”
동희 씨의 말대로 식구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소를 맞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의 실언에 대해 해준에게 엎드려 사죄했고 이소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춘식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처음에야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오해했다며, 지금은 정말 자신들도 이소를 아낀다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해준은 가만히 바라보다 ‘알겠다. 그날 아이들 보는 앞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은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올라갔다. 그것만으로도 식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소 역시 제 면을 봐서 그리 말해 주는 해준이 고마웠다.
“이소 님, 어디 가셔?”
“저 잠시만 산책 다녀오려고요.”
“단디 입었네. 곧 도련님 오실 건데 멀리 가지 마시고요.”
“그럼요. 금방 올게요.”
낙원댁이 곧 해준이 돌아올 테니 시간 맞추어 안채에 식사를 들일 거라 말했다. 이소는 핸드폰을 가볍게 흔들며 웃었다. 혹 무슨 일 있으시면 전화 주세요. 근처에 있을게요. 사실 별일이야 있겠냐만 이소의 행동 하나하나가 식구들의 수많은 눈에 밟히는 것을 안 이상 이소 역시 가벼운 산책마저도 일일이 알리고 다녀야 했다.
이소는 언덕을 내려오며 아르바이트 어플을 작동시켰다. 소동 이후 수일이 지났고 일상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다만 장사를 다시 시작하려니 마땅히 하고 싶은 것은 없었고 집에서만 뒹굴거리기도 어쩐지 눈치가 보여 며칠 가볍게 몸을 쓸 일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은근 제약이 많았다. 기술직은 4년제 못해도 2년제 전문대학을 나온 사람을 뽑았고, 공장은 대체로 기숙사 생활 포함이었으며 출퇴근을 하려 하니 새벽 5시까지 나가서 밤 8시에 돌아오는 일이었다. 여전히 해수를 직접 데리고 오는지라 돈은 적어도 출퇴근 시간만 유동적이면 좋겠는데 역시 그런 일은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뭐야, 아직도 인형 눈알 붙이기를 수작업으로 하는 데도 있네.”
잠시 별채 구석에 앉아 인형 눈알 붙이기를 하는 저를 상상했다. 아마 단추를 붙이기도 전에 해준에게 들켜 죄다 갖다 버려질 것 같다. 조금 웃음이 나왔다.
지금처럼 마냥 해준의 집에서만 기거할 수는 없었다. 정숙이 남겨 준 돈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중에 집을 구하기도 어렵고 장사를 하기도 부족했다. 해수가 성인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고 집을 마련할 때까지는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이소는 예전에 살았던 빌라 근처까지 다다랐다. 얼마 전까지 정을 붙이고 살던 곳은 철거 작업으로 뼈대만 남아 있었다. 봄에 이사를 한다고 진땀을 뺐었는데 어느새 초가을이 다 되었다. 가만히 빌라를 바라보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부동산 이 씨였다. 이소는 가볍게 묵례하며 웃었다. 반가웠다.
“윤 사장 오랜만이네. 이사 갔다며.”
“안녕하세요. 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시죠?”
“나야 맨날 똑같지. 이 동네 사람 잔뜩 빠져서 나도 이제 슬슬 빠질까 봐. 아파트 들어올 때까지 있어 보려고 했는데 영 기미가 없네. 근데 윤 사장은 어디로 이사 갔어, 여사님이랑 딸은 잘 있고?”
제 사정을 아는 사람과 간만에 만나니 입이 터졌다. 이소는 정숙이 미국으로 간 이야기와 해수가 많이 밝아졌다는 이야기들을 하며 떠들었다. 한참을 떠들던 이 씨는 별안간 이소에게 지난번 전화했을 때 왜 받질 않았냐며 채근했다.
“맞다.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잊어버렸어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었어요?”
“아니 별 건 아니고, 마침 도시락집도 문 닫았길래 윤 사장 일 쉬고 있나 하고. 내 사촌이 옆 동네에서 작게 밥집을 열었는데 손이 좀 모자란다고 해서. 시간은 많진 않구 한 열 시부터 다섯 시까지만. 오토바이 배달도 해 주면 좋고.”
이 씨의 말에 이소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저 마침 딱 그런 일 구하려고 했는데. 가볍게 나온 산책에서 월척을 물었다. 이소는 신이 나 동네 구멍가게에서 식구들 몫까지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들고 언덕을 올랐다.
* * *
[다음 소식입니다. 범양 윤치승 회장이 지속된 건강 악화로 두문불출한 지 한 달째, 부인인 이명희 본부장도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항간에서는 휘령동 사택에 기거하는 사용인들이 모두 퇴직 처리가 된 것을 두고 기묘한….]
삐릭-
“거 저 윤치승이 미술관에서 몇백 억 해 먹은 거 들키고 나니까 암 핑계 대고 안 나오는 거 아이간.”
“그거는 담당 로펌 변호사가 꿀꺽했대잖어. 윤치승은 여기저기 후원도 많이 하고 좋은 사람이야.”
“다 뻥이지, 그걸 믿냐. 범양 얼마나 뒤 구린데. 내 아는 언니의 친구도 도량천에서 철물점 하는데 거기 일대가 다 범양하고 일하는 조폭 새끼들 소굴이라데.”
“원래 윤치승이가 20년 전에 도량천에서 모조품 장사 크게 하다가 국회의원들 뒤 빨아 주고 회사 키운 거 모르는 사람 없지.”
“조용히 해 봐라, 축구 시작한다이.”
식구들은 다 같이 대청마루에 앉아서 때늦은 수박을 썰어 먹고 있었다. 축구 경기가 시작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방송된 뉴스 기사에서 범양의 소식이 들려왔다. 정작 식구들이 떠들든지 말든지 이소과 해준은 한 발짝 떨어져 해수의 영어 발표회 준비를 봐주고 있었다. 조금 더 역할을 분담하자면 차해준 코치, 윤이소 응원과 격려.
이소는 외국에 나갔다 온 적도 없는데 시디를 통째로 삼킨 건지 원어민 못지않게 영어를 술술 말하는 해수를 보며 연신 감탄했다. 마루 대들보에 기대앉은 해준은 이소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감탄하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발음과 문장을 체크해 줬다. 아직 일곱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 ‘이런 단어를 쓰는 게 조금 더 좋을 것 같다’ 혹은 ‘이 문장은 비문이다’라는 둥 퍽 진지하게 조언했다.
그때마다 해수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해준이 코치한 대로 단어를 바꿔서 다시 연습했다. 이소는 그 모습이 꼭 열혈 부녀같이 보여 카메라를 들어 ‘여기 보세요.’ 하고 사진을 찍었다.
“와, 둘이 닮게 나왔어요.”
동시에 고개를 돌린 해수와 해준의 얼빠진 표정이 퍽 비슷해 보여서 보여 주었더니 해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고 해수는 손을 저으며 질색을 했다. 은찬이 불러 해수가 수박을 더 먹으러 갔을 때 해준은 해수의 영어 발표회에 꽃다발을 보내야 하는 거냐고 나지막이 물었다.
이소는 해준의 코를 꼬집으며 웃었다.
“그냥 매년 하는 어린이집 발표회예요. 잘해서 나간다기보단 5분 정도 다 돌아가면서 구연 동화 하는 수준이라 거창한 거 아니니까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해수가 제일 잘할 텐데. 7살짜리가 영어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건 그 원에서도 처음일 거 아냐. 가서 영상 찍어 줘야 하는데, 희주 데려갈까? 희주 카메라 만질 줄 알아.”
“무슨 영상까지…. 됐어요. 눈으로 보면 돼요. 희주도 바쁠 거고.”
“애들 자라는 건 다 그때그때 남겨야 된다고. 해수 아빠.”
해준이 이소의 허리를 끌어안고 투정을 부렸다. 사실 해수의 영어발표회는 핑계고 그저 출장이 가기 싫은 것이다. 산책에서 돌아온 날 이 씨의 사촌 형 밥집 일을 구했다고 했을 때 해준은 자신의 지갑에서 카드를 내밀었다. 도시락집 일을 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또 일을 구했느냐며, 필요하다면 제 카드를 원하는 대로 쓰라는 말에 이소는 손을 내저었다. 이미 제가 잘 때마다 지갑에 현금을 두둑이 넣어 놓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카드까지 쓰라니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다.
해수의 대학 비용이라든지 훗날을 위해 돈을 모은다고 하면 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그저 집 안에만 있으니 너무 심심해서 그렇다며, 정말 짧게 다니고 말 거라 했더니 해준은 기어코 출근하는 날 가게 앞까지 쫓아왔다.
버스로 두 정거장밖에 되지 않는 거리라 걸어 다닐 거라고 했더니 그 거리를 함께 걸으며 몇 분 정도 걸리는지 계산했고, 사장에게 정말로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만 일을 시킬 거냐는 둥, 잔여 업무나 잦은 회식은 없는지 집요하게도 물어봤다. 면이 달아날 것처럼 창피했지만 하도 고집을 부려 어쩔 수가 없었다. 해준이 사장에게 하도 질리게 굴어 직장에 나가지도 못하고 거절당할 것 같았는데 정말로 일손이 부족하기는 한 모양인지 다음 날부터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둘이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뭣 땜에 그리 꼬치꼬치 캐묻슈?”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난 후 이소의 옆에 앉은 해준을 멀거니 쳐다보던 사장이 물었다. 해준이 ‘애인입니다.’라고 말하려는 것을 이소는 발을 밟으며 웃었다.
‘제 큰형이에요.’ 하자 사장이 ‘그래서 그리 늦둥이 동생을 챙겼구만, 그래 뭐 막내는 항상 눈에 밟혀요. 그치요.’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소의 변명에 해준은 잠시 말을 잃었다. 기분이 나쁜가? 하지만 어떻게 애인이라고 해. 이소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 아윽…! 교, 교수니임…! 잘못했다고요…!’
그날은 집에 돌아가서 형 소리를 다시 한번 들을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는 해준 때문에 이소는 곤욕을 겪었다. 별채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갈아입는 이소를 돌려세우곤 목덜미부터 가슴, 배, 그리고 기어코 구멍까지 빨아대며 그놈의 호칭에 집착하더니 기어코 잠들기 직전까지 몰아붙여 형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큰형은, 무슨. 씨발, 어디서 그런 소리를 생글생글 웃으면서 해요. 나 모르는 둘째 형도 있어요? 큰형에게 박히니까 더 좋죠, 이소 씨. 응? 좋다고 해 봐.’
‘앗, 으응…! 좋, 좋아요…! 좋으니까 이제 그만…!’
이제는 하다 하다 있지도 않은 둘째 형한테도 질투를 했다. 베개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좋다고 울었다. 얼마나 들이받았는지 벌어진 다리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한참이 걸렸다. 쉽게 다물릴 생각을 않는 말랑말랑한 입구가 움찔댈 때마다 뷰륵뷰륵 사정액을 뱉어 냈다. 골 사이가 축축이 젖어 들자 해준은 흰 천으로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콘돔 다 썼으면 그만하지 기어코 생으로 더 했구나. 얄미워. 의식이 멀어지기 전 해준의 뺨을 한 대 밀어내듯 때리고 잔 게 그나마 속이 시원했다.
아침을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뜬 이소는 근육통에 시달렸다. 해준은 전날 밤까지 이소의 허리를 끌어안고 ‘트렁크에 몰래 들어가라’느니 ‘티켓을 사서 보낼 테니 발표회 끝나자마자 바로 와 주면 안 되겠냐’느니 징징거렸다. 기한은 일주일이었지만 짧아질 일은 없었고 오히려 늘어질 일정까지 포함하면 약 열흘 정도 자리를 비우는지라 이소도 아쉬웠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은 일을 하면서 생산적으로 하루를 살아야지. 개똥 철학에 소똥 지론이지만 이소는 그런 생각으로 쭉 살아왔던지라 아쉬워하는 해준을 더 잡지도 않고 엉덩이를 두드려 출장을 보내 버렸다.
해준 역시 말만 그렇게 하곤 눈을 뜨자 새벽같이 짐을 챙겨 떠났다. 아침잠이 그렇게 많은 사람임에도 약속 시간만큼은 칼같이 지켰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뜬 이소는 침대 위 협탁에 어젯밤 제가 해준의 책상에 두었던 간식 상자를 발견했다. 내용물은 모두 가져갔는지 비워져 있었고 작은 쪽지 하나만 들어 있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약 챙겨 먹고 아프지 말고 있어. 사랑해.]
누가 동양화 가르치는 사람 아니랄까 봐 세필 붓으로 단정하게 적힌 글씨가 해준다웠다. 이소는 고이 접어 제 지갑에 넣었다. 참으려고 해도 비죽비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발표회 날 아침, 이소는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 아빠 11시 30분까지 갈게.”
“아빠, 콧물 난다.”
“으응. 얼른 가아.”
해수가 씩 웃으며 주 기사의 차에 올라탔다. 어린이집 발표회는 말이 발표회지 그냥 파티하는 날에 가깝다. 예쁜 원피스를 골라 입고 머리까지 곱게 묶은 해수가 짧게 손 키스를 보냈다. 해준의 저택에 오고 나서 해수는 부쩍 밝아지고 애교가 늘었다. 차가 골목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이소는 카디건을 여미며 대문을 넘어왔다. 아직 구월의 초입인데도 해준의 저택은 지대가 높아 도심 한복판에 비해 기온이 낮은 편이었다. 유난은 아닌지 이소뿐만 아니라 많은 식솔들의 옷소매가 길어졌다.
마당에서 고추를 널던 낙원댁이 이소를 보자마자 더운 배숙을 별채에 막 올려보냈다며 한술 뜨고 쉬라 했다. 누가 봐도 감기 걸린 사람 같나 보지. 이소는 미소 지으며 언덕 위 정원으로 향했다.
주인이 떠나고 난 안채와 정원은 이소의 생각보다 훨씬 적막한 느낌이었다. 사흘이 지나고 나서 불이 꺼진 안채를 지나쳐 별채로 오를 때마다 이소는 미묘하게 낯선 풍경에 마음이 적적해지곤 했다. 항상 불이 켜져 있던 서재와 중간 미닫이문이 열려 있던 마루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주인이 없는 집은 고작 며칠 만에 꼭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은 스산함을 주었다.
“열 있나.”
별채로 돌아온 이소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늘따라 팔다리가 유난히 무거웠다. 해준이 떠나기 전 안에 싸서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소는 약상자를 꺼내어 액상형 진통제 한 알을 까서 입에 털어 넣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지. 이소는 알람을 한 시간 뒤로 맞춰 둔 후 꼼질꼼질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눕고 싶었는지 베개가 머리통을 잡아당기는 듯 노곤노곤했다. 전신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완전히 잠에 빠지기 전, 이소는 문득 해준의 말을 떠올렸다. 희주랑 같이 가지, 카메라로 찍어 달라고 하고 자기는 편안하게 감상하고 응원하면 되지. 이소는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내가 다 혼자 할 수 있어요. 이소는 피식 웃었다. 그런 거 보면 해준도 자기 자식에게 어지간히 팔불출처럼 굴 것 같단 말야. 해준이 보고 싶었다. 출장만 없으면 같이 가 줬을 텐데.
약 기운이 서서히 퍼지자 생각이 흐려졌다. 그렇게 이소는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 * *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까지도 몽롱한 상태라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았다. 곧이어 귀를 파고드는 희주의 목소리에 이소는 손가락을 꿈지럭댔다.
“이소 형. 형, 일어나셔야 하지 않아요? 형?”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당황한 희주의 얼굴이었다. 왜 네가 내 방에 있지.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누운 자리가 축축했다. 이소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미간을 곱게 찡그렸다. 불쾌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보이지 않는 납덩이에 짓눌려 온몸이 침대 안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머리와 가슴도 답답했다. 희주가 협탁에 있는 미지근한 물을 컵에 따랐다. 누워 있던 이소의 등을 붙잡고 일으켜 컵을 입술에 대자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린 이소가 그 물을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희주는 한참 이소의 안색을 살피다 고개를 기울였다.
“정신 좀 드세요? 아니 시간이 꽤 지났는데 밖으로 안 나오셔서….”
“무슨 시간… 아, 괜찮아. 교수님이 또 전화했니? 나 혼자 가도 돼. 번거롭게 뭘 또 같이 가.”
이소가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나치게 흰 피부,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이 유독 시선을 빼앗았다. 희주는 이 집에 들어와 도련님의 남자 애인을 처음 보았을 때를 잊지 못했다. 고작 이십여 년밖에 살지 않았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텔레비전에서 봤던 여자 아이돌보다 배는 예뻤다.
동갑내기 용태에게 그 말을 전했을 때 ‘연예인은 티비 안에만 있고 그 형은 네 옆에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야?’라고 했지만 희주는 알 수 있었다. 아마 도련님의 사람만 아니었으면 정말 지독한 짝사랑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저 해준의 사람이라는 사실에 시작도 못하고 포기해 버렸지만.
희주는 시선을 돌리며 시계를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 지금 1시가 넘어서요. 해수 발표회 11시 30분에 시작 아니에요?”
희주의 말에 말없이 물을 들이켜던 이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몇 시라고? 얼른 협탁에 있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자 애석하게도 시침과 분침이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람 맞춰 놨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허둥대는 이소를 바라보던 희주가 바닥에 떨어진 이소의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떨어져 있었나 봐요. 알람 안 맞춰 놓으셨었어요?”
“으응, 아니. 맞췄었는데. 아 어떡하지, 나 어떡하지? 잠깐만, 희주야. 나 늦었어. 나가야겠다.”
이소는 몸을 일으키며 축축하게 젖은 옷을 대충 벗어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뒤집어 벗었지만 그것마저 얌전히 개킬 시간이 없었다. 희주는 갑자기 옷을 벗어 던지는 이소를 보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같은 남자인데도 왜 제가 고개를 돌려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몸이 저절로 뒤로 넘어갔다. 문득 이소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겨우 시선을 돌리자 드레스룸에서 머리만 내민 이소가 잔뜩 눈썹을 내린 채 입을 뗐다.
“정말로 미안한데…. 택시 한 번만 불러 줄 수 있을까? 어지러워서 못 걸어갈 것 같은데….”
자꾸만 시선이 입술에서 목덜미를 지나 탈의한 가슴으로 향하려 했다. 희주는 얼른 정신을 붙잡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어, 저기 형. 그러니까……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저 운전 잘해요.”
진짜? 그래 줄 수 있어? 이소가 놀랐다. 말을 마치자마자 이소의 손이 쑥 튀어나와 희주의 밤톨 같은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햇살 같은 미소는 덤이었다.
“고맙다. 나 얼른 옷 갈아입고 나갈게. 주차장에서 만나.”
희주는 후딱 고개를 숙이고 별채 문을 튀어나와 툇마루에 주저앉았다. 제 정수리에 얹었던 온기와 무게가 생생했다. 희주는 이소가 짚었던 것처럼 제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역시 달랐다. 조금 더 따뜻하고 포근했던 것 같은 느낌인데. 금세 귓불이 달아올랐다. 이소가 드레스룸의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아, 차…. 차 시동 걸어야지.”
희주는 신발도 대충 구겨 신은 채 언덕 아래로 달음박질쳤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 * *
어린이집 앞에 내린 이소는 후다닥 신발을 벗고 지하 강당으로 내려갔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실망한 해수의 표정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그냥 해준이 알아서 해 준다고 할 때 가만히 받기나 할걸. 발표 정말 잘했을 텐데, 사람들 앞에서 박수도 많이 받았을 텐데. 우리 해수 아빠 많이 찾았을 텐데.
강당은 잠겨 있었다. 닫힌 문 앞에는 영어 발표회 시간이 훌쩍 지난 안내문만 붙어 있었다. 이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잠들지 말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건 늦은 거였다.
“해수 아버님 아니세요?”
어린이집 원장이 커피잔을 든 채 서 있었다. 이소는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발표회에 늦어서 허겁지겁 달려온 꼴이었다. 딸 하나 있는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뭐 했느냐고 생각할까 봐 막 변명을 하려던 참이었다. 돌연 원장은 바짝 다가와 넉살 좋게 웃었다.
“보내 주신 도시락이랑 커피 너무 잘 먹었습니다. 아이들 간식까지 챙겨 주시고, 꽃다발도 준비해 주셔서 아이들이 정말 엄청 좋아했어요. 아, 물론 해수가 제일 좋아했어요. 오늘 완전 해수의 날이던데요.”
“…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바깥 놀이터에서 부르는 소리에 원장이 몸을 돌렸다. 나가면서 더 이야기하시죠, 아이들 지금 모두 밖에서 놀고 있어요. 부모님들도 계세요. 인사나 하시면 더 좋구요. 또각또각 계단을 오르는 원장의 발걸음에서 우쭐함이 느껴졌다.
강당을 벗어나 놀이터로 나오자 꺅꺅거리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원생들의 부모가 모두 원장과 이소를 한꺼번에 돌아보았다. 모두들 품에 커다란 꽃다발을 한 아름씩 들고 있었다.
“해수 아빠, 어쩜 이리 섬세해. 나 완전 감동 먹었잖아.”
“커피도 잘 마실게. 꼼꼼한 줄은 알았지만 진짜 고작 어린이집 발표회에 이렇게 다 챙겨 보낼 줄은 몰랐네. 이사는 잘했지?”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이 이소의 주위를 에워쌌다. 도통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대충 웃어넘기곤 해수를 찾아 놀이터로 걸어 들어갔다. 놀이터의 한가운데에서 신나게 술래잡기를 하던 해수가 이소를 발견하곤 큰 소리로 웃으며 달려들었다. 아이들도 모두 해수를 따라 펄쩍펄쩍 뛰었다.
“아빠! 아빠 지금 왔어?”
“아, 으응. 늦어서 미안해, 해수야. 아빠가 진짜 빨리 오려고 했는데….”
땀에 젖은 해수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괜찮아! 나 카메라 보고 아빠라고 생각하고 발표 잘했고, 끝나고 반 친구들한테 아빠가 주라던 꽃도 다 나눠 줬어. 도너츠도 다 줬어.”
“잠깐만, 무슨 도너츠…. 무슨 꽃?”
“아빠가 친구들 주라고 했잖아.”
“…내가?”
“응. 저기 앉은 삼촌이 그랬는데. 아빠가 내 친구들 먹으라고 보내 준 거라고.”
이소의 시선이 해수의 손가락이 뻗은 곳을 향했다. 벤치에 앉아 줄곧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주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소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해수와 주영을 번갈아 보았다. 정작 해수는 이소를 끌어안고 조금 얼굴을 부비다 다시 친구들에게 뛰어가 버렸다. 소란스러운 놀이터 한가운데에 이소와 주영의 시간만 고요가 흘렀다.
* * *
부모들은 어느새 삼삼오오 모여 구석으로 사라졌다. 이소는 주영이 앉은 벤치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주영이 해수의 발표회 날짜를 알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제가 이야기했던가. 어찌 되었건 주영의 깜짝 이벤트 덕분에 부끄러움은 면할 수 있었다. 이소는 주영의 곁에 앉아 가만히 커피가 담긴 컵을 만지작거렸다.
주영의 손이 이소의 흐트러진 카디건을 어깨 위로 끌어 올렸다. 이소는 흠칫 놀라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주영은 살풋 웃었다. 항상 정장만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다 편안한 차림의 주영을 보니 낯설었다. 이소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덕분에 진짜 한숨 돌렸어.”
“별 거 아니야. 엄청 좋아하더라. 원래 이맘때 애들은 간식 하나면 된다더니, 진짜네.”
“누가 그래?”
“와이프가.”
아, 결혼했었지. 이소는 코를 매만졌다.
“애가 잘하더라. 어린 게 떨지도 않고.”
“아, 직접 봤어야 하는데.”
“잘했어. 선생들이 찍는 것 같더라. 나중에 달라고 해.”
이소는 직접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적어도 해수가 아빠가 없어서 실망하지는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손을 흔드는 해수를 보며 이소가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주영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진짜 너랑 똑같네.”
“뭐가.”
“웃는 게 똑같아. 표정이나 분위기가, 너 어릴 때랑 많이 비슷해.”
이소는 눈동자를 굴리며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오래 같이 살다 보니 비슷해진 거겠지. 사실 닮은 건 형을 많이 닮았고 은형이도 닮은 구석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을 닮았다는 말에 주영이 눈을 깜빡이자 이소가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해수 손톱이 이렇게 길고 네모지거든. 나는 동그랗잖아. 근데 형이랑 은형이 둘 다 피아노 치는 사람처럼 길고 예쁘지. 쟤 웃을 때 미간 찡그리는 건 형 닮았고 마요네즈에 소시지 찍어 먹는 건 은형이랑 똑같고, 또… 아. 얼굴에 점 있는 것도 형이랑 똑같다.”
“점?”
주영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응. 여기 볼에 점.”
이소는 주영의 왼쪽 볼을 쿡 찍었다. 여기 점 있잖아. 해수도 여기에 점 있거든. 맨날 해수 점 있는 거 보면서 형 생각 많이 났는데.
주영은 잠시 말을 잃고 이소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그렇구나, 그럼 닮은 거 맞네. 주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한참을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웃었다. 이소는 목이 마른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맛이 썼다.
“해수 말이야.”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던 주영은 고요한 시선으로 이소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리를 옮겼는지 쪼그려 앉아 풀때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적당히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고 적당히 조용했다. 마치 이 이야기를 하는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주영은 망설이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너한테 입양 보낼까 해.”
“…….”
“친부가 동의하면 재판까지 가지 않고도 원만하게 입양 보낼 수 있어. 몇 가지 제도적인 부분이 걸리긴 하지만, 그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이고 어렵거나 불법적인 부분도 아니야. 심신미약 이런 것만 아니면 네가 해수를 기른 기간과 양부로서의 의무, 책임 등을 다했기 때문에 충분히 입양 조건에 맞아.”
주영은 담담하고 차분하게 해수의 거취에 관해 설명했다. 윤치승 회장과 이명희가 먼저 해수를 데려오기 전에 주영은 해수를 정리하고 싶어 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제 혈육이지만 제 밑에 있어 봐야 이용만 당할 것이고, 오히려 이소에게 보내 주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딸보다는 모르는 사이에 더 가깝지 않을까. 마치 아무것도 모른 채 제 호의를 이소의 것으로 착각하고 받아 든 지금처럼.
“지금의 나는, 오히려 너와 아이에게 혼란만 주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주영은 그 말을 하기까지 한참을 오래 고민하고 머뭇거리며 느리게 말을 골랐다. 공식적으로 제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해수의 친권을 유지하고 또 공개되는 순간부터 큰 이슈가 될 것이다. 이소 역시 이해하는 부분이었기에 주영의 결정이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주영이 진행하고자 하는 일들이 마치 슈퍼에서 물건을 반품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느껴져서 조금은 허탈했다. 제게는 지난 칠 년간 그리 빌고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어려운 일이었다.
이소가 아무 말을 않고 멍한 채 앉아 있자 주영은 조심스레 이소의 표정을 살폈다.
“이소야, 혹시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거나 원하지 않으면….”
이소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전혀 아니야. 해수를…… 입양할 수 있다곤, 생각도 못 해서. 아니, 사실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인지 몰랐고… 조금 벅찬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어렵다. 엄청 바라던 일인 건 맞아.”
“그럼 다행이고. 이제 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뿐이라 면목 없네.”
주영은 나중에 직접 서류를 건네주러 온다고 말했다.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함께 이동하게 되겠지만 일단은 그 전에 이소가 입양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검열하기 위해 여러 조사가 들어갈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신불자 신세를 벗어난 게 얼마 전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해수가 정말로 입양이 될까. 그럼 강해수가 아니라 윤해수로 살게 되는 걸까. 강해수든 윤해수든 중요한 것은 성씨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어디에 가도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 놓였다.
이소는 기대감에 입술을 비죽이며 풀꽃을 꺾고 있는 해수를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모든 긴장감이 가신 듯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이었다. 문득 주영이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이소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주영을 마주했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주영이 이소의 손목을 가리켰다.
“시계… 고쳤네?”
이소는 편하고 너른 호흡을 내뱉으며 웃었다. 이소는 제 손목을 들어 보이더니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 응. 이거 아끼는 거라. 근데 도대체 나 얼마나 난리를 피운 거야? 못 쓸 정도로 깨진 거 보고 등골이 서늘하더라니까. 난 별일 없었는데, 형 다친 건 아니지?”
“네가 몸부림을 좀 많이 치긴 했지. 다치진 않았어.”
주영은 그날을 생각하는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소는 민망해서 얼굴을 붉혔다.
“미안…. 고생했겠다. 아무튼 그날 고마웠어. 나 너무 추했으면 잊어 주고.”
“하나도 안 추했어. 주정도 귀여웠어. 어릴 때 생각나고.”
끝까지 말을 덧붙이는 주영을 보며 이소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주영과 술을 마신 건 학교 다닐 때 몇 번이 다였다. 그때는 뭐가 그리 좋다고 구석에 앉아 주영과 함께 과일주를 깠는지. 오히려 못 마시게 하니 오기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마 주영이 기억하는 제 모습은 열여덟 살에 헤롱거리던 윤이소일 것이다.
주영은 고개를 기울여 이소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이소야. 차해준 교수 말이야.”
해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애인 소리를 듣자 어쩐지 민망해 ‘어, 으응’ 하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주영은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아, 그 전에 너, 음…. 원래 남자, 좋아했던가?”
미술관에서 마주쳤을 때 상당히 놀랐던지 눈에 띄게 당황한 주영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소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입술을 당겼다.
“원래…라기보다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교수님이 남자라서…였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 아, 그런데 형 혹시 포비아라든지 그런 거라면….”
“아니야. 잘 됐지 뭐.”
주영은 자신이 그런 편협한 사고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며 웃어넘겼다. 이소는 진땀을 뺐다. 하긴 자신도 해준이 자신에게 키스했다고 고백했던 날 제일 먼저 왜 남자인 자기에게 키스를 했느냐고 어버버 당황했었으니까. 해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뭐 어때요.’라고 말한 게 기억이 난다. 그날 벚꽃 정말 예뻤는데. 이소는 또 해준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잘 해 주나 봐.”
주영의 말에 이소는 한참을 생각하다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뭐, 엄청 잘 해 주시지. 너무 신세만 지고 있어서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다정하셔. 자꾸 쓰러지니까 보약도 지어 주고, 먹는 거 엄청 신경 쓰고. 입는 것, 신는 것도 다 교수님이 사 주고, 나 가게 일 다시 구할 때도 따라가서 봐줬어.”
“일을 봐줘?”
“응. 그냥 거리라든지 일하는 시간이라든지. 가벼운 확인? 사장하고 면담하고 그런 건 웃겼는데. 하하하. 내가 애도 아니고.”
주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차 교수 뭐랄까. 그렇지 않게 생겨서 엄청 잡는 편이네.”
“잡아?”
주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그때도 손 한 번 만졌다고 죽일 듯이 노려보던데. 질투가 많은가 보다 하긴 했는데. 일하는 데까지 쫓아간 건 좀 아니지 않나…. 아무튼 좀 걱정되긴 한다. 집착하면 피곤하거든.”
“에이. 사귀면 그 정도 질투는 다 하잖아.”
그 정도 질투는 다 한다는 말에 주영은 고개를 팩 돌렸다.
“네가 경험이 별로 없어서 모르나 본데, 절대로 평균은 아니야. 괜히 그 사람 말에 휘둘리지 말고 아니다 싶으면 헤어져. 내가 당장은 다 말 못 하지만, 무른 네 성격 아니까 하는 말이야.”
“뭐야, 그게.”
아, 몰라. 네 애인 덩치부터가 너무 크고 성격이 밥맛없어. 진지하게 싫은 티 내며 품평하는 주영을 보며 이소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형 말만 들으면 내가 뭐 하나하나 다 보고하고 잡혀 사는 줄 알겠어. 이소는 웃었지만 주영은 영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런가….”
이소는 입술을 매만지며 해준을 생각했다. 질투, 많지. 애… 같은 면이 있지. 집착한다고? 집착은 정말 막 쫓아다니고 감시하고 못살게 구는 거 아닌가? 이소는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형 말처럼 질투가 많긴 하다.”
주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해준은 이소가 작은 지렁이에게 관심만 주어도 제 손을 놓았다며 투덜거리곤 했다. 주영이 돌아보았다.
“근데 나쁘지 않아. 살면서 그렇게 사랑 받아 본 적이 처음이란 말이야.”
“왜 사랑 받은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면 나 서운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데.”
주영이 고개를 돌리고 정색했다.
“응? 어?”
아하하하하, 이소는 주영의 말에 당황했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영이 오해를 한 것 같았다. 하긴 그 집에서는 주영만은 제게 쏟아붓듯 잘 해 줬다. 이소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손을 흔들었다.
“아니이, 형이랑은 다르지. 그러니까 나는 아….”
이소는 눈을 빙빙 돌렸다. 말로 표현하려니 조금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리하자면 확실했다.
“연애 감정을 말한 거야. 가족이랑은 다른, 그런 간지럽고 두근두근한 거. 물론 내가 이래도 되나, 낯설고 당황스럽기도 한데 그냥…. 요즘은 되게 행복할 때가 많아. 형도 알잖아, 형수 있으니까.”
아, 말하고 나니 민망하네. 이소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썩썩 문지르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히 주영의 앞에서 뜬금없이 해준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내 놓고 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단순히 아침에 있었던 열이 이제야 오르는 것은 아닐 텐데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저 멀리서 교사들이 부모님과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이소는 반절도 안 마신 커피를 집어 들었다. 커피 더 마시고 가지. 주영의 말에 이소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 미안, 나 사실 커피 쓴 거 잘 못 마셔. 교수님이 매번 사 주던 것만 마셔서 그런가.”
아무튼 나 이제 가 볼게,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그리고 고마워. 이소가 주영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자리를 떴다. 주영은 한참 동안 이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평온한 얼굴 아래 주먹을 쥔 손에 상흔이 유독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