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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가 별채에 살림을 꾸리고 난 후 해준은 칼같이 일찍 들어왔다. 행랑채를 지나 식솔들의 인사를 받고 나면 부리나케 언덕으로 발걸음을 했다. 대체로 미리 연락을 받은 별채의 새 주인이 대문 옆에 기대고 서 있으면 해준은 멀리서부터 팔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언덕 아래 식구들은 그런 해준을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른 척 하며 지냈다. 좋은 게 좋은 거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해준의 기운부터가 남달랐으니까.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벅찬 기분은 저택에 사는 모두가 소망하는 것이었으니, 제 주인이라도 그리 변한 것을 매우 기꺼워했다. 오늘도 해준은 눈에 띄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은 뒤 겅중겅중 뛰어 언덕을 올라갔다.
해준은 안채에 들어가기도 전에 별채의 문을 열었다. 편한 차림으로 책을 읽던 이소가 슬쩍 눈을 들어 해준과 마주쳤다. 미리 말하지, 하며 책을 덮고 일어나려는 이소에게 해준은 앉아도 된다 손짓했다.
“놀래 주려고. 오늘도 잘 보냈고?”
“그냥 가게 정리하고 부동산 아저씨 통해서 건물주하고 보상금 이야기도 했고…. 자잘한 일로 바빴어요.”
이소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항상 더러운 앞치마를 매고 어두운 주방에 쪼그려 앉아 양파를 까고 있었는데. 단정한 책상에 기대어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소는 낯설기도 하면서 한결 편안해 보였다. 해준은 문에 기대어 그 모습을 한참 들여다봤다. 구석구석이 오밀조밀 모두 예뻤다. 이소는 사각사각 샤프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도 하고, 할 일을 꼼꼼히 정리하다 종종 눈을 들어 해준과 시선이 맞부딪히면 민망한 듯 웃곤 했다. 왜 자꾸 보세요. 해준이 미소를 띠고 다정히 물었다.
“오늘 몇 시에 자려고요?”
“금방 자야죠. 교수님은 별일 없으세요? 건너갈까요?”
“일이 많아서 나는 조금 늦게 잘 것 같아요. 식전에 잠깐 산책이나 좀 할까.”
해준의 집에 들어왔지만 두 사람의 생활은 적당히 나뉜 채 유지되었다. 두 사람 모두 저택에 있을 때는 서재나 작업실, 정원에서 노닥거렸고 식사는 안채에서 함께했다. 둘 중 한 사람-주로 학교를 나가는 해준이었지만-만 있을 때는 각자의 공간에서 할 일을 하며 보냈다. 이소는 그것이 사귀는 사이라고 할지언정 적당한 거리와 선을 유지하면서 지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바쁜 해준의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로 움직였다. 정작 해준은 해수를 돌보는 일 때문에 이소를 제 안채에 완전히 들어앉히지 못한 것을 속으로만 몹시 아쉬워했다.
“손잡고 걸으니까 좋다, 그쵸.”
“응, 이렇게 좋은 거 진작 들어오지 그랬어.”
“그러게요.”
꼭 붙잡은 두 손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는 평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별채에서의 생활은 이소의 생각 이상으로 편안하고 안락하면서 조용했다.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제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들이었다. 건물이 무너진 후 가게를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는 틈틈히 내려가기도 했지만 철거 막바지에는 정말로 별채에서 하루종일 나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일이 없었다. 시간이 되면 식사가 올라왔고 다 먹고 밖에 내어 두면 알아서 금세 치워졌다. 미안할 정도로 제 손이 가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이소는 아주 오랜만에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잠을 자기도 하고, 일 없이 책에 파묻혀 있기도 하고, 멍하게 화채를 떠먹으며 꽃구경을 하며 보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준에게 하루 일과를 주절주절 남기는 메시지가 늘었고 저녁이 되면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대문 앞에 나가 있기도 했다. 외출했던 것은 해준인데도 주로 떠드는 것은 이소였다. 하루종일 어떤 책을 읽었고 얼마나 게으르게 하루를 보냈는지를 읊어대면 해준은 퍽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 많은 이야기를 다 들어 줬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생긴다. 이소는 핸드폰을 들어 몇 없는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1년 전에 연락하고 이사할 때 즈음 연락했던 친구 진혁, 거래처 옮기면서 전화가 끊겼었던 과일가게 사장님, 센터에서 해수를 돌봐 주었던 선생님들께 안부 인사를 전했다.
“너 시간 괜찮으면 얼굴 보면 좋겠는데. 나 요새 가게 일도 안 해. 정숙 사장님도 미국 아들네로 가셨거든.”
제일 먼저 연락한 것은 진혁였다. 작은 신문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진혁은 가끔씩 이소를 만나 해수의 선물을 전해 주며 농담처럼 생존을 확인하던 친구였다. 도시락 가게를 열고 나서는 한참 서로 바빴다가 이제야 안부를 전하려니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반면에 진혁은 그저 반가워만 했다.
- 잘 지내니까 됐지 뭐. 그런데 집 그렇게 돼서 어떡하냐. 지금은 어딨는데?
“뭐, 친구 집. 다시 집 구할 때까지는 여기 있으려구.”
오랜만에 연락한 진혁에게 제 연애사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지라 이소는 담백하게 제 안부를 전했다.
- 아, 그럼 밖에서 얼굴 봐야겠네. 나 안 그래도 너희 동네 근처에 볼일 있는데 거기서 볼래? 너 편하게.
이소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도 간만에 바깥바람 좀 쐴래. 내가 너 사무실 근처로 갈게. 주소 찍어 주라.”
이소는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어리버리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저에게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도와준 진혁였다. 잘 되면 꼭 다 갚아야지, 생각하던 것이 벌써 8년이다. 크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장에 빠듯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오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이소는 연락처를 넘기다 전화번호부의 마지막 줄에 자리한 주영의 번호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미술관에서 만났을 때 받았던 명함에 적혀 있던 번호였다. 고민 끝에 저장해 놓고 나서도 쉽사리 연락을 한다거나 말을 걸 용기는 없었다. 할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와 사고를 가로막았다.
결국 이소는 또 한 번 전화를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여전히 제 발목에 족쇄처럼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열쇠 역시 제 손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며칠 뒤 정원 앞에서는 때아닌 실랑이가 일었다. 해준이 자꾸 제 카드를 주려는 것을 이소가 연신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는 건데.”
“저 돈 많아요. 그리고 저만 내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소는 해준이 사 준 명품 지갑의 입구를 벌리며 씩 웃었다. 빳빳한 만 원짜리 열 장과 천 원짜리 열 장이 단정하게 들어 있는 지갑을 자랑스레 보여 주며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다며 간만에 신이 났다. 해준은 이소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오전부터 언덕 아래 주방에 내려갔었냐고 투덜댔다. 왜 자꾸 사람들 일하는 곳에 가 있어, 편히 쉬고 있지. 이소는 일을 안 하고 별채에만 있으니 시간이 안 가는 것 같다며 웃어넘기곤 운동화 끈을 동여맸다. 해준이 입술을 삐죽댔다.
“책 맘껏 읽고 잠도 많이 자고 그럼 좋잖아요. 해수도 유모님이 봐주시는데.”
“어떻게 매번 그래요. 그리고 혼자 있으니까 지루하기도 하고 식구분들께 미안하기도 해서요. 내일은 김장 재료 온 것도 같이 정리하기로 했어요.”
“그 사람들이 할 일에 너무 맘 쓰지 않아도 돼요. 이소 씨는 여기서 손끝 하나 안 움직이고 시키기만 해.”
해준의 말에 이소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 뒤늦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평생을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해준과 달리 대접받는 것에 익숙지 않은 이소는 오히려 드러누워 주는 것만 받아먹는 것이 더 불편하다는 것을 모르는 듯 싶었다.
“아무튼 다녀올게요. 버스 타야 해서 시간 맞춰 나가야 해요.”
“주 기사님 차 안 타고? 지금 부르면 바로 대기할 거예요. 너무 더우니까 차 타고 가.”
“아니에요, 버스 타면 금방이에요. 짧은 거리 가는데 주 기사님 호출하는 것도 너무 미안하고요.”
“기사님 불편하면 차를 하나 사 줄까?”
“네? 어, 아,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해준의 말을 이소가 얼른 잘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너무 놀라 큰 소리가 나간 것뿐이었는데 해준이 놀란 토끼 같은 표정으로 이소를 응시했다. 이소가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아, 그러니까…. 괜찮아요, 정말. 타고 갈 거라면 저 오토바이도 있고.”
“그거 너무 낡았잖아요. 아, 역시 오토바이가 좋아요? 차보다는? 하긴 이소 씨 오토바이 타는 거 꽤 멋있지. 난 못 타거든.”
대화가 진전 없이 계속 돌고 돌았다. 이소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이제 정말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저, 교수님.”
“응, 이소 씨.”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실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부담스러워서. 그 말에 해준이 잠시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해준에게 이소는 무엇이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이소는 언제나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 받았다.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성의를 짐처럼 느끼고 있다는 이소의 말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해준은 당황한 기색을 삼키며 애써 웃었다.
“아…. 그래요. 그럴 수도 있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해준의 손을 덥썩 잡으며 이소가 눈썹을 지그시 내렸다.
“죄송해요, 항상 제가 드리는 것보다 많이 주시잖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제 맘 아시죠. 정말이에요. 항상 감사하다구요. 과분할 정도로.”
“응, 알지.”
“헤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저 다녀올게요. 늦으면 연락할게요. 담백한 해준의 대답에 이소는 한결 풀어진 기색으로 발끝을 들어 해준의 볼에 입을 맞췄다. 가볍게 부딪힌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에 미련이 남는다. 해준은 한 번 더 붙잡고 싶은 것을 참으며 주먹을 몇 번이나 말아 쥐었다. 입술 끝에 매달린 ‘그럼 내가 데려다줄까요.’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키고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요. 기다릴게.”
그렇게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이소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떨어져 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곁에 두니 더 안절부절못하는 제 꼴이 우습다. 어쩜 이리 어미와 헤어진 똥강아지처럼 구는지. 해준은 손톱을 불안하게 매만지며 몇 번을 더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어미와 떨어진 새끼도 이것보단 덜 집착할 텐데.’
해준은 정말 질투심에 눈이 멀다 못해 뽑힐 것 같았다. 윤이소가 연인으로서 그어 둔 선, 정도,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해준은 정말로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소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계단 위에 선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아이 없이 저녁 시간에 시내에 나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현란한 네온사인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지나갔다.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 회식을 가려는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무리, 팔짱을 끼고 웃으며 스쳐 지나가는 커플들까지 모두 신기할 정도로 오랜만에 본 광경이었다. 진혁을 굳이 만나지 않더라도 종종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소는 약속한 껍데기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러운 유리문이 음이 고장 난 클레멘타인 노랫소리와 함께 열렸다. 구수하게 고기 타는 냄새와 담배, 술 냄새가 섞여 났다. 둥그런 철제 식탁에 더벅머리에 각진 뿔테안경을 쓴 오진혁이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이소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야, 나만 나이 먹었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이미 먼저 와 한잔 걸쳤는지 술상에 껍데기가 몇 조각 올라와 있었다. 사회부 기자는 현장에 자주 나가 몸이 호리호리할 줄 알았는데 진혁의 아랫배가 두툼했다. 모두 술살이라 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진혁 너 하나도 안 변했네.”
“사람이 뭐 일이 년 만에 확 변하냐. 근데 넌 살이 좀 붙었다, 보기 좋아졌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랑 계란말이 추가요. 치즈 많이 넣어서.”
이소는 한결 편안히 몸을 늘어뜨렸다. 제 속사정을 다 아는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편했고 언제 만나도 한 번을 싫은 소리 없이 다 받아 주는 친구였다. 한참을 사는 이야기를 했다. 진혁이 여자친구에게 네 번 차이고 다섯 번째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부터 부모님의 안부까지 꼼꼼히도 들었다. 사실 이소에게 지난 일 년을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은 해준을 만났다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말을 꺼내더라도 워낙에 사건이 많은 해였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니 철물점 주인에게 맞은 이야기도 나오고, 정숙이 떠난 이야기도 나오고, 주영의 이야기도 줄줄 나왔다. 처음에는 분개하며 듣던 진혁도 어느 순간부터는 말없이 소주잔을 내려놓고 줄담배를 태우며 이소의 말을 듣기만 했다.
힘들었겠다, 고생한다, 힘내자 따위의 이야기가 오가지 않는 자리. 그저 묵묵히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오진혁은 이소의 오랜 지기 역할을 잘 하고 있었다. 생긴 것에 비해 더럽게 복이 없는 새끼, 그런데도 한 번을 크게 오열한 적 없는 놈, 독한 자식. 오진혁이 평가하는 윤이소는 그랬다. 항상 제게 닥친 일을 남 일 말하듯 담백하게 굴었고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흥분하는 일이 없는 차분한 성격임을 알기에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일 년 반 만에 만난 이소는 어쩐지 조금 더 독기가 빠진 느낌이었다. 이유가 뭘까. 눈을 가늘게 뜨고 소주를 훌랑훌랑 넘기던 이소를 바라보던 진혁이 눈을 번득였다.
“야, 너 연애하지.”
“컵, 큽.”
“반응 보니 맞나 보네. 근데 설마 너 지금 있는 데도 애인 집이야?”
“…….”
말없이 눈을 피하는 이소를 보던 진혁은 고개를 삐뚜룸하게 비틀고 제 목을 툭툭 건드렸다.
“밸도 없이 여자 집에. 그거나 가리고 다녀라, 새꺄. 요새는 이런 거 자랑 아니다. 뒤에서 욕해요.”
진혁의 말을 듣고 대충 숟가락을 뒤집어 비춰 보니 목덜미 아래가 울긋불긋했다. 지난 밤 해준과 침대에서 뒹굴다 남은 상흔이었다. 기자 일을 하면 평소에 자주 쓸리고 다친다며 밴드를 내민 진혁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인 이소가 꼼꼼하게 목덜미의 붉은 자국을 가렸다. 너같이 목석같은 애도 연애를 다하고, 아니 무엇보다 해수까지 있는데도 너 좋대? 다 괜찮대? 상관없대? 이소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진혁이 혀를 내둘렀다.
“진짜 대단하다. 아무리 얼굴이 개연성이라고 해도 애 딸린 남자 사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 너 백수잖아. 애 딸린 백수 받아 준 걸 보면 너 무조건 그 사람 잡아야 된다. 그런 사람 흔하냐.”
진혁의 칭찬에 한두 마디씩 거들던 이소는 어느 순간부터 제 입으로 해준에게 받은 것들을 주절주절 읊기도 했다. 마주 앉은 진혁은 입꼬리를 씰룩씰룩 끌어당기며 10년 지기 친구의 연애사를 퍽 즐거운 듯 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또 뭐 했는데? 이야, 그거 찐 사랑이네. 누가 기자 아니랄까 봐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내던 진혁이 턱을 괴고 나긋하게 웃었다. 윤이소도 인생 이제 좀 풀리면 좋겠다. 그 말에 이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저를 잘 아는 이가 해 주는 말이기에 오랜 진심이 와닿았다.
가게에 들어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테이블 몇 개가 들어오고 빠질 동안 둘은 그 자리에 앉아 여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볼이 붉어진 진혁이 몇 개비째인지 모를 담배를 다시 물었다.
“그래도 비밀은 없어야 돼. 나중에 알고 나서 얼마나 배신감 느끼겠어.”
“알아. 그래도 워낙…. 일반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선뜻 말할 수가 없는 거지.”
삼류드라마도 아니고. 진혁은 왁왁 소리를 질러댔다. 뒤늦게 퍼마신 술이 이제야 몸에 돌기 시작하는 듯 혀가 풀리기 시작했다.
“야, 솔직히 존나 대단한 거야. 피 하나 안 섞인 애 기르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물론 그 새끼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겠지만 아마 쉽게 못 건드려. 지들이 켕기는 게 있는데 언론에 터뜨려 봤자 좋을 거 없잖아, 안 그러냐? 생각해 봐, B그룹 장남, 대학 시절 8년 전에 혼외자식 만들고 갖다 버려, 업둥이 사촌 동생이 객사 직전 아이를 주워다 길…, 읍읍…!”
이소는 급히 진혁의 입을 밀어 막으며 눈을 흘겼다.
“아주 내 딸 앞길 막으라고 동네방네 소문내지? 여기 아직 밖이거든.”
밖으로 새어 나가서 좋을 일이 없는 사건이었다. 이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해수의 안위가 먼저였고 그저 큰 탈 없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뒷받침해 줄 생각이었다. 괜한 구설수에 휘말려 아이의 뒤로 사생아 꼬리표가 줄줄 달린다든지 범양에서 버려진 아이 타이틀을 달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적었지만 그래도 현재까지는 필사적이었다.
진혁이 태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돼지껍데기 탄내와 섞인 연초 향이 테이블 곳곳에 남았다.
“그래서, 한 번 만나 보긴 하려고? 난 영 불안한데.”
윤주영. 그 세 글자를 내뱉는 진혁의 낯이 영 탐탁잖았다.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언제나 은은하게 웃는 얼굴으로 이소의 곁을 남을 듯하더니 돌연 영국으로 떠 버린 그놈이 마음에 들 리 없다. 나중에 듣고 보니 그놈이 해수 친아빠였다는 걸 알고 얼마나 노발대발했는지 모른다. 저 등신 호구 똘추가 결국은 제 인생을 갈아서 그 집의 뒤를 닦아 주다 끝나는구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소는 눈썹을 긁적였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꼭 물어봐야 할 것도 있고.”
“그래, 씨발. 지도 사람이고 입이 있으면 존나게 변명해 대겠지. 한번 들어나 봐. 해수는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회장이랑 사모는 애 보내 달라고 했고, 윤주영 그놈은 그렇게 못하게 막아 주겠다며. 왜 같은 집안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다른 건데? 난 너 괜히 다시 연락했다가 안 좋은 일에 엮일까 봐 걱정된다.”
“안 좋은 일 터질 거였으면 벌써 이 세상에 없었겠지 뭐.”
“허어, 씁. 소름 돋게.”
해수의 이름이 나오자 이소는 결국 설핏 웃었다. 무작정 약속을 믿는 나이도 아니고 그럴 정도로 무른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약속만이라도 간절한 사람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제가 제일 간절하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이소는 마지막으로 술을 털어 넣었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고들 하는데, 오늘따라 술마저 썼다. 범양을 생각하니 뭐 하나 단 게 없었다.
* * *
밤 열 시. 생각보다 길어진 술자리는 4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진혁이 담배 한 갑 반을 태우고 이소는 소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나서야 끝이 났다. 껍데기집은 진혁이 냈고 2차로 간 육회 집은 이소가 냈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친구에게 비싼 밥을 사 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조심히 들어가고, 그래도 간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누가 뭐래도 해수 네 딸이야. 자신감 가져, 새꺄. 뭔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나 아직 2년 차지만 사회부 기자야, 알지.”
“고맙다. 들어가.”
진혁을 태운 택시가 멀어지자 이소는 불 꺼진 건물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뭐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속은 시원했다. 들어 줄 사람이 있다는 건 이렇게 좋은 일이었다. 푸, 숨을 내뱉자 도시의 열기 속으로 알코올 냄새가 흩어졌다. 이러고 있으니 저 역시 거리를 비틀거리는 취객들과 다를 바가 없다. 보통 사람이 된 것 같다.
‘아, 잊을 뻔했네.’
이소는 배시시 웃으며 단정하게 내려온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전화, 전화를 할까. 이제 간다고. 이소는 지저분한 화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화면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차해준, 차해준……. 분명 익숙한 그 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제 손은 어느새 미련 남은 한 사람의 이름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주영]
저장할 때조차도 손이 떨어지지 않아 어렵게 입력했던 이름. 윤주영 이사도 아니고 주영이 형도 아닌 이름으로 저장한 것은 오로지 마음 속에 손톱만큼 남은 유치한 그 감정 찌꺼기 때문이었다. 주영과 헤어지고 나서 며칠을 고민했다. 우연처럼 마주치는 순간들이 가시가 되어 저를 찌르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직접 묻지 않으면 안 되는 때에 이르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정신이 흐려지니 자꾸만 판단이 바로 서지 않는다. 감정과 이성이 널을 뛰었다. 연락하기 싫다. 아니야, 해야 해. 그래도 싫다. 전말을 알아야만 해. 이소는 마지막으로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나지막이 눈을 떴다. 이번 한 번만 전화해 보고 사서함으로 넘어가면 오늘은 그냥 집에 들어가야지. 주영 생각만 해도 긴장해서 심장이 두근대는 걸 보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기도 하고. 이소는 입술을 적시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받지 마, 받지 마라, 진짜 받지 마라.
야속하게도 신호음이 세 번이 채 가기도 전에 화면은 연결 상태로 바뀌었다. 전화를 받는 상대는 믿기지 않는 듯 무겁게 입을 뗐다.
- …이소야?
이소는 숨을 들이마시고 질끈 눈을 감았다.
“지금 잠시 시간 좀 내줘, 아니 내. 할 말 있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바로 오겠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이소는 얼른 전화를 내리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어쩌면 준비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이소는 양 손바닥을 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 손을 잡을 사람이 어쩌면 이제는 둘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 주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면 계획을 다시 짤 것이다. 어느 정도 일이 해결될 즈음에 오늘 진혁에게 그랬듯이 해준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가 그랬듯이 이소 역시 해준이 항상 저를 보며 웃기를 바랐다. 저로 인해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부디 조금 더 진전되기를 바라면서 이소는 전화를 내려놓고 화단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고개를 들어 본 하늘에 달이 참 밝았다. 해준 생각이 났다. 금방 돌아갈게, 읊조리며 눈을 감고 주영을 기다렸다.
* * *
주영의 차에 올라타 주영이 즐겨 찾는 바에 올 때까지 이소는 내내 자신의 몸에서 나는 담배와 돼지껍데기 냄새로 괴로워했다. 저번처럼 카페 따위를 생각했던 이소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프라이빗 바로 데려갔을 때 적잖히 당황했다. 문 앞에서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대는 이소를 보며 주영이 난감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누가 들으면 안 될 이야기들이 많아서. 그리고 나도 술이 좀 들어가야….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아, 저는 그렇다 치고 주영은 사람들이 얼굴을 아는 재계인사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이소가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고개를 내려 제 어깨를 킁킁대자 주영은 그런 건 신경 안 쓴다며 손을 내저었다. 괜히 민망했다.
주영은 가벼운 칵테일을 두 잔 주문했다. 막상 불러 놓고 보니 여전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이소는 애꿎은 잔의 테두리만 만지작거렸다. 주영 역시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꽤 오랜 시간 적막이 흘렀지만 두 사람 사이에 대화랄 것은 없었다. 이소는 제 앞에 놓인 바다색 술을 쭉 들이켰다. 꼭 소다 아이스크림이 녹은 것 같은 달짝지근한 맛이었지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은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잔을 내려놓고 주영을 바라보자 주영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나 말해도 돼?”
“언제는 물어보고 말했어.”
이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제 기억 속의 주영은 언제나 다정했지만 제멋대로였다. 옛날 일을 반추하는 이소의 말에 주영은 피식 웃었다.
“앞으로는 다 물어보려고.”
“…….”
“다 너한테 물어보고 말하고, 네가 하라는 대로 하려고.”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걸 물어보는 건데.”
“그러기로 했어. 무조건 윤이소 말 잘 듣기로.”
주영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주영과 지내는 동안 종종 이소의 바람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주영이 요구한 것을 마땅히 해냈을 때 받는 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맹목적이고 순종적인 자세로 기다리는 것은 주영답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건지 호기심이 일면서도 동시에 제가 모르는 더 큰 비밀이 있을까 봐 두려워졌다.
주영 역시 제 앞에 든 술을 들이켜고 입 안 여린 살을 크게 훑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네 생각보다 음침하고 지저분할 수도 있어. 나한테 엄청 실망할 거고, 화를 내겠지. 이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도 너한테 어떤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다만 내 진심만큼은 알아주면 좋겠어. 주영은 양손을 모은 채 지긋이 이소를 응시했다.
“몇 번이고 다시 말해 줄 수 있으니까 듣기 힘들면 이야기하고.”
이소는 각오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나가. 그러니까 말해 봐. 처음부터 어떻게 된 건지. 오늘 다 들을 거야.”
주영은 칵테일을 다 마신 후 온더락을 주문했다. 투명한 글라스 안에 있는 얼음들이 술이 스며들며 달그닥 맞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정도로 두 사람만 있는 룸에는 고요가 짙게 깔렸다. 주영은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은형을 처음 본 날부터의 이야기였다.