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32/50)

7

“기름 짜 둔 거 벌써 다 썼나 보네. 이상하다, 요새 그렇게 많이 썼나.”

“그러니까 아껴 쓰라니까. 저번에 보니까 매실액도 10병 있다 해서 더 안 짰더니 절반밖에 없었잖아.”

주방 아짐과 낙원댁이 주방에서 묶음 마늘을 잔뜩 이고 평상에 내려놓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덥고 평화로운 하루였다. 아이들은 대청마루에서 팥이 잔뜩 올라간 빙수를 떠먹고 있었다. 얼음을 퍽퍽 갈아 떡과 과일까지 잔뜩 얹으니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정작 어른들은 그 옆에서 마늘이나 까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이소 역시 거들었다.

“이소 씨네는 잘 안 싸우는 것 같아요.”

부부싸움에 대한 주제로 한 시간가량 열띤 토론을 벌이던 여자들이 돌연 이소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소 씨네? 평생 누군가와 세트로 묶여 본 적이 없는 이소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저희요? 누구랑요, 교수님이랑요?”

“뭐, 아무래도 그렇죠? 대상이랄 게.”

동희 씨는 마늘을 까며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평상에 앉아 깐 마늘의 꼭지를 다듬으며 이소는 얼굴을 붉혔다. 안 그래 보이는데 참 사람을 잘 놀린다. 이미 저와 해준의 사이가 어떤지는 다들 알고 있는지라 이소는 적당히 둘러대며 말을 돌렸다.

“싸울 만한 일이 아직까진…. 무엇보다 그냥 교수님이 다 알아서 잘 해 주셔서. 아, 마늘 맵다.”

“에이, 내가 보기엔 이소 씨가 물러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도련님 은근히 성깔 있는데.”

동희 씨 말에 재료를 다듬던 여자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도 세 번까지는 봐줘. 뒤로는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지만 웃는 낯이긴 하잖아.”

“구렁이야, 천년 묵은 구렁이.”

“잘생긴 구렁이.”

“그건 맞다.”

여자들이 무릎을 치며 깔깔댔다. 이소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냥 강아지 같던데, 하고 덧붙이려다 괜히 또 염병천병이네 놀림을 받을 것 같아 입맛만 다시 마늘을 까댔다.

* * *

해준은 ‘그날’ 이후로 이소가 자리만 비우면 입이 닳도록 이소를 부르고 찾았다.

“이소 씨, 어디 갔지.”

또다. 이소 씨 어디 가. 나도 같이 가. 해준 본인이 외출할 때가 되면 한참을 끌어안고 ‘밥도 잘 먹어야 하고, 잠도 많이 자고, 지어 준 보약도 먹고.’ 하며 쓰다듬다가 발걸음을 뗐다. 해준이 부탁한 이소가 이 저택에서 할 일은 간단했다. 무조건 쉬어라, 놀아라, 자라.

집에 있는 동안 식솔들의 일을 도와주려고 돌아다니면 귀신같이 나와서 해준이 찾아 데려가곤 했다. 그리고 별채에 다시 들어앉혀 놓고 나면 하는 일도 없는데 입에 단 과자를 물리고 읽고 싶다던 책을 사다 바쳤다. 그것도 아니면 제가 잠이 온다며 이소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잤다. 주영을 만나고 돌아온 이후부터 해준은 유난히도 이소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루 늦게 들어온 것이 참 오래도 간다 싶었다.

식솔들이 문경으로 떠나기로 한 날이 성큼 다가와 유난히 분주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해수 역시 어린이집 방학이 곧이었다. 그동안은 어린이집 방학이 있다고 한들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원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던 해수는 처음으로 방학다운 방학을 맞아 이소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행 진짜 엄청 기대돼. 동희 이모가 그러는데, 거기 수영장도 있고 계곡도 있고, 밤 되면 희주 삼촌이 고기도 구워 먹을 거라고 했어. 어제 마트 가서 구워 먹을 마시멜로도 샀다.”

“마시멜로를 구워 먹어?”

“응. 동희 이모가 저번에 한 번 구워 줬었는데 진짜 쫄깃쫄깃해. 젤리 같아. 아빠도 이번에 가면 먹어.”

“아, 그러게. 아빠도 가고 싶은데.”

“왜? 아빠 안 가?”

이소는 어색하게 웃었다. 가고 싶지, 나도. 해수만 혼자 보내는 게 영 불안하기도 하고. 문경에 있는 별장이라니 생각만 해도 설레고 무척 가고 싶었는데. 이소는 간밤에 제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고집을 피우던 큰 개 한 마리를 떠올렸다. 얼마나 졸라대던지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났다.

* * *

어젯밤 스케줄을 정리하는 이소의 옆에 의자를 당겨 앉은 해준이 턱을 괴고 이소의 문경 별장 여행을 빨간 펜으로 슥슥 그어 버렸다. 제 일정에 별안간 엑스표가 그어져 놀란 이소가 해준을 돌아보자 입이 댓 발 나온 해준이 고개를 저었다.

“다음 주에 나 일본 출장 가는데.”

“그런데요?”

“이번 주에 이소 씨 문경 가 버리고, 나 다음 주에 일본 가고 나면 우리 2주나 못 봐요.”

이소는 눈을 가늘게 떴다.

“교수님도 같이 문경 다녀오면 되잖아요.”

“싫어, 그냥 자기 나랑 같이 있자. 나까지 거기 가면 사람들이 재미있게 못 놀 거 아니에요.”

그랬나. 이소는 잔칫날 격 없이 잘 놀았던 것을 생각하며 굳이 해준이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번의 설득에도 해준이 안 가겠다 고집을 피우자 결국은 제가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문경에 못 가는 대신 자신이 계획한 대로 데이트를 가자고 했다. 해수를 유모님에게 맡겨 놓고 자유롭게 둘만의 시간을 갖기로 합의하자 해준 역시 흔쾌히 승락했다. 해준이 이소를 끌어안고 머리를 부볐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애정 표현이 참 대형 동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 그럼 오늘 유모님 선물 사러 잠시만 외출했다 돌아올게요.”

“선물? 무슨 선물. 어디 가게.”

해준이 기분 좋게 머리를 부비다 고개를 들었다. 외출한다니까 또 잔뜩 경계한 얼굴이었다. 이소는 아이를 달래듯 해준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해수를 일주일간 돌봐 주시잖아요. 지금처럼 잠깐씩도 아니고, 아예 여행 가서 쭉 봐주시는건데…. 돈을 드리기는 좀 그렇고, 선물을 좀 드리고 싶어서. 저번에 보니까 스카프가 많이 낡은 것 같아서 한번 가서 볼까 하고요.”

해준이 굳이 그렇게까지 하냐는 표정이라 이소는 피식 웃으며 입을 맞췄다. ‘금방 올게요, 이번엔 주 기사님 차 타면 되잖아요.’ 하니 해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래두 얼른 다녀와, 없으면 너무 보고 싶어.’ 하며 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또 이소의 가슴에 머리를 헝클어지도록 부볐다.

“암만 봐도 구렁이 아니고 개 같은데.”

“응?”

“멍멍이.”

“응?”

아니에요. 이소는 어쩐지 제게 아들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 * *

“어쩌죠, 주 기사님 오늘 따님 학교행사 있으셔서 못 오시는데. 대신 상근이 부르죠.”

준경이 곤란해하며 대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라 일렀다. 이소는 새로 신은 빨간 캔버스화가 불편한지 발을 조금 매만지며 상근을 기다렸다. 저택 사람들은 대체로 이소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해준의 손님이 모두 이런 대접을 받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나이가 많든 적든 제 이름에 ‘님’을 붙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물이라도 닿을라치면 얼른 수건을 가져와 손을 닦아 주곤 했다. 집안일을 도울라치면 손사래를 치며 마루에 앉아 식혜나 드시라며 웃었다. 이소는 그게 못내 미안했고 민망해서 억지로라도 찾아가 일손을 보태면 그렇게나 고마워했다.

다만 모두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는데, 개중 특히나 이소를 고깝게 생각하는 게 상근이었다. 상근은 저택의 잡일을 도맡아 했다. 사람이 원체 많은 저택은 그만큼 장도 자주 보았는데, 그때마다 배추와 무를 자루에 실어 나르거나 떡을 만들 때 쓰는 쌀가루를 포대로 사 오는 일, 넓은 마당을 청소하는 일, 기와를 닦는 일, 밭의 잡초를 관리하는 일, 그리고 주 기사가 없으면 운전을 도맡곤 했다. 상근은 대체로 혼자 다녔고 식솔들과의 사이는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다만 해준에게는 언제나 굽신거렸다.

“왜요.”

방금까지 밭일을 하다 왔는지 흙이 묻은 장갑을 털어 내며 준경에게 퉁명스레 말을 던진 상근이 그 옆에 선 이소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흰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 빨간 캔버스화를 신은 말끔한 모습의 이소를 아래 위로 훑어본 상근은 별안간 ‘허, 참나.’ 하고 실소를 터뜨리더니 다시 준경에게 시선을 옮겼다.

“신사동까지 태워다 드리고 와.”

“예? 제가 왜요. 주 기사님 계시잖아요.”

“오늘 주 기사 일정 있어. 밭일 물러 줄 테니까 자네도 따라가서 쉬고 와. 커피 사 마시는거 좋아하잖아.”

준경이 상근에게 말을 거는 사이 낙원댁과 식구들이 이소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마침 가래떡을 튀겼다며 바구니째 가져오던 낙원댁이 ‘오늘 예쁘게 입었네, 어디 놀러 가나 봐.’ 하며 농담을 건네던 차였다.

“농담이시죠? 제가 왜 이 사람 치다꺼리까지 합니까? 두 다리 멀쩡하면 그냥 혼자 가라고 해요.”

목에 두른 수건을 팩 쳐낸 상근이 뒤를 돌자 걸어오던 낙원댁과 부딪혔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가래떡이 흙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에그머니! 아까워서 어쩌냐고 호들갑을 떠는 낙원댁을 보고 조금 움찔하던 상근은 애꿎은 이소만 노려보다 휙 돌아서서 저택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 사람 참, 왜 저렇게 날을 세우는지. 도련님 손님인데.”

“상근이 저거 성격 고쳐야 돼. 한두 번도 아니고! 아유, 진짜. 이거 흙 다 묻었잖어.”

떨떠름한 표정의 준경을 보고 이소는 곤란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괜히 저 때문에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것 같아 면구스러워졌다. 이소는 가방을 고쳐 메고 준경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저 그냥 택시 타고 다녀올게요. 교수님께는 따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금방 올 거거든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내일 문경 떠나기 전에 다 같이 식사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럴게요. 참, 아주머니. 혹시 무슨 색 좋아하세요?”

가래떡을 털어 바구니에 담던 낙원댁이 ‘글쎄, 모르겠는디. 나 무슨 색 좋아하더라?’ 했더니 준경이 헛기침을 하며 ‘제비꽃 색.’ 했다. 낙원댁이 ‘그래, 나 보라색 좋아하지. 왜요?’ 했다. 이소는 빙긋 웃으며 알겠다고만 말하고 자리를 떴다. 팔 월의 끝자락, 해가 뜨거웠지만 꽤 간만에 걷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 * *

습관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처음에는 돈 한두 푼 쓰는 것이 그렇게 살이 떨리더만 해준과 함께 다니면서 저도 통이 커졌는지 오만 원, 십만 원은 우습게 썼다. 예전같았으면 발도 들이지 않았을 백화점 문도 이제는 종종 드나들다 보니 익숙해졌다. 물론 이소 본인이 살 것은 여전히 가성비를 따졌지만 선물로 드릴 것은 될 수 있는 한 받는 사람이 기분좋게 넉넉한 인심을 가지고 구입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손에 한가득 선물 보따리를 든 채 택시를 잡았다. 유모 것만 사기가 미안해서 낙원댁과 아짐들 것도 하나씩 더 고르고, 동희 씨 것도 고르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여자들 것은 다 골랐고 남자들 것도 작은 것 하나 할까 하며 또 한바퀴를 돌았더니 금세 저녁 시간이 다 와 갔다. 택시에 올라 쇼핑백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을 때였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우웅 하고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주영이었다. 이소는 설핏 웃었다.

“응, 형.”

뒤늦게 피곤이 밀려오는지 이소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잠시 말이 없던 주영은 가볍게 웃었다.

- 되게 아무렇지 않게 잘 받네.

“그럼 뭐, 내가 울기라도 하려고.”

한결 여유 있어진 목소리였다. 담담하게 농담을 던진 이소의 말에 주영은 잘 들어갔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이소는 고개를 끄덕이다 뒤늦게 ‘응, 잘 들어갔지.’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그날 이후 주영에게 연락을 안 했다.

- 조만간 서류 하나 전달할 게 있어서 얼굴 좀 볼까 하는데 시간 언제 되나 해서.

“아하하, 나 이제 서류라고 하면 조금 무서운데. 무슨 서류인데?”

진담 반, 농담 반이었다. 이명희고 변호사고 하도 서류를 들이밀어서 뭐 돈 많고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어려운 서류만 들이미는 것이 그 세계의 룰인가 싶을 정도였다. 주영은 잠시 말을 고르다 ‘입양 서류인데.’ 하고 덧붙였다. 그 말에 감겨 있던 이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슨 서류? 입양, 뭐라고?”

-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이쪽에서도 최대한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진행을 좀 빨리 했어. 너 만날 수 있는 날짜랑 시간 정해서 메시지 남겨 줘. 난 이만 회의 들어가 봐야 해서, 나중에 또 전화할게. 끊는다.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주영이 무얼 준다고 한 건지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주영을 만난 이후부터 이소와 해수를 둘러싼 범양 일가의 움직임이 일반인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입양이라고. 김칫국일 수도 있겠지만 혹여 주영의 동의하에 입양이 진행될 수 있다면 평화롭고 순조롭게 일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는 괜히 기분이 들떴다. 택시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이 익숙했다. 해준이 오면 빨리 말해 주고 싶었다. 해수도 얼른 보고 싶었다.

* * *

문경으로 보내기 전 다 같이 식사를 했다. 해준의 곁에 앉은 채 해수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놓아 주면서 입이 근질거려 이소는 몇 번이나 입술을 뗐다가 다시 붙였다. 그런 이소를 보며 해수가 제 앞에 있는 불고기를 덜어 이소의 숟갈 위에 얻어 주었다. 그런 둘을 보고 식구들이 보기 좋다며 웃었다. 화기애애하고 단란했다.

별채로 돌아와 해수를 재운 이소는 어설프게 채운 짐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해수의 곁에 앉았다. 이렇게 멀리, 오랜 기간 동안 홀로 여행을 보내 본 적이 없기에 한참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경에 도착하면 읽으라고 편지를 써 볼까, 생각에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해수야, 아빠야. 잘 다녀오고, 아주머니 말 잘 듣고. 평소 자주 하던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는 것이 못내 쑥스럽지만 정성스레 마음을 담았다. 문득 이소는 고개를 들어 안채를 바라보았다. 해준의 작업실과 안채에 은은하게 노란 조명이 켜져 있었다. 해준은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잠깐 일어나기도 했다가 다시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청아한 울림, 풀잎 위를 뛰노는 밤벌레가 짝을 찾는 소리, 사바박 사바박 마른 가지를 휘감아 도는 바람의 냄새가 이소가 머문 별채에 실려온다. 이소는 행복했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해수는 벌써부터 씻고 있었다. 이소는 어설프게 세수를 마친 해수를 마저 꼼꼼하게 닦인 후 옷을 입혀 행랑채로 내려갔다. 마당 한가운데에 색색의 트렁크가 한가득이었다. 하얀 아이스박스에 가득 담긴 음식들을 열어 보며 이소는 혀를 내둘렀다. 가게를 하면서도 이렇게 많은 재료들을 한꺼번에 들여온 적이 없었는데,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질 양은 상당했다.

주방에 들어가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밥이에요?”

탑처럼 쌓인 김밥이 은박지에 둘둘 말려 나왔다. 차 안에서 먹을 도시락이라 이른 낙원댁이 이소에게 ‘도련님하고 드실 것은 저기 따로 빼놨다.’고 하였다. 오동나무 쟁반에 소담하게 담긴 김밥이 비단천에 덮여 있었다. 은젓가락 두 쌍과 수정과까지 놓인 음식은 은박지에 둘둘 말린 것과는 썩 결이 달라 보였다. 이소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몸을 돌렸다. 시원하게 얼린 냉차 한 박스가 보였다.

“이거 차 안으로 옮기면 되죠?”

“아유, 그냥 두지. 다른 사람 시키면 돼.”

“다들 바쁘신데 뭘요. 무겁지 않아요.”

이소가 냉차 박스를 들어 주방 문턱을 넘으려던 때였다. 문 바깥에서 누군가 튀어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앞으로 나아가려던 몸은 그대로 지나가던 상근과 세게 부딪혔다. 쿵, 얼린 냉차를 담았던 종이 박스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발등을 찍었다. 부상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인상을 구길 정도의 아픔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냉차들이 제 마음도 모르고 데굴데굴 굴러갔다.

“미안해서 어쩌나. 그러길래 잘 보고 나와야지.”

발등을 잡고 미간을 구긴 이소를 내려다본 상근은 무표정하게 말하곤 제 갈 길을 갔다. 주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군소리를 해댔다.

“저 새끼 왜 저렇게 성격이 못돼 처먹었는지 몰라. 도련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별채 손님한테 저리 군대.”

이소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하는 부끄러운 잔소리들을 뒤로하고 대문을 지나 내려가는 상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서니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마저 알아채지 못할까. 상근은 분명 제게 일부러 그런 것이다. 근데 대체 왜?

막 대문을 나서려던 상근은 별안간 몸을 돌려 이소를 한 번 바라보더니 표정을 구겼다. 우웩, 노골적으로 저를 보며 반감을 표하는 상근을 보며 이소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겼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괜찮아요? 저 자식 아까부터 주방 앞에 왜 서 있나 했더니, 이소 씨 나오자마자 바로 어깨빵 하는 거 내가 봤어요. 또 술 처먹었나 봐요.”

동희 씨가 다가와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 아이들은 이 소란을 못 본 듯했다. 이소는 허리를 숙여 묵묵히 냉차를 주웠다. 주방 안쪽에서 낙원댁이 투덜거렸다.

“혹시나 해서 하는 이야긴데, 괜히 대화로 풀어 보겠다고 가서 말 걸지 마. 저번에는 저 밑에서 사람들한테 자기 언덕 위 한옥 산다고 떠들고 다녔다나 봐. 도련님 차 몰고 다니면서 여자들한테 수작이나걸고. 속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우와 하지. 하여간 입이 방정이야.”

“그래도 이번에 안 데려가니까 속이 시원하다. 저놈 술 마시면 맨날 식구들 시비를 걸어싸서 춘식이랑 싸우는 거 꼴 뵈기 싫어.”

“그냥 본가 다시 내려가 버렸으면 좋겠어요. 서울 오고 싶다고 쫓아온 거죠?”

“그치. 저거 다 여자 만나려고 온 거야.”

사람들이 떠들든 말든 냉차를 상자에 다 담은 이소는 말없이 차에 물건을 갖다 실었다. 상근 씨는 안 가는구나. 저를 싫어하는 것을 알았으니 웬만하면 마주치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버스 앞에 서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기대에 찬 식솔들이 고속버스에 올랐다. 휴가도 보내 주고, 참 좋은 곳이야. 물론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복작대며 신나하는 저택 식구들을 보니 괜히 제 마음도 몽글몽글해졌다.

선글라스를 낀 동희 씨가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수수한 모습만 보다가 플라워 프린팅 원피스를 입고 곱게 화장한 모습을 보니 새로웠다.

“이소 씨, 쓸쓸하지 않겠어요? 지금이라도 몰래 따라 타요.”

“그러게요. 아쉽긴 한데 할 일이 잡혀서요. 대신 내년에는 꼭 같이 가요.”

이소의 말에 동희 씨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입꼬리를 씰룩댔다.

“그럴까요? 우리 내년 휴가에도 꼭 같이 가는 거예요?”

“네, 그럼요.”

“약속?”

“아, 네. 약속.”

이소는 새끼손가락을 얽어 오는 동희 씨에게 옅게 웃어 준 뒤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묵직한 엔진음과 함께 출발했다. 해수가 창문에 매달려 환하게 웃었다. 어린이집도 늦게 들어가서 소풍도 몇 번 못 갔는데 해준과 살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는구나 싶었다. 이소는 이를 드러내고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 좋은 거 많이 보고 신나게 놀다 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든든했다. 해준의 비호 아래 많은 사람들이 여름의 끝자락을 누리러 떠났다.

버스를 보내고 돌계단을 걸어 올라오던 이소는 대문에 기댄 상근을 마주쳤다. 상근은 이소의 얼굴을 위 아래로 훑고는 ‘어휴, 재수없어.’라고 읊조린 후 팩 몸을 돌렸다. 이소는 말없이 얄미운 뒤통수를 노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살다 보면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괜한 일에 휘말려 분란을 일으키지 말자 생각하며 주방에 둔 김밥을 들고 사뿐히 별채로 올랐다.

* * *

식솔들이 모두 문경에 가 있는 일주일, 해준과 이소 역시 바삐 잘 보냈다. 해준은 출장을 떠나기 전 막바지 업무를 보느라 오전에 나가 있다가 이른 오후쯤 들어왔다. 점심을 먹고 대나무 숲 언덕 냇가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곧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고, 그럼 신발을 고쳐 신고 얼른 달려 나갔다.

무더위가 심해 외출을 할 때는 버스와 지하철은 제쳐두고 주 기사의 차를 타고 외출을 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차 뒷자리에서 책을 읽는 이소를 보며 주 기사도 몰래 웃곤 했다. 이소는 해준이 오면 함께 저녁을 먹었고 밤마다 몰아치는 섹스도 했다. 누가 올라올 걱정이 없으니 제법 짓궂게 괴롭히기도 했고 정자에서 간식을 먹다가도 뒹굴기도 했다. 짐승처럼 흘레붙는 일이 저에게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큰 정원을 돌아다니며 이래저래 곳곳에서 입을 맞추고, 수음을 했다.

문경에 못 간 대신 이소의 소원대로 이소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다. 차에 오르려는 해준의 손을 붙들고 택시를 잡은 이소는 그대로 남산으로 직행했다. 돈가스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해준이 궁금하다던 스티커 사진도 찍었다. 해준의 키가 너무 커서 허리를 접어야 했는데 마지막 사진은 일부러 해준이 허리를 쭉 펴고 찍어 입술 아래만 나온 게 어찌나 우스운지 이소는 정말 큰 소리로 웃었다.

해준과 함께 돌아다니던 도중에 작은 점집이 있어 들여다보고 있으니 주인이 들어오라 손짓했다. 해준은 고개를 저었지만 이소가 팔을 잡아끌었다. 팔짱을 끼고 들어온 해준과 이소를 본 주인이 자신은 편견 따위는 없다며 궁합을 봐주겠다고 꼬셨다. 해준은 심드렁했지만 이소는 제법 흥미로워하며 꿇어앉았다.

‘인연이 깊어.’

점집에서 해 주는 말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말뿐이었다. 사실 구체적인 것 없이 대충 끼워 맞추기만 하면 그럴싸한 말들이었지만 이소는 괜히 마음이 벅찼다.

‘이 사람이 너 준다고 목숨값 많이도 치렀네. 네가 손 안 놓으면 쭉 결혼까지 하겠다.’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이소는 방긋 웃으며 흔쾌히 빳빳한 지폐를 건넸다. 궁합을 보는 내내 관심이 없어 보였던 해준도 문을 나서자마자 어깨를 기대며 ‘거봐, 자기야. 난 자기 손에 달렸어요.’ 하고 아양을 떨었다. 말이라도 그리 해 주니 고마워서 이소는 웃으며 눈을 접어웃었다.

이소가 직접 잡은 호텔은 스위트룸은 아니었지만 깨끗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고즈넉한 해준의 집도 좋지만 도시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호텔의 밤도 새로웠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가운만 입은 채 침대로 달려든 해준은 영화를 봐야 한다고 밀어내는 제 연인을 흘겨봤다. 둘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편의점에서 사 온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봤다. 정작 해준은 이소의 허리를 안은 채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고 이소만 혼자 깬 상태로 영화를 끝까지 다 봤다.

새벽 두 시가 되자 이소는 곤히 잠든 해준을 깨웠다. 잠이 덜 깬 채 눈을 깜빡이는 해준에게 ‘밤도깨비 데이트’ 하러 가자며 졸랐고 해준은 어린 연인의 부탁을 귀찮아하지도 않고 군말 없이 일어났다. 늦은 밤에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그 인파에 적절히 섞여들어 걷고 또 걸었다. 그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같은데 밖으로 나와 떠드는 이야기들은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이소는 그날 해준이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왜 카디건 대신 도포를 입는지, 발 사이즈는 몇인지 등 사소한 것들을 많이 알았다. 심지어 잠든 사이에 몰래 손가락 사이즈를 재어 반지 호수도 알아냈다. 큰 수확이었다.

삼사 일을 그리 놀다가 들어와서는 다시 평화로운 저택의 일상이었다. 이소는 전시 따위를 보다 돌아오면 꼭 간단한 빵과 간식을 사서 들어왔고 저와 해준의 식사를 위해 남아 있는 찬방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내일이면 식솔들이 문경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마당에 서서 행랑채를 바라보던 이소는 그새 뽀얗게 먼지가 앉은 대청마루를 바라보다 걸레를 주워 들었다. 이소는 본래 심심하거나 마음이 헛헛하면 청소를 했다. 사람이 든 자리는 티가 안 나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하던가. 매일매일 쓸고 닦던 곳에 사람이 없으니 구석구석에 금세 거미가 줄을 쳤다. 행주로 착각할 만큼 하얀 걸레를 들고 마루와 문지방을 구석구석 닦았다. 해준이 본다면 또 걸레를 집어 던져 놓고 얼른 안채로 데리고 가겠지만 오늘은 해준도 늦는 날이었다. 간만에 쓸고 닦고 하니 마음이 개운했다.

마루를 꼼꼼히 닦고 서재로 옮겨와 널브러진 책을 정리했다. 서재로 통하는 문 옆으로 잘 정돈된 방이 보였다. 다른 식구들의 방은 대체로 너저분한 편이었지만 그 방만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방 곳곳에 난을 심은 화분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꽤 나이 많은 사람의 방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준경 집사님 방인가 봐.’

호기심은 자꾸만 저를 방으로 끌어들인다. 이소는 걸레를 들고 머리만 집어넣은 채 정오의 해가 든 준경의 방을 힐긋거렸다. 시원한 편백나무 향이 스며 오는 방은 준경의 꼿꼿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이소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발을 뗐다. 신기하게도 준경의 방은 일주일 가까이 자리를 비웠음에 불구하고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이소는 반질반질한 책상과 잘 정리된 파일들, 단정한 한글과 한자로 또박또박 쓰여진 파일 목록을 구경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렇게 멋있게 늙어야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문득 시선을 사로잡은 검은 파일철의 책등에 쓰인 한자가 낯익었다.

[范陽]

한자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저 한자만큼은 제 이름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다른 파일들과 다르게 그 검은색 파일철의 두께는 상당했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종이와 자료의 양도 빽빽해 보였다.

‘왜 준경 집사님이 범양의 파일을 가지고 계시지?’

재단 일이라면 준경이 아닌 해준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소의 손가락이 길게 뻗어 나와 책꽂이에 꽂힌 파일을 막 뽑으려던 차였다.

“뭐하시나.”

“아, 깜짝이야.”

어느새 열린 문 틈에서 차가운 눈으로 이소를 노려보고 있던 상근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이소는 민망한 듯 얼른 손을 빼서 내렸다.

“도둑고양이야? 남의 방에서 뭐 하시냐고.”

“아, 네. 죄송합니다. 그게 저기, 청소를 좀 하다가 먼지가, 여기 왕 먼지가 있어서.”

이소는 괜히 소창 걸레로 툭툭 준경의 책꽂이를 털어냈다. 퍽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냉한 얼굴로 노란 눈깔을 도로록 굴린 상근이 기분 나쁘게 이죽거렸다.

“지가 청소는 개뿔, 니기미.”

말꼬리를 잡듯 이소를 내려다본 상근은 한참을 비식거리는 웃음을 매달고 혼잣말로 ‘놀고 있네.’, ‘지랄하고 앉아 있네.’ 하며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마치 들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에 이소는 점점 불쾌해졌다.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사람들 마음에 들려고 일부러 억지 노력을 한 적은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고, 부담스러워할까 봐 치대는 짓도 선을 지켜 가며 물러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건만 이소는 지속적으로 저를 오해하고 있는 듯한 상근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저기, 상근 씨. 저한테 무슨 오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이러시면 저도 곤란해요.”

“곤란해요-는 씨발, 에효 야! 사내새끼가 기집애도 아니고 말하는 거 하곤. 아, 비슷하지. 비슷하네, 킥.”

“네?”

갈수록 가관이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같이 있다 보니 묘하게 어디선가 술 냄새가 폴폴 올라오는 것이, 상근이 술을 한잔 걸친 게 틀림없었다. 도대체가 대화가 통하지 않아 이소는 신경질적으로 상근이 있는 문 쪽으로 걸어와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와중에도 상근은 이소를 곤란하게 하려고 발등을 쭉 내밀었으나 이소는 힐긋 내려다보곤 겅중 건너 피했다. 저보다 나이 열 살도 많아 보이는 상근과 괜한 일로 성내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

행랑채 마당으로 나와 걸어가는 동안에도 상근은 기둥 옆에 앉아 실실 웃었다. 이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돌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주영의 메시지였다.

- 많이 바쁘니? 다음주에는 시간 내줬으면 좋겠어. 네 얼굴 보고 싶다.

마지막 말은 괜히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 만나 놓고 무슨, 이소는 코를 문지르곤 [화요일에 전화 줄게.] 했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상근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교수님 있을 때는 상근 씨 그냥 피해야겠다. 진짜 대판 싸울 거 같은데.’

제게 비아냥대는 모습을 해준이 본다면 아마 불러다 한마디 할 것 같았다. 그럼 상근은 저에게 더 대거리를 해 댈 테고, 차라리 적당히 대화로 푸는 게 낫지 않을까. 저를 싫어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풀어 간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이소는 석조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영 찝찝한 기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

* * *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때 즈음, 자갈이 밟히는 소리와 함께 저택 식구들이 요란을 떨며 도착했다. 다들 얼마나 잘 놀았는지 조금 더 살갗이 까맣게 탔고, 얼굴이 티 나지 않게 부어서 돌아왔다. 낙원댁 말로는 아무리 잘 차려 줘 봤자 뭐하냐며, 그저 삼겹살에 라면, 소주만 일주일을 들이부었더니 저렇게들 되었다며 깔깔 웃었다. 짐을 옮기면서 이소에게 손을 흔드는 용태와 희주, 그리고 일주일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진 기색의 사람들이 이소에게 다시 웃어 주었다.

“별일 없었지? 밥은 잘 해 먹고?”

“아이, 그럼요.”

바지런한 이소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일지라도 다들 그렇듯이 안부는 ‘밥을 챙겨 먹었는가’로 물었다. 뒤늦게 쿵쿵 버스에서 뛰어내린 해수가 이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빠!”

“해수!”

일주일 만에 만난 둘은 서로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하루 이틀은 괜찮았는데 사오 일쯤 되니 서로가 무척 보고 싶어 하늘에 뜬 달만 보며 내일이 오기를 기다렸다고나 하면 믿을까. 길게 떨어져 본적이 없는 부녀는 고작 일주일을 가지고도 애틋하게 굴었다. 세한과 세현 형제가 그 곁에서 해수와 이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소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손을 흔들어줬다. 아이 아빠가 없어서 그런지, 그냥 해수와 또래라 그런지 유독 마음이 쓰이는 아이들이었다.

사람들이 얼추 다 내려온 후 이소는 해수의 짐을 챙겨 들고 별채로 올랐다 내려오기로 했다. 해준도 오늘은 저녁 시간 즈음 맞춰 온다고 했으니 이소는 해수와 오붓하게 여행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다들 3시간 넘게 버스에 구겨져서 돌아온지라 몸이 고단했기에 저녁 먹기 전 가볍게 콩국수나 말아 먹기로 하고 헤어지려던 참이었다.

“이야, 여기 다 모였네.”

가래가 잔뜩 낀 목소리와 함께 대문간이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열렸다. 멀찍이 문간에 기댄 채 사람들을 누런 눈깔로 노려보고 있는 상근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는 듯 사람들은 손을 휘휘 저어 버리고 한두 명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사이 벌써 단정하게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준경이 구두를 신고 디딤돌을 밟아 내려왔다. 술만 마시면 시비가 걸린다는 춘식이도 입을 비죽이며 트렁크 박스를 옮기던 중이었다.

“자네, 또 대낮부터 술 마셨어?”

“예에. 얼마 안 마셨어요. 혼자 있으니 적적하더라고요.”

“그럼 문경 따라오지 그랬어. 집에 혼자 남으면 무슨 재미라고.”

틀린 것 하나 없는 준경의 말에 상근은 비실비실 웃기만 했다. 웃을 때마다 입가에서 방금 마셨던 막걸리가 주륵주륵 샜다.

“근데 다른 재미는 봤어요.”

뚫어지게 꽂힌 시선은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상근을 무시하고 각자 할 일을 하려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해수의 어깨를 잡고 있던 이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상근의 시선이 저를 위아래로 진득하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단순히 적대감만 섞인 시선이 아니었다. 조금 더 불쾌했고 음습했고 익숙한 그런 것, 이소는 아주 오래 전 비슷한 동류의 시선을 고 대표에게서 느낀 적이 있었다. 고개를 쳐든 상근이 별안간 허리를 허공으로 툭툭 쳐올리며 허리 짓을 했다. 누가 봐도 아주 노골적인 몸짓이었다.

“그거 아세요, 집사님. 다들 문경 가시고 나니까 아주 밤마다, 안채에서 사람 죽어나는 소리가 나던데요.”

“오상근, 들어가.”

“나는 기집년 들어앉은 줄 알았어. 저 새끼 좆 떨어진 거 같다니까. 야아, 애기야. 아빠 말고 엄마라고 불러라, 엄마.”

준경이 낮게 으르렁댔다. 이소는 반사적으로 해수의 귀를 막았다. 해수가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지만 몸을 돌려 제 안으로 끌어안은 후 상근을 노려봤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못해도 스무 명 되는 식구들이 나와 있는 마당이었다. 상근은 거나하게 취한 건지 원래 저 사람의 행동거지가 저리 개차반인 건지 대문의 모서리에 제 고간을 비벼 대며 흐느끼듯 웃었다.

“교수님, 아앙, 너무 좋아요, 교수니임, 살려 주세요, 더 박아 주세요, 거기요, 거기.”

맹세컨대 그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소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들은 아이들의 귀를 막았고 남자들은 저어 씨발놈이 돌았나, 하며 혀를 찼다. 그러나 준경을 제외한 누구도 상근을 말릴 생각을 못 했다. 하고 있는 꼴이 충격적이기도 했거니와 상근의 입에서 쏟아지는 음담패설이 본인들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을 얹지 못했으리라.

상근은 얼마나 심취했는지 눈을 감고 대문을 붙잡은 채 높은 소리로 우는 듯 웃는 듯 어설프게 신음했고 사람들은 인상을 구기고 이소에게 ‘들어가세요, 무시하세요.’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상근이 터덜터덜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소는 해수에게 ‘들어가 있어.’ 하고 속삭였다. 해수도 무서웠는지 이소의 옷깃을 잡으려 했지만 눈치 보던 동희 씨가 얼른 해수의 손을 잡고 행랑채 가장 안쪽 방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상근은 준경에게 비실비실 웃으며 팔을 휘둘렀다.

“아니, 집사니임! 나느은, 너무 이 상황이 좆같단 말이에요.”

“자네 오늘 주정이 심해. 도련님 오기 전에 얼른 방으로 돌아가. 도련님 손님이야, 이미 선 넘었어.”

준경이 이소와 상근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상근 씨, 여기 아직 사람들 있습니다. 말씀 조심하세요.”

저를 향해 비틀비틀 다가오려는 상근을 보며 이소는 냉한 눈을 한 채 뇌까렸다.

“말씀 조심은 무슨, 싫은데? 야이 씹새꺄. 뒷구멍 벌려서 저 위에 들어앉으니까 좋냐?”

그 말 한마디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소의 관자놀이가 꿈틀댔다. 당신 말 다 했어? 이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준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 괜한 싸움에 휘말리지 말라는 손짓이었지만 상근이 눈을 부리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집사님. 놔 봐요. 맞잖아요. 왜 똑같이 얹혀 사는 입장인데 우리가 이 새끼 빨래며 밥이며 다 갖다 바치고. 반찬도 씨발, 찬 가짓수도 다르잖아요. 사람 차별하냐고요. 우리는 아침부터 일어나서 좆뺑이를 치느라 앉을 새도 없는데 이 새끼는 방 안에서 잠이나 처자고, 나와서 간식 처먹고. 애새끼들이랑 술래잡기를, 아 씨발, 존나 생각하니까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아니 다들, 이 상황이 웃기지 않냐고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나만 그런 거 아니면서?”

다들 약속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낯선 고요에 이소의 눈가가 떨렸다. 제 말에 다들 동의한다고 생각했는지 상근은 신이 났다.

“봐 봐. 다들 내 말 맞다고 생각하잖아. 내가 썅, 이상했다니까? 안채 옆에 별채에 사람 들어온다길래 가구도 옮기고 다들 아, 이제 도련님 장가가나 보다 했잖아요. 근데 씨발, 어? 어? 누가 들어왔어? 미친, 사내새끼가 들어와서 안주인마냥 앉아서 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호모 새끼가 씨발, 당당하게 내려와서 밥 처먹고 여자들이랑 앉아서 시시덕대고… 아, 춘식 아저씨도 그랬잖아. 도련님 취향이 좆 달린 사내새끼 후장에 박는 거일 줄은 몰랐다고 신기하댔잖아!”

“아, 아녀 그거는 진짜 처음에, 정말 처음에…!”

“양춘식.”

조용히 서 있던 준경이 핏발 선 눈으로 춘식을 돌아봤다. 사람들도 다들 눈을 피했다. 이소는 상근의 입을 막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저놈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실이었대도 저에게 잘 해 준 사람들이었다. 진심이 아니라 농이었다고 쳐도 상근의 입을 거쳐서 나오는 노골적인 언사들은 가시처럼 저를 찔렀다. 수치심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주머니들도 그랬잖아요! 도련님이 저 새끼 기집애마냥 빨아대고 안고 가는 거 보면서 징그럽다고도 했잖어, 밥상 차리면서도 이런 귀한 것은 나도 못 먹어 봤는데 저 새끼 먼저 먹는다고 팔자 폈다고 했잖어! 나만 이상해? 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굴어요? 저 새끼가 뭐 도련님 마누라라도 돼요? 남자끼리 씨발 토쏠리게-”

그때였다.

“어어, 도련님! 안 됩니다!”

도련님? 준경의 당황한 고함에 붉게 물든 이소의 두 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콰당탕-

상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해준이 그대로 상근의 모가지를 움켜잡아다 콱 내던졌다. 키가 180cm에 100kg은 되는 상근이 억 소리도 못 낸 채 종이짝처럼 느티나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평상다리에 등을 부딪친 상근이 어그, 그억 소리를 내며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놀라 다 같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간 해준이 더 빨랐다. 해준의 손에서 떨어진 꽃다발이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해준의 구둣발이 상근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두툼한 배때기에 푹, 살이 채이는 소리가 났다.

“상근아, 다시 말해 봐.”

잠시 멍하게 서 있던 이소는 주춤하며 발걸음을 뗐다. 말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턱이 달달 떨렸다. 저절로 눈가에 열이 몰렸다.

“도, 도련님…늦게, 늦게 온다 했는데…….”

“그러게, 일찍 오길 잘했네.”

범 없는 자리 여우가 설친다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해준이 구둣발로 상근의 갈비뼈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무게를 실어 밟았는지 상근의 몸이 땅바닥에 떨어진 넙치마냥 퍼덕퍼덕 뛰었다.

“흐, 으아씨……! 진짜…… 내가, 틀린 말, 했어요?”

상근이 배를 잡고 그억그억 한숨을 쉬다 해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눈에 뵈는 게 없어 보였다.

“…씨벌, 손발이 있으면 이 집에서 일을 하는 게 규칙이잖아요! 하다못해 아직 스무 살 안 된 용태도 이 땡볕에 밭일하다 더위를 먹었는데! 배추고 고추고 따오면 죄다 저 새끼 입에 먼저 들어가는 게 존나 배알이 꼴려서 그랬어요! 저번엔 씨발, 애도 아니고 졸졸 쫓아다니면서 주변에 있는 이상한 놈들 없게끔 살펴보라고 하질 않나. 제가 저보다 새파랗게 어린 놈한테 허리 숙여 가면서 무슨 님님 해대는 것도 꼴 받는데 저 새끼 먹인다고 녹용이고 홍삼이고 해다 바치는 것도, 씨발… 누가 보면 임신한 줄 알겠….”

“했으면?”

“…예?”

정적이 감돌았다.

“임신했으면. 그땐 입 다물고 곱게 안주인처럼 대해 주려고 했어?”

상근을 내려다보던 해준은 쪼그려 앉았다. 해준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가늠이 안 가 어버버거리고 있던 상근이 이소와 해준을 번갈아 보았다. 별안간 해준의 입에서 나온 임신이라는 단어에 저를 끼워 맞추려는 듯 동공이 흔들렸다. 이소 역시 당황한 얼굴로 해준을 보고 있었다.

해준이 고개를 돌렸다.

“다들 같은 생각?”

“…….”

“내가 버릇을 단단히 잘못 들였나 봐.”

상근이 말이 없자 해준은 돌연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상근의 뺨을 내리쳤다. 쨔악,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후두둑 코피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흐업, 하며 숨을 집어삼켰다. 정작 때린 사람은 무감해 보였다. 해준은 상근의 옷깃을 잡아틀어 짐승처럼 냄새를 맡듯 킁킁거렸다. 이내 고운 미간에 골이 패였다.

“상근이 형, 술 많이 마셨네. 아, 내가 두 살 아래지만 말 놓을게.”

여기선 내가 제일 위잖아, 그렇지.

“…….”

“형은 내 어린 손님 뒤치다꺼리는 하기 싫어하면서 늙은 쥐마냥 창고 털어서 내다 파는 건 군말않고 열심히 하더라. 이 집에 그런 규칙은 없는데.”

별안간 상근이 파드득 떨며 손을 모았다. 여전히 멱살이 잡힌 채였다.

“아니, 도련님. 그게, 그건 제가…. 제가 사정이, 설명을 드릴 건데….”

“그래도 그렇지, 식구들이 만든 술이랑 기름, 매실, 장독에 있는 장까지 사업자 떼다가 파는 건 잘못했지. 밤마다 바빴겠네. 언제부터 우리 집 기름과 술이 너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것이 됐어.”

해준이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상근의 이가 닥닥 떨리는 소리가 이소가 있는 곳까지 들렸다.

“난복동 726-5.”

“도, 도련님. 거기는.”

“왜 거기서 우리 광에 있어야 할 자재가 우르르 나오는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난 그런 건 허락한 적이 없거든. 근데 무엇보다 나를 열받게 하는 건….”

해준이 다른 손으로 다시 한번 빠르게 뺨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입술이 찢어졌다.

“내가 이 집에 짐승을 들이든 사람을 들이든, 너 까짓 게 주제 파악 못 하고 감히 훈수를 두는 거야.”

짝, 다시 한번 귓불을 향해 손이 매섭게 날아갔다. 짝, 짜악, 짜아악- 이후 일정한 타격음과 함께 몇 번이고 내려꽂는 손바닥에 식구들은 모조리 고개를 숙였고 마당을 울리는 굵직한 신음 소리가 바닥을 기었다.

이소는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다정하고 점잖은 차해준이 사람을 손바닥만으로 곤죽을 만들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소는 상근이 다섯 대쯤 맞았을 때 겨우 걸음을 떼어 해준에게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해준은 말끝마다 뺨을 내리쳤다. 타격마다 온 힘을 실어 때리는 듯 매서웠다.

“적어도 내 일에는, 들어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시키면 군말 없이 넙죽 엎드려서 하는 게….”

“악, 도, 도련, 님, 잘못, 잘못했습니다. 억, 악- 잘, 못했-”

“이 집 규칙 아니었어?”

해준의 손이 뺨에 내리꽂힐수록 상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부었다. 이소는 처음으로 해준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나 짧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퍽퍽 맞은 상근을 보며 결국에는 이소가 달려들었다. 그만하세요, 그만 때리세요! 이소는 단단한 고목과 같은 해준의 허리를 잡고 뒤로 끌어당기며 상근을 내리치는 손을 잡았다. 제힘으로는 될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무도 감히 해준을 막지 못했고, 나설 것은 저뿐이었다. 해준이 사람을 때리는 소리, 낮게 읊조리는 말들이 모두 가시가 되어 속을 후볐지만 일단 사람을 먼저 살리려 달려들었다. 교수님, 진짜 그만해! 말이 반토막 나서 막 나갔다.

그러나 이소가 잡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해준은 흥분한 상태로 상근에게 낮게 그르렁거렸다.

“은혜도 모르고.”

해준의 팔을 잡은 이소의 손이 우뚝 멎었다. 제발, 그만 말해. 해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작살이 되어 가슴을 후빈다.

“거지 같은 밑바닥 인생 구제해 줬으면 감사한 줄 알고 입 닥치고 살아야지.”

“차해준, 정신 차리라고!”

이후 무섭도록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더러운 옷깃을 움켜잡은 손에 닿은 목소리, 분노로 흐려졌던 정신이 돌아오자 해준은 제 팔을 잡은 이소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소의 어깨 너머로 쏟아지는 상처 받은 무수한 눈들을 뒤늦게 인지하는 순간, 해준의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식구들은 짐을 채 풀지도 못한 채 보자기를 든 손들을 서글프게 그러쥐고 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준은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하고 그 시선들을 마주했다.

“교수님, 나와 봐요.”

이소가 해준의 팔을 놓고 기절한 상근을 잡아들었다.

다들 서럽게 울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처지를 입 밖으로 내준 주인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혹은 시선을 피하며 약자임을 몸소 보여 줬다. 해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근의 피가 범벅이 된 제 손바닥이 붉게 부어올랐다.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상근 씨, 정신 차려 봐요. 상근 씨. 코피 나니까 고개 좀 뒤로 젖혀 봐요. 네?”

이소가 상근의 목덜미와 콧대를 잡고 꾹 누른 채 계속 말을 걸었다. 이소의 손 역시 상근의 코피로 군데군데가 얼룩덜룩했다. 해준은 두통이 밀려왔다. 이러려고 업무도 제쳐두고 달려온 게 아닌데. 그저 해수를 오랜만에 만나 들뜬 이소를 기분 좋게 안아 주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제가 서 있던 계단 아래까지 들려온 상근의 목소리와 언사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리고 잠시 이성이 날아갔다.

“문 집사.”

낮게 그르렁대는 해준의 목소리에 잠시 멍해 있던 준경이 얼른 걸음 했다.

“예, 도련님.”

“오상근 서류 정리해서 오늘 내보내.”

해준이 덧붙인 마지막 말에 바닥에 늘어져 있던 상근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잔뜩 부어 있는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 온 상근은 손톱으로 흙바닥을 벅벅 긁으며 애원했다.

“아, 안 돼요…! 도련님. 저 지금 나가면 그 새끼들한테 죽어요. 아시잖아요, 저 진짜 한강 가야 될 수도 있어요. 저 입 닥치고 있을게요. 이 사람, 아니 윤이소 씨한테 사과도 할게요. 이소 씨, 아니 이소 님. 제가 대가리, 대가리 이렇게 박을 테니까-”

상근이 피떡이 된 얼굴로 이소의 팔뚝을 붙잡고 신음했다. 이소의 팔에 흙과 피가 섞인 얼룩이 묻어났다. 해준의 시선이 칼날처럼 가 박혔다. 새하얀 팔뚝을 움켜잡은 고목 뿌리 같은 손가락을 향해 해준이 다시 팔을 쳐들었다.

“어디에 손을 대.”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상근의 손을 쳐내 버린 후 해준은 이소의 손목을 잡아챘다. 교수님! 소리를 지르는 이소가 개처럼 질질 끌려갔다. 흰 운동화가 만든 자국이 흙바닥에 어지럽게 나선을 그렸다. 아파, 아파요. 교수님 손 놔요. 손목을 콱 움켜쥔 채 몇 걸음을 질질 끌려가던 이소가 쥐덫에 물린 것마냥 시큰거리는 손목을 잡고 버둥거리자 해준이 팩 몸을 돌렸다.

“이리 와.”

이소의 눈에 핏대가 섰다.

“아파요. 놔주세요. 저 안 가요. 아직 해수도 여기 있고…!”

“부탁하는 거 아니야.”

해준은 이소의 팔을 제 쪽으로 확 당긴 후 허리를 숙인 후 순식간에 어깨에 들쳐 멨다. 졸지에 식구들 앞에서 보쌈당하는 꼴이 되자 이소가 꽥꽥 수치심과 분노로 소리를 질렀다. 놔, 미쳤어 뭐하는 거야, 놓으라고! 커다란 손아귀에 그대로 무릎과 두 발목이 겹쳐 잡힌 후 언덕 위로 끌려가는 이소의 날 선 목소리는 육중한 안채 정문이 닫히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준경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멍한 눈으로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은 느리게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아무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평상 바닥에 엎어진 채 ‘흐윽, 흐윽 씨발, 씨바알’ 하고 울기 시작하는 상근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저택을 나가면 자신들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난다. 해준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들은 그저 저도 상근처럼 축객령을 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문경에서 돌아온 날, 콩국수를 말아 먹으며 여행 사진을 보기로 했던 느긋한 시간은 없었다.

모두들 조용히 돌아가 각자의 방문을 닫았다.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은 꼭 아무도 살지 않는 집 같았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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