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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형은 윤이소의 친구였다. 이소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흰 피부에 긴 생머리를 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여학생. 이소가 가는 곳에는 항상 은형이 있었고, 이소는 꽤 자주 은형의 이야기를 했다. 제가 만들어 준 족보도 은형에게 갖다주어 함께 공부했고, 집에서 종종 주전부리를 잔뜩 만들면 이소는 종이봉투에 은형의 몫까지 챙겨서 학교로 가져가곤 했다.
주영은 처음 이소가 은형을 친구라며 소개했을 때 스스럼없이 제게 친하게 인사하던 여자애를 떠올렸다. 점퍼는 낡았고 양말이 해져 있었지만 눈빛이 당돌했고 밝고 명랑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이소와 달리 은형은 보통의 남자애들보다 짓궂고 장난이 넘쳤다. 그날도 우리 집만 오지말고 너희 집에 한 번 놀러가 보자며 이소의 어깨를 잡고 대문 앞에서 실랑이를 하는 것을 목격한 게 첫 만남이었다.
‘어, 어…. 안녕하세요.’
이소와 키가 엇비슷한 은형이 팔 사이에 이소의 머리를 끼운 채 양옆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봉곳한 젖가슴에 닿지 않으려고 이소가 고개를 바짝 숙인 채 ‘나중에, 나중에 가자.’ 하며 애원하고 있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이지만 마음 편히 친구를 초대할 수조차 없는 아이의 마음을 알기에 주영이 웃으며 대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 난 이소 사촌 형. 아주머니, 애들한테 간식 넉넉히 주세요. 이소야, 친구 저녁도 먹여서 보내고.”
집이 아니더라도 밖에서도 몇 번 만났다. 처음에는 하도 붙어 있어 둘이 사귀는 듯싶었지만 어느 날 곱게 접은 쪽지와 함께 직접 만든 초콜릿을 받았을 때는 몹시 당황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울 줄 알았지만 은형은 민망한 듯 웃더니 ‘다음에 또 고백할 거예요.’ 하고 손을 흔들었다. 별 고집이 다 있다 싶었다.
이후 은형은 정말 여러 번 고백했고 주영은 딱 그만큼 거절했다. 이소의 친구여서인 것과 제가 공개 연애 따위를 할 수 없는 신분인 것, 무엇보다 다른 것을 다 차치하더라도 주영은 회사와 학교 일로 또래에 비해 정말 몹시 바빴다. 더 좋은 사람 만나, 나 같은 놈 말고. 그런 주영에게 은형의 고백은 농담으로라도 받아 줄 수 없는 것이어서 단호한 거절과 애매한 위로를 반복하곤 했다. 둘이 남게 되는 날은 혹시나 사진이라도 찍힐까 이소를 불러냈고, 셋이 모였을 때는 언론에서도 크게 건들지 않았다.
“봄 축제였을 거야. 그때 기억나? 너는 여장 걸려서 내가 놀린다고 사진 찍어 주러 간 날, 끝나고 바로 아버지 회사 창립기념일 행사로 이동했고… 술을 정말 많이 마셨었어. 집에 돌아왔을 땐 기억이 나지 않았을 정도니까.”
눈을 떴을 때 주영은 제 방에서 옷도 다 벗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 방 안은 폭탄을 맞은 듯 엉망이었다고. 이소도 기억했다. 축제가 끝난 다음 날 주영은 하루 종일 숙취로 누워 있었고 자신이 2층까지 올라가 죽을 주고 갔었다.
그 시기 즈음 주영은 영국에서 다니던 학교의 졸업에 맞추어 MBA 과정을 미리 밟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의 풍족한 지원을 바탕으로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고 그 핑계로 짧은 여행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여행에는 이소도 데려갈 계획이었다. 안 하겠다는 것을 억지로 여권까지 만들게 해서 부득불 데려가겠다고 들떠 있던 때였다. 주영의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려 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왔어. 임신했다고.”
주영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오밤중에 카페에서 만난 은형이 초음파 사진을 들이댔을 때는 너무 놀라 사진을 집지도 못하고 떨어뜨렸다.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어. 정말로 기억에 없었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기억에 없었어.”
어려운 문제였다. 한 번 잤다고 해서 서로의 삶에 스며들 정도로 감정이 깊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과 은형 모두 너무 어렸다. 낳지도 않은 아이를 가지고 내 아이니 아니니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했다. 주영은 회사를 물려받아야 했으며 유학도 코앞이었고, 은형 역시 대학이든 취직이든 제 삶을 살아가야 할 나이였다. 앞날이 창창한 청년들이었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아이를 지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아이를 책임질 수 없어서가 아니야. 감정을 나눈 적 없으니까… 말 그대로 사고였으니까, 당장은 너무 힘들고 서럽더라도 미래를 위해 지우자고 했었어. 모든 비용은 내가 댈 거고, 추후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모두 지불해서라도 은형이에게 사죄하려고 했어.”
이소의 냉한 눈을 바라보며 주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이소의 낯이 너무 익숙지 않아서, 가슴이 미어져서 몇 번이나 목이 메는 것을 참고 또 참았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변명해 봤자 결국 제 과오였다.
“아이를 키우는 게 단순히 의욕만으론…. 안 되는 거잖아. 아이 아빠가 옆에 있어 줘야 할 거고, 키우면서 스무 해는 넘게 먹이고 재우고 입혀야 하는데 은형이는… 국가에서 지원받을 정도로 힘들었다는 걸 내가 아니까. 밤마다 울면서 전화를 하면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어. 도와주고 싶었는데 내가 생각한 건 고작 아이를 지우고 치료에 전념하자는 것 말곤 없었으니까.”
그 당시 주영이 보기에 은형은 맹목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불편한 조모를 모시고 외롭게 자란 은형은 사고였을지언정 좋아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졌고 그에 따른 근거 없는 애정과 집착이 무섭게 싹텄다. 자신은 남자여서 알 수 없지만 아이가 제 몸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본능적인 연민이 은형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다만 그 끝은 결국 파국일 것이라 생각했다. 주영은 은형을 사랑하지 않았고, 제집에서도 인정해 주지 않을 관계였다. 종래에 은형은 상처만 남아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차라리 돈을 더 달라고 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줬을 거야. 아이가 다 자랄 때까지 지원해 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을 상황이니까.”
배가 티가 나게 나온 은형에게 돈을 줄 테니 모두 잊어버리고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자고 했을 때 주영은 양 뺨을 수차례 맞았다. 이깟 돈을 주면서 아이를 지우라고 하냐며 경멸에 찬 눈빛을 받았다. 지긋지긋했다. 결국 폭발해 네가 평생 가야 이깟 돈을 만져 볼 수 있겠느냐며, 그 아이가 내 아이인지 어떻게 아느냐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지금이라도 태아의 혈액을 채취해 친자 확인을 하자며 몰아세웠다. 은형은 서럽게 울었다.
“원하는 건 하나였어. 내 아이로 인정하고 아이 아빠로 옆에 남아달라는 거. 자신도 아이도 자꾸 보면 정이 들 거고, 지금은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지만 같이 있다 보면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
“그랬을까? 정말로 그냥 곁에 남기만 하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게 진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모르겠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미워하고 날을 세울 것 같은데.”
이소는 주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기 힘든 부분이 오면 눈을 질끈 감기도 하고 무어라 욕을 하려다가 다시 다무는 등 끝까지 주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대로 소리 지르고 또 나가 버린다면 지지부진하게 더러운 인연이 계속될 것이다. 주영의 기억 속 은형은 어떤 점은 이소가 알고 있는 점과 일치했고 어떤 것은 낯설었다. 제 친구였음에도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다 결국 도망쳤어. 무서웠어. 3억이 넘는 돈을 아버지 몰래 빼서 그 애에게 던져 주고 영국으로 갔어. 난 절대로 그 애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었으니까.”
“허.”
이소가 혀를 찼다. 그 시기 은형의 히스테리는 출산 전까지 극에 달했다. 몇 번이나 그 새끼, 그 개새끼를 욕하다가도 밤만 되면 보고 싶다고 울었다. 이소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이 아빠가 누구냐고 물어도 죽어도 입을 열지 않아서 같이 욕하고 같이 울었다. 그 개새끼 나타나기만 하면 가슴을 짓밟고 낯짝을 때리고 침을 뱉어 줄 거라고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은형이 그제서야 속이 시원하다며 웃었다. 이소는 그 말이 참 슬프게 들렸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 사진 하나를 받았어.”
아이가 태어나고 은형은 자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수십 장도 넘게 찍었다. 이소의 눈에는 다 같아 보였는데 은형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이 이상했어. 어차피 내가 거둘 아이도 아닌데 하루, 또 하루 매일 다르게 도착하는 사진들을 보면서도 지울 수가 없더라. 은형이 말처럼 보다 보니 정이 쌓인 건지, 아니면 그냥 가벼운 동정심이었는지는 몰라도 쨌든 몇 번을 더 보다 보니 눈이 가긴 갔어.”
그럴 만했다. 해수는 예뻤다. 작았지만 정말 예뻤다. 주영과 은형의 예쁜 점만 골라 닮았다. 이소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신생아실에서 제일 예뻤다.
“그래서 귀국하기 얼마 전에 연락이 닿았고 한국에 가면 은형이부터 만나기로 되어 있었어. 내가 책임져야 했으니까…, 양육비가 얼마가 되었건 그것과는 별개로 풀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거든. 그랬는데….”
여기까지 이야기한 주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소 역시 말이 없었다. 그 뒤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 사람이 모두 알았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거짓말처럼 은형이 죽었다.
“결국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될 줄은 몰랐어.”
주영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눈을 깊게 감았다. 이소는 멍하게 눈을 깜빡이며 테이블에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건들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두 사람 모두 어리석었고 이기적이었으며 자신밖에 몰랐다.
그러나 누구 하나를 탓할 수도 없었다. 제가 쉽게 나서서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제가 아이를 길러 보니 정말 만만치 않았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다만 해수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영은 입술을 매만졌다. 은형의 사고 이후 아이의 행방까지 찾을 수 없어 아마도 그때 같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다.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다. 사진으로나 한 번 봤지 제대로 만져 본 적도 없는 아이가 이제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명치께가 조금 아파 오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조용히 감정을 곱씹을 틈도 없이 거대한 파고는 주영을 덮쳐 흔들었다.
윤이소마저 제 인생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주영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연거푸 담배를 태우자 졸아드는 연초 끝만큼 주영의 눈매도 가늘어졌다. 이소는 문득 그 담배를 저 역시도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만두었다. 이미 충분히 어지러웠다. 주영은 담뱃재를 털어내며 술로 목을 축였다. 주영은 은형의 이야기를 할 때와 다르게 이소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괜히 눈이 마주친 이소는 흠칫 놀라며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얼마나 더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인지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목소리를 삼키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간간히 턱이 불거지며 어금니를 깨무는 모습이 불안해 보여 이소는 자신도 모르게 예전처럼 다정하게 ‘형.’ 하고 부를 뻔했다. 아차, 하고 떨어진 입술을 다시 붙일 때였다.
“집에 오니 네 흔적을 찾을 수가 없더라.”
“…….”
“깨끗하게 비워진 방을 보고 나서야 피가 식었어. 거실을 돌아보니 굳은 나와는 달리 아버지, 어머니는 굉장히 평온하셨어. 15년을 같이 산 사람이 사라졌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식사를 하고 계시더라고.”
주영은 7년 전을 회상하며 단정한 손톱을 세워 원목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부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이소는 주영이 떠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차곡차곡 주변 정리를 했다고 한다.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지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학교도 종종 빠지는 듯했다고.
무얼 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못하면서 그렇게 밤마다 냉장고와 생필품을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다 썼다고 했다. 그렇게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인지를 몰랐다면서 그동안 자신들이 해 준 것에 대한 은혜를 개떡으로 아는지 앞으로 혼자 잘 살겠다며 떠났다고 전했다. 찾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는 덤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를 들으며 이소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날 정도로 깊게 베어 물며 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영이 영국에 갔을 때는 해가 넘어가기 전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이소는 거의 상주하듯 은형의 집에 왔다 갔다 하며 아이를 돌봤다. 정말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깨부수는 은형을 달래고 밤낮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신경 쓰느라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때였다. 물론 주영이 가고 나서 눈에 띄게 심해진 윤치승 부부의 구박도 덤이었다.
“처음엔 안 믿었어.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가 없으면 너를 어떻게 대하는지 뻔히 알았고. 아, 또 애꿎은 애를 쥐잡듯 잡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집 안 물건들을 얼마나 부숴 댔는지 몰라. 말이 안 되니까. 내가 영국에 있을 때도 늦게라도 네 답장은 꼭 왔었고, 전혀 그럴 조짐은 없었다는 걸 목소리만 들어도 아는데. 무엇보다 넌 거짓말을 정말로, 정말로 못하니까.”
주영은 그때를 생각하는 듯 눈썹을 꿈틀댔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제가 들어온 후 제가 한마디도 하지 않을 동안 윤치승은 저 혼자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윤치승이 있던 자리로 저벅저벅 걸어간 주영이 제 아버지 앞에 섰다. 분노로 떨리던 목소리를 어거지로 감추려 이를 악물었었다.
‘어디 있어요.’
대상을 구체적으로 덧붙이지 않아도 이소의 행방과 안위를 묻고 있다는 사실을 윤치승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윤치승은 누렇게 뜬 눈을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글쎄, 어디 기집년이랑 살림을 차렸나 보지. 키워 준 은혜를 개좆으로 아는 놈. 그대로 내다 버리려던 것을 깊이 헤아려 품어 주고 학교까지 보내 주었는데. 애비 애미 없는 자식들의 싹수란 원래 그런 것이다. 노랗다 못해 뿌리부터 썩었어. 암만 정성을 주어도 제 몫을 할 줄을 몰라.’
그렇게 말한 윤치승은 주영을 빤히 바라보면서 이를 쑤셨다. 테이블에 퉤 하고 뱉어 내는 몰상식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기품이 넘치고 차분했다고 했는데 제 아비는 꼭 백정의 자식처럼 굴었다. 발을 까딱거리며 쩝쩝대던 윤치승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왜. 키우던 개가 널 버리고 나갔다니까 속이 뒤틀려?’
‘…….’
‘네 놈 둘이서 방에서 붙어먹는 꼴을 안 봐도 돼서 난 속이 시원한데.’
걸레 같은 새끼. 그 말에 이성의 끈이 가볍게 끊어졌다. 주영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때려 갈겼다.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볼 한쪽이 들고 있던 이쑤시개로 깊게 파였다. 집안 사람들이 달려들었고 윤치승이 얼굴을 붙잡고 쓰러졌다. 주영이 치승에게 올라탄 후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순식간에 집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었다.
‘이소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이,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잠시 잊었다. 제 아비가 제가 자리 비우기만 기다렸다는 것을.
주영은 집 안 물건을 모조리 부수고 악을 썼다. 윤치승이 아끼는 도자기와 패물들의 절반이 그날 다 박살이 났다. 윤치승의 사람들이 주영의 양팔을 붙들고 무릎을 꿇렸다. 난생처음 아버지에게 악을 쓰며 대드는 이유가 덤으로 키워 준 사촌 동생을 멋대로 내보냈다는 이유인 것이 그렇게나 괘씸할 일이었는가.
윤치승은 하나뿐인 아들의 머리통을 나무조각상으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비겁했다. 20대 아들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중늙은이는 제 아들을 체벌하려 사람들의 손을 썼다. 어머니는 방관했다.
관자놀이에서 피가 흐르고 얇은 눈두덩이가 터지고 입술이 찢어지고 어금니가 나갔다. 이명희가 겨우 말려 조만간 있을 미술관 개관식에 내보내야 하니 손찌검을 그만두라는 말에 그제서야 윤치승은 씩씩대며 두툼한 손을 내려놓았다. 일하는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가렸다.
‘호모병에 걸린 개새끼, 이 씹할…. 개관식 전까지 이 또라이 같은 자식 집에서 내보낼 생각 하지 마.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새끼 정신머리 고치기 전까지는 물 한 모금 주지 말고 저 빈 방 안에 가둬 놔.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절대 열어 주지 마. 뒤주에 갇혀 뒈지던지 말던지.’
주영은 바닥에 엎어져 실실 웃었다. 내가 뒤주에 갇히면 당신은 뭐, 영조라도 된다던가. 늙어서도 권력에 빌붙는 인생이 좆같다.
그렇게 이소가 지냈었던 빈방 안에 일주일을 갇혀 있었다. 스물넷이나 되어서 방 안에 갇혀 있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일반 사람은 모를 것이다.
환기용 창문은 아이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작았고 바닥은 수시로 벌레가 기어 다녔다. 수평이 맞지 않는 바닥은 걸을 때 어느 부분은 삐걱삐걱 소리가 났고 어느 부분은 틈이 갈라져 돌가루가 밟혔다. 화장실이라고는 쪼그려 쓸 수 있는 아주 작은 수도가 연결된 1평 남짓한 공간. 밖에서 문을 걸어잠그면 문을 완전히 부수지 않는 이상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윤치승은 집에서 잡일 하는 사람이 쓰던 곳을 어린 이소에게 내어 주고 15년을 그곳에서 기거하게 했다. 이소는 단 한 번의 불평이 없었다. 그저 항상 백부·백모께 감사해했다. 주영은 제가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평안히 사는 동안 이소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 뒤늦게 한스러웠다.
“방 안이 온통 너의 흔적이더라. 키가 자랄 때마다 연필로 그었던 선, 열 살 때 제일 좋아했던 만화 스티커는 너덜너덜 낡았지만 여태 붙어 있었고, 둘이 레슬링 한답시고 침대에서 구르다가 벽을 찍어서 생긴 흠집도 거기 그대로 있었어. 너만 빼고. 너만 빼고 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어.”
시위하듯 그 방 안에서 일주일을 겨우 버텼다. 죽어도 잘못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저는 아버지에게만큼은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이명희가 울며 빌어서 겨우 문이 열렸을 때는 반쯤 기절한 주영이 히죽히죽 웃는 낯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공황발작이었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 아니어도 누구라도 일주일째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흰 방 안에 갇히면 일으킬 수 있는 증상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졌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런던에 가는 비행기는 모조리 취소되었고 유학도 미뤄졌다.
‘이제 제 아비 무서운 줄을 알겠지. 주영이 놈 가는 길에 사람 붙이고 시시각각 나한테 보고해. 딴짓거리 못 하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정신과 의사가 시시각각 찾아 들어와 온갖 말도 안 되는 검사와 기도를 동시에 해댔다. 제 정체성과 사상, 신념을 모조리 뜯어고치려는 윤치승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단 한 번도 이소에게 그런 역겨운 짓을 하지 않았건만 윤치승은 이소와 붙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갖 추잡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맥락을 읽은 이소가 말없이 주영을 바라보고 있자 주영은 조용히 왼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 줬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셨는지 끝났어.”
주영은 한숨을 쉬며 술을 들이켰다. 방에서 나온 그 뒤로도 쭉 몇 달을 집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윤치승의 사람이 쫓아다녔다. 재계도련님이 아니라 악질 범죄를 저지른 죄수 같았다.
“믿을 만한 놈이 하나도 없었어. 다 나를 감시하고 있었거든.”
주영의 주변인들마저 모두 아버지의 사람이었기에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생길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척, 성실하게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 척 굴었다. 제 담당 비서도 세 번이나 갈아치웠다. 하나같이 감청을 하다가 주영에게 들키고, 서류를 빼돌리다 주영에게 발각되었다. 진절머리가 났다.
범양은 주영이 영국에 가기 직전 가장 세를 많이 불렸다. 아직 대학생 신분이지만 영국에서 경영을 배우고 돌아올 주영의 자리도 미리 마련했다. 중견 재단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퍼포먼스와 공격적인 마케팅은 거금을 들여 외국에서 사 온 전문가들의 작품이었다. 주영은 공식석상에 자주 나갔고 그만큼 인지도도 커졌다. 윤치승의 경계도 느슨해졌다.
어느 정도 저를 완전히 믿는다고 생각했을 때 즈음, 주영은 다시 사람을 풀어 다시 이소의 뒤를 밟았다. 늦었지만 그래도 좁디좁은 대한민국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없을 거라 여겼다. 언제나 저는 이소를 찾는데 도가 터 있었고, 이소도 항상 제 사정거리 안에는 있었다.
그러나 이소가 사라진 지 두 달,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소는 그날을 기점으로 핸드폰이라든지 메일이라든지 모든 전자기기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통장에 있는 돈은 이소가 떠났다던 밤의 다음 날 모조리 인출되었다. 누군가 도용을 했나 싶어 CCTV를 찾아봤지만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제가 가진 돈의 전부를 은행에서 찾은 남자는 제가 아는 윤이소가 맞았다.
왜?
“도대체 왜. 계속 그런 의문이 따라다녔어. 왜 나갔지. 분명 나하고 얼마 전까지 연락했는데, 기다릴 거라고 했는데. 사실 다 거짓말이었나,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 거짓말이었나. 너를 찾으면 찾을수록 그런 생각뿐이었어.”
“…….”
이소는 범양에서 나온 그 날, 진혁의 집에서 많은 것을 했다. 범양이 추적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차단하자. 자신의 뒤가 밟힐 수 있을 거라는 피해망상은 모든 주소와 연락 수단을 해지하고 없애 버렸다. 혹여 꼬리가 밟힐까 봐, 마음이 바뀌어서 백부가 저희 부녀를 쫓아와 야산에 묻어 버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밤중에 누가 노크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랐고 조용히 이소를 부르면 짐을 싸서 나가라고 할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때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리는 밟혔지만 제 딴에는 필사적이었다.
윤치승 회장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물넷의 윤주영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분명 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낮과 밤이 되면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새벽이 되면 또 사람을 시켜 이소의 뒤를 밟을 수 있을 만큼 뒤졌다. 영국으로 다시 떠나기 전 이소를 찾고 싶었다.
저를 찾았다는 주영에 말에 이소는 말을 삼킨 채 귀를 기울였다. 술을 잔뜩 마셔서 깜빡깜빡 졸음이 올 법도 한데 정신은 또렷했다. 제가 없는 동안의 주영의 시간은 주영의 입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이 일에 몇 명이 얽혀 있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네가 정말이지, 도무지 정말이지…. 찾아지지가 않는 거야. 말도 안 되잖아. 네가 갑자기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질 수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흔적도 안 남고 사람이 사라질 수가 있나. 누가 일부러 방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찾기 어려울 수가 있나. 그렇게 일 년을 매달려서 너만 찾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 년을 너 하나만 찾았어.”
그럴 만했다. 이소는 그 당시 집을 나가고 몇 해를 정말 쥐 죽은 듯 숨어 살았다. 전화도 연락도 되지 않는 작은 암자에도 들어가 일을 해 주기도 하고, 센터에 아이를 맡겨 놓고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 일당직을 하며 살았고, 수십 번 지방으로 이사 다니면서 고되게 보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백부가 보낸 사람들일까 봐 그저 먹던 찌개도 내려놓고 아이를 데리고 몸을 피했다. 경찰을 보면 마음을 졸였고, 인상이 험상궂은 사람들만 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누구라도 제 손에서 아이를 빼앗아 갈 수 있었다.
아이 아빠라고 말하고 다니다가 서류를 보여 주면 동거인으로 찍혀 있는 저와 해수를 번갈아 보다 경찰을 불렀을 때는 무작정 겁이 나 뛰기부터 했다. 범양가 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바깥세상은 제 생각보다 더 집요하게 가짜 부녀에게 유난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숨어다녔다. 생활이 안정되어 해수가 어린이집에 제대로 다니기 시작한 때를 제외하고는 정말로 아무도 찾지 못하게 잘 숨어다녔다.
그렇게 일 년, 주영은 여전히 ATM기 앞에서 불안하게 돈을 찾는 이소의 사진만 품에 넣은 채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런던에 가서도 윤이소 찾기는 계속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어려웠고 속도는 더뎠다. 안타깝게도 간절했던 감정도 조금씩 마모되었다. 다만 실망이 계속되면 결과에 무던해지는 것뿐, 빠르게 다른 방법을 찾아내고 경로를 물색하는 것으로 바뀌는 정도였다.
“그렇게 런던에서 지낸 지 3년이 다 되었을 무렵, 네 소식을 들었고 나는 가타부타 따질 것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어.”
반가웠겠네. 이소는 주영이 찾은 제 모습이 어땠을지를 생각했다. 아이를 안고 있었을까,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하고 있었을까. 네가 기억하는 내 마지막 모습은 몇 살의 윤이소였을지 호기심이 들었다.
이소는 테이블에 놓인 주영의 손을 보았다. 떨고 있었다. 이소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리며 제 눈을 의심했다. 주영은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흥분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울거나 떤 적이 없었기에. 윤치승에게 대들고 물건을 부쉈다는 말조차도 믿기 어려웠다. 주영은 모든 일에 초연했고 담담했으며 이소와 함께 있을 때는 대체로 조용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런 주영이 지금 이소 앞에서 마치 분노를 참는 듯 입술을 물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초라한 장례식이었어.”
흔들리던 시선이 멎었다. 이소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주영을 응시했다. 주영의 눈가가 붉었다. 너무 작고 협소했다. 그것마저도 제가 계속해서 알아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아무도 찾지 않는 범양의 숨겨진 차남의 장례식장에는 오로지 주영과 비서뿐이었다. 활짝 웃는 제 동생의 영정 사진을 보며 주영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주영은 목이 메는지 술로 목을 축였다. 살짝 입만 적시고 다시 떨어진 컵 안에는 거의 다 녹은 얼음 조각이 가볍게 둥둥 떠 있었다. 곧 녹을 것 같았다.
“사고였대.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하다가 11미터 철근 위에서 미끄러졌고 즉사했대. 내가 선물로 준, 유독 네가 좋아하던 니트를 입고 웃고 있는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했더라. 처음엔 눈물도 안 나왔어. 믿기지가 않아서. 오랜 시간을 돌아 결국 찾아낸 네가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뜰 리 없다고 생각했어.”
이소는 혼란스러웠다. 그 시기에 일당꾼이기는 했지만 저는 여기 버젓이 살아 있었다. 밥도 잘 먹고, 잘 웃고 빠듯한 형편이기는 해도 해수와 즐겁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주영의 시간 속 윤이소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렇게 네 뼈를 태운 걸 가지고 영국으로 갔어. 아까워서 뿌리지도 못했어. 내가 벌을 받았구나 생각했어. 은형이도 버리고 아이까지 외면했더니… 결국 아끼던 너까지 잃는 걸로……. 이렇게 큰 벌을 받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주영은 런던에 도착해서야 이소의 지난 사진들을 한 장 더 받았다. 사진 속 이소는 안전모를 쓰고 벽돌에 기대어 지쳐 잠이 들어 있었다. 그사이에 골격은 조금 더 남자다워졌고 선이 조금 더 진해졌지만 여전히 사진 속 남자는 제가 좋아하고 아끼던 동생이었다. 이때는 살아 있었는데. 내 작은 도련님, 집을 나와 고생을 많이 했네.
‘이소야, 이소야… 이소, 야….’
결국 사진을 내려다보던 주영은 그대로 무너져 크게 오열했다.
벌은 내가 다 받을게. 내가 정말 잘못했어. 앞으로는 착하게 살게. 그러니까 다시 오면 안 될까. 한 번만 다시 보면 안 될까. 그럼 진짜 네 말만 들을 건데.
그렇게 주영은 단지를 끌어안고 밤마다 울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울었다. 근 스무 해를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척 크게 울었다. 제가 그렇게 크게 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국에 있을 때 내내 터지지 않았던 눈물은 바다를 건너고 오롯이 혼자가 되어서야 둑이 터지듯 콸콸 쏟아졌다. 몇 주가 지나도 상태가 나아지질 않자 윤 회장은 위로인지 조소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다 잊어버려라. 저 혼자 살겠다고 나간 녀석이 그렇게 죽을 줄 알았겠냐. 그래도 이 비서가 미리 발견해 시신은 찾았으니 이제 너도 그만하고 네 인생 찾거라.’
그 말을 들은 주영은 대꾸도 없이 조용히 담배만 태웠다.
아팠겠다, 우리 이소. 아픈 거 되게 싫어하는데.
또 아이처럼 질질 짜며 울었다. 사는 게 지옥 같았다.
주영은 그 뒤 밤낮없이 일만 했다. 이소를 찾는 일을 관두고 나니 남는 시간은 오로지 일뿐이었다. 그 시기 윤치승 회장은 몸 안에 종양이 자라고 있었고 발 빠르게 주영 앞으로 승계 작업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즈음 기업 합병으로 몇 번 자리가 오갔던 철강그룹의 장녀와 식도 올렸다. 첫 만남에서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두 번째 만남에서 결혼 약속을 하고 세 번째 만남은 식장이었다. 주식 5000주 증여가 마치 예물처럼 오갔다. 물론 ‘오랜 열애 끝에 드디어 웨딩마치’라는 이름으로 대서특필되었다. 모든 것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공허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의 제 삶이란 이런 것이었나.
작은 영화관에서 먹었던 팝콘이나 콜라, 은형과 셋이서 다 같이 갔었던 놀이동산, 강가에서의 피크닉, 영화를 보다 소파에서 잠이 드는 게으른 밤, 지하실에서 마셨던 아버지의 소주.
아무것도 모르는 이소에게 맞추어 소박하게 즐겼던 하루하루가 이제는 저와는 관련이 없는 삶이라는 걸. 저를 보며 환히 웃고 있는 아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주영은 애써 웃음 지었다.
영국에서의 결혼 생활 내내 아내와 주영 사이에서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시어머니인 이명희가 아내를 들들 볶았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고부 갈등은 잦은 부부싸움으로 이어졌고 기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지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범양의 주식은 곤두박질쳤고 윤치승과 이명희, 이제는 처가식구들까지 달려들어 주영을 압박했다. 특히나 어머니인 이명희와는 계열사 경영권을 놓고 지분율 경쟁이 지난하게 이어졌다. 물론 밖에서 보기에는 다툼 하나 없는 평화로운 가족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많이 위중하셔서 한국에 돌아왔어. 나도 영국지사장 자리는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고. 여전히 어머니와의 경영권 싸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아들로서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 적어도 임종 직전에는 곁에 있어야 하는 그런 거.”
이소는 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주영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즈음이었다. 납골당에서 이명희를 마주치고, 매체에서 윤치승의 건강 악화에 대해 떠들 때 이소는 저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해수 문제로 시끄럽게 얽혀 있지만 처음 그 집에 들어갔을 때부터 나올 때까지 윤이소는 단 한 번도 윤씨 일가가 운영하는 범양의 가족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정말 우연처럼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떤 어린아이의 사진을 봤어.”
이소는 직감했다. 천천히 눈을 들자 가볍게 말아 쥔 손으로 턱을 괴고 기억을 더듬는 주영의 쓸쓸한 낯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이를 안고 있는 너도.”
사진 날짜는 가장 최근. 그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더라. 내가 알고 있는 모습보다 더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고, 그 옆에 선 아이는 퍽 네가 좋은지 안겨서 떨어질 줄을 모르더라고. 그 사진 외에도 몇 장을 더 봤어. 모두 아이와 함께 있는 너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꽤 많았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사진에 찍혀 있는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뛰었다. 죽은 줄 알았던 윤이소가 시간을 거슬러 주영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부분 몰래 찍은 듯 흔들린 사진이 전부였지만 누가 봐도 제가 아는 이소였다.
“평화로워 보이더라. 아주 잘 웃고, 즐거워 보이고, 걱정 없이 사는 것 같았어.”
주영은 급히 사진을 챙겨 들고 서재를 나왔다. 그리고 즉시 아버지의 사람이 아닌 자신의 수하 중 가장 믿을 만한 이에게 연락을 취했다. 지금 바로 이 사람을 찾아 줄 수 있겠느냐고, 따로 연락하지 말고 안위만 제게 보고해 달라고.
“그리고 널 마주한 게 얼마 전이지. 진짜 살아 움직이는 널 보고서도 차 안에서 발이 안 떨어져서 돌아가기만 몇 번. 내가 보낸 장미를 받고 환하게 웃는 걸 보고 괜히 마음이 들떠서 몇 번을 더 보냈는데…. 짐처럼 느껴질 줄은 몰랐어, 미안.”
이소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예전부터 항상 그랬다. 이소가 뭐가 맛있다고 하면 질려서 다른 걸 먹고 싶을 때까지 오직 그것만 사 왔다. 더 이상 물려서 못 먹겠다고 하면 고개를 기울이며 ‘좋아한다고 했잖아.’ 하는 모습이 꼭 어린애 같아서 웃음을 터뜨리기를 여러 번. 그러나 누가 보냈는지도 모를 꽃바구니를 매번 받아 들고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보통 나중에 가서는 무서워할걸. 단순한 애정으로 그랬다는 고백에 기가 차 짧은 한숨을 토했다.
“네가 카페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사실들이 진실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라.”
그날 이후 주영은 바로 윤치승과 이명희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이소를 찾는 것과 별개로 제 아비 어미의 뒤를 캐는 일은 더럽고 추접스럽다며 하지 않았던 주영이었다. 사실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하니 자신의 부모가 저를 상대로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한 달도 안 되어 고구마 다발처럼 줄줄이 나오는 허술한 기록과 행적에 헛웃음이 나왔다. 스물넷의 저는 절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7년이 지난 지금 권력의 정점에 서자 손가락 하나로도 쉽게 가능해졌다. 은형의 사망 이후 윤이소는 감쪽같이 제 앞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찾지 못하게 흔적을 지우려고 한들 고작 일반인이 자신을 완전히 세상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숨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겨 준 것이 아니라면.
즉 돈줄을 쥔 자가 정보를 틀어막은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살아 있으면서 흔적을 지우는 일. 그것도 특정인에게만 발각되지 않게 하는 일. 스물넷의 주영의 주변에는 모두 부친의 끄나풀투성이였고 그들은 윤치승의 눈과 귀와 입, 손발이었다. 이런 꼴이니 바로 코앞에 있어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윤이소의 삶은 여러 갈래로 조작되었다. 범양에서 조작된 여권과 신분증만 여러 개였고 언제라도 주영이 꼬리를 잡았을 때를 대비해 잘라 낼 수 있게끔 준비된 루트가 있었다. 개중에는 일본으로 장사를 하러 떠나 배에서 객사하는 시나리오도 있었다.
‘씨팔,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애가 무슨 일본이야.’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그 작업은 주영의 간절함 때문에 꽤 오래 이어졌고 결국 윤치승은 좀처럼 주영이 포기하지 않자 서류상의 윤이소를 지워 버렸다. 물론 주영에게 전달된 기록 속에서만. 그 시기의 이소는 신용불량자 신세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방 어느 산골에서 잘 살아 있었다.
가짜 장례식은 그럴싸하게 치러졌다. 실종된 동생을 찾는 일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아들 하나 속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닿을 듯 말 듯 희망을 주다 종래에는 그 끈을 끊어 버리는 것. 다른 이의 간절함을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내어 버리는 것. 젊은 시절 도박과 경매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던 치승은 아들의 삶마저 장기 말처럼 쥐고 흔들었다.
그런 일에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는 이, 윤치승은 날 때부터 그런 잔인한 성정을 갖고 태어났다. 주영은 제 앞에 놓인 사진들을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너의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스물여섯, 스물일곱. 내가 잃어버린 칠 년이 거기 있었다.
거짓.
다 거짓말이었다.
윤이소가 스스로 집을 나갔다는 것도 거짓.
행방을 모른다는 것도 거짓.
죽었다는 것도 거짓.
제 인생도 거짓.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거짓.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죄다거짓거짓거짓거짓말거짓거짓말거짓거짓말거짓모든게거짓말…!
주영은 곧바로 서재에 신줏단지 모시듯 올려 두었던 유골함을 집어 던졌다. 엄한 놈의 뼛가루를 끌어안고 버린 시간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님, …죄송해요. 이번에도 임신이 아니래요.’
어머니가 저와 아내에게 더 이상 아이 문제를 의논치 않게 되었을 때 드디어 쓸데없는 일에 힘 빼는 것을 관두었구나 생각했다. 아니었다.
‘괜찮다. 우린 언제나 방법을 찾곤 했잖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들에게는 그저 보험이 있었을 뿐.
탁란(托卵)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새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낳아 키우게 하는 일. 대표적인 탁란조인 뻐꾸기는 모성애가 뛰어나고 헌신적인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작은 둥지에 알을 깐다. 뻐꾸기 새끼는 그 둥지에 있는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알들을 모두 둥지 밖으로 떨어뜨린다. 때로는 살아 있는 새끼마저도 어미가 둥지를 비우면 밖으로 밀어내 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자신이 오목눈이의 새끼인 양 먹이를 받아먹는다.
형, 밖에 누가 강아지를 버렸길래 데려왔어. 큰아버지한테 안 들키게 데리고 있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어?
붉은머리 오목눈이는 성체가 되어도 뻐꾸기 새끼보다 두 배는 작다. 그러나 그 작은 몸을 하고 제 가짜 새끼에게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나른다. 먹여도 먹여도 성에 차지 않는 제 새끼의 배를 채우려, 지친 몸을 하고 다시 날갯짓을 한다. 결국 둥지보다 커 버린 뻐꾸기 성체는 오목눈이 어미가 자리를 비우면 그대로 자리를 떠난다.
개? 그거 내가 내다 버렸다. 어디 얹혀사는 주제에 몰래 개까지 주워다 길러. 그 새끼 그거 가끔 얼빠진 짓 하는 거 너도 너무 봐주지 마라.
그렇게 먹이를 물고 돌아온 오목눈이는 빈 둥지에서 홀로 오지 않을 뻐꾸기를 기다린다.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홀로 남는다.
‘그런 취급을 해 놓고 이제 와서….’
윤치승과 이명희가 천덕꾸러기였던 이소를 기어코 내보내고 꾸준히 지켜본 일. 여린 성정을 가졌지만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아이를 끝까지 키워 낼 적임자. 제 살을 다 깎아 먹더라도 아이만큼은 조용히, 바르게 길러낼 사람. 그러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대로 폐기 처분해도 되는 존재. 윤이소는 그렇게 탁란의 숙주로 사용되었다.
제 DNA가 99.9% 일치하는 친자검사지와 IQ 182의 영재기록지를 들여다보며 주영은 길게 대마를 태웠다. 강해수,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탐낼 만한 수재였다. 그래, 아무것도 모를 때 데려오고 싶겠지. 그래서 이 차명 계좌로 아이 몫의 지분을 옮길 계획이었고.
작업 초반에는 윤이소가 필요할 것이다. 양육자이면서 보호자인 이소와의 관계가 갑자기 끊어지면 아이는 혼란스러워할 테고 최악의 경우에는 상품 가치가 사라져 버릴 테니까. 그리고 점차 그 어린아이의 눈에 각인시키고 싶었을 테다. 자본의 위용을, 자신이 살았던 삶의 초라함을, 손만 뻗으면 언제든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조부모를, 이 모든 걸 네 손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죽기 전 핏줄을 찾는 낭만적인 이유가 아니야.”
후계 구도에 또 다른 말을 추가하는 거지. 거기까지 들은 이소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테이블에 엎드렸다. 주영은 그런 이소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게임에 계속 발을 붙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진흙탕 싸움에서 고고한 학이 되려고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족이라 생각했던 자들의 이기적이고 잔혹한 행태에 한 톨 남은 인간적인 정까지 모두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더러운 싸움이라면 주영 역시도 온몸에 먹과 겨를 묻히고 달려들 생각이었다.
“이소야.”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영을 마주하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 너에게 사과 바구니를 줬어. 그 안에는 속이 곯은 것과 아닌 것이 섞여 있어. 그럼 넌 어떻게 할래?”
이소의 미간에 얕은 골이 패였다. 때아닌 사과는 또 무슨.
“…아닌 것은 골라내고 썩은 것은 도려내서 쓸 것 같은데. 형은?”
주영은 살풋 웃었다. 살릴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살리는 윤이소다운 생각이었다.
“바구니째 버릴 거야. 다른 것까지 모두 병균이 옮았을지 모르니.”
“…….”
“아버지가 가진 범양은 썩었어. 네 일 이외에도 온갖 불법적인 일이 얽혀 있고 몸집 불리기만 급급해서 조금만 건드리면 곧 터질 거야. 아마 아이 일이 이미지에 치명타가 되겠지만 기왕 싹을 자르는 거 뿌리까지 들어내야지.”
주영은 마지막으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일반 연초와 다르게 짙은 단내가 매캐하게 주영을 휘감았다. 처음에는 조금 매운 듯했는데 계속 맡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항상 제 눈에는 어른스러운 주영이었지만 7년이 지난 지금의 주영은 조금 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럼 난 이제 무얼 하면 되는….”
“넌 그냥 지금처럼만 있어.”
말꼬리를 자른 주영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가 풀어야 할 문제야. 잘못된 것은 고치고 부수고 없애서 처음으로 돌아갈 테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걱정하지 마, 아이의 존재가 알려지거나 기사화되는 일은 없을 거야. 지금처럼 그냥 넌 웃으면서 잘 지내면 돼. 네가 더 이상 상처 받는 일은 만들지 않게 할 거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주영이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이소의 심장도 동시에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마치 납덩어리를 목을 감은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이소는 남은 술을 모조리 들이켰다. 도려내는 걸로 안 되는 수준이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 * *
몇 병을 마셨는지 모른다. 이소는 반쯤은 테이블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었다.
뒤늦게 찾아온 술기운에 이소는 다시 한번 주영이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개새끼. 존나 나쁜 새끼. 쓰레기 새끼, 개호로새끼. 인간도 아닌 놈, 미친놈…. 아는 욕을 죄다 내뱉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사실 무엇보다 지난 7년간 이소가 죽을힘을 다해 살아온 나날들은 윤치승 회장에게는 그저 장기판의 말을 놀리는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는 게 너무나도 허탈하고 슬펐다.
자신이 윤치승 회장에게 해수를 담보로 돈을 뜯어내거나 협박하지 않은 것도, 모두 언젠가 자라서 사실을 알게 될 해수가 상처를 받을까 봐였다. 윤 회장은 회사에 타격이 있을까 봐 쉽게 터뜨리지 못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쪽은 인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갉아먹기 좋아하는 기자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제가 조금만 약았더라면 잘 키운 아이를 인질로 쥐고 얼마든지 더러운 짓거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소는 푸후 한숨을 내쉬었다.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화장실에서 손만 씻고 숨을 돌릴 생각이었는데 정작 변기를 붙잡고 한바탕 토악질을 했다. 술과 안주가 쏟아져 나왔다. 주영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명치께가 울렁거렸는데 게워 내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 이소는 손을 씻고 전화를 들었다. 몇 번의 수화음이 갔지만 해준은 받지 않았다. 벌써 자나.
목소리는 너무 많이 잠겨 있었고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져 제대로 된 발음이 나오지 않았다. 꾹꾹 눌러 해준에게 ‘저 들어갈ㄱ ㅓ 에요. 술 많이 마셧서요. 죄송해요. 곧봐요.’라고 보내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타가 엄청 많았던 것 같은데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핸드폰도 두 개로 보였다. 아니 세 갠가. 와, 나 핸드폰 세 개다!
비틀비틀 바에 들어가자 물을 건넨 주영이 걱정스레 낯을 살폈다.
“괜찮아?”
“응,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나 진짜 괜찮, 어으….”
“적당히 마시지 그랬어. 얘기 듣기만 해도 되는데.”
이소는 벌게진 눈으로 주영을 한 번 흘겼다. 속이 상해서 그렇지, 속이 상해서. 이소는 주영이 건넨 물잔을 받아 들고 한입에 들이켰다. 냉수가 들어가자 울렁거렸던 속이 조금 나아진 것도 같았다. 미간을 구기며 자리에 앉았지만 자꾸만 머리가 어지러웠다. 뒤늦게 술이 도는 듯 싶었다. 집에 가야 하는데 자꾸만 고개가 고꾸라졌다.
“이소야, 집에 데려다줄게. 일어나 봐.”
“아니야…. 나 여기 조금만 엎드려 있으면 금세 나아져. 아까, 토도… 하고 왔거든. 그럼 금방 깰 거야. 나 토하면 잘 깨.”
“그렇게 술이 늘었어? 너 테킬라만 3잔 넘게 마셨잖아. 그거 독한 건데, 얘 눈 감기네. 윤이소, 일어나 봐. 이소야, 집. 집 가자. 저번에 갔던 데로 데려다주면 되지?”
“아니…야아, 나…… 이사…. 갔…. 어어….”
주영이 몇 번이나 등을 두드렸지만 점차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집 주소, 주소를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해준의 집은 제 빌라에서 눈 감고 걸어서도 갈 수 있었지만 주소를 부르라면 애매했다. 그것도 정신이 말짱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수마가 덮쳐 온다. 주영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눈에 보이는 문장과 단어가 되어 머릿속을 웅웅 떠다녔다. 마치 소설의 인용문처럼 선명한 형태를 지닌 기억들이 주영의 목소리로 재생된다.
걸레 같은 새끼.
난 일 년을 매달려서 너만 찾았어.
추락사였대.
그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넌 걱정하지 마, 그대로 있어.
일어나 봐, 나랑 가자.
이소야, 듣고 있어?
윤이소, 이소야. 이거 뭐야.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었잖아….
나 가 볼게.
또 봐. ……해.
주영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이소는 팔을 휘적거리며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해, 듣고 싶지 않아. 이제 다 들었어. 이제 다 알겠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이소는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쉬고 싶다. 뭐가 이렇게 어렵고 힘든 건데. 그냥 평범할 수는 없는 거였나. 내가 바란 건 그냥 해수랑 행복하게 사는 거였는데. 해수가 그래도 된다고 하면 스물이 지나서도 대학교 졸업식도 가고, 좋은 사람 만나서 웃는 얼굴 보는 거 정도였는데. 생각보다 큰 싸움이 되겠구나.
허공에 발이 닿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음은 진짜 나쁜 거구나. 하늘을 나는 것 같다. 이소는 눈을 감고 해준의 정원 문을 여는 상상을 했다. 푸릇한 풀내음이 나고 납작한 디딤돌을 사뿐사뿐 걸어 몸을 돌리면 개구리가 골골 우는 작은 연못에 걸터앉은 제 연인을 생각했다. 깨끗한 얼굴을 하고 저를 보며 ‘이소 씨, 기다렸어.’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보고 싶다.
그렇게 의식이 끊겼다.
* * *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상앗빛이 어슴푸레하게 물든 천장이었다. 은은한 조명이 몰딩을 타고 뻗어 방 안을 밝혔다. 생소한 풍경이었다.
이소는 눈을 몇 차례 더 깜빡이며 제가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늠했다. 몸을 감싼 침구가 사부작거릴 때마다 시원한 감귤 향이 났다. 무거운 손가락을 들어 이불을 삭삭 긁어내리며 더듬었다. 아무 무늬가 없는 흰 시트는 손톱에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다. 멍한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해준의 집에서 쓰던 이불의 촉감이 아니다.
이소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침대에 팔을 받히고 다시 앞으로 고꾸라졌다. 숙취가 가시질 않았는지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에 잡히는 대로 탁자 옆에 있는 생수를 들이마셨다. 꿀꺽꿀꺽,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500mL 짜리 생수 하나를 완전히 비우고 난 이소가 머리를 흔들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방 안을 둘러보자 진회색의 카펫, 엄청나게 큰 베드, 티 테이블과 소파,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통창, 그리고 현관 옆에 붙어 있는 욕실까지 있었다. 자신은 지금 호텔 방 안에 있었다.
분명 어제 주영과 같이 술을 마시고 집에 가려고 일어났던 것 같은데 전혀 뜬금없는 곳에서 눈을 떴다.
주량이 과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렇게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이소는 욕실로 가려다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잠시 당황해 서 있었다. 맨몸에 흰 샤워 가운만 입고 있었다. 그 와중에 씻었는지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나 자신이 꼼꼼했던가. 코끝을 매만지며 상념에 빠져 있던 이소의 발끝에 젖은 옷가지가 채였다.
‘어, 옷을 여기에 벗어 놨나.’
고개를 내려 확인한 이소는 숨을 참고 인상을 구겼다. 어제 제가 입었던 옷에 술을 게워 낸 듯 역한 냄새가 잔뜩 났다. 아, 또 토했나 봐. 옷가지를 들추어 시계와 지갑을 찾았다.
지갑은 세면대 위에 있었지만 시계는 미끄러졌는지 변기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호텔이어도 변기는 변기다. 이소는 얼른 시계만 꺼내어 흐르는 물에 고약한 냄새를 씻어 냈다. 옷은 대충 애벌빨래를 한 후 걸어 두고 변기 옆에 쪼그려 앉아 시계를 들여다봤다.
“어떡하지. 아, 어떡해….”
속상했다. 어제 도대체 얼마나 과격하게 행동한 건지 시계의 전면부가 깨져 있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초침은 부드럽게 돌아가지 못하고 째깍째깍 같은 자리만 왔다 갔다 하면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제가 가진 것 중 제일 예쁜 것이라 진혁에게 자랑하고 싶어 차고 나온 거였는데. 정작 진혁은 네가 가격을 알면 이런 껍데기집에 차고 나오지도 못할 텐데 나중에 찾아보기나 하라며 호들갑을 떨었었다. 분명 어제 바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넘어지면서 어디 바닥에 찍혔나 보다.
이소는 시계를 티슈에 놓고 잘 개킨 후 주머니에 소중하게 집어넣고 자리로 돌아왔다. 몇 시지, 핸드폰의 시계를 보니 무려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4시? 새벽 네 시라고?’
이소는 전화를 들었다. 자신이 메시지를 보낸 이후 부재중 전화가 3통이 와 있었고 메시지는 ‘어디쯤 오고 있어요?’라고 한 뒤 조용했다. 얼른 통화 버튼을 눌러 한참을 기다렸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연달아 걸었지만 해준은 받지 않았다.
“주무시나…?”
답지 않게 먼저 잠들었는지 잠잠한 전화를 잠시 바라보던 이소는 메시지를 보낼까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얼른 출발하는 게 나을 듯 싶었다.
“맞다. 옷이 다 젖었지, 참.”
옷이 마를 때까지 있을 수도 없고 어쩌나, 떨떠름한 표정으로 침대로 다시 돌아온 이소는 티 테이블에 놓인 작은 상자와 단정한 글씨로 쓰인 편지를 발견했다.
이소는 상자를 들어 제 옆에 내려놓고 편지부터 집어 들고 읽어 내려갔다. 필체가 낯익다 했더니 주영의 편지였다.
너 힘 진짜 세더라.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이사한 집 주소를 몰라서 호텔에 놓고 가는 거 미안. 토를 너무 많이 해서 대충 씻기긴 했는데 요령이 없었다, 그것도 미안. 일어나면 다시 제대로 씻고 가는 게 좋겠어. 옷은 호텔에 요청해서 세탁 맡기고 쉬고 가. 조심히 들어가. 또 보자.
p.s 부서진 부분 보완해서 수리했어. 옛날 생각나서 사이렌도 넣었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조금 오래 걸렸지만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소는 작은 상자에 눈을 돌렸다. 오래전 해준에게도 비슷한 크기의 상자를 받고 반지로 오해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소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열린 상자 안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빨간 장난감 자동차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어, 어… 이거.”
아주 오래전 엄마와 함께 동네 문방구에서 산 장난감이었다. 워낙 손이 작았던 터라 손에 폭 들어오는 장난감을 가지고도 참 잘 가지고 놀았다. 어린 이소의 보물 1호였다.
이걸 주영이 여태 가지고 있었다니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이렌 넣었다고 했지. 가운데 버튼을 꾹 누르자 호텔 방이 떠내려갈 듯한 요란한 경보음에 이소는 화들짝 놀라 얼른 이불 안으로 장난감을 집어넣었다. 소리는 한참 만에 멎었다. 정적이 찾아오자 이소는 입술을 달싹이며 시트에 머리를 묻은 채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하하, 하하하.”
그렇게 제 손바닥 안에 폭 들어오는 자동차를 쥐고 한참을 웃었다. 성인이 되어 생긴 보물 1호는 해준이 준 시계였는데 소중한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사람 마음이 얼마나 단순한지 간밤의 불쾌함은 곱게 적은 편지와 오랜 장난감 하나에 점차 휘발되고 있었다.
물만으로 애벌빨래 한 옷은 드라이기로 대충 말린 후에 걸쳐 입었다. 조금 축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름이니 걷다 보면 금방 마를거라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늦기는 했지만 택시를 타고 바로 후원 쪽으로 올라가면 그래도 동이 트기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준의 고운 얼굴을 봐야지, 기대했다.
* * *
호텔을 나오자 공기 중에 미약하게나마 비 냄새가 났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호텔 앞에는 택시가 줄을 서 있었다. 일단 빌라 주소를 부른 후 근처에 가서 기사님께 직접 후원 뒷문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기로 했다. 달이 밝은 것인지 아니면 먼 곳에서 동이 터 오는 것인지 하늘은 아주 검지 않고 희끄무레한 흰색이 섞인 감색에 가까웠다.
후원 문 앞에 내려 언덕을 달음박질쳤다. 정문보다 해준의 안채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어서 이 길을 택했던 것이었는데 비가 내린 땅은 질척였고 그 때문에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꼴사납게도 기껏 물빨래한 옷에 흙이 엉망으로 튀었다. 해가 없는 이른 새벽, 대나무가 울창한 숲길은 조금 스산하고 음침한 분위기도 주었다. 산짐승이 튀어 나올 리도 없고 귀신도 믿지 않는데도 저절로 심장이 죄어들었다.
조심스레 후원 문을 열었다. 평소 같으면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을 나무문 소리가 유달리도 크게 들렸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의 후원은 대낮의 후원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 시계를 보자 시간이 다섯 시가 조금 못 되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꺼지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키가 작은 수국이 가득 핀 좁은 오솔길을 지나 안채 가까이에 발길을 멈췄다. 해준의 침실 불은 꺼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별채를 바라보았다. 평소 자신이 항상 켜 두던 해수 방의 불 역시 꺼져 있었다. 혹여 제가 늦으면 유모님이랑 같이 자라고 했는데 다행히 해수가 알아서 행랑채로 내려간 듯했다. 이소는 바지에 묻은 흙은 대충 털어 내고 툇마루에 앉았다. 바지는 조금 더럽지만 양말은 깨끗하니 자고 있는 해준의 얼굴을 잠깐이라도 본 뒤 욕실로 가서 씻고 침대로 기어 들어갈 생각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신발을 벗으려던 이소는 운동화 끈을 풀어내다 멀찍이 시선을 두고 얼른 다시 고쳐 맸다. 어둡기는 하지만 새벽의 감각은 기민하게 반응한다. 정자에 사람이 있었다. 전화를 아무리 해도 받지 않던 사람이 정자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제가 기다리던, 저를 기다리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갔다. 푸르른 밤의 장막과 같은 도포를 어깨에 걸친 채 앉은 자세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해준의 머리카락이 날렵한 콧등을 간질였다. 어째서 침대에서 자지 않고.
“교수님.”
나지막이 부르자 그 목소리에 반응하듯 빚어 놓은 듯 어여쁜 눈가가 움찔거렸다. 단정하게 겹쳐져 있던 속눈썹이 느리게 갈라지자 차분한 암녹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소는 손을 들어 해준의 창백한 흰 뺨을 감싸쥐었다.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살갗에는 땀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하긴, 해준의 저택은 이 동네에서도 특히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대체로 도심 한가운데보다 시원한 편이었다. 개중에서도 언덕 위 정원이 가장 서늘했다.
“뺨이 차요.”
이소는 엄지를 들어 서늘한 살갗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저 다녀왔어요.”
이소가 한 번 더 말을 건네자 그제서야 꿈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 해준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곤 이소의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손바닥만큼이나 따뜻한 입술이 해준의 입술에 깊게 닿았다. 아주 느리고 천천히 여린 살갗을 베어 물며 해준에게 몸을 기울인 이소는 제 작은 손으로 해준의 목덜미와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었다. 손이 닿는 곳곳마다 식어 있던 몸에 온기가 꽃잎처럼 돋는 느낌이었다.
해준은 손을 뻗어 이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맞댄 입술에서는 민트 향이 났고 몸에서는 감귤 향과 달큰한 담배 냄새가 났지만 아랑곳 않았다. 당장 다른 사람의 냄새를 묻혀 가지고 와 채근하는 것은 제쳐 두고 연락이 되지 않아 안달이 나다 못해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갈급하게 윤이소가 주는 키스를 받아먹으며 해준은 제 품에 그 작은 몸을 끌어안고 안정을 찾았다. 하루종일 보고 싶었다. 유난히 오늘따라 정말 하루종일 보고 싶었다.
키스를 하며 몇 번이나 자세를 엎치락뒤치락하던 둘은 그대로 정자 마루에 누워 한참을 뺨과 목덜미를 빨았다. 당장 섹스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준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어 속이 탄 사람처럼 이소에게 이마를 부비고 볼을 비볐다. 꼭 덩치 큰 개가 주인을 보고 왜 이리 늦게 왔냐며 토라진 것을 다 풀려는 것만 같아 이소는 얌전히 누워 해준이 하는 양 그대로 두었다.
눈이 마주치자 괜히 장난기가 돌아 손끝으로 턱을 간질이면 해준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미소 짓다가 다시 이마를 이소의 뺨에 부비곤 했다. 이소는 그게 퍽 우습기도 하고 해준이 귀엽게도 느껴져 머리를 썩썩 쓰다듬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슬쩍 고개를 든 해준이 눈을 흘겼다. 이소는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걱정했어, 연락도 안 되고.”
“죄송해요. 연락한다는 게 메시지를 안 보내고 보냈다고 착각했어요.”
“이소 씨 부담스러울까 봐 전화도 문자도 조금만 했는데.”
부담스러울까 봐. 이소는 머리를 쓰다듬다가 멈칫했다. 내 말을 신경 쓰고 있었구나. 미안해졌다. 해준은 여전히 이소를 끌어안은 채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고가 난 줄 알았어,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답이 없고. 술자리가 길어지나, 그래도 오늘 온다고 했는데.
그래서 기다렸지. 처음에는 안채에 있다가, 나중에는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 그다음에는 담장 근처를 내다보다가, 후문에도 서 있다가 그랬어.
문득 이소는 고개를 돌려 화로대를 찾았다. 가끔 마음이 헛헛할 때마다 정자에 나와 피우던 담배는 재를 턴 흔적도 없이 화로 주변이 깨끗했다. 이소의 시선을 눈치챈 해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끊을 거야.”
“좋아하시잖아요.”
“이소 씨한테 안 좋으니까요.”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이소는 웃으며 해준의 귀를 매만졌다. 밀랍으로 빚은 것 같은 이 고운 귀에는 좋은 말, 좋은 소식만 전해 주어야지.
어제 있었던 많은 일들은 실타래처럼 뭉쳐져 이소의 마음을 굴러다녔다. 아마 해준에게 풀게 되는 날이 오면 아주 천천히 차분하게 풀어내야지 생각했다. 그때 혹여나 듣다가 도망가 버리면 제 마음이 미어질지도 모르니 단단한 손목을 꼭 잡고 들어 달라 해야지. 물론 해준은 아마 끈기 있게 들어 주지 않으려나, 그리 바라며 이소는 쓰게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잘 지내고? 기자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네.”
“원래도 사회문제에 관심 많던 친구였어요. 멋지죠, 그렇게 공부하더니 결국 해냈더라구요.”
이소는 해준에게 진혁과 있었던 일들을 주절주절 풀어놓았다. 현재 거처를 옮긴 것과 시계 자랑도 하고, 1차는 돼지껍데기집이었지만 2차는 제가 무려 육회를 결제했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육회를 먹어 본 게 처음이었는데 부드럽고 맛있었다며 해맑게 웃는 이소를 보고 해준 역시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이소의 반질반질한 이마를 매만지던 해준은 문득 이소의 옷이 푹 젖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옷이 심하게 젖었네. 비는 어젯밤에 그쳤는데.”
“아, 이거는…. 토했는데…. 냄새가 심해서 대충 빨고 씻었어요. 다시 들어가서 씻으려고요.”
“저런, 지금은 속은 괜찮고?”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데…. 저, 죄송해요. 교수님이 사 주셨던 시계를 망가뜨려서요. 어디 넘어지다가 바닥에 세게 찧었는지, 유리가 완전히 부서져서.”
해준은 그런 것쯤은 괜찮다며 원한다면 열 개도 더 사 줄 수 있다고 토닥였다.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왔고 선물까지 고장 냈음에도 해준은 큰 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다. 이소는 진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나중에는 꼭 다 말하라던 충고. 만약 입장이 달랐다면 해준이 그런 상황인데 저에게 말을 다 안 해 주고 혼자 해결하려 했다면 자신은 서운했을까. 주영과의 만남도 몇 번이나 회피하려 했지만 결국은 만나서 대화를 하고 나서야 오랜 체증이 해결되었듯이 해준에게도 솔직히 제 속을 털어놓는 것이 관계에 이로울 것이다. 우선은 자고 일어나서 차분히 이야기해야겠다.
상념이 길었다. 해준이 이소를 품에 안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 교수님. 이제 우리 들어가서 잘까요?”
냄새 날 텐데, 아직 샤워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른 새벽이지만 아무래도 씻고 나서 늦잠이라도 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해준에게 기댄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돌연 해준의 두툼한 손아귀가 목 뒷덜미를 지그시 눌렀다.
“그런데 이소 씨.”
“응? 네?”
방금 전보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같이 들렸는데, 착각인가. 고개를 들어 눈을 바라보자 방금 전까지 저를 다정히 보던 얼굴에 미묘한 온기가 사라져 있었다.
“진혁 씨랑 헤어지고 나서 어디 갔었는지 왜 말 안 해 줘요?”
머리에서 샴푸 냄새도 나네. 해준이 입꼬리를 끌어당겼지만 이소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젖어 있는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바짝 붙어 있던 몸을 천천히 떨어뜨리자 해준은 말없이 뒷덜미를 누르던 손을 놔줬다. 방금까지 끌어안고 품었던 온기가 새벽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입술이 마르고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반사적으로 떨어진 반문에 마주 보던 해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반응을 보니 진짠가 보네요.”
이소는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거나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왜 말을 안 했지? 해준이 지적해 주지 않았다면 자신조차 모르고 넘어갈 정도로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해준의 고개가 나른하게 기울어졌다.
“그런데 내가 묻지 않았으면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나 봐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낮은 목소리에 질책이 묻어 있지는 않았지만 이소는 저도 모르게 몸을 물렸다. 해준은 그런 이소를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이소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떼지 못하자 옅은 한숨이 둘 사이를 채웠다.
“이소 씨.”
“……네.”
“해수가 진혁 씨 번호를 가지고 있었어요. 밤늦게 행랑채 근처에서 이소 씨 기다리는 나에게 해수가 번호를 알려 줬고, 새벽에 진혁 씨와 통화했어요. 둘이 열 시 조금 넘어서 헤어졌다고. 진혁 씨한테는 집에 바로 간다고 했다고 그랬다면서요.”
그때는 정말 주영과의 대화가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열두 시라도 제대로 연락했다면 이렇게까지 걱정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소 씨는 내내 연락이 없다가 동이 틀 때에야 왔고. 심지어는 어딜 다녀왔는지, 왜 늦었는지, 누굴 만났는지. 꼭 숨기려는 것같이 나에게 말을 안 하고 있잖아요.”
“…….”
“이소 씨가 비밀이 많은 건 알지만, 지금은 예외예요. 이런 상황에서 입을 닫으면 내가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살굿빛 입술에서 떨어지는 말들은 가시가 되어 고요한 새벽을 가른다. 부끄러운 거 없으면 내가 오해하게 두지 마요. 덧붙인 말에는 이소에 대한 믿음이 묻어 있었다. 교수가 천직 아니랄까 봐 해준은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에게 하나하나 가르치듯 이소의 대답을 끌어오고 있었다. 이소는 시선을 떨구고 더듬더듬 사과했다.
“말씀 안 드려서 죄송해요. 무거운 이야기라 지금은 안 꺼내려고 했었던 건데, 불쾌하실 줄 생각 못 했어요.”
“불쾌한 건 아니에요. 남자랑 뒹군 것만 아니면.”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 그런 짓 안 했어요!”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진 이소가 손을 내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농담이야. 자긴 그랬으면 나보기 미안해서 들어오지도 못했겠지.”
해준의 웃음소리에 이소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불안함과 미안함이 잔뜩 묻어 있는 눈 주위는 벌써 붉었다. 이슬 내음이 잔뜩 묻은 젖은 바람이 불었다. 해준은 꼼지락대는 이소의 손가락을 제 손가락에 걸고 끌어당겼다. 못 이기는 척 끌려오는 손을 얽어 쥐고 다른 손으로 덮어 토닥였다.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키던 이소는 사실대로 고했다.
“진혁이랑 헤어지고 주영이 형 만났었어요. 저번에 말씀드린….”
“범양 윤주영 이사?”
“네. 사촌, 사촌 형.”
사촌 형. 해준은 그 호칭을 몇 번 더 읊조리며 긴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음, 반갑지는 않은 이름이네요.”
그리고 툭 던진 말은 역시나 불호였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그렇고 유난히 주영을 경계하고 질색하는 모습을 보이는 해준에게 무척 당황했던지라 이소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왜요?”
“그냥요. 그 사람 감이 안 좋아서요.”
감이라니. 이소는 모호한 해준의 대답에 옅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제 손을 매만지는 해준의 손을 바라보며 시선을 내렸다. 어쩐지 힘이 조금 더 들어간 듯싶었다.
“아무튼 그건 내 감상이니 별개로 쳐요. 그래서 윤주영 이사하고는 무슨 할 말을 그렇게 했어요?”
“네?”
“미술관에서 만났을 때는 그 정도로 막역한 사이 같진 않아 보였는데, 따로 만나서 몇 시간씩이나 술을 마실 정도면 쌓아 둔 이야기가 꽤 많았나 싶어서.”
그리고 이소 씨가 씻기도 하고 잠도 자고 왔다면 어디 호텔이라도 갔었나 보지. 마치 저를 들여다본 듯 말하는 해준의 말에 이소는 다시 한번 말을 잃었다. 눈을 깜빡이며 해준을 멍하게 쳐다보던 이소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진짜 이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 못 하겠다. 생각도 말아야지.
“사실 엄청 오랜만에 만났거든요. 7년 만인가, 제가 집을 나오고 연락 끊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마주쳤어요. 그래서 뭐 안부 묻고 사는 이야기 하고 그러다 보니 대화가 길어졌어요. 제가 너무 많이 마시고 토해서 형이 호텔로 옮겨 준 거고… 눈 뜨니까 너무 엉망진창이라 옷은 대충 물로 빨아서 말리고, 바로 택시 타고 온 거에요.”
“7년 전이면… 윤주영 이사도 알아요? 이소 씨가 혼자 해수 키우고 있는 거.”
뭉뚱그려서 넘어가려고 했던 문제를 다시금 작살로 꽂아 물 위로 건져 올리는 해준의 추측에 이소는 혀를 내둘렀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매만지다 시선을 끌어 올리자 해준과 눈이 마주쳤다.
“얼마 전에, 알았대요.”
“그럼 사촌 간에 할 말이 많았겠네. 이해했어.”
미소 짓는 해준의 고개가 나른하게 젖혀졌다. 호수같이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기만 할 뿐인데 자꾸만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종용한다. 작은 입술이 움칠거리며 떨렸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아닌데 푸르스름한 정원이 색색으로 밝아올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해준에게 영영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다. 좋은 날을 골라서 천천히 차분하게 모든 일이 끝나면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랬다. 학교에 몸담고 있는 해준이 저로 인해 나쁜 일에 연루되지 않기를 바랐고, 혹여나 일이 커져 재판을 받게 되거나 기자들과 엮이게 된대도 제가 해준의 집에 기거하는 동안에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아마 윤치승과 이 일로 밀고 당기기를 한다면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저뿐만 아니라 무고한 해준까지도 해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숙과 진혁의 말 때문이었을까, 혹은 주영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소는 돌연 해준에게 구구절절 털어놓고 싶었다.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특히 더 그랬다. 제 인연들에게 조각조각 비밀을 떨어뜨리고 혼자 아등바등 살며 누구에게도 크게 의지하지 않았었는데.
“교수님.”
“응.”
이소는 잠시 망설였다. 말을 할까, 말까.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은 해준을 불렀지만 뒷말이 나오지 않아 몇 번이나 마른침만 삼켰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정원에 들어온 직후부터 현재까지 한 번도 해준이 제 손을 놓지 않았다는 걸. 단 한 번의 언성조차 높인 적이 없었다는 걸. 이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흔들림 없는 해준의 검은 눈동자는 이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말을 해 주기를.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동트는 새벽, 비밀을 털어놓을 시간이었다.
* * *
이소는 사실 수십 번을 상상했다. 제가 해준에게 해수의 일을, 주영의 일을, 은형의 일을 모조리 털어놓게 되는 순간을. 그때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화를 내고 있을까. 해준과의 식사 자리일까, 후원을 거닐면서 넌지시 말을 건넸을까, 혹은 어쩌면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종래에는 쏟아붓듯 고백하고 결국 헤어지게 되는 결말일까. 누군가가 보기에는 별것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일이어도 이소에게만큼은 지난 칠 년을 지난하게 옭아매던 사슬과 같던 비밀이었다.
이소는 해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서늘한 아침 기운에 해준의 도포를 넓게 펼쳐 함께 등에 둘러맨 채 손깍지를 꼈다. 밤새 짙었던 술 담배 냄새가 깨끗한 공기에 정화되고 익숙한 해준의 향으로 덮였다. 거세게 뛰는 심장박동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소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해수는요, 엄마 성을 따서 강해수예요.’로 시작한 이야기는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주영이 말해 준 이야기가 합쳐지면서 완전한 사건이 되었다. 범양가의 애물단지, 은형과 주영의 이야기, 이명희를 만난 이야기, 주영의 약속. 저 혼자 아이를 안고 암자를 떠돌고 단칸방을 전전해 가며 살았던 지난 시간을 보상받을 새도 없이 아이를 데려가려는 윤치승 회장의 이야기까지 했다.
이야기하며 참 많이 울 줄 알았는데 정작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유를 몰랐을 때는 왜 이리 서글프게 살아야 하나 싶었는데 진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담담해졌다. 어떠한 감상도 푸념도 곁들이지 않은 채 시간 순서대로 제 삶을 배열해 놓고 보니 뭐 죄다 이용당하기만 한 것 같아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해준은 이소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꽤 길었음에 불구하고 헛기침 한 번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사실 이소는 해준의 표정을 살피지도 못했다. 눈을 마주치면 또 울컥해 말하지 못할까 봐 그저 손만 꼭 쥔 채 새벽빛이 내려앉은 고요한 정원만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분명 선을 지키려고 일부러 말을 안 했었는데, 나중에는 너무 지저분한 옛날 일 때문에 그만 만나자고 할까 봐…. 그게 무서워서. 이기적이죠. 저도 알아요. 그러다 최근에는 교수님이 제 일로 인해서 다치지 않았으면 해서 말을 아꼈어요. 범양은 정말 생각보다 엄청 몸집이 크고, 교수님이나 저는 일개 개인이잖아요. 저 하나쯤은 정말로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해수가 걸려 있기 때문에, 일이 더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다행히도 주영이 형이 저와 같은 입장이라서, 도와줄 수 있다고 했어요. 법적인 자문이나 변호사도 구할 수 있을 거고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전 해수의 안위가 최우선이니까요.”
돌과 나무들, 꽃과 풀들을 바라보며 비밀을 풀어내는 것이 꼭 해준의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어서 괜찮았다. 단단하게 얽힌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소는 가끔 마음이 울컥할 때만 살짝 쥐었다 놓으며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해준의 정원만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교수님.”
“응.”
“절 감당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소가 무겁고 단단하게 내뱉은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말같이 느껴졌다.
“비밀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교수님께 의지한다거나 기대려는 생각은 없어요. 여전히, 온전하게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님이 저에게 많은 걸 베풀고 위로해 주셨듯이 저 역시 교수님을 웃게만 만들어 주고 싶거든요. 동정한다거나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거 말고.”
해준은 제 손을 쥐고 있는 희고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소의 손과 발은 깨끗한 얼굴과 다르게 군데군데 오래된 상처가 패여 있었다. 해수를 혼자 기르며 아득바득 고된 시간을 헤치고 참아온 훈장 같은 상처라고 했다. 그러나 해준은 매 순간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내가 너를 빨리 발견했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했다.
단순 과거의 행적과 기록만으로는 들을 수 없었던 이소의 과거 이야기는 비참했다. 어떻게 이걸 혼자 견뎠지 싶을 정도로 외롭고 쓸쓸했다. 듣기만 해도 배 속이 울렁거렸다. 이소는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자꾸만 목이 메어 오고 명치께가 뜨끈하게 달았다. 윤이소가 불쌍해서, 그놈들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무언가가 해준의 뺨을 톡 쳤다. 이소의 손가락이었다.
“그래도 이런 저를 곁에 두는 게 힘들어지면요….”
뺨을 살짝 문지르며 시선이 얽혔다. 올곧은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다. 해준은 여리고 단정한 외양을 하고 내면은 촘촘하고 단단한 남자의 담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주 오래전 옥상에서 쥐어 터진 얼굴을 하고 ‘안아 주실래요?’라는 부탁 외에는 그 어떤 손조차 내밀어 본 적이 없는 사람. 이소는 그렇게 담담하게 여러 번 마음을 정리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제가 모두 다 해결하고 꼭 돌아올게요.”
그리 말하고 설핏 웃은 이소는 이내 울컥한 듯 젖은 눈을 하고 시선을 떨궜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시린 눈가가 마를 때 즈음 해준의 손이 이소의 뺨을 살짝 잡고 돌렸다. 이소는 고개를 내렸다. 괜찮다고 떠들었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무서웠다. 경멸하는 시선이면 어쩌지, 팔자 사나워서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불안과 바닥에 진창으로 뭉개져 버린 자존감은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소의 시선이 올라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해준의 시선과 마침내 얽혔을 때, 마주친 두 눈동자는 타박도 질책도 없이 여전히 따뜻하고 다정했다.
해준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었다.
“걱정하지 마요, 안 떠날 거예요.”
“…….”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나는 네 곁에서 내 몫을 하며 기다릴 거야. 힘들면 와서 쉬는 그늘이 되어 주고, 아프면 약이 되어 주면 되지. 그러다 너무 힘에 부치는 것 같으면, 나를 쥐고 휘둘러도 좋아요. 기꺼이 그렇게 해도 돼요.”
정원의 바람이 소매 틈으로 들어와 손목을 간질였다. 이소 네가 원한다면 다 해 줄 거야, 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이소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돼요. 정말로 다치면 안 돼요.”
“나에게는 너도 마찬가지야. 누구도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커다란 눈에서 미처 떨어지지 못한 눈물은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해준이 볼을 쓸어넘겼다. 꾹 눌린 뺨의 호선을 타고 방울진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음을 터뜨릴 생각은 없었는데 괜히 눈물이 떨어지니 코가 매워졌다. 이소는 입술을 비죽여 울음을 참았다. 해준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꾹꾹 눌러담듯 내뱉었다.
“내가 이소 씨 편 할게. 그러니까 온전히 날 믿어요. 적어도 하나보단 둘이 낫겠지.”
“주영이, 형도 있어서 세 명….”
“난 그놈은 우리 편으로 안 쳐요. 혹시 알아, 회색분자일지.”
해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이소는 배시시 웃었다.
“범양의 사람이잖아. 그 사람 말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어요. 사실 관계 파악이 될 때까진 몸 사려요. 내게 폐 끼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같이한다고 생각해요.”
“같이.”
“응, 같이.”
이소는 해준의 말을 따라 하듯 읊조렸다. 줄줄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 내느라 해준의 손이 분주했다. 일부러 짓궂게 장난을 치느라 우악스럽게 볼을 문지르자 이소는 그 볼에 얼굴을 부비며 웃었다. 해준 역시 말랑말랑한 볼을 잡고 늘이며 이소를 달랬다. 코가 맹맹해진 목소리로 이소가 덧붙였다.
“어쩌면 조금 긴 싸움이 될 것도 같아요. 정말로 무척 힘들겠지만, 저는 절대로 해수 안 뺏길 거예요.”
일자로 앙다문 입술이 사랑스럽다. 해준은 그 작은 입술에 약하게 입을 맞췄다. 얌전하게 입맞춤을 받는 이소의 속눈썹에 맺힌 눈물방울이 파르르 떨렸다. 이마를 맞댄 해준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뺏기긴 누가.”
해준의 손이 이소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는 평소와 같았다.
“우리 딸 학교 입학식 같이 가야지, 해수 아빠.”
“아하하, 입학식.”
그제야 실감했다. 다 말했다. 정말로 다 말했어. 살짝 벌어진 입술이 천천히 정원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련했다. 동시에 온몸에서 진이 빠졌다. 단지 간밤의 숙취 때문은 아닐 것이다. 토닥토닥, 어깨를 당겨 제 품으로 끌어당긴 해준에게 편안히 안긴 이소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 * *
해준에게 고백한 이소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잠들었다. 해준은 한참을 그 옆에 앉아서 손을 잡고 있다 일어났다. 해준은 이소의 옷을 바구니에 넣은 채 바깥에 내놨다. 여전히 덜 마른 옷에서 진득한 담배 냄새가 났다. 해준은 제 것이 아닌 냄새를 잔뜩 묻히고 돌아온 이소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소가 전부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녘에는 몇 번이나 어금니를 악물고 참았다. 낯선 향수, 샴푸, 담배 냄새가 나는 이소가 낯설었다.
윤주영 이사. 강해수의 친부이자 윤이소의 사촌 형. 윤치승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 이소와 주영, 둘 사이의 관계. 담백하기 그지 없어 보임에도 자꾸만 생각에 제동이 걸리는 것은 그날 기억하는 윤주영의 눈 때문이었다.
기분 나빴다. 불쾌했다. 아쉽게 떨어지는 손과 훑어내리는 듯한 시선. 해준은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닌지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윤주영이 아니더라도 윤이소를 누구라도 그런 눈으로 쳐다봤다면 당장에 손을 비틀어 버렸을 것이다. 사촌이랄 게 없어서 정작 어떤 눈으로 보는 게 정상인지 알지도 못하겠다.
버드나무 가지가 살랑이며 연못 수면을 간질였다. 아침부터 복작복작한 소리와 함께 언덕 아래가 소란스러웠다. 일 년에 두어 번, 문경에 있는 별장으로 휴가를 갈 준비를 하느라 벌써부터 짐을 싸는 소리다. 서른 명이 넘는 식솔들 중 절반이 빠지고 나면 저택은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주로 아이들과 여자들, 몇몇 남자들이 함께 먼저 떠났고 뒤늦게 후발대가 떠나곤 했다. 그럼 해준은 그 큰 저택에 혼자 남아 쉬곤했다. 아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인 해수의 표정이 썩 밝았다. 이소가 지키고자 하는 아이, 범양이 빼앗으려고 하는 아이. 또래에 섞여 웃을 때는 그저 아이일 뿐인데. 저를 두고 어른들이 알력 싸움을 하는 줄도 모르고 환히 웃고 있었다.
해준은 한숨을 쉬며 손으로 버릇처럼 품을 더듬었다.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어 물려던 습관은 민망한 듯 손가락을 문지르며 뺨을 훑었다. 문득 이번 여름은 매미 우는 소리를 못 들었다. 아니면 그럴 여유도 없이 지냈거나.
“도련님, 안 주무셨습니까?”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죽과 차를 들고 서 있던 집사 준경이 의아한 눈으로 해준을 살폈다. 준경은 이 저택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이 드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제저녁, 안채 주인이 자리를 비운 후부터 어미와 떨어진 강아지마냥 대문과 후원을 쩔쩔매고 돌아다닌 해준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리 걱정되면 평소처럼 사람을 붙이고 들여다보면 될 것을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것도 딱 끊은 채 보통 사람처럼 구는 게 영 익숙치 않았다.
“잠이 안 와서.”
“이소 님은요.”
“벌써 왔지, 곤히 자니 깨지 않는다면 점심 식사는 건너뛰어도 좋아요.”
아, 새벽에 돌아오셨나. 별채가 아닌 안채를 가리키는 해준을 보며 준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기사를 붙여 주겠다는 것도 거절하고 가방 하나 든 것 없이 가볍게 대문을 나서던 말간 얼굴의 미인을 떠올렸다. 이소는 행랑채에 참 자주 내려와 있었다. 딸 해수가 또래 친구들 때문에 굳이 지루한 별채에 혼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이유도 없었지만, 이소는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참 잘 돌아다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마당 비질을 하거나 그릇을 옮기거나 과일을 손질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저녁 대여섯 시가 되면 대문 근처에 앉아 해준을 기다렸다. 본인이 자각하는지는 몰라도 남이 보기에는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까지 본다면 아마 해준은 출근조차 하지 않고 안채에만 머물 것이다.
잠이 안 와 나와 있다는 해준의 손에 들린 자동차 장난감은 못 보던 것이었다. 해수 양의 장난감인가, 싶었으나 꽤 낡았다. 해준은 손으로는 그 작은 물건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하며 한참을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문 집사, 지난번 검토하다 중단했던 부분들 말이에요. 세한, 범양, 우정 중에 범양이 가장 규모가 작은 재단이잖아, 그쵸.”
“네, 도련님.”
“그런데도 올해 상반기 국가지원사업 12건에 모두 범양예술재단 이사진 이름이 들어간 걸로 알아요. 단순히 운이나 실력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영 뒤가 구려 보이는데.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은데 불구하고 금융 이자 수익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것도 이해가 안 돼요. 이 부분 먼저 들쑤셔 봐요.”
“감사팀에 연통을 넣을까요?”
“누가 있더라… 아, 그래. 안상순 나전(螺鈿)장 아들 안남목한테 부탁해요. 얼마 전 쌍둥이 아들들 심장 수술 비용으로 돈을 받아 갔거든. 나목이가 아버지 닮아 성격이 꼼꼼할 거야.”
해준이 코를 찡긋거리며 웃자 준경은 쓰게 따라 웃었다. 젊은 나이에 일흔여든 살 노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는데 제 볼일을 볼 때는 친우의 약점을 이래저래 참 잘도 빼다 쓴다. 안치목의 이름을 받아 적은 후 더 시키실 일이 있는지 여쭈었다. 해준은 잠시 안채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해준의 손에서 나온 고가의 시계는 전면부 유리가 박살이 나 있었다. 유리가 저렇게 바스라질 정도면 무지막지한 힘을 가했거나 큰 사고로 시계를 찬 사람도 다쳤을 것 같은 형상이었다. 준경의 주름진 눈이 크게 띄었다.
“이건 이소 님 물건이 아닌가요? 혹시 다치신 건가요?”
“아니, 이소는 멀쩡해요. 시계만 갈렸지, 시계만.”
해준은 입술을 매만지며 톡톡 두드렸다.
“이 시계는 갖다 버리고 똑같은 걸로 하나 준비해 줘요. 그리고 하는 김에 이것도 같이 한번 열어 봐 주고.”
해준이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준경의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이것을 어쩌라는 것인지, 당황한 시선을 마주친 해준이 조용히 읊조렸다.
“어쩐지 기분이 더러워.”
가늘게 좁혀진 검은 눈동자는 준경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고 돌아섰다. 준경은 제 손에 쥐어진 작은 자동차와 안채로 걸어 들어가는 해준의 뒷모습을 번갈아보다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