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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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주세요.”
안채 대문이 닫히자 이소는 다시 한번 말했다. 언덕을 오르며 몇 번이고 내려 달라고 부탁했지만 꼴사납게 아이마냥 끌려와 버려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해준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소는 주먹으로 해준의 등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내려놔요.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성을 내자 해준은 말없이 이소를 정원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이소는 해준의 가슴을 퍽 하고 치며 밀어냈다. 힘으로 몇 배 차이가 남에 불구하고 해준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저 뒤로 주춤 밀려났다. 땅을 딛고 선 두 발목에 해준의 손자국이 벌겋게 났다. 욱신거리고 시큰거렸다.
“읏….”
이소가 비틀거렸다. 해준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제가 오래전 해준에게 주었던 해수의 어릴 적 손수건이었다. 해준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매끈한 정장을 입고도 그 낡은 손수건을 잘도 들고 다녔다. 전에는 그 점이 참 털털하고 상냥한 애정처럼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당혹스럽고 소름 끼쳤다. 해준의 시선이 이소의 손바닥에 머물렀다. 상근의 핏자국이 얼룩덜룩 묻어 있는 흰 손이 거슬렸다. 해준이 이소의 손목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 떨리는 손은 허공으로 도망쳤다.
“교수님, 사람을…, 사람을 그렇게 때리면… 죽을 수도 있어요. 피가 그렇게 나는데 멈추지도 않으시고….”
“손 줘.”
“저 안 다쳤어요. 상근 씨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어요? 식구들도 엄청 놀랐을 거고, 아이들도 다 보는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좀 선을 넘으신….”
“그래서.”
해준이 조용히 눈동자를 들어 당황한 표정의 이소를 응시했다. 겁을 집어먹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과 수치심, 당황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
해준이 날을 세우자 이소가 놀란 눈으로 해준을 올려다보았다. 저녁 해를 담은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 붉은 기가 서렸다. 서러운 듯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광기에 찬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소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게 아니라….”
“이소야, 네가 놀라서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나 본데.”
내 기분이 얼마나 개 같은지 설명을 좀 해 줄까. 해준의 눈동자가 아주 느리게 움직여 이소와 시선을 맞췄다. 꾹꾹 누른 메마른 분노가 어렸다. 이소는 제 앞에서 처음으로 단호하고 차갑게 말하는 해준의 말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상근 도둑질은 이미 여러 번 눈감아 줬어. 태만히 구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내버려 뒀고. 그 자식 말마따나 나가서 어이없게 뒈져 버릴까 봐 몇 년째, 또 몇 달째. 그리 미루면서 내 친히 아량을 베풀었건만.”
결국 모두들 이렇게 나를 기만하지.
친히 아량을 베풀었다는 말에 한 번, 모두들 해준을 기만했다는 말에 다시 한번. 이소는 움찔 몸을 떨었다. 언제나 식솔들을 다정하게 대해 주며 기꺼이 제가 가진 것을 나누던 심성 고운 이의 실상 은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해준은 제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식구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노는 것을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도 포함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주한 시선은 냉랭했다. 낮은 목소리로 뇌까리는 해준은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고, 자기들 처지에 감히 누구를 도마 위에 올리고 멋대로 다지고 써는지 모르겠는데. 식구들 뒷말이야 이제 와 알았대도 상근이 그놈에게만큼은 아직도 분이 덜 풀렸어.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치아를 모두 뽑고 혀를 자르고 싶을 정도야.”
“……교수님.”
정말로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소름 끼치는 가정이었다. 이소가 주먹을 꼭 쥔 채 파르르 떨었다. 해준은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생각은 자유지. 다만 속으로 어떤 잡생각을 하든 내 집 마당에선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 해.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런 생각일랑 새어 나가지 못하게 멍청한 머리통들을 바짝 조였어야 한다고.”
거기까지 내뱉은 해준은 미간을 꾹 눌렀다. 분명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데 해준은 후련해 보인다기보다는 답답하고 서글퍼 보였다. 해준은 숨을 깊게 내쉬고 다시 이소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식구들을 내가 오래 보고 지냈대도…. 나와 살을 섞고 마음까지 준 너와, 저택에서 잡일 하는 사람들을 내가 같게 취급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적어도 너는….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이소가 입술을 깨물었다. 해준은 고집스럽게 반복했다.
“얘기 끝났어. 그러니까, 손 이리 내.”
이소가 작은 주먹을 떨며 차마 펼치지 못하고 있자 해준은 무심하게 여린 손목을 다시 그러쥐었다. 무섭도록 강한 힘이었다. 어찌 반항해 볼 도리조차 없이 해준의 앞까지 끌려간 손바닥이 부드러운 천으로 꾹꾹 닦였다. 방금 전까지 사람의 뺨을 찢어지도록 때린 해준의 손은 열감이 채 빠지지 않아 뜨거웠다. 심기를 거스르면 이 손으로 언젠가 누군가를 또 때리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식은땀이 흘렀다. 이소는 제 손을 닦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는 해준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해준은 손을 다 닦아 낸 후에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교수님 마음을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사과하지 마.”
“……그래도요.”
“애초에 이 소란은 네 탓이 아니야. 난 너한테 화난 게 아니고.”
이소는 해준의 단호한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별안간 이게 무슨 사달인가. 이소는 해준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쉽게 동조할 수는 없었다. 상근의 말마따나 저나 식구들이나 모두 얹혀사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아무 말 없이 먹고 자고 노는 것이 식구들에게는 눈엣가시였을 수 있겠구나. 뒤늦게 깨달은 원망의 시선에 뒷골이 당겼다. 결국 이 저택 역시 하나의 작은 사회이기에, 그 안에서도 시기와 질투, 인정과 욕망이 노골적으로 오간다는 걸, 빠르게 캐치하지 못한 제가 바보천치였다. 좀 더 약게 굴었어야 했다.
“식구들 너무 나쁘게… 생각 마세요.”
이소는 숨을 들이켰다.
“교수님이 아니라 제가 불편해서 그랬던 거잖아요. 제가 너무 눈치 없이 굴어서 불만이 있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티 한 번 안 내고 잘 해 주셨고 해수도 잘 돌봐 주시고 그랬어요. 사람이 원래 내가 일하고 있을 때 누군가 쉬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그렇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잘못된 거지. 그런 꼴같잖은 시기심으로 똘똘 뭉친 새끼들이 괜한 사람을 들쑤시는 거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요.”
해준의 표정은 무감했다. 이소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렵다. 자신을 두고 이렇게 큰 소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의연하게 대처하기에는 저는 아직 너무 서툴렀고 현명치도 못했다. 마음 편히 해준에게 잘했다 잘했다 하기에도 마음이 불편했고, 식솔들 흉을 보며 투덜거릴 만한 성정도 못됐다. 그저 평안하게 지내고 싶었던 것뿐인데. 수습하지 않으면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할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일이 이전에도 있었어요?”
“어떤 일.”
해준이 이소에게 바짝 다가섰다.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반쯤 물러섰다. 의도치 않았지만 꼭 해준을 피하는 것처럼 보여 해준의 시선이 꿈틀거리며 이소의 발꿈치를 향해 떨어졌다. 흙바닥 끌린 자취만큼 집어먹은 겁이 눈에 선했다. 괴물 취급 하는군.
“내가 사람을 반 죽여 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구는 일? 아니면, 식구들이 내 집에서 내가 주는 돈과 쌀을 얻어먹으면서 뒤통수를 치는 일?”
이소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이 떨렸다. 사람이 종이짝처럼 구겨졌고 해준의 손이 닿는 족족 흙바닥과 허공에 피가 튀었다. 묵직한 타격음과 억억 먹히는 신음 소리는 꼭 철물점 사장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았던 예전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바짝 다가선 해준이 이소의 결이 고운 눈썹을 매만졌다.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어조는 분명하고 날카로웠다.
“여러 번 있었지. 설마 처음이려고. 그럼에도 매번 믿었어. 쉽게도 마음을 줬고. ……그런데도 참, 어김없이 몇 년에 한 번꼴로 저런 잔챙이가 꼭 속을 썩여. 사람과 물은 오래 한 곳에 두면 고여 썩어 버리기 마련인데, 내가 자꾸 잊어버리네.”
매번 마음을 주었다는 말은 사실인 듯 해준의 표정은 착잡해 보였다. 이소는 조용히 해준을 올려다봤다. 입꼬리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눈에 서려 있던 살기와 노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평소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온기 가득한 눈빛에 이소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헛헛해졌다. 팔을 들어 해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마음이 저렸다.
“…죄송해요. 괜한 질문을 했어요.”
“오늘은 사과만 할 거야?”
“그냥……. 저도 교수님도 참…. 외로운 날인 것 같아서요.”
“…….”
“이럴 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마음이 너무 아파요. 도움이 되고 싶은데.”
“신경 쓰지 말아요.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니까.”
어쩐지 너무 이상향에 가까웠다. 밑도 끝도 없이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들. 저와 해준의 사이에 대해 가타부타 말 한마디 얹지 않았던 시선들. 어떠한 걱정도 없이 하루의 시작과 끝을 즐겁게만 보내는 나날들은 어쩌면 해준의 호의를 가볍게 밟고 올라선 이들의 동정은 아니었을지. 해준에게 식구들을 미워 말라 말했지만 정작 이소 자신도 이따금씩 치받는 억울함에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것은 어찌 막을 수가 없었다.
집 안을 다 뒤집어엎을까. 자신은 둘째치고 어떻게 해준에게까지 그렇게 뒷말을 할 수가 있느냐며 쏘아붙일까. 그러나 자꾸만 제게 웃어 주었던 미소와 농담, 애정 어린 배려가 뒤죽박죽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그게 다 진심이 아니었다면 저뿐만 아니라 해준 역시 정말 많이 상처받을 텐데.
해준은 천천히 팔을 들어 이소를 토닥였다. 오늘은 놀랐을 테니 들어가 쉬어요. 나도 생각할 게 있으니 늦게 잘 거야. 혹시 혼자 있기 싫으면 잘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 해준의 말에 이소는 고개를 들었다. 소란이 소강되고 정원의 주인은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이소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에요. 잠이 안 와서요. 들어가시는 거 보고 저도 조금만 여기 있다 들어갈게요.”
“내려가려는 건 아니고?”
이소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미리 예상했다는 듯 해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많이 참아 주었다는 표정이었다.
“이소 씨 성격에 얌전히 발붙이고 있을까 싶긴 했다만.”
“…….”
“이런 상황에는 내 말을 좀 듣지?”
해준은 조금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착하고 어여쁘지만 가끔은 바보에 가까울 정도로 순진한 제 어린 연인에게는 가르쳐 줄 것들이 너무 많다.
“지금은 들쑤시기보단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왜 모르고 이리 답답하게 굴어. 나도 저것들 성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야. 내가 무서워서 더는 뒷말은 안 할 테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마 지금쯤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걸. 아마 이소 씨가 내려간대도 저 사람들은 네 그림자도 못 밟을 거야. 그런 사람들에게 당장 사과를 받아 봤자 후련하진 않을 텐데. 이소 씨가 그걸 원하는 건 아닐 테고.”
“…….”
알고 있었다. 윤이소는 굳이 사과를 받으러 내려가려는 것이 아니다. 알량한 동정심과 따뜻한 눈길로 사람들을 살피고 싶을 테지. 저보다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싶겠지.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잠자코 권력의 뒤에 숨어 시간을 죽이는 것이 오히려 저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지. 해준은 저를 향해 눈을 치뜬 이소를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마음이 지쳐서 그런지 자꾸만 뾰족하게 말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한테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면 내려가 봐요. 이참에 이소 씨가 무모함과 용기를 구분하는 것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짙은 오만이 묻어 있는 말투였다. 이소의 눈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정작 제가 별채에 틀어박혀 있는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 챙겨야 할 아이가 있었다.
“해수도 데려와야 하고….”
“올려보내라 하면 되지. 굳이 이소 씨가 내려갈 필요는 없어. 그러라고 있는 사용인들이니까. 누굴 불러 줄까. 이소 씨가 말만 하면 지금 바로 우리 공주님 안은 채로 저 언덕을 달려올 사람은 차고 넘쳤는데. 오는 김에 석반이나 들고 오라 하고, 너희들은 금일 먹을 자격이 없으니 한 끼 굶으라 할까.”
“그러지 마세요.”
“…….”
해준과 이소의 시선이 맞부닥쳤다. 이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을 멋대로 부리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 순진한 생각을 조롱이라도 하듯 차가운 시선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조용히 입술을 씹으며 부탁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다녀오면 돼요. 이소가 뒷걸음질로 몸을 떨어뜨리자 해준이 손목을 그러쥐었다. 아까 잡혔던 손목이 부은 듯 조금 시큰거렸다. 조롱하듯 일갈했지만 사실은 또 혼자 부딪히려는 이소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해준은 마지막으로 붙잡았다.
“그냥 여기 남아. 나랑 있어.”
“괜찮아요. 금방 돌아올게요. 정말로 금방.”
잡힌 손목을 천천히 떨어뜨리고 허리를 숙였다. 해준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냉한 얼굴에 이소는 시선을 더 맞출 수가 없었다. 대문을 열고 몸을 돌리는 와중에도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혹여 해준이 저를 따라나설까 봐 이소는 대문 앞 계단에서 잠시 기다렸지만 붉은 나무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이소는 깊게 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납을 단 듯 무거운 발걸음은 이내 빠르게 언덕 아래로 달음박질쳤다.
해준이 제가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식구들의 뒷담화만으로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 생각나서 미치겠어….’
오늘 해준의 모습은 낯설었고 무서웠다.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과 불씨가 형형한 흑안이 어른거렸다. 이 저택에서 해준의 말이 법인 것은 알고 있었다. 식구들과 해준 사이에 생긴 인연으로 계약 비슷한 것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정신적인, 재무적인 갑을관계가 발생했다는 것도, 자신과는 분명 어떤 이유로 다르다고 말씀하시는지 머리로는 이해하고, 해준이 모두 자신을 아껴서 그러는 것을 알고 있지만.
거지 같은 밑바닥 인생, 구제해 줬으면 감사한 줄 알고 살라. 어쩌면 그 순간 해준이 했던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제 초라한 삶에 쏟아지는 경멸과 비슷한 것이어서. 윤치승 회장이 어린 저를 작은 방구석에 몰아넣고 수도 없이 했던 말과 같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해준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적어도 제가 사랑하는 해준의 입으로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기에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이들보다 그 말이 견디기 힘들었다. 알고 있다. 이 사람의 본질은 선하다는 것. 다만 말이라는 것은 뱉으면 주워 담기가 어렵다.
“하아…….”
이소는 행랑채 마당에 서서 숨을 들이마셨지만 목소리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아홉 칸이 넘는 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이소는 돌담에 가지런히 놓인 해수의 신발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데려가야 하는데, 해수를 데리고 올라가야 하는데 막상 내려오니 사람들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상근이는 둘째치고 남은 사람들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어떤 문도 쉬이 열 수 없었다. 특히나 저는 더 그랬다. 저 안에 어딘가에 해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소는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누군가 문을 열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집에서 저는 결국 이방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그제야 내내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 * *
‘그 난리통에도 자는 걸 보면 애들은 애들이네….’
소란의 한가운데 동희 씨는 동희 씨 나름대로 방 안에서 고군분투였다. 방 밖을 나가고 싶다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조용히 있자며 이불로 끌어안은 채 한참을 진정시켰다.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아이들은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가장 그늘지고 구석진 방을 골라 들어왔기에 다행히 덥지 않았고, 소란스러움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마음만은 여전히 그 젖은 눈을 한 청년에게 머물러 있었다.
“걱정이네, 상근이 그 미친놈 때문에 둘 다 엄청 상처 받았을 텐데….”
분명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그 사람은 유달리 마음이 갔다. 제가 아들 둘을 키우는 아이 엄마라서 더 그랬을는지도 모르겠지만, 도대체가 괄괄하고 씩씩한 면이라고는 없는 이소는 언제나 조용하고 얌전해서 괜히 어디 가서 통수나 맞지 않으려나 우려가 되는 사람이었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저택 복도를 지날 때 상근이 놈이 하는 말이 마당을 쩌렁쩌렁 울렸고 동희 씨는 이마를 짚었다. 저 개새끼가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입만 열면 거짓부렁이네, 진짜 목을 따 버릴 수도 없고.
동희 씨는 한숨을 쉬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마룻바닥을 밟고 복도를 걷는 소리가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각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여자들은 곱게 한 화장을 지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남자들도 환복한 후 어기적어기적 복도로 기어나왔다. 다들 하나같이 얼굴이 좋지 않았다. 동희 씨가 책망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제일 먼저 춘식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나는 진짜로 처음 왔을 때, 그때만 한마디 얹은 것이 다인데. 지금은 정말 암시롱 안 하는데.”
동희 씨가 낙원댁과 아짐들을 노려보자 당황에 물든 얼굴을 한 사람들이 손을 내저었다.
“나도 지금은 내가 보약 알아서 달여 줄 정도로 예뻐한다니깐. 아니, 저 착한 애를 내가 뭐 미워해. 진짜야, 예전에 조금 궁시렁댄 걸 가지고 상근이 그놈이 괜히 말을 부풀려서. 아니 정말 어떡하면 좋아.”
“지금이라도 올라가서 빌면 되지 않을까? 그땐 말실수한 거라고, 지금은 아니라고.”
근데 정말로 나 이소 님 좋아해, 진짜 지금은 엄청 좋아해. 너 나 할 것 없이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동희 씨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 모지리들아, 그러니까 왜 그 주둥이 가벼운 놈 앞에서 그렇게 정신 빼놓고 입을 털었어.
동희 씨는 저 처음 들어왔을 때 팔자 사나워서 남편 잡아먹은 거 아니냐고 입을 놀렸다가 제게 머리채를 잡혔었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해준에게 말 들어갈 것도 없이 그 마당에서 쌈닭마냥 싸웠던 동희 씨는 그날 제힘으로 그 여자를 내쫓아 버렸다. 이소가 아까 상근이를 그렇게 쥐어팼어야 했는데. 애들만 아니었으면 제가 달려들어서 그 주둥이에 주먹을 내리꽂아 줬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건넛방 서재 미닫이문이 사르륵 열렸다. 딱 붙는 셔츠와 바지에서 품이 큰 카디건을 걸친 모습으로 환복한 준경이 모여 있는 사람들을 목도하곤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고는 아주 단정한 어조로 일갈했다.
“뭐 잘했다고 모여 있습니까, 자리로 돌아가세요.”
늙은 범과 같은 형형한 눈빛에 무리들은 알아서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복도 모서리를 돌아 마루로 나가려던 동희 씨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저지했다. 집사님, 잠시만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준경이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의 눈동자도 모두 동희 씨를 향했다.
준경이 동희 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마루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낙원댁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준경의 옆을 비집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동희 씨가 입술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이소 씨가 와 있어요.”
그 말에 식솔들은 동시에 숨을 집어삼키고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 * *
준경을 한 번 돌아본 동희 씨는 준경이 몇 차례 끄덕이자 천천히 걸음을 뗐다. 힘이 없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는 이소의 등이 가여워 보였다. 해수를 데리러 왔나. 제 마음 챙기기도 바쁠 텐데 부모가 되면 항상 아이가 눈에 밟힌다. 맘껏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제 새끼를 챙겨야 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동희 씨가 잘 알았다. 때문에 이소를 보면 항상 몇 년 전 땅만 파대던 제 모습을 보곤 했다.
“이소 씨.”
해수의 신발을 쥔 채 멍한 눈을 하고 있는 이소는 동희 씨가 곁에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인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소 씨.”
다시 한번 부르자 이소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방금까지도 울었던 듯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코가 새빨갰다. 아이고, 다 큰 사내새끼가 뭐 이리 서글프게 우는지. 저를 보고서도 울음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여전히 입을 비죽이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퍽 편해지기는 했나 보다. 동희 씨는 겨우 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
“…아까. 그러니까 1시간 정도, 됐어요.”
“근데 왜 안 부르고.”
이소는 말없이 해수의 신발을 만지작거렸다. 오전에 깨끗하게 다림질해서 올려보냈던 흰 셔츠에 얼룩덜룩 상근의 코피가 묻어 있었다. 갈아입을 새도 없이 안채에서 이쪽으로 내려온 것을 보면 그리 좋은 분위기에서 헤어진 것이 아니겠군. 동희 씨는 눈을 들어 언덕 위 붉은 대문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으면 고개를 빼고 내려다보거나 문에 기대어 이소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볼 위인이 보이질 않았다. 동희 씨는 얕게 고개를 저었다.
“해수 데리러 왔어요? 해수 내가 재웠어요. 애들 고단해서 그런지 저녁쯤 깰 거 같은데.”
“아….”
“조금 이따 와요. 저녁 식사 끝낼 때 즈음 올려보낼게요. 다들 뭐, 콩국수 먹을 분위기는 아닌 거 같은데.”
“…아까 일은….”
“응?”
이소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뗐다. 꼭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마냥 입술을 가만두지 못하고 손끝도 동동거린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한 소란 일으키고… 여행 끝나고 기분 좋게 들어오셨을 텐데. 그 저, 상근 씨는 어떻게 됐어요. 병원 가 봐야 할 텐데, 그리고 아까 교수님 말씀은 아마도 진심이 아니셨을 거예요. 저 때문에 화가 나셔서….”
“이소 씨.”
동희 씨는 땅만 쳐다보고 횡설수설 말을 이어 가는 이소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소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표정만 봐도 알 것 같다. 이 사람은 이런 일에 익숙지 않구나. 제 딴에는 앞뒤 안 가리고 뒷일 수습한답시고 내려왔겠지. 그러나 이 저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소만큼이나 녹록지 않게 살았고 이깟 일에 해준에게 앙심을 품을 인사들은 아니다. 그저 흠칫 놀라고 앞으로 입 조심은 하겠지만. 저택의 생리를 모르는 이 여린 인사는 제가 다 뒤집어쓰겠다고 내려와 눈치만 보고 앉아 있다. 착하다 못해 무르고 속없다.
동희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소의 시선 역시 따라 올라왔다.
“우리 잠깐만 얘기 좀 할까요?”
이소는 말없이 동희 씨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 아래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복도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어깨를 잔뜩 숙이고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며 이소가 앉았던 자리를 멀거니 바라봤다. 춘식은 자신의 입을 연신 때려 가며 ‘요 입, 망할 입’ 하며 욕지거리를 했고 아짐들도 푹푹 한숨만 쉬었다. 나이를 오륙십 먹고도 저 어린 핏덩이에게 상처만 준 자신들을 탓하며 그늘진 얼굴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서도 준경만은 그 자리에 남아 이소와 동희 씨가 나간 대문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하얀 자갈이 잔뜩 깔린 주차장에는 해준의 세단 두 대와 저택에서 쓰는 업무용 봉고가 한 대 서 있었다. 동희 씨와 이소는 세단 앞에 선 채 마주 보았다. 동희 씨가 쑥스러운 듯 이마를 매만졌다. 이소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제 앞에 서 있는 모습이 꼭 큰아들 같아 보이는 건 착각인가.
“저, 이소 씨. 그렇게 서 있으면 내가 뭐 혼내려고 그러는 것 같잖아요.”
“아, 죄송해요. 습관이라….”
이소는 얼른 손을 풀고 섰다. 별 짠한 습관이 다 있네. 동희 씨는 쓰게 웃고는 높은 언덕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안채 정문 등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아하니 준경이 올라간 듯싶었다. 가여운 우리 구렁이, 얕은 한숨을 내쉬곤 제 앞에 선 이소를 보고 쓰게 웃었다.
“이소 씨 전엔 안 그랬는데 이 집 들어오고 나서 부쩍 위축되어 보이는 거 알아요?”
“네?”
“아니,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말이 없긴 해도 할 말은 다 하는 타입 같았는데.”
“그랬나요.”
이소는 오늘따라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유독 많이도 듣는다고 생각했다. 눈치 없고, 무모하고, 대책 없고, 답답한 사람. 동희 씨는 시선이 흔들리는 이소를 안쓰럽게 올려다봤다.
“이소 씨 잘못한 것 하나도 없어요. 왜 이소 씨가 내려와서 사과를 해요. 오히려 화를 내야지.”
저녁 바람에 군불 때는 냄새가 실려 왔다. 저택의 식솔들이 제 할 일을 시작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희 씨는 천천히 눈을 맞춰 왔다.
“이소 씨가 어떤 마음으로 내려왔는지는 잘 알겠어요. 도련님 언사에 기분 나빴을 식구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도 이해하고요. 오상근이가 열받게 말하긴 했지만 애초에 소란 일으킨 건 나 때문이니까,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앞뒤 안 가리고 내려왔잖아요. 맞죠?”
어지러운 시선이 맞부딪혔다. 말을 잇는 동희 씨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혹시 여기 사는 거 불편해요?”
동희 씨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이소는 당황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다들 잘 해 주셔서 감사하죠.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근데 왜 편하게 못 있고 이렇게 안절부절못해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도련님이 제일 아끼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데.”
동희 씨는 처음 이소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지금과 꼭 같았지만 조금 더 똑 부러지고 제 할 일에 엄격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안채에 있어도 행랑채에 나와 있어도 꼭 제집이 아닌 것처럼 식구들 눈치를 보며 어디 도울 일이 없나 기웃거리는 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마 저였으면 옳다구나 하고 드러누워서 식솔들 이것저것 시켜 먹고 잠이나 푸지게 잤을 것이다. 애인이야 헤어지면 그만, 그전까지는 누릴 것은 다 누려야 되지 않겠는가.
“이소 씨 착한 건 알죠, 내가. 그거 잘 아는데…. 하….”
동희 씨는 이마를 긁적였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불러내서 굳이 돌려 말할 것은 없지 않을까.
“내가 답답해서 그래요. 착하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무르게 굴어요.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말도 하고, 화나면 화난다고 말도 하고 그래야죠. 사람이 어떻게 항상 허허 웃으면서 넘어가냐구요. 그건 부처님도 못 해요. 아니다, 하려나. 근데 아무튼 이소 씨는 부처가 아니잖아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지.”
이소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동희 씨는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달래듯 설명했다. 제가 성격이 특출나게 나쁜 것도 아닌데, 당연한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 깝깝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이렇게 죄다 제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는지 짐작도 안 갔다.
“저였으면요. 아주 쌩난리를 쳤을 거예요. 낙원댁 음식 한 열 번 물리고, 춘식이 아저씨 발도 볼 때마다 걸어 주고. 상근이 그 새끼는 그냥 바로 받아 버리고 입 닥치라고 깽판을 쳤을 거라고요.”
감정은 본능이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학습에서 비롯된다. 동희 씨는 아들 둘을 키우면서 숱하게 겪었다. 분노와 슬픔을 정제된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하는 법, 기쁨과 즐거움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법, 혼란스러운 마음을 사색으로 정리하는 법. 보호자에게 배우지 못하거나 스스로 터득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결핍된 상태로 자라게 된다. 이소는 꼭 화내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착한 것보다도 기죽은 사람마냥 움츠려 있달까.
“이소 씨는 그래도 돼요.”
“어떻게 그래요.”
“나 참, 진짜 이상한 사람 만드시네.”
동희 씨는 입술을 일자로 당긴 후 팔짱을 꼈다. 이소가 느린 시선을 맞추자 동희 씨는 두 눈을 깜빡였다.
“나한테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해 줘야죠. 왜 그걸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어요. 당하기만 하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더구나 여기 사람들하고 이소 씨는 위치나 상황 자체가 달라요. 도련님 사람이잖아요. 요즘 말로 최애. 그런데도 그렇게 무르기만 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들 같아도 이소 씨 얕잡아 봐요. 알잖아요. 사람이란 게 원체 간사한 거.”
머리로는 아는데 잘 안 되는 걸 어떡하나. 이소가 한숨을 푹 쉬자 동희 씨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삭삭 긁어내렸다. 아, 혼내듯이 말하는 거 고쳐야지. 잠시 정신을 놨더니 일곱 살 아들한테 하듯이 쏘아붙였다.
“도련님이 상근이한테 한 거 보고 놀란 건 이해해요. 그래도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그 상황에선 그 새끼가 잘못한 게 맞고, 식구들이 말실수한 것도 맞고. 이 집에서는 도련님 심기 거스르면 그놈이 나가야 하는 게 맞아요. 애초에 창고 물건 훔쳐다가 쓴 것도 그놈 잘못, 이소 씨한테 모욕 준 것도 그놈 잘못, 식구들 말 옮겨다가 과장한 것도 그놈 잘못인데 뭘 그걸 감싸 줘요. 여기니까 그냥 몇 대 맞고 끝났지 그 새끼 밖이었으면 벌써 고소 처먹고 빵에 보내고도 남았어요.”
동희 씨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한참을 떠들었더니 목이 다 아팠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을 앞에 두고 이러니저러니 말 얹는 게 저라고 편하겠는가. 다만 관계에 서툰 두 사람이 이러고 있는 꼴이 답답하고 집안 분위기가 삐걱거리는 것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어서 그랬다.
“아무튼 잔소리하려던 건 아닌데… 그렇게 느껴졌으면 미안해요. 당연히 위에 있을 줄 알았는데 한 시간 전부터 내려와 있다고 하니까 갑자기 아, 이건 아니다 싶어서 얘기 좀 하자고 했어요. 이소 씨, 제 말 무슨 말인지 알죠. 이소 씨는 이 집에서 특별해요. 도련님이 유일하게 조건 없이 데려온 사람이잖아요. 부담감 내려놓고 뻔뻔스럽게 굴어도 된다는 이야기예요.”
낯간지러운 이야기지만 동희 씨는 이후 사용인들을 편하게 쓰라는 말도 덧붙였다. 모두가 이소를 안주인처럼 여기고 있다고. 그 말에 이소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별채에 들어앉은 이상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희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제 진짜 얘기 끝. 아, 그리고 마음 쓸까 봐 하는 이야긴데요. 식구들은 지금은 진짜 모두 이소 씨 좋아해요. 상근이 말 너무 다 믿지 말고요, 걔가 원래 과장이 엄청 심해요. 나중에라도 식구들 마주치면 피하지 마시고요. 아까부터 다들 엄청 미안해하고 있거든요.”
동희 씨는 발 동동 구르며 제 입을 치던 춘식과 아짐들을 생각했다. 멍청하고 순박한 사람들. 한숨 푹푹 쉬고 있겠지. 이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럼 이제 이소 씨 자리로 돌아가요. 응석쟁이 도련님은 어쩌고 여길 왔어요. 그분 성격에 얌전히 보내 주는 척해 놓고 또 앞에 나와 고개 빼고 기다릴 텐데.”
“…아니에요. 저 여기 내려와서 교수님 화 엄청 나셨어요.”
“그 양반이 이소 씨한테 진심으로 화낼 사람으로 보여요?”
“…….”
“도련님은 이소 씨 절대 못 이겨요. 져 주는 게 아니라, 진짜 져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가 보라니까요.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이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동희 씨도 편안하게 웃었다.
“그럼 나 먼저 올라갈게요. 돌아가서 쉬어요.”
* * *
이소는 대문 쪽으로 멀어지는 동희 씨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가만히 서서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었다.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그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지나간 인연들의 발목을 붙잡고 빌어대던 자신. 어디서 맞고 온대도 싫은 소리 한 번을 못 했고, 도리어 좋게 타일러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마음에 돌덩이를 안고 살면서도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는 주지 않을 거라고, 차라리 날카롭고 예민한 것보다 낫다고. 그리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부르면 되지. 내가 막아 줄 텐데.’
철물점 사장에게 피떡이 되도록 맞은 날, 고작 한 달을 만난 해준이 제 어깨를 잡고 말해 주던 때를 떠올렸다.
이소는 주먹을 말아 쥐고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이소 씨를 일 순위에 둬. 해수도 아니고 나도 아닌, 네 마음을 가장 우선시에 둬.’
다른 사람의 상처에 일일이 신경 쓰다 결국은 제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지난날들을 해준이 열심히 봉합하고 수술하고 꼭꼭 붙여 주었다. 그러나 안일한 판단과 대상을 잘못 찾은 배려, 제 이기심은 해준을 목전에 두고 다른 이만을 살폈다.
붉은 대문 앞에 선 채 한참을 고민했다. 열어도 되는 걸까, 해준이 저를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지는 않을까. 동희 씨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머리를 울린다.
‘이소 씨는 그래도 돼요. 도련님 사람이잖아요.’
어쩌면 무의식중에 느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해준은 제게 결국은 억세게 굴지 않으리라는 것을. 제 편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결국 제일 나쁜 것은 자신이었다.
붉은 대문에 닿은 손에 힘이 들어간 순간 마치 바람에 밀리듯 자연스럽게 열린 대문의 건너편에는 거짓말처럼 해준이 있었다. 마치 이소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문을 연 이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해준은 이소를 살포시 당겨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며 연신 끌어안았다.
“미안해.”
“…….”
“그리 모진 말로 내보내는 게 아닌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과연 해준이 주는 애정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까. 이 사람이 주는 것만큼의 동일한 질량의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몹시 서글퍼졌다. 눈가에 열기가 몰렸다. 코를 훔치며 해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싫으면 사람들에게 해코지 않을게. 아이들 앞에서도 못 볼 꼴 보여 미안하다 말할게. 이소 네 말이 다 맞아. 네가 다 옳아. 그러니까 마음 풀어. 응? 이소야…. 내가 미안해.”
해준의 사과가 계속될수록 이소는 그저 말없이 품에 파고들었다. 아마 평생을 가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속 좁고 어린 내게는 당신의 사랑이 너무 크고 무겁다. 밑도 끝도 없는 이해심과 배려가 과분하다. 이소는 다시 한번 고맙고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